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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12월 18일)
제목: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는 삶"
말씀: 예레미야 12:1-6
찬양인도: 쉐키나(이동선 부목사님)
사회, 기도인도: 강건우 부목사님


설교자: 김주혁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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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 12:1-6,
1 여호와여 내가 주와 쟁변할 때에는 주는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패역한 자가 다 안락함은 무슨 연고니이까.
2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 마음은 머니이다.
4 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이 땅 거민이 악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결국을 보지 못하리라 함이니이다.
5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하겠느냐.
6 네 형제와 아비의 집이라도 너를 속이며 네 뒤에서 크게 외치나니 그들이 네게 좋은 말을 할찌라도 너는 믿지 말찌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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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회 자리를 사모하며 수요 저녁 기도회에 참여하신 모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수요 저녁 기도회를 통해 말씀과 기도로 우리를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2장 1절에서 6절까지 말씀입니다. 주신 말씀 저와 함께 교독하시겠습니다. 제가 먼저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혹시 달리기 경주를 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학창 시절 운동회를 하면 마지막 경기로 계주를 했습니다. 달리기 대표 선수들은 있는 힘껏 승리를 향해 달렸고 다른 학생들은 선수들을 위해서 응원의 함성을 질렀습니다. 혹여나 우리 팀이 먼저 결승전에 도착하면 너무나 짜릿한 승리의 기쁨을 누리곤 했었습니다. 아마 여기 계신 분들 중에는 왕년에 달리기 선수를 하셨던 분들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번 생각을 해볼까요? 달리기 경주를 하는데 사람과 경주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말과 경주를 한다면, 어떨까요? 말은 인간과 비교도 할 수 없이 달리기 속도가 굉장히 빠릅니다. 이런 황당한 경주에 참여하게 된다면 처음부터 불가능하다고 생각을 할 것이고, 또 경주에 대한 두려움이 임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예레미야 12장은 이러한 상황에 떨어진 예레미야의 심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아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은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예레미야를 거부했고, 심지어 가장 가까운 사람들조차도 예레미야를 배신했습니다. 예레미야의 고향은 아나돗인데요. 아나돗은 벤야민 지파 땅입니다. 베냐민 지파 땅에 제사장 가문에서 예레미야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아나도 사람들이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예레미야 11장 21절에,

*예레미야 11:21,
21 여호와께서 아나돗 사람들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네 생명을 취하려고 찾아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 하도다.
-예레미야 당신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마세요. 당신이 예언한다면, 우리 손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했지만, 그가 마주한 상황은 어려운 고난과 백성들의 거부였습니다. 이에 예레미야는 오늘 본문 1절에서, 이렇게 하나님께 질문하는 것이죠.

*예레미야 12:1,
1 여호와여 내가 주와 쟁변할 때에는 주는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패역한 자가 다 안락함은 무슨 연고니이까.
-하나님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왜 평안합니까? 이 자리에 모인 우리 역시도 예레미야와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믿음의 경주를 달리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한 번 사는 인생, 주님이 주신 그 사명을 멋지게 감당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우리 삶에 일어나는 일들에 관해서 예레미야의 질문과 같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 드는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는 삶을 어떻게 살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믿음의 경주에서의 승리는 무엇일까요? 첫 번째로,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는 삶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끝까지 순명하는 것입니다.

I.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끝까지 순명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당시에 다른 거짓 선지자들은 백성들을 향해 축복의 메세지를 전했습니다. 아무리 죄를 짓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선택된 민족은 평강하다 평강하다 외쳤습니다. 또 여호와의 성전이 우리에게 있기에 결코 유다는 멸망하지 않는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자기 민족에게 심판을 전했고 또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주신 사명은 사람들에게 환영받을 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조롱했고 반대했으며 그의 메세지를 무시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이렇게 질문한 거예요. 하나님, 악한 자가 왜 형통한 것입니까? 반역한 자가 왜 평안한 것입니까? 그런데 신기하게도 하나님께서 주신 답변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5절에 보니까요?

*예레미야 12:5,
5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하겠느냐.
-예레미야는 현 상황을 보며 하나님께 질문했지만, 하나님은 무엇을 보며 말씀하십니까? 미래를 보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앞으로 일어날 역사를 바라보며 예레미야에게 일러주셨습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끝이 아니라, 그 정도의 일에서 끝이 아니라 앞으로 더 큰 일이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 그 자리에서 훈련받고 있는 것은 아나도 고향 사람들 정도에게만 역사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금과 차원이 다른 더 높고 더 넓은 사명을 너에게 주기 위함이다. 라고 일러주신 것이죠. 그렇다면 믿음의 경주에서의 승리는 단순히 현재의 경쟁에서 앞서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악한 자 반역한 자들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을 믿음의 승리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세상과 다를 바 없는 반쪽짜리 승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것처럼, 믿음의 경주에서의 승리는 현재를 바라볼 뿐 아니라 미래를 바라보고 끝까지 주신 사명을 순명(順命)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3장 14절에 이렇게 고백하죠.

*빌립보서 3:14,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우리의 믿음의 경주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떤 유혹이 온다 할지라도 어떤 풍파가 불어온다 할지라도, 그것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사명을 지켜 나가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맞춰지는 그날까지 그 푯대를 향하여 우리는 끊임없이 달려가야 합니다. 믿음의 경주의 시작과 과정도 참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끝까지 완주(完走)하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6절과 7절에 보면,

*디모데후서 4:6-7.
6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것이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한 삶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명은 무엇일까요? 아마 각자마다 다 다를 것입니다. 개인의 사명, 부모로서의 사명, 남편으로서의 사명, 또 아내로서의 사명 직장인으로서 교회와 사회 속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믿음의 사명이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내가 원하지 않았지만 지금 나를 이 자리로 몰아가시는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의 경주에서 우리가 승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끝까지 버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완주입니다. 우리의 승리 조건 또한 완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뛰어난 자들이 아니잖아요? 능력이 출중(出衆)한 자들도 아니고요. 그저 연약(軟弱)하고 부족(不足)한 자들입니다. 작디작은 내 자신을 인정하고 앞으로 다가올 믿음의 그 경주(競走)에서 어떤 상황이 펼쳐진다 할지라도 사명을 끝까지 완주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승리의 면류관(冕旒冠)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완주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붙들 때 믿음의 경주를 완주할 수 있습니다.

II.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붙들 때 믿음의 경주를 완주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경주는 내가 달리는 것 같지만 내가 달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달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대로 임지하시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임지하심을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그런 부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주님의 임재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과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절대 권위가 있습니다. 이 땅의 모든 것은 일시적이지만 푸른 마르고 꽃은 시드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믿으시죠? 아멘이 일부분만 나오셔서 꽃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아멘!!~~ 우리는 성경의 절대 권위를 끝까지 유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그분의 말씀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어려운 순간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예레미야 15장 16절,

*예레미야 15:16,
16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예레미야는 그렇게 힘든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했습니까? 먹었습니다. 그 먹은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된 거예요.

사랑하는 영 가족 여러분,
혹시 오늘 수요 저녁 기도회에 오시면서 저녁 식사를 하셨습니까? 식사를 할 때 음식이 가장 맛있는 때가 있는데, 혹시 아십니까? 잘 모르시면 제가 알려드릴게요. 음식을 먹을 때 가장 맛있는 때는 배고플 때입니다. 배고프면 어떤 음식이든지 어떤 조미료를 낸 것보다 더 좋은 맛을 주게 되어 있는 것이죠. 예레미야가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배가 고프던지, 배가 부르던지, 내 상황이 고난해 있던지, 부유하게 있던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먹을 때마다 너무나도 행복합니다. 즐겁습니다. 충만합니다. 기쁩니다.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달려갈 때 마지막까지 달려갈 수 있게 만드는 힘이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어디로 달려가야 할지를 알려주는 등불입니다. 시편 119편 105절,

*시편 119:105,
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이 말씀이 기록될 때는 전기가 있던 것이 아니죠. 어떤 불빛이 밝게 그 주위를 비췄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녁만 되면 달빛 외에는 의지할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캄캄한 방과 같은, 칠흑 같은 우리 인생에 내 발 바로 앞을 비추는 그 등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빛이 비추는 곳을 보면서 이곳이 어디인지를 분별하고 확인하고 또 방향을 잡고 우리는 달려가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 가운데 있다면 우리는 어떤 풍파가 온다 할지라도, 흔들리지 않고 담대(膽大)하게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완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함께 뛰는 방법은 기도입니다.

예레미야는 지금 상황이 자신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되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내용을 누구에게 가져오나요? 하나님께 가지고 나옵니다. 하나님 왜 악한 자가 형통하고 반역한 자가 평안한 것입니까?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또 예레미야 15장 15절에 보면,

*예레미야 15:15,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오니 원컨대 주는 나를 기억하시며 권고하사 나를 박해하는 자에게 보복하시고 주의 오래 참으심을 인하여 나로 멸망치 말게 하옵시며 주를 위하여 내가 치욕 당하는 줄을 아시옵소서.
-또 예레미야는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 고발하며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예레미야18장에 20절 보면,

*예레미야 18장:19-20,
19 여호와여 나를 돌아 보사 나로 더불어 다투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옵소서.
20 어찌 악으로 선을 갚으리이까마는 그들이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구덩이를 팠나이다 내가 주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이키려 하고 주의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하여 선한 말씀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또한 암울해 보이는 바벨론 포로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과 약속을 믿으면서 반드시 구원해 낼 것임을 확신하며 기도를 올려드렸습니다. 예레미야 32장 17절입니다.

*예레미야 32:17,
17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권능과 펴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시나이다.
-주에게는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시나이다. 아멘, 이렇게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했고요. 하나님께 기도했구요. 또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구했고, 믿음의 경주를 하나님과 함께 달려 끝까지 완주했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있었고요. 또 말씀과 함께 하셨습니다.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서 광야에서의 시험을 이겨 나가셨죠. 무엇보다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이 이미 주어진 말씀을 완전하게 이루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셨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도 금식하며 기도하셨고 열두 제자를 선택하는 것과 같은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도 철야 기도를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앞둔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명하시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며 힘을 얻으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셨고 믿음의 경주를 자신의 모든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믿음의 경주에서 우리가 지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성경책에 써 있기 때문에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나온 것처럼 또 온라인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고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기까지만 주신 것이 아니라, 보다 효과적이고 더 확실하게 자신의 임재하심을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을 허락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거룩한 공동체는 믿음의 경주자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예레미야의 가장 큰 어려움 중에 하나가 무엇이었냐면 혼자라는 외로움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았지만 백성들은 그의 메시지를 거부했죠. 가까운 고향 가족들마저도 예레미야를 대적했습니다. 이러한 고립은 예레미야를 더 힘들게 만들었고요. 하나님께 질 의문을 던지게 했습니다. 전도사 4장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 있죠. 전도서 4장 9절-12절에,

*전도서 4:9-12,
9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10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11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아멘, 믿음의 경주는 혼자가 아니라, 거룩한 공동체와 함께 할 때 더욱더 강력해집니다. 우리는 이것을 매주 확인하고 있죠? 혼자 예배드리고 혼자 기도하는 것, 그것도 참 소중하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안아주심의 본당에 나와서 이렇게 함께 예배하고 함께 기도하면 어떻습니까? 우리에게 다락방에 나와서 서로 기도 제목을 나누고 말씀에 비추어 자기 삶의 방향을 다시금 붙잡고 또 다락방 영가족들과 한마음이 되어서 간절히 기도하면 믿음의 동지가 생기는 거예요. 나 혼자만 세상에서 외로이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 같은데, 그 자리에 나오면 함께 믿음의 경주를 달리고 있는 동역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혼자 달린다면 금세 지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교회라는 거룩한 공동체를 세워주셨고,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이고요. 지체의 각 부분입니다. 한번 이렇게 생각을 해볼까요?

지금 맛있는 달달한 디저트를 먹는다고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달콤한 디저트를 먹으면 기분이 어떨까요? 굉장히 업되겠죠. 그러면 기분이 좋으면 손도 기분이 좋고 다리도 기분이 좋을 거예요. 그런데 어떤 분은 손은 기분이 좋은데 다리가 기분이 안 좋으신 분이 계실까요? 예 그런 분은 조금 이상한 육체를 신체를 가지고 계신 분일 겁니다. 또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겠죠. 이 손가락이 있는데, 이 손가락 끝에 상처가 났어요. 상처를 건들 때마다 너무나도 아픈 거예요. 온몸이 아픕니다. 이 손가락만 아픈 것이 아니라, 다리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온몸이 이곳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성도라는 지체들이 모인 교회라는 몸입니다.

이곳 거룩한 공동체로 나오면 믿음의 경주에서 지치고 의문이 들었던 것들이 다른 지체들과 함께 말씀을 부여잡고 기도하고, 힘을 얻고 다시 뛰어 달릴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또 이뿐만이 아니죠. 우리는 지난 인생 10월에 주님과 함께 달려가며 정말 커다란 힘을 얻었습니다. 하반기 청계산 산삼 구국 기도회부터 시작해서 10월에 금식기도회, 특새, 한교섬, 또 ‘10.27 200만 연합 예배 및 큰 기도회’를 하나님께 올려드렸습니다. 성경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가정과 국가를 사랑하는 한국교회 모두가 모여서 함께 찬양하고 말씀 듣고 기도하니까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믿음의 경주를 포기하려다가도 다시금 힘을 얻어서 달려갈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선한 연대가 우리를 통해 가정과 교회 전 세계로 뻗어나가고 주님의 대사명을 이루기 위한 믿음의 경주가 끝까지 완주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마라톤 선수의 이야기를 하고 말씀을 해주려고 합니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마라톤은 42.195km를 달리는 경기잖아요.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경기이기도 합니다. 당시 올림픽이 열렸던 멕시코 시티는 해발 2천 미터가 넘는 고지대였습니다. 마라톤을 하기에는 굉장히 어려운 여건이었죠.

그래서 당시에 75명이 마라톤을 참가했는데 중도 포기를 18명이나 했다고 합니다. 이때 참가했었던 선수 중에 한 명이 탄자니아의 존 스티븐 와쿠아리라는 선수가 있었는데요. 메달권 진입이 유력했던 선수였습니다. 그런데 아쿠아리 선수가 경기 중에 넘어졌어요. 어깨를 다치고 무릎을 심하게 다쳤습니다. 의료진들은 더 이상 달려서는 안 된다고 진단을 내렸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포기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한 상황이었죠. 그런데 아쿠아리 선수는 무릎에 붕대를 감고 계속 달렸습니다. 더 이상 달릴 수 없는 한계에 이르러서는 다리를 끌다가 또 잠시 뛰다가 또 다리를 끌며 걸어갔습니다. 1등이 결승점을 통과한 지 1시간도 더 지났고, 또 메달 시상식마저도 다 마쳤구요. 관중들도 대부분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저 멀리서 아쿠아리 선수가 경기장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이 모습을 본 소수의 관중들이 기립박수를 치며 함성을 지르며 응원했고, 아쿠아리는 끝까지 42.195km를 완주하였습니다. 이것만 해도 감동적인데 저는 그 뒤에 했던 인터뷰가 더 마음에 와닿더라구요. 기자가 왜 포기하지 않고 계속 달렸느냐 묻자 아쿠아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나라가 저를 7천 마일이나 떨어진 이곳까지 보내준 것은 출발선에 서라는 것이 아니라, 완주를 하고 결승선을 통과하라는 것입니다. 출발선에 서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완주를 하고 결승선을 통과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영가족 여러분,
믿음의 경주를 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예레미야처럼 우리도 때론 고난과 반대에 부딪치고 지치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경주의 승리는 끝까지 사명을 완수하는 것에 있음을 믿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능력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요. 상대방의 실수로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승리하는 것이 속도가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달려주시면 승리가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기도하고, 거룩한 공동체에 나와 함께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놀라운 사명의 성취를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우리 곁에는 우리를 응원하고 함께 기도하는 동역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달려서, 그 결승점에 도착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맞이해 주시면서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불러주실 것입니다. 이 저녁 기도하는 가운데 용기를 내어서 다시금 일어나시구요. 주님과 함께 끝까지 사명을 감당하시는 모든 영 가족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요약
우리가 때로는 불 가운데 휩싸이고 차디찬 폭풍이 휘몰아쳐와도 믿음의 경주자로서 기꺼이 감당할 사명의 마지막 발걸음까지 주 위해 남은 나의 시간들을 조금도 주저함이나 낭비됨이 없어야 한다. 갖은 유혹과 절망에 짓눌려 쇠약해진 기도의 위기를 하나님의 저울 위에 다시 세우사 영원을 약속하신 언약의 말씀과 온갖 수치를 견딘 십자가의 준엄(峻嚴)한 무게를 더하시어 함량(含量) 미달인 이 땅을 새롭게 빚어 주시길 간구하며, 복음만이 세상를 바꾼다는 예수님의 당부를 소망과 기쁨 인내의 도전으로 받아 온 몸으로 반응하는 우리 사랑의 교회의 모든 공동체마다 서로를 붙들어 주는 기도의 저력으로 더욱 맥박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우리를 믿음의 경주로 부르시고 사명을 감당하게 하심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는 부족하여 예레미야처럼 때로는 고난과 거부 앞에서 흔들리지만 우리에게 더 크고 넓은 사명을 주시는 주님의 뜻을 바라보아야 한다.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으켜 주시는 주님의 손길을 의지하여, 믿음의 푯대를 향해 끝까지 달려가, 우리와 함께하기를 원하시는 주님 앞에 우리가 말씀과 기도로 영적 군사로 무장해야 한다. 어둠을 뚫고 나아가는 힘과 담대함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신 공동체를 통해 서로를 붙들고 일으키며 함께 눈물로 기도하고, 함께 승리의 기쁨을 나누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이 땅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과 함께 달려갈 때 우리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노라고 고백하는 그 결승선에서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주님의 칭찬을 받는 자들이 되어야야 한다. 그리하여 사랑의 교회가 전 세계에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이 땅에 복음과 거룩한 사명을 끝까지 이루어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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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12월 12일)
제목: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말씀: 빌립보서 1:27-30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부목사님)
 
설교자: 김영석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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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1:27-30,
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28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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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를 쓸 때에 사도바울은 로마의 차가운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언제까지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하는지, 혹시 내일이라도 처형을 당하는 것은 아닌지, 한 치 앞의 미래도 가늠할 수 없는 캄캄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차라리 이 세상을 떠나 영광 중에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편을 더 사모했습니다. 바울은 구원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죽음은 끝이 아니오, 예수님 계신 영원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관문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천국을 향한 분명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언제든지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부터 그가 품게 된 복음의 뜨거운 열정은 여전히 그 가슴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만일 그가 지금 세상을 떠난다면 이 땅에 남아 있는 성도들은 절망에 휩싸일 것이고, 지도자를 잃은 교회는 큰 타격을 입게 될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나 자신에게 있어서는 좋으나, 교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해서 육신으로 있겠노라고 그렇게 결심합니다. 24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1:24,
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교회를 위해 복음전도를 위해 다시금 삶의 의지를 붙잡은 것입니다. 놀랍게도 성령님께서는 바울에게 그가 성도들과 다시 만나 함께 거하게 될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25절에서,
 
*빌립보서 1:25,
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이제 바울은 감옥에서 나와서 교회에 돌아올 것이고. 교회와 온 성도들은 우리가 바울을 위해 드린 기도가 응답된 것을 보면서 크게 기뻐할 것입니다. 26절에서 말씀하듯 복음과 주님을 향한 그들의 자랑이 다시 교회의 품으로 돌아온 바울로 인해서 크게 풍성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언제 또 어떻게 감옥에서 풀려나게 될지 알 수 없었습니다. 또 바울만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빌립보 성도들도 적대적인 환경에서 아주 힘겹게 교회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는 소원이 있었습니다. 내가 곧 감옥에서 나와서 너희를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그때까지 어떤 어려움과 핍박이 있다 하더라도, 너희가 복음의 신앙을 굳세게 지키기를 원한다라는 간절한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27절과 28절에서,
 
*빌립보서 1:27-28,
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28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바울이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당시 교회를 향한 온갖 공격과 또한 거짓이 난무하던 상황 속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오직 피 묻은 복음의 신앙을 굳게 지키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이것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다양한 가치와 신념이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허물고 거짓으로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공격하는 시도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부정하며 성경적 신앙의 근간을 흔들어 놓는 수많은 불건전한 시도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속에서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굳건히 서 있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복음의 신앙 위에 굳건히 서시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우리가 구체적으로 힘써야 할 일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하나됨을 지키며, 협력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27절 후반부에서 말씀합니다. 화면을 보시고 같이 봉독하겠습니다.
 
II. 첫째는, 하나됨을 지키며, 협력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빌립보서 1:27,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결코 혼자만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온 교회가 한 마음, 한 뜻을 품고 협력할 때에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함부로 평가하거나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영광스러운 주님의 교회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강철 대오를 이루어 단단하게 하나되어 영광스러운 교회의 기품을 지켜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은혜의 주류에 굳게 서서 한마음과 한뜻을 품어 교회의 하나됨을 힘써 지키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길 즉 이 민족 더 나아가 전 세계를 복음으로 품는 위대한 사명에 진심과 전심으로 협력하시길 간절한 마음으로 축복합니다.
 
사탄은 교회가 주님을 믿고 한 마음으로 협력할 때에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탄의 관심이 늘 어디에 있냐 하면, 교회의 분열(分裂)에 있습니다. 언제든지 기회를 엿보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회 안에 분열을 조장합니다. 사탄은 헬라어로 디아볼로스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디아는 무엇무엇 사이에라는 뜻의 접두어이고 볼로스는 던진다 라는 뜻의 발로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사이에 던진다. 즉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를 어지럽히고 훼방하고 이간질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에게든지 또 무슨 일이든지 함부로 불평불만을 해서는 안 됩니다. 사탄에게 틈을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고, 자존심이 상하고, 감정이 상하고, 이런저런 일들로 섭섭한 감정을 품게 될 수 있습니다. 그때 주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탄이 그 틈을 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탄의 관계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교회의 연합을 위해서 공동체원 모두가 자기를 부인하는 자리에 서 있어야 합니다. 자기부인이란 무엇입니까? 담임 목사님의 저서 온전론을 보면, 자기 부인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내가 내 인생의 주인 노릇을 하며 관여했던 모든 고리를 끊고 인생의 최종 결정권을 주님께 드린다는 것이다.” -온전론 17p-
-아멘 원어로 볼 때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나와 어떤 대상의 연결고리를 끊는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자기부인은 자기중심성이라는 아주 지독한 우상을 단호하게 끊어내는 것입니다. 모든 자기중심적인 안전, 이익, 행복, 명예 이런 모든 우상을 다 끊어내고 오직 주님이 주신 사명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태도 그것이 자기부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의 기간 동안 계속해서 자기 부인에 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6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0:26,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누가복음 9장 2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가복음 9:23,
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또 요한복음 12장 24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2:24,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다툼과 갈등이 생길 때 엎드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때 기도해야 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과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때 성령님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실까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사탄과의 영적 전쟁을 결판 내신 바로 그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모든 신적 특권을 기꺼이 포기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 승리하셨습니다. 사탄에 대한 예수님의 필승 전략은 자기 부인과 권리포기였습니다. 성경님은 바로 이 자기 부인과 권리 포기가 승리의 길이라고 말씀하시며 너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겸손하라. 온유하라. 오래 참으므로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라.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명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자기 부인의 길입니다.
 
예수님처럼, 자신의 권리와 감정을 내려놓고 우리 공동체에 주신 사명을 최우선으로 생각할 때 우리는 온전히 하나되어 승리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각각 기질이 다르고 직업도 다른 사람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중에는 로마에 협력하던 세리마태도 있었고, 로마에 대항해서 투쟁하던 열혈당원 시몬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한때 더 높은 자리를 두고 다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목도하고,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내리신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기 부인의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섬김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자가 되었고 높아지려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 남을 낮게 여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다툼이 그쳤습니다. 다투던 그들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런 그들을 통해 생명의 복음이 전 세계 더 나아가 모든 민족을 향해 물이 바다 덮음같이 퍼져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됨을 힘써 지키며, 교회가 나아가는 방향에 기쁜 마음으로 협력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를 통해 복음이 힘 있게 선포됩니다. 말로만 전하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행동과 모습이 더 큰 소리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위한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육신이 살아 있어서 스스로를 내세우고 여전히 다투고 분열한다면, 여기서는 결코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모든 다툼과 허영을 버리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낮게 여겨야 합니다. 그래야 복음이 힘 있게 전파될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쉽지 않은 일이죠. 결코 쉽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힘으로 하려고 하니까 그런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그 길을 걸을 수 있는 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 달리신 십자가로 가까이 가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바라보고 그 하나님의 아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 그 십자가에서 흐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그 샘물 같은 보혈에 내 영혼을 적실 때 내 안에 없던 힘이 생겨날 것입니다. 거룩하게 살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희생할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은 나타날 것입니다. 분열이 그치고 하나 되는 역사가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비록 우리는 살아온 배경도 성격도 직업도 다르지만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온전히 하나되어 협력하고 우리가 이 일에 힘쓴다면 우리는 주님의 날카로운 새 타작(打作)기가 되어서 이 세상을 전 세계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하나됨을 힘써 지키며 협력하는 일에 힘을 쏟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힘을 쏟아야 할 일은 복음에 대한 반대에 담대히 맞서는 일입니다.
 
