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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주후 2020. 6. 24일) 제목:''아버지와 아들'' 말씀:누가복음 15:11-20절 설교자: 이기원 부목사님 ----- 예수께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러 이 세상에 오셨음을 증거 하는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잃은 아들에 관한 비유이다. 우리는 여기서 방탕한 아들에 대한 비유를 보게 된다. 그것은 앞의 비유들과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비유의 상황은 앞의 비유 보다 훨씬 더 크고 풍성하게 복음의 은혜의 부요함을 설명하며, 따라서 이 비유는 세상이 존재하는 동안은 불쌍한 죄인들에게 말할 수 없이 유용한 것이 될 것이다. 본문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세 가지 비유는 '복음중의 복음이다. 이 세 가지 비유는 당시 유대사회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예수님을 향한 원망에 대한 대답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예수께서 모든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의 말씀을 들으러 그에게 나아옴을 용납할 뿐 아니라, 심지어 이 사람(예수)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까지 함께 먹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누가복음 15장 11절에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라고 하였다. 여기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그리고 '두 아들'은 크게 나누면 '유대인과 이방인', 혹은 '바리새인? 사두개인과 죄인들'을 의미하고 있다. 오늘 우리는 두 아들의 비유 중에 '그 둘째'(아들)에 대한 주님의 비유를 생각해 본다. Ⅰ. 그 둘째는 자율 방종하는 탕자였다. 1) 그 둘째는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을 달라고 아버지에게 요구하였다. 12절에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라고 요청하였다. 여기 '내게 주소서'라는 말 은 청원이 아니고 일종의 명령적 어투의 강요를 의미한다. 그는 구약 신명기 21장 17절에서 명한 자기의 분깃을 요구한 것이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 아버지의 재산 중 2/3는 장자의 몫이고, 1/3은 차자들의 몫이었다. 그는 아버지를 떠나 아버지가 없는 곳에서 마음껏 자유하고, 독립하고, 자주하며 살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반역적 어투로 아버지께 감히 강요를 하였다. 누가복음 15장 12절 하반 절에 보면 이에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다」고 하였다. 둘째 아들의 몫을 떼면 나머지는 자연히 맏아들의 것이었다. 2) 그 둘째는 먼 나라로 떠났다고 하였다. 눅 15: 13절에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고 했다. '재산을 다 모았다'고 했다. 여기 '다'는 '무엇이든지'를 의미하며, 하나도 남겨두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렇게 한 이유는 그가 다시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올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먼 나라(distant country)! 그곳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상거가 먼 곳을 의미한다. 그러나 영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하나님을 등진 죄인들의 거처는 언제 어디서나 먼 나라이다. 영적으로 애굽이라고도 하고, 소돔이라고도 하고, 바벨이라고도 하는 이 세상은 실로 하나님 편에서 먼 나라들이다. 하나님의 집 교회가 바로 자기 옆에 있지만 사탄의 지배에서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하나님 떠난 인생(죄인)들은 실로 멀고도 먼 나라입니다. 암흑의 권세가 주장하는 이 세상 나라입니다. 3) 그 둘째는 허랑방탕했다. 눅 15: 13절 하반절에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라고 했다. 여기 '허랑방탕'은 어떤 기준의 한계를 넘어서 버린 낭비생활을 뜻한다. 나중에 집에 있던 큰아들은 그 둘째의 허랑방탕을 설명하기를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눅 15:30)이라고 그 동생의 죄를 지적했다. 이는 하나님 떠난 인생의 영적, 육적 타락의 생활을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고유한 지위와 신분과 달란트들을 모조리 사탄에게 빼앗겨버린 상태를 말한다. 그야말로 그 둘째는 '탕자'하였다. 4) 그 둘째는 기생(寄生)하는 종이 되고 말았다. 누가복음 15장 14절에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라고 했다. 다 없이한 후」라고 하였다.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설상가상의 비운을 맞게 되었다. 결국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고 하고 있다. 이 말은 '더 가난하고, 더 어렵게 되어 버렸다'는 뜻이다. 그는 할 수 없이 남에게 붙어살아야만 하는 기생(寄生)하는 인생의 걸음을 걷게 되었다. 누가복음 15장 15절에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아무도 오라고 청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찾아갔다는 말이다. 사람의 어떤 필요에 따라 간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가고 말았다. '붙어산다'는 말은 주인에게 있어서는 귀찮기 짝이 없는 존재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기생하는 인생이 되고 만 것이다. 그는 더 나아가 돼지에게 붙어사는 존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누가복음 15장 15절 하반 절부터 16절에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고 말씀하고 있다. '쥐엄열매'는 돼지의 사료이다. 결코 사람의 식료품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주는 자가 없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실로 그 둘째는 육체의 마지막을 만나는 저주의 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결코 인생은 떡으로만 살지 않는다.