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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03월 27일) 제목: "서사란 원래 불친절한 법" 말씀: 마가복음 15:21-25 찬양인도: 쉐키나(유재원 부목사님) 설교자: 강건우 부목사님 ---- *마가복음 15:21-25, 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22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23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24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 새 누가 어느 것을 가질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25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 ▶많은 사람들이 많은 번화가(繁華街)에 가면 항상 우리의 안부를 물어보시는 분이 계세요. “안녕하세요. 또는 실례합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불쑥 말을 건네면서 우리 손에 슬며시 이렇게 전단지를 이렇게 밀어주시는 분이 항상 번화가이라면 항상 있습니다. 그분들은 늘 우리의 건강을 걱정 피부를 걱정하고 끼니를 때우기에 뭘 먹으면 좋은지 항상 기꺼이 추천해 주십니다. 저는 이제 주말이 교회와 함께 궤적을 이렇게 같이 가다 보니까 번화가에 나갈 일이 많지 않은데 그래도 주로 점심에 여기 대로를 이렇게 한번 건너가 보면 교회 길 건너요 이분들하고 마주치는데요. 신기한 건 꼭 저에게 둘 중 하나를 주세요. 피트니스 운동이든지, 점심부패든지, 둘 다 필요해서 주는 것이라고 적극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만 분명한 거는 주실 때마다 한 0.1초 정도 고민합니다. 받을까? 말까? 여러분도 그런 경우 있으시죠. 그래서 가끔은 냉정하게 좀 지나칠 때도 있는데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이걸 받을까? 말까? 고민을 했어도 한참을 했어야 할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의 이름은 구레네 사람 시몬입니다. 가볍게 가벼운 전단지 한 장 받는 것도 잠깐 고민하는 것이 우리 인생인데,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체력적인 한계에 부딪치셨다고 로마 병사들이 판단을 했던지 마침 이제 가시는 그 지점부터가 아마 학자들은 오르막길이었을 것이라고 판단하는데 그게 오르막길이어서 그랬을지, 어쨌든 아무튼 갑작스러운 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시몬은 지금 대신 짊어지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여러분 이게 얼마나 불친절한 전개인지 모릅니다. 길 가던 사람 복잡하다가 또는 성경 표현대로 보면 억지로 십자가 찐 거는 둘째 치고, 그거는 둘째 치고요. 그러면 앞뒤 좌우 분량이라도 좀 이렇게 넉넉히 줘야 되는데 꼴랑 한 줄입니다. *마가복음 15:21, 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읽는 우리가 우리도 이렇게 보면 이렇게 중요한 순간을 아주 짧게 다루는 것이 우리가 읽는 면에 있어서도 불친절한데, 만약에 제가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면 이 기록만 봐서는 너무너무 불친절하다고 느낄 것 같아요. 시몬의 등장해서 이렇게 역사적인 등장해서 이 분량이나 또 이렇게 살 살펴주는 내용을 보면 상당히 불친절하다고 밖에 그래서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이 불친절하다는 서사를 어떻게 만드냐면 개연성을 여기다 갖다 붙여요. 어떻게 붙이냐면 이 사람이 여기 등장했어야 될 이유, 꼭 등장해야 될 이유를 찾습니다. 그것을 어디서 찾냐면 방금 읽으신 21절 상반부에 보면 전반부에 보면 이렇게 돼 있죠.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구레네 사람 시몬을 누구의 아버지라고 말합니까? 알렉산더와 루퍼의 아버지라고 기록을 합니다. 말은 마가복음을 읽고 있는 이 원독 자가 당시 알렉산더 루퍼 이렇게 말하면 알아들었다는 뜻이겠죠. 