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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6년 10월 04일)
제목: "다시, 처음처럼(Starting Over, Back to the Beginning)"
말씀: 마태복음 18:1-4

준비찬양: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1,2부), 이동선 부목사님(3,4부).

찬양인도: 영광(1부), 호산나(2부), 할렐루야(3부), 시온(4부).
대표기도: 백창록 1부), 김동현 (2부) ,성낙송 (3부) , 빈옥인 (4부) . 
사회: 임상규 부목사님(4부)--- 임병영(1부), 이기호(2부), 장단희(3부).

설교자: 윤대혁 후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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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18:1-4,
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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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네.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옆에 분과 밝은 얼굴로 인사하겠습니다. 평안하셨습니까? 인사하겠습니다. 평안하셨습니까? 오늘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평강이 안아주신 본당에 오신 또 각자에서 예배드리는 모든 성도님들의 삶에 현장에 은혜와 평강으로 임하여 주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대접받기를 원합니다. 누가 나를 대접해 주는 거를 마다할 사람은 없죠. 존경이란 대접을 받길 원하고, 사랑과 관심이라는 대접을 받기를 원하고, 누군가 나를 섬겨주는 대접을 받는 것을 원하고 좋아합니다. 부부관계 가운데서 또 가정에서 또 직장에서 또 교회에서 식당에서도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대접을 받기를 원하죠. 또 식당 사장님이 우연히 ‘손님 인상이 좋아요.’ 라고 말하면서 간혹 계란말이를 서비스로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나에게 준 계란말이기 때문에 너무나 기뻐서 어디 가서 나 이런 서비스 받았다. 대접받았다는 것을 자랑하고 이야기를 하죠.

반면에 누구는 주고 나는 안 주면 그때부터 우리는 마음 안에 다시는 그 식당을 가지 않겠다는 마음의 결단과 각오를 하게 됩니다. 뭐 계란말이가 대단해서 그런 건 아닙니다. 나를 그렇게 대접하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실망하고 나를 다른 사람보다 더 특별하게 대우해 줬기 때문에 사람은 기뻐하고 즐거워하죠. 착했던 3살 난 아이가 그 동생이 태어나고 나서 엄마 몰래 아이를 발로 차고 엄마 몰래 꼬집는 그 이유도 그 자기에 대한 엄마 아빠의 대접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운 감정이 생기고 싫은 감정이 생기는 거겠죠. 오늘 본문에도 대접받기를 원했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이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와서 질문합니다. “예수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천국이 임하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천국이 임하면 그 천국에서 누가 큰이일까? 누가 큰 사람입니까? 누가 더 대접을 받겠습니까?” 혹시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사랑하는 요한입니까? 아니면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우리도 예상하지 못했던 또 다른 사람인가요? 제자들의 관심사는 누가 더 많은 대접(待接)을 누가 더 크냐에 대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제자들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가족들도 이것이 큰 관심이었죠.

예수님은 2년, 3년 동안 따랐던 자신들의 아들을 보면서 왜 이렇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 싶어가지고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직접 와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그 나라가 임하게 되면 당신의 오른편에 나의 큰아들인 야고보를 당신의 왼편에 나의 둘째, 아들인 요한을 세워달라고 말합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하나는 국무총리요, 하나는 비서실장으로 세워달라고 청탁(請託)을 하게 되죠. 이렇게. 누가 크냐에 대한 그 관심을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말씀으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이야기하십니다. 2절과 3절 말씀인데요. 우리 함께 읽겠습니다.

*마태복음 18:2-3,
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귀를 쫑긋 세우고 예수님께서 누가 더 클까를 말씀하시길 기다리고 있는데, 저기 놀고 있는 한 아이를 부르더니, 이 아이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들이 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고 말했어요. 제자들에겐 큰 충격(衝擊)이었을 겁니다. 나보다 못한 나는 예수님을 2년, 3년 동안 따랐는데도 불구하고, 평범한 아이보다 못하다니 아마 자존심이 상한 말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누가 많이 배웠던 누가 많이 알고 누가 많이 가졌던 누가 많은 어떤 일을 했던 상관없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이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갖지 아니하면 결단코 너희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라고 말씀하고 있죠. 그렇다면 여러분 제자들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이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은 아니었다. 라는 겁니다. 대접받기를 원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는 절대로 너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거야. 라는 경고(警告)의 메시지를 하셨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제자들이 처음부터 그랬을까요? 제자들이 처음부터 대접받길 원했을까요? 그렇진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그가 메시아인 줄 알고 나고,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따랐을 때는 그들의 마음이 이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이었다는 것이죠.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제자들의 마음은 변화되었고, 변질되었고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3절에 그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3절 말씀 읽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8:3,
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여러분 돌이켜, 라는 말에 주목을 하셔야 됩니다. 이 돌이켜 라는 말은 헬라어는 ‘스프라 테페’라는 말인데 이 말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 돌이켜 의 첫 번째 의미는 ‘제자리로 돌아가라.’ 라는 말입니다.

I. 첫째, 제자리로 돌아가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제자들의 마음이 있었던 처음의 마음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었는데. 시간이 흘러서 제자들의 마음이 변화되었으니 변질되었으니 다시 처음 예수님을 따랐던 처음의 그 처음 자리로 너는 돌아가라 라는 말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따랐을 땐 순수한 마음이었습니다. 뭐 대단한 걸 바란 것도 아니었고 제자라는 그 사실이 기뻤고 그가 메시아라는 것 때문에 그는 따랐던 자들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고 예수님이 기적(奇蹟)을 봄과 동시에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면 내가 혹시 국무총리는 되지 않을까? 내가 한 자리는 차지 않을까? 더 높은 자리를 올라가고자 하는 마음에 관심이 있었다는 겁니다. 이 마음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이 나를 처음 따랐던 처음 자리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시며 돌이켜, 라는 말을 쓴 것이죠. 두 번째 돌이켜 라는 말은 방향을 바꾸라는 의미입니다.

II. 둘째, 방향을 바꾸라는 뜻이다.
-너 이렇게 살다, 큰일 난다. 네가 가는 길은 멸망의 길이야. 너가 가야 되는 길은 생명의 길인데 그것은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의 길을 걸어야 된다. 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며 돌이켜, 라는 말을 썼다는 것이죠. 여러분 여기서 말하는 어린아이와 같다. 라는 말은 어린아이의 행동을 따라 라는 말은 아닐 겁니다. 여러분 아이처럼 행동해라. 아이처럼 흉내 내라. 한마디로 말하면 아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쁘죠. 주쎄요. 이런 말은 아니라는 것이죠. 뿌잉뿌잉잉.~ 이건 아니라는 겁니다.

어린아이가 되라는 말은 적극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왜 많고 많은 것 가운데 왜 어린아이가 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우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모세처럼 되어야 된다. 다윗과 같아야 된다. 다니엘과 같지 아니하면 엘리야와 같지 아니하면 느헤미야와 같지 아니하면 더 이해하기 쉬울 텐데 왜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한 말을 했을까요? 왜 어린아이를 비유했을까요?

만약에 예수님께서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을 이야기했다면, 제자들은 그냥 그 자리에서 포기했을 겁니다. 나는 안 되는구나. 나는 절대로 할 수 없구나. 나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구나. 나는 하늘의 유업을 받을 수 없구나. 내가 모세가 된다고, 내가 다윗이 된다고, 내 출신이 어떠한데? 불가능해 포기(抛棄)해버렸을 거예요. 하지만 어린아이가 되는 것은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어른이었지만 이미 어린아이의 시절을 보낸 기억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어린아이 시절을 보냈어요. 그래서 어린아이가 된다는 것이 뭔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린아이는 너무나 평범하게 볼 수 있어서 충분히 따라 할 수 있는 시청각 자료가 될 수 있는 존재였다는 것이죠. 안타깝게도 제자들의 마음은 변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랐을 때, 그 마음은 없고 대접받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변한 거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처음 가졌던 그 처음 그 초심을 우리는 지키기가 참 어려움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서로에게 우리는 이렇게 말하죠. 우리가 부목사님이 새로우면 목사님 초심을 잃지 마세요. 라고 격려하기도 하고 제가 후임 목사로 부임해서 많은 성도님들이 목사님 초심 잃으시면 안 됩니다. 라고 말할 때 저도 동일하게 말합니다. 권사님, 초심 잃지 마세요. 장로님도 초심 잃지 마세요. 집사님도 초심 잃지 마세요. 순장님도 초심 잃지 마세요. 이 우리가 다시 초심을 잃지 않는 것은 목회자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여러분 가져야 될 마음이라는 것이죠.

제가 신학대학교 4학년 때, 24살 때 전도사 사육을 시작했습니다. 초등부 선생님이었다가 중고등부가 둘로 중등부, 고등부 나눠주면서 중등부 전도사를 시작을 했는데요. 그때 중등부 선생님들이 한 30명, 다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저보다 나이가 20살, 30살 많으신 분들이 선생님이었어요. 24살 된 난 아직도 결혼 안 한 총각 전도사가 이제 대학생 전도사가 했으니, 얼마나 마음이 여러분 겸손하고 얼마나 마음이 열심을 다하고 싶었을까요? 항상 교회에 제일 먼저 가서 불을 켜고 추운 겨울에는 보일러를 뜨고 또 예배가 다 끝나면 마지막까지 불을 끄고 나갔던 저였습니다.

그리고 회식이라도 하면 먼저 식당에 가서 예약(豫約)을 하고 자리를 만들어 놓고 음식(飮食)도 미리 주문해서 오시면 먹을 수 있도록 다 준비해 놓고 밖에서 기다린 다음에 들어가시면 신발도 다 이렇게 나갈 때 편하게 신으로 다 돌려놓고, 그리고 고기를 구울 때도 먼저 구워드리면서 선생님 접시에 이렇게 올려드렸습니다. 이렇게 올려드렸던 그래서 말하죠. 전도사님도 드세요. 선생님이 먹는 것만 봐도 전 배부릅니다. 라고 말해서 이거를 이렇게 제가 그랬다니깐요. 제가 그랬던 저였는데 어느 날 몇 개월도 지나지 않아 달라져버린 제 모습을 보게 됐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날도 교사 회식(會食)을 하는 날이었는데. 선생님, 저보다 나이 많으신 선생님이 다 식당에 와 있는데도 불구하고, 제가 제일 늦게 나타나 가장 좋은 자리에 앉아서 제 접시에 올려놓은 고기를 올려주는데 족족 먹으면서 당연(當然)한 듯이 먹고 있는 제 모습을 봤습니다. 왜? 저렇게 이상한 눈으로 보세요.

여러분도 그렇잖아요. 어느 순간 대접받는 게 당연하고 대접받는 게 익숙해져 버린 성도들이 교역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섬겨준 건데, 이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변화(變化)되어 버린 제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실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 역시도 제자들의 이 달라진 모습 보면서, 자신을 처음 따라왔을 때 그 처음 마음이 바뀌어있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은 다시 처음처럼 되기를 원하며 너희들은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된다. 라고 오늘 본문에 말씀하고 계신 거예요.

그렇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은 어떤 신앙일까요?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은 어떤 의미의 신앙의 길을 걷는 것일까요? 우리 그것을 우리가 세 가지로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함께 나누길 원하는데요.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 첫 번째는 하나님 없이는 못 사는 신앙이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란?
①첫째, 하나님 없이는 못사는 신앙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전적 위탁자의 삶을 살아가는 거예요. 아이들은 절대로 혼자 생활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부모의 도움이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어요. 이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란, ‘나는 주님이 없으면 하루도 살지 못합니다.’ 라는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 이 사람이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죠. 여러분 인간의 모습 가운데 가장 참혹(慘酷)하고 불쌍한 모습은 에덴 동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 임(臨)재(在) 가운데서 살았던 아담과 하와가 그가 죄(罪)를 범(犯)하고 나서 하나님의 얼굴을 피(避)하여 숨었던 아담과 하와, 그 에덴 동산에 쫓겨나 있었던 하나님과 멀어져 끊겨버린 그 아담과 하와의 그 존재(存在)가 인간의 가장 참혹(慘酷)하고 처량(凄涼)한 모습이었던 것이죠. 여러분,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늘 반복적(反復的)으로 가르쳐주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은 15장 5절인데요. 우리 함께 읽어볼까요? 시작.

*요한복은 15:5,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아멘
-너희는 나를 떠나선 너희가 아무리 많이 배웠고 많이 그걸 가졌다 할지라도 너희 인생의 존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nothing의 인생이다. 라고 가르쳐 주셨죠.

여러분, 우리는 날마다 이것을 기억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을 되찾는 거예요. 길거리에, 아니 아니면 놀이동산에, 백화점에 아니면 맛있는 식당에서 부모를 잃고 우는 아이를 만날 때 여러분 그런 아이 아마 만나보셨을 겁니다. 재미있는 놀이동산에서 부모를 잃었을 때 우리는 그 아이를 보면서 지금 재미있는 놀이동산이 있잖아. 너 행복하지 않아. 라고 말할 어른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백화점에서 장난감도 많은 그곳에서 엄마를 잃고 울고 있는 아이에게 많은 장난감이 네 손에 있잖아. 행복하지 않아? 라고 질문할 부모도 없을 겁니다. 손에 맛있는 핫도그를 들고 있는 아이에게 엄마를 잃어버려서 울고 있는데, 너 그 맛있는 핫도그를 먹으면 되잖아. 행복하지 않아? 라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이 아이는 아무리 좋은 옷을 입었고 놀이동산에 와 있고 맛있는 것을 들고 있다 할지라도 이 아이는 지금 큰일 난 아이입니다. 왜요? 엄마 아빠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자신을 늘 지켜주는 보호자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 아이는 큰일 난 인생이에요. 이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 이런 믿음입니다.

엄마 아빠를 잃어버리면 불안하듯이 내 인생의 하나님의 임재를 잃어버리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위기에 빠진 인생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을 느끼지 못한다면, 내가 주님과 멀어져 있다면, 불안해해야 되고 초조해야 되고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먹지 않는다면 그것이 나 인생에 가장 불행한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아이들은 좀 컸다고 생각하면 그때부터 부모로부터 독립하려고 하듯이 우리가 조금 신앙이 자랐다고 생각하면 마치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지 않아도 내가 얼마든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 라고 착각(錯覺)하게 되죠.

그래서 여러분 청소년 아이들이 청소년기 때, 그렇게 부모로부터 독립해서 가출해서 혼자 살아보기도 하는 그 일들을 벌이는 이유가 그 이유이기도 있게 합니다. 미국에서 이제 아이들이 이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갈 때, 서부에 있는 아이들은 대학을 동부로 가려고 하고, 동부에 있는 아이들은 대학을 서부로, 5시간, 6시간 비행기 타고 가야 되는 서부로 가려고 합니다. 살고 있는 동부에, 서부에 좋은 학교가 없기 때문에 그런 거 아니라 이유는 부모로부터 가장 먼 곳의 학교를 가겠다는 거예요. 하지만 딱 가고 나서 아이들이 뭘 느끼죠? 집 나가면 고생이다. 어떻게 잘하세요? 집 나가면 고생이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영적으로 성인이 되었다고 착각하면 그때부터 내가 모든 것을 선하게 결정할 수 있고 뜻대로 살아갈 수 있고 나는 얼마든지 죄의 유혹(誘惑)을 이길 수 있다. 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끼지 못한 순간부터 우리는 죄의 유혹에 넘어지기 시작합니다. 선하고 아름다운 길이 아니라, 잘못된 그릇된 길에 설 가능성이 많아져요. 요셉이 죄를 이길 수 있었던 힘이 무엇입니까?

요셉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어찌 하나님께 득죄(得罪)하리이까? 그의 마음에는 그의 생각에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늘 인식하고 살았다. 라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 나는 하나님 없이는 안 됩니다. 나는 하나님 없으면 나는 살지 못합니다. 라고 전적(全的) 의탁(依託)하고 사는 것, 이것이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놀면서도 항상 엄마가 있는지를 확인하며 놀아요. 열심히 친구와 놀다가도 뒤를 돌아보면서 엄마가 있는지 확인합니다.

자다가도 깨면 항상 손으로 더듬거려서 엄마가 있는지를 확인하고 잠을 자요. 저희 아들이 잘 때 항상 엄마가 있는지 확인하려고 그 엄마 볼 위에 손을 항상 올려놓고 잤어요. 그런데 여러분 따뜻한 손이 올려주면 얼마나 불편한지,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게 너무나 부모가 니 옆에 있다는 것을 인식할 때 편안하게 잠을 드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날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셔야 나는 삽니다. 주님이 안 계시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고백으로 사는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둘째, 두 번째 어린아이 같은 신앙은 어떤 신앙일까요? 두 번째는 말씀 그대로를 믿는 신앙입니다. 여러분 아이들은 부모의 보호가 없이는 살지 못하죠.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란?
②둘째, 말씀을 그대로 믿는 신앙이다.
-여러분 아이들은 부모의 보호가 없이는 살지 못하죠. 전적으로 부모의 공급과 부모의 보호(保護) 가운데 살아가야 됩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그 부모의 보호와 공급(供給)함에 있기 위해서 아이들은 철저하게 부모의 말을 따르고 여러분 순종(順從)하죠.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지으시고 나서 아담에게 하셨던 것은 순종(順從) 훈련(訓鍊)이었어요. 너희는 생육(生育)하고 번성(繁盛)하고 땅에 충만(充滿)하고 이 땅을 다스리라는 명령에 순종을 해야 됐던 것이 여러분 아담과 하와의 사명(使命)이었습니다. 선악(善惡)을 알게 한 나무를 만들어 놓으시고, 그 모든 것은 다 이름 어때? 그 선악을 알게 한 나무는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 이유 또한 나 하나님은 창조주(創造主)고 너희는 피조물(被造物)인데 너희가 나의 이 계명을 말씀을 언약(言約)을 지켜야만 에덴 동산에서의 축복(祝福)을 누릴 수 있고 너희가 이 말씀에 순종해야만 너희는 은혜와 복 가운데 산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선악을 알게 한 나무를 하나에게 세우셨다는 것이죠.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曠野)로 이끌 때에도 낮에는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실 때 너희가 이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따라야 된다. 이 구름 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너희가 순정으로 따를 때, 너희는 보와 은혜 가운데 살 수 있어. 라는 그 순종함을 가르쳐 주셨다라는 것이죠.

여러분,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를 비유하시면서 여러분 예수님은 그 어린아이의 순수(純粹)한 순종(順從)을 닮아가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왜냐면 아이들은요. 순종할 때 그 이유를 묻지 않습니다. 왜 순종해야 되는지 이게 나은지 저게 나은지 아이들은 계산하지 않아요. 아빠가 얘기이기 때문에 그냥 순종합니다. 내가 순종하면 아빠가 좋아하니깐 순종할 뿐이지, 이게 좋아 저게 좋아 판단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달라요. 어른들은 별의별 생각을 다 합니다. 이것이 나에게 이익이 될지 이것이 나에게 손해(損害)가 될지, 남들이 뭐라고 하면 어떻게 하지? 내가 생각했던 것, 내가 바랐던 것과 다르면 어떻게 하지? 온갖 많은 생각을 가지고 순종을 더디 하는 것이 어른이라면, 아이들은 계산(計算)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 말에 순종하자.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1983년도에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일입니다. 주일학교 예배가 마치고 나서 이제 성가대로 섬겼기 때문에 이제 1~23학년 아이들이 이제 예배 끝나고 성가 연습을 교육관에서 하고 있었습니다. 한 10시, 한 40분 정도 됐을까요? 갑자기 밖에서 전쟁이 났을 때 울리는 긴급경보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부모님들이 전쟁 났다고 허겁지겁 교육관의 아이들을 찾으러 데리러 온 거예요. 그때 아이들이 20~30명 있었거든요. 그때가 어떤 사건이냐면 북한의 이웅평 소령이 전투기를 타고 이제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넘어왔던, 여러분 그 사건 기억하실 겁니다. 그때 6.25 전쟁이 다시 터지는 줄 알고 진짜 긴급한 분위기 가운데 부모들이 교회 아이들을 찾으러 왔어요. 그때 그 모여있는 1~2,3학년 아이들이 정말 허겁지겁 얼굴이 사색이 돼서 교육관에 들어온 그 부모님들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무나 태연하게 전쟁 나서 죽어도 우리는 천국 가잖아요. 이게 아이들의 얘기였습니다. 엄마 왜 이렇게 걱정해? 우린 전쟁 나서 죽어도 우린 천국 가잖아. 그런데 계속 찬양을 했던 게 기억납니다. 아이들이 볼 때는 저런 철없는 아이들, 생각 없는 아이들 하겠지만, 이 아이들이 들었던 전도사님의 말씀, 아니 부모가 줬던 그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는 건 뭐예요? 아이들의 신앙이 순수하기 때문인 거예요. 말씀 그대로 믿는 거, 하지만 어른이 되면 생각이 많아집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말씀을 말씀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죠.

