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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장 강의(주후 2024년 03월 09일)-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다락방 시리즈 16)
-5과 "무엇이 부흥을 가능케 하는가?(What makes a revival possible?)"
말씀: 사도행전 4:7-20
찬양인도: 오준석 부목사님
사회: 임병영 부목사님
 
강의자: (오정현 담임목사님)-사랑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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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4:7-20,
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9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13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14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15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16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18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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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옆에 있는 분들 반갑습니다. 인사 고맙습니다. 한 주 안 봤더니, 은혜로 은혜가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 여러분들이 제가요 제가 목회자로서 사역자로서 제 자신을 돌아오면서 추스리는 말씀 중의 하나가 디모데전서 4장이에요. 7절-16절 말씀까지 쭉 보면,
 
*디모데전서 4:7-16,
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8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9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
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11 너는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12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13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14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15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16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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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현 담임목사님.
-내가 내 자신을 어떻게 추스려야 할 것인가?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성숙과 진보를 나타내는 어떻게 말에 있었어요. 행실에 있어서, 정절에 있어서, 믿음에 있어서, 사랑에 있어서 갖고 순서는 아마 말, 행실 그리고 자신을 들어 하나의 한 번씩 나에게는 저게 뭡니까? 이 뭐 좀 이렇게 체킹 포인트랄까, 나는 일찍부터 사역을 생각했기 때문에 누구든지 내 연소함을 없인 여기지 못하게요. 그러면 나 연소하면 업신여기지 마세요. 그런다고 없인 여기지 않나, 그렇지 않잖아요?. 앉아만 있어도 사역자의 기품이 있고 뭔가 있을 때 업신여기지 못하는 것이지. 순장도 나 순장 말씀 잘하는 거, “나 없인 여기지 마세요.” 그런 소용이 없어요.
 
여러분들이 말씀에 깊이와 하나님께서 여러분들 붙잡아주시는 어떤 거룩한 아우라가 있어야 해요. 그것이 영향이에요. 세상의 직분도 세상의 장관과 총리, 대통령과 거기 아우라가 있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도 그정도 품위는 있어야 될 거 아니에요??.
 
- 자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사도행전 3장에 나오는 이미 큰 그림을 그려드립니다. 전체로 나면서부터 못 걷는 자 베드로와 누굴 통해서 요한을 통해서 완전히 기적적인 치유를 받았는데 여파로 강력한 부흥이 예루살렘 성을 강타했어요. 그리고 병 고침 받은 사람의 나이가 오늘 4장 22절 대보니까 몇 살 40세쯤 됐다고 그랬어요.
 
*사도행전 4:22,
22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그럼 오늘 앞에 4절에 보니까 예루살렘에 이것 때문에 성전유문에 못 걷는 자가 이 기적이 일어나요. 예루살렘 교회 첫 번째 기적이 일어나게 되니까, 4절에 보니까,
 
*사도행전 4:4,
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얼마예요. 4절에 남자의 수가 왜 얼마 약 5천명이라 했어요. 앞에 이 장에서는 베드로사도가 복음을 선포하니까 복음 앞에 형제들이 몇 명이나 깨졌어요? 하루에 3천, 오늘 3장에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과 치유가 일어나니까, 오늘 3장 치유라니까 오늘 4장 앞을 4절에 보니까 몇 명이라고요. 5000명, 여기에 이제 당시 계수법은 누구만 세는 거예요. 남자 당정만 5000명이니까, 최소한 1만 5000명에서 2만 명, 여자 어른, 아이들 한꺼번에 주라면 한꺼번에 1만 5000명에서 2만 명이 주로 돌아오는 거예요. 어마어마한 부흥이 일어난 거예요. 그래서 저는 이 어마어마한 부흥에 대한 소원을 하고 간절히 사모할 때, 디모데전서 4장을 보면서 제가 목회자로서 자신을 좀 추스리고 다듬는다는 부흥에 대해서, 저의 어떤 금과옥조(金科玉條)랄까, 부흥에 대해서 저의 어떤 큰 도전을 주고, 저에게 저를 키우고 다시 저를 갖다가 어 인스파이하고 그리고 뭡니까? 리스파크를 하고 나를 점화를 시키는 거죠. 본문이 오늘 이 본문이에요. 이 본문 자꾸 이 본문을 보면 볼 때마다, 부흥에 대한 어떤 맥박(脈搏)이 몰아치는 거예요. 오늘 이제 그리고 1위는 부흥 이후에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하면, 오늘 앞에 3절을 보니까,
*사도행전 4:3,
3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이 부흥을 하면 부흥을 하면 야 부흥 하니까 다들 마 다 변화 받고 다 와 거꾸로 거꾸러지고 다 그래 가지고, 부흥이 강력하게 일어나니까 올해 3절에 보니까 무슨 일이 벌어졌어요? 사도들을 잡아 가지고 어디에 가두었어요. 감옥에 가두었어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강력한 성령 역사와 능력이 나타났고, 기적과 치유가 일어나니까 부흥이 일어나니까 이제는 외부적인 박해가 있는 거예요. 박해가 있었어요. 7절에 오늘 보니까,
 
*사도행전 4:7,
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사도들이 가운데 세우고 “너희가 무슨 권세와 뭐예요? 누구의 이름으로 이해를 행하느냐?”라고 몰아 세웠죠? 그리고 마침내 17절에 보니까,
 
*사도행전 4:17,
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민간인에게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후에는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협박하는 거에요. 협박, 왜냐하면, 오늘 대단한 예수님의 이름이 존귀함과 능력과 권세를 제일 좋아하는 자가 누굽니까 사탄이에요. 사탄, 그러니까 사탄은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말하지 못하도록 박해하고 예수님의 이름이 전파되는 걸 너무 싫어했고, 대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순간에는 사탄의 도구가 된 거예요. 다 한심 하는 교회 내에 이거 오늘날 한국교회 부흥을 위하는데, 교회 내에 부흥을 방해하는 사탄의 앞잡이들도 있는 거예요. 내가 누구라고 말하지는 않겠어요. 내가 어떤 단체라고 말하지는 않겠어요. 사도 베드로와 요하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20절에,
 
*사도행전 4:20,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선포하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이 갖는 능력을 선포한 거예요. 자, 다시 한 번 오늘 5과 전체의 내용이구요. “무엇이 부흥을 가능케 하는가?”에요. 5과 이구요. 전체 첫 번째 내용이고, 이거는 오늘 사도행전 4장은 교회 역사, Church Story, 교회 역사적으로 그러니까 처치 스토리, 교회 역사적으로 손꼽을 수 있는 큰 부흥이 일어난 것입니다. 동시에 또 마귀가 행동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또 방해하는 것이죠?
 
 
마귀가 방해하는 정글 같은 그런 상황이 되는 것이죠. 자 오늘 이 정도 하고, 이제부터 쭉쭉 진행해 나가면 됩니다.
 
◆ 말씀의 씨를 뿌리며.
-초대교회 성도들의 대화와 삶의 주제는 예수님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찬양했고,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 했으며, 심지어 핍박을 받을 때에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병자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으켰고, 귀신과 악명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적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칭하는 놀라운 이름들을 주목하고 연구해야 하는 이유는 그의 이름에는 세상을 이기는 능력과 하늘의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이름 속으로 들어가 그 이름의 권세와 영광과 은혜를 심비(心碑)에 새김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름에 걸 맞는 삶을 사는 능력을 확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저기 뭐야?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않아서 구하라 그래 받으니 너의 기쁨이 뭡니까? 충만하리라. 여러분과 저의 사역에 기쁨과 은혜가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우리 마음속에 뭐가 필요한가?
-주님의 이름으로 선언하고, 주님의 이름의 능력을 깨닫고, 주님의 이름의 효력을 우리가 기본적으로 체험을 해야 된다.
 
오늘 내용들을 보고 지난 주일날 우리가 우리 ‘예수님이 누구신가?’라는 지금 우리가 시리즈를 하고 있는데, 지난주에는 도피성 되신 예수 그리스도, 말씀을 했고, 그다음 도피성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왜 우리에게는 이렇게 와 닿고 은혜가 되는가? 구약의 대제사장직을 예표 했나? 그리고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모든 죄를 마치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할 수는 없어요. 말씀 한마디로 할 수가 없어요. 천지창조도 말씀 한마디로 하셨던 그분이, 우리의 죄를 없애하기 위해서는 그대로 마치 지우개를 가지고 써놓은 걸 갖다 지우듯이 그렇게 못하는 거예요. 우리의 죄 가를 다 없애기 위해서는 주님께서는 말 한마디로 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사랑하는 그분의 독생자 가장 사랑하는 그분의 최고의 소중한 것을 다 우리에게 내어주신 거예요. 대제사장으로 피를 흘리고, 역할을 하도록 만들어주신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께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진노의 잔을 다 쏟아 부어 버린 거예요. 예수님께 다 진노의 활을 다 쏟아 부어 버린 거예요. 그니까 그런 은혜가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에,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마는 값싼 은혜라는 건 없습니다. 항상 주님의 은혜는 값비싼 것이고, 주님의 주님께 모든 것들을 다 쏟아 부어졌기 때문에 얻어지는 오늘 여러분들과 저는 예수님께 하나님의 모든 진노가 다 쏟아 부으셨기 때문에 이 자리에 와갖고 이런 말씀을 준비하는 줄로 확신합니다. 여기에다 깊은 깨달음이 있으면 눈물 콧물이 나는 것이고, 나같이 쓸데없는 자리를 구성 너무 감사하고, 자다가 일어나도 온 세상 만물을 가져도 주 밖에는 없는 것이며, 감사로 못 다 갚겠다는 것입니다.
 
1. 관찰질문.
-오순절 상 성령 강림의 역사로 초대 교회가 불일 듯 부흥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당시 에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은 사도들을 붙잡을 빌미를 찾기 위해 그들을 공회 앞에 세우고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7절)라며 엄하게 심문(審問)했습니다. 이때 사도들이 힘 있게 대답한 말은 무엇입니까?
 
10절 보겠습니다.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너희 앞에 섰느니라) 사도는 여기서 거부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 다섯 가지를 증거 한다.
(1) 너희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중대한 사실을 선포할 때마다 자주 쓰는 권위 있는 명령형이다. 그 대상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는데, 이는 증거 하 는 내용의 중대성과 사실성을 암시한다.
(2)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 사도는 여기서 너희가’ 그런 일을 행한 죄인들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너희’가 죄인 취급하여 죽였지만 하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을 살리심으로 그를 죽인 자들을 심판했다는 것이다.
(4)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건강하게 된 것을 증거 했다. 너희가 십자가에 죽였지만,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 그 예수께서 지금 살아계셔서 이 능력을 베푸셨다는 것이니 저들의 간담(肝膽)을 서늘하게 만드는 선포가 아닐 수 없다.
(5)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상의 변론에 대한 명확한 증거를 제시한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그 권력과 무게감을 가지고 심문할 때에 베드로는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전도의 기회로 삼아가지고,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권세이심을 담당하게 했잖아요. 거침을 선포하게 된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산헤드린 공회는 당시 유대 최고의 재판기관이었습니다. 로마의 지배 본래는 사형도 다 시킬 수 있었겠지만, 로마의 지배 안에 있었기 때문에 사형 권 빼고는 다 있었어요. 종교, 인사, 민사, 다 처리하는 최고의 권력 기관이었어요. 예수님을 심문했던 공회였습니다. 어쩌면 오늘 이 산헤드린 공회에서 신문을 받으면서 베드로의 마음이 만감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전에는 예수님 신문에 있던 산헤드린 공회, 거기 근처에서 뵈도록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을 부인했죠? 전에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은혜의 아웃사이더였는데 이제는 자신이 신문을 받는 은혜의 주체가 된 거예요. 은혜의 어떤 중심이 된 거예요. 아마 감회가 새로웠을 거예요.
 
*사도행행 4: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너희가 무슨.....행하였느냐) 예수께서도 대제사장들에게 이와 유사한 질문을 받았으나 그들의 간계를 미리 아시고 지혜롭게 대처한 바 있다. 본 절에서도 대적 자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사도들을 처치할 구실을 마련하기 위하여 애매한 질문 공세를 편 것이0망함과 아울러(9절), 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기회로 삼았다(10-12절).
-요한이 잡혔을 그때가 이미 날이 저물어 가지고 어두워졌어요. 그러니까 그 유대인의 종교 관습에 따르면 일몰 이후에는 죄인들을 심문할 수 심문할 수가 없는 규율이 있었어요. 로마의 지배 본래는 사형도 다 시킬 수 있었겠지만, 로마의 지배 안에 있었기 때문에 사형 권 빼고는 다 있었어요. 종교 인사 민사 다 처리하는 최고의 권력 기관이었어요. 예수님을 심문했던 공해였습니다. 어쩌면 오늘 이 사례들의 공해에서 신문을 받으면서 베드로의 마음이 만감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전에는 예수님 신문에 있던 산해 드는 공이 거기 근처에서 뵈도록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을 부인했죠. 전에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마 은혜의 아웃사이더였는데 이제는 자신이 신문을 받는 은혜의 주체가 된 거예요. 은혜의 어떤 중심이 된 거예요. 아마 감회가 새로웠을 거예요. 요한이 잡혔을 그때가 이미 날이 저물어 가지고 어두워졌어요. 그러니까 그 유대인의 종교 관습에 따르면 일몰 이후에는 죄인들을 심문할 수 심문할 수가 없는 규율이 있었어요. 그래서 사도들이 하룻밤을 감옥에서 보내고 그다음 아침에 이제 그러니까 유대 종교 자 지도자들이 형식적으로는 종교적 교리를 준행하는데, 그걸 하는데 핵심을 못 깨닫는 거에요. 형식적으로는 밤에는 심문하면 안 되지, 이래가지고 말씀을 따른 거 같은데, 진짜 말씀에 정신과 핵심과 능력과 구원의 역사에는 눈이 멀어 있는 거예요. 여러분과 제가 이런 말씀을 다루면서 껍데기만 하면 안 되고, 진짜 엑기스와 핵심과 가장 중요한 실리에 눈이 떠 있고, 평생 덜 중요한 것, 가장 중요한 것에서 눈을 뜰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뭐라고 그랬어요.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자심을 당당하게 거침없이 선포하고 설교했어요. 거기에 대한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반응이 참 기가 차요. 그들은 당시 유다의 최고의 지성인들이었고 아주 높은 수준의 학문을 배운 공회원들이었는데. 그들의 반응이 뭡니까? 13절에,
*사도행전 4:13,
13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베드로가 원래 못 배운 사람인 줄 알고 이상 여기고 놀랐어요. 학문이 없는 걸 알고 있었는데, 또 함부로 할 수 없는 게 놀랬지만 자기들은 학문이 있어도 병 못 고치는데 베드로는 학문이 없어도 병을 고치고 기적을 일으킨 주체 자가 되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함부로 표현도 못 했어요.
 
2. 관찰해석.
-예수님의 이름은 천상천하(天上天下)의 모든 자들이 무릎을 꿇는 지극히 높은 이름입니다(빌 2:9-10). 이처럼 우주의 군세가 복종하는 이름이지만 오늘날 신자들 가운데 예수님의 이름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우주의 군세가 복종하는 이름이지만 오늘날 신자들 가운데 예수님의 이름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2000여 년 전에도 그러했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과 오늘날의 신자들이 예수님을 부끄러워하는 각각의 이유를 말해보세요
 
* 막 8: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 예수는 자신의 입장을 결정적으로 밝히면서 이 시대를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로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음란과 죄는 예수와 복음을 부인하고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를 모독하고 교회를 업신여기는 세대를 말한다. 이 본문의 핵심은 33-37에서 언급한 제자 됨과 그리스도인 됨을 위한 예수의 요구의 필연성과 정당성을 종말에 임할 심판묘사로 명백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같은 희망찬 종말 언급을 통해 박해받는 제자들과 추종자 곧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을 각오 한 용기와 믿음으로써(요16:33)예수 자신의 길을 따라오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은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예수님의 이름을 실제적으로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의 그 사람들이 누구인가? 그런 사람들이 있는가? 있음을 알고 계셨어요. 다시요.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고 계셨어요.
*요한복음 1: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이유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어요. 그러면서 그다음 디모데전서 8장 보니까 “주를 위하여 갇힌 자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하나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사도들이 볼 때 사도들을 사역을 볼 때, 사도들의 사역을 볼 때에 박해와 핍박과 고난을 따른 걸 보면서 부끄러워했을 수도 있는 거예요. 자, 오늘 이 부끄러워하는 배경 중의 하나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다.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대수로 폄하했어요. 무슨 뜻입니까? 나사렛은 갈릴리 북쪽 지하의 지방이잖아요. 북쪽에 무슨 이방인들이 사는 곳인데, 그러니까 사마리아 성 위에 나사렛이잖아요. 그리고 사마리아 성 밑에 유대잖아요. 사마리아 성 밑이 헤브론이고 예루살렘이고 그러니까 밑에 남쪽 지역에 있는 유대인들이 볼 때에 유대 지역에서 볼 때 사마리아 성과 위에 있는 갈릴린 이 나사렛에서 형편없는 지역에 나오는 형편없는 인간들이나 있는 곳이지, 그러나 이 빌립 같은 경우는 요한복음 1장에 보니까, 빌립 같은 경우는 나다니엘의 이 냉소적인 반응에 대해서 다른 말 하지 않고 그저 뭐라고 그랬어요. 빌림이 뭐라고 하느냐, 떠들지 말고 와봐! Come and See! 그러니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제대로 교제하면 세상에서 말하는 만 가지 논리와 논쟁이 별로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빌립은 떠들지 말고 와 보라고 한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갈릴리 지역에 목수 집안의 가난한 사람으로, 그다음에 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죄수로, 이 정도 생각하고 있었고, 헬라 사람들은 복음을 유치하고 어리석고 미련한 것이라 경멸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이 시선과 모든 것들을 다 뛰어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다시요. 모든 지성과 이성을 뛰어넘은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실체를 가지고 얘기하는 거예요. 제가 볼 때 오늘날 성도들 가운데 세상 앞에서 교회와 그다음에 예수님을 부끄러워하는 분들이 있다면 어떤 사람들은 아이고 뭐 교회가 세상에 몸을 열지 못하고 뭐 교회 지도자들의 문제가 많고 뭐 오만 얘기 다 있잖아요. 근데 그런 거 다 하나의 변명일 뿐이에요. 진짜로 뭡니까? 진짜는 예수님이 주시는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진짜는 주님이 주시는 치유와 능력과 주님과 예수님의 이름이 주는 예수님과 교제할 때 갖는 파워를 느끼지 못하고 있으니까, 예수님을 믿는다고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그저 나사렛 예수로 정도만 인식하기 때문에, 지금도 오늘날 우리 주위의 예수님을 나사렛 출신으로만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왜냐하면, 복음이 지성적이지 못하다. 복음은 무슨 철학적이지 못하다. 복음은 과학적이지 못하다. 오늘 이 시대에 맞지 않다 이런 식으로 그래서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예수 믿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CCC 파운드에 있던 김준권 목사님은 이런 세상의 흐름과 지성의 흐름을 잘 아셨기 때문에 CCC가 대한민국 CCC나 한국 과거의 대학생 기독 선교 단체는 최고의 지성이거든요. 최고의 지성 사유 가운데 진짜 최고의 변적은 뭐냐 능력 있는 예수 그리스도 출신이 나사렛이라고 할 때 그거 전혀 개의치 아니야. 그거는 전혀 개의치 아니하고, 그거는 전혀 나사렛이라는 이름이 오히려 능력의 진원지로서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인격적인 하나님의 신실한 종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변화시킨 그래서 CCC 최고의 단체 중의 하나가 CCC 여러분들 아시겠습니다만 이 시시기 대학 졸업하면요 나사렛이라고 있었어요. 내가 요걸 얘기하려고 지금 한참 이야기 얘기하는 거죠. 나사렛이라고 들어보셨어요? 나사렛 모임이라고 있어요. 나사렛 최고의 지성에 최고의 나사렛은 당시에 나사렛에서 온 선한 것이 나겠는가, 조롱하고 비난하고 그러는데 기독교는 그런 인간의 이성과 지식과 철학을 온전히 앞두어 뛰어넘을 수 있는 능력과 체험과 예수의 이름에 치유와 기름부음이 있다.
그래서 여러분, 지난번에 우리 이 년 전입니까?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와가지고 미국의 부통령이면, 여러분 지성인이고, 미국의 정치인이고, 세계적인 역량이 있는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마이크 펜스가 바로 글쎄 자기의 정체성 넘버 원, 자기가 뭐라고
➀그리스인이라고, 모든 치성을 압도하는 나사렛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인이라고,,,
두 번째로는 자기는
➁보수주의자라고 세 번째로, 이제 정책으로
➂공화당원이라고 뭐 정도였어요.
-첫 번째가 나는 예수고, 예수 믿는 사람, 그래서 우리 교회에 와가지고 너무나 감동을 받은 게 새벽 5시 6시에, 사람들이 그냥 물밀듯 밀려오고 그리고 그날 어마어마한 비가 왔거든요. 그리고 그날 또 어떻게 보면 우리가 뭐야? 오케스트라 찬양대가 있다고, 야, 새벽 5시 반에 어떻게 저렇게 수많은 과히 오케스트라 올 수 있냐고? 또 거기도 되게 감동 같대요... 그러니까 정체성이 확고하니까 나오는 어떤 저기 뭡니까? 나오는 어떤 그런 것도 다른 거죠. 자 이 말씀을 왜 드리는가 하면 저도 그러고 여러분들 여러분 자녀들도 그러고 예수의 이름에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확고한 자녀들을 키워야 되는 것이에요.
 
※내가 한번 얘기를 저는 중학교 들어갔을 때, 정말 제가 이 가난한 달동네에서 혼자 학교에 들어갔어요. 학교에 근데 너무나 똑똑한 놈들이 많았고, 아버지가 니 아버지 뭐하시노? 부산시장이야. 니 아버지 뭐하시노?부산국세청장 아들이야. 니 아버지 뭐하시노? 부산대학교 총장 아들이야. 그러고 국세청장 송모모라고 내 친군데 집에 처음 가니까요? 세상에 뜨신 물이 나오더라고.,,, 그리고 누나를 보니까 경남여고를 다녔는데 선녀 같더라고,,, 그리고 얘가 뭘 하나 먹는데 이게 뭐꼬? 그러니까 이게 비타민이야 근데 왜 먹나? 왜 먹는냐니까? 이거 몸에 좋은 거야. 뭐 몸에 어떻게 좋으냐? 먹어보면 알어. 나는 먹어본 적이 없어. 내가 어떻게 알어? 그렇다고 또래들이 있는데, 예수 믿는 사람 나 혼자였어요. 생물 시간에 들어가니까, 생물 시간에 말이야. 생물 시간 선생님 들어오는데 그때 뭐 강모 생물 시간 이름도 잘 안 잊어요. 이 사람이 들어오더니, 전부 다 뭐 너희들은 다 원숭이 자녀들이고 있잖아. 이거 저기 호모사피엔스 얘기하면서 네안데르탈인 뭐 크로마뇽인, 얘기하는데 있잖아요. 기가 막힌 거에요. 근데 아무도 얘기하는 놈이 없어요. 내가 딱 손 들어갖고 ‘선생님은 원숭이 자녀입니까? 아 그렇다면 선생님은 선생님 조상이 원숭이입니까?’ 그러니까 “이 새끼가 이리 나와!! 겁데가리도 없이 선생님께가 뭐 그냥 그렇게 이야기 하면 알아듣는 거지” 응 그러고 내 뺨을 두 차례를 맞았는데 근데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다. 그게 나중에 내가 깨달았지만 과학을 적당히 믿으면 무신론자가 되고, 과학을 진짜 믿으면 창조주 유신론자가 되는 것이에요.
 
※톤 브라운 박사가 나사(NASA)에 날라 가는 모든 우주 프로젝트 총책임자 과거에 톤 브라운이라고 독일 계열의 사람이 미국 최고의 나사 과학자인데 최고의 신실한 크리스천이었고 달나라 갈 때, 우주인이 뭘 갖고 갔다고 그랬어요?. 하나님의 말씀 갖고 올라갔다고 그랬잖아요. 시편의 말씀이죠. 적당히 알면 무실론 자가 됩니다. 그러나 제대로 알면, 하나님은 그 앞을 보시며 모든 것을 인도하십니다. 여러분 이런 면에 있어서 여러분 신앙의 초심을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어떤 장로님이신데, 자기가 진짜 이 찬송 들을 때마다 몇 십만 유튜브의 조회가 됐다는데요. 한 십몇 년 정도 된 찬송입니다. 이렇게 한번 들어보죠. 그리고 여기 지금 초심이 약간 흔들려 갖고요... 후렴만 ‘어저께나 오늘이나,,,’ 의 마지막 부분 어떻게 후렴만 어저께나 오늘이나 나도 이 찬송을 아침에 들으면서 한 번 불러 보자구요. 여기 계신 많은 분들이 저보다도 나이가 더 젊을 거예요. 지난 시간을 다 들어보면 여러분 아무리 어려워도, 아무리 힘들어도, 이 예수님의 이름 한결같은 마음으로, 이거 집중해 가지고 부부가 손잡고 여러분 힘들어도 안 되면 여러분 혼자라도 이 찬송 계속하면서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가정과 자녀와 여러분의 인생을 지켜주시는 것이에요. 이게 믿음이에요. 예외 없어요. 여러분 바울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분 배드로가 아니기 때문에, 여러분은 참수되어 거꾸로 십자를 못 박힌다든지 아니면 참수를 당하던지 그런 건 여러분 걱정하지 마세요. 여러분 바울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분의 생애 동안 집중하고 고백하고 찬양하고 선포하면 하나님 여러분 자녀 보호하신다니까 알겠어요? 보호하시고 여러분 다락방을 이걸 여러분의 것으로 체험돼 가지고 뿜어져 나와 가지고 이걸 여러분들이 순원들에게 그대로 전달해 주셔야 하면 되는 거예요. 내 마음을 그대로 좀 전달해 주세요. 내 마음을 전달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칠천기도 용사에 대해서 마음을 모으고 있습니다. 7000 기도 용사가 우리 천 부장 제도를 하고 뒤에서 돕고, 그다음에 천부장 뽑고, 천 부장은 백 부장 10명만 관으로 하면 돼. 백부장은 10명만 십 부장들 관할하면 돼. 중간에 50부장 점검하고, 나는 천 부장 일곱을 일곱 7분을 위해서 더 잘 내가 케어하고 그러면 우리가 7000명이 똑바로 정치인 총령 주님을 위해서는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죽으라면 죽고 허신하라면 헌신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 나라를 위해 준비되기를 원하는 그런 7000명의 기도 용사를 만들어 놓기만 하면 하나님 이 민족 살려주셨다니까요. 그래서 내가 무슨 생각이 들었냐면 이번 선거가 어떤 결과가 나오든 하나님이 하시는 것일 거고, 이번 선거 이후에 7천 기도 용사가 정신 똑바로 차리면 이것 때문에 하나님은 이 민족을 보호하여 주실 것이다. 남북문제도 해결하여 주실 것이다. 난 오늘 순장반 하면서 이렇게까지 내가 하고 싶지 않은데, 그러나 우리의 마음속에 주를 수 있는 간절함을 따라 가지고 주님의 일에는 이름에는 능력이 있다니까 처심을 잃지 않는 거, 초심에 대한 성심을 다시 가져가는 거,
 
3. 관찰질문.
-사도들은 핍박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자랑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죽음까지 각오하며 예수님의 이름을 확성기를 댄 것처럼 크게 전했습니다. 다음 구절에서 예순 다음 구절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이름이 갖는 능력을 생각하며 우리도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고 자랑해야 하는 이유를 서로 이야기해 보세요.
-여러분 자녀들이 교실에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따뜻하게 드러낼 수 있도록, 여러분 순원들이 직장에서 내가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예수 믿는 걸 떳떳이 드러낼 수 있도록, 이것이 최고의 믿음이에요. 지금 대한민국 10대 재벌들이 있습니다. 그 10대 재벌들 돈 많은 것보다도 예수님 이름 간직하고 믿고 선포하고, 능력 받는 것이 훨씬 더 소중한 것이에요.
-우리는 본래 하나님과 원수 된 사람들이었죠. 그런데 구원의 도피성으로 내어주신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셨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일방적인 십자가의 사랑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리가 원수에서 자녀로 바꾸어졌어요. 평생 원수가 평생 자녀가 된 거에요.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갖는 최고의 권세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응답받게 되는 특권을 주신 줄로 믿습니다. 이걸 자랑하지 않을 수가 있게 이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어요. 심문을 당할 때 오히려 베드로와 그들에게 설교했죠.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있다. 없다.
 
