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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12월 18일) 제목: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는 삶" 말씀: 예레미야 12:1-6 찬양인도: 쉐키나(이동선 부목사님) 사회, 기도인도: 강건우 부목사님 설교자: 김주혁 부목사님 ---- * 예레미야 12:1-6, 1 여호와여 내가 주와 쟁변할 때에는 주는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패역한 자가 다 안락함은 무슨 연고니이까. 2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 마음은 머니이다. 4 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이 땅 거민이 악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결국을 보지 못하리라 함이니이다. 5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하겠느냐. 6 네 형제와 아비의 집이라도 너를 속이며 네 뒤에서 크게 외치나니 그들이 네게 좋은 말을 할찌라도 너는 믿지 말찌니라. ---- ▶기도회 자리를 사모하며 수요 저녁 기도회에 참여하신 모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수요 저녁 기도회를 통해 말씀과 기도로 우리를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2장 1절에서 6절까지 말씀입니다. 주신 말씀 저와 함께 교독하시겠습니다. 제가 먼저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혹시 달리기 경주를 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학창 시절 운동회를 하면 마지막 경기로 계주를 했습니다. 달리기 대표 선수들은 있는 힘껏 승리를 향해 달렸고 다른 학생들은 선수들을 위해서 응원의 함성을 질렀습니다. 혹여나 우리 팀이 먼저 결승전에 도착하면 너무나 짜릿한 승리의 기쁨을 누리곤 했었습니다. 아마 여기 계신 분들 중에는 왕년에 달리기 선수를 하셨던 분들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번 생각을 해볼까요? 달리기 경주를 하는데 사람과 경주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말과 경주를 한다면, 어떨까요? 말은 인간과 비교도 할 수 없이 달리기 속도가 굉장히 빠릅니다. 이런 황당한 경주에 참여하게 된다면 처음부터 불가능하다고 생각을 할 것이고, 또 경주에 대한 두려움이 임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예레미야 12장은 이러한 상황에 떨어진 예레미야의 심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아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은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예레미야를 거부했고, 심지어 가장 가까운 사람들조차도 예레미야를 배신했습니다. 예레미야의 고향은 아나돗인데요. 아나돗은 벤야민 지파 땅입니다. 베냐민 지파 땅에 제사장 가문에서 예레미야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아나도 사람들이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예레미야 11장 21절에, *예레미야 11:21, 21 여호와께서 아나돗 사람들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네 생명을 취하려고 찾아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 하도다. -예레미야 당신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마세요. 당신이 예언한다면, 우리 손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했지만, 그가 마주한 상황은 어려운 고난과 백성들의 거부였습니다. 이에 예레미야는 오늘 본문 1절에서, 이렇게 하나님께 질문하는 것이죠. *예레미야 12:1, 1 여호와여 내가 주와 쟁변할 때에는 주는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패역한 자가 다 안락함은 무슨 연고니이까. -하나님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왜 평안합니까? 이 자리에 모인 우리 역시도 예레미야와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믿음의 경주를 달리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한 번 사는 인생, 주님이 주신 그 사명을 멋지게 감당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우리 삶에 일어나는 일들에 관해서 예레미야의 질문과 같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 드는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는 삶을 어떻게 살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믿음의 경주에서의 승리는 무엇일까요? 첫 번째로,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는 삶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끝까지 순명하는 것입니다. I.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끝까지 순명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당시에 다른 거짓 선지자들은 백성들을 향해 축복의 메세지를 전했습니다. 아무리 죄를 짓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선택된 민족은 평강하다 평강하다 외쳤습니다. 또 여호와의 성전이 우리에게 있기에 결코 유다는 멸망하지 않는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자기 민족에게 심판을 전했고 또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주신 사명은 사람들에게 환영받을 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조롱했고 반대했으며 그의 메세지를 무시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이렇게 질문한 거예요. 하나님, 악한 자가 왜 형통한 것입니까? 반역한 자가 왜 평안한 것입니까? 그런데 신기하게도 하나님께서 주신 답변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5절에 보니까요? *예레미야 12:5, 5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하겠느냐. -예레미야는 현 상황을 보며 하나님께 질문했지만, 하나님은 무엇을 보며 말씀하십니까? 미래를 보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앞으로 일어날 역사를 바라보며 예레미야에게 일러주셨습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끝이 아니라, 그 정도의 일에서 끝이 아니라 앞으로 더 큰 일이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 그 자리에서 훈련받고 있는 것은 아나도 고향 사람들 정도에게만 역사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금과 차원이 다른 더 높고 더 넓은 사명을 너에게 주기 위함이다. 