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주후 2024년 7월 14일) 1부, 4부
제목: "죽음을 뚫고 생명으로"
말씀: 사무엘 상 2:10, 사무엘하 22:50-51,
누가복음 1:46-48
대표기도: 유종성 부목사님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부목사님)
사회: 임병영 부목사님
 
설교자: 김정우 목사님(한국신학정보연구원)
ㅡㅡㅡㅡㅡ
 
*사무엘상 2:10,
10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
*사무엘하 22:50-51,
50 이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모든 민족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51 여호와께서 그의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원하도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하였더라.
*누가복음 1:46-48,
46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48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
 

▶김정우 목사님
-한나의 인생에는 모순이 많았습니다. 그 이름은 한나인데 은혜를 뜻합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 그녀의 태를 닫아서 임신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미 생명의 문이 닫혔는데, 주님의 은혜가 어디에 있습니까? 한나는 거의 남편 엘가나의 첫째, 아내입니다. 첫째는 창세기 일장의 첫째, 날처럼 특별하고 유일하고 유니크한 날인데 첫째인데 넘버원인데 둘째, 브닌나에게 습관적으로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온 나라가 축제를 맞이하면 모든 사람들이 가정들이 실로 성소로 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1년 중에 가장 맛있는 것을 먹는 날인데 브닌나는 주님의 집에서도 한나를 괴롭혔습니다. 한나 너 안나 하나님이 너희 태를 닫았는데 무슨 한나 그때 남편 엘가나가 한나를 위로하기 위해서 한나 보고 왜 우세요. 왜 안 막으세요? 왜 슬퍼하세요? “내가 당신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않소?” 웬 근거 없는 자신감? 자식을 낳을 수 없어서 고통당하는데 내가 당신에게 10아들보다 낫다 이 말이 무슨 도움이 되죠. 엘가나는 한나의 깊은 고통에 신체적이고 영적인 고통에 공감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나를 제대로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남자들은 여자의 정서에 대해서 반응하는데 늘 서툴러요 의도는 좋은데 결과는 늘 나빠요 나는 나의 아내에게 사과를 하거나 위로를 할 때면 늘 더 화내게 하는 특별한 의사가 저에게 있는 것 같습니다.
 
한나는 마음이 너무나 괴로워서 성전에 들어가서 간절히 기도하는데 대제사상 앨리가 한나를 보고 술을 그만 마시게나. 포도주 끊으세요! 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내 제사장께서 이렇게 피상적으로 단정적으로 나를 볼 수 있을까? 우리는 인생에서 모순에 부딪치면 어떤 반응을 합니까? 당황스럽고 화가 나고 좌절스럽고 다 포기해버리고 싶습니다. 또 때로는 지나치게 방어적이 되어서 오히려 공격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인생을 좀 살아보니까 모순이 인생의 기회구나! 아이러니가 패러독스의 기회구나! 모순이 역설의 기회구나! 아 이 모순은 나로 하여금 성숙하게 하라고 하는 현실로 내게 다가온 것이구나! 한나는 자신의 모순을 방치하지 않고 대면하였습니다. 직면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을 뚫고 생명으로 나아갔습니다. 한나는 태가 닫혔지만 아들 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문이 꽉 닫혔는데 열어달라고 두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닫았으니 하나님이 여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한나는 믿음을 선형적으로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직선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힘을 준만큼 결과가 나온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원인과 결과를 방정식대로 만드시는 분이 하나님은 곡선으로 일하시는 분이고, 변화구를 던지시는 분이고 바나나킥을 차시는 분입니다. 김중권 목사님의 말씀대로 변장된 축복으로 늘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이십니다. 한 나는 하나님께서 만약 나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 아들을 바치겠다고 서원을 하고 있습니다. 역설입니다. 평생 갖고 싶은 것을 주시면 내가 그것을 드리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상거래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모든 권리를 내가 포기(抛棄)하겠다고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한나는 유일한 아들 사무예를 하나님께 평생 동안 드리기로 서원하고 있습니다. 평생 드릴 필요는 없었습니다. 어머니와 자식의 연대감은 우리 남자들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여자들에게 자식은 분신과 같습니다. 살이 떨어지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인데 평생 드리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날 한나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오래 기도 했습니다. 기도가 끊어지지 않습니다. 기도가 기도를 이어갔습니다. 그동안 쌓였던 것들이 폭발했습니다. 그래서 한나는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생명 체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불임의 태, 생명이 꿈틀거렸습니다. 죽은 태가 살아났습니다. 새로운 느낌이었습니다. 뭔가 약동했습니다. 어렵던 마음이 녹았습니다. 막혔던 것이 뚫렸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위축되었는데 영원히 팽창하고 감각이 살아났습니다. 노래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한나의 노래는 대작은 아니지만, 아주 강력한 노래입니다. 이미지도 강력합니다. 플롯도 탄탄하고 주제가 선명합니다. 한나는 내 뿔이 높아졌다. 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한나는 그동안 너무나 뿔이 없어 가지고 치이고 살았습니다. 조롱과 모욕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뿔이 솟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나의 내면에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만나니까 내면에 힘이 생겼습니다. 기세가 생겼습니다. 기력이 회복되었습니다.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자신 속에 권위와 위엄이 생겼습니다.
 
뿔이 솟으니까, 추위의 다른 짐승들이 감히 덤비지를 못했습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들에게도 뿔이 솟아나기를 축원 드립니다. 자신의 뿔을 높여주신 주님을 한나는 찬양했습니다. 여호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다. 주님밖에 다른 이가 없다. 우리 하나님과 같은 반석도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비교 불가능한 분이었습니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이었습니다. 거룩하신 주님께서 우리 역사와 인생에 개입 하시고야 만다는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로 한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이 세상의 질서는 영원한 것 같지만 주님은 권력의 도치를 만드시는 분입니다. 용사의 활이 어느 날 꺾여버리고 넘어지는 자가 힘으로 뛰뛰는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경제력의 도치를 만드시는 분입니다. 늘 부익부 빈익빈의 원칙이 역사의 철칙이 되지 않도록 하시는 분이십니다. 풍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해서 품을 팔고, 줄이던 자들은 다시는 줄이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생명력과 생산력과 영향력의 도치를 만드시는 분이라고 노래합니다.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가 히브리어로 아카라, 아카라 가슴 아픈 단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로 가 일곱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많은 자녀를 낳았던 자는 쇠약하다. 한나 자신의 체험이었습니다. 어떻게 세상에 이런 일들이 일어날까요?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한나는 이 시의 정중앙에서 이런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6절예요.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신다 살리시기도 한다. 죽이시기도 하고 살리시기도 하고 서울에 내리기도 하시고 거기서 올리기도 하시는 도다. 이 시에서 한나의 시에서 가장 놀라운 말씀입니다. 정중앙에서 터닝 포인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왜 이것이 한나의 시에서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까?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주님에 대한 찬양이 왜 놀라운 말씀입니까? 왜냐하면, 이 말씀은 모세의 노래를 인용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32장 39절에 모세가 한 말씀입니다.
 
*신명기 32:29,
39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구원 사를 총정리하면서 모세가 마지막으로, 했던 것은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 시도 하는 주님에 대한 고백이었습니다. 한나는 모세의 고백과 정신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모든 생명의 탄생과 소멸은 단순한 자연적 과정만은 아니다. 주님은 인생과 역사에서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일하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한나가 연이어서 7가지를 분사 형으로 말하는데 하나님이 늘 하시는 일, 지금도 하고 계시는 일, 일곱 아들을 얻은 한나가 7가지 찬양을 하시는데,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고 내리기도 하시고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 이 모든 일을 주님께서 하신다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한 민족과 나라와 가정과 개인이 높아지고 낮아지는 데는 주님의 주권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높아짐과 낮아짐은 인셜라도 아니고 별자리도 아니고 묘 자리도 아니고, 주님의 주권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주님은 가난한 자라.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 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 도다. 비로소 한나가 부자가 아니라 귀족이 아니라 가난한 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빈궁한 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일차적으로 물질적이고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사회에서 궁핍한 사람들에게 1차적인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 교회는 교회 정치적으로는 장로교입니다. 신학 사상으로 말하자면, 개혁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실천에 있어서는 복음주의라고 합니다. 복음주의운동은 1846년 영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한참 산업혁명이 일어나서 사회적 모순이 너무 많이 일어났고 어린아이들을 일찍 공장에 보내고 하루 종일 일하게 하는 그런 모순이 있었습니다. 사회적 모순이 극심했고 그래서 1948년에는 칼 막스와 앵겔스가 커뮤니스트 매니페스토, 공산당 선언을 하는 그런 역사적인 배경 가운데 복음주의가 우리의 믿음은 복음 증거뿐만 아니라, 사회 참여요. 사회 개혁에 있다는 것을 선언하면서 운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복음주의 사상을 이어받은 로잔 언약은 복음 전도와 사회적 관심은 상호 배타기적이지 않고 교회는 이 두 가지 의무를 늘 같이 수행해야 한다고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1년에 한 번씩 한교섬도 하고 사랑 광주리도 하고 열심히 이 사회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1차적으로 주님은 빈궁했던 우리 가난했던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 대한민국을 이렇게 부강하게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에서 가난한 자 빈궁한 자는 본질적으로 영적입니다. 주님께서 가난한 심령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을 영광의 자리로 기어이 인도하십니다.
 
한나는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 받은 저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로 맞히고 있습니다. 아직 왕이 없습니다. 사사시대 말기입니다. 그렇지만 한나는 왕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기름 부음 받은 자, 메시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메시아는 구약성경에서 여기에 처음 나오고 있습니다. 한나는 이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를 누가 이룰 것인가? 가난한 자를 진토해서 일으켜서 영광의 자리로 인도할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실현할 자가 누구인가? 메시아가 와야 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나의 뿔을 높이신 주님께서 메시아의 뿔을 높이셔서, 이 사사 시대의 마지막 대혼란을 정리해주실 것을 한나는 바라보고 있습니다. 한나는 죽음을 뚫고 생명으로 나아갈 자신뿐 아니라 메시아 왕을 통하여 온 나라가 영광의 자리로 나아갈 것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한나의 기도는 어떻게 성취되었을까요? 사무엘서는 한나의 노래로 시작을 하고, 다윗의 노래로 마치고 있습니다. 한나의 노래가 사무엘서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한나의 기도를 붙들고 그 꿈을 이룬 사람은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한나의 기도가 예언이 되었습니다.
 
다윗이 이 한나의 노래를 꽃피우고 확장하였습니다. 사무엘하 22장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인생을 마무리하면서 51절 52절, 대작은 시를 썼습니다. 왜 시인들은 이런 대작은 시를 쓸까요? 다윗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감사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싶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모순을 역설로 만드신 하나님께 큰 감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 전체를 돌아보았습니다. 내가 어떻게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는가, 그 수많은 죽음을 뚫고 어떻게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는가, 다 짚어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후세에 꼭 남기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시인으로서, 내 시가 얼마나 멋지겠어요. 저 있는지 여러분들 알기나 하시오? 이런 걸 또 좀 자랑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큰 그림을 우리에게 큰 그림을 그려줘서, 우리가 너무 작은 그림을 그리고 살면 모순 속에 빠져서 나오지를 못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늘 큰 그림을 우주적인 그림을 그리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받은 구원이 큰 구원이었다고 마지막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그런데 놀랍게도 한나의 노래를 계속해서 가져오고 있습니다. 한나는 자신의 뿔을 높이신 주님의 능력을 찬송하다가 마지막으로, 주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뿔을 주님께서 높이 들릴 것이라고 바라보았습니다. 다윗이 이제 뭐라고 찬송합니까? 3절에 보니까, 주님은 너의 구원의 뿔이시다 주님이 내 구원의 뿌리시다. 한나가 바라본 그 뿔이 다윗에게 난 것입니다. 한나는 내가 주님의 구원을 기뻐한다고 노래했는데 다윗은 주님께서 나를 기뻐하시므로 나를 구원 하셨도다, 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한나의 구원에 있어서 아주 강력한 이미지는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다. 라는 노래였는데 다윗은 이 반석 이미지를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구원의 피난처가 되는 이 반석 이미지를 이 시에서 계속 뿌리고 있습니다. 주님이 영원한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오. 내가 피할 피난처시여 나이 망대시오. 32절에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여호와 왜 누가 하나님이시며, 우리 하나님 왜 누가 반석이시냐? 47절에,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높일지로다. 인생은 너무나 가변적이고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나는 늘 흔들리고 나는 마음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지만 주님이 나의 반석이시다. 거대한 삼각산 같은 인수봉 같은 마사달 같은 영원히 피할 반석이라고 한나는 노래하고 있습니다. 한 나에게 원수가 있었고, 대적이 있었는데, 다윗에게 대적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내 대적이 강한 원수들이었다. 그들은 프로들이었다. 나를 미워하는 자들이었다. 사악한 자들이었다고 원수들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한나의 노래의 핵심 주제는 여호와는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신다. 고 노래했는데 다윗은 28절에서 주께서 권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를 살피사 낮추시리라. 사무엘서 전체 주제가 높이시는 하나님, 낮추시는 하나님, 교만한 자는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아무리 센 힘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주님이 기어이 낮추고 마시는 엘리를 낮추시고, 사울을 낮추시고 이스라엘을 낮추시고, 겸손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무엘을 높이시고 다윗을 높이시는 이 운명의 역전을, 사무엘에서는 계속해서 말하고 있는데, 곤고한 백성을 구원하시는 주님을 그러니까 다윗은 늘 마음의 자리가 영광의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 곤고한 백성들의 신음에 그들의 고통에 그들의 토탄에 그들을 어떻게 새롭게 하고 갱신할 것인가에 다윗은 있었습니다.
 
한나가 마지막으로, 여왕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내리시며, 자기 왕에게 힘을 주소서! 라고 기도를 했는데 바위선 44절에 “주께서 또 나를 내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나를 보전하사 모든 민족의 으뜸으로 삼으셨으니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들이 나를 섬기리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나는 주님께서 다윗을 모든 열방의, 모든 민족의, 모든 언어의 머리로 대표로 세우실 것까지는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모든 열방의 메시아로 세울 것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도 한나도 못 본 부분이 있었습니다. 한나의 핵심 주제는 영원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고 서울에 내리기도 하시고 거기서 올리기도 하시는 분이었는데.,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원수를 다 물리쳐 주실 것을 바라보았고, 거의 원수들을 스올에 던질 것으로 생각을 했는데 자신은 영광스러운 메시아가 될 것으로 착각했는데, 이 스올에 던져진 사람은 거의 원수가 아니라, 다윗 자신이었습니다. 사망의 물결이 나를 에우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다. 다윗도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죽음의 물결이 죽음의 물결 가운데 다윗은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스올의 포승줄이, 죽음의 사자의 포승줄이, 나를 꽁꽁 매어 싸고 삼왕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메시아가 스올에 던져졌습니다. 다윗은 온갖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어디에 있는가, 하느님의 섭리가 어디에 있는가, 다윗은 하나님의 비선형적 통치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다윈이 거기에 자신이 이렇게 내가 열심히 사는데 어찌하여 내가 죽음을 당해야 하는가?
 
그러나 그는 죽음 가운데서 기도했고, 다윗이 스올에서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다윗을 건지시기 위해서 하늘 성전에서 친히 내려오시는데, 하늘장막을 찢으시고 친히 천군천사와 바람 날개를 타고 걸음을 타고 내려오시면서 흑암을 뚫고 내려오시고 그러니까 땅이 막 뒤흔들리고 지진이 일어나고, 우뢰 소리를 발하고, 그 깊은 죽음의 물 가운데서 다윗을 구원하는 이야기, 하나님의 구원, 우리는 예수 믿어 재산 받는 구원만 생각을 하는데 우리가 받은 구원은 우주적인 전쟁 가운데 하나님께서 물에 빠져 죽음의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교회와 성도들을 건져 주시는 어마어마한 우주적 전쟁의 사건 가운데서 다윗을 구원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대한민국을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이렇게 자유 민주주의적인 헌법도 주시고 제헌절도 주시는 이런 하나님을 다윗은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다윗이 내가 받은 구원이 큰 구원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50절에 다윗은 이름으로 여호와여 내가 모든 민족 중에 죽게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다. 로 마치고 있습니다. 18장 50절 “내가 모든 열방 가운데서 주님을 찬양하겠다. 주의 이름을 찬양하겠다.” 그런데 바울이 이 말씀을 하나님의 구원 사를 쭉 이야기를 하다가 바울이 이 말씀을 인용하네요. 로마서 15장 9절에,
 
*로마서 15:9,
9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세계 선교의 핵심적인 구절이 되겠습니다. 복음주의 신앙고백을 이렇게 정수로 만든 로잔 언약에서는 이 구절을 가지고 해석을 할 때, 세계의 모든 교회가 홀 처치가, 홀 가스팰을, 온전한 복음을 홀 월드의 온 세상에 전해야 한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한나의 기도를 통해서 다윈을 통하여 이렇게 확장되고 전개되면서 전 세계적인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의 나라는 망했습니다. 다윗의 후손들은 왕권을 잃었습니다. 수백 년 동안 다윗의 꿈을 가슴속에 품고 살았던 한 여자가 있었는데, 나사렛에서 살고 있는 마리아였습니다. 마리아가 이 한나와 다윗의 노래를 가져오면서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이 찬양을 드리고 있습니다. 몇 절 되지 않습니다. 참 소박합니다. 수수한 노래입니다. 모짜르트도 여기에서 매그니피컷을 노래했는데, 세바스찬 바흐도, 슈베르트도, 리발디도 누가 복음의 첫 찬양이 되겠습니다. 그렇지만 이 노래 자체는 너무나 소박합니다. 한나의 기도와 다윗은 노래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참 담백한데 특별합니다. 유니크하죠.
 
