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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04월 17일)
제목: "일어나 걸어라"
말씀: 사도행전 3:1-10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사회: 김대규 부목사님

설교자: 고영민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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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행전 3:1-10,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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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을 보면 나면서부터 걷게 된 이가 등장을 합니다. 지금 우리의 시대라 할지라도 장애인이 장애인(障礙人)에 대한 생각과 예우를 사회적 측면에서 배려한다고 해도 장애인들이 살아가기에 쉽지 않은 세상임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 당시 유대 사회라면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특히 아예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이라고 하면, 더욱 어려운 삶을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2절에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의 일상이 등장을 합니다.

 
* 사도행전 3:2,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이 사람을 사람들이 메고 성전 문 앞에 놓아주는 일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그 성전 문 앞에 앉아서 제사를 드리러 오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이 일상이었을 거예요.
 
사람들에게 아침에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아 성전 문 앞에 앉아서 구걸하다가 해질 때쯤에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집으로 돌아가는 일, 말입니다. 특별하게 무엇을 할 수 없었던 그에게는 이러한 삶이 매일매일 반복했을 것으로 우리가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라도 해야 먹고 살 것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한 평생을 살았을 그를 보고자 하면 마음 한 켠에 무겁고 먹먹한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만약에 우리 아이가 이렇게 한평생 살아가야 한다. 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삶은 너무나도 수동적입니다 구걸조차도 사람들에게 매어 나와야만 할 수 있는 사람 아닙니까?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만들어 가기는커녕 구걸로 인하여서 다른 사람들에게 받은 돈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면서 살아가는 그의 삶에는 능동적인 부분이 없습니다. 당시 사회상으로 봤을 때에는 결혼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녀를 기르는 기쁨도 아마 상상도 하지 않았을 거예요. 재산을 모으는 기쁨 어떤 일을 성취해서 얻는 기쁨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채 철저하게 수동적으로 주어졌던 삶을 살아갔던 큰 이변이 없는 한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아가야 했던 한 사람이 오늘 등장하게 되는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됐던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 모든 것의 시작이 무엇입니까?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에게 이 모든 것의 시작은 태어났을 때부터 걷지 못했던 그의 장애였습니다.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것이 원래 창조되었을 때 아름답게 살아갔을 바로 한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원흉(元兇)이죠. 그렇게 이것이 자신의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다 포기하고 지금까지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남아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도인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도 생명에 관한 것 영원에 속한 것을 전혀 꿈꾸지 못한 채 뭘 얻을 것 없을까? 뭘 더 얻을까? 하는 아주 현실적인 모습만 남아 있는 것 아닙니까? 그에게 남은 것은 그날그날 살아가야 할 현실의 문제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모습이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우리는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이 이 사람과는 우리가 다르다고 생각하기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 행동과 결정을 가지고 살아간다. 라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이 어그러지고, 어디서부터 어디서부턴가 무너져 있고, 어디서부턴가 잘못되어도 대부분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이처럼 말이죠. 이러한 삶이 맞는 것일까? 왜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하는 본질적인 질문들을 다 잃어버리고는 굉장히 수동적으로 오늘 아침을 시작하지 않습니까?
 
오늘 하루하루에 살아갈 현실의 문제만을 떠안은 채, 다른 사람 의해서 조직에 의해서 시스템에 의해서 혹은 여러 가지 상황에 떠밀려서 수동적으로 직장생활을 하거나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지 않습니까? 오직 오늘 하루의 삶에 문제만 매어서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이와 다른 것이 무엇이냐고 우리가 물을 수 있는 것이죠. 여러분들이 오늘 아침에 풀린 눈으로 회사에 출근하고 아무 생각 없이 주어졌던 일들을 해왔고, 그렇게 지금 죄송하지만 이 자리에 앉아 있다. 라면 수동적으로 말이죠. 이뿐입니까?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고 하자 무엇을 얻을까? 하여 그들을 바라보았던 것처럼 말이죠. 여러분들의 마음이 혹시 이 세상 가운데 어떻게 하면 무엇을 더 얻을까?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이 상황에 마음이 다 뺏겨있지는 않습니까? 시기를 또 차야 되고요. 지금은 이런 것들을 해야 된대 유행을 따라서 혹은 상황을 따라서 이렇게 해야 하고 저렇게 움직여서 이렇게 운영해야 된다더라. 하는 세상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이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현실의 문제 그러나 여러분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되는 이가 어느 날 구걸을 구걸이 너무 잘 돼서 그날은 풍족하게 보냈다고 해도 그에게 아무것도 변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 아셔야 됩니다. 우리의 현실의 문제가 해결되었음에도 변하는 것이 없을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 아셔야 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처럼 모든 것은 다 접어두고 세상사는 일에 함몰(陷沒)되어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청년부를 담당할 때 아이들을 심방(尋訪)에 보면 어떤 친구는 성공해야 하는 강박감에 사로잡혀 있어서 정말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는 친구가 있었어요. 성공해야 하고, 돈을 많이 버는 취급을 가져야 하는 것으로 대화가 가득할 때 여러분 교육자로서 어떤 마음이 드시는지 아십니까? 막 숨이 막혀옵니다. 어떤 말을 해줘야 하지? 온통 친구의 머릿속에는 성공과 좋은 직장과 어떻게 하면 현실의 문제를 타개할 수 있을까? 이 아이의 기본적인 태도(態度)가 바로 누구를 보아도 어떤 일을 마주쳐도 어떤 것을 더 얻을 수 있을까? 어떻게 더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그런 시선만 가지고 있더라는 겁니다. 완전히 여기에 함몰된 것이죠. 인생이 그게 전부가 아니고 더 가치 있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 라고 막 소리 지르고 싶은 마음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던 기억이 납니다. 여러분 혹시 여러분 중에 이런 현실에 함몰되어 있는 분이 계십니까? 예배와 예배에 와 계셔도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는 분이 혹시 계십니까? 오늘 근심과 염려로 주저앉아 계신 분이 혹시 계십니까? 그래서 현실이 신앙을 뒤덮어버려서 깊은 수렁에 빠지신 분이 계십니까? 이 깊은 수령에서 건져주시는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이 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현실의 문제 때문에 영원한 것을 잃지 않는 여러분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말씀을 좀 더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더 살펴보면 성전에 들어가려던 베드로와 요한이 그를 주목하여서 ‘우리를 보라’ 이렇게 말합니다. 드디어 베드로와 요한이 말하기 시작하니까 안심이 되죠. 구걸하던 그에게 베드로가 군더더기 없이 선포를 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내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 버려라 베드로와 요한은 그가 재물을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말했겠죠. 그러나 그가 정말 필요한 것을 바로 말합니다. 그가 이제는 포기했던 것, 그가 이제는 단념했던 것, 그래서 오늘 아침에도 사람들이 메고 올 수밖에 없었으나 사실은 메어 오면서도 마음속으로 진짜 간절히 원했던 것 어떤 말이요. ‘일어나 걸으라.’예요. 이제 어떻게 됩니까? 7절을 보니까,
 
*사도행전 3:7,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손목을 잡고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었다라고 말합니다. 8절에서는 뭐라고 말합니까?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다라고 말합니다. 아 이런 본문 보면 너무 마음이 좋죠. 네 여러분 혹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방글라데시에서 잠깐 사역을 했을 때 중간에 선교사님 사역을 도와준 적이 있습니다. 그때 뒀던 마을에 태어나면서부터 못 걸었던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 상체는 비장애인과 동일하게 보일지 모르겠어요. 그냥 다를 게 없었어요. 그러나 다리가 정말로 앙상한 거 있죠. 정말 뼈에 가죽만 살짝 붙어있는 앙상한 다리만 진짜 다리가 발가락도 뼈가 보 1만큼 앙상하게 보입니다. 어찌 보면 다리가 덜 자란 것처럼 짧아 보이기도 했던 것 같아요. 이런 모습이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오늘 말씀은 뭐라고 합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라고 말하자마자 발과 발목에 힘을 얻었다. 로 말합니다. 선포하자마자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해가 되십니까? 전 사실 그때 방글라데시에서 봤던 나면서부터 못 걸었다는 그분의 다리와 외에 여러 가지 조건들을 생각하노라면 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지금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은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뼈만 앙상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선포되었을 때, 걸었다는 말은 지금 걸을 수 있을 만큼 말씀 선포되자마자 근육이 붙어나가고 있고, 근육 가운데 걸을 수 있을 만큼 일반인만큼 여러분의 허벅지 만큼이요. 근육이 막 붓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작았거나 뒤틀린 뼈가 자라기 시작하고 바르게 맞춰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그뿐입니까? 갑자기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었던 그래서 균형(均衡) 감각(感覺)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던 사람이 다리로 걸었을 뿐 아니라 뭐까지 한다고요. 네 뛰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지금 등장하는 사건은 대단함이고 놀라움 자체예요. 눈앞에서 이 상황이 벌어졌다고 생각해보세요. 무릎 수술만 해도 재활하고 다시 뛰는데 몇 달이 걸리는 거 아시죠? 네, 이걸 생각하면 이것은 마치 아이가 걸음마를 하지도 않고도 갑자기 균형 감각을 얻은 것과 동일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시는 게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명령의 회복은 완전한 회복(回復)을 의미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상상을 해 보십시오.
 
“일어나 걸으라.” 선포했지, 내가 일어나 뛰라고 하지 않았다라고 말해서 뛰지는 못하고 이렇게 막 엉거주춤 이렇게 해왔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막 넘어질 것 같고, 그래도 이분은 진짜로 감사했을 거예요. 왜냐하면, 처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봤잖아요. 처음으로 한 발을 떼 봤잖아요.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회복은 지금 그런 상황 지금 상황보다 좀 더 나아진 회복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회복은 완전한 회복입니다. 모자람이 없는 회복인 것입니다. 지금 이 사람은 하나님의 완전한 회복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큰 은혜 아닙니까? 지금 저희 교회에도 사랑부가 있지 않습니까? 제가 신혼 때 화곡동에서 시작했습니다. 좋은 동네예요.
 
화곡동에는 사랑부로 유명한 교회가 있는데, 꼭 제가 주일에 사역하는 시간에 아마 교회 사랑부 예배 시간이었던 것 같애요. 그래서 출근을 하고자 하면은 이제 거의 매주 교회 앞을 지나갈 때마다 부모님이랑 사랑부 친구들이 여러 명이 교회에 이렇게 들어가는 모습을 보곤 했습니다. 하루는 아내가 당시 이제 주일에 교회를 가는 사랑부 학생들을 보면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보, 예수님이 다시 오시고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면 친구들도 완전히 회복되겠지?” 저는 깜짝 놀랐어요. 내 아내가 어 제 아내는 신학을 하지 않았습니다. 좀 놀랬어요. 그래서 제가 ‘물론이지’ 그랬더니, 아내가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아마 저기 함께 가는 부모님은 누구보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걸 기다릴 거야.’ 저는 매일같이 길을 매주 길을 지날 때마다 늘 동일하게 봤는데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이었어요. 그날에 예수님이 오시는 그날에 저분들도 창조 때에 기뻐하셨던 온전한 모습으로 회복이 일어나겠구나! 하면서 막 그날이 너무 기다렸던 기억이 납니다. 여러분, 그 교회 사랑부 부모님들이 그렇게 소망하고 기다리는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완성할 하나님 나라에서나 누릴 완전한 회복을 지금 여기 있는 그가 경험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그에게 무슨 치유 받을 조건이 있었습니까? 그가 보여준 특별한 믿음이 있었습니까? 아니에요. 오히려 그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뭘 얻을 게 없을까? 하여서 그들을 갈구하는 눈길만 바라보았던 사람 아닙니까? 현실에만 매어 있던 그의 삶에 성령의 강력한 능력에 폭탄(爆彈)이 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그의 삶을 완벽하게 회복시키고 계십니다. 그의 삶이 어그러졌던 근본적인 지점부터 완전하게 회복하고 계십니다.
 
단순하게 돈 몇 푼을 더 받아서 잠시나마 편하게 사는 것인 그런 임시적인 회복이 아니라, 그가 이렇게 이렇게밖에 살 수 없었던 근본적인 지점 나면에서부터 못 걷게 되었던 지점을 완전하게 회복시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회복시키실 때, 여러분들의 삶에 근본적인 부분부터 완전하게 회복시키시는 분인 줄 믿습니다. 어떨 때에는 우리가 이 부분만큼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들이라서 그게 남편이 될 수도 있죠. 그게 아이들이 될지도 모르겠어요. 우리 아이들만큼은 변화하지 않을 것 같아요. 저희 아버지만큼은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요. 그래서 이 부분만큼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상상하지도 않고, 기도하지도 않고,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에 다가오셔서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한 가지도 성령의 강한 능력으로 회복시키실 줄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도 현실의 깊은 수렁에 빠져 있어서 뭘 보아도 무엇을 얻을까? 로만 보이고 어떻게 더 벌어볼까? 로만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이 팍팍하게 살고 있는 우리라 할지라도, 주님께서 우리의 삶에 구석구석 모든 부분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완전하게 회복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할 수 있는 그가 들어간 곳이 어디입니까?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었던 성전에 들어갑니다. 그동안 성전(聖殿)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이라는 미(美)문(門) 앞에서 아이러니하게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수년을 보냈을 그가 말이죠. 장애인으로서 성전에 들어가는 멀쩡한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불허했을 그가 드디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당당하게 하나님의 품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전을 뛰어 들어가면서 그가 한 행동이 무엇입니까? 8절을 보면,
 
*사도행전 3:8,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하나님을 찬성했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재미있지 않습니까? 제자들은 지금 누구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했죠. 맞아요. 나사르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누구를 찬성하고 있죠. 하나님을 찬성하고 있어요. 왜 그렇습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했을 때 이러한 일이 너무나 능력이 넘쳐서 너무나 완전해서 하나님이 아니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찬성했던 것 아닙니까 특히 누구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했겠습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선포한 이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로 메시아였구나! 그리스도였구나! 그래서 그분이 참 구원자 맞구나! 하나님이 보내신 자구나! 거부할 수가 있었겠어요? 예수란 그분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보내신 구원자이시구나! 라는 걸 깨달았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것을 알 수 있습니까? 뒤에 서서 걸으며 뛰어 서서 걸으며 어떻게 들어갔다고 말하죠. 네, 성전에 아까 말했듯이 성전에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을 받고 구원을 받은 자라는 것을 지금 성경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11절부터, 베드로가 이 일이 너희가 죽인 예수로 인하여 일어난 일이라고 증언(證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회복은 우리의 삶에 영역(領域)만 회복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 완전한 우리의 삶에 영역만 회복할 회복을 뛰어넘어서 우리의 영을 완전하게 회복시키십니다. 성령의 능력의 폭탄이 그의 인생 가운데 떨어질 때 현실에만 얽매여 있던 저주(詛呪)의 끈이 끊어지고 삶이 완전하게 회복되는 것뿐만 아니라 이제는 생명에 관한 것, 영원한 것, 여기에 눈이 뜨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동안에는 무엇을 얻을까?
 
머릿속에 온통 그것만 있었던 사람 아닙니까? 오늘은 어떻게 하루를 보내야 되나, 오늘 저녁은 어떻게 해결하지? 이런 생각으로 가득 찼기에 관심도 없었던 것 필요도 없었던 것이 이제 눈이 뜨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돈보다 더 소중한 것 더 값어치 있는 것 돈으로 바꿀 수 없는 영원한 것에 심령의 눈이 뜨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말씀을 묵상할 때 지금 이 사람이 성전에 들어가면서 드리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 그의 인생에 처음일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을 해봤어요. 원망(怨望)과 무기력(無氣力)함으로 살아왔던 그의 인생에서 말이죠.
 
육체적인 완전한 회복을 경험했을 뿐만 아니라, 영적(靈的)으로도 완전하게 회복되어서 하나님을 바로 온전하게 찬양할 수 있는 자가 된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에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회복시키실 때, 여러분들의 삶의 문제들만 회복시키는 것에 끝나지 않고, 여러분들이 다시 온 전(穩全 한 찬양을 드릴 수 있도록 온전한 예배(禮拜)와 경배(敬拜)를 드릴 수 있도록 여러분들의 심령(心靈)도 완전히 회복시키실 줄 믿습니다. 세상의 욕심(慾心)들로 가려져 있던 여러분들의 눈을 다시 생명에 관한 것 영원한 것에 눈뜨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와 은혜(恩惠)의 은혜를 바라보는 여러분으로 회복시키실 줄 믿습니다. 이 밤에 사랑의 교회 성도님들의 삶의 영역뿐 아니라 영적인 영역에 완전한 회복을 경험(經驗)하시기를 소망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남은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과 같이 그날의 얻어진 재물(財物)로 기쁨을 누리며 그것으로 만족(滿足)하며 살아갔을 자들 아닙니까? 여러분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일을 다행히도 메어다가 줄 사람이 등장하죠?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이 비참(悲慘)한 인생들끼리 아무리 자기네들끼리 돕고 살아도 비참함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도와줘도 평생 데리고 나와서 성전 문 앞에 내어준다. 할지라도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은 똑같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에게 진정(眞定)으로 필요한 것은 사람의 도움도 아니오. 하루를 살아갈 재물도 아니오. 바로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하고 가장 필요한 것이 사람의 도움도 아니고 재물도 아닙니다. 바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인 줄 믿습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런 하나님의 완전한 회복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영적인 생채기가 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상처들이 곪아서 무엇을 해야 할지조차 잃어버리신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디선가부터 잘못된 것인지 몰라서 그저 눈물로만 기도하고 계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삶을 능력 있게 회복시키실 줄 믿습니다. 망가지고 무너진 여러분들의 삶을 좀 더 나은 정도의 회복이 아니라, 원래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려고 했던 완전한 축복으로 회복시키실 줄 믿습니다. 오늘 이 밤에 이런 완전한 회복이 회복을 주실 하나님께 믿음으로 나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삶에 회복뿐 아니라 여러분들을 영적인 깊은 수렁에서 건지셔서 더 다시 우리를 반석위에 세우시고, 기쁨을 회복시키시며 우리의 입술에 찬송을 담아주실 주님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믿음으로 나아갈 때,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되었던 이가 경험했던 완전한 회복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 이름으로 여러분과 여러분들의 가정 가운데 임할 줄 믿습니다.
 
