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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9월 13일)
제목: "고난 가운데 넘치는 위로"
말씀: 고린도후서 1:3~11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부목사님)
사회: 김대규 부목사님

설교자: 임병영 부목사님
ㅡㅡㅡㅡㅡㅡ

*고린도후서 1:3~11,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11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수요 저녁 기도회에 참여하신 모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이 시간 우리가 회복을 넘어 부흥의 산 역사를 경험하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옆에 있는 분들에게 한번 이렇게 인사했으면 좋겠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네 잘 오셨습니다. 말씀을 통하여서 주시는 강력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시는 시간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1장 3절에서 11절까지 말씀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3절에서 11절까지 말씀을 제가 한 절, 여러분들이 한 절 교독하신 후에 마지막 절은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 요즘 제 주변을 돌아보면 고난 중에 있는 분들을 참 많이 보게 됩니다. 얼마 전 다녀온 장례식의 경우에도 자녀를 먼저 하나님께 보내고, 또다시 오래지 않아서 남편을 하나님께로 보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분과 함께 남편의 죽음을 준비하면서 병원 신방인과 또 임종 예배, 그리고 장례 예배를 치르면서 지척에서 아픔 가운데 있는 분들을 보게 되어 마음이 무척이나 힘들었던 경우가 있었습니다. 또 어떤 분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기도 중에 있는데, 오래전 자녀를 먼저 보내고 근래에 남편이 항암 치료 중인 데다가 또 다른 자녀마저 시한부라고 하는 소식을 듣고 무척 힘겨워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그저 한숨만 나오는 안타까움에 솔직히 어떻게 위로해야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시간을 갖고 있는 중입니다. 전화를 드렸지만 전화는 받지 않으시고, 여러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 어떻게 하면 그분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전할 수 있을까요? 하는 기도하는 마음 중에, 아마 오늘 이렇게 고난 가운데 위로에 대한 말씀을 전하게 된 것 같습니다.

비단 제 주변의 이야기만 있을까요? 건강하게 잘 지내는 줄 알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검사를 받다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시한부라는 사식을 듣게 되었다면 여러분은 그 사실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오랫동안 경제적인 압박에 시달리면서 언제쯤 숨통이 트일지 감당하기 쉽지 않은 그런 상황 속에서 한숨만 내쉬고 남모를 눈물을 흘리는 분들도 또 얼마나 많으실까요? 오랫동안 임신하지 못하고, 여러 번의 시술에도 결과 없이 답답한 마음을 보내는 날들이 원망스러운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침묵하고 계신다고 생각되어서 마음에 큰 상처와 아픔을 가지신 분들도 이곳에 계실 거라 믿습니다.

이런 분들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이분들을 위로할 수 있을까요? 따뜻한 말 한마디, 그리고 손을 잡아주면서 격려하는 행동들이 그분들에게 얼마큼 위로가 될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때론 그 고통을 겪고 있는 분과 만나는 것을 두려운 마음으로 마주하기도 합니다. 나에겐 그분을 위로할 힘이나 준비가 아직 안 돼 있다. 라고 생각이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심지어 많은 고난을 겪고 있는 분들을 만나게 되면,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있지만, 그분의 삶이 도대체 어떻하길래 이렇게 고난이 많을까라고 고민했던 적도 있습니다. 혹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죄를 지어서 하나님의 벌을 받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감히 입 밖에는 내놓지 못하지만, 마음속으로 그분의 상황들을 살펴보며 안타까워하는 경우도 있겠죠. 도무지 그 많은 고난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 고난을 받은 사람들이 참 많이 있죠. 그중에 대표적인 인물을 한 사람 이야기한다면 바울을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울은 그런 면에서 고난을 받았다. 라는 그 경험 때문에 하나님의 벌을 받고 있는 것 아닌가라고 하는 오해를 받기에 충분할 정도로 많은 고난을 경험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았는지, 그를 대적하던 사람들이 바울을 공격하는 수단으로도 그 고난을 이용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시다시피, 바울이라는 사람은 다메섹으로 가는 그 길 위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하는 모든 날 동안에 수많은 고난을 겪었던 사람이죠.