실제로 로마서에서도 그렇게 기록을 하고 있고요. 우리 찾지는 않겠지만, 이들이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꽤나 유명한 또는 알만한 인물이었다. 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 익숙한 결론에 도달하는 거예요. 어떤 결론이냐면 억지로 십자가를 치게 된 구레네 사람 시몬이 복을 받았다. 어떤 복을 받았을까요? 후손의 복을 받았다. 믿는 사람들이 당시에 믿는 사람들이 알렉산드 어떤 루퍼 이렇게 이름만 대면 다 알 정도로 그의 자녀의 때에 축복을 받았다. 이렇게 이어가 개연성을 거기다 이제 넣는 거죠. 이 불친절한 서사를 여러분 맞습니다. 그것도 맞습니다. 실제로 그렇다고 마가복음이 이름을 거론하고 있는 거니까, 그것도 맞습니다. 특별히 마가복음이 쓰여 질 당시에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박해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그 억지로지는 것 같은 이 고난과 고통이 박해를 이 억지로지는 십자가이지만, 길 가운데 하나님이 반드시 값을 쳐주신다. 보상해 주신다. 라는 개념으로서도 큰 위로와 응원을 실제적으로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면 좀 아쉬운 점이 있다. 라는 거예요. 그게 뭐냐면 시몬의 십자가가 오늘 이렇게 지고 난 다음에 자녀들에 대해 결실을 거둔다. 라면 이 시간이 상당히 있었을 것이거든요. 대략 못 잡아도 20년, 30년 이렇게 사이에 시간이 필요했을 텐데, 이 30년이라는 이 시간차의 등고선을 시몬으로부터 자녀들까지 빨리 이어버리는 바람에 어디가 비냐면, 사이에 계속되었을 현재가 비입니다. 거의 다 틈이 생긴다. 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시몬의 십자가와 자녀의 일은 거리가 너무 멀어요. 시간차가 있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시간이 다 지나지 않는 한 매일을 살아가게 될 그 중간 중간에 현재는 계속 불친절한 서사로밖에 안 남는 거죠. 그때 왜 나한테 그걸 지게 만들었나? 최근 한 청년에게 제가 들은 다소 이어지는 말이 있었는데, 그게 뭐냐면 이렇게 얘기했어요. 저한테 “하나님 저한테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어요.” 하나님 저한테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자기가 마주한 이 신앙의 현재가 자기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 라는 포로였는데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 모두 구원받았죠? 이 세상 시름은 그래서 순간이고, 하나님 나라의 영혼과 영생을 약속받은 것이 우리지요? 그렇죠. 그럼에도 왜 우리는 늘 현재에서 고전합니까? 오늘이라고 하는 이 서사의 불친절한 이 지점들을 너무 내일로 몰아붙여서 그렇습니다. 서사의 등고선을요 지금 구원받은 인생과 나중에 천국 갈 영원한 입성에 너무 빨리 이어버려서 속결로 이어버려서 서사의 중반부이자 중요한 연결고리인 현재를 사는 힘이 약화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 불친절한 서사를 너무 알렉산드와 루퍼 이야기로 빨리 가져다 붙이지 말고, 오늘 이야기를 조금 다시 살펴보자. 라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우리의 서사를 좀 힘 있게 써내려갈 그런 응원을 받자.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21절부터 제가 다시 한 번 출발을 해볼게요. 읽진 않겠습니다. 21절 눈으로 한번 따라 읽으시면서 제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시몬의 이야기에서 자녀 이야기는 일단 빼겠습니다. 그럼 21절에서 알렉산드와 루프 이야기는 빠지겠죠? 빼버렸으니까 사실 21절에서는 억지로지고 간다는 것 말고는 별로 건질 게 없어요. 그러면 이야기에 이렇게 주목되어 있는 21절에 한정돼 있는 시설을 앞뒤로 좀 확장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보면 21절이 이 자체로도 참 불친절한 서사라는 것을 알 수가 있어요. 무슨 말이냐면 시몬이 그냥 가다가 갑자기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됐잖아요? 