II. 둘째는, 복음에 대한 반대에 담대히 맞서는 일입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에게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하나 될 것을 강조한 동시에 복음에 대한 반대에 대항해서 담대하게 맞설 것을 권면합니다. 2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빌립보서 1:28,
28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복음의 위대한 사명을 위해서 전신전력하는 그 길에 작은 것 하나까지도 문제 삼으며 대적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 자신도 복음을 수호하고 전파한다는 그 이유로, 말로 다 못할 고생을 겪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사는 인생에게 가해지는 위협과 공격의 무게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이 복음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고충을 겪게 될지를 너무나 잘 안 것이죠. 그래서 그렇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절대 그것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아라. 오히려 복음의 야성, 영적 기백을 품고 복음에 대한 반대에 담대히 맞서서 주신 사명과 방향을 붙잡고 정면 돌파하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8장 31절의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사도행전 28:31,
31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아멘 지난주 토비새에서 담임 목사님을 통해 주신 말씀과 같이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가르치는 일에 담대하게 거침없이 정면 돌파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복음 전파의 역사는 박해의 역사입니다. 대한민국 기독교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순교자 기념 박물관을 몇 곳 방문해 보았는데, 가장 먼저 가본 곳이 바로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이었습니다. 이 땅에 복음을 전파한 선교사님들이 그 먼 곳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통하 보이지도 통하지도 않는 조선 땅, 그곳에 와서 모진 박해와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중임을 의지하여 얼마나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했는지, 그 역사의 기록이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복음화는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 수많은 선교사님들의 희생으로 맺어진 열매임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살아간다는 것이 이와 같은 삶입니다. 그 길에 대적이 있고 핍박이 있지만 그로 인한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거침없이 복음을 위한 사명에 끝까지 충성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난에 처한 교회를 격려하면서 하나님이 보상하실 때가 반드시 있다고 격려했습니다. 하나님은 대적들의 행위를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고, 복음 때문에 고난받은 일꾼들에게 넘치는 위로를 베푸실 것이라고 힘주어 선포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을 위해서 기꺼이 고난을 받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복음의 증인으로 살다 보면요. 단대하고 조롱하며 훼방하는 무리들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미워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을 미워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위축되거나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 뒤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담대하고 대범하십시오. 오히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고, 선으로 악을 갚는 그 대범함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위해 박해받는 사람들에게 하늘의 상이 크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에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라고 고린도 후서 4장 17절에서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고린도후서 4:17,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장차 누릴 영광과 상급을 기대하면서 지금의 역경을 오히려 기뻐하며 끝까지 사명을 위해 정면돌파하시기 바랍니다.
 
일본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을 호류지라고 부릅니다. 니시오카 가문은 화재와 멸실의 위험이 있는 호류지를 자그마치 1400년 동안 대대로 지켜왔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크고 오래된 건축물을 짓는 목수를 미야 다이쿠 즉 궁목수라고 부르는데 이 니시오카 가문이 바로 궁목수 가문입니다. 그들은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 시간들을 지탱하는 목조 건축물을 세울 수 있었던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그것은 근본적으로 건물을 짓는 재료 건축 자재가 달랐기 때문이다 라고 설명합니다. 즉 천 년 이상을 지탱할 수 있는 노송을 썼다는 것입니다. 니쇼카 가문은 천 년 이상을 지탱하는 건축물을 지으려면 천 년은 된 노송을 써야 한다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그들은 나무의 생명력을 그 나무가 오랫동안 견뎌낸 연수로 평가했습니다. 천 년을 견딘 나무는 그렇게 천 년 이상을 쓰임 받았습니다. 견딤이 있어야 쓰임이 있다. 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난을 견디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은 영원토록 우리의 구주가 되십니다. 어차피 견뎌야 할 고난이라면 감사함으로 견뎌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견디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참으신 것은 앞에 있는 기쁨을 생각하셨기 때문이라고 우리 히브리서 12장 2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이 말씀을 한목소리로 공독하겠습니다.
 
*히브리서 12:2,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아멘,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해서 십자가를 참으셨다고 했습니다. 십자가 이후에는 반드시 기쁨과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고난의 때에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모난 모진 고난과 어려움을 힘든 고초를 겪으신 예수님을 묵상하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난 이후에 있을 상급과 기쁨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모든 박해와 또 공격을 담대하게 맞서시기 바랍니다. 견딤이 있어야 쓰임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담대히 맞서 싸우시고 더 나아가 복음의 사명을 위하여 모든 장애와 방해들을 정면돌파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사랑하는 영가족 여러분,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살아가는 삶, 복음의 신앙을 수호하고 전파하는 그 길에는 즐거움과 기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길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발걸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길을 걸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을 한 번도 빠짐없이 누리시기 바랍니다. 복음의 신앙을 위해서 힘차게 살아가십시오. 이를 위해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힘써야 할 첫 번째 일은 하나 됨을 지키고 협력하는 것입니다. 자기 권리 감정 자존심을 내려놓고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고 기쁨으로 협력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힘써야 할 일은 복음에 대한 반대에 담대하게 맞서는 것입니다. 오직 복음의 신앙을 위해 사는 우리를 비웃거나 비난하는 자들이 있을 터인데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고 전파해야 합니다.
 
비록 그 길에 고난은 고난은 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면류관(冕旒冠)을 우리에게 씌워주실 것입니다.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그 칭찬이면 충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이 세상의 금과 은 그 어떤 보아가 없어도 온 세상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그 칭찬 한마디면 충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복음의 신앙을 위한 발걸음에 더욱 힘을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요약
세상에서는 우리가 환란을 당하지만 담대하여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처럼, 하신 말씀을 기억하여, 우리의 대장 되신 주님을 따라갈 때에, 한 영혼이라도 거룩한 진영에서 이탈하는 자가 없기를 기도해야 한다. 모두가 온전히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교회의 하나됨을 지기며, 협력하는 일에 지혜롭게 힘쓰고, 십자가에서 세상 권세를 이기신 대장 되신 예수님을 의지하여 복음에 대한 어떤 공격과 방해가 있다 하더라도 담대히 맞서서 나아가야 한다. 대장 되신 예수님을 따라 정면 돌파하여 그렇게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헌신하는 모든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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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11월 27일)
제목: "함께 가고 함께 머물고"
말씀: 룻기 1:16
찬양인도: 쉐키나(이동선 부목사님)
사회: 강건우 부목사님

설교자: 하상범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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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 1:16,
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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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귀하신 아버지 하나님, 광야와 같은 인생길에서도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시고 앞서 인도하시며 우리의 모든 순간순간에 동행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늘 예비하신 회복의 은혜를 경험케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오늘도 기도의 자리에 나왔습니다. 이 시간 우리의 삶이 온전히 드려지게 합시고, 그 은혜를 더욱 깊이 누리는 복된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가정과 교회와 민족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가 하늘 보좌에 상달되게 하시고, 이 땅 가운데서 부흥의 불길로 이 교회와 민족 위에 타오르는 놀라운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말씀 가운데 풍성한 은혜를 부어주시길 소망하며 우리의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첫눈이 내린 날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는 수요기도회에 나오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수요저녁기도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시는 큰 은혜를 부어주시기를 소망합니다. 함께 말씀을 보겠습니다. 오늘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룻기 1장 16절 말씀입니다.

-구약성경을 펼치면 이 세상을 주관하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크고 광대한 이야기에 압도가 될 때가 있습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믿음의 조상들을 통해 삶의 기초를 놓으시며 고난 속에 있는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순종과 사랑의 삶을 이끄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그 이야기가 언제나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반면에 동시에 평범한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무관하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어떤 조건들을 대비해 보아도 나 스스로를 하나님의 이야기에서 소외된 존재로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다가 창세기에서 시작된 말씀이 한장 한장 넘기다 보면 위대한 신앙의 영웅들의 이름이 아닌 바로 평범한 사람을 통해 펼쳐지는 놀라운 이야기를 만나게 됩니다. 그 이야기가 바로 루세 이야기입니다. 루슨 이방 여인입니다. 모태신앙도 아니었습니다. 신앙적으로 볼 때에도 특별한 배경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따라 구원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요란하지도 않고 특별하지도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 속에서 절대 빠지면 안 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룻기 4장 17절 말씀은 이 이야기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줍니다.

*룻기 4장 17절,
17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작고 평범하게 보였던 룻의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로 이어지는 구원의 역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었습니다. 룻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하나님은 뛰어난 자들만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작고 평범한 사람들조차도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있어서는 귀히 사용하신다는 겁니다. 비록 내가 우리가 나 자신을 바라볼 때에 부족함다 보일지라도 평범하다 보였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인상적인 이야기는 그 속에서도 시작이 된다. 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무명의 이방여인 룻이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는지 차근차근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I. 첫 번째, 나오미와 룻의 관계에 ‘헤세드’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다 보면 관계라는 숙제를 마주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특히 고부관계는 바로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시어머니와의 관계가 얼마나 힘든지 이런 우스갯소리도 있습니다. ‘시’자가 들어가는 거는 다 싫다. 그냥 싫은 것도 아니고 전부 다 싫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반찬을 먹을 때에도 시금치가 들어갔으면 요렇게 뺀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리고 카페에 가서도 시럽은 쳐다도 안 본다고 합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통독하다가 10편이 나오면 이렇게 건너 뛴다 라고 하더라구요. 그리고 시어머니께서 집에 온다는 소문을 들으면 찬양을 이렇게 개사해서 부른다고 합니다. ‘예수가 함께 계시니 시험이 오나 겁 없네.’ 예수가 함께 계시니 시험이 오나 겁 없네. 라는 이 찬양을 부른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이 우스갯소리처럼 자부와 시어머니의 관계, 고부관계는 참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바라보면 바로 누군가의 관계 속에서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바로 시어머니와 며느리 룻의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우리 가운데에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가 펼쳐질 수 있구나 얼마나 도전적인 마음을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룻기 1장에서는 나오미가 함께하고자 한다고 계속 말하는 그의 며느리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룻기 1장 8절에서 9장 상반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룻기 1:8-9,
8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9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여기에 선대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선대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바라볼 때의 ‘해세드’입니다. 헤세드는 단순한 호위나 친절을 넘어서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학자 히브리어 단어를 연구하는 학자 ‘캐서린 샤켄필드’는 이 헤세드 단어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곤궁에 처한 자를 위해 의무 없이 자발적으로 베푸는 언약적 충성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조건 없는 자비와 헌신과 인혜와 사랑과 충성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나오미는 며느리 룻과 오르바가 그에게 보여준 햇세들을 인정하며 축복해 주었습니다. 이방 땅 낯선 문화 속에서 시부모와 시어머니와 그녀의 남편들에게 그의 며느리들이 얼마나 충성했었는지 얼마나 사랑을 베풀어 주었었는지 얼마나 자비를 행해주었었는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그런 며느리들의 삶을 축복하며 그들에게 더 나은 길을 권했던 것입니다. 시어머니와 함께 낯선 땅에 미망인으로 들어가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고향 땅으로 돌아가서 남편의 집에서 안식을 누리는 평범한 일상을 회복시키는 것이, 회복하도록 그녀들을 떠나보내는 것이 며느리들이 자신에게 베푼 해세드에 보답하는 길이라 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룻의 선택은 너무나 놀랍습니다. 나오미가 거듭거듭해서 만류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루키 1장 16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룻기 1:16,
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 나도 머물겠나이다.
-룻이 나오미에게 보내준 보여준 헤세드는 단순히 시어머니와 동행하겠다라는 말이 아닙니다. --- 룻기 1장 20절에서 21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룻기 1:20-21,
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아멘 나오미의 이름 가운데에는 이런 뜻이 있습니다. ‘나는 즐거움’입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자신을 즐거움이라 부르지 말라고 합니다. ‘마라’ 라고 부르라고 합니다. 마라는 영어로 비터입니다. 비록 쓴 잔, 쓴 물, 쓴 인생이라고 말합니다. 나오미의 고백은 자신이 고향 땅을 떠나 풍족하게 했지만, 어느덧 지나고 보니 남편을 잃고 두 아들을 잃어버려서 이제는 자신의 두 손이 시간이 지날수록 풍성해지는 것이 아니라 풍족해진 것이 아니라 점점 텅 비게 되었다. 라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웃음이 가득했었고 행복해진 인생을 살아간 것이 아니라, 점점 불행이 더해졌고 절망이 더해졌고 하나님께서 내 인생 가운데 쓴 잔을 허락하셨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 나오미는 나오미의 이 삶을, 이 인생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니에게 어머니의 텅 비워진 인생에 내가 하나님의 언약적 충성으로 그 빈자리를 채우겠습니다. 내가 어머니의 그 슬픔을 함께 동행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한 것이었습니다. 이 모습은 나오미와 루세의 이 모습은 우리를 하나님의 언양적 사랑으로 인도합니다. 시편 23편 4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시편 23:4,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아멘,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에 머물 때에 나와 함께 머물고 함께 동행하는 이들은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갈 때에는 하나 둘 나의 곁을 떠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친구도 떠나고, 가족도 떠나고, 심지어 나의 이 두 손으로 나의 힘으로 힘껏 붙잡고 있던 것들까지 하나씩, 하나씩 빠져나가고 떠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시편 23편 4절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떠난 다닐지라도 나는 너와 함께 하겠다’. 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신명기 31장 6절에서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신명기 31:6,
6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릴 떠나지 않을 뿐 아닌 아니라, 어떠한 상황 가운데 거한다 할지라도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 라고 말합니다. 이 구약에서 선포된 말씀은 다시 신약 말씀에 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전한 성취가 이뤄집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마태복음 1:23,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아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님들, 하나님의 헤세드는 변하지 않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릴 결코 떠나지 아니하시며,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텅 빈 인생 가운데 머문다 할지라도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그 빈자리를 하나님의 헤세드로 채워주신다. 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십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삶과 가정 속에서 울려 퍼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리고 이 고백을 넘어서 오늘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룻이 나오미에게 해세드를 베푼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 가운데에 베풀어 주신 헤세드를 세상 속에서 실천해야지만 됩니다. 누군가가 고통 가운데 울고 있을 때, 그의 삶에 깊이 뿌리내려 동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그러할 때 한가지를 기억해 주셔야지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나 자신의 다시 자격을 돌아볼 때가 맞습니다. 내가 권한 가운데에 내가 어려움 속에 있어도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 라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 계신다라는 그 믿음을 붙들고 다시 나의 고통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의 고통을 바라보고, 다른 이의 고통 가운데 해세드를 채워주는 하나님의 헤세드의 도구가 되어야지 됩니다. 지금이 바로 하나님의 그 이내에 그 해세드의 사랑을 실천할 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혹시 가족 중에 외로움에 지친 누군가가 있습니까? 영 가족 중에 홀로 눈물을 흘리는 영적 동지가 있습니까? 아니면 직장동료 중에 마음이 무너진 동료가 있습니까? 그들에게 내밀어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하나님의 헤세드를 전해 주십시오. 우리가 작은 헤세대를 실천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현장 가운데 함께하시고 동행하여 주시고 역사하여 주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헤세드를 전하는 도구가 되어졌을 때에 그곳이 끝나는 곳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펼쳐주시는 놀라운 은혜의 역사로 펼쳐주실 것입니다. 두 번째입니다.

II. 두 번째, 룻과 나오미 가운데에는 신앙이 계승되었습니다.

-성경 66권 중에 여인의 이름이 성경 책의 제목이 된 것은 단 2권이 있습니다. 에스더와 룻기입니다. 이 2권의 책은 각기 다른 시대와 배경 가운데서 기록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신앙의 계승과 결단이라는 공통적 메세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에스더는 이방인의 땅에서 유대인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녀의 결단을 가장 잘 대변하는 말은 아마도 제가 생각했을 때에는 에스더 4장 4절입니다. 그녀가 어떻게 말했는가 하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에스더 4:16,
16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에스더는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목숨을 걸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 고백은 오늘날 세상을 살아가며 는 그리스도인 우리에게 깊은 도전을 줍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거하며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이 에스더와 같이 이방인의 땅에서 유대인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참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군 생활을 할 때에 경험했던 것은 회식 자리에서 내 앞에 놓여진 술잔이 가득 채워지고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거절해야 될까? 그리고 보니까요, 사람이 많은 식당에서 일어나서 대표 기도를 해야 할 때도 그러한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필이면 12월에 지인들의 약속이 폭주하는 이때에 지인들이 저희들에게 주일의 약속 성탄절에 약속 잡자고 하면은 교회 가야 된다. 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야 할 때도 그렇습니다. 뿐만 아니라, 직장에서 아직 내가 그리스도인님을 드러내지 못했는데 믿음을 밝혀야 할 때도 그러하더라구요. 그리고 제가 자녀를 둔 성도님들을 만나니까, 이럴 때도 있습니다. 자녀가 결혼을 하는데 자녀에게 우리 결혼 예식을 예배로 드리자고 말을 해야 할 때, 마지막으로, 부모님의 하나님께서 부르심 앞에 장례를 드려야 하는데, 형제의 신앙이 달라야 할 때도 바로 그러더라구요. 이 모든 상황은 기독교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에스더의 고백과 같이 죽으면 죽으리라다. 하는 신앙의 결단을 요구하는 말들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룻의 상황은 어떠했을까요?

룻의 상황은 어떠했을까요? 룻은 에스더와 정반대의 상황 가운데에 있습니다. 이방인으로서 유대인의 땅으로서 살아가야지 됩니다. 이방인의 땅에서 유대인으로 살아가야 되는 그 룻을 가장 잘 대변하는 말씀이 오늘 함께 읽었던 룻기 1장 16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룻기 1:16,
16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아멘, 룻은 과거 모압 족속에는 어떤 신을 섬겼음가 하면, 그모스신을 섬겼습니다. 룻 역시 그들의 민족을 따라 금호수 신을 섬기는 모합족속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어머님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감정적 결단이 아닙니다. 무엇인가 하면 신앙의 계승을 이루는 위대한 결단의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그녀의 고백은 출애굽기 3장 6절에서 하나님과 모세 가운데 언약을 맺었던 그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출애굽기 3:6,
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룻이 지금 어머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됩니다. 라는 이 고백은 단절된 고백이 아니라, 연속성에 있는 믿음의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이 이삭에게 전수되었고, 이삭의 신앙이 야곱에게 계승되었습니다. 어머님의 신앙이 이 민족을 따라 흘렀던 그 믿음의 신앙이 바로 나오미에게 전수가 되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신앙은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을 부모가 자녀에게 선배가 후배에게 지금 세대가 한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전수하고 계승되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입니다. 신앙은 계승의 종교입니다. 신앙은 나 홀로 믿는 것이 아니라, 나 홀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이어지도록 전수하고 계승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사명인 것입니다.

가정을 심방(尋訪)하다 보면 그 가정 가운데에서 영적 기둥과 같은 분들을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그분들을 바라보면 가정에서 어떤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가 하면 어떠한 상황에도 요동(搖動)하지 않고 견고한 믿음으로 가정을 지탱합니다. 그리고 가정이 영적으로 격길로 빠지지 않도록 영적 나침반의 사명을 가정 가운데서 감당하는 그런 분들 말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바로 룻기 1장의 가운데에서 나오미가 그의 집안간에서 영적 기둥과 같은 역할을 감당했던 것 같습니다. 비록 그녀는 지금 하나님께서 나에게서 웃음을 뺏어갔다. 라고 말합니다. 나에게 쓰디 쓴 잔을 마시겠다.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내가 소중히 여겼던 모든 것들을 다 떠나가게 했다. 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비참한 인생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그녀가 붙들었던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이 무엇인가 하면, 며느리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라는 겁니다. 민족 가운데에 내려져 있는 그 신앙이 자신에서 끊어지지 않고 며느리들에게 전수되어지고 계승되어질 수 있도록 그 사명을 다했다라는 것입니다. 이 사명은 나오미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수요저녁기도회에 참석하신 성도님들과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는 기독교인 모두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이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성경에 기록되어져 있는 진리에 반대되는 말씀을 계속해서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만 바라봐도 그렇습니다. 이제는 부모의 신앙을 자녀에게 강요할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훈육도 쉽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녀가 부모를 신고할 수 있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학기 중에 있는 자녀가 5일 이상 체험 학습을 쓰게 되면 반 담임 선생님은 부모님에게 학교 학생의 안전과 건강을 묻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학생과 통화해야지만 됩니다.

학생과 통화하여서 학생 그의 안전과 건강을 확인해야 되는 이러한 시대 가운데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댁 가운데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다음 세대 나의 자녀들에게 어떻게 신앙을 계승해야지 될까요? 어떤 방법을 사용해야지만 될까요? 바로 방법이 있습니다. 토비새의 자리에 자녀들을 초대하십시오. 매주 믿음의 세대가 함께 예배드리는 토비새의 자리에 자녀들과 함께 참석하십시오. 자녀들과 함께 참석해서 함께 예배드리고, 함께 말씀을 듣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72구절을 암송하고, 함께 추억을 가지고 돌아가면 자녀들의 인생이 돌아보았을 때에, 하나님께서 요단강을 건너고 길갈의 12돌을 세웠던 것처럼, 그럼 자녀들의 인생 가운데에 믿음의 12돌이 세워질 것입니다. 또 하나의 방법이 있습니다. 또 하나인 참여할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특새입니다. 특새를 통해서 기도의 유산을 물려주십시오. 하나님께서 1년에 2번 열리는 그 특세는 나의 자녀들에게 신앙을 계승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부모의 새벽기도는 자녀의 평생 축복이 되며, 자녀의 새벽기도는 부모의 노후대책이 될 것입니다. 특세의 자리에서 부모님들께서 자녀를 위해 눈물을 뿌리며 기도하면 그 눈물은 하나님께서 자녀들의 인생 가운데에 뿌려주실 것입니다. 내가 흘려야 될 눈물이 잔 내가 자녀들을 대신하여 눈물을 흘렸기 때문에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의 인생에서 눈물을 덜 흘리게 하실 것이고, 내가 눈물을 흘리며 뿌렸던 그 기도가 자녀들의 인생 가운데에 반드시 기쁨의 단으로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성도님들, 믿음의 계승을 위해서는 토비새의 자리와 특새의 자리에 믿음의 자녀들을 꼭 데리고 함께 참석하시기를 소망합니다. 룻은 나오미와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순간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자녀 세대가 부모의 세대를 바라보며, 부모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다. 라고 하나님이 되십니다. 라고 고백할 때에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다음 세대를 우리 세대보다 더 크고 귀하게 사용하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밤, 수요 기도회에 참석하셔서 이 거룩한 여정을 하시고 믿음의 힘든 싸움을 하셔야 되는 귀한 성도님들에게 아버지와 위로를 주시고, 격려를 주시며 입술의 권세를 더해주셔서 자녀들에게 말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 선포되는 말씀이 자녀들의 마음에 심겨지게 되길 하나님께 축복하여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세 번째는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가고 함께 머물렀습니다.

III. 세 번째는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가고 함께 머물렀습니다.

-룻기 1장 16절 하반절에서, 룻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룻기 1:16b,
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아멘, 이 고백은 단순한 결단 정도가 아닙니다. 이방 여인 룻이 자신의 전 존재를 지금 아버지 하나님 앞에 드리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의탁하겠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늦은 루슨 모합 여인입니다. 성경에 보면 모압족속은 매우 어두운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기 19장 31절에서 38절 말씀해 보면, 룻이 아니라 롯이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가운데에 그의 두 딸을 데리고 탈출하게 됩니다. 그때의 큰딸이 그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가운데에서 자신의 남편을 잃었습니다. 그때에 그 딸이 어떤 행동을 하는가? 하면 그의 아버지 롯을 술을 먹이고 술을 취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과의 비정상적인 관객 가운데서 시작된 민족이 바로 모압족속입니다. 그리고 신명기 23장 3절에 보면, 모압족속은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지 못한다. 라고 선언되었던 민족이 모압족속을 바라보면 어떻습니까? 모압족속은 제로 시작된 민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영원히 멀어진 족속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룻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신이 바꿀 수 없는 그 한계 앞에서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룻의 이 고백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룻의 고백을 통하여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이 고백을 통해서 그녀의 과거를 끊고,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로 들어가게 된 문을 그의 삶 가운데 열어주셨던 것입니다. 무슨 하나님의 고백했는데 어떤 하나님을 고백했습니까? 바로 그녀의 시어머니가 믿던 그 나오미의 하나님을 고백했습니다. 나오미는 룻기에 바라보면 이런 하나님을 고백했습니다. 룻기 1장 20절에서 21절을 바라보면, 어떤 하나님을 바라보는가 하면, 나오미는 하나님에 대해서 전능자, 라고 고백합니다. 히브리어로 ‘엘 샤다’이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고 불가능한 속에서도 가능케 하시는 그 아버지 하나님을 바라봤던 것입니다.

