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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9월 11일)
제목: "하나님만을 끝까지 신뢰하는 제자"
말씀: 누가복음 12:1-12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부목사님)
사회: 강건우 부목사님
설교자: 강경식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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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2:1-12,
1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2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3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4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5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6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7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8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9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10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11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12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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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는 중에 특별히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 오셔서 수많은 기적(奇蹟)들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부분에 있어서 사람들이 얼마만큼 모였는지를 보면 성경의 표현대로라면 서로 밟힐 만큼 모였다. 라고 합니다. 이 표현대로라면 아마도 여기에 계신 모든 우리 손님들의 생각을 해보면 아마 다닥다닥 붙어서 예배를 드리는 숫자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많은 기적을 베푸시는 그분이 지금 이 시간에 오신다면 아마 이 시간은 예수님을 보려고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가 10월 27일 광화문에서 한국 교회 200만 연합예배 및 큰 기도회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됩니다. 그때 현장에서 서로 밟힐 만큼 모여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기를 소망합니다. 그때 현장에서 서로 밟힐 만큼 모여서 하나님께 나갈 때 그때가 우리가 하나님께 전심으로 나아가는 시간이고 또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는 귀한 은혜가 있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동성(同性)애(愛)라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숨기고 그것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성경을 왜곡하고 또 기독교인들의 입을 막으려는 그러한 그들의 모든 시도가 있습니다. 그것을 무력화(無力化)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임을 믿습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주변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한 부류는 무리이고 한 부류는 제자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 주님의 말씀보다는 떡을 먹고 배부름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十字架)에 못 박혀 죽으실 때 모두 떠났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핍박(逼迫)이 올 때 비록 두려움 때문에 한순간 잠시 부인은 했지만, 끝내 예수님을 위해서 한평생 살았습니다. 본문 10절에서,
*누가복음 12:10,
10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말로 인자를 거역(拒逆)하면 용서(容恕)를 받지만 성령(聖靈)을 모독(冒瀆)하는 자는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성령을 모독한다는 것은 그 해석에 있어서 여러 가지 의견이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영향력(影響力)있는 설득력 있는 해석을 보면 성령을 모독한다는 것은 구원과 관련하여 성냥의 메시지와 사역을 단순히 이례적(異例的)인 거부가 아니라, 지속되고 일관(一貫)되게, 끝까지 그리고 또한 결정적으로 부인하는 것을 말한다고 합니다. 결국 성령을 끝까지 거부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 수순(數旬)으로 구원(救援)을 받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⓵오늘날 교회 안에도 무리와 제자가 있습니다. 육신의 일에만 관심을 갖는 사람은 자신에게 어려움이 찾아들면 교회를 떠나는 그런 사람들은 무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⓶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順從)하고 끝까지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제자(弟子)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비에 참여하시는 모든 우리 성노님들은 아무리 힘들어도 주님을 끝까지 따라가고 섬기는 주님의 제자인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진정한 제자로서의 모습이 어떠해야 되는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온라인으로 참여하시는 분들과 이 자리에 참여하시는 모든 우리의 성도님들은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시고 있을 줄 믿습니다. 또한 주님의 제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이 시간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시는지를 귀 기울이시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I. 첫째,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外飾)을 주의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여러분은 바리세인 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바리세인은 율법을 연구하는 사람들이고 그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고 또 구조 율법이라고 하는 것을 연구하고 또 중요시 여겼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경건(敬虔)하게 살고자 몸부림치는 사람들이었기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尊敬)을 받았고 그리고 이스라엘에서도 영향력이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경건하게 살고자 했던 사람들이 자신들만의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자부(自負)하고 바리새인들에게 율법의 은혜를 배제(排除)시키려는 그런 움직임이 그런 모습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 때문에 분리(分離)주의자 또는 벽을 두르는 자라는 별명을 갖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바리새인에 대해서 잘 설명해 주는 내용이, 누가복음 18장 9절에서 14절에 증언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8:9-14,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비유한 바리세인의 모습을 보면 이 바리새인은 철저하게 세리와 구분을 짓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두 사람이 성전으로 올라가기도 하는데, 바리새인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에 십일조도 하고 다른 사람의 돈이나 물건을 강제로 빼앗는 그런 토색(土色)도 하지 않고, 불의(不義)도 또 간음(奸淫)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모습을 보면 이들은 얼마나 경건합니까? 반면에 세리(稅吏)는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께 불쌍히 여겨달라고 자기는 죄인(罪人)이라고 기도(祈禱)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게 하나도 없는 이 세리는 납작 엎드려 가지고 자신을 낮추고 겸손(謙遜)하게 하나님의 은혜(恩惠)만을 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 중에 누구를 예수님이 의롭다고 하셨냐? 바로 세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리 경건하게 살아도 자신을 높이는 사람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지만, 스스로 높아져서 남과 벽을 두르는 분리(分理)자가 돼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언젠가 매스컴에서 한 아파트 단지를 보도에 하게 되었는데, 그 아파트 단지 안에 보면 정문이 두개입니다. 한 단지 안에 정문이 두 개고, 그 정문은 각각 하나는 일반(一般) 분양(分讓) 아파트용이고 또 하나는 임대(賃貸)아파트 용이었습니다. 단지 내에서 일반분양동과 임대 동을 나누어서 분리(分離)한 것입니다.
