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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9월 4일)
제목:“어느 산 위에 계십니까?”
말씀: 오바댜 1:8,17,21
찬양인도: 쉐키나(유재원 부목사님)
 
설교자: 안 승훈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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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댜 1:8,17,21,
8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에 내가 에돔에서 지혜 있는 자를 멸하며 에서의 산에서 지각 있는 자를 멸하지 아니하겠느냐.
17 오직 시온 산에서 피할 자가 있으리니 그 산이 거룩할 것이요 야곱 족속은 자기 기업을 누릴 것이며.
21 구원 받은 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
 
80~90년대쯤에 잠깐 유행했던 개그가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그해 100만 대군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다가 한 봉우리에 힘겹게 올랐는데 잠깐 주춤하면서 살펴보더니, 이 산이 아닌 가벼? 하니까 50만 명이 기가 차서 죽었고, 그리고 그 옆 봉우리로 남은 50만 명을 이끌고 힘겹게, 힘겹게 올랐다가 다시 두리번, 두리번거리며 말하기를 아까 거긴 가벼!! 하니까 그 나머지 50만명도 힘들어 죽었다. 라는 이야깁니다. 당연히 사실은 아니죠. 하지만 나폴레옹이라는 강한 통솔력을 가지고 절대적인 신뢰를 받았던 사람이 여러 악수를 두면서 그 군대를 모두 소진하고, 결국 몰락하게 되었던 역사적인 사실을 어느 정도는 상징적으로 그려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최근에 보았던 한 국군 예비역, 장군의 글에서도 이 비슷한 상황을 우려하는 것을 저는 보았습니다. 이것은 이런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실제입니다.
 
미군과 국군이 같이 합동 훈련을 하는데, 작전을 다 한 뒤에 미군이 한국군을 평가를 하면서 한국군이 장비도 잘 갖추고 전투도 잘하는데 의외의 한 부분에서 큰 약을 보았다. 한국군이 작전을 잘하고 총과 같은 좋은 화기도 갖추었는데, 이상하게도 방향을 알게 하는 나침반을 소대별로 한 2개 정도밖에 구비하지 않았더라. 그래서 전장에서 훈련장에서 이리저리 우왕좌왕(右往左往)하는 모습을 자주 이것은 실전에서 매우 치명적(致命的)이다라고 평가했던 일입니다. 우리가 충분한 역량을 결정적인 순간에 다른 산에 올라가 있게 되면 모든 일을 그르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성경에서도 잘못된 산에 올라서 모든 일을 그르치게 되었던 한민족을 읽었습니다. 그 민족이 오늘 읽은 오바댜는 사실 1장짜리 아주 짧은 성경이죠. 평소에 자주 찾아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주 내용은 이 에돔 족속에 대한 심판을 다루고 있습니다. 에돔은 우리가 평소에 자주 언급하는 일반 민족도 잘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이름을 조금만 바꾸어 보면 여러분이 에돔은 ‘붉은’ 이라는 뜻인데요. 성경에는 이 이름의 뜻을 가진 한 사람이 나오죠. 바로 에서입니다. 에돔은 에서의 후예들입니다. 에서가 누구죠? 바로 열국의 아버지라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하나님께 직접 받았다. 쌍둥이 형 친형제입니다. 그런데 이 오바댜서가 바로 이스라엘 하나님 백성의 쌍둥이 형제의 후손들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에돔에 대한 심판은 바로 하느님 백성의 친형제 쌍둥이 형제와 같은 아주 가까운 이들에게도 심판이 임할 수 있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성경입니다. 잘 생각해보면 이 에서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죠. 그 유명한 아브라함의 직계손자입니다. 아브라함의 또 다른 아들 이스마엘이야 하갈의 아들이어서 어쩌면 그 계통에 들지 못하고 쫓겨나서 이슬람의 조상이 되었구나, 저희가 이렇게 인식할 수 있지만 아브라함의 정실인 사라의 아들 이삭이 오랜 시간 기도하여서 얻은 리브가와 그가 바로 혈통적으로 야곱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쌍둥이에서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아브라함의 차수이 이삭의 아들이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의 친형제 애서가 우리에게 이름도 익숙치 않은 이방 민족처럼 여겨지고 심지어 성경에는 그들의 심판이 기록되게 된 것일까요?
 
