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5년 3월 26일) 제목: "내면의 두려움에 귀를 기울이는 삶" 말씀: 마가복음 4:35-41 찬양인도: 쉐키나(장단희 부목사님) 설교자: 김승진 부목사님) ----- *마가복음 4:35-41, 35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 36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 ▶제가 오늘 말씀 제목을 처음 정했던 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가장 쓸데없는 일’이었습니다. 좀 센 것 같아서 바꿨는데요. 우리 성도님들은 시간을 낭비하는 가장 쓸데없는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얼마 전 제가 책 선물을 받았는데요. 책 제목이 이랬습니다.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 제목부터 제 수준에 딱 맞는 책이었는데요. 무슨 관계인지 모르겠더라구요. 내용은 이랬습니다. 거친 들판에 외로운 소년이 두더지와 여우와 말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내용이었습니다. 내용 중에 아주 인상적인 부분이 있었습니다. 소년이 두더지에게 묻습니다. ‘너는 시간을 낭비하는 가장 쓸데없는 일’이 뭐라고 생각하니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아까 제 질문에 성도님들은 어떻게 대답을 하셨습니까? 두더지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일’이야 두더지가 제법입니다. 아 누군가 이런 글을 썼더라고요. ‘사람에게 가장 쓸데없는 시간은 쇼핑하는 시간이다.’ 저는 살짝 동의가 되지 않았습니다. 필요한 물건 사는 데 왜 그러지?, 궁금하여 그 이유를 더 들어 더 들어 보았습니다.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쇼핑을 나가면 풍족이나 만족이 아닌 결핍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살 수 없는 수많은 상품이 먼저 나를 유혹하고, 그 유혹(誘惑)에 응하지 않으면 지나가는 내 뒤통수에다 대고 결핍(缺乏)을 새긴다고 합니다. 저는 부친께서 목회자(牧會者)였어서요 어릴 적에 그렇게 풍족(豐足)한 편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나이키 신발을 못 신었어요. 당시에 프로스펙스가 있으면 스펙스를 신어야 했고. 아식스 비슷했던 아수스인가 나이스 이런 것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이키 매장 앞을 지나면 애써 피하려고 했습니다. 자꾸 저에게 말을 걸어오는데 너 나이키 없잖아. 하나 사야지 이런 것 하나 사 살 수 없어. 그냥 지나치면 어휴 너는 나이키 하나 못 사는 인생이니? 어디선가 들려오는 이 내면의 소리가 비교하게 되고, 나를 좀 초라하게 만드는 것 같았습니다. 쇼핑을 가면 지금 신고 있는 내 신발이 좀 초라해집니다. 만족하며 신었던 신발이었는데,. 운동회 때 신고 달려서 1등 했던 신발이었는데, 하지만 더 좋은 것 앞에서는 초라(綃羅)해집니다. 가지지 못할 때 우리는 결핍이라는 것이 남아버리고 맙니다. 우리 삶에 가장 쓸데없는 비교(比較)질에 나도 모르게 내면의 결핍이 생겨버린 겁니다. 결핍은 내면의 자리를 틀고 앉아 여러 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이 소리에 이끌려 살아가게 됩니다. 책을 좀 더 읽어 나갔는데요. 이런 글이 이어 나왔어요. 나는 ‘내면의 두려움에 더 많이 귀를 기울였다’는 것에 후회를 해 내면의 소리는 언제부턴가 두려움을 가득 담아서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그렇게 인생의 시간을 쓸데없이 낭비하게 합니다. 청년들 중에 이런 얘기를 합니다. ‘목사님, 저는 비혼자야 비혼주의자니까 제게 결혼하라.’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저는 결혼 안 할 겁니다. 저는 분명히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 청년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근데 하나 알 것 같습니다.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있나? 그런 마음에 불렀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그래 너는 결혼하지 마, 절대 결혼하지 마, 너 결혼하나 못 하나 내가 지켜볼 거야. 엄청 섭섭해합니다. 다시 묻습니다. 왜 결혼 안 하겠다고 한 거야. 흔한 세 가지 대답이 있어요. 하나는 혼자 사는 게 편해요. 또 하나는 우리 교회 형제들은 다 별로인 것 같아요. 딴 교회 청년이라고 하겠습니다. 결혼해서 행복한 사람 못 봤어요. 이 대답에 아주 역설적(逆說的)인 것들이 드러나고 있는데요. 이렇게 말하는 경우 제가 경험한 바로는 대개 살아온 가정을 표현하는 것 이기도합니다. 