굉장히 불친절한 서사를 그의 인생에 순간적으로 경험하게 되는데 구레네 사람 시몬만 불친절한 서사를 경험하는 게 아니고 21절 자체가 마가복음 이 전반 맥락에서 보면 불친절한 서사예요. 즉 어울리지 않는 서사입니다. 갑자기 끼어드는 서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설명을 드려볼게요. 우리가 1절부터 25절까지 본문을 읽었는데 사이 지금 처음 읽은 21절을 그냥 여러분 삭제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삭제한다 그러면 위에 있는 20절 밑에 있는 22절이 남는 건데 20절 22절을 그대로 한번 읽어보면 전혀 문제가 없어요. 여러분 한번 화면 보시면서 같이 한번 그게 어떤 건지 읽어보세요. 20절 22절 같이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가복음 15:20,22, 20 희롱을 다 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22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오히려 없는 게 더 나은,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 구절이 즉 21절이 왜 삽입됐는가? 맥락에 별로 어울리지도 않고 갑자기 한 절만 딸랑 튀어나오는 이 구절이 마가의 입장에서는 어떤 의도가 있지 않고서야 이 맥락상 정황상 굳이 들어갈 이유가 없겠죠. 그럼 인제 의도가 뭐냐 이걸 우리가 살펴봐야 되는데 이왕 본문이 마가복음으로 이렇게 여기 21절에 끼어 들어갔으니까, 어디로 끼어 들어갔는지 살펴보면 여러분 21절, 22절, 23절 이렇게 눈으로 훑어가 보시면 21절은 이제 구레네 사람 시몬 얘기니까 빼고요. 22절에 보면 거기에 주요 인물은 예수님이에요. 그죠? 그리고 23절에 보면 거기도 예수님인 것 같은데, 사실 22절 23절에 등장은 안 하지만 실존하는 인물인데 그게 뭐냐면 22절에 예수님을 끌고 가는 존재고 23절에 봐도 몰 약을 탄 포도주를 주는 존재입니다. 그들은 24절에서 무슨 일을 벌이죠. 십자가에 못 받고 예수님의 옷을 나누 제비 뽑아 나눕니다. 이들이 누굴까요? 알렉산드와 루퍼라고 얘기하면 큰일 납니다. 누굴까요? 로마의 병사들입니다. 이 병사들을 주목하려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24절 기준으로 보면 이들이 뭘 하고 있죠. 제비 뽑아서 예수님의 옷을 나누고 있습니다. 누가 시켜서 했나요?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걸 좀 정리하면 지금 이들은 예수님의 것을 자발적으로 취하고 있습니다. 다시요. 로마 병사들은 뭐하고 있다고요? 예수님의 것을 자발적 능동적으로 취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몫으로 되어있는 것을 자신들이 자발적으로 취해가고 있습니다. 가져오고 있습니다. 이 병사들과 대비된 존재가 지금 우리가 갑자기 삽입시켰던 21절에 구레네 사람 시몬입니다. 시몬은 억지로 자발적이 아니구요. 억지로 예수님의 것을 떠맡습니다. 병사들은 어떻게 한다고요. 자발적으로 예수님의 것을 가져옵니다. 이 대비를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의 장면 즉 시몬이 등장하는 장면이 굉장히 중요하게 삽입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앞에서 시몬을 너무 자녀 이야기 몰고 가지 말자고 너무 먼 지점 가지 말고 여기 안에서 해결해 보자는 건데 마가는 결국 이 두 존재 즉 시몬과로 병사들을 대비시키면서 마가복음 종반부에 걸 맞는 아주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중요한 질문은 뭐냐면 자 로마의 군사들이 자발적으로 예수님의 것을 나누어 가졌다. 누가요? 로마의 병사 로마의 군사들이 자발적으로 예수님의 것을 나누어 가졌다 자 그러면 주님의 군사는 어딨나? 치욕을 주고 싶어서 주님의 옷을 다 벗기고, 그의 것을 앗아가고, 가져가는 병사들 대신에 주님의 치욕을 함께 하고 싶어서 주님의 수고를 덜어드리고 싶어서 로마 군사들 못지않게 자발적으로 주님의 것을 좀 나에게 주십시오. 나에게 덜어주십시오. 의욕적으로 말하고 있는 말에 써야 될 존재들은 지금 어디가 있는가? 시몬을 봐라, 얘 억지로 지금지고 간다. 왜 지고 가는지도 잘 모르겠고, 억지로지고 간다. 