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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6월 12일)
제목: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말씀: 마가복음 9:14~24
사회: 김대규 부목사님


설교자: 금동훈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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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가복음 9:14~24,
14 이에 그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더라

15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매우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
16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그들과 변론하느냐.
17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18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19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20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그가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더라.
21 예수께서 그 아버지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이르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22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24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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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성경은 인생을 인생의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낙망에 빠져 예수님께 찾아온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인생에 여러 문제 난제는 그의 아들이었습니다. 성경은 그의 아들이 귀신 들렸고, 그 귀신이 아들을 죽이기 위해 물에도 던지고 불에도 던졌다고 말합니다. 이름을 알 수는 없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의 삶에 깊이 관여하고 싶어 합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오기 전에 이미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실패였습니다. 그리고 어디에선가 모든 병(病)을 고치고 모든 귀신을 쫓아내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전해 듣고 혹시나 하여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만 역시나 예수님은 계시지 않았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요청하였으나 제자들은 귀신 돌린 아들을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귀신 들린 아들의 아버지는 낙망(落望)하고 좌절(挫折)하였을 것입니다. 근데 이 성경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2천 년 전 나와 상관없는 나라에서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일까요? 최근에 한 50대 중년의 젊은 남자 집사님이 저에게 찾아와서 조용히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목사님, 저 지난주에 점 보러 갔다 왔어요.” 예전에 여 집사님이나 권사님들께서 그러는 건 제가 좀 보았습니다만 이 남자 집사님이 직접 찾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으니깐 처음엔 너무 당황스러웠습니다. 인생이 너무 안 풀려서 직장에서 버틸 힘이 없어서, 자녀들이 이 부모님들의 마음과 생각과 계획과 다르게 엇나가니깐, 얼마나 힘들었는지 점집을 찾아가서 점을 보았다고 합니다. 도대체 얼마나 힘들었으면 얼마나 길이 보이지 않았으면 도대체 인생의 난제 앞에서 얼마나 외로웠으면 그랬을까요? 오늘 성경이 등 등장시키는 귀신 들린 아들을 끌어안고 짠하고 등장한 아버지의 모습은 바로 오늘날 여전히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이 단순히 한 개인만의 문제일까요? 교회에서도 동일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한번은 제가 최근에 대구에 내려가서 목사님들과 함께 식사를 하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희들이 목사님들이 몇 분이 식사하는데, 그 동네에서 가장 큰 교회의 고등부 부장 집사님으로 섬기는 분이 오셔서 대구의 명물 가장 맛있는 막창을 사주기로 하셨습니다. 맛있더라구요!!.
 
근데 이 막창을 막 먹다가 이 집사님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는 장년만 5천 명이 넘습니다.” 안 놀라네요. 어마어마하게 큰 교회예요. 그런데 그 교회에서 고등부 학생들이 60명이 모인답니다. 깜짝 놀랬어요. 어떻게 된 일인가? 그래서 맛있는 막창 앞에서 입맛이 있어서 더 이상 못 먹었어요. 왜 굳이 와서 그런 얘기를 할까요? 사주질 말던가, 어쨌든 이러한 교회의 여러 문제들 가운데 더 큰 문제는 이 한 목사님의 자녀가 기독교 미션스쿨을 다니는데, 미션스쿨 다니면 한 반에 반장도 뽑지만 종교부장도 뽑아야 합니다.
 
그런데 뽑으려고 하는데 1반에 교회 다닌 아이가 1명도 제대로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 반에서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 아이가 그 반의 종교부장이 됐답니다. 슬프지만 웃긴 이상한 이야기, 저도 사실은 청소년 사역을 살아내기 위해서 했습니다. 꽤 오래 전이지만 예전에 우리 강남에 있을 때, 소망관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제가 섬기던 부서는 중학교 1~2학년을 대상으로 하는 중등 1부였는데요. 그때 당시 제 기억으론 천 명이 넘었어요. 아이들이 중학교 1학년 2학년만 많을 때는 1,500명까지 왔어요. 어마무시해 안 놀래요. 60명이라구요. 여기는 중학교 1~2학년인데 천 명 1천 명 1,500이 넘는다고요. 그 당시 혹시 소방관을 아시는 분은 아실 거예요. 1층에서 저희가 4층에 있었는데, 4층 사패코를 썼는데요.
 
