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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6월 5일)
제목: “인자의 날 하루”
찬양인도: 쉐키나(이동선 부목사님)
말씀; 누가복음 17:20-22
사회: 강건우 부목사님
 
설교자: 백승준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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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7:20-22,
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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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 저녁 기도회에 오신 모든 성도님들을 환영합니다. 창립 46주년 성역 컨퍼런스가 며칠 앞두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은혜와 또 새로운 서명으로 채워주시는 시간되시길 소망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은 누가복음 17장 20-22절까지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들은 간절히 기다리는 어떤 그 하루가 있으십니까? 아마 한참 기말고사를 치르고 있는 우리 대학생들은 빨리 시험 마치고 방학하는 그 하루를 기다릴 거라고 생각됩니다. 군 복무 중에 있는 장병이 있다면 국방의 의무를 마치고 제대하는 그 하루를 기다리지 않을까요? 아마 또 직장인 분들은 긴 일들을 마치고 짧게 주어지는 그 여름 하루에 달콤한 하루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우리 모두는 어떤 하루를 기다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소망해야 될 그 하루가 무엇일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인자의 날 하루'를 기다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을 기다려야 될지 오늘 말씀을 좀 깊이 있게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이 말씀을 생각해 보면서 먼저 예수님께서 바리세인들과 함께 나눌 넘으신 이야기를 살펴볼까 합니다.
 
바리세인들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질문을 하나 던집니다. 바로 그 질문의 내용은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합니까? 라는 것이었습니다. 왜 바리세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물었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 하나님 나라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의 수많은 비유들은 바로 천국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산상설교 말씀의 핵심 부분 6장을 보면요. 기도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근데 그 기도도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왜 주셨느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바로 기도조차도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 위한 수단이란 것들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아마 바리세인들도 예수님께 관심이 많았고요. 또 하나님 나라에 관심이 많았기에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 기울였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궁금했던 내용을 질문하였습니다.
 
근데 그들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바로 그 언제 있었습니다. 근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수 없다.' 바리세인들은 뭔가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고 물리적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 시대의 어떤 배경을 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님 시대에 유대한 민족은 지금 로마의 식민 통치국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로마뿐만 아니라 참 오랜 기간 동안 나라를 빼앗기고 이제는 그 서러움 많은 민족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들 마음속에서는 하나님께서 다시금 보내시는 그 메시아, 다윗과 같은 왕이 이 땅에 와서 우리를 이 모든 식민 통치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어주고, 이제는 다윗왕국과 같이 열방을 다스리는 그런 뽐나는 나라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변화시켜 주시길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희망을 두었습니다. 바로 그 예수님이 그러한 다윗의 왕국,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메시아가 아닌가? 아마 그와 같은 질문을 던졌던 것 같습니다. 그와 같은 마음은 바리새인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에게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동기를 살펴볼 수 있는 그런 장면들이 몇 군데 있는데요. 특별히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직전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그렇게 받아들이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의 친척이었기도 했고 세베대 아들들의 어머니였던 마리아가 예수님께 나와서 이렇게 간청을 합니다. 나의 두 아들 중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그렇게 로비를 펼칩니다. 바로 거기서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이 이 땅 가운데 하나의 나라를 회복시키실 것이고. 다윗과 같은 왕국의 왕이 되실 것인데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예수님의 제자들 특별히 수제자라면 좌의정 우의정으로 높은 자리를 차지할 거라는 기대가 있었던 걸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조차도 예수님께 나와 제자들이 물었던 질문이 이렇습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때이니까. 끝까지 예수님이 다윗과 같은 그런 나라를 세워주시고자 하는 그런 열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강력한 나라에 대한 소망은 참 나라를 잃어보고 그 나라가 흔들리는 사람들이라면 이해가 갈 거라고 생각됩니다.
 
제가 최근에 선교지를 좀 방문하며 선교사님들을 만나 뵙고 왔는데요. 그중 한 나라가 미얀마였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코로나 터지자마자 또 미얀마 안에서 내전이 일어났구요. 지금은 상당히 좀 어려운 시기가 되었습니다. 군부의 세력이 그렇게 강하지 못해서 몇몇 도시만 장악하고 나머지 지역들은 또 반란군에 의해서 계속해서 중요 시설이 파괴되고, 전쟁이 좀 계속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나라의 젊은이들을 군인으로 뽑아가는 징집령이 내려졌고요.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들이 군대로 가서 또 전쟁터로 가서 죽는 것을 피해서 미얀마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주변 국가로 흩어져서 지금 살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나라도 매우 힘듭니다. 지금 동남아 그때 방문했을 때가 한 40도가 넘는 더위였는데요. 서로 주요 시설 파괴함으로 말미암아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하루에 8시간 누르면 잘 들어오는데요.
 
그 40도가 넘는 찜통 더위를 전기도 없이 선풍기도 안 돌아가는 상황에서 버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 참 그런 나라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 잠시 경험하다 왔습니다. 그리고선 그 다음 나라로 옮겨갔던 곳이 라오스였는데요. 사실 라오스도 독재 국가였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많이 없는 나라였지만 그래도 치안이라도 잘 지켜주는 나라가 얼마나 나라다운 나라인지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서는 이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얼마나 한국이 축복받은 나라인지 다시 1번 깊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아마 오랫동안 나라 없는 슬픔을 겪었던 바리세인들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아가 되셔서 다윗 왕국과 같은 그런 나라를 세워주시기를 바랬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하나님 나라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의 대답 20절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7:20-21,
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이 말씀을 좀 저희가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인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 여기서 말하는 너희는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과연 바리새인 안에 하나님 나라가 있을까요? 예수님은 바리세인을 보시고 참 많이 책망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행동 겉으로 보여주는 그 모든 것은 의롭게 보이고 아무 문제없는 거 같지만 그 마음으로는 썩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리세인을 보고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회칠한 무덤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겉에는 하얀 회칠을 했기 때문에 깨끗해 보이지만 그 안에서는 시체가 썩어 하고 가고 있는 것처럼 냄새가 나고 부패한 바로 그런 사람이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바리세인의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라고 해석하는 것은 좀 무리가 있을 거 같구요. 이 헬라어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서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서있다 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대화를 하고 있는 와중에 바리세인들과 함께 대화하고 있는 이 가운데 서있으신 분이 바로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신 겁니다. 하나님 나라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서 계시고, 예수님이 통치하시고 예수님의 말씀이 많은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의 보혈은 복음이 선포되고, 죄악과 사망의 권세가 물러나기 시작하였고, 하나님의 백성이 주님을 찬양하기 시작하는 바로 그곳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우리 말씀을 좀 깊이 있게 더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초등학교를 다니면 국가의 3요소라는 것들을 배우게 됩니다. 아직도 기억하고 계시지요?
 
한 나라가 국가답기 위해서는 3가지 요소가 필요한데 ⓵영토가 있어야 되고요. 그 영토를 살아가고 있는 ⓶백성이 있어야 되고 국민이 있어야 되고, 그리고 그 나라를 다룰 수 있는 ⓷주권 이 3가지가 있을 때 하나의 나라를 제대로 된 나라라고 얘기합니다. 제가 예전엔 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잘 몰랐을 때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회복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주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 가운데 다시 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악한 사단의 권세가 물러나고 사단과의 싸움을 이겨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 가운데 임하게 해주십시오. 라고 하나님의 잃어버린 주권을 회복하는 것을 하나님 나라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깊이 있게 하는 말씀을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그것은 제가 잘못된 또 생각이 짧았다는 것들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통치는 어제나 얻은 이나 똑같이, 하늘을 다스리고 계신 거지 이 땅을 여전히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서 여전히 천하 만물은 다 통치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백성에게 있는 것입니다.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에 살아가던 사람들이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다운 자격을 잃어버리는 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호세야 말씀이 있습니다. 호세야서 1장 9절의 말씀인데요.
 
*호세야서 1:9,
9 여호와께서 이러시되 그의 이름을 루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문제입니다. 루암미란 뜻은 백성이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 앞에 로 자가 붙으면 부정의 의미를 뜻하는데요. 이 루 암미가 암미가 되기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성경 전체에서 막아주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회복의 핵심이었습니다. 근데 이것이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던 바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과연 어떠한 일을 펼치셨습니까? 바로 하나님 백성다운 자격을 회복시키기 위하여서 하나님은 놀라운 일을 하셨습니다. 바로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의 자격으로 회복시켜 주신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한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자격(資格) 조건(條件)을 따지는 일이 있습니다. 바로 비자(VASA)를 받는 것입니다. 지금은 미국 비자 받는 것이 어렵지 않구요. 온라인을 통해서 몇 가지 자료만 내면은 금방 되지만, 제가 처음 미국 방문했을 때 광화문에 있는 미국대사관을 방문했었습니다. 그런데 방문하러 가서 여러 가지 자료(資料)들을 내야 됩니다. 재정이 얼마만큼 있고, 가는 목적과 거기에 묵을 것인지, 어떻게 돌아올 건지에 대한 여러 가지 증빙 자료를 내고 뭐 그렇게 인터뷰를 하더라도 조마조마합니다. 왜냐하면, 탈락(脫落)률(率)이 제일 높았던 것이목회자자였습니다.
 
선배님들이 미국 가셔서 잘 안 돌아오셨던 그런 케이스들이 있다 보니까, 아주 직업이 목회 자였으면 더 꼼꼼하게 아주 깐깐하게 그래서 때로는 자료가 좀 부족하면은 비자를 리젝트(rejected) 당하는 그런 일까지 있었습니다. 참 기분이 상하더라구요. 돈 내고 지나라 간다는데 뭐 이렇게까지 까다롭게 심사를 하는가? 여러분 하나님 나라 들어가는 것은 엄청난 심사 자격을 따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라의 왕이신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 나라의 백성 되기 위해선 하나님께서 거룩함이라는 자격조건, 의로움이란 자격조건을 따지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하나님의 눈에 봤을 때, 하나님의 자격에 들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준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대(審判臺) 앞에 서게 되었을 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는커녕 이제는 우리의 죄 값을 쥐고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罪人)이 바로 우리의 신분(身分)이었고 우리의 자격(資格)이었습니다. 그랬던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우리를 백성으로 만드셨습니까? 바로 우리의 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지불(支拂)해야 될 모든 형벌(刑罰)을 이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十字架)에서 대신(代身)지고 돌아가시게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담당해야 될 모든 죄를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대신 지불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서는 예수님이 갖고 계셨던 그 하나님 아들로서의 당당한 자격, 의로우신 바로 죄 없으신 거룩한 자격을 하나님 우리 가운데 부여하신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노라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내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의 같이 못 박았노라고 고백했던 사람을 이제는 내 백성이 아니라고 얘기했던 것들을 취소하시고, 이제는 너는 나의 백성이라고 말씀해 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이 피묻은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선포(宣布)되는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臨)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격을 회복(回復)하고 하나님의 통치(統治)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이 선포되는 바로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 시작하였고요. 그리고 나라는 점점점 확장(擴張)돼 가고 서무장해 가고 있다. 그런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정으로 사모해야 될 바로 하루가 있다. 라는 것을 22절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이에요. 22절을 제가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누가복음 17:22,
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있는 ‘인자의 날 하루’가 바로 무엇일까요? ‘인자의 날 하루’라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인해 시작되는 영광스러운 시대의 첫날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이 땅 가운데 이제는 재림의 왕으로 임하실 것이다. 그 재림의 왕으로 임하시는 바로 한날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요,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부활(復活)하시고 승천(昇天)하신 이후 초대 교회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곧 다시 오실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모든 어려움을 또 박해(迫害)를 이기면서 주의 복음(福音)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이날, 예수님의 승리(勝利)가 완전히 성취(成就)되는 그날을 보지 못한 채 제자들은 순교(殉敎)하고 또 제자들의 복음을 받아들였던 수많은 사람도 그날을 보지 못한 채 먼저 주님의 품에 안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으로 바라본 한 순간(瞬間)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으로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던 약속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자의 날이 성취되고 인자의 날 하루에 시작되는 놀라운 영광의 광경들을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 가운데 생생히 보여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빌립보서 2장 9절부터 11절까지 말씀입니다.
 
*빌립보서 2:9-11,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바로 이것이 인자의 날 시작하는 바로 하루에 이 세상에서 벌어질 놀라운 예배의 광경인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계시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 9절에서 11절을 보면요.
 
