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9월 27일)
제목: "존귀한 예수, 능력의 그 이름"
말씀: 마가복음 4:3-41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설교자: 김은석 부목사님
-----------

* 마가복음 4:35-41,
35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

▶이 저녁에 하나님께서 부흥의 새 역사를 경험케 하실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마가복음 4장 35절에서 41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온 교회는 하반기 사역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바라게는 우리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하여서 우리 모두에게 사명을 주시는 모든 사명을 잘 감당하는 2023년의 하반기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마가 복음서를 포함한 모든 복음서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분이 성육신하신 우리의 메시아, 우리의 구원자라는 사실입니다. 메시아이신 주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는가? 그리고 주님은 무엇을 하셨는가? 주님은 많은 것을 말씀으로 가르치셨는데 그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것을 충실하게 담아내는 것이 바로 복음서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서의 시작이요 마침입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다루게 될 이 본문에는 예수님이 과연 누구이신가를 너무도 분명하게 너무도 환하게 조명하여 주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이 새 복음서, 공간복음이라고 하는데요. 이 공간복음서에 모두가 다 기록이 되었는데, 이 공간복음서를 기록한 이 3명의 저자들이 모두 다 그가 누구이기에 라는 질문으로 이 본문을 마무리합니다.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지 않고 남겨두는 것은 아마도 이것을 대하는 독자가 스스로 답을 찾기를 원해서일 것입니다. 스스로 이 답을 찾아가면서 그 과정을 통해 우리 주님을 더 알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 주님을 신뢰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겠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고 있습니까? 제가 너무 어려운 질문을 드렸죠. 조금 더 예리하게 여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까? 오늘 이 사건을 기록했던 마태, 마가, 누가가 과연 이 사건을 읽는 우리에게 가장 바라는 마음이 무엇일까요? 아니요 이 사건에 등장하셔서 이 사건을 앞에서 이끌고 나아가시는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 우리에게 가장 바라시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제자라는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는 하지만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앎이 부분적이거나 온전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더라도 그분에 대해 바로 알고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요. 본문이 있기 전 마가복음 4장에서 4장 전체에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100배로 결실하는 씨앗과 같다는 거예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등경 위에 놓인 등불과도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람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이 자고 깨는 중에는 아무도 볼 수 없지만 밤에는 은밀하게 자라나 마침내 가을이 되면 그 주수대에 결실하는 이삭과 같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처음에는 작지만 다 성장한 이후에는 어느 것보다도 큰 겨자씨 하늘과 같다.

주님은요. 제자들에게 그리고 사람들에게 계속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그렇게 주님이 말씀으로 가르쳐 주시면 사람들은 듣지 제자들은 듣습니다. 그리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고 하잖아요. 이제는 듣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 그리고 주님만이 하나님 나라의 왕이시라는 것을 그리고 그분의 능력을 마치 시청각 교육처럼 목도하게 됩니다. 이처럼 갈릴리 도하 사건은 신학적으로 선교학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는요. 인간을 초월하시는 그 권능, 예수님의 신적인 지위와 능력이 잘 드러납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예수님이 이 배를 타고 이방 땅을 향하여, 이방인들이 살고 있는 땅을 향하여 나아가시게 되는데 이렇게 이방인들을 향하여 나아가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유대 땅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국경을 초월하고, 인종을 초월하고, 민족을 초월하여 온 열방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전하시려는 예수 그리스도의 소명, 즉 예수님의 초월하심을 증거 하는 사건입니다. 동시에 그 초월하심 가운데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시죠. 예수님이 제자들이 탄 배에 함께하시지 않습니까? 제자들이 만나는 폭풍을 주님께서 잠잠케 하시고 그들을 보호하시고 그들을 인도하시는 주님의 동행하심 바로 그리스도의 내재하심을 증거 하는 사건입니다. 우리 다 함께 본문 35절을 보겠습니다. 본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을 하세요.

*마가복음 4:35,
35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저 편으로 건너가자.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이 있는 곳은 갈릴리 서쪽 해변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비유로 말씀하시던 중에 이제 해가 뉘엿뉘엿 지나고 저녁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것처럼요. 갈릴리는 그 둘레가 한 50km 정도 된다고 해요. 그리고 그 갈릴리를 건너는 폭이 한 12km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꽤 큰 호수지역 그리고 갈릴리는 해수면보다 낮은 곳에 위치해 있고 갈릴리 주변에는 산이 둘러 있기 때문에 한 번 산을 타고 이 바람이 내려 불기 시작을 하면은 잠잠하던 갈릴리가 갑자기 걷잡을 수 없는 고약한 풍랑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바람이 없을 때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너무 평온하고 너무 잔잔하죠. 그런데 한 번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여러분 지금 이 시간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이라는 사실을 아셔야 돼요. 이 풍랑을 만약에 만나게 되면 꼼짝없이 봉변을 당할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입니다. 제 생각에는 아마 대다수의 제자들이 어부였기 때문에 정말 따라 나서기 싫었겠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도 단호한 주님의 명령 앞에 제자들은요. 결국 무리를 떠나 갈릴리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풍랑을 만나게 되죠. 마치 주님과 제자들이 탄 배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바람을 이고 큰 물결이 배에 들이닥칩니다. 금새 배에 물이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우리 주님은요 잠을 주무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단잠에 들어 계시는 거예요. 너무나 고통스러운 삶의 문제들 앞에서 마치 더 이상은 버티기 힘든 사업을 하면서 집에 들어가는 것이 너무나 두려운데 너무나 우리 집에는 갈등하는 가족들이 있어서 또한 아무리 노력해도 정말 말이 통하지 않는 나의 자녀들 때문에 치료해도 아무리 치료해도 낫지 않는 나의 질병들 그리고 마음의 불안과 우울 때문에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는 이렇게 고통을 하고 있는데 아무런 말씀이 없으신 우리 하나님처럼, 주님은 제자들의 고통을 외면한 채 잠을 주무시고 계십니다.

여러분, 그런 생각 한번 안 해보셨습니까? 혹시 배 멀미를 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지금 상황이 다른 사람들은 어떻죠? 배가 흔들리고요 물이 지금 다 들어와서 죽을 지경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잠을 주무실 수가 있을까? 웬만하면 여러분 깨실 법하잖아요. 어지러워서라도 깨실 법한데 거의 이 정도면 수면(睡眠)장애(障礙)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는 상황이거든요. 그런데 그 가운데 주님이 곤히 잠을 주무신다는 것은 아! 주님의 뭔가 숨겨진 의도가 있는 게 아닐까? 여러분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이렇게 곤히 잠을 주무시고 계시는 이 주님을 제자들이 깨웁니다. 불안에서 시작된 원망으로 제자들은 다급하게 주님을 깨웁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왜 돌보지 않으십니까?” 여러분 곰곰이 생각을 해보십시오. 앞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격랑 속에서 너무나 평안하게 잠을 주무시는 우리 예수님과 똑같은 장소잖아요. 똑같은 상황에서 죽을 것처럼 벌벌 떨고 있는 이 제자들의 모습이 너무나 극명하게 대조가 됩니다.

여러분, 왜일까요?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제자들은 죽을 줄 알았던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알았어요. 절대로 배가 가라앉지 않는다는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아무리 바람이 불고요. 아무리 물이 들이닥칠지라도 예수님이 타고 계신 이 배는 절대로, 절대로 침몰하지 않을 것임을 우리 주님이 알고 계셨던 것이죠. 그러니까 평안하게 잠을 주무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강한 바람에 나무는 흔들려도요 태산은 끄덕도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이 풍랑이 바다에 일렁인다 할 지라도요. 바다 속 깊은 곳은 어떻죠? 평온한 것입니다. 폭풍이 일면 어떻습니까?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면 어떻습니까? 너무나 거센 호우가 내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구름 위는 어떻습니까? 찬란한 태양이 떠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처럼 여러분, 예수님이 누구이십니까? 바람과 바다의 주인이세요. 그런 주님이 이 배에 타고 계시는데 감히 바람과 바다가 어떻게 예수님이 탄 배를 침몰시키실 수 있겠습니까? 잠언 서 3장 23절에서 26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 함께 다 같이 잠언 서를 읽도록 하겠습니다.

*잠언 3:23-26,
23 네가 네 길을 평안히 행하겠고 네 발이 거치지 아니하겠으며.
24 네가 누울 때에 두려워하지 아니하겠고 네가 누운즉 네 잠이 달리로다.
25 너는 갑작스러운 두려움도 악인에게 닥치는 멸망도 두려워하지 말라.
26 대저 여호와는 네가 의지할 이시니라 네 발을 지켜 걸리지 않게 하시리라.
-뭐라고 기록하죠? 여호와는 내가 의지할 이시니라. 너의 발을 지키시리라. 내 배를 지키시리라. 너의 인생을 지키시리라 파도가 아무리 클지라도 여러분 하나님보다 크지 않습니다. 믿으십니까? 문제가 아무리 겹겹이, 겹겹이 쌓여 있다 할지라도, 결국 모든 것은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음을 주님이 알고 계시기 때문에 전혀, 전혀 두려워하지 않으시는 거 여러분 그뿐이 아닙니다. 본문 39절에 보면 주님은 바람을 향해 꾸짖으세요.

*마가복음 4:39.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꾸짖으면서 말씀을 하세요. 여러분 이 모습을 보면 그냥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넘어서 이제는 주님이 이제는 스스로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보아라. 내가 하나님이라는 거야 내가 창조주다 내가 스스로 하나님으로 이 자리에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분으로서 모든 것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예전에는요. 비유로 말씀으로 알려주셨다면 이제는 말씀으로가 아니라 그분의 초월하심을 눈으로 목격할 수 있도록 직접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40절에 제자들을 향해 이러한 믿음을 가질 것을 요청하세요.

*마가복음 4:40,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왜 너희에게 믿음이 없느냐 내가 지금 너희와 함께하는데 왜 두려워하느냐? 인생의 배 격랑이 일어나는 갈릴리를 향해 나아가는 제자들의 삶에 여러분 예수님이 지금 함께하고 계십니다. 그 안에 계시는 거예요. 그 배에 예수님께서 타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내재하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격랑을 만난 배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침몰했습니까? 배가 바다 속으로 침몰을 했나요? 아니요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무엇 때문에 가라앉지 않았습니까? 풍랑이 작았고 안에 있는 어부들은 그 풍랑을 능수(能手)능란(能爛)하게 컨트롤해서 그 배를 가라앉지 않도록 요리조리 잘 요리를 했습니까? 아니에요. 여러분. 풍랑은 너무 컸고요 제자들은 그 안에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왜 배는 가라앉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이유는 너무나 심플합니다. 배가 가라앉지 않은 건요 예수님이 그 배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초월하심과 이 그리스도의 내재하심이 여러분 우리의 가정을 지킵니다. 우리의 교회를 지킵니다. 우리의 삶을 보호하시는 줄 믿습니다.

♬나는 믿네~ 나는 믿네! 내 앞에 바다가 갈라지지 않으면 주가 나로 바다 위를 걷게 하리.~아멘!

이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 제자들은요 다음과 같이 이제 고백을 합니다.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본문에 보면 제자들이요 심히 두려워한다.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바람과 바다를 보며 두려워하던 이 제자들은 큰 풍랑을 압도하시는 더 큰 힘 앞에 심히 두려워하게 됩니다. 여러분 참 재밌는 게요. 두려워하는 그 모양은 비슷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 두려움의 실체는 완전히 다른 두려움입니다. 들이치는 물을 보면서 제자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그야말로 물을 보고 또 누구를 본 것입니까? 나를 본 거예요. 그 물 앞에 너무나 무기력한 내 자신을 본 것이죠. 그런데 주님을 향한 두려움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그 문제를 압도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향하여 경외함으로 사랑함으로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죠. 처음 두려움은 주님을 보지 않은 두려움입니다. 문제와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았던 두려움, 곧 불신앙의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향한 두려움은 어떻습니까? 초월하시며 내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나의 시선을 온전히 고정시킴으로 말미암아 오로지 주님만을 경외하고 주님만을 사랑하는 두려움인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요. 다른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믿으십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요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요. 모든 걸 두려워하는 거예요.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하는 우리 모두는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하나님만을 경외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시 가장 중요한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예수는 과연 누구인가?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세요? 시편 107편은요 긴 포로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이스라엘의 공동체를 향한 회복의 노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는가를 풍랑을 통해서 표현을 합니다. 우리와 함께 시편 107편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 시편 107:23-25,28-29,
23 배들을 바다에 띄우며 큰물에서 일을 하는 자는.
24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과 그의 기이한 일들을 깊은 바다에서 보나니.
25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즉 광풍이 일어나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 도다.
28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음에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29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 도다.
-여러분, 기자의 고백대로 풍랑을 일으키는 것이 누구십니까?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세요. 그리고 그 풍랑을 잠잠케 하시는 이도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스라엘을 권능으로 지켜주시는 그 구약의 하나님이 오늘 본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증거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보여주고 계세요. 내가 바로 그 구약에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직접 보여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누구이십니까? 예수님은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초월의 주님이신 줄 믿습니다. 히브리서 13장 8절에 보면

*히브리서 13:8,
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와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분은요 창세전부터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앞으로도 영원토록 계실 전능의 왕인 줄 믿습니다. 특별히 여러분 주님은요. 하나님 나라의 왕이시며 주인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 나라를 여는 열쇠가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법이며, 하나님 나라로 가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누구도 하나님 나라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는 이 초월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기를 간절히, 간절히 소망합니다. 또한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주님은 우리 가운데 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의 길은요 풍랑을 이렇게, 이렇게 피해가는 길이 아니라 풍랑을 헤쳐 나가야 하는 길입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걸어가야 될 이 길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씀을 하십니다.

*요한복음 16:33,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는 여기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는 말에 주목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세상이 어떻죠? 지금 세상은요 죄악이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런 세상을 성도로서 살아가면서 어떻게 성도의 삶에 환란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환란을 피할 수는 없을지라도 우리가 주님 안에,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 큰 풍랑을 만날지라도 그 배 안에 예수님께서 거하시는 것처럼 우리는요. 우리의 삶에 내재하시는 주님으로 인해 세상이 도저히 빼앗을 수 없는 참된 평안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저는 2015년 10월에 경기도 수원의 한 예배당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저는요. 제 눈에 그렇게 많은 눈물이 들어있는 줄 그날 처음 알았습니다.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너무 영광스럽잖아요. 목사의 직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 너무 영광스러워서 가슴이 벅차고 너무 기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평생을 개척하셔서 쉽지 않은 목회의 길을 걸으셨던 부모님의 삶을 조금은 알기 때문에 두려움이 굉장히 많이 컸던 것 같습니다. 우리 사랑의 교회도 한 번 순장님이 되시면, 순장 사역을 이임하셔도 순원이라고 부르지 않고 뭐라고 부르죠? ‘쉬는 순장님’이라고 이렇게 부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한 번 순장님은 계속 이제 순장님이신 거죠. 그런 것처럼 한 번 이제 목사가 되면 물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물러설 수가 없는 거예요. 이제 죽으나 사나 나는 이제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구나! 라는 어떤 짓눌림이 제 안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감정이 많이 이렇게 올라왔던 것 같아요. 그렇게 안수식이 진행되고 있는데 제가 너무 우니까 축사를 하시려던 목사님이 막 역정을 내십니다. “초상났나요? 그만 좀 울어요.” 이렇게 호통을 치시면서 분위기를 바꾸시려고 농담을 하십니다. “저는 오늘 축사를 맡았습니다. 축사에는 세 가지 뜻이 있는데 첫째 짐승을 기르는 우리를 축사라 합니다. 둘째, 귀신을 내쫓는 것을 축사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쁜 일이 있을 때 축하하는 것을 축사라 합니다.”

