♣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6월 26일)
제목: "부르심에 합당한 삶"
말씀: 에배소소 4:1-3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사회: 강건우 부목사님
 
설교자: 이기원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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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배소소 4:1-3,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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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 저녁 기도회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 자리로 나아갈 수 있는 건강과 환경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성령의 강력한 역사 가운데 기도 응답의 은혜와 말씀을 통한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 그리스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생명의 강수가 흘러넘치는 우리 수요 저녁 기도회에 참여하신 모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4장 1절에서 3절 말씀입니다. 우리 함께 교독하시겠습니다. 제가 먼저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이 마음에 품고 섬긴 교회들이 많죠. 많았으나 오늘 본문이 쓰여 진 특별히 에베소 교회는 사도바울에게 좀 각별한 교회였던 것 같습니다. 서기 55년경부터 약 3년 동안 에베소에 머물면서 사도바울은 도란노 서원과 회당에서 매일 말씀을 전했는데 이때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사도바울을 힘들게 하는 핍박(逼迫)과 공격(攻擊)도 많았지만 놀라운 기적들도 수없이 일어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구원의 역사가 차고 넘쳤던 곳이 바로 이 에베소였습니다. 사도바울이 정말 좋은 믿음의 동력 자들과 행복한 사역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서로 함께 한 시간들을 통해서 사도 바울과 에베소 성도들은 서로에게 각별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러한 애틋한 마음은 나중에 그가 에베소를 떠난 후에도 3차전도(傳導)여행(旅行) 말미에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길에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에베소에서 약 50여 킬로미터나 떨어진 밀레도로 불렀을 때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때 장로들이 밀레도로 망설임 없이 사도바울의 부르심을 듣고 왔구요.
 
사도바울은 그들과 만나서 참 오랫동안 보지 못한 회포(懷抱)를 풀면서 얼마나 반가웠을까요? 함께 먹고 자면서, 욕도 같이 먹고 같이 즐거운 시간 또 영혼들이 성장하고 구원받는 것들을 같이 함께 한 동역 자들을 오랜만에 봤으니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그리고 사도 바울의 고별(告別) 설교를 들었습니다. 이들이 서로에게 얼마나 각별(各別)한 마음을 갖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그런 모습입니다. 따뜻하고 또 특별히 각별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에베소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이 그 애절한 마음 사랑하는 마음을 가득 담아 쓴 편지가 바로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이 담겨있는 에베소서입니다. 에베소서 1장부터 3장까지는 교리, 교리 이론 또 교리를 담고 있구요.
 
그리고 오늘 함께 읽은 본문 4장부터는 그 교리를 바탕으로 한 실천에 대한 말씀을 시작하는데, 그 시작을 어떻게 하느냐 그러므로, There for(데어 포어), 그 단어로 이 전환점(轉換點)을 시작합니다. 오늘은 시대 간 관계상 저희가 1절부터 3절까지만 살펴보지만, 4장에 담겨있는 큰 맥을 우리가 좀 짚고 넘어가야 됩니다. 그 맥(脈)은 사장에 담겨있는 그 맥은 사도 바울이 이 애틋하고 각별한 마음을 갖고 있던 성도들에게 에베소 성도들에게 하고 싶었던 그 말은, 교회의 일치(一致)성, 교회의 하나 됨 , ‘유니티’를 이루어라 라는 맥입니다.
 
머리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루는 성도들이 너희들이 주체로서, 하나가 되어야 된다는 이 하나 됨, 유니티를 이루기 위한 구체적(具體的)인 방법들을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1절 2절 3절이 그 구체적인 방법들을 나누고 있는데, 그리고 이 메세지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도 바울이 어떤 상황 가운데 서신을 썼는지, 또 보냈는지를 예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에게 주안에서 갇힌 내가라는 말씀으로 시작을 합니다.
 
빌립보서, 골로새서 그리고 빌레몬서와 함께 에베소서가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쓴 옥중 서신이라는 것을 말해주는데,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렇게 에베소 성도에게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에게 쓴다. 라고 하는 이 주안에서 갇힌 것을 언급하는 것은 절대로 그들에게 이 성도들에게 동정(同情)을 구하거나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그런 차원의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거룩한 자랑을 하고 있는 건데요. 그런 상황에 있는 것이 이런 상황에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빌립소서에 보면 빌립보서에서도 보면 옥중에서 내가 기쁘고, 기쁘고, 기쁘노니, 너희도 기뻐하라. 라고 옥중(獄中)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과 같은 맥락(脈絡)입니다.
 
복음의 가치를 위하여 본인이 옥살이를 하는 것은 절대 부끄러운 일이 아니고, 동정이나 불상이 역임을 받아야 할 일이 아니고, 오히려 너무나 감사하고 너무나 영광스러운 일인데 너희도 이런 세상의 가치를 초월(超越)하는 영혼의 가치를 갖기 바란다. 라는 차원으로 ‘주안에서 갇힌’, 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희를 권하노니’, 이 권하노니, 는 에베소에서 그 사도바울의 단순한 에베소 성도들에게 요청하는 요청(要請)이 아니라, 내가 그냥 말한다. 내가 말해줄게 차원을 넘어서 간청(懇請)한다. 애원(哀願)한다. 탄원(歎願)한다. 라는 그런 강력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어떤 간청을 하고 있는가 하면 바로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여러분 같이 한번 할까요?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라. 라는 간청, 애원, 탄원을 간곡(懇曲)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부르심은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부르심은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예수 그리스어를 통한 속죄의 은혜로 구원에 이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부르심을 말합니다.
 
이런 고귀한 부르심에 저희가 반응(反應)을 해야 하는데 어떤 반응을 해야 하는가? 하면 합당(合當)하게 해야 합니다. 합당한 반응을 해야 합니다. 그럼 이 합당하게로, 이렇게 번역이 되고 있는 그 헬라오 단어는 ‘익시오스’입니다.
 
◎익시오스는 저울에 ‘균형을 맞춘다.’라는 의미로 한쪽에 얹은 것과 반대쪽에 얹은 것의 무게가 같아야 한다. 라는 말인데요. 무엇에 비길 수 있는 당연히 보답한다.
-란 말에서 유래된 말로 어울리게 그 부르심에 ‘가치 있게’, ‘어울리게’ 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부르심의 가치에 맞게, 어울리게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이런 삶을 살 때 무슨 일이 일어나나요? 4장의 메인 핵심, ‘교회가 하나 된다.’는 거예요. 유니티를 이룬다는 거예요. 한 몸을 이루는 교회의 통일성을 갖고 같은 방향 같은 비전 같은 꿈 같은 사명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2절부터, 교회의 일치 하나 됨을 가능케 하는 필수 덕목들을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헬라어가 참으로 정교한 언어입니다. 그래서 칼바르트의 아들 마르쿠스 바르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헬라어 같이 한번 여러분 눈으로 보세요.
 
◎“헬라 원전에 나오는 이 헬라어 동사가 표현하는 절박함을 정확히 번역하여 전달한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만큼 이 단어가 요구하는 것은 크고 또 큰 것이다.” -마르쿠스 바르트-
 
-여러분 헬라어가 갖고 있는 정교(精巧)함, 섬세(纖細)함은 참 안타깝게도 많은 경우 다는 아니지만, 한국어는 영어로 담지 못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 덕목(德目)들을 이렇게 나열한 것들을 볼 때,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단어들인데요. 그 덕목들 속에 들어있는 헬라의 정교함, 섬세함 헬라어만 가지고 있는 깊은 맛이 좀 있습니다.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여 갖추어야 하는 첫 덕목인, 겸손(謙遜)의 그 정교함이 깃들여 있습니다. 우리가 문득 생각하는 겸손함은 어떤 것일까요?
 
거기에 있는 그 겸손함과 그 당시 문화 속에 담겨있던 겸손함의 차이에서 오는 의미가 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값어치와 진가를 나보다 높게 생각하면서, 그것을 인정하는 마음을 갖는 것, 인정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 겸손함이죠. 근데 헬라어에 담겨있는 이 겸손함 에는요. 1단계 더 나아가서 그들의 아래에 있는 자로, 그들 밑에 있는 자로, 취급받기를 원하는 마음을 갖는 것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 그거 아시나요? 그 당시 그리스나 로마 사회에서는 이런 겸손이 굉장히 낯설고 천시(賤視) 받고 혐오(嫌惡)스럽게 까지 여겨지는 개념(槪念)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이런 겸손에 해당하는 단어 자체를 잘 사용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이 겸손함에 담겨있는 의미가 그들 아래 다른 사람 밑에 있는 자로서 취급받기 원하는 마음까지 담고 있다 보니까 거기에는 굽실거리며 복종(服從)하는 노예(奴隸)의 모습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잘 사용하지도 않았구요. 그 단어를 별로 좋아하는 단어로 지금은 얼마나 좋은 단어입니까? 겸손함, 얼마나 좋은 단어입니까? 그때는 안 그랬다는 거죠. 그때 그리스, 그때 로마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그렇게 좋게 받아들여지는 단어 개념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별로 겸손은 덕으로 생각되어지지 않는 그런 단어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화에서 겸손을 정말 혁명적(革命的)으로 선포하고, 혁신적(革新的)으로 보여주셨던 겸손(謙遜)의 최고의 표본(標本)이 있으시죠.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여러분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8절까지 말씀을 한번 읽어볼까요? 같이 읽겠습니다.
 
*빌립보서 2:5-8,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라는 이 하나님의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그들 아래에 있는 그런 취급을 받는 그 위치로 내려가서 그 겸손의 극치를 보여주는 이 모습이, 여러분 이 당시에는 얼마나 문화에 맞지 않는 생소한 저게 뭐야? 뭐 다른 짓이야! 라고 할 수 있는 생소하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정말 혁명적인 선포였구요. 모습이었구요. 그랬던 것 그런 것이 여러분 좀 상상을 좀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런 모습으로 오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죠. 그러나 그 당시에 이거 그 모습을 보는 그 당시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받아들였는지를 우리가 살펴볼 고민해 볼 필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충격을 한번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남을 존중하고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냥 거기까진 우리가 알겠죠.
 
그렇게 종처럼, 노예처럼 취급받는 것을 원하는 마음까지, 원하는 마음까지 갖는 것이 바로 겸손이라고 부르심에 합당한 성도가 가져야 하는 모습이라고, 그 사회에는 이 사회의 흐름을 역류(逆流)하는 선포(宣布), 그 선포를 저와 여러분들이 마음에 새겨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그래 남을 좀 높게 여기는 건 노력을 하죠. 그러나 조금만 남이 나를 무시하면 그렇게 취급을 해버리면 우린 어떤 반응을 보냅니까? 너무 마음의 상처가 크죠. 가만히 있지 못하죠. 물론 여러분 이런 취급을 그냥 바보처럼 아무 때나 어떤 상황에서든 상관없이 받아 받으며 살아야 된다. 절대 그런 말은 아닙니다. 언제 이런 취급을 받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 하면 사명을 감당할 때, 믿음과 신앙의 순결을 지킬 때, 교회에 하나 됨을 이룰 때, 저분이 지나가면서 한 저 한 말이 가슴에 배겨서 나를 찢어내고 있는데, 그때 해야 되는 내 반응은 그것을 향하여 총알을 또 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하여 이 취급받기를 원하는 마음까지 가지며 수용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누구처럼? 예수님처럼, 자신이 존중받고 인정받기 위한, 여러분 고도의 교묘(巧妙)한 수단(手段)으로 써가 아니라, 교회에서 얼마나 겸손한 모습을 갖고 있는 성도들 중에 그런 실수를 범할 때가 있지 않은지요? 오히려 존중을 받기 위한 교묘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이런 고도의 교만을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
 
복음(福音), 생명(生命), 사명(使命), 비전, 꿈 앞에서, 그 앞에서 주위 사람들을 진심으로 존중한 마음, 존중하는 마음을 갖는 것 수모(受侮)를 감수(甘受)하며 희생(犧牲)을 원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바로 오늘 사도 바울이 말하는 부르심에 합당한 삶의 첫 번째 덕목 겸손인 것입니다.
 
1). 겸손(謙遜)이다.
-그럼 생각보다 어렵죠.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근데 나중에 그 해결책도 주시는데 그래서 이 겸손은요, 어려운 겸손은 이 겸손은요, 모든 영적인 복의 재료이고, 모든 덕에 뿌리이며, 이 겸손의 깊이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누리게 되는 것이라고 어거스틴이 말을 했습니다.
 
2). 온유(溫柔)이다.
-그 다음 덕목은요, 온유(溫柔)입니다. 온유는 하나님께 대해서는 기쁘게 순복(順服)하며 사람에 대해서는 남의 약점(弱點)에 대해 부드럽게 대하는 태도(態度)를 말합니다. 친절함, 너그러움 이런 말에서 유래(由來)된 말로 온화함, 정중함을 뜻하고 있는 그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딱 떠오르는 말이 있죠. 하나님께는 전심(全心)으로, 사람에게는 진심(眞心)으로가 떠오르는 덕목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사용된 온유(溫柔)라는 단어에도요. 헬라어의 정교함이 좀 담겨있는데요. 그것은 온유라는 단어에 담겨 친절함, 너그러움, 부드러움, 온화, 정중 그 의미가 있는데요. 결코 연약(軟弱)함은 내포(內包)하고 있지 포함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프라우테스’ 라는 이 온유라는 단어 에는요. 강한 자가 오히려 강한 자가 자신을 억제(抑制)하고, 조절(操切)함으로써 남을 부드럽게 대하며 섬긴다. 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연약해서 내가 뭘 할 수가 없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냥 참는 차원이 아니라 강함에도 불구하고요. 자신을 억제하고 조절함으로써 부드럽게 대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지만, 아니 그런 자격도 있지만 그런 힘도 있지만 그런 정당성도 있지만 내가 도대체 이 자리에서 이렇게 섬긴 게 몇 년인데, 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정당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데도 그런 취급과 그런 말을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으로서 해야 할 것은 그런 정당성을 다 갖고 있어요. 남들이 다 인정해요.
 
거기 가만히 있으면 안 되지 한소리 해줘야지 있으면 안 되지, 이렇게 행동해야지, 남들이 다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들까지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는 우리 목사님들까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하여 절제하고 조절하면서 온유함을 유지하는 거, 그게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가져야 하는 온유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유의 표식 중에 하나가 절제(節制)인 것이고. 이 온유를 통제(統制) 아래 있는 힘이다. 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성경적 온유는요, 하나님의 통제, 다스림 통치 아래 있는 힘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온유라는 것입니다. 교회 일체성, 하나 됨을 이루기 위해 실천해야 하는 그다음 덕목은 올해 참험입니다.
 
3) 오래 참음이다.-(마크로 디모스)
-남에 대해서 자기가 받은 피해에 대해서 분노(憤怒)나 복수(復讐)의 마음을 갖지 않고.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도 ‘마크로 디모스’ 라는 헬라어가 담고 있는 또 정교한 의미가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먼 거리 마크로스와 분노 디모스가 합쳐서 마크로디모스, 이 분노를 오래 참는다. 라는 그런 의미를 갖고 있는데, 그렇게 분노를 남을 향한 그 분노를 오래 참는 차원으로 그치지 않고 타인의 행동과 말에 대해 충분히 응징(膺懲)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참는 것을 말합니다. 아까는 정당성이 있었어요. 지금은 그 행동이 너무나, 너무나 불공정해서 충분히, 충분히 그 응징을 내가 해도 아니 거기에 대한 대가(代價)를 거기에 대한 결과를 반응을 요구(要求)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는 것을 말합니다. 오래 참음, 그냥 갚지 말라는 것과 충분히 갚을 수 있는 상황과 정황과 모든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들이 아무리 이야기를 한다. 해도 오히려 남들도 함께 또 동의를 해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하여 말라는 오래 참음, 정당성(正當性) 가운데 오래 참음, 단 순간 시간적인 길이를 넘어 또 다른 차원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특히 성경에서 어떤 때 사용됐냐면, 하나님의 죄인들에 대한 심판을 오래 참으시고 죄인들을 바라보신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고, 안 참으셔도 되는데,,, 안 참으셔도 되는 그 정황과 정당성이 뚜렷한 데도 불구하고, 오래 참으시면서 기다리시는 또 거기에 그냥 가만히 있으셔도 되는데 한걸음 나아가서 더 해주시는 대속(代贖)의 은혜(恩惠)를 베풀어 주실 때, 사용된 단어가 바로 이 오래 참음, 마크로 디모스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 1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디모데전서 1:16,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바라보면서 오래 참으신 것을 그치지 않고, 예수 그리스를 통해서 대속의 은혜까지 한 걸음 더, 더 나아가서 그런 자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베풀어 주신 것이 바로 오래 참음, 그 단어가 거기에서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부르심이 합당한 삶을 사는 그 다음 덕목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입니다.
 
