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6월 26일)
제목: "부르심에 합당한 삶"
말씀: 에배소소 4:1-3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사회: 강건우 부목사님
 
설교자: 이기원 부목사님
-----
 
* 에배소소 4:1-3,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
 
 
▶수요 저녁 기도회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 자리로 나아갈 수 있는 건강과 환경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성령의 강력한 역사 가운데 기도 응답의 은혜와 말씀을 통한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 그리스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생명의 강수가 흘러넘치는 우리 수요 저녁 기도회에 참여하신 모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4장 1절에서 3절 말씀입니다. 우리 함께 교독하시겠습니다. 제가 먼저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이 마음에 품고 섬긴 교회들이 많죠. 많았으나 오늘 본문이 쓰여 진 특별히 에베소 교회는 사도바울에게 좀 각별한 교회였던 것 같습니다. 서기 55년경부터 약 3년 동안 에베소에 머물면서 사도바울은 도란노 서원과 회당에서 매일 말씀을 전했는데 이때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사도바울을 힘들게 하는 핍박(逼迫)과 공격(攻擊)도 많았지만 놀라운 기적들도 수없이 일어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구원의 역사가 차고 넘쳤던 곳이 바로 이 에베소였습니다. 사도바울이 정말 좋은 믿음의 동력 자들과 행복한 사역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서로 함께 한 시간들을 통해서 사도 바울과 에베소 성도들은 서로에게 각별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러한 애틋한 마음은 나중에 그가 에베소를 떠난 후에도 3차전도(傳導)여행(旅行) 말미에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길에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에베소에서 약 50여 킬로미터나 떨어진 밀레도로 불렀을 때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때 장로들이 밀레도로 망설임 없이 사도바울의 부르심을 듣고 왔구요.
 
사도바울은 그들과 만나서 참 오랫동안 보지 못한 회포(懷抱)를 풀면서 얼마나 반가웠을까요? 함께 먹고 자면서, 욕도 같이 먹고 같이 즐거운 시간 또 영혼들이 성장하고 구원받는 것들을 같이 함께 한 동역 자들을 오랜만에 봤으니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그리고 사도 바울의 고별(告別) 설교를 들었습니다. 이들이 서로에게 얼마나 각별(各別)한 마음을 갖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그런 모습입니다. 따뜻하고 또 특별히 각별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에베소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이 그 애절한 마음 사랑하는 마음을 가득 담아 쓴 편지가 바로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이 담겨있는 에베소서입니다. 에베소서 1장부터 3장까지는 교리, 교리 이론 또 교리를 담고 있구요.
 
그리고 오늘 함께 읽은 본문 4장부터는 그 교리를 바탕으로 한 실천에 대한 말씀을 시작하는데, 그 시작을 어떻게 하느냐 그러므로, There for(데어 포어), 그 단어로 이 전환점(轉換點)을 시작합니다. 오늘은 시대 간 관계상 저희가 1절부터 3절까지만 살펴보지만, 4장에 담겨있는 큰 맥을 우리가 좀 짚고 넘어가야 됩니다. 그 맥(脈)은 사장에 담겨있는 그 맥은 사도 바울이 이 애틋하고 각별한 마음을 갖고 있던 성도들에게 에베소 성도들에게 하고 싶었던 그 말은, 교회의 일치(一致)성, 교회의 하나 됨 , ‘유니티’를 이루어라 라는 맥입니다.
 
머리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루는 성도들이 너희들이 주체로서, 하나가 되어야 된다는 이 하나 됨, 유니티를 이루기 위한 구체적(具體的)인 방법들을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1절 2절 3절이 그 구체적인 방법들을 나누고 있는데, 그리고 이 메세지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도 바울이 어떤 상황 가운데 서신을 썼는지, 또 보냈는지를 예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에게 주안에서 갇힌 내가라는 말씀으로 시작을 합니다.
 
빌립보서, 골로새서 그리고 빌레몬서와 함께 에베소서가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쓴 옥중 서신이라는 것을 말해주는데,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렇게 에베소 성도에게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에게 쓴다. 라고 하는 이 주안에서 갇힌 것을 언급하는 것은 절대로 그들에게 이 성도들에게 동정(同情)을 구하거나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그런 차원의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거룩한 자랑을 하고 있는 건데요. 그런 상황에 있는 것이 이런 상황에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빌립소서에 보면 빌립보서에서도 보면 옥중에서 내가 기쁘고, 기쁘고, 기쁘노니, 너희도 기뻐하라. 라고 옥중(獄中)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과 같은 맥락(脈絡)입니다.
 
