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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5년 1월 29일)
제목: “광야를 지나는 법”
말씀: 출애굽기 40:36-38
찬양인도: 쉐키나(장단희 부목사님)
 
설교자: 문진호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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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40:36-38,
36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
37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38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
 
▶- 새해 새길 여신은 주님과 동행하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출애굽기 40장 36절에서 3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출애굽기 40장 36절로 38절까지의 말씀 저와 여러분이 한 절씩 교독하시도록 하겠습니다.
 
-광야는 풀 한 포기가 없습니다. 광야는 사람이 살 수가 없는 곳입니다. 광야를 경험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소리를 직접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민수기 20장 5절 말씀입니다.
 
*민수기 20장 5절,
5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나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
-광야에 관해서 정말 리얼하게 이처럼 표현한 성경 구절이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광야는 어떤 곳인가 하면 없고, 없고, 없고, 없는 곳입니다. 내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다라고 느껴지는 그 자리 그곳이 광야입니다. 가끔 나는 왜 없을까? 라고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축한 돈도 없고, 연금도 없고, 직장도 없고, 애인도 없고, 차도 없고, 보험도 없고, 건강도 없는 모습을 보면서 아마 이 중에 하나는 하나쯤은 우리에게 동일하게 없다라고 생각할 만큼 우리 손에 들고 있는 것이 참 많지 않다 라는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 내 손에 아무것도 쥔 것이 없을 때, 그 자리가 광야입니다. 어쩌면 붙잡았다. 생각하는 그것을 잃어버리는 그 자리도 광야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평생 직장이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나오게 되고, 자녀들을 멀리 떠나보내고 세상이 흔들거리는 상황을 경험하고, 건강을 잃게 되는 그 순간 그 자리가 광야입니다. 놀랍게 생각되어지는 점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그 광야로 내모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이후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사람들을 광야로 보내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을 새롭게 빚어가십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광야에 계시는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향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는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이 쓰기 원하는 사람들을 거의 대부분 광야 학교에 보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새로운 민족을 시작하길 원하셨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바벨론의 안정적인 삶으로부터 그를 불러내셨고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요셉은 채색 옷을 벗겨 광야의 구덩이에 던져지게 하셨습니다.
모세를 왕궁의 편안한 곳으로부터 이끌어 광야의 목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엘리아에게는 광야에서 새로운 사명을 주셨고
다윗도 광야로 보내셨습니다.
 
그곳에는 온통 사울이 통치하는 그런 세상에서 하나님이 지배하시고 왕이 되시는 진짜 왕으로 성장해 가는 그 자리, 그것이 광야였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우리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광야를 매우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광야로 이끌림 받을 때, 대개는 불평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광야로 내모실 때, 그것을 불평하면서 내 삶에 왜 이렇게 없는 것 투성이야! 라고 불평가를 부르기보다는 우리에게 지혜가 필요한데 그것은 이 광야의 때를 어떻게 하면 잘 지나갈 수 있는가? 그것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한 해를 시작합니다. 내가 서 있는 자리가 광야라고 생각하신다면, 하나님의 손에 조율되어 쓰임받기를 원하고자 쓰임받고자 하는 그 기대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여러분은 반드시 광야를 통과하게 되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광야를 지나가는 법을 배우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본문 40장 36절에서 37절입니다. 한 번 더 우리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40:36-37,
36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
37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광야를 지나는 법, 첫 번째는 멈추라는 것입니다.
 
I. 멈추라는 것입니다(Stop & Go).
 
-설교 제목이기도 하죠. 스탑 엔고, 라고 하는 용어를 찾아보았습니다. 한국 용어가 있더라구요. 비행기가 활주로(滑走路)에 들어섰을 때 잠시 멈춥니다. 그리고 이륙(離陸)하기에 앞서서 최종적인 점검을 합니다. 계기판에는 이상이 없는지 그리고 조금이라도 뭔가 이상이 있으면 마지막으로, 이륙을 멈출 수 있는 단계이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한 순간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관제탑(管制塔)으로부터 출발 사인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관제탑에서 이륙해도 좋다라고 하는 사인이 와야지 비로소 비행기는 이륙을 시작합니다.
 
광야에서는 달리던 모든 것이 멈추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거긴 주유소도 없고 열기를 식힐 물도 그늘도 없습니다. 뜨거운 태양과 모래 바람을 맞으면서 계속해서 달릴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매우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이 광야에서 멈춘다는 것은 하나님이라고 하는 자원으로 일하는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멈춘다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새로운 방식으로 일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중요한 것이 이런 것입니다. 어떤 엔진을 가지고 자동차로 횡단을 한다고 할 때 엔진의 출력을 높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연료(燃料)가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광야에서 멈추었을 때 꼭 점검(點檢)해야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먼저는 쉬어야 되겠죠. 그리고 건강에 이상이 없는지를 확인합니다. 그리고 길을 오래도록 가기 위해서 불필요한 짐들은 없는지 확인하고 있다면 그것을 덜어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 멈춤을 통해서 해야 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라고 하는 연료를 채워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광야 같은 인생길에서 얻게 되어지는 가장 최고의 연료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는 속도 경쟁이라는 것을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좋은 엔진에 그리고 속도를 잘 내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들을 취하게 됩니다.
 
스펙도 필요하고 자격증도 필요합니다. 경력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엔진이 좋아야 잘 달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속도 경쟁을 하면서 살아오다가 우리의 삶이 갑자기 멈추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면 아 이대로 내 삶이 끝나버린 것 아닌가, 하는 죽음의 공포심(恐怖心)마저 들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아마 이런 느낌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줄애굽기 14장 11절입니다.
 
*출애굽기 14장 11절,
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의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광야에서 죽을 것 같다. 라고 하는 생각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모세를 통해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대답이 13절과 14절입니다.
 
*출애굽기 14장 13-14,
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우리가 가만히 있을 때,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우리가 멈추어 있는 그 시간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기 시작하십니다. 그것이 광야에서 우리가 멈추게 되는 그 순간에 맞이하게 되는 놀라운 신앙의 신비인 것입니다. 반석에서 물 가운데 마른 땅으로 건너갈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내시는 분이십니다. 광야에서 우리는 멈추게 됩니다. 그러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멈추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일을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멈추는 그 시간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돌보기 원하시는 분이신지를 깨달아 아는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광야는 멈추어 있는 그 순간에만 체험할 수 있는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공간인 것입니다.
 
조금 더 우리가 멈추어 선다는 것의 의미에 관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멈출 때 주님이 일하시게 하는 방법이 있어요. 그것은 우리의 짐을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시편 55편 22절 상반절입니다.
 
*시편 55편 22a절,
22a, 내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마태복음 11장 28절,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리가 쉴 때, 하나님은 우리보다 앞서가셔서 장막 칠 곳을 예비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쉴 때에 하나님은 양식(糧食)을 준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쉬지 않고 일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주인님께 올려드린 모든 짐을 대신해서 짐 져주시고, 그 삶의 문제들을 대신 처리해 주시기 위하여 계속해서 일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께 우리의 짐을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가 기도합니다. 주님 내 삶의 짐이 너무 무겁습니다. 내 삶의 짐을 좀 가볍게 해주십시오. ‘그래 내게 다 내려놓거라 내가 너를 쉬게 해주겠다.’ 주님 너무나 감사합니다. 주님 너무나 감사합니다. 그를 기도를 마치고 나서 다시 그 짐을 주섬주섬 싸가지고 어깨에 짊어지고 자리를 떠나는 그 모습, 여러분 어쩌면 우리가 기도하는데 주님께 전폭으로 맡기지 아니하기 때문에 기도가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는 나태(懶怠)함과는 다릅니다. 우리의 짐을 주님께 맡겨드리고 우리가 기도하므로 주님 앞에 멈추어 서 있으면 주님은 일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이냐면 우리가 멈출 때 그것은 나태함이나 게으름이나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는 무방비(無防備)함이 아니라, 그 시간을 통해서 새롭게 하나님과 더불어 일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하스테반 목사님이 이런 찬양을 잡고 계십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그가 하나님 됨 알지어다’(하 스테반 작곡) 열방과 세계 가운데 주가 높임을 받으리라. 우리가 멈추어서 하나님께 전폭으로 맡길 때, 그리고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일하시고 세상을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광야를 지나는 법, 두 번째는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본문 36절입니다.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II. 두 번째는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40:36,
36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
-여러분 여기 행진하는 길에 길에라고 하는 이 행진하는 길에 과거에 그들의 여정에서라고 하는 표현으로도 사용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냐면 원래 원래 말 뜻은 말뚝을 박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름이 떠올라 앞으로 나아갔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박혀있던 말뚝을 뽑는다라는 뜻인 것이죠. 장막 생활을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확한 표현인 것입니다. 말뚝을 박고 다시 말뚝을 뽑고 그것이 멈추었다 이동하는 그들의 삶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실인 것이죠. 하나님과 함께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정리해야 될 것이 있다면 삶의 말뚝을 뽑는 것입니다.
 
말뚝을 뽑는다는 것은 묵은 것들 고착화된 것들, 하나님 앞에 나의 모든 고집들 특별히 순종하기 싫어하는 죄악의 습관들, 이런 것들을 다 뽑아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름은 하루 이틀 또 오래도록 머무를 때에는 1년 이상을 한자리에 머무르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그 구름이 떠오르면 이스라엘 백성은 천막의 말뚝을 뽑고, 앞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 타이밍이 언제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에요. 항상 타이밍의 주도권은 하나님이 쥐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본문의 내용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또 다른 본문이 있는데, 민수기 9장입니다. 21절인데,
 
*민수기 9:21,
21 혹시 구름이 저녁부터 아침까지 있다가 아침에 그 구름이 떠오를 때에는 그들이 행진하였고 구름이 밤낮 있다가 떠오르면 곧 행진하였으며.
-떠오르면 곧 행진하였으며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 밤낮 있다가 떠오르면이라고 하는 이 표현을 좀 주목해서 보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밤낮 있다가 보통 우리가 밤낮이라고 표현하지 낮밤이라고 잘 얘기 안 합니다. 그런데 원래 원어적으로 순서는 밤낮이 아니라 밤이 맞습니다. 그러니까 이 표현은 뭐냐면 저녁부터 아침까지 있다가 아침에 구름이 떠오르면 아침에 날이 밝았을 때 출발입니다. 그런데 구름이 밤낮 있다가 떠오르면 곧 행진한다는 말은 무엇이냐면, 낮 밤으로 있다가 밤에 구름이 떠오르는 경우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낮에 이동하는 것이 편하겠습니까? 밤에 이동하는 것이 편하겠습니까?
 
장막을 그 한밤중에 말뚝을 뽑고 가족들을 다 깨워야 됩니다. 가축들을 몰아서 이동을 시작합니다. 여러분 얼마나 거추장스럽고 불편하고 그리고 힘든지 모릅니다. 늘 우리의 삶에 말뚝을 뽑아야 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타이밍은 우리의 삶에 말뚝이 뽑히기를 바라면서 우리에게 이동하라고 명령하시는데, 우리는 너무나 우리의 생각, 우리의 경험 우리의 고착화된 생각들 때문에 하나님의 타이밍에 잘 반응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함께 나아가려면 이유불문하고 말뚝을 뽑고, 앞으로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특별히 주님 앞에 불순종(不順從)하고자 하는 그 죄악의 습관들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특별히 주님 앞에 불순종하고자 하는 그 죄악의 습관들에 놀라운 비밀이 담겨져 있는 거예요. 실험생활을 해보면 이것이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우리가 순종할 때 마귀(魔鬼)가 두려워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것을 온갖 방법을 사용해서 방해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예가 출애굽기 8장 32절입니다.
 
