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10월 4일)
제목:"하나님이 주어되는 인생"
말씀: 창세기 4:1-8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부목사님)
사회: 김대규 부목사님(마무리 기도)
(강대인 부목사님)-사랑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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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5:1-8,
1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 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
2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3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6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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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사모하며 회복의 새 길로 또 이 길을 열어주신 우리 모든 분들, 이 수요 예배에 참여하셔서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수요 저녁 기도회를 통해서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나아가는 시간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오늘 주신 하나님의 말씀 함께 보면,
-“모두 나가시오! 제가 동생 요셉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계십니까?” 요셉은 주변의 모든 이집트 사람들을 다 쫓아 보내고 자신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이 말은 좀 이상하게 들립니다. 어색하죠? 이전에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어요. 그래서 형제들의 아버지, 당신들의 아버지라고 부르다가 오늘 이 본문에 보면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렇게 모두가 바뀌면서 “아버지 잘 계십니까? 살아 계십니까? 별일 없으십니까?” 라고 묻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생사를 이미 알고 있지만 다시금 묻고 있는 것이죠. 뭔가 조금 다른 차원으로 이렇게 대하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형들은 어땠을까요? 너무나 당황했습니다.

아연(俄然)질색(窒塞)했어요. 어찌 할 줄 몰랐습니다. 두려움과 충격에 빠졌습니다. 그저 위축된 모습으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왜 그럴까 봤더니 이 요셉은 형제들에 대한 애절함이 있었고요 또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했습니다. 특별히 동생 베냐민을 향한 그 애달픈 사랑이, 그간절한 그 마음 그것을 유다의 헌신되고 진실한 사랑을 통해서 요셉은 바라보게 된 겁니다. 그러면서 요셉의 마음이 활짝 열렸습니다. 그동안 요셉의 인생에서 너무 길었던 시험의 과정은 너무나 힘들게 보이죠? 견디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하나 겪어가는 것 자신이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만져주셨어요. 하나님이 함께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험난한 세월이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참 의아하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 모친 시간들을 다 견딜 수 있냔 말입니다. 자신은 너무나 분명 힘들 것인데 어떻게 기꺼이 형제들을 용서할 수 있었을까요?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올 수 있었을까요? 사실 이렇게 용서할 수 있는 마음, 정말 진심을 다해서 내 모든 것을 다 내어놓고 받아줄 수 있는 그 마음은 쉽지 않습니다. 요셉의 인생을 아는 사람이라면 더 그럴 것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원한과 상처가 깊은 그 마음, 결국 쓴 뿌리로 빠져들어 자신의 인생을 한 걸음도 걸을 수 없을 것 같아 보이는 모습이 바로 요셉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원수를 원수로 갚지 않습니다. 도리어 어떻게 하고 있죠? 그들을 용서합니다. 부당하게 해를 입힌 자를받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부당하게 해를 입힌 그 원수를 용서할 수 있을까요? 받아줄 수 있을까요? 정말 진심으로 그 사람을 내가 받아들이면서 함께 그와 함께 먹고 마시면서 살 수 있을까요? 억울한 일을 겹겹이 겪게 되면 더 원망하고 더 불편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이 말씀에 나타나는 용서라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불편하게 다가옵니다. 본문은 용서할 능력이 어디로부터 나오고 있는지 아주 선명하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우리가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오늘 이 시간을 통하여서 여기 계신 모든 분들에게 용서의 은총을 내려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누군가를 용서하는 건 너무나 어렵다고 했죠?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용서할 지라도요. 아마 완전히 만족하는 용서는 할 수 없을 거예요. 상대의 불의함은 끈질기게 남아 있고 또 상처는 우리를 계속적으로 괴롭힙니다. 오래전에 이미 하나님께 다 맡겼다라고 생각한 문제들까지도 다시금 내 안에서 되살아나면 나를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처의 황무지를 걸어가며 고통 하는 가운데 용서라는 이 말은 너무나 서글프고 또 거북스럽기까지도 하죠. 용서는 너무나 버거운 행위이고요 평생 가장 힘든 일일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소름 돋는 복수극을 보면서 왜 저런 드라마를 볼까? 라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동안 상처와 트라우마로 빠졌던 우리의 그 마음을 대신 처절히 응징해 주는 것을 보면서 가슴 시린 이 마음에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복수를 주제로 하고 있는 이 막장 드라마는 대부분 시청률이 높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용서는 무엇일까요?