라고 일러주신 것이죠. 그렇다면 믿음의 경주에서의 승리는 단순히 현재의 경쟁에서 앞서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악한 자 반역한 자들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을 믿음의 승리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세상과 다를 바 없는 반쪽짜리 승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것처럼, 믿음의 경주에서의 승리는 현재를 바라볼 뿐 아니라 미래를 바라보고 끝까지 주신 사명을 순명(順命)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3장 14절에 이렇게 고백하죠. *빌립보서 3:14,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우리의 믿음의 경주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떤 유혹이 온다 할지라도 어떤 풍파가 불어온다 할지라도, 그것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사명을 지켜 나가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맞춰지는 그날까지 그 푯대를 향하여 우리는 끊임없이 달려가야 합니다. 믿음의 경주의 시작과 과정도 참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끝까지 완주(完走)하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6절과 7절에 보면, *디모데후서 4:6-7. 6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것이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한 삶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명은 무엇일까요? 아마 각자마다 다 다를 것입니다. 개인의 사명, 부모로서의 사명, 남편으로서의 사명, 또 아내로서의 사명 직장인으로서 교회와 사회 속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믿음의 사명이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내가 원하지 않았지만 지금 나를 이 자리로 몰아가시는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의 경주에서 우리가 승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끝까지 버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완주입니다. 우리의 승리 조건 또한 완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뛰어난 자들이 아니잖아요? 능력이 출중(出衆)한 자들도 아니고요. 그저 연약(軟弱)하고 부족(不足)한 자들입니다. 작디작은 내 자신을 인정하고 앞으로 다가올 믿음의 그 경주(競走)에서 어떤 상황이 펼쳐진다 할지라도 사명을 끝까지 완주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승리의 면류관(冕旒冠)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완주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붙들 때 믿음의 경주를 완주할 수 있습니다. II.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붙들 때 믿음의 경주를 완주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경주는 내가 달리는 것 같지만 내가 달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달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대로 임지하시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임지하심을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그런 부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주님의 임재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과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절대 권위가 있습니다. 이 땅의 모든 것은 일시적이지만 푸른 마르고 꽃은 시드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믿으시죠? 아멘이 일부분만 나오셔서 꽃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아멘!!~~ 우리는 성경의 절대 권위를 끝까지 유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그분의 말씀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어려운 순간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예레미야 15장 16절, *예레미야 15:16, 16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예레미야는 그렇게 힘든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했습니까? 먹었습니다. 그 먹은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된 거예요. 사랑하는 영 가족 여러분, 혹시 오늘 수요 저녁 기도회에 오시면서 저녁 식사를 하셨습니까? 식사를 할 때 음식이 가장 맛있는 때가 있는데, 혹시 아십니까? 잘 모르시면 제가 알려드릴게요. 음식을 먹을 때 가장 맛있는 때는 배고플 때입니다. 배고프면 어떤 음식이든지 어떤 조미료를 낸 것보다 더 좋은 맛을 주게 되어 있는 것이죠. 예레미야가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배가 고프던지, 배가 부르던지, 내 상황이 고난해 있던지, 부유하게 있던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먹을 때마다 너무나도 행복합니다. 즐겁습니다. 충만합니다. 기쁩니다.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달려갈 때 마지막까지 달려갈 수 있게 만드는 힘이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어디로 달려가야 할지를 알려주는 등불입니다. 시편 119편 105절, *시편 119:105, 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이 말씀이 기록될 때는 전기가 있던 것이 아니죠. 어떤 불빛이 밝게 그 주위를 비췄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녁만 되면 달빛 외에는 의지할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캄캄한 방과 같은, 칠흑 같은 우리 인생에 내 발 바로 앞을 비추는 그 등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빛이 비추는 곳을 보면서 이곳이 어디인지를 분별하고 확인하고 또 방향을 잡고 우리는 달려가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 가운데 있다면 우리는 어떤 풍파가 온다 할지라도, 흔들리지 않고 담대(膽大)하게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완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함께 뛰는 방법은 기도입니다. 