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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2년 12월 25일)
제목: "마침내 품에 안은 성탄 선물"
말씀: 누가복음 2:25~28
대표기도: 홍진기 부목사님(1부)
찬양인도: 쉐키나(), 영광찬양대(1부)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
ㅡㅡㅡㅡㅡㅡ
*누가복음 2:25~28,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ㅡㅡㅡㅡㅡㅡ

▶오정현 담임 목사님
​-사랑의 교회는 성탄 죽하 예배 12월 25이 되면 자녀들과 잘 부르는 찬송이 있다. 탄일종이 땡땡땡!~~ 우리는 어릴 때의 생각이 날 것이다. 오늘 순전하게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께서 오늘 여러분에게 축복하실 것이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사랑합니다. 우리는 부모님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사랑합니다. 이것을 부르고 말씀을 전하겠다.
 
1. 탄일종이 땡땡땡(땡땡) 은은하게 들린다,
저 깊고 깊은 산골 오막살이에도
탄일종이 울린다.(땡땡)
2. 탄일종이 땡땡땡(땡땡) 멀리멀리 퍼진다,
저 바닷가에 사는 어부들에게도
탄일종이 울린다.(땡땡)
3. 탄일종이 땡땡땡(땡땡) 부드럽게 들린다,
주 사랑하는 아이 복을 주시려고
탄일종이 울린다.(땡땡) ♩
 
너무 귀한 시간이고 성탄주간이고 또 송년 주일이다. 다음주일은 새해주일이다. 이처럼 성탄 주일과 송년 주일이 겹치는 것은 앞으로 11년 뒤에 있을 것이다. 2034년에 있을 것이다. 그 사이에 정말 우리가 은혜를 받아야 되는데 오늘 말씀은 “마침내, 품에 안은 성탄 선물"로 전하겠다. 여러분은 성탄절에 무슨 선물을 받았는가? 안 받았는가? 어떤 집안은 대학입학이라는 좋은 선물을 받은 집안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집안은 취직이나 승진을 해서 받은 선물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집안은 건강이 다 회복된 건강회복의 선물을 받은 집안도 있을 것이다. 교회적으로는 이렇게 유아 세례를 받는 것도 예수님의 축복의 선물이라 생각한다. 어제 우리는 세시봉 콘서트를 선물로 받았다. 50,60,70,80 세대가 좋았다. 세시봉이 아니라 네시봉 이었다고 했다. 여름에 ‘플레닛쉐이커스(Planetshakers)’에는 10대 20대가 참으로 사랑의 큰 선물이었다. 오늘 오신 모든 성도님들께 다시 한 번 성탄 선물을 드리고 싶다. 지금 천장에 선물이 있는데 내려 보아라. 받아 보기를 바란다. 저 별과 함께 내려올 때, 기대와 소망이 내려온다고 여기면 된다.
 
선물 중에 최고의 선물은 아이를 낳지 못한 사람들 중에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께 받은 최고의 선물이다. 이삭을 주신 것이다.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민족의 최고의 선물은 지도자 모세였다. 온 인류가 하나님의 부름 받은 최고의 선물이 예수 그리스도의 선물인 줄로 확신한다. 이삭은 가정의 최고의 선물이며,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신 자녀의 최고의 선물이며 그러나 예수님은 온 인류를 위해 찾아오신 최고의 선물인줄로 확신한다. 오늘 이렇게 천장에서 이렇게 선물이 내려왔는데, 동방박사들이 유황과 몰약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께 드렸는데, 인간적으로 보면 아!! 선물 드리고 경배만 드린 것 같은데, 아니다. 이들은 누구를 만났는가? 메시아를 만났다. 이들의 인생사를 바꾸는 메시아를 만난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동방박사 이들은 최고의 선물을 자기가 평생 경배할 대상을 만났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어떤 선물을 받았는가?

*에배소서 2:8,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

*로마서 5:15,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의 선물이 넘쳤다고 했다. 성령님을 통하여 주셨음을 확신한다. 이 선물에 대해서 우리는 생각할 것이 있다. 그것은 너무나 실력 있고 너무나 고귀하고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은 이것은 우리가 값을 지불할 수가 없다. 너무나 고귀한 것은 선물로 받을 수밖에 없다. 꽃 한 송이, 물 한 방울, 하늘의 별빛, 세상의 공기, 우리가 당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다 선물로 받을 수밖에 없다. 여러분 지금 꽃 한 송이, 물 한 방울, 그리고 하늘에 별, 새의 지저귐, 신선한 공기, 한 번 숨을 쉬어보라. 오늘 저희 교회의 이 본당의 공기가 설악산 공기보다 더 좋다. 알 사람이 없도다. 선물이다. 아니 인생의 일분이 일초가 다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여러분들이 깨닫기를 바란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세상 음식은 살 수 있지만, 입맛은 살 수 없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사랑을 살 수 없다. 아무리 능력이 많아도 꽃 한 송이 만들 수 없다. 다 하나님의 선물일 수밖에 없다. 우리의 최고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이 본문이 최고의 선물을 받은 사람이 한 사람이 있다. 바로 시므온이라는 사람이다.
 
*최고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다.
그는 오랫동안 기다리며 예수님의 인격을 선물을 받았다. 최고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다. 시므온이라는 사람을 여러분이 잘 알 것이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보겠다. 25-26절에 네 가지로 되어있다.
 
*시므온이라는 사람은
1. 의롭고 경건한 사람-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노력하고 애쓰는 사람이다.
2.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 메시아를 사모하고 위로로 받는 자였다.
3. 성령이 그 위에 계시는 사람이다. 성령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새로운 세대가 열린다.
4.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아니하리라는 약속을 받은 것이다.

*누가복음 2:25,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첫째,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했다.
​-시므온의 인간 됨됨이가 보인다. 의롭다는 것은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지시를 받으며 살려고 노력하는 자이다. 경건했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으로 순종했다는 것이며 매일 자신을 돌아보며 사는 자라는 뜻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예배의 온 성도님들, 시므온처럼 의롭고 경건한 은혜를 선물로 받기를 소망한다.
 
사랑의 교회는 예수님의 온전한 제자가 되기를 온전한 주님을 닮아가려는 제자가 되기를 그 은혜의 고봉에 올라가려고 노력한 자들이다. 이 온전한 고봉에 올라가려면 의롭고 경건하여 지기를 이 성탄에 채워지기를 소원한다.
 
*누가복음 2:25-26,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둘째,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
-유대들은 메시아 오시기를 정말 사모했다. 이스라엘의 참된 위로가 있으려면 메시아가 오셔야 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제일 위로가 되는 것은 메시아가 오시면 되는 것이다. 메시아가 안 오시면 어떤 것도 위로가 안 된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위로라는 말은 메시아를 나타내는 귀한 말이다. 이스라엘을 위로하다는 =메시아 오심이다. 오늘 여기에 참여한 여러분들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받은 줄로 믿는다. 우리는 모두가 다 메시아를 선물로 받는 줄로 확신한다.
 
*누가복음 2:25-26,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셋째, 심령이 그 위에 계시는 사람.
-시므온은 성령 충만한 사람이었다. 구약시대에는 특별한 사람에게만 성령이 머물렀지만 오늘 시므온 위에 성령이 함께 하셨다는 말은 이제 성령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주신다. 구약은 특별한 사람에게 성령이 계셨는데, 신약 시대에는 여러분 마음을 열고 성령을 의존하기만 하면 보편적으로 성령의 축복이 임하게 하신다. 그리고 우리를 녹이고 빚고 채우고 새롭게 사용하신다.
 
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넷째, 죽기 전에 그리스도를 보게 되리라는 약속을 받은 사람.
-무슨 말씀인가? 메시아를 만나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았다. 시므온은 성령을 받아서 새 시대를 여는 예수님을 눈으로 직접 보게 될 것이라고 약속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오늘 예루살렘 성전에서 메시아만을 고대하는 것이다. 어느 날 그의 나이가 80이 넘었는데 그의 손은 떨렸지만 수십 년간 젊은 부부가 아기를 안고 들어왔을 때, 혼자 속삭이며 성령께 질문했을 것이다. 주님 제 아이가 메시아 입니까? 아니야, 시므온아 기다려라. 그러던 어느 날 아기를 안고 들어오는 한 커플을 보았다. 소박하게 들어오는 부부를 시므온이 그들을 보고 수천 번도 더 주님께 여쭈어 보았다. “이 아기가 그리스도입니까?” 그럴 때 주님께서 확신을 주셨다. “그 아이가 그리스도이다.” 라고 하셨다. 그 순간 시므온의 심장이 쿵쾅 뛰었다. 시므온이 “내가 온 세상을 구원하신 이 메시아 구주를 품에 안고 있구나!” 한다. 시므온이 메시아를 안고 있는 그림을 하나 구했다. 너무 멋있다. 웬만하면 영상에 안 보여주는데 오늘은 보여 주겠다.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안고 있다. 그 광채가 보인다. 시므온은 미래의 메시아를 만났다. 예수님을 안은 것 때문에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인무원려 난성대업(人無遠慮 難成大業)이라는 말이 있다.(사람이 멀리 앞을 보지 못하면 큰 일을 이루기 어렵다) -안중근 의사- 사람이 기대하지 않고 꿈꾸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사랑하는 영 가족 여러분, 오늘 시므온이 가졌던 그 감격과 눈물과 찬양과 탄성이 우리에게 동일하게 임하기를 원한다.
 
인생 최대의 사건이다. 온 우주의 예수님을 내 삶에 모시고 사는 인생, 내일이 새로울 것이다. 우리가 깨닫지 못해서 놀라운 것에 놀라지 않는다. 가장 귀한 선물을 받았는데 인생을 적당히 살 수 있는가? 예수님을 제대로 믿으면 모두가 다 새롭다.
 
*놓아주신다.
​*누가복음 2:28-29,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오늘 이 고백이 우리를 위하여 놓아주시는도다는 이것이 여러분들에게 최고의 선물이기를 바란다. 이제는 놓아주신다는 말은 라틴어로 눙크 리미티스이다. 이제 놓아준다는 것. 밤새워 군인이 보초를 선 다음에 상관에게 보고하는 책임을 다했다는 보고이며 자유함을 누린다는 것이다. 모든 책임을 벗고 평안하다는 것이다. 놓아주신다는 것은 인생의 모든 사명을 다 마치고 이제는 해방이 된다. 이 29절이 특별한 찬송이 된다. 오늘 성탄 당일에, 우리 모두가 고백이 되어서 이 한해를 마무리 하면서 이제는 놓아주신다는 것을 확신하며 세상으로부터 모든 중독으로부터 놓아주심을 참 선포가 되기를 바란다. 밤새 철야를 마친 군인이 막사에 가서 보고를 마친 자유함이 바로 시므온이 그랬다는 것이다. 오래 동안의 인생의 의무가 끝난 것이다. 여기 포함되어 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기 이전에 내가 가졌던 방식, 나를 사로잡았던 모든 가치관으로부터 이재는 벗어나서 새로운 삶이 펼쳐지기를 믿는다. 이제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판단, 비판이 곱지 않았다면 이제는 하늘의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이다. 모든 시대정신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시므온이 메시아를 품에 안고 놀라운 고백을 한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은 예수님을 제대로 품으면 죽음도 두려움이 아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 값을 메길 수 없는 최고의 선물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는 것이다. 시므온처럼...

♧요약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우리의 품안에 주실 때, 주님의 참된 위로를 받아 의롭고 경건한 은혜로 평생에 승리할 것을 믿고, 시대정신을 초월하여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눙크 디미티스 같은 자유함을 누리게 될 것이다. 저 출산의 시대에 우리나라의 국가적인 문제를 깨달아서 품고 간절히 기도해 주고 유아세례를 받은 자녀들이 주님의 사랑으로 건강하고 아름답게 자라기를 소원한다.
 
-시므온과 안나는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영접했다. 이들은 제사장도 아니고 유명한 사람도 아니며 단지 메시야를 기다리며 의롭게 살아가는 평범한 노인들이었다. 그리스도는 이처럼 심령에서부터 당신을 간절히 사모하는 자들에게 임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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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2년 12월 24일)-성탄 새벽예배.
제목: "성탄의 새벽, 신부된 교회를 사랑하다"
말씀: 골로새서 1:24~27
대표기도: 이종숙 권사님(목양5팀 여직장인대교구장)
찬양인도: 목양5팀
말씀읽기: 이예진 학생(고등부), 이한일 학생(중등부)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
 
*골로새서 1;24~27,
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25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
 
-여러분 짧은 시간이지만 말씀을 집중해서 하겠다. 우리가 살다보면 굴곡도 있고 낙심도 되고 어떨 때는 마음에 근심을 가질 때도 있지만 그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는 은혜의 원천이 무엇인가? 여러분과 저는 어디서 부름을 받고 어디서 능력을 받는가? 어디서 힘을 얻는가? 자 오늘 제가 ‘신부된 주님의 교회’는 눈에 보이는 이 교회 뿐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 자신의 삶도 그대로 같이 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교회 그러면 교회 눈에 보이는 유형교회 뿐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주님의 걸어가는 교회인 것이다. 눈에 보이는 교회를 어떻게 사랑하는가? 진짜 교회의 사랑의 강도가 내 생애의 방향과 완전히 결정적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이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나는 정말 교회와는 어떤가? 우선 여러분들의 삶의 힘의 근원이 무얼까? 오늘 본문 27절을 보면, 나는 어떻게 사랑하나? 나는 얼마나 교회를 사랑하나? 나보다 교회를 더 사랑하는가? 나는 평생 교회를 사랑할 수 있는가?
 
*골로새서 1:27,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세상 사람들이 살지 못하는 영적 비밀을 저와 여러분이 가지고 있다. 그것이 우리 속에 계신 예수님이 비밀이다. 오늘 성탄 새벽에 여러 이야기 보다도 성탄절 이후 새벽에 진짜 중요한 것을 말씀을 드리고 싶었는데, 우리가 힘의 원천, 삶의 능력, 어떤 불가항력, 그것을 어디서 받을 것인가? 기도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 모든 삶의 진짜 비밀과 능력의 원천은 우리 속에 계신 예수님이시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속에 능력의 비밀이라는 것은 공통된 현상이 있다. 그것은 24절에 있다. 우리가 예수님 임재하소서, 그리고 난 다음에 신부된 우리 주님을 간절히 갈망하오니!~~우리에게 여전히 임재하시고 우리를 붙잡아 주시고 역사하여 주옵소서. 이런 찬양 가사도 있듯이, 그런 찬양 하는 사람들에게 공통된 현상이 있다. 
 
*골로새서 1;24,
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힘의 능력의 원천에는 삶의 수많은 굴곡 가운데서도 한결 같은 시종일관 하는 능력의 비밀은 무엇이냐면 내 속에 계신 예수님가 비밀이다. 그것을 깨닫는 자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나는 공통된 현상은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는 것이다. 그것은 주님을 위하여 괴로움도 기뻐하는 인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위하여 기뻐하게 되는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육체에 채울 수 있는가?, 주님의 남은 고난이라는 것은 주님께서 구원사역의 고난이 남았다는 뜻이 아니다. 구원사역은 완벽하시다. 그 구원사역은 완벽하시는데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가운데 완벽성을 거처야 할 과정은 주님은 골고다의 고난도 겪으시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모욕도 당하시고, 어떨 때는 배고프시고, 수많은 짐들이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의 여정 가운데 신부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교회를 위하여 감당할 짐들이 있다는 것이다. 남은 거룩한 고난이 있다는 것이다. 고난은 고통당하는 것도 있지만 이게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여러분 오늘 나름대로 교회에 대해서 기준을 붙잡고 기도를 할 테인데, 여러분, 교회 생활, 여러 해 해왔을 것이다. 저는 우리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교회생활을 했다. 그러니까 제 나이만큼의 교회 생활을 한 것이다. 교회 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역사가 있다. 여러분 이 교회를 섬기면서 느끼는 것은 너무 힘드니까 그만 둘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우리는 끝까지 우리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우리는 교회생활을 하는 것이다. 맞는가? 아무도 예외가 없다. 그리고 끝까지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교회생활을 해야 여러분들의 삶이 보람과 마무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만약에 뭐가 잘못되어서 삐걱대어서 교회생활이 제대로 안 되고, 교회를 떠난다든지, 아니면 평생 사랑하는 교회가 없다든지, 평생 주님 앞에 설 때까지 교회생활을 힘 있게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교회생활을 잘 한다고 볼 수 없다. 그리고 교회가 얼마나 소중한지 여러분들을 알 것이다. 여러분 가정에 부부의 삶이 아무리 좋다하더라도 나는 교회가 시끄럽고, 교회 생활이 은혜가 없고, 교회 생활이 축복이 없으면, 부부의 삶이나 가정이 아무리 좋아도 언젠가는 힘들 때가 있다. 그런데 내가 나가는 교회가 항상 은혜스럽고, 거기가면 감격이 있고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주님이 함께 하신 것을 알고 기름부음이 충만하면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의 삶이 좀 부족함이 있어도 언젠가는 해결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부족해도 교회생활이 은혜가 있고 축복이 있으면, 주님의 교회가 축복이 되면, 언젠가는 우리의 삶의 어려움도 해결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주님의 교회는 늘 축복이 있는 줄로 확신한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눈을 여는 사람은 이런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은 끝까지 좀 부족해도 눈에 보이는 무형교회 기름부음 축복이 있는 줄 믿는다. 믿음의 능력, 믿음의 용량, 믿음의 기름부음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나는 어떻게 교회를 사랑하나? 나는 어떻게 내가 사랑하는 교회는 어느 정도 교회를 사랑하는가? 아니 내 주위의 귀한 신앙의 선배들, 목회하지 않고 일반 교우들이라 할지라도 그분들은 어떻게 교회를 사랑하는가? 제가 보니까 우리의 선대 어른들 가운데는 가족들보다도 어떻게 보면 자녀보다도 교회를 더 사랑했다 이게 좋다 나쁘다를 말하지 아니하고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다. 부족함이 있지만 ‘저는 저보다도 교회를 더 사랑하게 하여 주옵소서.’ 하는 마음이 항상 들었다. 나는 나보다도 교회를 더 사랑하고 있다. 제가 여러 가지 사역 중에 있지만 사역에 대외적은 데코레이션이고 진짜 중요한 것은 핵심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한 것이다. 나는 나보다도 교회를 사랑한다. 이런 마음이 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어떻게 나 자신보다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더 사랑하는가? 그리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 채우는가? 우리는 주님의 신부된 교회로서, 교회를 사랑하면 교회로서, 개인으로서 참으로 아름다운 줄 믿는다. 
 
바울은 어느 날, 그가 바울 되기 전에 그가 다메섹에서 꼬꾸라져 가지고, 그러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고 하신다. 이런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다. 그리고 직접 예수님을 핍박한 적이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님은 교회와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교회와 주님은 동일하시다.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교회를 사랑하고 그 교회 사랑을 하는 사람은 성탄이 좋다. 이 성탄의 계절에 어떤 수많은 일들이 지나가더라도 이 성탄은 기뻐해야 한다. 나보다도 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더 사랑하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축복하실 것이다. 결론적으로 여러분과 저는 평생 교회를 사랑할 교회가 있다는 것이 너무 좋은 것이다. 어떤 환경에서도 내 마음의 영적 고향인 주님을 평생 사모할 교회가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해외에서도, 우리가 어딜 가도, 그 교회 하나 하나가 또 시골 교회도, 그 교회 모두가 평생 사랑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지금도 부친 교회에 가면 내가 평생 사랑하는 교회가 된다. 내수동 교회도, 미국 남가주사랑의 교회도 그렇다. 우리 사랑의 교회는 말할 것도 없다. 여러분, 섬기는 교회가 평생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평생, 우선은 개인적으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평생을 사랑하는 교회가 있으면 한국교회의 전체도 자연스럽게 사랑하게 될 줄로 믿는다. 한국교회와 선지자들을 막 뭐라 하고, 한국교회를 비판하고, 주위교회를 함부로 말하지만 우리는 평생 살아가는 교회를 사랑하고 같이 가슴 아파 해야 한다. 그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워야 한다. 그의 몸 된 교회를 개인적으로 우리 교회도 기도의 제목이 되어서 나의 기도라고 여기고 기도해야 한다. 나에게 이 교회를 나의 육체에 채우라고 하시는구나, 로 여기며 사랑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고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한국교회 전체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이런 마음으로 우리가 결단해야 한다. 성탄의 새벽, 주님의 신부된 교회를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 교회를 우리 가정보다, 자신보다도, 이 교회를 더 사랑하는 평생이 되기를 소원한다.
 
♪예수님 임재하소서!♬ 
 
♣요약
성탄의 기쁨이 온 만방에 전해져서 주님의 빛으로 어둡고 후미진 곳에 비추어 주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고, 우리는 걸어다니는 교회로서 주님의 자녀로서 헌신하고 봉사하며 기도의 지팡이를 높이 들고 첨예한 갈등은 사라지고 평화와 새 날이 그곳에 예수님의 사랑과 빛이 환하게 비추어 주시길 기도해야 한다. 모두의 교회의 전체가 사랑이 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교회를 사랑하면 믿음의 용량을 결정짓는다. 늘 교회와 이웃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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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12월 21일) 
제목: "나의 거처를 어떻게 예비해야 할까?"
말씀: 요한복음 14:1~4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설교자: 안승훈 부목사님
ㅡㅡㅡㅡㅡㅡ

*요한복음 14:1~4,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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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승훈 부목사님

-은혜를 사모하면 믿음 보고 수요저녁기도회에 오신 여러분들을 환영한다.
 
