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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01월 24일)
제목: "약해질 용기, 신앙의 꽃"
말씀: 창세기 32:28
찬양인도: 쉐키나(이동선 부목사님)
사회: 강건우 부목사님
설교자: 유재원 부목사님
ㅡㅡㅡㅡ
*창세기 32:28,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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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수요 저녁 기도에 참여하신 모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수요 저녁 기도회를 통해 회복을 넘어 부흥의 르네상스를 경험하는 복된 시간되시길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2장 28절입니다. 제가 가진 성경책으로 구약 성경 50면에 있습니다. 한 절이므로 저와 합독하시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함께 읽습니다.
 
창세기 32:28,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아멘, 참으로 긴 여행이었습니다. 긴 인생의 끝자락에 다 닿은 야곱은 이제 고향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향으로 향하는 야곱에게 돌아온 것은 따뜻한 환대가 아닌 여전히 사그라들지 않는 형의 분노였습니다. 형이 400명을 거느리고 자신을 향해 달려온다는 사실을 들은 야곱은 심히 답답하고 두려웠습니다. 야곱은 쌍둥이로 자랐기 때문에 형, 에서의 불같은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형의 분노를 누그러뜨릴 계략을 찾기 시작합니다. 야곱은 형의 진노를 누그러뜨릴 선물이 필요하다 생각하여 염소와 낙타와 나귀 등 많은 가축들을 형을 위한 선물로 준비했으나 이상하게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불안한 마음으로 아내와 자식들, 모든 선물들, 모든 것들이 먼저 강을 건너가게 한 야곱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밤 야곱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밤을 맞이하게 됩니다.
 
오늘의 창세기 32장 24절에서는 야곱의 현재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제가 읽습니다.
 
*창세기 32:24,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야곱은 강 건너편에서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형 에서 때문에 강을 건너지 못하고 밤을 맞이하게 됩니다. 모든 걸 떠나보내고 야곱은 지금 혼자 남아 있습니다. 창세기 32장에서 만나는 이 위태로운 야곱의 모습 인생의 위기에 빠져 있는 나루터의 야곱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의 모습일지 모르겠습니다. 인생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걸 다 했지만 여전히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고독과 불안의 밤을 맞은 야곱의 모습은 첨단 산업과 인공지능으로 무장했지만 여전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얍복강의 야곱은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깊은 고독과 절망의 밤을 맞이합니다. 누구나 외로워하고 힘들어하는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나 다 자신이 무서워하는 깊은 절망의 밤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 오신 성도님들 중 누군가는 자식의 성공과 학업 때문에 고민하실 지도 모릅니다. 또는 어떤 분은 일터의 문제로 인해, 신앙적 문제로 인해, 관계의 문제로 인해 깊은 절망의 밤을 홀로지 새고 있을지 모릅니다. 또한 어떤 성도님께서는 말하지 못하는 개인의 비밀한 문제로 홀로 눈물로 밤을 지새며 뼈아픈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밤에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건넌 야곱이 한 가지 선택을 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힘으로 위기를 돌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이미 자신의 힘으로 많은 것들을 이루었습니다. 그가 이룬 모든 것들이 그의 결과물입니다. 두 아내와 두 여종과 많은 아들들과 수많은 양떼와 소떼들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지금 자신이 이룬 모든 것들을 떠나보내고 홀로 남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곱의 이때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그동안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들을 이룩해온 야곱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 비참한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야곱을 이런 상태로 내버려 두시는 것일까요?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무언가 중요한 말씀을 하시려는 것 같습니다. 홀로 밤을 지새며 고뇌에 빠져 있던 야곱에게 한 가지 특수한 상황이 발생합니다. 야곱은 달밤에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와 사력을 다해 씨름을 하게 됩니다. 창세기 32장 24절입니다. 제가 읽습니다.
 
*창세기 32:24,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씨름은 ‘아바크’라는 말인데 먼지라.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씨름은 아바크라는 말인데 먼지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이 씨름은 온몸에 흙먼지가 가득 묻을 정도로 매우 치열하고 격렬한 몸싸움을 뜻합니다. 생사를 건 치열한 씨름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 씨름은 밤이 새도록 계속됩니다. 그러나 밤이 새도록 계속된 이 씨름 가운데 진정한 승자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무승부로 결판이 나는 것 같습니다. 이때 야곱과 씨름하는 정체불명의 인물은 씨름 도중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25절입니다. 이번에는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32:25,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야곱과 씨름을 하던 사람은 자신이 이기지 못하자 야곱의 환도 뼈 즉 넓적다리의 위쪽 가운데 뼈를 쳐서 탈골시킵니다. 오늘 읽으신 개혁 개정 버전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허벅지 관절이 어긋났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이후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부위에 힘줄을 먹지 않기 시작하는 전통이 생겼다고 합니다. 이 일로 인해 야곱은 힘이 급격하게 약화되며 씨름에서 패자가 되는 상황으로 몰리게 됩니다. 과연 이 싸움은 누가 이기게 될까요? 위기(危機)에 몰린 야곱이 이번에는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환도 뼈를 부러뜨린 그 사람에게 자신을 축복하기 전에는 놓아주지 않겠다고 말을 한 것입니다. 상황이 참 이상합니다. 난데없이 달밤에 씨름을 하는 것도 야곱에게 씨름을 걸어온 사람도 씨름을 하다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關節)을 치는 상황도, 허벅지 관절이 어긋난 야곱이 자신의 뼈를 어긋나게 한 사람에게 축복을 해달라는 이상한 부탁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야곱과 씨름을 하던 이 사람은 야곱이 자신을 놓아주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7절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창세기 32:27,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내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다.
-그 사람은 야곱의 이름을 묻습니다. 야곱의 이름의 뜻은 잘 아시듯이 ‘속이는 자 발 뒤꿈치를 잡은 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야곱의 무언가를 바꾸려고 하는데요. 그게 무엇인지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28절 말씀인데요.
 
창세기 32:28,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에 저희가 한 번 더 같이 합독하도록 하겠습니다. 드디어 야곱과 씨름하던 그 사람의 정체가 밝혀졌습니다. 야곱과 씨름을 시도한 존재는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드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굳이 야곱과 씨름을 하셨을까요? 하나님과 씨름을 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누가 이기겠습니까? 온 땅의 주인이시며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씨름을 한다면 씨름의 모든 기술을 마스터하고 계실 씨름의 근원 되신 하나님이 이기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지금 왜 도대체 야곱과 씨름을 하고 계신 것일까요? 여기에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숨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과 씨름을 하시는 이유는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씨름을 통해서 야곱의 인생을 새롭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누군가의 인생을 온전하게 하시기 위해서 씨름을 걸어오실 때 절대로 지는 씨름은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늘 이기는 씨름만 하십니다. 하나님은 지는 씨름 따위는 아예 염두에 두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온전하게 하시기 위해 씨름을 걸어올 때, 자신이 이길 수 없는 그 씨름 때문에 자신의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 것 같은 그 씨름 때문에 공평하지 못하다고 하나님께 불평을 하곤 합니다.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무엇이죠? 약해지는 것입니다. 패배하는 것입니다. 내 뜻대로 돼야 하는데, 내 자녀의 성적이 더 좋아져야 하는데, 일터에서 더 큰 성공을 거둬야 하는데, 내 인맥이 더 넓어져야 하는데 문제가 해결돼서 좋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야 하는데, 본이 되는 모습이 되면 좋겠는데, 내가 저 사람보다는 더 열심히 살았으니까 하나님께서 이만한 보상을 내게 해주셔야 맞지 않는가?, 이런 식으로 고백하며 하나님 이건 공평하지 않습니다. 제가 원하는 바는 저의 뜻은 도대체 언제 이루어진단 말입니까? 하나님께 불평을 하는 경우들이 분명 있습니다. 저는 왜 늘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까? 왜 약해져야만 하는 것입니까? 주님,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맞습니까? 주님, 이것이 성도의 삶이 맞습니까? 주님, 저는 왜 이럴 수밖에 없단 말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어떻게 행동을 하겠습니까? 지혜로운 사람은요 여기에서 약해질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이 내 삶 가운데 훨씬 유리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나의 삶 가운데 이루어질 때 우리의 삶이 내가 원하는 뜻과 방향보다 훨씬 더 풍요롭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야곱은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은 지금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임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씨름에 더 간절하게 야곱이 매달렸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 누구보다 간절한 이 야곱의 인생을 지금 이 순간 새롭게 하십니다. 32장 28절 저희 다시 한 번 읽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32:28,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십니다. ‘스라’는 히브리어로 싸웠다 씨름했다. 다스린다. 라는 뜻입니다. 엘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이 해석을 보통 저희가 이야기할 때 성경의 말씀에 따르면 내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이렇게 해석을 하곤 합니다.
 