♣요약
인생의 한계 앞에서 우리의 능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며, 진정한 기도로 올려드리면, 현실의 난제를 초월한 새 차원의 인생으로 비상하게 하심을 확신해야 한다. 한 생명에게 ‘일어나 걸어라’라고 선포하셔서 당장의 기적을 보이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말씀의 능력으로 삶을 살아가면 완전한 회복을 주실 것이다. 우리 인생 가운데 능력으로 찾아와 주시는 주님께서 인생의 한계 앞에 무력하게 무너져 있는 우리의 인생 가운데 은혜를 베풀어 주실 줄 믿어야 한다. 성령의 역사를 베풀어 주실 것을 소망하고, 완전한 회복과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완전한 회복을 경험하게 해 주실 것을 확신해야 한다. 우리의 심령이 회복되게 하심을 소원하며, 언제나 기쁨과 찬송이 되어,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일어나 걸어가면 주님은 항상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도우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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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4년 04월 14일)-
(예수님은 누구신가?-Who is JESUS?)-9번째
제목: "용광로(鎔鑛爐) 속에서도 함께하시는 예수님"
말씀: 다니엘 3:19~27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영광찬양대
대표기도: 이현규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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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3:19~27,
19 느부갓네살이 분이 가득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향하여 얼굴빛을 바꾸고 명령하여 이르되 그 풀무불을 뜨겁게 하기를 평소보다 칠 배나 뜨겁게 하라 하고.
20 군대 중 용사 몇 사람에게 명령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지라 하니라.
21 그러자 그 사람들을 겉옷과 속옷과 모자와 다른 옷을 입은 채 결박하여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졌더라.
22 왕의 명령이 엄하고 풀무불이 심히 뜨거우므로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
23 이 세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결박된 채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떨어졌더라.
24 그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놀라 급히 일어나서 모사들에게 물어 이르되 우리가 결박하여 불 가운데에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하니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여 옳소이다 하더라.
25 왕이 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26 느부갓네살이 맹렬히 타는 풀무불 아귀 가까이 가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하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 가운데에서 나온지라.
27 총독과 지사와 행정관과 왕의 모사들이 모여 이 사람들을 본즉 불이 능히 그들의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을리지 아니하였고 겉옷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 탄 냄새도 없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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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대 찬송 감사합니다. 명실공이 우리가 지금 봄의 한가운데 꽃 대궐 속에 충만한 봄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제 마음속에 우리 성도들도 예외 없이 영원의 봄 동산을 경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근데 오늘 여러분 찬송가를 부르는데 이 찬송가가 보니까 좀 맥아리가 없어요. 잘 모르시는 것 같아요. 찬양대도 잘 모르시는 것 같고, 근데 이 찬송은 제가 한27년 전쯤 브라질의 상파울로에서 한인 교민들 집회를 하는데, 마지막 시간에 청소년들 한 십여 명이 나오더니, 특 송을 하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우리 교우들은 잘 모르고 있는데, 27년 전에 브라질 상파울로의 한인 교회 청소년들이 이 찬송을 하는 거예요. 특 송으로, 저는 어릴 때부터 이 찬송을 잘 알았어요. 근데 너무 마음에 와 닿는 거예요.
 
♬“이 말씀 전할 때, 내 마음이 기쁘고, 말씀을 할수록 새 기쁨 넘치네, 우리에게는 새 기쁨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그다음에 이 말씀을 들을 때, 이 말씀 들은 사람 또 듣기 원하고, 목말라 사모하니 말씀 진리라. 가사가 안 나오죠? 나라 영광중에 나부를 새 노래 옛 부터 좋아하더니, 이 말씀 다시 3절에, 이 말씀 들은 사람 또 듣기 원하고 목말라 사모하니 말씀 진리라.” ♪
 
오늘 이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목마른 말씀이 되기를 바라고, 이 말씀이 여러분들의 진리의 말씀으로 여러분들 탁 정리되기를 바랍니다. 옛 부터 좋아하더니, 말씀 뭐 하고 싶은데 시간이 없어요. 못합니다마는 이 찬송을 집에 가서도 함 불러보세요.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지금 주신 음성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브라질에 있는 청소년들을 이상으로 찬송이 돼서 영의 눈이 떠지기를 바랍니다. 사람들 다 그래도 주님 잘 섬겨요. 아무것도 없어도 해외 디아스포로로 흩어져 가지고 뭐 보장되는 거 없어도 이런 찬송을 통하여 주님의 임재를 깨달으면 이겨낼 수가 있는 것이에요.
 
오늘 저는 예수님 누구신가?(Who is Jesus?-더블유제이 시리즈) 번째 “용광로 풀무불 속에서도 함께하시는 여수님”에 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이 본문의 스토리는 여러분들이 익숙하게 하는 내용이고, 처음 오신 분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사드락과 매삭과 아벳느고라는 다니엘의 구약에 다니엘의 세 친구인데, 구약에 출중한 인물인 다니엘의 세 친구인 이들이 풀무불 속에, 용광도 속에서 구원받는 내용입니다. 이 저는 여기서 어떻게 예수님을 발견하고 여기서 어떤 은혜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 여러분 로마서 15장 4절에 이런 말씀해 주세요.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로마서 15:4,
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구약의 말씀을 기록한 이유가 뭐냐, 특별 오늘 이런 말씀을 기록한 이유가 뭐냐면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여러분 교과서 알죠“ 교과서 이 말씀이 여러분들의 교과서가 될 것이다. 오늘 3장에는 이 본문의 말씀이 여러분들의 생애와 여러분들의 생애와 여러분들의 인생에 교과서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다니엘과 다니엘의 세 친구란 1차 포로 때에 잡혀갔어요. 이 차 3차 포로 뒤에 잡혀가는 사람들에게도 얼마나 이 말씀이 위로가 됐을지 몰라요. 그리고 후대에 있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매달리고 수많은 고통 속에서도 이 말씀이 시대에 한 민족의 민족이 면함을 당할 어려움 가운데서도 교과서가 된 것이에요. 오늘 우리의 상황 우리의 주위의 상황이 녹록치 않고 수많은 일들이 일어났지만 여러분과 저의 이 말씀이 여러분들의 삶에 교과서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 생각할 것 하나님을 진심으로 섬겨도 풀무 불에 던짐을 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I. 하나님을 전심으로 섬겨도 풀무 불에 던짐 당할 수 있다.
-오늘 18절에 보니까 단연히 세 친구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우상 신상에 절하지 않겠다. 제가 배경을 다 뭐 자세히 말씀 다 못 드립니다마는 느부갓네살 왕이 당대 최고의 황제였고 당대 최고의 권력자였고 무소불이(無所不爲)를 행사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러니까 신상을 세웠어요. 그것도 평지에다가 높이 세워갖고 더 두드러지게 보이라고 세워 가지고 이제 절하라고 그랬어요. 근데 절 못한다고 다 이들 질투하던 사람들이 이들이 관리로서 잘 하니까 옆에는 항상 그래요. 누가 잘하면 대한민국 사람하고 똑 같에요. 누가 잘하면 봐주지를 못하는 거야. 질투하고 같이 박수치고 같이 해가지고 같이 잘하면 같이 성공하는데 물어뜯고 집어 뜯고, 잡아 뜯고, 지난주에 제가 원,불,비라고 그랬죠? 물어뜯고 집어 뜯고 잡아 뜯고 물,집,잡이에요. 그래갖고 이 세 친구를 갖다가 얼거 매 가지고, 이제 신상에 절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당시에 느부갓네살 왕이라는 이 황제가 왕이 무소불이 왕이 모욕을 당했다고 느끼고 그래서 이제 풀무 불에 집어 던져지게 되는데, 여기서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우리가 어떨 때는 결단하고, 순종하고, 충성하면 늘 사람들이 격려하고 인정해 준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을 때가 많이 있어요. 오히려 미워하고 박해할 수 있는 것이에요. 요한복음 15장 20절에 보니까,
 
*요한복음 15:20,
20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니 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다. 전에 우리 개혁 판에는 사람들이 나를 핍박했으니까, 너희도 핍박(逼迫)할 것이다. 주님을 핍박 하니까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도 핍박한다. 오죽하면 사도바울은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
 
*디모데후서 3:12,
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핍박을 받으리라. 여기서 경건하게 산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경건하게 개인적인 경건도 있습니다마는 복음을 위해서 전도를 하고, 기독교 신앙 가치관을 가지고 한번 나라를 한번 제대로 세워보고자 애를 쓰고, 전도와 선교를 위하여 어제도 여기 우리가 복음 통일을 위하여 어제도 여기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오후 한 시에 주님 이 나라가 피 흘림 없이 복음적으로 통일되게 해 달라고 막 그렇게 할 때에, 사람들이 박해를 하는 겁니다. 숨어서 경건하게 살면 누가 박해를 하겠어요? 그런데 기독교 정신을 선포하고, 이 나라가 사회주의가 되면 안 되고 이 나라가 공산주의가 되면 안 됩니다. 라고 외칠 때 박해가 있다는 것이에요. 이 세상은 세속의 우상들을 섬기지 않는 자들에게 그리고 복음을 선포하는 삶들에 대해서 저들 나름대로 뜨거운 용광로(鎔鑛爐)를 준비해 놓고 있는 것이에요. 용광로는 빈정거림과 무시와 따돌림의 화덕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대로 섬기고 기독교 신앙 가치관을 가지고 우리가 지금 차별금지법 ,동성애, 이런 거 반대하면 얼마나 무시라 미국 같은 데 가면요 완전히 왕따 시키고 있잖아요. 동부의 아이비리그 잘난 데는 전부 다 교술 다 동성애자들이 많고 얼마나 풀무 불을 많이 준비했는지 몰라요.
 
다시 본문으로 들어가 가지고, 느부갓네살 왕이 화가 머리끝까지 나가지고 풀무 불을 7배나 더 뜨겁게 하라고 그랬어요. 그리고 세 사람을 끌어다가 풀무 불에 던져 넣기 위하여 아주 더 힘이 센 사람들이 세 사람을 묶어 가지고 풀무불 속으로 왔어요. 저 이게 풀무 불이 제 제철 용광로인데, 내가 자세히 위에 있을 때, 뭐 자세 설마 큰 거 있어요. 그리고 밑에는 사람들이 막 왔다 갔다 할 정도로 있잖아요. 위에서만 갖다 놓고 이제 네 그런 게 있어요. 제가 설명을 다 못하고 21절과 22절을 보니까,
 
*다니엘 3:121-22,
21 그러자 그 사람들을 겉옷과 속옷과 모자와 다른 옷을 입은 채 결박하여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졌더라.
22 왕의 명령이 엄하고 풀무불이 심히 뜨거우므로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
 
-힘센 사람들이 단열의 세 친구를 뭐예요? 결박해서 풀무 불에 던졌는데 그들을 풀무 불에 던진 사람들이 먼저 불에 타서 죽어버렸어요. 그러니까 정도의 화력이니까. 이 세 친구는 이제 끝난 것 같았어요. 느부갓네살 왕도 좀 정신이 없는 게 진짜 고통스럽게 벌을 주려면 불을 7배나 강하게 하면 고통이 오겠습니까? 예 보통 풀무 불이 1000도가 넘는데, 7배라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불도 적당히 뜨거워요 고통스러운데 너무나 뜨거우면 뭐 고통 느낄 시간이 어디 있겠어요? 그러나 이 감정이 복받치고, 생각이 잘못되면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도 판단 능력이 마비된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우리 주위에도 예상외로 말도 안 되는 내용을 가지고 기독교를 비판하고, 비하하고, 조롱하고 공격하는 사람들을 보면 저노마 저것들이 느부갓네살이구나 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에요.
 
우리가 말씀을 순종하고 결단했는데도 실상은 풀무 불에 던짐을 당하고 고통당하는 삶의 현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다음은 어떻게 됩니까? 거기에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의 현장을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데, 다니엘이 세 친구가 옷을 입은 채로 던져줬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풀무 불에 던져져서 끝인 줄 알았는데, 24절에 보니까,
 
*다니엘 3:24,
24 그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놀라 급히 일어나서 모사들에게 물어 이르되 우리가 결박하여 불 가운데에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하니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여 옳소이다 하더라.
-그런데 이제 그다음에 더 놀라운 기적을 본 게 25절에 25절이요.
 
II.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의 현장
 
*다니엘 3:25,
25 왕이 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네 번째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 그러니까 풀무불이 하늘이 뭐야? 여기 두 가지 기적이 일어났는데, 하나는 기적이 한꺼번에 일어났는데, ➀‘하나는 불에 타지 않고 건재한 기적’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앞에 보니까 뭐라고 돼 있어요? 그들을 포박한 줄만 탔어요. 포승줄만 탄 거예요. 두 번째 기적은 뭐냐 하면 ➁‘네 번째 사람, 신들의 아들과 같은 네 번째 사람 그들이 함께 한 것’ 이 두 가지 기적이에요. 여러분 풀무불이에요. 닭갈비집에 가면 어떻게 돼요. 그리고 저기 뭡니까? 뭐 이런 구이 집에 가면 온몸에 냄새가 나는데, 뒤에 나옵니다. 냄새 하러 나지 아니하고 포승(捕繩)줄만 결박이 없어지고 네 번째 사람이 함께한 기적이 일어난 줄로 믿습니다.
 
이 네 번째 사람에 대해서 우리가 뭐 다 명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대체적으로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신들의 아들, 신의 아들 그러니까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이 신의 아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신약의 육신을 입으시기 전에 구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소위 크리스토파니, 구역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지난번에 우리 여호수아 5장의 군대 장관으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하다. 여러분, 그렇게 그냥 그렇게 해석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럼 큰 무리가 없어요.
 
그리고 그들은 거의 뜨거운 용광로 풀무불 속이 아니라 네 사람이 마치 한가한 정원을 거닐 듯이 마치 왕궁을 거니는 것처럼 풀무 불은 그들에게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이걸 보면서 제가 이사야 43장 2절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구나.
 
*이사야 43:2,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그할렐루야 이 약속의 말씀이 문자적으로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어요. 문자적으로,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인데 그것이 뭐냐 하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에게 이 풀무불의 핍박이 왔을 때에, 그것을 피했습니까? 안 피했습니까? 피하지 않았습니다. 풀무 불을 정면으로 맞닥뜨렸습니다. 그리고 정면으로 맞닥뜨리고 풀무 불 한가운데서 뜨거운 용광로 한가운데서 건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맞닥뜨리는 것 하나님을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않겠다고 목숨을 건 선언을 한 것입니다. 저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요? 뭐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일단 풀무 불에 여기서 보면, 풀무 불에서 건잠 받는 기적은, 풀무불 속에 들어가겠다고 선언하고 아니 실제로 풀무불 속에 들어가야 건짐을 받는 것이에요. 아무것도 안 하는데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그래서 제가 썼어요. 풀무 불에 안 들어가니까 풀무불 속에서 건짐 받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에요. 안 일어나는 것이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풀무 불에 속에 들어가지 않으니, 풀무 불에 건짐 받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
 
-어쨌든 간에 그렇게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왜 무언가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왜 내 신앙생활이 지루합니까? 왜 내 신앙생활에 물을 물 탄 듯 매가리가 없고, 물에 물 탄 듯 뭐가 없습니까? 왜 그럴까 왜 강직함이 없을까? 오늘 여기 본문을 보면서 우리가 해석하는 것은 풀무 불에 들어가는 경험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목숨을 걸고 믿음을 지킨 결과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27절에 보니까,
 
*다니엘 3:27,
27 총독과 지사와 행정관과 왕의 모사들이 모여 이 사람들을 본즉 불이 능히 그들의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을리지 아니하였고 겉옷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 탄 냄새도 없었더라.
-그다음에 제일 감동받는 것이 뭐예요? 불탄 냄새도 없었더라. 삼겹살만 구워 먹어도 난린데 냄새가 온통 다 난린데, 세 친구는 불타는 냄새조차 없었습니다. 그들을 결박했던 포승줄 불만 포승줄만 풀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야말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오늘 리빙 미라클!, 산 기적이 되었어요. 살아있는 기적이 어디였어요. 할렐루야!!! 사랑의 교회 모든 성도들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성도들 저도 저의 남은 생애 가운데 저와 여러분들은 산 기적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살아있는 기적이 돼요. 리빙 미라클!, 우리가 먼저 풀무 불에 들어가야 할 경험이 필요하고, ‘2033-50 비전’을 왜 합니까?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잖아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잖아요. 핍박도 없어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영적으로 성공하고, 축복의 근원이 되고, 정말로 세계 복음주의 쇠퇴를 막고, 남북의 피 흘림 없는 복음적 평화 통일을 우리가 뭔가를 하면, 핍박이 일어나는 것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역사에 은혜를 베푸셔갖고 모든 포승줄을 풀어주시고, 우리가 결단을 할 때, 우리가 리빙 미라클이 될 수 있도록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처럼 목숨을 건 선언이 필요하고, 풀무불의 형벌을 피하지 않았기 때문에, 풀무 불의 기적이 일어난 줄로 믿습니다. 다시 한 번 오늘날 내 삶에 왜 기적이 없는가? 내 삶의 신선한 감격과 주름을 섬기는 열정은 왜 없는가? 왜 내 신앙생활에 이렇게 생활이 지루하고 물에 물 타듯하고 뭔가가 없는가? 중요할 때에 주님을 향한 우리의 분명한 헌신의 자세, 중요할 때에 기독교 신앙에 대한 값을 치르는 대가,
 
-저는 어릴 때 태어나서 가만히 제가 보니까 어릴 때, 60명 가운데 나 혼자 예수 믿었어요. 학교만 가면 이제 예수쟁이라고 있잖아요. 뭐 예수를 믿냐? 내 주먹이나 믿어라. 이러면서 모욕당하고 교회 간다고 모욕당하고, 또 교회가 뭐 너무 초라하니까 모욕당하고, 주일 성수한다고 모욕당하고, 제가 한 번 얘기했죠? 우리 아버지 교 밑에 공병기지창 이라고 있는데, 거기에 내가 어릴 때 여름 성경학과 찬송하고 내려가면요 군인들이 이리 와 이리 와라 자식들 말이야. 어디 감히 이 앞에 노래를 부르고 다녀, 이리 와! 저놈 여기 누나 있나? 누나 없습니다. 내가 장남이니까. 어디 이러면서 노래하나 불러, ♪환난과 핍박 중에도~~이 신앙 생각할 때 기쁨이 충만하도다.~~♬ 말이 그렇지요. 수많은 핍박과 난제에요. 학교에 들어가서도 가난하고 그러니까, 예수 믿으니까, 있잖아요. 얼마나 근데 지금도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요. 예수쟁이기 때문에 찬송한다고, 전도한다고, 교회 간다고, 주일 성수한다고, 모욕당한 모든 것들이 저희 생애를 돌아보면 그것이 기적의 시작점이었어요. 수많은 기적들, 수많은 기적의 만남들이 수많은 인생의 수많은 과정과 열매들, 때론 예수님들을 모욕당하고 여기 예수님의 아내들 집안에 혼자 예수 믿는 분들을 주님들을 모욕당하고, 그래도 꿋꿋이 주님 사랑하고 그럴 때, 지나놓고 여러분 그러면, 자식이 기적을 일으킬 것이에요!!. 살아있는 미라클, 리빙 미라클(living Miracle), 여러분께 여러분들 회사 내에서 한 10년, 20년, 30년을 꿋꿋하게 신앙 지킨다고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리빙 미라클로 삼아주시는 것이에요.
 
