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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주후 2020. 6. 24일)

제목:''아버지와 아들''
말씀:누가복음 15:11-20절
설교자: 이기원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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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러 이 세상에 오셨음을 증거 하는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잃은 아들에 관한 비유이다. 우리는 여기서 방탕한 아들에 대한 비유를 보게 된다. 그것은 앞의 비유들과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비유의 상황은 앞의 비유 보다 훨씬 더 크고 풍성하게 복음의 은혜의 부요함을 설명하며, 따라서 이 비유는 세상이 존재하는 동안은 불쌍한 죄인들에게 말할 수 없이 유용한 것이 될 것이다.


본문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세 가지 비유는 '복음중의 복음이다.
이 세 가지 비유는 당시 유대사회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예수님을 향한 원망에 대한 대답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예수께서 모든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의 말씀을 들으러 그에게 나아옴을 용납할 뿐 아니라, 심지어 이 사람(예수)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까지 함께 먹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누가복음 15장 11절에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라고 하였다. 여기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그리고 '두 아들'은 크게 나누면 '유대인과 이방인', 혹은 '바리새인? 사두개인과 죄인들'을 의미하고 있다. 오늘 우리는 두 아들의 비유 중에 '그 둘째'(아들)에 대한 주님의 비유를 생각해 본다.


Ⅰ. 그 둘째는 자율 방종하는 탕자였다.


1) 그 둘째는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을 달라고 아버지에게 요구하였다. 12절에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라고 요청하였다. 여기 '내게 주소서'라는 말 은 청원이 아니고 일종의 명령적 어투의 강요를 의미한다. 그는 구약 신명기 21장 17절에서 명한 자기의 분깃을 요구한 것이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 아버지의 재산 중 2/3는 장자의 몫이고, 1/3은 차자들의 몫이었다. 그는 아버지를 떠나 아버지가 없는 곳에서 마음껏 자유하고, 독립하고, 자주하며 살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반역적 어투로 아버지께 감히 강요를 하였다. 누가복음 15장 12절 하반 절에 보면 이에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다」고 하였다. 둘째 아들의 몫을 떼면 나머지는 자연히 맏아들의 것이었다.


2) 그 둘째는 먼 나라로 떠났다고 하였다.
눅 15: 13절에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고 했다. '재산을 다 모았다'고 했다. 여기 '다'는 '무엇이든지'를 의미하며, 하나도 남겨두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렇게 한 이유는 그가 다시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올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먼 나라(distant country)! 그곳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상거가 먼 곳을 의미한다. 그러나 영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하나님을 등진 죄인들의 거처는 언제 어디서나 먼 나라이다. 영적으로 애굽이라고도 하고, 소돔이라고도 하고, 바벨이라고도 하는 이 세상은 실로 하나님 편에서 먼 나라들이다.
하나님의 집 교회가 바로 자기 옆에 있지만 사탄의 지배에서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하나님 떠난 인생(죄인)들은 실로 멀고도 먼 나라입니다. 암흑의 권세가 주장하는 이 세상 나라입니다.


3) 그 둘째는 허랑방탕했다.
눅 15: 13절 하반절에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라고 했다.
여기 '허랑방탕'은 어떤 기준의 한계를 넘어서 버린 낭비생활을 뜻한다. 나중에 집에 있던 큰아들은 그 둘째의 허랑방탕을 설명하기를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눅 15:30)이라고 그 동생의 죄를 지적했다. 이는 하나님 떠난 인생의 영적, 육적 타락의 생활을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고유한 지위와 신분과 달란트들을 모조리 사탄에게 빼앗겨버린 상태를 말한다. 그야말로 그 둘째는 '탕자'하였다.


4) 그 둘째는 기생(寄生)하는 종이 되고 말았다.
누가복음 15장 14절에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라고 했다.
다 없이한 후」라고 하였다.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설상가상의 비운을 맞게 되었다. 결국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고 하고 있다. 이 말은 '더 가난하고, 더 어렵게 되어 버렸다'는 뜻이다. 그는 할 수 없이 남에게 붙어살아야만 하는 기생(寄生)하는 인생의 걸음을 걷게 되었다. 누가복음 15장 15절에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아무도 오라고 청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찾아갔다는 말이다. 사람의 어떤 필요에 따라 간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가고 말았다. '붙어산다'는 말은 주인에게 있어서는 귀찮기 짝이 없는 존재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기생하는 인생이 되고 만 것이다. 그는 더 나아가 돼지에게 붙어사는 존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누가복음 15장 15절 하반 절부터 16절에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고 말씀하고 있다. '쥐엄열매'는 돼지의 사료이다. 결코 사람의 식료품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주는 자가 없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실로 그 둘째는 육체의 마지막을 만나는 저주의 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결코 인생은 떡으로만 살지 않는다.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복음)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임을 알아야 한다. 그 둘째! 그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절망과 싸움을 하는 탕자의 모습이다. 그 둘째! 그는 아버지(하나님)를 떠나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고', 결국 육체의 상징인 돼지인생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Ⅱ. 그 둘째에게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7절에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말씀을 보면 '이에 스스로 돌이키다'라는 말은 '자기 자신에 와서 보니'라는 뜻이다. 그는 자신에게 '내 아버지'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18절에 보면 '아버지'란 말이 세 번이나 반복된다. 20절에는 '아버지'란 말이 두 번 나온다.


1) 「내 아버지」라고 했다.
누가복음 15장 17절 상반 절에 “내 아버지에게는”이라고 하며, 결정적인 부자관계(父子關係)를 뜻한다.


2) 양식이 풍족한 품꾼을 많이 거느리고 있는 아버지라고 하고 있다.
누가복음 17장 17절 하반 절에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 고로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라고 하였다.


