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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9월 6일)
제목: "하나님을 고백하는 삶"
말씀: 에스더 2:19-23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설교자: 남수현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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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 2:19-23,
19 처녀들을 다시 모을 때에는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았더라.
20 에스더는 모르드개가 명령한 대로 그 종족과 민족을 말하지 아니하니 그가 모르드개의 명령을 양육 받을 때와 같이 따름이더라.
21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았을 때에 문을 지키던 왕의 내시 빅단과 데레스 두 사람이 원한을 품고 아하수에로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미는 것을 .
22 모르드개가 알고 왕후 에스더에게 알리니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이름으로 왕에게 아뢴지라.
23 조사하여 실증을 얻었으므로 두 사람을 나무에 달고 그 일을 왕 앞에서 궁중 일기에 기록하니라.

▶에스더서 2장 19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구약 성경 792면 쯤에 있는 에스더 2장 19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 화면 보시면서 저와 함께 교독하시겠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이 에스더, 에스더서 하면은 무엇이 먼저 떠오르십니까? 많은 분들은 ‘죽으면 죽으리다.’ 라고 하는 그녀의 고백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도 그 메시지가, 그 성경 구절이 먼저 떠오릅니다. 단호하고 결단을 해야 되는 인생에 아주 중요한 신앙적인 선택을 해야 될 때, 나도 한번 언젠가는 그와 같은 고백을 하리라 마음속으로 기도하고 결심한 적도 있으시겠죠? 그리고 또 에스더서에 대하여서 조금 더 알고 계신 분이 있으시다면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성경 가운데에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 단어가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은 곳이 바로 이 에스더서라고 하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에스도서에는 율법, 제사장, 정결, 정결이라고 하는 지극히 유대적인 그런 종교적인 색채를 띤 단어도 없습니다.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우리 잘 아는 루터는 성경에서 존재하지 않았었으면,,, 하는 어땠을까? 라는 이야기를 그의 기록 어디엔가 남겨놓았다고 합니다. 칼빈은 한 번도 그의 설교 가운데 이 에스더서를 설교의 소재로 사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단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는 성경, 저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작자미상의 성경, 그리고 또 한때 정경이 되지 못할 뻔 하다가 정경으로 된 귀하디, 귀한 성경 이와 같은 특징들을 생각을 해보면 저는 한 단어가 떠오릅니다. ‘감추어진’이게 뭔가 끝나는 것 같지 않죠? 감추어진 하나님 의뢰도 좋습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이제 설교로 준비하고자 1장과 2장 그리고 4장까지 읽고 묵상하고 설교를 준비하고 난 다음에 몇 가지 떠오르는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의 교훈을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 이 에스더서의 배경은요 페르시아의 첫 번째 왕인 고레스 왕 바로 그 왕 때에 1차 포로귀환 영이라고 하는 것을 선포해요. 반포합니다. 옛날 바벨론 시대에 유다 민족을 잡아와서 보로로 삼은 그 일을 다시 고국으로 돌려보냅니다. 돌아가십시오! 라고 하는 포로 기한 영 1차가 있은 지 그다음의 일입니다. 2차포로 기한까지는 약 한 70여 년의 시간이 있는데 아주 긴 시간이죠. 그 한가운데에 그 사이에 벌어진 일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포로 귀한 영이 반포되었습니다. 얼마든지 고국 땅, 유대 땅,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도 좋습니다. 그러나 누구든 자유롭게 자신의 조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쉽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이방 나라에서 그곳에서도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삶을 이어나가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갑자기 어느 날 살던 곳을 떠나 고국, 고향이라 하여도 쉽게 돌아갈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이지 않겠습니까?

거대한 이 페르시아 제국 넓디, 넓은 이 세상을 정복한 페르시아라고 하는 이 제국, 인류 최초의 제국이라고 하죠. 이 제국 앞에서 이스라엘 유대 민족 그 땅으로 봐도, 민족으로 봐도, 군사력으로 봐도 세력과 권력으로 봐도, 어느 것 하나 비교할 수 없는 페르시아 제국 앞에서는 정말 소수 중의 소수 민족 같은 이 한 민족이 페르시아 땅에서 여전히 삶을 이어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에스더서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함부로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을 부르기도 쉽지 않은 그 상황 가운데에서 포로에서 해방되어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지만, 여전히 이방 땅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그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향하여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을까요? 여러분이라면 그와 같은 상황 가운데에 하나님께 어떤 질문을 오늘 본문의 배경과 환경 가운데에 하시겠습니까? 몇 가지 교훈을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이 말씀에 대한 첫 번째 교훈은 이런 문장이에요.

