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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2월 29일)
제목: "사랑으로 내어주다"
말씀: 로마서 8:32
찬양인도: 쉐키나(유재원 부목사님)
사회: 강건우 부목사님
설교자: 구성찬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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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8:32,
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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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이 시작되고 나서 벌써 2월에 막바지입니다. 그런데 올해는 뭔가 좀 다른 게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게 뭘까? 라고 고민하면서 생각하다 보니까, ‘예수님은 누구신가?’ 설교 시리즈를 통해서 온 교회 영 가족들이 함께 한 해를 시작하면서부터 예수님에 대해서 계속 묵상하고 생각하고 또 그 예수님 담고자 하는 열심과 열망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 우리가 살아가면서 참 인생에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도 있고 또 오늘 하루도 지나오시면서 수많은 생각들이 우리를 스쳐 지나가지만 그래도 ‘예수님 생각하는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라고 고백하는 분들이 예수님의 제자 아니겠습니까?
네, 이 자리에는 다 예수님의 제자들만 계신 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사역 훈련의 꽃과 같은 본문이죠. 로마서 8장입니다. 로마서 8장에서도 예수님에 대해 더욱 묵상하다 보니까 이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더라고요.
오늘 본문 8장 31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오. 라며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고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이렇게 위해주고 계신가?
*로마서 8:31,
31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오늘 본문 32절에 이 표현이 저는 마음에 많이 와 닿았습니다.
*로마서 8:32,
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시는 이가라는 표현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위해주시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해 내어주심으로 이렇게 말씀합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내어주다. 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가 참 많이 여러 군데 쓰이는데요. 그중에서 몇 구절만 살펴보면 가장 먼저 창세기 14장에서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이렇게 전투를 통해서 구해서 돌아왔을 때, 살렘 왕이자 제사장인 멜기세댁을 만납니다. 그 멜기세댁을 만났을 때 내용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얻은 것에서 10분의 1을 멜기세댁에게 주었더라.
*창세기 14:17,
20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저기에서 주었더라. 라는 표현이 그 단어가 내어주다. 와 같은 단어입니다. 신약에서는 마태복음 5장 25절에서 예수님이 쓰신 단어예요.
*마태복음 5:25,
25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주어 재판관이나 옥리에게 죄인의 생사여탈권을 이렇게 내어줄 때 이 단어가 쓰였고요. 또 마태복음 10장 4절에는,
*마태복음 10:4,
4 가나나인 시몬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자라.
-예수님을 팔았다라고 할 때, 이 단어가 ‘내어주다’.와 같은 단어입니다. 전체적으로 이렇게 이 단어가 사용된 의미를 봤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것은 그냥 단순히 내주셨다 이런 의미가 아니더라고요. 하나님께서는요. 아들을 십자가 화목제물로 삼으셔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아들을 마치 헌물로 드리듯 드리신 거고요. 천지의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피조물의 재판관에게 자신의 아들의 판결 권을 내어주듯이 한 것이었고요. 또 마치 팔아서 소유권을 넘겨주듯이 완전한 사랑으로 우리에게 아들을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자격이 되어서 그렇게 하신 걸까요? 우리는 아무 자격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절대적인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잘 알고 있으실 본문일 텐데 같이 읽겠습니다.
*요한복음 3:16,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 예수님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셨습니다. 저는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겼습니다. 무슨 질문이냐면 그렇다면 내어줌을 당하신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우리에게 무엇을 주신 걸까라는 부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끼지 않고 아들을 사랑으로 내어주셨다는 로마서 8장 32절의 내용이 이제는 그 아들을 내어주셨을 때, 그 아들이 실제적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무엇을 내어주셨는가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될 때 이 본문도 함께 더 깊어져 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예수님은 그냥 다 우리에게 예수님이 다 주셨습니다. 라고 고백하기 이전에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아들을 내어주신 사랑과 그 사랑에 담긴 의미를 깊이 깨닫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사랑으로 내어주실 때 이스라엘의 상황이 어땠는지를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말라기 선지자 이후에, 400년 동안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셨어요. 그것을 우리는 400년 침묵이라고 부릅니다. 그 시기에 이스라엘 내부에서는 우리 스스로 힘을 키워서 다윗 왕조를 재건하자 라는 무력적인 운동이 일어나서 소위 마카비 왕조라고 하는 그런 왕조가 생겨나기도 했어요.