쌍둥이 형제로서 하나님 백성과 정말 가깝다 여길 수 있는 사람들인데 가까이 있다고 생각해 너무나 안타깝게 이 간발의 차이로 구원의 백성이 아니라, 심판받는 백성이 되고 만 것일까요? 그 이유를 우리가 살펴보면서 혹시나 우리도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과 정말 가까이 있고, 생활권을 살아간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 심판받는 백성이 되어버리지는 않는지, 우리가 천천히 말씀을 통해서 돌이켜 보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 일컫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이 에돔이 왜 심판받는 백성이 되었는가, 오바댜서에서는 그 이유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일장팔절의 말씀입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오바댜 1:8,
8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에 내가 에돔에서 지혜 있는 자를 멸하며 에서의 산에서 지각 있는 자를 멸하지 아니하겠느냐.
-에서의 산에서 지각 있는 자들이 멸절된다고 말합니다. 에서의 산이란 세일 산을 뜻합니다. 창세기 36장 그래서 ‘곧 에돔이 세일 산에 거주하니라.’ 세일 산에 산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었기에 이 에서 족속의 멸절에 이르게 되었을까요? 이것은 세일산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산에 거주하는 에돔 족속이 갖게 된 마음 때문입니다. 이 세일 산은 교만하게 했습니다. 오바댜서는 에돔이 심판 받는 이유를 3가지로 알려줍니다. 오바디아 1장 3절의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I. 첫 번째, 교만(驕慢)입니다.
 
*오바댜 1:3,
3 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바위 틈에 거주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
-하나님께서는 이 바위틈에 거주하고 높은 곳에 살면서 그 지형을 의지하여 교만해진 에돔을 심판 하신다고 합니다. 에돔 땅은 산지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올라가려면 매우 비좁은 길을 지나가야 됐습니다. 이 길은 몇 명의 군사만 배치해도 얼마든지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저희가 익숙한 삼국지의 촉나라가 험준한 지형 때문에 훨씬 더 세력이 큰 위나라와 오나라와 자웅을 겨루면서 삼국시대를 열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 에돔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어찌 저 구석에서 산지에 있었다면 그냥 그곳에 사는 자들이고 이렇게까지 교만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에돔은 마침 왕의 대로라 불리는 고대 근동의 가장 큰 두 문명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교역로(交易路), 요충지(要衝地)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에서 당시에는 아니지만, 후대의 이 지역에는 우리가 지금도 볼 수 있는 ‘페트라’-(요르단 서남쪽 고대도시 유적-붉은 장밋빛이 나는 부조건물-세계유산) 라는 바위 속에 요새 도시가 건설되었고요. 그것은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지금도 유명한 유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주요 교역로에서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要塞)까지 들어차고 앉았으니까 에돔은 누가 나를 끌어내랴.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다음 절 1장 4절에 말씀하십니다.
 
*오바댜 1:4,
4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오바댜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좀 더 잘 아는 선지자 예레미야도 똑같이 말합니다. 우리 예레미야 49장 16절의 말씀을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예레미야 49:16,
16 바위 틈에 살며 산꼭대기를 점령한 자여 스스로 두려운 자인 줄로 여김과 네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네가 독수리 같이 보금자리를 높은 데에 지었을지라도 내가 그리로 부터 너를 끌어내리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와 같은 말씀을 하고 계시지요. 근데 하나님이 왜? 이런 교만한 태도를 싫어하실까요? 왜 이런 태도를 심판하실까요? 그저 하나님 보시기에 꼴사납다, 보기 싫다, 이 정도여서 그러실까요? 왜냐하면, 이 교만이 근원이 되어서 에돔이 심판받게 되는 두 번째, 세 번째 이유가 알 감자가 따라 나오듯이 줄줄이 따라 나옵니다. 이 교만 때문에 유발된 에돔이 심판 받은 두 번째 이유는 7절에 나오는 ‘지각이 없음’입니다. 우리가 7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II. 두 번째, 지각(知覺)이 없음입니다.
 
