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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5년 3월 5일)
제목: “한마음, 하나의 부르심”
말씀: 에베소서 4:1-6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사회: 강건우 부목사님
 
설교자: 임병영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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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베소서 4:1-6,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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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앙망하며 새로운 역사를 경험하는 ‘수요저녁기도회’에 참여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오늘 수요 저녁 기도회를 통해서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그 따뜻한 손길을 경험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교회라는 단어를 듣게 되면 마음이 어떻게 드시나요? 어떤 분들은 교회에 대한 깊은 애정과 또 감사의 마음이 있을 것이고, 또 어떤 분들은 실망과 고민을 함께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교회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동시에 아프기도 하고, 교회가 정말 소중하지만 갈등을 느껴 힘겨울 때도 있습니다. ‘필립 얀시’ 라는 분이 쓴 책이 있습니다. 사역 훈련생은 필수로 읽어야 되는 책 중에 하나입니다.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이라고 하는 책인데 참 좋은 책이죠.
 
필립 얀시는 이 책을 통해서 자신의 신앙 여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교회를 다니면서 신앙을 배웠지만 점점 자라면서 교회의 위선적인 모습과 판단하는 태도를 보면서 크게 실망했다고 고백합니다. 교회는 은혜를 말하면서도 은혜를 실천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라고 말하면서 결국 그는 신앙과 교회를 멀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재미난 사실은 그가 신앙을 떠나 있을 때 더 깊은 갈증을 느꼈다. 라는 거예요. 그는 신앙을 결코 혼자서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하면서 신앙 공동체 안에서 자라고 함께 걸어갈 때 더욱 깊어진다. 라는 것을 교회를 다시 돌아보면서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교회는 불완전한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 하나님이 일하신다. 교회는 때로는 갈등과 고민을 주지만, 동시에 우리가 함께 하나님을 경험하는 자리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신앙의 현실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하는 지상 교회는 완벽하지 않죠. 서로 다른 배경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때로는 갈등이 생기고 기대와 현실의 차이 속에서 고민이 생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를 한 공동체로 부르셨고, 하나님께서 그 공동체 안에서 신앙의 여정을 함께 걸어가도록 하셨다.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이미 우리를 교회로 부르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신 것이 단순한 모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공동체로 삼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은 결코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한 몸 된 공동체로서 한 교회로서 세상 가운데 복음의 빛을 비추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는 공동체의 모습을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떠나서 신앙을 홀로 지키려 했던 ‘필립 얀시’는 결국 공동체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교회로 돌아오면서 이런 고백을 했는데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나는 신앙을 혼자 유지하려 했지만 그것은 마치 불을 꺼내놓고 타오르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았다.신앙은 함께할 때 더 깊어지고, 교회는 그 신앙이 성장하는 자리다. -필립 얀시-
 
사랑의 교회 성도 여러분 불이 모닥불 속에서도 뜨겁게 타오르지만 그중에 하나만 꺼내놓으면 금방 식어버리고 불이 꺼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죠. 하나님께서 교회를 택하신 이유는 우리는 개인적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이 아니라 공동체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감당하는 언약 백성으로 살도록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우리는 단순히 교회 안에서 하나 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도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연합할 때, 세상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한 마음과 한 공동체로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신앙은 혼자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혼자가 아닌 공동체 안에서 함께 성장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회로 부르신 이유는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 우리가 함께 에베소서 4장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에베소서 4장 1절에서 6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한 공동체로 부르셨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한마음으로 신앙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성숙해지려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부르신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 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교훈을 붙들고 하나님께서 부르신 삶에 합당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이 여러분을 부르신 삶에 합당하게 살 수 있을까요? 첫 번째로 나누고 싶은 말씀은 이겁니다.
 
I. 첫 번째, 하나님께서 부르신 삶에 합당하게 살기 위해선 겸손과 온유, 사랑 가운데 오래 참음으로 하나 됨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함께 말씀을 읽어볼까요? 에베소서 4장 1절에 2절까지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4:1-2,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바울은 예배소 교회에게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합당하게 하라. 라고 하는 이 ‘합당하게’라는 표현은 ‘조화롭게’라는 뜻도 있고 ‘균형있게’라고 하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신 목적에 맞게 조화롭게 균형있게 살아야 한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당하게 살 수 있을까요? 바울은 여기서 세 가지 태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먼저 겸손에 대해서 말하고 있어요. ➀겸손이란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죠. 빌립보서 2장 3절에도 바울은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 라고 권면한 내용이 나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다양한 사람과 다른 기준을 가진 사람들로 인해 갈등이 생길 때에 우리는 서로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서로를 이해하려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죠. 당시 에베소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 성도들이 함께 했던 교회입니다.
 
문화적 차이와 배경의 차이로 인해서 갈등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아주 큰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이런 그들에게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존중하는 겸손으로 무장할 때에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다.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태도는 온유입니다. ➁온유는 힘이 있지만 부드럽게 사용할 줄 아는 태도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1장 29절 말씀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생각을 나눌 때에 온유한 사람들은 자신이 옳다고 해서 강하게 주장하기보다는 상대를 배려하면서 함께 나아갑니다. 이것이 온유한 사람들의 특징이죠. 바울은 예배소 교인들이 서로가 서로의 차이로 인해서 다투기보다는 상대를 배려하며 함께 나아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세 번째 태도는 ➂사랑 가운데서 오래 참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완전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아니죠. 죄인들의 모임,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갈등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갈등이 없는 교회는 어찌 보면 이상한 교회일 수 있습니다. 드러나든지, 드러나지 않든지, 모든 공동체 속에 갈등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러한 갈등이 있을 때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오래 참아주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용납하고 인내해야 한다. 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랑 가운데,,, 라는 말을 듣게 되면 어떤 사랑이 생각나실까요? 바로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 예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한 사랑이겠죠. 그 사랑을 저와 여러분들이 받았다. 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오래 참으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용납하고 인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어떤 마음이 드실까요? 저와 여러분들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어떤 태도로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겸손과 온유의 태도를 가지고, 다락방과 훈련반, 교사 모임, 부서 모임, 여러 모임들 가운데에 계십니까? 아니면 내 뜻과 생각을 주장하는 그런 모임 가운데 계십니까? 또한 상대를 배려하는 사람 가운데 오래 참는 태도를 실천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내 마음과 뜻이 관철(貫徹)되지 않아서 관철하기까지 오만 방법들을 사용하면서 설득하고 계시는 모습이 있으십니까?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바울이 권면한 태도를 기억하면서 힘써 지켜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늘 은혜가 넘쳐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부르신 그 부르심에 합당한 열매가 가득한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로 나누고 싶은 말씀은 다시 시작하는 다락방과 예배 기도 속에서 한마음이 되는 신앙을 실천해야 한다. 라는 겁니다. 함께 말씀을 읽어볼까요? 에베소서 4장 3절 말씀입니다. 같이 읽습니다.
 
II. 두 번째, 한마음이 되는 신앙을 실천해야 한다.
 
*에베소서 4장 3절,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바울은 예베소 교회에서 하나님을 힘써 지켜야 한다. 라고 강조합니다. 여기서 ‘힘써’라고 하는 단어는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공동체가 하나 되는 것은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되기 위해 힘써 노력해야 한다.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시간이 흐르면 함께 밥 먹는 시간이 많아지면, 그리고 나눔 시간이 많아지고 만남의 시간, 훈련의 시간이 차곡차곡 쌓이게 되면 하나가 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때가 차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공동체 안에 각 사람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말씀에 순종하는 적극적인 의지와 삶을 통해서 한 공동체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때론 서로의 다름을 자기 품에 안고, 익숙하지 않은 패턴으로 어색한 표현을 계속해서 건네야 하는 힘을 다하는 노력이 있어야 공동체로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공동체 만드는 거 쉽습니까? 훈련반이나, 다락방이나, 여러 모임들 가운데 낯선 분들, 나와 맞지 않는 분들, 어색한 분들, 내 인생의 기준에서는 도저히 부합하지 않는 사람들을 그곳에서 만났을 때에, 여러분들은 그 공동체를 마음을 다해 뜻을 다해 사랑하며 한 공동체로 이루어 갈 소망과 마음과 기쁨과 감사가 넘치고 있습니까? 쉽지 않다라는 거죠. 저도 참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사랑의 교회 여러 회의가 있으면서 3년마다 이제 교구 교육자들이 교구로 바뀝니다. 사랑의 교회가 워낙 큰 교회다 보니까 교구가 바뀔 때마다 교회를 옮기는 느낌이에요. 새롭게 만나는 순장인들, 처음 보는 분들이 그렇게 많습니다.
 
제가 10년이 넘었는데도 불구하고, 저를 소개하면 처음 봤다고 얘기하시는 분도 계시고, 네 저는 당연히 그분을 처음 뵙고, 어떤 사역에서도 마주치지 못했던 경험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지금도 저를 알지 못하는 분이 있을 것 같아요. 저도 알지 못하는 분이 많습니다. 이런 분들과 만날 때마다 참 마음의 갈등과 어려움이 있어요. 처음 한 해에는 그래 열심히 해야지, 라고 하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가서 더 제 안에 에너지가 없는 에너지를 쥐어 짜내면서 만남을 이루어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지만 제가 무척 샤이한 사람이거든요. 엄청난 노력을 통하여서 관계를 이루어가는 사람인데, 매번마다 새롭게 바뀌는 그 모습들을 적응해 가려고 하니 참 쉽지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 해 한 해 노력하면 할수록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은혜가 있더라고요. 이때 우리가 말씀 가운데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더 있는데요. 바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이라고 하는 표현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힘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이미 하나가 되게 하셨다. 라는 것과 우리는 그것을 힘써 지켜야 한다. 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 되기 위해 힘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성령으로 하나 된 것을 힘써 지켜 나가는 것이죠. 제가 이 사실을 제대로 깨닫지 못해 가지고 그동안 제가 공동체 안에서 하나 되기를 힘썼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 공동체 안에서 늘 불편한 부분들이 생기고 어려움이 생기고 저와 맞지 않는 부분들이 있어 힘겨웠던 시간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일이라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에 부담이 덜어지더라고요.
 
이미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하나 되게 하신 그것을 내가 지켜 나가면 되는구나! 전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만들어 놓은 관계를 내가 힘써 지키면 되는구나! 라는 생각을 갖게 되면서 마음의 평안이 왔습니다. 이 말씀은 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해야 할 역할들을 강조하고 있는 거죠.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들이 성령이 하나 되게 하는 것을 힘써 지키는 것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먼저
➀첫 번째로는 다라방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 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교회 다락방은 신앙 공동체가 한마음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자리인 줄 믿습니다. 사도행전 2장 46절 말씀에 보니까,
*사도행전 2장 46절,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라고 하는 표현이 있어요.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이 어떻게 하나가 되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서로 교제하며 신앙을 나누었을 때에, 하나 됨을 이루어졌습니다. 하나 됨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다락방에 모여서 하나님 말씀 중심으로 서로의 삶을 나누고, 아픔을 나누고, 근심과 걱정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함께 덮어가는 과정을 통해서, 한 공동체로 하나 됨을 이루어 갔던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렇게 말씀과 신앙을 나누고 함께 교제하는 다락방을 통해서 하나 됨을 경험할 수 있다. 라는 겁니다. 오랜 참 꿀과 같았던 방학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다락방이 시작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하나 됨을 경험하는 시간이 다시 찾아왔다. 라는 거예요.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된 다락방을 저와 여러분들이 소홀히 여기지 않고 함께 기도하며 말씀을 나누며 영적 교제를 나누는 자리로 만들어 가서 각 다락방마다 하나 되는 은혜로 가득 채워지는 이번 상반기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직 다락방에 참여하지 않는 분들은 마음속에 나는 그럴 기회가 없는데, 라고 생각하실지 모르는데 오늘 이 말씀이 여러분들의 귀에 들렸다고 한다면 주님께서 여러분들을 다락방으로 부르고 있다. 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순종하여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각 교구별로 교육자분들께 용기 내어서 연락을 드리고 다락방을 신청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참 좋은 기회예요. 매 주일마다 다락방을 찾아드립니다. 라고 하는 캠페인을 하고 있는데요. 더 이상 주저하지 말고 다락방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를 부르신 부르심에 합당한 삶의 열매를 맺으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기를 바랍니다.
 
➁두 번째로는 예배와 기도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하나 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배는 개인적인 시간이면서도 공동체가 함께 드리는 시간입니다. 기도도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고 무엇보다도 공동체 안에서 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마태복음 18장 19절 말씀에 보니,
*마태복음 18장 19절,
19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함께 예배할 때 우리는 같은 말씀을 듣고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주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함께 합심하여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뜻을 더 깊이 깨닫고 마음이 하나로 모아질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매주일마다 담임 목사님을 통해서 이사야 강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 말씀이 있었어, 라고 하시는 분들은 빨리 주일날 교회에 나오셔서 말씀을 들으시면 좋겠습니다.
 
단순히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한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예배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주의 말씀을 함께 듣고 함께 기도하는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정과 일터에 교회와 모든 삶의 현장에 새 길을 반드시 여실 것을 기대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의 삶을 통하여 함께 예배하고, 함께 기도하는 그 시간을 통하여서 다시 한 번 더 새 길을 반드시 여실 것들을 기대합니다. 또한 한마음으로 말씀과 교회의 비전 사역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개인적인 기도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기도에도 참여해서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많은 기도의 시간들이 있어요. 토요 비전, 새벽 예배, 또 수요 저녁 기도회, 또 목요 주빌리 기도회, 금요 철야 기도회, 여러 기도회들이 다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문제만을 가지고 그 교회 기도회를 참여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개인의 기도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기도를 가지고 함께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저와 여러분들의 기도, 합심해서 드리는 그 기도를 통하여 새 길을 열 줄 믿습니다. 함께 말씀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에베소서 4장 4절에서 6절입니다. 같이 읽습니다. 참여하셔서 함께 기도로 동참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함께 나누고 싶은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나 되게 하신 공동체 안에서 연합하며 신앙의 비상을 경험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III. 세 번째로, 하나님께서 하나 되게 하신 공동체 안에서 연합하며 신앙의 비상을 경험해야 한다.

*에베소서 4장 4절에서 6절,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아멘 바울은 본문을 통해서 계속해서 하나하나 하나하나 이 하나라는 단어를 강조하고 있어요. 한 몸이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된 공동체라는 것을 말하고요. 한 성령이란 성경께서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신 것을 말하고 있으며, 한 소망이란 하나님께서 주신 동일한 약속을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한 주님 한 믿음, 한 세례는 우리의 신앙 고백이 같다. 라는 것을 말하고, 한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 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각자 다른 배경, 다른 생각, 다른 기준, 다른 환경, 다른 모든 것들 가운데 우리가 서로의 다름을 다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누구 안에서요. 하나님 안에서는 하나라고 하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3장 28절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
8 너희는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즉 우리는 주 안에서 한 공동체이며, 함께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는 가족, 영원한 가족, 영원히 함께하는 가족인 줄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 되기를 힘쓸 때에, 하나님께서 하나 된 사랑의 교회를 통해 더 크고 놀라운 일들을 이루실 것을 기대합니다. 특별히 사랑의 교회에 주신 비전이 있죠. 담임 목사님과 함께 기도하며 준비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교회적으로 새로운 도전이 있을 때마다 개인적인 생각보다는 공동체의 방향성에 집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시선이 교회와 하나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더 큰 부흥과 더 큰 은혜를 허락해 주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작년에 10월 27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함께 기도하고, 함께 비전으로 품으며, 함께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함께 한국 교회를 위해 기도했을 때에 이 나라와 민족과 한국 교회를 위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경험했습니다.
 