사전적으로 보면 부당하게 해를 입힌 사람에게 붕괴하거나 부정적 판단을 하지 않고 무관심한 행동을 할 권리를 자진해서 포기하면서 연민 또 관대함 심지어 사랑으로 품어주는 것이라고 정의 내리고 있습니다. 듣기만 해도 너무 불편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성도는 용서해야 됩니다. 성도는 우리에게 용서에 대한 말씀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주 줄 읽는 주기도문 말씀에도 나오잖아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그렇게 간구합니다. 그런데 용서는 읊조린다고 되지 않습니다. 그저 관념적인 것이 아니죠. 실제적인 것입니다. 파격적인 것입니다. 그만큼 어려워요. 너무나 힘듭니다. 용서보다 어려운 것이 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마 끝까지 용서하지 않는 것일 것입니다. 그만큼 용서하는 것도 어렵고 용서하지 않는 것도 어렵습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서 참 죄송한데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 제가 군대 입대한 후에 처음으로 사람을 미워해봤어요. 군에서 만난 두 달 위, 선임이었습니다. 얼마 이렇게 높지도 않다 보니 저도 참 제 마음에 이렇게 해도 되나? 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군대에서 이렇게 혼나는 게 있는데 언제 혼나냐면 웃으면 혼납니다. 제가 웃상이잖아요? 얼마나 혼났겠습니까? 너무 힘들었어요. 웃지 않는 게 제일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정오 시간만 되면 이제 이 세밀한 입 꼬리까지 그리고 이 눈매까지 아주 세밀하게 보던 그 사람이 그 손님이었습니다. 그냥 이렇게 피식만 해도 절 데리고 왔어요. 따라와 그러면 그냥 혼란한 겁니다. 그런데 그냥 후임들 웃기려고 장난치는 말년 병장들도 있었습니다. 오죽했겠습니까? 그런데 그 선임은 제가 병장을 달 때까지 계속적으로 저를 괴롭혔습니다. 모태 신앙으로 자라면서 미워하면 안 된다. 라고 배웠기 때문에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거 제 스스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주일에 교회를 못 가게 하면서 괴롭혀가지고 화장실에서 눈물을 흘렸어요. 때로는 억울하고 불이 나서 잠 못 이룰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 선인과 매일 살아가는 것이 어찌나 힘든 일인지 몰랐습니다. 억울함도 컸지만 그보다 내 자신이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라는 그것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마음으로는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만 쉽지 않았어요. 그만큼 받은 피해가 크면 클수록 상처는 더 깊었습니다. 용서는 개념이 아니에요. 현실입니다. 피해자의 고통스러운 감정을 수반합니다. 매일 마주하는 서림 앞에서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앞에 용서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며 매달렸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이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특별한 옷을 입히는 편애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형들의 시계에 의해서 이집트의 노예로 팔리게 되었고요. 또 노예로 팔리고 나서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어떻게 됩니까? 모함을 받아서 누명을 쓰고 이제 감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억울한 인생 중에도 가장 억울한 인생일 것입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주고, 이제 그 사람이 나를 좀 어떻게 좀 도와주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어떻게 합니까? 모른 척했습니다. 배신했습니다. 요셉은 이처럼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배신과 모함을 받았기 때문에 그 상처가 더 깊었을 것입니다. 트라우마가 남을 만도 하죠. 그런데 요셉의 인생에서 간섭하시고 이끌어주시는 그분, 늘 끝까지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그분 하나님이십니다. 요셉은 일평생 하나님을 느꼈고 그분을 바라보았으며 그분의 인도를 확신했습니다. 그의 인생의 주어는 늘 하나님이었습니다. 주어는 문장을 이끄는 주체가 되는 단어입니다. 문장의 가장 핵심이 되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주어이죠. 요셉의 주체 자는 곧 하나님입니다. 본문 5절, 7절, 8절에는 이것을 기록하고 있는데요.