*오바댜 1:7,
7 너와 약조한 모든 자들이 다 너를 쫓아 변경에 이르게 하며 너와 화목하던 자들이 너를 속여 이기며 네 먹을 것을 먹는 자들이 네 아래에 함정을 파니 네 마음에 지각이 없음이로다.
-지각이 없다. 라는 말을 영어 성경, NASB에서는 데일즈 노 언더스탠딩 인 힘(There is no understanding in him)이라고 표현합니다. 그가 이해를 하지 못한다. 잘 알지 못한다. 라는 말이죠. 오바댜 선지자는 이 지각이 없는 무언가를 지금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에돔이 그 안에 있던 지혜 자들조차도 또 없어져서 더욱더 지혜가 없게 될 것이라고 이 지각없음이 심화될 것이라고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흥미로운 것은 이 에돔은 원래 고대 성경에서 지혜로 유명했던 곳입니다. 대표적으로 족장 시대 저희가 창세기부터 출입국 직전까지라고 일컬어지는 이 시대에 아주 대표적인 인물 성경 인물 바로 욥이 에돔 지역 출신입니다. 욥기 1장 1절에서는 요에 출신 지역을 ‘우스’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우스가 바로 에돔 지역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그 옆을 위로하러 와서 욥기 그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세 친구의 참 여러 가지 권면, 우리가 인간적으로 보기에는 참 지혜로운 말들이 많이 있는데 그 지혜 자들 중 하나 세 친구 중 하나 엘리바스가 대만이라고 하는 에돔 북쪽의 도시 출신이라고 성경은 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에돔에는 지혜 자들이 원래 많았을 뿐만 아니라, 에서가 선택했던 것처럼 이 에돔이라는 지역에 산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관점에서는 참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요충지에 그리고 주요 교역로를 선택한 것은 자신의 안전(安全)과 부(富)를 보장(保障)하는 일이었죠.
 
에서는 이 세일 산을 택해서 요새처럼 튼튼함에 왕의 대로를 선택해서 그 부유함에 아! 나, 참 지혜롭게 선택을 잘 했다. 투자를 잘했다. 그랬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기준으로는 참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 지혜로운 선택을 하면서 포기한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하나님의 땅을 떠났죠. 에서는 세일을 선택하면서 가나안을 떠났고, 반면 야곱은 하나님께서 그의 조상들에게 주신 땅에 남아 있었습니다. 창세기 36장과 37장이 이 둘의 선택을 대비해서 그리고 있습니다. 창세기 36장 6절에서 8절을 우리 같이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창세기 36:6-8,
6 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자기의 가축과 자기의 모든 짐승과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모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의 동생 야곱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으니.
7 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주할 수 없음이러라 그들이 거주하는 땅이 그들의 가축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더라.
8 이에 에서 곧 에돔이 세일 산에 거주하니라.
-그런데 37장 바로 다음 장 첫 절 1절에서는 야곱은 다른 선택을 알려줍니다. 37장 1절 보겠습니다.
 
창세기 37:1,
1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땅에 거주하였으니.
-에서는 이렇게 세일 산을 선택하기 전에도 사실은 이미 한 번 더 지각없는 선택을 했던 사람입니다. 바로, 여러분이 잘 아시는 하나님의 백성의 장자 권을 죽 한 그릇에 팔았던 사건이죠. 히브리서에서는 이 사건을 두고 그가 자기 눈에 보이지만 영원하지 않은 것들 때문에 영광의 소망을 저버렸다라고 평가합니다. 히브리서 12장 16절 17절 말씀 같이 보겠습니다.
 