일반적으로 아버지의 폭력 외도 또는 무능(無能)이 많은 이유였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라는 남자가 집에 있으면 술과 폭력이 따라오거나 아버지의 무능으로 인해 어머니의 가혹(苛酷)한 일상이 가정에 자리 잡아 버렸습니다. 그렇게 30년을 아버지라는 남자에게 고통(苦痛)을 받았으니 나의 남은 인생도 남편이라는 남자에게 고통을 받을 것 같아 차라리 혼자 살아가야겠다. 얘기합니다. 좋은 남편 아버지에 대한 모습을 보지 못했으니 남자에 대한 왜곡(歪曲)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한 형제를 만나게 되더라도 아버지의 모습 남자의 모습 못난 모습들이 나오기 시작하면 이내 교회 형제들은 별로야. 라는 말을 내뱉게 됩니다. 그리고 결론도 내립니다. 결혼해서 행복해질 자신이 없네. 내면의 두려움이 인생을 지배해 버린 모습입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트라우마라는 단어가 우리가 이제 심심치 않게 일상에서 듣는 용어가 돼버렸습니다. 이 트라우마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헬라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외상(外傷), 상처(傷處)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이라는 엄청난 전쟁 상황에서 그 상황을 겪고 난 사람들이 그들에게 남겨진 것들이 무엇인가 보았더니, 총알 자국과 칼에 베인 상처보다 전쟁으로 인해 남게 된 두려움의 상처가 더 크다는 것을 심리학에서 자주 사용하면서 나오게 된 말입니다. 청년들에게 아버지의 폭력이 외상으로 남아있는 줄 알았는데, 내면의 두려움으로 깊게 잡아 버린 것입니다. 이 내면의 두려움 누구나 벗어야 한다는 건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벗어나려 해도 번번이 실패를 해왔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괜찮다고 했는데, 하지만 예수님으로도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이 그렇습니다. 큰 광풍(狂風)이 불어오고 있습니다. 미칠 광(狂) 자를 쓰고 있습니다. 심각한 상황을 묘사(描寫)하기 위해 오늘 말씀해 보면 다른 배들도 같이 떠 있다고 하는데요. 왜 이런 말씀을 묘사했을까? 했을 때 어떤 신학자는 다른 배들은 다 침몰(沈沒)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심각한 광풍이 불어오고 있었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배를 가지고 갈릴리 바다를 누비던 뱃사람들이었습니다. I. 제자들은 경험(죽음)이 들려주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 풍랑이 심각하다. 라고 할 때는 그 정도에 대해서 이 사람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심각한 광풍을 이겨내는 방법을 잘 압니다. 하지만 이길 수 없는 광풍(狂風)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부산에서 자랐습니다. 벌써 말투에 나와 있죠. 그죠. 바다를 놀이터 삼아 살았는데요. 놀았는데요. 모닥불 피워놓고 모닥불에 홍합도 구워 먹고, 실낚시로 잡은 잡어들을 굽고, 저는 달리기 시합보다 바다에서 수영 시합을 더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다의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을 잘 압니다. 반면에 저는 바다의 무서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태풍(颱風)이 심하게 몰아치던 밤이 지나고 나면 동네 간판이 떨어지고 도로 표지(標紙)판은 다 휘어있습니다. 바닷가 구경 나간 건너 옆집의 누군가가 파도(波濤)에 휩쓸려 죽었다는 소식을 저는 자주 들었습니다. 그래서 바다가 가진 죽음의 얼굴을 잘 알고 있습니다. 경험(經驗)이 반복(反復)되면 확신(確信)이 됩니다. 제자들은 뱃사람으로서 많은 바다의 일들을 경험했습니다. 죽음을 직감하고 있습니다. 이 바람은 지나갈 바람이 아니야,. 내가 경험해 봐서 아는데 이제 우리는 끝이야 구체적인 죽음의 소리가 내면에서 내 입 밖으로 툭 튀어나옵니다. 예수님도 안 되실 것 같다. 이런 넋두리 같은 소리를 우리는 기도라고 생각을 합니다. 내 경험 안에서 충분히 제한(制限)하고 재단(裁斷)한 후에 간구하는 것들을 기도라고 생각을 합니다. 아주 이성적인 것을 기도라고 생각을 합니다. 될 만한 것을 기도해야지, 내 경험상 예수님도 하실 수 없어. 이게 기도해서 될 일이야, 이건 기도할 때가 아니야. 제자들의 이런 마음에 예수님을 찾습니다. 우리 38절 말씀인데요. 같이 한번 봉독해 볼까요? 시작,, *마가복음 4:38, 38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이거는 예수를 나무라는 어조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위기(危機) 상황인데 예수님 무엇 하고 계십니까? 