4)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다.
-이렇게 보면 앞에 나오는 이 단어는요. 이 이 덕목은요, 앞에 나오는 오래 참음의 다음 단계, 다음 단계 다음 경지(境地)라고도 할 수가 있는데, 용납(容納)하고는 상대의 잘못을 용서(容恕)하는 것을 말합니다. 상대의 잘못을 용서하는 거, 여러분 그냥 참았습니다. 아까는 그냥 제가 참았죠. 남들이 이렇게 모든 걸 할 수 있다. 라고 동의하는 정황 속에서 참았죠. 참았죠. 또 그런 가운데도 내가 뭘 해줬죠 또 해주는 대속의 은혜까지 베푸는 것 좀 더 해줬어요. 그렇게, 그렇게 충분한 정당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올해 참음이 있었어요. 근데 어디까지 가냐면요. 마음의 모든 것들을 응어리를 싣는 차원까지 간다는 거예요. 더 힘들어지지 않나요?
 
여러분, 베드로전서 4장 8절에 나온 말씀처럼, “사랑한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라는 말씀처럼 사랑은 타인들의 죄 담요를 덮는 것으로, 보이지 않게 가린다. 내 마음에 담요를 덮어서 여러분 상처는 있을 수 있겠죠. 잊혀 지지 않을 수도 있겠죠. 그러나 내 마음의 상처에 담요를 덮어 가지고 보이지 않게 하는 거, 죄(罪)를 정당화(正當化)하거나 그것을 변명(辨明)해 준다는 해줘라. 그런 뜻이 아니구요. 이들의 죄가 필요 이상으로 알려지지 않게 드러나지 않게 내 마음에 되씹으면서 새겨지지 않게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허물을 사랑에 담요로 따뜻하게 덮어주라. 는 그런 의미가 바로 이 용납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음 덕목을 이야기합니다.
 
5)평안에 매는 줄로.
-평안에 매는 줄로, 평안에 매는 줄 여기에서 평화는 peace, 평안 히브리어로 살롬, 헬라어는 에이레네의 평화와 화평으로 이렇게 번역(飜譯)이 되는데요. 여기에도 그 정교함이 또 담겨 있습니다. 샬롬과 에이레네의 평화(平和)와 화평(和平), 이 의미와 함께 어떤 의미가 또 추가 되냐면, 일치(一致)와 조화(調和)입니다. 여러분, ‘일치와 조화 하나 됨에 일치와 조화’라는 의미가 진정한 평화와 화평은 일치와 조화를 이루어야만 가능하다는 그런 뜻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치를 이루는 줄은 평안에 매는 줄, 줄은 골로새서 3장 14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골로새서 3:14,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줄이니라.
-이것을 조화(調和)와 일치(一致)를 이루는 이 줄, 이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평화의 근간이 사랑이고, 그 사랑의 줄로 평화 살롬, 에이레네의 조화와 일치, 하나를 이루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이루시는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그동안까지 느꼈던 이 우리의 암담(暗澹)함이 해결이 됩니다. 여러분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은 모든 것 일치와 조화, 사랑, 여러분 평안의 메인 줄, 모든 것들이 성령께서 가능케 이루어 줄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믿고 구해야 합니다. 내 마음을 다짐하고, 내가 그렇게 해야겠지. 라는 차원(次元)을 넘어서 성령께서 해주실 것을 믿는 그 믿음, 그것을 갖는 것을 성령이 하나 되게 해주시는 은혜를 체험하는 단계라는 것입니다. 힘써 지키라 우리의 역할이 있습니다.
 
6) 힘써 지켜라.
-열심히 애써 지키라는 의미와 함께 서둘러, 그리고 지속적으로. 라는 또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여러분 즉 성도들이 교회의 하나 됨을 향해 부지런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빨리 위에 명시된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는 평안에 매는 줄로 서로를 배워 교회의 하나 됨, 사명의 방향성 한 방향 한 꿈을 이루는 모습으로 가야하는데 그것에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힘써서 지켜라. 뒤로 미루지 말고 다음으로, 미루지 말고 내가 좀 준비되면 내가 상황이 좀 나아지면으로 미루지 말고, 당장 빨리 그리고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이루라 라는 말씀을 담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렇게 교회의 일치성과 또 하나 됨에 대한 부르심에 합당한 모습은 우리가 이 교회 안에서 에베소교회 안에서 성도들끼리 그런 모습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고요. 그리고 이 교회가 지상교회의 전체 교회, 또 하나님의 유니버설 처치, 시상교회 모든 교회를 교회와 하나가 되는 차원으로도 이 부르심이 합당한 모습을 갖는 교회로서의 역할을 또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평안에 메는 줄로, 그 평안에 메는 줄 가운데 희생과 섬김을 동행하는 사랑의 줄이 있죠. 글로 이렇게 동여 메어 주어야 합니다. 안에서 있는 한 성도들 그 성도들만 하나 되는 게 아니라 교회와 교회가 또 하나 되고요. 또 이 나라에 있는 교회와 저 나라에 있는 교회들이 또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힘써야 한다는 거죠.
 
그런 차원에서 우리 사랑의 교회는 여러분들의 그 헌신과 섬김으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 여러분들의 헌신으로 이런 사회 국내외적으로 많이 감당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한교섬이고요. 여러분, 한교 섬을 통해서 국내 교회를 섬기고 또 복음의 서진을 통해 유럽 교회를 섬기는데요. 이번에는 감사하게도 사랑 광주리를 통해서 우크라이나에 있는 교회를 통해서 평안에 메는 줄로, 우리가 한국에 있는 대한민국에 있는 사랑의 교회로서, 또 다른 나라에 있는 교회와의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가 되신 것을 힘써 지키는 마음으로 숨길 수 있는 기회가 좀 있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여러분들에게 간단히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29억 원어치의 의료기기와 의료품을 많은 분들이 헌신해 주셔서 우크라이나에 전달을 했습니다. 우크라이에 가서 한 4천여 키로의 그 육로 여정을 소화하면서 계속해서 제 마음에 드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크라이나를 보면 볼수록, 알면 알수록 이 어린 목동과 같은 우크라이나가 가난했죠. 여러 가지 면에서 너무나 뒤처져 있죠. 사람들은 뭐 다른 윗사람들은 모르겠으나, 그냥 길거리에서 만나는 사람 너무 그냥 착해 빠졌죠. 아니 이런 나라가 어떻게 거인이고 노련한 장수와도 같은 러시아를 상대로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전쟁을 하고 있을까? 그 생각이 계속 나는 거예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여러분 러시아는 세계 2위 군사 강국입니다. 정규군만 90만 명을 갖추고 있구요. 그런 이런 군사, 군사 강대국으로서 가지고 있는 모든 무기와 이런 것들이 뭐 어 뭐 세계 4위다, 이런 통계들이 많이 나옵니다. 거기에 그 반면에 우크라이나는요 총 병력이 20만 명밖에 안 되구요. 그리고 그 병력이 갖고 있는 무기는 구형(舊型)무기(武器)가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이 돈바스 지역을 통해서 밀고 내려올 때 러시아의 정규군이 최신 무기를 가지고 20만 명이 국경에서 이미 준비하고 대기하고 있다가 밀고 내려온 거구요. 이 우크라이나군은 키예프를 중심으로 별 준비 없이 밀려 내려오는 러시아 군대를 상대로 전쟁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또 한 가지는 이 푸틴 대통령만큼 전쟁을 잘하는 사람이 지도자가 아마 이 시대에 거의 없을 것이다. 생각을 할 정도로 전문가들은 전쟁의 전문가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조지아와의 전쟁, 그것을 통해서도 사흘 만에 항복을 얻어냈어요. 푸틴 대통령이 그때 푸틴 대통령의 지지율이 88%로 올라갔고요.
 
3연임 금지 조항 대통령 3연임 금지 조항을 그 지지율을 가지고 개헌을 해 가지고, 대통령이 돼가지고 아직도 대통령을 하고 있는 사람이 전쟁으로서 리더십을 구축(構築)한 사람이 바로 푸틴 대통령입니다. 최고의 정보기관들이 얘기했어요. 3일 만에 3~4일 만에 그 전쟁은 끝날 것이다. 전쟁이 일어난다면 일어나지도 않을 거지만 일어난다면 3~4일 만에 끝날 것이라고 발표했구요. 푸틴 자신도 그렇게 확고한 자신을 가지고 전쟁을 시작했는데, 3년째 전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 정황에 변화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이 전쟁을 치르면서 참 놀란 사람은요, 갑자기 밀고 내려와서 피해를 입은 우크라이나 사람들도 아니구요. 또 민간인 동족 살생을 하고 있는 그 모습을 보는 세계인들이 아니라 이 전쟁을 통해서 가장 놀랄 사람은 푸틴 자신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왜 본인이 그렇게 이렇게 길게 전쟁을 할 줄 몰랐거든요. 그런 반항 가운데 그런 대접 가운데 키에프를 치지 못하고 이렇게까지 물러날 줄 몰랐을 거거든요. 이렇게 미숙한 어린 목동이 전쟁에 노련한 거인 장수를 상대로 3년 동안 전쟁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 답을 찾았습니다. 우연히 기사를 보고 또 우연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정황이 어떤가를 보고, 주위 사람들을 과의 대화를 나눈 가운데 무엇을 발견하게 되었냐면, 러시아 침공을 한 2주가 흐른, 얼마 안 된 거죠. 그 2주 흐른 전쟁 초기에 우크라이나의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그 이상한 현상은 뭐였냐면 성경(聖經), 품귀(品貴)현상이었어요. 기사를 한번 띄워주실까요?
 
※영국 크리스찬 투데이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성서공회는 러시아 침공 이후 전례 없는 숫자의 성경 요청을 받았다며 사람들에게 나눠줄 성경이 없어 거절하고 있다는 발표를 했습니다. 우크라이나 성서공회의 올렉산드로 총무는 성경을 구하기 위해 찾아온 한 목회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전했다. 그는 우리에게 성경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손상되거나 심지어 폐지가 누락된 찢어진 사본이라도 달라고 간청했다. 여러분 전쟁이 났습니다. 어느 민족이, 어느 나라가 전쟁 난 상태에서 지금 거인 러시아가 밀고 내려와서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그 전쟁을 치르는 상태에서 먹을 식량을 주세요. 무기를 달라고, 국제사회에 호소를 해야 되는데,,, 그것보다도 먼저 무엇을 하고 있냐면 성경을 달라고 호소(呼訴)를 하고 있는 거예요. 몸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안식처(安息處)를 달라고 하지 않고 성경을 달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요, 하나님께서는요. 이렇게 성경을 찾는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 하나님을 갈망(渴望)하고 하나님을 애타게 찾는 이 백성들을 긍휼(矜恤)히 여기시고 보호(保護)하고 있구나! 라는 것을 제가 보고 깨달으면서 소름이 끼쳤습니다. 여러분, 전쟁이라는 비극적인 현실을, 여러분 현실 속에 너무나 큰 고통을 치르고 있지만 구소련의 잔재(殘在)라고 할 수 있는 우크라이나는 2개 전쟁을 치르고 있다. 하나는 부패다 하나는 전쟁이다. 라고 할 정도로 그 부패와 싸우고 있는 그 모습이 이 전쟁을 통하여 지금 나라가 지금 뒤집어지고 있구요. 그리고 타 종교와는 기독교, 개신교가 세 번째 종교였습니다. 단순히 세 번째 종교가 아니라, 무시 받는 종교였습니다. 러시아 정교가 먼저였구요. 패턴이었고요. 그다음에 종교 개신교였는데, 거기는 인테리나 멋진 사람은 가는 곳이 아니었구요. 그 좀 떨어지는 수준의 사람들이 가는 그 종교가 개신교였는데, 지금 이 판세가 바뀌고 있습니다. 여러분, 전쟁이 터지고 나니까 어떤 일이 벌어졌냐면 다른 종교들은요, 교회가 더럽혀진다. 라는 이유로 문을 닫기 시작했어요. 여기 들어오지 말라 피난민들이 떼거지로 밀려 들어오니까, 오지 말라고 문을 닫았어요. 그런데 개신교는요 문을 활짝 열고 피난민들을 받아들였구요. 목사님들이 그들과 함께 먹고 자면서 생활했구요. 목사님들이 전 세계에서 들어오는 구호 물품을 가지고 그분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어떤 목사님은 어떤 플랫폼에서 기차역에서 천 명씩, 3개월씩 매일 그들을 먹이면서 함께 그들과 샤워도 못하면서 지내는 그런 모습들이 바로 개신교 목사님이었고요.
 
그리고 땅이 다 폭탄(爆彈)의 미사일에 의해서 뒤집어진 땅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기도를 하고 예배를 드리고 크게 개신교가 그러다 보니, 러시아 사람들이 이제는 이런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이제는 개신교가 기독교가 우리가 믿어야 되는 신앙이고 종교다. 라고 하면서 젊은이들이 교회로 지금 밀려오고 있는 그런 모습이 보여지는 거, 그런 모습이 우크라이나입니다. 그러면 지난번에 칼 세미나 때 우리 46명 우크라이나 목사님들 오셨죠? 그분들이 그분들이에요. 가서 보니까, 우크라이나 사람들이요. 이 작은 목동들이 하나님을 갈망(渴望)해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요. 전쟁이 터지자마자 밥 주세요. 빵 주세요. 떡 주세요. 안식처를 주세요. 라고 하지 않고, 성경을 주세요. 라고 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고 계시는 거예요.
 
거기에서 저희가 배워야 하는 중요한 영적인 교훈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피 흘림 없는 복음적 평화통일, 여러분 우리 땅에는 전쟁이 없어야 하죠. 꼭 없기를 바라고 그것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통일이 이루어져야죠. 여러분, 이런 언제 전쟁이 일어나도 정말 이상하지 않은 이 현실 속에 사는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군사력을 키우고, 경제력을 키우고 외교나 정치를 아니에요. 그걸로 해결이 안 돼요. 우크라이나를 보니까 여러분들이 저와 여러분들이 한국 교회가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무릎 꿇고, 하나님을 갈망할 때, 말도 안 되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상대로 3년을 저렇게 전쟁을 하며 나름대로 승리를 거두고 있는 것처럼, 물론 많은 손해가 있지만 저렇게 견디는 것처럼 전쟁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통일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경제력을 키우고 군사력을 키우고 외교의 외교나 정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 자리에 나와서 하나님의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하며 기도하는 백성들이 늘어날 때 하나님께서 이 땅에 피해 흘림이 없는 복음적 평화 통일을 허락해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 지난주 토요일과 주일 우리 그것을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온몸을 다 바쳐서 하나님 하나님을 갈망합니다. 하나님을 간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강구하오니 이 땅에 피 흘림 없는 복음적 평화 통일을 허락하여 주소서. 통일로 가는 길을 저희가 섬겼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선은 우크라이나 이 위험 상황을 도와야 되겠죠. 그 회복을 하는 그 과정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바를 해야 되겠죠.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도 경험을 쌓아야 되겠죠.
 
그리고 그 우크라이나가 갖고 있는 곡창지대의 그 곡창, 곡식들을 나중에 하나님이 허락하실 그 통일의 시대 북한의 식량 문제 해결하는 데 사용해야 되겠죠. 그런 은혜를 달라고 우리가 또 섬겨야 되겠죠. 그리고 북한이 혹여나 UN을 통해 어떤 상태의 붕괴(崩壞)가 이루어졌을 때, 자국민의 자결권을 행사하게 될 때, 그 모든 권한을 다른 국가에 주지 않고, 그래도 내 민족 뇌동법 대한민국에 맡기고 그리고 사랑의 교회가 세운 사랑 광주리 또 사랑의 교회가 세운 모든 사역들이 국제적인 NGO로서, 우크라이나를 통해 쌓은 경험과 실적을 가지고 UN에게 인정을 받아서, 북한을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나라로 만드는데 쓰임을 받고 나가야 된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담임 목사님께서 외치시는 ‘2033-50 비전’을 현실적으로 읽는 방법임을 믿습니다.
 
