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7월 24일)
제목: “의인과 믿음”
말씀: 로마서 1:16-17
찬양인도: 쉐키나(유재원 부목사님)
사회: 김대규 부목사님
설교자: 최종민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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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16-17,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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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처럼 바로 유대인에게는 십자가의 복음이 거리까지 십자가의 복음이 거리끼는 것이었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도 바울이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했었던 것은 무엇 때문에 그럴까요? 바로 복음은 모두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놀라운 진리, 이 놀라운 능력 앞에서 이 사도바울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랑하고 난 이것을 붙들고 평생을 영원토록 살아간다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동일한 고백인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이 사도바울은 이 복음의 능력, 복음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자신의 평생을 드렸던 사람입니다. 그 보금 안에 있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거죠. 저도 중학교 3학년 때 주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저는 모태신앙입니다. 믿는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서 이제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됐는데요. 제가 8살, 9살 때 제일 힘들었던 것이 무엇이냐면 TV에는 너무나도 재미있는 만화영화가 아침에 꼭 교회 가야 되는 그 시간에 시작했습니다. 디즈니만화동산 그걸 보고 싶어서 엄마한테 애걸 했습니다. 오늘 한 번만 교회 안 가면 안 되겠냐고 ‘교회 안 가면 내 자식 아니다.’
 
나가라 그래서 네 교회를 열심히 나갈 수밖에 없었고 그 가운데서 부모님이 가셨던 그 줄 성수와 또한 믿음에 대한 열정으로 지금 제가 이 자리에 서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런데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나서부터 제 마음 가운데 들었던 고민이 무엇이냐면 과연 이름은 무엇인가, 나는 믿음이 좋은 사람인가, 나는 구원받은 사람인가,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진정한 구원의 확신이 있는가. 저는 매일 고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씨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진짜 내가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았는가? 왜냐하면, 제 안에는 아직도 죄의 문제가 남아있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런 거룩한 삶이 아니라, 죄 가운데 계속적으로 싸워서 승리함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넘어지는 삶이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적으로 오기 때문에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저만 그렇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믿음이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서 정말 많이 고민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여름에 이 시간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말씀, 기도할 때 하나님께 주신 이 말씀 함께 깊이 나누고자 합니다. 그 복음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그 능력을 나는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믿음이 없는 자처럼 행동하는가? 과연 믿음은 무엇이고, 과연 의인은 누구인가? 같이 함께 살펴보길 원합니다.
 
16절 말씀에 바로 이제 사도바울은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면서 17절 말씀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17절 말씀은 바로 16절 말씀의 근거 구절이 됩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가 읽었던 이 개혁 개정에는 나오지 않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무엇이 등장하냐면 ‘왜냐하면’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로마서 1:16-17,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왜냐하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주신은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라는 그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근거 구절인 17절 말씀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17절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2가지 중요한 핵심 구절을 집중해야 되는데, 첫 번째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 여기에 대해서 보통 신학자들은 3가지 견해를 가지고 설명합니다.
첫 번째는 이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 그분의 의로우심, 하나님의 의로운 속성을 의미한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두 번째는 무엇이냐면 그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행하신 모든 의로우신 구원의 행위가 바로 하나님의 의다. 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견해는 무엇이냐면 바로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를 통하여서 의인이라는 거룩한 신분을 허락하신 것이다. 라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자 여기서 말한 이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견해 중에서 오늘 말씀 해당되는 그런 견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마음속으로 대답하실 줄로 믿습니다. 몇 번이든 상관없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에 의해 적합한 해석이고, 이 모든 것들이 다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좀 더 적합한 것이 있다면 3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견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견해 무엇인지 기억나시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의인이라는 거룩한 신분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1번부터 3번까지 견해를 합쳐보면,
 
하나님의 의는 거룩한 의로운 속성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그분이 행하신 의로운 구원의 행위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의로운 신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의로운 신분을 가진 자들이 되었습니다. 복음 안에 하나님께서 거룩한 의로운 신분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기 위해서 두셨다 그리고 그것을 나타내셨다. 라고 17절은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무엇을 통해서 주님이 이것을 드러내시고 나타내실까요? 바로 그것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는 이 구절 가운데 나와 있습니다. 이 구절에 대해서 정말 많은 신학자들의 여러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 초대교회 교부들을 이와 같이 설명합니다.
 
이것은 구약에서의 믿음과 신약에서의 믿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라고 그렇게 설명하고 있고 또한 어거스티는 이것이 복음을 전하는 자의 믿음, 또한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의 믿음을 같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존 칼비는 이것을 사람이 갖고 있는 믿음이 점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통해서 커져가는 그런 의로움이다. 라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우리가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구절을 좀 더 우리가 참고해야 되는데, 그 말씀이 고린도후서 2장 16절 멘스입니다. 제가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후서 2:16,
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사도바울은 믿는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향기다. 라고 말하면서 이 구절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 구절에서 무엇이라 말하냐면 이 그리스도의 거룩한 향기가 어떤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 그리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설명하면서 사망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기 위해서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 또한 생명을 강조하기 위해서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이 말씀을 따라서 이해한다면, 믿음으로부터 믿음에 이른다. 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냐면 오직 믿음을 통하여 오직 믿음을 통하여, 그렇다면 17절 말씀을 다시금 설명한다면, 다시금 우리가 해석한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복음 안에는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으로 말미암아 그분이 행하신 우롱 구원의 행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거룩한 신분, 이 신분이 어떻게 나타나냐면 바로 믿음을 통하여 나타난다. 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죠. 또한 여기서 나타난다는 것은 계시를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의로심이 우리를 거룩한 유인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이 어디에 있냐면, 복음 안에 있는데, 이것이 어떻게 어떻게 계시됐느냐, 바로 믿음을 통하여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로운 우리를 향한 거룩한 신분을 드러내시는데 게시하시는데, 그 계시하시는 것은 바로 오직 믿음을 통하여 주님이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믿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근데 여기서 아까 전에 제가 말씀드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찾으시는 온전한 믿음이 있을까요? 많은 청소년들과 청년들과 상담하게 되면, 여기에 대해서 무조건 아니라고 고개를 흔듭니다.
 
제가 처음 사육을 시작했을 때에, 중고등부를 담당했습니다. 광명의 한 교회에서 제가 중고등부를 저는 제가 전도사로 처음 사역을 시작할 때에 제가 반에 서서 말씀을 선포하면 아이들이 다 뒤집어질 줄 알았습니다. 떼굴떼굴 구르면서 아이들이 통에 자복하며 눈물 흘리며 하나님 제가 죄인입니다. 내가 예수님만으로 살겠습니다. 그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로 믿었습니다. 근데 제가 처음 전도사로 부임하고 나아갔을 때, 복음을 전했을 때 어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을까요? 대부분의 아이들이 다 잠에 들었습니다. 그걸 보면서 제가 어떤 마음이 들었냐 하면 제 안에다가 항상 사직서를 놓고 다녔습니다.
 
하나님, 저는 아무래도 이 일이 아닌가 봐요. 그럴 때에 어떤 한 친구가 저와 면담을 하게 됐는데 상담을 하게 됐는데, 전도사님 그때는 전도사였으니까요. 전도사님 저에게는 믿음이 없는 것 같아요. 전도사님 저는 믿음이 없어요. 그렇게 생각하니? 저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하구요. 이런저런 죄들 다 짓고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한마디 했습니다. 나도 너랑 똑같았어. 그런데 너에게는 믿음이 있어. 너 예수님 믿지 너 예수님이 너의 구원자임을 고백하지? 네 그럼 넌 믿음이 있는 거야. 믿음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믿음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 안에 있는 능력, 힘, 파워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죠.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이해하기 위해서는 첫 번째 우선적으로 이 믿음은 나에게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에게서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우리는 믿고 고백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과 9절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같이 한목소리 읽도록 하겠습니다.
 
*에베소서 2장 8-9절,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아멘 전 이 말씀이 너무 좋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 믿음, 구원이 나에게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선물이란 것을 이 말씀이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죠. 여기서부터 자유함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믿음을 주시고, 구원을 주셔야,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반대로 생각하죠. 하나님이 아무리 우리를 구원하셨다 할지라도 내 안에서 구원에 합당한 일들이 일어나야 되고, 또한 믿음을 향한 어떤 거룩한 노력이 일어나야 되고,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무언가를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으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 은혜와 믿음 구원을 우리에게 주실까요? 우리 안에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 가운데 성육신 사람으로 보내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 하시고, 또한 3일 만에 부활케 하시며 또한 승천하심으로, 지금도 하나님 보좌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며 나아가시도록 주님을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소망이 되고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바로 우리게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의 주권과 그분의 소유에 의한 것입니다. 이것을 고백하며 나갈 때에 우리 안에 진정한 평안과 자유함이 있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믿음을 먼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게 하십니다. 또한 더불어서 우린 어떻게 고백해야 할까요?
 
바로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이 놀라운 믿음이 바로 우리를 위해서 준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서 13절 말씀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13절.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아멘. 이 말씀에서 무엇이라고 말하냐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접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에 영접한다는 것이고. 그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십자가 구원의 능력, 그 이름의 권세를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무엇이냐며 믿는다는 그런 행위는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응당 마땅히 행해야 될 것, 하나님 앞에 드려야 될 것이 바로 믿음인 것이죠. 그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지적인 동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머릿속으로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얼마나 놀라우신 분이신지를 우리가 믿고 따르면서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 이것이 바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분만을 의지하고 전적으로 신뢰하는 삶입니다. 믿음은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아버지를 바라봐야 되고요. 아버지를 바라보게 되면, 그분을 향한 전적인 신뢰와 의지가 흘러나오게 됩니다. 주님은 그것을 향하여 우리의 믿음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이제 여름철이기 때문에 많은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데리고서 여행을 가십니다. 여행을 갈 때 자녀들이 캐리어를 쌓으면서 막 고민하는 거 들어보셨어요? 한 이번에 여행가는데 돈이 얼마나 들 것 같은데, 걱정이네 이런 얘기 들어보셨어요? 아 가서 뭐 먹지 어디서 자지 이런 얘기 들어보셨어요. 어린 아이는 어떻게 하냐면 룰루랄라 신나가지고 자기 장난감만 잔뜩 싸는 겁니다. 사춘기 아이는 한마디 합니다. 엄마 아빠 와이파이 돼? 그거 말고는 원하는 것이 없어요.
 
왜냐하면, 확신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모님이 나를 가장 좋은 곳에 데려갈 것이고, 그리고 부모님께서 내가 먹고 싶은 거 다 사줄 거라는 전적인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굳건한 관계성은 흔들리지 않는 온전한 믿음을 자아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그렇게 의지하고 있나요?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나요? 주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물으시는 것입니다. 너에게 믿음이 있느냐? 물으실 때 주님께선 그것을 물어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너에겐 진정으로 아버지 되는 나에 대한 확신이 있느냐? 어떠한 삶의 요동이 온다 할지라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서서 나를 신뢰함으로 세상의 모든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며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이 너에게 있느냐? 주님은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적인 신뢰와 의지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주님이 원하시고 바라시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예술 그리스도께서 과부와 재판장 비율을 말씀하시면서 이 말씀 하십니다. 누가복음 18장 8절입니다. 같이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8장 8절,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아멘. 불의한 재판장이 한 명 있습니다. 그 누구의 말도 들어주지 않습니다. 악독합니다. 항상 판결을 굳게 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의 지인들이 편한 대로, 그렇게 판결하는 악한 불의한 재판장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재판장이 한 과부가 매일 찾아와서 매일 원하고 바라기 때문에 너무나도 귀찮고 힘들고 어렵기 때문에 그 과부의 청을 들어줍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과부에게는 불의한 재판장의 대한 그를 향한 그런 굳건한 신뢰가 있습니까? 의지함이 있습니까? 너무나 선한 재판장이 내가 간과하면 반드시 들어줄 것이다. 라는 그런 마음이 있습니까? 없어요.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진정으로 자신을 이 돌파할 것은 이 재판장 밖에 없다는 그런 간절한 신뢰와 의지함으로 글을 찾아갔을 때에, 그 재판장도 불의한 재판장도 그 과부의 청을 들어줍니다. 하물며 우리가 신뢰에 맞이하는 우리의 유일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때에, 그분이 우리의 기도에 귀를 닫으시고 듣지 않으시며 눈을 가리시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주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갈 것은, 그분이 우리의 기도에 신실하게 응답해주시는 신뢰할 만한 유일한 분이심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이것은 세상 끝날 되면 힘들고 어려운 고난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의 믿음이 떠나가고 마음이 떠나가서 믿음을 못 보겠구나! 그런 한탄이 의한 것이 아니라 나는 믿음을 보길 원한다.
 
내 제자들아 사랑하는 내 사람들아, 나에게 믿음을 보여다오. 굳건한 믿음 흔들리지 않는 신뢰와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 아버지께 나오는 그러한 신실한 사람들이 되렴. 주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씀 가운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이 나의 믿음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향하여서 갖게 되는 온전한 신뢰와 의지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말씀해서 말하고자 하는 이 의인됨은 누구를 말합니까?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써 나는 하나님 믿음의 모든 것 되어드릴 만한 그런 선한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나에게 허락해주셨기 때문에 지금 부족해도 나는 주님만을 의지하며 신뢰하며 나아갑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그렇게 나아갈 때에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시작하신 그 거룩한 믿음의 시작을 더욱더 창대하게 하시고, 우리를 주의 거룩한 품에 안으시고 평생 주의 거룩한 뜻 가운데 살아가며 승리케 하실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세상 가운데 넘어져서 쓰러져 있느냐? 다시 일어나렴. 다시 일어나서 내가 너에게 준 믿음으로 신뢰와 의지함으로 이 아버지만을 바라보며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믿음의 싸움을 쌓으며 승리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소망한다. 주님이 격려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마지막 구절이 있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누었던 내용들을 다시금 돌아본다면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요? 오직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신뢰와 의지함을 가지고 세상 가운데 승리하며 살리라. 그와 같이 주의 거룩한 말씀대로 진정을 우리가 주님만을 의지합니다. 신뢰합니다. 믿습니다. 그런 믿음의 고백으로 주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 예수 그릿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 거룩한 사람들로 다시금 세우셔서, 주의 말씀대로 이 세상 가운데 승리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믿음이 연약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님은 있는 그대로 나오라 가십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본다면 진정으로 우리 삶 가운데 작은 겨자씨와 같은 믿음이 있다. 할 때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 가운데 우리를 통하여 상상도 할 수 없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실 줄로 믿습니다. ‘2033-50 비전’이 바로 주의 거룩한 이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하여서, 이 땅 가운데 펼쳐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겨자씨와 같은 믿음을 보길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 거룩한 씨앗을 심으셨으니깐요. 이제는 열매를 맺어야 될 때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열매를 맺어야 될 때입니다.
 