이런 노래가 없죠. 왜요 왜 그렇습니까? 배경이 놀랍습니다. 이 찬양의 배경이 뭐냐 하면,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아기예수를 잉태하고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에게 문안을 갔는데 엘리사벳과 마리아가 만나자마자 태중에 있던 태중에 있던 요한이 태 안에서 태 안에서, 기쁨으로 내 복 중에서 뛰놀았도다. 태 속에 있는 아이가 복중해서 뛰놀았다. 이 뛰놀았다는 이 헬라의 단어는 히브리어로 번역을 하자면 춤추다. 의 춤추다 아이가 태속에서 춤을 추는, 아 하나님의 임재를 하나님의 임재를 태속에 있는 아이가, 아기 예수 앞에 6개월 늦게 생긴 아기 예수 앞에서, 임재를 느끼면서 춤을 추는 성령으로 부른 찬양입니다. 성령의 감동 가운데 마리아가 찬양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약동과 충만, 성령께서 직접적이고 전인격적인 감동을 주시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송가는 본질적으로 여기에 있는 모든 구절들이 대부분의 구절들이 하나의 노래에서 온 것이고, 다윗의 노래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한나가 내 마음이 여호와를 즐거워하며 내가 주의 구원을 기뻐합니다. 라고 찬양했는데 마리아는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내 구주을 기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나 노래의 중심 사상은 48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다 비천하다. 한나는 이 마리아는 자신의 상황뿐만 아니라, 온 이스라엘의 상황을 비천(卑賤)하다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한나가 말하던 주리던 자, 임신하지 못 하던 자, 가난한 자, 빈궁한 자, 걸음더미에 있는 자, 이것을 추상적으로 표현하자면 한마디로 비천하다 우리가 지금 참 비천하게 되었다. 이것은 마리아 자신의 상황이라기보다는 온 이스라엘의 공동체적인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나가 느끼는 비천함은 영적이었을 것입니다. 기도하는 자리에 설 때, 우리는 늘 우리가 한없이 비천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비천한 나에게 비천한 나에게, 능하신 이가 큰일을 내게 하겠다.
 
다윗은 큰 구원을 바라보았는데, 그의 후손을 통해서 큰 구원을 바라보았는데, 주님의 큰 구원이 나사렛에서의 처녀 마리아에게 큰 일로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너무나 큰일을 이루시기 때문에 만세에, 만세의 나를 복이 있다. 행복하다고 일컬을 것이다. 마리아는 만세에 복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을 온전히 버렸기 때문입니다. 헤르만 바빙크라고 하는 이 개혁주의 조직 신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가운데 특별한 선택과 은혜를 입었다. 하나님은 마리아를 성자의 어머니가 되도록 준비하셨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가 자신의 어머니 되기를 원하셨다.
-헤르만 바빙크-
 
구원사의 정점이 하나님이 인류 역사에서 이루실 가장 큰 사건이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임마누엘이 되는 이 사건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육신의 영광이 이제 마리아에게 나타났습니다. 마리아를 통해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냥 신이 인간이 된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견줄 바 없는 하나님이 영광의 모든 속성을 가지신 그 하나님께서 비천한 인간인 우리와 같이 되신 것입니다. 무한히 유한이 되셨습니다. 영원히 시간 속에 들어왔습니다. 불변이 가변이 되었습니다. 창조주가 기름 부음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지존 자께서 엄마의 태속에 있고 어머니를 젖을 파는 완전한 의존 자가 되었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었습니다. 초자연이 자연 속에 들어오셨습니다. 신비입니다. 초월입니다. 비선형의 극치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고 있는 믿음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공로로, 우리의 노력으로, 우리의 선행으로 우리의 도덕적인 노력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하고 똑같은 혈육을 입으시고 우리와 똑같은 시험을 받으시고, 모든 시험을 이기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 성육신의 은총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이제는 대대로 있을 것이라고 마리아가 말하고 있습니다. 성육신을 통하여 주님의 자비로움이 은총이 우리에게 캐쉬가 된 것입니다. 성육신의 하나님께서 이제는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영원히 평생 우리가 어떤 인생의 과정을 통과하든지 간에 겸손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53절에 주리는 자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다. 이제는 주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경건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이 더 이상 해가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이 성육신의 약속은 다윈에게 약속한 것 정도가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그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마치 3명의 오페라 가수들이 각자의 아리아를 부르는 것 같은 한나가 자신의 아리아를 불러 거대한 오케스트라와 함께 51절에 걸치는 찬양을 드리고, 마리아의 그 청순하고 아름다운 이 매그니픽 컷을 우리는 들었습니다. 이 세 사람 다 인생으로 말하자면, 모순의 극치 가운데 살았습니다. 극한 모순 가운데 살아서 극단적 모순 가운데 살았지만 이 인생의 모순을 대면하고 역설로 디바인 패러독스로 하나님의 패러독스로 만들어서 주님의 구원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세 사람 다 각자의 많은 죽음을 뚫고 생명으로 나아갔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 생명으로 나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몸을 입고 오신 이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우리도 너무나 많은 모순들, 문명사적인 선언 속에서 우리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혼돈과 모순 가운데 있지만 우리의 수많은 모순을 맞닥뜨리고 받아들이고, 패러독스로 만들고 주님의 영광을 찬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의 뿔이 높아질 수 있기를 축원 드립니다.
 
요약










=====
 

-2부, 3부.
▶설교자: 김장한 목사님(극동방송 이사장)

2부ㆍ3부
제목: "이상적인 교회"
말씀: 사도행전 2:41~47
설교자: 김장한 목사님(극동방송 이사장)
ㅡㅡㅡㅡㅡㅡ
*사도행전 2:41~47,
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
 

○김장한 목사님(극동방송 이사장)
▶조금 아까 오정현 목사님 전화를 주시면서 거기 지금 몇 시입니까? 그러니까 토요일 날 저녁 한 7시 반, 8시 됐다고 그러시더라구. 내일 주일날 아마 거기서 설교하시는 것 같은데, 저더러 떠나시기 전에도 목사님 예배 좀 잘 드려주세요.
 
그러고 떠나시더라구 그래서 2부 예배 잘 드렸는데 3부 예배도 잘 드릴 것을 믿습니다. “이상적인 교회”, 오늘 초대교회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초대교회하고 사랑의 교회하고 비교를 해 봤는데 그때 피 예배당은 이렇게 아름답지 않았을 거라고 느껴지지만 하루에 3천 명이 더해주는 걸 보면은 거기도 많이 모였구요. 그때 찬양대가 여기 찬양대 만큼 했는지, 난 잘 몰르는데 그래도 찬양을 그때 했을 것 같고, 사실 교회는 빌딩이 아니라 오늘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교회인 줄 믿으시면 알면 아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아까 2부 예배에 ‘이상적인 교회’ 만약 규정한다면, 오늘 본문에 난 말씀을 근거로 성장하는 교회 그로잉 러치, 어린애가 자라서 성장해야지 정상적이죠. 교회가 개척해 가지고 계속 성장해야 이상적인 교회가 되고 두 번째로, 2부 예배 말씀드린 게 선교하는 교회 고잉 처치, 제가 중앙교에 목회할 때 장기 선교사는 안 되더라도 단기 선교사로도 1번 다녀오라고 내가 목회하는 동안에 우리 중앙 교회 성도들은 다 선교 지를 1번 다녀오라 그랬어요.
 
선교하는 교회가 이상적인 교회다. 그래서 오늘 세 번째로는 빛나는 교회, 글로잉 트러치 네 번째 눈물 있는 교회, 이제 이렇게 마감이 될 텐데 만약 2부 예배 안 나오신 분들은 아마 카세트 사시면은 2부 예배 설교가 나올 거예요. 자 어느 날 3부에 빛나는 교회가 글로잉 처치, 사도 행전 2장 44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모여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다. 이것이 빛나는 교회, 사실 글로잉 처치, 사랑의 교회 어디서 봐도 빛나는 교회예요.
 
사람들이 많아서도 아니고, 건물이 좋아서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상적인 교회로 인정하시기 때문에 빛나는 교회예요. 울리엄 캐리, 소년이죠. 구두 수선공이었습니다. 꿈과 소망 없이 살아가던 울리엄 캐리, 예수님을 믿고 인생관이 완전히 변했어요. 가치관이 달라졌고 꿈을 가진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변화를 시켰어요. 울리엄 캐리, 그는 구두 수선 가게를 차려놓고 그 앞에다가 세계 지도를 펴놓고 거기 3가지 표현을 써놨어요.
 
큰 비션을 가져라. 그레이피션, 두 번째로, 큰 기도를 해라. 그레이트 프레이, 세 번째로, 큰 기대를 걸라. 그레이트 익스펙테이션, 그 3가지를 써놓고 매일 구두 수선을 하면서 선교의 꿈을 접지를 않았습니다. 남의 구두 수선 가게에서 수선을 하나 사람이 꿈을 품어 봤자 수선 가게 하나 정도 차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했지만은 윌리엄 캐리의 꿈은 그거하고 달랐습니다. 그는 세계 지도를 품에 넣고 그 당시 아무도 외국 선교로 나가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있을 때, 선교사로 나가겠다는 자원을 했습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습니다. 후원자도 없을 텐데 아내까지도 선교사 나가는 걸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도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선교의 아버지, 선교의 원조 윌리엄 캐리,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는 꿈을 가졌기에 아무나 할 수 없는 그 일을 해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꿈을 포기하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지라도 그리스도인은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분 때문에 오늘도 희망차게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첫 번째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빛나는 교회는 꿈과 환상을 가졌다고 하죠.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실천하는 교회, 사자행전 11장 26절에, 만남의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1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실천하는 교회, 행하는 교회 무엇이 달라도 다릅니다. 자기만 위한 교회가 아니라 이웃과 남을 위한 교회, 사회에서 큰 빛이 되는 교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했습니다. 기도하는 교회, 사도행전 4장 13절에,
 
*사도행전 4:13,
13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우리 한국 부흥의 역사를 볼 것 같으면, 김익두 목사라는 분이 계셨어요. 깡패가 그 동네 친구의 권유로 이웃동네 금산교회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울리엄 스왈론이라 하는 선교사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사람이 변합니다. 김익두 얼마나 개망나니였냐고 할 것 같으면은 교회 부흥이 하고 있는데, 거기 신발을 다 걷어다가 화장실에 집어넣는 사람이었고, 그는 산으로 나무를 해러 한 게 아니라 시장으로 나무를 하러 가가지고 제일 보기 좋은 장작은 자기가 지고 갑니다. 누구도 말하는 사람도 없죠. 그러다가 울리엄 스왈론의 설교를 듣고 김익두 전도사는 다시 태어납니다. 어느 날 신방을 다녀오던 중 김익두 전도사는 거지 앉은뱅이를 만났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예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고쳐봐 고쳐보겠다고 생각을 하고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과수원 돌담 밑으로 거지를 데려가 가서,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내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라.” 했는데 아무 사건이 일어나질 않았습니다. 너무나 부끄럽고 그 자리 도망칠 수밖에 없어서 김 전도사는 자식의 무능함을 탄식하다가 담요를 싸들고 산으로 올라가서 금식과 철화를 하며 능력을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합니다. 간절히 기도하고, 나니까 기도하는 가운데 불같은 성령이 그에게 임했고, 전도사님은 성령의 능력이 충만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산에서 내려오다가 김 전도사는 얼마 전에 앉은뱅이를 다시 만났습니다. 이제 부끄러움도 없이 그의 손을 잡고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 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러자 앉은뱅이가 벌떡 그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김익두 목사의 첫 번째 기적이라고 합니다.
 
그 후 2만 명의 난치병 환자들을 안수해 기도해서 고쳐 주었고, 208개의 교회를 개척했고, 200여 명의 신학생들을 공부시켰습니다. 김익두 목사님과 한국교회 성도들은 정말 군산 천막 교회 집회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고, 교회가 급성장하기 시작했는데 그러다가 6.25 사변이 터짐으로써 공상군에 맞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했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의 이런 큰 능력은 기도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했죠. 김익두 목사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마가복음 9장 27절 이하에 보면,
 
*마가복음 9:29,
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22:39,
39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기도하러, 기도하는 가정은 변화됩니다. 기도하는 개인도 변화합니다. 기도하는 교회도 변화가 됩니다. 기도하는 나라는 반드시 변화가 오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영국의 노예 해방에 운동하였던 울리엄 웨어포스는 자기 아들에게 새벽 기도의 중요성을 관하여 편지를 써서 보낸 적이 있다고 합니다. 한번 들어보세요.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니게 원하는 것이 하나 있단다 그것은 결코 아침 기도를 무시하거나 짧게 해버리거나 성급하게 마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특히 골방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등한이 하지 않도록 주의했으면 한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달리 없다. 만약 내가 아침부터 하나님과 친근한 교제를 하게 된다면 너는 지금보다 더 훌륭하게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울리엄 웨어포스-
 
- 노예 해방을 지지하고 살아있는 신앙을 행동으로 보여준 투사의 삶이 올리엄 웨어포스라고 하지요 하루에 첫 시간을 어떻게 시작하는가에 따라서 하루의 결과가 어떠리라. 는 것을 예상해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새벽을 여는 사람은 충만한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네 번째로, 어떤 교회가 이상적인 교회냐, 눈물있는 교회가 이상적인 교회라고 했습니다. 그로잉 처치, 사도행전 2장 44절 45절에,
 
*사도행전 2:44-45,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허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람과 함께 울지 않고 배고프고 헐벗은 사람과 나누지 못하는 교회는 이상적인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적어도 3번이나 우셨다고 했습니다. 어떠한 교회가 이상적인 교회냐, 새벽마다 나와서 하나님 앞에 울부짖으면서 통행하는 그런 교회가 이상적인 교회,
 
여집사님이 남편의 무지한핍박을 가두면서도 새벽기도 빠지지 않고 주위를 성소하고, 수요일날 저녁 예배 꼭 참석을 했는데 그 남편은 부인이 교회 다닌다고 얼마나 하루는 그 여집사님이 자기 남편 신발 한 짝을 가지고 새벽 기도에 가서 앞에 남편의 구두를 놓고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신발 임자가 예수 믿고 구원받고 이 교회 장로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통곡으로 기도를 합니다. 남편이 벌떡 일어나 보니까, 아내가 없어졌어요. 틀림없이 교세 교회 갔을 거다. 교회를 갑니다. 암만 신발을 찾아도 한쪽밖에 없어. 그래서 다른 신발을 신고 교회 가보니까 자기 부인이 자기 구두 1짝을 갖다 놓고 통곡을 하면서 울면서 이 사람이 교회 나와서 회개하고, 교회가 열심히 봉사하고 교회에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장로가 되게 해달라고 열심히 기도하는 그 부인의 기도소리를 들으면서 감동을 받은 거예요. 다음 주일부터 교회 나가야지. 부인을 따라서 교회 나가기 시작해서 몇 년 후에 그 교회의 수석 장로가 됐다고 하죠.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그 교회가 이상적인 교회가 될 줄 믿습니다. 사도행전 20장 31절에,
 
*사도행전 20:31,
3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그랬습니다. 제가 중앙교회 45년 목회를 하면서, 헌금봉토에 기도 제목을 쓰라 그래요. 우리 교회의 기도 제목 90프로가 남편 예수 믿고 구원받게 해 달라고 하는 기도 제목이에요. 그런 분들이 새벽 예배에 와서 눈물로 통회하면서 남편, 시부모, 예수 믿게 해달라고 통곡하는 사람들, ‘구하라 그러면 너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믄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잃은 영혼을 위해서 얼마나 눈물을 흘렸습니까? 여러분 사랑하는 식구들 중에 아직 믿지 않는 사람 사랑하는 친구가 아직 믿지 않는 친구가 있다면, 얼마나 눈물을 흘리면서 그 사람들을 위해서 통곡을 하며 기도를 했나 두 번째로, 잃어버린 영혼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잠언 10:12에,
 
*잠언 10:12,
12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운다. 고 했습니다. 1997년 9월에 소천한 테레사 수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성녀입니다. 그녀가 그와 같이 헌신하게 된 삶을 살게 된 경위는 기차를 타고 가는데 도중에 테레사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고 합니다.
 
