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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04월 17일)
제목: "일어나 걸어라"
말씀: 사도행전 3:1-10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사회: 김대규 부목사님

설교자: 고영민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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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행전 3:1-10,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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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을 보면 나면서부터 걷게 된 이가 등장을 합니다. 지금 우리의 시대라 할지라도 장애인이 장애인(障礙人)에 대한 생각과 예우를 사회적 측면에서 배려한다고 해도 장애인들이 살아가기에 쉽지 않은 세상임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 당시 유대 사회라면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특히 아예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이라고 하면, 더욱 어려운 삶을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2절에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의 일상이 등장을 합니다.

 
* 사도행전 3:2,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이 사람을 사람들이 메고 성전 문 앞에 놓아주는 일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그 성전 문 앞에 앉아서 제사를 드리러 오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이 일상이었을 거예요.
 
사람들에게 아침에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아 성전 문 앞에 앉아서 구걸하다가 해질 때쯤에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집으로 돌아가는 일, 말입니다. 특별하게 무엇을 할 수 없었던 그에게는 이러한 삶이 매일매일 반복했을 것으로 우리가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라도 해야 먹고 살 것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한 평생을 살았을 그를 보고자 하면 마음 한 켠에 무겁고 먹먹한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만약에 우리 아이가 이렇게 한평생 살아가야 한다. 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삶은 너무나도 수동적입니다 구걸조차도 사람들에게 매어 나와야만 할 수 있는 사람 아닙니까?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만들어 가기는커녕 구걸로 인하여서 다른 사람들에게 받은 돈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면서 살아가는 그의 삶에는 능동적인 부분이 없습니다. 당시 사회상으로 봤을 때에는 결혼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녀를 기르는 기쁨도 아마 상상도 하지 않았을 거예요. 재산을 모으는 기쁨 어떤 일을 성취해서 얻는 기쁨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채 철저하게 수동적으로 주어졌던 삶을 살아갔던 큰 이변이 없는 한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아가야 했던 한 사람이 오늘 등장하게 되는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됐던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 모든 것의 시작이 무엇입니까?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에게 이 모든 것의 시작은 태어났을 때부터 걷지 못했던 그의 장애였습니다.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것이 원래 창조되었을 때 아름답게 살아갔을 바로 한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원흉(元兇)이죠. 그렇게 이것이 자신의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다 포기하고 지금까지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남아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도인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도 생명에 관한 것 영원에 속한 것을 전혀 꿈꾸지 못한 채 뭘 얻을 것 없을까? 뭘 더 얻을까? 하는 아주 현실적인 모습만 남아 있는 것 아닙니까? 그에게 남은 것은 그날그날 살아가야 할 현실의 문제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모습이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우리는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이 이 사람과는 우리가 다르다고 생각하기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 행동과 결정을 가지고 살아간다. 라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이 어그러지고, 어디서부터 어디서부턴가 무너져 있고, 어디서부턴가 잘못되어도 대부분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이처럼 말이죠. 이러한 삶이 맞는 것일까? 왜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하는 본질적인 질문들을 다 잃어버리고는 굉장히 수동적으로 오늘 아침을 시작하지 않습니까?
 
오늘 하루하루에 살아갈 현실의 문제만을 떠안은 채, 다른 사람 의해서 조직에 의해서 시스템에 의해서 혹은 여러 가지 상황에 떠밀려서 수동적으로 직장생활을 하거나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지 않습니까? 오직 오늘 하루의 삶에 문제만 매어서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이와 다른 것이 무엇이냐고 우리가 물을 수 있는 것이죠. 여러분들이 오늘 아침에 풀린 눈으로 회사에 출근하고 아무 생각 없이 주어졌던 일들을 해왔고, 그렇게 지금 죄송하지만 이 자리에 앉아 있다. 라면 수동적으로 말이죠. 이뿐입니까?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고 하자 무엇을 얻을까? 하여 그들을 바라보았던 것처럼 말이죠. 여러분들의 마음이 혹시 이 세상 가운데 어떻게 하면 무엇을 더 얻을까?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이 상황에 마음이 다 뺏겨있지는 않습니까? 시기를 또 차야 되고요. 지금은 이런 것들을 해야 된대 유행을 따라서 혹은 상황을 따라서 이렇게 해야 하고 저렇게 움직여서 이렇게 운영해야 된다더라. 하는 세상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이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현실의 문제 그러나 여러분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되는 이가 어느 날 구걸을 구걸이 너무 잘 돼서 그날은 풍족하게 보냈다고 해도 그에게 아무것도 변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 아셔야 됩니다. 우리의 현실의 문제가 해결되었음에도 변하는 것이 없을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 아셔야 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처럼 모든 것은 다 접어두고 세상사는 일에 함몰(陷沒)되어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청년부를 담당할 때 아이들을 심방(尋訪)에 보면 어떤 친구는 성공해야 하는 강박감에 사로잡혀 있어서 정말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는 친구가 있었어요. 성공해야 하고, 돈을 많이 버는 취급을 가져야 하는 것으로 대화가 가득할 때 여러분 교육자로서 어떤 마음이 드시는지 아십니까? 막 숨이 막혀옵니다. 어떤 말을 해줘야 하지? 온통 친구의 머릿속에는 성공과 좋은 직장과 어떻게 하면 현실의 문제를 타개할 수 있을까? 이 아이의 기본적인 태도(態度)가 바로 누구를 보아도 어떤 일을 마주쳐도 어떤 것을 더 얻을 수 있을까? 어떻게 더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그런 시선만 가지고 있더라는 겁니다. 완전히 여기에 함몰된 것이죠. 인생이 그게 전부가 아니고 더 가치 있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 라고 막 소리 지르고 싶은 마음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던 기억이 납니다. 여러분 혹시 여러분 중에 이런 현실에 함몰되어 있는 분이 계십니까? 예배와 예배에 와 계셔도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는 분이 혹시 계십니까? 오늘 근심과 염려로 주저앉아 계신 분이 혹시 계십니까? 그래서 현실이 신앙을 뒤덮어버려서 깊은 수렁에 빠지신 분이 계십니까? 이 깊은 수령에서 건져주시는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이 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현실의 문제 때문에 영원한 것을 잃지 않는 여러분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말씀을 좀 더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더 살펴보면 성전에 들어가려던 베드로와 요한이 그를 주목하여서 ‘우리를 보라’ 이렇게 말합니다. 드디어 베드로와 요한이 말하기 시작하니까 안심이 되죠. 구걸하던 그에게 베드로가 군더더기 없이 선포를 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내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 버려라 베드로와 요한은 그가 재물을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말했겠죠. 그러나 그가 정말 필요한 것을 바로 말합니다. 그가 이제는 포기했던 것, 그가 이제는 단념했던 것, 그래서 오늘 아침에도 사람들이 메고 올 수밖에 없었으나 사실은 메어 오면서도 마음속으로 진짜 간절히 원했던 것 어떤 말이요. ‘일어나 걸으라.’예요. 이제 어떻게 됩니까? 7절을 보니까,
 
*사도행전 3:7,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손목을 잡고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었다라고 말합니다. 8절에서는 뭐라고 말합니까?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다라고 말합니다. 아 이런 본문 보면 너무 마음이 좋죠. 네 여러분 혹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방글라데시에서 잠깐 사역을 했을 때 중간에 선교사님 사역을 도와준 적이 있습니다. 그때 뒀던 마을에 태어나면서부터 못 걸었던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 상체는 비장애인과 동일하게 보일지 모르겠어요. 그냥 다를 게 없었어요. 그러나 다리가 정말로 앙상한 거 있죠. 정말 뼈에 가죽만 살짝 붙어있는 앙상한 다리만 진짜 다리가 발가락도 뼈가 보 1만큼 앙상하게 보입니다. 어찌 보면 다리가 덜 자란 것처럼 짧아 보이기도 했던 것 같아요. 이런 모습이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오늘 말씀은 뭐라고 합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라고 말하자마자 발과 발목에 힘을 얻었다. 로 말합니다. 선포하자마자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해가 되십니까? 전 사실 그때 방글라데시에서 봤던 나면서부터 못 걸었다는 그분의 다리와 외에 여러 가지 조건들을 생각하노라면 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지금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은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뼈만 앙상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선포되었을 때, 걸었다는 말은 지금 걸을 수 있을 만큼 말씀 선포되자마자 근육이 붙어나가고 있고, 근육 가운데 걸을 수 있을 만큼 일반인만큼 여러분의 허벅지 만큼이요. 근육이 막 붓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작았거나 뒤틀린 뼈가 자라기 시작하고 바르게 맞춰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그뿐입니까? 갑자기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었던 그래서 균형(均衡) 감각(感覺)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던 사람이 다리로 걸었을 뿐 아니라 뭐까지 한다고요. 네 뛰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지금 등장하는 사건은 대단함이고 놀라움 자체예요. 눈앞에서 이 상황이 벌어졌다고 생각해보세요. 무릎 수술만 해도 재활하고 다시 뛰는데 몇 달이 걸리는 거 아시죠? 네, 이걸 생각하면 이것은 마치 아이가 걸음마를 하지도 않고도 갑자기 균형 감각을 얻은 것과 동일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시는 게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명령의 회복은 완전한 회복(回復)을 의미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상상을 해 보십시오.
 
“일어나 걸으라.” 선포했지, 내가 일어나 뛰라고 하지 않았다라고 말해서 뛰지는 못하고 이렇게 막 엉거주춤 이렇게 해왔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막 넘어질 것 같고, 그래도 이분은 진짜로 감사했을 거예요. 왜냐하면, 처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봤잖아요. 처음으로 한 발을 떼 봤잖아요.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회복은 지금 그런 상황 지금 상황보다 좀 더 나아진 회복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회복은 완전한 회복입니다. 모자람이 없는 회복인 것입니다. 지금 이 사람은 하나님의 완전한 회복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큰 은혜 아닙니까? 지금 저희 교회에도 사랑부가 있지 않습니까? 제가 신혼 때 화곡동에서 시작했습니다. 좋은 동네예요.
 
화곡동에는 사랑부로 유명한 교회가 있는데, 꼭 제가 주일에 사역하는 시간에 아마 교회 사랑부 예배 시간이었던 것 같애요. 그래서 출근을 하고자 하면은 이제 거의 매주 교회 앞을 지나갈 때마다 부모님이랑 사랑부 친구들이 여러 명이 교회에 이렇게 들어가는 모습을 보곤 했습니다. 하루는 아내가 당시 이제 주일에 교회를 가는 사랑부 학생들을 보면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보, 예수님이 다시 오시고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면 친구들도 완전히 회복되겠지?” 저는 깜짝 놀랐어요. 내 아내가 어 제 아내는 신학을 하지 않았습니다. 좀 놀랬어요. 그래서 제가 ‘물론이지’ 그랬더니, 아내가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아마 저기 함께 가는 부모님은 누구보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걸 기다릴 거야.’ 저는 매일같이 길을 매주 길을 지날 때마다 늘 동일하게 봤는데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이었어요. 그날에 예수님이 오시는 그날에 저분들도 창조 때에 기뻐하셨던 온전한 모습으로 회복이 일어나겠구나! 하면서 막 그날이 너무 기다렸던 기억이 납니다. 여러분, 그 교회 사랑부 부모님들이 그렇게 소망하고 기다리는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완성할 하나님 나라에서나 누릴 완전한 회복을 지금 여기 있는 그가 경험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그에게 무슨 치유 받을 조건이 있었습니까? 그가 보여준 특별한 믿음이 있었습니까? 아니에요. 오히려 그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뭘 얻을 게 없을까? 하여서 그들을 갈구하는 눈길만 바라보았던 사람 아닙니까? 현실에만 매어 있던 그의 삶에 성령의 강력한 능력에 폭탄(爆彈)이 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그의 삶을 완벽하게 회복시키고 계십니다. 그의 삶이 어그러졌던 근본적인 지점부터 완전하게 회복하고 계십니다.
 
단순하게 돈 몇 푼을 더 받아서 잠시나마 편하게 사는 것인 그런 임시적인 회복이 아니라, 그가 이렇게 이렇게밖에 살 수 없었던 근본적인 지점 나면에서부터 못 걷게 되었던 지점을 완전하게 회복시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회복시키실 때, 여러분들의 삶에 근본적인 부분부터 완전하게 회복시키시는 분인 줄 믿습니다. 어떨 때에는 우리가 이 부분만큼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들이라서 그게 남편이 될 수도 있죠. 그게 아이들이 될지도 모르겠어요. 우리 아이들만큼은 변화하지 않을 것 같아요. 저희 아버지만큼은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요. 그래서 이 부분만큼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상상하지도 않고, 기도하지도 않고,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에 다가오셔서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한 가지도 성령의 강한 능력으로 회복시키실 줄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도 현실의 깊은 수렁에 빠져 있어서 뭘 보아도 무엇을 얻을까? 로만 보이고 어떻게 더 벌어볼까? 로만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이 팍팍하게 살고 있는 우리라 할지라도, 주님께서 우리의 삶에 구석구석 모든 부분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완전하게 회복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할 수 있는 그가 들어간 곳이 어디입니까?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었던 성전에 들어갑니다. 그동안 성전(聖殿)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이라는 미(美)문(門) 앞에서 아이러니하게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수년을 보냈을 그가 말이죠. 장애인으로서 성전에 들어가는 멀쩡한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불허했을 그가 드디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당당하게 하나님의 품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전을 뛰어 들어가면서 그가 한 행동이 무엇입니까? 8절을 보면,
 
*사도행전 3:8,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하나님을 찬성했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재미있지 않습니까? 제자들은 지금 누구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했죠. 맞아요. 나사르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누구를 찬성하고 있죠. 하나님을 찬성하고 있어요. 왜 그렇습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했을 때 이러한 일이 너무나 능력이 넘쳐서 너무나 완전해서 하나님이 아니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찬성했던 것 아닙니까 특히 누구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했겠습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선포한 이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로 메시아였구나! 그리스도였구나! 그래서 그분이 참 구원자 맞구나! 하나님이 보내신 자구나! 거부할 수가 있었겠어요? 예수란 그분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보내신 구원자이시구나! 라는 걸 깨달았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것을 알 수 있습니까? 뒤에 서서 걸으며 뛰어 서서 걸으며 어떻게 들어갔다고 말하죠. 네, 성전에 아까 말했듯이 성전에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을 받고 구원을 받은 자라는 것을 지금 성경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11절부터, 베드로가 이 일이 너희가 죽인 예수로 인하여 일어난 일이라고 증언(證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회복은 우리의 삶에 영역(領域)만 회복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 완전한 우리의 삶에 영역만 회복할 회복을 뛰어넘어서 우리의 영을 완전하게 회복시키십니다. 성령의 능력의 폭탄이 그의 인생 가운데 떨어질 때 현실에만 얽매여 있던 저주(詛呪)의 끈이 끊어지고 삶이 완전하게 회복되는 것뿐만 아니라 이제는 생명에 관한 것, 영원한 것, 여기에 눈이 뜨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동안에는 무엇을 얻을까?
 
