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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04월 17일)
제목: "일어나 걸어라"
말씀: 사도행전 3:1-10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사회: 김대규 부목사님

설교자: 고영민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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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행전 3:1-10,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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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을 보면 나면서부터 걷게 된 이가 등장을 합니다. 지금 우리의 시대라 할지라도 장애인이 장애인(障礙人)에 대한 생각과 예우를 사회적 측면에서 배려한다고 해도 장애인들이 살아가기에 쉽지 않은 세상임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 당시 유대 사회라면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특히 아예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이라고 하면, 더욱 어려운 삶을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2절에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의 일상이 등장을 합니다.

 
* 사도행전 3:2,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이 사람을 사람들이 메고 성전 문 앞에 놓아주는 일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그 성전 문 앞에 앉아서 제사를 드리러 오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이 일상이었을 거예요.
 
사람들에게 아침에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아 성전 문 앞에 앉아서 구걸하다가 해질 때쯤에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집으로 돌아가는 일, 말입니다. 특별하게 무엇을 할 수 없었던 그에게는 이러한 삶이 매일매일 반복했을 것으로 우리가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라도 해야 먹고 살 것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한 평생을 살았을 그를 보고자 하면 마음 한 켠에 무겁고 먹먹한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만약에 우리 아이가 이렇게 한평생 살아가야 한다. 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삶은 너무나도 수동적입니다 구걸조차도 사람들에게 매어 나와야만 할 수 있는 사람 아닙니까?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만들어 가기는커녕 구걸로 인하여서 다른 사람들에게 받은 돈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면서 살아가는 그의 삶에는 능동적인 부분이 없습니다. 당시 사회상으로 봤을 때에는 결혼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녀를 기르는 기쁨도 아마 상상도 하지 않았을 거예요. 재산을 모으는 기쁨 어떤 일을 성취해서 얻는 기쁨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채 철저하게 수동적으로 주어졌던 삶을 살아갔던 큰 이변이 없는 한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아가야 했던 한 사람이 오늘 등장하게 되는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됐던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 모든 것의 시작이 무엇입니까?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에게 이 모든 것의 시작은 태어났을 때부터 걷지 못했던 그의 장애였습니다.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것이 원래 창조되었을 때 아름답게 살아갔을 바로 한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원흉(元兇)이죠. 그렇게 이것이 자신의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다 포기하고 지금까지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남아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도인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도 생명에 관한 것 영원에 속한 것을 전혀 꿈꾸지 못한 채 뭘 얻을 것 없을까? 뭘 더 얻을까? 하는 아주 현실적인 모습만 남아 있는 것 아닙니까? 그에게 남은 것은 그날그날 살아가야 할 현실의 문제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모습이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우리는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이 이 사람과는 우리가 다르다고 생각하기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 행동과 결정을 가지고 살아간다. 라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이 어그러지고, 어디서부터 어디서부턴가 무너져 있고, 어디서부턴가 잘못되어도 대부분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이처럼 말이죠. 이러한 삶이 맞는 것일까? 왜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하는 본질적인 질문들을 다 잃어버리고는 굉장히 수동적으로 오늘 아침을 시작하지 않습니까?
 