테레사야, 너는 5만 명의 거지와 2만 명의 문등 환자가 있는 칼카다에 가서, 그들은 길가에서 나서 길가에서 살다가 길가에서 죽는다. 네가 그들에게 잠자리를 주고, 죽을 때 무덤을 만들어줘라. 테레사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면서 2년 동안 인도 여행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48년 8월 8일 마침내 인도 켈커다로 향합니다. 그때 그녀의 팀은 찬송가 1권, 성경책 1권, 입고 있는 수녀복 1벌이 전부였습니다. 그때 그는 이렇게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이 1벌의 옷이 헤어지면 저는 무슨 옷을 입을지 모릅니다. 오늘 밤 어디서 잘지도 모릅니다. 내일 아침 어디서 먹게 될 지도 모르고 떠납니다. 내 일생을 당신에게 책임져 주시옵소서. 그후 30년이 지난 오늘날 그녀의 수고로 100여 곳에 고아원이 세워졌고, 세계 각처의 사랑의 선교회 미셔너리 오브 처치가 세워졌습니다.
 
저는 캘커다에 가서 테레스 수녀를 두 번 만났습니다. 가서 만나보니까 키가 작은 할머니 양로원도 하고 고아원도 하고 참 굉장히 서민적으로 사는데, 내가 인도 동북부에서 부흥회를 하고 나오다가 갈 거 다 해서 비행기 타고 서울로 돌아와야 되는데 내 가방에 있던 옷 다 넣고, 그때 선물을 15개를 받았어요. 그게 뭐냐, 사람들이 손으로 짠 셔라고 하는 게 있어 담요 비슷한 거, 각 집하에서 나한테 선물 1 주는데 15장을 받았어요. 제가 그걸 갖고 나와서 테레사 수녀한테 혹시 이게 당신에게 필요하면 내가 다 주고 가겠다. 그게 절대 필요하다고 그래서 내가 지갑에 있던 돈 그때 딸라 가져갔죠. 다 넣고 내가 입고 없던 1벌만 남기고 다 주고 그 샤 15개를 거기다 다 주고 왔는데, 참 자기 고국을 떠나서 30년 동안 캘카다에 살면서 그 죽어가는 사람들하고 함께 생활을 하면서 세계적인 우인이 됐다고 하는 것을 생각해 봤을 때에 어떤 교회가 이상적인 교회냐? 고린도전서 10장 33절이라는 말씀 그대로
 
*고린도전서 10:33,
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오늘 이 설교를 마치기 전에, 예화 하나를 드리고 마칠게요. 열광적인 샘보다 제자가 쉽다는 윌리엄 볼드의 선교적 생애입니다. 윌리엄 볼드라고 하는 학생은 어마어마한 부잣집 아들이었습니다. 남들은 국내에서 수학여행을 하는데 올리엄 볼드는 그 부모님이 고등학교 졸업 예물로 세계 여행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윌리엄 볼드는 세계 여행을 하던 중에 예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이 고통 하는 모습을 보고 부모의 바람과는 달리 선교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하는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 회사의 후계를 포기하고 자신의 성경책을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노 리설(No reserve), 남김이 없이 모두 바친다. 실크 로드로 갔던 이슬람 문화가 많이 자리 잡고 있었을 때의 윌리엄 볼드는 이집트 카이로를 떠나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게 됐습니다. 극에서 위생 비 위생적이지요. 한센 병 가진 사람들을 보면서 윌리엄 볼드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지만은 척수막염이 걸려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성경책에 이러한 글을 써놨습니다. 노 리트릿(No retreat), 후퇴하지 않겠다. 한 달 뒤에 25살의 나이에 결국 윌리엄 볼드는 세상을 떠납니다.
 
그는 사망하기 전에 자신의 성경책에 유언처럼 다음과 같은 문장을 실렸습니다. 노 리트릿(No retreat), 노 리그렛(No regrets), 노 리서브(No reserve), 마지막에 후회 없는 삶이었다고 합니다. 아들을 먼저 보낸 후 그의 어머니는 한센 병 환자들을 위해서 복음 병원을 차려줍니다. 복음병원은 현재 제2 인민 병원으로 이름이 바꿔졌습니다. 윌리엄 볼드는 기린은 작은 역사관도 만들어 주었습니다. 대부호의 자제로서 태어난 남부럽지 않은 편안한 삶을 얼마든지 살 수가 있었던 윌리엄 볼드는 자신의 모든 기회, 권리, 소유, 즉 자기 자신을 모두 버리고 자신의 십자가를 치고 예수님을 따라간 사람입니다. 자신이 남긴 말처럼 노 리서브(No reserve)-남김없이, 노 리트릿No reserve)-후퇴 없이, 노 리그렛(No regrets)-후회 없이, 그 수첩에 적어놓고 실천해 옮겼다고 합니다.
 
언제나 자신에게는 노!라고 말하고 예수님에게는 예스! 라고 말을 하면서 살아온 울리엄 볼드, 그가 세상을 떠나 이집트에 있는 그의 묘비에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져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 그는 일어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으며 형제 사랑에 대한 특별한 마음을 품고 주님을 섬기는 마음속에 열정이 불타오르며 소망으로 기뻐하고 고난을 인내하며 기도에 힘쓰며 성도와 교통하다가 세상을 떠났느니라.”
 
-참 하나님께 그만큼 바칠 수 있는 윌리엄 볼드를 보면서 오늘 내가 사는 삶이 어떠한 삶인가? 이 교회가 대한민국의 아니 전 세계에 이상적인 교회가 되고, 한국에 있는 많은 교회가 사랑의 교회를 본받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728x90


♣부흥헌신 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4년 7월 13일)
제목: "기도의 용사, 다니엘"
말씀: 다니엘 2:14~19
찬양인도: 쉐키나(유재원 부목사님)
대표기도: 김대규 부목사님
사회: 김대규 부목사님
 
설교자: 백신종 목사님(미 동부 메릴랜드 벧엘교회)-초빙
ㅡㅡㅡㅡㅡ
 
*다니엘 2:14~19,
14 그 때에 왕의 근위대장 아리옥이 바벨론 지혜자들을 죽이러 나가매 다니엘이 명철하고 슬기로운 말로.
15 왕의 근위대장 아리옥에게 물어 이르되 왕의 명령이 어찌 그리 급하냐 하니 아리옥이 그 일을 다니엘에게 알리매.
16 다니엘이 들어가서 왕께 구하기를 시간을 주시면 왕에게 그 해석을 알려 드리리이다 하니라.
17 이에 다니엘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그 친구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에게 그 일을 알리고.
18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은밀한 일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사 다니엘과 친구들이 바벨론의 다른 지혜자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시기를 그들로 하여금 구하게 하니라.
19 이에 이 은밀한 것이 밤에 환상으로 다니엘에게 나타나 보이매 다니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
 
▶올라오기 전에 작년에 말씀을 듣고 많이 기대하고 계신다그래 가지고 부담이 두 배나 되는 것 같습니다. 아 작년에는 선교 보고를 중심으로 말씀드렸고 올해는 주제에 맞게 기도의 7천 용사, 여러분들이 정말 기도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용사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런 잘 알려진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 연안 작은 마을에 브라운이라고 하는 아 이발사가 있었습니다. 아 이발사가 어느 날 드디어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고 교회 나가게 되었습니다. 첫 주 교회 나가서 말씀을 듣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면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반드시 복음을 전해야 된다. 전도 해야 된다는 말씀에 큰 은혜를 받고 드디어 결심을 합니다. 월요일 날 가서 이발소를 열면 내가 열심히 전도하리라. 그렇게 월요일 아침에 가서 이발소로 문을 열었는데 마침 단골손님이었던 미스터 존슨이라고 하는 분이 들어옵니다. 이 죤슨 씨가 들어와서 이발을 시작하는데 보니까 그날따라 브라운 씨가 쩔쩔매는 거예요. 얼굴에 땀이 송글 송글 맺히고, 얼굴이 붉게 변하고, 무언가 말을 하려고 하는데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물었습니다. 미스터 브라운, 도대체 괜찮으십니까? 뭐 할 말 있으면 하십시오. 그랬더니, 아닙니다. 그러면서 이발을 다 마치고 드디어 마지막 면도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 미스터 브라운이 결심을 하고, 이제 면도를 앞두고 벽에 가서 가죽 혁대에 면도칼을 갈면서 이렇게 물었다는 것이죠. 전도를 하는데 이런 질문했습니다. “Mr, Jhonson! Are you ready to die?”- “미스터 존슨씨, 아유 레디 투 다이? 존슨 씨 죽을 준비가 되셨습니까?
 
전도도 훈련을 받아야 되는데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몰랐던 것이죠. 제가 오늘 아침에 이렇게 교회 들어오면서 보니까 어린 자녀들 데리고 오신 부모님들을 많이 보게 되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말씀으로 훈련받고,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귀한 일꾼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간 한번 볼까요? 우리 주일학교 자녀들 어린이들 한번 손 들어보시겠어요? 저 뒤에도 조금 있고 한데요. 네, 우리 부모님들이 한 번 머리에 안수하고, 제가 함께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자녀들 머리에 안수 하시고, 또 흩어진 자녀들을 기억하면서 여러분들 함께 우리 자녀들 위해서 기도합니다.
 
*기도---
존귀하신 하나님, 이 어두운 시대 어린 자녀들 이른 새벽을 깨우고 어둠을 밝히는 1줄기 빛으로 세워주심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악한 세대를 변화시키는 기도의 용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니엘과 에스더와 같은 믿음의 사람들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바울과 또 다비다와 같은 정말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를 경험하고 증거하는 귀한 자녀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또 세탁소 이야기인데 한 세탁소를 운영하는 주인이 보니까 어느 날 같은 마을에서 교회를 섬기는 목사님들 사모님 두 분이 와서 반갑게 인사 나누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서로 반갑게 인사 나누면서 한 사모님이 다른 사모님에게 이렇게 이야기해요. ‘목사님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저희 목사님은 너무 지쳐서 더 이상 목회하기가 어렵다고 해요. 너무 낙심하고 힘들어서 이제는 좀 포기해야 될 것 같다고 이야기 하네요.’ 그러면서 한숨을 푹 쉬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른 사모님이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모님 저희도 그럴 때가 있었어요. 조금 지나면 하나님의 상황을 낮게 변화시키실 것이고, 괜찮아질 거예요. 저희 목사님은 잘 지내고 계세요. 모든 게 그저 감사하다고 하네요.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것도 감사하고 또 성도들도 행복해하고 또 교회 별다른 문제도 없고 또 함께 동역하는 모든 동역 자들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고 하네요.’ 아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다가 두 사모님이 떠나고, 이 세탁소 주인이 보니까 목사님들 바지를 수선하러 맡기셨는데 한 목사님의 바지는 허릿단을 늘리기 위해서 수리를 하는 것이고요. 다른 목사님의 바지는 헤진 무릎 단을 수선하는 그런 수선을 맡겼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목회자뿐만 아니라 그럼 성도들의 진정한 행복은 허릿단을 늘리는 데 있지 아니하구요. 우리의 기도에 단을 쌓는데 있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재산을 늘리고,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편안한 노후를 준비하면 물론 이 땅에서 잠시 우리가 행복한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정 성도의 참된 행복은요, 모든 상황 가운데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함으로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 안의 역사하시는 그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그럼 사실 하나님을 경험하고 나면 문제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보다 크시기 때문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일하시는 것을 깨닫고 나면 우리가 그토록 힘겨워했던 문제들이 도리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도구라고 하는 것,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의 씨앗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지난 2015년에 대북 지원 사역을 하시다가 북한에 억류된 임현수 목사님이 계십니다.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큰 빛 교회를 담임하시면서도 1996년부터 북한에 굶주리는 동포들을 돕기 위해서 거의 한 20여 년간 150여 회 북한을 다니면서 어려운 그 북한 동포들을 위해서 수고하신 분이시죠. 갑작스럽게 북한에서 목사님을 억류하면서 체제 전복 간첩행위라고 하는 죄목을 뒤집어 씌워서 평생 교화형 무기징역을 언도한 것입니다. 그럼 그날 이후 매일 8시간씩 중노동을 하면서요. 정말 내일을 알 수 없는 언제 풀려날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그 절망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그 고난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이 기도 때문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럼 임현수 목사님께서 정말 크고 작은 기도에 하나님께서 많이 응답하셨노라고, 한 2년 6개월 동안 북한에 억류가 되시고, 2017년 8월에 이렇게 풀려나게 되셨는데 많은 기도응답을 경험했다고 간증하시면서 하루는 뭐 작은 것이지만,,, 그럼 그 교화소가 사방이 산으로 둘러막힌 아 그런 곳이었습니다. 한여름에 8시간씩 중노동을 하다 보니까 온몸에 땀이 베이고요. 뭐 땀띠로 인해서 정말 진액을 쏟아내면서 고통스러운 노동을 하고 있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이런 푸념이 나오더라는 거예요. 하나님 바람 좀 보내주세요. 바람 좀 불게 해 주세요. 주변에 있던 교화 원들도 다 들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아 가지고요. 마치 선풍기를 튼 것처럼 큰 바람이 불어오더라는 거예요. 그럼 그 순간 하나님이 내 푸념도 기도로 들으셨구나! 하나님 살아계시는구나! 기도하면 하나님 들으시고 역사하시는구나! 깨달아지니까 그러면 그 땀띠도 그 진액을 쏟는 고통스러운 노동도 힘들지 않고 도리어 감사와 기쁨으로 찬송이 터져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교화 원들도 목사님이 성경을 이야기하거나 찬송을 하면 그렇게 멸시하고 때리고 했는데 그날따라 시원한 바람을 즐기면서 다 찬송을 듣더라는 거예요. 그럼 기도하면 하나님 역사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에베소서 3장 20절 말씀해 보면,
 
*에베소서 3:20,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도 들으시고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선한 생각으로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가득 채우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담임목사님 2018년도에 제가 섬기는 벧엘교회 오셔서 간증을 하시는데 보니까, 정말 아 이 시대 다니엘과 같은 사람이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난 가운데 연단 하셔서 정말 새로운 일을 위하여 준비하신 하나님의 일꾼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셔서 하신 여러 가지 말씀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고난은 제3의 성내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셨어요. 그럼 세례와 성찬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정말 참여하는 성내인데, 그럼 제3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에 있어서 필수 덕목이 있는데, 바로 고난(苦難)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은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통해서 정말 하나님의 놀라운 위로와 은혜를 경험하시기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과 역사를 체험하게 하시기 위해서 고난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고난을 피해가기보다 고난 가운데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와 평강을 더 풍성히 경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럼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다니엘서 2장은 느부갓네살 왕이 꾼 꿈으로 인해서, 이런 바벨론의 모든 지혜 자들이 당한 위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 사실 고대 왕들은 술사들 혹은 박사들에게 지혜 자들에게 꿈을 해석하라고 이야기할 때, 자기가 꾼 꿈을 이야기해주고 해석하라고 부탁하죠. 여러분, 그런데 느부갓네살 왕은 그 해석이 참된 것인지 알기 위해서 내가 꾼 꿈도 너희가 말하고 해석하라 이렇게 요구를 한 것입니다. 그럼 바벨론의 지혜 자들 중에 왕의 은밀한 꿈을 이야기하고 해석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럼 바벨론에 그런 신 자체가 존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이로 인해서 분노한 왕이 바벨론의 모든 지혜 자들, 갈대아의 모든 술사들을 죽이라고 이야기 한 것이죠. 그럼 다니엘과 친구들에게 또 하나의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럼 다니엘서 1장부터 6장까지 보면 매 장마다 다니엘과 새 친구들에게 임한 위기와 고난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럼 1장에서는 다니엘과 새 친구가 하나님을 위하여 뜻을 정하였기 때문에 당한 고난이었죠. 근데 2장에서는 바벨론의 박사들이 그 왕의 꿈을 말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죽을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여러분, 술객들은 바벨론의 신들의 무능함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놀라운 반전이 있죠.
 
