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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9월 27일) 제목: "존귀한 예수, 능력의 그 이름" 말씀: 마가복음 4:3-41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설교자: 김은석 부목사님 ----------- * 마가복음 4:35-41, 35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 ▶이 저녁에 하나님께서 부흥의 새 역사를 경험케 하실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마가복음 4장 35절에서 41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온 교회는 하반기 사역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바라게는 우리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하여서 우리 모두에게 사명을 주시는 모든 사명을 잘 감당하는 2023년의 하반기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마가 복음서를 포함한 모든 복음서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분이 성육신하신 우리의 메시아, 우리의 구원자라는 사실입니다. 메시아이신 주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는가? 그리고 주님은 무엇을 하셨는가? 주님은 많은 것을 말씀으로 가르치셨는데 그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것을 충실하게 담아내는 것이 바로 복음서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서의 시작이요 마침입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다루게 될 이 본문에는 예수님이 과연 누구이신가를 너무도 분명하게 너무도 환하게 조명하여 주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이 새 복음서, 공간복음이라고 하는데요. 이 공간복음서에 모두가 다 기록이 되었는데, 이 공간복음서를 기록한 이 3명의 저자들이 모두 다 그가 누구이기에 라는 질문으로 이 본문을 마무리합니다.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지 않고 남겨두는 것은 아마도 이것을 대하는 독자가 스스로 답을 찾기를 원해서일 것입니다. 스스로 이 답을 찾아가면서 그 과정을 통해 우리 주님을 더 알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 주님을 신뢰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겠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고 있습니까? 제가 너무 어려운 질문을 드렸죠. 조금 더 예리하게 여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까? 오늘 이 사건을 기록했던 마태, 마가, 누가가 과연 이 사건을 읽는 우리에게 가장 바라는 마음이 무엇일까요? 아니요 이 사건에 등장하셔서 이 사건을 앞에서 이끌고 나아가시는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 우리에게 가장 바라시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제자라는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는 하지만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앎이 부분적이거나 온전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더라도 그분에 대해 바로 알고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요. 본문이 있기 전 마가복음 4장에서 4장 전체에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100배로 결실하는 씨앗과 같다는 거예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등경 위에 놓인 등불과도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람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이 자고 깨는 중에는 아무도 볼 수 없지만 밤에는 은밀하게 자라나 마침내 가을이 되면 그 주수대에 결실하는 이삭과 같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처음에는 작지만 다 성장한 이후에는 어느 것보다도 큰 겨자씨 하늘과 같다. 주님은요. 제자들에게 그리고 사람들에게 계속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그렇게 주님이 말씀으로 가르쳐 주시면 사람들은 듣지 제자들은 듣습니다. 그리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고 하잖아요. 이제는 듣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 그리고 주님만이 하나님 나라의 왕이시라는 것을 그리고 그분의 능력을 마치 시청각 교육처럼 목도하게 됩니다. 이처럼 갈릴리 도하 사건은 신학적으로 선교학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는요. 인간을 초월하시는 그 권능, 예수님의 신적인 지위와 능력이 잘 드러납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예수님이 이 배를 타고 이방 땅을 향하여, 이방인들이 살고 있는 땅을 향하여 나아가시게 되는데 이렇게 이방인들을 향하여 나아가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유대 땅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국경을 초월하고, 인종을 초월하고, 민족을 초월하여 온 열방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전하시려는 예수 그리스도의 소명, 즉 예수님의 초월하심을 증거 하는 사건입니다. 동시에 그 초월하심 가운데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시죠. 예수님이 제자들이 탄 배에 함께하시지 않습니까? 제자들이 만나는 폭풍을 주님께서 잠잠케 하시고 그들을 보호하시고 그들을 인도하시는 주님의 동행하심 바로 그리스도의 내재하심을 증거 하는 사건입니다. 우리 다 함께 본문 35절을 보겠습니다. 본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을 하세요. *마가복음 4:35, 35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저 편으로 건너가자.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이 있는 곳은 갈릴리 서쪽 해변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비유로 말씀하시던 중에 이제 해가 뉘엿뉘엿 지나고 저녁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것처럼요. 갈릴리는 그 둘레가 한 50km 정도 된다고 해요. 그리고 그 갈릴리를 건너는 폭이 한 12km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꽤 큰 호수지역 그리고 갈릴리는 해수면보다 낮은 곳에 위치해 있고 갈릴리 주변에는 산이 둘러 있기 때문에 한 번 산을 타고 이 바람이 내려 불기 시작을 하면은 잠잠하던 갈릴리가 갑자기 걷잡을 수 없는 고약한 풍랑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바람이 없을 때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너무 평온하고 너무 잔잔하죠. 