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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8월 14일)
제목: "빈 손 인생:그래도 하나님은..."
말씀: 욥기 1:20-22
찬양인도: 쉐키나(윤재원 부목사님)
시회: 강건우 부목사님

설교자: 윤주은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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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1:20-22,
20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가 여전히 이 시간 이 자리를 사모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치유와 회복을 소망하게 하시니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이제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사오니, 귀를 열어 듣게 하시고, 눈을 열어 포기하시며 마음을 열어 감화시켜 주옵소서. 전하는 자 듣는 자 모두에게 맞춤형의 은혜를 허락하시고 권고하여 주옵소서. 이 모든 간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산 소망과 참 기쁨이 샘솟는 수요 저녁기도회에 참여하시는 모든 성도님들을 환영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권고해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치유와 회복을 얻는 복된 시간되기를 소망합니다. 함께 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구약성경 욥기 1장 20절부터 22절까지 말씀입니다. 구약성경 762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절씩 교독하고 마지막 절은 합독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삶이고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해 주시는 삶입니다. 성경은 그런 우리에게 형통함과 풍성함 안전함과 만족, 그것을 기대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과연 현실이 그러던가요? 오히려 우리의 삶은 그 약속대로 풀리지 않을 때가 더 많이 있습니다. 막힘과 부족함 불만과 위태로움을 마주합니다. 때로는 마음 한구석이 텅 빈 듯한 상실감(喪失感)마저 느끼게 됩니다. 우리 삶 속에서 무언가를 잃는 경험은 예고 없이 다양한 모습으로 찾아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가까웠던 사람의 배신이나 관계 문제가 될 수 있고, 또는 재산을 잃었거나 경제적인 어려움을 당할 때가 그럴 때가 있습니다. 건강이 나빠질 수도 있고, 질병에 걸릴 수도 있고 또 때로는 직장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기대했던 일이 무산되거나 또는 계획에 어긋나는 상황들을 만나게 되기도 합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상실감으로 다가오는 것들입니다.

신앙은 답을 모른 채, 계속 나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이라는 한 신학자의 말처럼, 우리는 상실의 짐에 짓눌려서 삶의 기반이 송두리째 빼앗기는 흔들리는 듯한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삶의 현실이 뒤죽박죽 되어버리는 때도 있습니다. 마치 헤아릴 수 없는 슬픔과 아픔 맥없이 밀려오는 낙담과 좌절, 허무함 당황스러움과 같은 상실의 강을 건넙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생 여정에서 우리가 견지해야 할 신앙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욥의 삶을 추적해 보겠습니다. 욥은 족장 시대의 인물입니다. 에돔 지방의 우수 출신이라고 합니다. 그는 모든 것을 갖춘 완벽한 남자였습니다.

제가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생각한 것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수님의 온전한 제자가 되자. 라고 그 기도에 제목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구약 모델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욥기 1장 1절에 묘사된 욥에 신앙평가를 보면,

*욥기 1:1,
1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그는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번역들을 참조해 보니까, 흠이 없었고, 정직했고, 하나님을 경외했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 악한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욥이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어서 2절과 3절을 보면.

*욥기 2:3,
3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느니라.
-욥은 아내와 수많은 자녀들을 두었고, 그가 살던 지역에서 으뜸가는 부자였습니다. 개혁개정의 표현에 따르면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종합적으로 욥은 물질로도 부자였고, 신앙으로도 부자였습니다. 여러분 여기까지만 보면 참 부럽지 않습니까? 저는 이런 욥이 참 부럽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부러움을 산 욥이 당한 일을 주목해보면 부럽다. 라고 우리가 생각했던 그것이 얼마나 경솔한 것인지 모릅니다. 13절부터 19절까지 기록된 내용을 제가 요약해 드리면, 욥은 아내만 제외하고 재산과 자녀들을 하루아침에 잃게 됩니다. 심지어 나중에는 피부병(皮膚病)까지 앓게 되고 그것 때문에 고생을 합니다. 그는 한두 푼 가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1~2명의 자녀를 가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10명의 자녀가 있었고, 그의 재산은 당대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4차례에 걸쳐서 하루아침에 잃고 만 겁니다. 욥의 반응이 그런데 놀랍습니다. 오늘 저희가 살펴볼 것인데 그 전에 어떻게 욥은 이런 반응을 보일 수 있었을까? 한번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 4절과 5절의 힌트가 숨어있습니다.