오늘 하루하루에 살아갈 현실의 문제만을 떠안은 채, 다른 사람 의해서 조직에 의해서 시스템에 의해서 혹은 여러 가지 상황에 떠밀려서 수동적으로 직장생활을 하거나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지 않습니까? 오직 오늘 하루의 삶에 문제만 매어서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이와 다른 것이 무엇이냐고 우리가 물을 수 있는 것이죠. 여러분들이 오늘 아침에 풀린 눈으로 회사에 출근하고 아무 생각 없이 주어졌던 일들을 해왔고, 그렇게 지금 죄송하지만 이 자리에 앉아 있다. 라면 수동적으로 말이죠. 이뿐입니까?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고 하자 무엇을 얻을까? 하여 그들을 바라보았던 것처럼 말이죠. 여러분들의 마음이 혹시 이 세상 가운데 어떻게 하면 무엇을 더 얻을까?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이 상황에 마음이 다 뺏겨있지는 않습니까? 시기를 또 차야 되고요. 지금은 이런 것들을 해야 된대 유행을 따라서 혹은 상황을 따라서 이렇게 해야 하고 저렇게 움직여서 이렇게 운영해야 된다더라. 하는 세상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이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현실의 문제 그러나 여러분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되는 이가 어느 날 구걸을 구걸이 너무 잘 돼서 그날은 풍족하게 보냈다고 해도 그에게 아무것도 변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 아셔야 됩니다. 우리의 현실의 문제가 해결되었음에도 변하는 것이 없을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 아셔야 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처럼 모든 것은 다 접어두고 세상사는 일에 함몰(陷沒)되어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청년부를 담당할 때 아이들을 심방(尋訪)에 보면 어떤 친구는 성공해야 하는 강박감에 사로잡혀 있어서 정말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는 친구가 있었어요. 성공해야 하고, 돈을 많이 버는 취급을 가져야 하는 것으로 대화가 가득할 때 여러분 교육자로서 어떤 마음이 드시는지 아십니까? 막 숨이 막혀옵니다. 어떤 말을 해줘야 하지? 온통 친구의 머릿속에는 성공과 좋은 직장과 어떻게 하면 현실의 문제를 타개할 수 있을까? 이 아이의 기본적인 태도(態度)가 바로 누구를 보아도 어떤 일을 마주쳐도 어떤 것을 더 얻을 수 있을까? 어떻게 더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그런 시선만 가지고 있더라는 겁니다. 완전히 여기에 함몰된 것이죠. 인생이 그게 전부가 아니고 더 가치 있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 라고 막 소리 지르고 싶은 마음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던 기억이 납니다. 여러분 혹시 여러분 중에 이런 현실에 함몰되어 있는 분이 계십니까? 예배와 예배에 와 계셔도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는 분이 혹시 계십니까? 오늘 근심과 염려로 주저앉아 계신 분이 혹시 계십니까? 그래서 현실이 신앙을 뒤덮어버려서 깊은 수렁에 빠지신 분이 계십니까? 이 깊은 수령에서 건져주시는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이 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현실의 문제 때문에 영원한 것을 잃지 않는 여러분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말씀을 좀 더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더 살펴보면 성전에 들어가려던 베드로와 요한이 그를 주목하여서 ‘우리를 보라’ 이렇게 말합니다. 드디어 베드로와 요한이 말하기 시작하니까 안심이 되죠. 구걸하던 그에게 베드로가 군더더기 없이 선포를 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내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 버려라 베드로와 요한은 그가 재물을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말했겠죠. 그러나 그가 정말 필요한 것을 바로 말합니다. 그가 이제는 포기했던 것, 그가 이제는 단념했던 것, 그래서 오늘 아침에도 사람들이 메고 올 수밖에 없었으나 사실은 메어 오면서도 마음속으로 진짜 간절히 원했던 것 어떤 말이요. ‘일어나 걸으라.’예요. 이제 어떻게 됩니까? 7절을 보니까,
 