♣요약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 제물 삼아, 날 자녀로 불러주신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의 합당한 삶을 살아가고,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과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며 평안에 매는 줄로 하나 되게 하신 성령님의 인도를 힘써 따라가야 한다. 모든 피조세계의 영광을 홀로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주님께서 지상의 교회가 하나 됨에 영광에 걸 맞는 희생하고 헌신하는 우리 사랑의 교회가 되기를 간구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한 교회를 세우는 차원을 넘어 교회가 교회를, 교회가 전 우주에 있는 전 세계에 있는 교회를, 또 평안에 매는 줄로 감당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사랑의 교회의 성도들, 사랑의 교회와 대한민국 교회되기를 원하며, 예배에서 승리하고 말씀의 검으로 무장하여 우리에게 주신 싸움을 능히 이기는 귀하고 축복된 주님의 군사가 되어야 한다. 부르심의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은 거기에 무게를 맞추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기억하여 그 무게감을 올려드리는 자로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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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6월 19일)
제목: "바울의 자기소개(自己紹介)"
말씀: 로마서 1:1:-6
찬양인도: 쉐키나(유재원 부목사님)
사회: 김대규 부목사님


설교자: 윤현수 부목사님
ㅡㅡㅡㅡㅡ
*로마서 1:1:-6,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6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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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는 로마서의 제일 첫 번째 구절인 로마서 1장 1절을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이 구절은 바울의 자기소개입니다. 자기소개는 중요한 기능을 합니다. 다른 이들에게 자신에 대한 신뢰를 형성하기 위해 자기소개는 꼭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관계가 중요하면 중요할수록 자기소개의 내용은 그 사람의 정체성 및 자격에 관한 가장 중요한 정보를 소개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결혼을 하기 위해 선을 보는 경우라든지, 좋은 직장에 취업을 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일평생 수고하고 노력해 온 전 생애의 결과물이라고 입증될 수 있는 자기소개를 해야만 합니다.


바울은 지금 자기가 설립하지도 않은 교회, 그것도 당시 세계 제국의 수도로서 서양 고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에 있는 교회를 향하여 장문의 서신 서를 쓰면서 자기를 소개합니다. 단순히 설교가 담겨있는 서신 서를 보낼 뿐만 아니라 바울은 로마 교회를 향하여 여러 가지 요구를 하며 이 서신 서를 보냅니다. 바울은 지금 예루살렘을 방문하려고 하는데요. 어 예루살렘에는 바울에게 죽음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 교회에 이 서신을 보낸 목적 가운데 하나는, 이방인 선교의 정당성을 로마 교회가 지지해 줌으로써, 자신들이 바울 자신이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했을 때, 로마 교회의 지지를 요구하면서 이 서신을 보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또 한 가지는 바울은 지금 스페인 선교를 하고 싶어 하는데 로마서 15장 23절에서 24절 말씀에 따르면,


*로마서 15:23-24,
23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24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
-아마도 바울이 스페인 선교를 하는 데 있어서 로마 교회로부터 후원을 요청하고 싶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바울은 죽음의 위협 생명에 어 위협이 담겨있는 예루살렘 여행을 떠나면서 로마 교회로부터 자신을 지지해 줄 것을 호소하고 또 스페인 선교를 장차 진행하려고 하는데 로마 교회가 후원(後援)해 줄 것을 요구하면서 생전 가보지도 않은 교회에 이 서신서를 쓰고 있다면 바울이 로마서 1장 1절에서 자신을 소개하는 내용은 아마도 굉장히 중요한 내용이 들어있다. 라고 우리는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오늘 자기를 어떻게 소개할까요? 교회 역사상 가장 유명한 로마서,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 교회가 억울한 어거스틴의 신학의 우산 아래에 있는데, 어거스틴이 로마서 13장 9절을 보고 회심(回心)했습니다. 가장 유명한 종교 개혁자 마틴루터가 로마서 1장에 성경 구절들을 가지고 회심했습니다. 이처럼 가장 유명한 이 로마서의 첫 번째 구절의 바울은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며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 살펴보자면, 바울은 가장 첫 번째 구절에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를 합니다. 오늘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 바울의 이 로마서 첫 번째 어구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고 하였던 바울의 자기소개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는,


I. 그리스도의 종은 성별된 존재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종이라고 소개를 하고 있는데요. 이 종(從)이라고 되어있는 헬러 단어 둘로 쓰는 사실 노예(奴隸)라고 하는 의미가 힐라어감에 더 강합니다. 노예는 주인의 소유물이었습니다. 노예의 유일한 덕은 주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과 복종이었구요. 철학적으로도 노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노예는 물건이었지,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노예를 살아있는 재산이라고 말했고, 말하는 도구라고 많은 철학자들이 칭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말씀을 조금 더 살펴보면, 노예가 주인의 소유물이 된 것과 같이 바울이 하나님의 소유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물 되었다. 라고 하는 말씀의 의미는 또한 굉장히 중요한 구약성경의 의미를 담고 있다. 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구약성경의 하나님께서 거룩한 것과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여 거룩한 것을 하나님께서 부정하고 속된 것으로부터 구별할 때 사용하는 단어를 바울은 지금 뒤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라고 할 때 이 ‘받다’ 라고 하는 것은 신적인 선택에 의하여 부르심을 받았다라고 하는 것인데 오늘 로마서 6절과 7절에 보면,

*로마서 1:6-7,
6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7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1장 6절과 7절에 보면, 성도들도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고 또 성도들은 거룩한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라고 말을 한다면, 아마도 바울이 부르심 받았다. 라고 하는 것은 거룩으로의 부르심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바울은 1장 1절에,

*로마서 1:1,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택정함을 입었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요. 여기서 택정함을 입다. 라고 할 때 사용된 이 단어가 바로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나님의 소유물을 성별할 때 사용한 단어였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종된 바울은 하나님의 신적인 선택에 의하여 부정하고 속된 것으로부터 거룩한 하나님의 소유물로 구분되었다. 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위하여 바울을 구분 하셨을까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구분하셨습니다.

우리 성도님,
오늘 성경 말씀 1장 6절에 바울뿐만 아니라 우리도 그리스도의 것으로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라고 했다면, 이 자리에 계신 우리 모든 성도님들도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의 성막에서 부정하고 속된 것으로부터 하나님의 성소와 지성소 안에 들어갈 물건을 구분하듯이 성도님들을 구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께서 구분하신 것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전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구분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소유물이요. 하나님 앞에 구별된 성별된 존재들을 향하여 끊임없이 유혹합니다. 다니엘에서 1장에 보면 느부갓네살 왕이 유다 나라에서 잡혀온 포로들을 가리켜서 흠(欠)이 없는 자들을 데리고 오너라.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흠이 없다. 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뭐 장애(障礙)가 없거나, 다친 곳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흠이 없다. 라고 하는 것이 구약 시대에 제사 드릴 때 제물에게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하나님 앞에 흠이 없는 것을 드려야 하고, 또 제사장이 되려면 흠이 없어야 하는데, 느부갓네살 왕이 바벨론에 끌려온 그 포로들 가운데 흠이 없는 자들을 데리고 오라고 하는 것은 느부갓네살 왕 앞에 나아가서 그 왕을 섬기고, 왕과 바벨론의 신을 섬기는 것이 바로 바벨론 제국의 제물로 받쳐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바빌론 제국은 무너졌지만, 세상 역사는 주님 오실 때까지 이 바빌론 제국의 성격을 가진 세상 나라는 계속해서 나타납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들여져야 하고, 하나님 앞에 제사장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성도들을 향하여 세상 나라는 끊임없이 세상의 영광과 세상의 신들 앞에 충성하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성도님, 사도바울이 로마서 첫 번째 구절에서 말씀합니다. ‘나는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다.’

나는 부름 받았고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 라고 하는 것은 바로 우리 성도님들에게 말씀하신 하시기 위하여 자기소개를 하는 것이고, 바울의 그 정체성이 바로 1장 6절에 따를 때, 우리의 정체성이기도 한 것입니다. 종(從)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단어에서, 종은 종인데 누구의 종이 되어야 할까요? 로마서 8장과 갈라디아서 4장 5장에 나오는 종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율법의 종, 죄의 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바울이 말하고 있는 이 종은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종은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고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자입니다.

II. 그리스도의 종은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성도님들과 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단어를 잠시 묵상해 보고 싶습니다. 우리 성도님들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예수 그리스도라는 우리 주님에 대한 칭호를 고백하고 읽고 들을 때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이 그리스도가 어떤 의미가 있느냐를 놓고 학자들은 오랜 시간 많은 연구를 해 왔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최근이 아니고, 한 10여 년 전 아주 결정적인 연구에 의하여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 칭호가 가진 의미가 무엇인지는 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스도는 어떤 칭호냐면 그리스도는 왕적인 권위를 가진 예수님에 대한 경칭(敬稱)입니다.

쉽게 말씀드리자면 우리 성도님들께서 신약성경을 펼쳐서 읽으실 때, 그리스도라는 말이 나오는 모든 구절은 ‘왕’이라고 읽으셔야 하겠습니다. 왕이라고 읽으셔 서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다. 라고 하는 이 말은 왕이신 예수님의 종이다. 라고 하는 바울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이것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1장 6절을 제가 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로마서 1:6,
6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이 말은 바울이 1장 1절에서 소개하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 그런데 너희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 6장 22절을 제가 한 번 더 읽어드리겠습니다.

*로마서 6:22,
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바울이 지금 자기를 소개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는 정체성이 지금 로마서 6장 22절과 1장 6절에 따를 때,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도 해당하는 정체성이요.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교회의 성도들 역시도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이라.’ 라고 지금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예수님의 왕이시다. 라고 하는 이 고백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그 친구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교회 갔더니, 하라고 하는 게 너무너무 많아서 내 힘들어서 못 가겠다. 현수야, 막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 갈 수 있는 정도까지만 나에게 알려주라. 나를 그렇게 예수님 믿고 싶다. 이야기를 또 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또 한 분은 제 대학교 은사님이신데, 그분이 변호사를 하시다가 대학 교수가 되셨는데, 제 은사님의 사모님은 열심히 교회를 다니시고, 예수님을 잘 믿는 분이셨습니다. 제 은사님은 교회를 전혀 나가지 않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저희들에게 이야기하시기를, 나는 교회는 안 가고, 예수님 믿지는 않는다. 그러나 내 아내가 십일조를 하고 감사헌금하고, 주일헌금 하는 것은 내가 다 하게 한다. 내 수입도 다 십일조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 이유는 내가 혹시 죽었는데, 예수님 계실까 봐 걱정이 된다. ‘예수님 제가 제 아내를 통해서 헌금 많이 했으니까 잘 봐주십시오.’ 이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최

근에 제가 어떤 유튜브를 보다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느 유명한 유튜버가 성경을 가르친다고 하는데, 복음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한다고 하더니, 종교와 진리를 비교한다고 하면서, 종교는 많은 규칙을 만들어 놓고, 죽고 나서 축복을 받고, 복을 받고 또 이 세상에서 복을 받기 위해서는 규칙을 잘 지켜야 된다. 라고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것이 종교다. 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진리란 무엇인가? 진리란, 하나님께서 다 해 놓으셨구나! 예수님께서 다 해 놓으셨구나! 그럼 됐네? 라고 그것을 알고 자유로워지는 것이 진리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린 이 3가지가, 복음의 일부분의 진리를 담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충만한 복음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게 만드는 우리의 오류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 주님이 사도바울을 통해서 예수님인 누구라고 소개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왕이십니다.’ 천지의 창조주시오. 하늘과 땅에 모든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 아버지가 우주의 왕이신데,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한 권위와 권세를 가지신 왕, 그리스도시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그 왕의 노예다. 라고 오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의 첫 단추는 무엇일까요? 하나님 나를 지옥에서 건져주십시오. 어떻게 하면 지옥에 안 갈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시킬 수 있는 최소한의 보증금을 제가 드릴 수 있습니까? 그리고 내가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의 고통 속에서 행복을 얻는 그 진리를 깨달아서 이제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라고 안주하며 살아가게 만드는 거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기본이 아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여호와 하나님이 만왕의 왕이시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고, 오늘 그 유명한 로마서의 첫 번째 구절이 파울루스 나 바울은 돌루스 종이다. 그리스도 왕의 종이다. 로마서의 가장 첫 번째 구절에서 바울은 ‘나는 노예다. 종이다. 왕 되신 예수님의 종이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과연 우리는 그리스도를 왕으로 인정하고 계십니까?

우리가 직분을 감당할 때, 내게 직분을 주신 그리스도께서 진정 왕이라고 생각하시고 그분의 충성스러운 신하로서 직분을 감당하고 계십니까? 직분을 받을 때도 왕이 주시는 이 직분이고, 직분을 내려놓을 때도 왕이신 주님께서 지금 이것을 내려놓으라고 하시는지 고민하고 계십니까?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라. 말씀하십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 말씀하시는 것이 왕이신 주님께서 하시는 명령입니다. 우리 기도할 때 왕이신 주님 앞에서 왕이신 주님께서 기도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기도하고, 계십니까? 내가 우리 다락방에서, 어떤 사역 부서에서, 너무너무 내가 맞지 않는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크기 때문에, 다른 사역 부서 가고 다른 다락방으로 이동해 버리면 그 사람 안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왕이신 주님께서 용서하기 힘든 사람 피해 다녀라.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까? 성경은 시종일관(始終一貫) 그리스도가 왕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데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하면 나를 천국에 보내주실까, 그리고 주님 내 마음이 뜨겁지 않습니다. 내 마음이 헌신과 섬김과 훈련과 주의 말씀에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가 않사오니 주님이 어떻게 한번 내 마음을 감동시켜 보십시오. 나는 찬양할 기분이 안 납니다.

주님이 교회를 통해서 설교자들을 통해서 순장님들을 통해서 내 감정을 기쁘게 좀 만들어 보십시오. 라고 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지에 창조주시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그 주님을 왕으로 섬기는 것이 그리스도인이요. 오늘 로마서 1장 1절, 6절 그리고 로마서 6장 22절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사도바울이 말하는 것은, 나는 종이면 좋고, 종 아니면 종이 되어가고 이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을 지금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 그리고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다. 라고 하는 이 성경 말씀을 오늘 우리 마음속에 다시 한 번 깊이 새기신 은혜가 있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주님께 우리의 삶에 절대적인 소유권을 가지고 계신 주님께 전적으로 복종하고 완전히 헌신(獻身)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왕이신데, 어떤 왕이실까요? 우리는 무조건 왕이신 주님 앞에 복종하고, 왕이신 주님께서 시키시는 것이 어떤 것이든 순종해야 하지만, 특별히 우리 주님을 닮아가고 순종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이 가장 중요하게 보여줄 것을 우리는 해야 하는데 그러므로, 우리는 세 번째로,

III. 그리스도의 종은 그리스도를 닮아야 합니다.

-자, 그러면 어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서 그리스도에게 충성해야 되는 것 중에 오늘 이 본문에서 말하는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종은 물론 사도바울이 살았던 그 당시 그리스 로마의 그 종개념도 가지고 있었지만 또한 구약 성경에 나타나는 종의 개념을 사도바울이 지금 내가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라고 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는 많은 하나님의 종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왕들이 하나님의 종이었고, 모세, 여호수아, 아브라함, 다윗 그리고 선지자, 심지어 이스라엘 전체가 여호와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종들이 그 종들은 다 부실한 종이었습니다. 종의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하는 종들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유일하게 여호와의 종 하나님의 종으로써 사역을 유일하게 잘 감당하신 분이 딱 1분 계십니다. 누구실까요? 바로 이사야서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보내시겠다. 라고 하는 여호와의 종이 나옵니다. 그것이 이사야서 40장에서 55장까지 나오는 여호와의 종인데요. 그 종이 바로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이사여서 1장부터 39장까지는 이스라엘의 왕들이 종으로 나타나는데, 그 왕들로는 하나님의 구원이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이 이사야서 1장부터 39장의 결론이고, 주제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 인간 왕으로는 안 된다.

