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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01월 24일)
제목: "약해질 용기, 신앙의 꽃"
말씀: 창세기 32:28
찬양인도: 쉐키나(이동선 부목사님)
사회: 강건우 부목사님
설교자: 유재원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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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2:28,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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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수요 저녁 기도에 참여하신 모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수요 저녁 기도회를 통해 회복을 넘어 부흥의 르네상스를 경험하는 복된 시간되시길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2장 28절입니다. 제가 가진 성경책으로 구약 성경 50면에 있습니다. 한 절이므로 저와 합독하시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함께 읽습니다.
 
창세기 32:28,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아멘, 참으로 긴 여행이었습니다. 긴 인생의 끝자락에 다 닿은 야곱은 이제 고향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향으로 향하는 야곱에게 돌아온 것은 따뜻한 환대가 아닌 여전히 사그라들지 않는 형의 분노였습니다. 형이 400명을 거느리고 자신을 향해 달려온다는 사실을 들은 야곱은 심히 답답하고 두려웠습니다. 야곱은 쌍둥이로 자랐기 때문에 형, 에서의 불같은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형의 분노를 누그러뜨릴 계략을 찾기 시작합니다. 야곱은 형의 진노를 누그러뜨릴 선물이 필요하다 생각하여 염소와 낙타와 나귀 등 많은 가축들을 형을 위한 선물로 준비했으나 이상하게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불안한 마음으로 아내와 자식들, 모든 선물들, 모든 것들이 먼저 강을 건너가게 한 야곱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밤 야곱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밤을 맞이하게 됩니다.
 
오늘의 창세기 32장 24절에서는 야곱의 현재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제가 읽습니다.
 
*창세기 32:24,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야곱은 강 건너편에서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형 에서 때문에 강을 건너지 못하고 밤을 맞이하게 됩니다. 모든 걸 떠나보내고 야곱은 지금 혼자 남아 있습니다. 창세기 32장에서 만나는 이 위태로운 야곱의 모습 인생의 위기에 빠져 있는 나루터의 야곱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의 모습일지 모르겠습니다. 인생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걸 다 했지만 여전히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고독과 불안의 밤을 맞은 야곱의 모습은 첨단 산업과 인공지능으로 무장했지만 여전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얍복강의 야곱은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깊은 고독과 절망의 밤을 맞이합니다. 누구나 외로워하고 힘들어하는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나 다 자신이 무서워하는 깊은 절망의 밤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 오신 성도님들 중 누군가는 자식의 성공과 학업 때문에 고민하실 지도 모릅니다. 또는 어떤 분은 일터의 문제로 인해, 신앙적 문제로 인해, 관계의 문제로 인해 깊은 절망의 밤을 홀로지 새고 있을지 모릅니다. 또한 어떤 성도님께서는 말하지 못하는 개인의 비밀한 문제로 홀로 눈물로 밤을 지새며 뼈아픈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밤에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건넌 야곱이 한 가지 선택을 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힘으로 위기를 돌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이미 자신의 힘으로 많은 것들을 이루었습니다. 그가 이룬 모든 것들이 그의 결과물입니다. 두 아내와 두 여종과 많은 아들들과 수많은 양떼와 소떼들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지금 자신이 이룬 모든 것들을 떠나보내고 홀로 남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곱의 이때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그동안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들을 이룩해온 야곱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 비참한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야곱을 이런 상태로 내버려 두시는 것일까요?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무언가 중요한 말씀을 하시려는 것 같습니다. 홀로 밤을 지새며 고뇌에 빠져 있던 야곱에게 한 가지 특수한 상황이 발생합니다. 야곱은 달밤에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와 사력을 다해 씨름을 하게 됩니다. 창세기 32장 24절입니다. 제가 읽습니다.
 