3) 그 아버지는 탕자의 소망이다.
누가복음 15장 18-20절에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라고 하였다. 그 아버지는 그 둘째, 곧 탕자의 소망이었다. 그 아버지는 부요한 아버지였다. 그 아버지는 탕자가 다시 재기할 수 있는 살아 있는 힘이었다. 그 아버지는 그 둘째 아들의 모든 재활의 힘이요 용기요 소망이었다. 그 아버지는 그 둘째의 과거요 현재요 미래였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실로 위대한 회개와 재기와 재생의 힘이 아버지였다.
4) 선수적(先手的) 사랑의 아버지였다.
누가복음 15장 20절에 선수적(先手的) 아버지의 사랑을 본다.
① 아직도 상거가 먼 데 아버지가 저를 먼저 보고 마중을 나갔다. 이것은 그가 자신을 떠나 버린 '그 둘째를 잊지 않고 늘 고대하며 기다린 사랑의 표'이다.


② 측은히 여겼다. 이는 그 둘째를 향한 아버지의 긍휼과 자비를 보여 준다. 아버지의 눈에는 자식의 죄와 죄로 인해 입은 상처는 보이지 않고 오직 '그 둘째만', 자식만 보인 결과이다.


③ 달려갔다. 바로 사랑은 여기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 보내신 것이다.


④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고 했다. 이것은 그 둘째를 향한 아버지의 견딜 수 없는 사랑의 폭발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 둘째를 향한 아버지의 선수적 사랑(initiative love)이다.
저 애굽의 총리였던 요셉과 그 아버지 야곱이 30년 세월 후에 만났을 때, 그 부자(父子)도 이렇게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


5) 온전한 회복의 아버지였다.
돌아와도 겸손하게 성령 충만으로 돌아가야 한다. 큰아들은 욕심을 내지만 나중에 받을 상급보다는 지금 현재 누리지 못하는 것에 불만하고 있다. 예수님께 찾아온 서기관과 바리새인 모습이다. 아버지는 문밖에 큰 아들을 향해 위로한다. 우리는 교회 안에 있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폼페이의 웅장함이 지진으로 어마어마한 폼페이가 묻힌다. 폼페이를 후에 발굴하고 보니 발굴자를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보초병이었다. 무기를 손에 들고 있다. 그림의 설명을 보라. “하늘에서 화산대와 불이 눈송이처럼 품페이 성 안에 쏟아져 내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살기 위해 성문 밖으로 밀려 나가기에 온통 아수라장이 돼 있는 장면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 성문을 지키는 군인 한 사람이 성문 곁에 서서 전혀 동요 없이 보초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보초 임무를 완수하면서 죽음을 맞이했다. 제목이 '충성'이다. 우리는 한심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는 그 자리에 있어서는 내가 감당할 자리를 지키는 것처럼 그 충성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내 것을 챙기지 않고 주님을 찾는 자가 되어라. 주님께로 돌아오는 은혜가 있기를 원한다.




♧ 요약
예수님이 탕자의 비유를 들려주신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중 작은 아들이 자신의 분깃을 받아 아버지를 떠나 허랑방탕하게 살며 재산을 낭비합니다. 쥐엄열매조차 먹지 못할 정도로 궁핍하게 되자 그는 아버지께 돌아와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안아주며 큰 잔치를 베풉니다. 예수께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러 이 세상에 오셨음을 증거 하는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잃은 아들에 관한 비유이다. 우리는 여기서 방탕한 아들에 대한 비유를 보게 된다. 그것은 앞의 비유들과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비유의 상황은 앞의 비유 보다 훨씬 더 크고 풍성하게 복음의 은혜의 부요함을 설명하며, 따라서 이 비유는 세상이 존재하는 동안은 불쌍한 죄인들에게 말할 수 없이 유용한 것이 될 것이다. 내 몫을 달라 하며 먼 타국으로 떠나려는 죽어 마땅한 패역한 아들의 모습이 나에게도 있음을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돌이켜 돌아올 수 있게 인도하심에 감사한다. 아버지 품 안에서 내 것을 찾기 위해 어쩌면 위장된 성실, 위장된 순종을 하고 있는 큰 아들의 모습이 나에게 있다면 이 또한 스스로 돌이켜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돌아올 때도 제대로 돌아와야 한다. 겸손하고 완벽하게 회개하여 주님 앞에 회복되어 온전한 자세로 충성 되이 바로 서야 한다.그 날에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이어받은 때까지 내 것을 챙기지 않고 우직하고 충성스런 사명을 다하게 되기를 소원한다. 내가 회개와 회복을 위해 속히 제자리로 돌아와 보초병처럼 충성하는 자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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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주후 2020. 6. 17.)

제목: “더욱 깊어진 갈망”
말씀:시편 42:1-5
설교자: 임상규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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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편 기자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고백한다.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모든 소망을 하나님께 두라는 것이다.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자는 절망과 낙망뿐이다. 그렇지만 주님께 소망을 두는 자는 절대 낙망하거나 불안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모든 책임을 지신다는 사실을 알고, 믿기 때문이다.
고난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더욱 주님께 소망을 두기를 소원한다. 예기치 않는 고통과 어려움으로 지쳐있는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절대 진리의 말씀으로 살아나고, 신앙과 절망의 간극사이에서 담대히 믿음의 걸음으로 하나님께 소망을 둠으로 우리를 도우실 하나님을 경험하길 원한다. 절박한 기도가 회복되게 하시고, 물 댄 동산, 영적 근원의 사명을 감당하기를 간구한다. 시편 기자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길 원한다. 이제 우리가 돌아가야 할 때이며 우리는 회개해야 할 때이다. 우리가 믿고 우리가 의지하고 우리가 소망해야 될 하나님을 갈망해야 할 때이다. 지난 주일부터 우리는 ‘돌아오면 회복 된다’는 스가랴서로 담임 목사님의 설교가 시작되었다. 이 말씀은 지금 이렇게 암흑같이 어두워진 가운데 우리의 어두워진 영혼을 깨우며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 회개와 회복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다시 한 번 질문하겠다. 우리는 진실로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고 계시는가? 무디어진 영혼을 깨웁시다.
코로나로 삼행시를 지어보겠다.


☆ 코로나 삼행시
코 → 코스프레 그만 멈추고,
로 → 로고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라.
나 → 나 자신부터.