세상에서는 조금 조용했을지 모르지만, 저와 여러분들은 그 증거(證據)의 현장에서 그 놀라운 일들을 목격하고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올해 10.27를 통해서도 그러한 은혜를 경험하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단순히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 됨을 위해서 노력하면서 함께 신앙의 비상(飛翔)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 일을 위하여서 우리가 계속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돌아오는 3월 8일 날, 3월 15일 날, 우리가 마음을 다해서 함께 기도하는 자리에 이곳에 계시는 모든 부분들뿐만 아니라 방송으로 참여하시는 모든 분들도 초대합니다. 한 마음으로 공동체 안에서 연합하여서 함께 기도하며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놀라운 비전을 이루어 가시고 신앙의 비상을 경험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놀라운 자리에 초대하실 때에 여러분 더 이상 주저하지 마시고 함께 연합해서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운 일들을 이루어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올해 상반기 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우리는 한 마음과 하나의 부르심을 따라 함께 걸어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삶에 합당하게 살기 위해서는 겸손과 온유, 사랑 가운데 오래 참음으로 하나 됨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또한 다락방과 예배, 기도 속에서 한마음이 되는 신앙을 실천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하나 되게 하신 공동체 안에서 연합하여 신앙의 비상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에 저와 여러분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준비하신 놀라운 은혜들을 기적과 같이 체험하고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저와 여러분들을 하나님께서 이곳으로 또 이 땅 가운데서 죄인 된 곳으로 살다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셨을 때의 그 부르심을 잘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부르심은 어떻게 보면 저와 여러분들의 개인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공동체적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결코 개인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교회로, 하나의 공동체로, 하나의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셨다.라는 겁니다.
 
⁂구약에서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부르실 때, 이스라엘 야곱이라는 사람이 이름이 바뀌었던 게 이스라엘이죠.
 
그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한 사람을 부르실 때에, 그 이스라엘 한 사람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로 부르셔서 세상의 빛으로 사용하시는 제사장 나라로 세우신 것도 보게 됩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어서, 그 자녀들이 애굽으로 들어가고, 애굽에서 수많은 사람들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준비되어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던 그 구약의 역사를 저 여러분들을 기억하실 겁니다.
 
왜 그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었습니까? 그 개인을 부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공동체적으로 그를 부르셔서 이 땅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제사장으로 제사장 나라로 세워가기 위해서였던 겁니다.
 
⁂신약에 왔어도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부르실 때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셨지만 결국 예수님의 12명의 제자를 부르신 것을 보게 됩니다. 12명이라는 공동체를 부르셔서, 그들과 함께 먹고 자고 그들 가운데 기적을 베푸시며 남들에게 알려주시지 않았던 세밀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그들에게 공동체적으로 가르치고 훈련을 받도록 하여 성장하게 하셨습니다.
 
결코 개인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함께 성장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세우셨다. 라는 겁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사명은 결코 저와 여러분들 혼자가 아니라 함께 감당해야 하는 사명이라는 겁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한마음으로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허락해 주신 2025년에 ‘2033-50 비전’을 위하여서 계획하신 많은 은혜와 능력과 기적들을 경험하게 하실 겁니다. 새로운 길들을 반드시 내셔서 사망의 강을 광야의 길을 내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들, 은혜의 비상을 경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이러한 자리에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이곳에 계시는 모든 분들이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공동체로 한마음으로 하나의 부르심 앞에 전적으로 순종하여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어서 이번 상반기 사역 가운데에 하나님께서 놀랍도록 부어주신 은혜를 모든 다락방, 모든 훈련반, 모든 부서와 모든 공동체에서 마음껏 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요약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를 한 공동체로 부르시는 신앙의 길을 함께 걸어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함께 믿음의 여정을 걸어가도록 계획하심을 믿고,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한 삶을 살기를 소원한다. 각 다락방과 훈련반, 그리고 모든 사랑의 교회 공동체에서 겸손과 온유로 서로 배려하고 사랑 가운데 오래 참음으로 용납하며,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 나아가야 하며,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더욱 견고해지고, 신앙의 성숙을 이루는 기쁨을 누리고, 우리에게 허락하신 꿈과 비전을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을 확신하며, 우리 개인의 신앙 성장을 넘어 사랑의 교회가 하나 되어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위해 쓰임 받아야 한다.
-마음을 찢는 회개와 가슴 터지는 감격으로, 우리를 오래 참아주신 하나님 은혜에 다시 사로잡혀 겸손과 온유, 사랑 가운데 서로를 용납하고, 인내하는 성령 하나님의 하나 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봄 학기 사랑의교회 모든 예배와 다락방을 비롯한 소그룹이 모이고, 흩어질 때마다 하나님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으로 끝마치는 사역이 되어야 한다. 지치지 않는 기도 생활, 샘솟는 영감, 찬양의 능력, 담대한 복음 증거, 참다운 영성 회복을 뜨겁게 사모하며 무수히 경험하는 예배가 되고, 명실상부(名實相符)한 사랑이 넘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예배하는 곳에 2025년 세상의 중력을 끊어내고, 하나님을 더 가까이 경험하는 거룩한 처소가 되며, 섬김과 희생의 그물이 튼실히 엮여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강력한 도구로 쓰임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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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5년 2월 26일)
-평신훈련 개강 및 사랑글로벌 아카데미 입학 감사예배
제목: "Finishing Well 합시다"
말씀: 디모데후서 4:9~11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대표기도: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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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4:9~11,
9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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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5년 2월 26일)
-평신훈련 개강 및 사랑글로벌 아카데미 입학 감사예배
제목: "Finishing Well 합시다"
말씀: 디모데후서 4:9~11
말씀봉독: 조성환 부목사님(사랑글로벌 예배아카데미 학장)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연합찬양대
대표기도: 서학수 장로님(평신도 훈련부 담당),
백형선 장로님(SaGA 재단법인 이사장)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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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4:9~11,
9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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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모든 평신도 훈련생들과 SaGA가 생도들에게 여호와의 영이 충만하여 훈련과 교과 과정의 이수를 위한 필요한 지혜와 능력과 육신의 강건함을 주시고, 일터와 가정에 평온과 형통의 축복도 주시옵소서.사랑 글로벌 아카데미의 오정현 총장 목사님과 학장님들, 국내외 교수진들에게 영육의 강건함과 능력을 더하시어 모든 생도들을 위하여 전심을 다하게 하옵소서. 2025년 평신도 훈련생들과 사랑 글로벌 아카데미 입학생들이 들리는 입학 감사 예배의 시종을 성령 하나님께 온전히 의탁 드리오며 우리의 유일한 소망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오정현 담임 목사님
어떤 사람은 삶의 허무(虛無)가 있고 공허(空虛)를 느끼고 또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굉장히 우울(憂鬱)하고 힘들고 그런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제가 지난주를 말씀한 대로 어떤 경우에도 끝까지 구원의 우물 물을 이렇게 들이켜 가지고 날마다 솟는 샘물을 경험함으로 말미암아 끝까지 물론 이건 꼭 스타일을 말하는 건 아니고, 그 내면이 끝까지, 영적 활력과 역동성을 유지하는 분이 있어요.차이가 뭐예요? 다시오. 공허하고 허무하고 무의미한 인생 우울증 있어 가지고, 아니면 끝까지 영적인 활력과 역동성을 유지하는 차이가 뭐예요? 그 차이는 한마디로 하나님께 쓰임 받느냐, 안 쓰임 받느냐 내가 하나님께 쓰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한 절대로 우울하거나, 허무하거나, 무의미하거나, 공허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거,
 
예를 들어서 구약의 물맷돌이 나오는데, 물맷돌은 다윗 왕국을 세우는 데 지대한 공헌(供獻)을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예루살렘 호산나 마지막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예루살렘 입성(入城)하실 때에 예수님을 등에 태운 나귀가 있잖아요.
 
나 나귀는 예수님의 십자가(十字架)의 사역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물맷돌은 무생물입니다. 그리고 나귀는 그냥 동물입니다. 무생물도, 동물도 다윗 왕국의 역사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의 그 영광스러운 사역에 놀랍게 쓰임 받았다면 하물며 하나님의 창조품이요, 창조물이요,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구원(救援)받은 우리 한 인생 한 인생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의 교회는 이 일을 위하여 ➀다락방이 있고, ➁제자 훈련, ➂사역 훈련이 있고, 그다음 ➃순장반이 있고, 그다음 크게 보면 또 ➄사랑 글로벌 아카데미가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 다락방을 통하여 말씀으로 영혼을 섬기며 한 영혼 한 영혼이 은혜의 사각지대가 없이 우리 교회가 처럼 큰 교회지만 그 한 영혼, 한 영혼이 말씀 앞에서 자신을 주님 앞에 돌아보면서 성숙(成熟)할 수 있는 그런 계기가 있고 다락방은 그렇게 소그룹 다이나믹스를 통하여 한 영혼을 케어하고 그 다락방에서 당신은 제자 훈련해야 한다. 당신은 사역 훈련해야 해야 한다. 라는 하나님의 훈련생들이 배출(輩出)되게 하시고 그리고 다락방은 그런 한 영혼에 대한 소중성과 그다음 그 귀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훈련받을 사람들을 배출하고, 그다음 그 훈련받는 사람들을 영적으로 성숙하게 하고, 양육하게 하고, 그다음 제대로 키우는 제자 훈련 사역 훈련을 하게 하고, 그리고 제자 훈련한 사역 훈련을 하고 난 다음에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말씀으로 다락방을 소그룹을 이렇게 섬길 수 있는 말씀으로 영혼을 섬기는 순장들을 배출해내고, 다락방과, 훈련과, 순장반과 그리고 순장만 5년, 10년, 20년 하면 매너리즘에 빠져가지고 어리버리 할 수 있는 이런 사람들을 끝까지 그렇게 하지 않도록, 신선도 유지, 활력 영감과 능력을 계속 가질 수 있도록 사랑 글로벌 아카데미를 허락하신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제, 자, 세계 어느 교회가 제자 훈련, 제자 훈련 50회를 맞이하는 이런 데가 어디 있겠나요? 이게 그리고 50년을 가면서도 약화되지 아니하고, 지금도 이와 같이 오늘도 거의 500 몇 명이죠? 510여 명입니다. 계속해서,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지금 그레이조이 스쿨 대학원 대학교 입장 정도 수준에서 313명이 이렇게 입학하는 케이스가 거의 예외가 거의 잘 있지 않는 이런 참 특별한 계기를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참 놀랍습니다. 50년을 한결같이, 그렇게 될 수 있는 비결이 뭔가 사랑의 교회는 이 제자반, 사역반 혹은 이 전도폭발반, 이렇게 하면서 또 우리 이제 사랑 글로 아카데미 이제 오기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우리가 갖는 정신이 있는 거예요.

그게 뭐냐? 우리는 Finishing Well을 해야 한다.
아까 다락방, 제자반, 사역반, 그다음에 순장반, 이 네 가지가 사랑의 교회의 어떤 사륜(四輪) 구동(驅動)과 같이 네 바퀴와 같이, 잘 이렇게 정리가 되면 하나님 나라의 시온의 도로를 달릴 수가 있는 것이에요. 그렇게 해서 이 일이 잘 감당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 사랑의 교회 입학생들에게 주시는 변치 않는 하나의 원칙이 하나 있어요.
 
그것이 뭐냐, 오늘 디모데후서 4장 9절로 11절까지 있는 오늘 등장하는 여러 인물이 등장하지만 특별히 세 사람입니다. 데마, 마가, 누가 그리고 바울 사도, 바울 사도는 이제 전체를 보는 것인데 그래서 오늘 훈련하고 또 입학하는 여러분들에게 데마처럼 되지 말고, 마가처럼 되었더라도 다시 회복하고, 누가처럼 가능하면 시종일관(始終一貫) 처음과 끝이 동일한 능력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세 사람을 우리가 앞에 놓고 롤 모델로 우리가 역할 모델로 우리가 교훈을 받지만 사실은 우리의 본성 안에 우리의 속사람 가운데서, 우리에게는 데마 같은 기질도 있고, 또 마가 같은 그런 기질도 있고 누가 같은 이런 속성도 있어요. 가능하면 우리 속에 있는 부족함은 떨구어내게 하여 주시옵시고, 훈련을 통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집중력을 가지고 시종일관 승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여러분,
첫째, 데마는 잘 아시는 대로, 오늘 본문 보니까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갔고, 보면 알지만 데마는 처음에는 영웅적인 행동으로 출발한 사람이에요. 바울과 함께 바울의 동력자란 말도 들었고 또 누가와 같은 반열(班列)에서 사역(事役)하던 그 정도의 수준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데마가 가만히 보니까, 바울 사도가 이제 순교의 이슬로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니까 바울 초창기 때는 바울 사도하고 같이 사역할 때는 막 무슨 막 그냥 세상이 뒤집어지고, 그다음에 막 난리가 나고, 그냥 뭐 앞치마만 해도 사람이 막 살아나고, 기적 같은 일들이 막 일어나고 그럴 때는 신나고 승승장구(乘勝長驅) 했는데 나중에 바울이 나중에 순교(殉敎) 당할 상황(常況)이 되니까, 아 이러다가는 내 인생 종치겠구나,,, 싶어 갖고 바울을 떠나서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갔다.
 
그럼 데마가 왜 그랬을까?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첫째는 대마 속에는 처음에는 영웅적으로 시작하지만 그 속 사람이 약한 거예요. 우리가 왜 약한가? 우리 약한 이유가 뭘까? 우리의 약한 이유는 우리의 속 사람이 약하기 때문에, 이번에 훈련하는 또 입학하는 여러분들, 제가 오늘 이제 일일이 훈련 입학을 다 말하지 않더라도 딱 말하면 찰떡같이 알아듣고, 여러분들은 그러면 훈련생과 입학생 다 커버하는 것이야 아시겠어요? 아멘
 
여러분들이 오늘 여러분들이 이번에 이 훈련과 입학을 잘 감당해 낼 수 있도록 여러분의 속 사람을 주님이 강화(强化)시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속 사람이, 여러분 속 사람이 왜 약할까요? 속 사람이 약한 이유는 뭐예요? 속 사람의 능력은 뭘로 결정됩니까? 이 훈련을 통하여 하나님께 전적(全的) 위탁(委託)하는 사람은 속사람이 강해지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전적 위탁을 한다는 말이 뭐예요? 제가 한 번씩 말씀드립니다마는 사람에게는 전심, 사람에게는 진심, 하나님께는 전심, 하나님께는 전심이 그것이 전적 위탁인데, 그 전적 위탁을 하게 되면 하나님께는 전적 위탁을 하고, 사람에게는 독립(獨立)을 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꾸로 왔다고 말씀드렸죠. 하나님께는 마음대로 독립해서 살고, 사람에게는 완전히 위탁되어 가지고 남편 때문에, 아내 때문에, 자식 때문에 속을 끓이고 난리가 나는 거예요. 죽고 살고 못 살고 불그락 푸르락 하는 것이에요. 열심히 괜찮죠. 그러니까 이제 머리를, 그리고 속 사람이 강건해지지 못한 하나님께 전적 위탁을 못하니까 항상 자기 자신에게 늘 집중(集中)하는 거예요.
 