머릿속에 온통 그것만 있었던 사람 아닙니까? 오늘은 어떻게 하루를 보내야 되나, 오늘 저녁은 어떻게 해결하지? 이런 생각으로 가득 찼기에 관심도 없었던 것 필요도 없었던 것이 이제 눈이 뜨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돈보다 더 소중한 것 더 값어치 있는 것 돈으로 바꿀 수 없는 영원한 것에 심령의 눈이 뜨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말씀을 묵상할 때 지금 이 사람이 성전에 들어가면서 드리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 그의 인생에 처음일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을 해봤어요. 원망(怨望)과 무기력(無氣力)함으로 살아왔던 그의 인생에서 말이죠.
 
육체적인 완전한 회복을 경험했을 뿐만 아니라, 영적(靈的)으로도 완전하게 회복되어서 하나님을 바로 온전하게 찬양할 수 있는 자가 된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에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회복시키실 때, 여러분들의 삶의 문제들만 회복시키는 것에 끝나지 않고, 여러분들이 다시 온 전(穩全 한 찬양을 드릴 수 있도록 온전한 예배(禮拜)와 경배(敬拜)를 드릴 수 있도록 여러분들의 심령(心靈)도 완전히 회복시키실 줄 믿습니다. 세상의 욕심(慾心)들로 가려져 있던 여러분들의 눈을 다시 생명에 관한 것 영원한 것에 눈뜨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와 은혜(恩惠)의 은혜를 바라보는 여러분으로 회복시키실 줄 믿습니다. 이 밤에 사랑의 교회 성도님들의 삶의 영역뿐 아니라 영적인 영역에 완전한 회복을 경험(經驗)하시기를 소망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남은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과 같이 그날의 얻어진 재물(財物)로 기쁨을 누리며 그것으로 만족(滿足)하며 살아갔을 자들 아닙니까? 여러분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일을 다행히도 메어다가 줄 사람이 등장하죠?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이 비참(悲慘)한 인생들끼리 아무리 자기네들끼리 돕고 살아도 비참함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도와줘도 평생 데리고 나와서 성전 문 앞에 내어준다. 할지라도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은 똑같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에게 진정(眞定)으로 필요한 것은 사람의 도움도 아니오. 하루를 살아갈 재물도 아니오. 바로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하고 가장 필요한 것이 사람의 도움도 아니고 재물도 아닙니다. 바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인 줄 믿습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런 하나님의 완전한 회복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영적인 생채기가 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상처들이 곪아서 무엇을 해야 할지조차 잃어버리신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디선가부터 잘못된 것인지 몰라서 그저 눈물로만 기도하고 계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삶을 능력 있게 회복시키실 줄 믿습니다. 망가지고 무너진 여러분들의 삶을 좀 더 나은 정도의 회복이 아니라, 원래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려고 했던 완전한 축복으로 회복시키실 줄 믿습니다. 오늘 이 밤에 이런 완전한 회복이 회복을 주실 하나님께 믿음으로 나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삶에 회복뿐 아니라 여러분들을 영적인 깊은 수렁에서 건지셔서 더 다시 우리를 반석위에 세우시고, 기쁨을 회복시키시며 우리의 입술에 찬송을 담아주실 주님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믿음으로 나아갈 때,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되었던 이가 경험했던 완전한 회복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 이름으로 여러분과 여러분들의 가정 가운데 임할 줄 믿습니다.
 
♣요약
인생의 한계 앞에서 우리의 능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며, 진정한 기도로 올려드리면, 현실의 난제를 초월한 새 차원의 인생으로 비상하게 하심을 확신해야 한다. 한 생명에게 ‘일어나 걸어라’라고 선포하셔서 당장의 기적을 보이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말씀의 능력으로 삶을 살아가면 완전한 회복을 주실 것이다. 우리 인생 가운데 능력으로 찾아와 주시는 주님께서 인생의 한계 앞에 무력하게 무너져 있는 우리의 인생 가운데 은혜를 베풀어 주실 줄 믿어야 한다. 성령의 역사를 베풀어 주실 것을 소망하고, 완전한 회복과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완전한 회복을 경험하게 해 주실 것을 확신해야 한다. 우리의 심령이 회복되게 하심을 소원하며, 언제나 기쁨과 찬송이 되어,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일어나 걸어가면 주님은 항상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도우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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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04월 10일)

제목: "성령의 열매"
말씀: 갈라디아서 5:22-26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부목사님)
사회: 강건우 부목사님
 
설교자: 홍진기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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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5:22-26,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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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배를 통하여서 주님께 소리로 온전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인도하시는 은혜를 경험하는 시간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는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열매로 시작해서 열매로 끝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성경에는 많은 열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가장 처음 나오는 책인 창세기에도 창세기 2장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이후에 동산에 많은 각종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그중에 또 가운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라는 특별한 하나님의 명령을 주셨습니다. 인류의 가장 중요한 첫 사건이 바로 열매로 시작하는 것을 우리는 창세기 장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성경의 제일 마지막 요한계시록 2장에 봐도 열매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하시는 말씀으로 이 땅에서 많은 고난을 견디고 주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온 성도들과 교회에게 너희가 끝까지 지키고 이기는 자에게 하나님의 낙원에서 생명의 열매를 주시겠다. 라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창세기와 그리고 계시록 사이에 있는 서신서 그리고 복음서, 예언서 그리고 역사서에도 수없이 많은 열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가 잘 알고 또 흔히 듣 흔히 들었던 의의 열매 그리고 마음의 열매, 손의 열매, 회개의 열매, 좋은 열매, 나쁜 열매, 성경에는 많은 열매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고, 오늘 우리가 살펴본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 성도의 삶에 이 열매라는 거 의미를 가지고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열매는 풍성함에 대명사처럼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듯이 열매는 풍성한 열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열매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열매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열매라는 단어를 읽었을 때, 열매라는 이 말씀을 읽었을 때, 우리 머릿속에는 늘 풍성함을 떠올리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갈라디아서 말씀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풍성한 열매 맺는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마음을 우리가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풍성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이 시간을 통하여서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목자의 심정으로 원하시는 풍성한 삶이 경험되고 또 말씀에서 말씀하시는 풍성함을 우리만 우리 가슴 가득히 담고 삶의 자리로 나아가는 시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익은 성령의 아마 아홉 가지 열매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 외우시죠? 사,희,화,오,자,양,충,온,절.
 
처음부터 시작 네 그럴 줄 알고 제가 준비했습니다. 그래도 여러분들의 자존심을 세워드리려고 한 글자씩만 띄웠습니다. 처음부터 한번 하나씩 떠올려 보겠습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잘하셨습니다. 네, 72구절 암송한 것 같죠 이렇게 아홉 가지 열매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 가운데서 맺기를 원하시는 말씀입니다. 근데 이 아홉 가지 열매를 생각할 때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내 삶과 이 아홉 가지 열매를 기억할 때, 열매의 이미지처럼 부요하고 풍성하고 아름답고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찬 그러한 뜨거움이 느껴지십니까? 사실 그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훨씬 많지 않습니까? 이 성령의 아홉 가지의 열매를 볼 때, 또 내 삶을 비교해 볼 때, 내 삶에서 이 아홉 가지의 열매가 풍성하게 맺어지지 못한 내 삶을 보면서, 아 그래 내 삶 가운데 이 아홉까지 열매가 풍성히 맺어져야 되는데, 그래 내가 이 아홉 가지 열매 중에 뭐 아홉 가지는 아니더라도 반절이라도 좀 맺으면 살아야 되는데, 이런 생각을 먼저 하게 될 것입니다.
 
솔직히 저도 하나님께서 저에게 너 삶에 있는 아홉 가지 열매를 나에게 내 놓으라 라고 하나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신다면 저도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내어놓을 만한 열매가 없는 것임을 저도 고백합니다. 내어놓을 수 있는 열매라고는 풍성하지도 않고, 다 자라지도 않고, 시장인 시장에다 내다 팔수도 없는 그런 열매들밖에 우리 속에 있지 않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닌지 살펴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서 좀 깊이 있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었던 본문뿐만 아니라 갈라디아서 전체 주제의 흐름을 흐름과 함께 이 본문을 집중하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열매가 누구의 열매냐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누가 맺느냐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누구에게 속한 열매냐? 라는 것입니다. 이 열매는 분명히 성령의 열매 다른 말로 성령님이 소유하시고 계시는 열매 성령님이 맺으시고 성령님이 주인이신 열매, 라는 의미로 분명하게 성경에서는 성령의 열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느 원어에도 프뉴마토스 라고 말하고 있는데, 프뉴마, 성령에다가 아토스라는 소유격을 붙여서 성령님께 속한, 성령님이 소유한 열매, 라는 의미를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혹시 이 열매를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그리스도인이 맺는 열매,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이 맺는 열매, 혹시 이렇게 성도인 내가 맺는 열매로 혹시 생각하고 있지 않은지, 우리를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님의 열매 그리고 나의 열매 우리에게 성령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데 있어서 아홉 가지의 이 열매가 우리를 우리 아홉 가지 열매를 우리의 삶에 맺음에 있어서 이 열매를 성령님의 소유로 성령님의 열매라고 우리가 인식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성령님은 도와주시는 분이고, 나의 저에게 힘을 주시는 분이고, 은혜를 주시는 분이고, 그래서 은혜로 내가 맺는 열매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한번 오늘 말씀을 통해서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물론 현상적으로 이 열매는 내 삶 가운데 내 삶의 모든 자리에서 드러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이 열매의 주체를 성령께 두느냐, 아니면 이 열매 맺는 사람 열매 맺는 주체를 내가 가지고 있느냐, 에 따라서 아주 다른 결과들을 가져오게 됩니다. 이 성령의 열매를 예수님께서 유아 모금 15장에서 비유로 말씀해 주신 포도나무 비유를 가지고 한 번 더 조금 더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이 말씀과 함께 살펴보면 우리가 맺어 우리가 맺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성령의 열매가 어떤 것인지를 조금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 말씀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4:1,-5,
1 나는 참 포도나무요 네 아버지는 농부라.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여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라. 아멘
-예수님은 포도나무고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나무를 돌보시는 농부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열매가 달리는 가지가 바로 저와 여러분이라고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맺고, 이 나무에서 나쁜 좋지 않은 열매가 맺는 중심의 핵심은 바로 가지가 어떤 상태에 있느냐 가지가 얼마나 열심히 열매를 위해 노력하고 왜 쓰느냐 거기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이 비유의 핵심은 가지에게는 아무 능력이 없고 가지가 나무에 잘 붙어 있느냐 나무가 나무에 이 가지가 온전히 붙어있느냐, 거기에 좋은 열매와 나쁜 열매의 기준이 있다. 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가져갈 일은 무엇입니까? 가지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오직 나무에 온전히 붙어있는 것입니다.
 
