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8월 21일)
제목:“들으시는 하나님”
말씀: 민수기 11:1-3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부목사님)
사회: 강건우 부목사님

설교자: 오우진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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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11:1-3,
1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시매.
2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3 그 곳 이름을 다베라라 불렀으니 이는 여호와의 불이 그들 중에 붙은 까닭이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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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먼저 광야에서라는 민수기의 제목을 가지고 개론적인 내용을 말씀드리고 좀 본문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민수기의 원 제목은 히브리어로 ‘배 미드바르’ 라고 합니다. 즉 ‘광야에서’ 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요. 원어 성경에서 모세의 오경은 그 제목을 보통은 첫 단어를 제목으로 삼는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민수기는 그 전통을 따르지 않고 다섯 번째 단어를 따르고 있습니다. 히브리 성경의 제목이 보여주듯이 민수기에는 출애굽 한 백성들이 광야에 있을 때 일어난 사건들을 많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I. 첫째, 광야에서.
-일반적으로 우리들에게 광야는 고통(苦痛), 연단(鍊鍛), 시련(試鍊) 등으로 이해되곤 하는데요. 하지만 사실 광야는 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광야(廣野)는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 길 끝에는 아주 분명한 목적지가 있는데요. 구약에서는 가난한 땅으로 가르켜지고 신약의 관점으로 볼 때는 우리가 가고 있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광야는 우리 자신에 대하여 증명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하나님 앞에서 증명(證明)해내곤 하는데요. 어떤 이는 신앙이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도 알게 되기도 하고요. 어떤 이는 연약(軟弱)한 사람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믿음이 견고(堅固)한 사람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기도 합니다. 광야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분명하게 경험하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갖게 됩니다. 말씀을 통해 만난 하나님은 현재적으로 임재 하는 분이시고, 삶의 현장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심을 깨닫게 되니, 광야는 그분을 경험하는 거룩한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광야에서 신자는 단순히 고통이나 시련을 당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하여 증명하고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경험하며 약속의 땅을 향해 전진해 나가는 것입니다. 민수기는 바로 이에 대한 기록이고요. 광야에서 만난 그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인도하사,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가시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성경이라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 11장 1절에서 3절의 본문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먼저 우리는 백성들의 악한 말을 들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II. 둘째, 백성들의 악한 말을 들으시는 하나님.
-여기서부터 좀 무서운 말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제가 좀 밝게 이야기를 해야 되는지, 긴장(緊張)하며 이야기를 했는지 고민을 많이 했는데요. 심판(審判)의 말을 말하다 보니 편안히 얘기하면 안 될 것 같고 또 너무 진지하게 얘기하면 굳을 것 같아서 그냥 적당하게 하려고 하니까 여러분들도 그냥 잘 이해하시면서 말씀을 좀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 3절에 보면 다베라라고 불리게 된 이 곳에서 1절을 다시 한 번 보게 되는데요.

*민수기 11:3,
3 그 곳 이름을 다베라라 불렀으니 이는 여호와의 불이 그들 중에 붙은 까닭이었더라.
1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시매.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였다고 기록이 돼 있습니다. 직역하면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악으로 원망하는 백성들이 되었다. 이 정도의 문장이 될 것입니다. 악으로 원망한 백성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말을 하나님 앞에서 했는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지가 않습니다. 악으로 원망했다는 표현으로 보아 악이 먼저는 마음속에 있었고, 그 마음 안에 담겨 있던 악이 입술로 발화가 되어서 하나님이나 또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를 원망하는 실제적인 어떤 표현이 만들어진 상황이었습니다. 어쩌면 이 말은 직접적이고 노골적(露骨的)인 거친 표현일 수도 있고요.