저는 우리 사랑의 영 가족 모든 분들이 다 처음엔 이 어린아이와 같은 순종하는 사람이었음을 저는 믿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세요? 지금은 그때보다 성경 지식도 많아졌고, 경험도 많아졌고, 훈련도 많이 받았고, 하나님에 대한 살아계심의 경험도 더 많이 했는데도 불구하고, 힘과 권력을 가졌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말씀을 말씀 그대로 받지 않고, 항상 말씀 앞에서 내 생각을 먼저 이야기하고 이것이 유익이 될지 손해가 될지를 따지고 있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셨던 것처럼 다시 너희는 처음처럼 돌아가야 된다.

주님을 만났던 그 처음,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듣겠나이다. 내가 순종하겠습니다. 했던 그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 저와 여러분에게 회복(回復)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도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치유하실 때, 그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백 부장을 보면서 내가 이만한 믿음을 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그 백 부장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주님 나도 종에게 일로 가라면 가고 절로 가라면 갑니다. 주님이 지금 이 자리에서 말씀하시면 지금 죽을 병에 걸린 내 하인이 말씀하시면 말씀하신 대로 나을 줄 믿습니다. 우리 집에 오실 필요 없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내가 이만한 믿음을 본 적이 없다’였습니다. 이 이만한 믿음이 어떤 믿음이에요?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라는 거예요. 어제 오정현 담임 목사님께서 토비새의 말씀을 전하시면서 참 귀한 도전의 말씀하셨어요.

우리가 10월 달에 ‘글로벌 특별 새벽 부흥회’를 앞두고 있고 7천 명의 한국 교류를 섬기는 우리 ‘한교섬’과 그리고 이번에 특별히 일본 목사님을 섬길 200명을 섬기는 ‘일교섬’ 세계 개혁주의 교회 목회자 지도자들을 섬기는 ‘WRF 서울 총회’를 우리가 준비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선 우리에게 그날에 은혜와 기적과 능력과 회복을 이미 준비하고 계시는데, 그러면 그 은혜와 기적과 능력과 회복을 받을 마음의 그릇을 우리가 준비해야 되는데,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다’고 말씀하셨고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는 말씀하셨다면 우리가 그 은혜와 기적을 받기 위해선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그 은혜를 체험하기 위해선 우리가 금식하며 기도하며 믿음의 그릇을 키워가야 된다.

우리는 금식할수록 내 안에 있는 불순물들, 거짓되고 의심(疑心)하고 자기 생각을 말하고 이것이 이익이 되는지 이익(利益)되는지 아느냐에 따라 판단(判斷)하고 있는 우리 안에의 불순물(不純物)들이 금식 기도하고, 제거(除去)되므로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 되어서 주님 주님이 말씀하시면 됩니다. 주님에게는 하나님께는 능치 못한 일이 없습니다. 라고 우리가 나아갈 수 있는 말씀을 그대로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줄 믿습니다.

아이들은 너무나 너무나 순수(純粹)해요. 그리고 그 말씀을 전적으로 따릅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제가 살던 미국의 집에 계단(階段)이 있었습니다. 딸아이가 4살, 5살 때였는데 첫 번째 계단에 오르면서 말합니다. 뛰어봐. 아빠가 안아줄게. 머뭇거리다 뜁니다. 그럼 저는 안아주죠. 두 번째 계단 올라갑니다. 머뭇거리다 뛰어봐. 아빠가 안아줄게. 아빠의 말을 듣고 뜁니다. 세 번째는 설명이 필요 없어요. 세 번째 계단 뜹니다. 받아줍니다. 네 번째 계단도 뜹니다. 받아줍니다. 다섯 번째 계단도 뜹니다. 받아줍니다. 아이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 계단 놓는데 일단 뛸 때는 그 계단에서 뛰지 않고 저 뒤로 가가지고 달려오면서 뜁니다. 엄청 뛰면서 달려와서 아이가 팍 나르죠. 그럼 저는 받아줍니다. 아이의 머릿속에는 내가 뛰면 아빠는 받아준다는 생각밖에 없어요. 아이의 머릿속에는 내가 뛰면 아빠는 슈악 하고 피할 거라는 생각이 없습니다. 받아줄 거라는 생각밖에 없어요. 이게 어린아이의 신앙이에요. 우리의 생각에 설마 응답하시겠다. 이게 아니라 반드시 주님을 응답하신다. 말씀대로 역사하신다. 나는 믿는다. 이것이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에요.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신앙을 회복해야 돼요. 아멘이십니까?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으로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어린아이 같은 신앙은 어떤 신앙일까요? 세 번째로, 그것은 자기를 낮추는 신앙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란?
셋째, 자기를 낮추는 신앙입니다.
-우리 4절의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함께 읽어볼까요? 시작.

*마태복음 18:4,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아멘.
여러분, 19세기에는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어린이의 인격은 존중(尊重)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인류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20세기의 최고의 발견은 어린이의 발견이다.’ 그 당시에 아이들은 인격체가 아니었습니다. 성인 남자만이 사람의 수로 포함되었어요. 아이들은 그 대상에서 제외되었어요. 아이들은 대접받는 대상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관심의 대상도 아니었습니다. 아이들은 항상 어디를 가나 자기를 낮추고 낮추는 것이 운명인 존재가 아이였습니다. 이 이야기하면 한편으로 이렇게 말씀하신 분이 있습니다.

목사님, 요즘 아이들은 안 그래요. 요즘 아이들은 부모 머리, 어른 머리 꼭대기에 서 있습니다. 말할 때 예 맞습니다. 그런 아이들은 치유(治癒)가 필요한 아이들이고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아이는 진짜 자기를 낮추는 아이를 말하는 거예요. 그런데 선생님 말씀하십니다. 어린아이처럼 너희가 너희 스스로를 낮추지 아니하면 천국에서 큰 자가 될 수 없다. 이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베드로 전설 5장, 5장 말씀인데 우리 함께 읽어볼까요? 시작.

*베드로전서 5:5,
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니라 아멘,
-뭘 말하고 있습니까? 예수님 하나님은 교만(驕慢)한 자를 대적(對敵)하시고 자기 스스로 낮추는 자에게 그 인생은 평생 하나님의 은혜(恩惠)가 떠나지 않게 하신다고 약속하셨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 사랑의 교회 성도님 안 그렇지만 주변에 보면 목이 곧은 성도가 있습니다. 그냥 자기를 낮추는 것을 자존심 상했다고 생각해요. 자신의 권리(權利)만 주장(主張)합니다. 그렇다면 그 인생은 하나님이 떠나는 인생인데 자기를 낮추고 낮추고 낮추는 자는 평생의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지 않는 자가 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영 가족 여러분,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되는 어린아이 신앙이 되어야 됨을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압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을 사신 분이 있는데, 그분이 누구냐면 예수님이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은요. 하나님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늘 하나님과 늘 함께하기를 구하셨고, 늘 하나님께 기도했으며, 늘 어려운 어떤 힘듦이 있을 때마다 죽게 나와서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을 구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늘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조건 순종(順從)했습니다. 주여, 하나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는 순종하신 분입니다. 또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낮아지고 낮아지신 겸손의 왕이 되셨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우리들에게, 너희가 나처럼 돼라. 예수님처럼 되라고 하면 저는 예수님처럼 못 살아요. 라고 말하겠지만, 예수님은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을 걸으셨던 분이세요. 그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어린아이처럼 돼라. 어린아이 신앙이 될 수 있다. 왜? 우리가 그 어린아이 시절을 보냈고. 우리가 그런 과거가 있고, 우리가 충분히 그와 같이 예수님처럼 살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기 위해서 어린아이 같은 신앙이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우린 돌이키면 됩니다. 주님 말씀하신 것처럼 다시 어린아이 같은 신앙이 되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게 되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영 가족 여러분,
예수님께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돌이켜 어린아이가 되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라 말씀하십니다. 다시 어린아이의 신앙으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는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나는 나를 낮춤으로 내 평생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지 않는 사람으로 살겠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우리를 떠나지 않는 그런 하나님의 백성으로 서게 되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마음이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순수한 믿음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자가 되게 하시고,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게 하시며 늘 우리를 낮추어 평생 은혜 속에 거하는 겸손한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은혜와 능력이 날마다 경험 되게 하여 주시고, 어린아이 같은 믿음으로 끝까지 주님을 따라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오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교회 기도문
1주여! 대접받기 좋아하는 마음이 커질 때마다 '돌이켜" 어린아이처럼 되게 하사 "주님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고백하며 '나의 그물을 내려놓았던 그 처음 자리'로 돌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2 주여! 이유를 물지 않고, 계산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게' 하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생육-번성-충만의 은혜'를 누리게 하여 주옵소서!
3 사랑의교회가 검손하게 금식하며 제24차 가을 특새로 달려와 엎드려 간구활 때. 제5회 한교섬/일교섬과 세계개혁주의협의회(WRF) 서울총회를 통해 대한민국과 세계교회가 '강력한 은혜와 회복과 능력과 기적'을 경험하게 하여 주옵소서!

♣요약
-제자들이 천국에서 누가 더 큰지를 두고 다툴 때,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세우시고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경고하셨다.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란,
첫째,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어 모든 것을 전적으로 맡기는 신앙이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계산 없이 순종하는 신앙이다.
셋째, 스스로를 낮추는 겸손한 신앙이다.
초심으로 돌아가 자기를 낮추고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때,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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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6년 9월 27일)- 명절 특별메시지
제목: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나이다(Lord, Yoy Know Everything About Me)"
말씀: 시편 139:1-6
찬양인도: 쉐키나(이동선 부목사님), 시온찬양대(4부) 외.
사회: 임상규 부목사님(4부)--- 임병영(1부), 이기호(2부), 장단희(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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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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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39:1~6,
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5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6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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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찬양대가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보혈 복음의 은혜를 고백적으로 찬송한 것을 주님이 받으신 줄 확신합니다.

저는 오늘이 명절 주일날 제 마음에 담겨 있는 평소에 이제 로마서 강의하다가 잠깐 멈추고 제 마음에 담겨 있는 내용을 같이 말씀을 하려고 합니다. 하기 전에 오늘이 예배가 본당 별관 또 여러 채플에서 또 대부도에서 들으시는 모든 분들이 오늘 예배를 통하여 정말 주님을 만나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어떤 은혜를 주시는가? 제가 어릴 때 출애굽기를 읽다가 너무 마음에 와닿은 단어들이 있었어요. 아주 그냥 후레쉬한 단어였어요. 출애굽기 24장 9절 10절인데요.
*출애굽기24:9,
9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출애굽기24:10,
10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9절 이런 내용이 나와요.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가 이스라엘 장로 70인이 올라갔어요. 어디? 시내 산에 올라갔어요.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 아래에는 뭘 편듯하고요? 청옥을 편, 청옥이 이게 사파이어입니다. 여러분 사파이어 좋습니까? 제가 볼 때는 사파이어가 다이아몬드보다. 훨씬 좋습니다. 청옥을 편듯하고 그냥 쫙 편하고 하늘같이 청명하더라. 그래서 청옥이란 말과 청명이란 말이 어릴 때 이게 참 마음에 와닿아 이 단어가 오늘 우리가 살다보면 인생의 우리 발 아래가 가시밭길도 있고, 수많은 돌짝 밭도 있지만 오늘 이 주일만큼은 청옥을 편듯하고 하늘같이 청명한 은혜를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어제 우리 명절 토비새에 특별 명절 음악회를 했는데, 하나님께는 전심, 사람에게는 진심, 사에게는 충심, 그다음에는 어제 명절 예배는 동심 그랬어요. 동심, 옛날에 그런 거 있잖아. 모든 동심의 세계는 모든 어른들의 마음의 고향입니다. 그랬잖아요?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이 마음 참 이렇게 딱 열고 웰컴홈,,, 주님의 품에 안기는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찬양대 위에다 ‘웰컴 홈’이라고 써 놨어요. 어린아이처럼 순전한 마음으로, 그래서 여러분 다시 한번 여러분들의 생애 오늘이 예배를 통하여 청옥같이 그리고 하늘같이 청명한 은혜가 펼쳐지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제가 평소에 제 마음에 두는 이런 내용들을 오늘 좀 말씀을 드릴 터인데 오늘 제목은 “하나님은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나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주님은 모르시는 것이 없으시나이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시편 139편에 누가 썼어요? 다윗이 썼어요. 다윗이 인생의 역경과 고난과 수많은 삶의 터널을 지나고 난 다음에 그의 생애를 되도록 보면서 그래 그렇지,,, 그러면서 다윗이 고백한 내용들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여러분들이 좀 더 이렇게 마음에 와닿는 이유가 뭐냐면 그냥 설명하는게 아니고 다윗의 간절한 기도의 내용이에요. 그러니까, 기도니까? 더 마음에 와 닿는 거예요. 아멘. 그래서 5절, 6절에 다윗이 오늘 뭐라고 말씀하느냐면, 5절이 이렇게 나와 있어요.

*시편 139:5,
5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다. 여기 주께서 나의 뒤를 둘러쌌다. 하는 그 말은 나의 과거를 다 아신다. 과거의 아픔과 상처와 수많은 지극히 곤란한 삶의 여성을 주님이 다 알고 계신다. 그리고 주님은 나의 앞을 알고 계신다. 내 미래를 알고 계시고, 나의 평생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령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나의 앞을 주님이 지금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지금 현재 나를 안수하신다. 안수한다. 라면 손으로 안수하시는 건데 하나님의 손은 권능의 진원지예요. 주님의 권능의 손으로 오늘 현재 나를 붙잡아 주신다. 다윗의 과거, 현재, 미래를 다 주님께서 다 아시고 살펴보셨나이다. 그런 기도의 제목이에요.

여러분, 다윗은 몇 살까지 살았을까요? 다윗이 70까지 살았어요. 물론 뭐 그전에 70전에 죽은 사람도 있지만 다윗은 왕이었잖아요. 왕이니까? 80, 90까지도 살 수 있는데 70까지 살았어요. 왜냐면 너무 고생을 많이 해 가지고,,, 죽을 고생을 해 가지고, 장인 어른이 3천 명의 살인부대를 만들어서 다윗을 잡아 죽이려고 특공대를 조직해 가지고 괴롭히는데 얼마나 힘이든지, 도망가고 도망가고 유대 광야에서 탄식을 할 정도로, 내가 광야에 외로운 당아 쇠와 같다. 지붕의 참새 같다. 그렇게 고백할 정도로 다윗을 몰아붙였고, 다윗에게 수많은 사람들이 대적하는 자가 많았는데 시무이 같은 사람은요. 맨날 다윗을 욕하는 사람이에요. 요즘 말로는 하면요. 밤마다 악플 다는 인간들이에요. 악플로 막 계속 괴롭히는 거에요.

더구나 아히도벨 같은 사람은 성경에 보면 아 아히도벨은 하나님 같은 모략을 가진 자다. 그런 그니까? 지상에서 가장 똑똑하고 모략을 부르고 그다음에이 남 죽이는데 이렇게 머리가 팍 발전해 있는 이런 아히도벨 같이 이런 모략가가, 이 소이 컨스피러시(Conspiracy), 모략가가 다윗을 죽이려고 날마다. 계략을 짜는 거예요. 그리고 가장 가장 그 극점의 아픔은 뭐냐? 사랑하던 아들이 다윗을 죽이려고 다윗을 배신하고, 아버지 마음을 아버지에게 갈 마음을 다 훔쳐 가지고 얼마나 못되었는지, 얼마 못된 이름도 압살 놈이에요. 예. 백주에 다윗의 처첩을 능욕하고, 다윗을 죽이려고 하니까? 다윗이 머리를 산발 한 채 기드론 시냇가를 울면서 내려가는데 아까? 말한 시므이가 뒤에서 저주를 하고, 별 일이 별 일이 다 있는 거예요.

여러분, 아무리 힘들어도 여러분 장인 어른이 지금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까? 예. 이런 기가 막힌 상황 속에서, 그 역경을 돌파하면서 다윗이 고백한 이 고백이 어떻게 살아남았을까요? 나중에는 다윗이 얼마나 고통을 겪었는지, 저 블레셋으로 망명을 해 가지고 아기스왕 앞에서 침을 줄줄 흘리면서 미친 체를 했어요. 여러분, 아무리 힘들어도 침을 막 흘려가면서 미친 체 하는 분이 여기 있어요?

지금 그런데 그런 고통과 심하고도 상처 받고도 쓰라린 그 고통 가운데서도 다윗이 오늘 이런 고백을 하는 거 하면서 다윗이 살아남은 거예요. 다윗 왕국을 펼치고 압살롬 대신에 솔로몬을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수많은 다윗의 역경 가운데 살아난 비결이 뭔가? 그 비결이 뭔가? 그 비결을 오늘 제가 여러분들에게 저의 인생의 경험담과 함께 그다음에 여러분 모두가 다. 저는 이제 강해 설교를 하기 때문에이 주제 설교를 잘 안 하시지만 그래도 오늘은 제가 할 말은 좀 하고 싶어요. 그게 뭔가 1절부터 4절까지 제 얘기가 아니라, 1절부터 4절까지 다윗의 강력한 고백이에요. 1절에 이렇게 나와 있어요.

*시편 139:1,
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절에 뭐라고 돼 있느냐?

*시편 139:2,
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여러분이 안고 이 여러분 자리에 있으면 일어서고 안고는 다 주님이 아시고, 멀리서도 여러분들의 생각을 밝히 뭐예요? 아시고, 생각을 다. 아시는 거예요. 아침에 자고 나서 무슨 생각하는지 잠 자기 전에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사람 만났을 때 무슨 생각하는지, 주님이 다 밝히 아시오며, 3절에 뭐라고 돼 있는가?

*시편 139:3
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뭐예요? 아시오니, 그다음 4절,

*시편 139:4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이중 부정은 강한 긍정이에요.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주님이 다 알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이거예요. 내 모든 상황과 아픔과 어려움과 나의 부족과 연약함을 주님이 다 아셔. 그래서 주님은 나의 모든 것을 다 아시나이다. 한번 따라하겠습니다. 주님이 다 아셔. 주님이 다. 아셔서 주님이 다 아셔. 주님이 다 아셔,

저는 저희 생애(生涯)를 관통하는 쭉 삶을 보면서 수많은 우여곡절(迂餘曲折)이 다 있죠. 없는 사람 어디 있겠어요? 대한민국의 60대, 70대, 80대는요. 전 세계 지금 유튜브로 다 올라와 있어요. 전 세계에서 가장 독특한 인종이다. 가장 유니크한 세대다. 후진국에서 태어나 가지고 중진국에서 교육받고 선진국을 살아가는 아주 전 세계에 정말 독특(獨特)한 세대이다. 한국 우리 90도 넣어 드릴게. 90도 더 더 고생하시고, 50도 넣어 드릴까요? 예,,, 10대 20 30대는 아직까지 다 잘 모르실 거예요. 수많은 일들이 일어났어요. 수많은 과정을 겪었어요. 거기는 감사도 있고 어려움도 있고 억울함도 있고 상처도 있고 수많은 난관도 있었어요. 근데 오늘 살아남은 이유가 뭐냐? 다윗처럼 주님이 다하셔. 말로다. 할 수 없는 정말 눈물로 어떨 때는 입을 뒤집어 쓰고 밤에 주님이 어때요? 그 가운데서도 주님이 다 아셔. 이거 안 했으면, 아마 다윗은 아마 있잖아요. 이거 몰랐으면 암이 열 번이라도 걸렸을 거예요. 다윗은 창자가 터져서 죽었을 거예요. 근데 주님이 다 아셔서, 이게 오늘 다윗의 고백이거든, 주님이 다하셔.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나이다. 내 혀의 모든 말을 모르는 것이 없으시나이다.

