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5년 3월 26일)
제목: "내면의 두려움에 귀를 기울이는 삶"
말씀: 마가복음 4:35-41
찬양인도: 쉐키나(장단희 부목사님)

설교자: 김승진 부목사님)
-----

*마가복음 4:35-41,
35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
36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

제가 오늘 말씀 제목을 처음 정했던 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가장 쓸데없는 일’이었습니다. 좀 센 것 같아서 바꿨는데요. 우리 성도님들은 시간을 낭비하는 가장 쓸데없는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얼마 전 제가 책 선물을 받았는데요. 책 제목이 이랬습니다.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 제목부터 제 수준에 딱 맞는 책이었는데요. 무슨 관계인지 모르겠더라구요. 내용은 이랬습니다. 거친 들판에 외로운 소년이 두더지와 여우와 말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내용이었습니다. 내용 중에 아주 인상적인 부분이 있었습니다. 소년이 두더지에게 묻습니다. ‘너는 시간을 낭비하는 가장 쓸데없는 일’이 뭐라고 생각하니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아까 제 질문에 성도님들은 어떻게 대답을 하셨습니까? 두더지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일’이야 두더지가 제법입니다. 아 누군가 이런 글을 썼더라고요. ‘사람에게 가장 쓸데없는 시간은 쇼핑하는 시간이다.’ 저는 살짝 동의가 되지 않았습니다. 필요한 물건 사는 데 왜 그러지?, 궁금하여 그 이유를 더 들어 더 들어 보았습니다.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쇼핑을 나가면 풍족이나 만족이 아닌 결핍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살 수 없는 수많은 상품이 먼저 나를 유혹하고, 그 유혹(誘惑)에 응하지 않으면 지나가는 내 뒤통수에다 대고 결핍(缺乏)을 새긴다고 합니다. 저는 부친께서 목회자(牧會者)였어서요 어릴 적에 그렇게 풍족(豐足)한 편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나이키 신발을 못 신었어요. 당시에 프로스펙스가 있으면 스펙스를 신어야 했고. 아식스 비슷했던 아수스인가 나이스 이런 것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이키 매장 앞을 지나면 애써 피하려고 했습니다. 자꾸 저에게 말을 걸어오는데 너 나이키 없잖아. 하나 사야지 이런 것 하나 사 살 수 없어. 그냥 지나치면 어휴 너는 나이키 하나 못 사는 인생이니? 어디선가 들려오는 이 내면의 소리가 비교하게 되고, 나를 좀 초라하게 만드는 것 같았습니다. 쇼핑을 가면 지금 신고 있는 내 신발이 좀 초라해집니다. 만족하며 신었던 신발이었는데,. 운동회 때 신고 달려서 1등 했던 신발이었는데, 하지만 더 좋은 것 앞에서는 초라(綃羅)해집니다. 가지지 못할 때 우리는 결핍이라는 것이 남아버리고 맙니다. 우리 삶에 가장 쓸데없는 비교(比較)질에 나도 모르게 내면의 결핍이 생겨버린 겁니다. 결핍은 내면의 자리를 틀고 앉아 여러 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이 소리에 이끌려 살아가게 됩니다.

책을 좀 더 읽어 나갔는데요. 이런 글이 이어 나왔어요. 나는 ‘내면의 두려움에 더 많이 귀를 기울였다’는 것에 후회를 해 내면의 소리는 언제부턴가 두려움을 가득 담아서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그렇게 인생의 시간을 쓸데없이 낭비하게 합니다. 청년들 중에 이런 얘기를 합니다. ‘목사님, 저는 비혼자야 비혼주의자니까 제게 결혼하라.’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저는 결혼 안 할 겁니다. 저는 분명히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 청년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근데 하나 알 것 같습니다.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있나? 그런 마음에 불렀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그래 너는 결혼하지 마, 절대 결혼하지 마, 너 결혼하나 못 하나 내가 지켜볼 거야. 엄청 섭섭해합니다. 다시 묻습니다. 왜 결혼 안 하겠다고 한 거야. 흔한 세 가지 대답이 있어요. 하나는 혼자 사는 게 편해요. 또 하나는 우리 교회 형제들은 다 별로인 것 같아요. 딴 교회 청년이라고 하겠습니다. 결혼해서 행복한 사람 못 봤어요. 이 대답에 아주 역설적(逆說的)인 것들이 드러나고 있는데요.

이렇게 말하는 경우 제가 경험한 바로는 대개 살아온 가정을 표현하는 것 이기도합니다. 일반적으로 아버지의 폭력 외도 또는 무능(無能)이 많은 이유였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라는 남자가 집에 있으면 술과 폭력이 따라오거나 아버지의 무능으로 인해 어머니의 가혹(苛酷)한 일상이 가정에 자리 잡아 버렸습니다. 그렇게 30년을 아버지라는 남자에게 고통(苦痛)을 받았으니 나의 남은 인생도 남편이라는 남자에게 고통을 받을 것 같아 차라리 혼자 살아가야겠다. 얘기합니다. 좋은 남편 아버지에 대한 모습을 보지 못했으니 남자에 대한 왜곡(歪曲)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한 형제를 만나게 되더라도 아버지의 모습 남자의 모습 못난 모습들이 나오기 시작하면 이내 교회 형제들은 별로야. 라는 말을 내뱉게 됩니다. 그리고 결론도 내립니다. 결혼해서 행복해질 자신이 없네. 내면의 두려움이 인생을 지배해 버린 모습입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트라우마라는 단어가 우리가 이제 심심치 않게 일상에서 듣는 용어가 돼버렸습니다. 이 트라우마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헬라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외상(外傷), 상처(傷處)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이라는 엄청난 전쟁 상황에서 그 상황을 겪고 난 사람들이 그들에게 남겨진 것들이 무엇인가 보았더니, 총알 자국과 칼에 베인 상처보다 전쟁으로 인해 남게 된 두려움의 상처가 더 크다는 것을 심리학에서 자주 사용하면서 나오게 된 말입니다.

청년들에게 아버지의 폭력이 외상으로 남아있는 줄 알았는데, 내면의 두려움으로 깊게 잡아 버린 것입니다. 이 내면의 두려움 누구나 벗어야 한다는 건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벗어나려 해도 번번이 실패를 해왔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괜찮다고 했는데, 하지만 예수님으로도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이 그렇습니다.

큰 광풍(狂風)이 불어오고 있습니다. 미칠 광(狂) 자를 쓰고 있습니다. 심각한 상황을 묘사(描寫)하기 위해 오늘 말씀해 보면 다른 배들도 같이 떠 있다고 하는데요. 왜 이런 말씀을 묘사했을까? 했을 때 어떤 신학자는 다른 배들은 다 침몰(沈沒)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심각한 광풍이 불어오고 있었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배를 가지고 갈릴리 바다를 누비던 뱃사람들이었습니다.

I. 제자들은 경험(죽음)이 들려주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 풍랑이 심각하다. 라고 할 때는 그 정도에 대해서 이 사람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심각한 광풍을 이겨내는 방법을 잘 압니다. 하지만 이길 수 없는 광풍(狂風)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부산에서 자랐습니다. 벌써 말투에 나와 있죠. 그죠. 바다를 놀이터 삼아 살았는데요. 놀았는데요. 모닥불 피워놓고 모닥불에 홍합도 구워 먹고, 실낚시로 잡은 잡어들을 굽고, 저는 달리기 시합보다 바다에서 수영 시합을 더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다의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을 잘 압니다. 반면에 저는 바다의 무서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태풍(颱風)이 심하게 몰아치던 밤이 지나고 나면 동네 간판이 떨어지고 도로 표지(標紙)판은 다 휘어있습니다. 바닷가 구경 나간 건너 옆집의 누군가가 파도(波濤)에 휩쓸려 죽었다는 소식을 저는 자주 들었습니다. 그래서 바다가 가진 죽음의 얼굴을 잘 알고 있습니다. 경험(經驗)이 반복(反復)되면 확신(確信)이 됩니다. 제자들은 뱃사람으로서 많은 바다의 일들을 경험했습니다.

죽음을 직감하고 있습니다. 이 바람은 지나갈 바람이 아니야,. 내가 경험해 봐서 아는데 이제 우리는 끝이야 구체적인 죽음의 소리가 내면에서 내 입 밖으로 툭 튀어나옵니다. 예수님도 안 되실 것 같다. 이런 넋두리 같은 소리를 우리는 기도라고 생각을 합니다. 내 경험 안에서 충분히 제한(制限)하고 재단(裁斷)한 후에 간구하는 것들을 기도라고 생각을 합니다. 아주 이성적인 것을 기도라고 생각을 합니다. 될 만한 것을 기도해야지, 내 경험상 예수님도 하실 수 없어. 이게 기도해서 될 일이야, 이건 기도할 때가 아니야. 제자들의 이런 마음에 예수님을 찾습니다. 우리 38절 말씀인데요. 같이 한번 봉독해 볼까요? 시작,,

*마가복음 4:38,
38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이거는 예수를 나무라는 어조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위기(危機) 상황인데 예수님 무엇 하고 계십니까? 여기서 예수님을 선생님이라 부르는 것도 아주 인상적입니다. ‘선생님, 지금 주무시다니요.’ 이 버릇없어 보이는 제자들의 모습에 왠지 우리는 공감이 됩니다. 우리 또한 기도하며 경험했던 예수님의 침묵이 답답했습니다. 주무시는 듯한 부제가 제자들처럼 우리에게 야속하기도 했습니다.

II. 제자들은 내면의 무지에 귀를 기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당장 묻게 됩니다. 예수님 왜 주무시고 계신 것인가요? 너무 피곤해서 노을이니깐 편안해서 주무시는 겁니까? 고물에서 비를 피하고 베개를 베고 있으니 예수님은 괜찮으셔서 주무셨던 것입니까? 멀미를 못 이겨 주무신 것은 아니십니까? 어쨌든 위기(危機)에 때에, 예수님은 우리들의 안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생각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냥 딴 배를 타고 계신 것 같습니다.

어려운 이를 만나 기도의 자리로 나가는 성도님을 뵌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 제가 기도 외에 답이 없어서 답답해서 새벽에 기도하러 나왔어요.” 너무 잘하셨어요. 너무 잘하셨어요. 늦은 시간에 또 그 성도님을 뵈었습니다. “목사님 지금 응답이 늦어지고 있지만 오늘 저녁에도 기도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참 잘하고 계십니다. 기도하셔야죠. 또 기도하러 오셔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성도님, 어떻게 되셨어요. 잘 해결되셨어요. 아니요. 아무리 기도해도 상황은 더 나빠지고 있어요. 예수님의 침묵이 계속될 때, 주무시듯 침묵하실 때, 목사인 제게도 당장의 원망이 찾아옵니다. 예수님 응답해 주셔야지요. 예수님 일어나셔야지요. 저렇게 간절하게 기도하는데 죽음의 눈금에 닿아 사랑을 다하고 있는데, 예수님 도대체 어디에 계신 겁니까? 이렇게 침묵이 계속되면 우리는 이 침묵을 부재(不在)라고 여기게 됩니다. 안 계시거나 계셔도 안 계신 것과 마찬가지인 것으로 우리는 판단(判斷)해 버립니다.

어느 그 글을 쓰던 작가는 얼마나 이 부제가 싫었으면 이런 표현을 다 썼습니다. ‘혀 짤린 하나님’이라고,,, 말을 안 하시니,,, 침묵이 길어지고 예수님의 부재가 경험되어질수록 우리는 우리의 해결 방법을 찾기 위해 백방(百方)으로 뛰기 시작을 합니다. 뱃사람들은 잃었던 제자들은 노를 부여잡고 버티고 차 들어오는 물을 정신없이 퍼내며 물건을 던지기도 하고, 어떻게든 배를 살려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닥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문가를 찾아서 듣습니다. 인터넷을 찾아서 듣습니다. ai든, 블로그든, 유튜버든 살기 위해 들려오는 소리는 다 들어댑니다. 듣다가, 듣다가 우리는 내면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너 이제 어떻게 할래 너 끝난 것 같은데’, 내면이 들려주는 소리 앞에, 미친 광풍 같은 그 소리 앞에, 우리가 듣는 소리는 죽음의 소리로 귀결(歸結)돼 버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침묵(沈默)이 정말 부재일까요? 예수님이 주무시고 계시면 부재하신 것일까요?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께서는 오히려 예수님께서 ‘침묵에 동행을 하고 계신다’. 라고 이 부분을 해석해 냅니다. 또 다른 분은요, 예수님의 침묵을 ‘하나님을 만나는 가장 깊은 임재’ 라고 고백을 합니다.

본회퍼 목사님은요, 침묵을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침묵을 부재라 하지 않고, 또 다르게 이야기하는 이들은 임재(臨在)와 동행(同行)과 존재(存在)로 경험(經驗)하고 있습니다.

성도님이 또 찾아오셨습니다. ‘목사님,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럴 수가 없죠. 그리고 밤새 허공에다 대고 하나님 당신은 없어요. 하나님 당신이 있다면 내 삶이 이럴 수는 없죠.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내가 이렇게 살아갈 수는 없죠.’ 소리쳤다고 합니다. 근데 이 성도님은 누구보다 하나님 계신 것을 믿고 계신 분이십니다.

내가 아무리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지우려 해도 나는 이미 그분이 살아계신 것을 알기에 그분을 향해 외치고 있었고, 우리의 존재가 지워지는 것은 가능할지라도 하나님의 존재는 여전히, 영원히 그대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시끄러운 소리, 우리의 시끄러운 행동이 지나가고 나면 침묵하시며 동행하시던 우리 주님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을 합니다. 39절 말씀입니다. 우리 다 같이 한번 봉독해 보겠습니다.

*마가복음 4:39,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다가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 지더라.
-큰 난리를 부리던 바다가 잠잠(潛潛)해졌습니다. 이 부분을 좀 다르게 해석하는 경험과 과학적인 입장을 가지고 해석하는 신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광풍이 일었지만 광풍이 예수님을 말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갑자기 잦아들었을 뿐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갑자기 잦아든 이 광풍에 자신의 교훈을 담아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III. 제자들이 예수님의 존재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갑자기 오는 광풍이 있어 그런데 갑자기 먹기도 해 우리 인생이 그런 거야. 이렇게 그냥 해석해 버리고 맙니다. 아마 이 신학자에게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 응답이 무엇입니까? 제가 묻는다면 아마 이 신학자는 이렇게 대답을할 것 같습니다. 기도해서 응답받는 게 아닙니다. 우연히 시간이 되면 응답받는 겁니다.

그냥 그렇게 우리 인생은 이루어지는 겁니다. 신학을 하고 계신 분이신데, 이분에게 예수님은 고물에서 주무시는 그냥 선생일 뿐인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오늘 우리가 만난 예수님이 선생님이십니까? 시끄럽던 제자들의 소리가 그치고 침묵하시던 그 존재,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꾸짖으며 말씀하십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예수님이 꾸짖는 대상은 마가복음에서는 귀신 사탄 어둠의 역 말고는 없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폭풍우의 파괴적인 힘도 악령의 힘이라. 그 악령이 자연의 힘에 작용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성경에서도 바다는 태고의 혼돈(混沌)을 상징하며 의인의 시련과 환난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사회적 통념이나 성경이 말하는 모든 개념에서 당시 바다는 죽음과 사망의 권세가 맞습니다. 이 죽음과 사망의 권세인 바다를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셨습니다. 시편 89편 10절 말씀인데요. 우리 같이 함께 봉독해 보겠습니다.

*시편 89편 10절,
10 주께서 라합을 죽인 당한 자 같이 깨트리시고 주의 원수를 주의 능력의 발로 흩으셨나이다.
-라합(바다괴물, 원수)이라는 이상한 것이 등장을 합니다. 성경을 보니 ‘바다괴물, 이며 원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 팔과 손으로 흉흉한 바다 곧 소용돌이치는 바다를 다스리시고 일어나는 바다를 잔잔케 하시며, 바다 괴물 라합을 깨트려 부수신다고 시편 기자는 지금 노래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바다를 잔잔케 하시는 분이셨으며, 바다를 다스리시는 분은 하나님뿐이셨습니다. 이제 신약에서는요 바다를 지배하고 있는 악한 사탄을 예수님께서 오셔서 무력(無力)하게 하고 있습니다. 결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바로 이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잠잠하라. 고요하라.” 그래서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큰 두려움에 두려워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들이 두려워했다는 바다를 보던 두려움과는 다른 두려움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그에게서 나오는 초 자연적이시고, 내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다른 그분의 놀라움을 보며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경험이 찾아왔습니다. 지식이 찾아왔습니다. 이건 또 다른 두려움이었습니다. 이 두려움 아주 닮은 두려움이 있습니다. 모세가 떨기나무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을 뵈었을 때, 그분 앞에서 경험했던 두려움입니다. 어느 신학자는 ‘잠잠하라 고요하라’ 이 말씀과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 말씀하시던 그 하나님이 나를 드러내시던 그 장면이 같은 말이라고 설명을 하는 이도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경험하게 되는 두려움 그 거룩함 앞에서 찾아오는 두려움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나의 내면과 나의 내면에 꽉 차 있는 두려움과 그 내면을 마주하고 계시는 그 하나님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 성경 말씀 하나 더 볼까요? 이사야 이 말씀은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이사야 57장 20절 말씀해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오는데요.