*출애굽기 8장 32절,
32 그러나 바로가 이때에도 그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여 그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
-주님과 함께 백성이 행진하고자 할 때, 노예의 삶으로부터 멀어지고 또 악으로부터 멀어지게 될 때 순종이 마귀를 두렵게 하고 죄약을 끊어버리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순종하지 못하게 온갖 방해와 온갖 모략(謀略)을 다 해서 우리를 공격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순종이 죄약을 끊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불순종의 조약들을 끊어버리고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하면 조약들을 끊어버릴 수 있습니다. 순종하면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죄악된 습성들을 고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순서가 굉장히 중요한 것이죠.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가정에 온갖 방해와 온갖 어려움들이 발생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예배를 못 드리게 하고, 성경책을 찢고 또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작용합니다. 그런데 어느순간 하나님이 그러한 방해와 그런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별하는 순간이 온다는 거예요. 출애굽기 8장 23절입니다.
 
*출애굽기 8장 23절,
23 내가 내 백성과 내 백성 사이를 구별하리니 내일 이 표정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시고.
-여러분 어느 순간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님 앞에 내가 뭔가 순종하며 정말 하나님 순종하는 자녀로 살아가고자 할 때의 고난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방법으로 그들을 구별하시고 그 고난으로부터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계속해서 순종하며 나아가야 될 이유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내 맘에 들지 않아도 내 뜻과 내 생각과 내 경험과 좀 달라도 하나님께 순종해야 될 이유가 이것입니다. 여러분 가끔 이런 이야기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제가 지난 2년 동안 제자훈련, 사육훈련 힘들게 마쳤지만 지난 2년 동안에 그 훈련이 나를 살게 했습니다. 그 훈련이 아니었으면 정말 어떻게 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을지 아찔합니다.
 
이런 고백들을 주변에서 자주 하는 것을 듣습니다. 순종이 마귀를 두려워 떨게 만듭니다. 순종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순종하면 죄악을 이길 힘을 주십니다. 순종하면 마귀를 이기고 하나님의 거룩한 그 성품이 우리 안에 깃들도록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입니다. 911 사태가 터진 그 다음 주에 카터콜론 목사님이 타임스퀘어 처치에서 이런 설교를 했던 것이 기억이 났습니다. 살기 위해 달리십시오. 생명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달리십시오. 진리가 내동댕이치는 세상으로부터 도망치십시오. 죄가 편하게 느껴지는 곳으로부터 달리십시오. 하나님의 이름을 자기 이익을 위해서 사용하는 곳으로부터 달리십시오. 탈출하세요. 빨리 떠나십시오. 달리십시오.
 
런, 런, 런! 여러분, 우리가 죄악의 자리로부터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삶의 자리로 순종하여 나아가는 그 나아감의 자리 가운데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불순종의 말뚝을 뽑아버리고, 순종의 자아가 자리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죄악을 이기고 주님과 동행하는 은혜를 바로 그 순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광야를 지나는 법, 세 번째는 보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멈추는 것이고. 두 번째는 뭐라고요. 나아가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보는 것입니다.
 
III. 세 번째는 보는 것입니다.
 
-언제 멈출지 언제 나아갈지 하나님의 구름이 떠오르는지 그 자리에 머무르는지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38절입니다.
 
*출애굽기 40:38,
38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
-여러분 광야에서는 시선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일하시는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언제 머무시는지를 보기 위해서 하나님을 향한 시선이 정말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됩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살고, 바라보지 않으면 죽게 되는 곳이 광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본다는 것에 관해서 저는 조금 더 생각을 해봅니다. 주님을 본다는 것은 주님의 눈에 비친 우리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 여러분 여러분 이런 겁니다.
 
부모님이 사랑하는 자녀들을 바라볼 때, 부모님의 그 눈에 자녀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자녀들의 어릴 적 사진을 보면서 부모님들은 미소를 짓습니다. 하염없이 그 자녀들의 웃는 모습을 보면서 그 어린 시절 그 자녀들과 함께했던 추억 함께 어려웠던 그리고 그 아이가 아프고 곤경에 처했던 그 시간들을 지냈던 기억들을 소환하면서 부모는 미소 짓고, 그 추억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동일하게 우리를 향해 미소 짓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출애굽기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기억나십니까 출애굽기를 우리는 지난 몇 달간 큐티를 하면서 묵상을 해왔습니다. 출애굽기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난을 보는 데서 시작합니다. 출애굽기 3장 7절입니다.
 
*출애굽기 3장 7절,
7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먼저 보고 계셨고, 우리의 모든 형편을 알고 계신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출애굽기를 마무리하면서 광야의 삶이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어지는 이 시점에 백성들의 시선을 하나님 앞으로 모으고 계십니다. 출애굽기는 하나님의 시선이 백성들을 향해 가 있다라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출애굽기 40장의 이 마지막 부분에서는 백성들의 시선이 이제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라는 것에서 마무리 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하는 어린 자녀에게 그림책을 보여주는 것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이 그 사랑하는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그림책을 보여주듯 출애굽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누가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있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목회하신 어느 목사님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대학 학부생이었을 때 존이라고 하는 이름을 가진 동료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 친구를 위해서 일주일에 몇 시간을 할애해서 책을 읽어주는 그런 봉사를 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스스로 책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점자가 아닌 이상 그 책을 누군가가 읽어주는 것을 통해서 공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시각을 잃어버린 이야기를 그 친구로부터 듣게 됩니다. 중고등학교 때 사고를 당했고 시력을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당시는 자기의 삶이 거기서 끝났다고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하신 하나님이 원망스러웠고, 자기 주변에 있는 이웃 사람들에게 그 원망의 마음을 화로 분노로 풀기 시작했습니다.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아니하고 자기 방에 틀어박혀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그의 방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참다 못해 자기 연민에 빠져있는 그 아이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이제 겨울이니까. 눈이 들이닥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창문을 달아야 된다. 내가 이것은 늘 하던 일이니까. 오늘 저녁까지 다 해 놓아라. 친구 존은 스스로를 저주하면서 더듬거리며 창고에 가서 창문과 공구들과 사다리를 가져다가 더듬더듬 거리면서 창문을 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해요. ‘내가 사다리에서 떨어져서 목이라도 삐거나 다치면 아빠는 어떤 마음이 있을까?’ 될 대로 되라 하면서 하다 보니까 어느 순간 창문 다는 그 일이 다 끝마쳐졌다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이야기를 하던 그 존이라고 하는 친구가 하던 말을 멈추고, 그의 눈에는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보았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나중에 내가 알게 된 일인데 그날 아버지는 내게서 3~4발짝 떨어진 곳에서 나를 계속 지켜보고 계셨어.
 
다윗도 광야의 깊은 고난 속에서 그가 광야 생활을 전전하는 가운데 가끔은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라고, 하나님이 과연 나를 돕고 계시냐라고, 사람들은 과연 너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라고 그렇게 비아냥거릴 때 원망하는 마음이 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주님의 눈 속에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기뻐합니다. 시편 31편 7절에 우리 같이 한번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윗의 마음이 되어서 그가 그 고난 가운데서도 어떻게 이런 찬양을 하나님 앞에 올려드릴 수 있는지 그런 마음으로 같이 한번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시편 31편 7절,
7 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 주께서 나의 고난을 보시고 환란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으며.
-주님께서 내 고난을 보셨다는 것입니다. 내 고난을 보시는 그 주님의 눈 속에 나의 모습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는 기뻐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눈에서 우리를 발견할 때 우리는 광야를 지나게 하시는 그 이유, 구름과 함께 멈추어라. 그리고 이동하라. 왜 stop and go를 통해서 10일이면 갈 거리를 40년을 돌아서 광야의 삶을 경험하게 하시는지,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역대하 16장 9절입니다.
 
*역대하 16장 9절,
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음 즉 이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다 함에.
-아사왕이 하나님이 아닌 아람 군대를 의지할 때에, 하나님이 주신 경고의 메시지였습니다. 하나님의 눈을 온 땅을 도로 관찰하시고, 특별히 우리의 곤경과 고난과 광야에서 내 손에 들려진 것이 아무것도 없어! 라고 한탄하며 하나님을 원망하는 그 순간조차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전심으로 향하는 자들을 향하여 능력을 베푸시겠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인도하실 때, 구름을 사용하셨듯이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여러분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서 가장 아쉬웠던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제대로 살아볼 걸’ 하는 그런 마음 아닙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지난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어쩌면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은 불편하고 힘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쉬운 길이었다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멈출 때, 멈추고 나아갈 때 나아가면 주님이 세심하게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이 우리 인생의 나침반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삶의 방향을 잃어버렸을 때, 주님을 따라가기만 하면 성경이 가리키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우리가 우리의 시선을 고정하고 멈추라 할 때 멈추고, 나아가라고 할 때 나아갈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광야를 지나는 법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우리에게 지도를 들려줍니다. 광야에서는 사실 지도가 필요 없습니다. 왠지 아십니까? 아무리 지도가 있어도 그 광야를 지나가기 위해서 이 지도를 따라가라. 아무리 길이 잘 그려져 있어도 여러분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광야에서는 내 위치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지도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해야지 합격해, 코인에 투자하십시오. 노후는 이렇게 준비하십시오. 관계는 이렇게 맺어야 합니다. 직장생활의 황금률은 이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수많은 지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광야에서 이런 지도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광야에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가리키는 나침반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새해 광야를 지나갈 때 성경을 통해 주님을 가리키는 그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19세기 위대한 전도자 디엘 무디가 성경의 사람이었다 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시카고 무디 성경학교 박물관에 그의 성경책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 성경책을 보면 하도 읽고 읽어 다 닳아버렸습니다. 어떤 성경의 구절은요, 너무 닳아서 구멍이 뚫리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그 성경에는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그가 많은 메모들을 했는데 그 메모 가운데 어떤 곳에는 t 어떤 곳에는 p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가이드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t는 트라이드(tried) 시험해 보았다는 것입니다. p는 프로븐(proven) 그것은 증명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것입니다. 의심이 날 때마다 이 말씀이 과연 그러한가? 의심이 날 때마다 그는 그곳에 T라고 적어놓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 봅니다. 해보니까 이 말씀이 정말 진리더라 P라고 옆에 적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올 한 해 우리의 성경책에 T와 P가 적혀지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고 한다면, 여러분 순종하십시오. 그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멈추라 하실 때 멈출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멈춤의 시간이야말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여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올해 주님이 밝혀주시는 말씀의 빛 가운데 길을 잃지 마시고 주님과 동행하며 행복한 행진을 해 나아가실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요약
우리의 삶 가운데 광야의 그 아무것도 우리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이겨낼 수 없는 그 삶의 자리가 펼쳐져 있다할지라도 주님 바라보며 주님께 시선을 고정하며 주님이 멈추라 하시면 멈추고, 가라 하시면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의 여정을 걸어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할 때, 주님이 일하시고 우리의 삶의 짐을 대신 져주시며 주님께 순종하는 그 훈련을 통하여 주님이 마침내 우리를 가장 좋은 곳, 약속했던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는 것들을 경험하는 삶의 풍요로움을 경험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올 한 해 주님과 동행하는 행복한 한 해가 될 수 있도록 주님 역사하시길 소원하며, 우리의 삶에 나침반 되신 그 성경을 통해 주님 바라보며, 주님의 인도함을 경험하는 은혜로운 삶이 되고, 모든 것 주님께 맡겨드리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광야 같은 인생길에서 삶이 멈추는 것을 경험할 때, 그때가 바로 하나님이 일하실 때임을 믿고 전심으로 주님께 삶의 짐을 내어 맡기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주님이 나아가라 명하시면 불순종의 말뚝을 뽑아 순종으로 나아갈 때, 마귀가 두려워 떠는 걸어 다니는 성경의 사람이 되어서, 아버지의 눈 속에 있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여 인도하시는 곳이 비록 광야일지라도 사랑으로 우리를 빚으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끝까지 신뢰하며, 오늘 주신 말씀을 기억하여 나의 기도의 제목으로 삼아서 주님 앞에 온전히 맡기며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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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5년 1월 22일)
제목: "복음이 이끄는 화해와 회복"
말씀: 빌레몬서 1:8-20
찬양인도: 쉐키나(이동선 부목사님)
사회: 강건우 부목사님