*룻기 1:20-21,
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그러니까 자신의 며느리가 이방 여인이고, 죄로 태어난 족속이고 하나님의 청호에 영원히 들어오지 못하지만 그녀가 하나님을 받아들이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녀의 삶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꿔주실 수 있는 전능자의 하나님을 고백하셨던 것입니다.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오미의 삶 전체를 붙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을 바라보면 성경을 찬찬히 묵상하다 보면, 이 전능하신 하나님이 성경 전체에서 반복되어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성경 전체에서 바라보기보다 잠깐 창세기 두 군데에서 잠깐 바라보려고 하는데요. 첫 번째는 창세기 17장 1절 말씀입니다. 함께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창세기 17장 1절,
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어떠한 상황인가 하면 아브라함의 나이가 99세 때입니다. 그리고 이미 너무 늙어서 아이를 생산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에 처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아내 사래 역시 하나님께서 그의 경수를 끊었기 때문에 자녀를 잉태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실 수 있는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아브라함과 사라 가운데의 아들 이삭을 바라봐 주셨습니다. 이삭의 이름의 뜻은 웃음입니다. 웃음이 없던 아브라함과 사라의 인생 가운데에 다가가 주셔서 하나님께서는 다시 웃음을 회복시켜주셨던 것이었습니다. 룻과 나오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룻기 4장 13절에서 14절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룻기 4:13,
13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14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기업 물을 자가 없었는데 하나님께서는 룻에게 기업 물을 자를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라고 고백한 그 룻의 인생에 다가가 주셔서, 남편이 없는 인생 가운데에 남편을 주셨고 자녀가 없는 인생 인생 가운데의 자녀가 허락하셨으며 더 이상 베풀 자비가 받을 자비가 없는 인생 가운데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풍성한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인생으로 바꾸어 주셨던 것입니다. 또 한 구절이 있습니다. 창세기 43장 14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창세기 43:14,
14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 야곱과 같은 상황에 처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야곱은 요셉을 잃었습니다. 또 그에게 기근이 닥쳤습니다. 이제는 베냐민을 보내야 하는 상황 가운데에 처해져 있습니다. 왜 이 상황이 힘든가 하면 야곱이 그 상황을 통제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그 상황 가운데에 개입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의 무능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 상황에서 야곱이 무엇이라고 고백하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내가 통제하고 내가 개입할 수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황을 통제하여 주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한 가운데 개입하여 주실 것이다. 라고 야곱이 고백했던 것입니다. 이 고백의 역사가 룻기 3장 18절 말씀은 똑같이 등장합니다. 어떤 상황입니까? 함께 말씀을 읽겠습니다.

*룻기 3:18,
18 이에 시어머니가 이르되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알기까지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아멘, 베들레엠에 들어가서 보아스와 룻이 타작 마당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를 나오미가 들었습니다. 나오미가 속으로 생각했을 때에 그가 준비했던 일들이 완성되어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그 어려움이 무엇인가 하면 보아스만 기업물을 자가 될 줄 알았는데 보아스 외에 또 다른 기업물을 자가 그 민족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더이상 나오미의 손에서 그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이 지나가 버렸습니다.

나오미가 어떻게 개입할 수 있는 상황이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 상황 가운데에서 나오미는 룻과 함께 고백했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쉬지 않으시고 이 상한권에 개입하여 주실 것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은 성경 말씀에서 당신의 이름을 밝히실 때에는 그의 백성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실 때에는 완료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으로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모세에게 당신의 이름을 밝히실 때에도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현재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6장 14절에서 6장 48절에서 ‘내가 생명의 떡이니라.’ 라고 현재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아버지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삶 가운데에서 함께하시고 동행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과거에 왕성하게 활동하시다가 지금은 쉬고 계시는 그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성경은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서 예레미아 33장 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레미아 33:2,
2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나오미는 남편이 죽고 두 아들마저 잃었을 때에 그의 모든 삶이 끝났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이름을 나오미, 즐거움, 웃는 인생 기쁜 인생이 아니라, 쓴 인생, 쓴 잔을 들이키는 인생이라고 말했습니다. 심지어 그의 며느리에게 자신을 이렇게 소개해 주지 않았습니까? 그의 고향 사람들에게 가서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두손이 풍족해지는 인생이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두 손은 텅 비어져 있는 인생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행복해지는 인생이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불행해지는 인생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텅 빈 인생 가운데에서 하나님께선 룻의 헤세드의 결단 주권적 하나님을 붙드는 그 결단을 통하여서 두 여인의 이야기는 사사시대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다윗 왕가의 이야기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까지 이뤄지는 구원의 역사가 되는 이야기를 우리는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의 이야기는 결코 끝나지가 않습니다. 상실과 고난의 자리에서도 아무리 우리의 인생이 텅 비어져 보이는 순간에서도 그리고 심지어 끝난 것처럼 느껴지는 바로 그 자리에서도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가고 함께 머물고 있으시며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 가운데에 서러운 역사를 펼쳐 보내주십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출애굽기 6장 7절을 보면 고통과 신음 가운데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가가셨습니다.

*출애굽기 6:7,
7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그리고 그 백성을 구출해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신적 부르심 앞에 루시 응했습니다. 룻의 응답 앞에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내가 너의 그 응답에 응하겠다라고 말씀하시며 룻과 함께 가고 함께 머무는 인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인생 가운데에 하나님께선 개입하여 오셨으며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평범한 이방 여인의 삶 가운데에 베풀어 주셨습니다.

♣요약
죄로 어긋나 한참을 비껴가던 나 같은 사람을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찾아내사 오늘 여기까지 사랑으로 인도해 주셨으니, 말로 다 표현 못할 그 은혜를 세상에 전하고, 나누는 삶으로 사용해 주시길 간구해야 한다. ‘어머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 이방 여인에게도 세대를 거슬러 계승되는 신앙을 주셨으니, 믿는 가정의 다음 세대들과 교회로 불러 주신 젊은이들로, 온 나라에 불어닥친 절망을 끊어내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 저력을 보여주기를 소원하고, 믿어도 고난이 있고 기도해도 상실이 여전한 인생이지만, 이 좁고 험한 세상의 길로 함께 가자 부르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며, 사명에 순종하여 주님 나라 이를 때까지, 순례의 걸음을 멈추지 않기를 소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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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11월 20일)
제목: 그리스도가 왕이 되게 하라"
말씀: 요한복음 8:12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부목사님)
사회:

설교자: 유종성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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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8:12,
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세상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생명을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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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종성 부목사님
-하나님 아버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영혼을 쉬게 하시며 위로하여 주옵소서. 반석처럼 나를 떠받쳐 주시는 왕이신 주님께서 나의 모든 무거운 짐을 받아 주옵소서. 1분 1분의 영혼에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 말씀하여 주옵소서. 우리 모두의 왕이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할렐루야! 잘 오셨습니다. 우리 좌우에 잘 오셨습니다. 한번 인사 나누겠습니다.
 
오늘 수요일 저녁 기도회는 SaGA 일터선교 아카데미 감사 보고 기도회입니다. 1년 동안 기도해 주셔서 저희들이 잘 공부했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소명의식을 발견하고 일터에서 변화를 경험했던 모든 부분들을 함께 나누며 감사하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 후에 일터 토크가 진행이 되고 또 크리스찬 MBA 특강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오늘 큰 은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8장 12절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두 가지로 정리하면
첫째로, 예수님께서 정체성을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빛이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소명의식을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라 생명의 빛으로 살아라.
 
할렐루야,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일터, 직장 사업장에서 일 자체가 어둠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회사에 출근하면 마치 사방에서 날아드는 총알처럼, 수많은 업무와 요구가 빗발치곤 합니다. 곧바로 쓰러질 것만 같고, 숨조차 쉴 수 없는 긴장 속에서 일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현실이 냉혹하다 보니 누군가의 승리가 나의 패배로 여겨져서 깊은 정글 속에서 길을 잃은 기분에 휩싸일 때도 있습니다.
 
무거운 바윗덩이 같은 거대한 프로젝트들이 끊임없이 밀려와서 숨길 수 없는 피로가 누적되고, 꾹꾹 눌러 왔던 절망에 멘탈이 무너질 때도 있습니다. 주님이 꼭 필요하고 주님의 은혜가 없이는 일터에서 승리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처럼 전쟁터와 같은 현장에서 직업 현장에서 평생 세상의 빛으로 생명의 빛으로 살아낸 분들도 계십니다. 영국의 정치가 ‘윌리엄 윌버 포스’는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서 평생을 바쳤습니다.
 
 
노예제도 폐지 법안이 영국 구 의회를 통과하기까지 46년이 걸렸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지점에서 병상에서 의회 통과 소식을 들었고 그 3일 후에 하나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영국에서 노예 제도는 완전히 폐지되었습니다. 그의 나이 74세였습니다. 끝까지 피니싱 웰 하면서 생명의 빛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 후에 노예제도 폐지는 불길처럼 퍼져나갔고 프랑스로, 미국으로, 남미로 계속해서 퍼져나갔습니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평생 정치인으로써 의회의 빛으로 살았습니다. 그리스도가 왕이 되시게 하는 선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퍼 박사는 1879년에 반혁명당을 창당하고 교육 문제를 주요 정치 의제로 삼았습니다. 우리가 하이퍼 박사님이 수상을 하신 것은 잘 기억을 하는데 그의 인생에 있어서 교육 투쟁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이슈였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국민이 내는 세금으로 공립학교뿐 아니라 성경을 가르치는 기독교 사립 학교도 교육 지원을 받도록 40년 동안 교육 투쟁을 했습니다.
 
그리고 1917년 그의 나이 79세 때, 이 법안은 네덜란드 의회를 통과했습니다. 그리고 4년 뒤에 그는 83세의 하나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60세가 되면 은퇴를 한다는 생각을 하시는데 70세가 돼도 80세가 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피니싱 웰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네덜란드는 그해 40년 교육 투쟁을 통해서 종교적 자유와 교육 평등을 법적으로 보장하는 독특한 교육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는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왕이 되게 하라’ 라고 하는 카이퍼 박사의 정치적 신학적 리더십의 중요한 유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저는 2021년부터 SaGA 일터 선교 아카데미 1기에서 4기까지를 섬기면서 일터 직장 사업장에서 정체성의 변화 소명의식의 변화를 가장 보람된 훈련의 열매로 경험해 왔습니다. 사가 일터 선교 아카데미를 섬기다보면 이런 고백을 많이 듣게 됩니다. 회사에서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일임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한달란 틀을 묻어둔 악하고 게으른 종이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주님 주신 은사와 소명을 성경적 경영과 직장 선교에 사용하겠습니다. 사업을 하는데 시작과 마무리를 기도로 하게 되었고, 이를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하고, 이를 통해 주님의 영광을 구하게 되었고 일의 성과는 주님의 뜻에 맡기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다’ 라고 하시며 ‘너희도 세상의 빛으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짧지만 오늘 말씀을 마무리할려고 합니다.
 
통계청에 의하면 현재 한국의 경제활동 인구는 약 2900만 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이 가운데 크리스천을 최소 15프로만 잡아 크리스천 경제활동 인구는 400만 명이 훨씬 넘습니다. 이 400만 크리스천 직장인들이 예수님께서 왕으로 통치하시는 그런 일터 직장 사업장에서 살아간다면 대부분의 대부분이 불신자인 일터 직장 사업장에서 ‘2033-50 비전’의 새로운 장이 활짝 열릴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모두 함께 직장에서 일어나 빛을 발하시기를 바랍니다.
 
♣요약
매일 출근하면 더 큰 전투가 기다릴 것이라는 어두운 근심의 구름이 몰려올 때에, 우리 주님께서 왕이신 주님께서 ‘강하고 담배하라’ 말씀하여 주시니 우리는 가정과 일터에서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오늘도, 내일도 주님 만나는 그날까지 피니싱 웰 하며 생명의 빛으로 살아가야 한다. 나를 강하고 담대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확신하면서 주님의 뜻으로 살아가서 주님의 지상명령을 이루어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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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11월 13일)-새생명축제 3일차 저녁
제목: "오늘은 구원의 날"
말씀: 고린도후서 6장 1-2
찬양인도: 캔송기즈-날마다 감사해요
사회: 김재원 장로님(KBS 아나운서-사랑의 교회 장로님)
설교자: 김상복 목사님-할렐루야 교회(미국) 원로목사님-초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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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린도후서 6장 1-2,
1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2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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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오페라 가수 다음에 저를 세우는 건 잔인하지 않아요. 그래요. 이미 성경을 읽었는지 모르겠는데 제가 다시 한번 읽을게요 본문을 좀 띄워줘도 괜찮겠어요.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하나님하고 같이 일하는 분이 지금 하는 얘기예요. 그게 이제 사도바올인데 오늘은 사도 바울이 아니고 김상복 목사예요.
 
* 고린도후서 6장 1-2,
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그걸 하나님의 은혜를 잘 받아들여라. 이제 그런 얘기죠? 글쎄 내가 은혜를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저는 오늘 저녁에 여러분 가운데 이미 예수를 믿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고 또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이미 알고 믿고 사는 사람도 있지만 혹시나 여러분 가운데서 오늘 저녁에 오셨을 때, 하나님의 의리가 뭔지 또 그 구원이라는 게 뭔지를 분명히 이해하기 못하고 있었다면은 오늘이 이 시간이 바로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시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순간이에요. 그래서 제가 오늘 메시지를 통해서 이 사실을 오늘 저녁에 여러분이 깨닫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여러분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 오늘이 여러분이 이제 집에 가고 남은 생애 조금 전에 에 가수 오페라 가수처럼, 24살에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내가 받았다. 라고 여러분도 간증하고 살게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80세 됐을 때 내가 37에, 40에, 50에 사랑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고, 그 하나님이 주신 구원을 알게 됐다. 이런 간증이 여러분에게도 꼭 잊게 되길 바래요. 그런 시간이 오늘 되길 바랍니다. 오늘이 이제 여기를 인제 에 지금은 은혜 받을 때요, 인제 그랬는데 지금은 은혜 받을 때요, 보라 고다음에 인제 여기도 또 지금은 그런데 아 그 원문 속에 보면 지금은 은혜 받을 때고 오늘은 구원의 날이다. 그랬어요. 여러분 모두의 구원이 확실하게 느껴지고, 받아지고 그런 인생에 결정적인 오늘 저녁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근데 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구원을 베푸실려고 하시나? 좀 얘기를 해보고 싶어요. 은혜라는 말은 이제 우리가 은혜를 베푼다. 그러죠 성경에서는 은혜란 말의 뜻은 내가 뭘 받을 자격도 없고 뭐 받을 걸 뭘 한 것도 아니고, 내가 부탁한 것도 아니고, 요구한 것도 아닌데 그분이 그냥 나를 좋아해 가지고 나에게 엄청난 선을, 사랑을 베풀어주는 거, 뭐 쉽게 말하면 여러분이 아마 젊었을 때 데이트를 할 때 크리스마스 기프트를 받았을런지 몰라요.
 
근데 그 크리스마스 기프트를 받았을 때, 여러분이 지갑을 꺼내서 얼마 드릴까요? 그런 사람 있나요? 없어요. 이건 기프트에요. 하나의 선물이거든요. 그저 내가 좋아서 내가 사랑해서 내가 원해서 그냥 주는 거예요. 뭐 대가를 바라는 것 아니에요. 에 그러면 그런 그 사랑의 덕을 나에게 끼칠 때, 그런 선물을 받을 때, 받는 사람으로서는 할 얘기가 없어요. 그냥 환하게 웃으면서 고마워요. 땡큐! 그저 한마디면 끝나는 거예요. 은혜는 뭐 은혜를 가지고 왜 은혜를 주시는 거예요. 뭐 때문에 그래요. 얼마 내야 돼요? 저 내가 뭘 했는데? 그런 게 없어요. 그저 땡큐! 그러면 그 은혜를 받는 태도거든요. 은혜는 그런 게 은혜죠 그래서 왜 이런 은혜를 베푸시기를 하나님이 원하시나? 좀 생각을 해볼라 하는데, 그 원인은요, 한 가지예요. 왜? 하나님이 인간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영원한 생명을 그저 선물로 주셔서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이 땅에서부터 시작해서 저 천국까지 우리의 숨이 끝나는 그 시간까지,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숨이 끝나는 그 시간이 바로 하늘 문이 열려서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바로 그 시간, 그런 시간이 된다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베푸시려고 하나? 그것을 예수님께서 설명을 해주셨어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마태복음 11장에 보니까, 이런 말이 있어요. ‘만약에 한 사람이 온 세상을 다 얻고, 또 자기 영혼을 잃어버리면 이제 우리 한국말로 자기 목숨을 잃어 버리면, 세상 다 얻었는데 자기 목숨 하나 잊어버리면 무슨 유익이 있냐?’ 아 이제 그렇게 예수님 말씀하시면서요. 근데 다음에 하실 말씀이 사람이 자기 목숨과 근데 이제 한국말 성경 번역이 조금 부족해요.
 
그때 목숨이라고 목숨은 생명이잖아요. 근데 그냥 우리가 갖고 있는 이런 생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영어 성경이 번역을 잘 했어요. 이 단어를 ‘목숨’이라고 한국말로 번역했는데, 정확하게 번역하면은 ‘영혼’이라고 번역을 해야 돼요. 이 영혼 사람은 몸이 있고, 영혼이 있어서 인간이 되는 거예요. 그저 사람은 목숨만 붙어있으면 사람인 줄 아는데 하나님의 관점은 그렇지가 않아요. 하나님은 육신만 있는 사람이 영원히 죽어있거나 영원히 살아있지 못하고 영원히 가치가 없고 영원히 떠나면, 그 인간은 아무 가치가 없다는 거예요. 인간의 가치는 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목숨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영혼에 있다는 거야. The Soul! 더 소울, 바디가 아니고,,, 그냥 라이프가 아니고, 육신과 영혼, 이 2가지가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이 하나님께서 만든 인간이거든요. 그런데 예수님 하실 말씀은 이 영혼이라는 것은 너무도 너무도 소중하기 때문에 온 세상을 다 합한 거 또 영혼의 가치만큼 없다.
 
그 얘기는 뭐냐면 오늘 저녁에 여러분이 여기 오셨는데, 여러분들 한 사람의 영혼의 가치는 즉 여러분의 가치는 그 영혼 때문에 가치가 있는 건데, 하나님이 주신 그 가치가 있는데, 이 가치라는 것은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그 영 몸만이 아니고, 사실 몸이라는 거는요 그 영국의 셰이핀이란 사람이 쓴 책이 하나 있어서 제가 좀 봤는데 이분이 무슨 책을 썼냐면은, he value of a dead human body. 거기서 ‘죽은 인간의 몸에 가치’라는 그런 책을 썼어요. 그걸 보면서 이분이 할 일이 없었구나 재미있게 생각했어.
 
시체가 얼마나 가치가 있냐? 이제 그런 걸 썼는데 이분이 말하기를 우리의 몸은 죽으면 이제 화장터 가서 한 시간 후에는 재가 돼서 나오는데, 영혼히 떠난 그 몸은 1시간 후면 재가 돼서 나오고, 그 재가 항아리 하나에 담겨있는데, 그 항아리 안에 있는 재는 16가지의 케미커 화학 물질이 있다. 화학물질로 되어 있다. 그런데 영혼이 떠나고 나면, 재가 된 16 가지의 화학물질은 돈으로 계산해 보니까 영국 돈으로 파이브 파운드 5파운드밖에 안 된다. 5파운드의 가치밖에 없다. 근데 5파운드가 얼만가 싶어서 제가 이제 환전 찾아봤어요. 한국돈은 얼마인가 찾아봤더니, 8,831원이에요. 영원히 빠지고 영원히 죽은 그 인간은 8,831원, 제가 오기 전에 설렁탕 먹고 왔는데요. 만오천 원 줬어요. 설렁탕 1그릇도 만 5천 있는데, 인간이 영원히 떠나고 나면은 8,831원의 가치밖에 안 되는 거야. 예 그게 인간이라는 거죠. 그게 인간이에요.
 
그래서 참 인간의 가치는 우리의 몸에 있는 것이 아니고 몸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이 넣어주신 가치가 있는데, 그 가치가 영혼이라는 가치인데 그 영혼이라는 가치는 한 사람의 몸과 그 영혼의 가치는 온 세상을 다 판 것보다도 더 중하고 더 가치가 있다. 사람들은 그걸 몰라요. 몰라서 그냥 뭐 서로 욕도 하고 미워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고, 지금 제일 고약한 사람이 푸틴이거든요. 러시아의 푸틴이에요. 우크라이나 전쟁에, 지금 2년 좀 넘고 그건 이제 3년 돼 가는데 그동안에 푸틴 때문에 푸틴이 전쟁을 시작해서 죽은 젊은이들이 러시아 젊은이들이 70만 명이랍니다.
 
온 세상보다도 더 고귀한 인간을 70만 명을 죽인 거예요. 그 사람이 회귀하지 않으면 반드시 지옥 갈 거예요. 안 되죠. 이렇게 전 세상을 다 합한 것보다도 어 정교하고 귀한 그런 존재가 인간이고 여러분과 저한테 칠십만 명을 그동안에 죽이다니요. 그리고 지금도 계속해서 요샌 또 북한군들까지 데려다가 죽일라 그러죠 왜 그러냐 하나님의 가치를 몰라서 그래요.
 
하나님이 얼마나 여러분과 저를 귀하게 여겼는지,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이 사람은 공산주의자로서 그냥 인간은 그저 한 줌에 흙이요. 이것은 그저 어떻게 하다 우연히 우주 초기에 물질들이 바다에서 흔들흔들하다가, 뭐가 하나 돼 가지고 또 그것이 막 해 가지고는 생명이 되고, 또 생명이 막 흔들다가 남자가 되고, 여자가 암컷이 되고 수컷이 되고, 저절로 생명이 생겼다는 사람들은요, 하나님 믿는 사람보다 더 큰 기적을 믿어요.
 
하나님 그래도 전능하고 존재하시고, 능력 있으시고, 무한하시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우주를 창조할 수 있는 하나님인데, 하나님 없이 기적의 기적의 기적의 기적을 믿는 사람들이 저절로 인간이 태어났고 또 이 생물들이 태어나서 결국은 짐승이 돼 가지고 막 흔들거리다가 동물이 되고, 원숭이 종류가 되고 그래서 드디어 인간이 태어났다. 그렇게 밖에 결국 이 푸틴 같은 사람은 인간은 하나의 동물이여. 뭐 막 죽여도 아무 가치가 없는 그런 존재거든요.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에요.
 
하나님은 여러분 한 사람을 전 세계를 다 합한 것보다도 더 소중하고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예수님을 통하여 분명히 말씀해 주셨는데, 오늘 이 밤에 오늘 오신 여러분 모두가 다 그게 나의 가치인가 부자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있고, 덜 한 사람도 있고 키 큰 사람도 있고 적은 사람도 있고 또 노래 잘하는 사람도 있고 노래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거 아무 상관없이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은 온 세상 다 합한 것보다도 여러분, 한 사람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기 바랍니다. 왜? 하나님이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 창조거든요. 그래서 창조가 아름다운 거예요.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로 만든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이 너무 신기하고 놀랍죠.
 
3천 년 전에 이스라엘의 왕 다윗이라는 분이 이분은 하나님을 알 사람이오.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자기를 바라보면서 이런 말 했어요. I praise God! 오 하나님이여!!! 나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제가 놀랍고 신기하고 놀랍게 창조된 것을 제가 압니다. 제 영혼이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냥 자기에 대해서 감격하는 거예요. 날 이렇게 신기하고 놀랍게 이렇게 만들어낸 우리 한국 성경에 옛날 성경을 보니깐요. 신묘막측하게 만들었다 그래요. 저는 좀 무슨 말인가 그랬어요. 근데 보니까, 아주 놀랍고 신기하게 만들었다. 다윗은 자기 자신을 보면서 야 어떻게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도 신기하고 놀라운 존재로 만들었는가? 저도 그런 느낌을 다윗의 시를 읽으면 저도 같은 마음을 느꼈어요.
 
제가 언제 그걸로 끝나면요. 쓰레기 치르러 나갈 때, 집에서 쓰레기 이제 봉지가 여러 개 있잖아요. 여러 개의 봉지를 들고 쓰레기 버리러 나갔는데 이걸 한 손으로 다 잡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두 손으로 잡고 또 봉투가 한 3개, 4개, 5개기 때문에 이 새끼손 가루 하나 끼고 요거 하나 끼고 요렇게 해서 이렇게 들고는 그걸 나갈 때 제가 그걸 가지고 엘리베이터를 탈라고 누르려니까 못 눌르겠어요. 다시 내려놓고 이제 엘리베이터를 누르면 다시 또 요렇게 하는데 아 그 5개, 6개 봉투가 한 손에 10개나 손에 다 들어가는 거야.
 
야 다윗이 맞구나, 신기하고 놀랍게 어떻게 이렇게 디자인을 해 가지고 요 열 손가락을 가지고 이렇게 봉투를 5개 6개를 한꺼번에 들고 쓰레기통에 갈 수가 있나, 아 제가 그때 깨달았어요. 와 대단하다 대단하다. 그 뭐 간단한 거지만은 여러분의 눈을 봐도 눈동자 귀를 봐도, 이만 봐도 예 아랫 위에 밑에 오장육부 뼈 세포 그다음엔 세포 밑에 있는 마지막까지, 작은 부분까지, 그게 전부가 다 종합해서 여러분이 된 겁니다. 근데 여러분은 하나님의 작품이에요.
 
