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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2월 1일)
제목: "승리의 시작, 마음의 할례"
말씀: 여호수아 5:2~9
찬양인도: 쉐키나()
사회:

설교자: 백요셉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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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5:2~9,
2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3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
4 여호수아가 할례를 시행한 까닭은 이것이니 애굽에서 나온 모든 백성 중 남자 곧 모든 군사는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길에서 죽었는데. 
5 그 나온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았으나 다만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길에서 난 자는 할례를 받지 못하였음이라.
6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의 음성을 청종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맹세하사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들이 보지 못하게 하리라 하시매 애굽에서 나온 족속 곧 군사들이 다 멸절하기까지 사십 년 동안을 광야에서 헤매었더니. 
7 그들의 대를 잇게 하신 이 자손에게 여호수아가 할례를 행하였으니 길에서는 그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못하였으므로 할례 없는 자가 되었음이었더라.
8 또 그 모든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마치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 머물며 낫기를 기다릴 때에. 
9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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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3년 1월 21일)
제목: "가족을 위한 기도 지팡이"
말씀: 사무엘상 1:26~2:1
대표기도: 노영훈 장로님(당회서기)
찬양인도: 창목회
말씀읽기: 천예준 어린이(소년부), 김예린 어린이(초등부)
사회 : 김도훈 부목사님(예배)

사회: 조성환 부목사님
(SaGA 사역, 찬양사역부-설날 찬양 음악회)
사회: 이민형 부목사님(주일학교 팀장)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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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1:26~2:1,
26 한나가 이르되 내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내 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 
27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내가 구하여 기도한 바를 여호와께서 내게 허락하신지라.
28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가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2:1
1 한나가 기도하여 이르되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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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현 담임목사님(가족을 위한 기도 지팡이)
-할렐루야!!!~
영하 12도에 최근 들어서 토비새에 제일 추운 날인 것 같은데 다를 그대로 이 새벽에 우리를 불러주신 주님을 우리는 찬양한다. 오늘 찬양대가 그 모든 민족을 찬양을 했는데 교역자인 창목회가 찬양을 했다. 사랑의 교회 한 해 교역자들의 섬김을 통해 수많은 영혼들이 주님 앞에 돌아오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오늘 이 성경 봉독을 또박또박하게 한 어린이를 축복한다. 하나님께서 맞춤의 은혜를 주시를 바란다. 오늘 새벽에 제가 나오면 이 교회 교통봉사 사역을 위한 분들과 인사를 하는데 오늘은 교통봉사 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는데, 오늘은 순장님들이 거의 나오셔서 봉사를 하셨다. 일부러 다 나오실 뿐만이 아니라 가족들과도 다 왔다는 것이다. 우리 순장님들과 이 새벽예배에 참여하신 모든 성도님들을 한 분 한 분도 축복한다. 오늘 성경고사 대회에서 드디어 처음으로 전국성경고사 대회에서 저희 교회가 1등을 했는데 제가 새벽에 나와서 이렇게 인사를 하니까, 아이들이 “목사님, 가까이서 뵈니까 더 감사하네요.” 한다. 아이들이 그렇게 말하니 제가 깜짝 놀랐다. 그래서 제가 “나도 그렇다. 이 새벽에 너희들 이렇게 나오니 너무 감사하다.”라고 했다. 우리 아이들 가운데 평양시장, 각국 각처의 유능한 인재들이 나올 줄 믿는다. 자, 우리는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을 산다. 어떻게 하면 제대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가? 작년 가을부터 하나님께서 아주 중요한 슬로건을 주셨다. ‘사람에게는 진심으로, 하나님께는 전심으로’, 그리고 
Sincere heart to people-사람에게는 진심으로, 
Wholeheartedly to God.-하나님께는 전심으로.
 
그러면 어떻게 하면 진심과 전심을 담을 수 있는가? 어떻게 진심과 전심의 사람이 되는가? 그렇게 기도하면서 보니 진심과 전심을 다음을 만한 그릇이 되어야 한다. 진심과 전심을 담을 만한 그릇이 되어야 한다. 믿음의 용량이 준비되어야 한다. 새벽이니까 더 잘 쏙 쏙 들어올 줄 믿는다. 그릇이 준비되어야 하는데 그릇은 고난과 믿음의 용량(用量), 이 두 가지가 같이 가야 강하고 믿음의 용량을 같이 가야 이 그릇이 준비되는 것이다. 아멘, 고난과 믿음의 용량이 같이 가는 핵심, 우리가 평생 붙잡을 만한 뭐가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그것이 바로 모세가 하나님께서 사명을 주시고 사명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라는 출애굽에 대한 엄청난 사명이고 엄청난 그릇의 준비인데 그것을 위해 수많은 고난을 겪에 하시고 심지어 뱀 꼬리 잡으라고 하시고, 그렇지 않은가? 뱀 꼬리 잡으면 그 당시 살모사, 죽는 것이다. 죽음을 각오한 그 전력투구(全力投球)를 하니까 뱀 꼬리를 잡으니 뱀 꼬리가 지팡이가 되었다. 그 지팡이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지팡이를 가지고 아멜렉도 승리하게 하시고, 지팡이를 가지고 반석에서 샘물도 터트리게 하시고, 그 지팡이가 단순한 지팡이가 아니라, 고난과 믿음의 사명이 같이 결합된 지팡이가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새벽에 적게는 이런 지팡이를 가지고 나오고 크게는 이런 지팡이를 가지고 나온다. 제가 앞으로 무얼 할 건가 싶은가하면, 컬렉션을 해보고 싶은데, 지팡이만 한 번 해볼까? 한다.
 
제가 몇 년 전에 덴버신학교에 가니까 창설하신 유명한 닥터 버넌이란 분이 유명하셨는데 그분은 그 컬렉션, 그분은 지팡이를 모으는 취미를 가지고 계셨다. 전 세계적인 양과 목자의 지팡이를 가져다가 딱 서재에 걸어놓았다. 여러분, 지팡이를 한 번 수집해 보겠는가? (가장 강하고 튼튼한 지팡이가 가장 비싸다-대추나무에 번개 맞은 지팡이가 가장 상품)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지팡이가 무얼 상징하는가? 고난과 믿음의 용량이다. 하나님은 항상 고난과 믿음의 용량을 가지고 그 사람을 쓰시고, 민족을 구원하시고 시대를 새롭게 하신 줄 확신한다. 제가 새해 많은 분들에게 이렇게 인사가 오면 저도 간단한 답을 드리는데 거기다가 꼭 쓰는 이야기가 새 한 해에, 새 은혜에, 새 역사가, 일어나게 해달라고 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 우리가 마음에 갖고 있는 이 지팡이를 통하여 기도의 지팡이를 통하여 새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란다. 오늘 기도의 지팡이의 예를 사무엘상 1:26-2:1절까지 한나의 기도의 지팡이를 이야기 하겠다. 앞으로도 더 이야기를 할 텐데, 한나의 기도의 지팡이의 오늘 핵심은 사무엘상 12장에 보면 사무엘이 뭐라고 하냐면 한나는 기도의 어머니로 기도의 지팡이로 본을 하나 보여주었다. 그 때 한나로 끝난 게 아니라 이 기도의 지팡이가 누구에게 전수가 되었는가? 사무엘에게 전수되었다. 사무엘이 기도의 지팡이를 가지고 은혜를 받고 난 다음에 나중에 기도의 응답을 가지고 이제 예루살렘 성막에서 그 사명을 감당하는데 기도의 불이 꺼지지 아니하였다. 그러니까 사무엘이 성막에서 수종들 때는 불이 꺼지지 아니하였고 그것이 연계 되어서 사무엘상 12:13절을 보면.
 
*사무엘상 12:23,
23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
-기가 막힌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한나의 기도의 지팡이가 사무엘에게 기도의 지팡이와 연결되고 반대로 한나의 기도의 지팡이가 사무엘의 강력한 기도의 지팡이로 계승이 된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 모든 기도의 지팡이, 앞으로 여러분들의 기도의 지팡이를 가지고 올 때마다 먼저 이제 한나를 생각해 보고 그리고 한나에게 이 기도이 지팡이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전수가 되었는데, 이 기도의 지팡이는 한나에게도 꼭 같다. 모세에게도 고난과 믿음의 용량이라는 믿음의 용량이라는 그 두 가지로 사람에게는 진심, 하나님께는 전심으로 쓰임 받도록 만들어 주셨는데 한나에게도 기도의 지팡이를 들도록 하나님께서 한나에게 고난을 주셨다. 오늘 사무엘상 6절을 보면, 어떤 고난을 주시는가? 
 