*욥기 1:4-5,
4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의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5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욥에는 경건한 성품이 있었습니다. 욥은 자녀들의 생일잔치가 끝날 때마다 했던 일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 그 자녀들을 불르고 불러서 정결하게 하고 번제(燔祭)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한 두번 그랬던 게 아니라, 항상 그렇게 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냐 하면, 혹시라도 자녀들이 잔치 중에 생일잔치 중에 하나님께 죄를 짓지는 않았을까? 하는 염려하는 마음 때문에 그들의 죄를 씻으려고 그렇게 한 겁니다.

욥은 꾸준한 영적 습관이 그의 삶에 뿌리 박혀 있었던 겁니다. 그는 하나님과 지속적이고 깊은 교제를 통해서 그 삶에 견고한 믿음의 토대를 세워왔던 것입니다. 여러분 항상(恒常)이 무서운 겁니다. 평소(平素)가 중요한 겁니다. 그게 실력(實力)입니다. 우리도 평소에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그리고 깊이 있는 교재를 통해서 견고한 믿음의 토대를 세워 가야 합니다. 여러분 경건한 성품이 다져지는 만큼 우리가 상실의 강을 건널 때 건널만하게 만드는 겁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영적 습관이 중요한 줄 알고 오늘 이 자리에 방학인데도 불구하고, 수요 저녁 기도에 나오신 여러분들 참 잘 하신 겁니다. 영적 습관을 지키려고 나오신 거죠. 견고한 믿음의 토대를 세우시려고 나오신 거잖아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들이 삶 가운데에 건너는 상실의 강을 이런 것들을 통해서 건널만한 힘을 챙겨 가시는 겁니다. 여러분, 평소에도 하나님과 지속적이고 깊은 교제를 나누십시오. 그렇게 여러분의 삶에 견건한 믿음의 토대를 세워 가시기를 바라며 또한 경건한 성품을 소유해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욥의 반응을 살펴보면서 상실의 강을 건널 때, 우리가 견지해야 할 핵심이 무엇인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3가지를 볼 건데 첫 번째 그것은 뭐냐하면, 나의 삶이 빈손 인생임을 절감하는 것입니다.

I. 첫 번째, 나의 삶이 빈손 인생임을 절감(切感)하는 것입니다.
-21절 상반 절입니다.

*욥기 1:21a,
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새 번역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모태에서 빈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에도 빈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우리 인생을 ‘빈손인생’ 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 욥기는 전체 42장 1070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세지는 않았고 찾아봤습니다. 그중에 고작 8개 절로 욥은 모든 걸 잃고 맙니다. 그 중에서도 7개절은 가족과 재산을 잃게 됩니다. 욥이 훌륭하다. 라고 평가를 받았던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일순간에 사라져버린 이 욥,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 줄 모릅니다. 건강이 남아 있으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2장 7절에 보면 건강도 잃어버립니다.

*욥기 2:7,
7 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
-그야말로 빈손 인생이 된 거죠. 성경은 인생의 본질이 빈손이라는 사실을 여러 군데서 알려주는데 2가지를 제시해 드리겠습니다. 먼저는 ⓵야곱입니다. 이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뼈저리게 이 사실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야곱 여러분, 아시는 대로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이나 섬겼지만 빈손으로 쫓겨날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돌보심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극적으로 재산을 얻고 떠났습니다. 그런 야곱의의 고백이라 합니다.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바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 하셨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으리라마는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 어젯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

⓶다윗 역시 인간의 모든 수고와 노력이 하나님의 일하심의 은혜가 없이는 자칫 빈손 인생이 될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 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에 깨어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야곱과 다윗의 고백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알몸으로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라고 말한 욥의 고백과 맞닿아 있는 교훈입니다. 이 두개의 본문은 욥의 고백을 야곱과 다윗의 삶을 통해서 각각 다르게 표현한 버전인 셈입니다. 이솝우화에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우리는 벌거숭이로 이 세상에 왔으니, 벌거숭이로 이 세상을 떠나리라. 어딘가에서 이런 표현도 한번 보았습니다. 아기의 첫 옷 호주머니가 없다. 먼 훗날 아기가 입게 될 마지막 옷도 호주머니는 없다. 그냥 왔다 그냥 간다. 제가 이 두 개의 메시지를 1문장으로 합쳐 봤습니다. 우리는 호주머니 없는 벌거숭이로 왔다가 호주머니 없는 벌거숭이로 간다. 누구의 이야기죠“ 욥의 이야기이고, 야곱과 다윗의 이야기이고,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이야기입니다. 저야 여러분의 이야기가 바로 이러한 호주머니가 없는 벌거숭이로 왔다가 호주머니가 없는 벌거숭이로 가는 인생입니다.