자기 자신에, 자기 자신에 베드로에게 베드로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봄으로써 네가 왜 사람을 주목하냐? 자기에게 집중하지 마라. 그래서 이번 모든 여러분들은 자기에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집중함으로 말미암아 속 사람의 강건함을 가지고 끝까지 잘 감당하고 활력(活力)과 역동성(逆動性)을 놓치지 마시기를 소망합니다.
 
또 하나는 데마가 도중에 하차한 이유는, 웬만한 어려움을 이겨낼 만한 더 큰 삶의 목표(目標), 하나님이 주시는 더 큰 비전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인생살이 하다 보면 이런저런 우여곡절(迂餘曲折), 우수(憂愁)사려(思慮)가 많이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시는 분명한 사명(使命)과 비전이 있는 것이에요.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훈련을 통하여 또 학업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 세상 사람들 그 누구도 그 누구도 쉽게 이해하지 못할 하나님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분명한 사명과 비전이 있는 줄로 믿으셔야 되는 것이에요. 오늘 이 말씀을 바울은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시고, 오늘 17절에 나와 있죠. 17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디모데후서 4:17-18,
17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바울의 사명은 뭡니까?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여 모든 이방인들에게 보낸 이방인에게 보낸 사도가 된 거예요. 그렇게 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어떤 일이 있어도 사자의 입에서 건졌는데, 18절에 한번 보세요. 18절도 보겠습니다.
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바울은 하나님이 주시는 이 놀라운 비전에 사로잡혀 가지고 웬만한 데는 흔들림이 없었어요.
그런데 데마는 흔들려 버렸어요. 바울은 어떤 경우에도 이 사명을 통하여 목자의 심정을 놓치지 않았다. 이거에요. 이 말이 데마에게서 받는 교훈이, 우리는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목표와 비전 사명이 더 확실해야 되고, 우리의 속 사람이 어떤 경우에도 흔들림이 없도록, 이제 속 사람이 흔들릴 만한 일들이 1년 동안 이걸 같이 있는 일을 하기 때문에 이것이 이렇게 흔들릴 만한 일들이 한 번씩 이제 한 번씩 이제 툭툭 칠 거예요. 파도(波濤)가 툭툭 일어날 거예요.
 
제가 이제 언젠가는 한번 얘기하겠지만 주 초에 제가 설교(說敎) 준비를 하다가 갑자기 설교 제목이 하나 생각났어요. 악플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악플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쉽게 말하면 비판을 어떻게 제가 이제 한번 설교할 거예요. ‘비판과 악플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그런데 대부분의 젊은 특별히 연예인들은 이 악플을 못 견뎌 가지고 어려움도 겪고 또 극단적인 선택도 하고 그렇게 다 하는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세상의 파도(波濤)를 감당(勘當)할 만한 영적(靈的) 내공(內工)이 준비가 안 돼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팍 치고 들어오니까, 그냥 나가 떨어지고 그다음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그다음에 실망(失望)하고 그다음에 중간에 나가 떨어지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이 경험을 해보니까요. 한 번 인생 파산(破散)했다가 경제적(經濟的)으로 완전히 폭망(暴亡)했다가 회복(回復)된 사람들은요. 웬만한 그리고 정말 사랑하는 가족들 있잖아요. 사랑하는 가족들을 먼저 남편이나, 아내나, 자식들이나 먼저 주님께 보냈는데 그 가운데 있잖아요. 그 가운데 정말 주님만을 신뢰(信賴)하고 주님만을 향한 속 사람이 강건(康健)해져 가지고 그 고비(苦悲)도 이겨낸 사람은요. 웬만한 파도 끄덕도 안 해요. 내 말 맞아요?. 틀려요? ➀가족들 사별, ➁경제적인 폭망, 세 번째 ➂암이 걸렸다가 나았다든자, 암이 걸렸다가 좀 나았다든지 아니면 거의 나은 수준이 된 분들은요. 웬만한 어려운 거는요. 그 문제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봐 다시 감옥을 갔다 왔다든지, 그다음에 폭망했는데 회복이 된다든지 아니면 또 뭡니까? 경제적인 파산을 회복이 된다든지, 아니면 사별 가족들을 사별을 이겨냈다든지, 아니면 깊은 건강의 고통 가운데서 조금 회복이 돼 이러면요. 웬만한 댓글들 신경 씁니까? 안 씁니까? 그건 아무 일도 아니에요. 아무 일도 웬만한 건 아무 일도 아니에요.
 
여러분, 지금 저기 뭡니까? 이번에 이제 1년 동안 이제 감사한 일도 있고, 기쁜 일도 있고, 은혜 받는 일도 많이 있지만 한 번씩 시험들 일도 많이 있을 거예요. 그런데 그럴 때마다 바울처럼 주께서 사자의 입에서 나를 건져내 주신다고 했어요. 바울은 죽다 산 거고, 그냥 얻어맞고 그냥 파산 당하고, 완전히 죽다 살고 그냥 완전히 공격(攻擊)당(當)하고 그냥 인간으로서 모멸(侮蔑)감(感) 말도 못하는데 그런 거 지나고 나니까, 웬만한 파도는 끄떡도 안 하는 거예요. 특히 이번 기수, 웬만한 파도는 다 이겨내시길 바라는 것이에요.
 
웬만한 파도는,,, 따라서 비옵기는, 사랑 그로벌 아카데미 이번에 303명, 한 명도 탈락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부탁합니다. 313명, 313명 이름도 3,13 딱 돼 있네. 3명이 마음 모아 가지고 3명을 끝까지 가게 한다. 그다음에 이번에 우리 제자반, 사역반 식구들, 끝까지 잘 감당할 수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
 
둘째, 마가가 있죠. 마가는 핵심은 뭐냐? 마가는 부잣집 도련님이었고 금수저였어요. 그런데 바울의 바울과 바나바의 바나바는 자기 삼촌인데,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제1차 전도 여행을 할 때, 이 금수저 도련님이 풍찬노숙(風餐露宿-객지에서 겪는 모진 고생)을 하고 고생하고, 그 당시에 무슨 자동차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걸어 다니면서, 온갖 어려움, 잠이나 제대로 잤겠어요 먹는 걸 제대로 먹었겠어요. 그러니까 바울과 바나바는 아예 각오(覺悟)했으니까 감당해야 되는데, 이 부잣집 도련님은 그걸 따라다니기 힘든 거에요. 그래서 탈락(脫落), 그런데 또 이제 정신 차려 갖고 다시 좀 해보려고 하니까 바울이 안 된다. 저리 어리 버리해 데려갔다가는 안 된다. 그래서 사도행전 15장 39절에 보면,
 
*사도행전 15장 39절,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삼촌인 바나바는 자기 조카니까 그래도 어째어째 해가지고 데리고 가려고 그러는데 바울은 둘이서 그냥 한바탕 하는데, 사도행전 15장 39절에 보니까, 이 문제로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섰어요. 그러니까 바울이란 영적 거장, 바나바라는 대단한 거장, 이 두 사람 사이를 갈라지게 만든 원인이 누구냐면 마가에요. 마가,,, 그런데 이것도 은혜로 받으니까, 나중에는 갈라져 가지고 한 것이 또 더 각자 사역에 더 귀한 열매를 맺으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나중에 이걸 마가가 깨닫고, 자기가 회복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더 무장(武裝)되어 가지고 끝까지 잘 감당해 가지고,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마가가 Finishing Well 한 결과가 뭐냐? 그것이 뭐냐 하면, 마가복음이에요. 우리 케논 성경, 우리 성경 신학과 그다음에 우리 보수 정통 신학의 Key 중에 하나가 마가복음에 대한 우리의 시각이에요.
 
만약에 마가복음이 없었으면, 마가복음에 이 복음서가 확고하지 않았으면 아마 우리 신학이 좀 흔들 흔들할 정도로 그런 뭐가 있는 거예요. 마가는 다시 회복해 가지고 피니시 웰을 해가지고 마가복음을 쓰고, 그다음 마가복음을 보면 제일 많이 나타나는 것이, 즉시, 바로, 이미디어트리(immediately), 옛날에는 비리비리 해 가지고, 중간에 이렇게 약화해서 중간에 그만두기도 하고 그랬는데 자기는 이제 아니라고 끝까지 자기는 뭐든지 주님 말씀하시면 즉시 하니라.
 
그래서 이번 기수 여러분들 다 즉시 은혜 받아가지고 끝까지 잘 써서, 내가 보고만 쓰지 말고, 여러분이 쓰신 여러분들의 은혜 받은, 정말 간절과 이런 것들 진짜 21세기에 복음의 증인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누가, 누가는 시종일관(始終一貫)하는 사람 사람과 끝까지, 한결같이, 11절에 보니까,
*디모데후서 4:11,
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누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잘 감당했습니다. 한결같은 사람이었어요. 여러분, 누가는 직업이 의사입니다. 의사들은 보면요. 정치(精緻)함이 있어야 돼요. 정교(精巧)하고 치밀(緻密)해야 돼요. 의사가 적당히 치밀한 게 없어가지고 적당히 수술하고 그러다가, 갑자기 말이야 위 수술하는데 위아래다가 가위 그냥 갖다 넣어놓고 말이에요. 이걸 해야지 저걸 자르고 막 이러면 되겠습니까??? 얼마나 학사가 치밀해야 합니까?
 
오늘도 제가 좀 아침에 잠깐 병원을 갔다 왔는데 야,,, 의사 정말 의사들 실력 좋아요. 주사를 놓는데 아플 겁니다. 그러는데도 별로 안 아파요. 실력이 좋아요. 그런데 또 어떤 의사 이 안에 뭘 넣느냐, 과연 얼마나 아픈지 근데 그게 다 뜻이 있는 거예요. 의사들은 갖고 있는 본인이 갖고 있는 직업에 대한 확실한 걸 갖고 있잖아요. 아주 정교하고 치밀해요. 근데 정교하고 치밀한 분들이 약점이 뭐냐 하면, 큰 그림을 가지고 전체를 보는 능력이 약한 거예요. 소위 하나님 나라의 역사의 흐름, 역사의 상선과 하선에 대한 어떤 시각(視覺), 이걸 잘 못하는데, 닥터 루이 의사인 누가가 히스토리아였어요 의사는 역사학자에요. 누가는 역사학자, 그래서 사도행전이라는 신약의 역사행전을 쓰는 거예요.
 
여러분, 사도행전은 누가 썼죠? 제가 아버지 얘기하지만 사도행전을 바울이 썼다고 하면 저는 돌아가시고 싶어요. 제자반 식구들은 그렇게 하면 안 되죠. 자, 사도행전은 누가 썼어요? 누가가 썼어요. 사도행전은 역사행전이에요. 사도행전은 시각이 얼마나 하나님 나라 전체에 대한 시각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걸 다 읽고 나면 사도행전 28장이 끝나지만, 사도행전 29장은 내가 서명받아서 내가 써야 되겠다. 이런 마음을 갖게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정치함과 큰 역사적, 긍정적 시각을 같이 가는 거에요. 이번 기수들은 의사처럼, 의사 누가처럼, 처음과 끝이 동일해야 됩니다. 치밀함, 전체를 보는 통전 적 시각, 거룩한 마이크로, 마이크로의 한 시각, 거룩한 매크로 한 시각, 이 두 가지를 잘게 가져서 끝까지, 피니시 웰 할 수 있도록 은혜 위에 은혜를 덧입혀 주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오늘 바울은 믿음의 선각자로서, 그의 양육과 그의 헌신과 그의 돌봄을 통하여 누가를 남겨 가지고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하게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누가가 쓴 성경의 분량이, 자기 스승 바울이 쓴 분량보다 많습니다. 이걸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고,,, 영적인 청출어람, 사랑의 교회는 기수가 더할수록 그 전 기수보다도 그 다음 기수(旗手)가 더 낫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제자만 사역반도 그러고, 5기가 4기보다 더 나을 줄로 믿습니다. 아니 다시 조금 더 크게, SaGA가? 5기가 4기보다 더 나을 줄 믿습니다. 4기는 또 시험 들지 말고, 왜냐하면 가면 갈수록 더 낫다는 개념에서, 그래서 또 나아가 그렇게 해서 영적인 바톤 터치가 잘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데마와 마가와 이 약점들을 다 데마와 마가가 그 약점들을 극복하고, 끝까지 속 사람이 강건하여 주님이 주신 사랑과 비전에 대해서 확고하게 되어 왔고,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 멋지게 쓰임 받음으로 말미암아 이번 기수, 명문 기수가 될 수 있도록 하나님 축복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온맘과 정성 다해 예수님의 신실한 제자되기 원합니다.!~♪~~
 
♣요약
주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를 사랑의 교회에 주실 것을 믿고, 역사상 이런 사역이 쉽지 않고, 이런 제자 훈련이 쉽지 않고, 이런 놀라운 그레이지 스쿨, 전례가 없는 은혜를 주신 주님을 찬양해야 한다. 이 일을 위하여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그림자 헌신, 물 떠온 헌신을 하는 주의 종들이 되어야 한다. 이번 기수도 이 시대 앞에 하나님 앞에 놀랍게 쓰임 받아야 한다. 이 시대의 물맷돌, 이 시대에 주님의 등을 태워가는 거룩한 당나귀의 역할을 해야 한다. 또한 이 시대에 누가와 바울의 역할을 잘 감당하여, 시대적 소명을 감당하고 은혜의 바톤 터치를 하는 귀한 훈련으로 주의 사람들 되어야 한다. 살다 보면 수많은 어려움도 있고, 수많은 마음의 아픔도 있을 수 있지만, 우리가 이런 말씀을 통하여 은혜받고, 삶의 수많은 과정들을 통하여 웬만한 파도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 은혜의 함대, 은혜의 신앙의 배를 띄우고, 항해할 수 있는 귀한 남녀 종들로 성숙해져야 한다. 모든 우리 훈련하는 목회자들 함께, SaGA의 모든 교수진들 함께하여 다 합력하여 끝까지 ‘Finishing Well’ 하는 평생 사역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평신도 훈련 개강 및 사랑 글로벌 아카데미 입학 감사 예배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드리자.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이 인생의 의미와 활력을 결정한다. 데마, 마가, 누가의 삶을 비교하며 신앙의 길을 조명하며, 데마는 처음에는 헌신적이었지만 세상을 사랑하여 떠났고, 이는 속사람이 약하고 비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반면 마가는 초기에 실패했으나 다시 회복되어 마가복음을 기록하는 영광을 얻었다. 누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바울과 함께하며 신실하게 사역한 인물로, 그의 흔들림 없는 헌신을 본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랑의 교회는 다락방, 제자훈련, 사역훈련, 순장반, 사랑 글로벌 아카데미(SaGA)를 통해 신앙을 훈련하고 성숙을 이루도록 돕기에, 신앙 여정에서 어려움과 시험이 있어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것(Finishing Well)이 중요하다. 한결 같이 주님 앞에서 올바르게 서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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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5년 2월 19)
제목: “하나님께서 돌보십니다”
말씀: 창세기 50:22-26
찬양인도: 쉐키나(이동선 부목사님)
사회: 강건우 부목사님

설교자: 백요셉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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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50:22-26,
22 요셉이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주하여 백십 세를 살며.
23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
24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26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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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요즘 감사해하는 물건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체중계입니다. 저희 집에 건강을 위해서 다이어트를 하시는 한 분이 계시는데요. 제가 집에 일찍 들어가서 저녁을 먹을 때면 분명히 다이어트를 하시는 거는 같은데, 놀랍고 광대하게 식사를 하시는 그분을 보면서 깜짝 놀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근데 중요한 것은 이런 일이 계속 되풀이된다는 겁니다. 우리 자매님들 우리 여성 성도님들은 잘 아시겠지만, 그렇게 드시면서 하시는 얘기가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먹으면 살찌는데,,, 라면서 계속 식사를 하십니다. 근데 저희 가정에 모세가 홍해를 가르는 것과 같은 역사가 그 다음 날에 일어납니다.