여기에 다른 일이라는 것도 우리가 관심을 갖지만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라는 데도 초점이 맞추어져야 되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받을 수 없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선 구원이 없다. 예수님의 이름 외에는 구원이 없다. 이거는 너무나도 확고한 만고불변의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어져서 요한복음 6장 24절에,
 
*요한복음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 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지금까지는...구하지 아니하였으나) 여기서 ‘구하다’로 번역된 ‘아이테오’는 ‘구하다’, '질문하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 ‘에로타오’와는 달리 ‘요구하다’란 의미로 많이 사용된다. 그리고 후반절의 내용이 기도와 관련된 것이 분명하므로 본절에서는 ‘구하다’로 번역되어야 한다. 그리고 특히 ‘구하다’란 말이 현재형으로 언급되어 ‘지속적으로 기도하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L. Morris). 그리고 이 지속적인 기도는 다른 이름으로써는 소용없고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 질 때 응답이 있을 것이다. 한편 ‘지금까지는...아니다’라는 구절은 미래적 시간에는 어떤 일들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리스도의 중보자 개념은 본절에서 아직은 선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아직 십자가상에서 피 흘림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성전의 휘장은 그대로 드리워져 있었으며, 신성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지 않으셨다.(Calvin). 그러나 그의 구속 사역이 완성될 그날 곧 ‘조금 있으면’ 제자들은 아들의 이름으로 구하는 모든 것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거 핵심이 뭐예요?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응답받는다는 이 용어는 어떤 뜻입니까? 우리의 자격이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가 잘해서가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가 무슨 헌신을 많이 해서가 아니라는 거예요. 단순하게 초심과 성심을 가지고 어저께나 오늘이나 한결같은 주 예수님 찬양합니다. 하는 그런 마음을 갖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을 믿고 이름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응답해 주시는 것이에요. 한 결 같이 그리고 요한복음 14장 12절에 보면,
 
*요한복음 14:12,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자 예수님이 하신 사건은 뭡니까? 오병이어 사건을 베풀어 진리의 말씀을 전하니까 하늘의 떡에 대한 얘기하니까 다 도망가 버렸잖아요? 그런데 베드로는 말이에요. 어떻게 했어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늘 기적을 베풀고 예수님을 전했더니, 핍박 가운데서 몇 명이나 예수 믿었어요. 5000명,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예수님이 하신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을 지금 베드로가 하고 있는 거지요. 오늘 이 5000명이 돌아올 때 초대교회의 120명 성도들, 여러 초대교회 성도들이 가질 수 있었던 감격과 은혜를 한번 상상해 보세요. 이걸 생각을 해서 여러분이나 저는 사랑의 교회 섬김과 사역을 통한 수많은 기적과 치유와 능력과 부흥을 경험한 사람들 아닙니까? 우리가 갖는 감격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올해는 다락방 교재 제목처럼 그리스도인 죽는 날까지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그랬기 때문에 올해 새 생명 축제는 오늘 산헤드린 공회 그 핍박 가운데서도 오늘 예루살림 초대교회가 가졌던 베드로와 함께 했던 5000명의 역사가 있었던 것처럼 원래 제가 목표가 뭐냐? 다른 해에 비해서 두 배, 세 배의 새생명 축제위원회가 있게 하여 주십시오.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올해는 결신이 5000명 이상 되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이 내 마음에 이 확신을 주신 거예요. 제가 올해는 5000명 이상 된다. 왜 됩니까? 이게요 5000명 이상 올려면 심플해요. 태신자를 뭡니까? 여기 태신자를 만 명 이상 데려가면 되는 거예요. 아주 심플한 거예요. 대개 이제 숫자 정하고 나면 한 10분의 1쯤 데리고 오더라고. 근데 올해는 만 명 이상 데리고 올 수 있도록, 나는 올해는 될 거라고 생각해 왜 되느냐 첫째, 누가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오늘 이걸 깨닫고 새 생명 축제에 데리고 오는 태신자 들을 만 명 이상 실제로 데려올 그럴라면 적어도 한 5만 명 정도는 우리가 계속 기도를 해야 되는 거예요. 20프로 정도 데리고 본래는 10분의 1 데리고 오는데 그리고 제가 또 하나 믿는 것은 7층 기도 용사가 있기 때문에 7천기도 용사는 이제 기도하러만 오고 그다음에 헌신하라면 헌신하고 그다음에 헬스장 데려오면 데리고 오고 그러면 말랑 말고 안 되는 사람은 칠천 기도용사가 들어오면 안 돼 그런 거 안 하는 사람은 빨리 빼내야 돼 우선 마음만 갖고 했던 사람 다 빼내고 거기다 아울 3500번 다시 잡아넣어야 되고 또 알 다시 부흥, 리바이벌 새로 해서 리바이벌 2779번 다시 잡아넣어야 되고 이렇게 해서 똘똘 뭉쳐 가지고 할 때에 올해 7천명, 영혼구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7000명을 내가 책임지고 하나님 간의 역사를 새롭게 집필해야 되는 줄 믿습니다. 7천명이 똘똘 뭉치면 4900만이 변화가 되고 영혼구원이 됩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이름을 270개 이상의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어요, 구세주, 그리스도, 선한 목자, 구원의주, 만왕의 왕, 영광과 소망, 보배로운 산돌, 생명의 말씀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 영혼의 감독자 우리 몸의 구세주, 더 좋은 은혜의 보좌, 하늘에서 내려온다. 모든 성도들 다락방 순원들 삶 가운데 풍성히 임하기를 바랍니다.
 
4. 묵상질문.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부끄러워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이름이 주는 축복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한편으로는 사탄의 치밀한 전략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 글을 읽고 묵상해 보세요.
-오늘날 교회 내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예수님을 나사렛의 예수로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나사를 내수로 폄하(貶下)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나사렛 출신으로만 이해했던 것처럼 무의식중에라도 예수님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나사렛 출신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복음을 지성적이지 않고 과학적이지 못하며 복음의 내용이 세상사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세상은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을 경멸(輕蔑)의 의미로 사용했지만, 예수님은 이름 가치를 바꾸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사람들이 무덤을 찾아왔을 때, 천사는 “너희가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라고 말했습니다(마가복음 16:6). 또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은 믿는 자들을 핍박(逼迫)하던 사울에게 “나는 나사렛 예수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사도행전 22:8). 예수님은 나사렛이란 이름을 취하여 그것을 하늘에까지 높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탐관오리를 척결하는 부패한 사또의 권력을 가진 부패한 사또의 부패를 척결하는 암행 의사가 마패를 들어 암행어사 출두요 그랬을 때, 그 사람이 갖는 능력이 아니고 그에게 마패의 암행어사라는 직분에게 부여한 왕의 이름의 권위가 부여된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교묘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반기독교 정서가 있습니다. 반기독교 문화가 있습니다. 오늘 나사렛의 이름을 무시하는 것처럼, 반기독교적인 정치 성향이 있습니다. 특별히 대학 교수들이 강단에서 잘못된 이념을 가르치고 또 사회 메디아, 이런 언론 굽어진 거 많이 있습니다. 엔티 기독교적인 글들, 반기독교적인 사상들, 이런 걸 가지고 오늘날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이걸 우리가 정확하게 알고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공격하는 거 있을 수 있다. 마귀의 전략이니까. 그러나 우리는 담대하게 이 시대에 베드로와 요한이 되어 가지고 시대 앞에 다른 일은 없는 구원을 들 수 없으니 오직 사랑의 구원을 얻으면 아니도 예수 그리스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느니라. 확실하게 선포하는 사랑의 교회와 순장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5번 적용문제.
-오늘날 성도와 교회가 부흥(復興)하는 비결(秘決)은 예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네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속에 있는 능력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산 같은 장애물(障碍物)들을 돌파(突破)할 것입니다. 신자들의 신앙생활이 무기력한 것은 예수님의 이름에 의존(依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신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끄러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고 있습니까? 이를 위한 당신의 각오(覺悟)와 다짐을 나누어 보세요.
-예수님의 이름이 매일매일 지금 내 삶에 신선한 능력으로 부어짐 받기를 바랍니다. 매일매일 역사해야 되는 거예요. 이게 왜 여기 중요한가. 하면 여러분, 왜 이것이 중요한가. 하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제자들이 이 제자들이 어떻겠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을 가지고 담대하게 할 수 있을 이유가 뭐냐 하면 또 예수님의 이름의 권위가 어디서부터 비롯되어 있습니까? 13절에 보니까
*사도행전 4:13,
13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13절에 13절 뒷부분에 에이 주의해야 됩니다. 사람들이 이 제자들이 전에 주님과 함께 교제하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주님과 함께 있은 것을 알았다. 몰랐다를 운동은 놀러 가고 합니다. 교제하고 동행하고 함께 다 알아야 되는 거예요. 그중에 하나가 여러분 특새는 뭡니까? 사람들에게는 큰 영향력이 있는 것입니다. 어 특새는 하나님 하고 계시지, 거기에 함께 찬영하기도 하고 말씀 듣고, 우리의 삶에 적용하고 활용을 찾고, 이게 너무나 소중한 일 아닌가? 여러분 오늘 손잡고 나오면서 저와 영화는 얼마나 좋고요. 이렇게 돌아 뭐 이렇게 아이고 돈 그대로 있고 흔히 나와서 여러분이 주님과 함께 동의하는 것을 누가 제일 잘 알고 있는가? 가까이 있는 사람 제일 잘 알죠. 남편이 예술을 가까이 했는지 술과 가까이 했는지, 누가 잘 압니까? 대답 좀 해봐요. 한 번 더 가장 가까운 아내가 제일 잘하고 우리 와서 반대하는데 부모가 예수님하고 경영하고 있는지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는지 부모가 함께 하고 있는지 부모가 함께 하고 누가 제일 잘 알아요. 아이들이 제일 잘 알죠. 아이들이 요새는요 주름과 가까이가 아니라 유투브와 가까이, 주님과 가까이가 아니라 드라마와 가까이 조영필 오빠 뭐 이런 사람도 있어요. 왜 나에게는 기름부음이 없는가, 고민하지 말고 왜 나는 주님과 더 가까이 하지 않는가? 왜 주름과 더 깊은 교제가 없는가? 그걸 고민해야 되는 거예요.
 
주님과의 교제 능력이 실질적으로 삶의 능력으로 정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가 나와 함께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왜 사람 말의 문제를 알 사람이 과거에 은혜 만났던 분들 이 자리에 계십니까? 과거에 나름대로 열심히 했던 분 시험 안 들고 열심히 초심으로 성심으로 한결같은 분들이 여기에 계시죠?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요즘 좀 뭔가 무언가 빠져있다면 정신 차려야 되고, 아주 신선한 우유도요 3일을 못 가요. 양분이 있다. 할지라도 그냥 놔두면 변해요. 매일매일 신선한 우유를 마셔야 되는 거예요. 오늘 이런 순장과 순원들이 이런 것이 매일매일 여러분들을 향한 신선한 우유가 돼 가지고 여러분들의 건강을 지켜주기를 원하는 것이에요. 어저께나 오늘이나 순원들과 부르고 들어보고 해주세요. 나도 오늘 가슴이 뭉클하더라고요. 내가 마음처럼 죽을 때까지 지속하게 해주시고, 허물 많은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의심 많은 도마에게 확신 주시고, 사랑하는 해주죠? 부드러운 사람으로 품고 서로 격려하는 자들이 되며, 오늘 그런 마음을 가지고 승리하는 순장, 순원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삶의 열매를 거두며 .
-그리스도인이 힘 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비결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님 이름의 능력이 회복(回復)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무릎이 예수님의 이름 앞에 꿇어지는 것이요, 모든 입술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빌 2:9-10). 당신이 속한 모든 삶의 영역에서 세상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고 거룩한 담력으로 예수를 자랑할 수 있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드립시다. 아멘.
*빌립보서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지극히 높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페립소센’은 ‘휘페르’('위로')와 ‘휩소스’('높은 곳')의 합성어로 ‘가장 높은 곳으로 올려지다’라는 의미 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겸손과 수치스러운 죽음의 자리에서 다시 부활과 승귀(昇貴)를 통해 영광에 이르도록 높이셨음을 시사한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바울은 이 이름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언급하지 않는다. 이 ‘이름’에 대해서 혹자는 ‘예수’라고 주장하며 혹자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문맥상 ‘이름’은 11절에 나오는 ‘주’를 가리킨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전우주를 다스리시는 주권을 소유하신 ‘주’이심을 시사한다.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해 설) ‘시인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사본에 따라 다르게 사용된다. 어떤 사본에서는 제1부정과거 가정법인 ‘엑소몰로게세타이’를 사용하여 ‘시인하였을 것이다’라는 의미로 기술한다. 다른 사본에서는 미래 직설법인 ‘엑소몰로게세타이’를 사용하여 ‘시인 할 것이다’라는 미래적 의미로 기술한다. 두 가지 경우 중 문맥상 전자가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10절의 ‘꿇게 하시고’의 헬라어 ‘캄프세’는 ‘캄프토’('굽히다')의 제1부정 과거 가정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높이셔서 ‘주’라는 칭호를 주심으로 모든 만물로 하여금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주’라고 시인하게 하셨다. ‘주’에 대한 시인은 하나님 뜻의 성취를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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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4년 04월 07일)
제목: "예수 그리스도, 이 시대의 도피성"

♣주일예배(주후 2024년 04월 07일)
제목: "예수 그리스도, 이 시대의 도피성"
(Who is JESUS") ⓼번째
말씀: 여호수아 20:1~9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영광찬양대(1부)
대표기도: 최민규 부목사님
사회: 임병영 부목사님(1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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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20:1~9,
1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모세를 통하여 너희에게 말한 도피성들을 너희를 위해 정하여.
3 부지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이는 너희를 위해 피의 보복자를 피할 곳이니라.
4 이 성읍들 중의 하나에 도피하는 자는 그 성읍에 들어가는 문 어귀에 서서 그 성읍의 장로들의 귀에 자기의 사건을 말할 것이요 그들은 그를 성읍에 받아들여 한 곳을 주어 자기들 중에 거주하게 하고.
5 피의 보복자가 그의 뒤를 따라온다 할지라도 그들은 그 살인자를 그의 손에 내주지 말지니 이는 본래 미워함이 없이 부지중에 그의 이웃을 죽였음이라.
6 그 살인자는 회중 앞에 서서 재판을 받기까지 또는 그 당시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성읍에 거주하다가 그 후에 그 살인자는 그 성읍 곧 자기가 도망하여 나온 자기 성읍 자기 집으로 돌아갈지니라 하라 하시니라.
7 이에 그들이 납달리의 산지 갈릴리 게데스와 에브라임 산지의 세겜과 유다 산지의 기럇 아르바 곧 헤브론과.
8 여리고 동쪽 요단 저쪽 르우벤 지파 중에서 평지 광야의 베셀과 갓 지파 중에서 길르앗 라못과 므낫세 지파 중에서 바산 골란을 구별하였으니.
9 이는 곧 이스라엘 모든 자손과 그들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을 위하여 선정된 성읍들로서 누구든지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리로 도망하여 그가 회중 앞에 설 때까지 피의 보복자의 손에 죽지 아니하게 하기 위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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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지난 한 주간 동안 22차 봄 특새에 은혜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22차가 되다 보니까 모든 것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졌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그렇게 힘들지 아니하고, 물론 힘든 사람 몇 명은 있었지만 힘들지 아니하고 자연스럽게 새벽에 일어나는 것 훈련이 되어 있어 가지고 물 흐르듯이 해서 자연스러웠습니다. 주의 영이 많은 곳에 주시는 자유를 능력을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번에 22차 특세니까 22차 총선도 지켜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나라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것 하나님이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첫 번째 오늘 생각할 것은 오늘 제목이 ‘예수님은 누구신가?’ “예수 그리스도, 이 시대의 도피성” 이라고 그랬는데 성찬을 앞에 놓고 우리가 아 좀 말씀 앞에서 우리가 좀 생각을 해야 하는데 먼저 생각할 것은 정글 같은 이 세상입니다. 여러분 3절에 보니까 도피성이 왜 생겼는가 보니까, 어떻게 실수했다고요?
 
I. 첫째, 정글 같은 세상.
 
*여호수아 20:3,
3 부지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이는 너희를 위해 피의 보복 자를 피할 곳이니라.
-이게 뭐 이렇게 소위 과실치사죠 그 이유는 이는 너희를 위해 피의 보복 자를 피할 수 있도록, 그리고 9절에서도 오늘 보니까,
 
*여호수아 20:9,
9 이는 곧 이스라엘 모든 자손과 그들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을 위하여 선정된 성읍들로서 누구든지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리로 도망하여 그가 회중 앞에 설 때까지 피의 보복자의 손에 죽지 아니하게 하기 위함이라.
-오늘 여러분들 그 구절 그쪽에 좀 뭔가 좀 어리버리 하게 합독을 하시는데 마지막에 뭔가 9절에 제 보니까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리로 도망하여 그리고 마지막 구절 뒤에 피의 보복자의 손에 죽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마지막에, 이 땅의 삶은 만만하지 않습니다. 부지중에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당시에 예를 들어서 나무 하다가 어떻게 도끼날이 날아가서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이웃과 서로 다투다가 어떻게 상대편을 밀쳤는데 벽에 머리를 부딪쳐서 죽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의도는 없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살인이 되어서 과실치사(過失致死)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본문 앞에는 가나안 전쟁을 7년 동안 수행을 했습니다. 외부적 전쟁이죠. 지금 우리나라에도 이 근처에도 현실적으로 우크라이나나 팔레스타인 전쟁 또 이 북한에 있는 탈북자들, 또 북한에 지금 그 전쟁 같은 삶을 사는 분들은 얼마나 힘들겠어요. 갑작스러운 지진이 난 대만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겠죠.
 
그래서 이 세상은 뭐 이것도 어렵지만 아주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이 세상은 경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탈락하고 이긴 자만 살아남는다는 승자 독식의 논리가 타락한 세상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오죽하면 어떤 철학자는 삶이 너무 무한한 치열한 경쟁과 끊임없는 갈등이 있으니까, 남을 짓밟지 않으면 짓밟히는 인간의 모습에 대해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무슨 말입니까?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처럼 언제 뒤처져 낙오될지 모른다는 그 논리에 코뚜레를 꿰어서 끌려가는 그런 삶도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참 짐이 있잖아요. 그거는 외부적인 전쟁도 그렇지만, 내면의 전쟁도 만만하지 않죠. 가장 극복하기 힘든 대상이 나 자신이에요. 나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나 젊은이들 나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나, 내 자신이 정글이고 내 자신이 가장 큰 적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소위 중독,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성 중독, 게임 중독, 소위 어딕션(Addiction), 유튜브도 들었는데, 들었다 하면 그냥 1시간 2시간 3시간 쭉 가는 거지. 이것이 일상을 정글같이 옭아매어서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도록 그리고 우리의 내면 가운데 나도 나를 용서하지 못하고, 상처 난 부분들 그리고 부지중에 나는 모르지만 상대방을 말로써 죽이는 그런 경우도 있을 수 있죠. 자, 외적으로, 내적으로 다시 본문으로 들어가서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
 
외부적으로 살인을 했을 때 당시 이스라엘 사회는 특별한 사법 조직이나 경찰 조직이 없었어요. 그래서 피해자 가족들이 살인자를 조사하고 보복하는 시스템이었어요. 소위 피해 보복의 관계였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고 피해를 입으면 대체적으로 감정적이 되고 판단력이 흐려져 가지고 같이 망하거나 무고한 사람들도 무차별적으로 죽이는 그런 비극이 있었어요. 이런 경우 이 정글 같은 사회 내 외부적으로 이런 경우 그 당시에 이스라엘 사회 무슨 해결 방법이 있었을까? 3절에 보니까 “부지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그리로 도망가게 해라.” 그리로 도망가게 해라. 그러니까 그리로 라는 말이 이 도피성에, 도피성을 만드시고 그리로 도망가게 하라. 부지중에서 있던 사람들 무슨 우리 찬송은 피난처에 있으니 환난을 당한 자 이리오라
 
주 여호와 피난처요. 세상의 날 리을 다시 그치게 하시는 피난처 되시는 여호와의 피난 도피성 피난처가 이 도피성이라는 말이에요. 도피성 피난처라는 말인데 refuge(도피), shelter(대피소), 그래서 오늘 저나 여러분이나 우리 가운데 이런 삶의 도피성이 필요 없을 만큼 완벽한 사람도 없고 또 도피성에 가지 못할 만큼 저주 받은 사람도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정글 같은 세상을 다 피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한 가지 정글 속에서도 예수 믿는 사람들은 우리가 정체성을 잃지 않고 힘 있게 살아갈 비결 중의 하나가 오늘 도피성이라는 사실이에요. 정글의 늪에 빠지지 않고 저와 여러분이 꿋꿋하게 우리의 삶을 걸어갈 수 있는 그 장소가 도피성이라는 사실입니다. 조금 더 나중에 깊이 들어가면 이 성찬이 우리의 삶의 도피성이 되는 것입니다. 예배가 도피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예배와 성찬이 도피성이 되기 위하여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II. 도피성이라는 해답.
-도피성이라는 해답을 주님이 허락해 주셨는데 구약의 도피성은 아까 말씀한 대로 피해 보복자가 따라와서 죽이려고 하는 순간 그 그걸 이렇게 피할 수 있도록 레퓨지로서 쉘터로서 피난처로서 만들어 놓은 것인데 요단 서편의 3개 요단 동편의 3개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디에 있든지 하루길이면 뛰어갖고 하루 만 4-50km, 한50km 정도만 48km에서 50km 정도만 뛰어가면 대체적으로 될 수 있도록 그래서 제가 한번 도표를 한번 만들어 드려서요. 한번 보시겠습니다. 이스라엘 지도를 한번 보시겠습니다. 보이십니까? 이스라엘 왼쪽은 지중해고 밑에는 사해고 위에는 요단강이죠? 저기 뭐야 위에 갈릴리 바다죠 사인의 요단강이 있고 요단 서편에, 서편에 보세요. 오늘 성경 보니까 7절 8절에 뭐라고 나와 있냐면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납달리 산지에 갈릴리에 아니 보여줘요 예 갈릴리에 뭐예요? 게데스 갈릴리에 어디에 어 저 위에 저 위에 게데스 보입니까? 그 다음에 에브라임 산지에 3개보입니까?
그 다음에 유다 산지에 헤브론 보입니까? 저 근처에 예루살렘이 있죠? 요단 딱 잘라고 오른쪽에 이제 동쪽 동편에 뭐야 요단강 베셀 보입니까? 밑에 그다음에 길르앗 라못 보입니까? 중간에 저희 므낫세 지파 바산 골란이 보입니까? 제가 이걸 이런 걸 제가 잘 안 보여드리는데 이 보여드리는 거는 어디에 있어도 하룻길이면 갈 수 있도록 그리고 저 도피성은 언덕 위에 산지에 있었어요. 접근이 늘 보일 수 있도록, 사람들의 도피성을 향하여 잘 찾아갈 수 있도록 그리고 문은 항상 열려 있었고, 계곡마다 다리를 놓고 또 안전판이 있었고, 그래서 결과 죽을 목숨이 구원받는 것이 도피성이다. 그리고 6절 그리고 이제 중요한 도피성으로 도망간 사람은 오늘 6절 시작.
 
*여호수아 20:6,
6 그 살인자는 회중 앞에 서서 재판을 받기까지 또는 그 당시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성읍에 거주하다가 그 후에 그 살인자는 그 성읍 곧 자기가 도망하여 나온 자기 성읍 자기 집으로 돌아갈지니라 하라 하시니라.
-오늘 6절을 여러분, 2절 3절과 함께 잘 기억해야 되고,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도피성에 돌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고 그다음 그 살인자가 도피성에 들어갔을 때에, 재판을 받기까지 또는 그 당시 그 당시의 대제사장이 뭐예요? 죽기까지 그 성읍에 거주하다가 그 후에 살인자는 그 성읍 고 자기가 도망하여 나온 자기 성을 자기 집으로 돌아갈 지이라 하시니라. 그 성 자기 집으로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도피성에 들어가면 이제 먹을 양식을 주고 거기에 살도록 되어 있는데 그래도 큰 감옥이죠. 감옥 같이 있는데 그 그가 자유의 몸을 받을 수 있는 한 가지 조건이 있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당시에 대제사장이 죽으면 자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대제사장의 죽음과 도피성에서 편안했던 그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자유와 바꾸어지는 것이에요. 그러면 제가 이 말씀을 드리면 어떤 사람은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대제사장이 1년 만에 죽을 수 있으면 1년 만에 나오는 거고, 수십 년 동안 제 세상에 죽지 않으면 수십 년 동안, 거기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대제사장 오래 살면 도피성 있는 사람이 ‘주여! 대제사장을 빨리 데려가 주옵소서.’ 그건 여러분 쓸데없는 상상이고 복음의 핵심을 깨닫지 못하는 거예요.
 