그럼 다니엘과 새 친구는 꿈의 내용을 증언함으로, 그리고 그 꿈을 해석함으로 전능하신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언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그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과 능력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까? 바로 기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고난의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하는 것이죠. 그럼 교회나 성도들이 의미 없이 당하는 고난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럼 저는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삶에 어떤 위기와 고난을 경험하고 있는지 기도에도 해결되지 않는 변화되지 않는 상황과 사람들을 놓고 여러분, 어떤 고통의 시간을 가지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으로 예비하시고 역사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럼 그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며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고난을 통해서 회개를 촉구하든지 인내와 순종을 훈련하든지,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을 경험하든지, 위기와 고난 가운데 역사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든지, 여러분, 고난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 기도회 용사 다니엘은 그 사실을 철저하게 붙잡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모든 순간에 기도했습니다. 그럼 왕의 근위대장인 아리옥이 왕의 명령을 집행하기 위해서 지금 다니엘을 죽이기 위해서 잡으러 왔는데, 그럼 그 위기의 순간에 다니엘은 침착하게 당황하지 아니하고 기도할 틈을 찾았습니다. 그럼 다니엘이 이 죽음의 위기에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우리가 인생에 당한 위기에 어떻게 기도해야 하겠습니까? 그럼 3가지로 말씀을 드릴 텐데
 
I. 첫 번째, 슬기로운 말로 상황을 진정시키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니엘 2:14~15,
14 그 때에 왕의 근위대장 아리옥이 바벨론 지혜자들을 죽이러 나가매 다니엘이 명철하고 슬기로운 말로.
15 왕의 근위대장 아리옥에게 물어 이르되 왕의 명령이 어찌 그리 급하냐 하니 아리옥이 그 일을 다니엘에게 알리매.
-라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 왕의 집행자가 죽이러 왔는데 뭐 웃으면서 친절하게 단일을 대했겠습니까? 아주 엄하게 그를 데리고 잡아 죽이기 위해서 가는데 그럼 그 순간에 다니엘이 명철하고 지혜로운 말로 물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뭐라고 물었습니까? 15절에 보니까, ‘왕의 명령이 어찌 그리 급하냐?’ 이렇게 물었어요. 그럼 이 질문이 지혜로워 보이십니까? 아니 왕이 왜 이렇게 급하게 명령을 하냐? 마치 왕을 비난하는 것처럼 들려요 그러면 원래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ESB 영어 성경에 보니까 이렇게 기록을 하는데, Why did the King it’s search harsh decree! 그럼 왕이 왜 이렇게 가혹한 명령을 내렸느냐? 이 가혹한 명령을 내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라고 물은 것이죠. 여러분 어쩌면 왕의 근위 대장이었던 아리옥 역시, 느부간네 쌀 왕이 내린 명령이 너무 엄중하다 가혹하다. 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이 말한 그 말로 인해서 여러분 아리옥의 반응을 보면 이어지는 구절에 보니까 아리옥이 그 일을 다니엘에게 다 말하며 그럼 아리옥도 왕의 명령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다니엘의 이야기를 듣고 그간 궁중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니엘에게 다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럼 다니엘의 말은 상황을 누그러뜨리는, 아리옥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지혜로운 말이었습니다. 그럼 잠언 29장 8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잠언 29:8,
8 거만한 자는 성읍을 요란하게 하여도 슬기로운 자는 노를 그치게 하느니라.
-그럼 슬기로운 한마디의 말은 노를 그치게 합니다. 그럼 어떤 사람은 갈등과 위기의 순간에 한마디 말로 분을 키우고요. 상황을 더 악화시키기도 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죠. 그럼 기도하지 않으니까 지혜가 부족하여서 슬기로운 말, 믿음의 말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럼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어려운 상황 어떤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당황하게 됩니다. 그럼 당황하고 그 마음과 말에 감정이 담기니까 실수하고, 상처주고, 상황을 악화시키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 위기 가운데 당황하지 말고 믿음의 사람들은 침착하게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 기도의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모든 관계와 상황 가운데 평안을 가져오는 사람입니다. 예레미야 29장 7절 말씀에 보면,
 
*예레미야 29:7,
7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너희가 잡혀간 그곳에서, 여러분 정말 고난의 자리이고 위기의 순간이지만 그럼 그곳에서 평안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가 구하고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이것이 고난의 자리이지만, 위기의 순간이지만 하나님은 어떤 계획을 가지고 나를 이곳에 두셨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기도하면,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 도시의 평안을 가죠. 그럼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로 말미암아서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리라고 하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시대가 악하고 사회가 정말 하나님 보시기에 성경적으로 정말 그런 성경을 거스르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그럼 우리 사랑의 교회 기도에 7천 용사들이 하나님 앞에 무릎 꿇으면 그럼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이 시대를 살리시고 이 사회를 살리실 줄로 믿습니다. 그럼 그 믿음으로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는 것이죠. 인생의 위기는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럼 기도의 사람은 위기를 만나면 하나님을 기대하면서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길, 하나님께서 열어주실 그 문을 찾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기도를 통하여 역사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 주시는 지혜로 상황과 관계를 진정시키고 평화의 길을 모색하는 기도의 사람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럼 두 번째로, 위기와 고난 가운데 여러분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II, 두 번째, 위기와 고난 가운데 여러분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16절에 다니엘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 함께 읽겠습니다.
*다니엘 2:16,
16 다니엘이 들어가서 왕께 구하기를 시간을 주시면 왕에게 그 해석을 알려 드리리이다 하니라.
-다니엘이 왕에게 시간을 주시면 내가 알려드리겠다.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앞서 읽은 대로 근위 대장 아리옥이 그 왕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일러주었습니다. 그럼 바벨론의 지혜 자들이 왕이 그 은밀한 꿈을 말하라고 이야기 하니까, 왕이여 전에도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왕이 그 꿈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면 우리가 해석해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했더니, 그럼 왕이 분노하면서 그들을 책망합니다. 다니엘서 2장 8절 말씀해 보니까,
 
*다니엘 2:8,
8 왕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분명히 아노라 너희가 나의 명령이 내렸음을 보았으므로 시간을 지연하려 함이로다,
-시간을 끌려고 그럼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이야기죠 그럼 다니엘이 그 이야기를 듣고도 왕에게 또 시간을 구합니다. 여러분 다니엘이 담대하게 시간을 구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그 왕의 은밀한 꿈을 알게 하실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위기의 순간에 가져야 할 믿음이죠. 그러면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11장 24절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마가복음 11:24,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한 것은 어떻게 하라 그랬습니까?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여러분 무엇이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고 기도한 것은 이미 받은 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럼 자기 주문 걸라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어떤 추상적인 희망을 가지고 그래도 하나님이 그렇게 일하시겠지, 그렇게 기대만 하고 있으라는 것이 아니라, 받은 줄로 믿으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기도와 간구뿐만 아니라 마음의 생각까지도 우리의 소원도 들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한 것을 주시는 것에 넘치도록 하나님은 더 좋은 것을 예비하시고, 더 선한 길로 인도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행하실 그 일을 믿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박사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저 경험과 통계와 학문을 통해서 바벨론의 지혜를 배웠을 뿐이죠. 정말 왕의 은밀한 꿈을 알려줄 신앙의 대상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하지만 다니엘은 그간 기도를 통해서 정말 모든 고난(苦難)과 위기(危機)를 기도로 뚫고 온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았던 다니엘은 그럼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이 위기의 순간에 일하실 것을 믿고 조금만 시간을 달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럼 17절에 보니까,
 
*다니엘 2:17,
17 이에 다니엘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그 친구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에게 그 일을 알리고.
-왕이 시간을 주어서 다니엘이 집으로 돌아가 친구들과 함께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시간을 얼마나 주었습니까? 그렇게 많이 주지 않았어요. 24절에 보니까,

*다니엘 2:24,
24 이에 다니엘은 왕이 바벨론 지혜자들을 죽이라 명령한 아리옥에게로 가서 그에게 이같이 이르되 바벨론 지혜자들을 죽이지 말고 나를 왕의 앞으로 인도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 해석을 왕께 알려 드리리라 하니.
-이틀날 아침에 다니엘이 급하게 아리옥을 찾아가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바벨론의 지혜 자들 죽이지 말고 나를 왕 앞으로 인도하라. 그럼 다음 날 아침에 바벨론의 모든 지혜 자들을 죽이기로 한 것입니다. 그저 반나절 저녁 1시간을 준 것이죠. 그날 밤에 하나님께서 느부갓가네살 왕의 꿈을 보여주시지 않으면 다니엘과 세 친구 역시 바벨론의 박사들과 함께 다 죽을 상황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정도 상황이면 낙심하고 두려움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받기에는 충분치 않은 시간이라고 시간이 부족하다고 절망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다니엘은 낙심하지 아니하구요. 그 짧은 시간 믿음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럼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직면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지만 때로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내 기도가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과연 상황이 바뀌겠나? 누가 정말 나타나서 내게 도움을 주겠나? 염려할 수 있습니다. 그럼 그때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생각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까? 시간을 믿는 것입니까?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아니면 상황과 기회와 사람들을 더 의지하고 믿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으면 우리의 짧은 탄식 가운데에도 위로하시고 역사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럼 믿음의 기도는 역사를 낳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죠. 그럼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외아들을 장가보낸 젊은 시어머니가 손주를 기다리는데 너무 조급했던 것 같애요. 뭐 소식이 없으니까 며느리를 붙잡고 우리 40일 특별 새벽 기도회를 하자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실 텐데 그렇게 40일간 며느리와 함께 기도해서 딱 한 가지를 놓고 우리 가정에 생명을 주시옵소서. 우리 가정의 생명을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럼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1주가 지나고 이제 20일이 지났는데도 아무 소식이 없어요. 그런데 여러분 역사는 마지막 날 일어납니다. 부흥에도 마지막 날 역사가 임하고, 수련회도 마지막 날 역사가 임하고, 드디어 40일이 되는 날 정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는데 그만 시어머니가 임신해 버렸다고 합니다. ㅎㅎㅎ 시어머니의 믿음이 더 컸는지 모르겠어요. 얼마 후에 곧 며느리에게도 아이가 생겼지만 이런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돼요. 그럼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럼 우리 안에 역사하실 하나님 일하실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여러분 믿음으로 선포하고 기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서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III. 세 번째,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서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럼 가정이 함께 기도하고, 소그룹 다락방에 함께 기도하고, 교회가 함께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 다니엘도 집으로 가서 가장 먼저 다니엘의 세 친구를 찾았습니다. 누구입니까? 사드락, 메삭 아벳드고는 바벨론 편이시구요. 히브리어 이름은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입니다. 여러분 하나냐는 핸 야회,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뜻이에요.
 
1장부터 펼쳐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져온 기도의 친구였을 것입니다. 그럼 미사엘 아사랴,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랴 누구이랴, 정말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를 보여주는 정말 기도로 하나님을 경험하게 만든 아마 그런 친구였을 것입니다. 아사랴 예 하나님의 도움이라고 하는 뜻이지,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사자굴에서 건지시고 다니엘의 세 친구를 그 풀목 뿔에서 건지신 그 하나님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 여러분 이 세 친구는 정말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가져온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런 기도의 동지들, 영적 기도의 동지들과 함께 기도한 것이죠. 오늘 이 자리에 기도의 군단별로 이른 아침부터 그러면 기도로 이 예를 재배를 준비하셨는데 그 기도가 하나님 앞에 다 상달되고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가져오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함께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베드로서 12장에 보면 헤롯이 예수님의 제자였던 야고보를 칼로 죽이자 그럼 유대인들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았습니다. 이튿날이면 베드로도 죽일 계획이었어요. 그럼 초대교회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베드로를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때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죠. 그럼 군인들 사이에서 쇠사슬에 묶여있던 베드로에게 한 천사가 나타나서 그를 깨우고, 손발의 쇠고랑이 다 풀어지고, 옥문이 열리고 기도하는 성도들이 있는 집으로 인도해 내었습니다. 그럼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에베소 교회 편지하면서 너희가 나를 위해서 기도할 뿐만 아니라 여러 성도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당부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우리 가족을 위해서 기도할 뿐만 아니라 여러 성도를 위해서 기도하고, 그럼 이 시대에 이 사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열방을 위해서 기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러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세계를 변화시키시고 하나님 이 땅에 하나님의 온전한 뜻이 이루어지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럼 그 일을 위해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죠. 우리 강준민 목사님께서 ‘난관을 돌파하는 기도’라고 하는 책을 2016년도에 출간하셨는데 그럼 이 책에 시너지 효과 영적인 시너지 효과에 대해서 그런 이야기를 적으셨어요.
 
그럼 자동차의 10마력의 힘을 제공하는 실린더를 8개 연결하면, 그러면 10마력에 실린더를 8개 연결하면 몇 마력의 힘이 나올까요? 그럼 숫자적으로는 80마력의 힘이 나와야 하는데, 그러면 그 이상의 효과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시너지 효과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럼 8개 실린더가 80마력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10마력짜리 8개가 3배 이상의 힘을 만들어내서 285마력의 힘을 만들어 낸다는 거예요. 그럼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함께 기도하면 영적인 시너지 효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놀랍게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면서 기도하셨죠. 마지막 순간에 겟세마네 동산에도 제자들을 데리고 함께 가셔서 기도하길 원하셨습니다. 눈이 너무 무거워서 문제였죠.
 
여러분 에스도도 위기의 순간에 함께 기도할 것을 당부합니다. 모르드게에게 부탁하여서, 모든 유대인들로 하여금 3일 간 함께 금식하고, 우리가 여호와 앞에 함께 기도하자 부탁했습니다. 그럼 마태복음 18장 20절의 말씀입니다. 우리 함께 읽습니다. 시작
*마태복음18:20,
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아멘 저는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기도의 용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럼 정말 인생의 위기 가운데, 우리가 당한 고난의 문제를 놓고 또 누군가를 위하여 중보하기 위해서 함께 연합한다고 하는 것은 여러분 이것은 주님의 뜻이고, 또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기도의 현장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여 함께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가 기대하지도 못했던 생각하지도 못했던 놀라운 일을 우리의 가정과 이 시대와 열방 가운데 행하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위기를 만날 때 함께 기도할 수 있는 영적 동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럼 교회는 모여서 함께 기도하는 공동체 그럼 교회에 주신 가장 중요한 사명은 어떤 행사 일을 치러 내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위하여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가 사명의 본질인 것을 기억하시고, 여러분 기도하는 교회 기도로 세상을 변화시키시는 저와 여러분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우리가 읽진 않았지만 19절 이하의 다니엘은 밤의 환상 가운데 그 꿈을 보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20절부터 23절까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찬송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다니엘의 상황을 보십시오. 당장 죽음은 면했지만, 기도응답을 통하여서 왕의 꿈을 해석하고 죽음의 위기는 넘겼지만 그가 당한 고통의 근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럼 그 근본 문제가 무엇입니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것이죠. 아마 어린 시절부터 그가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와서 이방신들의 지혜를 배우며 바벨론의 지혜자로 일하면서 그는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 주십시오.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그런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간절히 기도했지만,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럼 정말 우리가 구하고 간구하는 것에 때로는 응답이 없을 수도 있어요.
 
당면한 위기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역사를 하시는데 응답이 없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회복하십니다. 70년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정한 기한이 이르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기도의 제목이었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기도응답에는 4가지가 있는데, 한번 따라하겠습니다. 즉답, 체답, 무답, 부답, 즉답은 즉각적으로 응답하시는 기도의 응답이죠. 체답은 지체된 기도에 응답이에요. 하나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은 것입니다. 기다리도록 인내와 정말 하나님을 바라보는 소망을 가지고 기다리도록 우리를 연단하시는 그런 기도의 제목들입니다. 때로는 무답 하나님이 답하지 않으시는 것 같지만 이미 상황과 하나님의 선한 계획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계신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답들이죠.
 