그런데 제임스 보이스라는 목사님께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름 중에 동사의 하나님의 이름이 사용될 때 하나님은 그 동사의 목적어가 아니라, 항상 주어여야 한다.” 이렇게 말입니다. 실제로 항상 동사에 하나님의 이름이 섞여 나왔을 때는 하나님은 목적어가 아니라 주어였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이 주어라는 뜻입니다. 다니엘이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이 이름은 하나님이 심판받는다. 이렇게 해석하면 틀린 해석이 됩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신다. 하나님이 재판하신다. 이렇게 해석을 해야 맞습니다. 사무엘이라는 이름의 뜻은 어떻습니까? 사무엘이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었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들으신다. 이렇게 해석을 해야 맞습니다. 같은 원리로 해석을 한다면 오늘 저희가 함께 봉독했던 창세기 32장 28절의 말씀 해석은 조금 바뀌게 됩니다. 어떻게 바뀌게 됩니까? 스라-싸웠다 씨름했다 다스린다. 엘, 하나님을 이 부분을 뒤집으면 이렇게 해석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기신다. 하나님이 싸우신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야곱의 인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에서를 속여 장작 권을 얻어냈지만 형과의 관계에서는 처참한 실패를 맛봤습니다. 눈 먼 아버지를 속여 축복은 받아냈지만 그는 아버지를 아프게 한 아들이었습니다. 형에게는 더 없는 실패를 안긴 동생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야곱에게 만족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많은 것들을 가졌을지라도 말입니다. 평생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원하는 것을 얻어냈고 성취했던 그 야곱이 지금 하나님과 씨름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만약 여러분들에게 씨름을 걸어오신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기시겠습니까? 지시겠습니까? 그런데 그 씨름에서 야곱은 지금 어떤 상태가 되죠? 뼈가 어긋나는 고통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야곱을 보고 내가 하나님과 이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야곱의 지금 모습이 승리자의 모습입니까? 하나님을 이긴 사람의 모습이 맞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야곱의 지금 모습은 다리를 절뚝이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치셨기 때문에 이런 고통을 가지면 다리를 절뚝이면서 걸을 수밖에 없습니다. 약해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야곱은 패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니가 하나님과 이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은 역설의 책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야곱의 모습을 보고 그래 야곱아, 이제는 내가 승리자다. 라고 말씀하시는데, 약해진 야곱에게 패배한 야곱에게 승리자라고 하신 것이죠.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지금 야곱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야곱은 이제 서야 약함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약해질 용기를 갖게 된 것입니다. 내 뜻이 중요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중요함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씨름을 걸어오셨습니까? 그때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숨어 있습니다. 약해지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약할 때 하나님으로 인해 강해지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강하심이 진짜 나의 삶의 강함이자 승리라는 것을 깨닫는 자들이 바로 성도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약해질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진짜 힘과 능력을 공급받아 매일, 매일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약할 때 역사(役事)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약하기 때문에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약한 것은 패배가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를 대신하여 일하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힘으로 살아오셨습니까? 그렇다면 야곱처럼 나의 모든 힘과 능력으로 이기는 삶을 살려 했던 그 시간들을 뒤로 하고 힘을 빼고 약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이렇게 기도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나님 저는 약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강하십니다. 하나님 나의 힘이 되어 주시기 원합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 저에게 힘을 주시옵소서. 내가 주어가 되는 기도보다 훨씬 더 멋진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저는 약합니다. 그런 하나님은 강하십니다.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어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오늘 이 본문을 통해 아직도 야곱처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사랑하는 나의 딸아, 이 시대에 야곱아 지금까지는 너의 힘과 능력으로 살아왔고, 너의 머리를 써서 최선을 다해 승리했지만, 그것은 결코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란다. 나의 자녀가 제자가 살아가는 방식은 삶의 주인을 인정하고 약함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이란다. 내가 너의 허벅 관절을 친 이유도 바로 그것을 알려주기 위함이란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전히 강해지려 하십니까? 약해질 용기가 없으십니까? 기꺼이 약해지십시오. 우리는 약해져야 합니다. 약해지는 상황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기시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싸우실 것이다. 라는 고백이 우리의 입술 가운데 나와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약함을 고백하고 인정하는 것이 참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약해지는 것이 두렵습니다. 저에게는 9살 된 딸과 7살 된 아들이 있습니다. 저의 아들과 놀 때만 해도 저는 잘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기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저희 아들은 저를 닮아 눈썹이 굉장히 진하고, 그리고 저를 보신 분은 저의 아들을 보시면 그냥 바로 아시더라고요. 유재원 목사의 아들이다. 그 아이와 놀 때 전 항상 이기려 하고 있습니다. 아빠인 제가 7살 아들을 이기려 할 때 저의 모습을 보면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목사인 저조차도 저의 일상의 삶 가운데서 약함을 고백하고 인정하는 것이 참 쉽지 않습니다. 말씀을 전할 땐 좋은 설교자가 되고 싶습니다. 무언가를 할 땐 굉장히 잘하고 싶습니다. 누군가와 경쟁을 할 땐 이기고 싶은 심리가 당연히 저에게도 있습니다. 이런 저와 같은 자를 위해 여전히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일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왜 오셨습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야곱처럼 절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가셔야 했습니다. 그리스도가 나의 전부이시다. 라는 고백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벌거벗은 몸으로 가장 낮은 모습으로, 가장 약하며 천한 모습으로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그 모습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약함을 실패가 아닌 하나님의 강하심으로 고백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약해지는 것이 두려우십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단어에는 단 하나입니다. 약해져도 괜찮다. 약해질 용기가 너희들에게 기꺼이 필요하구나. 내가 너희들과 함께하도록 하겠다. 하나님께서 지금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약해질 용기를 기꺼이 가지십시오. 우리를 위하여 약한 모습으로 이 땅 가운데 찾아오신 그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는 약하지만 강해질 수 있고 부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강하신 하나님 나의 힘이 되어 주시옵소서. 강하신 하나님 저는 연약하지만 하나님이 저를 대신하여 싸우시고 이기시는 줄 믿습니다. 이렇게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때 우리는 회복을 넘어 부흥의 르네상스를 경험하는 2024년 한 해를 보내게 될 줄 믿습니다.
 
♣요약
내 힘과 능력이 아닌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며 나아가 하나님의 맞춤형 새 은혜, 승리하는 새 역사를 목도하여야 한다. 약할 때 강함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우리는 연약하여 넘어지고 다치고 깨지기 일쑤인데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여전히 나의 머리와 노력과 실력으로 개인의 지혜로 장애물을 뛰어넘으려 할 때가 너무도 많음을 깨달아서 이제는 하나님이 이기심을 진정으로 믿고 ‘하나님이 싸우십니다’ 라고 고백하며 우리를 위하여 약해지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약함을 자랑으로 강하신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시간으로 삼아야 한다. 이런 성경적 방식과 원리로 살아갈 때 회복을 넘어 부흥의 르네상스를 경험하는 약해질 용기, 신앙의 꽃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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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01월 17일)
제목: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라"
말씀: 디도서 2:11-14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부목사님)
사회: 김대규 부목사님

설교자: 김기완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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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도서 2:11-14,
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12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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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한 수요 저녁 기도회에 참여하신 모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수요 저녁 기도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 풍성히 누리는 복된 시간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디도서 2장 11절부터 14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디도서 2장 11절에서 14절 말씀을 교독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새해가 되면 여러 가지 목표를 세웁니다. 그중 많은 이가 공감할 수 있는 것을 하나 꼽자면 건강관리입니다. 몸에 적절한 체중을 맞추어서 보기 좋은 외모를 얻기 위해, 각종 수치를 정상으로 돌려서 질병으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해, 혹은 젊음과 활력을 오래 유지하여서 인생을 평안하게 살기 위해, 운동, 다이어트, 식습관 개선 등 방법은 각자 다르지만 건강이라는 목표를 세우기도 합니다. 그렇게 세운 목표 열심히 실천합니다. 그나마 몸의 변화는 눈에 잘 보이고 알아채기 쉬운 편입니다. 습관이나 생각, 성품과 변화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어떻습니까? 잘 쉽사리 드러나지가 않습니다. 오랜 시간 애쓰고 노력해도 이것이 변화가 있는 것인지 진짜 나에게 적용된 것인지 알아차리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성장과 성숙은 어떻습니까? 성숙한 신앙을 원하지 않는 성도는 없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이기 때문에 자가 평가가 너무 어렵고 막연하게 느껴집니다. 여러 선한 결단들을 시도하지만 예전으로 되돌아가기 일쑤입니다. 과연 우리에게는 영적으로 성장하고 변화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우리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을 향해서 더 나아갈 수 있을까요? 디도서에는 바울의 뒤를 이어서 그레데 교회를 섬기는 디도가 등장합니다. 그 디도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이고 그 내용은 목양의 권면입니다. 바울은 나이와 신분과 직업을 불문하고 그레데 교회의 모든 성도들의 변화와 성장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성장하고 변화되어서 교회의 일꾼이 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레데 사람들의 상태는 어떠합니까? 우리 함께 디도서 1장 12절을 읽겠습니다.

*디도서 1:12,
12 그레데인 중의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하니.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의 말을 빌려서 그레데 사람들의 특징을 세 가지로 요약합니다. 거짓말쟁이, 악한 짐승, 게으름뱅이, 이런 사람들이 지금까지 자신이 행해왔던 잘못된 행실을 완전히 끊어낼 수 있을까요? 거기에 더해서 변화하고 성장해서 교회 일꾼이 될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변화와 성숙의 방법을 제시합니다. 이 시간 함께 나눌 말씀을 통해서 나의 상태와 주변의 상황을 뛰어넘어, 영적 성장과 변화를 실현하고 하나님의 귀한 일꾼으로 서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디도서 2장 11절, 12절 상반절 말씀 우리 함께 읽겠습니다.

* 디도서 2:11-14,
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12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서 우리를 양육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그레데 사람들이 신앙적으로 성숙하고 변화할 수 있는 이유로 이것을 꼽은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기 때문에 우리의 성장과 변화의 가능성이 열렸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은혜 무엇이 있습니까?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완성시키신 십자가 구원입니다. 이 십자가 구원은 자기 백성을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입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은 오랫동안 준비되어 왔습니다. 여기서 11절에 ‘나타나’ 라고 번역된 원문은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것이 드러났을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헬라 문헌 중에 이 단어가 언제 사용되는지 살펴보니까, 아침에 수평선에서 태양이 솟아오를 때, 밤에 구름이 흘러가는 중에 달의 모습이 나타났을 때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즉 감추어져 있던 것이 드러나 보이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준비하신 구원의 계획이 때가 임함에 드러났습니다.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이 놀라운 은혜는 나의 성별, 사회적 위치나 혈통에 관계없이 주어집니다. 12절에서는 드디어 나타난 이 은혜가 우리를 양육하신다고 말합니다. ‘양육하다.’ 무슨 뜻일까요? 이 양육하다. 라고 번역된 원문은 지적인 학습이 아니라 실생활 훈련에 가까운 단어입니다. 우리나라 말에 가까운 의미를 찾으면 징계하다, 가르치다, 훈련하다 등의 의미로 번역이 됩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서 양육은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양육을 받으면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복음으로 말미암아 고난을 받는 것도 은혜고, 말씀을 깨닫도록 가르침을 받는 것도 은혜이며, 잘 하지 못하는 것을 잘 하도록 훈련받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양육을 받는 모습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 그 자체가 은혜의 양육을 받는 것이지요.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가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이유도 이 은혜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되,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양육합니다. 우리는 믿는 자들의 모임 교회이지 않습니까? 은혜 공동체 교회에서 은혜의 양육이 이루어집니다. 말씀을 배우는 기회는 물론이고 실생활 훈련도 이루어집니다. 돌아보면 우리가 모였던 그 수많은 공동체들이 큰 훈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행하시는 이 양육을 받은 사람은 무엇이 다른 겁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어떤 모습으로 변화시킬까요? 우리 화면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시는지 읽겠습니다. 디도서 2장 12절 말씀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I. 하나님의 은혜는 과거의 잘못을 버리게 합니다.