순이 나고, 움이 트고, 싹이 피어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야 되는 그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자신을 바라보면서 주님 나는 믿음이 없습니다. 나는 믿음이 연약합니다. 내가 믿음이 없는 것을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그렇게 외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 없는 자를 다시금 진토해서 일으켜 세우시며, 우리를 온전케 해주시며, 거룩한 능력으로 굳건히 세우시는 하나님 앞에 온전히 나아가는 사랑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와 같이 살아가기를 우리 모두가 그와 같이 준 옆에 나아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 요약
믿음의 주권자이시며 유일한 주인 되시는 성삼위일체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주 안에서 믿음을 찾아 선한 것이 하나도 없는 내 안에서 믿음을 찾아 헤매는 영적 방황을 마쳐야 한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을 확신하는 굳건한 관계성을 통하여 세상의 그 어떤 거친 파도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는 온전한 믿음을 고백하며, 우리가 날마다 의인이자 주의 거룩한 자녀로 살아갈 때, 복음 안에서 계시하신 의로우신 하나님의 속성과 거룩한 구원의 역사가 세상 가운데 온전히 나타나기를 간절히 간구하자. 우리의 상황과 우리 환경이 어렵고 눈물 나게 하고 아프고 참으로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소망 가운데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고 우리는 이 믿음을 붙잡고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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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7월 17일)
제목: "정답과 노답의 사이에서 “
말씀: 사도행전 16:19-26
설교자: 최민규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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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6:19-26,
19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어갔다가.
20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21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22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23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24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26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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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은 정답이 좋으십니까? 노답이 좋으십니까? 어 노 답의 의미는 답이 없다. 라는 의미입니다. 정답이 좋으시죠. 네 다시 질문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의 삶은 정답이십니까? 노 답이십니까? 여기서 정답이라고 말씀하신 분들은 답이 없으신 분들이십니다. 정답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삶은 많이 없을 것입니다. 인생 만사가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이 있죠. 인생의 모든 것들이 새옹의 말과 같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 의미는 인생의 회복 화와 복이죠. 즉 행복과 불행은 변수가 많으므로 예측하거나 단정하기 힘들다. 라는 의미입니다. 화(禍)가 복(福)이 될 수 있고 복이 화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 인생의 정답이 노답이 될 수 있고, 인생의 노 답이 정답이 될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답 같은 노 답을, 노 답 같은 정답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성경에도 노 답과 정답의 사이에서 머뭇거렸던 인물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삼손이 그렇죠. 삼손은 나실인입니다. 구별된 사람이죠. 삼손은 블레셋을 무찌르는데 쓰임 받았던 사사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행실은 많은 오류가 있죠. 그는 포도주를 가까이하고 시체를 만지며 자신의 신분을 망각한 채 살아갔던 사사였습니다. 사사기 14장 7절 말씀해 보면, 그의 삶을 한마디로 정리해 주는데요.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사사기 14장 7절,
7 그가 내려가서 그 여자와 말하니 그 여자가 삼손의 눈에 들었더라.
-삼손의 눈에 들었다란 의미는 삼손이 그 여자와 동침하였더라. 라는 의미와 같습니다. 즉 자신을 보는 대로, 자신이 느끼는 대로, 자신의 욕망대로, 살아갔던 사람이 바로 삼손이었음을 이야기해주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히브리소의 기자는 삼손을 믿음의 용장(勇將)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어 히브리서 11장 32절에서 33절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11장 32-33절,
32.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33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믿음의 용장임을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들에게 질문 드리겠습니다. 삼소는 정답입니까? 노 답입니까? 답답이죠. 아브라함은 어떻습니까? 아브라함도 정말로 믿음과 정답과 노답 사이 안에서 정말 머뭇머릇, 머뭇거리며 갈등했던 사람이 바로 이 아브라함이었습니다. 그 사건을 좀 말씀드리자면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며 바로에게 넘겨준 사건, 자신의 아내를 어떻게 넘겨줄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언약을 신뢰하지 못하고 화가를 통해 이스마엘을 낳은 사건, 하나님께서 모래를 봐라. 하늘의 별을 봐라. 내가 수많은 것들을 너에게 약속해 줄 거야. 그 말씀을 신뢰하지 못한 채,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을 낳죠. 불순종이죠. ‘어떻게 100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겠습니까?’ 라고 하나님을 비웃었던 사건, 하지만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거침없이 바친 사건으로 말미암아 믿음의 거장으로 거듭나죠. 아브라함은 정답입니까? 노 답입니까? 답답 답이죠. 아브라함처럼 정답과 노 답 사이에서 방황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 아닐까요?
 
제가 주일학교 살고 11년 했습니다. 그리고 올해 이제 교구로 넘어와서 다락방 순장님들 다락방 순원들을 신망하는데요. 여러분들의 가장 많은 기도 제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믿음의 배우자를 만나게 하옵소서, 내지는 우리 자녀들이 교회에 꼭 나오게 하옵소서, 내지는 우리 자녀들이 믿음의 회복을 시켜 주옵소서, 자녀의 문제 앞에서 우리는 왜 이렇게 답답할까요? 노 답일까요? 고등부 사역하면서 어떤 한 녀석이 저의 손을 꼭 잡으면서 기도 제목을 이렇게 주었습니다.
 
목사님, 우리 엄마가요. 교회에서만 순장님이 아니라, 집 안에서도 순장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나도 제 아내가 순장이거든요. 경제적인 상황은 어떨까요? 코로나 이후에 많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우리 성도님들은 겪고 있죠. 건강의 문제는 어떨까요? 암에 걸리신 분들, 지금도 응급실에서 생사를 왔다 갔다 하시는 분들, 굉장히 많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 이라는 정답, 신앙일이라는 신앙이라는 정답을 알고 있지만 관계의 문제, 건강의 문제 자녀의 문제,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느끼는 삶의 먹먹함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제가 2008년도서부터 10년도까지 사랑의 교회 유아부를 섬겼습니다. 유아 부 설교 굉장히 잘합니다. 자동행전 3장 16절 말씀! 아직도 기억이 나요? 제가 사도행전 3장의 말씀을 우리 아이들에게 전했는데요. 그 설교의 핵심은 ‘성전미문에 있는 장애인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 그 설교를 했던 거예요. 굉장히 잘 했습니다. 교만했던 거죠.
 
홈페이지에 어떤 반응들이 올까 막 가슴이 쿵닥 콩닥 뛰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음날이 되었습니다. 근데 한글이 올라온 거예요. 8월 2일 설교를 들으면서 점점점.... 내심 아 저를 칭찬해주는 그 대응이겠구나, 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그걸 클릭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내용을 보고 저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홈페이지에 올라왔던 글이니 그 내용의 일부를 여러분들에게 읽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가명입니다.
 
※저희 수민이는 교회에 가는 것을 너무 좋아합니다. 선생님들도 너무 헌신적이시고 노래하는 것도 좋아하고 가서 친구들 만나는 것도 참 좋아합니다. 그런데 8월 2일 설교를 들으면서 마음이 아팠답니다. 라는 순간서부터 가슴 막 후당당 뛰는 거예요. 이제 큰일 났다 수민이는 걷지 못합니다. 그날 설교에서 앉은뱅이를 고친 베드로 이야기를 듣고, 제게 조그마한 소리로 말하더군요. 엄마 나도 걸을 수 있어. 4~5세의 아이가 성전미문에 있는 앉은뱅이 장애인을 고침으로 말미암아 엄마 4~5세 여자아이가 나도 걸을 수 있어. 부모의 마음을 생각해보세요. 나도 걸을 수 있어. 하반신 마미로 신경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걸을 수 없는 수민이에게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 지 순간 난감했습니다. 그래 예수님을 믿으면 걸을 수 있을지도 몰라 라고 해야 하는 건지, 4살짜리 아이한테 저건 그냥 하나님이 얼마나 전능하신지 보여주는 사례일 뿐이야 너무 희망을 많이 가지면 너의 마음이 아프단다. 라고 이야기해 줄 수 없는 노릇이니까요? 바디메오의 눈을 고쳤다는 내용이 나왔을 때도 수빈이가 혹시라도 그걸 자기한테 적용시키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는데 저는 하나님을 믿지만 당장 기도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걷게 해줄 수 있다고 아이에게 말해 주고 싶지는 않고, 그렇게 아이가 믿게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전도사님, 선생님 도움을 부탁드립니다.
 
하나님이라는 정답을 알고 있지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정답을 알고 있어요. 기도, 찬양이라는 정답을 알고 있지만 막상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는 노 답인 환경과 상황이 너무나도 많다. 라고 하는 것이에요. 잠언 16장 구절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잠언 16장 9절,
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계획하고 있다는 정답은 알고 있지만, 이 땅 가운데 두 발을 내딛고 살아가는 우리의 걸음은 노 답인 상황이 너무나도 많다. 라고 하는 것이죠. 그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요? 무엇을 바라볼 수 있을까요? 그것에 대해서 고민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조금 더 하나님께 나아가는 성숙된 신앙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우리 모두의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을 좀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성경에 나오는 배경을 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제2차 선교 여행의 시작점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듣고 세워진 이방 교회를 돌보기 위하여 실라와 함께 떠나기 시작합니다. AD 49년에서 52년까지 3년간 약 2500에서 5600킬로미터를 여행하였습니다. 굉장히 많은 그 여행을 하게 되었다고 성경 말씀이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이죠. 무엇보다 2차 선교여행의 가장 큰 열매는 유럽 지역의 복음이 처음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선교 팀이 유럽의 첫 관문인 빌립보 성에 들어갔을 때 분위기는 굉장히 좋았습니다. 정답이구나! 자색 옷감 장사 루디아와 그 가족의 예수를 믿게 된 것이죠. 16장 14절 하반 절에서부터 16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6:14-16,
14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15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16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라.
-유럽의 첫 관문인 빌립보 성에 들어가서 루디아와 그의 가족에게 그리스도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이지요. 그들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고 4명의 선교사가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함으로, 자신의 믿음의 실제적인 증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답이죠. 얼마나 가슴이 뛰었을까요? 아 이렇게 복음의 열매들이 맺혀가는구나, 더 복음의 열매들이 맺히겠지. 정답의 삶을 살 수 있겠지. 그런데 이렇게 사역이 마무리되었으면 좋겠는데 이후 노 답의 상황이 벌어지게 됩니다. 바울과 신라는 기도하러 가는 도중에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을 만나게 됩니다. 엄청 괴롭혔던 것 같아요. 다 예수 그리스도의 조국 사도바울이여 우리를 고쳐주소서 막 이렇게 엄청 괴롭혔던 것 같애요. 그러자 바울은 그녀가 그녀는 귀신 들려 있었고, 상당한 주인들에게 많은 이익을 가져주었던 귀신 들린 여정이었죠.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이로 인해 주인들은 이익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화가 난 주인들이 바울과 신라를 고발하죠. 사도행전 16장 20절 말씀에, 이런 말씀이 등장합니다.
20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수익의 소망이 끊어졌기 때문에 복수를 하게 된 것이죠. 주인들은 두 사람이 빌립보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로마 사람인 자기들도 인정하거나 행하지도 않는 관습을 사람들에게 주입시키는 부랑 유대인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문제는 고소에 대한 진지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바울과 실라는 즉석에서 옷이 벗겨졌고, 간수 들에게 넘겨져 심한 매질을 당했던 것이죠. 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 22절 23절 말씀이,
 
*사도행전 16: 22절 23절,
22 우리가 일제에 일어나 고발하니 상간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23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세계 선교라는 성령의 역사라는 하나님의 동행하심이라는 정답을 알고 있었지만 한 발 한발 내딛는 그 순간 정답이 아닌 노 답 같은 인생이 벌어지게 된 것이죠. 이때 우리는 얼굴이 뜨거워지면서 인생의 먹먹함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바울과 실라가 바로 이 장면에서 보여준 믿음의 자세는 정말 아름다운 자세요. 우리의 삶에도 적용할 수 있는 신앙의 모범입니다. 그 두 가지를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노 답과 같은 환경에서도 신앙의 정공법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우리 25절 말씀을 다 같이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25절 말씀입니다.
 
I. 첫 번째- 신앙의 정공법.
 
*사도행전 16:25,
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함에 죄수들이 듣더라.
-노 답과 같은 그 환경 가운데 인생의 칠흑과 같은 한밤중 그 가운데, 기도와 찬양으로 그 모든 상황을 극복하며 이겨내려고 했던 선교사가 사도바울이요. 실라 임을 성경 말씀이 증언(證言)해주고 있는 것이죠. 정공법(正攻法)의 사전적 의기는 의미는 기교한 꾀나 모략을 쓰지 아니하고 정정당당히 공격하는 방법입니다. 기교나 꾀를 쓰지 않는 거예요. 인생의 한밤중일 때, 노 답인 그 상황에 기도와 말씀과 찬양을 바울과 실라가 붙잡았음을 성경 말씀이 증언해주고 있는 것이죠. 바울과 실라는 심한 매질과 차꼬라는 이중적인 어려움이 있었지만 기도와 찬양과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다니엘도 기도와 찬양과 말씀을 붙잡았던 신앙의 위인입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그런 모략 가운데, 다니엘이 어떻게 했습니까? 하던 대로 기도했습니다. 다니엘서 6장 10절 말씀에,
 
*다니엘서 6장 10절,
10 다니엘이 조서의 왕의 도장에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3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인생의 노 답인 환경 가운데 인생의 한밤인 그 환경 가운데 기도와 말씀과 찬양밖에 없구나, 이것을 깨달았던 거죠. 여호사밧은 어떻습니까? 암몬이 쳐들어왔을 때, 모압이 쳐들어왔을 때,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역대하 20장 18절 19절 말씀에,
 
*역대하 20장 18-19절,
18 여호사밧이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니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도 여호와 앞에 엎드려 여호와께 경배하고.
19 그핫 자손과 고라 자손에게 속한 레위 사람들은 서서 심히 큰소리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 하니라.
-찬성하였다. 찬송을 시작하자마자 전쟁에서 이겼음을 우리는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아! 그렇다면 우린 인생의 한밤 가운데, 인생의 노 답인 환경 가운데, 말씀과 기도와 찬양 신앙의 정공법을 붙드는 신앙인이 되어야 되겠구나. 이런 결단을 이런 멋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이 신앙의 정공법에 부흥이 가정에서 먼저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기도와 말씀과 찬양이 살아있는 우리 가정, 기도와 말씀과 찬양을 사랑하는 우리 자녀들, 말씀대로 기도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우리 부모의 모습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저는 고등부를 6년 동안 섬겼습니다. 아이들에게 항상 강조했던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혹시 믿음, 소망, 사랑, 다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믿음, 소망, 사랑 다음에 제가 그 고등부 때 올라가 가지고 설교하기 전에 믿음 소망 사랑하면, 아이들이 의리!!, 의리입니다. 사람이 좀 의리가 있어야 됩니다. 4가지 덕목이 의리라고, 우리 아이들에게 자꾸 주입시켰어요. 그 의리는 하나님에 대한 의지를 좀 표현하는 겁니다. 하나님과 너희와의 의리, 선생님과 너희와의 의리, 친구들과 너희와의 의리, 나와 너희와의 의리를 꼭 지켜서 하나님께서 핀셋으로 정해준 이 자리 꼭 지켜라.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아이들의 결정적인 순간만 되면 의리를 안 지키는 거예요. 의리 없어요. 예를 들어서 신앙과 자신의 학업이 충돌될 때 의리 안 지켜요. 신앙과 관계적인 문제가 충돌될 때, ㅇ의리 안 지켜요. 신앙과 경제적인 환경이 충돌될 때 의리이 안 지켜요. 교회를 떠나갑니다. 무엇이 문제일까? 뭐가 문제일까? 제가 하도 죄송합니다. 열이 받아서 이 주제를 가지고 소논문을 썼습니다. “아이들은 왜 의리가 없을까?” 진짜 썼습니다. 그 결론은 그 결론은 결국에는 바로 무엇이냐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아이들이 왜 의리가 없는지 아십니까? 가정이고, 부모예요. 부모가 믿음 적으로 흔들리면 우리 아이들도 흔들려요. 가정 안에 믿음이 뿌리내리지 않으면 우리 아이들의 신앙도 뿌리내리지 않아요. 제가 한번은 이대 교육 공학 박사님에게 물어봤습니다. 자녀에게 있어서 우리 부모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그분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전부입니다. 전부래요. 부모의 신앙이 전부래요. 굉장히 중요한 것이죠.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해서 양해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희 부친께서는 은사가 있으셨는데, 사업을 말아 드시는 은사가 있으셨습니다. 뭐 하면은 다 이제 말아 드시는 거예요. 만지면 다 말아 드시고, 아 정말 월요일에도 같이 아버지와 함께 식사를 하셨는데, 아버지께 입으로 직접 시인하시더라고요. ‘왜 그때는 그렇게 안 됐는지 모르겠다.’ 이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다 말아 드시는 은사가 있으셨습니다. 근데 참 안타까운 것은 화를 죄송합니다. 술로 푸셨습니다. 이제 사업이 안 되시는 것을 늦게까지 술을 드시고 오시면 새벽 1시 2시예요. 와 그때 막 난리가 나는 거예요. 그 당시에 막 정말로 비참하고 처참했습니다. 그때 저는 이제 무서웠기 때문에 이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잤으면 다른 척을 했죠. 그러면은 모든 상황을 저희 어머니께서 온몸으로 다 받아내셨습니다. 굉장히 처참했고, 비참했고 어려웠습니다. 하루는 어머니께서 이불을 들고 나가시는 거예요. 그래서 어머니께서 너무 힘드니까, 너무 어려우니깐 집을 나가시는구나.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근데 새벽 6시 반에 다시 들어오시는 거예요. 또 그런 일이 반복되면 어머니께서 이불을 들고 나가시는 거예요. 새벽 6시 반이 되면, 다시 들어오시는 거예요. 하루는 제가 어머니께서 이 새벽에 어디를 저렇게 가시나 몰래 따라가 봤습니다. 빌라 옆에 조그만한 교회가 있었는데, 입을 뒤집어쓰시고 철야 기도를 하셨던 거예요. 제가 기도하시는 그 모습을 두 눈으로 봤습니다. 아직도 잊혀 지지가 않아요. 이불을 뒤집어쓰시고 남편을 위하여, 저희 누나를 위하여, 저를 위하여 눈물로 밤새도록 기도 하셨던 거죠.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이 신앙을 저희 아버지 꺾지 못하셨습니다. 오히려 어머니께서 아버지를 전도하셨고, 할아버지 할머니 주변에 있는 모든 식구들을 전도하셨습니다. 아! 믿음이 이렇게 강한 거구나, 믿음은 참으로 아름다운 거구나, 믿음은 참으로 숭고한 거구나, 믿음은 능력이 있구나, 이걸 깨닫게 되었어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명절 때 되면, 저희가 저희 누나네 집에서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립니다. 근데 이제 제가 그래도 목사니깐 예배를 드리고 맨 마지막으로, 아버지 한 말씀 하십시오. 라고 제가 건의를 드렸어요. 근데 갑자기 아버지께서 안경을 탁 벗으시더니, 막 오열을 하시는 거예요. 손주들도 다 있고 매형도 있고, 제 아내도 있는데, 막 우시는 거예요. 저는 속마음을 또 시작됐구나. 그때 아버지께서 해주셨던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납니다. 눈물을 다 닦으시더니, 이런 말씀하셨어요. “나는 우리 집에서 한 게 아무 것도 없다. 우리 집은 너희 엄마가 기도와 말씀으로 세운 집이다. 너희도 힘들더라도 인생을 길게 바라보는 지혜가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 가정은 너희 엄마가 기도와 말씀으로 세운 집이다.” 저희 부친께서는 70대 중반이신데, 아 70 중반에 제가 처음으로 이 고백을 듣게 된 겁니다.
 