I. 세속사의 힘과 권세는 오히려 역사의 주관자가 누구인지 묻는다.
-1장에 관한 내용입니다. 1장 1절 한번 보시지 이 일은 아하수에로 왕 때에 있었던 일이니 아소에로는 인도로부터 구스까지 127 지방을 다스리는 왕이라.

*에스더 1:1,
1 이 일은 아하수에로 왕 때에 있었던 일이니 아하수에로는 인도로부터 구스까지 백이십칠 지방을 다스리는 왕이라.
-에스도서 1장은 아하스에로 왕이, 헬라 그리스를 공격하기 위한 일종의 작전 회의를 위하여서 연회 잔치를 베풀었는데, 그 잔치의 기간이 무려 6개월이었다고 합니다. 연회가 끝나갈 무렵에 아소에로는 제국의 백성들과 지도자, 방백들이라고 하죠. 그 앞에서 자신의 아내 왕후 와스디를 그 미모를 자랑하고 뽐내고 싶었나 봐요. 그래서 불러서 많은 사람들 앞에 나와서 인사해 주기를 바랐는데, 당시에 왕후 와스디는 이를 거절하게 됩니다. 이 일에 대하여서 격분한 아하수에로 왕은 당장 이 와스디 안에 왕후를 폐위시켜버리는 일이 발생을 합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전국에 조서를 내립니다. 모든 아내들은 남편들에게 복종하라. 자신이 일어난 상황에 대하여 반문일까요? 거절에 대한 상처를 그렇게 하지 말도록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도록 방포하는 일을 벌이게 됩니다.

전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던 그 제국의 왕, 동쪽으로는 인도까지, 그리고 서쪽으로는 구스라고 하는 아프리카 땅까지, 여러분, 얼마나 넓어요? 이 길 거리가 약 한 5,800km 정도 된다고 합니다. 전 세계를 다 뒤집어 삼킬 듯 오직 그리스 헬라 지역만 1차 전쟁에서 실패를 한 아쉬움이 있지만 어마어마한 제국입니다. 외형적으로는 군사력을 총동원하여서 얼마든지 원하는 지역, 원하는 땅을 점령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제국인 것 같지만 아내 한 명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다스릴 수 없고 아내의 말 한마디에 왕의 위신이 떨어져버리는 그것이 왕의 자리, 세상 권세의 또한 자리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1차 그리스와의 원정 전쟁에서 실패를 한 후에, 2차 전쟁을 원정을 앞두고 난 다음에 잔치를 통하여 작전 회의를 하면서 얼마나 많은 방백들과 지도자들과 사람들로부터 환호와 박수를 받았겠습니까? “왕이시여! 이번에는 반드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이번에는 저 그리스 연합군들이 아무리 힘을 모은다고 해도 이 세상의 주인은 당신 한 명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은 수많은 환호와 박수와 갈채를 받았지만 결과는 2차 때에도 대참패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서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하여서 세상 권력 앞에 이 세상 권력의 강대하고, 강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강대한 세속 사 세상 앞에 우리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역사의 주관자는 과연 누구일까? 인도에서부터 구수까지 엄청난 대제국을 만든 페르시아라고 하지만 그들의 역사는 고작 220년밖에 또 안 되지 않습니다. 한 천 년 정도 될 것 같죠? 한 2천 년 정도 될 것 같은 그 땅의 규모죠? 220년밖에 되지 않습니다. 고레스로부터 시작된 페르시아 제국은 어쩌면 오늘 이 1장에 등장하는 아하수에로 왕 때부터 그 세력이 기울었는지도 모릅니다. 세상 힘과 권세만 보면 영원할 것 같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답답하고, 불안하고, 불안정하고, 두려움을 주는 이 세상 가운데에 역사의 주관자는 과연 누구이신가? 라고 하는 질문을 1장이 우리에게 하고 있다. 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세속사 세상의 역사는 그 세속을 주관하고 다스리는 것 같은 당대한 나라 당대한 나라의 왕에 의하여서 찬란한 역사 전쟁의 위험을 기록하고 있는 것 같지만 여러분, 오늘 이 에스더서 1장 말미는 무엇을 기록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아무도 기억할 것 같지 않은 물어보지 않고, 찾아보지 않고,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것 같은 바로 이 와스디 왕후의 폐위의 사건을 다루고 마무리하고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 왜 중요한가 하면은 2장부터 이제 등장하는 모르드개와 에스더를 통하여서 나라의 운명이 바뀝니다. 역사의 한 페이지가 전혀 다른 것으로 쓰여 지는 것 같은 일들이 벌어지기 때문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작은 왕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것 같은 왕후의 폐위 사건은 성경은 기억하고 그것을 기록했다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 제가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메모한 내용은 교훈은 이와 같습니다.

