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사람-매일 책 읽는 습관 -"돈의 뇌과학" -우에하라 치카고-(번역 오정화) 재테크 심리서◇ 이 '돈의 뇌과학' 저자는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이다. 우에하라 치카코이며, 단순한 재테크 지식이나 투자 기술을 알려주는 책을 넘어, ‘뇌과학’과 ‘심리학’을 접목하여 돈에 대한 인간의 심리적 태도와 무의식을 다루는 심리·경제서(재테크 심리서)이다. 이 책은 도서관에 가기 싫어서 전자책으로 다운 받아 읽은 책이었는데 참으로 좋은 책으로 여겨졌다. 경제서를 요즘 더 읽는 것은 나에게 노후가 걱정이 되기도 하고 잃어버린 것을 어떻게 정리를 하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이기에 이 책을 선택했다. 다만 좋은 본보기의 책을 읽어보게 되어 좋았고 앞으로 더 철저하게 돈의 대한 이 관념을 특히나 심리적으로 돈 관리를 잘 해야함을 느끼게 되었다. 웰스 파이넨셜 테라피가 진정한 돈의 뇌과학이라 여겨졌다.
이책이 주는 주요 특징이라면, *핵심 주제 (파이낸셜 테라피): 아무리 열심히 돈 공부를 하고 투자법을 배워도 돈을 모으지 못하는 이유는 '뇌'와 '무의식'이 돈을 대하는 방식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돈에 대한 무의식적 불안, 왜곡된 가치관, 나쁜 습관을 심리학과 뇌과학 기법으로 치유하는 방법을 다루고 있다. * 돈에 대한 불안 관리: 돈이 줄어들까 봐 혹은 미래가 불안해서 과도하게 걱정하거나, 반대로 투자를 극도로 두려워하는 심리적 원인을 분석하고 이를 해결하는 사고법을 제시하며,
* 실행 가능한 자산 관리 및 인생 계획: 막연한 불안감에서 벗어나 구체적인 인생 계획표를 세우는 법, 그리고 장기 투자나 복리의 힘 같은 기본적인 투자 철칙을 뇌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도록 돕는 실천 팁들을 함께 담고 있다. 즉, "돈을 모으고 싶지만 자꾸 불안하고 마음대로 되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를 뇌과학과 심리학으로 풀어낸 자기계발형 경제 도서"로 이해하시면 좋다.
이 책은 어려운 환경을 딛고 일어선 저자가 뇌과학과 심리학을 병합하여 소비보다 돈을 모으는 습관과 절약 규칙을 강조하는 책이다. 파이넨셜 테라피 학회 활동을 통해 경제적 시야를 넓힌 저자는 무일푼인 이들에게 시드머니 마련과 채권 중심의 분산 투자를 역설하고 있고, 특히 금융 상품 가입 시 금융투자업 등록 여부를 확인하고, 스스로 공부하는 힘을 기르라고 조언한다. 가계부 작성과 일상적 절약을 기본으로 삼아 리스크를 줄이고, 최종적으로는 부모가 먼저 올바른 경제 습관을 실천하여 자녀에게 경제적·정서적으로 건강한 유산을 물려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어떤 계획을 준비하는 시니어로서 리스크를 줄이고 자산을 지키는 지혜를 얻고자 이 책을 펼쳤다. 뇌과학과 심리학으로 소비 심리를 다스리며 가계부와 절약으로 기본기를 다져야 한다는 메시지가 깊이 와닿았다. 단순히 부를 좇는 것을 넘어 파이넨셜 테라피를 통해 마음을 치유하고, 스스로 공부하며 자녀에게 건강한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진정한 삶의 태도를 배운 소중한 독서였다.
♣주일예배(주후 2026년 10월 11일)- 로마서 강해 ⑱ 제목: "성령의 능력으로 정죄는 끝났다 (Condemnation Is Over by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본문: 로마서 8:1-2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영광찬양대 외 대표기도: 백두산 부목사님 외 사회: 임병영 부목사님 외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 *로마서 8:1-2,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 ▶드디어 로마서 8장까지 왔습니다. 여러분들은 저는 너무 감사한데 여러분들 어떤지 모르겠어요. 오늘이 로마서 8장 주일이 되었습니다. 저는 청년기에 저에게 서서 로마서 8장은 저의 인생의 등불이었습니다. 로마서 7장 뒷부분에 “오호라 나는 공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절망적(絶望的)으로 탄식(歎息)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狀況)에서 로마서 8장은 저의 인생의 담을 뛰어넘고 저의 삶의 벽(壁)을 돌파(突破)하고 제 인생의 구덩이와 함정(陷穽)들을 뛰어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런 은혜를 갖고 오늘이 말씀을 같이 나누는데 로마서 8장은 성령(聖靈)이란 단어로 가득합니다. 좀 세게 말하면 성령으로 도배(塗排)질을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가 설교의 제목을 “성령의 능력으로 정죄는 끝났다.” 정죄는 어떻게 해요? 끝났다. 이 로마서 8장이 우리 교회 역사에도 특별하게 이 벅찬 역사가 되는데, 지금 18년 전에 그때는 우리 강남 예배당이 이렇게 본당에 좁아 가지고 그날은 한 30주년이니까 우리가 한번 잠실 체육관을 빌려보자. 그렇게 해서 잠실 체육관에서 세 번의 예배를 드렸는데, 그 잠실 체육관이 19 천 석, 2만 석이었는데 외 예배마다 거의 아이들 가득가득 찼어요. 차 가지고 30주년 예배를 하는데, 그날 제일 뜻깊던 것이 뭔가, 여러 가지 있지만 그 중에 하나가 로마서 8장을 우리 교회 모든 어 사역 반 식구들하고 또 순장반, 순장님들이 같이 해 가지고 3,여 명이 모여 갖고 로마서 8장을 그 소라 고동을 불고, 그다음에 북소리와 함께 있잖아요. 강력하게 했어요. 저는 또 30주년에 기억하는게 뭐냐면 옥한흠 목사님이 그날 설교를 하셨는데, 목사님 설교 반하고 지가 반을 하고 그랬는데, 옥목사님 그러시더라고요. 오목사 30주년에 나는 25년을 했고, 오목사는 5년 했으니까 나는 설교를 25분하고, 오목사는 5년을 해라. 어 5분을 해라. 5분을 해라. 25분하고 5분 해라. 나는 그게 기억나지만 그러나 더 간절히 남는 것은 로마서 8장을 모든 우리 사역반 식구들과 순장님들이 북소리와 함께 하던 걸 잊을 수가 없어요. 제가 그 자료를 찾아보니까 거의 뭐 잘 남아 있지 않는데 그래도 이게 디지털은 아니에요. 좀 화면이 좀 흐리긴 하지만 잠깐 한 10초 보여 드리려고 합니다. 괜찮으세요? 저는 이거 거의 이런 거 안 해요. 제가 왜냐하면 영상 이런 거 하면 설교는 안 남고 영상만 남아 가지고,,, 그래서 안 하는데 그래도 오늘은 또 로마서 8장 귀한 시간이니까 시작하는 시간이니까, 한 번 보여 드리겠어요. “로마서 8장 1절로 4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함이 없나니.”!!! -왜 이렇게 로마서 8장을 수천 명이 암송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뭐냐면 로마서 8장은 우리 인생의 수많은 난제(難題)에 대한 전천후(全天候) 해답을 주셨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주님에 대한 사랑이 식어질 때도, 믿음이 약해질 때도, 죄책감과 두려움으로 흔들릴 때도, 기도 응답이 없어 가지고 실망할 때도, 수많은 사연(事緣)이 있죠. 두려움과 우울감과 이런 거 있을 때도, 젊은이들은 육신의 정욕이 발동할 때도, 하여튼 어떤 경우에도 소망이 흐려지고 앞날이 보이지 않을 때도 어떤 경우에도 이 로마서 8장은 우리 인생 난제에 대한 처방(處方)이 될 줄로 믿습니다. 먼저 로마서 8장의 산의 고봉(高峰)에 올라가야 됩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로마서를 처음 시작할 때 로마서의 산에 올라갑시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8장은 로마서의 산에 높은 최정상 고봉입니다. 고봉이고 또 로마서 8장은 보석(寶石)이라면 보석의 가장 빛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데 이 고봉에 올라가면 좀 달라져요. 무슨 뜻인가 하면 우리가 산에 높은 산에 올라갈 우리 산에 높 울산 바위 머리 높은 산에 올라갈 때에 올라갈 때는 힘들어요. 가슴이 이렇게 좀 답답하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그냥 땀도 흘리고 올라갈 때 쉽지가 않아요. 근데 높은 산에 올라가기 시작하면요. 전에 안 보이던 것이 보여요. 바람이 더 시원한 바람에 불고 좀 더 올라가면 옛날에 안 보이던 것이 보이기 시작하고, 숨이 가쁘기도 하지만 새로운 관점(觀點)들이 산에 올라갈 때 보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앞으로 로마서 8장 몇 주 동안 하는 동안에 여러분들이 이전에 보지 못했던 새롭고 소중(所重)하고 어떻게 보면 신기한 것들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로마서 8장을 통하여 받은 은혜 중에 하나는, 오랫동안 제가 사역반을 로마서 8장을 인도를 하면서 로마서 8장은 놀랍게도 우리 예수 믿는 분들이 환경이나 처지는 달라 달라도 로마서 8장을 통하여 영적인 공감들을 가지고 우리가 영적인 동지가 되도록 하나로 묶어 주셨어요. 무슨 뜻인가 하면 여러분과 저의 삶의 형편이 다르지만 로마서 8장을 통하여 각자 다른 인생들을 붙잡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동일하다. 어떤 사람은 기도를 열심히 하니까 기도가 응답이 됐어. 근데 어떤 사람은 기도가 응답이 안 됐어요. 좀 달라요. 어떤 사람은 병이 낳기로 기도 병이 나왔어요. 근데 어떤 분들은 평생 병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어떤 사람은 기도할 때 막힌 문이 열리고 어떤 분들은 끝내 문이 열리지 않을 때도 있어요.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뭐냐면 하나님의 은혜의 동일성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삶의 환경이 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약속의 말씀이 있다는 것이에요. 한번 딱 보면 잘 모를 텐데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은혜의 동일성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삶의 환경이 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약속의 말씀에 있다.’ 그러니까 뭐가 동일한가? 은혜가 뭐가 동일한가? 로마서 8장에 보니까 세 가지가 동일해요. 뭐가? ◇로마서 8장에 나타나는 은혜의 동일성 ①첫째는 정죄하지 않으시는 은혜가 동일하다.(롬8:1-2) ②자녀로 받아 주시는 은혜가 동일하다.(롬8:15-17) ③끝까지 붙잡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동일하다.(롬8:26-30) -은혜가 이 동일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인생에 똑같은 방식으로 개입하신다는 뜻은 아니에요. 환경과 처지에 맞춤으로 달라요. 그런데 서로 다르게 역사하시면서도 그 누구도 그리스도의 사랑밖에 버려두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사람마다 환경이 다 달라요. 그렇지만 은혜가 동일하다는 말은 여러분과 저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사각 지대가 없도록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이 자리에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은 반드시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동일한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에요. 심지어 오늘 이 예배는 뭐 별관들이 들으시는데 오늘 본당에 들어와서 같이 예배를 드리는 분들 특별하게 이 가운데는 하나님의 동일한 은혜를 받아 누리지 못한 분들도 있어요. 어떤 메마른 분들도 있어요. 그렇지만 이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분들이 반드시 있어요. 그 넘치는 은혜가 메마른 분들에게 전달되게 돼 있는 것이에요.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의 동일성을 모두가 다 누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로마서 8장에 은혜가 동일하다는 깨닫고 난 다음에 제 자신에게 있어서 뭐가 달라졌는가? 인생을 해석하는 기준이 달리 바뀌고, 다른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고난을 대하는 태도가 근본적으로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로마서의 산에 올라가 가지고 로마서 8장이 젊을 때 저에게는 인생 등불이라고 그랬는데 은혜의 동일성을 깨닫고 난 다음에 저는 남과 비교하는 비교 의식에서 제가 해방이 되었어요. 남의 형통이 나를 작게 만들지는 않았어요. 예를 들어 어떤 분들이 특새에 나와서 기도할 때 어떤 분들은 특새에 와 가지고 기도할 때 기도 응답이 됐는데 내 기도가 응답이 안 되면 나도 모르게 사람들이 아 내 기도 응답에 몫이 줄어드는 거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 있을지 몰라요. 그런데 은혜의 동일성을 제대로 깨닫게 되면 응답에 ‘파이’ 나눠 먹기 안 하고 있는 파이를 나눠 먹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의 동일성 때문에 새로운 은혜의 파이가 풍성하고 넘치도록 한 분 한 분에게 공급될 것을 믿는 것이에요. 저는 수많은 사역들을 하면서 이 사역 나눠 먹고 이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늘 하나님의 은혜의 동일성에 의한 그 축복을 가지고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의 새로운 파이를 가지고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이 은혜의 동물성을 깨닫고 남을 판단한 대신에 가능하면 함께 울고, 함께 기뻐할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동일성에 대해서 로마서 8장에 대해서 아까 세 가지 얘기했지만 또 세 가지 선언이 나와요. 어떤 선언? ◇로마서 8장을 통한 동일한 은혜의 세가지 선언. ①첫째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정죄 받지 않는다. ②성령 안에서 나는 버려지지 않는다. ③ 나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나는 끊어지지 않는다. -할렐루야!~~ 아멘. 이 세 가지 때문에 우리의 과거는 죄에서 해방되고 그리고 현재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고 미래는 하나님의 사랑이 보장되는 줄로 확신합니다. 그래서 이 신앙 배경이 다 달라도 로마서 8장을 통하여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의 동일성을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다 환경이 다르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어떻다고요? 동일하다. 이걸 위하여 여러분들에게 제가 귀중한 예를 하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런 뜻입니다. 제가 지금 제가 사는 아파트가요. 15층에요. 어느 날 저녁에 15층에 각 세대마다 15층에 사는 사람, 10층에 사는 사람, 8층에 사는 사람, 3층에 사는 사람 각대마다 환경과 삶의 어떤 그 그 현장은 다 달라요. 15층에 어떤 고3 수험생은 저녁에 불빛에서 내일 있을 모의고사를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 거예요. 10층에 사는 어떤 엄마는 아이가 열이 나 가지고 그 열 나는 아이를 이렇게 돌보고 치유하게 바빠요. 8층에 사는 어떤 할아버지 노인은 어떤 생명 연장 기구를 가지고 그 아파트 안에서 그걸 가지고 이제 치료를 받고 있어요. 3층에 사는 어떤 가족은 그날 따라 늦은 저녁을 먹고 있었어요. 근데 갑자기 아파트 전체에 전기가 나가 버렸어요. 정전이 된 것이에요. 그랬을 때 무슨 일이 났겠습니까? 그 정전에 대한 삶의 반응이 다 달라요. 어두워지니까. 빛이 보이지 않으니까. 15층에 사는 모의고사를 준비하던 고3 학생은 아이고야 이거 어떡하나? 내일 시험을 봐야 되는데 10층에 사는 아이 열을 돌보는 그 엄마는 아이를 간호하기 어려워지고, 8층에 사는 그 노인 생명 연장 기구를 가지고 그 전기를 하는 분들 굉장히 위기를 처하게 되고 3층에서 온 가족들이 늦은 저녁을 먹는 가운데 갑자기 불이 다 꺼지니까 약간 우왕자왕 하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같은 정전이지만 각 사람이 겪는 어려움과 고통을 무기는 달랐어요. 근데 이제 중요한 것 정전된 정기가 다시 들어오기 위해서 각 가정마다 자기 방식으로 각기 어둠과 싸워 갖고는 해결이 안 돼요. 아파트 단지 같은 경우는 각자(各自) 도생(圖生)으로 하면 안 되고, 끊어진 주 전력선이 복구(復舊)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전력이 복구되고 회복되면 같은 전기가 각과정에 서로 다른 필요를 채우게 되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수험생은 책상 등을 밝혀서 계속 공부를 하게 되고, 어떤 집은 냉장고와 난방기를 돌려야 되고 어떤 집에서는 아까 말한 대로 생명 유지 장치가 움직이게 되고, 어떤 집에서는 저녁 식사를 위해 다시 불을 밝혀 같이 식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예를 왜 드느냐? 로마서 8장도 똑같습니다. 우리의 사정과 우리의 삶의 환경은 다 다릅니다 만는 모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성령과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동일한 생명의 근원에 연결되어 있는 줄 확신합니다. 이거예요. 우리 복음은 각자의 서사와 인생의 스토리와 사연을 지워 버리지는 않지만, 대신 오히려 동일한 은혜는 서로 다른 인생의 가장 절실한 문제를 해결하는 거에요. 이걸 보고 은혜의 동일성이다. 이런 의미에서 로마서 8장은 모든 사람이 붙들 수 있는 복음의 주 전력선을 공급받는 것이에요. 막강한 복음의 전력을 공급받고, 막강한 성령의 능력을 공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아파트의 삶의 방마다 어두움의 이유는 다르지만, 그 모든 어두움을 밝히는 복음(福音)과 성령(聖靈)의 주 전력은 하나라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로마서 8장을 통하여 우리 인생의 어떤 난제들도 하나님의 끊을 수 없는 사랑의 연결됨으로 말미암아 어떤 아무런 상황에서도 삶의 어둠을 해결하는 빛을 밝힐 수 있도록 은혜 주신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복음의 주 전력선, 이 회복 은혜의 동일성을 위하여 한두 가지 제가 살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성령의 주 전력선 복음의 주 전력선의 첫 번째는 우리에게 뭐가 없다? 