III. 풀무불(鎔鑛爐)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한 번 더 제가 구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크리스토파니를 정리하겠습니다.
 
◎크리스토파니(Cristophany)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1세기에 초림으로 성육신하시기 전에 구약에 예표로 나타나신 것이다.
 
*다니엘 3:25,
25 왕이 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The Son of God! 이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인 줄로 믿습니다. 풀무 불 가운데 신앙을 지키는 사람에게 그 신앙이 지키는 사람들을 구원해 주시는 구원자가 되시고, 그들을 보호하는 호위자 보호자가 되어 주시고, 그들의 수호천사가 되어 주시고, 그래서 가장 강력한 호위와 가장 강력한 구원은 뜨거운 용광로 불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세요.
 
여러분들의 생애 가장 강력한 호위는 돈도 아니고, 가장 강력한 호위는 권력도 아니고, 가장 강력한 호위는 정치적으로 여러분들을 같이 하는 그런 흐름이 아니라, 가장 강력한 호위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세요. 불 속에서도 그분이 나와 함께하면 여유롭게 걸릴 수가 있고,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나를 돌보시고 있다고 고백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풀무불 속에서도 어려움의 시간들을 말씀과 기쁨과 찬양으로 기도로 통과할 수 있도록 나와 함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떨 때는 말씀으로,
어떨 때는 특새의 은혜로,
어떨 때는 성도의 교제로,
어떨 때는 찬양의 능력으로,
여러분들의 호위자로,
구원자로 보호자로,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셔야 됩니다.
 
그래서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의 순간 혼자라고 느껴지는 순간에 예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셔서 승리하게 하신 것이 기적이라 이 말이죠. 신앙 때문에 직장에서 왕따 당할 때도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에요.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사역과 삶의 현장에서 우리를 살리는 가장 큰 은혜의 원천이 뭡니까? 가장 큰 구원의 원천이 뭡니까? 한마디로 임마누엘인데, 지금 나와 함께 다시는 예수님이 나의 삶에 가장 큰 보호와 가장 큰 구원의 원천이 되는 것을 믿으셔야 되는 것이에요. 이걸 여러분들이 그냥 적당히 생각하시면 안 돼요.
 
가족을 먼저 떠나보내는 인생의 풀무 불을 당한 고통을 당하는 분들, 지금 내가 암이 하나 두 개 한두 개 있어 가지고 여러분들에게 암 때문에 고통도 하는 그런 분들, 어떻게 보면 인생의 풀무불인데 가운데서 고생하는 분들 그분들에게 제일 큰 능력과 제일 큰 치유가 뭐냐, 지금 그분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세요. 지금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세요. 그래서 뜨거운 용광로 가운데 고생하는 분들의 고백 속에 지금도 주님이 나와 함께 계셔, 나는 그분의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여러분 참 희한한 게요 어려울수록 이게 더 실감이 가는 것이에요. 주님이 나와 함께하시는 이 은혜는 세상에 잘 나가고 모든 것이 평탄할 때 더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진짜 고통도 어렵고 눈물 날 때,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 더 잘 느껴진다니까요?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이제 하나의 용어를 말씀드리는데 플러스 원(+1)이라는 거예요. 나 플러스 원(+1) 예수 그리스도, 나와 함께 계시는 플러스 원(+1)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래서 오늘 용광로 속에서 함께하신 예수님에 대해서, 오늘 사실 설교 제목을 제가 ‘플러스 원(+1)되시는 예수님’ 이라고 하고 싶었어요. 저는 여러분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은 뭔가 달라야 한다. 그래서 다른 하나의 우리의 삶의 형태가 사실 팩트 리포트(fact report) 하는 사람이 있고 또 한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시각을 가지고 페이스 리포트(Faith Report), 보고만 하는 사람이 있고, 팩트리 볼트 바른 사람이 있고 믿음 보고만 하는 사람이 있다. 믿음보고를 하는 사람이 있다. 페이스트 리포트라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사실보고 정도가 아니라 우리는 우리도 눈이 있으니까 사실보고를 하지만 우리는 신앙 때문에 믿음보고의 보고자가 돼야 할 줄로 있습니다. 이거예요. 그러면 오늘 이 여기 말씀과 견주어 볼 때 우리는 이 땅에서의 우리 매일매일 삶의 현장을 사랑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진짜 어려울 때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주님을 깨닫는 그것이 뭐냐면 여러분 플러스 원(+1)이 되는 것이에요. 나 혼자가 아니라 플러스 원(+1)에 보고를 해야 돼 세 명 플러스 원(+1)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와 플러스 원(+1) 사실보고가 아니라, 사실보고는 나 혼자 감당하는 것이라 그것이라면, 믿음보고는 내 인생의 플러스 원(+1) 되시는 예수님과 함께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풀무불의 임재 공식은 플러스 원(+1)이에요. 다시요. 사실보고가 나 혼자 감당하는 것이라면, 믿음보고는 내 인생의 플러스 원(+1) 되어 주시는 예수님과 함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주일 앞에 서는 그날까지, 플러스 원(+1)의 인생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인생을 살아보면 마이너스 인생도 있어요. 마이너스 역할도 하는 사람도 있고 뺄셈만 하는 그런 환경도 있어요. 그런 사람 그런 환경을 만나면 우리가 에너지가 뺏겨요. 우리 주위 환경을 보면 에너지를 뺏는 환경들과 사건들이 너무 많아요. 제가 자세히 말씀을 안 드려도 여러분들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수많은 일들이 많이 일어나요!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는 마이너스 인생이 되면 안 돼요. 예수님은 우리 인생을 풀무불 속에서도 플러스 원(+1)으로 함께하시는 주님이신 줄로 믿는 것이에요. 오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풀무불 속에 들어갈 때는 그냥 세 사람 플러스 제로(3사람+0)였지만 오늘 풀무불 속에 함께 계신 예수님 때문에 뚜리 플러스 원(+1)이 된 것이에요. 부모들에게는 이 플러스 원(+1)이 돼야 할 것이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는 원 플러스 원(1+1)이 돼야 할 것이에요. 사람의 교회 이런 정신을 가지고 7천기도 용사를 하는데, 7천기도 용사를 하는데 7천기도 용사 7천 플러스 원(7000+1)이 돼야 할 것이에요. 요셉은 구덩이라는 풀무불 속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요셉 혼자서 울었던 게 아니라, 거기에 요셉 플러스 원(요셉+1)이 되었어요. 요셉 플러스 원(요셉+1)이 되니까, 창세기 39장에 보면,
 
*창세기 39:2~3,
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여러분 풀무 불 상황 속에서만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거예요? 아니 풀무 불 전에도 다니는 세 친구와 주님은 동행하셨어요. 다니엘서 1장에 보면 3년 동안 훈련받을 때도 주님 함께 하셨고, 다니엘서 2장에 보면 세 친구가 각도에 흩어져 가지고 공직을 수행할 때도 함께 계셨어요. 평소에 함께하셨던 주님께서 결정적인 카이로스의 시간에, 예수님이 크리스토파니(Cristophany)로 나타나셔 가지고 결정적인 순간에 크로노스의 시간을 카이로스의 결정적 기적의 시간으로 만들어 주신 것이에요. 세 친구와 이미 동행하고 계셨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강력함으로 나타난 것이에요. 그래서 용어를 제가 하나 만들었는데,
 
▷평상시 크로노스의 플러스 One(Plus One)의 임재가 결정적인 시기에 믿음으로 풀무 불에 들어가는 순간 카이로스의 플러스 원(Plus One)의 임재가 되어 주신다.
예수님은 평상시에 크로노스의 플러스 원(+1)을 임마누엘로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그런데 결정적으로 우리가 결정적인 시간에 이걸 깨닫고 헌신하고 풀무 에 들어갈 때에 카이로스 플러스 원(+1)을 만들어주시는 거예요. 평상시 크로노스의 플러스 원 크로노스란 말은 그냥 연대기 일반적으로 살아가는 그런 삶의 주님이 우리의 임재가 결정적인 시기에 믿음으로 풀무불에 들어가는 순간 카이로스 플러스 원(+1)이 되어 가지고 기적이 일어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이에요. 기적 공식이에요. 오늘 이 마음을 가지고 여러분 가정 지키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자신도 지키시길 바라고, 교회도 지키고, 이민족도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뭐 뻑 하면 힘들면 이민 간다고 그러는데, 그런 이야기 하지 마시고, 여러분 그런 거 말씀하지 마시고, 하나님 어려울 때도 하나님 이 가운데 플러스 원 되어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이런 플러스 원(+1)의 인생이 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주는 사람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 플러스 원(+1)이 되는 인생이 되고, 역사와 민족 앞에 플러스 원(+1)이 되는 인생이 될 줄로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북 스토어를 사랑 플러스로 지어놨어요. 그래서 앞으로 북스토어 간판을 사랑 플러스 원(+1)으로 바꿀 거예요. 사랑 플러스 원(+1), 전 세계 성도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를 대라 그러면, 많은 분들이 “여호와는 나의 목 자신에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우리 23편 1절도 좋지만 4절이 더 좋아요.
 
4절 내가 사망에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사망의 골짜기에서 주님이 나에게 사망이 음침한 죽음의 골짜기에서도 주님이 나에게 플러스 원(+1)이 되어 주시는 것이에요. 혼자, 이 세상 사람들은 잘나고 뭐 있고, 권력하고 모든 것, 지혜 이런 거 지식에 대해서 관심이 많지만 오늘 저와 여러분의 최고의 관심은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에요. 그리고 이것은 어려울 때일수록 더 실감을 한다니까요? 어려울 때일수록 여러분 어려울 때 저는 보면요 어려울 때, 주님의 이거 더 실감하면서 간절히 기도하고, 막 그냥 창자가 꼬이도록 어려운 기도 제목들이 많잖아요. 창자가 꼬이도록 간절히 기도했는데, 그 순간 자체는 나에게 해답이 없었어요. 당장은 해답이 없었어요. 지나고 나니까 하나님이 다 해답해 주셨어요.
 
시간은 좀 걸렸지만 그런데 지나고 나니까 가장 큰 가장 큰 해답은 뭐냐, 정말 어려울 때 창자가 꼴 정도로 기도의 제목이 심각했을 때, 주님의 임재를 끼면서 강하게 기도하고, 매달렸을 때 그리고 저는 어려울 때일수록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모든 해답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방향을 잡는 것이에요. 이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그리고 모든 해답은 뭐냐면 어려울 때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에요. 여호사밧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그 자체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려울수록 플러스 원(+1)을 느끼고, 기도할 때 지나놓고 보니까 당장 답은 없었지만 어려울수록 주님의 임재를 느끼며 간절하게 매어 달리는 기도한 자체가 최고의 응답이 된 것이에요. 아멘! 자 어려울수록 주님의 임자를 느끼면서 간절히 기도할 때, 자체가 기도에 응답이 되는 것이에요.
 
따라서 예수 믿고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도 하나님의 플러스 원(+1)의 임재의 은혜를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고 그냥 맹숭맹숭 적당히 산다면 그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것이고. 심지어 좀 세게 말해 저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에요. 예수 믿고 모든 것이 잘 되어가지고, 내 힘으로 모든 것이 잘 되고, 모든 것이 평탄해 가지고 하나님의 임재와 기름 부으심과 하나 선생님이 함께하심을 정말로 사모하고, 매어달리지 아니하고 적당히 해서 다 잘 된다면 여러분 좋은 거 아니에요.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고, 남북통일을 위해서 기도하고, 우리는 우리의 삶 자체가 막 그냥 뭐 압박을 당한다든지 막 칼로 찌를 정도로 그렇게 하지는 않잖아요? 나라를 위해 있기도 하고 통일을 위해 있기도 하고 경회를 위해 있기도 하다 보면 가스 마려할 일들이 많이 생긴다고요.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를 느껴가지고 더 영광을 사모하고, 더 찬양하면, 그것 자체가 기적이 된다는 거예요. 자체가,,, 그것 자체가, 결론은 풀무 불에서 구원받으면 세상이 뒤집어지는 것이에요.
 
IV 풀무 불에서 구원받으면 세상이 뒤집어진다.
 
풀무 불 가운데서 네 번째 사람이 거리는 걸 보고 느부갓네살 왕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어요. 26절에 풀무 불 아기 그게 밑에 통이 컸어요. 밑에서 사람이 그리는 걸 보면 밑에서 본 거예요.
 
*다니엘 3:26,
26 느부갓네살이 맹렬히 타는 풀무불 아귀 가까이 가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하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 가운데에서 나온지라.
-저는 진짜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결단하는 자리에는 이런 결과가 나타난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래서 저는 믿는 사람이 풀물 불을 결단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좀 더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이에요. 좀더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수준으로까지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날이 우리 교회와 개인과 이민족에게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영광을 바라보고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 임재 자체가 응답이라고 믿고, 진짜 하나님을 기대하고 찬양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대면하게 되는 것이에요. 하나님 앞에 부딪치게 되는 것이에요. 거꾸로,
함께하셔서 결단하는 자리에 하나님께서 이런 대반전의 역사를 이루신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이 우리가 제대로 풀무 불을 결단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대면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29절에,
 
*다니엘 3:29,
29 그러므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언어를 말하는 자가 모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경솔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을 거름터로 삼을지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하더라.
그 당시에 황제의 조서는 지금 우리 시대로 보면 SNS가 퍼지는 것이에요. 앞으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질투하는 모든 인간들, 한 번 더 해봐라 ‘그 몸을 쪼개고 집을 거름 터로 삼을지니.’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을 것이다. 사실 우리 하나님은 이런 법적 조치가 필요 없어요. 인간에게 이런 법적 조치 받을 필요도 없어요. 그 당시 최고의 무소불이에요. 황제가 권력자 하나님을 찬양하는 거예요. 누가 찬양하라고 해달라고 했나? 찬양하라고 여기에 보니까 시대의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언어라고 했어요. 아벨론의 신 정도가 아니라 천하 만고의 신들을 KO시키는 결과가 나왔어요. 세 친구들이 풀무 불에 들어가겠다고 순교조인 결단하고 난 다음에 당시 정치 세계에도 글로벌하게 영향을 끼치게 된 거예요. 왕의 조서가 최고의 SNS가 되어 가지고 각 언어로 각 나라에 퍼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은혜가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전 세계를 다녀보면 뭐 여러 나라가 다 주님 잘 섬기지만 한국 교회가 희망이에요. 사랑의 교회 사역이 한국 교회 사역이 올해는 ‘10.23’, 한국 교회 섬김의 날 사역이, 오늘 왕의 조서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전 세계 드디어 30절에,
 
*다니엘3:30,
30 왕이 드디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지방에서 더욱 높이니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초라한 아주 연약한 유대 민족이었고 초라한 포로였지만 그가 섬기는 하나님 때문에 제국의 모든 신들과 모든 권위들이 하루아침에 KO당했어요. 우리 식으로 말하면 강원도 홍천의 무명축구팀이 지금 프리미어 리그의 멘시티와 아스날을 10대 빵(10:0)으로 이긴 거예요. 저 강원도에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하기 짝이 없다. 원통 골엔 인제에 있는 축구팀이 파리의 샹제르망을 15:0으로 이긴 거예요. 별로 반응도 안 하시고,,, 사무엘상 30절 다 같이 우리 크게 보겠습니다.
 
*사무엘상 2:30,
30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이게 오늘 우리 시대가 오늘 우리가 감당해야 할 주님의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물론 주님을 열심히 섬겨도 세상 왕국에서는 높임 받지 못할 때도 있어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계산은 정확할 것입니다. 세상에서 높여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왕국에서는 반드시 높여 주실 것입니다. 알다 보면 풀부 불을 경험합니다.
 
※존경하는 목사님이 계 목사님이라고 계시는데 그분 목사님 사모님이 계은덕 사모님이세요. 사별함을 이렇게 했어요. 이번에 최근에 책을 하나 썼는데,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이라는 책을 썼는데 이 사모님은 자녀가 없으시고 미국의 USC라는 좋은 대학의 의과대학 교수셨어요.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암이 두 암이 왔어요. 두 암이 와가지고 지금 뼈만 남았어요. 근데 책을 쓰시고 저한테 추천사를 부탁했어요. 추천사를 써드렸어요. ‘수많은 사람들을 키운 좋은 사모님 교수님이기 전에 목사님 사모님, 몸에 두 암이 두 가지 암이 와가지고 완전히 뼈가 남아았어요. 그 다니시는 교회에서 막 특송을 하시는데, 특송한 내용을 써놓았어요.
 
♬귀하신 주여 날 붙드사~~, 마지막 특송이에요. 귀하신 주여 날 붙드사, 뼈만 남은 풀무불이에요. 여러분 저의 삶에 최고의 플러스 원은(+1)요, 주님이 날 붙들어 주시는 것이에요.
 
