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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9월 4일)
제목:“어느 산 위에 계십니까?”
말씀: 오바댜 1:8,17,21
찬양인도: 쉐키나(유재원 부목사님)
 
설교자: 안 승훈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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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댜 1:8,17,21,
8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에 내가 에돔에서 지혜 있는 자를 멸하며 에서의 산에서 지각 있는 자를 멸하지 아니하겠느냐.
17 오직 시온 산에서 피할 자가 있으리니 그 산이 거룩할 것이요 야곱 족속은 자기 기업을 누릴 것이며.
21 구원 받은 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
 
80~90년대쯤에 잠깐 유행했던 개그가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그해 100만 대군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다가 한 봉우리에 힘겹게 올랐는데 잠깐 주춤하면서 살펴보더니, 이 산이 아닌 가벼? 하니까 50만 명이 기가 차서 죽었고, 그리고 그 옆 봉우리로 남은 50만 명을 이끌고 힘겹게, 힘겹게 올랐다가 다시 두리번, 두리번거리며 말하기를 아까 거긴 가벼!! 하니까 그 나머지 50만명도 힘들어 죽었다. 라는 이야깁니다. 당연히 사실은 아니죠. 하지만 나폴레옹이라는 강한 통솔력을 가지고 절대적인 신뢰를 받았던 사람이 여러 악수를 두면서 그 군대를 모두 소진하고, 결국 몰락하게 되었던 역사적인 사실을 어느 정도는 상징적으로 그려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최근에 보았던 한 국군 예비역, 장군의 글에서도 이 비슷한 상황을 우려하는 것을 저는 보았습니다. 이것은 이런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실제입니다.
 
미군과 국군이 같이 합동 훈련을 하는데, 작전을 다 한 뒤에 미군이 한국군을 평가를 하면서 한국군이 장비도 잘 갖추고 전투도 잘하는데 의외의 한 부분에서 큰 약을 보았다. 한국군이 작전을 잘하고 총과 같은 좋은 화기도 갖추었는데, 이상하게도 방향을 알게 하는 나침반을 소대별로 한 2개 정도밖에 구비하지 않았더라. 그래서 전장에서 훈련장에서 이리저리 우왕좌왕(右往左往)하는 모습을 자주 이것은 실전에서 매우 치명적(致命的)이다라고 평가했던 일입니다. 우리가 충분한 역량을 결정적인 순간에 다른 산에 올라가 있게 되면 모든 일을 그르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성경에서도 잘못된 산에 올라서 모든 일을 그르치게 되었던 한민족을 읽었습니다. 그 민족이 오늘 읽은 오바댜는 사실 1장짜리 아주 짧은 성경이죠. 평소에 자주 찾아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주 내용은 이 에돔 족속에 대한 심판을 다루고 있습니다. 에돔은 우리가 평소에 자주 언급하는 일반 민족도 잘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이름을 조금만 바꾸어 보면 여러분이 에돔은 ‘붉은’ 이라는 뜻인데요. 성경에는 이 이름의 뜻을 가진 한 사람이 나오죠. 바로 에서입니다. 에돔은 에서의 후예들입니다. 에서가 누구죠? 바로 열국의 아버지라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하나님께 직접 받았다. 쌍둥이 형 친형제입니다. 그런데 이 오바댜서가 바로 이스라엘 하나님 백성의 쌍둥이 형제의 후손들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에돔에 대한 심판은 바로 하느님 백성의 친형제 쌍둥이 형제와 같은 아주 가까운 이들에게도 심판이 임할 수 있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성경입니다. 잘 생각해보면 이 에서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죠. 그 유명한 아브라함의 직계손자입니다. 아브라함의 또 다른 아들 이스마엘이야 하갈의 아들이어서 어쩌면 그 계통에 들지 못하고 쫓겨나서 이슬람의 조상이 되었구나, 저희가 이렇게 인식할 수 있지만 아브라함의 정실인 사라의 아들 이삭이 오랜 시간 기도하여서 얻은 리브가와 그가 바로 혈통적으로 야곱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쌍둥이에서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아브라함의 차수이 이삭의 아들이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의 친형제 애서가 우리에게 이름도 익숙치 않은 이방 민족처럼 여겨지고 심지어 성경에는 그들의 심판이 기록되게 된 것일까요?
 
쌍둥이 형제로서 하나님 백성과 정말 가깝다 여길 수 있는 사람들인데 가까이 있다고 생각해 너무나 안타깝게 이 간발의 차이로 구원의 백성이 아니라, 심판받는 백성이 되고 만 것일까요? 그 이유를 우리가 살펴보면서 혹시나 우리도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과 정말 가까이 있고, 생활권을 살아간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 심판받는 백성이 되어버리지는 않는지, 우리가 천천히 말씀을 통해서 돌이켜 보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 일컫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이 에돔이 왜 심판받는 백성이 되었는가, 오바댜서에서는 그 이유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일장팔절의 말씀입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오바댜 1:8,
8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에 내가 에돔에서 지혜 있는 자를 멸하며 에서의 산에서 지각 있는 자를 멸하지 아니하겠느냐.
-에서의 산에서 지각 있는 자들이 멸절된다고 말합니다. 에서의 산이란 세일 산을 뜻합니다. 창세기 36장 그래서 ‘곧 에돔이 세일 산에 거주하니라.’ 세일 산에 산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었기에 이 에서 족속의 멸절에 이르게 되었을까요? 이것은 세일산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산에 거주하는 에돔 족속이 갖게 된 마음 때문입니다. 이 세일 산은 교만하게 했습니다. 오바댜서는 에돔이 심판 받는 이유를 3가지로 알려줍니다. 오바디아 1장 3절의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I. 첫 번째, 교만(驕慢)입니다.
 
*오바댜 1:3,
3 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바위 틈에 거주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
-하나님께서는 이 바위틈에 거주하고 높은 곳에 살면서 그 지형을 의지하여 교만해진 에돔을 심판 하신다고 합니다. 에돔 땅은 산지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올라가려면 매우 비좁은 길을 지나가야 됐습니다. 이 길은 몇 명의 군사만 배치해도 얼마든지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저희가 익숙한 삼국지의 촉나라가 험준한 지형 때문에 훨씬 더 세력이 큰 위나라와 오나라와 자웅을 겨루면서 삼국시대를 열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 에돔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어찌 저 구석에서 산지에 있었다면 그냥 그곳에 사는 자들이고 이렇게까지 교만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에돔은 마침 왕의 대로라 불리는 고대 근동의 가장 큰 두 문명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교역로(交易路), 요충지(要衝地)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에서 당시에는 아니지만, 후대의 이 지역에는 우리가 지금도 볼 수 있는 ‘페트라’-(요르단 서남쪽 고대도시 유적-붉은 장밋빛이 나는 부조건물-세계유산) 라는 바위 속에 요새 도시가 건설되었고요. 그것은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지금도 유명한 유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주요 교역로에서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要塞)까지 들어차고 앉았으니까 에돔은 누가 나를 끌어내랴.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다음 절 1장 4절에 말씀하십니다.
 
*오바댜 1:4,
4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오바댜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좀 더 잘 아는 선지자 예레미야도 똑같이 말합니다. 우리 예레미야 49장 16절의 말씀을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예레미야 49:16,
16 바위 틈에 살며 산꼭대기를 점령한 자여 스스로 두려운 자인 줄로 여김과 네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네가 독수리 같이 보금자리를 높은 데에 지었을지라도 내가 그리로 부터 너를 끌어내리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와 같은 말씀을 하고 계시지요. 근데 하나님이 왜? 이런 교만한 태도를 싫어하실까요? 왜 이런 태도를 심판하실까요? 그저 하나님 보시기에 꼴사납다, 보기 싫다, 이 정도여서 그러실까요? 왜냐하면, 이 교만이 근원이 되어서 에돔이 심판받게 되는 두 번째, 세 번째 이유가 알 감자가 따라 나오듯이 줄줄이 따라 나옵니다. 이 교만 때문에 유발된 에돔이 심판 받은 두 번째 이유는 7절에 나오는 ‘지각이 없음’입니다. 우리가 7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II. 두 번째, 지각(知覺)이 없음입니다.
 
*오바댜 1:7,
7 너와 약조한 모든 자들이 다 너를 쫓아 변경에 이르게 하며 너와 화목하던 자들이 너를 속여 이기며 네 먹을 것을 먹는 자들이 네 아래에 함정을 파니 네 마음에 지각이 없음이로다.
-지각이 없다. 라는 말을 영어 성경, NASB에서는 데일즈 노 언더스탠딩 인 힘(There is no understanding in him)이라고 표현합니다. 그가 이해를 하지 못한다. 잘 알지 못한다. 라는 말이죠. 오바댜 선지자는 이 지각이 없는 무언가를 지금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에돔이 그 안에 있던 지혜 자들조차도 또 없어져서 더욱더 지혜가 없게 될 것이라고 이 지각없음이 심화될 것이라고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흥미로운 것은 이 에돔은 원래 고대 성경에서 지혜로 유명했던 곳입니다. 대표적으로 족장 시대 저희가 창세기부터 출입국 직전까지라고 일컬어지는 이 시대에 아주 대표적인 인물 성경 인물 바로 욥이 에돔 지역 출신입니다. 욥기 1장 1절에서는 요에 출신 지역을 ‘우스’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우스가 바로 에돔 지역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그 옆을 위로하러 와서 욥기 그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세 친구의 참 여러 가지 권면, 우리가 인간적으로 보기에는 참 지혜로운 말들이 많이 있는데 그 지혜 자들 중 하나 세 친구 중 하나 엘리바스가 대만이라고 하는 에돔 북쪽의 도시 출신이라고 성경은 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에돔에는 지혜 자들이 원래 많았을 뿐만 아니라, 에서가 선택했던 것처럼 이 에돔이라는 지역에 산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관점에서는 참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요충지에 그리고 주요 교역로를 선택한 것은 자신의 안전(安全)과 부(富)를 보장(保障)하는 일이었죠.
 
에서는 이 세일 산을 택해서 요새처럼 튼튼함에 왕의 대로를 선택해서 그 부유함에 아! 나, 참 지혜롭게 선택을 잘 했다. 투자를 잘했다. 그랬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기준으로는 참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 지혜로운 선택을 하면서 포기한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하나님의 땅을 떠났죠. 에서는 세일을 선택하면서 가나안을 떠났고, 반면 야곱은 하나님께서 그의 조상들에게 주신 땅에 남아 있었습니다. 창세기 36장과 37장이 이 둘의 선택을 대비해서 그리고 있습니다. 창세기 36장 6절에서 8절을 우리 같이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창세기 36:6-8,
6 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자기의 가축과 자기의 모든 짐승과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모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의 동생 야곱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으니.
7 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주할 수 없음이러라 그들이 거주하는 땅이 그들의 가축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더라.
8 이에 에서 곧 에돔이 세일 산에 거주하니라.
-그런데 37장 바로 다음 장 첫 절 1절에서는 야곱은 다른 선택을 알려줍니다. 37장 1절 보겠습니다.
 
창세기 37:1,
1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땅에 거주하였으니.
-에서는 이렇게 세일 산을 선택하기 전에도 사실은 이미 한 번 더 지각없는 선택을 했던 사람입니다. 바로, 여러분이 잘 아시는 하나님의 백성의 장자 권을 죽 한 그릇에 팔았던 사건이죠. 히브리서에서는 이 사건을 두고 그가 자기 눈에 보이지만 영원하지 않은 것들 때문에 영광의 소망을 저버렸다라고 평가합니다. 히브리서 12장 16절 17절 말씀 같이 보겠습니다.
 
*히브리서 12:16-37,
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17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에서는 보기에 좋은 부와 안전을 택하면서 보이지 않으나 더 중요한 하나님 백성의 장작 권을 가벼이 여겼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에돔이 조상 때로부터 나타난 교만의 상징이요. 심판받게 되는 두 번째 이유인 것이죠. 어쩌면 에서 스스로 보기에는 자신이 유목 사회에서 남자답고, 사냥을 잘하는 그의 능력을 더 믿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야곱에게 판 장자권이 서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야곱과 단둘이 구두로 말을 했기 때문에 실제로 이게 내가 판다. 라고 말해서 팔려가는 것이라 생각도 안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이것을 하찮게 여기는 그의 지각없는 모습을 보셨던 것이죠. 심지어 에서와 야곱의 아버지 이삭은 이 사건 이후에도 여전히 에서를 신뢰해서 그에게 축복을 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대가를 에서가 톡톡히 치렀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놀랍게도 저는 이 사건 이후에도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이 없이도 많은 불을 스스로 일구었고, 그 부을 의지하여서 아, 내가 이것 없이도 살아갈 수 있구나! 라고 세일 산을 택하여 떠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부여하신 이 권한의 중요성을 지각하지 못하고 자기의 실력과 안목만을 믿고 이 땅의 능력과 부유함만을 따라갔던 것입니다. 그의 후손들 역시, 자신들의 부와 안전을 믿고 하나님께 대하여 교만했습니다. 이들의 교만이 하나님께 대하여 이 지각없는 모습으로 나타났는데, 이 교만은 형제에 대하여는 이 교만이 또 다른 에돔이 심판받는 이유, 세 번째 이유, 바로 형제에 대한 포학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10절 말씀 보겠습니다.
 
III. 세 번째, 형제에 대한 포악(暴惡)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오바댜 1:10,
10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으로 말미암아 부끄러움을 당하고 영원히 멸절되리라.
-에돔의 후손들은 형제 민족인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과 대립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이스라엘이 제국의 침입을 받자, 그들은 환난(患難)을 방관(傍觀)하고 조롱(嘲弄)하고 심지어 그 침입에 적극적으로 앞장서기도 했습니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이스라엘을 때리는 제국 앞에서 에돔은 너무나 밉상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에돔이 왜 이렇게 행동을 했을까요? 인간적으로는 에돔이 이 형제의 대하여 포학할 만한 이유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조상에서도 야곱에게 속임수를 크게 당한 바가 있고요.
 
