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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한 영혼을 향한 목자의 심정 성경본문 : 요한복음 10:11 설교자: 김태성 목사(중국), 한정훈 선교사(체코), 정광섭 선교사(우크라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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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5년 4월 6일)
제목: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Blessed Are Those Who Wait)“
-<새로운 길> 이사야 시리즈 ⑩
말씀: 이사야 30:18~21,26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먹사님), 호산나 찬양대
대표기도: 김인용 장로님
사회: 문진호 부목사님(2부)
세례식 간증: 백기열 성도, 김은영 성도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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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30:18~21, 26,
이사야 30:18~21,
18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19 시온에 거주하며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백성아 너는 다시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가 네 부르짖는 소리로 말미암아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그가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
20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
21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
 
26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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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고 담대하라. 귀한 찬송 하나님께 받으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오늘 여러분, 회중 찬송 하셨는데 - 성령이 스승 되셔서 진리를 가르치시고, 그 말씀 한 줄 한 줄이 내 마음의 교훈 되도다. ~~
 
오늘 한 줄, 한 줄 한 단어 한 단어가 여러분들에게 다 와닿기를 바라는 겁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을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렇게 했습니다. 기다리는 자는 보기 있도다 오늘 18절 뒷부분에 보니까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사야 30:18,
18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여호와는 어떤 하나님 이시니요. 정의의 하나님이시라 그렇기 때문에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그랬습니다. 정의의 하남이라는 뜻은 억울함을 풀어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통한의 심정을 풀어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니까 그러기 때문에 그를 기다리는, 믿고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래서 오늘 이 주님의 말씀을 기다릴 때,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387명의 우리 성도들이 학습과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제가 오늘 세례받는 분들 가운데 참 특별한 분이 하나 있는데, 92세 되시는 어머님이 세례를 받으세요. 야, 대단하십니다. 92살까지 안 받으셨습니다. ㅎㅎ~ 그런데 근데 사실 앞 예배 때 받으셨는데요. 내가 가슴이 찡한 거예요. 진짜 이 세례도 너무 미루지 마시고, 가능한 빨리 받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까 기다림에 대해서 18절 앞부분에 보니까,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신다고 그랬어요. 앞에 이 접속자 그러나가 중요한데요.
 
*이사야 30:18,
18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그러나를 중심으로 전과 후가 완전히 바뀌는데 주님은 좀 문제가 있더라도 주님은 기다리시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거예요. 어떻게 기다리시는가 이게 어떤가 하면 16절을 보니까,
 
*이사야 30:16a,
16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가 말 타고 도망하리라 하였으므로 너희가 도망할 것이요 또 이르기를 우리가 빠른 짐승을 타리라 하였으므로 너희를 쫓는 자들이 빠르리니.
-우리가 말 타고 도망가리라. 그랬어요. 앞에 이 말 타고 도망간다는 말 탄다는 건 애굽을 상징하는데 애굽으로 돌아가자. 옛날에 광장에 있는 백성들 죄송합니다. 뻑 하면 사투리죠 걸핏하면 말이죠. 애굽으로 돌아간다고 패역(悖逆)한 백성이에요. 그런데 그 패역한 백성이라도 주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그리고 세상 나라, 세상 제국을 신뢰하는 사람들도 주님은 기다리고 계신다. 그러니까 그런 날을 이 분기점으로, 도망하는 자들,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자들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통하여 기다리신다. 아주 격렬하게, 강하게 대조가 되어 어떻게 기다리시는가, 19절에 보니까,
 
*이사야 30:19,
19 너는 다시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라.
-통곡할 만한 상황이 되었는데, 돌아오게 하나님께서 기다리시고 기다리는 자에게 다시 통곡하지 아니하게 하실 것이라. 우리가 이 참 수많은 일들을 우리가 경험하잖아요. 지난 한 주간에도 수많은 우리 주위에 수많은 일들이 일어났어요. 통곡하는 자에게 다시 통곡하지 아니하게 하실 것이라 20절에 보니까,
 
*이사야 30:20,
20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주께서 너희에게 오늘 여러분들 봉독했습니다마는 환란의 덕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그러나 내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겠다. 전에는 환란의 떡과 고생의 물 물리적인 어려움이 있지만, 이제는 주님이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스승이 되어 주시겠다. 그리고 앞에 이사야 29장 11절에 보니까,
 
*이사야 29:11
11 모든 계시가 너희에게는 봉한 책의 말처럼 되었으니.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 계시의 말씀이 봉해졌지만 계시의 말씀이 묵시의 말씀이 다 이렇게 닫혀져 있었지만 그러나 이제는 계시의 말씀을 밝혀 주시겠다. 그러니까 오늘 이 우리 모두에게 그러나의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사실 오늘 제가 이 세례식 때문에 이렇게 아주 압축해서 말씀을 드리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다시 말씀 한 줄, 한 줄을 깨닫는 지혜와 눈을 여러분들에게 열어주시길 바랍니다. 자 다시요. 18절에,
 
*이사야 30:18
18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훌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뭐가 있도다. 복이 있도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인들의 기다림은 무턱대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에요. 이거는 능동적인 기다림이에요. 말씀을 확신하고, 말씀은 씨앗이 내게 뿌려줬을 때, 이 씨앗이 반드시 추수를 할 것이다. 그걸 믿고 기다리는 것이에요. 따라서 여러분 기다림도 용기예요. 저희 집사람은 저한테 맨날 그래요. 나는 당신 기다리다가 평생 산다고 내가 그래서 ‘기다리는 것도 용기야’ 그리고 기다리는 것도 사역(事役)이에요.
 
여러분 많이 기다리는 분들 많이 계시잖아요. 그런데 우리의 기다림은 능동적인 기다림이에요. 그리고 기다림 동안에 우리가 뭘 깨닫는가 하면, 역사의 상선에서 구원의 수레바퀴가 돌아가라는 것을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에요. 우리가 기다리는 동안에 말씀을 통하여 기다리게 되면 역사의 하선 우리 인생 밑바닥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이 있지만 그건 눈에 보이는 것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역사의 상선에서 하나님의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가게 되는 것이에요. 주권적인 섭리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에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기다리게 하신 이유가 뭘까? 18절을 보니까 이렇게 나와 있어요.
 
*이사야 30:18
18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훌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이는 여호와께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뭘 베풀겠다고요. 은혜를 베풀게 하시냐 왜 기다리게 하시는가? 은혜를 베풀기 위하여 왜 기다리게 하시는가? 너희를 긍휼히 여기기 위하여, 그러니까 이해가 안 되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호의가 우리의 기다림을 통하여 베풀어지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특별히 제가 오늘 세례식이니까,. 두 가지만 오늘 세례 받는 분들, 학습 받는 분들, 그리고 오늘 방송에 들어오시는 분들, 그리고 우리 본당에 계시는 모든 우리 성도들 별관에 계시는 모든 분들, 하나님께서 오늘 기다리는 자에게 능동적으로 기다리는 자에게 말씀의 씨가 뿌려져 가지고, 이 말씀을 확신하는 주의 백성들에게 저는 지금 이사야서를 강의하면서 하나님께 너무너무 감사를 드리고 있어요.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딱 맞을 때, 이사야서를 하게 하셨는가? 나는 이사야가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지금 정말로 있잖아요. 이사야의 말씀을 너무나 놀라운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앞 예배 때, 우리가 이 말씀을 받고 어떤 장로님이, 목사님은 오늘 이 말씀은 저에게 주시는 겁니다. 왜 그렇게 반응을 할 수 있었는지,,, 두 가지 축복을, 두 가지 은혜를, 기다리는 자에게 주신 두 가지 축복을 지금부터 말씀을 드릴 테니까,. 여러분들 잘 말씀을 여러분의 것으로 확인하시고 능동적인 기다림의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첫 번째는 20절에 보니까 뭐라고 하냐? 20절에 보니까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사야 30:20
20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
-그러니까 첫 번째 축복은 뭐냐면 올바른 길을 가르치시는 스승의 축복을 받는 것이에요. 여러분 우리가 수많은 길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만 올바른 길을 가르쳐주시는 스승의 축복을 능동적으로 기다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I. 올바른 길을 가르치시는 스승의 축복 (20~21절).
-올바른 길을 가르치시는 스승이 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바로 뒤에 21절에,
 
*이사야 30:21,
21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
-누가 이제 어떤 분들은 이거 놓고 정치적으로 해석합니다. 우리는 좌파도 아니고 우리는 우파도 아니고 우리는 중도입니다. 그런 얘기를 합니다. 그런 뜻이 아니에요. 그런 뜻이 아니고 하나님은 우리가 오른쪽, 왼쪽으로 가지 아니하고, 우리가 올바른 길을 가게 해주시는 것이에요. 바른 길을 가게 해주시는 것이 우리에게 틀린 길이 아니라,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에요. 대표적으로 우리가 받는 이 스승의 축복은 뭡니까? 목자가 양떼를 인도하여 우리 앞을 인도하시는 것처럼 목자 스승의 은혜를 받는 것이에요. 왜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후 남유다 왕국에는 왜 당시의 올바른 스승이 필요했을까요? 앞의 9절에 보니까 뭐라고 나와 있는가,
 
*이사야 30:9.
9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 하는 자식들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들이라.
-패역하고 하나님 말씀 듣기를 싫어하는 이런 백성들이기 때문에 이런 백성들에게 제일 필요한 것이 참된 스승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 참된 스승은 목자이시고 참된 스승은 하나님이시고 참된 스승은 선지자의 말씀을 통해서 주시는 말씀이 될 수 있고, 오늘 우리 입장에서는 오늘 줄일 말씀이 될 수도 있고, 또 우리 다락방마다 주신은 공동체의 은혜가 될 수도 있고 다 포함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스승은 세상의 스승과 같이 아니하고, 신실한 목자이며, 또 집에서는 말씀을 가지고 자녀를 가르치는 신실한 부모가 될 수가 있고, 좋은 목자 경건한 부모 다 포함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스승의 역할을 제대로 하니까 앞에 29장 18절에 보니까, 그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고. 말씀을 들을 것이고. 어둡고 캄캄한 데서 맹인이 눈을 뜰 것이다. 눈이 열릴 것이다. 그러니까 참된 스승의 은혜가 있으면 눈이 열리고, 바른 길을 가게 된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바른 길을 가게 되는 단적인 예가 오늘 20절 21절 22절에 뭐라고 나와 있는가,
 
*이사야 30:22,
22 또 너희가 너희 조각한 우상에 입힌 은과 부어 만든 우상에 올린 금을 더럽게 하여
불결한 물건을 던짐 같이 던지며 이르기를 나가라 하리라.
-아멘, 무슨 뜻입니까? 올바른 스승의 은혜가 있고, 올바른 올바른 길을 가게 되면 그동안 하나님 아닌 우상을 의지하고 그 뭐 의지하던 잘못된 것들 다 던져버리고, 온전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뜻이에요. 오늘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충만하게 있기를 바랍니다. 이걸 신약의 창으로 해석하면 예수님이 참된 스승이시라는 거예요. 요한복음 13장 13절을 보니까
 
*요한복음 13:13,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뭐예요? 옳도다 왜냐하면, 그 선생님의 가르침이 영적인 권위와 능력이 있어서 일반 사람들과 다른 거예요. 마태복음 7장의 29절에 뭐라고 나와 있으니까,
 
*마태복음 7:29,
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진짜 하나님의 강력한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우리가 이 말씀을 받을 때 여러분 이 말씀을 아까 제가 말씀을 드렸죠 어떤 말씀이라고요. 능동적인 기다림으로 이 말씀을 드릴 때,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에게 권위 있는 권세 있는 말씀이 될 줄로 믿습니다. 자 ①스승의 축복이 있었고, 두 번째로는 ②참된 영적 의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참된 치유를 주시는 거예요.
 
II. 참된 의사를 통한 치유의 축복 (26절).
-오늘 26절을 여러분들이 읽었는데, 26절을 다시 한번 크게 합동하도록 크게 보겠습니다.
 
*이사야 30:26,
26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①달빛은 햇빛 같겠고 ②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두 번째 뭐예요? 햇빛은 7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할렐루야!~~ 정말 기가 막힌 표현이에요. 이사야는 궁정 시인이라고 그랬습니다. 로얄 포이트(Royal Poet), 정말 궁정 시인이 얼마나 표현이 지금도 이런 어떤 시인이 이런 표현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달빛같이 어둡고 힘들고 그리고 좀 희끄무레한 이런 상태의 그런 사람들이, 햇빛 같겠고 또 적당한 햇빛은 적당한 햇빛이 아니라,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그랬어요. 여러분 우리 일반적으로 낮에 2만 룩스라고 그래요. 2만 룩스가 7번이 되면 14만 룩스가 되는데, 정오의 햇빛은 10만 룩스라고 그래요. 그 10만 룩스가 7배가 되면 70만 룩스가 되는 거예요. 우리의 어둡고 한탄스럽고 힘든 상황이 70만 룩스의 밝은 빛을 받게 된다. 이겁니다. 그야말로 어두운 인생 가운데 별이 빛나는 밤을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밝은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아주 밝은 은혜를 그러니까 어두운 인생, 어두운 아픔, 여러 가지들이 있잖아요. 해보다 더 밝은 빛 그걸 받는다는 것이에요. 여기에는 치유의 은혜가 있는 거예요. 여러분 우울증이 있는 사람들, 우울증 있는 사람들 또 외상 외상증후군들, 정신적인 상처 이런 분들에게는 따뜻한 햇볕이 좋다고 합니다.
 