그런데 이렇게 십자가를 나눠질 거라면 예수님의 몫으로 이렇게 짊어진 이 십자가를 나눠줄 거라면 이렇게 억지로 질 게 아니지? 뭣도 모르는 애 갑자기 잡아다가 아무나 잡아다가 이렇게 짊어질 게 아니고, 십자가를 지라고 당부했던 예수님의 명령을 가까이에서 들었던 누군가가 정말 없는 건가 예수님 곁을 지금 지키고 이건 내가 지겠노라고 응당 손을 들어야 될 사람이 지금 없는 건가 지금 질문을 하고 있는 거 여러분이 숱한 질문 속에 반복된 질문 속에 등장해야 될 사람이 누군지 아시죠. 누굴까요? 제자들이에요. 제자들 지금 마가는 그래서 시모온의 불친절한 서사를 통해서 원래 자리에 있었어야 될 제자들 그런데 공석인 제자들을 지금 등판시키고 있는 겁니다. 시몬의 억울함에 이렇게 집중하느라 놓쳐버렸던 이 불친절한 예수님께 이 서사에 너무나 불친절한 제자들이 지금 발각되는 장면이라는 곳입니다. 시몬이 여기 등장하는 이유입니다. 마가복은 8장 34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볼까요? *마가복은 8:34,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러분 시몬이 지고 있는 십자가는 진작부터 예수님이 진작부터 누가 지라고 말해줬습니까? 제자들이 지고 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다가 제자들은 지금 혼비백산(魂飛魄散) 다 사라지고 어찌된 일로 이 길을 예수님 혼자 그것도 생판 그동안 없어서 안 보였던 시몬이라는 사람이 등장해서 사람에게 지워줘야 할 정도로 예수님은 지금 기진맥진(氣盡脈盡)하여서 홀로 길을 오르고 계시는데, 여기 보이세요. 오늘 마가복음 8장 34절에 이 명령의 가장 첫 번째 실행 팀이 됐었어야 할 이 제자들이 지금 어디가고 어디 가고 없습니까? 그 현재적 질문이요. 그러니까 시몬을 자녀의 이야기로 멀리 떨어뜨리기 전에 지금 이 장면에서 물었어야 될 현재적 질문은 어디로 가버리고, 우리가 자꾸 시몬 이야기를 더 먼 쪽으로 자꾸 붙이냐 이러는 것입니다. 그게 틀렸다는 얘기가 아니구요. 그도 그렇게 여러분 시몬이 알렉산드와 루포의 아주 좋은 성장 스토리에 이르려면 오늘 여기서 마가복음 15장 21절에서 십자가 한 번졌다고 그게 그냥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겁니까? 내일의 구레네 사람 시몬의 내일의 현재에서 그가 자기 십자가를 치는 제자 도에 들어서지를 않았다면 제자의 삶을 살아내는 치열함이 없었다면 자기 자리를 잘 지키는 열심이 없었다면, 그날을 볼 수 있었겠습니까? 따라서 시몬은요, 지금 제자들의 자리에 대신 위치하고 있고, 이건 그냥 재미삼아 들으시면 제자들의 수장이었다고 하는 시몬 베드로와 묘하게도 이름이 같으면서, 그렇게 제자들의 공석을 채우고 있고, 공석인 제자들의 현주소를 고발하는 데 쓰임 받고 있습니다. 도망가서 지금 흔적도 보이지 않고, 이 중요한 순간에 자발적으로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제자들을 발각시키는 한 사람으로 오늘 여기 서술되고 있다.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정도는 되어야 좀 끼어들 만하지 않겠습니까? 이 불친절한 서사가 좀 그러니까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마더복음에 맥락 없이 이렇게 이 장면이 한 칸으로 쫙 끼어드는 것이구나!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이 어떤 서사 가운데 계시는지는 잘 모릅니다. 늘 강단에서 설교를 하면 항상 가장 힘든 게 청중이 어떤 마음이신지 잘 모르겠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너무 이렇게 또 그런 것인데, 여러분 그러나 서사가 어떤 것이든지 간에 또는 여러분들의 서사가 어떻게 불친절한 것이든지 간에, 하나님 앞에 해석되지 않을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불친절한 이 서사를 해석할 힘을 갖추고 있느냐, 그게 관건이지 불친절한 서사 자체가 문제가 될 리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시공간(視空間)을 넘어서 존재하는 것이 하나님이고 사실 하나님은 시공간을 초월해서 오히려 시공간을 창조하신 분 아닙니까? 그런데 이 시공간 안에 살아가면서 아등바등 대고 있는 우리들에게 자기를 알리는 접점을 마련한다고 하면 입장에서는 그게 항상 불친절한 서사일 수밖에 없어요. 성경 전반을 걸쳐 한번 기억을 더듬어 보세요. 아주 대표적인 예로 예수님이 수태고지(受胎告知)를 받았다. 