그런데 무력으로 세운 왕조는 또 다른 더 강한 무력에 의해서 무너졌죠. 그러는 사이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 그룹과 서기관을 비롯해 지도자들은 이 율법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심정은 다 잊어버리고, 오히려 그 능력이 되고, 생명이 되어야 될 말씀이 족쇠가 되게 만들었고, 오히려 화석화되어버려서 더 이상 능력이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사회적으로도 점차 로마의 지배권이 강화되기 시작합니다. 특히 로마를 대신해서 세금을 수탈하는 세리들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도 좀 팍팍해지고 그들의 삶도 같이 팍팍해집니다. 수탈(收奪)과 침탈(侵奪)의 역사가 시작된 거죠. 그러니까 그 시대는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내어주기보다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내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움켜쥐는 시대였고요. 그 어떤 것도 밝고 소망이 있는 그런 모습보다는 자꾸만 점점 더 어두워진 그러한 시대였습니다. 아무것도 내어주지 않으려는 시대 바로 그런 시대에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내어주시고, 아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사랑으로 우리에게 무엇을 내어주셨는가? 우리 첫 번째 한번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1) 무한함을 내어주셨다: 성육신.
*요한복음 1:1,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이 말씀이 누구십니까? 이 말씀이 누구십니까? 네 예수님을 얘기하는 거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 가장 연약한 아기로 이 땅에 오신 거죠. 우리 이 구절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2:7,
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결핍된 마구간에서 누가 보살펴주지 않으면 생존조차 할 수 없는 한계 투성이인 아기로 오신 것은요. 자신의 무한함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시고, 자신은 그 유한함 속에 그 한계 속에 자발적으로 갇히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한계가 없으세요. 하지만 인간의 몸이라는 배고플 때 먹어야 되고 피곤하면 쉬어야 되고 밤이 되면 자야 되는 그 유한함 속으로 오신 것이죠. 말씀을 통해 살펴보면요. 4일을 밤낮으로 금식한 후에 줄이신지라 배고프셨고요.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오래 걷다 보니까 피곤해서 그냥 바닥에 철퍼덕 앉기도 하셨습니다. 그냥 이런 표현만 보면 오늘 우리의 모습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요.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그분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철저하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공간,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간이라는 한계 속으로 걸어 들어오신 것입니다. 자신의 무한함을 사랑으로 우리에게 내어주시며 기꺼이 우리를 위해 유한함 속으로 들어오신 것이죠. 그리고 30여 년의 인생을 평범한 한 사람으로 사셨습니다. 요셉이라는 목수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가업을 따라 목수 일을 하셨고요. 나사렛이라는 별로 유력하지 않은 작은 동네에서 이웃과 함께 가족과 함께 사셨습니다.
물론 언제든지 필요하면 12군단도 더 되는 천사를 부르실 수 있으셨겠지만, 우리에게 사랑으로 내어주신 근원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 인간의 유한함을 참고 버티고 견뎌내셨습니다. 이 표현이 예수님께 좀 무례한 표현일까요? 저는 말씀을 읽을수록 예수님께서 참 많이 힘드셨겠구나! 참 이 땅에서 이 땅의 모습을 보며 참 많이 가슴 아파하셨겠구나. 그래도 자신을 사랑하고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을 보면서 마음에 많은 위로를 받으셨겠구나!
오늘도 수요 저녁 기도회에 피곤한 가운데서도 그 지친 몸을 이끌고 달려 나온 한 분 한 분의 마음도 누구보다 깊이 공감하시고 잘 알고 계시겠구나! 자꾸 이런 묵상이 되더라고요. 그리고 이 구절이 새롭게 보였어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태복음 26:41,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은요. 우리 육신의 약함을 누구보다 잘 아시고 깊이 공감하십니다. 이런 약함 속에서도 우리가 예수님을 주인으로, 주인으로 모시는 삶을 계속해서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음은 자신의 무한함을 내어주신, 그리고 스스로 유한함을 옷 입으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내어주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진리가 있는 거죠. 우리는 유한하지만, 우리는 연약하지만 무한함을 내어주신 예수님을 믿기에 이제는 예수님의 무한함이 나의 유한함을 이끌어 가신다는 거야. 이게 무슨 말이냐면 나는 우리는 이 땅에서 발을 딛고 일상을 하루하루 살아가지만 이제는 그 무한함을 내어주셨던 예수님께서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마음껏 무한함을 발휘하시는 시대예요. 예수님께서는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 이런 일상을 살아가는 유한한 우리의 삶을 견인해 가세요. 이게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함이 우리의 유한함을 이끌어 가신다는 표현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얘기해요.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우리의 유한함 가운데 찾아오셔서 그 인도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도록 우리를 끌고 가신다는 겁니다. 그것은 그분이 우리의 유한함을 겪어보셨기에 누구보다 이 무한함이 어떻게 필요한지 아시기에, 오늘도 유한한 우리의 삶의 현장에 찾아오셔서 우리를 견인해가고 계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은요. 우리의 유한함을 깊이 공감하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무한함으로 우리를 초대하신 삶이고요. 또 세상 속에 살아가지만 세상에는 속하지 않은 무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 사는 삶입니다. 말이 좀 어렵죠.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은 우리의 유한함을 깊이 공감하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무한함으로 우리를 초대하신 삶이요. 또 세상 속에 살아가지만 세상에 속하지는 않은 무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 사는 삶이 바로 우리 제자의 삶입니다. 그렇게 말씀대로 사는 것을 손해 볼까 봐, 또 괜히 말씀대로 했다가 좀 무한함을 당할까 봐 주저하지 않으셔도 돼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우리를 무한한 그 사랑으로 지금도 인도해 가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무한함을 내어주신 첫 번째 내어주심에 이어 두 번째로 예수님은 사랑으로 무엇을 우리에게 내어주셨을까요?