여기서 예수님을 선생님이라 부르는 것도 아주 인상적입니다. ‘선생님, 지금 주무시다니요.’ 이 버릇없어 보이는 제자들의 모습에 왠지 우리는 공감이 됩니다. 우리 또한 기도하며 경험했던 예수님의 침묵이 답답했습니다. 주무시는 듯한 부제가 제자들처럼 우리에게 야속하기도 했습니다. II. 제자들은 내면의 무지에 귀를 기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당장 묻게 됩니다. 예수님 왜 주무시고 계신 것인가요? 너무 피곤해서 노을이니깐 편안해서 주무시는 겁니까? 고물에서 비를 피하고 베개를 베고 있으니 예수님은 괜찮으셔서 주무셨던 것입니까? 멀미를 못 이겨 주무신 것은 아니십니까? 어쨌든 위기(危機)에 때에, 예수님은 우리들의 안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생각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냥 딴 배를 타고 계신 것 같습니다. 어려운 이를 만나 기도의 자리로 나가는 성도님을 뵌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 제가 기도 외에 답이 없어서 답답해서 새벽에 기도하러 나왔어요.” 너무 잘하셨어요. 너무 잘하셨어요. 늦은 시간에 또 그 성도님을 뵈었습니다. “목사님 지금 응답이 늦어지고 있지만 오늘 저녁에도 기도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참 잘하고 계십니다. 기도하셔야죠. 또 기도하러 오셔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성도님, 어떻게 되셨어요. 잘 해결되셨어요. 아니요. 아무리 기도해도 상황은 더 나빠지고 있어요. 예수님의 침묵이 계속될 때, 주무시듯 침묵하실 때, 목사인 제게도 당장의 원망이 찾아옵니다. 예수님 응답해 주셔야지요. 예수님 일어나셔야지요. 저렇게 간절하게 기도하는데 죽음의 눈금에 닿아 사랑을 다하고 있는데, 예수님 도대체 어디에 계신 겁니까? 이렇게 침묵이 계속되면 우리는 이 침묵을 부재(不在)라고 여기게 됩니다. 안 계시거나 계셔도 안 계신 것과 마찬가지인 것으로 우리는 판단(判斷)해 버립니다. 어느 그 글을 쓰던 작가는 얼마나 이 부제가 싫었으면 이런 표현을 다 썼습니다. ‘혀 짤린 하나님’이라고,,, 말을 안 하시니,,, 침묵이 길어지고 예수님의 부재가 경험되어질수록 우리는 우리의 해결 방법을 찾기 위해 백방(百方)으로 뛰기 시작을 합니다. 뱃사람들은 잃었던 제자들은 노를 부여잡고 버티고 차 들어오는 물을 정신없이 퍼내며 물건을 던지기도 하고, 어떻게든 배를 살려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닥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문가를 찾아서 듣습니다. 인터넷을 찾아서 듣습니다. ai든, 블로그든, 유튜버든 살기 위해 들려오는 소리는 다 들어댑니다. 듣다가, 듣다가 우리는 내면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너 이제 어떻게 할래 너 끝난 것 같은데’, 내면이 들려주는 소리 앞에, 미친 광풍 같은 그 소리 앞에, 우리가 듣는 소리는 죽음의 소리로 귀결(歸結)돼 버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침묵(沈默)이 정말 부재일까요? 예수님이 주무시고 계시면 부재하신 것일까요?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께서는 오히려 예수님께서 ‘침묵에 동행을 하고 계신다’. 라고 이 부분을 해석해 냅니다. 또 다른 분은요, 예수님의 침묵을 ‘하나님을 만나는 가장 깊은 임재’ 라고 고백을 합니다. 본회퍼 목사님은요, 침묵을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침묵을 부재라 하지 않고, 또 다르게 이야기하는 이들은 임재(臨在)와 동행(同行)과 존재(存在)로 경험(經驗)하고 있습니다. 성도님이 또 찾아오셨습니다. ‘목사님,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럴 수가 없죠. 그리고 밤새 허공에다 대고 하나님 당신은 없어요. 하나님 당신이 있다면 내 삶이 이럴 수는 없죠.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내가 이렇게 살아갈 수는 없죠.’ 소리쳤다고 합니다. 근데 이 성도님은 누구보다 하나님 계신 것을 믿고 계신 분이십니다. 내가 아무리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지우려 해도 나는 이미 그분이 살아계신 것을 알기에 그분을 향해 외치고 있었고, 우리의 존재가 지워지는 것은 가능할지라도 하나님의 존재는 여전히, 영원히 그대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시끄러운 소리, 우리의 시끄러운 행동이 지나가고 나면 침묵하시며 동행하시던 우리 주님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을 합니다. 39절 말씀입니다. 