40, 40에 하나를 감안한 매, 다시 말하면 39대의 매를 여러 번 맞았고, 감옥에도 갇히고, 여러 번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상황도 경험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고난의 시간들을 살펴보면 과연 그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도가 맞는지 의심이 들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 있던 바울의 대접 자들은 바울이 겪은 고난으로 인해서 그가 사도로서는 부적합하다. 라고 생각하면서 사도직 자체를 부인하는 근거로 삼고 공격했던 것입니다. 그럼 그들에게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보내서 고난이 자신의 사도직을 부인할 근거가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을 위로를 경험한 큰 증거로 고백하면서 고난을 찬양하며 대적들의 말에 반박하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고린도후서의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함께 읽었던 바울의 이야기들 중에 우리가 함께 읽었던 본문의 핵심적인 내용을 한번 살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로, 본문에서 바울의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I.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참된 위로 자가 되신다.

-함께 고린도후서 1장 3절 말씀을 읽어볼까요? 같이 읽습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 자비의 아버지이시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바울은 하나님께서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지칭하면서, 위로의 하나님께서 모든 환란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실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말한 근거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의 사람으로 오신 사건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사람으로 오셔서 33년 동안 공생애를 겪으면서 인간이 겪게 되는 모든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다 경험하셨던 분이십니다. 그래서 모든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을 능히 위로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런 예수님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참된 위로 자가 될 수 있다. 라고 말하는 거죠.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만드신, 어딘가 저 멀리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처럼 느껴질지 모르지만, 그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피조물의 삶을 경험하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를 살펴서 온전히 위로하시는 참된 위로 자가 되실 수 있는 것이죠. 그러면 바울은 어떻게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요? 바울은 당시에 매우 견디기 힘든 환란을 통과하면서 많은 위로와 구원의 손길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8절, 9절 말씀을 보면,

*고린도후서 1:8-9,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바울이 아시아에서 겪었던 그 환란은 어떤 환란인지 성경에서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습니다. 여러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예배소에서 짐승들과 함께 덤벼들은 사람들과 싸웠던 사건, 또는 은장색 데메드리오에 의한 소동의 사건, 또는 배가 난파되는 사건 등을 견해로 제시하고 있지만, 정확하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상황이, 그는 살 소망이 끊어지고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은 심각한 상황이었다. 라는 겁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때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는 법을 배우면서, 하나님만이 참된 위로 자가 되시는 것을 깊이 체험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깊은 고난 가운데서도 참된 위로 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두 번째 핵심은 어떤 걸까요? 이겁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은 자들은 모든 환란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할 수 있다. 라는 거죠. 함께 읽어볼까요? 고린도후서 1장 4절 말씀입니다.

*고린도후서 1:4,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살려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자는 능히 모든 환란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할 수 있다. 라고 말합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고난은 그리스도로 인하여서 위로받는 통로가 되었고, 그가 경험한 위로는 다른 환란 중에 있는 자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세워가는 큰 능력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겪은 환란은 결코 가볍지가 않았죠. 여러 번 죽을 뻔했다. 라는 사실은 그가 죽지 않았다라고 하는 것을 말하기도 하지만, 정말 죽을 정도로 큰 위험 가운데 놓였다. 라는 말도 됩니다. 엄청난 고통과 고난과 아픔을 그는 계속해서 경험하고 있었다. 라는 거죠. 그럼에도 그는 복음을 증거 하면서 환란을 피해가지 않았음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환란을 통해서 하나님의 깊은 위로를 경험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경험을 통해서 다른 환란 가운데 있는 자들을 위로할 수 있는 능력을 계속 갖게 되었다. 라는 것들을, 그는 고난을 통과하면 하면 할수록 알게 되고, 확인하게 되고, 쌓았기 때문에, 그 모든 사실들을 위로할 수 있는 자로 고백할 수 있었던 거죠. 바울은 더 나아가서 자신이 겪은 환란을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고린도후서 1장 6절에서 7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죠.