어쩌면 다소 절제된 표현이었지만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은, 하나님을 조롱하거나 인간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공격적이고 불순한 표현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이들이 악한 말로 원망하였는지 성경은 말하지 않지만 출애굽기와 민수기에 기록된 백성들의 일반적인 문제와 동일한 문제였을 거라고 추측을 합니다. 또한 오늘 민수기의 본문과 구조상 짝을 이루는 출애굽기 15장의 말씀을 보면은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르 광야에서 모세를 원망하였는데, 이들이 모세를 원망했던 이유는 사흘 길을 걸어가는 동안 물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마도 오늘 본문에 사건도 직접적으로는 물과 같이 중중요한 자원이 결핍에서 비롯된 문제가 아니었을까, 이렇게 추측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곳에서 이 백성들도 이런 결핍(缺乏)의 문제로 인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하였는데 마치 전염병(傳染病)처럼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사람의 마음에서 다른 사람의 마음으로 전파되었고, 그 결과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하나님을 원망(怨望)하는 악한 말을 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실제로 조금 전에도 말했던 출애굽기 15장에서 마라에서 백성들이 했던 말을 들어보면은요. 백성들은 모세와 하나님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무엇을 마실까, 우리는 무엇을 마셔야 하나? 이런 식으로 말을 하면서 이후 신 광야에서 원망하며 말하기를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차라리 죽여 버리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렇게 이야기 하고 했던 것입니다. 애굽 땅에서 떡을 배불리 먹었을 때, 내가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행복했을 텐데 하나님을 이렇게 악한 말로 조롱(嘲弄)한 것이죠. 그런데 오늘 1절에 보니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민수기 11:1,
1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시매.
-네 여기까지만 읽겠습니다. 네 여기 보니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함에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악한 말로 원망함에,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마음속에 가득 차 있던 악이 입을 통해 소리로 발화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를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악한 말을 들으셨고, 진노(震怒)하셨고,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 그들을 불사르게 하셨습니다. 심판의 불이 백성들의 진영에 떨어진 것입니다. 2절을 보니,

*민수기 11:2,
2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2절을 보니 불로 심판받는 이 백성들은 모세를 향해 부르짖습니다. 얼마나 그 불이 강렬(强烈)하게 타올랐는지 백성들은 큰 재앙(災殃)을 당하여 절규(絶叫)에 가까 가까운 부르짖음으로 긴급(緊急)하게 자신들의 지도자였던 모세를 찾은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 같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을 듣고 이같이 강렬한 불로 심판을 하셨을까요? 성경은 곳곳에서 사람의 말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곤 하는데요. 잠언 4장 24절은 말하기를,

*잠언 4:24,
24 구부러진 말을 네 입에서 버리며 비뚤어진 말을 네 입술에서 멀리 하라.
-라고 경고 하였구요. 야고보서 1장 26절은,

*야고보서 1:26,
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성경이 이렇게 사람의 말에 대해 경고하는 것은 그 말이 공동체를 파괴하고, 관계를 깨뜨리고 분열(分列)시킬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게 조차도 파괴적(破壞的)인 영향력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경에서 강조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런 말들이 악한 말이 되어 하나님 앞으로 가게 될 때는 이 문제는 다른 차원(次元),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되기 시작합니다. 민수기 14장에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 원망하는 자들에 대해서 경고를 하셨는데요. 민수기 14장 29절에서 30절을 보면,

*민수기 14:29-30,
29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30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서 엎드려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그 약속하신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해서 신약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10절에 말하기를,

*고린도전서 10:10,
10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원망하다가 멸망하였다고 이렇게 경고하였습니다. 여러분, 이들의 특징에 대해서는 주의 형제 형제였던 야고보와 같이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셨던 유다가 유다서에서 어 성경의 구절들을 보면 이들이 과연 누구였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우리 한번 같이 한번 볼까요? 유다서 1장 5절입니다.

*유다서 1:5,
5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않은 자들을 멸하셨으며.
-출애굽한 백성들 중 멸망당한 자를 가리켜 유다는 말하기를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라고 분명하게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는 거였습니다. 또 유다서 1장 10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우리 한번 같이 읽어볼까요?

*유다서 1:10,
10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도다 또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그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영적인 지식이 전혀 없고 단지 이성은 짐승처럼 자기 자신의 현재적인 피로를 본능적으로 느끼고 알고 있습니다. 영적인 지식에 대해서는 무지한 짐승 같은 자들이라고 설명한 것입니다. 유다서 1장 15절을 한번 같이 해볼까요? 같이 읽겠습니다.