결코 정죄함이 없다. 그 말할 수 있습니다. II. 성령의 주 전력선 첫 번째,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1-2). -정죄함이 없는 은혜가 동일하다. 1절에 이제 1절 우리가 다 외우는 1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뭐가 없나니.” 정죄함이 없나니. 자, 오늘 정죄함 어떤 두려움 죄책감 이것이 없는 이유가 없는 뭔가? 첫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오늘이 예배를 드리는 모두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켜주신 성령님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고백하고 주님이 나의 주님이시라고 고백하는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적 가족이 된 줄로 믿습니다. 그거예요. 그렇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뭐가 없다? 정죄함이 없다. 정지함이 없다. 그리고 이 정죄함이 없는 효력이 어떻게 발생되는가? 언제부턴가? 내일이냐? 다음 주냐? 내년이 아니라 그러므로 이제 지금 이제 나우, 수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어려움에 발목 잡혀 있어. 과거의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 기쁨과 감사가 많이 사라지기 시작한 겁니다. 현재의 기쁨과 감사를 위해서 우리가 깨달을 것은 뭐냐? 지금이 순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우리들이 정죄함이 없다는 이 복음의 주 전력선을 공급받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다시요. 이제이고 시절은 이제이고 주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이 누려야 할 것임을 확신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그러므로라는 이 말은 그러므로 우리는 접속 그러므로 돼 있는데 본래 헬라의 원어 또 영어로,,, 있습니다만 원어에는 뭐냐면 그래 가지고 첫 말이 그러므로가 아니라 없다. 없다. 하나도 없다. *로마서 8:1,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 단어가 먼저 나와. 그러니까 정전은 뭐예요? 없다. 그래서 오늘 첫 번째 로마서의 산의 최고봉, 산의 정상 8장에 올라가 보면 8장 산에 올라가 보면 확성기처럼 울려 퍼지는 첫 번째 단어가 뭐냐면 없다. 없다. 그것도 결코 없다. ‘없다’는 외침이에요. 하나님은 지금 먼저 없다. 죄책감 우울증 두려움 없다. 그래 하시는데 왜 자꾸 나만 있다 정지함이 없다 없다 하는데 왜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없다가 그런는데,,, 왜 있는 것처럼 사느냐고?,, 로마서 1장부터 7장까지 말씀한 대로 죄의 형벌(刑罰)이 있어요. 1장부터 7장까지 있어요. 있다. 많이 있어요. 그런데 오늘 8장 1절에 첫 구절부터 없다. 없다. 없는 정도가 아니라, 어떻게 없다고요? 결코 없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리스도 안에서 정죄함이 없다고 선포하신 그 은혜를 함께 찬양하기를 바랍니다. 그거 하나 중요한 것. 그리고 이거 없다 없다 없다 그러고 이랬을 때에 더 깊이 깨닫는 것. 2절에서 그러므로 정자함이 없나니. 그러는데 2절에 뭐 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로마서 8:2,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우리는 은혜의 동일성 그다음 복음의 주 전력선 우리가 공급받고 있는데 이걸 구체적으로 좀 더 깊이 말하면 없다 없다 하는 것이 어떤 뜻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뭐가요?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여기에 이 법이라는 말을 여러 가지로 해석이 되지만 헬라의 본래의 뜻은 뭐냐면 지배력이에요. 생명의 성령의 지배력(支配力)이 죄와 사망의 지배력으로부터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생명의 성령의 능력이 죄와 사망의 능력으로부터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여러분 죄와 사망의 능력도 있어요. 우리는 아직까지 육신의 본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완전한 성화와 영화의 몸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죄와 사망의 본성이 있어요. 우리는 아주 고상한 열망이 있지만 우리 저열한 욕망도 우리 속에 자리잡고 있어요. 수많은 난제들이 우리 앞에 있어요. 죄 성이 다 있어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복음의 주 전선 성령의 능력의 주전선 그 플러그인이 되니까 생명의 성령의 능력이 여러분 진실로 이걸 깨닫고 하나님 앞에 의탁하고 이걸 이걸 여러분들 소원하시면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불쌍히 계셔 가지고 예외 없이 생명의 성령의 능력과 지배력이 죄와 사망의 지배력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여 주시는 것이에요. 사망보다 더 강한 통치, 더 강한 지배력이 우리 속에서 시작되었다는 선언인 것이에요. 놀라운 말씀이에요.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죄에서 해방 받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해방되었기 때문에 죄와 싸우는 것이에요. 주 전력선, 주 공급원이 이미 공급이 되었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가 형편이 좋을 때만이 아니라 형편이 어려울 때도 동일한 원리로 역사합니다. 내가 성공했을 때에도, 혹은 내가 실패했을 때에도, 건강할 때에도, 병들었을 때에도, 사람들에게 인정받았을 때에도,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무시당할 때에도, 내가 마음이 뜨거울 때만 나를 붙드시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감동도 느끼지 않는 날에도 생명의 성령의 능력과 지배력이 죄와 사망의 지배력과 능력을 압도하시는 것이에요. 그리고 이 생명의 성령의 지배력은 영원히 취소되지 않습니다. 로마서 8장 1절에는 없다. 정제는 없다. 끝났다. 로 시작해 가지고 로마서 8장 마지막 39절에는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으리라. 아멘. 로마서 전체의 대 개관이에요. 그러면 생명의 성령의 능력이 생명의 성령의 지배력이 죄와 사망의 지배력에서 벗어났다는 어떤 뜻인가? 이제 중요하게 이제 여러분들이 적용을 해야 되는데 이것은 우리의 죄의 본성보다도 성령의 능력의 양력이 더 크다이 말이에요. III. 죄의 본성의 능력보다 성령의 능력의 양력(揚力)이 더 크다. -여러분 양력이 뭔지 아십니까? 음력, 양력 그런게 아니에요. 여러분, 물을 물을 물이 물이 있을 때 배를 띄우게 하는 것이 물의 부력(浮力)이죠. 그렇죠? 양력은 비행기를 띄울 때 이런 비행기가 비행기도 똑같이 중력의 지배를 받아요. 일반적으로 그래비티 지배를 받아요. 그런데 A380 비행기 보잉 747 제일 큰 것들은 적어도 거의 300톤이 돼요. 300톤이나 되는 큰 쇠 덩어리가 어떻게 날겠어요? 근데 그 날개가 똑같이 그 새덩어 있을 때 병장에 이렇게 딱서 있을 때는 똑같은 중력의 지배를 받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 집에 봤던이 비행기가 엔진의 추진력과 추진력(推進力)으로 올라갈 때 날개의 그 양력이 공기의 중력보다도 더 클 때에 그 비행기가 그 큰 270톤 그 큰 비행기가 하늘을 향하여 날아가게 되는 것이에요. 마찬가지예요. 우리에게는 죄의 본성들이 다 있어요.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는 많은 문제들이 있어요. 그러나 그 남아 있다는 죄의 본성에 남아 있다는 그것이 우리가 죄의 노예(奴隸)라는 그런 뜻이 아니에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죄의 중력보다 더 강한 생명과 성령의 지배력으로 역사하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따라서 비행기가 이륙하기 위해서는 중력과 싸우는 대신, 죄의 지배를 받는 대신에 더 강한 힘, 양력을 의지하듯이 성도는 자신의 의지로 죄와 시름하는데 머물면 안 되고 안 되고 성령의 양력 적인 능력을 더 의지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거예요. 성령의 해방 선언은 죄의 중력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죄의 중력보다 더 강한 생명의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를 들어 올리는 양력이 돼야 하는 것이에요. 이것은 마치 뭐 같으냐면, 저 높은 산에 올라가는데 돌산으로 올라가는데 누가 올라가다가 갑자기 그 어떻게 잘못돼 가지고 힘이 다 빠져 가지고 추락(墜落)하기 직전이에요. 에 보니까 바위가 하나 있어요. 조그만 바위를 움켜 안고 있는 거예요. 이제 자기 힘으로는 에너지도 다 빠지고 힘이 빠지고 엄청 달성할 수가 없어요. 근데 어쩌 보니까 구조대가 도착을 했어요. 자 바위에 달려 가지고 있는 그 청년이 살기 위해서는 구조대가 내려준 밧줄을 붙잡아야 자기가 사는 거예요. 다른 말로면 자기가 지금 움켜지고 있던 안벽을 놓고 바위를 놓고 그 밧줄을 잡아야 되는 거예요. 이런 의미에서 자신의 힘을 더 짜내는 것이 구원이 아니고 자력 구원이 아니고 자신을 붙들어 줄 구원자에게 내 힘을 맡기는 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이 되는 것이에요. 이게 기독교의 계시의 신비(神祕)예요. 자,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죄의 본성이 있습니다. 아직까지 죄의 중력이 남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죄의 중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내 결심과 내가 움켜지고 있는 바위, 내 손가락에 더 힘을 준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힘만 의지하면 결국은 지치고 절망하는 것밖에 없어요. 복음의 이 주 전력서는 조금만 더 버텨라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생명의 밧줄, 성령의 능력을 붙잡으라는 초청인 줄 믿으셔야 되는 거예요. ◇복음의 주 전력은 “조금만 더 버텨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려 주신 생명의 밧줄, 성령의 능력을 붙잡으라”는 초청이다. -제가 성령의 능력을 의지(依支)하라는 이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 힘에 대한 집착(執着)을 내려놓고 말씀에 순종(順從)하여 성령의 능력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 찬송할 때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 근데 내 힘만 의지하면은 패(敗)할 수밖에 없도다. 그다음에 힘 있는 장수가 위에서 내려와 가지고 날 대신하여 싸울 때 우리는 영적(靈的) 전투(戰鬪)에서 죄의 중력의 지배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의 지배력으로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저의 사역과 저의 인생의 결정타 였어요. 지난 며칠 동안 저는 제천에 가서 기도를 했어요. 많은 사역들이 당장 처리들이 많이 있지만 하나님 이번 우리 가을 사역은 우리 교회 성도들에게 또 다른 영적인 인생 10월이 되게 도와 주십시오. 특새도 있고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마는 그런데 이걸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이 일을 진행하지 말게 하시고 복음의 주 전선, 성령의 능력의 주 공급원을 플러인하게 하셔서 모든 성도들이 죄의 지배가 아니라, 성령의 지배를 받아 모든 삶의 한계를 뛰어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바울은 이걸 깨닫고 우리는 죄의 본성이기 때문에 소위 육신의 소욕, 이 누구에게 다 육신의 소욕 desire, 아주 강한 단어예요. 육신의 소욕이라는 것은 그만큼 우리 육신의 욕망이 강하다는 것이에요. 그러면 육신의 소욕이 그만큼 강하냐? 성령의 능력과 성령의 소욕은 더 강하다. 육신의 소욕이 있지만 성령의 소욕 똑같이 소욕으로 나와요. 성령의 강력한 소욕에 우리 자신을 성령의 지배 아래 맡기게 될 때 우리는 상상수할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우리 가진 삶의 한계는 다 있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의 율법이 요구하는 것, 다 어려운 것 다 있습니다. 예. 우리에게도 한계가 다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사실을 육체의 소욕이 있지만 성령의 소욕, 성령의 지배를 받는 이것 때문에 너무나 놀랍고도 신기한 일들이 많이 생겼어요. 왜 저는 힘들 때마다 나를 성령의 소유께 나를 던지는 것이 성령의 지배에 나를 맡기는 것이에요. 청년 시절에 저는 로마서 8장 1절 2절을 앞에 써 놓고 붙여 놓고 암송하면서 하나님 아버지 내 인생에 부족한 죄의 지배력과 죄의 중력이 있지만 하나님 성령의 능력과 성령의 지배력에 나를 던지게 하여 주십시오. 놀라운 일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이 말씀을 읽고 암송하고 소리 내어서 선포할 때에 여러분 지치지 아니하고 쇠하지 않는 은혜를 하나님이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무한 리필 좋아하시죠? 응. 무한 리필를 좋아하시죠? 하나님은 희한하게도 성령의 능력, 성령의 지배력에 나를 의탁한다는 이런 기도를 하고 위탁을 할 때마다, 하나님은 무한 리필을 허락해 주시는 거예요. 한국 바라보는 리필, 영어 발음은 뤼필을 허락해 주시는 무한한 리필. 저는 어릴 때부터 이렇게 이제 좀 책을 좀 읽다 보니까 그러니까 가성으로 눈이 안 좋아져 버렸어요. 태어날 때부터 안 좋은게 아니고, 그 눈이 안 좋은 데다 나중에 또 이게 누워서 책을 읽다 보니까 완전 짝눈이 됐어요. 그 좀 어지럽기도 하고, 그런데 어느 날 안경점에 갔어요. 그래 가지고 짝눈이구나. 그리고 이제 딱 해 가지고 안경을 새로 맞췄어요. 그때부터 신천지가 눈앞에 전개되도다. 1.2, 1.5, 조정이 됐어요. 뭐 완전한 완벽한 비유는 아니지만 눈이 안 좋은 건 그대로 남아 있어요. 짝눈도 그대로 남아 있어요. 내가 온 이런 얘기를 왜 제가 다 하는지 모르겠어요. 다 남아 있어요. 그런데 새로운 안경이 있으면 그 부족함과 연약함이 극복이 되는 것이에요. 여러분, 우리는 죄성의 지배력이 우리에게는 본성으로 남아 있어요. 그런데 오늘이 말씀은 그대로 있고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뭐가 없나니,, 정죄함이 없나니,,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능력과 지배력이 죄와 사망의 능력으로부터 너희를 해방하였음이라. 해방을 선포하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구원 얻기 위해서 막 애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해방 선언한 이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우리는 가능하면 죄와 투쟁하고 싸우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모든 성도들, 사랑의 교회 모든 귀한 성도들이 복음의 주 전력선을 공급받고, 그다음 여러분 동일한 은혜를 가지고 내가 안고 있는 안벽을 내려놓고 생명줄을 붙잡음으로 말미암아 여러분들이 부족한 본성과 부족한 이 눈이 있다 할지라도 오늘 말씀을 통하여 새로운 안경을 끼고 새로운 차원으로 올라가 하기를 바랍니다. 여기 젊은이들 연세드신 분들 할 것 없이 이 말씀을 앞에 써 놓고 암송하고 그다음에 써놓고, 또 이것을 주장하고 선포하고, 힘들고 시험 될 때마다 desire, 육신의 소욕이 커질 때마다 오히려 이 말씀의 지배력이 더 큰 것을 믿고 의지할 때 하나님 여러분들 통해서 놀랍게 일하실 줄로 믿습니다. ♬주~~의 보혈 능력이 있도다. 주의 복음이 능력 있도다. 주의 말씀이 능력이 있도다. 주의 성령이 능력 있도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오늘 로마서 8장을 통하여 지나간 2000년 교회 역사에 수많은 성도들의 인생 난제에 대한 전천후 처방과 해답을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 한 명도 없이 끊어진 주 전력선이 복구되게 하여 주옵시고 끊어진 복음적 성령의 능력이 플러그인 소켓이 회복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정죄는 없다. 정죄는 끝났다. 그렇게 주님이 선포하실 때, 내게 있는 모든 죄악 된 잘못된 것들이 다 처리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성령님의 능력의 양력으로 죄의 중력을 돌파하여 우리 온 성도들을 지금 있는 힘든 자리에서 다시 한번 비상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간절히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요약 로마서 8장은 인생의 모든 난제에 대한 전천후 해답이자, 복음의 최고봉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으며,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다. 우리 안에는 여전히 죄의 중력과 육신의 소욕이 남아 있지만, 성령의 강력한 능력과 지배력인 '양력'이 이를 압도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힘이나 자력 구원을 의지하는 대신, 하나님이 내려주신 생명의 밧줄이자, 성령의 능력을 온전히 붙잡아야 한다. 성령의 지배 아래 자신을 내어드릴 때 죄(罪)의 세력을 이기고 새로운 차원(次元)으로 비상(飛上)할 수 있다.