다시 성령의 열매 이야기로 돌아와서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 맺어지는 아홉 가지의 열매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갑니까? 아니면 내가 열매를 맺을 가지로 우리의 생명나무인신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붙어있는 것에 집중하고 있습니까?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1. 가지에 같이 가지인 우리의 초점이 열매 있습니까? 아니면 나무에 붙어 있음에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갈라디아서의 주제는 로마서의 주제와 동일합니다. 너희는 더 이상 율법에 속하지 아니하고 성령에 속하였다. 너희는 더 이상 조 종에 영예 악한 영들의 종에 있지 아니하고 율법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영을 그리고 성령의 종이 되었음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 갈라디아서의 주제입니다. 우리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원래 나무가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원래 나무가 율법이고 세상이고 육체 나무에 붙어 있으면 가지는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힘을 써도 아무리 자기를 절제해도 그 가지는 육체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 것이 그러나 갈라디아서 그리고 로마서에서 사도바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나무에 접붙인 바 되었다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접붙인 바 됨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열매,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3절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 이후에 이러한 성령의 열매는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열매 맺는데 누가 그것을 금지할 수 있습니까? 성령께서 열매 맺으시는데 누가 그것을 방해할 수 있겠습니까? 예전에는 우리가 율법 안에 내가 열매 맺으려고 했습니다. 26절 말씀에 보면, 헛된 영광을 구하며 우리가 살아왔다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5:23,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5:26,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내가 열매를 맺어서 내가 영광을 얻고 내가 열매 맺어서 내가 열매에 좋음을 먹으며 살려고 하는 그러한 헛된 영광을 구하며 우리가 살아왔습니다. 그렇지만 영광의 끝은 다툼과 시기와 투기만 남는다. 라고 합니다. 그랬던 저와 여러분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24절 말씀에,
 
 *갈라디아서 5:24,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바 되었습니다. 내 영광을 구하며 나 스스로의 나의 힘으로 내 능력으로 영광을 얻어서 열매 맺어서 내가 영광이 내가 스스로 영광 받고자 하는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 나가에 못 박혀 버렸습니다. 그래서 25절 말씀에, 우리는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이 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25,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나는 교회 다닌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신앙이 있으니까 당연히 포도나무 가지에 내가 붙어있다. 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으십니까 혹시 떨어진 줄도 모르고 열매 맺기에 초점을 맞추고 힘쓴 내 모습은 없습니까? 사도마을은 오늘 이 갈라디아서 말씀을 통해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너희를 이전에 묻고 있던 모든 율법은 다 벗어버리고 너희가 이제 율법이 요구하던 열매들은 다 내려놓고, 너희가 은혜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나무에 붙어 있게 되면 너희의 힘과 너희의 능력과 너희의 노력과 지금까지 너희들이 율법을 지키려고 애쓰던 그러한 모든 노력은 비교도 되지 않는 성령님이 그분이 직접 맺으시는 그분의 열매를 맛보게 될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정리하면 성령의 열매가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 안에 온전히 거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나무에 내가 붙어 있기만 하다면 성령께서 성령인 주관자 되시고, 성령인 주체가 되셔서 성령이 소유하신 열매를 우리에게 맺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우리 아홉 가지의 석류의 열매를 한번 보시겠습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지금까지 율법은 열매를 우리의 스스로의 힘으로 지키고 맺으라고 했습니다. 율법은 열매들을 우리의 힘으로 맺으며 살아오러 살아가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실패했습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아무리 애써도 조금의 열매가 맺어질지는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 드리기에는 너무나 부끄러운 열매들뿐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9가지의 열매를 너희가 힘써서 맺으라. 내가 도와줄 테니까. 너희가 애써서 맺어라. 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성령께서 내가 이 열매를 맺겠다. 라고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애쓰고 힘써서 얼마나 사랑해야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가 되겠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노력하고 참고 참아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그러한 열매가 되겠습니까?
 
구약에 많은 유대인들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쓰고 애를 쓰고 애를 썼습니까? 하지만 모든 열매들은 다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시대에는 이 열매를 우리에게 맺을 것을 요구하지만 우리 마음 가운데 계신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이 성령의 시대에는 성령께서 이 열매를 맺으시겠다. 라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할 일이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할 일은 바로 이것입니다. 같이 한번 있도록 하겠습니다.
 
2. 전신전략을 다해 생명나무의 신 예수 글씨도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의 가진 나를 통해 성령의 풍성한 열매를 맺으십니다.
-아멘 우리의 힘과 우리의 능력으로 맺으려고 했었던 율법의 조문처럼 사랑하려고 율법의 명령처럼 참으려고 율법의 명령처럼 인내하려고 애썼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우리의 초점을 우리가 맺으려고 하는 열매에 두지 아니하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나무에 얼마만큼 잘 붙어있는지에 대한 초점을 맞출 때에, 성령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열매 맺어주시는 줄 믿습니다. 가정에서 예수님께 온전히 붙어 있으십시오. 성령께서 열매 맺으실 것입니다. 우리 회사에서 사업장에서 다른 것 말고 예수님께 붙어 있으십시오. 그러면 성령께서 열매 맺으십니다. 심지어 우리가 예배드리고 봉사하고 전도하고, 다 나빠하고 제자훈련하고 사약훈련하고 모든 우리의 신앙생활 생월에서도 이 훈련을 받아서 내가 어떤 열매를 맺고, 내가 이 봉사를 해서 얼마만큼의 성숙해 가고, 내가 이것을 하여서 어떤 것을 하고, 하고가 아니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붙어있는지에 대하여서 초점을 맞추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주님의 생명나무에 붙어 있을 때 성령께서는 가진 저와 여러분을 통해 성령의 열매를 맺어주시는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한 가지 더 살펴볼 것은 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단수형으로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인데 성령의 열매들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 단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아홉 가지인데, 단수형을 쓴 이유는 이 아홉 가지가 결국 모두 하나라는 그러한 의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열매는 각각이 맺는 것이 아닙니다. 이 열매는 내가 열심히 맺어서 이것도 맺고 저것도 맺고 하는 그러한 나의 열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홉 가지의 열매 중에서 아홉 가지 다는 아니어도 적어도 몇 가지만이라도 맺어보자 몇 가지만이라도 맺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보자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종종 나는 충성은 잘 안 되는데, 사랑은 좀 되는 거 같애. 나는 화평은 안 되는데 절제는 조금 되는 거 같애. 석류의 열매는 이 아홉 가지의 열매는 무엇은 되고 무엇은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은 맺어지고 무엇은 맺어지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성경에 분명히 성경의 이 열매는 하나의 열매라는 메시지를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까?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저와 여러분의 힘으로 이 성령의 열매를 하나의 열매처럼 이 성령의 열매를 하나도 빠짐없이 맺을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열매는 나에게 속한 열매가 아니라, 성령께서 맺으시는 성령의 열매기 때문에 온전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아홉 가지의 열매는 한 번에 맺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요 우리가 생명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있기만 하면 그래서 우리는 삶 가운데서 이 열매들을 하나하나 떼어놓고 이것을 어떻게 맺을까?
 
이것은 좀 부족한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혹시 이런 질문도 하시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혹시 당신의 이 성형의 9가지 열매 중에 혹시 부족한 게 있다고 어떤 것이 있는지 혹시 생각이 드시나요? 아니면 이 아홉 가지 열매 중에 이 열매는 나는 참 풍성하다 자신 있다. 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그런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은 없나요? 오늘 성경에서 성령의 이 아홉 가지 열매는 단 하나도 떼어 놓지 아니하고 하나의 열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전능하신 성령 하나님께서 맺으시는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께서 농부 되어 주시고, 농부 되어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나무 되어 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로 육신의 율법에 죄악에 젖 붙인 바 되었던 우리를 하나님의 생명의 나무로 접붙인 바 되어 주셔서, 우리의 힘이 우리의 능력이 아닌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열매 맺는 삶을 이제는 성령 하나님께서 아홉 가지의 열매를 동시에 풍성하게 맺어주시는 은혜를 우리 모든 성도인 들이 삶 가운데 누리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그러면 우리가 생명나무이신 예수님께 온전히 붙어 있을 수 있습니까?
 
교회에서도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만남 가운데서도 심지어 우리의 24시간 동안 어떻게 하면 우리가 생명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을 수 있습니까? 여러 가지 경건 생활의 방법으로 주님 앞에 붙을 수 있지만 저는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한 가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그것은 우리 같이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님께 붙어있는 가장 실제적이며 확실한 방법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붙잡는 것입니다. 아멘
-나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붙잡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붙잡고 계십니까?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서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읽고 배우고 암송하고 묵상하고 있습니까? 아침에 큐티 할 때, 읽고 중에 말씀 설교 들을 때 읽고, 다락방 할 때 읽고 또 특별히 시간을 내어서 통독할 때 읽고, 또 우리 훈련생들은 훈련 큐티 하고 IBS 하면서 읽고 그것이면 충분합니까? 그 정도면 우리가 24시간 주님과 함께 붙어 있다. 라고 생각할 만큼 충분하십니까?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성경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모든 것이 능력이 나온다. 라는 사실을 믿고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이 말씀이 우리의 삶 가운데 얼마나 밀접하게 붙어있는지를 생각해보면 부끄럽기 그지없음을 보게 됩니다. 방송인 조혜련 씨를 아직 하실 겁니다. 그분이 예전에 했던 간증을 들으면서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분이 예전에 핸드폰이 손에 없으면 불안해서 어찌할 줄을 몰랐는데 지금은 손에 성경이 없으면 불안해서 어찌할 줄 모른다. 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가 일상의 핸드폰을 들고 있는 것과 같이 그분은 일상의 성경을 들고 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모든 시간 동안에 손에서 성경을 놓지 않고 성경을 보고 있다고 합니다. 짬이 날 때마다 성경을 읽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매년 성경을 6번 읽고, 올해는 8번 읽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하는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분이 그냥 한강 한가한 분입니까? 참 바쁘게 살고 계시더라구요. 저는 감정을 듣는 순간에 어디 숨고 싶었습니다. 저는 사실 제 손에 성경은 없어도 되는데 핸드폰이 없으면 불안하거든요. 저도 이 한정을 들으면서 오늘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나는 나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무의 생명의 나무에 얼마나 붙어있는가, 나는 가정에서 직장에서 내 모든 시간 깨어있는 시간 동안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의 나무로 생명나무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말씀을 듣고자 하는가? 겨우 가지가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겨우 붙어있는 내 모습은 아닌지, 한번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성경을 통독하는 시간에는 순서대로 열심히 읽으십시오. 큐티 하는 시간에도 말씀을 속상하며 읽으십시오. 성경을 배우고 연구할 때는 성경을 깊이 읽으십시오.
 
그리고 그것으로 만족하지 마시고 내 손에 잡히는 대로, 시간이 나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 읽으시고 말씀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성령의 은혜를 능력을 경험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서 주님께 붙어 있을 때, 우리의 힘과 능력이 아닌 내 안에 성령께서 그분의 열매를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 풍성히 맺어주실 줄 믿습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내게 속한 내심으로 맺는 열매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나무에 우리가 온전히 붙어 있을 때에 그분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축복으로 맺어주시는 열매입니다. 내 힘과 능력의 열매가 아니라, 농부이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열매인 줄 믿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내가 맺은 열매를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겠습니까? 내 노력으로 맺는 열매는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릴 수 있는 요구가 되지 못합니다. 우리의 초점을 내가 어떤 열매를 맺냐, 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 얼마나 붙어 있느냐,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 얼마나 밀접하게 붙어서 성령과 동행하며 그분과 함께 살고 있느냐 이것이 열매 맺는 삶의 능력이고 비밀이고 우리에게 주신 선물은 선물인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삶의 모든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붙잡으시고 읽을 수 있으면 읽으시고 읽을 수 없으시면 들으시고 들으실 수 없으면 암송하시고 그리해서 내가 예수군 시도의 생명나무에 늘 붙어 있어서 아버지가 궁금해 주시고, 예수님께서 붙잡아 주시는 능력과 성령이 나와 성도들을 통해서 맺으시는 성령의 아홉 가지의 풍성에 의한 풍성한 열매를 우리 삶 가운데 다 맺고 사시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요약
내 힘으로 맺으려던 모든 시도를 내려놓고 성령하나님께 온전히 나를 내어 드려 이제는 결실을 위해 농부이신 성부하나님의 열매 맺으시는 실력과 신실하심을 믿고, 사는 날 동안 참 포도나무이신 성자 예수님께 끝까지 붙어있어야 한다. 우리가 휴대폰을 붙들고 사는 내 삶의 모든 영역이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리도록 성경을 더욱 더 가까이 하는 자로 살아가야 한다.

-우리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셨는데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처럼 은혜를 잊어버리고 이 성령의 열매조차 마치 율법을 지키듯이 내가 맺으려고 애쓰며 살아왔던 내 모습은 아닌지, 한번 돌아보아야 한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붙어 있으면 내 능력과 내 힘이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성령의 풍성한 아홉 가지의 열매를 내 삶 가운데서 온전히 맺게 해 주시는 줄 믿어야 한다. 제는 우리의 초점이 열매에 있지 아니하고, 내가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나무에 붙어있는지에 대한 초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우리의 삶 가운데 내가 맺는 보잘 것 없는 나의 열매가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맺으시는 풍성한 아홉가지 열매를 통하여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기를 간구하며, 오늘도 우리에게 함께하시며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있기를 간절히 소망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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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04월 03일)
제목: "한나의 찬양“
말씀: 사무엘상 2:1-3
찬양인도: 쉐키나
 
