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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2월 29일)
제목: "사랑으로 내어주다"
말씀: 로마서 8:32
찬양인도: 쉐키나(유재원 부목사님)
사회: 강건우 부목사님
 
설교자: 구성찬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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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8:32,
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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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이 시작되고 나서 벌써 2월에 막바지입니다. 그런데 올해는 뭔가 좀 다른 게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게 뭘까? 라고 고민하면서 생각하다 보니까, ‘예수님은 누구신가?’ 설교 시리즈를 통해서 온 교회 영 가족들이 함께 한 해를 시작하면서부터 예수님에 대해서 계속 묵상하고 생각하고 또 그 예수님 담고자 하는 열심과 열망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 우리가 살아가면서 참 인생에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도 있고 또 오늘 하루도 지나오시면서 수많은 생각들이 우리를 스쳐 지나가지만 그래도 ‘예수님 생각하는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라고 고백하는 분들이 예수님의 제자 아니겠습니까?
 
네, 이 자리에는 다 예수님의 제자들만 계신 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사역 훈련의 꽃과 같은 본문이죠. 로마서 8장입니다. 로마서 8장에서도 예수님에 대해 더욱 묵상하다 보니까 이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더라고요.
 
오늘 본문 8장 31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오. 라며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고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이렇게 위해주고 계신가?
 
*로마서 8:31,
31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오늘 본문 32절에 이 표현이 저는 마음에 많이 와 닿았습니다.
 
*로마서 8:32,
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시는 이가라는 표현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위해주시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해 내어주심으로 이렇게 말씀합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내어주다. 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가 참 많이 여러 군데 쓰이는데요. 그중에서 몇 구절만 살펴보면 가장 먼저 창세기 14장에서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이렇게 전투를 통해서 구해서 돌아왔을 때, 살렘 왕이자 제사장인 멜기세댁을 만납니다. 그 멜기세댁을 만났을 때 내용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얻은 것에서 10분의 1을 멜기세댁에게 주었더라.
 
*창세기 14:17,
20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저기에서 주었더라. 라는 표현이 그 단어가 내어주다. 와 같은 단어입니다. 신약에서는 마태복음 5장 25절에서 예수님이 쓰신 단어예요.
 
*마태복음 5:25,
25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주어 재판관이나 옥리에게 죄인의 생사여탈권을 이렇게 내어줄 때 이 단어가 쓰였고요. 또 마태복음 10장 4절에는,
 
*마태복음 10:4,
4 가나나인 시몬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자라.
-예수님을 팔았다라고 할 때, 이 단어가 ‘내어주다’.와 같은 단어입니다. 전체적으로 이렇게 이 단어가 사용된 의미를 봤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것은 그냥 단순히 내주셨다 이런 의미가 아니더라고요. 하나님께서는요. 아들을 십자가 화목제물로 삼으셔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아들을 마치 헌물로 드리듯 드리신 거고요. 천지의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피조물의 재판관에게 자신의 아들의 판결 권을 내어주듯이 한 것이었고요. 또 마치 팔아서 소유권을 넘겨주듯이 완전한 사랑으로 우리에게 아들을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자격이 되어서 그렇게 하신 걸까요? 우리는 아무 자격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절대적인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잘 알고 있으실 본문일 텐데 같이 읽겠습니다.
 
*요한복음 3:16,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 예수님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셨습니다. 저는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겼습니다. 무슨 질문이냐면 그렇다면 내어줌을 당하신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우리에게 무엇을 주신 걸까라는 부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끼지 않고 아들을 사랑으로 내어주셨다는 로마서 8장 32절의 내용이 이제는 그 아들을 내어주셨을 때, 그 아들이 실제적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무엇을 내어주셨는가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될 때 이 본문도 함께 더 깊어져 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예수님은 그냥 다 우리에게 예수님이 다 주셨습니다. 라고 고백하기 이전에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아들을 내어주신 사랑과 그 사랑에 담긴 의미를 깊이 깨닫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사랑으로 내어주실 때 이스라엘의 상황이 어땠는지를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말라기 선지자 이후에, 400년 동안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셨어요. 그것을 우리는 400년 침묵이라고 부릅니다. 그 시기에 이스라엘 내부에서는 우리 스스로 힘을 키워서 다윗 왕조를 재건하자 라는 무력적인 운동이 일어나서 소위 마카비 왕조라고 하는 그런 왕조가 생겨나기도 했어요.
 
그런데 무력으로 세운 왕조는 또 다른 더 강한 무력에 의해서 무너졌죠. 그러는 사이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 그룹과 서기관을 비롯해 지도자들은 이 율법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심정은 다 잊어버리고, 오히려 그 능력이 되고, 생명이 되어야 될 말씀이 족쇠가 되게 만들었고, 오히려 화석화되어버려서 더 이상 능력이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사회적으로도 점차 로마의 지배권이 강화되기 시작합니다. 특히 로마를 대신해서 세금을 수탈하는 세리들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도 좀 팍팍해지고 그들의 삶도 같이 팍팍해집니다. 수탈(收奪)과 침탈(侵奪)의 역사가 시작된 거죠. 그러니까 그 시대는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내어주기보다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내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움켜쥐는 시대였고요. 그 어떤 것도 밝고 소망이 있는 그런 모습보다는 자꾸만 점점 더 어두워진 그러한 시대였습니다. 아무것도 내어주지 않으려는 시대 바로 그런 시대에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내어주시고, 아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사랑으로 우리에게 무엇을 내어주셨는가? 우리 첫 번째 한번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1) 무한함을 내어주셨다: 성육신.
 
*요한복음 1:1,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이 말씀이 누구십니까? 이 말씀이 누구십니까? 네 예수님을 얘기하는 거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 가장 연약한 아기로 이 땅에 오신 거죠. 우리 이 구절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2:7,
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결핍된 마구간에서 누가 보살펴주지 않으면 생존조차 할 수 없는 한계 투성이인 아기로 오신 것은요. 자신의 무한함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시고, 자신은 그 유한함 속에 그 한계 속에 자발적으로 갇히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한계가 없으세요. 하지만 인간의 몸이라는 배고플 때 먹어야 되고 피곤하면 쉬어야 되고 밤이 되면 자야 되는 그 유한함 속으로 오신 것이죠. 말씀을 통해 살펴보면요. 4일을 밤낮으로 금식한 후에 줄이신지라 배고프셨고요.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오래 걷다 보니까 피곤해서 그냥 바닥에 철퍼덕 앉기도 하셨습니다. 그냥 이런 표현만 보면 오늘 우리의 모습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요.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그분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철저하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공간,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간이라는 한계 속으로 걸어 들어오신 것입니다. 자신의 무한함을 사랑으로 우리에게 내어주시며 기꺼이 우리를 위해 유한함 속으로 들어오신 것이죠. 그리고 30여 년의 인생을 평범한 한 사람으로 사셨습니다. 요셉이라는 목수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가업을 따라 목수 일을 하셨고요. 나사렛이라는 별로 유력하지 않은 작은 동네에서 이웃과 함께 가족과 함께 사셨습니다.
 
물론 언제든지 필요하면 12군단도 더 되는 천사를 부르실 수 있으셨겠지만, 우리에게 사랑으로 내어주신 근원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 인간의 유한함을 참고 버티고 견뎌내셨습니다. 이 표현이 예수님께 좀 무례한 표현일까요? 저는 말씀을 읽을수록 예수님께서 참 많이 힘드셨겠구나! 참 이 땅에서 이 땅의 모습을 보며 참 많이 가슴 아파하셨겠구나. 그래도 자신을 사랑하고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을 보면서 마음에 많은 위로를 받으셨겠구나!
 
오늘도 수요 저녁 기도회에 피곤한 가운데서도 그 지친 몸을 이끌고 달려 나온 한 분 한 분의 마음도 누구보다 깊이 공감하시고 잘 알고 계시겠구나! 자꾸 이런 묵상이 되더라고요. 그리고 이 구절이 새롭게 보였어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태복음 26:41,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은요. 우리 육신의 약함을 누구보다 잘 아시고 깊이 공감하십니다. 이런 약함 속에서도 우리가 예수님을 주인으로, 주인으로 모시는 삶을 계속해서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음은 자신의 무한함을 내어주신, 그리고 스스로 유한함을 옷 입으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내어주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진리가 있는 거죠. 우리는 유한하지만, 우리는 연약하지만 무한함을 내어주신 예수님을 믿기에 이제는 예수님의 무한함이 나의 유한함을 이끌어 가신다는 거야. 이게 무슨 말이냐면 나는 우리는 이 땅에서 발을 딛고 일상을 하루하루 살아가지만 이제는 그 무한함을 내어주셨던 예수님께서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마음껏 무한함을 발휘하시는 시대예요. 예수님께서는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 이런 일상을 살아가는 유한한 우리의 삶을 견인해 가세요. 이게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함이 우리의 유한함을 이끌어 가신다는 표현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얘기해요.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우리의 유한함 가운데 찾아오셔서 그 인도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도록 우리를 끌고 가신다는 겁니다. 그것은 그분이 우리의 유한함을 겪어보셨기에 누구보다 이 무한함이 어떻게 필요한지 아시기에, 오늘도 유한한 우리의 삶의 현장에 찾아오셔서 우리를 견인해가고 계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은요. 우리의 유한함을 깊이 공감하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무한함으로 우리를 초대하신 삶이고요. 또 세상 속에 살아가지만 세상에는 속하지 않은 무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 사는 삶입니다. 말이 좀 어렵죠.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은 우리의 유한함을 깊이 공감하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무한함으로 우리를 초대하신 삶이요. 또 세상 속에 살아가지만 세상에 속하지는 않은 무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 사는 삶이 바로 우리 제자의 삶입니다. 그렇게 말씀대로 사는 것을 손해 볼까 봐, 또 괜히 말씀대로 했다가 좀 무한함을 당할까 봐 주저하지 않으셔도 돼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우리를 무한한 그 사랑으로 지금도 인도해 가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무한함을 내어주신 첫 번째 내어주심에 이어 두 번째로 예수님은 사랑으로 무엇을 우리에게 내어주셨을까요?
 
2) 삶을 내어주셨다: 제자도.
 
우리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삶을 내어주셨다. 제자도’, 예수님은 유한한 인간으로 오셔서 베일에 싸인 채 지내시다가 십자가에 달리기 하루 전에 나타나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다 이루었다 하시고 그냥 3일 후에 부활하신 그런 사역을 하시지 않았어요.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필수 행위만을 하고자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예수님은요. 우리에게 자신의 삶을 내어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삶 자체가 오늘 우리가 따르고 있는 예수님의 온전한 제자도예요. 예수님은 특별히 공생회가 시작되고 난 후에 제자들과 늘 함께 지내셨는데, 제가 다섯 가지 정도의 구절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1,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마태복음 9:19,
19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
 
*마가복음 3:7,
7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
 
*마가복음 4:34,
34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누가복음 24:30,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이 구절들은 그냥 함께 걷고 함께 먹고 함께 배도 타고 함께 대화하고 또 가르치시고 또 함께 주무셨던 제자들에게 자신의 삶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365일, 24시간 다 자신을 그냥 열어서 제자들한테 보여주시면서 그 삶을 통해 제자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지를 친히 가르쳐 주신 겁니다. 이처럼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내어 주신 삶은요. 그 삶 자체가 하나의 강력한 말씀이요. 메시지가 되어서 제자들의 시선을 바꾸고, 그들의 가치관을 바꾸고, 그들이 추구하는 삶을 바꿔놓고, 그들의 행동까지 바꾸고, 결국 그들의 체질까지 바꿔버리시는 강력한 은혜의 시간이었어요. 좀 당연한 얘기 같습니까?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눈에 보이는 존재로 나타나서 어떻게 사는지를 친히 삶으로 보여주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렇구나!. 대단하시네!. 어떻게 저렇게 하셨을까? 이야 난 좀 아닌 듯 이렇게 우리가 스스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그러한 삶 자체가 우리에게 주시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우리의 눈을 열어 보여주시는 가장 큰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이 메시지는 그냥 듣고 흘려보내는 메시지가 아니라, 우리의 행동 지침이고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된다는 것을 친히 그분이 안 하셔도 되는 그분이 보여주신 거예요.
 