그래서 신기하고 놀라운 그런 존재가 된 거죠. 하나님이 창조했었고 하나님 만드신 거기 때문에 여러분의 가치는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의 남편이 주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의 친구나 이웃이 주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들을 모르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여러분이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간에 여러분 한 사람이 이 지구 전체보다도, 이 세상 전체보다도 더 정교하고 귀한 분이라는 것을 이 아침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되길 바랍니다.
 
그거 알면요. 얼마나 서피스 팀 자존감이 박혀요. 와 내가 그런 존재인가?!! 아 난 놀랐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볼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렇게 그래서 예수님은요, 사람들이 병자든지, 심지어 길거리 여자든지 무시받는 마트 같은 세무사원이지, 상관 안 했어요. 아무리 세상에 나쁜 사람들이라고 하고 상대도 안 한다. 그래도 예수님은 찾아가서 그 사람들을 고쳐주고, 그 사람들을 환영해 주고 심지어 창녀도 받아주고 막달라 마리아 아니에요? 예수님을 끝까지 섬겼던 그 여자가 길거리 여자예요.
 
또 뭐 개 같다고 하는 사마리아 여자도 가서 구원해 주고, 왜 유대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을 상대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마리아 사람이든가, 남자든가 여자든가, 아니든가 제자들은 어린아이들이 예수님께 찾아오니까 귀찮다고 말이야. 야 다 가 오지 마 하지마 바빠 그랬어요.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그 아이들 나한테 하는 거 막지 말라. 그 아들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데, 하나님이 창조한 최고의 걸작품이야. 하나님의 작품이야. 그래서 가치가 있는데, 막지 말고 데려오라 먹혀라. 여기 앉아라. 내 무릎에 앉아라. 그리고 그 아이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예수님께선 축복 기도를 해 주셨어요.
 
예수님에게는 예수님은 인간의 가치를 확실히 우리한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근데 세상은 우리는 아직까지도 모르고, 이 나의 가치가 얼마나 얼마나 귀한 것인지, 근데 사실 이 세상이라 그러면요. 대단할 거거든요. 이 이 육지에는 100만 종류의 생명체가 있대요. 예 100만 종류의 생명체 바다에는요. 육지보다 더 많대요. 150만 종류의 생물체가 있답니다. 아 그거는 물고기를 잔뜩 집어넣어 가지고 이 어부들이 가서 그걸 다 키워 자기가 키운 거 하나도 없어요.
 
바닷속에다 다 집어넣어서 그걸 건진 걸 가지고 갖다 팔아서 먹기도 하고. 집도 사고. 아이들 대학도 보내고. 어부가 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가서 건져온 거밖에는, 그렇게 150만 종류의 생명체가 바다에 있다는 거예요. 이 지구가 얼마나 귀합니까? 육지하고 바다뿐만 아니라 땅속에 엄청난 보화들이 있어요.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게 금이죠. 금을 제일 좋아합니다. 그런데 화학 물질 가운데 쭉 보니깐요. 금은 열다섯 번째 밖에 안 되더라고, 근데 금보다 조금 더 귀한 것이 백금이래요. 백금보다 좀 더 귀한 것이 다이아몬드래요. 근데 가장 물질 가운데 이 땅 속에 있는 물질 가운데 이 세상에 있는 물질 가운데 가장 비싼 것이 반물질이래요.
 
무슨 소린지 반물질, 반물질 뭐냐 천문학자들은 우주가 시작됐을 때, 그 우주가 시작됐을 때 첫 번째 재료 그것이 엔트메터라고 반물질인데, 그 반물질은 1그람만 있어도요 여기다 써놨는데 1그람만 있어도 62조 몇천억 달러야, 1그람만 해도. 이 땅속에는요. 뭐 기름도 있고, 별거 다 인간이 좋아할 수 있는 비싼 그런 보물들이 다 땅속에 있어요. 하나님이 창조했을 때 땅속에 집어넣어서 창조를 했어요. 캐 가지고 먹고 팔아서 먹고 살라구 이렇게 땅도 그렇고 육지도 그렇고 바다도 그렇고 이 지구 하나만 해도 엄청난 가치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여러분 한 사람이 이 엄청난 지구보다도 여러분이 더 귀하다는 겁니다. 더 소중하다는 거에요. 왜 영혼 때문에 육체 때문에 육체는 아까 얼마였다고 그랬어요. 얼마라고 8,831원밖에 안 돼. 근데 여러분은 아내의 하나님이 넣어주신 그 영혼이 이렇게 귀한 그런 존재로서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의 아르켜 줘서 내가 이렇게 소중하구나! 그런데 여러분 지금 지구에 몇 명 있습니까? 81억명이 있어요. 81억 1억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 지금 지구에 있는 사람만 따져도 전 세계에 81억 명의 81억 개의 지구의 그 가치가 이 한 이 땅에 있잖아요. 지구에 그런데 지구는 조그마한 존재예요. 우리 우주에서 제일 적은 별 가운데 하나예요. 우리 우주에는 1억 개의 별이 있다는 거예요. 우리 우주만 근데 우리 우주 같은 어주가 또 1억 개가 있다는 겁니다. 엄청난 이 우주 다 합한 것보다도 여러분 한 사람의 영혼의 가치가 더 귀하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오늘 이 저녁에 분명히 드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깨달아야 돼요. 그래야 여러분의 가치가 뭔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귀한 종류인지, 사도바울는 뭐라고 말하냐면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창조되는 걸작품이다. 그래서 걸작품이다. 매스 더 피스, Mass the peace에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변화시켜서 죽어 있는 영혼을 살려서, 정말 영원히 가치 있는 그런 존재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냈다고 말씀하셨어요.
 
여러분과 저를 위해서, 이 사실을 알면 참 내가 참 귀한 존재구나! 정말 귀한 존재구나! 근데 그 귀한 존재인데 그 영혼이 살아있는 영혼이 아니고, 죽은 영혼이라는 거예요. 사람 가운데 영혼이 죽은 사람이 있고, 영혼히 산 사람이 있어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하나님 우리한테 주는 그런 가치와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몰르기 아직까지는 모르기 때문에 자기의 가치를 몰라요.
 
나는 왜 이렇게 키가 작게 태어났나 아이고 내가 좀 뭐 좀 더 좀 키가 크게 태어났으면 머리가 좋게 태어났으면 그런 얘기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거 가지고 판단하지잖아요. 사람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존귀하게 생각하시고, 그런데 그 사람의 영혼이 죽어있기 때문에 죽었다는 건 뭐냐, 에베소서 2장 1절에 보니까,
 
*에베소서 2:1,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너희가 죄와 허물로 인하여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즉 인간은 하나님을 피조물, 하나님의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버지인데 아버지에게 등을 돌리고 하나님부터 떠나서 멀리멀리 도망가고 하나님 하도 오랫동안 도망다니다 보니까 어디서 온 줄도 모르는 거예요. 내가 어디서 왔지 아우 원숭이에서 왔다던가 하나님에서 왔는데, 하나님에게서 왔는데, 자기의 존재 가치를 모르는 거죠.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끊어졌어요. 인간이 하나님을 버리고 돌아서서 도망가고, 벌써 얼마나 오래됐는지 모르지만은 아담 과 하와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떠난 이후로 인간은 계속 하도 오랫동안 하나님을 떠나서 도망다녀 가지고 지금은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생물학자가 그냥 그냥 이런 물질에서 바다에서 흔들다가 그게 한참 흔들면 그게 생명체가 된다.
 
여러분 시계를 망치로 부셔가지고, 컵에다 놓고 막 몇 년 흔들면 시계가 됩니까? 시계가 있을라면은 시계를 만드는 엔지니어가 있어야죠. 디자이너가 있어야 되죠. 누군가 지혜를 가지고 능력을 가지고 만들어야 시계가 나오지, 시계 모든 부분이 다 있다고 그거를 100년 흔들어도 시계가 안 돼요. 디자이너가 있어야지. 디자이너가 지혜있고 놀라운 지성을 가진 그 분이 있어서 시계를 만드는 거지, 그냥 흔들어 가지고 생 이 시계가 되나요? 안 됩니다.
 
그것처럼 이제 여러분과 저는 이렇게 소중한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가 없고, 하나님을 모르고 그러나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갈증(渴症)이 있어요. 영적인 갈증이 있어요. 마음속에서 우리 탈북자들 얘기 들어보면요 북한에서는 하나님 전혀 모르죠. 근데 탈북하면서 압록강을 거네면서 뒤에서 빡 쏘니까 하나님이 살려주세요. 그랬더니, 하나님 모르는 사람도 어디서 그런 말이 나와요? 하나님이 살려주세요. 하나님 도와주세요. 그랬다는 사람들이 탈북자 가운데 여럿이 있더라고. 그저 간식을 들어보니깐요.
 
인간 속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어서, 그 하나님의 형상이 영원을 사모하는 열정이 그 속에 들어가 있거든요. 제가 지금 얘기하는 이 얘기를 들으면 그 영혼이 깨어나는 거예요. 깨달으면 깨어나는 거죠. 그 탈북자들도 그러고 이제 나와서 살아났어요. 그래 가지구 얼마 후에 한국에 와서 예수 뵙게 됐다고 그러더라구요. 그 하나님 앞에 기도를 했는데 그래서 자길 살려줬대 총 안 맞고 결국 사람 남쪽에 와서 보니까 자기가 부른 그 하나님이 계시다는 거예요.
 
에 자길 살리셨다. 영 사람이 영혼 때문에 가치가 있는데, 이 영웅은 죽어있는 하나님과 단절된 이 성경에는 죽음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성경의 죽으면 그래서 생명이 끊어져서 없어지는 게 성경의 죽음은 아니고,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이라는 것은 분리되는 거예요. 사람이 죽었다. 그러면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거예요. 그게 그게 죽음이고 하나님과 인간이 분리돼 있을 때 내 죄와 허물로 인하여 내가 죽었던 너희들 죄와 인간의 죄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벽이 생겼어요. 근데 그 벽은 사람이 없앨 수가 없어요.
 
100배를 해도, 천 배를 해도, 40일 동안 금식을 해도 인간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벽을 무너뜨릴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인간의 노력이 모습이 종교죠. 불교만 하더라도 억겁에 한 명이 부처가 된다고 그랬잖아요. 그래서 또 윤회하고 또 돌아와야 되고 또 돌아와야 되고, 내 모든 욕심을 완전히 100% 없애버려서 나의 존재가 아무것도 없는 무로 꺼지 없어질 때까지, 거기가 거기가 부처가 되는 시간이거든요. 존재에서 빠져나가는 거지 근데 몇 번 돌아와야 몇 번 돌아와야 내가 내 모든 걸 다 해결할 수 있어요. 할 수 없어요. 그렇게 해서 구원받을 수가 없어요.
 
구원은, 하나님이 주신 그 가치를 인정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작품이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듣고, 그 죄 나의 인간의 죄 때문에 그것을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므로 죄 대가를 하나님 쪽에서 지불하셨습니다. 인간이 지불할 수 없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목욕을 해도 그 죄를 버릴 수가 없어요. 없앨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 쪽에서 인간의 죄를 죄 값을 십자가 위해서 고통으로 죽음으로 예수님이 그걸 지시고 하나님 쪽에서 십자가 예수님 달렸을 때, 뭐라고 그랬습니까?
 
‘다 이루었다.’ 인간의 모든 죄를 다 이젠 덮었다 예수님의 선언에서 그 다 이루었다는 그 단어가 텔레테스트라는 희랍어 단어인데 그 지불 완료, 여러분과 저의 모든 인간의 죄가 하나님 쪽에서 예수를 통하여 덮어버렸습니다. 완전히 덮어 버렸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의 죄를 다 덮어버리고, 여러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회복시켜서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영원히 한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예수 믿는 겁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 위대한 사랑 하나님이 자기가 만든 인간이기 때문에 그 인간의 죄 대가를 하나님 쪽에서 지불했어요.
 
이제는 예수님 말씀하신 “내가 곧 길이여 내가 진리요 내가 생명에는 이제는 누구든지 나를 통해서 아버지께로 갈 수 있느니라.” 누구든지 모든 사람이 모든 인간이 그래서 예수님 오신 이래로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영원히 사는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구원이라고 표현하는데 그 구원을 하나님의 답 없이 모두에게 다 줌으로써 모든 인간이 다 하나님의 은혜로 영원한 생명을 받아서 예수님을 가슴에 모시고 살다가 어느 날 우리의 호흡이 끝나는 그 시간에 한나라에 가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축복이 우리 인간에게 있습니다.
 
거부하는 사람 빼놓고는 나는 싫어 나는 죽어도 하나님께 안 갈래 아 난 안 가 난 싫어 어떡해 하나님은 아무도 지옥에 보내지 않아요. 문을 활짝 열어놓고 하나님 속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완전히 사시고 덮으시고 영원한 생명을 그냥 은혜로 너희가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으니 이것이 너에게서 난 것이 아니오.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우리의 노력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런 아무도 영혼과 영원한 생명과 구원에 대해서 천국에 대해선 자랑할 자가 없는지 왜 하나님의 은혜니깐요.
 
인간에게 준 은혜군 그저준 은혜거든요. 여러분 가운데서 아직도 하나님이 주신 그 영원한 생명, 천국의 은혜, 죄 사함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분들이 혹시 계시면, 오늘 이 시간이 이 자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시간이요. 오늘 이 시간이 여러분의 영원한 구원의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여기에 들어올 때는 그냥 들어오셨어도 확실히 모르고 가셔서 여러분이 처문을 나가실 때는 내가 그렇게 하나님에게 소중했구나! 내가 하나님의 피조물이었고,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도 사랑하시고, 하나님은 그랬어요. 내가 널 영원히 사랑한다.
 
그랬어요. 왜 하나님의 자녀니까 여러분 가운데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딨어요. 교회에서 보면 이 뭐야? 박야 아들의 그 부모들도 보면요. 살아만 있어도 행복하다고 그래요. 자기 아이가 아무것도 못 하는 아인데도 살아만 있어도 감사하다고, 그런 부모가 있더라구요. 예 자기 자식은 살아만 있어줘도 고맙고 사랑스럽고 그 자식을 미워할 수가 없어요.
 
더욱이나 인간도 자기 자식에 대해서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신 여러분과 저를 얼마나 얼마나 더 사랑하시고, 자기 아들을 희생시켜서 죄를 덮어버리고, 영원한 생명과 부활과 생명을 주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 그 사랑, 오늘 이 저녁에 반드시 여러분의 것으로 받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제 저는 여러분들에게 기회를 드리고 싶어요. 저도 아까 노래하신 분처럼 25살에야 이걸 깨달았어요.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귀하게 만들고, 하나님이 이렇게 사랑한다는 걸 알게 되니깐요. 그걸 알고 깨닫고 나서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믿고 받아들이고 나니까 그때부터 세상이 달라졌어요. 세상 보는 눈이 달라지고 내가 나를 보는 눈이 달라지고 이 세상이 얼마나 더 아름다워지는지, 여러분도 그 체험을 오늘 저녁에 꼭 꼭 하시고 오늘이 은혜의 시간이요. 오늘이 지금이 구원의 시간입니다.
 
여러분들 들어오실 때 이 새생명 축제라고 하는 종이를 받고 들어오셨을 거예요. 지금 꺼내세요. 꺼내서 거기에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제가 이런 복음을 전하니까 어느 의사 선생님이 저한테 저하고 8시간을 씨름을 했어요. 마지막 가서 목사님 어디다 싸인할까요? 그래 어디다 싸인할까요? 그래 목사님 손바닥에 싸인할까요? 아니요. 난 내일 아침에 깨면 세수하면 다 없어져요. 하나님한테 싸인 하세요. 직접 사인하세요. 하나님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이고 은혜인데 구원인데, 하나님에게 직접 사인하세 여기다가, 여러분이 오늘 이 시간에 받은 그 종이에다가 사인을 하세요. 여기다가 제가 시간을 잠깐 드릴 테니까. 성명 뭐 요 간단한 인포메이션인데 목사님, 저는 오늘 이 시간이 저의 하나님의 은혜 시간이고 이 순간이 하나님께서 나 계신 구원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나의 아버지로,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 지시고 나를 위해서 희생하셔서 내가 이제는 영원히 살 수 있게 된 그런 존재로 만들어주신 거 감사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여기다가 서명을 하세요. 지금 잠깐 시간을 제가 드릴 테니까요.
 
♣요약
나를 위대하고 존귀하게 창조하신 분인 것을 듣고 믿으며, 나를 영원히 사랑하신 하나님 나에게 은혜로 민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나에게 주신 이 구원을 내가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나를 위하여 죽으신 분으로 믿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사실을 알고, 오늘 저는 이 기쁨과 감사와 평화를 누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연 자들의 가슴속에 오셨으니, 이제 주님과 함께 하루하루 성장하여서 믿음으로 영적으로 성장하고 깨달아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교회를 섬기며, 이 땅에 빛과 소금으로 많은 선으로 섬길 수 있는 귀한 사람들로 살아내면 주님께서 축복하실 것을 믿어야 한다. 성령님께서 날마다 날마다 도와주시고 기도할 때마다 응답해 주시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실 것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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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10월 30일)
제목: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실 때
말씀: 누가복음 17:11~19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부목사님)
사회: 김대규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호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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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7:11~19,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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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2024년 올해 하반기 사역을 시작하면서, 8월 11일 청계산 산상 기도회부터 글로벌 리더 사경회와 가을 특새 그리고 한교섬 마침내 10.27 연합 예배에 이르기까지. 공교회적 사명을 위해 마음 달려 온 헌신의 시간을 지나왔습니다. 언제나처럼 공동체에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마주한 우리는 이제 조용히 우리 각자 나 개인은 과연 하나님 앞에 어디에 있는지 묵상 가운데 다시 한번 질문하며 주님께 나아가야 될 때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 저는 다리와 같은 우리 일상의 한계를 뛰어넘는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미국 국방부가 한국을 방어하는 주한 미군의 준비 태세를 두고 단언한 표현이 있습니다. 군대 구호인데요. 바로 ‘오늘 밤 갑자기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우리는 싸워 이길 수 있다’는 뜻의 구호가 뭘까요? ‘파이트 투 나잇’입니다. 파이트 투 나잇, 이 표현을 들으신바 그대로 대단히 실전적이면서도 그 어떤 구호보다도 압도적입니다. 군대 다녀오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과연 지금 당장 오늘 밤에 훈련이 아닌 전쟁을 시작할 수 있는 준비 태세를 실전 력을 갖출 수 있는 군대는 과연 얼마나 강력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떠오르실 겁니다.
 
전쟁은 고사하고 이사만 가도 힘든 것이 우리 일상인데 오늘 수요 예배를 마치고 부부가 오셨다면 남편분이 교회가 서초동이니 우리 집은 남양주지만 여보 오늘 우리 저녁에 이사를 합시다. 하면 그 남편은 조용히 두고 가셔도 될 거 같애요. 해맑은 을 견딜 수 없죠 이사도 쉽지 않은데 오늘 밤 전쟁이 일어나서 그 모든 것들을 동원하여 합리적으로 체계를 만드는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파이트 투나잇’ 이 전투 구호는 우리의 신앙생활과도 음미해 볼 만한 연결 지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왜 그렇죠.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어떤 날이 아니라 오늘 지금 바로 내 믿음의 결단과 나의 말과 언어로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삶으로 입증해야 할 신앙 믿는 자로서의 결기라고 해야 할까요? 우리에게는 그런 비장함의 고민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상고해 볼 누가복음 17장 말씀은 예수님의 배려 사형 말기 행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제자의 생활 원리 믿음의 능력 그리고 재림의 시기 등을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그 가운데 오늘 우리가 읽었던 17장에서 11절부터 19절까지는 나병 환자 10명이 깨끗함을 봤다. 라는 소제목으로 성경 가운데 표현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이스라엘의 북동부 지역에 사마리아와 갈릴 사이에서 동서로 이동하고 계세요. 11절과 13절에 소개된바 그대로 예수님은 10명의 나병 환자를 만나십니다.
 
이 사건이 접경지역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은 나병 환자 집단이 인종적으로 뒤섞여 있다는 점을 우리에게 설명해 줍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긍흏을 베풀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13절에 표현된 대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말은 곧 치유에 대한 요청이었습니다. 나병 환자들의 요구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14절에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담담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에 담긴 함축적인 뜻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들의 순종에 따라서 믿음은 드러날 것이며, 치료도 일어나게 되리라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따르면 제사장들에게 도착할 즈음에는 나병이 치유될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한 것이죠. 제사장들에게 향하는 것으로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고, 실제로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문제는 이제부터입니다. 10명의 나병 환자들 모두 믿음을 보여주고 고침을 받았지만, 단 한 사람만 자신의 기적적인 치유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수님께 감사하기 위해 돌아와 그분 앞에 엎드립니다. 그것이 우리가 읽은바 그대로 15절과 16절에 설명되어 있죠. 예수님은 17절에서 오늘 설교 제목 그대로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은 10명의 나병 환자와 깨끗함을 받았을지라도 치유 받았음에도 정작 다른 아홉은 보이지 않음을 지적하는 것으로써 반응하십니다. 그리고 18절 말씀 그대로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 자가 없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돌아와 감사를 드렸던 사마리아 사람의 믿음의 반응을 확증하십니다.
 
예수님은 19절에서, 이 사마리아 사람을 칭찬하시고 ‘일어나 가라 내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인이 예수님께 감사하기 위해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은 그가 다른 9명 모두가 받은 육체적인 치유 외에도 구원까지 받았음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그 예수님의 질문 앞에 내 필요와 요구만 해결되면 정작 감사는커녕, 그 절실했던 간절함이 아주 쉽게 사라지는 저와 여러분의 곧 우리의 적나라한 모습을 마주하지 않습니까? 절망(切望)과 좌절(挫折)의 고통에서 찾아와 만나주시고 치유(治癒)해주신 예수님께 다시 돌아오지 않은 그 9명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이 깨달음이 지금 이 순간 저와 여러분의 가슴을 심장을 그리고 마음의 자소를 강타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그 질문에 대해 내 삶의 자리에서 믿는 자로서 실존적으로 답해야 할 의무와 함께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 각자 믿음의 분량과 신앙의 수준은 어떻습니까? 실제 고난 가운데 연단(鍊鍛)의 상황에 있을 때 정작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다음은 폰회퍼 목사님의 글입니다. ‘그리스도인에 감사에 관하여’ 라는 깊이 음미해 볼 내용입니다. 우리가 통상 얘기하는 감사의 어떤 내용과는 조금 다른 부분을 지적하고 있어요. 잘 들어보십시오.
 
“감사하지 않는 것은 망각과 더불어 시작됩니다. 망각은 무관심으로 연결됩니다. 무관심은 불만을 낳습니다. 불만은 절망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리고 절망은 저주(詛呪)를 초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에게 구원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게 주신 것에 대한 감사가 정직한 회심과 실천하는 사랑으로 변할 때까지 쉬지 않고 나를 고소합니다. 그러나 회심과 사랑의 실천이 이루어지면 하나님의 말씀은 악하고 곤궁(困窮)한 세상 가운데서도 기꺼이 기쁨 가운데 감사할 수 있는 자유로운 양심을 우리에게 선사합니다. ” -폰회퍼 목사님-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징계 혹은 우리가 자초한 인생의 실수와 잘못도 아닌 일생을 일상을 살아가다 어쩔 수 없이 마주하게 되는 비통(悲痛)한 슬픔과 가슴 아프도록 아픈 상실(喪失)에 대해서 어떤 마음가짐과 태도를 가지며 견뎌낼 수 있을까요? 과연 성경이 말하는 인내와 오래 참음은 우리 삶의 고통의 정점에서 어떻게 감사로 전환(轉換)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쉽습니까? 전 어렵던데요. 과연 그게 가능할까요? 이와 관련해서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고 싶은 책이 있습니다.
 
최근에 우리 사랑의 교회 가을 특새와 한교섬(한국교회 섬김의 날)에 오셔서 귀한 말씀을 전해주신 브라이언 채플 목사님이 편집해서 엮은 책이기도 합니다. 우리말로 번역도 됐어요. 이 책인데요. 이 책은 ‘성도의 불행에 답하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가 신대원 때 읽었는데요. 2014년에 나왔습니다. 미국에서는 2011년, 근데 영어 원제가 더 실질적으로 와 닿습니다. 영어원제가 뭐냐면 한국어 제목은 뭐라구요. ‘성도의 불행에 답하다.’ 25개의 설교 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영어는 이렇습니다. ‘더 하디스트 서먼스 유 윌 에버 헤브 투 프리치’("The Hardest Sermons You’ll Ever Have to Preach") 무슨 뜻이죠? 당신이 선포해야만 하는 가장 힘들고 어려운 설교들 정도의 제목이 되겠습니다.
 