근데 이 일반분양 아파트 사람들이 임대 아파트 사람들과 거리를 두기 위해서 정문만 달리하는 것이 아니라 울타리까지 둘러서 서로 오고 가는데 있어서 제안을 받게 했습니다. 임대 아파트 사람들이 넘어올까 봐 울타리까지 쳤다는 내용을 보면서 사회가 경제적인 부분 때문에 벽(壁)을 두르는 모습을 보면 너무나 씁쓸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령(聖靈)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우리 성부성자성령, 하나님은 하나이듯이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서로 분리를 한다면, 이것은 바리새인의 모습을 가진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그러한 모습은 있지 않은지,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교회는 생득적 개념으로 서로 다른 사람이 모여 있습니다. 그래서 이 모인 사람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여러 가지 차이를 느끼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가 되길 원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꼭 기억을 해야 합니다. 서로가 다른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적(主權的)인 모습이 반영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재능 속에서 태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어진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서로를 인정(認定)하고 화합(和合)하며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데 우리가 힘을 써야 하겠습니다.
본문에 돌아와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누룩 곧 외식(外飾)을 주의하라고 했을 때, 외식의 근본적인 뜻은 무엇일까요? 외식의 사전적인 의미는 겉만 보기 좋게 꾸며 드러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잘 보이려고 그렇게 했다면, 아마 애교스러운 모습이겠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외식을 주의하라고 하신 것은 외식이 나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 외식이 나쁠까요? 외식은 사람을 타락하게 하는 영적인 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 구석구석 뻗어나가는 이스트처럼 잘못된 영향력(影響力)으로 많은 사람들의 그 영혼을 타락(墮落)시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외식이 무서운 것은 겉을 꾸미는 것에 그 방점(傍點)이 있기보다는 속을 숨기는 것에 방점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을 끝까지 신뢰(信賴)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뭔가를 더 잘했을 때 우리는 시기(猜忌)하고 질투(嫉妬)하고 심지어는 미워하기까지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회개(悔改)를 해야 하는 것이 성경적이죠. 그런데 바리새인은 그 마음을 숨기고 아닌 척합니다. 그렇게 되면 회개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외식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을 알기 위해서 누가복음 16장을 살펴봐야 합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주인의 소유(所有)를 낭비(浪費)하는 청지기에 대한 비유(譬喩)가 나옵니다. 이 내용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면서 결론으로 하셨던 말이,
*누가복음16:13,
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바리새인들의 이 이야기를 듣고서 반응이 있었는데, 그 반응이 이렇습니다.
*누가복음16:14,
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결론적으로 바리새인이 외식했던 이유는 자신들이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속에 다른 것이 있음을 감추기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바리새인의 겉으로 드러난 경고는 사람들에게는 통했을지 몰라도 하나님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의 겉모습뿐만 아니라 내면까지도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함께 있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읽은 본문 앞에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을 비판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점심을 청(請)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고 식사(食事)를 하시게 됩니다. 당시 구전 율법인 장로들의 전통에서는 손뿐만 아니라 팔뚝까지 씻어야 했습니다. 바리세인이 이 예수님의 손 씻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이상이 여기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가복음 11:39,
39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장로들의 유전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바로 바리새인들의 위선적(僞善的)이고 외식(外飾)적인 모습을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말씀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비판받은 내용은 겉의 모습이 아니라,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의 문제는 내 마음은 그 누구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합니다.
