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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8월 21일)
제목:“들으시는 하나님”
말씀: 민수기 11:1-3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부목사님)
사회: 강건우 부목사님

설교자: 오우진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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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11:1-3,
1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시매.
2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3 그 곳 이름을 다베라라 불렀으니 이는 여호와의 불이 그들 중에 붙은 까닭이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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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먼저 광야에서라는 민수기의 제목을 가지고 개론적인 내용을 말씀드리고 좀 본문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민수기의 원 제목은 히브리어로 ‘배 미드바르’ 라고 합니다. 즉 ‘광야에서’ 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요. 원어 성경에서 모세의 오경은 그 제목을 보통은 첫 단어를 제목으로 삼는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민수기는 그 전통을 따르지 않고 다섯 번째 단어를 따르고 있습니다. 히브리 성경의 제목이 보여주듯이 민수기에는 출애굽 한 백성들이 광야에 있을 때 일어난 사건들을 많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I. 첫째, 광야에서.
-일반적으로 우리들에게 광야는 고통(苦痛), 연단(鍊鍛), 시련(試鍊) 등으로 이해되곤 하는데요. 하지만 사실 광야는 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광야(廣野)는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 길 끝에는 아주 분명한 목적지가 있는데요. 구약에서는 가난한 땅으로 가르켜지고 신약의 관점으로 볼 때는 우리가 가고 있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광야는 우리 자신에 대하여 증명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하나님 앞에서 증명(證明)해내곤 하는데요. 어떤 이는 신앙이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도 알게 되기도 하고요. 어떤 이는 연약(軟弱)한 사람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믿음이 견고(堅固)한 사람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기도 합니다. 광야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분명하게 경험하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갖게 됩니다. 말씀을 통해 만난 하나님은 현재적으로 임재 하는 분이시고, 삶의 현장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심을 깨닫게 되니, 광야는 그분을 경험하는 거룩한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광야에서 신자는 단순히 고통이나 시련을 당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하여 증명하고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경험하며 약속의 땅을 향해 전진해 나가는 것입니다. 민수기는 바로 이에 대한 기록이고요. 광야에서 만난 그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인도하사,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가시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성경이라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 11장 1절에서 3절의 본문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먼저 우리는 백성들의 악한 말을 들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II. 둘째, 백성들의 악한 말을 들으시는 하나님.
-여기서부터 좀 무서운 말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제가 좀 밝게 이야기를 해야 되는지, 긴장(緊張)하며 이야기를 했는지 고민을 많이 했는데요. 심판(審判)의 말을 말하다 보니 편안히 얘기하면 안 될 것 같고 또 너무 진지하게 얘기하면 굳을 것 같아서 그냥 적당하게 하려고 하니까 여러분들도 그냥 잘 이해하시면서 말씀을 좀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 3절에 보면 다베라라고 불리게 된 이 곳에서 1절을 다시 한 번 보게 되는데요.

*민수기 11:3,
3 그 곳 이름을 다베라라 불렀으니 이는 여호와의 불이 그들 중에 붙은 까닭이었더라.
1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시매.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였다고 기록이 돼 있습니다. 직역하면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악으로 원망하는 백성들이 되었다. 이 정도의 문장이 될 것입니다. 악으로 원망한 백성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말을 하나님 앞에서 했는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지가 않습니다. 악으로 원망했다는 표현으로 보아 악이 먼저는 마음속에 있었고, 그 마음 안에 담겨 있던 악이 입술로 발화가 되어서 하나님이나 또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를 원망하는 실제적인 어떤 표현이 만들어진 상황이었습니다. 어쩌면 이 말은 직접적이고 노골적(露骨的)인 거친 표현일 수도 있고요.

어쩌면 다소 절제된 표현이었지만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은, 하나님을 조롱하거나 인간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공격적이고 불순한 표현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이들이 악한 말로 원망하였는지 성경은 말하지 않지만 출애굽기와 민수기에 기록된 백성들의 일반적인 문제와 동일한 문제였을 거라고 추측을 합니다. 또한 오늘 민수기의 본문과 구조상 짝을 이루는 출애굽기 15장의 말씀을 보면은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르 광야에서 모세를 원망하였는데, 이들이 모세를 원망했던 이유는 사흘 길을 걸어가는 동안 물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마도 오늘 본문에 사건도 직접적으로는 물과 같이 중중요한 자원이 결핍에서 비롯된 문제가 아니었을까, 이렇게 추측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곳에서 이 백성들도 이런 결핍(缺乏)의 문제로 인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하였는데 마치 전염병(傳染病)처럼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사람의 마음에서 다른 사람의 마음으로 전파되었고, 그 결과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하나님을 원망(怨望)하는 악한 말을 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실제로 조금 전에도 말했던 출애굽기 15장에서 마라에서 백성들이 했던 말을 들어보면은요. 백성들은 모세와 하나님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무엇을 마실까, 우리는 무엇을 마셔야 하나? 이런 식으로 말을 하면서 이후 신 광야에서 원망하며 말하기를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차라리 죽여 버리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렇게 이야기 하고 했던 것입니다. 애굽 땅에서 떡을 배불리 먹었을 때, 내가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행복했을 텐데 하나님을 이렇게 악한 말로 조롱(嘲弄)한 것이죠. 그런데 오늘 1절에 보니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민수기 11:1,
1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시매.
-네 여기까지만 읽겠습니다. 네 여기 보니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함에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악한 말로 원망함에,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마음속에 가득 차 있던 악이 입을 통해 소리로 발화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를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악한 말을 들으셨고, 진노(震怒)하셨고,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 그들을 불사르게 하셨습니다. 심판의 불이 백성들의 진영에 떨어진 것입니다. 2절을 보니,

*민수기 11:2,
2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2절을 보니 불로 심판받는 이 백성들은 모세를 향해 부르짖습니다. 얼마나 그 불이 강렬(强烈)하게 타올랐는지 백성들은 큰 재앙(災殃)을 당하여 절규(絶叫)에 가까 가까운 부르짖음으로 긴급(緊急)하게 자신들의 지도자였던 모세를 찾은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 같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을 듣고 이같이 강렬한 불로 심판을 하셨을까요? 성경은 곳곳에서 사람의 말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곤 하는데요. 잠언 4장 24절은 말하기를,

*잠언 4:24,
24 구부러진 말을 네 입에서 버리며 비뚤어진 말을 네 입술에서 멀리 하라.
-라고 경고 하였구요. 야고보서 1장 26절은,

*야고보서 1:26,
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성경이 이렇게 사람의 말에 대해 경고하는 것은 그 말이 공동체를 파괴하고, 관계를 깨뜨리고 분열(分列)시킬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게 조차도 파괴적(破壞的)인 영향력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경에서 강조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런 말들이 악한 말이 되어 하나님 앞으로 가게 될 때는 이 문제는 다른 차원(次元),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되기 시작합니다. 민수기 14장에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 원망하는 자들에 대해서 경고를 하셨는데요. 민수기 14장 29절에서 30절을 보면,

*민수기 14:29-30,
29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30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서 엎드려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그 약속하신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해서 신약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10절에 말하기를,

*고린도전서 10:10,
10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원망하다가 멸망하였다고 이렇게 경고하였습니다. 여러분, 이들의 특징에 대해서는 주의 형제 형제였던 야고보와 같이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셨던 유다가 유다서에서 어 성경의 구절들을 보면 이들이 과연 누구였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우리 한번 같이 한번 볼까요? 유다서 1장 5절입니다.

*유다서 1:5,
5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않은 자들을 멸하셨으며.
-출애굽한 백성들 중 멸망당한 자를 가리켜 유다는 말하기를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라고 분명하게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는 거였습니다. 또 유다서 1장 10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우리 한번 같이 읽어볼까요?

*유다서 1:10,
10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도다 또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그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영적인 지식이 전혀 없고 단지 이성은 짐승처럼 자기 자신의 현재적인 피로를 본능적으로 느끼고 알고 있습니다. 영적인 지식에 대해서는 무지한 짐승 같은 자들이라고 설명한 것입니다. 유다서 1장 15절을 한번 같이 해볼까요? 같이 읽겠습니다.

*유다서 1:15,
15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니 하나님을 믿지 않고 또 짐승 같이 살아가는 이 사람들이 줄을 거슬러 모든 완악한 말로 하나님 앞에 말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요. 끝으로 우리가 유다서 1장 16절, 18절-19절을 한 번 더 보겠습니다. 16절입니다. 같이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유다서 1:16,18,
16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며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18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19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
-그러니 유다는 이들을 말하기를 정욕대로 행하는 자세, 자신의 정욕대로 하나님 앞에 행하기 때문에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조롱하고, 차라리 애굽에서 내가 죽임을 당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며 하나님을 조롱하는 자들, 그 사람들은 심지어 성령을 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결과적으로 지금 하나님 앞에서 단순히 말해 실수하는 자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믿음에서 파손된 자들입니다. 영적으로는 소경이고, 육체의 소욕을 따라 정욕대로 행하는 자들이고 완악한 말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불경건한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성경은 그들을 성경이 없는 자들이라고 말하니, 얼마나 하나님 앞에 원망하는 자들을 마음껏 해대는 이들을 하나님께서는 심판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오래 인내하셨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원망했는데요. 문법적으로 원망했다는 말은 단회 적으로 한 번 내뱉고 끝난 말이 아니라, 계속해서 반복해 하나님을 심판받고, 멸망 받는 그 시점에까지도 끊임없이 하나님을 원망한 자들이란 걸 보여줍니다. 더욱이 진영 끝에서 그들은 심판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소통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공동체를 분열시킨 이들을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말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주의하여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인생의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을 향해 가는 겁니다. 자원의 결핍이나 그 밖의 문제로 인해 많은 인내를 요구하는 때를 지나가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고통으로 인해 괴로워할 때도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표현들은 우리의 존재와는 비교할 수 없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을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비롯된 말들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만홀(漫忽)이 여김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시고, 우리의 말과 혀로 모욕(侮辱)할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높으신 그분을 찬양하는 마음과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그분의 거룩하심 앞에 경건을 무너뜨리지 않고 단정하고 고요하며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가득히 안고 언제나 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입술에 재갈을 물리고 그리고 그분의 거룩하심 앞에서 우리의 말과 혀를 다스릴 때 우리의 영혼은 참된 경건을 이루고 영원의 온전함을 이루어 가며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잠언이 말하는 성경의 교훈을 이 시간 마음 깊이 새겨두어야 할 것입니다.
*잠언 1:20,
20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오늘 두 번째는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 2절을 한번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2절입니다.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우리 1번 더 같이 읽어볼까요? 같이 한번 큰소리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III. 셋째,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민수기 11:2,
2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여러분 한번 집중해서 본문을 보십시오.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어떻게 됐습니까? 불이 꺼졌더라.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여러분 여기에 바로 우리의 위로(慰勞)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악한 말로 하나님을 원망(怨望)하는 소리만을 듣는다면 얼마나 이것이 우리에게 비극적(悲劇的)인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감사(感謝)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시편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그 심정을 헤아려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시편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그 심정을 헤아려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시편 5장 3절에,

*시편 5:3,
3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요한일서 5장에서도 이렇게 고백하는데요.