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복음)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임을 알아야 한다. 그 둘째! 그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절망과 싸움을 하는 탕자의 모습이다. 그 둘째! 그는 아버지(하나님)를 떠나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고', 결국 육체의 상징인 돼지인생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Ⅱ. 그 둘째에게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7절에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말씀을 보면 '이에 스스로 돌이키다'라는 말은 '자기 자신에 와서 보니'라는 뜻이다. 그는 자신에게 '내 아버지'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18절에 보면 '아버지'란 말이 세 번이나 반복된다. 20절에는 '아버지'란 말이 두 번 나온다. 1) 「내 아버지」라고 했다. 누가복음 15장 17절 상반 절에 “내 아버지에게는”이라고 하며, 결정적인 부자관계(父子關係)를 뜻한다. 2) 양식이 풍족한 품꾼을 많이 거느리고 있는 아버지라고 하고 있다. 누가복음 17장 17절 하반 절에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 고로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라고 하였다. 3) 그 아버지는 탕자의 소망이다. 누가복음 15장 18-20절에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라고 하였다. 그 아버지는 그 둘째, 곧 탕자의 소망이었다. 그 아버지는 부요한 아버지였다. 그 아버지는 탕자가 다시 재기할 수 있는 살아 있는 힘이었다. 그 아버지는 그 둘째 아들의 모든 재활의 힘이요 용기요 소망이었다. 그 아버지는 그 둘째의 과거요 현재요 미래였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실로 위대한 회개와 재기와 재생의 힘이 아버지였다. 4) 선수적(先手的) 사랑의 아버지였다. 누가복음 15장 20절에 선수적(先手的) 아버지의 사랑을 본다. ① 아직도 상거가 먼 데 아버지가 저를 먼저 보고 마중을 나갔다. 이것은 그가 자신을 떠나 버린 '그 둘째를 잊지 않고 늘 고대하며 기다린 사랑의 표'이다. ② 측은히 여겼다. 이는 그 둘째를 향한 아버지의 긍휼과 자비를 보여 준다. 아버지의 눈에는 자식의 죄와 죄로 인해 입은 상처는 보이지 않고 오직 '그 둘째만', 자식만 보인 결과이다. ③ 달려갔다. 바로 사랑은 여기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 보내신 것이다. ④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고 했다. 이것은 그 둘째를 향한 아버지의 견딜 수 없는 사랑의 폭발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 둘째를 향한 아버지의 선수적 사랑(initiative love)이다. 저 애굽의 총리였던 요셉과 그 아버지 야곱이 30년 세월 후에 만났을 때, 그 부자(父子)도 이렇게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 5) 온전한 회복의 아버지였다. 돌아와도 겸손하게 성령 충만으로 돌아가야 한다. 큰아들은 욕심을 내지만 나중에 받을 상급보다는 지금 현재 누리지 못하는 것에 불만하고 있다. 예수님께 찾아온 서기관과 바리새인 모습이다. 아버지는 문밖에 큰 아들을 향해 위로한다. 우리는 교회 안에 있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폼페이의 웅장함이 지진으로 어마어마한 폼페이가 묻힌다. 폼페이를 후에 발굴하고 보니 발굴자를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보초병이었다. 무기를 손에 들고 있다. 그림의 설명을 보라. “하늘에서 화산대와 불이 눈송이처럼 품페이 성 안에 쏟아져 내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살기 위해 성문 밖으로 밀려 나가기에 온통 아수라장이 돼 있는 장면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 성문을 지키는 군인 한 사람이 성문 곁에 서서 전혀 동요 없이 보초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보초 임무를 완수하면서 죽음을 맞이했다. 제목이 '충성'이다. 우리는 한심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는 그 자리에 있어서는 내가 감당할 자리를 지키는 것처럼 그 충성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내 것을 챙기지 않고 주님을 찾는 자가 되어라. 주님께로 돌아오는 은혜가 있기를 원한다. ♧ 요약 예수님이 탕자의 비유를 들려주신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중 작은 아들이 자신의 분깃을 받아 아버지를 떠나 허랑방탕하게 살며 재산을 낭비합니다. 쥐엄열매조차 먹지 못할 정도로 궁핍하게 되자 그는 아버지께 돌아와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안아주며 큰 잔치를 베풉니다. 예수께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러 이 세상에 오셨음을 증거 하는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잃은 아들에 관한 비유이다. 우리는 여기서 방탕한 아들에 대한 비유를 보게 된다. 그것은 앞의 비유들과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비유의 상황은 앞의 비유 보다 훨씬 더 크고 풍성하게 복음의 은혜의 부요함을 설명하며, 따라서 이 비유는 세상이 존재하는 동안은 불쌍한 죄인들에게 말할 수 없이 유용한 것이 될 것이다. 내 몫을 달라 하며 먼 타국으로 떠나려는 죽어 마땅한 패역한 아들의 모습이 나에게도 있음을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돌이켜 돌아올 수 있게 인도하심에 감사한다. 아버지 품 안에서 내 것을 찾기 위해 어쩌면 위장된 성실, 위장된 순종을 하고 있는 큰 아들의 모습이 나에게 있다면 이 또한 스스로 돌이켜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돌아올 때도 제대로 돌아와야 한다. 겸손하고 완벽하게 회개하여 주님 앞에 회복되어 온전한 자세로 충성 되이 바로 서야 한다.그 날에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이어받은 때까지 내 것을 챙기지 않고 우직하고 충성스런 사명을 다하게 되기를 소원한다. 내가 회개와 회복을 위해 속히 제자리로 돌아와 보초병처럼 충성하는 자 되기를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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