복음의 가치를 위하여 본인이 옥살이를 하는 것은 절대 부끄러운 일이 아니고, 동정이나 불상이 역임을 받아야 할 일이 아니고, 오히려 너무나 감사하고 너무나 영광스러운 일인데 너희도 이런 세상의 가치를 초월(超越)하는 영혼의 가치를 갖기 바란다. 라는 차원으로 ‘주안에서 갇힌’, 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희를 권하노니’, 이 권하노니, 는 에베소에서 그 사도바울의 단순한 에베소 성도들에게 요청하는 요청(要請)이 아니라, 내가 그냥 말한다. 내가 말해줄게 차원을 넘어서 간청(懇請)한다. 애원(哀願)한다. 탄원(歎願)한다. 라는 그런 강력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어떤 간청을 하고 있는가 하면 바로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여러분 같이 한번 할까요?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라. 라는 간청, 애원, 탄원을 간곡(懇曲)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부르심은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부르심은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예수 그리스어를 통한 속죄의 은혜로 구원에 이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부르심을 말합니다.
 
이런 고귀한 부르심에 저희가 반응(反應)을 해야 하는데 어떤 반응을 해야 하는가? 하면 합당(合當)하게 해야 합니다. 합당한 반응을 해야 합니다. 그럼 이 합당하게로, 이렇게 번역이 되고 있는 그 헬라오 단어는 ‘익시오스’입니다.
 
◎익시오스는 저울에 ‘균형을 맞춘다.’라는 의미로 한쪽에 얹은 것과 반대쪽에 얹은 것의 무게가 같아야 한다. 라는 말인데요. 무엇에 비길 수 있는 당연히 보답한다.
-란 말에서 유래된 말로 어울리게 그 부르심에 ‘가치 있게’, ‘어울리게’ 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부르심의 가치에 맞게, 어울리게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이런 삶을 살 때 무슨 일이 일어나나요? 4장의 메인 핵심, ‘교회가 하나 된다.’는 거예요. 유니티를 이룬다는 거예요. 한 몸을 이루는 교회의 통일성을 갖고 같은 방향 같은 비전 같은 꿈 같은 사명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2절부터, 교회의 일치 하나 됨을 가능케 하는 필수 덕목들을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헬라어가 참으로 정교한 언어입니다. 그래서 칼바르트의 아들 마르쿠스 바르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헬라어 같이 한번 여러분 눈으로 보세요.
 
◎“헬라 원전에 나오는 이 헬라어 동사가 표현하는 절박함을 정확히 번역하여 전달한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만큼 이 단어가 요구하는 것은 크고 또 큰 것이다.” -마르쿠스 바르트-
 
-여러분 헬라어가 갖고 있는 정교(精巧)함, 섬세(纖細)함은 참 안타깝게도 많은 경우 다는 아니지만, 한국어는 영어로 담지 못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 덕목(德目)들을 이렇게 나열한 것들을 볼 때,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단어들인데요. 그 덕목들 속에 들어있는 헬라의 정교함, 섬세함 헬라어만 가지고 있는 깊은 맛이 좀 있습니다.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여 갖추어야 하는 첫 덕목인, 겸손(謙遜)의 그 정교함이 깃들여 있습니다. 우리가 문득 생각하는 겸손함은 어떤 것일까요?
 