*이사야 57장 20절,
20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구쳐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우리 안에 더러워져 있는 악으로 가득 차 있는 우리의 마음의 모양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모양이 묘사되어져 있는 것을 진흙과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수구 진흙 물을 휘젓기 시작하면 각종 오물이 올라오는 것처럼, 내 안에 더러운 것들이 요동하는 바다처럼 솟구치고, 미친 바람이 불어 죽일 듯 몰아치고 있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마음을 피하고 싶습니다. 두려움에 적당히 사로잡히고 싶고, 적당히 염려하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래서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결혼을 못 하겠다. 라고 참 어려워하며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청년, 내면의 그 경험 속에서 나를 멸망시키고 파괴(破壞)하고 나를 주인 삼아서 사망(死亡)의 바다처럼 삼켜버리고 있는 이 청년과 같은 수많은 청년들은 말할 수 없는 깊은 상처와 아픔과 절망(絶望)의 문제를 그 속에 깊이 담아두고 감히 꺼내지도 못하고 어떻게 다루지도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강단에서 제가 지금 도저히 말할 수 없는 너무나 큰 아픔과 큰 문제를 가지고 와서 이야기하는 청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제가 그 얘기를 꺼내서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오늘 이 시간에 이 자리에 나와 계시는 성도님, 마음에 숨겨둔 너무나 아프고 너무나 두렵고 꺼낼 수가 없는 이야기가 있지 않으십니까? 그거 그렇게 외면하고 감추어두고 그거 피하면서 살아가려고 하십니까? 때마다 시마다 이것이 내가 이야기를 하고 내게 말을 하며, 나를 두려움과 염려로 사로잡아 가며 내 인생을 좀 먹듯 무너지게 하고 있는데, 사망의 더러운 것들로 죽음의 일들로 나를 이끌어 가게 하고 있는데, 이것을 그냥 두려워하고 계십니까? 죄와 사망의 권세가 온전히 승리한 것처럼 우리를 지배한 것처럼, 그렇게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을 그냥 보고 살아 가시려고 하고 계십니까?

내가 한번 이겨 내려고 하면 삼키고 괜찮아지려면, 다시 꺼내어 옥죄오는 지독한 사망의 권세가 우리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을 때, 내면의 두려움은 폭풍 속에서 보았던 예수님의 모습을 십자가에서도 동일하게 보게 합니다. 높이 들려 졌던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며, 마치 폭풍우에 잠든 예수님처럼 우리는 나약한 예수님을 보듯, 그는 그리스도일 리가 없다. 라고 말을 합니다. 목수가 나무에 달려 버렸습니다. 죽음과 저주와 심판과 죄의 상징인 나무에 달렸습니다.

손도 발도 목에 박혀 못에 박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창이 옆구리가 이제 다 터져 박혀 말도 제대로 못하는 나약한 한 사내로 우리는 여전히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침묵할 수밖에 없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겨우 숨만 턱턱 내쉬는 예수님은 내 삶을 도울 수도 없고, 나를 구원할 수 없다. 라고 우리는 끊임없이 여겨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십자가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상식적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타당합니다. 논리적입니다. 그런데 다시 묻고 싶습니다. 이 십자가가 지금 어디에 서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어디에 있습니까? 갈보리 언덕 위에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보고 계시는 십자가는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어디에 있습니까? 저 멀리 있습니까? 누군가에게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서 있는 곳은 우리의 두려움이 서 있는 곳입니다. 우리의 죄(罪)가 서 있는 곳입니다. 우리의 숨겨왔던 삶의 모양이 서 있는 곳입니다.

죽음의 권세와 사망에 쏘는 곳, 트라우마라 불리던 내면의 깊은 상처 위에 나의 내면에 가장 어둡고 두렵고 무섭고 감추고 싶었던 그곳에, 부모님도 형제도 나도 외면하고 감추고 숨기며 살았던 곳, 항상 찾아오는 두려움과 염려와 근원 상처와 아픔의 근원 결핍과 아집(我執)과 절망의 근원 바로 그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서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달려 계십니다. 바로 그곳에서 십자가의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동행하고 계십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들의 내면에 계십니다. 나의 깊은 곳에 예수님의 침묵하시며 동행하셨던 그 순간은 한 번도 변함이 없으셨습니다. 나를 살리시려고 재화 사망에 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려고, 악인의 멸망처럼 나를 무너지지 않게 하려고, 그 지독한 장소에 매달린 것이며 그 지독한 장소에서 죽음을 마주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주셨던 말씀 죽음의 죽음과 사망의 권세를 향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로 주셨던 말씀 ‘잠잠하라 고요하라 그리고 다 이루었다’ 말씀하셨습니다. ‘사망아 죽음아 두려움아 결핍아 조용하라 꼬여 와라 내가 다 이루었다 지금 내게 사랑하는 자에게서 떠나가라 내가 어디서 떠드느냐 내가 어디서 함부로 말하느냐 내 사랑하는 자 그 내면에서 모든 것들아 떠나가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며 십자가 위에서 죽음으로 모든 더러운 것들을 이겨 내셨습니다. 아무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그 상처, 숨겨왔던 이야기를 제게 들려주는 청년들이 참 많았습니다. 왜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그 내면의 상처에서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그들이 살아납니다. 힘을 얻습니다.

더 이상 들려주는 그 죽음과 사망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가 들려주는 그 소리에 내게 생명 되시고, 참 하나님 되시며, 나를 위해 세상의 모든 물결들을 뒤엎어 잠잠게 하시는 그 하나님의 소리를 따라 살아가기에 그동안 보았던 숨기고 가리웠던 내면의 이야기들을 이제는 꺼내요 할 수 있는 청년의 날들이 됩니다. 그러면서 외적으로 나타나는 변화들도 있습니다. 결혼을 하는 청년들이 점점 생겨납니다.

말씀드렸던 것처럼 아버지와 또 가정에서 겪었던 모든 일들, 그들이 풀어낼 수 있는 하나님의 복 중의 하나는 새로운 가정을 이루어서, 그가 다시 회복해 나가는 일들로 하나님을 만들어 가시는 것을 저는 보았습니다. 그리고 가정을 이루어서 또 다른 자신과 같이 상처 가운데 거하는 이들 청년들을 만나 그들이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저는 목회자의 가정에서 자라나며 제일 의심되는 것이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내가 정말 믿고 있는가? 예수님은 정말 어디에 계신가? 나는 잘 알고 있는가 혹시 아버지가 목사라서 내가 속아서 예수님을 믿는다. 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이런 의심이 마구 몰려오던 중학교 시절에 의심이 확신이 되는 것처럼 극에 달했던 시절에 제가 수양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중동부 겨울 수양이었는데요. 믿음에 대한 반항인지 내 마음의 의심에 대한 표현인지 설교 시간에 그냥 퍼질러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말씀이 끝나고 기도회가 시작되자, 이제는 마음 놓고 엎드려 잠에 들었습니다. 아 그때 참 좀 신기한 경험을 알게 되었는데요. 저는 잠이 들었는 줄 알았는데 아 꿈결같이 그날 기도에 인도하시는 목사님의 음성이 자꾸 들려오는 거예요. 여러분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음성을 따라 제가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눈을 감고 있었는데, 마치 눈을 뜬 것처럼 한 동산이 보였습니다. 목사님께서 마치 그 동산을 함께 보는 것처럼 그러면 그 길을 따라가 보시겠습니까? 라는 말에 저는 길을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동산 위에 나무가 보이십니까? 보니 큰 나무 한 그루가 보였습니다. 그 아래 가시죠. 하는 말에 그 아래 갔습니다. 앉아 쉬는 듯 있는데, 목사님의 음성이 또 들려옵니다. 올려다보세요. 그 나무를 올려다보는데 그 나무가 제게는 십자가로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나무에 달린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달린 한 사람이 내려다보는 그 눈길과 저는 마주쳤습니다. 그분이 저를 바라보고 계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울음이 터지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기도가 끝나고 눈을 떠보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제가 기도하고, 있어서 친구도 선생님도 모두 기다리고 있다가 갔다고 합니다. 저는 지금도 너무 힘들고 너무 고통스럽고 하나님의 침묵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재로 인하여 내 안에 흔들림 들이 찾아올 때 한 동산에 오릅니다. 그리고 십자가 아래 저는 무릎을 꿇습니다. 그러면 한 번 더 어김없이 그때 나를 바라봐 주셨던 예수님은 또 나를 바라봐 주십니다. 그리고 내면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임재에 동행하며 힘을 얻습니다. 한판 신나게 울고 나오면 살 것 같습니다. 내게 들려주는 두려움과 염려의 소리 들은 떠나가고 내조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사랑하는 성도 님들께 묻습니다. 어찌하여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예수님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알고 계십니다. 아직도 나를 모르느냐? 시간을 낭비하며 가장 쓸데없는 내면의 두려움에 귀를 기울이고 있느냐? 어찌 아직도 두려워하며 염려하고 있느냐? 십자가 나무 아래서 나와 함께 동행하는 것이 어떠냐? 그분이 우리의 모든 주인이 되십니다. 그분의 소리에만 기울이고 살아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서운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요약
우리를 암흑의 권세에서 건져내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생명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아가게 하시니 감사해야 한다. 보이는 두려움과 고통의 현실 앞에 침묵 아시지만, 우리 안에 임재하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살아가야 한다. 눈을 열어 하나님의 동산을 보며, 십자가의 동산에서 살아갈 날들, 기쁨의 동산을 살아갈 것을 소망하며, 우리가 주의 은혜를 힘입어 살아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찾아온 많은 문제들을 넘어서게 하실 것을 확신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의지하며 살아가야 한다. 제자들이 경험(죽음)이 들려주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내면의 무지에 귀를 기울리고, 예수님의 존재에 귀를 기울이고 있듯이, 우리도 내면의 두려움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주님 앞에 온전히 귀를 기울이는 자로 살아기기를 소망하자..




728x90


♧수요저녁기도회(2025년 3월 19일)
제목: "십자가의 길"
말씀: 누가복음 9:18~23
찬양인도: 쉐키나(이동선 부목사님)
사회: 강건우 부목사님

설교자: 임상규 부목사님
ㅡㅡㅡㅡ

*누가복음 9:18~23,
18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이르시되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19 대답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살아났다 하나이다.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21 경고하사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명하시고.
22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

▶20세기와 21세기 초에 기독교 사상계에 가장 영향을 미쳤던 한 분이 있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신학자요 목회자요 철학자 ‘달라스 윌라드’입니다. 달라스 윌라드는 그의 책 ‘잊혀진 제자도’에서 특별히 20세기 말을 지나면서 하나님 앞에서 제자도의 길을 잃어버린 성도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엄중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죠. 그의 책에서 특별하게 현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이렇게 지칭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이름은 바로 ‘뱀파이어 그리스도인’입니다.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우리 책 내용을 한번 보겠습니다. 그가 말하는 뱀파이어 그리스도인들의 표현은 이렇습니다. 예수님, 부디 당신의 피가 조금 필요합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의 학생이 되거나 당신의 성품을 닮을 마음은 없습니다. 솔직히 제가 인생에 즐기는 동안 좀 못 본 척해 주시렵니까? 천국에서 뵙겠습니다.

어떠십니까? 마음에 확 와닿으십니까 아니면 어떻게 저렇게도 될까, 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제가 이 글을 읽어 내려가면서 7년 전에 제가 섬겼던 한 교회의 부서 수련회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수련회 기간 동안 학생들과 함께 빌립보서를 같이 공부했습니다. 수련회 기간 동안 할 수 있는 곳은 딱 한 가지였습니다. 빌립보서를 읽고, 또 읽고, 또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가고 싶지 않습니까? 아멘! 집회 둘째, 날이었습니다.

함께 말씀을 나누고 그리고 서로가 조별로 모여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들을 나누는 시간을 한 친구의 나눔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교사들과 학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친구는요 신앙과는 사실은 좀 거리가 먼 친구였습니다. 이 친구의 삶은 랩, 그리고 팝 그리고 춤으로 가득 찼던 친구였죠 그런데 그 친구가 조용히 일어나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고백을 하였습니다. 가장 먼저 빌립보서 1장을 먼저 읽겠다고 했습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빌립보서 1:29,
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빌립보서 1장 29절 말씀을 읽어 내려간 후에 이 친구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저는 싱가포르에서 오랜 시간 동안 자라났습니다. 그리고 좋은 부모님 덕분에 부족함이 없이 컸습니다. 그리고 랩과 음악과 춤을 위해 싱가포르의 대형 로컬 교회들을 이곳 저곳 많이 찾아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 어느 곳에서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고난을 받는다는 것과, 십자가의 길을 살아야 가야 한다는 것을 단 한 번도 듣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며, 과연 이 땅의 교회들이 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그리고 나는 지금 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18살 학생이 말입니다.

이 한 명의 고백은요, 마치 뱀파이어 그리스도인처럼 살아가는 현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또한 뱀파이어 그리스도인들과 같지는 않지만 나의 삶을 바라보며 교회도 다니고 신앙생활도 하는데 예수님의 제자인지, 예수님의 길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너무 많이 놓쳐서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가운데 警鐘(경종)을 울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누가복음 9장의 본문의 말씀은, 참된 제자의 길은 무엇인지, 그리고 제자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계시는데요. 이 말씀을 통하여 오늘 우리 가운데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 가운데 귀 기울이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누가복음 9장은 본격적인 ‘제자도의 章(장)’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가 잘 기록 되어져 있습니다. 특별히 누가 보건 9장 1절에서 6절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불러 모으십니다. 그리고 전도 여행을 내보내시죠.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요. 바로 하나는
➀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능력과 권위를 부어주셨다. 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➁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여행을 위하여 너희가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 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말은 제자의 길이란 자신의 능력과 자신의 실력이 아닌 예수님께서 주시는 능력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여해 주시는 권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라는 것이죠.

또한 예수님의 제자는요 모든 상황 속에서 오직 누구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자일까요? 맞습니다. 예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자임을 말씀하고 계시는 거죠. 제자들의 말씀에 순종하여 전도 여행을 떠납니다. 제자들이 가는 마을 곳곳마다 하나님께서 놀라운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데요. 병든 자가 낫습니다. 치유가 일어납니다. 기적이 발생한 것입니다. 제자들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이름이 더 광범위하게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누가복음 9장 7절에서 성경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데요.

*누가복음 9장 7절,
7 분봉 왕 헤롯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당황하니 이는 어떤 사람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도 하며.
-이 소문이 동봉왕 해롯의 귓가에 들렸고 해롯이 심히 당황하였다. 라고 이후에 예수님은 벳세다로 옮기셔서 5천 명의 사람들에게 五甁二魚의 기적을 나타내십니다. 이미 수많은 기사와 이적을 베푸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유명하신데, 오병이어 사건으로 예수님의 주가가 한층 더 올라갔습니다.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을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서 예수님과 가까워지고 싶었던 것이죠. 예수님을 마치 우리의 모든 必要(필요)를 채워줄 政治的(정치적) 메시아로 여기면서 예수님께로 다가선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한 가지 이상한 질문을 하십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대해 누구라고 하느냐?” 라고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의 질문 앞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네, 예수님,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세례 요한’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또 다른 제자가 아니야. ‘어떤 사람은 엘리야’ 라고 말해 그러자 또 다른 제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다시 나타났다’ 라는 소리도 들립니다 라고 대답하였죠. 아무튼 ‘예수님은 정말 멋지시고 대단하시고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께 집중하고 있어요’ 라고 제자들이 신이 나서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잠시 뜸을 들이시고 제자들에게 재차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 가운데 우리의 마음속에 굉장히 호감이 가는 한 형제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행동보다 말이 앞서고, 실수 투성이고 어 성질이 아주,,, 바로 베드로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 이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의 본질, 예수님께서 바로 참 메시아 이십니다 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베드로야 이것을 너에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다 라고 말씀하시죠. 그리고 베드로의 이 고백, 이 반석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우겠다. 라고 약속하십니다. 이제 제자들 가운데 예수님이 누구이신지가 드러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구하는 정치적 메시아가 아니라,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메시아이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의 마음 가운데 무언가 모르는 뜨거운 열망이 일어납니다.