예레미야는 지금 상황이 자신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되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내용을 누구에게 가져오나요? 하나님께 가지고 나옵니다. 하나님 왜 악한 자가 형통하고 반역한 자가 평안한 것입니까?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또 예레미야 15장 15절에 보면, *예레미야 15:15,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오니 원컨대 주는 나를 기억하시며 권고하사 나를 박해하는 자에게 보복하시고 주의 오래 참으심을 인하여 나로 멸망치 말게 하옵시며 주를 위하여 내가 치욕 당하는 줄을 아시옵소서. -또 예레미야는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 고발하며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예레미야18장에 20절 보면, *예레미야 18장:19-20, 19 여호와여 나를 돌아 보사 나로 더불어 다투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옵소서. 20 어찌 악으로 선을 갚으리이까마는 그들이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구덩이를 팠나이다 내가 주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이키려 하고 주의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하여 선한 말씀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또한 암울해 보이는 바벨론 포로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과 약속을 믿으면서 반드시 구원해 낼 것임을 확신하며 기도를 올려드렸습니다. 예레미야 32장 17절입니다. *예레미야 32:17, 17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권능과 펴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시나이다. -주에게는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시나이다. 아멘, 이렇게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했고요. 하나님께 기도했구요. 또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구했고, 믿음의 경주를 하나님과 함께 달려 끝까지 완주했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있었고요. 또 말씀과 함께 하셨습니다.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서 광야에서의 시험을 이겨 나가셨죠. 무엇보다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이 이미 주어진 말씀을 완전하게 이루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셨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도 금식하며 기도하셨고 열두 제자를 선택하는 것과 같은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도 철야 기도를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앞둔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명하시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며 힘을 얻으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셨고 믿음의 경주를 자신의 모든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믿음의 경주에서 우리가 지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성경책에 써 있기 때문에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나온 것처럼 또 온라인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고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기까지만 주신 것이 아니라, 보다 효과적이고 더 확실하게 자신의 임재하심을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을 허락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거룩한 공동체는 믿음의 경주자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예레미야의 가장 큰 어려움 중에 하나가 무엇이었냐면 혼자라는 외로움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았지만 백성들은 그의 메시지를 거부했죠. 가까운 고향 가족들마저도 예레미야를 대적했습니다. 이러한 고립은 예레미야를 더 힘들게 만들었고요. 하나님께 질 의문을 던지게 했습니다. 전도사 4장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 있죠. 전도서 4장 9절-12절에, *전도서 4:9-12, 9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10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11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아멘, 믿음의 경주는 혼자가 아니라, 거룩한 공동체와 함께 할 때 더욱더 강력해집니다. 우리는 이것을 매주 확인하고 있죠? 혼자 예배드리고 혼자 기도하는 것, 그것도 참 소중하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안아주심의 본당에 나와서 이렇게 함께 예배하고 함께 기도하면 어떻습니까? 우리에게 다락방에 나와서 서로 기도 제목을 나누고 말씀에 비추어 자기 삶의 방향을 다시금 붙잡고 또 다락방 영가족들과 한마음이 되어서 간절히 기도하면 믿음의 동지가 생기는 거예요. 나 혼자만 세상에서 외로이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 같은데, 그 자리에 나오면 함께 믿음의 경주를 달리고 있는 동역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혼자 달린다면 금세 지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교회라는 거룩한 공동체를 세워주셨고,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이고요. 지체의 각 부분입니다. 한번 이렇게 생각을 해볼까요? 지금 맛있는 달달한 디저트를 먹는다고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달콤한 디저트를 먹으면 기분이 어떨까요? 굉장히 업되겠죠. 그러면 기분이 좋으면 손도 기분이 좋고 다리도 기분이 좋을 거예요. 그런데 어떤 분은 손은 기분이 좋은데 다리가 기분이 안 좋으신 분이 계실까요? 예 그런 분은 조금 이상한 육체를 신체를 가지고 계신 분일 겁니다. 또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겠죠. 이 손가락이 있는데, 이 손가락 끝에 상처가 났어요. 상처를 건들 때마다 너무나도 아픈 거예요. 온몸이 아픕니다. 