-우리가 인생의 노 답인 환경 가운데 인생의 한밤중인 그 환경 가운데,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요? 우리 자녀들에게 무엇을 알려 수 있을까요? 신앙의 정공법, 기도와 말씀과 찬양 외에 우리 하나님께서 다른 방법을 알려주신 적이 없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기도 외에는 다른 것으로는 이러한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오직 신앙의 정공법, 정공법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가정을 세우고 날마다 승리하는 성도님들의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첫 번째 신앙의 정공법입니다. 두 번째로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우리의 전 존재를 내어 드리는 거예요. 26절 말씀 우리 다 같이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II. 두 번째- 하나님의 섭리
 
*사도행전 16:26,
26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바울과 신라가 한 것은 찬양과 기도와 말씀을 계속 찬양 적으로 암송했던 것 뿐이죠. 그거 왜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했더니, 하나님께서 지진을 일으키셔서 옥터를 움직이고, 문을 열어주시므로 모든 사람의 메인 것을 벗겨 주셨다. 라고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계획하심이 그들의 삶 가운데 있었음을 우린 알 수 있습니다. 이 본문을 대할 때마다 저는 항상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왜 바울과 실라가 침묵했을까?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바울과 실라는 로마 시민 권자였습니다. 그러한 대우를 안 받아도 되는 사람들이었어요. 로마 시민이 법정 앞에 설 때 죄의 목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매질이나 고문을 당하지 않을 특권이 있었습니다. 이유 없이 때릴 수 없다. 라는 거예요. BC 2세기 제정된 법에 따르면, 로마 시민들은 모멸감을 느끼게 하는 형태의 처벌을 면제받았으며 법과 관련해서 설정된 가치 있는 특정 권리들을 누렸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과정을 겪어야 됐고 그 모든 과정 가운데 신문이 필요했고, 적당한 절차와 합리적인 이유들이 있어야 됨을 어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때린 거예요. 근데 침묵한 거죠. 37절 모든 상황이 끝난 이후에 바울이 다음 같이 얘기합니다.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공중 앞에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내보내고자 하느냐. 너희가 묻지도 않고 로마 사람들을 이렇게 대우해도 되느냐? 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이에 로마 관리들은 그들이 로마 사람인 것을 알고, 듣고 두려워하였다.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다면 왜 그 상황 가운데 바울과 실라가 침묵했을까요? 그것은 고난 앞에 노 답이라는 환경 앞에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비록 노답인 환경 가운데 있을지라도, 인생의 한밤중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이 있을 거야.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을 거야.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을 거야. 라는 마음의 믿음의 확신이 있었던 것이죠. 섭리란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을 유지하시고,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서 참여하시며, 만물을 그들의 지정된 목적으로 인도하시는 신적 에너지의 지속적인 실행이다. 칼빈은 이를 하나님의 돌봄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모든 피조물을 하나님이 유지하시고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참여하시며 만물을 하나님의 지정된 목적으로 인도하시는 신적 에너지의 실행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힘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능력이 바로 섭리다. -칼빈-
-라고 하는 것이죠. 비록 노 답과 같은 상황이었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하심이 하나님의 지속적인 신적 에너지가 그들의 삶 가운데 있음을 바울과 실라는 믿었다. 라고 하는 것이에요. 그 이후 어떤 일들이 벌어집니까? 칼로 자결하려던 간수를 살립니다. 그의 집에 들어가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세례를 베풀고 식사 교제를 합니다. 34절 말씀에, “그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크게 기뻐하니라.” 노 답과 같은 상황이지만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가 그 가운데 있음을 믿고 침묵하며 나아갔던 것이죠. 여러분들 환경 가운데 삶 가운데 노 답인 환경이 있습니까? 그런 어려움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돌보시고, 위로하시며 마침내 결국 우리의 모든 기도 제목을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저의 그 신대원(신학대학원) 동기 형이 1명 있었습니다. 그 형에게 소식을 이제 저희가 목사한테 받고 캄보디아 땅으로 선교를 떠나간다는 그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훈련을 받고 아내와 함께 캄보디아 땅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제가 2018년도에 사랑의 교회, 고등 1~2부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캄보디아 선교를 갔을 때, 그 선교사님 같이 만나면서 교제하기도 했었습니다. 굉장히 열심히 했어요. 언어도 배우고, 그들과 함께 호흡하고, 열심히 일하고,,, 그런데 뜻밖의 비보(悲報)가 전해졌습니다. 제 최원예 선교사님이시거든요. 주일날 첫 번째 캄보디아어로 설교를 하고, 그 저녁에 쉬던 도중 심정지로 세상을 떠난 거예요. 첫 번째 캄보디아어로 설교를 한 다음에 세상을 떠난 거예요. 사모님 홀로 남겨둔 사모님은 유방암에 걸리셨습니다. 제가 만나 뵀을 때는 머리가 없으신 거예요. 머리가 노 답이죠. 그 삶을 우린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시간이 좀 흘러 신대원에서 같이 공부했던 한 누님께서 자신의 SNS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습니다. 저는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이 글을 읽습니다.
여러분들과 함께 이 글을 나누기 원합니다.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하나님 당신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우리를 사랑하실 수 있다. 하나님 제 얼굴에 보면 이 오른쪽엔 상처가 있습니다. 저는 의도적으로 이쪽을 피해서 제 잘생긴 이쪽을 보여줍니다. 보기 흉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제 이쪽도 사랑할 권리가 있다. 라고 하는 거예요. 이쪽을 통해 일하실 수 있다. 라는 거예요. 개인적인 기대가 하나님의 방법과 다를 때 우리는 그것을 흔히 고난이라고 부른다. 어떤 이에게는 죽음이, 병이,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가난이 외로움이 그렇겠지. 그러나 우리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여정은 그것을 고난이라고 부르는 대신, 아멘!!으로 부르기를 선택하는 여정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더 알아가고 우리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법으로 배워가고 그 간극을 좁혀 나간다. 이해할 수 없는 죽음 앞에 그들을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깊으신 사랑의 뜻 앞에 아멘!의 작은 읊조림을 해본다. 하나님, 하나님, 아멘!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환경 가운데서도 하나님, 아멘!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거죠.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는 거죠. 모든 것에는 갈라진 틈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죠. 하지만 그 갈라진 그 틈새를 통하여 반드시 빛이 들어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두 가지입니다. 신앙의 정공법으로 나아가는 것, 두 번째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것,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해피엔딩, 하나님의 해피엔딩, 사도행전 16장 31절 말씀에 이 한 구절을 위해서 사도 바울과 신라가 고생했던 거예요.
 
*사도행전 16장 31절,
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이 한 구절을 위하여 바울과 실라는 신앙의 정공법으로 전적(全的) 위탁(委託)으로 나아갔던 것이죠. 인내 하셔야 합니다. 버티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내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해피엔딩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5장 11절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5장 11절,
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대다 하나님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이시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결말은 하나님의 해피엔딩,
 
사랑하는 성도님들, 노 답인 환경 가운데 있으십니까? 다른 것 의지하지 마시고 신앙의 정공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길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인생의 한밤중에 계십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여러분들을 이끄시고 계십니다. 하나님 아멘 하나님 아멘!!! 믿음으로 주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해피엔딩을 기다리는 인내하는 우리 모두의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요약
우리의 인생이 한밤중일 때, 다른 것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오직 전적 위탁함으로 주님께 나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신앙의 정공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과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것을 기억하여, 주님 앞에서 참된 신앙인으로 바울과 실라처럼 정답이든 노 답이든 간에 주님 앞에 진정한 헌신자로 살아내어 주님의 기쁜 자녀로 영광 돌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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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7월 10일)
제목: "예수, 나의 치료자"
말씀: 마태복음8:5-13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부목사님)
사회, 기도회 진행: 김대규 부목사님


설교자: 정상익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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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8:5-13,
5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6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7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8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10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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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며 말씀의 은혜를 드리는 수요저녁기도회에 나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오늘 수요저녁기도회를 통하여 참된 치료와 또 참된 회복을 경험하시는 시간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8장 5-13절 말씀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1절씩 교독하겠습니다. 제가 먼저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가?’ 시리즈를 통해서 예수님에 대해 계속해서 알아가고 있습니다. 담임 목사님께서 주신 말씀처럼, 생명의 떡이신 그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갈 때 예배가 회복되고 또 우리의 삶이 회복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

여러분은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그런데 머리로 알고 있는 이 사실이 실제적으로 얼마나 삶에서 구체적으로 체험되고 계신지요? 예수님이 나를 만나주시지 않는다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없으신가요? 예수님이 눈앞에 이렇게 두 팔 벌려 안아주신다고 하는데, 정작 내 눈앞에는 예수님이 전혀 계시지 않는 것 같은 그런 마음이 드신 적은 없으세요? 특별히 육신의 아픔, 영혼의 고통을 겪고 있는 가운데, 나는 치료가 필요한데, 예수님이 부재(不在)하신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맞으신가요?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라는 찬송가의 가사가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인데 그렇게 고백하지 못하고 주님과 나는 간 곳 없고, 괴로운 나만 보이도다. 라고 고백하신 적은 혹시 없으신가요? 어떻게 예수님의 치료를 경험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이 세상 나그네 삶을 살면서 계속해서 근본적으로 하게 되는 질문 중 하나입니다. 열심히 주님을 따라 살겠다며 고군분투(孤軍奮鬪)하는 가운데 고난을 계속 겪게 되면 이 질문을 자꾸만 하게 됩니다. 더욱 고민하는 가운데 이 근본적으로 질문을 던지게 되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성경(聖經)을 통해서 알려주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치료가 필요했던 사람이 한 명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를 치료(治療)해주신 예수님의 이야기가 이어지게 되는데요.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 산상수훈(山上垂訓)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잘 알려주셨던 그 예수님께서 이제 가버나움이라는 동네로 들어가십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북쪽에 위치했던 1세기 당시에 아마 1,500명 정도가 거주했던 그런 도시였어요. 그 도시로 예수님이 들어가십니다. 근데 이 가버나움이라는 도시를 성경은 이와 같이 이야기합니다. 마태복음 9장 1절 말씀인데요.

*마태복음 9:1,
1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성경은 가버나움을 본 동네,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을, 예수님의 고향과 같은 곳이라는 뜻이지요. 실제로 가버나움의 이 터에 가면 영어로 ‘칼퍼나움’이라고 써 있고, 그 뒤에 또 탄 오브 지저스 라고 적혀 있습니다. 예수님의 본 동네, 예수님의 마을이라고 적혀 있어요.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께서 공생애 3년간 이 가버나움을 선교 지로써, 이 선교 센터로써 사용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선교본부와 같았던 이 가버나움, 이 마을로 예수님이 들어가셨을 때, 한 가지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이 놀라운 기적의 사건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는데요.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 3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그 포인트를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예수님은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I. 첫 번째, 예수님은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예수님이 사역의 본부로 사용하셨던 그 가버나움 시대에 그 시내 안에서 누군가 바로 로마 백부장(百夫長)인데요. 오늘 우리가 읽었던 5절 말씀 함께 읽어볼까요?

* 마태복음8:5,
5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우리가 기도용사를 통해서 또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는 그 단어죠. 백부장(百夫長), 이 백부장(百夫長)은 1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있었던 군인이었습니다. 오늘날 한국 육군으로 비교하면 중대장 정도, 공군이나 해군으로 따지면 때때로는 대대장 정도 되는 그런 지휘관(指揮官)이라고 볼 수 있어요.

팔레스타인 지역을 다스리는 군대의 지휘관이 유대인 랍비로 여겨졌던 예수님께 찾아온 겁니다. 이 백부장은 로마군 소속 이방인(異邦人)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이 백부장을 거절(拒絶)하실 수도 있었어요. 실제로 예수님이 이방인을 거절하신 적이 있었거든요. 이후에 일어난 일이 마가복음 7장 말씀을 제가 한번 읽어 드리겠습니다. 25절에서 27절 말씀인데요.

*마가복음 7:25-27,
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아래에 엎드리니.
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 뒤에 나오는 이야기도 여러분 잘 아시죠? 부스러기라도 받겠습니다. 이야기를 하고 이 여인이 자신이 간구(懇求)했던 바를 그대로 받는 놀라운 사건이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이 나온 것처럼 두로 지방에 있었던 헬라인 여인을 바로 만나지 않으셨습니다. 요청(要請)에 바로 응답(應答)해 주시지도 않았어요. 이처럼 예수님은 이방인이었던 백부장을 만나지 않으실 수도 있었습니다. 아마 백부장과 친했던 유대인 장로들이 예수님이 만나주시지 않을 것을 우려(憂慮)했나 봅니다. 오늘 우리가 읽었던 마태복음 8장과 병행 본문인 누가복음에 이런 이야기가 담겨 있어요. 누가복음 7장 3절에서 4절 말씀 제가 읽어드립니다.