우리 다 같이 한번 봉독해 보겠습니다. *마가복음 4:39,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다가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 지더라. -큰 난리를 부리던 바다가 잠잠(潛潛)해졌습니다. 이 부분을 좀 다르게 해석하는 경험과 과학적인 입장을 가지고 해석하는 신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광풍이 일었지만 광풍이 예수님을 말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갑자기 잦아들었을 뿐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갑자기 잦아든 이 광풍에 자신의 교훈을 담아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III. 제자들이 예수님의 존재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갑자기 오는 광풍이 있어 그런데 갑자기 먹기도 해 우리 인생이 그런 거야. 이렇게 그냥 해석해 버리고 맙니다. 아마 이 신학자에게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 응답이 무엇입니까? 제가 묻는다면 아마 이 신학자는 이렇게 대답을할 것 같습니다. 기도해서 응답받는 게 아닙니다. 우연히 시간이 되면 응답받는 겁니다. 그냥 그렇게 우리 인생은 이루어지는 겁니다. 신학을 하고 계신 분이신데, 이분에게 예수님은 고물에서 주무시는 그냥 선생일 뿐인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오늘 우리가 만난 예수님이 선생님이십니까? 시끄럽던 제자들의 소리가 그치고 침묵하시던 그 존재,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꾸짖으며 말씀하십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예수님이 꾸짖는 대상은 마가복음에서는 귀신 사탄 어둠의 역 말고는 없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폭풍우의 파괴적인 힘도 악령의 힘이라. 그 악령이 자연의 힘에 작용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성경에서도 바다는 태고의 혼돈(混沌)을 상징하며 의인의 시련과 환난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사회적 통념이나 성경이 말하는 모든 개념에서 당시 바다는 죽음과 사망의 권세가 맞습니다. 이 죽음과 사망의 권세인 바다를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셨습니다. 시편 89편 10절 말씀인데요. 우리 같이 함께 봉독해 보겠습니다. *시편 89편 10절, 10 주께서 라합을 죽인 당한 자 같이 깨트리시고 주의 원수를 주의 능력의 발로 흩으셨나이다. -라합(바다괴물, 원수)이라는 이상한 것이 등장을 합니다. 성경을 보니 ‘바다괴물, 이며 원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 팔과 손으로 흉흉한 바다 곧 소용돌이치는 바다를 다스리시고 일어나는 바다를 잔잔케 하시며, 바다 괴물 라합을 깨트려 부수신다고 시편 기자는 지금 노래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바다를 잔잔케 하시는 분이셨으며, 바다를 다스리시는 분은 하나님뿐이셨습니다. 이제 신약에서는요 바다를 지배하고 있는 악한 사탄을 예수님께서 오셔서 무력(無力)하게 하고 있습니다. 결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바로 이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잠잠하라. 고요하라.” 그래서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큰 두려움에 두려워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들이 두려워했다는 바다를 보던 두려움과는 다른 두려움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그에게서 나오는 초 자연적이시고, 내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다른 그분의 놀라움을 보며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경험이 찾아왔습니다. 지식이 찾아왔습니다. 이건 또 다른 두려움이었습니다. 이 두려움 아주 닮은 두려움이 있습니다. 모세가 떨기나무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을 뵈었을 때, 그분 앞에서 경험했던 두려움입니다. 