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1월 11일
제목: "내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말씀: 히브리서 11:23~26
찬양인도: 쉐키나 찬양대(오준석 부목사님)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정상익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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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23~26,
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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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살면서 불안해 본적이 있는가? 아마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불안한 적은 없을 것 같다. 여러분은 보통 어떤 때에 불안해하는가?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불안해하는가? 아니면 혹시 건강상에 문제가 있을 때, 불안해한다. 여러분은 어떤 때에 불안함을 가장 많이 느끼시는가? 저는 고3때 미국에서 유학을 했다. 그 때에 어깨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혼자 수술대에 올라갔을 때 굉장히 불안해했다. 목사가 되고 나서 카드 값을 다 내고, 수중에 남은 돈이 하나도 없을 때, 빚을 지며 십일조를 냈을 때, 사실 솔직히 불안해했다. 추가 합격을 놓치고 ‘내가 가야될 대학교가 있을까?’를 불안해하는 고3 수험생이 있을 것 같다. 사업을 시작하신 분들 중에는 올해 특별히 경제가 어렵다고 하던데,
올해 사업은 어떻게 될지에 불안해하실 것이다. 또 건강상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과연 올해는 건강하게 살 수 있을지에 대해 불안해하시는 불들도 계실 것 같다. 연말연시를 맞아 직장을 옮겼거나 새로운 부서로 발령 받은 분들은 올해 업무가 어떻게 될지에 불안해하실 것이다.
 
생계를 꾸리고 계신 분들 중에는 금리가 올라서 올해 과연 어떻게 될지에 불안함으로 한해를 시작하셨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가진 것은 적고 불 확신성은 자꾸 커져만 가는 가운데에 사실 신앙으로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지만 때때로 불안해하는 내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불안해하지 않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당연히 믿음으로 살 것 같아 보이는 내 모습 안에도 어느 순간 불안이 엄습(掩襲)해 오는 것을 경험하고는 한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경적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가 사실 세상에서는 손해를 보고 있고 뒤쳐져 간다는 그런 생각이 우리를 종종 괴롭히곤 한다. 때로는 연약하고 불안한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이런 시대를 산다는 것이 벅차고 버겁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불안은 믿음의 부재를 의미한다. 우리는 불안할수록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하나님을 더 찾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지만 사실 내 주위에 있는 환경에 눈을 더 돌리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하는데 더 힘을 쓰곤 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앞에 두고 믿음 없이 불안해하며 매 순간마다 내 힘으로 무언가를 해결해 보려고 할 때가 많다. 왜 그런 선택을 하는가? 왜 그렇게 반응하는가? 사실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 하나님을 정말 믿는다고 하지만 그런 선택의 순간에 특별히 불안해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 가운데에 믿음 없이 행동하기 때문에 그렇다. 불안할 때 내게 필요한 것은 믿음을 잘 알면서도 사실 그 믿음을 선택하지 못할 때가 종종 있기 때문에 그렇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불안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런 시대 가운데에 믿음을 지키며 살았던 믿음의 영웅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그 불안함 가운데에 끝까지 충성하며 승리했던 사람, 바로 모세의 이야기이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이 모세의 이야기를 히브리서 기자가 11장 23절에서 쭈욱 이어서 설명하면서 불안(不安)의 시대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이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하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여러분이 잘 아시듯이 모세가 살아간 시대는 모두가 불안해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였다. 애굽의 왕이었던 애굽 바로 왕은 이스라엘 민족을 억압(抑壓)하기 위해서 아주 가혹(苛酷)한 노예(奴隸)정책(政策)과 함께 유아(乳兒)말살(抹殺) 정책을 펼친다. 히브리인들의 남자아이들은 죽음을 맞이할 상황에 놓여 져 있었다. 히브리 산파들이 말을 듣지 않자 남자 아이들을 나일 강에 던지라는 그 바로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불안해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임신했던 그 임산부는 아마 이렇게 불안해했을 것이다. ‘혹시 내 아이가 남자아이면 어떡할까?’ 이미 남자 아이를 출산(出産)한 가정은 더더욱 불안해했을 것이다. 언제 ‘이 금쪽같은 아이가 잡혀가서 나일 강에 던져질까?’ 모두가 불안해할 수밖에 없는 그 상황 가운데 모세가 태어난다. 그리고 그 불안했던 시대를 40년간 살아간다.
 
모세가 40세가 되었을 때는 어떠한가? 안락했던 그 애굽을 떠나서 미디안 광야로 가서 한 치 앞을 알 수 없었던 불안의 시대를 살아가야만 했다. 언제, 어떻게, 내 삶이 어떻게 굴러갈지 전혀 알 수 없을 만큼 힘들었던 그 시대를 계속해서 살아갔다. 모세가 80세가 되었을 때는 어땠을까? 여러분이 아시듯이 애굽 바로 앞에 목숨을 걸고 단판을 짓는 일을 해야 했다. 홍해가 앞에 있고, 뒤에는 바로의 군대가 있었던 그 상황 가운데에 행동해야만 했다.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40년 가까이 광야의 생활 가운데 하루하루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하는 가운데, 그 불안한가운데서 하나님을 믿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일생을 통틀어 불안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모세를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영웅이라 칭찬한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인 믿음을 가졌던 사람이라.”라고 이야기 하면서 오늘 우리가 읽었던 11장 23-26절을 통해 모세가 가졌던 믿음이 어떤 믿음이었는지를 자세하게 이야기 해 준다. 모세가 가졌던 믿음을 세 가지로 나누어서 살펴볼 수 있다.
 
I. 모세가 가졌던 믿음은 세상에 맞서는 담대한 믿음입니다.
-모세는 세상을 맞서는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갔던 영웅중에 한 사람이다. 히브리서를 보자.
 
*히브리서 11:23,
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모세는 세상에 맞서는 담대한 인물이었다. 히브리 사람들은 남자아이를 낳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모세의 부모는 남자아이를 낳았을 뿐 아니라 백일 가까운 그 남자 아이를 데리고 있었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커져서 더 이상 그 아이를 숨기지 못했을 때, 모세의 부모는 모세를 나일강에 던지는 대신 갈대 상자에 담아 떠나보내는 믿음의 모험을 감행한다. 그런 선택을 했다는 것이 발각 되었을 때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지만 믿음의 선택을 했던 그 모세의 부모, 그 부모의 믿음대로 모세는 바로의 공주에게 건짐을 받는다. 그뿐만이 아니라 바로의 공주의 손에서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유모로서 자기 친 어머니 아래서 믿음으로 양육 받는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된다. 모세의 부모는 어떻게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는가?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이야기 한다. 모세의 부모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에 맞섰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모세의 부모만 세상에 맞선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히브리 산파들도 이 출산을 도와주는 도우미들도 세상에 맞섰던 사람들이었다. 출애굽기 1장을 보면
 
*출애굽기 1:17,
17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히브리 출산 도우미들은 바로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왜?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세상에 맞서서, 세상의 권력을 모두 쥐고 있는 그 바로의 명령에 맞서서 아기들을 지켜내는 놀라운 모험을 감행한 것이다. 모세는 믿음의 부모를 통해 그리고 출산 도우미를 통해 주위에서 믿음으로 살아갔던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특별히 세상에 맞서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살아간 사람이었다. 성경은 모세가 아름다운 아이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아름다운 단어라고 해석되는 헬라어 단어에는 용모의 매력뿐만 아니라, 비범함, 위대함이라는 뜻도 담겨져 있다. 모세는 정말 아름다운, 하나님이 보시기에 평범하게 세상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비범하게 세상을 맞서며 살아갔던 그런 사람이었다.
 
우리 주위에도 세상의 시류에 거슬러서 마치 신앙에 연어처럼 살아갔던 사람들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에, 그리고 한국전쟁 때, 신앙을 버리라는 명령을 거스르면서 세상의 시류에 맞서서 싸웠던 신앙의 선배들이 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성경에 침 한 번 뱉으면 예수님의 그 십자가에 발 한 번 올리면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그 때에 과감하게 그것을 거절하고 끝까지 신앙을 지키려고 세상에 맞서 싸웠던 그 신앙의 선배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날 우리가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모세는 마치 연어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듯, 일제 강점기 때에 또 한국전쟁 때에 세상의 시류에 맞서 싸운 것처럼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며 하나님을 위해 살아갔던, 세상을 맞서며 믿음을 가졌던 사람이었다.
 
II. 모세가 가졌던 믿음은 고난을 감당하는 과감한 믿음입니다.
-모세는 고난을 감당하는 과감한 믿음을 가졌던 사람이었다. 히브리서 24절에 기자는 이렇게 기록한다
 
*히브리서 11:24,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가 믿음으로 자랐을 뿐만이 아니라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했다고 한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사는 것은 엄청난 특권이었다. 여러분 생각해보라. 애굽의 0.0001%의 사람도 누리지 못하는 정말 극소수의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엄청난 특권이다. 그것도 혈연으로 연결되지 않았다면 감히 선택할 수조차 없었던 엄청난 특권이었다. 그런데 그런 특권을 모세가 거부했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이야기 한다. 성경 신학자인 유진 H메릴에 따르면 모세를 건져준 바로의 딸은 하셉수트라는 여인일 가능성이 높다. 이 하셉수트라는 사람은 이집트 신왕조, 18왕조의 다섯 번째 파라오였던 여왕이었다. 이집트 역사를 통틀어 가장 번영했던 시기라고 했던 이야기하는 신왕조, 그것도 18왕조의 시작을 알렸던 굉장히 번영했던 시기에 일궈냈던 능력있 던 파라오였다. 물론 모세가 태어난 시기를 100% 확정할 수는 없다. 여러 의견들이 있다. 그러나 많은 신학자들이 추정하는 것처럼 모세를 건졌던 그 공주가 제18호 왕조였던 다섯 번째 파라오였던 하셉수트가 맞다면 정말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의 양아들이었던 것과 같다. 사도행전 7장 22절에 보면 이와 같이 나와 있다.
 
*사도행전 7:22,
22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모세는 그런 엄청난 양자였을 뿐만이 아니라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가 말과 행동이 능했던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모세가 그런 능력도, 그런 지혜도, 심지어 그런 신분(身分)조차도 다 거부(拒否)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하고자 했던 그 모습을 우리는 히브리서를 통해 볼 수 있다. 권력자의 아들이었던 모세가 자신의 정체성을 그 권력자와 함께 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히브리 백성과 함께 했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잘 알고 있는데 출애굽기 2장 12절 말씀을 함께 살펴보자.
 
