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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8월 28일) 제목: "광야, 은혜의 강물" 말씀: 시편 136:16 찬양인도: 쉐키나(유재원 부목사님) 사회: 설교자:신성식 부목사님 ----- *시편 136:16, 16 그의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참 감사합니다. 이 은혜의 자리에 우리를 불러주신 것 감사합니다. 연약한 우리의 인생에 광야를 지나갈 때에 은혜의 강물을 예비해 주시고 인생의 모든 목마름들을 해갈 할 수 있도록 은혜 주심에 감사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힘들 때마다, 어려울 때마다, 우리가 결핍의 상황에 처할 때마다 우리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치유와 회복의 제3일을 허락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 주님의 손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나아가시는 하나님이 택한 모든 자녀들을 이 시간도 기억해 주시고 은혜의 말씀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원하옵고 존귀하신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말씀의 능력과 성령의 역사하는 수요 저녁 기도에 참여하신 우리 모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수요 저녁 기도회를 통해서 새롭게 하시는 우리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말씀은 시편 136편 16절 한절 말씀입니다. 주신 말씀을 저와 함께 합독하시겠습니다.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의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를 통과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아멘. 한절 말씀인데요. 한 번 더 합독하겠습니다. 그의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를 통과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아멘.
저는 지난여름 7월과 8월을 지나면서 이 광야라는 단어가 제 마음속에 많이 와 닿았습니다. 또 날씨도 참 광야 같은 무덥고 힘든 날씨였지 않습니까? 오늘 시편 136편의 배경이 되는 역사적인 사건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입니다. 이 출애굽 사건에서 경험하는 광야는 실제로 사막 지대입니다. 인간이 살기 힘든 몇 가지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그 광야였습니다. 물이 없고요. 양식을 얻기에 적합하지 않았고 기온도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건져내신 하나님이 이 같은 광야길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내신 것입니다.
자 사진을 한번 보겠는데요. 우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애굽의 노예 생활 사백삼십 년의 노예 생활 그리고 광야 생활의 사십 년 그 기간을 지나면서 아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택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나아가기 위한 여정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몇 번의 광야 오늘 그 지도의 글씨가 좀 작게 보이는데요. 나일 강 쪽에서 이제 그 백성이 나와서 이제 출애굽에서 수르 광야, 시내 광야, 시내 광야 이 모든 광야를 통과해서 하나님께서 택한 그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광야 생활에 40년의 그 여정기(旅程期)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치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정처럼 오늘 영적인 이스라엘인 우리에게도 이 광야가 필수적인 코스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 광야는 이스라엘 땅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의 삶 속에도 있는 줄로 믿습니다. 특별히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순례의 여정에서 한두 번쯤 통과해야 되는 광야가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광야 길을 가다 보면 너무나 힘들고 고독하고 외롭습니다. 오늘 이 안아주심의 본당에 나오신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오늘 하루도 폭염 가운데서 인생의 광야 가운데서, 때로는 직장 생활 가운데, 가정생활 가운데, 자녀와의 관계 속에서 또 여러 정말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인간관계의 여러 가지 광야의 시간들을 지나왔습니다. 하나의 광야가 지나가면 이제 약속의 땅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하나의 광야가 지나가면 또 다른 광야가 예비 되어 있죠. 하나씩 광야가 왔으면 좋겠는데 어떻습니까? 두 개, 세 개의 광야가 우리에게 닥칠 때도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동행을 체험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주시는 회복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지난주일 담임 목사님 말씀을 통해서 온 교회가 참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회복과 치유에 제3일의 그 은혜가 광야를 지나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의 삶 가운데 함께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눈물 닦아주심 우리 하나님의 함께하심, ‘아들아 염려하지 말아라. 딸아 더 이상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너와 함께한다.’ 하나님께서 눈물 닦아주시고 함께하시고 우리의 어떤 연약함도 만져주시는 만져주심의 그 은혜가 인생의 광야길 가운데 있는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보면 광야라는 것은 우리 주님을 특별히 만나는 주님과 동행하는 장소입니다. 나 홀로 외로워서 우는 장소가 아니라, 우리 주님의 위로가 위로부터 임하는 귀한 은총의 장소가 되고요 다시금 소생하고 회복할 수 있는 영적인 회복의 장소가 바로 광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광야는 우리 하나님의 특별 은총을 체험하는 장소가 광야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광야 체험을 통해서 모든 이들이 한 결 같이 영적으로 성숙해지는 놀라운 은혜들을 경험하실 수 있기를 원합니다. 첫 번째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어떤 광야를 만나도 이 또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한번 같이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어떤 광야를 만나도 이 또한 인도하시리라.