자, 지난주에 지난 아론의 싹 난 지파이가 예수님이 뭘 예표 했다고요? 부활을 예표 했다. 그러면 오늘 여기에서 구약의 대제사장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것이에요. 히브리서를 보면 예수님이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라고 그랬고 그래서 여러분 제가 자막을 해 놓으면요 같이 보겠습니다.
 
*구약의 대 제사장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구약의 대 제사장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한다.
-훌륭합니다. 자막 팀 훌륭합니다. 정말 내가 감사드려요. 이번에 우리 그 특사 때도 말씀드렸지만 우리 하고 저하고 19년 20년 영상 팀은 나하고 12년 발맞추어 왔습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정말 오늘 이 말씀은 말씀도 안 봐도 여러분들 다 이해하기를 바랍니다. 잘 이해해야 하는 것이에요. 다시요. 아까처럼 잘못된 상상하지 말고요. 대제사장이 죽어야 뭡니까? 도피성에 피한 사람이 자유롭게 된다. 이거 어떤 뜻입니까? 사실 도폐성에 들어간 사람은 과실치사로 죽어야 되는 거예요. 실수여도 고귀한 생명을 죽인 범죄자예요. 그런데 그가 대제사장이 죽었을 때, 나왔다는 말은 그와 대제사장의 목숨과 바꿨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 이것은 마치 영적인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목숨을 버리시고 우리의 죽을 목숨과 바꾼 거예요. 복음적으로 생각을 해 보면 살인자가 도피에 들어갔다고 해서 살인자의 죄가 다 없어진 것이 아니에요. 모든 죄는 마땅한 형벌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죗값을 대제사장의 죽음으로 대속한 거예요. 대신 바꾼 거예요. 썹스티투션(substitution-치환, 대체) 된 거예요. 여기에 십자가의 깊은 사랑이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범죄(犯罪)는 값을 치러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진노(震怒)가 있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 진노가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도피성(逃避 城))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다 퍼부어 쏟아 부어진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과 저의 죄를 지우개로 지운다고 다 지워지는 게 아니고, 우리의 죄를 지우개로 지운다고 다 지워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죄를 내가 지어야 할 죄를 예수님께 다 쏟아 부으셨다. 그 말이에요. 그것이 도피성에 나타난 복음의 진리예요. 사도바울은 이걸 깨닫고 하나님께서 진노를 나타내신 것을 하나님의 의라고 했고 로마서 3장 26절에
 
*로마서 3장 26절
26 곧 이때에 자기 의로우심을 나타내 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의가 사라지지 않으려면 뭐냐 하면 누군가가 형벌을 받아야 되는 거예요. 누군가가 죗값을 치러야 되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도피성 되신 대제사장의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은혜인 줄 믿으셔야 되는 거예요. 이건 참 값비싼 은혜예요. 값비싼 은혜, 한 단계 더 올라가 가지고 구약의 도피성은 우발적으로 살인한 사람들을 정글 같은 세상에서 보호해 주시지만, 오늘 성령 시대에 사는 우리가 믿는 이 참된 복음은 우발적인 살인자뿐만 아니라, 고의 적으로, 고의적으로 죽인 악질(惡質) 죄인까지도 구원(救援)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구약에서는 대 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성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하지만 신약 시대에 지금은 우리가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리고 부활하신 그 은혜의 복음을 우리가 믿고 그분이 우리 곁에 계시기 때문에 지금 당장 우리의 삶을 의탁하면 우리에게 영원한 자유의 몸을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걸 너무 놀라워 가지고 히브리서 기자가 히브리서 6장 18절부터 20절까지 또박또박 기록하고 있는데 뭐라고 그랬냐면 18절에,
 
*히브리서 6:18-20,
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도피성을 찾은 우리에게 뭘 주신다고요? 아니라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았는데, 이것이 도피성이라는 거예요. 도피성을 찾은 우리에게 뭘 주신다고요? 아니라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았는데 이것이 도피성이라는 거예요. 도피성을 찾는 우리에게 큰 용기를 주시는데 그리고 이 도피성 안전한 곳에 누구 때문에 들어갈 수 있는가? 그다음에 20절 보겠어요. 20절 시작.
 
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아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한 대대사장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늘 보좌, 하늘 지성소로 들어가셨다 그 말이에요. 예수님께서 이런 길을 열어주시기 때문에 오늘도 우리는 은혜의 보자 앞에 지금도 나아갈 담력을 얻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 무슨 은혜가 있는가, 오늘 히브리서 6장 19절에
 
19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무슨 말인가? 이 시대의 정글 같은 세상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시대의 파도에 흔들림이 없이 도피성 되시는 안전한 영혼의 닻을 경험하신 주님께 이 시간 영광과 감사를 올려드리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우리가 주중에는 어떻게 보면 정글과 같은 세상 고통스럽고 어려운 환경 가운데 있는 성도들이 주일마다 예배에 이 예배가 도피성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와서 우리가 내 삶을 올려드리고 이럴 때, 진짜 이 시간이 여러분들 파도 많은 이 세상 가운데 영혼의 닻을 내린 안식(安息)을 누리게 되는 것이에요. 이게 얼마나 이걸 모르고 말이에요. 정글 같은 세상에 날마다 살다가 뭐 겉으로 평안하다. 하지만 뭐가 평안 하겠어요? 정글,,, 그러니 여러분 주중에 정글 같은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이와 같이 주일 나와서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이 시간이 도피성 되신 예수님 앞에서 우리가 영혼의 닻을 경험하는 겁니다.
 
안전한 영혼의 닻을 경험하는 거예요. 안식의 항구에 들어가는 거예요. 피난처(避難處)에 있으니 환난을 당한 자 이리 와서 주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예수 그리스도가 도피성인 신약 적 의미를 제가 도표를 만들었어요. 오늘 성찬식이니까 제가 길게 못 하니, 신약의 도피성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오른쪽에 어떻게 돼 있죠?
 
첫 번째, 남의 피가 아니라, 예수님 당신의 피를 흘리시고 도피성이 뭐예요? 되어 주신 거예요.
두 번째, 구약의 도피성은 신약의 도피성 예수 그리스도는 찾아오시는 예수 그리스도 일방적으로 주어진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세 번째, 구약의 도표성은 범죄자가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오른쪽에는 뭐예요 여러분 이 복음의 차이를 이해하시겠습니까? 오히려 예수님이 오래 기다려 주신다.
네 번째, 구약의 도피성은요. 일회성, 신약의 도피성은요. 영구적
다섯 번째, 구약은 도피성에서 해방 받았다. 하더라도 평생 짓눌림 있는 거예요.
그런데 신약은 도피성에서 완전히 새 생명의 소유자가 되고, 영적인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고아도 과부도 기댈 것 없는 인생도 과부도 도피성 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면 룻기 2장 12절에 뭐라고 되어 있는가?
 
*룻기 2:12,
12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이번에 보아스 우리가 배웠는데 보아스가 룻에게 그 과부에게, 그 정글 속에서 사는 과부의 룻에게 그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너에게 온전한 상주시기를 원하노라. 놀라운 피난처입니다. 시편 61편 1절로 3절에 보니까,
 
*시편 61:3-4,
3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4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셀라).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 주 날개 이 즐겁도다. 이 세상에 수많은 파도가 있어도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피난처와 견고한 망대와 장막과 과부들과 고아들에게 날개가 되는 줄 이 시대에 도피성 되는 줄 믿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성찬을 앞에 놓고 도피성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냥 거기서 먹고 마시고 그냥 산만 지탱해야 합니까? 소울 바이브 라이프로 살아야 합니까? 아닙니다. 도피성에 있는 사람들이 잘 되기 위해서 두 가지를 해요.
 
-거기서 무장을 하고 변화를 받아야 돼. 변화만 받으면 안 되고 거기서 세상 앞에서 살아갈 힘을 얻고 사명을 갖고 나와야만 하는 것이에요. 삶의 변화를 거기서 자기의 삶에 대한 재조명과 재정비를 하고, 삶을 점검(點檢)하고, 회개(悔改)하고, 평가(評價)하고, 오늘 우리 교회로 말하면 이 도피성 대신 주일마다 나와 가지고 여러분의 삶을 재정비하고 여러분이 타고 다니는 인생의 자동차를 닦고 조이고 기름 치고 오늘 찬송하면서 말씀 듣고 성찬에 참여하면서 우리의 삶을 재정비하고 재점검하고 우리의 삶의 변화를 가는 그리고 동시에 재정비할 뿐만 아니라, 소명자로 준비되고 사명자로 나와야만 하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나를 부르실 때, 역사가 나를 부를 때 시대가 나를 부를 때 내가 어떤 식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 도폐성 안에서 회계와 변화를 갖는 것만이 목표가 아니라 사명자로 나아가야 하는 거예요. 사명자로, 우리가 마틴 루터처럼 종교 개혁은 못한다 할지라도, 손양원 목사님처럼 그렇게 살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적어도 우리가 7천기도 용사를 은혜를 가지고 세상을 바꾸는 하나님의 기도 군대가 돼야 하는 것이에요.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구원하겠느냐?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가르치겠느냐? 주의 마음을 알아서 사명 자가 되겠는가? 이 시간 우리가 주의 마음을 알아 들이는 하나님의 신신한 남녀종들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누가복음 15장에 돌아온 탕자는 탕자로서 살 때, 그가 저 멀리 가가지고 향락, 사치 방탕하고 허랑 방탕 하고 그럴 때 그것은 정글이었어요. 수많은 중독과 아픔과 결국은 돼지 쥐엄 열매를 먹는 엉망진창의 삶이었어요. 이리 살다가는 내가 죽겠구나! 이리 비참하다가는 인생도 아니구나! 개돼지처럼 살구나! 우리 아버지 집에 가면 우리 아버지 집에 가면 지금보다 낫지. 그 아버지의 품이 돌아온 탕자에게는 도피성이 된 것이 그럼 그걸로 끝인가? 아니에요. 돌아온 탕자가 아버지 품에 들어가 가지고 자기를 돌아봤어요. 내가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하면 귀하게 살 수가 있는가? 어떻게 하면 내가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고 이제는 내가 마음대로 살았는데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고, 아버님을 더 사랑하고 아버님께 더 영광을 돌려야지, 그 마음을 품는 순간 제대로 도피성에서의 준비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이거예요. 그리고 신명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피성을 매년 한 차례씩 보수를 했습니다. 가는 길도 새로 닦았고 뒤에서 피의 보복 자가 따라와도 빨리 뛸 수 있도록 다리도 새로 놓고 잡초도 제거하고 접근할 수 있도록 매년 닦고 수리하고 보수하고 점검했습니다.
 
오늘 성찬식을 통하여 이 성찬식 자체도 도피성이 되게 하여 주셔서 닦고 조이고, 기름 치고 다시 사명을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군대로 준비될 수 있는 그런 축복이 저와 여러분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도피성 근처 가까이 가가지고 그 성 밖에서 천막을 친다고 해서 보호받지 못했습니다. 도피성 안에 완전히 들어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혹 우리 가운데 예수 믿는 아내를 만났다고 해서, 예수 잘 믿는 친구를 뒀다고 해서, 예수 믿는 아내의 치맛자락을 붙든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 교회는 남편들이 식구들을 교회에다 데려다 주고 본인은 안 들어오고 데려다 주고, 본인은 옆에 골프 연습장 가 골프 연습하고 소위 제가 이름을 붙여 성도라고 맴맴 성도, 맴 맴 맴 가운데서 그러다가 어느 날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들어와 가지고 이 안에 들어와 가지고 도피성 대신 이 안에 들어와 가지고 말씀을 깨닫고 피해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줄로 믿습니다. 그런 분들 가운데 순장되는 분들 많이 계세요. 다시요 도피성을 향해 힘차게 달린다고 하더라도, 그 성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달리기 자체가 당신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펄전 목사님은 겉으로 도는 신앙 제가 표현한 말로 맴돌기만 하는 신앙, 도무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신앙 이런 신앙, 은혜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신앙을 달팽이 신앙, 이라고 했어요. 수년 동안 심지어 수십 년 동안 신앙생활을 출발했는데 여전히 같은 지점에서 뱅 뱅 뱅 뱅 맴도는 신앙이 무슨 신앙이라고요? 달팽이 신해 오늘 성찬을 우리가 참여하면서 은혜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헌신의 수준이 뭔지를 모르는 그런 수준이 되지 말고 오늘 모두가 다 우리가 이 시간 맴 맴 성도 달팽이의 신앙을 처리할 수 있도록 은혜의 문턱을 넘어가는 귀한 성찬식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살아계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오늘 성찬에 참여해야 되는데 성찬에 참여한다는 것은 예수님 예수님의 몸과 보혈의 우리의 몸을 피한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우리의 삶에 뭐가 된다고요? 도피성이 되는 것입니다. 도피성이 되는 그래서 오늘 이 성찬이 최고의 도피성이 되는 것입니다. 도피성 대신 떡과 보혈이 우리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이 그리고 도피성에 참여할 때에 오늘 마음의 소원을 하세요. 아까 제가 그 지도를 보여드렸는데 7절 8절에 요단강 서편의 3개, 그다음에 요단 동편의 3개, 그 6개가 그냥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 각 이름 하나하나가 지닌 뜻이 있어요. 그래서 그 이름 하나하나 지닌 그 뜻의 도피성을 향하여 온 그 뜻이 여러분들에게 그대로 이번 성찬을 통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 게데스는 어떤 뜻이에요? 거룩한 곳이다. 성소다. 거룩한 곳이다. 여러분의 삶이 오염되었다고 생각한 분들 주여, 내 성찬을 통해 내 삶을 정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두 번째 뭐가 있어요? 어깨 견고함입니다.
세 번째는 뭐예요? 헤브론 헤브론에 있는 그 뜻이 뭐라고요? 교제라는 뜻이에요. 주님과의 교제가 뭐든지 오늘 성찬을 통해 주님과 더 나은 교재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외롭고 친구가 필요한 분들에게도 교제의 은혜를 허락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그 다음에 오른쪽에 뭐예요?
베셀은 요새다 포트리스다. 안전하다. 여러분의 가정과 자녀들을 안전하게 지켜주시기를 원하는 것이에요. 오늘 그대로 여러분들이 이걸 그대로 되게 그다음에 골란은 어떤 뜻이에요? 기쁨이라는 그 앞에 라못 이라는 뜻은 높은 곳 보호자라는 뜻이에요. 은혜의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게 하여 주옵소서. 골란은 기쁨을 오늘 성찬식에서의 시간을 통해서 여러분 참된 기쁨을 가지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여기에 대한 어떤 글들에 대한 문턱만 문턱 앞에서 왔다 갔다 합니다. 문턱을 넘어가세요.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시네....♩!!~~
 
♣요약
우리는 보복이 두렵고 중독으로 가득 찬 정글 같은 세상에서 도피성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피하기를 소원하며, 매주일 성전에서 온전한 치유와 안식을 경험해야 한다. 가장 강력한 도피성인 성찬을 통해서 맴맴 신앙, 달팽이 신앙을 재정비하고, 세상을 바꾸는 하나님의 기도 군대가 되어서 뚜벅뚜벅 걸어가 주님의 지상명령을 실천하는 ‘2033-50 비전’을 이루어 가야 한다. 제22차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우리나라에 좋은 지도자의 복을 주시길 간절히 기도하자.
-도피성은 극단적인 피의 복수를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부지중에 살인한 사람들이 도피할 수 있는 은신처였다.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아시고 그 죄를 용서해 주신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하신 사랑 속에서도 발견된다. 모세의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행해야 할 많은 일들을 지시해 주었다. 그 중 하나가 우발적으로 살인을 하게 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성역을 지정하는 일이었다. 마음에 계획한 바 없이 단지 손으로만 죄를 범한 사람의 피가 그 피의 복수자에 의해서일지라도 흘려지지 않도록 하는 것은 그 땅을 위해서였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 율법이 그들에게 크게 유익이 되는 것임을 상기시켜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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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차 봄 글로벌 특별부흥호(2024년 4월 06일)-여섯째 날
-사는 날 동안 능력이 있으리로다.
제목: "포로된 자들을 돌아오게 하소서"
말씀: 시편 126:1-6
설교자: 필립 라이켄 목사님(휘튼 칼리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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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26:1-6,
1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2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3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4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시내들 같이 돌려보내소서.
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오타나 번역이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Good morning and God bless you. My name is Philip Reichen. I'm the president of Wheaton College. It's so good to be with you this morning, even across video. I love the beloved Sauron Community Church, and I want to send my greetings to Doctor John O as the senior pastor and also my, my friend Sam Koh, who coordinates global missions for sarong. It's been good to worship with you in the past on a number of occasions, including for early morning prayer. And I admire your commitment to God's kingdom, your commitment to Korea, your commitment to the church around the world, your commitment to the gospel of Jesus Christ. God bless you as you gather this morning to pray and to carry forward the work of the kingdom.
-좋은 아침입니다. 신의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필립 라이켄(Philip Reichen)이라고 합니다. 저는 휘튼 칼리지의 총장입니다. 오늘 아침, 화상을 통해서라도 여러분과 함께 할 수 있어서 너무 좋습니다. 사랑하는 사랑의 커뮤니티 교회를 사랑하고, 수석 목사인 존 오(John 오) 박사님과 사랑을 위한 글로벌 선교를 조율하는 저의 친구 샘 코(Sam Koh)에게도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과거에 이른 아침 기도를 포함한 여러 차례에 걸쳐 여러분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여러분의 헌신, 한국을 향한 여러분의 헌신, 전 세계 교회를 향한 여러분의 헌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향한 여러분의 헌신에 감탄합니다. 오늘 아침 여러분이 모여서 기도하고 왕국의 일을 진행하는 동안 하나님의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I have in front of me psalm 126, which is a great psalm of the faith and one of the psalms of ascent that the people of God used to sing as they went up to Jerusalem. And here is what the word of God says. When the Lord restored the fortunes of Zion, we were like those who dream. Then our mouth was filled with laughter and our tongue with shouts of joy. And then they said, among the nations, the Lord has done great things for them. The Lord has done great things for us. Restore our fortunes, O Lord.
-저는 126편의 시편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 시편은 믿음의 위대한 시편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부르던 등정의 시편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합니다. 주께서 시온의 은혜를 회복하셨을 때, 우리는 꿈을 꾸는 사람들과 같았습니다. 그러자 우리의 입에는 웃음이 가득했고, 혀에는 기쁨의 함성이 가득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여러 나라 가운데서 주께서 그들을 위해 큰일을 해 주셨다고 말했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 큰일을 해 주셨습니다. 주님, 우리의 은혜를 회복시키십시오.

Like streams in, in the Negev, those who sow in tears shall reap with shouts of joy. He who goes out weeping, bearing seed for the sowing, shall come home with shouts of joy, bringing his sheaves with him. This is the word that God has promised to bless to our minds and to our hearts, and a word I hope will be encouraging to you. As I was preparing to preach from this passage, I came across the story of Petter Yasik. Petter was a minister in communist Czechoslovakia. He had traveled to Sudan, which he knew could be dangerous.
-네게브 강에서 시냇물처럼,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의 단으로 수확할 것입니다.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의 함성으로 집으로 돌아올 것이며, 그의 단을 가지고 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마음에 축복을 약속하신 말씀이며, 여러분에게 힘이 되는 말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구절에서 설교를 준비하던 중에 페테르 야식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페테르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국의 목사였습니다. 그는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수단을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And while he was there, he was captured by the intelligence service at the airport, and he was put in a small prison cell with five terrorists from Isis. It was a desperate situation. He prayed for God to deliver him. He hoped that there were other christian people that were praying for him. But as time went on and as someone gave him a bible to read, and he was able to read it from COVID to cover, and as he began to witness to his fellow inmates and began to see some of them come to Christ, he stopped praying for God to deliver him from prison. He started to pray that God would just keep him faithful in prison as he continued to carry out the work of the gospel. Then something happened that really sent Petir Yasik into despair. He was given a life sentence for spying against Sudan.
-그리고 그곳에 있는 동안 그는 공항의 정보국에 붙잡혔고, 다섯 명의 이슬람 테러리스트들과 함께 작은 감옥 감방에 갇혔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인도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다른 기독교인들이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누군가가 그에게 읽을 성경을 주었을 때, 그는 그것을 코로나로부터 읽을 수 있었고, 그가 동료 수감자들을 목격하고 그들 중 일부가 그리스도께 오는 것을 보기 시작하면서, 그는 감옥에서 그를 인도해달라고 하나님의 기도를 중단했습니다. 그는 복음의 일을 계속 수행하면서 하나님이 그를 감옥에서 충실하게 지켜주시기를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정말로 페테르 야식을 절망에 빠뜨리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수단을 상대로 스파이 활동을 한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습니다.

And he wasn't even sure if he could survive a life sentence. He would never see his family again. It was a deeply discouraging time. But he kept turning to the scriptures for consolation and encouragement. And one day, he was in the little prison courtyard, and he came to psalm 126, and he read these words. When the Lord brought back the captivity from Zion, we were like those who dream. And no sooner had he finished reading psalm 126 than one of the prison guards came up to him and said, today you will be released from prison. He could hardly believe it. It was actually just like the psalm being delivered from captivity and not even being able to believe it. It was like you were dreaming. It was so amazing and so joyful. As he reflected on this experience, Yasik said, that was a moment of joy like no other.
-그리고 그는 자신이 종신형을 받아도 살아남을 수 있을지조차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가족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매우 낙담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성경을 찾아 위로와 격려를 받았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작은 감옥 뜰에 있었고, 시편 126편에 이르러 이 말씀을 읽었습니다. 주께서 시온에서 포로를 다시 데려오셨을 때, 우리는 마치 꿈을 꾸는 사람들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시편 126편을 다 읽자마자 교도관 중 한 명이 다가와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거의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포로에게서 시편이 전달되는 것과 같았고 심지어 믿을 수조차 없었습니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놀랍고 너무 기뻤습니다. 이 경험을 되새기면서 야식은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의 순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As the other prisoners hugged me and they rejoiced over my release, we were shouting for joy. And he said, although I gave my life to Christ when I was 15 years old, I think it has more meaning now when I say, Lord, the rest of my life is yours. You brought me out of prison. You saved me from a life sentence. The rest of my life is yours. It's in your hands. Here I am. I want to serve you for the rest of my life. Well, hopefully, that's the same commitment that you've made to Jesus, to serve him with the whole rest of your life. And psalm 126 encourages us to follow through on that commitment because it assures us that there is a God who answers prayer and rescues his people. Let me just tell you a little bit about the context for this psalm.
-다른 죄수들이 저를 껴안고 제가 석방된 것을 기뻐할 때 우리는 기쁨의 함성을 지르고 있었습니다. 그가 말하길, 비록 제가 15살 때 그리스도께 제 생명을 바쳤지만, 이제는 주님, 제 남은 인생은 당신의 것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저를 감옥에서 꺼내주셨습니다. 주님은 저를 종신형에서 구하셨습니다. 제 남은 인생은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저는 여기 있습니다. 저는 주님을 평생 섬기고 싶습니다. 주님께서 예수님께 하신 그 약속과 같은 약속이 평생 그를 섬기도록 희망합니다. 그리고 시편 126편은 기도에 응답하고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보장하기 때문에 그 약속을 따르도록 독려합니다. 이 시편의 내용에 대해 조금 말씀드리겠습니다.

It references a time of captivity and a return to the city of God, to Zion, to the great city of Jerusalem. And this is from the end part of the psalms, book five that runs from psalm 107 through psalm 150. And these are psalms that, for the most part, were written to celebrate God's work with his people during their years of captivity in Babylon and then their return. If you know your Old Testament history, you know the people of God were held captive for some 70 years in Babylon, and, you know that was not a time of singing. If you look at psalm 137, that famous psalm, just a little bit later in the psalter, the people say, how can we even sing when we're in captivity? We're not at our in in. We're not in the city of God. We're not back home in Jerusalem. We're gonna set aside our instruments. We're not gonna sing any. And even when our enemies say, to us, to mock us, sing us one of the songs of Zion.
-이것은 하나님의 도시로, 시온으로, 위대한 도시 예루살렘으로, 포로로 잡힌 시간과 돌아온 시간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시편의 마지막 부분에 나온 것으로, 시편 107편부터 시편 150편까지에 이르는 5권입니다. 이것들은 대부분 바빌론에 갇혀 지내면서 하나님이 백성들과 함께 하신 일을 축하하기 위해 쓰여 진 시편들입니다. 여러분이 구약성경의 역사를 안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빌론에 70년 동안 갇혀 있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때는 노래할 때가 아니었음을 아실 것입니다. 시편 137편을 보시면, 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포로로 잡혀있을 때, 어떻게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 안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시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악기들을 따로 보관할 것입니다. 우리는 노래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의 적들이 우리에게 조롱하라고 말할 때도, 우리에게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불러줍니다.

We can't even do it because we're weeping so much with despair over the suffering that we're going through. And maybe you felt at times that your life is like that, and maybe you're going through times of difficulty right now, shedding tears for your children or grandchildren, really in despair over your situation at work. Maybe deeply concerned about the spiritual struggle that Korea is in today or concerned about the world situation for the church. There are many tears of lament that we could shed for the challenges that we face in this fallen world. But psalm 126 is about deliverance and about the joy comes when God releases you from captivity, when you're delivered from bondage to sin, perhaps first come to faith in Jesus Christ, or when you see the Holy Spirit work in your life in a powerful way to break some form of bondage, or when you see God working that way in somebody else's life. This is the kind of rejoicing that you would give.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에 절망하며 너무 많이 울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이 그런 것이라고 때때로 느꼈을 수도 있고, 아마도 여러분은 지금 자녀들이나 손자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정말로 직장에서의 상황에 절망하며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오늘날 한국이 겪고 있는 영적인 투쟁에 대해 깊이 우려하거나 교회의 세계 상황에 대해 우려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 타락한 세상에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도전들을 위해 흘릴 수 있다는 한탄의 눈물이 많습니다. 하지만 시편 126편은 인도에 관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감금에서 풀어주실 때, 여러분이 속박에서 죄로 인도받으실 때,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먼저 오셨을 때, 혹은 성령께서 여러분의 삶에서 어떤 형태로든 속박을 끊어내기 위해 힘 있게 일하는 것을 볼 때, 혹은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의 삶에서 그렇게 일하는 것을 볼 때 그 기쁨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줄 기쁨의 종류입니다.