♣요약
오늘 우리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통하여 교과서를 주신 주님을 찬양해야 한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플러스 원은(+1)으로 임재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동행 하시니, 우리의 삶에 풀무 불을 두려워하지 말고, 삶의 뜨거운 용광로 속에서도 주눅 들지도 말고, 기독교 정신을 우리가 부끄러워하지 말고, 복음의 횃불을 들고 영적 기백을 가지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처럼, 이 시대를 승리해야 한다. 질병의 용광로 속에서, 경제적인 용광로 속에서, 어려움 가운데서도 플러스 원 되시는 예수님이 가장 귀한 자본임을 확신해야 한다. 우리가 풀무 불에 던져질지라도, 정면 돌파하게 해서 풀무 불을 회피하지 말고 승리하는 온전한 제자로 살아내어 주님께서 결코 너희를 버려두지 아니하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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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헌신 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4년 04월 13일)
제목: "말세의 믿음을 보겠느냐?"
말씀: 누가복음 18:3-8
찬양인도: 직장인 순장반 찬양팀
대표기도: 권영란 집사님(여제자1반 총무)
사회: 김대규 부목사님
말씀읽기: 이송신 형제(청년 5국), 김정현자매(대학4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ㅡㅡㅡㅡ
 
*누가복음 18:3-8,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ㅡㅡㅡㅡ
 
할렐루야!!! 자, 앞뒤좌우 옆에 “기도의 동지들입니다.” “7,000 기도 용사의 동지들입니다.” 오늘은 칠천기도용사에 기도하고, 또 우리가 같이 나누고 우리가 마음을 집중하고 그런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성경적으로 7,000 기도용사는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는 몇 명이 있다구요? 하나님께서 선지자 엘리야에게 나만 남았다고 그랬을 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얘, 너만 남은 거 아니야.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자는 7,000기도 용사가 있다. 7,000이 있다. 그랬을 때 우리가 그런 내용들을 보면서 또 하나는 사랑의 교회가 2003년도, 2004년도 가을 특새를 마치고 난 다음에, 수많은 분들이 모이니까. 이렇게 특새만 모이면 되겠나, 경건의 특수성이 우리 일상성으로 특새가 1새가 되어야 한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7700 기도 용사를 만들고, 700 기도 선봉대가 있어 갖고, 화요일마다 모여서 네 이렇게 해서 오늘까지 내려왔는데 이제 나라 통일 또 세계 선교 마무리 사랑의 교회가 갖고 있는 나라, 국제화 이런 일들을 잘 감당하고 특별히 ‘2033-50비전’을 더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이 7,000 기도 용사의 이 사명이 순명이 되게 알려 주십시오. 사명이 사명을 순종할 때 그것을 일컬어서 순명이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집중력을 가지고 될 때에 하나님께서 이민족을 원하시리라고 믿습니다. 이걸 제가 늘 말씀드린 영적 제곱근의 원리, 만 명이 바뀌려면 몇 명이 바뀌어야 됩니까? 다시 만 명이 바뀌려면 몇 명이 바뀌어야 합니까? 100명이 바뀌면 100명이 똘똘 뭉치면 만 명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고 7,000이 똘똘 뭉치면, 몇 명이 바뀐다고요. 4900만 5000만이 바뀌게 되는 것이에요. 또 보니까 지금 우리나라가 5000만 인구가 이렇게 깨어졌어요. 4000만 500만 인가부터도 깨어졌더라고요. 그런 면에서 하나하나 7,000개를 용사답게 찬양도 하고 뭐 이런 좀 엇박이 많대요. 보니까 그러니까 이게요 ㅋㅋㅋ~ 그냥 되는 게 아니라, 반주자도 본래 반주자가 아니고 다 이게요 다 조화가 돼야 되는 거예요. 그래도 수고 많이 했어요. 이게요 잘 되는데, 잘하는 건 아무리 힘들지 않아요. 이게 쉽지 않은데 잘하는 게 힘든 거예요. 진짜 그러니까 다 잘하는 거 누가 못해. 다 사랑하고 우리는 잘하지 그러나 우리의 힘을 모아서 마음을 모아서 같이 동질적 의식을 가지고 애를 쓴ㄴ 것, 그것이 더 중요하다고 아멘!!! 한국교회가 다 잘할 땐 잘하는 건 누구나 다 잘하죠.
 
80년대, 90년대 초반에, 누구나 잘하는 잘하지, 지금 나 안 된다. 안 된다. 비판주의, 비난주의, 패배주의, 냉소주의 이런 거 있을 때, 우리가 끝까지 잘하는 것은 그게 진짜란 말이에요. 아멘. 그게 진짜란 말이야. 그 내가 지금 막 적어놨어요. 토비새(토요비전새벽기도회)는 여러분, 내 심중 있는 말들이 나가니까 내일은 얘기 내일은 선거에 선자도 이야기 안 할 것이에요. 제가 그렇죠. 제가 어디 중요한 선교회, 선교 집회하고 이런 거 갔다 오면 갔다 오면, 그다음 주는 제가 얘기 안 해요. 다들 갔다 오면 얘기할 것이다. 이런 사람의 사역에서 의표를 찔러야죠.
 
의표를 어떻게 찌르는가? 오늘 1면 좀 보세요. 하나님의 군대, 세상을 바꾸는 하나님 맺힌 기도군대, 기도의 용사가 되어 주님의 지상명령 ‘2033 50 비전’을 순명으로, 사명을 뭐로 한다고요. 순명으로 삼고 기도로 승리하는 바로 당신이 하나님의 뭐에 지팡이입니다. 여러분 기가 막힌 이 지팡이 뭐 이게 어딘지 알아요? 이거 그냥 모래사막에 꼽은 것 같애. 여기가 사하라사막이에요. 사라사막인데, 우리가 청년 최예술 자매가 리더인데 지팡이 번호 7,000 기도용사 지팡이로 185번, 빨리 받았네 사하라 사막에서 단기 선교 갔다가 거기서 찍은 거예요. 사하라 사막이에요. 이거 지금, 그러니까 이 옆에 또 발자국, 좋지 발자국 보세요. 이거는 실감이 잘 안 되고 파란 하늘 보이죠. 보입니까? 좀 더 크게 보여줄 수 없다. 사막에는 예수님 발자국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따라 사는 제자의 삶에 의미를 참 마음이 다짐하면서 주님의 발자국을 따라 갖고 있잖아요. 저쪽에 지팡이 번호가 몇 번이라고 했죠? 이런 자매가 시집을 잘 가야 되는데, 진짜 여러분 사하라 사막에다 기도의 지팡이 들고 가가지고 저기다가 꼽고 기도하고, 이걸 여기다 이거는 참 잘 한 것이에요. 우리가 잘하면 한국 사회가 바뀌는 것이 아시겠어요.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는 자들이 7000, 그리고 1차, 2차 특새를 마치고 난 다음에, 경건의 특수성이, 경건의 일상성으로, 특새가 1새로, 특새(특별새벽부흥회)에 주신 은혜가 삶의 현장에서 20여 년 동안 우리가 해 왔는데, 이것이 ‘2033-50 비전’을 우리가 그대로 이 시대에 우리의 우리가 건강할 때 이루기 위하여 나라를 주신 영적 이 용사들, 세상을 바꾸는 군대일 줄로 믿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말세 믿음을 보겠느냐?’ 그랬는데 한마디로 얘기하면 이것입니다. 한 마디로 얘기하면, 한마디로 얘기하면 말씀을 붙잡지 않으면, 세상의 쓰나미에 쓸려간다. 우리 여러분,
 
▷말씀을 붙잡지 않으면 세상의 쓰나미에 휩쓸려간다.
-말씀을 중심으로 살지 않으면 우리는 날마다 흔들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 이 새벽에 나와서 기도하는 여러분들은 오늘 핵심이 뭐냐 하면, 다시 한 번 크게 시작 말씀을 붙잡지 않으면 세상의 쓰나미에 휩쓸려간다. 히브리스 2장 1절에 보면, 뭐라고 나와 있느냐 히브리스 2장 1절의 시작
 
*히브리스 2:1,
1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그러니까 말씀을 붙잡지 않으면 우리는 휩쓸려 떠내려갈 수밖에 없는 것이어서 여러분 말씀을 읽었는데 이 말씀이 뭡니까? 오늘 침입 앞에서 우리가 기도하는 것 중의 하나가, 오늘 보니까 그런데 1절에 보니까, 항상 기도하고, 뭐 하지 말아야 한다고요.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구요. 제가 한 번씩 말씀드리지만 기도 안 하는 사람이 낙심합니까? 기도하는 사람이 낙심합니까? 기도 안 하는 사람도 낙심하지만, 고차원 쪽으로 올라가면요 기도하는 사람이 낙심하는 거예요. 왜 기도하니까, 기도해도 답이 안 이루어지는 거예요. 저는 수많은 중요한 기도 제목들을 놓고 그 시기는 기도 밤을 새워서 기도하고, 가슴 떨리게 기도하고, 그다음에 막 그냥 눈물로 기도하고, 그다음에 밥도 못 먹고 기도하고, 기도였을 때, 그때 그 기도의 응답은 바로 안 이루어진 일들이 많았어요. 막 가슴앓이 하고 밤새워 밤새우고, 그다음에 금식하고, 그다음에 금식하고 그다음에 막 정말 다윗처럼 미치게 기도하고, 그런데 고 순간은 기도 응답이 안 됐어요. 그러나 크게 보면 다 응답된 줄로 믿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런 과정들을 통하는 것이에요. 기도하다 보면 우리가 이 문제를 어떤 문제를 앞에 놓고 간절히 기도하는데, 오늘 무례한 재판관과 이 낙심하는 과부가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런 내용을 말씀하면서 이 내용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면 말씀 때문에 우리가 휩쓸어 내려가지 말아야 되는데, 말씀 때문에 이 세상의 흐름에 휩쓸어 내려가지 말아야 되는 이유는, 18장 앞에 예수님의 종말에 대해서 17장 34절 35절에,

*누가복음 17:34-35,

3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35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뭐하고요. 데려가 버리고 하나는 뭐야? 버려두고, 그러니까 말세에, 말세가 되면 그러니까 과거에 이 고대 근동 사회에 시체가 되어 있으면 화장을 안 하고 장례를 치르든지 할 때, 안하고 독수리가 쪼아 먹는 거에요.
 
*누가복음 17:37b,
37 이르시되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어떤 시체도 그리고 저희 중앙아시아 쪽에는 조장이라고 있잖아요? 그냥 아예 시체를 내놓고 제대로 진짜 먹도록, 시체가 있으면 죽음이 확실하다 그거는 뭐 예외가 없다. 마찬가지로 오늘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 인류의 역사는 반드시 그리고 종말이 있음을 우리 역사도, 삶도 똑같다 개인, 개인도 죽음에는 예외가 없다. 우리는 주님 앞에, 하나님 앞에 우리가 사명에 다하면 반드시 부름 받는 줄 믿습니다. 그러면 부름 받는 건 뭔가? 우리가 개인의 말세도 있고, 역사의 말세도 있고, 그다음 우리 하늘나라의 전체 복음의 역상에도 말세가 있어요. 오늘 18:8절 뒤에,
 
*누가복음 18:8,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오늘 토비새에 나와서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들은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물어보셨을 때 그렇습니다. 제가 주님을 향한 순절한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주님이 내 것인 사명에 대한 순종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순종하는 믿음이 뭐로 표현돼요? 오늘 주님께서 이 불의한 재판관 때문에 고통당하는 이 과부가 갖는 이 태도가 이 태도가 너무 중요한데, 이 태도를 통한 교훈을 말세에 제대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는가? 말세 믿음이 제일 중요한데요. 사실은 따지고 보면 오늘 기도에 관한 내용인데 따지고 오면 기도 말세 제대로 기도하는 사람을 보고 있느냐, 이렇게 물어보셨는데 여기에 보니까, 말세 믿음을 그러니까 어떤 경우에도 여러분 말씀을 붙잡고 시대의 흐름에 휩쓸어 내려가지 않는 이 기도하는 사람의 어떤 믿음을 통하여 나타나는데 믿음이 바로 기도한 것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믿음 좋다. 하는 말은 어떤 경우에도 태도의 자세를 건드리지 않는다. 라는 것이 믿음 좋다는 것으로 표현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변화되면, 말씀을 붙잡고 시대의 흐름에 휩쓸려 가지 않는 것인데,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저와 여러분은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수많은 세상적인 경험과 세상자의 가치관을 갖고 있어요. 세상적인 신념을 갖고 있어요. 그 세상적인 가치관 경험 신념을 갖고 있는데, 내가 갖고 있는 세상의 가치관과 경험과 신념보다 말씀이 앞서야 되는 것이에요. 이것이 예수 믿고 변화된 하나님의 백성에 아주 현저한 특징이에요. 예를 들어, 수학의 부등호, 알죠? 하나님의 말씀이 부등호, 그게 무슨 말이냐, 하나님의 말씀이 부등호, 내 경험과 지식과 이념 모두 앞선다. 이거에요. 누구든지 믿음이 내 경험과 신념과 가치관보다도 앞선다 이거예요. 좀 더 깊이 들어가면 기도하는 자세와 기도의 집중력이 내 경험과 가치관과 신념보다 앞선다 이거예요. 그래서 사랑의 교회 교우들은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로 믿습니다. 이 땅에 살아가지만 우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에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법을 우리가 법의 통치를 받아야 되는 것이 법의 통치의 핵심은 뭐냐 말세의 믿음을 보겠느냐? 말세 내 경험과 가치와 신념보다도 부등호로 말씀과 믿음과 기도가 더 앞서고 있겠느냐? 멀리 새벽에 나와서 7,000 기도 용사의 번호를 가지고 또 뭐 사 과정상 오지는 못하지만 공간적으로 오질 못하는 분들이 있을지라도, 오늘 이 오늘 수천 명이 오늘 여긴 그 들어오거든요. 저기 뭐예요? SNS로 들어오거든요. 어쨌든 간에 오늘 이 자리에 들어온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의 동지들인 줄을 믿습니다. 아시겠죠.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는 7,000 기도 용사가 되는 줄을 확신하는 것이에요. 경건의 한 지난 주간에 우리가 받았던 특세 은혜가 많은데 그 특새의 은혜를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꾸준하게 유지하려면 7000 기도 용사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제가 뭐 자세히 말씀드리지 않아도 누가복음 18장에 있는 이 내용은 어느 재판장에 너무너무 재판장 악질이었어요. 과부가 어떤 사정이 있는데, 뭐 과부의 사정이 뭔지 저는 다 제가 잘 몰라요. 그러나 너무나 억울한 사정이 있는 것 같아요. 재산을 몽땅 누가 가져갔거나,,, 너무나 억울한 거죠. 혼자 사니까 이거는 혼자 해결하기 벅찬 문제였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자식도 식구도 없고, 그러니까 이제 4절에 재판장을 찾았는데 재판장이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막돼먹은 재판장이고 요즘 같으면 이런 못돼먹은 재판장 내가 뭐 그러니까 바꾸겠다. 밤 날마다 부르짖는 것이에요.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어라 뭐라고 돼 있어요. 6, 7절 같이요.
 
*누가복음 18:6-7,
6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 지금 아까 말씀드린 제가요 많은 기도 앞에 있는 중요한 기도 전부들 앞에는 없고 그 모든 문제도 해결될 수 있도록 눈물로 기도하고, 금식하며 기도하고, 그다음에 찬양하며 기도하고, 하나님이 연구할 사항 없기도 하고 다 기도할 때도 당장 해답이 안 나올 때가 많았어요. 당장 응답은 안 됐어요. 그러나 밤낮 부르짖는 하나님 앞에서의 자세가 있을 때, 결국은 다 하나님 응답해 주실 것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 국가적으로도 그러고 여러분 생각이 좀 당장 응답은 안 되더라도 결국은 하나님이 응답해 주실 거예요. 이게 결국은 이게 믿음이에요. 이게 오늘 우리 칠천 기도 용사는 끈질긴 과부의 자세가 필요한 것이죠. 끈질긴 에이 불의한 재판관들이 얼마나 많은지 불의한 재판관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밤낮 부르짖는 자들을 밤낮 부르짖는 것 때문에 응답하거든. 하물며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오래 참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교회 40대 50대 때면 이 땅에는 40대 50대가 정신 차리라고 믿는 거예요. 사랑의 교회 40대 50, 우리 교회는요 30대가 제일 많아 우리가 등록이 10만 명이 됐는데 10만 명 이상 돼요. 30대가 3만 2000명이에요. 30대예요. 뭐 40대가 될 때 정말로 우려가 있잖아요. 정말로 마음속에 간절해요. 결국은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는 것이에요.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뭘 보겠느냐, 종말론적 입장에서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의 입장에서, 아니면 내 인생이 그래도 주님 앞에 곧 얼마 있으면 설 것이라는 확실히 믿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에, 그걸 너희들이 믿는다면, 정신을 차리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안타까운 심정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왜 기도하는 사람을 보겠느냐? 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왜 인사가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기도는 믿음의 표현이고, 기도와 믿음은 같이 가는 줄로 믿으셔야 되는 것이에요.
 
기도가 믿음이라는 말은 불평 대신에 감사하는 것이고, 기도가 믿음이라는 말은 내 한탄에 있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더 신뢰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세상은 이 세상은 너무 짧다 너무 치열합니다. 불신하게 환경들 불신하게 생태계가 너무 많고 원통한 일이 너무 많아요. 그럴 때 유다서 1장 20절에,
 
*유다서 1:20,
20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자 이런 우리 수많은 생태계 이런 상황 가운데서 거룩한 믿음이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무슨 뜻입니까? 성령으로 지속자인 기도를 하려면 반드시 우리가 믿음 위에 서 있을 때만 가능한 줄 믿으셔야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믿음 위에 세대로 서 있어야 제대로 된 기도를 끝까지 할 수가 있다는 것이에요.. 믿음은 우리의 내적 표현이고 내적 표현의 자연스러운 열매와 결과가 기도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과부처럼 억울할 때, 하나 앞에 기도할 때, 자연스럽게 우리가 뭘 봤느냐, 무슨 능력을 받느냐, 마음속에 쓴 뿌리와 원한이 있는 사람이 쓴 뿌리와 원한을 갖지 아니하고 그 쓴 뿌리와 원한을 뛰어넘는 것이에요. 사람은요, 원한을 풀지 않으면 쓴 뿌리를 풀지 않으면 그것이 독이 되고 오염이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 그것이 우리를 괴롭게 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래서 대한민국은 지금 쓴 뿌리하고 원한들이 뭐냐 하면, 독이 되고 오염이 돼 가지고 나라를 이상한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는 그런 환경이 되는데 그러면 안 되는 거예요. 여러분, 절대로 우리는 그걸 뛰어넘어야 할 줄을 믿는 것이에요. 제 말이 아니라 히브리서 12장 15절에 원어 문을 크게 읽습니다.
 