*고린도후서 1:6-7,
6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바울이 이렇게 말한 이유는, 자신이 겪은 환란이 그리스도와 연합된 상황에서 발생된 것이고, 또 그로 인한 환란에서 이길 만한 위로를 경험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도 자신과 같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이 겪는 환란도 두려워하지 말고, 견딜 수 있는 이유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라는 격려를 하고 있는 것이죠. 바울은 이렇게 자신을 공격할 수단으로 고난을 언급했던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그 고난을 통해 어떤 하나님의 위로가 있는지, 그리고 그 위로는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고난은 단순히 힘겹고 고통을 겪게 되는 경험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겪은 여러 번의 고난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참된 위로자 되심을 명확하게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살 소망이 끊어져 사형 선고를 받은 자처럼, 바울이 자신이 아닌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만드는 복된 위로의 시간이 된 것입니다. 또한 바울에게 있어서 고난은 단순히 자신만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하는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자신을 통해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비롯한 또 다른 사람들을 능히 위로해 줄 수 있는 하나님의 도구로 재인식할 수 있었던 시간이 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많은 고난 가운데 놓여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이 결코 저와 여러분들을 절망과 좌절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게 놔둘 수 없는 줄 믿습니다. 고난으로, 깊은 상처와 아픔으로 비전을 향해 달리지 못하게 하거나, 공동체 속에서 생명을 살리는 일에도 제외하지 못할 것을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바울이 고난을 통해 경험한 위로의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 되시고, 또한 저와 여러분처럼 연약하고, 부족하고, 어디 쓸데없는 그 사람을 들어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는 위로의 도구로 사용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를 보면 별로 고난을 많이 겪지 않은 사람처럼 보이죠? 진짜로 그렇게 보이시는가 봅니다. 사실 제 삶이 그렇게 넉넉한 삶은 아니었습니다. 사랑하기 위해서 여러 번의 설교의 과정이 있었고, 또 시간들이 있었지만, 이 이야기는 처음 하는 것 같아요. 부모님께서 목회를 하시다가 지방으로 가시게 돼서,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에 동생들과 서울에 따로 살게 되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동생 2명과 부모님을 떠나서 따로 지내는 것이 처음에는 무척이나 달콤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어머니가 해주시는 밥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리고 동생들을 제가 돌봐야 된다. 라는 그 책임이 참 무겁게 느껴지는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사고로 바로 아래에 있는 가운데 동생을 먼저 천국으로 보내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경험은 지금도 쉽사리 잊혀 지지 않는 저만의 상처가 되었어요. 가장 먼저 시체를 확인하고 그의 죽음을 확인하였던 그 시간은 저에게 힘겨웠던 경험이 되었고, 지금도 부모님께 쉽게 말씀을 드리지 못하는 죄송함으로 남아 있는 상처가 되었습니다. 물론 저희 부모님께서는 자녀를 먼저 천국으로 보내야 했던 그 아픔으로 어쩌면 저보다 더 큰 아쉬움과 후회와 아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한동안 동생을 먼저 보내야 했던 상처에서 쉽게 나오지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그 시간을 지금 돌이켜보면 한 2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분명 고난의 어려운 시간이 되었지만, 죽음에 대한 빠른 인식과 그 아픔이 하나님에 대해서 더욱 분명하게 이해하고 인식하게 되는 시간이 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하나님을 어렸을 때부터 의식하고 의지하면서 그분의 위로를 경험하고 살았던 시간이 되었던 거죠. 그래서 그 시간이 너무나 큰 아픔이었고, 절망이었고, 상처였고, 고통이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나한테, 저한테 큰 힘이 되어서 비슷한 상황 속에 놓여 있는 가정을 위로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어 감사한 시간이 됩니다.

비단 저뿐이겠습니까? 이 자리에 혹은 영상으로 예배를 참여하는 많은 분들이 각양각색의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위로와 그 능력을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한 위로로 끝나지 않고 다른 이들을 위로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서 이 사실을 가지고 우리가 함께 적용해 볼 수 있는 것이 어떤 것이 있을까요? 먼저 첫 번째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도록 할까요?

▷우리는 어떤 고난 앞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의 참된 위로 자 되심을 확신해야 합니다.
-어떤 고난 앞에서도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의 참된 위로 자가 되심을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위로로 우리의 위로를 채울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라는 것은 앞으로 어떤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위로 자가 되실 것이란 확실한 보증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위로 자가 되신다. 라는 확실한 보증은 더 이상 옛사람으로 채웠던 위로를 가지고 채울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함께 읽어볼까요? 고린도후서 5장 17절 말씀입니다.