여러분들께서 이 시간을 통하여서 회복을 넘어 부흥의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렇게 인사를 해보도록 하라. “집사님, 당신의 거처는 예비 되셨는가?”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아라. “당신의 거처는 예비 되었는가?” 자신 있는 분은 “예”라고 대답하시고, “아직 준비 중 입니다.”라고 대답하시는 분도 계신다. 의식주(衣食住)의 3대 문제 가운데 우리가 의(衣)와 식(食)은 여러분들이 해결하고 오셨을 것이다. 옷 입고 식사하고 오셨을 것이다. 그런데 주의 문제는 주는 우리가 오늘도 해결되었다고 담대히 말할 수 없는 것은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 중에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실제로 작년 말에 이런 결과가 발표되었다. 우리나라 중산층이 중간 가격에 서울에서 구매하려고 한다면, 20년을 꼬박 일하고 다른 돈을 한 푼도 쓰지 않아야 가능하다. 라는 통계가 나왔다.
 
그 말인 즉슨 우리가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아무것도 입지 않고 20년을 살아야 한다는 말인데 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실은 우리에게 필요한 시간은 30년, 어쩌면 40년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할 수 있는 시간은 대부분의 봉급을 집을 위해서,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서 써야 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이 자리에 계신 많은 분들이 “거처가 준비되셨습니까?” 하면 자신 있게 ‘예’라고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예”라고 대답하신 분들 가운데 “내 거처는 예비 되었는데, 생각해보니 내 자녀의 거처를 이제 예비해야 하는데, 그것은 아직 고민 중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예비해야 할지 너무나 막막합니다.” 라고 하시는 분들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우리에게 이 거처의 문제를 내가 해결해 주겠다고 한다면 그것만큼 환영할 일이 없겠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거처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다고 하신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말씀을 들어보겠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주신 거처는 어떤 것인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시는 거처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I.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시는 거처는 ‘아버지의 집’이다.
 
a)우리를 위해 예비 되는 거처는 ‘아버지의 집’이다.
*요한복음 14;2,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집인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 모든 성도들의 아버지이시기도 하다. 그래서 이 말씀을 듣고 나면 새로운 거처를 준비하시는 줄 알았는데 이미 내 아버지 집을 나에게 집을 다시 주신다고 하신다. 제 명의의 별도의 집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사시는 그 집에서 살라고? 실망스러워 하는 성도님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께서는 내 명의 다른 집을 주시겠다고 오늘 말씀하시는 것은 물리적인 집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런데 혹여 이것이 실망스럽다 하더라도 계속해서 들어보라.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집’은 건물로 생각되는 그런 집이 아니다. 이스라엘에서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할 때, 대부분의 경우에 이것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를 의미한다. 아버지를 믿는 자들의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내가 거처를 예비했다.”라고 말씀하실 떼, 첫 번째 특징은 우리가 거처하는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공동체, 하나님의 자녀들이 함께 거하는 그 가족을 위하여서 예비하신다는 것이다. 여전히 이 땅의 어떤 물리적인 땅과 집을 원하시는 분들께는 좀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의미로 실제적인 건물로서 아버지의 집을 언급하실 때가 있었다. 그것이 언제였냐면, 바로 성전의 대해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집을 청결하게 하시기 위해서 ‘이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성전 뜰에 가득했던 짐승들을 몰아내셨다. 그리고 이때, 예수님께서 예비하셨던 이 집이 바로 성전 독 체, 가운데 있는 성소뿐만이 아니라, 그 옆에 있는 회랑들과 그의 딸린 많은 방들과 그리고 뜰들이 붙어있는 물리적인 집이었다. 이 집을 예수님께서 청결하게 하시고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것을 만인에게 돌려주셨다. 이것은 모든 백성을 구원하시겠다는 어떤 상징적인 의미일 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성전에 예비 되어 있던 이방인의 뜰이라는 공간을 다른 이방인들이 볼 수 있도록 그곳을 점거하던 모든 것들을 치우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것이었다. 여기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시는 거처 두 번째 특징이 나타난다.
 
b) 우리를 위해 예비되는 거처는 ‘이미’ 마련되어 있다.

*요한복음 14;2,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많도다. 이 ‘많도다’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집의 공간이 많다. 많으니까 그곳에 와서 한 곳을 점거하면서 살아라, 는 그저 많다는 수량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린 아이가 손에 쥐고 있던 과자를 떨어뜨렸을 때, 아앙! 울 때, ~ 그 아이를 달랠 때, “아주 많아”, 많아~~ 그 아이에게 이야기 하는 것은 어른으로서 많이 있어, 많다고 자랑하려고 수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너를 위해서 충분히 예비 되어 있다.’라고 말하는 위로의 말이다. 예수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의 집이 예비 되어 있고, 이 많은 사람들이 예비 되어 있다.”라고 말씀하실 때에 그 은혜를 이미 아시는 여러분들께서는 오늘 설교의 비밀을 다 아시는 분들이시겠지만 아직 나를 위한 물리적인 공간이 필요하여 좀 더 들어보고자 하시는 분들께서는 예수님께서는 ‘너를 위하여 필요를 하는 그것을 이미 충분히 예비하였다.’ 라는 음성을 들으시면 좋겠다. ‘그렇지 않으면, 이미 너에게 말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만약에 이것이 충분하지 않으면 나는 솔직하게 말할 사람이야. 내가 너희에게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그저 너희를 위로 하려고 많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너희를 위한 거처가 이미 많이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오늘 말씀을 보면, 많은 공동체가 우리를 위해 예비 되어 있고, 많은 방들이 주님의 거처가 이미 거할 곳이 우리에게 예비 되어 있다면, 대체 왜? 그곳을 예비하러 가시는가? “내가 그것을 예비하러 가노라.” 라고 주님께서 선포하시는데, 예비하러 가시는 것은 사실은 준비되지 아니다. 우리가 이렇게 질문 드릴 수 있다. 그저 많은 사람이 다가오니까, 그 중에 한 명, 나 한 사람이니까, 오늘 주님께 와사 혹시 저를 위한 곳은 없나요? 이렇게 기도하면 “네가 누구더라, 이름을 좀 찾아보자.” “어 많이 있어 많이...너를 위한 공간이 많이 있어.” 라고 말씀하시면서 부랴부랴 돌아가셔서 그 장소를 혹시 준비하고 계신 것은 아니신가? 주님께서 그 장소를 예비 하러 가시는 곳에 이 장소가 이미 예비 되어 있다. 라는 반증이 드러난다.
 
제가 어린 자녀를 키울 때, 그 자녀가 스스로 정리 정돈을 잘 하지 못할 때, 아이들의 침실은 이미 있다. 그래서 이 아이가 밤에 잠들 공간은 이미 있다. 그런데 이 아이를 편히 그곳에 재우기 위해서는 저는 이 아이에게 먼저 젖병을 쥐어주던지, 장난감을 잠시 쥐어 주든지, 잠시 아이에게 기다리라고 말하고 먼저 앞서 그 장소에 들어가서 이불에 있는 장난감들을 다 치우고 아이를 눕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아이를 위하여 이미 침실이 예비 되어 있더라도 그곳에서 뒤척이다가 아이는 깨어나기 마련이다. 이미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거처를 태초부터 예비해 주셨지만 그 거처가 어느 샌가 오염되었다. 아까 말씀드린 성전에 실제로 물리적으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공간에 주님께서 그곳을 치우셔야만 만인이 와서 기도할 수 있게 되었던 것처럼, 우리를 위하여 주님이 이미 예비하신 공간이 있기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가서 치우시는 것이다. 그래서 이따가 말씀 드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신다고 하고는 우리와 잠깐 떨어져 계시지만, 우리에게 잠시 침묵하시는 그 시간이 사실은 우리에게 어찌나 복된 시간인지, 우리를 위해서 주님께서 우리 있을 곳을 예비 하시는 것을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시간인지 다시 말씀드리겠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거처의 세 번째 특징은 우리를 위하여서 공간을, 공동체를 예비하실 뿐만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갈 구체적인 삶을 주님께서 예비하시는 것이다.
 
c) 우리의 공간 뿐 아니라 우리의 삶도 함께 예비하신다.

*요한복음 14:2b,
2b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이것이 2절 말씀 세 번째 부분에 말씀이다. 2절 말씀에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신다는 세 가지 표현이 각기 다른 거처로 등장하는 것이다. 첫 번째 표현이 아버지 집, 보이코스 라고 표현되는 실제적인 한 집과 공동체를 의미하는 단어였고, 두 번째 표현이 그 집에 대비되는 전체의 커다란 공동체, 혹은 성전과도 같은 하나의 단지가 아니라 여러 개 있는 큰 단지를 예비하는 그 집뿐만이 아니라, 그와 대비 되는 우리 개인의 그 안에 주어진 공간, 즉 방을 의미하는 모네라는 단어로 거처이다. 우리가 거할 곳은 바로 모네라는 단어로 표현된다. 그런데 우리가 이 집에 큰 집이 우리를 위하여 준비되었고, 그 안에 우리를 위한 개별 공간도 충분히 준비되었는데 왜 또 거처를 준비하러 가신다고 하시는가? 여기서 말씀하시는 이 거처는 바로 토포스 라는 단어인데 그것은 광의의 place, 어떤 곳을 의미한다. 이것이 무슨 의미이냐면 이것은 한 주어를 중심으로 그 주변을 설명하는 단어이다. 이 팬이 이곳에 놓이면 강대상이 된다. 이 팬이 이 주머니에 꽂히는 이곳은 주머니가 된다. 이 주어를 중심으로 그것이 위치하는 모든 것, 그 주변 환경을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중심으로 한 내가 영위하는 모든 삶을 주님께서 예비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이 토포스라는 단어는 우리가 있는 그 자리만을 의미할 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지위로 번역되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가 처한 환경을 뜻하게 되기도 한다.
 
여러분들께서 침대에 누우신다면, 그곳이 바로 여러분의 거할 곳이 되고, 여러분들이 이 교회에서 순장으로 사역을 하신다면 그 직책도 여러분이 거할 곳이 되신다. 여러분의 주님께서 새로운 사명을 주셔서 부르신다면 그 새로운 기회도 여러분의 거할 곳이다. 내가 다리를 뻗을 곳, 내가 생활의 방식, 바로 나의 삶이 주님께서 나를 예비하시는 거처가 된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하여 큰 공동체와 그 안에 나의 몫을 준비해 주셨을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살아갈 지위와 삶의 형태, 그 기회들을 모두 예비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준비해 주시는 이런 거처는 구체적이고 섬세해서 내가 있어야 할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이다. 이것을 철저히 준비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을 우리가 당연히 취하고 누려야 한다. 어떻게 우리가 그러면 취하고 누릴 수 있는가? 2절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께서 위하시는 거처할 세 가지 특징을 살폈다면, 앞선 1절과 뒤 따르는 3절-4절에서 이 거처를 누릴 구체적인 세 가지 방법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먼저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거처를 예비하시겠다고 말씀하시기 전에 앞서서 그 전제로 말씀을 하신다. 1절을 보면,
 
II. 하나님께서 예비하실 거처를 누리는 방법.
 
*요한복음 14:1,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 말씀은 거처를 기대하는 우리에게 주시기 이전에 먼저 당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당시 제자들도 사실은 거처 때문에 고심하고 있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거처를 너희를 위해서 예비하겠다는 놀라운 말씀을 주셨기 때문에 사실 거처를 예비하신다는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많은 포상을 주는, 거처를 나누어 주는 좋은 분위기를 앞서서 예상하기 쉬운데, 거처를 주기 전에 제자들은 근심하고 있었다. 당시의 상황은 명절을 새는 저녁이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민족 명절, 가장 큰 명절은 유월절이었다. 대부분 명절에 삼삼오오 음식을 준비해서 자기 집에서, 또 마련한 모임장소에서 식사를 한다. 명절이기 때문에 이 분위기가 나빠지기 보다는 좋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근심하지 말라,’ 라는 말을 할 정도가 되었다. 이 말씀 직전, 그러니까 14장 1절 바로 직전 13장 후반부를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만찬장에서 어떤 사람은 뛰쳐나가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 따져 묻고, 어떤 사람은 “대체 이 일이 무슨 일입니까?”라고 소리지르는 그런 일이 발생했다. 13장 30절을 보겠다.
 
*요한복음 13:30,
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밖은 밤이다. 한밤중에 식사를 하다가 한 사람이 뛰쳐나갈 정도이다.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같이 식사를 하시다가 “너는 나를 배신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명절에 왜 갑자기 “너는 나를 배신할 거야? 하는 말씀을 하시는가? 어안이 멍멍한 제자들엑 예수님께서 바로 말씀하신다.
 
*요한복음 13:33,
33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이것을 간단하게 말하면, ‘나는 명절에 너희와 식사하다가, 이제 너희가 올 수 없는 곳으로 간다.’ 분위가 더 기묘하다. 사실 그저 명절 식사 하면서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 보려다가 예수님이 이상한 말씀을 하셔서 분위기가 엉망이 그런 상황이 아니라, 그 앞에 이러한 분위기를 만들어갈 맥락이 있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3년 만에 고생 고생 생 고생을 마치고 드디어 왕국의 중심부 예루살렘에 온 백성의 환영을 받으면서 입성했다. 개선한 직후이다. 그런데 마냥 좋은 상황만은 아니다.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따라올 때는 나를 따라오라.’ 하는 말씀하시는 것은 자신이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내려놓고, 자신의 가족과 생계를 내려놓고, 그저 주님을 따랐고, 주님을 따른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기쁘던 시기가 있었다. 그런데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가고, 머리 둘 곳은 없고 따라다니다가 돌에 맞아 죽을 뻔하기도 하고, 바다에 빠져 죽을 뻔하고, 심지어 먹을 것이 없어서 길가다가 밭에 있는 이삭을 주어다가 비벼서 생쌀을 씹으면서 다니다 보니 점점 고대어만 갔다. 어디든 따르기만 하면 기뻤던 제자들이었는데, 이제는 고생을 하다 보니 이 고생 끝에 어떤 거처를 주시나? 어떤 자리를 주시나? 내게 어떤 삶을 주시나? 내가 어떤 이득을 얻을 것인가를 생각들이 그들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이 수도로 오기 전에 제자들은 계속해서 싸움이 일어난다. ‘누가 더 큰 자리를 얻어야 하는 것인가?’ 이렇게 제자들은 처음과는 달리 지쳐서 이 수도에 도달했는데, 그나마 감사하게도 백성들은 열렬히 환영한다. 호산나, 호산나, 왕처럼 이들을 환영하는 것을 볼 때, 들쳤던 제자들의 마음 한켠에는 조금은 위안이 되고 그래도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구나!’ 하며 생각했는데, 우리를 지도자들이 잡아 죽이려고 달려들 때에 우리는 두려워하기만 했는데, 수도에 와보니 우리를 환영하는 이 인파들을 보니 여기서 예수님이 조금만 잘 하시면 우리가 바라는 그 자리, 그 결과를 얻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명절 당일 날 거하게 식사를 차려 함께 나누며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때, 이 제자들이 깨달은 것은 “자, 이제 결심이 섰다. 우리가 이 땅의 정권을 뒤 엎고, 하나님의 나라를 다시 세우자.”라는 말씀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내가 떠나겠다.” 라는 말씀이다. 긴장된 상황에서 자칫하면 우리가 조금만 긴장을 놓치면 이 땅의 세력에 다 먹혀서 가진 것도 다 잃을 것 같은 지쳐 있는 상황에서 우리의 수장이 정신을 바짝 차리시고 우리를 이끌어주셔야 하는데 “떠나겠다.” 라고 말씀하시고 계신다. 힘이 빠질 수밖에 없다. 아니, 화가 날 수밖에 없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질문할 수밖에 없다. 제자들은 모두 묻고 싶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고 무슨 말씀이신가요? 어디로 가신다는 겁니까?” 수제자 베드로가 나선다.
 
*요한복음 13:36a,
36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오늘 이 장면에서는 주님을 따라 순교하겠노라고 말하는 뉘앙스가 다르다. 주님이 세우신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모를 때에 아직 이 땅의 거처를 사모하고 그것을 바라는 제자로서 “주님, 자꾸 죽는다는 말씀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설마 정말 죽으시려고 하는 것은 아니시죠? 대체 저희가 고생하는 게 몇 년이 지났습니까? 예수님 한 분만 보고 따라왔습니다. 설마 진짜 죽으시는 것은 아니시지요? 도대체 어디 가신다는 것인가요?” 라고 질문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 번 더 강조하신다.

*요한복음 13:36b,
36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낙담한다. 지금 못 따라오는데 나중에 따라올 것이다. 우리 스승님께서 드디어 포기하셨구나. ‘저 바리새인들과 함께 일전을 치러야 하는데 로마제국과 일전을 치러야 하는데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서 싸워서 저것들을 얻어내야 되는데, 아무리 봐도 승산이 없으니 이 싸움에서 내가 죽게 될 것 같다.’고 이해하고 “아닙니다. 주님, 주님만 죽게 하실 수 없습니다. 저도 따라가서 죽겠습니다.” 라고 충성된 말을 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수제자의 이 충성스러운 반응도 찬물을 끼얹으신다. “아니다. 너도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가장 충성된 반응조차 대차게 내치신다. 그랬다면 이 상황에 분위기가 어떠하겠는가? 제자들의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술렁술렁하다. 동요한다. 그것이 오늘 1절에 말하는 근신이다. 이것은 영어로는 마음을 휘저어 버리다(stir up). 스털 업이다. 물이 가득 있는데 무엇을 넣어 휘젓는 것이다. 혹은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큰 돌덩이를 제자들의 마음속에 풍덩 빠뜨려서 파도가 일어, 일렁일렁 동요하는 그 모습이다. 그런데 직접 하시고서 동요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고 하신다. 우리에게도 예수님께서는 거처를 주시기 전에 동일한 말씀을 하신다.
 
예수님을 처음 따라 나설 때에 모든 것을 다 내어드리고도 같이 계속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 해, 두 해,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제자의 삶을 살아가다 보면, 우리를 지치게 하는 많은 일들을 경험한다. 머리 둘 곳이 없는구나, 배가 주리는구나, 사람들이 우리를 비방하는구나, 그런데 이 모든 것은 감내할 수 있다. 우리를 가장 난처하게 만드는 것, 우리를 가장 동요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힘들 때에, 이런 우리에게 위로가 필요할 때에 주님이 우리를 갑자기 떠나신다고 말씀하듯이 우리 문제를 중요히 생각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실 때이다. 그래도 주님을 위해서 이렇게 힘든 일을 했으니 그에 대해서 반응과 보상을 해주시리라 생각을 했는데, 다 지쳐서 낙담하기까지 응답이 없으시다. 심지어 어떨 때는 베드로처럼 용기를 내서 “생명까지 바치겠습니다.” 라고 말할 때, 오히려 주님은 우리의 기세를 꺾으시려는 듯 아니 “더 어려운 순간이 네게 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을 따라가시다가 그저 이 땅의 좋은 재물, 거처를 준비하겠다는 그런 큰 목표를 말하기 이전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고 ‘주님을 따라 산다는 것 어떤 것인지 제가 도저히 모르겠나이다.’ 말한 그런 지치는 순간을 경험한 적이 없는가? 설교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평생 벌어도 내 집 마련을 못하는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난 이미 지쳐서 나자빠져 있는데 주님은 나를 더 이상 상관하지 않으신 것 같아. 주님 일은 주님 일이고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 두시는구나. 다른 사람들은 이미 저만치 앞서 가는데 나는 이제 어떻게 하지?’ 부랴부랴 이 세상의 방법들을 찾아가려고 발버둥치지만 이미 늦은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때 주님이 일관되게 말씀하신다. “나를 믿으라.”라고 하신다. 제자들의 상황은 근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우리들의 상황도 근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 거처를 마련하려고 근심하면서 주님께 따져 묻지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근심 하지 말라. 나는 이 땅의 거처를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의 더 근본적인 거처, 온 세상 만물을 지으시고 모든 시간의 처음과 나중을 지으신 분이 계신 그곳에 가서 그것에 너희가 있을 곳을 예비하러 간다. 그리고 그것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직접 예비하겠다.” 주님께서 직접 예비하신다는 사실을 못 믿으신다면 주님께서 “내가 직접 너희를 위한 영원한 터를 예비할 것이니 근심하지 말라.”라고 하신 말씀을 못 믿으신다면, 그것은 내가 주님보다 내 집을 잘 준비한다는 뜻이다. 어쩌면 이 땅에 집을 준비하는 것은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땅의 집을 잘 준비하신 여러분, 혹은 조금만 더 준비하면 그것을 손에 가질 것처럼 생각되시는 여러분, 그곳이 정말 여러분들께서 영원히 거할 거처인가? 실제로 그렇지 않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그렇게 믿고 싶고, 그렇게 가치를 부여하고 싶더라도, 아무리 이 땅의 거처를 완비하고 싶더라도 아니 이미 완비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안에 채울 것들, 그 안에 함께 할 사람들, 그 안에서 살아갈 건강을, 시간이 지날수록, 갈수록 우리는 일어난다. 어쩌면 돈을 어떻게 많이 벌어서 그 거처에 채울 물건과 나의 라이프 스타일은 확보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런데 이게 주어진 시간이 내 손 사이로 빠져 나가는 것은 내가 그곳에서 함께 거할 가족이 떠나간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거처는 물리적인 공간만이 아니라, 그곳을 함께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고 그곳에서 어떻게 생활할지까지 모두 포함하는 것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다. 그 거처를 예수님보다 더 잘 준비할 자신이 있는가? 정말 그러한가? 이 천지 만물을 지으신 주님보다, 내 모든 죄를 사하시고 나를 죽음에서 건지신 그분보다, 나와 함께 살아갈 더 자질을 더 잘 살릴 확신이 있는가? 그런 확신이 없으시다면 부디 이 땅의 거처를 위한 근심을 내려놓으시기 바란다.
 