그 역사는 어떻게 일어나냐면 그분께서 체중계에 올라가시고 난 뒤에 이렇게 고백하십니다. 살이 전혀 찌지 않았다. 가끔은 이전보다 더 빠졌다라고 이야기하시는 겁니다. 그럴 때 보면서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역시 디지털은 믿지 못하는구나, 체중계를 바꿔야 되나라는 생각도 많이 하면서 북한이 해킹을 했나 우리 체중계를 라는 생각도 가끔 하게 됩니다. 여러분 근데 그 체중계의 숫자를 보면서 안심하고 그 숫자 그대로 믿는 그분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한번 해보았습니다. 아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이렇게 무게를 들고 흔들림 없이 살았으면 참 좋겠다.

세상이 무엇이라 얘기하든 간에 정말 하나님의 말씀만을 가지고 우리가 이렇게 살아갔으면 흔들림 없이 오직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따라가며 살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들의 힘과 소망이요. 우리들의 유일한 우리들의 길잡이가 되심을 믿으시길 소원합니다. 여러분 창세기는 50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중에 요셉의 이야기는 37장부터 마지막 50장까지 14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중에는 참 많은 에피소드 이야기들이 나오게 됩니다. 근데 오늘은 그중에 2가지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신실하게 요셉을 지키신 것처럼 우리의 삶을 지키시는지를 한번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는, 유다의 이야기를 한번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창세기 37장 요셉의 이야기는 야곱이 요셉에게만 채색 옷을 입히면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요셉이 두 가지 꿈을 꿉니다. 벼 단, 요셉의 벼 단은 형제들, 벼 단이 절하는 것이 첫 번째 꿈이었고, 두 번째 꿈은 해와 달과 열 한별이 요셉에게 절하는 꿈을 꾸게 됩니다. 형제들은 이 꿈을 듣고 요셉을 시기(猜忌), 질투(嫉妬)하며 죽이려고 하죠. 그때 아버지가 요셉에게 형들을 한번 살펴보고 오너라.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때 요셉이 형들을 보러 도단에 갔을 때 형들이 요셉을 발견한 뒤에 요셉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 때 첫째인 루우벤이 형제들을 말리려 하지만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형들이 일을 꾸미게 되죠. 그중에서 창세기 37장 26절 28절에 보면,

*창세기 37장 26-28절,
26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할까.
27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그에게 우리 손을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니라 하매 그의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
28 그 때에 미디안 사람 상인들이 지나가고 있는지라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은 이십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인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라고 유다가 고백합니다. 여러분 얼핏 듣기에는 굉장히 좋은 이야기 같습니다. 근데 하지만 유다는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있냐면 형들을 선동하고 설득하고 있는 겁니다. 야, 우리의 손에 피 묻히지 말고 팔아버리자. 우리가 괜히 수고하지 말고 그냥 팔아버려서 요셉을 치워버리자. 라고 선동하고 있는 겁니다. 어쩌면 요셉은 이 유다의 선동 때문에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려 갔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이렇게 팔려간 내용이 37장의 내용이고, 여러분 37장 그리고 38장, 39장이 있는데, 여러분 37장은 방금 내용이고, 39장은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내용인데, 38장이 조금은 불편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러분 38장은 유다가 자기 며느리와 부적절한 관계가 관계를 만드는 그런 내용이 일어나는데 여러분 이 이야기를 통해서 저는 유다를 한번 조금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38장에 이렇게 시작합니다. 38장 1절에서 2절입니다.

*창세기 38장 1-2절,
1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2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
-여러분 그 후, 라고 설명됐는데 그 후는 언제입니까? 요셉이 팔려 간 뒤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근데 그때 유다가 아둘람 사람 히라와 친하게 지냈다. 라고 얘기합니다. 아둘람 사람 이방인과 함께 친하게 지냈다.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죠. 그리고 가나안 사람과 결혼했다. 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근데 여러분 창세기 24장, 28장을 보면 여러분 아브라함이 이삭에게도 그렇고 이삭도 야곱에게도 그렇고 가나안 사람과 결혼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면, 혈통이 섞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 다른 이방인들과 결혼하지 말라고 했지만, 유다는 지금 누구와 결혼했습니까? 가나안 사람과 결혼했다. 라는 겁니다.

여러분 그리고 나서 유다가 가나안 사람을 통해서 3명의 자녀를 낳는데, 엘 오난 셀라라는 3명의 자녀를 낳습니다. 여러분 첫째, 아들 엘은 다말이라는 여인과 결혼을 하게 되죠. 근데 창세기 38장 7절에 보면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창세기 38장 7절,
7 첫째, 아들이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여 애를 하나님께서 치셨다.
-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당시에는 수 대 계승을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한 가정을 이루었는데 만약에 그 가정에 자녀가 없이 남편이 죽었으면, 그 아래 형제들과 아래 형제에게 그 아내가 결혼을 하여 대를 이으는 수대 계승을 했다라는 겁니다. 근데 이 두 번째 아들이 수대에 계승을 하기를 거부합니다. 38장 10절에,

*창세기 38장 10절,
10 그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그래서 하나님 보기에 악하여서 둘째, 아들도 치십니다. 근데 셋째, 아들이 장성할 때까지 기다리지만 유다가 셋째, 아들을 다말에게 주지 않습니다. 아마 첫째 아들, 둘째 아들이 죽는 것을 보면서 조금 이상하게 여겨서 그가 셋째 아들이 장성했는데도 불구하고, 다말에게 주지 않았던 거 같습니다. 여러분 이런 가정 계속 아들이 죽어나는 이 가정의 상황 가운데 조금 더 어려운 상황이 생기는데 유다의 아내가 죽게 됩니다. 여러분 이 아내가 죽게 된 슬픔을 유다는 어떻게 해소했냐면 세속적인 방법으로, 여러분 38장에 보면 양털을 깎는 시기나 양털을 깎는 자에게 갖더라. 라는 표현이 있는데, 양털을 깎았다. 라는 것은 1년에 한 번 잔칫날 축제의 날입니다.

즉 유다가 자기 아내의 죽음을 여러분 세속적인 방법으로 풀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때 유다가 자기 며느리 다말을 보면서 몸을 파는 자로 생각하고 하룻밤을 지내려고 합니다. 여러분, 그때 유다가 약속을 합니다. 내가 염소 새끼 한 마리를 줄 테니 하룻밤을 지내자 근데 다말이 그렇게 고백합니다. 아 그거 말고 그것을 줄 때까지 나에게 담보물을 주라. 당신이 갖고 있는 도장 끈 지팡이를 나한테 지금 달라.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유다가 그것을 담보물로 주고 하룻밤을 보내게 됩니다. 여러분 그 다음날 유다가 자신의 담보물을 찾으려고 염소 새끼를 친구 희라의 편에서 그곳에 다시 찾아오라고 얘기하지만 그곳 사람들이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그곳에는 몸을 파는 사람이 없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소식을 듣고 다시 돌아온 히라에게 그 얘기를 듣고 나서 조금 다시 찾거나 어떤 상황을 만들어서 회복했으면 좋겠는데, 여러분 그 상황을 모면하려고 그냥 없었던 일처럼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여러분, 세 달이 지난 후 유다에게 다말이 자기 며느리가 임신했다. 라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유다는 이 다말을 불사 지르려고 다말에게 갔지만 다말이 유다에게 유다가 자신의 담보물로 맡겼던 도장 끝 지팡이를 보여주면서 자신의 자녀임을 깨닫고 쌍둥이 자녀를 낳게 되는 것이 창세기 38장의 내용입니다.

여러분, 그리고 39장엔 다시 요셉의 이야기로 아까 나온다고 얘기했죠. 어떤 내용입니까? 여러분, 요셉이 보디발 장군의 집에 팔려가서 가정에 총무가 되고 그곳에서 아내와 보디발 장군의 아내와 에피소드가 있은 후에 왕의 죄수를 가둔 감옥에 다시 갇히게 됩니다.


여러분 40장은 어떤 이야기가 납니까? 40장에는 다시 보디발 장군의 감옥에서 왕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 장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이 꿈을 꾸는데 요셉이 그들의 꿈을 해석하죠. 떡 맡은 관원장은 바로 죽게 될 것이고. 술 맡은 관원장은 다시 복귀할 텐데 복귀하면 자신을 기억해 달라 라고 이야기하지만, 여러분 요셉은 2년 동안 잊혀 지고 맙니다. 그리고 나서 41장에 보면 애굽의 왕 바로가 두 가지 꿈을 꾸게 됩니다. 여러분,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지만, 두 가지 꿈 살찐 염소를 마른 염소가 잡아먹게 되죠. 몇 마리였습니까? 7마리, 7마리씩입니다. 여러분 그리고 어 좋은 이삭 일곱 개를 마른 이삭 일곱이 잡아먹는 꿈을 꾸게 됩니다.

여러분, 이 꿈을 해석하려고 온 땅을 뒤졌지만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죠. 그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요셉이 어 에고 왕 바로의 꿈을 해석하게 되죠. 앞으로 7년에 풍년이 있은 후에 7년의 흉년이 있을 텐데, 왕은 그것을 대비하라고 말합니다. 이 얘기를 들은 왕은 하나님께서 알려주셨으니 당신이 애굽의 총리가 되라고 이야기하고 애굽의 총리가 된 모습이 41장의 내용입니다. 여러분, 여기까지의 요셉 이야기가 있은 후에 42장과 44장에 요셉은 다시 형들을 만나게 되는 장면이 이루어지는데요.

여러분, 요셉이 형들과 헤어지고 나서 다시 만날 때까지 여러분 21년 또는 22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요셉의 나이는 38세에서 39세 정도의 나이가 됐는데, 여러분 성경에 이 숫자가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잠깐 정리를 해드리려고 이 숫자가 이만큼 걸렸다는 숫자가 좀 중요해 갖고 같이 나누려고 하는데 37장에 보면은 요셉이 17세가 되는 때에 꿈을 꾸고 이런 일이 벌어졌다. 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요셉이 30세가 되는 때에 애굽의 총리가 됐죠. 그러니까 30 빼기 17은 13입니다. 그 다음에 여러분 7년에 풍년이 있은 이후에 그다음에 1년 또는 2년 때쯤에 아마 흉년이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7을 더하고 아마 1 또는 2를 더하면은 아마 21 또는 22가 되겠죠.

그래서 21 또는 22의 시간이 지난 이후에 요셉이 형들을 만나게 되었다. 라는 겁니다. 여러분 어 42장에서 형들을 만났을 때를 여러분 기억 하십니까? 여러분 아마 흉년이 시작될 때, 애굽을 제외하고 모든 지면에 굉장히 식량을 구하기 어려울 그때에, 여러분 야곱이 형들에게 베냐민을 제외하고 식량을 구하러 애굽에 가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형들은 요셉 앞에 나아가게 되어 있는데, 여러분 요셉은 형들을 알아보지만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다. 라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식량을 주고 여러분 다시 보내는데 그런 얘기를 하죠.

다시 올 때, 베냐민이 없다면 다시 올 생각 식량을 구할 생각을 하지 말라 라고 돌려보냅니다. 여러분 43장에, 43장에 보면은 형들이 식량을 가지고 다시 갔는데도 불구하고, 43장의 시작은 기근이 더 심해졌더라. 라는 표현을 통해서 다시 요셉 앞에 갈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하나님께서 만드십니다. 야곱은 형들에게 식량을 다시 가져오라. 라고 이야기하지만 형들은 그렇게 아버지한테 얘기하죠. 요셉이 베냐민이 없으면 다시 오지 못하게 했으니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 된다. 라고 얘기하지만 야곱은 형들에게 너희가 내가 사랑했던 아들 요셉을 죽게 했는데 또 사랑하는 아들 베냐민도 이렇게 하느냐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나서 오히려 형들에게 왜 베냐민이 있다. 라는 이야기를 해서 이런 상황을 만들었냐, 라고 나무라게 됩니다. 여러분 그때 유다가 이런 고백을 합니다. 43장 9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창세기 43:9,
9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야곱에게 유다가 내가 베냐민 대신 담보가 될 테니 보내 달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 이야기 끝에 형들은 베냐민을 데리고 요셉에게 나아갑니다. 또 요셉은 이런 형제들을 보고 다시 식량을 가지고 보내려고 했는데 여러분 두 번째 만남 때에 어떤 에피소드가 있는지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여러분 베냐민의 자루에 은잔을 숨기게 됩니다. 여러분 아마 요셉은 변화된 형들의 모습이 진짜였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은잔을 숨겼던 것 같습니다. 그때 형들이 은잔을 훔쳤다. 라고 얘기했을 때 우리는 그런 사람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모시는 사람인데 우리는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 만약에 우리 자루에서 은잔이 발견되면 그 사람이 죽을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때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발견되죠. 여러분, 그때 다시 형들 베냐민 다 요셉 앞에 나와서 죽음 베냐민이 죽게 되는 위험에 처했을 때, 유다가 다시 한번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창세기 44장 30절에서 32절입니다.

*창세기 44:30-32,
30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31 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 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32 주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짐을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라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이 고백을 하는 유다는 어쩌면 20년 전에 요셉과 함께 지냈던 그 상황과 동일한 상황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무슨 말이냐면은 여러분 아버지 야곱이 정말 요셉을 편애(偏愛)하고 요셉만 사랑했던 그런 모습을 보며 유다는 질투(嫉妬)하고 여러 번 시기하면서 오히려 요셉을 죽이려 했고 팔아버렸습니다. 하지만 이런 동일한 상황 20년 이후에 아버지가 베냐만 사랑하는 이 동일한 상황에서 유다는 지금 오히려 요셉 대신 베냐민을 보면서 내가 그를 대신해서 목숨으로 바꾸겠다. 내가 담보가 되겠다라고 고백하고 있다.라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 20여 년 동안에 요셉만 신실하게 붙으시고 인도하신 것이 아니라 요셉의 형들도 만지시고 빚으셨다. 라는 겁니다.

여러분 20년 전에 사랑받는 요셉을 보며 시기 질투하고, 여러분 38장에 여러분 기억하시겠지만, 여러분 세상에서 허랑당탕하게 살며 자신의 욕정과 욕망을 마음껏 풀었던 유다가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여러분 그런 모습으로 변화되어 지금은 베냐민 대신 자신의 목숨을 담보하는 여러분 삶으로 그런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라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유다를 변화시킨 그 하나님의 손길이 지금 저와 여러분들도 변화시키고 계심을 믿으시길 소원합니다. 여러분 가끔 그런 사람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아 주님이 다시 오셔도 저 사람 변화되지 않을 거야.