*요한계시록 7:9-12,
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2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 가운데 다시 오실 날, 바로 인자의 날이 이 땅 가운데 온전히 성취되는 그날 벌어지게 될 놀라운 장면(場面)인 것입니다. 바로 예배의 순간 예수님의 완전한 통치가 시작된 순간, 여러분은 과연 예배의 자리에 함께 서 있을 광경을 상상해 보셨습니까? 단지 또 한민족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 족속(族屬), 백성, 방언(謗言)이 예수 빚을 높이는 바로 놀라운 영광의 잔치가 벌어지며 이제는 예수님의 통치가 온 땅을 다스림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죄악과 어두움과 모든 눈물은 사라지고 죽음과 질병(疾病)은 사라지고 즐거움과 기쁨의 잔치가 벌어지는 예배(禮拜)를 여러분 상상해 보셨습니까? 이 예배를 상상하고 이 예배를 꿈꾸는 사람마다 하나님의 나라 끝 날을 위해서 살아가는 힘이 생깁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이 이렇게 기록하셨습니다. 그의 유명한 책 “열방을 향해 가라.”라는 한 장면인데요.
 
“선교는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다.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은 예배이다. 선교는 예배가 없기 때문에 존재한다. 선교가 아니라 예배가 궁극적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궁극적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가 끝나고 셀 수 없는 많은 구속된 자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엎드릴 때, 선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선교는 일시적으로 필요하다. 하지만 예배는 영원히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가 선교의 연료이자 목적이다.” -존 파이퍼 목사님-
-참 이 말씀은 선교를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선교의 본질을 붙잡게 해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왜 선교를 해야 됩니까?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온전한 예배의 그날을 우리가 상상하면서, 예배가 없는 곳에 예배를 심고, 그리고 온전한 예배 가운데 우리 모두가 들어가기 위한 바로 목적으로 선교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인자의 그날'을 사모하는 그 이유가 있습니다. 이 땅 가운데 그런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가 드려지는 그날, 나도 이 예배의 한 무리에 속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 또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나로 인해 복음을 알게 되는 사람들과 함께 주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가슴 벅찰 그날, 그날이 올 때 얼마나 우리가 과연 기쁘고 감격(感激)스럽고 행복할 것인지, 우리가 그날을 사모함이 우리 가운데 충만 있기를 원합니다.
 
이 계시록 말씀을 가지고, 고용원 전도사님이 한 곡을 만드셨습니다. 7년 정도 같이 기도회를 저희 부흥을 위한 기도회, 그리고 또 쥬빌리 기도회 운동을 하면서, 고용원 전도사님과 깊이 교제(交際)할 수 있었습니다. 근데 이 계시록 7장의 말씀,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이 있도다.’ 라는 찬양을 만드시면서 그 찬양의 제목을 ‘비전’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처음에는 왜 이것이 비전일까? 몰랐는데요. 그것에 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본인의 비전이기도 하고, 모든 성도들의 궁극적인 비전이기도 해야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우리가 꿈꾸는 가장 최고의 비전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께서 이 땅 가운데 온전한 마음으로 이 땅을 통치하실 때, 그곳에 드려지는 그 예배의 한 순간이 우리의 삶에 궁극적인 목적이요. 비전이요. 우리의 꿈과 모든 삶에 희망이 되어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또한 우리의 목적이며 그러기에 우리는 선교(宣敎)를 해야 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그렇다면 인자의 그 하루를 이 땅 가운데 임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우리가 살아야겠습니까? 예수님이 또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절 14절의 말씀입니다. 한번 같이 읽을까요?
 
*마태복음 24:14,
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이 세상에 인자의 그 온전한 하루가 임하기 위하여, 그 끝이 오기 위하여서 분명히 전제 조건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증언(證言)되어 온 세상에 전파(傳播)되는 날이 모든 민족에게 죄 복음이 전파되고 온 민족이 주님의 이름을 듣고 구원(救援)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바로 무릎 꿇게 되는 날이 이를 때에, 그제야 끝이 올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날을 꿈꾸시며 하나님은 쉬지 않고 지금 일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이 하나님의 위대한 과업 앞에 하나님의 위대한 우선순위(優先順位)에 동참(同參)하여 함께 일하기를 소망하고 계십니다. 근데 최근 들어 하나님께서 새롭게 일하고 계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인 되신 하나님이 새롭게 일 하시는 것들에 상당히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우리는 온 세상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전파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땅 끝까지 가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를 선교 보내고, 그 선교사를 파송하면서 가든지, 보내든지 하는 것이 선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략(戰略)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이 세상의 끝을 바라보시면서 새로운 전략을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바로 땅 끝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바로 우리 가운데 보내셨어요. 우리가 가야지 만날 수 있었던 사람들을 이제는 그들을 보내셔서, 우리를 만나게 하시고 계시다.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입니까?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250만 명이 넘는 이주민들입니다. 한국 선교사님들이 사역하고 있는 140개국에서 150개국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만 명이 넘는 선교사님들이 140개국에서 지금 사역하고 계신데요. 점점 비자 받기 힘들고 또 사역하기가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근데 한국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의 국적을 살펴보니깐요. 190개국이 넘습니다. 그것은 무슨 말입니까? 선교사님들이 들어가지 못했던 나라, 선교사님들이 들어가기 힘든 지역의 나라 사람들이 우리 가까이에 와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이제 땅 끝에 사람들을 우리 가운데 보내셔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시는 그런 새로운 전략(戰略)을 펼치고 계시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이 일하심에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에 대해서 가끔 잘못 착각할 때 어떤 착각이 있냐 하면은요, 그저 예수님을, 하나님을 나의 구세주, 구원자로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구원(救援)자이신 하나님을 또한 주로 고백(告白)하는 것이 온(穩全)한 믿음이라고 성경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로마서 10:9,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우리 죄를 위하여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구원의 주, 구원을 위해서 속죄의 구원을 위해서 속죄의 죽음을 하신 것만 믿는 것, 그것만을 성경이 이해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서 대속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신 우리의 속죄 죄이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우리를 또한 속죄하신 주님은 우리의 주인 되길 원하십니다. 주인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이란 것은요, 내가 주인이 바뀌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 되고 아니 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었던 악한 이해의 지배받던 우리가 이제는 그 모든 것들을 끊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면서, 그 주인 대신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 그리고 주인이 나라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고 못 박히고 죽임을 당하사, 모든 것을 아낌없이 퍼부어주신 사랑의 주님이시라는 것들을 참된 고백입니다. 그러한 주님께서 갖고 계신 우선순위가 있다면 그 우선순위가 나의 우선순위가 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갖고 계신 우선순위는 다른 것이 아니듯 모든 민족과 백성과 방언과 모든 족속들이 주님께 나아오고 주님의 이 귀한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그들의 삶이 변화되는 것이 선교인 것입니다. 선교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그러기에 선교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우리는 고백해야 합니다.
여러분 선교는 하나님의 우선순위가 나의 우선순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우선순위가 나의 우선순위가 되는 것, 바로 그러한 삶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이 땅 가운데 영광 받으시고, 우리의 삶의 이유, 삶의 목적, 삶의 주인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봐야 될 바로 그날, 우리가 꿈꿔야 될 바로 그날을 우리가 마음에 소망하기 원합니다. 바로 그것은 이 땅 가운데 하나님께서 묻고 계신 바로 하나님의 미션, 하나님의 위대한 선교, 이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다시 회복하여서, 모든 민족 가운데 찬양을 받으시고, 또한 높임을 받으시는 그날을 하나님께선 기다리시며 지금도 쉬지 않고 열방을 구원하기 위해서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특별히 또한 구원의 방법으로 이제는 땅 끝에 사람들을 우리 가운데 가까이 보내셔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게끔 하셨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수많은 외국인들을 위해서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먼 곳에 나가서 전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이제는 땅 끝의 사람이 가까이 있기 때문에 조금만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 보면요. 우리가 쪽으로 섬기고, 환대하고, 그들의 필요를 돌보야 합니다. 우리가 선교지에서 할 수 있는 위대한 영광스러운 선교를 내 삶의 자리에서도 펼칠 수 있는 시대가 왔음을 분명히 기억하여야 합니다. 이런 시대의 하나님의 물음 앞에 모두가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주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주께서 허락하신 인자의 날 하루에 모두가 다 또한 우리뿐만 아니라, 나를 통해서 예수님을 알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던 그 사람들과 함께 주님을 높이게 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약
우리가 진정으로 꿈꾸고 소망해야 될 그 하루를 이 말씀을 통해서 ‘인자의 날 하루’ 보기를 소망해야 한다. 욕심과 정욕을 우선순위 삼았던 나를 돌이켜 하나님께 우선순위를 두는 예수님의 참 제자 삼아야 한다. 가든지, 보내든지 동참하여 모든 민족에게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 하는 세계선교에 쓰임 받는 자가 되어서, 대한민국에 보내주신 250만 명이 이주민들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섬겨 세계선교 마무리하는 그날을 든든히 세워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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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05월 29일)
제목: "야곱의 꾀와 하나님의 섭리(攝理)"
말씀: 창세기 28:10-19
찬양인도: 쉐키나(유재원 부목사님)
사회: 김대규 부목사님

설교자: 김은석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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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세기 28:10-19,
10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16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 7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18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9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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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실 것입니다. 좋으신 하나님으로 인해 저와 여러분 안에 하늘의 기쁨과 평강이 넘치기를 소망합니다.

지금 이곳은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들판입니다. 해가 지고 기온이 내려가 스산하기 이를 데 없는 허허벌판에서 야곱은 잠을 자기 위해 돌을 베고 누웠습니다. 창세기 41장과 45장에 보면, 야곱과 요셉의 나이가 나오는데요. 이를 가지고 계산을 해보면 지금 브엘세바를 떠나는 야곱의 나이가 77세입니다. 별로 놀라시지 않네요. 보통은 이제 젊은이 일 거라고 생각을 하시는데 이미 그의 나이가 77세입니다. 왜? 야굽은 사나운 짐승, 강도(强盜)의 위협(威脅), 수많은 어려움이 둘러싸인 이곳에서 잠을 자야 할까요?
 
우리는 이미 이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의 형 에서가 자신을 죽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야곱의 가정이 보통 가정인가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가정입니다. 아브라함이 기다리고 기다렸다가 백세(100세)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낳은 아들, 그것도 아직 나이 어린 그 이삭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여서 제물로 바치면서까지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이 주신 복과 유업(遺業)을 이어온 가정입니다. 이렇게 정말 특별한 가문인데, 이런 가정도 갈등(葛藤)을 겪습니다. 웬만한 갈등 정도가 아닙니다. 거의 가정이 깨어지기 직전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게 되었을까?
 
본문을 가만히 묵상(默想)하는 가운데 제게는 먼저 이삭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여러분, 본문의 이삭은요, 후계자(後繼者)를 정하는 데 있어서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과 너무나 큰 차이를 보입니다. 창세기 15장에 보면요. 아브라함은 이삭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누구를 과연 후계자로 정해야 할까를 고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에 충성(忠誠)된 종이었던 엘리에셀을 후계자로 기도하며 나아갑니다. 여러분 후계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부터가 다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요. 아브라함에게 엘리에셀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너의 몸에서 난 자녀가 너의 상속자(相續者)가 될 것이라는 응답(應答)을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 상속자에게는 큰 복을 주실 것이다. 땅도 주실 것이며, 많은 자손(子孫)을 주실 것이다. 라고 약속을 하십니다. 그리고 약속에 대한 증표(證票)로 할례(割禮)를 행하도록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심지어는요. 사래의 이름을 사라로 바꾸면서까지 이렇게 후손(後孫)을 준비(準備)하라고 하시거든요. 여러분 왜 그렇게 하셨을까? 그것은 그만큼 믿음의 유업을 잇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요. 이삭은 아들이 둘이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유업을 이어가는 것에는 별로 그렇게 관심(關心)이 없어 보입니다. 적어도요. 아브라함과 비견(比肩)될 만큼 신중(愼重)하게 처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여러분 단순히 유산을 물려주거나 땅을 물려주거나 가축을 물려주거나 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약속, 믿음의 유업을 잇는 일이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한 일이거든요. 따라서 누가 과연(果然) 후계자(後繼者)가 될 것인가를 놓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과연 누구일까? 과연 하나님은 누구를 선택(選擇)하라고 하실까?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구해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여러분 이삭은 어땠습니까? 창세기 25장 28절을 보면,
 
*창세기 25:28,
28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이삭은요, 에서가 사냥해 온 고기를 즐겨 먹었다. 라고 합니다. 그는요. 에서를 후계자로 세우기 위해서 자신이 평소 좋아하던 그 음식을 사냥해서 가져오라. 이렇게 에서에게 이야기합니다. 여러 차례 묻고 할 일을 행하고, 이름을 바꾸면서까지 후계자를 정했던 아브라함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여러분, 이삭이 아브라함처럼 조금 더 하나님의 뜻을 구했더라면 에서와 야곱이 극(極)에 달하는 갈등을 겪게 되었을까요? 만일 그랬다면 인간적인 잣대를 가지고 에서를 후계자로 선정(選定)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도하여 응답을 받은 뒤에 에서를 위해서 그의 마음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에서를 설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이미 엎질러진 물처럼 돌이킬 수 없는 상황(狀況)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이 본문 가운데 이런 이삭의 조금도 묵상을 하다가 야곱이 보이게 되었습니다. 이 28장에서의 야곱은요, 다급(多級)합니다. 왜냐하면, 이대로 두고 보면 고스란히 축복(祝福)을 형에게 빼앗길 것이 불 보듯 뻔하기 때문입니다. 평소 꾀가 많은 야곱이 이것을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습니다. 이삭의 영적인 둔감(鈍感)함에 야곱은 꾀로써, 응전(應戰)을 합니다. 이 아곱의 꾀는요.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두 가지 오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⓵첫째로는 축복의 유한성이고요.
⓶두 번째로는 축복의 주권성입니다.
 