*요일 5:15,
15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하나님이 들으시는 줄을 안즉, 성경은 이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언제나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자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세의 기도에는 놀라운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 개인의 어떤 간구(懇求)를 들으시는 차원(次元)이 아니라, 죄를 사(赦)하는 기도, 죄에 대한 심판(審判)에서 생명(生命)을 구원(救援)하는 기도(祈禱)였던 것입니다. 맹렬하게 타오르던 심판의 불은 모세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자 소멸(消滅)되었습니다. 심판하는 하나님은 우리의 원망(怨望)과 불평(不平)만을 들으시는 분이 아니었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죄를 사하시고 심판을 소멸하신 분이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마가복음 14장을 보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리 주님은 피와 땀을 흘리며 기도하실 때, 제자들은 눈이 심히 피곤하여 기도하지 못하고 잠이 들었습니다. 제자들조차 기도하는 것을 어려워해서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그 순간 졸고 말았던 것입니다. 기도할 때마다 우리는 감겨진 우리의 눈 안에서 산만(散漫)해진 정신이 하나님께 우리가 집중(集中)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을 경험(經驗)합니다. 육체는 피곤(疲困)하고 일상적인 일부터 맡고 있는 교회 사역에 이르기까지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들이 우리 자신의 머릿속에 오가서 내가 기도를 하고 있는 건지, 상상을 하고 있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을 만큼 어지럽게 하는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정상적인 생각으로는 단어를 떠올리지 못해서 생각 없이 쏟아내는 단어의 반복이나 차라리 의미는 알지 못해도 소리는 계속 낼 수 있으니 차라리 방언으로 기도하자는 마음으로 계속해서 방언(放言)으로 기도하는 때도 있습니다. 더욱이 어떠한 때는 불안(不安)과 염려(念慮)가 마음을 붙들고 놓지 않아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흐리게 하여 기도에 더욱 어려움을 주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모든 기도의 수고도,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듣고 계시며 심지어는 나의 기도를 통해 영혼의 죄를 사하시고 공동체(共同體)를 구원한다는 이 놀라운 사실 앞에서는 모두 다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조금 전 우리가 읽었던 요한의 서신에서 우리는 무엇이든지 구하는 말을 들으시는 것을 안다는 사도의 말을 읽었죠?

*요일 5:15,
15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바로 다음 구절에 사도는 이와 같이 이야기를 합니다.
*요일 5:16,
16 누구든지 형제가 죄범 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야고보서 5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야고보서 5:14-15,
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형제가 죄를 범하는 것을 보고, 죄로 인해 고통 받을 때 그 영혼을 기도하면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의 기도가 들으시는 하나님의 강권적(强權的)인 역사를 통해 한 영혼을 구원해내고 마는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킨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가지고 있는 가장 위대(偉大)한 힘은 심판대(審判臺) 위에 서있는 죄인을 이끌어내어 생명(生命)의 길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모세 한 사람의 기도도 이와 같은 역사 안에 힘이 있었는데, 만약 우리와 같은 수많은 이들이 하나님 앞에 죄(罪)를 범(犯)하여 고통(苦痛) 중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지금부터 저는 11년 전 한 교회에서 고등부를 맡아 사역(事役)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맡았던 고등부는 대략 240명의 아이들이었는데요. 240명 아이들이 거의 대부분 참석했던 그해 여름 수련회에서 집단적(集團的)으로 이 아이들이 거듭나고 변화(變化)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말씀이 시작된 때부터 무언가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은 것을 느낄 수가 있었는데요. 설교가 끝나고 기도회가 시작되자 아이들이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토로하고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은 자신들의 인생을 하나님의 영광(榮光)을 위해 살려주시기를 눈물을 흘리며 간절(懇切)히 기도하였습니다.

부모님들의 성화에 밀려서 겨우 저녁 집회만 참석하기 위해 학원 끝나고 가방 하나 떨렁 메고 들어왔던 아이들이 집회(集會)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기 위해 차를 타다가 내가 이 수련회(修練會)에 참석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後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면서 우르르 차에서 내려 다시 집회실로 들어와 기도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수련회에 가기 전에는 아니 수련회가 시작하기 전에는 앉은 자리에서 단 5분도 기도하지 못했던 아이들이 첫째 날, 저녁부터 말씀을 듣고 기도하기 시작하는데 새벽 1시가 돼도 기도가 멈추지 않는 상황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다음 날 일정(日程)을 진행하기 위해서 저는 억지로 기도회를 마무리하고 아이들을 재웠습니다.

그다음 날에도 아이들은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데 전날과 똑같이 기도가 멈춰지지 않고 또 다음 날 일정을 위해 억지로 새벽 1시의 기도회를 마무리했어야 했습니다. 신기(神奇)한 것은 은혜 받는 것은 똑같지만 고등학생과 장년들은 좀 다릅니다. 장년들은 기도에 불이 붙으면 멈추지 않고 기도하잖아요. 고등학생들은 간식을 먹고 들어와서 기도합니다. 수련회가 끝나고 주일이 돼서 아이들이 다시 주일에 모였습니다. 예배 시간 말씀을 전하는데 이 아이들이 말씀을 들으며 눈물을 멈추지 않는 겁니다.

부모님들은 수련회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우리 아이가 전혀 다른 사람들이 되어 돌아왔다고 저를 찾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고등부 아이들이 얼마나 변화(變化)가 어려운지 여러분들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저도 고등부를 맡고 나서 얼마나 아이들과 씨름을 했는지 모릅니다. 지금부터 11년 전이었으니까 아주 오래된 일은 아니지만, 저도 그때는 지금보다 혈기왕성(血氣旺盛)하고 아주 특심이 있는 열혈 사역자였습니다. 지금은 좀 많이 착해졌거든요. 저는 고등학생들이 허투(虛套)로 예배(禮拜)하는 게 너무 싫었습니다. 선생님들은 다 아이들을 달래주지만 누군가 하나는 악역을 맡아야지 하며 사냥 시간에 아이들의 핸드폰을 보면 저는 그 아이 손을 잡고 기도해주는 대신 끌고 나가 제발 교회를 나오지 말라고 설득을 했습니다. 말씀 시간에 졸면 내가 너희들 부모님을 설득해 줄 테니까. 제발 말씀시간에 안 오면 안 되겠냐고 부탁을 했습니다. 한번은 설교를 시작하는데 아이들이 설교를 듣지 않는 거예요. 지금 같으면 그렇게 하진 않겠지만, 설교가 시작되고 나서 3분 정도 지난 후에 저는 성경책을 덮고 내려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간곡하게 또 부탁했습니다. 제발 너네 교회를 좀 안 나왔으면 좋겠다. 근데 신기하게도 그렇게 교회를 나오지 말라고 설득을 하는데, 다음 주에 또 나와서 앉아있는 거예요. 그렇지만 달래고 윽박지르고 아무리 말을 해도 아이들이 전혀 변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겨울 수련회가 있었습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려고 준비를 하는데 너무 복통이 일어나는 거예요. 힘이 들어서 병원에 가보니 식중독(食中毒)이었습니다. 원래 수련회 전에 제가 교사를 데리고 기도회를 인도해야 하는데 도저히 참석할 수가 없어서 부장 선생님께 전화를 했습니다. 당시 부장 선생님이 참 신실하신 분이셨는데요. 이분이 제 전화를 받고 정신이 퍼뜩 든 겁니다. 원래 겨울 수련회는 보통 교회에서 진행을 하기 때문에 선생님들이 별로 신경 쓸 게 없습니다.

끝나고 아이들 돌아갈 때 손에 쥐어주는 간식 정도만 맛있게 준비하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던 거죠. 근데 갑자기 설교자가 식중독에 걸리고 교사들도 함께 교사들과 함께 기도회를 못 나오겠다고 하니 위기감(危機感)을 느낀 이 부장 선생님이 선생님들에게 긴급 문자를 남기고 저녁에 모든 교사들이 모여서 기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겨울 수련회 때 제가 맡았던 고등부의 영적인 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진행했던 그 수련회에서 아이들이 진지하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신앙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고, 기도했던 교사들이 이내 아이들의 뚜렷한 변화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당시에 밤새 구토하고 오전에 겨우 일어나 설교를 마무리하고 설교 전에 죽 한 그릇 먹고 나와서 기어가는 목소리로 설교하고 다시 집에 들어가 구토하고 준비하고 죽 한 그릇 먹고 설교했는데 하나님께서 선생님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이들의 영혼을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그해 여름이 되었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여름 수련회였죠. 선생님이 선생님들이 수련회 전부터 이번에는 아예 저한테 기도에 오지 말라고 말하더라구요. 말씀을 집중해서 준비하라고 하면서 수련회 전부터 교사들이 모여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련회장에 도착해 보니, 선생님들이 말씀을 준비하는 저를 위해 마련해 놓은 원룸의 저를 감금시켜 놓고, 본인들은 밖에서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집회 전에 제가 그 장소에 도착을 해보니 모든 선생님들이 동그랗게 모여 앉아 눈물을 흘리며 우리 주님께서 이 밤의 역사하사 아이들의 영혼을 위해 일하여 주시라고 기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름 수련회 저는 매일 저녁마다 3시간 동안 아이들에게 설교했고, 설교를 마무리하며 누가 한 번뿐인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겠냐고 질문을 던졌을 때, 성령께서는 아이들의 온 영혼에 큰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변화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우리가 기도해야 할까요? 왜 우리가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며 왜 우리는 모일 때마다 지도하는 일에 힘써야 할까요? 왜? 우리는 토요일 새벽마다 모여서 우리 사랑의 교회와 한국교회와 대한민국의 영적인 재건과 세계선교를 마무리하기 위해 기도해야 할까요? 단 한사람의 기도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심판으로 타오르던 불길을 꺼뜨리는 힘이 있는데, 7천 명이라는 기도의 사람들이 매주 하나님 앞에서 영혼을 위해, 교회를 위해, 국가를 위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도한다면,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우리 주님께 돌아오는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우리는 자신에게 일어난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고 오히려 다른 영혼(靈魂)들의 연약함을 위해서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는 자리에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광야(廣野)를 지나는 가운데 불편하고 인내해야 되는 상황(狀況)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 믿음으로 맡겨드리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앞에 수많은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면 이것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놀라운 특권이 되겠습니까?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계신데, 영혼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것은 나의 간구를 들으시고 영혼을 죄에서 건져내시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 번뿐인 인생인데, 어려운 형편을 푸념이나 하면서, 원망 가운데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영혼을 구원하시는 이 위대한 일에 동참하여 지도의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설 것인지를 우리는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사랑하는 남편, 사랑하는 아내, 사랑하는 부모님 혹은 사랑하는 자녀들이 돌아오기를 오랜 시간 기다린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이 있으시다면 낙심(落心)하지 마시고 다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의인의 기도는 간구(懇求)하는 힘이 있고 영혼(靈魂)을 죄에서 구원(救援)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살지 않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참여(參與)하지 않는다면 그런 인생에 어떤 기쁨과 즐거움이 있겠습니까? 바로 그 일에 있어 우리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시는 하나님이 계시니 지금은 우리가 한마음이 되어서 기도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지금도 수많은 영혼들의 죄(罪)를 사(赦)하시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계십니다.

♣요약
우리는 많은 인내가 필요한 광야 같은 인생길에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는 믿음의 고백과 간구로 날마다 승리하여 매일의 찬송과 감사가 하늘에 사무치게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진정으로 생명을 구해야 하며, 사랑하는 가족, 친척, 친구, 이웃에게 영혼의 죄를 사하며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큰 구원 역사를 속히 베풀어 주시길 간절히, 절규하며 기도해야 하며, 7천 기도용사를 필두로 사랑의 교회 모두 영 가족들이 ‘2033-50 비전’으로 맹렬히 기도할 때, 대한민국 영적 재건과 세계선교를 마무리 하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승리를 경험하게 될 것을 확신한다.
-우리는 말씀을 들은 대로 반응할 수 있는 은혜를 간구해야 한다. 영혼의 죄를 씻기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부르심과 기도할 때마다 거듭남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심을 확신하여, 힘든 역경 속에서도 물러나지 않고, 더욱 열심을 다해 기도해야 한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척과 친구와 이웃을 기도의 자리에서 건져내는 놀라운 역사들이 끊이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교회마다 주님의 자녀들로 기쁨으로 차고 넘쳐나길 소망한다.