*히브리서 12:16-37,
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17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에서는 보기에 좋은 부와 안전을 택하면서 보이지 않으나 더 중요한 하나님 백성의 장작 권을 가벼이 여겼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에돔이 조상 때로부터 나타난 교만의 상징이요. 심판받게 되는 두 번째 이유인 것이죠. 어쩌면 에서 스스로 보기에는 자신이 유목 사회에서 남자답고, 사냥을 잘하는 그의 능력을 더 믿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야곱에게 판 장자권이 서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야곱과 단둘이 구두로 말을 했기 때문에 실제로 이게 내가 판다. 라고 말해서 팔려가는 것이라 생각도 안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이것을 하찮게 여기는 그의 지각없는 모습을 보셨던 것이죠. 심지어 에서와 야곱의 아버지 이삭은 이 사건 이후에도 여전히 에서를 신뢰해서 그에게 축복을 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대가를 에서가 톡톡히 치렀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놀랍게도 저는 이 사건 이후에도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이 없이도 많은 불을 스스로 일구었고, 그 부을 의지하여서 아, 내가 이것 없이도 살아갈 수 있구나! 라고 세일 산을 택하여 떠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부여하신 이 권한의 중요성을 지각하지 못하고 자기의 실력과 안목만을 믿고 이 땅의 능력과 부유함만을 따라갔던 것입니다. 그의 후손들 역시, 자신들의 부와 안전을 믿고 하나님께 대하여 교만했습니다. 이들의 교만이 하나님께 대하여 이 지각없는 모습으로 나타났는데, 이 교만은 형제에 대하여는 이 교만이 또 다른 에돔이 심판받는 이유, 세 번째 이유, 바로 형제에 대한 포학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10절 말씀 보겠습니다.
 
III. 세 번째, 형제에 대한 포악(暴惡)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오바댜 1:10,
10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으로 말미암아 부끄러움을 당하고 영원히 멸절되리라.
-에돔의 후손들은 형제 민족인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과 대립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이스라엘이 제국의 침입을 받자, 그들은 환난(患難)을 방관(傍觀)하고 조롱(嘲弄)하고 심지어 그 침입에 적극적으로 앞장서기도 했습니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이스라엘을 때리는 제국 앞에서 에돔은 너무나 밉상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에돔이 왜 이렇게 행동을 했을까요? 인간적으로는 에돔이 이 형제의 대하여 포학할 만한 이유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조상에서도 야곱에게 속임수를 크게 당한 바가 있고요.
 
그런데 그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애덤 족속은 서로 엎치락, 뒤치락 하면서 오랜 원한 관계가 이어졌습니다. 우리 표를 하나 잠시 보겠습니다. 족장 시대에 처음 말씀드렸던 에서와 야곱은 야곱의 속임수로 에서가 장자의 축복을 뺏겼죠. 창세기 27장에 나옵니다. 그런데 출애굽 시기가 되자, 이번에는 에돔 족속의 반격이 이어집니다. 출애굽 한 백성들이 이 땅을 지나가려고 하자, 에돔 족속은 거절하고 이들이 광야로 더 크게 돌아가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더 세월이 흘러서, 이제 이스라엘이 왕정 시대에 접어들자, 그 유명한 다윗 왕이 에돔을 쳐서 그들을 속국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사무엘하 8장에 나옵니다. 그런데 그 아들 솔로몬 시기에 또 에돔이 반기를 들어서 소요 사태를 일으키죠. 이렇게 엎치락뒤치락 하는 것은 그 이후에도 이어집니다. 여호사밧이 왕이 되었을 때에 여호사밧 왕이 다시 에돔을 정벌(征伐)하러 가서 재정복했고요. 그것이 역대하 이 역사서 마지막 부분에 기록되고, 그 여호사밧의 아들 때가 되자, 또 에돔이 반기(反旗)를 일으켜서 독립(獨立)을 합니다. 계속해서 이들은 마치 우리 치고 받고 싸우는 형제의 라이벌 관계처럼 엎치락뒤치락 하다가 결국에는 외세 열강(列强)의 침입(侵入)을 받게 되는데, 그때 에돔이 이 이스라엘에 대한 오랜 원한(怨恨)으로 열강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것입니다.
 
아마 오바댜서, 오늘 이 기록된 말씀은 그 때를 염두에 두고 훨씬 더 전에 예언(豫言)으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推定)됩니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오바댜서 1장 11절에서 14절까지는 이 에돔 족속이 형제 이스라엘 족속의 환난(患難)에 대해서 수수방관(袖手傍觀)하고, 11절에, 그리고 12절에는 형제의 몰락(沒落)을, 기뻐하는 모습을, 13절에는 이 형제가 어려워 고난을 받을 때 오히려 거기서 이득(利得)을 취(取)하고, 14절에는 그 형제가 환난을 피(避)하지 못하도록 오히려 그들을 잡고 섰던 그 포악(暴惡)한 모습을 그리며 책망(責望)합니다.
 