거기에 있는 그 겸손함과 그 당시 문화 속에 담겨있던 겸손함의 차이에서 오는 의미가 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값어치와 진가를 나보다 높게 생각하면서, 그것을 인정하는 마음을 갖는 것, 인정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 겸손함이죠. 근데 헬라어에 담겨있는 이 겸손함 에는요. 1단계 더 나아가서 그들의 아래에 있는 자로, 그들 밑에 있는 자로, 취급받기를 원하는 마음을 갖는 것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 그거 아시나요? 그 당시 그리스나 로마 사회에서는 이런 겸손이 굉장히 낯설고 천시(賤視) 받고 혐오(嫌惡)스럽게 까지 여겨지는 개념(槪念)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이런 겸손에 해당하는 단어 자체를 잘 사용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이 겸손함에 담겨있는 의미가 그들 아래 다른 사람 밑에 있는 자로서 취급받기 원하는 마음까지 담고 있다 보니까 거기에는 굽실거리며 복종(服從)하는 노예(奴隸)의 모습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잘 사용하지도 않았구요. 그 단어를 별로 좋아하는 단어로 지금은 얼마나 좋은 단어입니까? 겸손함, 얼마나 좋은 단어입니까? 그때는 안 그랬다는 거죠. 그때 그리스, 그때 로마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그렇게 좋게 받아들여지는 단어 개념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별로 겸손은 덕으로 생각되어지지 않는 그런 단어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화에서 겸손을 정말 혁명적(革命的)으로 선포하고, 혁신적(革新的)으로 보여주셨던 겸손(謙遜)의 최고의 표본(標本)이 있으시죠.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여러분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8절까지 말씀을 한번 읽어볼까요? 같이 읽겠습니다.
 
*빌립보서 2:5-8,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라는 이 하나님의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그들 아래에 있는 그런 취급을 받는 그 위치로 내려가서 그 겸손의 극치를 보여주는 이 모습이, 여러분 이 당시에는 얼마나 문화에 맞지 않는 생소한 저게 뭐야? 뭐 다른 짓이야! 라고 할 수 있는 생소하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정말 혁명적인 선포였구요. 모습이었구요. 그랬던 것 그런 것이 여러분 좀 상상을 좀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런 모습으로 오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죠. 그러나 그 당시에 이거 그 모습을 보는 그 당시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받아들였는지를 우리가 살펴볼 고민해 볼 필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충격을 한번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남을 존중하고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냥 거기까진 우리가 알겠죠.
 
그렇게 종처럼, 노예처럼 취급받는 것을 원하는 마음까지, 원하는 마음까지 갖는 것이 바로 겸손이라고 부르심에 합당한 성도가 가져야 하는 모습이라고, 그 사회에는 이 사회의 흐름을 역류(逆流)하는 선포(宣布), 그 선포를 저와 여러분들이 마음에 새겨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그래 남을 좀 높게 여기는 건 노력을 하죠. 그러나 조금만 남이 나를 무시하면 그렇게 취급을 해버리면 우린 어떤 반응을 보냅니까? 너무 마음의 상처가 크죠. 가만히 있지 못하죠. 물론 여러분 이런 취급을 그냥 바보처럼 아무 때나 어떤 상황에서든 상관없이 받아 받으며 살아야 된다. 절대 그런 말은 아닙니다. 언제 이런 취급을 받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 하면 사명을 감당할 때, 믿음과 신앙의 순결을 지킬 때, 교회에 하나 됨을 이룰 때, 저분이 지나가면서 한 저 한 말이 가슴에 배겨서 나를 찢어내고 있는데, 그때 해야 되는 내 반응은 그것을 향하여 총알을 또 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하여 이 취급받기를 원하는 마음까지 가지며 수용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누구처럼? 예수님처럼, 자신이 존중받고 인정받기 위한, 여러분 고도의 교묘(巧妙)한 수단(手段)으로 써가 아니라, 교회에서 얼마나 겸손한 모습을 갖고 있는 성도들 중에 그런 실수를 범할 때가 있지 않은지요? 오히려 존중을 받기 위한 교묘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이런 고도의 교만을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
 
복음(福音), 생명(生命), 사명(使命), 비전, 꿈 앞에서, 그 앞에서 주위 사람들을 진심으로 존중한 마음, 존중하는 마음을 갖는 것 수모(受侮)를 감수(甘受)하며 희생(犧牲)을 원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바로 오늘 사도 바울이 말하는 부르심에 합당한 삶의 첫 번째 덕목 겸손인 것입니다.
 
1). 겸손(謙遜)이다.
-그럼 생각보다 어렵죠.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근데 나중에 그 해결책도 주시는데 그래서 이 겸손은요, 어려운 겸손은 이 겸손은요, 모든 영적인 복의 재료이고, 모든 덕에 뿌리이며, 이 겸손의 깊이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누리게 되는 것이라고 어거스틴이 말을 했습니다.
 