이렇게 하시면서 제가 막 울다가 웃다가 그랬어요. 그런데 그 가운데 이제 목사님이 뭐라고 하셨냐면 목사님들 울지 마세요. 제가 그날 2명이 목사 안수를 받았거든요. 목회는 힘든 것이지만 주님이 함께해 주십니다. 사역을 하고 교회를 섬기면서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어려움이 많겠지만 예수님이 목사님의 목회 가운데 늘 함께해 주십니다. 저도 돌아보면 늘 어렵고 힘들었지만 주님이 항상 함께해 주셔서 오늘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목사로 임직하심을 축하드립니다. 이 말씀을 하시는데 제가 눈에 눈물이, 눈물이 제가 그날 너무 울어가지고 그날 남은 눈물을 다 쏟아가지고요. 지금 흘릴 눈물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나선 제자들처럼 살겠노라고 신학교에 가 목사 안수까지 받게 됐지만 저는 제 자신을 너무 잘 알잖아요. 난 너무 부족한데 이 무거운 집을 내가 감당이나 할 수 있을까? 두려움과 염려에 짓눌려 있던 제게 예수님이 함께하신다는 그 말씀이 어찌나 큰 힘이 되던지요. 지금도 그 목사님의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본문 36절에 보면 뭐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까?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네. 라고 기록합니다.

*마가복음 4:36,
36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내재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이요. 잠을 주무시는 건 제자들의 고통을 돌아보시지 않는 게 아니에요. 그들의 신음을 외면하시기 때문에 주님이 잠을 주무시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은 문제 앞에서조차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참 믿음의 본을 보여주고 계시는 거예요. 여러분이 누구보다 평안하길 원하세요. 여러분이 누구보다 거친 풍랑을 헤쳐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존귀한 예수 그 이름의 능력을 힘입어 날마다, 날마다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내가 물 가운데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라. 내가 불 가운데 지날 때 타지도 아니할 것이며.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여러분 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이 예언의 말씀, 이 약속의 말씀을 이루시려고 그 밤 그 저녁에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고 계심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온전한 믿음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세요. 우리 사랑의 교회가, 여러분 우리 가정이 어떤 격랑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흔들리지 아니하고 오직 주님만 바라봄으로 승리하는 것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 믿음,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요, 이 믿음의 반석 위에 선 교회와 가정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운 일을 행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의 능력을 의지함으로 하나님 나라 건설에 앞장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간절히 소망합니다.

♣요약
우리는 어떠한 풍랑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오로지 하나님만 두려워함으로 다른 모든 것들을 두려워하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달아서 주님의 심정으로 우리도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드러내는 증인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인생 항로에는 잦은 풍랑이 있는데 그러한 풍랑 중에는 주님이 즉시 구원치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어떤 풍랑에도 주님은 성도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고 성도는 오직 믿음으로 풍랑을 이겨야 한다. 그런데 본문에서 보면 주님의 제자들은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풍랑이 닥치자 크게 두려워하였고, 이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으셨다. 주님이 항상 함께 계심을 믿지 못하는 연약한 우리 인생은 세상의 풍파만 보면 겁먹고 좌절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는 임마누엘 신앙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하겠다.






728x90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9월 20일)
제목: "주 여호와는 나의 힘"
말씀: 하박국 3:16-19
찬양인도: 쉐키나(유재원 부목사님)

설교자: 문진호 부목사님
---------------

*하박국 3:16-19,
16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

▶오랜만에 중고 서점을 갔습니다. 시선을 끄는 제목의 책을 보았습니다. 책 제목이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입니다. 내용이 좋아서 한 대목을 소개하겠습니다.

-청춘의 시기가 아프다고는 하지만 어쩌면 어른이 된 지금보다는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말하자면 수족관 속의 행복입니다. 한결같은 조명, 따뜻한 온도, 함께 생활하는 친구와 가족, 때맞춰 주어지는 먹이 그렇지만 그 평안의 대가는 두꺼운 유리벽입니다. 적지 않은 젊은이들에게 어쩌면 그것은 가족과 학교라는 보호막 안쪽에서 바라본 세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어른이 됩니다. 유리벽이 깨졌습니다. 수족관 밖으로 던져진 헐떡이는 물고기가 된 것입니다. 읽다가 문득 예수님 제자의 삶이 어떠한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도 예수님 처음 믿고 수족관 속에 행복을 경험하다가 어느 순간 유리벽이 깨져버립니다. 내 계획이 실패하고, 내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힘이 빠지는 경험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앙이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보니까 여기 계신 성도님들 대부분은 이미 인생의 유리벽이 깨져서 수족관 바퀴에 던져진 헐떡이는 물고기들이신 것 같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도 인생의 유리벽이 와장창 깨어져 버리는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의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여러분, 이런 상황이 된다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우리 식으로 말하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녀가 모의고사 성적이 안 나오고, 예상치 않은 세금 고지서가 날아오고, 집을 내놓았는데 빠지지가 않고, 몸에 암이 발견되고, 부부 간의 오랜 갈등이 폭발하여 우리 결혼 생활은 여기까지라고 말하고 힘 빠지게 만드는 이런 사례들은 얼마든지 나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요. 답도 제대로 나오지 않은 이런 상황에서 하바국이 보인 믿음의 반응이 놀랍기만 합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할렐루야! 언제라도 나를 지켜줄 것 같은 인생의 유리벽이 와장창 다 깨어져버리고 내 인생의 개혁 계획표가 망가져버릴 때, 우리도 하박국 선지자처럼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이렇게 고백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어떻게 하면 이런 극한의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는 찬송과 믿음 고백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하박국 선지자가 놓인 상황을 보겠습니다. 선지자는 그가 받은 부르심 때문에, 꿈 때문에 대가를 단단히 치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의 부르심의 길에 들어서지 않았다면 보지도 듣지도, 경험하지도 않았을 일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하박국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자료가 많지 않아서 정확하게 잘 모릅니다. 확실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름을 받고 그에게 묵시, 즉 미래에 관한 일이 주어집니다. 선지자는 그 부르심 때문에 매우 고통스럽고 힘 빠지는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우기 위해서 먼저 하시는 하나님의 힘 빼기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갈대야 사람들이라 불리 우는 바벨론을 일으켜서 유대 민족을 심판하시겠다는 계획을 듣게 됩니다. 선지자는 이렇게 반문하죠.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 데도 잠잠하시나이까?” 선지자는 하나님이 불의한 자들을 일으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심판하시는 이 일이 못내 못마땅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길이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길과는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은 이해할 수 없는 부르심일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중요한 것이 있는데요. 그것은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부르심의 믿음에 반응을 보이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하면, 믿음이 아닌 반응을 보여준 인물들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 구약에는 요나가 있고 신약에는 바울 되기 이전에 사울이 있습니다. 요나는 적극 앗수르에 가서 회개의 복음을 선포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요나의 반응은 도피입니다. 앗수르족은 죽은 사람의 머릿 가죽을 벗겨서 가져가고 노예를 끌고 갈 때에 꼬챙이에 꽂아서 줄줄줄줄 꿰어서 데리고 갑니다. 야만의 극치를 보여준 아슬로 사람들에게 회개를 선포한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요나의 반응은 스스로 온 힘을 다해 세상 끝, 지금의 스페인을 향해 도피해 버리는 일이었습니다. 사울에게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다.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다스림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임했다. 예수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죄인이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다는 이 복음 선포였습니다. 어떻게 인간 예수가 하나님이 될 수 있는가? 어떻게 예수가 메시아라며 십자가 형틀에서 마침내 죽임을 당해버리는가?

만약에 하나님이었다면 피했어야 마땅한데 사울은 예수를 통해 주신 복음의 방식을 철저히 배척하고 저항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지키기 위해 예수의 제자들을 잡아 죽이고자 했습니다. 자신의 온 힘을 다해 칼을 사용합니다. 요나와 사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다 이해되지 않을 때 믿음이 아닌 반응을 보였습니다. 둘의 공통점은 자신의 힘을 다해, 전심을 다해 도피하거나 저항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이런 부르심 앞에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일을 다 이해할 수 없을 때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반응은 무엇일까요? 여러분 저를 따라합니다. “전율하며 찬송합니다.” 한 번 더요. “전율하며 찬송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이성으로 다 이해할 수 없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반응이 바로 전율하며 찬송합니다. 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하박국 선지자의 첫 번째 반응은 전율하는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반응은 전율하는 것이었다.

*하박국 3:16,
16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하박국이 하나님께 들은 소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파르르 떨리도록 두렵고, 공포스러운 말씀입니다. 선지자는 이 말씀을 듣고 뼈가 썩고 온몸이 떨리도록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그리고 만문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성도의 삶이 바벨론에 의해서 왜 무너져야만 하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이해할 수 없을 때라도 다만 하박국은 전율합니다. 전 존재가 흔들흔들하면서도 요나처럼 도망가지 않습니다. 사울처럼 칼을 들어 저항하지 않습니다. 16절 우리 다시 한 번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장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우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란 날을 내가 기다림으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 도다.“
-하박국은 그 두려움과 공포를 오롯이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의 처소에 머뭅니다. 뼈가 썩는 고통 속에서도 그 환란 날을 스스로 기다린다. 라고 말합니다. 도피하거나 저항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두려움에 전율하며 이처럼 기다림으로 반응할 수 있을까? 여러분 우리가 실패할 때 전율합니다. 하나님의 힘 빼기 작업대에 올라가게 되는 순간이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성공적으로 김치를 담그게 할 때 첫 번째 단계 다 아시죠? 배추의 숨죽이기입니다. 이건 남자들도 다 아는 것입니다. 배추 이파리를 소금에 절여서 물도 빼고 숨도 죽여 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배추 숨죽이기의 달인이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사람들을 부르셔서 일을 시키실 때, 숨죽이기를 먼저 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쓰기 위해 40년 동안이나 미디안 광야에서 그를 숨죽여 놓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실 때 그가 얼마나 숨이 죽었는지 바보처럼 서 있는 모습을 여러분 다 보셨을 것입니다. 저 아무것도 못하는데요. 아마 웃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기가 막히고 너무 황당하니까 아마 이런 실수가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을 합니다. 말 잘하는 제 형 아론을 보내십시오. 제가 뭘 할 수 있어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그는 실수를 금할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더라는 것입니다. 자기는 하나님이 불러 세우는 일을 못한다. 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어렵게 설득해서 이제 모세의 가족이 애굽으로 돌아가는 장면입니다. 출애굽기 4장 20절, 21절입니다.

*출애굽기 4:20-21,
20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내 손에 쥔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여기까지는 굉장히 좋은 그림 아닙니까?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서 이제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근데 문제의 구절입니다. 출애굽기 4장 24절에 보니까

*출애굽기 4장 24
24 모세가 길을 가다가 숙소에 이르되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신지라.
-여러분 이해가 안 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는 모세 외에 대안이 없었습니다. 40년 동안은 하나님은 그를 숨죽여놓기까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하나님의 지팡이로서 쓰임 받도록 하나님은 그를 숨죽여 놓으시고 그를 마침내 하나님의 비밀 편지로 쓰시기 위해 그를 이제 세상 앞에 드러내놓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습격하여 죽이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해되십니까? 이스라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유일한 대안 모세를 하나님이 죽이려 하셨다는 것. 여러분, 저는 이해가 안 됩니다. 하나님의 숨죽이기입니다. 다 죽었다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 하나님은 여전히 모세가 죽을 것이 있다. 죽어야만 한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숨죽이기가 잘 되어야 훌륭한 김치 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의 특징은 숨죽이기 과정이 반드시 있었다. 라는 것입니다. 요셉도 있었습니다. 다윗도 베드로도 바울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이와 같은 숨죽이기 작업대 위에 다뤄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숨죽이기가 시작되면 반응은 예외가 없습니다. 전율을 하게 됩니다. 떨리게 됩니다. 두려워합니다. 저도 하나님의 숨죽이기에 작업대에 자주 올라보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익숙해질 만도 한데 늘 새롭습니다. 늘 새삼스럽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목회자 부르심이 있었습니다. 총신대 신학과에 들어가니 그곳에 또 다른 부르심이 있었습니다. 지성사회의 복음화 아이에프 선교 단체로 인도하셨습니다. 전공은 아이에프, 부전공은 신학과 그렇게 말할 정도로 이 선교단체 활동을 지나치게 열심을 내었습니다.

일주일에 4번을 모이는데 월요일에는 학년 모임, 화요일은 소그룹 모임, 목요일은 전체 모임, 토요일은 전도 모임 그리고 매일 아침마다 8시에 dpm 데일리 프레이어 미팅이라고 해서 기도모임이 있습니다.방학 때면 더 바빴습니다. 신앙강좌 챕터 캠프 mt 전체 수련회 리더 수련회 국내 아웃리치. 제가 살던 집이 부천이었는데 사당동까지 1시간 반을 오고 가며 하루에 3시간 새벽차 타고 나가서 막차 타고 집에 들어갈 때가 많아져 남들은 대학 생활이 다 낭만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저는 지금 생각해도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대학생활이 너무 고된 생활이었어요. 진짜 문제는 뭐냐면 남들 다 하는 아르바이트 할 시간이 없다는 거예요. 좀 용돈도 벌고 학비도 마련해가면서 좀 대학생활을 좀 여유 있게 보낼 만도 한데 저에게는 그런 기회조차 없었습니다. 수년 전 아버지를 천국 보내드린 상황에서 향토장학금은 기대할 수도 없었습니다.등록금을 제 힘으로 마련해야 되는데 이렇게 전공이 imf고 부전공이 신학이다 보니까 등록금을 마련할 시간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매 학기 등록금 마련할 때가 되면 다른 방법을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금식하며 하나님 앞에 엎어지는 거예요. 여러분 아시죠? 하나님 주실 때 언제 주신다고요. 미리 주시면 좋은데 미리 안 주세요. 등록 마감일이 돼도 소식이 없습니다. 이 등록금 하나님이 주신다는 소식이 와야 되는데 그러면 어떨 때는 등록 연장을 학생과에다가 부탁을 하고 또 계속 기도하는 거예요. 엎어져 있는 마지막 마지막 3차쯤 가가지고 하나님이 그때 주시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보내주신 까마귀의 공급이 있은 뒤 2년 동안을 저는 학교생활을 나름 열심히 잘 지내었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드디어 스스로의 힘으로 등록금을 마련할 기회가 온 겁니다. 군대였습니다. 군대 다녀오면 나이와 경력을 인정받아서 교육 전도사로 교회를 섬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니까 그렇게 교회가 등록금을 지원받아서 학교를 마치면 되겠다. 당시에 신학과 선배들이 대부분 그렇게 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런데 imf 관사님이 막아서는 것입니다. 왜 군대를 가려고 해? 왜라니요? 남들 다 가는데 저도 가야지요. 2학년 마치고 다 군대 가버리니까, 선교단체에 남자 리더십들이 한 명도 안 남아 있어요. 캠퍼스에 남아 줄 수 없겠니? 제가 이 부르심에 응답하게 되면 미래의 내 시간표가 어그러지게 되었습니다.