혹여 이 땅의 거처가 다 준비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가 우리의 삶이 이 땅에서 내 집에서 거하는 것으로 마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에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무엇이 더 중요하겠는가? 주님께서 예비하신 우리의 거처를 가장 잘 누리는 전제는 바로 우리가 이 땅 거처를 내가 예비한다는 이 근심을 내려놓는 것이다. 왜? 주님께서 반드시 친히, 나를 위한 영원한 것을 예비하시기 때문이다. 주님이 예비하시는 거처를 누리는 방법은 두 번째 방법은 더욱 놀라운 방법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찾아오는 거처를 맞이하라. 하신다.
 
*요한복음 14:3,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께서는 그 거처를 예비하시기 위해 잠시 떠나신다고 말씀하셨다. 처음에는 우리에게 따라올 수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나중에 그곳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어떻게? 제자들은 그것이 죽음으로 된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내가 다시 찾아와서 너희를 영접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찾아오시는 것이 거처가 아니라, “예수님 아니십니까?” 우리가 질문할 수 있다. 그렇다면 14장 23절을 보겠다.
 
*요한복음 14:23,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저 멀리 있는 천국, 천로역정을 다 거치고 고생 고생을 하여 하늘에 임하여야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직접 찾아오신다고 말씀하신다. 거처로 우리에게 찾아오신다고 말씀하신다. 이 거처는 움직이는 거처이다. 이제 이 거처가 어디인지는 더욱 중요하지 않다. 이 땅에 거처와 다른 점이다. 이 땅의 거처는 어디 있는지가 중요하고 어디 역, 어디 단지가 중요하지만, 그래서 그것으로 가치가 결정되고 주님께서는 우리의 평생을 그를 위해 소모하게 만들지만 주님께서는 우리가 평생의 수고를 이를 위해 하지 않아도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임재하시는 거처가 되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 거처를 맞이하라!!.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가? 우리에게 예비 된 거처를 맞이하는 방법은 23절에 읽은 대로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우리가 지키는 것이다. 우리가 이동하는 주님의 맞이하는 방법, 거처를 우리가 누리게 하는 방법은 바로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이 하신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내 삶에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매일 읽는 큐티를 결코 얕보지 말아야 한다. 오늘 내가 한 절의 말씀을 펼쳐 들어 주님을 사모할 때에 그 사모함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하늘의 거처를 하나님의 집을 지금 이곳으로 임하게 하실 것이다. 오늘 하나님의 거처가 우리에게 오실 것이다. 이 거처를 누릴 세 번째 방법은 바로 이 거처와 함께 다니는 것이다.
 
*요한복음 14:4,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내 거처를 어떻게 예비할까? 그 길을 몰라서 평생을 고민해 왔고 오늘도 이 자리에 나아와 무릎 꿇고 기도하지만 여전히 우리가 살아갈 길은 잘 보이지 않다. 창세시대를 살아갔던 신앙인물, 욥기도 그러했다. 창조시대, 창세 시대, 족장으로서 아직 이후에 주어질 다른 많은 복음이 주어지지 않아 주님께 의문만 가득하고 주님을 온전히 다 알고 어려웠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고난을 겪고, 자녀들이 다 죽고, 같이 거할 거처가 될 공동체가 사라지고, 자신의 재물들이 사라지고, 자신이 살아갈 터전이 사라지고, 건강이 사라져서 물리적인 거처마저 이 땅의 육신의 장막마저 없어져 버린 그때에 그는 여전히 고백한다. 욥기를 23장 8-10절을 보면,
 
*욥기 23:8-10,
8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9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주님은 이 모든 고난을 당하게 하고도 내게 안 보이신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주님을 신뢰하여 이렇게 고백한다고 말한다. 욥은 엄청난 믿음이 사람이었다. 고통 중에 보이지 않아도 주님을 여전히 신뢰한다고 믿음을 선포한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온 인류가 평생 경험한 이 문제, 고통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우리에게 주신다. 욥만큼 엄청난 믿음으로 고난 중에, 우리가 낙담하는 중에 어디로 갈지 몰라도 내가 주님을 신뢰합니다. 그런 믿음까지도 요구하지 않으신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이제는 너희에게 보여주겠다고 하신다. 영문 모를 고통을 겪는 욥은 감히 주님의 길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 우리에게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아는 것은 엄청난 특권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와서 거하신 후에 이제 우리는 그 거처에 “내가 있는 곳에 주님 임하여 주시옵소서! 이곳에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가 아니라 이제는 주님이 가시는 곳을 따라갈 수 있다. 이것은 움직이는 거처에 우리가 탑승한다는 의미이다. 어떤 이는 노년이 되어서 퇴직금을 다 투자해서 캠핑카로 다니시는 분들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잘 없지만 더 잘 사는 미국에 가면 그 넓은 나라를 벤츠 리무진 버스를 개조해서 어떤 집보다 호화롭고 좋게 만들어서 전국을 다니는 분들이 있다. 평생을 집을 마련하기 위해 수고했는데 그 수고를 드려서 내가 살아보지 삶을 가보지 못한 곳이 너무 많아서 이렇게라도 해보려고 발버둥치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가 있는 이 자리에만 임하신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는 이 집이 움직일 때에 함께 가자.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나와 함께 움직이는 놀라운 광경을 우리의 삶에 우리의 거처로 예비하셨다. 그전에 여러분이 얼마나 낙담했는지, 그전에 여러분의 삶이 얼마나 정리정돈 되지 않았는지는 상관이 없다. 엘리사가 사환을 위해 기도하여 사환이 타락한 사마리아 땅 한 가운데 한 도단 성에서 눈을 뜰 때에 그곳에 불 말과 불 병거가 둘러선 것을 보았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셔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친히 임재하여 주실 때, 우리에게 거처를 가져와 주실 때에 우리는 그곳에 탑승하여 그곳이 어디로 가시는지 이제는 명확히 보고 함께 따라가는 놀라운 모험이 시작되게 될 것이다. 주님이 시작하시는 이 놀라운 스펙타클한 역사에 우리가 함께 동행 하게 되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여러분들께서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이제는 근심하지 않겠습니다. 이제는 주님을 사모하며 내 삶에 주님의 거처를 환영하고 맞이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다른 이들을 향하여 찾아가시는 그 사역에 내가 따라가 그곳에 함께 거하겠습니다.” 결단하셔도 이 문을 나가 한파를 뚫고 나의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다 보면 이내 우리의 삶은 지쳐서 다시 낙담하는 경험을 한다. 다시 낙담하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다. 그 때에 이제 우리는 그 순간을 새롭게 생각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모두가 거처를 위하여서 고심하는 낙담하는 외로운 순간을 사용하셔서 나의 거처를 주셨다. 우리가 지금 성탄을 대망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처음 이 땅에 오셨을 때에 바로 그렇게 거처 없이 외롭게 사역을 시작하셨다.
 
*누가복음 2:7,
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예수님께는 태어나면서 맞아주는 이가, 이 땅의 거처가 없었다. 장성하여 사역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누가복음 9장 18절을 보면,
 
*누가복음 9:58,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이 땅에서 아픈 자들을, 슬픈 자들을 위로하시면서 두루 다니며 열심히 사역하시던 때에도 예수님은 머리 둘 곳 하나 없었다. 이것만 해도 엄청난 헌신인데 이것을 마치고 십자가를 향해서 걸어가실 때에도 오늘 제자들처럼 대체 어디가십니까? 타박하는 말들만 쏘아붙여 왔다. 심지어 우리를 위하여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난 뒤에도 예수님께서는 거하실 무덤하나 없었다.
 
*마태복음 27::59-60,
59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60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알아주는 이가 많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명의의 무덤이 아니라, 다른 이가 산 다른 이의 명의로 된 빌린 무덤에 묻히셨다. 그런데도 이 땅에서 거할 거처의 우리로 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에게 약속하신 이 거처들을 예비하시기 위하여 다시 그 길을 떠나셨다. 순수히 우리를 위하여서 다시 오셔서 맞이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저희가 이곳을 나가서 느낄 수 있는 쓸쓸함은 예수님께서 이미 앞서서 다 지고 가셨다. 혹여 지금 당장 내 앞에 견딜 수 없는 쓸쓸함이 거처가 예비 되지 않은 외로움이 임한다고 생각되실 때에, 질문해 보라. 주님이 말씀하신다. 근심하지 말라. 동요하지 말라. 너희 거처가 이미 예비 되었다. 내 거처가 너를 찾아갈 것이다. 그리고 내가 어디로 다니든지 너는 그 길을 알고 나와 함께 다니게 될 것이다. 이 믿음의 약속을 붙잡고 함께 나아가는 우리가 제자 되기를 소망한다.
 
요약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거처를 우리가 조금만 눈을 감으면 세상을 향하여 고개를 돌리면 잊어버린 채, 이곳에 세상의 거처를 힘쓰고 우리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다시 낙담하고 싶을 때, 주님이 그때에 우리의 마음이 바뀌게 하실 것을 믿고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먼저 사용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신 주님을 온전히 알아야 한다. 주님이 어디로 가셨는지, 무엇을 위하여 가셨는지 우리를 예비 된 처소가 어떤 것인지 온전히 알고 그 처소를 온전히 누리는 제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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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2년 12월 17일)ㅡ시내산 산상기도회
제목: "21세 목자들"
말씀: 누가복음 2:8~20
대표기도: 김홍길 안수집사님
말씀읽기: 유승윤 형제(청년3국),한채문 자매(대학2부)
찬양인도: 목양 4팀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박신욱 목사님(SEED선교회 국제대표)-초빙
ㅡㅡㅡㅡㅡㅡㅡ

*누가복음 2:8~20,
8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15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16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17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 
18 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 
19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20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박신욱 목사님(SEED선교회 국제대표)
지팡이를 들으시며 “이게 하나 있는데 이것을 들고 설교하고 싶습니다.” 하신다.
 
-오정현 목사님께서 일주일 전에 전화를 주셔서 토비새에 준비를 잘 하냐고 하셨다. 느낌에 이 토비새가 중요한데 “박목사, 할 수 있겠나?” 하시는 그런 걱정이 담겨 있는 것 같아서, 일주일동안 밤잠을 안자고 준비를 했다. 그런데 오늘 새벽에 1시에 일어났는데 시차도 있고 해서 준비한 것이 아니 것 같았다. 마음에 성령님께서 허락을 안 하시는 것 같았다. 큰일 났다는 생각을 했다. 불과 몇 시간이 남았는데 그래서 한 달간 묵상한 말씀인데, 어쨌든 바꾸었다. 포인트 세 개를 두 개로 줄였다. 그리고 내용도 포인트가 바뀌어졌는데, 오늘 제가 죽을 쓰면 성령님의 책임인줄 믿기를 바란다. 그러니까 무조건 오늘 은혜 받으시기를 축복한다.
우리가 성탄절이 되면 예수님의 탄생스토리를 묵상한다. 저도 해마다 여러 스토리 가운데서 은혜 받는 부분들이 있다. 올해는 베들레헴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천사의 전해주는 소식을 듣고 베들레헴 동네로 달려가서 예수님 나신 소식을 전해 준 이야기, 오늘 본문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은혜를 받았다.
 
예수님의 이 탄생이야기에 많은 분들이 등장하는데 그 목적이 무엇이겠는가? 그 네이티브 스토리, 그러니까 성탄이야기의 목적의 핵심이 무엇이겠는가? 왜 그 모든 등장인물들은 있고, 사건들이 있는가?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 그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증명하기 위해서 이 이야기들이 있는 것이다. 사가랴 제사장부터 시작해서 엘리사벳이 세례요한을 잉태하고, 그 천사의 가브리엘의 수태고지부터, 또 아기가 예수님이 난 지 팔일이 되었을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에 대해서 예언했던 시므온, 안나 선지자, 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거 하기 위한 목적이다. 마리아도 가브리엘 천사의 수태고지도 그렇고, 요셉에게 나타난 꿈에 천사의 이야기도 그렇고, 모두 다가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동방박사 이야기까지 한 가지의 목적이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라는 것, 그런데 누가복음에 목자들의 이야기가 만일에 없었다면 어떻게 되겠는? 이 목자들의 이야기가 꼭 필요했는가? 필요했다면 왜 필요한가? 예수님이 처녀의 몸에 태어나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거 하는 데 있어서 누구를 위해서 특별히 하나님께서 이 천사를 보내어서 이 목자들을 사용하셨는가? 예수님이 태어나신 그 날, 그 밤에, 아마 이 아기 예수님이, 태어난 갓 태어난 아기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땅에 오신 ‘메시아’라고 하는 사실을 가장 잘 절실하게 체험하면서 확신했던 사람은 누구인가? 마리아이다. 열 달간 품고 있을 때부터 그는 실제로 탄생했을 때 태어났을 때, 마리아는 아마 나 같은 부족한 종을 쓰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감격하고, 회개하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겸손히 엎드렸을 것이다.
 
그런데 요셉은 어떠했는가? 물론 요셉은 가브리엘 천사가 꿈에 나타났다. 마리아에게는 방에 있는데 들어와서 나타나 소식을 전했다. 그런데 요셉은 꿈에 천사가 나타났다. 마리에게 하는 말은 “두려워 말라, 이는 성령으로 잉태한 것이다.” 라고 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실을 그 꿈을 믿고 마리아를 데려왔다. 원래는 가만히 끊고자 했다. 마리아도 믿었겠지만 꿈에 나타난 천사의 이야기도 당시는 믿었기 때문에 마리아를 데리고 올 수 있었다. 가만히 끊지 않았다. 그리고 열 달이 지났다. 예수님이 마침내 탄생하셨다. 그 시각에, 혹시 이미 충분한 증거가 있지만 본인도 나타난 천사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정말 처녀가 아기를 낳을 수 있는가? 정말 이 아기가 하나님의 아들인가? 정말 성령으로 잉태하였는가?’ 하는 그 마음속에 어두운 그림자가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시간에 목자들이 달여 온 것이다. 그리고 천사의 말을 전해주는데,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표적이라.” 했다. 그 천사의 말을 와서 요셉에게, 마리아에게 전해준 것이다. 그 구유에 강보에 싸서 갓 태어난 아기 예수님을 누가 눕혔는가? 요셉일 것이다. 요셉이 강보에 아기를 싸서 둘 곳이 없어서 거기 두면 안 되는 장소이지만, 너무나 비천한 장소이지만, 짐승의 먹이를 담는 곳이지만, 그 구유에 아기를 누여둘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자신의 손으로 담아 아기 예수님을 강보에 싸서 그 구유에 놓았다.
 
그런데 목자들이 한 사람도 아니고 적어도 두 사람이 이상, 목자들이 와서 들에서 양을 돌보고 있는데, 천사가 한 사람이 그에 서고 온 동네에 큰 미칠, 그의 소식을 전하는데, 그들은 동네에 구주가 나셨다고 외친다. 메시아가 나셨다고 한다. 그런데 표적을 주는데 ‘그 아기는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을 것이다.’ 라는 것이다. 마치 천사가 요셉이 아기를 누일 곳이 없어서 구유에 누이던 장면을 마치 천사가 보았던 것처럼 목자들이 와서 그렇게 전해줄 때에 요셉이 심령 속에 있던 마음에 두려웠던 어두운 그림자가 깨끗하게 사라졌을 것이다. 목자들은 요셉에게 특별히 요셉에게, 마리아가 천사의 이야기를 목자들의 소식을, 이야기를 가슴에 담았다고 했지만, 사실은 요셉에게 가장 큰 증거가 되었을 것이다. 2천 년의 일어난 이야기이다. 우리는 어쩌면 21세기에 살고 있는 목자들이다. 왜냐하면 우리도 예수님의 증인들이기 때문에 2천 년 전에 목자들이, 만일에 2천전의 목자들은, 베들레헴의 목자들은, 강보에 싸인 아기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라는 사실을 증거 하는 증인이었다면 우리는 그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에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다시 오신다고 하는 사실을 그 천국 복음을, 그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거 하는 증인인 줄로 믿는다.
 
오늘 저는 아침에 2천전의 목자들의 그 증거 하는 일을 보면서 오늘 21세기의 목자들과 한 번 비교해 보기를 원한다. 그러면서 우리의 사명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우리가 이 증인의 삶을 예수님을, 다시 오실 예수님을 증거 하는 사명을 감당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려고 한다. 2천 년 목자들, 베들레헴의 목자들은 천사의 보냄을 받았다.
 
첫 번째 차이점은 베들레헴의 목자들은 베들레헴에 보냄을 받았다.

-베들레헴에 보냄을 받았다. 21세기의 목자들은 모든 민족으로 세상으로 가라고, 열방으로 가라고 하는 명령을 받았다. 예수님께서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고 하셨다. 또 마태복음 24장 2144절에
 
*마태복음 24:14,
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우리는 베들레헴으로 보냄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는 동네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일가친척에게만 보냄 받은 것이 아니라, 물론 우리가 우리 주위에 복음을 전해야 되겠지만 우리는 세상 모든 민족에게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모든 민족에게 열방에게 온 세상에게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 교회가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누가 가야 하는가? 누가 중요한 것인가? 청년들이 일어나서 가야 한다. 예수님이 30세에 사역을 시작하셨다. 유대인들은 당시 2천 년 전의 문화가 20대에 준비해서 모든 직업도 결정하고 준비해서 30세부터 일을 시작했다. 예수님이 갑자기 30세에 사역을 시작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30세에 사역을 시작하셨다는 것은 적어도 20대에 누가복음을 보면 사실 예수님은 12살부터 하나님의 뜻을 아셨다. 성경을 아셨다. 적어도 예수님은 17세 이후에 20대에 사역을 준비하신 것이다. 그리고 30대에 청년 때에 아직 청년 때에 사역을 시작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떠한가? 모든 민족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 천국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기 위해서,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서, 그리고 교회 기초가 되는 제자들을 훈련하시는데, 그 제자들은 누구인가? 야고보와 요한을 예수님이 부르실 때, 그들이 나를 따르라고 했을 때, 그들의 성경의 기록에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들이 아직도 싱글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30세에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셨다면 제자들은 심지어 결혼했던 베드로를 포함해서 다 20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달력에 나오는 그 숲이 있는 달려있는 그 청장년 제자들은 아닌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청년들이었다. 그들이 새 영을 받을 때, 성령을 받고, 그들이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교회를 사도들이 지었을 때, 그들은 청년들이었다. 예수님의 제자로 보내야 한다. 2천년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중세의 수도사들과 그리고 종교개혁자들과 그리고 근대와 현대의 선교사들이 서구의 모든 선교사들이, 20대에 준비해서 20대 후반에 선교지로 간 것이다. 언더우드가 20세에, 그 아펜셀러가 27세에, 토마스 선교사가 27세에 다 이 땅에 온 것이다. 죤 캘빈이 기독교 강연을 설 때가 27세였다. 2천년 교회 역사는 예수님 때부터 예수님께서 그렇게 디자인 하셨기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에, 20대에서 준비해서 20대 30대 청년들이 교회의 리더가 되고, 교회의 기초가 되고, 교회를 움직이는 그런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오정현 목사님도 마찬가지이시다. 20대에 헌신하셔서 준비하셨다. 그러므로 교회가 모든 민족에게 보냄 받음 교회가 이 사명을 감당하려면 청년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일으켜야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래서 우리 사랑의 교회는 그래도 다른 교회보다 청년들이 많다. 왜냐면 주보를 보면 결혼식이 많다. 청년이 교회에 많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청년들이 예수님의 제자로, 교회의 일꾼들로, 하나님 나라의 추수의 일꾼들로 일어나는 교회가 되기를 축원한다.
 
두 번째로 2천 년 전 베들레헴 목자들은 천사의 보냄을 받는다.

-그러나 오늘 21세기의 제자들은, 목자들은 성령의 보내심을 받는다. 목자들이 천사의 메시지를 듣고 천사들이 보냄을 받아 베들레헴에 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베들레헴에 갈 이유가 없었다. 그들의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은 천사의 보냄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증인의 사명을 감당했던 것은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님에 대해서 증인이 되어 주셨던 것은 그들이 천사의 보냄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2천 년 전 오순절에 예수님께서 청년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지상 명령을 주신 이후에는 다시 오실 십자가 부활의 예수님을 증거 하려면, 증거인이 될 수 있으려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야 한다. 다른 길이 없다. 성령의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면, 성령의 음성을 듣지 아니하면, 성령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아니하면, 성령의 권능을 받지 아니하면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성령의 권능을 받기 위해서 기다리라고 하셨다. 예수님도 우리가 아는 대로 기도로 사역을 시작하셔서 기도로 마쳤다. 왜 그런가? 왜 무리에게서 올라오셔서 기도하셨는가? 겸손하게 기도하셨는가? 왜 빈 들 광야로 나아가셔서 기도하셨는가? 왜 새벽 미명에 한 적한 곳으로 나아가 기도하셨는가? 왜 때로는 산으로 올라가셔서 홀로 기도하셨는가?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는가? 왜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시고 겟세마네 십자가를 앞두고 예수님이 기도하셨는가? 성령의 능력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예수님이 받으셔야 했기 때문이다.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모든 능력은 성령으로부터 성령께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기도하셨다. 그리고 21세기 목자들은 성령의 보냄을 받아야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고,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는 우리 21세기의 목자들은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그 길 밖에 없는 것이다.
 