그런데 한 번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여러분 지금 이 시간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이라는 사실을 아셔야 돼요. 이 풍랑을 만약에 만나게 되면 꼼짝없이 봉변을 당할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입니다. 제 생각에는 아마 대다수의 제자들이 어부였기 때문에 정말 따라 나서기 싫었겠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도 단호한 주님의 명령 앞에 제자들은요. 결국 무리를 떠나 갈릴리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풍랑을 만나게 되죠. 마치 주님과 제자들이 탄 배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바람을 이고 큰 물결이 배에 들이닥칩니다. 금새 배에 물이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우리 주님은요 잠을 주무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단잠에 들어 계시는 거예요. 너무나 고통스러운 삶의 문제들 앞에서 마치 더 이상은 버티기 힘든 사업을 하면서 집에 들어가는 것이 너무나 두려운데 너무나 우리 집에는 갈등하는 가족들이 있어서 또한 아무리 노력해도 정말 말이 통하지 않는 나의 자녀들 때문에 치료해도 아무리 치료해도 낫지 않는 나의 질병들 그리고 마음의 불안과 우울 때문에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는 이렇게 고통을 하고 있는데 아무런 말씀이 없으신 우리 하나님처럼, 주님은 제자들의 고통을 외면한 채 잠을 주무시고 계십니다. 여러분, 그런 생각 한번 안 해보셨습니까? 혹시 배 멀미를 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지금 상황이 다른 사람들은 어떻죠? 배가 흔들리고요 물이 지금 다 들어와서 죽을 지경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잠을 주무실 수가 있을까? 웬만하면 여러분 깨실 법하잖아요. 어지러워서라도 깨실 법한데 거의 이 정도면 수면(睡眠)장애(障礙)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는 상황이거든요. 그런데 그 가운데 주님이 곤히 잠을 주무신다는 것은 아! 주님의 뭔가 숨겨진 의도가 있는 게 아닐까? 여러분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이렇게 곤히 잠을 주무시고 계시는 이 주님을 제자들이 깨웁니다. 불안에서 시작된 원망으로 제자들은 다급하게 주님을 깨웁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왜 돌보지 않으십니까?” 여러분 곰곰이 생각을 해보십시오. 앞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격랑 속에서 너무나 평안하게 잠을 주무시는 우리 예수님과 똑같은 장소잖아요. 똑같은 상황에서 죽을 것처럼 벌벌 떨고 있는 이 제자들의 모습이 너무나 극명하게 대조가 됩니다. 여러분, 왜일까요?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제자들은 죽을 줄 알았던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알았어요. 절대로 배가 가라앉지 않는다는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아무리 바람이 불고요. 아무리 물이 들이닥칠지라도 예수님이 타고 계신 이 배는 절대로, 절대로 침몰하지 않을 것임을 우리 주님이 알고 계셨던 것이죠. 그러니까 평안하게 잠을 주무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강한 바람에 나무는 흔들려도요 태산은 끄덕도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이 풍랑이 바다에 일렁인다 할 지라도요. 바다 속 깊은 곳은 어떻죠? 평온한 것입니다. 폭풍이 일면 어떻습니까?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면 어떻습니까? 너무나 거센 호우가 내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구름 위는 어떻습니까? 찬란한 태양이 떠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처럼 여러분, 예수님이 누구이십니까? 바람과 바다의 주인이세요. 그런 주님이 이 배에 타고 계시는데 감히 바람과 바다가 어떻게 예수님이 탄 배를 침몰시키실 수 있겠습니까? 잠언 서 3장 23절에서 26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 함께 다 같이 잠언 서를 읽도록 하겠습니다. *잠언 3:23-26, 23 네가 네 길을 평안히 행하겠고 네 발이 거치지 아니하겠으며. 24 네가 누울 때에 두려워하지 아니하겠고 네가 누운즉 네 잠이 달리로다. 25 너는 갑작스러운 두려움도 악인에게 닥치는 멸망도 두려워하지 말라. 26 대저 여호와는 네가 의지할 이시니라 네 발을 지켜 걸리지 않게 하시리라. -뭐라고 기록하죠? 여호와는 내가 의지할 이시니라. 너의 발을 지키시리라. 내 배를 지키시리라. 너의 인생을 지키시리라 파도가 아무리 클지라도 여러분 하나님보다 크지 않습니다. 믿으십니까? 문제가 아무리 겹겹이, 겹겹이 쌓여 있다 할지라도, 결국 모든 것은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음을 주님이 알고 계시기 때문에 전혀, 전혀 두려워하지 않으시는 거 여러분 그뿐이 아닙니다. 본문 39절에 보면 주님은 바람을 향해 꾸짖으세요. *마가복음 4:39.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꾸짖으면서 말씀을 하세요. 여러분 이 모습을 보면 그냥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넘어서 이제는 주님이 이제는 스스로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보아라. 내가 하나님이라는 거야 내가 창조주다 내가 스스로 하나님으로 이 자리에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분으로서 모든 것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예전에는요. 비유로 말씀으로 알려주셨다면 이제는 말씀으로가 아니라 그분의 초월하심을 눈으로 목격할 수 있도록 직접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40절에 제자들을 향해 이러한 믿음을 가질 것을 요청하세요. *마가복음 4:40,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왜 너희에게 믿음이 없느냐 내가 지금 너희와 함께하는데 왜 두려워하느냐? 인생의 배 격랑이 일어나는 갈릴리를 향해 나아가는 제자들의 삶에 여러분 예수님이 지금 함께하고 계십니다. 그 안에 계시는 거예요. 그 배에 예수님께서 타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내재하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격랑을 만난 배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침몰했습니까? 배가 바다 속으로 침몰을 했나요? 아니요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무엇 때문에 가라앉지 않았습니까? 풍랑이 작았고 안에 있는 어부들은 그 풍랑을 능수(能手)능란(能爛)하게 컨트롤해서 그 배를 가라앉지 않도록 요리조리 잘 요리를 했습니까? 아니에요. 여러분. 풍랑은 너무 컸고요 제자들은 그 안에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왜 배는 가라앉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이유는 너무나 심플합니다. 