*고린도후서 5:17,
17 그런 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는 이미 옛 사람이 아닌 세 사람이 되었다. 라는 거죠. 그래서 세상에 어떤 좋은 위로라고 해도 하나님이 우리의 참된 위로 자가 되심을 뛰어넘을 만한 위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를 만족케 하는 위로는 하나님밖에 없다. 라는 것을 저와 여러분들은 이제 아셔야 되고 알았다. 라는 거죠. 다시 제가 서두에 말씀드렸던 장례 이야기로 잠시 돌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자녀를 먼저 하나님의 품으로 보내고 다시 남편을 하나님께로 보내는 그분의 마음을 세상에 어떤 것으로 위로할 수 있을까요? 한동안 그분과 연락이 잘 안 되었습니다. 자녀의 장례를 치르고 같이 있었던 카톡 방에서도 탈퇴하시고 연락이 잘 안 되었어요. 한동안 연락이 잘 안 되는 그 가운데에 소문이 들렸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안타까움이 담긴 원망과 불평이 그분의 입술을 통해서 고백되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연락이 안 되는 가운데 저와 그분을 사랑하는 신앙 공동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하나님께서 그분의 마음을 위로해 주시고 하나님이 그분의 참된 위로 자가 되시기를 강구하는 기도밖에 없었습니다. 그것 외에는 그분의 빈 것 같은 그 마음을 채울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마지막이 되었다라고 생각이 되었을 때에 그분이 저를 감사하게 불러주셨어요. 그리고 그분의 임종 예배와 남편의 얘기입니다. 임종 예배와 장례 예배 등을 함께 치르게 되었습니다. 나름 저의 경험한 고난이 있잖아요. 먼저 동생을 떠나보내는 천국으로 보내는 그 아픔과 상처 있었기 때문에 저의 경험한 고난이 그분을 위로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접근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장례 예배를 치르고, 시간이 지나면서 저는 그분의 참된 위로 자가 될 수 없다. 라는 확신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분의 참된 위로 자가 되어 주심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분으로 하여금 천국 소망을 품고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을 견디고자 하는 다짐하는 그분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그분의 참된 위로 자가 되어 주심을 보게 되어서 참 감사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고난 중에 우리를 만족케 하고 온전케 하고 위로하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 하나님으로 여러분들의 고난을 넉넉히 극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다른 것으로 채울 수가 없습니다. 이미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그 완전한 위로, 놀라우신 위로,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그 위로를 경험하신 분들입니다. 그 그릇에 세상에 어떤 것으로 담아서 채울 수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 한 분만 그것들을 채울 수 있는 분이 줄 확신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두 번째 같이 있습니다.

II. 우리는 하나님을 더 깊이 아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참된 위로 자 되신다. 라는 확신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을 때에 생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인식이 된 것, 잘못되었을 때 그 잘못된 자기감정이나 사탄의 거짓으로 인해서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도와주는 바른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바른 하나님에 대한 인식 가운데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참된 위로 자 되신다. 라는 사실을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거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러한 일에 거한다면 우리는 어떤 고난 가운데서도 방황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소망과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어제 저녁에 제가 교리 대학을 강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화요일 저녁에 교리 대학을 강의하고, 수요일 오전에 사역 훈련을 하고, 수요일 저녁에 수요 예배까지 하는 이 치열한 영적 전투의 현장은 저로 하여금 어떻게 끝나자마자 빨리 집에 가야지라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가득하게 하고 난 후에 강의를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교리 대학이 끝마치는 그 시간에 한 청년이 저에게 다가오는 거예요. 순간 불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 청년이 질문을 하러 오는 것 같은데 그 표정이 심상치 않았어요. 내심 빨리 끝내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설교 준비해야 되는데, 사역 훈련 준비해야 되는데 그런 마음 가운데 있는데 그 청년과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요 어느덧 시간이 40분이 넘게 대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청년의 이야기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근래에 깊은 고난과 분노가 있었는데, 교리대학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앎이 더해지면서 생각이 바뀌고 작은 변화가 나타났다는 겁니다.