4층까지 올라오는 데 30분 걸려요. 예비 끝나고 내려가는 데 40분 걸려요. 예배는 50분 거리 그때는요 저희가 예배 드릴 때, 찬양할 때 소리를 크게 찬양하면 안 돼요. 찬양할 때 아이들이 신나서 뛰면 안 돼요. 왜요 아이들이 8시, 10시, 12시, 3번 예배를 하는데 그 예배당에 꽉 차니까 산소가 부족한 거예요. 그래서 아이들이 찬양하다 쓰러졌어요. 거짓말 같죠? 진짜예요. 그래서 그 당시에 산소 발생기도 갖다 놓고 뭐도 갖다 놓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우리가 그때 아이들이 너무 많아서 찬양할 때도 조용조용히 하라고 그러고 뛸라고 하면 뛰지 말라고 그러고 왜요 예배드리다가 주님 뵐 수 있어 가지구요. 그런데 이제 한국 교회는 어떻습니까?
 
인구절벽이라고 말하면서 한국의 젊은 다음 세대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에 큰 문제가 우리 앞에 있다고 말합니다. 너무 많은 교회들이 주일 학교에 생명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쉽지 않습니다. 다음 세대에 대한 한국 교회의 열망과 기대는 큽니다만 현실은 너무나 너무나도 반대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교회 공동체도 다음 세대에 대한 큰 위기의 도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게 마치 귀신 들려서 불에도 물에도 던져서 죽일려고 하는 그 모습과 뭐가 다릅니까? 이렇게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공동체 모든 영역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생에서 풀리지 않는 난제와 고난 앞에서 도대체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은 더 힘들어요.
 
난제도 힘들지만 문제가 고난이 시련이 그것 때문에 어떻게 살아갈까, 고민도 해야 되지만 거기에 더하여서 왜 예수님은 나에게 이런 고난과 난제를 허락하셨는가? 이런 고통 중에 예수님은 나만 버려두고 어디로 숨으셨는가? 라는 의구심으로 말미암아 인생이 더 버겁습니다. 고난도 고통스러운데 나의 고난과 난제를 풀어주실 것이라고 믿었던 주님을 찾지 못하니, 더 고독하고 외롭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점집에 갔나 봅니다. 이런 이중적 고통을 갖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들은 도대체 무엇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I. 첫 번째로, 우리 주님께서 은혜로 주신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다시 한 번 첫 번째로, 은혜로 주시는 믿음으로 살아가라고 성경은 선언합니다. 여기서 믿음은 은혜로 주시는 겁니다. 은혜로 주시는 것인데 이 은혜로 주신 믿음을 통해 그래서 예수님이 주님이라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서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처음 16절 17절 가운데 예수님을 뭐라 부르느냐면 ‘디다칼로스 선생이여!’ 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 23절에서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을 어떻게 부르냐면 우리 개혁계정에서는 안 나오지만 헬라 원어 성경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여기서 ‘주여’가 나옵니다. 아까 16, 17절에는 ‘디다 칼로스 선생님이여’, 했던 이 호칭이 이제 23절에서는 ‘퀴리의 주님’이라고 그 호칭이 바뀌는 겁니다.
 
이 주님이라는 단어는 지식을 가르치는 선생이 아니라 우주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 못 박혀 죽으시고, 또한 부활하신 그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이라는 사실, 우주 만물을 통치하시고, 생(生)과 사(死)와 화(禍)와 복(福)을 주관 하시는 주님이라는 사실, 이 분만이 세상에 어떠한 방법으로도 해결할 수 없었던 나의 가장 큰 난제, 문제, 고난, 실현, 역경, 아픔, 내 아들의 문제, 내 아들의 죽음의 문제, 귀신 들린 문제, 내 아내의 문제, 내 남편의 문제, 내 가족의 문제, 바로 이분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게 되는 순간입니다. 이 고백이 바로 “주여, 내가 믿나이다.” 입니다.
 