*사도행전 3:7,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손목을 잡고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었다라고 말합니다. 8절에서는 뭐라고 말합니까?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다라고 말합니다. 아 이런 본문 보면 너무 마음이 좋죠. 네 여러분 혹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방글라데시에서 잠깐 사역을 했을 때 중간에 선교사님 사역을 도와준 적이 있습니다. 그때 뒀던 마을에 태어나면서부터 못 걸었던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 상체는 비장애인과 동일하게 보일지 모르겠어요. 그냥 다를 게 없었어요. 그러나 다리가 정말로 앙상한 거 있죠. 정말 뼈에 가죽만 살짝 붙어있는 앙상한 다리만 진짜 다리가 발가락도 뼈가 보 1만큼 앙상하게 보입니다. 어찌 보면 다리가 덜 자란 것처럼 짧아 보이기도 했던 것 같아요. 이런 모습이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오늘 말씀은 뭐라고 합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라고 말하자마자 발과 발목에 힘을 얻었다. 로 말합니다. 선포하자마자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해가 되십니까? 전 사실 그때 방글라데시에서 봤던 나면서부터 못 걸었다는 그분의 다리와 외에 여러 가지 조건들을 생각하노라면 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지금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은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뼈만 앙상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선포되었을 때, 걸었다는 말은 지금 걸을 수 있을 만큼 말씀 선포되자마자 근육이 붙어나가고 있고, 근육 가운데 걸을 수 있을 만큼 일반인만큼 여러분의 허벅지 만큼이요. 근육이 막 붓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작았거나 뒤틀린 뼈가 자라기 시작하고 바르게 맞춰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그뿐입니까? 갑자기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었던 그래서 균형(均衡) 감각(感覺)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던 사람이 다리로 걸었을 뿐 아니라 뭐까지 한다고요. 네 뛰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지금 등장하는 사건은 대단함이고 놀라움 자체예요. 눈앞에서 이 상황이 벌어졌다고 생각해보세요. 무릎 수술만 해도 재활하고 다시 뛰는데 몇 달이 걸리는 거 아시죠? 네, 이걸 생각하면 이것은 마치 아이가 걸음마를 하지도 않고도 갑자기 균형 감각을 얻은 것과 동일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시는 게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명령의 회복은 완전한 회복(回復)을 의미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상상을 해 보십시오.
 
“일어나 걸으라.” 선포했지, 내가 일어나 뛰라고 하지 않았다라고 말해서 뛰지는 못하고 이렇게 막 엉거주춤 이렇게 해왔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막 넘어질 것 같고, 그래도 이분은 진짜로 감사했을 거예요. 왜냐하면, 처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봤잖아요. 처음으로 한 발을 떼 봤잖아요.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회복은 지금 그런 상황 지금 상황보다 좀 더 나아진 회복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회복은 완전한 회복입니다. 모자람이 없는 회복인 것입니다. 지금 이 사람은 하나님의 완전한 회복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큰 은혜 아닙니까? 지금 저희 교회에도 사랑부가 있지 않습니까? 제가 신혼 때 화곡동에서 시작했습니다. 좋은 동네예요.
 
화곡동에는 사랑부로 유명한 교회가 있는데, 꼭 제가 주일에 사역하는 시간에 아마 교회 사랑부 예배 시간이었던 것 같애요. 그래서 출근을 하고자 하면은 이제 거의 매주 교회 앞을 지나갈 때마다 부모님이랑 사랑부 친구들이 여러 명이 교회에 이렇게 들어가는 모습을 보곤 했습니다. 하루는 아내가 당시 이제 주일에 교회를 가는 사랑부 학생들을 보면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보, 예수님이 다시 오시고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면 친구들도 완전히 회복되겠지?” 저는 깜짝 놀랐어요. 내 아내가 어 제 아내는 신학을 하지 않았습니다. 좀 놀랬어요. 그래서 제가 ‘물론이지’ 그랬더니, 아내가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아마 저기 함께 가는 부모님은 누구보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걸 기다릴 거야.’ 저는 매일같이 길을 매주 길을 지날 때마다 늘 동일하게 봤는데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이었어요. 그날에 예수님이 오시는 그날에 저분들도 창조 때에 기뻐하셨던 온전한 모습으로 회복이 일어나겠구나! 하면서 막 그날이 너무 기다렸던 기억이 납니다. 여러분, 그 교회 사랑부 부모님들이 그렇게 소망하고 기다리는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완성할 하나님 나라에서나 누릴 완전한 회복을 지금 여기 있는 그가 경험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그에게 무슨 치유 받을 조건이 있었습니까? 그가 보여준 특별한 믿음이 있었습니까? 아니에요. 오히려 그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뭘 얻을 게 없을까? 하여서 그들을 갈구하는 눈길만 바라보았던 사람 아닙니까? 현실에만 매어 있던 그의 삶에 성령의 강력한 능력에 폭탄(爆彈)이 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그의 삶을 완벽하게 회복시키고 계십니다. 그의 삶이 어그러졌던 근본적인 지점부터 완전하게 회복하고 계십니다.
 