☆ 주께 가까이 날 이끄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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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2020. 6. 10)

제목:''흩어진 나그네들에게 ''
말씀::베드로전서 1:1~7
설교자: 김경덕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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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에 대한 추억을 한두 개 쯤은 가지고 살고 있다. 편지함을 오래된 통을 꺼내 읽어보기도 한다. 모든 편지에는 이유가 목적이 있다. 개구쟁이 초등학교 아이가 갑자기 편지를 쓰는 것은 어버이 날이어서 쓴다. 유학 중인 딸이 왜 장문으로 아빠에게 이 메일을 쓰는가? 그것은 용돈이 떨어져서이다. 청년이 자매에게 밤바다 편지를 쓰는가? 좋아해서이다. 모든 편지에는 목적이 있다. 병무청장께서 편지를 보내는 것은 아들을 군대에 보내라는 뜻이고, 경찰서장께서 편지를 쓰는 것은 신호위반의 편지이다. 신약성경 27권중에 22권에 성경이 편지였다는 것이 편지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경의 저자요, 교회 지도자였던 사도들에게 편지를 써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 교회가 갓 태동했던 시기에 교회들마다 당면한 이슈와 혹은 어려움이 있었다는 뜻이다. 편지 한 통을 누군가 건네 준 두루마리 한 통을 받게 된다. 두루마리 편지를 읽으면서 일고 난 사람은 평온하고 담담함으로 변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공동체에게 전했다. 읽는 사람과 보낸 사람은 누구인가? 학자들은 이 편지를 AD 63년에 기록된 것으로 말하고 있다. 황제 네로가 교회를 핍박할 때이다. 대 재앙과 대 환난을 앞둔 신앙 공동체에 보낸 편자라는 사실이다. 신앙 때문에 받는 이 시련은 언제까지 계속 되는가? 이 땅의 성도들은 이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가를 생각하며 이 편지를 받은 이 성도는 이 편지를 보낸 사람을 발견하고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를 느꼈을 것이다. 헬라어로 기록된 이 편지는 페트로스 ~~ 아파스톨로스 ~ 베드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이다. 이 편지는 베드로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최고의 사도 베드로가 썼다. 이 편지를 왜 썼는가?


* 베드로는 소아시아 지역에 거주하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흩어진 나그네’(디아스포라)라고 한다. 디아스포라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멸망한 이후 전 세계에 흩어졌던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베드로는 이 용어를 통해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나그네 신분으로 살고 있음을 주지시킨다. 그리스도인은 비록 나그네요 이방인으로 살지만 하나님과 아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 베드로는 그것을 삼위 일체적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첫째,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께 미리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다.
둘째, 그들은 순종하는 자가 되도록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자들이다.
셋째,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은 자들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삼위 하나님의 전폭적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얻을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나그네라고 하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고 배척을 당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 핍박이 극심해서 마치 불로 연단하는 것과도 같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은 소망으로 인해 기뻐할 수 있다. 그 소망은 금보다도 귀하고 영광스럽고 존귀한 것이며, 그것은 썩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으며 사라지지 않는 것이기에 ‘산 소망’이라고 말한다. 그 소망은 하늘에 간직된 기업으로써 우리가 종말의 구원을 통해 얻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거듭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시험 가운데서 보호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 소망에 이르도록 인도하신다.


♣요약-
어려운 시간을 지나며 흩어져 있는 우리 성도들을 성령께서 말씀으로 연결하여 주시는 것을 믿고 나그네 같은 지금의 삶 속에서 말씀으로 주님과 동행하며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산 소망되시니 이 모든 고난과 근심은 잠깐일 것을 믿어서 주님 앞에 강한 척도 약한 척도 말고 겸손하게 세상 앞에서 당당하게 살기를 바란다. 금보다 더 귀한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라 하신 말씀을 소망으로 두고 흩어져 있기에 서로를 위해 더 기도하고 나그네 인생이기에 서로를 더욱 사랑하며 살아가는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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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20. 6. 3)
제목: ''매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
말씀: (디모디후서 2: 9~10)
설교자: 백승준 부목사님

ㅡㅡㅡㅡㅡㅡ
-우리 모두는 코로나로 인한 어둠이 지나가고 있다, 어둠의 때, 모든 것을 종식시켜 주시고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시리라 믿는다. 많은 문제를 직면하며 살고 있을지 모르겠다. 선교부를 일하면서 그렇고 해외에 살고 있는 안전문제가 마음에 걸린다. 선교지가 의료체계나 힘든 열약한 한 환경의 건강이 염려가 된다. 코로나로 인해서 단기선교도 우리교회에도 취소되었다. 우리 성도들의 선교로 소통이 되었었는데 그런 일들로 인해서 취소가 되어서 좀 아쉽고 한동안 갈 수도 없게 되어 선교의 자원을 어떻게 하나님은 인도하실지 그것에 대한 숙제와 고민도 떠안고 있다. 무엇보다도 더 마음을 누르는 것은 한국교회를 향한 연일 메스컴에 대한 잘못된 뉴스들이 교회에 대한 안 좋은 이미지를 갖게 되는 그런 현실을 바라보면서 코로나 이후의 한국 교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걱정도 있다. 그러나 오늘 디모데후서를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말씀해 주셨고 깨닫게 해주셨다.