설교자: 이지형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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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레몬서 1:8-20,
8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9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10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11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12 네게 그를 돌려 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13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14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15 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리니.
16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17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18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19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20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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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여호와를 앙망하며 나아갈 때 반드시 새로운 길이 열릴 줄로 확신합니다. 우리는 다양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박수 쳐주는 인생처럼, 아름다운 관계 속에서는 우리의 삶에 큰 기쁨과 의미를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모든 관계가 평안하지는 않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점점 더 분열(分裂)과 대립(對立) 속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가족 간의 갈등(葛藤)은 물론이고 친구와의 단절(斷絶), 직장 내의 불화(不和), 심지어 나라와 민족, 교회 안에서조차도 갈등이 생겨서 관계가 깨어지기도 합니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갈등은 더 깊게 느껴지고 화해(和解)는 더 어렵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갈등과 상처가 너무 깊어 도저히 상대방과는 화해할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갈등은 단순히 외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안에 죄성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죄(罪)로 인하여 깨어진 인간의 관계는 이처럼 갈등과 상처(傷處)를 낳게 됩니다. 그 결과 우리는 자주 서로를 피하거나 상처를 더 깊게 만들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관계의 갈등과 상처 속에서 용서(容恕)와 화해(和解)를 선택하기를 어려워합니다. 이러한 상황(狀況)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음(福音)을 주셨습니다.

복음은 우리의 개인의 죄를 용서받고 구원(救援)받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맺고 있는 모든 관계를 변화시키며 갈등과 상처를 회복하게 하는 능력이 있는 줄 믿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복음이 무너진 관계를 어떻게 새롭게 하는지 함께 나누길 원합니다.

빌레몬서는 사도바울이 골로새교회의 지도자인 빌레몬에게 쓴 편지입니다. 빌레몬의 종이었던 오네시모는 주인에게 상처를 입고 도망쳤지만, 로마에서 바울을 만나 복음을 통해 변화되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다시 보내며 그를 단순한 종이 아니라 주 안에서 사랑받는 형제로 받아들일 것을 요청합니다. 이 짧은 편지는 복음이 사람들의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또 그 과정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어떠한 신앙적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복음이 이끄는 화해와 회복의 세 가지 원리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복음의 능력이 이끄는 화해와 회복의 열매를 맺게 되길 소망합니다. 먼저 첫 번째 원리입니다. 복음은 무너진 관계를 향해 나아가게 합니다. 본문 8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더 읽겠습니다.

I. 복음은 무너진 관계를 향해 나아가게 합니다.

* 빌레몬서 1:8-10,
8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9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10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아멘 바울은 빌레몬에게 요청할 때,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앞세우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의 신앙적 스승이었기 때문에 빌레몬에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사랑으로 간구(懇求)하는 방식을 선택합니다.

자신을 복음의 사명을 위하여 갇힌 자 나이가 많은 자라고 표현하면서 현재 자신의 그 상태를 자신이 나이가 많고 감옥에 갇힌 연약한 상태에 있음을 강조하면서 빌레몬에게 권위가 아니라, 연민(憐憫)과 사랑으로 다가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복음이 강압적인 명령이 아니라 사랑으로 이끄는 초대(招待)임을 보여줍니다.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는 파괴된 상태였습니다. 당시 종이 주인을 떠나 도망가는 것은 법적으로 큰 죄로 간주되었으며 주인의 입장에서는 경제적으로 감정적으로 큰 손실을 입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바울은 복음으로 하여금 깨어진 이 관계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중요한 진리를 발견합니다. 복음은 우리가 깨어진 관계를 외면하지 않고 직면하게 합니다. 우리는 갈등을 피하고 상처를 숨기며 살고 싶어 하지만 복음은 우리를 그 관계로 다시 부르며 용기(勇氣)와 사랑으로 다가가게 합니다. 재로 인해서 무너진 관계를 복음의 능력으로 회복하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본질입니다.

한 가족이 있었습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 깊은 오해가 생겨서 몇 년 동안 서로 연락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자녀가 복음을 맞이하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부모님께 용기 내어서 연락하여 용서를 구했습니다. 물론 그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붙잡혀서 한 걸음씩 나아가게 되었을 때, 깨어진 관계가 회복(回復)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영가족 여러분,
우리의 삶에도 복음으로 화해를 향한 용기를 내야 할 관계가 있지 않습니까?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은 갈등이나 상처로 인한 단절된 관계가 우리에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와의 상처받은 관계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지는 않습니까? 복음은 그 관계를 외면(外面)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다시 나아가라고 우리를 도전(挑戰)합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깨어졌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의 십자가 사랑으로 말미암아 다시 하나님께로 이끌어주셨듯이 우리도 인간적인 갈등을 뛰어넘어서 관계를 회복하도록 요청하십니다. 이 과정이 참 쉽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고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서 아들을 주셨다는 그 은혜를 기억하게 한다는 것이죠. 혹 이 시간 말씀을 듣는 중에 해결되지 않은 갈등의 관계가 떠오르십니까? 내가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 수 있도록 기도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통해 받은 은혜를 생각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기와 사랑으로 그 관계 속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때로는 바울처럼 깨어진 관계를 화해로 이끄는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방관자(傍觀者)로 살게 하지 않고 화평의 사역(使役)에 동참(同參)하도록 이쁩니다. 이것은 우리가 받은 복음의 은혜를 삶으로 실천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용서함을 받았고 사랑받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우리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복음의 화해를 이루는 도구가 되어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복음이 이끄는 화해와 회복의 두 번째 원리는 복음은 용서와 화해를 요청합니다. 본문 11절 12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는데요. 함께 읽겠습니다.

II. 원리는 복음은 용서와 화해를 요청합니다.

* 빌레몬서 1:11-12,
11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12 네게 그를 돌려 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아멘, 오네시몬은 과거의 빌레몬에게 무익(無益)한 존재였습니다. 그는 종(從)으로서 주인의 재산(財産)과 신뢰(信賴)를 배신(背信)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빌레몬에게는 큰 실망과 상처를 안겼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가 이제는 나와 내게 유익하다 나와 내게 유익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복음의 능력으로 오네시모가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복음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우리를 새로운 존재로 변화시킵니다.

오네시모는 바울이 전해 준 복음을 통하여 도망친 종에서 이제는 바울의 심복(心腹)으로 바울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소중한 존재로 변화되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함께 예배드리는 우리 역시 복음의 능력 안에서 완전히 새롭게 된 하나님의 자녀인 줄 믿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용서하시고 새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복음을 믿는 자가 마땅히 따라가야 할 길임을 믿습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무조건 받아들이라고 요청하지 않습니다. 본문 14절 말씀을 제가 읽겠습니다.

* 빌레몬서 1:14,
14 다만 내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아멘, 바울은 복음의 진정성이 억지가 아니라, 자발성(自發性)에서 나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강요에 의한 용서는 참된 사랑과 회복을 가져오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행하는 용서와 화해는 그 자체로 복음의 증거(證據)가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억지로 무엇을 하려는 태도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우리의 마음의 진정성 있는 순종을 보시면서 그 순종(順從)을 원하신다는 것이죠. 진정한 복음의 변화는 억지에서 나오지 않고 은혜를 깊이 깨달을 때 자발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용서가 억지가 아닌 자발적인 선택으로 이루어질 때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순간이 됩니다.

사랑하는 영가족 여러분,
우리 중에서 용서가 쉬운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용서(容恕)는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은 우리의 마음속 깊은 상처를 다시 떠올리게 하고, 인간적인 자존심을 내려놓게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복음은 우리를 용서의 자리로 이끕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가 받은 그 은혜를 기억하므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를 원합니다.

※코리텐 붐의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코리텐 붐은 네덜란드의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녀와 가족은 나치 점령 시기에 유대인을 숨겨주었다는 일로 인하여서 발각되어져서 강제 수용소(收容所)에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비인간적인 고통(苦痛)을 겪었고 사랑하는 언니 배치를 잃는 아픔까지 겪게 되었습니다. 전쟁(戰爭)이 끝난 후에도 그녀의 마음에는 깊은 상처와 아픔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코리가 강연(講演)을 하던 중에 자신을 고문했던 나치의 경비원과 재회(再會)하게 됩니다. 그 경비원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서 코리에게 용서를 구했습니다. 하지만 코리의 마음에는 그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를 용서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제가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을 고백하오니 주님께서 저를 통해서 용서하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간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손을 내밀어 그를 용서했습니다. 그 순간 코리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자신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깨달았습니다. 용서는 우리의 감정이나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용서하셨다면. 내가 그를 용서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 -
- 다시요. 그리스도께서 나를 용서하셨다면 내가 그를 용서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의 용서를 기억하며 용서가 필요한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손을 내밀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시 지금 여러분에게 화해를 요청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통로가 되며 용서와 화해의 시작점을 만들어가는 십자가의 전달자로 쓰임받는 삶이 될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복음이 이끄는 화해와 회복의 세 번째 원리는 복음은 새롭게 변화된 관계를 만듭니다. 본문 15절 16절의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III. 복음은 새롭게 변화된 관계를 만듭니다.