설교자: 김대규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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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2:1-3,
1 한나가 기도하여 이르되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2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3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특새 은혜로 가득한 한 주간입니다. 우리는 새벽마다 이 안아주심의 본당에서 함께 모여서 찬양하며 말씀 듣고 우리 모두가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고, 세계 열방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모두가 개인의 간절한 기도에 제목들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든 인생들 가운데는 기도의 제목이 있습니다. 기도 제목이 없는 분은 단 한 분도 제가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기도 제목이 응답받을 때 우리는 참 감사와 기쁨을 느낍니다. 하지만 반대로 기도가 응답받지 못하고 물론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우리 모두의 기도를 응답해 주실 것을 우리가 분명히 믿지만 그 시간까지 우리가 기도 제목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참 귀한 하지만 또한 이 시간들이 우리의 삶을 어렵게도 하고 마음을 무겁게 할 때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기도 제목이 많다. 라고 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 가운데에는 그만큼의 고통과 아픔이 있다는 것을 반증하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의 삶이 꼭 같습니다. 모두 달라 보이고 겉으로는 평안해 보이고 잘 사는 것 같아도 속을 들여다보면 하나님 앞에 기도 제목 없는 분 간절히 구하는 것 없는 분이 단 한 분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보는 한 여인의 삶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가 오늘 사무엘상 이 장을 읽었습니다. 여러분 사무엘상의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네 주연 배우는 당연히 다윗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입니다. 이스라엘이 사사시대에서 왕 정정 시대로 넘어가면서 어두움의 터널을 지나 영광의 시대 이스라엘 민족 정점을 향해 치닫는 시간이 사물상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을 통해 언약 백송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이 왕국이 확장되고 공고해지고, 팔레스타인과 수리아 지역에 최강자로 떠오르는 시간까지는 주변 국가들의 끊임없는 침략과 억압이 지속되었고 이 시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참 아픔과 보통 기다림의 시간이 분명했습니다. 그들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몰랐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의 향방이 어떻게 결정될지 몰랐기 때문에 이 기다림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스라엘 민족들에게는 혼란과 불안의 시간이기도 하였습니다. 바람의 시대와 또 이 찬란한 영광의 시대를 잇는 고려와 같은 역할을 하는 이가 바로 사무엘입니다. 제가 사무엘소의 주인공이 누구라고 했죠? 네 다윗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아셨던 건 아니죠. 네 이 사무엘상의 주인공이 다윗이지만 이 책의 이름은 다윗이라고 하지 않고 그래서 사무엘 서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무엘의 출생의 비밀을 다룬 이야기로 오늘 이 사무엘에서는 시작되고 있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는 한나입니다. 한나는 고통 받는 여인이었습니다. 왜요 자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꽤 명문가였을 듯한 엘가라는 분의 첫 번째 부인이었습니다. 하나는 남편의 사랑을 정말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남편이 그렇게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행복하지 못했던 것은 그에게 아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시대에 아이를 갖지 못한다는 것 자녀가 없다. 라는 것은 희망이 없는 것이며 굉장히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아이가 없다는 이유로 수치를 당하는 여인의 삶과 심정이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을지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상상의 무게 이상으로 고통의 무게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고통 받고 힘들어하는 아내를 위로하기 위해서 그녀를 사랑했던 남편은 정말 갖은 수단을 다해서 그녀를 위로하고 그녀에게 사랑을 베풀고 애썼습니다. 성경에는 제사를 지낸 후에 분깃을 나누는데 분깃을 나눈다. 라고 하는 것은 제사 지낸 음식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엘가나가 이 분깃을 가족들에게 똑같이 나누어 주지 않고 한나에게 갑절을 주었다라고 기록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장을 읽었는데요. 1장의 4절과 5절을 한번 같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무엘상 1:4-5,
4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의 아내 브닌나와 그의 모든 자녀에게 주고.
5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 한나의 남편인 엘가나는 자신이 사랑했지만, 여인 한나가 자녀를 낳지 못했기 때문에 두 번째 부인인 부인 나를 얻었고 또 두 번째 부인인 분인 나는 공교롭게도 아이를 순풍순풍 잘 낳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녀에게는 최소 또한 아들 두 명 딸, 두 명 오늘 우리가 아까 읽은 본문에는 재물의 분갓을 그의 아내 분인 나와 그의 모든 자녀에게 주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정확한 표현은 그녀의 아들들과 딸들에게 주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들들과 딸들이라고 하는 것은 아들도 최소한 두 명 이상이고 딸도 두 최소한 두 명 이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제사를 드리고 재물을 나눌 때에 사람 숫자대로 몫을 정했습니다. 그니까 적어도 브닌나와 그의 자녀들을 합친 몇 명입니까? 적어도 최소 5명은 됩니다. 그리고 한나는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한 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분인 나와 자녀에게는 5개의 몫이 한나에게는 하나의 몫이 주어지는 것이 관례였는데 엘가나가 한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그녀가 가엽게 보였는지 성경에는 절의 몫을 주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갑절이라고 하는 것이 어 양의 두 배를 주었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또 다른 부분에 있어서는 좀 더 좋은 부분을 주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치킨을 먹을 때에 내가 좀 좋아하는 사람에게 뭐 줍니까 닭다리를 주죠. 그런데 닭다리를 주었는데 나는 뻑뻑 살을 좋아해요. 그러면 굉장히 괴로운 거죠. 그런데 이 엘가나가 이렇게 한나를 챙겼는데 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한나의 영원한 적수인 브닌나가 그러한 일을 겪고 나서 한나를 더 핍박하는 것입니다. 저는 브닌나가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것이 여러분 브닌나는 몇 번째 부인입니까? 두 번째 부인이에요. 그러니 남편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애썼겠습니까? 한나가 낳지 못하는 아이도 여러 명 낳아줬습니다. 그러면 이제 남편이 한나보다 자신을 더 더 사랑하고 더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이 남편은 여전히 한나만 사랑하고 한나만 바라보고 한나만 아끼니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거기에 더해 저는 참 이 엘가나라는 분이 눈치가 없는 분 같은데, 분깃을 나누는데 티가 나게 한나를 더 챙겨주니까 여자 입장에서는 얼마나 꼴 보기 싫었겠어요. 마치 시어머니가 아들을 결혼시켰는데 아들을 뺏겼다. 라는 느낌이 들어서 며느리가 미운데, 이 며느리를 구박하는데 아들이 이 구박하는 이 며느리를 더 챙기고, 또 엄마가 보는 앞에서 더 좋은 것 같아주고 선물하면은 시어머니 그 며느리를 더 구박할까요? 예뻐할까요? 구박하겠죠? 우리도 아는 걸 왜 얄가 나는 몰랐을까요? 물론 사랑의 교회에서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런 시어머니가 절대로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러니 이 두 번째 부인인 브닌나는 한나를 더 핍박하고 괴롭힌 것입니다. 이때 한나는 이 브닌나로부터 핍박당하는 마음 자기가 자녀가 없어서 고통당하고 수치스러운 마음을 어떻게 해결합니까? 우리가 1장 10절을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1장 10절 같이 읽겠습니다.
 
*사무엘상 1:10,
10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그러니까 자신의 괴로운 마음을 하나님 앞에 울며 기도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에 문제가 발견했을 때에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여러분 만약에 제가 한 나라면은 이 나로부터 더 핍박받고 구박받았을 때에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 것 같아요. 저 같았으면은 남편을 찾아갔을 것 같애요. 남편이 자기를 사랑하는 거 아닐까 그리고 남편인 엘가나에게 브닌나가 얼마나 못되고 나쁜 자매인지를 다 일일이 다 일렀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남편의 사랑을 더 얻기 위해서 브닌나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고 분인 나를 남편이 미워하도록 노력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나는 그렇게 하기 보다는 자신의 아픔과 힘겨움 고통의 문제를 들고 남편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찾아갔습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갔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합니다. 물론 우리도 기도합니다. 우리도 고통의 문제를 들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한나가 하나님 앞에 나아간 것이 더 놀라운 것은 한나의 기도가 더 대단한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은 여러분 한나가 가장 괴로울 때가 언제입니까? 자신이 아이를 갖지 못하고 자녀가 없어서 굉장히 괴로운데 하나님께 제사한 후에 분깃을 나눌 때였습니다 자식이 없어 브닌나와 그의 자녀들에게는 5개 이상의 몫이 돌아가고 자신은 한 몫밖에 받을 수 없고 남편의 배려로 조금 더 받거나 조금 더 좋은 것을 받았을 뿐인데, 이 브닌나는 자신을 괴롭히고 수치스러운 말들로 자신의 폐부를 찌르는 것입니다. 눈물 나도록, 한나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괴로움과 고통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는데, 예배의 자리로 나아갔는데 자신의 아픔이 치유되고 상처가 치유되고 사라져야 하는데, 한나의 경우에는 예배의 자리로 하나님께 나아가 나갈 때마다, 아픔이 확대되고 배가 됩니다. 위로받기 위해서 교회에 왔는데 마음이 더 힘들어지는 상황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한나는 다시금 하나님 앞에 자신의 아픔 상처를 들고 나아갑니다. 여호와의 전에 그녀가 들어가 울며 통곡하며 기도하는 와중에 제사장 앨리가 그녀를 오해합니다. 하나는 자신의 기도를 누가 들을까 싶어서 밖으로는 이야기하지 못하고 정말 속으로 통곡하면서 입술만 움직이면서 기도하는데, 앨리는 그녀가 취한 줄 알고 오해합니다. 한나는 자신에게 취했다고 말하는 엘리에게 이렇게 대답하죠. 1장 15절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듣겠습니다. 한나가 대답하여 이루되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나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오.
 
*사무엘상 1:15,
15 한나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하나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취한 게 아닙니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입니다. 내가 마음속에 원통함과 분함이 많아서 그것을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엘리가 알아듣고 편안히 가라 하나님이 내 기도에 응답하시기를 원한다. 말합니다. 자신에게 술 마시고 취했다고 하는 엘리에게 한나는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변화하고 설명하고 있습니까? 나는 취한 게 아니라,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입니다. 이 마음이 슬픈 여자입니다. 라는 고백에 대해서 조금 더 정확한 번역은 나는 영이 단단한 여자입니다. 나는 마음을 굳게 먹은 여자예요. 어떻게 마음을 굳게 먹었습니까? 하나는 여호와 앞에서 내 심정을 통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호와 앞에서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여호와 앞에서 내 심정을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10편 이 62편에,
 
*시편 62:8,
8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다윗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8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같이 있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토하라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는 그의 마음을 굳게 다짐하며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 마음을 토해 놓겠다. 내 영혼을 모두 쏟아놓겠다. 왜요 하나는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고통의 순간 속에서 예배 자리에 나갈 때마다 더 상처가 올라오는 못하고 더 아픔이 올라온 듯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 앞에 마음을 굳게 먹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나의 모든 것들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만을 굳게 신뢰하기 때문이다. 여러분, 우리의 기도 제목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아픔과 고통과 기도의 제목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어디에 풀어놓고 해결하시겠습니까? 여러분 오직 우리가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하나는 엘리에게서 여호와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라는 확신의 말씀을 듣고 회복된 얼굴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새 역사를 여는데 중요하게 쓰임 받는 아들 사무엘을 낳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그녀가 하나님 앞에 약속했던 것처럼 약속하라 기도했던 것처럼 아들을 하나님 앞에 신실히 키우고 하나님 앞에 드립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2장을 시작하면서 한나는 하나님 앞에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한나가 부른 이 찬양, 한나가 하나님 앞에 드린 노래는 아이를 낳지 못했던 한 여인이 아기를 낳고 즐거워하며 기뻐하고 감사했던 개인적인 차원의 노래를 뛰어넘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내게 아이를 주셨고 나는 아이를 낳아서 너무 기쁘고 감사합니다. 이 정도까지 머물렀다면 이거 이 찬양이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의 찬양은 이 개인의 감사와 기쁨을 넘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겸손하고 그는 고통 받는 백성을 구원하시 이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이다. 이 하나님의 구원의 사욕을 찬양하는 고공적인 승정과 위대한 승전가를 하나님 앞에 올려드립니다. 우리가 1절을 한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사무엘상 2:1,
1 한나가 기도하여 이르되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아멘 1장에서 한나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기도할 때는 그녀는 탄식과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탄식하며 눈물 하며 그녀의 모든 감정이 그렇게 휩싸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녀는 기쁨이 가득한 찬양을 하나님 앞에 올려드립니다. 한나의 마음은 즐겁고 기쁩니다. 원통과 고통으로 가득 찼던 마음은 즐거움과 기쁨이 넘치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원인은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가 주원의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합니다. 그녀의 마음을 변하게 한 것은 남편의 위로가 아닙니다. 재물도 아닙니다. 단순히 아이를 낳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녀의 찬양 그녀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한 것은 그것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시고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셨다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베푸셨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녀가 하나님께만 의지하고 매달리고 기도하였을 때 그녀는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아 알게 되었고, 그 은혜의 풍성함 은혜의 경험을 노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은혜의 경험이 그녀의 원통함과 격분의 마음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변하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 가운데 기쁨과 즐거움을 주실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가서 인정받고 위로받는다고 우리의 마음의 근본이 여러분 절대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순간 잠시 그것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 그리 오래지 않아 우리의 마음은 제 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복음으로 거듭난 사람, 하나님의 근본적인 위로와 은혜를 아는 사람은 이것을 체험하였기 때문에 마음이 온전히 뒤바뀌고 체온 받는 것입니다. 무엇으로요 하나님의 기쁨과 즐거움으로 그리고 그녀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내 뿔이 높아졌습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뿔이 높아졌다 이전 성경에서는 내 뿔이 들렸다라고 표현되었는데 이 뿌리라고 하는 것은 능력과 위험을 상징합니다. 그녀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것입니다. 또한 내 입이 크게 벌렸다 크게 열렸다라고 하는 것은 그녀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녀의 원수들에게서부터 떳떳이 서며 누구도 그녀를 비웃을 수 없으며 이제 도리어 그녀가 그렇게 할 수 있다. 이렇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녀의 마음뿐만 아니라, 그녀의 존재감마저도 하나님으로 인해서 완전히 달라졌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을 채우시는 한나의 마음을 변화시키시는 한나를 높이 세우시는 분 하나님의 힘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녀는 이어서 또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찬양합니다. 우리 이 절과 3절을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같이 있습니다. 여호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단석도 없으심이다.
 
 
*사무엘상 1:3,
3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아멘 내 마음이 기쁘고 즐겁고 내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 위상이 높아진 것뿐만 아니라 이제 하나는 한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고백합니다.
 