*민수기 11:1-3, 요약.
-이스라엘 백성의 죄는 그들이 여호와를 원망했다는 것이다. 율법(律法)이 죄(罪)를 드러내기는 하지만 없애지는 못한다. 율법이 죄를 저지하기는 하지만 이기지는 못한다. 그들은 불평하였다. 그들이 감사할만한 것을 그렇게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불평할 만한 어떤 꼬투리를 발견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죄로 인해 받으신 모욕(侮辱)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정당하게 진노(震怒)하셨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이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징벌(懲罰)하심으로써 심판하셨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노하셨으므로 그들은 모세를 찾아와 하나님의 진노에서 그들의 친구를 도와달라고 청하였다. 그들을 위한 모세의 중재 기도는 응답되었다.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제물을 받으셨으므로 진노의 불이 꺼졌다. 불평하는 백성의 수치(羞恥)를 영원히 알리기 위해 그곳을 새로운 이름으로 칭하였다. 그곳은 다른 사람들이 듣고 두려워하며 경고(警告)를 받아 그들처럼 죄를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다베라` 곧 `불사름` 이라고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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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8월 14일)
제목: "빈 손 인생:그래도 하나님은..."
말씀: 욥기 1:20-22
찬양인도: 쉐키나(이동선 부목사님)
시회: 강건우 부목사님

설교자: 윤주은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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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1:20-22,
20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가 여전히 이 시간 이 자리를 사모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치유와 회복을 소망하게 하시니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이제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사오니, 귀를 열어 듣게 하시고, 눈을 열어 포기하시며 마음을 열어 감화시켜 주옵소서. 전하는 자 듣는 자 모두에게 맞춤형의 은혜를 허락하시고 권고하여 주옵소서. 이 모든 간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산 소망과 참 기쁨이 샘솟는 수요 저녁기도회에 참여하시는 모든 성도님들을 환영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권고해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치유와 회복을 얻는 복된 시간되기를 소망합니다. 함께 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구약성경 욥기 1장 20절부터 22절까지 말씀입니다. 구약성경 762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절씩 교독하고 마지막 절은 합독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삶이고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해 주시는 삶입니다. 성경은 그런 우리에게 형통함과 풍성함 안전함과 만족, 그것을 기대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과연 현실이 그러던가요? 오히려 우리의 삶은 그 약속대로 풀리지 않을 때가 더 많이 있습니다. 막힘과 부족함 불만과 위태로움을 마주합니다. 때로는 마음 한구석이 텅 빈 듯한 상실감(喪失感)마저 느끼게 됩니다. 우리 삶 속에서 무언가를 잃는 경험은 예고 없이 다양한 모습으로 찾아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가까웠던 사람의 배신이나 관계 문제가 될 수 있고, 또는 재산을 잃었거나 경제적인 어려움을 당할 때가 그럴 때가 있습니다. 건강이 나빠질 수도 있고, 질병에 걸릴 수도 있고 또 때로는 직장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기대했던 일이 무산되거나 또는 계획에 어긋나는 상황들을 만나게 되기도 합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상실감으로 다가오는 것들입니다.

신앙은 답을 모른 채, 계속 나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이라는 한 신학자의 말처럼, 우리는 상실의 짐에 짓눌려서 삶의 기반이 송두리째 빼앗기는 흔들리는 듯한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삶의 현실이 뒤죽박죽 되어버리는 때도 있습니다. 마치 헤아릴 수 없는 슬픔과 아픔 맥없이 밀려오는 낙담과 좌절, 허무함 당황스러움과 같은 상실의 강을 건넙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생 여정에서 우리가 견지해야 할 신앙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욥의 삶을 추적해 보겠습니다. 욥은 족장 시대의 인물입니다. 에돔 지방의 우수 출신이라고 합니다. 그는 모든 것을 갖춘 완벽한 남자였습니다.

제가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생각한 것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수님의 온전한 제자가 되자. 라고 그 기도에 제목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구약 모델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욥기 1장 1절에 묘사된 욥에 신앙평가를 보면,

*욥기 1:1,
1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그는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번역들을 참조해 보니까, 흠이 없었고, 정직했고, 하나님을 경외했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 악한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욥이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어서 2절과 3절을 보면.

*욥기 2:3,
3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느니라.
-욥은 아내와 수많은 자녀들을 두었고, 그가 살던 지역에서 으뜸가는 부자였습니다. 개혁개정의 표현에 따르면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종합적으로 욥은 물질로도 부자였고, 신앙으로도 부자였습니다. 여러분 여기까지만 보면 참 부럽지 않습니까? 저는 이런 욥이 참 부럽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부러움을 산 욥이 당한 일을 주목해보면 부럽다. 라고 우리가 생각했던 그것이 얼마나 경솔한 것인지 모릅니다. 13절부터 19절까지 기록된 내용을 제가 요약해 드리면, 욥은 아내만 제외하고 재산과 자녀들을 하루아침에 잃게 됩니다. 심지어 나중에는 피부병(皮膚病)까지 앓게 되고 그것 때문에 고생을 합니다. 그는 한두 푼 가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1~2명의 자녀를 가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10명의 자녀가 있었고, 그의 재산은 당대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4차례에 걸쳐서 하루아침에 잃고 만 겁니다. 욥의 반응이 그런데 놀랍습니다. 오늘 저희가 살펴볼 것인데 그 전에 어떻게 욥은 이런 반응을 보일 수 있었을까? 한번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 4절과 5절의 힌트가 숨어있습니다.

*욥기 1:4-5,
4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의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5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욥에는 경건한 성품이 있었습니다. 욥은 자녀들의 생일잔치가 끝날 때마다 했던 일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 그 자녀들을 불르고 불러서 정결하게 하고 번제(燔祭)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한 두번 그랬던 게 아니라, 항상 그렇게 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냐 하면, 혹시라도 자녀들이 잔치 중에 생일잔치 중에 하나님께 죄를 짓지는 않았을까? 하는 염려하는 마음 때문에 그들의 죄를 씻으려고 그렇게 한 겁니다.

욥은 꾸준한 영적 습관이 그의 삶에 뿌리 박혀 있었던 겁니다. 그는 하나님과 지속적이고 깊은 교제를 통해서 그 삶에 견고한 믿음의 토대를 세워왔던 것입니다. 여러분 항상(恒常)이 무서운 겁니다. 평소(平素)가 중요한 겁니다. 그게 실력(實力)입니다. 우리도 평소에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그리고 깊이 있는 교재를 통해서 견고한 믿음의 토대를 세워 가야 합니다. 여러분 경건한 성품이 다져지는 만큼 우리가 상실의 강을 건널 때 건널만하게 만드는 겁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영적 습관이 중요한 줄 알고 오늘 이 자리에 방학인데도 불구하고, 수요 저녁 기도에 나오신 여러분들 참 잘 하신 겁니다. 영적 습관을 지키려고 나오신 거죠. 견고한 믿음의 토대를 세우시려고 나오신 거잖아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들이 삶 가운데에 건너는 상실의 강을 이런 것들을 통해서 건널만한 힘을 챙겨 가시는 겁니다. 여러분, 평소에도 하나님과 지속적이고 깊은 교제를 나누십시오. 그렇게 여러분의 삶에 견건한 믿음의 토대를 세워 가시기를 바라며 또한 경건한 성품을 소유해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욥의 반응을 살펴보면서 상실의 강을 건널 때, 우리가 견지해야 할 핵심이 무엇인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3가지를 볼 건데 첫 번째 그것은 뭐냐하면, 나의 삶이 빈손 인생임을 절감하는 것입니다.

I. 첫 번째, 나의 삶이 빈손 인생임을 절감(切感)하는 것입니다.
-21절 상반 절입니다.

*욥기 1:21a,
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새 번역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모태에서 빈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에도 빈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우리 인생을 ‘빈손인생’ 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 욥기는 전체 42장 1070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세지는 않았고 찾아봤습니다. 그중에 고작 8개 절로 욥은 모든 걸 잃고 맙니다. 그 중에서도 7개절은 가족과 재산을 잃게 됩니다. 욥이 훌륭하다. 라고 평가를 받았던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일순간에 사라져버린 이 욥,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 줄 모릅니다. 건강이 남아 있으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2장 7절에 보면 건강도 잃어버립니다.

*욥기 2:7,
7 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
-그야말로 빈손 인생이 된 거죠. 성경은 인생의 본질이 빈손이라는 사실을 여러 군데서 알려주는데 2가지를 제시해 드리겠습니다. 먼저는 ⓵야곱입니다. 이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뼈저리게 이 사실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야곱 여러분, 아시는 대로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이나 섬겼지만 빈손으로 쫓겨날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돌보심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극적으로 재산을 얻고 떠났습니다. 그런 야곱의의 고백이라 합니다.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바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 하셨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으리라마는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 어젯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

⓶다윗 역시 인간의 모든 수고와 노력이 하나님의 일하심의 은혜가 없이는 자칫 빈손 인생이 될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 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에 깨어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야곱과 다윗의 고백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알몸으로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라고 말한 욥의 고백과 맞닿아 있는 교훈입니다. 이 두개의 본문은 욥의 고백을 야곱과 다윗의 삶을 통해서 각각 다르게 표현한 버전인 셈입니다. 이솝우화에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우리는 벌거숭이로 이 세상에 왔으니, 벌거숭이로 이 세상을 떠나리라. 어딘가에서 이런 표현도 한번 보았습니다. 아기의 첫 옷 호주머니가 없다. 먼 훗날 아기가 입게 될 마지막 옷도 호주머니는 없다. 그냥 왔다 그냥 간다. 제가 이 두 개의 메시지를 1문장으로 합쳐 봤습니다. 우리는 호주머니 없는 벌거숭이로 왔다가 호주머니 없는 벌거숭이로 간다. 누구의 이야기죠“ 욥의 이야기이고, 야곱과 다윗의 이야기이고,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이야기입니다. 저야 여러분의 이야기가 바로 이러한 호주머니가 없는 벌거숭이로 왔다가 호주머니가 없는 벌거숭이로 가는 인생입니다.

사랑하는 영 가족 여러분,
사람들은 흔히 그렇게 말합니다.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잊는 것이 인생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없이 태어나서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다가 결국 없어지는 것이 인생입니다. 오늘 욥이 우리의 인생에 별명을 하나 지어줬습니다. 뭐죠? 빈손 인생입니다. 바라기는 상실의 강을 건널 때,나의 삶이 빈손 인생임을 절감하시기를 소망합니다. 두 번째 보겠습니다. 두 번째는 나의 삶은 하나님의 속안임을 알고 확인하고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입니다.