2) 삶을 내어주셨다: 제자도.
우리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삶을 내어주셨다. 제자도’, 예수님은 유한한 인간으로 오셔서 베일에 싸인 채 지내시다가 십자가에 달리기 하루 전에 나타나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다 이루었다 하시고 그냥 3일 후에 부활하신 그런 사역을 하시지 않았어요.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필수 행위만을 하고자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예수님은요. 우리에게 자신의 삶을 내어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삶 자체가 오늘 우리가 따르고 있는 예수님의 온전한 제자도예요. 예수님은 특별히 공생회가 시작되고 난 후에 제자들과 늘 함께 지내셨는데, 제가 다섯 가지 정도의 구절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1,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마태복음 9:19,
19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
*마가복음 3:7,
7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
*마가복음 4:34,
34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누가복음 24:30,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이 구절들은 그냥 함께 걷고 함께 먹고 함께 배도 타고 함께 대화하고 또 가르치시고 또 함께 주무셨던 제자들에게 자신의 삶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365일, 24시간 다 자신을 그냥 열어서 제자들한테 보여주시면서 그 삶을 통해 제자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지를 친히 가르쳐 주신 겁니다. 이처럼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내어 주신 삶은요. 그 삶 자체가 하나의 강력한 말씀이요. 메시지가 되어서 제자들의 시선을 바꾸고, 그들의 가치관을 바꾸고, 그들이 추구하는 삶을 바꿔놓고, 그들의 행동까지 바꾸고, 결국 그들의 체질까지 바꿔버리시는 강력한 은혜의 시간이었어요. 좀 당연한 얘기 같습니까?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눈에 보이는 존재로 나타나서 어떻게 사는지를 친히 삶으로 보여주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렇구나!. 대단하시네!. 어떻게 저렇게 하셨을까? 이야 난 좀 아닌 듯 이렇게 우리가 스스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그러한 삶 자체가 우리에게 주시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우리의 눈을 열어 보여주시는 가장 큰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이 메시지는 그냥 듣고 흘려보내는 메시지가 아니라, 우리의 행동 지침이고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된다는 것을 친히 그분이 안 하셔도 되는 그분이 보여주신 거예요.
목사님 말씀은 알겠는데, 삶으로 실천하는 게 잘 안 돼요. 라고 우리 사역반 집사님들이 얘기하시는 것 같아요. 그러면 얘기하죠. 네 저도 잘 안 돼요.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대로 끝까지 살고자 몸부림 쳐야 합니다. 왜 그렇죠? 예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삶을 우리에게 내어주시며, 얘들아 ‘내 사랑하는 제자들아 아무리 힘들어도 너희도 이렇게 한번 살아봐. 십자가를 향해 걷는 나의 이 땅에서의 생애가 내겐 고통이 아니라 축복이었단다. 왜냐하면 이런 나의 모습을 2천 년이 지나도 본받아 따라 살고자 하는 너희가 있기 때문이야.’
사랑하는 예수님의 제자 여러분,
이 예수님의 제자의 길 정말 잘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요. 사랑으로 삶을 내어주시면서 우리가 이 길 따라가면 우리가 걸어가는 이 길 끝에서 두 팔 벌려 우리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계세요. 그런데 우리 눈에는 그 모습이 안 보여요. 어떻게 그 길로 가야 되는지도 몰라요. 그렇게 그냥 있다가는 자꾸만 넓은 길, 큰 길로만 찾아갈 것 같으니까 예수님이 친히 이 땅에 오셔서 그 길로 가면 안 돼. 너희가 가야 될 길이 바로 이 길이야. 이 길로 와야만 이 길 끝에서 나를 만날 수 있단다. 예수님께서 친히 삶을 내어주시며 우리에게 이 길을 알려주신 거예요. 닫혀 있는 우리의 눈을 열어 이 좁은 길, 우리가 걸어가야 될 십자가의 길을 예수님께서는 친히 삶을 내어주시며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사랑으로 내어주신 예수님의 마지막 내어주심. 사실 로마서 8장 32절에 아끼지 않고 내어주셨다의 의미는 바로 이 내용일 겁니다. 우리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3) 생명을 내어주셨다: 십자가.