I. 첫 번째로,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다.
-여호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다니 거룩하신 하나님을 하나는 찬양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II. 두 번째로, 하나님은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다.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십니다. 반석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도 뒤집을 수 없고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에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라고 한나는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III. 세 번째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다
-여호와는 지식에 하나님이시라 여호와는 내 깊은 아픔과 고통과 문제를 하십니다. 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도 알 수 없는 내 남편도 알 수 없는 것을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해결하십니다.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Ⅳ. 네 번째는,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동을 달아보시고 공평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라고 한나는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하나님은 무한한 능력을 가지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공이의 하나님이시다. 여러분, 저는 이것을 어디서 배웠냐? 신학교 가서 배웠습니다. 현대 신학에서 정립된 하나님의 속성을 하나님의 성품을 3000년 전에 한나가 찬양을 통해서 담아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그녀는 고난의 시간을 지내오면서 기도하고, 응답받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서 더 깊이 더 자세히 더 정확히 이해하고 알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때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십니다. 왜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눈물의 시간을 주시고, 아픔의 시간을 주시고 고난의 시간을 주실까요? 여러분, 우리가 고난의 시간이 끝이 없는 동굴이 아니라 언젠가는 환한 빛을 보게 될 터널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두움을 지나는 시간이 결코 녹록치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고통의 시간을 허락하실 때가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한나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신 것처럼, 우리 삶에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먼저는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을 통해서 더욱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만 매달리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문제를 푸실 분 내 삶에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뿐 내 상처를 온전히 치유하실 분이 하나님 한 분밖에 없음을 기억하며 한나가 고백했던 것처럼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 나는 마음이 슬픈 사람입니다. 때문에 나는 마음을 굳게 먹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에게만 나의 모든 고통의 문제 시련의 아픔을 털어놓기로 작정했습니다. 하나님께 토해옵니다. 라고 말하며 나오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나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문제와 기도 응답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며 우리를 높이시며 우리의 내면을 완전히 바꾸실 수 있는지를 경험케 하십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경험으로 우리는 너무나 높으신 하나님, 광활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부여를 알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지식으로 깨닫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으로 삶으로 전심으로 깨닫고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의 십자가 화와 고난이 없다면 부활이 없습니다. 주께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심으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있었던 것이며, 우리에게 새 생명 주신 하나님의 말로 다할 수 없는 사랑을 조금이라도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새벽 특제에서 강준민 목사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꿈이 큰 만큼 다가오는 고난이 우리에게 주신 고난이 큰 만큼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기적이 크다.”
-강준민 목사님-
-고난이 끝이 아닙니다. 베푸시는 기적의 시작이고 큰 꿈을 위한 마중물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특새를 하면 수많은 기도 제목을 하나님 앞에 토로하고 우리의 개인적인 기도 제목 국가적인 어려움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해 주실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 응답의 역사로 인해 우리는 더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는 한낮처럼 정확히 깨달아 알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위대한 역사가 고난을 통해서 이루어짐을 우리 모두가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나가 고통의 시간을 지나 기도를 통해 응답받은 응답의 아들이 이스라엘의 위대한 역사의 정점을 향한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불임의 여인, 희망이 없던 여인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오직 하나님께만이 새로운 삶을 열어주셨던 것처럼 불임과 같은 어두운 이스라엘에게 생명을 주시고, 다시 일어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오늘 사무 해설을 통해 하나님은 분명히 보여주십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의 고난의 응답을 통해 더 놀라운 새 역사로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실 것을 기대하며, 소망하며 우리가 이 시간 기대하고 남은 특새 3일 기간 동안 간절히 기도할 때에 한나와 같이 한나 보다 더 놀라운 기도 영답을 받으시고 깨달음을 얻으시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요약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한나처럼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니 하나님을 하나는 찬양해야 한다. 하나님은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분시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하나님은 공이의 하나님이셔서 누구도 뒤집을 수 없고,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에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확신하며,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을 기억하여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행동을 달아보심을 깨달아서 늘 하나님의 공평을 베푸심에 감사하며 고통의 시간을 허락하실 때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한나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신 것처럼, 우리 삶에도 그럴 때가 있으니, 먼저는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을 통해서 더욱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것임을 알아 하나님께만 매달리기를 기도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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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03월 27일)
제목: "서사란 원래 불친절한 법"
말씀: 마가복음 15:21-25
찬양인도: 쉐키나(김재원 부목사님)

설교자: 강건우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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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5:21-25,
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22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23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24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 새 누가 어느 것을 가질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25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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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많은 번화가(繁華街)에 가면 항상 우리의 안부를 물어보시는 분이 계세요. “안녕하세요. 또는 실례합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불쑥 말을 건네면서 우리 손에 슬며시 이렇게 전단지를 이렇게 밀어주시는 분이 항상 번화가이라면 항상 있습니다. 그분들은 늘 우리의 건강을 걱정 피부를 걱정하고 끼니를 때우기에 뭘 먹으면 좋은지 항상 기꺼이 추천해 주십니다.

저는 이제 주말이 교회와 함께 궤적을 이렇게 같이 가다 보니까 번화가에 나갈 일이 많지 않은데 그래도 주로 점심에 여기 대로를 이렇게 한번 건너가 보면 교회 길 건너요 이분들하고 마주치는데요. 신기한 건 꼭 저에게 둘 중 하나를 주세요. 피트니스 운동이든지, 점심부패든지, 둘 다 필요해서 주는 것이라고 적극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만 분명한 거는 주실 때마다 한 0.1초 정도 고민합니다. 받을까? 말까? 여러분도 그런 경우 있으시죠. 그래서 가끔은 냉정하게 좀 지나칠 때도 있는데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이걸 받을까? 말까? 고민을 했어도 한참을 했어야 할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의 이름은 구레네 사람 시몬입니다. 가볍게 가벼운 전단지 한 장 받는 것도 잠깐 고민하는 것이 우리 인생인데,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체력적인 한계에 부딪치셨다고 로마 병사들이 판단을 했던지 마침 이제 가시는 그 지점부터가 아마 학자들은 오르막길이었을 것이라고 판단하는데 그게 오르막길이어서 그랬을지, 어쨌든 아무튼 갑작스러운 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시몬은 지금 대신 짊어지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여러분 이게 얼마나 불친절한 전개인지 모릅니다. 길 가던 사람 복잡하다가 또는 성경 표현대로 보면 억지로 십자가 찐 거는 둘째 치고, 그거는 둘째 치고요. 그러면 앞뒤 좌우 분량이라도 좀 이렇게 넉넉히 줘야 되는데 꼴랑 한 줄입니다.

*마가복음 15:21,
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읽는 우리가 우리도 이렇게 보면 이렇게 중요한 순간을 아주 짧게 다루는 것이 우리가 읽는 면에 있어서도 불친절한데, 만약에 제가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면 이 기록만 봐서는 너무너무 불친절하다고 느낄 것 같아요. 시몬의 등장해서 이렇게 역사적인 등장해서 이 분량이나 또 이렇게 살 살펴주는 내용을 보면 상당히 불친절하다고 밖에 그래서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이 불친절하다는 서사를 어떻게 만드냐면 개연성을 여기다 갖다 붙여요. 어떻게 붙이냐면 이 사람이 여기 등장했어야 될 이유, 꼭 등장해야 될 이유를 찾습니다. 그것을 어디서 찾냐면 방금 읽으신 21절 상반부에 보면 전반부에 보면 이렇게 돼 있죠.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구레네 사람 시몬을 누구의 아버지라고 말합니까? 알렉산더와 루퍼의 아버지라고 기록을 합니다. 말은 마가복음을 읽고 있는 이 원독 자가 당시 알렉산더 루퍼 이렇게 말하면 알아들었다는 뜻이겠죠. 실제로 로마서에서도 그렇게 기록을 하고 있고요.

우리 찾지는 않겠지만, 이들이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꽤나 유명한 또는 알만한 인물이었다. 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 익숙한 결론에 도달하는 거예요. 어떤 결론이냐면 억지로 십자가를 치게 된 구레네 사람 시몬이 복을 받았다. 어떤 복을 받았을까요? 후손의 복을 받았다. 믿는 사람들이 당시에 믿는 사람들이 알렉산드 어떤 루퍼 이렇게 이름만 대면 다 알 정도로 그의 자녀의 때에 축복을 받았다. 이렇게 이어가 개연성을 거기다 이제 넣는 거죠. 이 불친절한 서사를 여러분 맞습니다. 그것도 맞습니다. 실제로 그렇다고 마가복음이 이름을 거론하고 있는 거니까, 그것도 맞습니다. 특별히 마가복음이 쓰여 질 당시에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박해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그 억지로지는 것 같은 이 고난과 고통이 박해를 이 억지로지는 십자가이지만, 길 가운데 하나님이 반드시 값을 쳐주신다. 보상해 주신다. 라는 개념으로서도 큰 위로와 응원을 실제적으로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면 좀 아쉬운 점이 있다. 라는 거예요. 그게 뭐냐면 시몬의 십자가가 오늘 이렇게 지고 난 다음에 자녀들에 대해 결실을 거둔다. 라면 이 시간이 상당히 있었을 것이거든요. 대략 못 잡아도 20년, 30년 이렇게 사이에 시간이 필요했을 텐데, 이 30년이라는 이 시간차의 등고선을 시몬으로부터 자녀들까지 빨리 이어버리는 바람에 어디가 비냐면, 사이에 계속되었을 현재가 비입니다. 거의 다 틈이 생긴다. 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시몬의 십자가와 자녀의 일은 거리가 너무 멀어요. 시간차가 있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시간이 다 지나지 않는 한 매일을 살아가게 될 그 중간 중간에 현재는 계속 불친절한 서사로밖에 안 남는 거죠. 그때 왜 나한테 그걸 지게 만들었나?

최근 한 청년에게 제가 들은 다소 이어지는 말이 있었는데, 그게 뭐냐면 이렇게 얘기했어요. 저한테 “하나님 저한테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어요.” 하나님 저한테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자기가 마주한 이 신앙의 현재가 자기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 라는 포로였는데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 모두 구원받았죠? 이 세상 시름은 그래서 순간이고, 하나님 나라의 영혼과 영생을 약속받은 것이 우리지요? 그렇죠. 그럼에도 왜 우리는 늘 현재에서 고전합니까? 오늘이라고 하는 이 서사의 불친절한 이 지점들을 너무 내일로 몰아붙여서 그렇습니다. 서사의 등고선을요 지금 구원받은 인생과 나중에 천국 갈 영원한 입성에 너무 빨리 이어버려서 속결로 이어버려서 서사의 중반부이자 중요한 연결고리인 현재를 사는 힘이 약화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 불친절한 서사를 너무 알렉산드와 루퍼 이야기로 빨리 가져다 붙이지 말고, 오늘 이야기를 조금 다시 살펴보자. 라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우리의 서사를 좀 힘 있게 써내려갈 그런 응원을 받자.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21절부터 제가 다시 한 번 출발을 해볼게요. 읽진 않겠습니다. 21절 눈으로 한번 따라 읽으시면서 제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시몬의 이야기에서 자녀 이야기는 일단 빼겠습니다. 그럼 21절에서 알렉산드와 루프 이야기는 빠지겠죠? 빼버렸으니까 사실 21절에서는 억지로지고 간다는 것 말고는 별로 건질 게 없어요. 그러면 이야기에 이렇게 주목되어 있는 21절에 한정돼 있는 시설을 앞뒤로 좀 확장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보면 21절이 이 자체로도 참 불친절한 서사라는 것을 알 수가 있어요. 무슨 말이냐면 시몬이 그냥 가다가 갑자기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됐잖아요? 굉장히 불친절한 서사를 그의 인생에 순간적으로 경험하게 되는데 구레네 사람 시몬만 불친절한 서사를 경험하는 게 아니고 21절 자체가 마가복음 이 전반 맥락에서 보면 불친절한 서사예요. 즉 어울리지 않는 서사입니다. 갑자기 끼어드는 서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설명을 드려볼게요. 우리가 1절부터 25절까지 본문을 읽었는데 사이 지금 처음 읽은 21절을 그냥 여러분 삭제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삭제한다 그러면 위에 있는 20절 밑에 있는 22절이 남는 건데 20절 22절을 그대로 한번 읽어보면 전혀 문제가 없어요. 여러분 한번 화면 보시면서 같이 한번 그게 어떤 건지 읽어보세요. 20절 22절 같이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가복음 15:20,22,
20 희롱을 다 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22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오히려 없는 게 더 나은,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 구절이 즉 21절이 왜 삽입됐는가? 맥락에 별로 어울리지도 않고 갑자기 한 절만 딸랑 튀어나오는 이 구절이 마가의 입장에서는 어떤 의도가 있지 않고서야 이 맥락상 정황상 굳이 들어갈 이유가 없겠죠. 그럼 인제 의도가 뭐냐 이걸 우리가 살펴봐야 되는데 이왕 본문이 마가복음으로 이렇게 여기 21절에 끼어 들어갔으니까, 어디로 끼어 들어갔는지 살펴보면 여러분 21절, 22절, 23절 이렇게 눈으로 훑어가 보시면 21절은 이제 구레네 사람 시몬 얘기니까 빼고요. 22절에 보면 거기에 주요 인물은 예수님이에요. 그죠? 그리고 23절에 보면 거기도 예수님인 것 같은데, 사실 22절 23절에 등장은 안 하지만 실존하는 인물인데 그게 뭐냐면 22절에 예수님을 끌고 가는 존재고 23절에 봐도 몰 약을 탄 포도주를 주는 존재입니다. 그들은 24절에서 무슨 일을 벌이죠. 십자가에 못 받고 예수님의 옷을 나누 제비 뽑아 나눕니다. 이들이 누굴까요? 알렉산드와 루퍼라고 얘기하면 큰일 납니다. 누굴까요? 로마의 병사들입니다. 이 병사들을 주목하려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24절 기준으로 보면 이들이 뭘 하고 있죠. 제비 뽑아서 예수님의 옷을 나누고 있습니다. 누가 시켜서 했나요?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걸 좀 정리하면 지금 이들은 예수님의 것을 자발적으로 취하고 있습니다.