And it was like this for the children of Israel when they received the news that they would be freed from Babylon and be able to travel back to their home in Jerusalem. These were words to sing and not just to say, not just to read. And we can add our testimony to the testimony of the people of God. In Old Testament times. The Lord has done great things for us. To God be the glory. Maybe you know this famous hymn to God be the glory, great things he has done. It's really an echo of psalm 126 and as many reasons as the children of Israel had to give God the praise, we have even more reasons. Because of our salvation in Jesus Christ. We have an eternal salvation. We have a home in heaven. We've been delivered fully from the bondage of sin. Praise God for the great things that he has done in our lives and specifically the things that he has done through Jesus Christ.
-이스라엘 자손이 바빌론에서 해방되어 예루살렘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가 이와 같았습니다. 이것은 노래하기 위한 말이었고 단순히 말하기 위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백성의 증언에 우리의 증언을 추가할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주님은 우리를 위해 큰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이 되게 하소서. 어쩌면 여러분은 하나님께 이 유명한 찬송가가 영광이 되시기를, 또 큰 일이 되시기를 알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정말로 시편 126편의 메아리이며,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께 찬양을 드려야 했던 것만큼이나 많은 이유로 우리는 더욱 많은 이유를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구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천국에 집이 있습니다. 우리는 죄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서 하신 위대한 일들과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신 일들을 찬양합니다.

Now I want you to notice in this psalm that the first half of the psalm is all about praise and rejoicing. It's answered prayer and the joy that comes when you see God work. But you'll notice when you turn to verse four, the second half of the psalm, there's a change in perspective and perhaps a change in situation because the psalmist says, restore our fortunes, Lord. So now this is a time of difficulty and discouragement. And the psalmist is saying, Lord, you answered our prayers in the past and it brought us great joy. We're in a tough situation again, and we are asking you now to restore us, to do again what you've done before, and that should be a great encouragement as you gather for early morning prayer in the great city of Seoul this morning.
-이제 여러분은 이 시편에서 시편의 전반부가 모두 찬양과 기쁨에 관한 것임을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일하는 것을 볼 때 오는 것이 응답된 기도이며 기쁨입니다. 하지만 시편의 후반부인 4절로 넘어가면 관점의 변화와 어쩌면 시편가가 말하기를 우리의 운세를 회복시키십시오. 그래서 지금은 어려움과 낙담의 시기입니다. 시편가가 말하기를, 주님, 과거에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고, 그것이 우리에게 큰 기쁨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우리는 다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으며, 지금 여러분에게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고, 이전에 하신 일을 다시 해 주시기를 부탁드리며, 그것은 오늘 아침 서울의 큰 도시에서 새벽 기도를 위해 모일 때 큰 격려가 될 것입니다.

You've seen God answer many prayers in your life for the people you love, also for the ministry of Sauron Community Church. But there's a need for God to answer those prayers again. Think of the great things that God has done in Korea in past years. I think of the Pyongyang revival. I think of the way that welsh and then later english and american missionaries brought the gospel to Seoul. Seasons of revival, people that gave their lives for the gospel, the outpouring of the Holy Spirit. When Billy Graham came to Seoul for his famous crusades. Billy Graham, Wheaton College alum who studied right in Blanchard hall, the building you see behind me, these are some of the things that God has done in Korea and the tremendous global work of missions that has come through korean churches, and that work is going on all over the world today. And maybe there's a part of you that looks at the past and says, Lord, we need you to do it again.
-여러분은 여러분이 살면서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또한 사랑의 교회 사역을 위해 많은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다시 응답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몇 년간 한국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위대한 일들을 생각해 보세요. 저는 평양 부흥기를 생각합니다. 웨일스와 그 후 영미 선교사들이 서울에 복음을 전했던 방식을 생각합니다. 부흥기의 계절,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 성령의 분출물들. 빌리 그레이엄이 유명한 십자군 전쟁을 위해 서울에 왔을 때입니다. 제 뒤에 보이는 건물인 블랜차드 홀에서 바로 공부한 휘튼 칼리지 졸업생 빌리 그레이엄은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한국에서 하신 일들과 한국교회를 통해 들어온 선교의 엄청난 세계적인 일들이며, 오늘날 전 세계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여러분 중에 과거를 바라보며 주님, 우리는 당신이 다시 그것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Restore our fortunes, do again a work of grace, of revival, of sending out missionaries. Start with me with the work that you need to do in my life. Psalm 126 is a prayer of celebrating answered prayer. And it's a psalm of coming back to God again in prayer to ask him to do the same kinds of things that he's done in the past. As the psalmist describes his situation, you get a sense it's a time of great difficulty. He mentions the Negev, which is the very dry part of Israel in the south. It runs from the runs all the way down to the Red Sea. It's effectively a desert. It's a very dry place. The water doesn't run there except when there are occasional rains. And that's what the psalmist is imagining. He's in a desert place spiritually.
-우리의 재산을 회복하고, 은혜와 부활의 일을 다시 행하라, 선교사들을 보내는 일을 내게 하소서. 당신이 내 삶에서 해야 할 일부터 시작하라. 시편 126편은 응답된 기도를 축하하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 돌아와 과거에 하신 것과 같은 종류의 일들을 해달라고 기도하는 시편입니다. 시편가가 그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듯이, 당신은 그것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시기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는 네게브 강에 대해 언급합니다. 네게브 강은 남쪽에 있는 이스라엘의 매우 건조한 지역입니다. 그것은 사실상 사막입니다. 그곳은 매우 건조한 곳입니다. 가끔 비가 올 때를 제외하고는 물이 그곳으로 흐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시편가가 상상하는 것입니다. 그는 영적으로 사막의 장소에 있습니다.

But when you're in the desert, there are places where you can see a dry riverbed. There's no water in it, but you can tell there's been water there before. And if the rains fall, perhaps in the mountains, the water will rush down again and it will again fill the desert and the flowers will bloom and there will be a place for the birds to get the sustenance that they need. The waters do sometimes come to the desert places, and that's what the psalmist is asking for. Lord, come to this dry place, fill it with water and help things flourish again. And he also uses this analogy of sowing and reaping a farmer planting seed in the ground and then waiting for God to bring the harvest. Maybe it's a little surprising for you to see this farmer weeping as he plants the seed. But maybe you can imagine a family that has exhausted almost all of its food resources has almost nothing left.
-하지만 사막에 가면 마른 강바닥을 볼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물은 없지만, 전에도 물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비가 내린다면, 아마도 산에서, 다시 물이 쏟아져 내려올 것이고, 사막을 다시 채우고 꽃이 피고 새들이 필요한 식량을 얻을 수 있는 장소가 생길 것입니다. 사막의 장소에 가끔 물이 오기도 하는데, 그것이 시편에서 요구하는 것입니다. 주님, 이 건조한 곳으로 오셔서, 물을 채우고 다시 번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또한 그는 농부가 땅에 씨앗을 심고, 하나님이 수확을 가져다주시기를 기다리는 비유를 사용합니다. 어쩌면 이 농부가 씨앗을 심으면서 우는 것을 보는 것은 여러분에게 조금 놀라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마도 여러분은 식량 자원을 거의 다 소진한 가정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All it has left are the seeds that are left from the harvest from the year before. And they're going to have to plant those seeds in the ground. They're not going to be able to eat those seeds. They need to plant them so that again, something will grow and God will be able to sustain them. That's the picture here at the end of the psalm. And there are times in life when we're doing God's kingdom work, and there are a lot of tears that go with it because it's hard and because we don't seem to see any fruitful results. So we have to keep laboring in the hope of a coming harvest. And this psalm gives us such great assurance that if we're faithful to God's work and if we persevere in that work, our labor is not in vain, and one day there will be a harvest. I read a marvelous story that illustrates this psalm from a swedish missionary couple that traveled from Sweden to Belgian Congo.
-이제 남은 것은 1년 전에 수확한 씨앗뿐입니다. 이제 그 씨앗들은 땅에 심어야 합니다. 그 씨앗들은 먹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씨앗들을 심어야 다시 무언가가 자라고 하나님이 그것들을 지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시편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사진입니다.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나라 일을 할 때면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힘들기도 하고 결실을 볼 수 없는 것 같기도 해서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수확이 오기를 바라며 계속 노력해야 합니다. 이 시편은 우리에게 큰 확신을 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충실하고 그 일을 인내한다면 우리의 노력이 헛되지 않을 것이고 언젠가는 수확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스웨덴에서 벨기에 콩고로 여행한 스웨덴 선교사 부부의 놀라운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And when they arrived at the place where they wanted to proclaim the gospel, the king of the local tribe said, you can't live here. We don't want anything to do with any other gods. You're going to have to live outside the community. There was only one person that they had an opportunity to contact. It was a little boy from the village who would go out every day to sell them eggs and perhaps from time to time, a chicken. And the missionary wife, whose name was Faia Flood, proclaimed the gospel to that little boy every day. Well, sadly, in a time of childbirth, she gave birth to her firstborn, a daughter, and then died just a few weeks later. Her husband was in despair. He was angry with God that his wife had been taken away from him. He gave up on the mission field. He gave his daughter to another missionary family. He went back home to Sweden. He didn't want to have anything to do with God again.
-그리고 그들이 복음을 선포하고 싶은 장소에 도착했을 때, 지역 부족의 왕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다른 어떤 신들과도 관계가 없기를 원합니다. 당신은 공동체 밖에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접촉할 기회를 가진 사람은 단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이 매일 밖에 나가서 계란과 아마도 가끔 닭을 팔곤 했던 것은 마을의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선교사 부인의 이름이 파이아 플러드였는데, 그는 매일 그 어린 소년에게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자, 슬프게도, 그녀는 출산의 시기에 첫 아이인 딸을 낳았고, 그리고 나서 불과 몇 주 후에 죽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절망했습니다. 그는 그의 아내가 자신으로부터 빼앗긴 것에 대해 하나님께 화가 났습니다. 그는 선교장을 포기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딸을 다른 선교사 가정에 맡겼습니다. 그는 스웨덴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다시는 하나님과 관계가 없기를 원했습니다.

Amazingly, when that little girl grew up in the United States, one day she saw a magazine and she saw a picture of her mother's tomb. It said Zvey Flood, and it showed the place where she was buried. And she was amazed to discover that through the gospel efforts of her mother, that community had come to Christ. That little boy that sold them the eggs became the minister and she went to Sweden, told her father about it. He gave his life back to Christ. She went back to Belgian Congo. She knelt at the grave of her mother and the pastor, that little boy that had sold the eggs and had come to faith in Jesus Christ. He opened his Bible to psalm 126 to read this psalm over her as a psalm of blessing. Those who sow in tears, they're going to come back. They're going to come back home to God. They're going to come reaping the harvest of redemption.
-놀랍게도, 그 어린 소녀가 미국에서 자랐을 때, 어느 날 그녀는 잡지를 보았고, 그녀는 어머니의 무덤 사진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즈비 플러드 라고 쓰여 있었고, 그것은 그녀가 묻힌 장소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어머니의 복음적인 노력으로 그 공동체가 그리스도께 온 것을 발견하고 놀랐습니다. 그 알들을 팔았던 그 어린 소년이 목사가 되었고, 그녀는 스웨덴으로 가서 그녀의 아버지에게 그것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는 그의 생명을 그리스도께 돌려주었습니다. 그녀는 벨기에 콩고로 돌아갔습니다. 그녀는 어머니와 목사의 무덤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 소년은 축복의 시편으로 그녀에게 이 시편을 읽어주기 위해 126편의 시편에 성경을 열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파종한 사람들은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들은 구원의 수확을 거두러 올 것입니다.

This is a promise for us to believe as we turn together. God in prayer. God bless you. Sarang community church.
-이것은 우리가 함께 돌면서 믿는 약속입니다. 기도하는 하나님. 여러분에게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의 공동체 여러분...

♣요약








♣제22차 봄 글로벌 특별부흥호(2024년 4월 06일)-여섯째 날
-사는 날 동안 능력이 있으리로다.
제목: "
말씀: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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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차 봄 글로벌 특별새벽부흥회(주후 2024년 4월 05일)
-사는 날 동안 능력이 있으리로다.
제목: "세상을 압도하는 거룩한 백성"(오스 기니스 교수님)
말씀: 출애굽기 19:6

설교자: 오스 기니스 교수님( 소명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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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19:6,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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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오정현 담임목사님.
-할렐루야!!! 금요일 새벽입니다. 땡큐 God, 이스 프라이데이!! 우리 하나님이 주시는 이 금요일 아침 우리 오늘 모두가 다 새로워지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무장되는 영광스러운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제가 보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맞춤형 은혜를 주시는데 이번 특새에 보니까 우리 젊은이들이 너무너무 많이 와요. 그러니까 내가 보니까 이 젊은이들이 한국교회 미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런 말이 있어요. 젊음은 현존하는 미래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미래는 이 특세에 나온 젊은이들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요. 그래서 저는 이 청년 시절에 대학 가가지고 첫 채플에 찬양을 하는데 그때 찬송을 하는데, ‘가슴마다 파도친다. 우리들의 젊은이 할 일 많은 이 나라에 우리 태어났으니 복음들과 앞장서서 충성되게 일하자.’ 새벽이니까. 말도 잘 안 나오는데 다시

‘할 일 많은 이 나라에 우리 태어났으니 복음들과 앞장서서 충성되게 일하자’
어떻습니까? 젊은이들은 이 말 들으면 가슴이 막 뛰어대요 그러니까 그게 그리고 또 ‘십자가를 높이 들고 노래하며 나가자. 하늘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들은 죄의 자녀 부름 받은 형제니 몸과 마음 다 바쳐서 주 뜻대로 살리라.’ 어제 제가 우리 찬양 팀 리더 목사님께 물어봤어요. 이 찬송 안 하니까 몰라요. 그러는 거예요. 그러나 세상이 마이 달라졌구나? 다시 ‘할 일 많은 이 나라에 우리 태어났으니 복음 들고 앞장서서 충성되게 일하자. 아마 이런 마음들이 모아져서 이번에 우리나라를 위한 기도도 또 총선을 위한 기도도 연결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맞습니까? 이 강단 위에는 지금 젊은이들 우리 자녀들이 올라와 있어요. 이야 이 젊은이들이 복음의 영광 어제 내가 우리가 유튜브 저기 뭐야? 특새 유통으로 내가 배꼽을 잡았어요. 왜냐하면, 거기에 대한일 중등부 애들은 물어봤어요. 1904년도에 러시아어하고 저기 뭐야? 우리나라에서 러시아하고 우리나라하고 전쟁이 있었는데, ,무슨 전쟁이냐 물으니까, 한일전? 러일전쟁, 그다음 또 1894년도에 세워진 평양의 장로교회(장대현 교회), 이름이 뭐냐 1894년이니까, 사랑의 교회?,,, 그 말도 안 되는 말도 안 되는데도 그걸 보면서 내가 참 마음이 기쁘더라고요. 왜냐하면, 사실 답은 틀렸지만 그러나 그런 마음가짐으로 그 내가 일부러 그런 거 같기도 하고 그러니까 ’할 일 많은 이 나라에 우리 태어났으니 복음 들고 앞장서서 충성되게 일하자‘ 이 새벽에 이 자체가 기도의 제목이 되게 하셔서 여러분들의 가슴이 뛰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찬송을 가슴이 뛰어야 젊은 것입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도 이런 찬송을 하면 가슴에 뛰면 그것이 젊은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이 화석화된 어떤 딱딱한 신앙이 있다면, 오늘 기도를 통하여 찬양을 통하여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들 오늘 은혜의 새살이 돕는 시간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있는 시간되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 오늘 새벽 세 시부터 와가지고 서너 시간을 이렇게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드린 거 이거 자체가 은혜요 기적이요. 여기가 부문 현장이 되는 거예요. 아 뿜어져 나가야 되는 것이에요. 누가 시켜서 해도 하겠습니까? 우리가 자발적으로 사모하며 나온 것 하나님이 기뻐하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 영접하고 은혜 주신 자에게는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며 생수의 강이라고 했을 때 강이 단수가 아니고 플로를 복수예요. 생수의 강들 위 월스, 강 들이 흘러다가요 들이라 그러니까 얼마나 충만한 가면 낙동강 영산강 압록강 두만강 미시피강 뭐 인더스강 그다음에 뭐 또 없어요. 나일강 모든 것들 쌓아놓은 고등 훨씬 더 큰 영광스러운 생수의 강이 터진다는 거지요. 4월 10일 총선 그것도 그냥 우리 속 안에 다 들어오는 거예요. 아시겠습니까? 어떻게 할 고민하는 거 있어 우리 속에 다 들어와야 되는 거예요. 알겠죠. 우리 속에 들어오면 역사를 7000명이 역사하면 4900만이 만 명이 역사하면 1억이 바뀌게 되는 것이 아시겠죠. 이대로 될 줄로 확신합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에 막 어떤 문제 밑에서 막 신음해 갖고는 해결이 안 돼요. 헬리콥터 타고 올라가고 전체를 바라봐야 하는 것이 오늘 주님의 강이 나팔 불 때, 그다음에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우리들은 주의 자녀 정말 복음 들고 앞장서서 충성되기 일하자 할 만한 이 나라에 우리가 태어났으니 이런 찬송을 하는 순간에 위에 올라가 전체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 그래서 우리나라의 장례도 주님이 그렇게 인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오늘 오스 기니스 박사님과 그다음에 우리 최병락 목사님, 우리가 사랑하는 최 목사님 말씀도 들을 텐데 오늘 이 자리가 정말 은혜의 진원지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아시겠죠? 그래서 우리 모두가 다 생수의 강이 흐르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교회에도, 한국 교회도 이번 총선에도, 이게 압도적인 기도가 되어서 모든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아멘. 또한 생수의 강이 충만할 줄로 믿습니다.

지금 조금 이따 말씀을 전할 오스 기네스 박사는 지금 현존하는 전 세계 최고의 석학 중의 하나예요. 최고의 크리스천 스칼라이자 옥스퍼드 박사이시고 소명에 대한 책뿐만 아니라 놀라운 인사이트가 있는 분이에요. 그리고 조금 어려워요 어려운데 여기 젊은이들이 많이 계시니까 젊음의 특징은 학습 능력이에요.이 새벽에 오스기니스 박사가 우리 교회 우리 교회 우리 동재의 동지 나이는 많으시지만 저한테 하는 얘기가 이제 한국 교회는 전 세계 교회 리더십을 한국 교회와 같이 나누어져야 한다고 그러려면 여러분들이 치성과 그다음에 4명과 그다음에 하나님이 준 통찰력으로 무장이 돼야 되는 것이 이 시간 오스 기니스 박사의 월드클래스의 지적인 강의를 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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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오스 기니스 박사님(영국 소명 저자)
-Good. Very, very early morning. My beloved brothers and sisters in Christ, we welcome all of you to Sarang's Chuch special down revival worship. I'm so glad that you are joining us live from all around the world. This week is going to be an amazing week of God's blessing. He will provide his strengths equal our days. Thank you, God. It's Friday.
-좋아요. 아주, 아주 이른 아침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계신 사랑이의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사랑의 교회의 특별한 다운 부활 예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전 세계에서 생방송으로 우리와 함께 하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이번 주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 놀라운 한 주가 될 것입니다. 그는 우리와 같은 날들을 자신의 장점들을 제공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금요일입니다.

What a privilege to be with you, my sisters and brothers in Korea. It's a real joy. My hope, speaking from the west, is to try and bring you encouragement, but also a warning not to do what we in the west have done, because we have let the Lord down so often. It's often said that the western church is weak because it's worldly. The idea that the western church created the modern world, but it has become captive to the world it helped to create. And so it's become its own gravedigger. Now why is that? Many people think that the western church has given in to secularism.
-한국에 계신 제 형제자매들, 여러분과 함께 하는 것은 정말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정말 기쁜 일입니다. 서방세계로부터 말씀드리는 제 희망은 여러분에게 격려와 동시에, 우리가 주님을 너무 자주 실망시켰기 때문에 서방세계가 한 일을 하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흔히 서방세계는 세속적이기 때문에 약하다고 말합니다. 서방세계가 현대세계를 창조했지만 그것이 창조하는 데 도움을 준 세계에 사로잡히게 되었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서방세계는 스스로의 중력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왜 그럴까요? 많은 사람들이 서방세계가 세속주의에 굴복했다고 생각합니다.

Secularism is a philosophy, the idea there's no God or gods or the supernatural, but its a philosophy put forward by atheists. But whats done us in is not so much secularism, the philosophy, but secularization, which is a process. A process through which faith becomes more marginal and less meaningful. So that many people think they can just live without God. They can do very well. Thank you. Without God. And of course, behind that are the brilliant contributions and developments and advances, of science and technology and modernization. What's the biblical answer to that? I think the answer is the biblical notion of holiness.
-세속주의는 신이나 초자연적인 존재는 없다는 철학이지만 무신론자들이 제시한 철학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행해진 것은 세속주의가 아니라 세속화, 즉 과정입니다. 믿음이 점점 더 주변적이 되고 덜 의미 있게 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아주 잘 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없이도 말이죠. 물론 그 이면에는 과학기술과 현대화의 눈부신 공헌과 발전, 발전이 있습니다. 성경적인 답은 무엇일까요? 저는 거룩함에 대한 성경적 개념이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In the west, holiness has a bad reputation, as if it's a kind of super virtue or a higher form of being goody, goody, something off putting and impossible. But what is described in the Bible as holy? In the Old Testament, in the hebrew scriptures, three things are described as holy. The first is a day, Shabbat, the Sabbath, or Sunday. As we learn from Genesis, creation takes seven days, and yet the entire universe, time and space only take six days. And the 7th day is a day of rest.
-서양에서 거룩함은 마치 일종의 미덕(super virtuy)이나 선함의 상위 형태인 것처럼, 뒤로 미루고 불가능한 것처럼 나쁜 평판을 받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거룩함으로 묘사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구약성경에서는 세 가지를 거룩함으로 묘사합니다. 첫 번째는 하루, 안식일, 혹은 일요일입니다. 창세기에서 배운 것처럼, 창조에는 7일이 걸리지만, 우주 전체와 공간은 6일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7일은 휴식의 날입니다.

But not a day of rest because of exhaustion, but a day for us human beings of stopping, of cessation, so that we're free to create and to work hard in those six days. But on the 7th to remember that we are only creatures and the Lord is the creator, so we remember him and remember our small place on earth. So Sunday, Shabbat Sunday for christians is like a window in time that allows us to remember the Lord and to remember his place as primary our life. So the first thing in the Bible that's holy is a day.
-그러나 지쳐서 쉬는 날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이 멈춰 서는 날, 멈춰서는 날, 멈춰서는 날, 그래서 우리는 그 6일 동안 자유롭게 창조하고, 열심히 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7일에는 우리가 오직 피조물이고 주님은 창조주임을 기억하기 위해 우리는 그를 기억하고 지구상의 우리의 작은 자리를 기억합니다. 그래서 일요일, 기독교인들에게 안식일 일요일은 우리가 주님을 기억하고 그의 자리를 우리의 삶의 일차적인 자리로 기억할 수 있게 해주는 시간의 창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가장 먼저 거룩한 것은 하루입니다.

And that comes from Genesis, exaggerated even more so in Exodus, and then right through the scripture. The second thing is not a day, but a place, the tabernacle. And if Shabbat is a window in times the tabernacle or later the temple. And for us, the church is a window in space, where we make room for the Lord and give time for the Lord to remind ourselves that we are creatures, we are only creatures, and he is the creator and master of it all. But what's the third one? The third one is the hard one. A day, a place and a nation.
-그리고 그것은 제네시스, 과장된 것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이야기로, 출애굽기에서 더욱 과장되게 표현되고, 그 다음에 경전을 통해서 바로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두 번째는 하루가 아니라 장소, 곧 성막입니다. 그리고 샤브밧이 성막이나 그 이후의 성전에서 창이라면 말입니다. 우리에게 교회는 공간을 만들어 주는 창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공간을 만들어 주시고, 주님께서 우리가 피조물이고, 우리는 피조물일 뿐이며, 그는 이 모든 것을 창조하고 주인임을 상기시킬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 번째는 무엇일까요? 세 번째는 어려운 것입니다. 하루, 장소와 국가입니다.

Israel in Exodus 19 is called to be a holy nation, the people of God. Now the Lord cares for humanity. Take, say the covenant with Noah after the flood. The Lord cares for individuals and for families. Take the stories in Genesis of the call of Abraham and of Isaac and Jacob and their wives and their many children. But in Exodus, the Lord calls a people a nation. And the hebrew word is related to the word for body, so that as a people a nation, we are like limbs in a body, and all dependent and independent on each other. Now, what is it that we are called to recognize as a holy nation?
-출애굽기 19장에 나오는 이스라엘을 거룩한 민족, 곧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부릅니다. 이제 주님은 인류를 돌보십니다. 홍수 이후에 나오는 노아와의 언약을 들어보세요. 주님은 개인과 가족을 돌보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그들의 아내와 많은 자녀들의 소명 창세기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들어보세요. 그런데 출애굽기에서 주님은 한 민족을 민족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히브리어는 육체를 뜻하는 말과 연관이 있어서 한 민족으로서 우리는 한 민족의 팔다리와 같고, 모든 것이 서로 의지하고 독립합니다. 이제 우리를 거룩한 민족으로 인정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는 것은 무엇일까요?

The day Sunday is a window in time. The tabernacle, the church, the temple is a window in space. And I think a holy nation is a window in authority. All other human beings have their kings and their rulers and their emperors Xi Jinping in China and King Jong un in North Korea. And nations have their leaders and presidents and bosses and celebrities, but no, we have no God but God. And we are under his authority under God. And so we become a holy nation.
--일요일은 시간의 창입니다. 성막, 교회, 성전은 공간의 창입니다. 그리고 저는 세 번째, 거룩한 국가는 권위의 창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모든 인간들은 그들의 왕과 통치자, 그리고 중국에는 그들의 황제 시진핑과 북한에는 김정은이 있습니다. 그리고 국가에는 그들의 지도자와 대통령, 그리고 상사와 유명인사가 있지만, 아니, 우리에게는 하나님 외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아래 그의 권위 아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룩한 국가가 됩니다.

Now, without these three things of holiness, the day, the place and the people, life would be overrun by human self assertion. And as we know from the scripture, that never ends well. It ends in disaster. And we can know that the modern world, with its brilliant communication, its brilliant transport, its brilliant everything, can pretend to be a world that has no need of the Lord at all. We can do it all ourselves now with modern technology, science. But if that's the case, we know that it won't end well. So in the midst of that, we are the holy people who keep alive a witness to the Lord.
-이제 거룩함, 낮과 장소와 백성의 이 세 가지가 없다면, 삶은 인간의 자기주장으로 넘쳐날 것입니다. 우리가 경전에서 알고 있듯이, 그것은 결코 좋게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재앙으로 끝납니다. 그리고 우리는 현대 세상이, 그것의 찬란한 소통과, 그것의 찬란한 운송, 그것의 모든 것이, 주님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세계인 척 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현대 기술과 과학으로 모든 것을 우리 자신이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이 잘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와중에서, 우리는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있는 거룩한 백성입니다.