*사무엘상 1:6,
6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그의 적수인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
-그 당시 히브리 사회, 이스라엘 사회에서 자식이 없는 것은 하나님이 너를 축복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니까 한나 입장에서는 너무 괴로웠고 더더구나 다시 5절에 보면,
*사무엘상 1:5,
5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妊娠)하지 못하게 하시니. 
-기가 막힌 것이다. 뭐 브닌나를 어떤지 잘 알 것이다. 남편이라고 있는데 자기가 애를 못 낳으니까 ‘브닌나’라는 여자를 데려와 아이를 척척 낳는 것이다. 그러나 한나는 못 낳고 그것도 한나에게 태(胎)의 문을 안‘열어 주시니까 어떻게 보면 고난도 이런 고난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핵심(核心)은 모든 고난(苦難)은 기도(祈禱)의 지팡이를 들게 하는 초청장(招請狀)이다. 여러분이나 저나 우리의 삶의 모든 일이 다 순적하기만 하겠는가? 그런데 모든 종류의 고난은 기도의 지팡이를 들게 하는 초청장이다. 그래서 기도하는데 한나가 처음 기도할 때는 “하나님, 아들을 주시옵소서!” 기도했다. 그러다가 한나가 나중에는 기도를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냐면, 내가 억울하고 힘드니까 나에게 아들을 달라고 기도한 것이다. 기도하다가 가만히 보니까 하나님께서 한나에게 사명을 주신 것이다. ’아. 이 아들을 주실 때에 내가 이 아들을 드리겠나이다.’ 라고 한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사람에게는 진심, 이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께는 전심으로 기도의 지팡이를 들어야 하는데 기도가 통곡할 정도로 기가 막혔지만 11절에 보면 이 말씀이 핵심이다. 
 
*사무엘상1:11,
11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이제는 한나의 아들을 자녀를 달라고 이전에도 기도를 했을 것이다. 기도하는데 어느 순간 기도의 깊이와 기도의 지팡이를 높이 들고 주님 앞에 기도하나까 영적인 통찰력과 쉽게 이야기 하면 영적인 물미가 터진 것이다. ‘아, 이 자녀가 내 자녀가 아니고 하나님이 주시는 자녀이네. 하나님이 주실 자녀이면 정말 귀하겠다.’라고 생각하면서 한나의 마음속에는 이런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간절히 기도했지만 ‘나보다도 하나님이 나에게 더 주시기를 원하시겠구나.’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여러분 이것이 이해가 되는가? 여러분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우리가 진짜 원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지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라며 내가 원하는 것보다도 하나님이 더 주시기를 원하신다. 다시 말하면 내가 주시기를 원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더 주시기를 원하신다. 그것이 확신이 되는 순간 한나가 다시는 얼굴에 수색이 없어졌다. 
 
*사무엘상1:18,
18 이르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
-수색이 없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기도의 지팡이를 들 때 한나는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한다. 저는 한나는 자기를 생각해 달라는 것이다. 기억해 달라는 것이다. 여러분 기도는 기억해 달라고 해야 한다. 내가 내게 소원하는 것을 요청하는 것보다도 하나님이 나에 대한 더 귀한 것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 여러분 이 자녀는 나중에 내 자녀이기 전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부모들은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께 렌트하신 것이다. 깊은 내용들은 오늘 다 못할 것 같고 오늘 명절 특별 음악회가 있기 때문에 이정도로 마치려고 한다. 전심과 진심은 고난과 믿음의 용량의 핵심중에 하나가 기도의 지팡이이다. 기도의 지팡이를 들때는 한나가 기가 막히게 고통스러웠다. 그게 초청장이다. 그래서 깊은 기도의 경지에 들어가면 내가 요청하는 것보다도 하나님이 나에게 필요한 것을 더 잘 알고 계신다. 그리고 얼굴에 수색(愁色)이 없는 것이다. 나중에는 욥기도 하겠지만 우리가 기도의 지팡이를 높이 들자. 가지고 온 지팡이를 들고 내 영혼 주 찬양하자. 2장 1절을 보면, 한나가 너무 감사해서 
 
*사무엘상 2:1,
1 한나가 기도하여 이르되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오늘 영하 10도 넘는 이 어려운 가운데 새벽에 이렇게 나와서 명절 특별기도회를 기도의 지팡이를 높이 들고 있는 우리를 하나님은 응답해 주시리라 믿는다. 오늘 기도할 것은 사람에게는 진심, 하나님께는 전심으로 되어 고난과 믿음의 용량을 가지고 우리의 믿음의 용량을 키워주시는데 거기에 맞는 것이 기도의 지팡이이다 오늘 모세에게도 기도의 지팡이를 들게 하셨듯이 한나에게도 이런 기도의 지팡이를 들게 하시는데 한나에게는 고난과 어려움이 기도의 초청장이었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심정을 깨닫게 되고 아, ‘내가 원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더 귀한 것을 주시길 원하시구나!’ 를 깨닫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그 얼굴에 수색이 없고 하나님께 맡기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 맡기게 되니까 사무엘이 태어나고 한나의 기도가 사무엘에게 전수가 되어서 사무엘은 하나님 앞에 기도의 쉬는 죄를 범치 않았다. 
 
♩내 영혼 주 찬양하며~♬~~~
♣요약
여기서는 기도의 영과 아울러 예언의 영으로 감동받은 한나의 감사가 나온다.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살펴볼 수 있다. 
첫째, 한나는 하나님이 자비를 베풀어 주시사 감사하고 찬양함으로써 그 사실을 시인하였다. 감사는 우리가 마땅히 바쳐야 할 세금과도 같은 것이다. 
둘째, 한나가 받은 자비는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다. 그래서 한나는 특히 그것에 대한 감사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셋째, 한나의 감사를 여기서는 기도라고 한다. 왜냐하면 감사는 기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앞에서 간구했을 때는 그 음성이 들리지 않았으나 감사의 기도를 드릴 때는 모두들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한나는 말할 수 없는 신음으로 간구했으나 이제는 입술을 열어 하나님께 찬양을 올린 것이다. 한나의 감사에서 세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사람에게는 진심, 하나님께는 전심으로 되어 고난과 믿음의 용량을 가지고 우리의 믿음의 용량을 키워주시는데 거기에 맞는 것이 기도의 지팡이이다 오늘 모세에게도 기도의 지팡이를 들게 하셨듯이 한나에게도 이런 기도의 지팡이를 들게 하시는데 한나에게는 고난과 어려움이 기도의 초청장이었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심정을 깨닫게 되고 아, ‘내가 원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더 귀한 것을 주시길 원하시구나!’ 를 깨닫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그 얼굴에 수색이 없고 하나님께 맡기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 맡기게 되니까 사무엘이 태어나고 한나의 기도가 사무엘에게 전수가 되어서 사무엘은 하나님 앞에 기도의 쉬는 죄를 범치 않았다. 우리도 그러한 기도의 지팡이를 들고 주님을 간절하게 사모하여 현장예배와 헌신으로 주님께 나아가야 한다. 
--------------☆ 설날 찬양 음악회 ☆---------------
●소프라노:-최재연(입맞춤) 
●테너:이정명(그대는 나의 모든 것)
●메조 소프라노: 양송미(내 마음은 당신의 목소리에 열리고, 믿음의 고백)
rㅏ 사무엘 윤(더 이상날지 못하리)
●사무엘윤, 이정명(믿음의 고백)
●사무엘윤, 이정명, 최재연, 양송미(물 위를 걷는 여자)
●피아노:???

♧요약
한나가 어떻게 아들을 바쳤는가 보자. 첫째, 제물과 함께 : 수소 셋과 소제물을 바쳤다(24절). 어린 아이의 나이 한 살마다 수소 한 마리씩 바친 것인지도 모른다. 또는 수소 한 마리는 번제로 또 한 마리는 속건제로 드리고 마지막 한 마리는 화목제로 드린 것인지도 모른다. 둘째, 자신의 기도에 응답해 주신 하나님은 선하심에 감사함으로 : 한나는 그것을 엘리에게 표시하였다. 왜냐하면 엘 리가 그녀에게 용기를 주어서 안심하고 기도의 응답을 바라게 되었기 때문이다(26,27절).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27절). 셋째, 한나는 이 아이에 관한 모든 권리를 하나님께 바쳤다.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28절).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먼저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여 얻은 것이다.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 29:14,16). 이 기사에 의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빌려드리는 것이라고 한다. 세례를 통해 우리의 자녀를 하나님께 바칠 때는 그들이 엄연히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먼저 기억하도록 하자. 게다가 그들이 여전히 우리의 위로가 되는 우리의 자녀란 사실을 기억하도록 하자.
(5) 어린 사무엘은 그 또래의 아이들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일을 하였다. 그 아이는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28절). 즉 그는 기도를 하였던 것이다. 어린 아이들은 일찍부터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하며 예배드리도록 인동해서 가능한 한 그들이 예배에 동참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예배를 기쁘게 받으실 것이며 그들이 더 훌륭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가르쳐주실 것이다.