마리아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되죠? 이 저 출산 시대에 뭐 이런 거 아니잖아요. 굉장히 불친절한 서사가 갑자기 다가오는 거예요. 성경 전반에 걸쳐서 항상 하나님이 그의 어떤 인생에 뛰어들어 개입하실 때는 사람이 자기 이 서사가 굉장히 불친절하고 여깁니다. 자기의 이 세계관 안에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거든요. 그걸 수용하는 데 시간이 걸리고 수용하는 과정을 우리는 믿음이라고 부르게 되는데, 맥락에 그러나 항상 우리는 불친절해 보이지만 맥락에 항상 나 같은 이 피조 세계 안에 갇혀있는 존재를 굳이 만나려고 하시는, 나를 통해 일하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것이 맥락 안에 항상 담겨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의 불친절한 서사들을 살펴보면 거기에 항상 나와 나의 사명과 그리고 내가 거한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과 서사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오늘도 그래서 불친절한 여러분들의 각자의 서사 속에서 오늘 하나님이 무슨 이야기를 좀 하고 싶어 하는 건지, 나에게 좀 어떤 이야기와 어떤 무기를 들려주고 싶은 건지, 나는 어떤 역할이고 사명인지를 좀 알고자 찾고자 기도하러 나오신 여러분들에게 하나 오늘 기도 가운데에 또는 말씀 가운데 찬양 가운데에 말씀하여 주시고, 내가 감사히 지고 갈 십자가가 또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시는 귀한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는 고난 주간입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과 구원, 뭐 우리를 향한 사랑, 이런 것들을 많이 우리가 머릿속에 벌써 연상될 텐데 그러나 그것만 묵상한다면, 전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오늘 우리가 오늘을 살아갈 힘이 약화된다고 생각해요. 방금 나열한 것들은 사실 예수님의 수준에서 예수님이 치르시는 일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우리의 구원 우리 어떤 죄, 삶 충분히 지금 묵상하고, 또 우리 안에서 이걸 붙들고 씨름해야 되겠지만, 사실은요, 그렇게 너무 아까 알렉산드 루퍼처럼 멀리 이어버리면, 사이에서 우리가 뭘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제가 오늘 뭐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늘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불친절한 서사로 너무 많이 느껴집니다. 오늘 어떻게 해야 되는지는 잘 모르겠으니까, 그렇다면 구원사역을 단번에 다 이루어놓고도 왜 예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고 가라고 했을까?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라고 했을까?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는 희생과 구속이었죠. 이전의 율법으로 옮겨보자면 그것은 하나의 제사였고, 제사가 들여지는 공간은 성막이고 성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자신이 완벽한 제물이면서 자기 자신이요. 그러면서도 우리에게 너희들의 십자가를 들고 가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뭔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그 철저한 제약을 깨닫고 날마다 회심하라는 그런 면모도 있지만 더 넘어서는 니가 거한 그곳에서 그런 제사를 드리는 그런 제물을 올려드리는 그런 성막 삼고 성전 삼는 그래서 이 온 우주가 나에게 예배하는 온 전 우주적 예배 처소 삼아주는 꿈이 나한테 있는데, 내가 시작한 일을 너도 너의 지경 안에서 너의 영역 안에서 잘 감당해 주라. 하나님 오늘 그렇게 우리에게 부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자신의 십자가도 지지만 자신의 십자가도 지고 다 끝냈지만 우리에게도 여전히 십자가를 맡겨서 그 맥락 있는 부탁을 하고 계시다.