* 마태복음 18:1-4, 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
▶할렐루야! 네.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옆에 분과 밝은 얼굴로 인사하겠습니다. 평안하셨습니까? 인사하겠습니다. 평안하셨습니까? 오늘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평강이 안아주신 본당에 오신 또 각자에서 예배드리는 모든 성도님들의 삶에 현장에 은혜와 평강으로 임하여 주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대접받기를 원합니다. 누가 나를 대접해 주는 거를 마다할 사람은 없죠. 존경이란 대접을 받길 원하고, 사랑과 관심이라는 대접을 받기를 원하고, 누군가 나를 섬겨주는 대접을 받는 것을 원하고 좋아합니다. 부부관계 가운데서 또 가정에서 또 직장에서 또 교회에서 식당에서도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대접을 받기를 원하죠. 또 식당 사장님이 우연히 ‘손님 인상이 좋아요.’ 라고 말하면서 간혹 계란말이를 서비스로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나에게 준 계란말이기 때문에 너무나 기뻐서 어디 가서 나 이런 서비스 받았다. 대접받았다는 것을 자랑하고 이야기를 하죠.
반면에 누구는 주고 나는 안 주면 그때부터 우리는 마음 안에 다시는 그 식당을 가지 않겠다는 마음의 결단과 각오를 하게 됩니다. 뭐 계란말이가 대단해서 그런 건 아닙니다. 나를 그렇게 대접하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실망하고 나를 다른 사람보다 더 특별하게 대우해 줬기 때문에 사람은 기뻐하고 즐거워하죠. 착했던 3살 난 아이가 그 동생이 태어나고 나서 엄마 몰래 아이를 발로 차고 엄마 몰래 꼬집는 그 이유도 그 자기에 대한 엄마 아빠의 대접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운 감정이 생기고 싫은 감정이 생기는 거겠죠. 오늘 본문에도 대접받기를 원했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이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와서 질문합니다. “예수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천국이 임하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천국이 임하면 그 천국에서 누가 큰이일까? 누가 큰 사람입니까? 누가 더 대접을 받겠습니까?” 혹시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사랑하는 요한입니까? 아니면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우리도 예상하지 못했던 또 다른 사람인가요? 제자들의 관심사는 누가 더 많은 대접(待接)을 누가 더 크냐에 대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제자들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가족들도 이것이 큰 관심이었죠.
예수님은 2년, 3년 동안 따랐던 자신들의 아들을 보면서 왜 이렇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 싶어가지고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직접 와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그 나라가 임하게 되면 당신의 오른편에 나의 큰아들인 야고보를 당신의 왼편에 나의 둘째, 아들인 요한을 세워달라고 말합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하나는 국무총리요, 하나는 비서실장으로 세워달라고 청탁(請託)을 하게 되죠. 이렇게. 누가 크냐에 대한 그 관심을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말씀으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이야기하십니다. 2절과 3절 말씀인데요. 우리 함께 읽겠습니다.
*마태복음 18:2-3, 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귀를 쫑긋 세우고 예수님께서 누가 더 클까를 말씀하시길 기다리고 있는데, 저기 놀고 있는 한 아이를 부르더니, 이 아이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들이 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고 말했어요. 제자들에겐 큰 충격(衝擊)이었을 겁니다. 나보다 못한 나는 예수님을 2년, 3년 동안 따랐는데도 불구하고, 평범한 아이보다 못하다니 아마 자존심이 상한 말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누가 많이 배웠던 누가 많이 알고 누가 많이 가졌던 누가 많은 어떤 일을 했던 상관없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이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갖지 아니하면 결단코 너희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라고 말씀하고 있죠. 그렇다면 여러분 제자들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이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은 아니었다. 라는 겁니다. 대접받기를 원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는 절대로 너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거야. 라는 경고(警告)의 메시지를 하셨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제자들이 처음부터 그랬을까요? 제자들이 처음부터 대접받길 원했을까요? 그렇진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그가 메시아인 줄 알고 나고,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따랐을 때는 그들의 마음이 이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이었다는 것이죠.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제자들의 마음은 변화되었고, 변질되었고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3절에 그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3절 말씀 읽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8:3, 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여러분 돌이켜, 라는 말에 주목을 하셔야 됩니다. 이 돌이켜 라는 말은 헬라어는 ‘스프라 테페’라는 말인데 이 말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 돌이켜 의 첫 번째 의미는 ‘제자리로 돌아가라.’ 라는 말입니다.
I. 첫째, 제자리로 돌아가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제자들의 마음이 있었던 처음의 마음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었는데. 시간이 흘러서 제자들의 마음이 변화되었으니 변질되었으니 다시 처음 예수님을 따랐던 처음의 그 처음 자리로 너는 돌아가라 라는 말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따랐을 땐 순수한 마음이었습니다. 뭐 대단한 걸 바란 것도 아니었고 제자라는 그 사실이 기뻤고 그가 메시아라는 것 때문에 그는 따랐던 자들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고 예수님이 기적(奇蹟)을 봄과 동시에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면 내가 혹시 국무총리는 되지 않을까? 내가 한 자리는 차지 않을까? 더 높은 자리를 올라가고자 하는 마음에 관심이 있었다는 겁니다. 이 마음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이 나를 처음 따랐던 처음 자리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시며 돌이켜, 라는 말을 쓴 것이죠. 두 번째 돌이켜 라는 말은 방향을 바꾸라는 의미입니다.
II. 둘째, 방향을 바꾸라는 뜻이다. -너 이렇게 살다, 큰일 난다. 네가 가는 길은 멸망의 길이야. 너가 가야 되는 길은 생명의 길인데 그것은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의 길을 걸어야 된다. 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며 돌이켜, 라는 말을 썼다는 것이죠. 여러분 여기서 말하는 어린아이와 같다. 라는 말은 어린아이의 행동을 따라 라는 말은 아닐 겁니다. 여러분 아이처럼 행동해라. 아이처럼 흉내 내라. 한마디로 말하면 아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쁘죠. 주쎄요. 이런 말은 아니라는 것이죠. 뿌잉뿌잉잉.~ 이건 아니라는 겁니다.
어린아이가 되라는 말은 적극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왜 많고 많은 것 가운데 왜 어린아이가 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우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모세처럼 되어야 된다. 다윗과 같아야 된다. 다니엘과 같지 아니하면 엘리야와 같지 아니하면 느헤미야와 같지 아니하면 더 이해하기 쉬울 텐데 왜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한 말을 했을까요? 왜 어린아이를 비유했을까요?
만약에 예수님께서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을 이야기했다면, 제자들은 그냥 그 자리에서 포기했을 겁니다. 나는 안 되는구나. 나는 절대로 할 수 없구나. 나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구나. 나는 하늘의 유업을 받을 수 없구나. 내가 모세가 된다고, 내가 다윗이 된다고, 내 출신이 어떠한데? 불가능해 포기(抛棄)해버렸을 거예요. 하지만 어린아이가 되는 것은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어른이었지만 이미 어린아이의 시절을 보낸 기억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어린아이 시절을 보냈어요. 그래서 어린아이가 된다는 것이 뭔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린아이는 너무나 평범하게 볼 수 있어서 충분히 따라 할 수 있는 시청각 자료가 될 수 있는 존재였다는 것이죠. 안타깝게도 제자들의 마음은 변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랐을 때, 그 마음은 없고 대접받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변한 거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처음 가졌던 그 처음 그 초심을 우리는 지키기가 참 어려움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서로에게 우리는 이렇게 말하죠. 우리가 부목사님이 새로우면 목사님 초심을 잃지 마세요. 라고 격려하기도 하고 제가 후임 목사로 부임해서 많은 성도님들이 목사님 초심 잃으시면 안 됩니다. 라고 말할 때 저도 동일하게 말합니다. 권사님, 초심 잃지 마세요. 장로님도 초심 잃지 마세요. 집사님도 초심 잃지 마세요. 순장님도 초심 잃지 마세요. 이 우리가 다시 초심을 잃지 않는 것은 목회자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여러분 가져야 될 마음이라는 것이죠.
제가 신학대학교 4학년 때, 24살 때 전도사 사육을 시작했습니다. 초등부 선생님이었다가 중고등부가 둘로 중등부, 고등부 나눠주면서 중등부 전도사를 시작을 했는데요. 그때 중등부 선생님들이 한 30명, 다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저보다 나이가 20살, 30살 많으신 분들이 선생님이었어요. 24살 된 난 아직도 결혼 안 한 총각 전도사가 이제 대학생 전도사가 했으니, 얼마나 마음이 여러분 겸손하고 얼마나 마음이 열심을 다하고 싶었을까요? 항상 교회에 제일 먼저 가서 불을 켜고 추운 겨울에는 보일러를 뜨고 또 예배가 다 끝나면 마지막까지 불을 끄고 나갔던 저였습니다.
그리고 회식이라도 하면 먼저 식당에 가서 예약(豫約)을 하고 자리를 만들어 놓고 음식(飮食)도 미리 주문해서 오시면 먹을 수 있도록 다 준비해 놓고 밖에서 기다린 다음에 들어가시면 신발도 다 이렇게 나갈 때 편하게 신으로 다 돌려놓고, 그리고 고기를 구울 때도 먼저 구워드리면서 선생님 접시에 이렇게 올려드렸습니다. 이렇게 올려드렸던 그래서 말하죠. 전도사님도 드세요. 선생님이 먹는 것만 봐도 전 배부릅니다. 라고 말해서 이거를 이렇게 제가 그랬다니깐요. 제가 그랬던 저였는데 어느 날 몇 개월도 지나지 않아 달라져버린 제 모습을 보게 됐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날도 교사 회식(會食)을 하는 날이었는데. 선생님, 저보다 나이 많으신 선생님이 다 식당에 와 있는데도 불구하고, 제가 제일 늦게 나타나 가장 좋은 자리에 앉아서 제 접시에 올려놓은 고기를 올려주는데 족족 먹으면서 당연(當然)한 듯이 먹고 있는 제 모습을 봤습니다. 왜? 저렇게 이상한 눈으로 보세요.
여러분도 그렇잖아요. 어느 순간 대접받는 게 당연하고 대접받는 게 익숙해져 버린 성도들이 교역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섬겨준 건데, 이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변화(變化)되어 버린 제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실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 역시도 제자들의 이 달라진 모습 보면서, 자신을 처음 따라왔을 때 그 처음 마음이 바뀌어있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은 다시 처음처럼 되기를 원하며 너희들은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된다. 라고 오늘 본문에 말씀하고 계신 거예요.
그렇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은 어떤 신앙일까요?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은 어떤 의미의 신앙의 길을 걷는 것일까요? 우리 그것을 우리가 세 가지로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함께 나누길 원하는데요.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 첫 번째는 하나님 없이는 못 사는 신앙이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란? ①첫째, 하나님 없이는 못사는 신앙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전적 위탁자의 삶을 살아가는 거예요. 아이들은 절대로 혼자 생활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부모의 도움이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어요. 이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란, ‘나는 주님이 없으면 하루도 살지 못합니다.’ 라는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 이 사람이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죠. 여러분 인간의 모습 가운데 가장 참혹(慘酷)하고 불쌍한 모습은 에덴 동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 임(臨)재(在) 가운데서 살았던 아담과 하와가 그가 죄(罪)를 범(犯)하고 나서 하나님의 얼굴을 피(避)하여 숨었던 아담과 하와, 그 에덴 동산에 쫓겨나 있었던 하나님과 멀어져 끊겨버린 그 아담과 하와의 그 존재(存在)가 인간의 가장 참혹(慘酷)하고 처량(凄涼)한 모습이었던 것이죠. 여러분,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늘 반복적(反復的)으로 가르쳐주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은 15장 5절인데요. 우리 함께 읽어볼까요? 시작.
*요한복은 15:5,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아멘 -너희는 나를 떠나선 너희가 아무리 많이 배웠고 많이 그걸 가졌다 할지라도 너희 인생의 존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nothing의 인생이다. 라고 가르쳐 주셨죠.
여러분, 우리는 날마다 이것을 기억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을 되찾는 거예요. 길거리에, 아니 아니면 놀이동산에, 백화점에 아니면 맛있는 식당에서 부모를 잃고 우는 아이를 만날 때 여러분 그런 아이 아마 만나보셨을 겁니다. 재미있는 놀이동산에서 부모를 잃었을 때 우리는 그 아이를 보면서 지금 재미있는 놀이동산이 있잖아. 너 행복하지 않아. 라고 말할 어른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백화점에서 장난감도 많은 그곳에서 엄마를 잃고 울고 있는 아이에게 많은 장난감이 네 손에 있잖아. 행복하지 않아? 라고 질문할 부모도 없을 겁니다. 손에 맛있는 핫도그를 들고 있는 아이에게 엄마를 잃어버려서 울고 있는데, 너 그 맛있는 핫도그를 먹으면 되잖아. 행복하지 않아? 라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이 아이는 아무리 좋은 옷을 입었고 놀이동산에 와 있고 맛있는 것을 들고 있다 할지라도 이 아이는 지금 큰일 난 아이입니다. 왜요? 엄마 아빠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자신을 늘 지켜주는 보호자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 아이는 큰일 난 인생이에요. 이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 이런 믿음입니다.
엄마 아빠를 잃어버리면 불안하듯이 내 인생의 하나님의 임재를 잃어버리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위기에 빠진 인생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을 느끼지 못한다면, 내가 주님과 멀어져 있다면, 불안해해야 되고 초조해야 되고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먹지 않는다면 그것이 나 인생에 가장 불행한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아이들은 좀 컸다고 생각하면 그때부터 부모로부터 독립하려고 하듯이 우리가 조금 신앙이 자랐다고 생각하면 마치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지 않아도 내가 얼마든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 라고 착각(錯覺)하게 되죠.