*누가복음 7:3-4,
3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정한지라.
4 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유대인 장로들의 말에 예수님이 이방인인 이 백부장을 만나주시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前提)가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장로들의 걱정은 기우(杞憂)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인이었던 이 백부장을 만나 주셨습니다. 그가 찾아왔을 때 그를 물리치지 않으시고, 그와 대면(對面)해 주셨죠. 예수님은 우리를 만나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찾을 때, 한 결 같이 우리를 대면해 주시고, 우리를 안아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방인인 우리가 죄를 짓고 멀리 떨어져 있다가도 마치 이 재산(財産)을 다 탕진(蕩盡)하고 터덜터벅터벅 걸어오던 둘째, 아들을 보고 버선발로 뛰어나갔던 그 아버지처럼 우리를 품에 안아주시고 우리를 만나주시는 분이십니다. 백부장은 이 예수님이 만나주시는 그 특권(特權)을 누렸던 사람이지요. 오늘 본문에 예수님의 모습 두 번째가 나옵니다. 함께 읽어볼까요? 둘째, 예수님은 우리 이야기를 들어 주십니다.

II. 두 번째, 예수님은 우리 이야기를 들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이야기를 들어주십니다. 본문의 6절과 7절 말씀을 통해서도 이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6절7절 함께 읽겠습니다.

* 마태복음 8:6-7,
6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 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7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예수님은 백부장을 만나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셨습니다. 백부장은 자신의 하인이 이 중풍 병(中風病)으로 인해 마비(痲痹)가 되어 있다고 이 중풍 병으로 인해서 너무나 고통스러워하고 있다고 예수님께 이야기합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이방인(異邦人)인 사람을 만날 필요도 없는데 그가 늘어놓는 이야기를 경청(敬聽)하실 필요는 더더욱 없었을 겁니다. 바쁜 사역(事役) 스케줄 중에 가버나움에서 할일이 정말 많은데, 산상수훈을 막 마치고 다시 이 선교본부와 같은 가버나움으로 돌아와서 다음 사역을 준비하기에도 벅찬 일정인데, 이방인인 백부장이 와서 하소연하는 이야기에 굳이 귀를 기울이실 필요는 없었죠. 그런데 예수님은 이방인 백부장의 말을 들으십니다. 단순히 듣는 척 하시는 게 아니라 경청(敬聽)하십니다. 그의 말에 대답하시고 반응(反應) 하셨거든요. 예수님은 우리 이야기를 들어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가던 길도 멈춰 서서 우리말에 귀를 기울여 주시는 그런 분이세요.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시각(視覺) 장애인(障礙人)인 바디메오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돌아봐 주시옵소서!’ 라고 이야기했을 때 예수님이 보인 반응을 통해 우리는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8절에서 49절에,

*마가복음 10:48-49,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안심하라고, 일어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십니다. 가던 길을 멈춰 서서, 그의 말을 경청하시고, 안심하라고, 일어나라고 예수님께서 바디메오에게 이야기 하셨죠. 바디메오의 말을 들어주셨던 그 예수님이 동일하게 이 백부장의 말을 들어주시며 경청하시고, 반응하시는 모습을 몸을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백부장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반응하신 그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가 예수님께 올려드린 그 이야기를 들으시고, 경청하실 줄 믿습니다. 아멘~! 오늘 본문에서 알아볼 수 있는 예수님의 세 번째 모습은 이와 같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님은 우리를 고쳐주십니다.

III. 세 번째, 예수님은 우리를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고쳐주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본문 7절과 13절에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나오는데요.

*마태복음 8:7,13,
7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을 만나주셨어요. 그리고 그 백부장의 이야기에 경청(敬聽)하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 이야기를 들으시고, 자신의 종을 고쳐달라는 그 절박한 심정이 담긴 간구를 흘리시지 않으시고, 그 간구(懇求) 그대로 이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시는 예수님을 우리는 본문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백부장의 집에 가셔서 직접 고쳐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강력한 의지(依支)가 담겨있습니다. 바쁜 사역 스케줄 가운데서도 반드시 내가 너희 집에 가서 중풍 병에 걸려서 마비(痲痹)가 와서 있는 고통(苦痛)하고 있는 그 종(從)을 고쳐주겠다 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약속에서만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까 13절에서 읽은 것처럼,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봅니다. 백부장의 집에 가지도 않으시고 말씀만으로, 백부장의 종에 그 질병을 고치시고, 백부장이 이제는 종이 건강(健康)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모습을 우리는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절(懇切)한 간구(懇求)를 흘리지 않으시고, 들으실 뿐만 아니라 직접 고쳐주시겠다고 의지적으로 약속해 주시고, 그 약속을 반드시 이행(履行)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멘. 이 ‘고쳐주리라’ 그리고 ‘나으리라’ 라고 번역된 헬러 원어인 이오마이라는 동사는 신약 성경에서 총 27번 사용된 단어입니다. 근데 이 단어는 단순히 육체적인 치료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회복, 전인격적인 회복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동일한 단어를 사용한 누가복음 6장 18절 말씀을 살펴보면 이유를 알 수 있는데요. 제가 읽겠습니다.

*누가복음 6:18,
18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받은지라.
-귀신에게 고난을 받는 자들도 고침을 받았다라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단순히 육체적인 회복을 넘어서서, 영적인 회복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 단어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종(從)을 고치신 것은 단순히 중풍병(中風病)만, 단순히 육체적인 어려움만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의 영을 함께 회복해 주신 것이란 것을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또 이 단어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전인격적으로 회복(回復)되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육체(肉體)뿐만 아니라, 그 영혼(靈魂)마저 회복(回復)되기를 간절(懇切)히 소망(所望)하시며 일하시고 계십니다. 이 예수님의 치료(治療)는 전인격적(全人格的)인 치료입니다. 온전(穩全)한 치료입니다. 미처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마저도 미처 우리가 돌보지 못했던 영역(領域)마저도 회복시키실 수 있는 그런 완벽(完璧)한 온전한 치료입니다. 이런 치료를 행해 주시는 예수님이야말로 우리는 참된 치료자이심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떠세요? 나의 참된 치료자 되시는 예수님을 늘 온전히 경험하고 계신가요? 오랫동안 기도했던 질병이 낫지 않고, 악화되는 상황을 혹시 발견하고 계신가요? 그런 경우에 주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원망하는 마음이 들지 않으신가요? 아니야, 전인격적인 치료를 하고 계셔,, 라고 당연(當然)하게 여기시면서 담대(膽大)하게 선포(宣布)하고 계신가요?

전격적인 치료를 약속하시고, 또 실제로 베푸시고 계신 그 예수님께서 유독 내 인생만은, 유독 내 육체만은 왜? 돌보시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너무 서운한 마음이 들고, 너무 억울한 감정이 들고, 예수님과 더 깊은 관계를 가지기 어려운 경험을 가져본 적은 없으신가요? 왜, 우리에게 치료한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 생길까? 왜 우리에게 고난이 닥쳤고 왜 나는 상처를 받아야만 할까? 이러한 질문처럼 우리에게 왜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다가오는지, 왜 어려움이 있는지, 왜 그 어려움이 지속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또 우리가 참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우리는 무지(無知)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죠.

하나님께서 어떤 큰 계획을 가지시고 내 삶을 운행하고 계신지에 대해 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또 여전히 지속(持續)되고 있는 어려움에 대한 그 의미를 다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왜 주님은 치료가 필요할 때 보이시지 않는가? 라는 우리의 질문에 명확한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려주면서요.

※제가 섬기는 교구 안에 참 큰 어려움을 당하신 권사님이 한 분 계십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결혼 이후에 정말 아름다운 가정을 정말 만들어가는 것을 보고 기뻐한지가 얼마되지 않았는데, 며느리가 둘째 딸을 낳고 10일만에 대동맥 파혈로 소천하게 되었습니다. 졸지에 60대 내외 권사님 내외가 주 양육자가 되어서, 7살 손녀와 이제 10일 된 손녀를 양육하게 되었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갓난아이를 부모처럼 돌봐야 하기 때문에 주일 현장 예배조차 오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됐어요.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그 사랑하는 아들마저 올해 초의 급성 백혈병(白血病)으로 항암치료를 갑작스럽게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인 치료를 위해 골수 이식을 받아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당장 항암 치료를 받는 과정 가운데 골수 이식자를 열심히 찾아봤지만 여의치 않았습니다. 결국 골수 이식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그 아들의 딸, 사랑하는 첫째 손녀밖에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땅한 사람을 찾지 못해 결국 초등학교 2학년 된 그 첫째, 손녀가 병실에 입원하는 모습을 봐야 했던 그 할머니, 할아버지의 찢어진 심정, 사랑하는 며느리를 떠나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들에게까지 이런 병마(病魔)가 찾아와야 했다는 사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 눈물로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어미 아비의 심정은 겪어본 사람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을 견뎌내셔야 했던 우리 권사님과 안수 집사님이 너무나 가여워 보이고, 너무나 안타까워하면서 교구에서 정말 마음을 다해 함께 기도했습니다. 1학기 종강 주간 마지막 다락방 모임이었던 그 금요일에 마침 골수 이식이 진행되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 마지막 모임을 청계산 기도원에서 기도회로 모인다는 소식을 듣고, 제가 찾아뵈었어요. 청계산에서 간절히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눈물로 기도하는 가운데 이 권사님은 이런 고백을 들려주셨습니다. ‘이번 일을 통해 하나님이 살펴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나를 사랑해 주시고 함께 하신다는 것을 느낍니다. 이제 주님께 더 질문하지 않고 잠잠히 기도하려 해요.’ 권사님의 그 눈물의 고백을 듣는 가운데 저와 순장님, 순원들 모두 고난 가운데 함께 하시는 그 예수님은 깊이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이 백부장의 이야기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만나주시며, 우리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우리를 고쳐주십니다. 우리의 상황을 아시는 그 예수님은 지금도 이해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백부장의 종과 같이 전인격적인 치료를 경험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그 예수님의 온전히 체험할 수 있을까요? 기도 응답이 없는 것 같은 이때에, 그리고 고난이 계속 되는 이때에, 그 괴로움의 시간 가운데,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우리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목사님 예수님을 이미 모신 지, 제가 30년 40년이 되었걸랑요?’ 라고 이야기하시는 분이 여기 계실 수도 있습니다. ‘목사님, 이미 삶의 주인이신데도 여전히 변화가 없어요. 대답이 하나도 변화가 없구요. 나는 여전히 이 질병과 싸워야 하고요. 여전히 이 가정의 문제와 씨름해야 하고요. 여전히 재정의 문제, 관계의 문제에 여러 가지 상황적인 문제로 예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도 가끔 헷갈릴 때가 있어요.‘ 라고 이렇게 반문하는 분이 여기 계신지는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렇게 반문하게 되신다면, 오늘 나의 모습은 이 성경 말씀에 나오는 백부장의 모습과 한번 비교해 보셨으면 좋겠어요. 백부장은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오늘 8절 말씀 우리 함께 읽겠습니다.

* 마태복음8:8,
8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백부장의 대답에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어요. 주여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이 두 가지 표현에 아주 중요한 진리가 담겨있어요. 백부장은 예수님을 ‘주’, 라고 지칭하며 존경의 표시를 합니다. 물론 이때 유대 랍비에 대한 의례적인 정말 예의상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찌됐든 주님이라는 뜻으로 예수님을 부릅니다. 그뿐만 아니라,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라고 고백하는데요. 이 뒷부분을 통해 백부장이 단순히 예의상 주님이라고 얘기 했는지, 아니면 자신의 인생에 주인이라고 고백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이 말씀만으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전능하신 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믿고 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라고 말씀하셨네요.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백부장이 ‘주여’, 라고 고백했을 때 단순히 랍비여, 단순히 선생이여, 가 아니라 ‘내 주인이시여’, 라고 이야기할 게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백부장이 감당하지 못 하겠사오니. 라고 이야기를 했는데요. 여기에는 감히 자신이 예수님을 모실 자격(資格)이 없다. 라는 고백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을 모실만한 자격이 없는, 한없는 죄인(罪人)에 불과한 나를 찾아오시려 하십니까? 예수님의 말씀만으로 충분합니다. 라고 백부장이 고백하고 있는 거죠. 백부장에 이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구절 말씀도 함께 읽어볼까요?

*마태복음 8:9,
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백부장은 예수님의 권위(權威)를 인정했습니다. 자신이 지휘관이기 때문에 내 밑에 있는 100명에게 뭐라 하면 오고, 가라하면 가고, 또 하라 하면 하는데,,, 예수님, 예수님 말씀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럼 예수님, 내 삶을 좌지우지(左之右之)하실 수 있는 권위가 예수님께 있습니다. 백부장은 이렇게 ㅖ수님의 권위를 인정했습니다. 우리는 백부장과 같이 예수님이 전능하신 분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백부장과 같이 예수님이 우리 삶의 주인이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 권위가 예수님께 있습니다. 내가 내 자신의 주인이 아니라 예수님이 내 자신의 다시 한 번 인정해야 합니다. 근데 여러분 실제로 정말 그렇게 인정하고 계세요? 내 삶의 왕좌(王座)에 정말 예수님이 늘 언제나 항상 앉아계신다고 단언 하실 수 있으신가요? 사실 많은 경우에 우리 인생의 왕좌에 다른 것이 앉아 있을 때가 많습니다. 자녀를 두신 분들은 자녀가 그 왕좌에 앉아 있는 것을 경험하실 거에요. 그 자녀의 앞길이, 자녀의 학업이, 또 자녀의 학업 성취도가 또 자녀의 구직 활동이, 수험생활이, 내 인생의 왕좌에 앉아 있는 것을 봅니다. 내 건강이, 내 재정이, 내 시간이, 내 가정 상황이, 내 인생의 왕좌에 앉아 있을 때가 예수님이 앉아 있을 때보다 더 많기도 합니다.

말로는 예수님을 모신다고 실상 예수님을 모시기 보다는 내 인생이 중요하다고, 내가 간구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왕좌에 앉아 계신 주님을 더 끌어내릴 때가 있기도 합니다. 내가 원할 때만 예수님을 찾고 싶어 해요.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만 예수님이 이루어 주시기를 바라곤 합니다. 그렇다 보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재 장소, 가버나움이라는 이 우리의 삶은 괴로움의 장소가 돼 버립니다. 좌절(挫折)의 장소가 되어 버리곤 해요. 그래서 고난을 겪는 가운데 치료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본인이 백부장을 만나주셨던,이야기를 들어주셨던,그리고 고쳐주셨던 가버나움으로 인도하십니다. 가버나움이라는 말은 원래 다음과 같은 ‘크파르 나훔’이라는 문자적으로 봤을 땐 나훔의 마을인데 이 나홈이라는 단어에 위로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가버나움은 위로의 마을이란 뜻을 담고 있어요. 예수님은 우리를 괴로움의 마을이 아닌, 위로의 마을로 초청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가버나움이 괴로움의 장소가 되지 않도록, 위로의 장소가 되도록 지금도 함께 하시며 치료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8장 7절 말씀드리면, 1번 더 같이 해볼까요? 시작

*마태복음 8:7,
7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예수님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중풍병자에게 치료를 약속하셨습니다. 고통 받고 있는 종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백부장에게 반드시 고쳐 주리라. 약속하셨고 그것을 이뤄 주셨습니다. 확신을 주시며, 오늘도 일하고 계신 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동일한 말씀을 주고 계십니다.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의 이와 같은 말씀을 주고 계십니다.