ㅡ여기서는 기도의 영과 아울러 예언의 영으로 감동받은 한나의 감사가 나온다.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살펴볼 수 있다. 첫째, 한나는 하나님이 자비를 베풀어 주시사 감사하고 찬양함으로써 그 사실을 시인하였다. 감사는 우리가 마땅히 바쳐야 할 세금과도 같은 것이다. 둘째, 한나가 받은 자비는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다. 그래서 한나는 특히 그것에 대핸 감사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셋째, 한나의 감사를 여기서는 기도라고 한다. 한나가 기도하여(1절). 왜냐하면 감사는 기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앞에서 간구했을 때는 그 음성이 들리지 않았으나 감사의 기도를 드릴 때는 모두들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한나는 말할 수 없는 신음으로 간구했으나 이제는 입술을 열어 하나님께 찬양을 올린 것이다. 한나의 감사에서 세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 설날 찬양 음악회 ☆-----------------------------

●소프라노:-최재연(입맞춤) 
●테너:이정명(그대는 나의 모든 것)
●메조 소프라노: 양송미(내 마음은 당신의 목소리에 열리고, 믿음의 고백)
●베이스: 사무엘 윤(더 이상날지 못하리)
●사무엘윤, 이정명(믿음의 고백)
사무엘윤, 이정명, 최재연, 양송미(물 위를 걷는 여자)














































                                                                                     ☆성경고사 시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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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2년 12월 25일)
제목: "마침내 품에 안은 성탄 선물"
말씀: 누가복음 2:25~28
대표기도: 홍진기 부목사님(1부)
찬양인도: 쉐키나(), 영광찬양대(1부)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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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25~28,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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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현 담임 목사님
​-사랑의 교회는 성탄 죽하 예배 12월 25이 되면 자녀들과 잘 부르는 찬송이 있다. 탄일종이 땡땡땡!~~ 우리는 어릴 때의 생각이 날 것이다. 오늘 순전하게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께서 오늘 여러분에게 축복하실 것이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사랑합니다. 우리는 부모님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사랑합니다. 이것을 부르고 말씀을 전하겠다.
 
1. 탄일종이 땡땡땡(땡땡) 은은하게 들린다,
저 깊고 깊은 산골 오막살이에도
탄일종이 울린다.(땡땡)
2. 탄일종이 땡땡땡(땡땡) 멀리멀리 퍼진다,
저 바닷가에 사는 어부들에게도
탄일종이 울린다.(땡땡)
3. 탄일종이 땡땡땡(땡땡) 부드럽게 들린다,
주 사랑하는 아이 복을 주시려고
탄일종이 울린다.(땡땡) ♩
 
너무 귀한 시간이고 성탄주간이고 또 송년 주일이다. 다음주일은 새해주일이다. 이처럼 성탄 주일과 송년 주일이 겹치는 것은 앞으로 11년 뒤에 있을 것이다. 2034년에 있을 것이다. 그 사이에 정말 우리가 은혜를 받아야 되는데 오늘 말씀은 “마침내, 품에 안은 성탄 선물"로 전하겠다. 여러분은 성탄절에 무슨 선물을 받았는가? 안 받았는가? 어떤 집안은 대학입학이라는 좋은 선물을 받은 집안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집안은 취직이나 승진을 해서 받은 선물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집안은 건강이 다 회복된 건강회복의 선물을 받은 집안도 있을 것이다. 교회적으로는 이렇게 유아 세례를 받는 것도 예수님의 축복의 선물이라 생각한다. 어제 우리는 세시봉 콘서트를 선물로 받았다. 50,60,70,80 세대가 좋았다. 세시봉이 아니라 네시봉 이었다고 했다. 여름에 ‘플레닛쉐이커스(Planetshakers)’에는 10대 20대가 참으로 사랑의 큰 선물이었다. 오늘 오신 모든 성도님들께 다시 한 번 성탄 선물을 드리고 싶다. 지금 천장에 선물이 있는데 내려 보아라. 받아 보기를 바란다. 저 별과 함께 내려올 때, 기대와 소망이 내려온다고 여기면 된다.
 
선물 중에 최고의 선물은 아이를 낳지 못한 사람들 중에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께 받은 최고의 선물이다. 이삭을 주신 것이다.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민족의 최고의 선물은 지도자 모세였다. 온 인류가 하나님의 부름 받은 최고의 선물이 예수 그리스도의 선물인 줄로 확신한다. 이삭은 가정의 최고의 선물이며,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신 자녀의 최고의 선물이며 그러나 예수님은 온 인류를 위해 찾아오신 최고의 선물인줄로 확신한다. 오늘 이렇게 천장에서 이렇게 선물이 내려왔는데, 동방박사들이 유황과 몰약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께 드렸는데, 인간적으로 보면 아!! 선물 드리고 경배만 드린 것 같은데, 아니다. 이들은 누구를 만났는가? 메시아를 만났다. 이들의 인생사를 바꾸는 메시아를 만난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동방박사 이들은 최고의 선물을 자기가 평생 경배할 대상을 만났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어떤 선물을 받았는가?

*에배소서 2:8,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

*로마서 5:15,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의 선물이 넘쳤다고 했다. 성령님을 통하여 주셨음을 확신한다. 이 선물에 대해서 우리는 생각할 것이 있다. 그것은 너무나 실력 있고 너무나 고귀하고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은 이것은 우리가 값을 지불할 수가 없다. 너무나 고귀한 것은 선물로 받을 수밖에 없다. 꽃 한 송이, 물 한 방울, 하늘의 별빛, 세상의 공기, 우리가 당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다 선물로 받을 수밖에 없다. 여러분 지금 꽃 한 송이, 물 한 방울, 그리고 하늘에 별, 새의 지저귐, 신선한 공기, 한 번 숨을 쉬어보라. 오늘 저희 교회의 이 본당의 공기가 설악산 공기보다 더 좋다. 알 사람이 없도다. 선물이다. 아니 인생의 일분이 일초가 다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여러분들이 깨닫기를 바란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세상 음식은 살 수 있지만, 입맛은 살 수 없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사랑을 살 수 없다. 아무리 능력이 많아도 꽃 한 송이 만들 수 없다. 다 하나님의 선물일 수밖에 없다. 우리의 최고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이 본문이 최고의 선물을 받은 사람이 한 사람이 있다. 바로 시므온이라는 사람이다.
 
*최고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다.
그는 오랫동안 기다리며 예수님의 인격을 선물을 받았다. 최고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다. 시므온이라는 사람을 여러분이 잘 알 것이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보겠다. 25-26절에 네 가지로 되어있다.
 
*시므온이라는 사람은
1. 의롭고 경건한 사람-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노력하고 애쓰는 사람이다.
2.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 메시아를 사모하고 위로로 받는 자였다.
3. 성령이 그 위에 계시는 사람이다. 성령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새로운 세대가 열린다.
4.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아니하리라는 약속을 받은 것이다.

*누가복음 2:25,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첫째,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했다.
​-시므온의 인간 됨됨이가 보인다. 의롭다는 것은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지시를 받으며 살려고 노력하는 자이다. 경건했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으로 순종했다는 것이며 매일 자신을 돌아보며 사는 자라는 뜻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예배의 온 성도님들, 시므온처럼 의롭고 경건한 은혜를 선물로 받기를 소망한다.
 
사랑의 교회는 예수님의 온전한 제자가 되기를 온전한 주님을 닮아가려는 제자가 되기를 그 은혜의 고봉에 올라가려고 노력한 자들이다. 이 온전한 고봉에 올라가려면 의롭고 경건하여 지기를 이 성탄에 채워지기를 소원한다.
 
*누가복음 2:25-26,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둘째,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
-유대들은 메시아 오시기를 정말 사모했다. 이스라엘의 참된 위로가 있으려면 메시아가 오셔야 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제일 위로가 되는 것은 메시아가 오시면 되는 것이다. 메시아가 안 오시면 어떤 것도 위로가 안 된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위로라는 말은 메시아를 나타내는 귀한 말이다. 이스라엘을 위로하다는 =메시아 오심이다. 오늘 여기에 참여한 여러분들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받은 줄로 믿는다. 우리는 모두가 다 메시아를 선물로 받는 줄로 확신한다.
 
*누가복음 2:25-26,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셋째, 심령이 그 위에 계시는 사람.
-시므온은 성령 충만한 사람이었다. 구약시대에는 특별한 사람에게만 성령이 머물렀지만 오늘 시므온 위에 성령이 함께 하셨다는 말은 이제 성령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주신다. 구약은 특별한 사람에게 성령이 계셨는데, 신약 시대에는 여러분 마음을 열고 성령을 의존하기만 하면 보편적으로 성령의 축복이 임하게 하신다. 그리고 우리를 녹이고 빚고 채우고 새롭게 사용하신다.
 