II. 감추어진 것 같으나 연속된 우연 속에 하나님의 섭리는 더욱 빛난다.
-2장 앞부분인데 모르드개의 등장 사건입니다. 우리 5절에서 7절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에스더 2:5-7,
5 도성 수산에 한 유다인이 있으니 이름은 모르드개라 그는 베냐민 자손이니 기스의 증손이요 시므이의 손자요 야일의 아들이라.
6 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유다 왕 여고냐와 백성을 사로잡아 갈 때에 모르드개도 함께 사로잡혔더라.
7 그의 삼촌의 딸 하닷사 곧 에스더는 부모가 없었으나 용모가 곱고 아리따운 처녀라 그의 부모가 죽은 후에 모르드개가 자기 딸 같이 양육하더라.
-모르드개의 등장입니다. 5절에 우리가 읽은 내용에 보면, 어떤 왕이 잡혀갈 때에 그도 같이 함께 사로잡혀 왔더라라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고 왕과 함께 잡혀온 자라면 사회적 신분상 노예나 이런 계층이 아니라 왕급 계급,, 귀족 계급, 높은 계급 그 부류에 있었던 사람쯤 되지 않나 싶지만 사실 그것이 얼마나 이방 땅에서 사는지, 사는 데에 도움이 되었는지에 대하여서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왕궁에 관직에 일을 받기는 했습니다만 자신의 사회적 신분이 도움이 되었다라고 하는 것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가 이방 땅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았고 성실히 살아서 후에 나옵니다만 대궐 문 앞을 지키는 관직을 받은 것으로 추측을 합니다. 또 2장 19절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이죠.

*에스더 2:19,
19 처녀들을 다시 모을 때에는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았더라.
-조금 전 말씀드린 그것입니다. 고대 운동 시대에는 땅을 나누고 경계를 세울 때에, 성을 세웁니다. 성을 짓습니다. 그리고 성 앞에 성곽 문을 짓지요. 그리고 그 문 앞에 당시에 왕으로부터 임명받은 지도자 유력한 자가 그곳에서 성 안쪽에 백성들을 지키는 것뿐만 아니라, 이방 사람들이 그 성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경계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성 안에 있는 백성들을 지키면서 때로는 송사의 일을 한다든지, 사람들과 함께 사람들의 백성들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든지, 억울한 문제를 해결해 준다든지 하는 상당히 높은 관직의 정부 요직이라고 합니다. 20절입니다.