I. 어떤 광야를 만나도 이 또한 인도하시리라.
-어떤 광야? 우리의 인생 길 가운데 하나님 이 광야는 너무나 힘듭니다. 라고 우리가 하소연하는 그 광야도 있지만 그 광야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어떤 광야를 지나더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자들은 결론이 어떨까요? 감사로 찬양하는 자리에 반드시 서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스라엘의 시편이 실패의 노래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승리와 기쁨과 감사의 고백으로 이 시편이 변화된 줄로 믿습니다. 이 찬양은 단순히 과거의 광야를 이끌었던 이례적인 사건을 기억하는 것을 넘어서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은 포로계의 시절도 있었고 어려운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숱한 그 포로 생활에 고난의 역사를 회고하면서 현실의 광야를 이길 수 있는 그 찬양을 어떤 인생의 광야라 할지라도 그것을 이길 수 있는 하나님 앞에 찬양할 수 있는 찬양의 제목으로 하나님 앞에 올려드릴 수 있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걸어가는 어떤 광야라 할지라도 오늘의 광야를 이길 수 있는 어제의 놀라운 찬양의 제목들이 우리에게 있었습니다. 저는 좀 힘들 때마다 많이 불렀던 찬양이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참 많이 불안한 찬송인데요. ‘예수의 사랑, 예수의 사랑 바다 물결 같이 내게 임하니 영광의 물결에 온전히 쌓여서 내 영혼의 기쁨이 할 량 없다.’는 그 고백입니다. 특별히 이번 광야를 묵상하면서 이번 폭염을 지나가면서 예수님의 그 사랑이 바다 물결같이 내 삶 속에 물밀듯 미로 오기를 하나님 앞에 사모했던 그 마음들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광야를 만나도 이 또한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다 과거가 있죠?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무엇을 했는지 다 알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참 우리의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런데요 우리 모두에게는 다 은혜 받았던 과거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토록 힘들었던 그 시간들, 은혜의 과거들을 회상하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어떻게 크고 기이한 일들을 행하셨는지 은혜의 과거들을 많이, 많이 묵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은혜의 과거를 더듬어 살펴보다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무궁한 인재와 사랑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다음이 없는 하나님의 인자와 사랑을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데요. 예레미야는 예레미야서 31장 3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예레미야 31:3,
3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
-아멘. 내가 어떠한 사랑으로요?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거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라고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의 그 광야의 시절을 경험했습니다. 절대적인 위험의 그 가정을 겪어 나갔습니다. 가나안 땅에 입성해서 정착하는 그 생활의 고난과 시련의 시간도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끝인 것 같은 끝인 줄만 알았던 그때에 전투에서 패배하고, 민족의 존속이 위태로워질 수 있었던 그 때에도 가나한 땅 정복에서 힘든 가정일 때도, 이스라엘 백성의 곁에는 누가 계셨습니까? 아버지 하나님이 함께 동행 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 쉐키나 찬양 가운데 하나님 정말 광야의 길을 만드시고 나를 인도하시는 그 하나님, 아무도 보이지 않는 것 같은 그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힘든 가정의 소망이 없어 보이는 때, 아무런 내 힘으로 할 수 없을 것 같은 그 상황 가운데, 하나님은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 계신 줄로 믿습니다. 다시 한 번 오늘 말씀을 같이 한번 보겠습니다.
*시편 136:16,
16 그의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의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를 통과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다. 그 예 백성 하나님의 자기 백성이라는 말씀입니다. 인도하시는 하나님과 인도함을 받는 백성과의 그 친밀한 관계를 너무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인도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동행하시고 인도해 주신 사건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또한 인도하실 뿐 아니라, 인도하여 통과하게 하셨다. 라고 말씀합니다. 광야 이후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광야 이후에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신 성취된 약속에 중점을 두면서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인도하셨고, 광야에서 인도하셔서 그 어려운 시간들을 완전히 통과하게 하셨다는 이 믿음의 고백 가운데 하나님 앞에 인지하심이 영원합니다. 라고 하나님 앞에 영원히 찬양하는 그 고백들을 올려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136편에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는 이 고백이 많이 이렇게 반복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인자하심 광야로 자신의 백성을 인도하신 것이 영원한 사랑 때문이다. 라는 이 고백이 어떻게 보면 아이러니한 모습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모든 소망이 끊어진 것 같은 그 광야의 시간 우리를 대적하는 문제와 시련을 만나야 하는 시간, 지치고 낙담하는 때도 있습니다.