첫 번째로, 야곱은 소위 이 하나님의 축복을 한정되어 있는 유한한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유한한 것이기 때문에 내가 차지하지 않으면 빼앗겨 버리는 것이죠. 그래서 유한한 축복을 차지하려고, 유한(有限)한 축복을 빼앗으려고 꾀를 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축복은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축복은 유한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축복은 끊임없이 공급(供給)되고 영원(永遠)히 주어지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한(限)이 없으십니다. 그런 것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복도 영원하고, 무한(無限)하다. 라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에서를 축복하시지 않는 것은 복이 다 떨어져 가지고 더 이상 줄 복(福)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에서를 축복(祝福)하시는 것을 원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9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 아곱이 받은 축복을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우리 함께 로마서 9장 10절과 13절을 한 목소리로 읽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9:10-13,
10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여러분 성경은요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하셨습니다. 이미 야곱이 태어나기 전부터 야곱을 위한 祝福을 예정(豫定)하셨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그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죠. 그래서 아귀다툼을 했습니다. 그래서 혈육(血肉)이었던 형과 다투었습니다. 이미 자신에게 보장(保障)되어 있는 축복을 일부러 쟁취(爭取)하려 했던 것이죠.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축복의 유한(有限)성보다 더 큰 오해는요. 축복의 주권(主權)성입니다. 야곱은요,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하나님이 주시려는 축복을 가로챌 수 있다는 오해(誤解)를 했습니다.
 
사랑은 여러분,
은 누가 주시는 것입니까? 복은 이삭이 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죠.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우리가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내게 올 것이 아닌데, 억지로 빼앗을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부모님이 자녀를 축복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복을 비는 것일 뿐, 복은 부모님이 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복을 가로챌 수 있다라고 오해하고 착각(錯覺)을 했습니다. 이렇게 두 오해를 가지고 야곱은요, 하나님이 주시는 이 복을 유한하고 물질적인 것으로 보았구요. 또 놓쳐버릴까 봐 아등바등 하면서 꾀를 내었던 것입니다. 에서를 축복하는 것을 참지 못하고, 에서의 축복을 빼앗으려 했던 야곱이 본문에 나옵니다. 만약에 야곱이 영적(靈的)으로 조금만 더 깨어 있었더라면 자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祈禱)하며, 하나님 나는 어떤 존재(存在)입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라고 물었더라면 그는요. 오히려 자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자신을 향해 놀라운 꿈과 계획(計劃)을 가지고 계셨던 하나님을 더 깊이 깨달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삭의 영적이 둔감함, 야곱의 꾀, 처음에 본문을 묵상할 때는 이 두 가지가 보였었는데요. 계속해서 본문을 묵상하다 보니까, 저는 점점 더 깨닫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깨닫게 되었냐면, 결국은 이삭도 아니고, 야곱도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가 본문 가운데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야곱이 지금 에서와 갈등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야곱이 하란을 향하여 길을 떠나게 되었지 않습니까?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계획(計劃)과 섭리(攝理)였습니다.
 
초(秒), 분(分), 시(時), 일(日), 월(月), 연(年)을 지으시고 온 우주(宇宙)와 만물(萬物)을 모든 시간 동안 틀림없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그 섭리(攝理)입니다. 그 섭리를 따라서 지금 야곱은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여러분 이삭이 조금 더 하나님의 뜻을 보았다면은, 에서와 야곱이 극에 달하는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기록된 대로 야곱은 한 곳에 이르러 잠을 자고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에서 야곱은요, 하늘에까지 닿는 사닥다리를 보았구요. 그 사닥다리를 오르내리는 하나님의 사자(使者)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향해 축복하십니다. 땅과 자손(子孫)을 약속(約束)하십니다. 아브라함이 받았던 약속(約束), 아버지 이삭이 받았던 그 약속, 약속을 야곱 또한 받게 되었습니다. 이 약속을 받고 나서 야곱은 그제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평안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베고 잤던 돌을 세우고, 돌 위에 기름을 부어 이름을 ‘벧엘’이라 지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體驗)하기 전에 야곱에게 이 돌은 처량(凄涼)한 자신, 너무나 비참(悲慘)한 자신의 신세(身世)를 상징(象徵)하는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인재를 다 경험하고 나니까, 이 돌은 더 이상 처량한 자신의 신세를 상징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約束)을 상징(象徵)하는 증표(證票)가 되었습니다.
 
결국 야곱의 삶을 이끌고 온 것은 그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攝理)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버려지듯 내몰려 캄캄한 밤에 돌이나 베고 잠을 자야 했던 이 야곱,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차질(蹉跌) 없이, 틀림없이 인도(引導)해 오셨던 것입니다.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이미 야곱은 뱃속에서부터 하나님의 특정(特定)함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입니다. 하나님은요, 절대적(絶對的)인 주권(主權)으로 이 모든 일들을 행하시고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부릅니다. 야곱은 아버지와 형을 속였지만 하나님은 그를 축복하시기 위해 오늘 벧엘을 예비하신 것이지요. 세상 사람들은 말합니다. (點)이 모여 선(線)이 된다라고 말합니다. 그런 것처럼 모든 삶은 선택(選擇)의 총이다. 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의 선택이 있기 전에 우리가 어떤 것을 선택하기 이전에,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세밀(細密)한 섭리(攝理)라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 모두는 정말 한치 앞을 모르는 인생길을 걸어갑니다. 그것은요, 삶의 경험이 많은 어르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 유명 영화제인 칸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던 윤여정씨가 참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60살이 돼도 인생은 잘 몰라요. 나도 처음 살고 있거든요. 나도 67살은 처음입니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많은 경험이 있어도, 아무리 많은 데이터베이스가 있다할지라도, 우리 모두 처음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매 선택의 갈림길에서 우리는 온갖 지혜와 꾀를 짜냅니다. 그러나 동과 서 남과 북으로,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 삶 속에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조금 더 주목해 보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야곱에 보았던 사닥다리입니다. 야곱이 이제 꿈을 꾸면서 하늘까지 닿았던 이 사닥다리를 보게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 사닥다리는요. 땅과 하늘을 이으시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우리 요한복음 1장 51절에서 주님이 자신을 가리켜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한 목소리로 읽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51,
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주님은 여기에서 보면 자신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말씀하시죠. 인자 위에, 인자 위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이렇게 말씀을 하세요. 고대 근동에 사람들은 '지구라트' 라는 제단을 민들었습니다. 높은 제단을 쌓는 거에요. 하늘에 닿기까지 높이 쌓아서 하늘에 오르고자 했습니다. 창세기 11장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탑, 바벨, 이 지구라트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지구라트와 오늘 본문에서 야곱이 보았던 사닥다리는 둘 다 땅과 하늘을 잇는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바벨과 지구라트는요. 하늘에 닿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慾望)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이 사닥다리 야곱이 보았던 사닥다리는 땅에 내려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사랑은 여러분, 곰곰히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야곱이 꿈속에서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하나님께로 가고 싶었겠어요. 여러분, 야곱이 꿈속에서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하나님께 가고 싶었겠어요. 여러분, 야곱이 지금 하나님께 나아갈 용기(勇氣)가 있습니까? 하나님께 나아갈 능력(能力)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나아갈 지혜(智惠)가 있습니까? 하나님께 나아갈 할 자격(資格)이 있습니까? 야곱에게는요. 지금 패배감(敗北感)이 가득합니다. 좌절(挫折)감이 있고요. 소외(疏外)감이 가득합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存在)에 불과하죠. 여러분 그에게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야곱에게 하나님이 지금 임재(臨在)하여 주십니다. 여러분, 예수님도 이와 같습니다. 요한복음 1장 10절과 11절, 우리 다 같이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요한복음 1:10-11,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본문에 보면 어떻죠? 자기 땅에 오매, 예수님이 지금 땅으로 오셨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14절에 보면, 요한복음 1장 14절에 보면,
*요한복음 1:14,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영광을 보니아버지의독생자의영광이요은혜와진리가 충만하더라.
-14절에 보면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이렇게 표현해요. 여러분, 예수님이 왜? 이 땅도 우리가 야곱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우리가 하나님께도 나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께 나아갈 용기 없습니다. 자격 없습니다. 능력 없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친히 하나님이신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 땅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우리 중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납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이죠. 내가 어디에 있든지, 그곳에 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음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줄 믿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영적인 벧엘이 되는 것입니다.
 
※중학교 3학년 때 저한테 고민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꼭 가고 싶었던 미션스쿨이 있었거든요. 그 학교를 이제 알아보고 준비를 하다가 왠지 모르는 두려움이 이렇게 찾아옵니다. 혹시 학교에 떨어지면 어쩌지? 기도를 해도 기도가 잘 안 돼서 기도를 많이 못했습니다. 지레 겁을 먹은 것이지요. 그리고 오랜 고민 끝에 그 학교가 아닌 다른 학교를 지원했습니다. 집에서 가장 가꺼운 미션스쿨을 두고 목사님이 될 사람이 다른 학교를 가게 된 것이지요. 근데 나중에 발표가 나고, 그 지역이 난리가 났습니다. 제가 살던 동네가 난리가 났어요. 그 학교가 설립 이후에 지금까지 딱 그 합격자 대비 미달이 된 것입니다. 내가 왜 지원을 안 했을까? 처음에는 그걸 후회했습니다. 정말로 후회를 많이했습니다. 내가 왜 지원을 안 했을까? 그런데 후회를 하고 후회를 하고 후회를 하다 보니까 정말 후회를 한 건 학교에 지원을 안 한 게 후회가 아니라, 왜 하나님께 물어보지 않았을까? 왜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았을까?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몰라요. 한 치 앞을 모르는 내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 왜 물어보지 않았을까? 그렇게 이제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고 똑같은 이제 잘못을 반복(反復)하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3이 딱 되고 결심한 게 있습니다. ‘매일 하나님 앞에 나가리라.’
그래서 학교 바로 앞에 맞은편에 조그만 교회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항상, 그래서 정말 늦은 시간을 제외(除外)하고는 거의 매일 학교, 그 교회 지하 교육관에서 잠시 기도를 하고, 하나님께 비전과 뜻을 구하고, 학교의 등교를 1년 동안을 했습니다. 수능 일자가 가까워 오고 시험일이 다가오니까, 똑같이 3년 전처럼 너무나 큰 두려움이 막 밀려오는 거예요. 한 번 이렇게 좌절(挫折)을 맞보니까, 또 좌절감이 막 찾아보더라고요.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 다른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하나님께 묻고 있잖아요. 하나님 앞으로 저의 인생은 어떻게 펼쳐지겠습니까? 하나님 저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묻고, 묻고 또 묻고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응답을 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 어느 길을 걷든지, 어느 삶을 살든지, 너를 지킬 것이고,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때 누렸던 그 평안과 기쁨을요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딱 신뢰(信賴)하니까 두려움의 공간은 임재가 가득한 공간(空間)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때의 생각을 하면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저에게는 아마도 그곳이 벧엘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그곳에서 기도하면서 고 3때 목회자가 되어야겠다는 소명(召命)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 오늘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예배당, 컴컴한 지하교육관이 약속(約束)의 기념비(記念碑)입니다. 사역을 하면서 종종 지칠 때가 많이 있는데요. 그럴 때면 그때 기도하던 그 교육(敎育)관을 떠올리며 새 힘을 얻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에게도 벧엘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벧엘은 어디입니까? 야곱과 같은 내게 찾아오신 하나님, 나를 만나주시고 따스한 손길로 나를 안아주시며, 나와 함께 하겠노라. 약속하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 그 하나님을 뜨겁게 만났던 은혜의 기념비 벧엘이 있으십니까? 여러분 벧엘이 있으시다면 다시금 은혜를 회복하고, 기억하는 이 밤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오늘 이 밤 이 안아주심의 본당이 하나님의 임재(臨在)가 충만(充滿)하고,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한, 거룩한 벧엘이 되길 간절히 기도(祈禱)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여러분 한 분, 한 분과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지금은 멋진 옷을 입고, 아름다운 표정을 짓고 이 자리에 앉아 있지만, 분명히 우리 중 누군가는 생지옥(生地獄)을 겪는 분이 반드시 있습니다. 눈물로 이 밤을 지새울 분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오늘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여러분들과 오늘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 내가 반드시 너를 지키며 너를 인도하리라.’
 