*출애굽기 2:11,
11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모세는 히브리 사람들을 형제라고 불렀다. 그들을 대신해서 애굽 사람을 쳐 죽이는 선택을 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가 이런 선택을 했던 이유를 25절을 통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히브리서 11:25,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에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했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여기서 잠시는 일시적인 의미하는 단어가 맞다. 그렇다면 이 세상 가운데 일시적으로 누릴 수 있는 그 낙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하는 것을 선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쾌락, 즐거움, 재물, 명예,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감당한다. 실제로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떠났고, 그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출애굽해서 40여 년 동안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위대한 설교자로 중 한 명인 찰스 스펄전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고난의 바다에 뛰어 드는 자는 진귀한 진주들을 얻는다.” 고난의 바다에 뛰어 드는 자는 진귀한 진주를 얻는다. 라고 한다.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은 진귀한 진주를 얻는 것보다 더 값지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말처럼 모세는 고난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을 잘 보고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피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하는 선택을 했다. 자신이 누릴 수 있었던 죄악의 낮 대신에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을 함께 하며 끝까지 하나님께 쓰임 받는 선택을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세의 믿음이었다.
 
III. 모세가 가졌던 믿음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굳건한 믿음이다.
-모세의 믿음을 그리스도를 섬기는 굳건한 믿음이라고 히브리서 기자가 설명한다.
 
히브리서 11:26,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라고 이야기 한다. 이집트의 보화는 감히 누가 상상 할 수도 없을 만큼 큰 보화였다. 여러분 생각해 보라. 그 시절에 가장 크게 번영을 누렸던 그 왕국 가운데서 계속해서 모아왔던 그 금은보화를 놓고 본다면 과연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그리스도를 위해 수모를 받는 것이 더 큰 게 맞는가? 그런데 모세는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가 더 큰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구약시대에 살던 모세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수모를 더 큰 것으로 여겼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겠는가?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 같다. 모세가 하나님을 위해 일한 것처럼 하나님을 위해 선택한 것처럼 행동했던 그 모든 것은 결국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고, 그리스도를 선택한 것과 같다. 라고 한다. 세상이 아닌 하나님을 선택하고 세상이 아닌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그리스도를 섬긴 것이라고 말한다. 모세는 모든 평안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선택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을 선택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기꺼이 고난을 받았고 때로는 같은 민족에게 수모를 받기까지 하면서 오직 하나님을 영광을 위해 맡겨진 사명을 감당했다. 마침 히브리서를 처음 최초의 독자들도 그리스도를 위해 수모를 받았던 신앙인들이었다. 그들은 많은 위로를 받았을 것 같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 같다. 모세가 하나님을 위해 일 한 것처럼 하나님을 위해 선택했던 그 모든 것은 결국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고 그리스도를 선택한 것과 같다고 말한다. 세상이 아닌 하나님을 선택하고 세상이 아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그리스도를 섬김 것이라고 한다. 모세는 세상이 주는 모든 평안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선택했다. 하나님을 백성으로 살아가는 길을 선택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기꺼이 고난을 받았고, 때로는 같은 민족에게 수모를 겪기까지 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맡겨진 사명을 감당했다. 마침 히브리서를 처음 읽게 된 독자들도 그리스도를 위해 수모를 받았던 신앙인들이었다. 그들은 모세를 통해 많은 위로를 받았을 것일 것 같다. 그래, 모세가 그리스도를 선택한 것처럼, 내가 선택한 일이 어리석은 일이 아니었어, 그리스도를 위해 수모를 받았던 것은 그 어떤 일보다 값진 일이었어. 라고 아마 위로를 받았을 것 같다. 성경에 펼쳐진 이 모세의 삶을 보면서 그리스도를 위해 살며 수모를 받는 것이 얼마나 값진 인생인가를 깨닫게 된 것 같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것처럼 이 모세의 믿음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굳건한 믿음이었다.
 
여러분은 예수를 믿기 때문에 수모를 받으신 적이 있는가? 교회를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는가? 최근에 제가 제자 훈련을 위해 면담을 다니다가 한 집사님을 만났다. 믿지 않는 시댁 식구들 때문에 수십 년간 고통을 받으신 분이었다. 제가 면담을 하는데 삶의 스토리를 담다 보니까 면담 시간이 좀 길어졌다. 외간 남자가 내 며느리랑 이렇게 긴 시간을 쓴다고 하면서 화가 나셨던 시아버지께서 역정을 내며 문을 쾅 닫아버리시며 사실상 저를 그 시아버지가 쫓아내셨다. 그런 와중에도 저를 따라 현관문까지 따라 나오신 집사님이 하셨던 말씀이 생각이 났다. “목사님, 우리 아버님을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라구요. 시부모님 때문에, 시댁 때문에, 믿는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고난을 받으셨던 그 집사님이 여전히 가정에 파송된 선교사로서 그 고난을 감내해 내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믿음이 무엇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영 가족 여러분,
모세는 이처럼 그리스도를 위해 수모를 받는 것을 더 귀한 것으로 여겼던 사람이다. 세상에 맞서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갔을 뿐만 아니라 고난을 감당하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갔고 그리스도를 섬기는 굳건한 믿음으로 살아갔던 위대한 믿음의 영웅이었다. 모세는 이와 같은 믿음을 가졌던 신실한 믿음이었는데 불안하면서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었는가? 여전히 불안할 수밖에 없는 가운데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가지고 하루하루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었을까? 바로 상주시는 이가 누구신지 그분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렇다. 이집트에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상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사실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수모는 정말 큰 희생이 따른다. 그렇게 인내하는 믿음에는 결코 사소하지 않은 대가가 필요하다. 하지만 모세의 계산이 옳았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받은 수모는 우리가 이 세상 가운데 잠시 동안 누릴 수 있는 그 죄의 쾌락보다 그리고 견줄 수 없는 하나님의 상급을 받는 일이다. 우리는 상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기 때문에 믿음으로 이 불안한 시대를 살아갈 수 있다. 여러분은 어떠한가?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가? 불안해하는 대신에 믿음으로 담대하게 오늘 하루 살아가고 있는가? 불안한 시대에 내게 어떠한 바로 믿음이다. 사실 믿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런데 혹시 여러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대신에 세상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닌가? 사실 그러기가 너무 쉽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데 세상의 것, 그것은 너무 현실적으로 내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또 믿음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고난을 당하는 것이라고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다. 

그런데 여러분, 고난을 쉽게 감당할 수 있는가? 아인 믿기 때문에 고난을 받아 본 적이 있는가? 우리 모두는 고난 받기를 싫어한다. 고난보다는 그래도 복을 주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가 참 많다. 또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라고 성경은 이야기 한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겪는 수모가 싫어서 그 수모를 피하는 선택을 할 때가 있다. 여러분은 어떠한가? 웬만하며 회사에서 그리스도인인 것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시진 않는가? 내 앞에서 교회와 예배와 하나님을 모욕하는 그 사람 앞에서 시끄러워지는 것이 싫어서, 괜한 일 만들기 싫어서 침묵(沈默)하신 적은 없는가? 사실 우리는 조용히 사려고 하는 때가 더 많다. 그런데 이렇게 불안한 시대에서 쉽게 믿음을 선택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오늘 이렇게 말씀하신다. “믿음으로 살아가라. 너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다. 믿음의 선택을 해라.”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주문하신다. 믿음의 용사가 되어서 세상에 맞서는 믿음을 가지고 담대(膽大)하고 과감(果敢)하게 그리고 굳건하게 믿음의 용사(勇士)로 서기를 간절(懇切)히 바라고 계신다.

 
이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신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사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참 어렵다. 아마 성도님들 중에 이렇게 질문하시는 분들도 있다. “목사님, 사실 어려워요. 목사님은 그런 적이 없어서 잘 모르시죠?” 한다. 실제로 제가 사역하면서 한 집사님께 받았던 질문 중에 하나이다. “목사님, 목사님은 사회생활 안 해보셔서 잘 모르시죠? 저는 장교로 군 생활을 했었는데 제가 마지막으로 근무했던 곳이 사실 회사와 비슷한 셋팅을 가졌던 곳이었습니다. 군 안에서 건설하고 유지 보수하는 일을 맡았기 때문에 사실 건설회사와 비슷한 분위기를 가졌다고 스스로도 고백하는 그런 사무실이었다. 매주 최소 두 번 이상 회식을 하고 회식을 하면 반드시 폭탄(爆彈)주(酒)로 시작하는, 반드시 잔(盞)을 돌려야만 하는, 그런 사무실이었습니다. 당시 회식을 하면 기독교인이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해도 반드시 잔을 돌려야만 한다고 이야기를 하고 또 잔을 거절(拒絶)하면 육두문자를 날리면서 온갖 모욕(侮辱)을 주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를 가장 힘들게 했던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믿는다고 고백하던 사람들이었다. 함께 했던 그 부서들 안에 교회를 다닌다고 고백했던 사람들 중에 특별히 더 잔을 씻을 수 있는 물을 친히 가져와서 친히 음료수와 함께 어떻게든 잔을 함께 돌리자고 권유했던 것이 여전히 기억에 남습니다. 머릿속에 믿음을 삶에서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때 정말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거의 일주일에 두 번 이상은 회식에 끌려 다니면서 1차, 2차, 3차, 4차까지 하고 새벽 두세 시에 들어오면서 제가 느꼈던 감정은 이 기류에 휩쓸려가서는 믿음을 지킬 수 없겠구나! 나는 반드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더 굳건히 맞서 싸워야겠구나! 하는 그런 감정을 가졌습니다. 어려움을 겪을수록 더 믿음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의 급류에 휩쓸려 갈 수밖에 없겠구나! 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라고 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세상은 여러분들이 불안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급류에 휩쓸려서 하나님과 멀어질 수밖에 없게 만들려고 한다. 여러분은 끊임없이 밀려오는 세상의 급류를 어떻게 이겨내고 있는가? 계속해서 불안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떠나가게끔 만드는 그 세상을 어떻게 맞서고 있는가? 바로 이러한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믿음이다. 어떤 믿음인가?
 
▷모세가 가졌던 것처럼 바로 세상에 맞서는 믿음, 고난을 감당하는 믿음, 그리스도를 섬기는 믿음이다.

