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8월30일)
제목: "일용의 양식을 구하는 기도"
말씀: 누가복음 11:3
찬양인도: 유재원 부목사님

설교자: 하상범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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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1:3,
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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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늘 이렇게 모여서 기도하는 수요 저녁 기도회와 같이 함께 모여서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함께 모여서 통성으로 부르짖고 한 목소리로 같은 기도 제목을 읽으며 함께 기도합니다. 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의 19세기 목사님이시지요. 맥체인 목사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홀로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것 인간은 바로 그런 존재이다.”

조용히 독립적으로 나아가서 기도할 때도 있습니다. 홀로 부르짖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그런데 때로 이 구름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하늘에 계신 아빠와 나라는 친밀감을 느끼게 하기 보다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나는 땅에 있구나!라는 거리감과 격차 감으로 느껴질 때가 참 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다 보면 성도님들과 기도 제목을 나누어야 할 때가 있더라고요. 그러할 때에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가 생각이 납니다. 그러다 보니 그리스도인들은 저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되는데 내가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기도 제목을 내놓아도 될까라는 실제적인 고민이 들 때가 있더라고요. 그럴 때 제가 붙드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붙드는 말씀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어떤 사람들이 이렇게 물어보시더라고요. 어떻게 물어보시는가 하면 하나님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계시는 분이 아니시냐? 아니면 우리에 대해서 사랑의 반대편에 계셔서 우리에 대해서 무관심하여 계시며 때로는 우리 삶에 대해서 관찰자나 방관자로 우리를 바라보시는 분이 하나님이 아니시냐? 라고 물어보는 분들이 계십니다. 제가 그런 분들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함께 말씀을 보실까요? 이사야 66장 1절 말씀입니다. 다 같이 봉독하겠습니다.

* 이사야 66:1,
1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시편 103:19,
19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
-성경 말씀에 보니까 하나님은 하늘을 보자 삼고, 땅을 발판 삼아 창조의 모든 세계를 그의 왕권으로 다스리는 분이십니다. 라고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가 아버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홀로 조용히 하나님, 저의 삶 가운데에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십시오! 라고 부르짖을 때, 저의 현실적이고 비천한 생활의 작고 사소한 일들마저도 보좌에 계시는 하나님에게 알려지게 됨을 경험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느끼는가 하면, 저의 일용한 양식의 문제에서부터 세밀하고 세밀한 문제에게까지 하나님의 세밀한 도우심과 개입하심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버지, 하나님의 모든 세계를 다스리시고 왕이 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부유함을 끌어서 사용하는 일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말씀을 통해 하늘 아버지와 땅에 있는 우리의 거리감은 좁혀지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뿐만 아니라 현실적이고 내 삶에 필요한 실질적인 기도 제목 가운데에 하나님의 개입하여 주심과 아버지 하나님의 부유하여 주심이, 하나님께서 끌어서 사용하여 주심에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복된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우리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는가 하면,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말씀을 한 절 보겠습니다. 마가복음 6장 34절에서 37절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6장 34절에서 37절 말씀을 저희 다 같이 봉독하겠습니다.

*마가복음 6장 34-37,
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35 때가 저물어감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 여쭈오되.
36빈들이요 날도 저물어가니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총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37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자 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까.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오병이어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목자 없는 양과 같은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다가가셔서 하루 종일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저녁이 다가오자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떤 문제인가 하면 그것은 그 많은 군중들의 어디에서 식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 문제 앞에 명백하게 반대하는 두 가지의 대답이 방금 읽은 말씀 가운데에 있습니다. 하나는 제자들로부터 나온 대답이었고, 하나는 예수님으로부터 나온 대답이었습니다. 양식을 구하는 문제에 있어서 제자들은 군중들을 흩어 보내어 군중들로 하여금 사 먹게 하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었죠? 제자들로 하여금 너희들이 군중들에게 먹을 것을 직접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양식을 주는 문제에 있어서 구해서 그들에게 먹이는 방법에 대해서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오늘 아까 방금 읽었던 말씀을 보면 너무나 재미가 있습니다. 왜 재미가 있는가 하면 제자들이 말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방법이 서로 이야기하는 논리적인, 변증법적으로 이야기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충돌이 일어나고 있다. 라는 겁니다. 왜 재미가 있냐 하면 저는 이러한 충돌이 저의 삶 가운데에서 낯설지가 않다. 라는 겁니다. 저 역시 이러한 충돌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제 삶 가운데에서도 날마다 양식을 구해줘야 되는데, 제자들과 같이 논리적이고 현실 가능한 방법과 하나님께서 필요함을 강구함으로 구해야 되는 이 두 가지의 상황이 충돌되는 경험을 너무나도 자주 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2010년 1월에 결혼을 했습니다. 그때 신대원 2학년이었었고, 파트 전도사로 사역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결혼을 했었는데요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제가 아내에게 이렇게 말을 했었습니다. 지금 다시 돌아간다면 그 말을 안 할 것 같은데요 아내에게 그렇게 말을 했었습니다. 어떻게 말을 했었냐면 목회자의 아내는 하나님께 먹고 입히는 것을 맡길 줄 알아야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먹고 마시는 것을 입혀주신다는 것을 경험할 줄 알아야 된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날 아내가 돌아와서 저와 상의를 하지 않고 회사에 가서 사직서를 제출하고 왔더라고요. 아내의 대담함과 결심에 너무 적지 않지 않게 당황을 했습니다. 그걸 원했던 건 아니었는데요 당신의 사명과 소명을 가지고 상의를 했었으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는데요.