*에스더 2:20,
20 에스더는 모르드개가 명령한 대로 그 종족과 민족을 말하지 아니하니 그가 모르드개의 명령을 양육 받을 때와 같이 따름이더라.
-18절 이후에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의 새로운 왕비가 됩니다. 1장 전체가 그것을 표현하고 있고요. 왕비가 되었어도 그는 여전히 자신의 민족이 어디 출신인지, 자신의 나라가 어디인지를 숨겨야 하는 삶 가운데에 살고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모르드개가 어렸을 때부터 계속해서 그렇게 양육을 했다라고 합니다. 왕비가 되었어도 지금까지 살아오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여전히 포로 신세인 것처럼 마치 자신의 민족과 조국이 어디이며 누구인지도 말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기대한 바로는 이제 왕후 왕비가 되었으니 떳떳하게 자신의 힘과 그 자리에서의 파워를, 그리고 또 신앙적인 위력을 발휘할 수 있지 않겠느냐? 라고 생각을 하겠지만 그것이 또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모습이 아닐까라고 생각을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은 당시의 환경과 배경인 것 같습니다. 21절과 22절 그리고 23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에스더 2:21-23,
21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았을 때에 문을 지키던 왕의 내시 빅단과 데레스 두 사람이 원한을 품고 아하수에로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미는 것을 알고.
22 모르드개가 알고 왕후 에스더에게 알리니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이름으로 왕에게 아뢴지라.
23 조사하여 실증을 얻었으므로 두 사람을 나무에 달고 그 일을 왕 앞에서 궁중 일기에 기록하니라.
-정말 우연이죠. 대궐 문 앞에서 그 자신의 자리를 일을 하고 있는데 넷이 두 사람이 와서 수근 거리는 소리를 우연히 듣게 됩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왕을 죽이려는 음모, 암살에 관한 내용이라고 하는 사실이죠. 오늘 암살한다는 소식을 모르드개가 듣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자신의 조카이죠. 에스더에게 알리고 에스더는 모르드개의 이름으로 왕에게 알립니다. 그리고 공중에서는 이 일을 일기에 기록을 해놓습니다. 1장 그리고 2장을 자세히 읽어보면 드는 생각이 떠오르는 단어가 우연, 우연의 연속성이라고 하는 그 단어가 떠오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에스더서에는 기록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여러분, 에스도서의 하나님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기 싫어서가 아니라 인간의 행위를 더욱 강조하기 위하여서입니다. 우연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제어할 수 있는 그 영역 밖의 일이지 않겠습니까? 계획하고 준비를 한 그 영역, 저 멀리에 있는 일들이 우연일 것입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내가 관할하거나 통제할 수가 없는 것이 바로 우연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 하나님의 뜻과 비밀이 있다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컨트롤 할 수 있는 그 영역이 아닌 바로 그 지점, 인간의 영역 그 밖에서 하나님께서는 우연의 모습으로, 우연의 사건으로, 우연한 사람의 등장으로 일하고 계신다. 라고 하는 사실을 여러분 보실 수 있겠습니까?

왕후 첫 번째 왕후 와스디가 폐위되지 않았다면, 새로운 왕비를 뽑는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겠으며, 에스더가 그 곳에서 왕비를 뽑는 그 일에 어떻게 나갈 수 있었겠습니까? 우연 같아 보이지 않겠습니까? 사촌 오빠 모르드개가 성문 앞을, 대궐문 앞을 지키는 그 직책을 받은 것도 우연처럼 보입니다. 어떻게 이 자리를 얻을 수 있게 되지? 두 내시의 암살 의모를 들은 것은 이해가 되겠는데 어떻게 하필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있었을까 이거 우연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들어도 그 수많은 두 내시가 하는 이야기 중에 어떻게 왕의 암살 음모를 우연히 들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만약 왕의 왕을 암살하려고 하는 그 이야기를 우연히 듣지 않았다면 자신의 민족 유대인을 암살하고 몰살하려고 한다는 하만의 계획이 말 그대로 실천되었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겠습니까? 왕이 잠을 못 잘 수도 있겠죠. 밤에 잠이 안 오는 날이 있을 수도 있겠죠. 그런데 술과 함께하는 잔치를 6개월이나 하는 사람이라면 왕이라면 날마다 그 술에 취해 있었을 것입니다.