♣요약
우리가 황량(荒涼)한 벌판에 홀로 누운 야곱과 함께하여 주심과 같이 오늘 이 시간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심을 믿고, 오늘 이곳 안아주심의 본당에서 오늘의 은혜를 회복(回復)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한다. 절대적인 주권이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깨달아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김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참 된 평강과 기쁨을 누리는 평생이 되며, 하나님께 나아갈 용기와 힘조차 없는 야곱에게 찾아오셔서 그를 만나주시고 복을 주시며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던 것처럼 연약한 나의 심령을 회복해 주시길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은혜의 진원지이자 약속의 기념비적인 벧엘에서 다시 한 번 거룩한 소명을 확인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우리에게 주어진 ‘2033-50 비전’을 완수(完遂)하는 개인과 가정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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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05월 22일)
제목: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말씀: 에베소서 4:13-15
찬양인도: 쉐키나(이다니엘 부목사님)
사회: 강건우 부목사님
설교자: 권진우 부목사님
ㅡㅡㅡㅡㅡ



*에베소서 4:13-15,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ㅡㅡㅡㅡㅡ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수요져녁기도회에 참여하신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4장 13절에서 15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 오늘 말씀에서 사두바울은 성도가 온전함에 이르는 비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13절에서,
 
*에베소서 4:13,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일의 하나가 될 때, 그리스도의 충만한 데까지 이를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알아야지만 예수님을 닮은 온전함에 이를 수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절 뒤인 15절에서는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의 그에게까지 자라가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사랑 안에서 여길 보면 여기 성경에 3이라는 숫자가 붙어있는 것을 보실 수가 있을 것인데요. 이걸 따라서 아래 난 해주를 보면, 사랑 안에서 자라자. 라고 나와 있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잘하고 성장해 갈 수 있는 핵심 비결을 바울은 사랑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해보면 사도바울은 우리가 온전함에 이르는 길에 대해서 13절에서는 ⓵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일의 하나가 되라. 고 말하고 있고 15절에서는 ⓶사랑 안에서 자라가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15,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런데 이 둘은 지금 바울이라는 한 사람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온전함에 이르는 길에 대해서 바울이 전혀 다른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고 우리가 그렇게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무언가 이 둘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온전하게 우리가 성장하게 하는 비결(秘決)이라고 지금 바울이 말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그리고 15절에 나오는 사랑으로 자라가는 것 사이에는 이 둘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는 것일까요? 먼저 우리는 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다고 할 때, 우리가 믿어야 할 믿음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우리가 믿는 믿음의 내용이 뭡니까?
 
-먼저는
1) 예수 그리스도에 살아계실 존재하심, 그리고
2) 그분이 인간의 육신을 잊고 이 땅에 오셨고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리고 또한
3) 장차 세상을 심판하시고 택한 자들을 불러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재림하실 곳 다시 오실 것을 우리가 믿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믿음의 내용 안에 담겨있는 예수님의 심정은 무엇일까요?
심정은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완전한 사랑이 이 안에 담겨 있다. 라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아들의 생명을 주셨다. 라는 것은 더 이상 보탬 것이 없는 완전하고도 무한(無限)대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주면서까지 사랑하는데 거기에 무슨 다른 의도가 끼어 들 수가 있겠습니까?
 
단지 존재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존재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기꺼이 생명까지 내놓을 수가 있는 것이죠.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다. 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베푸신 더 이상 보틸 곳 없는 무한대의 완전한 사랑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인 것을 의미합니다. 이 예수님의 사랑을 나의 것으로 완전히 받아들인다. 이게 예수님을 믿는 것에 의미라고 볼 수 있죠. 그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일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해 가는 과정이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오늘 이제 본문에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님을 믿는 것과 아는 일이 나오는 아는 일이 나오는데 예수님을 믿는 것이 예수님의 나를 향한 완전한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면, 예수님을 아는 일은 이제 내가 예수님을 사랑해 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를 향한 예수님의 완전한 사랑을 받아들이고 또한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해 갈 때, 온전함에 이룰 수 있다. 라고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믿는 것과 아는 일은 사랑과 결부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바울은 15절에서 ‘사랑 안에서 자라자 온전하여 지자’ 라고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서 이것과 좀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에베소서의 좀 다른 말씀을 우리가 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에베소서 3장 17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3:17-19,
17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다 같이 합독(合櫝)하도록 하겠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여기 이제 19절을 보면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라고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걸 볼 수가 있습니다. 아까 우리가 본문의 4장 13절에 그리스도의 ‘장성(長成)한 분량(分量)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와’ 의미상 이게 연결되는 구절(句節)이라고 볼 수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러한 충만(充滿)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3장 17절 한 번 더 띄워주시겠습니까?
*에베소서 3:17,
17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
-3장 17절을 보니까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계 하오시옵고. 라고 말씀하고 있고 그다음 18절에선 뭐라 그러냐면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18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일아, 라고 말하고 있죠. 여기에서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시므로 충만해지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하다고 말해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일이 여기서도 나오고 있는 걸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아까 우리 본문의 에베소서 4장 13절 말씀을 좀 더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에베소서 3장 17절부터 19절까지 말씀을 이걸 병행(竝行)해서 우리가 같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라는 것이죠. 먼저 바울은 하나님으로 충만해지고, 온전해지기 위한 조건으로 믿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게 된다고 합니다. 이뿐 아니라 사람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진다고 합니다. 절대 흔들리거나 요동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죠. 믿음을 통해서 한 번 우리 안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일이 있어도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완전한 사랑으로 영 의원이 함께하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온전해지는 데 있어서 이건 매우 중요한 전제조건이 됩니다. 우리가 온전해지고,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는 것은 한 번에 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을 얻는 것은 믿는 순간에 단번에 되는 일이지만, 우리가 온전해지는 거, 그리고 예수의 수도에 장성한 분량까지 충만해지는 것은 어떻습니까? 이거는 단번에 되는 게 아니라 시간이 필요하죠. 과정이 필요하죠. 오랜 시간과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온전해지는 과정에 있어서 우리는 여전히 모여 우리 안에는 남아있는 죄 성으로 인해서 다시 죄(罪)를 범(犯)할 수도 있고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죄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외면(外面)하신다면 우리는 결코 온전(穩全)함에 자리를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과정 중에 중도 탈락(脫落)할 수밖에 없겠죠. 우리 안에 계실 뿐만 아니라 어떠한 상황(狀況)에서도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단단히 우리와 연합(聯合)하여 계시겠다고 다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믿음은 우리가 예수님을 닮는 온전함에 이르기 위한 거룩한 토대이고 견고(堅固)한 반석(磐石)이 되는 것입니다. 밑바탕이 되는 것이죠. 이 토대(土臺) 위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해져야 되고, 그리고 머리 대신 예수 그리스도께 에게까지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을 위해서 필요한 것을 사도 바로 뭐라고 말하고 있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는 것 바울은 특별히 아까 3장 18절에서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가라’ 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19절에서는 ‘그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가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된다. 라고 말합니다. 있는 것이죠. 하나님의 사랑을 예수님의 사랑을 알아가야 된다. 라는 것이죠. 근데 먼저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살펴봐야 되는 건 뭐냐 하면 이 ‘안다.’ 라는 단어 의미가 어떤 의미냐? 라는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성경에 나오는 ‘안다’ 라는 것은 다만 지식으로만 아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마치 부부가 서로를 알아가듯이, 지식을 넘어서는 경험(經驗)을 통해서 알아가는 걸 의미하는 것이죠.
 
※한 번은 제가요.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리에 제가 이렇게 밥 먹는 식당 안에 여러 부부들이 뭐 동호회 같은 것 같아요. 부부(夫婦) 동호회(同好會) 같은 데 모여서 회식(會食) 모임을 이렇게 갖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모임 동호회 모임 여러 분 중에 한 분이 남자 한 분이 너무 아마 리더 격인가 봐요. 전체 모임을 재미있고 유쾌하게 이끌어가는 거예요. 옆에서 들어도 정말 웃음이 나올 정도로 이야기도 아주 재미있게 잘하시고, 또 거기에 모인 분들이 부족한 것은 없는지 하나하나 살피면서 아주 매너 있는 모습도 보여주더라고요. 그리고 남자 분 옆엔 누가 앉았겠어요? 부부 모임이니까. 아내 되시는 분이 앉아 있죠. 그리고 아내 되시는 분 옆에는 또 이렇게 좀 친한 또 이렇게 여자 분이 앉아 계셨는데 여자 분이 아내분 한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유 자기는 좋겠어. 저렇게 재미있고 매너 좋은 남자하고 살고 얼마나 행복하고 좋아?”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제가 들었어요. 옆에서 그때 이야기를 들은 아내분이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면서 짧게 한마디 했습니다. 뭐라고 그랬을까요? “살아봐!~” 다시 말해서 ‘너 안 살아봤으면 말을 말어!!’ 라는 뉘앙스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그때 유레카!!!~ 성경에서 말하는 ‘안다.’ 라는 것이 이런 거구나!~ 할렐루야~!
 
그때 저는 확 그게 마음에 와 닿더라고요. 경험해보지 않고 안 살아보면 알 수 없는 지식, 결코 머리로만 알 수 없는 이 지식, 그것이 바로 오늘 성경에 나오는 ‘안다’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너무 화가 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과 동시에 우리는 또 지식으로도 주님을 알아가는 것 모두 사실은 다 필요합니다. 경험으로만 주님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와 동시에 지식으로 아는 것도 같이 필요해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게시된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면, 우리의 여러 삶의 정황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우리는 잘못 오해(誤解)하거나 혹은 손길을 하나님의 손길을 뻗치시는데 손길을 놓쳐버릴 수가 있습니다. 잘못된 경험적 지식을 우리가 가질 수가 있다. 라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우리가 신앙생활(信仰生活)을 하다가 죄를 지으면 양심(良沁)의 가책(呵責)을 느끼거나 내적인 심적인 고통(苦痛)을 느낄 때가 있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죄(罪) 지으면 어때요 불편하잖아요? 그죠 내면의 고통이 올 수도 있고 가책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증상(症狀)들이 의미하는 게 뭘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외면하시거나 버리셨기 때문에 찾아오는 증상이 아니에요. 그것은 우리를 놓지 않으시기 때문에 찾아오는 증상이죠. 특히 너 지금 주님 앞에 나와서 내 앞에 나와서 회개(悔改)하고 관계(關係)를 다시 회복(回復)하라는 일종의 하나님의 사랑이 담긴 사인(Sign)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性稟)을 잘못 오해하면, 죄로 인한 양심의 가책이나 고통을 이게 뭐 힘들잖아요. 고통이 뭔가 이렇게 불편하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워하시고, 외면하셨기 때문에 찾아오는 증상으로 잘못 이해를 하게 된다. 라는 것이죠. 그래서 오랫동안 하지 않아도 될 신앙에 방황(彷徨)을 하거나 시간의 낭비(浪費)를 하게 되는 그런 상황이 발생(發生)할 수도 있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바로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 가운데 여러 정황(情況)들 속에 찾아오시고, 하나님을 경험해야 되고, 우리가 알고 있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 삶을 통해 찾아오시는 주님을 그런 경험한 주님을 잘 뜻과 성품을 잘 해석(解釋)할 필요가 있다. 라는 것이죠. 그럴 때 우리가 하나님의 어떠한 성품(性稟)을 경험(經驗)하게 될까요?
 