그런데 그렇게 어느 날 제가 라면을 끓였습니다. 라면에 햄을 넣고 끓였습니다. 햄을 넣고 끓였는데 아내가 나와서 라면에 햄을 넣은 것을 보고 먹지 않고 들어가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물 따라 들어가서 물어봤습니다. 라면에 햄을 넣은 라면을 좋아하지 않느냐 웃긴 거예요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저한테 말을 하더라고요. 어떻게 한 끼에 두 끼 반찬을 먹을 수가 있냐고. 이해가 안 되시죠? 한 번의 라면을 먹고 그다음에 햄을 먹어야 되는데. 그래서 제가 그때 알았습니다. 지금 우리 집 상황이 이렇게까지 형편이 어렵구나 파트 전도사의 사역의 사례비로 남편의 학업도 뒷바라지해야지 되고 가게도 꾸려나가야 되는 아내의 사정을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철없던 저의 행동이라는 것을 그때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생각했던 방법은 아르바이트를 검색하면서 생계를 해야지 되나 아니면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께 맡기고 도 그래도 큰소리 쳤던 게 있잖아요 기도해야 되나라는 그 충돌 앞에 서 있는 저 자신을 봤었습니다. 그때에 어거스틴이 했던 한마디가 제 마음속에 떠오르더라고요. 어떤 말이 떠올랐는가 하면 한사코 눈을 뜨지 않으려는 사람에게는 사방이 암흑 천지인 것처럼 지금도 변함없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고 계시지만 그분의 법을 받아들이지 않으려에게는 결코 적용이 될 수 없다. 하나님, 제가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라는 그런 생각들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성경 말씀에 보니까 우리 삶 가운데에 저희들에게 왜 이렇게 두 가지의 충돌을 경험할 수밖에 없게 된 이유가 있더라고요. 그 이유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9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함께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3:19,
내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성경은 아담의 탈락 이후에 사람이 자신의 양식을 스스로 확보하게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기의 힘으로 자기의 안녕과 행복을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일로서 생명을 얻어야만 했습니다. 내가 땀을 흘려야만 양식을 얻을 수가 있게 된 겁니다. 그러니 어떻게 살아가야 되겠습니까? 스스로 모든 것을 관리하는 자가 돼야 됩니다. 내가 모든 것을 권한을 쥔 자가 돼야지 됩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모든 것을 해결하며 살아가야 됩니다. 그것이 아담의 타락 이후 사람이 이 땅 가운데 살아가게 된 방식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또 일깨운 사실이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히브리서 13장 14절에 보니 이 땅을 살아갈 때에 연구한 도성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영구한 도성이 없다라는 것은 그렇게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힘이 드는데 이 세상은 불확실성과 우연으로 가득 채워져 있더랍니다. 불확실성과 우연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내가 내 일, 나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예측할 수가 없는 것이 이 세상 가운데에 놓여져 있는 현실이랍니다. 그러니 나에게 보장되어져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고, 내가 세상에 메어서 세상에 속한 것을 의지하는 순간 내가 실망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는 것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경험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그러니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오늘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연장선상에 있는 말씀이 무엇인가 하면 누가복음 12장 22절에서 34절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2장 22절과 34절의 병행 구절이 무엇인가 하면은요 마태복음 6장 19절에서 34절 말씀인데요. 저희가 읽지 않아도 너무나 잘 하는 말씀입니다. 어떤 말씀인가 하면 들어도 예상이 되시죠? 계속해서 반복되는 말씀 염려하지 마라, 염려하지 마라, 염려하지 마라.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에게서 그런 세상을 살아가고 있으니, 우리를 향하여서 너희가 그런 세상 가운데에 있으니 염려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합니다. 왜 염려할 수밖에 없을까요? 성경에서 말하는 염려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염려는 나뉘는 마음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사람을 하나님만 바라보게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 안에서만 안식과 평안을 얻게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내가 평안을 얻고 내가 생명을 얻으려고 하니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이 나뉘게 되니 내가 염려 가운데 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라는 겁니다. 그것이 염려입니다. 이렇게 염려 가운데에 거하게 된 사람에게 다가오셔서 예수님께서 너희들 염려하지 말고 너희들에게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아버지 하나님께 구하라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은 한 가지가 더 등장합니다. 앞에 무엇이 등장하고 있는가 하면 바로 우리에게라는 말씀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우리에게라는 말씀을 보면 저희가 딱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 생각 딱나는가 하면 아 바로 옆에 계시는 분을 바라보면서 옆에 계시는 분과 나를 생각하면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부어주시는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근데 이 우리에게가 바로 옆에 계시는 분과 나를 바라보며 우리에게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우리에게를 바라볼 때는 옆에 계시는 분과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나를 향하여서 우리에게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왜 예수님께서 나와 예수님을 향하여서 우리가 말씀하고 있는지 그 비밀이 있습니다. 그 비밀이 무엇인가 하면 누가복음 저희가 읽지 않았는데요. 바로 앞절에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실 때에 너희들은 이렇게 기도하라라고 말합니다. 무엇이라고 기도하라고 하냐면 너희들은 이제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라고 부르라고 말합니다. 이제 너희들도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 부르기 때문에 너와 예수님인 내가 이제는 우리가 되었다라는 뜻입니다. 왜? 그렇다면 예수님과 하나님은 아들과 아버지라는 관계가 우리는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피조물인 우리와 신인 하나님이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예수님에게 던지게 됩니다. 그 질문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성경에서 그 질문에 대답을 하는데요. 요한복음 1장 12절 말씀을 너무나 잘 아는 말씀이시죠.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이것이 성육신의 목적이라는 말씀을 말씀해 주시는데요.
그 말씀이 갈라디아서 4장 4절에서 6절 말씀입니다.