그런데 이 포악이 너무나 어리석습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결국 같은 적들에 의해서 똑같이 멸망(滅亡)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미워하는 이웃의 집에 불난 걸 구경하다가 자기 집도 불타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에돔의 멸망은 유다가 주전 586년에 멸망하고, 30년도 지나지 않아 주전 553년에 일어납니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이 두 왕국이 멸망을 했다가 일시적으로 잠깐 회복(回復)된 시기도 비슷합니다.
 
그들을 지배하던 제국이 바뀌고 또 바뀌어 가다가 주전 152년이 되니까 이스라엘에서 레위 지파가 주도해서 마카비 왕조라는 독립 왕국을 이룹니다. 그리고 이들이 또 그들 주변에 살고 있던 에돔 족속, 당신은 이두메인이라고 불리던 이들을 또 가서 정벌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개종시킵니다. 유대교로 개종시킵니다. 그리고 이 왕조가 어떻게 몰락 하냐면, 그 이두메인의 가문 가운데 힘을 잡았던 헤롯이라는 가문이 등장해서 로마와 손을 잡고 유다 마카비 왕조를 멸망시킵니다. 또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이죠. 그나마 이 헤롯의 통치에 대하여서 성경에서 반발이 적었던 이유는 그가 명목상으로 유대교로 개종을 했고, 또 이 유대인들을 달래기 위해서 성전을 증축(增築)하는 일들을 보였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 헤롯도 잘 아시는 대로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에, 내 왕권이 흔들릴까 두려워 많은 유대인들을 또 학살(虐殺)합니다. 그리고 그 시대의 유대인 지도자들도 예수님께서 그들의 기득권을 위협할까 두려워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데 앞장서 버리고 맙니다. 시간이 흐르고 흐르고, 엎치락뒤치락 하다 보니까 이 형제가 어느덧 같은 통속, 그놈이 그 놈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유다의 멸망을 또 한 번 예언하신 성전이 무너지는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함락(陷落)이 될 때에 이두메인들도 역사의 뒤안길로 같이 사라졌습니다. 과거에는 겨우 이 30년간 짧은 시간차를 두고 멸망했던 이 두 문족이 이제 같은 시기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같이 멸망의 길을 걷는 것은 우리에게 참으로 많은 점을 시사(示唆)합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가장 가까웠던 이 에돔에 대한 경고(警告)는 사실 하나님의 백성을 포함한 우리 모두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오늘 오바댜서가 일견 에돔의 심판(審判)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후반부 15절에 가면 갑자기 이 경고가, 이 심판이 열국, 만국을 향해서 확대됩니다. 우리가 1장 15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오바댜 1:15,
15 여호와께서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웠나니 내가 행한 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내가 행한 것이 내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에돔에게 적용되는 이 기준은 만국(萬國), 즉 모든 나라, 모든 족속에게 적용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도 적용되어서 이들이 동시에 멸망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돔이 이스라엘에게 악을 행했으니까 그들만 멸망시키겠다고, 에돔이 이스라엘에게 어떤 악도 행하지 말고 그저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행하는 악을 다 당하고 있으라고 결코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후손들이 애굽에서 출 애굽하여 큰 민족을 이루며 가나안으로 들어올 때에 에돔을 건들지 말라고 분명히 성경에 말씀하셨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그들의 영토를 지킬 것, 그리고 그들의 신분을 보호해 줄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먼저 영토 명령의 보호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 신명기 2장 1절에서 5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신명기 2:1-5,
1 우리가 방향을 돌려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홍해 길로 광야에 들어가서 여러 날 동안 세일 산을 두루 다녔더니.
2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3 너희가 이 산을 두루 다닌 지 오래니 돌이켜 북으로 나아가라.
4 너는 또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세일에 거주하는 너희 동족 에서의 자손이 사는 지역으로 지날진대 그들이 너희를 두려워하리니 너희는 스스로 깊이 삼가고.
5 그들과 다투지 말라 그들의 땅은 한 발자국도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세일 산을 에서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라.
-비록 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었다가 자신의 어리석음과 교만(驕慢)으로 인해서 가나안을 떠났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400년이 지나도 그들을 치지 말라 그들의 땅을 취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결국 그들이 다시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신명기 후반부에 그들의 신분에 대한 보호(保護)의 명령(命令)으로서 다시 한 번 드러납니다. 신명기 23장 7절에서 8절 말씀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신명기 23:7-8,
7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네 형제임이니라 애굽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네가 그의 땅에서 객이 되었음이니라.
8 그들의 삼 대 후 자손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이 형제 에돔을 보호하고 사랑하여 결국 애돔이 떠나갔다가도 다시 하나님의 총회(總會)에 들어오기를 바라셨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좀 전에 쭉 말씀드렸다시피 그들은 서로 싸웠고 손잡고 멸망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자녀로서 선한 싸움을 싸울 좋은 경기를 가지고도 내가 지금 어느 산에 올라와 있는지를 잠시 파악을 못해서 이 엉뚱한 에서의 산에 오르면, 우리가 받은 그 좋은 약속이, 그 자원(資源)들이 다 소용이 없게 될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이런 멸망의 길을 걷게 될 수도 있습니다.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우리 믿는 자들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불화가 일어나고 성도가 이래도 되는가 하는 상황들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어리석음은 결코 어떤 특정한 부류의 사람에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까 보았던 것처럼 너무나 일상적인 것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지금 우리가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는 경제적인 안정과 지위의 유혹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에돔도 그것에 빠졌고 결국 이스라엘도 빠진 유혹입니다. 에돔도 그것에 빠졌고 결국 이스라엘도 빠진 유혹입니다. 우리는 그런 교만의 유혹에 지각 없이 빠져서는 안 됩니다. 이 에서의 산에 올라서는 안 됩니다. 오바댜서는 우리에게 구원의 산에 오르라고 말합니다. 에서의 산은 멸절될 것이나 시온 산에 피할 자가 있으리라고 선포합니다. 17절 말씀입니다.
 