※ 제가 아르헨티나 선교지에서 오래전 이야기이다. 돌아올 때이다. 그리고 안식년을 가지고 6개월 만에 아르헨티나로 혼자 돌아갔다. 가족을 캐나다에 두고 갔다. 교회를 개척하고 1년 만에 안식년을 가진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 교회에 제가 현지인 전도사님을 목사안수를 주기 위해서 갔다. 공항에 내렸는데 그 전도사님이 저를 데리러 왔다. 교회로 가는데 운전을 하면서 손을 덜덜 떨었다. 6개월 선교지인 교회에 큰 시련이 온 것이다. 교회가 없어질 상황이었다. 1년 밖에 되지 않은 곳이다. 그 교회를 두고 제가 떠나야만 했다. 6개월 만에 돌아오니까 그런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래서 저는 전도사님에게 나는 일주일 동안 교회에 있을 테니 나를 만나려고 하는 사람은 이번에 심방을 못하니까 교회로 오라고 했다. 그래서 교회에서 평소에 기도하던 강대상 앞에 무릎을 꿇었다. 기도를 시작하는데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아르헴티나에 있는 동안 내게 얼마나 남았느냐?” 하셨다. 처음에는 이렇게 물으셨다. “너는 아르헴티나에 있는 동안 얼마나 희생했느냐?” 하셨다. 그래서 제가 얼마나 억울했는지 모른다. 가족을 데리고 와서 아이가 아프기까지 희생했는데, 아르헴티나, 중국을 다니면서 목회자 세미나를 다니고 4년 동안 고생한 것 주님은 아십니까? 하면서 속으로 억울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런 마음을 주셨다. ‘너의 가족은 너의 아내도 너희 성도들도 희생하고 다 희생했는데, 미국에 있는 교회도 다 희생했는데, 선교비도 보내주고 기도로 준비해 주었는데, 너는 희생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는 것이다. 그때 제가 깨달은 것이 제가 희생한 것이 없었다. 제가 다니면서 강의만 하고 그랬다. 선교사라고 하지만 너무 부끄러웠다. ‘다 희생했는데 나만 희생이 적었구나!’ 했다. 의자들, 커튼, 에어컨, 등등 모든 것이 성도들의 물질로 된 것이다. 방석도 선교선물로 아내가 다 만든 것이었다. 모든 것이 그러는데, 너는 희생한 것이 무엇이냐고 하셨다. 그러면서 주님께서 제게 물어보시는 것이 “너는 아르헨티나 있는 동안 얼마나 나에게 나아왔느냐?” 하셨다. 기도를 많이 했다. 새벽마다 기도했지만 그것은 사역을 위한 기도였다. 일을 위한 기도였다. 또한 현지인 성도들에게 본을 보여주기 위해서 함께 기도했다. 주님께서 물어보신 것은 “네가 내게 얼마나 나아왔느냐?” 의 말씀인 것이다. 시간이 생명인데, 제가 주님께 드리는 것이 없었다. 얼마나 회개했는지 모른다. 주님 다시 제가 돌아오게 해주세요. 아이가 아파서 돌아올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제는 형편도 안 되지만 주님께 다시 돌아오고 싶다고 기도했다. 다시 시작해 달라고 얼마나 통곡하고 울었는지 모른다. 그때 성령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 성도들이 찾아오고 저녁에는 성경공부를 했는데 제가 1년 동안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한 것보다 그 일주일이 시간이 성도들이 더 풍성한 양식을 공급 받을 수가 있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말씀을 주신 것이다. 6개월 동안 스페인어를 안 했는데도 스페인어가 정확하게 나왔다. 생각하지 않는 말씀들이 제 입을 통해서 그런 예화들까지 나왔다. 저의 메시지가 아니었다. 전에는 그 성경공부와 설교들을 깊이 있게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깊이 있게 할 수 있는 그런 말씀들을 주님께서 주셨다. 성령께서 오시니까, 성령께서 임하시니까, 성령의 권능을 주시니, 제가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가 있게 하셨다.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는 일은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다. 이슬람의 영을, 저 견고한 힌두교, 불교, 무신론의 영을 어떻게 우리 힘으로 파괴할 수 있고, 예수님의 천국복음을 전할 수 있는가? 우리는 할 수가 없다. 성령의 보내심을 받는 길 밖에 없다.


그래서 이를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된다. 우리 청년들이 빈들로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아무도 없는 것으로 한 적한 곳으로 가야 된다. 주님만 계신 곳으로 가야 한다. 산으로 올라가야 한다. 그래서 100% 성려의 지배를 받고 성령이 임하셔서 모든 민족을 제자 삼는 일을 위해서 21세기 목자들이 되기를 특별히 우리 청년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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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 목사님 마무리 말씀.
사랑 PRS란-Public Reading of Scription. 그래서 사랑의 교회 공동체 성경읽기이다. 우리가 기준이 없는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임을 확신하여 우리 교회는 암송과 말씀을 읽고, 가르치고, 선포해야 한다.

*요한계시록 1:3,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이 예언의 말씀을 보면 오늘 시내 산에서 우리가 기도의 지팡이를 들고 올라온 것으로 생각하고 출애굽기 19장을 읽어보자 듣고 읽자. 19:20절까지 듣고 합독한다. -공동체 성경읽기-

♣요약
우리 사랑의 교회의 청년과 청소년들 그리고 우리 어린이들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가서 올려드리고 자녀들이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청년들과 청소년들에게 성령의 권능을 주셔서 기도하는 자가 되고 주님의 음성을 받아서 성령 충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모세처럼 우리 믿음의 4대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사모하며, 매주 부흥헌신 토비새로 달려 나와 시대의 사명자로 비상하며, 기도의 지팡이를 높이 들고 믿음을 보고하고 우리 한국교회와 우리 교회가 성탄의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메시야 탄생 소식을 처음 들은 사람은 양치는 목자들이었다. 목자라는 직업은 당시 가장 천한 직업에 속하였는데, 본문을 통해 본서는 복음이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사람들에게 맨 처음으로 전해졌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하나님의 역사는 강하고 능력 있는 자보다 약하고 부족한 자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때로 외양을 추구하는 자에게 있어 그리스도는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이는 양인 우리들을 영적으로 돌보시는 목자로서의 예수님의 탄생과도 관련이 있다. 본문은 목자들이 천사들의 이야기와 체험한 바를 전하는 내용이다.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들은 목자들은 즉시 베들레헴으로 가서 아기를 찾아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이들이 구유에 누인 아기가 메시야인지 여부를 율법적으로 따지거나 의논하지 않고 소박한 믿음으로 달려가 확인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점에서, 믿음은 학식이나 이론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즉시 실행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 교회가 드리는 구세군 후원금이 어려운 이웃들의 어려움에 전달되기를 바란다.



















*구세군 합주단 초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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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12월 14일)

제목: "예배는 새 생명의 특권입니다"
말씀: 에베소서 2:4-6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찬양인도: 쉐키나

설교자: 조성환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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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2:4-6,
4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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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예배 아카데미이다.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 한 번 주어진 인생을 사는데 어떤 사람들은 항상 부족한 가운데 거하는 데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다윗의 고백대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고백하며 환경과 상황에 상관없이 부어지는 하나님의 능력과 공급을 선포하고 취하고 그리고 누리며 살아가는 인생이 있다. 감옥에서도 감옥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의 권면은 바울의 삶과 똑 같은 것이다. 환경과 상황에 상관없이 흘러넘치는 삶의 비결은 무엇인가? 오직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이루시고 완성하신 그 안에서만 자신의 참된 가치를 찾고 삶의 이유와 목적을 찾는자들에게는 이 예배는 더이상 종교적인 의식이 아니라, 특권이요, 실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의 고백은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나의 힘이라고 고백한다. 무화과 나무의 열매가 없고, 논밭에 식물이 없고, 외양간에 송아지가 없는데도  '난 여호와로 즐거워하리라.' 바로 예배자들의 고백인 것이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의 그 찬양이  오늘 저녁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그래서 그런 비밀을 아는 자들이 수요예배 대면 예배에 나오신 줄 믿는다. 6절에 보면,

*에베소서 2:6,
6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거듭나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안에서 하늘에 이미 앉히셨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 모두가 이 세상에 거하는 동안 우리의 영혼은 이 육체라고 하는 집 안에 잠시 살아간다. 살아가면서 온갖 시험과 유혹 가운데서도 언제든지 예배하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 임재 앞에 나갈 수 있는 놀라운 그 특권을 부여 받았는데 이 특권은 오직 새 생명을 가진 사람, 거듭난 사람, 바로 예배자에게만 허락된 특권인 것이다. 비록 우리의 삶이 연약하고 허물이 여전히 있지만 예수님께서 이루신 완전한 구원 안으로 계속적으로 들어가는 삶, 바로 그것이 예배의 삶이요, 새 생명의 특권인 것이다. 이 비밀을 깨달은 사람이 그 입술에 이런 고백을 한다. 

♪빛나고 높은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주 예수 얼굴 영광이 해 같이 빛나네.해 같이 빛나네!~~♩

-이 시인의 삶은 인생의 폭풍이 와도 여전히 빛나고 높은 보좌에 앉아 계신 그 예수님,그분의 일점일획의 변화가 없으신 한결 같으신 그분, 어떤 때는 열을 받아서 실수를 했을 때도 여전히 빛나고 높은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그 주님을 또 다시 붙드는 바로 그런 삶이 바로 예배자의 삶이다. 그런 삶이기에 계속해서 그의 입술에서, 

♩~지극히 놓은 위엄과 한 없는 자비를 뭇 천사 소리 합하여 늘 찬송드리네.늘 찬송드리네...배할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모든 영광은 .푸레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우리의 육체는 나이가 들면서 시들지만 우리의 속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진다고 고린도전서 4장 16절에 이렇게 고백한다. 

*고린도전서 4장 16-18절
16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우리는 오늘 저녁에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십자가를 보이신 크신 역사, 완전한 구원 안에 거하고 있음을 감사하고 찬양하고 예배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같은 영혼이 채워질 줄 믿는다. ㅁ바로 그것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인줄 믿는다. 

♣요약
우리가 예배의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새 생명을 허락하셨으니 이 세상 사는 동안 우리의 참된 가치가 오직 예수님 안에 있음과 우리의 삶을 예배자로 부르셔서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보좌에 좌정하고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선포하며 붙들기를 간구해야 한다. 또한 부르신 그곳에서 예배자로 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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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2년 12월 11일)
제목: "왜 다윗인가?"
말씀: 사무엘상 17:45~47
대표기도: 최성현 부목사님(1부)
찬양인도: 쉐키나(이원준 부목사님), 영광찬양대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1부)
 
설교자: 김정우 목사님(한국신학정보연구원장, 전 총신대학원 교수님)-초빙
ㅡㅡㅡㅡㅡ
 

*사무엘상 17:45~47,
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46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ㅡㅡㅡㅡㅡ



▶김정우 목사님(한국신학정보연구원장,전 총신대학원 교수님)-초빙

 
-할렐루야!!오늘은 대림절 셋째 주일이다. 대림절은 ‘어드벤트’라는 단어에서 왔는데, 어드벤트(Advent)란 ‘오신, 출현’ 이란 뜻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다. 사람의 옷을 입고 아기로 오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바라보고 사모하고 준비하는 영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절기이다. 우리는 지난 만 3년 동안 코로나 팬데믹으로 참으로 대 환난을 겪은 것 같았는데 그래도 오늘 예배 가운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위로 주시고, 평화 주시고, 기쁨 주시고, 사랑주시길 간절히 사모한다. 옛날 옛적에 동방 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인도하는 그 별이 이번 성탄 기간 가운데 우리의 마음속에 다시 뜨고, 베들레헴의 목자들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 가운데 평화로다.” 하는 그 찬양 소리가 우리에게 다시 들리는 예배가 되기를 축원 드린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성경에서 제일 유명한 스토리이다.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에 보면, 주일학교 선생님께서 톰에게 “톰, 예수님의 첫 두 제자의 이름이 무엇이지요?”라고 물었는데 톰은 그 때에 성경구절을 2천개를 외운다고 알려졌기 때문에 이 질문에 대답을 쉽게 할 줄 알았는데 톰이 목소리를 높이면서 “다윗과 골리앗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다윗과 골리앗은 성경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성경에서 다윗의 모습은 여러 가지로 등장하고 있다. 다윗은 목동이고, 효자이고, 시인이고, 수금을 잘 타는 자이고, 음악 치료사이고, 용사이고 왕자의 절친이고, 공주와 애인이고, 무엇보다도 남북으로 갈라졌던 이스라엘을 통합하고, 동일한, 경건한 성군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다윗은 사실 백 가지 얼굴을 가지고 사람이고, 성경에서 가장 입체적인 인물 가운데서 한 사람이다. 그래서 정말 다윗은 어떤 사람이고 누구인가를 알기 쉽지가 않은데, 그럼 다윗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어떤 사람일까? 다윗은 한 마디로 말한다면, 성경은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다.’, ‘하나님과 뜻이 같은 사람이다.’라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사무엘이 그렇게 증거하고 있고 사도 바울도 다윗이 하나님 마음과 합하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친히 “네가 바로 그다. 나는 중심을 보는데, 이 아들이 바로 그다.” 라고 하나님께서도 친히 증거 해주셨다. 원래 사람의 마음은 복잡하고 깊어서 잘 볼 수가 없는데, 중심을 보시는 주님께서 ‘다윗이 네 마음에 맞는 사람이다. 나는 다윗과 함께 갈 수 있다. 다윗과 나는 너무 잘 통한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점에서 그렇게 말씀을 하셨는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은? 정말 어떤 사람인가? 우리는 다윗이 역사의 무대에 처음 등장하는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바로 이 점을 확인하고자 한다. 큰 스토리인데 여기서 다윗의 네 가지 모습을 볼 수 있다.
 
I. 다윗에게는 거룩한 동기(motivation)가 있었다.
 
*사무엘상 17:23,
23 그들과 함께 말할 때에 마침 블레셋 사람의 싸움 돋우는 가드 사람 골리앗이라 하는 자가 그 전열에서 나와서 전과 같은 말을 하매 다윗이 들으니라.
-다윗이 이새의 심부름을 전하기 위해서 베들레헴에서 엘라 골짜기를 따라서 내려왔을 때, 그때에 골리앗이 하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전쟁터에서 참 모습이다. 여기에서 들었다는 말은 그냥 흘러들었다는 말이 아니고, 제가 아내 말을 들을 때, 그냥 흘러 들은 것이 아니고, 고도로 집주해서 듣고 몰입하여 들었다는 말이다. 다른 군인들은 이미 타성에 빠져가지고 골리앗의 말을 그냥 흘러갔는데 다윗은 유심히 들었다. 다윗은 이게 무슨 말인가 하고 생각하면서 들었다. 다윗이 무슨 말을 들었는가? 골리앗의 말을 들었다. 골리앗이 많은 말들을 하고 있었고 지속적으로 말을 했는데, 골리앗의 말은 바로 이스라엘을 모욕(侮辱)하는 말이었다. 10절에 나타나고 있다.
 
*사무엘상 17:9-10,
9 그가 나와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겨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
10 그 블레셋 사람이 또 이르되 내가 오늘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하였으니 사람을 보내어 나와 더불어 싸우게 하라 한지라.
-골리앗이 가장 먼저 한 것은 고도의 심리전이었다. 이스라엘을 모욕했다. 모욕을 듣는 것은 참 어렵다. 모욕이라는 것은 사람을 놀리는 것이고, 골리는 것이고, 내 약점을 후벼 파는 것이고, 결국은 내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고, 모욕은 한 대 쥐어 막는 것보다 훨씬 감당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모욕(侮辱)을 들으면 내 인격이 파괴(破壞)되고, 지속적으로 모욕을 들으면 학교도 가기 싫어지고, 일도 하기 싫어지고, 무기력해지고, 그냥 죽고 싶고, 너무나 깊은 상처를 받게 되고, 그리고 이 모욕의 상처는 평생 가는 것이고, 아물지가 않는다. 골리앗이 계속해서 모욕을 하는데, 사울도 들었다. 사울은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오늘 25절에 보니까,
 
*사무엘상 17:25,
25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너희가 이 올라 온 사람을 보았느냐 참으로 이스라엘을 모욕하러 왔도다 그를 죽이는 사람은 왕이 많은 재물로 부하게 하고 그의 딸을 그에게 주고 그 아버지의 집을 이스라엘 중에서 세금을 면제하게 하시리라.
-그들은 계속해서 모욕을 들었다. 모욕을 느끼고 있지만 얼어붙어 있고 무섭다고만 말을 하고 있다. 마치 너무나 두렵고 무서워서 모래 속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타조처럼 이스라엘 군대들이 무력해졌다. 우리말로 말하면 다 봉이 되었다. 그래서 26절에 보면,
 
*사무엘상 17:26,
26 다윗이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거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26절의 말씀은 성경에 기록된 다윗의 첫 번째 말이다. 다윗의 첫 번째 말은 “이 오랑캐 같은 자식이 어떻게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느냐?” 라고 말한다. 이스라엘 군대가 계속해서 모욕을 들으면서도 이놈만 잡으면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누릴 수 있는데, 거기에만 관심을 갖고 있는데, 다윗의 관점은 어떻게 살아있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느냐에 있었다. ‘살아있는 하나님이 군대’라는 이 표현도 다윗이 처음 하는 말이다. 다윗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이 살아계셨다. 사울과 그의 군대와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이론적으로 살아계시고, 교리적으로 살아계셨는데, 다윗에게는 생생하게 살아계신다. 그의 몸속에, 뼈 속에, 삶속에, 인생 속에 체득되었고 살아계신 하나님은 그의 산 경험이었다. 어떻게? 그래서 다윗의 말이 너무나 진지하고 권위가 있는 것 같고 힘이 있어서 드디어 다윗의 말을 들었던 사람들이 다윗을 사울 왕에게로 데려 갔더니, 다윗이 사울 와 앞에 가서도 똑 같은 말을 하고 있다. 36절에 보니까,
 
*사무엘상 17:36,
36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다윗에게는 날마다 그냥 유대 광야에서 양을 치고 있었지만 그 양을 키우는 현장 속에서 무게를 연습하지도 않았고, 바디빌딩도 안 했지만 살아있는 그 현장 속에서 하나님이 체험되었다. 다윗의 동기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는 모욕을 받을 수가 없다. 다윗은 양을 치면서도 코람데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오늘 45절에 보니까,
 
*사무엘상 17:45,
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다윗의 마지막 말이 되겠다. 결전을 앞두고 말하고 있다. 다윗 믿음의 핵심적 고백이 되겠다. 모욕(侮辱)과 수치(羞恥)를 당하고 있는 바로 그 이름으로 나아간다고 말하고 있다. 왜 다윗인가? 다윗은 주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하고 있다. 다윗이 어떻게 골리앗에게 뛰어나갈 수 있었겠는가? 목숨을 던지지 않고는 어떻게 골리앗하고 싸울 수 있겠는가? 골리앗 앞에 나아간 이유는 그에게 동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람이 능력이 많고 출중해도 동기가 없으면, 자신을 발휘할 수가 없다.
 

*아이작 뉴튼이 한 말이다.
-우리가 가져올 변화는 우리 속에 있는 동기의 힘에 정비례한다.-
 
나는 왜 공부를 못 했을까? 동기가 없어서, 동기만 있었으면, 한국 사람만큼 아이큐가 좋은 사람이 없는데 왜? 공부를 못했는가? 동기가 있다면 우리는 산도 넘고, 바다도 건널 수 있을 것이다.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동기가 무엇인가? 깊은 내 속에서 늘 끓어오르는 동기가 무엇인가? 다윗은 “주님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 주여,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라고 한다. 주님은 살아있는 분이었기 때문에 주님의 이름은 온 세상에서 너무나 영광스런 이름을 가지고 계셔서, 그 이름이 모욕을 받아서는 안 되겠다고 여긴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빌려 표현을 한다면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우리 주기도문의 첫 번째 문장이다. 주님의 이름은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하고 영광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전 생애를 관통하는 우리의 강력한 동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 땅에서 편안하게 살다가 가는 게 아니라, 주님의 이름이 어떻게 이 연약하고 작은 나를 통하여 거룩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가? 영광을 받을 수 있는가? “내 직장에서, 내 직업에서, 내 은사 속에서, 내게 주신 생명의 날 동안,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이것이 다윗의 동기였다.
 
II. 다윗에게는 미션(mission)이 있었다.
 
*사무엘상 17:29,
29 큰형 엘리압이 다윗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양들을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다윗 앞에 강력한 강적이 나타났다. 바로 그이 형님인 엘리압이었다. 엘리압은 그 집에서 제일 큰 자였다. 다윗은 가장 작은 자였다. 엘리압은 다윗을 보고 갑자기 화를 내었다. 그리고 꾸짖었다. “야 꼬맹아, 들에 있는 양들은 누구에게 맡기고 여기에 와서 전쟁을 구경하려고 하느냐?” 라고 한다. 마치 양떼 같은 이 꼬맹이 다윗을 조롱(嘲弄)하고 있다. 형님이... “너의 완악함을 안다. 너는 늘 무모한 자식이야. 건방진 자식이야, 뻔뻔스러워, 왜 이렇게 자꾸만 주제 넘는 짓을 하려고 해, 그리고 늘 충동을 잘 당해, 전쟁은 어른들이 하는 것이니, 빨리 집에 가서 아버지 양이나 키워. 어디 양 냄새나는 것이 이 거룩한 전쟁터에 나타났니? 너는 막내지, 키도 작지, 군사학이나 공부한 적도 없지., 학력도 없지, 너는 주님 일을 할 수 있는 준비가 안 된 놈이야.”라고 형님이 이야기 한다. 형님이 골리앗보다 더 힘들다. 이런 형님과는 싸울 수가 없어서, 다윗이 농담을 한다. 아주 짧게... “형님, 어찌 이유가 없겠습니까? 이유라는 것이 일이다. 말도 못하겠습니까?” 어찌 이유가 없겠습니까? 라고 이유가 없겠냐고 한다. 이것이 이 중요한 일이 아니겠냐고 한다. 미션으로 번역으로 하면, “이것이 미션이 아닙니까?” 다윗은 늘 미션을 가지고 살았다.
 