어느 신학자는 ‘잠잠하라 고요하라’ 이 말씀과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 말씀하시던 그 하나님이 나를 드러내시던 그 장면이 같은 말이라고 설명을 하는 이도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경험하게 되는 두려움 그 거룩함 앞에서 찾아오는 두려움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나의 내면과 나의 내면에 꽉 차 있는 두려움과 그 내면을 마주하고 계시는 그 하나님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 성경 말씀 하나 더 볼까요? 이사야 이 말씀은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이사야 57장 20절 말씀해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오는데요. *이사야 57장 20절, 20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구쳐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우리 안에 더러워져 있는 악으로 가득 차 있는 우리의 마음의 모양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모양이 묘사되어져 있는 것을 진흙과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수구 진흙 물을 휘젓기 시작하면 각종 오물이 올라오는 것처럼, 내 안에 더러운 것들이 요동하는 바다처럼 솟구치고, 미친 바람이 불어 죽일 듯 몰아치고 있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마음을 피하고 싶습니다. 두려움에 적당히 사로잡히고 싶고, 적당히 염려하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래서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결혼을 못 하겠다. 라고 참 어려워하며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청년, 내면의 그 경험 속에서 나를 멸망시키고 파괴(破壞)하고 나를 주인 삼아서 사망(死亡)의 바다처럼 삼켜버리고 있는 이 청년과 같은 수많은 청년들은 말할 수 없는 깊은 상처와 아픔과 절망(絶望)의 문제를 그 속에 깊이 담아두고 감히 꺼내지도 못하고 어떻게 다루지도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강단에서 제가 지금 도저히 말할 수 없는 너무나 큰 아픔과 큰 문제를 가지고 와서 이야기하는 청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제가 그 얘기를 꺼내서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오늘 이 시간에 이 자리에 나와 계시는 성도님, 마음에 숨겨둔 너무나 아프고 너무나 두렵고 꺼낼 수가 없는 이야기가 있지 않으십니까? 그거 그렇게 외면하고 감추어두고 그거 피하면서 살아가려고 하십니까? 때마다 시마다 이것이 내가 이야기를 하고 내게 말을 하며, 나를 두려움과 염려로 사로잡아 가며 내 인생을 좀 먹듯 무너지게 하고 있는데, 사망의 더러운 것들로 죽음의 일들로 나를 이끌어 가게 하고 있는데, 이것을 그냥 두려워하고 계십니까? 죄와 사망의 권세가 온전히 승리한 것처럼 우리를 지배한 것처럼, 그렇게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을 그냥 보고 살아 가시려고 하고 계십니까? 내가 한번 이겨 내려고 하면 삼키고 괜찮아지려면, 다시 꺼내어 옥죄오는 지독한 사망의 권세가 우리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을 때, 내면의 두려움은 폭풍 속에서 보았던 예수님의 모습을 십자가에서도 동일하게 보게 합니다. 높이 들려 졌던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며, 마치 폭풍우에 잠든 예수님처럼 우리는 나약한 예수님을 보듯, 그는 그리스도일 리가 없다. 라고 말을 합니다. 목수가 나무에 달려 버렸습니다. 죽음과 저주와 심판과 죄의 상징인 나무에 달렸습니다. 손도 발도 목에 박혀 못에 박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창이 옆구리가 이제 다 터져 박혀 말도 제대로 못하는 나약한 한 사내로 우리는 여전히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침묵할 수밖에 없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겨우 숨만 턱턱 내쉬는 예수님은 내 삶을 도울 수도 없고, 나를 구원할 수 없다. 라고 우리는 끊임없이 여겨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십자가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상식적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타당합니다. 논리적입니다. 그런데 다시 묻고 싶습니다. 이 십자가가 지금 어디에 서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어디에 있습니까? 갈보리 언덕 위에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보고 계시는 십자가는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어디에 있습니까? 