그래서 여러분 청소년 아이들이 청소년기 때, 그렇게 부모로부터 독립해서 가출해서 혼자 살아보기도 하는 그 일들을 벌이는 이유가 그 이유이기도 있게 합니다. 미국에서 이제 아이들이 이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갈 때, 서부에 있는 아이들은 대학을 동부로 가려고 하고, 동부에 있는 아이들은 대학을 서부로, 5시간, 6시간 비행기 타고 가야 되는 서부로 가려고 합니다. 살고 있는 동부에, 서부에 좋은 학교가 없기 때문에 그런 거 아니라 이유는 부모로부터 가장 먼 곳의 학교를 가겠다는 거예요. 하지만 딱 가고 나서 아이들이 뭘 느끼죠? 집 나가면 고생이다. 어떻게 잘하세요? 집 나가면 고생이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영적으로 성인이 되었다고 착각하면 그때부터 내가 모든 것을 선하게 결정할 수 있고 뜻대로 살아갈 수 있고 나는 얼마든지 죄의 유혹(誘惑)을 이길 수 있다. 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끼지 못한 순간부터 우리는 죄의 유혹에 넘어지기 시작합니다. 선하고 아름다운 길이 아니라, 잘못된 그릇된 길에 설 가능성이 많아져요. 요셉이 죄를 이길 수 있었던 힘이 무엇입니까?
요셉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어찌 하나님께 득죄(得罪)하리이까? 그의 마음에는 그의 생각에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늘 인식하고 살았다. 라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 나는 하나님 없이는 안 됩니다. 나는 하나님 없으면 나는 살지 못합니다. 라고 전적(全的) 의탁(依託)하고 사는 것, 이것이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놀면서도 항상 엄마가 있는지를 확인하며 놀아요. 열심히 친구와 놀다가도 뒤를 돌아보면서 엄마가 있는지 확인합니다.
자다가도 깨면 항상 손으로 더듬거려서 엄마가 있는지를 확인하고 잠을 자요. 저희 아들이 잘 때 항상 엄마가 있는지 확인하려고 그 엄마 볼 위에 손을 항상 올려놓고 잤어요. 그런데 여러분 따뜻한 손이 올려주면 얼마나 불편한지,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게 너무나 부모가 니 옆에 있다는 것을 인식할 때 편안하게 잠을 드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날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셔야 나는 삽니다. 주님이 안 계시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고백으로 사는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둘째, 두 번째 어린아이 같은 신앙은 어떤 신앙일까요? 두 번째는 말씀 그대로를 믿는 신앙입니다. 여러분 아이들은 부모의 보호가 없이는 살지 못하죠.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란? ②둘째, 말씀을 그대로 믿는 신앙이다. -여러분 아이들은 부모의 보호가 없이는 살지 못하죠. 전적으로 부모의 공급과 부모의 보호(保護) 가운데 살아가야 됩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그 부모의 보호와 공급(供給)함에 있기 위해서 아이들은 철저하게 부모의 말을 따르고 여러분 순종(順從)하죠.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지으시고 나서 아담에게 하셨던 것은 순종(順從) 훈련(訓鍊)이었어요. 너희는 생육(生育)하고 번성(繁盛)하고 땅에 충만(充滿)하고 이 땅을 다스리라는 명령에 순종을 해야 됐던 것이 여러분 아담과 하와의 사명(使命)이었습니다. 선악(善惡)을 알게 한 나무를 만들어 놓으시고, 그 모든 것은 다 이름 어때? 그 선악을 알게 한 나무는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 이유 또한 나 하나님은 창조주(創造主)고 너희는 피조물(被造物)인데 너희가 나의 이 계명을 말씀을 언약(言約)을 지켜야만 에덴 동산에서의 축복(祝福)을 누릴 수 있고 너희가 이 말씀에 순종해야만 너희는 은혜와 복 가운데 산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선악을 알게 한 나무를 하나에게 세우셨다는 것이죠.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曠野)로 이끌 때에도 낮에는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실 때 너희가 이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따라야 된다. 이 구름 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너희가 순정으로 따를 때, 너희는 보와 은혜 가운데 살 수 있어. 라는 그 순종함을 가르쳐 주셨다라는 것이죠.
여러분,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를 비유하시면서 여러분 예수님은 그 어린아이의 순수(純粹)한 순종(順從)을 닮아가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왜냐면 아이들은요. 순종할 때 그 이유를 묻지 않습니다. 왜 순종해야 되는지 이게 나은지 저게 나은지 아이들은 계산하지 않아요. 아빠가 얘기이기 때문에 그냥 순종합니다. 내가 순종하면 아빠가 좋아하니깐 순종할 뿐이지, 이게 좋아 저게 좋아 판단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달라요. 어른들은 별의별 생각을 다 합니다. 이것이 나에게 이익이 될지 이것이 나에게 손해(損害)가 될지, 남들이 뭐라고 하면 어떻게 하지? 내가 생각했던 것, 내가 바랐던 것과 다르면 어떻게 하지? 온갖 많은 생각을 가지고 순종을 더디 하는 것이 어른이라면, 아이들은 계산(計算)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 말에 순종하자.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1983년도에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일입니다. 주일학교 예배가 마치고 나서 이제 성가대로 섬겼기 때문에 이제 1~23학년 아이들이 이제 예배 끝나고 성가 연습을 교육관에서 하고 있었습니다. 한 10시, 한 40분 정도 됐을까요? 갑자기 밖에서 전쟁이 났을 때 울리는 긴급경보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부모님들이 전쟁 났다고 허겁지겁 교육관의 아이들을 찾으러 데리러 온 거예요. 그때 아이들이 20~30명 있었거든요. 그때가 어떤 사건이냐면 북한의 이웅평 소령이 전투기를 타고 이제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넘어왔던, 여러분 그 사건 기억하실 겁니다. 그때 6.25 전쟁이 다시 터지는 줄 알고 진짜 긴급한 분위기 가운데 부모들이 교회 아이들을 찾으러 왔어요. 그때 그 모여있는 1~2,3학년 아이들이 정말 허겁지겁 얼굴이 사색이 돼서 교육관에 들어온 그 부모님들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무나 태연하게 전쟁 나서 죽어도 우리는 천국 가잖아요. 이게 아이들의 얘기였습니다. 엄마 왜 이렇게 걱정해? 우린 전쟁 나서 죽어도 우린 천국 가잖아. 그런데 계속 찬양을 했던 게 기억납니다. 아이들이 볼 때는 저런 철없는 아이들, 생각 없는 아이들 하겠지만, 이 아이들이 들었던 전도사님의 말씀, 아니 부모가 줬던 그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는 건 뭐예요? 아이들의 신앙이 순수하기 때문인 거예요. 말씀 그대로 믿는 거, 하지만 어른이 되면 생각이 많아집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말씀을 말씀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죠.
저는 우리 사랑의 영 가족 모든 분들이 다 처음엔 이 어린아이와 같은 순종하는 사람이었음을 저는 믿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세요? 지금은 그때보다 성경 지식도 많아졌고, 경험도 많아졌고, 훈련도 많이 받았고, 하나님에 대한 살아계심의 경험도 더 많이 했는데도 불구하고, 힘과 권력을 가졌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말씀을 말씀 그대로 받지 않고, 항상 말씀 앞에서 내 생각을 먼저 이야기하고 이것이 유익이 될지 손해가 될지를 따지고 있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셨던 것처럼 다시 너희는 처음처럼 돌아가야 된다.
주님을 만났던 그 처음,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듣겠나이다. 내가 순종하겠습니다. 했던 그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 저와 여러분에게 회복(回復)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도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치유하실 때, 그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백 부장을 보면서 내가 이만한 믿음을 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그 백 부장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주님 나도 종에게 일로 가라면 가고 절로 가라면 갑니다. 주님이 지금 이 자리에서 말씀하시면 지금 죽을 병에 걸린 내 하인이 말씀하시면 말씀하신 대로 나을 줄 믿습니다. 우리 집에 오실 필요 없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내가 이만한 믿음을 본 적이 없다’였습니다. 이 이만한 믿음이 어떤 믿음이에요?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라는 거예요. 어제 오정현 담임 목사님께서 토비새의 말씀을 전하시면서 참 귀한 도전의 말씀하셨어요.
우리가 10월 달에 ‘글로벌 특별 새벽 부흥회’를 앞두고 있고 7천 명의 한국 교류를 섬기는 우리 ‘한교섬’과 그리고 이번에 특별히 일본 목사님을 섬길 200명을 섬기는 ‘일교섬’ 세계 개혁주의 교회 목회자 지도자들을 섬기는 ‘WRF 서울 총회’를 우리가 준비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선 우리에게 그날에 은혜와 기적과 능력과 회복을 이미 준비하고 계시는데, 그러면 그 은혜와 기적과 능력과 회복을 받을 마음의 그릇을 우리가 준비해야 되는데,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다’고 말씀하셨고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는 말씀하셨다면 우리가 그 은혜와 기적을 받기 위해선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그 은혜를 체험하기 위해선 우리가 금식하며 기도하며 믿음의 그릇을 키워가야 된다.
우리는 금식할수록 내 안에 있는 불순물들, 거짓되고 의심(疑心)하고 자기 생각을 말하고 이것이 이익이 되는지 이익(利益)되는지 아느냐에 따라 판단(判斷)하고 있는 우리 안에의 불순물(不純物)들이 금식 기도하고, 제거(除去)되므로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 되어서 주님 주님이 말씀하시면 됩니다. 주님에게는 하나님께는 능치 못한 일이 없습니다. 라고 우리가 나아갈 수 있는 말씀을 그대로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줄 믿습니다.
아이들은 너무나 너무나 순수(純粹)해요. 그리고 그 말씀을 전적으로 따릅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제가 살던 미국의 집에 계단(階段)이 있었습니다. 딸아이가 4살, 5살 때였는데 첫 번째 계단에 오르면서 말합니다. 뛰어봐. 아빠가 안아줄게. 머뭇거리다 뜁니다. 그럼 저는 안아주죠. 두 번째 계단 올라갑니다. 머뭇거리다 뛰어봐. 아빠가 안아줄게. 아빠의 말을 듣고 뜁니다. 세 번째는 설명이 필요 없어요. 세 번째 계단 뜹니다. 받아줍니다. 네 번째 계단도 뜹니다. 받아줍니다. 다섯 번째 계단도 뜹니다. 받아줍니다. 아이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 계단 놓는데 일단 뛸 때는 그 계단에서 뛰지 않고 저 뒤로 가가지고 달려오면서 뜁니다. 엄청 뛰면서 달려와서 아이가 팍 나르죠. 그럼 저는 받아줍니다. 아이의 머릿속에는 내가 뛰면 아빠는 받아준다는 생각밖에 없어요. 아이의 머릿속에는 내가 뛰면 아빠는 슈악 하고 피할 거라는 생각이 없습니다. 받아줄 거라는 생각밖에 없어요. 이게 어린아이의 신앙이에요. 우리의 생각에 설마 응답하시겠다. 이게 아니라 반드시 주님을 응답하신다. 말씀대로 역사하신다. 나는 믿는다. 이것이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에요.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신앙을 회복해야 돼요. 아멘이십니까?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으로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어린아이 같은 신앙은 어떤 신앙일까요? 세 번째로, 그것은 자기를 낮추는 신앙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란? 셋째, 자기를 낮추는 신앙입니다. -우리 4절의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함께 읽어볼까요? 시작.
*마태복음 18:4,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아멘. 여러분, 19세기에는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어린이의 인격은 존중(尊重)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인류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20세기의 최고의 발견은 어린이의 발견이다.’ 그 당시에 아이들은 인격체가 아니었습니다. 성인 남자만이 사람의 수로 포함되었어요. 아이들은 그 대상에서 제외되었어요. 아이들은 대접받는 대상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관심의 대상도 아니었습니다. 아이들은 항상 어디를 가나 자기를 낮추고 낮추는 것이 운명인 존재가 아이였습니다. 이 이야기하면 한편으로 이렇게 말씀하신 분이 있습니다.
목사님, 요즘 아이들은 안 그래요. 요즘 아이들은 부모 머리, 어른 머리 꼭대기에 서 있습니다. 말할 때 예 맞습니다. 그런 아이들은 치유(治癒)가 필요한 아이들이고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아이는 진짜 자기를 낮추는 아이를 말하는 거예요. 그런데 선생님 말씀하십니다. 어린아이처럼 너희가 너희 스스로를 낮추지 아니하면 천국에서 큰 자가 될 수 없다. 이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베드로 전설 5장, 5장 말씀인데 우리 함께 읽어볼까요? 시작.
*베드로전서 5:5, 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니라 아멘, -뭘 말하고 있습니까? 예수님 하나님은 교만(驕慢)한 자를 대적(對敵)하시고 자기 스스로 낮추는 자에게 그 인생은 평생 하나님의 은혜(恩惠)가 떠나지 않게 하신다고 약속하셨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 사랑의 교회 성도님 안 그렇지만 주변에 보면 목이 곧은 성도가 있습니다. 그냥 자기를 낮추는 것을 자존심 상했다고 생각해요. 자신의 권리(權利)만 주장(主張)합니다. 그렇다면 그 인생은 하나님이 떠나는 인생인데 자기를 낮추고 낮추고 낮추는 자는 평생의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지 않는 자가 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영 가족 여러분,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되는 어린아이 신앙이 되어야 됨을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압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을 사신 분이 있는데, 그분이 누구냐면 예수님이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은요. 하나님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늘 하나님과 늘 함께하기를 구하셨고, 늘 하나님께 기도했으며, 늘 어려운 어떤 힘듦이 있을 때마다 죽게 나와서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을 구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늘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조건 순종(順從)했습니다. 주여, 하나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는 순종하신 분입니다. 또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낮아지고 낮아지신 겸손의 왕이 되셨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우리들에게, 너희가 나처럼 돼라. 예수님처럼 되라고 하면 저는 예수님처럼 못 살아요. 라고 말하겠지만, 예수님은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을 걸으셨던 분이세요. 그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어린아이처럼 돼라. 어린아이 신앙이 될 수 있다. 왜? 우리가 그 어린아이 시절을 보냈고. 우리가 그런 과거가 있고, 우리가 충분히 그와 같이 예수님처럼 살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기 위해서 어린아이 같은 신앙이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우린 돌이키면 됩니다. 주님 말씀하신 것처럼 다시 어린아이 같은 신앙이 되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게 되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영 가족 여러분, 예수님께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돌이켜 어린아이가 되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라 말씀하십니다. 다시 어린아이의 신앙으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는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나는 나를 낮춤으로 내 평생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지 않는 사람으로 살겠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우리를 떠나지 않는 그런 하나님의 백성으로 서게 되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마음이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순수한 믿음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자가 되게 하시고,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게 하시며 늘 우리를 낮추어 평생 은혜 속에 거하는 겸손한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은혜와 능력이 날마다 경험 되게 하여 주시고, 어린아이 같은 믿음으로 끝까지 주님을 따라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오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교회 기도문 1주여! 대접받기 좋아하는 마음이 커질 때마다 '돌이켜" 어린아이처럼 되게 하사 "주님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고백하며 '나의 그물을 내려놓았던 그 처음 자리'로 돌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2 주여! 이유를 물지 않고, 계산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게' 하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생육-번성-충만의 은혜'를 누리게 하여 주옵소서! 3 사랑의교회가 검손하게 금식하며 제24차 가을 특새로 달려와 엎드려 간구활 때. 제5회 한교섬/일교섬과 세계개혁주의협의회(WRF) 서울총회를 통해 대한민국과 세계교회가 '강력한 은혜와 회복과 능력과 기적'을 경험하게 하여 주옵소서!
♣요약 -제자들이 천국에서 누가 더 큰지를 두고 다툴 때,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세우시고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경고하셨다.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란, 첫째,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어 모든 것을 전적으로 맡기는 신앙이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계산 없이 순종하는 신앙이다. 셋째, 스스로를 낮추는 겸손한 신앙이다. 초심으로 돌아가 자기를 낮추고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때,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임한다.
제목: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나이다(Lord, Yoy Know Everything About Me)"
말씀: 시편 139:1-6
찬양인도: 쉐키나(이동선 부목사님), 시온찬양대(4부) 외.
사회: 임상규 부목사님(4부)--- 임병영(1부), 이기호(2부), 장단희(3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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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39:1~6,
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5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6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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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찬양대가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보혈 복음의 은혜를 고백적으로 찬송한 것을 주님이 받으신 줄 확신합니다.