단순하게 돈 몇 푼을 더 받아서 잠시나마 편하게 사는 것인 그런 임시적인 회복이 아니라, 그가 이렇게 이렇게밖에 살 수 없었던 근본적인 지점 나면에서부터 못 걷게 되었던 지점을 완전하게 회복시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회복시키실 때, 여러분들의 삶에 근본적인 부분부터 완전하게 회복시키시는 분인 줄 믿습니다. 어떨 때에는 우리가 이 부분만큼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들이라서 그게 남편이 될 수도 있죠. 그게 아이들이 될지도 모르겠어요. 우리 아이들만큼은 변화하지 않을 것 같아요. 저희 아버지만큼은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요. 그래서 이 부분만큼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상상하지도 않고, 기도하지도 않고,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에 다가오셔서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한 가지도 성령의 강한 능력으로 회복시키실 줄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도 현실의 깊은 수렁에 빠져 있어서 뭘 보아도 무엇을 얻을까? 로만 보이고 어떻게 더 벌어볼까? 로만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이 팍팍하게 살고 있는 우리라 할지라도, 주님께서 우리의 삶에 구석구석 모든 부분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완전하게 회복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할 수 있는 그가 들어간 곳이 어디입니까?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었던 성전에 들어갑니다. 그동안 성전(聖殿)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이라는 미(美)문(門) 앞에서 아이러니하게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수년을 보냈을 그가 말이죠. 장애인으로서 성전에 들어가는 멀쩡한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불허했을 그가 드디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당당하게 하나님의 품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전을 뛰어 들어가면서 그가 한 행동이 무엇입니까? 8절을 보면,
 
*사도행전 3:8,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하나님을 찬성했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재미있지 않습니까? 제자들은 지금 누구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했죠. 맞아요. 나사르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누구를 찬성하고 있죠. 하나님을 찬성하고 있어요. 왜 그렇습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했을 때 이러한 일이 너무나 능력이 넘쳐서 너무나 완전해서 하나님이 아니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찬성했던 것 아닙니까 특히 누구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했겠습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선포한 이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로 메시아였구나! 그리스도였구나! 그래서 그분이 참 구원자 맞구나! 하나님이 보내신 자구나! 거부할 수가 있었겠어요? 예수란 그분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보내신 구원자이시구나! 라는 걸 깨달았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것을 알 수 있습니까? 뒤에 서서 걸으며 뛰어 서서 걸으며 어떻게 들어갔다고 말하죠. 네, 성전에 아까 말했듯이 성전에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을 받고 구원을 받은 자라는 것을 지금 성경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11절부터, 베드로가 이 일이 너희가 죽인 예수로 인하여 일어난 일이라고 증언(證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회복은 우리의 삶에 영역(領域)만 회복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 완전한 우리의 삶에 영역만 회복할 회복을 뛰어넘어서 우리의 영을 완전하게 회복시키십니다. 성령의 능력의 폭탄이 그의 인생 가운데 떨어질 때 현실에만 얽매여 있던 저주(詛呪)의 끈이 끊어지고 삶이 완전하게 회복되는 것뿐만 아니라 이제는 생명에 관한 것, 영원한 것, 여기에 눈이 뜨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동안에는 무엇을 얻을까?
 
머릿속에 온통 그것만 있었던 사람 아닙니까? 오늘은 어떻게 하루를 보내야 되나, 오늘 저녁은 어떻게 해결하지? 이런 생각으로 가득 찼기에 관심도 없었던 것 필요도 없었던 것이 이제 눈이 뜨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돈보다 더 소중한 것 더 값어치 있는 것 돈으로 바꿀 수 없는 영원한 것에 심령의 눈이 뜨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말씀을 묵상할 때 지금 이 사람이 성전에 들어가면서 드리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 그의 인생에 처음일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을 해봤어요. 원망(怨望)과 무기력(無氣力)함으로 살아왔던 그의 인생에서 말이죠.
 
