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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8월 16일)
제목: "돌아가야 할 우리의 자리"
말씀: 호세아 6:1~6
찬양인도: 쉐키나(이다니엘 부목사님)
사회: 문진호 부목사님

설교자: 박단열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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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 6:1~6,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4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5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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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베이컨이 그의 저서 ‘노붐 오르가눔’에 기록한 말입니다. 이 말은 인간의 능력은 그가 가진 지식에 정비례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지식이 많은 것이 능력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지식 중에서도 잘못된 지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확한 사실에 근거한 지식이 아니라 자신의 선입견에 의해서 어긋난 사고를 할 수 있다고 그는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선입견을 4가지 우상,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것으로는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 등으로 구분해서 설명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에 근거해서 행동합니다. 즉 인간은 자신이 소유한 지식에 근거하여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보고 들은 모든 것을 통해 우리는 생각을 하게 되고요. 그 생각은 가치관을 형성하게 되고, 형성된 가치관이 행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데에도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나면 우리는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그 경로는 때로는 설교 말씀일 수도 있고요 성도 간의 교제일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봉사와 섬김과 같은 그런 행동들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일들로 통해서 각자가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결국 각자의 신앙관으로 정리되게 되고 실제적인 신앙의 행위로 드러나게 됩니다. 하지만 때때로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선입관은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그리고 그 오해로 인해 우리의 신앙 행위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에서 벗어나 형식만을, 때로는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감정적이거나 여러 가지 잘못된 모습으로 드러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바른 앎을 추구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호세아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의 삶과 그의 예언 활동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자와 결혼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디블라임의 딸 고멜이라는 여인과 결혼하였습니다. 그리고 세 자녀를 낳게 .그 세 자녀의 이름이 사실 굉장히 놀랍습니다. 장남이었던 이스르엘이라는 이름은 이제 각지로 흩어지게 될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고요 장녀 로르하마는 긍휼을 받지 못한 자, 그리고 막내 로암미는 내 백성이 아니다. 라는 그런 이름을, 이름의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세 자녀를 낳고서도 그 아내는, 호세아의 아내는 계속해서 음란한 행동을 하고, 가출하고, 다른 남자에게 가는 그런 잘못된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성경을 보시면, 마지막에 호세아는 그 가출했던 아내를 또한 다시 돈을 주고 사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호세아라는 선지자의 가정을 통해 신랑 되신 하나님과 그의 언약 관계,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축소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멜이 남편 호세아를 버리고 음란하게 다른 남자를 만나고 음란한 삶을 살았듯이, 이스라엘은 그들의 남편 대신 여호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않고, 이방의 우상들을 음란하게 섬겼습니다.북이스라엘은 결국 호세아의 장남 이스라엘의 이름과 같이 온 사방에 흩어져 살게 되었고, 로르하마의 이름과 같이 긍휼을 받지 못한 자로 나라가 망하는 망국을 경험하여 유리방황하게 되었으며, 로암미라는 이름처럼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한 비참한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음란한 아내를 용서하고, 다시 살아가는 호세아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회복시킬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대략 주전 760년에서 710년 사이에, 한 40~50년 정도 사역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기에는 북이스라엘이 기원전 722년에 완전히 멸망한 것 같은 그런 시기도 거치게 됩니다.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라는 왕의 시대부터 활약합니다. 여로보암 2세 당시에 북이스라엘은 그들의 나라의 역사상 가장 큰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그 어떤 시대보다도 북이스라엘이 강력했던 시기였습니다. 그들의 영토는 넓었고, 아직까지 아수르가 그리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북이스라엘 왕국은 고대 근동 지역 중에서도 강력한 국가로 자리매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에 북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는 강한 나라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의 우상들을 섬기는 영적으로는 음란한 나라였습니다. 그리하여 여로보암 2세 이후에 약 30년간 북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굉장한 혼돈 기를 겪게 됩니다. 30년 동안 6명의 왕이 바뀌면서 때로는 6개월, 때로는 1년, 2년 이렇게 짧은 기간 재위 기간을 거치면서 북이스라엘은 굉장히 정치적으로 혼돈하게 되고요. 그리고 점차 멸망해 가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주전 722년 호세아 왕 9년에 아수레 왕 살마네세 로셉에 의해 사마리아가 함락되고, 북 이스라엘 왕국은 철저하게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에 대해서 호세아서에서 호세아 선지자는 분명한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북이스라엘의 멸망의 이유가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그들에게 부재했기 때문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호세야서 4장 1절 자막을 보시면 이렇게 나옵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호세아 4:1,
1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호세아 4:6,
6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에 망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것은 특별히 하나님이 자신을 직접 보신 하나님의 말씀 구약에서는 그것을 모세의 오경으로 대변되는 율법으로 이야기하고 있 이 율법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에 아까 앞서 읽은 4장 6절 하반 절에서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계속해서 그들이 그 율법대로 살아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저버리고 하나님을 모르는 것처럼 살아갔기 때문에 결국 이스라엘이 멸망한다. 라는 것이죠.