저 멀리 있습니까? 누군가에게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서 있는 곳은 우리의 두려움이 서 있는 곳입니다. 우리의 죄(罪)가 서 있는 곳입니다. 우리의 숨겨왔던 삶의 모양이 서 있는 곳입니다. 죽음의 권세와 사망에 쏘는 곳, 트라우마라 불리던 내면의 깊은 상처 위에 나의 내면에 가장 어둡고 두렵고 무섭고 감추고 싶었던 그곳에, 부모님도 형제도 나도 외면하고 감추고 숨기며 살았던 곳, 항상 찾아오는 두려움과 염려와 근원 상처와 아픔의 근원 결핍과 아집(我執)과 절망의 근원 바로 그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서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달려 계십니다. 바로 그곳에서 십자가의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동행하고 계십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들의 내면에 계십니다. 나의 깊은 곳에 예수님의 침묵하시며 동행하셨던 그 순간은 한 번도 변함이 없으셨습니다. 나를 살리시려고 재화 사망에 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려고, 악인의 멸망처럼 나를 무너지지 않게 하려고, 그 지독한 장소에 매달린 것이며 그 지독한 장소에서 죽음을 마주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주셨던 말씀 죽음의 죽음과 사망의 권세를 향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로 주셨던 말씀 ‘잠잠하라 고요하라 그리고 다 이루었다’ 말씀하셨습니다. ‘사망아 죽음아 두려움아 결핍아 조용하라 꼬여 와라 내가 다 이루었다 지금 내게 사랑하는 자에게서 떠나가라 내가 어디서 떠드느냐 내가 어디서 함부로 말하느냐 내 사랑하는 자 그 내면에서 모든 것들아 떠나가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며 십자가 위에서 죽음으로 모든 더러운 것들을 이겨 내셨습니다. 아무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그 상처, 숨겨왔던 이야기를 제게 들려주는 청년들이 참 많았습니다. 왜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그 내면의 상처에서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그들이 살아납니다. 힘을 얻습니다. 더 이상 들려주는 그 죽음과 사망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가 들려주는 그 소리에 내게 생명 되시고, 참 하나님 되시며, 나를 위해 세상의 모든 물결들을 뒤엎어 잠잠게 하시는 그 하나님의 소리를 따라 살아가기에 그동안 보았던 숨기고 가리웠던 내면의 이야기들을 이제는 꺼내요 할 수 있는 청년의 날들이 됩니다. 그러면서 외적으로 나타나는 변화들도 있습니다. 결혼을 하는 청년들이 점점 생겨납니다. 말씀드렸던 것처럼 아버지와 또 가정에서 겪었던 모든 일들, 그들이 풀어낼 수 있는 하나님의 복 중의 하나는 새로운 가정을 이루어서, 그가 다시 회복해 나가는 일들로 하나님을 만들어 가시는 것을 저는 보았습니다. 그리고 가정을 이루어서 또 다른 자신과 같이 상처 가운데 거하는 이들 청년들을 만나 그들이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저는 목회자의 가정에서 자라나며 제일 의심되는 것이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내가 정말 믿고 있는가? 예수님은 정말 어디에 계신가? 나는 잘 알고 있는가 혹시 아버지가 목사라서 내가 속아서 예수님을 믿는다. 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이런 의심이 마구 몰려오던 중학교 시절에 의심이 확신이 되는 것처럼 극에 달했던 시절에 제가 수양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중동부 겨울 수양이었는데요. 믿음에 대한 반항인지 내 마음의 의심에 대한 표현인지 설교 시간에 그냥 퍼질러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말씀이 끝나고 기도회가 시작되자, 이제는 마음 놓고 엎드려 잠에 들었습니다. 아 그때 참 좀 신기한 경험을 알게 되었는데요. 저는 잠이 들었는 줄 알았는데 아 꿈결같이 그날 기도에 인도하시는 목사님의 음성이 자꾸 들려오는 거예요. 여러분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음성을 따라 제가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눈을 감고 있었는데, 마치 눈을 뜬 것처럼 한 동산이 보였습니다. 목사님께서 마치 그 동산을 함께 보는 것처럼 그러면 그 길을 따라가 보시겠습니까? 라는 말에 저는 길을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동산 위에 나무가 보이십니까? 