2년간 더 수업 등록을 위해 금식하며 엎드리는 시간을 더 해야 된다는 그 생각도,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캠퍼스에 남아달라는 말은 당시 믿음이 작은 책에 전율케 하는 저를 두려워 떨게 만드는 도전이었습니다. 제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는 뒤에 다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잉태하게 하시며 반드시 해산하게 하실 것이다. 여러분 저는 100% 신뢰합니다. 그런데 해산의 고통은 생각보다 강했습니다. 전율하게 됩니다. 네가 나의 유일한 대안이야. 그렇게 말하시고 불러 놓으셔놓고 동시에 죽을 것처럼 달려드는 하나님을 보면서 우리는 전율합니다. 하나님은 부르시고 부르신 사람을 왜 전율케 하시는가? 왜 두려움에 떠는 그 밤을 지새우게 하시는가? 여러분 이것입니다. 숨을 조여 오는 상황에서 우리는 전율할 때에만 깨달을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전율하지 않으면 결코 얻을 수 없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 앞에 철저하게 전열함으로 하나님이 주신 그 무엇을 얻은 인물 한 명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야곱입니다 야곱, 여러분 아셨는지 모르겠는데요. 야곱이 라반 삼촌의 집에서 20년간을 지내고 이제 귀향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 귀향의 결정은 하나님의 부르심이었습니다. 잘 모르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창세기 31장 3절입니다.

*창세기 31:3,
3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내 조상의 땅 내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분명히 야곱의 귀한 길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 라고 하는 약속의 말씀이 주어졌어요.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며 나아가는 귀한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강력한 복병을 만납니다. 400명의 칼 찬 군대와 함께 오는 형, 에서를 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부르시는 길은 항상 안전하고 언제나 괜찮은 길일 것이야 이런 착각을 거두실 때가 됐습니다. 성경은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였다라고 기록합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해서 갔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 라고 해서 그 약속 믿고 가는데 두려움에 심히 답답하고 전율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진실로 형 예수의 손에 죽게 되었구나. 죽을 것 같은 상황 앞에서 야곱은 전율합니다. 전율할 때, 두려워 떨 때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인 줄로 믿습니다. 야곱의 이 전율하도록 그를 두렵게 만드는 이 상황 앞에서 반응은 요나처럼 도망치거나 사울처럼 칼을 들어서 싸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머물러서 밤새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32:11,
11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형의 칼에 반드시 죽음을 당하겠구나. 두려움에 덜덜 떨며 전념하던 그 밤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에서보다도 하나님이 먼저 야곱을 기습해 오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 라고 내가 너를 지켜주겠다. 라고 내가 너를 붙들어주겠다. 라고 약속받은 그 귀한 길 아닙니까? 근데 에서보다도 지금 하나님께 붙들려서 먼저 죽을 상황에 처해버린 것입니다. 그냥 싸움이 아닙니다. 치열하게 싸움이 벌어집니다. 칠 흙 같은 어둠이기 때문에 누군가 자기에게 자기를 죽일 수 있다. 라고 하는 그 두려움이 엄습해서 전심으로 싸움 걸어온 자와 함께 싸움하기 시작한 거예요. 목숨을 건 혈투였습니다. 그리고 싸움의 결과는 야곱의 힘의 근원이 끊어져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몸을 지탱하는 골반뼈 이 고관절 부위를 끊어버리십니다. 야곱은 이제 지팡이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야곱이 누굽니까? 싸움의 규제입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마저 발목 잡은 자, 이 말은 기억하면 사바 잡는 자예요. 씨름에 능한 자예요. 하나님의 사자가 내 이름이 무엇이냐 축복하기에 앞서 물었을 때 그가 이렇게 대답하지 않습니까? 내 이름은 야곱입니다. 이 말의 뜻은 제가 그동안 싸움 좀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그의 삶 가운데 아버지 이삭, 형 에서 삼촌 라반과 겨루어서 언제나 승리했던 사람입니다. 싸움의 귀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하나님이 그를 기습하여 싸움을 걸어오실 때, 그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 싸움의 결과 싸움하는 자로서 힘의 근원이 사라져 버렸다라고 하는 것은 사형 선고와 다름이 없습니다. 내 평생 싸우는 자로 삿바 잡는 자로 남의 발목 잡아 넘어뜨리는 자로 살아왔는데, 늘 승리했는데, 하나님과의 싸움 앞에 그는 힘의 근원을 상실해버리고 말아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가장 잘하는 특기,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거, 그것을 하나님과의 싸움에서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힘의 근원을 끊어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는 전율합니다. 에서를 만나면 도망치기라도 해야 되는데, 도망칠 능력도 상실해버린 것입니다. 기습으로 싸움을 걸어오신 하나님을 야곱이 만나 이 사건에서 깨닫게 되어 주는 놀라운 진리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야곱의 힘의 근원이 사라지던 그 밤, 새로운 진실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내 생명을 보존하느님이 내 허리에서 나오고, 내가 가진 재주와 경력을 통해서 이길 수 있고, 내가 가진 기회 포착의 능력에서 나는 생명을 보존하며 이길 수 있으며, 남과 잘 싸워 이기는 데에서 나는 내 생명이 유지된다. 라고 생각했다.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힘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알고 복 받았다. 라고 생각했다는 것이에요. 야곱은 분명히 그렇게 생각합니다. 32장 10절입니다.

*창세기 32:10,
10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때나 이루었나이다.
-누가 누구의 지팡이로 힘쓴 결과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내가 내 지팡이로 이룬 결과가 이 많은 업적들입니다. 그런데 전율의 밤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이 힘 빼게 하신 후에 야곱의 고백이 달라집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창세기 32장 30절입니다.

*창세기 32:30,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존되었다.
-그동안은 내 힘으로, 내 겨루기 잘하는 실력으로 내 생명이 보존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구나! 하나님이 내 생명을 보존하고 계셨구나.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삶을 영혼부터 영혼까지 보존해 주시는 분이신 줄로 믿습니다. 전율의 밤을 지나며 자기 힘의 근원이 사라지니 내 생명을 보존하시는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하더라는 것입니다.

레리 크랩은 우리를 실망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 앞에서 전율하는 것은 그분을 경외하고 의지하는 신뢰 속에서 선하신 하나님을 받아들이도록 우리 영혼을 열어주는 문이다. 전율하는 그 밤이야말로 하나님이 내 삶 가운데, 새로운 빛 가운데로 찾아오심을 깨닫게 되어진다. 는 그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고난길에서 하나님의 숨죽이기, 하나님의 힘 빼기 작업대에 오르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반드시 브니엘의 하나님으로 여러분 모두를 만나주실 줄로 믿습니다. 내 생명을 보존하시는 분은 내 지팡이의 힘도 내 힘의 근원에서도 나오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기도로 엎드리고 하나님만을 전심으로 붙드는 전율의 밤을 지나면서 그것이 우리에게 새로운 힘이 되는 것입니다.

어느 집사님이 신방 중에 간증하신 일을 소개합니다. 그 집사님이 알고 지내던 교수님이 계셨는데 그 교수님의 가정은 그분의 표현이 이래요. 돈으로 자녀 키운 집안이라는 겁니다. 실제로 아들과 딸이 있는데 둘 다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명문대를 나왔고, 딸은 일찍 결혼을 했고, 지금은 이혼을 했고, 아들은 좋은 대학 여러분 말은 굉장히 좋은 대학입니다. 좋은 대학, 좋은 과를 나왔는데 지금은 무직 상태라는 겁니다. 그 아들은 부모와 완전히 관계마저 단절된 상태라는 거예요. 그 집안이 왜 이렇게 풍파가 많나? 그 집사님이 그 가정을 위해서 불쌍한 마음에 그 가정을 위해서 계속 기도를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어느 날 주님의 음성이 들리더랍니다. 내가 버렸니 내가 버렸니? 마치 돈으로 그 과정을 일으키기 위해서 열심으로 자기 힘을 다해서 살았지만 결과가 풍파가 많고, 남이 볼 때 망한 것처럼 보이는 그 상황 앞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더랍니다. 내가 버렸니? 이 집사님이 긍휼의 마음을 거두고 정말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 가정을 위해서 기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그 가정의 소식을 들었답니다. 딸이 먼저 신앙이 회복이 돼서 방언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정말 정말 사랑하는 딸의 자리로 다시 돌아왔다는 그러면서 부모님이 함께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남은 그 아들도 하나님이 회복시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전율하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망한 것과 같은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예수님도 겟세마네의 그 밤에서 전율의 밤을 통과하셨다는 것을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한 스스로의 바램과 계획, 자기 힘을 완전히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 고난의 잔, 전율의 잔을 마실 수 있도록 하나님의 힘이 들어오는 순간인 것입니다. 너무나도 아이러니하게 십자가에 버림받음으로 인해 세상에 빛을 잃고 어둠이 임할 때 온 땅도 전율합니다. 진동했습니다. 하나님의 성도들이 고난 앞에 힘 빼기를 할 때 세상도 그것을 주목하고 전율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고난 받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십니다.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의 힘 빼기를 통하여 하나님의 새로운 힘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도구가 되어
하나님의 사람들을 살리고 세우는 일에 쓰임 받을 수 있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제 이야기의 결론입니다. 캠퍼스에 남기로 했습니다.

캠퍼스에 남아 하나님께만 바라보고 엎드리는 그 시간, 내 힘을 빼는 시간 속으로 다시 이끄셨습니다. 간사님은 포기하지 않고 도전합니다. 네가 하나님이 부르셔서 신학과에 들어왔는데 하나님이 공급하심이 없다면 하나님이 힘 주시지 않는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가야 되겠니? 한 방 먹었습니다. 내가 성공하려고 내가 잘 살아보려고 신학과에 들어온 것이 아닌데 하나님 나  서주십시오.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기를 원합니다. 뜨거운 마음 가지고 왔는데, 내 살 길을 내 힘으로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방식에 부합하지 않았다.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뒤에는 제가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죠? 제가 지금 이렇게 서 있고 무사히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군대 문제도 하나님이 더 좋은 방법으로 해결해 주셨어요. 예 너는 병사로 가서 고생하니까 너는 고문관이 될 자질이 충분하니까 장교로 가라. 그래서 장교로 가서 조금의 자본을 마련해서 그걸로 결혼까지 허락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그 대학교 2학년 그 학생이 그 믿음이 부족해서 군대를 지금 가야 되나요 나중에 가야 되나요? 별거 아닌 것 같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전율하며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엎어지는 그 순간을 맞이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앞에 그 부르심에 순종하여 엎어지는 자를 하나님은 붙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를 쓰시는 줄로 믿습니다.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전율케 하는 시간을 우리 앞에 두십니다. 그 시간에 우리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부활의 능력에 참여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전율케 하시는 것입니다. 야곱의 삶, 예수님의 삶에 우리에게 주신 교훈은 이것입니다. 전율의 밤은 우리에게 있는 내 힘을 빼고 하나님의 힘이 임하게 하는 은혜의 시간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박국은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바벨론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멸망되어질 그 상황 앞에서도 그는 전율하며 찬송합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내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하나님을 끝까지 찬송하리로다. 이 믿음의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마지막에 여러분 기업을 좀 돕기 위해서 제가 사랑하는 선배 목사님이 라이센스를 저에게 주셨습니다. 써도 된다고,“주 여호와는 나의 힘” 이시라고 고백할 때 그 힘은 능력도 되지만 찬송도 되는 줄로 믿습니다. 영어로 힘이 찬송입니다. 그래서 “저는 내 힘이 빠지면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시며 나의 찬송이 되십니다.” 아멘. 여러분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내 힘이 빠지면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시며 나의 찬송이 되십니다.

♣요약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가 나의 믿음의 고백이 되어서 하바국이 고백했던 것처럼 그 어떤 상황을 만나도, 전율케 하는 고난의 상황 앞에서도 주님 앞에 엎어지고 기도하는 자가 되면, 반드시 승리하고, 반드시 다시 일어설 회복의 능력과 은혜를 입을 것이니, 인생의 유리벽이 무너져서 세상에 던져지는 그 순간, 고난의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의 권능의 힘으로 붙드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심을 믿어야 한다. 야곱처럼 고통과 두려움에 전율하는 밤이 찾아와도 하나님께 엎어져서 오직 주님만 구하는 담대함을 가져야 한다. 내 힘이 빠져나가고 그 자리에 주 여호와가 나의 힘이 되시고 주 여호와가 나의 찬송이 되시는 믿음의 고백을 올려드리고, 내 삶에 비록 무화과나무, 감람나무의 열매와 외양간 송아지가 없어도 전율하면서 강력한 주님의 손에 붙잡히는 은혜의 인생이 되어야 한다.




728x90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9월 13일)
제목: "고난 가운데 넘치는 위로"
말씀: 고린도후서 1:3~11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부목사님)
사회: 김대규 부목사님

설교자: 임병영 부목사님
ㅡㅡㅡㅡㅡㅡ

*고린도후서 1:3~11,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11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수요 저녁 기도회에 참여하신 모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이 시간 우리가 회복을 넘어 부흥의 산 역사를 경험하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옆에 있는 분들에게 한번 이렇게 인사했으면 좋겠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네 잘 오셨습니다. 말씀을 통하여서 주시는 강력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시는 시간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1장 3절에서 11절까지 말씀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3절에서 11절까지 말씀을 제가 한 절, 여러분들이 한 절 교독하신 후에 마지막 절은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 요즘 제 주변을 돌아보면 고난 중에 있는 분들을 참 많이 보게 됩니다. 얼마 전 다녀온 장례식의 경우에도 자녀를 먼저 하나님께 보내고, 또다시 오래지 않아서 남편을 하나님께로 보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분과 함께 남편의 죽음을 준비하면서 병원 신방인과 또 임종 예배, 그리고 장례 예배를 치르면서 지척에서 아픔 가운데 있는 분들을 보게 되어 마음이 무척이나 힘들었던 경우가 있었습니다. 또 어떤 분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기도 중에 있는데, 오래전 자녀를 먼저 보내고 근래에 남편이 항암 치료 중인 데다가 또 다른 자녀마저 시한부라고 하는 소식을 듣고 무척 힘겨워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그저 한숨만 나오는 안타까움에 솔직히 어떻게 위로해야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시간을 갖고 있는 중입니다. 전화를 드렸지만 전화는 받지 않으시고, 여러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 어떻게 하면 그분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전할 수 있을까요? 하는 기도하는 마음 중에, 아마 오늘 이렇게 고난 가운데 위로에 대한 말씀을 전하게 된 것 같습니다.