영 가족 여러분,
세상을 맞서는 담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가 될 때,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이다. 아멘, 여러분, 고난을 선택하는 과감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선택하고 감당할 때, 그 고난을 견뎌내고 이겨낼 능력을 주실 줄 믿는다. 성도여러분, 그리스도를 섬기는 굳건한 믿음을 갖기를 바란다. 그리스도를 위해 수모(受侮)를 당할 때, 그 어떤 것보다 값진 천국의 상급(賞給)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실 것이다. 우리 주위에도 모세와 같은 그런 믿음의 용사들이 참 많다. 주위를 들러보면 이미 모세처럼 열심히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믿음의 용사들을 발견할 수 있다. 저와 제자훈련을 받았던 집사님 중에 허리가 아파서 정말 고생을 많이 하신 집사님이 계신다. 그분은 훈련 가운데 척추(脊椎) 분리(分利)증 때문에 시술(施術)을 받게 되었다. 병상에 누워서 시술을 받고 나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던 그 집사님을 제가 기억한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 같이 허리가 아픈데 왜 굳이 교회에 가서 그런 어려움을 사서 받느냐고 만류(挽留)했다. 그래도 집사님은 훈련의 자리를 놓지 않았다. 오히려 함께 하는 훈련 공동체를 위해 고난을 감당하는 선택을 했다. 어떻게든 훈련 받고자 누워서 성경을 읽고 어떻게든 훈련에 나아가고자 그 허리를 붙들고 복대를 차고 하루하루 허리를 최대한 안 쓰려고 노력했던 그 집사님, 남편이 실직하고 재취업하는 그 어려운 과정 가운데서도 사역훈련의 자리를 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 그 자리를 끝까지 참석해서 이제 순장으로 파송되어서 열심히 순 원 들을 섬기고 있다. 여전히 경추와 요추 관절에 아픔을 감당해야 하지만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아름다운 인생을 열심히 사역하고 있다. 여러분 주위에도 세상에 맞서는 용사들이 있을 것이다. 고난을 감당하는 그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하루하루 살아가는 믿음의 영웅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섬기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오늘 하루도 뚜벅뚜벅 걷고 있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살아가는 그 영웅들이 주위에 계실 것이다. 그런 작고 큰 믿음의 영웅들의 이야기가 히브리서 뒤에 있는 이 믿음의 행전에 계속해서 기록되고 그 믿음행전을 수놓고 있는 줄 믿는다. 회복을 넘어 부흥을 소망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믿음이다. 상주시는 이이신 하나님을 믿고 따를 때에 내 믿음이 내 삶에 부흥으로, 그리고 내 삶에 부흥이 사랑의 교회와 한국교회 부흥으로 이어질 줄 믿는다.
 
사랑하는 영 가족 여러분,
모세처럼 세상에 맞서는 담대한 믿음을 가져라. 고난을 감당하는 믿음을 가지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섬기는 믿음을 가지길 소망한다. 바로 이 믿음이 부흥을 소망하는 우리에게 오늘 내게 필요한 믿음이다. 이 믿음을 가지고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장차 우리에게 주실 그 영광을 미리 이 땅에서 맛보는 축복을 전해 주실 것이다. 아멘, 그리고 이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승리할 때, 영원한 상을 이 땅 가운데 먼저 누리며 하나님이 오늘 하루도 나를 지켜주시고, 함께 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을 경험하며 살아가게 될 줄로 믿는다. 내게 필요한 것은 바로 믿음이다.
 
♧요약
불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실 것을 믿고 세상에 시류에 거스르기에는 우리의 믿음이 연약함을 깨달으며 우리를 공격해 오는 마귀를 이기기에는 너무 연약하니, 우리를 모세처럼 세상에 맞서는 믿음을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고난을 감당하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믿음, 그 믿음으로 가지고 하나님께서 주실 영원한 상을 바라보면서 나그네 인생 같은 이 땅의 삶 가운데 일하실 주님을 보고 그 영광을 체험하여야 한다. 회복을 넘어 부흥을 소망하며 내가 순종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서 하나님이 먼저 길을 만드시고 역사하시는 것을 체험하여 진정한 간증을 할 수 있는 믿음의 영웅들이 되기를 소원한다.


-모세는 세상의 명예를 거절했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으며 세상의 권력자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모세는 오직 보이지 않는 능력의 손을 인내함으로 의지했다. 진정한 믿음은 이처럼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극복하며 나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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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1월 4일)
제목:  "믿음을 선택하다"
말씀: 여호수아 14:6~12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부목사님)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임상규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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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14:6~12,
6 그 때에 유다 자손이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나아오고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와 당신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이르신 일을 당신이 아시는 바라. 
7 내 나이 사십 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하게 하였으므로 내가 성실한 마음으로 그에게 보고하였고. 
8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으므로. 
9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10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오늘 내가 팔십오 세로되.
11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12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 
ㅡㅡㅡㅡㅡㅡ

▷새해이다. 매우 추운 날이다. 성전으로 발걸음을 향하기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이 자리에 나온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다함없는 은혜의 축복을 내려 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세계적인 리더쉽 전문가인 존 멕스웰이 있다. 그는 그의 책 ‘생각의 법칙’에서 ‘당신의 생각이 당신의 인생을 결정한다.’ 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우리의 행동을 낳고, 우리의 행동이 바로 ‘우리 자신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한 사람의 행동과 가치는 그 사람의 마음 안에 무엇이 담겨있는지를 보여준다. 마음 안에 믿음을 가진 사람은 믿음을 드러낸다. 마음 안에 욕심과 욕망을 가진 사람은 결국에는 욕심과 욕망이 드러나게 된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새해를 시작하는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의 마음 가운데 어떤 마음이 담겨있는가? 아니 새해를 시작하며 우리의 마음 가운데 무엇을 담아내기를 소원하고 있는가? 믿음인가? 욕심인가? 한 번 자문해 보기를 바란다. 오늘 우리는 위대한 일을 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만하지 않았던 한 사람, 기적과 같은 놀라운 역사를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것에 초점을 두지 않았던 한 사람, 바로 그 사람, 갈렙에 대해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도대체 갈렙의 마음에 무엇이 가득했기에 그는 온전히 주님을 좇아갔던 것일까? 갈렙은 도대체 그의 마음이 무엇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살아갔던 것인가? 오늘 이 질문을 우리 앞에 내어놓고 2023년을 새롭게 살아가야 될 우리 가운데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 보는 이 수요저녁기도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다함께 여호수아 14장 6절 상반절의 말씀을 함께 읽어보자.
 
*여호수아 14:6a,
6 그 때에 유다 자손이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나아오고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와 당신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이르신 일을 당신이 아시는 바라.
-성경은 그때에 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그때는 바로 이스라엘 자손이 땅을 분배하는 그 때를 말한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 봐야 할 것은 땅의 분배(分配)가 단순히 소유의 분배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그 때임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약속하셨다. 너의 자손을 땅의 티끌과 같이 많게 하시겠다. 불가능하게 보였던 이 약속이었다. 도대체 인간의 머리로 계산해 볼 때 이것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이루어질 수 없는 그 일인데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다. 인간의 방법과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여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서 바로 성취하셨다. 또 한 가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있다. 바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했던 이 가나안이 바로 오늘 이 시간 이 본문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바로 역사적인 현장이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다는 것은 기쁨으로 충만하였다. 그런데 이와 더불어 그들의 마음 가운데에 알지 못하는 긴장이 공존하기 시작했다. 어느 땅을 분배 받을 것인가? 이미 그동안 전쟁을 치러오면서 어느 땅이 좋은 땅인지, 어느 땅이 비옥한 땅인지, 어느 땅이 좀 살기 어려운 땅인지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알고 있었다. 우리에게 안락함을 주는 땅, 나에게 기쁨을 주는 땅, 그 땅을 소유하고 싶은 마음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어느 족속이 공적이 더 많았는지, 얼마나 애썼는지에 대한 계산이 재빠르게 돌아가는 시점이기도 하였다.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그때였지만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다시금 하나님의 뜻보다, 나의 편안함과 나의 안위함을 구하는, 나의 삶의 초점이 다른 곳으로 흘러갈 수 있는 위기의 때이기도 하였다. 내가 손해 보지 않고 나의 권리를 이제 주장할 수 있는 바로 그때였다. 전쟁을 치르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똘똘 한 마음으로 뭉쳐 있었다. 왜냐하면 전쟁은 생존의 문제였다. 흩어지면 죽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모든 지파들이 하나로 뭉쳐있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미묘한 긴장이 시작된다. 땅의 분배는 단순한 땅의 분배 차원을 넘어서 나의 존재의 가치가 인정받는가? 나의 자신의 힘이 증명되는가의 시간이기도 하였다. 우리도 그런 경험을 하지 않은가? 가족들 간에 우애가 참 깊다. 특별히 어려운 시간을 거치면 가족들이 사랑으로 꽉 뭉쳐져 있다. 그런데 그 어려움이 지나고 문제가 해결되어지고 권리를 나누고 이익을 나누는 시점이 되면 사랑했던 가족들이 권리의 문제로 주도권의 문제로 다툼이 일어난다. 이스라엘이 바로 그 시간 가운데 놓여져 있었다. 그러한 때에 갈렙이 말하기 시작한다.
 
*여호수아 14:6~12,
6 그 때에 유다 자손이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나아오고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와 당신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이르신 일을 당신이 아시는 바라.
-모두가 예민해 하고 있을 그때 갈렙이 여호수아 앞에 나아온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갈렙이 누구인가? 출애굽 1세대 전쟁의 영웅이다. 여호수아와 더불어 혁혁한 공을 세운 자가 바로 갈렙이다. 그는 이스라엘 중에 지도자 중에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의 공적과 용기와 그동안의 행적을 기억할 때, 여호수아 앞에 나아와 이렇게 요구할 수 있다. 저에게 제일 좋은 땅을 주십시오. 그래도 되죠? 그래도 되죠? 수많은 족속들이 그 질문 앞에 아무도 대구할 수 없을 만큼 갈렙은 분명한 지도자 중에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전하는 첫 번째 메시지는 바로 가데스 바네아 사건이었다. 민수기 13장에 보면 모세가 가나안 땅을 정탐하도록 열두 명의 사람을 정탐하도록 파송한다. 그 열두명의 사람은 각 지파에서 가장 총명하고 민첩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가데스 바네아를 정탐하도록 보낸다. 가데스 바네아는 말 그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다. 약속의 땅이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단 한 가지도 거짓이 없었다. 축복의 땅이었다. 모두가 동의하는 바였다. 하지만 정탐꾼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두려움이 있었다. 바로 가나안의 견고한 성읍과 그리고 가나안 땅에 살고 있었던 아낙자손의 강성함이었다. 정탐꾼들이 이제 다시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함께 나누기 시작한다. 그리고 돌아온 열 명의 정탐꾼이 이렇게 말하기 시작한다. “여러분, 여러분, 그 땅은 너무 좋은 땅이지만 그 땅은 우리가 정복할 수 없습니다. 그 땅에 가보니까 아낙 자손이라는 족속이 있는데 그들은 마치 거대한 용사들과 같아서 우리가 그들과 절대로 싸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 땅을 차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 땅은 보기에 마치 메뚜기 한 마리 같습니다.” 라고 말한다.
 