때로는 하나님께서 NO 라고 얘기하실 수도 있어요. 부답 아니라고 얘기하실 수 있습니다. 그럼 그땐 우리의 순종이 필요해요. 하나님의 내 계획이나 내 생각 내가 원하는 것보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과 계획 인도하심을 더 소중히 여기고 순종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응답,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길을 걸어가는 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마무리 기도.
존경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또 여름 특별토비새로 정말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사람들 기도의 칠천 용사로 우리가 헌신하고 쓰임받기를 원합니다. 기도의 용사 다니엘과 같이 하나님 이 시대를 가슴에 품고 기도로 하나님의 역사를 가져오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하나님 앞에 드려진 인생이 되게 하시고 예수님 손에 들려진 오병 이어가 되게 하셔서 하나님 우리의 연약한 삶을 통해서 일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케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요약
우리는 슬기로운 말로 상황을 진정시키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하며, 위기와 고난 가운데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서 함께 기도해야 한다. 기도의 용사 다니엘과 같이 하나님 이 시대를 가슴에 품고 기도로 하나님의 역사를 가져오는 우리 모두가 되어, 오직 하나님 앞에 드려진 인생이 되고 우리의 연약한 삶을 통해서 일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
 
 
1. 기도하는 법.
1-1. 기도 응답의 비결
-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심 - 강조함
- 임현수 목사의 이야기 소개함 (캐나다 토론토, 북한에서 굶주림 피해 구명 활동)
- 고난 속에서도 기도로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큰 하나님의 섭리였음
- 우리는 기도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용사가 되어야 함
- 기도를 통해 신앙 공동체를 변화시키고 희망을 찾을 수 있음
 
1-2. 기도를 통한 변화
- 소제자의 이야기 - 개인적인 경험과 테마의 공유
- 개인적 고민을 극복하고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은 기도였음
- 기도로 우리의 생활과 삶을 변화시키고 신앙 공동체를 변화시킴
- 라던젤리와 에스퍼 만델리의 이야기 - 구체적인 사례
- 자신의 수입에 대해 조사를 요청했고, 그것이 내 생명이 됨
 
1-3. 기도를 통한 리더쉽
- 릴레이 로버츠의 이야기 - 의위적인 진술과 노력
- 조직 내에서 리더쉽을 발휘하며 직원들을 이끌어감
- 부모님과 자녀들과의 경청을 통한 이해와 친밀감 향상
- 중요한 의사 결정을 내릴 때 기도에 집중하였음
- 직원들과 함께 일을 진행하면서 겪은 도전과 극복 이야기
 
2. 위기 속에서 기적적으로 사는 법
 
2-1. 다니엘의 위기 관리 방법
- 다니엘이 당한 위기는 선악과 사건, 고문과 눈먼 소금 사건 등 다양함
- 선악과 사건 이후 고문과 파수가 벌어짐, 후에 다시 정체성 재확인 가능성을 확인함
- (중요) 위기를 맞다보며 본인이 감추고 싶던 의지를 시험받으며 개인적인 성장을 꾀함
- 파수 이후 자신의 원래 모습 되찾음
 
2-2. 일상생활에서 고난 겪는 사람들에게 주는 조언
- 실패하고 난 뒤 즉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법을 배움
- 이러한 새로운 시작을 통해 현재 상태에서 이상한 행세 없이 정상적인 행동을 계속 함
- 다른 사람들의 문제를 돕는 동안 스스로 깨닫는 것을 중요시 함
- 시험을 위한 불량도 포용될 수 있도록 다양한 환경에서 노력함
 
2-3. 앞으로의 생활 방향 설정하기
- 연구자나 학자들이 추천하는 공부 방법은 삶의 원리를 이해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것임
- 학습 및 경험을 통한 시각 개선을 강조하며, 팩트주의와 창의 사이의 밸런스 유지 권장함
- 실질적인 공부보다는 적용 가능한 지식이나 정보에 초점을 두어야 함
- 학습 자료를 사용하는 것은 유익하나 항상 옳은 답을 선택하도록 안내하거나 예고하지 않아야 함
 
3. 위기 중에서도 기도로
 
3-1. 기도하는 법
- 어려움 속에서도 감정이 담겨 실수 및 상황 악화될 수 있음
- (중요) 위기와 당황하지 않고 믿음을 갖고 기도해야 함
- 기도의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관계와 상황에서 평안을 얻음
- 예레미야 29장 7절을 보면, 하나님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함
-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변화의 역사가 일어남
 
3-2. 고난 속에서도 기도할 수 있는 믿음
- 위기 속에서도 기도할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함
- 다니엘이 왕에게 시간을 주면 해석을 알려준다면 벌벌이는 법을 알고 있었음
- 왕이 다니엘의 기도를 이해하고 받아들였으며, 다니엘은 하나님께 기도함
- 다니엘은 짧은 시간 믿음으로 기도하였고, 이를 통해 사건을 해결함
- 우리는 상황과 기회, 사람보다 하나님을 믿어야 함
 
3-3. 기도로서의 하나님과의 관계
- 다니엘은 새로운 친구를 찾었는데, 당시 다니엘이 몰랐던 바벨론 편임
- 다니엘이 기도할 때, 하나님이 역사하심을 확실히 믿어야 함
- 다니엘은 집으로 돌아가 친구들과 함께 기도하게 됨
- 이후 다니엘의 새 친구들에게 하나님이 자신들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심을 믿어야 함
- 우리도 기도할 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을 확실히 믿어야 함
 
4. 기도의 능력
 
4-1. 기도의 중요성
- (중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경험함
- 하나냐, 미사랴, 아사랴는 각자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기도의 중요성을 대표하는 이름임
-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와 놀라운 일들이 일어남
- 베드로를 위한 기도로 쇠사슬이 풀어지고 기도하는 성도들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음
- 기도로 얻어진 시너지 효과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할 수 있음
 
4-2. 기도의 결실
- 다니엘이 밤의 환상과 꿈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찬송함
- 그러나 죽음의 위기에 처한 후, 그의 고통의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음
- 위기 속에서도 기도응답이 없다고 느낄 때,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함
- 70년이라는 하나님의 정한 기한이 지나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을 믿어야 함
-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순종하는 태도가 필요함
 
4-3. 기도의 결과
- 하나님의 기도응답에는 즉답, 체답, 무답, 부답의 네 가지가 있음
- 즉답은 즉각적인 응답을 의미하며, 체답은 기다리는 기도를 의미함
- 무답은 상황과 하나님의 계획을 포착하지 못한 응답이며, 부답은 순종이 필요한 응답임
- 다니엘처럼 기도로 하나님의 역사를 개척하는 기도의 용사이 되기를 소망해야 함
- 기도의 결과로 인생을 바꾸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함.














728x90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7월 10일)
제목: "예수, 나의 치료자"
말씀: 마태복음8:5-13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부목사님)
사회, 기도회 진행: 김대규 부목사님


설교자: 정상익 부목사님
-----
* 마태복음8:5-13,
5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6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7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8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10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며 말씀의 은혜를 드리는 수요저녁기도회에 나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오늘 수요저녁기도회를 통하여 참된 치료와 또 참된 회복을 경험하시는 시간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8장 5-13절 말씀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1절씩 교독하겠습니다. 제가 먼저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가?’ 시리즈를 통해서 예수님에 대해 계속해서 알아가고 있습니다. 담임 목사님께서 주신 말씀처럼, 생명의 떡이신 그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갈 때 예배가 회복되고 또 우리의 삶이 회복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

여러분은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그런데 머리로 알고 있는 이 사실이 실제적으로 얼마나 삶에서 구체적으로 체험되고 계신지요? 예수님이 나를 만나주시지 않는다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없으신가요? 예수님이 눈앞에 이렇게 두 팔 벌려 안아주신다고 하는데, 정작 내 눈앞에는 예수님이 전혀 계시지 않는 것 같은 그런 마음이 드신 적은 없으세요? 특별히 육신의 아픔, 영혼의 고통을 겪고 있는 가운데, 나는 치료가 필요한데, 예수님이 부재(不在)하신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맞으신가요?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라는 찬송가의 가사가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인데 그렇게 고백하지 못하고 주님과 나는 간 곳 없고, 괴로운 나만 보이도다. 라고 고백하신 적은 혹시 없으신가요? 어떻게 예수님의 치료를 경험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이 세상 나그네 삶을 살면서 계속해서 근본적으로 하게 되는 질문 중 하나입니다. 열심히 주님을 따라 살겠다며 고군분투(孤軍奮鬪)하는 가운데 고난을 계속 겪게 되면 이 질문을 자꾸만 하게 됩니다. 더욱 고민하는 가운데 이 근본적으로 질문을 던지게 되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성경(聖經)을 통해서 알려주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치료가 필요했던 사람이 한 명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를 치료(治療)해주신 예수님의 이야기가 이어지게 되는데요.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 산상수훈(山上垂訓)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잘 알려주셨던 그 예수님께서 이제 가버나움이라는 동네로 들어가십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북쪽에 위치했던 1세기 당시에 아마 1,500명 정도가 거주했던 그런 도시였어요. 그 도시로 예수님이 들어가십니다. 근데 이 가버나움이라는 도시를 성경은 이와 같이 이야기합니다. 마태복음 9장 1절 말씀인데요.

*마태복음 9:1,
1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성경은 가버나움을 본 동네,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을, 예수님의 고향과 같은 곳이라는 뜻이지요. 실제로 가버나움의 이 터에 가면 영어로 ‘칼퍼나움’이라고 써 있고, 그 뒤에 또 탄 오브 지저스 라고 적혀 있습니다. 예수님의 본 동네, 예수님의 마을이라고 적혀 있어요.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께서 공생애 3년간 이 가버나움을 선교 지로써, 이 선교 센터로써 사용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선교본부와 같았던 이 가버나움, 이 마을로 예수님이 들어가셨을 때, 한 가지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이 놀라운 기적의 사건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는데요.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 3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그 포인트를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예수님은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I. 첫 번째, 예수님은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예수님이 사역의 본부로 사용하셨던 그 가버나움 시대에 그 시내 안에서 누군가 바로 로마 백부장(百夫長)인데요. 오늘 우리가 읽었던 5절 말씀 함께 읽어볼까요?

* 마태복음8:5,
5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우리가 기도용사를 통해서 또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는 그 단어죠. 백부장(百夫長), 이 백부장(百夫長)은 1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있었던 군인이었습니다. 오늘날 한국 육군으로 비교하면 중대장 정도, 공군이나 해군으로 따지면 때때로는 대대장 정도 되는 그런 지휘관(指揮官)이라고 볼 수 있어요.

팔레스타인 지역을 다스리는 군대의 지휘관이 유대인 랍비로 여겨졌던 예수님께 찾아온 겁니다. 이 백부장은 로마군 소속 이방인(異邦人)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이 백부장을 거절(拒絶)하실 수도 있었어요. 실제로 예수님이 이방인을 거절하신 적이 있었거든요. 이후에 일어난 일이 마가복음 7장 말씀을 제가 한번 읽어 드리겠습니다. 25절에서 27절 말씀인데요.

*마가복음 7:25-27,
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아래에 엎드리니.
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 뒤에 나오는 이야기도 여러분 잘 아시죠? 부스러기라도 받겠습니다. 이야기를 하고 이 여인이 자신이 간구(懇求)했던 바를 그대로 받는 놀라운 사건이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이 나온 것처럼 두로 지방에 있었던 헬라인 여인을 바로 만나지 않으셨습니다. 요청(要請)에 바로 응답(應答)해 주시지도 않았어요. 이처럼 예수님은 이방인이었던 백부장을 만나지 않으실 수도 있었습니다. 아마 백부장과 친했던 유대인 장로들이 예수님이 만나주시지 않을 것을 우려(憂慮)했나 봅니다. 오늘 우리가 읽었던 마태복음 8장과 병행 본문인 누가복음에 이런 이야기가 담겨 있어요. 누가복음 7장 3절에서 4절 말씀 제가 읽어드립니다.

*누가복음 7:3-4,
3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정한지라.
4 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유대인 장로들의 말에 예수님이 이방인인 이 백부장을 만나주시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前提)가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장로들의 걱정은 기우(杞憂)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인이었던 이 백부장을 만나 주셨습니다. 그가 찾아왔을 때 그를 물리치지 않으시고, 그와 대면(對面)해 주셨죠. 예수님은 우리를 만나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찾을 때, 한 결 같이 우리를 대면해 주시고, 우리를 안아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방인인 우리가 죄를 짓고 멀리 떨어져 있다가도 마치 이 재산(財産)을 다 탕진(蕩盡)하고 터덜터벅터벅 걸어오던 둘째, 아들을 보고 버선발로 뛰어나갔던 그 아버지처럼 우리를 품에 안아주시고 우리를 만나주시는 분이십니다. 백부장은 이 예수님이 만나주시는 그 특권(特權)을 누렸던 사람이지요. 오늘 본문에 예수님의 모습 두 번째가 나옵니다. 함께 읽어볼까요? 둘째, 예수님은 우리 이야기를 들어 주십니다.

II. 두 번째, 예수님은 우리 이야기를 들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이야기를 들어주십니다. 본문의 6절과 7절 말씀을 통해서도 이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6절7절 함께 읽겠습니다.

* 마태복음 8:6-7,
6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 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7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예수님은 백부장을 만나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셨습니다. 백부장은 자신의 하인이 이 중풍 병(中風病)으로 인해 마비(痲痹)가 되어 있다고 이 중풍 병으로 인해서 너무나 고통스러워하고 있다고 예수님께 이야기합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이방인(異邦人)인 사람을 만날 필요도 없는데 그가 늘어놓는 이야기를 경청(敬聽)하실 필요는 더더욱 없었을 겁니다. 바쁜 사역(事役) 스케줄 중에 가버나움에서 할일이 정말 많은데, 산상수훈을 막 마치고 다시 이 선교본부와 같은 가버나움으로 돌아와서 다음 사역을 준비하기에도 벅찬 일정인데, 이방인인 백부장이 와서 하소연하는 이야기에 굳이 귀를 기울이실 필요는 없었죠. 그런데 예수님은 이방인 백부장의 말을 들으십니다. 단순히 듣는 척 하시는 게 아니라 경청(敬聽)하십니다. 그의 말에 대답하시고 반응(反應) 하셨거든요. 예수님은 우리 이야기를 들어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가던 길도 멈춰 서서 우리말에 귀를 기울여 주시는 그런 분이세요.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시각(視覺) 장애인(障礙人)인 바디메오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돌아봐 주시옵소서!’ 라고 이야기했을 때 예수님이 보인 반응을 통해 우리는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8절에서 49절에,

*마가복음 10:48-49,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안심하라고, 일어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십니다. 가던 길을 멈춰 서서, 그의 말을 경청하시고, 안심하라고, 일어나라고 예수님께서 바디메오에게 이야기 하셨죠. 바디메오의 말을 들어주셨던 그 예수님이 동일하게 이 백부장의 말을 들어주시며 경청하시고, 반응하시는 모습을 몸을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백부장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반응하신 그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가 예수님께 올려드린 그 이야기를 들으시고, 경청하실 줄 믿습니다. 아멘~! 오늘 본문에서 알아볼 수 있는 예수님의 세 번째 모습은 이와 같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님은 우리를 고쳐주십니다.

III. 세 번째, 예수님은 우리를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고쳐주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본문 7절과 13절에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나오는데요.

*마태복음 8:7,13,
7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을 만나주셨어요. 그리고 그 백부장의 이야기에 경청(敬聽)하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 이야기를 들으시고, 자신의 종을 고쳐달라는 그 절박한 심정이 담긴 간구를 흘리시지 않으시고, 그 간구(懇求) 그대로 이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시는 예수님을 우리는 본문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백부장의 집에 가셔서 직접 고쳐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강력한 의지(依支)가 담겨있습니다. 바쁜 사역 스케줄 가운데서도 반드시 내가 너희 집에 가서 중풍 병에 걸려서 마비(痲痹)가 와서 있는 고통(苦痛)하고 있는 그 종(從)을 고쳐주겠다 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약속에서만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까 13절에서 읽은 것처럼,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봅니다. 백부장의 집에 가지도 않으시고 말씀만으로, 백부장의 종에 그 질병을 고치시고, 백부장이 이제는 종이 건강(健康)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모습을 우리는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절(懇切)한 간구(懇求)를 흘리지 않으시고, 들으실 뿐만 아니라 직접 고쳐주시겠다고 의지적으로 약속해 주시고, 그 약속을 반드시 이행(履行)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멘. 이 ‘고쳐주리라’ 그리고 ‘나으리라’ 라고 번역된 헬러 원어인 이오마이라는 동사는 신약 성경에서 총 27번 사용된 단어입니다. 근데 이 단어는 단순히 육체적인 치료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회복, 전인격적인 회복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동일한 단어를 사용한 누가복음 6장 18절 말씀을 살펴보면 이유를 알 수 있는데요. 제가 읽겠습니다.

*누가복음 6:18,
18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받은지라.
-귀신에게 고난을 받는 자들도 고침을 받았다라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단순히 육체적인 회복을 넘어서서, 영적인 회복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 단어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종(從)을 고치신 것은 단순히 중풍병(中風病)만, 단순히 육체적인 어려움만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의 영을 함께 회복해 주신 것이란 것을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또 이 단어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전인격적으로 회복(回復)되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육체(肉體)뿐만 아니라, 그 영혼(靈魂)마저 회복(回復)되기를 간절(懇切)히 소망(所望)하시며 일하시고 계십니다. 이 예수님의 치료(治療)는 전인격적(全人格的)인 치료입니다. 온전(穩全)한 치료입니다. 미처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마저도 미처 우리가 돌보지 못했던 영역(領域)마저도 회복시키실 수 있는 그런 완벽(完璧)한 온전한 치료입니다. 이런 치료를 행해 주시는 예수님이야말로 우리는 참된 치료자이심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떠세요? 나의 참된 치료자 되시는 예수님을 늘 온전히 경험하고 계신가요? 오랫동안 기도했던 질병이 낫지 않고, 악화되는 상황을 혹시 발견하고 계신가요? 그런 경우에 주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원망하는 마음이 들지 않으신가요? 아니야, 전인격적인 치료를 하고 계셔,, 라고 당연(當然)하게 여기시면서 담대(膽大)하게 선포(宣布)하고 계신가요?

전격적인 치료를 약속하시고, 또 실제로 베푸시고 계신 그 예수님께서 유독 내 인생만은, 유독 내 육체만은 왜? 돌보시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너무 서운한 마음이 들고, 너무 억울한 감정이 들고, 예수님과 더 깊은 관계를 가지기 어려운 경험을 가져본 적은 없으신가요? 왜, 우리에게 치료한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 생길까? 왜 우리에게 고난이 닥쳤고 왜 나는 상처를 받아야만 할까? 이러한 질문처럼 우리에게 왜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다가오는지, 왜 어려움이 있는지, 왜 그 어려움이 지속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또 우리가 참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우리는 무지(無知)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죠.

하나님께서 어떤 큰 계획을 가지시고 내 삶을 운행하고 계신지에 대해 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또 여전히 지속(持續)되고 있는 어려움에 대한 그 의미를 다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왜 주님은 치료가 필요할 때 보이시지 않는가? 라는 우리의 질문에 명확한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려주면서요.