And the Lord says, beginning with Isaiah, you are my witnesses. Now, it's easy to see with worship on Sunday that you're keeping alive a window to eternity. It's easy to see that with your wonderful rallies for revival and prayer, you're keeping a window open to the supernatural. But the really hard part, and especially in our modern world, is that in our ordinary day to day lives, our lifestyle, our behavior, we are a holy nation, a people of God.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사야를 시작으로 여러분이 나의 증인이 되심을 말씀하십니다. 이제,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면 여러분이 영원을 향한 창을 살려두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부활과 기도를 위한 멋진 집회와 함께, 여러분이 초자연적인 것을 향한 창을 열어두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특히 현대 세계에서 정말 어려운 부분은, 우리가 평범한 일상생활에서, 우리의 삶의 방식과 행동, 우리는 거룩한 국가이며, 하나님의 국민이라는 것입니다.

We are opening a window, pointing beyond ourselves so that the way we live by the supernatural power of the Holy Spirit cannot be explained by purely human reason and by purely human causation. I love the fact that again and again when the early church demonstrated the way of Jesus, as followers of Jesus, we read that the pagans cried out, great is the God of the Christians. Their love went beyond explanation. Their giving to the poor and the sick and the needy and others went beyond human explanation. And that's our challenge.
-성령의 초자연적인 힘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순수한 인간의 이성과 순수한 인간의 인과로 설명될 수 없도록 우리 자신 너머로 창문을 열고 있습니다. 초기 교회가 예수님의 방식을 보여주었을 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로서 이교도들이 부르짖고 위대하신 것이 그리스도인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읽었다는 사실이 계속해서 마음에 듭니다. 그들의 사랑은 설명을 넘어섰습니다. 가난한 사람과 병든 사람과 가난한 사람과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이 베푸는 것이 인간의 설명을 넘어섰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도전입니다.

The modern world can do so much, so well and so wonderfully, but it all falls short and we are witnesses to something higher. May it be said that you wonderful korean sisters and brothers so pray. Yes, so worship, yes, but also so live that the rest of the people around you in Korea and Asia, and I hope eventually in the west too, will say, great is the God of the korean Christians. They are a holy nation who point beyond themselves to something that witnesses to our lord. God be with you, and the Lord bless you. Thank you for the privilege of being with you.
-현대 세계가 할 수 있는 일이 아주 많고 훌륭하며 경이롭지만, 모든 것이 부족하고 우리는 더 높은 것의 증인입니다. 여러분의 멋진 한국 자매들과 형제들이 기도해 달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요, 예배해 주세요, 그래요, 하지만 여러분 주변에 있는 한국과 아시아 사람들이 위대한 것이 한국 기독교인들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우리 주님을 증인으로 삼는 것을 스스로를 넘어서는 거룩한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길 바라며, 주님께서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과 함께 할 수 있는 특권에 감사드립니다. Amen.

♣요약
서양 교회의 세속화와 성경적 거룩함
• 서양 교회는 세속화에 빠졌다.
• 세속화는 믿음을 사라지게 만든다.
• 성경적 거룩함이 해답이다.
거룩성을 유지하는 세 가지 요소
• 시간의 창, 안식일
• 공간의 창, 교회
• 권한의 창, 성민족
한국 크리스천들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
• 주일 예배로 영원에 대한 창을 유지한다
• 현대 세상에서도 성령의 능력으로 사는 건 어렵다
• 한국 크리스천들이 자신을 초월하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사는 것.





 


♣제22차 봄 글로벌 특별새벽부흥회(주후 2024년 4월 05일)
-사는 날 동안 능력이 있으리로다.(다섯 번째)
제목: "산을 평지처럼 걸어라"
말씀: 하박국 3:17, 스가랴 4:6-7
 
설교자: 최병락 목사님-초빙(강남중앙침례교회 담임)
 
* 하박국 3:17,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스가랴 4:6-7,
6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7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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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병락 목사님-초빙(강남중앙침례교회 담임)할렐루야! 제가 미국에서 목회를 할 때 큰 바위 얼굴 두 분이 계셨는데, 남가주 그때 사랑의 교회에 목회하시던 오정현 목사님, 그리고 새생명비전교회 강준민 목사님, 두 분이 목회하는 저에게는 참 이미 목회해서 큰 바라봄과 또 모델이 되어서 얼마나 감사한지요! 제가 미국에 잠시 있을 때 목사님께서 전화를 하셨습니다. 최 목사 어디야 미국에 잠시 들어와 있습니다. 4월 5일 빨리 칼랠드 한번 열어봐! 아침 시간 비어있나? “저희 교회 새벽기도가 있기는 한데 비어있습니다.” “우리 특새인데 와야 돼! 목사님 제가 여러 번 갔었는데요. 그러니까 그러면 시간 있으니까, 끊어!” 하고 끊으시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이 자리에 서 있게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박수... 예 우리 오정현 목사님은 저보다 위에 세대신데, 목사님 여기 특새 와서 보거나 목사님 가까이서 뵐 때마다 느끼는 마음은 저한테 기도가 자꾸 생겨요 목사님을 뵈면 제가 훨씬 젊거든요. 근데 이런 기도가 나와요. “주여, 저 젊음을 주시옵소서.” 주여 저 젊음을 제게 주시옵소서. 오늘도 아침에 기도가 그냥 나오는 거예요. 어 4시 20분부터 올라오셔 찬양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그렇지 못하고 있는데, ‘주여, 저 젊음을 주시옵소서.’ 정말 젊게 목회하시는 모습에 참 다시 한 번 도전을 받고요. 또 제가 너무나도 감사한 분이 또 강준민 목사님이십니다.
 
미국에 목회할 때 저를 살뜰하게 챙겨주시고, 멘토링을 해주신 분이신데, 어제와 그저께 오셔서 또 말씀을 전했던 영적 거인 뒤를 이어 가지고 오늘 말씀을 전한다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인데, 저는 세 번째 지금 특세를 초청받아서 오게 되었구요. 강준민 목사님 작년과 이번에 오시면서 어제 그저께 아침에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잠원 25장 17절 “너는 이웃 집에 자주 다니지 말라 그가 너를 싫어하며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일단 자주 와서 죄송하고 또 자주 불러주셔서 너무 감사하다는 말씀으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기도로 준비한 말씀 여러분하고 전하겠습니다. 전화는 전화 받는 여러분 모두 조안에 큰 은혜 있기를 축복합니다.
 
“산을 평지처럼 걸어라.” 에서 오늘 산 이야기를 많이 할 거고요. 산은 눈에 보이는 산이 아니라, 우리가 살다가 만나는 고난의 산, 역경의 산, 문제의 산, 재정이고 우리의 건강이고, 가정의 문제고, 앞이 보이지 않아 그런 여러 열악한 환경들이 바로 우리가 넘어야 할 산입니다. 오늘 혹시나 이 특새 기간에 정말 산을 만나서 어쩔 수 없이 이 특세기간에 산을 평지로 만들고 또는 산을 넘어가야 할 분이 있다면 이 중에 한 분이라도 그런 분이 있다면 이 설교는 그분을 위한 것입니다. 오늘 금요일 이제 1주일 동안 쌓아온 특색 가운데 오늘과 내일 가운데 응답 있기를 축복합니다.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을 우리는 에베레스트산이라고 그럽니다. 애버(ever)레스트입니다. 영원히 존재한다고 그래서 에버레스트라 그랬고, 신이 인간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 울타리를 쳐놓은 산이라고 이야기합니다. 8,849 메타 호흡이 가빠 올라갈 수도 없는 그곳에, 최초로 등장한 사람은 1953년 5월 29일 영국의 원정대인 에드만드 힐러리(Edmund Persival Hillary)와 셀파로 함께 참여했던 텐징 노르과이(Tenzing Norgay)가 온 세상을 경악시킬 첫 번째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1953년 그가 등정하는 것이 처음이 아니라 그로부터 이 년 전 그는 한번 등정에 거의 성공하다가 실패를 하게 됩니다. 실패를 하고 낙심하여 에베레스트를 눈앞에 두고 뒤를 돌아서다가 이 에드먼트 힐러리가 다시 고개를 돌려 에베레스트를 향해 주먹을 불끈 쥐면서 이른 외침을 외칩니다.
 
‘산아! 내가 반드시 다시 와서 너를 정복하리라. 왠 줄 아니? 산인 너는 그대로이지만 나는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라는 말을 했고 2년 뒤에 그는 더 자란 모습으로 와서 세상을 놀래키는 에베레스트 등장에 성공합니다. 아무튼 ‘I will come back and conquer you!-내가 다시 와서 너를 정복하리라.’ 산아, 왠 줄 아느냐? 산으로서 너는 잘할 수 없지만, 1cm도 잘할 수 없지만, 에서 휴맨 아이킹 그로우 사람으로서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As a mountain, do you know why? Because as a mountain, you cannot do well, but you cannot do well even 1cm, but you are growing up as a human eyeing grower in).
 
여러분 우리 앞에를 가로막고 있는 산들이 많지만 산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자라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목사님도 계속 말씀하신 것처럼 하이 프레이즈(High phrase!)! 헬기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높은 곳에 올라가서 여러분 맨하탄 꼭대기에서 비행기를 타고 내려다보면 어느 게 100층짜리인지 1층짜리인지 알 수 없습니다. 높은 곳에서는 다 평지일 뿐인 겁니다. 문제의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 내 믿음의 크기가 커지면 문제는 평지처럼 보여 지게 될 줄 믿습니다. 여러분이 특사에 나오신 이유도 그겁니다. 문제 앞에서 문제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아무것도 아니게 보이는 내 믿음을 키우기 위해 나왔던 것이고. 여러분도 모르는 사이에 월요일부터 예배드리는 시간 여러분의 믿음의 그릇은 커져 있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나와야 되는 거고, 그래서 기도해야 되는 거고, 그래야 찬양하는 거고, 그래서 말씀을 들을 때에 내게 보이지 않는 믿음의 그릇이 점점 커지게 되면 그렇게 커 보이던 문제도 믿음의 사이즈가 커지고 나면 우스워집니다. 내가 저것 가지고 떨었던가, 저것 가지고 염려했던가, 저거 가지고 세상 다 끝난 것처럼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던가,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저희 아내도 목회를 하면서 같이 동력을 저와 동력해 주는데 아내가 기도해 다행히도 감사하게도 기도의 사람입니다.
 
교회 앞에 자녀 문제 여러 가지로 목회를 저를 23년 동안 지금 도와오면서 큰 문제를 교회 문제를 닥칠 때도 저희 아내는 습관이 있어요. 큰 문제가 우리가 넘을 수 없잖아요. 미국에는 조그만 한 집이라도 클라짓(Clasit) 옷장이 공간이 좀 있게 만든 워킹 클라짓입니다. 항상 문제가 있으면 문제를 가지고 클라짓으로 들어갑니다. 두 시간 세 시간 길게는 네 시간 동안 나오지를 않아요. 안에서 간절하게 기도 소리가 집안 전체를 울립니다. 그리고는 나오는 시간이 언제 나오냐면 꼭 이럴 때 나옵니다. 그렇게 컸던 문제가 한 시간 기도하면 요만큼 작아지고 두 시간 기도하면 요만큼 작아지고 세 시간 기도하면 손에 딱 잡힐 만큼 크기가 되면은 응답된 줄 알고 나오는 겁니다. 그러고 나면 하나님이 곧 응답하십니다. 여러분 우리의 믿음의 크기와 믿음의 영 권을 가지고 계속 우리의 믿음이 커지면 아무리 커졌던 문제가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내 믿음이 커지면 문제가 작아 보이는 것이고. 문제가 손에 들어오고 작아지면 응답되는 줄 믿습니다. 어릴 적에 여러분이 뛰어놀던 초등학교 운동장 그렇게 한도 끝도 없이 넓었던 운동장을 어른이 되어서 여러분이 방문해 봤을 때 깜짝 놀라게 만들지 않습니까? 야 운동장이 이렇게 좁았어. 이렇게 작았어. 근데 왜 어릴 적은 그렇게 넓어 보였지 그리고 놀이터로 가보지요. 철봉에 내 이마가 퉁 하고 닿는 걸 보고 야 어릴 적은 까치발로 뛰어도 닿지 않던 철봉이 이렇게 낮았던 거야. 뛰놀던 동네 앞산을 바라보면서, 아니 왜 이러지 그때는 그렇게 높아 보이던 앞산이 동산이었던 거야! 동산도 그대로고 철봉의 높이도 그대로고 운동장의 넓이도 그대로이지만 여러분의 나이와 키가 컸기 때문에 어른이 되고 보니 높은 것도 없고, 넓은 것도 없고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를 위협하면서 마치 나를 집어삼킬 것처럼 나를 다 오늘 끝장낼 것처럼 무서운 발톱을 하고 파도처럼 우리를 스치고 습격(襲擊)하고 있지만 여러분의 믿음이 커지고 믿음의 담력(膽力)이 커지고 믿음에 정말 여러분의 그릇이 커지면 그 모든 것들이 야 이렇게 작은 문제였던 거야. 이런 문제 가지고 내가 떨었던 거야. 여러분의 문제가 작아 보이기 시작하고 이길 만한 담력이 생기면 하나님 이기게 하실 줄 믿습니다. 다 높아 보일 뿐이지, 우리가 오르지 못할 산은 없습니다. 믿음을 키우면 되는 겁니다. 여러분 특새 정말 잘 나오셨어요. 믿음을 키우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믿음을 무한대로 키워주시길 축원합니다. 10편 121편에 보면은 시편 기자가 큰 문제가 있었던지 도움이 필요했던지 높은 산을 바라보면서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쉽니다.
 
*시편 121편 1-2,
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2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그 산을 보면서 한숨을 쉬지요 도대체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저 산이 나를 가로막고 있는데, 산이 날 도와줄까 내 힘으로 산을 어떻게 이길까 태산 같은 문제 앞에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어보니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하고 한숨을 쉬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방긋 웃기 시작합니다. 그리곤 이렇게 연이어 고백을 하지요 내가 산을 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하다가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산 뒤의 산보다 크게 서 있는 하나님에게 시선이 고정되자 한숨이 찬송으로 바뀌고 한숨이 기쁨으로 바뀌게 되면서 나의 도움은 산보다 높은 여호와에게 서로다 오늘 하나님이 보이며 살게 되는 줄 믿습니다. 산이 보이면 절망하지만 하나님이 보이면 소망이 되는 것이고, 산이 보이면 눈물이지만 하나님이 보이면 찬송이 되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 믿음에도 눈이 있어요. 우리 육신에만 눈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도 눈이 있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눈으로는 산이 보이지만 믿음의 눈을 들고 보면 하나님이 보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이 새벽에 나오신 이유는 육신의 눈을 시력을 더 좋게 하기 위해 라식 수술을 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오늘 여러분이 어두워져 버린 영적인 눈을 다시 라식 수술하고 마땅히 봐야 할 하나님을 보는 시간되길 축원합니다. 믿음에도 눈이 있어서 믿음의 눈은 물어보면 하나님은 여전히 거기에 계시는 거예요. 모든 게 끝난 것 같아도 자신감이 생기지요. 소망이 생기지요 이 또 또한 지나가리라 믿음의 눈이 안 열렸을 때는 오늘이 끝인 것처럼 내가 한숨을 쉬었는데 믿음에 눈 들어 주를 보니 아 괜찮다 조금만 견디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나님이 새 나라를 주시리라. 더 좋은 것을 주시리라. 산이 문제가 아닙니다. 믿음 준비만 하면 됩니다. 여러분 한 산을 넘어도 다른 산 살아보셔서 아시잖아요. 사실만큼 살았잖아요. 한 산 넘으니까 끝납니까? 첩첩산중이 인생 아닙니까? 자녀 키워놓으면 건강의 문제 건강을 해결되고 나면은 부부간의 문제 부부가 좀 살만하면 이제 주님 오라 그러시고 뭐 여러 가지 우리의 산이 산 넘다가 끝나는 인생 아니겠습니까?
 
어마어마한 산을 만났던 한 사람을 소개할까 합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유명한 고 강영우 박사님 그분이 경기도 양평 문오리에서 태어났습니다. 4남매에 둘째로, 태어났고요. 14살 되던 날 축구를 하다가 날아오는 공에 눈을 맞았는데, 한쪽이 실명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한쪽도 실명이 되고 맙니다. 14살 소년이, 후천성 시각 장애인이 되고 맙니다. 엄청난 산을 만난 거지요 한 인생으로서 앞을 못 본다는 것 그러나 강영우 박사는 일이 있기 2년 전에 자기의 든든한 산이었던 자기의 빽 이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십니다. 가정의 가장이 되는 겁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만 해도 12살 당시로 나이로 참 큰 산을 만난 것인데 14살에 시각장애인이 되었으니, 또 하나의 넘기 힘든 산을 만난 거죠. 아들이 앞을 못 보게 되었다는 소식을 의사에게 듣자마자 충격으로 어머니가 돌아가시게 됩니다. 14살 때 천혜의 고아가 되지요 바로 위에 있었던 한 명의 누나가 세 명의 동생을 키우기 시작합니다. 누나도 어린데 동생을 어떻게 키웁니까? 이 일 일하면서 동생들을 키우려고 하다가 고마운 누나도 과로사로 죽게 됩니다. 이제 밑으로 남동생 하나 여동생 하나 남동생은 철공서로 그리고 여동생은 보육원으로 흩어지고 이 앞을 못 보는 강영우 학생은 맹인학교에 입학을 하게 됩니다. 중학교 입학해서 맹인 고등학교에 들어갔는데, 모두 직업학교 가라고 직업 훈련을 시킵니다. 왠지 모르게 직업훈련도 해야 되지만 누구보다도 점자 연습을 열심히 해서 나는 대학에 들어가겠다고 했을 때 그분의 당시만 하더라도 대학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교육이 준비된 학교가 없습니다.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해도 직업을 잡아야지 대학 갈 수 없다는 이야기만 했지만, 왠지 모르게 꺾이지 않는 꿈 때문에 공부를 열심히 했고, 당시 이화여대에서 여학생들이 내려와서 자원봉사를 하면서 많이 도와줬습니다. 그중에 한 명이 석은옥이라고 하는 여대생이 나중에 그의 아내가 되지요. 고등학교 3학년 마치고 난 뒤에 대학에 입학 원서를 넣지만 시각장애인을 받아줄 수 있는 학교는 대한민국에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공부하고 또 시도한 끝에 연세대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고 공부를 열심히 하고 졸업을 할 때는 보통 사람도 하지 못했던 전체 차석으로 졸업을 하게 됩니다. 대한민국 최초 시각장애인으로 외국 유학을 가게 되고, 거기에서 공부를 하여 피시버그대학교의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게 되며 최초의 한국인 시각장애인 박사가 됩니다.
 
그러고 난 뒤에 바로 죠지부시 대통령시절에 국무분과 국가장애위원 정책분과위원장 지금으로 말하면 차관보 자리로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이민자 중에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가신 분입니다. 장애인의 인권을 담당하면서 한 멋진 크리스천으로, 워싱턴 중앙 장로교의 성도로, 교회와 나라와 하나님 나라를 섬기다가 지금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분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분이 만난 많은 산들 중에 우리가 하나만 만나도 넘기 힘들었을 텐데, 그분은 모든 산들을 다 넘고 넘어 보통 사람도 할 수 없는 위기한 일을 했습니다. 그분이 돌아가기 전에 돌아가시기 전에 자기의 자서전 하나를 쓰게 됩니다. 그분이 쓴 자서전의 책 제목이 뭐냐면 ‘우리가 오르지 못할 산은 없다.’라고 하는 제목입니다. 그 많은 산들이 없었던 게 아니라, 하나하나 넘기 쉬웠던 산 하나도 없었지만 다 지나고 보니 우리가 넘지 못할 산은 없었다고 그분은 이야기합니다. 그분이 책의 서문에 이렇게 써두었습니다.
‘어느 날 절벽 가까이로 나를 부르셔서 다가갔다 하나님이 부르신 거지요 절벽 끝에 더 가까이 오라고 하셔서 더 가까이 그랬더니, 절벽에 겨우 발을 붙이고 서 있는 나를 절벽 아래로 밀어버리셨다. 나는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그런데 나는 그때까지 내가 날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 너무나도 두려웠던 절벽에 하나님 나 좀 살려달라고 외쳤는데, 살려주기는커녕 하나님 야속하게도 날 절벽으로 밀어버리셔서 도대체 하나님 왜 이렇게 나에게 잔인하시냐고 외치려고 했더니, 절벽에서 떨어지고야 비로소 내 몸에 날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은 두려움의 절벽이 아닌 어디든지 날아다닐 수 있는 창공이 되었다고 그분이 얘기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의 날개가 되어 주십니다.
하나님 우리와 함께하시고 아까 목사님 말씀처럼 우리가 헬리콥터를 타고 하이프레이즈로 위에 올라가서 창공을 날아다니면 넘지 못할 산이 어딨겠습니까? 나 혼자 힘으로야 넘을 수 없겠지만, 하나님이 나의 날개가 되어 주시면 넘지 못할 산이 없는 줄 믿습니다. 여기 성지순례 다녀보신 분도 계시겠지만, 성지순례 가서 예루살렘에서 사해로 내려갔다가 사해를 구경하고 난 뒤에, 차를 타고 최후의 로마의 항전 지 마사다 지역으로 내려가다 보면 엔게디 광야를 지나게 됩니다. 고속도로를 가로질러 가는 엔게디 광야 좌우에는 풀 한 폭이 나지 않는 광야고 흰 돌산으로 이루어져 있고 깊은 협곡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높은 산인데,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를 찾기 힘듭니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성지순례하는 사람이 뭘 발견했는지 한 사람이 소리를 지릅니다. 어머, 저것 봐! 그럼 사람들이 창문에 붙어가지고 야 신기하다. 야 신기하다. 외치는 장면이 있습니다. 앤게디 광양이 펼쳐지는 사람을 놀래는 장면은 뭘까요? 그 깎아지른 듯한 돌산에 사람이 서 있으면 한 발만 움직여도 떼구르르 굴러 떨어지는 위험천만한 절벽인데, 거기에 평안한 모습으로 서서 있는 산양들을 보기 때문에 ‘개디’가 ‘산양’이라는 뜻입니다. 개디의 땅이라고 해서 앤게디 게디의 샘물이라고 해서 앤 게디라고 부르는데, 사람은 거기 한 발도 걸을 수 없는데 그 양은 그곳에서 힘줄 때문에 비탈에 서도 평지처럼 서서 우리를 비웃듯이 보다가 식 한 번 웃고는 훌쩍 풀척 풀쩍 뛰어서 다른 산으로 평지처럼 뛰어다니는 걸 보면 얼마나 신기한지 모릅니다. 탄성이 저절로 나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을 읽었던 하박국 선지자는 나라는 태평성대를 이루고 있었던 시대지만 내적으로는 영적인 부 폐가 하늘을 찌를 듯한 내적 부패의 상황이었고, 국제 정세는 아수르가 멸망하게 되고 바벨론의 말발굽에 멸망하게 되었는데 이 예언자 하박국은 이미 바벨론이 남 유다로 쳐들어 내려오는 말발굽 소리를 듣고 놀라게 됩니다. 야, 이제 영적으로 부패했으나, 나라가 부강하니까 부패한 줄도 모르는 이 100성을 하나님이 바벨론의 말발굽으로 우리를 심판하시겠구나! 너무 놀랍니다. 이제 그들이 와서 모든 것을 짓밟을 것이고. 우리의 무화과나무를 다 열매를 떼 갈 것이고, 포도나 부모의 소추를 훔쳐갈 것이고. 우리마다 털어서 양도 소도 다 훔쳐갈 것을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해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기도하는 것이 하박국 선지자 하박국서의 내용입니다.
 
그 일은 이미 이루어질 것 같고, 우리에게 다칠 어마어마한 고난의 산이 이스라엘 이 남 유다에게 닥쳐올 때에, 하박국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하나님이요. 바벨론을 하나님 물리쳐 주시고 우리에게 얼씬도 못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할까, 아니면 그러한 일이 맞춰도 우리 한 사람 믿음 포기하지 않고 바벨론의 말발굽보다도 더 힘센 믿음을 가지게 해달라고 이 하박국은 기도하기 시작하면서 그가 기도했던 내용이 하박국 오늘 읽었던 3장 마지막 절입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하나님이여, 바벨론이 쳐들어와 우리에게 모든 악행을 행한다고 할지라도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하나님이여 비탈에 서 있는 산양 게디의 발목의 힘줄처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하나님 어떠한 고난과 어떤 문제가 우리를 엄습해 오고 우리를 쳐들어와도 하나님은 그것을 밟고 넘어갈 수 있는 하나님이 나의 힘이시오. 저 사슴에 힘줄을 주옵소서.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여, 발을 오늘 사슴의 발과 같이 하사 비탈도 비탈인 줄 모르고 산도 산인 줄 모르고, 평지도 평지인 줄 알아 평지도 평지처럼 산도 평지처럼 비탈도 평지처럼 달리는 사슴에 발을 주옵소서. 오늘 이 아침에 이 사슬의 사슴의 발에 힘줄을 취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는 나의 힘이시기 때문에 오늘 하나님이 여러분에 힘줄 되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떤 산이 와도 남들은 힘줄이 없으니까 높은 산이라고 울고 있지만 내게는 주 여호와가 나의 힘줄이 되어 주신이 산을 평지처럼 달릴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새벽에 나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를 없애는 기도도 해야 되지만, 문제가 문제로 안 보이는 믿음을 달라는 것, 그래서 앞으로 한산을 넘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산이 우리를 엄습해 올 때에 이제는 떠는 것이 아니라, 비웃을 수 있는 정도의 믿음을 가지고 내 눈에 평지도 평지로 보이고, 선보 평지로 보이는 눈 사슴에 힘줄을 가진 주 여호와를 나의 힘으로 삼는 사람이 고백할 수 있는 고백인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평지만 찾아서 달리기 해달라고 하박국은 기도한 것이 아니라, 산을 평지처럼 달리는 힘줄을 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산을 피해 다니는 믿음이 되지 마시구요. 산을 뛰어넘는 믿음을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저는 사슴의 다리를 가진 믿음의 사람들을 한번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목회하다가 한국에 잠시 방문을 해서 한국에 계신 목사님들과 한 20여 분의 목사님들하고 남도에 증도도 다녀오고 요양원도 다녀오고 하는 방문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 코스 중의 하나가 소록도를 가는 것이었습니다. 소록도는 나병 환자 한센 병 환자들의 집성촌이었죠. 거기에 가면 소록도 중앙교회가 있습니다. 소록도 중앙교회 20여 명의 목사님들이 앉으니까 그 당시에 돋보기안경을 두껍게 낀 경상도 70대 중반 되시는 남자 전도사님이 교회 전체를 관리하고 계시더라구요. 그분도 눈썹도 없고 입술도 없는 그건 나병 한센스병 환자셨습니다. 그분이 소록도 중학교에 대한 역사를 알려주시는데 너무 감동이 되더라고요. 그분이 경상도 짙은 사투리로 우리 20명의 목사님들에게 이야기하셨는데 제가 한번 흉내를 내보도록 하겠습니다.
 