*히브리서 12:15,
15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쓴 뿌리가 때문에 사람들을 더럽게 하지 않도록, 쓴 뿌리를 남기지 않도록, 원한을 남기지 않도록 그것을 뛰어넘는 기도의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뜻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능력이 나타나는데, 능력이 뭐냐 하면 우리로 하여금 쓴 뿌리와 원한을 극복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에요. 쓴 뿌리와 원하는 사탄의 놀이터를 만드는 거예요. 우리의 내 마음과 뿌리지 이 시대를 갖다 와요. 사탄의 놀이터를 다른 길이 없어요.
 
사랑의 교회 지금 기도하는 여러분들과 한국 교회 성도들의 기도하는 걸 통하여 우리 민족에게 임한 5000년 동안 안에서 빠글빠글 안에서 그냥 서로 원한 주고, 서로 비교하고, 서로 상처받고, 여러분 지금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 한국은 그래도 잘 사는구나! 미국 잘 산다 하지만 미국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에 가 보면요. 수많은 사람들이 홈리스예요. 홈리스 되가지고 마약 때문에, 홈리스 되고 뭐 여러 가지 사상으로 홈리스 되고, 일본에 일본의 신주쿠라든지 일본의 뭐야? 도쿄 유명한 우에노 공원 같은 데 가보면 거기에 홈리스들이 텐트를 치고 수많은 사람이 살아요. 내가 작년에 지난 12월 달에 가보니까 홈리스들이 있더라구요. 대한민국 그런 거 물론 서울역 앞에 이런 힘든 분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세계 전체적으로 비교하면 우리나라는 이 상대적으로 비교를 하니까 내가 좀 못한데 여러분 만약에 개인당 25만 원씩 받아갖고 100만 원 가족 받고 다 쓰고 죽어버려요. 후대가 어떻게 살겠어요? 후대가? 20대 야 30대는 어떻게 살겠냐구요!!. 무슨 성장의 동력이 있어야 나라가 희망이 있지요... 내가 한번 얘기했잖아요.. 아프리카 어느 나라 가면 아무도 안 받아줘 그거는 우리 신사임당 갖고 뭐야? 사우스아메리카 남미, 볼리비아 같은 데 가면 아무도 안 받아줘요 그거 진짜 그거 아무것도 아니지 우리는 기축통화가 아니에요. 우리는 유로라든지 엔이라든지. 달러가 아니에요. 우리는 심지어 중국의 위안화도 아니에요. 대한민국 원을 아무것도 이니에요. 우리가 제대로 살아가지고, 이 경제적인 크레딧이 생겨갖고 국가 부채를 낮추고, 이래갖고 우리가 잘 딴딴하게 기축통화가 될 때까지 스위스 프랑스처럼 잘 돼 가지고 기축통화가 될 때까지는 국가 부채 율을 높이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야 20대 ,10대, 30세대가 우리가 좋은 것을 물려주어야지, 빚을 물려주면 안 되는 것이에요. 정말 그런데 어떤 당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면 교수라고 하는 인간들이 많이 나와 가지고 엉터리 같은 얘기를 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마음의 원한을 가지면 안 되고, 그것을 우리는 원한을 풀어야 되는데 원한을 풀지 않으면 뭐가 된다고요? 쓴 뿌리가 되는 것이에요. 사탄의 놀이터가 되는 것이에요. 여러분과 제가 정신 똑바로 차리고 7,000 기도 용사, 우리만 똘똘 뭉쳐가지고 이거 노사모도 세상을 바꾸는데 대한민국의 사랑의 교회가 7,000 기도 용사가 되어서, 그다음에 수많은 새벽에 기도하는 각 교회도 6만여 교회, 전 세계 토요일 아침에 이와 같이 해야, 새벽 6시에, 6시에 나와 가지고 그래서 기도하는 나라가 거의 없어요. 그래서 정신 바짝 차리고, 오늘 보니까 바로하면, 칠천 기도용사가 바로가면 말세 믿음을 보겠느냐? 가 다른 말로 말세에 뭘 보겠느냐, 기도의 능력을 주시는 것이에요. 우리 속에 있는 쓴 뿌리, 우리 속에 있는 원한 모든 것을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정화해 주실 것을 바라는 것이에요. 많은 분들을 위로해 드렸어요. 많은 분들을 원희룡 형제에게 제가 위로해 드렸어요. 정신 바닥 차리라고,,, 그리고 또 우리 하여튼 또 여당도 야당도 다 위로해 드렸어요.
 
저는 어릴 때부터 모세가 되어라, 모세가 되어라 라고 하도 들어가지고, 모세에 대해서는 제가 전문가 중의 하나거든요. 여러분 모세가 광야에서 40년 동안 인도했던 백성들은 정말 순종적이고, 괜찮고, 은혜로운 백성입니까? 아니면 좀 못됐고 정말 있잖아요. 못돼먹었어요. 어떻게 되는 거예요. 못돼먹었어요. 못돼먹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래도 참고, 참고, 참아서 내가 차라리 내 이름을 제거해 주십시오. 그러나 저들을 살려달라고 못돼 먹은 백성 지도자로 세워가지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려고, 했듯이 아무쪼록 위정자들, 이 자리에 있는 성도들, 기도하는 모든 분들, 힘들고 어려운 것 많아도 우리가 마음의 쓴 뿌리와 원한이 많아도, 믿음으로 기도를 새롭게 하여, 담대하고, 거룩하고, 은혜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모두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배려하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기도하는 자세요. 사명을 순명으로 감당하는 자입니다. 이 시간 찬양을 하겠습니다. 그래서 칠천기도 용사로 되기를 원합니다. 꼭 그렇게 될 줄 믿습니다. 찬송을 하면서 기도를 올려드립시다. 1초 화살기도, 3초 거룩 기도, 5초 세상을 바꾸는 사명의 기도를 드립시다.
 
토요일 이전 새벽 예배를 15분을 더 늦추려고 합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예 그러니까 왜냐하면, 다 와서 앉아 있어야 되니까. 그리고 대신 아이 일찍 오셔서 하시는 분들이 6시부터 6시 반까지 오셔서 조용히 기도하는 시간을 갖도록 해드리겠어요. 이렇습니다. 개인적으로 와서는 기도하시고 6시 30부터는 우리가 기백을 가지고 6시 반에는 여기가 꽉 차서 넘쳐 가지고 정말로 이 곳이 미어터질 듯이 해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 이 기백이 오늘 이민족 향하여 흘러가리라고 믿는 것이에요. 그래서 7천 기도용사, 4월 27일 날 천 부장, 백 부장, 50 부장, 서임 식을 하고, 그다음에 본격적으로 한국교회 앞에, 또 우리 교회 앞에, 전체적으로 7,000 기도용사 발대식을 5월 18일 날 하겠어요. 5월 18일날 한 달 동안 준비해 가지고, 5월 18일 우리 교회가, 제가 이 발대한다고 그러니까 칠천기도용사, 천 부장 우리 지금 준비하시는 분들 중에 어떤 분이 ‘목사님 소 한 마리 내겠습니다.’ 어 잘 됐네요, 그러면 5월 18일 날 7000 기도 용사 발대 시간은 그날은 우리 교회가 헌당식 할 때처럼 은혜를 받게 하여 주시오옵소서. 여러분 헌당식 할 때 어떻게 했는지 아시죠. 2019년도에 그때 소 10 마리인가 잡았거든요. 뭐 하여튼 10 마리까지 못 잡고 소 몇 마리를 잡을 거예요. 잡아 가지고 우리가 진짜 발대식을 하고 온 교우들이 행복한 5월 달, 5월 18일은 너무 좋잖아요. 그죠 그리고 은혜와 능력을 가지고 5월 20일부터 5월 23일까지 우리 교회에서 전국 목사 장로 기도회를 합니다. 7천 기도용사 뒷받침해 주면 전국 목사 장로 기도하면, 목회자와 장로님들이 일어나고 바뀌면, 세상이 바뀔 줄로 믿는 것이에요. 그런 마음으로 우리가 물 흐르듯이 모델들이 다 진행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월 27일은 뭐하는 날이라고요. 많은 날이라고 7000, 천 부장, 백 부장, 50 부장, 십 부장, 임명하는 선임하는 날이고, 5월 18일은 잘 준비하면, 발대식입니다. 소 몇 마리 잡는다. 아시겠어요. 그래서 우리 모두가 다 정말 예수 믿는 일은 신나고, 기쁘고, 감사하고, 영광스럽고, 재미있는 거예요. 알겠습니까? 5월 20일부터 우리 전국 목사 장로회도 잘 감당하고 영적으로 뒷받침 안 되면 잘 안 되는 것이죠. 그렇게 기도하게 되면 좋겠습니다. 그다음 오늘 한 시에 1001차, 천 일차, 쥬빌리 기도회 및 한국교회 복음통일의 기도의 날을 우리교회에서 하겠습니다. 오늘 한 시에 여러분 시간 되시는 분들은 한 시에, 많이들 오셔가지고, 같이 기도합시다. 그러니까 “얼어붙은 한반도를 녹이는 환희의 기도를 준비하라 복음통일을” 그렇게 해서 오늘 제가 말씀을 낮에 1 시에 40분 전하겠습니다.
 
오늘 새벽에 말씀 전하고 오늘 한 시에 말씀 전하고 내일 일 부부터 사 부까지 하나님이 예배하신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담임 목회자를 위하여 눈물의 기도를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다음 4월 수선대후 부모 기도회가 오늘 오전 7시 50분에 우리 영아 부부터 고3 수험생 부모님과 자녀 교사들과 같이 기도하고, 하는 시간 갖겠습니다. 그리고 2024년 장애인 주간 기념 사랑부 미술 전시회가 오늘부터 5월 1일 수요일까지 사랑 아트 갤러리에 있습니다. 제가 보니까 장애인 우리 사랑부 미술전시회인데 아주 좋은 그림들이 많이 있어요. 감사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제 우리 3분 미라클 보고 개인기도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요약
우리 교회 믿음의 4대가 칠천 기도용사가 되어 도피성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기도 군대로 일어나 2033년에는 50%의 비전을 소망하며 우리교회 훈련생들이 육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성령의 능력의 권능을 의지하여 온전함의 고봉에 올라가 온 세상의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자가 되고, 역사와 부름 앞에서 사명을 감당하는 자로 쓰임 받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경쟁과 중독으로 가득 찬 정글 같은 세상을 너끈히 이길 힘을 도피성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야 한다. 말세에 믿음을 보시는 주님을 기억하여, 오직 기도이며, 죽음 외에는 예외가 없듯이, 죽음만이 새 생명을 살리는 길임을 깨달아서 나를 버리고 한 생명 한 생명을 함께 세워가는 칠천기도용사로 거듭나야 한다.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성도로 하여금 낙망치 말고 기도하도록 권하기 위함이다. 흔히 우리들은 기도 응답이 없으면 낙심하여 기도를 포기하고 만다. 그러나 응답이 쉬 나타나지 않아도 참고 기다리면 반드시 응답을 받게 된다. 바른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항상 기도하고, 쉬지 말고 간절하게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이기적인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깨어 기도해야 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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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04월 10일)

제목: "성령의 열매"
말씀: 갈라디아서 5:22-26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부목사님)
사회: 강건우 부목사님
 
설교자: 홍진기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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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5:22-26,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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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배를 통하여서 주님께 소리로 온전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인도하시는 은혜를 경험하는 시간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는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열매로 시작해서 열매로 끝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성경에는 많은 열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가장 처음 나오는 책인 창세기에도 창세기 2장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이후에 동산에 많은 각종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그중에 또 가운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라는 특별한 하나님의 명령을 주셨습니다. 인류의 가장 중요한 첫 사건이 바로 열매로 시작하는 것을 우리는 창세기 장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성경의 제일 마지막 요한계시록 2장에 봐도 열매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하시는 말씀으로 이 땅에서 많은 고난을 견디고 주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온 성도들과 교회에게 너희가 끝까지 지키고 이기는 자에게 하나님의 낙원에서 생명의 열매를 주시겠다. 라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창세기와 그리고 계시록 사이에 있는 서신서 그리고 복음서, 예언서 그리고 역사서에도 수없이 많은 열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가 잘 알고 또 흔히 듣 흔히 들었던 의의 열매 그리고 마음의 열매, 손의 열매, 회개의 열매, 좋은 열매, 나쁜 열매, 성경에는 많은 열매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고, 오늘 우리가 살펴본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 성도의 삶에 이 열매라는 거 의미를 가지고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열매는 풍성함에 대명사처럼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듯이 열매는 풍성한 열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열매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열매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열매라는 단어를 읽었을 때, 열매라는 이 말씀을 읽었을 때, 우리 머릿속에는 늘 풍성함을 떠올리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갈라디아서 말씀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풍성한 열매 맺는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마음을 우리가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풍성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이 시간을 통하여서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목자의 심정으로 원하시는 풍성한 삶이 경험되고 또 말씀에서 말씀하시는 풍성함을 우리만 우리 가슴 가득히 담고 삶의 자리로 나아가는 시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익은 성령의 아마 아홉 가지 열매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 외우시죠? 사,희,화,오,자,양,충,온,절.
 
처음부터 시작 네 그럴 줄 알고 제가 준비했습니다. 그래도 여러분들의 자존심을 세워드리려고 한 글자씩만 띄웠습니다. 처음부터 한번 하나씩 떠올려 보겠습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잘하셨습니다. 네, 72구절 암송한 것 같죠 이렇게 아홉 가지 열매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 가운데서 맺기를 원하시는 말씀입니다. 근데 이 아홉 가지 열매를 생각할 때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내 삶과 이 아홉 가지 열매를 기억할 때, 열매의 이미지처럼 부요하고 풍성하고 아름답고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찬 그러한 뜨거움이 느껴지십니까? 사실 그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훨씬 많지 않습니까? 이 성령의 아홉 가지의 열매를 볼 때, 또 내 삶을 비교해 볼 때, 내 삶에서 이 아홉 가지의 열매가 풍성하게 맺어지지 못한 내 삶을 보면서, 아 그래 내 삶 가운데 이 아홉까지 열매가 풍성히 맺어져야 되는데, 그래 내가 이 아홉 가지 열매 중에 뭐 아홉 가지는 아니더라도 반절이라도 좀 맺으면 살아야 되는데, 이런 생각을 먼저 하게 될 것입니다.
 
솔직히 저도 하나님께서 저에게 너 삶에 있는 아홉 가지 열매를 나에게 내 놓으라 라고 하나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신다면 저도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내어놓을 만한 열매가 없는 것임을 저도 고백합니다. 내어놓을 수 있는 열매라고는 풍성하지도 않고, 다 자라지도 않고, 시장인 시장에다 내다 팔수도 없는 그런 열매들밖에 우리 속에 있지 않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닌지 살펴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서 좀 깊이 있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었던 본문뿐만 아니라 갈라디아서 전체 주제의 흐름을 흐름과 함께 이 본문을 집중하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열매가 누구의 열매냐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누가 맺느냐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누구에게 속한 열매냐? 라는 것입니다. 이 열매는 분명히 성령의 열매 다른 말로 성령님이 소유하시고 계시는 열매 성령님이 맺으시고 성령님이 주인이신 열매, 라는 의미로 분명하게 성경에서는 성령의 열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느 원어에도 프뉴마토스 라고 말하고 있는데, 프뉴마, 성령에다가 아토스라는 소유격을 붙여서 성령님께 속한, 성령님이 소유한 열매, 라는 의미를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혹시 이 열매를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그리스도인이 맺는 열매,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이 맺는 열매, 혹시 이렇게 성도인 내가 맺는 열매로 혹시 생각하고 있지 않은지, 우리를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님의 열매 그리고 나의 열매 우리에게 성령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데 있어서 아홉 가지의 이 열매가 우리를 우리 아홉 가지 열매를 우리의 삶에 맺음에 있어서 이 열매를 성령님의 소유로 성령님의 열매라고 우리가 인식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성령님은 도와주시는 분이고, 나의 저에게 힘을 주시는 분이고, 은혜를 주시는 분이고, 그래서 은혜로 내가 맺는 열매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한번 오늘 말씀을 통해서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물론 현상적으로 이 열매는 내 삶 가운데 내 삶의 모든 자리에서 드러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이 열매의 주체를 성령께 두느냐, 아니면 이 열매 맺는 사람 열매 맺는 주체를 내가 가지고 있느냐, 에 따라서 아주 다른 결과들을 가져오게 됩니다. 이 성령의 열매를 예수님께서 유아 모금 15장에서 비유로 말씀해 주신 포도나무 비유를 가지고 한 번 더 조금 더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이 말씀과 함께 살펴보면 우리가 맺어 우리가 맺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성령의 열매가 어떤 것인지를 조금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 말씀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4:1,-5,
1 나는 참 포도나무요 네 아버지는 농부라.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여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라. 아멘
-예수님은 포도나무고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나무를 돌보시는 농부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열매가 달리는 가지가 바로 저와 여러분이라고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맺고, 이 나무에서 나쁜 좋지 않은 열매가 맺는 중심의 핵심은 바로 가지가 어떤 상태에 있느냐 가지가 얼마나 열심히 열매를 위해 노력하고 왜 쓰느냐 거기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이 비유의 핵심은 가지에게는 아무 능력이 없고 가지가 나무에 잘 붙어 있느냐 나무가 나무에 이 가지가 온전히 붙어있느냐, 거기에 좋은 열매와 나쁜 열매의 기준이 있다. 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가져갈 일은 무엇입니까? 가지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오직 나무에 온전히 붙어있는 것입니다.
 
