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05월 29일)
제목: "야곱의 꾀와 하나님의 섭리(攝理)"
말씀: 창세기 28:10-19
찬양인도: 쉐키나(유재원 부목사님)
사회: 김대규 부목사님

설교자: 김은석 부목사님

-----

* 창세기 28:10-19,
10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16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 7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18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9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실 것입니다. 좋으신 하나님으로 인해 저와 여러분 안에 하늘의 기쁨과 평강이 넘치기를 소망합니다.

지금 이곳은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들판입니다. 해가 지고 기온이 내려가 스산하기 이를 데 없는 허허벌판에서 야곱은 잠을 자기 위해 돌을 베고 누웠습니다. 창세기 41장과 45장에 보면, 야곱과 요셉의 나이가 나오는데요. 이를 가지고 계산을 해보면 지금 브엘세바를 떠나는 야곱의 나이가 77세입니다. 별로 놀라시지 않네요. 보통은 이제 젊은이 일 거라고 생각을 하시는데 이미 그의 나이가 77세입니다. 왜? 야굽은 사나운 짐승, 강도(强盜)의 위협(威脅), 수많은 어려움이 둘러싸인 이곳에서 잠을 자야 할까요?
 
우리는 이미 이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의 형 에서가 자신을 죽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야곱의 가정이 보통 가정인가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가정입니다. 아브라함이 기다리고 기다렸다가 백세(100세)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낳은 아들, 그것도 아직 나이 어린 그 이삭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여서 제물로 바치면서까지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이 주신 복과 유업(遺業)을 이어온 가정입니다. 이렇게 정말 특별한 가문인데, 이런 가정도 갈등(葛藤)을 겪습니다. 웬만한 갈등 정도가 아닙니다. 거의 가정이 깨어지기 직전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게 되었을까?
 
본문을 가만히 묵상(默想)하는 가운데 제게는 먼저 이삭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여러분, 본문의 이삭은요, 후계자(後繼者)를 정하는 데 있어서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과 너무나 큰 차이를 보입니다. 창세기 15장에 보면요. 아브라함은 이삭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누구를 과연 후계자로 정해야 할까를 고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에 충성(忠誠)된 종이었던 엘리에셀을 후계자로 기도하며 나아갑니다. 여러분 후계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부터가 다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요. 아브라함에게 엘리에셀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너의 몸에서 난 자녀가 너의 상속자(相續者)가 될 것이라는 응답(應答)을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 상속자에게는 큰 복을 주실 것이다. 땅도 주실 것이며, 많은 자손(子孫)을 주실 것이다. 라고 약속을 하십니다. 그리고 약속에 대한 증표(證票)로 할례(割禮)를 행하도록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심지어는요. 사래의 이름을 사라로 바꾸면서까지 이렇게 후손(後孫)을 준비(準備)하라고 하시거든요. 여러분 왜 그렇게 하셨을까? 그것은 그만큼 믿음의 유업을 잇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요. 이삭은 아들이 둘이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유업을 이어가는 것에는 별로 그렇게 관심(關心)이 없어 보입니다. 적어도요. 아브라함과 비견(比肩)될 만큼 신중(愼重)하게 처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여러분 단순히 유산을 물려주거나 땅을 물려주거나 가축을 물려주거나 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약속, 믿음의 유업을 잇는 일이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한 일이거든요. 따라서 누가 과연(果然) 후계자(後繼者)가 될 것인가를 놓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과연 누구일까? 과연 하나님은 누구를 선택(選擇)하라고 하실까?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구해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여러분 이삭은 어땠습니까? 창세기 25장 28절을 보면,
 
*창세기 25:28,
28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이삭은요, 에서가 사냥해 온 고기를 즐겨 먹었다. 라고 합니다. 그는요. 에서를 후계자로 세우기 위해서 자신이 평소 좋아하던 그 음식을 사냥해서 가져오라. 이렇게 에서에게 이야기합니다. 여러 차례 묻고 할 일을 행하고, 이름을 바꾸면서까지 후계자를 정했던 아브라함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여러분, 이삭이 아브라함처럼 조금 더 하나님의 뜻을 구했더라면 에서와 야곱이 극(極)에 달하는 갈등을 겪게 되었을까요? 만일 그랬다면 인간적인 잣대를 가지고 에서를 후계자로 선정(選定)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도하여 응답을 받은 뒤에 에서를 위해서 그의 마음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에서를 설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이미 엎질러진 물처럼 돌이킬 수 없는 상황(狀況)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이 본문 가운데 이런 이삭의 조금도 묵상을 하다가 야곱이 보이게 되었습니다. 이 28장에서의 야곱은요, 다급(多級)합니다. 왜냐하면, 이대로 두고 보면 고스란히 축복(祝福)을 형에게 빼앗길 것이 불 보듯 뻔하기 때문입니다. 평소 꾀가 많은 야곱이 이것을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습니다. 이삭의 영적인 둔감(鈍感)함에 야곱은 꾀로써, 응전(應戰)을 합니다. 이 아곱의 꾀는요.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두 가지 오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⓵첫째로는 축복의 유한성이고요.
⓶두 번째로는 축복의 주권성입니다.
 