하지만 아버지 이 아이의 아버지의 믿음의 고백을 조금 더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가 믿나이다.’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다음에 이어지는 게 뭐냐면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라고 외칩니다. 조금 이상하지요 내가 믿나이다. 해놓고,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해 놓고 주여 믿음 없음을 도와 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언어로 적으면 이상하지만 우리의 삶에서 살펴보면 그리 이상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믿음이 있지만 여전히 의심이 남아 있어요. 이러한 모습은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사건에서도 등장합니다. 한밤중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을 발견하고 정말 주님이시라면 저도 주님과 같이 물 위를 걷게 해달라는 베드로의 믿음은 그에게 물 위를 걷는 기적을 선사합니다. 하지만 거센 파도를 일으키는 바람을 보고 의심하여 빠져버린 베드로를 건져내신 주님께서 믿은 ‘믿음이 적은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라고 호되게 꾸짖는 예수님 그리고 베드로의 모습을 우리는 잘 압니다.
 
이제 자신이 인생의 난제인 아들, 인간의 방법으로는 전혀 고칠 수 없는 해결할 수 없는 귀신 들린 아들의 아버지는 이제야 깨닫습니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분이 바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주를 주관하시는 거룩하고 위대한 주님이라는 사실을 말이지요. 그리고 이분만이 나의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게 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의심, 불신앙에 문제가 뿌리 깊게 남아있다는 사실을 그 사실로 말미암아 고통스러워하지요.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기에 이 의심, 불신앙의 문제도 주님 앞에 던져버립니다. 그것이 바로 ‘주여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옵소서.’ 이것이 바로 이 모습입니다. 그러자 곧 기적이 그의 눈앞에서 펼쳐집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내신 것입니다. 그렇게 귀신은 쫓겨납니다. 기적(奇蹟)이 일어났습니다.
 