와~!! 번지수 제대로 찾았네,,, 예수님이 통치하시고 예수님이 다스리시면 우리 한 자리씩 큰 자리 앉을 수 있겠네... 라고 속으로 생각하고 이런 생각에 잠겨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매우 당혹스러운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22절의 말씀인데요. 우리 함께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9:22,
22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제자들은 이런 말씀을 기대하지 않았을까요? 그래 너희들 수고 많았다. 조금만 기다려, 조금만 참아, 내가 너희들에게 보상해 줄 거고, 너희들은 큰 자리에 앉을 거야. 라고 대답해 주시고 제자들은 승리의 찬가를 불러야 할 그 때에, 예수님은 찬물을 끼얹듯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얘들아, 나는 많은 고난을 받을 거야, 합니다. ‘얼마 안 있어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될거야,. 그리고 나는 죽게 될 거야. 그 후에 3일 후에 살아날 거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분명 부활을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의 귓가에는요. 그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습니다. 그저 예수님의 고난, 예수님의 죽음, 이라는 단어가 그의 머리에 刻印(각인) 되어 그들을 痲痹(마비)시켜 버렸습니다. 누가복음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마태복음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데요. 마태복음 16장 22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2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여기서 ‘항변하다’는 표현은 niv 성경에는 ‘질책하다, 꾸짖다“(Rebuke Him), 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며 향하여 항변합니다. 이렇게 말하죠. ”주여, 그리마옵소서. 이 일이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예수님 말도 안 됩니다. 절대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베드로의 충정이었습니까? 이것이 베드로의 예수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 때문이었습니까? 만약에 베드로가 충정 심으로 사랑함으로 대답했더라면, 이렇게 대답을 했겠죠. “예수님, 예수님 아닙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실 그 십자가를 제가 대신 지고 걸어가겠습니다. 그런 말 하지 마십시오”. 라고 말해야 좀 적합한 표현이 아닐까요? 그런데 베드로는 자신이 생각한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자신이 생각했던 제자의 길과 相衝(상충)되는 상황이 발생하자, 예수님을 붙잡고 붙들고 항변하며 그를 비난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 이것은 아니죠. 제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라온 것 이런 길이 아닙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3절에 말씀해 보면 좀 더 선명히 알 수 있는데요.

*마태복음 16장 23절,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하시고.
-예수님은 즉각적으로 베드로를 향하여 강한 어조로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이라고 칭하시며 예수님은 예수님을 떠나 물러가라 라고 명령하시죠. 베드로의 말이 예수님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실 그 길을 따라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말은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는, 예수님을 넘어져 자빠뜨리는 말씀이었던 것이죠. 예수님을 곁에서 聽從(청종)하며 함께 따라왔지만 베드로는 여전히 자기 자신이 그려놓은 자기의 그림이 있었습니다. ’내가 생각한 제자의 길, 내가 생각한 예수님을 따르는 길, 내가 생각한 십자가는 이러한 것이야‘ 라고 자기만의 그림을 그렸던 것이죠. 예수님은 괴도를 향하여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라고,

사랑하는 성교 여러분,
우리는 어떠합니까? 예수님께서 우리 앞에 십자가의 길을 말씀하실 때 우리도 예수님 앞에 나와 그로처럼 항변하며 예수님, 이것은 아니지요. 이런 것은 제가 주님을 따라온 것이 아니잖아요. 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제자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합니다. 우리 함께 누가복음 9장 23절의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9장 23절,
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전제 조건으로 세 가지를 말씀하시면 돼요.

▶전제조건-예수님을 따르는 길.
I. 첫째로, 자기 자신을 부인하라.

-너희는 너희 자기 자신을 부인하라. 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부인하라.. 라는 헬라어로 쓰인 원어의 뜻은 아르네오마이(포기하다, 거절하다, 관계를 끊는다)라는 단어를 씁니다. 이 아르네오마이라는 단어는 그 뜻이 굉장히 의미가 강력한데요. 포기하다, 거절하다, 관계를 끊는다, 라는 뜻이 담겨 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니가 가지고 있는 너의 생각 네가 그려놓은 너의 그림 네가 가지고 있는 너의 계획을 포기해야 해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거절하고 끊어버려야 해.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노라고 하면서도 우리의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고 아니 우리 마음속 저 깊은 곳에 독버섯처럼 자라있는 못된 자아를 주님께서 잘라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요, 쉽지 않습니다.

나를 증명해야 되고, 나를 증명하고 나를 자랑해야 살아남는 이 시대 가운데 나를 부인한다니요. 이것은 우리가 가고 싶지 않은 길입니다. 아니, 너무나도 피하고 싶은 길입니다. 그런데 주님, 그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 정말, ’나의 제자가 되길 원하니?‘ 너 자신을 먼저 부인해야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전제조건-예수님을 따르는 길.
II. 둘째로, 자기 십자가를 지라.

-예수님을 따르는 자에게는요. 그 제자들에게 각자 각자의 십자가를 허락하십니다.
교회에서 심방을 하다 보면 참 놀라운 것을 발견합니다. 학벌이 좋거나, 부유하거나, 자녀가 잘 되거나, 내 삶에 직업이 탄탄하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잖아요. 그런데요. 돈이 많아도, 권력이 있어도, 내가 원하는 것들을 잃어왔어도,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십자가가 있다는 것이에요.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에게 허락한 그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걸어가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면서 그 십자가가 너무 무겁지만 그 십자가가 너무 힘들지만 그 십자가를 지고 걸어갈 때, 우리는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됩니다. 이 십자가가 너무나 힘겹고 어렵지만, 이 십자가를 지고 나아갈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뒤를 돌아보니 아!!~~ 하나님께서 내 삶에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이뤄 놓으셨구나! 아니 지금도 이루고 계시는구나, 를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우리 모두에게 주님께서 주신 十字架(십자가)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 아버지, 이 잔을 내게 거두어 주십시오‘ 라고 기도했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 저 이것만 거두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라고 기도하는 그 십자가가, 그 십자가가 우리에게 있다. 라는 것이죠.

※제가 한 21년째 교제하고 있는 한 선교사님이 계십니다. 이 선교사님은 영국 런던에서 무슬림 사역을 감당하고 계시는 선교사님이십니다. 그런데 벌써 20년이 넘게 腦腫瘍(뇌종양)을 몸에 안고 선교사역을 감당하고 계십니다. 뇌종양으로 인한 고통이 너무 심해가지고 먹는 것을 다 토해버리고, 때때로는 먹을 힘조차 없고 그 괴로운 시간 들을 계속 적으로 보내오셨습니다. 몸에 제 3차 신경 고통이 조여오면 정말로 이 송곳으로 그 몸과 마디마디를 찌르는 것 같은 그 고통 때문에 너무 괴로우시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어느 날 선교사님께서 저 정말 건강이 이렇게 좋지 않은데 계속 런던에 있어야 됩니까? “주님 건강이 좋지 않은데 런던에 있어야 합니까? 계속 사역을 해야 합니까? 주님이 이 질병 질병을 주님께서 거두지 않으시는데 저 계속 이 자리에 있어야 됩니까?” 라고 그때 하나님께서 이 선교사님의 마음 가운데 아주 뜨거운 감동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것이 너에게 허락한 십자가야, 너의 십자가를 지고 가렴” 지금도 선교사님은 뇌종양을 안고 선교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묵묵히 그 땅에서 무슬림 영혼들을 섬기며 사역을 감당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선교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십자가가 있습니다. 때로는 그 십자가가 너무 무거워서, 그 십자가가 내 삶을 짓눌러서 피하고 싶고 떠나고 싶고 외면하고 싶은 그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는 나의 제자는, 그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이다.” 라고 말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 제자의 전제조건 세 번째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전제조건-예수님을 따르는 길.
III. 셋째로, 나를 따르라.

-나를 따르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따라야 될 것은 예수 그리스도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따라가야 할 것은요, 이 세상도 이 세상의 문화도 아닙니다. 이 세상의 권력자 이 세상에 부함 이 세상의 명예와 이 세상이 주는 안락함도 아닙니다. 우리가 따라야 될 분은요, 이 세상의 탁월한 지도자도 아닙니다. 위로해 주는 상담가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힘을 주는 친구도 사실은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잠시 피웠다가 사라질 꽃과 같은 유한한 것에 너희의 마음을 두지 말라. 영원히 변함없으시며 영원토록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심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따라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직 예수님만을 사랑하시기를 오직 예수님만을 의지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이 다른 그 무엇이 아닌 오직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우리의 삶의 모든 삶의 이유와 모든 삶의 목적과 모든 삶의 방향이 결정 되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단 한순간도 다른 길로 걸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한길, 그 길은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건져내시고자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우리가 하나님과 심지어 원수 되었을 때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지도 못한 채, 무지 가운데 살아가고 있던 우리를 건지시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그 길 가운데 서신 그 길, 바로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이 십자가는요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었죠. 이 십자가는요 정말로 세상 사람들이 다 내던져 버리고 싶은 것이 바로 십자가였죠 그런데 예수님은 그 십자가의 길로 묵묵히 걸어가십니다. 묵묵히 걸어가셔서 이 세상에 지혜를 멸하시고 총명을 패하셨습니다. 모든 통치자들과 권력을 무력화시키시고 하나님의 승리를 선포케 하셨던 것이죠. 그리고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의 죄악 사이에 막혀 져 있던 그 담을 주님께서 헐어버리사,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만이 결국 마침내 하나님의 勝利(승리)가 宣布(선포)되는 그 역사적인 현장이었던 것입니다. 승리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이 찬양의 가사에 보면 이런 고백이 나오는데요.

승리가 무엇인 줄 아는가? 우리는 승리하면 우리가 강압하고 악제하고 힘을 더 갖기를 원하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주님이 말씀하시는 그 승리 그 십자가의 길 가운데 주어지는 승리가 무엇인지, 승리는- 더 좋고 더 편한 가능성의 유혹을 절연히 잘라버리고, 오직 주님만 따라가는 것, 승리가 무엇인 줄 아는가? 하고 싶은 말, 그 많고 많은 말, 모두 힘겹게 꾹 누르고, 오직 주님께서 내 삶 가운데 말씀하게 하시는 것, 그것이 승리입니다. 승리란 무엇인가?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을 허옇게 잠재우고, 주님만 내 안에 사시는 거, 주님만 내 안에 사시고, 주님이 내 안에 역사하시고,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과 십자가의 능력이 내 안에 역사하면, 그것이 바로 승리라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말씀하시고 친히 걸어가신 그 길은요, 십자가의 길입니다. 우리가 길을 그 길을 따라갈 때 때로는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때로는 무시를 당할지도 모릅니다. 때로는요 모욕과 치욕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고통을 당하시므로 우리를 헤아리시는 주님께서 무시를 이미 당하셨고 무시당하는 자의 그 아픔을 헤아리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상처를 보듬으시며 모욕의 현장 가운데 우리보다 더 뜨거운 눈물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부끄러움을 가려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날마다 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게 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비교할 수 없고 끊을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힘입어, 예수님께서 친히 걸어가신 그 십자가의 길을 주님을 따라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서원합니다.

♣요약
우리는 참 많이 넘어지고 쓰러지는 인생이다. 그때마다 주님께서 다시 한번 우리 가운데 말씀하심을 청종하여,. ’십자가의 길로 나아오라.‘는 말씀을 붙잡고, 우리가 다른 것으로 우리의 인생을 방황하지 않고, 오직 우리의 생명이 주가 되어 주시는,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로만 걸어가는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들을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걸어가는 그 십자가의 길을 통하여 이 땅 곳곳 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과 부활의 생명과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이 머무는 거룩한 인생으로 살며, 나를 진정으로 부인하여 세상 사람들 앞에 겸손과 거룩함으로 본이 되어서 주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는 자로 살아가야 한다..








 

 

 

728x90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5312)
제목: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말씀: 사도행전 1:6-11, 7:55-56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부목사님)
사회: 김대규 부목사님


설교자: 윤현수 부목사님
-----


*사도행전 1:6-11, 7:55-56,
6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9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11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7:55-56,
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저희를 불러주셔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게 하시고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무릎 꿇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주의 말씀을 묵상할 때 성령님께서 조명하여 주시고 간절히 기도할 때 주님께서 예비하신 은혜와 응답을 받아 누리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수요 저녁 기도회에 참여하신 모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수요 저녁 기도회를 통해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경험하시길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사도행전 16절에서 11절과 755절에서 56절 말씀입니다.주신 말씀 16절에서 11절과 755절에서 56절 말씀을 저와 함께 교독 하시겠습니다. 제가 먼저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도행전은 땅에서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지만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순간마다 하늘이 등장합니다. 오늘 봉독하셨던 사도행전 제일 첫 부분도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는 장면, 즉 승천 사건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승천(昇天)은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하나님 아버지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만율을 통치하심을 보여주시는 영광스러운 사건입니다.

사도신경에서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려 오시리라. 하며 저희들이 믿음 가운데 고백합니다. 그런데 이 짧고 간단한 본문과 신앙 고백에는 성도가 인내하고 헌신하고 살아내야 하는 엄청난 무게와 시간의 현실이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다시 오시겠다. 라고 한 시간이 무려 2천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기다림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1절에 주님께서 떠나실 때 제자들이 주님이 사라질 때까지 물끄러미 하늘을 바라봅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이러한 음성이 들립니다.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성도 여러분 과연 이 말씀이 무슨 의미일까요?

*사도행전 1:11,
11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저는 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제자들의 심정을 먼저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저는 제자들의 심정이 아마도 부모 잃은 어린 아이와 같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을 믿고 젊은 생애(生涯)를 바쳤습니다. 그랬는데 주님께서 사망과 죄악과 죽음의 권세를 완전히 멸절시키시고 영원한 생명을 아직 도래(到來)하지 않은 시점에서 주님께서 하늘로 올라가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무거운 사명을 맡기시고 주님께서 떠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아직 믿음이 연약(軟弱)한 상태였습니다.

한마디로 저는 제자들의 심정은 이제 어떡하나 이제 큰일 났다. 저는 제자들이 그러한 심정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더하여 본문은 이런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사도행전 19절에,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사도행전 1:9,
9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이 말씀이 무슨 뜻인가요? 예수님이 이제 우리 육안(肉眼)으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17절에,

*사도행전 1:7,
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참으로 제게 있어서는 가장 힘든 이야기입니다. 저는 기다림이 가장 힘든데 주님께서 때와 시기는 너희가 알 수 없다고 말씀하시며 하늘로 가심을 그대로 본 그대로 오시리라. 오실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 그 사랑하던 예수님, 제자들의 모든 것 대신 예수님께서 이제 안 보이시고 언제 오실지 모른 채 제자들은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것. 이것은 매우 힘듭니다. 하늘을 바라보던 제자들의 심정은 우리도 쉽게 경험하는 심정입니다.

새 학기가 되어 교구 개강 모임을 하며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지난 주일 여자 직장인 교구 순장님들이 모여서 서로 인사를 나누는데 나누시는데, 순장 연차 이제 2년 차에 접어드시는 분 중 한 분이 본인을 소개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이제 1년밖에 지나지 않은 초보 순장이라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러자 3년 차 접어드시는 순장님께서 저는 2년을 했는데 저도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러셨습니다. 그랬는데 정말 놀랍습니다. 3년 하시면 잘하실까요?

어제 이제 여자 교구 순장님들이 모이셨는데 어느 순장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순장 사역 20년 된 순장입니다. 그런데 올해 우리 다락방의 상황이 정말 기도할 것이 많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1년 차 2년 차 되신 순장님들 순장 사역이 힘드시다고 하시는데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시면 20년이 되어도 힘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면 순장님께도 힘을 주시고 다락방 순원들, 우리 주님께서 성령 충만한 예수님의 제자로 세워주실 줄 믿습니다.

제자 반에서 함께 훈련했던 집사님들 다수가 이제 순장 파송이 된 저희 제자반이 있어서 우리 집사님들께서 모이셨는데 이제 훈련할 때와는 전혀 다른 고민을 털어놓으셨습니다. 어떤 순장님께서 순원이 저 말고 다른 순장님을 좋아해요. ㅎㅎㅎ~~ 또 다른 순장님께서 순원이 마음을 잘 열지 않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한 분은 신혼부부 다락방을 섬기시는 순장님이신데, 수원이 이런 이러한 문제로 아파하고 힘들어합니다 하며 눈물 끼 있는 얼굴로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목양 사역은 쉽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난다고 쉬워지지 않습니다.

저는 많은 말씀을 드리며 순장님들과 우리 제자반 집사님들을 권면하고 격려해 드렸지만 솔직한 저의 심정은 이렇습니다. 저도 신학교를 나오고 거의 10년이 넘도록 깨어 있는 모든 시간은 성경과 하나님과 교회와 성도와 관련된 생각만 하고 살아왔지만 사실 저도 잘 몰라요. ㅎㅎㅎ~~

순장님 성경책 붙들고 무릎 꿇어 하나님 앞에 처절하게 물어보세요.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온 힘을 다하여 권면하였습니다. 또한 우리가 예수님 믿는데도 여전히 이 땅에 가시와 엉겅기가 있고 우리 발은 아직도 피투성이가 될 때가 많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주님을 힘써 섬겼는데 주님께서 보상해 주실 줄 알았는데 병원에 갔더니 큰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주님이 옆에 계시면 예수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질문이라도 할 텐데 주님은 하늘에 오르셔서 구름이 그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이 상태입니다. 저희의 위치가 그리고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 응답하여 주옵소서. 간절히 기다리지만 오늘 본문을 말씀하십니다.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기다림의 사인을 주님이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심정이 바로 우리가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고 때로는 가정과 일터에서 힘써 소명을 감당하다가 넘어지고 쓰러지고 가시와 엉겅퀴에 우리 발이 상처나서 피 흘릴 때 우리가 고통스러워하며 주님 어디 계십니까? 주님 도와주옵소서. 라고 하는 그러한 우리의 탄식이 나올 때와 우리 제자들의 심정이 아마 같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말씀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었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지만 사도행전 18절에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 때문에 저희는 희망이 있습니다. 저도 교구 목회자로서 신방을 갈 때마다 그 어떤 신방도 사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매번 갈 때마다 힘듭니다.