※제가 섬기는 교구 안에 참 큰 어려움을 당하신 권사님이 한 분 계십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결혼 이후에 정말 아름다운 가정을 정말 만들어가는 것을 보고 기뻐한지가 얼마되지 않았는데, 며느리가 둘째 딸을 낳고 10일만에 대동맥 파혈로 소천하게 되었습니다. 졸지에 60대 내외 권사님 내외가 주 양육자가 되어서, 7살 손녀와 이제 10일 된 손녀를 양육하게 되었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갓난아이를 부모처럼 돌봐야 하기 때문에 주일 현장 예배조차 오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됐어요.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그 사랑하는 아들마저 올해 초의 급성 백혈병(白血病)으로 항암치료를 갑작스럽게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인 치료를 위해 골수 이식을 받아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당장 항암 치료를 받는 과정 가운데 골수 이식자를 열심히 찾아봤지만 여의치 않았습니다. 결국 골수 이식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그 아들의 딸, 사랑하는 첫째 손녀밖에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땅한 사람을 찾지 못해 결국 초등학교 2학년 된 그 첫째, 손녀가 병실에 입원하는 모습을 봐야 했던 그 할머니, 할아버지의 찢어진 심정, 사랑하는 며느리를 떠나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들에게까지 이런 병마(病魔)가 찾아와야 했다는 사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 눈물로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어미 아비의 심정은 겪어본 사람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을 견뎌내셔야 했던 우리 권사님과 안수 집사님이 너무나 가여워 보이고, 너무나 안타까워하면서 교구에서 정말 마음을 다해 함께 기도했습니다. 1학기 종강 주간 마지막 다락방 모임이었던 그 금요일에 마침 골수 이식이 진행되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 마지막 모임을 청계산 기도원에서 기도회로 모인다는 소식을 듣고, 제가 찾아뵈었어요. 청계산에서 간절히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눈물로 기도하는 가운데 이 권사님은 이런 고백을 들려주셨습니다. ‘이번 일을 통해 하나님이 살펴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나를 사랑해 주시고 함께 하신다는 것을 느낍니다. 이제 주님께 더 질문하지 않고 잠잠히 기도하려 해요.’ 권사님의 그 눈물의 고백을 듣는 가운데 저와 순장님, 순원들 모두 고난 가운데 함께 하시는 그 예수님은 깊이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이 백부장의 이야기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만나주시며, 우리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우리를 고쳐주십니다. 우리의 상황을 아시는 그 예수님은 지금도 이해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백부장의 종과 같이 전인격적인 치료를 경험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그 예수님의 온전히 체험할 수 있을까요? 기도 응답이 없는 것 같은 이때에, 그리고 고난이 계속 되는 이때에, 그 괴로움의 시간 가운데,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우리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목사님 예수님을 이미 모신 지, 제가 30년 40년이 되었걸랑요?’ 라고 이야기하시는 분이 여기 계실 수도 있습니다. ‘목사님, 이미 삶의 주인이신데도 여전히 변화가 없어요. 대답이 하나도 변화가 없구요. 나는 여전히 이 질병과 싸워야 하고요. 여전히 이 가정의 문제와 씨름해야 하고요. 여전히 재정의 문제, 관계의 문제에 여러 가지 상황적인 문제로 예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도 가끔 헷갈릴 때가 있어요.‘ 라고 이렇게 반문하는 분이 여기 계신지는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렇게 반문하게 되신다면, 오늘 나의 모습은 이 성경 말씀에 나오는 백부장의 모습과 한번 비교해 보셨으면 좋겠어요. 백부장은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오늘 8절 말씀 우리 함께 읽겠습니다.

* 마태복음8:8,
8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백부장의 대답에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어요. 주여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이 두 가지 표현에 아주 중요한 진리가 담겨있어요. 백부장은 예수님을 ‘주’, 라고 지칭하며 존경의 표시를 합니다. 물론 이때 유대 랍비에 대한 의례적인 정말 예의상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찌됐든 주님이라는 뜻으로 예수님을 부릅니다. 그뿐만 아니라,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라고 고백하는데요. 이 뒷부분을 통해 백부장이 단순히 예의상 주님이라고 얘기 했는지, 아니면 자신의 인생에 주인이라고 고백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이 말씀만으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전능하신 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믿고 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라고 말씀하셨네요.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백부장이 ‘주여’, 라고 고백했을 때 단순히 랍비여, 단순히 선생이여, 가 아니라 ‘내 주인이시여’, 라고 이야기할 게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백부장이 감당하지 못 하겠사오니. 라고 이야기를 했는데요. 여기에는 감히 자신이 예수님을 모실 자격(資格)이 없다. 라는 고백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을 모실만한 자격이 없는, 한없는 죄인(罪人)에 불과한 나를 찾아오시려 하십니까? 예수님의 말씀만으로 충분합니다. 라고 백부장이 고백하고 있는 거죠. 백부장에 이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구절 말씀도 함께 읽어볼까요?

*마태복음 8:9,
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백부장은 예수님의 권위(權威)를 인정했습니다. 자신이 지휘관이기 때문에 내 밑에 있는 100명에게 뭐라 하면 오고, 가라하면 가고, 또 하라 하면 하는데,,, 예수님, 예수님 말씀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럼 예수님, 내 삶을 좌지우지(左之右之)하실 수 있는 권위가 예수님께 있습니다. 백부장은 이렇게 ㅖ수님의 권위를 인정했습니다. 우리는 백부장과 같이 예수님이 전능하신 분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백부장과 같이 예수님이 우리 삶의 주인이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 권위가 예수님께 있습니다. 내가 내 자신의 주인이 아니라 예수님이 내 자신의 다시 한 번 인정해야 합니다. 근데 여러분 실제로 정말 그렇게 인정하고 계세요? 내 삶의 왕좌(王座)에 정말 예수님이 늘 언제나 항상 앉아계신다고 단언 하실 수 있으신가요? 사실 많은 경우에 우리 인생의 왕좌에 다른 것이 앉아 있을 때가 많습니다. 자녀를 두신 분들은 자녀가 그 왕좌에 앉아 있는 것을 경험하실 거에요. 그 자녀의 앞길이, 자녀의 학업이, 또 자녀의 학업 성취도가 또 자녀의 구직 활동이, 수험생활이, 내 인생의 왕좌에 앉아 있는 것을 봅니다. 내 건강이, 내 재정이, 내 시간이, 내 가정 상황이, 내 인생의 왕좌에 앉아 있을 때가 예수님이 앉아 있을 때보다 더 많기도 합니다.

말로는 예수님을 모신다고 실상 예수님을 모시기 보다는 내 인생이 중요하다고, 내가 간구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왕좌에 앉아 계신 주님을 더 끌어내릴 때가 있기도 합니다. 내가 원할 때만 예수님을 찾고 싶어 해요.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만 예수님이 이루어 주시기를 바라곤 합니다. 그렇다 보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재 장소, 가버나움이라는 이 우리의 삶은 괴로움의 장소가 돼 버립니다. 좌절(挫折)의 장소가 되어 버리곤 해요. 그래서 고난을 겪는 가운데 치료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본인이 백부장을 만나주셨던,이야기를 들어주셨던,그리고 고쳐주셨던 가버나움으로 인도하십니다. 가버나움이라는 말은 원래 다음과 같은 ‘크파르 나훔’이라는 문자적으로 봤을 땐 나훔의 마을인데 이 나홈이라는 단어에 위로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가버나움은 위로의 마을이란 뜻을 담고 있어요. 예수님은 우리를 괴로움의 마을이 아닌, 위로의 마을로 초청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가버나움이 괴로움의 장소가 되지 않도록, 위로의 장소가 되도록 지금도 함께 하시며 치료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8장 7절 말씀드리면, 1번 더 같이 해볼까요? 시작

*마태복음 8:7,
7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예수님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중풍병자에게 치료를 약속하셨습니다. 고통 받고 있는 종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백부장에게 반드시 고쳐 주리라. 약속하셨고 그것을 이뤄 주셨습니다. 확신을 주시며, 오늘도 일하고 계신 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동일한 말씀을 주고 계십니다.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의 이와 같은 말씀을 주고 계십니다.

※올해 초에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몇 년 전에 함께 제자 훈련을 했던 집사님께서 췌장(膵臟)암 진단을 받으셨다는 소식이었어요. 근데 이분이 유방암을 두 번이나 앓고 극복하셨던 분이세요. 추적(追跡) 검사 때마다 깨끗하다는 소식을 간증으로 삼으셨는데, 췌장암 3기라는 소식을 들으셨다고, 작년 연말에 이미 친정동생이 위암 4기 판정을 받았다며, 목사님 기도 부탁합니다. 라고 소식을 전한지 얼마 안 되어서 이런 소식을 전해 듣고, 제가 전화상에서 제가 많이 울었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지난 4월에는 우리 남편 집사님께서 교통사고를 크게 당해 어깨와 척추 뼈가 골절(骨折)되었습니다. 뺑소니 사고였는데요. 3개월 넘게 재활을 해야만 하는 상황 그리고 그 이후에도 여전히 후유증이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이 집사님께 한꺼번에 일어날까, 모두가 그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췌장암 수술을 앞둔 집사님을 위해, 기도하기 위해 오랜만에 또 제자 반 집사님들이 함께 모여 병문안을 갔습니다. 근데 그 자리에서 이 집사님이 ‘목사님 집사님 저는 정말 감사해요. 지금까지 지켜주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인 걸요. 제 인생의 주인이시니 가장 선한 길로 인도 해 주실 줄 믿어요.’ 이 집사님의 고백은 정말 큰 도전이 됐습니다. 이 집사님의 고백대로 예수님께서 우리 집사님을 선한 길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8차 항암 이후에 진행된 제거 수술이 잘 진행되게 해주셨고, 이후 치료 과정이 잘 진행될 수 있도록 의료진의 지혜를 주고 계신 상황입니다. 중풍병은 백부장이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매개체(媒介體)가 됐습니다. 어 중풍병(中風病)은 예수님이 이야기를 들어주신다는 그 사실을 깨닫게 하는 도구(道具)가 되었습니다. 이 중풍병은 백부장의 종이 예수님의 전인격적인 치료를 경험하게 하는 놀라운 도구가 되었습니다. 만약에 종이 병에 걸리지 않아도 백부장은 예수님을 찾아올 생각조차 못 했을 겁니다. 만약에 중풍 병이 아니었다면 이 병에 걸렸던 종은 예수님이 치료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겁니다.

※저는 엊그제 저녁까지 제자반 집사님들과 함께 대만 북부 신주시에서 3박 4일간 훈련 아웃리치를 진행했습니다. 지난 25년간 선교 사역을 이어오셨던 우리 교회에서 파송되었던 선교사님과 협력해서 사역을 진행했는데요. 막상 이야기를 듣고 보니 대만에 가신 지는 2년 밖에 안 됐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자초지종(自初至終)을 들어봤더니, 이전에 중국 우루무치에서 위구르족을 상대로 20년간 사역을 이어오셨는데, 갑자기 바뀐 중국 정세(政勢) 때문에 쫓기듯이 그 사역(事役)지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셨답니다. 많은 중국 선교사님드링 그리 하듯이, 어쩔 수 없이 중국 사역지에서 갑작스럽게 나오게 되신 거에요. 그리고 정말 뜻하지 않은 상황 가운데 하나님의 신적 개입으로, 정말 예상치 못했던 대만 땅에, 아이티(IT) 도시라고 불리는 신주시에 사역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그 신주시에 60년 전에 우리 한국 고신교단 첫 번째 선교사로 파손되었던 그 사역자가 세웠던 교회, 현지 교회 신주 장로교회에서 협력하게 되신 거였어요. 제가 선교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하나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만약 선교사님께서 20년 동안 생각하셨던 그 사역 지를 갑작스럽게 떠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함께 생각하지 않았겠구나, 만약에 선교사님이 고난(苦難)의 길을 겪지 않으셨다면 신주 장로교회가 사랑의 교회에서 전해준 그 사랑의 섬김을 받지 못했겠구나, 만약 이 선교사님의 거처를 그렇게 옮기시지 않으셨다면 하나님께서 대만 땅에서 일하시는 것을 우리 모두가 보지 못했겠구나, 선교사님 부부에게 찾아왔던 이 고난의 길로 보이는 변화(變化)가 우리 제자 반에게, 신주 장로교회에게, 사랑의 교회 영 가족에게 있어서는 위로의 길, 치료의 길이 된 것을 저는 봤습니다. 선교사님 부부 덕분에 주변 지역의 노방전도를 할 수 있었고, 더운 날씨에 그리고 여러 가지 상황에 지쳐 있었던 현지 교회 성도들을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그 대만 사람들에게 영혼 구원의 열정을 나눠줄 수 있었어요.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모통 동네였던 가버나움은 괴로움의 마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괴로움을 털어놓을 수 있는 곳 괴로움의 이야기를 들어주시는 피난처, 치료가 일어나는 현장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함께하시는 그곳은 백부장뿐만 아니라, 기적을 체험한 모두에게 치료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내 삶에 가버나움은 비록 고난이 가득해서 괴로움의 장소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이 함께 하시며 일하시는 나의 치료자 되시는 그 예수님께서 지금 역사하시는 위로(慰勞)의 장소가 된 줄 믿습니다. 아멘.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며, 위로를 경험하신 하는 곳이며, 소망을 발견하는 곳이 된 줄도 믿습니다. 나의 치료자 되시는 그 예수님께서 오늘 외로움의 가버나움에 있는 우리를, 위로의 가버나움 치료의 가버나움으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그 가버나움으로, 초청하고 계십니다. 치료자 되시는 예수님께서 고통과 절망 가운데 이 말씀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영 가족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아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십니다. 네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 우리를 고쳐 주십니다. 아멘. 그 예수님께서 육체뿐만 아니라 우리 영혼까지 전인격적인 치료를 베풀어 주신 것을 경험하시며 나의 치료자 되시는 그 예수님을, 치료가 필요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우리 영 가족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의 치료자 되시는 그 예수님께서 우리뿐만 아니라, 복음을 받는 모든 이들을 치료하실 줄 믿습니다. 나의 치료자 되시는 그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참된 회복을 경험하시는 사랑하는 영 가족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여전히 배반하고 여전히 의심하며, 여전히 주님을 왕좌에서 끌어내리려고 하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를 만나주셔서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고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전히 우리 삶 가운데 있는 고난 그 길 앞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해 주옵소서. 그 고난의 길이 위로의 길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나의 치료자 되신 예수님께서 괴로움에 가버나움을 위로와 치료의 가버나움으로 바꾸어 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해 주옵소서. 그리하여 나의 치료자 되시는 예수님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그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요약
언제나 우리를 만나주시고 이야기를 들어주시는 예수님만 찾고 따르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참 된 치료자이신 예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전인격적인 회복을 경험하며, 예수님을 삶의 진정한 주인으로 모시며 위로와 치료의 기적을 경험하는 인생이 되어 우리 예수님의 지상 명령인 예수님을 증거 하는 구힌 자녀로 살아내야 한다.








728x90

[경제·금융 상식 퀴즈 O X] 7월 8일 (853)


1. 금리가 낮은 일본 엔화를 빌려 금리가 높은 다른 나라의 자산에 투자해 수익을 얻는 투자 방법은?
① 사무라이 본드
② 엔 캐리 트레이드
③ 와타나베 부인
④ 갭 투자

2. 달러화 가치를 보여주는 지표인 ‘달러인덱스’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화폐는?
① 유로
② 엔
③ 파운드
④ 위안

3. 2006년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 4개국을 중심으로 설립된 신흥경제국 연합체는?
① FTA ② BRICS
③ IMF ④ WTO

4. 유가증권시장, 코스닥시장 등에 상장되지 않은 주식을 가리키는 말은?
① 테마주 ② 동전주
③ 대장주 ④ 장외주식

5. 한국 원화와 직거래 시장이 형성되지 않은 통화 환율을 계산할 때 달러화를 기준 삼아 간접적으로 계산한 환율은?
① 재정환율 ② 고정환율
③ 변동환율 ④ 실효환율

6 다음 중 부동산 거래세로 볼 수 있는 것은?
① 취득세 ② 부가가치세
③ 상속세 ④ 주민세

7. 다음 중 주식시장의 가격 급변동으로 인한 충격을 막기 위해 운용되는 제도는?
① 불마켓 ② 어닝쇼크
③ 사이드카 ④ 펀드런

8. 프랑스의 한 타이어 회사가 1900년대 초부터 발행한 식당 정보지로, 맛집 평가에서 세계적 권위를 얻게 된 책은?
① 론리 플래닛 ② 미슐랭 가이드
③ 르 몽드 ④ 그린 북

=====


[커버스토리] '중앙은행 무용론'…왜 나오는 걸까?



세계경제의 향방을 결정지을 변수로 미국 중앙은행(Fed)의 기준금리 인하 여부가 가장 먼저 손꼽힙니다. 선진 각국의 기준금리는 최근 1~2년 새 고공 행진을 끝내고 하락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습니다.