*누가복음 11:40,
40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바리새인들은 사람의 외형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내면도 만드셨다는 사실을 간과(看過)했습니다. 이런 문제는 비단 바리새인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만 들키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신 적은 없으십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이런 생각으로 살아간다면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꿩이 도망갈 때 자기 머리만 땅에 대고 눈을 감으면 숨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내가 아무도 모르게 일을 하려고 할 때 주변을 살펴보게 되는데 그때 아무도 보지 않으면 비밀(秘密)이 될까요? 본문에,
*누가복음 12:2,
2 감춘 것이 드러날 것이 없고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라고 말씀합니다.
*누가복음 12:3,
3 또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고 말씀합니다. 이 두 말씀이 연이어서 이렇게 나오는 이유는 그것을 어떻게든지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내가 머리가 좋아서 내 주변 사람들을 다 속였다고 혼자서 좋아하는데 사실은 속인 것이 들통 나는 것을 혼자만 모르고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주변 사람들이 그 사람의 의기양양(意氣揚揚)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아마도 웃음이 나와서 참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하는 생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똑똑해도 하나님을 속일 수가 없습니다. 사도행전 5장에 유명한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 나옵니다.
*사도행전 5:3,
3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초대 기독교 당시엔 재물(財物)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자기의 소유를 팔아 서로 통용(通用)하였습니다. 모두가 자기 밭과 집을 팔아서ㅡ 사도들 발 앞에 두면 이 사도들은 필요에 따라서 나눠주었기 때문에 당시의 초대 기독교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없었다고 합니다. 바나바도 자기 밭을 팔아서 사자들 앞 발 앞에 두었습니다. 바나바는 그때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稱讚)을 받지 않았겠습니까? 이 이야기를 들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자신들도 사람들로부터 존경(尊敬)을 받고 싶었는데, 반면에 돈에 대한 욕심(慾心)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둘이 말을 맞추고 돈의 일부를 숨기고 나서, 돈의 일부를 한 밭을 팔았다. 라고 그들 앞에 두었습니다. 그때 그들도 이렇게 말합니다.
‘사탄이 내 마음에 가득하여 내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췄느냐,’라고 반문(反問)하였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베드로는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라고 말씀합니다.
*사도행전 5:4,
4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그리고 나서 아나니아가 거짓말을 한 이후에 혼(魂)히 떠나가고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근데 이 사실을 몰랐던 아내의 삽비라도 3시간이 지나고 나서 동일하게 거짓말을 하다가 그녀마저도 혼이 떠나 죽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비밀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드러나게 됩니다.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저희 동네에 갤러그라는 게임기가 설치가 됐습니다. 슈팅게임인데 위에 있는 적을 아래에 있는 비행기가 쏴 맞추는 게임입니다. 당시의 이 게임이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이 50원 동전을 놓고 게임하는 것인데, 이 너무 재미있다 보니까 제가 집에 있는 동전을 하나씩, 하나씩 긁어모았습니다. 근데 이 동전이 부족하게 되니까. 저도 모르는 사이에 아버지의 호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동전만 건드렸는데 욕심이 커지다 보니 겁이 없어져서 지폐까지 건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점점 이 돈이 없어지는 것을 눈치 챈 아버지께서 비밀이 없나 봅니다. 덫을 놨는데 저는 세상에 있는 그 모든 돈은 갤러그를 위해서 존재하고 있다. 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너무나 빠져들었습니다. 근데 그게 덫인지도 모르고 덜컥 손에 쥐다가 현장에서 잡히게 됐습니다. 아버지께서는 허락도 없이 가져가려고 한 것은 도둑질이니까. 하나님 앞에 회개(悔改)하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때 순종하는 마음으로 진심으로 회개했습니다. 근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갤러그만 생각났었는데 그 회개 기도한 이후에 놀랍게도 전혀 게임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 것입니다. 전혀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너무나 신기했습니다. 마음을 만드시는 하나님께서 마음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그 마음이 유지(維持)된다. 라는 것은 너무나 놀랍습니다. 하나님 앞에 제약(制約)된 행동도 다 드러나지만 반면에 의로운 행동도 하느님께서 다 드러내 주십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나의 의로운 모습을 알아주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은 다 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주변에서 알아주지 못해서 손해 적은 없으셨습니까? 괜찮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시면 악한 마음과 행동도 하나님이 다 아시지만, 하나님을 향한 의로운 마음과 행동도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남들이 안 본다 해도 하나님께선 다 아시기 때문에 여러분이 귀를 위해서 묵묵히 기도하는 그 눈물의 기도 몸이 약하지만 가정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애쓰시는 그 모습 하나님께서 다 아십니다. 한국 교회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기도(祈禱)하고, 헌금(獻金)하고 봉사(奉仕)하는 그 모든 행위가 다 하나님께서 아시는 것을 여러분이 믿으시면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겁니다. 분명 그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마음 그 모든 행동 그 모습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주를 위한 그 모든 헌신(獻身)을 은혜로 갚아주실 줄 믿습니다. 성경에서는