*디도서 2:12,
12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버린다. 라고 번역된 원문은 아니라고 말한다. 포기(抛棄)한다는 뜻입니다. 누가복음 9장 23절 말씀처럼

*누가복음 9:23,
23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부인하고, 와 같은 단어입니다. 버린다, 라는 말은 부인하는 것입니다.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온전론에서 오정현 담임 목사님께서 말씀하시듯이 십자가를 지는 삶과 자기 부인은 뗄 래야 뗄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는 핵심이자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 가신 길을 따라가는 사람은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들을 자기 의지로 포기할 수 있습니다. 경건하지 않은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나 뜻을 거스르는 삶입니다. 여기서 불경건과 정욕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불경건과 정욕을 따로 두었지만 그 둘은 아주 밀접합니다. 세상에 속한 정욕들이 경건하지 않은 곳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멀어지면 자연스럽게 죄 성이 드러나고 이 죄 성이 온갖 세상 정욕들을 다 일으킵니다. 정욕은 인간의 본능적 욕구에서 비롯됩니다. 생리적 욕구뿐만 아니라 안전의 욕구, 인정받고 싶은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 등은 배우거나 경험하지 않아도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이 세상의 욕구가 나의 목표가 될 때, 이 세상의 욕구가 내가 정말 추구해야 하는 것 위에 올라설 때, 그것은 ‘정욕’이라고 하는 왜곡된 욕망이 됩니다. 정욕을 채우기 위해서 재정과 시간을 낭비하게 되고요. 스스로 합리화하면서 잘못된 방법을 찾고 죄를 짓습니다. 남의 이야기 같지만 누구나 본능적 욕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욕으로부터 자유하다고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여리고성 전투를 이기고 재물의 마음을 빼앗겨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던 아간, 남편이 있는 여인을 자신의 침상으로 불렀던 다윗을 돌아보면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승리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아는 사람도 순식간에 정욕으로 빠지게 됩니다. 사람을 순식간에 판단력 흐리게 만드는 이 정욕, 본능적 욕구에서 비롯되는 정욕을 자의로 포기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요? 반복되는 잘못이 죄책감이 되어버리지는 않습니다. 이 정욕을 정말 끊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은혜를 매일같이 채우고 경험하면 이 정욕으로부터 자유 함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로마서 6장 15절 말씀 화면 보면서 함께 읽겠습니다.

*로마서 6:15,
15 그런즉 어찌하리오 우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아멘, 하나님의 은혜, 십자가의 사랑은 내 몸과 정신을 지배하던 정욕을 버리게 합니다. 스스로의 연약함을 인정하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게 합니다. 내 삶을 좌지우지하던 잘못된 가치관과 목표를 버릴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불경건한 것들을 떠날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에서 자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 대신 지셨던 그 십자가의 무게, 그 죄의 무게는 우리가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 대신 질 수 있겠습니까? 오직 흠 없으신 어린 양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값없이 주신 그 은혜를 우리가 받은 것은 말 그대로 기적입니다. 은혜 회복의 시작,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에 감격하는 이 밤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눈 뜨면 찾아오는 정욕과 죄책감으로부터 자유 함을 누리고, 과거의 잘못을 끊고 경건으로 2024년을 무장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킵니까? 같이 읽겠습니다.

II. 하나님의 은혜는 현재 필요한 것을 취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세상의 정욕을 버린 사람, 과거의 과오를 떠난 사람이 새로운 현재를 살 수 있도록 양육합니다. 창세기 12장 1절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창세기 12:1,
1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내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고향인 갈대와 우르와 아버지의 집 하란을 떠나라고 말씀하셨고,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떠나라는 명령과 가라는 명령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말씀처럼 우리가 세상의 것을 끊는 것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은 동시에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은혜로 말미암아 과거의 잘못을 버린 성도는, 부인한 성도는, 떠난 성도는 자연스럽게 지금 현재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발견하고 취하게 됩니다. 사람이 어떻게 다른 이의 됨됨이를 완전히 바꿀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사람을 바꾸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도 할 수 없는 것, 하나님의 은혜로는 가능합니다. 사는 환경은 동일하더라도 은혜는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하고, 듣지 못했던 것을 듣게 합니다. 그래서 말과 행동과 생각과 태도를 변화시킵니다. 그렇다면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붙들고 살게 만듭니까? 디도서 2장 12절 말씀 우리 함께 읽겠습니다.

*디도서 2:12,
12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아멘, 은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우리가 세상의 것을 버리고 나서 따라가게 될 것은 바로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덕목들은 본문에서 읽지는 않았지만, 디도서 2장 1절부터 10절에서 설명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기대하는 내용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⓵신중함은 자신을 대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신중한 사람은 어떤 일에도 침착하고 단정하지, 섣불리 결정하지 않고 진정으로 자신을 위한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판단을 내립니다. 은혜의 양육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돌아보는 신중함이 있어서 시간을 허투로 보내지 않고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자리합니다. 그곳을 떠나야 한다면 신중한 판단 가운데 떠나고, 그곳에 남아야 한다면 신중한 판단으로 남게 됩니다. 자신의 본분을 지켜서 은혜와 예배의 자리, 봉사의 자리를 사수합니다.

⓶ 의로움은 타인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의로운 사람은 올곧고 바른 삶을 살아서 공정(公正)하고 흠(欠)이 없습니다. 남에게 폐를 끼치거나 악하게 변질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함이 사람의 관계에도 드러나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교회와 지체를 섬기는 데 아낌이 없습니다.

⓷ 경건함은 하나님을 향한 태도입니다.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며, 기도로 친밀하게 교제하고 경건한 삶, 정결한 삶, 진실 된 삶을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만들어줍니다. 그 누구도 스스로의 능력으로 스스로의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은혜로 말미암아 받았고, 은혜로 말미암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은혜는 이렇게 사람의 인격도 바꾸고 인생도 바꾸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의 삶은 쉬이 변하지 않습니까? 왜 성장했다가도 후퇴합니까? 과거의 삶을 끊지 못하고 현재를 살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우리를 양육하는 은혜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렀으니 은혜 없이 내 열심만으로도 신앙생활해도 상관없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내 힘을 다하여 살면 살수록 교만한 의인에 가까워지기 때문에 누구나 늘 새로운 은혜를 채우면서 살아야 합니다. 은혜는 한 번 받으면 일정 시간을 유지해 주는 회원권이 아닙니다. 한 번의 강력한 체험으로 반영구적 영구적인 자격을 얻는 것도 결단코 아닙니다. 은혜를 받는 방법으로 주신 말씀과 기도로서 새로운 은혜를 늘 내가 채우지 않는다면, 매주 매일의 은혜를 받지 못한다면 은혜를 망각하고 내가 떠났던 그 길을 향해서 다시 돌아가게 됩니다.