햇볕은 엄청난 치유의 힘이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것들을 지금 뭐 꼭 7배라기보다도 아주 그냥 아주 상징적으로, 이상적으로 표현하는 거예요. 진짜 말씀을 제가 기다리는 자에게는 결국은 세상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확실한 치유를 주신다 그 말이에요. 확실한 치유(治癒),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빛 대신 하나님께서 일곱 배의 이 새 하늘과 새 땅을 허락하실 그 날은 모든 상처가 치유되는 날이 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은 과거에 출애굽 때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어요. 출애굽 때 열 재앙(災殃) 가운데서 고통당하는 그들에게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출애굽 15장 26절에 잘 아시는 대로 크게 우리 합독합니다.
 
*출애굽기 15:26b,
26b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 임이라.
-소위 여호와, 여호와 라빠!! 선한 의사처럼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맞은 자리는 터진 자리, 그 다음에는 트라우마, 상처, 우울 다 포함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것은 여러분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수많은 치유도 주시고 그리고 이민족에게 임하는 수많은 우울증, 트라우마, 상처 모든 아픔들을 주님이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어떻게 달빛은 햇빛이 되겠고, 적당한 햇빛은 7배의 햇볕의 은혜를 주신다는 것이에요. 은총의 햇빛 상처를 치료하는 힘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우리 마음속에 아까 능동적인 기다림이 있는 사람에게는 우리의 마음속에 아 주님이 주시는 치유를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라는 간절한 소망을 갖는 것이에요. 앞에 예레미야에 보면 예레미야는 그 어둡고 슬픈 상황 가운데서 다른 길이 없어요. 예레미야 17장 14절을 보니까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예레미야 17:14,
14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그러니까 치유하시는 이 주님, 우리를 고쳐주십시오. 사모해야 되는 것이에요. 여호와 라파, 아빠 되신 하나님 우리 가정을 고쳐 주십시오. 지금 사모해야 되는 것이 오늘 세례받는 모든 분들 내 인생의 어두운 과거를 다 새롭게 고쳐 주십시오.
 
그리고 대한민국에 임한 수많은 어려움들의 상처를 주님이 치유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오늘 두 가지 첫째는 뭐예요? ①스승의 은혜, 두 번째는 뭡니까? ②치유의 은혜, 본래 하나 추수의 은혜까지 있는데, 제가 시간이 없어서 그건 다 말씀 못 드리고, 이 스승의 은혜와 치유의 은혜가 있으면 하나님이 추수의 축복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어렵지 않습니다. 단순(單純)명료(明了)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용기를 가지고 능동적으로 기다리는 주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올바른 길을 가르치시는 스승의 축복을 허락해 주시고 그다음 참으로 앞 어렵고 상황이 안 되는 어려움 가운데서도 주님 나 치유해도 나를 고쳐 달라고 사모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치유의 역사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적용,
-그렇다면 이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접목이 돼야 됩니까? 여러분 힘들고 어려울 때, 또 작은 일부터 큰일까지, 스승 내신 주님 앞에 물어보시길 바랍니다. 제가 오늘 두 가지 질문을 드릴 텐데 물어봤어 물어봤어?? 그리고 고쳐 달라고 치유를 기도해 봤어? 치유를 요청해 봤어요? 오늘 이 말씀이 탄핵정국 이후에 대한민국의 주신은 은혜가 되기를 바라는 겁니다.
 
제가 신학교 시절에 듣던 영어 중에 하나인데 제가 영어로 그대로 해서 죄송합니다.
▷God makes everything beautiful in His time!
-하나님께서는 (기다리는 자에게), 하나님의 때에 모든 것을 아름답게 이루신다.
 
하나님께서는 기다리는 자에게 모든 것을 아름답게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중고등학교 때 열심히 공부하셨죠. 다들 완료형 계속 해오신 거예요. 계속 해오신 거예요.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지고, 갓 메익스 에브리씽 뷰티풀 인 히즈 타임!!~~ 지금 이걸 믿고, 기다리는 자에게 그의 모든 것들을 아름답게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한국 교회만 똘똘 뭉치고, 정신 차리면 하나는 이 길을 새롭게 해 주시리라고 믿습니 정치 상황에서도 주님이 스승 되어 주시기를 바라고 상처 난 한국의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의사가 되어 주셔서 싸멤과 고쳐주심과 만져주시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또한 산불 피해를 입은 우리 모든 분들에게도 하나님이 만져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이 마음을 가지고 오늘 세례식 거행하고 우리가 마음을 더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말 다시 이 나라를 새롭게 하시고 이 나라를 치유해 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나 속좌함을 받은 후 3절 4절에 나속좌함을 받은 후 보혈의 공로로 나주의 은혜 이분이 늘 평안합니다. 오늘 이 말씀 그대로 믿고 의사의 축복 스승의 축복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찬양하고 세례식거행 가겠습니다.

요약
우리가 걸핏하면 과거의 습관으로 돌아가겠다 하던 우리에게 '그러나' 의 계기를 베푸시니,,,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끝까지 기다려야 한다. 주님께서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 치유하시는 ‘영적 스승이요, 영혼의 의사’가 되어 주실 때, 가정과 일터와 이 민족의 통곡할 만한 모든 아픔이 다 씻음 받게 됨을 확신하며, 우리 사랑의교회가 ‘제124기 제자훈련지도자세미나’를 전심으로 섬길 때, ‘온전한 제자훈련의 비전과 목회철학’을 통해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의 영적 지형도가 완전히 새로워지기를 소망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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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헌신 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5년 4월 5일)- 여의도순복음교회  
제목: "믿음보고(Faith Report)"

말씀: 민수기 13:30-33,14:6-8
찬양인도: 쉐키나, 제자,사역 훈련생 연합찬양대
데표기도: 박광호 집사님(남제자2반 총무)
말씀봉독: 선한 학생(고3 수험생부), 배운영 학생(다윗 중등부)
사회: 조성환 부목사님

오정현 담임목사(이원중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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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13:30-33, 14:6-8,

30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31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32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33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14:6-8,
6그 땅을 정탐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고.
7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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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조성환 부목사님
늘은 2025 세계고금주의연맹과 함께하는 대한민국 국가안전과 국민 대통합을 위한 기도회에 두 번째 시간이 함께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여의도 순복음교회 당회장이신 이영훈 목사님께서 오정현 담임 목사님을 먼저 소개하시고 이어서 오정현 담임 목사님께서 ‘믿음 보고(Faith Report)’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오늘의 인사 나누겠습니다.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이용훈 목사님(여의도 순복음 교회)
-우리가 지금 석 달 반째 그래서 국민 대통합과 국가 안정을 위한 기도회를 열고 있는데, 오늘 어제 탄핵 인용되고 난 후에, 온 국민의 관중이 집중된 가운데 우리가 산행 교육을 함께 은혜로 생각을 합니다. 오늘 주신 메시지를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주일마다 한마음으로 나아갈 길을 보여주실 줄로 믿습니다. 제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우리 오정현 목사님은 제가 미국 벤데스타 대학교 총장을 있을 때에 가장 큰 교회인 남가주 사랑의 교회를 섬기고 계시면서 귀한 성령사역을 전개하고 계셨고 그때 조용기 목사님을 모시고 3일 동안 큰 부흥회 열었던 기억을 합니다. 그리고 함께 돌아와서 옥한흠 목사님과 주용기 목사님의 강단 교류가 있었고, 그 후로 이 한 23년 지나서, 우리 사랑의 교회 오정현 목사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강남에서 가장 귀하게 성공적인 사역을 담당하고 계시고, 한국 기독교 대학의 산실은 평양에서 시작한 숭실대학교, 다시 해방 후에 연합교회로부터 출발해서 지금 종합적으로 우뚝 서 있는 숭실대학 이사장으로 섬기고 계신 오정현 목사님 나오실 때, 우리가 할렐루야! 로 맞이하면서 말씀하신 통해 큰 은혜 받는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목사님 모시겠습니다.
 
▶오정현 담임목사님 설교
할렐루야!!!~ 아, 정말 이 놀라운 국민 대통합 새벽기도회에 나올 수 있도록 환경 주시고, 믿음 주시고, 건강 주시고, 은혜를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오늘 여러분들 한 명도 그냥 돌아가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능력 받을 자 능력 받게 하시고, 치유 받을 자 치유 받게 하시고, 우리 간절한 기도가 준 앞에 놀랍게 응답 될 줄로 확신합니다.
 
저는 오늘 이영훈 목사님 지난 3월 15일 날, 우리 당장 목사님 저희 교회에 오셔서 말씀 귀한 말씀 전해주시고 여의도순복음교회 담임목사님 오셔 가지고, “장로교회 절대주권”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보답하러 품앗이하러 왔습니다. 감사드리고요. 하여튼 제가 제가 오늘 아침에 새벽에 오면서 보니, 수많은 버스들이 여러분들 미리 와 있고, 또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지나는데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 순복음교회 있는 것이 뜻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강남의 대법원, 대검찰청 앞에 저희 사랑의 교회가 있는 것이 또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탄핵 정국 이후 그 다음 날인데 오늘 또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저는 오늘 이 기도 때문에 우리나라 역사가 새로워지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는 인생을 보호합니다. 기도는 민족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오늘 목사님 말씀한 대로, 정말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 어떻게 일하실지, 우리가 기대하고 그 다음에, 저는 우리의 눈물의 기도가 흐르는 방향대로 이 민족의 역사의 방향이 흘러가리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믿음 보고’라는 제목으로 오늘 기도 제목 몇 가지를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 ‘믿음 보고(Faith Report)’라는 말은 페이스 리포트, 라고 그러는데 믿음 보고라는 말은 불신 보고가 있다는 뜻입니다. 믿음 없는 보고가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들이 봉독하신 민수기 13장 말씀을 여러분들이 잘 보시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들어가서 가데스 바네아에서 한 2년 동안 지나가지 가데스 바네아에서 야, 이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하나님 약속하신 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야 되는데, 정탐꾼을 좀 보내자 이렇게 해가지고 각 지파의 대표들을 열 지파, 또 관련된 열두 지파 대표들을 보내서 40일 동안, 그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왔습니다. 왔는데 와서 보고를 하는데, 열 정탐꾼이 뭐라고 보고하느냐 하면, 야 거기 가보니까 참 좋긴 좋더라. 좋기는 좋은데 뭐가 문제냐? 그 아낙 자손이 있고 보니까 우리는 저들이 보기에 메뚜기 같다. 우리는 저들이 보기에 우리는 이제 희망이 없다. 이렇게 보고를 하니까 사람들이 밤새우 통곡을 하고, 소위 불신보고예요.. 불신보고, 근데 갑자기 여호수아 갈렙이 나타나 가지고 아니 무슨 얘기를 하느냐고, 저들이 보기에 우리가 메뚜기 같은 것이 아니라, 저들이 우리의 밥이라고,,, 차이가 뭐냐면 이 열 정탐꾼은 환경과 그 환경과 그 다음에 자신을 비교한 거예요. 아낙 자순이 크고 또 여러 가지 보니까 자기들이 도저히 안 되겠다. 소위 메뚜기, 메뚜기 보고를 한 거예요. 그런데 세상에 여호수와 갈렙은 환경과 자신을 비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환경을 비교한 것이에요. 그러니까 저들이 우리의 밥이라고,,, 한 거예요. 저들이 우리의 밥이라고 오늘 이 새벽에 여러분 전 세계에 이런 나라가 있습니까? 새벽에 이렇게 모여 가지고 이 놀라운 찬양대를 하고, 오케스트라를 하고 또 우리 목사님하고 우리 팀 워크를 이루어 가지고 이렇게 같이 마음을 하는 이런 나라가 전 세계 쉽지가 않은 거예요.
 