비단 제 주변의 이야기만 있을까요? 건강하게 잘 지내는 줄 알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검사를 받다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시한부라는 사식을 듣게 되었다면 여러분은 그 사실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오랫동안 경제적인 압박에 시달리면서 언제쯤 숨통이 트일지 감당하기 쉽지 않은 그런 상황 속에서 한숨만 내쉬고 남모를 눈물을 흘리는 분들도 또 얼마나 많으실까요? 오랫동안 임신하지 못하고, 여러 번의 시술에도 결과 없이 답답한 마음을 보내는 날들이 원망스러운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침묵하고 계신다고 생각되어서 마음에 큰 상처와 아픔을 가지신 분들도 이곳에 계실 거라 믿습니다.

이런 분들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이분들을 위로할 수 있을까요? 따뜻한 말 한마디, 그리고 손을 잡아주면서 격려하는 행동들이 그분들에게 얼마큼 위로가 될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때론 그 고통을 겪고 있는 분과 만나는 것을 두려운 마음으로 마주하기도 합니다. 나에겐 그분을 위로할 힘이나 준비가 아직 안 돼 있다. 라고 생각이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심지어 많은 고난을 겪고 있는 분들을 만나게 되면,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있지만, 그분의 삶이 도대체 어떻하길래 이렇게 고난이 많을까라고 고민했던 적도 있습니다. 혹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죄를 지어서 하나님의 벌을 받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감히 입 밖에는 내놓지 못하지만, 마음속으로 그분의 상황들을 살펴보며 안타까워하는 경우도 있겠죠. 도무지 그 많은 고난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 고난을 받은 사람들이 참 많이 있죠. 그중에 대표적인 인물을 한 사람 이야기한다면 바울을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울은 그런 면에서 고난을 받았다. 라는 그 경험 때문에 하나님의 벌을 받고 있는 것 아닌가라고 하는 오해를 받기에 충분할 정도로 많은 고난을 경험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았는지, 그를 대적하던 사람들이 바울을 공격하는 수단으로도 그 고난을 이용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시다시피, 바울이라는 사람은 다메섹으로 가는 그 길 위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하는 모든 날 동안에 수많은 고난을 겪었던 사람이죠.

40, 40에 하나를 감안한 매, 다시 말하면 39대의 매를 여러 번 맞았고, 감옥에도 갇히고, 여러 번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상황도 경험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고난의 시간들을 살펴보면 과연 그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도가 맞는지 의심이 들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 있던 바울의 대접 자들은 바울이 겪은 고난으로 인해서 그가 사도로서는 부적합하다. 라고 생각하면서 사도직 자체를 부인하는 근거로 삼고 공격했던 것입니다. 그럼 그들에게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보내서 고난이 자신의 사도직을 부인할 근거가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을 위로를 경험한 큰 증거로 고백하면서 고난을 찬양하며 대적들의 말에 반박하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고린도후서의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함께 읽었던 바울의 이야기들 중에 우리가 함께 읽었던 본문의 핵심적인 내용을 한번 살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로, 본문에서 바울의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I.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참된 위로 자가 되신다.

-함께 고린도후서 1장 3절 말씀을 읽어볼까요? 같이 읽습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 자비의 아버지이시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바울은 하나님께서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지칭하면서, 위로의 하나님께서 모든 환란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실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말한 근거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의 사람으로 오신 사건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사람으로 오셔서 33년 동안 공생애를 겪으면서 인간이 겪게 되는 모든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다 경험하셨던 분이십니다. 그래서 모든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을 능히 위로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런 예수님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참된 위로 자가 될 수 있다. 라고 말하는 거죠.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만드신, 어딘가 저 멀리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처럼 느껴질지 모르지만, 그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피조물의 삶을 경험하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를 살펴서 온전히 위로하시는 참된 위로 자가 되실 수 있는 것이죠. 그러면 바울은 어떻게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요? 바울은 당시에 매우 견디기 힘든 환란을 통과하면서 많은 위로와 구원의 손길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8절, 9절 말씀을 보면,

*고린도후서 1:8-9,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바울이 아시아에서 겪었던 그 환란은 어떤 환란인지 성경에서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습니다. 여러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예배소에서 짐승들과 함께 덤벼들은 사람들과 싸웠던 사건, 또는 은장색 데메드리오에 의한 소동의 사건, 또는 배가 난파되는 사건 등을 견해로 제시하고 있지만, 정확하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상황이, 그는 살 소망이 끊어지고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은 심각한 상황이었다. 라는 겁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때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는 법을 배우면서, 하나님만이 참된 위로 자가 되시는 것을 깊이 체험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깊은 고난 가운데서도 참된 위로 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두 번째 핵심은 어떤 걸까요? 이겁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은 자들은 모든 환란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할 수 있다. 라는 거죠. 함께 읽어볼까요? 고린도후서 1장 4절 말씀입니다.

*고린도후서 1:4,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살려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자는 능히 모든 환란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할 수 있다. 라고 말합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고난은 그리스도로 인하여서 위로받는 통로가 되었고, 그가 경험한 위로는 다른 환란 중에 있는 자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세워가는 큰 능력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겪은 환란은 결코 가볍지가 않았죠. 여러 번 죽을 뻔했다. 라는 사실은 그가 죽지 않았다라고 하는 것을 말하기도 하지만, 정말 죽을 정도로 큰 위험 가운데 놓였다. 라는 말도 됩니다. 엄청난 고통과 고난과 아픔을 그는 계속해서 경험하고 있었다. 라는 거죠. 그럼에도 그는 복음을 증거 하면서 환란을 피해가지 않았음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환란을 통해서 하나님의 깊은 위로를 경험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경험을 통해서 다른 환란 가운데 있는 자들을 위로할 수 있는 능력을 계속 갖게 되었다. 라는 것들을, 그는 고난을 통과하면 하면 할수록 알게 되고, 확인하게 되고, 쌓았기 때문에, 그 모든 사실들을 위로할 수 있는 자로 고백할 수 있었던 거죠. 바울은 더 나아가서 자신이 겪은 환란을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고린도후서 1장 6절에서 7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죠.

*고린도후서 1:6-7,
6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바울이 이렇게 말한 이유는, 자신이 겪은 환란이 그리스도와 연합된 상황에서 발생된 것이고, 또 그로 인한 환란에서 이길 만한 위로를 경험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도 자신과 같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이 겪는 환란도 두려워하지 말고, 견딜 수 있는 이유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라는 격려를 하고 있는 것이죠. 바울은 이렇게 자신을 공격할 수단으로 고난을 언급했던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그 고난을 통해 어떤 하나님의 위로가 있는지, 그리고 그 위로는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고난은 단순히 힘겹고 고통을 겪게 되는 경험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겪은 여러 번의 고난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참된 위로자 되심을 명확하게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살 소망이 끊어져 사형 선고를 받은 자처럼, 바울이 자신이 아닌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만드는 복된 위로의 시간이 된 것입니다. 또한 바울에게 있어서 고난은 단순히 자신만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하는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자신을 통해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비롯한 또 다른 사람들을 능히 위로해 줄 수 있는 하나님의 도구로 재인식할 수 있었던 시간이 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많은 고난 가운데 놓여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이 결코 저와 여러분들을 절망과 좌절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게 놔둘 수 없는 줄 믿습니다. 고난으로, 깊은 상처와 아픔으로 비전을 향해 달리지 못하게 하거나, 공동체 속에서 생명을 살리는 일에도 제외하지 못할 것을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바울이 고난을 통해 경험한 위로의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 되시고, 또한 저와 여러분처럼 연약하고, 부족하고, 어디 쓸데없는 그 사람을 들어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는 위로의 도구로 사용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를 보면 별로 고난을 많이 겪지 않은 사람처럼 보이죠? 진짜로 그렇게 보이시는가 봅니다. 사실 제 삶이 그렇게 넉넉한 삶은 아니었습니다. 사랑하기 위해서 여러 번의 설교의 과정이 있었고, 또 시간들이 있었지만, 이 이야기는 처음 하는 것 같아요. 부모님께서 목회를 하시다가 지방으로 가시게 돼서,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에 동생들과 서울에 따로 살게 되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동생 2명과 부모님을 떠나서 따로 지내는 것이 처음에는 무척이나 달콤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어머니가 해주시는 밥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리고 동생들을 제가 돌봐야 된다. 라는 그 책임이 참 무겁게 느껴지는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사고로 바로 아래에 있는 가운데 동생을 먼저 천국으로 보내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경험은 지금도 쉽사리 잊혀 지지 않는 저만의 상처가 되었어요. 가장 먼저 시체를 확인하고 그의 죽음을 확인하였던 그 시간은 저에게 힘겨웠던 경험이 되었고, 지금도 부모님께 쉽게 말씀을 드리지 못하는 죄송함으로 남아 있는 상처가 되었습니다. 물론 저희 부모님께서는 자녀를 먼저 천국으로 보내야 했던 그 아픔으로 어쩌면 저보다 더 큰 아쉬움과 후회와 아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한동안 동생을 먼저 보내야 했던 상처에서 쉽게 나오지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그 시간을 지금 돌이켜보면 한 2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분명 고난의 어려운 시간이 되었지만, 죽음에 대한 빠른 인식과 그 아픔이 하나님에 대해서 더욱 분명하게 이해하고 인식하게 되는 시간이 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하나님을 어렸을 때부터 의식하고 의지하면서 그분의 위로를 경험하고 살았던 시간이 되었던 거죠. 그래서 그 시간이 너무나 큰 아픔이었고, 절망이었고, 상처였고, 고통이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나한테, 저한테 큰 힘이 되어서 비슷한 상황 속에 놓여 있는 가정을 위로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어 감사한 시간이 됩니다.

비단 저뿐이겠습니까? 이 자리에 혹은 영상으로 예배를 참여하는 많은 분들이 각양각색의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위로와 그 능력을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한 위로로 끝나지 않고 다른 이들을 위로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서 이 사실을 가지고 우리가 함께 적용해 볼 수 있는 것이 어떤 것이 있을까요? 먼저 첫 번째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도록 할까요?

▷우리는 어떤 고난 앞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의 참된 위로 자 되심을 확신해야 합니다.
-어떤 고난 앞에서도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의 참된 위로 자가 되심을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위로로 우리의 위로를 채울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라는 것은 앞으로 어떤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위로 자가 되실 것이란 확실한 보증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위로 자가 되신다. 라는 확실한 보증은 더 이상 옛사람으로 채웠던 위로를 가지고 채울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함께 읽어볼까요? 고린도후서 5장 17절 말씀입니다.

*고린도후서 5:17,
17 그런 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는 이미 옛 사람이 아닌 세 사람이 되었다. 라는 거죠. 그래서 세상에 어떤 좋은 위로라고 해도 하나님이 우리의 참된 위로 자가 되심을 뛰어넘을 만한 위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를 만족케 하는 위로는 하나님밖에 없다. 라는 것을 저와 여러분들은 이제 아셔야 되고 알았다. 라는 거죠. 다시 제가 서두에 말씀드렸던 장례 이야기로 잠시 돌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자녀를 먼저 하나님의 품으로 보내고 다시 남편을 하나님께로 보내는 그분의 마음을 세상에 어떤 것으로 위로할 수 있을까요? 한동안 그분과 연락이 잘 안 되었습니다. 자녀의 장례를 치르고 같이 있었던 카톡 방에서도 탈퇴하시고 연락이 잘 안 되었어요. 한동안 연락이 잘 안 되는 그 가운데에 소문이 들렸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안타까움이 담긴 원망과 불평이 그분의 입술을 통해서 고백되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연락이 안 되는 가운데 저와 그분을 사랑하는 신앙 공동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하나님께서 그분의 마음을 위로해 주시고 하나님이 그분의 참된 위로 자가 되시기를 강구하는 기도밖에 없었습니다. 그것 외에는 그분의 빈 것 같은 그 마음을 채울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마지막이 되었다라고 생각이 되었을 때에 그분이 저를 감사하게 불러주셨어요. 그리고 그분의 임종 예배와 남편의 얘기입니다. 임종 예배와 장례 예배 등을 함께 치르게 되었습니다. 나름 저의 경험한 고난이 있잖아요. 먼저 동생을 떠나보내는 천국으로 보내는 그 아픔과 상처 있었기 때문에 저의 경험한 고난이 그분을 위로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접근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장례 예배를 치르고, 시간이 지나면서 저는 그분의 참된 위로 자가 될 수 없다. 라는 확신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분의 참된 위로 자가 되어 주심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분으로 하여금 천국 소망을 품고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을 견디고자 하는 다짐하는 그분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그분의 참된 위로 자가 되어 주심을 보게 되어서 참 감사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고난 중에 우리를 만족케 하고 온전케 하고 위로하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 하나님으로 여러분들의 고난을 넉넉히 극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다른 것으로 채울 수가 없습니다. 이미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그 완전한 위로, 놀라우신 위로,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그 위로를 경험하신 분들입니다. 그 그릇에 세상에 어떤 것으로 담아서 채울 수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 한 분만 그것들을 채울 수 있는 분이 줄 확신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두 번째 같이 있습니다.

II. 우리는 하나님을 더 깊이 아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참된 위로 자 되신다. 라는 확신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을 때에 생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인식이 된 것, 잘못되었을 때 그 잘못된 자기감정이나 사탄의 거짓으로 인해서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도와주는 바른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바른 하나님에 대한 인식 가운데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참된 위로 자 되신다. 라는 사실을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거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러한 일에 거한다면 우리는 어떤 고난 가운데서도 방황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소망과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어제 저녁에 제가 교리 대학을 강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화요일 저녁에 교리 대학을 강의하고, 수요일 오전에 사역 훈련을 하고, 수요일 저녁에 수요 예배까지 하는 이 치열한 영적 전투의 현장은 저로 하여금 어떻게 끝나자마자 빨리 집에 가야지라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가득하게 하고 난 후에 강의를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교리 대학이 끝마치는 그 시간에 한 청년이 저에게 다가오는 거예요. 순간 불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 청년이 질문을 하러 오는 것 같은데 그 표정이 심상치 않았어요. 내심 빨리 끝내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설교 준비해야 되는데, 사역 훈련 준비해야 되는데 그런 마음 가운데 있는데 그 청년과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요 어느덧 시간이 40분이 넘게 대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청년의 이야기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근래에 깊은 고난과 분노가 있었는데, 교리대학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앎이 더해지면서 생각이 바뀌고 작은 변화가 나타났다는 겁니다.