II. 두 번째는 나의 삶은 하나님의 소관(所管)임을 알고 확인하고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욥기 1:20,
20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욥은 망연자실(茫然自失)한 상황에서 두 가지 행동을 보입니다. 하나는 ⓵자신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미는 것이었고, ⓶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나아가 엎드려 경배(敬拜)하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자신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민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상실, 그리고 깊은 절망 속에서 비통한 심정을 온몸을 드러내면서 보여준 행위였습니다. 그보다 우리가 주목해야 되는 것은 그 두 번째 그 뒤에 나오는 행동입니다. 그가 보인 행동이 뭐였냐면 땅에 엎드려 경계하는 것이었습니다. 20절에 보면,

*욥기 1:20,
20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그러자 또는 종이 전한 말해라는 표현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고려해서 읽어보면 욥이 종에게 비보를 듣자마자, 보인 첫 번째 반응 비통함을 표현함과 더불어서 땅에 엎드려 경배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굉장히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겁니다. 욥은 자신이 취할 수 있는 가장 겸손한 신앙의 제세를 취했습니다. 그는 이번 일에 최고 책임자이시자, 최종 결정권자이신 하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경배했습니다. 욥이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민 것이 그의 절망을 나타낸 것이라면, 그가 땅에 엎드려서 경배한 것은 하나님께 겸손(謙遜)히 복종(服從)하겠다는 결의(決意)를 나타내는 겁니다. 이처럼 욕은 겸손이 하나님께 나아가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합니다.

그것도 비보를 듣자마자, 상실감에 사로잡힐 시간도 없이 주저함 없이 곧장 그렇게 반응합니다. 그의 행위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제 욥은 입술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욥은 모든 상황을 찬양으로 승화시키는데, 여러분 21절 하반 절에 보시면,

*욥기 1:21,
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욥은 모든 것을 잃고서 잃어버린 것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합니다. 저는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한 찬송가의 가사가 떠올랐습니다. 찬송가 370장 2절입니다.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내 노래 되었네. 전날에 한숨 변하여 무엇이 되었어요. 내 노래되었네. 그날 욥이 부른 찬성 듣지는 않았지만 그 가사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결국 20절과 21절에 나타난 욕의 행위는 자기 삶이 하나님 소간임을 확인한 행위였습니다. 용은 이번 일이 하나님 소간(所幹) 임을 알았던 겁니다. 이번 일을 주관하실 분도 하나님이심을 유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두 번 세 번 생각하지 않고, 몇 날 며칠 망설이지 않고, 곧장 하나님께 나간 겁니다. 나아가서 따지든 드러눕든 울부짖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나아갔습니다. 여러분, 이런 자세가 귀한 겁니다. 여러분, 상황이 어떻든지 간에 이 자리에 나온 것이 잘 하신 겁니다. 여러분 상황이 어떠신지 간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잘하는 겁니다. 나아가셔서 아무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찬송도 안 해도 되고, 기도도 안 해도 되고 하나님 원망 안 해도 되고, 찬송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나아가는 거, 그게 귀한 줄로 믿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욥의 삶에 관건(關鍵)은 하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그것이 관건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처럼 산더미처럼 쌓인 집안일이나,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자녀 문제가 관건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쉴 새 없이 밀려오는 수많은 회사 일도 그의 관건이 아니었고, 사람들과 만남에서 오는 감정적(感情的)인 소모(消耗)도 그에게는 관건이 아니었습니다. 뭐 오르락내리락하는 그런 매출 이런 것도 관건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우리의 삶에서 그런 모든 것들이 다 중요하지만 그에게 삶의 관건은 오로지 하나님이었습니다.

시편의 기자들이 그러했습니다. 시편을 여러분들이 곱씹어 보시면 시편은 결국 삶의 관건이 하나님인 사람들의 기도입니다. 그들의 관건은 그들 자신이었거나 그들이 당한 상황이었거나 그들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교회답지 않아 다투는 우리’ 라는 책을 보다가 욥에 관한 한 문장을 발견했습니다. 욥은 자신의 삶에서 잃어버린 재산 혹은 자녀 하물며 건강에 대해서는 큰 미련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욥의 유일한 관심사는 바로 신학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향해 치열하게 묻고 따지는 유일한 물음은 신학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신학이 가리키는 것이 뭔지 아시겠죠? 하나님입니다.

한때 욥의 삶에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었던 재산, 자녀 그 모든 것들이 사라졌습니다. 당시 농경사회에서 가축이나 자녀는 큰 자산이 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욥은 자신의 정체성마저 완전히 잃어버렸다라고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전에 욥은 재산을 통해서 부자로 인정받았고, 자녀들을 통해서 존경받는 아버지로 인정받았고, 신앙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의 정체성을 규정해주던 그것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때도 욥의 삶의 관건은 무엇이었어요? 하나님이었습니다. 우리도 욥처럼 시공(時空)을 초월(超越)하여 삶의 관건이 오로지 하나님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욥에게는 왜 삶의 관건이 하나님이었을까요? 다시 돌아와서 욥에게는, 욥은 자기 삶이 하나님의 소관(所管)임을 알았던 겁니다. 욥은 평소에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믿음의 기초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일을 계기로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신한 겁니다. 여러분, 우리 삶은 우리 소관(所管)이 아니라, 하나님 소관(所管)입니다. 이건 의심할 필요도 없고, 따지고 들일도 아닙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확신할 뿐입니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이런저런 일들이 무엇이 되었든지 모두 하나님 소관(所管)임을 인정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엎드리면, 그걸로 된 겁니다. 이렇게 살기를 바라는 분들에게 기도 제목 하나를 제가 팁으로 드리려고 합니다.

4세기 교부 어거스틴을 다 아실 텐데, 이 어거스틴이 ‘사랑에도 질서가 있다.’라는 사랑의 질서 개념을 강조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더 사랑해야 할 것은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해야 할 것은 덜 사랑하고, 최고로 사랑해야 할 것은 최고로 사랑하는 그러면서 어거스틴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내 안에서 사랑의 질서를 잡아 주옵소서.” 우리의 기도로 삼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사랑의 질서를 잡아주셔서 부디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소관임을 의심 없이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의 영 가족 여러분,
우리가 든든하게 우리를 든든하게 해주던 삶의 울타리들이 무너졌을 때 우리가 견지해야 할 신앙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바라기는 나의 삶은 하나님 소관임을 확인하고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으시기를 소망합니다. 끝으로 우리가 견지해야 할 신앙의 핵심 중 핵심 하나만 더 봅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계신다. 나의 삶에 자리 잡고 계신 하나님의 존재에 사무치는 겁니다. 다시 한 번 21절을 보십시오.

*욥기 1:21,
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욥은 빈손 인생에 이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신이도 여호와시요. 거둔 이 시도 여호와시오니 헤아리기 힘든 일을 겪고서 비통해하며 하나님께 나아간 욥은 하나님의 고유하신 이름을 부릅니다. 여러 가지 이름이 많잖아요.

근데 여호와 하나님, 그 이름을 부르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욥은 모든 것을 잃은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만은 남아 계시다. 라는 사실을 붙들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온 1장의 흐름이나 욥의 친구들이 욥에 찾아오기 전까지에 내용을 다루었던 그 2장까지의 전개를 살펴보면, 욥에 일어나는 사건들은 모두 갑자기 발생한 이름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갑자기라고 제가 표현을 한 것은 욥이 겪게 된 일은 이유 없이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떤 결과가 발생했다. 라는 건 그에 따른 원인이 있게 마련입니다.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습니다. 그런데 욥에 삶에는 원인 모를 일들이 예고 없이 벌어졌습니다. 어떻게 된 걸까요? 배후에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욥이나 욥의 안에 또는 종들은 이해할 수 없었던 그 당시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일하심, 원인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욥에 삶에 개입했던 결과인 겁니다. 욥은 영문은 알 수 없었지만 자기 삶에 하나님의 일하심이 개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그는 주신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시는 이도 여호와시라. 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이러한 고백입니다. 나는 비록 재산을 잃고 자녀를 잃었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계십니다. 내가 소중하게 여겨온 것이든,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든 하나님은 여전히 계십니다.

내게 중요한 것이었던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든 혹 내게 그것이 필요한 것이었든, 필요하지 않는 것이었든 나는 지금 전부를 잃었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계십니다. 욥은 자신의 삶에 자리 잡고 계신 하나님의 존재에 사무쳤던 겁니다. 사실 욥은 더는 잃을 것이 없다. 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욥기 13장 15절을 보면,

*욥기 13:15,
15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셔도 자신으로서는 잃을 것이 없다.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욥은 수중에 있던 재산이나 곁에 살던 자녀 그런 게 아니라, 불변하셔서 여전히 그 자리에 계시고 내 삶의 좌정(坐定)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묵상하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그러한 것들에 잠시라도 마음을 빼앗겼던 것들이 아니라 그것이 아니라 처음과 끝이 한결같으시고 그런 하나님께 집중하면서 하나님의 존재에 사무쳤던 겁니다. 여러분, 욥기 3장 이후를 보면 욥은 자신을 위로한답시고 찾아온 친구들, 그 3명의 친구들과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눕니다. 그러나 친구들의 위로는 욥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켰습니다. 이때 욥의 친구들은 욥의 고난이 죄 때문이라고 비난하면서, 정죄(定罪)하면서 회개(悔改)를 촉구(促求)합니다. 하지만 욥은 결백을 주장하면서 친구들의 비난에 맞섰습니다. 그때 이런 말을 합니다. 욥기 19장 25절,

*욥기 19:25,
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우리가 볼 때 욥은 작은 것들을 잃은 게 아니었어요. 여러분 10자녀, 모든 전 재산, 그게 작은 겁니까? 작은 게 아니에요. 대체할 수 없을 만한 것들을 잃었습니다. 욥은 이러고서 어떻게 앞으로 살아가지, 싶을 심정을 느낄 정도로 모든 걸 잃었고,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게 되었습니다. 깊은 상실감을 느꼈죠 하지만 욕은 확신합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압니다. 내가 전부를 잃은 이 순간 하나님만은 여전히 살아 계셔서 나를 돌보시는 날이 반드시 오고야 낼 것을 나는 압니다. 욥의 고백이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왜인지 모르게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래도 여전히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내가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의 삶에 자정하고 계시고, 나의 삶에 자리 잡고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우리 모두의 삶에 깊이 새겨지는 진실 된 고백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럼 운전을 하다보면, 가끔 안개 낀 길을 만납니다. 그럴 때는 시야가 확보되지 않기 때문에 조금 더 열심히 집중해서 운전을 해야 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면 그제야 보이지 않던 사물들이 하나씩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안개가 걷히면 비로소 누가 보이기 시작할까요?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살다보면 하나님을 잘 보이지 않게 만드는 여러 가지 안개가 우리 삶에 드리워지곤 합니다. 예를 들어서 재물(財物)과 가족이 될 수도 있고, 건강과 관계가 될 수도 있고, 성공과 욕망이 될 수도 있고, 걱정과 두려움이 될 수도 있고, 과거의 상처가 될 수도 있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 될 수도 있고, 자기 의나 인정 같은 것들,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안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시야를 가려서 하나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러다가 상실의 때를 지나면서 삶에 안개가 걷히고 그제야 항상 그 자리에 계셨던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핵심은 무엇이죠?