다시요. 로마 병사들은 뭐하고 있다고요? 예수님의 것을 자발적 능동적으로 취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몫으로 되어있는 것을 자신들이 자발적으로 취해가고 있습니다. 가져오고 있습니다. 이 병사들과 대비된 존재가 지금 우리가 갑자기 삽입시켰던 21절에 구레네 사람 시몬입니다. 시몬은 억지로 자발적이 아니구요. 억지로 예수님의 것을 떠맡습니다. 병사들은 어떻게 한다고요. 자발적으로 예수님의 것을 가져옵니다. 이 대비를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의 장면 즉 시몬이 등장하는 장면이 굉장히 중요하게 삽입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앞에서 시몬을 너무 자녀 이야기 몰고 가지 말자고 너무 먼 지점 가지 말고 여기 안에서 해결해 보자는 건데 마가는 결국 이 두 존재 즉 시몬과로 병사들을 대비시키면서 마가복음 종반부에 걸 맞는 아주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중요한 질문은 뭐냐면 자 로마의 군사들이 자발적으로 예수님의 것을 나누어 가졌다. 누가요? 로마의 병사 로마의 군사들이 자발적으로 예수님의 것을 나누어 가졌다 자 그러면 주님의 군사는 어딨나? 치욕을 주고 싶어서 주님의 옷을 다 벗기고, 그의 것을 앗아가고, 가져가는 병사들 대신에 주님의 치욕을 함께 하고 싶어서 주님의 수고를 덜어드리고 싶어서 로마 군사들 못지않게 자발적으로 주님의 것을 좀 나에게 주십시오. 나에게 덜어주십시오. 의욕적으로 말하고 있는 말에 써야 될 존재들은 지금 어디가 있는가? 시몬을 봐라, 얘 억지로 지금지고 간다. 왜 지고 가는지도 잘 모르겠고, 억지로지고 간다. 그런데 이렇게 십자가를 나눠질 거라면 예수님의 몫으로 이렇게 짊어진 이 십자가를 나눠줄 거라면 이렇게 억지로 질 게 아니지? 뭣도 모르는 애 갑자기 잡아다가 아무나 잡아다가 이렇게 짊어질 게 아니고, 십자가를 지라고 당부했던 예수님의 명령을 가까이에서 들었던 누군가가 정말 없는 건가 예수님 곁을 지금 지키고 이건 내가 지겠노라고 응당 손을 들어야 될 사람이 지금 없는 건가 지금 질문을 하고 있는 거 여러분이 숱한 질문 속에 반복된 질문 속에 등장해야 될 사람이 누군지 아시죠. 누굴까요? 제자들이에요. 제자들 지금 마가는 그래서 시모온의 불친절한 서사를 통해서 원래 자리에 있었어야 될 제자들 그런데 공석인 제자들을 지금 등판시키고 있는 겁니다. 시몬의 억울함에 이렇게 집중하느라 놓쳐버렸던 이 불친절한 예수님께 이 서사에 너무나 불친절한 제자들이 지금 발각되는 장면이라는 곳입니다. 시몬이 여기 등장하는 이유입니다. 마가복은 8장 34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볼까요?

*마가복은 8:34,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러분 시몬이 지고 있는 십자가는 진작부터 예수님이 진작부터 누가 지라고 말해줬습니까? 제자들이 지고 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다가 제자들은 지금 혼비백산(魂飛魄散) 다 사라지고 어찌된 일로 이 길을 예수님 혼자 그것도 생판 그동안 없어서 안 보였던 시몬이라는 사람이 등장해서 사람에게 지워줘야 할 정도로 예수님은 지금 기진맥진(氣盡脈盡)하여서 홀로 길을 오르고 계시는데, 여기 보이세요. 오늘 마가복음 8장 34절에 이 명령의 가장 첫 번째 실행 팀이 됐었어야 할 이 제자들이 지금 어디가고 어디 가고 없습니까? 그 현재적 질문이요. 그러니까 시몬을 자녀의 이야기로 멀리 떨어뜨리기 전에 지금 이 장면에서 물었어야 될 현재적 질문은 어디로 가버리고, 우리가 자꾸 시몬 이야기를 더 먼 쪽으로 자꾸 붙이냐 이러는 것입니다. 그게 틀렸다는 얘기가 아니구요. 그도 그렇게 여러분 시몬이 알렉산드와 루포의 아주 좋은 성장 스토리에 이르려면 오늘 여기서 마가복음 15장 21절에서 십자가 한 번졌다고 그게 그냥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겁니까? 내일의 구레네 사람 시몬의 내일의 현재에서 그가 자기 십자가를 치는 제자 도에 들어서지를 않았다면 제자의 삶을 살아내는 치열함이 없었다면 자기 자리를 잘 지키는 열심이 없었다면, 그날을 볼 수 있었겠습니까? 따라서 시몬은요, 지금 제자들의 자리에 대신 위치하고 있고, 이건 그냥 재미삼아 들으시면 제자들의 수장이었다고 하는 시몬 베드로와 묘하게도 이름이 같으면서, 그렇게 제자들의 공석을 채우고 있고, 공석인 제자들의 현주소를 고발하는 데 쓰임 받고 있습니다. 도망가서 지금 흔적도 보이지 않고, 이 중요한 순간에 자발적으로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제자들을 발각시키는 한 사람으로 오늘 여기 서술되고 있다.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정도는 되어야 좀 끼어들 만하지 않겠습니까? 이 불친절한 서사가 좀 그러니까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마더복음에 맥락 없이 이렇게 이 장면이 한 칸으로 쫙 끼어드는 것이구나!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이 어떤 서사 가운데 계시는지는 잘 모릅니다. 늘 강단에서 설교를 하면 항상 가장 힘든 게 청중이 어떤 마음이신지 잘 모르겠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너무 이렇게 또 그런 것인데, 여러분 그러나 서사가 어떤 것이든지 간에 또는 여러분들의 서사가 어떻게 불친절한 것이든지 간에, 하나님 앞에 해석되지 않을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불친절한 이 서사를 해석할 힘을 갖추고 있느냐, 그게 관건이지 불친절한 서사 자체가 문제가 될 리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시공간(視空間)을 넘어서 존재하는 것이 하나님이고 사실 하나님은 시공간을 초월해서 오히려 시공간을 창조하신 분 아닙니까? 그런데 이 시공간 안에 살아가면서 아등바등 대고 있는 우리들에게 자기를 알리는 접점을 마련한다고 하면 입장에서는 그게 항상 불친절한 서사일 수밖에 없어요. 성경 전반을 걸쳐 한번 기억을 더듬어 보세요. 아주 대표적인 예로 예수님이 수태고지(受胎告知)를 받았다. 마리아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되죠? 이 저 출산 시대에 뭐 이런 거 아니잖아요. 굉장히 불친절한 서사가 갑자기 다가오는 거예요. 성경 전반에 걸쳐서 항상 하나님이 그의 어떤 인생에 뛰어들어 개입하실 때는 사람이 자기 이 서사가 굉장히 불친절하고 여깁니다. 자기의 이 세계관 안에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거든요. 그걸 수용하는 데 시간이 걸리고 수용하는 과정을 우리는 믿음이라고 부르게 되는데, 맥락에 그러나 항상 우리는 불친절해 보이지만 맥락에 항상 나 같은 이 피조 세계 안에 갇혀있는 존재를 굳이 만나려고 하시는, 나를 통해 일하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것이 맥락 안에 항상 담겨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의 불친절한 서사들을 살펴보면 거기에 항상 나와 나의 사명과 그리고 내가 거한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과 서사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오늘도 그래서 불친절한 여러분들의 각자의 서사 속에서 오늘 하나님이 무슨 이야기를 좀 하고 싶어 하는 건지, 나에게 좀 어떤 이야기와 어떤 무기를 들려주고 싶은 건지, 나는 어떤 역할이고 사명인지를 좀 알고자 찾고자 기도하러 나오신 여러분들에게 하나 오늘 기도 가운데에 또는 말씀 가운데 찬양 가운데에 말씀하여 주시고, 내가 감사히 지고 갈 십자가가 또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시는 귀한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는 고난 주간입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과 구원, 뭐 우리를 향한 사랑, 이런 것들을 많이 우리가 머릿속에 벌써 연상될 텐데 그러나 그것만 묵상한다면, 전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오늘 우리가 오늘을 살아갈 힘이 약화된다고 생각해요. 방금 나열한 것들은 사실 예수님의 수준에서 예수님이 치르시는 일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우리의 구원 우리 어떤 죄, 삶 충분히 지금 묵상하고, 또 우리 안에서 이걸 붙들고 씨름해야 되겠지만, 사실은요, 그렇게 너무 아까 알렉산드 루퍼처럼 멀리 이어버리면, 사이에서 우리가 뭘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제가 오늘 뭐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늘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불친절한 서사로 너무 많이 느껴집니다.

오늘 어떻게 해야 되는지는 잘 모르겠으니까, 그렇다면 구원사역을 단번에 다 이루어놓고도 왜 예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고 가라고 했을까?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라고 했을까?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는 희생과 구속이었죠. 이전의 율법으로 옮겨보자면 그것은 하나의 제사였고, 제사가 들여지는 공간은 성막이고 성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자신이 완벽한 제물이면서 자기 자신이요. 그러면서도 우리에게 너희들의 십자가를 들고 가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뭔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그 철저한 제약을 깨닫고 날마다 회심하라는 그런 면모도 있지만 더 넘어서는 니가 거한 그곳에서 그런 제사를 드리는 그런 제물을 올려드리는 그런 성막 삼고 성전 삼는 그래서 이 온 우주가 나에게 예배하는 온 전 우주적 예배 처소 삼아주는 꿈이 나한테 있는데, 내가 시작한 일을 너도 너의 지경 안에서 너의 영역 안에서 잘 감당해 주라. 하나님 오늘 그렇게 우리에게 부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자신의 십자가도 지지만 자신의 십자가도 지고 다 끝냈지만 우리에게도 여전히 십자가를 맡겨서 그 맥락 있는 부탁을 하고 계시다.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로마를 힘으로 못 눌러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게 아닙니다.

오히려 로마를 힘으로 누르는 것, 당시 모든 정부를 자신이 갖고 있는 권세로 누르는 것이 더 친절한 서사고 있는 이들에게는요. 맥락 있는 역사가 맞습니다. 그렇게 안 하세요.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군사력으로 오는 게 아니기 때문이에요.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나옵니까? 하나님이 임재 하셔야 오는 겁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어떻게 되느냐? 죄가 없는 땅에 임재 하는 것이요. 또 하나님께 예배하는 땅에 임재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기뻐 올려드리는 제사의 향기를 맡으시면서 흠향(歆饗)하시면서 공간에 거하시는 것이잖아요. 그러니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의 제물이 되셔서 성전성막의 영역을 다 찢으시고 그곳에 하나님이 임재하신 곳 그 거룩한 땅으로 바꾸시면서 죄악 된 땅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길 원하셔서 자기 자신이 희생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 신앙을 받아 가진 우리들에게도 너희들도 너희들의 공간의 하나님의 인재를 초청하는 귀한 축복의 통로 생명의 통로가 되라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십자가를 힘써 줘주라. 라고 말한 것으로 저는 이해합니다. 단순히 늘 우리의 죄악에 이렇게 내향적으로 눌려가지고 늘 우리는 죽일 죄인이지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물론 그것도 생각하지만 오늘 그곳에서 하나님 제가 제물 되어서 누군가를 하나님 만나게 하는 귀한 성전과 성막 담임 목사님 말씀대로 제사장 나라 역할을 하는 내가 되겠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는 바로 사명의 일환인 겁니다.