오늘 사도 바울은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으라.’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택하신 자녀들을 향한 더 이상 보탤 것 없는 넘치는 완전한 사랑을 말씀을 통해서, 또한 삶의 경험을 통해서 알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가야 되는데 특별히 알아가야 되는 게 뭐냐 하면, ‘지식에 넘치는 그분의 사랑을 알아가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변(變)하지 않는 그분의 사랑, 사랑의 너비, 그다음에 길이, 높이, 깊이를 알아가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을 알아가는 게 우리가 온전함에 이르는 비결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먼저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를 알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인간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범위(範圍) 그리고 사랑의 기한(期限)을 의미합니다.
 
너비와 길이는, 인간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이 범위, 즉 너비는 어떨까요? 제한이 없습니다. 어떤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주신 완전한 사랑의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는 것이죠. 누구든지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어떠함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격(資格)과 조건(條件)을 따지지 않으십니다. 이전에 내가 어떤 삶을 살았을지라도, 내 주변(周邊)의 사람들 심지어 가족들조차도 나를 천덕꾸러기로 여길지라도, 예수님은 존재 자체를 사랑하십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존귀한 자이기 때문인 것이죠. 또한 인간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에 뭘 알라 그래요? 너비 다음에 길이 알랍니다. 길이는 즉 기한을 의미하는데 예수도의 우리를 향한 사랑의 기한 길이는 어느 정도 길이일까요? 영원합니다. 영원하죠. 한 번 사랑하면 영원한 유통기한 유혹의 유효기간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한번 택함을 받으면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또한 우리의 어떠함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성경에서 뭐라고 표현 하냐? 신학적으로 언약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언약 언약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을 향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이요. 약속’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犯罪)한 이후에 창세기 3장부터 아들 예수도의 생명을 통해 인류(人類)를 구원(救援)하시겠다고 이미 창세기 때부터 약속하셨어요. 그 약속은 아브라함, 이삭, 다윗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졌고 때마다, 이 약속을 지키겠다고 확인하고 또 확인(確認)하고 반복(反復)하셨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약속하신 대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신약에 와서, 이 땅에 보내셔서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게 하셨죠. 약속을 결코 지키셨습니다. 그런데요. 하나님께서 이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이시는 그 약속을 지키기까지, 이 약속을 받는 수혜(受惠) 대상(對象)자인 인간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수천 년의 기간 동안 약속이 이루어지기까지 약속의 수혜를 받는 인간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아들의 생명까지 내어주신다고 약속하시니, 감사하다, 얼마나 감격적인가? 하면서 영적인 정조를 지키면서 하나님을 잘 섬겼습니까? 그렇지 않았다는 거,,, 우리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 오시기까지 우리가 구약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을 향한 범죄(犯罪) 역사이고, 배신(背信)의 역사라는 걸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정말 다급(多級)할 때 빼놓고는 하나님을 제대로 섬긴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人類)를 위해 아들의 생명(生命)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約束)은 변(變)하거나 취소(取消)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성경(聖經)의 곳곳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고 범죄(犯罪)할수록 오히려 하나님은 이 약속을 더 굳건히 하시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시고, 의지(依止)의 표현을 나타내는 걸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호세아서 3장 1절부터 3절까지 말씀을 모시겠습니다. 호세아 3장 1절부터 3절까지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호세아 3:1-3,
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2 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그를 사고.
3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아멘 이스라엘 자손이 또 하나님을 외면(外面)하고, 다른 신(神)을 섬깁니다. 호세아 선지자(先知者)가 활동할 당시만 해도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겹도록 하나님을 배신(背信)하고 다른 신을 섬기기를 이미 수차례, 수십, 수백 차례, 반복(反復)할 때입니다. 어쩌면 이제는 놀랍지도 않을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 뭐라고 말씀하시죠. 1절 중반에 아까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배신했는데도, 여전히 그들을 하나님은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랑을 눈에 보이도록 선명하게 나타내시기 위해서 호세아 선지자에게 그녀의 호세아의 아내 고멜을 다시 데려오고 사랑하라. 라고 명령하십니다. ‘고멜’ 이란 여인은 어떤 여인입니까? 남편인 호세아를 배신하고 여러 다른 남자들과 불륜(不倫)을 저지른 말 그대로 음란(淫亂)한 여인입니다. 심지어는 호세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셋이나 낳고도, 다시 집을 뛰쳐나가 창기(娼妓)가 된 여인입니다. 영적(靈的)으로 타락(墮落)한 이스라엘의 상태를 잘 나타내는 여인인 것이죠. 인간적으로 도저히 용서(容恕)하고 사랑할 수 없는 여인(女人)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그 여자를 데려오고 사랑하며 부부로서의 약속을 재차(再次) 다짐해라라고 하십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은 내가 이스라엘을 끝까지 사랑한다. 인류(人類)를 구원(救援)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반드시 내 아들을 보내겠다는 확고(確固)한 의지(意志)를 드러내고 있는 계시죠. 지금도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를 언약(言約)의 사랑으로 사랑하시는 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이제는 온전해지고, 예수도의 충만한 분량까지 가야 되는데 자리에 가기까지 우리를 향한 사랑을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이 좋아서 이리저리 도망 다니면, 지구(地球) 끝까지 쫓아오실 것이요, 10번 반복해서 죄를 지으면 11번 사랑의 매를 들어서라도 우리를 고쳐내고야 말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그 수준(水尊)과 깊이로 영원히 사랑하시는 이 한결같은 사랑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길이’ 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높이와 깊이를 깨달으라.
이것은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의 수준(水尊)과 정도(程道)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의 수준은 한마디로 뭐 어느 정도일까요? 바로 십자가(十字架)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간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에 수준은 십자가로 다 표현이 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되어 주신 사랑이죠. 사랑을 하는데,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생명을 내어준다. 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사랑하는 대상 외에 다른 아무 바라는 것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존재 자체가 전부이며 사랑 안에 다른 의도가 없다. 라는 걸 의미하는 것이죠. 주님께서 저와 우리 성도님들을 존재 우리 존재 자체로 사랑하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와 만나기를 기뻐하시고 늘 함께 하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말로 어떤 격식(格式)으로 주님 앞에 나오느냐 이건 아주 부차적(副次的)인 문제입니다. 일단 우리 존재(存在) 자체(自體)가 주님을 만나러 나오는 그것만으로도, 하나님 우릴 너무나 기뻐하시고 늘 우리를 하나님은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보고도 또 보고 싶어 하는 게 우리를 향한 사랑입니다. 그리고 무엇이든 우리 속에 있는 것을 하나님 너무나 알기 원하시고, 우리와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시편 109편 5절부터 10절까지의 말씀 좀 보겠습니다. 10편 109편 5절에서 10절까지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시편 109:5-10,
5 그들이 악으로 나의 선을 갚으며 미워함으로 나의 사랑을 갚았사오니.
6 악인이 그를 다스리게 하시며 사탄이 그의 오른쪽에 서게 하소서.
7 그가 심판을 받을 때에 죄인이 되어 나오게 하시며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
8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9 그의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며.
10 그의 자녀들은 유리하며 구걸하고 그들의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성도님들 중에 이 말씀을 보고 이 시 편 내용을 보고 놀라신 분들이 있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10편에 저렇게 심한 저주(詛呪)의 말씀도 있었나? 이런 생각 들지 않으십니까? 자녀(子女)는 고아(孤兒)가 되고 아내는 과부(寡婦)가 되고 유리(流離) 구걸(求乞)하고 황폐(荒廢)하고 단명(短命)하고 그런데 이 시 편의 저자가 누구인지 들으시면 더 놀라실 겁니다. 누구일까요? 다윗입니다. 다윗이 아마도 선을 누군가한테 선(善)을 베풀었는데 그걸 배신(背信)으로 되갚은 자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얼마나 화가 치밀어 오르고 감정(憾情)을 주체할 수 없었던지 사탄이 그의 오른쪽에서 서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의 연수(年數)를 짧게 해달라는 건 단명(短命)하게 해달라는 의미이고, 자녀는 고아가 되고, 아내는 과부가 되게 해달라고 합니다. 아 듣기만 해도 끔찍한 저주를 쏟아 붓는데, 말하는 대상(對象)이 어떤 다른 사람한테 하소연하는 것도 아니고, 감(敢)히 하나님 앞에 나와서 이런 내용으로 좀 기도(祈禱)하고, 있다. 라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은 이해가 되십니까? 과연 이 내용이 시편에 담겨 있다는 게 뭘 의미할까요? 우리가 생각할 때는 아니 어떻게 이렇게 끔찍하고 불경한 내용으로 하나 이렇게 기도할 수 있지? 예수님께서 ‘이웃을 사랑하라.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설령 마음은 안 그래도 좀 내용은 좀 정제(整齊)해서 기도해야 되는 거 아닌가? 라는 우리가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성품에서 어긋나는 것 같고, 불경(不敬)해 보이는 기도의 내용이 지금 이 기도가 성경에 담겨 있죠. 이게 뭘 의미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들으셨다. 라는 걸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에 어떻게 응답하셨는지, 우린 다 알 수 없지만, 일단 이 당황(唐惶)스러운 기도의 내용이 성경에 실렸다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귀담아 들으셨다. 라는 걸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멘이 안 나오시네요. 지금 다윗은요, ‘하나님 어떤 아무개가 있는데요. 제가 이러저러한 도움을 줬었거든요. 그런데 녀석이 제 뒤통수를 치고 배신(背信)을 때리지 뭐예요? 하나님 저는 솔직(率直)히 아무개가 용서(容恕)가 안 돼요. 천벌(天罰)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아주 단명(短命)해버리고 집이 망(亡)해버렸으면 좋겠어요.’라고 솔직한 자신의 속마음을 표현(表現)하고 있습니다. 성도님들, 이 말씀 보면서 어떤 장면(場面) 떠오르세요?
 
전 뭐가 딱 떠올랐냐 하면 저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자녀가 오늘 뭐 학교생활을 했던 직장생활을 했던 했으면서 어떤 좋지 못한 관계로 인해서 힘든 힘들었던 감정을 부모님에게 하소연하고 토로하는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그때 부모님들 얘기를 들으면 어떻게 반응(反應)하세요. 대뜸 ‘야 너 그런 말 하면 안 돼 좀 더 어른스럽게 굴지 못하겠니? 사회생활이 다 너 뜻대로 되는 줄 알아?’라고 하면 이제 앞으로 자녀의 속 깊은 대화는 이제 끝났다 기대하기 힘들다. 라고 봐야 합니다. ‘아 오늘 너 그런 일이 있었구나! 오늘 우리 딸 우리 아들 마음고생이 심했겠네. 아유 오늘 애 많이 썼어.’ 하면서 일단 안아주기도 하고 위로해 주는 것이 우선인 것이죠. 가르치는 것은 그다음 문제인 것입니다. 오늘 이 시 편이 다윗과 하나님 간의 그러한 대화가 이루어지는 장면인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어떤 대화의 주제가 되었던 일단 자녀가 부모님과 마주 앉아 마음을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부모에게 큰 즐거움 아니겠습니까? 부모님에게,,, 그러듯 하듯이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그분과 마주하는 이 시간을 일단 내용은 어찌 되었든, 마주하는 이 시간을 우리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매우 기뻐하신다. 라는 거죠. 이것은요, 우리에게 영생(永生)이라는 의미도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영생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救援)받으면 영생을 얻죠 이 영생이라는 것도 우리가 한번 다시 생각해 보게 돼요. 우리는 장차(將次)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永遠)히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눈물도 없고 고통도 없는 영광스러운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살아갈 기대(企待)와 소망(所望)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편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영생,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 우리에게 영생(永生) 왜 주실까요? 바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들의 생명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영원히 사랑 안에서 함께 하기 위해서 영원한 생명 영생으로 내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 영생이라는 말 안에는 관계성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고(苦)되고 험난(險難)한 세상을 떠나서 천국(天國)에서 고통과 슬픔 없이 영원히 살게 된다는 어떤 존재와 상태라는 측면에만 초점을 맞추어서 영생을 생각하는 경우가 사실 많이 있죠.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저와 우리 성도님들과 영원히 함께 사랑을 나누고 교제하며 세상에 무엇도 우리를 갈라 놓을 수 없어! 라 하시면서 영원한 하나 됨을 누리시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 존재 자체를 아들의 생명을 내어주신 사랑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사랑은 영원히 변함이 없는 한결같은 사랑입니다. 아들의 생명을 주신 사랑의 수준 정도의 수준으로 한 결 같이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설령(設令) 우리가 죄를 범할지라도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방식이 달라질 수는 있습니다. 때로는 매를 드실 수도 있고, 징계(懲戒)가 있을 수는 있지만 그것도 사랑의 매이고, 자녀답게 만들기 위한 사랑의 징계인 것이죠. 이렇게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우린 한 번쯤,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그럼 그러면 창조주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으로 많이 생각합니다. 물론 너무나 지극히 맞는 말이지만 그렇게만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면 나와의 개인적인 관계에 있어서는 좀 거리(距離)감을 느끼기가 싶습니다.
 