그 소리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밤새도록 통곡하기 시작한다. 모세와 아론 앞에 나아와 원망한다. 불평을 쏟아놓는다. 우리를 여기서 죽이려고 여기서 이 고생을 시켰냐고 한다. 원망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모두가 아니라고 말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 라고 말고 있는 그 때에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의 가슴에 옷을 찢는다. 그리고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담대하게 말하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땅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입니다. 우리가 그 땅을 정복해야 합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땅을 정복할 수 있게 도와주실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여호수아와 갈렙만 생존하여 지금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갈렙은 땅이 분배되는 이 중요한 시점 가운데 이 일을 다시 한 번 회고(回顧)한다. 이 일을 회상(回想)하면서 갈렙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하나님과 여호와의 종 모세 앞에 성실하게 보고하였고 나는 하나님께 충성하였다.’ 라고 자신의 삶을 고백한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갈렙에게 있어서 가데서 바네아는 단순한 정탐의 시간, 모험의 시간, 어떤 추억의 시간이 아니었다. 갈렙에게 있어서 가데서 바네아는 하나님을 향하여 믿음 보고를 올려드리고 믿음의 선택을 하고 믿음을 살아낸 결정적 시간, 결정적 사건이었다. 하나님 앞에 충성되었던 갈렙, 그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땅이었다. 갈렙은 이 하나님의 약속을 굳건히 붙잡는다. 지난 45년이라는 시간이 흘러왔지만 그의 관심은 오직 하나이다. 바로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께서 약속한 것을 이루시는 그 약속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마치 뜻을 정한 장인이 외길을 꿋꿋이 걸어가듯이 갈렙은 다른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동안 치러왔던 전쟁에 승리에도 도취되지 않았다. 여호수아의 리더쉽에는 철저하게 복종한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다. 자신의 평가와 결과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다만 하나님의 약속, 그 약속과 그 하나님의 뜻이 내 삶에 이루어지기를 그토록 갈망하고 소망하고 있다. 갈렙은 왜 이토록 철저하게 자신의 성공과 성취와 노력을 잊어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만을 붙들게 된 것인가? 갈렙의 마음에 중심축에 자리 잡고 그를 움직이는 그 힘의 원동력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다함께 여호수아 14장 10절을 보자.
 
*여호수아 14:10,
10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오늘 내가 팔십오 세로되.
-성도여러분, 갈렙이 무엇이라고 고백하고 있는가? 광야에서 방황한 지난 45년 동안 누가 자신을 생존하게 하셨다. 라고 고백하고 있는가? 바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를 생존하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I. 갈렙의 마음의 중심 - 말씀하신 대로 생존하게 하신 은혜.
 
-그는 분명히 알았다. 자신이 생존해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신 그 은혜 때문에 내가 지금까지 생존해 있음을 그는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모든 것ㄴ 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살아 왔음을 아는 자, 그 은혜를 아는 자는 더 이상 자랑하고 더 이상 의지할 것이 없다. 사도 바울이 고백하듯이 내가 가진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다. 라고 한다. 하나님의 그 은혜 외에는 다른 무엇으로 설명할 길이 없는 것이다. 갈렙은 하나님께서 철저히 그의 삶을 붙잡아 주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믿었다. 내 인생, 내 인생이 마음대로 내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셔야만 우리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께서 살아가게 하셔야만 우리가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그의 온 생애를 통하여 깨달았던 것이다. 이것이 갈렙의 마음을 꽉 채운 하나님을 향한 그 믿음이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삶은 내가 스스로 챙긴다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준비하고 내가 노력하고 내가 건강을 챙긴다고 우리의 삶이 항상 유지 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 삶을 붙들어주시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닌 나씽(Nothing)인 것이 우리의 삶이다. 이것을 아는 자는 하나님을 의지한다. 이것을 아는 자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인정하게 된다. 이 믿음 안에 거하는 자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가게 된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가 갈렙과 같은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II. 갈렙의 마음의 중심- 하나님의 약속을 놓지 않는 열망.
 
*여호수아 14:12,
12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
- 갈렙이 지금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 가나안에서 가장 좋은 금싸라기 땅을 구하고 있는가? 강남 한 복판에 가장 좋은 땅을 구하고 있는가? “그동안 제가 수고했으니, 그동안 제가 믿음으로 많은 전쟁으로 승리했으니, 이제 편안하게 지낼만한 호화로운 저택을 저에게 주십시오.” 라고 말하고 있는가? 결단코 아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말도 안 되는 것을 지금 요청하고 있는데 이 산지를 달라고 하고 있다. 이 산지가 어떤 곳인가? 바로 아낙 자손이 있는 곳이다.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벌벌 떨게 만들었던 그 강력한 아낙 자손들이 여전히 살아있는 그곳이 바로 이 산지이다. 그 성읍들은 크고 강하다. 전쟁이 쉽지 않다. 가장 어려운 곳이다. 모두가 회피하고 모두가 도망치고 모두가 그곳만큼은 가고 싶지 않은 곳이 바로 헤브론이다. 그런데 왜 갈렙은 그 땅을 달라고 그토록 강력하게 요구하는 것인가? 바로 그 땅이 하나님께서 갈렙에게 약속하신 그 땅이기 때문이다. 갈렙은 자신이 가야할 길을 분명히 알았다. 하나님이 주신 그 약속의 땅이기에 그 약속의 땅을 회피하지 않는다. 그 땅을 향하여 나아가기를 주저하지도 않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찬양을 부르면서 참 은혜를 받는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라고 우리가 찬양하며 참 많이 울지 않는가? 우리가 간절하게 불렀던 이 산지가 과연 갈렙이 말하고 있는 동일한 산지인가? 아니면 내가 원하고 내가 바라고 내가 그토록 소유하고 싶었던 산지는 아니었는가? 주님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이 산지는 내가 너에게 약속한 곳이야.” “갈렙, 힘들고, 어려울 거야, 때때로 눈물도 흘려야 돼, 오해도 받아야 되고, 고생도 해야 되는 곳이 바로 이 산지야, 남들이 다 갖기 싫어하는 그곳이 바로 너에게 약속한 땅이야.” 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우리가 애통하며 부르짖을 때가 있다. “하나님, 왜 저를 이 가정에 태어나게 하셨나요? 하나님, 왜 저를 이 가정에 보내셔서 저를 이토록 고생케 하시나요? 하나님, 왜 저를 이 회사에 보내셔서 제가 이런 모멸과 수치를 당하게 하시는지요? 하나님, 저를 왜 이 학교에 보내셔서 제가 늘 주눅 들고 어렵고 힘겹게 살아가게 하십니까?” 이렇게 부르짖으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은 고요하게 말씀하신다. “힘들지, 어렵지, 괴롭지, 그런데 그곳이 바로 너를 향한 약속이 이루어질 현장이야.” 라고 하신다. 갈렙은 그 땅을 피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 땅을 향하여 적극적으로 돌진하여 나아간다. 갈렙은 그 부르심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앞에 놓여 진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 험준한 산맥과 고통의 나날이 우리 앞에 놓여 져 있다 할지라도 갈렙과 같이 하나님의 약속만을 꼭 붙잡고 놓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 선에 서기를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한다.
 
III. 갈렙의 마음의 중심-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함.
 
*여호수아 14:12,
12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
-갈렙은 분명히 알았다. 그 땅이 어려운 땅이라는 것을, 그러나 그는 어려움과 고통과 고난과 그 모든 것들이 부담되지 않았던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그 어떤 원수도 그 어떤 장벽도 나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갈렙은 체험적으로 알았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말씀대로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면 말씀대로 애굽에서 우리를 건져내신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면 말씀대로 죽은 자를 일으켜 세우신 그 생명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면 그 말씀대로 반드시 약속을 이루실 것을 분명히 믿은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살아계신 하나님은 갈렙과 함께 계셨다. 갈렙과 함께 하신 그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이 변함없는 사실을 믿는가? 이 믿음이 우리를 승리케 하는 것이다. 이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어떤 풍파 속에서도 이기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이다. 이 믿음을 소유하고 믿음 보고하고 부흥보고 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기를 소원한다. 여호수아 14장 14절에 갈렙을 향하여 이렇게 평가를 내린다.
 