※‘목사님들 오늘 여기 잘 오셨습니다. 이 소록도는 그분의 표현이니까. 그냥 문둥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제가 옮기겠습니다. 여기는 문디 들이 오는 데입니다. 문등 병 참 고약하지요 집에서 암 환자 한 명만 생겨도 전부 직장까지 그만두고 좋은 의사 찾아 댕기면서 어쨌든 낫게 할려고 그러는데, 이 문동 병은 지랄병이라서 한 명만 걸려도 부모도 자식을 버리는 게 문둥병입니다. 우리 교회 여기 여 집사님은 처녀 때 20살 때 몸에 문둥병이 생겨가지고 저 경상도 아가씨인데 눈물, 눈물 방에서 울고 있는데, 부엌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 무슨 소리인가 하고 부엌으로 나가봤더니, 아버지가 딸 죽인다고 칼 가는 소리입니다. 놀라가지고 뒤 산으로 도망을 갔는데 쌀 한 대박을 보자기에 싸서 엄마가 와서 딸 품에 안겨주고는 엄마도 하는 말이 ’멀리 가레이. 멀리멀리 가레이. 아버지 눈에 안 띄는 대로 가레이‘ 엄마한테도 버림받고, 아버지한테도 버림받아 울며 찾아온 게 이 전라도 소록도까지 온 거 아닙니까? 여기 인생 막장들 오는 데입니다. 막장들이 오는데 소록도 왔다가 요 소록도 옆에 섬이 하나 더 있는데, 이 섬만 갔다 오면 다 변하는 거라요. 소록도 중앙교회가 일단 문디 들이 지은 건데 이거 아십니까? 이거 지을 때에 대한민국의 영락교회 본당 다음으로, 큰 본당입니다. 이건 문디 들이 남자들은 산에 올라가 가지고 나무를 베는데 손이 어디 있습니까? 손에다 손이 없으니까 손에다가 톱을 꺼내 묶어 가지고 그렇게 잘라 가지고 몸으로 굴려서 내린 거 아닙니까? 여자들은 백사장에서 모래를 퍼오는데 손이 없어가지고 손목에다 숟가락을 끈으로 담아가지고, 그래 퍼가지고 그때 소록도 앞바다가 피로 낭자했다. 그랬습니다. 문디들이 와가지고 이걸 지어 가지고, 지금은 우리가 얼마나 행복하게 이렇게 하나님 섬기는지 희한하지요? 소록도 와서 울다가 고 옆에 있는 섬만 갔다 오면 다 웃고 오는 거라 그 섬이 참 ’찌라도‘ 라는 섬인데 요상한 섬입니다. ’찌라도‘만 갔다 오면 안 변하는 사람이 없어요. 목사님들도 어렵게 왔으니까 오늘 찌라도 한번 주소 알려드릴 테니까. 다녀 오실랍니까? 그럼 주소 받아 적으소! 하고 꺼내서 받아 적는데 잘 적으이소? 하박국 가 봐! 3장, 3장 17절, 17절 거기 찌라도 나옵니다. 3장 17절 한번 찌라도 나오는지 한번 봅시다 같이 읽읍니다.
 
*하박국 3:17,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찌라도 여기에 찌라도! 여기에 섭이 나오더라고요. 이분들이 소록도에 와서 울며 우리 아버지 왜 날 버렸나, 우리 엄마 왜 난 안 찾아오나, 나는 언제 우리 집에 한번 성한 몸으로 가나 울다가 거기서 예수님을 만난 거예요. 그러다가 예수님 만나고 보니 야 내가 여기까지 안 왔으면 예수님 못 만날 텐데 이 세상에는 이렇게 살아도 영원한 천국 가게 되니 얼마나 좋은지 그때 이렇게 고백하는 거예요. 내 사는 날 동안 하나님 내 병 안 고쳐 주실지라도, 내 눈 뜬 날 동안 우리 엄마 얼굴 다시 못 볼지라도, 나 다시는 우리 고향 근처에도 못 갈지라도, 난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여기 와서 주님 만났으니 괜찮다. 찌라도, 믿음이 들어오니까 환경이 중요한 게 아니더라고요. 환경을 이겨버리는 믿음을 가지는 거예요. 지금도 소록도 중학교에는 지라도가 아니고 ‘찌라도’라는 찬양을 부르고 있습니다. 불 만들어 가지고 믿음 없이 어떻게 그분이 삽니까? 오늘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언제까지 평지를 주실 때만 찬양하고 산이 생기면 원망하겠습니까?
 
평지에서도 찬양하고 산을 만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니 산을 넘게 하실 것이니 믿음 가지고 또 찬양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길가에 장미꽃도 감사해야 되지만, 어머 장미꽃하고 다가갔다가 톡하고 찌르는 가시를 보고 원망할 게 아니라, 장미꽃에 돋아난 가시도 감사, 지나온 그날 밀어주셨던 순풍도 감사, 가는 길에 역풍도 하나님 뜻이 있어 감사, 문제 닫히면은요, 사람이 두 종류로 나뉘더라고요. 예수 잘 믿다가도 문제를 다치니까 대본의 믿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요? 예수 믿는데 왜 이런 문제를 만났어. 하나님 원망부터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며 문제를 만나니까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이런 큰 문제 만났는데 하나님 안 계셨더라면 어떡할 뻔했어. 똑같은 문제 앞에서도 믿음으로 고백하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 원망부터 시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의 눈을 가지시고 믿음의 눈으로 문제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눈을 가지고 보면은 육신의 눈을 보면 예수 믿는 사람이 왜 저래! 라고 하겠지만,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은 사람을 극렬하게 보고 예수를 믿으니까 그래도 저나마 사는 거야. 교회가 이렇게 많은데 세상이 왜 썩어서라고 말하겠지만, 믿으면 사람들은 교회가 이렇게 많으니까, 이 세상이 이나마 이렇게 있는 거야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예수 믿는데 내가 왜 요 모양 요 꼴로 사냐고 말하겠지만, 믿음에 눈이 있으면 예수 믿으니까 지금까지 살아온 거야.! 믿음의 눈으로 보면 다 은혜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말 있어요. 여러분 호수의 깊이는 홍수 때 하는 것이 아니라 가뭄 때 하는 것이라고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되고, 기도 안 해도 자녀가 잘 되고, 손대는 것마다 사업이 잘 되는데 누가 예수 잘 안 믿어요. 누가 하나님 찬양 안 해요. 그렇게 무화과나무에 소출이 풍성한데 누가 찬양을 안 해요. 진짜 믿으면 무화과 나머지 소출이 많을 때 찬양하다가 어느 날 소출이 하나도 없을 때도 추던 춤을 멈추지 않는 게 여러분 사실 우리가 이 찬양을 부를 때 정말 이 찬양 슬픈 찬양이거든요. ‘무화과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 열매가 없으며’ 근데 우리 부를 때 어떻게 불러요 무화과나무 잎이 정신 나간 찬양이거든요. 잎이 마르고 포도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 소출 없고 외양간에 송아지 없고 이거 없고 망했다는 찬양인데 우리는 춤추면서 찬양해요. 무화과나무 잎이 마 왜 그래요. 그거는 세상 사람은 못 불러요 믿음의 사람만 부르는 겁니다. 알고 보면은 세상에서 제일 슬픈 가사가 가사지만 우리는 찌라도의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야 사탄아 너는 나를 어떻게 봤냐, 무화과나무가 열매가 주렁주렁할 때만 찬양하는 사람으로 나를 오해했냐 무화과나무 열매를 다 가져가 봐라 나는 추던 춤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내 삶에 막 구워지는 홍수의 호수 깊이를 몰라요. 호수가 물이 가득 찼는데 얼마나 깊은지 어떻게 알아요. 가뭄이 오고 가뭄이 오고, 가뭄이 오고 가뭄이 오고, 물이 빠졌는데도 저렇게 깊었어, 저렇게 깊었어, 고난이 오고 정말 힘든 삶이 와도 정도면 하나님 떠날 거야,. 정도면 사람 하나님 원망할 거야. 그렇게 요 뱀 믿음이 충만한 것 같아서 축복 주니까 그러죠. 라고 해서 하나님이 그럼 한번 시험해보라고 다 가져가니까 다 가져가니까 마귀도 원망할 것 같았는데 요배 입에서 나오는 고백이 뭡니까? 주신이도 여호와시오. 취하신이도 여호와시니, 내가 부모에게 나올 때에 적신으로 나왔으니 내가 가진 것이 원래 없었는데, 무엇이 아깝단 말이냐 난 오직 여우와의 이름만이 찬송 받으리로다. 그는 바로 ‘찌라도’ 의 믿음을 가진 거예요.
 
어떤 산도 평지로 보는 눈을 가졌다 이 말이지요. 하박국은 왜 그렇게 자기 인생을 걸어가지고 키워 놓았던 무화과의 열매가 없고, 포도나무에 소출이 없고, 그렇게 모아두었던 모든 양과 소가 없을 때에 너무나도 당황했을 텐데, 조금은 당황했겠죠. 조금 당황하다가 금방 정신 차리면서 ‘찌라도’ 라고 말할 수 있었던 한 가지는 그다음 구절 때문에 그래요. 18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여전히 찬양할 수 있는 이유 한 가지는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구원에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이 순간에 하박국은 선택을 한 거예요. 없어진 것을 볼 것이냐, 여전히 내게 있는 것을 볼 것이냐, 무화과는 없어졌으나 당황하다가 괜찮아 내게 하나님 이어졌네. 어디 계시구나.
 
*하박국 3:18,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여러분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없어진 것을 바라보면 절망이 나오고 한숨이 나오지만 상황에도 내게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 믿음의 눈으로 있는 것을 봐야 되는데 있는 것을 볼 때에 언제나 절대로 죽을 때까지 여러분을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면 되는 겁니다. 아 무화가 열매가 없지 내 인생 다 드렸던 것이 실패로 돌아갔구나, 하고 절망하려다가 아참 잠시 뭐가 있나 보자 하나님 계시네 하나님 나와 함께 계시네! 여러분 다 잃어버려도 하나님이 나에게 계시면 하나도 안 잃어버린 것입니다. 세상 것 다 가지느라 하나님 잃어버리면 아무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이 계셔야 다 가진 것이고., 하나님 없이 세상 다 가져도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하루아침에 물거품처럼 사라집니다. 하나님을 인하여 구원의 하나님이 내게 계시다는 것 때문에 사실 하나만 분명하다면 오늘 힘든 상황 가운데 나오신 여러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일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좋을 때만 찬양하지 말고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려면 어려울 때 찬양해 보세요. 좋을 때 찬양은 하나님이 기쁨으로 받지만 어려울 때 찬양을 멈추지 않으면 감동으로 받으십니다. 하 너는 어떻게 어려운데도 찬양을 멈추지 않느냐, 내가 어찌 너 어려울 때 눈물의 찬양을 내가 외면하겠네. 하나님 눈물의 기도 눈물 속에 드리는 찬양 받으시고 응답하실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전천우의 믿음이 돼야 됩니다. 바울도 산을 평지처럼 걷는 믿음을 가졌으니까 끝까지 승리했는데 그가 빌립보서 4장 11절에 13절 이렇게 고백합니다.
 
*빌립보서 4:11-13,
11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13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여러분 일체의 비결을 배우십시오. 있을 때도 찬양하고 없을 때도 찬양하고 잘 될 때도 찬양하고 잘 안 될 때도 찬양하고 뜻이 있어 그러시겠지. 하나님이 잠시 쉬어라고 하는 쉼표를 내 인생 마지막 최종 점수처럼 마침표로 착각하지 말자. 중간고사를 기말고사 점수라고 착각하지 말자. 하나님은 일하고 계시니까 나는 하나님 지금 일어난 이 상황 때문에 하나님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빈부에 처할 때도 풍부에 처할 때도 하나님의 일을 멈추지 않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그가 뭐라고 고백합니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 형편과 상관없이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하나님이 하신다 이 말이지요. 하나님이 아시는 줄 믿습니다.
 
이번에 주제가 너무 멋지지 않습니까? 주제가 너무 멋있어요. “사는 날 동안 능력이 있으리로다.” 오늘 압도하는 우리 오스기니스 목사님의 압도하는 은혜가 여러분 가운데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신앙은 문제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혼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낮은 산만 찾아다니지 말고, 어떤 산도 넘는 사람이 되어야지요. 제가 좋아하는 찬양가사 중에 이런 게 있습니다.
 
‘내 앞에 바다가 갈라지지 않으면 주가 나로 바다 위 걷게 하리라.’ 처음에는 바다 갈라지게 해달라고 기도 해야지요 이 문제 해결해 달라고 기도해야지요. 이 문제 산성 같은 문제 하나님 평지가 되게 해달라 기도 해야죠 넘실거리는 바다를 갈라달라고 기도해야죠. 아무리 기도했는데 응답 안 해 주시면은 응답 안 해줬다고 원망하지 말고 감 잡아야죠. 아 요단강처럼 발 디디라는 것이구나. 내 앞에 바다가 갈라지지 않으면 추가 이 바다 위를 걷게 하시는 것이구나! 담력으로 가다 보면 산이 평지가 될 줄 믿습니다. 우리는 바다가 갈라지는 것만 기적이라고 하는데, 바다 위를 걷는 건 더 큰 기적인 것입니다.
 
-스가랴편,
-오늘 두 번째 본문으로 가면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스루바벨이,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의 하박국이 봤던 바벨론의 말발굽에 짓밟혀서 70년 동안 포로로 잡혀갑니다. 그 당시에 부모의 손을 잡고 갔던 10살 소년들은 70년이 지나자 80세 노인이 되고, 대부분 70년 포로 기간 동안에 바벨론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바벨론 2세 ,3세들입니다. 그중의 한 사람이 스룹바벨입니다. 아주 능했고 뭐 히브리 정신과 이 바벨론 정신 모든 것을 가진 국제적 감각을 가진 사람입니다. 나라의 바벨론에 그 인정을 받던 관료였습니다. 바벨론이 페르시아에게 멸망하고 메데바사 지역을 지나서 페르시아에게 멸망하게 됩니다. 첫 번째 왕이 고레스 왕입니다. 대제국을 이루었던 페르시아 왕이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첫 번째 대통령 취임 연설과 같은 곳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한마디를 하지요 얼마나 제국을 다스려야 되는데 할 일이 많겠습니까? 그러나 70년 전에 페르시아 제국에 비하면 새끼손가락 손톱만큼도 안 되는 한 나라 이야기를 합니다. ‘지금부터 70년 전에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 민족은 다 일어나 고토로 돌아가라.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라’는 말을 합니다. 고레스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어요. 하나님의 섭리 아니겠습니까? 그러고 난 뒤에 그들에게 필요한 은금을 주워 보내오라고 그럽니다. 그리고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으로 바벨론에서 태어나고, 자란 바벨론 이 스루바벨을 총독으로 세워 너는 일어나 백성들을 모아 모이는 사람마다 다 데리고 가라고 그럽니다. 자, 생각해보세요. 사람들을 데리고 1500킬로미터를 걸어가야 됩니다. 몇 명이 나설지도 몰라요. 태어나서 자랐으니 그곳이 자기들의 고향인데 진짜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람은 어릴 적 10살 때, 왔던 10살짜리 소년이었으나 지금은 80 노인이 된 사람들일 테고 90세, 백 세 된 사람은 내가 예루살렘에서 마지막 묻히고 싶은 사람들 대부분이에요. 길을 따라 나서지 결혼해서 자녀가 있는 젊은 사람들이 따라 나설 일은 만무하지 않겠습니까? 그걸 누구보다 잘 알았던 스룹바벨이 두려워 떨면서 하나님 앞에 이야기합니다.
 
‘1500킬로미터의 거리를 내가 깃발을 들어도 나이 많은 사람들 어릴 적 예루살렘을 본 사람들만 갈 텐데 내가 그들을 데리고 가서 그분들과 함께 어떻게 성제를 세웁니까? 못합니다.’ 두려워 떨고 있는 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스룹바벨을 바라보고 스룹바벨의 귀를 붙잡고 얘기합니다. ‘스룹바벨 잘 들어라. 잘 들어라 귀를 흔들면 잘 들으라고 예수님 그리고 하신 말씀이 6절입니다.
 
*스가랴 4:6,
6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네 능력으로 안 된다. 야, 내가 니 힘보고 부른 줄 아냐? 니 능보고 부른 줄 아냐? 이런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내가 너에게 한다고 내가 너에게 능력 준다고, 내가 성령 부어서 한다고, 너는 니 앞에 가로막고 있는 수백 개에서 한 수십 개 강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니가 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한다고, 정신이 번쩍 들게 합니다. 그러고 난 하나님이 너 잠시 있어봐. 하고는 스루바벨로부터 예루살렘에 있는 수백 개의 산을 향해 하나님이 외치십니다.
 
*스가랴 4:7,
7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 하나님이 앞서 행하시면서 스룹바벨의 깃발을 들었을 때, 5만 명이 따라 나섭니다. 은금을 가지고 간다는 소식 때문에 처처의 바위 뒤에 산 뒤에 그걸 뺏는 도적 떼들이 우글거리고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넘어야 할 산은 수백 개고 건너열강은 수십 개지만 스룹바벨은 그때부터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내 앞에 걸어가고 계신다는 거 하나님은 약속대로 산들을 꾸짖어서 산을 평지로 만들어 강을 메꾸어 산도 평지로 강도 평지로 건너게 되었고, 하나님은 숨어 있는 화살들을 다 꺾어 5만 명은 무사히 예루살렘에 기적처럼 도착했고 성전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이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제게 주어진 시간이 이 3분 남아서 이 얘기를 마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여러분이 산을 넘는 방법 한 가지만 소개할게요. 큰 산이 평지가 된다고 이 설교를 듣고 탁 여러분 산을 가보세요. 평지가 안 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설교를 반드시 들으셔야 돼요. 되는구나! 하고 갔는데 산 중턱에서 여러분 길을 잃어버릴 때도 있고, 생각보다 산이 높아 산에 고립될 때도 있습니다. 길을 잃어버릴 때도 있고, 이제 산을 넘어갈 수도 없고 왔던 길 돌아갈 수도 없어서 갈 길 몰라 헤맬 때, 기도해도 안 되던데요. 이거 걸었는데 산이 평지가 안 되던데요. 그분들 산을 벗어나는 방법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대학교 때 저는 지리산을 혼자 많이 올랐습니다. 처음에 올랐던 때를 기억합니다. 울적하던 어늘 어느 대학교 신학교 이 학년 때에 갑자기 기숙사에 있는 가방 하나를 메고 청바지에 운동화 신고 뱀사골 산장으로 해서 지리산 종주를 했습니다.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그래서 장터목산장이라고 지리산 천왕봉 밑에 장터목산장, 마지막 산장에 거의 죽을 것처럼 살아가지고, 도착을 하니까 산장지기가 저에게 이야기합니다. 야 이 젊은 사람 죽으려고 여기 이렇게 왔냐고 이 소지품 다 꺼내보라고 꺼내보니 아무것도 없어요. 책 두 권밖에 없었어요. 사는 게 기적이라고 하면서, 지리산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두 가지래요. 지리산에서 어떤 곳에서 고립이 되어도,,,
 
두 가지 첫째, 어떤 일이 있어도 올라올 때 꼭 초코파이를 가지고 와야 된다. 허기가 지면 죽는 거다 그래서 초콜렛 초코파이를 꼭 소지해야 된다. 아무것도 없구만 둘째, 꼭 호루라기를 가지고 다녀야 된다. 지리산은 어디에서 고립이 되었던지 내리막 방향으로 8시간만 걸어가면 인가가 나오기 때문에 초코파이 하나 먹고 걸어가면 산다. 두 번째 힘이 없거들랑 절대로 움직이지 말고 앉아서 호루라기를 불어라. 그러면은 호루라기가 꼭 산장, 산장마다 들리게 되어 반드시 기다리면 구조대가 온다. 얘기를 하더라고요. 여러분 우리 인생의 길을 잃어버렸을 때에 앞으로도 못 가고 뒤로도 못 갈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러분, 여러분에게 걸어갈 힘이 되는 분은 누굽니까? 믿음의 주요 원정 기하신 예수만 바라보고 가야 되는 거 아닙니까? 아무리 산이 고립되어도 믿음 버리지 말고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 방향으로만 걸어가면 언제 살아도 살게 될 줄 몰라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이 오 예수, 초코파이 같은 게 있지만 이건 저기 지리산 오를 때지만 인생의 산을 넘어갈 때는 오 예수! 가지고 안 되고 오 오 예수! 목사님 제가 특별히 만들어 왔습니다. 오 예수, 오 예수!! 목사님께 드리겠습니다. 오 예수만 바라보고 가시면 됩니다. 그래도 힘없거들랑 호루라기를 불어라 그랬지요? 호루라기 불면 구조대가 반드시 온다. 우리의 호루라기가 뭡니까? 기도의 호루라기죠 하나네 대만 아님 주를 불어라. 주를 불어라. 산의 한가운데 어둠의 한가운데 잃어버린 곳에 주를 부르라, 주를 부르라. 이 호루라기 소리를 기억하십시오. 살다가 지쳐 힘들어 한 걸음도 못 가겠거든. 내 힘으로 못 갈 때, 가려고 하지 말고 자리에 추를 부르십시오. 기도의 호루라기로 나 좀 살려달라고 주여, 나를 살려달라고 반드시 주님 오셔서 여러분 살게 해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주 앞에 나왔습니다.
 
♣요약
우리 앞에 산이 가로막고 있다고 이제 한숨 쉴 것이 아니라, 산보다 큰 믿음을 가져서. 평지도 평지처럼 산도 평지처럼 넘어갈 믿음을 주실 것을 확신하며, 산양의 힘줄을 가진 주 여호와를 나의 힘으로 삼는 사람이 고백할 수 있는 자로, 믿음의 크기와 담력에 대한 생각을 기도와 찬양으로 키우고 채워서 커진 문제에 봉착했을 찌라도, 변화를 받아, 주님을 바라보면 그 문제를 작아 보이게 만들어 주시니, 잠겨 있던 믿음의 눈이 열리고 앞 서 행하시는 주님께서 산을 꾸짖어 평지로 만드시는 하나님만 의지하면, 길 잃어버렸을 때, 우리의 영적인 호루라기를, 소리를 높일 때, 하나님 반드시 오셔서 역사하시고 응답하실 줄을 믿어야 한다. 우리가 인생길을 잃어버렸을 때 예수님만 바라보자. 그래서 산을 평지처럼 걸어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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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차 봄 글로벌 특별새벽부흥회(주후 2024년 4월 04일)
-사는 날 동안 능력이 있으리로다.(넷째 날)
제목: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
말씀: 에스켈 37:1-6
 
설교자: 크리스찬 소니아 목사님(루마니아호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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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켈 37:1-6,
1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2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6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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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r Sarang church, I bring you greetings from hope Church of Oradia. It is such a great privilege for me to speak to you again. And if I close my eyes, I can picture your wonderful congregation and your wonderful faces. You are all very wonderful people. And I want to say thank you so much to pastor o for giving me again this wonderful opportunity. Speak to this great event today. I want to speak to you about the God of impossible. The God of impossible. At some point, in a very well known text in the Old Testament, in Ezekiel 37, God is calling Ezekiel, and he's giving him this vision of the valley of dry bones.
-사랑의 교회 여러분, 저는 오라디아 호프교회로부터 여러분에게 인사를 드립니다. 여러분과 다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은 제게 큰 특권입니다. 그리고 눈을 감으면 여러분의 멋진 회중과 여러분의 멋진 얼굴들이 그려집니다. 여러분은 모두 매우 멋진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저에게 이런 멋진 기회를 주신 오 목사님께도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이 위대한 행사에 연설을 하소서. 저는 불가능의 하나님에 대해 여러분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불가능의 하나님 구약성경에 아주 잘 알려진 본문 어느 순간, 하나님은 에스겔을 부르시고, 그에게 마른 뼈의 골짜기에 대한 비전을 주신 것입니다.

And I believe with all my heart that today the vision that God is giving Ezekiel and the hope that God is bringing to Ezekiel and to the people of Israel through this vision that God is giving him is a vision that God can use for us and for our churches today. And listen to the word of God. In Ezekiel 37, the hand of the Lord was on me, and he brought me out by the spirit of the Lord and set me in the middle of a valley. It was full of bones. He led me back and forth among them, and I saw a great many bones on the floor of the valley, bones that were very dry. This is a picture of deadness. It's a picture of hopelessness.
-그리고 오늘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주시는 비전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비전을 통해 에스겔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져다주시는 희망이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위해 그리고 우리 교회를 위해 사용하실 수 있는 비전임을 진심으로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세요. 에스겔 37장에서 주님의 손이 나에게 닿았는데, 주님의 영에 의해 나를 데리고 나와 골짜기 한 가운데 세웠습니다. 그 안에는 뼈가 가득했습니다. 나를 그들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며 나는 계곡 바닥에 아주 많은 뼈들, 매우 건조한 뼈들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죽음의 사진입니다. 절망의 사진입니다.

It is a picture that we cannot escape. It's a picture that we cannot ignore. But God is actually bringing Ezekiel through the valley of dry bones. Actually, Ezekiel says that he led me back and forth among them. In other words, God wanted Ezekiel to hear the smell, to feel the smell, to hear the sound, to see them very close. And my question is why? Why is God giving his prophet this type of experience? Why? Because this was a picture of desperation, of the desperate condition in which the people of Israel was finding themselves at that time.
-이것은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그림입니다. 무시할 수 없는 그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실제로 에스겔을 마른 뼈의 골짜기로 데려오고 계십니다. 사실 에스겔은 저를 그들 사이에서 왔다 갔다 시켰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에스겔이 냄새를 듣고, 냄새를 느끼고, 소리를 듣고, 그들을 매우 가까이에서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제 질문은 왜일까요? 하나님은 왜 자신의 예언자에게 이런 종류의 경험을 주시는 걸까요? 왜일까요? 왜냐하면 이 그림은 절망의 그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습니다.