예수님 도와주세요. 하나님 도와주세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래서 아침에 출발할 때부터 우리 사랑의 교회 찬양 대 찬양 틀어 놓고 운전하고 가면서 하나님 도와주세요. 제가 죄 지은 게 있으면 또 용서해 주시고 이렇게 기도해서 갑니다. 그렇지만 성령님께서 도와주시면 우리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하시고 변화되게 하시고 고쳐주심을 믿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저는 목회자를 진작 그만두었을 텐데, 하나님께서 10년간 여기까지 오게 해 주신 것은 저의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성령님께서 모든 주님의 백성들을 양육하시고, 인도하신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임하시면 어떤 은혜를 주시는지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기를 두 가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먼저 너희가 권능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II.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먼저 너희가 권능을 받고.

-너무너무 기쁘고 감사한 소식입니다. 성령님이 임하시고 권능을 받는다. 라고 하는 것에 성경적 의미를 잠시 살펴보고 싶습니다. 출애굽기 40장에 광야의 성막이 완성되고 나서 구름이 가득했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에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나서 열왕기상 8장에 보면 성전이 완공되었을 때에도 구름이 성전에 가득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구름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를 상징하는 구름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셰키나라고 합니다. 우리 사랑의 교회는 쉐키나가 충만하게 임하여 있습니다. 예배 전에 찬양하셨던 분들 찬양팀 이름이 쉐키나입니다.

그런데 구름으로 상징된 이 하나님의 쉐키나, 하나님의 임재가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와 죄악으로 인해 이스라엘을 떠나십니다. 그것이 에스겔서 1011장에 기록되어 있기도 하는데요. 여호와의 영광이 예루살렘과 이스라엘과 성전을 떠나고 나서 이제 여호와의 영광, 하나님의 영이 다시 이스라엘과 성전으로 돌아오는 것이 유대인들의 소망이요, 모든 구약 성경의 예언들은 여호와의 영이 다시 성전으로 돌아오실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捕虜)에서 돌아와서 이 성전을 재건하고 헤롯이 성전을 증축했는데도 출애굽기 40장과 열왕기상 8장에서 나타났던 여호와의 임재의 구름은 두 번째 성전에 전혀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오실 당시 그 두 번째 성전은 하나님의 영이 없는 성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쉐키나가 인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많은 고민을 신학적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2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것은 여호와의 영, 아버지와 아들이 보내신 하나님의 영이 그 구약 성경에 수많은 예언서가 예언한 대로 다시 임하시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영의 임재가 이제 건물 성전이 아니라, 예수님 믿는 성도들을 성전 삼고 임하셨습니다. 사도행전 21절에서 4절 말씀에,

*사도행전 2:1-4,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여기서 불의 혀는 출애굽기 시내산에서 불과 연기가운데 임하셨던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임하셨던 것처럼, 오순절날 성도들에게 임하신 것입니다.

또한 미국의 리폼드 신학교회 신약학자 그레고리 빌이라고 하는 교수님께서는 당시 유대인들은 하늘나라에 모세의 성막이 예시했던 것보다 더 참되고 영광스러운 하늘의 성전이 있다고 믿었는데, 그 하늘 성전의 외벽과 지성소의 휘장이 모세 후 성막의 휘장은 흰 세마포(細麻布)였지만, 유대인들의 묵시 문헌에서 유대인들이 믿었던 하늘 성전 지성소의 휘장은 불의 혀라고 그들이 믿었다는 그러한 증거들을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 머리에 임하여 있었다. 라고 하는 성령 강림의 이 사건은 바로 이제 하나님께서 예전에는 모세의 성막과 솔로몬의 예루살렘 건물 성전 지성소 안에 임재하셨는데, 이제는 그 건물 성전이 아니라 예수님 믿고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 된 자기 백성을 성전 삼고,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영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께서 임하여 계신다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것을 더 확실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고린도전서 316절에,

*고린도전서 3:16,
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저희에게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임하신 성령님은 그 옛날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던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찾아오셔서 그들을 이끄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심과 같은 은혜와 축복과 보호를 저희에게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광야 이스라엘을 어떻게 인도하셨습니까?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아말렉과 같은 이스라엘의 대적(對敵)을 물리쳐 주셨고, 반석에서 샘물이 나게 하셨고, 하늘에서 하늘의 양식을 내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오신 성령님께서 그 옛날 이스라엘을 인도하셨던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을 가지고 오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길을 인도하시며 우리 앞을 막고 있는 홍해와 같은 문제를 갈라 주실 능력이 성령님께 있으십니다. 그리고 성령(聖靈)님께서는 하늘의 양식을 날마다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쓴 물을 마라의 쓴 연못물을 달게 만들어 주셨던 것처럼, 성령님께서는 우리 마음과 환경과 우리 인간관계와 우리 삶의 모든 쓴물을 등에 달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물이 없어 갈()할 때, 반석에서 샘물이 나게 하셨던 우리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교회 가운데 인도하시며 성도들의 인생 가운데 반석에서 샘물이 나게 하실 것입니다.

물이 없어서 헤매던 주님의 백성들을 물샘 열둘과 종려나무, 이른 그루가 있는 오아시스로 인도하셨던 것처럼, 성령님께서는 오늘 우리 성도님들을 물샘 열둘과 그 시원한 그늘이 있는 오아시스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때로는 아말렉과 같은 대적을 만나고, 우리를 저주(詛呪)하려는 발람과 같은 대적들을 만난다 할지라도,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셨던 하나님께서는 이제 성령님을 교회 가운데 보내셔서 우리 인생이 혹 시험과 죄악으로 정말 저주스러운 문제를 품고 있다 할지라도 그 저주를 바꾸어 축복으로 만들어 주실 능력이 성령님께 있으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順從)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만 一片丹心(일편단심) 信賴(신뢰)하고 따라가기만 한다면 저는 이러한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더욱 감사한 것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律法(율법)을 어겨서 하나님께 심판을 받았지만, 이제 우리는 성령님께서 우리 가운데 찾아오셔서 우리 마음 판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주심으로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도록 引導(인도)해 가실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임하신 결과 사도행전 2, 4, 6장에서는 베드로와 스데반과 같은 사도들과 집사들이 주님의 말씀을 전할 때 큰 말씀의 능력이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 3장과 6장에서는 성령 충만한 베드로와 요한과 스데반이 障礙人(장애인)治癒(치유)하고 큰 하나님의 奇事(기사)表迹(표적)을 행합니다.

68, 911장에서는 성령님의 역사를 따라 교회가 크게 復興(부흥)되는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에 이 성령님의 권능을 주시는 역사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성령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강력하게 증거하게 만들고 그리고 연약한 사람들을 회복시키시고, 특별히 교회를 든든하게 세우시는 역할을 하시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몸된 교회를 든든하게 세우고 병약한 자, 고통받는 자, 그리고 우리 사람과 개인을 넘어서 우리 공동체와 우리가 소속되어 있는 모든 특별히 나라와 민족을 하나님께서 회복시켜주시고, 능력 있게 치유할 그 일을 우리를 통해 행하시려고 성령님께서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기다림과 또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 날마다 하늘을 바라보았던 저희가 이제는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충만하게 일하시도록 기도하며 주님을 의지하고 힘써 使命(사명)堪當(감당)하셔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이제 신학적인 점검을 해보자면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개혁주의 신학에 따르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교회를 설립하시는 단회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날 임하신 성령님께서는 이제 모든 교회 가운데 항상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중생과 더불어 성령의 세례를 받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믿는 또한 정통신학은 성령님께서 말씀과 福音(복음) 證據(증거)에 더욱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고, 우리가 그 사명을 잘 감당하게 만들도록 성령 충만함을 우리 보고 저희가 구하라고 우리의 신학은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님들께서도 오순절 날 임하셨던 성령님께서는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렇지만 또한 우리가 주님의 사명을 더 잘 온전히 잘 수정되기 위하여 성령 충만을 힘써 간구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또 저희가 이런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와 스데반과 바울, 그리고 우리 교회에 어느 순장님, 어떤 집사님, 어떤 장로님은 성령 충만하실 수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까지는 안 될 것 같아요.

나는 그냥 예수님 믿고 천국 가는 그 턱걸이 하나님 보시기에 나는 그렇게 부족한 사람일 것 같아요라고 생각하시는 성도님들이 계실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연 나도 우리도 성령님의 큰 도우심을 받을 수 있는지가 궁금합니다. 여기와 관련하여 이 사도행전은 누가 복음과 연결된 책입니다. 사도행전을 쓴 저자가 누가 복음도 썼습니다. 그런데 이 사도행전을 썼던 저자가 누가 복음에서 이런 말씀을 합니다. 누가복음 1111절에서 13절에,

*누가복음 11:11-13,
11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그러므로 이 말씀이 약속하신 바 성령 충만은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주시는 것이냐면 죄 없는 사람, 특별한 사람, 특별히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 많은 교육을 받은 사람, 종교적으로 고귀한 직분을 가진 사람에게 성령 충만함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 자녀 된 자에게 누구에게나 주시는 것이 성령 충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여 우리 주님의 큰 충만한 은혜를 힘입어서, 성령님을 힘입어서 우리 가정과 다락방과 일터와 특별히 너무나 혼돈과 다툼과 갈등 속에 있는 이 대한민국을 치료할 사명을 힘 있게 감당하시는 우리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II. 두 번째로 성령님께서 임하시면 예수님의 증인이 되리라

주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예수님의 증인이 바로 교회를 부흥케 만들고 주님의 말씀을 힘있게 전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예수님의 증인은 어떤 정체성을 가진 사람일까요?

하늘로 떠나가신 예수님을 물꾸러미 바라보기만 하던 제자들에게 너희가 어찌 바라기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라고 어찌 보면 책망 적으로 말씀하셨던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신 것은 교회와 성도들로 하여금 권능을 받아 땅 끝까지 예수님의 증인 되게 만드시려는 것인데, 예수님의 증인은 어떤 사람일까요?

오늘 그 점을 마지막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증인은 법정에서 진술하는 자를 의미하는 법률 용어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증인 된다는 것은 법정에서 증언하듯,

III.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

-우리 성도님들께서 참 최근에 국가적으로 큰 사건이 있기 때문에 헌법재판 절차라고 하는 굉장히 특이한 절차를 TV에서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거기 증인 신청을 하고 재판관이 증인으로 이렇게 부르면 그 증인이 증언을 하는데 그 증인이 말하는 증언이 옳은지 그른지 우리는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 여러분 증인의 증언 중에 확실한 증언이 하나가 있습니다. 그 증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그 증인이 자기 목숨을 내어놓고 하는 증언입니다. 죽음으로써 자신의 증언의 진실성을 드러내놓고 하는 증언이 가장 확실한 증언입니다.

그런데 바로 사도행전에서도 예수님의 증인들이 많이 나오고 사도행전은 그리스도의 증인들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중에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고 자신의 증언에 참됨을 증언한 증인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입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의 지금 사도행전 755절에서 56절 말씀을 한번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사도행전 7:55-56,
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스데반은 사도행전에서 가장 중요한 예수님의 證人(증인)이면서 예수님의 증인이란, 특히 성령 충만을 받은 예수님의 증인이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어떤 정체성을 가진 사람인지를 잘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님들도 우리는 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 부름을 받았고,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우리 가정 생활, 우리 교회에서의 여러 사명들, 일터에서의 사명들, 나라와 민족과 땅 끝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언하는 어떤 일도 할 수가 없는데, 참으로 성령 충만함을 받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예수님의 증인 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를 스데반을 통해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스데반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스데반은 사도행전 7장에 스데반의 긴 설교가 나와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서 보여주는 스데반의 특징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처럼 여기는 자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처럼 여기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 자신이 먼저 그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고 그 말씀을 증언하는 자가 스데반이었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은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가 스데반의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예수님의 증인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생명을 거는 자가 예수님의 증인의 특징이요. 또한 예수님을 닮은 자가 예수님의 증인입니다. 스데반이 예수님을 닮았다라고 하는 증거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2334절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마지막 운명하실 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누가복음 2334,
34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그런데 사도행전 760절에 스데반도 하나님 앞에 그 목숨이 끊어지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도행전 760,
60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스데반은 그 죽음의 현장에서 예수님과 똑같은 용서와 사랑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2346
*누가복음 2346,
46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스데반도 예수님과 똑같습니다. 주 예수여 이제 아버지가 아니라 예수님께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요. 누가 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스데반의 죽음이 매우 유사하다고 하는 것은 스데반이 온전히 예수님을 닮았다라고 하는 말입니다. 온전한 닮음은 죽음까지 함께하는 닮음입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 걸고 증거했고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었습니다. 특별히 스데반이 이 예수님을 닮아서 나타낸 것은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을 증거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 예수님의 증인은 하나님을 담습니다. 성경에서 성령님을 지칭하는 표현은 여호와의 영, 하나님의 영, 아들의 영, 그리고 사도행전 16장에 예수의 영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 아들의 영, 예수의 영을 받으신 우리 성도님들께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의 특성과 성품을 당연히 드러내실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이와 같이 예수의 영을 보내셔서,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예수님을 닮아가게 하시는데, 스데반을 통하여 보여주신 예수님 닮음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하나님 말씀을 생명처럼 여기는 것이었고, 예수님을 온전히 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닮아서 사랑과 용서를 주님처럼 죽게까지 드러내었습니다. 성령님께서 이러한 특징을 스데반을 통하여 보여주신다면 성령님의 역사를 대적하는 사탄의 영, 미혹의 영, 악한 영은 그 반대의 성품이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악한 영은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것처럼 머리 풀어 헤치고 귀신처럼 소복 입고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생명처럼 여기고 생명을 걸고 주님의 말씀을 증거 하게 하는데, 그렇다면 악한 영의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망각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게 만들고, 하나님 말씀에 무지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입을 벙어리로 만드는 것이 사탄의 역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성령님께서는 오셔서 우리가 예수님의 그 사랑과 용서의 삶을 드러내게 하시는데, 우리의 삶 속에서 사랑과 용서가 아니라, 만약 내가 가는 곳마다 分裂(분열)이 일어나고 다툼이 일어나고 갈등이 일어나고 내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일이 진행되는 데 있어서 장애물이 발생하고 나로 인하여 주님의 일이 전진 되지 못하게 하는 일이 계속된다면 나는 누구를 닮은 것일까요?

그러므로 저희가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그때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생명처럼 여기고, 증거하고 있는지, 그리고 내가 진실로 예수님을 닮아서 사랑과 겸손과 온유와 용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점검하셔야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님들께서는 스데반의 삶은 너무 힘들어서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말씀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생명을 걸고 말씀을 증언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내었던 스데반에게 신약 성경 그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는 영광스러운 장면을 보여주시는데 하늘이 열리고 자 인자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십니다.

예수님은 보통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데 이 본문에서만 유일하게 예수님이 서 계십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도대체 예수님이 왜 서 계시는지를 연구했습니다. 예수님이 서 계시는 것은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하나는 너무너무 스데반을 사랑하고 예수님께서 감동하셔서 주님이 벌떡 일어나셨다. 라고 하는 겁니다.

너무 극진한 환대를 주님이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해석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그리스 로마 세계에는 재판정에서 법정에서 변호사가 자신의 자신의 辯護(변호)해 주는 사람을 변론할 때 辯論(변론)할 때 서서 변론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재판장은 보통 앉아 있다가 판결할 때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 법정 장면을 가지고 이 본문을 해석해 보면 예수님께서 보좌에서 일어나 계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스데반이 옳다 변론하시는 것이고, 온 우주의 재판장이신 예수님께서 스데반 너가 맞다. 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목숨을 걸고 주의 말씀을 생명처럼 여기고 증거하고, 또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매우 힘들지만 저희들이 그 주님의 성품을 드러내고 주님의 말씀을 진실로 생명처럼 여기는 그리스도의 증인을 힘써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하늘이 열리고 주님의 寶座(보좌)에서 일어나셔서 환대하시고 인정해 주시는 역사를 베풀어 주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이 순교한 후에 사도행전 8장에서 복음이 예루살렘을 넘어서 드디어 이방으로 전파되게 됩니다. 충성된 증인의 증언과 희생과 헌신과 사랑이 있은 이후에 복음은 비로소 지리적으로 확장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 제자 훈련과 사역 훈련, 그리고 다락방에서 그리고 여러 사역 부서에서 순장반에서, 권사회에서 힘써 수고하시고 애쓰시는 그 수고 힘들고 어려우시지만 우리 성도님들의 그 땀 흘리시고 피 흘리시는 섬김과 헌신과 사랑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역사를 지리적으로 확장시키실 것입니다.

정말 스레반과 같이 주의 말씀을 사랑하시고, 예수님 닮은 삶을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진정으로 세계 복음주의 교회를 살려내시고, 다시금 온 인류가 하나님 앞에 돌아와서 悔改(회개)하게 하는 대부흥의 역사를 우리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이 펼쳐주실 줄 믿습니다.

주님 안에서 수고가 헛되지 않은 줄 믿습니다. 하늘로 올려지신 주님께서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실 때까지, 이러한 주님의 증인 되는 사명 힘써 감당하여 땅 끝까지 주님의 복음이 증거되는 일에 영광스럽게 쓰임 받으시는 예수님의 증인 되시기를 간절히 권면드립니다.