*유다서 1:15,
15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니 하나님을 믿지 않고 또 짐승 같이 살아가는 이 사람들이 줄을 거슬러 모든 완악한 말로 하나님 앞에 말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요. 끝으로 우리가 유다서 1장 16절, 18절-19절을 한 번 더 보겠습니다. 16절입니다. 같이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유다서 1:16,18,
16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며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18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19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
-그러니 유다는 이들을 말하기를 정욕대로 행하는 자세, 자신의 정욕대로 하나님 앞에 행하기 때문에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조롱하고, 차라리 애굽에서 내가 죽임을 당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며 하나님을 조롱하는 자들, 그 사람들은 심지어 성령을 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결과적으로 지금 하나님 앞에서 단순히 말해 실수하는 자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믿음에서 파손된 자들입니다. 영적으로는 소경이고, 육체의 소욕을 따라 정욕대로 행하는 자들이고 완악한 말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불경건한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성경은 그들을 성경이 없는 자들이라고 말하니, 얼마나 하나님 앞에 원망하는 자들을 마음껏 해대는 이들을 하나님께서는 심판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오래 인내하셨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원망했는데요. 문법적으로 원망했다는 말은 단회 적으로 한 번 내뱉고 끝난 말이 아니라, 계속해서 반복해 하나님을 심판받고, 멸망 받는 그 시점에까지도 끊임없이 하나님을 원망한 자들이란 걸 보여줍니다. 더욱이 진영 끝에서 그들은 심판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소통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공동체를 분열시킨 이들을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말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주의하여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인생의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을 향해 가는 겁니다. 자원의 결핍이나 그 밖의 문제로 인해 많은 인내를 요구하는 때를 지나가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고통으로 인해 괴로워할 때도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표현들은 우리의 존재와는 비교할 수 없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을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비롯된 말들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만홀(漫忽)이 여김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시고, 우리의 말과 혀로 모욕(侮辱)할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높으신 그분을 찬양하는 마음과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그분의 거룩하심 앞에 경건을 무너뜨리지 않고 단정하고 고요하며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가득히 안고 언제나 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입술에 재갈을 물리고 그리고 그분의 거룩하심 앞에서 우리의 말과 혀를 다스릴 때 우리의 영혼은 참된 경건을 이루고 영원의 온전함을 이루어 가며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잠언이 말하는 성경의 교훈을 이 시간 마음 깊이 새겨두어야 할 것입니다.
*잠언 1:20,
20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오늘 두 번째는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 2절을 한번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2절입니다.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우리 1번 더 같이 읽어볼까요? 같이 한번 큰소리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III. 셋째,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민수기 11:2,
2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여러분 한번 집중해서 본문을 보십시오.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어떻게 됐습니까? 불이 꺼졌더라.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여러분 여기에 바로 우리의 위로(慰勞)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악한 말로 하나님을 원망(怨望)하는 소리만을 듣는다면 얼마나 이것이 우리에게 비극적(悲劇的)인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감사(感謝)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시편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그 심정을 헤아려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시편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그 심정을 헤아려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시편 5장 3절에,

*시편 5:3,
3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요한일서 5장에서도 이렇게 고백하는데요.

*요일 5:15,
15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하나님이 들으시는 줄을 안즉, 성경은 이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언제나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자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세의 기도에는 놀라운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 개인의 어떤 간구(懇求)를 들으시는 차원(次元)이 아니라, 죄를 사(赦)하는 기도, 죄에 대한 심판(審判)에서 생명(生命)을 구원(救援)하는 기도(祈禱)였던 것입니다. 맹렬하게 타오르던 심판의 불은 모세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자 소멸(消滅)되었습니다. 심판하는 하나님은 우리의 원망(怨望)과 불평(不平)만을 들으시는 분이 아니었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죄를 사하시고 심판을 소멸하신 분이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마가복음 14장을 보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리 주님은 피와 땀을 흘리며 기도하실 때, 제자들은 눈이 심히 피곤하여 기도하지 못하고 잠이 들었습니다. 제자들조차 기도하는 것을 어려워해서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그 순간 졸고 말았던 것입니다. 기도할 때마다 우리는 감겨진 우리의 눈 안에서 산만(散漫)해진 정신이 하나님께 우리가 집중(集中)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을 경험(經驗)합니다. 육체는 피곤(疲困)하고 일상적인 일부터 맡고 있는 교회 사역에 이르기까지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들이 우리 자신의 머릿속에 오가서 내가 기도를 하고 있는 건지, 상상을 하고 있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을 만큼 어지럽게 하는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정상적인 생각으로는 단어를 떠올리지 못해서 생각 없이 쏟아내는 단어의 반복이나 차라리 의미는 알지 못해도 소리는 계속 낼 수 있으니 차라리 방언으로 기도하자는 마음으로 계속해서 방언(放言)으로 기도하는 때도 있습니다. 더욱이 어떠한 때는 불안(不安)과 염려(念慮)가 마음을 붙들고 놓지 않아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흐리게 하여 기도에 더욱 어려움을 주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모든 기도의 수고도,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듣고 계시며 심지어는 나의 기도를 통해 영혼의 죄를 사하시고 공동체(共同體)를 구원한다는 이 놀라운 사실 앞에서는 모두 다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조금 전 우리가 읽었던 요한의 서신에서 우리는 무엇이든지 구하는 말을 들으시는 것을 안다는 사도의 말을 읽었죠?