여름마다 선교지에서 열심히 선교 사역을 담당하신 귀한 우리 사랑의 교회 권사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한번 선교지에 나가면 수십 명, 때로는 100명 이상의 많은 분들에게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을 가지고 영어로 이렇게 복음을 만들어서, 연세가 많은 분인데요. 복음을 전하시던 권사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권사님이 암에 이렇게 걸렸다는 그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권사님께서는 암 투병을 하시면서도 이 수요예배, 새벽기도, 주일 예배 정말 항암 기간이 아니면 몸에 좀 컨디션만 찾으면 항상 나와서 예배하는 자리에 계셨습니다. 어느 날 새벽 기도 시간에 그 권사님께서 저를 찾아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저 많이 좋아하셨어요. 괜찮아졌어요’. 병원에서도 너무너무 기적같이 좋아졌다는 그 소식을 전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목사님, ‘이제 조금 더 몸을 추스려서 다시 선교지에 나가고 싶습니다.’ 나가서 다시 한 번 그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기 원합니다. 라는 우리 권사님의 그 선교의 열정과 고백을 들으면서 제 마음속에도 참 새로운 도전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끝인 것 같은 그 상황에도 우리의 생명과 모든 것이 위태로운 때에도, 모든 중심에 서 있는 것처럼 힘든 그 순간에도 우리 주님은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찬양의 가사가 있죠?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으신, 우리를 한 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으시며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어떤 광야를 만나도 인도해 주시고, 우리 하나님, 카이로스의 그 시간에 우리를 극한 어려움에서 건지시고, 치우게 하시고, 회복해 하시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로 광야의 온도보다 더 높은 하나님 사랑의 온도, 같이 한번 고백해 볼까요?
II. 광야의 온도보다 더 높은 하나님의 사랑의 온도.
-광야의 온도보다 더 높은 하나님, 무엇보다 무슨 온도보다 무슨 온도가 더 높다고 고백합니까? 광야의 온도 우리 밤에도 열기가 떨어지지 않는 이 폭염 열대야 이 온도 보다 더 높은 것이 뭐라고요? 하나님의 사랑의 온도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를 사랑해서 광야로 인도하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광야에서도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의 온도가 우리 광야를 지나가는 우리 일상에 우리를 힘들게 하는 그 모든 더위와 폭염과 광야의 온도보다 하나님의 사랑의 온도가 더 높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아까 번의 그 지도의 사진처럼 그 계획에 따라서 모세를 보내셨고, 그 430년에 그 애굽에 종살이하던 그 백성을 출애굽 시켜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40년의 그 광야 생활 가운데 가나안으로 인도해 가시는 하나님의 그 손길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우리는 다 알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계획을 가지시고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내 인생인데 어디로 나가야 될지, 어디로 이끌어야 할지, 알지 못한 때조차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님들의 인생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셔서, 우리를 인도해 주신다는 이 사실이 정말 광야의 온도보다 더 우리의 심령을 뜨겁게 하고 하나님의 그 사랑의 온도가 우리의 가슴을 벅차오르게 만드는 줄로 믿습니다.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마실 물도, 먹을 양식도, 언제 어디서 적을 만나서 공격을 당할지도 모르는 불안한 그들이었지만 마치 하나님의 손길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그 상황 가운데 홀로 있는 것 같은 그 광야 생활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한 것은 표면적으로는 이스라엘의 불신앙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더 심오한 하나님의 우리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40년의 그 시간 동안, 이전에 430년에 종살이하던 그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던 죄약 된 습성을 버리는 기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라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한 그 시간이 40년에 광야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들이 방황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시간 동안, 자신들이 가야 할 목표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그 시간 동안에도 하나님께서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끝이 없을 것 같은 광야의 그 생활들 해결점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도무지 이 사건, 이 어려움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될지 모를 것 같은 그 절망의 상황들, 정말 그 절망과 두려움 가운데서 참 못 이루던 그 어려운 광야 생활, 마치 우리의 잘못으로 인해서 끝이 없이 이어질 것 같은 이 광야를 하나님께서는 인도하시고 완전히 통과할 수 있도록 우리의 손을 잡아주신 줄로 믿습니다. 통과하게 하셨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시련과 고난이 모두 지나가는 것들이었음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 힘든 문제 있죠? 오랫동안 기도했던 그 기자들이 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안에서, 우리 주님 안에서, 하나님의 손을 붙잡을 몸부림치며 고통하며 하나님 아버지 밖에는 없습니다. 라고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품 안에서 몸부림칠 언젠가는 그 시련과 고난도 모두 다 지나가는 것들이었음을 우리는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광야 생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언제나 그들과의 약속에 신실하셨습니다. 그 백성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그들을 돌보셨고, 결국에는 광야를 통과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들의 손을 잡아주시고 인도해 주셨습니다.