라는 사람 있지 않으십니까 여러분 근데 여러분 그런 가족, 여러분 그런 친구 직장 동료 여러분 그런 사람들에게도 여러분 포기하지 말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여러분 기도하시길 소원합니다. 유다를 변화시키신 그 하나님께서 여러분 반드시 그 사람도 변화시켜 주실 것을 믿으시길 소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의 손으로 여러분 못하실 것이 없으십니다. 여러분 변화의 능력이자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의 이름을 축원합니다. 여러분, 두 번째 이야기는 여러분 요셉의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오늘 같이 읽었던 본문 창세기 50장에서는 요셉의 마지막을 설명하면서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할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버지 야곱이 죽자 형들은 요셉을 두려워하고 떨게 됩니다. 그러면서 요셉에게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아버지가 죽으시기 전에 우리들을 용서해 주라고 이야기했다. 라고 고백하는데 창세기 50장 15절에서 18절을 우리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

*창세기 50:15-18,
15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16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18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여러분, 이렇게 형들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 요셉이 혹시 그 권력과 그 위치로 자신들이 해 할까, 이런 고백을 합니다. 이럴 때 요셉이 형들에게 대답하는데 아마 성경 구절 중 굉장히 유명한 구절이죠. 여러분 창세기 50장 19절에서 21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창세기 50:19-20,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여러분 요셉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쉽게 얘기하면 요셉 자신이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라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방법대로 인도하셨는데 자신이 뭐라고 하나님께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다. 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왠지 아십니까? 우리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를 가장 최선의 방법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희 모두가 어렵고 힘들고 곤란하고 원치 않는 상황에 놓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 저희 모두가 이 요셉의 고백, 우리가 하나님을 어찌 대신하리까, 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대신하리까, 라는 고백이 굉장히 유명해서 그렇지 요셉이 마지막에 한 저희가 함께 읽었던 오늘의 본분이 실질적으로 요셉의 마지막 유언입니다. 이야기 이를 통해서 마무리하길 원하는데요. 창세기 50장 22절 26절을 저희가 한 번만 더 읽길 원합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창세기 50:22-26,
22 요셉이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주하여 백십 세를 살며.
23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
24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26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여러분 하나님께서 돌보십니다가 요셉의 마지막 유언입니다. 이게 별거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이게 별거 아닌 이야기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돌보십니다. 근데 요셉에게는 엄청난 고백이었습니다.

여러분, 요셉이 30세에 총리가 되고 여러분 죽을 110세에 죽었다고 얘기하니까, 80년 동안 총리를 한 겁니다. 여러분 세계에서 최 강대국의 실제적인 권력자로 80년을 살았으니 얼마나 그 영향력이 대단했겠습니까? 여러분 요셉의 영향력이 어떠했는가를 잘 나타나는 구절이 창세기 50장 초반부에 나타나는데 요셉의 아버지 야곱이 죽을 때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제가 대신 읽겠습니다. 50장 1절에서 3절입니다.

*창세기 50:1-3,
1 요셉이 그의 아버지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고.
2 그 수종 드는 의원에게 명하여 아버지의 몸을 향으로 처리하게 하매 의원이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하되.
3 사십 일이 걸렸으니 향으로 처리하는 데는 이 날수가 걸림이며 애굽 사람들은 칠십 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
-여러분 요셉이 죽은 게 아니라, 요셉의 아버지 야곱이 죽었는데, 여러분 며칠 동안 애곱 사람들이 곡했다고 이야기합니까? 여러분 70일, 7일이 아니고, 여러분 70일 동안 애곡(哀哭)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 창세기 50장 6절에서 9절에 보면은 그 영향력을 더 실감하게 이야기하는데요. 이렇게 고백합니다.

*창세기 50:6-9,
6 바로가 이르되 그가 네게 시킨 맹세대로 올라가서 네 아버지를 장사하라.
7 요셉이 자기 아버지를 장사하러 올라가니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원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원로와.
8 요셉의 온 집과 그의 형제들과 그의 아버지의 집이 그와 함께 올라가고 그들의 어린 아이들과 양 떼와 소 떼만 고센 땅에 남겼으며.
9 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가니 그 떼가 심히 컸더라.
-여러분 바로에게 요셉이 이야기하는 겁니다. 아빠 나의 아버지를 장사하게 해주세요. 제가 내려가겠습니다. 했더니, 바로가 승낙하면서 했던 장면이 설명하고 있는데요. 여러분 바로의 모든 신하들, 바로 궁의 원로들, 애굽의 원로들이 요셉을 따라갔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물결이 병과 기병이 심히 많았다. 라고 이야기하니 여러분 요셉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했겠습니까? 여러분 근데 이렇게 영향력(影響力)이 많았던 요셉의 마지막이 뭐라고 고백했다는 겁니까? 하나님께서 돌보십니다. 여러분 제가 대신 50장 24절에서 25절을 읽겠습니다.

*창세기 50:24-25,
24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여러분 제가 만약에 이 요셉의 환경에 있었다라면 만약에 제 영향력으로 일했다라면, 만약에 제 마지막 제 삶의 끝에 제 자녀를 불러서 저는 이렇게 고백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제 자녀에게 ‘야, 너 할아버지 죽을 때 봤지? 내 영향력으로 너는 평생 내가 죽더라도 너의 재산, 너의 위치, 환경 여러분 너는 걱정 없을 거야.’ 라고 고백했을 텐데 요셉은 그 마지막을 그렇게 고백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돌보실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왜 그럽니까? 요셉이 110세까지 살아보니 자신의 삶을 이끌었던 것은 재물도 아니고 권력도 아니고 여러분, 그 어떠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셨다. 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돌아보니 하나님께서 신실하셨고 돌아보니, 나의 하나님께서 참 너무나도 신실하게 나의 삶을 지키시고 보호해주시고 이끌었다. 라고 요셉은 간증(看證)하고 있다. 라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의 마지막 고백이 이 요셉의 고백이 되길 원합니다.

돌아봤더니, 정말 우리 하나님 신실하셨다. 돌아봤더니, 우리 하나님 진짜 살아계셨다. 돌아봤더니, 우리 하나님이 돌보셨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 가운데 참 많은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여러분 어떠한 환경 가운데 여러분들이 놓이셨는지 저는 다 알지 못하지만 여러분 이 요셉의 고백이 위로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그 어떠한 상황 가운데 놓이더라도 하나님께서 돌보실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심을 여러분 기억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요약
시기와 질투 끝, 후회스러운 처지에 이르지 않도록 유다의 인생을 붙들고 다듬으셨던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에게도 넉넉히 베풀어 주시길 간구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닮은 예수 성품으로 온전히 변화되어, 상황이나 환경이 두텁게 쌓아 올린 안목의 비늘을 성령 하나님의 강권적인 인도하심으로 벗겨지기를 확신하며, 나를 축복의 통로로 삼으시려는 주의 뜻과 계획, 거룩한 비전을 성취하는 평생이 되길 소망하자.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는 것은 신자의 책임이 아니라, 특권(特權)이라던 요셉의 마지막 고백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信賴)하며 그 신실 하심을 찬양하는 불이 생의 마지막까지 꺼지지 않기를 간절히 사모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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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2025년 2월 12일)
제목: "주 안에서 기뻐하라"
말씀: 빌립보서 4:4-7
사회: 강건우 부목사님

설교자: 홍진기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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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4:4-7,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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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앙망하며 새로운 은혜를 사모하는 수요 저녁 기도회에 오신 우리 모든 성도님들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수요저녁기도회를 통해서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시는 이 시간 되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작년 연말부터 초대 교회의 역사와 초대교회 모습에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초대 교회라고 하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에 33년부터 150년 사이에 세워진 교회들을 말합니다. 예루살렘 인근에 세워지고 또 사도바울이 복음 전도 여행을 통하여서 로마 제국 안에 세워진 교회들을 초대 교회라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가 되는 데 있어서 큰 역할을 했던 교회들이 바로 초대 교회입니다. 초대 교회가 정확하게 몇 개나 세워졌는지를 알 수는 없지만, 여러 교회들의 이름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그중에서 빌립보교회와 그리고 사도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서 쓴 빌립보서의 내용을 가지고 함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빌립보교회는 사도바울이 2차 전도 여행 때 세워진 교회입니다. 사도바울이 1차 전도 여행 때 소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2차 전도 여행 때 비슷한 코스를 다시 정하고 1차 전도 여행 때 지나며 세웠던 그 교회들을 다시 돌아보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2차 전도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사도바울이 1차 전도 여행과 비슷한 목표로 가다가 북쪽으로 1차 전도 여행 때 가지 않았던 그 북쪽 지역으로 복음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성령께서 사도바울의 그 북쪽으로 가는 것을 막으십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어디로 가야 될지, 그렇게 고민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에게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그 환상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입니다. 바울이 밤중에 환상을 경험하게 되는데 마게도냐 사람이 그 환상 중에 나와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달라 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사도바울은 이 환상이 하나님의 음성이고 하나님께서 왜 나를 소아시아 북쪽이 아닌 다른 지역으로 가게 하셨는지를 그 환상을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이제 사도바울이 드로아라는 지역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서 마게도냐 지역으로 가게 됩니다. 들어서 잘 아시겠지만, 마게도냐 지역은 어떤 한 도시 이름이 아니라 그리스 북부 전체 전 지역을 의미하는 그러한 큰 지역의 지명입니다. 바울이 1차 전도 여행 때 전도했던 지역은 지금의 터키, 튀르키예라고 하는 그 지역이었는데. 이제는 하나님께서 바울을 이제 바다를 건너서 유럽 땅에 발을 밟게 하십니다. 사도바울이 배를 타고 건너서 처음 도착한 그 막의 도게도냐 땅이 바로 지금의 그리스 북부 지역인 유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바울의 길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방식으로 인도하셔서 유럽 땅을 밝게 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는데 사도바울의 그 복음을 전하는 지경을 지금의 소아시아 지역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 그리고 전 유럽을 뛰어넘어서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하게 하기 위해서 사도바울을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사도바울이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서 마게도냐 지방에 처음 도착하고 그 땅에서 처음 도착한 도시가 바로 빌립보라는 도시입니다. 우리가 다 읽지는 않았지만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빌립보에서 했던 일들이 복음을 전했던 또 그 가운데 일어났던 사실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세 가지 사건인데요. 첫 번째는 자주 장사 루디야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줍니다.

I. 첫 번째는 자주 장사 루디야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줍니다.

-그리고 귀신 들린 여인을 고치고 그 귀신 들린 여인을 고친 일 때문에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히게 되죠. 감옥에서 바울과 실라가 기도와 찬성을 하는 가운데 그 곳에 큰 지진이 일어나고 그곳에 옥문이 모두 열리게 됩니다. 옥문이 모두 열린 사건을 그 사실을 광경을 보고 그 간수장이, 감옥장이 자결을 하려고 하죠. 근데 바울이 그가 자결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이 말씀을 전하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너무나 유명한 말씀,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이렇게 빌립보 교회는 사도바울이 마게도냐 환상을 따라서 유럽 땅에 첫 발을 내딛어서 세워진 교회가 바로 빌립보 교회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에게 이렇게 특별한 애정을 가진 교회였고, 빌립보 교회도 바울을 사랑하고 바울을 위해서 특별히 기도하며 그리고 많은 선교에 대한 짐들을 함께 지며 했던 그러한 동역하는 교회였습니다. 바울 일행이 빌립보를 떠나서 그리스 남부 지역에 고린도를 비롯한 아덴 지역으로 복음을 전하러 갈 때,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선교비를 지원했습니다. 또한 빌립보 교회는 이방인 교회인데 유대인 교회였던 예루살렘 교회가 기근과 어려움을 당하자 예루살렘 교회를 향하여서 헌금을 하였던 교회이기도 합니다. 또한 바울이 로마에 압송돼서 감옥에 있다. 라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자 누구보다도 눈물을 흘리며 바울을 위해서 기도하고, 걱정했던 교회가 빌립보 교회입니다.

그리고 기도만 했을 뿐만 아니라 바울이 로마 옥 중에 있을 때 에바브로 디도를 보내서 직접 바울에게 찾아가서 위로하고 바울을 돕게 했던 교회가 바로 빌립보 교회입니다. 빌립보서에는 사도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다는 얘기를 듣고 걱정하고 눈물 흘리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향한 사도바울의 편지가 바로 빌립보서입니다. 사도바울은 큰 걱정과 염려와 근신 중에 있었던 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비단 빌립보 교인뿐만 아니라 우리 현대 그리스도인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짐과 염려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말씀을 전하고 있는 편지이기도 합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빌립보의 주제를 한번 살펴보면 빌립보는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을 향한 큰 걱정과 염려 가운데 있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전한 편지입니다. 그런데 이 주제가 이 빌립보서의 주제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주제가 기쁨입니다. 빌립보서에는 기쁨이라는 단어가 열여섯 번이 나오고 빌립보는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4장 전체 내용 가운데 사도바울의 기쁨이 가득 차 있는 것을 우리가 빌립보서를 읽으면 느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로마 감옥에 있습니다. 바울이 비록 로마 1실권 자고 바울이 로마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그런 다소 느슨한 감옥이라고 그렇게 알려져 있지만 그래도 바울은 죄수의 신분이었고, 바울은 감옥에 갖춰져 있습니다.

발에는 족쇄가 채워져 있고, 모든 것이 열악한 곳이 바로 감옥입니다. 사도바울은 총 세 번의 전도 여행과 그리고 로마로 압송되는 과정 가운데서 많은 고초(苦楚)를 겪게 되었죠. 전도 여행 중에 심한 배를 맞기도 하고 돌을 맞아서 거반 죽게 되어서 사람들이 죽은 줄 알고 성 밖으로 버려버린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로 오면서 지중해 풍랑(風浪)을 맞아서 거의 죽을 뻔한 그러한 경험을 하기도 했습니다. 바울이 지금 로마 감옥에 있으면서 기뻐할 수 있는 환경은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자기 안에 있는 뜨거운 기쁨을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렇게 전하고 있는데, 바울 안에 있는 이 기쁨이 도대체 어떤 기쁨일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같이 함께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2주 전에 담임 목사님의 주일 설교 ‘증오는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 라는 설교 말씀을 통해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저도 이 말씀을 통하여서 두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는데 ①첫 번째 성경에서 말하는 기쁨은 감정적인 기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은 너무나 연약해서 성경의 말씀과 성경의 명령대로 우리는 항상 기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씀하는 이 기쁨은 우리가 흔히들 알고 있는 그런 감정적 기쁨이 아니라고 목사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또 ②두 번째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이 기쁨은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것이고,. 믿음 위에 굳게 서서 선택할 때 누릴 수 있는 것이 바로 기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주일 담임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서 제가 구하는 것들이 참 얄팍하고 환경적이고 감정적인 기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내가 누려야 할, 우리가 누려야 할 기쁨은 십자가의 은혜의 기쁨이고, 구원의 감격의 기쁨이고, 믿음의 굳건한 선택의 고백이라는 것이 고백이 우리의 기쁨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깊이 새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빌립보서 4장에서는 사도바울이 그 기쁨을 잃어버리게 하는 2가지 이유를 우리에게 소개하면서 그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구원의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에 감격의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선택해야 될 두 가지를 바울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항상 기쁨을 유지하기 위한 첫 번째 선택은 바로 심판이 아니라 ①관용을 선택하라. 라고 사도바올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5절 말씀입니다. 우리 다 같이 읽겠습니다.