여러분, 이런 우리의 이런 간절함이 주님 앞에 그대로 상달되게 하여 주셔서, 우리가 불신 보고가 아니라. ‘믿음 보고(Faith Report)’ 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 ‘불신 보고’를 왜 불신 보고를 하는가? 눈에 보이는 대로 하니까, 우리는 눈에 보이는 대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고 우리는 역사의 하선이 있고, 역사의 상선이 있는 거예요. 이 밑에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을 역사의 하선에서 이루어지는 이런 모든 일들을 보고 이게 이렇다. 세상이 이렇다. 나라가 이렇게 돼가는데 이게 아니에요. 우리는 역사의 상선을 보아야 되는 것이에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지금 이 사람들은 홍해를 건넌 사람들이에요. 어디를 건넌다고요. 홍해는 인간이 건널 수 없는 곳이에요. 홍해를 기적처럼 걷는 것이고., 그 다음 매일매일 아침에는 맛날을 먹고 있는 것이에요. 지금도 기적을 체험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아침에는 그 한낮에 신광장이 더우니 한참 올라가면 60도, 70도까지 올라가는 그런 계란을 던지면 그대로 프라이가 되는 그런 크게 사람을 견딜 수가 없어요. 그런데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그렇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렇고 차가운 날 밤에 냉기를 불기둥으로, 그 뜨거운 참 한여름에 그 열기를 하나님께서 다 지금도 막아주고 계시는 것이에요. 그런데도 저들이 보기에 우리는 메뚜기 같다고 불신보고를 하고 있는 것이에요.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 자리 이 순간까지 와 있는 것 자체가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이 있다고 믿는 것이에요. 주님의 은혜가 없으면 우리가 어떻게 이 자리에 오겠습니까? 주님이 은혜 안 주시면 어떻게 예배를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이 자리에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한민국 우리가 지나간 140여 년의 선교 역사를 보면 여러분, 수천 년 내려오는 민족 종교를 100년 만에 바꾼다는 우리밖에 없는 것이에요.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선교사님이 오셔 가지고, 근대 교육 근대 병원 하지 않았으면 이 나라 될 수가 없는 곳이 오늘 대한민국의 참된 근대 교육의 효실이나 기독교이고, 그다음에 이 나라는 그동안 고려나 조선의 이 그 상황 가운데서 얼마나 양반 쌍놈 해 가지고 정말 우리 민초들은 거의 뭐 거지처럼 살았잖아요. 참자유가 없는 나라였어요. 그런데 참자유의 가치를 성경을 통해 보여주신 것이 기독교인 것이에요.
 
그리고 우리는 우리끼리 붕당 정착 우리끼리 싸우고,,, 요 요 반도 안에서 우리끼리 복닥복닥 맨날 싸우고 이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나라 아닙니까 우리가 그런 나라가 그런 나라가 여러분 우리가 글로벌 스탠다드,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교회 이 여의도 순복음교회와 다 대한민국 교회 은혜를 베풀어 주셔 가지고, 성도 수 1인당 세계 선교 파송 1위 국가를 만들어주신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에요. 이만큼 지금도 우리를 홍해를 건너게 하신 거예요. 지금도 만나를 먹게 하신 것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앞으로 안 된다. 안 된다. 여러분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이 민족의 역사를 새롭게 열어 주시리라고 확신하는 것이 오늘 이 자리가 불신 보고의 자리가 아니라, 이 자리가 ‘믿음 보고(Faith Report)’의 자리가 되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아니 꼭 그렇게 돼야만 할 것입니다.
 
지난 몇 달 동안 여의도 순범 교회가 간절히 이 새벽에 기도한 기도가 준 앞에 그대로 상달될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믿음 보고 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두 가지 특징이 있는 것이에요. 오늘 이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역사하실 것입니다.
 
첫째는, 믿음 보고 하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하지 아니하고, 영적인 세계의 눈을 열어야 한다.
-믿음 보고 하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하지 아니하고, 영적인 세계의 눈을 열고 있기 때문에 믿음 보고를 하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우리가 이 세상 사람들의 어떤 전략이나 이런 것을 뛰어넘고 우리는 영적인 비대칭 전략을 하고 살아갈 수가 있어요. 이건 참 독특한 것이에요. 예를 들어 이런 것입니다.
 
골리앗이 나와 가지고 이스라엘 민족을 조롱하고, 못살게 굴었어요. 그럴 때 사울 왕은 똑같이 전쟁을 할려고 뭐 갑옷을 입고 똑같이 칼을 들고 나가려고 그랬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하여 다윗에게 갑옷을 입히니까 안 맞습니다. 칼도 안 맞습니다. 다윗이 뭘 들고 나갔죠? 물맷돌을 들고 그 골리앗이 칼을 들고 위협할 때, 물 멧돌 들고 나가는 것이 영적인 비대칭 전략이 되는 것이에요. 미디아니 13만 5천 명이 쳐들어왔을 때에, 그냥 하나님께서 뽑으신 기도원의 300용사, 예수님의 열두 제자, 적은 자가 천을 이루고,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 사람들이 300명이 말이죠.
300명:135000명
13만 5천 명을 꽹과리와 그다음에 횃불과 함께 항아리와 함께, 이거는 완전히 비대칭 전략인 것이에요. 무엇보다도 믿어 암몬과 마몬 군대가 들어왔을 때, 여호사밧이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이건 다른 길이 없다. 찬양대와 함께 나가야 할 것이다. 13대 수많은 대군들이 쳐들어왔을 때, 찬양대를 가지고 찬양하면서 나갈 수 있는 것이 영적인 비대칭 전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라가 어지러웠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새로운 영적 비대칭 전략을 가지고 나가면 할 것입니다.
한국 교인이 이럴수록 더 말씀에 전념하게 하여 주시옵시고, 이럴수록 더 강력한 찬양의 군대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영적인 비대칭 전략의 아주 극치가 뭐냐? 여러분 가나안 땅 입성에 이제 들어 갈려고 그럴 때에 이 사람들이 불신 불신해 가지고 불신해 가지고, 40일 동안 가나안 정탐한 걸 1년을 연수를 쳐서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스라엘 외국에서 성인으로 나온 사람들은 한 명도 못 들어갔습니다. 대신 여호수아와 갈렙과 함께 젊은이들 그다음에 꿈을 가진 사람들이 가나안을 더 갖고 들어가게 되는데, 첫 성이 여리고성, 어마어마한 첫 성이었어요. 그 여리고 성, 첫 성이 말이죠. 지금도 가면 마차가 몇 대 지나갈 만한 큰 견고한 성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매일매일, 매일매일, 공성전략을 한다든지, 뭐 밖에서 뭐 이렇게 화살을 쏜다든지, 돌을 던진다든지 이렇게 하지 않고,다. 영적인 비대칭, 매일매일 도는 것이에요. 하나님 밖에는 길이 없구나!~~ 주님 외에는 다른 길이 없구나!~
 
여호와여,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는 도와줄 자가 주님밖에 없는 줄로 믿습니다. 아, 길이 없구나 마지막 날 일곱 바퀴를 돌 때, 마지막에는 주님 밖에 없습니다!!~~~. 할렐루야!~~ 하루 동안에 그 견고한 성, 여리고 성이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나라를 살펴보십시오. 길이 없습니다. 주님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주님 밖에 없다고 우리가 같이 외칠 때, 대한민국 교회가 이제 똘똘 뭉쳐 가지고, 주님밖에 없다고 외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있는 견고(堅固)한 성을 무너지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의 비대칭 전략이고, 역사적으로 보면 아브라함 링컨이 남북전쟁을 할 때, 남북전쟁은 치열했습니다. 거의 미국이 거의 절단 나는 그런 상황인 것 같습니다. 북군이 더 이렇게 남군에 비해서 군사적인 전략이나 이런 여러 가지들이 다 약했습니다. 전쟁하는데 갑자기 아브라함 링컨이 기도실에 들어가버렸습니다. 아니 지금 전쟁하고 전략 짜여야 되는, 왜 기도실입니까? 그게 여러분,,, 영적인 비대칭 전략인 것입니다. 기도실에 나와 가지고 아브라함 링컨이 뭘 선포합니까? 노예 해방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노예 해방을 선포하게 되니까.
 
그 전쟁이 남군과 북군의 전쟁이 정의와 불의와의 전쟁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우리 뭐 다 힘이 없었어요. 부산 초량교회 모여 가지고 수많은 목사님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눈물로 기도하고, 그 마룻바닥을 눈물로 적실 때, 하나님이 일하신 것입니다. 주여, 이민족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시고, 우리가 영적인 비대칭 전력을 가지고 전력투구할 때, 하나님이 일하실 것을 확신 합니다. 그 다음 또 하나 여러분 우리가 믿음 보고 하는 사람들의 특징 중에 하나는 비대칭 전략일 뿐만 아니라 또 하나는 뭐냐면요. 이미 결정된 것 가지고 인생을 더 낭비하지 아니하고
 
두 번째는, 내가 더 잘 할 수 있는 것에 목숨을 거는 것이에요.
-다시요. 뭐 어떻게 하자냐고요? 이미 결정된 것 갖고 인생을 낭비하지 아니하고, 내가 더 잘 할 수 있는 것에 목숨을 거는 것이에요. 오늘 제가 보니까 여의도 순복기에 와서 이 새벽에 제가 감동 받는 것 중에 하나는 여기에 젊은이들이 너무 많아요. 오늘 젊은이들 여러분, 오늘 제가 말씀드린 이 말씀 잘 기억하면 여러분 평생 영적으로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말씀 잘 기억하고 기도하면 작년 세대도 여러분 끝이 아름다울 수가 있습니다. 피니싱 웰((Finishing Well)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이미 결정된 게 뭐예요? 내가 어떤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내가 어디 지역 출신이다. 내가 키가 얼마다 그 다음에 내가 뭐 내가 어느 학교를 나왔다. 이미 다 결정된 거예요. 저는 좀 어릴 때부터 키가 좀 큰 편이 돼 가지고 저는 좀 이렇게 꾸부정합니다. 키 적은 분들은 세웁니다. 이미 결정된 겁니다. 그래도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어느 학교를 나왔다. 내가 어떤 부모를 만났다. 내가 뭐 무슨 뭐 흙수저다. 뭐 내가 어떤 지역 출신이다. 내가 겉으로 어떻다. 여러분 얼굴도요 쌍꺼풀 수술까지는 봐주지만 그 다음에 손대지 마세요. 이미 이미 결정된 거예요. 이미 결정된 것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결정된 내가 어느 학교를 나올 때 이런 것 갖고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에요. 내가 더 잘 할 수 있는 것에 목숨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게 뭡니까? 주님도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더 말씀을 의지하여 우리가 집중할 수가 있습니다. 더 사명 자가 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 한국 교회에 우리 모두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개인적으로는 여러분 복 받으면 뭐 할 겁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의 근원이 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때문에 다른 사람이 복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복의 대상이 아니라 복의 근원이 돼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제사장 나라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에요. 대한민국은 우리끼리 잘 먹고 잘 살라고 하나님 법 주시는 거 아니에요. 하나님이 세계 모든 민족을 위하여 세계 선교를 마무리할 수 있도록 이 민족을 제사장 나라로 삼아주신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사장은 누굴 위해 삽니까? 제사장은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백성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을 그렇게 하나님이 삼아주신 것입니다.
 
대한민국 교회가 똘똘 뭉쳐서 여의도 순복음교회와 사랑의 교회나 모든 교회들이 똘똘 뭉쳐 가지고 제사장 사명을 감당할 때에 우리는 이미 결정된 걸 가지고 인생을 낭비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더 잘 할 수 있는 사명에 목숨을 걸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명이 목숨보다 중요하다. 살아서는 충성, 죽어서는 영광, 이 사명의 사람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김밥하고, 또 뭐 뭡니까? 미국 갔다 오셔서 김밥하고 또 뭐 떡볶이 없어서 못 먹어요.
미국에 지금 너무나 놀라운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에요. 이렇게 하신 이유가 우리끼리 잘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교회가 세계 교회를 위한 제사장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동안 우리는 패스트 팔로우(Fast Follow)였어요. 우리는 잘 남 잘하는 거 막 따라가는 거였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많은 경우, 자 여러분 보십시오. 전 세계 교회 가운데, 대한민국 교회처럼 여러분 교회가 발전하고 정치, 경제, 문화, 역사, 교회 사회 이런 모든 영역에 걸쳐서 이만큼 되면요. 어느 나라든지 신학적으로 리버럴 해집니다. 인간의 이성을 앞세우고, 철학을 앞세워 그렇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대한민국 교회는 대부분의 주류 교회가 신학적으로 보수입니다. 신학적으로 건강합니다. 신학적으로 정통입니다. 아, 이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몰라요.
 
그러니까 뭐 케이뷰티 뭐 케이팝 또 뭐 케이컬쳐 얘기하지만 앞으로 이 대한민국은 케이 신학이 있는 것이에요. 이 케이 신학을 가지고 전 세계 건강하고 정통적이고, 성경의 무오성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원자였음을 믿고, 교회 공 교회의 중요성을 믿고, 성령의 능력과 주권을 믿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 모든 일들을 우리가 주님이 주신 은혜인 줄 알고, 앞으로 이제 우리 여의도순복음 교회나 사랑의 교회는 한국과 힘을 합쳐 가지고 작년 10월 27일은 차별 금지법을 위하여 여의도 광화문 그다음에 저 서울역까지 110만 명이 모였는데, 이번 10월 27일은 여의도 순복음교회, 저희 교회에서 세계복음주의연맹(WEA-World Evangelical Alliance), 그러니까 월드 이벤저리컬 얼라이언스라고,,, wea 세계총회를 하게 되게 하신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에요. 그동안 우리는 따라가는 것이었던 것이었는데, 이제는 우리가 이끌어야만 하는 그런 사명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게 우리가 더 잘할 수 있는 것에 목숨을 걸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영적인 비대칭 전략을 가지고 승리 하십시다. 그리고 우리가 더 잘 할 수 있는 것에 목숨을 걸도록 하십시다. 마귀는 과거를 집중하지만, 성령은 미래를 조명하는 것입니다. 오늘 탄핵 어제 되고 난 다음에 오늘 첫날입니다. 여기 하나님의 큰 뜻이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지난 서너 달 동안 우리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난을 겪었습니다. 눈물로 애걸복걸(哀乞伏乞) 하고 기도했습니다. 우리의 이 고난은 어떻게 말하는지 전 세계 어느 나라에도 이런 기도의 제목이 없습니다.
 