목사님 말씀은 알겠는데, 삶으로 실천하는 게 잘 안 돼요. 라고 우리 사역반 집사님들이 얘기하시는 것 같아요. 그러면 얘기하죠. 네 저도 잘 안 돼요.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대로 끝까지 살고자 몸부림 쳐야 합니다. 왜 그렇죠? 예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삶을 우리에게 내어주시며, 얘들아 ‘내 사랑하는 제자들아 아무리 힘들어도 너희도 이렇게 한번 살아봐. 십자가를 향해 걷는 나의 이 땅에서의 생애가 내겐 고통이 아니라 축복이었단다. 왜냐하면 이런 나의 모습을 2천 년이 지나도 본받아 따라 살고자 하는 너희가 있기 때문이야.’
 
사랑하는 예수님의 제자 여러분,
이 예수님의 제자의 길 정말 잘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요. 사랑으로 삶을 내어주시면서 우리가 이 길 따라가면 우리가 걸어가는 이 길 끝에서 두 팔 벌려 우리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계세요. 그런데 우리 눈에는 그 모습이 안 보여요. 어떻게 그 길로 가야 되는지도 몰라요. 그렇게 그냥 있다가는 자꾸만 넓은 길, 큰 길로만 찾아갈 것 같으니까 예수님이 친히 이 땅에 오셔서 그 길로 가면 안 돼. 너희가 가야 될 길이 바로 이 길이야. 이 길로 와야만 이 길 끝에서 나를 만날 수 있단다. 예수님께서 친히 삶을 내어주시며 우리에게 이 길을 알려주신 거예요. 닫혀 있는 우리의 눈을 열어 이 좁은 길, 우리가 걸어가야 될 십자가의 길을 예수님께서는 친히 삶을 내어주시며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사랑으로 내어주신 예수님의 마지막 내어주심. 사실 로마서 8장 32절에 아끼지 않고 내어주셨다의 의미는 바로 이 내용일 겁니다. 우리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3) 생명을 내어주셨다: 십자가.
 
우리에게 무한함을 내어주시고 또 자신의 삶을 내어주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람으로 내어주신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자신의 생명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0:45,
45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아담의 원죄 사로잡힌 인간은 할 수 없는 영역이에요. 모든 사람은 내가 저 사람을 대신해서 죽겠 하고 죽어도 자신의 죗값 때문에 죽는 것이지, 그 사람의 죄를 대신할 수는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아무 흠 없는 어린 양처럼 십자가에서 재물이 되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십자가 하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당시 로마의 가장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형벌이 바로 이 십자가였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오,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예수님께서 생명을 내어주신 십자가형은요. 같은 유대인이나 또 이방인이 봤을 때도 거리끼고 미련한 것으로 보였어요. 하지만 거리끼고 미련한 그 방법을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바치는 제단으로 삼으셨던 거예요. 이 비참한 형태인 십자가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제단이 되어서 화목 제물 되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셔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고 영원한 형벌에서 구원하여 주신 생명의 십자가요, 소망의 십자가요, 능력의 십자가가 된 줄 믿습니다.
 
창조주께서 피조물을 살리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그 자리가 된 것이죠. 우리는 내가 위험에 처했을 때 나를 살리고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 있어도 그 사람에게 너무 평생 감사하고 그 사람을 늘 추모하면서 우리는 살아갈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나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다면 우리는 그분을 생각하며 어떻게 살아야 될까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무게, 십자가의 고통, 십자가의 희생, 십자가에서 하나님과의 단절, 그런데 예수님이 그 짐을 져주시니까 예수님의 제자인 나에게는 그 십자가의 무게가 생명의 무게가 되고, 생명의 감격이 되고, 생명의 소망이 되고 그 생명의 영원함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세 가지 우리가 함께 살펴봤던 이 세 가지 자신의 무한함, 자신의 삶, 자신의 생명까지 모든 것을 사랑으로 내어주셨는데 그러면 그렇게 되고 자연스럽게 마무리가 된 걸까요? 우리에게 무한함을 내어주시고 유한함을 입으신 그 예수님의 사랑으로 인해서 지금까지 셀 수 없는 많은 그 수많은 유한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주요, 주인으로 모신 무한한 생명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삶을 사랑으로 내어주셨기에 지난 2천년 동안 수많은 제자들이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고, 지금 2024년에도 제자 훈련 49기, 사역 훈련, 36기생들이 열심으로 예수님을 그 제자들을 따라 삶으로 보여주신 그 제자들을 따라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이 모든 특권적인 삶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사랑으로 내어주셨기에 가능한 거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기에 그 희생을 통해 부활하는 역동하는 생명이 이제는 우리의 삶에서 시작된 거예요. 하나님만이 가지신 그 부활하는 역동하는 생명력이 이제는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부활의 생명이 되어서 우리의 삶을 인도해 가시는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으로 내어주는 것은 겉보기에는 모든 것을 다 줘버리는 나는 손해 보고 희생만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이런 거는 예수님만 하는 거예요. 라고 특별한 영역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 다시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생명의 역사는 예수님이 우리와 지금도 함께 계시기에 우리의 일상 속에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바울 그리스도의 사도’ 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 이제 2차 투옥되어서 마지막 참수형을 기다리고 있을 때예요. 당시 로마에는 네로 황제가 로마 대화재의 원인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다 뒤집어씌우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다 잡아가지고 길의 횃불 등처럼 그들을 태워서 죽이기도 하고 또 경기장에서 사자에게 찢겨 죽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남은 그리스도인들은 숨어 지내면서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죠. 또 한편으로는 어린아이들까지 희생되는 모습을 보면서 분노에 차서 이대로 있을 수 없다. 이렇게 저들이 우리의 어린아이까지 이렇게 살해하고 고통스럽게 하는데 우린 더 이상 이대로 있으면 안 된다. 칼을 들고 일어나자. 일단 우리의 지도자인 바울부터 구해내자 하고 젊은 청년들이 일어나요. 그 소식을 들은 누가가 먼저 바울에게 찾아갑니다.
 
그 사도행전 지은 누가가, 누가가 가서 바울에게 이 소식을 전하죠. 그리고 누가도 동조합니다. 왜냐하면 그 모습을 봤으니까요. 그때 바울이 그 얘기를 듣다가 이렇게 반응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계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린도전서 14:4-7.
4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저한테 이렇게 얘기해 주시는 것 같았어요. 영화 보는 중이었는데 아들아, ‘사랑은 할 수 없을 때 하는 것이 사랑이란다. 사랑은 할 수 없을 때 사랑하는 거야. 아버지께서 아끼지 않고 나를 내어주실 때처럼, 또 내가 너를 위해 나를 내어줄 때처럼 사랑할 수 없을 때 하는 것이 사랑이란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랑으로 모든 것을 내어주실 때 사랑할 수 없는 이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사랑받을 자격조차 없지만, 사랑으로 자신의 무한함을 내어주시고, 자신의 삶을 내어주시고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셨습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살리신 것 아닙니까? 그 사랑이 있기에 우리가 오늘도 이 자리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그 보좌 앞에 나아와서 예배드릴 수 있는 것 아닌가요? 그렇다면 그 사랑으로 내어주신 은혜를 받은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요? 우리도 예수님의 이 사랑으로 우리 자신을 내어줘야 될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내일 아니에요. 지금입니다. 교회 다닌다고 하면 꼰대처럼 쳐다보는 회사 분위기, 복음을 전하는 것은 개인의 자율성을 존중해 주지 않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우리의 이웃과 동료들, 전도자에게 너나 잘하라고 얘기하는 이 시대에, 우리가 해야 될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 이리저리 흔들리고 또 시시각각 바뀌는 그런 가짜 사랑 말고 진짜 사랑을 해야 될 때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세상은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상에 엄청난 성공을 거둬서 봐. 나 성공했어. 이러니까 예수님 대단하지 아니에요. 이 모습을 통해서 예수님의 제자라는 걸 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 적이 없어요. 너희가 서로 사랑할 때, 너희가 서로 사랑할 때, 비로소 너희가 내 제자인 것을 알리라.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될 때입니다. 그런데 훈련 반 안에서조차 사랑하지 못하면 어떡하죠? 다락방 안에서조차 사랑하지 못하고 시계하고 질투하면 어떡하죠? 한 공동체 안에서 서로 미워하고, 큰소리 내고,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저떳 하고 정죄하면 예수님의 제자라는 걸 알 수 있을까요? 사랑할 수 없는 나 같은 존재를 위해 사랑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라면 예수님의 제자라면요. 이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지 말아야 됩니다. 누군가는 그럴 수도 있어요. 아니 사랑만으로 정말 다 됩니까? 안 될 때도 있어요. 그런데요. 결국 사랑은 안 되는 것도 극복할 힘을 줍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 아닙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사랑해도 결국 중요할 때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던 제자들, 예수님의 사랑이 실패한 것 같죠.
 
하지만 결국 이 끝없는 사랑,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이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이 그 도망간 제자들을 이제는 이웃을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는 사랑의 전달자로 만든 것 아닙니까? 우리 다시 예수님께서 내어주신 그 사랑으로 돌아갑시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 밖에 안 됩니다. 예언도 패하고요. 방언도 그쳐요. 하지만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내어주신 예수님을 담기 위해 오늘도 우리 자신을 용서하고 사랑하고, 우리 가족을 용서하고 사랑하고, 우리 다락방 순장님과 선원들을 용서하고 사랑하고, 우리 제자 반 사역반 지체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정말 우리 사랑의 교회 공동체 서로 서로가 용납하고 사랑하는 이번 2024년 봄 학기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요약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우리에게 아끼지 않으시고 아들을 내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신 예수님 따라 우리도 사랑하기를 원해야 한다. 사랑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이 시대에 우리 사랑의 교회 모든 지체들이 서로를 용납하고, 이해하며 품어주고, 섬겨주는 사랑의 능력을 회복하여, 각자의 삶의 현장마다 사랑의 등불이 밝혀져 어두운 현실을 비추는 예수님의 등불이 되어야 한다.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님처럼 사랑을 내어주어야 한다.
-우리를 위해 자신의 무한함을 사랑을 내어주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유한한 사랑이 하나님과 이웃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예님의 온전한 사랑으로 고침 받고, 우리를 위해 자신의 삶을 사랑으로 내어주신 예수님의 제자도를 본받아 가정과 일터, 훈련반과 다락방에서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며 끝까지 서로 사랑하는 봄 학기를 맞이해야 한다. 또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뜨거운 심장이 사랑의 교회가 복음으로 요동쳐서 ‘2033-50 비전’을 이루는 생명의 마중물로 사용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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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02월 14일)
제목: "동행의 발견"
말씀: 출애굽기 33:6~11
찬양인도: 쉐키나