그런데 그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애덤 족속은 서로 엎치락, 뒤치락 하면서 오랜 원한 관계가 이어졌습니다. 우리 표를 하나 잠시 보겠습니다. 족장 시대에 처음 말씀드렸던 에서와 야곱은 야곱의 속임수로 에서가 장자의 축복을 뺏겼죠. 창세기 27장에 나옵니다. 그런데 출애굽 시기가 되자, 이번에는 에돔 족속의 반격이 이어집니다. 출애굽 한 백성들이 이 땅을 지나가려고 하자, 에돔 족속은 거절하고 이들이 광야로 더 크게 돌아가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더 세월이 흘러서, 이제 이스라엘이 왕정 시대에 접어들자, 그 유명한 다윗 왕이 에돔을 쳐서 그들을 속국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사무엘하 8장에 나옵니다. 그런데 그 아들 솔로몬 시기에 또 에돔이 반기를 들어서 소요 사태를 일으키죠. 이렇게 엎치락뒤치락 하는 것은 그 이후에도 이어집니다. 여호사밧이 왕이 되었을 때에 여호사밧 왕이 다시 에돔을 정벌(征伐)하러 가서 재정복했고요. 그것이 역대하 이 역사서 마지막 부분에 기록되고, 그 여호사밧의 아들 때가 되자, 또 에돔이 반기(反旗)를 일으켜서 독립(獨立)을 합니다. 계속해서 이들은 마치 우리 치고 받고 싸우는 형제의 라이벌 관계처럼 엎치락뒤치락 하다가 결국에는 외세 열강(列强)의 침입(侵入)을 받게 되는데, 그때 에돔이 이 이스라엘에 대한 오랜 원한(怨恨)으로 열강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것입니다.
 
아마 오바댜서, 오늘 이 기록된 말씀은 그 때를 염두에 두고 훨씬 더 전에 예언(豫言)으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推定)됩니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오바댜서 1장 11절에서 14절까지는 이 에돔 족속이 형제 이스라엘 족속의 환난(患難)에 대해서 수수방관(袖手傍觀)하고, 11절에, 그리고 12절에는 형제의 몰락(沒落)을, 기뻐하는 모습을, 13절에는 이 형제가 어려워 고난을 받을 때 오히려 거기서 이득(利得)을 취(取)하고, 14절에는 그 형제가 환난을 피(避)하지 못하도록 오히려 그들을 잡고 섰던 그 포악(暴惡)한 모습을 그리며 책망(責望)합니다.
 
그런데 이 포악이 너무나 어리석습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결국 같은 적들에 의해서 똑같이 멸망(滅亡)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미워하는 이웃의 집에 불난 걸 구경하다가 자기 집도 불타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에돔의 멸망은 유다가 주전 586년에 멸망하고, 30년도 지나지 않아 주전 553년에 일어납니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이 두 왕국이 멸망을 했다가 일시적으로 잠깐 회복(回復)된 시기도 비슷합니다.
 
그들을 지배하던 제국이 바뀌고 또 바뀌어 가다가 주전 152년이 되니까 이스라엘에서 레위 지파가 주도해서 마카비 왕조라는 독립 왕국을 이룹니다. 그리고 이들이 또 그들 주변에 살고 있던 에돔 족속, 당신은 이두메인이라고 불리던 이들을 또 가서 정벌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개종시킵니다. 유대교로 개종시킵니다. 그리고 이 왕조가 어떻게 몰락 하냐면, 그 이두메인의 가문 가운데 힘을 잡았던 헤롯이라는 가문이 등장해서 로마와 손을 잡고 유다 마카비 왕조를 멸망시킵니다. 또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이죠. 그나마 이 헤롯의 통치에 대하여서 성경에서 반발이 적었던 이유는 그가 명목상으로 유대교로 개종을 했고, 또 이 유대인들을 달래기 위해서 성전을 증축(增築)하는 일들을 보였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 헤롯도 잘 아시는 대로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에, 내 왕권이 흔들릴까 두려워 많은 유대인들을 또 학살(虐殺)합니다. 그리고 그 시대의 유대인 지도자들도 예수님께서 그들의 기득권을 위협할까 두려워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데 앞장서 버리고 맙니다. 시간이 흐르고 흐르고, 엎치락뒤치락 하다 보니까 이 형제가 어느덧 같은 통속, 그놈이 그 놈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유다의 멸망을 또 한 번 예언하신 성전이 무너지는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함락(陷落)이 될 때에 이두메인들도 역사의 뒤안길로 같이 사라졌습니다. 과거에는 겨우 이 30년간 짧은 시간차를 두고 멸망했던 이 두 문족이 이제 같은 시기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같이 멸망의 길을 걷는 것은 우리에게 참으로 많은 점을 시사(示唆)합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가장 가까웠던 이 에돔에 대한 경고(警告)는 사실 하나님의 백성을 포함한 우리 모두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오늘 오바댜서가 일견 에돔의 심판(審判)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후반부 15절에 가면 갑자기 이 경고가, 이 심판이 열국, 만국을 향해서 확대됩니다. 우리가 1장 15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오바댜 1:15,
15 여호와께서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웠나니 내가 행한 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내가 행한 것이 내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에돔에게 적용되는 이 기준은 만국(萬國), 즉 모든 나라, 모든 족속에게 적용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도 적용되어서 이들이 동시에 멸망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돔이 이스라엘에게 악을 행했으니까 그들만 멸망시키겠다고, 에돔이 이스라엘에게 어떤 악도 행하지 말고 그저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행하는 악을 다 당하고 있으라고 결코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후손들이 애굽에서 출 애굽하여 큰 민족을 이루며 가나안으로 들어올 때에 에돔을 건들지 말라고 분명히 성경에 말씀하셨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그들의 영토를 지킬 것, 그리고 그들의 신분을 보호해 줄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먼저 영토 명령의 보호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 신명기 2장 1절에서 5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신명기 2:1-5,
1 우리가 방향을 돌려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홍해 길로 광야에 들어가서 여러 날 동안 세일 산을 두루 다녔더니.
2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3 너희가 이 산을 두루 다닌 지 오래니 돌이켜 북으로 나아가라.
4 너는 또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세일에 거주하는 너희 동족 에서의 자손이 사는 지역으로 지날진대 그들이 너희를 두려워하리니 너희는 스스로 깊이 삼가고.
5 그들과 다투지 말라 그들의 땅은 한 발자국도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세일 산을 에서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라.
-비록 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었다가 자신의 어리석음과 교만(驕慢)으로 인해서 가나안을 떠났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400년이 지나도 그들을 치지 말라 그들의 땅을 취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결국 그들이 다시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신명기 후반부에 그들의 신분에 대한 보호(保護)의 명령(命令)으로서 다시 한 번 드러납니다. 신명기 23장 7절에서 8절 말씀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신명기 23:7-8,
7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네 형제임이니라 애굽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네가 그의 땅에서 객이 되었음이니라.
8 그들의 삼 대 후 자손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이 형제 에돔을 보호하고 사랑하여 결국 애돔이 떠나갔다가도 다시 하나님의 총회(總會)에 들어오기를 바라셨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좀 전에 쭉 말씀드렸다시피 그들은 서로 싸웠고 손잡고 멸망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자녀로서 선한 싸움을 싸울 좋은 경기를 가지고도 내가 지금 어느 산에 올라와 있는지를 잠시 파악을 못해서 이 엉뚱한 에서의 산에 오르면, 우리가 받은 그 좋은 약속이, 그 자원(資源)들이 다 소용이 없게 될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이런 멸망의 길을 걷게 될 수도 있습니다.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우리 믿는 자들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불화가 일어나고 성도가 이래도 되는가 하는 상황들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어리석음은 결코 어떤 특정한 부류의 사람에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까 보았던 것처럼 너무나 일상적인 것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지금 우리가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는 경제적인 안정과 지위의 유혹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에돔도 그것에 빠졌고 결국 이스라엘도 빠진 유혹입니다. 에돔도 그것에 빠졌고 결국 이스라엘도 빠진 유혹입니다. 우리는 그런 교만의 유혹에 지각 없이 빠져서는 안 됩니다. 이 에서의 산에 올라서는 안 됩니다. 오바댜서는 우리에게 구원의 산에 오르라고 말합니다. 에서의 산은 멸절될 것이나 시온 산에 피할 자가 있으리라고 선포합니다. 17절 말씀입니다.
 
*오바댜 1:17,
17 오직 시온 산에서 피할 자가 있으리니 그 산이 거룩할 것이요 야곱 족속은 자기 기업을 누릴 것이며.
-오바댜서에서는 이 산이 야곱 족속만 구원받는 것처럼 쓰였지만, 우리는 그 이후의 성경을 다 알고 있죠. 그 이후에 오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산에는 이제는 야곱 족속만 부르신 것이 아니라, 주께서 만국 백성을, 우리를 포함한 이들을 다 부르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산에 오른다는 것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요? 미가 선지자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미가서 4장 2절입니다.
 
*미가 4:2,
2 곧 많은 이방 사람들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돌을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니라. 우리가 그의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원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여호와의 산에 오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대로 하나님의 길로 행하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감사하게도 오바댜서의 마지막 부분은 시온 산에 오른 자의 삶의 태도를 우리에게 세 가지로 알려줍니다.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여러분들께 우리가 어떻게 시온산에 오른 자의 태도로써 살아갈지 세 가지를 간단하게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IV. 네 번째, 시온 산에 오른 자의 삶의 태도를 우리에게 세 가지로 알려줍니다.
 
-⓵여호와의 산에 올라가는 방법-첫 번째로, 우리는 이 산에 오를 때에 심판은 내가 아닌 하나님이 하시는 것임을 기억을 해야 합니다. 16절 말씀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오바댜 1:16,
16 너희가 내 성산에서 마신 것 같이 만국 인이 항상 마시리니 곧 마시고 삼켜서 본래 없던 것 같이 되리라.
-선지 서에서 등장하는 이 마시는 잔(盞)은 바로 심판(審判)의 잔(盞)을 의미합니다. 만국 인이 마신다는 이 16절의 말씀은 천하 만민이 하나님 앞 시온 산에서 공정(公正)히 심판받는 날이 반드시 오리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심판의 권한이 하나님께 있음을 기억하면서, 내가 에서의 산에 올라 자신의 권세나 안전한 위치를 이용해서 남을 정죄(定罪)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드메인 헤롯은 자신의 왕권을 이용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고,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행실 도덕적 우의를 근거로 예수님을 비난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같이 몰락했죠.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이러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은지 우리는 반드시 돌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회 속에서 SNS나 댓글과 같은 익명의 안전성 뒤에, 그런 산성 뒤에 숨어서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모습에 휩쓸려서도 안 될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형제 사이에 너무나 자주 일어납니다.
 
특히 오래 보았던 우리 동력 자들 사이에도 많이 일어납니다. 목회자들도 마찬가지고요. 이 자리에 많이 와 계신 우리 훈련생들, 예전 우리 순장님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참 열심히 하여 훈련을 받고 이 수요예배에 나와 앉아 있지만 혹여 내가 여전히 그럴 만한 이유를 가지고 남을 정죄하고, 그럴 만한 이유를 가지고 남에게 포악해도 된다고 자신을 생각하고 있다면, 내가 지금 에서의 산에 올라와 있지 않은지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⓶여호와의 산에 올라 살아가는 방법 두 번째는 우리가 피할 곳은 다른 어떤 곳도 아니요, 하나님 것밖에 없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17절 말씀 읽겠습니다.
 
*오바댜 1:17,
17 오직 시온 산에서 피할 자가 있으리니 그 산이 거룩할 것이요 야곱 족속은 자기 기업을 누릴 것이며.
-이것은 이미 앞서 묵상한 에서의 태도를 통해서 우리가 반면(半面)교사(敎師)를 얻는 것입니다. 내가 이 땅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 곁이 아닌, 하나님의 약속의 장소가 아닌, 다른 든든한 요새와 대로에 의지해서 나의 안전과 나의 소망을 의탁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⓷여호와의 산에 올라 살아가는 방법 세 번째,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나라가 하나님의 것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21절 같이 읽겠습니다.
 
*오바댜 1:21,
21 구원받은 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
-에서가 야곱을 떠나서 세일에 자리 잡은 뒤에 그의 후손들은 아주 금방 왕조를 세웠습니다. 창세기에서는 그들이 이스라엘보다 훨씬 더 일찍 왕을 가졌다라고 말합니다. 36장, 창세기 36장 31절에,
 
*창세기 36:31,
31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는 왕이 있기 전에 에돔 땅을 다스리던 왕들은 이러하니라.
-라고 그 목록을 나열하는데, 나중에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여 이 땅에 와 보니 이 주변 민족이 왕을 가진 모습이 참 부러웠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이 왕정을 세우고 난 이후에 자신들의 왕, 다윗을 통하여 에돔 땅을 침공(侵攻)하고 형제의 싸움이 격화되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왕이심을 망각(妄覺)하고 우리 자신 가운데 왕의 모습을 더욱 더 드러낼 때에 이 왕들의 싸움이 이 땅 가운데 만연(漫然)하다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내가 왕인 채 살아가는 이 땅의 모습, 그것이 교만하고 지각없는 형제에 대한 포악한 모습의 절정(絶頂)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성산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철저히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모습, ⓵주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다. ⓶나의 피난처는 주님 앞밖에 없다. ⓷주님이 왕 되신다. 라는 모습을 통합하신 분이 바로 오늘 우리가 찬양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교만할 이유를 다 가지고 가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지각 없이 다른 곳에 의지할 이유도 다 가져가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형제에 대하여 그들이 이렇게, 이렇게 역사 속에 나의 삶 속에 행했습니다. 라고 그들에게 우리가 마땅히 포악해도 될 만한 이유조차도 다 가져가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앞에 무릎 꿇을 때에, 이성산에 오를 때에 우리는 더 이상 애서의 산에 올라, 이산이 아닌 가벼!!! 하고 멸망당하지 않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누리게 하시는 백성의 복락(福樂)을 다 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 주님의 그 날을 기대하며 나의 마음을 지켜서 왕 되신 주님의 통치를 누리며 살아가기를 소망하며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요약
주님께서 왕 되심을 믿고, 내가 남에 대하여 포악할 그 어떤 이유도 이 세상 어떤 것도 의지할 이유도 없도록 내게 충분한 은혜를 주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앞에 그 성산에 늘 거하는 주의 백성으로서 모두가 교만(驕慢)하지 말고, 지각(知覺)이 없이 행동하지 말며, 형제에 대한 포악(暴惡)은 생각에 조차 없어야 한다. 시온 산에 오른 자의 우리는 삶의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이 하실 일을 기억하여 오직 하나님 밖에 없음과 이 나라가 하나님 것임을 기억하여서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고 무릎 꿇어서 우리가 어느 산에 있는지를 기억해야 하여 올바른 산에 올라서 진정한 복락을 누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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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8월 28일)
제목: "광야, 은혜의 강물"
말씀: 시편 136:16
찬양인도: 쉐키나(유재원 부목사님)
사회:

설교자:신성식 부목사님
-----

*시편 136:16,
16 그의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참 감사합니다. 이 은혜의 자리에 우리를 불러주신 것 감사합니다. 연약한 우리의 인생에 광야를 지나갈 때에 은혜의 강물을 예비해 주시고 인생의 모든 목마름들을 해갈 할 수 있도록 은혜 주심에 감사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힘들 때마다, 어려울 때마다, 우리가 결핍의 상황에 처할 때마다 우리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치유와 회복의 제3일을 허락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 주님의 손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나아가시는 하나님이 택한 모든 자녀들을 이 시간도 기억해 주시고 은혜의 말씀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원하옵고 존귀하신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말씀의 능력과 성령의 역사하는 수요 저녁 기도에 참여하신 우리 모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수요 저녁 기도회를 통해서 새롭게 하시는 우리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말씀은 시편 136편 16절 한절 말씀입니다. 주신 말씀을 저와 함께 합독하시겠습니다.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의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를 통과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아멘. 한절 말씀인데요. 한 번 더 합독하겠습니다. 그의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를 통과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아멘.