우리가 뭘 너무 잘못하면 이런 것도 많이 있겠지만, 하나님은 우리나라를 이 고난의 민족을 다시 정비시켜 가지고 세계 복음의 역사를 위한 제사장 나라가 되기 위하여 주님이 우리 이렇게 고난을 주신 줄로 믿으셔야 되는 것이에요. 거룩한 고난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힘을 합쳐 가지고 저는 제가 보니까 이번 이 탄핵 정국을 통하여 대한민국이 다시 한번 우리는 끝까지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지켜야 할 것이다. 사회 전체주의는 안 된다. 우리는 이 끝까지 우리는 자유 정말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그 다음에 시장경제를 지켜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고마운 것은 20-30 세대가 깨어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민족을 지켜주셔야 하는 것이죠. 이 민족의 세계 제사장 나라가 되기 위한 여러분들이 지켜주셔야만 하는 것이 오늘 이 말씀을 근거로 해 나중에 사무엘의 은혜를 받아 가지고 일어나 백성들아 사무엘 31장 14절에 일어나 길갈로 가자
 
*사무엘하 11장 14절,
14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우리 모두가 다 믿음 보고함으로 말미암아, 여러분 대한민국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오늘 이 자리가 영적인 길갈이 되게 하여 주시옵시고,. 일어나 길갈로 가서 우리 다시 한번 자유의 나라, 생명의 나라, 창조의 나라, 거룩의 나라, 기적의 나라를 세울 수 있도록 은혜 위에 은혜(은상가은)를 덧입혀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존경하는 이영훈 목사님과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똘똘 뭉쳐 가지고, 세계복음주의연맹(WEA), 역사상 유례가 없는 하나님의 역사를 계속 이루어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은혜 위에 은혜를 덧입혀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요약
영광스러운 국민 대통합 새벽 기도를 하러 가신 주님을 찬양하며,.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눈물로 기도하는 대로, 이 민족의 방향이, 이 민족이 제사장 나라가 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을 말씀으로 살고, 성령으로 새롭게 하여, 우리가 모두가 다 기도로 일어나 길갈로 가서, 자유의 나라, 생명의 나라, 창조의 나라, 기적의 나라를 세워가야 한다. 2030 다음 세대들도 우리 믿음이 전수되게 하여서, 대한민국이 앞으로 전 세계 수많은 나라들 가운데, 그야말로 복음의 패스트 팔로우(Fast Follow) 정도가 아니라, 퍼스트 무버(First Mover)로서, 이제는 정말 한국 교회 주신 축복을 나눌 수 있는 축복의 근원이 되는 나라가 되기를 소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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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5년 3월 30일)
제목: "슬기로운 새판짜기"(Wise Spiritual Renewal)-이사야 시리즈 ⑨
말씀: 이사야 28.23~29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호산나 찬양대
대표기도: 권순환 장로님(2부)
사회: 문진호 부목사님(2부)
헌금찬양: 신상근(테너)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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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28.23~29,
23 너희는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자세히 내 말을 들으라.
24 파종하려고 가는 자가 어찌 쉬지 않고 갈기만 하겠느냐 자기 땅을 개간하며 고르게만 하겠느냐.
25 지면을 이미 평평히 하였으면 소회향을 뿌리며 대회향을 뿌리며 소맥을 줄줄이 심으며 대맥을 정한 곳에 심으며 귀리를 그 가에 심지 아니하겠느냐.
26 이는 그의 하나님이 그에게 적당한 방법을 보이사 가르치셨음이며.
27 소회향은 도리깨로 떨지 아니하며 대회향에는 수레 바퀴를 굴리지 아니하고 소회향은 작대기로 떨고 대회향은 막대기로 떨며.
28 곡식은 부수는가, 아니라 늘 떨기만 하지 아니하고 그것에 수레바퀴를 굴리고 그것을 말굽으로 밟게 할지라도 부수지는 아니하나니.
29 이도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난 것이라 그의 경영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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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늘 이 예배를 통하여 우리 온 성도들 수많은 삶에 짐을 지고 있고 또 상처도 있고 트라우마도 있지만 상처가 변하여 별이 되기를 바랍니다. 복음의 능력으로 오늘 모두가 다 삶의 패자부활전이 가능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이사야서 우리 아홉 번째 강해, ‘슬기로운 새판짜기’ 이런 제목입니다. 새판짜기란 말은 현재 판이 흔들려 있고 혼돈(混沌)스럽다 이런 뜻입니다. 인생이나 국가나 새판 짜기를 위하여 하나님은 한 번씩 우리를 흔드실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요, 한번 흔들어보면 아는 것입니다.
 
겉으로 멀쩡하게 다 괜찮아 보이지만 품위가 있고, 다 이렇게 신사처럼 보이지만 한번 흔들어보면, 여러분 그 물병에 침전물이 막 이렇게 돼 있는데, 물병에 침전(沈銓)물이 있다 하더라도 가만히 두면 물병이 위가 깨끗하게 보여요. 근데 한번 탁 흔들면 밑에서부터 올라오는데 콩나물 대가리 꽁치 찌꺼기 멸치 대가리 다 올라오는 거예요. 사람이 안 흔들어 보면 모르지만 한번 흔들어 보면 그가 어떤 인격인지 그의 삶이 어떤지가 다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에는 벼락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하나님이 흔들고 계시는 것입니다. 왜 흔드시는가 하나님은 우리나라를 벌 주시고 심판하기 위해서 흔드시는가? NO! 우리 성도들 기도를 통하여 이 흔드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이 대한민국을 향한 새판 짜기를 위하여 흔드는 것이라고 믿으셔야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게 잘 감당이 되면 다시 한번 대한민국은 거룩한 황금(黃金)기(期)를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흔드시는 이유는 온전한 사람 더 이렇게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빚어주시기 위하여 국가적으로도 더 온전한 나라를 위하여 만드시기 위하여, 어떻게 보면 그래서 오늘 주님이 우리를 흔드실 때, 우리가 잘 감당(堪當)하면 이게 우리의 삶의 골든타임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I. 온전함을 위한 흔드심.
 
-여러분 아브라함을 한번 보십시오. 제가 아브라함을 보면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마음이 좀 찡한 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흔드셨어요. 어떻게 흔드셨는가? 그리고 ‘너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라’ 그랬어요. 그냥 적당한 거 바치라. 그러면 뭐 흔들릴 거 있습니까? 그냥 바치면 되죠. 근데 정말 사랑하는 독자 이상을 바치라 그랬을 때, 아브라함은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에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그렇게 흔들지 않으셨다면 그는 결코 한계를 돌파(突破)하지 못했을 것이고. 믿음의 조상도 되지가 못했을 거예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을 흔들 그때가 온전한 믿음으로 새판짜기로 올라가는 시간이에요. 그래서 야고보는 우리가 실연당하고 흔들릴 때, 그 이유가 뭐냐 우리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야고보 1장 사진을 보니까 뭐라고 나왔냐, 시작
 
*야고보서 1:4,
4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아멘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고, 더 부족함이 없게, 우리 인생에 우리 국가의 완성도를 높이시기 위하여, 제가 이 말씀드리면, 어떤 분들은 목사님, 그래 나 믿음의 의사는 안 해도 좋으니까 나 흔들지 마세요. 그런 분이 계시다면 그런 분이 오늘 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반응도 안 하시고,,, 여러분 우리는 신앙의 참새가 아니고 신앙의 독수리가 돼야 합니다. 독수리가 되려면 하나님이 그 독수리답게, 독수리답게 키우시도록 하나님이 독수리를 한번 흔드는 거예요. 어릴 때부터 독수리 훈련을 하게 돼요. 독수리가 제대로 날 수 있도록 그 보금자리를 흔들어 던져버리고 던져버릴 때, 떨어지는 새끼를 나중에 업어 가지고 제대로 훈련을 하는 거예요. 제 얘기가 아니고, 신명기 32장에 보니까 나와 있어요. 크게 합독 하십시다.
 
*신명기 32:11,
11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엎는 것 같이. 아멘
-주님은 우리를 참새 신앙이 아니라, 독수리 신앙 만들기를 원하시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 우리를 한번 흔드시는 거예요. 이 나라도 하나님께서 흔드시는 거예요. 교회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박해(迫害)로 흔들어버렸어요. 그러면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교회는 소위 로컬리즘(Localism), 어떤 그 예루살렘이라는 그 지역주의 한계를 벗어나기가 힘들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흔들어버려 가지고 예루살렘 스테반의 핍박을 통하여 예루살렘 교회가 글로벌 교회로 온전히 성장하도록, 하나님이 예루살렘 교회도 흔드시고,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신 거예요.
 
그러니까 반드시 하나님의 교회나 무형교회나 유형교회는 우리들이 새롭게 되기 위해서는 온전케 되기 위서는 하나님이 흔드실 때가 있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이 배경을 가지고 오늘 본문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이사야 오늘 제가 아홉 번째 강의를 하는데, 이사야는 우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왕 시대를 거칩니다. 그런데 지금 오늘은 히스기야 왕 시대에 대한 내용인데, 특별히 남유다 왕국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警告)였습니다. 그리고 북쪽이 망하는데 북쪽 에브라함 북쪽이 다 망하는 걸 보면서 너희들이 에브라함을 빗대어 가지고 남쪽 유다 왕국을 경고(警告)하시는데, 특별히 어떻게 경고하시는가, 야 이 말씀대로 안 하면 너희는 화 있을 진저,,, 그래서 지난번에 27장까지는 소 묵시록이라고 그랬고 28장부터 35장까지 하나님의 폭풍 같은 경고와 심판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게 보니까 28장에도, 29장에도, 30장에도, 31장에도 33장에도 계속 ‘화 있을진저’,~ 예를 들어 28장 1절을 보니까,
 
*신명기 28:1,
1 교만한 면류관은 화 있을 진저.
-30장 일절을 보니까,
*신명기 30:1,
1 폐역한 자식들은 화 있을 진저,.
-하나님이 왜 이렇게 화 있을 진저, 라고 말씀하실까요? 우리가 온전케 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경고(警告)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28장을 보면 앞부분 보면 남 유다 왕국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고 경고하시는 거예요. 특별히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을 전하시는데, 선지자의 경고를 하게 하셨는데, 유다 왕국의 지도자들이라든지, 권력층 지도자들이 그 말씀을 드리려고 하지도 않고 백성들도 마찬가지예요. 오히려 이사야 선지자를 조롱하고 선지자가 전하는 말씀을 어린아이들의 옹알거리는 하찮은 잡소리로 들었어요. 자꾸 잔소리하고 같은 말 다시 반복한다. 그러면서 이사야 28장 9절 10절에 유다 왕국의 지도자들이나 백성들이 뭐라 하면 그들이 이르기를 그가 누구에게 지식을 가르치며 누구에게 도를 전하며 깨닫게 하려는가,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 은하에게 말하려는가, 하면서 교만해 있었어요. 한국이 지금 어떤 사람 복음을 잘하면 세상에 똑똑한 사람들 뭐 그런 얘기 다 하냐? 이런 식이에요.
 
그러면서 그들이 하는 얘기가 십절 대저 경계의 경계를 더하며, 경계의 경계를 더하며, 교훈의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하더라도 조롱하는 거예요. 경계의 경계를 더하고 교훈의 교훈을 더하고 교훈의 교훈을 더하고 그러니까 자꾸 같은 말 잡소리 하지 말라. 그러듯이 그만큼 교만해 있었어요. 그니까 하나님께서는 이걸 다 듣고 계시는 거예요. 그런 지도자 타락한 백성들의 조롱 소리를 하나님이 다 듣고 계신다는 거에요. 다 듣고 계셔 가지고, 그들이 조롱한 대로, 하나님의 귀에 들린 대로 똑같이 하나님이 경고하시고 호통을 치셨어요. 28장 9절 10절 그 다음에 13절에는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신명기 28:13,
13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경계의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의 교훈을 더하며 교훈의 교훈을 더하며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사 그들이 가다가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붙잡히게 하시리라.
-그랬습니다. 하나님도 알고 계신다. 정신 차리라고 하나님이 강력하게 도전하신 것이에요. 이런 뜻입니다. 여러분 소돔과 고모라가 망할 때에 롯의 그 사위들이 장인어른이 하는 그 말을 아주 우습게 여겼어요. 농담으로 여겼어요.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 한국 교회나 여러분 개인에게 주시는 말씀이 있어요. 이제 더 자세하게 하시는 말씀이 있을 거예요. 이 말씀을 우리가 세상의 어떤 그런 뭐 어린아이들이 하는 반복적인 말이 아니라, 주님의 강력한 말씀으로 드려야만 하는 것이에요. 왜 롯에 사위들이 농담으로 여겼는가 오만해져 가지고, 교만해져 가지고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시는 거예요. 이렇게 하나님은 28장에서 앞부분에서는 하나님께서 북풍한설(北風寒雪), 일진광풍(一陣狂風)의 회오리 같은 경고(警告)의 폭풍 언어를 선포 하시 사,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충격을 받아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런 상황이 되었을 때, 주님은 사람들을 경고하고 심판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고, 목자의 심정을 주님이시니까 다시 한번 이제는 폭풍의 언어 대신에 따뜻한 봄바람 같은 그런 미풍 같은 메시지를 가지고 깨닫게 해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폭풍 같은 경고를 넘어 따뜻한 목자의 심정의 메시지를 전하시는데 그 핵심이 뭔가, 오늘 본문에 보니까 농부의 지혜를 배우라. 는 것이 농부의 지혜를 배워가지고 새판 짜기를 하라 농부의 지혜를 배워라.
 