의식적으로 반복적으로 은혜의 자리에 나가면 그렇다면 어떻게 됩니까? 선하신 주님께서 다시 합당한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 거하는 삶을 회복함으로 신중함, 의로움, 경건함뿐만 아니라 덤으로 주시는 복들도 풍성히 받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우리는 어떻게 변화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킵니까? 함께 읽겠습니다. 디도서 2장 13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⓸ 하나님의 은혜는 미래의 소망을 기다리게 합니다.
*디도서 2:13,
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아멘 은혜는 우리에게 미래에 대한 소망을 품게 합니다. 소망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이후에 이루어졌으면 하는 우리의 바람이 현재의 삶에 영향을 미쳐서 그것을 준비하게 만듭니다. 그것이 소망의 역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망이 있는 사람과 소망이 없는 사람은 확연히 다른 삶을 살아갑니다. 좋은 소망은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삶의 모습을 바꿉니다. 그런데 본문은 우리가 기다리는 소망에 대해서 복되다. 라고 설명합니다. 복스러운 소망이라고 기록하고 있죠. 예수님께서 복이 있나니 복이 있으리라 하시던 그 복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복이 되는 소망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읽은 성경은 복스러운 소망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 이 두 가지를 우리가 기다리는 것처럼 기록해 놓았지만 원문에 정확한 번역을 옮기자면 복스러운 소망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즉 복스러운 소망, 즉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을 우리가 기다린다. 그 말을 풀어쓴 것입니다. 은혜의 양육을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을 소망하면서 살아갑니다. 은혜의 양육을 받은 사람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영광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서두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다는 말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을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미래에 나타나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은 바로 예수님의 다시 오심입니다. 이것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는 가능성에 대한 기대감이 아닙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다시 돌아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20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2:20,
20 이것을 증언하시니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아멘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이 땅에 오십니다. 영광으로 나타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구원의 계획이며, 우리의 남은 인생을 디자인하고 이끌어가는 소망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소망이 되면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닫게 되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게 됩니다. 미래의 소망을 기다리는 것은 수동적인 상태가 아닙니다. 능동적으로 움직입니다. 그렇다면 은혜의 양육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능동적으로 움직일까요? 디도서 2장 14절,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디도서 2:14,
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선한 일을 열심히 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소망에 가득 찬 사람은 예수님께서 왜 나타나셨는지,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를 지셨는지,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왜 양육하는지를 알아서 선한 일을 열심히 하면서 살아갑니다. 선한 일을 열심히 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사역과 교회를 위해서 시간과 힘과 물질로 헌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소망으로 품고 사는 사람은 선한 일을 열심히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도록 주님이 의도하셨다고 기록하지 않습니까? 그 의도에 그 뜻에 걸맞게 살아갑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는 사실을 알게 된 성도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생명, 자신의 물질, 자신의 재능, 자신의 경험, 모든 부분에 있어서 감사한 마음이 가득 차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받은 은혜를 삶으로 드러냅니다. 누가 인정해 주지 않아도 담담하게 충성을 다합니다. 디도서 말씀을 기록한 바울이 그 모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 말씀 다 함께 읽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5:10,
10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오,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아멘 바울이 다른 사도들보다 더 많이 수고했다고 이야기한 이유는 다른 사도들을 낮추거나 폄하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신이 정말로 더 많이 수고했다고 자신을 드러내는 말도 아닙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그보다 더 최선이 없도록 사역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이 받은 시간으로 자신이 받은 달란트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쉬지 않고 애써서 쏟아 부었기 때문에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역량을 온전히 사용하여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내게 주신 그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주신 사역에 모든 것을 다 바쳐 충성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수고와 충성을 보면서 바울이 진짜 은혜를 아는 사람이었구나, 라는 명제에 동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주신 비전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 눈앞에 보여진 비전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가 한국교회를 섬기고 ‘2033-50 비전’의 천병이 되어서 앞장서는 것도 미래의 소망이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우리의 최선입니다. 정말 버거운 사역처럼 보이지만, 정말 어려운 사역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사랑의 교회에 나에게 주신 목표이기 때문에 비전이기 때문에 바울처럼 모든 것을 다하여 수고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열매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은혜의 감격에 몸부림치면서 더 많이 수고하면서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우리가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 열매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우리 한국을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것을 섬기는 우리를 변화시켜 주실 줄 확신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양육을 받는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인 줄을 확신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신 것을 믿으십니까? 그 소망을 아는 사람은 반드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수고합니다. 아무리 공로를 쌓는다고 해도 그 은혜는 갚을 수가 없기 때문에 은혜를 갚기 위해 수고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목적,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위해서 수고합니다. 각자 섬기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담담하게 충성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정리하면,
오늘의 본문은 하나의 문장이며 한 덩어리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고, 그 은혜가 우리를 양육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불경건과 세속적인 욕망을 버리고, 신중하고 올바르며 경건하게 사는 것을 취하고, 복스러운 소망,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며 살게 합니다. 혹시라도 나의 삶에서 부족한 모습을 어느 정도의 타협점이나 자체적인 경계를 정해서 합리화하고 있다면, 아직 옛사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불경건한 습관에 발목을 잡히고 있다면, 섬기고 있으나 예전의 뜨거움과는 다르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면 그때야말로 우리는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를 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양육에 다시 한 번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이라도 성장과 변화가 가능할까요? 하나님은 가능케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완벽한 선물입니다.그 은혜가 친히 우리를 양육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통한 성장과 변화를 묵상하니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들고, 이전보다 더 은혜를 사모하며 은혜를 회복하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더 간절히 은혜를 구하며 나아갑시다. 은혜가 나를 양육하고 다스리도록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합시다. 그러면 모든 것이 가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나를 다스려서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만 붙들게 하십니다. 의식적으로 반복적으로 은혜와 예배의 자리에 우리가 나아갈 때 넘치는 은혜를 주실 줄을 믿습니다. 맡겨주신 비전과 사역의 기쁨으로 충성할 때 풍성한 열매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사랑의 교회 영가족,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그 주인공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요약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한시도 바로 살아갈 수가 없는 자들임을 알고,. 세상에 경건치 않은 것과 정욕에서 자유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삶을 사모해야 한다.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주님의 손에 올려드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양육 받는 삶을 구하며, 은혜의 양육으로 우리의 모습이 성숙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선한 열심으로 담담하게 충성하는 주의 일꾼들이 되어 충만한 은혜를 받는 복스러운 소망,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허락하신 은혜의 자리를 사모하고 사수하여 예비하신 은혜를 놓치지 않으므로 변화하고 성장하는 삶이 되고, 받은 은혜에 감사하고 받을 은혜를 소망함으로 은혜의 양육을 받을 때, 더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오직 주의 은혜만을 바라고 소망하면서 하나님 은혜가 우리의 삶을 지배할 때에 우리의 모든 악한 본성과 우리의 죄악된 것과 게으르고 하나님 앞에 나약한 것들이 정말로 드러나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은혜를 채우실 때에 주의 거룩함과 주의 은혜와 주의 사랑으로 우리를 덧입는 주의 용사로 하나님의 거룩한 찬양, 아름다운 자녀로 날마다 만들어 감을 기억하며, 우리가 날마다 자신을 포기하지 아니하며 주님 앞에 우리의 삶을 드려서. 그래서 늘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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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12월 27일)
제목: "말씀의 능력, 피어나는 소망"
말씀: 디모데후서 3:14~17
찬양인도: 쉐키나(이동선 부목사님)
사회: 김대규 부목사님
 
설교자: 장단희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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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3:14~17,
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ㅡㅡㅡㅡㅡ
 
장단희 부목사님.
태초 진행형 역사와 우리를 살리시는 피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이 주간 가운데 태초 진행형 생명이 역사하게 하심을 믿습니다. 2023년에 마지막 주가 이 시간 흘러가고 있습니다. 더불어 이번 주는 새롭게 시작할 2024년을 소망으로 기대하며 나아가는 주이기도 합니다. 2023년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교회를 통해 한국교회와 이 나라 이민족, 온 세계 열방 위에 위대한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새롭게 시작되는 2024년을 통하여 비교할 수 없는 충천하는 은혜로 날마다 함께하시고 새로운 역사로 이루실 것을 간절히 믿으시길 소망합니다.
 
제가 사랑의 교회에서 사역을 하게 된 지 어느덧 이제 딱 1년이 되었습니다. 저는 계속적으로 현재 진행형으로, 아주 큰 감격으로서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잠시 나누자면 사랑의 교회에서 제가 지난 1년 동안 경험했던 모든 사역들, 모든 예배들, 그리고 모든 영 가족들과의 나눔과 교재들이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기초로 하고 말씀을 중심으로 하여서 그 안에 능력이 나타나고 기적이 실체가 되는 것을 제가 생생히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의 말씀입니다. 소망이 없다고 하는 이 시대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말씀의 능력을 통하여서 이 나라가 소망이 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의 능력을 통하여서 우리의 삶이 소망이 있다고 하십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말씀의 능력, 능력의 말씀에 대하여 적극적이면서도 강력한 가르침으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그의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올바른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올바른 신앙의 자세를 명확하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동일한 신앙의 자세를 겸비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한 신앙의 자세와 사명이 있습니다. 부르심의 소명 따라 사명자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이 삶을 살아가게 하십니다. 죄로 말미암아 눈이 어두워 앞을 보지 못하는 지금 이 시대 가운데에서 얻은 죄악 세상 가운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을 환히 밝혀야 하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자로 살아가야 하는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바울 서신의 특징을 이 시간 잠깐 살펴보고 나아가자면, 바울 서신은 구원론과 종말론이 함께 갑니다. 곧 이 마지막 때에 구원받은 언약 백성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우리의 구원의 완성을 기다리며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지 계속해서 구원론과 종말론이 함께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삶의 실제가 그러하였습니다. 바울은 날마다 이 삶을 겸비하였고 견제하며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그의 삶의 중심에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 있었습니다. 그는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요한과도 같은 이 편지에서 이 마지막 편지에서 온 마음을 다하여 간절한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오직 말씀만을 붙들고 살아갈 것을 강권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만이 소망 없는 죄악 된 어둔 세상 속에 생명의 빛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지금의 시대는 말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마지막 때라고도 합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디모데후서 3장 1절을 통하여서 말세 고통 하는 때가 이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성경 역사를 돌아보자면 창세기에서 아담의 탈락 이후에 이 세상이 오염되지 않았던 적은 없습니다. 이 세상은 완전히 탈락하였고, 전적으로 오염되고, 부패하여서 탈락 이후의 모든 것은 정상적인 삶이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비정상적인 세상이고 비정상적인 인생들이었습니다. 모든 것은 죄악으로 가득 찼고, 구원이 없으면 오직 죽음뿐인 그러한 세상이 지금의 세상이고 또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인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장 18절 말씀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에베소서 4:18,
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아멘 죄악 된 세상 속에서, 죄인 된 인간에게 참된 지혜와 참선은 절대로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마음의 완고함과 무지함으로 가득 찬 인간은 결국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어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망각한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곧 빛보다는 어둠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서 살아가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죠. 한마디로 허물과 죽음뿐인 인생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일까요?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 사랑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6절 말씀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4:6,
6 어두운 데 빛이 빛이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아멘 우리 민족이 그랬습니다. 이 대한민국 땅이 그랬습니다. 변방의 나라 미개한 족속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처음 기도의 말을 빌리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땅이 바로 이 나라의 민족 대한민국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대한민국을 사랑하셨습니다. 택함 받은 주의 백성 삼으셨습니다. 합정동에 있는 양화진 선교사 묘원에 있는 그 기념물 입구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습니다. 하나님이 조선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께서 이 나라 이 민족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외국인 선교사님들을 보내주셨습니다. 외국인 선교사님들 사이에서는 우리나라는 소위 선교하기 전부터 기가 막힌 나라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영어 성경을 보면 ‘택함 받은 백성’이라는 소위 구원받은 백성이 영어로 추슨 피플(chosen people)입니다. 추슨 피플인데 이 나라의 이름이 이미 초선이었습니다. 번역하면 택함 받은 이였죠. 세계 어느 나라가 이럴까요? 예를 들면 선교사님들이 선교를 하는데 조선이니 ‘나 조선 사람이요.’ 이것이 선교사님들에게는 어떤 말로 들리냐면 ‘나 택함 받은 백성이요’, ‘나 구원받은 백성이요’ 라는 말로 들렸다는 사실입니다. 선교사님들에게 우리나라의 별명은 이미 하나님의 택함 받은 나라,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이었습니다. 이 자신감, 이 믿음으로 선교사님들이 그렇게 많은 순교의 피를 흘리시고 그 사랑으로 복음을 전도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둠뿐이었던 이 나라 가운데 복음의 빛을 비춰주셨습니다.
 