*요일 5:15,
15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바로 다음 구절에 사도는 이와 같이 이야기를 합니다.
*요일 5:16,
16 누구든지 형제가 죄범 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야고보서 5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야고보서 5:14-15,
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형제가 죄를 범하는 것을 보고, 죄로 인해 고통 받을 때 그 영혼을 기도하면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의 기도가 들으시는 하나님의 강권적(强權的)인 역사를 통해 한 영혼을 구원해내고 마는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킨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가지고 있는 가장 위대(偉大)한 힘은 심판대(審判臺) 위에 서있는 죄인을 이끌어내어 생명(生命)의 길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모세 한 사람의 기도도 이와 같은 역사 안에 힘이 있었는데, 만약 우리와 같은 수많은 이들이 하나님 앞에 죄(罪)를 범(犯)하여 고통(苦痛) 중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지금부터 저는 11년 전 한 교회에서 고등부를 맡아 사역(事役)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맡았던 고등부는 대략 240명의 아이들이었는데요. 240명 아이들이 거의 대부분 참석했던 그해 여름 수련회에서 집단적(集團的)으로 이 아이들이 거듭나고 변화(變化)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말씀이 시작된 때부터 무언가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은 것을 느낄 수가 있었는데요. 설교가 끝나고 기도회가 시작되자 아이들이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토로하고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은 자신들의 인생을 하나님의 영광(榮光)을 위해 살려주시기를 눈물을 흘리며 간절(懇切)히 기도하였습니다.

부모님들의 성화에 밀려서 겨우 저녁 집회만 참석하기 위해 학원 끝나고 가방 하나 떨렁 메고 들어왔던 아이들이 집회(集會)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기 위해 차를 타다가 내가 이 수련회(修練會)에 참석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後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면서 우르르 차에서 내려 다시 집회실로 들어와 기도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수련회에 가기 전에는 아니 수련회가 시작하기 전에는 앉은 자리에서 단 5분도 기도하지 못했던 아이들이 첫째 날, 저녁부터 말씀을 듣고 기도하기 시작하는데 새벽 1시가 돼도 기도가 멈추지 않는 상황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다음 날 일정(日程)을 진행하기 위해서 저는 억지로 기도회를 마무리하고 아이들을 재웠습니다.

그다음 날에도 아이들은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데 전날과 똑같이 기도가 멈춰지지 않고 또 다음 날 일정을 위해 억지로 새벽 1시의 기도회를 마무리했어야 했습니다. 신기(神奇)한 것은 은혜 받는 것은 똑같지만 고등학생과 장년들은 좀 다릅니다. 장년들은 기도에 불이 붙으면 멈추지 않고 기도하잖아요. 고등학생들은 간식을 먹고 들어와서 기도합니다. 수련회가 끝나고 주일이 돼서 아이들이 다시 주일에 모였습니다. 예배 시간 말씀을 전하는데 이 아이들이 말씀을 들으며 눈물을 멈추지 않는 겁니다.