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넷째, 죽기 전에 그리스도를 보게 되리라는 약속을 받은 사람.
-무슨 말씀인가? 메시아를 만나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았다. 시므온은 성령을 받아서 새 시대를 여는 예수님을 눈으로 직접 보게 될 것이라고 약속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오늘 예루살렘 성전에서 메시아만을 고대하는 것이다. 어느 날 그의 나이가 80이 넘었는데 그의 손은 떨렸지만 수십 년간 젊은 부부가 아기를 안고 들어왔을 때, 혼자 속삭이며 성령께 질문했을 것이다. 주님 제 아이가 메시아 입니까? 아니야, 시므온아 기다려라. 그러던 어느 날 아기를 안고 들어오는 한 커플을 보았다. 소박하게 들어오는 부부를 시므온이 그들을 보고 수천 번도 더 주님께 여쭈어 보았다. “이 아기가 그리스도입니까?” 그럴 때 주님께서 확신을 주셨다. “그 아이가 그리스도이다.” 라고 하셨다. 그 순간 시므온의 심장이 쿵쾅 뛰었다. 시므온이 “내가 온 세상을 구원하신 이 메시아 구주를 품에 안고 있구나!” 한다. 시므온이 메시아를 안고 있는 그림을 하나 구했다. 너무 멋있다. 웬만하면 영상에 안 보여주는데 오늘은 보여 주겠다.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안고 있다. 그 광채가 보인다. 시므온은 미래의 메시아를 만났다. 예수님을 안은 것 때문에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인무원려 난성대업(人無遠慮 難成大業)이라는 말이 있다.(사람이 멀리 앞을 보지 못하면 큰 일을 이루기 어렵다) -안중근 의사- 사람이 기대하지 않고 꿈꾸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사랑하는 영 가족 여러분, 오늘 시므온이 가졌던 그 감격과 눈물과 찬양과 탄성이 우리에게 동일하게 임하기를 원한다.
 
인생 최대의 사건이다. 온 우주의 예수님을 내 삶에 모시고 사는 인생, 내일이 새로울 것이다. 우리가 깨닫지 못해서 놀라운 것에 놀라지 않는다. 가장 귀한 선물을 받았는데 인생을 적당히 살 수 있는가? 예수님을 제대로 믿으면 모두가 다 새롭다.
 
*놓아주신다.
​*누가복음 2:28-29,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오늘 이 고백이 우리를 위하여 놓아주시는도다는 이것이 여러분들에게 최고의 선물이기를 바란다. 이제는 놓아주신다는 말은 라틴어로 눙크 리미티스이다. 이제 놓아준다는 것. 밤새워 군인이 보초를 선 다음에 상관에게 보고하는 책임을 다했다는 보고이며 자유함을 누린다는 것이다. 모든 책임을 벗고 평안하다는 것이다. 놓아주신다는 것은 인생의 모든 사명을 다 마치고 이제는 해방이 된다. 이 29절이 특별한 찬송이 된다. 오늘 성탄 당일에, 우리 모두가 고백이 되어서 이 한해를 마무리 하면서 이제는 놓아주신다는 것을 확신하며 세상으로부터 모든 중독으로부터 놓아주심을 참 선포가 되기를 바란다. 밤새 철야를 마친 군인이 막사에 가서 보고를 마친 자유함이 바로 시므온이 그랬다는 것이다. 오래 동안의 인생의 의무가 끝난 것이다. 여기 포함되어 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기 이전에 내가 가졌던 방식, 나를 사로잡았던 모든 가치관으로부터 이재는 벗어나서 새로운 삶이 펼쳐지기를 믿는다. 이제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판단, 비판이 곱지 않았다면 이제는 하늘의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이다. 모든 시대정신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시므온이 메시아를 품에 안고 놀라운 고백을 한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은 예수님을 제대로 품으면 죽음도 두려움이 아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 값을 메길 수 없는 최고의 선물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는 것이다. 시므온처럼...

♧요약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우리의 품안에 주실 때, 주님의 참된 위로를 받아 의롭고 경건한 은혜로 평생에 승리할 것을 믿고, 시대정신을 초월하여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눙크 디미티스 같은 자유함을 누리게 될 것이다. 저 출산의 시대에 우리나라의 국가적인 문제를 깨달아서 품고 간절히 기도해 주고 유아세례를 받은 자녀들이 주님의 사랑으로 건강하고 아름답게 자라기를 소원한다.
 
-시므온과 안나는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영접했다. 이들은 제사장도 아니고 유명한 사람도 아니며 단지 메시야를 기다리며 의롭게 살아가는 평범한 노인들이었다. 그리스도는 이처럼 심령에서부터 당신을 간절히 사모하는 자들에게 임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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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2년 12월 24일)-성탄 새벽예배.
제목: "성탄의 새벽, 신부된 교회를 사랑하다"
말씀: 골로새서 1:24~27
대표기도: 이종숙 권사님(목양5팀 여직장인대교구장)
찬양인도: 목양5팀
말씀읽기: 이예진 학생(고등부), 이한일 학생(중등부)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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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1;24~27,
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25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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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짧은 시간이지만 말씀을 집중해서 하겠다. 우리가 살다보면 굴곡도 있고 낙심도 되고 어떨 때는 마음에 근심을 가질 때도 있지만 그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는 은혜의 원천이 무엇인가? 여러분과 저는 어디서 부름을 받고 어디서 능력을 받는가? 어디서 힘을 얻는가? 자 오늘 제가 ‘신부된 주님의 교회’는 눈에 보이는 이 교회 뿐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 자신의 삶도 그대로 같이 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교회 그러면 교회 눈에 보이는 유형교회 뿐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주님의 걸어가는 교회인 것이다. 눈에 보이는 교회를 어떻게 사랑하는가? 진짜 교회의 사랑의 강도가 내 생애의 방향과 완전히 결정적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이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나는 정말 교회와는 어떤가? 우선 여러분들의 삶의 힘의 근원이 무얼까? 오늘 본문 27절을 보면, 나는 어떻게 사랑하나? 나는 얼마나 교회를 사랑하나? 나보다 교회를 더 사랑하는가? 나는 평생 교회를 사랑할 수 있는가?
 
*골로새서 1:27,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세상 사람들이 살지 못하는 영적 비밀을 저와 여러분이 가지고 있다. 그것이 우리 속에 계신 예수님이 비밀이다. 오늘 성탄 새벽에 여러 이야기 보다도 성탄절 이후 새벽에 진짜 중요한 것을 말씀을 드리고 싶었는데, 우리가 힘의 원천, 삶의 능력, 어떤 불가항력, 그것을 어디서 받을 것인가? 기도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 모든 삶의 진짜 비밀과 능력의 원천은 우리 속에 계신 예수님이시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속에 능력의 비밀이라는 것은 공통된 현상이 있다. 그것은 24절에 있다. 우리가 예수님 임재하소서, 그리고 난 다음에 신부된 우리 주님을 간절히 갈망하오니!~~우리에게 여전히 임재하시고 우리를 붙잡아 주시고 역사하여 주옵소서. 이런 찬양 가사도 있듯이, 그런 찬양 하는 사람들에게 공통된 현상이 있다. 
 
*골로새서 1;24,
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힘의 능력의 원천에는 삶의 수많은 굴곡 가운데서도 한결 같은 시종일관 하는 능력의 비밀은 무엇이냐면 내 속에 계신 예수님가 비밀이다. 그것을 깨닫는 자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나는 공통된 현상은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는 것이다. 그것은 주님을 위하여 괴로움도 기뻐하는 인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위하여 기뻐하게 되는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육체에 채울 수 있는가?, 주님의 남은 고난이라는 것은 주님께서 구원사역의 고난이 남았다는 뜻이 아니다. 구원사역은 완벽하시다. 그 구원사역은 완벽하시는데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가운데 완벽성을 거처야 할 과정은 주님은 골고다의 고난도 겪으시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모욕도 당하시고, 어떨 때는 배고프시고, 수많은 짐들이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의 여정 가운데 신부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교회를 위하여 감당할 짐들이 있다는 것이다. 남은 거룩한 고난이 있다는 것이다. 고난은 고통당하는 것도 있지만 이게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여러분 오늘 나름대로 교회에 대해서 기준을 붙잡고 기도를 할 테인데, 여러분, 교회 생활, 여러 해 해왔을 것이다. 저는 우리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교회생활을 했다. 그러니까 제 나이만큼의 교회 생활을 한 것이다. 교회 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역사가 있다. 여러분 이 교회를 섬기면서 느끼는 것은 너무 힘드니까 그만 둘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우리는 끝까지 우리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우리는 교회생활을 하는 것이다. 맞는가? 아무도 예외가 없다. 그리고 끝까지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교회생활을 해야 여러분들의 삶이 보람과 마무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만약에 뭐가 잘못되어서 삐걱대어서 교회생활이 제대로 안 되고, 교회를 떠난다든지, 아니면 평생 사랑하는 교회가 없다든지, 평생 주님 앞에 설 때까지 교회생활을 힘 있게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교회생활을 잘 한다고 볼 수 없다. 그리고 교회가 얼마나 소중한지 여러분들을 알 것이다. 여러분 가정에 부부의 삶이 아무리 좋다하더라도 나는 교회가 시끄럽고, 교회 생활이 은혜가 없고, 교회 생활이 축복이 없으면, 부부의 삶이나 가정이 아무리 좋아도 언젠가는 힘들 때가 있다. 그런데 내가 나가는 교회가 항상 은혜스럽고, 거기가면 감격이 있고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주님이 함께 하신 것을 알고 기름부음이 충만하면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의 삶이 좀 부족함이 있어도 언젠가는 해결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부족해도 교회생활이 은혜가 있고 축복이 있으면, 주님의 교회가 축복이 되면, 언젠가는 우리의 삶의 어려움도 해결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주님의 교회는 늘 축복이 있는 줄로 확신한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눈을 여는 사람은 이런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은 끝까지 좀 부족해도 눈에 보이는 무형교회 기름부음 축복이 있는 줄 믿는다. 믿음의 능력, 믿음의 용량, 믿음의 기름부음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나는 어떻게 교회를 사랑하나? 나는 어떻게 내가 사랑하는 교회는 어느 정도 교회를 사랑하는가? 아니 내 주위의 귀한 신앙의 선배들, 목회하지 않고 일반 교우들이라 할지라도 그분들은 어떻게 교회를 사랑하는가? 제가 보니까 우리의 선대 어른들 가운데는 가족들보다도 어떻게 보면 자녀보다도 교회를 더 사랑했다 이게 좋다 나쁘다를 말하지 아니하고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다. 부족함이 있지만 ‘저는 저보다도 교회를 더 사랑하게 하여 주옵소서.’ 하는 마음이 항상 들었다. 나는 나보다도 교회를 더 사랑하고 있다. 제가 여러 가지 사역 중에 있지만 사역에 대외적은 데코레이션이고 진짜 중요한 것은 핵심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한 것이다. 나는 나보다도 교회를 사랑한다. 이런 마음이 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어떻게 나 자신보다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더 사랑하는가? 그리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 채우는가? 우리는 주님의 신부된 교회로서, 교회를 사랑하면 교회로서, 개인으로서 참으로 아름다운 줄 믿는다. 
 