실제로 이 책 안에 담긴 설교문 중에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게 없습니다. 비난의 비극 갑작스러운 돌연사 어린 자녀의 죽음 젊은 가장에 비명횡사(非命橫死), 장애(障礙)를 가진 성도의 고통스러운 죽음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자살 문제까지 그리고 그 자살에는 ‘브라이언 채플 목사님’이 다룬 하나님을 안 믿는 자의 자살도 아니고 성도의 자살도 아니고, 이 책에는 목사의 자살 문제도 다루고 있어요. 저 같은 목사가 자살했을 때, 어떻게 설교를 할 수 있을까요? 그 설교 문이 이 책에 있습니다. 이 책을 추천한 우리나라의 어느 신학자는 추천해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잘 들어 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실제 성도들의 고단한 혹은 잔인하기까지 한 삶의 여정에서 과연 해답을 제시해 줄 수 있을까? 단순히 하나의 개념적인 신앙적인 확신으로만 그치는 것은 아닐까? 상실과 고통으로 인하여 눈물을 쏟거나 혹은 그런 눈물조차 메말라버린 아픔의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은 어떤 위로(慰勞)와 답을 줄 수 있을까? 목사인 우리는 고난과 역경이라는 절망적인 상황에 갇혀서 출구를 찾지 못해 무너져 버릴 것 같은 이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으로 무엇을 설교하며 권면할 수 있을까? 이 책에 담긴 이 질문들은 여유롭게 즐길 만한 지적 사색에 속한 것들이 아니다. 사방이 꽉 막혀버린 듯한 절망적인 어려움 속에서 깊이 신음하고 울부짖으며 몸을 떨면서 차디찬 돌 하나가 들어있는 듯 메인 가슴을 움켜쥐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던진 이 질문들은 사느냐 죽느냐 내가 믿는 신앙이 믿음이 서느냐 무너지느냐는 실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책 가운데 어린 자녀의 죽음에 대해 설교한 로버트 레이먼 목사님의 상한 마음을 치유하는 소망이라는 설교 내용을 발췌해서 여러분에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조금 길지만 집중해서 한 사람의 고난에 찬 신앙의 분투 내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들어주십시오. 247페이지 정도부터 있는데요.
 
‘오랜 교회사를 통해 통틀어 살펴보면 사랑스러운 어린 자녀들이 죽었고 부모들은 자녀를 잃은 것으로 크게 낙심하고 슬퍼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청교도 목사 토마스 보스턴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보스턴의 아내는 건강하지 못했습니다. 아이를 낳는 일은 그녀에게 단지 힘든 일이 아니라, 목숨을 거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9월 8일 보스턴 목사의 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주님은 나의 첫 아들 에벤에셀을 죽음으로 데리고 가셨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보스턴 목사님이 고백한 내용을 목사님이 정리한 것이죠. 나는 내 아들이 우리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그 어느 때보다 지금 더욱 깊이 확신한다. 나는 내 첫 아들을 주님께 보내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은 것을 평소보다 더욱 기뻐하고 있다. 그러나 내 아들의 죽음은 나에게 너무나도 큰 고통이며 매서운 훈련이다. 아들의 몸을 땅에 묻는 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일은 내 아들의 이름 에벤에셀을 내 가슴에 묻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주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1년이 지나고 나서 8월에 보스턴 목사의 아내는 또 아기를 낳았습니다. 보스턴은 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이 아기의 이름을 다시 똑같이 에벤에셀로 짓는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에 이 아기도 홍역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보스턴은 아무도 없는 헛간으로 가서 아들의 회복을 위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내 아들 에벤에셀을 살려달라고 그의 생명을 건져달라고, 하나님께 전심을 다해 간구했다. 그러나 내 모든 전부를 쏘아부은 기도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나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욱 나빠지고 있었다. 실제로 몇 시간 후에 나의 두 번째 아들 에베에셀은 숨을 거두었다 첫째, 아들이 죽어서 이름이 에벤 에셀이었는데. 그 아들을 기억함과 동시에 둘째, 아들을 얻은 기쁨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며 에벤 에셀이라고 지었는데 그 두 번째 아들도 죽은 거죠. 첫째, 아들에 이어 둘째, 아들의 장례식을 치른 후에 보스턴 목사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이제야 비로소 확실히 깨달았다. 나는 내가 이 세상 가운데 살아가는 동안 경비하게 몸을 낮추고 주님을 따라 미지의 길을 걸어가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죽은 아이를 관에 누일 때 아내는 아들의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나는 얼굴에 덮인 수의를 들추어 내 아들을 잠시 바라보고는 다시 덮었다.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될 내 아들을 하나님의 나라 복판에서 만난 날을 확신하면서....’
 
‘시간이 흘러 나중에 삶을 마감할 즈음 보스턴 목사의 회고록에는 다음과 같은 위대한 동시에 가슴 저미는 신앙 고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내용일까요? 우리 한국어의 위대한 표현이 있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하죠. 나에게는 마땅히 주님을 찬양해야 할 이유가 있다. 두 아들을 먼저 잃은 아버지 목사로서 노년에 선 보스턴 목사가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 좀 뭐라구요. 나에게는 마땅히 주님을 찬양해야 할 이유가 있다. 나는 6명의 자녀를 둔 목사이자 아버지이다. 그 가운데 한 명은 이미 무덤 속에 있고 한 명은 아주 짧게 나와 함께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모두 에벤에셀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 자녀들 중 단 한 명도 결코 잃지 않았다. 뭐라구요? 그러나 나는 내 자녀들 중 단 한명도 결코 잃어버리지 않았다. 나는 부활의 날에 내 모든 자녀들을 지금 살아있는 자녀들과 함께 이미 죽은 2명의 아들 첫째와 둘째, 에베에셀을 포함하여 모든 자녀들을 다시 만날 것이다. 나에게 목사로서, 아버지로서, 하나님 언약의 말씀 안에 있는 이 단 한 마디 내 자녀의 하나님이라는 약속은 달콤하고도 시원한 목마름을 해결해 주는 말씀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진정으로 간절히 소망하는 삶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이 시간에 아버지의 집으로 달려온 여러분의 간구하고 있는 기도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신앙인으로서 믿음을 가진 자임에도 정작 여러분이 꿈꾸고 목적하는 삶의 목적이 단지 이 땅 가운데서 성공해서 우리 스스로의 이름을 드높이고, 내 인생 가운데 걱정과 어려움 한 번 없이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누리며 내 자녀들과 더불어 편안히 살아가는 것에만 매여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진정 우리의 사명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가운데 임하도록 밀알로 쓰여 지는 것 아니었습니까? 죄인 된 우리가 감히 복음에 감격하여 회심한 그 순간부터, 우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세상을 복음으로 변화시키고자 헌신과 성김을 위해 결단한 것 아니었습니까? 우리 주변에 여전히 고단한 삶의 어려움과 고통에 힘겨워하는 사람들, 특히나 그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분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그래서 제약된 세상에 길들여져서 사망의 길로 달려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신앙인이라는 우리는 성도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부여받은 우리는 과연 어떻게 오늘을 또 내일을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결코 나 개인의 삶에만 고립되거나 매몰되어 있는 것은 이 땅을 살아가는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합당한 삶의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고난에 처절하게 직면할 때 비로소 마침내 타인의 고통이 눈에 보이며 그의 고통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나 자신의 고통과 정직하게 대면함으로써 비로소 우리의 교회 지역사회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게 됩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우리 주변 이웃들에 대해 아무런 고민도 관심도 연민도 없다면 과연 내 신앙과 믿음의 실체가 정체가 무엇인지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현실을 살아가는 내 삶의 모습이 비록 때때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과 저는 다리처럼 초라해 보일지라도 분연히 떨쳐 일어나 믿는 자의 삶이 어떤 것인지, 우리 기도와 말과 행동으로 그리고 세상에 가치 하는 전혀 다르게, 살아가는 삶의 모습 이 교회의 담장 밖을 넘어 세상 가운데 조용히 보여주어야 합니다.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얼마 전에 돌아가신 목사들의 목사라고 평가받는 유진 피터스 목사님이 생전에 말씀하신바 그대로 영광스러운 사역을 끝까지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저 스스로도 하나님 앞에 다시 다짐해 봅니다.
 
목사님이 이런 얘기를 했어요.
‘목사로서 내 일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거나 사람들에 직면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목사로서 내 일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거나 사람들이 직면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삶 속에 언제나처럼 운행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문화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의 문화는 어느 정도 자신이 똑똑하고 제대로 적당히 도움만 받으면 당신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성경에는 행복한 사람이 별로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실 성경에는 행복한 사람이 별로 많지 않습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고단한 극단의 삶 속에서조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쁨과 평안을 누리며 자기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를 맛보며 자신들의 삶을 살아낸 자들입니다. 십자가의 능력 대신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세상에서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분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을 신뢰함으로 우리 삶을 에워싸는 모든 삶의 정황을 넉넉히 이기며 무엇보다 의지적으로 우리의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쁨으로 달려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유진 피터스-
 
요약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 저는 다리’와 같은 우리 믿음의 한계를 넘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강력히 경험해야 한다. 피 묻은 복음의 그 원초적인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끝내 승리로 이끄시는 선하신 하나님을 목도하며, 우리 교회의 공교회적 헌신과 섬김 가운데 겸비(兼備)함을 가지고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위로가 되는 사명 공동체로 온전히 사용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우리가 무슨 희망이 있으며, 우리 가정의 역전이 가능할지, 내 자녀들이 성경이 말하는바 그대로 장수의 화살이 될까, 막막하기만 하고, 도대체 이 경제적인 어려움은 삶의 질 권은 우리의 부모님의 병환과 그리고 억눌리는 삶의 모든 고단함의 이유들이 과연 해결될 수 있을까? 라는 걱정과 맨 정신에 잠을 잘 수 없는 때가 우리를 강타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은 지나감과 동시에 영원하신 하나님 하늘 보좌를 박차고 우리를 위해 친히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의 그 보혈의 피를 뿌리셔서 우리를 위해 다시 사신 그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의 모든 삶의 문제는 역전될 줄 믿어야 한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실 때, 주님이 다시 오실 그날까지 우리 모든 믿음으로 지켜나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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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10월 23일)
제목: “어느 민족 누구게나 결단할 때 있나니”
말씀: 히브리서 11:23-27
찬양인도: 쉐키나(이동선 부목사님)
사회: 강건우 부목사님

설교자: 이민건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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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23-27,
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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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5년 미국 의회에서 영토 확장을 위해 멕시코와 전쟁을 하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이를 적극적으로 반대했습니다. 그를 도와 하버드대 로웰 교수라는 사람도 이 링컨과 마음을 같이 모으게 되었습니다. 그는 노예 제도와 영토 확장을 위한 이 전쟁을 방지하는 수단의 하나로서, 1845년 12월에 현재의 위기 더 프레젠 크라이시스라는 제목의 이 5행시, 18절의 장편 서사시를 발표하게 됩니다. 이것을 영국 회중교회의 찬송가 작가인 윌리엄 가렛 호더가 압축해서 32행의 찬송 시로 개사를 했고요. 제가 오늘 설교 제목으로 삼은 찬송가 586장 ‘어느 민족 누구게나’로 작곡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어느 민족 누구게나, 이 결단할 시간이 한 번쯤은 반드시 온다. 라는 것입니다. 국어사전에 보면 결단 이렇게 정의하더라고요. 결단, -결정적인 판단을 하거나 단정을 내림. 또는 그런 판정이나 단정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여러분 이 결단은요. 한자로 보시면 결단(決斷)할 결, 과 끈을 단, 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냐면 여러분이 대단한 결단도 참 중요하지만 더하여서 불필요한 것들을 과감히 끊어내는 과정이 정확하게 만나면 결단이 이루어진다. 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수많은 믿음의 결단들이 등장하는데요. 대표적인 예로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다니엘입니다. 다니엘 1장 8절에 보면요.

*다니엘 1:8,
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다니엘은 결심과 불필요한 것들을 이렇게 결단하는데요. 한번 보시겠습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결단을 하고요.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는 이 단절하는 모습을 보게 되죠. 또한 여러분 자신의 유대 민족을 살리기 위한 에스더의 결단을 우리는 대표적으로 알고 있는데요. 에스더 4장 16절 말씀 제가 먼저 제가 한번 읽어드릴게요.

*에스더 4:16,
16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구절이죠. 죽으면 죽으리로다. 라는 결단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결단 우리가 많이 해보셨겠지만 생각보다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네, 어렵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이 결단이 믿음과 결부되면 더 어렵다. 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이 눈에 뻔히 보이는 현실과 저와 여러분의 본능, 매우 이숙한 이 삶의 패턴을 뒤로 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그 기준에 따라 이 심장 떨리는 위기의 순간을 믿음의 결단을 하면 그런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우리에게 찾아온다. 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세와 모세의 부모는 이런 상황 가운데서 결단할 결 끈을 단 합치니 결단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야곱도 죽었습니다.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들도 그 시대의 사람들도 모두 다 죽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하셨기 때문에 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번성하고 매우 강하게 되어서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본 요셉을 알지 못하는 애굽 왕이 등장을 하죠. 이대로 두면 전쟁이 날 때, 우리의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염려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 위에 감독들을 세우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 학대를 하지만, 저와 여러분 잘 알고 계신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번성하게 됩니다. 여러분 왜죠? 살아계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더 참지 못한 애굽 왕은 이런 결정을 하게 되는데요. 바로 출애굽기 1장 16절에 나와 있습니다.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출애굽기 1:16,
16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면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아멘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오늘 본문이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장 1절, 2절 제가 한 번 읽어드리겠습니다.

*출애굽기 2:1-2,
1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어.
2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여러분, 오늘 이 본문의 내용을 보고 히브리서 저자는 오늘 본문 23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히브리서 11:23,
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여러분 더 놀라운 건요. 사도행전 7장 20절에 이 구절이 또 나옵니다. 같이 한번 읽어볼게요. 시작

*사도행전 7:20,
20 그때에 모세가 낳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의 아버지 집에서 석 달 동안 길리더니. -아멘 여러분, 그렇습니다. 모세의 외모도 준수했지만 그 본질 자체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쉽게 말하면 이 아이에게 하나님의 분명한 뜻과 목적과 부르심이 있었다는 것을 모세의 부모는 보고 알게 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모세의 부모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의 자세와 태도로 바로의 명령을 거절하는 다시 말해 죽을 각오를 하고 믿음으로 아이를 살리는 결단을 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죠.

사랑하는 여러분,
고대 근동의 절대적인 권력 앞에서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위해 기꺼이 위협을 무릅쓰고 생명을 건 결단을 했다는 것을 히브리서 저자는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놀랍게도 히브리서 저자는 이것을 보고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뭐라고요? 믿음이라고요? 그런데 여러분 모세의 부모가 믿음이 있었지만 사실 여러분 하나도 떨리지 않았겠습니까? 저도 뒤늦게 이제 130일이 된 딸을 제가 얻었는데요.

오늘 본문처럼 잘생긴 딸인데요. 잘생겨서 지금 좀 기도 제목이 있습니다. 여튼 몸에 조금만 제 딸의 열이 나고 아이가 잘 먹던 분유를 먹지 않고, 뭔가 조금만 칭얼거려도 제 마음이 상당히 어려워져요. 여러분, 그걸 생각하면요. 당시 모세가 태어났을 때, 아마 눈빛이 초롱초롱하고 너무나 아름다웠던 아들을 둔 모세의 부모는 이 모세를 살리기 위해 결단한, 모세 부모의 속마음은 여러분 절대로 평안하지 않았을 겁니다. 분명히 모세의 마음도, 모세 부모의 마음도 떨리고 불안했을 겁니다. 요즘 아파트처럼 여러분 당시에 방음이 잘 되지 않았을 거잖아요. 모세의 해맑은 이 웃음소리도 부모의 마음에는 정말 많은 부담감을 줬을 거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이처럼 두렵고 떨리는 상황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은요. 같이 함께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믿음의 사람이란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아멘, 여러분 그렇습니다. 믿음의 사람이란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더 경외하는 것이죠.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을 가장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모세의 부모만 위대한 결단을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훗날 이 부모의 신앙을 본받아 자란 모세도요. 믿음의 결단을 하게 되는데요. 우리 24절 25절 말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히브리서 11:24-25,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아멘. 여러분, 이게 사실 우리가 너무 익숙한 본문이라서 별로 감동이 없는데요. 사실 여러분의 역사적 배경을 조금만 살펴보면 너무나 감동적인 부분입니다. 출애굽기 2장 15절을 한번 보시면요.

*출애굽기 2:15,
15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는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이 미대한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곁에 앉았더라.
-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여러분, 모세는 분명히 내적, 외적 고통과 고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겁니다. 먼저 내적으로는요. 애굽의 왕자에서 한순간에 변방의 낳은 예로 세상 적으로는 여러분 폭망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어떤 분이 이 모세가 도망간 애굽에서 미디안까지의 거리를 구글 지도로 표시를 해놓은 걸 봤는데요. 한 700km 모세가 도망을 갔습니다. 상상이 안 되시죠? 서울에서 부산까지가 보통 350에서 400kg가 되는데요. 그 두 배의 거리를 모세는 살기 위해서 도망을 갔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미디안 땅에 머물며 여러분 우물곁에 묵묵히 앉아 있는 모세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보란 말입니다. 모세에게나마 가장 인생에서 힘든 시간이었을 게 분명합니다. 또한 여러분 모세는 외적으로 심각한 고뇌가 있었을 거예요. 한 예로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곧 자신의 형제를 치는 것을 모세가 봅니다.

그때 모세는 정말 이렇게 좌우를 살피고,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여 모래에 감추게 되는데요. 사실 여러분, 이건 모세가 동족 히브리 사람을 도와준 거잖아요. 그런데 다음 날 히브리 사람 2명이 싸우고 있었는데, 그 섬을 말리는 모세에게 히브리 사람이 애굽 사람에게 모세가 그 전날에 행한 일들을 고백하고 고발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 고발했다는 것을 보면요. 히브리 사람 중에는 전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민족적 자부심을 가지지 못하고, 너무나 오랫동안 노예 생활을 했기에 종살이를 해서, 히브리인의 정체성마저 노예로 전락했다는 것을 우리는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요. 노예로 고통 받고 있는 히브리인들을 자기 형제라고 칭하면서, 지금 민족적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 좀 길게 말씀드렸는데요. 무슨 말씀을 드리고 싶냐면 모세는 민족, 자기 민족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가진 사람이었다. 라는 것입니다. 상상컨대 여러분, 모세 바로의 딸에게서 모세가 자랐고 수많은 학문과 사상을 모세는 교육을 받았을 것입니다. 제가 이 문헌을 찾아보니까 히브리, 특별히 이집트 왕궁의 문헌들을 보면 왕족 자녀들의 교육은요. 이 어릴 때부터 약 12년간 지속되었대요.

제가 사랑의 교회를 부임하고 종종 타 교회 목사님들 성도님들과 소통할 때가 있는데요. 제가 이렇게 인사를 해봤습니다. ‘해와 같이 빛나는 얼굴로 내일 뵙겠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교회 교육자들이 정말 와!!!~ 그랬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한교섬(한국교회섬김의 날) 목사님들에게 여기 나오는 저희 주제처럼 목사님의 목회가 이 ‘목양 진심, 사명 전심’이 되기를 정말 간절히 소망합니다. 로 인사를 드리니까 목사님들이 정말 사랑의 교회의 교육차는 품위가 다르다. 라고 말씀을 하셨어요.

여러분 몇년만 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동고동락을 해도 말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고 행동이 바뀝니다. 이런 상황에서 모세에게 자기 민족을 향한 불타는 마음이 여전히 살아있었다는 것은요. 어머니 요게벳이 모세가 장성할 때까지, 그의 옆에서 자기 민족에 대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 교육을 철저히 시켰다라고 성경 해석학자들은 입을 모읍니다. 이런 신앙적 민족적 정체성이 모세에게 분명히 있었기 때문에 무려 400년이란 시간을 애굽인들 가운데 동화되지 않고, 구별되게 살아갈 수가 있었다. 라는 것입니다.

저는 사실 여러분,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오정현 담임 목사님께서 토비 때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계신 것처럼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며 칠천 기도 용사뿐만 아니라, 사랑의 교회 다음 세대가 제대로 된 여러분이 정체성 민족성을 가지기 위해서 전력투구하시는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혹시 여러분 2주 전 주일 예배 대표 기도문 두 번째 구절 생각나십니까? 네 생각나시는군요. 여러분 안 나실까 봐 제가 가지고 왔는데요.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이런 기도 제목이었습니다.

*대표 기도문 두 번째
“주여 남은 자가 되어 임전무퇴(臨戰無退) 기도의 종을 쳐서 가정과 직장과 무너져가는 민족의 심장을 울릴 때 다음 세대에게 거룩한 나라를 물려주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정말 가슴이 뜨거워지죠. ‘마크 그랜빌’이라는 이 성경 해석학자도 그의 출애굽기 주석에서 모세에 대해서 이렇게 해석을 했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돌보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는 인물이었다. 그 리더십의 핵심 특징은 사심 없는 태도와 공동체를 향한 깊은 사랑의 실천에서 드러난다. -마크 그랜빌-
-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는 인물을 통해 성경적이고 바른 민족 정신을 가진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그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 저와 여러분이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에도 특별한 은혜를 주시고 연약한 인생에 개입하시며 영광을 드러내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여러분 꼭 기억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의 관점에서 모세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히브리서 11:27,
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모세 역시 마음속에 여러분 왜 두려움이 없었겠습니까? 모세 또한 왕실에서 교육을 받았기에 세상적인 관점, 목표 지향점이 누구보다도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현실적인 가치를 따라서 살아가지 않고 지금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면서 참았다.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단순히 애굽 사람을 실수로 죽여서 도망간 게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분명한 믿음의 관점과 결단이 모세에게 있었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저는 오늘 본문의 이 구절을 보면서 사실 오랜 고민에 빠졌는데요. 우리 26절 말씀 여러분 한번 읽어주시겠습니다.

*히브리서 11:26,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아멘 여러분, 모세가 이 결단을 했던 당시에는 여러분 모세가 살았던 그 당시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지 않았잖아요. 훨씬 이전의 시간이었습니다. 모세에겐 여러분, 그리스도의 개념이 아마 분명히 없었을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40일간 독대했을 때,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모세 5경에 기록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아마 모세는 확실하거나 아니면 어렴풋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을 거예요. 신명기 18장 15절이 여러분 바로 그 근거입니다.

*신명기 18:15,
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말하고 있죠. 여러분, 그렇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이 민족을 향한 뜨거운 마음 위에 하나님이 일으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하늘의 모든 명예와 왕권을 버리고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늘 마음에 품고 믿음의 결단을 했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는 거예요. 맞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통해 모세의 모습 또한 하나님 안에서 대단한 결단을 했다. 위대한 결단을 했다는 것을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모세가 했던 믿음의 선택은요. 여러분 당대를 뛰어넘는 이 시대와 시대를 뛰어넘는, 초월하는 심지어 여러분 장차 보내실 나와 같은 선지자 즉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며 믿는 믿음 가운데서 했던 결단, 수천 년 후에 일어난 일들을 미리 바라보면서 했던 결단이다. 라는 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그렇잖아요. 오늘 이 예배를 마치고 본당 뒤에서 누가 수백만 원 하는 이 골든바 하나를 저와 여러분에게 모두 다 나눠준다고 한번 상상해 보세요. 벌써 기대되고 심장이 뛰시죠. 여러분, 예배에 집중하지 못할 거예요. 서초동에 있는 모든 보물을 모아서 다가오는 주일날 저와 여러분에게 특별히 수요일저녁기도회에 오신 여러분에게만 준다고 여러분, 한번 상상해 봅시다. 주일날 새벽 1시부터 교회 본당은 터져 나갈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모세가 아주 분명히 확신하고 결단했던 것은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가 애굽의 모든 보물을 모은 것보다 더 크다고 확실히 믿는 확고한 믿음이 모세에게 있었다. 라는 것입니다.