안개 때문에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때에도 세상의 사물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겁니다. 우리가 단지 보지 못했을 뿐이죠. 마찬가지로 우리 삶에 여러 가지 안개가 끼어서 우리가 하나님을 보지 못하며 살 뿐이지 그때도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시고 우리 삶에 자리잡고 계십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영 가족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을 잃으셨습니까? 어떤 일로 마음이 슬프고, 아프며 낙담하고 좌절하고 계십니까? 어떤 이유로 억울하고 혼란스럽고 허무하고 당황스러우십니까? 저와 여러분들에게 도전합니다. 그 상황이 오히려 복된 일임을 고백하십시다. 모든 것을 잃었더라도 하나님을 잃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잃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잃은 모든 것이 사실은 안개였고, 이제야 비로소 하나님을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 삶의 안개를 걷어 주옵소서. 우리 삶에 잔뜩 낀 안개를 말끔히 걷어 주옵소서. 저와 여러분들의 진실 된 기도 제목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입술을 열어서 한 가지 더, 주신이도 여호와이시요. 거두는 이도 여호와시라. 고백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다 함께 고백해 볼까요? 주신이도 여호와이시요. 거두는 이도 여호와시라. 바라기는 상실의 강을 건널 때,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계신다. 세상을 영에 선포하시며, 나의 삶에 자리 잡고 계신 하나님의 존재에 사무치시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빈손 인생임을 잊고 살면서, 손에 쥐 것을 세기에 바쁘고, 손에 쥐지 않은 것을 얻으려고 바쁜 줄 모릅니다. 그러다 어느 날 거센 폭풍을 맞아서 손에 쥐는 것마저도 휩쓸려 가며, 텅 빈 손을 바라보면서 당황하고, 낙심하고, 절망하고, 분노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하나님께 상처받기도 하고 하나님께 삐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수많은 인생 질문들이 생겨납니다. 여러분, 한 사람의 진면목은 최고의 순간에 최악의 순간에 확연히 드러납니다. 우리로 따지면 그리스도인은 상실의 지님이 짓눌렸을 때 그때에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로 인해서든 감당할 수 없는 상실감을 사로잡힐 때, 나의 삶이 빈손 인생임을 절감하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삶은 하나님 소관임을 확인하고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계신다. 나의 삶에 자리 잡고 계신 하나님의 존재에 사무치시기를 바랍니다. 여기까지 깨닫고 나니깐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삶이 빈손 인생인 줄만 알았는데, 사실은 만물보다 크신 하나님께서 만 손으로 우리 빈손 인생을 쥐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이 위대한 약속을 붙들며 사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만유해주이신 예수 글 속에서 언젠가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우리가 저 천국에 갈 때에 그때에는 우리가 이 땅에서 잃었던 모든 것보다도 더 값지고 영원한 것을 얻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잃었던 그 모든 것을 잊게 될 줄로 믿습니다. 끝으로 우리가 지금껏 나누지 않은 본문 22절의 새 번역을 보시면,

*욥기 1:22,
22 이렇게 욥은, 이 모든 어려움을 당하고서도 죄를 짓지 않았으며, 어리석게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이 사건의 결론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그와 같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욥처럼 모든 일에 어려움을 당하고서도 죄를 짓지 아니 아니며, 어리석게 원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만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계신다. 그 믿음의 반석 위에 날마다 넉넉히 승리하며 살아가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의 이름으로 간절히 진실로 소망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계십니다.

♣요약
말씀을 통해 상실의 강을 건너는 우리 삶에 믿음을 돌아보아 감사해야 한다. 우리 삶의 현실은 기대와 달리 상실로 가득하듯이, 우리는 예고 없이 다양한 모습으로 찾아오는 상실의 강을 건너야 한다. 우리 모두 인생의 본질이 빈손 인생임을 깨달아, 없이 태어나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다가 결국 없어지는 것이 인생임을 고백하고, 나의 삶이 빈손 인생임을 절감하게 해야 한다. 삶에서 마주하는 이런저런 일에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나의 삶이 관건이 오로지 하나님이 되어서, 나의 삶은 하나님 소관임을 확인하고,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아가야 한다. 삶의 안개를 걷어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계신다, 세상을 향해 선포하며 나의 삶에 자리 잡고 계신 하나님의 존재에 사무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 모든 간구(懇求)를 그날에 더 값지고 영원한 모든 것을 얻게 하실 것을 확신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욥처럼 나아가야 한다.

-영원하도록 지음 받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써 세상이 권하는 잠시의 모든 약속은 다 거짓임을 깨닫고, 없고 없다가도 있는 이 빈손 인생으로 하여금 여호와의 그 크고 의로운 손을 더욱 의지해야 한다. 삶으로 마주하는 이런저런 모든 일의 관건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나의 소견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관아래 있음을 확신하고 흐트러진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아 의심 없이 하나님을 따라가야 한다. 불투명한 내일로 인해 우리 모두의 믿음이 흔들리려 할 때, 그래도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그래도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단 한 번도 흔들림 없이 나를 사랑하셨던 그 하나님의 존재를 선포하면서 하늘에 사무치는 찬송과 감사로 승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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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8월 7일)
제목: "습관을 따라“
말씀: 누가복음 22:39-46
찬양인도: 쉐키나(이다니엘 부목사님)

설교자: 박단열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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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복음 22:39-46,
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40 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41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45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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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한창 특새 기간이었을 때의 일입니다. 특새 때 교역자들은 3시 30분에 기도회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 맞춰서 나오기 위해서는 일찍 일어나서 일찍 출발해야 합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대체적으로 2시경에는 일어나서 와야 늦지 않게 주차도 하고 여유 있게 기도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새벽 2시에는 자는 사람이 많을까요? 그때 일어난 사람이 많을까요? 자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 그 기간에 특별히 긴장하고 매일 긴장하며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눈을 떴는데, 2시 50분입니다. 화들짝 놀라서 일어났습니다. 큰일 났다 하면서 주차는 어디하지, 또 기도회는 어떻게 해야 되지, 그런 막 많은 생각을 하면서 화장실에 딱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보니까 특새가 지난주에 끝났습니다. 1주간 특새에 맞춰 삶을 살아가다 보니 1주일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몸의 습관이 들어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저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감사한 마음으로 다시 침대에 누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당시에도 습관이라는 것이 참 무서운 것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최후의 만찬에 마치신 예수님께서 습관을 따라 감람산으로 가셨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감란 산으로 가셨다는 것은 곧 기도하러 가신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는 습관이 있으셨다. 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문장입니다. 감람산으로 가신 주님께서는 함께한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왜 기도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까? 바로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기도에는 유혹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 가족 여러분들에게 여러분에게도 유혹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까? 근데 여러분에게 유혹은 언제 찾아옵니까? 요한일서 2장 16절 함께 한번 보겠습니다.

*요한일서 2장 16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씀을 볼 때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이라고 말하고 그것들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은 우리 육체가 원하는 것을 탐하는 욕심을 말합니다. 인간의 일반적인 욕구인 식욕, 성욕, 수면욕, 배설 욕 같은 것들을 지나치게 탐닉하려고 할 때 우리는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안목의 정욕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으로부터 비롯되는 욕심을 이야기합니다.

때로는 SNS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생활을 보며, 나보다 뭔가 더 나아 보이는 그 사람의 모습을 보고 아 나도 좀 저런 걸 갖고 싶다. 라는 생각이 지나치게 작동할 때 우리는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이생의 자랑은 부유한 재산이나 높은 신분을 자랑하는 것을 말하며, 이런 것들을 얻기 위해 잘못된 수단이나 방법을 이용하려는 것이 또한 유혹에 빠지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유혹은 언제 우리에게 다가옵니까? 이 말씀의 내용을 볼 때 사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 순간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서 하루를 살아가고, 직장에 가고, 학교에 가고, 식사를 하고, 쇼핑을 하고, 티브이를 보고,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다른 사람을 만나고 걸어가는 모든 순간이 유혹이 유혹의 순간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는 것마저 그 동기가 세상의 것을 쫓기 위함이라면 그것마저도 유혹에 휘둘리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러시아의 대문호인 도스토예프스키가 습관에 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습관이란 인간으로 하여금 어떤 일이든지 하게 만든다.” -도스토예프스키-
-그는 이 자막의 말과 같이 습관의 능력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습관에 능력이 있다는 것뿐 아니라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에 한번 주목해 봐야 될 것입니다. 그 어떤 일이 하나님 안에서 거룩한 능력을 행하는 일이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과 같은 유혹에 빠져 이 세상이 추구하는 죄 된 본성을 강화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최선을 다해서 삶을 살아가야 하지만 그 최선이 하나님 뜻 안에서 행하는 최선인지 아니면 이 세상이 주입하는 죄의 유혹에 근거한 최선인지를 날마다 스스로 점검하며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뜻 안에 살아갈 수 있습니까? 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뜻 안에 행하기 위해 첫째로,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습관을 따라 기도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I. 첫째로, 예수님과 같이 습관에 따라 기도하여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
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말씀처럼 쉬지 말고 기도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마주하는 세상의 모든 것이 유혹의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세상을 마주하는 모든 순간에 기도하겠다. 라는 그런 결단과 실행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말씀처럼 쉬지 않은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 참 어려운 일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우리가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 기도하고자 하는 갈망과 기도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정말 그 간절함, 열심히 기도하겠다는 의지가 있더라도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 삶의 하나님을 거역하기 쉬운 습관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22장 21절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예레미야 22장 21절,
21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중하지 아니한 것이 네 습관이다. 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죄 된 본성 가운데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아니 하고자 하는 습관이 기본 값으로 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깊은 뿌리 깊은 습관 즉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려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죄의 유혹을 이겨내기 위해 아무리 애써도 그것을 이뤄내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뿌리 깊은 습관인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하는 습관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우리의 몸에 기도의 습관을 단단히 새겨야 합니다. 습관을 따라 기도하지 않고서는 우리 안에 있는 불순종의 습관을 이길 수 없습니다. 나의 계획과 나의 의지 나의 노력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더우나 추우나 피곤하나 기도할 수 있도록 우리는 기도를 습관화해야 합니다. 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뜻 안에 행하기 위해, 두 번째로,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기도하여야 합니다.

II. 두 번째로,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기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습관을 따라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말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 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기도 내용은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는데요.
첫 번째는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라는 기도구요.
두 번째는 그러나 내 원이 아닌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기도 하셨습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는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십자가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는 예수님의 요청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모든 인간의 대속 제물로 십자가 형태를 올려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분명한 뜻임을 알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의 수치와 고통 그리고 모든 사람의 대신 죄를 짊어짐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고 버림받게 되는 그 찰나의 순간에 대한 그 고통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느끼셨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옮겨달라고 요청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바로 자신의 원이 아닌 하나님의 원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대로 되기를 원하는 기도를 올려 드리셨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예수님의 이런 기도와 같아야 합니다. 아무리 내가 원하고 소원한 일이 있다. 할지라도 그 소원한 일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때로는 그 소원을 꺾고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여야 합니다. 때때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그 순간에도 자신의 욕망을 추구할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렇게 기도 할 수 있죠.

ex) 하나님, 올해 고3인 우리 아들이 정말 지혜 주셔서 반드시 좋은 대학 가야 됩니다. 가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정작 아들에게는 “아들아, 너는 고3이니까. 열심히 공부해야 해 그러니까 여름에 고등부 수련회는 올해는 가지 말자. 공부해야지. 그리고 대학가서 수련회 가면 되잖아. 이번 학원 방학 특강 시간이 고3부 예배 시간이랑 겹쳤네 학원 다녀와서 온라인으로 예배드리면, 돼. 이번 여름이 너무 중요한 거 알지? 올해만 잘 참고 내년에 대학 가서 그때 예배 잘 드리면, 돼.”
-이런 기도를 하고 있진 않습니까? 분명히 하나님께 기도는 하고 있지만 현재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이 추구하는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는 유혹에 휘둘려 하나님께 하는 기도마저도 나의 욕망을 성취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철저하게 나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로 나아가야 합니다.