우리에게 무한함을 내어주시고 또 자신의 삶을 내어주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람으로 내어주신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자신의 생명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0:45,
45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아담의 원죄 사로잡힌 인간은 할 수 없는 영역이에요. 모든 사람은 내가 저 사람을 대신해서 죽겠 하고 죽어도 자신의 죗값 때문에 죽는 것이지, 그 사람의 죄를 대신할 수는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아무 흠 없는 어린 양처럼 십자가에서 재물이 되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십자가 하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당시 로마의 가장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형벌이 바로 이 십자가였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오,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예수님께서 생명을 내어주신 십자가형은요. 같은 유대인이나 또 이방인이 봤을 때도 거리끼고 미련한 것으로 보였어요. 하지만 거리끼고 미련한 그 방법을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바치는 제단으로 삼으셨던 거예요. 이 비참한 형태인 십자가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제단이 되어서 화목 제물 되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셔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고 영원한 형벌에서 구원하여 주신 생명의 십자가요, 소망의 십자가요, 능력의 십자가가 된 줄 믿습니다.
창조주께서 피조물을 살리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그 자리가 된 것이죠. 우리는 내가 위험에 처했을 때 나를 살리고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 있어도 그 사람에게 너무 평생 감사하고 그 사람을 늘 추모하면서 우리는 살아갈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나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다면 우리는 그분을 생각하며 어떻게 살아야 될까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무게, 십자가의 고통, 십자가의 희생, 십자가에서 하나님과의 단절, 그런데 예수님이 그 짐을 져주시니까 예수님의 제자인 나에게는 그 십자가의 무게가 생명의 무게가 되고, 생명의 감격이 되고, 생명의 소망이 되고 그 생명의 영원함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세 가지 우리가 함께 살펴봤던 이 세 가지 자신의 무한함, 자신의 삶, 자신의 생명까지 모든 것을 사랑으로 내어주셨는데 그러면 그렇게 되고 자연스럽게 마무리가 된 걸까요? 우리에게 무한함을 내어주시고 유한함을 입으신 그 예수님의 사랑으로 인해서 지금까지 셀 수 없는 많은 그 수많은 유한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주요, 주인으로 모신 무한한 생명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삶을 사랑으로 내어주셨기에 지난 2천년 동안 수많은 제자들이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고, 지금 2024년에도 제자 훈련 49기, 사역 훈련, 36기생들이 열심으로 예수님을 그 제자들을 따라 삶으로 보여주신 그 제자들을 따라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이 모든 특권적인 삶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사랑으로 내어주셨기에 가능한 거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기에 그 희생을 통해 부활하는 역동하는 생명이 이제는 우리의 삶에서 시작된 거예요. 하나님만이 가지신 그 부활하는 역동하는 생명력이 이제는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부활의 생명이 되어서 우리의 삶을 인도해 가시는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으로 내어주는 것은 겉보기에는 모든 것을 다 줘버리는 나는 손해 보고 희생만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이런 거는 예수님만 하는 거예요. 라고 특별한 영역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 다시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생명의 역사는 예수님이 우리와 지금도 함께 계시기에 우리의 일상 속에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바울 그리스도의 사도’ 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 이제 2차 투옥되어서 마지막 참수형을 기다리고 있을 때예요. 당시 로마에는 네로 황제가 로마 대화재의 원인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다 뒤집어씌우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다 잡아가지고 길의 횃불 등처럼 그들을 태워서 죽이기도 하고 또 경기장에서 사자에게 찢겨 죽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남은 그리스도인들은 숨어 지내면서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죠. 또 한편으로는 어린아이들까지 희생되는 모습을 보면서 분노에 차서 이대로 있을 수 없다. 이렇게 저들이 우리의 어린아이까지 이렇게 살해하고 고통스럽게 하는데 우린 더 이상 이대로 있으면 안 된다. 칼을 들고 일어나자. 일단 우리의 지도자인 바울부터 구해내자 하고 젊은 청년들이 일어나요. 그 소식을 들은 누가가 먼저 바울에게 찾아갑니다.