첫 번째로, 야곱은 소위 이 하나님의 축복을 한정되어 있는 유한한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유한한 것이기 때문에 내가 차지하지 않으면 빼앗겨 버리는 것이죠. 그래서 유한한 축복을 차지하려고, 유한(有限)한 축복을 빼앗으려고 꾀를 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축복은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축복은 유한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축복은 끊임없이 공급(供給)되고 영원(永遠)히 주어지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한(限)이 없으십니다. 그런 것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복도 영원하고, 무한(無限)하다. 라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에서를 축복하시지 않는 것은 복이 다 떨어져 가지고 더 이상 줄 복(福)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에서를 축복(祝福)하시는 것을 원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9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 아곱이 받은 축복을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우리 함께 로마서 9장 10절과 13절을 한 목소리로 읽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9:10-13,
10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여러분 성경은요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하셨습니다. 이미 야곱이 태어나기 전부터 야곱을 위한 祝福을 예정(豫定)하셨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그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죠. 그래서 아귀다툼을 했습니다. 그래서 혈육(血肉)이었던 형과 다투었습니다. 이미 자신에게 보장(保障)되어 있는 축복을 일부러 쟁취(爭取)하려 했던 것이죠.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축복의 유한(有限)성보다 더 큰 오해는요. 축복의 주권(主權)성입니다. 야곱은요,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하나님이 주시려는 축복을 가로챌 수 있다는 오해(誤解)를 했습니다.
 
사랑은 여러분,
은 누가 주시는 것입니까? 복은 이삭이 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죠.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우리가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내게 올 것이 아닌데, 억지로 빼앗을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부모님이 자녀를 축복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복을 비는 것일 뿐, 복은 부모님이 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복을 가로챌 수 있다라고 오해하고 착각(錯覺)을 했습니다. 이렇게 두 오해를 가지고 야곱은요, 하나님이 주시는 이 복을 유한하고 물질적인 것으로 보았구요. 또 놓쳐버릴까 봐 아등바등 하면서 꾀를 내었던 것입니다. 에서를 축복하는 것을 참지 못하고, 에서의 축복을 빼앗으려 했던 야곱이 본문에 나옵니다. 만약에 야곱이 영적(靈的)으로 조금만 더 깨어 있었더라면 자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祈禱)하며, 하나님 나는 어떤 존재(存在)입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라고 물었더라면 그는요. 오히려 자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자신을 향해 놀라운 꿈과 계획(計劃)을 가지고 계셨던 하나님을 더 깊이 깨달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삭의 영적이 둔감함, 야곱의 꾀, 처음에 본문을 묵상할 때는 이 두 가지가 보였었는데요. 계속해서 본문을 묵상하다 보니까, 저는 점점 더 깨닫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깨닫게 되었냐면, 결국은 이삭도 아니고, 야곱도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가 본문 가운데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야곱이 지금 에서와 갈등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야곱이 하란을 향하여 길을 떠나게 되었지 않습니까?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계획(計劃)과 섭리(攝理)였습니다.
 
초(秒), 분(分), 시(時), 일(日), 월(月), 연(年)을 지으시고 온 우주(宇宙)와 만물(萬物)을 모든 시간 동안 틀림없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그 섭리(攝理)입니다. 그 섭리를 따라서 지금 야곱은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여러분 이삭이 조금 더 하나님의 뜻을 보았다면은, 에서와 야곱이 극에 달하는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기록된 대로 야곱은 한 곳에 이르러 잠을 자고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에서 야곱은요, 하늘에까지 닿는 사닥다리를 보았구요. 그 사닥다리를 오르내리는 하나님의 사자(使者)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향해 축복하십니다. 땅과 자손(子孫)을 약속(約束)하십니다. 아브라함이 받았던 약속(約束), 아버지 이삭이 받았던 그 약속, 약속을 야곱 또한 받게 되었습니다. 이 약속을 받고 나서 야곱은 그제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평안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베고 잤던 돌을 세우고, 돌 위에 기름을 부어 이름을 ‘벧엘’이라 지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體驗)하기 전에 야곱에게 이 돌은 처량(凄涼)한 자신, 너무나 비참(悲慘)한 자신의 신세(身世)를 상징(象徵)하는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인재를 다 경험하고 나니까, 이 돌은 더 이상 처량한 자신의 신세를 상징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約束)을 상징(象徵)하는 증표(證票)가 되었습니다.
 