본문에
-9 “이 복음으로 인하여 내가 악을 행하는 자처럼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당하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느니라”.
이 말씀은 바울이 유언과도 같이 남긴 말씀이다. 이 말씀을 남기고 4장에 부음바 되어서 그의 떠나는 그 시간 직감한다. 사도 바울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사도 바울은 이 복음으로 인하여 마치 악을 행한 범죄자처럼 감옥에 갇히기까지 고난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그 어떤 사슬에도 묶이지 않았고, 매이지 않았고, 갇히지 않았다. 여전히 복음의 말씀은 널리널리 전파되고 있었던 것이다. 괴로운 상황에서 보게 된다. 고린도후서 1123-27절까지 보면 그것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바울은 고생의 순간들을 마음속에 새겨놓았던 것 같다.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름을 받고 그의 복음이 평생이었지만 연일 계속되는 고난 속에서 신음했다. 그러나 분명히 한 가지를 깨달았다. 그러나 몸은 엉망이었지만 한 번도 하나님의 말씀에 매이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도 그 진리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귀신들린 여인을 치유해 주는 모습이 있다. 그 치유에 기적이 일어나자마다 바울과 신라가 감옥에 갇힌다. 옷이 찢겨지고 매를 맞지만 그들은 그래서 찬양을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때 지진을 일으키셨고, 하나님께 백성들이 돌아오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이 메시지가 빌립보 감옥에서 선포되었고, 빌립보 교회가 개척되었다. 또한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가택 연금되어 있는 모습을 본다. 그러나 그 기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였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였다. 그 결과 가이사의 집에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오게 되었고 로마 그 당시 제국의 수도였던 로마에 하나님은 교회가 든든하게 세워지는 것이었다.