*갈라디아서 4:4~6,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이 말씀을 제가 함께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아멘. 아들과 아빠의 관계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서 이제는 우리를 그 관객 가운데 끌어들였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서 이제는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을 아빠라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들이 하나님을 아빠라 부를 수 있는 나를 통하여서 근데 어떻게 불렀다고요? 갈라디아서 말씀해 보니까,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해서 나의 내조하시는 영을 통하여 내가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연스러움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데 성경에 또 다른 영적인 비밀이 한 가지 있습니다. 무엇이냐면 성경에서 그림으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까 봐 그림으로 그려지는 언어가 하나가 있는데요. 그 모습이 무엇이냐 하면 아빠와 아들을 그려줄 때에요. 아빠와 아들이라고 말하냐면 아들은 아빠의 모든 것들을 받을 수 있는 자가 되었다라는 겁니다. 그러니 아들이 되었다라는 것은 아빠의 모든 것들을 상속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너희가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라고 말할 때에는 너희는 이제 하나님의 모든 부유함을 요청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부유함을 끌어쓸 수 있는 아들이 되었으니 아버지 하나님한테 그 부유함을 요청하시라라는 그 고난을 받았으니 이 땅에서 그 고난을 누려라라는 그 영적인 비밀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아들들 딸들이라는 권한을 주셨으니 오늘부터는 마음껏 누리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제가 한 가지 더 부탁드리는 게 있습니다. 무엇을 부탁드리는가 하면 아빠라는 이미지가 무엇인지를 기억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왜냐하면 저는요. 딸딸이 아빠입니다. 딸딸이 아빠다 보니까, 꼬맹이들이 이렇게 디즈니를 이렇게 만화를 보더라고요. 디즈니 만화를 보니까 세상을 저는 꼬맹이들을 통해서 세상을 알게 됩니다. 꼬맹이들을 통해서 세상을 알다 보니까 세상이 아빠를 왜곡해서 가르쳐주더라고요. 제가 아빠다 보니까요. 세상에 엄마들을 나쁘게 가르치더라고요. 저희 꼬맹이들이 디즈니의 라푼젤이라는 만화를 봅니다. 아시나요? 머리가 이렇게 긴고 예쁜 공주가 있는데요. 거기에서 보니까 엄마가 마녀더라고요. 엄마는 나에게 상처를 주는 분이더라고요. 하늘 아버지라고 생각할 때에 마치 내가 육적인 아버지인 것처럼 나에게 상처를 주는 분은 아닐까? 나에게 어쩌면 나를 괴롭히는 분은 아닐까? 라고 내가 자녀와 아들의 관계를 왜곡되게 이미지를 그릴 수 있는 메시지 가운데에 이제는 살아갈 수 있는 시대가 되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그려지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이 있습니다. 어떤 모습이 그려지고 있는가 하면 시편 84편 11절 말씀입니다.