아버지가 맡긴 양떼들을 너무나 잘 돌보고 아버지의 말씀과 아버지의 심부름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모든 것들을 철저하게 하는 그리고 아버지가 증표까지 받아오라는 것까지 확실하게 한다. 요즘 이런 친구를 찾아볼 수 있을까? 이런 책임감이 다윗에게 있었다. 다윗은 자발적이고, 즉각적이고, 부지런했고, 책임감이 투철하고, 다윗의 마음속에는 ‘내가 무슨 일을 하던지 온전하게 해야지.’ 마치 온전 론으로 살고 있는 다윗을 본다. 다윗에게는 목장과 전장이 구별되지 않았다. 목장이 전쟁터이고 목장이 전쟁터였다. 장소는 달라도 늘 미션은 동일했다. 사랑의 교회 식으로 말하면 다윗은 ‘일터선교사’이다. 일터도, 미션도 분리가 되지 않는다. 엘리압은 일터는 일터이고, 미션은 미션이지, 라고 한다. 다윗은 그렇지 않다. 늘 미션이 있었다.
 
III. 다윗은 목자의 심정(Shepherd's heart)을 갖고 있었다.

*사무엘상 17:33.
33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울 수 없으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사무엘상 17:36,
36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이제는 목자의 마음이 사울 왕 앞에서 진술되고 있었다. 다윗의 말에는 신중함과 예의와 확신과 위엄과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에 다윗이 드디어 사울 왕 앞으로 인도함을 받게 되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려고 하려면, 사울왕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사울 왕이 다윗을 내어 보내려고 하면, 사울 왕이 다윗에게 설복(設伏)이 되어야 한다. 왕의 마음은 마치 깊은 보의 물과 같다고 해서 왕의 마음을 우리가 헤아릴 수가 없는데, 그럼 다윗이 어떻게 말하고 무엇을 말해야 될까? 사울은 다윗을 보자마자, “너는 할 수 없어.” 엘리압과 똑 같은 말을 한다. “너는 어리고 골리앗은 어린 시절부터 용사야, 전쟁의 용사야, 골리앗은 철저하게 훈련되었어.” 맞는 말이다. 사실이다.
 
사울의 프레임과 엘리압의 프레임과 같다. 둘 다 사실을 잘 보는데, 믿음의 프레임이 없다. 그러자 다윗이 무어라고 대답을 하는가? “우리의 밥입니다.” 성경은 인용하지 않았다. 그때 다윗은 사실에 대해서 사실로 대답을 했다.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자 않고 분석을 제시하지 않고 자신이 아버지 양을 지키고 있을 때, 목양을 하고 있을 때, 현장 속에 있을 때를 말하고 있는데, 그 때 나는 사자와 짐승과 곰과 붙은 적이 있다고 한다. 처음부터 사자하고 싸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윗은 이 양떼를 지키기 위해서 온갖 야수들과 싸웠는데 대표적으로 싸운 것이 사자이고, 그리고 곰이다. 야수들과 싸울 때마다 다르게 싸워야 했을 것이다. 이 야수들, 강한 짐승들, 맹렬한 짐승들, 자기 새끼를 위해서 먹을 것을 꼭 챙겨야 되는 굶주린 이 야수들, 야수들도 목숨을 걸고 다윗에게 덤비고, 인정사정없이 먹으려고 덤볐을 것이다. 한두 번도 아니고, 다윗은 여러 목자들과 싸우는 것도 아니다. 홀로 싸웠다. 짐승을 잡을 때 수염(鬚髥)도 잡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무서운 짐승들과 싸웠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새끼 한 마리를 위해서 싸웠다고 한다. 한 마리... 다윗은 자기 양도 아니고, 아버지의 양이다. 아버지 것이다. 아버지의 먕을 위해서 목숨 걸고 싸웠다. 그 때 아버지 양의 한 마리이지만 내가 건져 냈다고 한다. 그래서 일어나서 으르렁 거릴 때, 사투를 벌일 때, 내가 따라가서 건져내고 잡아서 쳐 죽였다고 한다. 다윗이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적용
골리앗도 이 짐승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간증에 있어서 사실은 생생한 체험보다 더 중요하고 더 놀라운 것은 37절이다.
 
*사무엘상 17:37,
37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다윗이 싸운 것 같지만 다윗도 죽을 고비를 수없이 당했는데, 하나님이 나를 건져내었다. 정말 다윗도 죽을힘을 다해 수없이 다했는데 하나님이 나를 건져냈다고 말하고 있다. 내가 하나님의 양이다. 주님의 나의 목자이시다. 내가 양 한 마리를 위해 애썼는데 이 양 한 마리조차 내가 빼앗기지 않으려고 그렇게 목숨 걸고 싸웠는데 사실은 나도 수없이 나도 죽을 뻔했다. 그런데 하나님이 건져내셨다. 내가을 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건지신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양이다. 주님이 나의 목자이시다. 내가 양을 건신 것은 하나님이 나를 건지신 것,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내 실력과, 내 용기와, 내 기백과, 내 지식과, 내 기백과 내 기술로서 이 일을 이룬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목자 되신 주님께서 나를 건져내셨다. 시편 23편 4절에 보면,
 
*시편 23:4,
4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목자의 마음을 가지고 다윗이 살았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다윗하고 무언가 다윗이 하는 것을 보면 무언가 뭉클한, 또 다윗 마음속에서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진짜로 함께 계시구나. 늘 함께 계시구나, 이놈과 싸울 때도, 저 원수와도 싸울 때도, 계시구나.” 이게 쌓인 것이다. 믿음은 이런 체험들이 주님을 위해서 싸울 때, 쌓여가는 것이다.
 
IV. 다윗은 비전(vision)이 있었다.

*사무엘상 17:45,
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골리앗과 싸우는데 골리앗이 다윗을 저주하면서 나왔다. 없인 여겼다. 이 신들을 저주하며 없이 여긴다. 골리앗은 완벽한 방어체계를 갖고 있었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머리에는 놋 투구와 가슴에는 어린 갑을 다리에는 놋 경갑을, 그리고 그 앞에는 큰 골리앗은 거구였다. 골리앗의 전신을 커버하는 모습으로 나왔다. 마치 아이언도구로 자신을 완전히 방어한 모습이다. 그리고 칼과 창과 단창을 공격무기로 가지고 나아왔다. 이런 골리앗에게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내가 나아간다. 고 한다. 이 표현도 성경에서는 처음 나오고 있다. ‘만군의 여호와’는 사무엘에서 처음 나오지만 ‘내가 만군의 여호와 이름’이라는 이 말은 골리앗에게 처음 만군의 하나님이었다. 천군을 의미한다. 천상에 있는 군대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열두 군단이나 더 되는 내가 군대를 못 부를 줄 알았느냐? 로마의 군단은 5860명 되고 모든 것들이 다 있는데, 만군의 여호와 이름으로 내가 나아간다고 말하고 있다. 마치 우리가 예수 이름으로 늘 사는 것처럼,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간다고 말하고 있다. 다윗에게 늘 하나님은 실존의 하나님이시고, 그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이시다. 교회는 우습게 보여도 주님의 지상 군대이다. 이것을 사울과 그의 군대는 몰랐다. 다윗은 알고 있었다. 다윗은 이 싸움을 통해서 자신의 비전을 확실히 말하고 있다.
 
*사무엘상 17:46,
46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사울의 전투에서 이루어지는 엘라 골짜기에서 이루어지는 조그만 싸움이었지만, 다윗은 이 싸움이 온 세상이 듣게 될,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알게 하겠다는 것이다. 이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장차 중요한 영적 교훈을,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구나. 다윗은 글로벌 시각을 가지고 있다. 주님의 명성이 온 세상에 전해져야 한다. 우리에게 적용을 한다면, 열국들이 우리를 볼 때, 와! 대한민국은 복음으로 복 받은 나라구나. 한국에는 아직도 교회가 살아있구나. 예내가 살아있구나. 한국교회는 아직도 미션이 있구나, 비전이 있구나. 온 세상이 알게 되리라고 한다. 그리고 여호와의 구원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이 무리는 바로 우리 공동체, 싸우고 있는 우리 공동체이다. 우리 로칼 처치, 우리 교회의 성도들이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했다. 주님의 구원하심은 칼과 창에 있지 않다. 우리의 능력 안에 있지 않다. 우리가 주님의 싸움을 위해서는 자신을 부정하고 내 칼도 내 창도, 우리에게 힘은 언제 생기는가? 나를 부인할 때, 주님을 긍정할 때, 우리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긍정으로 전쟁의 승패는 주님께 속했다. 이게 바로 요나단의 고백이었다. 요나단도 블레셋을 쳐서 이길 때, 여호와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려있지 않다고 말한다. 믿음이 없는 군대는 사울의 군대처럼 수단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장애물이 된다. 늘 생생하게 살아 있는 믿음이 있으면, 다윗에게는 네 가지 동기가 있었고, 미션이 있었고, 목자의 마음이 있었고, 그리고 비전이 있었다. 그렇다면, 다윗은 골리앗을 어떻게 이겼는가? 하늘에서 번개가 내려서 골리앗이 죽었는가? 49절을 보면,
 
*사무엘상 17:49,
49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그런데 어떻게 돌이 이마에 박혔을까? 골리앗은 완전한 놋 투구를 눈만 보이는 놋투구를 쓰고 나왔는데 어떻게 돌이 이마에 박혔을까? 이마에는 뼈인데 어떻게 박혔을까? 골리앗이 뒤로 쓰러지지 않고 앞으로 엎어졌다고고 한다. 이마와 정강이 바지와 발음이 같다. 다윗은 그 당시 물맷돌로 골리앗의 정강이 바지 사이로 쏘았을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엎어지자 골리앗의 칼을 뽑아서 죽였다. 이렇게 하는 것이 더 재미있겠다. ㅋㅋㅋ 그렇다면 우리의 골리앗은 누구인가? 골리앗은 유아독존이고 신성모독이고 바벨탑을 쌓은 자이고 인간의 교만과 오만한 자이고, 골리앗은 완전무장을 한 군국주위이고 전체주의이다. 우리 모두를 가난하게 하고 우리의 자유를 빼앗으려고 하고 우리를 종으로 삼으려고 하는 이런 모습을 볼 수 있겠다. 그렇지만 오늘 우리가 적용을 할 때는 우리에게도 골리앗의 모습이 있다. 오만하고 교만하고 나하고 다르고 나보다 약한 자들을 골려먹고, 모욕하는 내가 오만한 인간이 아닌가? 깨어지지 않는 인간이 아닌가를 생각해야 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가운데 카르바조가 다윗과 골리앗이라는 그림을 그렸다. 다윗의 손에 들린 골리앗의 머리는 바로 카라바조 자신의 그림이었다. 무기를 믿고 살고, 내 실력으로 자만하고 내 광기를 따라 살고, 하나님 없이도 내가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면 내 스스로 구원할 수 있다고 하면, 우리가 골리앗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다윗처럼 되기를, 하나님의 마음을 합한 다윗처럼 되기를 사모한다. 

다윗과 골리앗. [카라바조], 바로 내 얼굴

왜 다윗인가? 다윗의 동기와 미션과 목자의 마음과 비전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분명한 것 같다.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다. 다윗은 예수님 모형이고, 예표이고, 그림자이고, 예수님은 다윗의 아들로서 다윗의 주가 되심으로서 진정한 다윗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둘 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났고, 둘 다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았고, 그래서 우리도 늘 성령의 기름부음 받기를 사모해야 할 것이다. 둘 다 거룩한 동기가 있었다. 우리 주님의 이름이 내 실수 때문에, 나의 부족함 때문에 모욕당해서는 안 된다. 주님의 이름은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한다. 예수님은 기도도,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늘 우리는 세속적인 동기, 자기중심적 동기를 이제는 좀 벗어버리고, 더 영적이고, 더 공적이고, 더 하나님 중심적인 동기가 우리 속에서 불탔으면 좋겠다. 이 동기가 날마다 새롭게 생산적이고 열매 맺으면서 살 수 있기를 바란다. 둘 다 목자의 마음을 가졌다. 다윗은 목자로서 양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 싸웠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참 목자였다. 종말론적으로 장차 다윗이 오리라고 할 때, 바로 예수님을 가리키는 이 표현들이, 다윗이 모델이 된 것이다. 예수님도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양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 내가 목숨을 바칠만한 코즈가 우리 마음 속에 있기를 원한다. 우리도 목자의 마음으로 우리 주위에 있는 착한 양떼들, 식구들, 나보다 연약한 학우들, 사회의 연약한 자들, 교회의 성도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창조만물들, 목자의 마음으로 돌볼 수 있기를 축원한다. 둘 다 거룩한 용사로 싸웠다. 둘 다 적장의 머리를 베었다. 다윗은 골리앗의 칼로 골리앗을 죽였다. 예수님은 사단의 무기인 죽음으로서 죄와 사망 권세를 폐하셨다. 우리의 날마다 우리의 은사를 연습해서 우리 생활전선에서 책임을 온전히 다하고 우리의 기술과 실력과 지식과 덕을 날마다 향상해서 오늘도 주님 편에 잘 살았구나! 하는 그래서 기뻐하는 거룩한 용사로서 기쁨이 충만하기를 바란다. 둘다 미션과 비전이 있었다. 다윗에게 온 땅을 향한 비전이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은 모든 민족으로 제자 삼는 그런 비전을 가지셨다. 날마다 주님 닮아가자. 그리고 주님 가르침을 잘 받아야 한다. 우리 믿음의 실력을 쌓고 선행의 용량을 키우고, 더 선명한 높은 비전으로 주님과 교회를 세울 수 있기를 축원한다.
 
요약
우리도 다윗처럼 주님의 친구가 되고 용사가 되어서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이 생생하시고 말씀하시고 운행하셔서 우리의 삶에 충만하게 되기를 간구하며 우리의 마음을 다 씻어서 정화되어서 아기 예수님을 맞이하는 마음에 기쁨이 충만해야 한다. 다윗의 거룩한 동기(motivation)와 다윗의 미션(mission)과 다윗의 목자의 심정(Shepherd's heart)과 그리고 다윗의 비전(vision)을 닮아서 우리가 담대히 주님의 삶을 닮아가야 한다.
-만군의 여호와란 이스라엘이라는 한 국가와 민족에게만 국한된 하나의 지역 신이 아니라 온 우주의 통치자시며 만군의 주재자이심을 강조하는 하나님을 뜻한다. 만군의 하나님은 권세와 능력이 무한하사 온 세계에 악한 자들을 징계하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대신하여 대적들과 전쟁하신다. 다윗은 전쟁의 목적을 살아서 역사를 운행해 가시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데 있다고 선언했다. 우리가 이 선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하고, 모든 일의 승패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에 좌우되며 전쟁을 통해서까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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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2년 12월 10일)
제목: "실망시킨 적 없으신 하나님"
말씀: 창세기 22:1~5
찬양인도: 사랑광주리 사역, 북사선, 이웃사랑선교
말씀읽기: 임준성 학생(소년부), 주은서(초등부)
대표기도: 강희근 장로님(사랑광주리 이사)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정우길 부목사님
(SaGA 복음통일아카데미 부학장)
ㅡㅡㅡㅡㅡ

*창세기 22:1~5,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4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북한 교회에 있는 이름의 깃발이다. 준비해 주심에 감사하다. 우리의 소망과 열망을 담은 표현이다. 오늘 어디서 많이 듣고 보신 것들을 보신 것 같다 ‘통인헌신은 진심으로 영혼 섬김은 전심으로’ 이야기이다. 설교 제목이 “실망시지 않은 적 없으신 하나님”, 이것도 어디서 많이 들어보지 않았는가? 찬양의 가사를 좀 땄다. 사실 우리가 찬양을 할 때, 그 멜로디도 좋아하고 여러 가지 의미를 담은 기도로 찬양을 하겠지만 가사가 이렇게 고백이 될 때, 찬양이 더 은혜로 다가온다. 아마 2000년 초반쯤 나오게 된 찬양이며 많이 불렀고 아마 이 찬양 부르면서 믿음의 고백을 담았을 때, 눈물 없이 부를 수 없는 그런 찬양 고백이 있었을 것이다. 저도 눈물을 흐르면서 부른 적이 있다. 혹시 지금 힘들고 어렵고 답답할 때, 이 찬양의 가사를 좀 상황 상 찬양은 하지 않고, 좀 가사를 띄어드리겠다. 기쁨으로 찬양 334장이다. 가사를 같이 읽어보자,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지나온 모든 세월을 돌아보아도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 안 미친 것 전혀 없네.”!~~♩

-혹시 하나님에 대해서 지금 실망하시고 아예 가사가 마음에 닿지 않는 분들은 오늘 아브라함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신하고 그런 고백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소망한다. 하나님은 한 번도 실망시킨 적 없으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아브라함의 여정을 전체를 보겠다.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친 순종의 대표적인 성경의 사례인데, 그래서 세부적인 해석은 하지 않겠다. 아브라함의 인생의 전체를 다루고 싶은데 아브라함이 창세기 12장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하란에서 출발할 때가 75세이다. 제가 성경에 확인된 나이만 설명을 드리겠다. 우리로 표현하면 아브라함은 신앙생활 처음 시작한 것이 75세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죽은 나이가 175세이다. 아브라함은 모태신앙이 아니다. 이삭은 모태신앙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175세를 살았지만 1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신앙생활을 한다. 아브라함이 75세에 부름 받고 100세에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이 이삭이다. 그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시점이 오늘 본문인데 아브라함이 100여년 걸친 신앙 속에서 오늘이 언제쯤 될까를 생각해보면 아마 막연하게 예전에 설교 들었을 때, 이때 이삭의 나이가 17세이다. 라고 기억할 것이다. 여러 가지 유추가 있는데 해석은 하지 않겠다. 보통은 객관적으로 볼 때 15-37세이다. 어머니 사라가 죽기 전에 그 사이라고 여겨진다. 저는 대략 잡아서 이삭이 15-35세 중간인 25세 정도로 추측을 하고 말씀을 진행하겠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인생을 보면 75세에 부름 받고 가나안 땅으로 이주한 모든 여정을 거쳐서 한 40-50년 지난 다음인 오늘 시점이다. 아주 중요한 포인트이다. 기억해 주시기를 바란다. 그리고 대략 한 50년 살다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된다. 아브라함이 처음 출발부터 오 신실하신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다고 그렇게 고백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저도 마찬가지이다. 여러분 대부분도 그런 경험을 했을 것이다.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고 또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하나님은 나를 한 번도 실망시킨 적 없다고 고백하면서 신앙을 시작하시는 분은 거의 없다. 저도 그랬다. 오늘 아브라함을 통해서 한 번 보자.
 
​※아브라함 부르신 나이 75세
생 마감 175세, 백 년 동안 신앙생활, (이삭 나이 평균 25세),
 
*창세기 22:1,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부르셨다고 말씀하신다. 시험 받을 만한 기간이 지났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50여년이 지났다. 이제 아브라함을 한 번 테스트 할 때가 됐다. 이 시험하다를 설명하지 않아도 아실 것이다. 이것은 유혹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결정적으로 점검해 본다고 생각하면 된다. 저는 한 단계 앞서서 설명을 드리고 싶다. 이 테스트는 기회를 준 것이다. 여러분과 제가 이미 이 기회가 주어져 있고 그 기회를 통과하고, 오늘 아침 이 기회가 주어졌다면, 이 기회를 놓치지 않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한다. 너의 믿음을 가지고 새로운 출발을 하라고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는 주님,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것은 설명하지 않겠다. 그런데 이 테스트가 무엇인지를 성경이 설명해 주고 있는데 12절을 보겠다.
 
*창세기 22:12,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 하나님의 평가가 저와 여러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긍정적인 평가가 되길 소망한다. 하나님께서 지난 50여 년 동안 그렇게 인도하셨다. 크게 두 가지로 정리를 하겠다. 하나는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땅의 약속 받고 갔다. 또 하나는 자손의 약속을 받고 간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고 하는 표현은 실망은 기대감에서 출발한다. 내 기대감이 채워지지 않으면 실망하게 되어 있다. 이 찬양의 고백처럼 설교의 제목처럼 실망시키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의 기대감을 실망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기대감을 주셨는가? 저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본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기대감은 약속이었다. 그리고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이 주시면서 인도하셨다.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음으로 받았고, 기대감을 가지고 출발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땅을 준다고 하셨는데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 기근이 생겨서 애굽으로 내려간 것, 설명하지 않겠다. 그리고 부자가 되어서 가나안으로 돌아온다. 처음에는 기대감으로 왔다가 다시 실망으로 온 것 같았는데 다시 기대감을 가지고 가나안에 돌아오게 된 아브라함, 아들도 마찬가지다. 후손을 약속하셨는데 처음에 기대감이 있었다. ‘그래 나에게 후손이 있을 것 같은데’, 하는 마음이었지만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기대감이 실망으로 바뀌면서 종이라도 아들로 삼아야 하겠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안 되니까 여종의 아들, 이스마엘이라도 후손으로 삼아야 하겠다고 하니 그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직접 아브라함과 사라의 몸에서 아들을 주시는 것이 이삭이다. 기대감을 가지고 출발했다가 실망을 했던 아브라함이지만, 이제는 그 기대감보다 더 큰 은혜를 통해서 돌려주시고 기대감을 주시고 실망시키지 아니한 체험을 한 아브라함, 그 실망시키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따라갈 수 있는 그 믿음의 고백이 저와 여러분에게 일어나길 소망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살았던 것처럼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는 우리가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I. 하나, 기대 이상으로 베풀어 주시는 은혜와 복을 누리게 한다.
 