우리에게도 다가오는 현실은 어둡고 좌절되고 낙망하게 만들고, 우리를 어둠의 감옥에 갇혀 있을 수 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흥왕할 것이며 승리하고 결국에는 모든 민족과 백성 언어 모든 나라들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 꿇고 예수를 주로 믿고 시인하는 바로 그날이 우리 가운데 찾아 올 것이다. 우리는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능력이 있고 살아있는 것이기에 이 세상 어떤 것도 하나님의 말씀에 매이게 할 수 없다. 토비새에서 스펄전 목사님을 인용하신 것을 기억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자와 같다~~” 이 말씀을 잘 몰랐다가 이 코로나 사태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능력이 있고 얼마나 놀라운지 묵상해 본다. 우리 어떻게 해야 전도를 잘 할 수 있을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팬더믹 시기를 겪으면서 분명히 깨닫는 것이 있다. 전도의 중요한 키가 아니라 우리 어떤 것을 갖고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에게 있는 복음은 어떤 것보다 가장 능력 있는 생명의 말씀임을 믿는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나도 놀랍고 너무나도 큰 변화를 일으키는 능력의 기적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1224, 1920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은 힘이 있어 흥하여 세력을 얻느니라~ 등 사도행전 전체 역사를 보면 사단이 교회를 방해하고 하나님의 복음 사역자들을 방해하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 흥왕하여 교회가 성장하고 힘을 얻어서 교회의 악한 것들을 이겨서 승리하는 기록이 사도행전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기에 어떤 날샌 검보다 날카로워서 이 세상 모든 악한 것들을 파괴할 수 있는 검이다.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놀라운 것이며 우리 손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세상을 변화를 시킬지 다시 한 번 깊이 있게 생각해 보고자 한다.
왜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서 이 세상을 변화 시킬 수밖에 없는가? -3가지가 있다.
1.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당연하게 들었던 말씀이다. 한 번 이 시간을 통해서 다시 생각해 보자. 진리란 사전적 정의는 언제 어디서나 인정할 수 있는 보편타당한 법칙이나 사실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어떤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이 그것이 바로 진리라 여긴다. 진리란 말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거창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 조건이 따라온다. 궁극적인 질문이란 무엇인가! 평소 우리가 먹고 살기 바쁘다보면 그런 질문 앞에 우리 자신을 잘 내놓지 않지만 우리 인생에서 이 질문들이 자주 떠올리는 순간들이 자주 온다. 가까운 친구나 가족이 세상을 떠난다든지 아니면 현실과 같이 인간이 큰 재난이나 재앙들이 찾아오는 그 시간일 때, 사람들은 근원적인 질문들을 마음속에 떠올리기도 한다. 산다는 것이 무엇이고, 죽은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며, 이 세상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고, 또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인가? 과연 진짜 신은 존재하는 것일까? 이러한 구체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은 종교와 철학을 의지 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이런 것들보다는 과학에 의지하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과학은 대단한 힘을 갖게 되지만 명쾌한 해답을 주기에 그렇다. 본인(목사님)은 화학을 전공했다. 어린 시절 독극물을 실험하면서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염산과 또 다른 양잿물인 수산화나트륨 독극물과 독극물을 섞으면 강력한 독극물이 될 것 같은데 그 둘은 소금물이 된다. 그러니까 NaCLNaOH이 섞으면 더 강력한 독극물이 아닌 소금물이 되는 것이다. 그 단순한 진리에 탄복했다. 그래서 그런 명쾌한 단순한 진리의 해답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과학을 통해서 질문들을 해결해 보려고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생명의 기원들에 대한 과학의 논리를 살피면 그 초라한 논리를 보고 우리는 과연 우리가 신뢰하며 믿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우리가 많은 것들 중에 설명할 수 없는 진화론이 있다. 진화론이 인류를 어떤 기초를 설명할 때 더욱 그렇다. 태초에 어떤 물질이 있었다고 설명하는데 생명의 기원은 그 물질이 물과 암모니아 매탄 이산화탄소가 있었는데 어느 날 번개가 쳤을 때 이 물질들이 화학적 반응을 일으켜서 단백질로 변화되어 단백질이 우연히 좀 더 고차원적인 방식으로 바꾸기 시작하여 그 우연의 우연을 거듭하여 생명체로 발전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진리인 것처럼 배웠지만 이것이 일어날 수 있는 확률은 정말 0이다. 어떤 학자는 타이핑을 칠 수 있는 원숭이가 삼국지 같은 소설을 써 낼 수 있을까? 이것은 자판의 우연의 일치로 써낼 그런 확률보다 더한 확률을 우리는 믿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을 의지 한다면 이 세상을 의지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다. 창세기 1:1절부터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시며,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이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계시고, 그 하나님이 자기의 선하신 뜻을 따라 이 세상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만물의 영장으로서 사람이 특별한 지위를 누리는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아 이 땅을 하나님과 함께 다스릴 그 영광을 같이 누릴 존재로 만들어졌기 때문이기에 그렇다. 문제는 무엇인가 이 땅에서 그렇게 지음 받은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신하여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죄로 말미암아 이 세상 모든 것이 망가지게 되었다. 이 세상의 유일한 소망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허락하신 한 가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라는 그 단순한 진리가 성경 안에 기록되어 있다. 그렇게 되어있어 우리게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다시 한 번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고 하나님과 영원토록 할 수 있는 바로 그 삶, 하나님나라의 영원한 삶을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진리가 왜 중요한가? 바로 역병이 돌던 시기 팬더믹이 있던 시기 수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질문에 해답에 되어주기 때문이다. 로마시대 초기 기독교 역사를 보면은 그 시대에도 그 역병이 전 세계적이지는 아니라도 로마시대를 장악했던 두 번의 역병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역병을 거치면서 초기 기독교가 엄청난 성장부흥이 있었다는 분석이 있다. 신학자 로드니 스타크란 사람이 쓴 책인데, 1차역병은 165년 마르크 아우렐리우스가 통치시에 천연두가 돌았다고 한다. 그 천연두로 인해 15년간 로마제국에 인구가 3분의 일이 줄어드는 죽게 되는 일이 벌어졌다.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본인도 비엔나에서 이 역병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그리고 체 100년이 지나지 않아서 251년 파괴력을 가직 역병이 다시 로마에 휩쓸게 되는데 이번에는 홍역으로 여겨진다. 그 홍역으로 인해서 수백만 사람들이 죽었다. 그러나 역병의 시기, 우리와 같이 이 팬더믹의 시기에 하나님의 복음은 더욱더 흥하여서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왔다고 이 책은 기록하고 있다. 로드니 스타크는 죽음에 한 복판에서 죽어가고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하면서 근본적인 질문으로 사람들에게 있게 되었다. 러나 유일하게 기독교 인 들만이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을 사람들에게 선포하게 된다.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하셨고, 하나님을 거역한 인간들로 인해서 수많은 죄가 들어오며 수많은 악과 재앙이 찾아오게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돌아갈 때에 그 모든 재앙에서 벗어나 우리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영원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그 십자가의 복음을 힘 있게 전파했던 것이다.
백년이 지나지 않아서 처음 기독교인들이 첫 역병이 일어났을 때 기독교인들이 수는 사만 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백년이 지난 이후에 백육십 만 명으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했다고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 세상의 유일한 진리라는 그 확고한 사실 앞에 다시 한 번 우리 마음을 다부짐을 해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선포할 책임이 있다. 베드로전서 3:15절을 보면 우리와 같은 이러한 시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왜 이런 일이 벌어지며 이 세상을 치유할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그러할 때 우리는 진리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책임이 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이 말씀을 선포할 때 사람들은 진리의 말씀으로 돌아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날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고 절대로 매일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2.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이유가 있다면 구원에 이르는 진리를 얻기 위해서이다. 이 성경은 바로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영생을 얻게 되는 책이라고 성경 스스로가 증거하고 있다. 요한복음 5:39절을 보면 성경전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게 해준다. 신약에만 아니라 구약에 어디라도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를 찾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게 인도 해준다. 창세기 316, 2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준비한 그 어린 양이 우리를 위해 구원할 소망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어린양 되신 출애굽기를 보면 어린양이 되셔서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받을 형벌을 이제는 벗어나게 만드는 놀라운 구원의 길을 보여주고 계신다. 구약 5경에 놀라운 제사에 대해서 보여주신다. 그 제사를 통해서 참된 제물이시며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요, 우리의 유일한 제사상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게 하신다. 여호수아를 통해서 군대 장관으로 오셔서 친히 정복의 싸움에 최선봉에서 싸우시는 하나님의 군대장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끔 인도하시며, 다윗의 언약과 다윗의 전체를 통해서 참된 메시아 되심을 우리 가운데 소개하고 있다. 구약에서 신약 전체에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생명을 전파하고 있다. 우리는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이 예수님으로만 영생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영생을 먹고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자만이 이 세상 가운데 담대히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죄악과 죽음과 싸워 이기는 유일한 사람으로 세워질 수 있음을 믿는다. 고전 1555-58절을 보면 바로 이와 같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했던 영웅스런 선배들의 모습이 또한 로마시대 바로 역병의 시기에 기록되어 있다. 모든 사람들이 죽음 앞에 벌벌 떨 그 때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영원한 사명과 소명을 꿈꾸며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담대하게 섬겼던 믿음의 선조들이 있었기에 초대교회는 승리했던 것을 본다. 우리 또한 하님께서 주신 생명이 있기에 우리에게 시시각각 찾아오는 모든 두려움을 떨쳐내는 백성이라 믿는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형벌은 없다. 왜냐하면 더 이상 율법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만이 우리를 지배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두려움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담대한 모습들,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떳떳한 모습으로서 모든 두려움을 떨쳐 버리는 우리가 되길 소원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고 절대로 매일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3.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요 우리 가운데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만이 아니라 능력 그 자체이다. 어떠한 능력인가? 디모데후서 316-17절에 기록되어 있다.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바로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이며 하나님의 능력이지만 또 이 말씀을 묵상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온전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 자신은 연약하지만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이 되어 주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할 때면 우리는 조금씩 변화되는 것을 믿는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없었지만 매일 묵상하고 그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차근차근 변화시켜 주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완전한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이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변화된 사람들이 초대교회 로마시대를 변화시켰다. 이 역병의 시기에 안타까운 기록이 있다. 치사율(致死率)25퍼센트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집단에서의 연구를 보면 10퍼센트였다고 한다. 그 당시 연구결과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기적이 교회 안에 계셨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이방인들은 서로 자기만 살기 위해서 힘쓰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달랐다. 하나님 말씀을 몸소 행했기에 실천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고통을 함께 나누었기 때문이다. 함께 병에 걸려서 죽게도 되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것에는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그 아름다운 사랑 때문에 세상과 다른 놀라운 결과의 모습은 이방인들에게 큰 도전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역병이 끝나는 순간 수많은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디오니소스는 이렇게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그 능력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고 생명이고 능력이다. 이 세상 어떤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방해할 수 없고 매일 수 없다. 이 세상은 우리를 매이게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하게 깨달아서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승리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공동체는 승리 하 수 밖에 없다. 믿음의 선배들이 보여 주었듯이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그 말씀은 승리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한다. 바로 말씀에 매어야 한다. 우리가 이 세상 가운데 채울 것은 바로 생명의 말씀 능력의 말씀에 나아가서 이 말씀으로 새로운 힘을 공급받게 된다면 이 세상 어떤 것도 우리를 꺾을 수 없다는 것을 믿는다. 세상 미디어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 말씀에 집중하라. 그 말씀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 있는 도구로 만들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귀한 일꾼으로서 예수님의 참된 제자로서 하나님 나라에 아름답게 쓰임 받는 사람이길 주 이름으로 부탁한다.