그래서 제가 이제 이 과정을 거치면서 제 인생에 쭉 보면서 오늘 이렇게 명절날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주님이 다 아신다. 그랬을 때,,, 뭐 여러 가지 삶에 대한 통찰력이라든지 삶의 적용이 있습니다마는 주님이 다 아신다고 그랬을 때 한 두 가지 정도의 제게 통찰력을 주시더라고요. 그게 뭐냐 하면, 첫 번째는 주님이 다. 하신다고 그랬을 때 주님이 다 아신다는 고백은 체념의 말이 아니라, 믿음의 선언이에요.

I. 첫째, ‘주님이 다 아신다'는 고백은 체념의 말이 아니라, 믿음의 선언이다.

-뭐 주님이 다. 아까? 내가 할 건 뭐 있나 이게 아니에요. 주님이 다 아신다는 말은 체념이 아니라, 믿음의 선언, 특별히 어떤 믿음의 선언인가 하면, 주님께 대한 전적위탁에 대한 선언이에요. 여러분 살다. 보면 진짜 어려움 당하면요. 실 오라기 하나라도 주님께 다 맡기지 않으면 안 될 그런 상황도 있어요. 너무 어려우면 내 여러분 너무 어려워지면 여러분 갈 데가 없어요. 너무 어려워지면 만날 사람이 없어요. 여러분, 제가 왜 갈 데가 없습니까? 제가 왜 만날 사람이 없습니까? 그런데 진짜 어려우니까? 갈 데가 없고, 만날 사람이 없더라고,,, 그러니까? 방법은 딱 하나예요. 주님께 내가 모든 걸 맡겨야 되는 거예요. 주님께 맡긴다는 것은 어떤 뜻인가 하면, 주님께는 전적위탁을 하고 그다음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독립을 하는 것이에요. 이해가 됩니까?

주님께 전적 위탁을 하고 사람과의 관계에선 그래서 사람들의 사람들의 관계 때문에 사람들의 인정,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 사람들이 공격하는 것, 사람들이 칭찬하는 것, 아니면 반대로 사람들이 상처 주는 것, 이런 모든 것들로부터 주님께 전적 위탁이 되면 거기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 자유스러워지는 것이에요.

좀 제가 어려운 말로 우리 내면 우리 내면은 다. 종살이를 하고 있어요. 사람들이 인성에 대한 갈급하고 다 사람들이 상처 주면 또 고통 당하고 사람들이 다 우리 내면이 전부 다 갈등과 수많은 짐을 지고 있어요. 심지어 이것은 남편과 아내 사이도 마찬가지고, 부자 간에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주님이 다 아셔 그러고 주님께 의탁을 하게 되면 하나님께는 전적 의탁이 되고, 사람에게는 독립이 되는 것이에요.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하나님 중심이 되고, 사람 중심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에요. 그러면 여러분들 되게 남편과 아내가 서로 싸우는 이유가 뭡니까? 더 안 알아 주니까. 그리고 남편과 아내는 뭐 싸우면 꽁 하잖아요. 아내는 늘 2, 30년 전에 얘기고 그대로 들고 와 갖고 또 얘기하잖아요. 남편도 마찬가지고 다. 이런 부족함이 다.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부족함 가운데서 주님께 나를 전적으로 위탁하면, 남편이나 아내나 가까운 사람들의 평가가 내게 너무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왜냐면 사람으로 독립하니까. 그러니까? 주님이 다 아신다는 말은 이게 이런 것들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전적 위탁에 대한 믿음의 선언인 줄 믿습니다. 이거예요.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다시요. 내면의 종살이를 하지 않게 돼요. 내 내면의 아픔, 내면의 상처, 인정받지 못하는 욕구 뭐 이런 모든 것들에서 좀 자유 자유스러워지는 것이에요.

사랑의 교회 모든 성도들은 오늘 명절날 사람 때문에 생긴 모든 상처와 관계와 인정에 대한 욕구로부터 참 자유가 선포되는 그야말로 믿음의 전적(全的)위탁(委託)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다시요. 이렇게 하나님께 전적으로 위탁하면 사람에게 독립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독립이라는 이 말이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 뜻이 아니에요. 다른 사람의 칭찬을 먹고 살지 않겠다. 다른 사람의 비난 때문에 내가 주신 사명을 약화 시키지 않겠다. 하나님께 전체 위탁되고 받아들여진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증명하느라고 내 인생을 소진(消盡)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독립하고 하나님께 전적 위탁된 그리스도인은 오히려 이웃과 동료를 이기적인 동기 없이 더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나님께 전체적 위탁되고 사람에게 독립된 이 은혜를 받으면요. 이 하나님에 대한 중심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 남편을 사랑하는 것이 진짜가 되고, 그 아내를 사랑하는 사랑이 진짜 깊이가 있게 되는 것이에요. 이걸 다. 어떻게 설명해요?

저희 저희 집 사람은 어느 순간 저를 포기했어요. ㅋㅋㅋ~~ 우리 집 사람은 이게 하나의 몰입하고, 공부면 공부에 몰입하고, 남편은 남편의 몰입하고 자식의 자식의 뭐 이런 스타일이에요.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이 상처를 많이 주고 받는 거예요. 근데 어느 순간이 진리를 깨닫고 저를 포기했어요. 그리고 하나님 전체적 위탁, 위탁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 마음에 아, 저 위탁하니까? 나를 진짜 사랑하겠구나. 그리고 내가 삼식이가 되더라도 나를 버리지를 않겠구나. 자, 이건 중요한 얘기입니다.

여러분, 여기 우리가 자식에게 안 얽매인 부모가 어디 있겠으며, 남편과 아내에게 신경 쓰지 않는 그런 가족이 어디 있게 다 있 있는 거예요. 교회 안에도 다 마찬가지에요. 교회도 중직 자와 목회자 사이에 다 있어요. 다 있는데 하나님께 전적 위탁을 하고 그럴 때 사람에게는 독립을 하게 되면 사람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이 되면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머리털까지도 다 세시고 계시는 하나님이세요. 거기서 진짜 거기서 평안과 안식이 있는 것이에요.

근데 사람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 사람 중심이 되면 늘 흔들리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내면에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자는 욕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성숙한 은혜, 믿음의 선포가 저와 여러분에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내면에 종살이에서 벗어나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간절히 바랍니다. 그다음 또 제가 보니까? 주님이 다 아셔 그랬을 때, 주시는 큰 축복 중에 하나가 뭐냐면, 우리 인생이 전능자의 손에서 기적 같은 능력을 받게 되는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에요. 무슨 말이냐? 하나님 나를 다 아신다. 그랬을 때 나를 관찰하고 다 아시고 무슨 뭐 100점짜리 이런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은 나를 다. 아시는 정도의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나를 창조하신 분이세요. 창조주세요. 일반적으로 어떤 객관적인 지식을 가지고 많이 하는 그런 차원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나를 믿음의 작품으로 남기시고 전능자의 손에 내가 붙들림을 받게 되는 것이에요. 너무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주님이 다 하신다는 고백이 위해서 우리의 인생은 전능자의 손에 빚어지는 작품이 되는 것이에요.

II. 둘째, ‘주님이 다 아신다'는 고백 위에서 우리 인생은 전능자의 손에 빚어지는 작품이 된다.

-할렐루야!~~ 주님은 하나님은 내 과거와 현재에 관한 정보를 빠짐없이 갖고 계신다. 그 정도가 아니에요. 하나님은 나를 관찰하고 연구해서 알아가시는 그 정도가 아니에요. 하나님은 나를 창조하고 지으셨기 때문에 나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나를 전적으로 아시는 분이에요. 여러분의 기질(基質)과 재능(才能)을 아실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이 견딜 수 없는 삶의 무게도 알고 계시고 상처받는 지점도 알고 계시고 다 알고 계시는 거예요. 오늘에 우리는 오늘의 나만 보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모태서부터 영혼까지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세요. 다 알고 계시. 아까이 ’안다‘는 말이 ’옴니션스‘라 그러는데 옴니세티아(Omnisentient)로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신다. 특별히 창조주 하나님으로 다 알고 계신다. 나를 그냥 다. 아는 것 정도로만 충분하지 아니하고 내 인생을 아실뿐만 아니라, 그 인생을 사명(使命)대로 능력대로 그 뜻을 이루실 능력이 있는 하나님이세요. 그래서 그 하나님께 나를 다. 맡긴다는 것은 무한한 능력을 가진 그 하나님께, 창조주 하나님께 나를 의탁하니까? 내 운명을 의탁하니까? 나보다도 나를 더 잘하고 계시는 그 하나님께서,,, 끝까지 우리의 삶을 기적(奇蹟) 같은 삶을 이루어내실 능력이 있는 줄 믿습니다. 이거예요.

여러분 이거 마음에 확신하셔야 돼요. 저는 하나님이 다. 아시라고 하는 그 순간에 내게 하나님 전적 위탁을 통한 사람과의 독립이 이런 은혜를 주실 믿음의 선언뿐만 아니라, 아 나는 부족하고 내 내 영적인 연약하면 다 있지만 나의 가장 아킬레스건도 다 알고 계시지만, 내가 주님께 나를 맡기고 나가 전적 위탁을 하는 그 순간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이 내 인생을 통하여 역사하시는데 기적과 같은 일들을 이루어 주시는 것이에요.

지난 시간들을 보면 수많은 기적 같은 일들을 허락하신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에요. 이것도 모르고 예수 믿으면서 권사님들이 논현동에 점집에 가면 됩니까, 안 됩니까? 뭐 좀이 영이 뭐 영을 좀 통한다는 그런 어떤 그 귀신의 영력이 있으니까? 조금 더 아는 면이 그 점쟁 있을지 모르지만 여러분 말도 안 되는 얘기예요.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이 나를 다 아시기 때문에 그분께 나를 의탁하고, 그 아시는 은혜 때문에 내 삶을 하나님의 전능자의 손으로 빚어 주신다는 사실 앞에 내 삶의 기적을 기대해야 되는 것이에요. 그걸 은혜를 받을 때, 이미 결정된 과거의 상처(傷處)와 문제를 가지고 더 고민하지 아니하고 나를 더 잘하시는 하나님의 전능성 앞에 나를 맡기고, 나의 실력, 나의 생각, 나의 판단, 나의 찬양, 나의 삶의 헌신, 나의 사랑을 주님께 맡길 때,,, 주님은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것이에요.

어저께도 했습니다만은 깊은 말씀의 은혜와 높은 찬양의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이 하나님 앞에 나를 드릴 때에 하나님은 나를 기적과 같은 삶으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5절에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뭐 하셨나이다?

*시편 139:5
5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다 안수하셨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다 내가 다 안수하셨다. 앞들을 좀 더 크게 앞뒤를 둘러싸시고 나를 안아 주셨다. 그래서 오늘이 안아 주심의 본당에 오실 때마다. 시편 139편 5절을 암송하면서 다. 앉으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것이에요. 말씀의 능력인 것이에요. 주께서 나의 앞뒤를 뭐 하시고 둘러싸시고 내게 뭐 하셨다? 안수하셨다. 안수해 주셨다. 앉을 때마다 이 예배는 뭐 지금 벌써 자리가 모자라 가지고 다. 예배 시간 되면 다 오늘은 평소보다. 몇 분 좀 빨리 시작했어요. 알 사람만 알도다. 좀 빨리 시작했어요. 밖에서 이제 예배들 많이 계시는데 본당이나 우리 체플이나 모든 또 방송으로 들어오신 모든 분들, 예배의 자리 자체가 주님의 안아 주심의 자리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나를 빚으셔 가지고 내가 계획하지도 못했던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명을 이루게 하시고 기가 막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거예요. 사람들이 다 끝났다고 마침표를 찍지만 하나님은 끝난 줄 알았던 자리에서 전혀 새로운 문장을 시작하셔서 인생의 마침표를, 쉼표로 바꿔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악과 고통과 상처로 로 마침표로 찍게 하지 않으시고 상처와 우울함과 어려움만으로 내 인생을 마무리의 마침표를 찍게 하지 않으시고, 그걸 쉼표로 만드시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을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것이에요. 읽어 보겠습니다. 같이요.

◎'이제 다 끝났다'는 인생의 마침표를 심표로 바꾸시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할렐루야. 그래서 정리하면 하나님이 나를 다. 아시기 때문에 내 인생에는 우연히 버려지는 조각이 없고, 하나님이 전능하시기 때문에 깨어진 조각도 삶을 다시 세우는 죄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이 뒤엉킨 실을 보고 있습니다마는 하나님은 완성된 작품을 미리 알고 계시는 것이에요.

자, 이까지는 이까지는 하나님이 다. 아셔 하면 웬만큼 우리가 다. 설명하고 이해가 돼요. 그런데 한 가지 오늘 정말 중요한 것이 하나 남아 있어요. 하나님은 다. 아시는데 무엇까지 아시나? 내가 진짜 억울함을 당했을 때, 아니면 다른 식으로 말하면 억울함을 주고 고통의 원인이 되고 악한 괴계가 있는데 여러분, 하나님 악인도 아실까요? 여러분 말씀은 듣고 계십니까? 다시 한번 하나님 악인도 아실까요? 하나님 악인도 아시는 것이에요.

우리의 늘 우리의 그 가슴 한편에는 늘 어떤 생각 여러분 억울한 일 당하고 원수 같은 어려움 당하고 그랬을 때, 아무도 진실을 모른다는 느낌이 있을 때, 상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살아가는 것 같을 때, 그때 고통이 되는 거예요. 오늘 본문 뒤에 19절 20절에 다윗이 놀라운 선포를 하라고 하고 있는데 무슨 선포를 하고 있느냐?

*시편 139:19~20,
19 하나님이여 주께서 반드시 악인을 죽이시리이다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아 나를 떠날지어다.
20 그들이 주를 대하여 악하게 말하며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으로 헛되이 맹세하나이다.
-다윗은 자기를 악하게 대하는 자는 자기 악하게 대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하여 악하게 말하고 주의 원수들이 주의를 헛되이 말할 때, 이런 모든 것들을 주님이 다 모른다? 아신다?. 주님이 다 아신다. 그래서 다윗이 뭐라고 하냐면 주님 저 인간적으로는 이 악인들을 쓸어버리고 처리하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이 다 아시니까? 주님께 맡기겠습니다. 다시요. 우리가 사람에게 억울한 일을 당하면 가장 견디기 힘든 것 그것은 뭐냐면 손해 받은 거 그 자체보다도, 아무도 진실을 모른다는 느낌이에요. 우리를 저 잘못한 악인들이 막 활보를 한다든지, 거짓이 막 그냥 승리한다든지, 그럴 때 우리의 마음속에 법정 하나가 세워지는 것이에요. 내 자신이 검사와 증인과 판사와 지평자가 되어 가지고 끊임없이 상대 유죄를 입증하고 형을 선고하는 거예요. 그럴 때 정작 그 법적에 세워 가지고 내가 그냥 판결을 하고 막 그렇게 되는 순간 아까 말한 것처럼, 내면의 종살이가 되는 거예요. 자유함이 없어지는 것이에요. 그럴 때 하나님이 악인도 이 상황도 다 아신다는 사실이 저와 여러분에게는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누가 먼저 거짓말을 했는지 아시고 악한 자의 동기를 주님이 아시고, 아무도 보지 못한 여러분들의 눈물과 밤잠을 설치된 시간까지 주님이 아실까요? 모를까요? 주님이 다 아시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는 진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여러분들의 영혼과 여러분들의 에너지와 여러분들의 삶의 모든 힘을 소진할 필요가 없어요. 악을 처벌하기 위하여 여러분들의 영혼을 불태울 필요가 없어요. 내가 잊어버리면 악이 사라질까봐 두려워서 그 상처를 붙들고 내 마음에 재판정에서 판결을 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다시오.

하나님은 악인도 알아, 알아요? 몰라요? 아신다. 여러분, 복수는 상대에게 내가 받은 고통을 돌려주는 시도가 복수예요. 그러나 하나님께 전체로 위탁하고 맡기는 것은 내 고통과 상대의 죄를 모두 아시는 하나님께 최종 판결권을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제 얘기가 아닙니다. 다윗은 이 최종 판결권을 하나님께 내어 드렸습니다. 그를 죽이려고 하는 사울 왕, 악하게 구는 사울왕, 발을 가리우려고 동굴에 들어왔는데 부하가 딱 보니까? 사울 왕이 동굴 안쪽에는 다윗이 있었는데 거기를 모르고 유대 광야는 그런 데가 있거든요. 동굴이 깊이가,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드디어 저 악한 원수 사울 왕을 죽일 기회를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제가 한 얘기가 아니고 부하들이 한 얘기에요. 그래서 다윗이 아니야!~.

원수가 없는 걸 하나님께 맡겨야 돼요. 그리고 대신 증거는 남겼어요. 사울 왕의 옷자락을 버었어요. 그다음 다. 사울 적진에서 사울 왕이 그 부하들과 함께 잠에 밤에 잠을 자고 있는데, 다윗이 그 들어가 가지고 창과 물병을 가지고 옵니다. 다윗의 부하들이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징벌하여 이 다윗왕 사울 왕을 죽이려고 우리 기회를 주셨습니다. 창까지 다. 갖고 있으니까? 그 창으로 찔러버립시다. 그럴 때 다윗이 하나님이 기름 부음 받은 종을 우리가 해하면 안 된다. 하나님께 맡기자. 하나님은 사울 왕의 악행도 알 아실까요? 모를까요?

다윗은 사울 왕의 최종 처분권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사울의 악을 심판하는 심판권을 하나님께 맡긴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 적인 맡김인 것입니다. 칼은 내려 놓되, 증거까지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맡겼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옳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사울의 악 때문에 나도 사울과 같은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결정하고 최종 판결권을 하나님께 맡겨 드렸습니다. 오늘이 판결권을 주님께 맡겨 드리는 것이 하나님이 다 아셔. 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대한민국의 이 상황을 아실까요? 모르실까요? 대한민국의 정치 지도자들 하나님이 다. 아실까요? 모르실까요? 그 우리는 정말이 말씀 믿고 하나님이 다 아신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올바른 방향으로 가게 하여 주옵소서. 어떻게 하면,,, 절실하게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할 때, 하나님은 대한민국도 하나님이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마음 가지고 하나님께는 전적 위탁, 사람으로부터는 독립,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를 다 아시기 때문에 우리를 기적 같은 삶의 수준으로 이끌어 주시고 악인도 다 아시니까? 복수는 주님께 맡기고, 최종 판결 주님께 맡기고,

※어떤 회사의 직원이 상사가 상사가 있잖아요. 너무 못되게 굴어 가지고 그 상사가 어떻게 했냐면 한 직원이 프로젝트에 실패를 그 팀의 실패를 어떤 직원에게 다 그냥 다. 덤티기를 씌워 버렸어요. 이 직원이 크리스천인데 너무너무 화가 나 가지고 이런 못된 상사가 있나 이러면서 밤에 생각을 했어요. 어떻게 했느냐? 밤마다. 휴대 전화에 상사의 문제를 과거의 실수와 사의 문제를 다 알고 있었거든. 휴대 전화에 상사의 폭로문을 썼다가 지웠다가 폭도 익명의 개시판에 폭로하려고 했잖아요. 그것조차도 주님께 다. 맡기고 진실은 밝히되 상대를 파괴하는 사람이 되지 말게 달라고 기도하고 그래서 관련이 이메일과 회의 기록을 다 정리하고 회사의 공식 절차에 따라 사실 관계를 소명하고, 신뢰할 수 있는 책임자에게 조사를 요청하고 그러나 동료들에게 상사를 험담하며 동료를 자기 편으로 만들지 않고 그 사실이 밝혀질 때까지 필요한 거리를 유지하고 상사가 자기처럼 수치를 당해야 한다는 마음 판결권을 하나님께 내려놓고, 그래서 상 그 상사를 무너뜨리기 위하여 거짓 폭로를 사용하지 않았어요. 자기가 심판자가 되지 않았어요. 필요한 말은 하지만 상대를 찌르기 위한 말은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정의의 절차는 밥되 복수의 쾌감은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정의의 절차는 밟되 복수의 쾌감은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활 속에 맡김이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평생 기름 부어 주시고 여러분의 삶의 기적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성경 주님의 이름은 강한 성 그곳에 달려간 자 안전하리. 우리가 높은 찬양으로 찬송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주님은 다 하시는 줄 믿습니다. 모태부터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의 모든 눈물과 상처와 아픔과 부족함을 다 알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주여, 주님은 수많은 우리 인생의 절망적인 마침표를 다 아시고, 소망의 쉼표로 바꿔 주시는 그런 주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아니 내 인생을 기적과 믿음의 작품까지 만들어 주시는 분이신 줄 신뢰합니다. 나의 가정과 직장에서 당한 모든 억울함을 주님이 아시는 줄 믿사오니, 상처 준 모든 악인과 원수까지도 주님께 맡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를 낳으시고 나를 보호해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 올리옵나이다.