이른바 피벗(pivot, 금융정책의 전환)이란 흐름이죠. ‘세계의 은행’ 소리를 듣는 Fed가 여기에 동참하느냐 마느냐는 지구 반대편 한국 가정의 소비와 저축에도 큰 영향을 주기 때문에 신경 쓰이는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금리인하와 관련된 Fed 입장은 모호하기만 하고, 듣기에 따라선 오락가락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지난달 12일 제롬 파월 Fed 의장은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 직후 “인플레이션이 목표치인 2%까지 내려오는 데 예상보다 (시간이) 더 오래 걸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20일밖에 지나지 않은 지난 2일, 유럽중앙은행(ECB) 주최 포럼에선 “우리는 인플레이션을 우리의 목표 수준으로 되돌리는 데 상당한 진전을 이뤘다”고 온도차가 느껴지는 평가를 했어요.

올 초만 해도 Fed가 금리를 세 차례 내릴 것으로 예상됐지만, 지금은 오는 9월 한 차례 정도만 금리를 내릴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Fed가 시장에 선제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눈치만 본다는 비판이 나오고, 이럴 거면 Fed가 왜 필요하냐는 무용론(無用論)까지 쏟아집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봐야 할지 4·5면에서 탐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중앙은행 최대 임무는 물가와 금융 안정
민간에서 출발한 미국 Fed, 더욱 독립적


미국 중앙은행(Fed)에 대한 이해를 늘리려면 먼저 중앙은행의 필요성과 태동 과정, Fed 설립의 특징 등을 알아볼 필요가 있어요. 이렇게 만들어진 중앙은행의 주요 임무는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정부의 은행’에서 ‘은행의 은행’으로




중앙은행이 왜 필요한지는 ‘중앙은행이 없다면 어떤 문제가 생길까’라는 물음을 떠올려보면 쉽게 알 수 있어요. 만약 중앙은행이 없다면 각 시중은행이 저마다 돈(은행권)을 찍어내야 합니다. 은행마다 경영 상태와 신뢰도가 달라 이들 은행권을 교환하기 쉽지 않고, 통화 질서에도 큰 혼란이 생깁니다. 외국과의 교역은 물론, 외환시장이 작동하기도 어렵습니다. 정부가 경기부양을 위해 재정지출을 늘리려 해도 국채 발행을 떠안아줄 곳이 마땅치 않습니다. 경제활동이 거의 정지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것이 바로 한 나라의 법정통화(법화, fiat money)를 독점 공급하는 중앙은행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중앙은행의 모태는 17세기 유럽에서 등장합니다. 1694년 민간은행이던 영국은행(Bank of England)은 은행권을 표준화할 수 있는 특권을 국가로부터 부여받습니다. 영국 정부는 전쟁 비용 조달을 위해 국채를 발행해야 했는데, 국채를 사들인 사람에겐 이를 영국은행 주식과 교환할 수 있게 했습니다. 국채를 발행해 영국은행에 떠넘기고, 그 대가로 단일 은행권을 찍어낼 수 있게 해준 겁니다. 이렇게 ‘정부의 은행’이 된 영국은행은 은행 간 지급결제까지 기능을 넓혀 ‘은행의 은행’이 됐고, 1946년엔 국영은행으로 바뀌게 됩니다.

미국 Fed는 한참 뒤늦은 1913년에야 창설됩니다. 프랑스(1800년), 독일(1876년), 일본(1882년)보다도 늦었죠. 이는 자유와 분권에 대한 열망이 강한 미국 사회의 전통 때문입니다. 미국 내 각 주에는 이미 인가받은 은행이 많았는데, 연방 차원에서 은행감독권까지 갖는 중앙은행을 설치하는 것을 반길 리 없었죠. 일정한 요건만 맞추면 어떤 은행이든 자유롭게 은행권을 발행할 수 있는 ‘자유은행업(freebanking) 시대’가 20세기 초까지 계속됐습니다. 그런데 1907년 증시가 급락하면서 ‘트러스트’라는 이름의 신탁은행들의 대출 자산이 급속히 부실해지고 연쇄 도산 위기를 맞게 됩니다. 이때 뉴욕 월가 은행가 존 피어폰트 모건이 건전한 은행들도 위험해질 수 있다며 다른 유력 은행가들과 긴급 회동해 구제금융을 갹출하자고 제안합니다. 이런 경험에서 ‘최종 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 역할을 할 중앙은행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2개 연방준비은행을 기반으로 Fed를 설립합니다. 민간에서 만들어진 Fed는 정부로부터 좀 더 독립적인 의사결정이 가능하고, 의장은 ‘경제 대통령’이란 별명까지 얻게 됐습니다.

미 Fed, 고용안정에도 중점

그러면 현대 중앙은행의 가장 큰 임무는 뭘까요? 한국은행법 제1조는 ‘물가안정’과 ‘금융안정’을 한은의 목적이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경기가 침체될 때는 통화공급을 늘려 경기를 살리고, 경기가 과열되면 물가가 오를 수 있어 돈줄을 죄어야 합니다. 이렇게 통화량을 관리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바로 기준금리입니다. 중앙은행은 물가가 오를 것 같으면 금리를 올리고, 반대의 경우 금리를 내려 투자와 경제활동이 활성화하도록 합니다.

요즘 들어선 중앙은행이 고용안정, 즉 안정적 경제성장과 관리에도 많은 역할을 하기를 요구받고 있습니다. 특히 코로나19가 창궐하던 3~4년 전 한은법의 목적에 ‘고용안정’을 추가하자는 법안 발의가 이어지기도 했죠. 미국 Fed는 연방준비법에서 ‘최대고용’ ‘물가안정’ ‘적정장기이자율’ 등 세 가지를 설립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합니다. 호주도 완전고용 유지를 중앙은행의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대부분의 선진국 중앙은행은 그렇지 않습니다. 금리를 주요 정책 수단으로 삼는 중앙은행에 고용안정 임무까지 부과하는 것은 무리가 있고, 중앙은행이 정부 정책에 끌려다니는 문제를 낳을 수 있죠. 그래서 영국의 경우, 물가안정과 금융안정을 최우선으로, 그리고 고용과 성장을 하위 목표로 두고 있습니다.

NIE 포인트
1. 중앙은행의 태동 과정을 국가별로 살펴보자.
2. ‘은행의 은행’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는 건지 공부해보자.
3. 중앙은행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독립적 의사결정이다. 왜 그런지 생각해보자.


"뒷북 대응 일관"…美 Fed에 잇따르는 비판
달러 스마일, 트럼플레이션이 어려움 더해



미국의 금융통화정책을 결정하는 기구는 중앙은행(Fed) 내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입니다. Fed 이사회 이사 7명, 연방준비은행장 5명 등 총 12명으로 구성되는 FOMC는 6주에 한 차례씩, 1박 2일에 걸친 회의를 열어 기준금리 결정, 향후 금리정책 방향 제시(foward guidance)를 합니다.

위원들은 당대 최고의 경제학자와 금융 전문가들이지만, 비판도 적지 않게 받고 있습니다. 자유주의 경제학의 태두 밀턴 프리드먼도 오락가락하는 Fed 정책의 문제점을 꼬집어 ‘샤워실의 바보들’이라 맹비난했죠. 샤워기에서 찬물이 나온다고 뜨거운 물을 확 틀었다가 너무 뜨거운 나머지 다시 찬물로 급하게 꼭지를 돌리는 장면에 비유한 겁니다. 경제 상황에 면밀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냉탕·온탕식으로 대처하는 아마추어에 머문다는 얘기죠. 프리드먼은 저서 <미국 화폐사, 1867~1960>(1963년)에서도 “중앙은행이 대공황을 키웠다”고도 했습니다.

트라우마 된 Fed의 두 가지 실책

이런 유의 Fed 비판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코로나19 사태를 극복하기 위해 미국 정부가 천문학적 규모의 재정을 풀면서 물가상승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는데, Fed는 이를 일시적 현상이라 보고 금리 인상을 미뤘습니다. Fed는 물가상승률이 8%까지 근접한 2022년 3월에야 제로금리 정책을 변경하고 금리를 올렸습니다.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미국 통화정책 역사상 최대 실수 중 하나로 기록될 것”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지금은 정반대 상황이 연출되고 있습니다. 피벗(금리정책 전환), 즉 금리 인하의 필요성이 1년 반 전부터 제기됐는데, 아직도 Fed는 서두를 필요 없다는 식입니다. 지난달 FOMC 회의 때는 시장의 예상과 달리 더욱 ‘신중 모드’로 돌아섰습니다. 제롬 파월 Fed 의장은 “정책을 완화하는 데 필요한 확신을 얻기까지 시간이 더 걸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행태를 이해하기 위해선 Fed의 금리정책 역사 속 두 가지 실수를 주목해야 합니다. 먼저, 1929년 미국 경제가 침체하기 시작하자 당시 매리너 에클스 Fed 의장이 금리를 내렸는데요, 이후 물가가 오르자 이번엔 금리를 급하게 올렸습니다. 문제는 이 결정이 대공황을 재촉하는 요인이 됐습니다. 프리드먼의 비판과 같은 맥락이에요, 이를 ‘에클스 실수’라 부릅니다. 2년 전 Fed가 금리 인상에 주저한 것은 아마 에클스 실수가 떠올랐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1970년대 후반에는 당시 폴 볼커 Fed 의장이 스태그플레이션(경기하강 속 물가상승)을 맞아 금리를 연 17%까지 올리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물가가 잡힐 기미가 보이자 너무 급하게 금리를 내려 물가가 다시 뛰기 시작했어요. 이른바 ‘볼커의 실수’입니다. Fed가 피벗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데는 볼커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고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능성 높아지는 트럼플레이션

달라진 경제 상황이 금리 결정을 어렵게 만드는 측면도 있습니다. 미국 경제가 호황일 때뿐 아니라 불황일 때에도 달러가 강세를 띤다는 ‘달러 스마일(dollar smile) 이론’이 그런 예를 보여줍니다. 이는 달러 가치가 ‘불황 때 강세, 중간 지점일 때 약세, 호황일 때 강세’를 보여 마치 웃음 짓는 모양이 된다고 해서 붙은 이름입니다. 호황일 때 경기 과열을 막으려고 미국 금리를 올리면 강달러 현상이 더 심해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코로나19 팬데믹 때처럼 경기가 악화할 때 달러화는 강세 기조로 돌아섭니다. 실제로 그랬습니다. 이때 정부가 돈을 많이 푼다고 해도 금리 인상을 결정하기 쉽지 않습니다. 자칫 달러 가치 상승세에 기름을 부을 수 있고, 국제수지 적자 등 문제를 더 키울 수 있기 때문이죠.

다음으로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올해 말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면 중국 등의 수입품에 관세를 대폭 올리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있는 것도 금리 인하 결정을 주저하게 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재집권하면 수입관세 증대로 인한 물가상승, 즉 ‘트럼플레이션(trumplation)’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금리를 낮추는 피벗 결정이 자칫 물가를 더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겁니다. 고용시장 강세로 인해 여간해선 물가가 낮아지지 않는 ‘끈적끈적한(sticky) 인플레이션’을 경험 중인 미국 내 경제 상황도 금리 인하를 어렵게 합니다.

NIE 포인트
1. 미국 Fed의 체계와 금융정책 결정 과정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2. Fed가 금융시장을 안정적으로 관리했던 역사를 공부해보자.
3. 트럼플레이션이 세계경제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각국 정부가 이를 어떻게 협력하고 풀어야 할까?


장규호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danielc@hankyung.com

728x90

♣주일예배(주후 2024년 7월 7일)-성찬식(聖餐式)
제목: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예수님은 누구신가? ⑮번째
말씀: 요한복음 6:33~40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영광찬양대(1부)
대표기도: 권진우 부목사님
사회: 이기호 부목사님(1부)
헌금송: 홍혜천 집사(소프라노)
 
설교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
ㅡㅡㅡㅡ
 
*요한복음 6:33~40,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4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36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
 
▶성찬식을 앞에 놓고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이라는 제목으로 오늘 15번째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이 7월 첫 주일이고,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는 이 시간에 출입해 주시는 시원한 생수를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 오늘 요한복음 6장을 펼쳐 놓았는데 요한복음 6장에서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사건,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가지고 5천 명을 먹이신 사건인데 누구는 그래요. 보리떡 5천 개하고 물고기 2천 마리를 가지고 5명을 먹였다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사람도 많아요. 이 오병이어의 사건을 가지고 그 표적 이후에 오늘 예수님의 그 자기 선언, 제가 예수님이 누구신가? 구약을 통하여 또 지난번에 많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예수님이 나는 누구다. 라고 하는걸 ‘에고 에이미’, 헬라로 I am, 나는 누구다. 예수님 당신의 자기 선언, 예를 들어서 예수님께서 말하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시니 그럴 때 예수님이 나는 포도나무다. 아시지요? 그것도 모르면 안 되죠. 그다음에 나는 선한 목자다 아시지요? 사랑의 교회 성도들은 목자의 심정을 다 아는 분들이니까. The Shepherd heart. 나는 선한 목자다. 그러니까 나는 생명의 빛이다. 이런 것들을 예수님의 자기 선언이라고 하는데 이제 앞으로 좀 다룰 터인데 오늘 첫 번째 주님께서 에고 에임이 자기선언하신 것이 뭐냐면, 오늘 나는 생명의 떡이다.
 
I. 나는 생명의 떡이다.
-그래서 이 생명의 떡이 예수님의 당신 자신의 강력한 선언을 하셨기 때문에 이 생명의 떡 문제를 여러분들이 해결을 잘하면, 그가 줄이지도 아니하고 오늘 35절에, 오늘 요절인데요. 뒤에 보면 뭐라고 나오느냐 하면 이렇게 나옵니다.
 
**요한복음 6:35,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아멘 생명의 떡 문제와 그다음에 목마른 문제를 주님이 해결해 주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생명의 떡의 문제는 오늘 다루게 될 것이고. 여러분 다음 7장에 가면 ‘너희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리라.’ 거기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거예요. 앞에 4장에서도 그 수가성 물가의 예수님과의 말씀하실 때, 생수가 곧 성령의 역사이다. 그러니까 생명의 떡의 문제와 말씀의 떡의 문제와 생수의 문제 성령의 역사가 서로 선순환이 되는 거예요. 둘 다 서로 같이 톱니바퀴처럼 같이 이어져 가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생명의 떡을 위하여 주님 먼저 영적 시각 교정을 해주시는데, 뭐라고 교정을 해주시는가 하면 사람들이 오늘 이 주님이 이 말씀을 하기 전에 배경은 뭐냐 앞에 배경이 이래 나와 있어요. 주님께서 떡을 가지고 5천명을 먹이신 기적 같은 사건이라니까, 우리가 주님만 제대로 따르면 이 삶의 방해 문제가 해결되겠구나. 떡의 문제가 해결되겠구나. 이렇게 생각을 한 거예요. 뭐가 해결된다고요. 떡의 문제 빵 문제가 해결되겠구나. 떡의 문제가 해결되겠구나. 그래서 주님만 따르면 무한정 먹을 수 있겠구나, 그래서 주님을 무료 급식소 소장으로, 그렇게 생각을 한 거예요. 영의 눈을 못 뜬 거죠. 왜냐하면, 떡을 자꾸 먹어도 더 배고프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야 하루 종일 굶었는데 주님 이렇게 우리의 굶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니, 배고픔을 해결해 주시니, 우리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자. 그리고 제 얘기가 아니고 오늘 본문에 15절에 뭐라고 나왔냐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요한복음 6:15,
15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육신의 떡 문제, 우리 주님은 육신의 떡 문제를 오늘 해결해 주세요. 육신의 떡 문제 등한시하지 않으시고 주님은 저와 여러분의 경제의 문제도 주님은 관심이 있으세요. 여러분 주님을 잘 따르면 특별한 훈련을 위하여 아주 고단수의 아주 바울 같은 이런 사람들 제외하고는 웬만하고는 하나님 여러분들의 경제 문제, 떡 문제 해결해 주시는 것이에요. 무슨 뜻이냐 저는 어릴 때 가난한 개척교회 목사 아들이었기 때문에 저희 제 부친교회 근처 개척교회 옆에 보면 다 하루살이 노동자들 정말 못 사는 사람들만 살았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나니까, 삶이 맨날 술 마시고 그냥 가족들 폭력 행사하고 이런 남편들이 정신을 바짝 차려가지고 삶이 정리가 되니까, 반듯하게 사니까 경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에요.
 
그게 참 보험의 능력이에요. 그런데 주님 우리 떡 문제도 해결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생명의 떡을 해결해야 되는데, 무슨 예수님을 요술방망이처럼 삼아가지고, 잘못된 시각 교정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26절의 앞에 뭐라고 하시냐면,
 
*요한복음 6:26,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잘못된 시각을 고쳐주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뭐하지 아니할 것이오. 줄이지 않을 것이다.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뭐예요? 목마르지 않는다.’ 근데 주님은 하루 먹고 또 배고프고 이런 것 정도 문제가 아니라 주님은 생명의 떡의 문제를 해결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진짜 영적인 고갈 상태를 해결해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사랑의 교회는 제자 훈련하는 교회고, 점점 예수님의 온전한 제자 되기를 우리가 소원하는 교회인데 주님의 제자가 되어 가는 이런 과정을 신학적으로는 성화의 과정이라고 그래서 성화예요. sanctification, 성화의 과정이라고 그러는데 이 성화의 과정에 대해서 저 나름 또 다른 정의를 내린다면 성화라는 것은 육신의 떡을 의지하는 수준에서 점점 더 생명의 떡을 의지하는 과정이다.
 