결국 야곱의 삶을 이끌고 온 것은 그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攝理)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버려지듯 내몰려 캄캄한 밤에 돌이나 베고 잠을 자야 했던 이 야곱,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차질(蹉跌) 없이, 틀림없이 인도(引導)해 오셨던 것입니다.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이미 야곱은 뱃속에서부터 하나님의 특정(特定)함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입니다. 하나님은요, 절대적(絶對的)인 주권(主權)으로 이 모든 일들을 행하시고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부릅니다. 야곱은 아버지와 형을 속였지만 하나님은 그를 축복하시기 위해 오늘 벧엘을 예비하신 것이지요. 세상 사람들은 말합니다. (點)이 모여 선(線)이 된다라고 말합니다. 그런 것처럼 모든 삶은 선택(選擇)의 총이다. 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의 선택이 있기 전에 우리가 어떤 것을 선택하기 이전에,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세밀(細密)한 섭리(攝理)라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 모두는 정말 한치 앞을 모르는 인생길을 걸어갑니다. 그것은요, 삶의 경험이 많은 어르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 유명 영화제인 칸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던 윤여정씨가 참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60살이 돼도 인생은 잘 몰라요. 나도 처음 살고 있거든요. 나도 67살은 처음입니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많은 경험이 있어도, 아무리 많은 데이터베이스가 있다할지라도, 우리 모두 처음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매 선택의 갈림길에서 우리는 온갖 지혜와 꾀를 짜냅니다. 그러나 동과 서 남과 북으로,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 삶 속에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조금 더 주목해 보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야곱에 보았던 사닥다리입니다. 야곱이 이제 꿈을 꾸면서 하늘까지 닿았던 이 사닥다리를 보게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 사닥다리는요. 땅과 하늘을 이으시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우리 요한복음 1장 51절에서 주님이 자신을 가리켜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한 목소리로 읽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51,
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주님은 여기에서 보면 자신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말씀하시죠. 인자 위에, 인자 위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이렇게 말씀을 하세요. 고대 근동에 사람들은 '지구라트' 라는 제단을 민들었습니다. 높은 제단을 쌓는 거에요. 하늘에 닿기까지 높이 쌓아서 하늘에 오르고자 했습니다. 창세기 11장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탑, 바벨, 이 지구라트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지구라트와 오늘 본문에서 야곱이 보았던 사닥다리는 둘 다 땅과 하늘을 잇는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바벨과 지구라트는요. 하늘에 닿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慾望)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이 사닥다리 야곱이 보았던 사닥다리는 땅에 내려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사랑은 여러분, 곰곰히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야곱이 꿈속에서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하나님께로 가고 싶었겠어요. 여러분, 야곱이 꿈속에서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하나님께 가고 싶었겠어요. 여러분, 야곱이 지금 하나님께 나아갈 용기(勇氣)가 있습니까? 하나님께 나아갈 능력(能力)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나아갈 지혜(智惠)가 있습니까? 하나님께 나아갈 할 자격(資格)이 있습니까? 야곱에게는요. 지금 패배감(敗北感)이 가득합니다. 좌절(挫折)감이 있고요. 소외(疏外)감이 가득합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存在)에 불과하죠. 여러분 그에게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야곱에게 하나님이 지금 임재(臨在)하여 주십니다. 여러분, 예수님도 이와 같습니다. 요한복음 1장 10절과 11절, 우리 다 같이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요한복음 1:10-11,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본문에 보면 어떻죠? 자기 땅에 오매, 예수님이 지금 땅으로 오셨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14절에 보면, 요한복음 1장 14절에 보면,
*요한복음 1:14,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영광을 보니아버지의독생자의영광이요은혜와진리가 충만하더라.
-14절에 보면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이렇게 표현해요. 여러분, 예수님이 왜? 이 땅도 우리가 야곱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우리가 하나님께도 나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께 나아갈 용기 없습니다. 자격 없습니다. 능력 없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친히 하나님이신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 땅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우리 중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납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이죠. 내가 어디에 있든지, 그곳에 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음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줄 믿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영적인 벧엘이 되는 것입니다.
 