♣요약
다윗의 고백을 통해 본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나이다"의 뜻을 따라 우리는 전적 위탁의 믿음 선언을 하고 '주님이 다 아신다'는 체념이 아닌 전적 위탁의 선언을 해야 한다. 내면의 종살이와 사람의 평가의 인정 욕구에서 벗어나 하나님 중심의 자유를 얻어야 하며, 우리는 전능자의 손에 빚어지는 작품이니, 나를 지으신 창조주께서 나의 연약함과 고통도 다 아시니, 인생의 '마침표'를 소망의 '쉼표'로 바꾸어 기적 같은 삶으로 이끌어 주심을 확신하자. 또한 최종 판결권의 이양해야 하는데, 악인의 간계와 억울함도 아시므로, 직접 복수하거나 심판자가 되지 말고, 최종 판결권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서 자유함을 누리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

■사랑의교회 이번주 기도제목
-1 주여! 날이 갈수록 “하나님은 다 아셔!"의 믿음이 더 깊이 체화되게 하사, '사람 의존증=내면의 종살이'에서 독립하여 오직 하나님께만 전적위탁 하게 하여 주옵소서!
2 주여! 악과 고통으로 깨어지고 뒤엉킨 나의 억울함'을 주님이 다 아시오니. 악인과 원수에 대한 나의 처분권과 최종 판결권'도 주님께 맡기고 끝까지 승리하게 하여 주옵소서!
3 사랑의교회가 제24차 가을 특새로 달려오는 진심-전심-충심-동심'을 다 아시는 주님께 간구하며 엎드릴 때, 제5회 한교섬과 세계개혁주의협의회(WRF) 서울 총회를 통해 대한민국과 세계교회 앞에 '청옥을 편 듯한 미래'를 활짝 열어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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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사람-매일 책 읽는 습관사진 속에 보이는 책은 한강 작가의 소설 《흰 (The Elegy of Whiteness)이다.



이 책은 일반적인 서사 중심의 소설(줄거리가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이 아니라,

'흰색'에 관련된 65개의 짧은 글과 단어들로 이루어진 시적인 소설이다. 그래서 전자책으로 그냥 읽다 보니ㅡㅡㅡ"이게 무슨 이야기지?", "줄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하고 헷갈리거나 난해하게 느껴지게 된다. 나는 이 책을 교보문고와 우리 구에 있는 도서관과 연계한 전자도서관에서 빌린 책이기에 부지런히 읽으면 2-3일에 한 권을 읽을 수 있다. 다만 책 대출이 신간은 거의 없고 지난 것이라 어쩔 수 없이 대기 없이 바로 빌려 읽게 되었다. 항상 신간은 예약을 해야 된다. 그래서 이렇게 오래 좀 되어도 안 읽은 책이기에 이것 부터 읽기로 했다.

이 책을 이해하고 감동을 느끼실 수 있도록 핵심 내용과 감상 포인트를 정리를 해보려고 한다. '흰'은 이 소설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 주제는 '태어나자마자 세상을 떠난 언니(아기)'에 대한 기억과 추모이다.

-책 속, 어머니가 자신을 낳기 전, 임신 7개월 만에 첫 아기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아기는 세상에 나온 지 단 두 시간 만에 숨을 거두었다. 어머니는 죽어가는 아기를 안고 "제발 죽지 마, 부탁이야..."라고 울부짖었다.

배경은 폴란드 바르샤바이며, '나'는 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가 다시 재건된 도시(폴란드 바르샤바)에 머물며, 파괴 속에서도 다시 살아난 도시의 '흰 빛'과 자신의 삶을 오버랩되고 있다. '나'는 세상을 떠난 언니에게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삶, 이 세상을 선물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세상의 수많은 '흰 것들'을 하나씩 적어 내려가기 시작하게 된다.
이 책에 나오는 주요 '흰 것들'의 단어는, 책에 나오는 '흰색'은 단순히 색깔이 아니라, 생명, 죽음, 그리고 애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강배넷저고리 / 배넷저고리'는 어머니가 태어날 아기를 위해 꿰맨 작은 옷, 아기에게 입혀진 처음이자 마지막 '흰 옷'이다. 소금, 눈, 달, 쌀, 흰 나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위태롭고, 순수하며, 금세 사라지거나 부서지기 쉬운 존재들이다. 수건, 붕대는 상처를 감싸고 치유하는 '흰색'이다. 수의(죽은 이에게 입히는 옷)는 생명의 시작(배넷저고리)과 끝(수의)이 모두 '흰색'으로 연결되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내가 여기서 읽고 감동적인 핵심은 어디인가를 생각해 보니, 하나의 시집을 읽듯 마음으로 느껴보는 것 같았고,"만약 내가 태어나지 않고, 그 언니가 살아남았다면?"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 삶과 숨결은, 먼저 떠난 그 작은 생명 덕분이 아닐까?" '나'는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이 순간들이 언니의 몫까지 대신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느끼는 부분이다. 그래서 내가 보는 아름다운 눈, 맑은 빛, 흰 소금, 따뜻한 쌀밥의 감각을 "언니, 당신이 보고 있나요? 이것이 세상이에요" 하며 건네는 마음으로 글을 쓰는 대목이 아름다웠고,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별이었던 아기와의 헤어짐, 그리고 그 슬픔을 안고 나를 낳아준 어머니, 그 덕분에 지금 살아 숨 쉬는 나. 책에 담긴 '흰색'은 차가운 색이 아니라, 상처 입은 영혼을 다정하게 감싸 안아주는 따뜻하고 눈부신 빛이는 것을 자연스럽게 인도해 주니 나에게는 감동이었고, 오래전 아주 오래전 나의 어머니도 동생을 하나 낳으시면서 잃었기 때문에 무척 마음에 와 닿았던 책 중의 하나이고 깊이있게 읽게 되었다.

내가 느낀 것은, 세상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떠난 작은 언니에게, 이 세상의 아름답고 투명한 '흰 빛'들을 모아 바치는 서정적이고 아련한 헌사(獻詞)라는 책으로 느껴졌다. 이 프레임(죽음과 생명, 그리고 언니에게 건네는 마음)을 염두에 두고 읽으니, 하나씩 음미해 보는 느낌이 아주 시적이면서, 단어 하나하나가 훨씬 깊고 먹먹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흰]이 주는 이 책의 감동의 진짜 핵심은 슬픔을 가련하게 추모하는 데 그치지 않고, 죽은 아기의 몫까지 내가 더 단단하고 눈부시게 살아내겠다는 결연한 삶의 의지가 생겼다. 여기 소설 속 떠난 아기가 끝내 보지 못한 이 깨끗하고 흰 세상을 내 눈으로 대신 보고, 그 투명한 빛을 모아 아기의 영혼에 사랑을 보내주고 싶다, 나의 삶도 비로소 구원받는 그 조용하고 격정적인 숭고함이 마음을 깊게 흔들어 주어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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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주후 2026년 9월 20일)
제목: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
-(Faith That Pleases God)”
본분말씀: 히브리서 11:6
찬양인도: 쉐키나(이동선 부목사님), 시온찬양대(4부)
대표기도: 노추찬목사님(1부), 김재원장로님(2부), 김칠복장로님(3부), 윤혁진 안수집사님(4부).
사회: 임병영(1부), 이기호(2부), 장단희(3부), 임상규 부목사님(4부)
헌금찬양: 사랑유스콰이어찬양단(피아노:황나래성도)


설교자: 윤대혁 후임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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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6,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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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 가운데 충만하게 임하게 될 줄 믿습니다. 그 마음이 옆에 분과 이렇게 인사하겠습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인사하겠습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평안하셨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은 이후에, 우리가 교회 생활, 신앙생활, 믿음 생활이 시작되었다고 우리는 말을 합니다. 매 주일 교회 출석하고 또 훈련반에서 또 훈련받고 다락방에 들어가 믿음의 교제를 나누고 또 때에 맞게 또 귀한 자리에서 헌신의 봉사의 시간을 갖습니다. 헌금 생활도 하고 또 기회 있으면 선교도 가고 이 모든 것들을 우리는 신앙생활이 시작되었다. 라고 말하죠. 전에 하지 않았던 관심 없던 것들이 내 안에 큰 관심이 되어서 이제 우리 믿음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믿음 생활, 신앙생활 한다고 말하면 우리 사랑의 교회에서는 제자 훈련을 받고 제자가 되고 제자가를 삼는 그런 그리스도의 온전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삶을 우리 신앙생활로 정의내리지만 일반적으로 말할 때 신앙생활과 믿음 생활은 교회 생활과 많이 우리가 접목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 생활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믿음이 무엇인지, 믿음 생활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는 많은 성경 구절 가운데 오늘 히브리서 11장 6절은 우리에게이 부분을 가르쳐 주고 있는데, 다시 한번 하나님 말씀 봉독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읽습니다. 시작.

*히브리서 11:6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오늘 본문은 이렇게 정의를 내립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전문의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 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는 이 말은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믿음이다. 믿음 생활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 이것이 여러분 믿음 생활,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죠.

예수를 믿기 전에는 나의 기쁨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고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고 내가 시간이 있고 재정이 넉넉하면 내가 원하는데 가서 시간을 보내고 내가 갖고 싶은 것을 사고 사람들에게 나의 만족과 나의 기쁨을 위해서 자랑하며 사는 것, 이것이 우리의 삶의 중심이었는데 예수를 믿든 그 순간부터 이제는 나의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나의 삶이 완전히 바뀌어졌다는 것이죠. 그래서 소요리 문답 1에 보면 이런 질문합니다. 인간이 사람이 사람의 목적이 무엇이냐?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이냐? 물을 때 답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들의 인생의 목적이 처음에는 예수를 믿기 전에는 나의 기쁨이 목적이었는데, 예수를 믿고 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부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기뻐하며 그분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사람이 되는 목적이다. 라는 것이죠. 아이가 태어났을 때는 눈이 보이지 않아서 엄마 아빠를 못 알아봅니다. 그런데 눈이 열리고 엄마 아빠를 알아본 순간, 아이는 방긋 웃으며 엄마 아빠에게 웃음을 보이죠. 그럼 아이가 웃는 모습을 볼 때 그 부모는 너무나 기뻐서 또한 웃습니다. 아이는 자신을 보고 웃는 엄마 아빠를 보면서 더 밝게 웃죠. 이게 신앙이라는 겁니다.

내 기쁨을 살았다가 예수를 한 순간, 그 아이가 부모의 웃는 얼굴을 보며 함께 웃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함께 우리가 기뻐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모습이다. 라는 것이죠. 주님을 알기 전에는 나를 위해서 살았습니다. 근데 주님을 안 순간부터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누가 이렇게 살아야 된다고 말한 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자원해서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 교회에 나오는게 너무나 재밌고 믿는 사람들을 만나 신앙의 나눔을 하는게 너무나 재밌고 성경 읽는게 너무나 즐겁고 또 교회에서 하라는 봉사와 헌신 된 자리에서 기쁨으로 충성되게 헌신하는 모습이 내 삶에 가장 큰 기쁨이 되어지며 우리는 살아가게 되죠. 그래서 주변의 친구들과 지인들이 달라진 내 모습 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도 교회 가냐고,,,

오늘도 교회 가냐고 말합니다. 그래서 비아냥 거리며 이렇게 말해요. “교회 가면 떡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 그때 우리는 할 말이 있습니다. 아니 어떻게 알았냐고, 교회 갔더니 떡이 나오더라. 찬양돼서 떡을 주고 교회 가더니 밥이 나오더라. 포에버에서 김밥을 주는데, 또 교회 왔다. 갔던 거 아니냐고, 교회 갔더니 떡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 어떻게 알았냐고. 교회 갔더니 떡을 주고 밥도 주더라. 이런 이야기를 할 때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기쁨 가운데 살죠. 그래서 우리 오정현 담임 목사님께서 늘 하시는 말씀처럼 ‘알 사람이 없도다’. 세상은 모르는 정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를 다니면서 신앙생활 갖는 그 기쁨이 우리 가운데 있음을 보게 되죠. 오히려 어떨 때는 그 기쁨이 어떨 때 우리에게 근심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교회 나오면 남편은 항상 교회에 나를 내려다 주고 자기는 서초구에서 맛있는 밥을 먹고 예배 끝날 때, 나를 데리러 왔더니 이 남편이 어느 날 예수를 믿은 순간부터 완전히 달라지는 거예요. 교회 나오기 시작하더니 훈련받기 시작하더니 다락방 참여하기 시작하더니, 어떨 때는 이제는 순장이 되어서, 화요일 순장반, 수요일 수요예배, 목요일 사랑의 전도단, 금요일 금요 기도회, 토요일 토비새(토요비전새벽예배), 주일 주일예배,,, 매일 교회 가서 어느 날 그 와이프가 걱정합니다. ‘이러다가 목사 되는 거 아니야?’ 기도해 달라고,,, 우리 남편 목사 되지 않게 해달라고,,, 이렇게 근심 어린 마음을 가질 때가 있죠. 전에는 관심도 없었던 사람이, 예수를 믿은 순간부터 이것이 자기 인생에 가장 큰 기쁨이 되는,,,
여러분,
그렇다면 이 믿음 생활이 즐겁고 좋은 것인데 여러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오늘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크게 세 가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 첫 번째는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믿음은?
I. 첫째,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계신 것과 그를 찾는 자에게 상주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는 믿음이다. 라는 것이죠.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시작이고 기본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면서 이 신앙을 지켜기가 참 어려움을 보게 됩니다. 왜냐면 세상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비아냥거리면서 말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는게 맞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게 맞는가?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당신의 삶에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맞는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너의 삶으로 증명하라고 비아냥거리며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 이런 핑계를 댈 때가 있죠.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데, 하나님은 살아 계셔, 다만 내 삶에 역사하지 않을 뿐이야, 이런 말로 우리는 핑계를 될 때가 있죠.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미션 스쿨을 이제 다니면서 선교부장이 되었습니다. 윤리 선생님이 갑자기 저를 선교부장 나와봐 하면서 강단에 세우셨어요. 저 60명의 학우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이제 기독교에 대해서 궁금한 거 있으면 선교부장에게 물어보라. 라고 한 거예요. 짓궃은 저희 친구들이 나올 질문은 뻔합니다. 첫 번째 질문 이거였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증명해 보이라’ 고, 지금 하나님이 살아 계심이 내 눈에 보이게 한다면 내가 이번 주부터 교회를 다니겠다고 친구들이 말을 합니다. 그때 제가 ‘나를 본 자가 하나님을 본 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말이 생각이 안 났어요. 그 말이, 그리고 그 말을 할 만한 자신감도 없었습니다. 큰일 났다. 싶어서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거였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셨다.’ ‘하나님을 망령되이 여기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반 협박을 했습니다. 또 친구 관계니까,,, 더 이상 할 말이 없으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탄 안 물러가라.’ 이게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답변이었습니다.

여러분, 온 세상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부인합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해요. 창조론을 부인하고 진화론을 주장하는 이유도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부정하겠다는 겁니다. 동성애의 모든 뿌리는 하나님은 틀렸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실수하셨다는 거예요. 성경은 잘못됐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말은 결국에는 하나님을 부인하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주관자인 사탄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싫어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의심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랑의교회 영가족 여러분, 우리가 상황이 어떠하든 우리의 환경이 어떠하든 그거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신 분이심을 믿습니다. 우리 이것을 믿어야 된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말할 때 대표적인 성경의 구절은 열왕기상 18장에 나오는 갈멜산에서 여러분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 850대1, 엘리야 한 명의 선지자와 싸웠던 그 대결의 현장일 겁니다.

이 이 대결의 현장에서 엘리야는 무엇을 가지고 싸웠고, 무엇을 가지고 이 전쟁에 이겼냐면, 오직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싸워 승리했다는 것이죠. 그 선지자들이 세운 그 제단과 엘리야가 세운 제단 앞에 그들이 자신이 믿는 신들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아무리 바알 선지자 그리고 아세라 선지자들 850명이 외쳐 불러도 어떤 것도 나타나지 않았을 때 ,엘리야는 오히려 자신이 세운 제단 위에 ‘물을 부어’라고 말합니다. 한 번이 아니라 세 번을 부어라. 그리고 그 물이 재단에 출렁출렁해서 이 받으시는 불이 임해야 되는데 그러면 마른 장작을 올려야 되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물을 부으라고 했어요. 흥건하게 적셔라. 그 이유는 뭐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그가 믿었기 때문입니다. 믿었으니까, 물을 부으라고 한 거예요. 그 믿음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의 그 믿음이 영적인 승리를 이루어 갔다. 라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끝까지 붙들어야 될 것이 무엇이죠?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흔들리면 모든 것이 다 무너지는 거예요. 8년 전에 기회가 있어서 인도 땅에 선교를 갔습니다. 한 100명, 120명의 20대, 30대들의 목회자가 되겠다고 모인 젊은이들, 신학생들과 함께 목회자 세미나를 했습니다. 여러분, 인도 땅은 처음에 시작할 때 신이 세 개로 시작했습니다. 브라마, 시바, 미슌으로 시작했다가 지금 인도 땅의 신이 무려 3억 3천만 개의 신이 있습니다.

지금도 신성한 어머니의 강이라고 말하는 그 겐지스 강은 세계에서 가장 오염된 강이에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강에 가서 몸을 씻으면 피부병이 낳는다. 그 강에 가서 몸을 씻으면 병이 낳는다. 그 강에 가서 그 오염된 물을 마시면 내 영혼이 깨끗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겐지스 강에 와서 머무시고 그 물을 마십니다. 말도 안 되는 우상이 섬기는 그 땅에 여러분 신이 3억 3천만 개가 있는 그 땅에 20대 30대에 목회자가 되어 모여 있던 그 젊은이들에게 어떤 말을 해 주고 어떤 격리를 해 줘야 이들이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눈에 보이는 현실은 답이 없는 거예요. 어떤 말로 위로해 줄 수 있을까?

하지만 분명히 하나인 것은 그 세상에 많은 우상(偶像) 신(神)이 있다. 할지라도,,, 내가 믿는 하나님이 내가 믿는 하나님이 유일한 하나님이고 내가 믿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이다. 믿음 외에는 이길 수 있는 방법도 이길 수 있는 힘도 없더라는 것이죠.

여러분, 아무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부인할 수 없고 아무리 느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이 살아계심은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들의 삶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우리에게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요한복음 11장 40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함께 읽을까요? 시작.

*요한복음 11:40,
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 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믿어야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고,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어야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내 삶 가운데서 보게 되는 줄 믿습니다.

※신대원 들어가서 조직신학 수업을 듣는데 신론의 과목이었어요. 그 조직신학 교수님께서 수업을 하면서 전도사님들에게 강조하면서 하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전도사님, 성경은 믿음으로 읽어야 됩니다. 성경은 믿음으로 읽어야 됩니다. 성경은 이성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성경은 믿음으로 읽어야 됩니다. 그래야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봅니다.”

이 말씀은 저와 여러분이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 겁니다. 우리가 살면서 여러분의 삶의 현실의 모든 것들을 다. 믿음으로 봐야 믿음으로 봐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우리 삶 가운데 보이게 되는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영가족 여러분,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려고 하신 그 주의 말씀이 살아서 역사하게 되길 주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그래서 믿는 자의 기도인 힘이 있고, 믿는 자의 삶에는 반드시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이 임함을 믿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은 무엇일까요? 두 번째는 하나님 앞에서 오늘을 살아내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은?
II. 둘째, 하나님 앞에서 오늘을 살아내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는다면,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 오늘도 살아가야 된다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는데 어떨 때는 불편하고 불이익이 다가오면 그때부터 마치 하나님이 아니 계신 것처럼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할 때가 있죠. 성경의 말씀이 이런 말씀이 있어요. 사사기 말씀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여호와의 눈 앞에서 악을 행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라는 것이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 앞에서 믿음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닌 다른 길을 우리는 택하며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원하시고 바라시는 바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기 원하시죠. 창세기 17장 1절인데 함께 읽겠습니다.