And God wanted Ezekiel to understand very well how desperate the spiritual condition of Israel is. And that's why God is giving Ezekiel this type of experience, because he wanted to see where the people of Israel is right now. This is a picture that talks about no hope, about death, about hopelessness. But let's stop for a minute and let's pause for a minute and let's think of the spiritual condition and of the desperate condition in which our churches and our ministry is today. Because so many times we feel like we are serving God in a place very similar with the valley of dry bones.
-하나님은 에스겔이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얼마나 절망적인지를 잘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런 경험을 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지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 그림은 희망이 없다는 것, 죽음에 대한 것, 절망에 대한 것입니다. 하지만 잠시 멈추고 오늘날 우리 교회와 사역이 처해 있는 영적 상태와 절망적인 상태를 생각해 봅시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경우 우리는 마른 뼈의 골짜기와 매우 비슷한 곳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Friends, we are serving God here in this part of the world, and we are located here in eastern Europe, and we are on the continent where many years ago, revival started. We are serving God on the continent where hundreds of years ago reformed happened. But you know what we can find right now here in this part of the world? A lot of dryness, a lot of decay, a lot of hopelessness, a lot of a big belly of dry bones. So many churches are closing down. So many churches in Europe are being transformed into restaurants or even worse, some of them into nightclubs.
-여러분, 우리는 여기 이 지역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 동유럽에 위치하고 있고, 수년 전 부활이 시작된 대륙에 있습니다. 우리는 수백 년 전 개혁이 일어났던 대륙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우리가 지금 이 지역에서 무엇을 찾을 수 있는지 알고 있나요? 건조함, 많은 부패, 많은 절망, 많은 뼈가 말라버린 많은 교회들이 문을 닫고 있습니다. 유럽의 많은 교회들이 식당이나 심지어 더 나쁜 것은 몇몇 교회들은 나이트클럽으로 탈바꿈하고 있습니다.

But maybe today when you look at your life, you find that there is a lot of dryness in your life and a lot of hopelessness in your life. Or maybe there is a lot of decay in your own life. And maybe so many times you get discouraged and you think that there is no hope for us anymore, that the best times are gone and God cannot work anymore. And our ministry and what we do and what we preach and what we sing and everything is happening in a valley of dry bones. And there is no place for vision anymore. Is there hope? Why is God bringing his prophet Ezekiel there? To discourage him. Why is God doing this to him? Just to tell him, Ezekiel, I'm sorry.
-하지만 어쩌면 오늘날 여러분의 삶을 보면 삶에 건조함과 절망감이 많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될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여러분 자신의 삶에 많은 부패가 존재할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낙담하고, 아마도 너무 많이 우리에게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최고의 시기는 가고, 하나님은 더 이상 일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사역과 우리가 하는 일과 설교하는 일과 노래하는 일과 모든 것이 마른 뼈의 골짜기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비전이 있는 곳은 없습니다. 희망은 없을까요? 하나님은 왜 그의 예언자 에스겔을 그곳으로 데려오는 것일까요? 그를 단념시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에스겔, 미안합니다.

It is really, really bad, and there is nothing we can do anymore, friends, that's not the reason God is bringing him there. God wants to give him hope. And that is why in verse three, God asked me, says, ezekiel, son of man, can these bones live? Now, if you were Ezekiel, imagine for a moment you are Ezekiel, and God is asking you this question. Why would you answer, can these bones live? Ezekiel had a few options, didn't he? He could have gone into hypocrite mode and he could have said amen, of course, but this amen could have been just out of his lips, but not in his heart. Or he could have gone into a self pity mode. Ezekiel, can these bones live? Oh, Lord. I mean, look at this valley. Everything is so discouraging.
-정말, 정말로, 그리고 우리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를 그곳으로 데려오시는 이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희망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3절에서,
*에스켈 37:3,
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나님이 저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 에스겔이 이 뼈들이 살 수 있을까요? 자, 만약 여러분이 에스겔이라고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이 에스겔이라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이 질문을 하고 있다고 잠깐 상상해보세요. 왜 대답하시겠습니까, 이 뼈들이 살 수 있을까요? 에스겔은 몇 가지 선택사항이 있습니다, 그렇죠? 그는 위선적인 모드로 들어갔을 수도 있고, 물론 아멘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이 아멘은 그의 입 밖에 나왔을 수도 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는 자기 연민의 모드로 들어갔을 수도 있습니다. 에스겔, 이 뼈들이 살 수 있을까요? 오, 맙소사, 이 계곡을 보세요. 모든 것이 너무 기가 막힙니다.

God, I don't think there is any hope for this valley. I'm here alone. I'm here by myself. I don't have any team here. I don't have any colleagues. There are no other christians alive in this valley. I feel overwhelmed. I'm in a burnout, Lord. I don't believe there is anything that can be done in this valley of dry bones. He could have gone in this self pity mode like you and I. We go into this self pity mode so many times. And look at this text. He asked me, son of man, can these bones live? And I said, and I love this sovereign lord, you alone know he doesn't go into hypocrite mode. He doesn't give God self pity and complains himself that it's too hard, it's too difficult, that I feel like I want to resign. But he is looking at a sovereign God.
-하나님, 저는 이 계곡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기에 혼자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 혼자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 팀이 없습니다. 저는 동료가 없습니다. 이 계곡에는 다른 기독교인들이 살아있지 않습니다. 저는 압도당합니다. 주님, 저는 번 아웃 상태입니다. 그는 당신과 저처럼 자기 연민 모드로 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자기 연민 모드로 여러 번 들어갑니다. 그리고 이 본문을 보세요. 그는 인간의 아들인 저에게 이 뼈들이 살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이 주권적인 주님을 사랑합니다. 당신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자기 연민을 주지 않고 너무 힘들고 너무 어려워서 사임하고 싶다고 스스로에게 불평합니다. 하지만 그는 주권적인 하나님을 보고 있습니다.

And Ezekiel understands something, friends. Ezekiel understands that the valley of dry bones is God's valley of dry bones. And it is not Ezekiel's valley of dry bones. Ezekiel understands that even though the condition is desperate, even though there is no hope from a human perspective, he understands that God is sovereign. And he understands that our God is a powerful God. He's an almighty God, and he can do whatever he wants in that valley of dry bones. And that is why Ezekiel is looking at God in faith. And he knows that if God wants to bring these bones back to life, God can bring these bones back to life.
-그리고 에스겔은 무언가를 이해합니다, 친구들아. 에스겔은 마른 뼈의 골짜기가 하나님의 마른 뼈의 골짜기라는 것을 이해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에스겔의 마른 뼈의 골짜기가 아닙니다. 에스겔은 그 상태가 절망적일지라도 인간의 관점에서 희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주권자임을 이해합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이 강력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이해합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그 마른 뼈의 골짜기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에스겔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뼈들을 되살리고 싶다면 하나님이 이 뼈들을 되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He knows that God is not done. Even though he doesn't see any hope, he knows that God can do an amazing work right there in that valley of dry bones. And friends, this is where hope starts. This is where things are changing. This is where in the middle of dryness, God is doing, is beginning to do something amazing. And I know that so many times we have so many reasons to complain ourselves that it is too difficult, it is too much, it is too expensive, it cannot be done. It is impossible. But I want to remind you something very important today. That we serve a God of impossible. That's why he's not just giving any type of answer.
-그는 하나님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비록 그는 희망을 보지 못했지만, 하나님이 바로 그 마른 뼈의 골짜기에서 놀라운 일을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친구들, 여기서 희망이 시작됩니다. 여기서 상황이 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바로 건조한 가운데 놀라운 일을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우리가 그것이 너무 어렵고, 너무 비싸고, 할 수 없다고 스스로에게 불평할 이유가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오늘 여러분에게 매우 중요한 것을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불가능의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단지 어떤 대답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That's why he doesn't look at himself, at what he can do, but he looks at what God can do. And friends, Sarang church, I know that God gave you a great vision until the year of 2033. And I believe with all my heart that God didn't just give you that vision by accident. I know that God, the God that you serve, is a God of impossible. And I know that God can help you to fulfill your vision. I know that God allowed this great church in South Korea for a very specific reason. Do you know what God can do through a congregation like Sarang Chuch? Do you know why God has blessed you so much?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할 수 있는 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친구들 사랑교회 여러분, 2033년까지 하나님께서 큰 비전을 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연히 그 비전을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진심으로 믿습니다. 여러분이 섬기는 하나님이 불가능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비전을 이루도록 도와주실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국에서 이 큰 교회를 허락하신 것은 아주 구체적인 이유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랑의 교회와 같은 회중을 통해서 하나님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나요?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복을 주셨는지 알고 있나요?

Do you know why God gave you so many wonderful people? And do you know what God can do through you? You can be a blessing for South Korea. And I believe that our God, even today, is a God that can do the impossible. And I believe that God can use your church. And I believe that through strong church there are hundreds and thousands of churches that can be planted everywhere. And I believe that God has blessed you for a reason. That one day you, Sarang church will go into North Korea and you will plant hundreds of churches over there. And I believe that through you, God will bless many nations. Friends, let's not give up. Let's not discourage.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멋진 사람들을 많이 주셨는지 아세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해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 아세요? 당신은 남한을 위한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 하나님은 불가능한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이용하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튼튼한 교회를 통해 곳곳에 심을 수 있는 교회가 수백, 수천 개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유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날 당신이 북한에 사랑의 교회가 들어가고 당신은 그 곳에 수백 개의 교회를 심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을 통해 하나님이 많은 나라를 축복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친구들아, 포기하지 말자. 낙담하지 말자.

Let's not stop proclaiming the gospel because God wants to do something great, not just through Ezekiel, but God wants to do something great through our churches, in our generation, in our valley of dry bones. God is still sovereign. God is still powerful. God can still move many hearts and many people can come to salvation in Jesus Christ. Amen. Prophesy, son of man. So I prophesied as I was commanded. How is God bringing life through his word. Through his word. And there was a noise and a rattling sound, and the bones came together bone to bone. Then he said to me, prophesy to the breath. Prophesy, son of man, and say to it, this is what the sovereign Lord says.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우리 교회를 통해서, 우리 세대에, 마른 뼈로 이루어진 골짜기에서 위대한 일을 하시길 원하시니 복음 선포를 멈추지 맙시다. 하나님은 여전히 주권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강력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많은 마음을 움직일 수 있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아멘. 사람의 아들 프로피시입니다. 그래서 나는 명령받은 대로 예언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을 통해 생명을 가져오십니까. 말씀을 통해 소음과 딸랑딸랑 소리가 나셨고, 뼈가 뼈와 뼈로 합쳐졌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 프로피시가 이렇게 말씀하시니 주권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Come, breath from the four winds and breathe into this slain, and they may live. So I prophesied as he commanded me, and breath entered them. They came to life and stood up on their feet. A vest army. Friends, let me be honest with you. So many times I felt like I am doing the ministry in the middle of the valley of dry bones. I remember when I started this ministry 15 years ago, and so many times I wondered, will anyone come? Will anyone come to life into this ministry? Will God do something significant through this church and through this ministry? And at times, I felt just like Ezekiel. I felt like I'm overwhelmed. I felt the smell of the decay.
-이리 와서, 네 개의 바람으로 숨을 쉬고, 죽은 자에게 숨을 불어넣으면 그들이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가 나에게 명하는 대로 예언했고, 숨이 그들에게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살아나며, 일어섰습니다. 조끼 부대. 친구들이여,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뼈가 마르는 골짜기 한가운데에서 사역을 하는 것처럼 여러 번 느꼈습니다. 15년 전에 이 사역을 시작했을 때가 생각나고, 누가 올까 하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구든지 이 사역으로 살아날까요?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통해서, 또 이 사역을 통해서 뭔가 중요한 일을 하실까요? 그리고 때로는 에스겔과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나는 벅찬 기분이 들었습니다. 나는 부패하는 냄새를 느꼈습니다.

I felt the hopelessness and all the other feelings and emotions that went through my heart. And I felt that there is nothing that can be done anymore. But, friends, I saw exactly what happened into this text. And I saw how God is raising up an army of people. And I saw how God is raising up an army of young people. And there were young people that came right here into this church, and they asked me, can we get involved? And I said, of course. Can we also be part of what God is doing here? And in the last 15 years, so many times in the middle of desperation, in the middle of hopelessness, I saw how God, through his word, can bring life. So many times when I come on Sunday morning to preach the word of God, I'm wondering myself, will anyone listen?
-저는 절망감과 모든 감정들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저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친구들, 저는 이 본문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았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한 무리의 사람들을 기르시는지 보았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한 무리의 젊은이들을 기르시는지 보았습니다. 여기 이 교회에 바로 온 젊은이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저에게 우리가 참여할 수 있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물론 저는 말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여기서 하시는 일에 동참할 수 있을까요? 지난 15년 동안, 절망의 가운데서,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어떻게 생기를 가져오실 수 있는지 보았습니다. 주일 아침에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러 올 때면, 저는 정말 여러 번, 누가 들어주실까요?

Will God touch anybody's life through this word of God? And so many times I picture in my mind that there will be so many young people that will come, and they will just scroll down on their phones and they will be not interested in the word of God or in what is happening here. But, friends, so many times I saw exactly what is happening right here in this text, how God is raising up an army. Why is God doing that? And God is doing that, my friends, because today God wants to work in our generation. He is still the God of possible. He can restore marriages. He can bring people from death to life. In Jesus Christ, God can give salvation today. God can use us. God can use our churches. God can use this generation. And God is not done yet.
-하나님께서 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다른 사람의 삶을 건드릴 수 있을까요? 저는 앞으로 아주 많은 젊은이들이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그저 핸드폰을 스크롤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나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친구들, 저는 이 본문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하나님이 어떻게 군대를 만드는지를 여러 번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그러시는 걸까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러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우리 세대에서 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여전히 가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사람들을 죽음에서 살아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오늘날 구원을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대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God can bring life in the valley of dry bones even today. This text is amazing. Because, friends, what starts with decay and hopelessness now ends in hope. What starts in deadness now is a great army. What starts with desperation now, it ends in an amazing hope. And God is bringing Ezekiel in the valley of dry bones, not to discourage him, but to give him hope, to tell him, I can still use you. I can still give you vision. I can still bring up many people from death to life. And this is our hope today. Our hope is not in ourselves, is not in our programs. It's not in our methods.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마른 뼈의 골짜기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이 본문은 놀랍습니다. 왜냐하면 친구들이여, 썩어가고 절망으로 시작하는 것은 이제 희망으로 끝납니다. 지금의 죽음에서 시작하는 것은 위대한 군대입니다. 절망으로 시작하는 것은 놀라운 희망으로 끝납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마른 뼈의 골짜기로 데려오시는 것입니다. 그를 낙담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여전히 당신에게 비전을 줄 수 있습니다. 저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을 죽음에서 삶으로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희망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우리 자신에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프로그램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방법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Our hope is in the sovereign God, in the God of impossible. I believe that God will continue to use Sarang church. I cannot wait until 2033 when I believe that God will help you fulfill your vision. But it's not just the destination that's important, but the journey there. So, Sarang church, continue to serve God, continue to pray, continue to worship, continue to proclaim the word of God. Because I believe that God can do something amazing and something great in South Korea, in North Korea, in Europe, and all over the world. May God bless.
-우리의 희망은 주권자이신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의 교회를 계속 이용하실 것으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비전을 이루실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으로 믿는 2033년까지 기다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목적지만이 아니라 그곳으로의 여정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교회는 계속 하나님을 섬기고 기도하고 예배하고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 남한에서도 북한에서도 유럽에서도 전 세계에서도 놀라운 일을 하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요약
-불가능한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에스겔의 비전과 에스겔이 본 마른 뼈의 계곡은 절망과 희망 없음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이 경험을 통해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이 비전은 우리와 우리 교회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유럽의 교회와 사명의 절망적인 상황
• 유럽 교회는 많은 고난과 희망 없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많은 교회가 폐쇄되거나 레스토랑, 나이트클럽으로 변모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기를 원한다.
 -마른 뼈의 계곡에서 희망을 찾다
• 고립된 계곡, 팀 없음, 에스겔의 믿음과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계곡에서 불가능한 일을 이루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비상함을 통한 교회의 사명
• 하나님이 사람들을 축복하고 통해서 많은 국가들에 축복을 베풀 수 있다. 사랑의 교회는 북한에 수백 개의 교회를 심을 수 있다 하나님은 아직도 강하게 작용하여 많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다
 -하나님은 죽은 뼈의 계곡에서 삶을 불어 넣을 수 있다. 하나님은 죽은 뼈의 계곡에서 삶을 불어 넣는다. 하나님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이끌어낸다. 하나님은 우리 세대에서 일하고 있다
 -하나님이 사랑교회에 대한 소망
하나님은 불가능한 일도 이루실 것이다. 2033년까지 하나님이 비전을 이루시리라 믿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하나님의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제22차 봄 글로벌 특별새벽부흥회(주후 2024년 4월 04일)
-사는 날 동안 능력이 있으리로다.(넷째 날)
제목: “역전시키시는 은혜의 능력"
말씀: 룻기 1:19-2:3
 
설교자: 강준민 목사님(미국 새생명비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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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 1:19-2:3,
19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22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룻기 2:1-3,
1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유력한 자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보아스더라.
2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하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
3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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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가 끝나면 인제 피드백을 받게 되지요 그래서 어제 설교 끝나고 받은 피드백 중 하나가 설교가 짧아서 은혜스러웠다. 그래서 깨달은 게 아니었으면 내용이 부실하면 짧게라도 해야 된다. 그런 생각을 좀 하게 됐습니다. 전 역전의 드라마를 많이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제 인생이 정말 초라하게 출발해서 바늘집 아들로 성장하고 또 대학에 갈 수가 없어서 상업고등학교로 들어가고 그런 여러 가지 스토리들이 제 삶 속에 있기 때문에 또 어려움도 많이 겪고 그래서 아야 역전의 하나님을 늘 사모하고 살아갑니다. 어 하나는 룻기를 통해서 역전의 드라마를 보여주십니다. 룻기는 드라마예요. 4장으로 되어 있지만 문학적으로도 아주 탁월한 드라마고, 이스라에엘 민족들이 오순절에 읽었던 드라마입니다. 또 선교의 드라마, 선교의 드라마, 모압 여인 룻이 원래는 이스라엘 총회에 들어올 수 없어요. 모압 사람들은 그런데 구원을 받고, 또 보아스를 만나고 또 그리고 보아스의 엄마가 기생 라합인데, 기생라합의 구원이 연결되는 그런 구속의 드라마 선교의 드라마입니다. 또 역전의 드라마죠 아들 둘과 남편을 잃은 여인 나오미와 남편을 잃은 룻이 나중에 다시 해보게 되는 역전의 드라마입니다. 또 특별히 사랑의 드라마예요. 사랑의 드라마,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사랑 어려운 사랑이잖아요. 아주 어려운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며느리들한테 물어봤더니, 제일 좋아하는 여자가 하와래요. 왜냐면, 하와는 시어머니가 없기 때문에 좋다고 그래요. 얼마 전에 며느리가 시어머니 생신에 메시지를 보냈어요. 어머니 오래 사세요. 그런데 그게 잘못 들어갔어요. 이게, 가끔 잘못 들어가잖아요. ‘어머니 오래 사시네요.’ 당장 전화가 왔습니다. ‘그래 내가 오래 산다.’ 우리가 살다 오면 이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가 너무 어렵잖아요. 네 이번에 유흥만 교수 책을 읽다가 이런 글을 읽었는데요. 조금 가슴이 와 닿았어요. ‘시어머니가 아프면 머리가 아프고 친정엄마가 아프면 가슴이 아프다.’ 네, 뭐 물론 다 그럴 거는 아시겠지만, 굉장한 우리 생애 가운데 시어머니와 며느리 관계가 지금도 어렵고, 요즘은 또 시어머니가 며느리 눈치를 보는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뭐 며느리들은 너무 힘들어하더라고요. 시편도 읽지 않고 시체 들어간 거 다 싫어해요. 시편도 있지 않고 시금치도 안 먹고 뭐 그런 얘기도 많이 있죠. 센디에고에 가면 씨 월드가 있는데, 씨 월드를 제일 싫어한대요. 그런데 여기 보면 며느리와 그리고 시어머니가 얼마나 놀라운 사랑을 나누는지 아름다운 사랑의 스토리가 기록돼 있습니다. 근데 출발은 좀 비극적으로 출발하죠. 흉년의 때가 됐는데, 1:1절에 보면,
 
*룻기 1:1,
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흉년이 들었습니다. 우리 인생은 흉년이 들 때가 있어요.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죠. 밀물이 있고 썰물이 있는 것처럼, 그때 유다 베들레헴 사람이 모압 지방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이 사사들이 취잔 때니까 혼돈의 때, 그리고 어두운 때에, 놀라운 스토리가 전개가 되죠. 2절에 보니까
 
*룻기 1:2,
2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오 안에 이름은 나오며 엘리멜렉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나의 왕이요. 그런 뜻인데요. 아내의 이름 나오미는 찬송 환영이라는 뜻이에요.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이 두 아들의 이름이 별로 좋지 않아요. 말론는 연약함 기룐는 쇠약함. 왜 이름을 그렇게 지었나 몰라요. 그러니까 일찍 죽죠. 일단 베들레임 에브라임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합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다니 그들이 흉년을 피해서 모아보러 갔는데 그들이 떠난 곳이 베들레헴이죠.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이에요. 그리고 예수님이 태어날 땅이죠. 베들레헴이란 이름의 뜻은 떡집이에요. 떡집 예수님 생명의 떡으로 오셨잖아요. 베들레헴은 교회예요. 교회 그러니까 떡집을 따라 만든 거죠. 특별히 교회가 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떡은 생명의 떡이거든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떡이요. 참된 음료, 참된 양식을 줄 수 있는 것이 교회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많이 줄 수 있는 게 있어요. 세상에 어디어 될 수 없는 것은 뭐냐면, 예수님의 보혈과 예수님의 살 예수님의 성찬이죠. 성찬 생명이 떡, 생명 영생 구원은 세상에 죽지 못해요. 여러분 교회가 문제가 많다고 할지라도, 여러분 교회만 해줄 수 있는 놀라운 게 생명의 떡인데, 베들레헴을 떠나면 안 되죠. 교회를 떠나면 안 되죠. 모압지방에 사는데 엘리멜렉이 선택한 길이 별로 좋은 것 같지 않아요. 3-5절을 보게 되면,
 
*룻기 1:3-5,
3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4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
-오리바라는 이름의 뜻은 목이 곧다. 돌이키다 그런 뜻을 가지고 있구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룻은 우정이란 뜻을 가지죠. 우정,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10년쯤에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비극이죠. 그러니까 이 드라마를 하나님이 처음 만드실 때 우리 인생에서 비극과 역경과 시련을 반드시 넣으세요. 그렇지 않으면 드라마가 되지 않아요. 드라마 속에는 항상 위기와 갈등과 음모와 그리고 어 절망이 있는 것이죠. 여러분도 예외가 없어요. 하나님의 사람들 속에는 다 이런 스토리가 있는 거예요. 두 아들이 죽었어요. 두 아들이 며느리 남았죠. 남편이 죽은 것까지는 괜찮아요.
 
아닌가! 아니네 말 조심 해야 되는데, 네 남편이 준 것까지는 괜찮은데 두 아들이 준 건 진짜 힘든 거예요. 고개를 끄덕이는 문제 많으신데, 이 남편은 남이었다간 임이 됐잖아요. 그러니까 한 자만 떼면 그냥 이미 남이 되기도 하고 남이 임이 되기도 하는 거예요. 내 자식은 달라요. 자식은 달라요.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어요. 그러니까 나오미가 너무 고통스럽죠. 남편이 죽은 것도 힘들지만 물론 돼지 두 아들이 죽었어요. 그러니까 절망이죠. 나오면 슬픈 여인이 된 거죠. 이름이 찬송가 환희라는 이름인데 슬픈 여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근데 거기서 인생이 끝나질 않아요. 잘 보셔야 돼요. 하나님이 여기서 잠시 쉼표를 찍은 건데 우리는 쉼표를 찍은 자리에 우리 마침표를 찍을 때가 많아요. 이제 끝났다 뭐 남편 죽고 도와도 죽었으니까 끝났다라고 생각하고 마침표를 찍어요. 이제 끝이야 아니에요. 하나님이 쉼표를 참신 건데 우리 마침표를 찍을 때가 많잖아요. 찰리 채플린이 그런 말을 했어요.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이제 좀 더 전체를 봐야 돼요. 우리가 어떤 시장 관객을 만날 때 너무 일찍 결론을 내리죠. 망했다. 이제 끝이다. 절망이다. 근데 하나님은 아니래요. 어떻게 그러면 나오미와 룻의 인생이 이렇게 변화가 있게 되었는지 실제로 돌이킬 때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돌이킬 때 회계죠 방향을 바꾸는 거죠. 다시 기회가 있어요.
 
I. 돌이킬 때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인생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아요. 여사람 보니까 인생은 즐겨요 그리고 사람도 즐겨요 웬만해 죽지 않아요. 여러분 새벽도 나와도 안 죽어요. 네 분명히 말씀드리면, 안 죽어요. 네 질겨요 사람이요. 인생은 쉽게 끝나지 않아요. 중요한 건 돌이키는 것인데, 6절에 보니까,
 
*룻기 1:6,
6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들었어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는 걸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돌이키는 것입니다. 듣는 게 참 중요해요. 믿음은 들으면서 오잖아요. 예, 근데 유대인의 전승하면 천사가 나오미를 찾아와 가지고 소식을 전해줬다는 전승이 있어요. 돌이키는데 이것도 은혜입니다. 여러분 돌이킬 수 있다는 것이 은혜예요. 그러면서 돌아오죠? 실제로서 그대로 오면 있던 곳으로 나오고 두 며느리도 그와 함께 하여 이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가다가 돌아오려고,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내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느라. 하고 그때를 이렇게 마침에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나오미와 두 며느리가 함께 울죠. 그리고 시어머니가 참 좋아요. 나 따라오지 말고 어머니 집으로 돌아가서 남편을 새로 만나 가지고 위로를 받아라. 참 좋은 시어머니죠. 며느리에 대한 관심 그다음에 미래에 대한 관심을 갖고 그리고 함께 울어요. 우는 게 참 중요한 것 같아요. 울어야 산다고 그러잖아요. 14절에,
 
*룻기 1:14,
14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여기서 오르바는 모압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고 룰은 시어머니를 붙쫓았더라. 네 돌이키는 게 중요하고 두 번째는 선택은 결과를 낳습니다. 아 출발은 비슷해요. 오르바하고 룻이 시어머니하고 헤어질 것인가? 안 따라 할 것인가? 근데 어 선택은 우리가 하는 것 같지만 결과는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아요. 룻의 선택은 영원한 선택이 되었고, 오르바(목이 곧다, 돌이키다)는 이름도 없잖아요. 아직까지 제가 미국 생활하면서 오르바라 이름 하는 여자를 본 사람이 없고, 만난 적이 없어요. 룻이라는 이름은 많이 들어봤지만 나오미라는 이름도 많이 들어봤고요. 룻이 선택이 너무너무 아름다워요
 
II. 선택은 결과를 낳습니다.
 
*룻기 1:16,
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룻의 선택은 영원한 선택이 되었고 오르바는 이름도 없잖아요. 아직까지 제가 미국 생활하면서 오르바라 이름하는 여자를 본는 만난 적이 없어요. 룻이라는 이름은 많이 들어봤지만 나오미라는 이름도 많이 들어봤고요. 룻이 선택이 너무너무 아름다워요 16절-17절에 보면,
 
*룻기 1:16-17,
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무엇이 굉장한 고백을 하면서 선택을 하는데 선택을 잘했어요. 인생은 선택인데요. 선택을 잘해야 되고 또 실수할 수 있어요. 그러나 좋은 모범을 따르고 또 실수를 통해서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죠. 근데 룻의 선택은 세 가지 특징이 있어요. 첫째는 좁은 길을 선택했어요. 남이 안 가는 길 두 번째는 사랑의 길을 선택했어요. 시어머니를 공개하는데 아무런 조건이 없어요.
⓵좁은 길을 선택하십시오.
⓶사랑의 길을 선택하십시오.
⓷믿음의 길을 선택하십시오.
-나중에 룻이 보아스를 만날 거다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냥 시어머니를 아주 순수하게 모시려고 간 거죠. 세 번째가 믿음의 길을 선택한 거죠. 하나님 여호와 시어머니의 하나님 시어머니의 백성을 선택했습니다. 그게 이제 우리가 배워야 될 아주 중요한 선택의 길입니다. 믿음을 지키는 게 쉽지 않아요. 사도바울과 우리의 생애 마지막 편지 보면 하나를 떠났다 예 도마도 세상으로 떠나고 내가 복음과 함께 했던 나와 함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몇 명 남았죠. 끝까지 남는 게 쉽지 않아요. 너무너무 쉽지 않은 일이죠. 사도바울 생이 마지막에 내가 믿음을 지켰다고 그래요. 내가 사랑을 지켰다도 아니에요. 내가 지갑을 지켰다도 아니에요. 내가 믿음을 지켰다 믿음이 정말 어려운 거예요. 예수로 난 믿음은 선물이에요. 그리고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것이 축복입니다.
 