설교자: 백요셉 부목사님
ㅡㅡㅡㅡㅡ

*출애굽기 33:6~11,
6 이스라엘 자손이 호렙 산에서부터 그들의 장신구를 떼어 내니라.
7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8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 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9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10 모든 백성이 회막 문에 구름 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예배하며.
11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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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오늘 수요 저녁 기도회에 오신 영 가족들을 주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주님만이 허락해 주실 수 있는 풍성한 은혜가 오늘 저희들에게 임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저희들에게 주신 말씀은 출애굽기 33장 6절에서 11절의 말씀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저희들에게 주신 말씀은 출애굽기 33장 6절에서 11절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한 줄씩 교독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말씀만이 저희들의 힘과 능력이 되심을 믿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평생 기억에 남는 장면들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제게도 그런 장면들이 있는데요. 그 장면은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먼저는 아버지의 눈물입니다. 저희 아버지는 저희 친할머니가 돌아가실 때에도 제게 눈물을 보이신 적이 없습니다. 근데 제가 홀로 미국의 유학길을 떠날 때 공항에서 아버지께서 안아주시면서 따뜻한 뜨거운 눈물을 흘리신 장면이 제 인생의 기억에 남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장면을 이야기하자면 저도 제 자녀가 있기 때문에 제 자녀가 태어난 날을 기억합니다. 2012년 6월 16일인데요. 그 자녀가 태어났을 때, 그 얼굴을 처음 보고 감격했던 순간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근데 그 자녀가 딸인데 처음 대면했을 때 그 모습을 보면서 저희 아버지 얼굴이 이렇게 겹치는 경험을 해서 참 묘하다. 아니 딸인데 어떻게 아버지 얼굴이 있을까라는 묘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딸은 자라나서 지금 머리만 긴 백요셉으로 자라는 그래서 제가 항상 주님 앞에 기도하는 기도의 제목은 주님 끝까지 지켜주시옵소서. 하나님 책임져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곤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에게도 평생 기억에 남는 장면들 그리고 추억들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본문 출애굽기 33장의 배경이 되는 32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런 평생 기억에 남는 시간이 그런 사건을 갖게 됩니다. 그런 사건은 뭐냐면 노아의 홍수 이후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 땅에서 진멸하시겠다. 라고 말씀하신 사건입니다. 이 장면을 출애굽기 32장 10절에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출애굽기 32:10,
10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진노하시면서 진멸하시겠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든 최초의 우상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을 한 이후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난한 땅에 이르기까지 40년 동안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서 그들을 인도해 내어주십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 오늘의 본문 33장이지만 32장에 보면,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 하나님 앞에 대면하여 십계명을 받는 이 장면이 나오고, 그 장면에서 모세가 더디 내려옴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론 앞에 나아가 자신들의 신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이에 아론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금을 녹여 송아지를 만든 이후에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들의 신이라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 우상을 이 금송아지를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기 32장 6절에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출애굽기 32:6,
6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면 금송아지를 자신의 신이라고 생각하고 그 앞에서 예배하고 경배하고 뛰놀고 기뻐 춤췄다.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든 최초의 우상이며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에는 딱 두 가지 종류의 신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내가 만든 신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나를 만든 신입니다. 이 세상에는 이 두 가지 신 밖에 없다. 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내가 만들어서 신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밖에 없다. 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버리고 내가 만든 신을 하나님이라고 모시고 경배하고 그 앞에서 뛰어놀았다. 라는 겁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 모습을 보시고 진노하시고 이들을 진멸하겠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상을 만든 이 날에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셨습니다. 그 날에도 구름 기둥으로 불기둥으로 만나와 외출하기로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하나님과 동행하셨다. 라는 겁니다. 하지만 이 백성들은 그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그 은혜를 깨닫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
한번 그렇게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 구름기둥, 불기둥 만나와 메추라기를 경험했을 때 어땠을까요? 아마 굉장히 감격스러웠을 겁니다. 굉장히 은혜로웠고 너무나도 행복했고 그 하나님의 은혜에 찬양과 경배를 돌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열흘이 지나고, 1년이 지나고 그 은혜가 익숙했을 때, 익숙해졌을 때에 이제는 슬슬 그 은혜가, 은혜가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이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보다는 익숙해졌기 때문에 내가 바라고 원하는 삶을 소망했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욕망을 통해서 모세가 더딘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아론에게 나아가 나의 신, 내가 원하는 신, 내가 원하고 바라는 삶을 인도할 신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라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도 한번 잘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았을까요? 저는 믿었다라고 생각합니다. 근데 잘못 믿은 겁니다.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어야 되지만, 내가 만든 그 우상을 신으로 생각하고 믿었다. 라는 겁니다. 근데 우리들의 삶 속에서도 내가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 바라고, 주님과 동행하지만, 그리고 열심을 내서 훈련도 받고 오늘 이 자리에도 수요 저녁 기도회로 나오지만 우리들의 열심과 우리들의 믿음이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내가 만든 신을, 즉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을 인도해낼 신을 믿고 있는지, 아니면 나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있는지 우리가 한번 돌아보기를 소원합니다. 간절히 바라고 소원하기는 내가 만든 신이 아니라 나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따르는 저희 모두가 되길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진노와 진멸의 위기 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모세의 중보기도 때문이었습니다. 출애굽기 32장 11절과 11절에서 14절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제가 대신 읽겠습니다.

*출애굽기 32:11-14,
11 모세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12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13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주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14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모세의 기도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하나님께 그런 기도를 한 겁니다. ‘하나님 큰 권능과 하나님의 큰 능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해내셨는데, 하나님 여기서 이스라엘을 진멸하시면 애국 사람들이 말하기를,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산에서 이 사람들을 억지로 끌어내서 악한 의도로 죽이시려고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시키셨다라고 하실 터인데, 하나님 그 진노를 그치셔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하나님 야곱에게 하셨던 그 약속을 지켜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 라는 겁니다. 이 모세의 기도가 세상을 바꿨던 사람을 살린 역사적인 기도임을 여러분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변에도 하나님의 진노로 죽어야 마땅한 죽을 수밖에 없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세가 했던 기도처럼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나님의 그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 나라와 영광을 위해 그 주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오늘의 기도를 들으실 줄 믿습니다. 그렇게 주변을 살리고 주변을 소생시킬 수 있는 기도의 용사들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로 하나님의 진노를 그치셨지만 조금은 이상한 표현을 33장 본문에서 말씀하시는데 저와 여러분을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33절 1절에서 3절 말씀입니다.

*출애굽기 33:1-3,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를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네 자손에게 주기로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
2 내가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3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말이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께서 진노를 그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려주시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이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으로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겠다. 라는 겁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셔서 그들을 방해하는 모든 대적들을 물리쳐 주시겠다. 라고 이야기하시는 겁니다. 내가 약속한 걸 지키겠다. 라고 말씀하시되 나는 너희와 함께 가지 않겠다. 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사랑 여러분,
이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읽으시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말을 우리들의 삶 속에 한번 적용해 보자면 이런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약속하신 것들을 내가 이루어주겠다. 라는 겁니다. 네가 원하는 거, 바라는 거, 그동안 내가 약속하고 함께했던 그런 것들, 내가 이루어주겠다. 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서 방해하고 적대하는 것들 다 깨끗하게 물리쳐 주시겠다. 라는 겁니다. 하지만 나는 너와 함께 가지는 않겠다. 라는 겁니다. 여러분, 언뜻 보면 굉장히 멋진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단 내가 만든 신을 섬길 때의 멋진 표현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내가 만든 신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목적의 수단으로 하나님을 믿는 삶을 산다면 이 말씀은 정말로 훌륭한 말씀입니다. 왜냐, 내가 그동안 이루고자 했던 거, 바라고자 했던 거, 소원했던 것을 하나님이 사자를 통해서 단번에 그 길을 평탄하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을 해주시는데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서 저희가 아까 서두에서도 계속 나눴던 부분처럼, 우리들의 믿음의 주체가 누구냐, 라는 질문을 하고 계시는 겁니다. 만약에 우리들의 믿음의 대상이 나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 동행하지 않는 삶, 하나님이 없는 삶 아무리 성공하더라도 아무리 잘 되더라도 하나님이 없는 삶은 복된 삶이 아님을 우리가 기억하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된다. 라는 겁니다. 소원하기는 하나님께서 이 질문에 우리들도 지혜롭고 복된 선택을 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소원합니다. 내 삶의 운전대를 단순히 내가 운전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시고 지금도 나를 사랑하시며 나를 통해서 반드시 역사하실 그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에서는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을 알려주시고 계십니다. 첫 번째는 장신구를 떼어라.라는 겁니다. 출애굽기 33장 5절과 6절을 다시 한 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I. 첫 번째는 장신구를 떼어라.

*출애굽기 33:5-6,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한 순간이라도 너희 가운데에 이르면 너희를 진멸하리니 너희는 장신구를 떼어 내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 정하겠노라 하셨음이라.
6 이스라엘 자손이 호렙 산에서부터 그들의 장신구를 떼어 내니라.
-아멘! 여러분, 장신구는 어떤 역할을 합니까? 여러분 장신구는 먼저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돋보이게 하고 나를 높아지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여러분, 내가 장신구를 착용했는데 여러분 다른 사람이 높아지거나 다른 사람이 돋보이는 경우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여러분, 장신구는 내가 높아지고, 내가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내의 연약함이 있거나 나의 부족함을 이 장신구로 커버하고 또 내가 어느 부분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그래도 멀끔하고 높아지는 역할을 하게 되죠? 그리고 또 이 장신구는 어떤 역할을 합니까? 내 마음에 만족감을 주게 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그동안은 내가 다른 어떠한 것들에 두려움이 있거나, 내 자존감이 낮아진 상태에서 이 장신구를 통해서 내 자신에게 만족감을 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라는 겁니다.

여러분,
이러한 기능들을 볼 때에는 장신구는 굉장히 좋은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근데 하나님께서는 오늘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 첫 번째 비결을 장신구를 떼어내라. 라고 말씀하셨다. 라는 겁니다. 근데 여러분 그거 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런 도전을 하고 계시는 겁니다. 이제는 내가 갖고 있는 이 도구를 통해서 나를 높이고 나를 돋보이게 하고 나에게 만족을 주는 삶을 살았다. 라면 이제는 하나님 앞에 나의 장신구를 내려놓고 이제는 하나님께서 나를 높여주시는 삶, 이제는 하나님께서 나를 돋보게 해 주시는 삶, 이제는 하나님께서 나의 만족이 되어주시는 삶을 살기를 원하고 계신다.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속에서 우리의 장신구가 무엇입니까? 여러분, 비본질적인 것들은 무엇입니까? 여러분 그게 성공입니까? 돈입니까? 가족입니까? 건강입니까? 우리들의 지식입니까? 아름다움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 동일한 도전을 하고 계십니다. 너희들의 장신구는 무엇이니? 이제는 그 장신구를 내려놓고 ‘내가 너희들을 높이는 주체가 되어줄게. 내가 너희들을 돋보이게 하고 내 손에 붙들려 귀하게 사용해 줄게, 이제는 내가 너의 만족이 되어줄게, 내가 너의 힘이 되어줄게’ 라고 도전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이 도전 앞에 우리들의 장신구를 떼어내어 주님과 동행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 두 번째는 회막으로 나아가라입니다. 여러분 출애굽기 33장 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II. 두 번째는 회막으로 나아가라.