요약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의 정체성과 사명을 깨달아, 주님 다시 오실 날을 간절히 사모하며 늘 성령님의 도우심을 의지하여 신실하게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스데반과 같이 생명을 다해 복음을 증언하며, 그리스도의 심정과 사랑을 온전히 드러내는 주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 성령님을 의지하여 땅 끝까지 주님의 증인 되고, 변치 않은 믿음과 소망으로 주의 사명 잘 감당하며,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여 개인, 가정, 일터, 교회, 나라와 민족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遍滿(편만)케 되는 일에 쓰임 받아야 한다. 주님을 닮아 전심으로 복음을 증언하는 자, 주님의 심정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자가 되기를 간구하며 실천하는 자로 주님을 증거하며 살아가야 한다.





728x90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5년 3월 5일)
제목: “한마음, 하나의 부르심”
말씀: 에베소서 4:1-6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사회: 강건우 부목사님
 
설교자: 임병영 부목사님
-----
 
* 에베소서 4:1-6,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
 
▶여호와를 앙망하며 새로운 역사를 경험하는 ‘수요저녁기도회’에 참여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오늘 수요 저녁 기도회를 통해서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그 따뜻한 손길을 경험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교회라는 단어를 듣게 되면 마음이 어떻게 드시나요? 어떤 분들은 교회에 대한 깊은 애정과 또 감사의 마음이 있을 것이고, 또 어떤 분들은 실망과 고민을 함께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교회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동시에 아프기도 하고, 교회가 정말 소중하지만 갈등을 느껴 힘겨울 때도 있습니다. ‘필립 얀시’ 라는 분이 쓴 책이 있습니다. 사역 훈련생은 필수로 읽어야 되는 책 중에 하나입니다.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이라고 하는 책인데 참 좋은 책이죠.
 
필립 얀시는 이 책을 통해서 자신의 신앙 여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교회를 다니면서 신앙을 배웠지만 점점 자라면서 교회의 위선적인 모습과 판단하는 태도를 보면서 크게 실망했다고 고백합니다. 교회는 은혜를 말하면서도 은혜를 실천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라고 말하면서 결국 그는 신앙과 교회를 멀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재미난 사실은 그가 신앙을 떠나 있을 때 더 깊은 갈증을 느꼈다. 라는 거예요. 그는 신앙을 결코 혼자서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하면서 신앙 공동체 안에서 자라고 함께 걸어갈 때 더욱 깊어진다. 라는 것을 교회를 다시 돌아보면서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교회는 불완전한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 하나님이 일하신다. 교회는 때로는 갈등과 고민을 주지만, 동시에 우리가 함께 하나님을 경험하는 자리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신앙의 현실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하는 지상 교회는 완벽하지 않죠. 서로 다른 배경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때로는 갈등이 생기고 기대와 현실의 차이 속에서 고민이 생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를 한 공동체로 부르셨고, 하나님께서 그 공동체 안에서 신앙의 여정을 함께 걸어가도록 하셨다.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이미 우리를 교회로 부르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신 것이 단순한 모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공동체로 삼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은 결코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한 몸 된 공동체로서 한 교회로서 세상 가운데 복음의 빛을 비추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는 공동체의 모습을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떠나서 신앙을 홀로 지키려 했던 ‘필립 얀시’는 결국 공동체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교회로 돌아오면서 이런 고백을 했는데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나는 신앙을 혼자 유지하려 했지만 그것은 마치 불을 꺼내놓고 타오르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았다.신앙은 함께할 때 더 깊어지고, 교회는 그 신앙이 성장하는 자리다. -필립 얀시-
 
사랑의 교회 성도 여러분 불이 모닥불 속에서도 뜨겁게 타오르지만 그중에 하나만 꺼내놓으면 금방 식어버리고 불이 꺼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죠. 하나님께서 교회를 택하신 이유는 우리는 개인적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이 아니라 공동체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감당하는 언약 백성으로 살도록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우리는 단순히 교회 안에서 하나 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도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연합할 때, 세상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한 마음과 한 공동체로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신앙은 혼자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혼자가 아닌 공동체 안에서 함께 성장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회로 부르신 이유는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 우리가 함께 에베소서 4장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에베소서 4장 1절에서 6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한 공동체로 부르셨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한마음으로 신앙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성숙해지려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부르신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 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교훈을 붙들고 하나님께서 부르신 삶에 합당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이 여러분을 부르신 삶에 합당하게 살 수 있을까요? 첫 번째로 나누고 싶은 말씀은 이겁니다.
 
I. 첫 번째, 하나님께서 부르신 삶에 합당하게 살기 위해선 겸손과 온유, 사랑 가운데 오래 참음으로 하나 됨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함께 말씀을 읽어볼까요? 에베소서 4장 1절에 2절까지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4:1-2,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바울은 예배소 교회에게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합당하게 하라. 라고 하는 이 ‘합당하게’라는 표현은 ‘조화롭게’라는 뜻도 있고 ‘균형있게’라고 하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신 목적에 맞게 조화롭게 균형있게 살아야 한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당하게 살 수 있을까요? 바울은 여기서 세 가지 태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먼저 겸손에 대해서 말하고 있어요. ➀겸손이란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죠. 빌립보서 2장 3절에도 바울은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 라고 권면한 내용이 나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다양한 사람과 다른 기준을 가진 사람들로 인해 갈등이 생길 때에 우리는 서로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서로를 이해하려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죠. 당시 에베소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 성도들이 함께 했던 교회입니다.
 
문화적 차이와 배경의 차이로 인해서 갈등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아주 큰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이런 그들에게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존중하는 겸손으로 무장할 때에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다.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태도는 온유입니다. ➁온유는 힘이 있지만 부드럽게 사용할 줄 아는 태도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1장 29절 말씀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생각을 나눌 때에 온유한 사람들은 자신이 옳다고 해서 강하게 주장하기보다는 상대를 배려하면서 함께 나아갑니다. 이것이 온유한 사람들의 특징이죠. 바울은 예배소 교인들이 서로가 서로의 차이로 인해서 다투기보다는 상대를 배려하며 함께 나아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세 번째 태도는 ➂사랑 가운데서 오래 참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완전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아니죠. 죄인들의 모임,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갈등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갈등이 없는 교회는 어찌 보면 이상한 교회일 수 있습니다. 드러나든지, 드러나지 않든지, 모든 공동체 속에 갈등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러한 갈등이 있을 때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오래 참아주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용납하고 인내해야 한다. 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랑 가운데,,, 라는 말을 듣게 되면 어떤 사랑이 생각나실까요? 바로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 예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한 사랑이겠죠. 그 사랑을 저와 여러분들이 받았다. 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오래 참으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용납하고 인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어떤 마음이 드실까요? 저와 여러분들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어떤 태도로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겸손과 온유의 태도를 가지고, 다락방과 훈련반, 교사 모임, 부서 모임, 여러 모임들 가운데에 계십니까? 아니면 내 뜻과 생각을 주장하는 그런 모임 가운데 계십니까? 또한 상대를 배려하는 사람 가운데 오래 참는 태도를 실천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내 마음과 뜻이 관철(貫徹)되지 않아서 관철하기까지 오만 방법들을 사용하면서 설득하고 계시는 모습이 있으십니까?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바울이 권면한 태도를 기억하면서 힘써 지켜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늘 은혜가 넘쳐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부르신 그 부르심에 합당한 열매가 가득한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로 나누고 싶은 말씀은 다시 시작하는 다락방과 예배 기도 속에서 한마음이 되는 신앙을 실천해야 한다. 라는 겁니다. 함께 말씀을 읽어볼까요? 에베소서 4장 3절 말씀입니다. 같이 읽습니다.
 
II. 두 번째, 한마음이 되는 신앙을 실천해야 한다.
 
*에베소서 4장 3절,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바울은 예베소 교회에서 하나님을 힘써 지켜야 한다. 라고 강조합니다. 여기서 ‘힘써’라고 하는 단어는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공동체가 하나 되는 것은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되기 위해 힘써 노력해야 한다.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시간이 흐르면 함께 밥 먹는 시간이 많아지면, 그리고 나눔 시간이 많아지고 만남의 시간, 훈련의 시간이 차곡차곡 쌓이게 되면 하나가 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때가 차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공동체 안에 각 사람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말씀에 순종하는 적극적인 의지와 삶을 통해서 한 공동체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때론 서로의 다름을 자기 품에 안고, 익숙하지 않은 패턴으로 어색한 표현을 계속해서 건네야 하는 힘을 다하는 노력이 있어야 공동체로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공동체 만드는 거 쉽습니까? 훈련반이나, 다락방이나, 여러 모임들 가운데 낯선 분들, 나와 맞지 않는 분들, 어색한 분들, 내 인생의 기준에서는 도저히 부합하지 않는 사람들을 그곳에서 만났을 때에, 여러분들은 그 공동체를 마음을 다해 뜻을 다해 사랑하며 한 공동체로 이루어 갈 소망과 마음과 기쁨과 감사가 넘치고 있습니까? 쉽지 않다라는 거죠. 저도 참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사랑의 교회 여러 회의가 있으면서 3년마다 이제 교구 교육자들이 교구로 바뀝니다. 사랑의 교회가 워낙 큰 교회다 보니까 교구가 바뀔 때마다 교회를 옮기는 느낌이에요. 새롭게 만나는 순장인들, 처음 보는 분들이 그렇게 많습니다.
 
제가 10년이 넘었는데도 불구하고, 저를 소개하면 처음 봤다고 얘기하시는 분도 계시고, 네 저는 당연히 그분을 처음 뵙고, 어떤 사역에서도 마주치지 못했던 경험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지금도 저를 알지 못하는 분이 있을 것 같아요. 저도 알지 못하는 분이 많습니다. 이런 분들과 만날 때마다 참 마음의 갈등과 어려움이 있어요. 처음 한 해에는 그래 열심히 해야지, 라고 하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가서 더 제 안에 에너지가 없는 에너지를 쥐어 짜내면서 만남을 이루어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지만 제가 무척 샤이한 사람이거든요. 엄청난 노력을 통하여서 관계를 이루어가는 사람인데, 매번마다 새롭게 바뀌는 그 모습들을 적응해 가려고 하니 참 쉽지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 해 한 해 노력하면 할수록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은혜가 있더라고요. 이때 우리가 말씀 가운데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더 있는데요. 바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이라고 하는 표현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힘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이미 하나가 되게 하셨다. 라는 것과 우리는 그것을 힘써 지켜야 한다. 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 되기 위해 힘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성령으로 하나 된 것을 힘써 지켜 나가는 것이죠. 제가 이 사실을 제대로 깨닫지 못해 가지고 그동안 제가 공동체 안에서 하나 되기를 힘썼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 공동체 안에서 늘 불편한 부분들이 생기고 어려움이 생기고 저와 맞지 않는 부분들이 있어 힘겨웠던 시간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일이라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에 부담이 덜어지더라고요.
 
이미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하나 되게 하신 그것을 내가 지켜 나가면 되는구나! 전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만들어 놓은 관계를 내가 힘써 지키면 되는구나! 라는 생각을 갖게 되면서 마음의 평안이 왔습니다. 이 말씀은 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해야 할 역할들을 강조하고 있는 거죠.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들이 성령이 하나 되게 하는 것을 힘써 지키는 것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먼저
➀첫 번째로는 다라방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 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교회 다락방은 신앙 공동체가 한마음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자리인 줄 믿습니다. 사도행전 2장 46절 말씀에 보니까,
*사도행전 2장 46절,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라고 하는 표현이 있어요.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이 어떻게 하나가 되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서로 교제하며 신앙을 나누었을 때에, 하나 됨을 이루어졌습니다. 하나 됨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다락방에 모여서 하나님 말씀 중심으로 서로의 삶을 나누고, 아픔을 나누고, 근심과 걱정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함께 덮어가는 과정을 통해서, 한 공동체로 하나 됨을 이루어 갔던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렇게 말씀과 신앙을 나누고 함께 교제하는 다락방을 통해서 하나 됨을 경험할 수 있다. 라는 겁니다. 오랜 참 꿀과 같았던 방학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다락방이 시작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하나 됨을 경험하는 시간이 다시 찾아왔다. 라는 거예요.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된 다락방을 저와 여러분들이 소홀히 여기지 않고 함께 기도하며 말씀을 나누며 영적 교제를 나누는 자리로 만들어 가서 각 다락방마다 하나 되는 은혜로 가득 채워지는 이번 상반기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직 다락방에 참여하지 않는 분들은 마음속에 나는 그럴 기회가 없는데, 라고 생각하실지 모르는데 오늘 이 말씀이 여러분들의 귀에 들렸다고 한다면 주님께서 여러분들을 다락방으로 부르고 있다. 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순종하여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각 교구별로 교육자분들께 용기 내어서 연락을 드리고 다락방을 신청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참 좋은 기회예요. 매 주일마다 다락방을 찾아드립니다. 라고 하는 캠페인을 하고 있는데요. 더 이상 주저하지 말고 다락방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를 부르신 부르심에 합당한 삶의 열매를 맺으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기를 바랍니다.
 
➁두 번째로는 예배와 기도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하나 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배는 개인적인 시간이면서도 공동체가 함께 드리는 시간입니다. 기도도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고 무엇보다도 공동체 안에서 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마태복음 18장 19절 말씀에 보니,
*마태복음 18장 19절,
19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함께 예배할 때 우리는 같은 말씀을 듣고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주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함께 합심하여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뜻을 더 깊이 깨닫고 마음이 하나로 모아질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매주일마다 담임 목사님을 통해서 이사야 강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 말씀이 있었어, 라고 하시는 분들은 빨리 주일날 교회에 나오셔서 말씀을 들으시면 좋겠습니다.
 
단순히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한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예배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주의 말씀을 함께 듣고 함께 기도하는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정과 일터에 교회와 모든 삶의 현장에 새 길을 반드시 여실 것을 기대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의 삶을 통하여 함께 예배하고, 함께 기도하는 그 시간을 통하여서 다시 한 번 더 새 길을 반드시 여실 것들을 기대합니다. 또한 한마음으로 말씀과 교회의 비전 사역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개인적인 기도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기도에도 참여해서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많은 기도의 시간들이 있어요. 토요 비전, 새벽 예배, 또 수요 저녁 기도회, 또 목요 주빌리 기도회, 금요 철야 기도회, 여러 기도회들이 다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문제만을 가지고 그 교회 기도회를 참여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개인의 기도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기도를 가지고 함께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저와 여러분들의 기도, 합심해서 드리는 그 기도를 통하여 새 길을 열 줄 믿습니다. 함께 말씀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에베소서 4장 4절에서 6절입니다. 같이 읽습니다. 참여하셔서 함께 기도로 동참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함께 나누고 싶은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나 되게 하신 공동체 안에서 연합하며 신앙의 비상을 경험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III. 세 번째로, 하나님께서 하나 되게 하신 공동체 안에서 연합하며 신앙의 비상을 경험해야 한다.

*에베소서 4장 4절에서 6절,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아멘 바울은 본문을 통해서 계속해서 하나하나 하나하나 이 하나라는 단어를 강조하고 있어요. 한 몸이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된 공동체라는 것을 말하고요. 한 성령이란 성경께서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신 것을 말하고 있으며, 한 소망이란 하나님께서 주신 동일한 약속을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한 주님 한 믿음, 한 세례는 우리의 신앙 고백이 같다. 라는 것을 말하고, 한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 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각자 다른 배경, 다른 생각, 다른 기준, 다른 환경, 다른 모든 것들 가운데 우리가 서로의 다름을 다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누구 안에서요. 하나님 안에서는 하나라고 하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3장 28절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
8 너희는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즉 우리는 주 안에서 한 공동체이며, 함께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는 가족, 영원한 가족, 영원히 함께하는 가족인 줄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 되기를 힘쓸 때에, 하나님께서 하나 된 사랑의 교회를 통해 더 크고 놀라운 일들을 이루실 것을 기대합니다. 특별히 사랑의 교회에 주신 비전이 있죠. 담임 목사님과 함께 기도하며 준비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교회적으로 새로운 도전이 있을 때마다 개인적인 생각보다는 공동체의 방향성에 집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시선이 교회와 하나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더 큰 부흥과 더 큰 은혜를 허락해 주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작년에 10월 27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함께 기도하고, 함께 비전으로 품으며, 함께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함께 한국 교회를 위해 기도했을 때에 이 나라와 민족과 한국 교회를 위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경험했습니다.
 
세상에서는 조금 조용했을지 모르지만, 저와 여러분들은 그 증거(證據)의 현장에서 그 놀라운 일들을 목격하고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올해 10.27를 통해서도 그러한 은혜를 경험하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단순히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 됨을 위해서 노력하면서 함께 신앙의 비상(飛翔)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 일을 위하여서 우리가 계속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돌아오는 3월 8일 날, 3월 15일 날, 우리가 마음을 다해서 함께 기도하는 자리에 이곳에 계시는 모든 부분들뿐만 아니라 방송으로 참여하시는 모든 분들도 초대합니다. 한 마음으로 공동체 안에서 연합하여서 함께 기도하며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놀라운 비전을 이루어 가시고 신앙의 비상을 경험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놀라운 자리에 초대하실 때에 여러분 더 이상 주저하지 마시고 함께 연합해서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운 일들을 이루어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올해 상반기 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우리는 한 마음과 하나의 부르심을 따라 함께 걸어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삶에 합당하게 살기 위해서는 겸손과 온유, 사랑 가운데 오래 참음으로 하나 됨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또한 다락방과 예배, 기도 속에서 한마음이 되는 신앙을 실천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하나 되게 하신 공동체 안에서 연합하여 신앙의 비상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에 저와 여러분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준비하신 놀라운 은혜들을 기적과 같이 체험하고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저와 여러분들을 하나님께서 이곳으로 또 이 땅 가운데서 죄인 된 곳으로 살다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셨을 때의 그 부르심을 잘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부르심은 어떻게 보면 저와 여러분들의 개인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공동체적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결코 개인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교회로, 하나의 공동체로, 하나의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셨다.라는 겁니다.
 