​-하나님은 그렇게 인도하시고 앞으로도 그렇게 인도하실 줄로 믿는다. 아브라함의 50년의 신앙생활이 그 증명하고 있다. 저와 여러분들이 그 증명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인도하지 않으셨는가? 아브라함이 두 가지 약속을 받았던 것, 나에게는 어떤 약속으로 다가올 수 있는지 모르겠다. 예수 처음 믿기 시작할 때, 잘 될 줄 알았다. 형통하다고 약속 받았다. 그래서 예수 믿기 시작하고 교회 다니기 시작했는데, 형통한 분도 계시지만, 일이 잘 안 되시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그래서 실망하셨을 것이다. 그 실망을, 그 기대감을 채워주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우리를 인도하시는지 이제 고백할 수 있지 않은가? 세상에 부귀영화(富貴榮華)를 세상의 형통(亨通)함을, 예수 믿으면 그런 것이 나에게 자동으로 올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런 것보다 더 소중한 하늘의 소망과 하늘의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까 이제는 세상 것은 좀 부족해도 하나님 앞에 실망하지 아니하고 결코 나의 기대감 그 이상으로 넘치는 은혜와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 것, 주님을 높여드리기를 소망한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인도하셨다. 할렐루야!!~` 나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 내가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이 후회가 되는가?
 
처음에는 내가 제대로 가는 길인가를 혼돈하기도 했겠지만 하나님은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결코 실망시키지 아니하시고, 세월을 지내보니까, 신앙생활 하고 보니까 아!! 새로운 삶이 이런 것이구나,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혜아래서 더 감사하게 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찬양과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결코 실망시킨 적이 없으신데, 혹시 아직도 하나님 앞에 실망스럽고, 낙심되고, 원망 섞인 고백이 나온다면 조금만 더 기다려 보기를 바란다. 조금 더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해 가시는 그 과정 속에서 아브라함을 생각하면서, 아브라함이 50년 동안 하나님 앞에 훈련 받았던, 그 하나님이 열심히 아브라함을 이끌어 가시고 놀라운 은혜의 역사를 경험케 하셨던 그 하나님의 손에서 빚어갔던 아브라함처럼 그렇게 조금만 더 성장하면 이 찬양의 고백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 한 번도 저를 실망시킨 적 없으셨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안 주실 때도 있으셨다. 내가 원하는 대로, 기도 응답이 안 되는 적도 있었지만 조금 지나놓고 보니까 그게 유익이었다. 그 때는 실망스러운 것 같았는데, 조금 지나보니까, 내 기대가 훨씬 뛰어넘는 놀라운 기대감으로 함께 하셨던 하나님, 응답하셨던 하나님, 그 하나님을 결국에 가서는 찬양하게 되고 눈물로 실망시킨 적 없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 시간이, 그 날이 속히 임하게 될 줄 믿는다. 조금 더 인내하고 기다리면서 실망시킨 적 없으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고백하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런 발걸음이 되기를 축복한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또 있다. 두 번째이다. ​
 
II. 둘,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기적의 실체를 경험하게 한다.
-아브라함은 기적의 사람이었다. 3절을 보면,
 
*창세기 22:3,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바로 순종을 한다. 그 귀한 아들을 독자를 제물로 잡으려고 한다. 그런 결단을 하게 된 이유를 창세기에서 설명은 안 하지만 히브리서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히브리서 11:19a,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의 판단에는 이삭을 제물로 잡아 죽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분명히 이삭을 살릴 거야.’ 하는 믿음이 있었다. 우리로 표현하면 믿음이다. 이 믿음이 어디서 나왔을까? 우리는 아브라함과 비교하면서 나 같은 신앙, 기가죽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아브라함을 칭찬하는 핵심 표현인데, 왜 이런 결단을 할 수 있고, 이런 순종이 가능했을까? 저와 여러분들에게 동일한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서 기적을 체험케 하시는 이런 결단, 이런 순종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 저는 이것이 아브라함의 경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브라함이 우리가 생각하는 부활을 믿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해석이다. 이삭의 제물 사건, 순종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 보혈 십자가를 예표 한다는 해석이 충분하지만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계시로라도 받았다고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들의 신앙이다. 이미 십자가를 통해서 경험한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이고, 아브라함은 그 정도의 믿음이 아니라고 생각을 하는데,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아브라함은 적어도 이삭을 제물로 바쳐도 하나님의 기적으로 이 아들이 살아날 것을 확신했다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에게 이러한 믿음을 주시도록 인생 여정을 이끌어 가시는 주님을 찬양하고 그 믿음으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란다. 아브라함이 그런 경험을 통해 없던 데서 낳은 아들, 도저히 애굽에서 살아날 것 같지 않은 그런 상황 속에서 애굽에서 피신했다가 가나안으로 돌아왔던 그 여정, 애굽으로 가긴 갔지만 오죽하면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살아나기 위해서 거짓말까지 한 그 절망 속에서 오히려 부자가 되어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기적과,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해도 도저히 안 되었던 후손을 자기 몸으로 직접 낳을 수 있도록 기적을 베푸신 하나님을 경험한 아브라함은 이제 독자 이삭을 바칠만한 넉넉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나아갔다.
 
저와 여러분들의 인생이 아브라함과 비교할 수 없겠지만 짧은 인생일지라도 많은 경험은 아닐지라도, 작은 기적의 연속 속에서 저는 기적을 일상으로 표현하는 것을 참 좋아한다. 우리 담임 목사님도 가끔 그런 표현을 하신다. 어떤 분이 그러더라. 기적은 한 번 만 일어나는 것이 기적이다. 그런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기적은 자주 일어나는 것이 기적이다.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할렐루야!! 왜 기적을 잊어야 되는가? 하나님을 잊어버려서 그런 것 아니겠는가. 안 되는 것을 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시고 그 은혜와 복을 주시기 위해서 저와 여러분들을 테스트 하시고 기회를 주시는 그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기회를 붙잡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한다. 내 것을 포기하면 기적이 일어난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오늘 아브라함의 모습이다. 물질을 붙잡고 있었다면 물질을 포기해 보아라. 되돌려 주시는 물질의 하나님의 법과 은혜를 경험하게 될 줄로 저는 확신한다. 인생의 노후대책을 붙잡고 계셨다면 하나님의 노후대책의 기적을 한 번 맛보시도록 그것을 내려놓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여전히 자녀를 붙잡고 계시다면 그것을 내려놓음으로 말미암아 이 자리에 나와 있는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기적을 경험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되고 맛볼 줄로 믿는다. 우리의 모든 것들이 내가 만든 우상들이 내려놓는 그 순간 하나님의 기적으로 바뀌어져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아브라함처럼 독자 이삭을 바칠 수 있는 순종하는 아브라함처럼 저와 여러분들 그렇게 바꿀 줄로 믿는다. 붙잡고 있는 건 내려놓는 은혜가 임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사실 오늘이 중요한 결론이다. 한 가지 더 대 제목을 보겠다. 화면을 참조해주길 바란다.

 
III. 셋, 약속(기도) 응답의 때를 인내하며 기다리게 한다.

그렇다. 하나님의 응답의 때를 기다리는 게 믿음이다. 제가 말씀을 준비하면서 사실 지금까지는 서론인데 짧게 결론을 내도록 하겠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제가 아브라함 인생 100년을 잠깐 말씀드렸다. 오늘 사건을 중심에 50년쯤으로 본다면, 앞으로 아브라함은 50년을 더 산다. 창세기에 기록을 놓고 보면 12장에서 시작한 아브라함의 사건이 오늘 22장에서 정점을 찍고 그 다음에 이삭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잠깐 아브라함에게 언급한 두 구절 정도가 있고 나머지는 이삭의 사건으로 진행이 된다. 아니 전반부 50년은 크게 다양한 삶의 경험을 하고 기적을 경험한 아브라함이 가장 정점을 이루고 순종한 그 테스트를 통과한 아브라함에게 여러 가지 풍성한 은혜의 사건이 주어지지 않고, 그냥 침묵하다가 인생을 마감한다. 그가 기진하여 술을 다 하고 175세에 죽었다가 이후의 삶이다. 그러나 단 하나 이런 구절이 표현되어 있다. 창세기 24장 1절이다.
 
*창세기 24:1,
1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셨다. 근데 그 복이 범사에 복이다. 설명이 필요 없다. 아브라함의 인생을 이끌어 가신 하나님 마지막 기적을 스스로 경험하게 하신 그 하나님께서 이제 아브라함이 그 테스트를 통과한 이후의 삶은 그냥 한 구절이면 끝나는 것이다. 한 표현이면 된다.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이 하나님의 약속이 하나님의 말씀이 저와 여러분들의 신앙 고백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나의 인생 속에 진정한 하나님의 복이 범사에 임하였음을 간증하고 고백하고 그렇게 묵묵히 기다리며 사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소망한다. 보통 말씀을 묵상하면 이 정도 되면 아브라함이 이제 테스트를 통과하고 난 다음에 이삭이 막 자녀를 낳아야 된다. 가나안 땅에서 거부가 된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는데, 여전히 후손의 약속은 없다. 아브라함이 죽을 때 야곱이 몇 살이냐 하면 성경에 근거한 나이이다. 정확한 나이이다. 야곱이 15세 때 아브라함이 죽는다. 그러면 독자 이삭을 바쳐 여호와이레 하나님이 준비하신 예비하신 은혜와 복을 경험했던 수풀에 걸려있는 그 양을 통해서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경험했던 아브라함이 이제 이 약속, 이 테스트를 통과한 다음에 이삭이 계속 자녀를 낳아야 되지 않는가. 우리 상식으로는 야곱이 열두 아들 낳았는데 사실은 이삭이 열 두 아들을 지금부터 낳아야 정상인데 50년 동안 이삭은 겨우 결혼해서 쌍둥이 야곱을 낳고, 그것도 서로 싸우면서 태어난 이상한 아들 그 야곱이 15살 될 때 세상을 마감한다. 그리고 성경은 침묵하고 있다. 단 한 표현 그에게 아브라함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다가 오늘 사건 이후에 50년의 핵심이다. 여러분 이 말씀을 각자에게 적용하고 기다리게 하시고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내가 원하는 기대감과 다른 하나님의 때가 하나님의 역사가 이제는 아브라함이 초조하지 않는다. 성경 어디를 봐도 다급한 아브라함의 모습 실수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 그냥 묵묵히 저는 그렇게 거룩한 상상을 한다. 50년 동안 하나님을 섬기고 묵묵히 바라보았던 아브라함, 상황에 따라 일희일비하지 아니하고 이해가 안 되는 자녀의 축복이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아브라함의 믿음은 흔들리지 아니하고, 15살 된 야곱을 보면서 인생을 마감한 아브라함의 인생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의 인생이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 아브라함의 마지막 모습을 히브리서 11장 9절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같이 보겠다.
 
*히브리서 11:9,
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살았다. 저는 이 히브리서 11장 9절 말씀을 보면서 오늘 말씀의 결과를 찾았다. 오늘 말씀의 핵심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음성이 무엇인지를 저는 이 말씀에서 찾았다. 아브라함의 이후에 50년의 인생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나그네 인생을 가나안 땅에서 잘 마무리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적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들을 체험한 저와 여러분들의 인생 속에서 신앙생활 속에서,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는 약속과 저 멀리 보이는 기도의 응답들을 놓고 기다리고 인내하며 하나님의 또 다른 손길을 초월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묵묵히 인생길을 마무리하고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길 바란다.
 
우리는 너무 급하지 않는가. 인생을 살면 살수록 신앙생활에 경험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하나님 신실하신 그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신뢰하고 믿음으로 반응하며 묵묵히 기다리고 인내하며 나아가는 그런 신앙인의 발걸음을 놓치지 않는 저와 여러분 될 수 있기를 바란다.
 
한국의 분단 역사가 이제 휴전선으로 말미암아 분단된 것이 내년이면 벌써 70년이다. 그 동안에 북한 선교다, 통일 선교다, 또 이제 최근에는 통일 대신에 이제는 평화를 써야 된다. 그래서 평화통일 단어 많이 쓴다. 시대에 따라서 개념들은 많이 바뀌고 상황에 따라서 강조점들은 달라지지만 교회는 우리 교회 늘 쓰는 기도의 제목이 있다. ‘피 흘림이 없는 복음적 평화 통일’, 이것이 이 시대에 주님이 주시는 약속이고 모리아 산에서 순종했던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피 흘림이 없는 복음적 평화 통일에 약속으로 임하게 되는 것을 저는 확신한다. 인내하고 기다리고 준비하면서 하나님의 때를 바라보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소망한다. 사랑광주리가 8주년이 지나갔다. 오늘 감사의 예배이다. 관여하신 분들 기피하시는 분들 계시고, 피상적으로 들으신 분들도 계실 터인데, 세상의 환경은 늘 바뀌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고 순종하는 자들 기회를 주셨을 때, 그 기회를 포기하지 아니하고 결단하고 헌신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은혜는 변함이 없이 지금도 지속되는 줄로 믿는다.
 
여러분, 문단의 아픔이 얼마나 힘든지 아시지 않는가. 좀 넉넉히 가지고 있는 분들은 나누고 싶다. 그래도 나눌 수가 없다. 지나가는 사람 옆에 사는 사람 불쌍하고 어렵고 힘들면 도와줄 수 있다. 그런데 지금 마음이 있어도 도울 수가 없다. 여러분 따뜻한 밥 먹으면서, 맛있는 고기 먹으면서, 밥을 못 먹는 사람 고기 먹고 싶어 하는 사람 나눠줄 수 있다. 나눠주고 또 그렇게 살지 않는가! 혹시 내 자녀가 지금 먹을 것이 없어서 엄마 나 먹을 것 좀 주면 좋겠어요.. 할 때 그 마음이 어떤지, 우린 내가 못 먹어도 자녀에게 주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지 않는가. 그리고 줄 수 있다. 지구촌 어딘들 못 쫓아가겠는가. 필요하다면 달려간다. 어떤 분의 간증이 있다. 자기 아이가 선교지에서 힘들다고 연락이 왔다고 한다. 그 즉시 비행기 타고 날아갔다고 한다. 그 아이 위로해 주려고... 그게 부모의 마음이고 가족의 마음인데 실제로 얼마 전에 자기 딸이 두 살짜리 손자와 함께 그 것도 아픈 아이 먹을 것이 없어서 도와달라고 울면서 전화하는 목소리를 듣고 마음이 찢어져 있는 엄마의 마음, 위해서 내려오신 분이다. 이유가 있을까? 주고 싶고, 줘야지. 그분의 탄식이 그러하다. 아니 얼마나 됐든 줘야 되는 거 아닌가. 내 딸이 지금 죽어가고 있는데, 굶어가고 있는데, 배고프다고 하는데 보내야 하는 거 아닌가? 보낼 방법이 없다.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 같지만 지금도 보이지 않는 손길을 통해서 일하고 계시고 침묵하시는 것 같지만 지금도 기적을 일으키시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의 믿음을 통해서 일하시는 줄로 믿는다. 우리가 못하는 것을 지금 사랑광주리가 하고 있다. 후에 보시면 소개가 나올 텐데 좀 마음을 모아 주시기 바란다.
 
아브라함이 자손이 번성하는 것 보지도 못하고 15살짜리 손자들이 서로 싸우는 것 보다가 인생을 마감해도 그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믿음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늘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조상의 고백을 드리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 시간 저와 여러분들에게 순종하고 결단한 그 믿음을 보시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유유히 흘러가고 약속이 흘러가는 그런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를 보게 될 줄로 믿는다.
 
여러분, 저를 포함해서 우리 인생을 포기해 보셨는가? 한 번 하나님 앞에 멋지게 헌신해 보셨는가? 모든 목회자들이 할 수 있는 표현 하나 저도 목사니깐 말씀드리겠다. 제가 80년에 1980년에 신학을 결정했는데, 그 때 정말 다 포기했다. 저는 포기한다는 것에 대해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제가 해 봤다. 내가 꿈꿨던 젊은 시절에 하고 싶은 것 다 내려놓고, ‘저 주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고백을 했다. 수십 년 전이니까 제가 얘기한다. 여러분 그렇게 한 번 해보시지 않겠는가. 목사가 되라는 것도 아니고, 선교사가 되라는 것도 아닌데 한 번쯤은 “내 인생을 포기하고 주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고백하는 것 필요하다. 남은 인생이 얼마일지 모르지만 한 번도 자신을 포기해 본 적이 없었다면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드리고 포기하겠습니다.” “주님 주권 속에 주님의 기적 속에 살아가겠습니다.”라고 한 번 외치고, 그렇게 고백하고, 눈물 흘리며 기도하고, 인생을 하나님께 헌신하는 멋진 결단의 계기가 되기를 부탁을 드린다.
 
자녀를 한 번도 포기해 본 적이 없는가? “한 번 쯤은 내 자녀 아닙니다. 하나님 자녀니깐 제 주권도 제 사랑도 제 안타까운 애정도 다 내려놓겠습니다. 하나님 자유롭게 하세요.” 그렇게 내 아이의 주권을 하나님께 내려드리고 포기할 때, 하나님의 기적이 시작될 줄로 믿는다.
 
지난 주 주일 예배 마지막 우리 담임 목사님 찬양하면서 인도하실 때 좀 부끄럽지만 눈물 많이 흘렸다. 혼자 뒤에서. 마스크가 그래서 좋다. 그냥 누구도 모르는 것 같다. 혼자 눈물을 주르륵 흘렀는데 이런 가사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히 함께 하리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에게!~’.
 
여러분, 우리 십자가의 길 걸어 보았는가? 순교자의 삶을 사는 자에게 순교자가 무언인지 아는가? 육신의 순교는 어렵지만 믿음의 순교는 가능하다. 조롱하는 소리 세상의 유혹 속에도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기를 원하는 이 고백 한 번 해 보셨는가? 우리 다 같이 고백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이 악한 세상에서 더러운 세상에서 주님의 순결한 신부가 되어서 한 번 인생 단 1분이라도 단 1초라도 한 번 그렇게 살다가 ‘주님 만나고 싶습니다.’ 고백하고 내 생명, 내 헌신, 내 믿음, 내 사랑 주님께 드리리.~ 고백하면서 기도하고 새롭게 우리 인생을 출발하는 결단하는 이아침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요약
이악한 세상에서 주님의 순결한 신부가 되어 살아야 한다. 십자가의 길을 걷고 싶고 선교자의 삶을 살아보고 싶은 우리의 간절함,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 놓치지 아니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거, 모든 것 주님 것이라 고백하고, 주님 원하시는 것 마음껏 내어드리고, 나를 포기하고, 주님의 초월적인 기적의 역사에 함께 올라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해야 한다. 우리 교회가 믿음의 4대가 피흘림 없는 복음적 평화통일의 비전을 가지고 벅찬 감격으로 나아가 통일시대를 향한 믿음보고를 통해 하나님의 날을 기대하고 사랑광주리 사역을 위한 1만 성도의 기도가 헌신이, 속죄 제물로 자신을 드렸던 모세처럼 통일을 앞당기는 거룩한 제물로 사용되기를 소원하며 복음 안에서 하나 되고 통일의 마중물이 되기를 소원하며 모두가 평화통일과 부흥의 주역으로 쓰임 받기를 간구하자.

 
-아브라함의 아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것이었다. 여호와께서 지시하신 모리아 산은 예루살렘에 있는 것으로 브엘세바에서는 약 80Km 떨어진 곳이었다. 거기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가혹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하나의 시험으로써, 아브라함의 믿음을 성장시키려는 계획이었다. 이처럼 상상도 못할 어려운 시련 뒤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숨겨져 있는 경우가 있음을 깨닫고 우리는 이 시련을 믿음으로 잘 극복해야 할 것이다.
 