*출애굽기 33:7,
7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아멘! 여러분, 하나님과 동행하는 두 번째 비결은 회 막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여러분, 이 회막의 위치가 굉장히 중요한데 오늘의 본문 33장 7절에는 이 회막을 치는 장소가 진 바깥에 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세상과 분리하여 그리고 죄와 분리하여 회막을 치라고 명령하고 계시는 겁니다. 이 회막은 하나님과 만나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 회막에서 세상과 분리하는 곳, 죄와 분리된 곳, 이곳에서 하나님과 만나자고 도전하고 계시는 겁니다. 여러분, 이 회막을 요즘 말로 하면 골방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저는 물론 이 골방이라고 내포된 의미는 비좁고 막혀 있는 그런 공간적인 의미도 있지만 저는 이 골방을 아까 얘기한 것처럼 세상과 단절되어 하나님과 독대하는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 훈련생들과 제자들에게 꼭 골방을 만들라고 골방을 사수하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나서 제가 이 골방에 대해서 물어봅니다. 혹시 고방을 정하셨어요? 라고 물어보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동하는 버스가 제 골방입니다. 이동하는 택시가 골방입니다. 지하철이 골방입니다. 운전하는 이 차 안이 제 골방이라’고 말을 합니다. 근데 제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만약에 버스가 급정거해서 다른 사람의 가방으로 내 머리를 친다면 그게 골방이 될 수 있을까? 이동하는 지하철에서 사람들이 꽉꽉 차 있는데 내가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그곳이 정말 골방이 될 수 있을까? 내가 운전하고 있는데 갑자기 다른 차가 새치기를 해오거나 갑자기 급정거를 해서 차가 박을 것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면 그곳이 정말 골방이 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물론 여러분,
이동하면서 하나님 생각을 안 하시는 것보다는 하시는 게 낫지만 여러분, 골방은 하나님과 독대하는 곳 아까 전에 읽었던 본문처럼 회막은 짐과 바깥에 짐 바깥에 구분되어서 만든 장소, 이루는 장소, 하나님과 독대하는 장소라고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들의 삶에도 그런 장소가 있는지를 질문하고 또 도전 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연애를 해보셨습니까? 저만 해본 것 같은 것처럼 이런 반응은 저는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겠죠. 여러분 연애를 하면은 그런 장소들이 생기지 않으십니까? 추억의 장소 그리고 그 장소에서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 장소에서 이런저런 대화도 나누고 사랑이 싹트고 사랑이 싹 트다가 결혼도 결심하고 프로 포즈도 하고 뭐 하여튼 그렇습니다. 여러분, 근데 꼭 저만 연애한 것처럼 이런 마음은 참 저는 연애하고 결혼했습니다. 여러분, 아주 까마득하신 분들은 회개하시고 연애의 감성을 다시

여러분,
골방, 하나님과의 골방, 여러분 제가 부탁드리는 이유는 그 장소에서 하나님과 울고, 불고, 정말 가슴을 찢으며 하나님 힘들어요! 하나님 아파요! 라고 눈물을 흘리셨던 그 장소가 있으시냐고 질문하는 겁니다. 여러분 너무 기쁘고 즐겁고 행복해서 그 장소에서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 드렸던 그 장소가 있으시냐는 겁니다. 그 장소에서 하나님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고 싶어요.’ 라고 정말 부르짖으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하나님 알려달라고 외쳤던 장소가 있으시냐는 겁니다. 그 장소에만 가면 그 사람이 생각나는 것처럼 그 장소에 가기만 하면 하나님과 함께했던 추억이 깃든 그런 골방이 있으시냐고 저는 질문 드리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그거 아십니까?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능력은 다른 곳이 아니라 여러분 골방에서 시작됨을 여러분 믿으시길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 하나님의 그 능력은 골방에서 무릎 꿇는 우리들의 무릎과 눈물로 하나님은 역사하신 줄을 여러분 믿으시길 소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골방, 여러분 두 번째 하나님과 동행하는 비결은 골방, 회막으로 나아가라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는 오늘의 말씀을 마무리하며 여러분에게 도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들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신은 딱 두 종류 밖에 없는데 내가 믿고 있는 그 신은 내가 만든 신인지, 나를 창조하시고 만드신 신인지를 여러분 돌아보시길 소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내 삶의 주체가 주님이셔야 되는데 과연 나와 하나님과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나의 장신구가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 그 장신구를 떼어내라고 도전하고 계시는데, 내 마음 가운데 불편함이 있는 혹시 정말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이것들을 하나님 내려놓습니다. 하나님 이 장신구를 내려놓고 하나님이 나의 힘과 능력이 되어 주시옵소서라고 고백하는 시간 또 우리들의 골방을 통해서 하나님 그런 추억의 장소를 통해 하나님과 동행하는 평생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라고 결단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이 사는 이 땅의 삶을 보통 그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심을 받은 삶, 하나님께 보내심을 받은 삶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들 이 보내심을 받은 삶의 목적은 단 한 개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하는 삶을 사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부르심에 언제 부르실지 다 알지 못하지만, 그냥 보편적으로 80년에서 100년을 살다가 보내신 분한테 다시 가는 겁니다. 여러분 다른 거 없습니다. 보내셨으니까 보내신 곳으로 다시 가는 게 저희들의 인생입니다. 근데 오늘 이 시간에 저는 권면하고 도전하기는 여러분, 세상의 그 풍요와 여러분 세상의 성공보다, 전능하신 하나님과 동행함을 선택하셔서 그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셔서 이곳에서 보내심을 받은 이 80년에서 100년의 시간을 충성 되이 하나님과 정말 하나님의 기쁨으로 살다가 주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서 쓰임 받다가 하나님께 다시 보내신 분에게 다시 돌아갔었을 때, 하나님께 착하고 충성된 종아, 그동안 수고 많이 했다! 라고 칭찬 들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약
하나님과 동행하며 수많은 산과 골짜기를 지날 때, 내가 만든 신의 형상을 믿고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시간 회개의 영을 부어주심을 따라 나를 만드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내가 맡는 신보다 나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따를 수 있는 평생 되어야 한다. 나의 장신구 떼어내고, 나의 골방에서 주의 은혜를 사모하며, 하나님을 부르짖고 주님을 찾는 자에게 베풀 만한 은혜를 더하여 주심을 확신해야 한다. 그리하여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많은 이들에게 간증하는 평생 되어, 그렇게 인도하시고 그렇게 역사하실 주님을 기대하며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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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02월 07일)
제목: "물 위를 걸으려면 배에서 나오라"
찬양인도: 쉐키나(유재원 부목사님)
말씀: 마태복음 14:25-33
사회: 강건우 부목사님

설교자: 이윤기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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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4:25-33,
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26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27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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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자리를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놀라운 은혜가 생수의 강과 같이 성도님께 넘쳐나기를 다시 한 번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와 함께 말씀 읽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4장 25절부터 33절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마태복음 14장 25절에서 33절입니다. 제가 한 절 읽고 여러분께서 한 절 읽고 마지막 합독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저는 사랑의 교회 대학부를 섬기고 있습니다. 사역 가운데에 청년들과 많은 대화를 하게 되는데요. 우리 청년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크게 두 가지 질문을 합니다.

먼저는 “목사님, 제가 무엇을 하며 살면 좋겠습니까?”, “무엇을 공부하면 좋겠습니까?” 사실 이 질문도 굉장히 어려운데요. 그다음 질문이 더 어렵습니다. “목사님, 제가 누구와 함께 살아야 합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 계신 우리 많은 기혼 성도님께서는 주님 제가 누구와 함께 살아야 합니까? 이 질문 앞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응답대로 결혼하신 줄로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어쨌든 제가 이런 질문들을 마주할 때에 참 우리 청년들의 인생이 바다 위에 머무는 것 같다. 라는 느낌이 많이 듭니다. 바다라는 곳이 어떤 곳일까요? 물론 우리가 여름 휴가철에 마주하는 바다는 낭만적인 곳이지만 캄캄한 어두운 밤에 마주하는 바다는 굉장히 무섭습니다. 파도가 어디까지 몰아닥칠지, 그리고 이 바다가 어디가 끝인지 보이지가 않습니다. 또 만약 배를 타고 나가서 바다 위에 있을 때는 어떨까요? 요나가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었을 때 폭풍을 만났습니다. 그때 그 배에 있었던 그 수많은 선장과 선원들이 얼마나 베테랑이었습니까? 그럼에도 그들의 모든 경험과 능력은 그 바다 앞에서 무기력해질 뿐이었습니다. 이처럼 바다란 불확실성을 보여주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내가 얼마나 무기력한 존재인지를 나타내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께서는 내 인생이 바다 위에 있다. 라고 느낀 적이 있으십니까?

예측하지 못할 불확실성의 연속 가운데서 또는 내가 그 무엇을 해도 소용이 없는 무기력함 속에서 인생의 위기를 마주하고 있지 않으십니까? 오늘 본문은 그러한 인생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인생의 바다 위에 있다고 느낄 때에도 하나님의 은혜의 손 위에 내가 놓여 있음을 믿는 그 믿음이 우리 성도님들의 가슴 가슴마다 온전히 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바다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십니다. 오늘 본문 배경을 먼저 살펴보면 지금 제자들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조금 더 분명하게 볼 수가 있는데요. 사실 오늘 본문 바로 앞부분에는 어떤 사건이 있었냐 하면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5개로 수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고 열 두 광주리가 남은 바로 그 사건 그래서 요한복음에 보면 사람들이 이 오병이어 사건 이후에 기적 이후에 예수님을 억지로 붙잡아 임금으로 모시자고 하는 그런 분위기입니다.

제자들도 얼마나 기세등등했을까요? 그동안 우리 예수님께서 인정받지 못하셨다고 생각했었을 터인데 드디어 우리 예수님께서 온 백성에게 인정받는 분이 되셨다. 이제 바로 우리가 기다리던 그때이다. 라는 마음으로 굉장히 어깨가 한껏 높아지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이 굉장히 뜻밖입니다. 마태복음 14장 22절 23절인데요. 함께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4:22-23,
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어쩌면 제자들은 지금 이 좋은 분위기를 더 누리고 싶었을 수도 있는데 예수님께서 서두르시며 자리를 뜨게 만드십니다. 여러분, 어떤 상황인지 좀 그려지시나요? 예수님께서 그 좋은 분위기에서 제자들의 등을 떠밀면서 빨리 돌아가자 빨리 배로 가자! 하고 밀어대고 계십니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이 예수님 없이 벳세다에서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건너가게 되는데 바로 그 바다에서 거센 풍랑을 만나는 게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 본문을 동일하게 다루는 마가복음 6장 47절에 보면 이렇게 나오네요.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라고 나옵니다. 지금 제자들이 해가 저무는 시간부터 오늘 본문 25절에 보면,

*마태복음 14:25-33,
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밤 사경까지라고 나오는데요. 우리 시간으로 말하면 밤 사경은 새벽 3시에서 6시 사이를 읽었습니다. 즉 9시간에서 10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에 계속 거센 풍랑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데 어느 정도 나아갔냐 하면 대략 10리 정도 한 4kg 정도라고 하는데요. 제가 지도에서 찾아보니까 동작대교에서 동호대교, 영동대교 정도까지 그 거리를 겨우 나갔다고 말을 합니다. 제자들 입장에서 보면 굉장히 당황스럽지 않았을까요? 오병이어의 그 좋던 분위기에서 누가 가라고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빨리 넘어가자고 재촉하셨습니다. 자기들도 아쉬운 마음을 이내 꾹꾹 눌러가면서 주님께 순종하여 배에 올라탔는데 지금 결과가 어떻습니까? 밤새도록 9시간 10시간 넘는 시간 동안 죽을 고생하고 있지 않습니까? 제자들의 마음은 예수님을 향해서 얼마나 따지고 싶었을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셨다면 순풍을 만났어야 되는 거 아닙니까? 하지만 그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지금 이 제자들이 어려움 당하는 모습이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삶의 모습과 삶의 고민과 굉장히 닮아 있지 않습니까? 저는 여기 수요기도회에 나오신 성도님이시라면 내 삶에 대한 모든 부분들을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귀 기울이시며 그 말씀에 순종하고자 나오신 분들인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도 참 힘든 사실은 내가 순종하며 사는 그 삶 가운데서도 여전히 내 삶 속에 어려움이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여전히 반드시 응답해 주셔야 하는 기도 제목이 내 삶 가운데 있다. 라는 것이 어려운 사실입니다.