요약
바울의 위로는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핍박하는 힘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인간의 마음과 양심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는 막을 수 없다. 그것은 어떤 인간의 힘에 의해서도 결코 매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디모데로 하여금 예수님을 증거 함으로 매이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용기를 주었을 것이다. 바울은 왜 즐거이 고난을 당하였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혼이 구원 받은 후 다른 사람들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기꺼이 일하고 고난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 말씀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 있는 도구로 만들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귀한 일꾼으로서 예수님의 참된 제자로서 아름답게 쓰임 받는 사람이길 바라며, 교회사의 교훈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능력이 있고,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인지, 이 세상 어떤 것도 하나님 말씀이 매일 수 없고, 하나님 말씀이 승리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이 말씀을 가까이 하여 우리의 삶 또한 승리하는 삶이 되고, 말씀이 다시 흥왕하여 한국교회가 힘을 얻고, 전 세계를 향해 선교의 열정이 타오르는 그 놀라운 부흥을 허락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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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 (2020. 5 27)
제목: “위대한 신앙, 다윗처럼
말씀: 역대상 19:1-9
설교자: 정은석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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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역대상 19:1~절까지이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바라볼 때 흔히 그들이 나타냈던 결과에 주목할 때가 많다. 예를 들면 모세 -홍해를 갈라선 사건, 여호수아 -여리고 성 무너진 사건들이 있다. 승리했던 그런 일들을 더 많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그런 결과를 내기까지 기도의 문제 이런 것들이 강조되기도 하고 그런 것들을 주목하는 것이 당연지사이지만, 우리는 스스로 믿음이나 기도가 부족했나? 신앙의 회의를 느끼면서 놀라운 그런 기적들을 바라볼 때 마음속에 열등감을 갖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성경에 어떤 인물과 나타나는 사건과 기적들을 바라볼 땐 그 결과도 존경하지만 그 사람이 그 기적을 행할 수 있었던 그 능력을 이루어 낼 수 있었던 그 사람만의 가치, 생각의 방향, 마음의 태도가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이런 결과를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할 수 있다. 왜냐면 하나님을 향한 바른 태도, 바른 가치가 결국 그 사람의 삶과 신앙의 모든 것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으면 기도하면 그 이전에 그 사람자체가 기도하는 그 사람자체가 뭔가 행동하는 데 사람자체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중심된 가치, 그 마음의 방향, 그 방향과 가치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삶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내 것으로 삼아낼 때에, ‘무언가 내가 해내어야지’, ‘뭔가 내가 보여줘야지라고 하는 노력과 열심히 없이도 하나님께서는 자연스럽게 그 사람을 통해 성경에 말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변화와 하나님의 나라를 감당해 낼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게 하신다. 성경 속에 나타났던 기적과 능력을 오늘 우리 삶 속에서도 경험하게 해 주신 줄 믿는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성경에 어떤 인물의 가치와 마음의 태도를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가? 많은 인물들이 떠오르겠지만 다윗이라고 생각한다. 왜인가? 가장 평범한 목동에서 가장 높은 왕의 자리에 올랐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사람의 진면목과 실패함을 둘다 보여 준 사람이 다윗이기 때문에 그렇다. 따라서 다윗을 기억할 때 골리앗을 이긴 믿음, 악기를 내어준 찬송, 절말과 낙심 속에서 기도했던 그 다윗을 생각하기 전에 그리고 그것을 통해 이루어 냈던 다윗의 승리를 우리가 마음속에 담기 전에 그런 믿음과 찬송과 기도와 승리가 가능할 수 있었던 다윗의 하나님을 향한 태도 삶의 가치와 삶의 방향을 주목하고 그것을 내 것으로 삼아 우리의 삶을 힘 았게 걸어간다면 지금 평범한 삶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도 하나님 앞에 위대한 사람으로 서가는 놀라운 축복이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함께 하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다윗의 하나님을 향한 삶, 그리고 자신의 삶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삶의 태도는 무엇이었을까요? 도대체 그게 어떤 것이었기에 하나님도 사람도 기억하는 가장 위대한 신앙이 될 수 있었는가? 두 가지가 있다. 말씀을 통해 살펴보면 은혜가 될 수 있다.