*창세기 45:5,7,8,
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6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오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습니다.
-이처럼 형제들에게 그는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인입니다. 하나님이 주어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즉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의 역사가 나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라고 형들에게 고백합니다. 그래서 도리어 자신을 이집트에 팔아넘긴 형들을 위로할 수 있었죠. “형님들 형님들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옵소서 한탄하지 마옵소서. 나를 보낸 이가 여호와시오 나를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 형제들의 악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끝까지 새일 행하실 하나님을 주어로 여겼습니다. 그렇게 하니 그 모든 시간들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시간이라고 해석된 거죠.

여러분,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사람들의 이 악함까지도 사용하셔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역사를 써 가십니다. 그 섭리 가운데 요셉을 사용하셨습니다. 요셉이 이걸 알았어요. 이것을 믿은 겁니다. 하나님은 아신다. 이것이 바로 용서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원한을 품지 않았고요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이 놀라운 신비에 얼마나 하나님께서 끝까지 인도하시는지를 그는 확신하며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또 섭리를 인정하면요 원수까지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원수의 악행도 하나님은 선으로 바꾸시고 당신의 뜻대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그래서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그저 내게 나타난 현상, 내게 주어진 환경만 바라보지 말라고 합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그를 위하여서 기도하라.

여러분, 용서하고 싶은데 용서가 안 되고 계속적으로 그 사람에게 마음이 사로잡혀 있습니까? 누가 좋아할까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인정하십시오.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며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고 합니다. 베드로에게 심지어 70번씩 7번까지 용서하라고 말씀합니다. 사도바울도 말하죠.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또 목마르거든 마시오라고요. 목마르네요.

※미국 하버드 의대의 정신과 교수인 조지 베일런트는 “용서를 위해서는 감정 이입과 미래를 그릴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라고 한다. -조지 베일런트-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바탕으로 과거 일에 얽매이지 말고 오히려 보다 나은 미래를 바라보면서 나아가는 이 마음이 용서할 수 있다. 복수심을 내려놓고 용서하려면 그 일은 그저 과거에 머물러 있는 일이라고 인식해야 합니다. 그래야 더 나은 미래를 향해서 나아갈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펼쳐주실 새로운 미래를 향하여서 나아갈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더욱더 아끼고 사랑해야 합니다. 나를 먼저 용서해야 합니다. 다가올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분명한 확신은 여러분 어디에서 올 수 있습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그 시선, 내가 바라보고 있는 이 시선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바라보고 계실까?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까?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면서 어떤 표정을 짓고 계실까? 하나님을 주어으로 삼게 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게 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과거에 매이지 않습니다. 지금 과거를 청산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더 좋은 미래가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 미래를 현재로 끌어서, 지금 이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그가 꾼 꿈을 통해 보이신 그 계시를 믿었습니다. 바로의 꿈을 해석하면서도요 이것이 하나님의 계시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여러분, 계시를 믿으면 어떻게 됩니까? 오히려 자신 앞에 두려워하는 형들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 우리가 할 수 없는 일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에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낙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고난을 인내로 극복하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이 주인이시기 때문이죠. 하나님이 이 우리 가족을, 이 우리 가족의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님이 나를 먼저 보내셨다. 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의 손길을 요셉은 깨달은 것입니다. 요셉은 어떤 고난에도 원망하거나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난 중에 하나님을 더 의지했어요. 그 고난을 인내로 극복하며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갔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으면서 모든 시련과 역경을 극복할 수 있는 이 원동력을 그 투나미스 능력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고난이 왜 괴롭습니까? 고난 자체가 주는 그 어려움도 분명 있겠지만 이 고난의 원인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요. 여인이 해산할 때 자신의 고통의 원인을 알기 때문에 이것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리고 출산 이후에 기쁨을 바라보기 때문에 견뎌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되면요 모든 고난의 원인과 결과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금 해석되지 않는 그 고난이 바로 이 시간 해결될 줄 믿습니다. 그러면 고난 중에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고난을 극복하면서 더 큰 축복과 영광 가운데 우리를 인도하실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욕도 마찬가지였죠.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그 고통 가운데 그는 이렇게 욥기 23장 10절에서 고백합니다.