다시 성령의 열매 이야기로 돌아와서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 맺어지는 아홉 가지의 열매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갑니까? 아니면 내가 열매를 맺을 가지로 우리의 생명나무인신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붙어있는 것에 집중하고 있습니까?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1. 가지에 같이 가지인 우리의 초점이 열매 있습니까? 아니면 나무에 붙어 있음에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갈라디아서의 주제는 로마서의 주제와 동일합니다. 너희는 더 이상 율법에 속하지 아니하고 성령에 속하였다. 너희는 더 이상 조 종에 영예 악한 영들의 종에 있지 아니하고 율법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영을 그리고 성령의 종이 되었음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 갈라디아서의 주제입니다. 우리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원래 나무가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원래 나무가 율법이고 세상이고 육체 나무에 붙어 있으면 가지는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힘을 써도 아무리 자기를 절제해도 그 가지는 육체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 것이 그러나 갈라디아서 그리고 로마서에서 사도바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나무에 접붙인 바 되었다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접붙인 바 됨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열매,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3절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 이후에 이러한 성령의 열매는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열매 맺는데 누가 그것을 금지할 수 있습니까? 성령께서 열매 맺으시는데 누가 그것을 방해할 수 있겠습니까? 예전에는 우리가 율법 안에 내가 열매 맺으려고 했습니다. 26절 말씀에 보면, 헛된 영광을 구하며 우리가 살아왔다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5:23,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5:26,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내가 열매를 맺어서 내가 영광을 얻고 내가 열매 맺어서 내가 열매에 좋음을 먹으며 살려고 하는 그러한 헛된 영광을 구하며 우리가 살아왔습니다. 그렇지만 영광의 끝은 다툼과 시기와 투기만 남는다. 라고 합니다. 그랬던 저와 여러분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24절 말씀에,
 
 *갈라디아서 5:24,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바 되었습니다. 내 영광을 구하며 나 스스로의 나의 힘으로 내 능력으로 영광을 얻어서 열매 맺어서 내가 영광이 내가 스스로 영광 받고자 하는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 나가에 못 박혀 버렸습니다. 그래서 25절 말씀에, 우리는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이 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25,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나는 교회 다닌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신앙이 있으니까 당연히 포도나무 가지에 내가 붙어있다. 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으십니까 혹시 떨어진 줄도 모르고 열매 맺기에 초점을 맞추고 힘쓴 내 모습은 없습니까? 사도마을은 오늘 이 갈라디아서 말씀을 통해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너희를 이전에 묻고 있던 모든 율법은 다 벗어버리고 너희가 이제 율법이 요구하던 열매들은 다 내려놓고, 너희가 은혜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나무에 붙어 있게 되면 너희의 힘과 너희의 능력과 너희의 노력과 지금까지 너희들이 율법을 지키려고 애쓰던 그러한 모든 노력은 비교도 되지 않는 성령님이 그분이 직접 맺으시는 그분의 열매를 맛보게 될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정리하면 성령의 열매가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 안에 온전히 거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나무에 내가 붙어 있기만 하다면 성령께서 성령인 주관자 되시고, 성령인 주체가 되셔서 성령이 소유하신 열매를 우리에게 맺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우리 아홉 가지의 석류의 열매를 한번 보시겠습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지금까지 율법은 열매를 우리의 스스로의 힘으로 지키고 맺으라고 했습니다. 율법은 열매들을 우리의 힘으로 맺으며 살아오러 살아가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실패했습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아무리 애써도 조금의 열매가 맺어질지는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 드리기에는 너무나 부끄러운 열매들뿐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9가지의 열매를 너희가 힘써서 맺으라. 내가 도와줄 테니까. 너희가 애써서 맺어라. 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성령께서 내가 이 열매를 맺겠다. 라고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애쓰고 힘써서 얼마나 사랑해야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가 되겠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노력하고 참고 참아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그러한 열매가 되겠습니까?
 
구약에 많은 유대인들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쓰고 애를 쓰고 애를 썼습니까? 하지만 모든 열매들은 다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시대에는 이 열매를 우리에게 맺을 것을 요구하지만 우리 마음 가운데 계신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이 성령의 시대에는 성령께서 이 열매를 맺으시겠다. 라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할 일이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할 일은 바로 이것입니다. 같이 한번 있도록 하겠습니다.
 
2. 전신전략을 다해 생명나무의 신 예수 글씨도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의 가진 나를 통해 성령의 풍성한 열매를 맺으십니다.
-아멘 우리의 힘과 우리의 능력으로 맺으려고 했었던 율법의 조문처럼 사랑하려고 율법의 명령처럼 참으려고 율법의 명령처럼 인내하려고 애썼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우리의 초점을 우리가 맺으려고 하는 열매에 두지 아니하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나무에 얼마만큼 잘 붙어있는지에 대한 초점을 맞출 때에, 성령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열매 맺어주시는 줄 믿습니다. 가정에서 예수님께 온전히 붙어 있으십시오. 성령께서 열매 맺으실 것입니다. 우리 회사에서 사업장에서 다른 것 말고 예수님께 붙어 있으십시오. 그러면 성령께서 열매 맺으십니다. 심지어 우리가 예배드리고 봉사하고 전도하고, 다 나빠하고 제자훈련하고 사약훈련하고 모든 우리의 신앙생활 생월에서도 이 훈련을 받아서 내가 어떤 열매를 맺고, 내가 이 봉사를 해서 얼마만큼의 성숙해 가고, 내가 이것을 하여서 어떤 것을 하고, 하고가 아니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붙어있는지에 대하여서 초점을 맞추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주님의 생명나무에 붙어 있을 때 성령께서는 가진 저와 여러분을 통해 성령의 열매를 맺어주시는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한 가지 더 살펴볼 것은 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단수형으로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인데 성령의 열매들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 단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아홉 가지인데, 단수형을 쓴 이유는 이 아홉 가지가 결국 모두 하나라는 그러한 의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열매는 각각이 맺는 것이 아닙니다. 이 열매는 내가 열심히 맺어서 이것도 맺고 저것도 맺고 하는 그러한 나의 열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홉 가지의 열매 중에서 아홉 가지 다는 아니어도 적어도 몇 가지만이라도 맺어보자 몇 가지만이라도 맺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보자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종종 나는 충성은 잘 안 되는데, 사랑은 좀 되는 거 같애. 나는 화평은 안 되는데 절제는 조금 되는 거 같애. 석류의 열매는 이 아홉 가지의 열매는 무엇은 되고 무엇은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은 맺어지고 무엇은 맺어지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성경에 분명히 성경의 이 열매는 하나의 열매라는 메시지를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까?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저와 여러분의 힘으로 이 성령의 열매를 하나의 열매처럼 이 성령의 열매를 하나도 빠짐없이 맺을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열매는 나에게 속한 열매가 아니라, 성령께서 맺으시는 성령의 열매기 때문에 온전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아홉 가지의 열매는 한 번에 맺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요 우리가 생명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있기만 하면 그래서 우리는 삶 가운데서 이 열매들을 하나하나 떼어놓고 이것을 어떻게 맺을까?
 
이것은 좀 부족한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혹시 이런 질문도 하시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혹시 당신의 이 성형의 9가지 열매 중에 혹시 부족한 게 있다고 어떤 것이 있는지 혹시 생각이 드시나요? 아니면 이 아홉 가지 열매 중에 이 열매는 나는 참 풍성하다 자신 있다. 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그런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은 없나요? 오늘 성경에서 성령의 이 아홉 가지 열매는 단 하나도 떼어 놓지 아니하고 하나의 열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전능하신 성령 하나님께서 맺으시는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께서 농부 되어 주시고, 농부 되어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나무 되어 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로 육신의 율법에 죄악에 젖 붙인 바 되었던 우리를 하나님의 생명의 나무로 접붙인 바 되어 주셔서, 우리의 힘이 우리의 능력이 아닌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열매 맺는 삶을 이제는 성령 하나님께서 아홉 가지의 열매를 동시에 풍성하게 맺어주시는 은혜를 우리 모든 성도인 들이 삶 가운데 누리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그러면 우리가 생명나무이신 예수님께 온전히 붙어 있을 수 있습니까?
 
교회에서도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만남 가운데서도 심지어 우리의 24시간 동안 어떻게 하면 우리가 생명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을 수 있습니까? 여러 가지 경건 생활의 방법으로 주님 앞에 붙을 수 있지만 저는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한 가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그것은 우리 같이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님께 붙어있는 가장 실제적이며 확실한 방법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붙잡는 것입니다. 아멘
-나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붙잡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붙잡고 계십니까?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서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읽고 배우고 암송하고 묵상하고 있습니까? 아침에 큐티 할 때, 읽고 중에 말씀 설교 들을 때 읽고, 다락방 할 때 읽고 또 특별히 시간을 내어서 통독할 때 읽고, 또 우리 훈련생들은 훈련 큐티 하고 IBS 하면서 읽고 그것이면 충분합니까? 그 정도면 우리가 24시간 주님과 함께 붙어 있다. 라고 생각할 만큼 충분하십니까?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성경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모든 것이 능력이 나온다. 라는 사실을 믿고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이 말씀이 우리의 삶 가운데 얼마나 밀접하게 붙어있는지를 생각해보면 부끄럽기 그지없음을 보게 됩니다. 방송인 조혜련 씨를 아직 하실 겁니다. 그분이 예전에 했던 간증을 들으면서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분이 예전에 핸드폰이 손에 없으면 불안해서 어찌할 줄을 몰랐는데 지금은 손에 성경이 없으면 불안해서 어찌할 줄 모른다. 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가 일상의 핸드폰을 들고 있는 것과 같이 그분은 일상의 성경을 들고 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모든 시간 동안에 손에서 성경을 놓지 않고 성경을 보고 있다고 합니다. 짬이 날 때마다 성경을 읽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매년 성경을 6번 읽고, 올해는 8번 읽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하는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분이 그냥 한강 한가한 분입니까? 참 바쁘게 살고 계시더라구요. 저는 감정을 듣는 순간에 어디 숨고 싶었습니다. 저는 사실 제 손에 성경은 없어도 되는데 핸드폰이 없으면 불안하거든요. 저도 이 한정을 들으면서 오늘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나는 나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무의 생명의 나무에 얼마나 붙어있는가, 나는 가정에서 직장에서 내 모든 시간 깨어있는 시간 동안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의 나무로 생명나무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말씀을 듣고자 하는가? 겨우 가지가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겨우 붙어있는 내 모습은 아닌지, 한번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성경을 통독하는 시간에는 순서대로 열심히 읽으십시오. 큐티 하는 시간에도 말씀을 속상하며 읽으십시오. 성경을 배우고 연구할 때는 성경을 깊이 읽으십시오.
 
그리고 그것으로 만족하지 마시고 내 손에 잡히는 대로, 시간이 나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 읽으시고 말씀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성령의 은혜를 능력을 경험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서 주님께 붙어 있을 때, 우리의 힘과 능력이 아닌 내 안에 성령께서 그분의 열매를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 풍성히 맺어주실 줄 믿습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내게 속한 내심으로 맺는 열매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나무에 우리가 온전히 붙어 있을 때에 그분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축복으로 맺어주시는 열매입니다. 내 힘과 능력의 열매가 아니라, 농부이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열매인 줄 믿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내가 맺은 열매를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겠습니까? 내 노력으로 맺는 열매는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릴 수 있는 요구가 되지 못합니다. 우리의 초점을 내가 어떤 열매를 맺냐, 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 얼마나 붙어 있느냐,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 얼마나 밀접하게 붙어서 성령과 동행하며 그분과 함께 살고 있느냐 이것이 열매 맺는 삶의 능력이고 비밀이고 우리에게 주신 선물은 선물인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삶의 모든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붙잡으시고 읽을 수 있으면 읽으시고 읽을 수 없으시면 들으시고 들으실 수 없으면 암송하시고 그리해서 내가 예수군 시도의 생명나무에 늘 붙어 있어서 아버지가 궁금해 주시고, 예수님께서 붙잡아 주시는 능력과 성령이 나와 성도들을 통해서 맺으시는 성령의 아홉 가지의 풍성에 의한 풍성한 열매를 우리 삶 가운데 다 맺고 사시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요약
내 힘으로 맺으려던 모든 시도를 내려놓고 성령하나님께 온전히 나를 내어 드려 이제는 결실을 위해 농부이신 성부하나님의 열매 맺으시는 실력과 신실하심을 믿고, 사는 날 동안 참 포도나무이신 성자 예수님께 끝까지 붙어있어야 한다. 우리가 휴대폰을 붙들고 사는 내 삶의 모든 영역이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리도록 성경을 더욱 더 가까이 하는 자로 살아가야 한다.

-우리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셨는데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처럼 은혜를 잊어버리고 이 성령의 열매조차 마치 율법을 지키듯이 내가 맺으려고 애쓰며 살아왔던 내 모습은 아닌지, 한번 돌아보아야 한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붙어 있으면 내 능력과 내 힘이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성령의 풍성한 아홉 가지의 열매를 내 삶 가운데서 온전히 맺게 해 주시는 줄 믿어야 한다. 제는 우리의 초점이 열매에 있지 아니하고, 내가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나무에 붙어있는지에 대한 초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우리의 삶 가운데 내가 맺는 보잘 것 없는 나의 열매가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맺으시는 풍성한 아홉가지 열매를 통하여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기를 간구하며, 오늘도 우리에게 함께하시며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있기를 간절히 소망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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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장 강의(주후 2024년 03월 09일)-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다락방 시리즈 16)
-5과 "무엇이 부흥을 가능케 하는가?(What makes a revival possible?)"
말씀: 사도행전 4:7-20
찬양인도: 오준석 부목사님
사회: 임병영 부목사님
 
강의자: (오정현 담임목사님)-사랑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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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4:7-20,
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9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13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14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15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16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18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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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옆에 있는 분들 반갑습니다. 인사 고맙습니다. 한 주 안 봤더니, 은혜로 은혜가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 여러분들이 제가요 제가 목회자로서 사역자로서 제 자신을 돌아오면서 추스리는 말씀 중의 하나가 디모데전서 4장이에요. 7절-16절 말씀까지 쭉 보면,
 
*디모데전서 4:7-16,
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8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9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
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11 너는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12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13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14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15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16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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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현 담임목사님.
-내가 내 자신을 어떻게 추스려야 할 것인가?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성숙과 진보를 나타내는 어떻게 말에 있었어요. 행실에 있어서, 정절에 있어서, 믿음에 있어서, 사랑에 있어서 갖고 순서는 아마 말, 행실 그리고 자신을 들어 하나의 한 번씩 나에게는 저게 뭡니까? 이 뭐 좀 이렇게 체킹 포인트랄까, 나는 일찍부터 사역을 생각했기 때문에 누구든지 내 연소함을 없인 여기지 못하게요. 그러면 나 연소하면 업신여기지 마세요. 그런다고 없인 여기지 않나, 그렇지 않잖아요?. 앉아만 있어도 사역자의 기품이 있고 뭔가 있을 때 업신여기지 못하는 것이지. 순장도 나 순장 말씀 잘하는 거, “나 없인 여기지 마세요.” 그런 소용이 없어요.
 
여러분들이 말씀에 깊이와 하나님께서 여러분들 붙잡아주시는 어떤 거룩한 아우라가 있어야 해요. 그것이 영향이에요. 세상의 직분도 세상의 장관과 총리, 대통령과 거기 아우라가 있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도 그정도 품위는 있어야 될 거 아니에요??.
 
- 자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사도행전 3장에 나오는 이미 큰 그림을 그려드립니다. 전체로 나면서부터 못 걷는 자 베드로와 누굴 통해서 요한을 통해서 완전히 기적적인 치유를 받았는데 여파로 강력한 부흥이 예루살렘 성을 강타했어요. 그리고 병 고침 받은 사람의 나이가 오늘 4장 22절 대보니까 몇 살 40세쯤 됐다고 그랬어요.
 
*사도행전 4:22,
22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그럼 오늘 앞에 4절에 보니까 예루살렘에 이것 때문에 성전유문에 못 걷는 자가 이 기적이 일어나요. 예루살렘 교회 첫 번째 기적이 일어나게 되니까, 4절에 보니까,
 
*사도행전 4:4,
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얼마예요. 4절에 남자의 수가 왜 얼마 약 5천명이라 했어요. 앞에 이 장에서는 베드로사도가 복음을 선포하니까 복음 앞에 형제들이 몇 명이나 깨졌어요? 하루에 3천, 오늘 3장에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과 치유가 일어나니까, 오늘 3장 치유라니까 오늘 4장 앞을 4절에 보니까 몇 명이라고요. 5000명, 여기에 이제 당시 계수법은 누구만 세는 거예요. 남자 당정만 5000명이니까, 최소한 1만 5000명에서 2만 명, 여자 어른, 아이들 한꺼번에 주라면 한꺼번에 1만 5000명에서 2만 명이 주로 돌아오는 거예요. 어마어마한 부흥이 일어난 거예요. 그래서 저는 이 어마어마한 부흥에 대한 소원을 하고 간절히 사모할 때, 디모데전서 4장을 보면서 제가 목회자로서 자신을 좀 추스리고 다듬는다는 부흥에 대해서, 저의 어떤 금과옥조(金科玉條)랄까, 부흥에 대해서 저의 어떤 큰 도전을 주고, 저에게 저를 키우고 다시 저를 갖다가 어 인스파이하고 그리고 뭡니까? 리스파크를 하고 나를 점화를 시키는 거죠. 본문이 오늘 이 본문이에요. 이 본문 자꾸 이 본문을 보면 볼 때마다, 부흥에 대한 어떤 맥박(脈搏)이 몰아치는 거예요. 오늘 이제 그리고 1위는 부흥 이후에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하면, 오늘 앞에 3절을 보니까,
*사도행전 4:3,
3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이 부흥을 하면 부흥을 하면 야 부흥 하니까 다들 마 다 변화 받고 다 와 거꾸로 거꾸러지고 다 그래 가지고, 부흥이 강력하게 일어나니까 올해 3절에 보니까 무슨 일이 벌어졌어요? 사도들을 잡아 가지고 어디에 가두었어요. 감옥에 가두었어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강력한 성령 역사와 능력이 나타났고, 기적과 치유가 일어나니까 부흥이 일어나니까 이제는 외부적인 박해가 있는 거예요. 박해가 있었어요. 7절에 오늘 보니까,
 
*사도행전 4:7,
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사도들이 가운데 세우고 “너희가 무슨 권세와 뭐예요? 누구의 이름으로 이해를 행하느냐?”라고 몰아 세웠죠? 그리고 마침내 17절에 보니까,
 
*사도행전 4:17,
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민간인에게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후에는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협박하는 거에요. 협박, 왜냐하면, 오늘 대단한 예수님의 이름이 존귀함과 능력과 권세를 제일 좋아하는 자가 누굽니까 사탄이에요. 사탄, 그러니까 사탄은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말하지 못하도록 박해하고 예수님의 이름이 전파되는 걸 너무 싫어했고, 대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순간에는 사탄의 도구가 된 거예요. 다 한심 하는 교회 내에 이거 오늘날 한국교회 부흥을 위하는데, 교회 내에 부흥을 방해하는 사탄의 앞잡이들도 있는 거예요. 내가 누구라고 말하지는 않겠어요. 내가 어떤 단체라고 말하지는 않겠어요. 사도 베드로와 요하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20절에,
 
*사도행전 4:20,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선포하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이 갖는 능력을 선포한 거예요. 자, 다시 한 번 오늘 5과 전체의 내용이구요. “무엇이 부흥을 가능케 하는가?”에요. 5과 이구요. 전체 첫 번째 내용이고, 이거는 오늘 사도행전 4장은 교회 역사, Church Story, 교회 역사적으로 그러니까 처치 스토리, 교회 역사적으로 손꼽을 수 있는 큰 부흥이 일어난 것입니다. 동시에 또 마귀가 행동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또 방해하는 것이죠?
 