2). 온유(溫柔)이다.
-그 다음 덕목은요, 온유(溫柔)입니다. 온유는 하나님께 대해서는 기쁘게 순복(順服)하며 사람에 대해서는 남의 약점(弱點)에 대해 부드럽게 대하는 태도(態度)를 말합니다. 친절함, 너그러움 이런 말에서 유래(由來)된 말로 온화함, 정중함을 뜻하고 있는 그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딱 떠오르는 말이 있죠. 하나님께는 전심(全心)으로, 사람에게는 진심(眞心)으로가 떠오르는 덕목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사용된 온유(溫柔)라는 단어에도요. 헬라어의 정교함이 좀 담겨있는데요. 그것은 온유라는 단어에 담겨 친절함, 너그러움, 부드러움, 온화, 정중 그 의미가 있는데요. 결코 연약(軟弱)함은 내포(內包)하고 있지 포함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프라우테스’ 라는 이 온유라는 단어 에는요. 강한 자가 오히려 강한 자가 자신을 억제(抑制)하고, 조절(操切)함으로써 남을 부드럽게 대하며 섬긴다. 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연약해서 내가 뭘 할 수가 없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냥 참는 차원이 아니라 강함에도 불구하고요. 자신을 억제하고 조절함으로써 부드럽게 대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지만, 아니 그런 자격도 있지만 그런 힘도 있지만 그런 정당성도 있지만 내가 도대체 이 자리에서 이렇게 섬긴 게 몇 년인데, 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정당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데도 그런 취급과 그런 말을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으로서 해야 할 것은 그런 정당성을 다 갖고 있어요. 남들이 다 인정해요.
 
거기 가만히 있으면 안 되지 한소리 해줘야지 있으면 안 되지, 이렇게 행동해야지, 남들이 다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들까지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는 우리 목사님들까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하여 절제하고 조절하면서 온유함을 유지하는 거, 그게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가져야 하는 온유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유의 표식 중에 하나가 절제(節制)인 것이고. 이 온유를 통제(統制) 아래 있는 힘이다. 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성경적 온유는요, 하나님의 통제, 다스림 통치 아래 있는 힘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온유라는 것입니다. 교회 일체성, 하나 됨을 이루기 위해 실천해야 하는 그다음 덕목은 올해 참험입니다.
 
3) 오래 참음이다.-(마크로 디모스)
-남에 대해서 자기가 받은 피해에 대해서 분노(憤怒)나 복수(復讐)의 마음을 갖지 않고.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도 ‘마크로 디모스’ 라는 헬라어가 담고 있는 또 정교한 의미가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먼 거리 마크로스와 분노 디모스가 합쳐서 마크로디모스, 이 분노를 오래 참는다. 라는 그런 의미를 갖고 있는데, 그렇게 분노를 남을 향한 그 분노를 오래 참는 차원으로 그치지 않고 타인의 행동과 말에 대해 충분히 응징(膺懲)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참는 것을 말합니다. 아까는 정당성이 있었어요. 지금은 그 행동이 너무나, 너무나 불공정해서 충분히, 충분히 그 응징을 내가 해도 아니 거기에 대한 대가(代價)를 거기에 대한 결과를 반응을 요구(要求)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는 것을 말합니다. 오래 참음, 그냥 갚지 말라는 것과 충분히 갚을 수 있는 상황과 정황과 모든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들이 아무리 이야기를 한다. 해도 오히려 남들도 함께 또 동의를 해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하여 말라는 오래 참음, 정당성(正當性) 가운데 오래 참음, 단 순간 시간적인 길이를 넘어 또 다른 차원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특히 성경에서 어떤 때 사용됐냐면, 하나님의 죄인들에 대한 심판을 오래 참으시고 죄인들을 바라보신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고, 안 참으셔도 되는데,,, 안 참으셔도 되는 그 정황과 정당성이 뚜렷한 데도 불구하고, 오래 참으시면서 기다리시는 또 거기에 그냥 가만히 있으셔도 되는데 한걸음 나아가서 더 해주시는 대속(代贖)의 은혜(恩惠)를 베풀어 주실 때, 사용된 단어가 바로 이 오래 참음, 마크로 디모스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 1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디모데전서 1:16,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바라보면서 오래 참으신 것을 그치지 않고, 예수 그리스를 통해서 대속의 은혜까지 한 걸음 더, 더 나아가서 그런 자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베풀어 주신 것이 바로 오래 참음, 그 단어가 거기에서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부르심이 합당한 삶을 사는 그 다음 덕목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입니다.
 