여러분, 이사야서에 그러니까 소위 이제 농부의 지혜와 농부 신학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오늘도 앞 얘기를 마치고 많은 분이 그러더라고요. 아!! 제가 이사야의 여러분 ‘토기장의 비유’ 이런 거는 우리가 잘 알아요. 그런데 농부가 있다는 말을 성경을 많이 읽었지만 오늘 이사이에 처음 보는 것 같다. 그런 얘기를 해요. 아마 이 말씀이 농부의 지혜와 농부의 신앙이 여러분 생애(生涯)에서 오늘 이것이 마지막이 될지 몰라요. 그러니까 이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확인되게 하여 주시옵시고, 이 말씀을 듣는 귀와 눈을 열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는 ‘슬기로운 모략으로 농부의 지혜’를 말씀하시는 그 내용들이 23절부터 29절까지 나와 있습니다.
 
II. 슬기로운 모략, 농부의 지혜(23-29절)
 
-오늘 본문에 이 말씀을 주신 이유는 새판짜기를 가지고 우리가 온전해져야 한다. 그런 뜻인데요. 먼저는 파종하는 농부의 지혜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23절부터 26절까지, 이 내용이 나와 있는데, 23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뭐라고 나와 있냐면,
 
*이사야 28:23,
23 너희는 귀를 기울여 네 목소리를 들어라 자세히 내 말을 들으라.
-그랬어요. 무슨 말인지 자세히 내 말을 들으라. 는 말은 잘 말을 잘 안 듣는다. 그거예요. 백성들이 말을 듣지 않는 거예요. 그리고 또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뭐냐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맞춤형으로 이 말씀을 주신다. 그런 뜻이 되어 있어요. 그리고 14절에 보니까,
 
*이사야 28:14,
14 이 백성을 다스리는 너희 오만한 자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그랬어요. 하나님 말씀을 거부하고 선지자를 조롱하는 미성숙한 자들이니까. 제발 이제는 이 농부의 지혜를 좀 배우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배우느냐 24절에 뭐라고 나와 있냐면,
 
*이사야 28:24,
24 파종하려고 가는 자가 어찌 쉬지 않고 갈기만 하겠느냐 자기 땅을 개간하며 고르게만 하겠느냐
-이 말씀의 뜻이 뭐냐면, 파종하고 씨를 뿌리는 자의 지혜를 배우는데 씨를 뿌리기 전에 여러분 개간(開墾)하고 땅을 고르고 그 다음에 땅을 갈고 그렇게 하지 않겠어요? 근데 땅을 고르고 그다음에 땅을 개간하고 땅을 가는 이유는, 씨를 뿌리기 위함이지 그것만 위하여 개간하고 고르고 땅을 가는 것 그것만을 위하여 계속 하지는 않는다. 이 말이에요. 그게 농부의 지혜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땅을 고르고 개간하고, 가는 이유가 무엇일까? 씨를 뿌리는데 씨를 뿌리는데 어떻게 뿌리는가, 25절을 보니까,
 
*이사야 28:25,
25 지면을 이미 평평히 하였으면 소회향을 뿌리며 대회향을 뿌리며 / 소맥(밀)을 줄줄이 심으며 / 대맥(보리)을 정한 곳에 심으며 / 귀리를 그 가에 심지 아니하겠느냐.
-이 소회향은 지금 허브예요. 허브고, 대회향 비슷한 파슬리 비슷한 것인데, 대회향은 신약의 근처라고 말할 수 있어요. 소회향과 대회향 그다음에 소맥을 줄 수 있어요. 소맥, 소주 맥주가 아닙니다. 소맥은 소맥은 밀이에요. 밀 소맥을 어떻게 심어요? 줄줄이 심으며, 그 다음에 대맥 보리는 정한 곳에 심으며, 귀리를 그 가에 심지 아니하겠느냐, 농부의 지혜가 뭐냐 하면 이 네 가지 소회향과 대회향은 그 그냥 뿌리면 되는 거예요. 평평한데 그냥 뿌리면 나는 거예요. 그런데 밀은 그렇게 하면 안 돼요. 밀은 줄줄이 줄줄이 심어야 돼요. 줄을 해가지고 심어야 되는 거예요. 맞습니까? 그다음에 대맥, 보리는 특정한 곳에다가, 거기에 보리를 심어야 되는 것이고, 그 다음 귀리는 가장자리 밖에다가, 귀리를 심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씨가 씨 뿌리는 것이에요. 그 씨의 종류에 따라서 다르게 해야지, 두 종류를 같이 뿌리고 이렇게 하지 않는 거예요. 그게 정한 곳에, 대맥 같은 경우 줄줄이 소맥 같은 경우 그다음에 평평한 곳에 소회향과 대회향을 뿌리고 귀리는 그 가장자리 밖에다가 가에다가 이렇게 그러니까, 이사야가 궁정 시인이었지만 왕궁 서기관이었지만 농사법에도 익숙한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26절에 보니까 놀라운 말씀을 선포하는데 이는 그의 하나님이 그에게 적당한 방법을 보이사 가르치셨다고 했어요.
 
*이사야 28:26,
26 이는 그의 하나님이 그에게 적당한 방법을 보이사 가르치셨음이며.
-사람마다 농사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적당하게 해주셨다는 것이에요. 그러니 신앙도 비슷한 거예요. 어떤 신앙은 어떤 신앙은 아무 데나 뿌려도 야성적인 그리스도인들, 웬만해도 뭐 폭풍 북풍 한설을 견디는 소나무와 같이 굳게 견디는 그런 신앙인들이 있어요. 그런데 어떤 신앙들은 거기 다 어떤 데 이렇게 이게 이게 뭐라 전투력이 좀 약해갖고 좀 이 연약한 성도들은요, 보호해 주셔야 되는 거예요. 소맥 같은 경우는 줄줄이 심으라고 그러시고, 그리고 이 줄을 재고 맞춰서 뿌려주고, 관심을 기울여줘야 되고, 뭐 관심 안 길어줘도 막 자라는 성도들이 있어요.
 
이렇게 이렇게 이제 씨앗을 지혜롭게 적당하게 잘 심는데, 그 심는 것이 목표가 아니고, 올바로 추수하고 올바른 알곡을 만드는 것이 목표가 돼요. ①첫 번째는 농사를 파종하는 지혜가 있고, 두 번째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냐, 농부에게 지혜를 배우는데 ②두 번째로는 추수하는 지혜가 있다는 것이에요. 그게 27절부터 29절까지 나와 있어요. 무슨 지혜라고요? 다시요. 무슨 지혜라고요? 추수하는 지혜, 씨앗의 종류에 따라 심는 방법이 다르듯이, 씨앗이 자랐을 때 추수하는 방법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소회향 대회향은 보십시오.
 
*이사야 28:27,
27 소회향은 도리깨로 떨지 아니하며 대회향에는 수레 바퀴를 굴리지 아니하고/ 소회향은 작대기로 떨고 대회향은 막대기로 떨며.
-젊은 분들은 도리깨가 뭔지 잘 모르더라고요. 옛날에 우리 할 때 도리깨 있잖아요. 도리깨 들깨 같은 거 털 때 근데 소회향은 아주 적은 씨고, 아주 적기 때문에 도리깨질로 하면 그냥 다 납작해서 없어져 버려요 그러니까 아주 도리깨질을 하지 아니하고, 또 대회향에는 수레바퀴를 가지고 막 굴리거나 이렇게 하지 않는 거예요. 소회향은 그냥 작대기로, 조그마한 작대기로,,, 탁탁 털고, 대회향은 또 막대기로 아주 가는 씨니까 탁탁 털면 되고, 그게 추수예요. 근데 이제 28절에는 뭐냐, 심각해지는 건데
 
*이사야 28:28,
28 곡식은 부수는가, 아니라 늘 떨기만 하지 아니하고 그것에 수레바퀴를 굴리고 그것을 말굽으로 밟게 할지라도 부수지는 아니하나니.
-또 아까 말한 대로 도리깨질을 하고 그것을 말굽으로 밟게 할지라도 부수지는 아니한다. 그런 뜻이에요. 자 밀이나 보리나 우리가 추수할 때에 수레바퀴를 굴리지 않아요. 곡식은 도리깨질과 수레바퀴를 굴려서 이렇게 부수지만 어느 상태까지만 부수고, 완전히 부수지는 않는 거예요. 밀보리는 도리깨질도 하고, 호두 같은 딱딱한 껍질이 있는 것들은 말발굽으로 이렇게 추수를 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소회향 같은 성격의 영적으로 좀 접목을 하면 소회향 같은 그런 성도들은 말발굽으로 고생을 안 시켜도 성질 머리대로 하나님 우리를 다루시는데, 그 소회향, 대회향 같은 적은 씨앗으로도 추수하는 그런 분들은 아까 막대기와 작대기로 다루신다고 그랬잖아요. 적당한 작대기 적당한 막대기만 탁탁 해도 경고를 받아 가지고, 고치는 거예요.
 
근데 성질이 좀 강해 가지고 호두 같은 이런 것들은 그냥 말발굽으로 추수를 하는 것이에요.. 그냥 또 뭐예요? 수레바퀴로 그냥 굴러야 되는 거예요. 어느 걸 선택하시겠어요. 어느 걸 선택하시겠어요? 어떤 성도들은 목사님들 성질이 좀 세고 고약해 가지고 하나님 나를 다루시는데 말발굽 떼거리로 나를 다루십니다. 말발굽 떼거리로 자기가 살아있고 좀 딱딱하고 고집이 센 교우들은 와장창창,,, 도리깨질이나, 수레바퀴를 굴려야 성숙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내가 소회향 교인인지 대회향 교인인지 내가 소맥인지, 대맥인지, 호두 교인인지, 귀리인지, 나는 어떤 종류의 교인인지 한번 생각 저는 다시 목회자로서 여러분들은 다시 작대기만 살살 대도 오늘 이런 말씀 드리면, 하나님이 여러분들과 개인에게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하나님이 경고하시는 것이 있어요.
 
말씀을 통하여 주님이 계속 집중적으로 경고하시는 게 있어요. 물질 문제라든지, 이성 문제라든지, 아니면 내 어떤 인격이라든지, 아니면 가정 문제 라든지, 이런 면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있어요. 작대기하고 막대기만 될 때 알아서 하세요. 그게 안 되면 말발굽이 나오는 겁니다. 그게 안되면 수레바퀴가 나오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얘기입니다.
 
그런데 고마운 것은 여기에 복음이 있는 거예요. 그 말발굽을 사용하고, 그다음에 수레바퀴를 사용하고 도리깨질을 하더라도, 그 곡식 자체를 완전히 보호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그걸 무너뜨리거나 그걸 어깨거나 없애버리는 것이 하나님 뜻이 아니에요. 그것은 뭐예요? 그걸 하나님께서 그 도리깨질, 곡식을 추수할 때 곡식알 자체를 결코 부수지는 않아요. 완전히 그냥 없애버리지 않으세요.
 
오늘 이 말씀의 배경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특별히 남 왕국 유다 왕국이 앗수르 라는, 어떤 돌이 깨질 앗수르 라는 막대기 아수르라는 말발굽을 가지고 그들을 훈련하시는 거예요. 그니까 하나님께서 없애는 것이 목표가 아니고 알곡이 제대로 보호해 가지고, 제대로 알곡으로 남는 것, 그것이 목표인 줄 믿으셔야 되시는 것이에요. 하나님 앞에 알곡으로 남기는 거, 말씀 가지고 우리가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이고,. 어떤 집사님이 그런 얘기 해요. 이 집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제가 우리 시어머니가 얼마나 센지 모릅니다. 그 시어머니가 정말 강하고 쎄시는데, 그 시어머니의 막대기와 시어머니의 짝대기 앞에서도 나는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변화되지 않았는데, 그냥 ‘내가 잘났습니다.’ 자식이라는 이 말발굽이 말이야. 자식이라는 수레바퀴와 말발굽으로 나를 밟으시니까, 내가 꼼짝없이 무너지고 변화되고 성숙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볼 때는요. 어머니들에게 최강의 말발굽은 자식들이에요. 최강의 수레바퀴도 자식들이고, 최강의 막대기도 말 안 듣는 자식들이에요. 이런 말발굽 자식들 때문에 엄마는 눈물로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이에요.
 