저는 지난여름 7월과 8월을 지나면서 이 광야라는 단어가 제 마음속에 많이 와 닿았습니다. 또 날씨도 참 광야 같은 무덥고 힘든 날씨였지 않습니까? 오늘 시편 136편의 배경이 되는 역사적인 사건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입니다. 이 출애굽 사건에서 경험하는 광야는 실제로 사막 지대입니다. 인간이 살기 힘든 몇 가지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그 광야였습니다. 물이 없고요. 양식을 얻기에 적합하지 않았고 기온도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건져내신 하나님이 이 같은 광야길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내신 것입니다.

자 사진을 한번 보겠는데요. 우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애굽의 노예 생활 사백삼십 년의 노예 생활 그리고 광야 생활의 사십 년 그 기간을 지나면서 아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택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나아가기 위한 여정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몇 번의 광야 오늘 그 지도의 글씨가 좀 작게 보이는데요. 나일 강 쪽에서 이제 그 백성이 나와서 이제 출애굽에서 수르 광야, 시내 광야, 시내 광야 이 모든 광야를 통과해서 하나님께서 택한 그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광야 생활에 40년의 그 여정기(旅程期)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치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정처럼 오늘 영적인 이스라엘인 우리에게도 이 광야가 필수적인 코스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 광야는 이스라엘 땅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의 삶 속에도 있는 줄로 믿습니다. 특별히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순례의 여정에서 한두 번쯤 통과해야 되는 광야가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광야 길을 가다 보면 너무나 힘들고 고독하고 외롭습니다. 오늘 이 안아주심의 본당에 나오신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오늘 하루도 폭염 가운데서 인생의 광야 가운데서, 때로는 직장 생활 가운데, 가정생활 가운데, 자녀와의 관계 속에서 또 여러 정말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인간관계의 여러 가지 광야의 시간들을 지나왔습니다. 하나의 광야가 지나가면 이제 약속의 땅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하나의 광야가 지나가면 또 다른 광야가 예비 되어 있죠. 하나씩 광야가 왔으면 좋겠는데 어떻습니까? 두 개, 세 개의 광야가 우리에게 닥칠 때도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동행을 체험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주시는 회복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지난주일 담임 목사님 말씀을 통해서 온 교회가 참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회복과 치유에 제3일의 그 은혜가 광야를 지나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의 삶 가운데 함께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눈물 닦아주심 우리 하나님의 함께하심, ‘아들아 염려하지 말아라. 딸아 더 이상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너와 함께한다.’ 하나님께서 눈물 닦아주시고 함께하시고 우리의 어떤 연약함도 만져주시는 만져주심의 그 은혜가 인생의 광야길 가운데 있는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보면 광야라는 것은 우리 주님을 특별히 만나는 주님과 동행하는 장소입니다. 나 홀로 외로워서 우는 장소가 아니라, 우리 주님의 위로가 위로부터 임하는 귀한 은총의 장소가 되고요 다시금 소생하고 회복할 수 있는 영적인 회복의 장소가 바로 광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광야는 우리 하나님의 특별 은총을 체험하는 장소가 광야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광야 체험을 통해서 모든 이들이 한 결 같이 영적으로 성숙해지는 놀라운 은혜들을 경험하실 수 있기를 원합니다. 첫 번째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어떤 광야를 만나도 이 또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한번 같이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어떤 광야를 만나도 이 또한 인도하시리라.

I. 어떤 광야를 만나도 이 또한 인도하시리라.
-어떤 광야? 우리의 인생 길 가운데 하나님 이 광야는 너무나 힘듭니다. 라고 우리가 하소연하는 그 광야도 있지만 그 광야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어떤 광야를 지나더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자들은 결론이 어떨까요? 감사로 찬양하는 자리에 반드시 서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스라엘의 시편이 실패의 노래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승리와 기쁨과 감사의 고백으로 이 시편이 변화된 줄로 믿습니다. 이 찬양은 단순히 과거의 광야를 이끌었던 이례적인 사건을 기억하는 것을 넘어서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은 포로계의 시절도 있었고 어려운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숱한 그 포로 생활에 고난의 역사를 회고하면서 현실의 광야를 이길 수 있는 그 찬양을 어떤 인생의 광야라 할지라도 그것을 이길 수 있는 하나님 앞에 찬양할 수 있는 찬양의 제목으로 하나님 앞에 올려드릴 수 있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걸어가는 어떤 광야라 할지라도 오늘의 광야를 이길 수 있는 어제의 놀라운 찬양의 제목들이 우리에게 있었습니다. 저는 좀 힘들 때마다 많이 불렀던 찬양이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참 많이 불안한 찬송인데요. ‘예수의 사랑, 예수의 사랑 바다 물결 같이 내게 임하니 영광의 물결에 온전히 쌓여서 내 영혼의 기쁨이 할 량 없다.’는 그 고백입니다. 특별히 이번 광야를 묵상하면서 이번 폭염을 지나가면서 예수님의 그 사랑이 바다 물결같이 내 삶 속에 물밀듯 미로 오기를 하나님 앞에 사모했던 그 마음들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광야를 만나도 이 또한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다 과거가 있죠?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무엇을 했는지 다 알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참 우리의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런데요 우리 모두에게는 다 은혜 받았던 과거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토록 힘들었던 그 시간들, 은혜의 과거들을 회상하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어떻게 크고 기이한 일들을 행하셨는지 은혜의 과거들을 많이, 많이 묵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은혜의 과거를 더듬어 살펴보다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무궁한 인재와 사랑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다음이 없는 하나님의 인자와 사랑을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데요. 예레미야는 예레미야서 31장 3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예레미야 31:3,
3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
-아멘. 내가 어떠한 사랑으로요?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거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라고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의 그 광야의 시절을 경험했습니다. 절대적인 위험의 그 가정을 겪어 나갔습니다. 가나안 땅에 입성해서 정착하는 그 생활의 고난과 시련의 시간도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끝인 것 같은 끝인 줄만 알았던 그때에 전투에서 패배하고, 민족의 존속이 위태로워질 수 있었던 그 때에도 가나한 땅 정복에서 힘든 가정일 때도, 이스라엘 백성의 곁에는 누가 계셨습니까? 아버지 하나님이 함께 동행 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 쉐키나 찬양 가운데 하나님 정말 광야의 길을 만드시고 나를 인도하시는 그 하나님, 아무도 보이지 않는 것 같은 그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힘든 가정의 소망이 없어 보이는 때, 아무런 내 힘으로 할 수 없을 것 같은 그 상황 가운데, 하나님은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 계신 줄로 믿습니다. 다시 한 번 오늘 말씀을 같이 한번 보겠습니다.

*시편 136:16,
16 그의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의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를 통과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다. 그 예 백성 하나님의 자기 백성이라는 말씀입니다. 인도하시는 하나님과 인도함을 받는 백성과의 그 친밀한 관계를 너무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인도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동행하시고 인도해 주신 사건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또한 인도하실 뿐 아니라, 인도하여 통과하게 하셨다. 라고 말씀합니다. 광야 이후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광야 이후에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신 성취된 약속에 중점을 두면서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인도하셨고, 광야에서 인도하셔서 그 어려운 시간들을 완전히 통과하게 하셨다는 이 믿음의 고백 가운데 하나님 앞에 인지하심이 영원합니다. 라고 하나님 앞에 영원히 찬양하는 그 고백들을 올려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136편에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는 이 고백이 많이 이렇게 반복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인자하심 광야로 자신의 백성을 인도하신 것이 영원한 사랑 때문이다. 라는 이 고백이 어떻게 보면 아이러니한 모습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모든 소망이 끊어진 것 같은 그 광야의 시간 우리를 대적하는 문제와 시련을 만나야 하는 시간, 지치고 낙담하는 때도 있습니다.

여름마다 선교지에서 열심히 선교 사역을 담당하신 귀한 우리 사랑의 교회 권사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한번 선교지에 나가면 수십 명, 때로는 100명 이상의 많은 분들에게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을 가지고 영어로 이렇게 복음을 만들어서, 연세가 많은 분인데요. 복음을 전하시던 권사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권사님이 암에 이렇게 걸렸다는 그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권사님께서는 암 투병을 하시면서도 이 수요예배, 새벽기도, 주일 예배 정말 항암 기간이 아니면 몸에 좀 컨디션만 찾으면 항상 나와서 예배하는 자리에 계셨습니다. 어느 날 새벽 기도 시간에 그 권사님께서 저를 찾아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저 많이 좋아하셨어요. 괜찮아졌어요’. 병원에서도 너무너무 기적같이 좋아졌다는 그 소식을 전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목사님, ‘이제 조금 더 몸을 추스려서 다시 선교지에 나가고 싶습니다.’ 나가서 다시 한 번 그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기 원합니다. 라는 우리 권사님의 그 선교의 열정과 고백을 들으면서 제 마음속에도 참 새로운 도전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끝인 것 같은 그 상황에도 우리의 생명과 모든 것이 위태로운 때에도, 모든 중심에 서 있는 것처럼 힘든 그 순간에도 우리 주님은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찬양의 가사가 있죠?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으신, 우리를 한 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으시며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어떤 광야를 만나도 인도해 주시고, 우리 하나님, 카이로스의 그 시간에 우리를 극한 어려움에서 건지시고, 치우게 하시고, 회복해 하시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로 광야의 온도보다 더 높은 하나님 사랑의 온도, 같이 한번 고백해 볼까요?

II. 광야의 온도보다 더 높은 하나님의 사랑의 온도.
-광야의 온도보다 더 높은 하나님, 무엇보다 무슨 온도보다 무슨 온도가 더 높다고 고백합니까? 광야의 온도 우리 밤에도 열기가 떨어지지 않는 이 폭염 열대야 이 온도 보다 더 높은 것이 뭐라고요? 하나님의 사랑의 온도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를 사랑해서 광야로 인도하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광야에서도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의 온도가 우리 광야를 지나가는 우리 일상에 우리를 힘들게 하는 그 모든 더위와 폭염과 광야의 온도보다 하나님의 사랑의 온도가 더 높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아까 번의 그 지도의 사진처럼 그 계획에 따라서 모세를 보내셨고, 그 430년에 그 애굽에 종살이하던 그 백성을 출애굽 시켜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40년의 그 광야 생활 가운데 가나안으로 인도해 가시는 하나님의 그 손길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우리는 다 알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계획을 가지시고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내 인생인데 어디로 나가야 될지, 어디로 이끌어야 할지, 알지 못한 때조차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님들의 인생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셔서, 우리를 인도해 주신다는 이 사실이 정말 광야의 온도보다 더 우리의 심령을 뜨겁게 하고 하나님의 그 사랑의 온도가 우리의 가슴을 벅차오르게 만드는 줄로 믿습니다.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마실 물도, 먹을 양식도, 언제 어디서 적을 만나서 공격을 당할지도 모르는 불안한 그들이었지만 마치 하나님의 손길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그 상황 가운데 홀로 있는 것 같은 그 광야 생활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한 것은 표면적으로는 이스라엘의 불신앙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더 심오한 하나님의 우리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40년의 그 시간 동안, 이전에 430년에 종살이하던 그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던 죄약 된 습성을 버리는 기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라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한 그 시간이 40년에 광야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들이 방황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시간 동안, 자신들이 가야 할 목표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그 시간 동안에도 하나님께서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끝이 없을 것 같은 광야의 그 생활들 해결점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도무지 이 사건, 이 어려움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될지 모를 것 같은 그 절망의 상황들, 정말 그 절망과 두려움 가운데서 참 못 이루던 그 어려운 광야 생활, 마치 우리의 잘못으로 인해서 끝이 없이 이어질 것 같은 이 광야를 하나님께서는 인도하시고 완전히 통과할 수 있도록 우리의 손을 잡아주신 줄로 믿습니다. 통과하게 하셨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시련과 고난이 모두 지나가는 것들이었음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 힘든 문제 있죠? 오랫동안 기도했던 그 기자들이 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안에서, 우리 주님 안에서, 하나님의 손을 붙잡을 몸부림치며 고통하며 하나님 아버지 밖에는 없습니다. 라고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품 안에서 몸부림칠 언젠가는 그 시련과 고난도 모두 다 지나가는 것들이었음을 우리는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광야 생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언제나 그들과의 약속에 신실하셨습니다. 그 백성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그들을 돌보셨고, 결국에는 광야를 통과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들의 손을 잡아주시고 인도해 주셨습니다.

오늘 이 시간, 광야 같은 인생 길 가운데 이 안아주심의 본당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만져주심과 고쳐주심과 함께 하심을 바라보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의 광야 같은 그 고생도 일순간에 끝나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어려움을 만나지만 하나님의 계획을 모를 때, 광야 안에서 고생을 매일매일 경험하는 것 같을 때, 아무런 해결의 길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을 때에도,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택한 자녀들, 어떤 어려움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사랑하는 자녀들, 영원히 고통 가운데 두지 않으신다는 그 사실을 우리는 믿으실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영원히 고통 가운데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따뜻한 손길을 내미셔서 이 안아주심의 본당에서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시고, 우리를 만져주시고, 함께하시고 고쳐주시는 우리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손길이 광야의 시간들 속에 우리 가운데 함께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언젠가는 이 광야의 모든 어려움을 끝내시고 통과하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시편 136편에서 시편 기자가 바로 하나님 앞에 ‘그 인자하심이 영원합니다.’ 인자하심 하나님의 해세드가 영원합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자하심, 해쎄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언약적인 사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받을 만한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우리를 택해 주시고, 우리를 불러주시고, 자녀 삼아 주시고, 오늘 이 자리까지 우리를 인도해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쏟아부어주신 해세드가 오늘 우리 가운데 함께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와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처럼 우리 부모님이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에는 어떤 조건이 없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해세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믿음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초월해서 내가 여전히 하나님의 은총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은 아무리 보이고 힘들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품 안에,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 안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 끊을 수 없는,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지켜주시고 붙잡아 주시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인생길이 어떻게 정리될지 모르고, 이 광야 같은 인생이 어떻게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바로 연약한 우리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갑 없이 주시는 이 인자하심, 해세드, 이 은혜가 광야의 인생길을 뚜벅뚜벅 걸어가시는 우리 성도님들의 삶 속에 지금부터 영혼까지 함께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주시는 이 햇세드 인자하심이 함께 하심으로 우리가 걸어가는 광야 길의 인생, 광야의 그 뜨거운 온도보다 훨씬 더 높은 하나님의 사랑의 온도, 하나님의 사랑의 온도는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우리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고 우리의 마음에 더 하나님의 그 사랑을 풍성하게 경험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온도를 체험하시는 우리 귀한 성도님들 한 분 한 분 되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세 번째입니다. 광야는 반복되어도 구원하시는 우리 하나님은 동의하십니다.