초월적인 하늘에서 내려오신 하나님이 보내신 여호와의 종이 와야만 인류의 구속과 인간의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 이사야서의 주장이고, 바로 그 여호와의 종이 이사야서 40장부터 55장까지 게시된 여호와의 종이십니다. 그런데 그 여호와의 종, 예수 그리스도 참된 하나님의 종이신 주님이 오셔서, 어떤 일을 하셨고 어떻게 사역해야 하셨는지가 매우 중요한데, 참된 하나님의 종이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것은 사랑과 희생과 섬김의 도를 실천하셨습니다. 자신을 대속 제물로 내어주시고 그러니까 하나님의 종이 대속적인 죽음을 죽어서 다른 이들을 구원하고,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고 사람들이 생각을 못 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서가 충격적인 것은 하늘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여호와의 종이 오시면 그분이 진정으로 세상의 구원과 구속 가져오실 것인데, 그분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방식은 자기를 제물로 내어주셔서 자기가 생명과 피를 다 쏟아 부으며 죽음을 통과하여, 세상에 구원을 주시겠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바로 그분이십니다. 오늘 읽었던 본문 1장 2절에,

*로마서 1:2,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그러니깐 내가 지금 그리스도의 종인데, 나의 주인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이 하나님의 복음인데, 그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리스도가 하셨던 모든 일들은 구약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분이 특별히 오늘 읽었던 또한 1장 4절에 따르면,

*로마서 1:4,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사도바울이 지금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내용이 성경에 약속한 대로 성경대로 오셨고, 또 그분이 죽으셨다. 라고 하는 것을 오늘 복음의 내용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사야서가 예언한 그리스도가 오셔서, 계속적 죽음을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시겠다. 라고 하는 그 예언을 그리스도께서 성경 그대로 오셔서 성취했다. 라고 하는 것을 지금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구절을 어 한번 더 읽어보겠습니다. 로마서 3장 25절에서 26절인데요.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로마서 3:25-26,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지금 3장 25절에서도 사도바울이 강조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오셔서 구원의 역사를 베푸시는 데 있어서 그분이 화목제물 되셨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오셔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방식 세상을 사랑하신 방식이 자기 목숨을 제물로 내어 놓으시며, 희생과 사랑을 실천하셨다. 이것을 바울은 끊임없이, 끊임없이 이 서신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화목제물로 내어주셔서 죽으시므로 세상을 구원하신 것은, 제물을 드리는 것은 제사장의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지금 화목재물이 되셨고 죽으셨다. 부활하셨다. 라고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이 예수님의 사역의 특징은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예를 들자면 제사장과 같은 사역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로마서 15장 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로마서 15:16,
16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바울은 자신이 나 내가 하나님의 부분에 제사장 직분이다. 라고 하는 것은 제사장과 같이 자기를 제물로 내어주신 예수님처럼 나를 섬기는 것이 그리스도의 종의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로마서 12장 1절에,

*로마서 12:1,
1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사도바울은 로마스 3장에서 그리스도께서 화목제물 되셨다. 라고 이야기를 한 다음에, 내가 제사장의 직분을 받았다. 복음의 제사장의 직분을 받았다. 라고 이야기를 한 다음에,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는 너희들이 거룩한 산 제물로 너희 몸을 들여라. 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종인 모든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자신을 희생 제물로 내어놓으시며, 희생과 사랑을 통하여 세상의 구원을 가져오신 그리스도처럼 섬겨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만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생명을 쏟아 부으시며 온몸에 물과 피를 다 쏟으시며 세상의 구원을 향하여 사랑과 희생과 섬김을 베풀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사도바울의 사명이요. 그리스도에 종 된,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의 성도들의 사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그리스도의 종 바울 그리고 그리스도에 종 된, 우리 모든 성도님들에게 주시는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 왕이신 그분의 모든 말씀에 복종하고 순종해야 될 뿐만 아니라, 특별하게 우리에게 순종해야 될 것을 말씀해 주시는데 그것은 고난당한 종의 길을 걸어가시며 자기 생명을 대속 제물로 내어놓으시며 세상을 향한 구원의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신 그리스도를 닮아서 우리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며, 희생과 사랑에 봉사와 섬김의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을 오늘 그리스도의 종의 사명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님, 마지막으로, 이렇게 그리스도의 노예되고, 그리스도의 소유물 되고, 그리스도의 종이 되면 우리에게 유익이 있을까요?

아까 제 친구의 말처럼 딱 천국 갈 수 있는 커트라인까지만 믿어서 천국 가도 천국 가는 거고,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서 복음의 제사장되고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들여서 온몸을 다 불태워서 주님 앞에 들이는 사람이나 딱 천국 갈 정도로 믿는 사람이나 아 주님이 다 하셨네. 깨닫고 예수님 섬기는 사람이나 다 똑같이 천국에 들어가면 그리스도의 종에 삶을 신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억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네 번째로, 그리스도의 종은 강력한 권세를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입니다.

IV. 그리스도의 종은 강력한 권세가 있습니다.

-종이라고 다 같은 종이 아닙니다. 로마 제국에는 엄청나게 많은 종이 있었습니다. 수천만 명의 종이 있었다. 라고 알려져 있는데요. 종의 신분과 형편을 다 달랐습니다. 는데. 황제의 종은 로마의 정치와 행정에서 막강한 권세를 행사했습니다. 그래서 로마 황실 집안사람이라고 하는 의미의 파밀리아 카예사리스라고 하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 황제의 가족과 친척과 관료들도 이 파밀리아 카예사리스에 들어가 있었는데, 이거는 황실 집안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인데요. 이 가운데는 노예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카이사르의 집, 즉 황실에서 노예로 봉사하는 노예들은 보통 노예가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로마 제국 내에서 행정과 정치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마르쿠스 프로세네스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기독교인입니다. 역사적으로 이 사람은 약 40년 동안 황실 노예로서 25개의 관직을 맡았는데, 그 직책들 가운데는 황제의 침실과 의상 하루 일과 심지어 매일 문안하는 자들을 통제하는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팔라스라고 하는 사람도 노예입니다. 황실 노예인데요. 이 사람은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노예였는데 그는 경제적 문제와 재정 관리를 황제의 재정 관리를 담당하면서, 큰 권력을 행사했고 막대한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원로원 의원들조차 그 노예의 눈치를 보면서 행동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바울 당시 내가 노예요. 라고 하는 것은 여러 의미가 있지만 누구의 노예가 되느냐에 따라서 그것은 강력한 권위 주장일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황제 카이사 카이사르의 노예입니다. 카이사르의 종입니다. 라고 하는 것은 그 종이 하는 말 로마 제국의 모든 사람이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은 카이사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하늘과 땅에 모든 권세를 가지신 ‘만왕의 왕 만주의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종’이라 라고 사도바울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사도바울이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는 사도바울의 직분을 수행하는 한도에 있어서는, 교회와 모든 세상이 그 말씀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라고 했는데, 이 복음이라고 하는 단어도 당시 로마 사람들은 황제가 탄생하고 즉위하고 황제가 통치함으로써 로마 제국 내에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준 것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로마 황제가 주님이시고 구원자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지금 하나님의 복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로마의 복음 카이사르의 복음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아니한 진정한 복음이 있고, 하나님의 복음 앞에서는 제국의 복음이 사실 거짓 복음이다. 라고 하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그 거짓 복음 제국의 복음에 황제의 종 된 자들의 권세가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것처럼, 사도바울은 그 제국의 노예들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권위를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왕이신 예수님의 권세는 단순히 교회와 이 세상뿐만 아니라, 전 우주에 미치기 때문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은 그 권세가 우주적인 권세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우주적이라고 하는 말은 사탄 마귀와 귀신들과 하나님의 복음을 대적하는 모든 흑암의 권세들을 멸절시키고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그리스도의 종들에게 주셨다. 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야 할 자가 결단코 없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 그리스도의 참된 종이 될 때 이 권세를 가지실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 우리가 때로는 영적으로 무기력하고 실패하고 낙심하고 지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난과 환난만 바라보고 그것을 없애고 그 문제만을 해결하기 위해 투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탄의 공격과 세속의 파구 앞에 무기력하게 넘어지고 힘이 없고 권세가 없는 것은 혹시 참된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그 신실한 사명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리스도의 종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권세를 우리가 잃어버렸기 때문에 낙심하고 넘어지고 무기력하게 된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오늘 우리 문제의 근본 해결책은 바로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교회 와서 인생 문제와 역경을 해결해 달라고 강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제1번 우선순위는 우리 정체성을 찾고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특정함을 입었고 선별된 자이고 오직 복음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사용하도록 우리는 바쳐진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희생제물로 내어주셨듯이 우리도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들이고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에 사역을 감당하는 그 신실한 종의 사역을 감당할 때, 저는 세상을 이기며 모든 우주적 흑암의 권세들을 다스리고, 하나님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게 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권세와 능력을 신실하신 그리스도의 종인 저희들에게 주님이 주실 줄 믿습니다. 이제 우리 사랑하는 우리 제자 훈련반 사육 훈련반 분들께서 복음의 제사장이 되어 이방인을 그리스도의 제물로 바치기 위하여 국내외 아웃리치를 떠날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우리 훈련생 여러분은 말씀을 연구하고, 적용을 하시고 그 적용한 내용 결단 적용하신 내용을 실천하시는 것이 굉장히 힘드셨을 것입니다.

그 공동체 안에서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이 어떨 때는 피눈물 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부르신 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꼭 기억 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부르신 주님은 그 부르심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번 아웃리치를 통해서도 가까이는 우리 가족과 이웃을 향한 섬김의 사역을 감당해 오셨지만 국경을 넘어서 또 머나먼 대한민국 땅에 척박하고 어려운 상황에 있는 시골 교회에 가셨을 때, 그곳에서 복음의 제사장을 사역을 감당하실 때, 우리 훈련생들도 그리스도에 권세를 가진 종으로 세워지실 뿐만 아니라, 그 교회들도 힘과 능력과 은혜를 얻게 되는 하나님의 역사를 허락해 주실 줄 믿습니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사랑 안고 가오리다. 모든 존귀와 영광과 권세는 주님 홀로 받으시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충성하고 섬기시는 그리스도의 종의사명을 올여름 잘 감당하셔서, 하늘과 땅에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의 그 권세를 소유하여, 세상을 살리시는 하나님 백성 되시기를 우리 훈련생들과 우리 모든 성도님들께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요약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에 복종하며 전적으로 주님만 바라보고, 순종하는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고,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신 주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며,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복음의 제사장적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의 권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복음을 능력 있게 전파하는 자로 주님의 지상 명령에 순종하는 자로, 바울처럼 복음을 위해 말씀으로 무장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종임을 기억하여 순명으로 자기 소개를 잘 하는 자가 되기를 소망한다.

-오늘 로마서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의 정체성과 사명을 일깨워 주셨음에 감사해야 하며, 우리 전 존재가 온전히 주님께 바쳐진 자로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충성하여, 고난당하는 종의 길을 걸어가신 주님의 종으로서, 사랑과 희생과 복음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신실한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주께서 주신 권세를 가지고, 흑암의 세력을 무너뜨리며 하나님의 복음을 능력 있게 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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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 바울의 자기소개와 그리스도의 종에 대한 이해.
1-1. 바울의 자기소개 및 그 의미
- 바울은 로마서에서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 소개함
- (중요) 이 소개는 바울의 정체성과 자격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
- 바울이 로마 교회로부터 스페인 선교를 요청한 목적을 명시
- 바울의 자기소개는 신뢰를 형성하고 로마 교회의 지지를 호소함


1-2. 그리스도의 종에 대한 이해.
- 그리스도의 종은 성별된 존재로서, 주인의 소유물이며, 거룩한 존재
- (중요) 그리스도의 종은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고 그를 따르는 자
- 그리스도의 종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택정되고, 하나님의 소유물로 구분됨
- 이 세상은 하나님의 소유물이며, 그 앞에 충성해야 함


1-3.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와 신앙생활.
-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고 거룩한 성도로 인식
- 그리스도는 그 자리에 바울, 우리 모두가 구약성경의 성별과 같이 속된 것으로부터 거룩한 소유물로 선택됨
-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그리스도를 섬기며, 세상의 영광과 신들을 섬기는 자가 됨
- (중요) 그리스도라는 칭호에 대한 이해는 정확하고 올바르게 통용되어야 함


2. 그리스도의 왕적 권위와 종의 의미.
2-1. 그리스도와 왕적 권위의 연결
- 그리스도는 칭호로서 왕적인 권위를 가짐
- (중요) 바울이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고백은 왕, 즉 예수님의 종이라는 본질을 인정하는 것
- 교회 성도들 역시 왕, 즉 예수님의 종이라는 자격을 가짐
-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천지 창조의 주님으로서 그리스도라는 왕적 자리매김을 가짐
- 이 왕적 권위는 예수님을 의미하며,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함


2-2.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신앙의 기본.
- 기독교 신앙의 기본은 하나님을 지옥에서 해방시키는 것임
- 이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시키는 최소한의 보증금을 제공함
- 즉, 죄로부터 자유로워짐은 궁극적인 목표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짐
- 이러한 자유로움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오류임
- 이 오류를 이해하고 그리스도를 왕으로 인정하는 것이 중요함


2-3. 그리스도를 닮아서 섬기는 종의 역할.
- (중요) 그리스도의 종은 예수님을 닮아가고, 그리스도의 충성을 보여줌
- 이것은 주님을 섬기는 삶을 통해 드러나야 함
- 왕, 즉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종의 역할 중 하나임
- 또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야 함
- 이것은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그리스도의 충성을 보여주는 삶을 통해 드러나야 함.


3.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사명과 그 효과.
3-1. 그리스도의 종이로서의 사도 바울
- 바울은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받음
- 자신의 몸을 하나님에게 제물로 내려놓음
- (중요) 화목제물로 죽어 세상을 구원함
- 예수처럼 섬김과 사랑을 실천
- 예수의 사역과 동일한 사도 바울의 사역


3-2. 그리스도의 종의 강력한 권세.
- 그리스도의 종은 강력한 권세를 받았음
- (중요) 황제의 가족과 친척, 관료들도 파밀리아 카예사리스에 있음
- 마르쿠스 프로세네스는 기독교인이고, 황실 종이
- 황실 종이라는 권한을 이용해 복음을 전파


3-3.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의 가치.
-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이 유익함
-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희생
- 사랑과 희생, 섬김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
- 예수 그리스도처럼 사랑을 실천하며 희생과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함
- (중요) 성도들은 자신을 희생 제물로 내어놓아야 함


4. 로마 시대의 교회와 노예
4-1.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팔라스의 노예 권력.
-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팔라스는 노예이면서도 황실의 권한을 가졌음
- 그의 권력은 경제적 문제와 재정 관리 분야에서 활약됨
- (중요) 황제 카이사르의 노예임에도 불구하고, 팔라스는 자신의 권위를 주장함
- 팔라스의 권위는 그가 노예임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바울에게 공격 받음
- 사도바울은 이 복음이 진짜 복음임을 명확히 주장함


4-2. 진짜 복음과 제국의 복음의 대결.
- 바울은 복음이 로마의 복음이라 말하며, 이 복음은 황제와 관련된 복음임
- (중요) 바울은 진정한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권세의 일환임을 강조함
- 그리스도의 권세는 단순한 제국의 복음과는 다름
- 그리스도의 권세는 사탄, 마귀, 귀신의 권세를 이기는 권능을 가짐
- 바울은 참된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 위해 필요한 권세를 하나님께 바침


4-3.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의 정체성 회복.
-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 위해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은 사명을 잊은 경우임
- 우리의 문제는 정체성을 찾고 발견하는 것이며,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임을 기억해야 함
- 훈련생들은 국경을 넘어 복음의 제물을 바치는 일에 참여해야 함
- (중요) 훈련생들은 제자로서 힘과 능력, 은혜를 얻게 될 것임
- 훈련생들은 아웃리치, 국내외에서도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며, 존귀와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드려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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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6월 12일)
제목: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말씀: 마가복음 9:14~24
사회: 김대규 부목사님


설교자: 금동훈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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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가복음 9:14~24,
14 이에 그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더라

15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매우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
16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그들과 변론하느냐.
17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18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19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20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그가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더라.
21 예수께서 그 아버지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이르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22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24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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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성경은 인생을 인생의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낙망에 빠져 예수님께 찾아온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인생에 여러 문제 난제는 그의 아들이었습니다. 성경은 그의 아들이 귀신 들렸고, 그 귀신이 아들을 죽이기 위해 물에도 던지고 불에도 던졌다고 말합니다. 이름을 알 수는 없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의 삶에 깊이 관여하고 싶어 합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오기 전에 이미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실패였습니다. 그리고 어디에선가 모든 병(病)을 고치고 모든 귀신을 쫓아내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전해 듣고 혹시나 하여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만 역시나 예수님은 계시지 않았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요청하였으나 제자들은 귀신 돌린 아들을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귀신 들린 아들의 아버지는 낙망(落望)하고 좌절(挫折)하였을 것입니다. 근데 이 성경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2천 년 전 나와 상관없는 나라에서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일까요? 최근에 한 50대 중년의 젊은 남자 집사님이 저에게 찾아와서 조용히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목사님, 저 지난주에 점 보러 갔다 왔어요.” 예전에 여 집사님이나 권사님들께서 그러는 건 제가 좀 보았습니다만 이 남자 집사님이 직접 찾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으니깐 처음엔 너무 당황스러웠습니다. 인생이 너무 안 풀려서 직장에서 버틸 힘이 없어서, 자녀들이 이 부모님들의 마음과 생각과 계획과 다르게 엇나가니깐, 얼마나 힘들었는지 점집을 찾아가서 점을 보았다고 합니다. 도대체 얼마나 힘들었으면 얼마나 길이 보이지 않았으면 도대체 인생의 난제 앞에서 얼마나 외로웠으면 그랬을까요? 오늘 성경이 등 등장시키는 귀신 들린 아들을 끌어안고 짠하고 등장한 아버지의 모습은 바로 오늘날 여전히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이 단순히 한 개인만의 문제일까요? 교회에서도 동일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한번은 제가 최근에 대구에 내려가서 목사님들과 함께 식사를 하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희들이 목사님들이 몇 분이 식사하는데, 그 동네에서 가장 큰 교회의 고등부 부장 집사님으로 섬기는 분이 오셔서 대구의 명물 가장 맛있는 막창을 사주기로 하셨습니다. 맛있더라구요!!.
 