※중학교 3학년 때 저한테 고민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꼭 가고 싶었던 미션스쿨이 있었거든요. 그 학교를 이제 알아보고 준비를 하다가 왠지 모르는 두려움이 이렇게 찾아옵니다. 혹시 학교에 떨어지면 어쩌지? 기도를 해도 기도가 잘 안 돼서 기도를 많이 못했습니다. 지레 겁을 먹은 것이지요. 그리고 오랜 고민 끝에 그 학교가 아닌 다른 학교를 지원했습니다. 집에서 가장 가꺼운 미션스쿨을 두고 목사님이 될 사람이 다른 학교를 가게 된 것이지요. 근데 나중에 발표가 나고, 그 지역이 난리가 났습니다. 제가 살던 동네가 난리가 났어요. 그 학교가 설립 이후에 지금까지 딱 그 합격자 대비 미달이 된 것입니다. 내가 왜 지원을 안 했을까? 처음에는 그걸 후회했습니다. 정말로 후회를 많이했습니다. 내가 왜 지원을 안 했을까? 그런데 후회를 하고 후회를 하고 후회를 하다 보니까 정말 후회를 한 건 학교에 지원을 안 한 게 후회가 아니라, 왜 하나님께 물어보지 않았을까? 왜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았을까?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몰라요. 한 치 앞을 모르는 내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 왜 물어보지 않았을까? 그렇게 이제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고 똑같은 이제 잘못을 반복(反復)하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3이 딱 되고 결심한 게 있습니다. ‘매일 하나님 앞에 나가리라.’
그래서 학교 바로 앞에 맞은편에 조그만 교회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항상, 그래서 정말 늦은 시간을 제외(除外)하고는 거의 매일 학교, 그 교회 지하 교육관에서 잠시 기도를 하고, 하나님께 비전과 뜻을 구하고, 학교의 등교를 1년 동안을 했습니다. 수능 일자가 가까워 오고 시험일이 다가오니까, 똑같이 3년 전처럼 너무나 큰 두려움이 막 밀려오는 거예요. 한 번 이렇게 좌절(挫折)을 맞보니까, 또 좌절감이 막 찾아보더라고요.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 다른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하나님께 묻고 있잖아요. 하나님 앞으로 저의 인생은 어떻게 펼쳐지겠습니까? 하나님 저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묻고, 묻고 또 묻고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응답을 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 어느 길을 걷든지, 어느 삶을 살든지, 너를 지킬 것이고,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때 누렸던 그 평안과 기쁨을요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딱 신뢰(信賴)하니까 두려움의 공간은 임재가 가득한 공간(空間)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때의 생각을 하면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저에게는 아마도 그곳이 벧엘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그곳에서 기도하면서 고 3때 목회자가 되어야겠다는 소명(召命)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 오늘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예배당, 컴컴한 지하교육관이 약속(約束)의 기념비(記念碑)입니다. 사역을 하면서 종종 지칠 때가 많이 있는데요. 그럴 때면 그때 기도하던 그 교육(敎育)관을 떠올리며 새 힘을 얻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에게도 벧엘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벧엘은 어디입니까? 야곱과 같은 내게 찾아오신 하나님, 나를 만나주시고 따스한 손길로 나를 안아주시며, 나와 함께 하겠노라. 약속하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 그 하나님을 뜨겁게 만났던 은혜의 기념비 벧엘이 있으십니까? 여러분 벧엘이 있으시다면 다시금 은혜를 회복하고, 기억하는 이 밤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오늘 이 밤 이 안아주심의 본당이 하나님의 임재(臨在)가 충만(充滿)하고,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한, 거룩한 벧엘이 되길 간절히 기도(祈禱)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여러분 한 분, 한 분과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지금은 멋진 옷을 입고, 아름다운 표정을 짓고 이 자리에 앉아 있지만, 분명히 우리 중 누군가는 생지옥(生地獄)을 겪는 분이 반드시 있습니다. 눈물로 이 밤을 지새울 분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오늘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여러분들과 오늘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 내가 반드시 너를 지키며 너를 인도하리라.’
 
♣요약
우리가 황량(荒涼)한 벌판에 홀로 누운 야곱과 함께하여 주심과 같이 오늘 이 시간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심을 믿고, 오늘 이곳 안아주심의 본당에서 오늘의 은혜를 회복(回復)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한다. 절대적인 주권이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깨달아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김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참 된 평강과 기쁨을 누리는 평생이 되며, 하나님께 나아갈 용기와 힘조차 없는 야곱에게 찾아오셔서 그를 만나주시고 복을 주시며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던 것처럼 연약한 나의 심령을 회복해 주시길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은혜의 진원지이자 약속의 기념비적인 벧엘에서 다시 한 번 거룩한 소명을 확인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우리에게 주어진 ‘2033-50 비전’을 완수(完遂)하는 개인과 가정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하자.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