그 청년은 그동안 고난 중에 늘 침묵하던 하나님 때문에 불평과 원망이 늘 가득했고, 내 감정으로, 내 마음으로, 뜨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이성으로라도 하나님을 아는 방법을 끝까지 한번 가보자 노력했다라고 해요. 그런데 다시 한 번도 그 마음의 그 갈급한 심정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하나님을 다시 한 번 알아가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교리 대학을 들어왔고, 단 두 번의 수업, 두 번째 수업이었거든요. 어저께 단 두 번의 수업 만에 하나님에 대해 배우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그 일로 인해서 이제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 나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셨다. 라는 생각이 변화로 나타나서 위로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말이 좀 어려웠죠. 고난 중에 늘 원망과 불평했던 그 마음이 하나님에 대해서 단 두 번 배우고 익히는 과정을 통하여서 그 마음이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셨던 것이 아니라 사실은 네가 나에게로 오기를 기다리고 계셨다. 라는 인식으로 바뀌어서 그 마음의 위로를 받고 돌아갔다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깊이 알면 알수록 우리는 어떤 고난도 극복할 수 있는 위로를 경험하게 됩니다. 불평과 원망에 쌓여 있던 그 마음에 어쩌면 하나님이 나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 아닌가라고 하는 스쳐 지나가는 하나님에 대한 앎이 깊어지며, 나에게 허락된 그 위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진정한 위로를 경험하고 돌아가는 그 청년을 통하여서 하나님은 이렇게 나를 위로하시는구나! 내일 설교해야 되는데 이렇게 귀한 지체를 보내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눌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구나! 라는 위로 또한 저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누구보다도 온전히 위로하실 참된 위로 자가 되 그러기에 어떤 고난 가운데 있다 해도 주저하거나 머뭇거리지 말고 위로자 되신 하나님을 확신하면서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한번 말씀 읽어볼까요? 데살로니가 후서 2장 16절에서 17절까지 말씀이다.

*데살로니가후서 2:16-17,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17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참된 위로 자 되시는 하나님을 아는 일에 힘써 나아간다면 그가 우리의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시는 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을 믿고 고난 중에 넘치는 위로를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로 같이 한번 볼까요? 세 번째입니다.

III. 하나님의 위로를 나누고 경험하는 교회 공동체로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고난 중에 위로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고난을 통해 우리에게 허락된 위로로 또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를 들어서 하나님의 위로의 도구로 사용하실 하나님의 계획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반드시 위로를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우리가 속한 예배 공동체, 그리고 말씀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훈련반이나 다락방에서도 활발하게 일어나는 일이죠. 함께 예배하며, 함께 말씀을 나누고, 함께 울며,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위로받는 공동체를 통해 우리에게 깊은 위로를 허락해 주심을 경험합니다.

오늘도 사역 훈련하는 가운데에 뜨겁게 기도하고 울며 외치는 시간들을 통해서 마음에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를 가득가득 경험했던 시간을 경험했습니다. 또한 주일 예배나 수요 예배, 토요일 비전, 새벽 예배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 자들이 모여서 예배하는 시간입니다. 온라인으로 경험하지 않고, 현장에 나와서 예배할 때 주위를 한번 둘러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 찬양과 말씀을 통해서 위로하시는 것들을 목도할 수 있습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졸던 분이 찬양하는 가운데에 두 손 들고 찬양하는 모습을 보게 되고, 말씀에 깊이 들어가며 그 마음 가운데에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표정 가운데에 있는 분도 목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로하실 때에 그 위로가 또한 나에게까지 전해지는 것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 있을 때 여러분, 찬양을 부르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다. 라는 것을 경험하셨죠? 경험이 없으신가 보네요.

저는 있었습니다. 예전에 하나님께 크게 실망하고 상심했던 적이 있어요. 그때 아내가 저를 불러서 가정 예배를 드리자고 했습니다. 가정 예배에 평소 자녀들을 데리고 억지로 앉히고 막 말씀 익히고 찬양 부르면서 했던 예배였는데, 그때는 자녀들도 억지로 앉히지 않고 오로지 둘만 예배가 드리는 예배가 되었습니다. 사실 왔다 갔다 하는 그 아이들 앉혀놓고 예배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아요. 아내가 선곡한 찬양을 처음 부르는데 목사님, 제 입에서 찬양이 나오지 않는 거예요.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아내 혼자 그 한곡을 다 부르더라고요. 그런데 그런 저를 아내는 책망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또 다른 찬양을 선곡하여서 함께 부르자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도 여전히 저의 입에서는 찬양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목사인데, 라는 마음이 들어서 입만 조금 뻥긋거리는 찬양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평소 제 아내분이 그럴 분이 아니신데, 또 그 찬양을 다 부르고 난 다음에 한국을 더 부르자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 마음이 참 불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심지어 투덜거리고 왜 또 찬양을 하려고 이러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무부 장관 되시는 그분께서 얘기하시는 그 찬양을 억지로 펴서 억지로 찬양을 따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저에게 이러실 수 있냐며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했던 제 마음이었기 때문에 정말로 찬양을 하고 싶지 않았던 저의 모습이 그대로 그 표정 가운데 나타났던 건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계속 홀로 부르던 아내의 찬양에 맞춰서 제가 찬양을 하고 있는 겁니다. 심지어 눈물 가득히 찬양하면서 우리 두 부부가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를 올려드리고, 그 위로로 가득한 가정 예배를 처음 경험해 봤는데, 그 시간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울컥거리는 마음이 있어요.

그 찬양의 가사가 대단한 것도 아닙니다. 너희 마음을 위로한다, 내가 너의 아버지다. 그런 찬양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 앞에 영광을 올려드리고, 그분을 경배하고, 송축하는 찬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눈물이 나고 하나님의 위로를 깊이 체험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한 동안 그 찬양을 가정 예배에서 부르면서 은혜를 나눴던 기억이 있습니다. 때론 우리는 고난을 경험하면서, 하나님과 단절된 경험을 하면서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을 쏟아놓을 때가 있습니다. 찬양을 하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가득한 때도 있죠. 그런데 그럴 때일수록 교회 공동체에 나가야 됩니다. 말씀 공동체, 예배 공동체, 가정에서도 은혜 공동체, 다락방 훈련 공동체 여러분 그렇게 그 공동체로 나아가서 함께하는 그 사람들로 인하여 고난을 극복할 넘치는 위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위로를 나누고 경험하는 교회 공동체에 깊이 동참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더 이상 온라인 예배가 우리의 위로를 채울 수 없다.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장으로 나오셔야 됩니다. 현장에 나와서 함께 위로받은 자들을 목도하며 함께 위로를 전하며 하나님 앞에 영광의 예배를 올려드릴 때에 우리 눈앞에 보이는 수많은 고난과 염려와 근심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위로로, 넘치는 위로로 경험되는 시간들을 체험하게 되실 겁니다. 함께 예배하고 찬양하는 영 가족을 통해서 우리는 고난 중에도 큰 위로를 경험하고 특별히 예배 현장에 나와 경험하는 그 위로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영광과 찬송을 올려드릴 때에 하나님께서는 고난 중에서도 우리를 붙드셔서 넘치는 위로로 채우시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귀한 도구로 사용하심으로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보좌로 나아가게 하는 은혜를 허락해 주실 줄 믿습니다.

♣요약
-세상이 주는 위로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참되신 위자 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면 은혜롭고 넘치는 은혜와 위로를 경험해야 한다. 하나님 우리에게 많은 아픔과 고통이 동반된 고난이 있더라도 이 고난을 하나님이 아니시면 해결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궁유를 베풀어주심을 믿고 현장 예배를 사모하여 공동체 안에서 더 크고 놀라운 하나님이 우리의 참된 위로 자가 되시는 주님을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한다.
 -그들이 환난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장차 임할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때 주님께서 성도의 눈물을 친히 씻어 주실 것이다. 그리고 고난과 영광의 관계를 깨닫게 될 때 고난은 기쁨으로 바뀔 수 있다.

-그들이 환난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장차 임할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때 주님께서 성도의 눈물을 친히 씻어 주실 것이다. 그리고 고난과 영광의 관계를 깨닫게 될 때 고난은 기쁨으로 바뀔 수 있다.







728x90


♣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9월 6일)
제목: "하나님을 고백하는 삶"
말씀: 에스더 2:19-23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설교자: 남수현 부목사님
----------------

*에스더 2:19-23,
19 처녀들을 다시 모을 때에는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았더라.
20 에스더는 모르드개가 명령한 대로 그 종족과 민족을 말하지 아니하니 그가 모르드개의 명령을 양육 받을 때와 같이 따름이더라.
21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았을 때에 문을 지키던 왕의 내시 빅단과 데레스 두 사람이 원한을 품고 아하수에로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미는 것을 .
22 모르드개가 알고 왕후 에스더에게 알리니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이름으로 왕에게 아뢴지라.
23 조사하여 실증을 얻었으므로 두 사람을 나무에 달고 그 일을 왕 앞에서 궁중 일기에 기록하니라.

▶에스더서 2장 19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구약 성경 792면 쯤에 있는 에스더 2장 19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 화면 보시면서 저와 함께 교독하시겠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이 에스더, 에스더서 하면은 무엇이 먼저 떠오르십니까? 많은 분들은 ‘죽으면 죽으리다.’ 라고 하는 그녀의 고백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도 그 메시지가, 그 성경 구절이 먼저 떠오릅니다. 단호하고 결단을 해야 되는 인생에 아주 중요한 신앙적인 선택을 해야 될 때, 나도 한번 언젠가는 그와 같은 고백을 하리라 마음속으로 기도하고 결심한 적도 있으시겠죠? 그리고 또 에스더서에 대하여서 조금 더 알고 계신 분이 있으시다면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성경 가운데에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 단어가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은 곳이 바로 이 에스더서라고 하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에스도서에는 율법, 제사장, 정결, 정결이라고 하는 지극히 유대적인 그런 종교적인 색채를 띤 단어도 없습니다.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우리 잘 아는 루터는 성경에서 존재하지 않았었으면,,, 하는 어땠을까? 라는 이야기를 그의 기록 어디엔가 남겨놓았다고 합니다. 칼빈은 한 번도 그의 설교 가운데 이 에스더서를 설교의 소재로 사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단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는 성경, 저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작자미상의 성경, 그리고 또 한때 정경이 되지 못할 뻔 하다가 정경으로 된 귀하디, 귀한 성경 이와 같은 특징들을 생각을 해보면 저는 한 단어가 떠오릅니다. ‘감추어진’이게 뭔가 끝나는 것 같지 않죠? 감추어진 하나님 의뢰도 좋습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이제 설교로 준비하고자 1장과 2장 그리고 4장까지 읽고 묵상하고 설교를 준비하고 난 다음에 몇 가지 떠오르는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의 교훈을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 이 에스더서의 배경은요 페르시아의 첫 번째 왕인 고레스 왕 바로 그 왕 때에 1차 포로귀환 영이라고 하는 것을 선포해요. 반포합니다. 옛날 바벨론 시대에 유다 민족을 잡아와서 보로로 삼은 그 일을 다시 고국으로 돌려보냅니다. 돌아가십시오! 라고 하는 포로 기한 영 1차가 있은 지 그다음의 일입니다. 2차포로 기한까지는 약 한 70여 년의 시간이 있는데 아주 긴 시간이죠. 그 한가운데에 그 사이에 벌어진 일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포로 귀한 영이 반포되었습니다. 얼마든지 고국 땅, 유대 땅,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도 좋습니다. 그러나 누구든 자유롭게 자신의 조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쉽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이방 나라에서 그곳에서도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삶을 이어나가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갑자기 어느 날 살던 곳을 떠나 고국, 고향이라 하여도 쉽게 돌아갈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이지 않겠습니까?

거대한 이 페르시아 제국 넓디, 넓은 이 세상을 정복한 페르시아라고 하는 이 제국, 인류 최초의 제국이라고 하죠. 이 제국 앞에서 이스라엘 유대 민족 그 땅으로 봐도, 민족으로 봐도, 군사력으로 봐도 세력과 권력으로 봐도, 어느 것 하나 비교할 수 없는 페르시아 제국 앞에서는 정말 소수 중의 소수 민족 같은 이 한 민족이 페르시아 땅에서 여전히 삶을 이어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에스더서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함부로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을 부르기도 쉽지 않은 그 상황 가운데에서 포로에서 해방되어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지만, 여전히 이방 땅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그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향하여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을까요? 여러분이라면 그와 같은 상황 가운데에 하나님께 어떤 질문을 오늘 본문의 배경과 환경 가운데에 하시겠습니까? 몇 가지 교훈을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이 말씀에 대한 첫 번째 교훈은 이런 문장이에요.

I. 세속사의 힘과 권세는 오히려 역사의 주관자가 누구인지 묻는다.
-1장에 관한 내용입니다. 1장 1절 한번 보시지 이 일은 아하수에로 왕 때에 있었던 일이니 아소에로는 인도로부터 구스까지 127 지방을 다스리는 왕이라.

*에스더 1:1,
1 이 일은 아하수에로 왕 때에 있었던 일이니 아하수에로는 인도로부터 구스까지 백이십칠 지방을 다스리는 왕이라.
-에스도서 1장은 아하스에로 왕이, 헬라 그리스를 공격하기 위한 일종의 작전 회의를 위하여서 연회 잔치를 베풀었는데, 그 잔치의 기간이 무려 6개월이었다고 합니다. 연회가 끝나갈 무렵에 아소에로는 제국의 백성들과 지도자, 방백들이라고 하죠. 그 앞에서 자신의 아내 왕후 와스디를 그 미모를 자랑하고 뽐내고 싶었나 봐요. 그래서 불러서 많은 사람들 앞에 나와서 인사해 주기를 바랐는데, 당시에 왕후 와스디는 이를 거절하게 됩니다. 이 일에 대하여서 격분한 아하수에로 왕은 당장 이 와스디 안에 왕후를 폐위시켜버리는 일이 발생을 합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전국에 조서를 내립니다. 모든 아내들은 남편들에게 복종하라. 자신이 일어난 상황에 대하여 반문일까요? 거절에 대한 상처를 그렇게 하지 말도록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도록 방포하는 일을 벌이게 됩니다.