1892년 레이놀즈 선교사님은 이 땅 가운데 선교를 하러 오셨습니다. 그는 한국 성경 번역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듬해인 1893년 그의 맏아들이 태어난 그 해에 하나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이러한 아픔과 슬픔 가운데에도 선교사님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 비전을 결코 놓지 않았습니다. 이 사명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1910년 4월 2일 오후 5시에 아주 유명한 말을 남기게 됩니다. 번역 ‘다 됐소.’ 구약 성경이 드디어 완역된 것입니다. 이 나라의 민족 가운데 드디어 성경이, 신약, 구약이 완전히 번역되었던 것입니다. 어둠뿐이었던 이 나라 위에 능력의 말씀을 통하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이 비추어졌습니다. 이 나라가 복음화가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이 영광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주신 비전 ‘2033-50 비전’ 또한 기적의 실체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어둠을 물리치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때이든지 말씀 안에 거해야 합니다. 이 마음으로 오늘 함께 읽으셨던 본문 말씀 디모데후서 3장 14절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디모데후서 3:14,
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아멘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면 능력을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바꿔 말하면 이 시대가 아무리 소망이 없다고 하고, 이 시대가 아무리 어둠뿐이라 할지라도, 내 삶을 뒤흔드는 폭풍과도 같은 이 현실을 마주하는 나의 이 삶 속에서 나의 상황, 환경, 어쩌면 육신의 어려움이 될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를 흔드는 모든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력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의 복음 그 안에 거하라. 부활, 소망 안에 거하라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참된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가 이 편지를 받는 때는 AD 약 66년경이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초대교의 역사는 부흥과 함께 고난이 따랐습니다. 현실이 어떠하였습니까? 영적 아비였던 디모데의 선생님은 지금 죽음의 위기 가운데 아무것도 안 보이는 그 감옥 가운데 소위 거적 대기 하나 걸치고, 그렇게 아무런 소망이 없는 것 같은 그 현실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의 믿음의 가정들은 어떠하였습니까? 사도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에서 자신의 친애하는 제자들이 자신을 떠났고, 모두가 나를 버렸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배교를 하였습니다. 더욱이 피해 황제 네로의 핍박과 박해로 인하여서 로마 통치 하에 있는 온 저녁에 그 곳에 거하는 그리스인들에게 피바람이 불고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 속에서 디모데의 영적 아비인 바울은 피하라 도망쳐라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외쳤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외침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신앙의 자세는 어떠합니까? 언제든 어느 때이든 우리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해야 합니다. 날마다 오늘 말씀처럼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그 안에서 능력의 말씀이 승리하는 것을 경험케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모든 영가족 여러분,
냉소주의와 비관주의와 패배주의로 물든 세상의 소리들이 넘쳐나는 격변하는 이 세상 속에서 우리는 불변하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위에 거해야 합니다. 우리는 영원토록 변함없으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이 말씀을 붙들며 살아가야 됩니다. 지금의 때가 어떠하십니까? 지금의 상황이 어떠하십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신실하신 살아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배우고 확신한 일,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 안에 거하시며 날마다 능력의 삶을 실제로 경험하는 삶을 살아가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어서 오늘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가 누구에게서 이것을 배웠는지 알지 않느냐?” 묻습니다. 디모데는 그의 영적 아비 사도 바울에게서 배웠습니다. 이미 바울의 모든 삶을 보았고, 그는 삶으로써 배웠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의 어머니 유니게, 그의 할머니 루이스를 통하여서 신앙이 무엇인지 신앙의 또한 믿음의 말씀의 세대 계승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의 교회에 이 세대 계승의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믿음의 사대로 이어지는 신앙의 세대 계승에 이 축복을 주신 줄로 믿습니다.
 
디모데가 말씀의 신앙을 물려받고 이 말씀을 가르쳐 전파하는 사명을 준행하였듯이,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에게 이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말씀 위에 거하고 또 이 말씀을 가르치며 지키며, 후대에게 전파하며, 행하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말세의 모든 상황 속에서도 주의 말씀은 멈추지 않습니다. 말씀의 능력으로 말미암는 이 신앙이 전파되고 흘러가며 하나님의 복음은 소망으로 꽃을 피울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이 사명을 감당케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오늘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이 사명을 감당하는 힘을 주시기 위하여서 하나님의 말씀 특별 계시, 성경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서 일하십니다. 말씀의 능력을 힘입을 때 모든 상황 속에서 소망이 변하는 줄로 믿습니다. 함께 디모데후서 3장 15절의 말씀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디모데후서 3:15,
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이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아멘, 그렇다면 왜 말씀이 능력입니까? 왜 말씀이 내 삶 가운데 실제적인 능력이라고 우리는 외칠 수 있는 것입니까? 디모데가 어려서부터 알았던 오직 성경만이, 오직 말씀만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안에 있는 그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우리에게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오직 말씀만이 이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주는 믿음을 주는 유일한 방법이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그 어떤 잘나 보이는 지도 우리를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 수많은 종교도, 그 어떠한 지식도, 지금 서점에 가보면 수많은 베스트셀러들이 있습니다. 여러 책들이 있고 또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우리에게 구원을 줄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우리에게 구원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지혜, 내 지혜가 아닌 오직 유일한 참 지혜인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힘입어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결국은 삶입니다. 믿음은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삶이 믿음이고, 우리가 경건의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며, 삶의 경건이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이 돼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은 구원받은 성도가 이 경건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올바른 방향과 삶의 명확한 목표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함께 디모데후서 3장 16절 아주 잘 아시는 구절입니다.
 
*디모데후서 3:16,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아멘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감동을 하나님의 영감 또는 하나님의 호흡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습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었습니다. 비록 사람이 썼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완전히 신적으로 개입하셔서 완전한 영감으로서 완전 축자영감(逐字靈感-성서의 한 자 한 자가 모두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기록되었음)으로, 모든 성경을 우리에게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하고도 무오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오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 말씀드렸듯이 이 성경은 하나님의 호흡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말씀이 호흡으로 되었다. 하는 것은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을 역동케 하는 내 심장을 쿵쾅쿵쾅 뛰게 하는 살아 역사하시며 운행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처럼 하나님의 호흡이 담겨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가족 여러분,
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로 나아가고 계십니까? 이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거닐고 계십니까? 말씀을 읽으시며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그 사랑의 벅찬 숨결을 느끼며 나아가야 됩니다. 성경은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이 66건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그 거룩하시고 그 인자하시며 날마다 목자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 하나님의 신실하신 숨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처럼 말씀에는 하나님의 신적 호흡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인생의 방향을 돌이키는 참된 교사의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가르치시며, 인도하시는 목자가 되시며 교사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통하여서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주셨다면 회개(悔改)도 동시에 나오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하여서 이 가르침을 통하여서 우리에게 당연으로 나오는 것이 참된 회개인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잘못된 삶의 방향을 깨닫게 합니다.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계십니까? 어떠한 방법이 필요하십니까? 삶의 갈피를 못 잡으시겠습니까? 그렇다면 가장 먼저 말씀으로 돌아오십시오. 말씀이 우리의 삶의 방향을 깨닫게 합니다. 어두운 세상 가운데에서, 참된 삶의 목적을 참된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게 하고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돌이키게 하며 참된 회개를 하고, 하나님 안에 거하도록 인도해 주는 것입니다. 올바른 방향을 가르쳐줍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신적 호흡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 나를 사랑으로 가르쳐 주시며 인도하심을 믿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 구원을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유익하다. 지금 내 삶에 가장 큰 유익을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영 가족 여러분은 무엇을 통하여서 가장 큰 유익을 누리고 계시고 얻고 계십니까? 우리는 삶에 진정한 유익을 주는 것은 오직 단 하나,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음을 믿으며 나아가야 됩니다. 그러므로 무익한 세상 지혜에 매달리는 미련함을 이제는 모두 벗어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유익함을 깨달아, 날마다 우리의 진정한 믿음의 삶의 방향, 참된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삶의 중심이 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삶을 살아갈 때 어둔 세상 속에서 말씀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소망의 백합화가 찬란하게 피어나게 될 것입니다. 함께 디모데후서 3장 17절 말씀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디모데후서 3:17,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아멘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참된 지혜를 주시고 참된 가르침을 주시는 가운데 이제 우리로 하여금 삶을 살아가게 해줍니다. 오늘 디모데후서 3장 14절에서부터 17절 말씀은 이처럼 구원과 믿음과 삶에 대해서 명확하게 가르쳐주고, 신앙의 올바른 자세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읽으셨던 디모데후서 3장 17절에는 사실 말씀 자체에 모순이 있고 또 더 나아가서 반전이 있습니다. 어떠한 것이냐면 본래 사람은 온전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본래 사람은 절대로 선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 세상 가운데 아무리 선하게 보인다 하는 사람일지라도, 아무리 어떠한 봉사로서 어떠한 도덕적이나 예의적인 측면이 가장 최상으로 올바로 서 있다고 하는 존재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그 인생은 절대로 선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비록 온전할 수 없는 존재이고, 선할 수 없는 존재이나 말씀의 능력으로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을 날마다 믿으며 나아가시기를 소망합니다. 말씀의 능력을 통해 십자가 대속의 고열로 말미암아 우리는 성령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의 능력이 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나의 죽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나의 부활,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 생명이 나의 영원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는 부족하나 내가 연약하면 연약할수록 그리스도께서 강하시기에 날마다 우리를 강하게 하시고 힘 있게 하시며 다시 살리시는 그 생명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하십니다. 우리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절대 선이시고, 그분은 완전한 선이시기에 우리는 연약하나 이 선을 행할 능력을 우리가 갖추게 된 것입니다.
 