저는 오늘이 명절 주일날 제 마음에 담겨 있는 평소에 이제 로마서 강의하다가 잠깐 멈추고 제 마음에 담겨 있는 내용을 같이 말씀을 하려고 합니다. 하기 전에 오늘이 예배가 본당 별관 또 여러 채플에서 또 대부도에서 들으시는 모든 분들이 오늘 예배를 통하여 정말 주님을 만나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어떤 은혜를 주시는가? 제가 어릴 때 출애굽기를 읽다가 너무 마음에 와닿은 단어들이 있었어요. 아주 그냥 후레쉬한 단어였어요. 출애굽기 24장 9절 10절인데요. *출애굽기24:9, 9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출애굽기24:10, 10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9절 이런 내용이 나와요.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가 이스라엘 장로 70인이 올라갔어요. 어디? 시내 산에 올라갔어요.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 아래에는 뭘 편듯하고요? 청옥을 편, 청옥이 이게 사파이어입니다. 여러분 사파이어 좋습니까? 제가 볼 때는 사파이어가 다이아몬드보다. 훨씬 좋습니다. 청옥을 편듯하고 그냥 쫙 편하고 하늘같이 청명하더라. 그래서 청옥이란 말과 청명이란 말이 어릴 때 이게 참 마음에 와닿아 이 단어가 오늘 우리가 살다보면 인생의 우리 발 아래가 가시밭길도 있고, 수많은 돌짝 밭도 있지만 오늘 이 주일만큼은 청옥을 편듯하고 하늘같이 청명한 은혜를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어제 우리 명절 토비새에 특별 명절 음악회를 했는데, 하나님께는 전심, 사람에게는 진심, 사에게는 충심, 그다음에는 어제 명절 예배는 동심 그랬어요. 동심, 옛날에 그런 거 있잖아. 모든 동심의 세계는 모든 어른들의 마음의 고향입니다. 그랬잖아요?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이 마음 참 이렇게 딱 열고 웰컴홈,,, 주님의 품에 안기는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찬양대 위에다 ‘웰컴 홈’이라고 써 놨어요. 어린아이처럼 순전한 마음으로, 그래서 여러분 다시 한번 여러분들의 생애 오늘이 예배를 통하여 청옥같이 그리고 하늘같이 청명한 은혜가 펼쳐지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제가 평소에 제 마음에 두는 이런 내용들을 오늘 좀 말씀을 드릴 터인데 오늘 제목은 “하나님은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나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주님은 모르시는 것이 없으시나이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시편 139편에 누가 썼어요? 다윗이 썼어요. 다윗이 인생의 역경과 고난과 수많은 삶의 터널을 지나고 난 다음에 그의 생애를 되도록 보면서 그래 그렇지,,, 그러면서 다윗이 고백한 내용들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여러분들이 좀 더 이렇게 마음에 와닿는 이유가 뭐냐면 그냥 설명하는게 아니고 다윗의 간절한 기도의 내용이에요. 그러니까, 기도니까? 더 마음에 와 닿는 거예요. 아멘. 그래서 5절, 6절에 다윗이 오늘 뭐라고 말씀하느냐면, 5절이 이렇게 나와 있어요.
*시편 139:5, 5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다. 여기 주께서 나의 뒤를 둘러쌌다. 하는 그 말은 나의 과거를 다 아신다. 과거의 아픔과 상처와 수많은 지극히 곤란한 삶의 여성을 주님이 다 알고 계신다. 그리고 주님은 나의 앞을 알고 계신다. 내 미래를 알고 계시고, 나의 평생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령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나의 앞을 주님이 지금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지금 현재 나를 안수하신다. 안수한다. 라면 손으로 안수하시는 건데 하나님의 손은 권능의 진원지예요. 주님의 권능의 손으로 오늘 현재 나를 붙잡아 주신다. 다윗의 과거, 현재, 미래를 다 주님께서 다 아시고 살펴보셨나이다. 그런 기도의 제목이에요.
여러분, 다윗은 몇 살까지 살았을까요? 다윗이 70까지 살았어요. 물론 뭐 그전에 70전에 죽은 사람도 있지만 다윗은 왕이었잖아요. 왕이니까? 80, 90까지도 살 수 있는데 70까지 살았어요. 왜냐면 너무 고생을 많이 해 가지고,,, 죽을 고생을 해 가지고, 장인 어른이 3천 명의 살인부대를 만들어서 다윗을 잡아 죽이려고 특공대를 조직해 가지고 괴롭히는데 얼마나 힘이든지, 도망가고 도망가고 유대 광야에서 탄식을 할 정도로, 내가 광야에 외로운 당아 쇠와 같다. 지붕의 참새 같다. 그렇게 고백할 정도로 다윗을 몰아붙였고, 다윗에게 수많은 사람들이 대적하는 자가 많았는데 시무이 같은 사람은요. 맨날 다윗을 욕하는 사람이에요. 요즘 말로는 하면요. 밤마다 악플 다는 인간들이에요. 악플로 막 계속 괴롭히는 거에요.
더구나 아히도벨 같은 사람은 성경에 보면 아 아히도벨은 하나님 같은 모략을 가진 자다. 그런 그니까? 지상에서 가장 똑똑하고 모략을 부르고 그다음에이 남 죽이는데 이렇게 머리가 팍 발전해 있는 이런 아히도벨 같이 이런 모략가가, 이 소이 컨스피러시(Conspiracy), 모략가가 다윗을 죽이려고 날마다. 계략을 짜는 거예요. 그리고 가장 가장 그 극점의 아픔은 뭐냐? 사랑하던 아들이 다윗을 죽이려고 다윗을 배신하고, 아버지 마음을 아버지에게 갈 마음을 다 훔쳐 가지고 얼마나 못되었는지, 얼마 못된 이름도 압살 놈이에요. 예. 백주에 다윗의 처첩을 능욕하고, 다윗을 죽이려고 하니까? 다윗이 머리를 산발 한 채 기드론 시냇가를 울면서 내려가는데 아까? 말한 시므이가 뒤에서 저주를 하고, 별 일이 별 일이 다 있는 거예요.
여러분, 아무리 힘들어도 여러분 장인 어른이 지금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까? 예. 이런 기가 막힌 상황 속에서, 그 역경을 돌파하면서 다윗이 고백한 이 고백이 어떻게 살아남았을까요? 나중에는 다윗이 얼마나 고통을 겪었는지, 저 블레셋으로 망명을 해 가지고 아기스왕 앞에서 침을 줄줄 흘리면서 미친 체를 했어요. 여러분, 아무리 힘들어도 침을 막 흘려가면서 미친 체 하는 분이 여기 있어요?
지금 그런데 그런 고통과 심하고도 상처 받고도 쓰라린 그 고통 가운데서도 다윗이 오늘 이런 고백을 하는 거 하면서 다윗이 살아남은 거예요. 다윗 왕국을 펼치고 압살롬 대신에 솔로몬을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수많은 다윗의 역경 가운데 살아난 비결이 뭔가? 그 비결이 뭔가? 그 비결을 오늘 제가 여러분들에게 저의 인생의 경험담과 함께 그다음에 여러분 모두가 다. 저는 이제 강해 설교를 하기 때문에이 주제 설교를 잘 안 하시지만 그래도 오늘은 제가 할 말은 좀 하고 싶어요. 그게 뭔가 1절부터 4절까지 제 얘기가 아니라, 1절부터 4절까지 다윗의 강력한 고백이에요. 1절에 이렇게 나와 있어요.
*시편 139:1, 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절에 뭐라고 돼 있느냐?
*시편 139:2, 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여러분이 안고 이 여러분 자리에 있으면 일어서고 안고는 다 주님이 아시고, 멀리서도 여러분들의 생각을 밝히 뭐예요? 아시고, 생각을 다. 아시는 거예요. 아침에 자고 나서 무슨 생각하는지 잠 자기 전에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사람 만났을 때 무슨 생각하는지, 주님이 다 밝히 아시오며, 3절에 뭐라고 돼 있는가?
*시편 139:3 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뭐예요? 아시오니, 그다음 4절,
*시편 139:4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이중 부정은 강한 긍정이에요.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주님이 다 알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이거예요. 내 모든 상황과 아픔과 어려움과 나의 부족과 연약함을 주님이 다 아셔. 그래서 주님은 나의 모든 것을 다 아시나이다. 한번 따라하겠습니다. 주님이 다 아셔. 주님이 다. 아셔서 주님이 다 아셔. 주님이 다 아셔,
저는 저희 생애(生涯)를 관통하는 쭉 삶을 보면서 수많은 우여곡절(迂餘曲折)이 다 있죠. 없는 사람 어디 있겠어요? 대한민국의 60대, 70대, 80대는요. 전 세계 지금 유튜브로 다 올라와 있어요. 전 세계에서 가장 독특한 인종이다. 가장 유니크한 세대다. 후진국에서 태어나 가지고 중진국에서 교육받고 선진국을 살아가는 아주 전 세계에 정말 독특(獨特)한 세대이다. 한국 우리 90도 넣어 드릴게. 90도 더 더 고생하시고, 50도 넣어 드릴까요? 예,,, 10대 20 30대는 아직까지 다 잘 모르실 거예요. 수많은 일들이 일어났어요. 수많은 과정을 겪었어요. 거기는 감사도 있고 어려움도 있고 억울함도 있고 상처도 있고 수많은 난관도 있었어요. 근데 오늘 살아남은 이유가 뭐냐? 다윗처럼 주님이 다하셔. 말로다. 할 수 없는 정말 눈물로 어떨 때는 입을 뒤집어 쓰고 밤에 주님이 어때요? 그 가운데서도 주님이 다 아셔. 이거 안 했으면, 아마 다윗은 아마 있잖아요. 이거 몰랐으면 암이 열 번이라도 걸렸을 거예요. 다윗은 창자가 터져서 죽었을 거예요. 근데 주님이 다 아셔서, 이게 오늘 다윗의 고백이거든, 주님이 다하셔.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나이다. 내 혀의 모든 말을 모르는 것이 없으시나이다.
그래서 제가 이제 이 과정을 거치면서 제 인생에 쭉 보면서 오늘 이렇게 명절날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주님이 다 아신다. 그랬을 때,,, 뭐 여러 가지 삶에 대한 통찰력이라든지 삶의 적용이 있습니다마는 주님이 다 아신다고 그랬을 때 한 두 가지 정도의 제게 통찰력을 주시더라고요. 그게 뭐냐 하면, 첫 번째는 주님이 다. 하신다고 그랬을 때 주님이 다 아신다는 고백은 체념의 말이 아니라, 믿음의 선언이에요.
I. 첫째, ‘주님이 다 아신다'는 고백은 체념의 말이 아니라, 믿음의 선언이다.
-뭐 주님이 다. 아까? 내가 할 건 뭐 있나 이게 아니에요. 주님이 다 아신다는 말은 체념이 아니라, 믿음의 선언, 특별히 어떤 믿음의 선언인가 하면, 주님께 대한 전적위탁에 대한 선언이에요. 여러분 살다. 보면 진짜 어려움 당하면요. 실 오라기 하나라도 주님께 다 맡기지 않으면 안 될 그런 상황도 있어요. 너무 어려우면 내 여러분 너무 어려워지면 여러분 갈 데가 없어요. 너무 어려워지면 만날 사람이 없어요. 여러분, 제가 왜 갈 데가 없습니까? 제가 왜 만날 사람이 없습니까? 그런데 진짜 어려우니까? 갈 데가 없고, 만날 사람이 없더라고,,, 그러니까? 방법은 딱 하나예요. 주님께 내가 모든 걸 맡겨야 되는 거예요. 주님께 맡긴다는 것은 어떤 뜻인가 하면, 주님께는 전적위탁을 하고 그다음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독립을 하는 것이에요. 이해가 됩니까?
주님께 전적 위탁을 하고 사람과의 관계에선 그래서 사람들의 사람들의 관계 때문에 사람들의 인정,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 사람들이 공격하는 것, 사람들이 칭찬하는 것, 아니면 반대로 사람들이 상처 주는 것, 이런 모든 것들로부터 주님께 전적 위탁이 되면 거기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 자유스러워지는 것이에요.
좀 제가 어려운 말로 우리 내면 우리 내면은 다. 종살이를 하고 있어요. 사람들이 인성에 대한 갈급하고 다 사람들이 상처 주면 또 고통 당하고 사람들이 다 우리 내면이 전부 다 갈등과 수많은 짐을 지고 있어요. 심지어 이것은 남편과 아내 사이도 마찬가지고, 부자 간에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주님이 다 아셔 그러고 주님께 의탁을 하게 되면 하나님께는 전적 의탁이 되고, 사람에게는 독립이 되는 것이에요.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하나님 중심이 되고, 사람 중심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에요. 그러면 여러분들 되게 남편과 아내가 서로 싸우는 이유가 뭡니까? 더 안 알아 주니까. 그리고 남편과 아내는 뭐 싸우면 꽁 하잖아요. 아내는 늘 2, 30년 전에 얘기고 그대로 들고 와 갖고 또 얘기하잖아요. 남편도 마찬가지고 다. 이런 부족함이 다.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부족함 가운데서 주님께 나를 전적으로 위탁하면, 남편이나 아내나 가까운 사람들의 평가가 내게 너무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왜냐면 사람으로 독립하니까. 그러니까? 주님이 다 아신다는 말은 이게 이런 것들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전적 위탁에 대한 믿음의 선언인 줄 믿습니다. 이거예요.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다시요. 내면의 종살이를 하지 않게 돼요. 내 내면의 아픔, 내면의 상처, 인정받지 못하는 욕구 뭐 이런 모든 것들에서 좀 자유 자유스러워지는 것이에요.
사랑의 교회 모든 성도들은 오늘 명절날 사람 때문에 생긴 모든 상처와 관계와 인정에 대한 욕구로부터 참 자유가 선포되는 그야말로 믿음의 전적(全的)위탁(委託)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다시요. 이렇게 하나님께 전적으로 위탁하면 사람에게 독립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독립이라는 이 말이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 뜻이 아니에요. 다른 사람의 칭찬을 먹고 살지 않겠다. 다른 사람의 비난 때문에 내가 주신 사명을 약화 시키지 않겠다. 하나님께 전체 위탁되고 받아들여진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증명하느라고 내 인생을 소진(消盡)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독립하고 하나님께 전적 위탁된 그리스도인은 오히려 이웃과 동료를 이기적인 동기 없이 더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나님께 전체적 위탁되고 사람에게 독립된 이 은혜를 받으면요. 이 하나님에 대한 중심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 남편을 사랑하는 것이 진짜가 되고, 그 아내를 사랑하는 사랑이 진짜 깊이가 있게 되는 것이에요. 이걸 다. 어떻게 설명해요?
저희 저희 집 사람은 어느 순간 저를 포기했어요. ㅋㅋㅋ~~ 우리 집 사람은 이게 하나의 몰입하고, 공부면 공부에 몰입하고, 남편은 남편의 몰입하고 자식의 자식의 뭐 이런 스타일이에요.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이 상처를 많이 주고 받는 거예요. 근데 어느 순간이 진리를 깨닫고 저를 포기했어요. 그리고 하나님 전체적 위탁, 위탁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 마음에 아, 저 위탁하니까? 나를 진짜 사랑하겠구나. 그리고 내가 삼식이가 되더라도 나를 버리지를 않겠구나. 자, 이건 중요한 얘기입니다.
여러분, 여기 우리가 자식에게 안 얽매인 부모가 어디 있겠으며, 남편과 아내에게 신경 쓰지 않는 그런 가족이 어디 있게 다 있 있는 거예요. 교회 안에도 다 마찬가지에요. 교회도 중직 자와 목회자 사이에 다 있어요. 다 있는데 하나님께 전적 위탁을 하고 그럴 때 사람에게는 독립을 하게 되면 사람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이 되면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머리털까지도 다 세시고 계시는 하나님이세요. 거기서 진짜 거기서 평안과 안식이 있는 것이에요.