근데 여기에서 하나님을 아느니라. 라고 할 때 이 ‘알다’ 라는 말에 대해서 아마도 많은 설교 시간을 통해서 들어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알다라는 히브리어 ‘야다’라는 단어는 지식적인 앎을 넘어선 경험적이나, 때로는 가장 친밀한 부부 관계를 표현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하곤 합니다. 또한 고대 근동 시대에서는 어떤 언약을 맺을 때에 당사자들 간 그 언약이 굉장히 중요했기 때문에 이 언약을 맺을 때, 그 당사자들 간의 결합 관계를 의미할 때도 이 단어를 사용했고요. 또한 어떤 나라의 죽음과 신하의 주종 관계에서도 신하가 주인에게 드리는 충성을 아는 것, 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호세아서에서는 계속해서 2장 20절, 4장 6절, 5장 4절, 6장 6절, 8장 2절, 13장 4절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한 언급을 계속해서 반복해서 하고 있습니다. 한번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2장 20절입니다.

*호세아 2:20,
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호세아 4:6,
6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호세아 5:4,
4그들의 행위가 그들로 자기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나니 이는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그들의 행위가 그들로 자기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나니 이는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
6장 6절입니다.
6 나는 이해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죄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8장 2절입니다.
2 그들이 장차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하나님이요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아나이다 하리라.
13장 4절입니다.
4 그러나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이렇게 반복해서 하나님 여호와를 알 것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 바로 호세아의 말씀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그들에게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5장 4절에 나타난 것처럼 그들의 마음 가운데 음란한 마음,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을 섬기고,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기를 거역하는 그런 잘못된 마음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에, 그것으로 말미암아 여호와를 바르게 아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기보다는 자신들의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을 차지하기 위해 그릇된 지식으로 하나님을 잘못 섬겼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알기는 알았지만 바르게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문제가 있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말로는 하나님을 섬긴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자기 자신들의 만족과 만족을 위해서,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이방의 신들을 즐거워하고 섬겼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멸망하게 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호세아는 결국 하나님과의 언약을 저버린,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내어버린 북이스라엘이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 다시 회복해야 하실 하나님을 기대하면서, 오늘 우리가 읽었던 호세야 6장 1절부터 6절까지의 본문을 우리에게 준 것입니다. 이 본문을 통해서 호세아는 우리에게 크게 두 가지 권고를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권고는 바로

I.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지금까지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숭배했던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향해 우리의 방향을 고정하고 그 방향으로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지금껏 잘못된 삶을 통해 찢어졌던 삶을 하나님께서 낫게 하실 것이고, 그릇된 행동으로 인해 우리를 찢었더라도 다시 싸매어 주실 것을 이야기합니다. 또한 영적으로 완전히 죽은 것과 같았던 삶에서 우리를 일으키실 것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2절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셋째 날에 우리를, 우리를 일으키신다. 라는 말이 나옵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사람이 죽은 지 셋째 날이 되면, 그의 육체를, 육체 주위를 떠돌아다니던 영혼이 완전히 응부로 옮겨진다. 라고 그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즉, 셋째 날이 되었다는 것은 완전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신다는 말은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오기만 한다면, 완전한 죽음과 같은 상태에 놓여 있다 하더라도 여호와 앞에서 다시 완전히 살아날 수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권고는 3절에 나타납니다.