※올해 초에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몇 년 전에 함께 제자 훈련을 했던 집사님께서 췌장(膵臟)암 진단을 받으셨다는 소식이었어요. 근데 이분이 유방암을 두 번이나 앓고 극복하셨던 분이세요. 추적(追跡) 검사 때마다 깨끗하다는 소식을 간증으로 삼으셨는데, 췌장암 3기라는 소식을 들으셨다고, 작년 연말에 이미 친정동생이 위암 4기 판정을 받았다며, 목사님 기도 부탁합니다. 라고 소식을 전한지 얼마 안 되어서 이런 소식을 전해 듣고, 제가 전화상에서 제가 많이 울었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지난 4월에는 우리 남편 집사님께서 교통사고를 크게 당해 어깨와 척추 뼈가 골절(骨折)되었습니다. 뺑소니 사고였는데요. 3개월 넘게 재활을 해야만 하는 상황 그리고 그 이후에도 여전히 후유증이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이 집사님께 한꺼번에 일어날까, 모두가 그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췌장암 수술을 앞둔 집사님을 위해, 기도하기 위해 오랜만에 또 제자 반 집사님들이 함께 모여 병문안을 갔습니다. 근데 그 자리에서 이 집사님이 ‘목사님 집사님 저는 정말 감사해요. 지금까지 지켜주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인 걸요. 제 인생의 주인이시니 가장 선한 길로 인도 해 주실 줄 믿어요.’ 이 집사님의 고백은 정말 큰 도전이 됐습니다. 이 집사님의 고백대로 예수님께서 우리 집사님을 선한 길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8차 항암 이후에 진행된 제거 수술이 잘 진행되게 해주셨고, 이후 치료 과정이 잘 진행될 수 있도록 의료진의 지혜를 주고 계신 상황입니다. 중풍병은 백부장이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매개체(媒介體)가 됐습니다. 어 중풍병(中風病)은 예수님이 이야기를 들어주신다는 그 사실을 깨닫게 하는 도구(道具)가 되었습니다. 이 중풍병은 백부장의 종이 예수님의 전인격적인 치료를 경험하게 하는 놀라운 도구가 되었습니다. 만약에 종이 병에 걸리지 않아도 백부장은 예수님을 찾아올 생각조차 못 했을 겁니다. 만약에 중풍 병이 아니었다면 이 병에 걸렸던 종은 예수님이 치료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겁니다.

※저는 엊그제 저녁까지 제자반 집사님들과 함께 대만 북부 신주시에서 3박 4일간 훈련 아웃리치를 진행했습니다. 지난 25년간 선교 사역을 이어오셨던 우리 교회에서 파송되었던 선교사님과 협력해서 사역을 진행했는데요. 막상 이야기를 듣고 보니 대만에 가신 지는 2년 밖에 안 됐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자초지종(自初至終)을 들어봤더니, 이전에 중국 우루무치에서 위구르족을 상대로 20년간 사역을 이어오셨는데, 갑자기 바뀐 중국 정세(政勢) 때문에 쫓기듯이 그 사역(事役)지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셨답니다. 많은 중국 선교사님드링 그리 하듯이, 어쩔 수 없이 중국 사역지에서 갑작스럽게 나오게 되신 거에요. 그리고 정말 뜻하지 않은 상황 가운데 하나님의 신적 개입으로, 정말 예상치 못했던 대만 땅에, 아이티(IT) 도시라고 불리는 신주시에 사역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그 신주시에 60년 전에 우리 한국 고신교단 첫 번째 선교사로 파손되었던 그 사역자가 세웠던 교회, 현지 교회 신주 장로교회에서 협력하게 되신 거였어요. 제가 선교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하나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만약 선교사님께서 20년 동안 생각하셨던 그 사역 지를 갑작스럽게 떠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함께 생각하지 않았겠구나, 만약에 선교사님이 고난(苦難)의 길을 겪지 않으셨다면 신주 장로교회가 사랑의 교회에서 전해준 그 사랑의 섬김을 받지 못했겠구나, 만약 이 선교사님의 거처를 그렇게 옮기시지 않으셨다면 하나님께서 대만 땅에서 일하시는 것을 우리 모두가 보지 못했겠구나, 선교사님 부부에게 찾아왔던 이 고난의 길로 보이는 변화(變化)가 우리 제자 반에게, 신주 장로교회에게, 사랑의 교회 영 가족에게 있어서는 위로의 길, 치료의 길이 된 것을 저는 봤습니다. 선교사님 부부 덕분에 주변 지역의 노방전도를 할 수 있었고, 더운 날씨에 그리고 여러 가지 상황에 지쳐 있었던 현지 교회 성도들을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그 대만 사람들에게 영혼 구원의 열정을 나눠줄 수 있었어요.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모통 동네였던 가버나움은 괴로움의 마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괴로움을 털어놓을 수 있는 곳 괴로움의 이야기를 들어주시는 피난처, 치료가 일어나는 현장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함께하시는 그곳은 백부장뿐만 아니라, 기적을 체험한 모두에게 치료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내 삶에 가버나움은 비록 고난이 가득해서 괴로움의 장소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이 함께 하시며 일하시는 나의 치료자 되시는 그 예수님께서 지금 역사하시는 위로(慰勞)의 장소가 된 줄 믿습니다. 아멘.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며, 위로를 경험하신 하는 곳이며, 소망을 발견하는 곳이 된 줄도 믿습니다. 나의 치료자 되시는 그 예수님께서 오늘 외로움의 가버나움에 있는 우리를, 위로의 가버나움 치료의 가버나움으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그 가버나움으로, 초청하고 계십니다. 치료자 되시는 예수님께서 고통과 절망 가운데 이 말씀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영 가족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아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십니다. 네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 우리를 고쳐 주십니다. 아멘. 그 예수님께서 육체뿐만 아니라 우리 영혼까지 전인격적인 치료를 베풀어 주신 것을 경험하시며 나의 치료자 되시는 그 예수님을, 치료가 필요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우리 영 가족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의 치료자 되시는 그 예수님께서 우리뿐만 아니라, 복음을 받는 모든 이들을 치료하실 줄 믿습니다. 나의 치료자 되시는 그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참된 회복을 경험하시는 사랑하는 영 가족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여전히 배반하고 여전히 의심하며, 여전히 주님을 왕좌에서 끌어내리려고 하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를 만나주셔서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고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전히 우리 삶 가운데 있는 고난 그 길 앞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해 주옵소서. 그 고난의 길이 위로의 길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나의 치료자 되신 예수님께서 괴로움에 가버나움을 위로와 치료의 가버나움으로 바꾸어 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해 주옵소서. 그리하여 나의 치료자 되시는 예수님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그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요약
언제나 우리를 만나주시고 이야기를 들어주시는 예수님만 찾고 따르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참 된 치료자이신 예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전인격적인 회복을 경험하며, 예수님을 삶의 진정한 주인으로 모시며 위로와 치료의 기적을 경험하는 인생이 되어 우리 예수님의 지상 명령인 예수님을 증거 하는 구힌 자녀로 살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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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7월 3일)
제목: “본능적으로 vs 성령으로”
말씀: 갈라디아서 5:16-24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사회: 강건우 부목사님
 
설교자: 오규현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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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5:16-24,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19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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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성령의 새 바람이 불어와 생명의 능력 역사하는 수요저녁기도회에 함께 하신 모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저는 오늘 설교 제목을 본능적으로 대 성령으로라고 이렇게 잡았는데 어 이것이 현재 우리 신앙인의 현주소를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 먼저 17절 말씀을 한번 보시면요.
 
*갈라디아서 5:17,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7절에는 지금 거스르니 서로 대적하므로, 라는 단어를 써서 우리 안에 있는 내적 갈등의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와 성령은 서로에 대해 반대하기를 갈망하고 서로를 대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육체는 우리의 몸 신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罪)와 부패(腐敗) 가운데 있는 옛 사람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아담의 타락(墮落)으로 그의 후손(後孫)인 우리들은 모두 본질상 진노(震怒)의 자녀였습니다. 육체 욕심으로만 가득 차 있었고, 죄악 된 본능을 따라서 살아갈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자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우리 안에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존재가 들어오게 되었으니 바로 하나님의 영이자,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면서 원래부터 있었던 이 육체와 새로운 존재인 성령 사이에 내적 전쟁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절대로 공존할 수 없는 이 존재가 있기 때문에 성령과 육체 사이에서 어느 쪽도 온전히 쫓아가지 못하고 늘 엎치락뒤치락 좌절하고 갈등하는 그러한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마지막 24절에 말씀을 가만히 보시면요. 24절 말씀인데요.
 
*갈라디아서 5:24,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서 육체가 그 정욕(情慾)과 탐심(貪心)과 함께 이미 어떻게 됐다고요. 이미 죽었다고 했습니다. 이미 죽었습니다. 그런데 왜 육체가 우리들을 아직도 유혹하고 성령과 내적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미 죄와 육체의 세력이 지배(支配)하는 옛 세상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十字架)와 부활(復活) 사건(事件) 속에서 다 처리되었습니다.
 
그런데 옛 세상은 여전히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야 할 영역으로 아직도 지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옛 시대와 새 시대가 겹치는 시기, 신약 적으로 말하면 종말론적인 그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의 삶은 불가피하게 이 악한 세대 속에서 육체와의 전쟁에 계속 직면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상황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될까요? 늘 이러한 상황에 맞닥뜨리면서 좌절(挫折)하고 절망(絶望)하면서 괴로워 하면서만 그렇게 살아야 할까요? 이런 내적 갈등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할지, 어떻게 해야 할 지 가장 확실한 방법을 바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16절 말씀을 보시면,
 
*갈라디아서 5:16-16,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8절 말씀을 보면요.
 
*갈라디아서 5:18,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만일 성령에 인도 하시는 바가 되면, 이라고 했구요. 그리고 25절, 우리가 읽진 않았지만 25절 말씀 보면,
 
*갈라디아서 5:25,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지금 보면 성령을 따라, 성령의, 성령으로, 우리말에서는 조사가 이렇게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원문을 보면 이 단어는 똑같은 단어입니다. ‘프뉴마티’라고 하는 똑같은 단어입니다. 성령으로 성령에 의해서 라고 하는 이 동일한 단어가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조상으로 볼 때 어떻습니까? 지금 17절이라고 하는 우리의 이런 현주소에 우리의 상황 신앙의 현 상황이 있다면, 16절과 18절 바로 ‘프뉴마티’라고 하는 이 샌드위치 빵 속에 17절에 우리의 내적 상황이 끼어있는 바로 그러한 구조입니다. 저는 바로 여기에 이 해답의 열쇠가 있다. 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오늘 이 샌드위치 빵 역할을 하고 있는 프뉴마티에 대해서 저와 잠시 2가지 각도에서 한번 생각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러한 상황들을 극복하고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을지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 편에서 이루어지는 강력한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I. 첫 번째로, 하나님 편에서 이루어지는 강력한 성령님의 인도하심.

-샌드위치 빵 중에서 지금 위쪽에 있는 빵은 하나님 편에서 이루어지는 그러한 것으로 18절에 나오는 것처럼 뭐라고 나와 있죠.
 
*갈라디아서 5:18,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여기 지금 너희가 만일 이라고 했죠. 지금 가정법에 쓰이고 있는데, 이 가정은 무슨 가정이냐면요. 미래의 어떤 불확실한 일에 대한 가정이나 아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 거기에 대한 바람 정도가 아닙니다. 여기 나오는 등장하고 있는 이 과정은 확실하고 반드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그리고 진리처럼 일어나는 현상을 말할 때에 사용되는 가정입니다. 이것은 본래 우리 육체를 지배하고 있었던 죄의 세력보다 더 강력하신 성령님께서 우리들을 인도하신다. 라고 하는 바로 그러한 강력한 논증(論證)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진 주된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4절에 있는 말씀인데요. 함께 우리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8:14,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아멘 특별히 지금 이 로마서 8장 14절과 아까 읽었던 본문의 18절에서 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다. 라고 하는 이 단어는 현재 수동태 동사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 여기 주목을 해야 됩니다. 이것은 신자의 어떤 이런 책임 있는 삶이 스스로의 그 부단한 노력만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주도적인 그 행위에 대한 끊임없는 순종의 반응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의 인도하시는 바가 된다. 라고 하는 이것을 우리는 무엇으로 식별할 수가 있을까요? 종교 교육자였던 마르틴 루터가 이 부분들을 아주 잘 설명을 해 주고 있는데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령에 인도하시는 바가 된다는 것은 사람이 감심(感心-깊이 마음에 느낌) 즉 마음속 깊이 느끼고 그렇게 감동되어 마음이 움직임으로 육체 즉 옛사람을 죽인다는 것이다. 곧 하나님 외에 모든 것을 버리며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버림을 말한다. 그것은 죽음과 죽음의 친구들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며 허탄한 이 세상 쾌락과 그것으로 말미암은 부패하고 더러운 열매를 내어버림이며 이 세상의 모든 좋다는 것들을 버리고 그 대신 고난의 자리로 나아간다. 이것은 우리 본성의 특징이 아니라, 우리 속에 계신 성령님의 역사이다.” -마르틴 루터-
-루터의 이 말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들이 어떠한 모습인지를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어제 아침에 L국, 제가 보안상 나라 이름을 밝힐 수가 없는 점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L국 단선을 마치고 귀국을 했습니다. 단선 기간 중에 주신 그 은혜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렇게 수요 저녁 기도회에서 말씀을 나눌 수 있다는 이 사실이 큰 특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단선에서 이렇게 저희가 그 단선 방문했던 현지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에 대한 설립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오래전에 한국 선교사님을 통해서 복음을 받아들이게 됐던 그 마을의 한 유지였던 분이 그곳에 교회를 세우게 되었는데, 정부에서 알고 그 교회를 부수고 그분을 감옥에 가두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분은 감옥에서 마치 이 사도바울이 정말 감옥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렇게 간수에게 나아갔던 것처럼 오히려 그곳의 간수(看守)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래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간수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마을에 교회를 세우는 것을 허락해 주게 되고 그분을 풀어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다시 교회가 세워지고, 십자가가 달리게 되어서 맘껏 예배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 그 가운데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교회를 저희가 방문을 했을 때, 아주 소수 민족들이 사는 시골 마을이었습니다. 과연 이곳에 교회가 있을까? 라고 생각이 될 정도로 아주 깊은 산속으로 이렇게 들어갔는데 예배당을 탁 열고 정말 건물도 허름하고 한 듯 저는 열고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면, 그 안에 드럼과 그리고 일렉트로닉과 베이스 기타가 앰프에 연결되어 있어서 이렇게 하나님을 막 놀랍게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 찬양하는 소리가 온 하늘에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제가 너무나 제 가슴속에 이렇게 스며들어오는 정말 놀라운 찬양이 그들의 부르고 있었는데, 그 찬양이 뭐였냐 면요. 이렇습니다.
 
‘할렐루야! 주를 찬양 하여라! 할렐루야 내게 자유 주셨네. 죄의 저주 끊으신 구원의 주 그 이름 주 예수 나의 산 소망’, 이 찬양을 연주하고 있더라구요. 아 그 시골 마을에서 최신 찬양을 그렇게 부르고 있는 걸 보면서 전 너무나 놀랐습니다. 그곳에 들어가서 함께 1시간 정도를 뜨겁게 찬양하고, 말씀을 듣고 통성 기도하고, 또 성찬식까지 했습니다. 우리가 와서 한 건 아닌 것 같고요. 근데 성찬식이 어떻게 준비가 되어 있더라고요. 그리고 예배가 2시간 넘게 진행이 됐습니다. 정말 열악(劣惡)한 환경(環境) 아까 제가 말씀드렸지만 거기에 이렇게 드럼 일렉 베이스 기타가 있지만 정말 그것이 막 우리가 하는 것처럼 정말 그것이 새것이고. 이것이 아니라 정말 헌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곳에서 열악한 환경 속에서 비록 우리와 언어와 형식은 다르지만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전심으로 찬양하고 예배하는 그 모습에서 저는 제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부끄럽게 다가왔습니다. 나는 이렇게 오늘도 이 자리에 와서 찬양을 하는데, 아 그때 바로 며칠 전에 그곳에서 찬양하고 예배했던 생각이 나면서 너무나 제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저는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데, 과연 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것만큼 나는 전심으로 그렇게 하나님 앞에 그렇게 감격하며 찬양하고 있는가? 그 모습을 돌아볼 때의 회개(悔改)가 절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에 오게 되는 이 모든 손해(損害)와 모든 고난(苦難)들 그 땅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순간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속해있었던 마을에서 쫓겨나고 그리고 가지고 있는 직업도 잃어버리게 되고 그리고 모든 것을 잃게 되는 어떤 그러한 고난과 그런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배의 자리로 나아오는 그 소수 민족들의 모습 그것이 성령에 인도하시는 바가 아니면 우리가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을 통해서 깊은 회개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 우리들의 모습 또한 성령님의 역사하심이다. 라고 그렇게 생각될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聖靈)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참된 신자는 자기 내면에 있는 이 악의 소굴을 끊임없이 경계하는 자들입니다. 제가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신자의 삶은 악한 이 세상의 역량(力量) 아래에 유혹을 받을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 놓고 그렇게 있을 때에 죄악된 본성이 우리가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서 마치 게릴라처럼 갑자기 공격해 들어올 수가 있다. 라는 것입니다. 어떤 모습으로 그렇게 찾아올까요? 오늘 말씀의 19절에서 21절 말씀 보면, 바로 이러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갈라디아서 5:19-21,
19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이것은 당시 이방 세계에서 만연했던 죄의 목록들인데요. 이 편지를 받는 갈라디아 교인들뿐만 아니라, 오늘날 이거 이 죄악의 모습들은 우리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먼저는 성적인 죄악들입니다. 결혼 관계 이해관계에서 이뤄지는 불법적인 성관계를 말하는 음행(淫行)과 다양한 형태의 도덕적인 악을 말하는 더러운 것, 이걸 오늘날로 치면 성추행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호색(好色) 즉 성적인 것에 대한 노골적(露骨的)이고 과도한 탐닉(耽溺)과 방종(放縱) 생활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등장하는 죄악은 이방문화에 나타난 종교적인 죄입니다.
 