근데 사람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 사람 중심이 되면 늘 흔들리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내면에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자는 욕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성숙한 은혜, 믿음의 선포가 저와 여러분에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내면에 종살이에서 벗어나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간절히 바랍니다. 그다음 또 제가 보니까? 주님이 다 아셔 그랬을 때, 주시는 큰 축복 중에 하나가 뭐냐면, 우리 인생이 전능자의 손에서 기적 같은 능력을 받게 되는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에요. 무슨 말이냐? 하나님 나를 다 아신다. 그랬을 때 나를 관찰하고 다 아시고 무슨 뭐 100점짜리 이런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은 나를 다. 아시는 정도의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나를 창조하신 분이세요. 창조주세요. 일반적으로 어떤 객관적인 지식을 가지고 많이 하는 그런 차원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나를 믿음의 작품으로 남기시고 전능자의 손에 내가 붙들림을 받게 되는 것이에요. 너무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주님이 다 하신다는 고백이 위해서 우리의 인생은 전능자의 손에 빚어지는 작품이 되는 것이에요.
II. 둘째, ‘주님이 다 아신다'는 고백 위에서 우리 인생은 전능자의 손에 빚어지는 작품이 된다.
-할렐루야!~~ 주님은 하나님은 내 과거와 현재에 관한 정보를 빠짐없이 갖고 계신다. 그 정도가 아니에요. 하나님은 나를 관찰하고 연구해서 알아가시는 그 정도가 아니에요. 하나님은 나를 창조하고 지으셨기 때문에 나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나를 전적으로 아시는 분이에요. 여러분의 기질(基質)과 재능(才能)을 아실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이 견딜 수 없는 삶의 무게도 알고 계시고 상처받는 지점도 알고 계시고 다 알고 계시는 거예요. 오늘에 우리는 오늘의 나만 보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모태서부터 영혼까지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세요. 다 알고 계시. 아까이 ’안다‘는 말이 ’옴니션스‘라 그러는데 옴니세티아(Omnisentient)로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신다. 특별히 창조주 하나님으로 다 알고 계신다. 나를 그냥 다. 아는 것 정도로만 충분하지 아니하고 내 인생을 아실뿐만 아니라, 그 인생을 사명(使命)대로 능력대로 그 뜻을 이루실 능력이 있는 하나님이세요. 그래서 그 하나님께 나를 다. 맡긴다는 것은 무한한 능력을 가진 그 하나님께, 창조주 하나님께 나를 의탁하니까? 내 운명을 의탁하니까? 나보다도 나를 더 잘하고 계시는 그 하나님께서,,, 끝까지 우리의 삶을 기적(奇蹟) 같은 삶을 이루어내실 능력이 있는 줄 믿습니다. 이거예요.
여러분 이거 마음에 확신하셔야 돼요. 저는 하나님이 다. 아시라고 하는 그 순간에 내게 하나님 전적 위탁을 통한 사람과의 독립이 이런 은혜를 주실 믿음의 선언뿐만 아니라, 아 나는 부족하고 내 내 영적인 연약하면 다 있지만 나의 가장 아킬레스건도 다 알고 계시지만, 내가 주님께 나를 맡기고 나가 전적 위탁을 하는 그 순간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이 내 인생을 통하여 역사하시는데 기적과 같은 일들을 이루어 주시는 것이에요.
지난 시간들을 보면 수많은 기적 같은 일들을 허락하신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에요. 이것도 모르고 예수 믿으면서 권사님들이 논현동에 점집에 가면 됩니까, 안 됩니까? 뭐 좀이 영이 뭐 영을 좀 통한다는 그런 어떤 그 귀신의 영력이 있으니까? 조금 더 아는 면이 그 점쟁 있을지 모르지만 여러분 말도 안 되는 얘기예요.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이 나를 다 아시기 때문에 그분께 나를 의탁하고, 그 아시는 은혜 때문에 내 삶을 하나님의 전능자의 손으로 빚어 주신다는 사실 앞에 내 삶의 기적을 기대해야 되는 것이에요. 그걸 은혜를 받을 때, 이미 결정된 과거의 상처(傷處)와 문제를 가지고 더 고민하지 아니하고 나를 더 잘하시는 하나님의 전능성 앞에 나를 맡기고, 나의 실력, 나의 생각, 나의 판단, 나의 찬양, 나의 삶의 헌신, 나의 사랑을 주님께 맡길 때,,, 주님은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것이에요.
어저께도 했습니다만은 깊은 말씀의 은혜와 높은 찬양의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이 하나님 앞에 나를 드릴 때에 하나님은 나를 기적과 같은 삶으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5절에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뭐 하셨나이다?
*시편 139:5 5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다 안수하셨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다 내가 다 안수하셨다. 앞들을 좀 더 크게 앞뒤를 둘러싸시고 나를 안아 주셨다. 그래서 오늘이 안아 주심의 본당에 오실 때마다. 시편 139편 5절을 암송하면서 다. 앉으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것이에요. 말씀의 능력인 것이에요. 주께서 나의 앞뒤를 뭐 하시고 둘러싸시고 내게 뭐 하셨다? 안수하셨다. 안수해 주셨다. 앉을 때마다 이 예배는 뭐 지금 벌써 자리가 모자라 가지고 다. 예배 시간 되면 다 오늘은 평소보다. 몇 분 좀 빨리 시작했어요. 알 사람만 알도다. 좀 빨리 시작했어요. 밖에서 이제 예배들 많이 계시는데 본당이나 우리 체플이나 모든 또 방송으로 들어오신 모든 분들, 예배의 자리 자체가 주님의 안아 주심의 자리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나를 빚으셔 가지고 내가 계획하지도 못했던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명을 이루게 하시고 기가 막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거예요. 사람들이 다 끝났다고 마침표를 찍지만 하나님은 끝난 줄 알았던 자리에서 전혀 새로운 문장을 시작하셔서 인생의 마침표를, 쉼표로 바꿔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악과 고통과 상처로 로 마침표로 찍게 하지 않으시고 상처와 우울함과 어려움만으로 내 인생을 마무리의 마침표를 찍게 하지 않으시고, 그걸 쉼표로 만드시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을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것이에요. 읽어 보겠습니다. 같이요.
◎'이제 다 끝났다'는 인생의 마침표를 심표로 바꾸시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할렐루야. 그래서 정리하면 하나님이 나를 다. 아시기 때문에 내 인생에는 우연히 버려지는 조각이 없고, 하나님이 전능하시기 때문에 깨어진 조각도 삶을 다시 세우는 죄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이 뒤엉킨 실을 보고 있습니다마는 하나님은 완성된 작품을 미리 알고 계시는 것이에요.
자, 이까지는 이까지는 하나님이 다. 아셔 하면 웬만큼 우리가 다. 설명하고 이해가 돼요. 그런데 한 가지 오늘 정말 중요한 것이 하나 남아 있어요. 하나님은 다. 아시는데 무엇까지 아시나? 내가 진짜 억울함을 당했을 때, 아니면 다른 식으로 말하면 억울함을 주고 고통의 원인이 되고 악한 괴계가 있는데 여러분, 하나님 악인도 아실까요? 여러분 말씀은 듣고 계십니까? 다시 한번 하나님 악인도 아실까요? 하나님 악인도 아시는 것이에요.
우리의 늘 우리의 그 가슴 한편에는 늘 어떤 생각 여러분 억울한 일 당하고 원수 같은 어려움 당하고 그랬을 때, 아무도 진실을 모른다는 느낌이 있을 때, 상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살아가는 것 같을 때, 그때 고통이 되는 거예요. 오늘 본문 뒤에 19절 20절에 다윗이 놀라운 선포를 하라고 하고 있는데 무슨 선포를 하고 있느냐?
*시편 139:19~20, 19 하나님이여 주께서 반드시 악인을 죽이시리이다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아 나를 떠날지어다. 20 그들이 주를 대하여 악하게 말하며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으로 헛되이 맹세하나이다. -다윗은 자기를 악하게 대하는 자는 자기 악하게 대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하여 악하게 말하고 주의 원수들이 주의를 헛되이 말할 때, 이런 모든 것들을 주님이 다 모른다? 아신다?. 주님이 다 아신다. 그래서 다윗이 뭐라고 하냐면 주님 저 인간적으로는 이 악인들을 쓸어버리고 처리하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이 다 아시니까? 주님께 맡기겠습니다. 다시요. 우리가 사람에게 억울한 일을 당하면 가장 견디기 힘든 것 그것은 뭐냐면 손해 받은 거 그 자체보다도, 아무도 진실을 모른다는 느낌이에요. 우리를 저 잘못한 악인들이 막 활보를 한다든지, 거짓이 막 그냥 승리한다든지, 그럴 때 우리의 마음속에 법정 하나가 세워지는 것이에요. 내 자신이 검사와 증인과 판사와 지평자가 되어 가지고 끊임없이 상대 유죄를 입증하고 형을 선고하는 거예요. 그럴 때 정작 그 법적에 세워 가지고 내가 그냥 판결을 하고 막 그렇게 되는 순간 아까 말한 것처럼, 내면의 종살이가 되는 거예요. 자유함이 없어지는 것이에요. 그럴 때 하나님이 악인도 이 상황도 다 아신다는 사실이 저와 여러분에게는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누가 먼저 거짓말을 했는지 아시고 악한 자의 동기를 주님이 아시고, 아무도 보지 못한 여러분들의 눈물과 밤잠을 설치된 시간까지 주님이 아실까요? 모를까요? 주님이 다 아시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는 진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여러분들의 영혼과 여러분들의 에너지와 여러분들의 삶의 모든 힘을 소진할 필요가 없어요. 악을 처벌하기 위하여 여러분들의 영혼을 불태울 필요가 없어요. 내가 잊어버리면 악이 사라질까봐 두려워서 그 상처를 붙들고 내 마음에 재판정에서 판결을 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다시오.
하나님은 악인도 알아, 알아요? 몰라요? 아신다. 여러분, 복수는 상대에게 내가 받은 고통을 돌려주는 시도가 복수예요. 그러나 하나님께 전체로 위탁하고 맡기는 것은 내 고통과 상대의 죄를 모두 아시는 하나님께 최종 판결권을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제 얘기가 아닙니다. 다윗은 이 최종 판결권을 하나님께 내어 드렸습니다. 그를 죽이려고 하는 사울 왕, 악하게 구는 사울왕, 발을 가리우려고 동굴에 들어왔는데 부하가 딱 보니까? 사울 왕이 동굴 안쪽에는 다윗이 있었는데 거기를 모르고 유대 광야는 그런 데가 있거든요. 동굴이 깊이가,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드디어 저 악한 원수 사울 왕을 죽일 기회를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제가 한 얘기가 아니고 부하들이 한 얘기에요. 그래서 다윗이 아니야!~.
원수가 없는 걸 하나님께 맡겨야 돼요. 그리고 대신 증거는 남겼어요. 사울 왕의 옷자락을 버었어요. 그다음 다. 사울 적진에서 사울 왕이 그 부하들과 함께 잠에 밤에 잠을 자고 있는데, 다윗이 그 들어가 가지고 창과 물병을 가지고 옵니다. 다윗의 부하들이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징벌하여 이 다윗왕 사울 왕을 죽이려고 우리 기회를 주셨습니다. 창까지 다. 갖고 있으니까? 그 창으로 찔러버립시다. 그럴 때 다윗이 하나님이 기름 부음 받은 종을 우리가 해하면 안 된다. 하나님께 맡기자. 하나님은 사울 왕의 악행도 알 아실까요? 모를까요?
다윗은 사울 왕의 최종 처분권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사울의 악을 심판하는 심판권을 하나님께 맡긴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 적인 맡김인 것입니다. 칼은 내려 놓되, 증거까지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맡겼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옳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사울의 악 때문에 나도 사울과 같은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결정하고 최종 판결권을 하나님께 맡겨 드렸습니다. 오늘이 판결권을 주님께 맡겨 드리는 것이 하나님이 다 아셔. 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대한민국의 이 상황을 아실까요? 모르실까요? 대한민국의 정치 지도자들 하나님이 다. 아실까요? 모르실까요? 그 우리는 정말이 말씀 믿고 하나님이 다 아신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올바른 방향으로 가게 하여 주옵소서. 어떻게 하면,,, 절실하게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할 때, 하나님은 대한민국도 하나님이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마음 가지고 하나님께는 전적 위탁, 사람으로부터는 독립,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를 다 아시기 때문에 우리를 기적 같은 삶의 수준으로 이끌어 주시고 악인도 다 아시니까? 복수는 주님께 맡기고, 최종 판결 주님께 맡기고,
※어떤 회사의 직원이 상사가 상사가 있잖아요. 너무 못되게 굴어 가지고 그 상사가 어떻게 했냐면 한 직원이 프로젝트에 실패를 그 팀의 실패를 어떤 직원에게 다 그냥 다. 덤티기를 씌워 버렸어요. 이 직원이 크리스천인데 너무너무 화가 나 가지고 이런 못된 상사가 있나 이러면서 밤에 생각을 했어요. 어떻게 했느냐? 밤마다. 휴대 전화에 상사의 문제를 과거의 실수와 사의 문제를 다 알고 있었거든. 휴대 전화에 상사의 폭로문을 썼다가 지웠다가 폭도 익명의 개시판에 폭로하려고 했잖아요. 그것조차도 주님께 다. 맡기고 진실은 밝히되 상대를 파괴하는 사람이 되지 말게 달라고 기도하고 그래서 관련이 이메일과 회의 기록을 다 정리하고 회사의 공식 절차에 따라 사실 관계를 소명하고, 신뢰할 수 있는 책임자에게 조사를 요청하고 그러나 동료들에게 상사를 험담하며 동료를 자기 편으로 만들지 않고 그 사실이 밝혀질 때까지 필요한 거리를 유지하고 상사가 자기처럼 수치를 당해야 한다는 마음 판결권을 하나님께 내려놓고, 그래서 상 그 상사를 무너뜨리기 위하여 거짓 폭로를 사용하지 않았어요. 자기가 심판자가 되지 않았어요. 필요한 말은 하지만 상대를 찌르기 위한 말은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정의의 절차는 밥되 복수의 쾌감은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정의의 절차는 밟되 복수의 쾌감은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활 속에 맡김이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평생 기름 부어 주시고 여러분의 삶의 기적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성경 주님의 이름은 강한 성 그곳에 달려간 자 안전하리. 우리가 높은 찬양으로 찬송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주님은 다 하시는 줄 믿습니다. 모태부터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의 모든 눈물과 상처와 아픔과 부족함을 다 알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주여, 주님은 수많은 우리 인생의 절망적인 마침표를 다 아시고, 소망의 쉼표로 바꿔 주시는 그런 주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아니 내 인생을 기적과 믿음의 작품까지 만들어 주시는 분이신 줄 신뢰합니다. 나의 가정과 직장에서 당한 모든 억울함을 주님이 아시는 줄 믿사오니, 상처 준 모든 악인과 원수까지도 주님께 맡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를 낳으시고 나를 보호해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 올리옵나이다.
♣요약 다윗의 고백을 통해 본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나이다"의 뜻을 따라 우리는 전적 위탁의 믿음 선언을 하고 '주님이 다 아신다'는 체념이 아닌 전적 위탁의 선언을 해야 한다. 내면의 종살이와 사람의 평가의 인정 욕구에서 벗어나 하나님 중심의 자유를 얻어야 하며, 우리는 전능자의 손에 빚어지는 작품이니, 나를 지으신 창조주께서 나의 연약함과 고통도 다 아시니, 인생의 '마침표'를 소망의 '쉼표'로 바꾸어 기적 같은 삶으로 이끌어 주심을 확신하자. 또한 최종 판결권의 이양해야 하는데, 악인의 간계와 억울함도 아시므로, 직접 복수하거나 심판자가 되지 말고, 최종 판결권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서 자유함을 누리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
■사랑의교회 이번주 기도제목 -1 주여! 날이 갈수록 “하나님은 다 아셔!"의 믿음이 더 깊이 체화되게 하사, '사람 의존증=내면의 종살이'에서 독립하여 오직 하나님께만 전적위탁 하게 하여 주옵소서! 2 주여! 악과 고통으로 깨어지고 뒤엉킨 나의 억울함'을 주님이 다 아시오니. 악인과 원수에 대한 나의 처분권과 최종 판결권'도 주님께 맡기고 끝까지 승리하게 하여 주옵소서! 3 사랑의교회가 제24차 가을 특새로 달려오는 진심-전심-충심-동심'을 다 아시는 주님께 간구하며 엎드릴 때, 제5회 한교섬과 세계개혁주의협의회(WRF) 서울 총회를 통해 대한민국과 세계교회 앞에 '청옥을 편 듯한 미래'를 활짝 열어 주옵소서!