II.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이것은 우리 삶에서 끊어졌던 하나님과의 언약의 거리가 다시금 굳게 맺어지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편견과 우리의 선입견으로 인해 하나님에 대해 잘못된 그릇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의 마음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향한 바른 지식을 추구하자는 것입니다. 신랑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지식을 통해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삶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통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을 때에 우리가 참된 구원의 길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쌓을 수 있겠습니까? 바로 우리에게 약속으로 주신 하나님의 살아있는 그 말씀을 통해 하나의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나의 구주로 믿고 의지합니다. 아마도 이곳에 계신 모든 우리 성도님들은 이 말에 동의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때로는 특별한 경험으로 하나님을 알 수도 있고요. 그리고 어떤 경로든지 예수를 믿게 된 이후에 우리의 신앙이 바르게 자라나기 위해서는 결국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토대 위에서 성장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을 알게 하는 중요한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항상 말씀의 토대 위에서만 건강하게 자라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때로는 기도와 묵상, 교재와 전도, 봉사도 필요하지만 그 근본에는 하나님의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드러내신 말씀이 자리 잡아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에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 나는 얼마나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있을까라는 것은 평소에 내 삶에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으로 그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지금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가까이 하지 않고 말씀을 잘 보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의 어떤 중대한 균열이 생겨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더 깊이,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서 내가 하나님을 바르게 안다. 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근거가 부족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더 가까이 하고 더 깊이 알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쌓을 수 있고, 그로 말미암아 평소의 삶에서, 삶의 자리에서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올해 봄에 있었던 일입니다. 저희 집에 초등학교에 입학한 저희 첫째 아이가 어느 날 이제 집에서 학교 후에 저녁에 집에서 수학 숙제를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초등학교 1학년짜리가 수학 숙제라고 해봤자 그렇게 막 대단한 문제가 있을 수는 없습니다. 거기에 굉장히 막 수능 시험에 넣을 만한 그런 문제는 전혀 나오지 않죠. 고작 해봐야 한 자릿수 혹은 두 자릿수에 덧셈 뺄셈 정도가 그에게 주어진 숙제입니다. 그런데 제가 옆에서 그래도 숙제를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옆에서 그래도 열심히 하라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옆자리에 앉아서 이렇게 지켜보고 있는데 열심히 하더라고요. 양손을 사용해서 9빼기 7을 하는데 막 그렇게 하는데, 저희 같은 어른들이라면 그냥 웬만하면 머리로 바로바로 생각해서 쓸 수 있는 답인데 막 열심히 하다가, 9빼기 7인데 당당하게 상을 딱 적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옆에서 보면서 아이고 어떻게 하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제가 개입을 했습니다. 이게 정답이 맞을까? 라고 물어봤어요. 그러니까 저희 아이가 제 생각에 그랬어요. 이렇게 물어보면 내가 잘못했나? 한번 살펴보고 한번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금방 바로 된 정답을 쓸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가만히 있는 거예요. 그래서 왜 그러지? 이거 쉬운 거니까 한 번 더 생각해 봐라. 지금 내가 볼 때 이 답이 잘못된 것 같으니까 한 번만 더 생각해 보면 어떨까라고 하는데 가만히 있는 거예요.