육체적인 완전한 회복을 경험했을 뿐만 아니라, 영적(靈的)으로도 완전하게 회복되어서 하나님을 바로 온전하게 찬양할 수 있는 자가 된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에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회복시키실 때, 여러분들의 삶의 문제들만 회복시키는 것에 끝나지 않고, 여러분들이 다시 온 전(穩全 한 찬양을 드릴 수 있도록 온전한 예배(禮拜)와 경배(敬拜)를 드릴 수 있도록 여러분들의 심령(心靈)도 완전히 회복시키실 줄 믿습니다. 세상의 욕심(慾心)들로 가려져 있던 여러분들의 눈을 다시 생명에 관한 것 영원한 것에 눈뜨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와 은혜(恩惠)의 은혜를 바라보는 여러분으로 회복시키실 줄 믿습니다. 이 밤에 사랑의 교회 성도님들의 삶의 영역뿐 아니라 영적인 영역에 완전한 회복을 경험(經驗)하시기를 소망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남은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과 같이 그날의 얻어진 재물(財物)로 기쁨을 누리며 그것으로 만족(滿足)하며 살아갔을 자들 아닙니까? 여러분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일을 다행히도 메어다가 줄 사람이 등장하죠?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이 비참(悲慘)한 인생들끼리 아무리 자기네들끼리 돕고 살아도 비참함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도와줘도 평생 데리고 나와서 성전 문 앞에 내어준다. 할지라도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은 똑같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에게 진정(眞定)으로 필요한 것은 사람의 도움도 아니오. 하루를 살아갈 재물도 아니오. 바로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하고 가장 필요한 것이 사람의 도움도 아니고 재물도 아닙니다. 바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인 줄 믿습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런 하나님의 완전한 회복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영적인 생채기가 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상처들이 곪아서 무엇을 해야 할지조차 잃어버리신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디선가부터 잘못된 것인지 몰라서 그저 눈물로만 기도하고 계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삶을 능력 있게 회복시키실 줄 믿습니다. 망가지고 무너진 여러분들의 삶을 좀 더 나은 정도의 회복이 아니라, 원래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려고 했던 완전한 축복으로 회복시키실 줄 믿습니다. 오늘 이 밤에 이런 완전한 회복이 회복을 주실 하나님께 믿음으로 나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삶에 회복뿐 아니라 여러분들을 영적인 깊은 수렁에서 건지셔서 더 다시 우리를 반석위에 세우시고, 기쁨을 회복시키시며 우리의 입술에 찬송을 담아주실 주님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믿음으로 나아갈 때,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되었던 이가 경험했던 완전한 회복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 이름으로 여러분과 여러분들의 가정 가운데 임할 줄 믿습니다.
 
♣요약
인생의 한계 앞에서 우리의 능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며, 진정한 기도로 올려드리면, 현실의 난제를 초월한 새 차원의 인생으로 비상하게 하심을 확신해야 한다. 한 생명에게 ‘일어나 걸어라’라고 선포하셔서 당장의 기적을 보이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말씀의 능력으로 삶을 살아가면 완전한 회복을 주실 것이다. 우리 인생 가운데 능력으로 찾아와 주시는 주님께서 인생의 한계 앞에 무력하게 무너져 있는 우리의 인생 가운데 은혜를 베풀어 주실 줄 믿어야 한다. 성령의 역사를 베풀어 주실 것을 소망하고, 완전한 회복과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완전한 회복을 경험하게 해 주실 것을 확신해야 한다. 우리의 심령이 회복되게 하심을 소원하며, 언제나 기쁨과 찬송이 되어,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일어나 걸어가면 주님은 항상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도우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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