20여 년 전 제가 군복무를 마치고 대학 2학년에 복학하였습니다. 제가 그 시기에 그 어느 때보다도 정말 하나님과 깊은 친밀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 그때는 아직 신학교는 가지 않았는데 하나님 말씀을 묻는 것이 너무 행복하고 기도한 것이 너무 즐거워서 매일 도서관에 가면 하루에 최소 1시간에서 2시간은 말씀만 읽고 연구하고 또 기도도 1시간에서 2시간 정도 최소한 하루에 3~4시간은 말씀과 기도만 했던 시기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만큼 하나님과 깊은 어떤 충만한 친밀한 교제의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그러면서 어느 날 제 자신을 돌아보니, 원래 제가 참 세상적인 욕망과 유혹에 잘 넘어가기 쉬운 그런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하나님 외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어진 제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충만한 은혜를 누리다가도 또 어느 순간에 보면 제가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유혹에 빠져 실수하고, 실패하는 제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 제 자신을 보면서 저는 제 신앙을 돌아보게 되었고 나름대로 왜 이런 것일까? 그것을 고민하고 묵상하며 나름대로 정리를 해 보았습니다. 한번 그림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그렸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항상 그림과 같이 우리의 삶은 항상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과 17절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17절,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다시 그림 보여주세요. 우리 이 말씀에 나온 것처럼 우리 애는 성령을 따르는 어떤 마음과 육체를 따르는 마음이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흔히 말하는 것처럼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을 따르려고 하는 마음과 세상의 것을 따르려고 하는 우리의 마음과 같습니다. 근데 여기서 이 그림에서 볼 때 하나님과 세상 속에 있는 살아가는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나를 끌어당기고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서 제가 고등학교 때 배웠던 만유인력의 공식을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만유인력의 공식을 기억하십니까? 여러분은 기억 못 하실 것 같아서 준비했습니다.



에프는 알 제곱분의 쥐 곱하기 엠1 곱하기 엠2입니다. 뭐 잘 아시는 것처럼 에프는 힘이고요. 쥐는 중력 가속도를 얘기하는 거고, 알은 거리를 얘기합니다. 그리고 엠1 엠2는 두 매개체의 무게를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두 무게가 무거울수록 더 인력이 당기는 힘이 커지고 그리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해서 더 가까워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그 힘이 커진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근데 아까 그림을 봤을 때 하나님과 세상 속에서 나라는 존재가 있을 때 하나님이 나를 당기는 힘과 세상이 나를 당기는 힘 사이에서 우리가 있다라는 거죠. 근데 아까 그 공식은 다 잊어버리고 거기서 변하는 것이 다른 상수는 다 변하는데 어 변하지 않는데 예를 들어서 중력 가속도 이런 것들은 다 변하지 않는데 유일하게 변하는 변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거리입니다. 즉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기 때문에 거리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큰 힘이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하나님과 내가 서로 당기는 힘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만큼 세상에 죄와 죄의 유혹이 당기는 힘은 기하급수적으로 낮아지게 됩니다. 반대로 세상의 죄와 유혹에 가까워질수록 죄의 유혹이 담기는 힘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하나님께 다가가고자 하는 힘은 기하급수적으로 낮아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배우고 묵상하고 암송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과의 거리는 서서히 좁혀지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급속도로 좁혀진 것이 아니라 서서히 좁혀지게 된다는 겁니다. 내가 계속해서 말씀을 묵상하고 어제도 하고 오늘도 하고 내일도 하고 어제도 기도하고, 오늘도 내 기도하고, 내일도 기도해야 서서히 조금씩 그 거리가 좁혀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점차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면 놀랍게도 죄의 유혹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어느 지점 이상 나아가면 하나님과 끌어당기는 그 힘이 너무 강해지고, 죄의 유혹이 담긴 힘이 너무나 약해져서 마치 내가 그 죄의 유혹으로부터 완전히 초월한 것 같이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아주 지극히 높은 영적인 충만함과 동시에 영적인 교만함이 우리 마음 가운데 싹트게 됩니다. 반대로 세상 적 욕망에 가까이 나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말씀도 싫고, 기도하기도 싫고, 예배도 귀찮아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해도 그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근데 여기서 진짜 문제가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그림을 보여주세요. 보여주실 겁니다. 정말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 존경하는 영 가족 여러분, 너무나 거룩한 여러분,
저희 중간에 있는데, 여러분이 아무것도 안 하고 어떠한 인풋도 없이 가만히 중간에 있으면 여러분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겠습니까? 아니면 세상으로 가까이 나가겠습니까? 솔직하게 말씀하십시오. 난 아무것도 안 하는데 점점 하나님께 가까이 나간다. 라고 하면 거짓말입니다. 왜냐하면,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에게는 불순종하는 습관이 기본적으로 장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예레미야 22장 21절 보겠습니다.

*예레미야 22장 21절,
21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
-너무 슬프게도 가만히 있으면 서서히 세상에 죄의 유혹으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시선과 관심이 쏠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중하지 않는 것이 기본적인 습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정말 시간이 오래 걸리고 경건한 습관을 가진 것도 어렵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도 힘들고 하나님과 아주 친밀한 상황일 때도 계속해서 말씀과 기도에 힘쓰지 않으면 우리는 서서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가까워지는 것은 참으로 긴 시간이 필요한데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가만히만 있어도 점차 죄와 유혹으로 나가고 영적으로 교만해서 한순간에 미끄러지기도 하고 나름대로 발버둥치려고 하여도 그 방향이 잘못되어 있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 그것이 우리의 기본 값입니다. 오늘 본문 44절부터 46절을 제가 한 번 더 읽어드리겠습니다.

* 누가복음 22:44-46,
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45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셔서 땀이 핏방울처럼 땅에 떨어질 만큼 그렇게 기도 하신 이후에 돌 던질 만큼 떨어진 곳에 있는 제자들에게 다시 돌아오셨을 때, 그의 제자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습관에 따라 기도하고, 나의 원이 아닌 하나님의 원대로 살기를 소망하며 기도하지만 여전히 제자들과 같이 자고 있는 것이 저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말씀의 은혜가 충만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 애쓰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가던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할 때에, 그 감격과 기쁨은 어디 가고 여전히 나는 세상에 죄의 유혹과 욕망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있지 않는가? 그렇게 스스로를 돌아보게 됩니다.

나의 주님께서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돌 던질 만큼 그렇게 가까운 곳에서 저토록 처절하게 기도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욕구를 이기지 못하고 영적으로 어두워져 자고 있었구나! 그렇게 한탄하게 됩니다. 여전히 나는 영적으로 실패하고 무능한 무가치한 존재가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 어찌하여 자드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는 말씀에서 저는 다시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나는 여전히 실패하고 넘어지기 쉬우며 유혹에 빠져 영적으로 넘어지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구나, 예수님께서 저에게 그래 너 실패했으니 이제 넌 끝이야, 아무리 해도 넌 안 되는구나. 내가 그렇게 주의하라고 했는데 그렇게 한숨을 쉬시며 나를 포기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나마저 나 자신을 포기하고 싶어지는 그 순간에도 여전히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시 일어나 기도하라고 하시는구나, 내가 영적인 실패와 그 실패의 그 순간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순간에도 불구하고, 다시 하나님께 나아와 기도하며 불순종의 습관을 끊으며 기도의 습관을 쫓아 살아가며 하나님께 더욱더 가까이 나오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주님의 그 말씀에 순종하겠습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수요저녁기도회 나오신 영 가족 여러분,
기도하는 습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코로나가 한창 심각할 때 정부와 질병관리본부에서 고강도 사회적 거리두기 캠페인이란 것을 한 것이 벌써 4년 전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고강도 사회적 거리 두기는 실패하면서도 정작 고강도 영적 거리 두기에는 대성공을 했습니다. 하나님과 영적 거리 두기는 결과적으로 세상의 죄와 유혹과의 거리를 좁히게 만듭니다. 그런 실패의 시간들이 지나가고 많은 것들이 회복되었지만 여전히 우리 마음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이 원인이긴 한데, 여전히 세상의 유혹에 휘둘리고 나의 욕망에 휘말려서 하나님을 벗어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혹시나 나의 본모습은 아닌가, 돌아보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의 영적 거리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영적 거리에 가깝게 하기 위해 우리는 습관에 따라 기도하여야 합니다. 기도할 때 나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구하여야 합니다. 날마다 우리 자리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친밀히 나아가는 기도의 자리를 습관화하시는 우리 모든 영 가족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2024년 여름 토요 성령 집회와 이번 주 광복주일에 진행되는 ‘2033-50 비전’을 순명으로 품는 청계산 산상구국기도회 같은 기도회를 통해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시기를 소망합니다. 매일 아침 진행되는 날마다 솟는 샘물 새벽 기도회와 글로벌 사랑글로벌 기도회 그리고 여러 가지 우리의 기도에 자리에서 하나님과의 거리를 더욱더 좁히기 위해 애쓰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요약
우리를 위한 대속의 제물로 주시기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순종의 습관 속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보다는 하나님께 거역하기 쉬운 삶을 살아가는 그런 우리를 여전히 포기하지 않으시고 붙들어 주심에 감사드려야 한다. 하나님과 세상의 죄 유혹 가운데 살아가며 날마다 수많은 유혹의 순간에 습관을 따라 기도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유혹을 이겨내며 나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믿음의 길을 걸어가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청중하지 않는 습관이 아니라 죄와 유혹을 이기기 위해 습관을 따라 기도할 수 있도록 날마다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 나의 계획과 생각을 관철하는 기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하는 믿음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 연약한 본성으로 인해 죄로 실패하고 넘어질 때에 낙심하여 영적 실패의 순간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눈을 들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다시 기도의 자리로 습관을 따라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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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7월 31일)-교회음악하계대학 특별수요찬양축제.
제목: “진정한 찬양은 하나님을 신뢰함에서 나옵니다.”
말씀: 잠언 3:5
 
설교자: 조성환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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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3:5,
5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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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엔 사랑의 교회 음악목사이시고, 사랑글로벌 아카데미 싸가의 학창이신 조성환 목사님께서 “진정한 찬양은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나옵니다.” 잠언 3장 5절의 말씀을 가지시고 제목으로 말씀을 전해 주시겠습니다. 제가 본 말씀 읽겠습니다. 잠언 3장 5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잠언 3:5,
5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저녁 특별수요 찬양 페스티벌로 하나님 앞에 올려드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정말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의지하지 아니하고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신 그 하나님의 목적이 오늘 이 저녁에도 충만하게 일을 하나님 또 예배로 먼저 주님 앞에 올려드릴 때,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 이곳에 모인 모든 교회들의 음악 지도자들 위해 성령님께서 기름 부어주시고, 이 세미나가 마칠 때에 온전히 또한 준비되어 새롭게 된 에너지로 하나님 하나님의 교회에 돌아가서 잘 귀하게 충성 되이 섬길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내려주옵소서. 잠깐 나누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주시기를 원하옵고, 감사하며 우리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 저녁까지 아주 좋은 시간을 여러분들이 보내고 계신 줄 믿습니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서로가 믿고 신뢰하는 것처럼 신뢰하는 것처럼 힘이 되고 격려가 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 자신에게 이런 신뢰하는 관계의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요? 75세의 우상을 숭배하던 조상의 땅 화란에서 본토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난 아브라함은 그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그 하나님의 그 약속의 말씀 듣고 믿었을 때, 또 다른 말로 얘기하면 그것은 신뢰했을 때, 하나님은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창세기 15장은 기록합니다. 창세기 15장 6절에서,
 
*창세기 15장 6절,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다른 말로 얘기하면 누구든지 하나의 힘을 열망치 않고, 영원한 생명으로 보이게 됩니다. 말씀하십니다. 근데 그 얘기를 다른 말로 신뢰하니, 좀 설명하면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한 참된 만족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왜냐면, 예수님께서 인생에서 너무나 목말라 하던 우물가의 여인, 수가성 여인을 만나서 결코 인간이 하나님만이 채우실 수 있는 것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너도 예배 자리로 나오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배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가치를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라는 단어는 사실 다른 데 쓰여지면 안 되고 하나님께만 드려줘야 됩니다. 이런 하나님을 경험한 모세는 출애굽기 15장에서 너무나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여호와여 신중의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이까, 성경에서 예배라는 단어가, 워쉽이라고 하는 단어가 제일 먼저 나온 것이었냐면 창세기 22장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러 가면서 종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가 예배하고 돌아오리라. 할 때 그 바로 예배라고 하는 것이 워쉽입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야 산에서 이삭을 번제(燔祭)로 바치라는 하나님께 아무런 이견을 보이지 않고 말씀을 듣고, 그 다음날 아침 일찍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그 산 모리야산으로 올라가서 이삭을 제물(祭物) 대신했고 그 이삭을 향해 순종(順從)과 신뢰(信賴)의 칼을 들이대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이름을 두 번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의 그 신뢰의 예배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름을 부르심으로써, 응답하신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잠언에서 “너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라고 한 것은 명철이라고 했을 때 그것이 뭐냐면, 밝은 명, 밝을 철인데요. 영어로 얘기하면 언더스탠딩(Understanding)입니다.
 