*시편 84:11,
11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이사야 49:15,
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한 절만 더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0절입니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수가 되었습 아멘.

*마태복음 10:30,
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기억해 주십시오.성경은 세상이 왜곡해 버린 이미지가 아니라 인내하고 자유로우시며 좋은 것을 아끼지 않는 분이라고 말합니다.세상의 부모를 혹 우리를 잇는다 할지라도 손바닥에 우리의 이름을 써가며 잊지 않는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늘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와 거리감이 느려지는 아이 아니라 머리탈까지 새시는 세심한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제 이쯤에서 그런데요 그런 하나님이신데 질문이 듭니다. 어떤 질문이 드는가 하면 왜 날마다 그 하나님 앞에서 구해야 됩니까라는 질문이 듭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의 병행 구절이 마태복음 6장 11절입니다. 마태복음 6장 11절의 바로 위에 마태복음 6장 8절 말씀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6:8,
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아 하나님께서 세심하고 머리털까지 아시고 전지하시고 전능하신데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신데 왜 그러한 하나님께 날마다 가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구해야 합니까? 그분이 정녕 좋은 분이 맞으십니까라는 갑작스러운 당혹스러움이 생깁니다. 마치 성경은 아까 처음으로 저에게 처음으로 돌아가게 만듭니다. 두 개의 충돌 앞에서니다. 모순덩어리 아닙니까라는 질문을 다시 가지게 만듭니다. 성도님들은 그러지 않으십니까? 그 질문 앞에 서기 위해서는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이 되는 출애굽기 16장 다시 만나의 이야기로 조금 돌아가야지 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만나의 이야기를 살짝만 볼까요? 출애굽기 16장 4절 말씀입니다.