아이의 아버지의 믿음으로 아이와 아버지와 아들의 모든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믿음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면 내가 믿을께. 내가 이 병에서 낳으면 예수님이든 하나님이든 다 믿을게.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처럼 기적이 일어나면 그것도 나의 가장 큰 문제인 난제가 내 눈앞에서 해결되면, 나와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쉬워질까요? 그래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기적과 이적을 간절히 사모합니다. 그런데요. 오늘 말씀을 잘 살펴보면 기적과 믿음의 순서가 바뀌어져 있습니다. 기적이 먼저가 아니라, 믿음이 먼저인 것입니다. 아들의 문제가 해결되기 전 그 아버지의 믿음의 문제가 먼저 해결된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강원도 오지에서 살았습니다. 3살 땐가, 4살 땐가 정확히 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너무 어렸기 때문에 저는 몹시 건강이 좋지 않아서 시름시름 앓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이 병원 저 병원 다 다녀봤지만, 도대체 고칠 방법이 없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어머니는 어떡해요. 그냥 아들이 죽어가는 걸 볼 수만 없으니까 여기저기 기웃기웃 찾다가 어느 산 산 밑에 산기슭에 용한 무당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무당을 찾아가니깐 이 무당이 저를 보자마자 ‘어여가, 왜 죽을 사람을 데려왔어?’ 라고 하며 저희 어머니를 쫓아냅니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어떻게 해요? 거기서 포기할 수 없으니깐 그 용한 무당보다 조금 더 용한 무당이 사는 산 중턱에 갔다고 합니다. 가서 또 데려가자마자 문을 보자마자 이 무당이 저를 보자마자 그러더군요. ‘왜 산송장을 데려왔어 가서 장례 준비나 해!’ 쫓아내더라는 거예요. 포기할 수 있습니까? 포기할 수 없어요. 저희 어머니는 저의 엄마니까요? 엄마는 자식을 위해서 포기(抛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요. 그 산 중턱에 사는 용한 무당보다 더 용한 무당이 사는 산꼭대기 사는 무당을 찾아갔습니다. 찾아가자마자 이 용한 무당은 더 용하니깐 냄새만으로도 죽은 송장 썩는 냄새가 난다고 빨리 데려가라고 아우성을 칩니다. 하지만 더 이상 어머니가 갈 데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 무당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애원합니다. 내 아이 좀 살려주세요. 내 아이 좀 살려주세요. 10분, 20분, 1시간 2시간이 지나니까 이 무당이 너무너무 힘든 거예요. 왜요 뒤에 손님 받아야 되는데요. 이 어머니가 안 가니까 그렇게 1시간 하고 30분이 지난 다음에 이 무당이 저희 어머니 귀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고 합니다. 이건 영업 비밀인데, 산을 내려가서 길을 따라가면 내과 하나가 나오는데 거기를 건너서 마을 입구에 가면 빨간 벽돌을 지은 땡땡 교회가 하나가 나올거요. 거기 가서 예수라는 선생님을 만나면, 당신 아들은 저는 살아날 겁니다. 어머니는 다 죽어가는 저를 들쳐 업고 날라 가기 시작했습니다. 산을 내려가고 냇가를 건너고 다리를 건너고 한 마을 입구에 빨간 벽돌로 지어져 있는 땡땡 교회를 문을 박차고 뻥 하고 들어가니까, 마침 그곳에 절 막 이게 정장을 입은 한 남자와 또 십 수 명의 여자 분들이 뭔가를 하다가 그 외 뒷문이 뻥 소리가 나면서 크게 들리니까, 깜짝 놀라서 뒤를 쳐다봤다고 합니다. 정적이 흐르는 그 순간, 중년의 남자가 넥타이를 하고 정장을 입은 이 남자분이 저희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오셨나요? 그러니깐 저희 어머니께서 우리 어머니 그때 아무것도 몰랐어요.
 
‘혹시 여기 예수라는 선생님이 계시나요? 제가 지금 그분을 급하게 만나야 하는데 어디 계신가요?’ 그런 상황 가운데 이 중년의 남성분이 어머니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죄송한데 지금 예수님이 출타 중이라서 제가 봐드려도 될까요?’ 하며 다 죽어 가는 저를 교회 예배당 중앙에 눕히고 십 수 명의 성도들이 둘러싸서 갑자기 큰소리로 기도하기 시작했답니다. 주여, 이 아이를 살려달라고 그렇게 기도하는데 저희 어머니가 생전 교회란 곳을 가본 적도 없으니까, 저 구석 통에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예수님께 비나이다. 그렇게 30분 정도 기도했더니, 갑자기 죽어가서 시름시름 앉지도 못하던 제가 앉으드래요. 시퍼렇게 변해 가던 입술이 빨갛게 변해 가고 눈엔 생기게 나고 그리고 두리번두리번 거리다가 10분 정도 더 기도하니깐 제가 갑자기 힘을 내서 예배당 이쪽저쪽을 뛰어 댕기면서 날아 댕기더래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제가 이런 기적 같은 겨 이 기적 같은 일을 경험했는데, 이런 제가 예수님 믿는 게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믿음이 적은 세대여, 왜 의심하느냐? 예수 이렇게 기적 같은 일을 경험하고 나서 어떻게 예수가 안 믿겨집니까? 그런 기적을 경험하면 하는데 예수가 안 믿겨지는 게 더 큰 기적이에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이야기는 제가 지어낸 이야깁니다. 왜냐 이유가 있어요. 제가 2007년도인가, 2008년도인가 사랑의 교회에 이제 부임해서 수요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한 멋진 목사님께서 수요 예배 강단에서 수요 저녁 기도회 강단에서 설교를 하고 있는데, 수요 저녁 기도회 가운데 설교를 하다가 자신의 간증을 하는 거예요. 아까 제가 말한 그런 아주 멋들어진 간증이요. 근데 그 간증을 듣는 제가 빠져드는 거예요. 그러면서 내 마음 가운데 억울함이 있는 거예요. 주여 저에게는 왜 저런 간증을 안 주십니까 저도 저런 간증을 원합니다. 근데 안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지어냈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기적을 경험한 경험하는 것이 믿음을 얻는 데 더 좋겠습니까? 아니면 기적이라고 기적이란 찾아보지도 못했던 저 같은 사람이 예수님을 더 잘 믿겠습니까? 확신컨대, 저는 그러한 경험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예수님이 너무,너무,너무 잘 믿겨집니다. 우리 스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다시 부활하신 예수님이 너무너무 잘 확실히 믿겨집니다.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에게서 나신 것이 왜 안 믿겨집니까? 너무 확실하게 저는 믿겨집니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그렇게 바라는 기적 같은 일을 경험하고 믿는 것이 기적입니까? 아니면 그러한 일이 없이도 우리 주님을 주님이 믿어지는 것이 진짜 기적일까요? 저는 확실히 하기는 후자입니다. 기적 같은 일을 경험하고, 믿는 것으로 누구나 다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이 없음에도 이렇게 예수님이 확실하게 믿어지는 것, 저는 이것이 더 멋진 기적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실 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20장 29절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20:29,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거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하시니라
-그래서 제가 복됩니다. 우리 사랑하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 바로 이 믿음입니다. 세상과 전혀 다른 방법으로 주시는 이 위대한 믿음, 그렇다면 그러면 이 믿음에 어떠한 능력이 있어서 인생의 난제 앞에서 이 믿음으로 살아가라고 선언하실까요? 바로 은혜로 주신 이 믿음은, 이 믿음은 마지막 승리까지 약속이 성취되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가 버틸 수 있는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능력을 주기 때문입니다. 하박국 2장 4절을 보면, 말씀을 보면
 