그러니까 이해하는 것, 내가 이해하는 것, 그러니까 너의 이해보다 하나님을 더 신뢰하라. 고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길, 우리의 길을 우리의 인생의 길을 하나님께 온전(穩全)하게 맡기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뢰가 하나님께는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뢰가 기쁨이 되는 역사가 성경에 또 나오는데, 역대하 20장에서, 여호사밧 왕 때 유다의 연합군이 쳐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엄청난 위기였어요. 그래서 역대하 20장 21절에 보니까,
 
*역대하 20장 21절,
21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요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였으니, 이렇게 나오는데 여러분 엄청난 위기(危機)를 당했을 때 정말 하나님을 신뢰하는 백성들의 고백 속에서 이런 고백(告白)이 나오는 거였어요.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시편 117편에도 보니까,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하다.” 라고 고백합니다. 정말 우리가 찬양 중에 어떤 스타일의 찬양을 하든지,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전심으로 신뢰하면서 하나님 정말 내 이런 위기 중에서 이런 상황(狀況) 속에서도 내 삶에 향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무나도 크고 그리고 또 이 상황에 향하신 하나님의 진실하심이 너무나 크다 라고 크시도다. 라고 고백하게 될 때, 그 신뢰의 고백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역대하 20장 21절의 말씀에도 너무나 많은 얘기들을 할 수 있겠지만, 거기에 보니까 거룩한 예복(禮服)을 입히고 라고 돼 있잖아요.
 
*역대하 20장 21절,
21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그 예복(禮服)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입혀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를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지 않고서 어떻게 우리의 셀 수 없는 그 많은 죄들을 용서(容恕)받을 수 있으며 또 그 하나님의 스탠더드를 어떻게 하면 우리의 삶으로는 절대로 그것을 충족시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찬양을 받아주시고,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너무나 감사한 것은 구약에서는 짐승을 잡아서 하나님의 제사를 드릴 때, 그 짐승의 피의 역할은 죄를 덮는 것이라고 신약에 나오는 예수님의 그 피는 어떤 피냐면, 요한복음에서 세례요한이 이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세상 죄를 덮는 것이 아니고 “세상 죄를 쥐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그 예수 그리스도 사랑을 믿고 신뢰하고, 고백 신뢰의 고백을 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그냥 죄를 덮는 수준이 아니고, 그 죄를 완전히 가져가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죄가 되심으로 우리를 완전히 자유케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의의 병기로 우리의 삶을 들일 수 있도록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당장이라도 나를 삼킬 것 같은 거친 세파의 출렁임 속에서, 너무나 바보 같은 결정 나의 결정 때문에 내 인생의 위기가 닥쳤을 때, 나 자신의 그 연약(軟弱)한 모습 너무나 형편없는 그 모습 때문에, 어 너무나 후회를 막 하고 있는 그런 나의 연약함 속에서도, 자폐아인 그 자녀가 엄마의 머리털을 붙잡고 흔들어내는 그런 처절한 상황 속에서도, 그리고 그토록 오랫동안 배우자의 믿음을 위해서 기도했지만, 수십 년이 지나도 아직까지 변화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어 그런 나의 연약함 속에서도, 또 그리고 여기에 모이는 많은 찬양대 대원들과 지휘자들과 반주자들이 있는데, 우리가 얼마나 여러 번,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서,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얼마나 너무나 여러 번 오랫동안 찬양했습니까?
 
그런데 막상 내 인생에 위기가 닥쳤을 때, 무너지는 나의 그런 모습 속에서, 우리가 다시금 일어나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찬양으로, 그리고 오늘 저녁에 드려지는 5개의 프로젝트콰이어가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드릴 때, 우리는 어 저들이 얼마나 찬양을 잘하는가? 그런 것을 보려고 여기 앉아있는 자들이 아니고 그 모든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서 우리의 전적인 신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라고 함께 고백하는 귀한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했던 찬양 중에서 ‘거친 파도 날 향해 봐도 주와 함께 날아 오르리. 폭풍 가운데 나의 영혼 잠잠하게 주를 보리라.
 
♣요약
오늘 프로젝트콰이어의 모든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전적인 신뢰를 고백하고 선포하는 축제의 시간이 되어서, 이 시간 우리의 삶을 주님께 온전히 올려드려야 한다. 우리의 이해와 지혜를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신뢰하는 자로, 우리가 주님 앞에 예배를 드릴 때마다 노래가 아닌 신뢰로 가득찬 찬양과 예배를 올려드리기를 간구하며, 온전한 신뢰 속에 예배할 때마다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소망하자.
 
첫 번째 우리 프로젝트콰이어는 프로젝트콰이어 5반-1반까지입니다. 인간에게 주신 상상력과 창의력은 정말 귀하고 놀랍습니다. 그 상상력과 창의력이 성령께 붙잡힐 때,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시게 하고, 피조물은 자기의 자리로 돌아오게 되는 기쁨과 만족 충족됨이 있습니다. 한국 교육에 친근한 찬송가 인애하신 구세주여, 가사를 가지고 창의력을 발휘하여 작곡한 부분으로 시작하여 원곡의 부분을 또 다시 어제와 오늘이 함께 귀한 영성과 아름다움을 더해보는 인애하신 구세주, 그리고 또 성령이 오셨네. 원곡의 기쁨을 더해진 생동감에 성냥님의 강림이 함께해 주시겠습니다. 우리 프로젝트콰이어를 박수로 만나주 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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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7월 24일)
제목: “의인과 믿음”
말씀: 로마서 1:16-17
찬양인도: 쉐키나(이동선 부목사님)
사회: 김대규 부목사님
설교자: 최종민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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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16-17,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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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처럼 바로 유대인에게는 십자가의 복음이 거리까지 십자가의 복음이 거리끼는 것이었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도 바울이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했었던 것은 무엇 때문에 그럴까요? 바로 복음은 모두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놀라운 진리, 이 놀라운 능력 앞에서 이 사도바울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랑하고 난 이것을 붙들고 평생을 영원토록 살아간다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동일한 고백인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이 사도바울은 이 복음의 능력, 복음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자신의 평생을 드렸던 사람입니다. 그 보금 안에 있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거죠. 저도 중학교 3학년 때 주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저는 모태신앙입니다. 믿는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서 이제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됐는데요. 제가 8살, 9살 때 제일 힘들었던 것이 무엇이냐면 TV에는 너무나도 재미있는 만화영화가 아침에 꼭 교회 가야 되는 그 시간에 시작했습니다. 디즈니만화동산 그걸 보고 싶어서 엄마한테 애걸 했습니다. 오늘 한 번만 교회 안 가면 안 되겠냐고 ‘교회 안 가면 내 자식 아니다.’
 
나가라 그래서 네 교회를 열심히 나갈 수밖에 없었고 그 가운데서 부모님이 가셨던 그 줄 성수와 또한 믿음에 대한 열정으로 지금 제가 이 자리에 서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런데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나서부터 제 마음 가운데 들었던 고민이 무엇이냐면 과연 이름은 무엇인가, 나는 믿음이 좋은 사람인가, 나는 구원받은 사람인가,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진정한 구원의 확신이 있는가. 저는 매일 고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씨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진짜 내가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았는가? 왜냐하면, 제 안에는 아직도 죄의 문제가 남아있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런 거룩한 삶이 아니라, 죄 가운데 계속적으로 싸워서 승리함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넘어지는 삶이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적으로 오기 때문에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저만 그렇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믿음이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서 정말 많이 고민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여름에 이 시간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말씀, 기도할 때 하나님께 주신 이 말씀 함께 깊이 나누고자 합니다. 그 복음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그 능력을 나는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믿음이 없는 자처럼 행동하는가? 과연 믿음은 무엇이고, 과연 의인은 누구인가? 같이 함께 살펴보길 원합니다.
 
16절 말씀에 바로 이제 사도바울은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면서 17절 말씀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17절 말씀은 바로 16절 말씀의 근거 구절이 됩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가 읽었던 이 개혁 개정에는 나오지 않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무엇이 등장하냐면 ‘왜냐하면’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로마서 1:16-17,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왜냐하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주신은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라는 그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근거 구절인 17절 말씀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17절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2가지 중요한 핵심 구절을 집중해야 되는데, 첫 번째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 여기에 대해서 보통 신학자들은 3가지 견해를 가지고 설명합니다.
첫 번째는 이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 그분의 의로우심, 하나님의 의로운 속성을 의미한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두 번째는 무엇이냐면 그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행하신 모든 의로우신 구원의 행위가 바로 하나님의 의다. 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견해는 무엇이냐면 바로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를 통하여서 의인이라는 거룩한 신분을 허락하신 것이다. 라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자 여기서 말한 이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견해 중에서 오늘 말씀 해당되는 그런 견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마음속으로 대답하실 줄로 믿습니다. 몇 번이든 상관없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에 의해 적합한 해석이고, 이 모든 것들이 다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좀 더 적합한 것이 있다면 3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견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견해 무엇인지 기억나시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의인이라는 거룩한 신분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1번부터 3번까지 견해를 합쳐보면,
 
하나님의 의는 거룩한 의로운 속성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그분이 행하신 의로운 구원의 행위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의로운 신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의로운 신분을 가진 자들이 되었습니다. 복음 안에 하나님께서 거룩한 의로운 신분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기 위해서 두셨다 그리고 그것을 나타내셨다. 라고 17절은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무엇을 통해서 주님이 이것을 드러내시고 나타내실까요? 바로 그것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는 이 구절 가운데 나와 있습니다. 이 구절에 대해서 정말 많은 신학자들의 여러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 초대교회 교부들을 이와 같이 설명합니다.
 