III. 광야는 반복되어도 구원하시는 우리 하나님은 동일하다.

-한 번 고백하겠습니다. 광야는 반복되어도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동일하십니다. 하나의 광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돼서 반복되는 광야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만져주시고 고쳐주시는 우리 하나님은 동일하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첫 번째 사진을 한 번 더 보겠습니다. 이 사진에 잘 보시면 우리 지중해가 있고요. 그 지중해의 오른편으로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그리고 요단강이 있고 요단강 쪽에 ‘싯딤’이라는 그 지역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거의 빠져나갈 쯤에 약속의 땅을 이제 눈앞에 목전에 두고 있는 시점이 바로 이 싯딤이었습니다. 430년에 치열했던 노예 생활, 애굽의 노예 생활을 지나가면서 이제 또 40년의 그 광야 길을 뒤돌아가면서 마지막 관문이 싯딤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지도를 보겠습니다.

이 싯딤은 요단강 동편에 위치했기 때문에 멀리나만 가나한 땅을 멀리 바라볼 수 있는 그 지역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싯딤이라는 뜻은 아카시아라는 뜻입니다. 한국의 아카시아 나무 있죠? 그 나무들처럼 크지는 않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는 이 아카시아 나무가 없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드디어 이제 이 요단강 동편에서 멀리 가나안 땅이 보이는 이 싯딤에서 아카시아 나무를 볼 수 있었던 무성한 나무들이 많은 곳에 이 백성들이 도착했습니다.

그 광야를 끝나고 사막을 지나와서 이제 그늘 진 곳, 정말 좀 햇빛을 피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이 사실 하나나마도 그 백성들의 마음이 얼마나 심과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물이 귀했던 광야와는 달리, 이제 물줄기가 흘러가는 요단강을 바라보는 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벅차오르는 감격이 그 백성들에게 있었습니다. 지나온 광야에 비하면 너무나도 좋은 것임은 분명합니다. 그런데요 이 이스라엘은 바로 이 광야의 끝자락에서 이 40년 광야의 끝자락에서 그 약속의 땅에 보이는 그 입구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말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한 큰 우상숭배의 죄악을 범했던 장소가 바로 이 싯딤이었습니다.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출애굽 했던 1세대는 그곳에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다 이 싯딤에서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광야가 끝나는 지점 싯딤이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이 고난이 끝나기를 원하지만 광야가 끝나기를 원하지만, 고난이 끝나는 것이 축복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신앙의 여정 길 가운데, 광야길 가운데 우리는 방심하면 안 된다는 것을 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싯딤의 사건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가 성 여인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수가 성 여인도 이 광야의 주제와 연관해 볼 수 있습니다. 뙤약볕에 광야와 같은 이 뙤약볕에 우물물을 길러 왔던 여인에게 예수님은 이 물을 길어 올리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시지 않고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요한복음 4장 14절 말씀인데요. 같이 한번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4:14,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너희 안에서 영원토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밖에서 우물물을 지어 먹는 그 인생이 아니라, 안에서 솟아나는 그 은혜로 살아가는 인생인 것을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주님께서 그 수가 성 여인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도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반속에서 솟아나는 그 샘물이 광야의 모든 메마름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크고 작은 광야를 만날 때에 그 이후에 집착(執捉)합니다. 왜? 이 광야가 나에게 닥쳐왔나? 왜 이 고난이 나에게 있나? 크고 작은 인생의 고난과 광야를 만날 때 우리는 그 이유가 무엇인가? 왜 이런 어려움들이 생겼는가? 집착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한 번 믿음의 문을 열고, 이 광야를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당연한 문으로, 관문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오히려 그 광야의 시간 동안 우리는 주님과 더 자연스럽게 동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광야를 만난다 할지라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광야는 우리 인생에 목적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광야는 목적지가 아니라, 축복의 다리입니다. 블레싱 브릿지입니다. 우리가 어떤 광야를 지나간다 할지라도 이 광야가 우리 인생의 목적지라면 우리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적지가 아니라 축복의 달이 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우리는 소망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업은 광야에서 만들어지고 가난에서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이사야서 43장 18절, 19절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이사야 43:18-19,
18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반드시 광야의 길을 사막의 강을 내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광야 같은 우리의 삶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은혜의 강물이 흐르게 하시고, 위로의 강물이 흐르게 하시고, 축복의 강물이 흐를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 길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셔서 결국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주실 것이라는 정해진 그 결론을 반드시 이루어주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미 결론이 있습니다. 답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면 답은 정해져 있고 과정도 예상된다면 이제부터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는 하나님 앞에 찬양을 선택하며 나아갈 수 있는 그것이 오늘 우리의 인생의 광야를 만날 때 가장 지혜로운 모습일 것입니다. 광야의 때에 하나님을 붙잡으실 수 있기를 원합니다. 광야가 약속으로 나아가는 하나님의 계획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광야를 지나더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감사로 찬양하는 자리에 반드시 서게 될 줄로 믿습니다.

코로나시기에 40대 후반의 젊은 남동생을 천국으로 보낸 그 형님 되시는 성도님 부부가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병실에서 저희 사랑의 교회 권사님 한 분께서 계속해서 기도해 주시고, 복음의 메시지를 전해 주시면서 결국에는 그 동생은 그 코로나로 천국으로 보내 드렸지만 그 형님 부부가 사랑의 교회에 등록을 하게 되었고요. 그리고 그 동생의 부모님, 이 어머니 아버지도 사랑의 교회에 등록하셔서 네 분이 동시에 사랑이 위해 등록을 해서 이제 올 가을에 이제 세례를 받기 위해서 준비하고 우리 담임 목사님의 그 세례를 온 가족이 함께 받기 위해서 사모하며 기다리는 귀한 가족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이 닥친다 할지라도 우리가 인내하면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어떤 광야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반전의 드라마를 준비시켜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역전의 드라마를 연출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흔들리지 않고 담대하게 인내하며 나아가는 우리 성도님들 되실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 인생의 광야를 지나갈 때에 은혜의 강물을 예비해 놓으시고, 인생의 목마름을 해갈(解渴)할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의 아버지가 되어주심을 끝까지 믿고 신뢰하며 나아가는 우리 귀한 믿음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

♣요약
우리 인생의 광야를 지나갈 때에 은혜의 강물을 예비해 주시고 우리 인생의 모든 목마름을 해갈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길 간구해야 하며, 아무리 힘든 광야의 시간을 지나간다 하더라도 반드시 인생의 광야를 끝내게 하시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헤세드의 인자하심을 마음껏 찬양하는 언약의 백성들이 될 수 있어야 한다.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초월해서 내가 여전히 하나님의 은총 아래 있다는 것과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붙들고 있다는 것을 신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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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8월 21일)
제목:“들으시는 하나님”
말씀: 민수기 11:1-3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부목사님)
사회: 강건우 부목사님

설교자: 오우진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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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11:1-3,
1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시매.
2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3 그 곳 이름을 다베라라 불렀으니 이는 여호와의 불이 그들 중에 붙은 까닭이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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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먼저 광야에서라는 민수기의 제목을 가지고 개론적인 내용을 말씀드리고 좀 본문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민수기의 원 제목은 히브리어로 ‘배 미드바르’ 라고 합니다. 즉 ‘광야에서’ 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요. 원어 성경에서 모세의 오경은 그 제목을 보통은 첫 단어를 제목으로 삼는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민수기는 그 전통을 따르지 않고 다섯 번째 단어를 따르고 있습니다. 히브리 성경의 제목이 보여주듯이 민수기에는 출애굽 한 백성들이 광야에 있을 때 일어난 사건들을 많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I. 첫째, 광야에서.
-일반적으로 우리들에게 광야는 고통(苦痛), 연단(鍊鍛), 시련(試鍊) 등으로 이해되곤 하는데요. 하지만 사실 광야는 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광야(廣野)는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 길 끝에는 아주 분명한 목적지가 있는데요. 구약에서는 가난한 땅으로 가르켜지고 신약의 관점으로 볼 때는 우리가 가고 있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광야는 우리 자신에 대하여 증명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하나님 앞에서 증명(證明)해내곤 하는데요. 어떤 이는 신앙이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도 알게 되기도 하고요. 어떤 이는 연약(軟弱)한 사람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믿음이 견고(堅固)한 사람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기도 합니다. 광야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분명하게 경험하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갖게 됩니다. 말씀을 통해 만난 하나님은 현재적으로 임재 하는 분이시고, 삶의 현장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심을 깨닫게 되니, 광야는 그분을 경험하는 거룩한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광야에서 신자는 단순히 고통이나 시련을 당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하여 증명하고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경험하며 약속의 땅을 향해 전진해 나가는 것입니다. 민수기는 바로 이에 대한 기록이고요. 광야에서 만난 그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인도하사,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가시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성경이라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 11장 1절에서 3절의 본문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먼저 우리는 백성들의 악한 말을 들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II. 둘째, 백성들의 악한 말을 들으시는 하나님.
-여기서부터 좀 무서운 말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제가 좀 밝게 이야기를 해야 되는지, 긴장(緊張)하며 이야기를 했는지 고민을 많이 했는데요. 심판(審判)의 말을 말하다 보니 편안히 얘기하면 안 될 것 같고 또 너무 진지하게 얘기하면 굳을 것 같아서 그냥 적당하게 하려고 하니까 여러분들도 그냥 잘 이해하시면서 말씀을 좀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 3절에 보면 다베라라고 불리게 된 이 곳에서 1절을 다시 한 번 보게 되는데요.

*민수기 11:3,
3 그 곳 이름을 다베라라 불렀으니 이는 여호와의 불이 그들 중에 붙은 까닭이었더라.
1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시매.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였다고 기록이 돼 있습니다. 직역하면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악으로 원망하는 백성들이 되었다. 이 정도의 문장이 될 것입니다. 악으로 원망한 백성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말을 하나님 앞에서 했는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지가 않습니다. 악으로 원망했다는 표현으로 보아 악이 먼저는 마음속에 있었고, 그 마음 안에 담겨 있던 악이 입술로 발화가 되어서 하나님이나 또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를 원망하는 실제적인 어떤 표현이 만들어진 상황이었습니다. 어쩌면 이 말은 직접적이고 노골적(露骨的)인 거친 표현일 수도 있고요.

어쩌면 다소 절제된 표현이었지만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은, 하나님을 조롱하거나 인간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공격적이고 불순한 표현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이들이 악한 말로 원망하였는지 성경은 말하지 않지만 출애굽기와 민수기에 기록된 백성들의 일반적인 문제와 동일한 문제였을 거라고 추측을 합니다. 또한 오늘 민수기의 본문과 구조상 짝을 이루는 출애굽기 15장의 말씀을 보면은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르 광야에서 모세를 원망하였는데, 이들이 모세를 원망했던 이유는 사흘 길을 걸어가는 동안 물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마도 오늘 본문에 사건도 직접적으로는 물과 같이 중중요한 자원이 결핍에서 비롯된 문제가 아니었을까, 이렇게 추측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곳에서 이 백성들도 이런 결핍(缺乏)의 문제로 인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하였는데 마치 전염병(傳染病)처럼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사람의 마음에서 다른 사람의 마음으로 전파되었고, 그 결과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하나님을 원망(怨望)하는 악한 말을 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실제로 조금 전에도 말했던 출애굽기 15장에서 마라에서 백성들이 했던 말을 들어보면은요. 백성들은 모세와 하나님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무엇을 마실까, 우리는 무엇을 마셔야 하나? 이런 식으로 말을 하면서 이후 신 광야에서 원망하며 말하기를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차라리 죽여 버리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렇게 이야기 하고 했던 것입니다. 애굽 땅에서 떡을 배불리 먹었을 때, 내가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행복했을 텐데 하나님을 이렇게 악한 말로 조롱(嘲弄)한 것이죠. 그런데 오늘 1절에 보니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민수기 11:1,
1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시매.
-네 여기까지만 읽겠습니다. 네 여기 보니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함에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악한 말로 원망함에,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마음속에 가득 차 있던 악이 입을 통해 소리로 발화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를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악한 말을 들으셨고, 진노(震怒)하셨고,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 그들을 불사르게 하셨습니다. 심판의 불이 백성들의 진영에 떨어진 것입니다. 2절을 보니,

*민수기 11:2,
2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2절을 보니 불로 심판받는 이 백성들은 모세를 향해 부르짖습니다. 얼마나 그 불이 강렬(强烈)하게 타올랐는지 백성들은 큰 재앙(災殃)을 당하여 절규(絶叫)에 가까 가까운 부르짖음으로 긴급(緊急)하게 자신들의 지도자였던 모세를 찾은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 같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을 듣고 이같이 강렬한 불로 심판을 하셨을까요? 성경은 곳곳에서 사람의 말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곤 하는데요. 잠언 4장 24절은 말하기를,

*잠언 4:24,
24 구부러진 말을 네 입에서 버리며 비뚤어진 말을 네 입술에서 멀리 하라.
-라고 경고 하였구요. 야고보서 1장 26절은,

*야고보서 1:26,
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성경이 이렇게 사람의 말에 대해 경고하는 것은 그 말이 공동체를 파괴하고, 관계를 깨뜨리고 분열(分列)시킬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게 조차도 파괴적(破壞的)인 영향력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경에서 강조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런 말들이 악한 말이 되어 하나님 앞으로 가게 될 때는 이 문제는 다른 차원(次元),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되기 시작합니다. 민수기 14장에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 원망하는 자들에 대해서 경고를 하셨는데요. 민수기 14장 29절에서 30절을 보면,

*민수기 14:29-30,
29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30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서 엎드려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그 약속하신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해서 신약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10절에 말하기를,

*고린도전서 10:10,
10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원망하다가 멸망하였다고 이렇게 경고하였습니다. 여러분, 이들의 특징에 대해서는 주의 형제 형제였던 야고보와 같이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셨던 유다가 유다서에서 어 성경의 구절들을 보면 이들이 과연 누구였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우리 한번 같이 한번 볼까요? 유다서 1장 5절입니다.

*유다서 1:5,
5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않은 자들을 멸하셨으며.
-출애굽한 백성들 중 멸망당한 자를 가리켜 유다는 말하기를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라고 분명하게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는 거였습니다. 또 유다서 1장 10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우리 한번 같이 읽어볼까요?