*하박국 2:4,
4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믿음이 히브리어로 ‘애무나’라는 단어를 쓰는데 이 애무나의 의미 가운데 하나가 버티다 ‘마지막까지 버티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의 고난과 난제로 인한 고통과 이 고통 앞에서 예수님의 부재로 겪는 이중의 고통이 분명히 있습니다만 이러한 고통 중에도 우리는 믿음으로 버틸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능력, 에무나의 능력을 주셨기 때문에 끝까지 버틸 수 있다구요.
 
그래서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지금 여기 바로 이 자리에 앉아서 함께 말씀을 듣고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해 애무나의 믿음은 너무도 강력하기에 절대 훼손되거나 깨어지지 않습니다. 이 믿음은 우리를 사랑하게 합니다. 아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여전히 인생의 난제로 나의 마음이 죽을 것처럼 느껴지지만, 절대로,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애무나(마지막까지 버티다)의 믿음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셔서 오늘도 우리로 하루를 살아가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주신 믿음의 능력으로 오늘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고난 삶의 고난의 문제 앞에서 무엇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II. 두 번째로, 우리는 이 믿음으로 현재를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보통 교회 다니면 믿음이 믿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며 신앙생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우리 삶 속에서 그 믿음의 능력이 나타날까요? 아마도 그런 경우는 많지 않을 겁니다. 그럼 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믿음의 능력이 우리 삶에서 자꾸 비껴가고 있을까요? 가만히 살펴보니까, 우리는 믿음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옛날 과거에 머물어 살아가거나 미래로 우리의 믿음을 믿음의 도전을 미루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에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의 고난과 풀리지 않는 난제 앞에서 자꾸 믿음을 과거의 믿음이나 미래로 미루는 믿음으로 오늘 일어나야 될 믿음의 능력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을 잠시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사랑하는 예수께서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한참 후에 나사로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그러자 말하다가 이렇게 예수께 이야기합니다. 요한복음 11장이신 21절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1:21,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자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바로 이 부분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 믿지만 과거에 머물러 있는 믿음입니다. 지금 말고 나사로가 죽기 전에 예수님이 오셨더라면 오라버니는 오라버니 나사로는 죽지 않았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합니다. 이런 과거에 머물러 있는 믿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예전엔 사실 금식기도 했다고, 내가 젊은 날에는 엄청난 부흥을 경험하고 중고등학교 청년회 때 회장을 했다고, 무엇 무엇을 했다고 내가 옛날에 뭔가 영적인 큰일을 선교를 하고 전도를 했을 때, 엄청난 일이 일어났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에게 하는 것을 우리는 매우 좋아합니다. 이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믿음의 능력이 과거에 머물러서 더 이상 자라나지 않는 믿음의 난쟁이들이 되는 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우리가 과거의 믿음에 머물러 믿음의 난쟁이가 되었다면 우리는 오늘 어떠한 믿음의 능력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또 1가지 유형은 믿음을 미래로 미루는 분들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3절 24절 말씀 가운데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23-24,
23 예수께서 이러시되 내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할 때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는 마르다에게 오늘 나사로가 살아날 것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르다는 예수님의 능력을 미래로 미루어 버립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잘 알고 예수님을 너무너무 사랑하기도 하지만 예수님께서 살려주시겠다고 하시는 말씀도 믿지만 그것이 지금은 아니고, 나중에, 아주 나중에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어떻습니까? 우리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아 있지 않습니까?
 