이 손가락만 아픈 것이 아니라, 다리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온몸이 이곳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성도라는 지체들이 모인 교회라는 몸입니다. 이곳 거룩한 공동체로 나오면 믿음의 경주에서 지치고 의문이 들었던 것들이 다른 지체들과 함께 말씀을 부여잡고 기도하고, 힘을 얻고 다시 뛰어 달릴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또 이뿐만이 아니죠. 우리는 지난 인생 10월에 주님과 함께 달려가며 정말 커다란 힘을 얻었습니다. 하반기 청계산 산삼 구국 기도회부터 시작해서 10월에 금식기도회, 특새, 한교섬, 또 ‘10.27 200만 연합 예배 및 큰 기도회’를 하나님께 올려드렸습니다. 성경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가정과 국가를 사랑하는 한국교회 모두가 모여서 함께 찬양하고 말씀 듣고 기도하니까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믿음의 경주를 포기하려다가도 다시금 힘을 얻어서 달려갈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선한 연대가 우리를 통해 가정과 교회 전 세계로 뻗어나가고 주님의 대사명을 이루기 위한 믿음의 경주가 끝까지 완주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마라톤 선수의 이야기를 하고 말씀을 해주려고 합니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마라톤은 42.195km를 달리는 경기잖아요.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경기이기도 합니다. 당시 올림픽이 열렸던 멕시코 시티는 해발 2천 미터가 넘는 고지대였습니다. 마라톤을 하기에는 굉장히 어려운 여건이었죠. 그래서 당시에 75명이 마라톤을 참가했는데 중도 포기를 18명이나 했다고 합니다. 이때 참가했었던 선수 중에 한 명이 탄자니아의 존 스티븐 와쿠아리라는 선수가 있었는데요. 메달권 진입이 유력했던 선수였습니다. 그런데 아쿠아리 선수가 경기 중에 넘어졌어요. 어깨를 다치고 무릎을 심하게 다쳤습니다. 의료진들은 더 이상 달려서는 안 된다고 진단을 내렸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포기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한 상황이었죠. 그런데 아쿠아리 선수는 무릎에 붕대를 감고 계속 달렸습니다. 더 이상 달릴 수 없는 한계에 이르러서는 다리를 끌다가 또 잠시 뛰다가 또 다리를 끌며 걸어갔습니다. 1등이 결승점을 통과한 지 1시간도 더 지났고, 또 메달 시상식마저도 다 마쳤구요. 관중들도 대부분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저 멀리서 아쿠아리 선수가 경기장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이 모습을 본 소수의 관중들이 기립박수를 치며 함성을 지르며 응원했고, 아쿠아리는 끝까지 42.195km를 완주하였습니다. 이것만 해도 감동적인데 저는 그 뒤에 했던 인터뷰가 더 마음에 와닿더라구요. 기자가 왜 포기하지 않고 계속 달렸느냐 묻자 아쿠아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나라가 저를 7천 마일이나 떨어진 이곳까지 보내준 것은 출발선에 서라는 것이 아니라, 완주를 하고 결승선을 통과하라는 것입니다. 출발선에 서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완주를 하고 결승선을 통과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영가족 여러분, 믿음의 경주를 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예레미야처럼 우리도 때론 고난과 반대에 부딪치고 지치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경주의 승리는 끝까지 사명을 완수하는 것에 있음을 믿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능력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요. 상대방의 실수로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승리하는 것이 속도가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달려주시면 승리가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기도하고, 거룩한 공동체에 나와 함께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놀라운 사명의 성취를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우리 곁에는 우리를 응원하고 함께 기도하는 동역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달려서, 그 결승점에 도착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맞이해 주시면서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불러주실 것입니다. 이 저녁 기도하는 가운데 용기를 내어서 다시금 일어나시구요. 주님과 함께 끝까지 사명을 감당하시는 모든 영 가족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요약 우리가 때로는 불 가운데 휩싸이고 차디찬 폭풍이 휘몰아쳐와도 믿음의 경주자로서 기꺼이 감당할 사명의 마지막 발걸음까지 주 위해 남은 나의 시간들을 조금도 주저함이나 낭비됨이 없어야 한다. 갖은 유혹과 절망에 짓눌려 쇠약해진 기도의 위기를 하나님의 저울 위에 다시 세우사 영원을 약속하신 언약의 말씀과 온갖 수치를 견딘 십자가의 준엄(峻嚴)한 무게를 더하시어 함량(含量) 미달인 이 땅을 새롭게 빚어 주시길 간구하며, 복음만이 세상를 바꾼다는 예수님의 당부를 소망과 기쁨 인내의 도전으로 받아 온 몸으로 반응하는 우리 사랑의 교회의 모든 공동체마다 서로를 붙들어 주는 기도의 저력으로 더욱 맥박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우리를 믿음의 경주로 부르시고 사명을 감당하게 하심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는 부족하여 예레미야처럼 때로는 고난과 거부 앞에서 흔들리지만 우리에게 더 크고 넓은 사명을 주시는 주님의 뜻을 바라보아야 한다.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으켜 주시는 주님의 손길을 의지하여, 믿음의 푯대를 향해 끝까지 달려가, 우리와 함께하기를 원하시는 주님 앞에 우리가 말씀과 기도로 영적 군사로 무장해야 한다. 어둠을 뚫고 나아가는 힘과 담대함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신 공동체를 통해 서로를 붙들고 일으키며 함께 눈물로 기도하고, 함께 승리의 기쁨을 나누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이 땅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과 함께 달려갈 때 우리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노라고 고백하는 그 결승선에서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주님의 칭찬을 받는 자들이 되어야야 한다. 그리하여 사랑의 교회가 전 세계에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이 땅에 복음과 거룩한 사명을 끝까지 이루어 가야 한다. 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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