2023년을 마무리하고 2024년을 기다리시면서, 스스로를 돌아보시며 또한 앞으로 나아가야 될 방향을 바라보시며 어떠한 마음으로 나아가고 계십니까? 내 아내 연약함에 매몰되지 마십시오. 나의 부족함과 나의 온전하지 못함과 나의 선하지 못함 때문에 그저 무너지고 낙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비교할 수 없을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하나님의 선하심을 붙들며 날마다 말씀의 능력 안에서 온전함으로 나아가시며, 선한 능력으로 나아가시는 모든 영가족분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이 삶을 살아가게 하실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디모데에게 편지를 하면서 마지막에 이러한 고백을 합니다. 잘 아시는 고백입니다. 너무나도 멋진 고백입니다. “나는 이제 나의 달려갈 길과 모든 사명을 마쳤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의의 면류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도 동일합니다. 비록 지금 이 시대가 너무나도 흔들리는 시대이고 너무나도 어둠뿐인 죄악 된 세상이지만, 어쩌면 우리의 삶이 무너지는 삶의 현실이고 어려운 삶의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이 되시길 우리의 삶에 소망이 피어나는 것입니다.
 
한국 초기 여성 의료 선교사님이셨던 로제타 홀 선교사님은 선교지인 조선 땅에서 남편인 윌리엄 제임스 홀 선교사님과 조선 최초의 서양 결혼을 하신 그러한 선교사님이십니다. 미국에서 조선에 대한 그 소명을 품고 준비하실 때 사실 윌리엄 제임스 홀, 남편 선교사님은 다른 나라를 지망하고 계셨는데, 이 아내 분에게 한눈에 반해서 이 사역 지까지 변경하여서 조선 땅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두 분이 조선 땅에서 결혼하셔서 이제 아들 샤오도 홀을 갖게 되었고, 또 뱃속에는 에디스 홀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결혼한 지 3년쯤 되었을 때, 우리나라의 청일전쟁이 일어나게 되었고, 제임스 홀 선교사님께서는 이 사명을 마다하지 않고 그 자리로 나아가 의료 선교로 봉사하시다가 결국 이질에 걸려서 하나님 품으로 가셨습니다. 로제타 홀 선교사님의 일기에 보면, 하나님 제발 우리 남편을 살려주세요. 라는 눈물의 고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이 있으셨기에 남편을 데려가셨습니다. 그리고 미국 땅으로 잠시 건너가서 이제 그 마음을 추스리고 다시 조선 땅으로 와서 의료 사역에 조선 여성 의료 사역에 힘쓰시는 가운데, 7개월 만에 또 딸 이디스가 풍토병에 걸려서 이질에 걸려서 하나님께서 데려가셨습니다. 양화진 선교사 기념공원 로제타 홀 선교사님 그 기념관에 가면 이 일기가 실제로 있습니다. 그 딸에 머리카락이 있고 하루하루 체온을 쟀던 그 기록이 있습니다. 맥박이 하루하루 느려지고 또 그 체온이 걷잡을 수 없이 올라가던 그런 것이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그 딸마저 데려가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님은 이 사명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양화진에 가보면 로제타 홀 선교사님 이 제임스 선교사님 홀 가족 묘비에 이런 글이 쓰여 있습니다. 로마서 14장 8절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 주를 위해 그러므로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로다.”
-아멘, 말씀의 능력 위에 하나님 주신 사명을 포기하지 않고 조선 선교를 위하여서 선교사님은 모든 사명과 그 삶을 바치며 살아 가셨습ㄴ다. 그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나라 이 민족, 이 땅 가운데 복음이 꽃피고 이 한국 땅이 복음화가 되었습니다. 말씀의 능력을 힘입을 때, 상황이 믿음을 지배하는 것이 아닌 능력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믿음이 상황과 환경을 지배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연가족 여러분,
이 마지막 때에 오직 말씀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소망이 피어나게 하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이 소명자의 삶을 살아가야 됩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자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우셨습니다. 사랑의 교회가 이런 교회이기에 한국 교회의 소망이 있습니다. 이 믿음 안에서 능력의 말씀 위에서, 이 확신 가운데 날마다 말씀 위에 거하시며, 가르치고 전파하시며, 다음 세대에게 이 신앙을 물려주시고, 주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실 때 풍성한 은혜를 누리시며,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기쁨을 누리시는 연말연시의 모든 시간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소망합니다.
 
♣요약
하나님 말씀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소망이 피어나서 날마다 말씀을 통하여 믿음의 반석 위에 굳건히 서야 하며, 격변하는 세상 속에서 변함없는 사랑과 은혜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께 소망함을 두어야 한다. 오직 성경만이 구원에 이르는 참된 진리이자 지혜임을 믿으며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자로서 삶의 명확한 방향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참된 선을 누리며, 말씀을 의지하고 배우고 확신하는 신앙의 축복된 자로 세상 사람들 앞에 본이 되어 주님을 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지표가 되며 가르치고 배워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단순히 배우고 암기하는 교과서가 아니며 시대적 상황에 제약되는 역사서도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구체적인 우리의 삶에 적용되어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인도하는 살아있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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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12월 20일)
제목: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먈씀: 마가복음 5:35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부목사님)
설교자: 이민건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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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5:35-42,
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0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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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살아계신 아버지 오늘 수요 저녁 기도회를 통해 여전히 죄로 인해 공고한 우리들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다는 분명한 믿음과 그 사실로 다시 기쁨을 회복하여 주옵소서. 주님을 사랑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성탄의 달 12월에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한 수요 저녁 기도에 참여하신 성도 여러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이 예배를 통해서 예수님을 꼭 만나셔서 오늘 설교 제목처럼 크게 놀라고 놀라는 인생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시 한 번 더 간절히 소망 드립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말씀은 마가복음 5장 35절에서 42절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살면서 크게 놀라고 놀랐던 경험 혹시 계십니까? 제가 10년 전의 일인데요. 지인 1명이 로또 한 장을 주시더라고요. 거절했습니다. 사실 저는 목사라서 로또를 피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습니다. 제가 아는 로또는 지난번 담임 목사님께서 이 설교 시간에 말씀하신 창세기 12장 4절에 나오는 그 롯만 제가 알고 있습니다. 바로 이 로또인데요. 이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여하튼 그분과 헤어지고 기차역으로 갔는데 그분이 전화가 오셨습니다. “목사님 가방에 로또를 넣어두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가방을 열어서 생전에 처음 보는 그 종이 그 조각이 뭐라고 심장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저의 심장을 뜨게 하는 그 마법의 종이를 제가 이제 보기 시작했는데요. 한 칸씩 한 칸씩 보는데 첫째 자리도, 둘째 자리도, 셋째 자리도 맞는 겁니다. 그때 제가 기차역에 있었는데요. 저도 모르게 기차역에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와, 대박!!! 그런데 저도 정말 저를 놀라게 만드는 일은 그다음 자리부터였습니다. 여러분 넷째 자리도 맞는 겁니다. 정말 오늘 설교 제목처럼 제가 크게 놀라고 놀랐습니다. 정말 여러분 심장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찬송가 288장의 가사처럼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저를 오랜 가난 가운데서 구원해 줄 그 종이만 보였습니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하나님은 이 믿음 없는 목사가 물질을 의지하면서 살까 봐 두 자리는 모두 틀리게 하셔서 저는 5만 원에 당첨이 되었습니다. 사실 제가 1등을 했다면 절대 여러분에게 이 자리에서 말하지 않을 겁니다.
 
오늘 본문에도 여러분 이 크게 놀라고 놀라는 사건이 등장합니다. 이 사건은 제가 로또 1등이 될 뻔한 사건과는 정말 비교도 안 되는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교회를 오랫동안 다니신 분들은 몇 번 들어봤던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본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제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25절에 나오는 한 여인이 믿음이 좋아서 병이 나았다. 그리고 뒤에 나오는 야이로 라는 사람이 아주 큰 믿음이 있어서 병이 낫고 딸을 살렸다. 여러분 이 정도의 의미만을 가진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왜냐하면 저와 여러분이 들고 있는 이 성경은 우리 인간의 믿음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책이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시며, 인간을 향한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에 대부분의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믿음이 매우 컸기 때문에 오늘 제가 설교 제목으로 정한 크게 놀라고 놀라는 이런 기적적인 일이 생긴 것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크고 크게 놀라고 놀라는 일이 오늘 본문의 주인공들에게 일어난 것일까요? 먼저 오늘 본문의 사건은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사건입니다. 혜성같이 등장한 예수란 서른 초반의 청년이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니면서 수많은 기적들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길을 가다가 무슨 기준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12명의 제자들을 세우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 라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개념을 이야기하고 다니셨고,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정확한 타이밍에 폭풍이 불고 있는 배 안에서 주무시다가 일어나서 바다를 꾸짖으셨는데, 갑자기 바람이 그치고 심지어 성난 이 바다를 잠잠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사건 바로 직전에 거라사 인 지방에서는 귀신 들린 사람이 이 청년을 보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고 말할 만큼 그는 그 시대에 혜성같이 등장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이었죠 그 청년이 배를 타고 다른 곳으로 건너가고 계셨는데, 이미 이 청년의 소문을 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회담장 중에 한 사람이고 이름은 야이로 라고 하는 사람이 갑자기 예수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간곡히 부탁을 하고 있는 거예요. 회당 장은 당시 회당의 건물 기구 두루마리 성경을 관리하는 사회적 지위가 매우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여러분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간곡히 부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22절 23절 함께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마가복음 5:22-23,
22 회담장 중에 하나인 야유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앞에 엎드려.
23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아멘 그런데 여러분 이게 웬일입니까? 그 시대에 회담장의 지위가 높아서 그런지 아니면 그가 너무 간절하게 부탁해서 그런지 예수님은 그를 따라 나서십니다. 24절도 한번 보세요.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 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큰 무리가 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상상이 가십니까?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서로 밀고 당기고 있었습니다. 아마 거리가 홍대 거리처럼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한 여자가 등장합니다. 25절, 26절 제가 한번 읽어드릴게요.
 