III. 세 번째, 고통 중에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나오미가 이렇게 1장 20절에 보면,
 
*룻기 1:20,
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그가 부른 이름이 놀라워요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번에 제가 이 두 보물을 선택한 게 마라라고 나온 게 두 군데예요. 마라, 쓰다 하는 뜻이잖아요. 쓰다. 내 인생이 쓰다.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습니다.
-그녀 인생이 쓴 인생이 된 거죠. 나오미이란 환희 기쁨, 그런 뜻 인생인데 네 쓴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근데 저는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가장 놀라운 소망은 뭐냐면 이 나오미가 부르고 있는 하나님 이름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라는 이름은 언약의 하나님이었어요. 언약을 지키시잖아요. 그다음에 나오는 이름이 뭐냐면 전능자라는 이름이에요. 전능자 ‘샤다이’ 전능자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엘샤다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99세에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내게 아들을 주겠다. 사라에게 아들을 주겠다. 사라가 웃죠? 네 왜 우느냐? 그랬더니, 안 웃었습니다. 웃었다 하면 됩니다. 뭐야? 나중에 네가 그렇게 얘기하는데 니 아들 이름을 이삭이라고 해라 이삭의 이름이 웃음이에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지금 때리셨다는 거예요. 전능하신 하나님이 풍족하게 난 자기를 비웠다는 거예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기를 괴롭혔다는 거죠. 내려가게 하신다.
 
제 인생에서 참 목회를 하다가 내려간 경험이 있어요. 2006년부터 9년까지 참 괴로웠어요. 너무너무 힘들었어요. 어느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2009년도에 선교단교회를 내려왔는데, 내려오면서 많은 걸 깨달았어요. 그때 고은, 시인의 꽃이라는 시가 제 가슴에 와 닿았어요.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시 고은) 내려가면서 이제는 몰랐던 것들을 깨닫기 시작했고, 그리고 무너지고 부서지고, 으깨어지는 게 무엇인지를 알게 된 거죠. 지금 아무리 어려워도 여러분이 불러야 될 이름이 있어요. 하나님, 전능자, 엘사다이 하나님, 이름을 불러야 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자는 하나님이 구운하신다는 거죠.
 
지금 나오미는 절망의 언덕 위에 희망의 집을 짓고 있는 거예요. 어떻게 전능자라는 이름을 부르므로 이름이 정말 중요하잖아요. 전능하신 하나님 엘사다이 하나님, 엘사다이 하나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역전시킬 수도 있다는 소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네 번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고 거듭 새롭게 시작할까요? 22절의 말씀을 보면요,
 
*룻기 1:22,
22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여기 중요한 표현이 나오는데 시작할 때, 보리 추수 시작할 때, 이게 뭘 의미하냐면 이게 문학이나 또는 예술을 보면 암시를 하거든요. 암시 그러니까 보리추수 시작할 때 새로운 시작이 출발되고요. 그리고 보리추수 끝날 때, 또 다른 역사가 일어나요? 그때 인제 룻이 보리추수가 끝나면 그때, 먹을 게 없어요. 근데 그때 나오미가 며느리를 불러 가지고 작업의 정석을 가리킵니다. 그래 가지고 이제 먹고살 게 없으니까 보아스를 해야 된다. 이게 인제 드라마인데요. 보리추수 시작할 때 새로운 시작이 출발할 거고, 끝날 무렵에 또 다른 시작이 끝나요? 하나님의 역사는 쉼표지, 계속 마침표가 아니거든요. 그래서 인제 새로운 시작하는데, 2장이 1절에 가면 갑자기 또 한 번의 암시를 줘요 이게 인제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암시가 참 재미있거든요.
 
*룻기 2:1,
1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유력한 자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보아스더라.
-요셉에 생긴 걸 보면 계속 옷이에요. 옷 그래서 계속 채색 옷에다가 또 죄수옷에다가 또 국무총리 옷에다가 나중에는 이제 형제들 오니까 옷을 한 번씩 나눠줘요. 그리고 왜냐하면, 베냐민에게 다섯 벌을 줘요. 예 수님의 옷 얘기죠. 예수님의 옷 그죠? 그런데 여기서는 갑자기 보아스라. 는 인물을 등장시켜요 2장 1절을 보시면 나우미 남편 엘리멜렉에게 친족으로 유력한 자니. 그의 이름은 보아스더라 룻기를 기록한 기자가 아 지금 성급할 만큼 갑자기 보아스란 인물을 툭 던져 놓는 거죠. 툭 한 마디 던져 놓는데 친족으로 유력한 자, 당시에 기업 무를자라는 고멜이라는 제도가 있었는데, 어떤 여인이 과부가 되면 동생이 과부와 결혼해서 씨를 이어주는 거죠. 대를 이어줘야 돼요. 근데 이제 말론과 기룐 둘 다 죽었잖아요. 그다음 친족 가운데 대려 이어질 만한 사람이 필요한데 바로 보아스가 그중에 하나라고 등장을 하는 거죠. 왜 보아스가 누굴까? 이 보아서라는 이름이 흥미로워요 우리가 역대하 3장 17절에 보게 되면,
 
IV.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고 거듭 새롭게 시작하십시오.
-보리추수 할 때, 추수를 마칠 때, 새로운 기회가 생긴다.
 
*역대하 3:17,
17 그 두 기둥을 성전 앞에 세웠으니 왼쪽에 하나요 오른쪽에 하나라 오른쪽 것은 야긴이라 부르고 왼쪽 것은 보아스라 불렀더라.
-야긴은 그가 세우다 보아스는 안에 힘이 있다. 성전은 하나님이 세우신다. 하나님께 힘이 있다. 이 보아스가 누구냐 하면 마태복음 1:5절에 보세요.
 
*마태복음 1:5,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그런데 정탐꾼 중에 한 사람이 살문이었을 거라고 그래요. 그게 라합이의 정탐(偵探)꾼을 살려줬잖아요. 그래서 나중에 살문과 라함이 결혼한 거죠. 그런데 라합은 기생이었고 가나안 여자였어요. 그런데 보아스를 안 거죠. 이 보아스가 굉장히 훌륭한 인물이었다. 인격적으로 훌륭하고 신앙식 훌륭한데 이 보아스가 늦게까지 결혼을 못 했어요. 왜냐하면, 동네 사람들이 그건 제 상상력인데요. 동네 사람들이 기생 라합의 아들이야, 기생라합의 아들이야, 그래서 딸을 안 주는 거예요. 성경 안 쓰였으니까요? 그냥 제 상상한 거니까, 네 그래서 나이가 들었어요. 사람은 정말 좋은데, 근데 보아스는 나중에 결혼해서 르세크스 오벳을 낳고 오벳을 낳고 이 스토리가 나오는 거죠. 그니까 보아스의 마음속에는 어머니 생각이 드는 거예요. 어머니가 늘 외로운 기생 라합이면서 하나님 믿긴 믿지만 사람들의 지켜진 낙인이 뭐냐면 기생 이라는 게, 또 성경을 거듭 얘기를 해요. 기생 라합이라고 히브리서 보면 기생 라합을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만들 때, 대단한 인물들을 통해서 역사하신 게 아니라, 기생을 통해서 창녀를 통해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거예요. 그리고 아들이 바로 보아스였던 거죠. 그런데 룻기장에 가면 룻이 시어머니를 공궤하려고 먹을 게 하나도 없어요.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시어머니를 공궤하려고 이삭을 주우러 나가는데 가장 놀라운 게 뭐냐면 룻기에 보면 이 모압에서 온 이 룻이 은혜라는 말을 자주 써요 2장 2절에 보면,
 
*룻기 2:10,
10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하니.
-먹을 게 없으니까 은혜를 사모하면서 이삭을 주으러 가는 거죠. 십자를 보니까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여 얘기를 했는데 나는 이방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 저녁에 은혜를 베푸시며 날 돌보시나이까? 하니 보아스에게 룻이한 얘기죠 내가 어떻게 은혜를 베푸십니까? 날 돌보십니까? 13절에 보시니까,
 
*룻기 2:13,
13 룻이 이르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하니라.
*룻기 2:20,
20 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하고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이니라 하니라.
-여기 나온 은혜는 해세드, 하나님의 무궁한 사랑 여러분 어디가 어떻게 다시 시작할 수 있죠. 다시 시작할 때는 은혜를 붙잡고 시작하셨대요.
 
*은혜란 전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 호의다.
-정말 지혜로워요 왜냐하면, 새롭게 시작할 때는 언제나 은혜와 함께 시작하고, 그리고 내게 아직도 남아있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돼요.
 
※제가 2009년도에 교회를 떠나면서 아 너무 자세한 얘기는 할 수도 없고, 근데 이제 뭐 교회 떠나면서 없어요. 뭐가 그래서 제 아내하고 인제 앉아 가지고 어떻게 할 것인가? 근데 없는 게 아니더라구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더라구요. 그리고 저를 힘들게 한 분들이 결코 빼앗아갈 수 없는 게 있는데, 내가 그동안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있고, 하나님에 계신 지혜와 깨달음이 내 안인데 그건 빼앗아갈 수 없는 거예요. 하나님을 빼앗아 갈 수 없고, 내가 그동안의 깨달은 말씀과 지혜와 지식을 빼앗아 생각할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딸 둘을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로고스 교회를 개척한 경우이기 때문에 우리 작게 시작하자 아주 작게 시작하자 그래서 딸 둘에게 주일학교 교사를 맡아 달라. 그래서 이제 다시 작게 시작하기로 시작을 한 것입니다. 빈손으로 시작하는 거죠. 바닥에서 시작하는 거예요. 이게 중요해요. 우리가 뭔가 새롭게 시작할 때, 너무 거창하게 시작하는 게 아니라, 항상 작게 그리고 하나부터 시작하는 게 중요하다는 거죠. 룻이라는 여인은 대단히 지혜로운 여인이죠. 왜냐면, 하나님과 함께 은혜와 함께 그리고 이삭 하나 주우러 나가는 거죠. 우리가 뭔가 새로 시작할 때 언제나 기억할 것은 아직도 내게 남아있는 게 무엇인지 우리는 그렇잖아요. 목사님에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 얘기 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가족이 있고, 건강이 있고, 경험이 있고, 교육이 있다면 아직도 남아있는 게 많은 것입니다. 다음 하나님은 우리에게 언제나 우리가 없는 것을 물어보지 않아요. 모세에게 내 손에 있는 게 무엇이냐? 과부에게 내게 있는 게 무엇이냐? 마지막 떡 한 하나입니다. 네 생도의 아내에게 엘리스가 물어보죠. 내게 있는 게 무엇이냐 기름 한 병입니다. 네 거기서 출발하는 하나님 모습 오벙이어이에요. 여러분 손에 있는 것 손에 있는 그것 아론의 지팡이 손에 있는 그것 아브라 매 처음에 하나님께서 뭐든지, 첨 처음 주실 때 가장 가진 것, 내게 있는 것, 계속 가보라 하면 딴 얘기를 해요. 아니다. 사라에게 아들을 주겠다. 내게 있는 것이라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오늘 여러분들이 말씀을 들으면서 아직도 내게 있는 게 무엇인지 아직도 남아있는 게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거죠. 거기서부터 출발하는 거죠. 없다고요. 아니에요. 있어요. 찾아보세요. 많아요.
 
그래서 인제 은혜를 사모하고 길을 떠나는데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세요. 은혜를 사모하고 길을 떠난 사람에게는 길을 열어주시죠. 2장 3절을 보니까,
 
*룻 2:3,
3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여기 우연이라고 써 있는데요. 이거는 섭리라고 그러니까 섭리, 그리스인에게는 우연은 없어요. 섭리에요. 섭리밖에 없어요. 오늘 제가 얘기한 것도 저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누구 한 사람을 위해서 내가 왔다고 생각해요. 누구 한 사람을 위해서 왔는데 누군지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주우러 나가고 있는 이 룻을 인도하고, 계시다는 거죠. 어디로 보아스의 밭으로 놀라운 이런 거예요. 시작하세요. 가진 것 가지고 그냥 쉬이 시작하세요. 어떤 분은 아무것도 안 하는데 아무것도 안 하니까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거예요. 이삭을 주우러 가죠. 여러분 기도하셔야죠. 네 어떤 분이 하나님 기도해서 주셔서 하나님 복권 한 장만 당첨되게 해달라고 하는 거에요. 복권 계속 기도하라는 거예요. 복권 한 장만 40일이도 응답이 없는 거죠. 하나님 찾아오셨어요. 하나님이 찾아 오셨어요. 하나님이 찾아와서 복권당첨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내가 하나 부탁이 있다. ‘복권 하나만 사다오!’ 아직도 이해를 못하는 분계신데요. 복권 한 장도 안사면서 복권 당첨하게 다루기도 하니까 하나님이 너무 그렇잖아요. 여러분 할 수가 없다고요. 염려만 하지 마세요. 염려해서는 아무것도 이러잖아요. 원망도 아무것도 이러잖아요. 기도하세요.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일하는 것보다 하나님이라시면 훨씬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거예요. 작은 것이라도 시작하는 거예요. 작은 것이라도 부탁하는 거죠. 4절에 보시니까,
 
*룻 2:4,
4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하나님의 은혜(Grace)를 받아 특별한 은총(Favor)를 누리도록 하세요.
-오 보아스가 참 좋은 사람이에요. 하인들에게 축복을 베풀고, 하인도 보아스 좋아해요. 거기서 인제 보아스의 눈에 룻이 들어와요. 이건 은총이라 은총 페이버, 네 눈에 들어오는 거죠. 하나님 은혜를 받아서 특별한 은총을 누리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구원은 은혜죠 그런데 사람을 통해서 주시는 것은 은총이죠. 은총, 그러니까 루시 보아스에게 받은 은총 하나님께서 보아스를 통해서 루시에게 은총을 사람을 무시하면 안 돼요. 하나님이 사람을 축복하시는 거죠. 사람을 우습게 여기면 안 돼요. 좋은 만남을 갖고 와야 돼요. 좋은 만남이 찾아오는 것은 은혜지만 좋은 만남을 가꾸는 것은 지혜예요. 그러니까 우정이라는 게 참 깊은 건데요. 우리 오 목사님 만나는 게, 벌써 한 40년대예요. 40년 여 목사님 이렇게 제가 이렇게 찾아오니까 이렇게 떡 국물이 떨어지는 거예요. 야 이거 놀라운 거예요. 진짜 아 이 인생은 간단해요. 이 복 받은 사람 같에요. 옆에만 딱 가도요. 이게 결국은 줄서기거든요. 그러니까 어떻게 눈치 눈치가 빨라야지, 제가 나이가 드니까 제가 나이만 들면 진짜 거룩일 줄 알았거든요. 근데 아니 이거 눈치가 늘어요. 아니 목사가 실력 없으면 눈치라도 있어야죠. 목사님 내년에 또 좀,,, 우리 교인들이 들으면 좀 화날 것인지 몰라요. 목사님, 저도 먹을 만큼 살아요. 네 근데 은혜를 베풀어요. 보아서가 은혜를 사모하면 은혜를 받게 되죠. 보아스를 위로자고요. 참 멋있는 남자예요. 네 13절에 보니까,
 
*룻기 2:13,
13 룻이 이르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하니라.
-여러분 제일 좋은 것은 뭐냐 하면, 작은 은혜를 받아서 큰 은혜를 키우는 게 지혜예요. 부스러기 은혜를 받았어요. 처음에는 이삭을 죽었는데 나중에 보아스가 소년들이 길러오는 물을 마셔라 그걸 키워요. 나중에는 보아스가 초청해 가지고 복은 곡식을 줘요 은혜를 점점 키우죠. 어떤 어떨 때 어떨 때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키우셨을까?
 
첫째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 때 큰 은혜가 임합니다.
-최선을 다해야 돼 작은 거지만 최선을 다해야 돼요. 우리는 전부 너무 큰 걸 생각하잖아요. 작은 게 중요한 거죠. 얼마 전에 오 목사님이 저한테 연락을 주셨는데 2001년도에 제가 섬기던 교회에서 드렸던 수건을 지금도 샤워할 때, 쓰신다고 보내온 거예요. 혹시 사진 좀 올릴 수 있나 모르겠네요. 안 뜨나? 2001년도,,, 나도 없어요. 근데 그걸 지금 쓰시고 계시는 거 그래서 내가 이번 엄마 생각이 뭐냐면 내가 좀 사드릴까 아니면 장로님들하고 권사님들에게 좀 부탁을 할까? 2001년도, 23년 전에 타올을 지금도 쓰고 계시는 거죠. 아 이게 인제 여러분 엄 목사님 잘 모르시죠. 제가 잘 알아요. 왜냐하면, 지금 40년 지냈잖아요.
 
제가 이렇게 오늘 아침에 또 일찍 일어났어요. 시차 때문에, 일찍 일어났는데 오목사람에게 없는 게 있고 있는 게 몇 가지 있어요. 가르켜 드려요 예 네!!!~~ 이건 참 네 진짜 여러분 없는 것 세 가지 사심 없어요. 욕심 없어요. 욕망은 있어요. 거룩한 욕망은 있는데, 욕심은 없어요. 세 번째 탐심이 없어요. 여러분 탐심이 있으면 이렇게 큰 기회 할 수 없어요. 크게 쓰임 받지 못해요. 가지고 있는 거 몇 가지 첫째, ⓵초심 이 초심을 계속 가지고 계시는 거죠. 만날 때마다 감동을 받아요. 두 번째가 재밌어요. ⓶동심, 어린애 같에요. 세 번째가 ⓷성심, 찬양 인도 하나 볼 때마다 하, 정말 저렇게 안 해도 되는데 왜 저러시나 부목수도 많은데, 왜 저러시나!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성심, 또 하나 ⓸뚝심 곰 같에요. 곰, 어떨 때 보면요 다 받아내는 거죠. 마지막이 중요해요. 뒷심 여러분 뒷심 못 쓰면 이렇게 교회 못 해요. 성과를 만들려면 ⓹뒷심, 필요한데 대부분 초심이 있는데, 뒷심이 없어요. 뒷심이 없으면요. 끝까지 가려면 뒷심이 필요해요. 네 오 목사님 뒷심이 있어요. 너무 괜찮은 거죠. 그러니 묵상하는데 사랑의 귀에 부러운 교재가 있더라고요. 얘기해 드려요 아 진짜 부러운 게 있어요. 제가 사실은 뭐 LED 별로 안 부러워요 조금 부러워요 우리 교회도 하고 싶은데 아직 못하고 있어요. 네 너무너무 부러워 근데 부러워하면 진다는데 나는 마음껏 부러워하는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부러워하면 복을 받더라구요. 네 그래서 마음껏 부러워할려고 그래요. 내가 메모를 해 봤어요. 사랑에게 성도들을 향한 부러움 첫째, 대단해요. 어려울 때는 역시 경고에요.
⓵ 하나님을 향하는 갈망,
⓶찬양과 경배를 위한 갈망,
⓷은혜를 사모하는 갈망,
⓸말씀을 사모하는 갈망,
⓹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갈망, 세 가지만 더 해드릴게
⓺배움에 대한 갈망, 경과
⓻훈련에 대한 갈망, 훈련받은 교회가 어려울 때는요 역시 경고예요. 그리고
⓼변화와 성숙에 대한 갈망, 이게
⓽온전함에 대한 갈망, 마지막 하나 더
⓾섬김에 대한 갈망, 지난번에도 소식 들으니까
-이번엔 7000 교회를 섬겼다고 그러더라고요. 놀라운 것입니다.
작년에 제가 네 수건 좀 사드리세요.... 아이 정말 여러분 너무하세요. 안 돼요.
 
사실 작년에 인제 와가지고 천천히 교회라고 제주 열방제작교회하고 천천히 교회 얘기를 했죠. 근데 제주 열방교회는 차가 필요해서 차를 나중에 선물해 드렸고요. 그다음에 천천히는 또 연락 왔어요. 사랑의 교회 신자가 와서 또 격려도 해 주시고 나중에 연락이 왔는데 쌀 서른 포가 왔대요. 사람에게 오정의 목사님이 보낸 거래요. 혹시 좀 띄워줄 수 있나요? 없으시나? 아마 띄워줄 거예요. 나중에 띄워줄 거예요. 근데 감동적이었어요. 저한테 연락 왔어요. 쌀 30포가 왔습니다. 그리고 보니까 발신이 이제 사랑에게 오정현 목사, 너무너무 기뻐서 여러분 하나님이 감동을 주는 것은 한 영혼을 향한 관심이에요. 그리고 섬기는 관심 목사님께 제가 배운 것은 뭐 뚝심도 있지만 한 영혼을 향한 관심 관심이 기회가 크면 좀 사그러질 텐데 칼 세미나를 할 때 보면은 한 영혼을 향한 관심을 강조하는데, 그게 지금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두 번째 겸손한 사람에게 더 큰일을 주시죠. 교만하면 다 빼앗겨요 겸손한 사람에게 배려를 주시죠. 제가 작년에 말씀드렸죠? 리거륜 목사님께서 받은 은혜를 보존하고 키우는 건 딱 세 가지밖에 없대요 영어로 세 가지 얘기인데 1.휴미리티 겸손 두 번째가 뭐 2.튜리티 성숙 세 번째가 3.유니티 하나가 되는 것 그중에 하나가 겸손이죠. 세 번째 감사를 표현할 때 더 은혜가 임하죠. 감사 정말 잘하는 것 같아요.
 
둘째로, 겸손한 사람에게 더 은혜를 임합니다.
셋째로, 감사를 표현할 때, 더 큰 은혜가 임합니다.
 
나중에 시어머니께 갖다 나눠 드려요 볶은 곡식을 그다음에 이삭을 주운 걸 갖다 나눠 드리는데 룻기 1장 17-18절을 보게 되면,
 
*룻기 1:17-18,
17 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는지라.
18 그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어머니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가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 시어머니에게 드리매.
-시어머니에게 나눴잖아요. 물어보죠. 어느 밭에서 주웠느냐 룻이 참 착해요. 어머니 그냥 드시긴 하세요. 그런 게 아니라, 보아스의 집이에요. 밭이에요. 보아스는 친족 가운데 귀염 모르자다 얘기를 해주죠 하나님 먼저가 인생 역전을 가져야죠 결론을 맺겼어요. 이제 끝내야 돼요. 실력 없으면 일찍 끝내라기도 해야 돼요. 나중에 결혼해요. 그니까 3장은 정말 재밌는 장인데, 제가 오늘 기회를 안 좋아하지 못하는데요. 나오미가 룻에게 작업의 정서를 가리키는 거예요. 룻이 순종을 잘해요. 그래 가지고 룻이 보아스에게 프로포즈를 해요. 결국 결혼하고 오벳을 낳았는데 이렇게 이게 마지막 결론이에요.
 
*룻기 4:13-14,
13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14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놀라운 것이죠. 찬송할지어다. 회복이 됐어요. 마라 인생에서 찬송 인생, 기쁨의 인생, 회복이 됐어요. 절망 인생에서 소망이 넘치게 됐어요. 믿음이란 뭘까요? 네, 절망의 언덕에서 소망의 집을 짓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아직 끝났다고 말씀하지 않으면 끝난 게 아닙니다. 따라서 해봐서 끝나기 전까진 끝난 것이 아닙니다. 역전의 드라마죠 결국은 오벳을 낳는데 오벳이 누구죠? 룻기 4:21-22에,
 
*룻기 4:21-22,
21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22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오벳의 이름의 뜻이 섬김이에요. 섬김, 그리고 스토리가 마태복음1:5절에 나오죠.
 
*마태복음 1:5,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결국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 기생라합 모압 여인이 예수님 족보에 들어가고, 그리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서 모든 인생을 역전시키는 거죠. 주님 오셔서 만난 여자가 누군지 아세요. 남편 다섯이나 있는 여자 그래서 성경에 보면요 십자가를 거리끼는 것이라고 거리끼는 것, 거리낀다는 말이 ‘스칸달론’ 거기서 스캔다이론 스캔들, 하나님이 스킨달 이렇게 했어요. 하나님께서 가장 추한 인생들을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역전의 드라마를 만들어 가신 겁니다. 여러분 인생에 역전의 드라마가 계속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약
역전에 드라마를 만들어주신 하나님께서 우리들 가운데 인생이 바닥치고, 내려가고, 비우고 빈손에 힘겨워하는 자가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쉼표를 찍은 자리에 마침표로 찍지 않게 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며 다시 시작하고, 역전의 꿈을 꾸고, 시작할 수 있도록 우리는 함께 간구하고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가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 때 큰 은혜가 임하고, 겸손한 사람에게 더 은혜가 더해지니 더욱 감사를 표현해서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어야 한다. 그리하여 역전의 드라마를 쓰는 인생이 되기를 간구하자.
-룻기의 주인공은 나오미, 룻, 그리고 보아스이다. 그리고 룻기의 주제는 가까운 친척이 죽은 자의 가족과 재산을 책임져야 한다는 율법을 통해 나오미와 룻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지만 보다 궁극적인 주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다. 곧 보아스와 룻의 아름다운 신앙과 사랑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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