이제 곧 설날 연휴가 다가옵니다. 우리 담임 목사님의 말씀처럼 각 가정마다 한 꺼플만 벗겨보면 누구에게도 말하지도 못하는 각 가정의 어려움을 마주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또 저는 청년 사역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청년들도 입시와 각종 고시와 또 취업하는 문제와 진로의 문제와 무엇보다 결혼하는 이런 문제 앞에서 결코 쉽지 않은 시간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청년들의 문제는 비단 청년들의 것이 아니라 우리 청년들의 부모님들의 기도 제목이 되지 않습니까? 우리 성도님께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내가 그렇게 주님께 불순종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이토록 예배의 자리도 온전히 지키며 섬김 가운데 나아가고 내 자녀도 내 남편도 우리 가정이 하나님께 온전하게 말씀에 엎드려 살며 노력하였는데, 왜 여전히 밤새도록 새벽 3시까지 우리의 인생은 풍랑을 만난 것 같은가라는 이 고민과 이 질문이 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안타까운 삶 삶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리고 이 기도 제목들로 여전히 눈물 흘리며 주님 앞에 기도하시는 분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오늘 이 성경 본문을 통해서 그러한 우리 삶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와 도전이 각 성도님의 마음마다 온전하게 전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순종의 여정 속에서 풍랑을 마주할 때에, 어떻게 이 풍랑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그 방법을 오늘 두 가지만 살펴보고자 하는데요. 첫째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끝까지 낙심하지 않으시길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오직 예수님만이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라는 이 고백이 필요합니다. 한번 저를 따라 해보실까요?

I. 첫 번째로-오직 예수님만이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오늘 본문과 병행 본문인 마가복음 6장 47절과 48절을 한번 함께 읽겠습니다.
*마가복음 6:47-48,
47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48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지금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죠? 산에서 기도하고 계시는데요.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는 걸 모르시는 분이 아니세요?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라고 말하십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을 만날 것과 만나고 있는 것을 알고, 보고 계십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들지 않습니까? 왜 처음부터 같이 배에 올라타시고 풍랑이 불기 시작하면 잠잠 하라. 라고 말씀해 주시는 그 기적을 베풀지 않으셨을까? 오늘 이 사건 직전에 무슨 일이 있었다고 했죠? 오병이어가 있었습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께서 수많은 사람을 먹이시는 놀라운 기적을 베푸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제자들은 풍랑 앞에서 주님을 찾기보다 나름대로 자기들이 갖고 있는 온갖 배 기술과 노 젓는 경험을 실현합니다. 심지어 불과 몇 개월 전에도 이미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다가 풍랑을 잠잠케 하신 모습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찾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가 않습니다. 사실 이 배에 타고 있던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은 최소한 이들은 전문 프로 어부가 아닙니까? 얼마나 이런 상황을 갈릴리 바다에서 경험했겠습니까? 위기가 닥쳤을 때 자신들이 가장 익숙하고 신뢰할 수 있는 방식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옵니다. 그리고 그 방식을 의지해서 풍랑을 돌파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지금 제자들은 바다 위에서 자기들의 실력도 경험도 전혀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닫습니다. 사람은 아무도 인생의 어려움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어려움을 이겨내는 방식은 모두가 다릅니다. 공통적인 것은 모두가 자기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 어려움을 이겨낸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배의 키를 잡고 노를 젓는 게 바로 자신들이 신뢰할 수 있는 방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인생의 풍랑을 극복하고 계십니까? 믿을 만한 지인을 먼저 찾아가시나요? 통장의 계좌 잔고를 확인하십니까? 내가 세워놓은 타임라인에서 혹시라도 내가 실수한 것은 없었나, 내 계획이 틀리지 않았나, 돌아보고 계십니까? 혹은 경력이 부족해서 혹은 공부가 부족해서 혹은 노력이 부족해서 내가 이 어려움을 마주하고 극복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라고 생각하시며 그 방식들을 의지하고 계십니까? 오늘 바다 위에서의 이 위기는 제자들이 진짜 무엇을 믿고 있는 자리인 줄로 확신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의 풍랑의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을 가장 먼저 신뢰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쩌면 제자들이 노를 젓다가 힘이 빠질 때까지 기다리셨을 수도 있어요. 우리가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려 할 때 그 빠져 있는 사람이 힘이 팔팔 넘치면 그때 가서 구하면 어떻게 되죠? 자칫하면 둘 다 죽습니다. 내가 그 사람을 구하려고 할 때 그 사람의 손이 내 머리를 덮치고, 나도 그 사람의 머리를 덮치고 함께 물속으로 잠수하게 돼요. 그래서 우리는 물에 빠진 사람이 어느 정도 힘이 빠져야 더 편하게 구할 수 있다. 라고 생각하는데요. 성도의 삶 가운데서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인간적인 힘이 빠지기를 기다리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힘이 빠진 바로 그때 제자들은 자기들이 스스로를 구할 수 없는 것을 깨달았던 그때에 예수님께서 저 멀리서부터 물 위로 차벅차벅 걸어오기 시작하십니다. 지금 배 안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캄캄한데 정말 빛 하나 보이지 않는 캄캄한 곳인데 저 멀리서 누군가가 다가오니까 유령이다 귀신이다 소리치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27절인데요. 큰 목소리로 함께 읽겠습니다.

*마태복음 14:27,
27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 안심하라. 부터만 다시 한 번 크게 읽어볼까요?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아멘. 그리고 오늘 이 사건이 다 마무리될 때에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입술에서 어떤 고백을 받으셨냐면 33절입니다.

*마태복음 14:33,
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사랑하는 여러분,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 인생의 풍랑을 잠재우실 수 있는 분인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지금 우리의 입술 가운데서 이 고백을 원하세요. 주님만이 내 삶의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이 고백이 우리의 입술과 마음 가운데에 온전히 새겨지기를 다시 한 번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로 어떻게 우리가 순종의 여정 속에서 마주하는 이 풍랑 가운데서 끝까지 포기하지도 낙심하지도 않을 수 있을까 바로 우리에게는 이것이 필요한데요. 저를 따라 하시겠습니까? 배에서 나오는 믿음, 배에서 나오는 믿음, 배에서 나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II. 두 번째로, 배에서 나오는 믿음이 필요하다.

오늘 본문은 다른 복음서 중에서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서도 동일하게 다릅니다. 이 마태 마가 요한복음에서 다루는데요. 사실 마태복음에만 특별하게 나타나는 내용이 있습니다. 바로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다른 본문에는 없습니다. 마태는 분명히 물 위를 걸으려다 빠지는 그 베드로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는 게 분명합니다. 2천년이 지난 지금이지만 이 베드로를 통해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에게 베드로의 모습이 투영되고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기를 분명히 바랐을 거예요. 물에 빠진 이 베드로, 과연 그 믿음이 실패한 믿음이었을까요? 한번 28절부터 살펴볼 텐데요. 제가 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14:28,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여러분이 지금 배 안에 있는 제자들이라면 주님께서 오신다면 상식적으로 합리적으로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저 같으면 주여 풍랑을 잠잠케 하소서 혹은 주요 이 풍랑에서 속히 벗어나게 하소서 이게 정상적이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 베드로의 반응이 굉장히 독특합니다. 아마 마태도 이 베드로의 반응을 보면서 굉장히 놀랐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남겨놨을 것 같아요. 주여, ‘나는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지금 바람과 파도가 배를 집어삼키고자 합니다.’ 지금 이 상태에서 배 밖으로 나가면 아무리 수영을 잘하는 뱃사람이었던 베드로일지라도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분명히 베드로는 잘 알고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지금 이 베드로가 누구를 바라보고서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라고 말합니까? 예수님입니다. 지금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갖고서 주님께 외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로 나아가고 싶어 합니다. 비록 지금까지는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이 베드로조차도 자신의 배 기술과 노 젓는 것에 그 경험에 의지하여서 이 풍랑을 벗어나고자 했지만,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다가오시는 모습을 보고서는 주님께서 그동안 나에게 베풀어주셨던 은혜가 무엇이었는가, 기적이 어떠했는가, 주님께서 우리를 통하여서 일하셨던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 내가 신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서 나아가길 원합니다. 베드로의 입술 가운데서는 과연 '주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는 외침이 그 내면 가운데서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주님께서 계신 물 위로 나아가길 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이 폭풍이 몰아치는 상황 속에서요 질문인데요. 배 안이 안전합니까? 배 밖이 안전합니까? 어려운 질문이죠? 배 안이 안전합니까? 배 밖이 안전합니까? 여기서 만약 물 위를 걷게 하는 게 안전합니다. 라고 하신다면 주변을 잘 돌봐주셔야 될 것 같습니다. 당연히 지금 다른 제자들은 배 안이 안전하다. 라고 말을 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배 밖으로 나오질 않거든요. 아무도 배 밖으로 몸을 던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베드로만큼은 배에서 나가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게 가장 안전한 길인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주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말합니다. 그런데 이 베드로의 질문보다 요청보다 더 놀라운 것은 사실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29절에서 단 우리말 성경 가운데서 두 글자로 말씀하신대요. 짧으니까 함께 힘 있게 읽어볼까요? 시작,
마태복음 14:29,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오라 거기까지는 아닙니다. 두 글자입니다. 시작 오라, 오라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밤새도록 제자들이 뭐 하느라 노력하고 있었을까요? 죽을 고생하고 있었을까요? 배 밖으로 안 빠지려고, 물에 안 빠지려고 죽기까지 노를 젓고 고생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정반대의 말씀으로 오라. “너의 배에서 나와서 나에게 오라” 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다른 제자들이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께 질문했을 때는 드디어 우리 형 베드로가 미쳤구나. 9시간 10시간 동안 사투를 벌이더니 드디어 이상해진 것은 아닌가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서 이 제자들도 굉장히 놀라기 시작했을 거예요.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배 밖이 안전합니까? 아니면 배 안이 안전합니까? 사실 배 밖이던 배 안이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배 밖으로 예수님께서 계신 물 위로 초청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인생의 풍랑을 마주할 때에 내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나의 배를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배에서 나와 예수님을 붙잡는 우리의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배에서 나가면 우리가 뭐 할까 두려워 못 나갑니까? 물에 빠져 죽을까 두려워 못 나가는 거 아닙니까? 이에 대해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또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한 평생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히브리서 2:15,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미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 많은 사람들이 죽기를 무서워 한 평생 내어 종노릇하며 살아간다. 라고 말을 합니다. 세상 권세의 종노릇하며 살아가는 그 이유와 그 원인이 죽기를 두려워한다. 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배에서 나가면 나 죽는 거 아니야 우리 청년들이라면 이 입시에서 떨어지면, 이 고시에서 떨어지면 내가 이직하지 못하면 죽는 거 아니야. 내 자녀들의 삶의 문제가 내가 원하는 대로 기도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죽는 것은 아니야 내 건강에 문제가 이대로 해결되지 않으면, 내 가정의 문제가 이번 설 연휴 가운데서 해결되지 않으면 내가 배 밖으로 나가면 나는 죽는 것 아니야 이 마음이 우리들 안에 있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모두 각자가 타고 있는 배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배에서 나오면 물에 빠져 죽을까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러한 우리를 향하여서 30절에서 말씀을 하시는데요. 30절, 31절, 31절인데요.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14:30-31,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맞습니다. 베드로는 바람을 보고 두려워하여서 물에 빠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소리칩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여 나를 살려주옵소서. 그런데 주님께서 이렇게 반응하십니다. 31절 32절인데요. 함께 한목소리로 읽겠습니다.