너무 크신 하나님, 이쪽으로만 우리가 생각하면
※예전에 제가 집사님 한 분한테 하나님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세요. 라고 물었더니, 그분이 뭐라고 대답했냐 하면 교장 선생님 같습니다. 라는 답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교장 선생님 아예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참 훌륭하시고 본인이 되시는 분이시죠. 우리 교장 선생님 하지만 학생들 입장에서는 사실 좀 가까이 다가가기가 어려운 느낌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느낌으로 말한 것 같아요. 참 하나님 되게 막 신이시고 완전한데, 좀 가까이 하기에는 조금 거리감이 있는, 교장 선생님이라는 표현을 쓰더라구요. 그런데 우리가 오늘 말씀을 보면 언제든 우리를 만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어떤 마음의 상태 가운데 있는지, 너무나 우리를 알기 원하시는 세밀(細密)하신 하나님 다정다감(多情多感)하신 하나님이심을 느끼게 됩니다.
 
또한 우리가 어떠한 상태와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간에, 우리를 존재 자체로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들의 생명을 주신 사랑의 깊이로 언제나 한 결 같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우리가 말씀을 통해 알게 됩니다.
 
제가 지난주 토요일에 지지난주 토요일에 사역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서 제가 이제 티비(TV)를 켰습니다. 그때 무슨 방송이 나왔냐 하면요. 우리 개그맨 이용식씨 아시죠? 별명이 뽀식이 아닙니까? 뽀식이라고 하는 이제 별명으로 잘 알고 계실 텐데, 이분이 교회 집사님이세요. 근데 그분의 딸이 있죠. 요즘에 방송에 자주 나오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수민 자매라고 딸이 있는데, 딸도 믿음이 참 좋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근데 딸이 ‘원혁’이라는 가수하고 이렇게 결혼을 하게 되었더라구요. 근데 이 원혁이라는 가수는 목사님 또 아들이라고 해요. 그래서 전에 보니까 이용식 집사님하고 이 딸인 수민자매하고 원혁 형제와 함께 교회 간증(干證) 집회(集會)도 뭐 가고 그러더라고요.
 
우리 김재원 장님 하는 아침마당에도 나오고 그렇게 본 적도 있는데, 그런데 방송을 그날 토요일 날 키니까 이 원혁 형제와 이수민 자매가 결혼식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결혼식 순서 중에 뭐가 있었냐 하면, 그 신랑이 신부를 위해서 이제 사랑의 세레나데를 불러주는 장면이 있었어요. 보통의 축가 부르잖아요. 다른 사람이 근데 원효형제가 가수니까 신부인, 이제 이수민 자매를 위해서 본인이 준비한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가만히 노래를 듣고 있는데, 듣다 보니까 가사가 심상치가 않은 거예요. 왠지 CCM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거 이상하다, 이거 CCM 같은데, 아무래도 그래서 인터넷을 뒤져봤더니, 맞더라고요. 제목이 뭐냐면 ‘너를 선택한다.’ 라는 CCM 찬양이었습니다. 이 제목만 봐도 ‘너를 선택한다.’ 어떤 느낌인지 아시겠죠? 하나님의 택하신 자녀로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있는 노래입니다. CCM 찬양입니다. 제가 가사를 한번 불러드릴까요?
 
제가 노래라면 부르면 좋겠는데, 제가 들은 지 얼마 안 돼서 실수할 것 같아가지고, 제가 가사로 대신하겠습니다.
“귀하고 아름다운 나의 사랑아, 나의 모든 마음을 너에게 준다. 무엇보다 소중한 나의 사랑아, 나의 모든 정성을 너에게 준다. 나의 기쁨아, 나의 사랑아 나는 언제나 너를 선택한다. 어떤 이가 세상을 다 준다. 해도 나는 언제나 너를 선택한다. 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대도 나는 너를 선택했다. 어디에 있던지 무엇을 하던지 상관하지 않고 너를 사랑하다.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상관하지 않고 너를 사랑한다. 나의 행복아, 나의 사랑아 나는 언제나 너를 선택한다. 네가 잘난 사람이 아니어도, 다른 사람들이 손가락질해도 난 항상 변함없이 널 사랑한다.”
 
-오늘 우리가 나눴던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사랑이 이 찬양의 가사 안에 집약적(集約的)으로 잘 녹아져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가 말씀을 통해 또한 삶의 순간(瞬間)순간마다 경험하게 될 때 하나님을 더욱 친밀(親密)하게 느끼게 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과의 거리감은 좁혀지게 되고 높았던 마음의 벽은 낮아지고 허물어지게 됩니다. 이로 인해서 우리는 세밀함과 따뜻함으로 우리를 대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더 편하게 자주 만나게 될 것이고, 만남의 자리가 이젠 부담이 아니라 의무가 아니라 점점 기쁨이 되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과의 사랑의 연합(聯合)이 깊어지면서 마침내는 주님을 닮아가는 자리에 우리가 이르게 될 줄 믿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온전(穩全)하게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攝理)를 깨달은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사랑 안에서 자라가자. 고 권면(勸勉))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디 하나님의 넓고, 깊은 사랑, 그리고 높고 깊은 사랑을 알아가는 가운데, 주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해져가는 저와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 바랍니다.
 
♣요약
인간의 지식으로 측량할 수 없고,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넘치는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하심을 감사해야 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우리의 인생은 언제나 감사할 수밖에 없고, 아들의 생명까지 내어주신 사랑의 수준으로, 한 결 같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으로 인해 소망을 노래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를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기뻐하시는 온전함의 수준까지 빚으시는 주님께 우리는 모든 영광 올려 드려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보텔 것 없는 예수님과 친밀한 연합을 이루어 성령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시므로, 충만해지는 역사를 경험해야 한다. 그 어떤 높은 산일지라도, 나를 향하신 예수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달아, 기쁘게 오르는 온전함과 영광을 드러내는 자로 살아가며, 주님의 몸 된 교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 되어 복음주의 쇠퇴를 막는 결정적 승부처럼 2033-50 비전에 사용되는 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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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04월 24일)

제목: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을 예배 합니다"
말씀: 출애굽기 3:12, 로마서 12:1
찬양인도: 쉐키나(유재원 부목사님)
성경읽기: 김명원 안수집사님, 손재선 집사님

설교자: 남동우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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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12, 로마서 12:1,
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로마서 12:1,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예배니라.
 
▶ 남동우 부목사님
이번 장애인 주일을 맞이해서 우리가 글로벌 광장에서 큰 행사를 준비하고 또 우리 수요 찬양예배를 통해서 우리 장애인들이 가지고 있는 끼와 그 은사를 통해 하나님 앞에 영광을 보이려고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서는데 기대와 격려와 박수 한번 하겠습니다. 좀 전에 우리 사랑부 예배 현장 영상을 보셨는데 우리 성도들이 예배를 사모하고 정말 간절함이 있는 것을 느끼지 않나? 라는 생각이 되죠?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하는 것이 너무 당연하지 않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이 코로나 때문에 우리가 예배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우리가 매주 예배를 드리고 너무 많은 예배를 드리다 보니까 예배의 중요성을 잃어버리고 살아가지 않나, 또 형식적으로 의무감을 갖고 있지 않나, 라는 생각도 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이 어느 순간인가 예배를 잊어버리고 그들 마음속에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아주 작은 민족이지만 하나님이 선택하여서 그들을 선민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신명기 7장 7절에 이렇게 기록됐습니다.
 
*신명기 7:7.
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너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요가 많기 때문에 아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적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놀라운 은혜를 받음에서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문화에 익숙해져서 동화되어지고 마치 그들이 애굽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이 정말 행복하고, 그들의 삶이 정말 즐거웠나요? 오늘 첫 번째 우리가 생각할 대제는 하나님께서 예배하는 것을 잃어버렸을 때, 그들의 삶은 노예의 삶입니다.
 
▷첫 번째, I. 하나님께서 예배하는 것을 잃어버렸을 때, 그들의 삶은 노예의 삶입니다.

-라고 하는 부분입니다. 현재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애고의 문화에 매몰되어져 가지고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망각하고 하나님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기억도 하지 않고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르심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인데 불구하고, 하나님이 가장 싫어한 우상 숭배에 빠져 있고, 하나님 앞에 재배하지 않는 인생으로 낙오되어져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하나님 백성이 아닌 노예의 삶으로 완전히 전략되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잘 아시다시피 노예 생활은 어떤 삶입니까? 자기 생명도 없고, 주권도 없고, 물건처럼 사고파는 존재입니다. 우리도 어쩌면은 세상의 노예가 되면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하나님의 백성의 삶이나 애굽의 삶이나 별반 차이 없는 것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건 아닙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그들을 찾으시고 하나님을 찾는 자를 돌보시고 하나님이 복 주신다. 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세상의 풍조와 문화는 우리가 보기에는 정말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스럽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어떻게 돼집니까 길은 멸망 사망의 길이요. 사망의 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혹시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예배를 잃어버리고, 노예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시간 다시 한 번 예배를 회복하는 귀한 시간되기를 소망합니다. 두 번째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두 번째, II.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예배 없는 노예 생활에 안경도로 그대로 두시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아무 조건 없이, 은혜로 참 예배자로 세우신다고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었던 출애굽기 3장 12절 말씀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출애굽기 3:12,
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세우셔서 바로 왕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어달라고 요청합니다. 우리 나름대로 이 애굽 왕 바로는 강파가 있어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출애굽기 5장 2절에,
 
*출애굽기 5:2,
2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로 삼았는데 바로 왕 입장에서는 이들을 자신의 많은 수익을 얻는 데 써야 되는데 이들을 당장 풀어주게 되면 많은 유익을 포기해야 되기 때문에 결코 버려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바로 왕에 가서 여러 가지 재앙(災殃)을 내립니다. 그들을 내어보내 달라고 말합니다. 그때 이 바로왕은 이렇게 말합니다.
출애굽기 8장 25에,
 
*출애굽기 8:25,
25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
 
-멀리 가지 말고 이 땅에서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애국 사람 앞에서 예배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결국 거절되어지죠. 다시 모세가 가서 또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어 달라고 말합니다. 그때 바로 왕은 출애굽기 10장 1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출애굽기 10:11,
11 그렇게 하지 말고 너희 장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이것이 너희가 구하는 바니라 이에 그들이 바로 앞에서 쫓겨 나니라.
-너희 어른들만 가서 섬기고 어린아이들은 두고 가라. 이 말은 뭐예요? 이들이 예배하러 갔다가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바로 왕에게 모세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보내 달라.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출애굽기 10장 24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출애굽기 10:24,
24바로가 모세를 불러서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의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 것들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
-어른들과 어린아이 가는데 소와 양은 데리고 가지 말라는 거죠. 이 말은 뭐예요? 구약 시대에 제사는 최고 제물이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 소와 양이 제물을 가져가야 하나님 앞에 제사할 수 있는데, 이 제물을 가지고 가지 말고, 결국 제사를 드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결국 출입기 12장에서 마지막 장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처음 난 모든 장자의 어린아이로부터 동물들까지 첨 난 모든 자들이 죽게 되던 사건 앞에서 이 바로 왕은 두 손을 들고 항복하게 되어 집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12장 31절과 32절 말씀인데,

*출애굽기 12:31-32,
31 밤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르되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에서 떠나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며.
32 너희가 말한 대로 너희 양과 너희 소도 몰아가고 나를 위하여 축복하라 하며.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바로 왕이 지배해서 430년 만에 애굽에 노예서 완전히 해방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의 말씀처럼,
 
*에베소서 2:8,
8 너희는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어 하나님의 선물이라.
-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라는 표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요. 우리 구원에는 죄와 허물로 놓치고 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 성장되어져서 하나님의 자는 저한테는 권세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러면 어떤 공로나 우리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 진 것입니다. 이 구원의 은혜를 우리의 심(心)비(碑)에 새겨야 됩니다. 이 은혜를 잊어버리면 우리가 애굽 문화에 동화되어서 예비를 잃어버리게 되어 지는 것입니다.
오늘 그러면 이런 은혜를 입은 자들은 오늘 어떻게 우리가 살아야 되는가? 오늘 로마서 우리의 12장 1절 말씀 읽었는데 한 번 더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로마서 12:1,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예배니라.
-이 시대에 구원 받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올려드려야 될 예배는 모릅니까? 오늘 영적인 예배입니다.
 