*창세기 32:24,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씨름은 ‘아바크’라는 말인데 먼지라.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씨름은 아바크라는 말인데 먼지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이 씨름은 온몸에 흙먼지가 가득 묻을 정도로 매우 치열하고 격렬한 몸싸움을 뜻합니다. 생사를 건 치열한 씨름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 씨름은 밤이 새도록 계속됩니다. 그러나 밤이 새도록 계속된 이 씨름 가운데 진정한 승자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무승부로 결판이 나는 것 같습니다. 이때 야곱과 씨름하는 정체불명의 인물은 씨름 도중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25절입니다. 이번에는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32:25,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야곱과 씨름을 하던 사람은 자신이 이기지 못하자 야곱의 환도 뼈 즉 넓적다리의 위쪽 가운데 뼈를 쳐서 탈골시킵니다. 오늘 읽으신 개혁 개정 버전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허벅지 관절이 어긋났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이후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부위에 힘줄을 먹지 않기 시작하는 전통이 생겼다고 합니다. 이 일로 인해 야곱은 힘이 급격하게 약화되며 씨름에서 패자가 되는 상황으로 몰리게 됩니다. 과연 이 싸움은 누가 이기게 될까요? 위기(危機)에 몰린 야곱이 이번에는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환도 뼈를 부러뜨린 그 사람에게 자신을 축복하기 전에는 놓아주지 않겠다고 말을 한 것입니다. 상황이 참 이상합니다. 난데없이 달밤에 씨름을 하는 것도 야곱에게 씨름을 걸어온 사람도 씨름을 하다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關節)을 치는 상황도, 허벅지 관절이 어긋난 야곱이 자신의 뼈를 어긋나게 한 사람에게 축복을 해달라는 이상한 부탁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야곱과 씨름을 하던 이 사람은 야곱이 자신을 놓아주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7절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창세기 32:27,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내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다.
-그 사람은 야곱의 이름을 묻습니다. 야곱의 이름의 뜻은 잘 아시듯이 ‘속이는 자 발 뒤꿈치를 잡은 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야곱의 무언가를 바꾸려고 하는데요. 그게 무엇인지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28절 말씀인데요.
 
창세기 32:28,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에 저희가 한 번 더 같이 합독하도록 하겠습니다. 드디어 야곱과 씨름하던 그 사람의 정체가 밝혀졌습니다. 야곱과 씨름을 시도한 존재는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드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굳이 야곱과 씨름을 하셨을까요? 하나님과 씨름을 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누가 이기겠습니까? 온 땅의 주인이시며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씨름을 한다면 씨름의 모든 기술을 마스터하고 계실 씨름의 근원 되신 하나님이 이기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지금 왜 도대체 야곱과 씨름을 하고 계신 것일까요? 여기에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숨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과 씨름을 하시는 이유는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씨름을 통해서 야곱의 인생을 새롭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누군가의 인생을 온전하게 하시기 위해서 씨름을 걸어오실 때 절대로 지는 씨름은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늘 이기는 씨름만 하십니다. 하나님은 지는 씨름 따위는 아예 염두에 두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온전하게 하시기 위해 씨름을 걸어올 때, 자신이 이길 수 없는 그 씨름 때문에 자신의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 것 같은 그 씨름 때문에 공평하지 못하다고 하나님께 불평을 하곤 합니다.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무엇이죠? 약해지는 것입니다. 패배하는 것입니다. 내 뜻대로 돼야 하는데, 내 자녀의 성적이 더 좋아져야 하는데, 일터에서 더 큰 성공을 거둬야 하는데, 내 인맥이 더 넓어져야 하는데 문제가 해결돼서 좋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야 하는데, 본이 되는 모습이 되면 좋겠는데, 내가 저 사람보다는 더 열심히 살았으니까 하나님께서 이만한 보상을 내게 해주셔야 맞지 않는가?, 이런 식으로 고백하며 하나님 이건 공평하지 않습니다. 제가 원하는 바는 저의 뜻은 도대체 언제 이루어진단 말입니까? 하나님께 불평을 하는 경우들이 분명 있습니다. 저는 왜 늘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까? 왜 약해져야만 하는 것입니까? 주님,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맞습니까? 주님, 이것이 성도의 삶이 맞습니까? 주님, 저는 왜 이럴 수밖에 없단 말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어떻게 행동을 하겠습니까? 지혜로운 사람은요 여기에서 약해질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이 내 삶 가운데 훨씬 유리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나의 삶 가운데 이루어질 때 우리의 삶이 내가 원하는 뜻과 방향보다 훨씬 더 풍요롭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야곱은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은 지금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임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씨름에 더 간절하게 야곱이 매달렸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 누구보다 간절한 이 야곱의 인생을 지금 이 순간 새롭게 하십니다. 32장 28절 저희 다시 한 번 읽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32:28,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십니다. ‘스라’는 히브리어로 싸웠다 씨름했다. 다스린다. 라는 뜻입니다. 엘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이 해석을 보통 저희가 이야기할 때 성경의 말씀에 따르면 내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이렇게 해석을 하곤 합니다.
 