⁂구약에서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부르실 때, 이스라엘 야곱이라는 사람이 이름이 바뀌었던 게 이스라엘이죠.
 
그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한 사람을 부르실 때에, 그 이스라엘 한 사람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로 부르셔서 세상의 빛으로 사용하시는 제사장 나라로 세우신 것도 보게 됩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어서, 그 자녀들이 애굽으로 들어가고, 애굽에서 수많은 사람들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준비되어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던 그 구약의 역사를 저 여러분들을 기억하실 겁니다.
 
왜 그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었습니까? 그 개인을 부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공동체적으로 그를 부르셔서 이 땅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제사장으로 제사장 나라로 세워가기 위해서였던 겁니다.
 
⁂신약에 왔어도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부르실 때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셨지만 결국 예수님의 12명의 제자를 부르신 것을 보게 됩니다. 12명이라는 공동체를 부르셔서, 그들과 함께 먹고 자고 그들 가운데 기적을 베푸시며 남들에게 알려주시지 않았던 세밀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그들에게 공동체적으로 가르치고 훈련을 받도록 하여 성장하게 하셨습니다.
 
결코 개인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함께 성장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세우셨다. 라는 겁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사명은 결코 저와 여러분들 혼자가 아니라 함께 감당해야 하는 사명이라는 겁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한마음으로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허락해 주신 2025년에 ‘2033-50 비전’을 위하여서 계획하신 많은 은혜와 능력과 기적들을 경험하게 하실 겁니다. 새로운 길들을 반드시 내셔서 사망의 강을 광야의 길을 내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들, 은혜의 비상을 경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이러한 자리에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이곳에 계시는 모든 분들이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공동체로 한마음으로 하나의 부르심 앞에 전적으로 순종하여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어서 이번 상반기 사역 가운데에 하나님께서 놀랍도록 부어주신 은혜를 모든 다락방, 모든 훈련반, 모든 부서와 모든 공동체에서 마음껏 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요약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를 한 공동체로 부르시는 신앙의 길을 함께 걸어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함께 믿음의 여정을 걸어가도록 계획하심을 믿고,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한 삶을 살기를 소원한다. 각 다락방과 훈련반, 그리고 모든 사랑의 교회 공동체에서 겸손과 온유로 서로 배려하고 사랑 가운데 오래 참음으로 용납하며,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 나아가야 하며,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더욱 견고해지고, 신앙의 성숙을 이루는 기쁨을 누리고, 우리에게 허락하신 꿈과 비전을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을 확신하며, 우리 개인의 신앙 성장을 넘어 사랑의 교회가 하나 되어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위해 쓰임 받아야 한다.
-마음을 찢는 회개와 가슴 터지는 감격으로, 우리를 오래 참아주신 하나님 은혜에 다시 사로잡혀 겸손과 온유, 사랑 가운데 서로를 용납하고, 인내하는 성령 하나님의 하나 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봄 학기 사랑의교회 모든 예배와 다락방을 비롯한 소그룹이 모이고, 흩어질 때마다 하나님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으로 끝마치는 사역이 되어야 한다. 지치지 않는 기도 생활, 샘솟는 영감, 찬양의 능력, 담대한 복음 증거, 참다운 영성 회복을 뜨겁게 사모하며 무수히 경험하는 예배가 되고, 명실상부(名實相符)한 사랑이 넘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예배하는 곳에 2025년 세상의 중력을 끊어내고, 하나님을 더 가까이 경험하는 거룩한 처소가 되며, 섬김과 희생의 그물이 튼실히 엮여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강력한 도구로 쓰임 받아야 한다.








728x90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5년 2월 26일)
-평신훈련 개강 및 사랑글로벌 아카데미 입학 감사예배
제목: "Finishing Well 합시다"
말씀: 디모데후서 4:9~11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대표기도: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
*디모데후서 4:9~11,
9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5년 2월 26일)
-평신훈련 개강 및 사랑글로벌 아카데미 입학 감사예배
제목: "Finishing Well 합시다"
말씀: 디모데후서 4:9~11
말씀봉독: 조성환 부목사님(사랑글로벌 예배아카데미 학장)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연합찬양대
대표기도: 서학수 장로님(평신도 훈련부 담당),
백형선 장로님(SaGA 재단법인 이사장)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
*디모데후서 4:9~11,
9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
 
▶기도:
모든 평신도 훈련생들과 SaGA가 생도들에게 여호와의 영이 충만하여 훈련과 교과 과정의 이수를 위한 필요한 지혜와 능력과 육신의 강건함을 주시고, 일터와 가정에 평온과 형통의 축복도 주시옵소서.사랑 글로벌 아카데미의 오정현 총장 목사님과 학장님들, 국내외 교수진들에게 영육의 강건함과 능력을 더하시어 모든 생도들을 위하여 전심을 다하게 하옵소서. 2025년 평신도 훈련생들과 사랑 글로벌 아카데미 입학생들이 들리는 입학 감사 예배의 시종을 성령 하나님께 온전히 의탁 드리오며 우리의 유일한 소망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오정현 담임 목사님
어떤 사람은 삶의 허무(虛無)가 있고 공허(空虛)를 느끼고 또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굉장히 우울(憂鬱)하고 힘들고 그런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제가 지난주를 말씀한 대로 어떤 경우에도 끝까지 구원의 우물 물을 이렇게 들이켜 가지고 날마다 솟는 샘물을 경험함으로 말미암아 끝까지 물론 이건 꼭 스타일을 말하는 건 아니고, 그 내면이 끝까지, 영적 활력과 역동성을 유지하는 분이 있어요.차이가 뭐예요? 다시오. 공허하고 허무하고 무의미한 인생 우울증 있어 가지고, 아니면 끝까지 영적인 활력과 역동성을 유지하는 차이가 뭐예요? 그 차이는 한마디로 하나님께 쓰임 받느냐, 안 쓰임 받느냐 내가 하나님께 쓰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한 절대로 우울하거나, 허무하거나, 무의미하거나, 공허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거,
 
예를 들어서 구약의 물맷돌이 나오는데, 물맷돌은 다윗 왕국을 세우는 데 지대한 공헌(供獻)을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예루살렘 호산나 마지막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예루살렘 입성(入城)하실 때에 예수님을 등에 태운 나귀가 있잖아요.
 
나 나귀는 예수님의 십자가(十字架)의 사역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물맷돌은 무생물입니다. 그리고 나귀는 그냥 동물입니다. 무생물도, 동물도 다윗 왕국의 역사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의 그 영광스러운 사역에 놀랍게 쓰임 받았다면 하물며 하나님의 창조품이요, 창조물이요,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구원(救援)받은 우리 한 인생 한 인생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의 교회는 이 일을 위하여 ➀다락방이 있고, ➁제자 훈련, ➂사역 훈련이 있고, 그다음 ➃순장반이 있고, 그다음 크게 보면 또 ➄사랑 글로벌 아카데미가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 다락방을 통하여 말씀으로 영혼을 섬기며 한 영혼 한 영혼이 은혜의 사각지대가 없이 우리 교회가 처럼 큰 교회지만 그 한 영혼, 한 영혼이 말씀 앞에서 자신을 주님 앞에 돌아보면서 성숙(成熟)할 수 있는 그런 계기가 있고 다락방은 그렇게 소그룹 다이나믹스를 통하여 한 영혼을 케어하고 그 다락방에서 당신은 제자 훈련해야 한다. 당신은 사역 훈련해야 해야 한다. 라는 하나님의 훈련생들이 배출(輩出)되게 하시고 그리고 다락방은 그런 한 영혼에 대한 소중성과 그다음 그 귀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훈련받을 사람들을 배출하고, 그다음 그 훈련받는 사람들을 영적으로 성숙하게 하고, 양육하게 하고, 그다음 제대로 키우는 제자 훈련 사역 훈련을 하게 하고, 그리고 제자 훈련한 사역 훈련을 하고 난 다음에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말씀으로 다락방을 소그룹을 이렇게 섬길 수 있는 말씀으로 영혼을 섬기는 순장들을 배출해내고, 다락방과, 훈련과, 순장반과 그리고 순장만 5년, 10년, 20년 하면 매너리즘에 빠져가지고 어리버리 할 수 있는 이런 사람들을 끝까지 그렇게 하지 않도록, 신선도 유지, 활력 영감과 능력을 계속 가질 수 있도록 사랑 글로벌 아카데미를 허락하신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제, 자, 세계 어느 교회가 제자 훈련, 제자 훈련 50회를 맞이하는 이런 데가 어디 있겠나요? 이게 그리고 50년을 가면서도 약화되지 아니하고, 지금도 이와 같이 오늘도 거의 500 몇 명이죠? 510여 명입니다. 계속해서,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지금 그레이조이 스쿨 대학원 대학교 입장 정도 수준에서 313명이 이렇게 입학하는 케이스가 거의 예외가 거의 잘 있지 않는 이런 참 특별한 계기를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참 놀랍습니다. 50년을 한결같이, 그렇게 될 수 있는 비결이 뭔가 사랑의 교회는 이 제자반, 사역반 혹은 이 전도폭발반, 이렇게 하면서 또 우리 이제 사랑 글로 아카데미 이제 오기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우리가 갖는 정신이 있는 거예요.

그게 뭐냐? 우리는 Finishing Well을 해야 한다.
아까 다락방, 제자반, 사역반, 그다음에 순장반, 이 네 가지가 사랑의 교회의 어떤 사륜(四輪) 구동(驅動)과 같이 네 바퀴와 같이, 잘 이렇게 정리가 되면 하나님 나라의 시온의 도로를 달릴 수가 있는 것이에요. 그렇게 해서 이 일이 잘 감당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 사랑의 교회 입학생들에게 주시는 변치 않는 하나의 원칙이 하나 있어요.
 
그것이 뭐냐, 오늘 디모데후서 4장 9절로 11절까지 있는 오늘 등장하는 여러 인물이 등장하지만 특별히 세 사람입니다. 데마, 마가, 누가 그리고 바울 사도, 바울 사도는 이제 전체를 보는 것인데 그래서 오늘 훈련하고 또 입학하는 여러분들에게 데마처럼 되지 말고, 마가처럼 되었더라도 다시 회복하고, 누가처럼 가능하면 시종일관(始終一貫) 처음과 끝이 동일한 능력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세 사람을 우리가 앞에 놓고 롤 모델로 우리가 역할 모델로 우리가 교훈을 받지만 사실은 우리의 본성 안에 우리의 속사람 가운데서, 우리에게는 데마 같은 기질도 있고, 또 마가 같은 그런 기질도 있고 누가 같은 이런 속성도 있어요. 가능하면 우리 속에 있는 부족함은 떨구어내게 하여 주시옵시고, 훈련을 통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집중력을 가지고 시종일관 승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여러분,
첫째, 데마는 잘 아시는 대로, 오늘 본문 보니까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갔고, 보면 알지만 데마는 처음에는 영웅적인 행동으로 출발한 사람이에요. 바울과 함께 바울의 동력자란 말도 들었고 또 누가와 같은 반열(班列)에서 사역(事役)하던 그 정도의 수준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데마가 가만히 보니까, 바울 사도가 이제 순교의 이슬로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니까 바울 초창기 때는 바울 사도하고 같이 사역할 때는 막 무슨 막 그냥 세상이 뒤집어지고, 그다음에 막 난리가 나고, 그냥 뭐 앞치마만 해도 사람이 막 살아나고, 기적 같은 일들이 막 일어나고 그럴 때는 신나고 승승장구(乘勝長驅) 했는데 나중에 바울이 나중에 순교(殉敎) 당할 상황(常況)이 되니까, 아 이러다가는 내 인생 종치겠구나,,, 싶어 갖고 바울을 떠나서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갔다.
 
그럼 데마가 왜 그랬을까?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첫째는 대마 속에는 처음에는 영웅적으로 시작하지만 그 속 사람이 약한 거예요. 우리가 왜 약한가? 우리 약한 이유가 뭘까? 우리의 약한 이유는 우리의 속 사람이 약하기 때문에, 이번에 훈련하는 또 입학하는 여러분들, 제가 오늘 이제 일일이 훈련 입학을 다 말하지 않더라도 딱 말하면 찰떡같이 알아듣고, 여러분들은 그러면 훈련생과 입학생 다 커버하는 것이야 아시겠어요? 아멘
 
여러분들이 오늘 여러분들이 이번에 이 훈련과 입학을 잘 감당해 낼 수 있도록 여러분의 속 사람을 주님이 강화(强化)시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속 사람이, 여러분 속 사람이 왜 약할까요? 속 사람이 약한 이유는 뭐예요? 속 사람의 능력은 뭘로 결정됩니까? 이 훈련을 통하여 하나님께 전적(全的) 위탁(委託)하는 사람은 속사람이 강해지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전적 위탁을 한다는 말이 뭐예요? 제가 한 번씩 말씀드립니다마는 사람에게는 전심, 사람에게는 진심, 하나님께는 전심, 하나님께는 전심이 그것이 전적 위탁인데, 그 전적 위탁을 하게 되면 하나님께는 전적 위탁을 하고, 사람에게는 독립(獨立)을 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꾸로 왔다고 말씀드렸죠. 하나님께는 마음대로 독립해서 살고, 사람에게는 완전히 위탁되어 가지고 남편 때문에, 아내 때문에, 자식 때문에 속을 끓이고 난리가 나는 거예요. 죽고 살고 못 살고 불그락 푸르락 하는 것이에요. 열심히 괜찮죠. 그러니까 이제 머리를, 그리고 속 사람이 강건해지지 못한 하나님께 전적 위탁을 못하니까 항상 자기 자신에게 늘 집중(集中)하는 거예요.
 
자기 자신에, 자기 자신에 베드로에게 베드로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봄으로써 네가 왜 사람을 주목하냐? 자기에게 집중하지 마라. 그래서 이번 모든 여러분들은 자기에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집중함으로 말미암아 속 사람의 강건함을 가지고 끝까지 잘 감당하고 활력(活力)과 역동성(逆動性)을 놓치지 마시기를 소망합니다.
 
또 하나는 데마가 도중에 하차한 이유는, 웬만한 어려움을 이겨낼 만한 더 큰 삶의 목표(目標), 하나님이 주시는 더 큰 비전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인생살이 하다 보면 이런저런 우여곡절(迂餘曲折), 우수(憂愁)사려(思慮)가 많이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시는 분명한 사명(使命)과 비전이 있는 것이에요.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훈련을 통하여 또 학업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 세상 사람들 그 누구도 그 누구도 쉽게 이해하지 못할 하나님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분명한 사명과 비전이 있는 줄로 믿으셔야 되는 것이에요. 오늘 이 말씀을 바울은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시고, 오늘 17절에 나와 있죠. 17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디모데후서 4:17-18,
17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바울의 사명은 뭡니까?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여 모든 이방인들에게 보낸 이방인에게 보낸 사도가 된 거예요. 그렇게 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어떤 일이 있어도 사자의 입에서 건졌는데, 18절에 한번 보세요. 18절도 보겠습니다.
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바울은 하나님이 주시는 이 놀라운 비전에 사로잡혀 가지고 웬만한 데는 흔들림이 없었어요.
그런데 데마는 흔들려 버렸어요. 바울은 어떤 경우에도 이 사명을 통하여 목자의 심정을 놓치지 않았다. 이거에요. 이 말이 데마에게서 받는 교훈이, 우리는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목표와 비전 사명이 더 확실해야 되고, 우리의 속 사람이 어떤 경우에도 흔들림이 없도록, 이제 속 사람이 흔들릴 만한 일들이 1년 동안 이걸 같이 있는 일을 하기 때문에 이것이 이렇게 흔들릴 만한 일들이 한 번씩 이제 한 번씩 이제 툭툭 칠 거예요. 파도(波濤)가 툭툭 일어날 거예요.
 