근데 이 막창을 막 먹다가 이 집사님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는 장년만 5천 명이 넘습니다.” 안 놀라네요. 어마어마하게 큰 교회예요. 그런데 그 교회에서 고등부 학생들이 60명이 모인답니다. 깜짝 놀랬어요. 어떻게 된 일인가? 그래서 맛있는 막창 앞에서 입맛이 있어서 더 이상 못 먹었어요. 왜 굳이 와서 그런 얘기를 할까요? 사주질 말던가, 어쨌든 이러한 교회의 여러 문제들 가운데 더 큰 문제는 이 한 목사님의 자녀가 기독교 미션스쿨을 다니는데, 미션스쿨 다니면 한 반에 반장도 뽑지만 종교부장도 뽑아야 합니다.
 
그런데 뽑으려고 하는데 1반에 교회 다닌 아이가 1명도 제대로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 반에서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 아이가 그 반의 종교부장이 됐답니다. 슬프지만 웃긴 이상한 이야기, 저도 사실은 청소년 사역을 살아내기 위해서 했습니다. 꽤 오래 전이지만 예전에 우리 강남에 있을 때, 소망관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제가 섬기던 부서는 중학교 1~2학년을 대상으로 하는 중등 1부였는데요. 그때 당시 제 기억으론 천 명이 넘었어요. 아이들이 중학교 1학년 2학년만 많을 때는 1,500명까지 왔어요. 어마무시해 안 놀래요. 60명이라구요. 여기는 중학교 1~2학년인데 천 명 1천 명 1,500이 넘는다고요. 그 당시 혹시 소방관을 아시는 분은 아실 거예요. 1층에서 저희가 4층에 있었는데, 4층 사패코를 썼는데요.
 
4층까지 올라오는 데 30분 걸려요. 예비 끝나고 내려가는 데 40분 걸려요. 예배는 50분 거리 그때는요 저희가 예배 드릴 때, 찬양할 때 소리를 크게 찬양하면 안 돼요. 찬양할 때 아이들이 신나서 뛰면 안 돼요. 왜요 아이들이 8시, 10시, 12시, 3번 예배를 하는데 그 예배당에 꽉 차니까 산소가 부족한 거예요. 그래서 아이들이 찬양하다 쓰러졌어요. 거짓말 같죠? 진짜예요. 그래서 그 당시에 산소 발생기도 갖다 놓고 뭐도 갖다 놓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우리가 그때 아이들이 너무 많아서 찬양할 때도 조용조용히 하라고 그러고 뛸라고 하면 뛰지 말라고 그러고 왜요 예배드리다가 주님 뵐 수 있어 가지구요. 그런데 이제 한국 교회는 어떻습니까?
 
인구절벽이라고 말하면서 한국의 젊은 다음 세대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에 큰 문제가 우리 앞에 있다고 말합니다. 너무 많은 교회들이 주일 학교에 생명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쉽지 않습니다. 다음 세대에 대한 한국 교회의 열망과 기대는 큽니다만 현실은 너무나 너무나도 반대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교회 공동체도 다음 세대에 대한 큰 위기의 도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게 마치 귀신 들려서 불에도 물에도 던져서 죽일려고 하는 그 모습과 뭐가 다릅니까? 이렇게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공동체 모든 영역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생에서 풀리지 않는 난제와 고난 앞에서 도대체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은 더 힘들어요.
 
난제도 힘들지만 문제가 고난이 시련이 그것 때문에 어떻게 살아갈까, 고민도 해야 되지만 거기에 더하여서 왜 예수님은 나에게 이런 고난과 난제를 허락하셨는가? 이런 고통 중에 예수님은 나만 버려두고 어디로 숨으셨는가? 라는 의구심으로 말미암아 인생이 더 버겁습니다. 고난도 고통스러운데 나의 고난과 난제를 풀어주실 것이라고 믿었던 주님을 찾지 못하니, 더 고독하고 외롭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점집에 갔나 봅니다. 이런 이중적 고통을 갖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들은 도대체 무엇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I. 첫 번째로, 우리 주님께서 은혜로 주신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다시 한 번 첫 번째로, 은혜로 주시는 믿음으로 살아가라고 성경은 선언합니다. 여기서 믿음은 은혜로 주시는 겁니다. 은혜로 주시는 것인데 이 은혜로 주신 믿음을 통해 그래서 예수님이 주님이라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서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처음 16절 17절 가운데 예수님을 뭐라 부르느냐면 ‘디다칼로스 선생이여!’ 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 23절에서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을 어떻게 부르냐면 우리 개혁계정에서는 안 나오지만 헬라 원어 성경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여기서 ‘주여’가 나옵니다. 아까 16, 17절에는 ‘디다 칼로스 선생님이여’, 했던 이 호칭이 이제 23절에서는 ‘퀴리의 주님’이라고 그 호칭이 바뀌는 겁니다.
 
이 주님이라는 단어는 지식을 가르치는 선생이 아니라 우주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 못 박혀 죽으시고, 또한 부활하신 그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이라는 사실, 우주 만물을 통치하시고, 생(生)과 사(死)와 화(禍)와 복(福)을 주관 하시는 주님이라는 사실, 이 분만이 세상에 어떠한 방법으로도 해결할 수 없었던 나의 가장 큰 난제, 문제, 고난, 실현, 역경, 아픔, 내 아들의 문제, 내 아들의 죽음의 문제, 귀신 들린 문제, 내 아내의 문제, 내 남편의 문제, 내 가족의 문제, 바로 이분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게 되는 순간입니다. 이 고백이 바로 “주여, 내가 믿나이다.” 입니다.
 
하지만 아버지 이 아이의 아버지의 믿음의 고백을 조금 더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가 믿나이다.’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다음에 이어지는 게 뭐냐면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라고 외칩니다. 조금 이상하지요 내가 믿나이다. 해놓고,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해 놓고 주여 믿음 없음을 도와 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언어로 적으면 이상하지만 우리의 삶에서 살펴보면 그리 이상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믿음이 있지만 여전히 의심이 남아 있어요. 이러한 모습은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사건에서도 등장합니다. 한밤중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을 발견하고 정말 주님이시라면 저도 주님과 같이 물 위를 걷게 해달라는 베드로의 믿음은 그에게 물 위를 걷는 기적을 선사합니다. 하지만 거센 파도를 일으키는 바람을 보고 의심하여 빠져버린 베드로를 건져내신 주님께서 믿은 ‘믿음이 적은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라고 호되게 꾸짖는 예수님 그리고 베드로의 모습을 우리는 잘 압니다.
 
이제 자신이 인생의 난제인 아들, 인간의 방법으로는 전혀 고칠 수 없는 해결할 수 없는 귀신 들린 아들의 아버지는 이제야 깨닫습니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분이 바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주를 주관하시는 거룩하고 위대한 주님이라는 사실을 말이지요. 그리고 이분만이 나의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게 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의심, 불신앙에 문제가 뿌리 깊게 남아있다는 사실을 그 사실로 말미암아 고통스러워하지요.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기에 이 의심, 불신앙의 문제도 주님 앞에 던져버립니다. 그것이 바로 ‘주여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옵소서.’ 이것이 바로 이 모습입니다. 그러자 곧 기적이 그의 눈앞에서 펼쳐집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내신 것입니다. 그렇게 귀신은 쫓겨납니다. 기적(奇蹟)이 일어났습니다.
 
아이의 아버지의 믿음으로 아이와 아버지와 아들의 모든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믿음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면 내가 믿을께. 내가 이 병에서 낳으면 예수님이든 하나님이든 다 믿을게.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처럼 기적이 일어나면 그것도 나의 가장 큰 문제인 난제가 내 눈앞에서 해결되면, 나와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쉬워질까요? 그래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기적과 이적을 간절히 사모합니다. 그런데요. 오늘 말씀을 잘 살펴보면 기적과 믿음의 순서가 바뀌어져 있습니다. 기적이 먼저가 아니라, 믿음이 먼저인 것입니다. 아들의 문제가 해결되기 전 그 아버지의 믿음의 문제가 먼저 해결된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강원도 오지에서 살았습니다. 3살 땐가, 4살 땐가 정확히 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너무 어렸기 때문에 저는 몹시 건강이 좋지 않아서 시름시름 앓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이 병원 저 병원 다 다녀봤지만, 도대체 고칠 방법이 없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어머니는 어떡해요. 그냥 아들이 죽어가는 걸 볼 수만 없으니까 여기저기 기웃기웃 찾다가 어느 산 산 밑에 산기슭에 용한 무당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무당을 찾아가니깐 이 무당이 저를 보자마자 ‘어여가, 왜 죽을 사람을 데려왔어?’ 라고 하며 저희 어머니를 쫓아냅니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어떻게 해요? 거기서 포기할 수 없으니깐 그 용한 무당보다 조금 더 용한 무당이 사는 산 중턱에 갔다고 합니다. 가서 또 데려가자마자 문을 보자마자 이 무당이 저를 보자마자 그러더군요. ‘왜 산송장을 데려왔어 가서 장례 준비나 해!’ 쫓아내더라는 거예요. 포기할 수 있습니까? 포기할 수 없어요. 저희 어머니는 저의 엄마니까요? 엄마는 자식을 위해서 포기(抛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요. 그 산 중턱에 사는 용한 무당보다 더 용한 무당이 사는 산꼭대기 사는 무당을 찾아갔습니다. 찾아가자마자 이 용한 무당은 더 용하니깐 냄새만으로도 죽은 송장 썩는 냄새가 난다고 빨리 데려가라고 아우성을 칩니다. 하지만 더 이상 어머니가 갈 데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 무당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애원합니다. 내 아이 좀 살려주세요. 내 아이 좀 살려주세요. 10분, 20분, 1시간 2시간이 지나니까 이 무당이 너무너무 힘든 거예요. 왜요 뒤에 손님 받아야 되는데요. 이 어머니가 안 가니까 그렇게 1시간 하고 30분이 지난 다음에 이 무당이 저희 어머니 귀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고 합니다. 이건 영업 비밀인데, 산을 내려가서 길을 따라가면 내과 하나가 나오는데 거기를 건너서 마을 입구에 가면 빨간 벽돌을 지은 땡땡 교회가 하나가 나올거요. 거기 가서 예수라는 선생님을 만나면, 당신 아들은 저는 살아날 겁니다. 어머니는 다 죽어가는 저를 들쳐 업고 날라 가기 시작했습니다. 산을 내려가고 냇가를 건너고 다리를 건너고 한 마을 입구에 빨간 벽돌로 지어져 있는 땡땡 교회를 문을 박차고 뻥 하고 들어가니까, 마침 그곳에 절 막 이게 정장을 입은 한 남자와 또 십 수 명의 여자 분들이 뭔가를 하다가 그 외 뒷문이 뻥 소리가 나면서 크게 들리니까, 깜짝 놀라서 뒤를 쳐다봤다고 합니다. 정적이 흐르는 그 순간, 중년의 남자가 넥타이를 하고 정장을 입은 이 남자분이 저희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오셨나요? 그러니깐 저희 어머니께서 우리 어머니 그때 아무것도 몰랐어요.
 
‘혹시 여기 예수라는 선생님이 계시나요? 제가 지금 그분을 급하게 만나야 하는데 어디 계신가요?’ 그런 상황 가운데 이 중년의 남성분이 어머니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죄송한데 지금 예수님이 출타 중이라서 제가 봐드려도 될까요?’ 하며 다 죽어 가는 저를 교회 예배당 중앙에 눕히고 십 수 명의 성도들이 둘러싸서 갑자기 큰소리로 기도하기 시작했답니다. 주여, 이 아이를 살려달라고 그렇게 기도하는데 저희 어머니가 생전 교회란 곳을 가본 적도 없으니까, 저 구석 통에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예수님께 비나이다. 그렇게 30분 정도 기도했더니, 갑자기 죽어가서 시름시름 앉지도 못하던 제가 앉으드래요. 시퍼렇게 변해 가던 입술이 빨갛게 변해 가고 눈엔 생기게 나고 그리고 두리번두리번 거리다가 10분 정도 더 기도하니깐 제가 갑자기 힘을 내서 예배당 이쪽저쪽을 뛰어 댕기면서 날아 댕기더래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제가 이런 기적 같은 겨 이 기적 같은 일을 경험했는데, 이런 제가 예수님 믿는 게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믿음이 적은 세대여, 왜 의심하느냐? 예수 이렇게 기적 같은 일을 경험하고 나서 어떻게 예수가 안 믿겨집니까? 그런 기적을 경험하면 하는데 예수가 안 믿겨지는 게 더 큰 기적이에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이야기는 제가 지어낸 이야깁니다. 왜냐 이유가 있어요. 제가 2007년도인가, 2008년도인가 사랑의 교회에 이제 부임해서 수요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한 멋진 목사님께서 수요 예배 강단에서 수요 저녁 기도회 강단에서 설교를 하고 있는데, 수요 저녁 기도회 가운데 설교를 하다가 자신의 간증을 하는 거예요. 아까 제가 말한 그런 아주 멋들어진 간증이요. 근데 그 간증을 듣는 제가 빠져드는 거예요. 그러면서 내 마음 가운데 억울함이 있는 거예요. 주여 저에게는 왜 저런 간증을 안 주십니까 저도 저런 간증을 원합니다. 근데 안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지어냈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기적을 경험한 경험하는 것이 믿음을 얻는 데 더 좋겠습니까? 아니면 기적이라고 기적이란 찾아보지도 못했던 저 같은 사람이 예수님을 더 잘 믿겠습니까? 확신컨대, 저는 그러한 경험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예수님이 너무,너무,너무 잘 믿겨집니다. 우리 스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다시 부활하신 예수님이 너무너무 잘 확실히 믿겨집니다.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에게서 나신 것이 왜 안 믿겨집니까? 너무 확실하게 저는 믿겨집니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그렇게 바라는 기적 같은 일을 경험하고 믿는 것이 기적입니까? 아니면 그러한 일이 없이도 우리 주님을 주님이 믿어지는 것이 진짜 기적일까요? 저는 확실히 하기는 후자입니다. 기적 같은 일을 경험하고, 믿는 것으로 누구나 다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이 없음에도 이렇게 예수님이 확실하게 믿어지는 것, 저는 이것이 더 멋진 기적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실 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20장 29절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20:29,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거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하시니라
-그래서 제가 복됩니다. 우리 사랑하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 바로 이 믿음입니다. 세상과 전혀 다른 방법으로 주시는 이 위대한 믿음, 그렇다면 그러면 이 믿음에 어떠한 능력이 있어서 인생의 난제 앞에서 이 믿음으로 살아가라고 선언하실까요? 바로 은혜로 주신 이 믿음은, 이 믿음은 마지막 승리까지 약속이 성취되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가 버틸 수 있는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능력을 주기 때문입니다. 하박국 2장 4절을 보면, 말씀을 보면
 
*하박국 2:4,
4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믿음이 히브리어로 ‘애무나’라는 단어를 쓰는데 이 애무나의 의미 가운데 하나가 버티다 ‘마지막까지 버티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의 고난과 난제로 인한 고통과 이 고통 앞에서 예수님의 부재로 겪는 이중의 고통이 분명히 있습니다만 이러한 고통 중에도 우리는 믿음으로 버틸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능력, 에무나의 능력을 주셨기 때문에 끝까지 버틸 수 있다구요.
 