*빌레몬서 1:15-16,
15 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리니.
16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복음은 관계의 본질을 변화시킵니다. 오네시모는 더 이상 도망친 종이 아니라, 사랑받는 형제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종으로서 빌레몬에게 속한 자가 아니라, 이제는 주 안에서 사랑받는 형제요, 바울의 동력자가 되었고 빌레몬에게도 그러한 관계로 받아들여져야만 했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단순히 법적 사회적 틀 안에서 오네시모를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서서, 그를 그리스 안에서 형제로 영접(迎接)할 것을 요청합니다. 이 편지를 받아본 빌레몬의 입장이 어떠했을까요? 이 요청은 당시 사회적인 통념(通念)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 혁명적(革命的)인 제안(提案)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세계에서 주인과 종의 관계는 철저히 상하관계로 고정되어 있었고, 종은 기본적인 인격적 대우조차 받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지금 오네시모를 빌레몬의 종으로 되돌려 보내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완전히 새롭게 된 관계로 받아들이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빌레몬에게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라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서 빌레몬이 교제하듯이 오네시모도 동일한 사랑과 존중으로 대해주라고 고백(告白)하고 있다는 것이죠. 더 나아가 바울은 오네시모의 잘못을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선언합니다. 18절의 말씀을 우리가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빌레몬서 1:18,
18 그가 만일 내게 불의를 하였거나 내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아멘,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중보자의 역할을 떠올리게 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를 우리에게 떠올리게 하는 것이죠. 우리 모두 죄로 인해서 하나님께 큰 빚을 진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빚을 십자가에 대신 갚아 주셨습니다. 바울이 오네시모의 빚을 대신 갚아주겠다고 한 이것은 바로 복음의 본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十字架)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복음은 용서를 요청하고 그 용서를 위해서 희생(犧牲)을 감수(勘收)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희생을 통해서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화해를 이끌어냅니다. 이처럼 복음은 어떤 문화적 사회적 장벽도 뛰어넘어서 모든 관계를 새롭게 하는 줄 믿습니다. 단지 인간적인 화해에서 멈추지 않고 그 관계가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사랑의 공동체(共同體)로 변화되도록 만듭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모든 관계를 새롭게 만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간적인 계산이나 사회적인 지위를 넘어서 서로를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받는 형제요, 사랑받는 자매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여전히 종종 우리를 신분이나 지위 배경으로 나누고 갈등하도록 만듭니다. 하지만 복음은 그러한 구분을 넘어서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는다면 우리의 관계에서도 복음의 변화가 나타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특히 우리가 쉽게 판단하거나 무시했던 사람들에게 복음 안에서 사랑과 존중으로 다가갈 때, 그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움이 드러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복음은 우리가 주도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도록 이끕니다. 상대방이 먼저 변화하기를 기다리기보다 내가 먼저 사랑의 행동을 선택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관점을 하나님의 관점(觀點)으로 상대를 바라봄으로써 더 이상 세상의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형제와 자매로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길 소원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복음이 무너진 관계를 향해 나아가게 하고, 용서와 화해를 요청하며 새롭게 변화된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cs 루이스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용서는 우리가 받은 은혜를 반영하는 가장 강력한 행위다"
-C.S루이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우리는 용서를 선택해야 하고, 하나님의 그 사랑 가운데 그 화해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야 하는 그리스도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말씀 앞에서 여러분은 어떠한 결단을 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가 받은 복음을 단지 마음속으로 간직하고 멈추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 나누며 화해와 회복을 이루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화해(和解)는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복음의 능력이 드러나길 소망합니다. 그러하기 위해서 먼저 깨어진 관계를 직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화해를 향한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상대를 용서하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새롭게 변화된 관계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나타내는 모든 영 가족들 되시길 바랍니다.

복음은 화해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회복의 능력입니다. 모든 영 가족이 복음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삶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복음의 진리를 통해 우리를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깨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능력으로 회복되었음을 믿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며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그 놀라운 은혜를 기억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삶이 복음의 증거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화해의 중재자가 되어 가정과 교회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평화와 사랑을 나타내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복음이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통해 드러나고, 우리의 삶이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도구가 되게 하옵소서. 특별히 사랑의 교회 모든 영가족들이 2025년 한 해를 살아가는 동안 박수 쳐주는 인생으로 세워져서 복음의 힘찬 깃발을 들고 세계 교회를 견인(牽引)하며 남북 통일의 비전을 품고 세계 선교의 마무리를 이끌어낼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마침내 ‘2033-50의 비전’을 이루어 가는 이래 우리 모든 연가족들이 아름답게 쓰임받는 주님의 온전한 제자들로 세워지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신실하게 인도하실 주님을 기대하오며 살아 계신 우리 고주 예수 그리스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요약
복음의 은혜로 다시 일으켜 세워져서 갈등을 직면하며, 깨어지고 무너진 관계를 회복할 용기를 주시길 간구해야 한다. 고통의 십자가 위에서 내미셨던 주님의 손에 자발적으로 내손을 포개는 십자가의 전달자 되어 복음이 이끄는 용서의 자리에서 화해의 시작점으로 쓰임받으며, 복음으로 통념을 완전히 뒤엎는 관계의 혁명을 일으키시는 주님을 확신하여 세상의 시선이 아닌 하나님 시각으로 형제와 자매를 새롭게 바라보는 자로 주 안에서 연합하여 하나님 나라를 성취하여 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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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5년 1월 8일)
제목: "사랑은 있는 그대로를 견뎌주는 것"
말씀: 고린도전서 13:1-7
찬양인도: 쉐키나(이동선 부목사님)
사회: 김대규 부목사님

설교자: 방요한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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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린도전서 13:1-7,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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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앙망하며 은혜를 사모하는 수요 저녁 기도에 참여하시는 모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수요저녁기도회를 통해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시간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3장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3장 1절에서 7절의 말씀을 저와 함께 교독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고린도교회 가운데에 다양한 성령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는 그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분쟁(分爭)하고 분열(分裂)했죠.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신 것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고 공동체를 더 사랑하도록 허락하신 선물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은사를 그 능력을 추구하다가 도리어 가장 중요한 사랑을 놓쳐버린 것이죠.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마지막 절에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권면합니다.

*고린도전서 12:31,
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여기에서 바울이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한 것은 은사(恩賜)의 크고 작음이 있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은사를 넘어 교회가 궁극적으로 가야 할 길을 사모(思慕)하라라는 의미죠. 여러분 그 길이 어떤 길이겠습니까? 바로 사랑의 길입니다. 여러분 2025년도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앙망(仰望)하는 우리 사랑의 교회 가운데 경탄(驚歎)할 만한 새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그 길이 사명(使命)의 길, 순명(順命)의 길, 그리고 사랑의 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럼 함께 본문 말씀을 보겠습니다. 여러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장으로 너무 유명한 말씀이죠. 바울은 15가지의 동사로 사랑을 정의하는데요.

오늘은 그중에서 첫 번째 나오는 이 개념을 중심으로 함께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함께 1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 고린도전서 13:1,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여러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은사 중 하나가 바로 방언(方言)의 은사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이 지금 고린도 성도들을 향해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그 방언의 은사가 있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그 은사는 의미 없는 소음에 불과한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거죠.

여러분, 사실 이 말에는 그 문자 그대로의 이면에 더 충격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1세기 헬라 문화에서는 우상숭배(偶像崇拜)가 성행했죠. 보통 우상숭배할 때 어떤 의식이나 제사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당시 그리스도 문헌들을 찾아보면 구리와 꽹과리는 우상숭배의 의식이나 그 제사 때 사용했던 도구라고 합니다. 이러한 내용이 플루타르코스의 이시스와 오시리스 그리고 루키아노스가 쓴 신드레 데와 같은 문헌에도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1절을 다시 해석해 보면 바울이 지금 내가 방언을 하면서 천사의 말을 하는 것 같이 아주 신령해 보이는 은사를 가졌어도 사랑이 없으면 그거 우상숭배 같은 거야! 라고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죠.

여러분,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요약하면 두 가지로 요약된다고 하셨죠. 첫째는 무엇입니까? ⓵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⓶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사랑의 본질이시고 그분의 말씀인 성경의 핵심이 사랑이라면 그것을 믿는 성도에게는 무엇이 있어야겠습니까? 바로 사랑이 있어야겠죠. 그런데 그런 성도에게 사랑이 없다. 그것은 일부가 없는 것이 아니라 전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 없는 은사는 우상숭배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바울이 강하게 꼬집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 2절 말씀을 또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

* 고린도전서 13:2,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여러분, 고린도교회가 방언의 은사와 함께 자랑했던 은사가 또 있는데요. 그것은 예언의 은사 그리고 지식의 은사였습니다. 예언의 은사, 지식의 은사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여러분, 본문에서 말하는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현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설교와 같다고 말할 수 있는데요. 이 설교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하고 그 신령한 지식을 대현하는 것 이게 얼마나 값진 은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지금 아무리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나눌 지식이 있고, 그 지식을 뒷받침하는 믿음이 있는 것 같아 보여도 사랑이 없다면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3절의 말씀 우리 또 한번 같이 읽어볼까요?
* 고린도전서 13:3,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러분은 이 3절의 말씀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여러분 인간은 자기 의를 위해서 사랑 없이도 구제(救濟)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자기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자기 몸까지도 얼마든지 내어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이 본문을 보면서 예전에 한 목사님께서 해 주셨던 얘기가 생각났습니다. 이분은 다음 세대를 대상으로 목회(牧會)를 하셨던 분인데요. 목사님이 쉬는 날도 없이 사역을 하셨어요. 그리고 자기가 받는 사례비 이상의 이상의 물질로 그 아이들을 위해서 사용했습니다. 쉬는 날도 없이 이렇게 무리해서 사역을 하시다 보니 병이 나셨어요. 그래서 사역을 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 사역이 쉬면서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드셨다고 하더라고요.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헌신한 것이 정말 순수한 사랑이었을까? 만약 이 내 헌신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면 이렇게 헌신해도 아무도 나를 좋아해 주지 않았다면, 아무도 나를 따르지 않고, 아무도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면 나는 조건 없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헌신을 할 수 있었을까? 정말 예레미야가 그랬던 것처럼 그 사람들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계속해서 눈물로 씨를 뿌릴 수 있었을까? 그러면서 어쩌면 내가 지금까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헌신하고 내 몸을 이렇게 이렇게까지 불사르게 내어준 것은 순수한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이 아니라 내 헌신의 대가로 사람들의 인정과 존경을 취하기 위한 조건적인 헌신이었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생각하시면서 회개(悔改)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과 사람을 진실하게 사랑하는 목회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인간은 자기 의를 위해 개인의 욕망을 위해 자기 것을 내어주고 심지어 자기 몸까지도 내던질 수 있는 그런 존재입니다. 여러분,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사랑이라고 말하면서 구제도 합니다. 때때로 자신을 내어주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참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의 은사(恩賜)가 우리의 헌신(獻身)이 정말 의미 있는 은사와 헌신이 되려면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할까요? 맞습니다. 진실한 사랑 그 진실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그 진실한 사랑이 그 진실한 사랑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4절에 앞부분만 우리 한목소리로 힘차게 읽겠습니다.

* 고린도전서 13:4a,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첫 번째로 정의한 사랑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래 참다라고 번역한 이 단어는 마크로 디메오라는 단어인데요. 이 단어의 의미와 용래가 궁금해서 제가 헬라어 사전 세계와 그리고 가지고 있는 자료들을 좀 찾아봤습니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10번 그리고 70인경에서 2번, 외경에서 6번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 단어의 용례를 좀 찾아보니까 이 ‘마크로 디메오’라는 단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그리고 요세푸스의 유대 전쟁사 필로가 기록한 모세의 생애와 같이 꽤 유명한 작품에도 자주 등장하는 단어더라고요. 그래서 찾아본 용례를 종합해 보면 이 단어는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보는 것처럼 ⓵오래 참고 기다리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그리고 두 번째는요. ⓶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견뎌낸다.라고 하는 의미가 있더라고요. 조금만 이 부분을 자세히 설명하자면 내게 어떤 그것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어요. 그런데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그것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내며 인내하고 기다린다라고 하는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간단하게 정의하면 마크로 디메오의 뜻은 있는 그대로를 견뎌주는 것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이죠.

여러분, 이 정의를 따른다면 사랑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나 내 이성으로 동의가 되는 부분 혹은 내가 선호하는 부분만을 품으며 인내한다라는 것이 아니겠죠. 때로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고 또 어떤 부분은 내가 선호하지 않는 모습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면서 견디고 기다려주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교회 영가족 여러분, 그렇다면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람들을 정말 있는 그대로 견뎌주고 계십니까?