대개 이런 왕이 잠이 안 와서 잠을 취하지 못했다. 라는 것도 우연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필 잠이 오지 않는 그날 밤, 왜 하필 그 일기 역사를, 그 수많은 역사 가운데에 최근의 일기의 내용을 봤을까요? 우연치고는 너무 우연이 아닙니까? 그 일기를 본 덕분에 그 이전에 두 내시의 암살 음모를 모르드게라고 하는 사람이 막았다라고 하는 사실과, 그 일을 통하여 하만이라고 하는 사람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 라고 하는 암살 계획을 알게 됩니다. 이 일을 통하여 모르드개의 운명과 하만 왕을 죽이려고 하는 암살 계획을 가지고 있던 하만의 운명이 그다음 날 하루아침에 완전히 바뀌어 지게 되는 그 일,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에스도서에는 하나님의 이름도 없고, 제사와 성전과 정결과 거룩과 이와 같은 단어가 표현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하나님의 부재가 느껴지는 이 성경 가운데에 하나님은 하나님, 당신의 존재를 강력하게 증거하고 있다. 라고 하는 사실을 여러분 깨달으실 수 있겠습니까?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 자신의 조국에 살고 있는 바로 그 민족이 아니라, 이방 땅에 흩어져 살아야만 하는 디아스포라의 그 민족들에게 여전히 나는 하나님의 백성인가? 하나님의 백성이 맞다면 나는 왜 이방 땅에서 태어나면서부터 갖은 고난과 고초를 겪어야만 하는가? 나는 오늘도 하나님을 믿고 오늘 아침에도 하나님께 기도를 하며,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하나님의 경륜으로 이 간절하고도 불쌍한 마음 오늘 나의 환경을 살펴주옵소서! 도와주옵소서!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간절히 기도하지만 마치 하나님은 숨어 계시는 것과 같은 나는 과연 하나님의 백성이 맞는 것인가? 오늘 우리의 그런 질문이 에스더에서뿐만 아니라 여전히 우리 가운데에도 있다. 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우리의 일상의 삶이 불완전해 보이고, 불안해 보이고, 확실성이 없는 것 같아 보이는 그때에라도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모습으로, 또 오늘 에스더서에 있는 거와 같이 우연의 모습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까지 몰아가셔서 부재하심이 아니라, 존재하심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깨달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나의 선택이 맞는 것인지, 지금 직장을 옮기는 것이 맞는 때인 것인지, 나의 장래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어떤 선택과 방향으로 해야 되는 것인지, 매우 궁금해 하며 매우 답답해하는 그 상황 가운데에서 오늘날 우연히 펼친 말씀 한 구절, 우연히 오늘 아침 나에게 온 기도 제목과 함께 날아온 톡으로 들어온 성경 말씀을 통하여 나의 마음속을 강력하게 붙잡으시는 그 하나님을 경험해 본 적 없습니까? 도저히 이 사람은 지금 나에게 올 때가 아닌데, 전혀 낯선 곳에서 나를 찾아와 나를 위로해주고 나를 도와주며 나를 격려해주는 그 우연의 경험을 많이들 웃으시네요!! 해보신 적 있으시죠? 또한 내가 깨닫지 못할 때라도 이상한 일들과 사건을 통하여서, 나의 정신을 반짝하고 차리게 만드는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은 마치 우연인 것 같으나 필연적으로 나에게 찾아오시는 그 하나님, 변함없이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세 번째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오늘 이 에스더서의 교훈과 말씀은...

III. 수동적인 끌려감으로 살아가지만 하나님을 고백하는 삶에 섭리가 있다.
-에스ej서에는 1장과 2장, 3장까지 계속된 이 우연히, 나타나고, 등장하고, 계속되고, 쓰여 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우연과 함께 또 다른 에스더의 특징 중에 하나는 수동적인 표현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모르드개에게도 그리고 에스더에게도 이들을 지칭하는 성경 구절이 계속해서 수동형, 수동적 동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에스더서 2장 21절과 23절을 제가 한번 읽어볼게요.

*에스더 2:21-23,
21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았을 때에 문을 지키던 왕의 내시 빅단과 데레스 두 사람이 원한을 품고 아하수에로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미는 것을 알고.
22 모르드개가 알고 왕후 에스더에게 알리니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이름으로 왕에게 아뢴지라.
-들었어요. 그리고 일에 대하여 조사를 했는데, 그 결과에 대하여서 실증을 얻었다라고 하는 표현이 자세히 보니까 이런 뜻이에요. 그 일이 찾아왔다 그 일이 발견되었다라고 하는 뜻이에요.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가 다 수동적이에요. 그리고 2장 6절에 보면 모르드개의 첫 등장이 이런 표현입니다. 아까 읽었어요. “모르드개도 왕이 잡혀올 때에 모르드개도 함께 사로잡혔더라.” 이 이방 땅에 잡혀올 때도 사로잡혀서 왔고 어떻게 대궐 문 앞을 지키는 관직을 가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우연히 두 내시의 왕의 암살 계획을 듣게 되었고, 조사는 했지만 그보다 더 엄청나고도 확실한 결과가 자기에게 찾아왔다라고 하는 표현입니다. 에스더서 2장 8절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시작.