*빌립보서 4:5,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 ‘관용’이라는 단어는 남의 잘못을 너그럽게 이해하고 용서한다. 라는 그러한 뜻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자랑하며 구원의 기쁨을 항상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관용을 선택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는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팎으로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유대주의자들이 할례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비난했고, 교회 밖에서는 로마의 정부에 심한 박해 때문에 어디를 가든지 피해 다녀야 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복음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 때문에, 유대인만 구원 넣는 것이 아니라 나 같은 이방인도 구워 넣을 수 있다는 하나님의 놀라운 복음을 얻고 가운데 있었던 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할례받지 못한 자들이라는 비난 때문에 그리고 로마의 박해 때문에 자기 안에 있는 그 기쁨이 금방 잃어버리는 것을 종종 확인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위해서 항상 기뻐할 수 있는 방법 하나로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할 것을 그들에게 말씀합니다. 이는 사도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은 무조건 참고 용서하라. 가 아니라 그렇게 하라는 근거를 대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너희를 핍박하는 이들을 위하여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하고 용서해야 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우리를 핍박하는 사람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을 비난하고 그들을 위해 복수를 준비하고 심판을 그들을 위해서 준비하다가 우리 안에 있는 십자가와 구원의 기쁨을 잃어버릴까 봐 너희가 너희를 힘들게 하는 이들을 비난함으로 그들을 심판함으로 우리 마음속에 있는 더 큰 구원의 기쁨을 잃어버리고 살까 봐 하나님께서는 사도바울을 통해서 그들에게 심판이 아닌 관용을 선택하라. 라고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이러한 동일한 이유로 우리가 은혜를 잃어버리곤 합니다.

나를 공격하고 나를 힘들어하는 사람들 때문에 주일날 받았던 말씀을 읽으면서 또 훈련을 통해서 받았던 다락방을 통해서 받았던 은혜들을 잃어버리곤 합니다. 주일날 예배 시간에 영광스러운 예배를 경험하고 은혜를 받고 집에 돌아가기 위해서 교회 주차장에서 차를 빼다가 우리가 은혜를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은혜를 받고 집에 돌아가는 길 가운데서 차 안에서 과자 하나 때문에 싸우는 아이 때문에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받았던 은혜를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받았던 은혜를 가지고 주중에 나의 삶의 현장에서 기쁨으로 살아야 하지, 라는 결단이 하루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삶의 현장에서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 때문에 그 기쁨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또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에게 너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관용해라. 그 이유는 너희 안에 있는 십자가의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5절 말씀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빌립보서 4:5,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주께서 곧 오신답니다. 비록 억울하고 힘든 일이 있을지라도 그들을 심판(審判)하고 심판하기 위해 분노(憤怒)하지 말고 관용하라고 말합니다. 심판과 분노를 선택하지 말고, 너희 안에 십자가(十字架)의 능력의 은혜의 구원(救援)의 기쁨을 선택할 때 반드시 주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라고 바울은 믿고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이 방학이라서 집에 있습니다.

많은 엄마들이 기쁨이 빼앗기는 이유가 집에 있는 우리 아이들 때문입니다. 그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여러분들을 가운데 있는 십자가의 기쁨을 빼앗기지 마시고 너그러이 품고 관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들을 주님이 심판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바울은 스데반의 순교할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돌에 맞아 피가 철철 흐르는 상황 가운데서 스데반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도행전 7장 60절 말씀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사도행전 7장 60절,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스테반이 돌 맞아야 될 이유는 없습니다. 스테반은 억울하게 돌을 맞았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 7장 55절에 보면 스테반의 얼굴이 성령 충만했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아무런 잘못도 없는 나에게 돌을 던지고 피를 나게 한 그들에게 용서(容恕)와 관용(寬容)을 선택하여 이 죽음의 극한 자리에서 기쁨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 자리에서 스데반의 그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본 사람입니다. 그때는 바울이 스테반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복음의 능력으로 변화되고 십자가의 비밀을 소유하게 되고, 그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 되자, 자기도 그러한 똑같은 일을 당하는 상황 가운데서 복수(復讐)와 심판을 선택한 것이 아닌 관용(寬容)과 용서(容恕)를 선택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들을 괴롭게 하고 힘들게 하는 자들을 위하여서 관용하고 용서해라. 그것은 너희 안의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라고 이렇게 권면(權勉)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주님을 만나고 난 이후에 이 스테반의 기도가 스테반이 원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 기도는 사실 예수님이 하신 기도였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23장 34절 말씀,

*누가복음 23장 34절,
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증오와 복수와 심판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관용을 선택하시는 그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극한 자리에서 하나님이 주신 기쁨을 잃지 않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관용을 선택하신 모범(模範)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도바울이 대단한 성인군자라서 이렇게 자기를 핍박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증오와 심판을 선택하지 않고 관용을 선택하는 것은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기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그 기쁨을 한순간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자기를 힘들고 어렵게 하는 이들을 향하여서 심판이 아닌 관용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들을 향하여서 관용과 용서를 선택할 때, 우리 마음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기쁨이 더욱더 충만하게 될 줄 믿습니다. 5절 말씀에 보면,

*빌립보서 4:5,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그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이 관용에 차별(差別)이 없게 하라는 그러한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든,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든, 모두가 우리가 이 관용을 선택하여서 그들이 내가 선택한 관용을 알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얼마든지 증오와 심판과 복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선택하지 않는 것은 그 증오와 복수와 심판이 내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복음의 구원의 기쁨을 빼앗아갈까 염려되기 때문에 또 내가 하는 심판보다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는 그 심판이 더 완벽한 심판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복수와 심판이 아닌 관용을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조 여러분,
여러분들을 힘들게 하고 여러분들의 은혜의 기쁨을 빼앗아가는 사람들에게 복수와 그리고 심판이 아니라 관용으로 대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용서하고 관용함으로써 여러분들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구원의 기쁨이 사라지지 않도록 깊은 선택을 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사도바울은 두 번째로, 항상 기쁨을 유지하기 위한 두 번째 선택의 권면을 해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염려가 아닌 기도를 선택하라는 것이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가는 두 번째 아주 고약한 그 유혹이 바로 염려입니다. 6절 말씀해보면, 아

II. 두 번째 염려가 아닌 기도를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6,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염려는 앞에 앞으로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해서 미리 걱정하고, 여러모로 마음을 써서 걱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6절 말씀의 원어 ‘매립나오’라는 원어에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일에 근심에 빠져 스스로 괴롭히다. 라는 그러한 의미의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염려는 하나님께서 나의 주님 되시고 하나님이 내 삶을 책임지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신다. 라는 것을 의심하는 그 결과가 바로 염려입니다. 성도가 기쁜 삶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성도가 항상 기쁨의 삶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염려는 아주 최고의 적 중에 하나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로 항상 기뻐하는 기쁨을 유지하기 위해서 앞서 염려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씀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앞서서 우리가 미움과 복수가 아닌 관용을 선택해야 되는 이유가 주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심판하시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가 동일하게 염려하지 말아야 될 근거로 하나님께 기도와 간구할 수 있는 자격을 우리가 얻었기 때문이라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작은 고민과 염려는 있겠지만, 성인들이 하는 삶의 큰 고민(苦悶)은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아이들에게는 부모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삶에 대해 염려하지 않고 천진난만(天眞爛漫)한 얼굴로 그렇게 살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부모 때문입니다.

부모님이 자기를 지켜주실 것을 믿기 때문에 아이는 그렇게 큰 염려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아버지가 되십니다. 바울은 그렇기 때문에 염려를 선택해서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이 주신 기쁨을 잃어버리지 말고 주님을 붙잡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염려 대신에 선택하라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가 구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무엇으로 기도하라고 말씀하냐? 하면 6절 말씀해 보면,

*빌립보서 4:6,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을의 기도와 강구로 너희 구할 것을 무엇으로 감사하므로 하나님께 아뢰라 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 마음에 가득한 구원의 기쁨과 그리스도로 인한 기쁨을 잃지 않기 위해서 우리 마음의 염려의 문제를 해결해야 되는데, 그 염려를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 하면 감사하므로 기도로 추님 앞에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떨 때 감사합니까? 그렇습니다. 기도한 후 응답받았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6절 말씀에 감사하므로 기도하라는 것은 우리가 응답받았다. 라는 것을 믿음으로 기도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응답이 무엇인지 7절 말씀에서 계속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7절 같이 읽겠습니다.

*빌립보서 4:7,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기도하면 내가 원하는 기도한 것을 다 들어주겠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겠다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성도인들이 경험하셨겠지만, 염려를 마음에 품으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엉망이 됩니다. 염려의 특징 중에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질서가 없습니다. 질서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고, 그렇게 예상할 수 없는 일들을 우리가 걱정하는 것을 염려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염려를 하게 되면 밤을 이루지 못합니다.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생각에 질서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룻밤에 수십 번의 집을 짓고, 집을 허물고 하루에 수백 번 내가 염려하는 그 집에 들락날락하는 그 모습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 감사하므로 기도하면 염려 대신 기도를 선택하면 하나님께서 질서의 평안을 주십니다. 염려는 무질서이고 평화는 질서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평안이 있을 때 우리는 질서를 발견하게 되고 그 질서를 통해서 그 평안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마음의 기쁨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서 염려를 통해서 내 마음과 생각이 혼란하도록 나를 내버려두지 마시고 그 염려를 감사하므로 기도의 제목 삼아 주님 앞에 나아가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무질서가 질서의 평안으로 하나님 바꿔주시고, 그 염려 때문에 우리 안에 기쁨이 사라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평안함으로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의 기쁨을 회복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사도바울은 주도적이고 치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전도 여정의 일정을 보면 얼마나 그가 열심히 계획하고 얼마나 열심히 그 계획을 따라서 치밀(緻密)하게 전도(傳導) 여행(旅行)을 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치밀한 사람이 또 주도적인 사람이 자기가 계획한 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안해하고 밤에 잠을 자지 못합니다. 자기의 생각대로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염려(念慮)가 돼서 밤에 잠을 자질 못하고 꼬박 밤을 새우며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왜 이 계획이 되지 않을까? 왜 저 계획이 되지 않을까? 그렇게 기쁨을 잃어버리는 그러한 성향(性向)을 가진 사람이 사도바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바울의 그 전도 여행을 통해서 이것은 네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것이다. 염려하지 마라 너의 계획대로 안 된다고 염려하지 마라. 내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 내가 허락하는 곳에 가서 내가 만나게 하는 사람에서 내가 허락하는 상황 가운데서 너는 내가 부탁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 주어라. 그러면 그 모든 상황은 내가 책임진다. 하나님께서는 사도바울의 전도여행 가운데 실패의 경험을 통하여서 이 일은 내가 염려함으로 내가 계획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따라갈 때, 내 염려가 아닌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하나님이 일을 이루시고 그것이 가장 기쁨의 삶이라는 사실을 고백(告白)하게 됩니다.

그렇게 바울의 염려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계획된 일들이 바로 샤도바올이 유럽 땅의 첫 발을 밟게 되는 일이었고, 그리고 유럽 땅의 첫 성인 빌립보에서 교회가 세워지고 그리고 그 빌립보 교회를 통하여서 유럽 복음의 전진 기지가 되도록 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드로와에서 하나님의 하나님께서 보여주셨던 그 환상(幻象)에 순종(順從)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그것은 제 계획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가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는 것은 효과적(效果的)이지 않습니다. 효율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자기의 뜻대로 갔다면 유럽 복음화가 어떻게 됐을지 모르는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많은 염려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염려하는 일들은 우리가 염려한다고 해서 해결(解決)이 잘 안 됩니다.

그 시간에 염려하기보다 하나님 앞에 벌떡 일어나 기도(祈禱)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줄 믿습니다. 염려로 뒤죽박죽 되어서 기쁨을 잃어버린 내 마음 가운데 질서의 하나님께서 평강(平康)을 허락(許諾)하셔서 우리 안에 기쁨을 허락해 주실 줄 그 평강이 어떤 평강입니까? 오늘 7절 말씀해 보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이라고 말씀합니다.

*빌립보서 4:7,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이라는 말은 우리가 생각하고 상상하고 기대할 수 있는 이상의 평강이라는 그러한 의미입니다. 사도바울은 자기가 생각하고 기대하고 경험할 수 있는 그 이상의 평강을 유지하면서 바울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 성도들을 향해서 오늘 이렇게 ‘너희는 항상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내 안에 있는 이 기쁨을 너희도 누리기를 원한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로마 감옥에 갇혀있는 지금 갇혀있는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나를 위해 걱정할 거 없다. 나를 위해 걱정하지 마라. 나는 이곳에서 너무 기쁘고 너무 감사하다. 오히려 나를 위해 걱정하지 말고 기쁨과 평안을 잃어버린 너희들을 위해 걱정하라. 너희들은 너희들을 괴롭히고 있는 이들을 위해서 복수와 심판을 통해 심판을 생각하며 선택하며 너희 마음 가운데 있는 예수 그리스도일 수도 있겠다. 기쁨을 놓치지 마라 너희는 염려함으로 인하여서 내 삶이 이제 앞으로 어떻게 될까 염려함으로 인하므로 너의 마음과 생각이 무질서하게 되는 일을 선택하지 마라. 그 염려가 너의 기도의 재목이 돼서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주님께서 질서의 편광을 주기를 원한다. 그렇게 빌립보 성도들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바울의 말은 이 말씀은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하시는 말씀인 줄 믿습니다. 우리도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땅에서 슬픔 가운데 염려하면서 걱정하면서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복수할까 하면서 이를 갈며 살고 싶어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바울를 통하여서 내 안에 허락하신 십자가의 놀라운 은혜와 구원의 기쁨과 그 감격을 유지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증오와 복수와 심판 대신 관용을 선택하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염려와 걱정 대신에 감사의 기도를 선택하므로 우리 안에 기쁨을 빼앗기지 말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4장 말씀 쭉 아래로 내려가면 우리가 너무나 좋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13절 말씀입니다. 다 같이 읽겠습니다.

*빌립보서 4:13,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말씀 우리 성도님들 다들 좋아하시죠. 특별히 시험 보기 전에 이 말씀을 암송하고 꼭 내가 해서는 안 될 것들 앞에서 이 말씀을 암송합니다. 이 말씀의 문맥적으로 살펴보면 사도바올이 말씀하는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이 모든 것은 바로 12절에 말씀하는, ‘내가 어떤 상황에서도 비천(卑賤)이나 풍부(豐富)나 배고픔이나 배부름이나 어떤 곳에서도 내가 기뻐할 수 있는 일체(一切)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가 복수와 심판 대신에 관용을 선택하고 내가 염려 대신에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선택했더니, 내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는 이 세상이 나의 기쁨을 빼앗아갈 수 없는 일체의 비교를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면 내가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 라고 말씀합니다.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응원합니다.