사랑하는 영 가족 여러분,
사람들은 흔히 그렇게 말합니다.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잊는 것이 인생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없이 태어나서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다가 결국 없어지는 것이 인생입니다. 오늘 욥이 우리의 인생에 별명을 하나 지어줬습니다. 뭐죠? 빈손 인생입니다. 바라기는 상실의 강을 건널 때,나의 삶이 빈손 인생임을 절감하시기를 소망합니다. 두 번째 보겠습니다. 두 번째는 나의 삶은 하나님의 속안임을 알고 확인하고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입니다.

II. 두 번째는 나의 삶은 하나님의 소관(所管)임을 알고 확인하고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욥기 1:20,
20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욥은 망연자실(茫然自失)한 상황에서 두 가지 행동을 보입니다. 하나는 ⓵자신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미는 것이었고, ⓶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나아가 엎드려 경배(敬拜)하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자신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민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상실, 그리고 깊은 절망 속에서 비통한 심정을 온몸을 드러내면서 보여준 행위였습니다. 그보다 우리가 주목해야 되는 것은 그 두 번째 그 뒤에 나오는 행동입니다. 그가 보인 행동이 뭐였냐면 땅에 엎드려 경계하는 것이었습니다. 20절에 보면,

*욥기 1:20,
20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그러자 또는 종이 전한 말해라는 표현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고려해서 읽어보면 욥이 종에게 비보를 듣자마자, 보인 첫 번째 반응 비통함을 표현함과 더불어서 땅에 엎드려 경배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굉장히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겁니다. 욥은 자신이 취할 수 있는 가장 겸손한 신앙의 제세를 취했습니다. 그는 이번 일에 최고 책임자이시자, 최종 결정권자이신 하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경배했습니다. 욥이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민 것이 그의 절망을 나타낸 것이라면, 그가 땅에 엎드려서 경배한 것은 하나님께 겸손(謙遜)히 복종(服從)하겠다는 결의(決意)를 나타내는 겁니다. 이처럼 욕은 겸손이 하나님께 나아가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합니다.

그것도 비보를 듣자마자, 상실감에 사로잡힐 시간도 없이 주저함 없이 곧장 그렇게 반응합니다. 그의 행위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제 욥은 입술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욥은 모든 상황을 찬양으로 승화시키는데, 여러분 21절 하반 절에 보시면,

*욥기 1:21,
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욥은 모든 것을 잃고서 잃어버린 것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합니다. 저는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한 찬송가의 가사가 떠올랐습니다. 찬송가 370장 2절입니다.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내 노래 되었네. 전날에 한숨 변하여 무엇이 되었어요. 내 노래되었네. 그날 욥이 부른 찬성 듣지는 않았지만 그 가사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결국 20절과 21절에 나타난 욕의 행위는 자기 삶이 하나님 소간임을 확인한 행위였습니다. 용은 이번 일이 하나님 소간(所幹) 임을 알았던 겁니다. 이번 일을 주관하실 분도 하나님이심을 유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두 번 세 번 생각하지 않고, 몇 날 며칠 망설이지 않고, 곧장 하나님께 나간 겁니다. 나아가서 따지든 드러눕든 울부짖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나아갔습니다. 여러분, 이런 자세가 귀한 겁니다. 여러분, 상황이 어떻든지 간에 이 자리에 나온 것이 잘 하신 겁니다. 여러분 상황이 어떠신지 간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잘하는 겁니다. 나아가셔서 아무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찬송도 안 해도 되고, 기도도 안 해도 되고 하나님 원망 안 해도 되고, 찬송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나아가는 거, 그게 귀한 줄로 믿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욥의 삶에 관건(關鍵)은 하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그것이 관건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처럼 산더미처럼 쌓인 집안일이나,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자녀 문제가 관건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쉴 새 없이 밀려오는 수많은 회사 일도 그의 관건이 아니었고, 사람들과 만남에서 오는 감정적(感情的)인 소모(消耗)도 그에게는 관건이 아니었습니다. 뭐 오르락내리락하는 그런 매출 이런 것도 관건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우리의 삶에서 그런 모든 것들이 다 중요하지만 그에게 삶의 관건은 오로지 하나님이었습니다.