*오바댜 1:17,
17 오직 시온 산에서 피할 자가 있으리니 그 산이 거룩할 것이요 야곱 족속은 자기 기업을 누릴 것이며.
-오바댜서에서는 이 산이 야곱 족속만 구원받는 것처럼 쓰였지만, 우리는 그 이후의 성경을 다 알고 있죠. 그 이후에 오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산에는 이제는 야곱 족속만 부르신 것이 아니라, 주께서 만국 백성을, 우리를 포함한 이들을 다 부르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산에 오른다는 것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요? 미가 선지자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미가서 4장 2절입니다.
 
*미가 4:2,
2 곧 많은 이방 사람들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돌을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니라. 우리가 그의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원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여호와의 산에 오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대로 하나님의 길로 행하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감사하게도 오바댜서의 마지막 부분은 시온 산에 오른 자의 삶의 태도를 우리에게 세 가지로 알려줍니다.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여러분들께 우리가 어떻게 시온산에 오른 자의 태도로써 살아갈지 세 가지를 간단하게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IV. 네 번째, 시온 산에 오른 자의 삶의 태도를 우리에게 세 가지로 알려줍니다.
 
-⓵여호와의 산에 올라가는 방법-첫 번째로, 우리는 이 산에 오를 때에 심판은 내가 아닌 하나님이 하시는 것임을 기억을 해야 합니다. 16절 말씀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오바댜 1:16,
16 너희가 내 성산에서 마신 것 같이 만국 인이 항상 마시리니 곧 마시고 삼켜서 본래 없던 것 같이 되리라.
-선지 서에서 등장하는 이 마시는 잔(盞)은 바로 심판(審判)의 잔(盞)을 의미합니다. 만국 인이 마신다는 이 16절의 말씀은 천하 만민이 하나님 앞 시온 산에서 공정(公正)히 심판받는 날이 반드시 오리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심판의 권한이 하나님께 있음을 기억하면서, 내가 에서의 산에 올라 자신의 권세나 안전한 위치를 이용해서 남을 정죄(定罪)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드메인 헤롯은 자신의 왕권을 이용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고,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행실 도덕적 우의를 근거로 예수님을 비난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같이 몰락했죠.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이러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은지 우리는 반드시 돌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회 속에서 SNS나 댓글과 같은 익명의 안전성 뒤에, 그런 산성 뒤에 숨어서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모습에 휩쓸려서도 안 될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형제 사이에 너무나 자주 일어납니다.
 