이 세상의 어떤 환경 속에서도 어떤 형편 속에서도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므로, 증오와 복수와 심판 대신 관용을 선택하므로, 염려가 걱정되신 감사의 기도를 선택하므로 내가 일체의 비결을 배워서 주님이 내게 어떤 상황을 허락하시더라도 내가 주의 은혜 가운데 내게 능력을 그런 기쁨의 능력을 주시는 은혜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우리 성도님들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요약
우리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결국은 주님의 은혜의 수레바퀴로 돌아간다는 것을 믿으며, 불안한 환경과 변덕스러운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오직 예수께 의탁(依託)하여 흔들림 없는 기쁨을 누려야 한다.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이 계승해 온 그리스도의 사랑과 관용을 나도 선택하며, 영혼의 좌소(左蘇를 억울함과 미움에 뺏기지 않도록 십자가로 마음의 중심이 끄떡없게 다짐해야 한다. 염려에 사로잡혀 아래만 바라보는 절망(絶望)과 낙심(落心)의 시선(視線)이 주께 묶여 기도하므로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계획을 바라보아 기쁨과 평강으로 하늘 문이 열리는 응답의 축복을 경험하기를 소망한다. 진정한 염려가 아닌 기도가 주님과의 교제가 해결점이라는 것을 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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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5년 2월 5일)
제목: “새로운 삶을 향한 삭개오의 결단”
말씀: 누가복음 19:1~10
찬양인도: 쉐키나(장단희 부목사님)
사회: 김대규 부목사님
 
설교자 : 유선비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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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9:1~10,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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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혹시 이런 경험 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새 신발을 샀는데 그 신발과 맞는 옷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새 옷을 사고 새 옷을 샀는데 그 신발과 옷과 어울리는 가방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또 새 가방을 사고, 남자분들은 특별히 it 쪽에 일하시는 분들은 아이폰만 살려고 했는데 아이패드를 사고 용돈을 모아서 맥북을 사고, 또 애플 워치를 사고, 전문 용어로 사과 농장을 운영하게 됐다. 이런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요.
 
이렇게 하나의 소비가 비슷한 것을 소비하게 되는 연쇄 반응을 일으키는 것 그래서 스타일의 총체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현상들이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나타납니다. 이러한 현상을 심리학에서는 ‘디드로 효과’라고 부르는데요.
 
*디드로효과 (Diderot effect)
-어떤 제품을 소유하게 되면 그 제품과 관련된 다른 제품들까지 그 제품에 맞춰서 갖추려고 하는 경향. -드니 디드로-
 
-디드로 효과는 어떤 제품을 소유하게 되면 그 제품과 관련된 다른 제품들까지 그 제품에 맞춰서 갖추려고 하는 경향을 일컫습니다. 그래서 디드로 통일성 제품 간 연결성이라고도 말합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드니 디드로는 18세기 프랑수아 철학자였는데요. 어느 날 그는 친구로부터 고급 실내복 비단 가운을 선물 받았습니다. 원래 스타일에 신경을 쓰지 않던 철학자였는데 그 실내 비단 가운을 입고 거실에 앉아서 거울을 한번 쳐다봤는데 나도 꽤 그럴듯해 보이는데 이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전에 자신의 스타일보다 훨씬 멋져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그 가운을 입고 문득 서재를 돌아보니까 너무나 제각각인 가구들 낡아서 보풀이 일어나는 양탄자 멋지지 않은 그런 가구들이 눈에 들어오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 서재는 내 새 비단 가운과 너무 안 어울린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씩 둘씩 그 비단 가운과 어울리는 제품으로 서재를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책상서재에 앉아서 책상에 앉아서 서재에 앉을 수는 없죠. 책상에 앉아서 서재를 둘러보는데 그 서재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멋진 서재로 변화된 것을 디드로는 발견하게 됐습니다.
 
결국 그는 비단 가운 하나가 그것이 뭐라고 집 전체를 재편하는 경험을 하게 됐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디드르 효과라는 말로 이렇게 전해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경험 하나의 변화가 삶의 총체적인 변화로 이어지는 현상은 단순히 소비 현상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생활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전개되는 것입니다.
 
한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중심 대신 그리스도를 자신의 삶에 모시면은 그 사람은 마치 디드로의 비단 가운을 입은 거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7절을 보면,
 
*갈라디아서 3:27,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은 이 옷을 입었다. 예수님으로 옷 입었다는 것은 단순히 상징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삶의 중심으로 모신 사람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은 신앙의 결단을 하는 것이고,. 새로운 삶을 살겠다. 라는 놀라운 인생의 방향을 전환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삶을 대대적으로 재편해 나가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로 옷 입은 바로 신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으로 옷 입고 나의 삶을 돌아보면 예수님과 어울리지 않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설교를 들으려고 유튜브를 켰는데 고양이 쇼츠만 50개 보고 나온 내 모습이 정말 주님과 어울리지 않는구나. 토요일 밤에 넷플릭스에서 중증외상센터 정주행 하다가 주일까지 날을 새고, 피로도가 중증이 되어서 안아주심의 본당에서 숙면을 취하는 것은 이건 정말 주님과 어울리지 않는 거야. 금요일 저녁에 핸드폰 5분만 하겠다고 인스타를 켰는데 쿠팡 특가를 보고 싸게 살려고 새벽 2시까지 잠들었네. 나는 토요일 날 칠천기도용사 10부장인데, 이건 정말 아닌 거 같애. 이러한 고백들을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성도들은 하게 되는 것입니다. 뭔가 나의 삶이 내가 믿는 예수님 내가 나의 주인으로 나의 중심으로 모시는 예수님과 어울리지 않는 삶이 전개될 때 갈등하게 되고 뭔가 그 주님께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오늘 이 삭개오는 이 디드르 효과, 영적 디드르 효과라고 할까요? 예수님과 함께하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의 삶을 재편해 가는지 잘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일전에 보면은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리고는 그 당시에 돈은 돈이 도는 도시고 상업이 발달한 도시고, 동서양의 그런 무역이 아주 잘 진행되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물건들이 많이 팔리고 세리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종려나무의 도시라고 불릴 정도로 농업이 발달하였고요.
 
그다음에 대추야자와 그다음에 향유 같은 귀한 물건들이 많이 나는 부유한 도시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다음에 향유 같은 귀한 물건들이 많이 나는 부유한 도시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오늘날 서울 대한민국의 서울과도 굉장히 유사한 도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절에 보니까,
 
*누가복음 19:2,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누가는 삭개오를 등장시키는데 삭개오라는 사람의 이름을 언급하고, 세리장이라는 걸 언급하고, 부자라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삭개오라는 이름은 의로운 자라는 뜻입니다. 누가 모금에 많은 사람이 등장하고 어떤 사람은 이름 없이도 이렇게 등장시키는데 누가가 이렇게 삭개오의 이름을 언급한 것은 뭔가 의도가 있다. 라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그 의로운 자란 뜻을 갖고 있는 사케오 오늘날도 그랬듯이 그 당시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식들의 이름을 지을 때 굉장히 신중하고 좋은 이름을 지어줬다. 라고 합니다. 내 아들이 내 딸이 이 이름을 갖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 이런 마음으로 좋은 이름 지어주는 것 아닙니까? 삭개오도 부모님이 그 당시가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신앙이 중심이 되는 그런 백성이었기 때문에 외로운 삶을 살아라. 율법 대로 살아라.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며 살아라. 이러한 의도로 삭개오에게 최고의 이름을 고르고 골라서 지어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삭개오도 어렸을 때는 그 이름대로 삭개오답게 살려고 노력하며 하루 이틀 이렇게 자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삭개오가 자라서 세리가 됐고 세리장이 되었죠. 삭개오도 돌 때부터 이렇게 세리가 되어서 떼돈을 벌겠다.라는 생각을 안 했을 겁니다. 왜 세리가 되었을까요?
 
그 당시 세리는 로마로부터 세금을 징수하는 그 하청업자였다고 합니다. 로마가 아웃소싱을 한 것이죠. 그래서 세리들 이스라엘 백성들의 세금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걷게 한 다음에 이렇게 받치게 했는데, 그 세대들 중에는 그런 과정에서 조금의 그런 이익이 아니라 부당하게 과하게 이익을 얻어가지고 부를 축적할 사람들이 있었다. 라는 것입니다. 세리로 부자가 된 사람은 그래서 당시 부패한 로마 경제시스템을 악용하여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힘들게 하고 부자가 되려고 했던 사람이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분노를 유발했고, 구타 유발자와 같은 그런 사람이었고요. 매국노라고 칭해지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삭개오는 아마 처음에는 세리가 되어 부당한 부자가 되려고 생각하면서 이 길을 들어섰던 것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는 신체적으로 매우 약했습니다. 그래서 육체적인 일은 하기 어려웠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어찌 보니까 직업을 찾기 위해서 아니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먹고 살기 위해서, 그 가운데 세리로 들어섰을 것입니다. 분명히 돌 때부터 세리가 되겠다. 라고 결단하는 사람은 아니었을 거란 말이에요. 당시 세리들의 또한 관행들이 있지 않습니까? 세리가 되었는데 다들 세리들이 그렇게 하니까 그 관행에 조금 조금씩 천천히 물들어 갔던 것이었습니다. 삭개오의 직업은 그가 의로운 자라는 신앙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녹록치 않은 환경이었던 것입니다. 로마의 지배 아래에서 경제적 압박과 또한 생존의 문제로 타협하지 않기가 보통 쉽지 않은 그런 상황에 삭개오가 놓인 것입니다.
 
결국 삭개오는 의로운 정체 자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었지만 세상과 타협(妥協)하고 그 부정과 손잡을 수밖에 없는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딜레마를 부각 시켜주는 1명의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는 삭개오에서 오늘 우리의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서울에서 성도로 살아간다는 것 우리는 직장에서 사회에서 신앙의 길과 세상의 유혹과 관행과 끊임없이 갈등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나는 교회에서는 김 집사지만 직장에서는 김 대리인 것입니다. 시장에서 실적을 위해서 정직함을 포기하고 그 거짓 보고서를 작성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대학에 다 학원 보내고 그런 불안감 속에서 주일 성수와 자녀 신앙 교육을 우선순위에서 밀어내기가 쉬운 것입니다. 삭개오가 의로운 자라는 이름을 가지고도 현실과 타협하며 살았던 것처럼 우리도 믿음을 지키려고 하지만 세상의 방식과 믿음이 충돌하는 그 현장이 바로 우리 오늘 교회 문을 열고 나가면 맞이하는 우리 하루하루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도 어찌 보면 21세기 삭개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삭개오가 뒤에 구원을 받기 때문에 앞에 구원받기 전에 삭개오가 우리와 어떤 스탠스가 다를지 모르지만 이렇게 신앙과 어떤 삶의 현장에서의 그 갈등하는 모습은 삭개오와 우리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은 기분 탓만은 아닐 것입니다. 3절 상반부에 보니까,
 
*누가복음 19: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수 없어.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보고자 하되,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궁금했습니다. 이 궁금함이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아직도 예수님을 알지 못하지만 궁금해 하지도 않는 분들이 있는데, 이 삭개오에서 에게는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신 이유이겠지만,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도대체 어떤 분이시길래 저렇게 사람들이 몰리는 거지 소문이 들었습니다. 자기와 동종 업계에 일하는 마태가 예수님의 12명 그 이너서클 안에 들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손가락질 받고 멸시 받고 욕을 먹으며 살았던 그 세리 마태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 들었다는 것은 삭개오에게 충격이었습니다.
 
삭개오는 나도 주님이 받아주실까 나도 주님께 가면 나의 이 탐욕이 치유 받을 수 있을까? 나도 주님과 한번 식탁 교제를 나누는 그런 특권을 누릴 수 있을까? 삭개오는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그 안에 주님을 향한 갈망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습니다. 3절에 보니까,
 
*누가복음 19: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수 없어.
-그가 예수께 어떠한 사람인지 하여 보고자 하듯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가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삭개오는 이 가운데 두 가지 장애물(障碍物)을 발견합니다. 한 가지는 키가 작은 것입니다. 키가 작은데 어느 정도 작냐면 무리 속에서 예수님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작은 자였다는 것이죠. 이것은 그의 개인적인 장애물을 의미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주님께 나아가려는데 그 개인적인 장애물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직장에서 아까 말씀드린 거짓 보고서를 작성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있을 수 있구요. 1주 2주 교회를 안 가다 보니까 늦잠을 자게 되는 그 게으름의 관성이 그랬을 수도 있구요. 또 세상 사람들에게 교회에 다닌다고 혼나고 이렇게 핍박(逼迫)받았던 것들이 기억나서 그랬을 수도 있구요. 혹은 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받았던 어떤 상처가 내가 주님께 나아가는데 그런 개인적인 장애물로 작동할 때가 우리도 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장애물은 환경적인 장애물이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사람이 많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학교의 개인적인 장애물만이 아니라 외적인 장애물도 나타나는 것이죠. 우리에게도 그런 외적인 장애물이 있습니다. 교회를 안 다니는 가정 형편이 얼마나 교회에 다니기가 어렵습니까? 그런 가정형편도 그렇고요.
 
또한 뭐 눈만 뜨기만 하면 수많은 뉴스와 콘텐츠들의 홍수 가운데 우리는 살고 있구요. 또한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고지서에 무슨 뭐도 납부해야 되고, 뭐도 챙겨야 되고 뭐도 해야 되고 연말정산도 해야 되고, 안 돼서 또 신경질도 나고 그러한 일들이 너무 우리에게 많이 있고요. 그다음에 교회를 다니는 것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안 좋게 보는 그 시선(視線)도 바로 외부적인 장애물로 우리에게 작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4절에 보니까,
 
*누가복음 19:4,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삭개오는 자신에게 찾아온 이 기회가 얼마나 소중한지 또 이것이 흔치 않은지를 직감적으로 알았던 것 같습니다. 부지런히 어떻게 하면 이 장애물을 극복할지 굉장한 순발력을 가지고 굉장한 창발성을 가지고 이 장애물을 극복했습니다. 돌 무화과나무는 그 당시에 키가 크지 않은 나무고 가지를 넓게 펴고 있는 나무여서 삭개오라는 사람이 이렇게 오르기 쉬운 나무였다라고 합니다. 그 나무는 삭개오가 개인적인 장애물과 외부적인 장애물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는 아주 절호의 기회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 도움을 받아서 삭개오는 예수님을 볼 수 있게 됐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예수님을 만나게 해주는 돌 무화과 나무와 같은 것이 있죠. 오늘 이 교회가 어떤 곳입니까? 세상의 소음(騷音)에서부터 우리가 차단(遮斷)되어서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며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삭개오의 돌 무화과나무와 같은 곳이 바로 이 교회입니다.
 
주일 예배를 드리면, 우리의 영혼이 살아나고 다락방에 나면 나가면 우리의 영혼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도움을 받아서 돌 무화과 나무의 도움을 받는 것을 넘어서, 우리가 또한 돌 무화과 나무의 역할을 감당하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삭개오와 같이 주님께 나아가는데 힘들어하고 게으름의 관성과 안 나가다 보니까 못 나가게 되고 또 불러주지 않으니까 먼저 나가기 힘들어하는 그런 분들에게 먼저 다락방에 초대를 하고, 중보기도를 하고, 안부를 물어보는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돌 무화과나무가 되는 우리 개인 개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우리의 공동체가 그런 돌 무화과나무와 같이 오르기 쉽게 아주 낮고 가지를 넓게 편 돌 무화과나무와 같은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다락방이 그러한 돌 무화과 나무와 같은 다락방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5절에 보니까,
 
*누가복음 19:5,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누군가 미리 알려준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확하게 삭개오라고 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저기 나무에 올라가 있는 키 작은 아저씨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삭개오야 라고 삭개오의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목소리에는 온기와 사랑이 가득했습니다. 어렸을 때 엄마에게 들었던 삭개오야라는 그런 부드러운 목소리 말고 세리가 되어서 삭개오는 이러한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한 번도 없는 그러한 따뜻한 목소리로 주님을 삭개오를 불러 주셨습니다.
 