 
마귀가 방해하는 정글 같은 그런 상황이 되는 것이죠. 자 오늘 이 정도 하고, 이제부터 쭉쭉 진행해 나가면 됩니다.
 
◆ 말씀의 씨를 뿌리며.
-초대교회 성도들의 대화와 삶의 주제는 예수님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찬양했고,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 했으며, 심지어 핍박을 받을 때에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병자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으켰고, 귀신과 악명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적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칭하는 놀라운 이름들을 주목하고 연구해야 하는 이유는 그의 이름에는 세상을 이기는 능력과 하늘의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이름 속으로 들어가 그 이름의 권세와 영광과 은혜를 심비(心碑)에 새김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름에 걸 맞는 삶을 사는 능력을 확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저기 뭐야?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않아서 구하라 그래 받으니 너의 기쁨이 뭡니까? 충만하리라. 여러분과 저의 사역에 기쁨과 은혜가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우리 마음속에 뭐가 필요한가?
-주님의 이름으로 선언하고, 주님의 이름의 능력을 깨닫고, 주님의 이름의 효력을 우리가 기본적으로 체험을 해야 된다.
 
오늘 내용들을 보고 지난 주일날 우리가 우리 ‘예수님이 누구신가?’라는 지금 우리가 시리즈를 하고 있는데, 지난주에는 도피성 되신 예수 그리스도, 말씀을 했고, 그다음 도피성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왜 우리에게는 이렇게 와 닿고 은혜가 되는가? 구약의 대제사장직을 예표 했나? 그리고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모든 죄를 마치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할 수는 없어요. 말씀 한마디로 할 수가 없어요. 천지창조도 말씀 한마디로 하셨던 그분이, 우리의 죄를 없애하기 위해서는 그대로 마치 지우개를 가지고 써놓은 걸 갖다 지우듯이 그렇게 못하는 거예요. 우리의 죄 가를 다 없애기 위해서는 주님께서는 말 한마디로 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사랑하는 그분의 독생자 가장 사랑하는 그분의 최고의 소중한 것을 다 우리에게 내어주신 거예요. 대제사장으로 피를 흘리고, 역할을 하도록 만들어주신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께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진노의 잔을 다 쏟아 부어 버린 거예요. 예수님께 다 진노의 활을 다 쏟아 부어 버린 거예요. 그니까 그런 은혜가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에,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마는 값싼 은혜라는 건 없습니다. 항상 주님의 은혜는 값비싼 것이고, 주님의 주님께 모든 것들을 다 쏟아 부어졌기 때문에 얻어지는 오늘 여러분들과 저는 예수님께 하나님의 모든 진노가 다 쏟아 부으셨기 때문에 이 자리에 와갖고 이런 말씀을 준비하는 줄로 확신합니다. 여기에다 깊은 깨달음이 있으면 눈물 콧물이 나는 것이고, 나같이 쓸데없는 자리를 구성 너무 감사하고, 자다가 일어나도 온 세상 만물을 가져도 주 밖에는 없는 것이며, 감사로 못 다 갚겠다는 것입니다.
 
1. 관찰질문.
-오순절 상 성령 강림의 역사로 초대 교회가 불일 듯 부흥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당시 에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은 사도들을 붙잡을 빌미를 찾기 위해 그들을 공회 앞에 세우고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7절)라며 엄하게 심문(審問)했습니다. 이때 사도들이 힘 있게 대답한 말은 무엇입니까?
 
10절 보겠습니다.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너희 앞에 섰느니라) 사도는 여기서 거부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 다섯 가지를 증거 한다.
(1) 너희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중대한 사실을 선포할 때마다 자주 쓰는 권위 있는 명령형이다. 그 대상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는데, 이는 증거 하 는 내용의 중대성과 사실성을 암시한다.
(2)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 사도는 여기서 너희가’ 그런 일을 행한 죄인들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너희’가 죄인 취급하여 죽였지만 하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을 살리심으로 그를 죽인 자들을 심판했다는 것이다.
(4)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건강하게 된 것을 증거 했다. 너희가 십자가에 죽였지만,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 그 예수께서 지금 살아계셔서 이 능력을 베푸셨다는 것이니 저들의 간담(肝膽)을 서늘하게 만드는 선포가 아닐 수 없다.
(5)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상의 변론에 대한 명확한 증거를 제시한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그 권력과 무게감을 가지고 심문할 때에 베드로는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전도의 기회로 삼아가지고,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권세이심을 담당하게 했잖아요. 거침을 선포하게 된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산헤드린 공회는 당시 유대 최고의 재판기관이었습니다. 로마의 지배 본래는 사형도 다 시킬 수 있었겠지만, 로마의 지배 안에 있었기 때문에 사형 권 빼고는 다 있었어요. 종교, 인사, 민사, 다 처리하는 최고의 권력 기관이었어요. 예수님을 심문했던 공회였습니다. 어쩌면 오늘 이 산헤드린 공회에서 신문을 받으면서 베드로의 마음이 만감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전에는 예수님 신문에 있던 산헤드린 공회, 거기 근처에서 뵈도록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을 부인했죠? 전에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은혜의 아웃사이더였는데 이제는 자신이 신문을 받는 은혜의 주체가 된 거예요. 은혜의 어떤 중심이 된 거예요. 아마 감회가 새로웠을 거예요.
 
*사도행행 4: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너희가 무슨.....행하였느냐) 예수께서도 대제사장들에게 이와 유사한 질문을 받았으나 그들의 간계를 미리 아시고 지혜롭게 대처한 바 있다. 본 절에서도 대적 자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사도들을 처치할 구실을 마련하기 위하여 애매한 질문 공세를 편 것이0망함과 아울러(9절), 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기회로 삼았다(10-12절).
-요한이 잡혔을 그때가 이미 날이 저물어 가지고 어두워졌어요. 그러니까 그 유대인의 종교 관습에 따르면 일몰 이후에는 죄인들을 심문할 수 심문할 수가 없는 규율이 있었어요. 로마의 지배 본래는 사형도 다 시킬 수 있었겠지만, 로마의 지배 안에 있었기 때문에 사형 권 빼고는 다 있었어요. 종교 인사 민사 다 처리하는 최고의 권력 기관이었어요. 예수님을 심문했던 공해였습니다. 어쩌면 오늘 이 사례들의 공해에서 신문을 받으면서 베드로의 마음이 만감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전에는 예수님 신문에 있던 산해 드는 공이 거기 근처에서 뵈도록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을 부인했죠. 전에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마 은혜의 아웃사이더였는데 이제는 자신이 신문을 받는 은혜의 주체가 된 거예요. 은혜의 어떤 중심이 된 거예요. 아마 감회가 새로웠을 거예요. 요한이 잡혔을 그때가 이미 날이 저물어 가지고 어두워졌어요. 그러니까 그 유대인의 종교 관습에 따르면 일몰 이후에는 죄인들을 심문할 수 심문할 수가 없는 규율이 있었어요. 그래서 사도들이 하룻밤을 감옥에서 보내고 그다음 아침에 이제 그러니까 유대 종교 자 지도자들이 형식적으로는 종교적 교리를 준행하는데, 그걸 하는데 핵심을 못 깨닫는 거에요. 형식적으로는 밤에는 심문하면 안 되지, 이래가지고 말씀을 따른 거 같은데, 진짜 말씀에 정신과 핵심과 능력과 구원의 역사에는 눈이 멀어 있는 거예요. 여러분과 제가 이런 말씀을 다루면서 껍데기만 하면 안 되고, 진짜 엑기스와 핵심과 가장 중요한 실리에 눈이 떠 있고, 평생 덜 중요한 것, 가장 중요한 것에서 눈을 뜰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뭐라고 그랬어요.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자심을 당당하게 거침없이 선포하고 설교했어요. 거기에 대한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반응이 참 기가 차요. 그들은 당시 유다의 최고의 지성인들이었고 아주 높은 수준의 학문을 배운 공회원들이었는데. 그들의 반응이 뭡니까? 13절에,
*사도행전 4:13,
13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베드로가 원래 못 배운 사람인 줄 알고 이상 여기고 놀랐어요. 학문이 없는 걸 알고 있었는데, 또 함부로 할 수 없는 게 놀랬지만 자기들은 학문이 있어도 병 못 고치는데 베드로는 학문이 없어도 병을 고치고 기적을 일으킨 주체 자가 되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함부로 표현도 못 했어요.
 
2. 관찰해석.
-예수님의 이름은 천상천하(天上天下)의 모든 자들이 무릎을 꿇는 지극히 높은 이름입니다(빌 2:9-10). 이처럼 우주의 군세가 복종하는 이름이지만 오늘날 신자들 가운데 예수님의 이름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우주의 군세가 복종하는 이름이지만 오늘날 신자들 가운데 예수님의 이름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2000여 년 전에도 그러했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과 오늘날의 신자들이 예수님을 부끄러워하는 각각의 이유를 말해보세요
 
* 막 8: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 예수는 자신의 입장을 결정적으로 밝히면서 이 시대를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로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음란과 죄는 예수와 복음을 부인하고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를 모독하고 교회를 업신여기는 세대를 말한다. 이 본문의 핵심은 33-37에서 언급한 제자 됨과 그리스도인 됨을 위한 예수의 요구의 필연성과 정당성을 종말에 임할 심판묘사로 명백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같은 희망찬 종말 언급을 통해 박해받는 제자들과 추종자 곧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을 각오 한 용기와 믿음으로써(요16:33)예수 자신의 길을 따라오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은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예수님의 이름을 실제적으로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의 그 사람들이 누구인가? 그런 사람들이 있는가? 있음을 알고 계셨어요. 다시요.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고 계셨어요.
*요한복음 1: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이유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어요. 그러면서 그다음 디모데전서 8장 보니까 “주를 위하여 갇힌 자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하나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사도들이 볼 때 사도들을 사역을 볼 때, 사도들의 사역을 볼 때에 박해와 핍박과 고난을 따른 걸 보면서 부끄러워했을 수도 있는 거예요. 자, 오늘 이 부끄러워하는 배경 중의 하나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다.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대수로 폄하했어요. 무슨 뜻입니까? 나사렛은 갈릴리 북쪽 지하의 지방이잖아요. 북쪽에 무슨 이방인들이 사는 곳인데, 그러니까 사마리아 성 위에 나사렛이잖아요. 그리고 사마리아 성 밑에 유대잖아요. 사마리아 성 밑이 헤브론이고 예루살렘이고 그러니까 밑에 남쪽 지역에 있는 유대인들이 볼 때에 유대 지역에서 볼 때 사마리아 성과 위에 있는 갈릴린 이 나사렛에서 형편없는 지역에 나오는 형편없는 인간들이나 있는 곳이지, 그러나 이 빌립 같은 경우는 요한복음 1장에 보니까, 빌립 같은 경우는 나다니엘의 이 냉소적인 반응에 대해서 다른 말 하지 않고 그저 뭐라고 그랬어요. 빌림이 뭐라고 하느냐, 떠들지 말고 와봐! Come and See! 그러니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제대로 교제하면 세상에서 말하는 만 가지 논리와 논쟁이 별로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빌립은 떠들지 말고 와 보라고 한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갈릴리 지역에 목수 집안의 가난한 사람으로, 그다음에 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죄수로, 이 정도 생각하고 있었고, 헬라 사람들은 복음을 유치하고 어리석고 미련한 것이라 경멸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이 시선과 모든 것들을 다 뛰어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다시요. 모든 지성과 이성을 뛰어넘은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실체를 가지고 얘기하는 거예요. 제가 볼 때 오늘날 성도들 가운데 세상 앞에서 교회와 그다음에 예수님을 부끄러워하는 분들이 있다면 어떤 사람들은 아이고 뭐 교회가 세상에 몸을 열지 못하고 뭐 교회 지도자들의 문제가 많고 뭐 오만 얘기 다 있잖아요. 근데 그런 거 다 하나의 변명일 뿐이에요. 진짜로 뭡니까? 진짜는 예수님이 주시는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진짜는 주님이 주시는 치유와 능력과 주님과 예수님의 이름이 주는 예수님과 교제할 때 갖는 파워를 느끼지 못하고 있으니까, 예수님을 믿는다고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그저 나사렛 예수로 정도만 인식하기 때문에, 지금도 오늘날 우리 주위의 예수님을 나사렛 출신으로만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왜냐하면, 복음이 지성적이지 못하다. 복음은 무슨 철학적이지 못하다. 복음은 과학적이지 못하다. 오늘 이 시대에 맞지 않다 이런 식으로 그래서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예수 믿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CCC 파운드에 있던 김준권 목사님은 이런 세상의 흐름과 지성의 흐름을 잘 아셨기 때문에 CCC가 대한민국 CCC나 한국 과거의 대학생 기독 선교 단체는 최고의 지성이거든요. 최고의 지성 사유 가운데 진짜 최고의 변적은 뭐냐 능력 있는 예수 그리스도 출신이 나사렛이라고 할 때 그거 전혀 개의치 아니야. 그거는 전혀 개의치 아니하고, 그거는 전혀 나사렛이라는 이름이 오히려 능력의 진원지로서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인격적인 하나님의 신실한 종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변화시킨 그래서 CCC 최고의 단체 중의 하나가 CCC 여러분들 아시겠습니다만 이 시시기 대학 졸업하면요 나사렛이라고 있었어요. 내가 요걸 얘기하려고 지금 한참 이야기 얘기하는 거죠. 나사렛이라고 들어보셨어요? 나사렛 모임이라고 있어요. 나사렛 최고의 지성에 최고의 나사렛은 당시에 나사렛에서 온 선한 것이 나겠는가, 조롱하고 비난하고 그러는데 기독교는 그런 인간의 이성과 지식과 철학을 온전히 앞두어 뛰어넘을 수 있는 능력과 체험과 예수의 이름에 치유와 기름부음이 있다.
그래서 여러분, 지난번에 우리 이 년 전입니까?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와가지고 미국의 부통령이면, 여러분 지성인이고, 미국의 정치인이고, 세계적인 역량이 있는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마이크 펜스가 바로 글쎄 자기의 정체성 넘버 원, 자기가 뭐라고
➀그리스인이라고, 모든 치성을 압도하는 나사렛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인이라고,,,
두 번째로는 자기는
➁보수주의자라고 세 번째로, 이제 정책으로
➂공화당원이라고 뭐 정도였어요.
-첫 번째가 나는 예수고, 예수 믿는 사람, 그래서 우리 교회에 와가지고 너무나 감동을 받은 게 새벽 5시 6시에, 사람들이 그냥 물밀듯 밀려오고 그리고 그날 어마어마한 비가 왔거든요. 그리고 그날 또 어떻게 보면 우리가 뭐야? 오케스트라 찬양대가 있다고, 야, 새벽 5시 반에 어떻게 저렇게 수많은 과히 오케스트라 올 수 있냐고? 또 거기도 되게 감동 같대요... 그러니까 정체성이 확고하니까 나오는 어떤 저기 뭡니까? 나오는 어떤 그런 것도 다른 거죠. 자 이 말씀을 왜 드리는가 하면 저도 그러고 여러분들 여러분 자녀들도 그러고 예수의 이름에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확고한 자녀들을 키워야 되는 것이에요.
 
※내가 한번 얘기를 저는 중학교 들어갔을 때, 정말 제가 이 가난한 달동네에서 혼자 학교에 들어갔어요. 학교에 근데 너무나 똑똑한 놈들이 많았고, 아버지가 니 아버지 뭐하시노? 부산시장이야. 니 아버지 뭐하시노?부산국세청장 아들이야. 니 아버지 뭐하시노? 부산대학교 총장 아들이야. 그러고 국세청장 송모모라고 내 친군데 집에 처음 가니까요? 세상에 뜨신 물이 나오더라고.,,, 그리고 누나를 보니까 경남여고를 다녔는데 선녀 같더라고,,, 그리고 얘가 뭘 하나 먹는데 이게 뭐꼬? 그러니까 이게 비타민이야 근데 왜 먹나? 왜 먹는냐니까? 이거 몸에 좋은 거야. 뭐 몸에 어떻게 좋으냐? 먹어보면 알어. 나는 먹어본 적이 없어. 내가 어떻게 알어? 그렇다고 또래들이 있는데, 예수 믿는 사람 나 혼자였어요. 생물 시간에 들어가니까, 생물 시간에 말이야. 생물 시간 선생님 들어오는데 그때 뭐 강모 생물 시간 이름도 잘 안 잊어요. 이 사람이 들어오더니, 전부 다 뭐 너희들은 다 원숭이 자녀들이고 있잖아. 이거 저기 호모사피엔스 얘기하면서 네안데르탈인 뭐 크로마뇽인, 얘기하는데 있잖아요. 기가 막힌 거에요. 근데 아무도 얘기하는 놈이 없어요. 내가 딱 손 들어갖고 ‘선생님은 원숭이 자녀입니까? 아 그렇다면 선생님은 선생님 조상이 원숭이입니까?’ 그러니까 “이 새끼가 이리 나와!! 겁데가리도 없이 선생님께가 뭐 그냥 그렇게 이야기 하면 알아듣는 거지” 응 그러고 내 뺨을 두 차례를 맞았는데 근데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다. 그게 나중에 내가 깨달았지만 과학을 적당히 믿으면 무신론자가 되고, 과학을 진짜 믿으면 창조주 유신론자가 되는 것이에요.
 