그래서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지금 여기 바로 이 자리에 앉아서 함께 말씀을 듣고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해 애무나의 믿음은 너무도 강력하기에 절대 훼손되거나 깨어지지 않습니다. 이 믿음은 우리를 사랑하게 합니다. 아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여전히 인생의 난제로 나의 마음이 죽을 것처럼 느껴지지만, 절대로,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애무나(마지막까지 버티다)의 믿음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셔서 오늘도 우리로 하루를 살아가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주신 믿음의 능력으로 오늘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고난 삶의 고난의 문제 앞에서 무엇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II. 두 번째로, 우리는 이 믿음으로 현재를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보통 교회 다니면 믿음이 믿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며 신앙생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우리 삶 속에서 그 믿음의 능력이 나타날까요? 아마도 그런 경우는 많지 않을 겁니다. 그럼 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믿음의 능력이 우리 삶에서 자꾸 비껴가고 있을까요? 가만히 살펴보니까, 우리는 믿음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옛날 과거에 머물어 살아가거나 미래로 우리의 믿음을 믿음의 도전을 미루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에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의 고난과 풀리지 않는 난제 앞에서 자꾸 믿음을 과거의 믿음이나 미래로 미루는 믿음으로 오늘 일어나야 될 믿음의 능력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을 잠시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사랑하는 예수께서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한참 후에 나사로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그러자 말하다가 이렇게 예수께 이야기합니다. 요한복음 11장이신 21절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1:21,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자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바로 이 부분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 믿지만 과거에 머물러 있는 믿음입니다. 지금 말고 나사로가 죽기 전에 예수님이 오셨더라면 오라버니는 오라버니 나사로는 죽지 않았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합니다. 이런 과거에 머물러 있는 믿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예전엔 사실 금식기도 했다고, 내가 젊은 날에는 엄청난 부흥을 경험하고 중고등학교 청년회 때 회장을 했다고, 무엇 무엇을 했다고 내가 옛날에 뭔가 영적인 큰일을 선교를 하고 전도를 했을 때, 엄청난 일이 일어났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에게 하는 것을 우리는 매우 좋아합니다. 이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믿음의 능력이 과거에 머물러서 더 이상 자라나지 않는 믿음의 난쟁이들이 되는 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우리가 과거의 믿음에 머물러 믿음의 난쟁이가 되었다면 우리는 오늘 어떠한 믿음의 능력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또 1가지 유형은 믿음을 미래로 미루는 분들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3절 24절 말씀 가운데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23-24,
23 예수께서 이러시되 내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할 때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는 마르다에게 오늘 나사로가 살아날 것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르다는 예수님의 능력을 미래로 미루어 버립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잘 알고 예수님을 너무너무 사랑하기도 하지만 예수님께서 살려주시겠다고 하시는 말씀도 믿지만 그것이 지금은 아니고, 나중에, 아주 나중에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어떻습니까? 우리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아 있지 않습니까?
 
우리도 예수님을 성경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믿습니다. 또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문제, 난제, 고난을 해결해 주실 것도 아주 잘 믿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믿음의 능력이 나타 나냐는 것은 오늘은 아니랍니다. 나중에 한참 후에, 왜요? 사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약속도 믿지만 믿음의 겁쟁이들입니다. 혹시나 내가 나의 문제 나의 아픔을 해결해 달라기도 했는데 응답되지 않을까? 봐. 내가 믿는 예수를 혹시 내가 의심할까봐? 그저 도망가기 바쁩니다. 주님께서 주신 은혜로 얻은 믿음이나 나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이라는 더 큰 의심이 있기에, 우리는 점잖게 내일로, 내일로 나중으로 도망가기 바쁩니다. 그리고 뭔가 있어 보이기 위해서 나중에 마지막 날에 부활할 때는 다시 살아날 줄 내가 믿나이다.
 
이 겁쟁이 마르다의 고백이 우리의 속마음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과거의 믿음으로 믿음의 난쟁이가 되어 도망가거나, 미래로 미루는 믿음으로 믿음의 겁쟁이가 되어 뒷걸음질 치는 우리에게 다시 한 번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지금 바로 이곳에서. 아멘, 이렇게 우리는 마음의 담대함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능력은 과거에 머무르거나 미래로 미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있는 이곳에서 드러나야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랑의 교회 영 가족 여러분, 오늘 이 이야기를 하고 이제 마칠까 합니다.
 
지난 3~4개월 전에 한 여 집사님께서 암이 재발됐어요. 2021년도에 수술을 했는데 재발되고 그다음 해 전이되고, 어려운 과정을 겪었습니다. 작년 말에는 의사분이 호스피스 병동까지 이야기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제가 전해 듣고 제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제가 믿음을 가지고 에무나의 믿음 버티는 믿음을 가지고 가서 기도해 드려야 되는데 두려웠어요. 혹시 내가 기도했는데 안 이루어질까 봐요. 저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믿음의 겁쟁이처럼요. 그래서 믿음의 난쟁이가 되어서 뒤로, 뒤로 뒤로 미루었습니다. 믿음의 난쟁이가 되어 과거의 믿음의 영광만 입으로 말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제가 기도해야 되는데, 그래서 기도하면서 그날 치유의 응답이 안 일어날 것 같은데, 그래도 나는 더 마음의 담대함을 가지고 나아가야 되었습니다.
 
그런 순간 제 마음 가운데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시고 담대한 믿음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기도하기 시작했어요. 주여 살려주옵소서! 주여, 이 집사님을 살려 주옵소서 제가 가는 곳곳마다 그분을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 집사님의 이름을 대고 우리 선한 자들을 위해 선한 자들의 기도, 함께하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실 것이라고 믿으며,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깨우시는 그 순간순간마다 기도하며, 기도하며 또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몇 개월 전 월요일 날 오후 2시 막 한잠 낮잠이 들려고 하는 그 순간, 몽롱한 순간에 전화가 왔어요. 화가 났어요. 잠을 자야 되는데 월요일에? 이래 전화를 받으니깐 그 집사님의 남편분이에요. 그리고 다짜고짜 저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뺍니까 맙니까? 뭘 빼고 뭘 말아야 되는지 모르는데, 대답할 수가 없어 자초진종 설명해 보니까 그분이 복수 차고 폐에 물이 차 가지고 폐에다가 관을 꽂았는데 이 관에서 이 물이 다 안 나와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야 관을 뺀다는 거예요. 그날 가서 기도를 많이 하고 그날 가서 인제 했는데 이제 관에서 물이 폐에서 조금, 조금밖에 안 나오는데 의사가 좀 긴가민가한 거죠. 그래서 집사님한테 물어봤습니다. 근까 이 남편 집사님은 저한테 전화해서 물어보는 거예요. 저는 뭐라고 답해야 돼요? 나는 지금 비몽사몽인데 이럴 때는 답을 바로 하면 안돼요. 1초 2초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여, 지혜를 주옵소서. 그리고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뺐시다. 오늘 뺐시다. 우리는 집사님 우리는 오늘밖에 못 삽니다.
 
어제는 이미 지나가서 살 수 없고 내일은 아직 안 왔으니 거기도 살 수 없습니다. 오늘 뺍시다 그리고 기적처럼 회복되기 시작해서 그동안 어려워서 할 수 없었던 저랑 같이 섬기는 사역 부서 새 가족 부서에서 스텝으로 생명을 걸고 섬겼습니다. 너무 너무 감동적이고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거지요. 그런데 며칠 전에 다시 한 번 집사님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목사님 항암제도 잘 맞고 마침 아내가 이 항암 치료하는데, 이 약값이 너무 비싼데 마침 우리 집사님부터 보험이 적용됐답니다.‘ 할렐루야, 아닙니까? 그래서 항암치료하고 하루 이틀 하는데, 갑자기 간에 문제가 생긴 거예요. 간수치가 올라가고 또 의사는 호스피스 병동을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목사님 어떡합니까? 저는 어떡합니까? 그래서 오늘 이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올라왔습니다.
 
생과 사를 주관하시는 우리 하나님, 화와 복을 다스리는 우리의 하나님,
오늘 과거에 내 과거로 나의 믿음을 미뤄 버리고, 미래로 내 믿음을 미뤄서 숨고 도망가는 믿음이 아니라, 애무나의 믿음, 끝까지 버티는 믿음 마지막 승리할 때까지 버틸 수 있는 강력한 에무나의 믿음 허락하여 주셔서,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께서 이 시 집사님에게 생명의 능력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주여 이 집사님에게 생명의 능력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바로 이 믿음을 가지고 우리가 믿음의 기도로 나갈 때 낙망의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함으로 말미암아 오늘 가장 위대한 소망으로 바뀔 줄 믿습니다. 우리 귀한 성도님들도 믿음으로 함께 기도해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요약
우리 앞에 놓은 고난과 난제 앞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에무나의 믿음을 가지고 마지막 순간까지 버티며 승리해야 한다. 우리 영 가족 공동체가 과거의 믿음에 머무르거나 미래로 믿음을 미루지 말고 어떠한 순간에도 믿음 보고를 올려드리는 영적 군사로 살아가야 한다. 이 믿음으로 현재의 초월적 회복과 부흥을 경험하여,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 자가 되어야 하는지를 깨달아, 믿음의 기도용사로 비상하여 주님의 기쁜 자녀로 주님의 지상 명령을 실천하는 자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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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6월 5일)
제목: “인자의 날 하루”
찬양인도: 쉐키나(유재원 부목사님)
말씀; 누가복음 17:20-22
사회: 강건우 부목사님
 
설교자: 백승준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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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7:20-22,
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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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 저녁 기도회에 오신 모든 성도님들을 환영합니다. 창립 46주년 성역 컨퍼런스가 며칠 앞두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은혜와 또 새로운 서명으로 채워주시는 시간되시길 소망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은 누가복음 17장 20-22절까지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들은 간절히 기다리는 어떤 그 하루가 있으십니까? 아마 한참 기말고사를 치르고 있는 우리 대학생들은 빨리 시험 마치고 방학하는 그 하루를 기다릴 거라고 생각됩니다. 군 복무 중에 있는 장병이 있다면 국방의 의무를 마치고 제대하는 그 하루를 기다리지 않을까요? 아마 또 직장인 분들은 긴 일들을 마치고 짧게 주어지는 그 여름 하루에 달콤한 하루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우리 모두는 어떤 하루를 기다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소망해야 될 그 하루가 무엇일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인자의 날 하루'를 기다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을 기다려야 될지 오늘 말씀을 좀 깊이 있게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이 말씀을 생각해 보면서 먼저 예수님께서 바리세인들과 함께 나눌 넘으신 이야기를 살펴볼까 합니다.
 
바리세인들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질문을 하나 던집니다. 바로 그 질문의 내용은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합니까? 라는 것이었습니다. 왜 바리세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물었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 하나님 나라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의 수많은 비유들은 바로 천국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산상설교 말씀의 핵심 부분 6장을 보면요. 기도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근데 그 기도도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왜 주셨느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바로 기도조차도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 위한 수단이란 것들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아마 바리세인들도 예수님께 관심이 많았고요. 또 하나님 나라에 관심이 많았기에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 기울였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궁금했던 내용을 질문하였습니다.
 
근데 그들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바로 그 언제 있었습니다. 근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수 없다.' 바리세인들은 뭔가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고 물리적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 시대의 어떤 배경을 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님 시대에 유대한 민족은 지금 로마의 식민 통치국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로마뿐만 아니라 참 오랜 기간 동안 나라를 빼앗기고 이제는 그 서러움 많은 민족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들 마음속에서는 하나님께서 다시금 보내시는 그 메시아, 다윗과 같은 왕이 이 땅에 와서 우리를 이 모든 식민 통치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어주고, 이제는 다윗왕국과 같이 열방을 다스리는 그런 뽐나는 나라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변화시켜 주시길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희망을 두었습니다. 바로 그 예수님이 그러한 다윗의 왕국,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메시아가 아닌가? 아마 그와 같은 질문을 던졌던 것 같습니다. 그와 같은 마음은 바리새인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에게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동기를 살펴볼 수 있는 그런 장면들이 몇 군데 있는데요. 특별히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직전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그렇게 받아들이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의 친척이었기도 했고 세베대 아들들의 어머니였던 마리아가 예수님께 나와서 이렇게 간청을 합니다. 나의 두 아들 중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그렇게 로비를 펼칩니다. 바로 거기서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이 이 땅 가운데 하나의 나라를 회복시키실 것이고. 다윗과 같은 왕국의 왕이 되실 것인데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예수님의 제자들 특별히 수제자라면 좌의정 우의정으로 높은 자리를 차지할 거라는 기대가 있었던 걸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조차도 예수님께 나와 제자들이 물었던 질문이 이렇습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때이니까. 끝까지 예수님이 다윗과 같은 그런 나라를 세워주시고자 하는 그런 열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강력한 나라에 대한 소망은 참 나라를 잃어보고 그 나라가 흔들리는 사람들이라면 이해가 갈 거라고 생각됩니다.
 
제가 최근에 선교지를 좀 방문하며 선교사님들을 만나 뵙고 왔는데요. 그중 한 나라가 미얀마였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코로나 터지자마자 또 미얀마 안에서 내전이 일어났구요. 지금은 상당히 좀 어려운 시기가 되었습니다. 군부의 세력이 그렇게 강하지 못해서 몇몇 도시만 장악하고 나머지 지역들은 또 반란군에 의해서 계속해서 중요 시설이 파괴되고, 전쟁이 좀 계속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나라의 젊은이들을 군인으로 뽑아가는 징집령이 내려졌고요.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들이 군대로 가서 또 전쟁터로 가서 죽는 것을 피해서 미얀마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주변 국가로 흩어져서 지금 살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나라도 매우 힘듭니다. 지금 동남아 그때 방문했을 때가 한 40도가 넘는 더위였는데요. 서로 주요 시설 파괴함으로 말미암아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하루에 8시간 누르면 잘 들어오는데요.
 
그 40도가 넘는 찜통 더위를 전기도 없이 선풍기도 안 돌아가는 상황에서 버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 참 그런 나라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 잠시 경험하다 왔습니다. 그리고선 그 다음 나라로 옮겨갔던 곳이 라오스였는데요. 사실 라오스도 독재 국가였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많이 없는 나라였지만 그래도 치안이라도 잘 지켜주는 나라가 얼마나 나라다운 나라인지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서는 이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얼마나 한국이 축복받은 나라인지 다시 1번 깊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아마 오랫동안 나라 없는 슬픔을 겪었던 바리세인들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아가 되셔서 다윗 왕국과 같은 그런 나라를 세워주시기를 바랬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하나님 나라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의 대답 20절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7:20-21,
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이 말씀을 좀 저희가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인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 여기서 말하는 너희는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과연 바리새인 안에 하나님 나라가 있을까요? 예수님은 바리세인을 보시고 참 많이 책망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행동 겉으로 보여주는 그 모든 것은 의롭게 보이고 아무 문제없는 거 같지만 그 마음으로는 썩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리세인을 보고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회칠한 무덤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겉에는 하얀 회칠을 했기 때문에 깨끗해 보이지만 그 안에서는 시체가 썩어 하고 가고 있는 것처럼 냄새가 나고 부패한 바로 그런 사람이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바리세인의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라고 해석하는 것은 좀 무리가 있을 거 같구요. 이 헬라어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서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서있다 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대화를 하고 있는 와중에 바리세인들과 함께 대화하고 있는 이 가운데 서있으신 분이 바로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신 겁니다. 하나님 나라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서 계시고, 예수님이 통치하시고 예수님의 말씀이 많은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의 보혈은 복음이 선포되고, 죄악과 사망의 권세가 물러나기 시작하였고, 하나님의 백성이 주님을 찬양하기 시작하는 바로 그곳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우리 말씀을 좀 깊이 있게 더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초등학교를 다니면 국가의 3요소라는 것들을 배우게 됩니다. 아직도 기억하고 계시지요?
 