*마태복음 14:32-33,
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
-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울음에 바람이 그치는지라 베드로가 물에 빠지며 주님께 구원해 달라고 부르짖자 주님은 결코 베드로가 익사하도록 물에 빠져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즉시 손을 내미시고 그 베드로가 더 이상 물에 빠지지 아니하도록 꽉 붙잡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있는 배로 데려가십니다. 물론 우리가 이때 저도 궁금하긴 합니다. 예수님께서 물속에 있는 채로 데리고 가셨을까 물 위로 꺼내셨을까 그건 우리는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베드로가 죽지 아니하도록 즉시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잡아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내가 믿음을 갖고 물 위를 걷다가 혹여 두려움으로 물에 다시 빠질 때에도 반드시 다시 잡아주시는 구원자이신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세요. 비록 물에 내 인생이 빠지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절대 배에서 자기의 자녀가 나와서 빠져 죽도록 내버려두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런 주님을 향한 시선을 놓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성도 여러분 지금 베드로는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여 두려워하여 물에 빠졌는데요.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믿음이 작은 자여!” 라고 하십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이 두려움과 이 대척점에 있는 것을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믿음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을 통해 보았을 때에 믿음이 있는 곳에는 두려움이 없을 줄로 믿습니다. 반대로 두려움이 있는 곳에는 믿음이 없기도 합니다. 우리 사랑하는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청하신 것처럼 2천 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도 사랑하는 나의 딸들아 나의 아들아 너희에게 믿음이 있기를 원하노라. 이 음성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 성도 여러분께 우리가 순종의 여정 속에서 풍랑을 마주할 때에 어떻게 하면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가 먼저는 오직 예수님만이 내 삶의 구원자이심을 고백하자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풍랑을 멈춰주시거나 내가 이 풍랑으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즉시 나를 붙잡아주실 예수님을 믿고 배에서 나오는 그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배에서 나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했죠? 믿음입니다. 우리가 순종의 여정 가운데 머물 때에도 내가 계획했던 바와 다르게 내 삶이 내 가정이, 내 자녀가 내 인생이 흘러갈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대부분의 우리는 내가 원래 원했던 항로로 인생이 돌아가기를 간절히 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내가 타고 있는 이 배가 파손되지 아니하고 안전하게 나아가기를 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풍랑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배 안이냐, 밖이냐, 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가, 그렇지 않는가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시선이 배도 아니요, 풍랑도 아니요. 오직 예수님께로만 향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말씀으로 오늘 말씀을 매듭짓겠습니다. 11장 6절입니다.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히브리서 11:6,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의 벼랑 끝에 내몰린 느낌을 받을 때가 있으십니까? 내 삶 가운데에 풍랑이 불어 닥쳐서 이 배가 언제 파손되는 것은 아닌가, 두려우신 상황 가운데 놓일 때가 있습니까?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가정 가운데서도 억울한 관계로 인하여서, 내가 어찌할 바를 몰라 낙망하실 때가 있으십니까? 경제적 어려움 가운데서 자녀의 문제로 인하여서, 배우자로 인하여서, 건강으로 인하여서 주님께 눈물로 기도하실 때가 있으십니까? 우리 삶 가운데 풍랑이 밀려온다면 그 풍랑 저편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에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시길 원합니다.

사랑하는 내 딸아, 내 아들아 너희 믿음의 눈이 열리기를 원하노라.’

♣요약,
어떠한 풍랑이 찾아올지라도 나를 가장 잘 아시고 나를 가장 사랑하시는 주님만이 나의 유일한 구원자이시니, 내 믿음이 연약해질 때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오라 하시는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여 즉시 배에서 나와서 물 위를 걸어가야 한다.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해결할 수 없는 상황과 인생의 벼랑 끝에 내몰리는 순간 가운데서도 즉시 손을 내밀어 구원해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 모든 풍랑의 상황을 다스리시고 구원하실 줄로 믿고, 내가 붙잡고 있던 나의 능력, 실력, 경력이 있다면 이제는 오직 주님 앞에서 겸손하게 내려놓고, 내가 안전한 울타리로 믿고 있던 이 배에서 나가 주님께로 향하는 인생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가장 신뢰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말씀을 기억하여, 우리는 주님으로 문제를 해결하실 줄 믿어야 한다.

※ 배 안→배 밖→주님 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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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주후 2024년 1월 31일)
제목: 말씀 대로(大路)
말씀: 이사야 55:6~9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부목사님)
사회: 김대규 부목사님
 
설교자: 설성환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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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55:6~9,
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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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존귀하신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전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시니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주님 이 시간 드려지는 이 예배를 통하여서 하나님의 이름만이 높아지는 예배가 되게 하시고 이 시간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온전히 깨닫게 하셔서 평생 주님과 동행하며 말씀대로 살아가는 복된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우리의 삶의 이유와 목적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한 수요 저녁 기도회에 나오신 모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은 수요 저녁 기도회를 통하여서 회복을 넘어 부흥의 르네상스를 경험하는 이 현장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이사야 55장 6절부터 9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주신 말씀 이사야 55장 6절에서 9절 말씀을 저와 함께 교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먼저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사야 55:6~9,
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아멘, 사람은 태어났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그리고 아침에 눈을 떠서 또 저녁에 이르기까지 매 순간 수많은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그런 존재입니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것들도 있겠지만, 우리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우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런 생각들도 있을 것입니다. 캐나다 온타리오 주에 있는 퀸즈 대학 교회 심리학자들이 수행한 연구에 따르면 평균적으로 사람은 하루에 6,200번 정도의 생각을 하면서 살아간다. 라고 합니다. 지금 현재 수요 저녁 기도회 현장에 참석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우리 모두는 6,200번의 생각 중에 포함되는 여러 가지의 생각들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이 순간에 어떠한 생각을 하고 계신가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을 살펴보게 되면 우리가 삶속에서 하게 되는 수많은 생각들이 때로는 하나님 보시기에 영광이 되고 또 기쁜 그런 생각이 될 때도 있겠지만, 때로는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르지 못하고 하나님의 생각과는 다른 그런 생각들을 우리가 취할 때가 있다. 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말씀을 함께 보면서 여러분들은 어떠한 생각이 지금 이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시나요?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들었던 생각은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일평생 살아가게 되면서 지금까지 경험한 대로 그리고 우리의 마음대로 정한 그러한 기준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평생 하나님 마음에 딱 맞는 그러한 생각으로 우리가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평생 내 이기적인 욕심과 그러한 생각으로 살아가는 그러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꽉 차 있는 그런 생각으로 매일매일을 살아가게 되는 것, 저와 여러분들이 이렇게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면 하나님께서 정말 기뻐하시는 그러한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하는 마음이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 머리 가운데 가득 채워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각을 하고 또 그 생각이 행동으로 이어지는 그러한 삶을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오늘 본문 말씀 6절과 7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또 하나님을 부르고 또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그러한 첫 단추가 깨어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 우리가 전적으로 붙드는바 되지 않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하나님을 부르지도 않으며 날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는 인생은 결단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각을 할 수도 없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절대로 살아갈 수 없다. 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각, 그리고 그러한 삶을 우리가 살아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찾아야 되고 또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께로 날마다 돌아가는 그런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들이 그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한 성도로서 경험하게 되는 영적인 유익은 무엇이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첫 번째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I. 첫 번째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삶이 온전하게 붙들려서 여호와 하나님을 찾고 주님을 간절히 부르는 사람, 하나님께로 늘 돌아가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고 또 그것이 시작되었다. 라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한다. 라는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리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게 될 때 우리의 삶 가운데 어떠한 변화들이 일어나게 될까요?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모든 일들을 바라보면서 저와 여러분들의 입술의 고백이 하나님의 선하신 고백을 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들 중에서 고난과 여러 가지 문제들이 함께 섞여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진정으로 우리의 삶 가운데 신뢰한다. 라는 것은 우리에게 처해 있는 상황에 의해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들의 고백이 결코 바뀌는 삶이 아닌 줄로 믿습니다. 상황과 환경에 따라서 신뢰하는 그러한 행동은 옆집 이웃에게도 흔히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그런 행동과 태도일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어떠한 상황이나 환경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힘은 하나님과의 그 지속적인 관계를 통해서만이 가능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오래된 하나님과의 관계와 교재의 시간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두터운 신뢰 관계를 만들어내게 된다. 라는 사실입니다. 그 두터운 신뢰 관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생기게 된다면 이전에는 오직 나 스스로만 믿고 나 자신만을 의지하는 생각으로 살았던 그런 사람에서 이제는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부르며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하나님께 의존하는 사람으로 변화하게 된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일들을 그저 이해하며 넘어갈 때가 너무나도 많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해한다. 라는 것은요 내가 상황을 보고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일 때에만 내가 비로소 행동하겠다. 라는 그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철저한 상황과 환경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 상식 안에서 또 내 지식 안에서, 나의 경험 안에서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라는 거죠.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이해관계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우리들의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함을 통하여서 하나님과 자녀와의 관계가 되었기 때문에 그 복음의 능력으로 깊은 친밀감이 형성되어 있는 관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그 선하심 가운데 하나님을 온전하게 신뢰할 수 있게 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야고보서 1장 17절의 말씀을 보게 되면,
 
*야고보서 1:17,
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람은 상황과 그리고 환경에 따라서 정말 수시로 변하는 그러한 모습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전적으로 사람을 신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늘 한 결 같이 신실하게 변함없이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그 하나님의 선하심을 우리가 믿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신뢰할 수 있다. 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나의 상식에서 벗어난 그런 상황을 우리가 맞이하게 한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지만 또는 내가 생각했던 길과는 다르지만 저와 여러분들이 그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함으로 순종하며 뚜벅뚜벅 걸어가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 길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시온의 대로(大路)였다. 라는 것을 깨닫는 날이 올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또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하는 사람들은 내 지식과 내 경험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로마서 8:28,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아멘. 의사는 환자를 진찰하고 또 진찰한 것에 따라 적절한 처방을 내리게 됩니다. 어떠한 약을 먹어야 할지 그 처방전을 통하여서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의사가 진찰한 것과 상관없이 약을 처방해 주지는 않는다. 라는 것이죠. 또한 처방된 이 약들을 만약 우리가 따로 사용한다면 그 한 알 한 알 우리가 따로 복용하고 따로 사용한다면 때로는 그 약의 성분이 우리의 몸에 해로운 약이 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의사의 처방전에 의해서 이 약들이 조합되었을 때는 우리에게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까? 각각의 약들이 가지고 있는 서로 다른 그 기능들이 섞여서 아픈 환자의 병이 잘 치료될 수 있게 하는 그러한 역할을 하게 한다. 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겪은 일들을 하나씩 따로 떼어놓고 보면 때로는 우리의 인생에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거나 때로는 좋아 보이지 않는 그런 일들을 우리가 경험하게 될 때도 있겠지만, 그런데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그 하나하나의 일들을 이어 붙이셔서 가장 선하게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의 눈으로 목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불행한 환경에 놓이게 되면 어떻게 이것이 내 인생에서 선을 이룰 수 있겠느냐, 라고 질문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신뢰하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그 하나하나의 일들을 놓고 보게 되었을 때, 그것이 때로는 고난이고 때로는 그것이 우리의 삶 가운데 문제의 시간이라고 생각했었던 그 사건들이 결국에는 우리들을 그리스도인답게 성장시키고 다듬어가고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게 만드는 하나님의 숨겨진 축복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깨닫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이사야서 55장 8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목소리로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이사야서 55:8,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아멘. 하나님의 생각과 또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길과는 다르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고 또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며 하나님과 평생토록 우리가 교제하며 살기를 원한다면 유언하고 연약한 그러한 우리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각으로 날마다 바꿔가는 그러한 우리의 모습이 있어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우리가 믿고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한다. 라는 것은 예수님이 가셨던 길을 따라가는 그러한 삶인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이 가셨던 길을 우리가 따라간다. 라는 것은요 그분을 믿는다. 라는 것이고 또 그분을 신뢰한다. 라는 우리들의 신앙 고백이 됩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온전히 구하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매 순간 결정할 때 그 마음과 생각과 행동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하나님께서 그 생각을 받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내 생각과 내 가치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과 그 생각으로 가득 채워가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을 찾는 하나님을 찾고 그분을 부르고 하나님께로 날마다 우리가 돌아가게 될 때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경험하게 되는 영적인 유익
 