우리도 예수님을 성경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믿습니다. 또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문제, 난제, 고난을 해결해 주실 것도 아주 잘 믿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믿음의 능력이 나타 나냐는 것은 오늘은 아니랍니다. 나중에 한참 후에, 왜요? 사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약속도 믿지만 믿음의 겁쟁이들입니다. 혹시나 내가 나의 문제 나의 아픔을 해결해 달라기도 했는데 응답되지 않을까? 봐. 내가 믿는 예수를 혹시 내가 의심할까봐? 그저 도망가기 바쁩니다. 주님께서 주신 은혜로 얻은 믿음이나 나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이라는 더 큰 의심이 있기에, 우리는 점잖게 내일로, 내일로 나중으로 도망가기 바쁩니다. 그리고 뭔가 있어 보이기 위해서 나중에 마지막 날에 부활할 때는 다시 살아날 줄 내가 믿나이다.
 
이 겁쟁이 마르다의 고백이 우리의 속마음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과거의 믿음으로 믿음의 난쟁이가 되어 도망가거나, 미래로 미루는 믿음으로 믿음의 겁쟁이가 되어 뒷걸음질 치는 우리에게 다시 한 번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지금 바로 이곳에서. 아멘, 이렇게 우리는 마음의 담대함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능력은 과거에 머무르거나 미래로 미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있는 이곳에서 드러나야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랑의 교회 영 가족 여러분, 오늘 이 이야기를 하고 이제 마칠까 합니다.
 
지난 3~4개월 전에 한 여 집사님께서 암이 재발됐어요. 2021년도에 수술을 했는데 재발되고 그다음 해 전이되고, 어려운 과정을 겪었습니다. 작년 말에는 의사분이 호스피스 병동까지 이야기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제가 전해 듣고 제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제가 믿음을 가지고 에무나의 믿음 버티는 믿음을 가지고 가서 기도해 드려야 되는데 두려웠어요. 혹시 내가 기도했는데 안 이루어질까 봐요. 저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믿음의 겁쟁이처럼요. 그래서 믿음의 난쟁이가 되어서 뒤로, 뒤로 뒤로 미루었습니다. 믿음의 난쟁이가 되어 과거의 믿음의 영광만 입으로 말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제가 기도해야 되는데, 그래서 기도하면서 그날 치유의 응답이 안 일어날 것 같은데, 그래도 나는 더 마음의 담대함을 가지고 나아가야 되었습니다.
 