한 나라가 국가답기 위해서는 3가지 요소가 필요한데 ⓵영토가 있어야 되고요. 그 영토를 살아가고 있는 ⓶백성이 있어야 되고 국민이 있어야 되고, 그리고 그 나라를 다룰 수 있는 ⓷주권 이 3가지가 있을 때 하나의 나라를 제대로 된 나라라고 얘기합니다. 제가 예전엔 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잘 몰랐을 때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회복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주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 가운데 다시 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악한 사단의 권세가 물러나고 사단과의 싸움을 이겨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 가운데 임하게 해주십시오. 라고 하나님의 잃어버린 주권을 회복하는 것을 하나님 나라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깊이 있게 하는 말씀을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그것은 제가 잘못된 또 생각이 짧았다는 것들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통치는 어제나 얻은 이나 똑같이, 하늘을 다스리고 계신 거지 이 땅을 여전히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서 여전히 천하 만물은 다 통치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백성에게 있는 것입니다.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에 살아가던 사람들이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다운 자격을 잃어버리는 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호세야 말씀이 있습니다. 호세야서 1장 9절의 말씀인데요.
 
*호세야서 1:9,
9 여호와께서 이러시되 그의 이름을 루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문제입니다. 루암미란 뜻은 백성이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 앞에 로 자가 붙으면 부정의 의미를 뜻하는데요. 이 루 암미가 암미가 되기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성경 전체에서 막아주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회복의 핵심이었습니다. 근데 이것이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던 바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과연 어떠한 일을 펼치셨습니까? 바로 하나님 백성다운 자격을 회복시키기 위하여서 하나님은 놀라운 일을 하셨습니다. 바로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의 자격으로 회복시켜 주신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한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자격(資格) 조건(條件)을 따지는 일이 있습니다. 바로 비자(VASA)를 받는 것입니다. 지금은 미국 비자 받는 것이 어렵지 않구요. 온라인을 통해서 몇 가지 자료만 내면은 금방 되지만, 제가 처음 미국 방문했을 때 광화문에 있는 미국대사관을 방문했었습니다. 그런데 방문하러 가서 여러 가지 자료(資料)들을 내야 됩니다. 재정이 얼마만큼 있고, 가는 목적과 거기에 묵을 것인지, 어떻게 돌아올 건지에 대한 여러 가지 증빙 자료를 내고 뭐 그렇게 인터뷰를 하더라도 조마조마합니다. 왜냐하면, 탈락(脫落)률(率)이 제일 높았던 것이목회자자였습니다.
 
선배님들이 미국 가셔서 잘 안 돌아오셨던 그런 케이스들이 있다 보니까, 아주 직업이 목회 자였으면 더 꼼꼼하게 아주 깐깐하게 그래서 때로는 자료가 좀 부족하면은 비자를 리젝트(rejected) 당하는 그런 일까지 있었습니다. 참 기분이 상하더라구요. 돈 내고 지나라 간다는데 뭐 이렇게까지 까다롭게 심사를 하는가? 여러분 하나님 나라 들어가는 것은 엄청난 심사 자격을 따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라의 왕이신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 나라의 백성 되기 위해선 하나님께서 거룩함이라는 자격조건, 의로움이란 자격조건을 따지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하나님의 눈에 봤을 때, 하나님의 자격에 들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준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대(審判臺) 앞에 서게 되었을 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는커녕 이제는 우리의 죄 값을 쥐고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罪人)이 바로 우리의 신분(身分)이었고 우리의 자격(資格)이었습니다. 그랬던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우리를 백성으로 만드셨습니까? 바로 우리의 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지불(支拂)해야 될 모든 형벌(刑罰)을 이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十字架)에서 대신(代身)지고 돌아가시게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담당해야 될 모든 죄를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대신 지불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서는 예수님이 갖고 계셨던 그 하나님 아들로서의 당당한 자격, 의로우신 바로 죄 없으신 거룩한 자격을 하나님 우리 가운데 부여하신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노라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내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의 같이 못 박았노라고 고백했던 사람을 이제는 내 백성이 아니라고 얘기했던 것들을 취소하시고, 이제는 너는 나의 백성이라고 말씀해 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이 피묻은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선포(宣布)되는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臨)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격을 회복(回復)하고 하나님의 통치(統治)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이 선포되는 바로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 시작하였고요. 그리고 나라는 점점점 확장(擴張)돼 가고 서무장해 가고 있다. 그런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정으로 사모해야 될 바로 하루가 있다. 라는 것을 22절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이에요. 22절을 제가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누가복음 17:22,
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있는 ‘인자의 날 하루’가 바로 무엇일까요? ‘인자의 날 하루’라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인해 시작되는 영광스러운 시대의 첫날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이 땅 가운데 이제는 재림의 왕으로 임하실 것이다. 그 재림의 왕으로 임하시는 바로 한날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요,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부활(復活)하시고 승천(昇天)하신 이후 초대 교회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곧 다시 오실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모든 어려움을 또 박해(迫害)를 이기면서 주의 복음(福音)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이날, 예수님의 승리(勝利)가 완전히 성취(成就)되는 그날을 보지 못한 채 제자들은 순교(殉敎)하고 또 제자들의 복음을 받아들였던 수많은 사람도 그날을 보지 못한 채 먼저 주님의 품에 안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으로 바라본 한 순간(瞬間)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으로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던 약속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자의 날이 성취되고 인자의 날 하루에 시작되는 놀라운 영광의 광경들을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 가운데 생생히 보여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빌립보서 2장 9절부터 11절까지 말씀입니다.
 
*빌립보서 2:9-11,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바로 이것이 인자의 날 시작하는 바로 하루에 이 세상에서 벌어질 놀라운 예배의 광경인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계시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 9절에서 11절을 보면요.
 
*요한계시록 7:9-12,
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2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 가운데 다시 오실 날, 바로 인자의 날이 이 땅 가운데 온전히 성취되는 그날 벌어지게 될 놀라운 장면(場面)인 것입니다. 바로 예배의 순간 예수님의 완전한 통치가 시작된 순간, 여러분은 과연 예배의 자리에 함께 서 있을 광경을 상상해 보셨습니까? 단지 또 한민족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 족속(族屬), 백성, 방언(謗言)이 예수 빚을 높이는 바로 놀라운 영광의 잔치가 벌어지며 이제는 예수님의 통치가 온 땅을 다스림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죄악과 어두움과 모든 눈물은 사라지고 죽음과 질병(疾病)은 사라지고 즐거움과 기쁨의 잔치가 벌어지는 예배(禮拜)를 여러분 상상해 보셨습니까? 이 예배를 상상하고 이 예배를 꿈꾸는 사람마다 하나님의 나라 끝 날을 위해서 살아가는 힘이 생깁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이 이렇게 기록하셨습니다. 그의 유명한 책 “열방을 향해 가라.”라는 한 장면인데요.
 
“선교는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다.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은 예배이다. 선교는 예배가 없기 때문에 존재한다. 선교가 아니라 예배가 궁극적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궁극적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가 끝나고 셀 수 없는 많은 구속된 자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엎드릴 때, 선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선교는 일시적으로 필요하다. 하지만 예배는 영원히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가 선교의 연료이자 목적이다.” -존 파이퍼 목사님-
-참 이 말씀은 선교를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선교의 본질을 붙잡게 해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왜 선교를 해야 됩니까?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온전한 예배의 그날을 우리가 상상하면서, 예배가 없는 곳에 예배를 심고, 그리고 온전한 예배 가운데 우리 모두가 들어가기 위한 바로 목적으로 선교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인자의 그날'을 사모하는 그 이유가 있습니다. 이 땅 가운데 그런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가 드려지는 그날, 나도 이 예배의 한 무리에 속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 또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나로 인해 복음을 알게 되는 사람들과 함께 주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가슴 벅찰 그날, 그날이 올 때 얼마나 우리가 과연 기쁘고 감격(感激)스럽고 행복할 것인지, 우리가 그날을 사모함이 우리 가운데 충만 있기를 원합니다.
 
이 계시록 말씀을 가지고, 고용원 전도사님이 한 곡을 만드셨습니다. 7년 정도 같이 기도회를 저희 부흥을 위한 기도회, 그리고 또 쥬빌리 기도회 운동을 하면서, 고용원 전도사님과 깊이 교제(交際)할 수 있었습니다. 근데 이 계시록 7장의 말씀,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이 있도다.’ 라는 찬양을 만드시면서 그 찬양의 제목을 ‘비전’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처음에는 왜 이것이 비전일까? 몰랐는데요. 그것에 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본인의 비전이기도 하고, 모든 성도들의 궁극적인 비전이기도 해야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우리가 꿈꾸는 가장 최고의 비전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께서 이 땅 가운데 온전한 마음으로 이 땅을 통치하실 때, 그곳에 드려지는 그 예배의 한 순간이 우리의 삶에 궁극적인 목적이요. 비전이요. 우리의 꿈과 모든 삶에 희망이 되어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또한 우리의 목적이며 그러기에 우리는 선교(宣敎)를 해야 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그렇다면 인자의 그 하루를 이 땅 가운데 임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우리가 살아야겠습니까? 예수님이 또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절 14절의 말씀입니다. 한번 같이 읽을까요?
 
*마태복음 24:14,
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이 세상에 인자의 그 온전한 하루가 임하기 위하여, 그 끝이 오기 위하여서 분명히 전제 조건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증언(證言)되어 온 세상에 전파(傳播)되는 날이 모든 민족에게 죄 복음이 전파되고 온 민족이 주님의 이름을 듣고 구원(救援)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바로 무릎 꿇게 되는 날이 이를 때에, 그제야 끝이 올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날을 꿈꾸시며 하나님은 쉬지 않고 지금 일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이 하나님의 위대한 과업 앞에 하나님의 위대한 우선순위(優先順位)에 동참(同參)하여 함께 일하기를 소망하고 계십니다. 근데 최근 들어 하나님께서 새롭게 일하고 계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인 되신 하나님이 새롭게 일 하시는 것들에 상당히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우리는 온 세상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전파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땅 끝까지 가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를 선교 보내고, 그 선교사를 파송하면서 가든지, 보내든지 하는 것이 선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략(戰略)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이 세상의 끝을 바라보시면서 새로운 전략을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바로 땅 끝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바로 우리 가운데 보내셨어요. 우리가 가야지 만날 수 있었던 사람들을 이제는 그들을 보내셔서, 우리를 만나게 하시고 계시다.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입니까?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250만 명이 넘는 이주민들입니다. 한국 선교사님들이 사역하고 있는 140개국에서 150개국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만 명이 넘는 선교사님들이 140개국에서 지금 사역하고 계신데요. 점점 비자 받기 힘들고 또 사역하기가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근데 한국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의 국적을 살펴보니깐요. 190개국이 넘습니다. 그것은 무슨 말입니까? 선교사님들이 들어가지 못했던 나라, 선교사님들이 들어가기 힘든 지역의 나라 사람들이 우리 가까이에 와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이제 땅 끝에 사람들을 우리 가운데 보내셔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시는 그런 새로운 전략(戰略)을 펼치고 계시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이 일하심에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에 대해서 가끔 잘못 착각할 때 어떤 착각이 있냐 하면은요, 그저 예수님을, 하나님을 나의 구세주, 구원자로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구원(救援)자이신 하나님을 또한 주로 고백(告白)하는 것이 온(穩全)한 믿음이라고 성경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로마서 10:9,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우리 죄를 위하여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구원의 주, 구원을 위해서 속죄의 구원을 위해서 속죄의 죽음을 하신 것만 믿는 것, 그것만을 성경이 이해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서 대속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신 우리의 속죄 죄이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우리를 또한 속죄하신 주님은 우리의 주인 되길 원하십니다. 주인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이란 것은요, 내가 주인이 바뀌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 되고 아니 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었던 악한 이해의 지배받던 우리가 이제는 그 모든 것들을 끊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면서, 그 주인 대신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 그리고 주인이 나라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고 못 박히고 죽임을 당하사, 모든 것을 아낌없이 퍼부어주신 사랑의 주님이시라는 것들을 참된 고백입니다. 그러한 주님께서 갖고 계신 우선순위가 있다면 그 우선순위가 나의 우선순위가 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갖고 계신 우선순위는 다른 것이 아니듯 모든 민족과 백성과 방언과 모든 족속들이 주님께 나아오고 주님의 이 귀한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그들의 삶이 변화되는 것이 선교인 것입니다. 선교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그러기에 선교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우리는 고백해야 합니다.
여러분 선교는 하나님의 우선순위가 나의 우선순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우선순위가 나의 우선순위가 되는 것, 바로 그러한 삶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이 땅 가운데 영광 받으시고, 우리의 삶의 이유, 삶의 목적, 삶의 주인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봐야 될 바로 그날, 우리가 꿈꿔야 될 바로 그날을 우리가 마음에 소망하기 원합니다. 바로 그것은 이 땅 가운데 하나님께서 묻고 계신 바로 하나님의 미션, 하나님의 위대한 선교, 이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다시 회복하여서, 모든 민족 가운데 찬양을 받으시고, 또한 높임을 받으시는 그날을 하나님께선 기다리시며 지금도 쉬지 않고 열방을 구원하기 위해서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특별히 또한 구원의 방법으로 이제는 땅 끝에 사람들을 우리 가운데 가까이 보내셔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게끔 하셨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수많은 외국인들을 위해서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먼 곳에 나가서 전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이제는 땅 끝의 사람이 가까이 있기 때문에 조금만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 보면요. 우리가 쪽으로 섬기고, 환대하고, 그들의 필요를 돌보야 합니다. 우리가 선교지에서 할 수 있는 위대한 영광스러운 선교를 내 삶의 자리에서도 펼칠 수 있는 시대가 왔음을 분명히 기억하여야 합니다. 이런 시대의 하나님의 물음 앞에 모두가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주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주께서 허락하신 인자의 날 하루에 모두가 다 또한 우리뿐만 아니라, 나를 통해서 예수님을 알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던 그 사람들과 함께 주님을 높이게 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약
우리가 진정으로 꿈꾸고 소망해야 될 그 하루를 이 말씀을 통해서 ‘인자의 날 하루’ 보기를 소망해야 한다. 욕심과 정욕을 우선순위 삼았던 나를 돌이켜 하나님께 우선순위를 두는 예수님의 참 제자 삼아야 한다. 가든지, 보내든지 동참하여 모든 민족에게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 하는 세계선교에 쓰임 받는 자가 되어서, 대한민국에 보내주신 250만 명이 이주민들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섬겨 세계선교 마무리하는 그날을 든든히 세워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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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05월 29일)
제목: "야곱의 꾀와 하나님의 섭리(攝理)"
말씀: 창세기 28:10-19
찬양인도: 쉐키나(유재원 부목사님)
사회: 김대규 부목사님

설교자: 김은석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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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세기 28:10-19,
10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16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 7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18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9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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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실 것입니다. 좋으신 하나님으로 인해 저와 여러분 안에 하늘의 기쁨과 평강이 넘치기를 소망합니다.

지금 이곳은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들판입니다. 해가 지고 기온이 내려가 스산하기 이를 데 없는 허허벌판에서 야곱은 잠을 자기 위해 돌을 베고 누웠습니다. 창세기 41장과 45장에 보면, 야곱과 요셉의 나이가 나오는데요. 이를 가지고 계산을 해보면 지금 브엘세바를 떠나는 야곱의 나이가 77세입니다. 별로 놀라시지 않네요. 보통은 이제 젊은이 일 거라고 생각을 하시는데 이미 그의 나이가 77세입니다. 왜? 야굽은 사나운 짐승, 강도(强盜)의 위협(威脅), 수많은 어려움이 둘러싸인 이곳에서 잠을 자야 할까요?
 
우리는 이미 이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의 형 에서가 자신을 죽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야곱의 가정이 보통 가정인가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가정입니다. 아브라함이 기다리고 기다렸다가 백세(100세)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낳은 아들, 그것도 아직 나이 어린 그 이삭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여서 제물로 바치면서까지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이 주신 복과 유업(遺業)을 이어온 가정입니다. 이렇게 정말 특별한 가문인데, 이런 가정도 갈등(葛藤)을 겪습니다. 웬만한 갈등 정도가 아닙니다. 거의 가정이 깨어지기 직전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게 되었을까?
 