우상숭배(偶像崇拜)와 주술(呪術), 미신(迷信)이구요. 그리고 여기서부터 비롯된 술 취함과 방탕함 이 방탕하다는 것은 술을 진탕 마시고 떠드는 행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타난 죄악은 대인관계에서 나타난 죄악입니다. 바로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분나가 폭발(爆發)하는 것입니다. 당 짓는 것, 분열(分裂)함, 투기(妬忌) 바로 질투심(嫉妬心),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19절 말씀을 가만히 들어보면 어떻게 됐죠? 육체의 일들이 이게 육체의 일이 맞을까? 아닐까 헷갈리거나 분간이 안 된다고 그러나요? 뭐라고 얘기하죠? 분명하다. 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분명하다 그랬습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다. 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방금 언급된 육체의 분명한 일들을 생각하거나 혹시 미혹당에서 행하고 있는 것이 있으셨다면 오늘 이 시간 성령님의 인도화심 앞에서 우리의 모습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회개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제가 오늘 제목을 ‘본능적으로 대 성령으로’ 라고 이렇게 잡았다고 해서 오해하지 말아야 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성령님과 제약된 본성이 힘의 균형을 잃어서 이게 누가 이기냐, 서로 정면으로 대립하는 지루한 어떤 그러한 전시 상황인 것처럼 그렇게 보여 질 수 있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라는 것입니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고 승패(勝敗)는 결정되어 있습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육체의 세력을 결정적으로 처리하셨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이미 승리한 싸움을 하는 것뿐입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降服)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終熄)되어서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으로부터 결정적으로 벗어나게 됐죠. 그런데 독립국으로써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날은 언제일까요? 1948년 8월 15일입니다. 그 3년 동안의 기간이 있습니다. 이때까지 여전히 우리나라 일제 잔당(殘黨)이 남아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일제 잔당과 싸우는 것, 이것은 어떤 싸움일까요? 승리를 위한 싸움이 아닙니다. 이미 결정적으로 게임이 끝난 싸움을 하는 것뿐이라는 것이죠. 지금 바울이 말하는 신자들의 상황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신자들은 지금 육신의 세력보다 훨씬 더 강력한 성령님의 지배 아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령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으면, 아무리 강한 우방(友邦)을 가졌다고 해도 도움이 되지가 않을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공동체를 통해서, 그리고 상황을 통해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심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동시에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우리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을 혼돈(混沌)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오늘날 이 세상은요,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합니까? 우리 자신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라고, 자기를 수련(修練)하고 명상(瞑想)하고 그렇게 나아갑니다. 자기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부추깁니다. 그리고 수많은 시끄럽고 복잡한 소리들이 가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방해하고 있다. 라는 것이죠.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듣겠다는 그 소원과 그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준비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의 말씀을 들을 때 휴대폰 스마트폰을 두면 하나의 말씀에 집중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쉽지 않습니다. 네, 잠깐 그것을 두고 하나님 말씀에 내가 듣겠다는 소원을 가지고 거기에만 집중을 하고 순종(順從)하겠다는 준비된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뭐냐면 바로 두 번째로, 우리 편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바로 그 일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샌드위치 빵 중에 아래쪽 빵 즉 우리들 편에서 이루어지는 성령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우리 16절 말씀을 한번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같이 있습니다.
 
II. 우리 편에서 이뤄지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함.
 
*갈라디아서 5:16,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아멘 여기 행하다. 라고 이렇게 번역된 단어는 걸어가다. 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바울 서신이나 요한 서신에서는 살아가다 처신하다. 라고 하는 이런 뜻의 신자의 삶으로 자주 묘사되는 단어입니다. 게다가 이 단어가 지금 현재 명령형으로 쓰여 있어서 이 행위를 지속할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 결국 우리의 역할은 뭘까요? 우리의 역할은 자명합니다. 성령을 따라 산다는 것은 우리가 그의 권위에 복종하며 그의 인도하심을 환영하고 그 말씀에 순종한다는 바로 그것입니다.
 
저희 팀은 L국으로 단선을 가기 어려운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었습니다. 저희 팀원 중에 비행기를 오래 탈 수 없는 분이 있기도 했고요. 그리고 면역(免疫)반응(反應)으로 인해서 습하고 더운 환경에 적응할 수 없는 분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가기 전부터 무슨 일이 있었냐 하면 저희를 인솔(引率)하기로 하신 선교사님께서 한국에 잠시 귀국하셨을 때 갑작스럽게 발견된 질병(疾病)으로 인해서 수술(手術)을 하게 되셨습니다. 그러면서 저희 팀을 직접 현지에서 인솔할 수 없는 그러한 상황을 맞이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가기 전에 갑작스러운 일정이 생겨서 못 갈 것 같다고 그렇게 연락 오신 분도 계셨구요. 그리고 제 아들은 왜 하필이면 그렇게 저의 아이들도 둘째부터 열이 나기 시작해서 첫째까지 고열(高熱)이 나가지고 출국(出國) 전날 밤 11시에 저는 겨우 오픈하고 있었던 병원을 찾아서 진료(診療)를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만약에요. 이 모든 일에 대해서 제가 본능적으로 반응을 했다. 그러면 이 L국 단선을 결코 시행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단선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예비(豫備)해 두신 놀라운 은혜들도 누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본능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함으로 반응하였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성령님의 강력한 인도하심도 있었지만, 우리 편에서는 단선을 위해서 모일 때마다 기도하고, 그리고 개인의 자리에서는 릴레이로 돌아가면서 금식(禁食)기도를 하면서 몸부림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기 때문이다. 라고 그렇게 생각되어집니다. 여러분 오늘 16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갈라디아서 5:16,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지금 너희들을 성령을 따라 행하라. 라고 하는 권면과 그리하며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고 하는 이 약속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좀 더 명확하게 말하면 명령과 강한 부정 안에서의 가정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무슨 말이냐 하면 이 명령을 따르면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 확실하다. 라고 하는 이 미래에 대한 강한 부정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문법적으로 해석하면 이렇게 됩니다. 너희들은 성령을 따라 살아가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할 것이 확실하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성령님을 따라서 살아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사소한 선택에서부터 중요한 선택에 이르기까지 실수가 없어집니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일들을 기쁨으로 200프로 감당(堪當)할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100프로, 하나님 100프로, 그리고 불평 없이 늘 사랑과 기쁨이 넘치고 사람들과의 관계나 어떠한 일을 행함에 있어서 그것을 잘 감당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마치 육체의 욕심은 더 이상 나와는 상관없는 그러한 것처럼 보여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 열매가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 22절과 23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한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5:22-23,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아멘 사랑, 희락, 기쁨이죠?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친절함을 말합니다. 충성, 온유, 절제, 자기통제 여러분 이 얼마나 아름다운 단어들입니까? 정말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맺길 원하고 맺어야 하는 아름다운 열매들이 아닙니까? 이러한 것들은 모두 본능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인간적 행위를 통해서 산출(算出)되는 육체 일들과는 전혀 반대되는 성령님께서 늘 승리할 때마다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열매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복수가 아닌 단수로 쓰여 지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이미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승리(勝利)를 우리 삶에 적용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靈)이십니다. 원 보혜사(保惠師) 되신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하고 계셨던 모든 사역을 이 땅에 오셔서 그대로 바톤 처치를 하여서 지금도 역사하고 계시는 또 다른 보혜사이십니다. 요한 칼빈은 이 본문을 주석하면서 성령을 따라가는 삶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미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한 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마음이 간절하다. 그는 자기의 사욕을 따르지 않는다. 양이 목자를 따르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좋아한다. 이런 사람은 벌써 그리스도 안에 있어서 정죄를 면한 자이니, 율법 아래 있지 않다. 하나님 앞에서 그의 행실에 허물과 결점이 있을 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허물없는 것과 같이 도와주신다.” -요한 칼빈-
 
-날마다 성령님의 인도(引導)하심과 통제(統制)하심을 받으며 사시길 바랍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면요. 뜬구름 잡는 예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지금도 조명(照明)하고 역사(役事)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붙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편에서는 무엇을 합니까? 성령님이 그렇게 우리를 강하게 붙들면 우리 편에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게 하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가 감당하는 모든 행동에 동기로 작용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이기적인 욕망과 그리고 우리의 본능들을 통제하고 마침내 통제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지금까지 행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행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 순간 우리가 여태껏 내 힘으로 할 수 없었던 놀라운 일들을 하게 될 것이고. 또한 우리가 소망하는 모든 일들이 이루어져 나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를 통해서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우리 자신의 삶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속해 있는 가정(家庭)과 그리고 감당하는 사역(使役)과 우리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와 그리고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일 가운데 놀라운 변화의 역사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간증을 하면서 설교를 마무리하려 합니다.
 
저희 팀이 본능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모두가 한마음으로 성령님의 인도화심에 순종함으로 나아간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살아서 물론 여기 돌아왔습니다. 네,,, 비행기를 탈 수 없었던 분이 비행기를 타는 동안 오래 탈 수 없었던 분이 비행기 타는 동안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덥고 습한 환경에 있을 수 없는 분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단선 기간 내내,,, 구름으로 하늘을 덮으시고 비가 오지 않는 시원한 날씨를 주셨습니다. 옷과 신발이 하나도 젖지 않고 우기(雨氣)라 그랬거든요.
 
그 동네가 근데 우산도 챙겨갔습니다. 쓸 일이 없었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 뭔지 아십니까? 한국에 내리자마자 옷과 신발이 다 젖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비록 선교사님은 현지에서 저희 팀을 인솔(引率)하지 못했지만, 함께 협력하고 계셨던 현지 선교사님들과 그곳에서 또한 사업하고 계신 집사님을 통해서, 다양한 사역 현장을 보고 또 다양한 간증을 들으면서 앞으로 하나님께서 그 땅에 마치 우리나라의 그 일을 일으키셨던 것처럼, 그 땅에 일어나게 된 놀라운 선교 역사들을 눈으로 목도(目睹)하고, 기도의 지경이 넓혀지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근데 제가 더 가서 더 깜짝 놀랐던 건 뭐냐 하면, 현지 선교사님과 집사님이 우리 팀의 이런 어려운 사정들을 아시고 함께 기도해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이러한 작은 순종의 발걸음으로 그 땅이 앞으로 임하게 될 위대한 하나님의 선교 사역에 한 점을 찍는 놀라운 특권을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돌아오기 전 만났던 선교사님 중에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거대한 영적 항공모함(航空母艦)인 사랑의 교회에서 1년에 1번 오는 특공대(特攻隊) 투입(投入)으로 저희는 다시 이 땅에서 선교할 동력(動力)을 얻게 됩니다. 이제 이미 갔다 온 팀도 있겠지만, 계속되는 국내외 아웃리치에 참여하는 제자 훈련생들 그리고 영 가족들이 부름 받은 곳에서 그렇게 순종으로 나아갈 때에 성령의 새 바람이 불어와 놀라운 은혜 역사를 경험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영 가족들이 이 하절기를 맞아서 주일 예배와 토비새를 통해서 충만한 은혜를 누리고 또한 매일의 삶 속에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말씀에 순종하는 예수님의 온전한 제자로 살아가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요약
본능적으로 행하던 육체의 일들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회개하고 성령 하나님이 인도하시려는 순종의 생애로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국내외 아웃리치에 참여하는 제자, 사역 훈련생과 영 가족들이 부름받은 곳에서 성령의 새 바람이 일으키는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쓰임 받아야 한다. 하절기에도 더욱 열기를 더할 주일예배와 토비새에 은혜 충천함을 받고 매일의 삶 속으로 뛰어 들어 능력을 받아 하나님의 온전한 제자로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저희들을 성령 하나님의 거듭나게 하심과 새롭게 하시는 역사로 말미암아 자녀 삼아 주심과 우리 인생의 여정을 여기까지 강권적으로 인도해주심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자. 여전히 연약하여 본능적으로 행해왔던 육체의 일들을 이 시간 말씀에 순종하여, 정직하게 인정하고 회개하며, 성령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려는 순종의 삶을 살아가며 풍성한 열매를 맺기를 소원하자. 또한 계속 진행되고 있는 국내 아웃리치와 단기 선교에 참여하는 제자사역 훈련생들과 영 가족들이 부르심을 받은 자리에서 순종할 때에, 성령의 새 바람이 불어오는 놀라운 은혜 역사를 경험하고, 모든 영 가족들이 하절기를 맞아 예배의 자리를 더욱 사모함으로 나아가고, 매일의 삶 속에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말씀에 순종하여 은혜로운 응답을 받는 예수님의 온전한 제자로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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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6월 26일)
제목: "부르심에 합당한 삶"
말씀: 에배소소 4:1-3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사회: 강건우 부목사님
 
설교자: 이기원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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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배소소 4:1-3,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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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 저녁 기도회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 자리로 나아갈 수 있는 건강과 환경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성령의 강력한 역사 가운데 기도 응답의 은혜와 말씀을 통한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 그리스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생명의 강수가 흘러넘치는 우리 수요 저녁 기도회에 참여하신 모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4장 1절에서 3절 말씀입니다. 우리 함께 교독하시겠습니다. 제가 먼저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이 마음에 품고 섬긴 교회들이 많죠. 많았으나 오늘 본문이 쓰여 진 특별히 에베소 교회는 사도바울에게 좀 각별한 교회였던 것 같습니다. 서기 55년경부터 약 3년 동안 에베소에 머물면서 사도바울은 도란노 서원과 회당에서 매일 말씀을 전했는데 이때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사도바울을 힘들게 하는 핍박(逼迫)과 공격(攻擊)도 많았지만 놀라운 기적들도 수없이 일어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구원의 역사가 차고 넘쳤던 곳이 바로 이 에베소였습니다. 사도바울이 정말 좋은 믿음의 동력 자들과 행복한 사역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서로 함께 한 시간들을 통해서 사도 바울과 에베소 성도들은 서로에게 각별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러한 애틋한 마음은 나중에 그가 에베소를 떠난 후에도 3차전도(傳導)여행(旅行) 말미에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길에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에베소에서 약 50여 킬로미터나 떨어진 밀레도로 불렀을 때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때 장로들이 밀레도로 망설임 없이 사도바울의 부르심을 듣고 왔구요.
 