▶이기원 부목사님(사랑광주리 상임이사)
-‘사랑광주리’의 8주년 감사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인도하시고, 기도와 함께 후원해 주신 여러분께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린다. 통일은 모리아 산으로 향하는 순종으로 시작되고 여호와의 은혜로 마무리 될 것이다. 이민족이 통일을 이루고 북녘 땅에도 속히 배고픔과 병으로 인해 복음을 접할 기회를 갖지 못하는 영혼들이 없는 날, 그리고 믿음을 지키며 하루 하루를 연명하고 있는 지하 교회의 성도님들이 자유를 찾아, 하나님께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기를 간절히 기도드린다. 오늘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찬양을 하면서 두 개의 깃발을 흔들어 주었다. 하나는 로얄, 왕권을 상징하는 보라색, 그 색깔 바탕에 우리 사랑의교회 로고인 붉은 피, 보혈과 섬김의 심벌을 담았으면 또 다른 깃발에는 재건되어야 할 북한 교회의 이름들을 담았다. 만세를 외치며 왕 되신 하나님께, 왕 되신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이 영권이 한반도 구석구석에 임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깃발을 흔들며 찬양을 올려드렸다. 오늘 시간이 많이 없는 관계로 사랑광주리 사역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없다. 그래서 여러분 주보에 보면 사랑광주리가 어떤 일을 하고 그 내용을 담아서 넣었으니 무엇보다 기도해 주시고, 기도하며 후원해 주신 모든 영 가족들에게 감사드린다. 코로나 기간동안 잠깐 후원을 잊으신 분들은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시는 것을 대 환영한다. 많이 기도해 주면 좋겠다. 선물을 하나 씩 줄 것이다. 올리브 오일 발사믹이다. 왜 이 선물을 준비했느냐면 말씀을 아직은 못 드린다. 사랑광주리 후원자로 오시면 알게 될 것이다. 그 상황을 이행하시고 기도와 후원을 부탁드린다. 모리아 산으로 향하는 산상 기도회이다. 통일과 북녘 땅을 위해서 기도하며 마음을 담아 외치면 세 가지 기도 제목으로 기도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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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12월 7일)-평신도훈련헌신예배 수료식
제목: "말씀으로 영혼을 섬기는 고귀한 삶"
말씀: 디모데후서 4:1~5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찬양인도:쉐키나(이원준 부목사님)
대표기도: 송기양 장로님(평신도훈련담당)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ㅡㅡㅡㅡㅡ


*디모데후서 4:1~5,
1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ㅡㅡㅡㅡㅡㅡ


 
▶▶사랑의 교회가 일 년에 아름다운 날이 많이 있지만 오늘 저녁이 바로 그날이다. 오늘 저녁이 축복된 날이다. 오늘 저녁에 꽃다발이 가장 많이 오는 날이다. 안 가지고 온 분들은 가서 사오라. ㅋㅋㅋ!!!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길 원한다. 오늘 들어올 때, 오늘 화면에 에베레스트 산이 심상치 않았다. 독수리가 굉장하다. 어떠한가? 여러분은 하나로 보이지만 저는 세 개로 보인다. 오늘 우리가 21세기의 47기 제자 반, 44기 사역 반, 69기, 70기 전도폭발반이 다 이 시대의 독수리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가 저 영상에 에베르스트 산이 나오는데, 제자 반 훈련, 사역 반, 전폭의 수료예배이다. 졸업이 아니다. 제자의 삶의 여정은 주님을 닮아가는 수료는 이 정서를 갖고 계속 평생 주님을 닮아가는 승리자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 교회는 이런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함께 하고 이렇게 수료하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잘되고 우리 교회가 잘 되어서 영적으로 균형 잡힌 하나님의 종들은 항상 하나님 사랑과 교회 사랑과 나라 사랑이 같이 가는 것이다. 자 질문을 하나 하겠다. 설교를 많이 하지 않겠다. 인터뷰를 하겠다.
 
여러분, 무얼 받을 때 은혜가 많은가? 헌신할 때 은혜가 많은가? 헌신할 때이다. 어디에요? 전폭에서 헌신할 때 은혜가 많다고 말한다. 헌신할 때이다. 이게 올바른 답이다. 오늘 날 대속하신 예수, 날 자유케 하셨으니 내 몸과 마음을 주님 위해 평생 쓰게 하여 주옵소서. 진짜 은혜는 헌신할 때 받는다. 찬송 ‘성자의 귀한 몸’
 
♬▷성자의 귀한 몸
성자의 귀한 몸 날 위하여
버리신 그 사랑 고마워라.
내 머리 주 앞에서 조아려 하는 말
나 무엇 주님께 바치리까.
 
지금도 날 위해 간구하심
이 여튼 믿음이 아옵나니
주님의 참사랑 고맙고 놀라 와
찬송과 기도를 쉬지 않네.
 
주님의 십자가 나도지고
신실한 믿음과 마음으로
형제의 사랑과 친절한 위로를
뉘게나 베풀고 하옵소서.
 
만가지 은혜를 받았으니
내 평생 슬프나 즐거우나
이몸을 온전히 주님께 바쳐서
주님만 위하여 늘 살겠네. 아멘♪~~
 
- 오늘 진짜 은혜는 헌신할 때 받는다. 그럼 어떤 헌신을 해야 하는가? 제자반 사역반 마치고 말씀으로 다른 영혼들을 섬길 때, 은혜를 받는다. 참으로 소중하다. 우리교회의 신앙적, 사역적 토대가 된다. 진짜 은혜는 말씀으로 다른 분들을 섬길 때, 은혜이다. 만 가지 은혜를 받았으니 그러한 것이다. 찬송하자. !!~~토비새에 다 모이는데 칠천이든 몇 명이 모이든 은혜이다. 75년부터 제자훈련이 체화화 되었다. 편안하게 은혜이다. 이 시간 성령님이 주시는 은혜 가운데서 우리 삶을 같이 나누고 그의 인생을 새롭게 하고 머리만 때리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집중하여 마음을 겨냥해서 삶의 변화되는 축복이 있어야 한다. 진짜 축복은 헌신할 때이다. 우리에게 만 가지 은혜를 주심에 찬양하라.
 
신앙의 본질이 무언가? 신앙의 본질은 주님의 심정을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다 읽고 다 훈련을 받았지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의 전체를 관통하는 주님의 심정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심정을 깨닫는 것 중에서 가장 절실하고, 가장 절박하고, 가장 간절하게, 가장 처절하게 깨닫는 성경이 오늘 디모데후서 4장이다. 디모데후서 4장은 바울의 마지막 유언 같은 장이며, 바울이 1차 수감되고, 로마 감옥에 수감되었지만 좀 자유 함이 있었다. 2차 감옥에서는 사형선고가 내려졌고 곧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바울은 지금 몸은 그렇지만 영은 맑고 청명하고 강력했기 때문에 오늘 디모데후서 4장 같은 이런 강력한 하나님의 심정을 깨닫는 선포를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지를 보자.
 
*디모데후서 4:1~2,
1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예수 그리스도는 장차 오실 예수시며 심판하실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는다. 강력하다. 하나님의 심정을 깨닫는 강력함이 선포되는 구절이다. 그다음 2절에는 너무나 명확한 말씀이다.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한다. 물론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계시의 역사와 구원사적 전체 언약의 신학적인 바탕에서 나온 구절이다. 결국은 예수 믿고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동일하게 주신 말씀이다. 말씀을 전파하라고 하신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신구약 전체를 통해서. 여러분 구약 있는 내용들을 잘 해석을 하는 성경이 히브리서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누구인가? 미상이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바울이라고도 하고, 요즘 현대신학에서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닌가? 한다. 또 바울의 제자인 아볼로 같은 사람이기도 하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결사적으로 바울처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처럼, 아볼로처럼, 이것을 선교사는 선교사대로, 목회자는 목회자대로, 다 적용될 수 있느 것이다. 사랑의 교회 44년의 역사를 말씀을 드리면 우리 교회에 모든 성도들과 제자 반, 사역반 모두가 목회자와 함께 말씀 사역을 말씀으로 영혼을 섬기는 대열에 끼어들어야 한다. 늘 말씀을 항상 힘쓰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주의 신실한 훈련 자들이 목회자와 함께 말씀 사역을 공유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우리 순장님을 통해 다락방을 섬기는 것이다. 어떤 목사님들은 신학교를 7년 9년을 다니고, 신학을 10년 12년을 해도 성경을 다 모르는데, 어떻게 사랑의 교회는 1년 2년 훈련을 마치고 그것을 가지고 말씀을 인도 하냐고? 질문하시는 분들이 있지만 그럴 때 저는 “목사님, 우리 교회는 신학적으로 성경 마니아가 우리의 목표가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 관에서 똑똑한 사람들을 만드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우리의 목표는 이 말씀을 가지고 말씀 사역의 고귀하고 존귀한 그 사명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한 훈련된 성도들을 통하여 많이 알고 똑똑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단 한 명이라도 단 인생에 삶의 앞으로의 여정 가운데, 말씀을 통하여 참된 변화를 만들고자 합니다.” 라고 대답한다. 말씀을 통해 변화의 은혜를 받기를 원하며 그리고 내가 받는 변화의 은혜가 감사해서, 또 다른 사람을 말씀으로 섬기고 또 말씀으로 섬김으로 말미암아 변화와 축복의 근원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성경 많이 아는 게 목표가 아니다. 그 말씀을 가지고 삼천 여개의 다락방에서 영혼을 섬기는 이 일이야 말로 우리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특별한 목표인줄 믿는다. 우리는 신학자를 만드는 것이 아닌 말씀으로 영혼을 섬기는 사역을 하는 것이 소중하다. 이것이 캐돌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차이이다. 우리가 오리지널 기독교이다. 우리가 오리지널 크리스천이 되어야 한다. 카돌릭은 이 말씀이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이 말씀을 누가 해석하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절대적인 라틴어라든지, 신학적은 바탕이 완벽하게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은 함부로 다루지 않는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 요한 캘빈이 영국 교회들이 변화 받아서 은혜를 받아서 이 말씀을 가지고 다른 영혼들을 섬길 수 있다고 보통 언어로 번역을 한 것이다. 수많은 번역가들과 같이 은혜를 나누고 말씀의 은혜를 체험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 자체가 능력인 줄 믿는다. 강단 위에서 다 귀하지만 우리는 프로테스탄트로서 우리의 어떤 역할이 있고 영적 사명이 있다. 그것은 바로 말씀을 가지고 영혼을 섬기는 것이다. 어떤 특정한 전문성을 가진 것이 아닌 기도와 말씀을 가지고 영혼을 섬길 수 있는 이런 사명을 우리가 받은 것이다. 바울이 이것을 깨닫고 너무나도 절박하게 처절하게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그러면 어떻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섬기는가? 세 가지이다.
 
 
*디모데후서 4:2,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⓵경책하며 ⓶경계하며 ⓷권하라.
 
 
첫째는 경책하라(Convince).
- 경책은 영어로 컨빈스이다. 기독교 변증, 신앙적 의문사항 내용들을 차근차근 대답해야 한다. 주님이 왜 대강절에 주님은 왜 성육신해야 하나? 예수님이 몸을 입고 오시지 않으면 피를 흘릴 수가 없다. 몸을 입고 와야지만 피를 흘리실 수 있다. 피 흘림 없이는 죄 사함을 받을 수 없기에 그렇다. 피가 흘러야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 인간으로 오셔야 피 흘리기 위해서 무죄한 자로 인간의 몸이어야 한다. 인터뷰는 굉장히 즐거운 시간이다. 구약의 어두운 것들을 잘 설명한 것이 히브리서이다. 히브리서를 읽으면 구약 전체가 눈에 확 들어올 것이다. 그것을 다 읽으면 오늘 21세기의 정말 컨빈스이다. 경책(警責)이다.
 
 
둘째는 경계하라(Rebuke).
-이 말은 어리버리 하게 살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육신의 습관이 덕지덕지 남아서 오염되어서 살지 말고, 육체이 소욕대로 살지 말고, 한 발은 육신의 소욕에, 한 발은 성령의 소욕에 왔다갔다 허우적거리지 말고, 해매이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중심잡고 살아라. 라고고 하시면서 엄히 경책한다고 하신다. 그래서 강하게 질책을 하신다. 아까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같은 아볼로 같은 바울 같은, 경책하는 은사가 제일 많은 사람은 나단 선지자이다. 죄를 지적하고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우리는 좋은 의미에서 사랑하는 이웃들에게 경계(儆戒)할 수 있는 축복을 주시길 바란다.
 
 
셋째는 권하다(?).
-권면하고 위로하는 것이다. 상처받은 자를 싸매어 주고 소위 바나바의 은사를 받은 자가 되어 위로를 해야 한다. 제가 이런 내용들은 왜 하는가? 왜 믿음의 모험과 믿음 보고를 하라고 하는가? 이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어제 좋았다가 내일 안 좋고 오늘 안 좋다가 내일 좋을 수도 있는 것처럼 삶 전체가 만만치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 권면하고 위로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경책하고, 경계하고, 권하는 것을 잘하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 하나님의 심정을 깨닫고 경계하고 경책하고 권하는 것을 완벽하게 잘 하는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닮아가는 이 수료의 과정이 필요한 것이며 점점 높은 고봉을 향하여 달려가며 모든 사람들에게 권(勸)하고 훈련자 모두 한 분 한분 성령님이 인도하셔서 새롭게 하시고 능력을 물 붓듯 하시기를 소원한다.
 
 
♣요약
우리는 말씀을 전파하는 자 되어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고 경계하고 권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전도자는 항상 긴장 가운데 말씀 전파에 힘써야 하며 모든 일에 인내와 근신하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또한 때로는 부드러운 권면으로, 때로는 강한 책망으로 귀가 어두워진 자들을 깨우쳐야 한다. 이러한 전도자로서의 사명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우리는 말씀으로 영혼을 섬겨야 한다. 올 한 해 우리 교회에 평신도훈련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한 해 동안 훈련을 통해 예수님을 닮아가고 예수님처럼 살기로 결단한 모든 훈련생들에게 주님의 은혜가 항상 함께 하시기를 소원한다. 47기 제자반, 44기 사역반, 전도폭발 60,70기 모든 수료생들을 가르치고 인도하신 목사님들도 수고가 많으셨다. 모두가 영가족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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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2년 12월 4일)
제목: "아론이냐, 모세냐?"
말씀: 출애굽기 32:15~32
찬양인도: 쉐키나(이원준 부목사님), 영광찬양대(1붘0
대표기도: 신동호 부목사님(1부)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1부)
 
설교자: 오정현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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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2:15~32,
15 모세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오는데 두 증거판이 그의 손에 있고 그 판의 양면 이쪽 저쪽에 글자가 있으니.
16 그 판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요 글자는 하나님이 쓰셔서 판에 새기신 것이더라.
17 여호수아가 백성들의 요란한 소리를 듣고 모세에게 말하되 진중에서 싸우는 소리가 나나이다.
18 모세가 이르되 이는 승전가도 아니요 패하여 부르짖는 소리도 아니라 내가 듣기에는 노래하는 소리로다 하고.
19 진에 가까이 이르러 그 송아지와 그 춤 추는 것들을 보고 크게 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
20 모세가 그들이 만든 송아지를 가져다가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게 하니라.
21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 백성이 당신에게 어떻게 하였기에 당신이 그들을 큰 죄에 빠지게 하였느냐.
22 아론이 이르되 내 주여 노하지 마소서 이 백성의 악함을 당신이 아나이다.
23 그들이 내게 말하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노라 하기에.
24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
25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을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26 이에 모세가 진 문에 서서 이르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가는지라.
27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의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죽이라 하셨느니라.
28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임을 당하니라.
29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자기의 아들과 자기의 형제를 쳤으니 오늘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30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를 위하여 속죄가 될까 하노라 하고.
31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32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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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의 마지막 종착역인 12월 첫 주이다. 12월이 되면 우리 모두가 한 해를 반성하고 자신을 더 돌아보게 된다. 주님을 전심으로 심기기를 원한다. 부흥 시리즈를 하면서 한국교회 다시 한 번 제4의 복음을 허락하시길 소원한다. 오늘 아침에 나오는데 초록색 넥타이를 하게 되었다. 제4의 복음은 1차 1907년 평양 대 부흥이었다. 그래서 평양 대 부흥은 일제 강점기를 지냈다. 그리고 40년쯤 지나서 2차 1948년도에 건국되면서, 조선시대를 지나 대한민국으로 건국되고, 기독교 정신위에 세워진 것이다. 건국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잡혀서 감옥에 있었는데 이승만 대통령 특출함과 재능이 아까워서 이제 감옥에 있는 동안에 성경을 넣어준다 성경을 읽다가 성령이 임하여 영적으로 뜨거워져서 영적으로 감옥에서 영접했다. 그가 하나님께 구한 내용이 있다. 나의 평안함을 구하지 아니하고 나의 민족을 구원해 달라고 했다. 그 기도를 들으시고 절체절명에서 우리 민족을 구원해 주셨다.
 
“하나님이여 나의 영혼을 구원한 것처럼 이 민족을 구원해 주옵소서.”-이승만 초대 대통령-
 
3차 1970-80년대에 빌리그해헴 세계선교 대회를 통해 제3의 부흥 1990년대 초반까지 50-60%가 복음의 강력한 바람이 불었다. 다시 한 번 제 마음의 소원은 이 시대의 이 민족을 불쌍히 여겨 주심에 4차 제4의 부흥, K부흥이 일어나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우리는 소원해야 한다. 그리고 월드컵도 인도하셔서 찬양 드린다. 선수들이 자기를 내 세우지 않고 서로를 세워주고 마음이 찡했다. 오늘 아침 브라질에서 메일이 왔다. 제가 지난 7월에 브라질 장로교회에서 설교를 했는데 이번 월드컵에 한국과 브라질이 본선에서 붙기를 바란다고 했다. 또한 브라질하고 경쟁해서 1:1되어서 코너킥으로 하나 더 넣게 하여 주시길 소원하면서 전체적인 안목을 주시길 바라는 것이다. 나라가 어려우니 그러한 기대감을 갖게 된다. 부흥을 정말 싫어하는 것이 마귀이다. 인터넷 4차 산업혁명시대에 영적인 부흥대첩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혁명시대에는 부흥의 지팡이를 들고 선제공격을 하기를 바란다. 우리의 영적인 복음 대첩이 필요하다. 이제는 적당한 것으로 해결 안 된다. 무한돌파, 무한격파가 필요하다. 우리 신앙은 의존과 순종으로 참여해야 한다. 무한돌파, 무한지평, 무한하신 자원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적인 원어이고 이것은 신앙적인 용어이다. 그리고 오늘 말씀을 통하여 창조주이시고 무한하신 하나님 안에 들어가게 하여 주셔서 정말 무한지평을 열어주시길 바란다. 오늘 본문의 배경을 보자. 출애굽기 32장 1절
 
*출애굽기 32:1,
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서 그런데 한 달 이상 시내 산에 올라가 있었다. 모세가 내려오지 않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웠다. 지도자가 산에 올라가서 40일이 되어도 안 내려오니 불안한 것이다. 혹시 모세가 죽은 것은 아닐까 하여 사람들은 일주일이면 내려오겠지 했는데 40일이 되어도 안 내려오니까 수색하고 싶어도 그 구름이 둘려 싸여 있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으니 감히 가볼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엄위하심으로 가볼 수가 없는 것이다. 오죽하면 모세의 시종 아론도 같이 올라가지 못하고 산기슭에 있었다. 산에 못 올라간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과 대면하는 기간이 장장 40일이 걸렸다. 난리가 난 것이다. 사람들이 불안하고 하니까, 애굽에서의 음식물과 애굽의 습관들이 생각난 것이다. 문화, 애굽의 그런 물든 것들, 그래서 아론에게 찾아가서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신을 만들어 달라고 한다. 그러자 아론이 그들에게 너희들의 아내와 자녀들에게서 금 고리를 빼내어 가져오라고 한다. 금붙이로 아론은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거푸집에 부어서 만든 것이다. 금송아지를 섬기게 한다.
 
*출애굽기 32:2,
2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
*.출애굽기 32:4-5,
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금송아지를 만든 이유는 400여 년 동안 애굽의 옛 습관을 닮아가는 것이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앞에 출애굽기 20장에 십계명을 말씀하실 때에 제1계명은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제2계명은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 계명을 믿는다 하면서도 어기는 것이다.
*출애굽기 32:6,
6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이 것은 애굽식이다. 하나님을 섬기는데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1계명을 믿는데 2계명을 어기는 것이다. 마치 주일날 예배를 드리는데 월요일 점집에 가는 것과 같다. 리더가 부재하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 나냐면, 40일간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다락방 40일간 빠지만 난리가 난다. 40일간 큐티를 안 하면 난리가 날 것이다. 그렇게 철저히 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영적인 잡초들이 일어날 것이다. 우리가 영적으로 바로 서 있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눈에 보이는 우상을 만들지는 않을지라도 우리 마음에 분별력이 사라진다. 영적 침체에 빠지게 될 것이다. 코로나 이후에 하나님을 믿지만 마음속에 금송아지를 하나씩 갖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버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단지 하나님도 섬기고 이방 신도 섬긴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도 그러할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혼합주의 같다. 진짜 복음을 방해한다.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잘못된 사람들로 인해 너무 왔다 갔다 한다. 그리고 모세에 대해서 믿지 못하고 불평하는 것이 부화뇌동하고 다른 신을 찾으려고 했다. 그리고 애굽의 그 오염된 과거의 문화, 과거에 물들은 것들, 심지어 아론조차 분별력이 없어졌다. 나중에 아론에게 모세가 야단을 치니까 내가 금귀고리를 불에 넣었더니 그냥 송아지가 나왔다고 말한다. 그 중요한 순간에 자기는 산 아래에서 적어도 토비새라도 해야 했다. 지팡이를 들어야 하고 기도를 해야 한다. 기가 찬다. 오늘 드디어 모세와 대화를 나누는데,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다.
 
*출애굽기 32:8,
8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이런 잘못한 백성들을 향하여,
 
*출애굽기 32:9,
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10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모세가 내려가서 26절에 나온다.
 
*출애굽기 32;26,
26 이에 모세가 진문에 서서 이르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가는지라.
-오늘 이 말씀을 한 해의 말씀으로 삼아서 주님의 음성으로 들려지기를 바란다.
 
*출애굽기 32:17,19,20,
17여호수아가 백성들의 요란한 소리를 듣고 모세에게 말하되 진중에서 싸우는 소리가 나나이다.
19 진에 가까이 이르러 그 송아지와 그 춤추는 것들을 보고 크게 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
*출애굽기 32:20,
20 모세가 그들이 만든 송아지를 가져다가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게 하니라.
-모세도 강력한 성격이다. 모세가 아론을 추긍했다.
 