부모님들은 수련회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우리 아이가 전혀 다른 사람들이 되어 돌아왔다고 저를 찾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고등부 아이들이 얼마나 변화(變化)가 어려운지 여러분들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저도 고등부를 맡고 나서 얼마나 아이들과 씨름을 했는지 모릅니다. 지금부터 11년 전이었으니까 아주 오래된 일은 아니지만, 저도 그때는 지금보다 혈기왕성(血氣旺盛)하고 아주 특심이 있는 열혈 사역자였습니다. 지금은 좀 많이 착해졌거든요. 저는 고등학생들이 허투(虛套)로 예배(禮拜)하는 게 너무 싫었습니다. 선생님들은 다 아이들을 달래주지만 누군가 하나는 악역을 맡아야지 하며 사냥 시간에 아이들의 핸드폰을 보면 저는 그 아이 손을 잡고 기도해주는 대신 끌고 나가 제발 교회를 나오지 말라고 설득을 했습니다. 말씀 시간에 졸면 내가 너희들 부모님을 설득해 줄 테니까. 제발 말씀시간에 안 오면 안 되겠냐고 부탁을 했습니다. 한번은 설교를 시작하는데 아이들이 설교를 듣지 않는 거예요. 지금 같으면 그렇게 하진 않겠지만, 설교가 시작되고 나서 3분 정도 지난 후에 저는 성경책을 덮고 내려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간곡하게 또 부탁했습니다. 제발 너네 교회를 좀 안 나왔으면 좋겠다. 근데 신기하게도 그렇게 교회를 나오지 말라고 설득을 하는데, 다음 주에 또 나와서 앉아있는 거예요. 그렇지만 달래고 윽박지르고 아무리 말을 해도 아이들이 전혀 변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겨울 수련회가 있었습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려고 준비를 하는데 너무 복통이 일어나는 거예요. 힘이 들어서 병원에 가보니 식중독(食中毒)이었습니다. 원래 수련회 전에 제가 교사를 데리고 기도회를 인도해야 하는데 도저히 참석할 수가 없어서 부장 선생님께 전화를 했습니다. 당시 부장 선생님이 참 신실하신 분이셨는데요. 이분이 제 전화를 받고 정신이 퍼뜩 든 겁니다. 원래 겨울 수련회는 보통 교회에서 진행을 하기 때문에 선생님들이 별로 신경 쓸 게 없습니다.

끝나고 아이들 돌아갈 때 손에 쥐어주는 간식 정도만 맛있게 준비하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던 거죠. 근데 갑자기 설교자가 식중독에 걸리고 교사들도 함께 교사들과 함께 기도회를 못 나오겠다고 하니 위기감(危機感)을 느낀 이 부장 선생님이 선생님들에게 긴급 문자를 남기고 저녁에 모든 교사들이 모여서 기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겨울 수련회 때 제가 맡았던 고등부의 영적인 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진행했던 그 수련회에서 아이들이 진지하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신앙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고, 기도했던 교사들이 이내 아이들의 뚜렷한 변화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당시에 밤새 구토하고 오전에 겨우 일어나 설교를 마무리하고 설교 전에 죽 한 그릇 먹고 나와서 기어가는 목소리로 설교하고 다시 집에 들어가 구토하고 준비하고 죽 한 그릇 먹고 설교했는데 하나님께서 선생님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이들의 영혼을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그해 여름이 되었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여름 수련회였죠. 선생님이 선생님들이 수련회 전부터 이번에는 아예 저한테 기도에 오지 말라고 말하더라구요. 말씀을 집중해서 준비하라고 하면서 수련회 전부터 교사들이 모여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련회장에 도착해 보니, 선생님들이 말씀을 준비하는 저를 위해 마련해 놓은 원룸의 저를 감금시켜 놓고, 본인들은 밖에서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집회 전에 제가 그 장소에 도착을 해보니 모든 선생님들이 동그랗게 모여 앉아 눈물을 흘리며 우리 주님께서 이 밤의 역사하사 아이들의 영혼을 위해 일하여 주시라고 기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름 수련회 저는 매일 저녁마다 3시간 동안 아이들에게 설교했고, 설교를 마무리하며 누가 한 번뿐인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겠냐고 질문을 던졌을 때, 성령께서는 아이들의 온 영혼에 큰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변화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우리가 기도해야 할까요? 왜 우리가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며 왜 우리는 모일 때마다 지도하는 일에 힘써야 할까요? 왜? 우리는 토요일 새벽마다 모여서 우리 사랑의 교회와 한국교회와 대한민국의 영적인 재건과 세계선교를 마무리하기 위해 기도해야 할까요? 단 한사람의 기도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심판으로 타오르던 불길을 꺼뜨리는 힘이 있는데, 7천 명이라는 기도의 사람들이 매주 하나님 앞에서 영혼을 위해, 교회를 위해, 국가를 위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도한다면,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우리 주님께 돌아오는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우리는 자신에게 일어난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고 오히려 다른 영혼(靈魂)들의 연약함을 위해서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는 자리에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광야(廣野)를 지나는 가운데 불편하고 인내해야 되는 상황(狀況)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 믿음으로 맡겨드리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앞에 수많은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면 이것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놀라운 특권이 되겠습니까?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계신데, 영혼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것은 나의 간구를 들으시고 영혼을 죄에서 건져내시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 번뿐인 인생인데, 어려운 형편을 푸념이나 하면서, 원망 가운데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영혼을 구원하시는 이 위대한 일에 동참하여 지도의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설 것인지를 우리는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사랑하는 남편, 사랑하는 아내, 사랑하는 부모님 혹은 사랑하는 자녀들이 돌아오기를 오랜 시간 기다린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이 있으시다면 낙심(落心)하지 마시고 다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의인의 기도는 간구(懇求)하는 힘이 있고 영혼(靈魂)을 죄에서 구원(救援)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살지 않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참여(參與)하지 않는다면 그런 인생에 어떤 기쁨과 즐거움이 있겠습니까? 바로 그 일에 있어 우리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시는 하나님이 계시니 지금은 우리가 한마음이 되어서 기도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지금도 수많은 영혼들의 죄(罪)를 사(赦)하시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계십니다.