오직 그것만을 더 큰 재물로 정말 믿고 살고 생명을 걸고 모세는 결단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모세는 특권 계층의 자녀, 그렇습니다. 아직 금 수저를 넘어서는 아마 다이아몬드 수저 같은 인생을 모세는 살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가 미래가 보장된 이 왕궁의 안락함보다 광야를 선택했습니다. 여러분 정말 이 시니컬하게 우리가 본문을 보면요. 이 상, 누가 어떤 방식으로 주는 상입니까? 이 상, 언제 주는데요 어디서 누가 줍니까? 사실 여러분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뜻하신 때에 그 장소에서 하나님께서 주실 거지만 현실적으로는 여러분 이 상, 언제 받을 줄 아무도 모릅니다. 모세 자신도 몰랐을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여러분 눈에 보이지 아니하고 도대체 하나님이 언제 주실 지도 모르는 이 상을 기대하고 기도하면서 바라보는 삶이 바로 믿음의 삶이라고요. 이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성경은 우리 하나님은 그래 모세가 정말 믿음이 있네. 저게 믿음의 결단이지... 라고 평가 하신다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는 그 어느 때보다 고민이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영광스러운 10.21일 한교섬이 끝나는 바로 다음 날이 오늘이고요. 그리고 3일 뒤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한국교회 역사상 전무후무한 ‘10.27 한국교회 200만 연합예배 및 큰 기도회’가 저와 여러분들을 특별히 설교하는 저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정말 한 주간 밥맛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래서 라면만 먹었습니다. 사실 이번 10월은 그 어느 때보다 쉽지 않은 일정의 연속이었지만 저의 머릿속에는 온통 모세, 출애굽, 민족성, 결단, 10.27, 200만... 반드시 승리한다. 밖에 없었어요. 어제 목사님들을 호텔 내에서 섬기고 웰컴 할 때도 이 생각밖에 없었어요. 모세, 출애굽, 민족성, 결단, 10.27, 200만, 반드시 승리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설교에 어떻게 믿음의 관점으로, 성경적인 관점으로, 그리고 목양적인 마음으로 여러분에게 잘 전달할까, 성령의 감동으로 전달할까, 정말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여러분 모세의 인생이 정말 머릿속에 제가 딱 정리가 되더라고요. 모세 인생 이랬잖아요. 기도의 지팡이로 홍해를 가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물을 먹고 싶다고 하니까, 반석을 쳐서 삼다수가 나오게 했잖아요. 그리고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기를 먹고 싶대요. 그러니까 여러분 하늘에서 교촌치킨이 떨어지게 했습니다. 심지어 자신을 대적하는 사람들을 여러분 모세가 명하니까 땅이 갈라져서 그 대적하는 사람들을 다 죽여 버리는 정말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너무 멋지죠. 저도 여러분 이런 인생 한번 살아보고 싶어요. 지금 저를 격려하기 위해서 저희 제자 반 여직장인 14반 집사님들 앞에 앉아 계신데요. 여러분, 집사 집사님들이 종종 훈련을 할 때 배가 고프다고 늘 배가 고프대요. 이유를 모르겠는데 배가 고프다고 하면 저도 한번 기도해서 하늘에서 BBQ가 떨어지는 그런 역사가 일어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놀랍게도 히브리서 저자는 그것을 모세의 믿음의 증거라고 제시하고 있지 않다. 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여러분 기적, 은사, 능력, 심지어 대단한 기여와 헌신도 어쩌면 믿음의 증거가 되지 않을 수 있다. 라는 걸 성경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어요. 그렇습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꿈꾸며 누리고 싶은 평생 보장된 그 자리를 이 믿음의 결단으로 스스로 발 베어버리고 다시 말해 단절하고 심지어 자신을 고발했던 그 답답한 속이 터지는 민족과 함께 고난을 받으며 살았던 모세의 모습만이 여러분 믿음이다. 성경은 그렇게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세의 부모 모세도 바로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결단할 때 출애굽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민족의 회복과 부흥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훗날 장정 60만, 약 200만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 이스라엘 민족의 가장 기념비적인 사건도 마찬가지 모세가 믿음으로 결단할 때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세의 부모가 믿음의 눈으로 모세가 확실히 다른 아이라고 그것을 알았을 때, 애굽의 애굽 왕의 이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생명을 걸고 결단했던 것처럼, 모세가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그렇게 말 듣지 않고, 자신을 심지어 고발했던 이 히브리 민족의 영적 골든타임에, 하나님의 마음으로 영적 전력투구하신 것처럼, 사랑하는 사랑의 교회 영 가족 여러분 이번 ‘10.27 한국교회 200만 연합예배 및 큰 기도회’에 반드시 참석하여 하나님께서만 주시는 그 상, 그 상급 그 영광을 저와 여러분 반드시 경험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제 네이버 지도로 찾아보니까, 교회에서 광화문까지 총 11km 걸어서 3시간 4분, 교회에서 서울역까지 총 8.7km, 걸어서 2시간 25분 걸리더라고요. 사실 우리가 주말에 건강을 위해서 춘천까지 자전거도 타고 가시고요. 건강을 위해서 하루에 아침에 조깅을 5~10kg 하시는 분들도 많이 계시다는 것 알고 있습니다. 평생 한 번 있는 우리가 사랑하는 대한민국과 여러분의 자녀를 위해서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한 죽음으로 사신 우리 한국교회, 이 교회의 영광과 복음을 위해서 여러분, 한번 꼭 결단해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사실 모세의 인생은 여러분 끝난 인생이었습니다. 갈대 상자에서는 기적적으로 살아났을지 모르겠지만, 살인자로 도망자로, 패배자로, 인생이 마무리될 것 같은 위기의 연속이 모세의 인생이었습니다.

이런 모세 인생의 생명의 기적의 빛이 비추어지는 이 기적의 태동과 같은 사건이 있는데, 전 여러분에게 이 말씀을 드리고 오늘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출애굽기 2장 15절에서 17절 말씀인데요.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출애굽기 2:15-17,
15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는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 곁에 앉았더라.
16 미디안 제사장에게 일곱 딸이 있었더니 그들이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그들의 아버지의 양 떼에게 먹이려 하는데.
17 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는지라 모세가 일어나 그들을 도와 그 양 떼에게 먹이니라.
-히브리 민족을 돕다가 수백 킬로미터를 도망친 모세가 여러분, 지금 또 무엇을 하고 있죠? 그렇습니다.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패배감을, 이 절망감을 젖 먹던 힘까지 메워서 일어나 다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그들을 돕고 있는 모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모세의 이 작은 결단이 훗날 그에게 아내와 자녀, 가족이라는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만들어 주었고, 200만을 출애굽 시키는 구원의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수능도 코앞이고 사업도 해야 되고, 요양원에 계시는 부모님 병문안도 해야 되는 것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모세가 있는 힘을 다하여 일어나 남을 도왔던 것처럼, 우리 ‘10.27 한국교회’를 위해 일어나 주시기를 한 번 더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이 민족의 거룩한 방파제 재건을 위해서 결단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10.27의 결단이 우리와 다음 세대를 이 거룩한 세대로 바꾸는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고요. 우리 오전에 담임 목사님께서 생명을 다해서 늘 확신 있게 말씀하고 계신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으로 인해 반드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찬송가 586장 4절을 여러분, 큰 소리로 함께 읽고 마쳤으면 좋겠는데요. 여러분 큰 소리로 우리 마음을 다하여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악이 비록 성하여도 진리 더욱 강하다. 진리 따라 살아갈 때 어려움도 당하리.
우리가 가는 그 앞길에 어둔 장막 덮쳐도 하나님이 함께 계셔 항상 지켜주시리.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셔 항상 지켜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셔 항상 지켜주실 것입니다.

♣요약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도 하나님 위해 수모를 귀히 여겼던 모세처럼 눈앞에 보이는 현실에 좌고우면(左顧右眄) 하지 않고, 부르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믿음의 상급을 향해 가는 평생이 되어야 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신앙의 선배들이 감행했던 믿음의 결단(決斷)을 계승하여 역사의 상선(上線)에서 하나님이 일으키시려는 거룩한 물결에 교회를 주류(主流) 삼아야 하며, ‘10.27 한국교회 200만 연합예배 및 큰 기도회’에 쏟아 부은 진심과 전심으로 소멸하는 대한민국이 깨어나서 가정과 나라가 완전히 새로워지는 새날, 새 역사를 집필하게 되기를 간절히 간구하여야 한다. 어느 민족 누구 게나 결단을 해야 할 때, 모세와 모세 부모처럼 우리는 진심과 전심으로 믿음으로 주님 앞에서 지상명령을 수행해야 한다.
-어느 민족은 누구게나 위기가 오고, 믿음의 결단을 할 때가 온다는 것을 모세를 통해, 모세의 부모를 통해 우리는 보았듯이, 쉬운 길을 택하기보다 믿음의 길을 택할 수 있는, 수모와 헌신의 길을 택할 수 있는 하늘의 상을 받는 그 길을 결단할 수 있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진리를 따라갈 때 어려움도 당할 수 있지만 우리 가는 그 앞길에 어둔 장막 덮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이 함께 계셔 항상 지켜주심을, 모세처럼, 모세의 부모처럼, 말씀을 믿고 결단하는 우리 모두도 반드시 경험하는 자가 되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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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10월 9일)
-제천기도동산금식 기도회- 현장예배 인터넷 방송예배

제목: "싸울 날을 위하여 기도를 예비하는 삶"
말씀: 잠언 21:30-31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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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21:30-31,
30 지혜로도 못하고, 명철로도 못하고 모략으로도 여호와를 당하지 못하느니라.
31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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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겨 놓고 싸운 사람은 항상 뭐가 되느냐 하면요 안정이 되는 거예요. 안정이 되는 것이고. 항상 여유가 생기는 거예요. 여러분 한 번 그 아시죠? 우리 2002년도에 마지막 우리 월드컵 8강 진출하고 그럴 때, 이태리 하고 붙을 때 우리가 2:1로 이겼거든요. 그게 막 너무나 치열하고 막 가슴이 막 막 그냥 심장마비 걸릴 정도로 막 그렇다고 했죠? 어떤 분이 그걸 여유만 만하게 보는 거예요. 이유가 뭐에 재방송이니까. 이긴 거 알고 있으니까 있잖아요. 우리가 인생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신다는 거 확실하면요. 우리의 마음의 여유와 안정과 통찰력이 생기는 거예요. 그럼 예를 들어서 이런 거예요.
고난, 어둠은 왜 있는거, 우리는 막 삶의 어두움을 가지고 막 고민하잖아요. 그런데 이런 하나님이 죽을 때까지 인도하신 것을 믿고 깨닫는 하나님의 백성은 어둠이란 것은 새벽에 오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이런 통찰을 갖는 거에요. 예를 들어서 겨울은 왜 있는가? 그렇다면 겨울은 왜 있는가? 봄이 오기 위하여 아주 철학적인, 아니 사람들은 철학적이라고 그럴지 모르지만 우리는 이 하나님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신다는 걸 믿는 사람은 이런 면에 있어서의 어떤 인사이트가 다른 사람하고 그런 면에서 하나님 저희 어릴 때부터 은혜를 주시고, 저도 저희 환경이 뭐 편한 환경은 아니었고, 어릴 때부터 힘든 일이 참 많았는데요. 그래도 희한하기도 하나님들 인도하시라는 이건 확실한 믿음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낙심하지 않는 거예요.

힘들어도 뭐 한번 하룻밤 자고 나면 또 괜찮아지고, 힘들어도 금식 한번 하고 나면 힘들어도 에 불황은 왜 있는가? 호황기를 위하여... 고난은 왜 있는가? 우리의 성숙을 위하여... 뭔가 이런 있잖아요. 예 이게 하나님으로 끝까지 우릴 인도하시는 금식을 통하여 내가 나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통제하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이런 고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 제가 첫 금식할 때, 그 제가 또 시편, 20편 갖고 제가 말씀을 드렸지만, 너의 마음의 생각과 객을 다 이루어 주시리라고 느낌으로 있겠지만, 오늘 수요일 저녁에는 시편 48편 14절을 한 번 더 이 읽어보겠습니다.

*시편 48편 14절,
14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할렐루야! 오늘 이 마음을 가지고 찬성을 한 장 하고 제가 오늘 본문 갖고 조금 더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에 금식하면서 주제가가 있습니다. 그것이 190장입니다. 성령이여 강림하사 나를 감화하시고 애통함과 회개한 맘 충만하게 하사.

저는 또 우리 교회는 아주 한국교회 앞장서서 또 세계적인 컨템프를 이해하고 글로벌한 그런 찬성도 많이 하고, 현대적인 찬성도 많이 하지만 우리 한국 교회가 있는 큰 은혜 중의 하나가 신앙 자본이에요. 그리고 특별히 신앙 자본 가운데 찬송 자본과 함께 이 기도 자본이 있는 것이에요. 기도를 통하여 나는 우리 선대 어른들이 ‘성령이여 강림하사’ 이 찬송 순수하고 소박하고 절박하면서도 순전한 찬송에 이 찬송을 통하여 성령 체험하는 덕 내가 보았고 또 이 찬성을 통하여 하나님이 불을 내리신 것을 보았어요. 들어보면서 제가 말씀드렸는데 제가 옥한흠 목사님이랑 그 96년도에 처음으로 오목사님도 처음으로 저도 처음으로 성지순례를 하는데 96년도에 28년 전에 첫 성지수례를 갔는데 마가의 다락방에 갔어요. 마가의 다락방에 가가지고 목사님 우리 찬송 한 장 부르자 그때 이 찬송을 같이 하는데 너무너무 놀라웠어 찬송하면서 그리고 하여튼 그때 마가의 다락방에서 했던 거 고대로 할게요. 아시겠죠. 그 마가의 다락방에서 고대로 할 테니까.
190장 성령이여 강림하사
1.성령이여 강림하사 나를 감화 하시고 애통하며 회개한 맘 충만하게 하소서
2.성령이여 강림하사 크신 권능 주소서 원하옵고 원하오니 충만하게 하소서
3.힘이 없고 연약하나 엎드려서 비오니 성령 강림하옵소서 충만하게 하소서
4.정케하고 위로하사 복을 받게 하소서 충만하게 하시오니 무한 감사합니다.
[후렴]; 예수여 비오니 나의 기도 들으사 애통하며 회개한 맘 충만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 말씀한 대로 주여,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로다. 주여, 우리 가정도, 우리 교회도, 우리 민족도, 주님 그렇게 되게 하여 주십시오. 정말 소원하면서 기도하시고 그리고 그 일을 위하여 우리 다 성령 충분하게 하시고 한국교회의 기도 자본이 우리 다음 세대에 아름답게 계승되게 하여 주옵소서. 저는 마음에 막 지금 가슴이 설레이는 게 하나 있어요. 이번에 21일 22일 날 한국교회 섬김의 날 할 때 자 우리 순장반이, 그때 우리 순장반 참관할 거예요. 3천 명이 우리 순장님들을 참관할 거예요.

순장반 시간 그때 우리 순장님들과 우리 모든 우리 오신 8천명의 목사님들이 이 찬송을 할 때 하나님 불 떨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그들을 제가 사모하고 지금 어떤 면에서 믿음으로 고백하고 확신하는 것이 그럼 오늘 이 자리 제천 자리, 서울 본당 자리가 2024년 10월 22일 오전 10시에 순장 반 참관하는 그 시간에 불 떨어지는 것의 예고편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모든 우리 자녀들을 우리 모든 성도들 다 은혜 받게 하여 주시옵시고, 무엇보다도 이번 글로벌 특새에 불 떨어지게 하시고, 그다음에 10월 21일 21일 한교섬에 불 떨어지게 하여 주시옵시고, 무엇보다도 100만 명이 모였을 때, 불 떨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얼마 조금 전에 이번에 참여하겠다는 사람 벌써 40만 명이 등록을 했습니다. 40만 명이 등록을 했습니다. 그리고 서울시장님하고 내가 연결을 해 가지고, 서울광장에서 하기로 했습니다. 여러분, 놀라운 일입니다. 서울광장 함부로 안 빌려줍니다. 서울광장 상으로 해서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십장부인 서울시청 서울시청 앞에 서울시광장에서 100만 명이 모일 때 하나님 성명에 불이 떨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다 같이 주여 성령 충만의 은혜를 달라고 주여 성령 충만의 은혜를 주옵소서. 크게 2번 외치고, 한 4~5분간, 뜨겁게 오늘 금식기도 동산에 뜨거운 오늘 금식 기도 기간에 다 같이 올리기도 하겠습니다.
성령이여 강림하사 권능을 주시옵소서. 원하옵고 원하오니 충만하게 하여 주옵소서. 힘이 없고 연약하나 엎드려서 비오니 성령 강림 하옵소서. 충만하게 하여 주옵소서. 다시 한 번 성령이여 강림하사 크신 본능 주소서.

우리가 믿음의 이 프로세스와 성령 충만의 프로세스가 비슷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것은 우리 죄 때문에 믿어야 되는 것처럼,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것은 내 어떤 감성이나 그다음에 어떤 내 상황에 따라 걸린 것이 아니라, 예수로서의 보혈과 성경의 권위를 믿고 그것을 내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에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 믿고 난 다음에도 우리의 삶이 좀 메마르고 육적인... 수도 있고 또 헤멜 수도 있고, 권한 가운데서 어려울 수도 있는데,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성령충만이에요. 그럼 그 성령충만 어떻게 우리가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까? 성령충만이 불이 떨어진다 그랬을 때, 아니면 성령충만이 나 내 삶을 어떻게 영광스럽게 뜨겁게 한다. 이랬을 때 그것은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이에요. 똑 같애요.

그 메카니즘이 무언을 믿음으로 받는 것처럼 성령 충만도 믿음으로 받는 것이에요. 그래서 금식을 하고 이런 찬양을 하고 주님, 나오다 보면 믿음이 더 커지고 믿음이 더 확실해지고, 흔들림이 없이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오늘 이 자리에 참여한 모든 분들 성령 충만에 대한 믿음의 은혜로 고백하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할렐루야!! 감사드리고 오늘 이 제천에서 오늘 저녁 수요 예배드린다고 그러니까 우리 담양에 있는 분들도 오신다고 그래요. 담양에서 오시면 어디 있어요? 어이고 저 담양에서도 담양에서도 오신 분을 믿음으로 박수 합시다. 오늘 그러니까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정말 서울본당 보세요... 담양에서 오신 분을 우리가 믿음으로 더 우리 고맙습니다. 우리 다 함께 하나님의 말씀 한 군데 더 보겠습니다. 잠언 21장 30절 31절을 보겠습니다. 한 15분 정도 제가 더 싸울 제가 설교할 힘이 없어요. 지금 그러니까 15분 중에 집중해서 말씀드릴 테니까.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는 것에 대해서 오늘 잠언 21장 30절 31절 두 구절을 가지고 ‘싸울 날을 위하여 기도를 예배하는 삶’ 사올라를 위하여 뭘 예배한다고요? 기도를 예비하는 삶, 간절한 기도, 금식기도, 주님 앞에 우리가 매어 달리는 기도, 하여튼 여러 기도를 예비하는 삶, 잠언 21장 30절 31절 같이 우리 같이 보겠습니다. 시작,

*잠언 21:30-31,
30 지혜로도 못하고, 명철로도 못하고 모략으로도 여호와를 당하지 못하느니라.
31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
-오늘 싸울 날을 위하여 특별히 싸울 날은 동성애 차별금지법, 이 어려운 상황을 위하여 우리가 오늘 기도를 예비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이김을 우리가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지금 벌써 오늘 들어오는 게 보건복지부 장관한테 지금 벌써 피보험자 동성들, 동성 커플들 피보험자 보험 해주는 거, 그거 벌써 질문하고 이렇게 해 가지고 이번 국회 하면서 10월 23일인가, 그걸 벌써 한다고 그러는데 여러분 올해 10월 10월 27일 날 하기 전에 그런 것들이 다 처리되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아직 그것이 너무 중요한데 저는 지금 독재 국가나 특별한 이슬람 국가가 아니고 OECD 국가 가운데서 동성애법 차별 금지법이 통과되지 않는 나라가 우리가 유일한 거죠. 우리가 이걸 막아야 되는 것이에요. 이걸 싸울 날을 위한 싸울 차별금지법을 앞에 놓고, 우리가 반드시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을 해야 되는 거예요. 동성애의 차별금지법이 왜 이렇게 심각해졌는가? 왜 지금 동성애라는 이슈가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고, 이것이 통과되면 왜 문제가 있는가? 뭐 제가 여러 번 말씀드리지만 이건 단순한 동성애만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하나님이 제정하신 두 신적 기관이 있는데, 하나는 뭐예요? 교회고, 또 하나는 뭐예요? 가정입니다. 그러니까 사탄의 최고의 전략은 뭐냐면 하나님이 예배하신 두 기관을 무너뜨리는 거예요. 가정과 교회를 무너뜨리는 건 최고의 사탄의 전략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그 전략을 이기려고 교회와 가정이 선순환을 하고 교회와 과정에 우리가 철 아주 그냥 강철 동맹을 맺고 교회 같은 가정, 가정 같은 교회, 다시요. 뭐 같은 교회라고요. 가정 같은 교회 뭐,같은 가정이라고요. 교회 같은 가정, 이걸 막으려고 사탄은요. 강철 동맹을 깨뜨리려고 별짓을 다 하는 것이에요.

예를 들어서 이탈리아의 사회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가 있었어요. 이 안토니아 그람시는 마르크스주의에 아주 그 공산주의자인데, 머리가 좋아 가지고 자 이거 1990년 80년 90년대 소위 공산주의가 러시아가 소비에트가 멸망하고 수많은 그 공산 나라들이 다 이렇게 다 엎어지게 되니까. 그람시가 왜 공산주의가 무너지지? 공산주의가 무너진 원인이 뭘까? 하고 여러 가지 찾아봤는데 결국은 답이 뭐냐면요 기독교 때문에 공산주의가 무너진다. 이랬어요. 공산주의 무너지는 원인을 어디서 찾았다고요? 기독교에서 실패 원인을 어디서 찾았다고요? 기독교에서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따라야만 가르치기 때문에, 교회가 있는 한 이 공산주의 사상을 가지고 사회를 뒤집고 전복시키기가 어렵다.

과거에 마르크스주의가 마르시즘이, 경제 이론에 탈을 쓰고 사회를 전복시키는 자본론부터 시작해 가지고 다 경제 이론을 갖고 한국의 서울대학교에 있는 어떤 자생적 사회주의자들, 경제학과 이런 데서 다 나온 거예요. 경제학을 가지고 사회를 전복시키려고 했지만, 결국은 실패해갖고 지금은 뭘 탈을 썼느냐 소위 문화를 탈았어요. 클처, 그래서 이 문화라는 가면을 쓰고 기독교의 전통가치를 뒤흔들려는 전략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소위 문화 막시즘, 컬추럴 막시즘을 가지고 그 대표적으로 동성애의 옷을 입고, 또 소수 인권의 옷을 입고, 동성애를 문화로 포장해서, 기독교의 중요한 전통 가치인 가정을 무너뜨리고, 가정 같은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거에요. 이해가 가십니까? 싸우려면 적을 알아야 되니까,,, 그래서 지금 이들의 전략은 너무나도 치밀하고 이들은 되게 돈 있는 사람들이고, 되게 잘 나가는 사람들이고 공부 많이 한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이들이 갖고 있는 경제력과 네트워크는 전 세계적으로 너무 강력해 가지고 좀 있어 보이거든, 그리고 좀 아 소수 뭐 이렇게 하고, 어 뭐 그런 사람 차별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게, 그 차별 금지법이란 말을 앞으로 바꿔야 돼 이걸요. 우리가 꼭 차별하는 것 같잖아. 그 우리가 언어의 프레임에 끼거든거에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돈이 많고, 그다음에 메디어 장악하고, 다 이래 갖고 아주 그냥 아주 그냥 전 세계를 쥐락펴락하고 돈이 많고, 이래 갖고 전 세계 미디어를 장악하고 엘리트 집단을 갖고 우리의 무의식 세계를 파고들고,

제가 오늘 낮에도 우리 그래서 장로님 뭐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기가 막힌 얘기를 하더라고요. 장로님 왜 법사위원회의 동성애를 통과시키겠다고, 그런 사람들을 왜 그렇게 난리예요. 그러니까 답이 그거예요. 동성애를 사명으로 받아들이는 거에요. 그리고 대표적으로 정의당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정의당은 동성애를 사명으로 받았어요. 그래가지고 정의당의 1호 정책이 뭐냐면 동성애 소수인권법 통과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당 자체도 전체 메이저에서는 좀 소수니까, 그렇듯 심각한 문제는 이걸 가지고 이걸 가지고 이제 과거에는 인권위원회, 인권위원회가 거의 대부분 다 문화 막시즘에, 그래서 인권위원회가 이걸 받아 가지고 얼마나 군대도 인권을 한다. 그래갖고 군대도 엉망으로 만들고, 그다음에 아이들 소수인권의 성적인 성적 지향 마음대로 자유를 준다고 그래갖고 우리 아이들 교육도 엉망으로 만들고, 거기 다 국가인권위에서 한 거예요.

그래서 만약에 동성애가 이게 통과가 되면, 통과가 되면 국가 인권위원회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받게 되는 거에요. 모든 걸 간섭하고 관할하고, 교육, 정치, 사회, 회사, 다 관할하고 가장 심각한 건 교회를 치는 거에요. 내가 이런 얘기를 하면 당장 나한테 여러분 그래야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우리가 근원을 깨닫고 알게 되면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려야 되는 거예요. 지금 이거는 단순히 동생 10월 27일은 단순한 시간이 아니에요. 이것은 세계 교회가 새로워지느냐, 마느냐 하는 출발점 그야말로 불쏘시개가 돼야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우리는 기도할 때, 그런 기도까지 한 거예요. 뭘 기도했냐, 이제 10월 27일 날 그 거대한 집회를 통하여 제대로 방향을 잡으면 자 독일이다, 호주다, 그다음에 또 영국이나 미국도 마찬가지 이런 특별 캐나다 같은 데 엉망진창 됐는데 이런 걸 보고 용기를 내가지고 전통적 가치, 가정의 가치, 그다음에 교회 교회의 어떤 신실한 복음적 가치를 지키려고 하는 어떤 기독교적 가치를 지금 기독교적 가치를 고수하려고 하는 그런 당들이 이제 안 된다. 이거 다 나라 망하게 됐으니까,, 우리 법 개정하자. 다 통과된 그런 나라들, 우리들 때문에 다시 법 개정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도록,,, 아멘 너무 중요한 거예요. 지금 그래서 이런 사명을 가지고 금식을 왜 합니까?