*출애굽기 32:24
24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
-아론은 역시 말을 잘한다. 말도 안 되는 말이다.
 
*출애굽기 32:26,
26 이에 모세가 진 문에 서서 이르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가는지라.
-누가 나오는가 하면 레위 인이 나아온다. 그리고 모세는 레위자손에게 칼을 들었다. 나중에 그래서 레위 인이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이 된다. 여기서 두 가지의 제목을 알게 된다.
 
*출애굽기 28,29,
28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임을 당하니라.
29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자기의 아들과 자기의 형제를 쳤으니 오늘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I. 아론의 연약함을 극복하여야 한다. 
-아론은 백성들이 자기에게 우상을 만들자고 했을 때에 단호하게 거절을 못했다. 금 귀걸이로 금송아지를 만든 것이다. 모세가 그래서 왜 그랬냐고 책임 추긍을 한 것이다.
 
*출애굽기 32:21,
21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 백성이 당신에게 어떻게 하였기에 당신이 그들을 큰 죄에 빠지게 하였느냐.
-자기 합리화 하며 불에 넣었더니 금송아지가 나왔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책임회피를 하는 것이다. 백성들이 그러하였다고 말한다.
 
*출애굽기 32:4,
24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
-아론의 가장 큰 문제는 책임 회피이다. 자기 합리화한다. 꼭 빌라도 같다. 예수님을 취조했을 때 예수님께서 죽을 제목이 없는 줄 알면서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군중들이 그러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책임회피 한다. 우리가 제 4의 부흥을 위해서는 우리가 이 시대의 문제가 책임회피이다. 또다른 표현은 남의 탓이다. 남의 탓으로 교묘한 자기 합리화 한다. 우리 한국교회가 부흥하기를 원한다면 잘못된 자기 합리화와 남의 탓이 사라져야 한다. 사실 지도자 아론은 무서운 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백성들이 그에게 돌을 던지고 위협한다 할지라도 자기 책임을 다 했다면 하루아침에 3천명이 죽어나가는 무서운 결과가 아닐 것이다. 자기 합리화 책임 회피인 것이다. 모세 앞에서도 백성들의 탓으로 돌린다. 우리 한국인도 남 탓 하는 DNA가 있다. 조상 탓도 한다. 그래서 남편 탓, 아내 탓, 부모 탓 등이 다 그렇다. 한국사회 진영논리 남의 탓이다. 우리 속에는 잘못된 DNA가 있다. 책임 회피는 우리에게 참된 복음이 아니다.
 
남의 탓을 하고 선동과 분노 하는 자는 멸망이다. 아담은 자기의 죄를 하와에게 전가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 책임이라고 하신다. 신앙에는 다른 길이 없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는 영적 DNA가 회복되어야 한다. 다니엘은 자기 민족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할 때, 우리 모두가 범죄 한 자라고 한다. 책임전가 남의 탓이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줄 믿는다. 그러면 책임회피를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남 탓 하지 말고 우리가 어떻게 극복하는가? 오늘 모세처럼 책임을 지고 가야 한다. 아론이 아닌 모세처럼 속죄의 제물이 되어야 한다. 말씀의 깊이 있는 신앙생활, 영적인 돌파구를 마련하고 주님을 깊이있게 만나야 한다. .
 
*출애굽기 32:10,
10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보통 사람이라면 하나님 참 잘 됐습니다. 라고 할 것이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심정을 깨달았다. 하나님은 이 백성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심정을 모세가 깨달은 것이다. 다 잘못된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중보기도 한다. 그들의 죄를 사하고 한다. 민족을 위한 속죄이다.
 
*출애굽기 32:30,
30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를 위하여 속죄가 될까 하노라 하고.
-모세 자신이 속죄 제물이 된다는 것이다. 모세는 자기 자신의 피로 각을 뜨고 드린다.
 
II. 아론의 연약함을 제거해야 한다.
*출애굽기 32:32,
32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내 몸을 속죄의 제물로 각을 뜨고 피를 흘려도 나를 죽여달라고 피의 제물로 받아 달라고 한다. 그래서 모세가 예수님의 모형인 것이다.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인 것이다. 바울도 마찬가지다.
 
*로마서 9:3,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사람은 다 잘 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남의 탓 말고 모세처럼 각을 떠야 한다. 이 백성을 구원해 달라고 한다. 모세처럼 나를 피의 제물로 드리겠다고 한다. 하나님께 매달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 나를 주님께 속죄 제물로 바쳐야 한다. 마치 죄의 문제가 십자가의 죽음으로 해결되는 것처럼 우리 사이에 치유 불가능해 보이는 남 탓도 피의 복음으로만이 해결될 수 있다. 진영논리와 이념 갈등도 정말 기름을 붓고 있다. 이 세상의 갈등과 불만과 남 탓이 넘쳐난다. 매스미디어와 미신론자가 사회적인 문제들을 증폭시켜가지고 사람들을 이간질 하고 갈등을 만들고 있다. 우리의 갈등과 웬만한 상식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 우리가 순교적인 자세로 우리가 민족의 제단 위에 피를 뿌려야 한다. 이런 마음을 가질 때 해결된다.
*요한복음 1:29,
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예수님만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예수님만이 이스라엘과 세상 전체를 사하신다. 속죄물이 되신 것이다. 예수님이 일하신다.
 
*골로새서 1:14,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성탄에 오실 때까지 민족을 향한 속죄의 제물이 되고 모세의 마음이 되어야 한다. 이 시대의 속죄의 제물이 되신 예수님의 피의 복음을 되어야 한다. 
*시편99:8,
8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주께서는 그들에게 응답하셨고 그들의 행한 대로 갚기는 하셨으나 그들을 용서하신 하나님이시니이다.
-그들을 용서하신 것이다. 우리의 약점들이 주님의 능력으로 용서함을 받기를 바란다. 모세처럼 갈 것인가? 아론처럼 갈 것인가? 시대의 책임을 져야 한다. 무한책임, 무한돌파, 이 것 외에는 없다. 우리도 속죄의 제물이 되어야 한다. 특별히 사회에서 중요한 전문가들도 많다. 예수님 앞에 속죄물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한 은혜를 받는 사회인이 되어야 한다. 젊은이들도 바짝 정신을 차려서 부끄럽지 않는 제 4의 복음 부흥이 일어나기를 소원한다.
 
♧요약
이 주님의 심정을 가지고 한 평생 모세의 마음을 가지고 자신을 속죄 물로 드리겠다는 결심하는 이 시대의 복음 전사, 헌신용사가 되어 우리는 분별력을 가지고 회개하여 k부흥을 방해하는 자기합리화, 책임회피의 잡초를 제거하고 부화뇌동과 영적침체에 빠지지 말고, 모세처럼 우리가 속죄의 제물이 되어서 순교적인 피의 복음이 되어 영적 부흥대첩을 완수하여야 한다. 그래서 민족의 아픔을 치유하는 제4의 부흥이 임하기를 기도하며 소원하여야 한다.
-모세는 우상 숭배자들에 대하여 두 돌 판을 깨뜨림으로써 하나님과의 언약이 죄로 인해 깨어졌음을 표시하고 아론의 죄를 물었다. 그리고 우상 숭배자를 처벌하고 하나님께 백성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중보 기도를 드렸다. 이와 같이 영적 지도자는 죄를 엄히 다스려 다시는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백성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공의와 사랑의 두 측면을 모두 갖추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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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2년 12월 3일)-부흥헌신토비새
제목: "변함 없는 섬김의 원리"-(2022년 제2기 사랑글로벌 아카데미 졸업헌신 감사예배-194명(名))
말씀읽기: 이병구(후원 이사회 이사장님)
대표기도: 백형선(재단법인 이사장님)
사회: 김대순 부목사님
찬양: 쉐키나(이원준 부목사님), 영광찬양대

설교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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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6:6-10,
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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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스런 이 헌신 예배가 가능하도록 우리 모든 교수진 분들 다 일어나 주시기 바랍니다. 박수로 감사 드리자. 이사진 분들도 일어나 주시기 바랍니다. 박수로 인사드리며, 졸업생들 고생을 했다. 더더구나 이 새벽에 기도의 지팡이를 들고 들어왔다. 그래서 모두 들고 졸업을 축하드린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드린다. 새벽만다 기백과 감격을 가지고 온 성도가 모였다. 하나님께서 온 교회가 모였다. 새벽에 히스기야가 앗수르군대 18만 5천명이 몰살되는 기적을 보았다. 오늘 이 졸업식이 우리 모든 성도들이 영적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주님은 새벽에 역사하시는데 야곱은 다시 한 번 새벽에 씨름하고 새벽에 이스라엘로 개명해 주셨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께서 진정한 변화를 허락해 주시길 소원한다. 제가 한 번씩 할 때마다 지팡이를 들어라. 홍해가 새벽에 갈라진 줄 믿는다. 아멘, 모세가 새벽의 두 번째 십계명을 받은 줄로 믿는다. 아멘, 여리고 성이 새벽에 무너진 줄로 확신한다. 그리고 우리 마음속에 마음의 소원을 가지고 오늘 이 새벽에 주시는 영적인 기백과 담력과 결의를 다짐하는 영광스런 새벽이 되길 바란다. 모든 영광을 주님께 올려드린다. 주님께 영광 올려드리자.

새벽에 이렇게 기도의 지팡이를 들고 주님께 올려드렸는데 저는 이번 2기를 하면서 무슨 맘이 들었냐면 성경에 독특한 신학교가 있다. 사무엘 19장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와 있다.

*삼상19:18,
18 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전하였고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살았더라.
-라마 나욧 선지학교가 이겻이 나중에 엘리야와 엘리사에게 계승되는데 정말 하나님의 인물들이 배출되기를 바란다. 두 번째로는 하나님께서

*사도행1전 17: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야말로 사도행전 17장에 나타났던 베뢰아 사람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상고하고 말씀을 잘 사모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베뢰아 아카데미에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와 기름부으심을 체험하는 사랑 글로벌 아카데기가 되어야 한다. 그다음에는

*사도행전 19:9,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우리 한국에도 출판사가 있는데, 그 이름도 있지만 우리 오늘은 사랑의교회가 2기 사역을 하면서 사랑의교회의 글로벌 아카데미는 라마 마욧의 은혜가 있게 하여 주시며, 베뢰아 아카데미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시며, 두런노 서원의 바울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르치는 그런 능력이 나타나기를 소망한다. 저는 사랑글로벌 아카데미 1년 동안 이 아카데미를 통하여 제 마음에 소원하고 기대를 갖는 것은 한 때, 러시아아 닫혔다가 문을 열고, 해외 디아스포라 교회가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그리고 카자흐스탄, 키르키스탄, 여러 중앙아시아 나라들과 러시아를 향하여 디아스포라 교회들이 힘을 합하여 그 선교를 했다. 문제는 그 지역에 맞는 일꾼들이 있어야 하는데 시간은 없고 이를 어떡하면 좋겠나? 를 생각하여 러시아의 어떤 교회가 6개월 동안 한국식으로 해보자고 했다고 한다. 한국에 처음 신앙이 들어왔을 때, 한국교회가 가졌던 그런 은사와 능력을 가지고 한 번 집중해보자.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한국과 똑 같이 새벽부터 시작하여 아침 5시부터 밤 10시까지 6개월 동안 완전히 훈련을 하듯이 했다고 한다. 그것을 6개월 동안 하니까 미국의 3년 동안 신학대학교 교육한 것 이상의 효과가 있다고 한다. 똑 같이 새벽 기도하고 하루 종일 같이 훈련하면서 저는 언젠가는 우리 이 사랑 글로벌 아카데미에 아침 5시부터 밤 10시까지 6개월 동안 Intensible 강하게 집중적으로 하려고 한다. 이럴 때 하나님의 인물들이 배출 될 줄 믿는다. 그래서 러시아 사람들이 훈련해서 한 때는 이만여 사역자들이 현지에 있게 되었고 선교 부흥이 일어났다.

어젯밤 제대로 잠을 잤는가? 하나님께 기도했다. 오늘 고도의 순간 안식을 다 달라고... 나는 무슨 마음이 들었냐면, 만약에 월드컵 축구가 졌다면, 오늘 이 졸업식에 마음이 좀 그러할 것 같았다. 제가 그래서 어제 2:1로 제가 이길 거라고 장로님에게 이야기 했다. 어제도 이태리하고도 이길 거라고 이야기 했다.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참 우리 한국에 마음 둘 데가 없는데 지금 만약에 졌으면 또 남의 탓을 할 것이다. 졌다고 하면 대통령 잘못 두어서 졌다고 다들 그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것 같아서 기도를 했다. 하나님께 기적이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야!! 우르과이가 3골을 넣어서 죄송하지만 하나님께 대한민국에 위로가 필요합니다. 라고 기도했다. 밤을 새고 축구를 보고 이 새벽에 다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져서 지금부터 힘들겠지만 오늘 다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신 것처럼 오늘 사랑글로벌 아카데미 졸업생들이 다시 라마나욧의 그 놀라운 사관학교, 나중에 엘리야 엘리사 사관학교, 그 다음에 베뢰아 아카데미 말씀을 사모하는 그 깊은 집중력, 두란노 서원의 인재배출, 그렇게 해서 21세기, 어떤 디아스포라 교회에 힘을 합쳐서 6개월 동안 해서 신학교 3년 교육 한 것과 같이 되기를 바라며 하나님께서 3학기를 일 년 동안 해주실 것을 확신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있다. 세 가지 일을 하셨다.

1. 섬기러 오심-사람들을 섬기고 그의 몸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온 인류를 위해 죽으셨다. 구원역사를 완성하셨다.
2. 마귀의 세력을 멸하려-주님이 이 땅에 마귀의 세력을 물리쳐 주시려고 오셨다.
3. 제자들을 훈련하러 오심-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을 훈련하셨다. 주님은 3년 동안 제자들을 훈련하셨다. 그 훈련한 제자들은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섬기려 오셨고, 구속역사를 완성하셨고, 마귀의 세력을 멸하시고, 제자들을 훈련시키셨다.

※37년 전에 미국에 기독교 서적 가운데 특별 출판 상을 받은 책이 있다. Life style evangelism.
(라이프스타일 어벤저즘) -조셉 알드리치 저-
-그 책을 제가 번역을 했다. 그 책에는 서문에 제가 평생 잊을 수 없는 글이 서문에 써 있었다. 성경에 나온 내용은 아니지만 “예수님은 천국에서도 세상에서 겪으셨던 험한 십자가에 그 죽음의 십자가의 흔적과 상처, 스티그마를 가지고 계셨다. 천사 가브리엘이 주님께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주님 주님은 세상에 계실 때 사람들을 위새 심한 고통, 스티그마를 받으셨군요?“ 했더니 대답의 예수님께서 ”그래 그랬지”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하고 수고하셨는지 그 주님의 사랑과 수고를 이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계시는지요?”라고 물었다. 주님은 “아니야 다 아는 것이 아니고 팔레스타인 소수의 몇 사람만이 알고 있다.” 그래서 천사 가브리엘이 당황해서 “그러면 주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하여 주님께서 무슨 일을 하셨나요? 했다. 그때 주님은 이렇게 답하신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열 두 명의 제자들에게 이 모든 것을 다 알렸다.“ 라고 하셨다. 그 훈련 받은 소수의 사람들이 주님의 메시지를 전파할 것이라고 하셨다. 그렇게 해서 세상 끝 날까지 주님의 메시지가 다 선포된다고 하시며 결국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럴 때, 이 가브리엘 천사가 예수님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아니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나 제자들은 다 부족한 사람들이다. 다 형편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다 부족하기 짝이 없는 자들이다. 만약 그들이 잘못하고 넘어지면 어떻게 하죠? 그리고 제자들이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죠?“ 라고 물었다. 주님은 그러자 이렇게 대답하셨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통하여 열 두 제자, 그들 외에 다른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신다. 그러니까 제자들을 통하여 사역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하신 것이다.

한국교회가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가야한다. 한국교회가 감당해야 한다는 것은 전 세계 복음주의가 감당해야 할 때에 무슨 큰 대단한 것들이 아니라 이런 훈련된 하나님의 사람들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이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시는 저와 여러분들 외에는 하나님은 다른 대안이 없는 것이다. 사랑의 교회에 이 기도의 지팡이를 들고 하나님을 사모하는 여러분들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이다. 한국 교회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집중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일해 주실 것을 확신한다.

저는 이 졸업식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졸업식이다. 작년에는 아바르타임에 대해서 말씀했고 오늘은 이 3기 4기 졸업 할 때까지 오늘 사도행전 16장 6-10절 내용을 제가 하나씩 할 것이다. 오늘 다 할 수가 없다. 사도행전 16:6-10절은 역사가 바뀌는 장이다. 아놀드 토인비가 오늘 바울이 받았던 이 말씀을 통하여 유럽의 장래가 결정되었다고 이야기 했다. 여기에는 크게 세 가지가 나온다.

첫 번째는 예수님의 영이 인도하는 사역 섬김,
두 번째는 바울의 환상 중에 나타나심.-비전과 패러다임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성령의 문제는 지배에 관한 문제이다. 오늘 졸업생들이 세계비전 구슬을 하나씩 받게 된다. 지금부터 20년 전에 빌리그램 목사님과 함께 넘버 2맨 이셨다. 나이도 비슷하셨다. 그분이 선물을 주셨다. 이 구슬은 세계지구본이다. 같은 비전과 소명을 가지고 가려고 이렇게 동지가 되는 차원에서 이 구슬을 선물로 주게 된다. 우리 교회 모든 분들도 이 구슬을 다 드렸으면 좋겠다. 그날이 오기를 바란다. 오늘 순서지를 보면 안중근 의사의 휘호를 넣어놓았다. “인(人)무(無)원(遠)려(慮) 난(難)성(成)대(大)업(業)”-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않으면 큰일을 이룰 수 없다. 원대한 포부를 가지지 않으면 큰일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성도님들과 동일하다. 하나님은 성령의 인도하심과 꿈과 비전 있는 사역 외에는 있을 수가 없다. 그것이 섬김의 변함없는 원리이다.

*사도행전 16:10,
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다. 우리 사랑글로벌 2기 졸업생은 특별히 유념해야 될 것은 생명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하여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 끝날까지 이 세상의 증인들이다. 증인이란 목숨을 걸고 사실 그대로 증거 하는 것이다. 그래서 증인과 순교자의 어근은 다 같다. 그러니까 이 졸업생들은 이 사역이 명백히 면면히 흘려가야 한다.

*마가복음8:35b,
35b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예수님께서 자신과 복음을 동일선상으로 놓으셨다. 복음과 동일시-모든 믿는 자에게 복음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는 것이다. 신앙이란 나가서 감당할 몫은 우리가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보혈의 피로 다시 회복되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 삶 속에서 확장되는 것이다. 신앙은 예수님의 생명이 내 삶 속에서 확장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생명이 확장 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처음부터 생명사역이다. 교회가 만들어진 것도 생명사역을 위하여 기독교의 순교 역사도 생명복음이다. 원시 복음도 생명나무가 나온다. 선악을 알게 한 나무와 생명나무가 나온다. 주님은 우리에게 선악의 나무를 선택하지 말고 생명나무를 선택하라고 하신다. 생명의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을 오늘 2기 졸업생들은 생명나무를 선택하는 자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 선택은 타락 이전에 하나님과의 교제가 완벽하게 있고 빛 가운데 거하는 것이고, 생명나무 선택은 자기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이고, 선악을 나무가 아니라, 생명나무를 선택한다는 것은 사건이 많이 있을 때마다 비록 나에게 상처를 주고 나를 모욕하고 어떨 때, 나를 빰을 때린다고 할지라도 그 상처에 모욕에 집중하지 아니하고 생명나무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생명을 선택하는 것이다. 반면에 선악의 나무를 선택한다는 것은 자기 판단의 생각과 자기중심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선택하지 말고, 생명나무 기도하고 오래참고, 나를 대적하고 나를 어렵게 하는 사람들을 주님께 맡겨버리는 것이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주님 앞에 주님을 기억하면서 예수님께 맡겨버리면 된다. 그러면 손해인 것 같지만 결과는 생명이고 결과는 죽음이고 따라서 우리 모두는 앞으로 졸업생은 생명의 복음을 전하고 선택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각오를 해야 한다. 수많은 디시즌(decision)해야 할 때, 가족, 자녀, 모든 교우들, 친구, 이웃들과의 결정이 있을 것이다. 요즘 결정 장애 증후군인 들이 많다.
수많은 일들 앞에 선택할 때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에 결정해야 한다. 기도의 지팡이를 들고 내 스타일로 하지 말고 모든 일을 선택을 할 때 여기에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로 결정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도하실 것이다.

*아브라함 카이퍼 미국 캘빈신학교에서 프랑스혁명을 반대하면서 가진 그 기백을 가지고 캘빈 신학교가 모토로 생명을 주님께 올려 드린다고 했다.-My heart I offer to You Lord, promptly and sincerely. 앞으로 주님의 일을 감당할 때에 생명의 복음을 선포하는 선택을 해야 한다.

♣요약
SAGA 2기 졸업생들을 축복하며, 우리 모두가 오늘 이 말씀을 붙잡아서 우리를 통하여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구하며, 우리 모두가 생명의 복음을 선포하는 자로 거룩한 환상과 복음의 능력이 충만한 변함없는 섬김의 능력을 가지고 생명나무를 선택하는 평생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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