♣책 읽는 사람-매일 책 읽는 습관사진 속에 보이는 책은 한강 작가의 소설 《흰 (The Elegy of Whiteness)이다.
이 책은 일반적인 서사 중심의 소설(줄거리가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이 아니라,
'흰색'에 관련된 65개의 짧은 글과 단어들로 이루어진 시적인 소설이다. 그래서 전자책으로 그냥 읽다 보니ㅡㅡㅡ"이게 무슨 이야기지?", "줄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하고 헷갈리거나 난해하게 느껴지게 된다. 나는 이 책을 교보문고와 우리 구에 있는 도서관과 연계한 전자도서관에서 빌린 책이기에 부지런히 읽으면 2-3일에 한 권을 읽을 수 있다. 다만 책 대출이 신간은 거의 없고 지난 것이라 어쩔 수 없이 대기 없이 바로 빌려 읽게 되었다. 항상 신간은 예약을 해야 된다. 그래서 이렇게 오래 좀 되어도 안 읽은 책이기에 이것 부터 읽기로 했다.
이 책을 이해하고 감동을 느끼실 수 있도록 핵심 내용과 감상 포인트를 정리를 해보려고 한다. '흰'은 이 소설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 주제는 '태어나자마자 세상을 떠난 언니(아기)'에 대한 기억과 추모이다.
-책 속, 어머니가 자신을 낳기 전, 임신 7개월 만에 첫 아기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아기는 세상에 나온 지 단 두 시간 만에 숨을 거두었다. 어머니는 죽어가는 아기를 안고 "제발 죽지 마, 부탁이야..."라고 울부짖었다.
배경은 폴란드 바르샤바이며, '나'는 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가 다시 재건된 도시(폴란드 바르샤바)에 머물며, 파괴 속에서도 다시 살아난 도시의 '흰 빛'과 자신의 삶을 오버랩되고 있다. '나'는 세상을 떠난 언니에게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삶, 이 세상을 선물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세상의 수많은 '흰 것들'을 하나씩 적어 내려가기 시작하게 된다. 이 책에 나오는 주요 '흰 것들'의 단어는, 책에 나오는 '흰색'은 단순히 색깔이 아니라, 생명, 죽음, 그리고 애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강배넷저고리 / 배넷저고리'는 어머니가 태어날 아기를 위해 꿰맨 작은 옷, 아기에게 입혀진 처음이자 마지막 '흰 옷'이다. 소금, 눈, 달, 쌀, 흰 나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위태롭고, 순수하며, 금세 사라지거나 부서지기 쉬운 존재들이다. 수건, 붕대는 상처를 감싸고 치유하는 '흰색'이다. 수의(죽은 이에게 입히는 옷)는 생명의 시작(배넷저고리)과 끝(수의)이 모두 '흰색'으로 연결되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내가 여기서 읽고 감동적인 핵심은 어디인가를 생각해 보니, 하나의 시집을 읽듯 마음으로 느껴보는 것 같았고,"만약 내가 태어나지 않고, 그 언니가 살아남았다면?"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 삶과 숨결은, 먼저 떠난 그 작은 생명 덕분이 아닐까?" '나'는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이 순간들이 언니의 몫까지 대신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느끼는 부분이다. 그래서 내가 보는 아름다운 눈, 맑은 빛, 흰 소금, 따뜻한 쌀밥의 감각을 "언니, 당신이 보고 있나요? 이것이 세상이에요" 하며 건네는 마음으로 글을 쓰는 대목이 아름다웠고,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별이었던 아기와의 헤어짐, 그리고 그 슬픔을 안고 나를 낳아준 어머니, 그 덕분에 지금 살아 숨 쉬는 나. 책에 담긴 '흰색'은 차가운 색이 아니라, 상처 입은 영혼을 다정하게 감싸 안아주는 따뜻하고 눈부신 빛이는 것을 자연스럽게 인도해 주니 나에게는 감동이었고, 오래전 아주 오래전 나의 어머니도 동생을 하나 낳으시면서 잃었기 때문에 무척 마음에 와 닿았던 책 중의 하나이고 깊이있게 읽게 되었다.
내가 느낀 것은, 세상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떠난 작은 언니에게, 이 세상의 아름답고 투명한 '흰 빛'들을 모아 바치는 서정적이고 아련한 헌사(獻詞)라는 책으로 느껴졌다. 이 프레임(죽음과 생명, 그리고 언니에게 건네는 마음)을 염두에 두고 읽으니, 하나씩 음미해 보는 느낌이 아주 시적이면서, 단어 하나하나가 훨씬 깊고 먹먹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흰]이 주는 이 책의 감동의 진짜 핵심은 슬픔을 가련하게 추모하는 데 그치지 않고, 죽은 아기의 몫까지 내가 더 단단하고 눈부시게 살아내겠다는 결연한 삶의 의지가 생겼다. 여기 소설 속 떠난 아기가 끝내 보지 못한 이 깨끗하고 흰 세상을 내 눈으로 대신 보고, 그 투명한 빛을 모아 아기의 영혼에 사랑을 보내주고 싶다, 나의 삶도 비로소 구원받는 그 조용하고 격정적인 숭고함이 마음을 깊게 흔들어 주어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설교자: 윤대혁 후임 목사님 ----- *히브리서 11:6,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 가운데 충만하게 임하게 될 줄 믿습니다. 그 마음이 옆에 분과 이렇게 인사하겠습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인사하겠습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평안하셨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은 이후에, 우리가 교회 생활, 신앙생활, 믿음 생활이 시작되었다고 우리는 말을 합니다. 매 주일 교회 출석하고 또 훈련반에서 또 훈련받고 다락방에 들어가 믿음의 교제를 나누고 또 때에 맞게 또 귀한 자리에서 헌신의 봉사의 시간을 갖습니다. 헌금 생활도 하고 또 기회 있으면 선교도 가고 이 모든 것들을 우리는 신앙생활이 시작되었다. 라고 말하죠. 전에 하지 않았던 관심 없던 것들이 내 안에 큰 관심이 되어서 이제 우리 믿음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믿음 생활, 신앙생활 한다고 말하면 우리 사랑의 교회에서는 제자 훈련을 받고 제자가 되고 제자가를 삼는 그런 그리스도의 온전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삶을 우리 신앙생활로 정의내리지만 일반적으로 말할 때 신앙생활과 믿음 생활은 교회 생활과 많이 우리가 접목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 생활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믿음이 무엇인지, 믿음 생활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는 많은 성경 구절 가운데 오늘 히브리서 11장 6절은 우리에게이 부분을 가르쳐 주고 있는데, 다시 한번 하나님 말씀 봉독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읽습니다. 시작. *히브리서 11:6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오늘 본문은 이렇게 정의를 내립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전문의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 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는 이 말은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믿음이다. 믿음 생활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 이것이 여러분 믿음 생활,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죠. 예수를 믿기 전에는 나의 기쁨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고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고 내가 시간이 있고 재정이 넉넉하면 내가 원하는데 가서 시간을 보내고 내가 갖고 싶은 것을 사고 사람들에게 나의 만족과 나의 기쁨을 위해서 자랑하며 사는 것, 이것이 우리의 삶의 중심이었는데 예수를 믿든 그 순간부터 이제는 나의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나의 삶이 완전히 바뀌어졌다는 것이죠. 그래서 소요리 문답 1에 보면 이런 질문합니다. 인간이 사람이 사람의 목적이 무엇이냐?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이냐? 물을 때 답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들의 인생의 목적이 처음에는 예수를 믿기 전에는 나의 기쁨이 목적이었는데, 예수를 믿고 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부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기뻐하며 그분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사람이 되는 목적이다. 라는 것이죠. 아이가 태어났을 때는 눈이 보이지 않아서 엄마 아빠를 못 알아봅니다. 그런데 눈이 열리고 엄마 아빠를 알아본 순간, 아이는 방긋 웃으며 엄마 아빠에게 웃음을 보이죠. 그럼 아이가 웃는 모습을 볼 때 그 부모는 너무나 기뻐서 또한 웃습니다. 아이는 자신을 보고 웃는 엄마 아빠를 보면서 더 밝게 웃죠. 이게 신앙이라는 겁니다. 내 기쁨을 살았다가 예수를 한 순간, 그 아이가 부모의 웃는 얼굴을 보며 함께 웃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함께 우리가 기뻐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모습이다. 라는 것이죠. 주님을 알기 전에는 나를 위해서 살았습니다. 근데 주님을 안 순간부터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누가 이렇게 살아야 된다고 말한 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자원해서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 교회에 나오는게 너무나 재밌고 믿는 사람들을 만나 신앙의 나눔을 하는게 너무나 재밌고 성경 읽는게 너무나 즐겁고 또 교회에서 하라는 봉사와 헌신 된 자리에서 기쁨으로 충성되게 헌신하는 모습이 내 삶에 가장 큰 기쁨이 되어지며 우리는 살아가게 되죠. 그래서 주변의 친구들과 지인들이 달라진 내 모습 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도 교회 가냐고,,, 오늘도 교회 가냐고 말합니다. 그래서 비아냥 거리며 이렇게 말해요. “교회 가면 떡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 그때 우리는 할 말이 있습니다. 아니 어떻게 알았냐고, 교회 갔더니 떡이 나오더라. 찬양돼서 떡을 주고 교회 가더니 밥이 나오더라. 포에버에서 김밥을 주는데, 또 교회 왔다. 갔던 거 아니냐고, 교회 갔더니 떡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 어떻게 알았냐고. 교회 갔더니 떡을 주고 밥도 주더라. 이런 이야기를 할 때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기쁨 가운데 살죠. 그래서 우리 오정현 담임 목사님께서 늘 하시는 말씀처럼 ‘알 사람이 없도다’. 세상은 모르는 정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를 다니면서 신앙생활 갖는 그 기쁨이 우리 가운데 있음을 보게 되죠. 오히려 어떨 때는 그 기쁨이 어떨 때 우리에게 근심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교회 나오면 남편은 항상 교회에 나를 내려다 주고 자기는 서초구에서 맛있는 밥을 먹고 예배 끝날 때, 나를 데리러 왔더니 이 남편이 어느 날 예수를 믿은 순간부터 완전히 달라지는 거예요. 교회 나오기 시작하더니 훈련받기 시작하더니 다락방 참여하기 시작하더니, 어떨 때는 이제는 순장이 되어서, 화요일 순장반, 수요일 수요예배, 목요일 사랑의 전도단, 금요일 금요 기도회, 토요일 토비새(토요비전새벽예배), 주일 주일예배,,, 매일 교회 가서 어느 날 그 와이프가 걱정합니다. ‘이러다가 목사 되는 거 아니야?’ 기도해 달라고,,, 우리 남편 목사 되지 않게 해달라고,,, 이렇게 근심 어린 마음을 가질 때가 있죠. 전에는 관심도 없었던 사람이, 예수를 믿은 순간부터 이것이 자기 인생에 가장 큰 기쁨이 되는,,, 여러분, 그렇다면 이 믿음 생활이 즐겁고 좋은 것인데 여러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오늘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크게 세 가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 첫 번째는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믿음은? I. 첫째,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계신 것과 그를 찾는 자에게 상주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는 믿음이다. 라는 것이죠.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시작이고 기본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면서 이 신앙을 지켜기가 참 어려움을 보게 됩니다. 왜냐면 세상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비아냥거리면서 말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는게 맞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게 맞는가?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당신의 삶에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맞는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너의 삶으로 증명하라고 비아냥거리며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 이런 핑계를 댈 때가 있죠.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데, 하나님은 살아 계셔, 다만 내 삶에 역사하지 않을 뿐이야, 이런 말로 우리는 핑계를 될 때가 있죠.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미션 스쿨을 이제 다니면서 선교부장이 되었습니다. 윤리 선생님이 갑자기 저를 선교부장 나와봐 하면서 강단에 세우셨어요. 저 60명의 학우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이제 기독교에 대해서 궁금한 거 있으면 선교부장에게 물어보라. 라고 한 거예요. 짓궃은 저희 친구들이 나올 질문은 뻔합니다. 첫 번째 질문 이거였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증명해 보이라’ 고, 지금 하나님이 살아 계심이 내 눈에 보이게 한다면 내가 이번 주부터 교회를 다니겠다고 친구들이 말을 합니다. 그때 제가 ‘나를 본 자가 하나님을 본 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말이 생각이 안 났어요. 그 말이, 그리고 그 말을 할 만한 자신감도 없었습니다. 큰일 났다. 싶어서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거였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셨다.’ ‘하나님을 망령되이 여기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반 협박을 했습니다. 또 친구 관계니까,,, 더 이상 할 말이 없으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탄 안 물러가라.’ 이게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답변이었습니다. 여러분, 온 세상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부인합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해요. 창조론을 부인하고 진화론을 주장하는 이유도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부정하겠다는 겁니다. 동성애의 모든 뿌리는 하나님은 틀렸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실수하셨다는 거예요. 성경은 잘못됐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말은 결국에는 하나님을 부인하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주관자인 사탄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싫어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의심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랑의교회 영가족 여러분, 우리가 상황이 어떠하든 우리의 환경이 어떠하든 그거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신 분이심을 믿습니다. 우리 이것을 믿어야 된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말할 때 대표적인 성경의 구절은 열왕기상 18장에 나오는 갈멜산에서 여러분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 850대1, 엘리야 한 명의 선지자와 싸웠던 그 대결의 현장일 겁니다. 이 이 대결의 현장에서 엘리야는 무엇을 가지고 싸웠고, 무엇을 가지고 이 전쟁에 이겼냐면, 오직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싸워 승리했다는 것이죠. 그 선지자들이 세운 그 제단과 엘리야가 세운 제단 앞에 그들이 자신이 믿는 신들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아무리 바알 선지자 그리고 아세라 선지자들 850명이 외쳐 불러도 어떤 것도 나타나지 않았을 때 ,엘리야는 오히려 자신이 세운 제단 위에 ‘물을 부어’라고 말합니다. 한 번이 아니라 세 번을 부어라. 그리고 그 물이 재단에 출렁출렁해서 이 받으시는 불이 임해야 되는데 그러면 마른 장작을 올려야 되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물을 부으라고 했어요. 흥건하게 적셔라. 그 이유는 뭐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그가 믿었기 때문입니다. 믿었으니까, 물을 부으라고 한 거예요. 그 믿음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의 그 믿음이 영적인 승리를 이루어 갔다. 라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끝까지 붙들어야 될 것이 무엇이죠?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흔들리면 모든 것이 다 무너지는 거예요. 8년 전에 기회가 있어서 인도 땅에 선교를 갔습니다. 한 100명, 120명의 20대, 30대들의 목회자가 되겠다고 모인 젊은이들, 신학생들과 함께 목회자 세미나를 했습니다. 여러분, 인도 땅은 처음에 시작할 때 신이 세 개로 시작했습니다. 브라마, 시바, 미슌으로 시작했다가 지금 인도 땅의 신이 무려 3억 3천만 개의 신이 있습니다. 지금도 신성한 어머니의 강이라고 말하는 그 겐지스 강은 세계에서 가장 오염된 강이에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강에 가서 몸을 씻으면 피부병이 낳는다. 그 강에 가서 몸을 씻으면 병이 낳는다. 그 강에 가서 그 오염된 물을 마시면 내 영혼이 깨끗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겐지스 강에 와서 머무시고 그 물을 마십니다. 말도 안 되는 우상이 섬기는 그 땅에 여러분 신이 3억 3천만 개가 있는 그 땅에 20대 30대에 목회자가 되어 모여 있던 그 젊은이들에게 어떤 말을 해 주고 어떤 격리를 해 줘야 이들이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눈에 보이는 현실은 답이 없는 거예요. 어떤 말로 위로해 줄 수 있을까? 하지만 분명히 하나인 것은 그 세상에 많은 우상(偶像) 신(神)이 있다. 할지라도,,, 내가 믿는 하나님이 내가 믿는 하나님이 유일한 하나님이고 내가 믿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이다. 믿음 외에는 이길 수 있는 방법도 이길 수 있는 힘도 없더라는 것이죠. 여러분, 아무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부인할 수 없고 아무리 느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이 살아계심은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들의 삶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우리에게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요한복음 11장 40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함께 읽을까요? 시작. *요한복음 11:40, 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 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믿어야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고,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어야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내 삶 가운데서 보게 되는 줄 믿습니다. ※신대원 들어가서 조직신학 수업을 듣는데 신론의 과목이었어요. 그 조직신학 교수님께서 수업을 하면서 전도사님들에게 강조하면서 하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전도사님, 성경은 믿음으로 읽어야 됩니다. 성경은 믿음으로 읽어야 됩니다. 성경은 이성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성경은 믿음으로 읽어야 됩니다. 그래야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봅니다.” 이 말씀은 저와 여러분이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 겁니다. 우리가 살면서 여러분의 삶의 현실의 모든 것들을 다. 