※톤 브라운 박사가 나사(NASA)에 날라 가는 모든 우주 프로젝트 총책임자 과거에 톤 브라운이라고 독일 계열의 사람이 미국 최고의 나사 과학자인데 최고의 신실한 크리스천이었고 달나라 갈 때, 우주인이 뭘 갖고 갔다고 그랬어요?. 하나님의 말씀 갖고 올라갔다고 그랬잖아요. 시편의 말씀이죠. 적당히 알면 무실론 자가 됩니다. 그러나 제대로 알면, 하나님은 그 앞을 보시며 모든 것을 인도하십니다. 여러분 이런 면에 있어서 여러분 신앙의 초심을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어떤 장로님이신데, 자기가 진짜 이 찬송 들을 때마다 몇 십만 유튜브의 조회가 됐다는데요. 한 십몇 년 정도 된 찬송입니다. 이렇게 한번 들어보죠. 그리고 여기 지금 초심이 약간 흔들려 갖고요... 후렴만 ‘어저께나 오늘이나,,,’ 의 마지막 부분 어떻게 후렴만 어저께나 오늘이나 나도 이 찬송을 아침에 들으면서 한 번 불러 보자구요. 여기 계신 많은 분들이 저보다도 나이가 더 젊을 거예요. 지난 시간을 다 들어보면 여러분 아무리 어려워도, 아무리 힘들어도, 이 예수님의 이름 한결같은 마음으로, 이거 집중해 가지고 부부가 손잡고 여러분 힘들어도 안 되면 여러분 혼자라도 이 찬송 계속하면서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가정과 자녀와 여러분의 인생을 지켜주시는 것이에요. 이게 믿음이에요. 예외 없어요. 여러분 바울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분 배드로가 아니기 때문에, 여러분은 참수되어 거꾸로 십자를 못 박힌다든지 아니면 참수를 당하던지 그런 건 여러분 걱정하지 마세요. 여러분 바울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분의 생애 동안 집중하고 고백하고 찬양하고 선포하면 하나님 여러분 자녀 보호하신다니까 알겠어요? 보호하시고 여러분 다락방을 이걸 여러분의 것으로 체험돼 가지고 뿜어져 나와 가지고 이걸 여러분들이 순원들에게 그대로 전달해 주셔야 하면 되는 거예요. 내 마음을 그대로 좀 전달해 주세요. 내 마음을 전달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칠천기도 용사에 대해서 마음을 모으고 있습니다. 7000 기도 용사가 우리 천 부장 제도를 하고 뒤에서 돕고, 그다음에 천부장 뽑고, 천 부장은 백 부장 10명만 관으로 하면 돼. 백부장은 10명만 십 부장들 관할하면 돼. 중간에 50부장 점검하고, 나는 천 부장 일곱을 일곱 7분을 위해서 더 잘 내가 케어하고 그러면 우리가 7000명이 똑바로 정치인 총령 주님을 위해서는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죽으라면 죽고 허신하라면 헌신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 나라를 위해 준비되기를 원하는 그런 7000명의 기도 용사를 만들어 놓기만 하면 하나님 이 민족 살려주셨다니까요. 그래서 내가 무슨 생각이 들었냐면 이번 선거가 어떤 결과가 나오든 하나님이 하시는 것일 거고, 이번 선거 이후에 7천 기도 용사가 정신 똑바로 차리면 이것 때문에 하나님은 이 민족을 보호하여 주실 것이다. 남북문제도 해결하여 주실 것이다. 난 오늘 순장반 하면서 이렇게까지 내가 하고 싶지 않은데, 그러나 우리의 마음속에 주를 수 있는 간절함을 따라 가지고 주님의 일에는 이름에는 능력이 있다니까 처심을 잃지 않는 거, 초심에 대한 성심을 다시 가져가는 거,
 
3. 관찰질문.
-사도들은 핍박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자랑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죽음까지 각오하며 예수님의 이름을 확성기를 댄 것처럼 크게 전했습니다. 다음 구절에서 예순 다음 구절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이름이 갖는 능력을 생각하며 우리도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고 자랑해야 하는 이유를 서로 이야기해 보세요.
-여러분 자녀들이 교실에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따뜻하게 드러낼 수 있도록, 여러분 순원들이 직장에서 내가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예수 믿는 걸 떳떳이 드러낼 수 있도록, 이것이 최고의 믿음이에요. 지금 대한민국 10대 재벌들이 있습니다. 그 10대 재벌들 돈 많은 것보다도 예수님 이름 간직하고 믿고 선포하고, 능력 받는 것이 훨씬 더 소중한 것이에요.
-우리는 본래 하나님과 원수 된 사람들이었죠. 그런데 구원의 도피성으로 내어주신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셨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일방적인 십자가의 사랑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리가 원수에서 자녀로 바꾸어졌어요. 평생 원수가 평생 자녀가 된 거에요.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갖는 최고의 권세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응답받게 되는 특권을 주신 줄로 믿습니다. 이걸 자랑하지 않을 수가 있게 이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어요. 심문을 당할 때 오히려 베드로와 그들에게 설교했죠.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있다. 없다.
 
여기에 다른 일이라는 것도 우리가 관심을 갖지만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라는 데도 초점이 맞추어져야 되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받을 수 없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선 구원이 없다. 예수님의 이름 외에는 구원이 없다. 이거는 너무나도 확고한 만고불변의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어져서 요한복음 6장 24절에,
 
*요한복음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 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지금까지는...구하지 아니하였으나) 여기서 ‘구하다’로 번역된 ‘아이테오’는 ‘구하다’, '질문하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 ‘에로타오’와는 달리 ‘요구하다’란 의미로 많이 사용된다. 그리고 후반절의 내용이 기도와 관련된 것이 분명하므로 본절에서는 ‘구하다’로 번역되어야 한다. 그리고 특히 ‘구하다’란 말이 현재형으로 언급되어 ‘지속적으로 기도하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L. Morris). 그리고 이 지속적인 기도는 다른 이름으로써는 소용없고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 질 때 응답이 있을 것이다. 한편 ‘지금까지는...아니다’라는 구절은 미래적 시간에는 어떤 일들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리스도의 중보자 개념은 본절에서 아직은 선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아직 십자가상에서 피 흘림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성전의 휘장은 그대로 드리워져 있었으며, 신성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지 않으셨다.(Calvin). 그러나 그의 구속 사역이 완성될 그날 곧 ‘조금 있으면’ 제자들은 아들의 이름으로 구하는 모든 것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거 핵심이 뭐예요?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응답받는다는 이 용어는 어떤 뜻입니까? 우리의 자격이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가 잘해서가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가 무슨 헌신을 많이 해서가 아니라는 거예요. 단순하게 초심과 성심을 가지고 어저께나 오늘이나 한결같은 주 예수님 찬양합니다. 하는 그런 마음을 갖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을 믿고 이름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응답해 주시는 것이에요. 한 결 같이 그리고 요한복음 14장 12절에 보면,
 
*요한복음 14:12,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자 예수님이 하신 사건은 뭡니까? 오병이어 사건을 베풀어 진리의 말씀을 전하니까 하늘의 떡에 대한 얘기하니까 다 도망가 버렸잖아요? 그런데 베드로는 말이에요. 어떻게 했어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늘 기적을 베풀고 예수님을 전했더니, 핍박 가운데서 몇 명이나 예수 믿었어요. 5000명,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예수님이 하신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을 지금 베드로가 하고 있는 거지요. 오늘 이 5000명이 돌아올 때 초대교회의 120명 성도들, 여러 초대교회 성도들이 가질 수 있었던 감격과 은혜를 한번 상상해 보세요. 이걸 생각을 해서 여러분이나 저는 사랑의 교회 섬김과 사역을 통한 수많은 기적과 치유와 능력과 부흥을 경험한 사람들 아닙니까? 우리가 갖는 감격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올해는 다락방 교재 제목처럼 그리스도인 죽는 날까지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그랬기 때문에 올해 새 생명 축제는 오늘 산헤드린 공회 그 핍박 가운데서도 오늘 예루살림 초대교회가 가졌던 베드로와 함께 했던 5000명의 역사가 있었던 것처럼 원래 제가 목표가 뭐냐? 다른 해에 비해서 두 배, 세 배의 새생명 축제위원회가 있게 하여 주십시오.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올해는 결신이 5000명 이상 되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이 내 마음에 이 확신을 주신 거예요. 제가 올해는 5000명 이상 된다. 왜 됩니까? 이게요 5000명 이상 올려면 심플해요. 태신자를 뭡니까? 여기 태신자를 만 명 이상 데려가면 되는 거예요. 아주 심플한 거예요. 대개 이제 숫자 정하고 나면 한 10분의 1쯤 데리고 오더라고. 근데 올해는 만 명 이상 데리고 올 수 있도록, 나는 올해는 될 거라고 생각해 왜 되느냐 첫째, 누가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오늘 이걸 깨닫고 새 생명 축제에 데리고 오는 태신자 들을 만 명 이상 실제로 데려올 그럴라면 적어도 한 5만 명 정도는 우리가 계속 기도를 해야 되는 거예요. 20프로 정도 데리고 본래는 10분의 1 데리고 오는데 그리고 제가 또 하나 믿는 것은 7층 기도 용사가 있기 때문에 7천기도 용사는 이제 기도하러만 오고 그다음에 헌신하라면 헌신하고 그다음에 헬스장 데려오면 데리고 오고 그러면 말랑 말고 안 되는 사람은 칠천 기도용사가 들어오면 안 돼 그런 거 안 하는 사람은 빨리 빼내야 돼 우선 마음만 갖고 했던 사람 다 빼내고 거기다 아울 3500번 다시 잡아넣어야 되고 또 알 다시 부흥, 리바이벌 새로 해서 리바이벌 2779번 다시 잡아넣어야 되고 이렇게 해서 똘똘 뭉쳐 가지고 할 때에 올해 7천명, 영혼구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7000명을 내가 책임지고 하나님 간의 역사를 새롭게 집필해야 되는 줄 믿습니다. 7천명이 똘똘 뭉치면 4900만이 변화가 되고 영혼구원이 됩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이름을 270개 이상의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어요, 구세주, 그리스도, 선한 목자, 구원의주, 만왕의 왕, 영광과 소망, 보배로운 산돌, 생명의 말씀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 영혼의 감독자 우리 몸의 구세주, 더 좋은 은혜의 보좌, 하늘에서 내려온다. 모든 성도들 다락방 순원들 삶 가운데 풍성히 임하기를 바랍니다.
 
4. 묵상질문.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부끄러워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이름이 주는 축복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한편으로는 사탄의 치밀한 전략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 글을 읽고 묵상해 보세요.
-오늘날 교회 내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예수님을 나사렛의 예수로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나사를 내수로 폄하(貶下)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나사렛 출신으로만 이해했던 것처럼 무의식중에라도 예수님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나사렛 출신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복음을 지성적이지 않고 과학적이지 못하며 복음의 내용이 세상사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세상은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을 경멸(輕蔑)의 의미로 사용했지만, 예수님은 이름 가치를 바꾸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사람들이 무덤을 찾아왔을 때, 천사는 “너희가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라고 말했습니다(마가복음 16:6). 또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은 믿는 자들을 핍박(逼迫)하던 사울에게 “나는 나사렛 예수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사도행전 22:8). 예수님은 나사렛이란 이름을 취하여 그것을 하늘에까지 높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탐관오리를 척결하는 부패한 사또의 권력을 가진 부패한 사또의 부패를 척결하는 암행 의사가 마패를 들어 암행어사 출두요 그랬을 때, 그 사람이 갖는 능력이 아니고 그에게 마패의 암행어사라는 직분에게 부여한 왕의 이름의 권위가 부여된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교묘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반기독교 정서가 있습니다. 반기독교 문화가 있습니다. 오늘 나사렛의 이름을 무시하는 것처럼, 반기독교적인 정치 성향이 있습니다. 특별히 대학 교수들이 강단에서 잘못된 이념을 가르치고 또 사회 메디아, 이런 언론 굽어진 거 많이 있습니다. 엔티 기독교적인 글들, 반기독교적인 사상들, 이런 걸 가지고 오늘날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이걸 우리가 정확하게 알고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공격하는 거 있을 수 있다. 마귀의 전략이니까. 그러나 우리는 담대하게 이 시대에 베드로와 요한이 되어 가지고 시대 앞에 다른 일은 없는 구원을 들 수 없으니 오직 사랑의 구원을 얻으면 아니도 예수 그리스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느니라. 확실하게 선포하는 사랑의 교회와 순장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5번 적용문제.
-오늘날 성도와 교회가 부흥(復興)하는 비결(秘決)은 예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네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속에 있는 능력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산 같은 장애물(障碍物)들을 돌파(突破)할 것입니다. 신자들의 신앙생활이 무기력한 것은 예수님의 이름에 의존(依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신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끄러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고 있습니까? 이를 위한 당신의 각오(覺悟)와 다짐을 나누어 보세요.
-예수님의 이름이 매일매일 지금 내 삶에 신선한 능력으로 부어짐 받기를 바랍니다. 매일매일 역사해야 되는 거예요. 이게 왜 여기 중요한가. 하면 여러분, 왜 이것이 중요한가. 하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제자들이 이 제자들이 어떻겠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을 가지고 담대하게 할 수 있을 이유가 뭐냐 하면 또 예수님의 이름의 권위가 어디서부터 비롯되어 있습니까? 13절에 보니까
*사도행전 4:13,
13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13절에 13절 뒷부분에 에이 주의해야 됩니다. 사람들이 이 제자들이 전에 주님과 함께 교제하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주님과 함께 있은 것을 알았다. 몰랐다를 운동은 놀러 가고 합니다. 교제하고 동행하고 함께 다 알아야 되는 거예요. 그중에 하나가 여러분 특새는 뭡니까? 사람들에게는 큰 영향력이 있는 것입니다. 어 특새는 하나님 하고 계시지, 거기에 함께 찬영하기도 하고 말씀 듣고, 우리의 삶에 적용하고 활용을 찾고, 이게 너무나 소중한 일 아닌가? 여러분 오늘 손잡고 나오면서 저와 영화는 얼마나 좋고요. 이렇게 돌아 뭐 이렇게 아이고 돈 그대로 있고 흔히 나와서 여러분이 주님과 함께 동의하는 것을 누가 제일 잘 알고 있는가? 가까이 있는 사람 제일 잘 알죠. 남편이 예술을 가까이 했는지 술과 가까이 했는지, 누가 잘 압니까? 대답 좀 해봐요. 한 번 더 가장 가까운 아내가 제일 잘하고 우리 와서 반대하는데 부모가 예수님하고 경영하고 있는지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는지 부모가 함께 하고 있는지 부모가 함께 하고 누가 제일 잘 알아요. 아이들이 제일 잘 알죠. 아이들이 요새는요 주름과 가까이가 아니라 유투브와 가까이, 주님과 가까이가 아니라 드라마와 가까이 조영필 오빠 뭐 이런 사람도 있어요. 왜 나에게는 기름부음이 없는가, 고민하지 말고 왜 나는 주님과 더 가까이 하지 않는가? 왜 주름과 더 깊은 교제가 없는가? 그걸 고민해야 되는 거예요.
 
주님과의 교제 능력이 실질적으로 삶의 능력으로 정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가 나와 함께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왜 사람 말의 문제를 알 사람이 과거에 은혜 만났던 분들 이 자리에 계십니까? 과거에 나름대로 열심히 했던 분 시험 안 들고 열심히 초심으로 성심으로 한결같은 분들이 여기에 계시죠?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요즘 좀 뭔가 무언가 빠져있다면 정신 차려야 되고, 아주 신선한 우유도요 3일을 못 가요. 양분이 있다. 할지라도 그냥 놔두면 변해요. 매일매일 신선한 우유를 마셔야 되는 거예요. 오늘 이런 순장과 순원들이 이런 것이 매일매일 여러분들을 향한 신선한 우유가 돼 가지고 여러분들의 건강을 지켜주기를 원하는 것이에요. 어저께나 오늘이나 순원들과 부르고 들어보고 해주세요. 나도 오늘 가슴이 뭉클하더라고요. 내가 마음처럼 죽을 때까지 지속하게 해주시고, 허물 많은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의심 많은 도마에게 확신 주시고, 사랑하는 해주죠? 부드러운 사람으로 품고 서로 격려하는 자들이 되며, 오늘 그런 마음을 가지고 승리하는 순장, 순원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삶의 열매를 거두며 .
-그리스도인이 힘 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비결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님 이름의 능력이 회복(回復)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무릎이 예수님의 이름 앞에 꿇어지는 것이요, 모든 입술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빌 2:9-10). 당신이 속한 모든 삶의 영역에서 세상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고 거룩한 담력으로 예수를 자랑할 수 있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드립시다. 아멘.
*빌립보서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지극히 높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페립소센’은 ‘휘페르’('위로')와 ‘휩소스’('높은 곳')의 합성어로 ‘가장 높은 곳으로 올려지다’라는 의미 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겸손과 수치스러운 죽음의 자리에서 다시 부활과 승귀(昇貴)를 통해 영광에 이르도록 높이셨음을 시사한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바울은 이 이름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언급하지 않는다. 이 ‘이름’에 대해서 혹자는 ‘예수’라고 주장하며 혹자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문맥상 ‘이름’은 11절에 나오는 ‘주’를 가리킨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전우주를 다스리시는 주권을 소유하신 ‘주’이심을 시사한다.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해 설) ‘시인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사본에 따라 다르게 사용된다. 어떤 사본에서는 제1부정과거 가정법인 ‘엑소몰로게세타이’를 사용하여 ‘시인하였을 것이다’라는 의미로 기술한다. 다른 사본에서는 미래 직설법인 ‘엑소몰로게세타이’를 사용하여 ‘시인 할 것이다’라는 미래적 의미로 기술한다. 두 가지 경우 중 문맥상 전자가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10절의 ‘꿇게 하시고’의 헬라어 ‘캄프세’는 ‘캄프토’('굽히다')의 제1부정 과거 가정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높이셔서 ‘주’라는 칭호를 주심으로 모든 만물로 하여금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주’라고 시인하게 하셨다. ‘주’에 대한 시인은 하나님 뜻의 성취를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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