바울은 어느 날, 그가 바울 되기 전에 그가 다메섹에서 꼬꾸라져 가지고, 그러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고 하신다. 이런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다. 그리고 직접 예수님을 핍박한 적이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님은 교회와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교회와 주님은 동일하시다.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교회를 사랑하고 그 교회 사랑을 하는 사람은 성탄이 좋다. 이 성탄의 계절에 어떤 수많은 일들이 지나가더라도 이 성탄은 기뻐해야 한다. 나보다도 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더 사랑하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축복하실 것이다. 결론적으로 여러분과 저는 평생 교회를 사랑할 교회가 있다는 것이 너무 좋은 것이다. 어떤 환경에서도 내 마음의 영적 고향인 주님을 평생 사모할 교회가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해외에서도, 우리가 어딜 가도, 그 교회 하나 하나가 또 시골 교회도, 그 교회 모두가 평생 사랑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지금도 부친 교회에 가면 내가 평생 사랑하는 교회가 된다. 내수동 교회도, 미국 남가주사랑의 교회도 그렇다. 우리 사랑의 교회는 말할 것도 없다. 여러분, 섬기는 교회가 평생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평생, 우선은 개인적으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평생을 사랑하는 교회가 있으면 한국교회의 전체도 자연스럽게 사랑하게 될 줄로 믿는다. 한국교회와 선지자들을 막 뭐라 하고, 한국교회를 비판하고, 주위교회를 함부로 말하지만 우리는 평생 살아가는 교회를 사랑하고 같이 가슴 아파 해야 한다. 그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워야 한다. 그의 몸 된 교회를 개인적으로 우리 교회도 기도의 제목이 되어서 나의 기도라고 여기고 기도해야 한다. 나에게 이 교회를 나의 육체에 채우라고 하시는구나, 로 여기며 사랑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고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한국교회 전체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이런 마음으로 우리가 결단해야 한다. 성탄의 새벽, 주님의 신부된 교회를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 교회를 우리 가정보다, 자신보다도, 이 교회를 더 사랑하는 평생이 되기를 소원한다.
 
♪예수님 임재하소서!♬ 
 
♣요약
성탄의 기쁨이 온 만방에 전해져서 주님의 빛으로 어둡고 후미진 곳에 비추어 주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고, 우리는 걸어다니는 교회로서 주님의 자녀로서 헌신하고 봉사하며 기도의 지팡이를 높이 들고 첨예한 갈등은 사라지고 평화와 새 날이 그곳에 예수님의 사랑과 빛이 환하게 비추어 주시길 기도해야 한다. 모두의 교회의 전체가 사랑이 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교회를 사랑하면 믿음의 용량을 결정짓는다. 늘 교회와 이웃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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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12월 21일) 
제목: "나의 거처를 어떻게 예비해야 할까?"
말씀: 요한복음 14:1~4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설교자: 안승훈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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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1~4,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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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승훈 부목사님

-은혜를 사모하면 믿음 보고 수요저녁기도회에 오신 여러분들을 환영한다.
 
여러분들께서 이 시간을 통하여서 회복을 넘어 부흥의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렇게 인사를 해보도록 하라. “집사님, 당신의 거처는 예비 되셨는가?”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아라. “당신의 거처는 예비 되었는가?” 자신 있는 분은 “예”라고 대답하시고, “아직 준비 중 입니다.”라고 대답하시는 분도 계신다. 의식주(衣食住)의 3대 문제 가운데 우리가 의(衣)와 식(食)은 여러분들이 해결하고 오셨을 것이다. 옷 입고 식사하고 오셨을 것이다. 그런데 주의 문제는 주는 우리가 오늘도 해결되었다고 담대히 말할 수 없는 것은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 중에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실제로 작년 말에 이런 결과가 발표되었다. 우리나라 중산층이 중간 가격에 서울에서 구매하려고 한다면, 20년을 꼬박 일하고 다른 돈을 한 푼도 쓰지 않아야 가능하다. 라는 통계가 나왔다.
 
그 말인 즉슨 우리가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아무것도 입지 않고 20년을 살아야 한다는 말인데 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실은 우리에게 필요한 시간은 30년, 어쩌면 40년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할 수 있는 시간은 대부분의 봉급을 집을 위해서,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서 써야 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이 자리에 계신 많은 분들이 “거처가 준비되셨습니까?” 하면 자신 있게 ‘예’라고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예”라고 대답하신 분들 가운데 “내 거처는 예비 되었는데, 생각해보니 내 자녀의 거처를 이제 예비해야 하는데, 그것은 아직 고민 중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예비해야 할지 너무나 막막합니다.” 라고 하시는 분들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우리에게 이 거처의 문제를 내가 해결해 주겠다고 한다면 그것만큼 환영할 일이 없겠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거처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다고 하신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말씀을 들어보겠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주신 거처는 어떤 것인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시는 거처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I.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시는 거처는 ‘아버지의 집’이다.
 
a)우리를 위해 예비 되는 거처는 ‘아버지의 집’이다.
*요한복음 14;2,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집인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 모든 성도들의 아버지이시기도 하다. 그래서 이 말씀을 듣고 나면 새로운 거처를 준비하시는 줄 알았는데 이미 내 아버지 집을 나에게 집을 다시 주신다고 하신다. 제 명의의 별도의 집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사시는 그 집에서 살라고? 실망스러워 하는 성도님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께서는 내 명의 다른 집을 주시겠다고 오늘 말씀하시는 것은 물리적인 집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런데 혹여 이것이 실망스럽다 하더라도 계속해서 들어보라.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집’은 건물로 생각되는 그런 집이 아니다. 이스라엘에서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할 때, 대부분의 경우에 이것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를 의미한다. 아버지를 믿는 자들의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내가 거처를 예비했다.”라고 말씀하실 떼, 첫 번째 특징은 우리가 거처하는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공동체, 하나님의 자녀들이 함께 거하는 그 가족을 위하여서 예비하신다는 것이다. 여전히 이 땅의 어떤 물리적인 땅과 집을 원하시는 분들께는 좀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의미로 실제적인 건물로서 아버지의 집을 언급하실 때가 있었다. 그것이 언제였냐면, 바로 성전의 대해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집을 청결하게 하시기 위해서 ‘이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성전 뜰에 가득했던 짐승들을 몰아내셨다. 그리고 이때, 예수님께서 예비하셨던 이 집이 바로 성전 독 체, 가운데 있는 성소뿐만이 아니라, 그 옆에 있는 회랑들과 그의 딸린 많은 방들과 그리고 뜰들이 붙어있는 물리적인 집이었다. 이 집을 예수님께서 청결하게 하시고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것을 만인에게 돌려주셨다. 이것은 모든 백성을 구원하시겠다는 어떤 상징적인 의미일 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성전에 예비 되어 있던 이방인의 뜰이라는 공간을 다른 이방인들이 볼 수 있도록 그곳을 점거하던 모든 것들을 치우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것이었다. 여기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시는 거처 두 번째 특징이 나타난다.
 
b) 우리를 위해 예비되는 거처는 ‘이미’ 마련되어 있다.