*욥기 23:10,
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주가 보이신 생명에게 찬양이 나오는 가사인데요. ♪나의 길 오직 그가 아시나니 나를 달려하신 후 내가 정금 같이 나아오리라.♩!!~ 그 시련의 시간 그 고난의 시간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가운데 정금같이 인도하시는 시간이라는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여러분, 요셉이 이집트로 보냄 받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정금같이 구원의 도구로 쓰임 받기 위해서 7절에 그 답변이 나오죠? 큰 구원으로 야곱의 가족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먼저 보내셨다. 하나님이 성도들을 택해서 왜 세상에 보내셨을까? 왜 나를 부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이곳저곳에 나를 보내고 계실까? 그것은 바로 죽어가는 영혼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나도 많이 있기 때문에 우리를 보내고 계신 것입니다. 그들을 구원하라고, 그들을 영혼 구원의 도구로 우리를 삼고자 지금도 우리를 보내고 계십니다. 요셉은 가족의 생명을 구원하는 사명을 기쁨으로 감당했습니다. 이들을 구원하는 것은 나의 사명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어가는 영혼들을 향하여서 영혼의 양식인 말씀을 끝까지 공급하며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까? 마태복음 28장 19절, 20절의 말씀에도 나오고 있죠 제사를 삼아라

*마태복음 28:19-20,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모든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내가 분부한 모든 것에 지 너희를 인도할 것이다. 라는 이 주님의 말씀 사도바울도 뭐라고 고백합니까? 나의 달려갈 길과 또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였다. 그는 사명을 목숨보다 귀하게 여겼습니다. 요셉은 바로의 꿈을 통해 보이신 계시를 의심치 않았죠. 끝까지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사명의 사람입니다. 계시를 받은 사람입니다.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역동적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말씀에 확신이 있으면 역동성이 나타납니다. 말씀을 부여잡고 나가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습니다. 불확실은 인생을 실패로 치닫게 하지만 계시의 말씀을 신실하게 믿고 따르면 그 가운데 역사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는데 아직도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매일 마다 말씀을 보고 있는데 왜 내 삶속에서 역사가 일어나지 않을까요? 잘 들여다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 말씀이 내 가운데 역사하시는 말씀이라는 확신이 없기 때문에 그 가운데 역동이 일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 확신하면요 정말 주님의 말씀을 믿으면 내가 알 수 없는 용서가 가능해집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용서되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 화해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요셉은 무수한 그 어려움 속에서도 자기만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자기 연민에 더 이상 빠질 이유가 없고, 오히려 자기 용납하면서 난 그런 인생이야 너 안 될 인생이야! 라고 살 수도 있는데 이것을 뛰어넘게 하시는 그 하나님의 역사를 날마다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보통 관계 속에서 막 꼬인 것들을 있을 때마다 뭘 생각하죠? 저 사람 만나고 싶지 않다 그런 생각하잖아요. 그러면서 내가 저 사람을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왜 나에게 그만큼 보상이 오지 않을까 내 이 내 생각 내 입장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 감정이 앞서게 됩니다. 그러나 내 기준으로는 어떤 용서나 어떤 화해도 이루어질 수 없겠죠? 어떻게 해야 화해가 일어납니까? 다 받아내면 그저 모든 것들을 다 그냥 그래 맞춰야 합니다. 그러면 용서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이거 맞지만 틀린 이야기입니다. 왜 그럽니까? 이 용서라는 거, 이미 얘기했지만 내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무리 내 열심을 다하여서 하려고 해도, 용서는 내 속에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것이 가능하다. 라고 생각하는 것 그 자체가 교만인 것이죠. 그럼 어떻게 해야 됩니까? 신실하신 하나님 믿어야죠. 나보다 정의를 실현하는 데 뛰어나신 그 하나님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용서를 통해서 복수하려는 마음을 거두고 하나님께서 처리하시도록 넘겨드려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다 갚아주십니다. 그래서 필립 얀씨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정의와 자비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할 저울을 하나님의 손에 놓아드려야 한다. -필립 얀씨-