*에스더 2:8,
8 왕의 조서와 명령이 반포됨에 처녀들이 도성 수산에 많이 모여 해개의 수하에 나아갈 때에 에스토로 왕궁으로 끌려가서 궁녀를 주관하는 해계의 수하에 속하니.
-이제 왕비가 되기 위한 일종의 시험, 컨테스트에 나가게 되는 그 상황을 묘사합니다. 아직 왕비가 되기 전이에요. 그런데 왕궁으로 이끌려가서 에스더를 표현하는 것은 이끌려갔어요. 수동적인 입장이에요. 선택하는 자의 호의가 아니면 다른 길은 선택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1장의 에스더의 이름을 두 가지로 표현합니다. 원래 유대인으로 불려 진 이름 하다사 그리고 개명된 이름 에스더입니다. 소수민족 중에 소수 민족인 이 에스더가 자신의 민족과 함께 신앙적인 유대감과 간절한 하나님을 향한 그리움이 있을 때의 하다사의 모습과 그것을 철저히 감추도록 교육받고 철저히 숨기면서 이방 땅에서 이방 민족과 이방 문화와 이방의 음식을 어쩔 수 없이 같이 먹고 마시고 살아야 하는 그 이름 에스더라고 하는 이 혼동된 정체성 가운데에 수동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비슷하죠? 나도 모르지만 지극히 많은 부분이 누가 하라는 대로, 부모님이 하라고 말씀하시는 그대로 따라가는 수동적인 삶을 사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여기에서 에스더의 표현을 에스도서를 마무리하고 있지 않습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4장이 되면서부터 수동적인 에스더가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바뀌는 모습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만이라고 하는 총리대신이 유대인 진멸 정책, 유대인 말살 계획 조서를 이 에스더가 그 초안을 받아보게 됩니다. 우리가 사실 그 앞장에 에스더를 생각하면 두려워 떨며 손을 덜덜덜 떨며 그 초안을 보고 자기 사촌 오빠 모르드개에게 전달해 주는 것조차 두려워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이 위기 가운데에 서서히 전면적으로 능동적으로 등장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수동적인 모에서 모습에서 생각과 판단뿐 아니라, 자신의 종교적인, 자신의 신분적인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에 관하여서 지극히 수동적인 이 한 여인이 어떻게 ‘죽으면 죽으리다.’ 라고 하는 적극적인 신앙의 고백을 하는 사람으로 바뀔 수가 있을까요? 여기서 잠깐 멈추고 에스더서를 비교할 때에 에스더서를 연구할 때에 많은 사람들이 요셉의 인생과 많이 비교를 한다고 합니다. 요셉의 인생도 누군가에 의하여서, 계속해서 끌려다니던 인생이었던 것 알고 계시죠? 그의 형태에 의하여서 본인이 원하지 않는 상황 가운데에 계속해서 알아주지 않는 것 가운데에 수동적으로 끌려다니게 됩니다. 시편 105편은 요셉의 일생과 일대기를 아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편 15편 16절 한번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시편 105:16,
16 그가 또 그 땅에 기근이 들게 하사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유대 땅에 엄청난 기근이 들게 됩니다. 먹고 살 만큼 먹고 살고 조금 힘든 기근이 아니라 살 수 없을 정도의 기근이 들게 되자, 아버지 할아버지가 다 됐죠. 돌아가실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야곱이 아들들에게 먹을 것을 양식을 구하라고 몰아냅니다. 애굽으로, 천리도 넘는 길을 몰아내서 양식을 구해오라 도저히 살기가 힘들다. 라고 하는 것으로 혹독하게 자식들을 내치는 일들로 요셉의 형들이 이 애굽으로 내려오고 마침내 총리가 된 요셉을 만나게 되죠. 하나님께서 양식을 다 끊게 만드시니까 그제서야 하나님의 뜻을 서서히 알아가게 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아주 놀라운 말씀과 기록이 있습니다. 105편 17절 한번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시편 105:17,
17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자신의 삶이 끌려다니는 인생, 누군가에 의해서 끌려가게 되는 인생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오늘 여기 17절에 그의 생애를 무엇이라고 표현합니까?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요. 요셉을 말합니다. 나는 끌려간다. 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셨다. 라는 것이에요. 45장쯤에 가면 이보다 더욱 정확한 표현이 나옵니다. 창세기 45장 7절에 이렇게 나와 있어요.