*요한복음 14;2,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많도다. 이 ‘많도다’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집의 공간이 많다. 많으니까 그곳에 와서 한 곳을 점거하면서 살아라, 는 그저 많다는 수량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린 아이가 손에 쥐고 있던 과자를 떨어뜨렸을 때, 아앙! 울 때, ~ 그 아이를 달랠 때, “아주 많아”, 많아~~ 그 아이에게 이야기 하는 것은 어른으로서 많이 있어, 많다고 자랑하려고 수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너를 위해서 충분히 예비 되어 있다.’라고 말하는 위로의 말이다. 예수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의 집이 예비 되어 있고, 이 많은 사람들이 예비 되어 있다.”라고 말씀하실 때에 그 은혜를 이미 아시는 여러분들께서는 오늘 설교의 비밀을 다 아시는 분들이시겠지만 아직 나를 위한 물리적인 공간이 필요하여 좀 더 들어보고자 하시는 분들께서는 예수님께서는 ‘너를 위하여 필요를 하는 그것을 이미 충분히 예비하였다.’ 라는 음성을 들으시면 좋겠다. ‘그렇지 않으면, 이미 너에게 말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만약에 이것이 충분하지 않으면 나는 솔직하게 말할 사람이야. 내가 너희에게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그저 너희를 위로 하려고 많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너희를 위한 거처가 이미 많이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오늘 말씀을 보면, 많은 공동체가 우리를 위해 예비 되어 있고, 많은 방들이 주님의 거처가 이미 거할 곳이 우리에게 예비 되어 있다면, 대체 왜? 그곳을 예비하러 가시는가? “내가 그것을 예비하러 가노라.” 라고 주님께서 선포하시는데, 예비하러 가시는 것은 사실은 준비되지 아니다. 우리가 이렇게 질문 드릴 수 있다. 그저 많은 사람이 다가오니까, 그 중에 한 명, 나 한 사람이니까, 오늘 주님께 와사 혹시 저를 위한 곳은 없나요? 이렇게 기도하면 “네가 누구더라, 이름을 좀 찾아보자.” “어 많이 있어 많이...너를 위한 공간이 많이 있어.” 라고 말씀하시면서 부랴부랴 돌아가셔서 그 장소를 혹시 준비하고 계신 것은 아니신가? 주님께서 그 장소를 예비 하러 가시는 곳에 이 장소가 이미 예비 되어 있다. 라는 반증이 드러난다.
 
제가 어린 자녀를 키울 때, 그 자녀가 스스로 정리 정돈을 잘 하지 못할 때, 아이들의 침실은 이미 있다. 그래서 이 아이가 밤에 잠들 공간은 이미 있다. 그런데 이 아이를 편히 그곳에 재우기 위해서는 저는 이 아이에게 먼저 젖병을 쥐어주던지, 장난감을 잠시 쥐어 주든지, 잠시 아이에게 기다리라고 말하고 먼저 앞서 그 장소에 들어가서 이불에 있는 장난감들을 다 치우고 아이를 눕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아이를 위하여 이미 침실이 예비 되어 있더라도 그곳에서 뒤척이다가 아이는 깨어나기 마련이다. 이미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거처를 태초부터 예비해 주셨지만 그 거처가 어느 샌가 오염되었다. 아까 말씀드린 성전에 실제로 물리적으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공간에 주님께서 그곳을 치우셔야만 만인이 와서 기도할 수 있게 되었던 것처럼, 우리를 위하여 주님이 이미 예비하신 공간이 있기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가서 치우시는 것이다. 그래서 이따가 말씀 드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신다고 하고는 우리와 잠깐 떨어져 계시지만, 우리에게 잠시 침묵하시는 그 시간이 사실은 우리에게 어찌나 복된 시간인지, 우리를 위해서 주님께서 우리 있을 곳을 예비 하시는 것을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시간인지 다시 말씀드리겠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거처의 세 번째 특징은 우리를 위하여서 공간을, 공동체를 예비하실 뿐만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갈 구체적인 삶을 주님께서 예비하시는 것이다.
 
c) 우리의 공간 뿐 아니라 우리의 삶도 함께 예비하신다.

*요한복음 14:2b,
2b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이것이 2절 말씀 세 번째 부분에 말씀이다. 2절 말씀에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신다는 세 가지 표현이 각기 다른 거처로 등장하는 것이다. 첫 번째 표현이 아버지 집, 보이코스 라고 표현되는 실제적인 한 집과 공동체를 의미하는 단어였고, 두 번째 표현이 그 집에 대비되는 전체의 커다란 공동체, 혹은 성전과도 같은 하나의 단지가 아니라 여러 개 있는 큰 단지를 예비하는 그 집뿐만이 아니라, 그와 대비 되는 우리 개인의 그 안에 주어진 공간, 즉 방을 의미하는 모네라는 단어로 거처이다. 우리가 거할 곳은 바로 모네라는 단어로 표현된다. 그런데 우리가 이 집에 큰 집이 우리를 위하여 준비되었고, 그 안에 우리를 위한 개별 공간도 충분히 준비되었는데 왜 또 거처를 준비하러 가신다고 하시는가? 여기서 말씀하시는 이 거처는 바로 토포스 라는 단어인데 그것은 광의의 place, 어떤 곳을 의미한다. 이것이 무슨 의미이냐면 이것은 한 주어를 중심으로 그 주변을 설명하는 단어이다. 이 팬이 이곳에 놓이면 강대상이 된다. 이 팬이 이 주머니에 꽂히는 이곳은 주머니가 된다. 이 주어를 중심으로 그것이 위치하는 모든 것, 그 주변 환경을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중심으로 한 내가 영위하는 모든 삶을 주님께서 예비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이 토포스라는 단어는 우리가 있는 그 자리만을 의미할 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지위로 번역되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가 처한 환경을 뜻하게 되기도 한다.
 
여러분들께서 침대에 누우신다면, 그곳이 바로 여러분의 거할 곳이 되고, 여러분들이 이 교회에서 순장으로 사역을 하신다면 그 직책도 여러분이 거할 곳이 되신다. 여러분의 주님께서 새로운 사명을 주셔서 부르신다면 그 새로운 기회도 여러분의 거할 곳이다. 내가 다리를 뻗을 곳, 내가 생활의 방식, 바로 나의 삶이 주님께서 나를 예비하시는 거처가 된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하여 큰 공동체와 그 안에 나의 몫을 준비해 주셨을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살아갈 지위와 삶의 형태, 그 기회들을 모두 예비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준비해 주시는 이런 거처는 구체적이고 섬세해서 내가 있어야 할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이다. 이것을 철저히 준비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을 우리가 당연히 취하고 누려야 한다. 어떻게 우리가 그러면 취하고 누릴 수 있는가? 2절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께서 위하시는 거처할 세 가지 특징을 살폈다면, 앞선 1절과 뒤 따르는 3절-4절에서 이 거처를 누릴 구체적인 세 가지 방법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먼저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거처를 예비하시겠다고 말씀하시기 전에 앞서서 그 전제로 말씀을 하신다. 1절을 보면,
 
II. 하나님께서 예비하실 거처를 누리는 방법.
 
*요한복음 14:1,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 말씀은 거처를 기대하는 우리에게 주시기 이전에 먼저 당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당시 제자들도 사실은 거처 때문에 고심하고 있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거처를 너희를 위해서 예비하겠다는 놀라운 말씀을 주셨기 때문에 사실 거처를 예비하신다는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많은 포상을 주는, 거처를 나누어 주는 좋은 분위기를 앞서서 예상하기 쉬운데, 거처를 주기 전에 제자들은 근심하고 있었다. 당시의 상황은 명절을 새는 저녁이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민족 명절, 가장 큰 명절은 유월절이었다. 대부분 명절에 삼삼오오 음식을 준비해서 자기 집에서, 또 마련한 모임장소에서 식사를 한다. 명절이기 때문에 이 분위기가 나빠지기 보다는 좋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근심하지 말라,’ 라는 말을 할 정도가 되었다. 이 말씀 직전, 그러니까 14장 1절 바로 직전 13장 후반부를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만찬장에서 어떤 사람은 뛰쳐나가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 따져 묻고, 어떤 사람은 “대체 이 일이 무슨 일입니까?”라고 소리지르는 그런 일이 발생했다. 13장 30절을 보겠다.
 
*요한복음 13:30,
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밖은 밤이다. 한밤중에 식사를 하다가 한 사람이 뛰쳐나갈 정도이다.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같이 식사를 하시다가 “너는 나를 배신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명절에 왜 갑자기 “너는 나를 배신할 거야? 하는 말씀을 하시는가? 어안이 멍멍한 제자들엑 예수님께서 바로 말씀하신다.
 