특히 오래 보았던 우리 동력 자들 사이에도 많이 일어납니다. 목회자들도 마찬가지고요. 이 자리에 많이 와 계신 우리 훈련생들, 예전 우리 순장님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참 열심히 하여 훈련을 받고 이 수요예배에 나와 앉아 있지만 혹여 내가 여전히 그럴 만한 이유를 가지고 남을 정죄하고, 그럴 만한 이유를 가지고 남에게 포악해도 된다고 자신을 생각하고 있다면, 내가 지금 에서의 산에 올라와 있지 않은지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⓶여호와의 산에 올라 살아가는 방법 두 번째는 우리가 피할 곳은 다른 어떤 곳도 아니요, 하나님 것밖에 없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17절 말씀 읽겠습니다.
 
*오바댜 1:17,
17 오직 시온 산에서 피할 자가 있으리니 그 산이 거룩할 것이요 야곱 족속은 자기 기업을 누릴 것이며.
-이것은 이미 앞서 묵상한 에서의 태도를 통해서 우리가 반면(半面)교사(敎師)를 얻는 것입니다. 내가 이 땅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 곁이 아닌, 하나님의 약속의 장소가 아닌, 다른 든든한 요새와 대로에 의지해서 나의 안전과 나의 소망을 의탁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⓷여호와의 산에 올라 살아가는 방법 세 번째,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나라가 하나님의 것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21절 같이 읽겠습니다.
 
*오바댜 1:21,
21 구원받은 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
-에서가 야곱을 떠나서 세일에 자리 잡은 뒤에 그의 후손들은 아주 금방 왕조를 세웠습니다. 창세기에서는 그들이 이스라엘보다 훨씬 더 일찍 왕을 가졌다라고 말합니다. 36장, 창세기 36장 31절에,
 
*창세기 36:31,
31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는 왕이 있기 전에 에돔 땅을 다스리던 왕들은 이러하니라.
-라고 그 목록을 나열하는데, 나중에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여 이 땅에 와 보니 이 주변 민족이 왕을 가진 모습이 참 부러웠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이 왕정을 세우고 난 이후에 자신들의 왕, 다윗을 통하여 에돔 땅을 침공(侵攻)하고 형제의 싸움이 격화되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왕이심을 망각(妄覺)하고 우리 자신 가운데 왕의 모습을 더욱 더 드러낼 때에 이 왕들의 싸움이 이 땅 가운데 만연(漫然)하다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내가 왕인 채 살아가는 이 땅의 모습, 그것이 교만하고 지각없는 형제에 대한 포악한 모습의 절정(絶頂)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성산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철저히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모습, ⓵주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다. ⓶나의 피난처는 주님 앞밖에 없다. ⓷주님이 왕 되신다. 라는 모습을 통합하신 분이 바로 오늘 우리가 찬양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교만할 이유를 다 가지고 가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지각 없이 다른 곳에 의지할 이유도 다 가져가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형제에 대하여 그들이 이렇게, 이렇게 역사 속에 나의 삶 속에 행했습니다. 라고 그들에게 우리가 마땅히 포악해도 될 만한 이유조차도 다 가져가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앞에 무릎 꿇을 때에, 이성산에 오를 때에 우리는 더 이상 애서의 산에 올라, 이산이 아닌 가벼!!! 하고 멸망당하지 않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누리게 하시는 백성의 복락(福樂)을 다 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 주님의 그 날을 기대하며 나의 마음을 지켜서 왕 되신 주님의 통치를 누리며 살아가기를 소망하며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요약
주님께서 왕 되심을 믿고, 내가 남에 대하여 포악할 그 어떤 이유도 이 세상 어떤 것도 의지할 이유도 없도록 내게 충분한 은혜를 주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앞에 그 성산에 늘 거하는 주의 백성으로서 모두가 교만(驕慢)하지 말고, 지각(知覺)이 없이 행동하지 말며, 형제에 대한 포악(暴惡)은 생각에 조차 없어야 한다. 시온 산에 오른 자의 우리는 삶의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이 하실 일을 기억하여 오직 하나님 밖에 없음과 이 나라가 하나님 것임을 기억하여서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고 무릎 꿇어서 우리가 어느 산에 있는지를 기억해야 하여 올바른 산에 올라서 진정한 복락을 누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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