*창세기 17:1,
..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주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전능하신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너의 말과 너의 행동이 온전해야 된다. 완전해야 된다. 하나님 앞에서 말하고 하나님 앞에서 행동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이것을 우리는 코람데오, 신전주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겁니다. 주님 보시기에 내 말과 행동이 기뻐하실만 한가? 주님 보시게 나의 선택과 나의 일터와 나의 가정이 기뻐하실만 한가? 이것이 하나님 앞에 선 하나님 앞에 살아내는 믿음의 백성의 삶이라는 것이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마치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 계신 것처럼,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할 때가 있어요. 내 자존심 하나 지키겠다고, 양심을 버려가면서 내 이익만을 위해서 믿음과 상관없는 하나님이 앞에 계신데도 불구하고, 온전하지 못한 거짓된 말과 바르지 못한 행동을, 우린 살아갈 때도 있다. 라는 것이죠. 우리가 갖는 하나의 착각이 있습니다. 내가 좋은 교회 다니고 좋은 말씀을 듣고 좋은 믿음의 성도들과 함께 하면 우리의 신앙은 자랄 수 있어요. 그런데 내가 좋은 교회 다닌다고 해서 내가 좋은 말씀을 듣는다고 해서 내가 좋은 사람들과 믿음의 교제를 한다고 해서 내가 그렇다고 좋은 성도가 반드시 되는 것은 아니다. 라는 것이죠.

좋은 교회 다니고 좋은 말씀 듣고 좋은 성도들과 함께 하는 것이 나의 신앙과 별개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자처럼 말하고, 하나님 앞에서 사는 자처럼 행동하고 주님께서 보고 있는 자처럼, 우리는 섬기며 날아가야 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하나님을 기쁘게 하라. 우리 누구를 기쁘게 해야 돼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됩니다. 다. 알면서도 불구하고 사람의 눈치를 보다가 하나님의 시선을 잃어버리는 삶을 우리가 살게 된다는 것이죠. 여러분, 주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오늘도 살아내는 믿음임을 믿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이 믿음의 삶을 걸었던 성도들을 만나게 됩니다.

※2020년도에 코비드가 시작되고 1년 동안 교회를 오픈하지 못하고 다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린 다음에 2021년도가 시작되면서 이제 교회 현장이 오픈됐습니다. 교회가 오픈되고 나서 부분적인 오픈이었지만 그때 제가 섬겼던 교회에서 큰 두 개의 장례가 함께 왔습니다. 한 분의 장례는 98세 된 권사님의 장례였고, 또 한 분의 장례는 그분의 따님인 60대 중반의 그 따님의 장리였습니다. 98세 권사님께서 1년 만에 교회가 오픈되니까? 너무나 즐거운 나머지 교회 오셨다가 다리에 근육이 빠지셨던지 넘어셔서 고관절에 금이 가셨습니다. 그리고 고관절에 이제 수술을 하시게 됐어요. 병원에 입원하다. 보니까? 간호할 사람이 없어서 한국에 있는 따님이 엄마를 간호하겠다고 미국에 오게 됐습니다. 그리고 병원에 들어가서 어머니 권사님의 병원을 간호하다가 그 어머니 권사님과 따님 권사님이 그 병원에서 코비드에 감염이 되셨습니다. 안타깝게도 두 분 다, 폐렴으로 인해서 산소 호흡기를 의지하고 계셨어요. 2주가 흐르는 이후에 98세 된 권사님은 회복하지 못하시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됩니다. 따님 역시도 산소호흡기 의지해서 도움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한국에 있는 따임 권사님의 남편과 또 손주들 아들과 딸이 미국으로 급히 들어왔습니다. 어머니 권사님의 장례를 드릴 때, 따님 권사님의 패는 이미 섬유화돼서 오늘 내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마치 코비드에, 코비드라는 전쟁터에 치루어 지는 장례와 같았어요. 장모님 또 할머니겠죠. 그 어머니 권사님의 장례를 드리면서 아내의 장례를 또한 준비해야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어머니 권사님의 장례를 치르면서 사위분과 그 형제들이 그 조가(弔歌)를 부르는데, 차마 목회자로서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너무나 안타까운 현실이었습니다. 그 사위와 아드님이 이런 찬양을 부릅니다. 슬픔 가운데 부르는 찬양이 이거였습니다. ♬‘내 평생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내 영혼 평안해 평안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어떤 일을 만나도 내 영혼 평안해. 하나님이 우리와 대장 되신 우리 대장 되시니 어떤 적을 만나도 내 영혼 편안해. 이 세상의 심판 때가 와도 내가 주님 품에 있으니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평안해.’ 어머니 권사님을 장례 치르고 와이프가 아내가 오늘 내일 하는 그 가운데서 부른 찬양이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은 평안해. 어떻게 이와 같은 찬양을 부를 수 있을까? 장례를 마치고 그 남편이 병원에 있는 아내를 찾아가서 내가 이런 찬양을 불렀다고 하니까? 아내가 힘없는 팔을 들면서 잘했다고 엄지를 이렇게 들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하루 이틀이 지나지 않아 그 아내 역시도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이런 상황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런 여러분 이런 상황을 겪고 있다면 무슨 말로 여러분 이것을 견뎌낼 수 있을까요? 모든게 다 원망스럽고, 와서 엄마를 간호하라고 한 그 오빠가 너무나 싫을 수도 있고, 누가 누구 때문인 것 같고, 누구 때문에 실수한 것 같고, 내가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원망을 가질 수밖에 없는 그 때에 그 따님의 장례를 치르며 아내의 장례를 치르는 그 가운데서 남편분과 그 아들과 딸이 이런 조가(弔歌)를 부릅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이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불었네.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가 되었고 전날에 한숨 변하여 내 노래가 되었네. 내 주는 자비하셔서 늘 함께 계시고 내 궁핍을 하시고 늘 채워 주시네. 내 주와 맺은 언약은 영 분별하시니 그 나라 가기까지는 늘 보호하시네. 늘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이 찬양을 남편과 자녀인 아들과 딸이 불렀습니다. 그리고 가족이 인사를 나눕니다. 남편 되신 분이 첫 인사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을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시는 사랑하는 어머니를 간호하다가 하나님의 품에 갔으니 이보다 값진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게 그 남편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아들과 딸이 흐르는 눈물을 참으며 이런 고백을 드립니다. 하나님은 항상 옳으십니다.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완전하십니다. 우리는 완전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어머니가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물려 주신 그 믿음을 붙들고, 계속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만을 섬기며 우리는 살아가겠습니다.

이 믿음의 고백을 드립니다. 깨닫는 것은 우리 인생의 슬픔과 아픔과 이해되지 못하는 일을 만날 때 우리가 무엇으로 이것을 이겨낼 수 있을까요? 그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이 이 믿음밖에 없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영가족 여러분,
우리들에게 눈물 날 일이 있고, 우리에게 억울한 일이 있고, 답답한 일이 있고 속상한 일이 있고, 어찌할지 모르는 막막한 순간이 찾아오고 내가 과연 견딜 수 있을까? 이겨낼 수 있을까? 싶은 그 수많은 어려움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때 믿어야 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셀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나는 완전하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걸어가야 될 고백임을 믿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아무리 고난스러워도 우리 세상 앞에 엎드리지 않고 거짓과 타협하지 않고, 우린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오늘도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우리들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이 됨을 믿습니다.

목회를 하면서도 여러분 절대로 목양에 게으를 수 없는 이유는, 주님이 보고 계시기 때문에 게으릴 수 없고 우리가 살아가면서도 우리가 딴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주님이 보고 계시기 때문에 딴 생각할 수 없고, 내 안에 유혹이 찾아오고 진리를 내려놓고 거짓과 타협하고 싶을 때도, 그럴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살아 계실 때문에 보고 있기 때문에 내가 그 길을 택하지 못하고 믿음의 길을 진리의 의 길을 걸어가야 되는 거, 여러분, 이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이 됨을 믿습니다. 아멘, 그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은 무엇일까요? 첫 번째는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는 믿음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 앞에서 오늘을 살아내는 믿음이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끝까지 붙들고 나아가는 믿음입니다. 히브리 11장 6절에 보면 하반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은?
III. 셋째, 하나님을 끝까지 붙들고 나아가는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6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기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은 자기를 찾는 자에게 반드시 하나님은 상을 내려 주신다. 이 믿음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이죠. 그래서 오늘 우리가 모여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이유는, 이 약속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임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린 끝까지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기도의 자리에서야 된다는 것이죠. 이런 말이 있습니다.

2천 년 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은 믿었다. 그 앞에 나아가면 병든 자가 났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오병이어 기적이 나타나는 것을 그 모였던 사람들 다. 믿고 모였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구원자임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고,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를 믿지만 그러나 오늘날의 사람들은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가 주의 얼굴을 구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짖으면, 우리에게 초월적인 신비적인 하나님의 기적과 같은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하나님의 부르짖지 않는다. 여러분, 우리들의 기도는 주를 찾으면 주의 얼굴을 구하면, 주께 기도하면, 상주신 이심을 믿으며 나아가는 자가 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일치 침략기에 있을 때, 이 나라를 살릴 수 있었던 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나라의 해방을 위해서 부르짖는 기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625 동란 때 온 나라가 붉게 물들을 수 있었을 그 위기 가운데서도 공산주의에 넘어가지 않고, 자유민주주의가 세워질 수 있었던 것도 여러분 교회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나라를 위하여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가 부흥하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선교사를 보낼 수 있는 나라가 될 수 있었던 것도 1974년도에 엑스플로 74년에서 여의도 광장에서 6일 동안 무려 665만 명이 모여서 함께 기도했던 외침의 기도가 한국 교회를 부흥하는 교회로 한국 교회에 많은 선교사를 보내는 교회로 설 수 있었다는 것이죠. 포괄적 차별 금지법이 이 땅에 씨앗이 뿌려지고 뿌리를 내리려고 할 때 막을 수 있었던 것은 광화문 광장과 여의도와 시청까지 한국교회 250만 명의 사람들이 오프라인에서 현장에서 220만 온라인에서 130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외쳤던 간절한 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이 나라가 넘어가지 않고 영적으로 무너지지 않고 설 수 있었음을 믿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도 상주신 이심을 믿으며 나아가는 기도를 주님은 기뻐하시고 응답하여 주시는 줄 믿습니다.

엘리야가 3년 6개월 동안 가물었던 이스라엘 땅 가운데 피를 내리게 할 때, 그가 기도하고 나서 그의 종에게 말합니다. 밖에 나가 봐라. 구름이 모였느냐?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구름 한 점 없습니다. 또 가서 기도합니다. 밖에 나가 봐라. 아무것도 없습니다.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일곱 번까지 그는 포기하지 않고 기도합니다. 그가 기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뭐예요? 하나님은 그를 찾는 자에게, 그를 찾는 자에게 반드시 상을 내려 주신다. 이 믿음이 가물었던 이스라엘 땅 가운데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게 하신 은혜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영가족 여러분,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도 상주신 이심을 믿는 자를 기뻐하시는 주님께 날마다 나아가게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역대하 16장 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역대하 16:9,
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를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말이 무슨 뜻이에요? 하나님은 지금도 온 세상을 찾아다니시면서 두루 감찰하시면서 나를 찾는 자, 나 얼굴을 구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실 준비를 하고 계신다. 아멘. 그 은혜가 믿는 우리에게 있게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영가족 여러분,
이 세상에 어떤 어두움이 있어도, 절대로 어두움은 빛을 이기지 못합니다. 새벽을 기도하며 기다리는 자에게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 빛을 막을 수 있는 어둠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으며 이 짙은 어두운 밤을 기도로 기도로 지세운다면 반드시 주님께서 우리에게 승리의 날을 허락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 사랑의 교회가 토비새를 강조하는 이유가 뭔지 아세요? 왜 토비새가 중요할까요? 우리가 토요일 날 모여서 모두가 잠든 시간에 모여서 한국 교회를 기도하고, 이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다음 세대를 위해 기도하면, 열방 위해서 기도하면, 어떤 어둠의 권세가 우리이 나라의 이 민족의 이 교회의 온 열방에 틈타지 못하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모여서 기도해야 되는 거예요. 사랑하는 영가족 여러분, 우리 주님은 지금도 믿음으로 나아가는 자를 하나님을 붙들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자를 기다리고 계시고, 기뻐하시며 응답하기를 원하십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기 원합니다. 사랑하는 영가족 여러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는 겁니다. 그것은 오늘도 하나님 앞에서 살아내는 믿음으로 사는 겁니다. 그것은 오늘도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 믿기에 그를 붙들고 끝까지 나아가는 자에게, 주님은 기뻐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기쁨으로 받아 주시고 영광을 보게 하실 하나님을 날마다. 소망하며 살 수 있는 우리 사랑의 교회 모든 영가족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을 믿게 하시고, 오늘도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시며, 어떤 상황에서도 끝까지 주님을 붙들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믿음을 기쁨으로 받아 주시며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자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릴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요약
오늘 본문과 관련하여 말씀하신 것은
-신앙생활은 나 자신의 만족이 아닌,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삶이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은 크게 세 가지인데,
1.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는 믿음이다. 세상의 의심과 부정 속에서도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야 한다. 살아 계심을 믿고 바라볼 때 삶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보게 된다.
2. 하나님 앞에서 오늘을 살아내는 믿음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며 코람데오(하나님 앞에서)의 자세로 신실하게 사는 삶이다. 세상의 이익이나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바로 서야 한다.
3. 하나님을 끝까지 붙들고 나아가는 믿음이다.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반드시 상 주시는 분임을 믿고, 기도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전심으로 주를 찾고 의지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능력과 은혜를 베푸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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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6년 9월 13일) 로마서 강해 ⑰
제목: “죄(罪)와의 피나는 투쟁(鬪爭)과 고뇌(苦惱)
-(The Fierce Struggle and Anguish Against Sin)”
말씀: 로마서 7:7-25
찬양인도: 쉐키나(이동선부목사님), 시온찬양대(4부)
대표기도: 조미영권사님(4부)
사회: 임상규 부목사님
광고안내 및 기도: 윤대혁 후임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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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7:7-25,
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9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12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1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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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청명한 가을의 문턱의 이 귀한 시간이 주일날, 로마서 17번째 강해(성경 본문의 뜻을 하나하나 풀어서(講) 설명한다(解))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삶의 모든 메마름과 갈증을 채워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메마름을 갖고 살아갑니다. 아마 누가 우리 영혼의 엑스레이를 가지고 영혼의 영혼을 이렇게 촬영할 수 있다면 오늘이 자리에 어떤 분은 지난 한 주간 동안 아주 감사한 마음으로 오신 분도 있을 것이고, 근데 어떤 분들은 너무 피투성이 같은 삶의 현장이 힘들어서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내 삶을 살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오늘 예배의 자리에 온몸으로 오신 그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 모든 분들에게 말씀을 통한 생수가 여러분들에게 길어지기를 바랍니다.

저는 오늘 로마서 7장의 말씀을 본문을 이제 계속 강의를 하고 있는데 자, 먼저 로마서 6장 18절에 있는 내용이 나옵니다. 뭐라 나오냐면 같이 보겠습니다.

*로마서 6:18,
18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죄로부터 해방되어 우리 지난번에 6장에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되어 우리가 정말 신부로서 신랑 되신 예수님과 연합되었다. 이 놀라운 선포를 듣고 은혜를 받았는데, 문제는 오늘 7장 본문 19절에 보면 뭐라고 나오냐면 19절에 시작,

*로마서 7:19,
19 내가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거기에다가 23절은 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함께요.
*로마서 7:23
23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한쪽은 죄에 해방되었다. 이렇게 선언이고 됐는데 또 한쪽은 내가 정말 죄의 법에 사로잡혀 있다. 또 19절에 내가 원하는 바 뭐예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않을 뭐예요? 악을 행하는 도다.

오늘은 말씀에 좀 여러분 깊이 들어가기 때문에 잘 살펴야 되는 것이에요. 어떻게 한 사람이 이렇게 다르게 고백을 할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로마서를 읽는 저희들은 한쪽만 바라보면 안 되고, 복음을 입체적으로 복음을 단면적으로 보면 안 되고, 복음을 평면적으로 보면 안 되고 입체적으로 전체를 보아요. 전체를 무슨 뜻인가 하면 우리의 이 시각이 말씀으로 시각이 신분과 상태를 구별할 수 있어야 돼요. 무슨 말이냐? 로마서 6장에서 우리의 신분이 예수님께 속하게 되어 어떻게 의롭게 되었는지, 나와 있고 로마 7장은 새로운 신분 얻은 사람이라도 현실 속에서 삶 가운데 치열하게 부딪히는 내면의 상태를 말씀하고 있어요. 제가 이렇게 한번 써 봤어요.

“죄의 지배와 죄의 잔존을 구별해야 한다.”
-무슨 뜻인가? 우리는 이미 로마서 6장에서는 죄의 지배권이 깨어져, 그 죄가 우리를 지배할 수 없도록 주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신 줄로 믿습니다. 처리가 되었어요. 그 로마 7장에서 여전히 성도 안에서 활동하는 죄의 잔존(殘存) 세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는 왕좌(王座)에서 쫓겨났지만 아직 전쟁(戰爭)터에서는 물러가지 않았어요. 이런 뜻이에요. 625 때, 우리 9.28 이제 6.25 때 우리 다. 힘들다가 62 6호 인천상륙작전을 통하여 서울이 수복(修復)되었어요. 수복되었는데 서울은 이제 전 수복됐는데 문제는 저 남쪽에 지리산에 뭐가 남아 있는 거예요? 음. 파라티산, 빨지산이 남아 있는 거예요. 이 빨지산이 남아 갖고 준동을 하는 거예요. 이미 전체적으로 수복이 되었는데 이 잔존(殘存) 세력들이 있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런 이유로 로마서 6장, 7장을 평면적으로 읽으면 안 되고 전체를 보는데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우리는 이미'와 '아직'의 긴장 속에서 '지금'의 복음을 읽어야 한다.”
-부사 세 가지 크게 하겠습니다. 시작, 우리는 이미와 아직의 긴장 속에서 지금의 복음을 읽어야 한다. 오늘 계속 기억하십시오. 자, 우리는 다시 첫째 뭐예요? 이미와 그다음에 뭐예요? 아직의 기적 속 긴장 속에서 뭐예요? 지금의 자, 무슨 뜻이 우리는 이미 죄 사함을 받은 줄로 믿습니다. 이미 우리는 의롭다을 받은 줄로 확신합니다.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아 가지고 보혈로하신 예수님께 연합된 줄로 믿습니다. 이미 죄의 짐에서 다시 해방된 줄로 확신합니다.

그런데 아직 우리 속에 죄의 존재가 빨지산처럼 완전히 제거(除去)되지 않고 아직 우리가 영화로운 몸을 입지 않았어요. 그래서 우리는 지금 뭘 해야 되? 지금 성령님을 의지해서 죄와 싸우고 죄와의 피나는 투정을 해야 되는 것이에요. 잔존하는 세력들과 각개의 전투를 벌려야 되는 것이에요.

저는 이제 이 말씀을 전체적으로 쭉 보면서, 본문이 좀 길 길고 쉽지 않은 본문이지만 제가 딱 하나 확인한 거 이거예요. 여러분과 저의 힘으로는 죄를 이길 수가 없어요. 다시요. 우리 실력으로는 죄를 이길 수가 없어요. 우리 힘으로 죄를 이긴다고 하는 그 순간 우리는 종교가 되고 종교인이 되는 것이에요. 우리는 오늘 마이 말씀 속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내 힘으로는 죄를 이길 수가 없지만 성령님을 통하여 지금 말씀하시는 그 음성을 듣기를 소망합니다. 평면적이 안 전체적으로 봐요. 첫 번째 생각할 것은,

I. 숨가쁜 깔딱고개를 넘어야.
-우리 숨 가쁜 우리의 삶의 깔딱고개를 넘어가야 돼요. 이 깔딱고개란 말이 뭔지 제가 이거 이거 이거 표준어인가 하고 제가 살펴보았더니 깔딱고개다. 표준어, 자, 이런 뜻이에요. 설악산에 가면 대청봉이 있고 설악산에 가면 울산바위가 있어요. 울산바위 한번 올라가 보셨어요? 올라가려면 기가 찹니다. 계단을 800 계단을 올라가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깔딱, 깔딱, 깔딱 하다가 올라가는 거예요. 로마서 오늘 7장에 이 깔딱고개를 넘어가야 다음번에 말씀할 로마서 8장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에요.