4)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다.
-이렇게 보면 앞에 나오는 이 단어는요. 이 이 덕목은요, 앞에 나오는 오래 참음의 다음 단계, 다음 단계 다음 경지(境地)라고도 할 수가 있는데, 용납(容納)하고는 상대의 잘못을 용서(容恕)하는 것을 말합니다. 상대의 잘못을 용서하는 거, 여러분 그냥 참았습니다. 아까는 그냥 제가 참았죠. 남들이 이렇게 모든 걸 할 수 있다. 라고 동의하는 정황 속에서 참았죠. 참았죠. 또 그런 가운데도 내가 뭘 해줬죠 또 해주는 대속의 은혜까지 베푸는 것 좀 더 해줬어요. 그렇게, 그렇게 충분한 정당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올해 참음이 있었어요. 근데 어디까지 가냐면요. 마음의 모든 것들을 응어리를 싣는 차원까지 간다는 거예요. 더 힘들어지지 않나요?
 
여러분, 베드로전서 4장 8절에 나온 말씀처럼, “사랑한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라는 말씀처럼 사랑은 타인들의 죄 담요를 덮는 것으로, 보이지 않게 가린다. 내 마음에 담요를 덮어서 여러분 상처는 있을 수 있겠죠. 잊혀 지지 않을 수도 있겠죠. 그러나 내 마음의 상처에 담요를 덮어 가지고 보이지 않게 하는 거, 죄(罪)를 정당화(正當化)하거나 그것을 변명(辨明)해 준다는 해줘라. 그런 뜻이 아니구요. 이들의 죄가 필요 이상으로 알려지지 않게 드러나지 않게 내 마음에 되씹으면서 새겨지지 않게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허물을 사랑에 담요로 따뜻하게 덮어주라. 는 그런 의미가 바로 이 용납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음 덕목을 이야기합니다.
 
5)평안에 매는 줄로.
-평안에 매는 줄로, 평안에 매는 줄 여기에서 평화는 peace, 평안 히브리어로 살롬, 헬라어는 에이레네의 평화와 화평으로 이렇게 번역(飜譯)이 되는데요. 여기에도 그 정교함이 또 담겨 있습니다. 샬롬과 에이레네의 평화(平和)와 화평(和平), 이 의미와 함께 어떤 의미가 또 추가 되냐면, 일치(一致)와 조화(調和)입니다. 여러분, ‘일치와 조화 하나 됨에 일치와 조화’라는 의미가 진정한 평화와 화평은 일치와 조화를 이루어야만 가능하다는 그런 뜻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치를 이루는 줄은 평안에 매는 줄, 줄은 골로새서 3장 14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골로새서 3:14,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줄이니라.
-이것을 조화(調和)와 일치(一致)를 이루는 이 줄, 이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평화의 근간이 사랑이고, 그 사랑의 줄로 평화 살롬, 에이레네의 조화와 일치, 하나를 이루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이루시는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그동안까지 느꼈던 이 우리의 암담(暗澹)함이 해결이 됩니다. 여러분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은 모든 것 일치와 조화, 사랑, 여러분 평안의 메인 줄, 모든 것들이 성령께서 가능케 이루어 줄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믿고 구해야 합니다. 내 마음을 다짐하고, 내가 그렇게 해야겠지. 라는 차원(次元)을 넘어서 성령께서 해주실 것을 믿는 그 믿음, 그것을 갖는 것을 성령이 하나 되게 해주시는 은혜를 체험하는 단계라는 것입니다. 힘써 지키라 우리의 역할이 있습니다.
 
6) 힘써 지켜라.
-열심히 애써 지키라는 의미와 함께 서둘러, 그리고 지속적으로. 라는 또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여러분 즉 성도들이 교회의 하나 됨을 향해 부지런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빨리 위에 명시된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는 평안에 매는 줄로 서로를 배워 교회의 하나 됨, 사명의 방향성 한 방향 한 꿈을 이루는 모습으로 가야하는데 그것에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힘써서 지켜라. 뒤로 미루지 말고 다음으로, 미루지 말고 내가 좀 준비되면 내가 상황이 좀 나아지면으로 미루지 말고, 당장 빨리 그리고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이루라 라는 말씀을 담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렇게 교회의 일치성과 또 하나 됨에 대한 부르심에 합당한 모습은 우리가 이 교회 안에서 에베소교회 안에서 성도들끼리 그런 모습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고요. 그리고 이 교회가 지상교회의 전체 교회, 또 하나님의 유니버설 처치, 시상교회 모든 교회를 교회와 하나가 되는 차원으로도 이 부르심이 합당한 모습을 갖는 교회로서의 역할을 또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평안에 메는 줄로, 그 평안에 메는 줄 가운데 희생과 섬김을 동행하는 사랑의 줄이 있죠. 글로 이렇게 동여 메어 주어야 합니다. 안에서 있는 한 성도들 그 성도들만 하나 되는 게 아니라 교회와 교회가 또 하나 되고요. 또 이 나라에 있는 교회와 저 나라에 있는 교회들이 또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힘써야 한다는 거죠.
 