▷세 번째, III. 우리는 온전한 예배를 하나님께 올려드려야 됩니다.
 
-여러분 우리의 예배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공적인 예배가 있고 또 예배를 마치며 흩어져서 드리는 삶의 예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매주의 즐거운 노래로 찬양하고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렸다 할지라도,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일상에서 일터에서 예배하지 않는 내가 드린 추일 예배가 참 예배가 될까요? 우리 입술로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고백하면서 우리가 진심으로 삶의 현장에서 참 예배를 하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가 드리는 입술에 이 진정한 예배도 참 예배가 되어 질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전부를, 우리의 삶에 전체를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 온전한 예배자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요. 진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되어 지는 것입니다.
 
이번 2024년 장애인 주간 주제가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좀 이상하게 느껴집니까? 이 말은 구원받은 백성들은 온전한 예배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데 그것은 공식적인 공적인 예배를 넘어서 삶의 현장에서 우리가 성도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렇게 표현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의 몸을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드리라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몸을 사용하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직장에서 우리의 몸을 사용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드릴 우리의 산제물의 영적인 예배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면서도 흩어진 삶의 현장에서 자신만을 위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이것은 진정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히브리스 13장 1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자 들어보십시오.
 
*히브리서 13:16,
16 오직 선을 행하면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이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오직 선을 행하면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이 이 같은 제사를 뭐하신다고요? 기뻐하시니라. 오늘 본문에 선행과 구제가 예배란 사실을 나는 미처 몰랐어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혹시 여러분들 구제하는 것이 예배라고 생각해보셨어요? 선행하는 것이 예배라고 생각해 보셨어요? 오늘 이번에서 13장 16절은 예배라고 제사라고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요. 오늘 우리 주위를 돌아보시면 우리의 손길이 필요로 한 곳이 너무너무 많아요. 그래서 우리 자신의 몸을 들여서 봉사하고, 섬기고 나눔을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드려야 될 산제물이요. 하나님이 기뻐하는 영적 예배라는 사실을 이 시간 우리의 마음에 새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
하나님께 예배하는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마음을 주셨어요.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마음을 주셨다니까요?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 가운데 있다. 라는 것이에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인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고 그들에게 긍휼과 사랑으로 함께 할 수 있는 마음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아멘!!! 인정해야 돼요. 여러분 인정 안 해도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내 마음에다 묶어 놓지 말고, 내 마음에다 딱 차곡차곡 쌓지 말고 부자처럼 창고를 짓는 자기를 위해서 부자가 창고를 짓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마음을 심어놓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이웃들에게 표현하고 실천하는 믿음의 성도들 되기를 소원합니다.
 
※조지 휫 필드는 그의 일기 중에서 이런 말을 기록했습니다.
-나는 녹슬어 없어지기보다 나는 녹슬어 없어지기보다 닳아서 없어지기를 원하노라. –조지 휫 필드-
 
여러분,
우리에게 주시는 이 육체 건강한 육체를 자신만을 위해서 잘 보관했다가 하나님 앞에 가서 하나님 이제 왔습니다. 하며 하나님 싫어하신다. 우리의 건강한 육체를 가지고 이 육체가 자라서 없을 지을 정도로 우리가 주님 앞에 충성스럽게, 내 이웃을 내 몸 같이 살아가는 주님의 말씀처럼, 내 몸을 필요로로 하는 곳이 있다면, 어느 부서든 어느 기관이든 어느 곳에 가던 사업의 현장에 가서 정말 녹슬지 아니하고 몸이 아스러질 정도로 일을 하는 믿음의 성도들 되기 바랍니다. 여러분, 혹시 직장에서 그렇게 하십니까? “아이, 나는 사장도 아닌데 내가 뭐 그렇게 할 필요가 뭐 있어?” 여러분 우리의 고용주는 그분의 사장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의 고용주이심을 믿습니다. 여름을 직장에 여러분들이 선택해서 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신 거 이걸 믿으면 그 사람이 주위 사람들이 어떠하든 사장이 어떠하든, 나를 힘들게 하든, 관계없이 우리의 몸을 온전히 사용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에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전 6장 20절의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6:20,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중요한 말씀입니다. 여러분들 구속해 주셨어요. 아까 우리의 심비의 새기라고 했는데, 이 구속의 은혜를 심비에 새기면 여러분들의 몸이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 것이 되어졌었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맛이나 먹든지 무엇이라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셔야 된다. 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정말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일터에서, 우리 교회에서, 봉사하고 계십니까?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참 예배자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귀하게 사용해 주셔서 우리에게 예배를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올해 우리 장애인 선교회의 큰 주제가 ‘온전한 예배자’입니다. 그래서 그 예배에 맞춰서 이번에 주제도 정해졌습니다. 오늘 장애인 주간 기념 수요 찬양이므로 영 가족 여러분들이 온전한 예배의 기쁨이 회복되어지기를 소원합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이 ‘조지 휫 필드’처럼 정말 몸이 아스라 질 정도로 주님의 영광을 해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교회 선신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물 떠온 그 하인의 기쁨이 여러분들 가운데 하나님이 이 시대에 받으시는 온전한 예배자로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어 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구속의 은혜를 망각하거나 저버리지 않고 심비에 새겨서 우리의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온전한 예배 자가 되고, 이 시대의 하나님이 찾으시는 영적예배를 드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온전히 올려드리는 자가 되고, 장애인 선교부 모든 영 가족과 가정을 사명의 문 빚 장과 단단한 강철 신발로 보호해 주시며 풀무 불 같은 세상에서 지치고 낙심할 환경 가운데서도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매일 하나님의 산 기적을 경험하는 가정이 되기를 소망하며, 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기를 실천하는 자로 나아가 아직도 믿지 않는 자녀와 가족, 형제에게 복음이 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에게 값없이 베풀어 주신 이 구속의 은혜를 심비에 새겨서 평생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몸을 산 재물로 들여서 온전한 예배자로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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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04월 17일)
제목: "일어나 걸어라"
말씀: 사도행전 3:1-10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사회: 김대규 부목사님

설교자: 고영민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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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행전 3:1-10,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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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을 보면 나면서부터 걷게 된 이가 등장을 합니다. 지금 우리의 시대라 할지라도 장애인이 장애인(障礙人)에 대한 생각과 예우를 사회적 측면에서 배려한다고 해도 장애인들이 살아가기에 쉽지 않은 세상임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 당시 유대 사회라면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특히 아예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이라고 하면, 더욱 어려운 삶을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2절에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의 일상이 등장을 합니다.

 
* 사도행전 3:2,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이 사람을 사람들이 메고 성전 문 앞에 놓아주는 일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그 성전 문 앞에 앉아서 제사를 드리러 오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이 일상이었을 거예요.
 
사람들에게 아침에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아 성전 문 앞에 앉아서 구걸하다가 해질 때쯤에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집으로 돌아가는 일, 말입니다. 특별하게 무엇을 할 수 없었던 그에게는 이러한 삶이 매일매일 반복했을 것으로 우리가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라도 해야 먹고 살 것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한 평생을 살았을 그를 보고자 하면 마음 한 켠에 무겁고 먹먹한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만약에 우리 아이가 이렇게 한평생 살아가야 한다. 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삶은 너무나도 수동적입니다 구걸조차도 사람들에게 매어 나와야만 할 수 있는 사람 아닙니까?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만들어 가기는커녕 구걸로 인하여서 다른 사람들에게 받은 돈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면서 살아가는 그의 삶에는 능동적인 부분이 없습니다. 당시 사회상으로 봤을 때에는 결혼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녀를 기르는 기쁨도 아마 상상도 하지 않았을 거예요. 재산을 모으는 기쁨 어떤 일을 성취해서 얻는 기쁨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채 철저하게 수동적으로 주어졌던 삶을 살아갔던 큰 이변이 없는 한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아가야 했던 한 사람이 오늘 등장하게 되는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됐던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 모든 것의 시작이 무엇입니까?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에게 이 모든 것의 시작은 태어났을 때부터 걷지 못했던 그의 장애였습니다.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것이 원래 창조되었을 때 아름답게 살아갔을 바로 한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원흉(元兇)이죠. 그렇게 이것이 자신의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다 포기하고 지금까지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남아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도인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도 생명에 관한 것 영원에 속한 것을 전혀 꿈꾸지 못한 채 뭘 얻을 것 없을까? 뭘 더 얻을까? 하는 아주 현실적인 모습만 남아 있는 것 아닙니까? 그에게 남은 것은 그날그날 살아가야 할 현실의 문제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모습이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우리는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이 이 사람과는 우리가 다르다고 생각하기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 행동과 결정을 가지고 살아간다. 라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이 어그러지고, 어디서부터 어디서부턴가 무너져 있고, 어디서부턴가 잘못되어도 대부분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이처럼 말이죠. 이러한 삶이 맞는 것일까? 왜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하는 본질적인 질문들을 다 잃어버리고는 굉장히 수동적으로 오늘 아침을 시작하지 않습니까?
 
오늘 하루하루에 살아갈 현실의 문제만을 떠안은 채, 다른 사람 의해서 조직에 의해서 시스템에 의해서 혹은 여러 가지 상황에 떠밀려서 수동적으로 직장생활을 하거나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지 않습니까? 오직 오늘 하루의 삶에 문제만 매어서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이와 다른 것이 무엇이냐고 우리가 물을 수 있는 것이죠. 여러분들이 오늘 아침에 풀린 눈으로 회사에 출근하고 아무 생각 없이 주어졌던 일들을 해왔고, 그렇게 지금 죄송하지만 이 자리에 앉아 있다. 라면 수동적으로 말이죠. 이뿐입니까?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고 하자 무엇을 얻을까? 하여 그들을 바라보았던 것처럼 말이죠. 여러분들의 마음이 혹시 이 세상 가운데 어떻게 하면 무엇을 더 얻을까?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이 상황에 마음이 다 뺏겨있지는 않습니까? 시기를 또 차야 되고요. 지금은 이런 것들을 해야 된대 유행을 따라서 혹은 상황을 따라서 이렇게 해야 하고 저렇게 움직여서 이렇게 운영해야 된다더라. 하는 세상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이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현실의 문제 그러나 여러분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되는 이가 어느 날 구걸을 구걸이 너무 잘 돼서 그날은 풍족하게 보냈다고 해도 그에게 아무것도 변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 아셔야 됩니다. 우리의 현실의 문제가 해결되었음에도 변하는 것이 없을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 아셔야 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처럼 모든 것은 다 접어두고 세상사는 일에 함몰(陷沒)되어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청년부를 담당할 때 아이들을 심방(尋訪)에 보면 어떤 친구는 성공해야 하는 강박감에 사로잡혀 있어서 정말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는 친구가 있었어요. 성공해야 하고, 돈을 많이 버는 취급을 가져야 하는 것으로 대화가 가득할 때 여러분 교육자로서 어떤 마음이 드시는지 아십니까? 막 숨이 막혀옵니다. 어떤 말을 해줘야 하지? 온통 친구의 머릿속에는 성공과 좋은 직장과 어떻게 하면 현실의 문제를 타개할 수 있을까? 이 아이의 기본적인 태도(態度)가 바로 누구를 보아도 어떤 일을 마주쳐도 어떤 것을 더 얻을 수 있을까? 어떻게 더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그런 시선만 가지고 있더라는 겁니다. 완전히 여기에 함몰된 것이죠. 인생이 그게 전부가 아니고 더 가치 있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 라고 막 소리 지르고 싶은 마음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던 기억이 납니다. 여러분 혹시 여러분 중에 이런 현실에 함몰되어 있는 분이 계십니까? 예배와 예배에 와 계셔도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는 분이 혹시 계십니까? 오늘 근심과 염려로 주저앉아 계신 분이 혹시 계십니까? 그래서 현실이 신앙을 뒤덮어버려서 깊은 수렁에 빠지신 분이 계십니까? 이 깊은 수령에서 건져주시는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이 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현실의 문제 때문에 영원한 것을 잃지 않는 여러분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말씀을 좀 더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더 살펴보면 성전에 들어가려던 베드로와 요한이 그를 주목하여서 ‘우리를 보라’ 이렇게 말합니다. 드디어 베드로와 요한이 말하기 시작하니까 안심이 되죠. 구걸하던 그에게 베드로가 군더더기 없이 선포를 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내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 버려라 베드로와 요한은 그가 재물을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말했겠죠. 그러나 그가 정말 필요한 것을 바로 말합니다. 그가 이제는 포기했던 것, 그가 이제는 단념했던 것, 그래서 오늘 아침에도 사람들이 메고 올 수밖에 없었으나 사실은 메어 오면서도 마음속으로 진짜 간절히 원했던 것 어떤 말이요. ‘일어나 걸으라.’예요. 이제 어떻게 됩니까? 7절을 보니까,
 