*마가복음 5:25-26,
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라고 기록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녀는 혈루 증으로 12년간 고생을 하고 있는 여자였습니다. 여러분 혈루증이란 오늘날로 말하면 만성 자궁 출혈증입니다. 보통 여자는 생리 때만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피가 나오지만 이 병은 생리와 상관없이 불규칙적으로 한 번 하열하면 멈추지 않는 아주 무서운 질병이었습니다. 당시 의술이 지금처럼 발전되지 않았기에 26절에 나오는 것처럼 많은 의사에게 그 여자는 많은 괴로움을 받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처럼 여성 병원도 있지 않았습니다. 비록 의사였지만 다른 남성에게 여성의 하체를 보여준다는 것은 얼마나 수치스러웠겠습니까? 또한 그 여자는 12년간 긴 세월을 이 질병으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12년, 4,380일 시간으로는 10만 5,120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 설명해 드린 고통은 그 시대에 시대적 상황, 종교적 상황을 배제하고 설명 드린 것입니다. 이 여자는 더 이 여자에게 있어서 더 큰 문제는 혈루 증으로 인해 모두에게 부정한 여자로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 라는 것입니다. 레위기 15장에 보면 이 유출 병 기류에 대해서 아주 상세하게 나와 있는데요. 이 여인은 레위기에 나오는 율법처럼 유출 병으로 인해 부정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실 이 여자가 유출 병으로 부정한 것도 문제였지만 이 여자가 걸린 유출은 정상적이 아닌 비정상적인 유출이었습니다. 생리와 같은 정상적인 유출은 옷을 빨고 목욕을 하고 정결케 하면 해결이 됩니다. 하지만 이 유출 병에 걸린 부정한 사람은 속죄제를 들여서 속죄할 만큼 하나님 앞에 또한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죄 있는 사람으로 취급을 당한 것이 그 여자를 정말 더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레위기 15장 25절 말씀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레위기 15:25,
25 만일 여인의 피의 유출이 그의 불결기가 아닌데도 여러 날이 간다든지 그 유출이 그의 불 결기를 지나도 계속되면 그 부정을 유출하는 모든 날 동안은 그 불결한 때와 같이 부정한즉.
그의 불결기가 아닌데도 여러 날이 간다든지 그 유출이 그의 불 결기를 지나도 계속되면 제사장은 그 한 마리는 속죄제로 여호와 앞에서 속죄해야 된다. 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죄가 있는 여인이었다. 라는 거예요. 그리고 제사장은 제사장에게 가서 그 죄를 해결해야 하는 여자였습니다. 이런 부정한 여인이 지금 수많은 군중들을 해치고 예수님의 손에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여자가 이렇게 행동한 동기에 대해서 또 이렇게 설명합니다. 28절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5:28,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이로라.
-곧이어 성경은 그녀의 혈류 근원이 곧 말랐고 병이 나은 줄 그녀 스스로가 느낄 만큼 매우 강력한 치유가 있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의 몸이 느낄 만큼 강력한 치유가 그 순간 일어났습니다. 요즘 고등학생들이 힘들어하는 3년의 시간이 아니라, 그 4배에 시간 동안 그녀를 괴롭게 하던 질병이 그 뿌리까지 나았으니까 여러분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저 같으면 소리를 지르고 정말 난리가 났을 겁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기쁨을 느낄 틈도 없이 우리 예수님은 갑자기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옷의 손을 되었느냐?” 여러분 예수님의 의도를 전혀 알지 못했던 제자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런 겁니다. 왜 당연한 걸 물으십니까?” 그때 예수님은 이 일을 행한 여자를 보려고 주변을 둘러보십니다. 그때 여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33절 말씀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마가복음 5:33,
33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여자는 이실직고 합니다. 이런 말이 되겠죠? 예수님 저는 유출 병으로 12년간 고생을 했습니다. 많은 의사들에게 가서 수치를 당하고 재산까지 다 허비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어요. 방금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댄 이후로 제 몸이 완전히 다 나았습니다. 부정한 제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여자가 단순히 예수님 몰래 예수님 옷자락에 손을 댄 사실을 들켜서, 지금 예수님 앞에 엎드려 여러분 지금 두려움에 떨고 있었을까요? 사실 이 사건은 지금 설교를 듣는 저와 여러분에게는 별 감흥이 없지만 당시에는 여자가 병을 나았던 이 기적만큼이나 이 여자의 고백이 이 상황을 함께 지켜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매우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유출 병이 있는 여자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다면 예수님도 그 순간 부정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죄가 없다던 그분이 그 순간 죄인이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자가 전한 그 속사정을 들은 주변의 사람들은 분명히 웅성거렸을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저 능력을 행하는 예수란 청년이 부정해졌대. 그리고 예수님 옆에서 이 상황을 부정이라는 의미가 어떤 의미이고, 그리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가장 잘 알았던 회당 장 야이로가 여러분 지금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어요. 성경에 나오지 않은 이야기를 제가 상상을 조금 더 더해서 죄송하지만 분명히 이 야이로는 율법을 가르치고 절하는 회당장이라서 분명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겁니다.
 
예수님 유출 병에 걸린 여자와 접촉했으면 예수님도 부정했을 건데, 율법대로 지금부터 저녁까지 무리와 격리를 해야 하는데, 내 딸은 어떡하지? 저 여자가 진짜 나은 것이 맞다면, 지금 가서 제사장에게 보여야 하는데, 나는 1초라도 급한데 난 어떡하지 이런 생각들로 야이로의 마음은 매우 힘들었을 겁니다. 야이로의 마음이 매우 다급했다고 생각하고요. 특별히 그가 가진 신학적 율법적 기준들 때문에 야이로가 매우 혼란한 상태였을 것 같습니다.
 
작년에 있었던 일인데요. 갑자기 아버지가 쓰러지셨다고 제 동생이 전화가 왔더라고요. 정말 그 순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눈물만 주르륵 흘러내렸습니다. 급하게 아내와 함께 밤늦게 아버지가 계시는 대구로 내려갔는데 다행히 약물 부작용이란 의사의 소견을 받고 다음 날 퇴원을 할 수가 있었는데요. 제가 그때 밤늦게 대구로 운전해서 내려가면서 차 안에서 지금까지 제가 수십 년간 공부했던 신학적 율법적 가치들은 정말 일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냥 힘없이 기도만 나오더라고요. “하나님 우리 아버지 좀 살려주세요.” 지금은 아닌 것 같아요. 야이로의 신정 또 아마 이와 같았을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고민할 틈도 주지 않고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35절 말씀 여러분이 한번 읽어주시겠습니다.
 
*마가복음 5:35,
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 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여러분 이게 뭡니까? 아직 예수님의 말씀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자신이 그렇게 사랑했던 딸이 죽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지금은 작고하신 고 이어령 씨가 쓴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책에 그는 죽음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것은 타인의 죽음이었어. 동물원 창살 철창 속에 호랑이였지 지금은 아니야. 철창을 나온 호랑이가 나에게 덤벼들어 바깥에 있던 죽음이 내 살 갓을 뚫고 오지.’ 이어령씨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책에서 회고한 내용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야에로의 딸이 딸의 죽음은 회당 장 야이로에게 바깥에 있던 죽음이 자신의 살 갓을 뚫고 들어오는 매우 실존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이 절망을 깨고 우리 멋진 예수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6절을 한번 보세요.
 
*마가복음 5:36,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 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아멘, 예수님의 목소리의 톤이 어떠했는지, 그 목소리가 컸는지 작았는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은 회당 장에게 분명하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고 38절에 나오는 것처럼 회담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미 통곡함을 보시고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말씀하셨어요. 당시 장례식에는 헌화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집에서는 통상 2명의 피리 연주자들과 손으로 두드리는 이 타악기를 갖고 연주하는 장례 풍습이 있었죠. 회당장의 사회적 지위로 볼 때 이 규모는 훨씬 더 크고 모인 사람들도 더 많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헌화하는 자들의 소리가 야이로의 마음에 딸의 죽음에 대한 더 확실한 객관적인 증거와 40절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고 있는 사람들의 비웃음을 보면서 이 아이로는 절망했을 겁니다. 요즘 사람들의 말을 빌리면 야이로 딸의 죽음은 팩트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야이로의 부부와 자기와 함께한 자들을 데리고 죽은 아이가 있는 이 절망의 한가운데로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41절처럼 행동하십니다.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내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시니라.” 아람어 이 달리다굼은 탈리타 소녀, 어린아이의 의미와 쿰 일어나라. 라는 뜻의 결합된 단어입니다. 학자들은 당시 이 어머니가 사랑하는 자녀들을 깨울 때 따라 일어나 탈리타 쿰. 라고 말했다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41절을 자세히 보시면 근원적으로 이 사실을 기록하고 이 본문을 읽는 우리에게도 분명히 무언가를 전하고 싶은가 봅니다. 여러분 41절을 다시 한 번 더 보시면요. 이렇게 기록합니다.
 
*마가복음 5:41,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여러분 그냥 예수님이 말을 하면 되는데요. 왜 굳이 손을 잡았겠습니까? 41절에 여러분 그 아이 누굽니까? 네, 야유로의 딸이 맞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그 아이의 상태는 지금 어떤가요? 네 죽은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 그 아이는 죽은 그 상태부터 그 순간부터 부정해졌다. 라는 말입니다. 민수기 5장 2절에서 3절을 보시면요. 이렇게 나와 있어요.
 