그런 차원에서 우리 사랑의 교회는 여러분들의 그 헌신과 섬김으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 여러분들의 헌신으로 이런 사회 국내외적으로 많이 감당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한교섬이고요. 여러분, 한교 섬을 통해서 국내 교회를 섬기고 또 복음의 서진을 통해 유럽 교회를 섬기는데요. 이번에는 감사하게도 사랑 광주리를 통해서 우크라이나에 있는 교회를 통해서 평안에 메는 줄로, 우리가 한국에 있는 대한민국에 있는 사랑의 교회로서, 또 다른 나라에 있는 교회와의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가 되신 것을 힘써 지키는 마음으로 숨길 수 있는 기회가 좀 있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여러분들에게 간단히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29억 원어치의 의료기기와 의료품을 많은 분들이 헌신해 주셔서 우크라이나에 전달을 했습니다. 우크라이에 가서 한 4천여 키로의 그 육로 여정을 소화하면서 계속해서 제 마음에 드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크라이나를 보면 볼수록, 알면 알수록 이 어린 목동과 같은 우크라이나가 가난했죠. 여러 가지 면에서 너무나 뒤처져 있죠. 사람들은 뭐 다른 윗사람들은 모르겠으나, 그냥 길거리에서 만나는 사람 너무 그냥 착해 빠졌죠. 아니 이런 나라가 어떻게 거인이고 노련한 장수와도 같은 러시아를 상대로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전쟁을 하고 있을까? 그 생각이 계속 나는 거예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여러분 러시아는 세계 2위 군사 강국입니다. 정규군만 90만 명을 갖추고 있구요. 그런 이런 군사, 군사 강대국으로서 가지고 있는 모든 무기와 이런 것들이 뭐 어 뭐 세계 4위다, 이런 통계들이 많이 나옵니다. 거기에 그 반면에 우크라이나는요 총 병력이 20만 명밖에 안 되구요. 그리고 그 병력이 갖고 있는 무기는 구형(舊型)무기(武器)가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이 돈바스 지역을 통해서 밀고 내려올 때 러시아의 정규군이 최신 무기를 가지고 20만 명이 국경에서 이미 준비하고 대기하고 있다가 밀고 내려온 거구요. 이 우크라이나군은 키예프를 중심으로 별 준비 없이 밀려 내려오는 러시아 군대를 상대로 전쟁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또 한 가지는 이 푸틴 대통령만큼 전쟁을 잘하는 사람이 지도자가 아마 이 시대에 거의 없을 것이다. 생각을 할 정도로 전문가들은 전쟁의 전문가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조지아와의 전쟁, 그것을 통해서도 사흘 만에 항복을 얻어냈어요. 푸틴 대통령이 그때 푸틴 대통령의 지지율이 88%로 올라갔고요.
 