그 사도행전 지은 누가가, 누가가 가서 바울에게 이 소식을 전하죠. 그리고 누가도 동조합니다. 왜냐하면 그 모습을 봤으니까요. 그때 바울이 그 얘기를 듣다가 이렇게 반응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계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린도전서 14:4-7.
4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저한테 이렇게 얘기해 주시는 것 같았어요. 영화 보는 중이었는데 아들아, ‘사랑은 할 수 없을 때 하는 것이 사랑이란다. 사랑은 할 수 없을 때 사랑하는 거야. 아버지께서 아끼지 않고 나를 내어주실 때처럼, 또 내가 너를 위해 나를 내어줄 때처럼 사랑할 수 없을 때 하는 것이 사랑이란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랑으로 모든 것을 내어주실 때 사랑할 수 없는 이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사랑받을 자격조차 없지만, 사랑으로 자신의 무한함을 내어주시고, 자신의 삶을 내어주시고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셨습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살리신 것 아닙니까? 그 사랑이 있기에 우리가 오늘도 이 자리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그 보좌 앞에 나아와서 예배드릴 수 있는 것 아닌가요? 그렇다면 그 사랑으로 내어주신 은혜를 받은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요? 우리도 예수님의 이 사랑으로 우리 자신을 내어줘야 될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내일 아니에요. 지금입니다. 교회 다닌다고 하면 꼰대처럼 쳐다보는 회사 분위기, 복음을 전하는 것은 개인의 자율성을 존중해 주지 않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우리의 이웃과 동료들, 전도자에게 너나 잘하라고 얘기하는 이 시대에, 우리가 해야 될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 이리저리 흔들리고 또 시시각각 바뀌는 그런 가짜 사랑 말고 진짜 사랑을 해야 될 때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세상은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상에 엄청난 성공을 거둬서 봐. 나 성공했어. 이러니까 예수님 대단하지 아니에요. 이 모습을 통해서 예수님의 제자라는 걸 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 적이 없어요. 너희가 서로 사랑할 때, 너희가 서로 사랑할 때, 비로소 너희가 내 제자인 것을 알리라.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될 때입니다. 그런데 훈련 반 안에서조차 사랑하지 못하면 어떡하죠? 다락방 안에서조차 사랑하지 못하고 시계하고 질투하면 어떡하죠? 한 공동체 안에서 서로 미워하고, 큰소리 내고,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저떳 하고 정죄하면 예수님의 제자라는 걸 알 수 있을까요? 사랑할 수 없는 나 같은 존재를 위해 사랑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라면 예수님의 제자라면요. 이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지 말아야 됩니다. 누군가는 그럴 수도 있어요. 아니 사랑만으로 정말 다 됩니까? 안 될 때도 있어요. 그런데요. 결국 사랑은 안 되는 것도 극복할 힘을 줍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 아닙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사랑해도 결국 중요할 때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던 제자들, 예수님의 사랑이 실패한 것 같죠.
하지만 결국 이 끝없는 사랑,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이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이 그 도망간 제자들을 이제는 이웃을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는 사랑의 전달자로 만든 것 아닙니까? 우리 다시 예수님께서 내어주신 그 사랑으로 돌아갑시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 밖에 안 됩니다. 예언도 패하고요. 방언도 그쳐요. 하지만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내어주신 예수님을 담기 위해 오늘도 우리 자신을 용서하고 사랑하고, 우리 가족을 용서하고 사랑하고, 우리 다락방 순장님과 선원들을 용서하고 사랑하고, 우리 제자 반 사역반 지체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정말 우리 사랑의 교회 공동체 서로 서로가 용납하고 사랑하는 이번 2024년 봄 학기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요약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우리에게 아끼지 않으시고 아들을 내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신 예수님 따라 우리도 사랑하기를 원해야 한다. 사랑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이 시대에 우리 사랑의 교회 모든 지체들이 서로를 용납하고, 이해하며 품어주고, 섬겨주는 사랑의 능력을 회복하여, 각자의 삶의 현장마다 사랑의 등불이 밝혀져 어두운 현실을 비추는 예수님의 등불이 되어야 한다.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님처럼 사랑을 내어주어야 한다.
-우리를 위해 자신의 무한함을 사랑을 내어주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유한한 사랑이 하나님과 이웃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예님의 온전한 사랑으로 고침 받고, 우리를 위해 자신의 삶을 사랑으로 내어주신 예수님의 제자도를 본받아 가정과 일터, 훈련반과 다락방에서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며 끝까지 서로 사랑하는 봄 학기를 맞이해야 한다. 또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뜨거운 심장이 사랑의 교회가 복음으로 요동쳐서 ‘2033-50 비전’을 이루는 생명의 마중물로 사용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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