*유다서 1:10,
10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도다 또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그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영적인 지식이 전혀 없고 단지 이성은 짐승처럼 자기 자신의 현재적인 피로를 본능적으로 느끼고 알고 있습니다. 영적인 지식에 대해서는 무지한 짐승 같은 자들이라고 설명한 것입니다. 유다서 1장 15절을 한번 같이 해볼까요? 같이 읽겠습니다.

*유다서 1:15,
15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니 하나님을 믿지 않고 또 짐승 같이 살아가는 이 사람들이 줄을 거슬러 모든 완악한 말로 하나님 앞에 말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요. 끝으로 우리가 유다서 1장 16절, 18절-19절을 한 번 더 보겠습니다. 16절입니다. 같이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유다서 1:16,18,
16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며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18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19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
-그러니 유다는 이들을 말하기를 정욕대로 행하는 자세, 자신의 정욕대로 하나님 앞에 행하기 때문에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조롱하고, 차라리 애굽에서 내가 죽임을 당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며 하나님을 조롱하는 자들, 그 사람들은 심지어 성령을 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결과적으로 지금 하나님 앞에서 단순히 말해 실수하는 자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믿음에서 파손된 자들입니다. 영적으로는 소경이고, 육체의 소욕을 따라 정욕대로 행하는 자들이고 완악한 말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불경건한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성경은 그들을 성경이 없는 자들이라고 말하니, 얼마나 하나님 앞에 원망하는 자들을 마음껏 해대는 이들을 하나님께서는 심판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오래 인내하셨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원망했는데요. 문법적으로 원망했다는 말은 단회 적으로 한 번 내뱉고 끝난 말이 아니라, 계속해서 반복해 하나님을 심판받고, 멸망 받는 그 시점에까지도 끊임없이 하나님을 원망한 자들이란 걸 보여줍니다. 더욱이 진영 끝에서 그들은 심판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소통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공동체를 분열시킨 이들을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말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주의하여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인생의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을 향해 가는 겁니다. 자원의 결핍이나 그 밖의 문제로 인해 많은 인내를 요구하는 때를 지나가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고통으로 인해 괴로워할 때도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표현들은 우리의 존재와는 비교할 수 없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을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비롯된 말들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만홀(漫忽)이 여김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시고, 우리의 말과 혀로 모욕(侮辱)할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높으신 그분을 찬양하는 마음과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그분의 거룩하심 앞에 경건을 무너뜨리지 않고 단정하고 고요하며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가득히 안고 언제나 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입술에 재갈을 물리고 그리고 그분의 거룩하심 앞에서 우리의 말과 혀를 다스릴 때 우리의 영혼은 참된 경건을 이루고 영원의 온전함을 이루어 가며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잠언이 말하는 성경의 교훈을 이 시간 마음 깊이 새겨두어야 할 것입니다.
*잠언 1:20,
20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오늘 두 번째는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 2절을 한번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2절입니다.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우리 1번 더 같이 읽어볼까요? 같이 한번 큰소리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III. 셋째,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민수기 11:2,
2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여러분 한번 집중해서 본문을 보십시오.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어떻게 됐습니까? 불이 꺼졌더라.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여러분 여기에 바로 우리의 위로(慰勞)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악한 말로 하나님을 원망(怨望)하는 소리만을 듣는다면 얼마나 이것이 우리에게 비극적(悲劇的)인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감사(感謝)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시편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그 심정을 헤아려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시편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그 심정을 헤아려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시편 5장 3절에,

*시편 5:3,
3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요한일서 5장에서도 이렇게 고백하는데요.

*요일 5:15,
15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하나님이 들으시는 줄을 안즉, 성경은 이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언제나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자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세의 기도에는 놀라운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 개인의 어떤 간구(懇求)를 들으시는 차원(次元)이 아니라, 죄를 사(赦)하는 기도, 죄에 대한 심판(審判)에서 생명(生命)을 구원(救援)하는 기도(祈禱)였던 것입니다. 맹렬하게 타오르던 심판의 불은 모세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자 소멸(消滅)되었습니다. 심판하는 하나님은 우리의 원망(怨望)과 불평(不平)만을 들으시는 분이 아니었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죄를 사하시고 심판을 소멸하신 분이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마가복음 14장을 보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리 주님은 피와 땀을 흘리며 기도하실 때, 제자들은 눈이 심히 피곤하여 기도하지 못하고 잠이 들었습니다. 제자들조차 기도하는 것을 어려워해서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그 순간 졸고 말았던 것입니다. 기도할 때마다 우리는 감겨진 우리의 눈 안에서 산만(散漫)해진 정신이 하나님께 우리가 집중(集中)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을 경험(經驗)합니다. 육체는 피곤(疲困)하고 일상적인 일부터 맡고 있는 교회 사역에 이르기까지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들이 우리 자신의 머릿속에 오가서 내가 기도를 하고 있는 건지, 상상을 하고 있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을 만큼 어지럽게 하는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정상적인 생각으로는 단어를 떠올리지 못해서 생각 없이 쏟아내는 단어의 반복이나 차라리 의미는 알지 못해도 소리는 계속 낼 수 있으니 차라리 방언으로 기도하자는 마음으로 계속해서 방언(放言)으로 기도하는 때도 있습니다. 더욱이 어떠한 때는 불안(不安)과 염려(念慮)가 마음을 붙들고 놓지 않아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흐리게 하여 기도에 더욱 어려움을 주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모든 기도의 수고도,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듣고 계시며 심지어는 나의 기도를 통해 영혼의 죄를 사하시고 공동체(共同體)를 구원한다는 이 놀라운 사실 앞에서는 모두 다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조금 전 우리가 읽었던 요한의 서신에서 우리는 무엇이든지 구하는 말을 들으시는 것을 안다는 사도의 말을 읽었죠?

*요일 5:15,
15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바로 다음 구절에 사도는 이와 같이 이야기를 합니다.
*요일 5:16,
16 누구든지 형제가 죄범 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야고보서 5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야고보서 5:14-15,
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형제가 죄를 범하는 것을 보고, 죄로 인해 고통 받을 때 그 영혼을 기도하면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의 기도가 들으시는 하나님의 강권적(强權的)인 역사를 통해 한 영혼을 구원해내고 마는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킨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가지고 있는 가장 위대(偉大)한 힘은 심판대(審判臺) 위에 서있는 죄인을 이끌어내어 생명(生命)의 길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모세 한 사람의 기도도 이와 같은 역사 안에 힘이 있었는데, 만약 우리와 같은 수많은 이들이 하나님 앞에 죄(罪)를 범(犯)하여 고통(苦痛) 중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지금부터 저는 11년 전 한 교회에서 고등부를 맡아 사역(事役)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맡았던 고등부는 대략 240명의 아이들이었는데요. 240명 아이들이 거의 대부분 참석했던 그해 여름 수련회에서 집단적(集團的)으로 이 아이들이 거듭나고 변화(變化)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말씀이 시작된 때부터 무언가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은 것을 느낄 수가 있었는데요. 설교가 끝나고 기도회가 시작되자 아이들이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토로하고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은 자신들의 인생을 하나님의 영광(榮光)을 위해 살려주시기를 눈물을 흘리며 간절(懇切)히 기도하였습니다.

부모님들의 성화에 밀려서 겨우 저녁 집회만 참석하기 위해 학원 끝나고 가방 하나 떨렁 메고 들어왔던 아이들이 집회(集會)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기 위해 차를 타다가 내가 이 수련회(修練會)에 참석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後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면서 우르르 차에서 내려 다시 집회실로 들어와 기도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수련회에 가기 전에는 아니 수련회가 시작하기 전에는 앉은 자리에서 단 5분도 기도하지 못했던 아이들이 첫째 날, 저녁부터 말씀을 듣고 기도하기 시작하는데 새벽 1시가 돼도 기도가 멈추지 않는 상황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다음 날 일정(日程)을 진행하기 위해서 저는 억지로 기도회를 마무리하고 아이들을 재웠습니다.

그다음 날에도 아이들은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데 전날과 똑같이 기도가 멈춰지지 않고 또 다음 날 일정을 위해 억지로 새벽 1시의 기도회를 마무리했어야 했습니다. 신기(神奇)한 것은 은혜 받는 것은 똑같지만 고등학생과 장년들은 좀 다릅니다. 장년들은 기도에 불이 붙으면 멈추지 않고 기도하잖아요. 고등학생들은 간식을 먹고 들어와서 기도합니다. 수련회가 끝나고 주일이 돼서 아이들이 다시 주일에 모였습니다. 예배 시간 말씀을 전하는데 이 아이들이 말씀을 들으며 눈물을 멈추지 않는 겁니다.

부모님들은 수련회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우리 아이가 전혀 다른 사람들이 되어 돌아왔다고 저를 찾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고등부 아이들이 얼마나 변화(變化)가 어려운지 여러분들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저도 고등부를 맡고 나서 얼마나 아이들과 씨름을 했는지 모릅니다. 지금부터 11년 전이었으니까 아주 오래된 일은 아니지만, 저도 그때는 지금보다 혈기왕성(血氣旺盛)하고 아주 특심이 있는 열혈 사역자였습니다. 지금은 좀 많이 착해졌거든요. 저는 고등학생들이 허투(虛套)로 예배(禮拜)하는 게 너무 싫었습니다. 선생님들은 다 아이들을 달래주지만 누군가 하나는 악역을 맡아야지 하며 사냥 시간에 아이들의 핸드폰을 보면 저는 그 아이 손을 잡고 기도해주는 대신 끌고 나가 제발 교회를 나오지 말라고 설득을 했습니다. 말씀 시간에 졸면 내가 너희들 부모님을 설득해 줄 테니까. 제발 말씀시간에 안 오면 안 되겠냐고 부탁을 했습니다. 한번은 설교를 시작하는데 아이들이 설교를 듣지 않는 거예요. 지금 같으면 그렇게 하진 않겠지만, 설교가 시작되고 나서 3분 정도 지난 후에 저는 성경책을 덮고 내려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간곡하게 또 부탁했습니다. 제발 너네 교회를 좀 안 나왔으면 좋겠다. 근데 신기하게도 그렇게 교회를 나오지 말라고 설득을 하는데, 다음 주에 또 나와서 앉아있는 거예요. 그렇지만 달래고 윽박지르고 아무리 말을 해도 아이들이 전혀 변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겨울 수련회가 있었습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려고 준비를 하는데 너무 복통이 일어나는 거예요. 힘이 들어서 병원에 가보니 식중독(食中毒)이었습니다. 원래 수련회 전에 제가 교사를 데리고 기도회를 인도해야 하는데 도저히 참석할 수가 없어서 부장 선생님께 전화를 했습니다. 당시 부장 선생님이 참 신실하신 분이셨는데요. 이분이 제 전화를 받고 정신이 퍼뜩 든 겁니다. 원래 겨울 수련회는 보통 교회에서 진행을 하기 때문에 선생님들이 별로 신경 쓸 게 없습니다.

끝나고 아이들 돌아갈 때 손에 쥐어주는 간식 정도만 맛있게 준비하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던 거죠. 근데 갑자기 설교자가 식중독에 걸리고 교사들도 함께 교사들과 함께 기도회를 못 나오겠다고 하니 위기감(危機感)을 느낀 이 부장 선생님이 선생님들에게 긴급 문자를 남기고 저녁에 모든 교사들이 모여서 기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겨울 수련회 때 제가 맡았던 고등부의 영적인 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진행했던 그 수련회에서 아이들이 진지하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신앙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고, 기도했던 교사들이 이내 아이들의 뚜렷한 변화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당시에 밤새 구토하고 오전에 겨우 일어나 설교를 마무리하고 설교 전에 죽 한 그릇 먹고 나와서 기어가는 목소리로 설교하고 다시 집에 들어가 구토하고 준비하고 죽 한 그릇 먹고 설교했는데 하나님께서 선생님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이들의 영혼을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그해 여름이 되었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여름 수련회였죠. 선생님이 선생님들이 수련회 전부터 이번에는 아예 저한테 기도에 오지 말라고 말하더라구요. 말씀을 집중해서 준비하라고 하면서 수련회 전부터 교사들이 모여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련회장에 도착해 보니, 선생님들이 말씀을 준비하는 저를 위해 마련해 놓은 원룸의 저를 감금시켜 놓고, 본인들은 밖에서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집회 전에 제가 그 장소에 도착을 해보니 모든 선생님들이 동그랗게 모여 앉아 눈물을 흘리며 우리 주님께서 이 밤의 역사하사 아이들의 영혼을 위해 일하여 주시라고 기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름 수련회 저는 매일 저녁마다 3시간 동안 아이들에게 설교했고, 설교를 마무리하며 누가 한 번뿐인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겠냐고 질문을 던졌을 때, 성령께서는 아이들의 온 영혼에 큰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변화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우리가 기도해야 할까요? 왜 우리가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며 왜 우리는 모일 때마다 지도하는 일에 힘써야 할까요? 왜? 우리는 토요일 새벽마다 모여서 우리 사랑의 교회와 한국교회와 대한민국의 영적인 재건과 세계선교를 마무리하기 위해 기도해야 할까요? 단 한사람의 기도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심판으로 타오르던 불길을 꺼뜨리는 힘이 있는데, 7천 명이라는 기도의 사람들이 매주 하나님 앞에서 영혼을 위해, 교회를 위해, 국가를 위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도한다면,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우리 주님께 돌아오는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우리는 자신에게 일어난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고 오히려 다른 영혼(靈魂)들의 연약함을 위해서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는 자리에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광야(廣野)를 지나는 가운데 불편하고 인내해야 되는 상황(狀況)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 믿음으로 맡겨드리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앞에 수많은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면 이것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놀라운 특권이 되겠습니까?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계신데, 영혼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것은 나의 간구를 들으시고 영혼을 죄에서 건져내시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 번뿐인 인생인데, 어려운 형편을 푸념이나 하면서, 원망 가운데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영혼을 구원하시는 이 위대한 일에 동참하여 지도의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설 것인지를 우리는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사랑하는 남편, 사랑하는 아내, 사랑하는 부모님 혹은 사랑하는 자녀들이 돌아오기를 오랜 시간 기다린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이 있으시다면 낙심(落心)하지 마시고 다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의인의 기도는 간구(懇求)하는 힘이 있고 영혼(靈魂)을 죄에서 구원(救援)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살지 않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참여(參與)하지 않는다면 그런 인생에 어떤 기쁨과 즐거움이 있겠습니까? 바로 그 일에 있어 우리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시는 하나님이 계시니 지금은 우리가 한마음이 되어서 기도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지금도 수많은 영혼들의 죄(罪)를 사(赦)하시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계십니다.