*여호수아 14:14,
14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
-갈렙은 45년 동안 끊임없이 매순간마다 그는 믿음을 선택했다. 그는 한 결 같이 하나님의 충성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를 만든 것은 믿음이었지 그 다른 무엇이 아니었다. 여기서 온전히 좇았다. 라는 것은 여호와를 따라 채워졌다. 여호와를 따랐기 때문에 충만해졌다. 여호와를 따랐기 때문에 온전히 채워지고 여호와를 따라 전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갔다는 의미이다.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삶, 날마다 그 믿음을 선택한 삶이 바로 갈렙의 삶이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올 한 해가 시작되었다. 올 한해가 시작되는 이 시작점에서 무엇을 선택하기를 원하는가? 돈, 권력, 명에, 내 자식, 내가 바라는 소망, 안개와 같은 것들을 선택하지 말고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 하나님, 우리를 붙드시고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 하나님을 믿음으로 선택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부흥은 다른 것으로 오지 않는다. 부흥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임재 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친밀함을 경험해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아라, 날마다 주님만을 의지하라. 갈렙의 믿음의 보고로 살아갔던 것은 그의 특별함이 아니라, 바로 그의 삶을 가득 채웠던 하나님의 사랑이었음을 기억하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는 2023년을 시작하는 우리 가운데 우리의 삶이 다른 그 무엇이 아닌 하나님으로 충만해지시길 원하신다. 믿음을 살아내고 믿음을 살아낸 부흥보고의 고백을 다른 그 누구가 아닌, 다른 그 어떤 사람이 아닌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듣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의 갈렙을 찾으신다. 어떠한 어려움이 찾아와도, 어떠한 시련이 찾아와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오늘을 살아갈 하나님의 사람을 찾고 계신다. 믿음을 선택하라.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그 믿음을 선택하라. 하나님만을 온전히 좇아가는 신앙을 선택하라. 이러한 믿음을 선택을 한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이다. 회복을 넘어 부흥을 우리 가운데 반드시 허락하실 것이다. 이 믿음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요약
매일 선택의 여정 속에 살아가는 우리 가운데 갈렙을 통하여 우리가 정말로 바라보고 의지해야 될 것이 무엇이지를 깨달아서 갈렙과 같이 믿음의 선택을 온전히 순종함으로 선택하고,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을 체험하며 우리가 수많은 선택의 길 앞에서 우리가 주저하거나 어려워하지 않고 오직 주님이 우리의 생명이 되심을 온전히 믿고 오직 주님만을 따라가는 주님의 신실한 제자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순종함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비록 육적으로는 이스라엘의 혈통은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을 선물로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갈렙은 원래 그나스(그니스) 사람이었는데, 그니스 족속은 에돔의 후손으로 가나안에 거주했고, 정복 대상의 목록에 나왔던 족속이다. 그런데 이 족속은 어느새 이스라엘에 편입되어 들어왔고, 특히 유다 지파에 속하게 되었으며, 갈렙은 유다 지파의 대표자로 활동했던 것이다. 갈렙은 성실과 온전한 순종의 사람으로 말씀을 믿고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경외하였다. 또한 불의를 보면 분개했으며, 영적인 강건함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가나안 땅에서의 기업과 건강, 장수의 복을 받았다. 이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좇는 성실한 신앙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게 된다. 언약→믿음→순종→복은 영원히 변함없이 시행되는 하나님의 원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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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12월 28일)
제목:"하나님이 빚으시는 인생"
말씀: 다니엘 1:11-17,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안 바울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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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1:11-17,
11 환관장이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를 감독하게 한 자에게 다니엘이 말하되.
12 청하오니 당신의 종들을 열흘 동안 시험하여 채식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후에.
13 당신 앞에서 우리의 얼굴과 왕의 음식을 먹는 소년들의 얼굴을 비교하여 보아서 당신이 보는 대로 종들에게 행하소서 하매.
14 그가 그들의 말을 따라 열흘 동안 시험하더니.
15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더 좋아 보인지라.
16 그리하여 감독하는 자가 그들에게 지정된 음식과 마실 포도주를 제하고 채식을 주니라.
17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으니 다니엘은 또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더라.


▶안 바울 부목사님
-은혜를 사모하며 수요저녁기도회에 나오신 성도 여러분을 환영한다. 오늘도 이 기도회를 통해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나아가는 응답의 은혜를 체험하는 복된 시간되시길 소망한다. 오늘 말씀은 다니엘1장 11-17절이다. 함께 교독하자.
 
-2022년도 이 한 해도 며칠 남지 않았다. 3일 남은 것 같다. 모든 영 가족 여러분들 끝까지 행복 가득한 하루하루 되기를 소망한다. 뿐만 아니라 2023년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더 놀라운 풍성한 은혜가 여러분들의 삶에 가득하기를 소망한다. 옆에 분과 인사합시다. “내년에도 예배의 승리자가 됩시다.” 2022년 한 해 아마도 많은 기도제목들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여러분들은 나아왔을 것이다.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왔을 때에 여러분들이 원하는 대로 기도응답을 받았는가? 여러 가지 문제, 가정의 문제, 재정의 문제, 자녀의 문제,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사실 우리의 기도제목일 텐데 어떻게 해결함을 받았는가? 흔히 이야기 하는 것처럼 그런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통쾌하게 속 시원하게 하나님께서 그 문제들을 풀어주실 때가 있다. 그러나 반대로 여전히 어쩌면 풀리지 않거나 하나님께서 정 반대로 그 답변을 주실 때가 그런 경우가 있다. 그러나 어떠한 상황에 있더라도 저는 이 말씀을 꼭 여러분들에게 드리고 싶다. 기도의 자리를 끝까지 놓치지 않고 여전히 주님 앞에서 기도로 살아내시려 노력하는 여러분들이 기도의 승리자 인줄 믿는다. 기도 자가 승리자이다.
 
오늘 우리가 기도의 본으로 종종 삼고 있는 한 인물을 보고자 한다. 누구인가? 다니엘이다. 다니엘은 기도의 습관으로 유명하다. 함께 말씀을 보다.
 
*다니엘 6:10,
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기도의 습관이다. 먼저 자기만의 기도의 자리가 다니엘에게는 있었다. 그리고 정해진 시간에 그 자리에 올라갔다. 그리고 정해진 자리에 정돈하고 자리를 세팅을 하고 기도를 한다. 시작기도는 자기의 삶의 감사의 기도제목들로 채워나간다.. 이것은 다니엘의 기도 습관이다. 습관은 반복되어지는 것이고, 또한 훈련되어 지는 것이다. 처음부터 우리 DNA에 박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제자훈련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방법을 반복해서 훈련하고 연습을 한다. 그리고 그것을 내일 더 잘할 수 있도록 훈련을 한다. 처음부터 기도를 잘 하는 사람이 있을까? 죄 된 본성 된 우리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기도의 습관은 반복되어지고 훈련되어야 한다. 우리 사랑의 교회는 참 좋은 프로그램들이 많다. 그 중에 ‘중보기도학교’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제가 맡아서 좋은 것은 아니다. 혹시 한 해 한 해 가면서 이 참 좋은 이 프로그램을 못 들으신 분들이 있다면 중보기도학교를 통해서 기도의 습관을 쌓아가는 2023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아멘,
 
기도의 습관만큼 중요한 것이 있다면, 응답 받는 기도를 하는 것이다. 응답받는 기도, 다니엘은 처음부터 그의 모든 기도가 응답받는 기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모든 기도가 처음부터 기도조차도 아니었다라고 한다. 다니엘도 자신이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할 때가 분명히 있었다. 만약 그가 원하는 대로 응답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기도의 실패라고 이야기 한다면, 기도의 쓴맛, 기도의 실패를 맛본 사람이다. 오늘 본문이 1장이다. 1장 초반부에 이 자리까지 오는 초반에 다니엘은 두 번의 기도의 실패를 맛보았다.
 
첫 번째 기도의 실패는
바벨론으로 끌려온 자체가 기도의 실패이다. 바벨론 왕궁으로 끌려온 것을 보면 다니엘은 아마도 왕족이나 귀족의 자녀였을 것이다. 그렇다. 만약에 왕족이나 귀족의 자녀였으면 그가 어렸을 적에 끌려오기 전에 어떠한 기도제목을 하나님께 올려드렸을까? 아마도 자기 나라 이스라엘이 이 바벨론으로부터 공격을 받지 않도록 바벨론으로부터 구원해 달라고 기도를 했을 것이다.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있는 바벨론 군대가 천군천사로 진열되는 그런 기도를 아마도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그런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히스기야 시대 때에 앗수르 군대가 공격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기도를 통해서 앗수르 군대가 진멸되는 사건들이 있었다. 이 역사를 알고 있는 왕궁의 또는 귀족의 자녀였던 다니엘이라고 한다면 그 역사를 떠올리면서 아마도 ‘저 못된 바벨론 군대가 하나님의 기적적이고 정말 놀라운 그 천군천사의 그 능력으로 말미암아 진멸 되게 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를 했을 것이다. 굉장히 어린 자녀의 순순한 기도이다. 그런데 이 기도가 ‘Yes’, 라는 기도의 응답을 받았는가? ‘No’라는 응답을 받았는가? No 라는 응답을 받았다. 기도가 실패라는 것이다. 기도의 응답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응답을 받지 못했다. 이 자리까지 오면서
 
두 번째는 기도의 실패는
끌려오면서 그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떻게든 잘 살아내려고 했는데,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하나의 뉴스가 들리는 것이다. 그 뉴스가 뭐냐면, 왕이 지정(指定)한 음식(飮食)과 왕이 지정한 포도주(葡萄酒)를 마시라는 뉴스였다. 아마 다니엘은 이 문제를 앞에 두고 하나님께 다시 기도하러 나갔을 것이다. 기도하러 가서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한 내용은 그 음식으로 그 포도주로 자신을 더럷히지 않게끔 먹지 않게끔 해달라는 기도제목이었다. 그는 우상에게 드려지는 음식으로 포도주로 거룩한 백성인 자기가 더럽혀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신음을 했고 이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구나! 분명히 하나님께서 나를 더럽히지 않겠구나! 하는 확신이 있는 가운데 환관(宦官) 장(長)을 찾아갔다. 단판(單板)을 지으려고 찾아갔다. 이게 하나님이 뜻이니 저 환관장이 마음을 변화시켜서 나에게는 음식을 먹지 않게끔, 포도주를 먹지 않게끔, 할 것이다. 라는 그 믿음을 가지고 그 환관 장에게 나아가는데 환관 장이 YES,인가 NO인가? NO라고 했다. 말씀을 한 번 더 보자.
 
*다니엘 1:10,
10 환관장이 다니엘에게 이르되 내가 내 주 왕을 두려워하노라 그가 너희 먹을 것과 너희 마실 것을 지정하셨거늘 너희의 얼굴이 초췌하여 같은 또래의 소년들만 못한 것을 그가 보게 할 것이 무엇이냐 그렇게 되면 너희 때문에 내 머리가 왕 앞에서 위태롭게 되리라 하니라.
-다니엘이 이것을 먹지 않게끔 기도를 했고, 첫 번째로 순종해서 환관 장에게 나아갔는데, 환관장이 NO라고 대답을 해버린 것이다. 환관장의 말은 너무나 맞는 말이다. 말씀에 보면 환관 장은 다니엘을 보면서 긍휼(矜恤)한 마음을 품었고, 또 도와주고 싶었다는 말씀에 쓰여 있지만 상식적으로 팩트를 보면 왕궁으로 들어온 최고급의 음식, 그 고기와 또 포도주를 먹은 사람이 더 때깔이 좋은 것은 사실이다. 얼굴빛이 더 좋은 것은 사실이다. 환관장이 채소만 먹어서는 자기가 위태로울 거서 같으니까 NO라고 대답을 한 것이다. 두 번째도 실패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붙들고 기도했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생각하고 순종하고 환관 장에게 나아갔는데 환관장이 NO라고 대답한 것이다. 우리도 이러한 때가 있다. 우리도 이러한 기도의 응답을 받을 때가 분명히 있다. 아마도 올해 2022년을 살아오면서도 이렇게 NO라는 응답을 여러 차례 받으신 분들도 있을 것이다. 아쉽지만 앞으로도 그럴 경우가 있을 것이다. 2023년에도 그럴 경우가 있을 것이다. 내가 분명히 기도할 때 보니까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하나님께서 분명히 기뻐하시는 일인데 그분이 그 길이 열리지 않는 것이다. 믿음의 모험을 하고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을 향해서 당당히 나아가는데 하나님께서 그 길을 열어주시지 않을 때가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도여러분, 그 때에 꼭 기억하시길 바란다. 끝까지 기도(祈禱)하는 자가 승리자이다. 끝까지 기도하는 자가 하나님께서 승리자로 이끄실 줄 믿는다. 주님께 묻고, 묻고 또 묻는 사람, 그 사람을 하나님은 승리자로 세워주신다. 기도의 문이 열리지 않는 것을 두고 여러분들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이 기도는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단정 짖지 않기를 바란다.
 