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로마를 힘으로 못 눌러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게 아닙니다. 오히려 로마를 힘으로 누르는 것, 당시 모든 정부를 자신이 갖고 있는 권세로 누르는 것이 더 친절한 서사고 있는 이들에게는요. 맥락 있는 역사가 맞습니다. 그렇게 안 하세요.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군사력으로 오는 게 아니기 때문이에요.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나옵니까? 하나님이 임재 하셔야 오는 겁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어떻게 되느냐? 죄가 없는 땅에 임재 하는 것이요. 또 하나님께 예배하는 땅에 임재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기뻐 올려드리는 제사의 향기를 맡으시면서 흠향(歆饗)하시면서 공간에 거하시는 것이잖아요. 그러니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의 제물이 되셔서 성전성막의 영역을 다 찢으시고 그곳에 하나님이 임재하신 곳 그 거룩한 땅으로 바꾸시면서 죄악 된 땅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길 원하셔서 자기 자신이 희생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 신앙을 받아 가진 우리들에게도 너희들도 너희들의 공간의 하나님의 인재를 초청하는 귀한 축복의 통로 생명의 통로가 되라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십자가를 힘써 줘주라. 라고 말한 것으로 저는 이해합니다. 단순히 늘 우리의 죄악에 이렇게 내향적으로 눌려가지고 늘 우리는 죽일 죄인이지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물론 그것도 생각하지만 오늘 그곳에서 하나님 제가 제물 되어서 누군가를 하나님 만나게 하는 귀한 성전과 성막 담임 목사님 말씀대로 제사장 나라 역할을 하는 내가 되겠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는 바로 사명의 일환인 겁니다. 오늘 본문으로 따지면 시몬이 억지로 지고 가던 자리가 원래 누가 있어야 된다구요? 제자들이 있어야 될 자린데, 너는 지금 너는 지금 이야기를 읽고 알고 있는 너는 지금, 과연 아무것도 모르고 억지로 쥐고 가는 사람이냐? 아니면 이 모든 맥락에 관심이 있어서 이야기가 더 이상 불친절한 서사가 아니라, 나와 함께하는 내가 준 사명에 아주 맥락 있는 서사로 받아 가지는 사람이냐 알렉산더와 루퍼처럼 30년 후에 이루어질 그냥 보상으로 이 오늘 십자가를 치부하는 사람이냐, 아니면 오늘 기꺼이 지고 가는 전심으로 자발적으로 주님 곁에서 십자가를 좀 치고 싶은 바로 제자더냐?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도리어 묻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영 가족 여러분 원래 서사란, 오늘 제가 제목 정한 대로 서사란 원래 불친절한 법입니다. 중요한 것은 서사로 깊이 파고들었느냐, 그래서 그게 내 길이길이 남길 이야기가 되었느냐, 예수님과의 진한 스토리가 되었느냐, 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억지로 십자가 친 한 번으로 불친절한 서사로 구레네 사람 시몬이 뒤에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듯이, 오늘 여러분들의 불친절한 서사 곳곳에, 뭐 여러분의 미래나 자녀의 문제나 풀리지 않는 기도의 제목이나 하여튼 장벽이고, 허들 같은 여러분 모든 서사의 불친절한 지점에 불친절한 서사 그대로 두지 마시고, 오늘 거기서 하나님께서 나와 무슨 이야기를 쓰고 싶어 하시는 건지, 나를 통해 세상에 무슨 질문을 던지고 나를 통해 교회에 믿는 이들에게 믿지 않는 일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싶어 하는가? 하는 것으로 여러분의 생애를 하나님 앞에 온전히 올려드리시는 귀한 십자가 지고 가는 제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여러분 그래야 우리의 사는 날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살다가 능력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사는 날 어떻게 능력이 있습니까? 