♣요약
우리는 많은 인내가 필요한 광야 같은 인생길에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는 믿음의 고백과 간구로 날마다 승리하여 매일의 찬송과 감사가 하늘에 사무치게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진정으로 생명을 구해야 하며, 사랑하는 가족, 친척, 친구, 이웃에게 영혼의 죄를 사하며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큰 구원 역사를 속히 베풀어 주시길 간절히, 절규하며 기도해야 하며, 7천 기도용사를 필두로 사랑의 교회 모두 영 가족들이 ‘2033-50 비전’으로 맹렬히 기도할 때, 대한민국 영적 재건과 세계선교를 마무리 하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승리를 경험하게 될 것을 확신한다.
-우리는 말씀을 들은 대로 반응할 수 있는 은혜를 간구해야 한다. 영혼의 죄를 씻기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부르심과 기도할 때마다 거듭남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심을 확신하여, 힘든 역경 속에서도 물러나지 않고, 더욱 열심을 다해 기도해야 한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척과 친구와 이웃을 기도의 자리에서 건져내는 놀라운 역사들이 끊이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교회마다 주님의 자녀들로 기쁨으로 차고 넘쳐나길 소망한다.

*민수기 11:1-3, 요약.
-이스라엘 백성의 죄는 그들이 여호와를 원망했다는 것이다. 율법(律法)이 죄(罪)를 드러내기는 하지만 없애지는 못한다. 율법이 죄를 저지하기는 하지만 이기지는 못한다. 그들은 불평하였다. 그들이 감사할만한 것을 그렇게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불평할 만한 어떤 꼬투리를 발견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죄로 인해 받으신 모욕(侮辱)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정당하게 진노(震怒)하셨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이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징벌(懲罰)하심으로써 심판하셨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노하셨으므로 그들은 모세를 찾아와 하나님의 진노에서 그들의 친구를 도와달라고 청하였다. 그들을 위한 모세의 중재 기도는 응답되었다.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제물을 받으셨으므로 진노의 불이 꺼졌다. 불평하는 백성의 수치(羞恥)를 영원히 알리기 위해 그곳을 새로운 이름으로 칭하였다. 그곳은 다른 사람들이 듣고 두려워하며 경고(警告)를 받아 그들처럼 죄를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다베라` 곧 `불사름` 이라고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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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8월 14일)
제목: "빈 손 인생:그래도 하나님은..."
말씀: 욥기 1:20-22
찬양인도: 쉐키나(윤재원 부목사님)
시회: 강건우 부목사님

설교자: 윤주은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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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1:20-22,
20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가 여전히 이 시간 이 자리를 사모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치유와 회복을 소망하게 하시니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이제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사오니, 귀를 열어 듣게 하시고, 눈을 열어 포기하시며 마음을 열어 감화시켜 주옵소서. 전하는 자 듣는 자 모두에게 맞춤형의 은혜를 허락하시고 권고하여 주옵소서. 이 모든 간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산 소망과 참 기쁨이 샘솟는 수요 저녁기도회에 참여하시는 모든 성도님들을 환영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권고해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치유와 회복을 얻는 복된 시간되기를 소망합니다. 함께 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구약성경 욥기 1장 20절부터 22절까지 말씀입니다. 구약성경 762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절씩 교독하고 마지막 절은 합독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삶이고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해 주시는 삶입니다. 성경은 그런 우리에게 형통함과 풍성함 안전함과 만족, 그것을 기대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과연 현실이 그러던가요? 오히려 우리의 삶은 그 약속대로 풀리지 않을 때가 더 많이 있습니다. 막힘과 부족함 불만과 위태로움을 마주합니다. 때로는 마음 한구석이 텅 빈 듯한 상실감(喪失感)마저 느끼게 됩니다. 우리 삶 속에서 무언가를 잃는 경험은 예고 없이 다양한 모습으로 찾아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가까웠던 사람의 배신이나 관계 문제가 될 수 있고, 또는 재산을 잃었거나 경제적인 어려움을 당할 때가 그럴 때가 있습니다. 건강이 나빠질 수도 있고, 질병에 걸릴 수도 있고 또 때로는 직장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기대했던 일이 무산되거나 또는 계획에 어긋나는 상황들을 만나게 되기도 합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상실감으로 다가오는 것들입니다.

신앙은 답을 모른 채, 계속 나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이라는 한 신학자의 말처럼, 우리는 상실의 짐에 짓눌려서 삶의 기반이 송두리째 빼앗기는 흔들리는 듯한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삶의 현실이 뒤죽박죽 되어버리는 때도 있습니다. 마치 헤아릴 수 없는 슬픔과 아픔 맥없이 밀려오는 낙담과 좌절, 허무함 당황스러움과 같은 상실의 강을 건넙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생 여정에서 우리가 견지해야 할 신앙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욥의 삶을 추적해 보겠습니다. 욥은 족장 시대의 인물입니다. 에돔 지방의 우수 출신이라고 합니다. 그는 모든 것을 갖춘 완벽한 남자였습니다.

제가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생각한 것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수님의 온전한 제자가 되자. 라고 그 기도에 제목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구약 모델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욥기 1장 1절에 묘사된 욥에 신앙평가를 보면,

*욥기 1:1,
1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그는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번역들을 참조해 보니까, 흠이 없었고, 정직했고, 하나님을 경외했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 악한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욥이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어서 2절과 3절을 보면.

*욥기 2:3,
3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느니라.
-욥은 아내와 수많은 자녀들을 두었고, 그가 살던 지역에서 으뜸가는 부자였습니다. 개혁개정의 표현에 따르면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종합적으로 욥은 물질로도 부자였고, 신앙으로도 부자였습니다. 여러분 여기까지만 보면 참 부럽지 않습니까? 저는 이런 욥이 참 부럽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부러움을 산 욥이 당한 일을 주목해보면 부럽다. 라고 우리가 생각했던 그것이 얼마나 경솔한 것인지 모릅니다. 13절부터 19절까지 기록된 내용을 제가 요약해 드리면, 욥은 아내만 제외하고 재산과 자녀들을 하루아침에 잃게 됩니다. 심지어 나중에는 피부병(皮膚病)까지 앓게 되고 그것 때문에 고생을 합니다. 그는 한두 푼 가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1~2명의 자녀를 가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10명의 자녀가 있었고, 그의 재산은 당대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4차례에 걸쳐서 하루아침에 잃고 만 겁니다. 욥의 반응이 그런데 놀랍습니다. 오늘 저희가 살펴볼 것인데 그 전에 어떻게 욥은 이런 반응을 보일 수 있었을까? 한번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 4절과 5절의 힌트가 숨어있습니다.

*욥기 1:4-5,
4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의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5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욥에는 경건한 성품이 있었습니다. 욥은 자녀들의 생일잔치가 끝날 때마다 했던 일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 그 자녀들을 불르고 불러서 정결하게 하고 번제(燔祭)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한 두번 그랬던 게 아니라, 항상 그렇게 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냐 하면, 혹시라도 자녀들이 잔치 중에 생일잔치 중에 하나님께 죄를 짓지는 않았을까? 하는 염려하는 마음 때문에 그들의 죄를 씻으려고 그렇게 한 겁니다.

욥은 꾸준한 영적 습관이 그의 삶에 뿌리 박혀 있었던 겁니다. 그는 하나님과 지속적이고 깊은 교제를 통해서 그 삶에 견고한 믿음의 토대를 세워왔던 것입니다. 여러분 항상(恒常)이 무서운 겁니다. 평소(平素)가 중요한 겁니다. 그게 실력(實力)입니다. 우리도 평소에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그리고 깊이 있는 교재를 통해서 견고한 믿음의 토대를 세워 가야 합니다. 여러분 경건한 성품이 다져지는 만큼 우리가 상실의 강을 건널 때 건널만하게 만드는 겁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영적 습관이 중요한 줄 알고 오늘 이 자리에 방학인데도 불구하고, 수요 저녁 기도에 나오신 여러분들 참 잘 하신 겁니다. 영적 습관을 지키려고 나오신 거죠. 견고한 믿음의 토대를 세우시려고 나오신 거잖아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들이 삶 가운데에 건너는 상실의 강을 이런 것들을 통해서 건널만한 힘을 챙겨 가시는 겁니다. 여러분, 평소에도 하나님과 지속적이고 깊은 교제를 나누십시오. 그렇게 여러분의 삶에 견건한 믿음의 토대를 세워 가시기를 바라며 또한 경건한 성품을 소유해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욥의 반응을 살펴보면서 상실의 강을 건널 때, 우리가 견지해야 할 핵심이 무엇인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3가지를 볼 건데 첫 번째 그것은 뭐냐하면, 나의 삶이 빈손 인생임을 절감하는 것입니다.

I. 첫 번째, 나의 삶이 빈손 인생임을 절감(切感)하는 것입니다.
-21절 상반 절입니다.

*욥기 1:21a,
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새 번역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모태에서 빈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에도 빈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우리 인생을 ‘빈손인생’ 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 욥기는 전체 42장 1070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세지는 않았고 찾아봤습니다. 그중에 고작 8개 절로 욥은 모든 걸 잃고 맙니다. 그 중에서도 7개절은 가족과 재산을 잃게 됩니다. 욥이 훌륭하다. 라고 평가를 받았던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일순간에 사라져버린 이 욥,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 줄 모릅니다. 건강이 남아 있으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2장 7절에 보면 건강도 잃어버립니다.

*욥기 2:7,
7 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
-그야말로 빈손 인생이 된 거죠. 성경은 인생의 본질이 빈손이라는 사실을 여러 군데서 알려주는데 2가지를 제시해 드리겠습니다. 먼저는 ⓵야곱입니다. 이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뼈저리게 이 사실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야곱 여러분, 아시는 대로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이나 섬겼지만 빈손으로 쫓겨날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돌보심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극적으로 재산을 얻고 떠났습니다. 그런 야곱의의 고백이라 합니다.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바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 하셨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으리라마는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 어젯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

⓶다윗 역시 인간의 모든 수고와 노력이 하나님의 일하심의 은혜가 없이는 자칫 빈손 인생이 될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 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에 깨어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야곱과 다윗의 고백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알몸으로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라고 말한 욥의 고백과 맞닿아 있는 교훈입니다. 이 두개의 본문은 욥의 고백을 야곱과 다윗의 삶을 통해서 각각 다르게 표현한 버전인 셈입니다. 이솝우화에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우리는 벌거숭이로 이 세상에 왔으니, 벌거숭이로 이 세상을 떠나리라. 어딘가에서 이런 표현도 한번 보았습니다. 아기의 첫 옷 호주머니가 없다. 먼 훗날 아기가 입게 될 마지막 옷도 호주머니는 없다. 그냥 왔다 그냥 간다. 제가 이 두 개의 메시지를 1문장으로 합쳐 봤습니다. 우리는 호주머니 없는 벌거숭이로 왔다가 호주머니 없는 벌거숭이로 간다. 누구의 이야기죠“ 욥의 이야기이고, 야곱과 다윗의 이야기이고,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이야기입니다. 저야 여러분의 이야기가 바로 이러한 호주머니가 없는 벌거숭이로 왔다가 호주머니가 없는 벌거숭이로 가는 인생입니다.

사랑하는 영 가족 여러분,
사람들은 흔히 그렇게 말합니다.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잊는 것이 인생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없이 태어나서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다가 결국 없어지는 것이 인생입니다. 오늘 욥이 우리의 인생에 별명을 하나 지어줬습니다. 뭐죠? 빈손 인생입니다. 바라기는 상실의 강을 건널 때,나의 삶이 빈손 인생임을 절감하시기를 소망합니다. 두 번째 보겠습니다. 두 번째는 나의 삶은 하나님의 속안임을 알고 확인하고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입니다.

II. 두 번째는 나의 삶은 하나님의 소관(所管)임을 알고 확인하고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욥기 1:20,
20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욥은 망연자실(茫然自失)한 상황에서 두 가지 행동을 보입니다. 하나는 ⓵자신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미는 것이었고, ⓶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나아가 엎드려 경배(敬拜)하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자신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민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상실, 그리고 깊은 절망 속에서 비통한 심정을 온몸을 드러내면서 보여준 행위였습니다. 그보다 우리가 주목해야 되는 것은 그 두 번째 그 뒤에 나오는 행동입니다. 그가 보인 행동이 뭐였냐면 땅에 엎드려 경계하는 것이었습니다. 20절에 보면,

*욥기 1:20,
20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그러자 또는 종이 전한 말해라는 표현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고려해서 읽어보면 욥이 종에게 비보를 듣자마자, 보인 첫 번째 반응 비통함을 표현함과 더불어서 땅에 엎드려 경배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굉장히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겁니다. 욥은 자신이 취할 수 있는 가장 겸손한 신앙의 제세를 취했습니다. 그는 이번 일에 최고 책임자이시자, 최종 결정권자이신 하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경배했습니다. 욥이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민 것이 그의 절망을 나타낸 것이라면, 그가 땅에 엎드려서 경배한 것은 하나님께 겸손(謙遜)히 복종(服從)하겠다는 결의(決意)를 나타내는 겁니다. 이처럼 욕은 겸손이 하나님께 나아가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합니다.

그것도 비보를 듣자마자, 상실감에 사로잡힐 시간도 없이 주저함 없이 곧장 그렇게 반응합니다. 그의 행위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제 욥은 입술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욥은 모든 상황을 찬양으로 승화시키는데, 여러분 21절 하반 절에 보시면,

*욥기 1:21,
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욥은 모든 것을 잃고서 잃어버린 것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합니다. 저는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한 찬송가의 가사가 떠올랐습니다. 찬송가 370장 2절입니다.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내 노래 되었네. 전날에 한숨 변하여 무엇이 되었어요. 내 노래되었네. 그날 욥이 부른 찬성 듣지는 않았지만 그 가사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결국 20절과 21절에 나타난 욕의 행위는 자기 삶이 하나님 소간임을 확인한 행위였습니다. 용은 이번 일이 하나님 소간(所幹) 임을 알았던 겁니다. 이번 일을 주관하실 분도 하나님이심을 유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두 번 세 번 생각하지 않고, 몇 날 며칠 망설이지 않고, 곧장 하나님께 나간 겁니다. 나아가서 따지든 드러눕든 울부짖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나아갔습니다. 여러분, 이런 자세가 귀한 겁니다. 여러분, 상황이 어떻든지 간에 이 자리에 나온 것이 잘 하신 겁니다. 여러분 상황이 어떠신지 간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잘하는 겁니다. 나아가셔서 아무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찬송도 안 해도 되고, 기도도 안 해도 되고 하나님 원망 안 해도 되고, 찬송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나아가는 거, 그게 귀한 줄로 믿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욥의 삶에 관건(關鍵)은 하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그것이 관건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처럼 산더미처럼 쌓인 집안일이나,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자녀 문제가 관건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쉴 새 없이 밀려오는 수많은 회사 일도 그의 관건이 아니었고, 사람들과 만남에서 오는 감정적(感情的)인 소모(消耗)도 그에게는 관건이 아니었습니다. 뭐 오르락내리락하는 그런 매출 이런 것도 관건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우리의 삶에서 그런 모든 것들이 다 중요하지만 그에게 삶의 관건은 오로지 하나님이었습니다.