시편의 기자들이 그러했습니다. 시편을 여러분들이 곱씹어 보시면 시편은 결국 삶의 관건이 하나님인 사람들의 기도입니다. 그들의 관건은 그들 자신이었거나 그들이 당한 상황이었거나 그들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교회답지 않아 다투는 우리’ 라는 책을 보다가 욥에 관한 한 문장을 발견했습니다. 욥은 자신의 삶에서 잃어버린 재산 혹은 자녀 하물며 건강에 대해서는 큰 미련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욥의 유일한 관심사는 바로 신학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향해 치열하게 묻고 따지는 유일한 물음은 신학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신학이 가리키는 것이 뭔지 아시겠죠? 하나님입니다.

한때 욥의 삶에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었던 재산, 자녀 그 모든 것들이 사라졌습니다. 당시 농경사회에서 가축이나 자녀는 큰 자산이 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욥은 자신의 정체성마저 완전히 잃어버렸다라고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전에 욥은 재산을 통해서 부자로 인정받았고, 자녀들을 통해서 존경받는 아버지로 인정받았고, 신앙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의 정체성을 규정해주던 그것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때도 욥의 삶의 관건은 무엇이었어요? 하나님이었습니다. 우리도 욥처럼 시공(時空)을 초월(超越)하여 삶의 관건이 오로지 하나님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욥에게는 왜 삶의 관건이 하나님이었을까요? 다시 돌아와서 욥에게는, 욥은 자기 삶이 하나님의 소관(所管)임을 알았던 겁니다. 욥은 평소에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믿음의 기초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일을 계기로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신한 겁니다. 여러분, 우리 삶은 우리 소관(所管)이 아니라, 하나님 소관(所管)입니다. 이건 의심할 필요도 없고, 따지고 들일도 아닙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확신할 뿐입니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이런저런 일들이 무엇이 되었든지 모두 하나님 소관(所管)임을 인정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엎드리면, 그걸로 된 겁니다. 이렇게 살기를 바라는 분들에게 기도 제목 하나를 제가 팁으로 드리려고 합니다.

4세기 교부 어거스틴을 다 아실 텐데, 이 어거스틴이 ‘사랑에도 질서가 있다.’라는 사랑의 질서 개념을 강조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더 사랑해야 할 것은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해야 할 것은 덜 사랑하고, 최고로 사랑해야 할 것은 최고로 사랑하는 그러면서 어거스틴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내 안에서 사랑의 질서를 잡아 주옵소서.” 우리의 기도로 삼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사랑의 질서를 잡아주셔서 부디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소관임을 의심 없이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의 영 가족 여러분,
우리가 든든하게 우리를 든든하게 해주던 삶의 울타리들이 무너졌을 때 우리가 견지해야 할 신앙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바라기는 나의 삶은 하나님 소관임을 확인하고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으시기를 소망합니다. 끝으로 우리가 견지해야 할 신앙의 핵심 중 핵심 하나만 더 봅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계신다. 나의 삶에 자리 잡고 계신 하나님의 존재에 사무치는 겁니다. 다시 한 번 21절을 보십시오.

*욥기 1:21,
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욥은 빈손 인생에 이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신이도 여호와시요. 거둔 이 시도 여호와시오니 헤아리기 힘든 일을 겪고서 비통해하며 하나님께 나아간 욥은 하나님의 고유하신 이름을 부릅니다. 여러 가지 이름이 많잖아요.

근데 여호와 하나님, 그 이름을 부르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욥은 모든 것을 잃은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만은 남아 계시다. 라는 사실을 붙들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온 1장의 흐름이나 욥의 친구들이 욥에 찾아오기 전까지에 내용을 다루었던 그 2장까지의 전개를 살펴보면, 욥에 일어나는 사건들은 모두 갑자기 발생한 이름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갑자기라고 제가 표현을 한 것은 욥이 겪게 된 일은 이유 없이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떤 결과가 발생했다. 라는 건 그에 따른 원인이 있게 마련입니다.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습니다. 그런데 욥에 삶에는 원인 모를 일들이 예고 없이 벌어졌습니다. 어떻게 된 걸까요? 배후에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욥이나 욥의 안에 또는 종들은 이해할 수 없었던 그 당시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일하심, 원인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욥에 삶에 개입했던 결과인 겁니다. 욥은 영문은 알 수 없었지만 자기 삶에 하나님의 일하심이 개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그는 주신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시는 이도 여호와시라. 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이러한 고백입니다. 나는 비록 재산을 잃고 자녀를 잃었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계십니다. 내가 소중하게 여겨온 것이든,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든 하나님은 여전히 계십니다.