전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던 그 제국의 왕, 동쪽으로는 인도까지, 그리고 서쪽으로는 구스라고 하는 아프리카 땅까지, 여러분, 얼마나 넓어요? 이 길 거리가 약 한 5,800km 정도 된다고 합니다. 전 세계를 다 뒤집어 삼킬 듯 오직 그리스 헬라 지역만 1차 전쟁에서 실패를 한 아쉬움이 있지만 어마어마한 제국입니다. 외형적으로는 군사력을 총동원하여서 얼마든지 원하는 지역, 원하는 땅을 점령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제국인 것 같지만 아내 한 명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다스릴 수 없고 아내의 말 한마디에 왕의 위신이 떨어져버리는 그것이 왕의 자리, 세상 권세의 또한 자리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1차 그리스와의 원정 전쟁에서 실패를 한 후에, 2차 전쟁을 원정을 앞두고 난 다음에 잔치를 통하여 작전 회의를 하면서 얼마나 많은 방백들과 지도자들과 사람들로부터 환호와 박수를 받았겠습니까? “왕이시여! 이번에는 반드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이번에는 저 그리스 연합군들이 아무리 힘을 모은다고 해도 이 세상의 주인은 당신 한 명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은 수많은 환호와 박수와 갈채를 받았지만 결과는 2차 때에도 대참패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서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하여서 세상 권력 앞에 이 세상 권력의 강대하고, 강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강대한 세속 사 세상 앞에 우리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역사의 주관자는 과연 누구일까? 인도에서부터 구수까지 엄청난 대제국을 만든 페르시아라고 하지만 그들의 역사는 고작 220년밖에 또 안 되지 않습니다. 한 천 년 정도 될 것 같죠? 한 2천 년 정도 될 것 같은 그 땅의 규모죠? 220년밖에 되지 않습니다. 고레스로부터 시작된 페르시아 제국은 어쩌면 오늘 이 1장에 등장하는 아하수에로 왕 때부터 그 세력이 기울었는지도 모릅니다. 세상 힘과 권세만 보면 영원할 것 같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답답하고, 불안하고, 불안정하고, 두려움을 주는 이 세상 가운데에 역사의 주관자는 과연 누구이신가? 라고 하는 질문을 1장이 우리에게 하고 있다. 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세속사 세상의 역사는 그 세속을 주관하고 다스리는 것 같은 당대한 나라 당대한 나라의 왕에 의하여서 찬란한 역사 전쟁의 위험을 기록하고 있는 것 같지만 여러분, 오늘 이 에스더서 1장 말미는 무엇을 기록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아무도 기억할 것 같지 않은 물어보지 않고, 찾아보지 않고,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것 같은 바로 이 와스디 왕후의 폐위의 사건을 다루고 마무리하고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 왜 중요한가 하면은 2장부터 이제 등장하는 모르드개와 에스더를 통하여서 나라의 운명이 바뀝니다. 역사의 한 페이지가 전혀 다른 것으로 쓰여 지는 것 같은 일들이 벌어지기 때문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작은 왕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것 같은 왕후의 폐위 사건은 성경은 기억하고 그것을 기록했다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 제가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메모한 내용은 교훈은 이와 같습니다.

II. 감추어진 것 같으나 연속된 우연 속에 하나님의 섭리는 더욱 빛난다.
-2장 앞부분인데 모르드개의 등장 사건입니다. 우리 5절에서 7절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에스더 2:5-7,
5 도성 수산에 한 유다인이 있으니 이름은 모르드개라 그는 베냐민 자손이니 기스의 증손이요 시므이의 손자요 야일의 아들이라.
6 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유다 왕 여고냐와 백성을 사로잡아 갈 때에 모르드개도 함께 사로잡혔더라.
7 그의 삼촌의 딸 하닷사 곧 에스더는 부모가 없었으나 용모가 곱고 아리따운 처녀라 그의 부모가 죽은 후에 모르드개가 자기 딸 같이 양육하더라.
-모르드개의 등장입니다. 5절에 우리가 읽은 내용에 보면, 어떤 왕이 잡혀갈 때에 그도 같이 함께 사로잡혀 왔더라라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고 왕과 함께 잡혀온 자라면 사회적 신분상 노예나 이런 계층이 아니라 왕급 계급,, 귀족 계급, 높은 계급 그 부류에 있었던 사람쯤 되지 않나 싶지만 사실 그것이 얼마나 이방 땅에서 사는지, 사는 데에 도움이 되었는지에 대하여서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왕궁에 관직에 일을 받기는 했습니다만 자신의 사회적 신분이 도움이 되었다라고 하는 것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가 이방 땅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았고 성실히 살아서 후에 나옵니다만 대궐 문 앞을 지키는 관직을 받은 것으로 추측을 합니다. 또 2장 19절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이죠.

*에스더 2:19,
19 처녀들을 다시 모을 때에는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았더라.
-조금 전 말씀드린 그것입니다. 고대 운동 시대에는 땅을 나누고 경계를 세울 때에, 성을 세웁니다. 성을 짓습니다. 그리고 성 앞에 성곽 문을 짓지요. 그리고 그 문 앞에 당시에 왕으로부터 임명받은 지도자 유력한 자가 그곳에서 성 안쪽에 백성들을 지키는 것뿐만 아니라, 이방 사람들이 그 성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경계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성 안에 있는 백성들을 지키면서 때로는 송사의 일을 한다든지, 사람들과 함께 사람들의 백성들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든지, 억울한 문제를 해결해 준다든지 하는 상당히 높은 관직의 정부 요직이라고 합니다. 20절입니다.

*에스더 2:20,
20 에스더는 모르드개가 명령한 대로 그 종족과 민족을 말하지 아니하니 그가 모르드개의 명령을 양육 받을 때와 같이 따름이더라.
-18절 이후에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의 새로운 왕비가 됩니다. 1장 전체가 그것을 표현하고 있고요. 왕비가 되었어도 그는 여전히 자신의 민족이 어디 출신인지, 자신의 나라가 어디인지를 숨겨야 하는 삶 가운데에 살고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모르드개가 어렸을 때부터 계속해서 그렇게 양육을 했다라고 합니다. 왕비가 되었어도 지금까지 살아오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여전히 포로 신세인 것처럼 마치 자신의 민족과 조국이 어디이며 누구인지도 말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기대한 바로는 이제 왕후 왕비가 되었으니 떳떳하게 자신의 힘과 그 자리에서의 파워를, 그리고 또 신앙적인 위력을 발휘할 수 있지 않겠느냐? 라고 생각을 하겠지만 그것이 또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모습이 아닐까라고 생각을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은 당시의 환경과 배경인 것 같습니다. 21절과 22절 그리고 23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에스더 2:21-23,
21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았을 때에 문을 지키던 왕의 내시 빅단과 데레스 두 사람이 원한을 품고 아하수에로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미는 것을 알고.
22 모르드개가 알고 왕후 에스더에게 알리니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이름으로 왕에게 아뢴지라.
23 조사하여 실증을 얻었으므로 두 사람을 나무에 달고 그 일을 왕 앞에서 궁중 일기에 기록하니라.
-정말 우연이죠. 대궐 문 앞에서 그 자신의 자리를 일을 하고 있는데 넷이 두 사람이 와서 수근 거리는 소리를 우연히 듣게 됩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왕을 죽이려는 음모, 암살에 관한 내용이라고 하는 사실이죠. 오늘 암살한다는 소식을 모르드개가 듣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자신의 조카이죠. 에스더에게 알리고 에스더는 모르드개의 이름으로 왕에게 알립니다. 그리고 공중에서는 이 일을 일기에 기록을 해놓습니다. 1장 그리고 2장을 자세히 읽어보면 드는 생각이 떠오르는 단어가 우연, 우연의 연속성이라고 하는 그 단어가 떠오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에스더서에는 기록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여러분, 에스도서의 하나님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기 싫어서가 아니라 인간의 행위를 더욱 강조하기 위하여서입니다. 우연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제어할 수 있는 그 영역 밖의 일이지 않겠습니까? 계획하고 준비를 한 그 영역, 저 멀리에 있는 일들이 우연일 것입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내가 관할하거나 통제할 수가 없는 것이 바로 우연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 하나님의 뜻과 비밀이 있다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컨트롤 할 수 있는 그 영역이 아닌 바로 그 지점, 인간의 영역 그 밖에서 하나님께서는 우연의 모습으로, 우연의 사건으로, 우연한 사람의 등장으로 일하고 계신다. 라고 하는 사실을 여러분 보실 수 있겠습니까?

왕후 첫 번째 왕후 와스디가 폐위되지 않았다면, 새로운 왕비를 뽑는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겠으며, 에스더가 그 곳에서 왕비를 뽑는 그 일에 어떻게 나갈 수 있었겠습니까? 우연 같아 보이지 않겠습니까? 사촌 오빠 모르드개가 성문 앞을, 대궐문 앞을 지키는 그 직책을 받은 것도 우연처럼 보입니다. 어떻게 이 자리를 얻을 수 있게 되지? 두 내시의 암살 의모를 들은 것은 이해가 되겠는데 어떻게 하필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있었을까 이거 우연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들어도 그 수많은 두 내시가 하는 이야기 중에 어떻게 왕의 암살 음모를 우연히 들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만약 왕의 왕을 암살하려고 하는 그 이야기를 우연히 듣지 않았다면 자신의 민족 유대인을 암살하고 몰살하려고 한다는 하만의 계획이 말 그대로 실천되었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겠습니까? 왕이 잠을 못 잘 수도 있겠죠. 밤에 잠이 안 오는 날이 있을 수도 있겠죠. 그런데 술과 함께하는 잔치를 6개월이나 하는 사람이라면 왕이라면 날마다 그 술에 취해 있었을 것입니다.

대개 이런 왕이 잠이 안 와서 잠을 취하지 못했다. 라는 것도 우연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필 잠이 오지 않는 그날 밤, 왜 하필 그 일기 역사를, 그 수많은 역사 가운데에 최근의 일기의 내용을 봤을까요? 우연치고는 너무 우연이 아닙니까? 그 일기를 본 덕분에 그 이전에 두 내시의 암살 음모를 모르드게라고 하는 사람이 막았다라고 하는 사실과, 그 일을 통하여 하만이라고 하는 사람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 라고 하는 암살 계획을 알게 됩니다. 이 일을 통하여 모르드개의 운명과 하만 왕을 죽이려고 하는 암살 계획을 가지고 있던 하만의 운명이 그다음 날 하루아침에 완전히 바뀌어 지게 되는 그 일,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에스도서에는 하나님의 이름도 없고, 제사와 성전과 정결과 거룩과 이와 같은 단어가 표현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하나님의 부재가 느껴지는 이 성경 가운데에 하나님은 하나님, 당신의 존재를 강력하게 증거하고 있다. 라고 하는 사실을 여러분 깨달으실 수 있겠습니까?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 자신의 조국에 살고 있는 바로 그 민족이 아니라, 이방 땅에 흩어져 살아야만 하는 디아스포라의 그 민족들에게 여전히 나는 하나님의 백성인가? 하나님의 백성이 맞다면 나는 왜 이방 땅에서 태어나면서부터 갖은 고난과 고초를 겪어야만 하는가? 나는 오늘도 하나님을 믿고 오늘 아침에도 하나님께 기도를 하며,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하나님의 경륜으로 이 간절하고도 불쌍한 마음 오늘 나의 환경을 살펴주옵소서! 도와주옵소서!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간절히 기도하지만 마치 하나님은 숨어 계시는 것과 같은 나는 과연 하나님의 백성이 맞는 것인가? 오늘 우리의 그런 질문이 에스더에서뿐만 아니라 여전히 우리 가운데에도 있다. 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우리의 일상의 삶이 불완전해 보이고, 불안해 보이고, 확실성이 없는 것 같아 보이는 그때에라도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모습으로, 또 오늘 에스더서에 있는 거와 같이 우연의 모습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까지 몰아가셔서 부재하심이 아니라, 존재하심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깨달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나의 선택이 맞는 것인지, 지금 직장을 옮기는 것이 맞는 때인 것인지, 나의 장래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어떤 선택과 방향으로 해야 되는 것인지, 매우 궁금해 하며 매우 답답해하는 그 상황 가운데에서 오늘날 우연히 펼친 말씀 한 구절, 우연히 오늘 아침 나에게 온 기도 제목과 함께 날아온 톡으로 들어온 성경 말씀을 통하여 나의 마음속을 강력하게 붙잡으시는 그 하나님을 경험해 본 적 없습니까? 도저히 이 사람은 지금 나에게 올 때가 아닌데, 전혀 낯선 곳에서 나를 찾아와 나를 위로해주고 나를 도와주며 나를 격려해주는 그 우연의 경험을 많이들 웃으시네요!! 해보신 적 있으시죠? 또한 내가 깨닫지 못할 때라도 이상한 일들과 사건을 통하여서, 나의 정신을 반짝하고 차리게 만드는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은 마치 우연인 것 같으나 필연적으로 나에게 찾아오시는 그 하나님, 변함없이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세 번째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오늘 이 에스더서의 교훈과 말씀은...

III. 수동적인 끌려감으로 살아가지만 하나님을 고백하는 삶에 섭리가 있다.
-에스ej서에는 1장과 2장, 3장까지 계속된 이 우연히, 나타나고, 등장하고, 계속되고, 쓰여 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우연과 함께 또 다른 에스더의 특징 중에 하나는 수동적인 표현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모르드개에게도 그리고 에스더에게도 이들을 지칭하는 성경 구절이 계속해서 수동형, 수동적 동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에스더서 2장 21절과 23절을 제가 한번 읽어볼게요.

*에스더 2:21-23,
21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았을 때에 문을 지키던 왕의 내시 빅단과 데레스 두 사람이 원한을 품고 아하수에로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미는 것을 알고.
22 모르드개가 알고 왕후 에스더에게 알리니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이름으로 왕에게 아뢴지라.
-들었어요. 그리고 일에 대하여 조사를 했는데, 그 결과에 대하여서 실증을 얻었다라고 하는 표현이 자세히 보니까 이런 뜻이에요. 그 일이 찾아왔다 그 일이 발견되었다라고 하는 뜻이에요.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가 다 수동적이에요. 그리고 2장 6절에 보면 모르드개의 첫 등장이 이런 표현입니다. 아까 읽었어요. “모르드개도 왕이 잡혀올 때에 모르드개도 함께 사로잡혔더라.” 이 이방 땅에 잡혀올 때도 사로잡혀서 왔고 어떻게 대궐 문 앞을 지키는 관직을 가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우연히 두 내시의 왕의 암살 계획을 듣게 되었고, 조사는 했지만 그보다 더 엄청나고도 확실한 결과가 자기에게 찾아왔다라고 하는 표현입니다. 에스더서 2장 8절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시작.