제가 처음 시작할 때, 로마서의 산에 들어 가십시다.①, 기억나시죠? 로마사의 산에 들어가고 그 산에 있는 수많은 아름다운 나무도 보고 계곡도 보고 돌도 보고 이 물도 흐르는 걸 보고 이렇게 말씀을 드렸는데 이 로마서의 깔딱고개, 우리에게는 무슨 깔딱고개가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가? 8장에 정상이 올라가게 뭐가 기다리고 있는가? 이 죄 문제가 심각(心覺)하다는 거예요. 죄 문제가.

오늘 본문에는 본문에만 죄라는 말이 다섯 번을 나와요. 개혁개정판에 죄냐 죄를 죄가 죄가 죄는 죄가 죄로 죄로 죄느니라 죄느라 죄의 죄의 15번이나 죄가 나와요.

그래서 여기에 이제 죄를 죄에 대해서 뭐라고 대표적으로 말씀하느냐면 8절에 이렇게 나와 있어요.

*로마서 7:8,
7: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
-그리고 또 11절에 보니까? 똑같이 한번,
*로마서 7:11,
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말이 좀 이렇게 한번 딱 보면 와닿지 않는데 7절에 보니까? 그 계명이 뭐냐면
*로마서 7:7,
7 ..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우리가 율법 율법을 통하여 탐내지만 이런 거 있는데 이 계명인데 이 계명을 우리에게 주었는데 이 계명을 우리가 순종하고 할 그게 아니고 우리는 불 순종의 이 죄 성이 있어 가지고 아담과 하와부터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그런데 그게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해 가지고, 그 유혹(誘惑)에 넘어가 버리는 거예요. 심지어 이 죄는 율법(律法)조차도 아주 업유즈 하고 율법조차도 이용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죄가 호시탐탐(虎視眈眈) 우리를 공격하려고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율법 자체는 문제는 아니에요. 죄는 율법을 나쁘게 이용해 가지고 우리 속에 탐심을 일으키고 우리를 속이고, 결국 사망으로 이끌어가는 거에요. 그래서 9절 뒤에 보니까? 읽겠습니다.

*로마서 7:9,
9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그렇다고 나를 죽인 범인이 율법인가? 그건 아니라는 겁니다. 13절에 보니까? 이렇게 나와 있어요.
*로마서 7:13,
1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
-이 내용 자체를 여러분들 보시는데 죄의 잔존 세력 빨치산들이 나를 어렵게 하는데 이 내면의 문제를 가지고 우리 고통을 갖게 하는데, 이제 핵심이 뭐냐면 바울은 자기의 이 죄 문제를 우리 인간의 죄 문제를 외부의 환경이나 무슨 남을 통하여 남의 문제를 통하여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고 바울은 이 죄 문제를 자기 내면의 문제로 자기의 문제로 알았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놀라운 내용이 하나 나와요. 그것이 뭐냐? 바울이 계속해서 1인 칭을 썼어요. 내가 나는 어떻게 되나? 나의 문제는 무엇인가 하는 죄가 15번 나오는데, 나의 문제 남 환경이나 남을 탓하지 아니하고 바울이 나의 문제 1인 칭을 얼마나 썼는가 본문에서 많이 썼어요. 7절부터 25절까지, 나라는 1인 칭, 내가 내가 나는 내가 내가 내 속에 내 육신 뭐 나는 나를 내 자신이 35번을 썼어요.

-좀 많이 쓴 거 같은데 반응도 안 하시네요. 그러니까? 나의 문제를 죄와 나의 문제에 대해서 숨 넘어갈 정도로 깔딱고개로 속사포로 말하고 있는 것이에요.

드디어 자기의 문제를 세 가지를 가지고 설명해요. 자기의 삶의 문제, 내면의 문제, 바울이 체험한 세 가지 고뇌(苦惱)를 얘기하는 거예요.이 고뇌는 아마 신앙생활 깊이 들어간 분들이나 처음 믿는 분들이나 아마 예수님 믿고 변화되고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고백한 분들이라면 이 고는 다 비슷하게 아 여러분 여러분들이 이렇게 뭐라 그럴까요? 동의가 될 거예요. 마음이 같이 아마 이해가 될 거예요. 자 첫 번째 고해가 뭐냐? 15절을 보겠습니다. 함께 보겠습니다.

II. 둘째, 내면의 세 가지 고뇌(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는 고뇌).
*로마서 7:15,
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뭐예요?
○첫째,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는 고뇌(현상).
-내가 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고 미워하는 것을 행한다. 이것은 옳고 그름을 모른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왜 그랬는지, 나 자신도 이해가 안 된다는 거예요. 안 되는 줄 알면서 왜 그랬을까? 청소년들 보고 문제 일으키는 자식들 보고, 너 너 왜 왜 그러니 왜 그러니? 나도 몰라요. BJR이야 배 째라 ㅋㅋㅋ내가 내가 내가 원하는 걸 알면서도, 옳고 그럼을 알면서도 못 하는 거예요. 아마 바울은 이 말씀을 하면서 자기 고뇌 중에 하나가,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심히 다투어서 갈라섰잖아요. 기억나십니까? 그 바나바가 누굽니까? 바울을 인도해 가지고 바울을 이 복음의 역사에 등장시킨 위대한 은인(恩人)이에요. ‘내가 바나바 왜 다투었을까?’ 아마 그렇게 생각했을지 몰라요.


그래서 15절에 첫 번째 고해는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는 고뇌, 두 번째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 가지고 18절에 이렇게 나와. 18절에 같이 보겠습니다.

*로마서 7:18,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둘째, 선을 원하나 행할 능력이 없는 고뇌(원인).
-선을 행하고 싶은 의지는 있지만 내 안에 남아 있는 죄의 잔존 세력 때문에 실행할 능력이 없는 권해요. 끊는 것이 좋은 줄 알면서도 끊지 못하고, 하지 말아야 할 줄 알면서도 반복(反復)하는 것이에요.

베드로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고 어떻게 이겨내려고 그러는데요. 쿨쿨 찼어요. 예수님이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선을 행하고 싶은 의지는 있는데, 남아 있는 잔존 세력 때문에 이 해결이 안 되는 거예요. 세 번째 고뇌가 뭐냐? 21절에 같이 보겠습니다.

*로마서 7:21,
21..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셋째,선을 행하려 할 때 악이 함께 존재하는 고뇌 (본질).
-이거는 이제 영적 전쟁의 본질을 깨닫는 고뇌예요. 여기서 함께 있다는 이 번역된 헬라어는 바로 내 곁에 바짝 붙어 있다. 내 옆에 악이 찰싹 달라붙어 있다는 거예요. 껌딱지처럼 내가 가는 곳마다 악도 동행을 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선을 행하고자 할 때, 조금만 손을 뻗으면 다할 수 있는 그곳에 악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이에요.

마르다가 예수님 모시고 벳세다에서 예수님을 잘 섬기려고 그러는데 보니까? 마리아는 가만히 있는 거예요. ‘저 애는 왜 가만히 있습니까?’ 좋은 일인데도 보니까? 그 뭐라 그럴까? 불평이 나오는 거예요. 좋은 일인데도,,, 2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해요. 우리가 이 땅에서 아무리 거룩해지고 아무리 선하고 아무리 높은 곳에 도달해서 하나님과 깊어진다. 할지라도 우리 속에 여전히 이런 죄 성이 자리잡고 있는 것 알아야 되는데 이런 연약한 속성이 다 우리에게 다. 있는 거예요. 완벽하게 거룩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실수와 허물에 빠지고, 수많은 문제 봉착(逢着)을 하는 거예요. 이런 연약(軟弱)함이 다. 있는 거예요.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어버이 주를 앞에 놓고 제가 장남이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했어요. 야, 이번 어버이의 주 한 주간은 ‘내가 우리 어머니나 아버지가 무슨 말씀을 하든지 내가 다 한번 순종을 해 보자.’ 그건 선한 거죠. 그죠? 무슨 말씀을 그래서 뭐 종 치라면 종 치고, 종 치고, 그다음에 뭐 교회 뭐 뭡니까? 뭐 청소라고 심부름도 말하면 하고 뭐 많은 것들을 이렇게 제가 실천을 했어요. 그리고 기특하게도 동생들과 함께 이번에는 아침 몇 몇 번을 우리 우리가 식사를 우리가 준비하자. 어머니 아버지 위해서 우리가 준비하자. 그래서 초등학교 6학년이 밥을 했어요. 밥할 때 물이 요 만큼 하야 돼요. 요즘은 뭐 물 그 다 밥솥이 다 있지만 옛날에는 딱 이 감으로 잡아야 돼, 제가 장남이었으니까,,, 일주일 내내 제가 부모님을 순종(順從)을 잘했어요. 그리고 아 드디어 주일 예배가 되었어요. 주일 예배가 되어 가지고 아 이제 주일 예배 어버이 주일 날, 제대로 예배드리러 가야 되겠구나, 하면서 이제 뭐 개척 교회였으니까? 세면 바닥에다 돗자리 깔고 예배를 드리는데 가는데 아침에 이제 어머니 어머니의 옷을 주시는데 보니까? 양말을 주셨는데 양말이 구멍 난 양말이야. 그래서 구멍 난 양말이라 할지라도 주셨으니까? 다. 순종하니까 네, 하고 구멍 난 양말을 신었겠어요? 안 신었겠어요? 그 순간 엄마 왜 나한테 이렇게 구멍 난 양말을 주세요? 라고 항의하는 그 순간 내 마음속에 아차, 자 무슨 말을 하느냐? 우리 속에 아무리 잘하고 싶어도 우리 약점들이 다 있다는 것이에요. 우리가 다. 한계가 있다는 것이에요. 이거는 평생을 살아낸 어른들도 마찬가지예요. 교양 있는 지식인도, 신실한 선교사님도, 이런 속성 때문에 속으로 싸우는 거예요.

학식이 있는 자나 없는 자나 다 이런 속성이 다.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21절에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로마서 7:21,
21..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그 내면에서 두 영이 전쟁을 버리고 있는 거예요. 25절 뒤에,,,

*로마서 7:25,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이런 뜻이에요. 한 성도가 오랫동안 충성스럽게 교회를 섬겼어요. 어느 날 자신보다. 늦게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이 사람들 앞에서 더 크게 칭찬받고 중요한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입으로는 겉으로는 그분 보고, 축하합니다. 정말 축하합니다. 말은 하지만 마음속에는 두 개의 목소리가 충돌(衝突)하는 거예요. 속에 남아 있는 죄의 뿌리와 욕망은 이렇게 속삭이는 거예요. ‘왜 나는 안 알아줘?’ 내가 저 사람보다. 더 많이 객관적으로 수고를 했는데, ‘아이 마 치 아쁘라 마’ 어 ‘차라리 그가 실패했으면 더 좋겠다.’ 근데 동시에 또 성령으로 새로워진 속사람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저 사람에게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진심으로 축하하고 싶다. 그의 성공은 나의 실패가 아니고, 그의 성공이 축복이다. 여러분 다른 이 사람의 마음속에 다른 사람을 축복하고 싶어 하면서도 한편으로 시기가 있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로 불평이 있고 겸손하게 섬기고 싶으면서도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 있고, 이런 성향 있죠. 내면의 전쟁이에요. 그래서 항상 제가 말씀드리지만 ‘동’자가 위험한 거예요.

동문(同門), 동창(同昌), 요새는 동생(同生)도 좀 위험하고 제일 위험한 게 동서(同壻)야. 동서(同壻). 다. 이런 이런 동력(同力) 자, 뭐예요? 이 내면의 전쟁이 얼마나 치열(熾熱)한지, 23절에 보니까? 이렇게 나와 있어요. 23절에,

*로마서 7:23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이 싸운다, 사로잡는다는 이 용어 자체가 전쟁 용어예요. 마귀(魔鬼)도 우리에게 전쟁을 거는 거예요. 치열하게. 마귀도 군대를 정렬(整列)시키고 군사 작전에 돌입(突入)하는 것처럼, 그래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내주는 내 속에 있는 죄의 세력이 우리를 무너뜨리고 파멸시키고 낙담시키기 위하여 하나님께 멀어지게 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전열(戰列)을 가다듬고 전쟁(戰爭)을 치르려고 준비(準備)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교회를 오래 다니고, 중직 자이고, 교회 생활 오래 한 분들일수록 정말 조심해야 되는 것이에요. 정말 조심해야 되요. 제가 이제 말씀 여기까지 드렸는데 지금까지 이런 내면의 권의 죄와의 투쟁은 피나는 전쟁이 있다는 것은 이것은 나쁜 게 아니에요. 이게 믿음이 없다는 말도 아니에요. 오히려 제대로 전쟁을 준비하도록 만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은 싸우잖아요. 영적(靈的)으로 죽은 사람에게 싸움이 없어요. 죄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죄를 거스리는 새로운 생명(生命)의 원리(原理)가 들어갔다는 뜻이에요. 죄와의 피너는 투쟁과 고뇌를 한다는 이 사실은 그 사람 안에 죄를 거스리는 새로운 생명의 원리가 들어갔다는 거예요.

*“죄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죄를 거스르는 새로운 생명의 원리가 들어왔다는 뜻이다.”
-주님을 더 닮아가겠다는 이런 새로운 생명의 원리가 들어간 줄 믿습니다. 이 바울의 탄식(歎息)은 성령께서 죄의 무감각 했던 마음을 깨우셨다는 증거예요. 그래서 신앙이 깊어질수록 은혜가 많아도 갈등(葛藤)이 있는 것이고, 신앙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죄와의 충돌(衝突)를 피할 수가 없어요. 신앙이 깊어질수록 죄가 더 많이 발견되는 거예요. 그 이유는 뭐냐? 죄가 더 많이 많아진 게 아니라, 죄가 점점 더 죄답게 보이는 과정(過程)이에요. 이 성화라는 것은 죄가 점점 작게 보이는 과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거룩하심 앞에서 죄가 더 죄게 보이는 과정이에요.
*“성화는 죄가 점점 작게 보이는 과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거룩하심 앞에서 죄가 점점 더 죄답게 보이는 과정이다.”
-그러니까? 성숙(成熟)할수록 더 깊이 자각(自覺)하게 되는 거예요. 성숙할수록 더 죄에 대해서 더 예민해지는 거예요. 아멘입니까? 성숙할수록 우리는 더 큰 소리를 못 치는 거예요. 옛날에는 내가 자신이 있어 가지고 눈빛이 번쩍번쩍 하는 거야. 근데 성숙할수록 내면을 들어볼수록 아 나는 이런 죄성이 있구나. 내 속에서 이것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구나. 이걸 돌아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주님을 닮아가고 온유(溫柔)해지게 되는 거예요. 할렐루야!!~.

자, 이런 뜻이에요. 바울이 처음에 이걸 자기가 내면 자가 갈등(葛藤)하고 막 내가 이렇게 하면서 아, 내가 뭔가 했을 때, 제일 처음에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뭐라고 했냐면, 고전 15장 9절에 이게 주후 55년쯤 됐어요. 55년쯤,
*고린도전서 15:9
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사도 중에 가장 뭐한 자라? 작은 자라. 처음에 받은 은혜 사도 중에 나는 가장 작은 자라. 그런데 5년쯤 지나고 주 60년쯤 되었을 때는, 에베소서 3장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어요.
*에베소서 3:8,
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도 더 작은 나이니라.
-작은 자보다도 더 작은 나라고 더 깊이 들어갔어요. 내면의 이 어려움,이 내면의 이 고뇌를 겪어놓은 바울이, 작은 자, 정도가 아니라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 그다음에 드디어 바울이 마지막에 썼던 디모데전서에 보면 다. 같이 읽겠습니다.
*디모데전서 1: 15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죄인 중에 이거는 거의 5년쯤 AD 한 60 5년쯤, 55년, 60년, 65년, 5년 5년을 10년을 거치면서 작은 자 작은 자 중에 더 작은 자 죄인 중에 내가 괴수(怪獸)라고 사역이 깊어지고 주님의 은혜를 더 많이 알아갈수록 자기의 낮아짐을 고백하고 더 부족함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성도가 성화 될수록 내면의 전쟁이 더 격렬해지는 이유는 처음에는 겉으로 나타난 행동으로만 죄를 보지만, 성숙할수록 죄의 뿌리를 보기 시작하는 거에요. 우리는 오늘이 자리는 제 모습만 본 분이 계시고, 더 성숙할수록 제의 깊은 뿌리를 보고 계시는 분들이 계세요. 이 오늘 이 예배는 아마 죄 뿌리를 더 깊이 보는 분들이 성숙성 많이 계세요. 그래서 이런 뜻이에요. 우리가 분노하고 화를 열 때 겉으로 아 분노하고 화를 죄송합니다. 이게 아니라 그 아래 숨어 있는 자기 중심성, 우리가 열심히 봉사하는데 그 봉사 속에 인정받고 싶어 하는 인정 욕구,. 그리고 남들을 분별하고 남들을 판단할 때 사실은 그 속에 있는 냉소와 교만, 그리고 염려속 염려인데 염려 속에 자리 잡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 성공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욕망, 이런 것들이 다 숨겨진 죄의 뿌리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여러분이 살아가는 동안에 가장 경건한 바울 같은 사람이 이토록 실험했다면 우리도 이런 실험을 하는 것, 내부의 전투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아니다. 어때요? 자연스러운 거예요. 자연스러운 거에요. 여러분, 살다 보면 기가 막힌 일들이 많아요. 딱 보면 나하고 안 맞는 사람들 옆에다가 많이 붙여 놔요. 그 그냥 보기만 해도 은혜가 안 돼. 보기만 해도 케미가 안 맞아, 꼭 옆에 원수 같은 빌런들을 한 명씩 갖다 놓는 거예요. 근데 하나님은 그런 사람 붙여 놓고 우리 속에 죄 성과 죄의 뿌리를 보게 하는 거예요. 자기의 판단, 자기 의로움을 주장한 사실은 그 안속에 그 안속에 있는 죄의 뿌리를 봐야 되는데, 오늘 저는 이런 상황 속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죄의 문제는 내 힘으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는데, 어떻하면 좋을까? 내 힘으로 해결한다는 것 자체가 이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그렇게 하겠다는 종교인들이고, 세상 종교인데 우리는 복음의 신비하는 은혜를 깨달아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님으로 고백하고, 죄에서의 자유를 얻게 하며 보혈의 능력 이걸 우리가 믿는 사람들인데,,,

저는 오늘이 상황 속에서 제 마음에 아 그렇구나, 말씀을 통하여 깨달은 두 가지 진리가 있어요. 돌파구 방법, 브랙드로 하는 방법 첫째 24절에 보니까,
*로마서 24a,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로마서 24b,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 누구도 죄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첫 번째는요. 솔직하게 내이 죄송과 문제를 주님 앞에 고백하는 것이에요. 솔직하게 탄식하는 것이에요. 주님, 특별할 정도로 놀라울 정도로 솔직하고 겸손해야 돼요. 하나님이 죄 문제는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첫 번째, 돌파구, 특별할 정도로 솔직하게 겸손해야,
-나이가 들어도 남들이 볼 때 성숙하다. 그래도,,, 내 죄의 뿌리를 내가 아는 이상 주님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다 바울이 가진 해결책이었어요. 주님 저는 곤고한 사람입니다. 이 사망의 법에서 내가 나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 저는 탄식합니다. 저는 제 힘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한 번씩 제가 말씀드리지만 저 만23살 때 그 당시 우리 교단에서는 가장 큰 규모의 대학부를 제가 맡았어요. 만 24살 때 너무나 대단한 주의 분들이 많지만 나가 그걸 맡고 20대 중반에 나는 청년의 정욕이 없나요? 나는 20대 중반에 약점이 없나요? 토요일 날 하루 종일 아침에 학교 갔다가 토요일 날 토요일 날 리더십 제자 훈련하고 주요일 날 아침에 새벽 4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 종일 예배드리고 다. 겉으로는 멀쩡하게 열심히 하지만, 주중에는 나도 육신의 약점을 갖고 있는 인간이라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자주자주 떼굴떼굴 구르는 거예요. 주님 저는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제임으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에요. 약점이 그대로 있는 거예요. 그런데 지나놓고 지금 다 보면 그때 ‘오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건져내랴’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나. 주님 앞에 솔직히 고백하는 그것이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 주신 은혜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이 되는 것이에요.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이 말씀을 방송으로 듣는 여러분들, 수많은 분들이 오늘이 말씀을 듣는데, 여러분의 이 죄성의 뿌리를 생각하면 여기는 큰 소리 칠 사람 아무도 없기 때문에, 바울이 그랬다면 바울이 죄인 중에 괴구라고 고백했다면 그것도 가장 성숙할 때, 우리는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으니 오로 나는 곤고(困苦)한 사람이로다. 주님 나는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솔직(率直)하게 겸허(謙虛)한 자세로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은 그것 자체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길을 주실 것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죄 문제를 해결 못 한다 사람의 힘으로 죄 문제를 해결하려는 순간 종교가 되고 종교인이 되어 버린다.