그런데 제임스 보이스라는 목사님께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름 중에 동사의 하나님의 이름이 사용될 때 하나님은 그 동사의 목적어가 아니라, 항상 주어여야 한다.” 이렇게 말입니다. 실제로 항상 동사에 하나님의 이름이 섞여 나왔을 때는 하나님은 목적어가 아니라 주어였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이 주어라는 뜻입니다. 다니엘이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이 이름은 하나님이 심판받는다. 이렇게 해석하면 틀린 해석이 됩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신다. 하나님이 재판하신다. 이렇게 해석을 해야 맞습니다. 사무엘이라는 이름의 뜻은 어떻습니까? 사무엘이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었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들으신다. 이렇게 해석을 해야 맞습니다. 같은 원리로 해석을 한다면 오늘 저희가 함께 봉독했던 창세기 32장 28절의 말씀 해석은 조금 바뀌게 됩니다. 어떻게 바뀌게 됩니까? 스라-싸웠다 씨름했다 다스린다. 엘, 하나님을 이 부분을 뒤집으면 이렇게 해석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기신다. 하나님이 싸우신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야곱의 인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에서를 속여 장작 권을 얻어냈지만 형과의 관계에서는 처참한 실패를 맛봤습니다. 눈 먼 아버지를 속여 축복은 받아냈지만 그는 아버지를 아프게 한 아들이었습니다. 형에게는 더 없는 실패를 안긴 동생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야곱에게 만족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많은 것들을 가졌을지라도 말입니다. 평생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원하는 것을 얻어냈고 성취했던 그 야곱이 지금 하나님과 씨름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만약 여러분들에게 씨름을 걸어오신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기시겠습니까? 지시겠습니까? 그런데 그 씨름에서 야곱은 지금 어떤 상태가 되죠? 뼈가 어긋나는 고통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야곱을 보고 내가 하나님과 이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야곱의 지금 모습이 승리자의 모습입니까? 하나님을 이긴 사람의 모습이 맞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야곱의 지금 모습은 다리를 절뚝이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치셨기 때문에 이런 고통을 가지면 다리를 절뚝이면서 걸을 수밖에 없습니다. 약해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야곱은 패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니가 하나님과 이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은 역설의 책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야곱의 모습을 보고 그래 야곱아, 이제는 내가 승리자다. 라고 말씀하시는데, 약해진 야곱에게 패배한 야곱에게 승리자라고 하신 것이죠.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지금 야곱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야곱은 이제 서야 약함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약해질 용기를 갖게 된 것입니다. 내 뜻이 중요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중요함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씨름을 걸어오셨습니까? 그때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숨어 있습니다. 약해지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약할 때 하나님으로 인해 강해지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강하심이 진짜 나의 삶의 강함이자 승리라는 것을 깨닫는 자들이 바로 성도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약해질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진짜 힘과 능력을 공급받아 매일, 매일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약할 때 역사(役事)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약하기 때문에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약한 것은 패배가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를 대신하여 일하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힘으로 살아오셨습니까? 그렇다면 야곱처럼 나의 모든 힘과 능력으로 이기는 삶을 살려 했던 그 시간들을 뒤로 하고 힘을 빼고 약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이렇게 기도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나님 저는 약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강하십니다. 