*베드로전서 4:14,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恥辱)을 당하면 곧 무슨 말인가? 예수님의 방법으로 말씀과 기도로 세상을 향해서 당당히 나아갈 때, 길이 막히면, 문이 막히면 그래서 사람으로부터 치욕을 당하면, 그 자리가 하나님이 떠난 자리가 아니라, 영광(榮光)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라고 사도 베드로는 권면(勸勉)하고 선포(宣布)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도를 멈추지 말고 끝까지 하나님과 씨름하길 바란다. 다니엘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말씀은
 
번째, 기도의 좋은 습관은 -하나님이 이끄심이라는 확신이 들 때까지 기도하다.

-어디까지 나를 인도하시려는가? 하는 궁금증에 마침표가 찍혀질 때까지, ‘어디까지 나를 인도하시는 거지?’라는 그 궁금증에 마침표가 찍힐 때까지 기도하라는 것이다. 기도의 실패(失敗) 후에도 오늘 말씀에 보면 다니엘은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분명히 환관장이라고 하는 바벨론 제국의 제 2인자가 거절(拒絶)을 딱 했는데, 거기서 다니엘은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게 없지 않는 걸 기뻐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묻는다. 그 때 다니엘에게 머릿속에 섬광(閃光)과 같이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다니엘의 말씀에 오늘 읽은 첫 번째 11절의 말씀이다. 읽어보자.
 
*다니엘 1:11-17,
11 환관장이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를 감독하게 한 자에게 다니엘이 말하되.
-제 2인자였던 환관장이 안되니 자기의 음식을 관리하고 있는 그 감독관(監督官)에게 가서 한번 딜(deal)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두 번의 기도의 실패가 있었지만 다시 기도의 자리로 가고, 그 때 하나님께서 그 머릿속에 이 방법을 떠올리게 한 것이다. 안 먹게 해달라고 그에게 찾아가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법이 떠올랐다. 한번 시험(試驗)해 달라는 것이다. 손해(損害) 볼 것이 없지 않느냐고 한다. 왕의 음식의 먹는 소년들과 자기들의 친구들을 열흘 동안 시험해 보고 비교해봐 달라는 것이다. 아마 이 감독관은 납득이 되었을 것 같다. 환관 장에게는 그냥 먹지 않게 해달라고만 그렇게 들이밀었는데, 새로운 방법이 떠올라서 감독관에게 찾아갔고 새로운 방법을 납득(納得)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提示)했다. 저는 이런 지혜(智慧)와 방법(方法)들이 기도의 자리에서 나왔다고 생각이 든다. 기도하는 와중(渦中)에 다니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臨)한 것이다. 우리도 그렇다. 우리도 기도하는 와중에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실 때가 있다. 기도하는 와중에 하나님께서 들리게 하실 때가 있다. 또한 기도하는 와중에 환상(幻想) 가운데 보여주실 때가 있다.
 
여러분들, 기도하는 자가 왜 승리자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통해서 그의 인생을 빚어 가시기 때문이다. 기도의 습관(習慣)을 가진 사람이 승리(勝利)자(者)가 되는 것은 기도를 하면 할수록 더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 가운데 찾아와 주셔서 가까이 하는 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인생이 되기 때문이다. 시편에 말씀에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내게 복이라.’ 라는 말씀이 있다. 하나님께서 더 가까이 우리 가운데 찾아와주셔서 우리의 기도를 영점 조정해 주신다고 하신다. 지금은 과녁(貫革)이 빗나가 있었던 그 기도를 영점(零點) 조정해 주신다. 우리 군대 가면 총을 쏘는데 처음에는 전혀 다른 과녁으로 오밀조밀 모여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뒤에서 조금 씩 조금씩 이렇게 영점 조절을 해주신다. 따라서 다니엘의 기도는 실패한 기도가 아니다. 그 기도를 하나님이 만지시고 새로운 기도제목을 그에게 던져주시고 영점조정의 시간을 지나가게 하신 것이다. 기도하는 하는 중에 새로운 기도가 떠오르게 하시고 전혀 다른 방법을 생각나게 하셨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의 신적개입을 가능케 하는 열쇠가 될 줄 믿는다. 그렇게 다니엘은 기도의 자리를 찾아갔다. ‘하나님의 이끄심’이라는 확신이 들 때까지 기도했다. 바벨론의 왕이 왕의 음식과 포도주를 줄 때에 그래서 다니엘 자기 안에 영적 싸움이 일어날 때, 모든 만물과 인생에 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 이끄심이 발견 될 때까지 그 때까지 다니엘은 기도했음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은 기억하시길 바란다. 끝까지 기도하는 자가 인생의 승리(勝利)자(者)가 되는 것이다.
 
두 번째, 기도의 좋은 습관은 –말씀 습관을 가지라.

-다니엘이 이렇게 끝까지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뜻이 그의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분명히 하나님이 무엇을 좋아하시고 무엇을 싫어하시는지를 분명히 알았다. 그래서 다니엘 1장 8절 서두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다니엘 1:8,
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 장에게 구하니.
-다시 자기 계획을 정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중심된 삶, 하나님의 말씀을 가이드 받는 삶으로 내 삶을 정했다는 것이며 그렇게 뜻을 정했다라고 결단한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가? 그는 유대인으로서 어릴 적부터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을 함께 읽고 듣는 것에 습관이 되어 있었다. 말씀 습관이 다니엘 안에 있었던 것이다.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무엇을 좋아하는 것인지, 무엇을 싫어하는 것인지를 분명히 다니엘은 알고 있었다.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어떠한 말씀을 하시는지를 분명히 알았던 것이다. 우리도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분명히 우리는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를 해야 할 것인데, 성경은 항상 정확(正確) 무(無)오(誤)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가운데 가르쳐 주신다. 문제는 진리를 싫어하는 우리가 외면(外面)할 뿐이다. 어떻게든 말씀 가운데 틈을 찾아서 ‘이렇게 하면 되겠지, 저렇게 하면 되겠지’ 하면서 말씀 가운데 틈이 있으면 그 틈을 파고들어서 하고 싶은 것을 하려고 하는 게 우리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우리 함께 말씀을 보자. 시편 119편이다.
 
*시편 119:105,
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말씀은 우리 기도의 목적지를 알려주신다. 마치 망망대해에서 빛을 비추어주는 등대(燈臺)처럼 주의 말씀은 우리 인생의 기준(基準)이 되고 지침서(指針書)가 되고 가이드가 되는 것이다. 등대가 되는 것이다. 만약 이 등대와 같은 말씀이 없다면 우리 기도는 너무 쉬이 무너져버리거나 좌우로 흔들릴 것이다. 앞이 막혀서 기도를 멈추고 주저앉아 버릴 때가 있을 것이고 또는 반대로 이 말씀이 없다면 진리의 말씀이 없다면 우리 눈으로 볼 때 일이 잘 풀릴 때 그때도 기도를 멈추어 버릴 때도 아마 있을 것이다. 말씀 없이 기도를 한다면 과연 우리의 기도가 어떻게 되겠는가? 망망대해에서 키 없이 떠다니는 배처럼 목적이 없을 것이다. 그냥 이리저리 흔들리고 마는 그런 기도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이스라엘의 출애굽 여정을 우리기도 생활의 빗대어 보면 출애굽 여정이 그렇다. 광야길 가운데 멈추어 서면 안 되는 길이 출애굽여정이었다. 언약의 땅이 가나안 땅, 이 목적지를 하나님께서 말씀을 해 주셨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해 주셨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는 분명한 말씀이 있었다. 목적지가 있었고 지침이 있었다. 가이드가 있었다. 그 중간에 멈추어 버리면 안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물이 없는 마라, 그런 땅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행군을 멈추어버리면 안 되는 것이다. 반대로 엘림, 물이 풍성해서 ‘아 여기가 하나님의 뜻이구나, 이만하면 됐지’ 하는 마음을 여정을 멈추어버려서도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목적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말씀이 없다면, 정확 무오한 진리의 말씀이 없다면 하나님의 뜻을 잘못 오해해서 내가 눈에 좋아 보이는 대로 때로는 멈추어버리고 때로는 가버리고 그렇게 할 때가 우리는 너무나 많다. 마라이든 엘림이든 주님의 말씀이 그곳이 목적지가 아니라고 하신다면 텐트를 걷고 두 다리로 일어서서 다시 행군을 해야 될 줄 믿는다.
 
다니엘은 기도의 습관과 함께 말씀의 습관이 있었다. 정확한 가이드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해에 여러 가지 다짐을 할 텐데, 말씀 습관도 다짐하며 결단하기를 소망한다. 내년 한 해 여러 가지 것들이 새롭게 시작이 될 때, 이 다락방도 그렇고 공동체 성경읽기도 그렇고 말씀을 늘 가까이 하면서 내게 주시는 오늘의 말씀이 무엇인가? 내게 주시는 오늘의 목적지는 무엇인가?를 늘 묵상하시고 하나님께 묻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럴 때에 다니엘이 삶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삶에도 친히 개입하시고 친히 역사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발견케 될 줄을 믿는다. 자 그럼 이런 기도의 습관과 말씀의 습관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을 어떻게 빚어 가시는가?
 