*창세기 45:7,
7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당신들을 나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형들로부터 노예로 팔린 청소년 때로부터 시작하여서, 총리가 된 때까지의 많은 삶의 변화들이 있었지만 총리가 된 그 이유들을 되묻고 되물었지만 하나님께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이 바로 이 이유였군요. 형들과 우리의 후손들을 위하여서 하나님께서 보내셨군요! 라고 하는 그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 이 하나님께서 내가 속해 있는 이 세상 한가운데서도 여전히 일하고 역사하실까? 이런 끊임없는 질문을 하는 에스더와 같은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에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에스더를 통하여서 에스도서를 통하여서, 우연히 우연에 우연히 계속되어도 알 수 없는 그 상황 가운데 몰고 가시는 하나님은 도대체 누구이신가? 라고 하는 질문을 하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아 정체성, 신앙적 정체성을 깨닫고는 모든 것을 다 끊게 하고서,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라고 하는 것을 고백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거예요. 끌려 다니는 인생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인생, 끌려가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자리인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하나님께서 보내신 바로 그 자리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4장 16절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에스더 4:16,
16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대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3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 인생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에스더서는 완전의 역사를 기록한 책입니다. 우연한 일들의 연속 가운데에 하나님의 필연이 쓰여 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재한 상황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역설하고 계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한 사람의 인생 모르드개도 마찬가지고 에스더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삶은 알 수 없는 곳에서 알 수 없는 존재에 의하여 끌려다니는 인생이라고 생각한 그 것이 그 곳이 하나님께서 반드시 보내주신 자리임을 깨닫는 책 하나님께서는 이방 땅에서도 여전히 역사 가운데에 개입하셨습니다. 아하스에로 왕의 헬라를 향한 전쟁보다 그의 왕비, 그의 아내가 폐위된 사건을 더 소중하게 기록으로 남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대궐문 앞에서 직무를 수행한 모르드개의 그 직책도 우연이고, 내시가 그 대궐문 앞에서 왕을 살해할 음모를 꾸미는 것을 듣는 것도 우연인 것 같고, 하만이 모르드개를 처형하려고 하는 계획들이 진행되던 중에 왕이 우연히 책을 펼쳐서 최근의 일기를 듣게 된 것도 우연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상황 가운데에 유대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역사이심을 보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마치 감추어 계시는 하나님, 숨어 계시는 하나님인 것 같지만 오늘 우리의 삶에 찾아오셔서 역사하시고, 섭리하시고, 다스리시고, 일하시는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잠언 3:16,
16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내 길을 기도하시리라.
-그 말씀을 등대삼아 오늘도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발견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약
삶의 작은 부분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깨닫고 내가 선택한 일이 잘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불안함과 불확실한 세상 가운데 놓여 져 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질문한 것들을, 그 모든 상황들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며 나를 보내시는 하나님의 섭리임을 깨달아야 한다.
-왕의 목숨을 해치려는 음모를 발견함으로써 모르드개가 그 나라에 행한 업적이 여기 기록되어 있다. 후에 이에 대한 기록이 다시 한 번 나타나 모르드개를 유리하게 만들 것이다. 유대인을 멸망시키려는 하만의 계획이 아직 한 걸음도 진행되지 않았을 때이건만 그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이미 여러 단계나 진행된 처였다. 이제 하나님은 모르드개가 왕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 주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후에 그는 유대인들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는 더 좋은 나은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왕의 신하 두 명이 왕을 해치고자 하는 음모를 꾸며서 왕을 옥에 집어넣을 뿐만 아니라 왕을 죽이고자 하였다. 모르드개는 그들의 반역 행위를 눈치 채고 에스더를 통해서 왕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그렇게 함으로써 에스더는 왕의 신임을 더욱 두텁게 받게 되었으며 모르드개도 왕의 호의를 받게 되었다. 반역자들은 자기들이 행한 죄과에 따라 나무에 달렸다. 그들의 음모가 발각된 뒤 충분히 이를 조사하여 모반 사실을 밝혀낸 후에야 비로소 그들은 나무에 달렸다. 그리고 그 사건의 전모는 궁중 일지에 기록되었고 모르드개가 그 음모를 발견한 사람이라는 것도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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