본문을 가만히 묵상(默想)하는 가운데 제게는 먼저 이삭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여러분, 본문의 이삭은요, 후계자(後繼者)를 정하는 데 있어서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과 너무나 큰 차이를 보입니다. 창세기 15장에 보면요. 아브라함은 이삭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누구를 과연 후계자로 정해야 할까를 고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에 충성(忠誠)된 종이었던 엘리에셀을 후계자로 기도하며 나아갑니다. 여러분 후계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부터가 다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요. 아브라함에게 엘리에셀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너의 몸에서 난 자녀가 너의 상속자(相續者)가 될 것이라는 응답(應答)을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 상속자에게는 큰 복을 주실 것이다. 땅도 주실 것이며, 많은 자손(子孫)을 주실 것이다. 라고 약속을 하십니다. 그리고 약속에 대한 증표(證票)로 할례(割禮)를 행하도록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심지어는요. 사래의 이름을 사라로 바꾸면서까지 이렇게 후손(後孫)을 준비(準備)하라고 하시거든요. 여러분 왜 그렇게 하셨을까? 그것은 그만큼 믿음의 유업을 잇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요. 이삭은 아들이 둘이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유업을 이어가는 것에는 별로 그렇게 관심(關心)이 없어 보입니다. 적어도요. 아브라함과 비견(比肩)될 만큼 신중(愼重)하게 처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여러분 단순히 유산을 물려주거나 땅을 물려주거나 가축을 물려주거나 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약속, 믿음의 유업을 잇는 일이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한 일이거든요. 따라서 누가 과연(果然) 후계자(後繼者)가 될 것인가를 놓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과연 누구일까? 과연 하나님은 누구를 선택(選擇)하라고 하실까?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구해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여러분 이삭은 어땠습니까? 창세기 25장 28절을 보면,
 
*창세기 25:28,
28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이삭은요, 에서가 사냥해 온 고기를 즐겨 먹었다. 라고 합니다. 그는요. 에서를 후계자로 세우기 위해서 자신이 평소 좋아하던 그 음식을 사냥해서 가져오라. 이렇게 에서에게 이야기합니다. 여러 차례 묻고 할 일을 행하고, 이름을 바꾸면서까지 후계자를 정했던 아브라함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여러분, 이삭이 아브라함처럼 조금 더 하나님의 뜻을 구했더라면 에서와 야곱이 극(極)에 달하는 갈등을 겪게 되었을까요? 만일 그랬다면 인간적인 잣대를 가지고 에서를 후계자로 선정(選定)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도하여 응답을 받은 뒤에 에서를 위해서 그의 마음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에서를 설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이미 엎질러진 물처럼 돌이킬 수 없는 상황(狀況)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이 본문 가운데 이런 이삭의 조금도 묵상을 하다가 야곱이 보이게 되었습니다. 이 28장에서의 야곱은요, 다급(多級)합니다. 왜냐하면, 이대로 두고 보면 고스란히 축복(祝福)을 형에게 빼앗길 것이 불 보듯 뻔하기 때문입니다. 평소 꾀가 많은 야곱이 이것을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습니다. 이삭의 영적인 둔감(鈍感)함에 야곱은 꾀로써, 응전(應戰)을 합니다. 이 아곱의 꾀는요.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두 가지 오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⓵첫째로는 축복의 유한성이고요.
⓶두 번째로는 축복의 주권성입니다.
 
첫 번째로, 야곱은 소위 이 하나님의 축복을 한정되어 있는 유한한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유한한 것이기 때문에 내가 차지하지 않으면 빼앗겨 버리는 것이죠. 그래서 유한한 축복을 차지하려고, 유한(有限)한 축복을 빼앗으려고 꾀를 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축복은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축복은 유한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축복은 끊임없이 공급(供給)되고 영원(永遠)히 주어지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한(限)이 없으십니다. 그런 것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복도 영원하고, 무한(無限)하다. 라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에서를 축복하시지 않는 것은 복이 다 떨어져 가지고 더 이상 줄 복(福)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에서를 축복(祝福)하시는 것을 원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9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 아곱이 받은 축복을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우리 함께 로마서 9장 10절과 13절을 한 목소리로 읽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9:10-13,
10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여러분 성경은요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하셨습니다. 이미 야곱이 태어나기 전부터 야곱을 위한 祝福을 예정(豫定)하셨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그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죠. 그래서 아귀다툼을 했습니다. 그래서 혈육(血肉)이었던 형과 다투었습니다. 이미 자신에게 보장(保障)되어 있는 축복을 일부러 쟁취(爭取)하려 했던 것이죠.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축복의 유한(有限)성보다 더 큰 오해는요. 축복의 주권(主權)성입니다. 야곱은요,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하나님이 주시려는 축복을 가로챌 수 있다는 오해(誤解)를 했습니다.
 
사랑은 여러분,
은 누가 주시는 것입니까? 복은 이삭이 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죠.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우리가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내게 올 것이 아닌데, 억지로 빼앗을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부모님이 자녀를 축복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복을 비는 것일 뿐, 복은 부모님이 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복을 가로챌 수 있다라고 오해하고 착각(錯覺)을 했습니다. 이렇게 두 오해를 가지고 야곱은요, 하나님이 주시는 이 복을 유한하고 물질적인 것으로 보았구요. 또 놓쳐버릴까 봐 아등바등 하면서 꾀를 내었던 것입니다. 에서를 축복하는 것을 참지 못하고, 에서의 축복을 빼앗으려 했던 야곱이 본문에 나옵니다. 만약에 야곱이 영적(靈的)으로 조금만 더 깨어 있었더라면 자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祈禱)하며, 하나님 나는 어떤 존재(存在)입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라고 물었더라면 그는요. 오히려 자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자신을 향해 놀라운 꿈과 계획(計劃)을 가지고 계셨던 하나님을 더 깊이 깨달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삭의 영적이 둔감함, 야곱의 꾀, 처음에 본문을 묵상할 때는 이 두 가지가 보였었는데요. 계속해서 본문을 묵상하다 보니까, 저는 점점 더 깨닫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깨닫게 되었냐면, 결국은 이삭도 아니고, 야곱도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가 본문 가운데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야곱이 지금 에서와 갈등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야곱이 하란을 향하여 길을 떠나게 되었지 않습니까?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계획(計劃)과 섭리(攝理)였습니다.
 
초(秒), 분(分), 시(時), 일(日), 월(月), 연(年)을 지으시고 온 우주(宇宙)와 만물(萬物)을 모든 시간 동안 틀림없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그 섭리(攝理)입니다. 그 섭리를 따라서 지금 야곱은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여러분 이삭이 조금 더 하나님의 뜻을 보았다면은, 에서와 야곱이 극에 달하는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기록된 대로 야곱은 한 곳에 이르러 잠을 자고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에서 야곱은요, 하늘에까지 닿는 사닥다리를 보았구요. 그 사닥다리를 오르내리는 하나님의 사자(使者)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향해 축복하십니다. 땅과 자손(子孫)을 약속(約束)하십니다. 아브라함이 받았던 약속(約束), 아버지 이삭이 받았던 그 약속, 약속을 야곱 또한 받게 되었습니다. 이 약속을 받고 나서 야곱은 그제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평안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베고 잤던 돌을 세우고, 돌 위에 기름을 부어 이름을 ‘벧엘’이라 지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體驗)하기 전에 야곱에게 이 돌은 처량(凄涼)한 자신, 너무나 비참(悲慘)한 자신의 신세(身世)를 상징(象徵)하는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인재를 다 경험하고 나니까, 이 돌은 더 이상 처량한 자신의 신세를 상징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約束)을 상징(象徵)하는 증표(證票)가 되었습니다.
 
결국 야곱의 삶을 이끌고 온 것은 그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攝理)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버려지듯 내몰려 캄캄한 밤에 돌이나 베고 잠을 자야 했던 이 야곱,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차질(蹉跌) 없이, 틀림없이 인도(引導)해 오셨던 것입니다.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이미 야곱은 뱃속에서부터 하나님의 특정(特定)함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입니다. 하나님은요, 절대적(絶對的)인 주권(主權)으로 이 모든 일들을 행하시고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부릅니다. 야곱은 아버지와 형을 속였지만 하나님은 그를 축복하시기 위해 오늘 벧엘을 예비하신 것이지요. 세상 사람들은 말합니다. (點)이 모여 선(線)이 된다라고 말합니다. 그런 것처럼 모든 삶은 선택(選擇)의 총이다. 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의 선택이 있기 전에 우리가 어떤 것을 선택하기 이전에,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세밀(細密)한 섭리(攝理)라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 모두는 정말 한치 앞을 모르는 인생길을 걸어갑니다. 그것은요, 삶의 경험이 많은 어르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 유명 영화제인 칸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던 윤여정씨가 참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60살이 돼도 인생은 잘 몰라요. 나도 처음 살고 있거든요. 나도 67살은 처음입니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많은 경험이 있어도, 아무리 많은 데이터베이스가 있다할지라도, 우리 모두 처음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매 선택의 갈림길에서 우리는 온갖 지혜와 꾀를 짜냅니다. 그러나 동과 서 남과 북으로,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 삶 속에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조금 더 주목해 보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야곱에 보았던 사닥다리입니다. 야곱이 이제 꿈을 꾸면서 하늘까지 닿았던 이 사닥다리를 보게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 사닥다리는요. 땅과 하늘을 이으시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우리 요한복음 1장 51절에서 주님이 자신을 가리켜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한 목소리로 읽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51,
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주님은 여기에서 보면 자신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말씀하시죠. 인자 위에, 인자 위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이렇게 말씀을 하세요. 고대 근동에 사람들은 '지구라트' 라는 제단을 민들었습니다. 높은 제단을 쌓는 거에요. 하늘에 닿기까지 높이 쌓아서 하늘에 오르고자 했습니다. 창세기 11장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탑, 바벨, 이 지구라트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지구라트와 오늘 본문에서 야곱이 보았던 사닥다리는 둘 다 땅과 하늘을 잇는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바벨과 지구라트는요. 하늘에 닿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慾望)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이 사닥다리 야곱이 보았던 사닥다리는 땅에 내려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사랑은 여러분, 곰곰히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야곱이 꿈속에서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하나님께로 가고 싶었겠어요. 여러분, 야곱이 꿈속에서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하나님께 가고 싶었겠어요. 여러분, 야곱이 지금 하나님께 나아갈 용기(勇氣)가 있습니까? 하나님께 나아갈 능력(能力)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나아갈 지혜(智惠)가 있습니까? 하나님께 나아갈 할 자격(資格)이 있습니까? 야곱에게는요. 지금 패배감(敗北感)이 가득합니다. 좌절(挫折)감이 있고요. 소외(疏外)감이 가득합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存在)에 불과하죠. 여러분 그에게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야곱에게 하나님이 지금 임재(臨在)하여 주십니다. 여러분, 예수님도 이와 같습니다. 요한복음 1장 10절과 11절, 우리 다 같이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요한복음 1:10-11,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본문에 보면 어떻죠? 자기 땅에 오매, 예수님이 지금 땅으로 오셨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14절에 보면, 요한복음 1장 14절에 보면,
*요한복음 1:14,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영광을 보니아버지의독생자의영광이요은혜와진리가 충만하더라.
-14절에 보면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이렇게 표현해요. 여러분, 예수님이 왜? 이 땅도 우리가 야곱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우리가 하나님께도 나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께 나아갈 용기 없습니다. 자격 없습니다. 능력 없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친히 하나님이신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 땅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우리 중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납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이죠. 내가 어디에 있든지, 그곳에 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음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줄 믿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영적인 벧엘이 되는 것입니다.
 
※중학교 3학년 때 저한테 고민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꼭 가고 싶었던 미션스쿨이 있었거든요. 그 학교를 이제 알아보고 준비를 하다가 왠지 모르는 두려움이 이렇게 찾아옵니다. 혹시 학교에 떨어지면 어쩌지? 기도를 해도 기도가 잘 안 돼서 기도를 많이 못했습니다. 지레 겁을 먹은 것이지요. 그리고 오랜 고민 끝에 그 학교가 아닌 다른 학교를 지원했습니다. 집에서 가장 가꺼운 미션스쿨을 두고 목사님이 될 사람이 다른 학교를 가게 된 것이지요. 근데 나중에 발표가 나고, 그 지역이 난리가 났습니다. 제가 살던 동네가 난리가 났어요. 그 학교가 설립 이후에 지금까지 딱 그 합격자 대비 미달이 된 것입니다. 내가 왜 지원을 안 했을까? 처음에는 그걸 후회했습니다. 정말로 후회를 많이했습니다. 내가 왜 지원을 안 했을까? 그런데 후회를 하고 후회를 하고 후회를 하다 보니까 정말 후회를 한 건 학교에 지원을 안 한 게 후회가 아니라, 왜 하나님께 물어보지 않았을까? 왜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았을까?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몰라요. 한 치 앞을 모르는 내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 왜 물어보지 않았을까? 그렇게 이제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고 똑같은 이제 잘못을 반복(反復)하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3이 딱 되고 결심한 게 있습니다. ‘매일 하나님 앞에 나가리라.’
그래서 학교 바로 앞에 맞은편에 조그만 교회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항상, 그래서 정말 늦은 시간을 제외(除外)하고는 거의 매일 학교, 그 교회 지하 교육관에서 잠시 기도를 하고, 하나님께 비전과 뜻을 구하고, 학교의 등교를 1년 동안을 했습니다. 수능 일자가 가까워 오고 시험일이 다가오니까, 똑같이 3년 전처럼 너무나 큰 두려움이 막 밀려오는 거예요. 한 번 이렇게 좌절(挫折)을 맞보니까, 또 좌절감이 막 찾아보더라고요.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 다른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하나님께 묻고 있잖아요. 하나님 앞으로 저의 인생은 어떻게 펼쳐지겠습니까? 하나님 저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묻고, 묻고 또 묻고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응답을 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 어느 길을 걷든지, 어느 삶을 살든지, 너를 지킬 것이고,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때 누렸던 그 평안과 기쁨을요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딱 신뢰(信賴)하니까 두려움의 공간은 임재가 가득한 공간(空間)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때의 생각을 하면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저에게는 아마도 그곳이 벧엘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그곳에서 기도하면서 고 3때 목회자가 되어야겠다는 소명(召命)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 오늘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예배당, 컴컴한 지하교육관이 약속(約束)의 기념비(記念碑)입니다. 사역을 하면서 종종 지칠 때가 많이 있는데요. 그럴 때면 그때 기도하던 그 교육(敎育)관을 떠올리며 새 힘을 얻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에게도 벧엘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벧엘은 어디입니까? 야곱과 같은 내게 찾아오신 하나님, 나를 만나주시고 따스한 손길로 나를 안아주시며, 나와 함께 하겠노라. 약속하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 그 하나님을 뜨겁게 만났던 은혜의 기념비 벧엘이 있으십니까? 여러분 벧엘이 있으시다면 다시금 은혜를 회복하고, 기억하는 이 밤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오늘 이 밤 이 안아주심의 본당이 하나님의 임재(臨在)가 충만(充滿)하고,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한, 거룩한 벧엘이 되길 간절히 기도(祈禱)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여러분 한 분, 한 분과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지금은 멋진 옷을 입고, 아름다운 표정을 짓고 이 자리에 앉아 있지만, 분명히 우리 중 누군가는 생지옥(生地獄)을 겪는 분이 반드시 있습니다. 눈물로 이 밤을 지새울 분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오늘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여러분들과 오늘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 내가 반드시 너를 지키며 너를 인도하리라.’
 
♣요약
우리가 황량(荒涼)한 벌판에 홀로 누운 야곱과 함께하여 주심과 같이 오늘 이 시간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심을 믿고, 오늘 이곳 안아주심의 본당에서 오늘의 은혜를 회복(回復)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한다. 절대적인 주권이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깨달아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김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참 된 평강과 기쁨을 누리는 평생이 되며, 하나님께 나아갈 용기와 힘조차 없는 야곱에게 찾아오셔서 그를 만나주시고 복을 주시며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던 것처럼 연약한 나의 심령을 회복해 주시길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은혜의 진원지이자 약속의 기념비적인 벧엘에서 다시 한 번 거룩한 소명을 확인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우리에게 주어진 ‘2033-50 비전’을 완수(完遂)하는 개인과 가정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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