가만히 있는데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끼던 그 순간 저희 아들의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두르락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누가 당황했을까요? 눈물을 흘린 아이가 당황했을까요? 제가 당황했을까요? 제가 갑자기 당황을 한 거예요. 그래서 왜 눈물을 흘릴까? 그래서 계속해서 얘기해보라고 하는데 몇 분 동안 대답을 하지 않는 겁니다. 그러다가 제가 계속해서 물어봤습니다. 우영아 왜 울었냐? 라고 물어보니까 갑자기 그 아이가 저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아빠가 나를 야단치는 것 같아서 울었어요. 라고 대답하는 거예요. 그때 저에게 어떤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먼저 일단 크게 반성을 했습니다. 혹시 내가 그동안 우리 아이에게 강압적인 모습이 나에게 혹시 나 있었지 않을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은데 그런 모습을 보면서 설명을 했어요. 그런 게 아니다. 아빠는 네가 바른 답을 찾아가고 바르게 이 문제를 풀어가는 게 목적이지 니가 이거를 틀렸다거나 뭐 잘못했다고 해서 야단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설명을 하고 그렇게 넘어갔습니다. 넘어갔는데 그날 밤 자리에 누워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냐 하면 우리 아이의 이런 모습이 어쩌면 하나님 앞에서 나의 모습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때론 여러 가지 시험 문제들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여러 가지 숙제들도 있고요 시험들도 다가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사실 그 시험 문제 그렇게 대단히 어렵거나 그렇게 복잡한 문제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제가 저희 아이의 그 수학 숙제의 답을 2, 3 옆에서 혼자 계속 암산으로 혼자 풀고 있던 저처럼, 하나님께서는 제 삶의 여러 가지 복, 제가 볼 때는 복잡하고 어려워 보이는 그 문제들을 끙끙대며 양손을 써가며 어떻게든지 풀어가려고 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옆에서 이미 답을 다 알고 계시고, 그 답을 하나님 생각에는 참 쉽게 우리가 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어려워하고 힘들어하는 모습이 나의 모습이 아닐까라고 생각을 했던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그저 나에게 바른 길을 알려주시려고, 인도하시고 안내하시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혹시 하나님이 나를 혼내시는 것은 아닐까? 나를 야단치시는 것은 아닐까? 내가 잘못된 길로 갔다가 하나 나에게 벌을 주는 것은 아닐까? 라고 하나님의 진심과 하나님의 마음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 나의 모습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 라고 하면서도, 하나님 믿는다. 라고 하면서도, 때때로 우리는 굉장히 경험적인 것이 아니라, 그냥 나의 어떤 선입견과 나의 기본적인 하나님에 대한 인식으로 나의 삶의 순간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막기도 하고, 온전히 신뢰하지도 못하고 그렇게 살아갈 때가 참 많다는 것을 느낍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하게 9빼기 7정도의 문제를 주심에도 불구하고,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고, 그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바로바로 풀릴 수 있는 그 문제들을 나의 계획과 나의 생각이 앞서기 때문에 어떻게든지 내 방식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풀어보려고 그 간단한 문제를 복잡하게 풀다가 실패하고, 실패하고 난 뒤에는 하나님, 나에게 왜 이런 힘든 일을 주십니까? 왜 하나님 나에게 이렇게 야단치시고 나를 힘들게 하십니까? 라고 오히려 잘못된 반응을 하는 것이 연약한 나의 모습은 아닐까? 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삶에 놓여져 있는 우리 우리의 그런 문제들을 마주할 때에, 하나님에 대한 바른 앎이나 이해가 없이, 나의 생각으로 판단하고 살아갈 때에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어려운 일들이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되고요. 우리 인생의 여러 가지 시험 문제들과 과정들을 허락하신 출제자의 의도, 하나님의 의도를 바르게 파악하는 것이 우리가 인생 가운데 정말 큰 은혜와 복을 누릴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지난여름 휴가 동안에 저희 가족들과 함께 차를 타고 가던 중에 저희 아이들이 이제 저희 사역에 주일학교에 있으니까 또 찬양을 많이 듣습니다. 캔송 키즈 찬양을 듣는데요. 15집부터 쭉 거슬러 올라가다 어느덧 10집까지 들었어요. 10집까지 듣는데 캔송 키즈 10집에 이런 이런 제목의 찬양이 있습니다. ‘우리의 자리’라는 찬양이 있었는데요. 그 찬양의 가사를 듣다가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번 가사를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1절 주님의 생명의 빛 비치는 그곳에, 주님의 음성이 잘 들리는 그곳에,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맞아주시는 내가 있어야 할 곳 할 곳, 내 자리가 있죠 잠시 잊었나요? 잠시 놓쳤나요? 주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십자가의 은혜가 넘치는 주님의 품, 그것이 우리의 자리죠.