“성화는 육신의 떡을 의지하는 수준에서 점점 더 생명의 떡을 의지하는 과정이다.”
-육신의 떡 정도가 아니라 생명의 떡은 그래서 여러분, 참 이 인류의 역사는 아담이 불순종을 선악을 알게 한 나무를 먹는 걸 따먹는 걸 가지고 문제가 시작돼 가지고 영원한 파멸로 갔어요. 그러니까 제일 첫 번째 아담을 통하여 먹는 것이 잘못돼 가지고 파멸로 갔는데, 제2의 아담 되시는 예수 그리스께서 오늘 생명의 떡이 되시므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실 것이에요. 떡의 문제를 진짜 떡의 문제로 해결해 주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우리 시각 교정을 해야 되는데 오늘 꼭 필요한 거처럼 우리가 하나 생각할 것이 뭐냐 하면 주님이 생명의 떡이 되셨다. 하는 그 말은 어떤 뜻인가 오늘 37절에 중요한 말씀이 나와요.
 
*요한복음 6:37,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결코 내 쫓지 아니하리라. 오늘 성찬을 앞에 놓고 오늘 생명의 떡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오늘 이것입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거절하지 않으시다.”
-오는 자는 결코 내가 내쫓지 아니하리라. 거절하지 아니하리라. 주님의 초청 우리 주님은 초청하시고 용납하시고 받아주시고, 이끌어주시는 선한 목자이세요. 근데 사탄은 내 쫓고 참수하고, 거절하고 밟아버리고 아주 못돼먹었어요. 그래서 저와 여러분 오늘의 성찬에 참여하면서 거절하시지 않으시는 주님의 그 복음 중에 복음 앞에 우리가 눈물이 나고, 감사가 되고, 정말 치밀어 오른 은혜가 우리 속에 새로워져야 되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이 시대는요 거절의 사회에요.
 
저만 하더라도요. 중학교를 시험 봐가 들어갔다니까 중학교 입시가 3대1, 4대1, 5대1, 이었어요. 그러면 하나만 남고, 나머지 3대1, 4대1, 이면 나머지 3배, 4배가 다 거절당한 것 아니에요. 고등학교 입시는 더 치열했죠. 대학입시도 치열했죠. 요즘도 대학입시 어떤 과는 10대1, 20대1, 되는 거예요. 뭐 하나 들어가면 나머지 9, 하나 들어가면 나머지 19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제대로 된 회사는 다 안 받잖아요. 그러니까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해 가지고 중등, 고등학교 대학, 회사에서 거절당하는, 내가 이러니까 목사님 영업 사원은 매일 거절당합니다. 우리가 태신자를 품고 전도할 때도 거절당할 때가 있죠.
 
어떤 형제가 마음을 먹고 어떤 자매에 대해서 필이 꽂혀갖고 유아마이 선샤인(You are my sunshine) 그러면서 꽃다발을 들고 자매에게, 자매 나를 받아주소서. 라고 했는데 그 자매가 나는 형제와는 인연이 없는 것 같애요. 이러면서 단칼에 거절하는 거예요. SNS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이 거절당한 경험 있죠. 단톡 방에 있는데, 혼자 남겨주고 다른 방을 만들어 가지고 거절시키는 거예요. 차단을 해 가지고 거절당한 경험입니다. 남편으로부터 거절을 당하고, 아내로부터 거절당하고 그래서 이 사회가 소사이어티 오브 거절, 이런 말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거절의 사회 그리고 한국 사회는 상처가 너무 많고 천년, 2천년, 이 한반도에서 내려오면서 너무 경쟁 하다 보니까, 30프로는 무조건 있죠. 30프로는 무조건 이쪽 누가 말해도 들어먹질 않고 서로가 그냥 뭐 몸과 뜻과 정성과 목숨을 다해 싸우고 있어요. 한국 사회는 상처가 많아서, 누가 뭐래도 말을 안 듣는 30프로, 30프로 의심과 불신과 거절의 트라우마가 많은 사유가 오늘 생명의 떡의 역사를 체험하면 이 성찬회를 받으면 거절로부터 자유로워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오늘 뭐라고 말씀하느냐 하면 39절에 눈물이 핑 돌아요.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39절 본문에,
 
*요한복음 6:39,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한복음 6장에, 말씀의 바다에 나를 풍덩 던져 보니까, 39절을 깨닫게 하시는데 나를 보내신 주님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니라. 주님의 부활의 몸으로 같이 살도록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고, 그래서 주님으로 지금 한번 뒤에 보니, 요한복음 6장 28절에,
 
*요한복음 10:28,
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II. 생명의 떡으로 먹으라고 하신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으시는 주님이심을 믿으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건물을 지을 때, 남쪽 타워, 북쪽 타워 중간에 요셉 브릿지가 있는데, 주님의 손을 안아 가지고 여러분 멀리 봐야 보여요. 그게 루버로 해 가지고 예수님의 손으로 이거 안았어요. 남쪽 타워, 북쪽 타워 건물을 안았어요. 그리고 그 안을 때 거기에 루버에 십자가가 많이 들어있어요. 그리고 안아주시는 본당 자체가 그러고, 여기서 사랑 글로벌 광장에 천여 평이 다 사람들이 거절한 누구든지 올 수 있도록, 그리고 거기에 안영남 작가의 포에버 러브라고 거기에 소나무 옆에 여기 있어요. 붉은 심장이 있어요. 24시간 내내 벌떡벌떡 LED가, 또 어떤 사람은 목사님 전기 값 갖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죠. 똑같애. LED라서 비싸지도 않어요. 예 LED 할 돈 따로 있고, 구제할 돈 따로 있는 거예요. 제발 좀 편협하지 말고, 큰 그림을 보고 제발 좀 비판하지 말고, 거절하지 말고, 우리 주님이 교회 누구든지 거절 감을 느끼지 말게 하시고, 교회 와서 패배감을 느끼지 않고, 은혜를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자 그런데 그래서 사랑의 교회는 이 사회에서 거절당하고, 왕따 당하고, 추방당하고 단톡방에서 차단당하는 모든 사람들을 환영하는 교인 줄 믿습니다. 문제는 그런데 문제가 되죠. 그건 뭐냐 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거절하지 않으시는데 세상의 떡에 취한 우리가 예수님을 거절하고 있는 것이에요. 참, 아이러니한 것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은 그에게 나오는 사람은 누구도 거절하지 않으시는데, 세상의 떡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거절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주님이 이 말씀을 설교를 하셨거든요. 오늘 요한복음 6장에 설교하셨는데 요한복음 6장,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보포면 빨간 글씨로 돼 여기 빨개요 아 한 페이지가 다 빨개요. 계속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셔서 그런데 주님이 이 설교를 하고 난 다음에, 많은 사람들이 66절에 보니까 예수님을 거절하고 다 떠나가 버렸어요.
 
*요한복음 6:66,
66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님은 거절하지 않는다. 우리가 거절하면 되겠어요?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 떡에 취해 가지고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외면함으로 영혼의 굶주림과 귀가를 계속 갖는다면 되겠습니까? 심지어 배신한 사람들 있어요. 7절이라고 하니까, 가롯 유다 같이, 그래서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라는 것은 거절하지 않으신 주님을 믿습니다. 다 거절당한 경험을 가지고 상처와 트라우마가 있는 우리 삶의 현상 가운데서 주님 오늘 우리를 거절하신 주님의 품으로 나를 던집니다. 그다음 또 하나 깨달을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거절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뜻인가? 우리로 하여금 생명의 떡을 먹게 하시므로 거절하지 않으시는 거예요.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예수님의 생명이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시고,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시는 거 뭐냐면 생명은 좀 추상적인 용어예요.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어떤 이론적인 것이에요. 철학적인 것이에요. 그런데 생명의 떡은 먹어야 되는 거예요. 생명의 떡은 체험해야 되는 것이에요. 여러분 오늘 성찬을 통하여 생명의 떡을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아주 중요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인 체험이 필요하다는 거죠. 그래서 생명의 떡을 구체적으로 체험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오늘 본문 뒤에 53절에 보니까, 여러분 읽었습니다마는
 
*요한복음 6:53,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생명의 떡을 먹는다는 말은 인자의 살을 먹고 인자의 피를 마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에요. 그게 좀 54절에 보니까,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주님의 부활의 몸으로 다시 살리겠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것을 말씀하고 그러니까 이제 55절에 다 같이 시작,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은, 내 피는 놀라운 기가 막힌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을 하는데, 60절에 보니까, 제자들이 뭐라고 그러냐,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 야 이 말씀이 어렵도다 누가 이걸 깨달을 수가 있겠는가? 오늘 이 말씀이 어렵도다. 생각하는 분들은 이제부터 여러분들의 귀를 쫑긋 세우고 제 말씀 앞에 같이 요한복음 6장의 세계에 다시 우리가 뛰어들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비슷한 느낌이 있을 수 있는 분들은 어떻게 주름에 살과 피를 먹고 마실 수 있는지 제자들처럼 오늘 어리버리하게 못 알아듣지 말고,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깨닫는 영적 시각 교정, 영안을 열어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물리적으로 예수님의 피지컬 예수님의 바디와 예수님의 피를 먹는가, 그 정도 아니에요. 영적으로 먹고 마셔야 되는 것이에요. 이런 뜻입니다. 어느 날 엘리야가 선지자가 로뎀나무 밑에서 이제 번 아웃 돼 가지고 나의 생명을 취해 달라고 완전히 고갈 상태가 됐어요. 그때 누가 보냈었어요. 그 로뎀나무 밑에서 천사를 보내 가지고 천사가 준 떡과 물을 먹고 마셨는데요. 마찬가지로 우리들은 로뎀나무가 아니라, 예수님의 나무 십자가 밑에서 오늘 생명의 떡 대신 예수님을 깨닫고 생수를 먹고 다시 회복해야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성만찬을 통하여 생명의 떡을 체험해야 된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몸과 피를 기념해야 되는 것인데, 그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바울이 이걸 잘 깨닫고 난 다음 고전 11장 26절에,
 
*고린도전서 11:26,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아멘. 자, 오늘 주님의 생명의 떡을 먹는다는 것은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인데 이 뜻은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뭐라고 얘기하느냐 바울이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무슨 말이냐? 주의 죽으심의 십자가의 사건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은 십자가의 깊은 신비와 비의를 오늘 이 자리에서 더 깊이 깨달을 때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저는 예수님의 십자를 더 깊이 묵상한다. 할 때, 이번 주에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가 에드워즈 테일러라는 18세기 청교도 목사님이시자 시인이었던 그분이 생명의 떡에 대해서 깨닫는 거에서 아 너무 마음에 와 닿았어요. 마음에 그냥 막 그냥 전율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가 뭐라고 말씀했는가, 이렇게 말씀했어요.
 
“하나님은 그의 사랑스러운 아들을 갈고 반죽해서 생명의 떡을 만들었다.”-에드워즈 테일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갈고 반죽해 가지고 이 생명의 떡을 만들었다. 예수님의 몸을 십자가에서 으깨고 반죽해서 만들어진 떡이 생명의 떡인 줄 믿습니다. 그리 생명의 떡을 먹으라는 것은 이 십사가의 깊은 은혜와 신비를 오늘도 기억하고 확인하고 묵상하면서, 우리가 성찬에 참여할 때, 우리 모두는 생명의 떡을 먹게 되는 것이고, 거절의 상처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날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53절에 다시 한 번 ,
 
*요한복음 6:53,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오늘 우리 가운데 수많은 상처 입은 분들, 슬픔 당한 분들, 극한 거절로 고통당하는 분들, 이분들 계시면 십자가를 통하여 아들을 갈고 반죽해서 몸을 으깨어져 떡을 만드시고 그걸 통하여 생명의 떡 되신 예수님을 우리가 묵상하고 체험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저는 우리 가운데 상처가 치유되고, 거절이 해결되고, 슬픔이 극복되고, 우리 가운데 수없이 거절당하고, 공고한 인생이고, 먹어도 배고픈 인생이고, 어려움의 파도가 몰려올 때는 숨을 자리가 없고, 슬픔에 강이 범람(汎濫)할 때는 안전하게 있을 데가 없고 실패할 때마다 가슴을 쉬는데도 쉴 데가 없는 그런 우리 삶의 상황이 있다면, 오늘 생명의 떡을 먹고 소생하시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그리고 생명의 떡을 먹는다는 것은 십자가의 깊은 신비를 깨닫는 것이에요. 제가 젊을 때,
 
♬ 주님 가신 길 십자가의 길 외롭고 무거웠던 길 골고다의 지친 언덕길 오 나의 주님 나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죄인 위해 권한 받으셨네. 이 세상에 생명주시기를 그렇게도 원하셨던 길, 우리의 생명 죽게드리네. 나의 자랑 십자가일세. 나의 생애 주님까지 나의 영광 나타내 주소서 이 세상에 생명주시기를 그렇게도 원하셨던 길!~~,
 
-여기에 주님의 십자가에 대한 깊은 신비가 우리 모두에게 눈이 열리기를 바라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빠져도 십자가 앞에서 자빠져야 됩니다. 생명의 떡을 오늘 먹는다는 것은 으깨어진 예수님의 십자가 깊이를 묵상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게 복음의 진리예요. 그리고 생명의 떡이신 이 예수님은 2천 년 전에 이 땅에 초림으로 오셨지만 앞으로 그 어느 날 완벽한 모습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게 주님의 재림입니다.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 너무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있어요. 요한계시록 7장 15절-16절에 우리 크게 또박또박 같이 합동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7:15~16,
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16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요한계시록에서 우리에게 다시 확인한 생명의 떡을 너희들이 제대로 먹게 될 때, 결국은 다시는 영적으로 주리지도 아니하고 목마르지 않은 축복을 허락해 주실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생각과 계산으로만 확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생명의 떡의 문제는 수학적이거나 계산 정도가 아니라, 이건 생명적이고 하나님 적이고 천국적의 차원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제 성찰 앞에 놓고 적용하겠습니다.
 
적용.
35절 요절 말씀을 다시 한 번 크게 우리가 읽고 고백하겠습니다.
*요한복음 6:35,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할렐루야! 내게 뭐에요? 오는 자는, 주님은 용납하고 받아들이고 초청의 전문가라 그러셨죠. 주님께 가는 자는 상처받아갖고 도망가지 아니하고 생명의 떡 되시는 주님 오라 그러시는데 세상의 떡에 취해 가지고 우리가 주님을 거절하는 우리의 마음이 있다면 그런 부분이 있다면 주님 주님께 내가 나아가겠습니다. 성찬을 통하여 주님 앞에 나아가겠습니다.
 
내게로 오라. 주님 앞에 나간다는 이 말씀은 마치 불이 난 집의 창가에서 이제 불타 죽기 직전에 겁에 질린 자식에게 밖에 있던 아버지가 그 아들을 살리려고 밑에다가 안전장치를 다하고 얘야 뛰어내려라. 뛰어내려라. 뛰어내리라고 애절하게 외치는 그 부모의 심정과 같아요. 여러 나라를 사막에서 헤맨 후에 탈진해서 거의 죽어가고 있는 자를 발견한 구조대가 이거 마시세요. 탈진해 죽어가기 직전인 사람에게 이거 마시세요. 라고 말하면서 물을 주는 거와 같아요. 불타는 집에서 뛰어내리지 않으면 죽는 거예요. 물마시라고 하는데도 안마시면 갈증으로 죽는 것이에요. 오늘 주님의 안타까운 심정을 깨닫고 오라하시는 주님의 심정을 깨닫고,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그의 몸을 갈고 으깨고 이렇게 하신 것, 그분 앞에 우리가 마음의 소원을 가지고 내 생애를 통하여 주님 앞에 생명의 떡을 먹고 주님 앞에 쓰임받기를 원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성찬에 참여할 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으깨어 주셨으니 우리도 헌신하고 우리의 삶을 들일 때 그게 진짜 축복이요. 그게 진짜 은혜가 되는 겁니다.
 
♣요약
우리는 목마를 수밖에 없는 떡의 전쟁터에서 돌아와 ‘거룩한 성찬’을 받을 때, 예수님의 영원한 생명으로 모든 영적 굶주림을 해결하여 주셔서 참된 만족을 누리며 예수님께서 친히 갈리고 으깨어진 생명의 떡이 되어 주셨사오니 거절 사회에서 받은 패배감을 온전히 치유 받아야 한다. 우리도 가정과 일터에서 으깨어진 생명의 떡이 되어 예수님의 피의 복음의 능력에 의지하여 ‘2033-50 비전’을 올려 드릴 때, 한국교회와 세계 복음주의 교회와 함께 강력한 하나님의 군대로 일어나는 믿음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728x9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