-또 하나는 25절에 뭐라고 나와 있냐?
*로마서 7:25a
25a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솔직한 고백과 또한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내 힘으로 결코 해결할 수 없으니 죄 문제는 인간의 힘으로 결코 해결할 수 없으니 내 삶의이 부족한 부분을 주님께 전적으로 위탁하고 주님께 감사할 때 주님이 돌파구(突破口)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랬어. 감사하노니, 감사하노니 그래서 여러분, 죄와의 피나는 투쟁을 위하여 솔직함뿐만 아니라, 이 죄를 이기겠다는 이 첫걸음은 강한 의지나 결심이 아니라 죄를 대적하는 첫 단추는 자신의 모습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에요. 다윗처럼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도다. 솔직함을,,, 바울은 죄를 구원할 능력이 자기에게 없음을 인정하고 누가 나를 건져내라고 탄식하고 그래서 죄와 죄를 이기기 위하여서는,

”죄와의 피나는 싸움은 주먹을 불끈 쥐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인정하고 무릎을 끓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다 "주님, 주님이 아니시면 이겨 낼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인정하고 무릎을 꿇는데 시작하는 거예요. 주님이 아니시면 이겨낼 방법이 없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죄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죄 문제를 해결하는 순간 종교가 되고 종교인이 되어 버리는 것이에요. 우리는 종교인이 아니라 크리스천이에요.

우리는 주님 없으면 못 사는 사람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처절한 고뇌의 현장, 피나는 전쟁의 현장, 적들이 전열을 가다듬고 우리를 공격하는 그런 현장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이것은 일반적인 상상과 반응을 뛰어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죄와의 편안한 투쟁의 아주 중요한 해결 방법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이것이 죄와의 피라는 처절한 투쟁 가운데서 승리하도록 도우시는 결정적인 열쇠가 되는 것이고, 젊은이들 말하면 치트키, 만능 열쇠, 우리가 실패해도 이기게 하는 열쇠인 줄로 믿습니다. 이런 내용은 방법이나 수단이 아니라 인격이에요. 인격,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이것은 인격이에요. 인격, 인격, 그리고 이렇게 감사할 때의 감사는 여러분과 저의 교만(驕慢)과 절망(絶望)을 동시에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내가 이겼을 때 내가 잘해서 이겼다. 라고 생각하는 교만을 이기고 내가 넘어졌을 때 나는 끝났다. 라고 생각하는 절망을 동시에 처리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겼을 때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다고 고백을 하고 넘어졌을 때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전히 나를 붙들고 있다. 라고 고백(告白)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내가 감사(感謝)하리로다.

예수님께 가까이가 와이파이 가까이 가면 이기고, 멀 멀어지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안 되는 거예요. 주님과 가까이 가면 솔직히 가까이 가면이 가까이 가는 강도가 강해지면 이기고 멀어지면 죄 성과 연결되고 멀어지면 데이터 요금은 폭탄 맞고, 마귀의 보이스 피싱에 당할 수가 있고 죄의 놀이가 되고,

죄의 연약한 죄의 뿌리를 보면서 한 30여 년 전에 저에게 놀라운 이걸 이기게 도와줬던 중요한 찬양 있었어요. ~~♬주께서 나를 이끌어 주사 세상의 죄를 이기네,,, 주의 보혈로 나를 씻으사 주 앞에 서게 하소서~~(The Lord leads me forth, overcoming the sins of the world.). !~~~ 세상이 나를 다. 감사하고 죄가 나를 다. 감사하고 있지만 그 주님께 감사하고 fade away!!!(사라지다)~ 내 죄 성을 고백할 때에 다 그것이 물러갈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여러분 다 우리 연약한 자들입니다. 바울조차 이랬는데 우리가 뭐 중불나는 존재라 우리 다 연약한 존재 다 실수할 수 있고, 다 연약할 수 있고 지금도 사람 때문에 갈등하고 있고 지금도 수많은 아픔과 뭐 어떻게 보면 억울함과 상처가 수만 있지만 이걸 주님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기도: 하나님 아버지 나도 어떻게 할 수 없는나 오른 나는 공고한 사람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뿌리는 늘 상처받고 힘든 우리 주님 오늘이 말씀으로 승리의 길을 열어 주신 줄로 믿습니다. 로마서 8장을 앞에 놓고 이 7장에 이 숨 가쁜 고백을 내면의 자아를 투쟁하는 우리의 수많은 갈등을 주님 나는 곤고한 사람입니다. 고백하며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전적 의탁을 통하여 승리하는 온 성도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연약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부족하다고 꺾지 않으시고 오늘 이 순간이 자리까지 불러신 주님 앞에 모든 영광과 감사를 올려 드리며 말씀 앞에 순종하여 모두가 다 바울처럼 주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빚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받들어 간절히 간절히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요약
우리는 이미와 아직의 긴장 속에서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는 '무력함과 곤고함의 고뇌'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오고 오는 죄의 깔딱고개'를 돌파하해야 한다. 우리가 성숙할수록 '더 깊이 숨겨진 죄의 뿌리'를 알아 날마다 '죄악에서 이끌어 내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하며, '교만과 절망'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3 사랑의교회가 '보리떡을 내어드리는 진심-전심- 충심'으로 제111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9.14-18)를 섬길 때, 한국교회가 새 차원으로 비상하기를 간절히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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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6년 9월 6일)
제목: “다시 열정으로(A Return to Passion”
말씀: 사도행전 20:24
찬양인도: 쉐키나(이동선 부목사님), 시온찬양대(4부)
대표기도: 조덕현 안수집사님(4부)
사회: 임상규 부목사님(4부), 임병영(1부), 이기호(2부), 장단희(3부) 부목사님.


설교자: 윤대혁 후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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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24,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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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옆에 분과 인사하시죠. 평안하셨습니까? 인사하겠습니다. 평안하셨습니까? 평안하셨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은 누구신가? 라는 그 질문 앞에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우리는 자주 얘기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신음하는 우리의 기도 소리에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많은 하나님의 좋은 선하신 그 이름을 우린 이야기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 입에 잘 달라붙지 않은 또 다른 하나님에 기억해야 될 성품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열정의 하나님이다’ 라는 겁니다. 이사야서 9장 7절의 말씀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함께 읽겠습니다.


*이사야 9:7,
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하나님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시는 열정의 하나님이죠. 그래서 하나님 우리를 향하여서 하나님께서는 주무시지도 않고 쉬지도 않으신다. 라는 그 열심의 열정의 하나님임을 우리 가운데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성경에 보면은 하나님의 열정의 이야기가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지 창조할 때에도 6일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마지막 날에는 인간을 손으로 직접 부으셔서 생기를 불어 넣으신 다음에 아담이라 하셨던 하나님의 열정의 창조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담이 원치도 않았어요. 달라고 하지도 않았지만 홀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하여서 원하지도 않았는데 사랑하는 아내 하와를 주셨던 하나님의 열정이 창세기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을 보여 주시며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너희 자손 이렇게 많게 할 것이고, 그 약속을 이루어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거라 하시는 하나님의 열심과 열정이 있었습니다. 광야에서도 40년의 시간 동안 하나님은 만남을 보내 주셔서 굶지도 않게 하시고 배고프지도 않게 하셨던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의 열정이 있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이 땅에 보내셔서 온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이루시는 열정이 있었죠. 그래서 성경에는 하나님의 열정, 열심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났던 모든 사람들은 열정의 하나님을 만났기에 열정의 삶을 또한 살아갑니다. 그래서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고, 이렇게 살아야 된다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예수를 만난 순간부터 하나님 만난 순간부터 내 마음 안에 마음이 불처럼 뜨거워지고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서 안 된다. 내가 주의 영광을 살아야 되겠다는 결정과 결심과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들을 우리는 고백하게 됩니다.


노아 역시도 120년 동안 산에 배를 지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던 열정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공양을 뒤로하고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그 열정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예배에 대한 열정이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는 회복을 향한 기도의 열정이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온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재건되길 원하는 민족을 향한 열정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사람의 이 열정은 하나님을 만난 그 순간부터 그 열정을 품게 되죠. 오늘 읽었던 사도행전의 이 본문의 말씀은 사도 바울이 그가 어떻게 삶을 살았는지를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하면서 쓴 구절이기도 한데요. 우리 한번 다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읽겠습니다. 시작.


*사도행전 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 바울은 예수를 다메섹에서 만난 그 순간부터 자신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복음의 사도로 평생을 살고자 하는 자신의 생명이 죽는다 할지라도 막힘 없이 내어 주었던 열정과 열심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영 가족 여러분,
여러분들은 열정의 사람입니까? 아니면 열정을 회복해야 되는 사람이신가요? 이 이 질문 앞에 어떤 분이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저는 지금은 아닌데 왕년에는 내가 왕년에는 대단했습니다. 그 왕년에 그 대단했을 때, 목사님 저 만나셨어야 되는데 이렇게 얘기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갈렙은 그가 인생을 이렇게 고백하잖아요. 그때나 40년이나 이때나 85세가 되었을 때나 내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왜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왕년에 그때는 이런 이야기를 할까요? 왜 우리가 지금 열정을 회복해야 되는 상태가 된 걸까요?


제가 전도사 시절에 제 마음에 참 흡족한 때가 언제였냐면 그때는 타고 다니는 그 차에 기름이 만땅이었을 때 정말 만족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냥 마음이 밥을 안 먹어도 뭔가 배부른 거예요. 그리고 더운 날에는 에어컨을 시원하게 켤 수 있고 또 추운 날에는 히터를 빵빵하게 틀 수 있고 어디를 가든 하나도 두렵지 않 않았습니다. 길을 잘못 들어가든 아니면 내가 가야 될 길을 놓치든 할 것 없이 헤매인다 할지라도 하나도 어려움이 되지 않았어요. 그 이유는 내 차에 기름이 만땅이라는 것. 근데 어느 날 기름이 앵꼬가 되어서 이제 기름을 넣어 달라는 빨간색 그 등이 켜지는 딱 순간부터 마음이 긴장감이 찾아옵니다. 빨간 신호등에 차가 멈추면 마음이 초조해지는 거예요. 가야 될 길을 놓쳐서 길을 잃어버리면 그때부턴 패닉의 혼란에 빠집니다. 더워도 에어컨을 켤 수 없고 추워도 히터를 틀 수 없고 심지어는 라디오도 켜지 못해서 운전할 때, 마음 안에 계속 이런 생각을 반복합니다. 다시는 운전하지 말자. 다시는 운전하지 말자. 다시는 운전하지 말자.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영적인 삶의 연료 탱크가 고갈되기 시작하면 그때부턴 아무것도 하기 싫은 거예요. 그냥 하고 싶은 생각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들의 인생의 영적인 연료 탱크를 비게 만든 사건은 무엇 때문에, 우리가 영적으로 이렇게 식어지는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일까요?


자, 이렇게 세 가지를 나눈다면 첫 번째 열정이 식는 이후 첫 번째는 여러분 그것은 여러분 죄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었던 열정, 우리 안에 있던 소망, 우리 안에 있던 그 꿈과 그 기대가 죄를 지은 순간부터 그 열정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죠.


◎왜 열정이 사라지는가?
I. 첫 번째는, 죄(罪)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은 하나님 앞에 사명을 받았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이 충만하여 다스리라는 그 사명을 받았는데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순간부터 그들은 잎을 가져다가 몸을 가리고 숨어 버렸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여러분 잠수를 탔다는 겁니다. 이렇게 초라한 인생, 사명이 있었던 인생이 뜨거웠던 인생이 하나님 앞에 열심을 다해 살았던 인생이 한 순간에 하나님 앞에 숨어 버리는 잠수한 인생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그들이 지었던 여러분 죄 때문입니다.


여러분 죄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라지게 만듭니다. 그리고 죄는 하나님 멀어지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를 다 막아 버리죠. 마치 구멍 난 항아리처럼 아무리 부어도 부어도 채워지지 않아서 메마른 심령으로 살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 바로 죄다. 라는 것이죠. 여러분, 하나님의 예배 열정이 있었던 그 다윗은 그가 범죄하고 나서 시편 51편에 그가 잃어버린 것을 회복시켜 달라고 죄를 통하여 잃어버린 것을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하는 그 구절이 시편 51편의 구절인데, 그는 이것을 회복시켜 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주의 성신을 내게 거두지 마옵소서. 하나님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주옵소서. 하나님 내 입술의 찬양을 다시 열어 주옵소서.”


여러분, 죄로 인하여 잃어버린 걸 말합니다. 뭘 잃어버렸다고요? 성령 충만함을 잃어버렸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그 임재를 잃어버려서 그 마음의 담대함과 자신감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죄로 인하여 구원의 즐거움을 잃어버렸습니다. 기쁨이 사라졌어요. 감사가 사라졌습니다. 즐거움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죄로 인하여 또한 노래가 사라졌어요. 찬양이 멈추기 시작했습니다.이 모든 잃어버린 그 열정을 씌워 버린 그 이유가 어디였습니까? 바로 다윗이 지었던 죄로 인하여 그는 그 열정과 모든 기쁨과 감사가 사라져 버린 것이죠. 두 번째 왜 열정이 식어져 버릴까요? 첫 번째는 죄입니다. 두 번째는 허무주의입니다.


◎왜 열정이 사라지는가?
II. 두 번째는, 허무주의(虛無主義)입니다.
-모든 것이 하기 싫어져요. 이 말은 뭐냐면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한들, 내가 이렇게 기도한들, 최선을 다한들, 열심히 순종하고 산들 뭐가 달라지겠는가? 이 이 허무주의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이 허무주의는 이것이 팽찬 때가 언제였냐면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2차 세계전이 끝난 다음에 황폐해 버린 세상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질문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데 이와 같은 전쟁의 아픔이 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하나님이 만드신 이 아름다운 세상을 이렇게 황무케 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과연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이 하나님에 대한 의심(疑心)을 갖기 시작하면서 사람들 마음 안에 허무주의가 들어왔습니다. 믿는 우리도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게 맞는가? 하나님이 역사하시는게 맞는가?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오시는게 맞는가? 그렇다면 왜 나의 인생은 여전히 변하지 않고 쳇바퀴 돌듯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인가?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는가? 이와 같은 의심의 마음이 들 때 내 안에 있는 불탔던 열정이 식어지기 시작한다. 라는 것이죠. 세 번째 왜 열정이 식어질까요? 세 번째는 비난하는 말들입니다.


◎왜 열정이 사라지는가?
III. 세 번째는, 비난하는 말들입니다.
-은혜받고 열심히 봉사했습니다. 훈련받았습니다. 또 다락방에 들어가서 사역에 들어가서 그리고 또 순장으로 서임받고 또 직분자가 되어서 너무나 재밌게 즐겁게 신앙생활하고 있는데, 갑자기 나에 대한 이상한 이야기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이런 이야기였어요. 저분 이상한 것 같아요. 뭐가 이상한데요? 그냥 이상합니다. 저분이 예수 믿기 전에 이래 때문에요. 저래 때문에요. 지금 저렇게 열심히 하는 이유가 다 이유가 있대요. 순장되려고 뭐 되려고 이런 얘기 할 때마다,,, 내 마음 안에 식어지는 마음이 생기는 거예요. 또 나름 순장이 되어서 열심히, 열심히 또 이제 복습을 하고 순장반에 또 담임 목사님의 또 말씀도 듣고, 또 예습도 하고, 또 복습도 하고, 강의도 또 계속 반복해서 듣고 실습도 한다고 인형을 세워 놓고 ‘여기다,, 김집사님 최집사님’ 붙여 놓고 다 실습까지 해서 열심히 지난 봄을 했는데, 가을 텀이 시작됐는데 이상한 얘기가 들립니다. ‘목사님 저 지난 저 다락방에서 봄 때 아무것도 배운게 없어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락방 바꿔 달라는 이야기들을 때 순정으로서 내가 더 이상 하지 말아야 되겠다. 못 해 먹겠다. 라는 그 생각을 가질 때가 있죠. 수많은 비난(非難)과 비방(誹謗)의 말들이 내 신앙의 불을 꺼트릴 때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열정이 왜 사라지느냐가 마지막은 내 삶에 동역자가 없는 외로움입니다.


◎왜 열정이 사라지는가?
Ⅳ. 네 번째는, 내 삶에 동역자가 없는 외로움입니다.
-마음을 기댈 사람이 없고, 그리고 기도 제목을 나눌 사람이 없고, 나를 위하여 눈물로 눈물로 함께 해 줄 사람이 없다는 그 순간이 있을 때, 여러분 우리는 탈진에 빠질 때가 있어요. 침체(沈滯)에 빠지죠.


여러분, 하나님의 기적을 행했던 그 엘리야 역시도 놀라운 기적을 행했지만 그가 기적을 행했는데도 불구하고 아합왕과 이세벨 그 사람이 하나도 변하지 않을 것 같아 왔던 낙심마 그 이세벨이 내가 엘리야를 반드시 죽이겠다고 말하는 그 비난의 말을 들을 때 침체가 찾아왔어요. 근데 문제는 나와 함께 이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마음이 생겼을 때, 여러분 엘리야에게 찾아왔던 영적인 침체, 여러분 식어진 열정이 있었다는 것이죠. 이와 같이 여러분 죄와, 허무주의와, 비난의 말들과, 동역자가 없다, 는 것이 우리의 열정을 식어지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다시 우리 열정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는 영적인 열정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크게 세 가지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첫 번째 다시 열정으로 가라면,,, 첫 번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반드시 제일 먼저 회복하셔야 합니다.


○ 다시 열정으로 가려면?
①첫째,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받았던 그 은혜가 주님께서 부으신 은혜가 우리가 죄를 지은 순간부터 그 은혜의 통로가 다 깨어지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은 이런 말을 그랬습니다. 여러분, 고린도후서 11장 2절인데 함께 읽을까요? 시작.


*고린도후서 11:2
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
-내가 하나님의 열심이, 내게 부어 주시는 열심으로, 내게 주시는 은혜의 힘 입어서 내가 그 일을 감당하는데 하나님의 은혜의 파이프가 끊기는 죄가 들어오기 시작하면 받을 수 있는 완전히 깨어져 버린 항아리기 때문에 받을 능력도 없고 담아낼 수 있는 힘이 없으니 우리에게 열정이 식어질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요. 제일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은혜의 파이프를 활짝 열어야 되는데, 그것이 뭐냐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된다는 것이죠.


이 이 열정이란 이 단어가 여러분 라틴어로 이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부어진다. 그니까? 열정은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거예요.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의 하나님으로부터 그 힘과 능력과 지혜가 부어져서 감당해 나가는 것, 이것이 열정인데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제일 먼저 회복해야 된다는 것이죠. 열정은 각오도 결단도 아닙니다. 열정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거라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 15장 4절 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요한복음 15:4~5,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나를 떠나서는 주님과 멀어져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우리는 하나님과의 여러분 회복된 관계 가운데 있을 때 열정이 회복되는 것이죠. 다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 들어가야 됩니다.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거룩한 신부가 되어서, 사랑의 친밀한 교제(交際)에 들어갈 때, 우리 안에 다시 열정(熱情)이 시작되는 것이죠.