*고린도후서 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審判臺)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11:6,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느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하지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하나님을 향한 순전(純全)한 마음을 아시고 가정과 교회를 위해서 애쓰는 모습을 다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런 여러분들을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으로 꼭 품어주시고 안아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II. 둘째,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어떤 핍박에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책임져 주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친구라고 본문 4절에 명확하게 표현하는 것인데, 이것이 본문 이 본문은 유일하다고 합니다. 친구는 특징적으로 친한 사이를 말을 하는데, 더 자세하게 설명하면 비밀(秘密)을 공유(共有)할 수 있는 관계를 말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중에는 비밀을 공유할 수 있을 만한 친구들이 몇 분이나 있으십니까 단 한 분이라도 계시면 그분은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친구라고 하시면서 진정한 진짜로 두려워할 자가 누구인지 설명합니다. 진짜 두려워할 사람은 몸만 죽일 수 있는 자가 아니라, 죽인 이후에 지옥(地獄)에 던져 넣을 수 있는 자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왜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박해(迫害)를 받았듯이 자기도 또한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도 그런 핍박(逼迫)을 받을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핍박의 끝은 육체(肉體)의 죽음입니다. 그런데 육신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주님께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은 이후에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權勢) 있는 자가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입니다. 이 말은 모든 힘의 절정(絶頂)에 누가 계시다는 겁니까? 바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제자들로 하여금 핍박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 이후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그 하나님만을 끝까지 믿으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두 가지 이야기를 하시게 됩니다.
바로 ⓵참새와 ⓶머리털 이야기입니다. 당시 참새는 작고 흔한 새였습니다. 이 참새는 당시 로마 시대에 사용되던 동전인 앗사리온 두 개로 다섯 마리가 팔린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에서는 앗사리온 동자 하나를 가지고 참새 두 마리를 살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앗사리한 동전 하나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의 16분의 1의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루에 노동을 8시간으로 둔다면 이 16분의 1은 30분이죠. 이 30분을 해당하는 것을 노동을 했을 때, 2마리를 살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1마리의 가격은 15분 정도 일한 데나리온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오늘날 시급으로 하면 1만 원 정도 쳤을 때, 2500원 정도의 가치를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보면, 이게 정말 싼 세일임을 알 수 있어요. 아사리온 2개 가지고 5마리 샀다면, 1마리 가지고 한 아사리온 가지고 2마리를 산 것으로 비하면 1마리를 더 준 거죠. 그만큼 덤으로 줄 만큼 참새는 가치가 그렇게 크지 않다. 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값싼 새라고 사람들은 알고 있는 것이죠. 반면에 희귀종 스펙스 마코 앵무새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얼마나 값이 나가는지 2억 6천만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희귀종이기 때문에 시장에 유통되는 새는 아닙니다. 예를 들면 참새가 이 마코 앵무새의 가격을 따지면 10만분의 1의 가치에 불과하지만, 이렇게 하찮게 보이는 참새도 하나님께서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참새들보다 귀(貴)하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참새의 생명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하물며 너희를 기억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너희들의 생명을 소홀(疏忽)히 여기겠느냐는 것입니다. 참새 한 마리도 기억하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살펴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향하여 여러분의 앉고 일어섬을 모르시겠습니까?