먼저는 본문의 배경은 이러하다.
다윗이 직위에 올라서 계속 정복 전쟁이 진행되었다. 그런 가운데 암몬의 왕 나하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사실 그 당시에 다윗 왕국은 영토의 확장이 최고로 이루어져 있었고 당시에 최고의 강대국으로서 군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암몬와이 죽었다. 그의 아들인 하눈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는 복잡한 상황이 된다. 다윗은 정복전쟁 계속해 가고 있는 가운데 암몬도 정복할 나라 중에 한 나라였다. 그런데 혼란스럽고 어순한한 상황이지만 그러면 정치가이자 군사전문가였던 다윗은 그가 틈을 놓치면 안되었던 것이다. 암몬을 공격하기에 최고의 적기다. 그럼에도 다윗은 암몬을 공격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하스의 위로하는 조문단을 꾸며 보낸다. 그런데 조문단을 보내는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본문 2절에 그이 아버지가 의를 베풀었으니 그리 아들에게 보낸다. 문상의 이유가 암몬의 왕이었던 나하스가 이전에 다윗에게 호의를 베풀었다는 뜻이다. 호의라는 말은 히브리 말로 헤쎄드이다.=호의이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나하스가 다윗이 필요할 때, 은혜로 사랑으로 친절로 베푼 적이 있었고, 그 다윗이 그것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기억하고 지금 나하스의 죽음 앞에 사절단을 조문으로 암몬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사실 그게 문상 보내는 것이 대단한 것이냐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지금 다윗은 영토를 정복해야 할 전쟁 중에 있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겠는가? 땅을 차지하는 것, 승리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을 것이다. 적이 약점을 보이거나 뭔가 승리할 수 있는 허점이 보이게 되어지면 집요하게 이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함이 상식적이고 지혜로운 일이라 할 수 있겠으나 그러나 그 상황에서 그렇게 하지 않고 조문단을 보내는데, 이유가 이전에 나하스에게 받았던 성경도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는 사소할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은혜로 기억하고 그 은혜를 내가 받았기에 모든 것을 멈추고 조문단을 보냈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다윗의 위대한 신앙의 태도를 발견하게 된다.


 다윗의 위대한 신앙의 태도
1.하나님의 싸움과 나의 싸움을 구별하여 내 싸움에 집중하기.
하나님은 언제나 모든 전쟁으로부터 내가 주인이라고 말씀하신다. 전쟁의 주인이다. 다윗은 그것을 철저하게 몸으로 지켰던 사람이다. 곰과 양떼를 지켰던 그 시절부터 시작해서 골리앗을 쓰러뜨린 모든 과정까지 다윗은 의자할 것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전쟁에 하나님이 주인되셔야 한다는 것,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루어 가셔야지만이 된다는 것, 힘과 능력과 승리의 원동력은 오직 내 하나인 한 분 밖에 없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다윗은 언제나 대단한 무기와 뛰어난 병기를 찾지도 않았고, 그것을 구하거나 입지도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기 때문이서 그렇다. 내가 개입해서 이렇게 하면 이기고 저렇게 하면 승리할 것이다란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본인이 개입하면 내 힘으로 되어지면 패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기에, 싸움은 하나님께서 싸우시고 나는 내가 싸워야 할 그 일, 내 해야할 일에 집중하겠다는 생각한 사림이 바로 다윗이었다. 하나님의 승리를 위해서 쓰임을 위해서 거룩한 도구로써 자기를 만들기 위한 싸움만 집중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싸움을 이길 수 있는 좋은 도구로 나를 만들어 낼 것인가에 집중했던 사람이 바로 다윗이다. 그래서 다윗은 어떤 싸움에서도 자기 자신에만 집중했다. 그러니 상식적으로 어수선한 틈을 타서 적국이 공격을 해서 승리할 수 있었지만, 다윗은 그 절호의 기회를 내려놓고 어쩌면 왕으로서 멋지게 이름을 날릴 수 있는 욕심을 내려놓고 사절단을 만들어서 그들은 보낸다. 자기 자신에게 베풀어 주었던 그 은혜를 기억하여 집중하며 승리하는 모습을 보인다. 다윗은 자기 욕심을 먼저 생각하고,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지 않을 때 언제나 패베 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늘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뭔가 거창하게 이야기 하며 계획하는 다윗은 그럴 때마다 졌다. 인구조사나, 우리아 아내를 범했을 때, 다윗은 번번이 패배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본문의 자기에게 허락된 은혜에 기억하는 것, 여기에 집중하는 것이 승리함을 알았다.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 자기싸움이 될 수 있을까요? 내가 힘이 생기면 그래서 이전에 어떤 은혜를 받았는지를 잘 모른다. 내가 잘 되면 내가 잘해서 그러는 줄 안다. 그래서 그 자리까지 오를 수 있게 도와주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그 은혜를 잊는다. 우리의 죄 된 인간의 본성이다. 다윗의 당대의 최고의 권력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성경조차 기억하지 않는 그 작은 호의, 자기가 힘들었을 때에 자기에게 베풀어 주었던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조문단을 보내는 그 다윗에 모습을 통해서 자기의 싸움은 다른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 있는 욕심을 내려놓는 것, 그래서 하나님을 통해서 베풀었던 은혜이든, 사람을 통해 받았던 그 은혜이든 그것을 기억하는 것이고 거기에 집중했던 이 다윗의 모습이 위대한 신앙의 사람으로 서 갔던 다윗의 핵심 가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위대한 신앙이란 대단한 결과와 업적이 나타나고 보여지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 정말 위대한 신앙으로 가는 것이 은혜를 잊지 않는 것이 바로 위대한 사람이며 보답의 길이다. 그 은혜의 통로가 되었던 사람을 잊어버리고 사람들을 하대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하나님의 싸움에 어떤 사람을 사용하는가? 자기 싸움에 승리한 사람을 사용한다. 내가 드러나지 않고 하나님만이 드러난 준비된 사람으로 된 것만이 거룩한 실천이다. 자기 싸움에 승리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영광스런 사람을 사용하는 줄 믿는다. 하나님의 사람은 호의와 친절과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을 중심 가치를 놓고 한 걸음 씩 옮겨가는 자이다. 그이 신앙의 모습은 자신의 정치적인 야망보다 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 소중함 예의로 대하는 모습이다. 다윗이 조문단을 보내고 나니 그 암몬의 새로운 신하들이 모여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다. 핵심은 다윗이 조문단을 보낸 것은 아버지를 존경하고 호의를 생각해서 아니고 저들이 자기 나라를 염탐하고 정탐하러 왔다고 말해주며 믿지 말하고 한다. 그래서 하눈이 사절단을 잡아다가 이렇게 하고 있다. 본문 4절에 보면, 이에 다윗의 신하들을 잡아서 수염을 자르고 의복을 자르고 엉덩이를 들쳐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런 상태를 보면 사절단은 다윗에게 한 짓이나 다름없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수치와 모욕을 했다. 다윗이 이 내용을 듣고 어떠했겠는가? 보복하고 싶을 것이다. 험한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그 복수를 행하지 않는다. 오히려 암몬을 정리하고 나라의 자존심을 찾겠다는 거창한 슬로건을 가지고 전쟁의 명분을 삼을 수도 있었는데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5절에 보면, 그 사람들이 부끄럽게 하도록 하지 않고, 수염이 자라기까지 여리고에서 머물다가 돌아오라고 한다. 오히려 상처를 입었던 자기의 그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고 만져주는 것을 최고로 먼저 해준다. 엉덩이를 드러나는 수치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윗은 사절단의 상처를 알고서, 참고 상처받은 자들을 여리고에 모든 것을 제공해 주고, 휴식을 취하게 한다. 수염이 자라고 치유되기까지 있다가 오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함부러 여기지 않고 무례히 하지 않는다. 큰일을 하는 사람일수록 그 사람을 진실하게 대하는 것이 우선 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사람의 마음을 먼저 살피고 소중히 여길 수밖에 없다. 내가 받은 호의와 친절을 기억하고 보답해야 한다.