제가 이제 언젠가는 한번 얘기하겠지만 주 초에 제가 설교(說敎) 준비를 하다가 갑자기 설교 제목이 하나 생각났어요. 악플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악플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쉽게 말하면 비판을 어떻게 제가 이제 한번 설교할 거예요. ‘비판과 악플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그런데 대부분의 젊은 특별히 연예인들은 이 악플을 못 견뎌 가지고 어려움도 겪고 또 극단적인 선택도 하고 그렇게 다 하는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세상의 파도(波濤)를 감당(勘當)할 만한 영적(靈的) 내공(內工)이 준비가 안 돼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팍 치고 들어오니까, 그냥 나가 떨어지고 그다음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그다음에 실망(失望)하고 그다음에 중간에 나가 떨어지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이 경험을 해보니까요. 한 번 인생 파산(破散)했다가 경제적(經濟的)으로 완전히 폭망(暴亡)했다가 회복(回復)된 사람들은요. 웬만한 그리고 정말 사랑하는 가족들 있잖아요. 사랑하는 가족들을 먼저 남편이나, 아내나, 자식들이나 먼저 주님께 보냈는데 그 가운데 있잖아요. 그 가운데 정말 주님만을 신뢰(信賴)하고 주님만을 향한 속 사람이 강건(康健)해져 가지고 그 고비(苦悲)도 이겨낸 사람은요. 웬만한 파도 끄덕도 안 해요. 내 말 맞아요?. 틀려요? ➀가족들 사별, ➁경제적인 폭망, 세 번째 ➂암이 걸렸다가 나았다든자, 암이 걸렸다가 좀 나았다든지 아니면 거의 나은 수준이 된 분들은요. 웬만한 어려운 거는요. 그 문제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봐 다시 감옥을 갔다 왔다든지, 그다음에 폭망했는데 회복이 된다든지 아니면 또 뭡니까? 경제적인 파산을 회복이 된다든지, 아니면 사별 가족들을 사별을 이겨냈다든지, 아니면 깊은 건강의 고통 가운데서 조금 회복이 돼 이러면요. 웬만한 댓글들 신경 씁니까? 안 씁니까? 그건 아무 일도 아니에요. 아무 일도 웬만한 건 아무 일도 아니에요.
 
여러분, 지금 저기 뭡니까? 이번에 이제 1년 동안 이제 감사한 일도 있고, 기쁜 일도 있고, 은혜 받는 일도 많이 있지만 한 번씩 시험들 일도 많이 있을 거예요. 그런데 그럴 때마다 바울처럼 주께서 사자의 입에서 나를 건져내 주신다고 했어요. 바울은 죽다 산 거고, 그냥 얻어맞고 그냥 파산 당하고, 완전히 죽다 살고 그냥 완전히 공격(攻擊)당(當)하고 그냥 인간으로서 모멸(侮蔑)감(感) 말도 못하는데 그런 거 지나고 나니까, 웬만한 파도는 끄떡도 안 하는 거예요. 특히 이번 기수, 웬만한 파도는 다 이겨내시길 바라는 것이에요.
 
웬만한 파도는,,, 따라서 비옵기는, 사랑 그로벌 아카데미 이번에 303명, 한 명도 탈락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부탁합니다. 313명, 313명 이름도 3,13 딱 돼 있네. 3명이 마음 모아 가지고 3명을 끝까지 가게 한다. 그다음에 이번에 우리 제자반, 사역반 식구들, 끝까지 잘 감당할 수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
 
둘째, 마가가 있죠. 마가는 핵심은 뭐냐? 마가는 부잣집 도련님이었고 금수저였어요. 그런데 바울의 바울과 바나바의 바나바는 자기 삼촌인데,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제1차 전도 여행을 할 때, 이 금수저 도련님이 풍찬노숙(風餐露宿-객지에서 겪는 모진 고생)을 하고 고생하고, 그 당시에 무슨 자동차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걸어 다니면서, 온갖 어려움, 잠이나 제대로 잤겠어요 먹는 걸 제대로 먹었겠어요. 그러니까 바울과 바나바는 아예 각오(覺悟)했으니까 감당해야 되는데, 이 부잣집 도련님은 그걸 따라다니기 힘든 거에요. 그래서 탈락(脫落), 그런데 또 이제 정신 차려 갖고 다시 좀 해보려고 하니까 바울이 안 된다. 저리 어리 버리해 데려갔다가는 안 된다. 그래서 사도행전 15장 39절에 보면,
 
*사도행전 15장 39절,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삼촌인 바나바는 자기 조카니까 그래도 어째어째 해가지고 데리고 가려고 그러는데 바울은 둘이서 그냥 한바탕 하는데, 사도행전 15장 39절에 보니까, 이 문제로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섰어요. 그러니까 바울이란 영적 거장, 바나바라는 대단한 거장, 이 두 사람 사이를 갈라지게 만든 원인이 누구냐면 마가에요. 마가,,, 그런데 이것도 은혜로 받으니까, 나중에는 갈라져 가지고 한 것이 또 더 각자 사역에 더 귀한 열매를 맺으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나중에 이걸 마가가 깨닫고, 자기가 회복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더 무장(武裝)되어 가지고 끝까지 잘 감당해 가지고,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마가가 Finishing Well 한 결과가 뭐냐? 그것이 뭐냐 하면, 마가복음이에요. 우리 케논 성경, 우리 성경 신학과 그다음에 우리 보수 정통 신학의 Key 중에 하나가 마가복음에 대한 우리의 시각이에요.
 
만약에 마가복음이 없었으면, 마가복음에 이 복음서가 확고하지 않았으면 아마 우리 신학이 좀 흔들 흔들할 정도로 그런 뭐가 있는 거예요. 마가는 다시 회복해 가지고 피니시 웰을 해가지고 마가복음을 쓰고, 그다음 마가복음을 보면 제일 많이 나타나는 것이, 즉시, 바로, 이미디어트리(immediately), 옛날에는 비리비리 해 가지고, 중간에 이렇게 약화해서 중간에 그만두기도 하고 그랬는데 자기는 이제 아니라고 끝까지 자기는 뭐든지 주님 말씀하시면 즉시 하니라.
 
그래서 이번 기수 여러분들 다 즉시 은혜 받아가지고 끝까지 잘 써서, 내가 보고만 쓰지 말고, 여러분이 쓰신 여러분들의 은혜 받은, 정말 간절과 이런 것들 진짜 21세기에 복음의 증인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누가, 누가는 시종일관(始終一貫)하는 사람 사람과 끝까지, 한결같이, 11절에 보니까,
*디모데후서 4:11,
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누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잘 감당했습니다. 한결같은 사람이었어요. 여러분, 누가는 직업이 의사입니다. 의사들은 보면요. 정치(精緻)함이 있어야 돼요. 정교(精巧)하고 치밀(緻密)해야 돼요. 의사가 적당히 치밀한 게 없어가지고 적당히 수술하고 그러다가, 갑자기 말이야 위 수술하는데 위아래다가 가위 그냥 갖다 넣어놓고 말이에요. 이걸 해야지 저걸 자르고 막 이러면 되겠습니까??? 얼마나 학사가 치밀해야 합니까?
 
오늘도 제가 좀 아침에 잠깐 병원을 갔다 왔는데 야,,, 의사 정말 의사들 실력 좋아요. 주사를 놓는데 아플 겁니다. 그러는데도 별로 안 아파요. 실력이 좋아요. 그런데 또 어떤 의사 이 안에 뭘 넣느냐, 과연 얼마나 아픈지 근데 그게 다 뜻이 있는 거예요. 의사들은 갖고 있는 본인이 갖고 있는 직업에 대한 확실한 걸 갖고 있잖아요. 아주 정교하고 치밀해요. 근데 정교하고 치밀한 분들이 약점이 뭐냐 하면, 큰 그림을 가지고 전체를 보는 능력이 약한 거예요. 소위 하나님 나라의 역사의 흐름, 역사의 상선과 하선에 대한 어떤 시각(視覺), 이걸 잘 못하는데, 닥터 루이 의사인 누가가 히스토리아였어요 의사는 역사학자에요. 누가는 역사학자, 그래서 사도행전이라는 신약의 역사행전을 쓰는 거예요.
 
여러분, 사도행전은 누가 썼죠? 제가 아버지 얘기하지만 사도행전을 바울이 썼다고 하면 저는 돌아가시고 싶어요. 제자반 식구들은 그렇게 하면 안 되죠. 자, 사도행전은 누가 썼어요? 누가가 썼어요. 사도행전은 역사행전이에요. 사도행전은 시각이 얼마나 하나님 나라 전체에 대한 시각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걸 다 읽고 나면 사도행전 28장이 끝나지만, 사도행전 29장은 내가 서명받아서 내가 써야 되겠다. 이런 마음을 갖게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정치함과 큰 역사적, 긍정적 시각을 같이 가는 거에요. 이번 기수들은 의사처럼, 의사 누가처럼, 처음과 끝이 동일해야 됩니다. 치밀함, 전체를 보는 통전 적 시각, 거룩한 마이크로, 마이크로의 한 시각, 거룩한 매크로 한 시각, 이 두 가지를 잘게 가져서 끝까지, 피니시 웰 할 수 있도록 은혜 위에 은혜를 덧입혀 주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오늘 바울은 믿음의 선각자로서, 그의 양육과 그의 헌신과 그의 돌봄을 통하여 누가를 남겨 가지고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하게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누가가 쓴 성경의 분량이, 자기 스승 바울이 쓴 분량보다 많습니다. 이걸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고,,, 영적인 청출어람, 사랑의 교회는 기수가 더할수록 그 전 기수보다도 그 다음 기수(旗手)가 더 낫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제자만 사역반도 그러고, 5기가 4기보다 더 나을 줄로 믿습니다. 아니 다시 조금 더 크게, SaGA가? 5기가 4기보다 더 나을 줄 믿습니다. 4기는 또 시험 들지 말고, 왜냐하면 가면 갈수록 더 낫다는 개념에서, 그래서 또 나아가 그렇게 해서 영적인 바톤 터치가 잘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데마와 마가와 이 약점들을 다 데마와 마가가 그 약점들을 극복하고, 끝까지 속 사람이 강건하여 주님이 주신 사랑과 비전에 대해서 확고하게 되어 왔고,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 멋지게 쓰임 받음으로 말미암아 이번 기수, 명문 기수가 될 수 있도록 하나님 축복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온맘과 정성 다해 예수님의 신실한 제자되기 원합니다.!~♪~~
 
♣요약
주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를 사랑의 교회에 주실 것을 믿고, 역사상 이런 사역이 쉽지 않고, 이런 제자 훈련이 쉽지 않고, 이런 놀라운 그레이지 스쿨, 전례가 없는 은혜를 주신 주님을 찬양해야 한다. 이 일을 위하여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그림자 헌신, 물 떠온 헌신을 하는 주의 종들이 되어야 한다. 이번 기수도 이 시대 앞에 하나님 앞에 놀랍게 쓰임 받아야 한다. 이 시대의 물맷돌, 이 시대에 주님의 등을 태워가는 거룩한 당나귀의 역할을 해야 한다. 또한 이 시대에 누가와 바울의 역할을 잘 감당하여, 시대적 소명을 감당하고 은혜의 바톤 터치를 하는 귀한 훈련으로 주의 사람들 되어야 한다. 살다 보면 수많은 어려움도 있고, 수많은 마음의 아픔도 있을 수 있지만, 우리가 이런 말씀을 통하여 은혜받고, 삶의 수많은 과정들을 통하여 웬만한 파도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 은혜의 함대, 은혜의 신앙의 배를 띄우고, 항해할 수 있는 귀한 남녀 종들로 성숙해져야 한다. 모든 우리 훈련하는 목회자들 함께, SaGA의 모든 교수진들 함께하여 다 합력하여 끝까지 ‘Finishing Well’ 하는 평생 사역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평신도 훈련 개강 및 사랑 글로벌 아카데미 입학 감사 예배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드리자.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이 인생의 의미와 활력을 결정한다. 데마, 마가, 누가의 삶을 비교하며 신앙의 길을 조명하며, 데마는 처음에는 헌신적이었지만 세상을 사랑하여 떠났고, 이는 속사람이 약하고 비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반면 마가는 초기에 실패했으나 다시 회복되어 마가복음을 기록하는 영광을 얻었다. 누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바울과 함께하며 신실하게 사역한 인물로, 그의 흔들림 없는 헌신을 본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랑의 교회는 다락방, 제자훈련, 사역훈련, 순장반, 사랑 글로벌 아카데미(SaGA)를 통해 신앙을 훈련하고 성숙을 이루도록 돕기에, 신앙 여정에서 어려움과 시험이 있어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것(Finishing Well)이 중요하다. 한결 같이 주님 앞에서 올바르게 서기를 원한다.












728x90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5년 2월 19)
제목: “하나님께서 돌보십니다”
말씀: 창세기 50:22-26
찬양인도: 쉐키나(이동선 부목사님)
사회: 강건우 부목사님

설교자: 백요셉 부목사님
----

*창세기 50:22-26,
22 요셉이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주하여 백십 세를 살며.
23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
24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26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

제가 요즘 감사해하는 물건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체중계입니다. 저희 집에 건강을 위해서 다이어트를 하시는 한 분이 계시는데요. 제가 집에 일찍 들어가서 저녁을 먹을 때면 분명히 다이어트를 하시는 거는 같은데, 놀랍고 광대하게 식사를 하시는 그분을 보면서 깜짝 놀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근데 중요한 것은 이런 일이 계속 되풀이된다는 겁니다. 우리 자매님들 우리 여성 성도님들은 잘 아시겠지만, 그렇게 드시면서 하시는 얘기가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먹으면 살찌는데,,, 라면서 계속 식사를 하십니다. 근데 저희 가정에 모세가 홍해를 가르는 것과 같은 역사가 그 다음 날에 일어납니다.

그 역사는 어떻게 일어나냐면 그분께서 체중계에 올라가시고 난 뒤에 이렇게 고백하십니다. 살이 전혀 찌지 않았다. 가끔은 이전보다 더 빠졌다라고 이야기하시는 겁니다. 그럴 때 보면서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역시 디지털은 믿지 못하는구나, 체중계를 바꿔야 되나라는 생각도 많이 하면서 북한이 해킹을 했나 우리 체중계를 라는 생각도 가끔 하게 됩니다. 여러분 근데 그 체중계의 숫자를 보면서 안심하고 그 숫자 그대로 믿는 그분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한번 해보았습니다. 아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이렇게 무게를 들고 흔들림 없이 살았으면 참 좋겠다.

세상이 무엇이라 얘기하든 간에 정말 하나님의 말씀만을 가지고 우리가 이렇게 살아갔으면 흔들림 없이 오직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따라가며 살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들의 힘과 소망이요. 우리들의 유일한 우리들의 길잡이가 되심을 믿으시길 소원합니다. 여러분 창세기는 50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중에 요셉의 이야기는 37장부터 마지막 50장까지 14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중에는 참 많은 에피소드 이야기들이 나오게 됩니다. 근데 오늘은 그중에 2가지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신실하게 요셉을 지키신 것처럼 우리의 삶을 지키시는지를 한번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는, 유다의 이야기를 한번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창세기 37장 요셉의 이야기는 야곱이 요셉에게만 채색 옷을 입히면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요셉이 두 가지 꿈을 꿉니다. 벼 단, 요셉의 벼 단은 형제들, 벼 단이 절하는 것이 첫 번째 꿈이었고, 두 번째 꿈은 해와 달과 열 한별이 요셉에게 절하는 꿈을 꾸게 됩니다. 형제들은 이 꿈을 듣고 요셉을 시기(猜忌), 질투(嫉妬)하며 죽이려고 하죠. 그때 아버지가 요셉에게 형들을 한번 살펴보고 오너라.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때 요셉이 형들을 보러 도단에 갔을 때 형들이 요셉을 발견한 뒤에 요셉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 때 첫째인 루우벤이 형제들을 말리려 하지만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형들이 일을 꾸미게 되죠. 그중에서 창세기 37장 26절 28절에 보면,

*창세기 37장 26-28절,
26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할까.
27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그에게 우리 손을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니라 하매 그의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
28 그 때에 미디안 사람 상인들이 지나가고 있는지라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은 이십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인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라고 유다가 고백합니다. 여러분 얼핏 듣기에는 굉장히 좋은 이야기 같습니다. 근데 하지만 유다는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있냐면 형들을 선동하고 설득하고 있는 겁니다. 야, 우리의 손에 피 묻히지 말고 팔아버리자. 우리가 괜히 수고하지 말고 그냥 팔아버려서 요셉을 치워버리자. 라고 선동하고 있는 겁니다. 어쩌면 요셉은 이 유다의 선동 때문에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려 갔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이렇게 팔려간 내용이 37장의 내용이고, 여러분 37장 그리고 38장, 39장이 있는데, 여러분 37장은 방금 내용이고, 39장은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내용인데, 38장이 조금은 불편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러분 38장은 유다가 자기 며느리와 부적절한 관계가 관계를 만드는 그런 내용이 일어나는데 여러분 이 이야기를 통해서 저는 유다를 한번 조금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38장에 이렇게 시작합니다. 38장 1절에서 2절입니다.

*창세기 38장 1-2절,
1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2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
-여러분 그 후, 라고 설명됐는데 그 후는 언제입니까? 요셉이 팔려 간 뒤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근데 그때 유다가 아둘람 사람 히라와 친하게 지냈다. 라고 얘기합니다. 아둘람 사람 이방인과 함께 친하게 지냈다.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죠. 그리고 가나안 사람과 결혼했다. 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근데 여러분 창세기 24장, 28장을 보면 여러분 아브라함이 이삭에게도 그렇고 이삭도 야곱에게도 그렇고 가나안 사람과 결혼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면, 혈통이 섞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 다른 이방인들과 결혼하지 말라고 했지만, 유다는 지금 누구와 결혼했습니까? 가나안 사람과 결혼했다. 라는 겁니다.