*에스더 2:8,
8 왕의 조서와 명령이 반포됨에 처녀들이 도성 수산에 많이 모여 해개의 수하에 나아갈 때에 에스토로 왕궁으로 끌려가서 궁녀를 주관하는 해계의 수하에 속하니.
-이제 왕비가 되기 위한 일종의 시험, 컨테스트에 나가게 되는 그 상황을 묘사합니다. 아직 왕비가 되기 전이에요. 그런데 왕궁으로 이끌려가서 에스더를 표현하는 것은 이끌려갔어요. 수동적인 입장이에요. 선택하는 자의 호의가 아니면 다른 길은 선택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1장의 에스더의 이름을 두 가지로 표현합니다. 원래 유대인으로 불려 진 이름 하다사 그리고 개명된 이름 에스더입니다. 소수민족 중에 소수 민족인 이 에스더가 자신의 민족과 함께 신앙적인 유대감과 간절한 하나님을 향한 그리움이 있을 때의 하다사의 모습과 그것을 철저히 감추도록 교육받고 철저히 숨기면서 이방 땅에서 이방 민족과 이방 문화와 이방의 음식을 어쩔 수 없이 같이 먹고 마시고 살아야 하는 그 이름 에스더라고 하는 이 혼동된 정체성 가운데에 수동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비슷하죠? 나도 모르지만 지극히 많은 부분이 누가 하라는 대로, 부모님이 하라고 말씀하시는 그대로 따라가는 수동적인 삶을 사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여기에서 에스더의 표현을 에스도서를 마무리하고 있지 않습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4장이 되면서부터 수동적인 에스더가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바뀌는 모습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만이라고 하는 총리대신이 유대인 진멸 정책, 유대인 말살 계획 조서를 이 에스더가 그 초안을 받아보게 됩니다. 우리가 사실 그 앞장에 에스더를 생각하면 두려워 떨며 손을 덜덜덜 떨며 그 초안을 보고 자기 사촌 오빠 모르드개에게 전달해 주는 것조차 두려워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이 위기 가운데에 서서히 전면적으로 능동적으로 등장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수동적인 모에서 모습에서 생각과 판단뿐 아니라, 자신의 종교적인, 자신의 신분적인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에 관하여서 지극히 수동적인 이 한 여인이 어떻게 ‘죽으면 죽으리다.’ 라고 하는 적극적인 신앙의 고백을 하는 사람으로 바뀔 수가 있을까요? 여기서 잠깐 멈추고 에스더서를 비교할 때에 에스더서를 연구할 때에 많은 사람들이 요셉의 인생과 많이 비교를 한다고 합니다. 요셉의 인생도 누군가에 의하여서, 계속해서 끌려다니던 인생이었던 것 알고 계시죠? 그의 형태에 의하여서 본인이 원하지 않는 상황 가운데에 계속해서 알아주지 않는 것 가운데에 수동적으로 끌려다니게 됩니다. 시편 105편은 요셉의 일생과 일대기를 아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편 15편 16절 한번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시편 105:16,
16 그가 또 그 땅에 기근이 들게 하사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유대 땅에 엄청난 기근이 들게 됩니다. 먹고 살 만큼 먹고 살고 조금 힘든 기근이 아니라 살 수 없을 정도의 기근이 들게 되자, 아버지 할아버지가 다 됐죠. 돌아가실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야곱이 아들들에게 먹을 것을 양식을 구하라고 몰아냅니다. 애굽으로, 천리도 넘는 길을 몰아내서 양식을 구해오라 도저히 살기가 힘들다. 라고 하는 것으로 혹독하게 자식들을 내치는 일들로 요셉의 형들이 이 애굽으로 내려오고 마침내 총리가 된 요셉을 만나게 되죠. 하나님께서 양식을 다 끊게 만드시니까 그제서야 하나님의 뜻을 서서히 알아가게 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아주 놀라운 말씀과 기록이 있습니다. 105편 17절 한번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시편 105:17,
17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자신의 삶이 끌려다니는 인생, 누군가에 의해서 끌려가게 되는 인생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오늘 여기 17절에 그의 생애를 무엇이라고 표현합니까?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요. 요셉을 말합니다. 나는 끌려간다. 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셨다. 라는 것이에요. 45장쯤에 가면 이보다 더욱 정확한 표현이 나옵니다. 창세기 45장 7절에 이렇게 나와 있어요.

*창세기 45:7,
7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당신들을 나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형들로부터 노예로 팔린 청소년 때로부터 시작하여서, 총리가 된 때까지의 많은 삶의 변화들이 있었지만 총리가 된 그 이유들을 되묻고 되물었지만 하나님께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이 바로 이 이유였군요. 형들과 우리의 후손들을 위하여서 하나님께서 보내셨군요! 라고 하는 그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 이 하나님께서 내가 속해 있는 이 세상 한가운데서도 여전히 일하고 역사하실까? 이런 끊임없는 질문을 하는 에스더와 같은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에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에스더를 통하여서 에스도서를 통하여서, 우연히 우연에 우연히 계속되어도 알 수 없는 그 상황 가운데 몰고 가시는 하나님은 도대체 누구이신가? 라고 하는 질문을 하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아 정체성, 신앙적 정체성을 깨닫고는 모든 것을 다 끊게 하고서,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라고 하는 것을 고백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거예요. 끌려 다니는 인생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인생, 끌려가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자리인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하나님께서 보내신 바로 그 자리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4장 16절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에스더 4:16,
16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대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3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 인생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에스더서는 완전의 역사를 기록한 책입니다. 우연한 일들의 연속 가운데에 하나님의 필연이 쓰여 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재한 상황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역설하고 계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한 사람의 인생 모르드개도 마찬가지고 에스더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삶은 알 수 없는 곳에서 알 수 없는 존재에 의하여 끌려다니는 인생이라고 생각한 그 것이 그 곳이 하나님께서 반드시 보내주신 자리임을 깨닫는 책 하나님께서는 이방 땅에서도 여전히 역사 가운데에 개입하셨습니다. 아하스에로 왕의 헬라를 향한 전쟁보다 그의 왕비, 그의 아내가 폐위된 사건을 더 소중하게 기록으로 남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대궐문 앞에서 직무를 수행한 모르드개의 그 직책도 우연이고, 내시가 그 대궐문 앞에서 왕을 살해할 음모를 꾸미는 것을 듣는 것도 우연인 것 같고, 하만이 모르드개를 처형하려고 하는 계획들이 진행되던 중에 왕이 우연히 책을 펼쳐서 최근의 일기를 듣게 된 것도 우연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상황 가운데에 유대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역사이심을 보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마치 감추어 계시는 하나님, 숨어 계시는 하나님인 것 같지만 오늘 우리의 삶에 찾아오셔서 역사하시고, 섭리하시고, 다스리시고, 일하시는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잠언 3:16,
16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내 길을 기도하시리라.
-그 말씀을 등대삼아 오늘도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발견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약
삶의 작은 부분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깨닫고 내가 선택한 일이 잘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불안함과 불확실한 세상 가운데 놓여 져 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질문한 것들을, 그 모든 상황들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며 나를 보내시는 하나님의 섭리임을 깨달아야 한다.
-왕의 목숨을 해치려는 음모를 발견함으로써 모르드개가 그 나라에 행한 업적이 여기 기록되어 있다. 후에 이에 대한 기록이 다시 한 번 나타나 모르드개를 유리하게 만들 것이다. 유대인을 멸망시키려는 하만의 계획이 아직 한 걸음도 진행되지 않았을 때이건만 그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이미 여러 단계나 진행된 처였다. 이제 하나님은 모르드개가 왕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 주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후에 그는 유대인들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는 더 좋은 나은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왕의 신하 두 명이 왕을 해치고자 하는 음모를 꾸며서 왕을 옥에 집어넣을 뿐만 아니라 왕을 죽이고자 하였다. 모르드개는 그들의 반역 행위를 눈치 채고 에스더를 통해서 왕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그렇게 함으로써 에스더는 왕의 신임을 더욱 두텁게 받게 되었으며 모르드개도 왕의 호의를 받게 되었다. 반역자들은 자기들이 행한 죄과에 따라 나무에 달렸다. 그들의 음모가 발각된 뒤 충분히 이를 조사하여 모반 사실을 밝혀낸 후에야 비로소 그들은 나무에 달렸다. 그리고 그 사건의 전모는 궁중 일지에 기록되었고 모르드개가 그 음모를 발견한 사람이라는 것도 기록되었다.





728x90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8월30일)
제목: "일용의 양식을 구하는 기도"
말씀: 누가복음 11:3
찬양인도: 유재원 부목사님

설교자: 하상범 부목사님
ㅡㅡㅡㅡㅡㅡ

*누가복음 11:3,
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

​▶저는 오늘 이렇게 모여서 기도하는 수요 저녁 기도회와 같이 함께 모여서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함께 모여서 통성으로 부르짖고 한 목소리로 같은 기도 제목을 읽으며 함께 기도합니다. 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의 19세기 목사님이시지요. 맥체인 목사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홀로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것 인간은 바로 그런 존재이다.”

조용히 독립적으로 나아가서 기도할 때도 있습니다. 홀로 부르짖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그런데 때로 이 구름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하늘에 계신 아빠와 나라는 친밀감을 느끼게 하기 보다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나는 땅에 있구나!라는 거리감과 격차 감으로 느껴질 때가 참 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다 보면 성도님들과 기도 제목을 나누어야 할 때가 있더라고요. 그러할 때에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가 생각이 납니다. 그러다 보니 그리스도인들은 저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되는데 내가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기도 제목을 내놓아도 될까라는 실제적인 고민이 들 때가 있더라고요. 그럴 때 제가 붙드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붙드는 말씀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어떤 사람들이 이렇게 물어보시더라고요. 어떻게 물어보시는가 하면 하나님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계시는 분이 아니시냐? 아니면 우리에 대해서 사랑의 반대편에 계셔서 우리에 대해서 무관심하여 계시며 때로는 우리 삶에 대해서 관찰자나 방관자로 우리를 바라보시는 분이 하나님이 아니시냐? 라고 물어보는 분들이 계십니다. 제가 그런 분들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함께 말씀을 보실까요? 이사야 66장 1절 말씀입니다. 다 같이 봉독하겠습니다.

* 이사야 66:1,
1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시편 103:19,
19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
-성경 말씀에 보니까 하나님은 하늘을 보자 삼고, 땅을 발판 삼아 창조의 모든 세계를 그의 왕권으로 다스리는 분이십니다. 라고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가 아버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홀로 조용히 하나님, 저의 삶 가운데에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십시오! 라고 부르짖을 때, 저의 현실적이고 비천한 생활의 작고 사소한 일들마저도 보좌에 계시는 하나님에게 알려지게 됨을 경험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느끼는가 하면, 저의 일용한 양식의 문제에서부터 세밀하고 세밀한 문제에게까지 하나님의 세밀한 도우심과 개입하심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버지, 하나님의 모든 세계를 다스리시고 왕이 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부유함을 끌어서 사용하는 일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말씀을 통해 하늘 아버지와 땅에 있는 우리의 거리감은 좁혀지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뿐만 아니라 현실적이고 내 삶에 필요한 실질적인 기도 제목 가운데에 하나님의 개입하여 주심과 아버지 하나님의 부유하여 주심이, 하나님께서 끌어서 사용하여 주심에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복된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우리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는가 하면,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말씀을 한 절 보겠습니다. 마가복음 6장 34절에서 37절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6장 34절에서 37절 말씀을 저희 다 같이 봉독하겠습니다.

*마가복음 6장 34-37,
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35 때가 저물어감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 여쭈오되.
36빈들이요 날도 저물어가니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총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37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자 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까.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오병이어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목자 없는 양과 같은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다가가셔서 하루 종일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저녁이 다가오자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떤 문제인가 하면 그것은 그 많은 군중들의 어디에서 식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 문제 앞에 명백하게 반대하는 두 가지의 대답이 방금 읽은 말씀 가운데에 있습니다. 하나는 제자들로부터 나온 대답이었고, 하나는 예수님으로부터 나온 대답이었습니다. 양식을 구하는 문제에 있어서 제자들은 군중들을 흩어 보내어 군중들로 하여금 사 먹게 하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었죠? 제자들로 하여금 너희들이 군중들에게 먹을 것을 직접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양식을 주는 문제에 있어서 구해서 그들에게 먹이는 방법에 대해서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오늘 아까 방금 읽었던 말씀을 보면 너무나 재미가 있습니다. 왜 재미가 있는가 하면 제자들이 말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방법이 서로 이야기하는 논리적인, 변증법적으로 이야기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충돌이 일어나고 있다. 라는 겁니다. 왜 재미가 있냐 하면 저는 이러한 충돌이 저의 삶 가운데에서 낯설지가 않다. 라는 겁니다. 저 역시 이러한 충돌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제 삶 가운데에서도 날마다 양식을 구해줘야 되는데, 제자들과 같이 논리적이고 현실 가능한 방법과 하나님께서 필요함을 강구함으로 구해야 되는 이 두 가지의 상황이 충돌되는 경험을 너무나도 자주 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2010년 1월에 결혼을 했습니다. 그때 신대원 2학년이었었고, 파트 전도사로 사역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결혼을 했었는데요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제가 아내에게 이렇게 말을 했었습니다. 지금 다시 돌아간다면 그 말을 안 할 것 같은데요 아내에게 그렇게 말을 했었습니다. 어떻게 말을 했었냐면 목회자의 아내는 하나님께 먹고 입히는 것을 맡길 줄 알아야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먹고 마시는 것을 입혀주신다는 것을 경험할 줄 알아야 된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날 아내가 돌아와서 저와 상의를 하지 않고 회사에 가서 사직서를 제출하고 왔더라고요. 아내의 대담함과 결심에 너무 적지 않지 않게 당황을 했습니다. 그걸 원했던 건 아니었는데요 당신의 사명과 소명을 가지고 상의를 했었으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는데요.