II. 두 번째는 우리의 생각보다 높으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붙들려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간절히 부르고 날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될 때, 우리를 향한 그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깨닫게 되고, 그 하나님의 위대한 여정에 함께 동참하게 되는 그러한 복된 삶을 누리게 됩니다. 그 여정 가운데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신실하게 인도하시는 것을 우리가 경험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죽음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을 때, 우리의 경험과 우리의 역량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그런 하나님의 위대한 인도하심을 보여주고 있는 것을 우리는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사건을 우리가 생각해 본다면 가장 대표적으로 홍해가 갈라진 그 사건을 우리가 기억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해서 그 광야를 지나가게 될 때 뒤에는 수많은 애굽 군대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이려고 쫓아오고 있는 그런 긴박한 상황입니다. 앞에는 홍해 바다 때문에 막히게 돼서 앞으로 갈 수도 없고, 또 뒤에는 그 애굽 군대가 쫓아오고 있기 때문에 뒤로도 갈 수도 없는 그런 상황 가운데서 바다를 반으로 가르시고 그 길로 행하게 하신다. 라는 것을 우리의 머릿속으로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아무도 그러한 일들을 생각해 보지 못했을 것 같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으로 보았을 때, 그 홍해의 바다는 자신들이 애굽 군대에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러한 장소로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어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과 분명하게 달랐다. 라는 거예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상상하지 못한 높으신 하나님의 생각이 거기에 숨겨져 있었다. 라는 겁니다. 우리들은 우리를 향한 높으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이미 분명하게 예비 되어 있다. 라는 사실에 우리의 시선을 주목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삶에 허락하시는 그 문제들과 어려움들을 우리의 삶 가운데 지나게 하실 때 문제를 피할 길과 해결할 길을 이미 분명하게 예비해 두셨다. 라는 것을 우리가 분명하게 믿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생각보다 높으신 그 하나님의 계획, 그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그 홍해 바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게 만드는 죽음의 바다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리고 애굽 군대를 수장시키는 구원의 바다였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고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보다 높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홍해 바다를 갈랐던 그 사건뿐만이 아니라 요셉의 인생을 다뤄가셨던 그 하나님을 보면 동일하게 하나님의 높으신 계획과 그 생각을 우리가 볼 수 있게 됩니다. 야곱의 11번째 아들이었던 요셉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자라나게 됩니다. 아버지 야곱이 그 요셉을 특별히 차별하고 사랑해서 그 아끼는 모습에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시기하고 또 질투하는 그런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마음이 점점 자라나게 돼서 결국에는 요셉을 죽이고자 하는 그런 마음까지 이 형들이 갖게 됐지만,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유다의 제안으로 요셉은 요셉을 죽이지 않고 애굽의 노예로 팔리게 하는 그러한 일을 행하게 합니다. 요셉이 애굽의 노예로 팔려간 이후에도 바로의 신하 보디발의 집에서 머물게 되었던 그 과정들, 그리고 그 집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그 억울한 일로 인하여서 왕의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에 갇히게 되고, 또 그 감옥에서 있었던 일들 인간적인 눈으로 보게 되었을 때 너무나도 암울한 현실을 경험하였었던 요셉이었지만, 결국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그 인도하심 안에서 애굽의 총리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그런 요셉을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 가운데서 요셉은 자신을 애굽으로 팔아넘긴 그 형들을 용서하고 창세기 50장 20절 말씀에서처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목소리로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창세기 50:20,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아멘 요셉의 고백은 어떻게 고백하고 있습니까? 자신이 경험한 수많은 이해되지 않는 상황과 환경을 하나님께서 선으로 바꿔주셨다. 라고 그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신이 경험한 여러 가지 어려움과 고난의 시간들이 하나님의 더 큰 계획의 일부였다. 라는 것을 깨닫고 고백하는 그러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라는 거예요. 우리들은 이러한 성경의 이야기들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들의 생각보다 높다는 것을 다시금 분명하게 확인해야 합니다.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태복음 16장 21절의 말씀을 보게 되면,
 
*마태복음 16:21,
21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서 많은 고난을 받게 되고 또한 죽임을 당하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게 되실 것을 말씀해 주는 장면이 나오게 됩니다. 마태복음 16장 21절 말씀인데요. 우리 한목소리로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3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아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고 또 죽임 당하시고 다시 3일 만에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의 죄를 해결해 주시고 우리들을 구원해 주시기 위한 일들을 예수님께서 감당할 것을 얘기해 주시는 장면이 이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2절의 말씀을 보게 되면,
 
*마태복음 16:22,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제자 베드로는 그 예수님의 말씀에 이렇게 반응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마태복음 16장 23절의 말씀을 보면 이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그 말씀에 대해서 이렇게 반응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16:23,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다. 라고 강하게 질책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각은 당장 우리의 눈에 좋아 보이는 그러한 길에 집중하고 있는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생각을 늘 마음에 품고 행동하시는 그러한 모습이었다.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각은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서 모든 고통과 고난도 다 당하시고 죽으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한 그러한 생각이셨지만, 베드로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고난을 보고 인간적인 생각을 했던 그러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신이 계획하고 생각한 대로 되지 않아도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온전하게 신뢰하기 때문이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가장 완벽하게 우리의 삶을 인도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수도 없이 겪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 나한테 이러한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게 될까?’ 라는 생각이 들 만한 그런 수많은 일들이 계속 우리의 인생 가운데 끊임없이 나타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저와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내 생각은, 내 계획은, 이렇게 하면 잘 돼야 되는데 왜 그렇게 되지 않을까라고 불평하고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결국 그 사건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혜의 순간이었고, 그렇게 축복의 순간이었다. 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고백하게 하시는 그 은혜의 순간을 우리에게 주실 줄로 믿습니다.
 
내가 원했던 문이 열리지 않아서, 차선책으로 다른 문으로 들어봤는데 뒤돌아보니까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이 처음 가려고 했었던 그 길보다 오히려 훨씬 더 좋은 길이었다. 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날이 올 줄로 믿습니다. 지금 당장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길을 우리의 기준과 경험과 생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라고 해서 하나님의 길이 틀렸다라고 속단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실수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가장 선하신 그 방법으로 우리의 삶을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 실수가 없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온전히 굳건히 믿고 우리의 인생 가운데 가장 신실하게 인도하고 계시는 그 예수 그리스도께 날마다 붙들려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순종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그 말씀의 대로를 기쁨으로 걸어가는 복된 매일의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요약
오늘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과 더욱 친밀함을 누리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늘 고백하며 일평생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환경을 경험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생각 생각보다 더 큰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말씀대로 더 높은 하나님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 당장 인간적인 관점으로 좋아 보이는 길에 집중하는 인생이 아니라, 실수가 없으신 그 하나님의 높은 뜻과 계획을 늘 신뢰하여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에 늘 붙들린바 되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살아갈 수 있는 복된 평생이 되기를 간구해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시기로 작정하신 때를 말한다. 또한 만날 만한 때란 죄인이 회개하고 죄에서 돌아서겠다고 하는 결단을 내리는 때를 의미한다. 여호와께서는 그를 찾는 이에게 나타나시고 그에게 청종하는 자를 가까이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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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01월 24일)
제목: "약해질 용기, 신앙의 꽃"
말씀: 창세기 32:28
찬양인도: 쉐키나(이동선 부목사님)
사회: 강건우 부목사님
설교자: 유재원 부목사님
ㅡㅡㅡㅡ
*창세기 32:28,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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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수요 저녁 기도에 참여하신 모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수요 저녁 기도회를 통해 회복을 넘어 부흥의 르네상스를 경험하는 복된 시간되시길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2장 28절입니다. 제가 가진 성경책으로 구약 성경 50면에 있습니다. 한 절이므로 저와 합독하시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함께 읽습니다.
 
창세기 32:28,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아멘, 참으로 긴 여행이었습니다. 긴 인생의 끝자락에 다 닿은 야곱은 이제 고향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향으로 향하는 야곱에게 돌아온 것은 따뜻한 환대가 아닌 여전히 사그라들지 않는 형의 분노였습니다. 형이 400명을 거느리고 자신을 향해 달려온다는 사실을 들은 야곱은 심히 답답하고 두려웠습니다. 야곱은 쌍둥이로 자랐기 때문에 형, 에서의 불같은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형의 분노를 누그러뜨릴 계략을 찾기 시작합니다. 야곱은 형의 진노를 누그러뜨릴 선물이 필요하다 생각하여 염소와 낙타와 나귀 등 많은 가축들을 형을 위한 선물로 준비했으나 이상하게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불안한 마음으로 아내와 자식들, 모든 선물들, 모든 것들이 먼저 강을 건너가게 한 야곱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밤 야곱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밤을 맞이하게 됩니다.
 
오늘의 창세기 32장 24절에서는 야곱의 현재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제가 읽습니다.
 
*창세기 32:24,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야곱은 강 건너편에서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형 에서 때문에 강을 건너지 못하고 밤을 맞이하게 됩니다. 모든 걸 떠나보내고 야곱은 지금 혼자 남아 있습니다. 창세기 32장에서 만나는 이 위태로운 야곱의 모습 인생의 위기에 빠져 있는 나루터의 야곱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의 모습일지 모르겠습니다. 인생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걸 다 했지만 여전히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고독과 불안의 밤을 맞은 야곱의 모습은 첨단 산업과 인공지능으로 무장했지만 여전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얍복강의 야곱은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깊은 고독과 절망의 밤을 맞이합니다. 누구나 외로워하고 힘들어하는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나 다 자신이 무서워하는 깊은 절망의 밤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 오신 성도님들 중 누군가는 자식의 성공과 학업 때문에 고민하실 지도 모릅니다. 또는 어떤 분은 일터의 문제로 인해, 신앙적 문제로 인해, 관계의 문제로 인해 깊은 절망의 밤을 홀로지 새고 있을지 모릅니다. 또한 어떤 성도님께서는 말하지 못하는 개인의 비밀한 문제로 홀로 눈물로 밤을 지새며 뼈아픈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밤에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건넌 야곱이 한 가지 선택을 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힘으로 위기를 돌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이미 자신의 힘으로 많은 것들을 이루었습니다. 그가 이룬 모든 것들이 그의 결과물입니다. 두 아내와 두 여종과 많은 아들들과 수많은 양떼와 소떼들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지금 자신이 이룬 모든 것들을 떠나보내고 홀로 남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곱의 이때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그동안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들을 이룩해온 야곱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 비참한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야곱을 이런 상태로 내버려 두시는 것일까요?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무언가 중요한 말씀을 하시려는 것 같습니다. 홀로 밤을 지새며 고뇌에 빠져 있던 야곱에게 한 가지 특수한 상황이 발생합니다. 야곱은 달밤에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와 사력을 다해 씨름을 하게 됩니다. 창세기 32장 24절입니다. 제가 읽습니다.
 