그 우리 주일학교에 보면요. 주일학교 학부모 기도가 있는데, 그 주일학교 말발굽 부모 기도회에요. 지금 다들 열심히 기도합니다. 열심히 열심히, 얼마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지혜로 하나님의 방법으로 농부의 지혜를 가지고, 우리를 부수되 완전히 부수지 않고, 알곡으로 남기시고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소회향 대회향, 허브, 근채, 이런 거 할 때는 씨가 작으니까,,, 하나님은 알아서 조금 하시지만 막대기 정도 사용하시지만 호두라든지 강하고 그다음에 딱딱한 이런 곡식들이 딱딱한 것 될 때는 하나님께서 강하게 강하게 맞닥뜨리시는 거예요. 그래서 방법은 우리 모두는 방법이 없어요.
 
대형교회도 대형교회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하나님께서는 대형교회가 역할을 제대로 하도록 하나님의 방법을 갖고 하는 거예요. 방법은 뭐냐 환경적인 어려움, 환경적인 말발굽, 환경적인 수레바퀴를 가지고 우리를 치시든지, 아니면 이런 말씀을 듣고 미리미리 경고를 받아 가지고, 알아서 자발적 권한을 감행하시든지, 둘 중에 하나예요. 그래서 우리 교회 같은 경우는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 환경적 어려움을 당하시겠어요. 아니면 자발적 고난을 하시겠어요? 두 개 다 안 할 거예요? 이런 성도들은 아까 말씀의 은혜가 뭔지 모르는 분이에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성숙시키기를 원하시는 거예요. 새 판짜기를 가지고 신앙의 새 차원으로 올라가기를 원하는 거예요. 거룩한 영적인 황금기에 갖고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기를 원하시는 것이에요.
 
그러면 예외 없이 환경적 권한 환경적 말발굽이 있을 수 있고, 아니면 이 말씀을 미리 깨달아 가지고, 주님 제가 자발적 권한을 감행하겠습니다. 자발적 권한이 뭡니까? 자발적으로 제자훈련 받는 거, 자발적 권한이에요? 일주일에 여러 시간 들을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훈련받는 거 아니에요? 자발적 권한이다. 이 말이에요. 그리고 특새할 때, 우리가 새벽에 일찍 나와 가지고, 자발적으로 했잖아요. 기도할 때, 마귀(魔鬼)를 향한 선제공격(先制攻擊)을 하는 거 아닙니까? 원래 원래 저기 뭡니까? 우리 특새, 이제 4월 20일부터 할 텐데, 그 특새는 뭐냐, 특새 제목이 뭐냐면 기도 불패, 자발적 권한을 위하여 영적 전투를 시작하는 거예요. 기도 그리고 기도가 답이다.
 
그랬는데 여기는 지금 그러니까 이게 영장이 선제공격이고 특새를 통하여 기도 대첩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판 짜기 하고, 알곡이 되려면 작대기로 맞든지, 아니면 수레바퀴와 말발굽과 이런 도리깨질을 당하든지, 그래야 되는데 이걸 환경 적으로 당하든지, 아니면 내가 자발적으로 하든지, 이렇게 하자면 우리는 성숙할 수가 없는 것이에요.
 
따라서 하나님은 때로는 작대기와 막대기로 떨기도 하시고 수레바퀴와 굴리면서 알곡을 만드시고 성숙하게 하신 새판짜기를 하게 하시는데, 어떤 방식을 사용하시든 간에 그 목적은 아모스 9장 9절, 아모스 시작,
 
*아모스 9:9,
9 보라 내가 명령하여 이스라엘 족속을 만국 중에서 체질하기를 체로 체질함 같이 하려니와 그 한 알갱이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거기서 만국 중에서 체질하기를 채로 체질함 같이 하려니와 농사의 지혜를 가지고 추수를 위하여 주님께서 어떤 사람은 도리깨질로 어떤 사람은 막대기로 어떤 사람은 수레바퀴로 어떤 사람은 말발굽으로 채질하겠는데, 그러나 방법은 뭐냐 목표는 뭐냐, 그 한 알갱이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그 목적은 한 알갱이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연단해 주시는 것이에요. 고난이나 역경이 성도들을 보호하시는데, 적극적인 하나님의 방식임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시는데, 이걸 깨닫는 것이 온전한 성숙으로 가는 길이에요.
사도 바울 같은 경우도 그 좋은 분에게 가시를 줘서 계속,,, 그러나 가시가 가시로 있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은혜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시는 거예요. 베드로 같은 경우는 부끄러움과 수치 그것조차도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성숙하기에는 온전한 도구로 사용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뭐라고 써놨느냐 보세요.
 
말발굽의 고난과 역경은 성도를 알곡으로 성숙시키고 지키는 보호막이 된다.
-이제 기가 막힌 거예요. 드디어 오늘 결론이라고 말할 수 있는 29절의 말씀, 보호막이 된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29절 크게 우리 합독 하겠습니다.
 
*이사야 28:29,
29 이도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난 것이라 그의 경영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니라.
-할렐루야!!~ 그의 경력은 뭐하며 기묘하며, 그의 지혜는 광대하니라. 이사야는 궁정 시인이었어요. 이사야의 워딩, 말하는 단어 하나하나가 너무 놀라요. 이 용어 자체가 이거 벌써 2700, 2800년 전 얘긴데, 너무나 놀라워 지금도 이런 단어 쓰기가 쉬울까요? 여러분 오늘 이 말씀 그대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작대기와 막대기와 하나님의 말 발굽과 하나님의 수레바퀴와 하나님의 이게 뭐예요? 도리깨질, 이것이 여러분들에게 기묘하고, 하나님의 지혜의 광대함을 여러분들의 생애 속에서 체험하기를 원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온전하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자주자주 얘기하는 거예요. 뭡니까? 2천년 교회 역사에는 어떤 경우에도 반드시 답이 있다는 것이에요. 반드시 답이 있다. 여기 공직에 계시는 분들 여러분들 한번 생각해 보시라고,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의 경영은 뭐라고 그랬어요. 예 기묘하고 하나님의 지혜는 뭐예요? 광대하다 우리가 갖고 있는 제한된 것 같고,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경영을 함부로 평가하면 안 되는 것이에요.
 
자 이번에 이 탄핵 정국 한번 보세요. 여러분 제가 국가를 이끌어간 중요한 위치에 계신 분들하고 대화를 해보면 요즘 말이죠. 목사님 답이 없습니다. 답이 없습니다. 그럼 어떡하실 거예요? 기도하는 것 외에는 답이 없습니다. 나는 거기에 하나님의 경영의 뭐에 기묘함과 거기에 하나님의 지혜의 뭐에 광대함에 들어갔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어떤 성도들은요, 저 헌법재판소 앞에 가 갖고 밤새워서 기도를 해요. 움막을 치고 밤새워서 기도를 하는 거예요.
 
그 기도를 못하는데 어제 내가 누구를 만났는데 자기는 어릴 때 별명이 공주였대요. 공주 다 해주고 집에 공주야 공주인데 밤새워서 한 달 동안 계속 가서 밤새워서 기도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때요 그러니까 목사님 제가요 공주가 노숙자가 되었습니다. 이 어려운 정국 가운데서 기도에 무릎을 꿇고 밤새워서 기도해 가지고 공주가 노숙자가 되었다. 하나님의 지혜는 뭐하고 광대하시도다. 국가만 그렇겠습니까? 하나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형 교회는 알아서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경영에 하나님의 지혜의 광대함을 믿고, 하나님이 주신 그래서 우리에게 예를 들어서 많은 일을 맡긴다 그랬을 때 그것은 무슨 뜻이에요. 그 공동체가 살아있고 그 공동체가 뭐예요?
 
사명이 있고 그 공동체가 감당해야 할 영적인 비전이 있으니까 하나님이 맡기시는 것이에요. 아무쪼록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의 알곡 작전이 성공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주님의 경영과 주님의 지혜는 너무나도 기이하고 놀랍다는 사실을 믿으셔야 되시는 것이에요. 우리가 갖고 있는 요 제안 가지고 아까 이스라엘의 지도자, 하나님의 말씀을 경계에 경계를 다하고, 교훈을 다한다고 함부로 폄하하고 그러지 말고 하나님의 지혜는 광대하시고, 하나님의 경영은 기묘하시도다. 결론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 있어요. 오늘 12절에 뭐라고 나오느냐 이렇게 나와 있어요.
 
*이사야 28:12,
12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의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의 상쾌함이니라.
-너무 놀라운 말씀이에요. 안식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주님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특권이에요. 상쾌함은 그리스도 내 삶에 우리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우리는 오늘도 예배를 통하여 주님 안에서 안식을 얻어야만 하는 것이에요. 이 예배를 통하여 줄이고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삶의 상쾌함을 가져야만 하는 것이에요. 리프레시(Refresh) 해야 되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뜻은 우리 안식이요. 상쾌함이고 하나님의 지혜는 뭐예요? 무궁하고 그의 경영은 무궁하고 하나님의 지혜는 광대하시도다 예수님께서 신약의 창으로 해석을 할 때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마태복음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그 다음에 그리하면 너의 마음이 뭘 얻는다고요? 쉼을 얻으리니... 오늘 이 말씀을 배우고 이 말씀을 적용하고, 이 말씀을 묵상하고, 이 말씀을 암송할 때에 우리의 마음이 쉼을 얻는데, 두 가지를 주는 거예요. 하나는 안식이고 하나는 상쾌함이에요. 그 안식과 상쾌함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찬송가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아주시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아주시옵소서 내 힘과 결심 약하여 늘 깨어지기 쉽지만 주님 나 알곡으로 만드셔 가지고 그 크신 역사 이루게 날 받아주시옵소서 아멘 다시 한번 그 크신 역사에 이루게 날 받아 주소서. 내 모습 이대로 날 받아주소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영적 가족 영 가족 여러분 은혜를 받되, 은혜도 후유증이 없어야 합니다. 끝까지 은혜가 유지가 되어야 하는 것이에요. 인간의 지혜는 한때는 반짝하는 것 같지만 후유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이 농사의 지혜는 요대로, 우리가 하면 이 민족을 후유증 없는 은혜로 하나님이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주님이 지금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음성이 있습니다. 경고를 주십니다. 그럴 때 작대기 막대기로 끝내야지, 수레바퀴 말발굽으로 끝내지 말고, 아니면 자발적 고난을 통하여 주님을 온전히 닮아가는 신실한 제자로 한 분, 한 분 맞춤형 은혜를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요약
주님이 우리를 흔드실 때에 온전함을 위한 새판짜기임을 믿고, 자기 독자를 바치게 하기 위해 아브라함의 믿음을 흔드셔서 믿음의 조상 되게 하신 것처럼, 예루살렘 교회를 흔드셔서 지역주의를 탈피하여 글로벌 교회 되게 하신 것처럼, 막대기와 도리깨질과 말발굽과 수레바퀴로 이 나라와 우리를 흔드실 때에, 오히려 대한민국의 황금기를 예비하고 계신 줄 믿고 기도하게 하여야 한다. 우리 개인과 가정과 일터와 한국 교회와 대한민국에 다시 한번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하나님의 놀라운 경영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온 한국 교회가 새로운 차원으로 올라가기를 간구하며, 개인적으로는 안식과 상쾌함에 무한 지평이 활짝 열리기를 기도하자. 우리의 가정과 일터와 교회와 나라에 거룩한 황금기를 예비하실 것을 확신하며, 우리는 주님 앞에 납작 엎드려 거룩하고 슬기로운 새판짜기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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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5년 3월 26일)
제목: "내면의 두려움에 귀를 기울이는 삶"
말씀: 마가복음 4:35-41
찬양인도: 쉐키나(장단희 부목사님)

설교자: 김승진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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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4:35-41,
35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
36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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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오늘 말씀 제목을 처음 정했던 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가장 쓸데없는 일’이었습니다. 좀 센 것 같아서 바꿨는데요. 우리 성도님들은 시간을 낭비하는 가장 쓸데없는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얼마 전 제가 책 선물을 받았는데요. 책 제목이 이랬습니다.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 제목부터 제 수준에 딱 맞는 책이었는데요. 무슨 관계인지 모르겠더라구요. 내용은 이랬습니다. 거친 들판에 외로운 소년이 두더지와 여우와 말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내용이었습니다. 내용 중에 아주 인상적인 부분이 있었습니다. 소년이 두더지에게 묻습니다. ‘너는 시간을 낭비하는 가장 쓸데없는 일’이 뭐라고 생각하니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아까 제 질문에 성도님들은 어떻게 대답을 하셨습니까? 두더지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일’이야 두더지가 제법입니다. 아 누군가 이런 글을 썼더라고요. ‘사람에게 가장 쓸데없는 시간은 쇼핑하는 시간이다.’ 저는 살짝 동의가 되지 않았습니다. 필요한 물건 사는 데 왜 그러지?, 궁금하여 그 이유를 더 들어 더 들어 보았습니다.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쇼핑을 나가면 풍족이나 만족이 아닌 결핍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살 수 없는 수많은 상품이 먼저 나를 유혹하고, 그 유혹(誘惑)에 응하지 않으면 지나가는 내 뒤통수에다 대고 결핍(缺乏)을 새긴다고 합니다. 저는 부친께서 목회자(牧會者)였어서요 어릴 적에 그렇게 풍족(豐足)한 편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나이키 신발을 못 신었어요. 당시에 프로스펙스가 있으면 스펙스를 신어야 했고. 아식스 비슷했던 아수스인가 나이스 이런 것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이키 매장 앞을 지나면 애써 피하려고 했습니다. 자꾸 저에게 말을 걸어오는데 너 나이키 없잖아. 하나 사야지 이런 것 하나 사 살 수 없어. 그냥 지나치면 어휴 너는 나이키 하나 못 사는 인생이니? 어디선가 들려오는 이 내면의 소리가 비교하게 되고, 나를 좀 초라하게 만드는 것 같았습니다. 쇼핑을 가면 지금 신고 있는 내 신발이 좀 초라해집니다. 만족하며 신었던 신발이었는데,. 운동회 때 신고 달려서 1등 했던 신발이었는데, 하지만 더 좋은 것 앞에서는 초라(綃羅)해집니다. 가지지 못할 때 우리는 결핍이라는 것이 남아버리고 맙니다. 우리 삶에 가장 쓸데없는 비교(比較)질에 나도 모르게 내면의 결핍이 생겨버린 겁니다. 결핍은 내면의 자리를 틀고 앉아 여러 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이 소리에 이끌려 살아가게 됩니다.