오늘 이 시간, 광야 같은 인생 길 가운데 이 안아주심의 본당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만져주심과 고쳐주심과 함께 하심을 바라보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의 광야 같은 그 고생도 일순간에 끝나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어려움을 만나지만 하나님의 계획을 모를 때, 광야 안에서 고생을 매일매일 경험하는 것 같을 때, 아무런 해결의 길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을 때에도,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택한 자녀들, 어떤 어려움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사랑하는 자녀들, 영원히 고통 가운데 두지 않으신다는 그 사실을 우리는 믿으실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영원히 고통 가운데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따뜻한 손길을 내미셔서 이 안아주심의 본당에서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시고, 우리를 만져주시고, 함께하시고 고쳐주시는 우리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손길이 광야의 시간들 속에 우리 가운데 함께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언젠가는 이 광야의 모든 어려움을 끝내시고 통과하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시편 136편에서 시편 기자가 바로 하나님 앞에 ‘그 인자하심이 영원합니다.’ 인자하심 하나님의 해세드가 영원합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자하심, 해쎄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언약적인 사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받을 만한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우리를 택해 주시고, 우리를 불러주시고, 자녀 삼아 주시고, 오늘 이 자리까지 우리를 인도해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쏟아부어주신 해세드가 오늘 우리 가운데 함께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와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처럼 우리 부모님이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에는 어떤 조건이 없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해세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믿음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초월해서 내가 여전히 하나님의 은총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은 아무리 보이고 힘들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품 안에,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 안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 끊을 수 없는,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지켜주시고 붙잡아 주시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인생길이 어떻게 정리될지 모르고, 이 광야 같은 인생이 어떻게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바로 연약한 우리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갑 없이 주시는 이 인자하심, 해세드, 이 은혜가 광야의 인생길을 뚜벅뚜벅 걸어가시는 우리 성도님들의 삶 속에 지금부터 영혼까지 함께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주시는 이 햇세드 인자하심이 함께 하심으로 우리가 걸어가는 광야 길의 인생, 광야의 그 뜨거운 온도보다 훨씬 더 높은 하나님의 사랑의 온도, 하나님의 사랑의 온도는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우리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고 우리의 마음에 더 하나님의 그 사랑을 풍성하게 경험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온도를 체험하시는 우리 귀한 성도님들 한 분 한 분 되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세 번째입니다. 광야는 반복되어도 구원하시는 우리 하나님은 동의하십니다.
III. 광야는 반복되어도 구원하시는 우리 하나님은 동일하다.
-한 번 고백하겠습니다. 광야는 반복되어도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동일하십니다. 하나의 광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돼서 반복되는 광야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만져주시고 고쳐주시는 우리 하나님은 동일하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첫 번째 사진을 한 번 더 보겠습니다. 이 사진에 잘 보시면 우리 지중해가 있고요. 그 지중해의 오른편으로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그리고 요단강이 있고 요단강 쪽에 ‘싯딤’이라는 그 지역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거의 빠져나갈 쯤에 약속의 땅을 이제 눈앞에 목전에 두고 있는 시점이 바로 이 싯딤이었습니다. 430년에 치열했던 노예 생활, 애굽의 노예 생활을 지나가면서 이제 또 40년의 그 광야 길을 뒤돌아가면서 마지막 관문이 싯딤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지도를 보겠습니다.
이 싯딤은 요단강 동편에 위치했기 때문에 멀리나만 가나한 땅을 멀리 바라볼 수 있는 그 지역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싯딤이라는 뜻은 아카시아라는 뜻입니다. 한국의 아카시아 나무 있죠? 그 나무들처럼 크지는 않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는 이 아카시아 나무가 없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드디어 이제 이 요단강 동편에서 멀리 가나안 땅이 보이는 이 싯딤에서 아카시아 나무를 볼 수 있었던 무성한 나무들이 많은 곳에 이 백성들이 도착했습니다.