그의 이름은 죄인과 동일시되었는데 예수님이 부르실 때는 마치 삭개오 이름과 같이 너는 의인이야, 라고 선언하신 것 같은 그 부드러운 주님의 목소리를 삭개오는 들었을 때 이미 그의 안에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속히 내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단순히 빨리 내려오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초를 질 테니까. 뭐 10초 안에 내려오라 이런 것이 아니라 주저하지 말고 망설이지 말고 거리낄 것 없이 나에게 내려오라. 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대로 가도 될까, 내가 이렇게 주님 보시기에 부끄럽게 살았는데, 라고 우리도 일주일에 고민하며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도 주님이 우리를 이렇게 부르시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이렇게 안아주심의 본당에서 예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입구에서 우리의 일주일 동안에 세상에서의 우리 제자다움을 점검하는 어떤 빅 데이터를 분석해서 상위 10%만 안아주시면 본당에 들어올 수 있지 않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가 언제나 이 삭개오를 부르신 주님 앞에 나올 수 있는 특권, 오늘 우리도 지금 삭개오와 같이 주님의 초청을 받았기 때문에 이렇게 안아주심의 본당에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더 충격적인 삭개오에 충격적이었는데, 내가 오늘 내 집에 유학했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단순히 방문이 아니라, 그와 함께 거주하겠다는 것이고. 그와 교제하겠다는 것이고. 그와 친밀(親密)한 관계 를 맺겠다는 주님의 선언(宣言)이셨습니다. 그 전에 그의 집은 부유(富裕)하고 텅 비고 적막(寂寞)하고 쓸쓸한 집이었는데.
 
이제 올 세상을 품을 만큼 그것보다 더 큰 사랑의 주님이 그의 집에 오셔서 머물러 삭개오와 단둘이 교제하시겠다고 선언하는 것 이것은 삭개오오에게 그야말로 복음이었던 것입니다. 사케오는 단지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무에 올라갔는데 예수님을 삭개오와 머물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삭개오가 원했던 것보다 더 강한 마음으로 삭개오와 교제하기를 주님은 원하셨습니다. 삭개오의 갈망에 100배 천 배 만 배로 큰 갈망으로 주님은 지금 여리고 성에 진입하신 것입니다. 삭개오가 한 발짝 내 딛었다면 주님은 100걸음 다가오신 것입니다.
 
아니 삭개오가 한 발짝 내 딛을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이 먼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누추한 이 땅에 오셔서 삭개오를 만나시기 위해 백 걸음 천 걸음 먼저 발걸음을 내딛으셨기 때문에 삭개오가 주님께 한 발짝 내 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삭개오가 나무에 올라가 예수님을 보고자 했다면, 우리 주님을 삭개오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나무에 못 박혀 달려서 몸 찢으시고 피를 내셔서 삭개오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죄 때문에 멸시(蔑視)를 받았다면 죄 없으신 우리 주님은 삭개오를 위하여 친히 저주를 받으시면서까지 삭개오를 구원하신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신 것입니다. 삭개오는 이런 주님을 만나고 8절에 이렇게 선언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19:8,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당시 율법의 배상은 원금의 120%만 갚으면 되는데, 삭개오의 이러한 정말로 급진적이고 과감한 헌신과 결단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모시고 주님과 교제하는 순간 삭개오에게 이러한 놀라운 변화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삭개오는 완전히 변화된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그런 것입니다. 단순히 성경책을 연구하는 종교가 아니라,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함께 이곳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입니다. 주님과 눈을 마주치는 것입니다. 주님의 안아주심을 영적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놀라운 변혁을 경험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그 고급스러운 비단 가운을 입고, 디드로가 이제는 전과 같이 살지 않고 자신의 서재를 완전히 재편했던 것처럼, 예수님과 만나고 그리스도로 옷 입을 사람이 된 삭개오는 자신의 삶을 주님과 어울리는 삶을 살겠다. 라고 선언하고 그의 삶을 주님께 재편한 것입니다. 이제는 주님과 어울리는 삶을 살겠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삭개오의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 삭개오의 이 선언을 통하여 우리는 회심과 성화에 대해서 잠깐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회심이란 무엇인가 하면 함께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회심
사람이 성령의 역사로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며, 예수님을 구원자와 주님으로 믿고 따르기로 결단하는 것.
-이것은 인생에 처음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삶의 중심에 모시면 물론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 가운데 진행되지만 우리도 그 안에서 우리의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이 첫 번째 결단이 바로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턴하겠다. 라는 것이 바로 우리의 회심인 것이죠.
 
삭개오가 그의 소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의 회심의 과정인 것입니다. 그러나 회심이 신앙의 완성은 아닙니다. 신자의 삶을 계속 이렇게 변화되어가는 과정 가운데 진행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화인데 성화가 무엇이냐면 한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성화
신자가 성령의 능력으로 점점 더 거룩해지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과정.
-성화란 신자가 성령의 능력으로 점점 더 거룩해지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과정이 바로 성화입니다. 물론 회심과 동일하게 성화도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 가운데 진행되지만 이 성화의 과정도 신자의 결단과 실천을 약화 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이 성화의 과정을 갖지만, 오늘 우리가 분명히 결단해야 되고 나의 삶을 정리하고 주님께 어울리는 삶으로 마치고자 부단히 애를 써야 되는 것이 바로 성화의 과정인 것입니다. 매일매일의 선택과 결단을 통하여 주님과 울리는 삶을 살고자 하는 우리의 정서와 우리의 의지, 우리의 동정이 이끌어가는 것이 바로 성화인 것입니다. 디드로의 비단 가운을 입고 디드로가 서재를 정리했죠. 처음에는 양탄자 하나만 정리했지만, 결국 그의 비단 가운은 그의 삶 그의 서재 전체를 정리했다. 라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을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성령의 은혜로 놀라운 변화를 입은 우리는 분명히 우릴 삶 동안에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을 예수님과 어울리는 재편의 삶을 살고자 우리가 그렇게 추구해 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삭개오의 결단을 통하여 몇 가지 마지막으로, 적용 점을 찾고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회개를 통해 예수님과 어울리는 낡은 어울리지 않는 습관과 결별하라입니다.
 
I. 첫 번째는 회개를 통해 예수님과 어울리는 낡은 어울리지 않는 습관과 결별하라.
 
회개는 낡은 가구를 버리는 것과 같죠. 망가진 서랍과 삐걱거리는 탁자 또 저도 겨울에 보니까 입는 옷이 몇 개 없더라고요. 근데 또 서랍장 안에는 겨울옷이 너무 많이 있죠. 또 드라이 크리닝 하려면 돈이 아까우니까 또 안 입고 그래서 한 옷만 계속 입고 다니게 되는데, 그렇게 안 입는 것들이 또 이렇게 우리 집에 많이 있다는 것이죠. 공간만 차지하고 먼지만 펄펄 나는 것입니다. 더 이상 필요 없는 가구를 정리하고 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는 회개입니다. 새로운 공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주님과 어울리는 새로운 습관과 성령의 열매들을 채우기 위해서 공간을 만드는 것이 바로 이 회개의 과정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고 하다 보면 우리 안에 정든 옛날 낡은 습관들이 있는 거죠. 이것 없으면 나 굉장히 심심할 것 같고, 이건 좀 나쁘지 않은 것 같고, 그 이것도 이 정도 하면 안 하고 어떻게 사나 하는 이거 다 관행이야 괜찮아 관행 하면서 이렇게 또 하게 되는 것들이 있는 거죠.
 
그러나 조금 불편하고 조금 어렵더라도 과감하게 회개하는 것을 통하여 우리의 삶에 1순위가 어울리는 아름다운 것들이 들어올 수 있게 하는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 예배 때 참회 기도를 하지 않습니까? 처음 아주 처음 저도 우리 교회에 왔을 처음 왔을 때, 참회의 기도 시간이 너무 긴 것 같은 거예요. 아 이거 너무 길다. 이거 좀 끝나야 될 것 같은데, 이거 뭔가 방송 사고는 아닌가 이런 생각도 들더라고요. 그만큼 이 참회의 기도 시간이 오르간 연주 시간이 길게 느껴졌는데 아 이것에 가지고 있는 귀한 의미가 있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내 죄를 낱낱이 고백하는 것, 그러한 시간이 5분 내기도 일주일에 어렵다는 것, 이 정도로 우리가 바쁜 일상에 살고 있다는 것 아닙니까 그 시간에 내 입술로 또렷또렷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낡은 가구를 주님 앞에 내려놓고, 주님이 우리 안에 일하실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을 만드는 시간 그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새해 한 주 한 주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너무 또 주일까지 묵혀두지 마시고요.
 
우리 또 보면은 뭐 이렇게 분리 수거하는 날이 또 며칠 며칠로 정해져 있어서 우리가 분리 수거 벌이기는 또 매일매일 하기는 어렵지만 매일매일 우리가 큐티를 하면서 주님 앞에 회개하는 기도의 시간을 영적 루틴으로 잡아서 매일매일 회개하는 것, 매일 매일 주님 앞에 우리의 먼지와 더러운 것들을 주님께 불쌍히 여겨달라고 아뢰는 그런 은혜로운 개인의 회개의 시간을 통하여 주님과 어울리지 않는 낡은 가구들을 매일매일 정리하는 그런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두 번째는 과감하고 급진적으로 그리스도와 어울리는 삶을 결단하라입니다.
 
II. 두 번째는 과감하고 급진적으로 그리스도와 어울리는 삶을 결단하라.
 
-저도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것부터 천천히 합시다. 라고 적용점을 찾으려고 했는데 본문을 계속 보면 볼수록 본문은 또렷이 뭐라고 말하냐면은 과감하고 급진적인 결단을 하라고 촉구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변화에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이 본문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삭개오와 같은 과감하고 급진적인 결단인 것입니다. 이 결단은 오늘 우리 예배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갱신하는 자리입니다. 언약을 갱신한다는 것이 어떤 뜻이냐면 언약을 갱신(更新)한다는 것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다시 깨닫고 주님께 대한 헌신과 순종을 새롭게 결단하는 것입니다.
-예배의 요소 안에 이 부분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다시 한번 명심했으면 좋겠습니다. 예배는 언약을 갱신하는 것입니다. 다시 주님의 아름다우심과 우리를 위해 베푸신 놀라운 구원을 깨닫고 우리의 헌신과 결단을 갱신하는 것입니다. 언약을 갱신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이렇게 살겠다.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오늘 삭개오가 주님 앞에 서서 결단했던 것처럼 예배의 이런 언약의 갱신의 요소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될 것입니다. 디드로와 같이 매일매일 우리의 삶의 작은 부분을 주님과 어울리도록 그렇게 재편하도록 우리가 결단하고 실천해 나아가는 첫 발걸음, 일주일을 삶의 예배로 드리고자 그 시작을 위해서 결단하는 언약적 철 첫 발걸음이 바로 바로 주일 예배에서 드리는 우리 결단의 시간입니다. 귀한 우리 담임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적용 찬양을 부르지 않습니까? 그 가운데 우리가 결단하는 것 아닙니까? 합심 기도 제목을 하면서 결단하는 것 아닙니까? 이 결단의 요소가 예배에 굉장히 중요한 요소라는 것입니다.
 
매 주일주일 예배 나올 때, 오늘은 어떤 말씀으로 나를 은혜 받게 해주실까 오늘은 얼마나 찬양 부를 때 얼마나 내 마음이 뜨거워질까, 그런 은혜의 기대하는 마음을 갖고 나오는 것도 너무 좋지만 오늘 나는 내 무너져 있는 이 부분을 주일 날 나아가서 주님 앞에 결단하고 돌아와야겠다. 이것이 예배가 가지고 있는 언약의 갱신을 의미하는 너무나도 중요한 예배 속성 중에 하나라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예수님으로 옷 입을 사람들과 함께하라입니다.
 
III. 세 번째는 예수님으로 옷 입을 사람들과 함께하라.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요.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 다섯 명의 평균이 나다 이런 말이 있더라고요. 생각해보니까 저도 생각해 봤습니다. 나랑 가까운 사람 5명의 평균이 나더라구요. 성경에 보니까 잠언 27장 1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철이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잠언 27장 17절입니다.
 
*잠언 27장 17절,
17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이 말씀은 성도가 서로의 신앙생활을 함께 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을 닮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날카로운 모습, 주님을 향해 예리해져 있는 모습을 닮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재 안에는 성화로 나아가는 성도의 거룩한 영적인 견주임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은 우리 교회에서 신앙 생활한다. 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을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서 모이는 거거든요. 저 사람은 서재 가봤더니, 주님과 너무 어울리게 개편되어 있는 거예요. 암송도 하고, 실천도 하고, 훈련을 통해서 소그룹을 통해서 만나서 다락방에서 이야기해 보니까 그러면 우리가 도전을 받는 것이죠.
 
견주임을 통하여 우리가 도전을 받는 것입니다. 나도 저 사람과 같이 예수님과 어울리는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처음에 우리가 회심을 통하여 성화의 길을 걷고자 하는 그 불같은 마음이 공동체 안에서 그 온기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왜 제자훈련을 할까요? 다 1순위가 어울리는 삶을 살고자 하는데 안 되기 때문 아닙니까? 함께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올 한 해 이제 인제 다락방도 다시 시작하는데 다시 한번 과감하게 결단하여 다락방을 안 나가시는 분이 있다면 다락방에 나가시기를 소망합니다. 혹은 제자 훈련을 받아야 되는데 뭐 1년, 2년, 10년 이렇게 연장하셔서 미루신 분도 계실 수 있을 것 같애요.
 
학교와 같이 과감하게 결단해서 성경 대학도 듣고 성경 파노라마도 듣고 해서 1년 후에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옷 입은 사람과 함께 주님을 닮아갈 수 있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기를 소망합니다. 말씀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의 한 주는 삭개오의 이야기와 닮아 있습니다. 우리의 52주, 1년은 삭개오의 이야기의 반복입니다. 우리는 신앙과 현실의 갈등 가운데 주님 앞에 늘 죄송한 마음과 나아가도 될까라는 마음이 있지만 다시 주님을 바라보면 언제나 그랬듯이 우리를 위하여 뜨거운 마음과 따뜻함으로 우리를 영접해 주시는 주님 앞에 나아와 받아들여지고 치유 받고 회복되고 주님의 안아주심을 경험하며 한 주를 또다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여정을 주님과 동행하기를 소망합니다. 빌립보서 1장 6절 말씀을 보면,
 
*빌립보서 1:6,
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혀주신 우리 하나님께서 단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혀 주시는 것에 머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보다 더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와 어울리도록 총체적으로 재편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열심이 을 맞이하는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줄 믿습니다. 그 은혜에 반응하며 매 주일마다 회개하고 주님 앞에 언약을 갱신하며 일수 그리스도 옷 입은 우리 성도들과 함께 주님과 어울리는 삶을 살아가고자 결단하며 실천하는 2025년 은혜의 한 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요약
회개를 통해 주님과 어울리지 않는 습관과 결별하는 낡은 가구를 버리는 마음으로 과감하고, 급진적으로 그리스도와 어울리는 삶을 결단해야 한다. 예배를 통해 언약을 갱신함으로 언약을 갱신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다시 깨닫고 주님께 대한 헌신과 순종을 새롭게 결단하는 것이어야 한다. 진정한 회개를 통해 예수님과 어울리는 낡은 어울리지 않는 습관과 결별하고, 과감하고 급진적으로 그리스도와 어울리는 삶을 결단해야 한다. 예수님으로 옷 입을 사람들과 함께하며, 매일 큐티와 말씀과 암송과 소그룹에서 더욱 서로 사랑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닮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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