책을 좀 더 읽어 나갔는데요. 이런 글이 이어 나왔어요. 나는 ‘내면의 두려움에 더 많이 귀를 기울였다’는 것에 후회를 해 내면의 소리는 언제부턴가 두려움을 가득 담아서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그렇게 인생의 시간을 쓸데없이 낭비하게 합니다. 청년들 중에 이런 얘기를 합니다. ‘목사님, 저는 비혼자야 비혼주의자니까 제게 결혼하라.’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저는 결혼 안 할 겁니다. 저는 분명히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 청년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근데 하나 알 것 같습니다.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있나? 그런 마음에 불렀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그래 너는 결혼하지 마, 절대 결혼하지 마, 너 결혼하나 못 하나 내가 지켜볼 거야. 엄청 섭섭해합니다. 다시 묻습니다. 왜 결혼 안 하겠다고 한 거야. 흔한 세 가지 대답이 있어요. 하나는 혼자 사는 게 편해요. 또 하나는 우리 교회 형제들은 다 별로인 것 같아요. 딴 교회 청년이라고 하겠습니다. 결혼해서 행복한 사람 못 봤어요. 이 대답에 아주 역설적(逆說的)인 것들이 드러나고 있는데요.

이렇게 말하는 경우 제가 경험한 바로는 대개 살아온 가정을 표현하는 것 이기도합니다. 일반적으로 아버지의 폭력 외도 또는 무능(無能)이 많은 이유였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라는 남자가 집에 있으면 술과 폭력이 따라오거나 아버지의 무능으로 인해 어머니의 가혹(苛酷)한 일상이 가정에 자리 잡아 버렸습니다. 그렇게 30년을 아버지라는 남자에게 고통(苦痛)을 받았으니 나의 남은 인생도 남편이라는 남자에게 고통을 받을 것 같아 차라리 혼자 살아가야겠다. 얘기합니다. 좋은 남편 아버지에 대한 모습을 보지 못했으니 남자에 대한 왜곡(歪曲)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한 형제를 만나게 되더라도 아버지의 모습 남자의 모습 못난 모습들이 나오기 시작하면 이내 교회 형제들은 별로야. 라는 말을 내뱉게 됩니다. 그리고 결론도 내립니다. 결혼해서 행복해질 자신이 없네. 내면의 두려움이 인생을 지배해 버린 모습입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트라우마라는 단어가 우리가 이제 심심치 않게 일상에서 듣는 용어가 돼버렸습니다. 이 트라우마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헬라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외상(外傷), 상처(傷處)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이라는 엄청난 전쟁 상황에서 그 상황을 겪고 난 사람들이 그들에게 남겨진 것들이 무엇인가 보았더니, 총알 자국과 칼에 베인 상처보다 전쟁으로 인해 남게 된 두려움의 상처가 더 크다는 것을 심리학에서 자주 사용하면서 나오게 된 말입니다.

청년들에게 아버지의 폭력이 외상으로 남아있는 줄 알았는데, 내면의 두려움으로 깊게 잡아 버린 것입니다. 이 내면의 두려움 누구나 벗어야 한다는 건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벗어나려 해도 번번이 실패를 해왔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괜찮다고 했는데, 하지만 예수님으로도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이 그렇습니다.

큰 광풍(狂風)이 불어오고 있습니다. 미칠 광(狂) 자를 쓰고 있습니다. 심각한 상황을 묘사(描寫)하기 위해 오늘 말씀해 보면 다른 배들도 같이 떠 있다고 하는데요. 왜 이런 말씀을 묘사했을까? 했을 때 어떤 신학자는 다른 배들은 다 침몰(沈沒)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심각한 광풍이 불어오고 있었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배를 가지고 갈릴리 바다를 누비던 뱃사람들이었습니다.

I. 제자들은 경험(죽음)이 들려주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 풍랑이 심각하다. 라고 할 때는 그 정도에 대해서 이 사람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심각한 광풍을 이겨내는 방법을 잘 압니다. 하지만 이길 수 없는 광풍(狂風)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부산에서 자랐습니다. 벌써 말투에 나와 있죠. 그죠. 바다를 놀이터 삼아 살았는데요. 놀았는데요. 모닥불 피워놓고 모닥불에 홍합도 구워 먹고, 실낚시로 잡은 잡어들을 굽고, 저는 달리기 시합보다 바다에서 수영 시합을 더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다의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을 잘 압니다. 반면에 저는 바다의 무서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태풍(颱風)이 심하게 몰아치던 밤이 지나고 나면 동네 간판이 떨어지고 도로 표지(標紙)판은 다 휘어있습니다. 바닷가 구경 나간 건너 옆집의 누군가가 파도(波濤)에 휩쓸려 죽었다는 소식을 저는 자주 들었습니다. 그래서 바다가 가진 죽음의 얼굴을 잘 알고 있습니다. 경험(經驗)이 반복(反復)되면 확신(確信)이 됩니다. 제자들은 뱃사람으로서 많은 바다의 일들을 경험했습니다.

죽음을 직감하고 있습니다. 이 바람은 지나갈 바람이 아니야,. 내가 경험해 봐서 아는데 이제 우리는 끝이야 구체적인 죽음의 소리가 내면에서 내 입 밖으로 툭 튀어나옵니다. 예수님도 안 되실 것 같다. 이런 넋두리 같은 소리를 우리는 기도라고 생각을 합니다. 내 경험 안에서 충분히 제한(制限)하고 재단(裁斷)한 후에 간구하는 것들을 기도라고 생각을 합니다. 아주 이성적인 것을 기도라고 생각을 합니다. 될 만한 것을 기도해야지, 내 경험상 예수님도 하실 수 없어. 이게 기도해서 될 일이야, 이건 기도할 때가 아니야. 제자들의 이런 마음에 예수님을 찾습니다. 우리 38절 말씀인데요. 같이 한번 봉독해 볼까요? 시작,,

*마가복음 4:38,
38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이거는 예수를 나무라는 어조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위기(危機) 상황인데 예수님 무엇 하고 계십니까? 여기서 예수님을 선생님이라 부르는 것도 아주 인상적입니다. ‘선생님, 지금 주무시다니요.’ 이 버릇없어 보이는 제자들의 모습에 왠지 우리는 공감이 됩니다. 우리 또한 기도하며 경험했던 예수님의 침묵이 답답했습니다. 주무시는 듯한 부제가 제자들처럼 우리에게 야속하기도 했습니다.

II. 제자들은 내면의 무지에 귀를 기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당장 묻게 됩니다. 예수님 왜 주무시고 계신 것인가요? 너무 피곤해서 노을이니깐 편안해서 주무시는 겁니까? 고물에서 비를 피하고 베개를 베고 있으니 예수님은 괜찮으셔서 주무셨던 것입니까? 멀미를 못 이겨 주무신 것은 아니십니까? 어쨌든 위기(危機)에 때에, 예수님은 우리들의 안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생각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냥 딴 배를 타고 계신 것 같습니다.

어려운 이를 만나 기도의 자리로 나가는 성도님을 뵌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 제가 기도 외에 답이 없어서 답답해서 새벽에 기도하러 나왔어요.” 너무 잘하셨어요. 너무 잘하셨어요. 늦은 시간에 또 그 성도님을 뵈었습니다. “목사님 지금 응답이 늦어지고 있지만 오늘 저녁에도 기도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참 잘하고 계십니다. 기도하셔야죠. 또 기도하러 오셔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성도님, 어떻게 되셨어요. 잘 해결되셨어요. 아니요. 아무리 기도해도 상황은 더 나빠지고 있어요. 예수님의 침묵이 계속될 때, 주무시듯 침묵하실 때, 목사인 제게도 당장의 원망이 찾아옵니다. 예수님 응답해 주셔야지요. 예수님 일어나셔야지요. 저렇게 간절하게 기도하는데 죽음의 눈금에 닿아 사랑을 다하고 있는데, 예수님 도대체 어디에 계신 겁니까? 이렇게 침묵이 계속되면 우리는 이 침묵을 부재(不在)라고 여기게 됩니다. 안 계시거나 계셔도 안 계신 것과 마찬가지인 것으로 우리는 판단(判斷)해 버립니다.

어느 그 글을 쓰던 작가는 얼마나 이 부제가 싫었으면 이런 표현을 다 썼습니다. ‘혀 짤린 하나님’이라고,,, 말을 안 하시니,,, 침묵이 길어지고 예수님의 부재가 경험되어질수록 우리는 우리의 해결 방법을 찾기 위해 백방(百方)으로 뛰기 시작을 합니다. 뱃사람들은 잃었던 제자들은 노를 부여잡고 버티고 차 들어오는 물을 정신없이 퍼내며 물건을 던지기도 하고, 어떻게든 배를 살려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닥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문가를 찾아서 듣습니다. 인터넷을 찾아서 듣습니다. ai든, 블로그든, 유튜버든 살기 위해 들려오는 소리는 다 들어댑니다. 듣다가, 듣다가 우리는 내면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너 이제 어떻게 할래 너 끝난 것 같은데’, 내면이 들려주는 소리 앞에, 미친 광풍 같은 그 소리 앞에, 우리가 듣는 소리는 죽음의 소리로 귀결(歸結)돼 버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침묵(沈默)이 정말 부재일까요? 예수님이 주무시고 계시면 부재하신 것일까요?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께서는 오히려 예수님께서 ‘침묵에 동행을 하고 계신다’. 라고 이 부분을 해석해 냅니다. 또 다른 분은요, 예수님의 침묵을 ‘하나님을 만나는 가장 깊은 임재’ 라고 고백을 합니다.

본회퍼 목사님은요, 침묵을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침묵을 부재라 하지 않고, 또 다르게 이야기하는 이들은 임재(臨在)와 동행(同行)과 존재(存在)로 경험(經驗)하고 있습니다.

성도님이 또 찾아오셨습니다. ‘목사님,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럴 수가 없죠. 그리고 밤새 허공에다 대고 하나님 당신은 없어요. 하나님 당신이 있다면 내 삶이 이럴 수는 없죠.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내가 이렇게 살아갈 수는 없죠.’ 소리쳤다고 합니다. 근데 이 성도님은 누구보다 하나님 계신 것을 믿고 계신 분이십니다.

내가 아무리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지우려 해도 나는 이미 그분이 살아계신 것을 알기에 그분을 향해 외치고 있었고, 우리의 존재가 지워지는 것은 가능할지라도 하나님의 존재는 여전히, 영원히 그대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시끄러운 소리, 우리의 시끄러운 행동이 지나가고 나면 침묵하시며 동행하시던 우리 주님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을 합니다. 39절 말씀입니다. 우리 다 같이 한번 봉독해 보겠습니다.

*마가복음 4:39,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다가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 지더라.
-큰 난리를 부리던 바다가 잠잠(潛潛)해졌습니다. 이 부분을 좀 다르게 해석하는 경험과 과학적인 입장을 가지고 해석하는 신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광풍이 일었지만 광풍이 예수님을 말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갑자기 잦아들었을 뿐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갑자기 잦아든 이 광풍에 자신의 교훈을 담아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III. 제자들이 예수님의 존재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갑자기 오는 광풍이 있어 그런데 갑자기 먹기도 해 우리 인생이 그런 거야. 이렇게 그냥 해석해 버리고 맙니다. 아마 이 신학자에게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 응답이 무엇입니까? 제가 묻는다면 아마 이 신학자는 이렇게 대답을할 것 같습니다. 기도해서 응답받는 게 아닙니다. 우연히 시간이 되면 응답받는 겁니다.