시편의 기자들이 그러했습니다. 시편을 여러분들이 곱씹어 보시면 시편은 결국 삶의 관건이 하나님인 사람들의 기도입니다. 그들의 관건은 그들 자신이었거나 그들이 당한 상황이었거나 그들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교회답지 않아 다투는 우리’ 라는 책을 보다가 욥에 관한 한 문장을 발견했습니다. 욥은 자신의 삶에서 잃어버린 재산 혹은 자녀 하물며 건강에 대해서는 큰 미련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욥의 유일한 관심사는 바로 신학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향해 치열하게 묻고 따지는 유일한 물음은 신학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신학이 가리키는 것이 뭔지 아시겠죠? 하나님입니다.

한때 욥의 삶에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었던 재산, 자녀 그 모든 것들이 사라졌습니다. 당시 농경사회에서 가축이나 자녀는 큰 자산이 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욥은 자신의 정체성마저 완전히 잃어버렸다라고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전에 욥은 재산을 통해서 부자로 인정받았고, 자녀들을 통해서 존경받는 아버지로 인정받았고, 신앙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의 정체성을 규정해주던 그것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때도 욥의 삶의 관건은 무엇이었어요? 하나님이었습니다. 우리도 욥처럼 시공(時空)을 초월(超越)하여 삶의 관건이 오로지 하나님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욥에게는 왜 삶의 관건이 하나님이었을까요? 다시 돌아와서 욥에게는, 욥은 자기 삶이 하나님의 소관(所管)임을 알았던 겁니다. 욥은 평소에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믿음의 기초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일을 계기로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신한 겁니다. 여러분, 우리 삶은 우리 소관(所管)이 아니라, 하나님 소관(所管)입니다. 이건 의심할 필요도 없고, 따지고 들일도 아닙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확신할 뿐입니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이런저런 일들이 무엇이 되었든지 모두 하나님 소관(所管)임을 인정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엎드리면, 그걸로 된 겁니다. 이렇게 살기를 바라는 분들에게 기도 제목 하나를 제가 팁으로 드리려고 합니다.

4세기 교부 어거스틴을 다 아실 텐데, 이 어거스틴이 ‘사랑에도 질서가 있다.’라는 사랑의 질서 개념을 강조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더 사랑해야 할 것은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해야 할 것은 덜 사랑하고, 최고로 사랑해야 할 것은 최고로 사랑하는 그러면서 어거스틴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내 안에서 사랑의 질서를 잡아 주옵소서.” 우리의 기도로 삼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사랑의 질서를 잡아주셔서 부디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소관임을 의심 없이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의 영 가족 여러분,
우리가 든든하게 우리를 든든하게 해주던 삶의 울타리들이 무너졌을 때 우리가 견지해야 할 신앙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바라기는 나의 삶은 하나님 소관임을 확인하고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으시기를 소망합니다. 끝으로 우리가 견지해야 할 신앙의 핵심 중 핵심 하나만 더 봅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계신다. 나의 삶에 자리 잡고 계신 하나님의 존재에 사무치는 겁니다. 다시 한 번 21절을 보십시오.

*욥기 1:21,
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욥은 빈손 인생에 이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신이도 여호와시요. 거둔 이 시도 여호와시오니 헤아리기 힘든 일을 겪고서 비통해하며 하나님께 나아간 욥은 하나님의 고유하신 이름을 부릅니다. 여러 가지 이름이 많잖아요.

근데 여호와 하나님, 그 이름을 부르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욥은 모든 것을 잃은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만은 남아 계시다. 라는 사실을 붙들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온 1장의 흐름이나 욥의 친구들이 욥에 찾아오기 전까지에 내용을 다루었던 그 2장까지의 전개를 살펴보면, 욥에 일어나는 사건들은 모두 갑자기 발생한 이름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갑자기라고 제가 표현을 한 것은 욥이 겪게 된 일은 이유 없이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떤 결과가 발생했다. 라는 건 그에 따른 원인이 있게 마련입니다.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습니다. 그런데 욥에 삶에는 원인 모를 일들이 예고 없이 벌어졌습니다. 어떻게 된 걸까요? 배후에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욥이나 욥의 안에 또는 종들은 이해할 수 없었던 그 당시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일하심, 원인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욥에 삶에 개입했던 결과인 겁니다. 욥은 영문은 알 수 없었지만 자기 삶에 하나님의 일하심이 개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그는 주신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시는 이도 여호와시라. 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이러한 고백입니다. 나는 비록 재산을 잃고 자녀를 잃었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계십니다. 내가 소중하게 여겨온 것이든,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든 하나님은 여전히 계십니다.

내게 중요한 것이었던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든 혹 내게 그것이 필요한 것이었든, 필요하지 않는 것이었든 나는 지금 전부를 잃었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계십니다. 욥은 자신의 삶에 자리 잡고 계신 하나님의 존재에 사무쳤던 겁니다. 사실 욥은 더는 잃을 것이 없다. 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욥기 13장 15절을 보면,

*욥기 13:15,
15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셔도 자신으로서는 잃을 것이 없다.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욥은 수중에 있던 재산이나 곁에 살던 자녀 그런 게 아니라, 불변하셔서 여전히 그 자리에 계시고 내 삶의 좌정(坐定)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묵상하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그러한 것들에 잠시라도 마음을 빼앗겼던 것들이 아니라 그것이 아니라 처음과 끝이 한결같으시고 그런 하나님께 집중하면서 하나님의 존재에 사무쳤던 겁니다. 여러분, 욥기 3장 이후를 보면 욥은 자신을 위로한답시고 찾아온 친구들, 그 3명의 친구들과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눕니다. 그러나 친구들의 위로는 욥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켰습니다. 이때 욥의 친구들은 욥의 고난이 죄 때문이라고 비난하면서, 정죄(定罪)하면서 회개(悔改)를 촉구(促求)합니다. 하지만 욥은 결백을 주장하면서 친구들의 비난에 맞섰습니다. 그때 이런 말을 합니다. 욥기 19장 25절,

*욥기 19:25,
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우리가 볼 때 욥은 작은 것들을 잃은 게 아니었어요. 여러분 10자녀, 모든 전 재산, 그게 작은 겁니까? 작은 게 아니에요. 대체할 수 없을 만한 것들을 잃었습니다. 욥은 이러고서 어떻게 앞으로 살아가지, 싶을 심정을 느낄 정도로 모든 걸 잃었고,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게 되었습니다. 깊은 상실감을 느꼈죠 하지만 욕은 확신합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압니다. 내가 전부를 잃은 이 순간 하나님만은 여전히 살아 계셔서 나를 돌보시는 날이 반드시 오고야 낼 것을 나는 압니다. 욥의 고백이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왜인지 모르게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래도 여전히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내가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의 삶에 자정하고 계시고, 나의 삶에 자리 잡고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우리 모두의 삶에 깊이 새겨지는 진실 된 고백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럼 운전을 하다보면, 가끔 안개 낀 길을 만납니다. 그럴 때는 시야가 확보되지 않기 때문에 조금 더 열심히 집중해서 운전을 해야 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면 그제야 보이지 않던 사물들이 하나씩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안개가 걷히면 비로소 누가 보이기 시작할까요?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살다보면 하나님을 잘 보이지 않게 만드는 여러 가지 안개가 우리 삶에 드리워지곤 합니다. 예를 들어서 재물(財物)과 가족이 될 수도 있고, 건강과 관계가 될 수도 있고, 성공과 욕망이 될 수도 있고, 걱정과 두려움이 될 수도 있고, 과거의 상처가 될 수도 있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 될 수도 있고, 자기 의나 인정 같은 것들,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안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시야를 가려서 하나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러다가 상실의 때를 지나면서 삶에 안개가 걷히고 그제야 항상 그 자리에 계셨던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핵심은 무엇이죠?

안개 때문에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때에도 세상의 사물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겁니다. 우리가 단지 보지 못했을 뿐이죠. 마찬가지로 우리 삶에 여러 가지 안개가 끼어서 우리가 하나님을 보지 못하며 살 뿐이지 그때도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시고 우리 삶에 자리잡고 계십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영 가족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을 잃으셨습니까? 어떤 일로 마음이 슬프고, 아프며 낙담하고 좌절하고 계십니까? 어떤 이유로 억울하고 혼란스럽고 허무하고 당황스러우십니까? 저와 여러분들에게 도전합니다. 그 상황이 오히려 복된 일임을 고백하십시다. 모든 것을 잃었더라도 하나님을 잃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잃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잃은 모든 것이 사실은 안개였고, 이제야 비로소 하나님을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 삶의 안개를 걷어 주옵소서. 우리 삶에 잔뜩 낀 안개를 말끔히 걷어 주옵소서. 저와 여러분들의 진실 된 기도 제목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입술을 열어서 한 가지 더, 주신이도 여호와이시요. 거두는 이도 여호와시라. 고백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다 함께 고백해 볼까요? 주신이도 여호와이시요. 거두는 이도 여호와시라. 바라기는 상실의 강을 건널 때,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계신다. 세상을 영에 선포하시며, 나의 삶에 자리 잡고 계신 하나님의 존재에 사무치시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빈손 인생임을 잊고 살면서, 손에 쥐 것을 세기에 바쁘고, 손에 쥐지 않은 것을 얻으려고 바쁜 줄 모릅니다. 그러다 어느 날 거센 폭풍을 맞아서 손에 쥐는 것마저도 휩쓸려 가며, 텅 빈 손을 바라보면서 당황하고, 낙심하고, 절망하고, 분노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하나님께 상처받기도 하고 하나님께 삐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수많은 인생 질문들이 생겨납니다. 여러분, 한 사람의 진면목은 최고의 순간에 최악의 순간에 확연히 드러납니다. 우리로 따지면 그리스도인은 상실의 지님이 짓눌렸을 때 그때에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로 인해서든 감당할 수 없는 상실감을 사로잡힐 때, 나의 삶이 빈손 인생임을 절감하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삶은 하나님 소관임을 확인하고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계신다. 나의 삶에 자리 잡고 계신 하나님의 존재에 사무치시기를 바랍니다. 여기까지 깨닫고 나니깐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삶이 빈손 인생인 줄만 알았는데, 사실은 만물보다 크신 하나님께서 만 손으로 우리 빈손 인생을 쥐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이 위대한 약속을 붙들며 사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만유해주이신 예수 글 속에서 언젠가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우리가 저 천국에 갈 때에 그때에는 우리가 이 땅에서 잃었던 모든 것보다도 더 값지고 영원한 것을 얻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잃었던 그 모든 것을 잊게 될 줄로 믿습니다. 끝으로 우리가 지금껏 나누지 않은 본문 22절의 새 번역을 보시면,

*욥기 1:22,
22 이렇게 욥은, 이 모든 어려움을 당하고서도 죄를 짓지 않았으며, 어리석게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이 사건의 결론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그와 같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욥처럼 모든 일에 어려움을 당하고서도 죄를 짓지 아니 아니며, 어리석게 원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만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계신다. 그 믿음의 반석 위에 날마다 넉넉히 승리하며 살아가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의 이름으로 간절히 진실로 소망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계십니다.

♣요약
말씀을 통해 상실의 강을 건너는 우리 삶에 믿음을 돌아보아 감사해야 한다. 우리 삶의 현실은 기대와 달리 상실로 가득하듯이, 우리는 예고 없이 다양한 모습으로 찾아오는 상실의 강을 건너야 한다. 우리 모두 인생의 본질이 빈손 인생임을 깨달아, 없이 태어나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다가 결국 없어지는 것이 인생임을 고백하고, 나의 삶이 빈손 인생임을 절감하게 해야 한다. 삶에서 마주하는 이런저런 일에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나의 삶이 관건이 오로지 하나님이 되어서, 나의 삶은 하나님 소관임을 확인하고,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아가야 한다. 삶의 안개를 걷어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계신다, 세상을 향해 선포하며 나의 삶에 자리 잡고 계신 하나님의 존재에 사무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 모든 간구(懇求)를 그날에 더 값지고 영원한 모든 것을 얻게 하실 것을 확신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욥처럼 나아가야 한다.

-영원하도록 지음 받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써 세상이 권하는 잠시의 모든 약속은 다 거짓임을 깨닫고, 없고 없다가도 있는 이 빈손 인생으로 하여금 여호와의 그 크고 의로운 손을 더욱 의지해야 한다. 삶으로 마주하는 이런저런 모든 일의 관건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나의 소견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관아래 있음을 확신하고 흐트러진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아 의심 없이 하나님을 따라가야 한다. 불투명한 내일로 인해 우리 모두의 믿음이 흔들리려 할 때, 그래도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그래도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단 한 번도 흔들림 없이 나를 사랑하셨던 그 하나님의 존재를 선포하면서 하늘에 사무치는 찬송과 감사로 승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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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8월 7일)
제목: "습관을 따라“
말씀: 누가복음 22:39-46
찬양인도: 쉐키나()
대표기도:
설교자: 박단열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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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복음 22:39-46,
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40 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41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45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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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한창 특새 기간이었을 때의 일입니다. 특새 때 교역자들은 3시 30분에 기도회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 맞춰서 나오기 위해서는 일찍 일어나서 일찍 출발해야 합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대체적으로 2시경에는 일어나서 와야 늦지 않게 주차도 하고 여유 있게 기도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새벽 2시에는 자는 사람이 많을까요? 그때 일어난 사람이 많을까요? 자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 그 기간에 특별히 긴장하고 매일 긴장하며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눈을 떴는데, 2시 50분입니다. 화들짝 놀라서 일어났습니다. 큰일 났다 하면서 주차는 어디하지, 또 기도회는 어떻게 해야 되지, 그런 막 많은 생각을 하면서 화장실에 딱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보니까 특새가 지난주에 끝났습니다. 1주간 특새에 맞춰 삶을 살아가다 보니 1주일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몸의 습관이 들어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저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감사한 마음으로 다시 침대에 누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당시에도 습관이라는 것이 참 무서운 것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최후의 만찬에 마치신 예수님께서 습관을 따라 감람산으로 가셨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감란 산으로 가셨다는 것은 곧 기도하러 가신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는 습관이 있으셨다. 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문장입니다. 감람산으로 가신 주님께서는 함께한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왜 기도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까? 바로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기도에는 유혹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 가족 여러분들에게 여러분에게도 유혹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까? 근데 여러분에게 유혹은 언제 찾아옵니까? 요한일서 2장 16절 함께 한번 보겠습니다.