3연임 금지 조항 대통령 3연임 금지 조항을 그 지지율을 가지고 개헌을 해 가지고, 대통령이 돼가지고 아직도 대통령을 하고 있는 사람이 전쟁으로서 리더십을 구축(構築)한 사람이 바로 푸틴 대통령입니다. 최고의 정보기관들이 얘기했어요. 3일 만에 3~4일 만에 그 전쟁은 끝날 것이다. 전쟁이 일어난다면 일어나지도 않을 거지만 일어난다면 3~4일 만에 끝날 것이라고 발표했구요. 푸틴 자신도 그렇게 확고한 자신을 가지고 전쟁을 시작했는데, 3년째 전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 정황에 변화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이 전쟁을 치르면서 참 놀란 사람은요, 갑자기 밀고 내려와서 피해를 입은 우크라이나 사람들도 아니구요. 또 민간인 동족 살생을 하고 있는 그 모습을 보는 세계인들이 아니라 이 전쟁을 통해서 가장 놀랄 사람은 푸틴 자신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왜 본인이 그렇게 이렇게 길게 전쟁을 할 줄 몰랐거든요. 그런 반항 가운데 그런 대접 가운데 키에프를 치지 못하고 이렇게까지 물러날 줄 몰랐을 거거든요. 이렇게 미숙한 어린 목동이 전쟁에 노련한 거인 장수를 상대로 3년 동안 전쟁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 답을 찾았습니다. 우연히 기사를 보고 또 우연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정황이 어떤가를 보고, 주위 사람들을 과의 대화를 나눈 가운데 무엇을 발견하게 되었냐면, 러시아 침공을 한 2주가 흐른, 얼마 안 된 거죠. 그 2주 흐른 전쟁 초기에 우크라이나의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그 이상한 현상은 뭐였냐면 성경(聖經), 품귀(品貴)현상이었어요. 기사를 한번 띄워주실까요?
 
※영국 크리스찬 투데이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성서공회는 러시아 침공 이후 전례 없는 숫자의 성경 요청을 받았다며 사람들에게 나눠줄 성경이 없어 거절하고 있다는 발표를 했습니다. 우크라이나 성서공회의 올렉산드로 총무는 성경을 구하기 위해 찾아온 한 목회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전했다. 그는 우리에게 성경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손상되거나 심지어 폐지가 누락된 찢어진 사본이라도 달라고 간청했다. 여러분 전쟁이 났습니다. 어느 민족이, 어느 나라가 전쟁 난 상태에서 지금 거인 러시아가 밀고 내려와서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그 전쟁을 치르는 상태에서 먹을 식량을 주세요. 무기를 달라고, 국제사회에 호소를 해야 되는데,,, 그것보다도 먼저 무엇을 하고 있냐면 성경을 달라고 호소(呼訴)를 하고 있는 거예요. 몸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안식처(安息處)를 달라고 하지 않고 성경을 달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요, 하나님께서는요. 이렇게 성경을 찾는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 하나님을 갈망(渴望)하고 하나님을 애타게 찾는 이 백성들을 긍휼(矜恤)히 여기시고 보호(保護)하고 있구나! 라는 것을 제가 보고 깨달으면서 소름이 끼쳤습니다. 여러분, 전쟁이라는 비극적인 현실을, 여러분 현실 속에 너무나 큰 고통을 치르고 있지만 구소련의 잔재(殘在)라고 할 수 있는 우크라이나는 2개 전쟁을 치르고 있다. 하나는 부패다 하나는 전쟁이다. 라고 할 정도로 그 부패와 싸우고 있는 그 모습이 이 전쟁을 통하여 지금 나라가 지금 뒤집어지고 있구요. 그리고 타 종교와는 기독교, 개신교가 세 번째 종교였습니다. 단순히 세 번째 종교가 아니라, 무시 받는 종교였습니다. 러시아 정교가 먼저였구요. 패턴이었고요. 그다음에 종교 개신교였는데, 거기는 인테리나 멋진 사람은 가는 곳이 아니었구요. 그 좀 떨어지는 수준의 사람들이 가는 그 종교가 개신교였는데, 지금 이 판세가 바뀌고 있습니다. 여러분, 전쟁이 터지고 나니까 어떤 일이 벌어졌냐면 다른 종교들은요, 교회가 더럽혀진다. 라는 이유로 문을 닫기 시작했어요. 여기 들어오지 말라 피난민들이 떼거지로 밀려 들어오니까, 오지 말라고 문을 닫았어요. 그런데 개신교는요 문을 활짝 열고 피난민들을 받아들였구요. 목사님들이 그들과 함께 먹고 자면서 생활했구요. 목사님들이 전 세계에서 들어오는 구호 물품을 가지고 그분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어떤 목사님은 어떤 플랫폼에서 기차역에서 천 명씩, 3개월씩 매일 그들을 먹이면서 함께 그들과 샤워도 못하면서 지내는 그런 모습들이 바로 개신교 목사님이었고요.
 