지난주 오정현 다임 목사님께서 여러분 신랑 되신 주님과 결혼한 신부 된 이야기를 나누시며 우리들의 인생은 사랑 우선주의(優先主義)가 되어야 된다. 말씀 기억하시죠? 그래서 목사님께서 지난 20전 24년에 자신의 목회를 이와 같이 단장(短章)하셨습니다. 나는 24년의 목회를 24개월의 시간처럼 보낼 수 있었다. 기억하십니까?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제가 그 말씀을 듣고 얼마나 얼마나 회개(悔改)한지 모릅니다. 목사님 24년의 목회를 24개월 같았는데 나는 지난 3개월의 목회를 왜 3년이라고 말했을까? 왜 내가 3년이라고 말했을까? 그래서 앞으로 3일이라고 말하려고 지금 마음에 먹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영 가족 여러분,
하나님의 열정은 이와 같은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지면 지치지 않습니다. 머물지 않습니다. 그 힘으로 감당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로마서 여러분 8장 26절의 말씀에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나의 부족함을 나의 연약함을 성령 하나님은 반드시 도와주셔서 감당하게 하시고 이기게 하시고 승리케 하여 주시는 줄 믿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주님과의 사랑의 인격적인 교재가 회복돼야 되는 거예요.


이미 목회할 때 청년 이미 목회를 10년 했습니다. 뭐 한국 청년 사역도 마찬가지겠지만 이민교회 청년 사역도 그 목회자가 가정을 오픈해서 청년들을 많이 초대하고 또 음식을 대접하는 이 일들이 참 많이 이루어집니다. 남과주 사랑의 교회 부목사 시절에 청년부가 어려워졌다는 얘기 듣고 교회가 저보고 이제 청년부를 맡아 달라고 어 하셔서 청년부를 다시 일으켜야 되는 그 사명과 비전으로 청년부에 이제 담당 목사가 되어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딱 가 봤더니 청년들이 많이 지쳐 있고 위로 위로가 필요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아내에게 앞으로 우리가 청년들을 위로하고 회복시키기 위해서 아내의 허락하에 청년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음식을 나눠 주고, 또 베풀어 주고 함께 기도하자는 시간을 저는 아내의 기쁨의 허락 가운데 저는 이걸 시작을 했습니다.


한 7월 8월 동안 한 20개 팀, 한 250에서 300명이 이제 저희 집에 월요일, 목요일, 토요일 이렇게 와야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저 아내의 기쁨의 허락 가운데 여러분 시작을 했습니다. 근데 한 열개 팀 11개 팀 반환점을 돌았을 때 인가요? 어 그날도 청년들이 오는 날이었는데 아내가 음식 이렇게 준비하는 중, 칼로 이렇게 음식을 썰다가 갑자기 칼을 내려놓고, 저를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하는 거였습니다. “좋니? 좋아 그러더라고요.” 너무나 미안했습니다. ㅋㅋ~~ 그래서 그날 청년들이 오는 날이니까? 또 이제 집을 청소를 하고 청년을 맞이해서 음식을 나누고, 또 기도 제목 나누고, 그다음에 한 10시 반 되었을 때 빨리 가라 가면서 청년들을 이렇게 보냈어요. 근데 치우겠다는 청년들도 이제 빨리 가라고 이제 주차 빨리 차를 빼야 되니까? 이게 보냈는데 그 안 가도 되는 집에도 가까운 형제도 같이 가서 이렇게 마중한 다음에 이제 방에 집에 딱 들어오니까? 거실에는 이제 먹다 남은 음식물들이 있고, 또 주방에는 해야 될 설거지가 있는데, 아내가 너무나 지쳤던지 소파에 누워서 이제 지쳐서 잠이 들은 겁니다. 가까이 갔더니 아내가 여기 자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아내를 깨웠습니다. 너무나 피곤했던지 깨우기에도 아내가 일어나지 않는 거예요. 근데 제가 그때 아내를 이렇게 안아서 이제 방으로 가려고 했는데 어 용기가 나지 않아서 못 했습니다. 그래서 아내를 끝까지 깨웠습니다. 끝까지 깨워서 끝까지 깨워서 자기야, 오늘 우리 이거 정리 이거 내일 아침에 하고, 오늘은 그냥 빨리 가라고 끝까지 깨워서 방에다. 누고 저는 옆에 이제 누워 있는데, 마음 안에 화가 이게 화가 올라오는 거예요. 이 청년들, 이 청년들 막 분노를 참을 수가 없어서 밤을 새고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가지고 제가 새벽 기도를 갔습니다.


제가 새벽 기도를 간 거는 그날 아침에 치우기 싫어서 간 건 아니었습니다. 그냥 진짜 기도하려고 갔을 뿐이에요. 그래서 이제 갔는데 마음 안에 하나님 더 못 하겠습니다. 나의 청년 사역, 정말 교회가 보내서 갔는데 나 도저히 못 하겠다고 막 이런 마음 있는데 하나님 앞에 가면 하나님께 저희 마음 만져 주시잖아요. 제 마음 만져 주시기 시작하는 거예요. 기도가 바뀌었습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주님 도와주세요. 주님 도와주세요. 그때 생각났던 찬양이 이런 찬양이었습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주의 사랑 주의 능력 내게 부어 주소서. 주의 사랑 주의 능력 내게 부어 주소서.♪~~
아시는 분도 있을 겁니다. 이런 노래인데요. 주의 사랑, 주의 능력 내게 부어 주소서. 이 이 찬양을 한 30분, 수십 번을 계속 반복해서 불렀어요. 그런데요. 제 안에서 뭔가 이렇게 차가 올라오는 게 있는 거예요. 다시 기쁨이 올라오고, 감사가 올라오고 즐거움이 임하고 꽉 채워진 참 하나님으로부터 부음 받은 그 새 힘과 새 은혜가 저한테 가득 차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아침이 이제 금요일이었는데 금요일 날 금요기도가 있었거든요. 금요. 기도를 이제 준비하고 이제 미리 나가서 금요일 기도 오는 청년들 가운데 어제 왔던 목요일 날 왔던 그 청년들이 옵니다. 근데 그 미웠던 마음은 온데 간데 없고, 오면 오자 멀리서 반가 인사하면서 어제 우리 집에 와서 너무나 고마웠어요. 너무나 고마웠어요. 얼마나 내가 기쁜지 몰라요. 우리 집에 냉장고는 너희 집에 냉장고라고 생각하면 언제든지 오세요. 이러고 있는 제 모습을 보기 시작했어요. 한 순간에 달라져 있는 제 모습 봤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그 은혜의 자리를 지키면 그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감당할 수 있는 힘뿐만 아니라, 넘치는 은혜와 능력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시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가 그 자리에 떠나면 안 되는 거예요. 날마다 거룩한 주의 예배이 자리를 반드시 목숨 걸고 지켜야 되는 줄 믿습니다.


토비새의 은혜에 나아가서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시고, 내 심령에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 주시는 그 은혜를 사모하며 나와야 되는 거예요. 훈련반에 나와야 되는 거예요. 말씀 앞에서야 되는 거예요. 기도의 자리를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 내게 은혜 주시옵소서. 라는 마음으로 그 자리를 지켜갈 때, 하나님의 관계 회복을 통해서 우리를 다시 열정의 사람으로 바뀌시는 그 은혜가 저와 여러분 삶 가운데 반드시 임하게 될 줄 믿습니다. 두 번째 우리가 어떻게 해야 다시 열정으로 살게 될까요? 두 번째는 표대를 향하여 우리가 달려가야 합니다.


○ 다시 열정으로 가려면?
②둘째, 풋대를 향하여 달려가야 합니다
-자,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자연스럽게 우리 안에 사명이 시작되는데, 꿈을 꾸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저 이렇게 살기 원합니다. 내 인생의 비전을, 내 인생의 꿈을 여기에 드리며 내가 주님 앞에 하나님께는 전심이요. 사람에게는 진심이요. 그리고 하나님께 맡기신 사명과 사역에는 우리가 충심을 다하겠다는 그 마음이 일어나기 시작하는데요.


여러분, 그러나 하지만 그런 일을 감당할 때마다. 우리를 가로막는 많은 일들이 생깁니다. 우리에게 사명이 있는데 그 사명대로 걷지 못하게 하는 온갖 비난들과 어려움들과 핍박들이 우리에게 찾아올 때가 있어요. 사도 바울 역시도 복음을 전하고 그 사명의 길을 걷는데 복음을 전할 때마다, 사도 바울이 과거에 지었던 그의 잘못들을 사람들이 낱낱이 이야기하며, 그는 사도가 될 자격이 없다. 라고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복음을 들어서 고침 받은 사람들이 이제 배신(背信)해서 반대로 사대 사도 바울을 핍박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복음을 전해서 세웠던 교회가 한 순간에 영지주의 이단 사상이 들어와서 교회가 혼미게 되는 일들을 그가 맞이했을 때, 마음 안에 이게 말이 된다는 말인가? 내가 복음을 전한들, 내가 열심히 한들, 이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라는 찾아오는 실패감과 낙심의 마음이 그에게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도 불구하고요. 사도 바울이 어떻게 이겨내냐면 이렇게 고백합니다. 자, 13절의 말씀인데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빌립보서 3:13,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뭘 말하는 거예요? 내 삶에 있었던 나를 가로막고 나를 붙잡고 있는 수많은 많은 이들이 내 앞에 있었지만 그것을 난 다 잊어버리고, 기억하지 않고, 앞에 있는 것을 나는 잡으려고 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14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빌립보서 3:14,
4 풋대를 항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어디에 포커스 한 거예요? 내가 표대를 향하여 나를 부르신 그 부르심을 향하여 나는 오늘도 오늘도 달려가겠다. 이것이 다시 열정으로 사는 힘이었다는 것이죠.


사랑하는 영가족 여러분,
우리가 반드시 믿음으로 살고, 의을 구하고 살고 거짓과 싸우고, 악한 것과 싸울 때, 찾아오는 마음이 있어요. 이렇게 열심히 한들 이렇게 수고한들 뭐가 달라지겠는가? 뭐가 바뀌겠는가? 나만 손해 보는 거 아닌가? 이런 마음이 들 때 그 지나왔던 모든 것들을 다 뒤로하고 우리가 앞에 계신 주님, 의에 굶주리고 의를 위해 싸웠던 죄와 싸웠던 복음을 위해서 걸었던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위하여 그분을 표대로 삼아 살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후배 교역자들에게 이런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제 50대 초반이 되니깐 저도 제 후배 또 부교역자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고충을 이렇게들을 때가 있어요. 목회하다 보면 왜 힘든 일이 없겠습니까? 왜 어려운 일이 없겠습니까? 왜 오해받고 왜 손가락질 받고 그런 일이 없겠어요?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 부목사님들 역시도 그런 일을 겪을 때, 또 후배 목사님들이 와서 이렇게 말해요. 목사님, 저 더 이상 못 하겠습니다. 저 목회 안 하고 그냥 딴 일 하고 싶어요. 아내도 힘들고 아이도 힘들고 인생도 어렵고 그냥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이 있는데, 꼭 목회 안 하고 그냥 세상 일 하면서 하나님의 기쁨에 일을 감당하며 살게요. 라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힘들어하는 많은 부목사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제가 이런 얘기를 해 줍니다.


우리가 목회하면서 이런 오해가 있을 거라는 거, 이런 어려움이 있을 거라는 거, 이런 환난과 고난이 있을 거라는 거 우리가 모르고 이 자리에 온 거 아니지 않냐, 복음 위해서 살다 보면 목회 길를 걷다 보면 오해도 받고 핍박도 받고 그리고 손가락질도 당하고 힘든 일 겪는다는 거 다 알고 오지 않았느냐? 다 알고 왔는데 불구 왜 지금까지 다 알고 왔는데 왜 이제 와서 딴 소리 하냐고,,, 우리 다. 알고 왔다고 모르고 오지 않았다고 다 알고 왔잖아,,,


여러분이 이야기는 우리들의 신앙도 마찬가지예요. 믿음의 길을 거는데 말씀으로 사는데 핍박(逼迫)이 있습니다. 어려움이 있습니다. 환난(患難)이 있습니다. 방해(妨害)를 합니다. 왜 너만 그렇게 사냐고 손가락질도 합니다. 그런데 이미 우리는 우리가 믿음대로 살다 보면, 죄와 싸우다 보면, 거짓된 것과 싸우다 보면, 말씀대로 살다 보면, 하나님의 나라 의를 구하다 보면, 세상에 핍박과 환난이 있다는 것 우리가 다 알고 있잖아요. 여러분 안 걷겠습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어요. 그런 일이 있어도 그런 핍박이 있어도 나는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제자의 길을 나는 끝까지 걷겠습니다. 우리는 그 표대를 향하여 살아갈 때, 다시 주님께서 우리를 열정의 사람으로 바꾸시는 그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게 되는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열정으로 살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될까요? 자, 첫 번째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돼야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표대를 향하여 달려가야 됩니다. 마지막으로 동역자를 만나야 되고 우리가 동역자가 되어져야 됩니다.


○ 다시 열정으로 가려면?
③셋째, 동역자를 만나고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의 선한 동역자들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신앙을 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해야 된다는 것이죠. 함께 격려하고, 함께 기도해 주고, 함께 믿음의 길을 걷는 믿음의 동역자들이 우리 주변에 있어야 되고 우리도 그와 같은 사람이 돼야 된다는 거예요. 어찌 보면 내가 왜 영적으로 잘하지 않을까? 남에게 영적으로 날마다 낙심과 또 침체 가운데 식어진 신앙으로 살까? 살펴보면 여러분 안에 여러분 믿음의 동역자가 없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다락방에 속하지 않아서 홀로 교회를 왔다갔다 하다 보니 내 믿음이 자지 않고 뜨거워지지 않고 오히려 식어져 버리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다. 라는 것이죠. 사도 바울이 1차 전도 여행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2차 전도여행을 떠날 때 마가를 데리고 가냐, 데리고 가지 않느냐의 문제로 1차 전도 여행과 함께 갔던 바나바와 다투게 됐습니다. 이 다툼은 초대교회가 시끄러웠던 소돔과 같은 다툼이었다고 말하고 있어요. 당시 바나바는 초대교회의 큰 어른이었습니다. 반면에 사도 바울은 그 예수님을 부인하고 교회를 핍박하다가 온 사도였기 때문에, 그를 해하고자 하는 사람이 초대교회에 여전히 있었어요. 그렇다 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다 이런 다툼의 문제 앞에서 다 바나바의 편을 듣는 것 같은 거예요.


사도 바울이 홀로 남겨진 것 같은데, 2차 전도 여행을 떠났을 때, 그를 따랐던 사람이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실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근데 그 2차 전도 여행은 외로움 가운데 있었던 그 사도 바울의 실라가 있었지만 2차 전도 여행 때 사도 바울은 2차 전도 여행을 통해서 수많은 믿음의 동역자들을 만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2차 전도여행 때 빌립보에서, 그는 평생 동역 자된 ‘루디아(Lydia)’ 라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2차 전도에서 루스드라 라는 곳에서 그는 ‘디모데’라는 제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2차 전도 여행 때, 육체에 가시가 있어서 복음을 더 이상 전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을 때 그를 옆에서 병을 살펴주는 주치의와 같은 ‘누가’라는 사람을 그는 만나게 돼요. 그 동역자가 있었기 때문에 여러분 사도 바울은 2차 전도 여행을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가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디모데를 만나서 너무나 놀라운 배움의 감사의 시간을 보내게 돼요. 왜냐면 여러분 디모데는 그의 어머니가 유대 사람이고, 그의 아버지가 헬라 사람인데, 그 디모데를 보니까? 너무 목회를 너무나 잘한 겁니다. 그의 모습을 통해서 여러분 사도 바울이 너무나 귀한 거를 배워요. 그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런 고백하시죠?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처럼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이와 같은 엄청난 고백이 누구를 통해서 영향받았을까요? 그의 동역자였던 디모데를 통해서 그는 배웠다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들의 삶에 이와 같은 동역자가 있어야 우리는 끝까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의 길을 완주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왜 시어졌는가? 왜 내 신앙이 잘하지 않는가? 어찌 보면 교회 왔는데 혼자 왔다가 혼자 가는 신앙이라면, 신앙이 식어질 수밖에 없어요. 반드시 여러분 다락방에 들어가서 순장님들과 또 다락방 순원들과 함께 말씀을 나누고 함께 기도 제목을 나누고 함께 울어주고 함께 울어줄 수 있는 그 믿음의 공동체를 동역자를 만나고, 동역자가 되어주는 그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사랑의 교회에는 서로에게 정말 많은 칭찬과 격려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지사님 때문에 우리 교회가 행복해졌습니다. 권사님 때문에 제가 행복합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우리가 서로 격려하고 아름답게 믿음의 길을 뜨겁게 끝까지 할 수 있는 그런 교회로 함께 세워가게 되기를 간절히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최근에 제가 이런 고백을 합니다. 사랑의 교회에서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제가 제일 행복하지 않을까? 아, 이런 고백을 늘 하게 되는데 왜냐면 오정현 담임 목사님의 늘 따뜻한 격려와 사랑과 또 가르쳐 주시는 귀한 배움이 있고, 또 사랑교 영 가족분들이 만날 때마다. 좋아해 주시고 칭찬해 주시고, 사진 찍자 하시고 막 그러니까요. ㅋㅋㅋ ~


제 안에 막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는 거예요. 잘하고 싶다. 잘하고 싶다. 칭찬이 있으니까. 요즘에 저희 아내가 이런 얘기를 많이 합니다. ‘자기는 왜 교회 가면 집에 안 와요? 왜 집에 올 생각을 하네요?’ 뭐 이런 얘기를 왔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여러분, 누군가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면 함께 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다시 용기를 내서 우리가 믿음의 길을 걷게 되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도 그가 열정 있게 사역하셨던 그 힘은 날마다.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삶이 있었습니다. 병든 자가 오고 눈먼 자가 왔을 때 하늘을 우러러서 하나님을 바라보시며 기도하고, 그 일을 감당하셨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었어요. 또 예수님은 또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핍박과 방해와 공작(工作)이 있다 할지라도,,, 멈추지 않아야 되는 십자가(十字架)의 사명(使命)의 길이 있으셨습니다. 그 예수님께는 함께 복음(福音)의 길을 걸어가는 제자(弟子)들이 있었어요. 그러기에 주님은 열정 있게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셨죠.


우리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역시도 하나님과 인격적인 깊은 교제를 통해서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사명 푯대를 향한 비전을 품고 사명을 품고 그리고 믿음의 동역자 영 가족들과 함께 영적이고, 영원하고 영광과 고난을 함께하는 영 가족들과 함께 뜨거운 열정의 사람으로 인생의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식어버린 영적인 열정을 회복시켜 주옵소서. 죄로 인하여 멀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게 하시고 뒤에 있는 것을 내 삶에 나를 무겁게 하는 힘들게 만드는 모든 것들을 잊어버리고 나에게 주신 우리에게 주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믿음의 동역자를 허락하여 주시고, 우리도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격려가 되는 동역자가 되게 하여 주셔서, 사는 날 동안 하나님께 전심이요. 사람에겐 진심이요. 하나님께 맡기신 사명과 비전에는 우리가 충심을 다하는 주의 성도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올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요약
하나님은 뜻을 이루기 위해 쉬지 않으시는 ‘열정의 하나님’이시며, 그분을 만난 성도 역시 사명과 열정의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죄, 허무주의, 타인의 비난, 그리고 함께할 동역자의 부재와 외로움은 영적 연료를 고갈시켜 열정을 식게 만든다. 식어진 영적 열정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하며,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중요하니, 열정은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은혜이므로, 주님과의 친밀한 인격적 교제와 예배와 기도의 자리를 최우선으로 지켜야 한다. 또한 푯대를 향한 매진이 되어, 지난날의 장애물에 매이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사명)을 향해 멈춤 없이 달려가, 동역자와의 연합을 해야 한다. 홀로 서는 신앙이 아닌 공동체 안에서 함께 기도하고 격려하며 사명을 완주할 동역자를 만나고, 스스로도 좋은 동역자가 되어 주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 명확한 푯대, 그리고 공동체와의 연합을 통해 주님께 전심, 사람에게 진심, 사명에 충심을 다하는 열정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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