*사도행전 3:7,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손목을 잡고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었다라고 말합니다. 8절에서는 뭐라고 말합니까?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다라고 말합니다. 아 이런 본문 보면 너무 마음이 좋죠. 네 여러분 혹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방글라데시에서 잠깐 사역을 했을 때 중간에 선교사님 사역을 도와준 적이 있습니다. 그때 뒀던 마을에 태어나면서부터 못 걸었던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 상체는 비장애인과 동일하게 보일지 모르겠어요. 그냥 다를 게 없었어요. 그러나 다리가 정말로 앙상한 거 있죠. 정말 뼈에 가죽만 살짝 붙어있는 앙상한 다리만 진짜 다리가 발가락도 뼈가 보 1만큼 앙상하게 보입니다. 어찌 보면 다리가 덜 자란 것처럼 짧아 보이기도 했던 것 같아요. 이런 모습이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오늘 말씀은 뭐라고 합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라고 말하자마자 발과 발목에 힘을 얻었다. 로 말합니다. 선포하자마자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해가 되십니까? 전 사실 그때 방글라데시에서 봤던 나면서부터 못 걸었다는 그분의 다리와 외에 여러 가지 조건들을 생각하노라면 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지금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은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뼈만 앙상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선포되었을 때, 걸었다는 말은 지금 걸을 수 있을 만큼 말씀 선포되자마자 근육이 붙어나가고 있고, 근육 가운데 걸을 수 있을 만큼 일반인만큼 여러분의 허벅지 만큼이요. 근육이 막 붓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작았거나 뒤틀린 뼈가 자라기 시작하고 바르게 맞춰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그뿐입니까? 갑자기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었던 그래서 균형(均衡) 감각(感覺)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던 사람이 다리로 걸었을 뿐 아니라 뭐까지 한다고요. 네 뛰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지금 등장하는 사건은 대단함이고 놀라움 자체예요. 눈앞에서 이 상황이 벌어졌다고 생각해보세요. 무릎 수술만 해도 재활하고 다시 뛰는데 몇 달이 걸리는 거 아시죠? 네, 이걸 생각하면 이것은 마치 아이가 걸음마를 하지도 않고도 갑자기 균형 감각을 얻은 것과 동일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시는 게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명령의 회복은 완전한 회복(回復)을 의미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상상을 해 보십시오.
 
“일어나 걸으라.” 선포했지, 내가 일어나 뛰라고 하지 않았다라고 말해서 뛰지는 못하고 이렇게 막 엉거주춤 이렇게 해왔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막 넘어질 것 같고, 그래도 이분은 진짜로 감사했을 거예요. 왜냐하면, 처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봤잖아요. 처음으로 한 발을 떼 봤잖아요.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회복은 지금 그런 상황 지금 상황보다 좀 더 나아진 회복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회복은 완전한 회복입니다. 모자람이 없는 회복인 것입니다. 지금 이 사람은 하나님의 완전한 회복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큰 은혜 아닙니까? 지금 저희 교회에도 사랑부가 있지 않습니까? 제가 신혼 때 화곡동에서 시작했습니다. 좋은 동네예요.
 
화곡동에는 사랑부로 유명한 교회가 있는데, 꼭 제가 주일에 사역하는 시간에 아마 교회 사랑부 예배 시간이었던 것 같애요. 그래서 출근을 하고자 하면은 이제 거의 매주 교회 앞을 지나갈 때마다 부모님이랑 사랑부 친구들이 여러 명이 교회에 이렇게 들어가는 모습을 보곤 했습니다. 하루는 아내가 당시 이제 주일에 교회를 가는 사랑부 학생들을 보면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보, 예수님이 다시 오시고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면 친구들도 완전히 회복되겠지?” 저는 깜짝 놀랐어요. 내 아내가 어 제 아내는 신학을 하지 않았습니다. 좀 놀랬어요. 그래서 제가 ‘물론이지’ 그랬더니, 아내가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아마 저기 함께 가는 부모님은 누구보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걸 기다릴 거야.’ 저는 매일같이 길을 매주 길을 지날 때마다 늘 동일하게 봤는데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이었어요. 그날에 예수님이 오시는 그날에 저분들도 창조 때에 기뻐하셨던 온전한 모습으로 회복이 일어나겠구나! 하면서 막 그날이 너무 기다렸던 기억이 납니다. 여러분, 그 교회 사랑부 부모님들이 그렇게 소망하고 기다리는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완성할 하나님 나라에서나 누릴 완전한 회복을 지금 여기 있는 그가 경험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그에게 무슨 치유 받을 조건이 있었습니까? 그가 보여준 특별한 믿음이 있었습니까? 아니에요. 오히려 그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뭘 얻을 게 없을까? 하여서 그들을 갈구하는 눈길만 바라보았던 사람 아닙니까? 현실에만 매어 있던 그의 삶에 성령의 강력한 능력에 폭탄(爆彈)이 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그의 삶을 완벽하게 회복시키고 계십니다. 그의 삶이 어그러졌던 근본적인 지점부터 완전하게 회복하고 계십니다.
 
단순하게 돈 몇 푼을 더 받아서 잠시나마 편하게 사는 것인 그런 임시적인 회복이 아니라, 그가 이렇게 이렇게밖에 살 수 없었던 근본적인 지점 나면에서부터 못 걷게 되었던 지점을 완전하게 회복시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회복시키실 때, 여러분들의 삶에 근본적인 부분부터 완전하게 회복시키시는 분인 줄 믿습니다. 어떨 때에는 우리가 이 부분만큼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들이라서 그게 남편이 될 수도 있죠. 그게 아이들이 될지도 모르겠어요. 우리 아이들만큼은 변화하지 않을 것 같아요. 저희 아버지만큼은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요. 그래서 이 부분만큼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상상하지도 않고, 기도하지도 않고,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에 다가오셔서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한 가지도 성령의 강한 능력으로 회복시키실 줄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도 현실의 깊은 수렁에 빠져 있어서 뭘 보아도 무엇을 얻을까? 로만 보이고 어떻게 더 벌어볼까? 로만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이 팍팍하게 살고 있는 우리라 할지라도, 주님께서 우리의 삶에 구석구석 모든 부분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완전하게 회복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할 수 있는 그가 들어간 곳이 어디입니까?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었던 성전에 들어갑니다. 그동안 성전(聖殿)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이라는 미(美)문(門) 앞에서 아이러니하게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수년을 보냈을 그가 말이죠. 장애인으로서 성전에 들어가는 멀쩡한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불허했을 그가 드디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당당하게 하나님의 품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전을 뛰어 들어가면서 그가 한 행동이 무엇입니까? 8절을 보면,
 
*사도행전 3:8,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하나님을 찬성했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재미있지 않습니까? 제자들은 지금 누구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했죠. 맞아요. 나사르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누구를 찬성하고 있죠. 하나님을 찬성하고 있어요. 왜 그렇습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했을 때 이러한 일이 너무나 능력이 넘쳐서 너무나 완전해서 하나님이 아니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찬성했던 것 아닙니까 특히 누구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했겠습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선포한 이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로 메시아였구나! 그리스도였구나! 그래서 그분이 참 구원자 맞구나! 하나님이 보내신 자구나! 거부할 수가 있었겠어요? 예수란 그분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보내신 구원자이시구나! 라는 걸 깨달았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것을 알 수 있습니까? 뒤에 서서 걸으며 뛰어 서서 걸으며 어떻게 들어갔다고 말하죠. 네, 성전에 아까 말했듯이 성전에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을 받고 구원을 받은 자라는 것을 지금 성경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11절부터, 베드로가 이 일이 너희가 죽인 예수로 인하여 일어난 일이라고 증언(證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회복은 우리의 삶에 영역(領域)만 회복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 완전한 우리의 삶에 영역만 회복할 회복을 뛰어넘어서 우리의 영을 완전하게 회복시키십니다. 성령의 능력의 폭탄이 그의 인생 가운데 떨어질 때 현실에만 얽매여 있던 저주(詛呪)의 끈이 끊어지고 삶이 완전하게 회복되는 것뿐만 아니라 이제는 생명에 관한 것, 영원한 것, 여기에 눈이 뜨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동안에는 무엇을 얻을까?
 
머릿속에 온통 그것만 있었던 사람 아닙니까? 오늘은 어떻게 하루를 보내야 되나, 오늘 저녁은 어떻게 해결하지? 이런 생각으로 가득 찼기에 관심도 없었던 것 필요도 없었던 것이 이제 눈이 뜨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돈보다 더 소중한 것 더 값어치 있는 것 돈으로 바꿀 수 없는 영원한 것에 심령의 눈이 뜨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말씀을 묵상할 때 지금 이 사람이 성전에 들어가면서 드리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 그의 인생에 처음일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을 해봤어요. 원망(怨望)과 무기력(無氣力)함으로 살아왔던 그의 인생에서 말이죠.
 
육체적인 완전한 회복을 경험했을 뿐만 아니라, 영적(靈的)으로도 완전하게 회복되어서 하나님을 바로 온전하게 찬양할 수 있는 자가 된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에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회복시키실 때, 여러분들의 삶의 문제들만 회복시키는 것에 끝나지 않고, 여러분들이 다시 온 전(穩全 한 찬양을 드릴 수 있도록 온전한 예배(禮拜)와 경배(敬拜)를 드릴 수 있도록 여러분들의 심령(心靈)도 완전히 회복시키실 줄 믿습니다. 세상의 욕심(慾心)들로 가려져 있던 여러분들의 눈을 다시 생명에 관한 것 영원한 것에 눈뜨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와 은혜(恩惠)의 은혜를 바라보는 여러분으로 회복시키실 줄 믿습니다. 이 밤에 사랑의 교회 성도님들의 삶의 영역뿐 아니라 영적인 영역에 완전한 회복을 경험(經驗)하시기를 소망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남은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과 같이 그날의 얻어진 재물(財物)로 기쁨을 누리며 그것으로 만족(滿足)하며 살아갔을 자들 아닙니까? 여러분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일을 다행히도 메어다가 줄 사람이 등장하죠?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이 비참(悲慘)한 인생들끼리 아무리 자기네들끼리 돕고 살아도 비참함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도와줘도 평생 데리고 나와서 성전 문 앞에 내어준다. 할지라도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은 똑같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에게 진정(眞定)으로 필요한 것은 사람의 도움도 아니오. 하루를 살아갈 재물도 아니오. 바로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하고 가장 필요한 것이 사람의 도움도 아니고 재물도 아닙니다. 바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인 줄 믿습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런 하나님의 완전한 회복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영적인 생채기가 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상처들이 곪아서 무엇을 해야 할지조차 잃어버리신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디선가부터 잘못된 것인지 몰라서 그저 눈물로만 기도하고 계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삶을 능력 있게 회복시키실 줄 믿습니다. 망가지고 무너진 여러분들의 삶을 좀 더 나은 정도의 회복이 아니라, 원래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려고 했던 완전한 축복으로 회복시키실 줄 믿습니다. 오늘 이 밤에 이런 완전한 회복이 회복을 주실 하나님께 믿음으로 나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삶에 회복뿐 아니라 여러분들을 영적인 깊은 수렁에서 건지셔서 더 다시 우리를 반석위에 세우시고, 기쁨을 회복시키시며 우리의 입술에 찬송을 담아주실 주님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믿음으로 나아갈 때,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되었던 이가 경험했던 완전한 회복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 이름으로 여러분과 여러분들의 가정 가운데 임할 줄 믿습니다.
 
♣요약
인생의 한계 앞에서 우리의 능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며, 진정한 기도로 올려드리면, 현실의 난제를 초월한 새 차원의 인생으로 비상하게 하심을 확신해야 한다. 한 생명에게 ‘일어나 걸어라’라고 선포하셔서 당장의 기적을 보이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말씀의 능력으로 삶을 살아가면 완전한 회복을 주실 것이다. 우리 인생 가운데 능력으로 찾아와 주시는 주님께서 인생의 한계 앞에 무력하게 무너져 있는 우리의 인생 가운데 은혜를 베풀어 주실 줄 믿어야 한다. 성령의 역사를 베풀어 주실 것을 소망하고, 완전한 회복과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완전한 회복을 경험하게 해 주실 것을 확신해야 한다. 우리의 심령이 회복되게 하심을 소원하며, 언제나 기쁨과 찬송이 되어,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일어나 걸어가면 주님은 항상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도우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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