 다윗의 위대한 신앙의 태도
2.세상 방법이 아닌 하나님과 연합하기.
6절에 하눈이 상황파악이 된다. 하눈이 해결책을 내놓는데, 은 천 달란트와 병거와 마병과 영병을 가지고 해결하려 한다.
첫째 -잘못된 것은 다윗에게 찾아가서 직접 이야기와 사과를 해야 했다. 사과가 전혀 없었다.
둘째 -잘못된 것은 당사자인 이스라엘과 전혀 상관없는 아람을 끌어 들여서 그들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방식이 잘못 되었다. 지금 세상에서 발생하는 것과 동일하다. 하나님의 방식을 알지 못한 문제 해결 방식은 딱 두 가지이다. 책임해피와 돈으로 해결하려 한다. 그러니까 문제 해결 방법은 세상은 사람으로 해결하려 한다. 세상의 가치를 힘과 돈만 있음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게 하눈과 세상이 보여주는 방법이다. 그러면 힘과 돈에 이런 것과 맞서는 다윗의 방법은 역대상 19:12-13절이다. 지금 암몬은 아람과 다윗에게 맞서는 상황이다. 그런데 암몬과 아람군과 맞서고 있는 자는 요압과 아비새얐다. 요압과 아비새가 전장을 지키는 자였다. 실질적으로는 다윗이 행하는 일이기에 생각과 방향대로 모든 것을 수행해야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비새와 요압의 고백은 무엇인가? 서로 돕자고 한다. 암몬과 아람의 사이에 낀 요압과 아비새는 하나님만 계시면 된다고 한다. 다윗을 대표하는 요압과 아비새는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다운 정체성을 유지하는 자들이기에 하나님과 연합된 자이기에, 어떻게든 하나님과만 연합되고,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 승리함을 믿는다. 그렇게 살면 내가 다 세상의 방법 앞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면, 하나가 되면 반드시 이기게 하실 것이다. 코로나 바리러스로 인생에 지나가고 있는 이때에 지금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을 것이다. 그 시간 속에서 무엇을 생각하는가? 정말 마음먹으시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멈추시게 하셨다. 모든 것을 스톱하게 하실 수도 있다. 우리에게 모두에게 요청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상과 연합하는 것을 보시고 멈추어 나를 바라보라고 하시는 것 같다. 세상과 연합함을 버리고 나하고만 연합하여 믿어서 우리를 바라보기를 바라신다. 지금 이 시간을 의미 없이 지나가면 안 되며 하나님의 방법만을 바라며 살고 있는지 아닌지를 잘 생각하는 시간이 되고 정리하는 시간으로 되길 바란다. 하나님은 무언가 대단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을 가지고 산다면 축복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절며하게 포장하지 말고, 모든 것을 정리하고 이 과정이 지나가길 바란다. 다윗의 이 놀라운 핵심 가치와 태도가 우리의 뼈에 새겨지길 간절히 소망한다. 뭔가 내 삶이 힘들어도 결과가 없어도 거리가 없어도 안 될 때 어떤가? 내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당황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로 내 싸움에 집중하고, 나를 선대해 주었던 사람에게 갚아주기를 바란다.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위로 받는다면 얼마나 행복한가. 눈에 보이는 믿음의 결과를 소유하지 않더라도 흔들리지 말고 나는 내 싸움만 집중하자. 받은 은혜를 생각하고 기억하여 그들에게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 허물을 덮어주고 약점을 안아주고 눈물 닦아주는 자가 되길 바란다. 이것이 쌓이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칭찬해 주실 것을 믿는다. 또한 주님과 더욱 가깝게 지내며 내 생애 무엇을 덜어내야 할지를 생각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과 연합하는 분별력으로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위대한 결과는 나타내지 않아도, 위대한 신앙의 길을 끝까지 달려가길 바란다.


 요약
다윗의 순수한 의도를 오해한 하눈이 조문 사절단을 모욕하고 돌려보낸다. 하눈과 암몬 자손들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나하스의 호의에 대해 하눈이 이를 수치와 모욕으로 갚은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그런 상황이 되면 억울함을 느낄 수 있고, 낙담할 수 있다. 하지만 다윗이 조문 사절단을 여리고로 보내 시간을 갖게 하며 끝까지 주님의 때를 기다렸듯이, 요압과 아비새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끝까지 암몬과 아람 연합군에 맞서 싸워 승리를 쟁취했듯이 모든 것은 주님께 맡기고 지금 있는 자리에서 행해야 할 선을 행하는 것, 베풀어야 할 호의와 은혜를 베푸는 것이 정성껏 갚아서 주님의 뜻을 바라보라. 의도치 않은 수치와 모욕이 있다 해도, 호의와 은혜에 대해 생각하는 결과가 다르더라도 낙담하지 않고 더욱 더 힘내서 해야 할 일을 하며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며, 코로나 바리러스도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이때에 더욱 주님과 가까이 하여 그리고 당연히 그 바라보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온전히 그 분의 때를 기다리는 자세가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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