내가 동의 되는 부분만이 아니라, 내가 선호하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정말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이기 때문에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견뎌주고 계십니까? 우리는 어떻게든 내가 원하는 모양으로 상대를 바꿔서 품고 싶어 하죠. 교회 안의 지체, 직장의 동료, 친구, 배우자, 심지어 자식에게도 그렇지 않습니까? 있는 그대로 품고 견뎌주기보다 칼을 대서라도 자꾸만 내가 원하는 모양으로 깎아버리고 바꿔서 내 곁에 있게 하고 싶은 것이죠. 그런데 그게 안 되면 어떻게 합니까? 단절하거나 멀어집니다.

여러분, 여기서 있는 그대로를 견뎌준다. 라고 할 때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견뎌준다라는 것은 불리한 것을 알면서도 불리한 것을 보면서도 그것을 묵인하고 덮어준다라는 뜻이 아니죠. 그것은 잘못 적용하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맥락(脈絡)은 이 본문의 맥락은 공동체의 지체됨을 지키기 위해서 사랑이 필요한데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이냐면 있는 그대로를 견뎌주는 사랑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공동체를 깨뜨리는 불의와 악의에 대해서 그것을 그렇게 하도록 돕거나 방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여기서 있는 그대로를 견뎌준다는 것은 공동체의 하나 됨을 위해 어떤 이의 특징과 특성, 그리고 그 고유의 것을 내 불편함 때문에 혹은 내가 선호하지 않기 때문에 바꾸거나 깨뜨리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견뎌주는 것이 바울이 정의한 사랑의 첫 번째 정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를 이렇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청년을 지도하면서 특히나 있는 그대로를 견뎌주지 못했던 것 같아요. 저는 제가 원하는 청년들의 모양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대로 커주면 너무 좋은 거예요. 근데 그 고요한 모양을 무시하면서 내가 원하는 모양으로 깎아내고 다뤄내면서 그게 안 되면 막 화가 나서 바꾸려고 하고 저는 그랬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동역자, 동료 그리고 배우자 또한 자녀를 있는 그대로 견뎌주고 계십니까? 여러분, 우리는 왜 이렇게 사람을 있는 그대로 견뎌주지 못하는 걸까요? 쉽게 말하면 불편한 게 싫은 거죠. 세상이 너무 편리를 추구하기 때문일까요? 사람들은 조금만 불편해도 못 견디는 거예요. 그래서 기어코 내가 편한 방식으로 내가 편한 상황으로 바꿔내야만 하는 것이죠.

여러분, 사회가 점점 발전할수록 우리의 자기 중심성은 굉장히 강해지는 것 같아요. 풍요하게 되면 풍요하게 될수록 이상하게 이기심은 더 단단해지는 것 같아요. 그럴수록 어떻습니까? 그럴수록 우리 안에 사랑이 얄팍해지는 것이죠. 여러분,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향해서 왜곡된 사랑과 비틀린 사랑을 가르쳐준다는 사실 아십니까? 여러분, 수많은 노래와 영화와 드라마를 보십시오. 여러분, 그곳에 나오는 사랑 다 엉터리입니다. 실제랑은 너무 다른 거예요. 여러분, 수많은 매체와 미디어가 말하는 사랑은 다 어떻습니까? 다 핑크빛입니다. 막 하얀 구름이 핑크빛 솜사탕으로 변하는 감정이 사랑인 것처럼 세상은 가르칩니다. 그렇지만 아니죠 여러분 사랑은 핑크빛이 아닙니다. 핏빛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희생하고, 피 흘리고 아픈 것이죠.

여러분, 오늘 본문이 말하는 사랑을 한번 보십시오. 본문에서 쭉 보시면 사랑은 무엇이라고 시작합니까? 오래 참고로 시작해요. 그리고 뭐로 끝날까요? 견디느니라로 끝납니다. 사랑은 감정이라는 게 아니에요.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사랑은 이 세상이 말하는 핑크빛 감정이 아니라 사랑은 피 흘림의 훈련을 통해 만들어지는 굳센 의지인 것입니다. 느끼는 것이 아니라, 훈련해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세상이 말하는 사랑에 속습니다. 그래서 그게 사랑인 줄 알고 덤볐다가 실패하고 너무 많이 아파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사랑을 너무너무 모르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을 좀 배우라고 그 사랑을 좀 훈련하라고 때때로 우리에게 인생 채찍과 사람 막대기를 허락하시죠. 그런데 그렇게 상황과 사람을 통해서 우리를 사랑의 사람으로 연단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인데 우리는 그것에 직면하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그렇게 그런 상황과 그런 사람을 직면하게 되면 기도합니다. 주여, 저 인간만 좀 사라지게 하여 주옵소서 사랑이 훈련될 수 없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는 이렇게 사람 하나 바르게 사랑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오늘 사랑에 대한 개념 중에서 여러분 15개 개념 중에 딱 하나 봤습니다. 근데 이 하나도 잘 안 되는 게 저와 여러분의 연약(軟弱)함인 것이죠. 여러분, 이 사랑에 자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 사랑을 온전하게 완전하게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는 것이죠. 여러분, 그런데도요 하나님은 우리가 이 사랑을 보여주길 원하세요. 우리가 이런 사랑을 구현해냄으로써 하나님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가 하나님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하신가를 드러내고 보여주기를 원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이렇게 있는 그대로를 견뎌주는 사랑에 우리는 항상 실패합니다. 이러한 절망 앞에 소망이 되는 기쁜 소식이 있다면 여러분, 그 소식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런 연약(軟弱)함을 다 아시고, 우리가 있는 그대로를 견뎌주는 사랑을 실천하고 보여주기 전에 그 사랑을 먼저 경험(經驗)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요 저와 여러분이 좀 괜찮아서가 아니라요. 좀 괜찮았을 때가 아니라요. 여전히 죄인인 상태에 있었을 때, 그 죄인은 그 상태를 그대로 견뎌주시고, 이 사랑을 보여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무수히 많은 죄(罪)로 얼룩진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께서는 먼저 있는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이에 대해 로마서 5장 8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로마서 5장 8절,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아멘. 우리가 의인이었을 때인가요? 우리가 조금 괜찮은 짓을 했을 때인가요? 아니요.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여러분 혹시 이런 얘기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왕이 범죄자(犯罪者)를 사랑해서 그 범죄자 대신 죽었다라는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여러분, 이건 터무니없는 이야기라서요. 동화에도 나오지 않아요. 그런데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실존(實存) 앞에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創造主) 하나님께서 죄인을 위해 그 죄인에 대한 사랑을 확증(確證)하시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있는 그대로를 견뎌주신 놀라운 사랑인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경험한 이 말도 안 되는 사랑, 이 설명할 수 없는 이 사랑을 이 있는 그대로를 견뎌주신 이 사랑을 디모데전서 1장 16절을 통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디모데전서 1장 16절,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사랑하는 우리 영 가족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있는 그대로를 견뎌주는 이 완벽한 사랑을 값없이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내 배우자, 내 자녀, 내 동료, 내 동역자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있는 그대로 견뎌주는 사랑에 실패하지만 우리 구주께서는 실패하지 않는 사랑으로 저와 여러분을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여전히 있는 그대로 견뎌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바울을 부르신 것처럼 저와 여러분을 향해 그 사랑을 베풀어야 할 삶의 현장으로 초청하고 계신 것이죠.

사랑하는 영 가족 여러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각 가정과 직장과 삶의 현장, 그리고 주님의 몸된 교회로 부르셨습니다. 내가 받은 그 사랑 있는 그대로를 견뎌주는 그 사랑을 실천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가 어떠한가를 깊이 깨닫고 감격할 수 있도록 저와 여러분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에 감격만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삶의 자리에서 본이 되어 그 사랑을 보여주도록 저와 여러분을 보내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이 시간 있는 그대로를 견뎌주는 그 사랑, 우리가 받은 그 사랑을 우리 교회와 우리 일터와 그리고 우리 가정 가운데 흘려보내기로 작정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여러분, 올해 우리는 우리 모든 영가족들은 남은 자가 되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에 순명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에 순명할 때 담임 목사님의 말씀처럼 경탄할 만한 새 길이 반드시 열릴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들고 그 길을 걸어가야 할까요? 저는 그것이 사랑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이야기 하나를 끝으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엔 이라는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이 소녀가 5살이 되던 해 바이러스가 걸리면서 눈을 실명하게 됩니다. 거의 보이지 않게 된 것이죠.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엄마는 갑자기 돌아가셨고, 아빠는 실의에 빠져서 알코올 중독에 빠집니다. 엔 동생과 함께 보호소로 보내졌는데 곧 동생마저 죽어버립니다. 어떻게 그걸 이 아이가 감당할 수가 있었겠어요? 그래서 갈수록 이상해져 갑니다. 결국엔 정신병원(精神病院)에 수용(受用)되죠. 아무도 이 아이를 책임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로라’라는 간호사가 이 아이를 찾아옵니다. 로라는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 받은 그 사랑으로 엔을 있는 그대로 받아줍니다. 엔은 2년 뒤에 극적으로 정상인 판정을 받고 시각(始覺)장애(障礙) 학교에 입학을 합니다. 최우수 학생으로 졸업을 하면서 한 신문사의 도움으로 개안수술(開眼手術)을 하게 돼요. 그리고 나서 졸업하고 그다음 해에 어느 날 신문을 보는데 신문에 기사가 난 거예요.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짐승 같은 사나운 아이를 돌봐줄 사람을 구한다. 라는 기사를 본 거죠. 근데 이때 엔은 이 기사를 보면서 자기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돌려주기로 결심합니다. 엔이 그 아이를 만나서 처음 했던 일은 무엇이었냐면 아이가 짐승처럼 물면 물려주는 거였어요. 피가 철철 흐르는데도 그냥 그렇게 물려주었습니다. 물건을 던지면 맞았고요. 그 아이가 발작을 하면 꼭 안아주었습니다. 여러분, 그랬던 이 아이가 먼 훗날 글을 하나 쓰는데요. ‘3일만 볼 수 있다면’ 이라는 짧은 책을 냅니다. 그리고 그 책의 내용에는 이런 내용이 써 있었습니다. ‘내가 3일만 볼 수 있다면 제일 먼저 내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준 앤 선생님을 찾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몇 시간이고 바라보면서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제 마음에 깊숙이 새길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선생님이 무려 45년간을 이 아이를 위해서 헌신하고 돌봤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주인공이 누군지 아십니까? 이 엔은 바로 엔 셜리번 그리고 이 글을 쓴 주인공이 바로 헬렌 켈러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견뎌주는 사랑이 또 다른 사랑을 낳았고, 그 사랑이 또 다른 사랑을 낳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의 가정이, 여러분의 일터가,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 된 우리 사랑의 교회, 모든 다락방과 훈련의 모든 현장이, ‘있는 그대로를 견뎌주는 사랑’ 때문에 그 사랑이 사랑을 낳고 또 그 사랑이 또 다른 사랑을 낳는 온전한 사랑의 산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설교 요약 (고린도전서 13:1-7)
오늘 설교는 고린도전서 13장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다룹니다. 고린도교회는 성령의 다양한 은사를 받았지만, 그 은사를 자랑하며 분쟁과 분열을 일으켰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은사들이 사랑 없이 사용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강조합니다.