그 청년은 그동안 고난 중에 늘 침묵하던 하나님 때문에 불평과 원망이 늘 가득했고, 내 감정으로, 내 마음으로, 뜨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이성으로라도 하나님을 아는 방법을 끝까지 한번 가보자 노력했다라고 해요. 그런데 다시 한 번도 그 마음의 그 갈급한 심정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하나님을 다시 한 번 알아가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교리 대학을 들어왔고, 단 두 번의 수업, 두 번째 수업이었거든요. 어저께 단 두 번의 수업 만에 하나님에 대해 배우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그 일로 인해서 이제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 나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셨다. 라는 생각이 변화로 나타나서 위로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말이 좀 어려웠죠. 고난 중에 늘 원망과 불평했던 그 마음이 하나님에 대해서 단 두 번 배우고 익히는 과정을 통하여서 그 마음이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셨던 것이 아니라 사실은 네가 나에게로 오기를 기다리고 계셨다. 라는 인식으로 바뀌어서 그 마음의 위로를 받고 돌아갔다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깊이 알면 알수록 우리는 어떤 고난도 극복할 수 있는 위로를 경험하게 됩니다. 불평과 원망에 쌓여 있던 그 마음에 어쩌면 하나님이 나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 아닌가라고 하는 스쳐 지나가는 하나님에 대한 앎이 깊어지며, 나에게 허락된 그 위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진정한 위로를 경험하고 돌아가는 그 청년을 통하여서 하나님은 이렇게 나를 위로하시는구나! 내일 설교해야 되는데 이렇게 귀한 지체를 보내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눌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구나! 라는 위로 또한 저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누구보다도 온전히 위로하실 참된 위로 자가 되 그러기에 어떤 고난 가운데 있다 해도 주저하거나 머뭇거리지 말고 위로자 되신 하나님을 확신하면서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한번 말씀 읽어볼까요? 데살로니가 후서 2장 16절에서 17절까지 말씀이다.

*데살로니가후서 2:16-17,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17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참된 위로 자 되시는 하나님을 아는 일에 힘써 나아간다면 그가 우리의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시는 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을 믿고 고난 중에 넘치는 위로를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로 같이 한번 볼까요? 세 번째입니다.

III. 하나님의 위로를 나누고 경험하는 교회 공동체로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고난 중에 위로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고난을 통해 우리에게 허락된 위로로 또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를 들어서 하나님의 위로의 도구로 사용하실 하나님의 계획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반드시 위로를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우리가 속한 예배 공동체, 그리고 말씀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훈련반이나 다락방에서도 활발하게 일어나는 일이죠. 함께 예배하며, 함께 말씀을 나누고, 함께 울며,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위로받는 공동체를 통해 우리에게 깊은 위로를 허락해 주심을 경험합니다.

오늘도 사역 훈련하는 가운데에 뜨겁게 기도하고 울며 외치는 시간들을 통해서 마음에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를 가득가득 경험했던 시간을 경험했습니다. 또한 주일 예배나 수요 예배, 토요일 비전, 새벽 예배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 자들이 모여서 예배하는 시간입니다. 온라인으로 경험하지 않고, 현장에 나와서 예배할 때 주위를 한번 둘러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 찬양과 말씀을 통해서 위로하시는 것들을 목도할 수 있습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졸던 분이 찬양하는 가운데에 두 손 들고 찬양하는 모습을 보게 되고, 말씀에 깊이 들어가며 그 마음 가운데에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표정 가운데에 있는 분도 목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로하실 때에 그 위로가 또한 나에게까지 전해지는 것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 있을 때 여러분, 찬양을 부르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다. 라는 것을 경험하셨죠? 경험이 없으신가 보네요.