하나님 나의 힘이 되어 주시기 원합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 저에게 힘을 주시옵소서. 내가 주어가 되는 기도보다 훨씬 더 멋진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저는 약합니다. 그런 하나님은 강하십니다.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어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오늘 이 본문을 통해 아직도 야곱처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사랑하는 나의 딸아, 이 시대에 야곱아 지금까지는 너의 힘과 능력으로 살아왔고, 너의 머리를 써서 최선을 다해 승리했지만, 그것은 결코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란다. 나의 자녀가 제자가 살아가는 방식은 삶의 주인을 인정하고 약함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이란다. 내가 너의 허벅 관절을 친 이유도 바로 그것을 알려주기 위함이란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전히 강해지려 하십니까? 약해질 용기가 없으십니까? 기꺼이 약해지십시오. 우리는 약해져야 합니다. 약해지는 상황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기시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싸우실 것이다. 라는 고백이 우리의 입술 가운데 나와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약함을 고백하고 인정하는 것이 참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약해지는 것이 두렵습니다. 저에게는 9살 된 딸과 7살 된 아들이 있습니다. 저의 아들과 놀 때만 해도 저는 잘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기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저희 아들은 저를 닮아 눈썹이 굉장히 진하고, 그리고 저를 보신 분은 저의 아들을 보시면 그냥 바로 아시더라고요. 유재원 목사의 아들이다. 그 아이와 놀 때 전 항상 이기려 하고 있습니다. 아빠인 제가 7살 아들을 이기려 할 때 저의 모습을 보면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목사인 저조차도 저의 일상의 삶 가운데서 약함을 고백하고 인정하는 것이 참 쉽지 않습니다. 말씀을 전할 땐 좋은 설교자가 되고 싶습니다. 무언가를 할 땐 굉장히 잘하고 싶습니다. 누군가와 경쟁을 할 땐 이기고 싶은 심리가 당연히 저에게도 있습니다. 이런 저와 같은 자를 위해 여전히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일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왜 오셨습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야곱처럼 절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가셔야 했습니다. 그리스도가 나의 전부이시다. 라는 고백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벌거벗은 몸으로 가장 낮은 모습으로, 가장 약하며 천한 모습으로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그 모습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약함을 실패가 아닌 하나님의 강하심으로 고백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약해지는 것이 두려우십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단어에는 단 하나입니다. 약해져도 괜찮다. 약해질 용기가 너희들에게 기꺼이 필요하구나. 내가 너희들과 함께하도록 하겠다. 하나님께서 지금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약해질 용기를 기꺼이 가지십시오. 우리를 위하여 약한 모습으로 이 땅 가운데 찾아오신 그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는 약하지만 강해질 수 있고 부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강하신 하나님 나의 힘이 되어 주시옵소서. 강하신 하나님 저는 연약하지만 하나님이 저를 대신하여 싸우시고 이기시는 줄 믿습니다. 이렇게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때 우리는 회복을 넘어 부흥의 르네상스를 경험하는 2024년 한 해를 보내게 될 줄 믿습니다.
 
♣요약
내 힘과 능력이 아닌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며 나아가 하나님의 맞춤형 새 은혜, 승리하는 새 역사를 목도하여야 한다. 약할 때 강함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우리는 연약하여 넘어지고 다치고 깨지기 일쑤인데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여전히 나의 머리와 노력과 실력으로 개인의 지혜로 장애물을 뛰어넘으려 할 때가 너무도 많음을 깨달아서 이제는 하나님이 이기심을 진정으로 믿고 ‘하나님이 싸우십니다’ 라고 고백하며 우리를 위하여 약해지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약함을 자랑으로 강하신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시간으로 삼아야 한다. 이런 성경적 방식과 원리로 살아갈 때 회복을 넘어 부흥의 르네상스를 경험하는 약해질 용기, 신앙의 꽃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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