-사랑의 중요성
바울은 사랑이 없는 은사는 소음에 불과하며, 이는 우상숭배와 같다고 지적합니다. 예수님께서 요약하신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성도들의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다면 은사와 헌신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사랑의 정의
본문은 사랑을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특히 "오래 참음"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상대방을 바꾸려는 시도 대신 그들의 본래 모습을 견뎌주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의 실천
우리의 사랑은 종종 실패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도 있는 그대로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은 그 완전한 사랑의 증거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이 사랑을 본으로 삼아 다른 사람들에게도 오래 참는 사랑을 실천하라고 권면합니다.

-결론
성도들은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받은 사랑을 실천하고, 그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함을 드러내야 합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와 훈련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며, 우리가 받은 그 사랑을 가정과 교회, 일터, 사회에서 실천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요약1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을 통해 바울은 사랑의 중요성과 본질을 설명하며, 성도들이 그 사랑을 실천하도록 권면합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닌 의지로,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실천해야 합니다.
♣요약2
우리 사랑의교회가 2025년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열어주실 경탄할 만한 새 길을 걸어갈 때, 모든 영 가족이 서로를 ‘있는 그대로 견뎌주는 사랑’으로 그 길을 걸어가며, 주신 사명에 순명할 때, 더 큰 기적의 새역사를 집필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우리 사랑의교회 영 가족의 각 가정마다 있는 그대로를 견뎌주는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여, 서로에게 용납과 용서와 인내를 통해, 믿음과 사랑이 계승되는 수선대후의 은혜가 되어야 한다. 또한 이 나라, 이 민족이 자기 유익을 위해 분쟁하고 다투는 나라가 아니라, 전 공동체적인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며 서로를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통치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나라를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매번 있는 그대로를 견뎌주는 사랑에 실패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실패하지 않는 완전한 사랑으로 우리를 있는 그대로 견뎌주심을 확신하며, 주님의 그 완전한 사랑이 있기에 우리가 지금 주님 앞에 설 수 있음을 깨닫고, 주님의 그 완전한 사랑이 우리의 모든 관절과 뼈 마디마디를 관통하게 하여 주시길 사모하며, 나의 가정, 나의 일터 그리고 우리 사랑의 교회 모든 사역의 현장에서도 그 사랑이 거룩한 선순환을 이루어 가기를 간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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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12월 18일)
제목: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는 삶"
말씀: 예레미야 12:1-6
찬양인도: 쉐키나(이동선 부목사님)
사회, 기도인도: 강건우 부목사님


설교자: 김주혁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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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 12:1-6,
1 여호와여 내가 주와 쟁변할 때에는 주는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패역한 자가 다 안락함은 무슨 연고니이까.
2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 마음은 머니이다.
4 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이 땅 거민이 악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결국을 보지 못하리라 함이니이다.
5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하겠느냐.
6 네 형제와 아비의 집이라도 너를 속이며 네 뒤에서 크게 외치나니 그들이 네게 좋은 말을 할찌라도 너는 믿지 말찌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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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회 자리를 사모하며 수요 저녁 기도회에 참여하신 모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수요 저녁 기도회를 통해 말씀과 기도로 우리를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2장 1절에서 6절까지 말씀입니다. 주신 말씀 저와 함께 교독하시겠습니다. 제가 먼저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혹시 달리기 경주를 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학창 시절 운동회를 하면 마지막 경기로 계주를 했습니다. 달리기 대표 선수들은 있는 힘껏 승리를 향해 달렸고 다른 학생들은 선수들을 위해서 응원의 함성을 질렀습니다. 혹여나 우리 팀이 먼저 결승전에 도착하면 너무나 짜릿한 승리의 기쁨을 누리곤 했었습니다. 아마 여기 계신 분들 중에는 왕년에 달리기 선수를 하셨던 분들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번 생각을 해볼까요? 달리기 경주를 하는데 사람과 경주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말과 경주를 한다면, 어떨까요? 말은 인간과 비교도 할 수 없이 달리기 속도가 굉장히 빠릅니다. 이런 황당한 경주에 참여하게 된다면 처음부터 불가능하다고 생각을 할 것이고, 또 경주에 대한 두려움이 임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예레미야 12장은 이러한 상황에 떨어진 예레미야의 심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아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은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예레미야를 거부했고, 심지어 가장 가까운 사람들조차도 예레미야를 배신했습니다. 예레미야의 고향은 아나돗인데요. 아나돗은 벤야민 지파 땅입니다. 베냐민 지파 땅에 제사장 가문에서 예레미야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아나도 사람들이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예레미야 11장 21절에,

*예레미야 11:21,
21 여호와께서 아나돗 사람들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네 생명을 취하려고 찾아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 하도다.
-예레미야 당신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마세요. 당신이 예언한다면, 우리 손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했지만, 그가 마주한 상황은 어려운 고난과 백성들의 거부였습니다. 이에 예레미야는 오늘 본문 1절에서, 이렇게 하나님께 질문하는 것이죠.

*예레미야 12:1,
1 여호와여 내가 주와 쟁변할 때에는 주는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패역한 자가 다 안락함은 무슨 연고니이까.
-하나님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왜 평안합니까? 이 자리에 모인 우리 역시도 예레미야와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믿음의 경주를 달리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한 번 사는 인생, 주님이 주신 그 사명을 멋지게 감당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우리 삶에 일어나는 일들에 관해서 예레미야의 질문과 같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 드는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는 삶을 어떻게 살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믿음의 경주에서의 승리는 무엇일까요? 첫 번째로,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는 삶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끝까지 순명하는 것입니다.

I.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끝까지 순명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당시에 다른 거짓 선지자들은 백성들을 향해 축복의 메세지를 전했습니다. 아무리 죄를 짓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선택된 민족은 평강하다 평강하다 외쳤습니다. 또 여호와의 성전이 우리에게 있기에 결코 유다는 멸망하지 않는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자기 민족에게 심판을 전했고 또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주신 사명은 사람들에게 환영받을 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조롱했고 반대했으며 그의 메세지를 무시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이렇게 질문한 거예요. 하나님, 악한 자가 왜 형통한 것입니까? 반역한 자가 왜 평안한 것입니까? 그런데 신기하게도 하나님께서 주신 답변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5절에 보니까요?

*예레미야 12:5,
5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하겠느냐.
-예레미야는 현 상황을 보며 하나님께 질문했지만, 하나님은 무엇을 보며 말씀하십니까? 미래를 보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앞으로 일어날 역사를 바라보며 예레미야에게 일러주셨습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끝이 아니라, 그 정도의 일에서 끝이 아니라 앞으로 더 큰 일이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 그 자리에서 훈련받고 있는 것은 아나도 고향 사람들 정도에게만 역사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금과 차원이 다른 더 높고 더 넓은 사명을 너에게 주기 위함이다. 라고 일러주신 것이죠. 그렇다면 믿음의 경주에서의 승리는 단순히 현재의 경쟁에서 앞서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악한 자 반역한 자들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을 믿음의 승리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세상과 다를 바 없는 반쪽짜리 승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것처럼, 믿음의 경주에서의 승리는 현재를 바라볼 뿐 아니라 미래를 바라보고 끝까지 주신 사명을 순명(順命)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3장 14절에 이렇게 고백하죠.

*빌립보서 3:14,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우리의 믿음의 경주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떤 유혹이 온다 할지라도 어떤 풍파가 불어온다 할지라도, 그것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사명을 지켜 나가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맞춰지는 그날까지 그 푯대를 향하여 우리는 끊임없이 달려가야 합니다. 믿음의 경주의 시작과 과정도 참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끝까지 완주(完走)하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6절과 7절에 보면,

*디모데후서 4:6-7.
6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것이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한 삶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명은 무엇일까요? 아마 각자마다 다 다를 것입니다. 개인의 사명, 부모로서의 사명, 남편으로서의 사명, 또 아내로서의 사명 직장인으로서 교회와 사회 속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믿음의 사명이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내가 원하지 않았지만 지금 나를 이 자리로 몰아가시는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의 경주에서 우리가 승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끝까지 버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완주입니다. 우리의 승리 조건 또한 완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뛰어난 자들이 아니잖아요? 능력이 출중(出衆)한 자들도 아니고요. 그저 연약(軟弱)하고 부족(不足)한 자들입니다. 작디작은 내 자신을 인정하고 앞으로 다가올 믿음의 그 경주(競走)에서 어떤 상황이 펼쳐진다 할지라도 사명을 끝까지 완주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승리의 면류관(冕旒冠)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완주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붙들 때 믿음의 경주를 완주할 수 있습니다.

II.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붙들 때 믿음의 경주를 완주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경주는 내가 달리는 것 같지만 내가 달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달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대로 임지하시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임지하심을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그런 부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주님의 임재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과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절대 권위가 있습니다. 이 땅의 모든 것은 일시적이지만 푸른 마르고 꽃은 시드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믿으시죠? 아멘이 일부분만 나오셔서 꽃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아멘!!~~ 우리는 성경의 절대 권위를 끝까지 유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그분의 말씀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어려운 순간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예레미야 15장 16절,

*예레미야 15:16,
16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예레미야는 그렇게 힘든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했습니까? 먹었습니다. 그 먹은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된 거예요.

사랑하는 영 가족 여러분,
혹시 오늘 수요 저녁 기도회에 오시면서 저녁 식사를 하셨습니까? 식사를 할 때 음식이 가장 맛있는 때가 있는데, 혹시 아십니까? 잘 모르시면 제가 알려드릴게요. 음식을 먹을 때 가장 맛있는 때는 배고플 때입니다. 배고프면 어떤 음식이든지 어떤 조미료를 낸 것보다 더 좋은 맛을 주게 되어 있는 것이죠. 예레미야가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배가 고프던지, 배가 부르던지, 내 상황이 고난해 있던지, 부유하게 있던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먹을 때마다 너무나도 행복합니다. 즐겁습니다. 충만합니다. 기쁩니다.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달려갈 때 마지막까지 달려갈 수 있게 만드는 힘이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어디로 달려가야 할지를 알려주는 등불입니다. 시편 119편 105절,

*시편 119:105,
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이 말씀이 기록될 때는 전기가 있던 것이 아니죠. 어떤 불빛이 밝게 그 주위를 비췄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녁만 되면 달빛 외에는 의지할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캄캄한 방과 같은, 칠흑 같은 우리 인생에 내 발 바로 앞을 비추는 그 등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빛이 비추는 곳을 보면서 이곳이 어디인지를 분별하고 확인하고 또 방향을 잡고 우리는 달려가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 가운데 있다면 우리는 어떤 풍파가 온다 할지라도, 흔들리지 않고 담대(膽大)하게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완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함께 뛰는 방법은 기도입니다.

예레미야는 지금 상황이 자신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되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내용을 누구에게 가져오나요? 하나님께 가지고 나옵니다. 하나님 왜 악한 자가 형통하고 반역한 자가 평안한 것입니까?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또 예레미야 15장 15절에 보면,

*예레미야 15:15,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오니 원컨대 주는 나를 기억하시며 권고하사 나를 박해하는 자에게 보복하시고 주의 오래 참으심을 인하여 나로 멸망치 말게 하옵시며 주를 위하여 내가 치욕 당하는 줄을 아시옵소서.
-또 예레미야는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 고발하며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예레미야18장에 20절 보면,

*예레미야 18장:19-20,
19 여호와여 나를 돌아 보사 나로 더불어 다투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옵소서.
20 어찌 악으로 선을 갚으리이까마는 그들이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구덩이를 팠나이다 내가 주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이키려 하고 주의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하여 선한 말씀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또한 암울해 보이는 바벨론 포로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과 약속을 믿으면서 반드시 구원해 낼 것임을 확신하며 기도를 올려드렸습니다. 예레미야 32장 17절입니다.