첫 번째는 구하지 않았던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우리 영혼구원이라는 표현을 좀 과장되게 표현을 하면 오늘 이야기를 보면 다니엘의 기도가 징검다리가 되어서 이방 민족 중에 한 영혼이 하나님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알게 되는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났다. 예상 밖의 열매가 맺어졌다. 다니엘의 기도의 초점은 세계를 품고 기도하는 것도 아니고 이방민족을 위해서 기도한 것도 아니고 이웃과 가족을 위한 기도도 아니었다. 그냥 단지 개인의 기도, ‘음식을 먹지 않게 해주시고, 포도주를 마시지 않게 해주세요.’라는 개인적인 기도제목이었는데 그런데 그 기도를 멈추지 않고 하나님께 계속 올리다보니까 하나님은 그 기도를 사용하셔서 다니엘의 개인의 승리를 넘어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한 영혼이 하나님께 이르도록 만드셨다. 최소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궁금해 하도록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이다. 누구인가? 그들이 먹는 음식을 먹는 것을 감독하는 감독관이다. 저는 마치 이게 그 구약 버전으로 요한복음에 나오는 가나의 혼인잔치, 물 떠온 하인의 구약버전인 것 같다. 그는 왕의 진미를 먹는 사람보다 채소를 먹고 기도하는 사람이 얼굴이 더 윤택해지는 것을 친히 눈으로 본 사람이다. 사실 ‘윤택(潤澤)하다.’ 하는 표현을 그렇게 멋진 표현은 원어 적으로 아니다. 좀 더 살쪄가는 것이다. 점점 살이 찌다. 는 것이다. 살이 오르는 것이다. 아주 맛있게 시즈닝이 된 그 고기를 먹는 것보다 포도주를 마시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 채소와 기도를 하는 것이 더 윤택하게 되고 더 얼굴이 좋아보이게 된 것이다. 우리 2023년이 되면 영원한 우리의 숙원이 있지 않은가? 다이어트, 다이어트가 있는데, 채소를 먹더라도 기도를 하면 윤택해질 수 있다. 채소를 먹고 기도하면 더 살이 오를 수도 있다. 어쨌든 말이 안 되는 사건이 이 인생 가운데 찾아왔고 이 인생은 이제부터 아마 고민하기 시작할 것이다. 저건 뭐지? 하면서 생각이 많아 질 것이다. 하나님은 다니엘의 기도를 이와 같이 사용하셨다.
 
우리 올해 안에 여러분들 가운데서도 이러한 하나님의 놀랍고 신비한 역사하심이 가득하기를 축원한다. 내가 기도한 것도 아닌데, 나의 기도를 사용하셔서 내가 끝까지 기도했더니 그 기도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전혀 다른 열매들을 우리의 삶 가운데 열매 맺게 하신다. 크고 놀라운 일이다. 하나님의 큰 일이 내 삶 가운데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일들을 바라볼 때, 우리 가운데 자주 찾아오는 고난을 다시 한 번 해석할 필요가 있다. 고난이 찾아올 때마다 하나님께 어찌하여 이런 고난을 저에게 허락하시는지요? 라고 불평어린 질문을 던질 것이 아니라, 이 고난을 통해 어떠한 제가 예상하지 못하는 또 다른 열매를 하나님이 맺어 주시려는가? 또 다른 한 영혼이 구원을 받을 것인가? 라고 하는 기대감이 있는 그런 질문으로 바꾸어서 이 고난을 대할 필요가 있다. 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는 하나님은 다니엘과 함께 어떻게 그의 인생을 어떻게 빚어 가시는가?
-구하지 않았던 한 영혼을 구원해 내실 뿐만이 아니라, 그 시대를 바꿀 바로 그 한 사람으로 다니엘을 빚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시대와 그 지역에 대체 불가능한 사람으로 빚어 가신다. 더 큰 사명의 자리로 부르시는 것이다. 제가 오늘 말씀을 보면서 한 가지 질문이 들었다. 질문이기도 하고, 불평이기도 하다. ‘몸을 위해서만 이렇게 기도해도 될까?’ ‘먹고 마시는 것만 위해서 이렇게 기도해도 될까?’ 하는 생각을 했다. 조금 있으면 이방 민족에 다신을 섬기는 그런 지식과 철학들을 바벨론이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에게 가르쳐 줄 텐데, 세상의 학문이 들어올 텐데 그거는 내팽개쳐놓고 몸만 위해서 이렇게 기도하면 될까? 라고 하는 불평어린 질문이다. 사실 우리의 자녀들의 문제가 그렇지 않은가? 교회는 다니지만 세상이 비 성경적인 지식들을 더 많이 대하는 우리 자녀들, 그런 철학들을 대하고 은연중에 무신론 자 들로 변하는 우리 자녀들, 대학교가 제일 무서운 종교라고 하는데, 대학교가면 교회를 떠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등지고 한 방 인생을 꿈꾸는 우리의 자녀들, 다니엘은 몸을 더럽히고 싶지 않고 싶다는 기도를 드렸는데 마음과 생각을 키우는 세상 학문을 두고 그런 기도제목은 오늘 말씀 가운데 있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 하나님의 율법을 귀하게 여긴 다니엘을 하나님이 지키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과 말씀을 지킨 다니엘은 하나님이 지키신다. 오늘 마지막 절이다. 1장 17절을 보면,
 
*다니엘 1:17,
17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으니 다니엘은 또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더라.
-바벨론이 학문과 언어를 다니엘에게 가르쳤지만 좋은 음식과 포도주를 줄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참 지혜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다니엘에게는 바벨론의 철학과 학문을 꿰뚫어볼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가 있었다. 이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지혜이다. 하나님이 언약의 말씀에 쓰여 있다.
 
*신명기 28:1,
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원한다. 내가 순종했던 그 말씀이 나를 지키는 것이다. 주일 성수가 나의 생각과 마음을 지킨다. 우리 자녀가 지킨 토비새가 과학문명의 첨단을 달리고 있는 세상을 말씀으로 이기게 만드는 줄 믿는다. 이후에 다니엘의 이야기를 보면 1장 마지막에 보면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세상 학문으로는 전혀 따라올 수 없는 지혜와 총명이 있었다고 이야기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 자를 하나님께서는 높이신다. 우리 요셉도 그런데 우리 사도행전을 함께 읽어보자.
 
*사도행전 7:9-10,
9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10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 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그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통치자로 세웠느니라.
-이런 은혜가 여러분들 자녀에게 임하기를 소원한다. 말씀을 맺겠다. 다니엘은 기도를 멈추지 않고 응답의 확신이 있을 때까지 이끄심의 확신이 있을 때까지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 기도는 말씀이라는 흔들리지 않는 반석에서 시작이 되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 사용하시고, 그 인생에 개입하시면서 마치 물 떠온 하인처럼 다니엘과 그 친구들의 음식을 감독하던 한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목도하게 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다니엘 본인도 더 높은 차원으로 신앙의 비상을 경험했다. 오늘 말씀과 같이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들의 가정에 풍성하기를 소망하며 또한 거룩한 기도의 습관과 말씀의 습관으로 한 해를 잘 마무리 하는 한 해의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런 주님이 제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요약
내 안에 풀리지 않거나 절망의 자리에서도 기도의 끈을 놓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확신하여서 하나님의 응답임을 받을 때까지 끝까지 기도해야 한다. 기도의 제목들을 두고 주님의 이끄심을 사모하여 말씀을 마음이 기준으로 삼고 믿음을 선포하며 기도의 지팡이를 들고 주께로 더 가까이 더 나아가고 기도를 하면 할수록 내 인생을 주님께서 개임하심을 확신하며 기도해야 한다.
 
-다니엘은 왕이 주는 진미와 포도주를 거절했다. 그 이유는 왕의 진미가 하나님 앞에 부정한 것으로, 정신과 육체의 건강에 이롭지 못한 음식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식물의 대부분은 의심할 나위없이 바벨론 신전의 우상들에게 바쳐졌던 제물이었다. 따라서 그것을 먹는 행위는 거짓 신의 성찬에 참여하는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채식과 물이었다. 채식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주신 식물이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체질과 필요를 잘 아시고 아담에게 그의 식물을 지정하여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채식이었던 것이다. 채식은 정신력을 맑게 하고, 노화의 촉진을 막아주며, 성인병을 예방하고, 인내력을 갖게 하며 일생을 건강 상태로 살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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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주후 2021년 6월 9일)
제목: ''나의 백성아, 보아라 들어라''
말씀: 이사야 6:1~8
설교자: 박유관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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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6:1~8,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4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6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이 본문 이사야 6장은 위대한 왕의 부고(訃告)로 시작한다. 웃시야 왕은 남유다를 52년간이나 통치했다. 웃시야 왕이 통치할 때, 남 유다는 다윗과 솔모몬 이후에 최고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었다. 역대하 26장에 기록에 의하면 웃시야 왕은 도시마다 성벽을 건축하였고, 지방 국토를 요새화 했고, 또한 이 왕은 농사를 굉장히 좋아했기에 농업이 발달했다. 비록 작은 나라였지만 앗수르 제국의 팽창 정책에 맞장을 뜰만큼 강한 나라였다. 주변국 모두가 앗수르에 조공을 바칠 때에 웃시야 왕이 통치하는 남 유다만이 유일하게 조공을 바치지 않을 만큼 부국강병을 이루었던 그런 왕이었다. 경제, 국방, 문화, 모든 면에서 아주 탁월한 왕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이 문제였을까? 그는 결국 자만심에 빠진다. 제단의 분향하는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려고 했다. 왕이 막 제단에 불을 붙이는 순간 제사장 아사랴를 비롯한 용맹한 80명의 제사장들이 왕의 앞을 가로막는다. 하지만 웃시야는 모든 만류를 무시하고 제단에 손을 댔다. 그때 그의 이마에 갑자기 나병(癩病)이 생겼다. 그리고 왕위를 아들인 요람에게 물려주고 별궁에 머무르다 생을 마감한다. 다윗 왕과 솔로몬왕의 버금가는 권력을 가졌던 왕이 죽었다는 소식은 백성들에게 충격과 혼란 그 자체였다.
 