현재를 해석하는 힘, 현재에 주시는 십자가를 기꺼이 칠 수 있는 마음, 고난 주간을 지나 부활절도 특새로 이어지는 이 좋은 기도하기 좋은 이 시절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여러 불친절한 서사들을 각자의 불친절한 서사들을 기도 가운데에 해석할 힘주시고, 그래서 단 한 분도 억지로지는 십자가 없게 하시고, 나 모를, 너도 나도 이거 왜 지는지 모르겠다. 나도 일단지고 나가자, 가다 보면 뭐 있겠지, 너무 아쉬워요.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그러라고 주신 생명의 고귀한 시간이 아닙니다. 우리의 희생과 헌신 속에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기뻐 받으시고 특별히 그의 희생과 헌신 속에서 내가 십자가 지는 것이 자발적으로 주님, 남의 몫을 이렇게 감당하는 것이 너무나 기쁘고 감사하다. 그렇게 신앙의 새로운 부흥기를 마련하시는 귀한 여러분 되시기를 이 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약 현재를 해석하기가 너무 어려운 우리 가운데에 여전히 미래에 대한 고민이 있고, 진척되지 않는 미래에 대한 답답함이 있고, 열심히 부딪쳐도 넘어설 수 없는 미래 때문에 답답한 마음도 있고, 분투하고 애써 보지만 명확하지 않은 현재 때문에 너무나 괴로운 인생들을 사는 우리가 현재로 마음 무거운 경우가 너무 많을 때, 오늘 구레네 사람 시몬처럼 그래서 우리가 앞뒤 좌우도 모르고 억지로 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인생이 되지 않고, 분명히 세우고자 하는 자리가 있을 것임을 믿고, 나를 통해 물으시고자 하는 것이 있어서 하나님 나를 사용하시고 계시는 줄 확신해야 한다. 순전히 하나님께 붙들려서 하나님 마음껏 나를 사용해 주시길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 좋은 이정표가 되며 작지만 하나님 나라에 좋은 모퉁이 돌이 될 수 있도록, 귀퉁이가 될 수 있도록 주님 앞에 매어 달리며 나아가는 이 귀한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야 한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것은 우리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내용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던 장소, 그곳은 골고다라 하는 곳으로 번역하면 해골의 곳을 뜻한다. 이곳은 평범한 처형장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점에서 죄인들과 다를 바 없이 취급되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못 박히셨던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던 그 시각은 제 삼시였다. 유대인들의 계산 방법에 따르면 제 삼시는 곧 아침 아홉 시경이거나 아니면 그보다 좀 늦은 시각이었다. 그들은 바로 그 때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받았던 모욕, 사형당하기로 된 죄수에게는 포도주를 주는 관습이 있었는데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줄 포도주에 몰 약을 탔으므로 포도주의 맛은 썼다. 예수님은 그 포도주를 맛보시긴 했어도 그것을 마시는 것은 원치 않으셨다. 그는 그 포도주의 쓴 맛을 기꺼이 받아들였지만 그것을 마심으로써 그 효과를 얻으려 하시지는 않으셨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들의 옷들은 사형을 집행한 사람들에게 사례로 주어졌다. 그래서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나누려고 제비를 뽑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그들은 예수님의 고통을 즐거워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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