*예레미야 32:17,
17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권능과 펴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시나이다.
-주에게는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시나이다. 아멘, 이렇게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했고요. 하나님께 기도했구요. 또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구했고, 믿음의 경주를 하나님과 함께 달려 끝까지 완주했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있었고요. 또 말씀과 함께 하셨습니다.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서 광야에서의 시험을 이겨 나가셨죠. 무엇보다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이 이미 주어진 말씀을 완전하게 이루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셨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도 금식하며 기도하셨고 열두 제자를 선택하는 것과 같은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도 철야 기도를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앞둔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명하시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며 힘을 얻으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셨고 믿음의 경주를 자신의 모든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믿음의 경주에서 우리가 지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성경책에 써 있기 때문에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나온 것처럼 또 온라인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고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기까지만 주신 것이 아니라, 보다 효과적이고 더 확실하게 자신의 임재하심을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을 허락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거룩한 공동체는 믿음의 경주자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예레미야의 가장 큰 어려움 중에 하나가 무엇이었냐면 혼자라는 외로움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았지만 백성들은 그의 메시지를 거부했죠. 가까운 고향 가족들마저도 예레미야를 대적했습니다. 이러한 고립은 예레미야를 더 힘들게 만들었고요. 하나님께 질 의문을 던지게 했습니다. 전도사 4장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 있죠. 전도서 4장 9절-12절에,

*전도서 4:9-12,
9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10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11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아멘, 믿음의 경주는 혼자가 아니라, 거룩한 공동체와 함께 할 때 더욱더 강력해집니다. 우리는 이것을 매주 확인하고 있죠? 혼자 예배드리고 혼자 기도하는 것, 그것도 참 소중하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안아주심의 본당에 나와서 이렇게 함께 예배하고 함께 기도하면 어떻습니까? 우리에게 다락방에 나와서 서로 기도 제목을 나누고 말씀에 비추어 자기 삶의 방향을 다시금 붙잡고 또 다락방 영가족들과 한마음이 되어서 간절히 기도하면 믿음의 동지가 생기는 거예요. 나 혼자만 세상에서 외로이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 같은데, 그 자리에 나오면 함께 믿음의 경주를 달리고 있는 동역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혼자 달린다면 금세 지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교회라는 거룩한 공동체를 세워주셨고,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이고요. 지체의 각 부분입니다. 한번 이렇게 생각을 해볼까요?

지금 맛있는 달달한 디저트를 먹는다고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달콤한 디저트를 먹으면 기분이 어떨까요? 굉장히 업되겠죠. 그러면 기분이 좋으면 손도 기분이 좋고 다리도 기분이 좋을 거예요. 그런데 어떤 분은 손은 기분이 좋은데 다리가 기분이 안 좋으신 분이 계실까요? 예 그런 분은 조금 이상한 육체를 신체를 가지고 계신 분일 겁니다. 또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겠죠. 이 손가락이 있는데, 이 손가락 끝에 상처가 났어요. 상처를 건들 때마다 너무나도 아픈 거예요. 온몸이 아픕니다. 이 손가락만 아픈 것이 아니라, 다리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온몸이 이곳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성도라는 지체들이 모인 교회라는 몸입니다.

이곳 거룩한 공동체로 나오면 믿음의 경주에서 지치고 의문이 들었던 것들이 다른 지체들과 함께 말씀을 부여잡고 기도하고, 힘을 얻고 다시 뛰어 달릴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또 이뿐만이 아니죠. 우리는 지난 인생 10월에 주님과 함께 달려가며 정말 커다란 힘을 얻었습니다. 하반기 청계산 산삼 구국 기도회부터 시작해서 10월에 금식기도회, 특새, 한교섬, 또 ‘10.27 200만 연합 예배 및 큰 기도회’를 하나님께 올려드렸습니다. 성경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가정과 국가를 사랑하는 한국교회 모두가 모여서 함께 찬양하고 말씀 듣고 기도하니까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믿음의 경주를 포기하려다가도 다시금 힘을 얻어서 달려갈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선한 연대가 우리를 통해 가정과 교회 전 세계로 뻗어나가고 주님의 대사명을 이루기 위한 믿음의 경주가 끝까지 완주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마라톤 선수의 이야기를 하고 말씀을 해주려고 합니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마라톤은 42.195km를 달리는 경기잖아요.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경기이기도 합니다. 당시 올림픽이 열렸던 멕시코 시티는 해발 2천 미터가 넘는 고지대였습니다. 마라톤을 하기에는 굉장히 어려운 여건이었죠.

그래서 당시에 75명이 마라톤을 참가했는데 중도 포기를 18명이나 했다고 합니다. 이때 참가했었던 선수 중에 한 명이 탄자니아의 존 스티븐 와쿠아리라는 선수가 있었는데요. 메달권 진입이 유력했던 선수였습니다. 그런데 아쿠아리 선수가 경기 중에 넘어졌어요. 어깨를 다치고 무릎을 심하게 다쳤습니다. 의료진들은 더 이상 달려서는 안 된다고 진단을 내렸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포기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한 상황이었죠. 그런데 아쿠아리 선수는 무릎에 붕대를 감고 계속 달렸습니다. 더 이상 달릴 수 없는 한계에 이르러서는 다리를 끌다가 또 잠시 뛰다가 또 다리를 끌며 걸어갔습니다. 1등이 결승점을 통과한 지 1시간도 더 지났고, 또 메달 시상식마저도 다 마쳤구요. 관중들도 대부분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저 멀리서 아쿠아리 선수가 경기장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이 모습을 본 소수의 관중들이 기립박수를 치며 함성을 지르며 응원했고, 아쿠아리는 끝까지 42.195km를 완주하였습니다. 이것만 해도 감동적인데 저는 그 뒤에 했던 인터뷰가 더 마음에 와닿더라구요. 기자가 왜 포기하지 않고 계속 달렸느냐 묻자 아쿠아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나라가 저를 7천 마일이나 떨어진 이곳까지 보내준 것은 출발선에 서라는 것이 아니라, 완주를 하고 결승선을 통과하라는 것입니다. 출발선에 서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완주를 하고 결승선을 통과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영가족 여러분,
믿음의 경주를 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예레미야처럼 우리도 때론 고난과 반대에 부딪치고 지치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경주의 승리는 끝까지 사명을 완수하는 것에 있음을 믿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능력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요. 상대방의 실수로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승리하는 것이 속도가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달려주시면 승리가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기도하고, 거룩한 공동체에 나와 함께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놀라운 사명의 성취를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우리 곁에는 우리를 응원하고 함께 기도하는 동역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달려서, 그 결승점에 도착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맞이해 주시면서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불러주실 것입니다. 이 저녁 기도하는 가운데 용기를 내어서 다시금 일어나시구요. 주님과 함께 끝까지 사명을 감당하시는 모든 영 가족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요약
우리가 때로는 불 가운데 휩싸이고 차디찬 폭풍이 휘몰아쳐와도 믿음의 경주자로서 기꺼이 감당할 사명의 마지막 발걸음까지 주 위해 남은 나의 시간들을 조금도 주저함이나 낭비됨이 없어야 한다. 갖은 유혹과 절망에 짓눌려 쇠약해진 기도의 위기를 하나님의 저울 위에 다시 세우사 영원을 약속하신 언약의 말씀과 온갖 수치를 견딘 십자가의 준엄(峻嚴)한 무게를 더하시어 함량(含量) 미달인 이 땅을 새롭게 빚어 주시길 간구하며, 복음만이 세상를 바꾼다는 예수님의 당부를 소망과 기쁨 인내의 도전으로 받아 온 몸으로 반응하는 우리 사랑의 교회의 모든 공동체마다 서로를 붙들어 주는 기도의 저력으로 더욱 맥박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우리를 믿음의 경주로 부르시고 사명을 감당하게 하심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는 부족하여 예레미야처럼 때로는 고난과 거부 앞에서 흔들리지만 우리에게 더 크고 넓은 사명을 주시는 주님의 뜻을 바라보아야 한다.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으켜 주시는 주님의 손길을 의지하여, 믿음의 푯대를 향해 끝까지 달려가, 우리와 함께하기를 원하시는 주님 앞에 우리가 말씀과 기도로 영적 군사로 무장해야 한다. 어둠을 뚫고 나아가는 힘과 담대함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신 공동체를 통해 서로를 붙들고 일으키며 함께 눈물로 기도하고, 함께 승리의 기쁨을 나누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이 땅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과 함께 달려갈 때 우리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노라고 고백하는 그 결승선에서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주님의 칭찬을 받는 자들이 되어야야 한다. 그리하여 사랑의 교회가 전 세계에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이 땅에 복음과 거룩한 사명을 끝까지 이루어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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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12월 12일)
제목: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말씀: 빌립보서 1:27-30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부목사님)
 
설교자: 김영석 부목사님
----
 
*빌립보서 1:27-30,
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28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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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를 쓸 때에 사도바울은 로마의 차가운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언제까지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하는지, 혹시 내일이라도 처형을 당하는 것은 아닌지, 한 치 앞의 미래도 가늠할 수 없는 캄캄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차라리 이 세상을 떠나 영광 중에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편을 더 사모했습니다. 바울은 구원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죽음은 끝이 아니오, 예수님 계신 영원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관문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천국을 향한 분명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언제든지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부터 그가 품게 된 복음의 뜨거운 열정은 여전히 그 가슴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만일 그가 지금 세상을 떠난다면 이 땅에 남아 있는 성도들은 절망에 휩싸일 것이고, 지도자를 잃은 교회는 큰 타격을 입게 될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나 자신에게 있어서는 좋으나, 교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해서 육신으로 있겠노라고 그렇게 결심합니다. 24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1:24,
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교회를 위해 복음전도를 위해 다시금 삶의 의지를 붙잡은 것입니다. 놀랍게도 성령님께서는 바울에게 그가 성도들과 다시 만나 함께 거하게 될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25절에서,
 
*빌립보서 1:25,
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이제 바울은 감옥에서 나와서 교회에 돌아올 것이고. 교회와 온 성도들은 우리가 바울을 위해 드린 기도가 응답된 것을 보면서 크게 기뻐할 것입니다. 26절에서 말씀하듯 복음과 주님을 향한 그들의 자랑이 다시 교회의 품으로 돌아온 바울로 인해서 크게 풍성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언제 또 어떻게 감옥에서 풀려나게 될지 알 수 없었습니다. 또 바울만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빌립보 성도들도 적대적인 환경에서 아주 힘겹게 교회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는 소원이 있었습니다. 내가 곧 감옥에서 나와서 너희를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그때까지 어떤 어려움과 핍박이 있다 하더라도, 너희가 복음의 신앙을 굳세게 지키기를 원한다라는 간절한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27절과 28절에서,
 
*빌립보서 1:27-28,
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28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바울이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당시 교회를 향한 온갖 공격과 또한 거짓이 난무하던 상황 속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오직 피 묻은 복음의 신앙을 굳게 지키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이것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다양한 가치와 신념이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허물고 거짓으로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공격하는 시도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부정하며 성경적 신앙의 근간을 흔들어 놓는 수많은 불건전한 시도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속에서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굳건히 서 있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복음의 신앙 위에 굳건히 서시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우리가 구체적으로 힘써야 할 일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하나됨을 지키며, 협력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27절 후반부에서 말씀합니다. 화면을 보시고 같이 봉독하겠습니다.
 