*요한일서 2장 16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씀을 볼 때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이라고 말하고 그것들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은 우리 육체가 원하는 것을 탐하는 욕심을 말합니다. 인간의 일반적인 욕구인 식욕, 성욕, 수면욕, 배설 욕 같은 것들을 지나치게 탐닉하려고 할 때 우리는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안목의 정욕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으로부터 비롯되는 욕심을 이야기합니다.

때로는 SNS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생활을 보며, 나보다 뭔가 더 나아 보이는 그 사람의 모습을 보고 아 나도 좀 저런 걸 갖고 싶다. 라는 생각이 지나치게 작동할 때 우리는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이생의 자랑은 부유한 재산이나 높은 신분을 자랑하는 것을 말하며, 이런 것들을 얻기 위해 잘못된 수단이나 방법을 이용하려는 것이 또한 유혹에 빠지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유혹은 언제 우리에게 다가옵니까? 이 말씀의 내용을 볼 때 사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 순간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서 하루를 살아가고, 직장에 가고, 학교에 가고, 식사를 하고, 쇼핑을 하고, 티브이를 보고,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다른 사람을 만나고 걸어가는 모든 순간이 유혹이 유혹의 순간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는 것마저 그 동기가 세상의 것을 쫓기 위함이라면 그것마저도 유혹에 휘둘리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러시아의 대문호인 도스토예프스키가 습관에 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습관이란 인간으로 하여금 어떤 일이든지 하게 만든다.” -도스토예프스키-
-그는 이 자막의 말과 같이 습관의 능력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습관에 능력이 있다는 것뿐 아니라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에 한번 주목해 봐야 될 것입니다. 그 어떤 일이 하나님 안에서 거룩한 능력을 행하는 일이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과 같은 유혹에 빠져 이 세상이 추구하는 죄 된 본성을 강화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최선을 다해서 삶을 살아가야 하지만 그 최선이 하나님 뜻 안에서 행하는 최선인지 아니면 이 세상이 주입하는 죄의 유혹에 근거한 최선인지를 날마다 스스로 점검하며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뜻 안에 살아갈 수 있습니까? 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뜻 안에 행하기 위해 첫째로,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습관을 따라 기도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I. 첫째로, 예수님과 같이 습관에 따라 기도하여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
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말씀처럼 쉬지 말고 기도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마주하는 세상의 모든 것이 유혹의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세상을 마주하는 모든 순간에 기도하겠다. 라는 그런 결단과 실행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말씀처럼 쉬지 않은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 참 어려운 일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우리가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 기도하고자 하는 갈망과 기도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정말 그 간절함, 열심히 기도하겠다는 의지가 있더라도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 삶의 하나님을 거역하기 쉬운 습관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22장 21절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예레미야 22장 21절,
21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중하지 아니한 것이 네 습관이다. 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죄 된 본성 가운데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아니 하고자 하는 습관이 기본 값으로 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깊은 뿌리 깊은 습관 즉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려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죄의 유혹을 이겨내기 위해 아무리 애써도 그것을 이뤄내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뿌리 깊은 습관인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하는 습관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우리의 몸에 기도의 습관을 단단히 새겨야 합니다. 습관을 따라 기도하지 않고서는 우리 안에 있는 불순종의 습관을 이길 수 없습니다. 나의 계획과 나의 의지 나의 노력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더우나 추우나 피곤하나 기도할 수 있도록 우리는 기도를 습관화해야 합니다. 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뜻 안에 행하기 위해, 두 번째로,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기도하여야 합니다.

II. 두 번째로,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기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습관을 따라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말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 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기도 내용은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는데요.
첫 번째는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라는 기도구요.
두 번째는 그러나 내 원이 아닌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기도 하셨습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는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십자가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는 예수님의 요청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모든 인간의 대속 제물로 십자가 형태를 올려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분명한 뜻임을 알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의 수치와 고통 그리고 모든 사람의 대신 죄를 짊어짐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고 버림받게 되는 그 찰나의 순간에 대한 그 고통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느끼셨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옮겨달라고 요청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바로 자신의 원이 아닌 하나님의 원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대로 되기를 원하는 기도를 올려 드리셨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예수님의 이런 기도와 같아야 합니다. 아무리 내가 원하고 소원한 일이 있다. 할지라도 그 소원한 일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때로는 그 소원을 꺾고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여야 합니다. 때때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그 순간에도 자신의 욕망을 추구할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렇게 기도 할 수 있죠.

ex) 하나님, 올해 고3인 우리 아들이 정말 지혜 주셔서 반드시 좋은 대학 가야 됩니다. 가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정작 아들에게는 “아들아, 너는 고3이니까. 열심히 공부해야 해 그러니까 여름에 고등부 수련회는 올해는 가지 말자. 공부해야지. 그리고 대학가서 수련회 가면 되잖아. 이번 학원 방학 특강 시간이 고3부 예배 시간이랑 겹쳤네 학원 다녀와서 온라인으로 예배드리면, 돼. 이번 여름이 너무 중요한 거 알지? 올해만 잘 참고 내년에 대학 가서 그때 예배 잘 드리면, 돼.”
-이런 기도를 하고 있진 않습니까? 분명히 하나님께 기도는 하고 있지만 현재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이 추구하는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는 유혹에 휘둘려 하나님께 하는 기도마저도 나의 욕망을 성취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철저하게 나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로 나아가야 합니다.

20여 년 전 제가 군복무를 마치고 대학 2학년에 복학하였습니다. 제가 그 시기에 그 어느 때보다도 정말 하나님과 깊은 친밀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 그때는 아직 신학교는 가지 않았는데 하나님 말씀을 묻는 것이 너무 행복하고 기도한 것이 너무 즐거워서 매일 도서관에 가면 하루에 최소 1시간에서 2시간은 말씀만 읽고 연구하고 또 기도도 1시간에서 2시간 정도 최소한 하루에 3~4시간은 말씀과 기도만 했던 시기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만큼 하나님과 깊은 어떤 충만한 친밀한 교제의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그러면서 어느 날 제 자신을 돌아보니, 원래 제가 참 세상적인 욕망과 유혹에 잘 넘어가기 쉬운 그런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하나님 외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어진 제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충만한 은혜를 누리다가도 또 어느 순간에 보면 제가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유혹에 빠져 실수하고, 실패하는 제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 제 자신을 보면서 저는 제 신앙을 돌아보게 되었고 나름대로 왜 이런 것일까? 그것을 고민하고 묵상하며 나름대로 정리를 해 보았습니다. 한번 그림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그렸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항상 그림과 같이 우리의 삶은 항상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과 17절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17절,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다시 그림 보여주세요. 우리 이 말씀에 나온 것처럼 우리 애는 성령을 따르는 어떤 마음과 육체를 따르는 마음이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흔히 말하는 것처럼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을 따르려고 하는 마음과 세상의 것을 따르려고 하는 우리의 마음과 같습니다. 근데 여기서 이 그림에서 볼 때 하나님과 세상 속에 있는 살아가는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나를 끌어당기고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서 제가 고등학교 때 배웠던 만유인력의 공식을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만유인력의 공식을 기억하십니까? 여러분은 기억 못 하실 것 같아서 준비했습니다.



에프는 알 제곱분의 쥐 곱하기 엠1 곱하기 엠2입니다. 뭐 잘 아시는 것처럼 에프는 힘이고요. 쥐는 중력 가속도를 얘기하는 거고, 알은 거리를 얘기합니다. 그리고 엠1 엠2는 두 매개체의 무게를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두 무게가 무거울수록 더 인력이 당기는 힘이 커지고 그리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해서 더 가까워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그 힘이 커진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근데 아까 그림을 봤을 때 하나님과 세상 속에서 나라는 존재가 있을 때 하나님이 나를 당기는 힘과 세상이 나를 당기는 힘 사이에서 우리가 있다라는 거죠. 근데 아까 그 공식은 다 잊어버리고 거기서 변하는 것이 다른 상수는 다 변하는데 어 변하지 않는데 예를 들어서 중력 가속도 이런 것들은 다 변하지 않는데 유일하게 변하는 변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거리입니다. 즉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기 때문에 거리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큰 힘이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하나님과 내가 서로 당기는 힘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만큼 세상에 죄와 죄의 유혹이 당기는 힘은 기하급수적으로 낮아지게 됩니다. 반대로 세상의 죄와 유혹에 가까워질수록 죄의 유혹이 담기는 힘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하나님께 다가가고자 하는 힘은 기하급수적으로 낮아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배우고 묵상하고 암송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과의 거리는 서서히 좁혀지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급속도로 좁혀진 것이 아니라 서서히 좁혀지게 된다는 겁니다. 내가 계속해서 말씀을 묵상하고 어제도 하고 오늘도 하고 내일도 하고 어제도 기도하고, 오늘도 내 기도하고, 내일도 기도해야 서서히 조금씩 그 거리가 좁혀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점차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면 놀랍게도 죄의 유혹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어느 지점 이상 나아가면 하나님과 끌어당기는 그 힘이 너무 강해지고, 죄의 유혹이 담긴 힘이 너무나 약해져서 마치 내가 그 죄의 유혹으로부터 완전히 초월한 것 같이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아주 지극히 높은 영적인 충만함과 동시에 영적인 교만함이 우리 마음 가운데 싹트게 됩니다. 반대로 세상 적 욕망에 가까이 나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말씀도 싫고, 기도하기도 싫고, 예배도 귀찮아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해도 그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근데 여기서 진짜 문제가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그림을 보여주세요. 보여주실 겁니다. 정말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 존경하는 영 가족 여러분, 너무나 거룩한 여러분,
저희 중간에 있는데, 여러분이 아무것도 안 하고 어떠한 인풋도 없이 가만히 중간에 있으면 여러분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겠습니까? 아니면 세상으로 가까이 나가겠습니까? 솔직하게 말씀하십시오. 난 아무것도 안 하는데 점점 하나님께 가까이 나간다. 라고 하면 거짓말입니다. 왜냐하면,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에게는 불순종하는 습관이 기본적으로 장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예레미야 22장 21절 보겠습니다.

*예레미야 22장 21절,
21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
-너무 슬프게도 가만히 있으면 서서히 세상에 죄의 유혹으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시선과 관심이 쏠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중하지 않는 것이 기본적인 습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정말 시간이 오래 걸리고 경건한 습관을 가진 것도 어렵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도 힘들고 하나님과 아주 친밀한 상황일 때도 계속해서 말씀과 기도에 힘쓰지 않으면 우리는 서서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가까워지는 것은 참으로 긴 시간이 필요한데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가만히만 있어도 점차 죄와 유혹으로 나가고 영적으로 교만해서 한순간에 미끄러지기도 하고 나름대로 발버둥치려고 하여도 그 방향이 잘못되어 있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 그것이 우리의 기본 값입니다. 오늘 본문 44절부터 46절을 제가 한 번 더 읽어드리겠습니다.

* 누가복음 22:44-46,
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45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셔서 땀이 핏방울처럼 땅에 떨어질 만큼 그렇게 기도 하신 이후에 돌 던질 만큼 떨어진 곳에 있는 제자들에게 다시 돌아오셨을 때, 그의 제자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습관에 따라 기도하고, 나의 원이 아닌 하나님의 원대로 살기를 소망하며 기도하지만 여전히 제자들과 같이 자고 있는 것이 저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말씀의 은혜가 충만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 애쓰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가던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할 때에, 그 감격과 기쁨은 어디 가고 여전히 나는 세상에 죄의 유혹과 욕망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있지 않는가? 그렇게 스스로를 돌아보게 됩니다.

나의 주님께서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돌 던질 만큼 그렇게 가까운 곳에서 저토록 처절하게 기도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욕구를 이기지 못하고 영적으로 어두워져 자고 있었구나! 그렇게 한탄하게 됩니다. 여전히 나는 영적으로 실패하고 무능한 무가치한 존재가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 어찌하여 자드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는 말씀에서 저는 다시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나는 여전히 실패하고 넘어지기 쉬우며 유혹에 빠져 영적으로 넘어지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구나, 예수님께서 저에게 그래 너 실패했으니 이제 넌 끝이야, 아무리 해도 넌 안 되는구나. 내가 그렇게 주의하라고 했는데 그렇게 한숨을 쉬시며 나를 포기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나마저 나 자신을 포기하고 싶어지는 그 순간에도 여전히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시 일어나 기도하라고 하시는구나, 내가 영적인 실패와 그 실패의 그 순간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순간에도 불구하고, 다시 하나님께 나아와 기도하며 불순종의 습관을 끊으며 기도의 습관을 쫓아 살아가며 하나님께 더욱더 가까이 나오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주님의 그 말씀에 순종하겠습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수요저녁기도회 나오신 영 가족 여러분,
기도하는 습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코로나가 한창 심각할 때 정부와 질병관리본부에서 고강도 사회적 거리두기 캠페인이란 것을 한 것이 벌써 4년 전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고강도 사회적 거리 두기는 실패하면서도 정작 고강도 영적 거리 두기에는 대성공을 했습니다. 하나님과 영적 거리 두기는 결과적으로 세상의 죄와 유혹과의 거리를 좁히게 만듭니다. 그런 실패의 시간들이 지나가고 많은 것들이 회복되었지만 여전히 우리 마음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이 원인이긴 한데, 여전히 세상의 유혹에 휘둘리고 나의 욕망에 휘말려서 하나님을 벗어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혹시나 나의 본모습은 아닌가, 돌아보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의 영적 거리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영적 거리에 가깝게 하기 위해 우리는 습관에 따라 기도하여야 합니다. 기도할 때 나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구하여야 합니다. 날마다 우리 자리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친밀히 나아가는 기도의 자리를 습관화하시는 우리 모든 영 가족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2024년 여름 토요 성령 집회와 이번 주 광복주일에 진행되는 ‘2033-50 비전’을 순명으로 품는 청계산 산상구국기도회 같은 기도회를 통해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시기를 소망합니다. 매일 아침 진행되는 날마다 솟는 샘물 새벽 기도회와 글로벌 사랑글로벌 기도회 그리고 여러 가지 우리의 기도에 자리에서 하나님과의 거리를 더욱더 좁히기 위해 애쓰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요약
우리를 위한 대속의 제물로 주시기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순종의 습관 속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보다는 하나님께 거역하기 쉬운 삶을 살아가는 그런 우리를 여전히 포기하지 않으시고 붙들어 주심에 감사드려야 한다. 하나님과 세상의 죄 유혹 가운데 살아가며 날마다 수많은 유혹의 순간에 습관을 따라 기도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유혹을 이겨내며 나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믿음의 길을 걸어가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청중하지 않는 습관이 아니라 죄와 유혹을 이기기 위해 습관을 따라 기도할 수 있도록 날마다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 나의 계획과 생각을 관철하는 기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하는 믿음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 연약한 본성으로 인해 죄로 실패하고 넘어질 때에 낙심하여 영적 실패의 순간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눈을 들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다시 기도의 자리로 습관을 따라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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