그리고 땅이 다 폭탄(爆彈)의 미사일에 의해서 뒤집어진 땅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기도를 하고 예배를 드리고 크게 개신교가 그러다 보니, 러시아 사람들이 이제는 이런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이제는 개신교가 기독교가 우리가 믿어야 되는 신앙이고 종교다. 라고 하면서 젊은이들이 교회로 지금 밀려오고 있는 그런 모습이 보여지는 거, 그런 모습이 우크라이나입니다. 그러면 지난번에 칼 세미나 때 우리 46명 우크라이나 목사님들 오셨죠? 그분들이 그분들이에요. 가서 보니까, 우크라이나 사람들이요. 이 작은 목동들이 하나님을 갈망(渴望)해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요. 전쟁이 터지자마자 밥 주세요. 빵 주세요. 떡 주세요. 안식처를 주세요. 라고 하지 않고, 성경을 주세요. 라고 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고 계시는 거예요.
 
거기에서 저희가 배워야 하는 중요한 영적인 교훈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피 흘림 없는 복음적 평화통일, 여러분 우리 땅에는 전쟁이 없어야 하죠. 꼭 없기를 바라고 그것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통일이 이루어져야죠. 여러분, 이런 언제 전쟁이 일어나도 정말 이상하지 않은 이 현실 속에 사는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군사력을 키우고, 경제력을 키우고 외교나 정치를 아니에요. 그걸로 해결이 안 돼요. 우크라이나를 보니까 여러분들이 저와 여러분들이 한국 교회가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무릎 꿇고, 하나님을 갈망할 때, 말도 안 되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상대로 3년을 저렇게 전쟁을 하며 나름대로 승리를 거두고 있는 것처럼, 물론 많은 손해가 있지만 저렇게 견디는 것처럼 전쟁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통일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경제력을 키우고 군사력을 키우고 외교의 외교나 정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 자리에 나와서 하나님의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하며 기도하는 백성들이 늘어날 때 하나님께서 이 땅에 피해 흘림이 없는 복음적 평화 통일을 허락해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 지난주 토요일과 주일 우리 그것을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온몸을 다 바쳐서 하나님 하나님을 갈망합니다. 하나님을 간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강구하오니 이 땅에 피 흘림 없는 복음적 평화 통일을 허락하여 주소서. 통일로 가는 길을 저희가 섬겼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선은 우크라이나 이 위험 상황을 도와야 되겠죠. 그 회복을 하는 그 과정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바를 해야 되겠죠.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도 경험을 쌓아야 되겠죠.
 
그리고 그 우크라이나가 갖고 있는 곡창지대의 그 곡창, 곡식들을 나중에 하나님이 허락하실 그 통일의 시대 북한의 식량 문제 해결하는 데 사용해야 되겠죠. 그런 은혜를 달라고 우리가 또 섬겨야 되겠죠. 그리고 북한이 혹여나 UN을 통해 어떤 상태의 붕괴(崩壞)가 이루어졌을 때, 자국민의 자결권을 행사하게 될 때, 그 모든 권한을 다른 국가에 주지 않고, 그래도 내 민족 뇌동법 대한민국에 맡기고 그리고 사랑의 교회가 세운 사랑 광주리 또 사랑의 교회가 세운 모든 사역들이 국제적인 NGO로서, 우크라이나를 통해 쌓은 경험과 실적을 가지고 UN에게 인정을 받아서, 북한을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나라로 만드는데 쓰임을 받고 나가야 된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담임 목사님께서 외치시는 ‘2033-50 비전’을 현실적으로 읽는 방법임을 믿습니다.
 
♣요약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 제물 삼아, 날 자녀로 불러주신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의 합당한 삶을 살아가고,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과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며 평안에 매는 줄로 하나 되게 하신 성령님의 인도를 힘써 따라가야 한다. 모든 피조세계의 영광을 홀로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주님께서 지상의 교회가 하나 됨에 영광에 걸 맞는 희생하고 헌신하는 우리 사랑의 교회가 되기를 간구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한 교회를 세우는 차원을 넘어 교회가 교회를, 교회가 전 우주에 있는 전 세계에 있는 교회를, 또 평안에 매는 줄로 감당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사랑의 교회의 성도들, 사랑의 교회와 대한민국 교회되기를 원하며, 예배에서 승리하고 말씀의 검으로 무장하여 우리에게 주신 싸움을 능히 이기는 귀하고 축복된 주님의 군사가 되어야 한다. 부르심의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은 거기에 무게를 맞추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기억하여 그 무게감을 올려드리는 자로 살아가야 한다.
 
 






728x9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