믿음으로 봐야 믿음으로 봐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우리 삶 가운데 보이게 되는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영가족 여러분,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려고 하신 그 주의 말씀이 살아서 역사하게 되길 주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그래서 믿는 자의 기도인 힘이 있고, 믿는 자의 삶에는 반드시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이 임함을 믿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은 무엇일까요? 두 번째는 하나님 앞에서 오늘을 살아내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은? II. 둘째, 하나님 앞에서 오늘을 살아내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는다면,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 오늘도 살아가야 된다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는데 어떨 때는 불편하고 불이익이 다가오면 그때부터 마치 하나님이 아니 계신 것처럼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할 때가 있죠. 성경의 말씀이 이런 말씀이 있어요. 사사기 말씀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여호와의 눈 앞에서 악을 행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라는 것이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 앞에서 믿음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닌 다른 길을 우리는 택하며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원하시고 바라시는 바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기 원하시죠. 창세기 17장 1절인데 함께 읽겠습니다. *창세기 17:1, ..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주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전능하신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너의 말과 너의 행동이 온전해야 된다. 완전해야 된다. 하나님 앞에서 말하고 하나님 앞에서 행동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이것을 우리는 코람데오, 신전주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겁니다. 주님 보시기에 내 말과 행동이 기뻐하실만 한가? 주님 보시게 나의 선택과 나의 일터와 나의 가정이 기뻐하실만 한가? 이것이 하나님 앞에 선 하나님 앞에 살아내는 믿음의 백성의 삶이라는 것이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마치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 계신 것처럼,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할 때가 있어요. 내 자존심 하나 지키겠다고, 양심을 버려가면서 내 이익만을 위해서 믿음과 상관없는 하나님이 앞에 계신데도 불구하고, 온전하지 못한 거짓된 말과 바르지 못한 행동을, 우린 살아갈 때도 있다. 라는 것이죠. 우리가 갖는 하나의 착각이 있습니다. 내가 좋은 교회 다니고 좋은 말씀을 듣고 좋은 믿음의 성도들과 함께 하면 우리의 신앙은 자랄 수 있어요. 그런데 내가 좋은 교회 다닌다고 해서 내가 좋은 말씀을 듣는다고 해서 내가 좋은 사람들과 믿음의 교제를 한다고 해서 내가 그렇다고 좋은 성도가 반드시 되는 것은 아니다. 라는 것이죠. 좋은 교회 다니고 좋은 말씀 듣고 좋은 성도들과 함께 하는 것이 나의 신앙과 별개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자처럼 말하고, 하나님 앞에서 사는 자처럼 행동하고 주님께서 보고 있는 자처럼, 우리는 섬기며 날아가야 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하나님을 기쁘게 하라. 우리 누구를 기쁘게 해야 돼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됩니다. 다. 알면서도 불구하고 사람의 눈치를 보다가 하나님의 시선을 잃어버리는 삶을 우리가 살게 된다는 것이죠. 여러분, 주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오늘도 살아내는 믿음임을 믿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이 믿음의 삶을 걸었던 성도들을 만나게 됩니다. ※2020년도에 코비드가 시작되고 1년 동안 교회를 오픈하지 못하고 다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린 다음에 2021년도가 시작되면서 이제 교회 현장이 오픈됐습니다. 교회가 오픈되고 나서 부분적인 오픈이었지만 그때 제가 섬겼던 교회에서 큰 두 개의 장례가 함께 왔습니다. 한 분의 장례는 98세 된 권사님의 장례였고, 또 한 분의 장례는 그분의 따님인 60대 중반의 그 따님의 장리였습니다. 98세 권사님께서 1년 만에 교회가 오픈되니까? 너무나 즐거운 나머지 교회 오셨다가 다리에 근육이 빠지셨던지 넘어셔서 고관절에 금이 가셨습니다. 그리고 고관절에 이제 수술을 하시게 됐어요. 병원에 입원하다. 보니까? 간호할 사람이 없어서 한국에 있는 따님이 엄마를 간호하겠다고 미국에 오게 됐습니다. 그리고 병원에 들어가서 어머니 권사님의 병원을 간호하다가 그 어머니 권사님과 따님 권사님이 그 병원에서 코비드에 감염이 되셨습니다. 안타깝게도 두 분 다, 폐렴으로 인해서 산소 호흡기를 의지하고 계셨어요. 2주가 흐르는 이후에 98세 된 권사님은 회복하지 못하시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됩니다. 따님 역시도 산소호흡기 의지해서 도움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한국에 있는 따임 권사님의 남편과 또 손주들 아들과 딸이 미국으로 급히 들어왔습니다. 어머니 권사님의 장례를 드릴 때, 따님 권사님의 패는 이미 섬유화돼서 오늘 내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마치 코비드에, 코비드라는 전쟁터에 치루어 지는 장례와 같았어요. 장모님 또 할머니겠죠. 그 어머니 권사님의 장례를 드리면서 아내의 장례를 또한 준비해야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어머니 권사님의 장례를 치르면서 사위분과 그 형제들이 그 조가(弔歌)를 부르는데, 차마 목회자로서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너무나 안타까운 현실이었습니다. 그 사위와 아드님이 이런 찬양을 부릅니다. 슬픔 가운데 부르는 찬양이 이거였습니다. ♬‘내 평생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내 영혼 평안해 평안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어떤 일을 만나도 내 영혼 평안해. 하나님이 우리와 대장 되신 우리 대장 되시니 어떤 적을 만나도 내 영혼 편안해. 이 세상의 심판 때가 와도 내가 주님 품에 있으니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평안해.’ 어머니 권사님을 장례 치르고 와이프가 아내가 오늘 내일 하는 그 가운데서 부른 찬양이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은 평안해. 어떻게 이와 같은 찬양을 부를 수 있을까? 장례를 마치고 그 남편이 병원에 있는 아내를 찾아가서 내가 이런 찬양을 불렀다고 하니까? 아내가 힘없는 팔을 들면서 잘했다고 엄지를 이렇게 들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하루 이틀이 지나지 않아 그 아내 역시도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이런 상황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런 여러분 이런 상황을 겪고 있다면 무슨 말로 여러분 이것을 견뎌낼 수 있을까요? 모든게 다 원망스럽고, 와서 엄마를 간호하라고 한 그 오빠가 너무나 싫을 수도 있고, 누가 누구 때문인 것 같고, 누구 때문에 실수한 것 같고, 내가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원망을 가질 수밖에 없는 그 때에 그 따님의 장례를 치르며 아내의 장례를 치르는 그 가운데서 남편분과 그 아들과 딸이 이런 조가(弔歌)를 부릅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이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불었네.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가 되었고 전날에 한숨 변하여 내 노래가 되었네. 내 주는 자비하셔서 늘 함께 계시고 내 궁핍을 하시고 늘 채워 주시네. 내 주와 맺은 언약은 영 분별하시니 그 나라 가기까지는 늘 보호하시네. 늘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이 찬양을 남편과 자녀인 아들과 딸이 불렀습니다. 그리고 가족이 인사를 나눕니다. 남편 되신 분이 첫 인사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을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시는 사랑하는 어머니를 간호하다가 하나님의 품에 갔으니 이보다 값진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게 그 남편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아들과 딸이 흐르는 눈물을 참으며 이런 고백을 드립니다. 하나님은 항상 옳으십니다.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완전하십니다. 우리는 완전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어머니가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물려 주신 그 믿음을 붙들고, 계속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만을 섬기며 우리는 살아가겠습니다. 이 믿음의 고백을 드립니다. 깨닫는 것은 우리 인생의 슬픔과 아픔과 이해되지 못하는 일을 만날 때 우리가 무엇으로 이것을 이겨낼 수 있을까요? 그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이 이 믿음밖에 없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영가족 여러분, 우리들에게 눈물 날 일이 있고, 우리에게 억울한 일이 있고, 답답한 일이 있고 속상한 일이 있고, 어찌할지 모르는 막막한 순간이 찾아오고 내가 과연 견딜 수 있을까? 이겨낼 수 있을까? 싶은 그 수많은 어려움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때 믿어야 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셀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나는 완전하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걸어가야 될 고백임을 믿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아무리 고난스러워도 우리 세상 앞에 엎드리지 않고 거짓과 타협하지 않고, 우린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오늘도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우리들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이 됨을 믿습니다. 목회를 하면서도 여러분 절대로 목양에 게으를 수 없는 이유는, 주님이 보고 계시기 때문에 게으릴 수 없고 우리가 살아가면서도 우리가 딴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주님이 보고 계시기 때문에 딴 생각할 수 없고, 내 안에 유혹이 찾아오고 진리를 내려놓고 거짓과 타협하고 싶을 때도, 그럴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살아 계실 때문에 보고 있기 때문에 내가 그 길을 택하지 못하고 믿음의 길을 진리의 의 길을 걸어가야 되는 거, 여러분, 이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이 됨을 믿습니다. 아멘, 그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은 무엇일까요? 첫 번째는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는 믿음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 앞에서 오늘을 살아내는 믿음이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끝까지 붙들고 나아가는 믿음입니다. 히브리 11장 6절에 보면 하반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은? III. 셋째, 하나님을 끝까지 붙들고 나아가는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6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기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은 자기를 찾는 자에게 반드시 하나님은 상을 내려 주신다. 이 믿음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이죠. 그래서 오늘 우리가 모여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이유는, 이 약속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임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린 끝까지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기도의 자리에서야 된다는 것이죠. 이런 말이 있습니다. 2천 년 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은 믿었다. 그 앞에 나아가면 병든 자가 났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오병이어 기적이 나타나는 것을 그 모였던 사람들 다. 믿고 모였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구원자임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고,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를 믿지만 그러나 오늘날의 사람들은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가 주의 얼굴을 구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짖으면, 우리에게 초월적인 신비적인 하나님의 기적과 같은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하나님의 부르짖지 않는다. 여러분, 우리들의 기도는 주를 찾으면 주의 얼굴을 구하면, 주께 기도하면, 상주신 이심을 믿으며 나아가는 자가 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일치 침략기에 있을 때, 이 나라를 살릴 수 있었던 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나라의 해방을 위해서 부르짖는 기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625 동란 때 온 나라가 붉게 물들을 수 있었을 그 위기 가운데서도 공산주의에 넘어가지 않고, 자유민주주의가 세워질 수 있었던 것도 여러분 교회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나라를 위하여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가 부흥하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선교사를 보낼 수 있는 나라가 될 수 있었던 것도 1974년도에 엑스플로 74년에서 여의도 광장에서 6일 동안 무려 665만 명이 모여서 함께 기도했던 외침의 기도가 한국 교회를 부흥하는 교회로 한국 교회에 많은 선교사를 보내는 교회로 설 수 있었다는 것이죠. 포괄적 차별 금지법이 이 땅에 씨앗이 뿌려지고 뿌리를 내리려고 할 때 막을 수 있었던 것은 광화문 광장과 여의도와 시청까지 한국교회 250만 명의 사람들이 오프라인에서 현장에서 220만 온라인에서 130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외쳤던 간절한 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이 나라가 넘어가지 않고 영적으로 무너지지 않고 설 수 있었음을 믿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도 상주신 이심을 믿으며 나아가는 기도를 주님은 기뻐하시고 응답하여 주시는 줄 믿습니다. 엘리야가 3년 6개월 동안 가물었던 이스라엘 땅 가운데 피를 내리게 할 때, 그가 기도하고 나서 그의 종에게 말합니다. 밖에 나가 봐라. 구름이 모였느냐?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구름 한 점 없습니다. 또 가서 기도합니다. 밖에 나가 봐라. 아무것도 없습니다.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일곱 번까지 그는 포기하지 않고 기도합니다. 그가 기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뭐예요? 하나님은 그를 찾는 자에게, 그를 찾는 자에게 반드시 상을 내려 주신다. 이 믿음이 가물었던 이스라엘 땅 가운데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게 하신 은혜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영가족 여러분,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도 상주신 이심을 믿는 자를 기뻐하시는 주님께 날마다 나아가게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역대하 16장 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역대하 16:9, 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를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말이 무슨 뜻이에요? 하나님은 지금도 온 세상을 찾아다니시면서 두루 감찰하시면서 나를 찾는 자, 나 얼굴을 구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실 준비를 하고 계신다. 아멘. 그 은혜가 믿는 우리에게 있게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영가족 여러분, 이 세상에 어떤 어두움이 있어도, 절대로 어두움은 빛을 이기지 못합니다. 새벽을 기도하며 기다리는 자에게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 빛을 막을 수 있는 어둠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으며 이 짙은 어두운 밤을 기도로 기도로 지세운다면 반드시 주님께서 우리에게 승리의 날을 허락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 사랑의 교회가 토비새를 강조하는 이유가 뭔지 아세요? 왜 토비새가 중요할까요? 우리가 토요일 날 모여서 모두가 잠든 시간에 모여서 한국 교회를 기도하고, 이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다음 세대를 위해 기도하면, 열방 위해서 기도하면, 어떤 어둠의 권세가 우리이 나라의 이 민족의 이 교회의 온 열방에 틈타지 못하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모여서 기도해야 되는 거예요. 사랑하는 영가족 여러분, 우리 주님은 지금도 믿음으로 나아가는 자를 하나님을 붙들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자를 기다리고 계시고, 기뻐하시며 응답하기를 원하십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기 원합니다. 사랑하는 영가족 여러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는 겁니다. 그것은 오늘도 하나님 앞에서 살아내는 믿음으로 사는 겁니다. 그것은 오늘도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 믿기에 그를 붙들고 끝까지 나아가는 자에게, 주님은 기뻐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기쁨으로 받아 주시고 영광을 보게 하실 하나님을 날마다. 소망하며 살 수 있는 우리 사랑의 교회 모든 영가족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을 믿게 하시고, 오늘도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시며, 어떤 상황에서도 끝까지 주님을 붙들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믿음을 기쁨으로 받아 주시며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자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릴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요약 오늘 본문과 관련하여 말씀하신 것은 -신앙생활은 나 자신의 만족이 아닌,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삶이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은 크게 세 가지인데, 1.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는 믿음이다. 세상의 의심과 부정 속에서도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야 한다. 살아 계심을 믿고 바라볼 때 삶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보게 된다. 2. 하나님 앞에서 오늘을 살아내는 믿음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며 코람데오(하나님 앞에서)의 자세로 신실하게 사는 삶이다. 세상의 이익이나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바로 서야 한다. 3. 하나님을 끝까지 붙들고 나아가는 믿음이다.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반드시 상 주시는 분임을 믿고, 기도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전심으로 주를 찾고 의지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능력과 은혜를 베푸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