*창세기 32:24,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씨름은 ‘아바크’라는 말인데 먼지라.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씨름은 아바크라는 말인데 먼지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이 씨름은 온몸에 흙먼지가 가득 묻을 정도로 매우 치열하고 격렬한 몸싸움을 뜻합니다. 생사를 건 치열한 씨름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 씨름은 밤이 새도록 계속됩니다. 그러나 밤이 새도록 계속된 이 씨름 가운데 진정한 승자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무승부로 결판이 나는 것 같습니다. 이때 야곱과 씨름하는 정체불명의 인물은 씨름 도중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25절입니다. 이번에는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32:25,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야곱과 씨름을 하던 사람은 자신이 이기지 못하자 야곱의 환도 뼈 즉 넓적다리의 위쪽 가운데 뼈를 쳐서 탈골시킵니다. 오늘 읽으신 개혁 개정 버전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허벅지 관절이 어긋났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이후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부위에 힘줄을 먹지 않기 시작하는 전통이 생겼다고 합니다. 이 일로 인해 야곱은 힘이 급격하게 약화되며 씨름에서 패자가 되는 상황으로 몰리게 됩니다. 과연 이 싸움은 누가 이기게 될까요? 위기(危機)에 몰린 야곱이 이번에는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환도 뼈를 부러뜨린 그 사람에게 자신을 축복하기 전에는 놓아주지 않겠다고 말을 한 것입니다. 상황이 참 이상합니다. 난데없이 달밤에 씨름을 하는 것도 야곱에게 씨름을 걸어온 사람도 씨름을 하다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關節)을 치는 상황도, 허벅지 관절이 어긋난 야곱이 자신의 뼈를 어긋나게 한 사람에게 축복을 해달라는 이상한 부탁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야곱과 씨름을 하던 이 사람은 야곱이 자신을 놓아주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7절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창세기 32:27,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내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다.
-그 사람은 야곱의 이름을 묻습니다. 야곱의 이름의 뜻은 잘 아시듯이 ‘속이는 자 발 뒤꿈치를 잡은 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야곱의 무언가를 바꾸려고 하는데요. 그게 무엇인지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28절 말씀인데요.
 
창세기 32:28,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에 저희가 한 번 더 같이 합독하도록 하겠습니다. 드디어 야곱과 씨름하던 그 사람의 정체가 밝혀졌습니다. 야곱과 씨름을 시도한 존재는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드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굳이 야곱과 씨름을 하셨을까요? 하나님과 씨름을 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누가 이기겠습니까? 온 땅의 주인이시며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씨름을 한다면 씨름의 모든 기술을 마스터하고 계실 씨름의 근원 되신 하나님이 이기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지금 왜 도대체 야곱과 씨름을 하고 계신 것일까요? 여기에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숨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과 씨름을 하시는 이유는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씨름을 통해서 야곱의 인생을 새롭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누군가의 인생을 온전하게 하시기 위해서 씨름을 걸어오실 때 절대로 지는 씨름은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늘 이기는 씨름만 하십니다. 하나님은 지는 씨름 따위는 아예 염두에 두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온전하게 하시기 위해 씨름을 걸어올 때, 자신이 이길 수 없는 그 씨름 때문에 자신의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 것 같은 그 씨름 때문에 공평하지 못하다고 하나님께 불평을 하곤 합니다.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무엇이죠? 약해지는 것입니다. 패배하는 것입니다. 내 뜻대로 돼야 하는데, 내 자녀의 성적이 더 좋아져야 하는데, 일터에서 더 큰 성공을 거둬야 하는데, 내 인맥이 더 넓어져야 하는데 문제가 해결돼서 좋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야 하는데, 본이 되는 모습이 되면 좋겠는데, 내가 저 사람보다는 더 열심히 살았으니까 하나님께서 이만한 보상을 내게 해주셔야 맞지 않는가?, 이런 식으로 고백하며 하나님 이건 공평하지 않습니다. 제가 원하는 바는 저의 뜻은 도대체 언제 이루어진단 말입니까? 하나님께 불평을 하는 경우들이 분명 있습니다. 저는 왜 늘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까? 왜 약해져야만 하는 것입니까? 주님,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맞습니까? 주님, 이것이 성도의 삶이 맞습니까? 주님, 저는 왜 이럴 수밖에 없단 말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어떻게 행동을 하겠습니까? 지혜로운 사람은요 여기에서 약해질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이 내 삶 가운데 훨씬 유리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나의 삶 가운데 이루어질 때 우리의 삶이 내가 원하는 뜻과 방향보다 훨씬 더 풍요롭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야곱은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은 지금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임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씨름에 더 간절하게 야곱이 매달렸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 누구보다 간절한 이 야곱의 인생을 지금 이 순간 새롭게 하십니다. 32장 28절 저희 다시 한 번 읽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32:28,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십니다. ‘스라’는 히브리어로 싸웠다 씨름했다. 다스린다. 라는 뜻입니다. 엘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이 해석을 보통 저희가 이야기할 때 성경의 말씀에 따르면 내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이렇게 해석을 하곤 합니다.
 
그런데 제임스 보이스라는 목사님께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름 중에 동사의 하나님의 이름이 사용될 때 하나님은 그 동사의 목적어가 아니라, 항상 주어여야 한다.” 이렇게 말입니다. 실제로 항상 동사에 하나님의 이름이 섞여 나왔을 때는 하나님은 목적어가 아니라 주어였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이 주어라는 뜻입니다. 다니엘이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이 이름은 하나님이 심판받는다. 이렇게 해석하면 틀린 해석이 됩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신다. 하나님이 재판하신다. 이렇게 해석을 해야 맞습니다. 사무엘이라는 이름의 뜻은 어떻습니까? 사무엘이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었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들으신다. 이렇게 해석을 해야 맞습니다. 같은 원리로 해석을 한다면 오늘 저희가 함께 봉독했던 창세기 32장 28절의 말씀 해석은 조금 바뀌게 됩니다. 어떻게 바뀌게 됩니까? 스라-싸웠다 씨름했다 다스린다. 엘, 하나님을 이 부분을 뒤집으면 이렇게 해석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기신다. 하나님이 싸우신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야곱의 인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에서를 속여 장작 권을 얻어냈지만 형과의 관계에서는 처참한 실패를 맛봤습니다. 눈 먼 아버지를 속여 축복은 받아냈지만 그는 아버지를 아프게 한 아들이었습니다. 형에게는 더 없는 실패를 안긴 동생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야곱에게 만족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많은 것들을 가졌을지라도 말입니다. 평생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원하는 것을 얻어냈고 성취했던 그 야곱이 지금 하나님과 씨름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만약 여러분들에게 씨름을 걸어오신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기시겠습니까? 지시겠습니까? 그런데 그 씨름에서 야곱은 지금 어떤 상태가 되죠? 뼈가 어긋나는 고통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야곱을 보고 내가 하나님과 이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야곱의 지금 모습이 승리자의 모습입니까? 하나님을 이긴 사람의 모습이 맞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야곱의 지금 모습은 다리를 절뚝이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치셨기 때문에 이런 고통을 가지면 다리를 절뚝이면서 걸을 수밖에 없습니다. 약해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야곱은 패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니가 하나님과 이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은 역설의 책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야곱의 모습을 보고 그래 야곱아, 이제는 내가 승리자다. 라고 말씀하시는데, 약해진 야곱에게 패배한 야곱에게 승리자라고 하신 것이죠.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지금 야곱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야곱은 이제 서야 약함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약해질 용기를 갖게 된 것입니다. 내 뜻이 중요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중요함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씨름을 걸어오셨습니까? 그때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숨어 있습니다. 약해지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약할 때 하나님으로 인해 강해지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강하심이 진짜 나의 삶의 강함이자 승리라는 것을 깨닫는 자들이 바로 성도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약해질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진짜 힘과 능력을 공급받아 매일, 매일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약할 때 역사(役事)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약하기 때문에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약한 것은 패배가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를 대신하여 일하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힘으로 살아오셨습니까? 그렇다면 야곱처럼 나의 모든 힘과 능력으로 이기는 삶을 살려 했던 그 시간들을 뒤로 하고 힘을 빼고 약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이렇게 기도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나님 저는 약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강하십니다. 하나님 나의 힘이 되어 주시기 원합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 저에게 힘을 주시옵소서. 내가 주어가 되는 기도보다 훨씬 더 멋진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저는 약합니다. 그런 하나님은 강하십니다.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어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오늘 이 본문을 통해 아직도 야곱처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사랑하는 나의 딸아, 이 시대에 야곱아 지금까지는 너의 힘과 능력으로 살아왔고, 너의 머리를 써서 최선을 다해 승리했지만, 그것은 결코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란다. 나의 자녀가 제자가 살아가는 방식은 삶의 주인을 인정하고 약함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이란다. 내가 너의 허벅 관절을 친 이유도 바로 그것을 알려주기 위함이란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전히 강해지려 하십니까? 약해질 용기가 없으십니까? 기꺼이 약해지십시오. 우리는 약해져야 합니다. 약해지는 상황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기시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싸우실 것이다. 라는 고백이 우리의 입술 가운데 나와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약함을 고백하고 인정하는 것이 참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약해지는 것이 두렵습니다. 저에게는 9살 된 딸과 7살 된 아들이 있습니다. 저의 아들과 놀 때만 해도 저는 잘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기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저희 아들은 저를 닮아 눈썹이 굉장히 진하고, 그리고 저를 보신 분은 저의 아들을 보시면 그냥 바로 아시더라고요. 유재원 목사의 아들이다. 그 아이와 놀 때 전 항상 이기려 하고 있습니다. 아빠인 제가 7살 아들을 이기려 할 때 저의 모습을 보면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목사인 저조차도 저의 일상의 삶 가운데서 약함을 고백하고 인정하는 것이 참 쉽지 않습니다. 말씀을 전할 땐 좋은 설교자가 되고 싶습니다. 무언가를 할 땐 굉장히 잘하고 싶습니다. 누군가와 경쟁을 할 땐 이기고 싶은 심리가 당연히 저에게도 있습니다. 이런 저와 같은 자를 위해 여전히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일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왜 오셨습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야곱처럼 절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가셔야 했습니다. 그리스도가 나의 전부이시다. 라는 고백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벌거벗은 몸으로 가장 낮은 모습으로, 가장 약하며 천한 모습으로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그 모습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약함을 실패가 아닌 하나님의 강하심으로 고백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약해지는 것이 두려우십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단어에는 단 하나입니다. 약해져도 괜찮다. 약해질 용기가 너희들에게 기꺼이 필요하구나. 내가 너희들과 함께하도록 하겠다. 하나님께서 지금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약해질 용기를 기꺼이 가지십시오. 우리를 위하여 약한 모습으로 이 땅 가운데 찾아오신 그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는 약하지만 강해질 수 있고 부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강하신 하나님 나의 힘이 되어 주시옵소서. 강하신 하나님 저는 연약하지만 하나님이 저를 대신하여 싸우시고 이기시는 줄 믿습니다. 이렇게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때 우리는 회복을 넘어 부흥의 르네상스를 경험하는 2024년 한 해를 보내게 될 줄 믿습니다.
 
♣요약
내 힘과 능력이 아닌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며 나아가 하나님의 맞춤형 새 은혜, 승리하는 새 역사를 목도하여야 한다. 약할 때 강함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우리는 연약하여 넘어지고 다치고 깨지기 일쑤인데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여전히 나의 머리와 노력과 실력으로 개인의 지혜로 장애물을 뛰어넘으려 할 때가 너무도 많음을 깨달아서 이제는 하나님이 이기심을 진정으로 믿고 ‘하나님이 싸우십니다’ 라고 고백하며 우리를 위하여 약해지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약함을 자랑으로 강하신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시간으로 삼아야 한다. 이런 성경적 방식과 원리로 살아갈 때 회복을 넘어 부흥의 르네상스를 경험하는 약해질 용기, 신앙의 꽃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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