배가 가라앉지 않은 건요 예수님이 그 배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초월하심과 이 그리스도의 내재하심이 여러분 우리의 가정을 지킵니다. 우리의 교회를 지킵니다. 우리의 삶을 보호하시는 줄 믿습니다. ♬나는 믿네~ 나는 믿네! 내 앞에 바다가 갈라지지 않으면 주가 나로 바다 위를 걷게 하리.~아멘! 이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 제자들은요 다음과 같이 이제 고백을 합니다.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본문에 보면 제자들이요 심히 두려워한다.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바람과 바다를 보며 두려워하던 이 제자들은 큰 풍랑을 압도하시는 더 큰 힘 앞에 심히 두려워하게 됩니다. 여러분 참 재밌는 게요. 두려워하는 그 모양은 비슷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 두려움의 실체는 완전히 다른 두려움입니다. 들이치는 물을 보면서 제자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그야말로 물을 보고 또 누구를 본 것입니까? 나를 본 거예요. 그 물 앞에 너무나 무기력한 내 자신을 본 것이죠. 그런데 주님을 향한 두려움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그 문제를 압도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향하여 경외함으로 사랑함으로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죠. 처음 두려움은 주님을 보지 않은 두려움입니다. 문제와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았던 두려움, 곧 불신앙의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향한 두려움은 어떻습니까? 초월하시며 내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나의 시선을 온전히 고정시킴으로 말미암아 오로지 주님만을 경외하고 주님만을 사랑하는 두려움인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요. 다른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믿으십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요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요. 모든 걸 두려워하는 거예요.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하는 우리 모두는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하나님만을 경외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시 가장 중요한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예수는 과연 누구인가?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세요? 시편 107편은요 긴 포로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이스라엘의 공동체를 향한 회복의 노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는가를 풍랑을 통해서 표현을 합니다. 우리와 함께 시편 107편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 시편 107:23-25,28-29, 23 배들을 바다에 띄우며 큰물에서 일을 하는 자는. 24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과 그의 기이한 일들을 깊은 바다에서 보나니. 25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즉 광풍이 일어나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 도다. 28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음에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29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 도다. -여러분, 기자의 고백대로 풍랑을 일으키는 것이 누구십니까?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세요. 그리고 그 풍랑을 잠잠케 하시는 이도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스라엘을 권능으로 지켜주시는 그 구약의 하나님이 오늘 본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증거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보여주고 계세요. 내가 바로 그 구약에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직접 보여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누구이십니까? 예수님은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초월의 주님이신 줄 믿습니다. 히브리서 13장 8절에 보면 *히브리서 13:8, 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와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분은요 창세전부터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앞으로도 영원토록 계실 전능의 왕인 줄 믿습니다. 특별히 여러분 주님은요. 하나님 나라의 왕이시며 주인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 나라를 여는 열쇠가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법이며, 하나님 나라로 가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누구도 하나님 나라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는 이 초월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기를 간절히, 간절히 소망합니다. 또한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주님은 우리 가운데 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의 길은요 풍랑을 이렇게, 이렇게 피해가는 길이 아니라 풍랑을 헤쳐 나가야 하는 길입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걸어가야 될 이 길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씀을 하십니다. *요한복음 16:33,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는 여기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는 말에 주목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세상이 어떻죠? 지금 세상은요 죄악이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런 세상을 성도로서 살아가면서 어떻게 성도의 삶에 환란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환란을 피할 수는 없을지라도 우리가 주님 안에,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 큰 풍랑을 만날지라도 그 배 안에 예수님께서 거하시는 것처럼 우리는요. 