내게 중요한 것이었던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든 혹 내게 그것이 필요한 것이었든, 필요하지 않는 것이었든 나는 지금 전부를 잃었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계십니다. 욥은 자신의 삶에 자리 잡고 계신 하나님의 존재에 사무쳤던 겁니다. 사실 욥은 더는 잃을 것이 없다. 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욥기 13장 15절을 보면,

*욥기 13:15,
15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셔도 자신으로서는 잃을 것이 없다.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욥은 수중에 있던 재산이나 곁에 살던 자녀 그런 게 아니라, 불변하셔서 여전히 그 자리에 계시고 내 삶의 좌정(坐定)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묵상하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그러한 것들에 잠시라도 마음을 빼앗겼던 것들이 아니라 그것이 아니라 처음과 끝이 한결같으시고 그런 하나님께 집중하면서 하나님의 존재에 사무쳤던 겁니다. 여러분, 욥기 3장 이후를 보면 욥은 자신을 위로한답시고 찾아온 친구들, 그 3명의 친구들과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눕니다. 그러나 친구들의 위로는 욥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켰습니다. 이때 욥의 친구들은 욥의 고난이 죄 때문이라고 비난하면서, 정죄(定罪)하면서 회개(悔改)를 촉구(促求)합니다. 하지만 욥은 결백을 주장하면서 친구들의 비난에 맞섰습니다. 그때 이런 말을 합니다. 욥기 19장 25절,

*욥기 19:25,
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우리가 볼 때 욥은 작은 것들을 잃은 게 아니었어요. 여러분 10자녀, 모든 전 재산, 그게 작은 겁니까? 작은 게 아니에요. 대체할 수 없을 만한 것들을 잃었습니다. 욥은 이러고서 어떻게 앞으로 살아가지, 싶을 심정을 느낄 정도로 모든 걸 잃었고,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게 되었습니다. 깊은 상실감을 느꼈죠 하지만 욕은 확신합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압니다. 내가 전부를 잃은 이 순간 하나님만은 여전히 살아 계셔서 나를 돌보시는 날이 반드시 오고야 낼 것을 나는 압니다. 욥의 고백이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왜인지 모르게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래도 여전히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내가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의 삶에 자정하고 계시고, 나의 삶에 자리 잡고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우리 모두의 삶에 깊이 새겨지는 진실 된 고백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럼 운전을 하다보면, 가끔 안개 낀 길을 만납니다. 그럴 때는 시야가 확보되지 않기 때문에 조금 더 열심히 집중해서 운전을 해야 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면 그제야 보이지 않던 사물들이 하나씩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안개가 걷히면 비로소 누가 보이기 시작할까요?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살다보면 하나님을 잘 보이지 않게 만드는 여러 가지 안개가 우리 삶에 드리워지곤 합니다. 예를 들어서 재물(財物)과 가족이 될 수도 있고, 건강과 관계가 될 수도 있고, 성공과 욕망이 될 수도 있고, 걱정과 두려움이 될 수도 있고, 과거의 상처가 될 수도 있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 될 수도 있고, 자기 의나 인정 같은 것들,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안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시야를 가려서 하나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러다가 상실의 때를 지나면서 삶에 안개가 걷히고 그제야 항상 그 자리에 계셨던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핵심은 무엇이죠?