오늘 본문으로 따지면 시몬이 억지로 지고 가던 자리가 원래 누가 있어야 된다구요? 제자들이 있어야 될 자린데, 너는 지금 너는 지금 이야기를 읽고 알고 있는 너는 지금, 과연 아무것도 모르고 억지로 쥐고 가는 사람이냐? 아니면 이 모든 맥락에 관심이 있어서 이야기가 더 이상 불친절한 서사가 아니라, 나와 함께하는 내가 준 사명에 아주 맥락 있는 서사로 받아 가지는 사람이냐 알렉산더와 루퍼처럼 30년 후에 이루어질 그냥 보상으로 이 오늘 십자가를 치부하는 사람이냐, 아니면 오늘 기꺼이 지고 가는 전심으로 자발적으로 주님 곁에서 십자가를 좀 치고 싶은 바로 제자더냐?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도리어 묻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영 가족 여러분 원래 서사란, 오늘 제가 제목 정한 대로 서사란 원래 불친절한 법입니다. 중요한 것은 서사로 깊이 파고들었느냐, 그래서 그게 내 길이길이 남길 이야기가 되었느냐, 예수님과의 진한 스토리가 되었느냐, 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억지로 십자가 친 한 번으로 불친절한 서사로 구레네 사람 시몬이 뒤에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듯이, 오늘 여러분들의 불친절한 서사 곳곳에, 뭐 여러분의 미래나 자녀의 문제나 풀리지 않는 기도의 제목이나 하여튼 장벽이고, 허들 같은 여러분 모든 서사의 불친절한 지점에 불친절한 서사 그대로 두지 마시고, 오늘 거기서 하나님께서 나와 무슨 이야기를 쓰고 싶어 하시는 건지, 나를 통해 세상에 무슨 질문을 던지고 나를 통해 교회에 믿는 이들에게 믿지 않는 일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싶어 하는가? 하는 것으로 여러분의 생애를 하나님 앞에 온전히 올려드리시는 귀한 십자가 지고 가는 제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여러분 그래야 우리의 사는 날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살다가 능력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사는 날 어떻게 능력이 있습니까? 현재를 해석하는 힘, 현재에 주시는 십자가를 기꺼이 칠 수 있는 마음, 고난 주간을 지나 부활절도 특새로 이어지는 이 좋은 기도하기 좋은 이 시절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여러 불친절한 서사들을 각자의 불친절한 서사들을 기도 가운데에 해석할 힘주시고, 그래서 단 한 분도 억지로지는 십자가 없게 하시고, 나 모를, 너도 나도 이거 왜 지는지 모르겠다. 나도 일단지고 나가자, 가다 보면 뭐 있겠지, 너무 아쉬워요.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그러라고 주신 생명의 고귀한 시간이 아닙니다. 우리의 희생과 헌신 속에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기뻐 받으시고 특별히 그의 희생과 헌신 속에서 내가 십자가 지는 것이 자발적으로 주님, 남의 몫을 이렇게 감당하는 것이 너무나 기쁘고 감사하다. 그렇게 신앙의 새로운 부흥기를 마련하시는 귀한 여러분 되시기를 이 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약
현재를 해석하기가 너무 어려운 우리 가운데에 여전히 미래에 대한 고민이 있고, 진척되지 않는 미래에 대한 답답함이 있고, 열심히 부딪쳐도 넘어설 수 없는 미래 때문에 답답한 마음도 있고, 분투하고 애써 보지만 명확하지 않은 현재 때문에 너무나 괴로운 인생들을 사는 우리가 현재로 마음 무거운 경우가 너무 많을 때, 오늘 구레네 사람 시몬처럼 그래서 우리가 앞뒤 좌우도 모르고 억지로 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인생이 되지 않고, 분명히 세우고자 하는 자리가 있을 것임을 믿고, 나를 통해 물으시고자 하는 것이 있어서 하나님 나를 사용하시고 계시는 줄 확신해야 한다. 순전히 하나님께 붙들려서 하나님 마음껏 나를 사용해 주시길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 좋은 이정표가 되며 작지만 하나님 나라에 좋은 모퉁이 돌이 될 수 있도록, 귀퉁이가 될 수 있도록 주님 앞에 매어 달리며 나아가는 이 귀한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야 한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것은 우리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내용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던 장소, 그곳은 골고다라 하는 곳으로 번역하면 해골의 곳을 뜻한다. 이곳은 평범한 처형장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점에서 죄인들과 다를 바 없이 취급되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못 박히셨던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던 그 시각은 제 삼시였다. 유대인들의 계산 방법에 따르면 제 삼시는 곧 아침 아홉 시경이거나 아니면 그보다 좀 늦은 시각이었다. 그들은 바로 그 때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받았던 모욕, 사형당하기로 된 죄수에게는 포도주를 주는 관습이 있었는데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줄 포도주에 몰 약을 탔으므로 포도주의 맛은 썼다. 예수님은 그 포도주를 맛보시긴 했어도 그것을 마시는 것은 원치 않으셨다. 그는 그 포도주의 쓴 맛을 기꺼이 받아들였지만 그것을 마심으로써 그 효과를 얻으려 하시지는 않으셨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들의 옷들은 사형을 집행한 사람들에게 사례로 주어졌다. 그래서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나누려고 제비를 뽑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그들은 예수님의 고통을 즐거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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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03월 13일)
제목: "영생의 복이 있는 팀워크"
말씀: 시편 133:1-3
찬양인도: 쉐키나(이동선 부목사님)
사회: 강건우 부목사님
 
설교자: 양은규 부목사님(목양9팀, 1권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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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33:1-3
1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2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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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성경 말씀에는 하나님의 감격, 하나님의 칭찬, 하나님의 복이 함께 연합하고 함께 거하고 함께 하나 되는 그 동거는 형제들 위에 부어졌다라고 선언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시편 본문 133편 3편 앞에 보면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이렇게 적혀 있는데요. 히브리어 성경에는 이렇게 돼 있지 않고 다윗의 시 그리고 올라가는 자들의 노래 이렇게 돼 있습니다. 아마 이게 후대에서 아마 이것이 예배에 의해서였기 때문에 성전이라고 붙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솔로몬 다윗 시대는 성전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회막에서부터 이미 유월절이나 초막절에 그들이 함께 요 앞에 보이고 그 얼굴을 함께 나타내는 그 절기에 이 찬양이 불려졌다. 라는 거예요. 그래서 다윗 때부터 솔로몬 그리고 솔로몬 이후까지 계속적으로 이 찬양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술에 고백되어지고 함께 노래했던 곡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함께 이 곡을 고백하면서 그들이 우리는 어떤 사람들인가? 이 성전에 올라가는 우리는 어떤 사람들인가 함께 고백하면서 그들의 정체성을 이해하게 됐을 것이고요. 그리고 우리가 함께하는 것에 대하여서 우리가 함께 연합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함께 이 절기를 지키면서 같이 시간을 보내는 그 동거하는 그 시간을 통하여서 우리가 함께하는 것에 주님이 어떤 복을 주시는가라는 것을 기대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편은 단순하게 그들의 공동체의 고백, 그들의 정체성, 하나님의 축복을 넘어서서 여기 안에는 굉장히 계시적이고 언약적인 메시지가 숨겨져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사도행전 2장 29절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행전 2:29,
29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다윗을 가리켜서 그는 선지자다. 그는 선지자여서 메시아의 부활을 이렇게 예언하였다라고 29:31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다윗은 선지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편 140편 또한 다윗이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 정도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마음을 이 시에 담아주신 것입니다. 다윗에게 보여주신 영적 의미가 우리는 확인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눈에, 다윗의 마음에 하나님의 감격을 보여줬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의 그 아름다움에 하나님의 감격, 하나님의 그 벅찬 희열을 다윗의 눈과 마음과 그 입술에 담아준 것이죠. 그래서 어떻게 해요? 내 백성의 연합하는 것을 봐라. 그들이 함께 나와서 내 얼굴을 보는 것을 봐라. 그들이 얼마나 아름다우냐? 이것이 얼마나 선하냐? 내가 이것을 보고 복을 내리지 않겠냐? 내가 복 내리겠다. 야, 이거 영생이야, 이렇게 하나님이 감격하는 것입니다. 이 다윗을 통한 하나님의 감격이고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우리 첫 번째 한번 같이 따라 읽도록 합시다. 시작
 
I. 첫 번째, 참 연합과 참된 팀워크는 하나님의 눈에 아름답습니다.
 
다윗은 형제가 연합하는 것이 아름답다 선하다 이렇게 말하는데요. 이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서 a는 b 같다. a는 c 같다. 이렇게 연합의 의미를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a는 b 같다 할 때 이 b는 뭐냐 하면 ⓵첫 번째는 보배로운 기름이에요. 2절에 나와 있는 보배로운 기름, 그래서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은 뭐와 같다 보배로운 길을 갔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은 무엇 같다 ⓶헐몬산의 이슬 같다 이렇게 비유해 주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의 아름다움은 다윗이 야 형제가 연합하는 것에 그 아름다움은 내 눈에 만족스럽다. 지도자의 눈에 기쁘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눈에 선하고, 하나님의 눈에 흡족하고, 하나님의 눈에 아름답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디서 확인할 수 있습니까? 3절입니다. 3절에 뭐라고 돼 있어요? 예. 여호와께서 덕을 명령하셨다.
 
*시편 133:3,
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곧 영생이다. 하나님께서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의 그 아름다움을 보고 거기에 이야!! 복 받을 행동이다. 잊고 복 받을 만하다. 이거 영생이다. 라고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는요. 하나님이 아름답다. 라고 하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토브’ 라고 그러는데 하나님의 눈에 좋다 선하다 ‘토브’ 아름답다. 라는 표현이 있는데 어디에 나와 있냐면 창세기에 나와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그 지으신 것이 어떻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좋았다가 토브입니다. 오늘 여기 있는 토브 하나님 눈에 선하다 할 때도 토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눈에 좋았다. 그리고 또 뭐가 좋았어요? 하나님 눈에 힘이 좋은 건 뭡니까? 남녀가 함께하는 것을 보고 심이 좋았더라.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이 좋았더라. 근데 하나님 눈에 좋지 않은 것이 있어요. 뭐가 좋지 않아요? 독거하는 거 이 가운데 아무도 혼자 살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셨네요. 혼자 독차하는 것이 아름답지 않다. 좋지 않다. 그리고 뭡니까? 죄로 인하여서 남녀 부부의 관계가 깨어지고, 또 죄로 인하여서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가 깨어지고 이것이 뭡니까? 하나님 눈에 좋지 않았습니다. 연합이 깨어진 것이죠. 팀웍이 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참 연합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정말 우리가 함께 하나님의 얼굴을 뵙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연합은 하나님의 눈에 아름다운 것이고, 복을 명령하실 만한 정말 선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의 아름다움을 b와 c라고 제가 표현했는데 b는 뭐라 그랬습니까? 보배로운 기름, 보배로운 기름 그다음에 c는요. 헐몬의 이슬, 여러분 이 두 가지 다 우리는 뭡니까? 이래도 기억도 잘 못할 만큼 희미하지만 이것을 유대인들이 딱 들었을 때는요. 이거는 매우 강렬한 이미지이고,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동일한 이미지가 그 언어 속에서 다 고백되는 거예요. 여러분, 두 비유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보배로운 기름도, 그리고 헐몬의 이슬도 이 두 가지 비유가 공통점이 있어요. 뭘까요? 자꾸 질문만 하면 곤란하겠죠. 제가 알려드릴게요. 흘러내린다. 두 비구는 흘러내립니다. 그리고 이 두 비유조차 그 결과의 공통점이 뭐냐 하니까, 하나님의 축복이고, 그것은 영생 하라 이래가지고요. 그 영원함 그 하나님께서 이 두 가지 비유를 딱 보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 그 영원함이 깃든 것이다. 라고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우리 한번 읽어보도록 하십시다. 시작
 
II. 두 번째, 성령의 기름 부으심과 임재가 영생의 복이 있는 팀워크를 만듭니다.
 
-여러분 여기 나오는 보배로운 기름 이렇게 돼 있는데요. 이 보배로운 기름 이것은 어떤 기름이냐? 여러분 이 기름은요 아론의 머리에 부었다라고 말했는데 이 기름은 바로 관유라고 합니다. 관유, 관유는 출애굽기 29장에 있는 말씀인데요. 우리 한번 같이 읽어보도록 하십시다.
 
*출애굽기 29“6-9,
6 그 머리에 관을 씌우고 그 위에 성패를 더하고.
7 관유를 가져다가 그 머리에 부어 바르고.
8 그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들에게 속옷을 입히고.
9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띠를 띠우며 관을 씌워서 제사장의 직분을 그들에게 맡겨 영원한 규례가 되게 하라 너는 이같이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위임하여 거룩하게 할지니라.
-여러분, 이 특별히 시편 133편에 있어서의 이 보배로운 기름이 아론의 수염 그리고 그 옷깃을 타고 내려서 온몸에 흘러내린 같다. 라고 이렇게 표현을 하고 있는데요. 이것은 바로 대제사장의 위임식입니다. 이 위임 식에 쓰이는 관유는 어떻게 만들어지느냐 이건 함부로 만들면 안 돼요. 만들다가 사람이 써도 안 돼요. 쓰면 어떻게 돼요? 그 백성 가운데 끊어질 거다 이렇게 표현해요. 굉장히 오묘(奧妙)하고 신비한 기름입니다. 우리 출애굽기 30장에 있는 이 관유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한번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30:23-25,
23 너는 상등 향품을 취하되 액체 몰약 오백 세겔과 그 반수의 향기로운 육계 이백 오십 세겔과 향기로운 창포 이백 오십 세겔과.
24 계피 오백 세겔을 성소의 세겔대로 하고 감람기름 한 힌을 취하여.
25그것으로 거룩한 관유를 만들되 향을 제조하는 법대로 향 기름을 만들지니 그것이 거룩한 관유가 될지라.
이게 향 기름이에요. 향 기름, 그래서 이걸 더해가지고요. 거룩한 관요를 가지고 어떻게 해요? 아론의 머리에 붙는 겁니다.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이게 한 양이 어느 정도냐면 20kg 정도 20kg, 20kg 정도면 여러분 해피 식용유 20kg 한 통 튀김할 때, 쓰는 거 그 정도의 양입니다. 그 기름을 가지고 어떻게 해요? 사람인 부족한 아론 사람이에요. 근데 그에게 대제사장의 위임을 하면서 그 머리에다가 붓는 겁니다. 그래서 이 보배로운 기름 그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여기 머리에 부으니까 어떻게 돼요?
 
여러분 이런 거 안 부어봤죠? 여러분 제 향기를 한번 맡아보세요. 이 신비한 기름이 머릿속부터 쫙 부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여러분 조금은 제가 흘려 내려가지고 이렇게 하는 게 아니고 20kg 20kg 그래서 이게 부어지면요. 이 제사장이 이 에봇을 입거든요. 에봇을 입고 여기에 12지파를 표현하는 보석이 박힌 옷을 입고 이제 세마포는 안 입었겠죠. 이제 탁 내려 있으면 모세가 그 기름을 가지고 붓는 겁니다. 부으면 이 기름이 흘러내릴 때 모든 사람들 눈에 뭐로 보여요? 저거 하나님이 특별하게 세우는 하나님의 임직이 저기 있구나! 눈으로 다 봐요. 두 번째는 이 보배로운 기름이 옷깃을 적셔가지고 흘러내려서 발끝까지 다 흘러내렸을 거예요. 그러면 이 향이 향이 여러분 그 모든 이 대제사장의 위임 식에 참여하고 있던 사람들이 그 향을 어떻게 했겠어요? 다 맡는 겁니다. 저는 아직까지 이 관유를 한 번도 맡아본 적이 없어요. 만들지 마라 그랬으니까 못 만들었겠죠. 근데 이 기름을 가지고 붙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 대제사장의 위임으로 선포할 때 이것이 신약 적으로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건 구약 적으로는 그런 의미가 있지만 신약 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래서 신약에 보면 우리가 이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이것에 대해서 해석하는 단서의 질문을 한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이 뭐냐면 ‘하이베르그 신앙고백서’ 라는 책이 있습니다. 하이베르그 신앙고백서 제31문과 32문에 보면 이렇게 돼 있어요.
 