*민수기 5:2-3,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모든 나병 환자와 유출 병이 있는 자와 죽음으로 부정하게 된 자를 다 진정 밖으로 내보내되.
3 남녀를 막론하고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어 그들이 진영을 더럽히게 하지 말라 내가 그 진영 가운데에 거하느니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예수님은 이 사건만 해도 벌써 율법에 의하면 두 번이나 부정하게 되신 겁니다. 유출병자와 접촉을 했고, 죽음으로 부정하게 된 자를 만져서 부정하게 된 것이죠.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스라엘 진정 밖으로 지금 당장 내보내야 하는 부정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정한 30대 초반의 청년이 죽음과 부정과 모든 율법을 초월한 선포를 지금 41절 42절에서 하고 있습니다. 우리 큰 목소리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마가복음 5:41-42,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아멘 내가 내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내가 내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이렇게 예수님이 말씀하시니까 죽음으로 부정하게 된 그 소녀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던 내 사랑하는 딸이 30대 청년의 말씀에, 즉각 반응에 지금 아버지 야이로의 눈앞에서 일어나 여러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 사건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이 죽었던 딸이 갑자기 살아나서인지 아니면 하루에 두 번 부정을 저질렀던 이 메시아로 불리던 한 사람이 행했던 두 번의 부정을 이기고, 심지어 율법과 죄의 문제를 넘어서는 놀라운 기적 때문인지, ‘크게 놀라고 놀라워했다.’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오늘 이야기는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립니다.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여러분은 복음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12년 동안 혈루 증으로 고생하고 있는 저와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그 고생을 기쁨으로 바꾸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 그것을 복음이라고 믿습니다. 또한 12년 동안 너무나 사랑스럽게 키운 딸이 갑자기 죽었던 그 절망의 순간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친히 개입하셔서 병을 치유해 주시는 것도 복음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죄로 부정해진 저와 여러분, 우리 인생의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시려고 우리 인생의 가장 깊숙한 곳에 들어오셔서 친히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저와 여러분의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그것이 이 위대한 사실이, 바로 복음이라고 믿습니다. 또한 이 복음을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여러분 이 예배 때마다 크게 놀라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오늘 본문은 저와 여러분에게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예배 때마다 커피 한 잔 하면서 다리를 꼬면서, 핸드폰이나 보면서, 방관하는 자세로 예배를 드리면 안 된다. 라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시간 또 말씀으로 저와 여러분의 부정해진 모든 것을 살려내는 기적의 현장이 바로 이 예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복음, 이 변화의 시작, 크게 놀라고 놀라는 것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만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마가복음 5장 35절 이렇게 시작하는데요.
 
*마가복음 5:35,
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아멘 놀랍게도 제가 복음서에 ‘아직 말씀하실 때’ 라는 구절을 설교를 준비하면서 찾아보니까 10번 넘게 나오더라고요. 국어사전에 ‘아직’이라는 단어 이런 뜻이 있었습니다. 아직 부사로 어떤 일이나 상태 또는 어떻게 되기까지 시간이 더 지나야 함을 나타내거나 어떤 일이나 상태가 끝나지 아니하고 지속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아직 사업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아직 나의 사랑하는 가족이 사경을 헤매고 있으며, 아직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고,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연약한 모습으로 안아주신 내 본당에 앉아 기도밖에 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 예수님이 한 번만 말씀하시면 예수님만 저와 여러분의 곁에 계시면, 크게 놀라고 놀라는 일이 지금도 저와 여러분에게 일어날 수 있음을 여러분 이 시간 꼭 기억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래서 우리 오정현 담임 목사님께서 여러분 여기서 매주 목이 터져라 말씀하시잖아요. 기적의 토비새 나오라고요. 평범한 인생이 신적 개입을 통해 비범한 인생이 된다고요.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만나러 오는 장소에 온 힘을 쏟아서 나오시기를 다시 한 번 더 소망합니다. 그러면 ‘크게 놀라고 놀라운 일’이 저와 여러분에게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이 복음을 매주일, 매 토비새 때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 말씀을 듣는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에 말씀대로 믿고 순종하여 따라서 ‘2033-50의 비전’뿐만 아니라 2023년 남아있는 2주밖에 없지만 기적의 주인공이 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요약
모든 부정을 이기신 전능하신 예수님을, 우리도 말씀으로 만나서 우리 모두 질병과 죽음의 문제까지도 해결 받는 은혜를 경험해야 한다. 두 번의 부정한 사건도 심지어 소녀의 죽음까지도 우리 예수님의 복음 앞에 사라지는 능력을 오늘 말씀을 통해 들었듯이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도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을 믿고 12년 동안 혈루 병 걸린 여인처럼 긴 시간 동안 고통 가운데 있는 우리의 문제도, 12살 때는 정말 미래가 창창한 아이에게 일어난 문제도 우리 예수님 앞에 있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음을 믿고, 우리 인생도 지루하고 힘없고 문제투성이의 인생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크고 놀라고 놀랄 수 있는 복된 인생이 되고, 경탄할 만한 인생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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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12월 06일)ㅡ평신도제자훈련 수료 및 파송헌신예배
제목: "제자 훈련 수료자가 지켜야 할 원칙"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말씀: 마가복음 1:9-11
대표기도: 김기상 장로님
사회: 김대규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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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9-11,
9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10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1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원래 창립 우리 탄생 45주년 귀한 이 한 해에 제자반, 사역반, 전도폭발 수료하는 여러분들 축하합니다. 박수...
-여러분 사랑의 교회의 사역을 이렇게, 저렇게 사람들이 이렇게 나름대로 평가를 하지만 사랑의 교회 사역의 비밀 병기가 뭘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참 오늘 놀라운 게 말이에요. 들어오는데 꽃 파는 장수들이 있더라고요. 그 장수들,.. 지난주 수요일 임직 식 할 때도 꽃 파는 장수들이 많이 나오셨는데, 제가 보면서 참 저 장수들이 신기했어요.. 그러니까 이 시간이 중요할 줄 알고,,, 사랑의 교회 보이지 않는 사역의 토대 그리고 영적으로 어떤 기능이 있는, 토비새, 제자반, 사역반, 순장반, 특새..등,, ..오늘도 우리 전도폭발도 있겠죠? 그러니까 또 뭐가 있어요? 이런 여러분들 나름대로 이렇게 생각하겠지만 사랑의 교회 사역에 보이지 않는 비밀병기가 뭘까? 역시 훈련생은 다릅니다.

▷제자 훈련의 목적과 중요성.
1. 복음에 대한 정확한 자기 이해.
2. 인격적 성령 사역에 대한 은혜.
3. 내가 누구인가는 거룩한 정체성에 대한 사명에 대한 정체성

-인공지능 시대에 대한 대응 전략 수립
사랑의 교회와 2033 50 비전을 향한 각자의 은사를 온전히 내어드리는 일에 집중
복음에 대한 정확한 자기 이해를 위한 노력
인공지능 시대에 대처할 수 있는 믿음의 역량 강화.

-사랑의 교회, 예수님처럼 사는 제자의 삶
제자 훈련생 525명이 땅 끝까지 이 세상 끝 날까지 예수님처럼 사는 온전한 제자의 삶을 살게 해달라고 기도함
수요자 모두가 사랑의 교회와 2033 50 비전을 향해 각자 받은 은사를 온전히 내어드리며 주님의 기쁨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함
한국교회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영적 회배주의와 회의주의, 비관주의와 냉소주의에 젖어 침체에 빠진 한국교회를 불 이제는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는 성령님의 역사로 부여된 소망의 역사를 선포하게 해달라고 기도함.

-문화관의 세 가지
문화관을 잘 감당될 수 있도록 세 가지가 필요함
첫째- 복음에 대한 정확한 자기 이해,
둘째- 인격적 성령사역에 대한 은혜,
셋째- 거룩한 정체성에 대한 사명에 대한 정체성임.

-생성 형 AI의 등장
지금 애들은 AI에 익숙해져서 좋은 음악을 들려달라고 하면 좋은 음악이 나옴
우리 시대 때보다 훨씬 더 힘들 것임
생성형 AI는 데이터 분석뿐만 아니라 새롭고 독창적인 콘텐츠를 생산하는 AI임.

-선진국의 교회
선진국에 사는 분들이 우리 대한민국에 와가지고 우리 교회 보면 눈이 휘둥그레짐
선진국 중진국 후진국 그리고 오늘 이 인공지능 시대 우리 아이들, 우리 아이들은 지금 제 손녀딸 저 애들이 앞으로 살면 좋겠음 기가 막힌 시대에 우리는 한 결 같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 뭘까? 어떤 경우에도, 어떤 경우에도 통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봐야 함.

-예수님의 세례
예수님이 요한의 세례를 받은 이유는 우리 때문임. 복음에 대한 정확한 자리가 있을 때, 나도 모르게 나타나는 놀라운 자세의 결과임. 신앙생활은 반드시 복음의 깊은 신비를 깨달을 뿐만 아니라 하늘 문이 열리는 능력을 발휘해야 됨.

-알리스타 메크라스의 방한
전 세계에 가장 강력한 선교학자의 신학자 알리스타 메크라스가 올 것임. 12월 25일 성탄 절날 지붕이 번쩍번쩍한다고 국수, 전라도 한 번 마지막으로 기회가 있는 것임. 복음에 대한 정확한 자기 이해가 필요함.

-사랑의 교회 믿음의 역량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이요, 주님이 사랑하시는 딸들임을 죽을 때까지 확고히 갖고 있으면 침체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면 자매들은 하나님 나라의 공주가 되는 것임. 사랑의 교회는 믿음의 역량에 의해 결정된 개인도 마찬가지임. 사랑의 교회에 갖는 믿음의 힘, 믿음의 역량, 사랑의 교의 힘은 어디서 나오냐? 결국은 겉으로 날 때 무슨 건물이다, 무슨 사람들이 모인다. 이런 외적인 것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랑의 교회 내에 이런 사명을 가진 평신도 지도자들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서 우리 교회가 살고 죽는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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