*요한복음 13:33,
33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이것을 간단하게 말하면, ‘나는 명절에 너희와 식사하다가, 이제 너희가 올 수 없는 곳으로 간다.’ 분위가 더 기묘하다. 사실 그저 명절 식사 하면서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 보려다가 예수님이 이상한 말씀을 하셔서 분위기가 엉망이 그런 상황이 아니라, 그 앞에 이러한 분위기를 만들어갈 맥락이 있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3년 만에 고생 고생 생 고생을 마치고 드디어 왕국의 중심부 예루살렘에 온 백성의 환영을 받으면서 입성했다. 개선한 직후이다. 그런데 마냥 좋은 상황만은 아니다.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따라올 때는 나를 따라오라.’ 하는 말씀하시는 것은 자신이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내려놓고, 자신의 가족과 생계를 내려놓고, 그저 주님을 따랐고, 주님을 따른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기쁘던 시기가 있었다. 그런데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가고, 머리 둘 곳은 없고 따라다니다가 돌에 맞아 죽을 뻔하기도 하고, 바다에 빠져 죽을 뻔하고, 심지어 먹을 것이 없어서 길가다가 밭에 있는 이삭을 주어다가 비벼서 생쌀을 씹으면서 다니다 보니 점점 고대어만 갔다. 어디든 따르기만 하면 기뻤던 제자들이었는데, 이제는 고생을 하다 보니 이 고생 끝에 어떤 거처를 주시나? 어떤 자리를 주시나? 내게 어떤 삶을 주시나? 내가 어떤 이득을 얻을 것인가를 생각들이 그들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이 수도로 오기 전에 제자들은 계속해서 싸움이 일어난다. ‘누가 더 큰 자리를 얻어야 하는 것인가?’ 이렇게 제자들은 처음과는 달리 지쳐서 이 수도에 도달했는데, 그나마 감사하게도 백성들은 열렬히 환영한다. 호산나, 호산나, 왕처럼 이들을 환영하는 것을 볼 때, 들쳤던 제자들의 마음 한켠에는 조금은 위안이 되고 그래도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구나!’ 하며 생각했는데, 우리를 지도자들이 잡아 죽이려고 달려들 때에 우리는 두려워하기만 했는데, 수도에 와보니 우리를 환영하는 이 인파들을 보니 여기서 예수님이 조금만 잘 하시면 우리가 바라는 그 자리, 그 결과를 얻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명절 당일 날 거하게 식사를 차려 함께 나누며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때, 이 제자들이 깨달은 것은 “자, 이제 결심이 섰다. 우리가 이 땅의 정권을 뒤 엎고, 하나님의 나라를 다시 세우자.”라는 말씀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내가 떠나겠다.” 라는 말씀이다. 긴장된 상황에서 자칫하면 우리가 조금만 긴장을 놓치면 이 땅의 세력에 다 먹혀서 가진 것도 다 잃을 것 같은 지쳐 있는 상황에서 우리의 수장이 정신을 바짝 차리시고 우리를 이끌어주셔야 하는데 “떠나겠다.” 라고 말씀하시고 계신다. 힘이 빠질 수밖에 없다. 아니, 화가 날 수밖에 없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질문할 수밖에 없다. 제자들은 모두 묻고 싶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고 무슨 말씀이신가요? 어디로 가신다는 겁니까?” 수제자 베드로가 나선다.
 
*요한복음 13:36a,
36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오늘 이 장면에서는 주님을 따라 순교하겠노라고 말하는 뉘앙스가 다르다. 주님이 세우신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모를 때에 아직 이 땅의 거처를 사모하고 그것을 바라는 제자로서 “주님, 자꾸 죽는다는 말씀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설마 정말 죽으시려고 하는 것은 아니시죠? 대체 저희가 고생하는 게 몇 년이 지났습니까? 예수님 한 분만 보고 따라왔습니다. 설마 진짜 죽으시는 것은 아니시지요? 도대체 어디 가신다는 것인가요?” 라고 질문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 번 더 강조하신다.

*요한복음 13:36b,
36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낙담한다. 지금 못 따라오는데 나중에 따라올 것이다. 우리 스승님께서 드디어 포기하셨구나. ‘저 바리새인들과 함께 일전을 치러야 하는데 로마제국과 일전을 치러야 하는데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서 싸워서 저것들을 얻어내야 되는데, 아무리 봐도 승산이 없으니 이 싸움에서 내가 죽게 될 것 같다.’고 이해하고 “아닙니다. 주님, 주님만 죽게 하실 수 없습니다. 저도 따라가서 죽겠습니다.” 라고 충성된 말을 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수제자의 이 충성스러운 반응도 찬물을 끼얹으신다. “아니다. 너도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가장 충성된 반응조차 대차게 내치신다. 그랬다면 이 상황에 분위기가 어떠하겠는가? 제자들의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술렁술렁하다. 동요한다. 그것이 오늘 1절에 말하는 근신이다. 이것은 영어로는 마음을 휘저어 버리다(stir up). 스털 업이다. 물이 가득 있는데 무엇을 넣어 휘젓는 것이다. 혹은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큰 돌덩이를 제자들의 마음속에 풍덩 빠뜨려서 파도가 일어, 일렁일렁 동요하는 그 모습이다. 그런데 직접 하시고서 동요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고 하신다. 우리에게도 예수님께서는 거처를 주시기 전에 동일한 말씀을 하신다.
 
예수님을 처음 따라 나설 때에 모든 것을 다 내어드리고도 같이 계속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 해, 두 해,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제자의 삶을 살아가다 보면, 우리를 지치게 하는 많은 일들을 경험한다. 머리 둘 곳이 없는구나, 배가 주리는구나, 사람들이 우리를 비방하는구나, 그런데 이 모든 것은 감내할 수 있다. 우리를 가장 난처하게 만드는 것, 우리를 가장 동요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힘들 때에, 이런 우리에게 위로가 필요할 때에 주님이 우리를 갑자기 떠나신다고 말씀하듯이 우리 문제를 중요히 생각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실 때이다. 그래도 주님을 위해서 이렇게 힘든 일을 했으니 그에 대해서 반응과 보상을 해주시리라 생각을 했는데, 다 지쳐서 낙담하기까지 응답이 없으시다. 심지어 어떨 때는 베드로처럼 용기를 내서 “생명까지 바치겠습니다.” 라고 말할 때, 오히려 주님은 우리의 기세를 꺾으시려는 듯 아니 “더 어려운 순간이 네게 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을 따라가시다가 그저 이 땅의 좋은 재물, 거처를 준비하겠다는 그런 큰 목표를 말하기 이전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고 ‘주님을 따라 산다는 것 어떤 것인지 제가 도저히 모르겠나이다.’ 말한 그런 지치는 순간을 경험한 적이 없는가? 설교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평생 벌어도 내 집 마련을 못하는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난 이미 지쳐서 나자빠져 있는데 주님은 나를 더 이상 상관하지 않으신 것 같아. 주님 일은 주님 일이고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 두시는구나. 다른 사람들은 이미 저만치 앞서 가는데 나는 이제 어떻게 하지?’ 부랴부랴 이 세상의 방법들을 찾아가려고 발버둥치지만 이미 늦은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때 주님이 일관되게 말씀하신다. “나를 믿으라.”라고 하신다. 제자들의 상황은 근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우리들의 상황도 근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 거처를 마련하려고 근심하면서 주님께 따져 묻지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근심 하지 말라. 나는 이 땅의 거처를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의 더 근본적인 거처, 온 세상 만물을 지으시고 모든 시간의 처음과 나중을 지으신 분이 계신 그곳에 가서 그것에 너희가 있을 곳을 예비하러 간다. 그리고 그것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직접 예비하겠다.” 주님께서 직접 예비하신다는 사실을 못 믿으신다면 주님께서 “내가 직접 너희를 위한 영원한 터를 예비할 것이니 근심하지 말라.”라고 하신 말씀을 못 믿으신다면, 그것은 내가 주님보다 내 집을 잘 준비한다는 뜻이다. 어쩌면 이 땅에 집을 준비하는 것은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땅의 집을 잘 준비하신 여러분, 혹은 조금만 더 준비하면 그것을 손에 가질 것처럼 생각되시는 여러분, 그곳이 정말 여러분들께서 영원히 거할 거처인가? 실제로 그렇지 않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그렇게 믿고 싶고, 그렇게 가치를 부여하고 싶더라도, 아무리 이 땅의 거처를 완비하고 싶더라도 아니 이미 완비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안에 채울 것들, 그 안에 함께 할 사람들, 그 안에서 살아갈 건강을, 시간이 지날수록, 갈수록 우리는 일어난다. 어쩌면 돈을 어떻게 많이 벌어서 그 거처에 채울 물건과 나의 라이프 스타일은 확보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런데 이게 주어진 시간이 내 손 사이로 빠져 나가는 것은 내가 그곳에서 함께 거할 가족이 떠나간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거처는 물리적인 공간만이 아니라, 그곳을 함께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고 그곳에서 어떻게 생활할지까지 모두 포함하는 것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다. 그 거처를 예수님보다 더 잘 준비할 자신이 있는가? 정말 그러한가? 이 천지 만물을 지으신 주님보다, 내 모든 죄를 사하시고 나를 죽음에서 건지신 그분보다, 나와 함께 살아갈 더 자질을 더 잘 살릴 확신이 있는가? 그런 확신이 없으시다면 부디 이 땅의 거처를 위한 근심을 내려놓으시기 바란다.
 