그런데 그렇게 어느 날 제가 라면을 끓였습니다. 라면에 햄을 넣고 끓였습니다. 햄을 넣고 끓였는데 아내가 나와서 라면에 햄을 넣은 것을 보고 먹지 않고 들어가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물 따라 들어가서 물어봤습니다. 라면에 햄을 넣은 라면을 좋아하지 않느냐 웃긴 거예요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저한테 말을 하더라고요. 어떻게 한 끼에 두 끼 반찬을 먹을 수가 있냐고. 이해가 안 되시죠? 한 번의 라면을 먹고 그다음에 햄을 먹어야 되는데. 그래서 제가 그때 알았습니다. 지금 우리 집 상황이 이렇게까지 형편이 어렵구나 파트 전도사의 사역의 사례비로 남편의 학업도 뒷바라지해야지 되고 가게도 꾸려나가야 되는 아내의 사정을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철없던 저의 행동이라는 것을 그때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생각했던 방법은 아르바이트를 검색하면서 생계를 해야지 되나 아니면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께 맡기고 도 그래도 큰소리 쳤던 게 있잖아요 기도해야 되나라는 그 충돌 앞에 서 있는 저 자신을 봤었습니다. 그때에 어거스틴이 했던 한마디가 제 마음속에 떠오르더라고요. 어떤 말이 떠올랐는가 하면 한사코 눈을 뜨지 않으려는 사람에게는 사방이 암흑 천지인 것처럼 지금도 변함없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고 계시지만 그분의 법을 받아들이지 않으려에게는 결코 적용이 될 수 없다. 하나님, 제가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라는 그런 생각들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성경 말씀에 보니까 우리 삶 가운데에 저희들에게 왜 이렇게 두 가지의 충돌을 경험할 수밖에 없게 된 이유가 있더라고요. 그 이유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9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함께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3:19,
내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성경은 아담의 탈락 이후에 사람이 자신의 양식을 스스로 확보하게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기의 힘으로 자기의 안녕과 행복을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일로서 생명을 얻어야만 했습니다. 내가 땀을 흘려야만 양식을 얻을 수가 있게 된 겁니다. 그러니 어떻게 살아가야 되겠습니까? 스스로 모든 것을 관리하는 자가 돼야 됩니다. 내가 모든 것을 권한을 쥔 자가 돼야지 됩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모든 것을 해결하며 살아가야 됩니다. 그것이 아담의 타락 이후 사람이 이 땅 가운데 살아가게 된 방식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또 일깨운 사실이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히브리서 13장 14절에 보니 이 땅을 살아갈 때에 연구한 도성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영구한 도성이 없다라는 것은 그렇게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힘이 드는데 이 세상은 불확실성과 우연으로 가득 채워져 있더랍니다. 불확실성과 우연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내가 내 일, 나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예측할 수가 없는 것이 이 세상 가운데에 놓여져 있는 현실이랍니다. 그러니 나에게 보장되어져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고, 내가 세상에 메어서 세상에 속한 것을 의지하는 순간 내가 실망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는 것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경험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그러니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오늘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연장선상에 있는 말씀이 무엇인가 하면 누가복음 12장 22절에서 34절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2장 22절과 34절의 병행 구절이 무엇인가 하면은요 마태복음 6장 19절에서 34절 말씀인데요. 저희가 읽지 않아도 너무나 잘 하는 말씀입니다. 어떤 말씀인가 하면 들어도 예상이 되시죠? 계속해서 반복되는 말씀 염려하지 마라, 염려하지 마라, 염려하지 마라.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에게서 그런 세상을 살아가고 있으니, 우리를 향하여서 너희가 그런 세상 가운데에 있으니 염려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합니다. 왜 염려할 수밖에 없을까요? 성경에서 말하는 염려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염려는 나뉘는 마음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사람을 하나님만 바라보게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 안에서만 안식과 평안을 얻게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내가 평안을 얻고 내가 생명을 얻으려고 하니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이 나뉘게 되니 내가 염려 가운데 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라는 겁니다. 그것이 염려입니다. 이렇게 염려 가운데에 거하게 된 사람에게 다가오셔서 예수님께서 너희들 염려하지 말고 너희들에게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아버지 하나님께 구하라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은 한 가지가 더 등장합니다. 앞에 무엇이 등장하고 있는가 하면 바로 우리에게라는 말씀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우리에게라는 말씀을 보면 저희가 딱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 생각 딱나는가 하면 아 바로 옆에 계시는 분을 바라보면서 옆에 계시는 분과 나를 생각하면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부어주시는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근데 이 우리에게가 바로 옆에 계시는 분과 나를 바라보며 우리에게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우리에게를 바라볼 때는 옆에 계시는 분과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나를 향하여서 우리에게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왜 예수님께서 나와 예수님을 향하여서 우리가 말씀하고 있는지 그 비밀이 있습니다. 그 비밀이 무엇인가 하면 누가복음 저희가 읽지 않았는데요. 바로 앞절에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실 때에 너희들은 이렇게 기도하라라고 말합니다. 무엇이라고 기도하라고 하냐면 너희들은 이제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라고 부르라고 말합니다. 이제 너희들도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 부르기 때문에 너와 예수님인 내가 이제는 우리가 되었다라는 뜻입니다. 왜? 그렇다면 예수님과 하나님은 아들과 아버지라는 관계가 우리는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피조물인 우리와 신인 하나님이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예수님에게 던지게 됩니다. 그 질문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성경에서 그 질문에 대답을 하는데요. 요한복음 1장 12절 말씀을 너무나 잘 아는 말씀이시죠.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이것이 성육신의 목적이라는 말씀을 말씀해 주시는데요.
그 말씀이 갈라디아서 4장 4절에서 6절 말씀입니다.

*갈라디아서 4:4~6,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이 말씀을 제가 함께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아멘. 아들과 아빠의 관계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서 이제는 우리를 그 관객 가운데 끌어들였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서 이제는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을 아빠라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들이 하나님을 아빠라 부를 수 있는 나를 통하여서 근데 어떻게 불렀다고요? 갈라디아서 말씀해 보니까,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해서 나의 내조하시는 영을 통하여 내가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연스러움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데 성경에 또 다른 영적인 비밀이 한 가지 있습니다. 무엇이냐면 성경에서 그림으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까 봐 그림으로 그려지는 언어가 하나가 있는데요. 그 모습이 무엇이냐 하면 아빠와 아들을 그려줄 때에요. 아빠와 아들이라고 말하냐면 아들은 아빠의 모든 것들을 받을 수 있는 자가 되었다라는 겁니다. 그러니 아들이 되었다라는 것은 아빠의 모든 것들을 상속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너희가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라고 말할 때에는 너희는 이제 하나님의 모든 부유함을 요청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부유함을 끌어쓸 수 있는 아들이 되었으니 아버지 하나님한테 그 부유함을 요청하시라라는 그 고난을 받았으니 이 땅에서 그 고난을 누려라라는 그 영적인 비밀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아들들 딸들이라는 권한을 주셨으니 오늘부터는 마음껏 누리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제가 한 가지 더 부탁드리는 게 있습니다. 무엇을 부탁드리는가 하면 아빠라는 이미지가 무엇인지를 기억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왜냐하면 저는요. 딸딸이 아빠입니다. 딸딸이 아빠다 보니까, 꼬맹이들이 이렇게 디즈니를 이렇게 만화를 보더라고요. 디즈니 만화를 보니까 세상을 저는 꼬맹이들을 통해서 세상을 알게 됩니다. 꼬맹이들을 통해서 세상을 알다 보니까 세상이 아빠를 왜곡해서 가르쳐주더라고요. 제가 아빠다 보니까요. 세상에 엄마들을 나쁘게 가르치더라고요. 저희 꼬맹이들이 디즈니의 라푼젤이라는 만화를 봅니다. 아시나요? 머리가 이렇게 긴고 예쁜 공주가 있는데요. 거기에서 보니까 엄마가 마녀더라고요. 엄마는 나에게 상처를 주는 분이더라고요. 하늘 아버지라고 생각할 때에 마치 내가 육적인 아버지인 것처럼 나에게 상처를 주는 분은 아닐까? 나에게 어쩌면 나를 괴롭히는 분은 아닐까? 라고 내가 자녀와 아들의 관계를 왜곡되게 이미지를 그릴 수 있는 메시지 가운데에 이제는 살아갈 수 있는 시대가 되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그려지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이 있습니다. 어떤 모습이 그려지고 있는가 하면 시편 84편 11절 말씀입니다.

*시편 84:11,
11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이사야 49:15,
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한 절만 더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0절입니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수가 되었습 아멘.

*마태복음 10:30,
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기억해 주십시오.성경은 세상이 왜곡해 버린 이미지가 아니라 인내하고 자유로우시며 좋은 것을 아끼지 않는 분이라고 말합니다.세상의 부모를 혹 우리를 잇는다 할지라도 손바닥에 우리의 이름을 써가며 잊지 않는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늘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와 거리감이 느려지는 아이 아니라 머리탈까지 새시는 세심한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제 이쯤에서 그런데요 그런 하나님이신데 질문이 듭니다. 어떤 질문이 드는가 하면 왜 날마다 그 하나님 앞에서 구해야 됩니까라는 질문이 듭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의 병행 구절이 마태복음 6장 11절입니다. 마태복음 6장 11절의 바로 위에 마태복음 6장 8절 말씀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6:8,
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아 하나님께서 세심하고 머리털까지 아시고 전지하시고 전능하신데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신데 왜 그러한 하나님께 날마다 가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구해야 합니까? 그분이 정녕 좋은 분이 맞으십니까라는 갑작스러운 당혹스러움이 생깁니다. 마치 성경은 아까 처음으로 저에게 처음으로 돌아가게 만듭니다. 두 개의 충돌 앞에서니다. 모순덩어리 아닙니까라는 질문을 다시 가지게 만듭니다. 성도님들은 그러지 않으십니까? 그 질문 앞에 서기 위해서는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이 되는 출애굽기 16장 다시 만나의 이야기로 조금 돌아가야지 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만나의 이야기를 살짝만 볼까요? 출애굽기 16장 4절 말씀입니다.

*출애굽기 16:4,
4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여정 가운데에 날마다 오늘날 이해하기 위해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었던 약간의 시점을 이해하시면 조금 편하신데요. 만나는 아침에 주시고 외출하기에는 저녁에 주셨습니다. 그리고 여섯째 날에는 일곱째 날까지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저녁에 그다음 날 하루치를 주셨고, 때로는 아침에 그 저녁이 될 때까지 양식을 주셨고, 때로는 여섯째 날 이틀치 양식을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 하나님의 방식은 그들이 필요한 것을 아시지만 날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가와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은 날마다 하나님께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도 날마다 나에게 나아와서 하나님과 날마다 만나는 것들을 원하셨습니다. 그러니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라고요? 날마다 내가 너희들에게 나오듯이 너희들도 나에게 날마다 나오기를 나에게 만나는 것을 나에게 나아와 나를 만나주지 않을래?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날마다 나아온다는 것은 내 삶에 주시는 것들은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에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라는 입술에 신앙 고백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의존하고 살지 않아서는 내 삶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라는 나의 존재적 인정과 고백이 담겨져 있어야지 된다라는 겁니다. 왜 이것이 필요한가 하면은요 마치 이것이 없으면 누가복음 12장 13절에서 21절 부자의 비유가 해석이 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24:28~31,
28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9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내 곡식에, 내 창고에 일용할 양식이 풍성한 부자의 비유도 이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내 곡식에, 내 창고에 양식이 풍부하다 할지라도 왜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고백해야지 되냐면 하나님 내 창고의 양식이 풍성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축복이 보존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은근한 축복이 촉촉히 적셔지지 않는다면 하나님 이것들은 갑자기 사라질 수가 있습니다. 이것들은 갑자기 가치를 잃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이것들은 갑자기 사용되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라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 고백과 하나님을 향한 나에 의존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내가 그 고백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을 간구하는 이 기도는 곧 나의 신앙 고백이 담겨져 있는 기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우리에게 그 고백이 올려지는 기도를 바라보고 있다라는 거죠. 그러니 아버지 하나님 앞에 날마다 나아간다는 것은 나의 생존을 위한 기도 그 이상의 신앙고백이 담겨져 있는 고백임을 성도님들께서 기억하셔야지만 됩니다. 마지막으로 딱 하나만 더 보겠습니다. 그 무엇이냐면요 일용할 양식을 기도할 때에 우리에게 날마다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주시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외에는 없는 게 있습니다. 무엇이 없는가 하면 나 아이 니가 없습니다. 우리의 공동체의 기도 제목입니다. 우리의 공동체의 기도 제목을 딱 떠올리시면은 성도님들 딱 생각하시는 게 있습니다. 무엇을 생각하시는가 하면 책임감 그런데요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에 담긴 기도는 책임감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왜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가 하면 제가 마지막 이야기를 하는데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요. 의기소침한 두 제자가 엠마오로 이렇게 걸어갑니다. 작은 마을을 향해서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요. 그때 갑작스럽게 한 낯선 이가 두 제자 가운데에 동행합니다. 그리고 그 두 제자에게 너희들 왜 낙담에 빠졌니? 라고 물어보시거든요. 그 물어보신 다음의 이야기를 같이 본문 잠깐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24장 28절에서 31절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24:28~31,
28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9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아멘. 교회에 이상한 문화가 있어요. 특별한 문화가 있어요 뭐죠? 저희들 우리 하나님 만나자 할 때 어떻게 하죠?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여서 함께 식사를 그렇게 해요. 제자 훈련할 때도 끝나고 그렇게 같이 밥을 먹어요. 저도 사 상원사회를 섬기고 있는데요. 저희 권사님들께서도 수요 기도회 같이 기도를 하거든요. 기도회를 해도 저희 귀하게 섬기게 된 우리 회장님, 총무님, 권사님께서 저에게 꼭 일용할 양식을 꼭 주셔요. 왜냐하면 저희는 일용할 양식을 나누는 그 자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는 장소이며 그곳에서 우리의 눈이 열려 하나님을 알아보는 곳이기 때문에 단순하게 밥을 먹고 인생의 자랑을 나누고 교제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그 자리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곳이라는 믿음의 고백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인용한 양식을 주옵소서가 단순히 생존 방편이 아니라 단순히 책임이 아니라 그곳에서 우리가 교재를 나누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자리라는 것까지 기억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길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 가운데에 일용할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일용할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딱 두 군데만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하고 병행 구절인 마태복음 6장 11절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신학자들은 이 말이 무엇인지 에서 그리스 문서에서 해도 그리스 문서에 고대 문서에 다른 곳에서는 사용이 되지 않았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주석자들이 이 단어의 뜻을 해석하려고 보니까 크게 세 가지로 해석한다고 말합니다. 일용할 단어에 대해서 첫 번째는 우리의 생활에 필요한 두 번째는 오늘의 두 번째는 내일의 그래서 제가 이 주석자들이 해석한 세 가지 뜻을 종합해 보니까 이렇더라고요.

우리 생에 필요한 오늘의 그리고 내일의 양식 아마도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은 염려 가운데에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필요한 양식을 오늘도 내일도 영원토록 부어주실 것이니, 너희들이 염려 가운데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을 누리라라는 하나님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지 않으셨을까? 라는 생각을 누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어떤 분이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시절이 너무나 하수상하다고 마음에도 현실에도 눈물이 내려서 마음이 평안할 때가 없고 안식을 누릴 때가 없다라고 말씀들 하시더라고요.

그러할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라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내 삶 가운데에 오늘도 내일도, 앞으로도 영원토록 모든 피로를 채워주시는 그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오늘 밤 돌아가셔서 평안한 단잠을 주시는 은혜를 누리는 복된 이 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요약
하나님,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 부를 때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경외하는 우리들에게 있음을 알고, 하늘의 보화가 이 땅의 주의 백성들에게 상속됨의 실체를 누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 밤잠 못 이루는 불안한 영혼들은 하늘에 속한 이 땅의 참된 벗들과 샬롬의 평안을 맛보며 부흥의 새날을 여심을 믿고 이 새 땅에서의 삶에서 경탄할 만한 역사의 새 지평이 열리는 은혜를 맛보며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오늘 필요한 양식은 오늘, 내일 필요한 양식은 내일 있기를 위해서 간구해야 하겠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어린아이들이 부모에게 의지하듯이 우리는 하나님을 끊임없이 의지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날의 필요에 따라서 날마다 하나님께서 채워 주시므로 그날, 그날 해야 할 의무에 새롭게 복종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728x9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