*출애굽기 16:4,
4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여정 가운데에 날마다 오늘날 이해하기 위해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었던 약간의 시점을 이해하시면 조금 편하신데요. 만나는 아침에 주시고 외출하기에는 저녁에 주셨습니다. 그리고 여섯째 날에는 일곱째 날까지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저녁에 그다음 날 하루치를 주셨고, 때로는 아침에 그 저녁이 될 때까지 양식을 주셨고, 때로는 여섯째 날 이틀치 양식을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 하나님의 방식은 그들이 필요한 것을 아시지만 날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가와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은 날마다 하나님께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도 날마다 나에게 나아와서 하나님과 날마다 만나는 것들을 원하셨습니다. 그러니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라고요? 날마다 내가 너희들에게 나오듯이 너희들도 나에게 날마다 나오기를 나에게 만나는 것을 나에게 나아와 나를 만나주지 않을래?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날마다 나아온다는 것은 내 삶에 주시는 것들은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에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라는 입술에 신앙 고백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의존하고 살지 않아서는 내 삶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라는 나의 존재적 인정과 고백이 담겨져 있어야지 된다라는 겁니다. 왜 이것이 필요한가 하면은요 마치 이것이 없으면 누가복음 12장 13절에서 21절 부자의 비유가 해석이 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24:28~31,
28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9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내 곡식에, 내 창고에 일용할 양식이 풍성한 부자의 비유도 이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내 곡식에, 내 창고에 양식이 풍부하다 할지라도 왜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고백해야지 되냐면 하나님 내 창고의 양식이 풍성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축복이 보존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은근한 축복이 촉촉히 적셔지지 않는다면 하나님 이것들은 갑자기 사라질 수가 있습니다. 이것들은 갑자기 가치를 잃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이것들은 갑자기 사용되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라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 고백과 하나님을 향한 나에 의존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내가 그 고백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을 간구하는 이 기도는 곧 나의 신앙 고백이 담겨져 있는 기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우리에게 그 고백이 올려지는 기도를 바라보고 있다라는 거죠. 그러니 아버지 하나님 앞에 날마다 나아간다는 것은 나의 생존을 위한 기도 그 이상의 신앙고백이 담겨져 있는 고백임을 성도님들께서 기억하셔야지만 됩니다. 마지막으로 딱 하나만 더 보겠습니다. 그 무엇이냐면요 일용할 양식을 기도할 때에 우리에게 날마다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주시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외에는 없는 게 있습니다. 무엇이 없는가 하면 나 아이 니가 없습니다. 우리의 공동체의 기도 제목입니다. 우리의 공동체의 기도 제목을 딱 떠올리시면은 성도님들 딱 생각하시는 게 있습니다. 무엇을 생각하시는가 하면 책임감 그런데요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에 담긴 기도는 책임감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왜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가 하면 제가 마지막 이야기를 하는데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요. 의기소침한 두 제자가 엠마오로 이렇게 걸어갑니다. 작은 마을을 향해서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요. 그때 갑작스럽게 한 낯선 이가 두 제자 가운데에 동행합니다. 그리고 그 두 제자에게 너희들 왜 낙담에 빠졌니? 라고 물어보시거든요. 그 물어보신 다음의 이야기를 같이 본문 잠깐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24장 28절에서 31절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24:28~31,
28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9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아멘. 교회에 이상한 문화가 있어요. 특별한 문화가 있어요 뭐죠? 저희들 우리 하나님 만나자 할 때 어떻게 하죠?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여서 함께 식사를 그렇게 해요. 제자 훈련할 때도 끝나고 그렇게 같이 밥을 먹어요. 저도 사 상원사회를 섬기고 있는데요. 저희 권사님들께서도 수요 기도회 같이 기도를 하거든요. 기도회를 해도 저희 귀하게 섬기게 된 우리 회장님, 총무님, 권사님께서 저에게 꼭 일용할 양식을 꼭 주셔요. 왜냐하면 저희는 일용할 양식을 나누는 그 자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는 장소이며 그곳에서 우리의 눈이 열려 하나님을 알아보는 곳이기 때문에 단순하게 밥을 먹고 인생의 자랑을 나누고 교제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그 자리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곳이라는 믿음의 고백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인용한 양식을 주옵소서가 단순히 생존 방편이 아니라 단순히 책임이 아니라 그곳에서 우리가 교재를 나누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자리라는 것까지 기억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길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 가운데에 일용할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일용할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딱 두 군데만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하고 병행 구절인 마태복음 6장 11절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신학자들은 이 말이 무엇인지 에서 그리스 문서에서 해도 그리스 문서에 고대 문서에 다른 곳에서는 사용이 되지 않았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주석자들이 이 단어의 뜻을 해석하려고 보니까 크게 세 가지로 해석한다고 말합니다. 일용할 단어에 대해서 첫 번째는 우리의 생활에 필요한 두 번째는 오늘의 두 번째는 내일의 그래서 제가 이 주석자들이 해석한 세 가지 뜻을 종합해 보니까 이렇더라고요.

우리 생에 필요한 오늘의 그리고 내일의 양식 아마도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은 염려 가운데에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필요한 양식을 오늘도 내일도 영원토록 부어주실 것이니, 너희들이 염려 가운데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을 누리라라는 하나님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지 않으셨을까? 라는 생각을 누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어떤 분이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시절이 너무나 하수상하다고 마음에도 현실에도 눈물이 내려서 마음이 평안할 때가 없고 안식을 누릴 때가 없다라고 말씀들 하시더라고요.

그러할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라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내 삶 가운데에 오늘도 내일도, 앞으로도 영원토록 모든 피로를 채워주시는 그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오늘 밤 돌아가셔서 평안한 단잠을 주시는 은혜를 누리는 복된 이 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요약
하나님,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 부를 때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경외하는 우리들에게 있음을 알고, 하늘의 보화가 이 땅의 주의 백성들에게 상속됨의 실체를 누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 밤잠 못 이루는 불안한 영혼들은 하늘에 속한 이 땅의 참된 벗들과 샬롬의 평안을 맛보며 부흥의 새날을 여심을 믿고 이 새 땅에서의 삶에서 경탄할 만한 역사의 새 지평이 열리는 은혜를 맛보며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오늘 필요한 양식은 오늘, 내일 필요한 양식은 내일 있기를 위해서 간구해야 하겠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어린아이들이 부모에게 의지하듯이 우리는 하나님을 끊임없이 의지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날의 필요에 따라서 날마다 하나님께서 채워 주시므로 그날, 그날 해야 할 의무에 새롭게 복종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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