제31문, 왜 예수님을 기름부음 받은 자, 라는 뜻의 그리스도라고 부릅니까?
제32문, 그러면 당신은 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옵니까?
-이렇게 질문을 두 가지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는 그렇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하는데요. 예수 그리스도까지가 다 이름인 줄 알아요. 아니에요 예수가 이름이고 그리스도는 직임, 직임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100% 하나님이시고 100% 인간이시지만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 성부 하나님께서 성령 하나님을 메시아로 이 땅에서의 공직의 삶을 살게 하실 때에 그 위에 뭘 벗습니까? 세례요한이 물세례를 하죠. 물세례를 하지만 그 물세례 이면에 성령이 어떻게 해요? 비둘기 같이 그 위에 나시는 거예요. 성령이 그 위에 부어지는 거예요. 예수님의 메시아직, 메시아지 예수님의 그리스도 직, 이것이 공식적으로 선언되고 선포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옵니까? 우리는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그 직임, 그 사명, 그 기름 부으심을 동일하게 소유하고 우리가 이 땅의 왕 같은 제사장으로, 그의 소재는 백성으로 이 땅을 살아가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이 그 속에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기름 부으신 메시아 적은 공적으로 시작되었고요. 우리는 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 땅에서 메시아 책임을 계속적으로 감당하는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이고, 교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아론은 부족한 사람이에요. 그냥 인간이었어요. 은 죄인이에요. 그런데 그가 하나님 앞에 구별된 제사장의 그 책임을 감당하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그에게 관유를 붓게 했습니다. 그 관유가 이렇게 구워지면서 향기가 쫙 나는 거야. 여러분 향기는요. 우리의 뇌에 굉장히 강력하게 박히는 메시지입니다. 여러분, 자기 똥차가 지나가며 우리는 이미 맡았던 향기이기에 그죠? 냄새가 안 나는데도 나는 것 같아. 여러분 대제사장의 그 위임 식 가운데에 그 기름 부어지는 아론의 모습을 보고 또한 그 향기를 맡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뇌리에 박히는 그 향기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아마 저의 해석입니다. 아마 속죄의 향기라고 느꼈을 겁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길, 나를 살릴 하나님 앞에 살릴 수 있는 그 제사장의 향기를 그들이 맡았을 것입니다. 저 사람은 희생양을 통하여서 우리를 우리의 죄 문제에서 해결할 분이야! 라는 향기가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느껴졌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 대제사장이요. 아론이 이 기름부음 다 받고 난 다음에 민숙이에서 어떻게 기도하라고 명령하시냐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호와는 내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내게로 향하여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내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지니라.” -이게 뭐예요? 대제사장이 세워질 때 그 기름을 관유를 부으면서 그 지금이 세워지고 난 다음에는 그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복을 선포하는 책임을 감당하는 겁니다. 아마 대제사장의 그 기름의 냄새를 맡을 때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축복의 향기다. 하나님의 심정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복 주시는 그 향기다. 라고 느꼈을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어디에 있다고요?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그 자리에 하나님이 느끼시는 감동이고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하게 되는 축복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고린도후서 2장 15절 말씀 한번 같이 읽도록 합시다.
 
*고린도후서 2:15,
15 우리는 구원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의 향기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이 세상을 향하여서 어떤 향기를 바라고, 세상은 교회를 바라보면서 어떤 향기가 그들의 뇌리에 박혀야 할까요? 여러분 물어보셨습니까? 여러분, 여러분 주변에 있는 직장인들에게 여러분들의 동료에게 그리고 여러분들의 가족들에게 물어보셨나요? 나에게서 어떤 향기가 납니까? 여러분, 아론이 세워졌을 때 그 아론을 바라보면서 모든 사람들은 죄 사함의 향기를 맡았을 것입니다. 구원의 향기를 맡았을 거예요.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그 축복의 기도처럼 그들은 다 축복의 향기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는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이 메시아적인 책임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세상 가운데 어떤 향기를 맡게 해야 할까요? 그러면 세상은 어떤 향기를 맡나요?
 
사도바울은 “우리는 구원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다.” -여러분 그리스도라는 말은 메시아입니다. 메시아 메시아여야 합니다. 저는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향기가 나기를 축복합니다. 메시아의 향기가 나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이게요 어디서 난다고요? 형제가 연합할 때요. 형제가 서로 사랑할 때, 형제가 자매가 함께 거하며 함께 살아가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 방향을 맞출 때 거기에 그 향기가 난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은 교회를 향해서 무엇을 기대할까요? 세상은 교회를 향하여서 그 구원의 향기, 그 축복의 향기를 기대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에 이 기름 부으심이 있는 공동체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세 번째 우리 같이 한번 말씀해봅시다.
 
III. 세 번째, 이스라엘 부어짐은 하나님의 성품으로 풍성해지는 사역 적 팀워크와 열매를 기대하게 합니다.
 
-여러분 그 두 번째 비유에 보면 ‘헐몬의 이슬’이라고 그랬습니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린 같다라고 말했을 때, 이 헐몬의 이슬 여러분 누군가 이렇게 말을 하면요. 못 알아듣는 말을 하지는 않아요. 우리는 해석이 필요하지만 아마 다윗이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의 아름다움은 헐몬의, 헐몬산에 있는 많은 이슬들이 모든 시온에서 내린 같다 이렇게 말했을 때는요. 그 언어를 듣는 모든 사람은 동일한 그림, 동일한 생각을 하게 됐을 것입니다. 이 가나안 땅에서 이 헐몬에 이슬이라는 말은 여러분 헐몬산을 바라보면 거기에 만년설이 있답니다. 요즘 여름에는 만년설이 안 보인대요. 많이 기후가 좀 그래서 그러나 거기에 만년설이 있고, 그리고 거기에는 항상 그 만년설이 녹은 그리고 수증기가 되어서 매일같이 내리는 이슬이 근원이 거기다. 라고 모든 사람들이 다 생각하는 거예요. 매일매일 이슬이 내리는데 그 권한이 어디 있을까요? 다 호르몬에 있으리라고 생각을 한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많은 물이 쌓여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하나님의 복이 저기에 쌓여 있다. 라고 보는 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그 헐몬에 쌓여 있는 그 복들이 어디에 내려요? 시온의 산들에 내린 같지 이 시온의 산들에 내리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 아름다움은 바로 형제가 연합하는 그 모습 속에 날리시는 하나님의 복이다. 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헐몬의 이스리를 바라보며 기대할 것입니다. 여러분 목동들이 헐몬의 이슬을 바라볼 때 이 씨를 딱 들려주면 뭘 생각할까요?저 헐몬의 이슬이 쫙 올라가지고 모든 시온의 산들에 내릴 때에, 거기에 내가 몰고 가는 양떼와 소대가 그 풀을 뜯고 살찌는 것을 상상할 겁니다. 농부가 이 시를 들으면서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린 같다. 라고 말을 했을 때, 그 농부들의 뇌리 속에는 저 이슬이 내리면 곡식이 영글고 익어가겠고 올해도 풍년이 되겠구나! 라고 상상할 겁니다.
 
여러분, 어부가 이 시를 들을 때에는 어떡할까요? 야 저 헐몬의 이슬이 모든 요단들을 적시고 요단의 물이 풍성하여져서 요단이 범람하고 밀과 그리고 수많은 이 어종들이 풍성하게 자라고 그것이 사회로 흘러가서 모든 주변의 밭들의 풍성 함들이 이어지겠지 오늘도 풍년이 들겠지, 라고 생각하게 된다.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면 이와 같은 복이 있다고 말을 합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면 이것은 기대를 넘어서서 현실적으로 많은 풍성한 열매가 우리에게 맺힐 거라는 것을 알게 된다. 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가정의 웃음소리를 들어보셨습니까?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그 기도 소리를 들어보셨습니까?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그 의시하는 모습들을 보셨습니까? 여러분 한 분씩 제가 이렇게 예배를 마치고 나갈 때 보면 그 제자 반은 일부러 그러는지 아니면 출석 체크를 하기 위해서 그러는지 아니면 정말 그렇게 뜨거운지 잘 모르겠어요. 주님만 아시겠죠? 그런데 그들이 모여서 뜨겁게 기도하는 반들이 있습니다. 제가 지나가면서 어떤 생각하는 줄 아세요? “저반은 됐다. 저반은 된다. 저반은 원래 제자반 성공이다. 저반은 원래 사역반의 성공이다. 저 안은 된다. 저 안에는 은혜가 있다.” 이렇게 제가 속으로 딱 이야기하고 가요. 그리고 사역자를 딱 가요. 사역자 다 보고 난 다음에 기억했다가 잘했다고 칭찬해 주고 그런 거예요.
 
여러분,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이 단지 그들만의 어떤 일치, 그들만의 우리 함께 해보자! 뭐 이 정도의 것이 아니라요. 그것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덮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이 있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헐몬에 있는데 이것이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그곳에 어떻게 부어지는 실제적인 열매를 기대하게 되고 그것은 반드시 열매가 맺을 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형제가 연합하여 가는 것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지 하나님이 복을 주지 않을 수가 없는 거예요. 내가 복을 명하마, 영생이다. 이 영생이라는 말을요. 우리는 영생 영원한 삶 이렇게 되는데, 영원함입니다. 영원함 근데 여기는 여러분 우리가 이 영원함이라는 것이 굉장히 많은 개념들이 있지만 다윗은 그 영원함을 생각했어요. 그 영원함은 어떤 영원함일까 아마 다윗의 그 심상 속에 있는 그 영원함은 하나님의 영원함일까, 하나님의 생명의 영원함, 하나님의 복의 영원함,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계획의 영원함, 그 영원함이 어디에 있다고요? 하나님을 향하여 전심으로 연합하여 나아가는 메시아로서의 그 직임과 그러나 이 땅의 축복의 냄새와 정말 이 땅을 향하여서 정말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고자 하는 그 연합 위에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그 위에 부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들에게는 연합하고 있는 지체가 여러분 하나님 안에서 함께 연합하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향하여 메시아적인 사역을 감당하고 구속 사역을 감당하고 그 기름 부으심을 하여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드러나며, 세상은 우리를 바라보면서 구원의 향기를 맡으며 구속의 향기를 맡으며, 축복의 향기를 맡으며, 저들로 인하여서 우리가 복을 받을 것이라는 그 기대감을 주는 그 만남이 여기 있는 우리가 함께 연합할 때,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자반 사역반 이것은 굉장히 아름다운 구속의 향기를 바랄 수 있는 공동체입니다. 여러분 축복의 향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는 그러한 그 영원함에 복이 머무는 훈련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락방은 어떻습니까? 다락방은요 말씀이 이후로 하나 되고 기도로 연합하고 그 위에 수많은 물을 준비하고 계시고, 수많은 부유함을 준비하고 계신 그 하나님의 복이 임하는 곳이 바로 다락방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다락방에 그냥 가지 마세요. 거기에 가면 하나님의 기름 부으시니 헐몬의 이슬이 내릴 거라는 그 기대감을 가지고 연합하고자 나아갈 때에 하나님이 그곳에 그 영원함을 보이시고 복으로 우리에게 풍성함을 선물해 주십니다. 2033-50의 비전을 우리가 이루고자 할 때 이것이 그냥 이루어지겠습니까? 형제가 연합하여 함께 7천 기도의 용사들이 참 예배 자가 되어주고 은혜의 빚진 자로 자신을 낮출 줄 알고, 복음의 전도자로 용맹을 바랄 줄 알고, 내가 다른 사람을 한 사람으로 치유해 보겠다. 라는 그러한 헌신과 화해자로서 소명자로서 나아갈 때에 우리가 함께 그것을 시도할 때, 거기에 우리의 힘이 아닌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헐몬의 그 이슬이 그 위에 내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그러한 팀웍을 원하십니다. 그러한 연합을 원하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고자 헌신할 때에 그 위에 영원함이 있는 그 영원함의 복이 열매 맺도록 하나님께서 축복할 것입니다. 이 복이 살아가는 교회의 모든 공동체 위에, 그 여러분들의 가정 위에, 충만하게 임할 수 있게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약
우리는 서로 사랑함의 팀워크로 하나님께 나아가 누리는 영원함의 축복에 나를 가장 먼저 불러주심을 확신하며 의미 있게 사용해 주시길 원해야 한다. 생명의 풍성함을 사모하고 모든 영 가족들이 성령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믿고, 형제의 연합을 온전히 이루어 가는 사귐의 복을 경험하며, 예수님의 구속에 참여해서 태신 자를 작정하여 주님의 기쁜 자녀로, 그리스도의 생명의 향기로, 세상을 진동시켜서 우리는 진정한 복음의 씨앗으로 쓰임 받아 영생의 복이 있는 팀워크로, 참 연합과 참된 팀워크로 하나님의 눈에 아름다운 자가 되고, 성령의 기름 부으심과 임재가 영생의 복이 있는 팀워크를 만들어, 하나님의 성품으로 풍성해지는 사역 적 팀워크로 열매 맺는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 1보배로운 기름, 2헐몬의 이슬, -(흘러내림, 영생, 그 영원함, 하나님의 성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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