우리의 삶에 내재하시는 주님으로 인해 세상이 도저히 빼앗을 수 없는 참된 평안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저는 2015년 10월에 경기도 수원의 한 예배당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저는요. 제 눈에 그렇게 많은 눈물이 들어있는 줄 그날 처음 알았습니다.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너무 영광스럽잖아요. 목사의 직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 너무 영광스러워서 가슴이 벅차고 너무 기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평생을 개척하셔서 쉽지 않은 목회의 길을 걸으셨던 부모님의 삶을 조금은 알기 때문에 두려움이 굉장히 많이 컸던 것 같습니다. 우리 사랑의 교회도 한 번 순장님이 되시면, 순장 사역을 이임하셔도 순원이라고 부르지 않고 뭐라고 부르죠? ‘쉬는 순장님’이라고 이렇게 부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한 번 순장님은 계속 이제 순장님이신 거죠. 그런 것처럼 한 번 이제 목사가 되면 물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물러설 수가 없는 거예요. 이제 죽으나 사나 나는 이제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구나! 라는 어떤 짓눌림이 제 안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감정이 많이 이렇게 올라왔던 것 같아요. 그렇게 안수식이 진행되고 있는데 제가 너무 우니까 축사를 하시려던 목사님이 막 역정을 내십니다. “초상났나요? 그만 좀 울어요.” 이렇게 호통을 치시면서 분위기를 바꾸시려고 농담을 하십니다. “저는 오늘 축사를 맡았습니다. 축사에는 세 가지 뜻이 있는데 첫째 짐승을 기르는 우리를 축사라 합니다. 둘째, 귀신을 내쫓는 것을 축사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쁜 일이 있을 때 축하하는 것을 축사라 합니다.” 이렇게 하시면서 제가 막 울다가 웃다가 그랬어요. 그런데 그 가운데 이제 목사님이 뭐라고 하셨냐면 목사님들 울지 마세요. 제가 그날 2명이 목사 안수를 받았거든요. 목회는 힘든 것이지만 주님이 함께해 주십니다. 사역을 하고 교회를 섬기면서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어려움이 많겠지만 예수님이 목사님의 목회 가운데 늘 함께해 주십니다. 저도 돌아보면 늘 어렵고 힘들었지만 주님이 항상 함께해 주셔서 오늘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목사로 임직하심을 축하드립니다. 이 말씀을 하시는데 제가 눈에 눈물이, 눈물이 제가 그날 너무 울어가지고 그날 남은 눈물을 다 쏟아가지고요. 지금 흘릴 눈물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나선 제자들처럼 살겠노라고 신학교에 가 목사 안수까지 받게 됐지만 저는 제 자신을 너무 잘 알잖아요. 난 너무 부족한데 이 무거운 집을 내가 감당이나 할 수 있을까? 두려움과 염려에 짓눌려 있던 제게 예수님이 함께하신다는 그 말씀이 어찌나 큰 힘이 되던지요. 지금도 그 목사님의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본문 36절에 보면 뭐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까?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네. 라고 기록합니다. *마가복음 4:36, 36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내재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이요. 잠을 주무시는 건 제자들의 고통을 돌아보시지 않는 게 아니에요. 그들의 신음을 외면하시기 때문에 주님이 잠을 주무시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은 문제 앞에서조차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참 믿음의 본을 보여주고 계시는 거예요. 여러분이 누구보다 평안하길 원하세요. 여러분이 누구보다 거친 풍랑을 헤쳐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존귀한 예수 그 이름의 능력을 힘입어 날마다, 날마다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내가 물 가운데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라. 내가 불 가운데 지날 때 타지도 아니할 것이며.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여러분 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이 예언의 말씀, 이 약속의 말씀을 이루시려고 그 밤 그 저녁에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고 계심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온전한 믿음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세요. 우리 사랑의 교회가, 여러분 우리 가정이 어떤 격랑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흔들리지 아니하고 오직 주님만 바라봄으로 승리하는 것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 믿음,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요, 이 믿음의 반석 위에 선 교회와 가정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운 일을 행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의 능력을 의지함으로 하나님 나라 건설에 앞장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간절히 소망합니다. ♣요약 우리는 어떠한 풍랑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오로지 하나님만 두려워함으로 다른 모든 것들을 두려워하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달아서 주님의 심정으로 우리도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드러내는 증인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인생 항로에는 잦은 풍랑이 있는데 그러한 풍랑 중에는 주님이 즉시 구원치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어떤 풍랑에도 주님은 성도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고 성도는 오직 믿음으로 풍랑을 이겨야 한다. 그런데 본문에서 보면 주님의 제자들은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풍랑이 닥치자 크게 두려워하였고, 이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으셨다. 주님이 항상 함께 계심을 믿지 못하는 연약한 우리 인생은 세상의 풍파만 보면 겁먹고 좌절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는 임마누엘 신앙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하겠다. 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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