-요셉을 계속적으로 묵상하다 보니 떠오르는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완전한 화해와 용서를 허락해 주셨죠. 그는 누구일까요? 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끊어진 관계를 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 자신을 완전히 내어드렸습니다. 모든 모욕과 온갖 고통을 다 참아내시면서 그 인간의 악한 꾸밈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믿고 순종하였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어 되는 인생’을 산 것이죠. 하나님의 선하시는 뜻을 믿었기 때문에 자신을 십자가에 들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섭리 가운데 반드시 화해하시고 회복시키고 살리신다. 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끊어진 관계를 이어주시려고 본인이 스스로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감당한 것입니다. 그 길은 좁은 길입니다. 죽는 길입니다. 하지만 생명의 길이에요. 영원히 살아나는 길입니다. ‘이를 믿는 자마다 영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이 부활의 길이자 소망의 길이기에 우리는 이 길을 바라봐야 합니다. 신학자 톰 라이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화해 사역을 통해서 용서가 가능해졌기에 하나님은 세상을 죄의 짐에서 해방시킬 뿐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도 탈락한 세상에서 늘 진노하셔야 하는 짐에서 해방되신다.” 라고요.
-신학자 톰 라이트-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의 짐도 덜어지고 우리에게도 하나님과 화해하는 이 놀라운 은혜를 은총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라고, 용서하라고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고 계시는데, 우리가 용서하지 않을 이유가 있습니까? 전혀 없잖아요? 성경 어디에 찾아도 용서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받아들이면 돼요. 용서를 가로막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침묵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향해서 두 팔을 벌리고 “내게 와라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받아들이고 있다 어서 좀 와라” 라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치 탕자의 아버지처럼 저 멀리서 어제 나오려나, 이제 나오려나, 라면서 끝까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그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근이역에 달려가 그를 안고 입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범위 좁지 않습니다. 원대합니다. 이 기근의 때에 돌아온 요셉의 형제들뿐만 아니라 무엇이라고 고백하고 있냐면요. 7절에 보면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나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다. 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에 보면 가족들뿐만 아니라 후손을 두시려고 했다. 라는 것을 원어로 보니까요. 남은 자더라고요. 렘넌트 무슨 말입니까? 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그 자들, 우리가 123에 바에게 무릎 꿇지 않는 그 7천 명을 남겨주신 것을 가지고 함께 많은 목회자들이 기도하는 것처럼 여전히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남은 모든 자들을 구원하시겠다. 라는 이 놀랍고 원대한 계획을 요셉을 통해서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요셉은 어려서부터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랐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듣고 너희 아버지, 너희 할아버지, 또 조부모에 이르기까지의 아브라함, 또 이삭 야곱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언약을 진실 되게 믿고 따랐다. 라는 것을 이 아들 요셉에게 사랑으로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 어렸을 때 이야기했던 그 이야기가 요셉의 귀에 쟁쟁했어요. 그는 그 청소년의 나이에 이집트로 팔려갔지만 그 하나님의 언약을 끝까지 마음에 새겼습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이르실 것이다. 지난 날 동안의 날 동안의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뜻은 변개치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실 것이라는 이 믿음이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 삼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 주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이 복음의 놀라운 사실은 우리에게 크고 놀라운 감동과 감격을 주며 우리가 살아갈 이유를 제공합니다. 아무리 어려움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이 모든 어려움들을 해치고 이겨나갈 수 있는 힘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능히 이루실 것입니다. ‘능하신 이가 큰일 행하시니 그 이름 거룩해 내 영혼 주 찬양하며’~ 요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아요. 심지어 하나님께서 자신을 바로의 아버지로 삼았다 그 온 집의 주인으로 삼으셨다. 라고 고백합니다. 이 말을 해석해보면요. 내가 바라보다 높게 되었다. 라는 의미 아닙니까? 이거 반역자가 하는 이야기예요. 그런데 잘 살펴보면 요셉이 스스로 이인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요셉을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역사하셨기 때문에 바로의 아버지로 삼으셨다는 것이고 온 지배의 통치자로, 요셉을 삼고 계신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의 직위는 더 낫지만 실제로 그는 더 위에 있었습니다. 