안개 때문에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때에도 세상의 사물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겁니다. 우리가 단지 보지 못했을 뿐이죠. 마찬가지로 우리 삶에 여러 가지 안개가 끼어서 우리가 하나님을 보지 못하며 살 뿐이지 그때도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시고 우리 삶에 자리잡고 계십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영 가족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을 잃으셨습니까? 어떤 일로 마음이 슬프고, 아프며 낙담하고 좌절하고 계십니까? 어떤 이유로 억울하고 혼란스럽고 허무하고 당황스러우십니까? 저와 여러분들에게 도전합니다. 그 상황이 오히려 복된 일임을 고백하십시다. 모든 것을 잃었더라도 하나님을 잃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잃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잃은 모든 것이 사실은 안개였고, 이제야 비로소 하나님을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 삶의 안개를 걷어 주옵소서. 우리 삶에 잔뜩 낀 안개를 말끔히 걷어 주옵소서. 저와 여러분들의 진실 된 기도 제목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입술을 열어서 한 가지 더, 주신이도 여호와이시요. 거두는 이도 여호와시라. 고백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다 함께 고백해 볼까요? 주신이도 여호와이시요. 거두는 이도 여호와시라. 바라기는 상실의 강을 건널 때,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계신다. 세상을 영에 선포하시며, 나의 삶에 자리 잡고 계신 하나님의 존재에 사무치시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빈손 인생임을 잊고 살면서, 손에 쥐 것을 세기에 바쁘고, 손에 쥐지 않은 것을 얻으려고 바쁜 줄 모릅니다. 그러다 어느 날 거센 폭풍을 맞아서 손에 쥐는 것마저도 휩쓸려 가며, 텅 빈 손을 바라보면서 당황하고, 낙심하고, 절망하고, 분노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하나님께 상처받기도 하고 하나님께 삐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수많은 인생 질문들이 생겨납니다. 여러분, 한 사람의 진면목은 최고의 순간에 최악의 순간에 확연히 드러납니다. 우리로 따지면 그리스도인은 상실의 지님이 짓눌렸을 때 그때에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로 인해서든 감당할 수 없는 상실감을 사로잡힐 때, 나의 삶이 빈손 인생임을 절감하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삶은 하나님 소관임을 확인하고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계신다. 나의 삶에 자리 잡고 계신 하나님의 존재에 사무치시기를 바랍니다. 여기까지 깨닫고 나니깐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삶이 빈손 인생인 줄만 알았는데, 사실은 만물보다 크신 하나님께서 만 손으로 우리 빈손 인생을 쥐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이 위대한 약속을 붙들며 사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만유해주이신 예수 글 속에서 언젠가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우리가 저 천국에 갈 때에 그때에는 우리가 이 땅에서 잃었던 모든 것보다도 더 값지고 영원한 것을 얻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잃었던 그 모든 것을 잊게 될 줄로 믿습니다. 끝으로 우리가 지금껏 나누지 않은 본문 22절의 새 번역을 보시면,

*욥기 1:22,
22 이렇게 욥은, 이 모든 어려움을 당하고서도 죄를 짓지 않았으며, 어리석게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이 사건의 결론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그와 같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욥처럼 모든 일에 어려움을 당하고서도 죄를 짓지 아니 아니며, 어리석게 원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만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계신다. 그 믿음의 반석 위에 날마다 넉넉히 승리하며 살아가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의 이름으로 간절히 진실로 소망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계십니다.

♣요약
말씀을 통해 상실의 강을 건너는 우리 삶에 믿음을 돌아보아 감사해야 한다. 우리 삶의 현실은 기대와 달리 상실로 가득하듯이, 우리는 예고 없이 다양한 모습으로 찾아오는 상실의 강을 건너야 한다. 우리 모두 인생의 본질이 빈손 인생임을 깨달아, 없이 태어나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다가 결국 없어지는 것이 인생임을 고백하고, 나의 삶이 빈손 인생임을 절감하게 해야 한다. 삶에서 마주하는 이런저런 일에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나의 삶이 관건이 오로지 하나님이 되어서, 나의 삶은 하나님 소관임을 확인하고,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아가야 한다. 삶의 안개를 걷어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계신다, 세상을 향해 선포하며 나의 삶에 자리 잡고 계신 하나님의 존재에 사무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 모든 간구(懇求)를 그날에 더 값지고 영원한 모든 것을 얻게 하실 것을 확신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욥처럼 나아가야 한다.

-영원하도록 지음 받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써 세상이 권하는 잠시의 모든 약속은 다 거짓임을 깨닫고, 없고 없다가도 있는 이 빈손 인생으로 하여금 여호와의 그 크고 의로운 손을 더욱 의지해야 한다. 삶으로 마주하는 이런저런 모든 일의 관건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나의 소견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관아래 있음을 확신하고 흐트러진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아 의심 없이 하나님을 따라가야 한다. 불투명한 내일로 인해 우리 모두의 믿음이 흔들리려 할 때, 그래도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그래도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단 한 번도 흔들림 없이 나를 사랑하셨던 그 하나님의 존재를 선포하면서 하늘에 사무치는 찬송과 감사로 승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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