​2절입니다. 주님의 생명에 비치는 그곳에 주님의 음성이 잘 들리는 그곳에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맞아주시는 내가 있어야 할 곳 내 자리가 있죠. 잠시 잊었나요? 잠시 놓쳤나요? 주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십자가의 은혜가 넘치는 주님의 품, 그곳이 우리의 자리죠. 잠시 잊었어도 잠시 놓쳤어도 주님은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시죠. 십자가의 은혜가 넘치는 주님의 품 그곳이 우리의 자리죠.
-아이들의 찬양인데 제가 듣다가 참 많은 어떤 울림이 제 마음 가운데 있었습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니고, 저희 가정은 제가 이제 5대째 신앙생활하고 있고요. 저는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 모두 목회를 하셨습니다. 집안에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게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나서 말씀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알아가고 또한 목회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저이지만, 제가 이 찬양의 가사에서 어디서 제가 흔들렸냐 하면 잠시 잊었나요? 잠시 놓쳤나요? 에서 저 또한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놓치고 잊고 살아가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가슴 깊이 느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오지만, 매주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놓치고 살아가기 쉬운 존재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예배를 드리고 집에 돌아가면 금세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또 내 삶에, 내 생각대로 내 길을 걸어가기 위해 그렇게 애쓰는 모습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 사랑의 교회, 귀한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기 위해 날마다 애쓰고 살아가십니까? 그렇게 살아간다 할지라도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그 뜻을 잊어버리기 쉬운 존재입니까? 우리 날마다 주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우리에게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는 힘써 여호와를 알아야 하고요 또한 여호와께 돌아와야 합니다. 날마다 혹시나 내가 잘못된 길로 걸어가지 않을까 우리 스스로를 점검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 자신을 비추어서 그 길로 나아가기 위해 힘써야 하는 존재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께 돌아가는 삶 정도에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이키고 열정을 갖고 하나님께 나아간다 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으면 우리는 결국 의미 없거나, 한쪽으로 치우친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6절에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이해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신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미 없는 종교 행위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에게 끊임없이 그 십자가의 은혜의 자리로 돌아오라고 하신 그 말씀에 반응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길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지식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날마다 기억하며, 앞서서 말씀드린 우리의 자리에 앉은 찬양의 가사처럼, 때때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십자가의 은혜를 잠시 놓치기도 하고 잊어버리기도 하지만, 계속해서 다시 주님께로 돌아가기 위해 힘써야 하는 것이 우리가 살아갈 길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오늘도 은혜의 자리를 찾아 이 자리에 나오신 모든 사랑의 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바로 알고 우
리에게 허락된 은혜의 자리로 돌아오기를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요약
우리는 연약하여 하나님을 안다 하면서도 우리의 선입견과 경험에 의지하여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할 때가 많지만 한 결 같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자리를 마련하고 계신 하나님이 계심을 확인하며 우리가 돌아가야 할 자리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힘써 하나님을 바르게 알기를 소망하며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은혜의 자리로 날마다 돌아갈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주장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십자가의 은혜의 자리를 잊거나 놓치고 살아왔다면 다시 한 번 은혜의 자리로 나아갈 힘과 지혜를 허락해 주시기를 간구하자.
-하나님을 온전히 알지 못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여기서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바로 알고 그대로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닥치는 불행과 행복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다. 때문에, 재난에 빠졌을 때는 그 재난에서 자신을 구원하실 하나님의 처분, 곧 불쌍히 여기시고 건져 주실 것을 바라고 기다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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