그냥 그렇게 우리 인생은 이루어지는 겁니다. 신학을 하고 계신 분이신데, 이분에게 예수님은 고물에서 주무시는 그냥 선생일 뿐인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오늘 우리가 만난 예수님이 선생님이십니까? 시끄럽던 제자들의 소리가 그치고 침묵하시던 그 존재,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꾸짖으며 말씀하십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예수님이 꾸짖는 대상은 마가복음에서는 귀신 사탄 어둠의 역 말고는 없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폭풍우의 파괴적인 힘도 악령의 힘이라. 그 악령이 자연의 힘에 작용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성경에서도 바다는 태고의 혼돈(混沌)을 상징하며 의인의 시련과 환난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사회적 통념이나 성경이 말하는 모든 개념에서 당시 바다는 죽음과 사망의 권세가 맞습니다. 이 죽음과 사망의 권세인 바다를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셨습니다. 시편 89편 10절 말씀인데요. 우리 같이 함께 봉독해 보겠습니다.

*시편 89편 10절,
10 주께서 라합을 죽인 당한 자 같이 깨트리시고 주의 원수를 주의 능력의 발로 흩으셨나이다.
-라합(바다괴물, 원수)이라는 이상한 것이 등장을 합니다. 성경을 보니 ‘바다괴물, 이며 원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 팔과 손으로 흉흉한 바다 곧 소용돌이치는 바다를 다스리시고 일어나는 바다를 잔잔케 하시며, 바다 괴물 라합을 깨트려 부수신다고 시편 기자는 지금 노래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바다를 잔잔케 하시는 분이셨으며, 바다를 다스리시는 분은 하나님뿐이셨습니다. 이제 신약에서는요 바다를 지배하고 있는 악한 사탄을 예수님께서 오셔서 무력(無力)하게 하고 있습니다. 결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바로 이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잠잠하라. 고요하라.” 그래서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큰 두려움에 두려워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들이 두려워했다는 바다를 보던 두려움과는 다른 두려움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그에게서 나오는 초 자연적이시고, 내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다른 그분의 놀라움을 보며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경험이 찾아왔습니다. 지식이 찾아왔습니다. 이건 또 다른 두려움이었습니다. 이 두려움 아주 닮은 두려움이 있습니다. 모세가 떨기나무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을 뵈었을 때, 그분 앞에서 경험했던 두려움입니다. 어느 신학자는 ‘잠잠하라 고요하라’ 이 말씀과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 말씀하시던 그 하나님이 나를 드러내시던 그 장면이 같은 말이라고 설명을 하는 이도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경험하게 되는 두려움 그 거룩함 앞에서 찾아오는 두려움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나의 내면과 나의 내면에 꽉 차 있는 두려움과 그 내면을 마주하고 계시는 그 하나님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 성경 말씀 하나 더 볼까요? 이사야 이 말씀은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이사야 57장 20절 말씀해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오는데요.

*이사야 57장 20절,
20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구쳐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우리 안에 더러워져 있는 악으로 가득 차 있는 우리의 마음의 모양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모양이 묘사되어져 있는 것을 진흙과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수구 진흙 물을 휘젓기 시작하면 각종 오물이 올라오는 것처럼, 내 안에 더러운 것들이 요동하는 바다처럼 솟구치고, 미친 바람이 불어 죽일 듯 몰아치고 있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마음을 피하고 싶습니다. 두려움에 적당히 사로잡히고 싶고, 적당히 염려하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래서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결혼을 못 하겠다. 라고 참 어려워하며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청년, 내면의 그 경험 속에서 나를 멸망시키고 파괴(破壞)하고 나를 주인 삼아서 사망(死亡)의 바다처럼 삼켜버리고 있는 이 청년과 같은 수많은 청년들은 말할 수 없는 깊은 상처와 아픔과 절망(絶望)의 문제를 그 속에 깊이 담아두고 감히 꺼내지도 못하고 어떻게 다루지도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강단에서 제가 지금 도저히 말할 수 없는 너무나 큰 아픔과 큰 문제를 가지고 와서 이야기하는 청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제가 그 얘기를 꺼내서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오늘 이 시간에 이 자리에 나와 계시는 성도님, 마음에 숨겨둔 너무나 아프고 너무나 두렵고 꺼낼 수가 없는 이야기가 있지 않으십니까? 그거 그렇게 외면하고 감추어두고 그거 피하면서 살아가려고 하십니까? 때마다 시마다 이것이 내가 이야기를 하고 내게 말을 하며, 나를 두려움과 염려로 사로잡아 가며 내 인생을 좀 먹듯 무너지게 하고 있는데, 사망의 더러운 것들로 죽음의 일들로 나를 이끌어 가게 하고 있는데, 이것을 그냥 두려워하고 계십니까? 죄와 사망의 권세가 온전히 승리한 것처럼 우리를 지배한 것처럼, 그렇게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을 그냥 보고 살아 가시려고 하고 계십니까?

내가 한번 이겨 내려고 하면 삼키고 괜찮아지려면, 다시 꺼내어 옥죄오는 지독한 사망의 권세가 우리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을 때, 내면의 두려움은 폭풍 속에서 보았던 예수님의 모습을 십자가에서도 동일하게 보게 합니다. 높이 들려 졌던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며, 마치 폭풍우에 잠든 예수님처럼 우리는 나약한 예수님을 보듯, 그는 그리스도일 리가 없다. 라고 말을 합니다. 목수가 나무에 달려 버렸습니다. 죽음과 저주와 심판과 죄의 상징인 나무에 달렸습니다.

손도 발도 목에 박혀 못에 박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창이 옆구리가 이제 다 터져 박혀 말도 제대로 못하는 나약한 한 사내로 우리는 여전히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침묵할 수밖에 없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겨우 숨만 턱턱 내쉬는 예수님은 내 삶을 도울 수도 없고, 나를 구원할 수 없다. 라고 우리는 끊임없이 여겨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십자가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상식적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타당합니다. 논리적입니다. 그런데 다시 묻고 싶습니다. 이 십자가가 지금 어디에 서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어디에 있습니까? 갈보리 언덕 위에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보고 계시는 십자가는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어디에 있습니까? 저 멀리 있습니까? 누군가에게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서 있는 곳은 우리의 두려움이 서 있는 곳입니다. 우리의 죄(罪)가 서 있는 곳입니다. 우리의 숨겨왔던 삶의 모양이 서 있는 곳입니다.

죽음의 권세와 사망에 쏘는 곳, 트라우마라 불리던 내면의 깊은 상처 위에 나의 내면에 가장 어둡고 두렵고 무섭고 감추고 싶었던 그곳에, 부모님도 형제도 나도 외면하고 감추고 숨기며 살았던 곳, 항상 찾아오는 두려움과 염려와 근원 상처와 아픔의 근원 결핍과 아집(我執)과 절망의 근원 바로 그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서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달려 계십니다. 바로 그곳에서 십자가의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동행하고 계십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들의 내면에 계십니다. 나의 깊은 곳에 예수님의 침묵하시며 동행하셨던 그 순간은 한 번도 변함이 없으셨습니다. 나를 살리시려고 재화 사망에 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려고, 악인의 멸망처럼 나를 무너지지 않게 하려고, 그 지독한 장소에 매달린 것이며 그 지독한 장소에서 죽음을 마주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주셨던 말씀 죽음의 죽음과 사망의 권세를 향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로 주셨던 말씀 ‘잠잠하라 고요하라 그리고 다 이루었다’ 말씀하셨습니다. ‘사망아 죽음아 두려움아 결핍아 조용하라 꼬여 와라 내가 다 이루었다 지금 내게 사랑하는 자에게서 떠나가라 내가 어디서 떠드느냐 내가 어디서 함부로 말하느냐 내 사랑하는 자 그 내면에서 모든 것들아 떠나가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며 십자가 위에서 죽음으로 모든 더러운 것들을 이겨 내셨습니다. 아무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그 상처, 숨겨왔던 이야기를 제게 들려주는 청년들이 참 많았습니다. 왜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그 내면의 상처에서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그들이 살아납니다. 힘을 얻습니다.

더 이상 들려주는 그 죽음과 사망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가 들려주는 그 소리에 내게 생명 되시고, 참 하나님 되시며, 나를 위해 세상의 모든 물결들을 뒤엎어 잠잠게 하시는 그 하나님의 소리를 따라 살아가기에 그동안 보았던 숨기고 가리웠던 내면의 이야기들을 이제는 꺼내요 할 수 있는 청년의 날들이 됩니다. 그러면서 외적으로 나타나는 변화들도 있습니다. 결혼을 하는 청년들이 점점 생겨납니다.

말씀드렸던 것처럼 아버지와 또 가정에서 겪었던 모든 일들, 그들이 풀어낼 수 있는 하나님의 복 중의 하나는 새로운 가정을 이루어서, 그가 다시 회복해 나가는 일들로 하나님을 만들어 가시는 것을 저는 보았습니다. 그리고 가정을 이루어서 또 다른 자신과 같이 상처 가운데 거하는 이들 청년들을 만나 그들이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저는 목회자의 가정에서 자라나며 제일 의심되는 것이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내가 정말 믿고 있는가? 예수님은 정말 어디에 계신가? 나는 잘 알고 있는가 혹시 아버지가 목사라서 내가 속아서 예수님을 믿는다. 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이런 의심이 마구 몰려오던 중학교 시절에 의심이 확신이 되는 것처럼 극에 달했던 시절에 제가 수양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중동부 겨울 수양이었는데요. 믿음에 대한 반항인지 내 마음의 의심에 대한 표현인지 설교 시간에 그냥 퍼질러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말씀이 끝나고 기도회가 시작되자, 이제는 마음 놓고 엎드려 잠에 들었습니다. 아 그때 참 좀 신기한 경험을 알게 되었는데요. 저는 잠이 들었는 줄 알았는데 아 꿈결같이 그날 기도에 인도하시는 목사님의 음성이 자꾸 들려오는 거예요. 여러분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음성을 따라 제가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눈을 감고 있었는데, 마치 눈을 뜬 것처럼 한 동산이 보였습니다. 목사님께서 마치 그 동산을 함께 보는 것처럼 그러면 그 길을 따라가 보시겠습니까? 라는 말에 저는 길을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동산 위에 나무가 보이십니까? 보니 큰 나무 한 그루가 보였습니다. 그 아래 가시죠. 하는 말에 그 아래 갔습니다. 앉아 쉬는 듯 있는데, 목사님의 음성이 또 들려옵니다. 올려다보세요. 그 나무를 올려다보는데 그 나무가 제게는 십자가로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나무에 달린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달린 한 사람이 내려다보는 그 눈길과 저는 마주쳤습니다. 그분이 저를 바라보고 계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울음이 터지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기도가 끝나고 눈을 떠보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제가 기도하고, 있어서 친구도 선생님도 모두 기다리고 있다가 갔다고 합니다. 저는 지금도 너무 힘들고 너무 고통스럽고 하나님의 침묵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재로 인하여 내 안에 흔들림 들이 찾아올 때 한 동산에 오릅니다. 그리고 십자가 아래 저는 무릎을 꿇습니다. 그러면 한 번 더 어김없이 그때 나를 바라봐 주셨던 예수님은 또 나를 바라봐 주십니다. 그리고 내면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임재에 동행하며 힘을 얻습니다. 한판 신나게 울고 나오면 살 것 같습니다. 내게 들려주는 두려움과 염려의 소리 들은 떠나가고 내조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사랑하는 성도 님들께 묻습니다. 어찌하여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예수님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알고 계십니다. 아직도 나를 모르느냐? 시간을 낭비하며 가장 쓸데없는 내면의 두려움에 귀를 기울이고 있느냐? 어찌 아직도 두려워하며 염려하고 있느냐? 십자가 나무 아래서 나와 함께 동행하는 것이 어떠냐? 그분이 우리의 모든 주인이 되십니다. 그분의 소리에만 기울이고 살아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서운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요약
우리를 암흑의 권세에서 건져내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생명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아가게 하시니 감사해야 한다. 보이는 두려움과 고통의 현실 앞에 침묵 아시지만, 우리 안에 임재하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살아가야 한다. 눈을 열어 하나님의 동산을 보며, 십자가의 동산에서 살아갈 날들, 기쁨의 동산을 살아갈 것을 소망하며, 우리가 주의 은혜를 힘입어 살아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찾아온 많은 문제들을 넘어서게 하실 것을 확신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의지하며 살아가야 한다. 제자들이 경험(죽음)이 들려주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내면의 무지에 귀를 기울리고, 예수님의 존재에 귀를 기울이고 있듯이, 우리도 내면의 두려움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주님 앞에 온전히 귀를 기울이는 자로 살아기기를 소망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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