사도바울은 그들과 만나서 참 오랫동안 보지 못한 회포(懷抱)를 풀면서 얼마나 반가웠을까요? 함께 먹고 자면서, 욕도 같이 먹고 같이 즐거운 시간 또 영혼들이 성장하고 구원받는 것들을 같이 함께 한 동역 자들을 오랜만에 봤으니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그리고 사도 바울의 고별(告別) 설교를 들었습니다. 이들이 서로에게 얼마나 각별(各別)한 마음을 갖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그런 모습입니다. 따뜻하고 또 특별히 각별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에베소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이 그 애절한 마음 사랑하는 마음을 가득 담아 쓴 편지가 바로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이 담겨있는 에베소서입니다. 에베소서 1장부터 3장까지는 교리, 교리 이론 또 교리를 담고 있구요.
 
그리고 오늘 함께 읽은 본문 4장부터는 그 교리를 바탕으로 한 실천에 대한 말씀을 시작하는데, 그 시작을 어떻게 하느냐 그러므로, There for(데어 포어), 그 단어로 이 전환점(轉換點)을 시작합니다. 오늘은 시대 간 관계상 저희가 1절부터 3절까지만 살펴보지만, 4장에 담겨있는 큰 맥을 우리가 좀 짚고 넘어가야 됩니다. 그 맥(脈)은 사장에 담겨있는 그 맥은 사도 바울이 이 애틋하고 각별한 마음을 갖고 있던 성도들에게 에베소 성도들에게 하고 싶었던 그 말은, 교회의 일치(一致)성, 교회의 하나 됨 , ‘유니티’를 이루어라 라는 맥입니다.
 
머리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루는 성도들이 너희들이 주체로서, 하나가 되어야 된다는 이 하나 됨, 유니티를 이루기 위한 구체적(具體的)인 방법들을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1절 2절 3절이 그 구체적인 방법들을 나누고 있는데, 그리고 이 메세지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도 바울이 어떤 상황 가운데 서신을 썼는지, 또 보냈는지를 예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에게 주안에서 갇힌 내가라는 말씀으로 시작을 합니다.
 
빌립보서, 골로새서 그리고 빌레몬서와 함께 에베소서가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쓴 옥중 서신이라는 것을 말해주는데,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렇게 에베소 성도에게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에게 쓴다. 라고 하는 이 주안에서 갇힌 것을 언급하는 것은 절대로 그들에게 이 성도들에게 동정(同情)을 구하거나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그런 차원의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거룩한 자랑을 하고 있는 건데요. 그런 상황에 있는 것이 이런 상황에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빌립소서에 보면 빌립보서에서도 보면 옥중에서 내가 기쁘고, 기쁘고, 기쁘노니, 너희도 기뻐하라. 라고 옥중(獄中)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과 같은 맥락(脈絡)입니다.
 
복음의 가치를 위하여 본인이 옥살이를 하는 것은 절대 부끄러운 일이 아니고, 동정이나 불상이 역임을 받아야 할 일이 아니고, 오히려 너무나 감사하고 너무나 영광스러운 일인데 너희도 이런 세상의 가치를 초월(超越)하는 영혼의 가치를 갖기 바란다. 라는 차원으로 ‘주안에서 갇힌’, 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희를 권하노니’, 이 권하노니, 는 에베소에서 그 사도바울의 단순한 에베소 성도들에게 요청하는 요청(要請)이 아니라, 내가 그냥 말한다. 내가 말해줄게 차원을 넘어서 간청(懇請)한다. 애원(哀願)한다. 탄원(歎願)한다. 라는 그런 강력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어떤 간청을 하고 있는가 하면 바로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여러분 같이 한번 할까요?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라. 라는 간청, 애원, 탄원을 간곡(懇曲)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부르심은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부르심은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예수 그리스어를 통한 속죄의 은혜로 구원에 이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부르심을 말합니다.
 
이런 고귀한 부르심에 저희가 반응(反應)을 해야 하는데 어떤 반응을 해야 하는가? 하면 합당(合當)하게 해야 합니다. 합당한 반응을 해야 합니다. 그럼 이 합당하게로, 이렇게 번역이 되고 있는 그 헬라오 단어는 ‘익시오스’입니다.
 
◎익시오스는 저울에 ‘균형을 맞춘다.’라는 의미로 한쪽에 얹은 것과 반대쪽에 얹은 것의 무게가 같아야 한다. 라는 말인데요. 무엇에 비길 수 있는 당연히 보답한다.
-란 말에서 유래된 말로 어울리게 그 부르심에 ‘가치 있게’, ‘어울리게’ 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부르심의 가치에 맞게, 어울리게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이런 삶을 살 때 무슨 일이 일어나나요? 4장의 메인 핵심, ‘교회가 하나 된다.’는 거예요. 유니티를 이룬다는 거예요. 한 몸을 이루는 교회의 통일성을 갖고 같은 방향 같은 비전 같은 꿈 같은 사명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2절부터, 교회의 일치 하나 됨을 가능케 하는 필수 덕목들을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헬라어가 참으로 정교한 언어입니다. 그래서 칼바르트의 아들 마르쿠스 바르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헬라어 같이 한번 여러분 눈으로 보세요.
 
◎“헬라 원전에 나오는 이 헬라어 동사가 표현하는 절박함을 정확히 번역하여 전달한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만큼 이 단어가 요구하는 것은 크고 또 큰 것이다.” -마르쿠스 바르트-
 
-여러분 헬라어가 갖고 있는 정교(精巧)함, 섬세(纖細)함은 참 안타깝게도 많은 경우 다는 아니지만, 한국어는 영어로 담지 못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 덕목(德目)들을 이렇게 나열한 것들을 볼 때,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단어들인데요. 그 덕목들 속에 들어있는 헬라의 정교함, 섬세함 헬라어만 가지고 있는 깊은 맛이 좀 있습니다.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여 갖추어야 하는 첫 덕목인, 겸손(謙遜)의 그 정교함이 깃들여 있습니다. 우리가 문득 생각하는 겸손함은 어떤 것일까요?
 
거기에 있는 그 겸손함과 그 당시 문화 속에 담겨있던 겸손함의 차이에서 오는 의미가 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값어치와 진가를 나보다 높게 생각하면서, 그것을 인정하는 마음을 갖는 것, 인정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 겸손함이죠. 근데 헬라어에 담겨있는 이 겸손함 에는요. 1단계 더 나아가서 그들의 아래에 있는 자로, 그들 밑에 있는 자로, 취급받기를 원하는 마음을 갖는 것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 그거 아시나요? 그 당시 그리스나 로마 사회에서는 이런 겸손이 굉장히 낯설고 천시(賤視) 받고 혐오(嫌惡)스럽게 까지 여겨지는 개념(槪念)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이런 겸손에 해당하는 단어 자체를 잘 사용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이 겸손함에 담겨있는 의미가 그들 아래 다른 사람 밑에 있는 자로서 취급받기 원하는 마음까지 담고 있다 보니까 거기에는 굽실거리며 복종(服從)하는 노예(奴隸)의 모습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잘 사용하지도 않았구요. 그 단어를 별로 좋아하는 단어로 지금은 얼마나 좋은 단어입니까? 겸손함, 얼마나 좋은 단어입니까? 그때는 안 그랬다는 거죠. 그때 그리스, 그때 로마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그렇게 좋게 받아들여지는 단어 개념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별로 겸손은 덕으로 생각되어지지 않는 그런 단어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화에서 겸손을 정말 혁명적(革命的)으로 선포하고, 혁신적(革新的)으로 보여주셨던 겸손(謙遜)의 최고의 표본(標本)이 있으시죠.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여러분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8절까지 말씀을 한번 읽어볼까요? 같이 읽겠습니다.
 
*빌립보서 2:5-8,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라는 이 하나님의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그들 아래에 있는 그런 취급을 받는 그 위치로 내려가서 그 겸손의 극치를 보여주는 이 모습이, 여러분 이 당시에는 얼마나 문화에 맞지 않는 생소한 저게 뭐야? 뭐 다른 짓이야! 라고 할 수 있는 생소하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정말 혁명적인 선포였구요. 모습이었구요. 그랬던 것 그런 것이 여러분 좀 상상을 좀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런 모습으로 오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죠. 그러나 그 당시에 이거 그 모습을 보는 그 당시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받아들였는지를 우리가 살펴볼 고민해 볼 필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충격을 한번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남을 존중하고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냥 거기까진 우리가 알겠죠.
 
그렇게 종처럼, 노예처럼 취급받는 것을 원하는 마음까지, 원하는 마음까지 갖는 것이 바로 겸손이라고 부르심에 합당한 성도가 가져야 하는 모습이라고, 그 사회에는 이 사회의 흐름을 역류(逆流)하는 선포(宣布), 그 선포를 저와 여러분들이 마음에 새겨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그래 남을 좀 높게 여기는 건 노력을 하죠. 그러나 조금만 남이 나를 무시하면 그렇게 취급을 해버리면 우린 어떤 반응을 보냅니까? 너무 마음의 상처가 크죠. 가만히 있지 못하죠. 물론 여러분 이런 취급을 그냥 바보처럼 아무 때나 어떤 상황에서든 상관없이 받아 받으며 살아야 된다. 절대 그런 말은 아닙니다. 언제 이런 취급을 받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 하면 사명을 감당할 때, 믿음과 신앙의 순결을 지킬 때, 교회에 하나 됨을 이룰 때, 저분이 지나가면서 한 저 한 말이 가슴에 배겨서 나를 찢어내고 있는데, 그때 해야 되는 내 반응은 그것을 향하여 총알을 또 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하여 이 취급받기를 원하는 마음까지 가지며 수용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누구처럼? 예수님처럼, 자신이 존중받고 인정받기 위한, 여러분 고도의 교묘(巧妙)한 수단(手段)으로 써가 아니라, 교회에서 얼마나 겸손한 모습을 갖고 있는 성도들 중에 그런 실수를 범할 때가 있지 않은지요? 오히려 존중을 받기 위한 교묘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이런 고도의 교만을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
 
복음(福音), 생명(生命), 사명(使命), 비전, 꿈 앞에서, 그 앞에서 주위 사람들을 진심으로 존중한 마음, 존중하는 마음을 갖는 것 수모(受侮)를 감수(甘受)하며 희생(犧牲)을 원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바로 오늘 사도 바울이 말하는 부르심에 합당한 삶의 첫 번째 덕목 겸손인 것입니다.
 
1). 겸손(謙遜)이다.
-그럼 생각보다 어렵죠.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근데 나중에 그 해결책도 주시는데 그래서 이 겸손은요, 어려운 겸손은 이 겸손은요, 모든 영적인 복의 재료이고, 모든 덕에 뿌리이며, 이 겸손의 깊이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누리게 되는 것이라고 어거스틴이 말을 했습니다.
 
2). 온유(溫柔)이다.
-그 다음 덕목은요, 온유(溫柔)입니다. 온유는 하나님께 대해서는 기쁘게 순복(順服)하며 사람에 대해서는 남의 약점(弱點)에 대해 부드럽게 대하는 태도(態度)를 말합니다. 친절함, 너그러움 이런 말에서 유래(由來)된 말로 온화함, 정중함을 뜻하고 있는 그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딱 떠오르는 말이 있죠. 하나님께는 전심(全心)으로, 사람에게는 진심(眞心)으로가 떠오르는 덕목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사용된 온유(溫柔)라는 단어에도요. 헬라어의 정교함이 좀 담겨있는데요. 그것은 온유라는 단어에 담겨 친절함, 너그러움, 부드러움, 온화, 정중 그 의미가 있는데요. 결코 연약(軟弱)함은 내포(內包)하고 있지 포함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프라우테스’ 라는 이 온유라는 단어 에는요. 강한 자가 오히려 강한 자가 자신을 억제(抑制)하고, 조절(操切)함으로써 남을 부드럽게 대하며 섬긴다. 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연약해서 내가 뭘 할 수가 없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냥 참는 차원이 아니라 강함에도 불구하고요. 자신을 억제하고 조절함으로써 부드럽게 대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지만, 아니 그런 자격도 있지만 그런 힘도 있지만 그런 정당성도 있지만 내가 도대체 이 자리에서 이렇게 섬긴 게 몇 년인데, 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정당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데도 그런 취급과 그런 말을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으로서 해야 할 것은 그런 정당성을 다 갖고 있어요. 남들이 다 인정해요.
 
거기 가만히 있으면 안 되지 한소리 해줘야지 있으면 안 되지, 이렇게 행동해야지, 남들이 다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들까지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는 우리 목사님들까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하여 절제하고 조절하면서 온유함을 유지하는 거, 그게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가져야 하는 온유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유의 표식 중에 하나가 절제(節制)인 것이고. 이 온유를 통제(統制) 아래 있는 힘이다. 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성경적 온유는요, 하나님의 통제, 다스림 통치 아래 있는 힘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온유라는 것입니다. 교회 일체성, 하나 됨을 이루기 위해 실천해야 하는 그다음 덕목은 올해 참험입니다.
 
3) 오래 참음이다.-(마크로 디모스)
-남에 대해서 자기가 받은 피해에 대해서 분노(憤怒)나 복수(復讐)의 마음을 갖지 않고.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도 ‘마크로 디모스’ 라는 헬라어가 담고 있는 또 정교한 의미가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먼 거리 마크로스와 분노 디모스가 합쳐서 마크로디모스, 이 분노를 오래 참는다. 라는 그런 의미를 갖고 있는데, 그렇게 분노를 남을 향한 그 분노를 오래 참는 차원으로 그치지 않고 타인의 행동과 말에 대해 충분히 응징(膺懲)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참는 것을 말합니다. 아까는 정당성이 있었어요. 지금은 그 행동이 너무나, 너무나 불공정해서 충분히, 충분히 그 응징을 내가 해도 아니 거기에 대한 대가(代價)를 거기에 대한 결과를 반응을 요구(要求)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는 것을 말합니다. 오래 참음, 그냥 갚지 말라는 것과 충분히 갚을 수 있는 상황과 정황과 모든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들이 아무리 이야기를 한다. 해도 오히려 남들도 함께 또 동의를 해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하여 말라는 오래 참음, 정당성(正當性) 가운데 오래 참음, 단 순간 시간적인 길이를 넘어 또 다른 차원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특히 성경에서 어떤 때 사용됐냐면, 하나님의 죄인들에 대한 심판을 오래 참으시고 죄인들을 바라보신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고, 안 참으셔도 되는데,,, 안 참으셔도 되는 그 정황과 정당성이 뚜렷한 데도 불구하고, 오래 참으시면서 기다리시는 또 거기에 그냥 가만히 있으셔도 되는데 한걸음 나아가서 더 해주시는 대속(代贖)의 은혜(恩惠)를 베풀어 주실 때, 사용된 단어가 바로 이 오래 참음, 마크로 디모스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 1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디모데전서 1:16,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바라보면서 오래 참으신 것을 그치지 않고, 예수 그리스를 통해서 대속의 은혜까지 한 걸음 더, 더 나아가서 그런 자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베풀어 주신 것이 바로 오래 참음, 그 단어가 거기에서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부르심이 합당한 삶을 사는 그 다음 덕목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입니다.
 
4)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다.
-이렇게 보면 앞에 나오는 이 단어는요. 이 이 덕목은요, 앞에 나오는 오래 참음의 다음 단계, 다음 단계 다음 경지(境地)라고도 할 수가 있는데, 용납(容納)하고는 상대의 잘못을 용서(容恕)하는 것을 말합니다. 상대의 잘못을 용서하는 거, 여러분 그냥 참았습니다. 아까는 그냥 제가 참았죠. 남들이 이렇게 모든 걸 할 수 있다. 라고 동의하는 정황 속에서 참았죠. 참았죠. 또 그런 가운데도 내가 뭘 해줬죠 또 해주는 대속의 은혜까지 베푸는 것 좀 더 해줬어요. 그렇게, 그렇게 충분한 정당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올해 참음이 있었어요. 근데 어디까지 가냐면요. 마음의 모든 것들을 응어리를 싣는 차원까지 간다는 거예요. 더 힘들어지지 않나요?
 