지금 나도 내 나이에 금식하기 힘들어요. 내 앞에 국밥 참 그리워요. 무슨 우리 다 힘든 사람들인데 부족한데 이렇게까지 우리가 결사적으로 하는 이유가 뭐냐, 우리가 다 모여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안토니어 그람스 미국으로 말하면 놀만 촘스키 이름도 촘스키야, MIT 교수인데 진짜 나쁜,,, 미 전부 다 동부 아이브리그 애들을 다 머리를 세뇌시켜 놓고, 저도 제가 할 수 있는 이건 어떻게 보면 정말 제가 지금 내가 언제 이런 역할을 할 수 있겠나??? 아마 거의 마지막 역할이에요.

제가 지금 그래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하는 영 가족 여러분, 오늘 한국 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사실 이 내용은 그냥 단순한 것이 아니라, 이 동성애라는 이 전쟁을 앞에 놓고, 모략으로도 치유로도 명치로도 안 되는데, 이유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그리고 오늘 이거를 통하여 준비하고 마병을 예비하고, 그래서 제가 화요일 날 여기서 순장반을 이야기 하면서 그런 얘기를 했어요. 전쟁을 앞에 놓은 사람은 전쟁을 앞에 놓은 사람 뭘 생각 하냐?

전쟁을 앞에 놓은 사람은 전쟁을 앞에 놓은 사람은 심각한 전쟁을 앞에 놓은 사람은 죽기 직전의 사람은 죽음이냐? 삶이냐? 라는 그런 생사의 갈림길에 있는 전쟁을 앞에 놓은 사람은 관심이 딱 하나예요. 어떻게 하면 이기느냐? 그래서 우리는 이 전쟁을 앞에 놓고 이기는 거 생각해야 돼요. 승리하는 걸 생각해야 돼. 승리하는 것 생각해야 돼요.

오늘 30절을 보세요. 지혜로도 못 하고, 지혜가 뭐예요? 영어로 위즈덤, 명찰로도 안 돼 똑똑한 언더 스탠딩 NIV에 보니까 인사이트로 나와 있어요. NASB는 그리고 표준 성경은 언더 스탠딩 뉴인터내셔널을 보여주는 인사이트, 모략은 카운스 지혜로도 안 되고, 이기면 누구에게 했다고요. 기억을 할게 통찰력과 시세를 읽어내는 능력이 아무리 대단하다 할지라도, 세상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는 여호와를 당할 자가 없다고 믿습니다. 대신 우리가 같이 우리가 그 타이밍에 하나님의 그 바운더리로 들어가야 되는 거예요. 우리가요. 인간이 세운 치밀하고도 조직적인 계획과 방법과 무기가 제 아무리 대단해도 제가 토비새에서 말씀드렸죠? 900대의 철병가가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홍수처럼 폭우를 쏟으시면 진흙탕에 빠져 가지고 900대의 철병가가 뭐가 된다구요?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에요. 전쟁은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오. 내일이 전쟁이면 우리는 이기는 것만 생각해야 되는 거예요. 기타 등등이에요. 복잡한 것 많이 있겠지만, 이기면 이김만 생각하는데, 그것만 집중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이긴 것이 누구에게 달려 있다고요? 여호와께 달려 있다.

마음의 소원을 가지고, 이기는 것은 주님께 있는 줄 믿습니다. 금식하면 더 간절해 질 거에요. 금식하면 더 간절해지고 진지해지는 것이에요. 하루에 3끼를 안 먹으면요. 할 일이 없어요. 특별히 여성들은 할 일이 없어요. 하루에 3끼를 이렇게 안 하고 기도할 때, 그만큼 더 간절해지고, 집중력 있고, 더 더 진지해지는 거에요. 주님께 맡기고 주님이 통제하시도록 마음을 맡겨야 합니다. 한국 사회에 임한 이 문화 막시즘을 이겨내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의 생애를 힘들게 하는 모든 악한 궤계가 다 무너지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오늘 금식하면서 더 진지하고, 더 긴박하고, 더 간절해지는 간절해질 때, 마지막 결론이 뭐냐? 주님께 더 고정되게 되는 것이에요. 역대하 20장 12절을 다 같이 보겠어요.

*역대하 20장 12절,
12 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
아멘. 오직 주만 바라보는 상황이 어떤 상황인가 하면, 큰 무리가 쳐들어왔어요. 3개국이 쳐들어왔어요. 모압과 암몬과 마온, 이 세 나라가 쳐들어오니까 나라가 풍전등화(風前燈火)예요. 나라가 촛불을 꺼질 것 같은데, 깜박깜박 하는 거예요. 그랬을 때 여호사밧이 뭐라고 얘기 하냐면, 오직 주만 바라보는데 말로만 주만 바라보는 게 아니라, 13절에,,, 13절이에요. 13절 시작,
13 유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아내와 자녀와 어린이와 더불어 여호와 앞에 섰더라.
-할렐루야! 다 모여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아멘. 오늘 이 마음 가질 때에, 이번 10월 27일에 대한민국 교회 모든 교회들마다 여기는 것처럼 모든 사람들 아내와 자녀와 어린아이가 다 함께 모여 시청 앞, 서대문에서 종로까지, 광화문에서 용산까지 100만명이 모여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모아, 오직 주만 바라보며, 승리를 경험하기를 간절히 간절히 바랍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구원에 뿔이시오.
나의 힘이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는 나의 반석이시며 나의 요새 시라
주는 나를 건지시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나의 피활 바위 시요 나의 방패시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그는 나의 여호와 나의 구세주

나의 생명이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는 나의 사랑이시며 나의 의지시라
주는 나를 이끄시어 주의 길 인도하시며 나의 생의 목자 되시니 나를 따름이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생명의 면류관으로 내게 씌우소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그는 나의 여호와 나의 구세주 ♪~~

오늘 말씀 의지해 가지고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배하는데, 우리는 기도를 예비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허락하시는 승리를 경험하게 하여 주십시오. 문화 막시즘 이 참담하고도 잘못된 계획을 하고 있는 한국의 어떻게 보면 좌파라 그럴까,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모든 어떤 그런 것들이 모든 생각들이 다 처리되고 정리되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버지는 이 일을 위하여 모두가 다 모든 형제자매들 한국 교회 성도들이, 아내와 자녀와 남편과 어린이가 다 함께 여호와 앞에 서서 오직 주만 바라보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이번 글로벌 특새, 한국 교회 섬김의 날, 특별히 10월 27일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을 가지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요약
하나님은 영원한 우리 하나님이시니 죽을 때까지 인도하심을 확신하며, 그 하나님의 믿음으로 기도할 때에 우리 모두가 금식의 시간을 기쁨과 감사를 이어져가며, 한국 교회의 기도의 자본이 다음 세대에 계승되어, 기도의 제단을 쌓아 준비하는 모든 글로벌 특새와 한국교회 섬김의 날에 하늘에 불이 떨어지는 경험을 해야 한다. 서울시 광장에서 한국 사회를 살리기 위하여 기도할 때, 이 나라가 건강한 가정, 거룩한 나라로 바로 서가는 나라가 될 것을 믿는다. 하나님 얼굴을 구하는 복음의 나라가 되고,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을 때까지 영원히 인도하실 것을 믿고, 싸울 날을 위하여 기도를 예비하는 삶으로 우리가 주님 앞에 끝까지 믿음으로 나아가며 참 된 승리할 날을 기대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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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10월 2일)
제목: "다윗의 집, 하나님의 집“
말씀: 사무엘하 7:4-17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사회: 강건우 부목사님
 
설교자: 남수현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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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7:4-17,
4 그 밤에 여호와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5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6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
7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다니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8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와 같이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9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
10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그를 심고 그를 거주하게 하고 다시 옮기지 못하게 하며 악한 종류로 전과 같이 그들을 해하지 못하게 하여.
11 전에 내가 사사에게 명령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아니하게 하고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게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13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14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15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17 나단이 이 모든 말씀들과 이 모든 계시대로 다윗에게 말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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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하나님의 부흥을 사모하는 수요저녁기도회에 오신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찬양하고 환영합니다. 오늘 10월 첫째 주, 수요저녁기도회를 통하여서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이 또 우리의 심령 가운데에 차고 넘치는 시간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실 하나님의 말씀은 구약성경 사무엘하 7장 4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인데, 9절까지만 저하고 교독하시겠습니다.
 
*사무엘하 7:4-9,
4 그 밤에 여호와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5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6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
7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다니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8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와 같이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9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
 
-오늘 사무엘하 7장 그리고 앞에 있는 6장 말씀도 같이 한번 보면서 다윗의 집, 하나님의 집, 이라고 하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마음이 힘들고 어려울 때가 종종 있지요. 그러나 힘든 일이 성도의 신앙생활에 전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기도했던 그 기도가 응답되는 기쁨과 내가 충만한 날이 있습니다. 내가 기도한 것을 오랫동안 간절히 또한 기도하였는데 하나님이 들어 응답하셔 주셨다는, 응답 주신 그 감사와 은혜가 마음 가득 채워질 때에 그 마음이 날아갈 듯한 그런 때도 있습니다.
 
오늘 이 본문 사무엘하 7장에 나온 다윗, 다윗 왕의 마음도 그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순풍의 돌을 단 것처럼 만사가 하나씩 하나씩 다 풀어졌습니다. 해결되었습니다. 어려웠던 갈등과 문제들이 다 사라진 듯합니다. 이방 블레셋인들, 전쟁을 날마다, 날마다 하고자 쳐들어왔던 블레셋 인들도 평정하였고 남북을 통일시켰으며, 이스라엘 나라의 수도를 예루살렘으로도 정했습니다. 그러니까 더더군다나 감사한 것은 그토록 오랫동안 고대하던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하나님의 언약궤도 바로 자신 있는 다윗 성으로 옮기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사울 왕이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던 나라와 그 왕정, 정치도 제 모습을 찾아가는 듯합니다.
 
다윗이 이름 없는 목동으로, 예루살렘 어느 골짜기 들판에서부터 바로 이 예루살렘 성 자신의 이름인 이름을 단 성, 다윗성에 오기까지 거리는 불과 10키로, 20키로 내외의 거리였지만 그 들판에서 목동으로 지내다가 왕이 된 이 자리, 다윗성의 왕으로 선 이 자리에 오기까지, 그 세월은 20년이 넘습니다. 시련이 그를 따라 쫓았고 불안과 염려와 또는 도망 자 라는 별명이 그를 쫓아다녔습니다. 떠돌이 신세였던 바로 그 다윗이라고 하는 사람에게 집이 생겼습니다. 다윗 왕으로서, 아주 멋진 궁이 생긴 것입니다. 긴 세월을 쫓기고 불안의 시절 시달렸던 다윗에게 마침내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1절입니다.
 
*사무엘하 7:1,
1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
-정확히 그렇게 나와 있죠. 평안하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평안의 때에 무엇인가를 하고 싶었습니다. 자신에게는 이제 아주 멋진 집이 있으니 이제는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지어 드려야겠다고 생각한 듯 합니다. 다윗은 그 결심을 나단에게 이야기합니다. 가까이 있던 선지자 나단은 다윗의 이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한 것 같습니다. 나단은 무슨 일을 계획하든 그대로 실행하라. 라는 기쁨의 마음을 선지자 입장에서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을 올려 드리고자 하는 이 한 사람, 다윗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다윗이 기쁘고 그 기쁜 마음에 올려드리고자 한 그 마음을 들은 나단 선지자도 매우 기뻤습니다. 다윗의 의견에 무조건 긍정하고 수용해 주었습니다. 3절입니다.
 
*사무엘하 7:3,
3 나단이 왕께 아뢰되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 하니라.
-나단이 이야기했죠. 그런데 하나님께 드릴 것으로 충만했던 다윗, 다윗의 마음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고자 기쁜 마음이 가득했던 바로 그날 밤 나단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생각하지도 못한 말씀을 듣습니다. 오절에 있어요.
 
*사무엘하 7:5,
5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라고 시작한 여기에서부터 하나님께서 나단에게 다윗에게 전할 아주 강력한 말씀을 오늘 전해 주고 있습니다. 다윗의 그 마음의 소원을 더욱 기쁘게 하는 응답이 아니었어요. 평온한 마음에 이제 기뻐 춤추며 뛰게 될 소식을 가지고 갈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한절, 한절 들으면서 나라는 어쩌면 다윗의 요청을 되돌려야 할지도 제고해야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엄습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마 그 사실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불순종과 배신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잘 믿는다 하여 놓고, 하나님을 등 저버리는 배신이 난무하던 마치 전염병(傳染病)과 같이 이스라엘 온 땅 가운데에 난무(亂舞)하던 전염병과 같은 그때에 하나님을 진심으로 섬기고 다윗을 보면 하나님이 늘 함께하는 것 같고, 하나님의 인재가 느껴지며 진심으로 그 마음에서 백성들의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위대한 왕,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왕이다. 라는 칭송이 울려 퍼지는 그때의 나나는 아마 그날 밤 무척 난처(難處)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으로 올려드리고자 하는 마음의 기쁨이 충만하던 그때에도 나다는 이것을 어떻게 다윗에게 전해야 할까, 전하지 말아야 될까, 난처하던 바로 그 순간 그때에도 하나님은 또다른 커다란 계획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오늘 읽은 7장 4절에서 전체 17절까지 그리고 7장뿐만 아니라 6장에 있는 이 내용을 통하여서 저는 먼저 이 교훈을 통하여서 다윗의 기도, ‘하나님의 거절’이라고 하는 이름의 제목을 한번 지어보고 싶었습니다.
 
I. 첫 번째는 다윗의 기도, 하나님의 거절입니다.
 
-오늘 이 본문인 7장 앞서 6장에서 보면 다윗은 언약(言約)궤(櫃)를 자신의 성, 다윗 성으로 가져오기까지 얼마나 많이 준비하고 기도한 우여곡절(迂餘曲折)이 많은 스토리가 있었는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다윗은 이때뿐 아니라, 사무엘하 6장에 이때뿐 아니라, 계속해서 그가 20대의 청춘 전부 10년의 기간 전부의 기간 동안 어떤 일이든 하나님께 먼저 묻고 어떤 때든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자 했던,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에게 도움과 피난처(避難處)와 구원(救援)과 구해주심과 용서(容恕)와 자비(慈悲)와 성령(聖靈)을 구했던 것으로는 1등이었던 것을 주변 사람들도 알고, 나단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다윗에게 당신의 건축 계획은 잘못되었고, 하나님의 건축계획에 방해가 된다. 라는 말을 이제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7장 4절과 5절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사무엘하 7:4-5,
4 그 밤에 여호와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5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이 말씀을 보면, 저는 모세가 먼저 생각이 났습니다. 모세도 시작하기가 어려웠지 하나님 앞에 결국은 무릎 꿇어 순종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꿈에 그리던 가나한 땅으로 가기 위하여 한걸음, 한걸음 나아갔죠. 백성들을 광야에서 가나안 땅으로 나가기에 끊임없는 거절과 불순종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불순종은 더욱 심해졌고, 불만은 더욱 거칠어졌습니다. 민수기 20장 12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제가 한번 읽어볼게요.
 
*민수기 20:12,
12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간다는 뜻이지요. 광야에서 물이 없어서 목말라 죽겠다. 라고 하는 백성들의 그 불평에 옷에는 감정이 폭발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을 불순종하는 이 백성들을 보고 화가 나서 반석에 물을 쳐, 저들이 구하는 물을 얻게는 해주지만 자신의 모습을 통하여 오늘 20장 12절에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거룩함에 훼손(毁損)되는 하나님의 거룩함이 나타나지 않은 그 이유로 인하여 너는 땅에 그 땅에 들어가지 못 한다. 라고 하는 하나님으로부터 거절의 소식을 듣습니다. 사무엘하 6장으로 한번 돌아와 보겠습니다.
 
다윗은 그토록 꿈에 그리던 하나님의 언약궤를 자신의 성으로 가지고 오고 싶었습니다. 기랏여아림 이라고 하는 아주 높은 산악 중에 있는 그곳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었는데, 자신의 성으로 가지고 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가지고 오는 동안 사고가 생겼죠. 언약궤를 운반하는 레위 사람, 웃사가 뒤뚱거렸을까요? 무엇인가 부딪쳐서 출렁거렸을까요? 아니면 언약궤가 떨어지는 것을 손으로 잡은 그 일 때문에 언약계의 운반이 스톱됩니다. 잠깐 동안 오벳에돔의 집에 머무르려고 했는데, 그 기한이 석 달을 가게 되었죠. 첫 번째 실패가 있었지요. 그 실패의 기간 동안 다윗은 하나님을 묵상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디서부터 문제가 생겼는지, 웃사의 실수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라는 방식대로 하지 않고, 사람이 할 수 있는 방식대로 취한 것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언약궤를 옮기는데 무사히 성 안으로 들여옵니다. 사무엘하 6장 14절과 15절에는 다윗이 언약궤를 자신의 성 안으로 들여올 때에 그 모습이 나옵니다. 춤을 추며 하나님을 경비하며 기뻐하며 뛰었다라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무엘하 6:14-15,
14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15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오니라.
-그런데 오늘 이 사무엘하 6장을 넘어, 7장에서는 똑같은 그 언약궤를 보고서는 마음이 조금 달라진 것을 하나님이 눈치 채셨습니다. 다윗은 좋은 집, 자신의 궁 안에 있는 초라한 언약궤의 모습을 비교하면서 ‘내 손으로 더 좋은 하나님의 집을 지어 주어야 되겠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 사무엘하 6장에 언약궤가 자신의 성 안으로 들어올 때에 들어갈 때에 하나님을 기뻐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경배하였던 그 경외심이 희미해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내가 무엇인가 할 수 있다. 라고 하는 그 마음은 웃사의 실수를 어쩌면 반복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고 있는 내가 그래도 이 넓은 궁궐에 저 작은 언약궤를 위하여 저대로 둘 수는 없지. 라고 하는 희미해진 경외심에 이르게 됩니다. 그것은 지금 하나님으로 가득 차 있다. 라고 그리하여서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을 드린다. 라고 생각하던 그때였는데 실상은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넘어가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넘어가기 직전입니다. 그때의 나단 선지자가 이야기를 하죠. 안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들은 나단은 안 된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라는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오늘 이 구절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다윗에게 직접 말씀하시지 않고 나단을 통해 말씀하셨을까? 직접 말씀하셨으면 또 분명하고 더 또렷하고 정신이 번쩍 들었을 텐데, 아닙니다. 선지자를 옆에 두게 한 이유도 있겠거니와 직접 본인이 깨달을 수 없는 상태도 오늘 우리의 성대의 삶 가운데는 있습니다. 그때 우리의 가까이에 있는 우리의 이웃, 우리의 친구, 우리의 공동체 가운데 그 한사람, 우리의 훈련 중에 있는 다른 어떤 사람을 통하여 내게 해주시는 충고, 내게 해주시는 그 말이 하나님의 말씀처럼 번쩍하고, 우리의 마음에 정곡(正鵠)을 찌르는 때도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 속에서 내가 옳다. 라고 하는 그 생각 가운데에 가득 차있는 바로 그때에 내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라고 하는 그때의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칠 수도 있는 것 아닐까요? 그러므로 나단 같이 곁에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며 감사이며 은혜입니까? 나에게 지적하고 나에게 지적 절을 하는 그 사람을 싫어하고, 불편해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조언(助言)이며 오늘 이 다윈처럼 나의 계획을 뛰어넘어 더 큰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주는 감사와 은혜가 넘치는 사람이지 않겠습니까? 첫 번째는 다윗의 기도, 하나님의 거절이라고 했습니다.
 
II. 두 번째는 다윗의 집, 하나님의 집입니다.
 
-다윗은 그 이유를 찾기 위해 사무엘하 7:17-18절입니다.

*사무엘하 7:17-18,

17 나단이 이 모든 말씀들과 이 모든 계시대로 다윗에게 말하니라.
18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나단이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것을 다윗에게 말할 때에는,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하셨다. 비전을 주셨다. 라고 말씀합니다. 이 계시가 묵시와 같고, 묵시가 비전입니다. 하나님이 계시하셨다고 말합니다. 18절에, 좀 쉽게 해석된 표준어 새 번역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18 다윗 왕이 성막으로 들어가서 주 앞에 꿇어앉아 이렇게 기도하였다. 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시간이 다윗에게는 가장 중요한 시간인 줄 믿습니다. 자신이 하고자 한 것을 하지 않기 위한 기도라는 것입니다. 골리앗을 죽인 것보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 다윗 성, 자신 있는 곳으로 옮긴 그곳보다 가장 중요한 행동입니다.
 
오늘 이 시기는 다윗에게 전성기의 때였습니다. 칭송과 존경을 한 몸에 받고 경배와 순종으로 성숙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린 왕으로, 백성에게 소문이 자자하던 바로 그때였습니다. 다윗은 지금 왕관을 쓰고 왕의 보좌(寶座)에 있습니다.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그때의 다윗은 선택해야 합니다. 잘 나가고 있는 그때에, 가까이에 있는 선지자, 가까이에 있는 한 사람이 한 이야기를 들을 것인가, 그 이야기를 또 거절해야 할 것인가, 라른 선택의 기로(崎路)에 놓여있습니다. 주변 국가의 왕들처럼 똑같이 선택할 것인가? 서울처럼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을 자신의 왕권 유지를 위하여서 원칙 정도는 무너뜨려도 된다. 라는 그런 왕이 될 것인가? 아니면 함께 정치적, 종교적, 관습으로 정도는 시ㅜ해도 되는 내 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서는 하나님을 수단으로 삼는 것쯤, 다른 왕들도 했었고, 선대의 왕들도 했었던 것처럼 그렇게 살아갈 왕이 될 것인가, 다윗은 선택해야 됐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기도를 품은 다윗에게 그 순간을 멈추고 쉬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로 나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5절에서,
 
*사무엘하 7:5,
5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다윗에게, 하나님은 내가 세운 왕 다윗에게, 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다윗에게 참으로 긍휼이 필요할 때, 다윗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세운 나의 왕 다윗에 대해서 말하라. 하지 않으시고, ‘내 종 다윗에게’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다윗은 왕으로 성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성도로 성공하는 자리에 나아갔습니다. 다윗이 칭찬받는 이유는 왕으로서 정치를 잘하고, 단 한 번도 전쟁에서 승리를 놓친 적이 없었던 그것이 성공으로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순종의 자리로 나아간 성도로서 하나님 앞에 인정받은 기억된 자라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 것인가? 내 종 누구누구야!!! 내 종 OOO야? 종으로 할 일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에 종의 임무를 다하여 하나님 부르는 그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부르실 때에 바로 그 앞에 나아가 무릎 꿇고 기도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나단을 통해서 해주시는 말씀이 무엇이냐, 우리가 읽은 4절에서 9절, 끝까지 읽는 17절까지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잠깐 보면 좋겠습니다. 먼저 6절과 7절입니다.
 
*사무엘하 7:6-7,
6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
7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다니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하나님에게는 집이 필요하지 않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집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백성들 가운데에 임재하셨지, 단 한 번도 어느 집안에 계신 적이 없습니다. 8-9절입니다.
 
*사무엘하 7:8-9,
8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와 같이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9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
-읽기만 해도 그 뜻이 이해가 되어 지죠. 어쩌면 다윗까지 생각하지 않고 우리 자신을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 오랫동안 간절한 기도를 드렸는데 아니라고 해요. 응답이 없어요.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의 한뜻으로, 이 주변 사람을 통하여 아닌 것 같애요. 거절에 대하여 속상해 하기보다, 오늘 나단을 통해주시는 더 큰 하나님의 계획과 비전을 오늘 우리가 볼 줄 알야야 됩니다. 하나님의 오늘 내게 주신 거절 때문에 마음 아파할 것이 아니라, 거절 넘어 더 큰 하나님을, 하나님의 계획을 말씀하시는 것을 우리가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윗 스스로 절대로 왕이 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계세요. 사실 다윗이 이 생각을 한 첫 번째, 저도 이 생각을 계속 묵상하다가 1절부터 읽었는데요. 1절 한 번 보세요.
 
*사무엘하 7:1,
1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
-자신이 나라를 통일시켜서 블레셋을 무찔러서 평화가 오고 좋은 집에 살게 된 것이 아니라, 오늘 1절을 성경대로 히브어로 그대로 해석하면, ‘여호와께서 그의 사방에 대적들로부터 평안하게 해 주셨을 때에’. 자신이 한 것입니까? 누가 해주신 겁니까? 다시요. 누가 해주신 겁니까? 하나님이 평안하게 해 주셔서 좋은 집에 살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르므로 오늘 우리의 평안은 절대 하나님으로부터 오심을 믿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12절 13절 읽겠습니다.
 
*사무엘하 7:12-13,
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13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지은 손으로 그 안에 머물며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이 지으신 하나님 자신이 세우신 영원한 나라를 이 땅 가운데에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사사시대에 불안정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평안함과 평화의 시대, 하나님이 허락하신 시대를 계획하고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죽은 후에도 후손을 통하여서 계속해서 그 왕위가 이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오늘 이 본문을 읽게 되면 그 씨가 누구인지 알게 되죠. 바로 그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하여서 다윗이 손으로 짓고자 하는 그 집이 아니라, 다윗 가운데 임재 한 하나님의 나라, 그 평화의 나라를 살게 하실 뿐만아니라, 다윗이 죽고난 후에도 영원한 하나님 나라, 메시아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계획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사무엘하 7장 4절에서 17절의 말씀을 ‘다윗 언약’ 이라고 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조금 더 들여다 보고 싶었습니다.
 