보니 큰 나무 한 그루가 보였습니다. 그 아래 가시죠. 하는 말에 그 아래 갔습니다. 앉아 쉬는 듯 있는데, 목사님의 음성이 또 들려옵니다. 올려다보세요. 그 나무를 올려다보는데 그 나무가 제게는 십자가로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나무에 달린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달린 한 사람이 내려다보는 그 눈길과 저는 마주쳤습니다. 그분이 저를 바라보고 계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울음이 터지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기도가 끝나고 눈을 떠보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제가 기도하고, 있어서 친구도 선생님도 모두 기다리고 있다가 갔다고 합니다. 저는 지금도 너무 힘들고 너무 고통스럽고 하나님의 침묵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재로 인하여 내 안에 흔들림 들이 찾아올 때 한 동산에 오릅니다. 그리고 십자가 아래 저는 무릎을 꿇습니다. 그러면 한 번 더 어김없이 그때 나를 바라봐 주셨던 예수님은 또 나를 바라봐 주십니다. 그리고 내면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임재에 동행하며 힘을 얻습니다. 한판 신나게 울고 나오면 살 것 같습니다. 내게 들려주는 두려움과 염려의 소리 들은 떠나가고 내조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사랑하는 성도 님들께 묻습니다. 어찌하여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예수님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알고 계십니다. 아직도 나를 모르느냐? 시간을 낭비하며 가장 쓸데없는 내면의 두려움에 귀를 기울이고 있느냐? 어찌 아직도 두려워하며 염려하고 있느냐? 십자가 나무 아래서 나와 함께 동행하는 것이 어떠냐? 그분이 우리의 모든 주인이 되십니다. 그분의 소리에만 기울이고 살아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서운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요약 우리를 암흑의 권세에서 건져내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생명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아가게 하시니 감사해야 한다. 보이는 두려움과 고통의 현실 앞에 침묵 아시지만, 우리 안에 임재하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살아가야 한다. 눈을 열어 하나님의 동산을 보며, 십자가의 동산에서 살아갈 날들, 기쁨의 동산을 살아갈 것을 소망하며, 우리가 주의 은혜를 힘입어 살아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찾아온 많은 문제들을 넘어서게 하실 것을 확신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의지하며 살아가야 한다. 제자들이 경험(죽음)이 들려주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내면의 무지에 귀를 기울리고, 예수님의 존재에 귀를 기울이고 있듯이, 우리도 내면의 두려움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주님 앞에 온전히 귀를 기울이는 자로 살아기기를 소망하자.. ![]() ![]() ![]() |
'○수요저녁기도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수요저녁기도회(2025년 3월 19일) "십자가의 길"제목: "십자가의 길"(임상규 부목사님)-사랑의 교회 ☆ (0) | 2025.03.19 |
---|---|
☆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5년 3월 12일)"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윤현수 부목사님)-사랑의 교회 ☆ (0) | 2025.03.13 |
☆ ♣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5년 3월 5일) “한마음, 하나의 부르심”(임병영 부목사님)-사랑의 교회 ☆ (0) | 2025.03.05 |
☆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5년 2월 26일)"Finishing Well 합시다"(오정현 담임목사님)-사랑의 교회 ☆ (0) | 2025.02.26 |
☆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5년 2월 19) “하나님께서 돌보십니다”(백요셉 부목사님)-사랑의 교회 ☆ (0) | 2025.0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