여러분의 눈물의 기도, 간절한 기도에 그 소망을 소홀히 여기시겠습니까? 우리 성도님들은 이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기도의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그다음은 머리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머리카락이 하루에 50개에서 80개 정도가 떨어진다고 합니다. 이 머리에서 50~80개가 언제 떨어졌는지, 우리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바쁜 일상 속에서 내 머리카락이 어디에서 어떻게 빠졌는지, 신경을 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빠진 이 머리카락 하나라도 하나님은 기억하시고 다 세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학자가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이 셀 수 없는 머리털을 하나님께서 셀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는 사람의 지혜를 뛰어넘는다는 말인 것이죠. 그 하나님의 지식은 사람의 지혜를 뛰어넘기에 사람은 하나님의 계획과 지혜를 다 알 수 없다.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러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지혜와 지식을 신뢰하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핍박을 받을 때, 그 핍박(逼迫)이 하느님께서 미처 손을 쓰지 못해 가지고 실수해 가지고 오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다. 라는 것입니다. 계획과 뜻 아래에서 허락(許諾)된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받는 핍박의 현장에서 성령님은 그들과 함께 하셔서 그들이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몰라 할 때, 가르치시는 분이라고 성령은 이야기합니다. 오늘 본문 누가보검 12장 11절과 12절입니다.
*누가복음 12:12-13,
11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12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이렇듯 핍박(逼迫)의 현장은 외로운 현장이 아니라, 성령께서 제자들과 함께하는 현장입니다. 우리에게 핍박의 현장은 어디입니까? 세상에 나가서 복음(福音)을 전하는 현장입니다. 세상에 나가서 성경이 옳다고 외치는 현장입니다. 그 현장에서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막막해할 때,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야 될지 정확하게 설명을 해 주실 겁니다. 성령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알려주시고자 하는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책임지시고 계시고 우리를 친히 다스린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여 주실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8절에, 베드로가 박해를 받는 중에 대 제사장을 위시하여 당시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모였을 때, 어떻게 말해야 될지 성령을 통하여 성령이 충분한 말씀을 하게 합니다. 또한 사도행전 6장 10절에는 스데반이 순교를 당하는 모습에서 그가 성령의 은혜 속에서 지혜와 성령으로 말을 한다. 라고 증언(證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약속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약속을 실제로 이행(履行)하는 분임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들이 우리는 하나님만을 끝까지 신뢰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의 도심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특별히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날선 비판을 자주 하셨습니다. 우리 생각하기에 너무 하나 싶을 정도로 그렇게 심하게 비판하셨는데 그런데 그런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의식하는 것은 하나님께 잘 보이기 위해서 과장(誇張)했던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한 자신들의 그 내면에 죄악 된 모습을 감추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회귀하지 않는 이유는 감추면 숨길 수 있을 거라고 잘못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뿐만 아니라, 내면(內面)까지도 만드셨기에 모든 것을 다 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장 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시란 사실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아무리 핍박을, 핍박이 몰려오더라도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사람 앞에서 주님을 부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핍박의 상황에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던 사실을 믿고, 핍박 가운데서도 성령님께서 함께하셔서 할 말을 가르쳐주실 것을 믿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힘든 일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만을 끝까지 신뢰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시기를 바랍니다. 작은 참새 한 마리도 그리고 떨어지는 머리카락 하나도 기억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분명히 여러분과 저를 기억하시고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런 믿음의 모습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소망합니다.
♣요약
우리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면 우리도 모르게 외식할 수밖에 없음을 고백해야 한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내면도 아심을 확신하고, 오직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셔서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사랑으로 가득 채우기를 소망해야 한다. 성령께서 알려주시고자 하는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책임지시고 계시고 우리를 친히 다스리심을 믿고, 우리 옆에 지체들을 더욱더 사랑하고, 하나님을 믿다가 힘든 일이 생기더라도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는 마음을 갖고, 우리의 모든 인생을 하나님께 맡길 때, 하느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은혜를 우리 모두가 누려야 한다. 항상 말씀으로 교훈해 주신 대로 하나님만을 끝까지 신뢰하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外飾)을 주의하라고 명령하셨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어떤 핍박에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면하셨으니 우리는 이 말씀을 실천하고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고, 주님을 온전하게 닮아가려 노력하는 기쁜 제자로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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