유진 피터스 목사님이 쓴 문장이 저의 마음을 사로 잡았습니다. 내용은 좀 어려운 것 같아도 실제로는 하나도 안 어렵습니다. 왜냐면 오늘 이 본문 가운데 유진 피터스 목사님은 어떻게 표현학 있느냐, 사무엘하 2절에서 17절까지에는 한 개의 비 인칭 목적어와 23개의 1인칭 주어가 있다. 라고 하는 거에요. 이게 무슨 소리지요? 한 개의 비인칭 목적어, 비 인칭 목적어라고 하는 것은요. 인격적인 대상이 아닌 존재에게 부치는 인칭이라는 거에요. 목적어라는 거에요. 그것, 저것, 이것, 뭐를 지칭하죠? 하나님의 언약궤를 오늘 사무엘하 7장에서는 그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임재에 관한 인격적인 것이 배제된 빠져있는 비인격적인 대상으로 그것이라고 하는 것과 똑 같은 의미로 기록했다는 거에요. 23개 1인칭 주어는, 다윗의 하나님의 언약궤에 대한 비 인격적이고 비인칭 목적어에 사용한 하나님의 궤를 반론이라도 하듯이 그것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붙잡고 말씀하시듯이 ‘내가 너에게 나의 힘으로 너를’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 번 보십시오. 성경을 펼치시고 사무엘하 7장 4-17절에 제가 읽는 곳 눈으로 한 번 따라와 보십시오.
 
*사무엘하 7:5-17,
5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7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다니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9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
10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그를 심고 그를 거주하게 하고 다시 옮기지 못하게 하며 악한 종류로 전과 같이 그들을 해하지 못하게 하여.
11 전에 내가 사사에게 명령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아니하게 하고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게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13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23번이나 반복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이사야 41장 10절에도 1인칭 주어, 하나님이 강력하게 임재 하는 말씀이죠.
 
*이사야 41:10,
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여러분, 다윗은 거절당했지만 더 큰 하나님의 계획을 듣습니다. 더 큰 하나님의 묵시와 비전의 말씀을 받게 됩니다. 사무엘하 7장 18절을 읽겠습니다.
 
*사무엘하 7:18, 26,
18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26 사람이 영원히 주의 이름을 크게 높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 하게 하옵시며 주의 종 다윗의 집이 주 앞에 견고하게 하옵소서.
-다윗은 나단이 들려준 계시의 말씀을 깨닫습니다. 어쩌다가 16절에, 26절까지 왔다가 다시 15절에 멈추었어요. 15절에 어떤 말씀이 있는지 아세요?
   
*사무엘하 7:15,
15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이게 무슨 말씀일까요? 마태복음 1장 1절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다윗의 예수 그리스도 족보입니다.

*마태복음 1:1,
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사무엘하 7장 15절 계속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는 히브리 족보에는 들어가서는 안 되는 4명의 여자 이름이 있습니다. 3절에 시아버지에게 들어간 다말, 5절에 기생라합, 이방인 룻, 6절에 우리아의 아내, 이 4명의 여인, 불륜 이방 여인, 살인이라고 하는 별명이 붙은 바로 이 사건의 주인공들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 히브리의 족보에는 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는 끊어질 듯, 끊어질 듯 끊어질듯 이어집니다. 실패할 듯, 실패할 듯, 보이지만 하나님의 그 구원의 역사와 하나님의 계획은 계획해서 이어져 나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은 실패했지만, 다윗을 통하여서는 빼앗기지 아니할 것이다 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보이십니까? 인간은 실패하지만 하나님은 이루십니다. 사울에게는 은총을 빼앗았지만, 다윗에게서는 그 왕위가 영원하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때때로 상처 받았다고 말씀들을 하죠. 실패했다고들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왜 기억해 주시지 않냐고 때로는 원망도 하죠.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 하나님의 신실하심 앞에 그런 말 할 자격이 없습니다. 실패한 나를 도저히 이 자리에 있을 수 없는 나를, Pass Over! 나를 지나쳐도 할 말이 없는 나를, 붙잡아 주시는 그 하나님, 잠시 당한 거절 때문에 속상하다구요?? 그 거절 속에 숨어 있는 우리 자신의 마음은 내가 무엇인가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대신 할 수 있다. 라고 하는 그 교만을, 하나님은 지적하시는 거에요. 그러므로 그 거절에 감사해야 되지 않을까요? 우리의 계획과 하나님의 계획으로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우리도 역시 다윗처럼 우리 자신의 집을 짓습니다. 직업적인 성공, 안정적인 가정, 여러 가지 다양한 모습의 집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는 기도를 담아 드립니다. 우리는 그것을 채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말씀의 교훈을 귀를 활짝 열고, 마음의 문을 열고, 귀를 기울이시기를 바랍니다. 이제껏 신앙생활 가운데에 거절하심에 대한 그 뒤에 예비하신 하나님의 더 큰 계획을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무릎 꿇어 기도함으로 그 계획을, 그 비전을, 그 묵시를 받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내가 그 거절로 물러나면 그거 못 듣는 거에요. 오늘 내가 상처 받았다고 오지 않으면 하나님의 더 큰 은혜와 계획을 들을 기회를 놓쳐버리는 거에요. 7장 29절을 한 번 읽어볼까요?
 
*사무엘하 7:29,
29 이제 청하건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하니라.
-‘다윗의 의자’ 라고 하는 책을 지은 ‘알란 레드파스’ 목사님은 오늘 이 구절을 가지고 ‘거절 속의 축복’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다윗은 성전은 못 지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통해 영원한 왕국을 세우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절을 실패라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더 큰 복을 계획하셨다.
 
다윗이 오늘 29절에서 받은 본, 들은, 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집집마다 걸려있는 ‘주의 종이 복을 받게 하옵소서.’ 그 복보다 더 큰 복이에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복, 하나님 나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통치되는 하나님 나라를 마음에 품는 그 복이었어요. 오늘 우리도 그 복을 품는 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다음 주부터 시작되는 전교인 금식기도회에 오늘 다윗과 같이 그 자리에 나가 무릎 꿇는 여러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 내 종 다윗에게, 라고 하는 그 표현처럼, 하나님이 오늘 내가 종으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것, 주님, 내게 말씀하옵소서. 주의 말씀을 온전히 듣겠습니다. 이런 은혜와 하나님의 더 큰 계획을 듣고 보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약
골리앗도 개의치 않았던 열정적인 다윗이 하나님의 더 크고 영원한 계획 앞에 겸손히 엎드렸던 것처럼 순종하는 지혜를 주셔서 본성이 갈구하는 욕망의 성취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 다윗의 성전 건축계획을 압도하게 하셔서 사람이 도저히 꿈꾸지 못할 더 큰 축복으로 인도하셨던 하하님께서 내 인생에도 담아주실 은혜와 사랑이 있음을 믿고 오늘의 더딤을 능히 견디고 이겨내야 한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나에게서 끝나지 않을 구원 계획을 지금도 힘있게 펼쳐나가실 것이기에 보냄 받은 가정과 일터와 일상에 제약된 현실을 능히 돌파하는 믿음 위에 믿음을 더하시길 간구하고, 오늘 우리의 계획이 실패한 것 같고 거절당한 것 같을 때에도 주님 앞에 순종하고 귀 기울여서 주님의 계획을,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 거절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더 큰 은혜와 축복을 받고 경험하는 자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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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9월 25일)
제목: “성령의 임재를 위한 기도”
말씀: 누가복음 3:21-22
찬양인도: 쉐키나(이동선 부목사님)
사회: 김대규 부목사님
 
설교자: 강대인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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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3:21-22,
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22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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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하나님 목마른 영혼들이 이 시간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주님의 성령께서 이 자리에 임하셔서 우리가 주님의 뜻을 분명히 깨닫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저희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주셔서 주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할렐루야! 수요기도회에 오신 영 가족 여러분들,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보내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3장 21절로 22절의 말씀입니다. 신약 92쪽에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이고 또한 우리를 하나님의 인재로 인도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입니다. 우리가 기도드리면, 하늘과 땅이 연결되고 또한 우리의 강군은 하늘에 상달됩니다. 그리고 기도는 우리의 예상보다 더 큰 일들을 이루곤 하죠.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하늘 문이 열리는 나타나고요. 그 가운데 성령이 임재를 하게 됩니다. 오늘 저는 ‘성령의 임재를 위한 기도’라는 주제를 가지고 우리가 드리는 이 기도를 통하여 예수님처럼 어떻게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을까? 이 성령의 인재를 위하여서 함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의 기도는 하늘을 여는 열쇠입니다.
 
I. 첫째로, 우리의 기도는 하늘을 여는 열쇠입니다.
 
*누가복음 3:21-22,
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본문 21절 말씀해보면,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렸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 하늘 문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신 것이죠. 하늘이 열렸다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원래 닫혀 있었기 때문에 열렸다라고 오늘 이 본문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닫혀 있던 그 문이 새롭게 열려 열리게 되었다. 하늘도 닫혀 있는 가운데 있다가 기도하는 가운데 열려졌다는 것입니다. 이 하늘이 열렸다는 것은 그저 물리적으로 하늘이 열린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으로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연결해 주시는 하늘 문을 여시고 하늘과 땅에 그 통로를 다시금 이어주시는 그 시간이 바로 기도의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하늘을 여는 열쇠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의 아주 중요한 순간마다 기도하고, 계십니다. 먼저 제자를 부르실 때 기도를 하시는데요. 밤새도록 기도하시고 있는 장면이 누가 보건 6장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6장 12절에서 13절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6:12-13,
12 이때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이때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셨고요.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한 제자 한 제자들을 부르기 위하여서, 이 귀한 공생애를 감당하기 위하여서 기도하러 가신 것입니다. 여러분 잘 아는 변화 산에서의 사건을 알고 계십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함께 산에 올라가서 그들은 자고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셨습니다. 또한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서도 그 전날 밤 땀이 핏방울같이 되도록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특별히, 우리 예수님께서는 죽음 앞에서도 십자가 상해서 그 죽어 가는 불쌍한 영혼들을 바라보시면서 그 안타까운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잠시라도 떨어지는 것에 대한 작품을 탄식하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중요한 순간 그때마다 날마다 기도하셨고,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가지셨습니다. 기도가 모든 닫힌 것들을 여는 하늘의 열쇠라면 여러분 여러분들에게 중요한 순간은 어느 때입니까?
 
여러분, 그 중요한 순간에 여러분들은 무엇을 하십니까? 최근 담임 목사님께서는 골든타임을 놓쳐서는 안 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이 세계는 동성애로 인하여서 많은 곳들이 압박과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전 세계 교회 안에도 동성애 문제로 많은 갈등들을 빚고 있습니다. 이런 중차대한 문제는 그저 현실적으로는 너무나 복잡하고 해결하기 어려워 보이는 문제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해결책을 찾고자 다양한 방법들을 강구하였지만 그 노력 가운데서도 갈등과 혼란만 야기한 때도 너무나 많았음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캐나다는 이미 넘어갔고요. 미국의 많은 주에서도 이 어려움을 통하여서 어떤 목사님들은요, 동성애 발언만 하더라도 목사로부터 면직을 당하는 일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다가올 시대는 어떻습니까?
 
이 동성애에 대한 입장 차이로 갈등들이 더욱 심화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문제를 가지고 기도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이 바로 이것을 위하여 기도할 아주 중요한 순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세계적인 상황에서 이 한국 땅을 지켜주시도록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지금부터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열어주셔서 이 땅 고쳐 주시고 이 땅 가운데 어떠한 동성애의 문제가 들어오지 않도록 주님,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함께 기도하며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작년 2월에 미국의 에즈베리 대학교에서 일어난 부흥을 기억할 것입니다.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함께 기도하던 중에 성령의 강력한 인재로 인하여서 오랜 기간 기도의 불길이 꺼지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적 각성과 회개 또 치유를 경험하면서요. 이 생생한 관증들을 이곳저곳에 전달하였습니다. 이 소문을 듣고 이곳 저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함께 부흥을 간구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기도는 단지 우리의 문제를 하나님께 알리는 도구가 절대 아닙니다. 여러분 그저 우리의 것만 드리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시도록 하늘 문을 열어주시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는 시간이 되도록 여러분 함께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에게 중요한 순간은 언제입니까? 여러분, 그 중요한 순간을 어떻게 보내고 계십니까? 이 시간 기도를 통하여서 닫힌 하늘 문을 열고 성령의 역사를 소망하시길 바랍니다. 둘째로, 성령의 임재는 기도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II. 둘째로, 성령의 임재는 기도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누가복음 3:22,
22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본문 22절에 말씀해 보니까요? 예수님께서 기도 하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강림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성령의 임재는 예수님의 기도와 직접적으로 연결되고 있다는 것이죠. 누가는 예수님의 기도를 자주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 하셨다. 이 기도는 성령님을 우리 삶으로 불러들이는 통로가 된다. 라구요. 누가복음 4장 18절 말씀 보니까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가복음 4:18,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여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아멘 예수님께서는요. 이사야 말씀을 인용해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였다. 그 성령이 임하였을 때 어떠한 일이 나타나는지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기름을 부어주시고 포로 된 자에게 무엇을 주십니까? 자유를 허락하여 주시고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또한 눌린 자도 자유케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는 그렇습니다. 주의 성령이 우리 가운데 임할 때 그 쥐의 성령의 능력으로 모든 사역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임재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시면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야만 성령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성령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일하시는 것입니다. 기도는 성령을 불러오는 통로이기 때문에 여러분 기도할 그 가운데 성령님께서 임지하셔서 우리의 가정도, 우리의 일터도, 우리의 교회도, 우리의 모든 공동체도 회복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2019년부터 작년까지 지난 4년 동안 여러분 팬데믹으로 인하여서 많이 힘드셨죠? 지난 이곳에서(은혜채플) 한번 수요저녁기도회를 드렸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가 바로 코로나 때였습니다. 그 이후로 처음으로 다시 한 번 이렇게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는데요. 그 기간 여러분 전 세계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이 도전에 직면하면서 모든 것들이 멈추었고요. 너무나 많은 어려움들이 이곳저곳에 찾아왔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였죠.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릴 수가 없었고요. 또한 심지어 교회가 문을 닫게 되는 상황들도 있었습니다. 왜 여기에서 코로나시기에 예배를 드렸냐면, 그때 당시에 본당에서 한 번 코로나 확진 자가 들렀다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황당한 일이죠. 그런데 제가 이 어려운 상황에서 너무나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뭐냐면요. 예배 시간에 제가 한번 교회 밖으로 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광장에서 많은 성도님들께서 같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마스크를 쓰시고, 본인의 휴대폰을 들고 스마트폰에서 주일예배를 같이 함께 드리고 있었던 장면입니다. 그리고 함께 기도하는데요. 그곳에서 직접 무릎을 꿇고 기도하시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여러분, 이런 안타까운 상황 속에서도 온라인을 통하여서 이 기도의 간구는 활성화되고 있었구요. 우리는 지금도 매일 정오에 올 온전한 온라인으로 온전한 ‘정오기도회’를 드리고 있습니다. 10월 27일에도 오프라인 100만 명 또 온라인으로 100만 명이 함께 대연합 예배와 큰 기도회를 올려드릴 것입니다.
 
이처럼 팬데믹은 우리에게 위기를 경험하게도 했지만, 동시에 영적으로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의 인재를 경험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하여 준 것입니다. 지방이나 해외에서 올 수 없는 분들까지도, 스마트폰을 통하여서 함께 이 놀라운 성령의 인재를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놀라운 성령의 임재를 사모하고 계십니까? 할렐루야!! 성령의 임재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요. 성령님이 임재 하시면 능치 못할 것이 없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하십니다. 주여 임재 하옵소서. 우리의 기도를 틀어 주시고 성령을 부어 주옵소서. 강력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여줍니다.
 
III. 셋째로,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여줍니다.
 
22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22절의 하나님께서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라고 하나님께서 우리 예수님을 향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주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시죠?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이십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은 부자 관계이라는 것이죠. 또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바라보시면서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라고 말씀하고 있죠. 이 본문에 다시 한 번 띄워주면 좋겠는데요. 오늘 이 본문을 보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인 거예요.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인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얼마나 기뻐하실지 우리를 보면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 라고 말씀하시죠. 그래서 22절에, ‘너(이향애)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 하노라.’ 라는 이 너라는 곳에 우리의 이름을 한번 넣어서 본문을 같이 한번 읽어보기 바랍니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대인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대인이를 기뻐 하노라.’ 아멘! 하나님의 음성은 모든 어려움을 헤쳐 나가게 할 능력이 될 줄 믿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있죠. 다양성을 추구하다보니 명확한 정체성을 세울 기준을 우리들에게 제공하지 못합니다. 저희들은 우리가 누군지 알고 있죠.
 
그런데 지금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누군지,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할지, 늘 이 불확실성으로 인하여서 많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방황(彷徨)하게 되는 것이죠. 다양한 소셜 미디어를 통하여서 자신을 찾아가기도 하는데 이것은 더욱더 우리를 혼란하게 만듭니다. 오히려 자꾸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게 만들고요. 그로 인해 열등감 혹은 우울 감들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체성은 세상이 주지 않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셨다. 여기에서 우리는 시작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입니다.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 아주 특별하게 후!!!~~~ 생기를 불어넣어서 생명이 되었습니다. 영적 존재로 만드셔서 성령의 인재를 경험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지었어요. 자녀들에게는 기도를 통해서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게 주셨구요. 얼마나 좋습니까? 늘 기도를 통해 만나면서 우리는 사랑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한다.’ 이처럼 기도는 하나님과 함께 사랑의 음성을 듣고 또한 함께 고백하는 귀한 시간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에 그분의 사랑을 새겨주시고, 우리의 정체성을 확증해 주십니다. 이 진리를 깨닫는 순간 우리 삶은 변화될 수밖에 없는 거죠. 여러분 우리는 자녀입니다. 더 이상 세상의 어떠한 소리가 우리를 흔들 수 없습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여러분, 어려움들도 우리를 침노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임재를 통해 기도에 놀라운 그 순간을 우리 가운데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⓵기도는 하늘을 여는 열쇠이다. ⓶성령의 임재 그것은 바로 기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고요. ⓷기도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누구인지, 그 정체성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임재를 구하는 기도에 여러분 헌신하셔야 합니다. 오늘도 이 시간 하나님께서 성령님 임재 하여 주시도록, 우리가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역사하여 주시도록 기도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기도 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을 하는 시간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이것을 위하여서 몇 가지를 제안하고 싶은데요.

1. 첫째로, 개인기도 생활을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각자의 삶 속에서 성형의 인재를 지속적으로 경험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기도해야 해요. 기도를 위해 기도의 장소와 시간을 따로 마련하셔야 합니다. 여러분들에게 기도의 장소가 있으십니까? 여러분들에게 기도의 시간이 정하여져 있습니까?
 
제가 ‘워룸’이라는 영화를 한번 본 적이 있는데, 그 ‘워룸’이라는 영화를 보면요. 기도를 통하여서 삶이 바뀌는 것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 남편이 불륜을 하게 되고 이로 인하여서 아내와 자녀들이 큰 상처를 받게 됩니다. 어떠한 한 사람을 통하여서 이 여성에게 이 아내에게 기도를 하라고 요청을 하죠. 그 권면의 소리가 그 아내에게 아내의 귀에, 또 아내의 마음에 사로잡게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우리 아내는 결국 ‘기도의 방’을 따로 만들게 되었고 그 기도의 방에서 하나님께 간절한 심정으로 날마다 기도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된 것이죠. 이것이 바로 남편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남편의 마음이 변화되게 되었구요. 남편이 회개(悔改)하고 결국 가정이 회복(回復)되는 역사가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방이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하는 방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사모하는 이 기도를 날마다 드림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놀라움 은혜 현장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2. 둘째로, 교회 공동체 기독 가운데 우리 함께 참여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교회는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는 공동체죠. 우리가 함께 모여서 기도할 때 성령님께서 강력하게 임재 할 줄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 사랑의 기회는 토비새와 주일예배 합심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여기 계신 모든 우리 영 가족 여러분들 특새를 통하여서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길은 부으심을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강력한 기도가 해결한다는 것이죠. 이 강력한 기도는 공동체의 기도를 통하여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작년 6월 3일 상암에서 빌리그레함 전도대회 50주년 기념행사를 우리가 함께 가졌습니다. 여러분 상암경기장에 오신 분들은 아마 아실 것입니다. 일만 성도가 함께 찬양을 부를 때 얼마나 우리의 가슴이 뜨거워졌습니까?
 
뿐만 아니라 프랭클린 그레함 목사님께서 결신하는 그 메시지를 전할 때에, 그곳에서 많은 분들이 주님께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화룡점정(畫龍點睛)은 기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촛대를 옮기지 말아 달라는 이 간절한 기도가, 거기 오신 7만여 명의 참석자들의 가슴을 울렸습니다. 기도로 하늘 문이 열리고, 은혜의 빗줄기가 모든 분들 가운데 임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의 자리 놓치지 마십시오. 특별히 공동체가 기도하는 자리는 절대 놓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함께 모여서 기도하고, 우리가 기도의 불씨를 지필 그때에, 우리가 다 같이 참석해서 마음모아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천장이 울리는 기도, 성령의 역사하심을 간구하는 기도가 나타날 줄 믿습니다.
 
3. 셋째로, 기도 가운데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에게 반드시 임하셔서 우리의 모든 기도를 응답 하실 뿐만 아니라 새겨주십니다. 얼마나 생생하게 새겨 주시는지요. 왜 그런가 했더니, 갓 이즈러브(God is Love),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힘조차 없을 때 여러분 기도하십시오. 도저히 기도조차 나오지 않을 때가 분명히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내가 너를 사랑한단다. 얘가 내가 너와 함께 한단다 내가 너로 말미암아 내가 너의 존재 그 자체로 말미암아 너누나 기쁘단다.’ 이 사랑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함을 드립니다. 기도드립니다.
 
♣요약
우리의 기도를 통해 하늘 문을 여는 열쇠가 되고, 성령의 강력한 임재를 체험하여야 한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고, 그 사랑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우리가 되어, 개인과 공동체가 회복되고, 그 기도를 통해 영적 부흥에 불길이 타올라 10.27일 한국교회 2백만 연합예배의 기도회가 우리 한국과 열방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 교육에 이르기까지, 올바르게 바로잡아 주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온전한 세상으로 인도되어지는 성령의 새바람이 불어오길 강력히 간구해야 한다.
 
사회:
-네 본당에서 오늘 공사가 진행돼서 은혜채플로 내려왔는데요. 마음속에 염려가 있었는데, 오히려 이렇게 조금 좁은 공간에 이렇게 앉으니까, 여러분 어떠세요? 좋죠. 네 자 아주 더 따뜻하고 좋은 것 같네요. 그래서 혹시라도 은혜 채플 처음 오신 분 계세요? 우리 교회에는 또 이렇게 아름다운 은혜 채플도 있고, 언약 채플도 있고, 많은 예배 공간들이 있습니다. 오늘 강대인 목사님 보내주셔서 귀한 은혜 나눠주신 또 귀한 은혜 내려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강대희 목사님 목양 3팀장으로 섬기시면서 반포 지역 목양하시고 성찬식과 노회를 섬기고 계십니다. 우리 옆에 계신 분에게 이렇게 한번 고백해 볼까요? 기도하면 해결됩니다. 한 번 더 고백하실 때의 ‘기도하면 열립니다.’!!!~
 
네 여러분 이 은혜 채플이라는 공간은 아주 특별한 공간입니다. 새벽마다 새벽 기도가 이 은혜체플에서 또 이렇게 드려집니다. 새벽마다 기도하시는 많은 기도가 쌓인 곳이고요. 또 금요기도회가 이곳에서 또 이렇게 하나님 앞에 올려드려지게 됩니다. 금요기도회의 또 기도제목을 읽으면서 우리가 함께 기도하는데요. 금요기도회에는 특별히 참 마음 아픈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은 기도의 제목들이 있습니다. 눈물의 기도가 이곳에 쌓여있을 줄로 믿습니다. 오늘도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 번지점프가 뭔지 아시죠? 번지점프 해보신 경험이 있으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절대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네,,, 제 돈을 내면서 그런 끔찍한 경험을 하고 싶진 않습니다. 근데 사람들이 그 높은 곳에서 어떻게 그렇게 뛰어내릴 수 있을까? 어떻게 뛰어내릴 수 있죠. 네,,, 발이나 몸에 줄을 감았기 때문에 그 줄이 절대로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 높은 곳에서 뛰어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줄을 묶지 않고 뛰어내린다면 그 인생은 어떻게 될까요? 네,,, 더 이상 볼 수 없겠죠? 우리 삶이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 삶이 그렇게 위태한 곳에서 매일매일 곡예를 하듯, 때로는 높은 곳에서 떨어질 때도 있는데, 기도하지 않고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줄을 묶지 않고 그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것과 같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높은 곳에서 뛰어내릴 수 있는 것, 우리의 인생의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반드시 붙잡아 주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에도 우리 가운데에 여러 가지 기도의 제목들이 있고 어려움들이 있고 해결되지 못한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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