이집트에 있는 모든 정책을 요셉을 통하여서 계획하였고 실행하였습니다. 이집트의 온 땅의 통치자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 나라의 주인은 누구십니까? 이 대한민국을 살리시는 그분은 누구십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을 주인삼고 그 뜻대로 살아가면요. 낮은 지위에 있다 할지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하나님이 높여주실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위대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위대합니다. 하나님이 빛으로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빛의 사람으로 쓰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바로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누구보다 견딜 수 없는 고난을 겪었지만 하나님이 주인이기 때문에 견뎌냈습니다. 그 모든 사건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우리의 주어가 하나님임을 인정하십시오. 모든 상황을 뛰어넘어서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여전히 용서되지 않습니까? 그 사람 때문에 오늘 하루 망쳤다고 생각합니까?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마십시오. 넘어지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섭리 속에 나를 끝까지 이끄실 것을 믿으십시오. 용서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화해하는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견딜 수 없는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그 군대 선임 용서했을까요? 용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원한에 대한 그 안 갚음은 끝없는 악순환을 불러일으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내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자구나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내 안에 괴물이 있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습니다. 정말 많이 울면서 회개했습니다. 그렇게 울고 있는 저에게 예수님이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니 다른 사람에게 은혜로 응답할 힘이 생겼어요. 받아들일 힘이 생긴 것입니다. 이것은 내 지식과 나의 어떤 경험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한이 없는 은혜를 주시니 그저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더 이상 이 상처의 올가미들은 다 떠나가라. 라고 외칠 수 있었습니다. 마틴 루터킹 주니어 목사님은 “용서란 단지 가끔 하는 행동이 아니라 영구적인 태도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줄 선물인 은혜와 용서를 지지하는 이 문화를 형성하는 것보다 더 위대한 것이 어디 있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용서라는 것은 우리 본성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하시기에 계속적으로 배우고 훈련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고 따르면서 지속적인 은혜를 받아 누리셔야 합니다. 우리가 ‘2033, 50’ 비전을 가지고 나아가잖아요. 이 비전 받으면서 한 번쯤 이런 생각하죠? 그게 과연 우리의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십니다. 작년 ‘9.26일’에 보여주셨습니다. 많은 자리에서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우리 가운데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 이 나라 사랑하십니다. 대한민국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행하실 것입니다. 더 나은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게 하실 것이기에 더 이상 과거에 매이지 마십시오. 미래를 이끌어와 현재를 그렇게 하나님의 뜻으로 살아가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요약
이유 없이 모욕과 멸시를 받으시고, 피 흘리신 십자가에서 이 모든 것을 용서하신 예수님을 통해 용서받아서 용서하였다고 하면서도 왜? 이렇게 용서가 쉽지 않은지, 상처와 쓴 뿌리로 자신을 괴롭히는 이 꼬인 얼개들을 화해의 다리로 풀어주심을 확신하여서 옹졸한 편견으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지 않아야 한다. 십자가 부여잡고 은혜에 빚진 자 되어, 먼저 용서하고 관계를 회복하기를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이 그의 섭리 가운데 열어주실 미래를 현재로 끌어와서 더 이상 맨 곳에 살지 않고, 빛과 제사장의 사명을 감당하는 인생 되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어되는 인생길’을 걸어가는 삶이 되어야 한다.

▶사회 김대규 부목사님
나조차도 내 인생의 연약함을 바라볼 때 나조차도 내가 용납이 안 되는데 어느 누구인들 나 이 좁은 마음에 품고 그를 사랑하고 용납하며 용서하겠습니까? 하나님 은혜 주셔서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과 은혜 가운데 메이고 잠기는 이 시간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 믿음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은혜의 시간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의 제목 우리 보시면서 오늘 주신 말씀 기억하고 함께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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