저는 있었습니다. 예전에 하나님께 크게 실망하고 상심했던 적이 있어요. 그때 아내가 저를 불러서 가정 예배를 드리자고 했습니다. 가정 예배에 평소 자녀들을 데리고 억지로 앉히고 막 말씀 익히고 찬양 부르면서 했던 예배였는데, 그때는 자녀들도 억지로 앉히지 않고 오로지 둘만 예배가 드리는 예배가 되었습니다. 사실 왔다 갔다 하는 그 아이들 앉혀놓고 예배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아요. 아내가 선곡한 찬양을 처음 부르는데 목사님, 제 입에서 찬양이 나오지 않는 거예요.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아내 혼자 그 한곡을 다 부르더라고요. 그런데 그런 저를 아내는 책망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또 다른 찬양을 선곡하여서 함께 부르자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도 여전히 저의 입에서는 찬양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목사인데, 라는 마음이 들어서 입만 조금 뻥긋거리는 찬양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평소 제 아내분이 그럴 분이 아니신데, 또 그 찬양을 다 부르고 난 다음에 한국을 더 부르자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 마음이 참 불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심지어 투덜거리고 왜 또 찬양을 하려고 이러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무부 장관 되시는 그분께서 얘기하시는 그 찬양을 억지로 펴서 억지로 찬양을 따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저에게 이러실 수 있냐며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했던 제 마음이었기 때문에 정말로 찬양을 하고 싶지 않았던 저의 모습이 그대로 그 표정 가운데 나타났던 건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계속 홀로 부르던 아내의 찬양에 맞춰서 제가 찬양을 하고 있는 겁니다. 심지어 눈물 가득히 찬양하면서 우리 두 부부가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를 올려드리고, 그 위로로 가득한 가정 예배를 처음 경험해 봤는데, 그 시간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울컥거리는 마음이 있어요.

그 찬양의 가사가 대단한 것도 아닙니다. 너희 마음을 위로한다, 내가 너의 아버지다. 그런 찬양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 앞에 영광을 올려드리고, 그분을 경배하고, 송축하는 찬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눈물이 나고 하나님의 위로를 깊이 체험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한 동안 그 찬양을 가정 예배에서 부르면서 은혜를 나눴던 기억이 있습니다. 때론 우리는 고난을 경험하면서, 하나님과 단절된 경험을 하면서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을 쏟아놓을 때가 있습니다. 찬양을 하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가득한 때도 있죠. 그런데 그럴 때일수록 교회 공동체에 나가야 됩니다. 말씀 공동체, 예배 공동체, 가정에서도 은혜 공동체, 다락방 훈련 공동체 여러분 그렇게 그 공동체로 나아가서 함께하는 그 사람들로 인하여 고난을 극복할 넘치는 위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위로를 나누고 경험하는 교회 공동체에 깊이 동참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더 이상 온라인 예배가 우리의 위로를 채울 수 없다.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장으로 나오셔야 됩니다. 현장에 나와서 함께 위로받은 자들을 목도하며 함께 위로를 전하며 하나님 앞에 영광의 예배를 올려드릴 때에 우리 눈앞에 보이는 수많은 고난과 염려와 근심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위로로, 넘치는 위로로 경험되는 시간들을 체험하게 되실 겁니다. 함께 예배하고 찬양하는 영 가족을 통해서 우리는 고난 중에도 큰 위로를 경험하고 특별히 예배 현장에 나와 경험하는 그 위로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영광과 찬송을 올려드릴 때에 하나님께서는 고난 중에서도 우리를 붙드셔서 넘치는 위로로 채우시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귀한 도구로 사용하심으로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보좌로 나아가게 하는 은혜를 허락해 주실 줄 믿습니다.

♣요약
-세상이 주는 위로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참되신 위자 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면 은혜롭고 넘치는 은혜와 위로를 경험해야 한다. 하나님 우리에게 많은 아픔과 고통이 동반된 고난이 있더라도 이 고난을 하나님이 아니시면 해결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궁유를 베풀어주심을 믿고 현장 예배를 사모하여 공동체 안에서 더 크고 놀라운 하나님이 우리의 참된 위로 자가 되시는 주님을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한다.
 -그들이 환난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장차 임할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때 주님께서 성도의 눈물을 친히 씻어 주실 것이다. 그리고 고난과 영광의 관계를 깨닫게 될 때 고난은 기쁨으로 바뀔 수 있다.

-그들이 환난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장차 임할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때 주님께서 성도의 눈물을 친히 씻어 주실 것이다. 그리고 고난과 영광의 관계를 깨닫게 될 때 고난은 기쁨으로 바뀔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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