이것은 구약에서의 믿음과 신약에서의 믿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라고 그렇게 설명하고 있고 또한 어거스티는 이것이 복음을 전하는 자의 믿음, 또한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의 믿음을 같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존 칼비는 이것을 사람이 갖고 있는 믿음이 점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통해서 커져가는 그런 의로움이다. 라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우리가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구절을 좀 더 우리가 참고해야 되는데, 그 말씀이 고린도후서 2장 16절 멘스입니다. 제가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후서 2:16,
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사도바울은 믿는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향기다. 라고 말하면서 이 구절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 구절에서 무엇이라 말하냐면 이 그리스도의 거룩한 향기가 어떤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 그리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설명하면서 사망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기 위해서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 또한 생명을 강조하기 위해서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이 말씀을 따라서 이해한다면, 믿음으로부터 믿음에 이른다. 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냐면 오직 믿음을 통하여 오직 믿음을 통하여, 그렇다면 17절 말씀을 다시금 설명한다면, 다시금 우리가 해석한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복음 안에는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으로 말미암아 그분이 행하신 우롱 구원의 행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거룩한 신분, 이 신분이 어떻게 나타나냐면 바로 믿음을 통하여 나타난다. 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죠. 또한 여기서 나타난다는 것은 계시를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의로심이 우리를 거룩한 유인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이 어디에 있냐면, 복음 안에 있는데, 이것이 어떻게 어떻게 계시됐느냐, 바로 믿음을 통하여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로운 우리를 향한 거룩한 신분을 드러내시는데 게시하시는데, 그 계시하시는 것은 바로 오직 믿음을 통하여 주님이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믿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근데 여기서 아까 전에 제가 말씀드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찾으시는 온전한 믿음이 있을까요? 많은 청소년들과 청년들과 상담하게 되면, 여기에 대해서 무조건 아니라고 고개를 흔듭니다.
 
제가 처음 사육을 시작했을 때에, 중고등부를 담당했습니다. 광명의 한 교회에서 제가 중고등부를 저는 제가 전도사로 처음 사역을 시작할 때에 제가 반에 서서 말씀을 선포하면 아이들이 다 뒤집어질 줄 알았습니다. 떼굴떼굴 구르면서 아이들이 통에 자복하며 눈물 흘리며 하나님 제가 죄인입니다. 내가 예수님만으로 살겠습니다. 그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로 믿었습니다. 근데 제가 처음 전도사로 부임하고 나아갔을 때, 복음을 전했을 때 어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을까요? 대부분의 아이들이 다 잠에 들었습니다. 그걸 보면서 제가 어떤 마음이 들었냐 하면 제 안에다가 항상 사직서를 놓고 다녔습니다.
 
하나님, 저는 아무래도 이 일이 아닌가 봐요. 그럴 때에 어떤 한 친구가 저와 면담을 하게 됐는데 상담을 하게 됐는데, 전도사님 그때는 전도사였으니까요. 전도사님 저에게는 믿음이 없는 것 같아요. 전도사님 저는 믿음이 없어요. 그렇게 생각하니? 저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하구요. 이런저런 죄들 다 짓고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한마디 했습니다. 나도 너랑 똑같았어. 그런데 너에게는 믿음이 있어. 너 예수님 믿지 너 예수님이 너의 구원자임을 고백하지? 네 그럼 넌 믿음이 있는 거야. 믿음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믿음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 안에 있는 능력, 힘, 파워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죠.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이해하기 위해서는 첫 번째 우선적으로 이 믿음은 나에게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에게서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우리는 믿고 고백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과 9절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같이 한목소리 읽도록 하겠습니다.
 
*에베소서 2장 8-9절,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아멘 전 이 말씀이 너무 좋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 믿음, 구원이 나에게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선물이란 것을 이 말씀이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죠. 여기서부터 자유함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믿음을 주시고, 구원을 주셔야,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반대로 생각하죠. 하나님이 아무리 우리를 구원하셨다 할지라도 내 안에서 구원에 합당한 일들이 일어나야 되고, 또한 믿음을 향한 어떤 거룩한 노력이 일어나야 되고,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무언가를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으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 은혜와 믿음 구원을 우리에게 주실까요? 우리 안에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 가운데 성육신 사람으로 보내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 하시고, 또한 3일 만에 부활케 하시며 또한 승천하심으로, 지금도 하나님 보좌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며 나아가시도록 주님을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소망이 되고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바로 우리게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의 주권과 그분의 소유에 의한 것입니다. 이것을 고백하며 나갈 때에 우리 안에 진정한 평안과 자유함이 있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믿음을 먼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게 하십니다. 또한 더불어서 우린 어떻게 고백해야 할까요?
 
바로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이 놀라운 믿음이 바로 우리를 위해서 준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서 13절 말씀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13절.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아멘. 이 말씀에서 무엇이라고 말하냐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접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에 영접한다는 것이고. 그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십자가 구원의 능력, 그 이름의 권세를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무엇이냐며 믿는다는 그런 행위는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응당 마땅히 행해야 될 것, 하나님 앞에 드려야 될 것이 바로 믿음인 것이죠. 그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지적인 동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머릿속으로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얼마나 놀라우신 분이신지를 우리가 믿고 따르면서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 이것이 바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분만을 의지하고 전적으로 신뢰하는 삶입니다. 믿음은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아버지를 바라봐야 되고요. 아버지를 바라보게 되면, 그분을 향한 전적인 신뢰와 의지가 흘러나오게 됩니다. 주님은 그것을 향하여 우리의 믿음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이제 여름철이기 때문에 많은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데리고서 여행을 가십니다. 여행을 갈 때 자녀들이 캐리어를 쌓으면서 막 고민하는 거 들어보셨어요? 한 이번에 여행가는데 돈이 얼마나 들 것 같은데, 걱정이네 이런 얘기 들어보셨어요? 아 가서 뭐 먹지 어디서 자지 이런 얘기 들어보셨어요. 어린 아이는 어떻게 하냐면 룰루랄라 신나가지고 자기 장난감만 잔뜩 싸는 겁니다. 사춘기 아이는 한마디 합니다. 엄마 아빠 와이파이 돼? 그거 말고는 원하는 것이 없어요.
 
왜냐하면, 확신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모님이 나를 가장 좋은 곳에 데려갈 것이고, 그리고 부모님께서 내가 먹고 싶은 거 다 사줄 거라는 전적인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굳건한 관계성은 흔들리지 않는 온전한 믿음을 자아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그렇게 의지하고 있나요?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나요? 주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물으시는 것입니다. 너에게 믿음이 있느냐? 물으실 때 주님께선 그것을 물어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너에겐 진정으로 아버지 되는 나에 대한 확신이 있느냐? 어떠한 삶의 요동이 온다 할지라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서서 나를 신뢰함으로 세상의 모든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며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이 너에게 있느냐? 주님은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적인 신뢰와 의지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주님이 원하시고 바라시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예술 그리스도께서 과부와 재판장 비율을 말씀하시면서 이 말씀 하십니다. 누가복음 18장 8절입니다. 같이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8장 8절,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아멘. 불의한 재판장이 한 명 있습니다. 그 누구의 말도 들어주지 않습니다. 악독합니다. 항상 판결을 굳게 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의 지인들이 편한 대로, 그렇게 판결하는 악한 불의한 재판장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재판장이 한 과부가 매일 찾아와서 매일 원하고 바라기 때문에 너무나도 귀찮고 힘들고 어렵기 때문에 그 과부의 청을 들어줍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과부에게는 불의한 재판장의 대한 그를 향한 그런 굳건한 신뢰가 있습니까? 의지함이 있습니까? 너무나 선한 재판장이 내가 간과하면 반드시 들어줄 것이다. 라는 그런 마음이 있습니까? 없어요.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진정으로 자신을 이 돌파할 것은 이 재판장 밖에 없다는 그런 간절한 신뢰와 의지함으로 글을 찾아갔을 때에, 그 재판장도 불의한 재판장도 그 과부의 청을 들어줍니다. 하물며 우리가 신뢰에 맞이하는 우리의 유일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때에, 그분이 우리의 기도에 귀를 닫으시고 듣지 않으시며 눈을 가리시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주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갈 것은, 그분이 우리의 기도에 신실하게 응답해주시는 신뢰할 만한 유일한 분이심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이것은 세상 끝날 되면 힘들고 어려운 고난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의 믿음이 떠나가고 마음이 떠나가서 믿음을 못 보겠구나! 그런 한탄이 의한 것이 아니라 나는 믿음을 보길 원한다.
 
내 제자들아 사랑하는 내 사람들아, 나에게 믿음을 보여다오. 굳건한 믿음 흔들리지 않는 신뢰와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 아버지께 나오는 그러한 신실한 사람들이 되렴. 주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씀 가운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이 나의 믿음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향하여서 갖게 되는 온전한 신뢰와 의지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말씀해서 말하고자 하는 이 의인됨은 누구를 말합니까?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써 나는 하나님 믿음의 모든 것 되어드릴 만한 그런 선한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나에게 허락해주셨기 때문에 지금 부족해도 나는 주님만을 의지하며 신뢰하며 나아갑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그렇게 나아갈 때에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시작하신 그 거룩한 믿음의 시작을 더욱더 창대하게 하시고, 우리를 주의 거룩한 품에 안으시고 평생 주의 거룩한 뜻 가운데 살아가며 승리케 하실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세상 가운데 넘어져서 쓰러져 있느냐? 다시 일어나렴. 다시 일어나서 내가 너에게 준 믿음으로 신뢰와 의지함으로 이 아버지만을 바라보며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믿음의 싸움을 쌓으며 승리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소망한다. 주님이 격려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마지막 구절이 있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누었던 내용들을 다시금 돌아본다면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요? 오직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신뢰와 의지함을 가지고 세상 가운데 승리하며 살리라. 그와 같이 주의 거룩한 말씀대로 진정을 우리가 주님만을 의지합니다. 신뢰합니다. 믿습니다. 그런 믿음의 고백으로 주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 예수 그릿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 거룩한 사람들로 다시금 세우셔서, 주의 말씀대로 이 세상 가운데 승리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믿음이 연약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님은 있는 그대로 나오라 가십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본다면 진정으로 우리 삶 가운데 작은 겨자씨와 같은 믿음이 있다. 할 때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 가운데 우리를 통하여 상상도 할 수 없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실 줄로 믿습니다. ‘2033-50 비전’이 바로 주의 거룩한 이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하여서, 이 땅 가운데 펼쳐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겨자씨와 같은 믿음을 보길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 거룩한 씨앗을 심으셨으니깐요. 이제는 열매를 맺어야 될 때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열매를 맺어야 될 때입니다.
 
순이 나고, 움이 트고, 싹이 피어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야 되는 그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자신을 바라보면서 주님 나는 믿음이 없습니다. 나는 믿음이 연약합니다. 내가 믿음이 없는 것을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그렇게 외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 없는 자를 다시금 진토해서 일으켜 세우시며, 우리를 온전케 해주시며, 거룩한 능력으로 굳건히 세우시는 하나님 앞에 온전히 나아가는 사랑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와 같이 살아가기를 우리 모두가 그와 같이 준 옆에 나아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 요약
믿음의 주권자이시며 유일한 주인 되시는 성삼위일체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주 안에서 믿음을 찾아 선한 것이 하나도 없는 내 안에서 믿음을 찾아 헤매는 영적 방황을 마쳐야 한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을 확신하는 굳건한 관계성을 통하여 세상의 그 어떤 거친 파도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는 온전한 믿음을 고백하며, 우리가 날마다 의인이자 주의 거룩한 자녀로 살아갈 때, 복음 안에서 계시하신 의로우신 하나님의 속성과 거룩한 구원의 역사가 세상 가운데 온전히 나타나기를 간절히 간구하자. 우리의 상황과 우리 환경이 어렵고 눈물 나게 하고 아프고 참으로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소망 가운데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고 우리는 이 믿음을 붙잡고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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