II. 첫째는, 하나됨을 지키며, 협력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빌립보서 1:27,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결코 혼자만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온 교회가 한 마음, 한 뜻을 품고 협력할 때에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함부로 평가하거나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영광스러운 주님의 교회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강철 대오를 이루어 단단하게 하나되어 영광스러운 교회의 기품을 지켜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은혜의 주류에 굳게 서서 한마음과 한뜻을 품어 교회의 하나됨을 힘써 지키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길 즉 이 민족 더 나아가 전 세계를 복음으로 품는 위대한 사명에 진심과 전심으로 협력하시길 간절한 마음으로 축복합니다.
 
사탄은 교회가 주님을 믿고 한 마음으로 협력할 때에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탄의 관심이 늘 어디에 있냐 하면, 교회의 분열(分裂)에 있습니다. 언제든지 기회를 엿보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회 안에 분열을 조장합니다. 사탄은 헬라어로 디아볼로스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디아는 무엇무엇 사이에라는 뜻의 접두어이고 볼로스는 던진다 라는 뜻의 발로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사이에 던진다. 즉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를 어지럽히고 훼방하고 이간질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에게든지 또 무슨 일이든지 함부로 불평불만을 해서는 안 됩니다. 사탄에게 틈을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고, 자존심이 상하고, 감정이 상하고, 이런저런 일들로 섭섭한 감정을 품게 될 수 있습니다. 그때 주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탄이 그 틈을 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탄의 관계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교회의 연합을 위해서 공동체원 모두가 자기를 부인하는 자리에 서 있어야 합니다. 자기부인이란 무엇입니까? 담임 목사님의 저서 온전론을 보면, 자기 부인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내가 내 인생의 주인 노릇을 하며 관여했던 모든 고리를 끊고 인생의 최종 결정권을 주님께 드린다는 것이다.” -온전론 17p-
-아멘 원어로 볼 때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나와 어떤 대상의 연결고리를 끊는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자기부인은 자기중심성이라는 아주 지독한 우상을 단호하게 끊어내는 것입니다. 모든 자기중심적인 안전, 이익, 행복, 명예 이런 모든 우상을 다 끊어내고 오직 주님이 주신 사명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태도 그것이 자기부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의 기간 동안 계속해서 자기 부인에 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6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0:26,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누가복음 9장 2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가복음 9:23,
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또 요한복음 12장 24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2:24,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다툼과 갈등이 생길 때 엎드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때 기도해야 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과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때 성령님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실까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사탄과의 영적 전쟁을 결판 내신 바로 그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모든 신적 특권을 기꺼이 포기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 승리하셨습니다. 사탄에 대한 예수님의 필승 전략은 자기 부인과 권리포기였습니다. 성경님은 바로 이 자기 부인과 권리 포기가 승리의 길이라고 말씀하시며 너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겸손하라. 온유하라. 오래 참으므로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라.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명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자기 부인의 길입니다.
 
예수님처럼, 자신의 권리와 감정을 내려놓고 우리 공동체에 주신 사명을 최우선으로 생각할 때 우리는 온전히 하나되어 승리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각각 기질이 다르고 직업도 다른 사람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중에는 로마에 협력하던 세리마태도 있었고, 로마에 대항해서 투쟁하던 열혈당원 시몬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한때 더 높은 자리를 두고 다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목도하고,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내리신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기 부인의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섬김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자가 되었고 높아지려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 남을 낮게 여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다툼이 그쳤습니다. 다투던 그들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런 그들을 통해 생명의 복음이 전 세계 더 나아가 모든 민족을 향해 물이 바다 덮음같이 퍼져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됨을 힘써 지키며, 교회가 나아가는 방향에 기쁜 마음으로 협력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를 통해 복음이 힘 있게 선포됩니다. 말로만 전하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행동과 모습이 더 큰 소리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위한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육신이 살아 있어서 스스로를 내세우고 여전히 다투고 분열한다면, 여기서는 결코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모든 다툼과 허영을 버리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낮게 여겨야 합니다. 그래야 복음이 힘 있게 전파될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쉽지 않은 일이죠. 결코 쉽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힘으로 하려고 하니까 그런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그 길을 걸을 수 있는 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 달리신 십자가로 가까이 가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바라보고 그 하나님의 아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 그 십자가에서 흐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그 샘물 같은 보혈에 내 영혼을 적실 때 내 안에 없던 힘이 생겨날 것입니다. 거룩하게 살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희생할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은 나타날 것입니다. 분열이 그치고 하나 되는 역사가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비록 우리는 살아온 배경도 성격도 직업도 다르지만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온전히 하나되어 협력하고 우리가 이 일에 힘쓴다면 우리는 주님의 날카로운 새 타작(打作)기가 되어서 이 세상을 전 세계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하나됨을 힘써 지키며 협력하는 일에 힘을 쏟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힘을 쏟아야 할 일은 복음에 대한 반대에 담대히 맞서는 일입니다.
 
II. 둘째는, 복음에 대한 반대에 담대히 맞서는 일입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에게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하나 될 것을 강조한 동시에 복음에 대한 반대에 대항해서 담대하게 맞설 것을 권면합니다. 2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빌립보서 1:28,
28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복음의 위대한 사명을 위해서 전신전력하는 그 길에 작은 것 하나까지도 문제 삼으며 대적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 자신도 복음을 수호하고 전파한다는 그 이유로, 말로 다 못할 고생을 겪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사는 인생에게 가해지는 위협과 공격의 무게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이 복음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고충을 겪게 될지를 너무나 잘 안 것이죠. 그래서 그렇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절대 그것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아라. 오히려 복음의 야성, 영적 기백을 품고 복음에 대한 반대에 담대히 맞서서 주신 사명과 방향을 붙잡고 정면 돌파하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8장 31절의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사도행전 28:31,
31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아멘 지난주 토비새에서 담임 목사님을 통해 주신 말씀과 같이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가르치는 일에 담대하게 거침없이 정면 돌파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복음 전파의 역사는 박해의 역사입니다. 대한민국 기독교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순교자 기념 박물관을 몇 곳 방문해 보았는데, 가장 먼저 가본 곳이 바로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이었습니다. 이 땅에 복음을 전파한 선교사님들이 그 먼 곳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통하 보이지도 통하지도 않는 조선 땅, 그곳에 와서 모진 박해와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중임을 의지하여 얼마나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했는지, 그 역사의 기록이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복음화는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 수많은 선교사님들의 희생으로 맺어진 열매임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살아간다는 것이 이와 같은 삶입니다. 그 길에 대적이 있고 핍박이 있지만 그로 인한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거침없이 복음을 위한 사명에 끝까지 충성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난에 처한 교회를 격려하면서 하나님이 보상하실 때가 반드시 있다고 격려했습니다. 하나님은 대적들의 행위를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고, 복음 때문에 고난받은 일꾼들에게 넘치는 위로를 베푸실 것이라고 힘주어 선포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을 위해서 기꺼이 고난을 받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복음의 증인으로 살다 보면요. 단대하고 조롱하며 훼방하는 무리들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미워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을 미워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위축되거나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 뒤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담대하고 대범하십시오. 오히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고, 선으로 악을 갚는 그 대범함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위해 박해받는 사람들에게 하늘의 상이 크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에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라고 고린도 후서 4장 17절에서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고린도후서 4:17,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장차 누릴 영광과 상급을 기대하면서 지금의 역경을 오히려 기뻐하며 끝까지 사명을 위해 정면돌파하시기 바랍니다.
 
일본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을 호류지라고 부릅니다. 니시오카 가문은 화재와 멸실의 위험이 있는 호류지를 자그마치 1400년 동안 대대로 지켜왔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크고 오래된 건축물을 짓는 목수를 미야 다이쿠 즉 궁목수라고 부르는데 이 니시오카 가문이 바로 궁목수 가문입니다. 그들은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 시간들을 지탱하는 목조 건축물을 세울 수 있었던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그것은 근본적으로 건물을 짓는 재료 건축 자재가 달랐기 때문이다 라고 설명합니다. 즉 천 년 이상을 지탱할 수 있는 노송을 썼다는 것입니다. 니쇼카 가문은 천 년 이상을 지탱하는 건축물을 지으려면 천 년은 된 노송을 써야 한다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그들은 나무의 생명력을 그 나무가 오랫동안 견뎌낸 연수로 평가했습니다. 천 년을 견딘 나무는 그렇게 천 년 이상을 쓰임 받았습니다. 견딤이 있어야 쓰임이 있다. 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난을 견디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은 영원토록 우리의 구주가 되십니다. 어차피 견뎌야 할 고난이라면 감사함으로 견뎌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견디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참으신 것은 앞에 있는 기쁨을 생각하셨기 때문이라고 우리 히브리서 12장 2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이 말씀을 한목소리로 공독하겠습니다.
 
*히브리서 12:2,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아멘,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해서 십자가를 참으셨다고 했습니다. 십자가 이후에는 반드시 기쁨과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고난의 때에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모난 모진 고난과 어려움을 힘든 고초를 겪으신 예수님을 묵상하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난 이후에 있을 상급과 기쁨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모든 박해와 또 공격을 담대하게 맞서시기 바랍니다. 견딤이 있어야 쓰임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담대히 맞서 싸우시고 더 나아가 복음의 사명을 위하여 모든 장애와 방해들을 정면돌파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사랑하는 영가족 여러분,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살아가는 삶, 복음의 신앙을 수호하고 전파하는 그 길에는 즐거움과 기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길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발걸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길을 걸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을 한 번도 빠짐없이 누리시기 바랍니다. 복음의 신앙을 위해서 힘차게 살아가십시오. 이를 위해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힘써야 할 첫 번째 일은 하나 됨을 지키고 협력하는 것입니다. 자기 권리 감정 자존심을 내려놓고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고 기쁨으로 협력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힘써야 할 일은 복음에 대한 반대에 담대하게 맞서는 것입니다. 오직 복음의 신앙을 위해 사는 우리를 비웃거나 비난하는 자들이 있을 터인데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고 전파해야 합니다.
 
비록 그 길에 고난은 고난은 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면류관(冕旒冠)을 우리에게 씌워주실 것입니다.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그 칭찬이면 충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이 세상의 금과 은 그 어떤 보아가 없어도 온 세상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그 칭찬 한마디면 충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복음의 신앙을 위한 발걸음에 더욱 힘을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요약
세상에서는 우리가 환란을 당하지만 담대하여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처럼, 하신 말씀을 기억하여, 우리의 대장 되신 주님을 따라갈 때에, 한 영혼이라도 거룩한 진영에서 이탈하는 자가 없기를 기도해야 한다. 모두가 온전히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교회의 하나됨을 지기며, 협력하는 일에 지혜롭게 힘쓰고, 십자가에서 세상 권세를 이기신 대장 되신 예수님을 의지하여 복음에 대한 어떤 공격과 방해가 있다 하더라도 담대히 맞서서 나아가야 한다. 대장 되신 예수님을 따라 정면 돌파하여 그렇게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헌신하는 모든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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