여러분 그리고 나서 유다가 가나안 사람을 통해서 3명의 자녀를 낳는데, 엘 오난 셀라라는 3명의 자녀를 낳습니다. 여러분 첫째, 아들 엘은 다말이라는 여인과 결혼을 하게 되죠. 근데 창세기 38장 7절에 보면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창세기 38장 7절,
7 첫째, 아들이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여 애를 하나님께서 치셨다.
-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당시에는 수 대 계승을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한 가정을 이루었는데 만약에 그 가정에 자녀가 없이 남편이 죽었으면, 그 아래 형제들과 아래 형제에게 그 아내가 결혼을 하여 대를 이으는 수대 계승을 했다라는 겁니다. 근데 이 두 번째 아들이 수대에 계승을 하기를 거부합니다. 38장 10절에,

*창세기 38장 10절,
10 그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그래서 하나님 보기에 악하여서 둘째, 아들도 치십니다. 근데 셋째, 아들이 장성할 때까지 기다리지만 유다가 셋째, 아들을 다말에게 주지 않습니다. 아마 첫째 아들, 둘째 아들이 죽는 것을 보면서 조금 이상하게 여겨서 그가 셋째 아들이 장성했는데도 불구하고, 다말에게 주지 않았던 거 같습니다. 여러분 이런 가정 계속 아들이 죽어나는 이 가정의 상황 가운데 조금 더 어려운 상황이 생기는데 유다의 아내가 죽게 됩니다. 여러분 이 아내가 죽게 된 슬픔을 유다는 어떻게 해소했냐면 세속적인 방법으로, 여러분 38장에 보면 양털을 깎는 시기나 양털을 깎는 자에게 갖더라. 라는 표현이 있는데, 양털을 깎았다. 라는 것은 1년에 한 번 잔칫날 축제의 날입니다.

즉 유다가 자기 아내의 죽음을 여러분 세속적인 방법으로 풀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때 유다가 자기 며느리 다말을 보면서 몸을 파는 자로 생각하고 하룻밤을 지내려고 합니다. 여러분, 그때 유다가 약속을 합니다. 내가 염소 새끼 한 마리를 줄 테니 하룻밤을 지내자 근데 다말이 그렇게 고백합니다. 아 그거 말고 그것을 줄 때까지 나에게 담보물을 주라. 당신이 갖고 있는 도장 끈 지팡이를 나한테 지금 달라.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유다가 그것을 담보물로 주고 하룻밤을 보내게 됩니다. 여러분 그 다음날 유다가 자신의 담보물을 찾으려고 염소 새끼를 친구 희라의 편에서 그곳에 다시 찾아오라고 얘기하지만 그곳 사람들이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그곳에는 몸을 파는 사람이 없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소식을 듣고 다시 돌아온 히라에게 그 얘기를 듣고 나서 조금 다시 찾거나 어떤 상황을 만들어서 회복했으면 좋겠는데, 여러분 그 상황을 모면하려고 그냥 없었던 일처럼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여러분, 세 달이 지난 후 유다에게 다말이 자기 며느리가 임신했다. 라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유다는 이 다말을 불사 지르려고 다말에게 갔지만 다말이 유다에게 유다가 자신의 담보물로 맡겼던 도장 끝 지팡이를 보여주면서 자신의 자녀임을 깨닫고 쌍둥이 자녀를 낳게 되는 것이 창세기 38장의 내용입니다.

여러분, 그리고 39장엔 다시 요셉의 이야기로 아까 나온다고 얘기했죠. 어떤 내용입니까? 여러분, 요셉이 보디발 장군의 집에 팔려가서 가정에 총무가 되고 그곳에서 아내와 보디발 장군의 아내와 에피소드가 있은 후에 왕의 죄수를 가둔 감옥에 다시 갇히게 됩니다.


여러분 40장은 어떤 이야기가 납니까? 40장에는 다시 보디발 장군의 감옥에서 왕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 장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이 꿈을 꾸는데 요셉이 그들의 꿈을 해석하죠. 떡 맡은 관원장은 바로 죽게 될 것이고. 술 맡은 관원장은 다시 복귀할 텐데 복귀하면 자신을 기억해 달라 라고 이야기하지만, 여러분 요셉은 2년 동안 잊혀 지고 맙니다. 그리고 나서 41장에 보면 애굽의 왕 바로가 두 가지 꿈을 꾸게 됩니다. 여러분,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지만, 두 가지 꿈 살찐 염소를 마른 염소가 잡아먹게 되죠. 몇 마리였습니까? 7마리, 7마리씩입니다. 여러분 그리고 어 좋은 이삭 일곱 개를 마른 이삭 일곱이 잡아먹는 꿈을 꾸게 됩니다.

여러분, 이 꿈을 해석하려고 온 땅을 뒤졌지만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죠. 그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요셉이 어 에고 왕 바로의 꿈을 해석하게 되죠. 앞으로 7년에 풍년이 있은 후에 7년의 흉년이 있을 텐데, 왕은 그것을 대비하라고 말합니다. 이 얘기를 들은 왕은 하나님께서 알려주셨으니 당신이 애굽의 총리가 되라고 이야기하고 애굽의 총리가 된 모습이 41장의 내용입니다. 여러분, 여기까지의 요셉 이야기가 있은 후에 42장과 44장에 요셉은 다시 형들을 만나게 되는 장면이 이루어지는데요.

여러분, 요셉이 형들과 헤어지고 나서 다시 만날 때까지 여러분 21년 또는 22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요셉의 나이는 38세에서 39세 정도의 나이가 됐는데, 여러분 성경에 이 숫자가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잠깐 정리를 해드리려고 이 숫자가 이만큼 걸렸다는 숫자가 좀 중요해 갖고 같이 나누려고 하는데 37장에 보면은 요셉이 17세가 되는 때에 꿈을 꾸고 이런 일이 벌어졌다. 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요셉이 30세가 되는 때에 애굽의 총리가 됐죠. 그러니까 30 빼기 17은 13입니다. 그 다음에 여러분 7년에 풍년이 있은 이후에 그다음에 1년 또는 2년 때쯤에 아마 흉년이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7을 더하고 아마 1 또는 2를 더하면은 아마 21 또는 22가 되겠죠.

그래서 21 또는 22의 시간이 지난 이후에 요셉이 형들을 만나게 되었다. 라는 겁니다. 여러분 어 42장에서 형들을 만났을 때를 여러분 기억 하십니까? 여러분 아마 흉년이 시작될 때, 애굽을 제외하고 모든 지면에 굉장히 식량을 구하기 어려울 그때에, 여러분 야곱이 형들에게 베냐민을 제외하고 식량을 구하러 애굽에 가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형들은 요셉 앞에 나아가게 되어 있는데, 여러분 요셉은 형들을 알아보지만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다. 라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식량을 주고 여러분 다시 보내는데 그런 얘기를 하죠.

다시 올 때, 베냐민이 없다면 다시 올 생각 식량을 구할 생각을 하지 말라 라고 돌려보냅니다. 여러분 43장에, 43장에 보면은 형들이 식량을 가지고 다시 갔는데도 불구하고, 43장의 시작은 기근이 더 심해졌더라. 라는 표현을 통해서 다시 요셉 앞에 갈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하나님께서 만드십니다. 야곱은 형들에게 식량을 다시 가져오라. 라고 이야기하지만 형들은 그렇게 아버지한테 얘기하죠. 요셉이 베냐민이 없으면 다시 오지 못하게 했으니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 된다. 라고 얘기하지만 야곱은 형들에게 너희가 내가 사랑했던 아들 요셉을 죽게 했는데 또 사랑하는 아들 베냐민도 이렇게 하느냐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나서 오히려 형들에게 왜 베냐민이 있다. 라는 이야기를 해서 이런 상황을 만들었냐, 라고 나무라게 됩니다. 여러분 그때 유다가 이런 고백을 합니다. 43장 9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창세기 43:9,
9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야곱에게 유다가 내가 베냐민 대신 담보가 될 테니 보내 달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 이야기 끝에 형들은 베냐민을 데리고 요셉에게 나아갑니다. 또 요셉은 이런 형제들을 보고 다시 식량을 가지고 보내려고 했는데 여러분 두 번째 만남 때에 어떤 에피소드가 있는지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여러분 베냐민의 자루에 은잔을 숨기게 됩니다. 여러분 아마 요셉은 변화된 형들의 모습이 진짜였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은잔을 숨겼던 것 같습니다. 그때 형들이 은잔을 훔쳤다. 라고 얘기했을 때 우리는 그런 사람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모시는 사람인데 우리는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 만약에 우리 자루에서 은잔이 발견되면 그 사람이 죽을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때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발견되죠. 여러분, 그때 다시 형들 베냐민 다 요셉 앞에 나와서 죽음 베냐민이 죽게 되는 위험에 처했을 때, 유다가 다시 한번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창세기 44장 30절에서 32절입니다.

*창세기 44:30-32,
30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31 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 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32 주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짐을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라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이 고백을 하는 유다는 어쩌면 20년 전에 요셉과 함께 지냈던 그 상황과 동일한 상황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무슨 말이냐면은 여러분 아버지 야곱이 정말 요셉을 편애(偏愛)하고 요셉만 사랑했던 그런 모습을 보며 유다는 질투(嫉妬)하고 여러 번 시기하면서 오히려 요셉을 죽이려 했고 팔아버렸습니다. 하지만 이런 동일한 상황 20년 이후에 아버지가 베냐만 사랑하는 이 동일한 상황에서 유다는 지금 오히려 요셉 대신 베냐민을 보면서 내가 그를 대신해서 목숨으로 바꾸겠다. 내가 담보가 되겠다라고 고백하고 있다.라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 20여 년 동안에 요셉만 신실하게 붙으시고 인도하신 것이 아니라 요셉의 형들도 만지시고 빚으셨다. 라는 겁니다.

여러분 20년 전에 사랑받는 요셉을 보며 시기 질투하고, 여러분 38장에 여러분 기억하시겠지만, 여러분 세상에서 허랑당탕하게 살며 자신의 욕정과 욕망을 마음껏 풀었던 유다가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여러분 그런 모습으로 변화되어 지금은 베냐민 대신 자신의 목숨을 담보하는 여러분 삶으로 그런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라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유다를 변화시킨 그 하나님의 손길이 지금 저와 여러분들도 변화시키고 계심을 믿으시길 소원합니다. 여러분 가끔 그런 사람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아 주님이 다시 오셔도 저 사람 변화되지 않을 거야.

라는 사람 있지 않으십니까 여러분 근데 여러분 그런 가족, 여러분 그런 친구 직장 동료 여러분 그런 사람들에게도 여러분 포기하지 말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여러분 기도하시길 소원합니다. 유다를 변화시키신 그 하나님께서 여러분 반드시 그 사람도 변화시켜 주실 것을 믿으시길 소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의 손으로 여러분 못하실 것이 없으십니다. 여러분 변화의 능력이자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의 이름을 축원합니다. 여러분, 두 번째 이야기는 여러분 요셉의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오늘 같이 읽었던 본문 창세기 50장에서는 요셉의 마지막을 설명하면서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할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버지 야곱이 죽자 형들은 요셉을 두려워하고 떨게 됩니다. 그러면서 요셉에게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아버지가 죽으시기 전에 우리들을 용서해 주라고 이야기했다. 라고 고백하는데 창세기 50장 15절에서 18절을 우리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

*창세기 50:15-18,
15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16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18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여러분, 이렇게 형들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 요셉이 혹시 그 권력과 그 위치로 자신들이 해 할까, 이런 고백을 합니다. 이럴 때 요셉이 형들에게 대답하는데 아마 성경 구절 중 굉장히 유명한 구절이죠. 여러분 창세기 50장 19절에서 21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창세기 50:19-20,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여러분 요셉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쉽게 얘기하면 요셉 자신이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라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방법대로 인도하셨는데 자신이 뭐라고 하나님께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다. 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왠지 아십니까? 우리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를 가장 최선의 방법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희 모두가 어렵고 힘들고 곤란하고 원치 않는 상황에 놓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 저희 모두가 이 요셉의 고백, 우리가 하나님을 어찌 대신하리까, 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대신하리까, 라는 고백이 굉장히 유명해서 그렇지 요셉이 마지막에 한 저희가 함께 읽었던 오늘의 본분이 실질적으로 요셉의 마지막 유언입니다. 이야기 이를 통해서 마무리하길 원하는데요. 창세기 50장 22절 26절을 저희가 한 번만 더 읽길 원합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창세기 50:22-26,
22 요셉이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주하여 백십 세를 살며.
23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
24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26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여러분 하나님께서 돌보십니다가 요셉의 마지막 유언입니다. 이게 별거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이게 별거 아닌 이야기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돌보십니다. 근데 요셉에게는 엄청난 고백이었습니다.

여러분, 요셉이 30세에 총리가 되고 여러분 죽을 110세에 죽었다고 얘기하니까, 80년 동안 총리를 한 겁니다. 여러분 세계에서 최 강대국의 실제적인 권력자로 80년을 살았으니 얼마나 그 영향력이 대단했겠습니까? 여러분 요셉의 영향력이 어떠했는가를 잘 나타나는 구절이 창세기 50장 초반부에 나타나는데 요셉의 아버지 야곱이 죽을 때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제가 대신 읽겠습니다. 50장 1절에서 3절입니다.

*창세기 50:1-3,
1 요셉이 그의 아버지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고.
2 그 수종 드는 의원에게 명하여 아버지의 몸을 향으로 처리하게 하매 의원이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하되.
3 사십 일이 걸렸으니 향으로 처리하는 데는 이 날수가 걸림이며 애굽 사람들은 칠십 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
-여러분 요셉이 죽은 게 아니라, 요셉의 아버지 야곱이 죽었는데, 여러분 며칠 동안 애곱 사람들이 곡했다고 이야기합니까? 여러분 70일, 7일이 아니고, 여러분 70일 동안 애곡(哀哭)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 창세기 50장 6절에서 9절에 보면은 그 영향력을 더 실감하게 이야기하는데요. 이렇게 고백합니다.

*창세기 50:6-9,
6 바로가 이르되 그가 네게 시킨 맹세대로 올라가서 네 아버지를 장사하라.
7 요셉이 자기 아버지를 장사하러 올라가니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원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원로와.
8 요셉의 온 집과 그의 형제들과 그의 아버지의 집이 그와 함께 올라가고 그들의 어린 아이들과 양 떼와 소 떼만 고센 땅에 남겼으며.
9 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가니 그 떼가 심히 컸더라.
-여러분 바로에게 요셉이 이야기하는 겁니다. 아빠 나의 아버지를 장사하게 해주세요. 제가 내려가겠습니다. 했더니, 바로가 승낙하면서 했던 장면이 설명하고 있는데요. 여러분 바로의 모든 신하들, 바로 궁의 원로들, 애굽의 원로들이 요셉을 따라갔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물결이 병과 기병이 심히 많았다. 라고 이야기하니 여러분 요셉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했겠습니까? 여러분 근데 이렇게 영향력(影響力)이 많았던 요셉의 마지막이 뭐라고 고백했다는 겁니까? 하나님께서 돌보십니다. 여러분 제가 대신 50장 24절에서 25절을 읽겠습니다.

*창세기 50:24-25,
24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여러분 제가 만약에 이 요셉의 환경에 있었다라면 만약에 제 영향력으로 일했다라면, 만약에 제 마지막 제 삶의 끝에 제 자녀를 불러서 저는 이렇게 고백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제 자녀에게 ‘야, 너 할아버지 죽을 때 봤지? 내 영향력으로 너는 평생 내가 죽더라도 너의 재산, 너의 위치, 환경 여러분 너는 걱정 없을 거야.’ 라고 고백했을 텐데 요셉은 그 마지막을 그렇게 고백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돌보실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왜 그럽니까? 요셉이 110세까지 살아보니 자신의 삶을 이끌었던 것은 재물도 아니고 권력도 아니고 여러분, 그 어떠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셨다. 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돌아보니 하나님께서 신실하셨고 돌아보니, 나의 하나님께서 참 너무나도 신실하게 나의 삶을 지키시고 보호해주시고 이끌었다. 라고 요셉은 간증(看證)하고 있다. 라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의 마지막 고백이 이 요셉의 고백이 되길 원합니다.

돌아봤더니, 정말 우리 하나님 신실하셨다. 돌아봤더니, 우리 하나님 진짜 살아계셨다. 돌아봤더니, 우리 하나님이 돌보셨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 가운데 참 많은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여러분 어떠한 환경 가운데 여러분들이 놓이셨는지 저는 다 알지 못하지만 여러분 이 요셉의 고백이 위로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그 어떠한 상황 가운데 놓이더라도 하나님께서 돌보실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심을 여러분 기억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요약
시기와 질투 끝, 후회스러운 처지에 이르지 않도록 유다의 인생을 붙들고 다듬으셨던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에게도 넉넉히 베풀어 주시길 간구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닮은 예수 성품으로 온전히 변화되어, 상황이나 환경이 두텁게 쌓아 올린 안목의 비늘을 성령 하나님의 강권적인 인도하심으로 벗겨지기를 확신하며, 나를 축복의 통로로 삼으시려는 주의 뜻과 계획, 거룩한 비전을 성취하는 평생이 되길 소망하자.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는 것은 신자의 책임이 아니라, 특권(特權)이라던 요셉의 마지막 고백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信賴)하며 그 신실 하심을 찬양하는 불이 생의 마지막까지 꺼지지 않기를 간절히 사모하자.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