그 광야를 끝나고 사막을 지나와서 이제 그늘 진 곳, 정말 좀 햇빛을 피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이 사실 하나나마도 그 백성들의 마음이 얼마나 심과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물이 귀했던 광야와는 달리, 이제 물줄기가 흘러가는 요단강을 바라보는 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벅차오르는 감격이 그 백성들에게 있었습니다. 지나온 광야에 비하면 너무나도 좋은 것임은 분명합니다. 그런데요 이 이스라엘은 바로 이 광야의 끝자락에서 이 40년 광야의 끝자락에서 그 약속의 땅에 보이는 그 입구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말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한 큰 우상숭배의 죄악을 범했던 장소가 바로 이 싯딤이었습니다.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출애굽 했던 1세대는 그곳에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다 이 싯딤에서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광야가 끝나는 지점 싯딤이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이 고난이 끝나기를 원하지만 광야가 끝나기를 원하지만, 고난이 끝나는 것이 축복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신앙의 여정 길 가운데, 광야길 가운데 우리는 방심하면 안 된다는 것을 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싯딤의 사건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가 성 여인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수가 성 여인도 이 광야의 주제와 연관해 볼 수 있습니다. 뙤약볕에 광야와 같은 이 뙤약볕에 우물물을 길러 왔던 여인에게 예수님은 이 물을 길어 올리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시지 않고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요한복음 4장 14절 말씀인데요. 같이 한번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4:14,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너희 안에서 영원토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밖에서 우물물을 지어 먹는 그 인생이 아니라, 안에서 솟아나는 그 은혜로 살아가는 인생인 것을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주님께서 그 수가 성 여인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도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반속에서 솟아나는 그 샘물이 광야의 모든 메마름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크고 작은 광야를 만날 때에 그 이후에 집착(執捉)합니다. 왜? 이 광야가 나에게 닥쳐왔나? 왜 이 고난이 나에게 있나? 크고 작은 인생의 고난과 광야를 만날 때 우리는 그 이유가 무엇인가? 왜 이런 어려움들이 생겼는가? 집착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한 번 믿음의 문을 열고, 이 광야를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당연한 문으로, 관문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오히려 그 광야의 시간 동안 우리는 주님과 더 자연스럽게 동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광야를 만난다 할지라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광야는 우리 인생에 목적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광야는 목적지가 아니라, 축복의 다리입니다. 블레싱 브릿지입니다. 우리가 어떤 광야를 지나간다 할지라도 이 광야가 우리 인생의 목적지라면 우리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적지가 아니라 축복의 달이 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우리는 소망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업은 광야에서 만들어지고 가난에서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이사야서 43장 18절, 19절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이사야 43:18-19,
18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반드시 광야의 길을 사막의 강을 내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광야 같은 우리의 삶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은혜의 강물이 흐르게 하시고, 위로의 강물이 흐르게 하시고, 축복의 강물이 흐를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 길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셔서 결국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주실 것이라는 정해진 그 결론을 반드시 이루어주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미 결론이 있습니다. 답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면 답은 정해져 있고 과정도 예상된다면 이제부터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는 하나님 앞에 찬양을 선택하며 나아갈 수 있는 그것이 오늘 우리의 인생의 광야를 만날 때 가장 지혜로운 모습일 것입니다. 광야의 때에 하나님을 붙잡으실 수 있기를 원합니다. 광야가 약속으로 나아가는 하나님의 계획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광야를 지나더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감사로 찬양하는 자리에 반드시 서게 될 줄로 믿습니다.
코로나시기에 40대 후반의 젊은 남동생을 천국으로 보낸 그 형님 되시는 성도님 부부가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병실에서 저희 사랑의 교회 권사님 한 분께서 계속해서 기도해 주시고, 복음의 메시지를 전해 주시면서 결국에는 그 동생은 그 코로나로 천국으로 보내 드렸지만 그 형님 부부가 사랑의 교회에 등록을 하게 되었고요. 그리고 그 동생의 부모님, 이 어머니 아버지도 사랑의 교회에 등록하셔서 네 분이 동시에 사랑이 위해 등록을 해서 이제 올 가을에 이제 세례를 받기 위해서 준비하고 우리 담임 목사님의 그 세례를 온 가족이 함께 받기 위해서 사모하며 기다리는 귀한 가족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이 닥친다 할지라도 우리가 인내하면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어떤 광야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반전의 드라마를 준비시켜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역전의 드라마를 연출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흔들리지 않고 담대하게 인내하며 나아가는 우리 성도님들 되실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 인생의 광야를 지나갈 때에 은혜의 강물을 예비해 놓으시고, 인생의 목마름을 해갈(解渴)할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의 아버지가 되어주심을 끝까지 믿고 신뢰하며 나아가는 우리 귀한 믿음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
♣요약
우리 인생의 광야를 지나갈 때에 은혜의 강물을 예비해 주시고 우리 인생의 모든 목마름을 해갈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길 간구해야 하며, 아무리 힘든 광야의 시간을 지나간다 하더라도 반드시 인생의 광야를 끝내게 하시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헤세드의 인자하심을 마음껏 찬양하는 언약의 백성들이 될 수 있어야 한다.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초월해서 내가 여전히 하나님의 은총 아래 있다는 것과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붙들고 있다는 것을 신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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