혹여 이 땅의 거처가 다 준비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가 우리의 삶이 이 땅에서 내 집에서 거하는 것으로 마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에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무엇이 더 중요하겠는가? 주님께서 예비하신 우리의 거처를 가장 잘 누리는 전제는 바로 우리가 이 땅 거처를 내가 예비한다는 이 근심을 내려놓는 것이다. 왜? 주님께서 반드시 친히, 나를 위한 영원한 것을 예비하시기 때문이다. 주님이 예비하시는 거처를 누리는 방법은 두 번째 방법은 더욱 놀라운 방법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찾아오는 거처를 맞이하라. 하신다.
 
*요한복음 14:3,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께서는 그 거처를 예비하시기 위해 잠시 떠나신다고 말씀하셨다. 처음에는 우리에게 따라올 수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나중에 그곳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어떻게? 제자들은 그것이 죽음으로 된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내가 다시 찾아와서 너희를 영접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찾아오시는 것이 거처가 아니라, “예수님 아니십니까?” 우리가 질문할 수 있다. 그렇다면 14장 23절을 보겠다.
 
*요한복음 14:23,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저 멀리 있는 천국, 천로역정을 다 거치고 고생 고생을 하여 하늘에 임하여야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직접 찾아오신다고 말씀하신다. 거처로 우리에게 찾아오신다고 말씀하신다. 이 거처는 움직이는 거처이다. 이제 이 거처가 어디인지는 더욱 중요하지 않다. 이 땅에 거처와 다른 점이다. 이 땅의 거처는 어디 있는지가 중요하고 어디 역, 어디 단지가 중요하지만, 그래서 그것으로 가치가 결정되고 주님께서는 우리의 평생을 그를 위해 소모하게 만들지만 주님께서는 우리가 평생의 수고를 이를 위해 하지 않아도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임재하시는 거처가 되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 거처를 맞이하라!!.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가? 우리에게 예비 된 거처를 맞이하는 방법은 23절에 읽은 대로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우리가 지키는 것이다. 우리가 이동하는 주님의 맞이하는 방법, 거처를 우리가 누리게 하는 방법은 바로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이 하신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내 삶에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매일 읽는 큐티를 결코 얕보지 말아야 한다. 오늘 내가 한 절의 말씀을 펼쳐 들어 주님을 사모할 때에 그 사모함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하늘의 거처를 하나님의 집을 지금 이곳으로 임하게 하실 것이다. 오늘 하나님의 거처가 우리에게 오실 것이다. 이 거처를 누릴 세 번째 방법은 바로 이 거처와 함께 다니는 것이다.
 
*요한복음 14:4,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내 거처를 어떻게 예비할까? 그 길을 몰라서 평생을 고민해 왔고 오늘도 이 자리에 나아와 무릎 꿇고 기도하지만 여전히 우리가 살아갈 길은 잘 보이지 않다. 창세시대를 살아갔던 신앙인물, 욥기도 그러했다. 창조시대, 창세 시대, 족장으로서 아직 이후에 주어질 다른 많은 복음이 주어지지 않아 주님께 의문만 가득하고 주님을 온전히 다 알고 어려웠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고난을 겪고, 자녀들이 다 죽고, 같이 거할 거처가 될 공동체가 사라지고, 자신의 재물들이 사라지고, 자신이 살아갈 터전이 사라지고, 건강이 사라져서 물리적인 거처마저 이 땅의 육신의 장막마저 없어져 버린 그때에 그는 여전히 고백한다. 욥기를 23장 8-10절을 보면,
 
*욥기 23:8-10,
8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9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주님은 이 모든 고난을 당하게 하고도 내게 안 보이신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주님을 신뢰하여 이렇게 고백한다고 말한다. 욥은 엄청난 믿음이 사람이었다. 고통 중에 보이지 않아도 주님을 여전히 신뢰한다고 믿음을 선포한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온 인류가 평생 경험한 이 문제, 고통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우리에게 주신다. 욥만큼 엄청난 믿음으로 고난 중에, 우리가 낙담하는 중에 어디로 갈지 몰라도 내가 주님을 신뢰합니다. 그런 믿음까지도 요구하지 않으신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이제는 너희에게 보여주겠다고 하신다. 영문 모를 고통을 겪는 욥은 감히 주님의 길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 우리에게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아는 것은 엄청난 특권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와서 거하신 후에 이제 우리는 그 거처에 “내가 있는 곳에 주님 임하여 주시옵소서! 이곳에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가 아니라 이제는 주님이 가시는 곳을 따라갈 수 있다. 이것은 움직이는 거처에 우리가 탑승한다는 의미이다. 어떤 이는 노년이 되어서 퇴직금을 다 투자해서 캠핑카로 다니시는 분들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잘 없지만 더 잘 사는 미국에 가면 그 넓은 나라를 벤츠 리무진 버스를 개조해서 어떤 집보다 호화롭고 좋게 만들어서 전국을 다니는 분들이 있다. 평생을 집을 마련하기 위해 수고했는데 그 수고를 드려서 내가 살아보지 삶을 가보지 못한 곳이 너무 많아서 이렇게라도 해보려고 발버둥치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가 있는 이 자리에만 임하신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는 이 집이 움직일 때에 함께 가자.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나와 함께 움직이는 놀라운 광경을 우리의 삶에 우리의 거처로 예비하셨다. 그전에 여러분이 얼마나 낙담했는지, 그전에 여러분의 삶이 얼마나 정리정돈 되지 않았는지는 상관이 없다. 엘리사가 사환을 위해 기도하여 사환이 타락한 사마리아 땅 한 가운데 한 도단 성에서 눈을 뜰 때에 그곳에 불 말과 불 병거가 둘러선 것을 보았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셔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친히 임재하여 주실 때, 우리에게 거처를 가져와 주실 때에 우리는 그곳에 탑승하여 그곳이 어디로 가시는지 이제는 명확히 보고 함께 따라가는 놀라운 모험이 시작되게 될 것이다. 주님이 시작하시는 이 놀라운 스펙타클한 역사에 우리가 함께 동행 하게 되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여러분들께서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이제는 근심하지 않겠습니다. 이제는 주님을 사모하며 내 삶에 주님의 거처를 환영하고 맞이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다른 이들을 향하여 찾아가시는 그 사역에 내가 따라가 그곳에 함께 거하겠습니다.” 결단하셔도 이 문을 나가 한파를 뚫고 나의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다 보면 이내 우리의 삶은 지쳐서 다시 낙담하는 경험을 한다. 다시 낙담하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다. 그 때에 이제 우리는 그 순간을 새롭게 생각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모두가 거처를 위하여서 고심하는 낙담하는 외로운 순간을 사용하셔서 나의 거처를 주셨다. 우리가 지금 성탄을 대망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처음 이 땅에 오셨을 때에 바로 그렇게 거처 없이 외롭게 사역을 시작하셨다.
 
*누가복음 2:7,
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예수님께는 태어나면서 맞아주는 이가, 이 땅의 거처가 없었다. 장성하여 사역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누가복음 9장 18절을 보면,
 
*누가복음 9:58,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이 땅에서 아픈 자들을, 슬픈 자들을 위로하시면서 두루 다니며 열심히 사역하시던 때에도 예수님은 머리 둘 곳 하나 없었다. 이것만 해도 엄청난 헌신인데 이것을 마치고 십자가를 향해서 걸어가실 때에도 오늘 제자들처럼 대체 어디가십니까? 타박하는 말들만 쏘아붙여 왔다. 심지어 우리를 위하여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난 뒤에도 예수님께서는 거하실 무덤하나 없었다.
 
*마태복음 27::59-60,
59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60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알아주는 이가 많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명의의 무덤이 아니라, 다른 이가 산 다른 이의 명의로 된 빌린 무덤에 묻히셨다. 그런데도 이 땅에서 거할 거처의 우리로 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에게 약속하신 이 거처들을 예비하시기 위하여 다시 그 길을 떠나셨다. 순수히 우리를 위하여서 다시 오셔서 맞이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저희가 이곳을 나가서 느낄 수 있는 쓸쓸함은 예수님께서 이미 앞서서 다 지고 가셨다. 혹여 지금 당장 내 앞에 견딜 수 없는 쓸쓸함이 거처가 예비 되지 않은 외로움이 임한다고 생각되실 때에, 질문해 보라. 주님이 말씀하신다. 근심하지 말라. 동요하지 말라. 너희 거처가 이미 예비 되었다. 내 거처가 너를 찾아갈 것이다. 그리고 내가 어디로 다니든지 너는 그 길을 알고 나와 함께 다니게 될 것이다. 이 믿음의 약속을 붙잡고 함께 나아가는 우리가 제자 되기를 소망한다.
 
요약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거처를 우리가 조금만 눈을 감으면 세상을 향하여 고개를 돌리면 잊어버린 채, 이곳에 세상의 거처를 힘쓰고 우리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다시 낙담하고 싶을 때, 주님이 그때에 우리의 마음이 바뀌게 하실 것을 믿고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먼저 사용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신 주님을 온전히 알아야 한다. 주님이 어디로 가셨는지, 무엇을 위하여 가셨는지 우리를 예비 된 처소가 어떤 것인지 온전히 알고 그 처소를 온전히 누리는 제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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