♣요약
우리는 많은 인내가 필요한 광야 같은 인생길에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는 믿음의 고백과 간구로 날마다 승리하여 매일의 찬송과 감사가 하늘에 사무치게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진정으로 생명을 구해야 하며, 사랑하는 가족, 친척, 친구, 이웃에게 영혼의 죄를 사하며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큰 구원 역사를 속히 베풀어 주시길 간절히, 절규하며 기도해야 하며, 7천 기도용사를 필두로 사랑의 교회 모두 영 가족들이 ‘2033-50 비전’으로 맹렬히 기도할 때, 대한민국 영적 재건과 세계선교를 마무리 하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승리를 경험하게 될 것을 확신한다.
-우리는 말씀을 들은 대로 반응할 수 있는 은혜를 간구해야 한다. 영혼의 죄를 씻기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부르심과 기도할 때마다 거듭남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심을 확신하여, 힘든 역경 속에서도 물러나지 않고, 더욱 열심을 다해 기도해야 한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척과 친구와 이웃을 기도의 자리에서 건져내는 놀라운 역사들이 끊이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교회마다 주님의 자녀들로 기쁨으로 차고 넘쳐나길 소망한다.

*민수기 11:1-3, 요약.
-이스라엘 백성의 죄는 그들이 여호와를 원망했다는 것이다. 율법(律法)이 죄(罪)를 드러내기는 하지만 없애지는 못한다. 율법이 죄를 저지하기는 하지만 이기지는 못한다. 그들은 불평하였다. 그들이 감사할만한 것을 그렇게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불평할 만한 어떤 꼬투리를 발견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죄로 인해 받으신 모욕(侮辱)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정당하게 진노(震怒)하셨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이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징벌(懲罰)하심으로써 심판하셨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노하셨으므로 그들은 모세를 찾아와 하나님의 진노에서 그들의 친구를 도와달라고 청하였다. 그들을 위한 모세의 중재 기도는 응답되었다.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제물을 받으셨으므로 진노의 불이 꺼졌다. 불평하는 백성의 수치(羞恥)를 영원히 알리기 위해 그곳을 새로운 이름으로 칭하였다. 그곳은 다른 사람들이 듣고 두려워하며 경고(警告)를 받아 그들처럼 죄를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다베라` 곧 `불사름` 이라고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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