여러분, 베드로전서 4장 8절에 나온 말씀처럼, “사랑한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라는 말씀처럼 사랑은 타인들의 죄 담요를 덮는 것으로, 보이지 않게 가린다. 내 마음에 담요를 덮어서 여러분 상처는 있을 수 있겠죠. 잊혀 지지 않을 수도 있겠죠. 그러나 내 마음의 상처에 담요를 덮어 가지고 보이지 않게 하는 거, 죄(罪)를 정당화(正當化)하거나 그것을 변명(辨明)해 준다는 해줘라. 그런 뜻이 아니구요. 이들의 죄가 필요 이상으로 알려지지 않게 드러나지 않게 내 마음에 되씹으면서 새겨지지 않게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허물을 사랑에 담요로 따뜻하게 덮어주라. 는 그런 의미가 바로 이 용납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음 덕목을 이야기합니다.
 
5)평안에 매는 줄로.
-평안에 매는 줄로, 평안에 매는 줄 여기에서 평화는 peace, 평안 히브리어로 살롬, 헬라어는 에이레네의 평화와 화평으로 이렇게 번역(飜譯)이 되는데요. 여기에도 그 정교함이 또 담겨 있습니다. 샬롬과 에이레네의 평화(平和)와 화평(和平), 이 의미와 함께 어떤 의미가 또 추가 되냐면, 일치(一致)와 조화(調和)입니다. 여러분, ‘일치와 조화 하나 됨에 일치와 조화’라는 의미가 진정한 평화와 화평은 일치와 조화를 이루어야만 가능하다는 그런 뜻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치를 이루는 줄은 평안에 매는 줄, 줄은 골로새서 3장 14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골로새서 3:14,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줄이니라.
-이것을 조화(調和)와 일치(一致)를 이루는 이 줄, 이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평화의 근간이 사랑이고, 그 사랑의 줄로 평화 살롬, 에이레네의 조화와 일치, 하나를 이루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이루시는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그동안까지 느꼈던 이 우리의 암담(暗澹)함이 해결이 됩니다. 여러분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은 모든 것 일치와 조화, 사랑, 여러분 평안의 메인 줄, 모든 것들이 성령께서 가능케 이루어 줄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믿고 구해야 합니다. 내 마음을 다짐하고, 내가 그렇게 해야겠지. 라는 차원(次元)을 넘어서 성령께서 해주실 것을 믿는 그 믿음, 그것을 갖는 것을 성령이 하나 되게 해주시는 은혜를 체험하는 단계라는 것입니다. 힘써 지키라 우리의 역할이 있습니다.
 
6) 힘써 지켜라.
-열심히 애써 지키라는 의미와 함께 서둘러, 그리고 지속적으로. 라는 또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여러분 즉 성도들이 교회의 하나 됨을 향해 부지런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빨리 위에 명시된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는 평안에 매는 줄로 서로를 배워 교회의 하나 됨, 사명의 방향성 한 방향 한 꿈을 이루는 모습으로 가야하는데 그것에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힘써서 지켜라. 뒤로 미루지 말고 다음으로, 미루지 말고 내가 좀 준비되면 내가 상황이 좀 나아지면으로 미루지 말고, 당장 빨리 그리고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이루라 라는 말씀을 담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렇게 교회의 일치성과 또 하나 됨에 대한 부르심에 합당한 모습은 우리가 이 교회 안에서 에베소교회 안에서 성도들끼리 그런 모습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고요. 그리고 이 교회가 지상교회의 전체 교회, 또 하나님의 유니버설 처치, 시상교회 모든 교회를 교회와 하나가 되는 차원으로도 이 부르심이 합당한 모습을 갖는 교회로서의 역할을 또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평안에 메는 줄로, 그 평안에 메는 줄 가운데 희생과 섬김을 동행하는 사랑의 줄이 있죠. 글로 이렇게 동여 메어 주어야 합니다. 안에서 있는 한 성도들 그 성도들만 하나 되는 게 아니라 교회와 교회가 또 하나 되고요. 또 이 나라에 있는 교회와 저 나라에 있는 교회들이 또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힘써야 한다는 거죠.
 
그런 차원에서 우리 사랑의 교회는 여러분들의 그 헌신과 섬김으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 여러분들의 헌신으로 이런 사회 국내외적으로 많이 감당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한교섬이고요. 여러분, 한교 섬을 통해서 국내 교회를 섬기고 또 복음의 서진을 통해 유럽 교회를 섬기는데요. 이번에는 감사하게도 사랑 광주리를 통해서 우크라이나에 있는 교회를 통해서 평안에 메는 줄로, 우리가 한국에 있는 대한민국에 있는 사랑의 교회로서, 또 다른 나라에 있는 교회와의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가 되신 것을 힘써 지키는 마음으로 숨길 수 있는 기회가 좀 있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여러분들에게 간단히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29억 원어치의 의료기기와 의료품을 많은 분들이 헌신해 주셔서 우크라이나에 전달을 했습니다. 우크라이에 가서 한 4천여 키로의 그 육로 여정을 소화하면서 계속해서 제 마음에 드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크라이나를 보면 볼수록, 알면 알수록 이 어린 목동과 같은 우크라이나가 가난했죠. 여러 가지 면에서 너무나 뒤처져 있죠. 사람들은 뭐 다른 윗사람들은 모르겠으나, 그냥 길거리에서 만나는 사람 너무 그냥 착해 빠졌죠. 아니 이런 나라가 어떻게 거인이고 노련한 장수와도 같은 러시아를 상대로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전쟁을 하고 있을까? 그 생각이 계속 나는 거예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여러분 러시아는 세계 2위 군사 강국입니다. 정규군만 90만 명을 갖추고 있구요. 그런 이런 군사, 군사 강대국으로서 가지고 있는 모든 무기와 이런 것들이 뭐 어 뭐 세계 4위다, 이런 통계들이 많이 나옵니다. 거기에 그 반면에 우크라이나는요 총 병력이 20만 명밖에 안 되구요. 그리고 그 병력이 갖고 있는 무기는 구형(舊型)무기(武器)가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이 돈바스 지역을 통해서 밀고 내려올 때 러시아의 정규군이 최신 무기를 가지고 20만 명이 국경에서 이미 준비하고 대기하고 있다가 밀고 내려온 거구요. 이 우크라이나군은 키예프를 중심으로 별 준비 없이 밀려 내려오는 러시아 군대를 상대로 전쟁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또 한 가지는 이 푸틴 대통령만큼 전쟁을 잘하는 사람이 지도자가 아마 이 시대에 거의 없을 것이다. 생각을 할 정도로 전문가들은 전쟁의 전문가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조지아와의 전쟁, 그것을 통해서도 사흘 만에 항복을 얻어냈어요. 푸틴 대통령이 그때 푸틴 대통령의 지지율이 88%로 올라갔고요.
 
3연임 금지 조항 대통령 3연임 금지 조항을 그 지지율을 가지고 개헌을 해 가지고, 대통령이 돼가지고 아직도 대통령을 하고 있는 사람이 전쟁으로서 리더십을 구축(構築)한 사람이 바로 푸틴 대통령입니다. 최고의 정보기관들이 얘기했어요. 3일 만에 3~4일 만에 그 전쟁은 끝날 것이다. 전쟁이 일어난다면 일어나지도 않을 거지만 일어난다면 3~4일 만에 끝날 것이라고 발표했구요. 푸틴 자신도 그렇게 확고한 자신을 가지고 전쟁을 시작했는데, 3년째 전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 정황에 변화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이 전쟁을 치르면서 참 놀란 사람은요, 갑자기 밀고 내려와서 피해를 입은 우크라이나 사람들도 아니구요. 또 민간인 동족 살생을 하고 있는 그 모습을 보는 세계인들이 아니라 이 전쟁을 통해서 가장 놀랄 사람은 푸틴 자신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왜 본인이 그렇게 이렇게 길게 전쟁을 할 줄 몰랐거든요. 그런 반항 가운데 그런 대접 가운데 키에프를 치지 못하고 이렇게까지 물러날 줄 몰랐을 거거든요. 이렇게 미숙한 어린 목동이 전쟁에 노련한 거인 장수를 상대로 3년 동안 전쟁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 답을 찾았습니다. 우연히 기사를 보고 또 우연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정황이 어떤가를 보고, 주위 사람들을 과의 대화를 나눈 가운데 무엇을 발견하게 되었냐면, 러시아 침공을 한 2주가 흐른, 얼마 안 된 거죠. 그 2주 흐른 전쟁 초기에 우크라이나의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그 이상한 현상은 뭐였냐면 성경(聖經), 품귀(品貴)현상이었어요. 기사를 한번 띄워주실까요?
 
※영국 크리스찬 투데이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성서공회는 러시아 침공 이후 전례 없는 숫자의 성경 요청을 받았다며 사람들에게 나눠줄 성경이 없어 거절하고 있다는 발표를 했습니다. 우크라이나 성서공회의 올렉산드로 총무는 성경을 구하기 위해 찾아온 한 목회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전했다. 그는 우리에게 성경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손상되거나 심지어 폐지가 누락된 찢어진 사본이라도 달라고 간청했다. 여러분 전쟁이 났습니다. 어느 민족이, 어느 나라가 전쟁 난 상태에서 지금 거인 러시아가 밀고 내려와서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그 전쟁을 치르는 상태에서 먹을 식량을 주세요. 무기를 달라고, 국제사회에 호소를 해야 되는데,,, 그것보다도 먼저 무엇을 하고 있냐면 성경을 달라고 호소(呼訴)를 하고 있는 거예요. 몸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안식처(安息處)를 달라고 하지 않고 성경을 달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요, 하나님께서는요. 이렇게 성경을 찾는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 하나님을 갈망(渴望)하고 하나님을 애타게 찾는 이 백성들을 긍휼(矜恤)히 여기시고 보호(保護)하고 있구나! 라는 것을 제가 보고 깨달으면서 소름이 끼쳤습니다. 여러분, 전쟁이라는 비극적인 현실을, 여러분 현실 속에 너무나 큰 고통을 치르고 있지만 구소련의 잔재(殘在)라고 할 수 있는 우크라이나는 2개 전쟁을 치르고 있다. 하나는 부패다 하나는 전쟁이다. 라고 할 정도로 그 부패와 싸우고 있는 그 모습이 이 전쟁을 통하여 지금 나라가 지금 뒤집어지고 있구요. 그리고 타 종교와는 기독교, 개신교가 세 번째 종교였습니다. 단순히 세 번째 종교가 아니라, 무시 받는 종교였습니다. 러시아 정교가 먼저였구요. 패턴이었고요. 그다음에 종교 개신교였는데, 거기는 인테리나 멋진 사람은 가는 곳이 아니었구요. 그 좀 떨어지는 수준의 사람들이 가는 그 종교가 개신교였는데, 지금 이 판세가 바뀌고 있습니다. 여러분, 전쟁이 터지고 나니까 어떤 일이 벌어졌냐면 다른 종교들은요, 교회가 더럽혀진다. 라는 이유로 문을 닫기 시작했어요. 여기 들어오지 말라 피난민들이 떼거지로 밀려 들어오니까, 오지 말라고 문을 닫았어요. 그런데 개신교는요 문을 활짝 열고 피난민들을 받아들였구요. 목사님들이 그들과 함께 먹고 자면서 생활했구요. 목사님들이 전 세계에서 들어오는 구호 물품을 가지고 그분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어떤 목사님은 어떤 플랫폼에서 기차역에서 천 명씩, 3개월씩 매일 그들을 먹이면서 함께 그들과 샤워도 못하면서 지내는 그런 모습들이 바로 개신교 목사님이었고요.
 
그리고 땅이 다 폭탄(爆彈)의 미사일에 의해서 뒤집어진 땅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기도를 하고 예배를 드리고 크게 개신교가 그러다 보니, 러시아 사람들이 이제는 이런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이제는 개신교가 기독교가 우리가 믿어야 되는 신앙이고 종교다. 라고 하면서 젊은이들이 교회로 지금 밀려오고 있는 그런 모습이 보여지는 거, 그런 모습이 우크라이나입니다. 그러면 지난번에 칼 세미나 때 우리 46명 우크라이나 목사님들 오셨죠? 그분들이 그분들이에요. 가서 보니까, 우크라이나 사람들이요. 이 작은 목동들이 하나님을 갈망(渴望)해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요. 전쟁이 터지자마자 밥 주세요. 빵 주세요. 떡 주세요. 안식처를 주세요. 라고 하지 않고, 성경을 주세요. 라고 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고 계시는 거예요.
 
거기에서 저희가 배워야 하는 중요한 영적인 교훈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피 흘림 없는 복음적 평화통일, 여러분 우리 땅에는 전쟁이 없어야 하죠. 꼭 없기를 바라고 그것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통일이 이루어져야죠. 여러분, 이런 언제 전쟁이 일어나도 정말 이상하지 않은 이 현실 속에 사는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군사력을 키우고, 경제력을 키우고 외교나 정치를 아니에요. 그걸로 해결이 안 돼요. 우크라이나를 보니까 여러분들이 저와 여러분들이 한국 교회가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무릎 꿇고, 하나님을 갈망할 때, 말도 안 되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상대로 3년을 저렇게 전쟁을 하며 나름대로 승리를 거두고 있는 것처럼, 물론 많은 손해가 있지만 저렇게 견디는 것처럼 전쟁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통일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경제력을 키우고 군사력을 키우고 외교의 외교나 정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 자리에 나와서 하나님의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하며 기도하는 백성들이 늘어날 때 하나님께서 이 땅에 피해 흘림이 없는 복음적 평화 통일을 허락해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 지난주 토요일과 주일 우리 그것을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온몸을 다 바쳐서 하나님 하나님을 갈망합니다. 하나님을 간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강구하오니 이 땅에 피 흘림 없는 복음적 평화 통일을 허락하여 주소서. 통일로 가는 길을 저희가 섬겼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선은 우크라이나 이 위험 상황을 도와야 되겠죠. 그 회복을 하는 그 과정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바를 해야 되겠죠.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도 경험을 쌓아야 되겠죠.
 
그리고 그 우크라이나가 갖고 있는 곡창지대의 그 곡창, 곡식들을 나중에 하나님이 허락하실 그 통일의 시대 북한의 식량 문제 해결하는 데 사용해야 되겠죠. 그런 은혜를 달라고 우리가 또 섬겨야 되겠죠. 그리고 북한이 혹여나 UN을 통해 어떤 상태의 붕괴(崩壞)가 이루어졌을 때, 자국민의 자결권을 행사하게 될 때, 그 모든 권한을 다른 국가에 주지 않고, 그래도 내 민족 뇌동법 대한민국에 맡기고 그리고 사랑의 교회가 세운 사랑 광주리 또 사랑의 교회가 세운 모든 사역들이 국제적인 NGO로서, 우크라이나를 통해 쌓은 경험과 실적을 가지고 UN에게 인정을 받아서, 북한을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나라로 만드는데 쓰임을 받고 나가야 된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담임 목사님께서 외치시는 ‘2033-50 비전’을 현실적으로 읽는 방법임을 믿습니다.
 
♣요약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 제물 삼아, 날 자녀로 불러주신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의 합당한 삶을 살아가고,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과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며 평안에 매는 줄로 하나 되게 하신 성령님의 인도를 힘써 따라가야 한다. 모든 피조세계의 영광을 홀로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주님께서 지상의 교회가 하나 됨에 영광에 걸 맞는 희생하고 헌신하는 우리 사랑의 교회가 되기를 간구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한 교회를 세우는 차원을 넘어 교회가 교회를, 교회가 전 우주에 있는 전 세계에 있는 교회를, 또 평안에 매는 줄로 감당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사랑의 교회의 성도들, 사랑의 교회와 대한민국 교회되기를 원하며, 예배에서 승리하고 말씀의 검으로 무장하여 우리에게 주신 싸움을 능히 이기는 귀하고 축복된 주님의 군사가 되어야 한다. 부르심의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은 거기에 무게를 맞추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기억하여 그 무게감을 올려드리는 자로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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