그런 순간 제 마음 가운데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시고 담대한 믿음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기도하기 시작했어요. 주여 살려주옵소서! 주여, 이 집사님을 살려 주옵소서 제가 가는 곳곳마다 그분을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 집사님의 이름을 대고 우리 선한 자들을 위해 선한 자들의 기도, 함께하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실 것이라고 믿으며,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깨우시는 그 순간순간마다 기도하며, 기도하며 또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몇 개월 전 월요일 날 오후 2시 막 한잠 낮잠이 들려고 하는 그 순간, 몽롱한 순간에 전화가 왔어요. 화가 났어요. 잠을 자야 되는데 월요일에? 이래 전화를 받으니깐 그 집사님의 남편분이에요. 그리고 다짜고짜 저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뺍니까 맙니까? 뭘 빼고 뭘 말아야 되는지 모르는데, 대답할 수가 없어 자초진종 설명해 보니까 그분이 복수 차고 폐에 물이 차 가지고 폐에다가 관을 꽂았는데 이 관에서 이 물이 다 안 나와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야 관을 뺀다는 거예요. 그날 가서 기도를 많이 하고 그날 가서 인제 했는데 이제 관에서 물이 폐에서 조금, 조금밖에 안 나오는데 의사가 좀 긴가민가한 거죠. 그래서 집사님한테 물어봤습니다. 근까 이 남편 집사님은 저한테 전화해서 물어보는 거예요. 저는 뭐라고 답해야 돼요? 나는 지금 비몽사몽인데 이럴 때는 답을 바로 하면 안돼요. 1초 2초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여, 지혜를 주옵소서. 그리고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뺐시다. 오늘 뺐시다. 우리는 집사님 우리는 오늘밖에 못 삽니다.
 
어제는 이미 지나가서 살 수 없고 내일은 아직 안 왔으니 거기도 살 수 없습니다. 오늘 뺍시다 그리고 기적처럼 회복되기 시작해서 그동안 어려워서 할 수 없었던 저랑 같이 섬기는 사역 부서 새 가족 부서에서 스텝으로 생명을 걸고 섬겼습니다. 너무 너무 감동적이고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거지요. 그런데 며칠 전에 다시 한 번 집사님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목사님 항암제도 잘 맞고 마침 아내가 이 항암 치료하는데, 이 약값이 너무 비싼데 마침 우리 집사님부터 보험이 적용됐답니다.‘ 할렐루야, 아닙니까? 그래서 항암치료하고 하루 이틀 하는데, 갑자기 간에 문제가 생긴 거예요. 간수치가 올라가고 또 의사는 호스피스 병동을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목사님 어떡합니까? 저는 어떡합니까? 그래서 오늘 이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올라왔습니다.
 
생과 사를 주관하시는 우리 하나님, 화와 복을 다스리는 우리의 하나님,
오늘 과거에 내 과거로 나의 믿음을 미뤄 버리고, 미래로 내 믿음을 미뤄서 숨고 도망가는 믿음이 아니라, 애무나의 믿음, 끝까지 버티는 믿음 마지막 승리할 때까지 버틸 수 있는 강력한 에무나의 믿음 허락하여 주셔서,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께서 이 시 집사님에게 생명의 능력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주여 이 집사님에게 생명의 능력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바로 이 믿음을 가지고 우리가 믿음의 기도로 나갈 때 낙망의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함으로 말미암아 오늘 가장 위대한 소망으로 바뀔 줄 믿습니다. 우리 귀한 성도님들도 믿음으로 함께 기도해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요약
우리 앞에 놓은 고난과 난제 앞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에무나의 믿음을 가지고 마지막 순간까지 버티며 승리해야 한다. 우리 영 가족 공동체가 과거의 믿음에 머무르거나 미래로 믿음을 미루지 말고 어떠한 순간에도 믿음 보고를 올려드리는 영적 군사로 살아가야 한다. 이 믿음으로 현재의 초월적 회복과 부흥을 경험하여,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 자가 되어야 하는지를 깨달아, 믿음의 기도용사로 비상하여 주님의 기쁜 자녀로 주님의 지상 명령을 실천하는 자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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