*역대하 26장 22절에 보면,
22 웃시야의 남은 시종 행적은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기록하였더라.
-이사야의 직업은 왕실 서기관이었다. 왕실 서기관이 하는 일은 왕의 치적과 업적과 말씀을 낱낱이 기록하는 것이다. 이사야는 왕의 치적(治績)을 기록하면서 그가 얼마나 대단하고 위대한 왕인지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대단하고 위대하다고 생각했던 왕이 죽은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의 마음처럼, 이사야의 마음에도 큰 좌절과 실망이 찾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성전에서 예배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갑자기 하나님께서 높이 들린 하나님의 보좌를 이사야에게 보여주신다. 그 순간 이사야는 세상 왕의 보좌보다 더 높은 보좌에 앉아계시는 하나님을 보았다. 이 세상의 보좌가 텅 비어있어서 좌절했던 이사야는 있다가 하나님의 보좌를 보며 이 세상을 진정으로 통치하시고 다스리시고 심판하시는 분이 누구인지 그리고 모든 영광의 주인이 진정으로 누구인지를 깨달았다. 다윗과 솔로몬의 필적할만한 대단한 왕 곁에 있는 사람은 자기의 세계관으로 살지 않고, 바로 그 위대한 산 사람의 세계관으로 살 가능성이 높다. 이사야도 마찬가지였다. 웃시야라는 대단한 왕의 치세와 위엄에 눌려 그는 웃시야 적 세계관에만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이사야가 성전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보고 그리고 인간왕의 더 높은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의 그분의 영광을 볼 때, 이사야의 웃시야 적 세계관이 완전히 깨져버렸다. 하나님은 그러한 그의 세계관을 깨뜨리면서 새로운 세계를 보여 주셨다. 그 세계를 보여주시는 순간 스랍들이 서로 창화하며 최고의 수준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를 듣는다. 이 스랍들은 두 개 날개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고, 두 개의 날개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고, 두 날개로 날며,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찬양한다. 이 사람들의 찬송을 듣기 전까지 이사야는 성전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스랍들의 찬양을 들으며 성전을 넘어 온 땅에, 온 세상에 가득한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까지 보게 된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과 그 임재는 어느 한 장소나 한 인물이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지금도 교회를 넘고, 이 나라를 넘고, 이 지구를 넘어, 온 우주에 가득하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은 미지의 세계에서 거시의 세계로 거시의 세계에서 초월의 세계까지 뻗어나간다. 이런 엄청난 하나님의 영광을 이사야가 본 것이다. 이사야 66장 전체에서 이보다하는 단어는 48번이나 사용된 만큼, 이사야 전체에서 반복되는 중요한 주제이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깨닫는가이다. 오래 전 신문에 실린 기사가 생각이 났다. 도둑들이 어느 집 별장을 털었다. 귀금속을 다 훔치고 나서 허름해 보이는 가방에 골프채가 들어있는 것을 보았다. 이것도 돈이 되겠다 싶어서 들고 나왔다. 그리고 그 골프채를 125만원 받고 팔았다. 어떤가? 괜찮게 팔았는지 판단해 보라. 그런데 그 골프채는 타이거우즈가 매이저 대회에서 연속으로 우승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만든 기념 골프채였다. 당장에 내다 팔아도 수억 원을 호가(呼價)하는 것이었다. 여러분, 이 기사의 제목이 뭔지 아는가? “안목(眼目) 없는 도둑”이다. 그 골프채 하나가 그들이 훔친 보석 전부보다 골프채의 값이 더 나가는 것이었는데 몰라본 것이다. 이사야서에 무엇을 보고 무엇을 깨닫는가의 이 질문은, 과연 볼 수 있는 영적 안목을 갖추고 있느냐하는 질문과 같은 맥락(脈絡)이다. 명품과 진품이 있어도 그 가치를 알 수 있는 안목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성경을 보는 안목이 없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있겠는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가 잘 아는 CS 루이스라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두 가지 독서법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첫 번째 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책을 이용하는 독서,
두 번째 는 저자의 목적을 받아들이는 독서이다. 라고 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이 두 번째 방법을 택해야 한다. 왜 그런가? 그것은 말씀의 인격성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말씀의 인격성이 요구하는 것은 저자의 목적을 받아들이기 위해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성경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말과 말하는 사람은 따로 뗄 수 없다. 그래서 말은 말하는 사람 자신이다. 따라서 말의 본질은 인격성에 있다. 아무리 화려한 말을 하고 설득력 있는 말을 하다라도 사기꾼이 말하면 아무도 듣지 않는다. 그러나 좀 말을 더듬고 어눌하게 해도 진실하게 하는 사람이 말한다면 사람들은 그 말을 귀담아 듣는다. 바로 이게 말의 인격성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관한 논문이나 보고서나 교과서가 아니다. 성경은 인격적으로 전달된 계시(啓示)이다. 성경이 말은 인격 대 인격으로 하는 말이다.
 
※유진 피터스는 ‘이 책을 먹으라.’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성경에 명사는 어원분석의 대상으로,
동사는 문법 분석의 대상으로,
형용사는 감탄의 대상으로,
부사는 토론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해서는 안 된다. 라고 말한다.
 
※어느 편집인의 말처럼 성경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이다. 성경을 책일 뿐 아니라 말이자, 인격이기에 연구대상에 그치지 않고,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대상이며, 쳐다보는 대상으로만 그쳐서는 안 되고, 주목하여 바라보고 더 나아가 꿰뚫어보는 대상이 되어야 한다.
 
※안소니 불룸이라는 ‘살아있는 기도’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겨우 몇 분 내어 드리면서, 그 시간에 그분이 임재해 주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하지만 우리의 문을 노크하는 하나님께 죄송하지만 바쁩니다. 나머지 23시간 30분은 어떤가? 심지어 전혀 반응이 없을 때도 있다. 우리의 마음과 양심과 삶의 문을 두드리시는 하나님의 노크소리를 아예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부재 대해 불평할 권리가 없다. 그분보다 우리가 더 부재하기 때문이다. 이미 오신 예수 그리스도,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하루 23시간 30분, 우리 영혼의 문을 쿵쿵 두드리고 계신다. 을지로와 세종로와 강남을 걷고 있는 그 시간, 직장에서 갑 질을 당하고 있는 그 시간, 암 말기라고 선고받은 그 시간, 나의 모든 시간에 하나님은 내 영혼의 문을 쿵쿵 두드리고 계신다. 그런데 왜 우리는 하나님께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것인가? 여러분은 지난 한달, 하나님께서 그 두드리는 소리를 몇 번이나 들었는가? 다시 한 번 유진 피터스의 말을 들어보자.

 
※유진 피터스
“이 책을 너의 내자 안으로 집어넣어라. 이 책에 나오는 말이 너의 혈관을 타고 움직이게 하라. 이 말을 씹고 삼켜서 근육과 연골과 뼈가 되게 하라.”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이 우리의 몸에 들어가고 사람의 인생으로 들어가길 원하신다. 이상하지 않는가? 처음에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말씀이 영혼으로 말씀이 들어가야 하는데 유진 피터스는 왜 몸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하는가? 돌아가신 외할머니는 결혼하시고 평생을 새벽 두시에 일어나셨다. 왜냐하면 용산시장과 가락동 시장에서 장사를 하셨기 때문이다. 가락동 시장이 있기 전에 용산의 그 시장이 있었다. 어릴 적, 제가 외갓집에 가면 외할머니와 외삼촌들이 이른 아침부터 일하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보았다. 그런데 장사를 그만두시고도 늘 새벽 두시에 일어나셨다. 왜 그러셨을까? 몸이 기억하는 것이다. ‘근육이 기억하는 딱 그만큼이 내 신앙이다.’라는 말이 있다. 무슨 뜻인가? 몸의 기억은 반념의 기억보다 앞서고 또 오래 간다. 그래서 몸의 훈련이 없는 훈련은 항상 부족한 채로 남을 수 있다. 그리고 훈련 자체를 허위로도 만들 수 있다. 여러분, 결심을 믿지 말라.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여러분의 눈물도 믿지 말라. 하루에도 수시로 변하는 내 감정을 신뢰할 수 없다. 대신 여러분의 몸을 믿어라. 결론은 내 몸이 말을 안 들어도 내 몸을 믿어라. 몸은 정직하다. 우리 몸은 많이 먹으면 살찐다. 힘들면 힘들다고 하고 아프면 아프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몸은 정직하다. 그리고 특별한 지시가 없으면 늘 기억하는 대로 움직인다. 성경을 읽고 암송하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이 몸이 기억하도록 훈련을 해야 하는데, 우리는 생각만큼 몸의 훈련을 하지 않는다. 몸의 훈련이 되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성경에 몰두하지 못한다. 왜 그런가? 이 질문에 답을 알기 위해서 생각해 보았다.

 
▷다섯 가지 없음(5無)에 대해서 정리를 해 보았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친밀한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지 않을까를 생각했다.
첫째, 무관심(無關心) - 성경과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이다. 영적인 일 자체에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더 나은 영적인 삶에 대해 호소한 일만큼 곤혹스러운 일이 없다. 영적 무관심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오직 현재만 있고 눈에 보이는 것만 있다.

둘째, 무지(無知) – 관심 없으면 보고 있지만 볼 수 없고, 듣고 있지만 들을 수 없다.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 이러한 태도가 성경과 하나님에 대한 무지를 낳는다. 지나온 시간에 대한 감사도 없고, 다가올 시간에 대한 소망도 없고, 현재를 보는 눈마저 어둡게 만든다.

셋째, 무책임(無責任) – 영적인 일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가 무책임한 태도를 낳는다. 이 무책임한 태도는 자기 선택의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 대신에 다른 사람과 상황에 그 책임을 돌린다. 이 시대에 이기적 개인주의는 책임을 지지 않는 인간형을 낳았다. 자신의 영혼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해서도 그는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

넷째, 무감각(無感覺) - 영적인 책임이 영적인 무감각을 낳는다. 영적 무감각에 빠지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면서 하나님을 안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한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지 않으면서 주의 길을 간다고 말한다. 영적으로 무감각하기 때문이다.

다섯 째, 무분별(無分別) - 무감감이 무분별을 낳는다. 맹목적인 신앙과 과도한 열심히 말씀이 그러한가 하는 진지한 영성을 잃어버렸다. 확증편향성으로 판단을 중지하고, 특정 이론에 빠져 분별력을 상실하는 것이다. 이런 분들과 대화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런 사람들은 정보의 바다에서 유영할 뿐, 진리의 항구에 이르지 못한다. 정보는 있지만 그 가치를 분별할 수 있는 말씀의 지혜가 없는 것이다. 무관심, 무지, 무책임, 무감각, 무분별, 말씀에 대한 이러한 태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고 꿰뚫어보고 체험하지 못하게 하는 우리 안에 있는 커다란 장애물이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몸이 기억하는 말씀 훈련이 되기 위해 우리 안에 있는 이러한 장애물들을 치워야 한다.

이러한 다섯 가지 없음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의 부재가 일어나지 않기를 하는 은혜가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하나님의 일을 경험한 사람들은 반드시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된다. 제가 살고 있는 동네에 방송국이 하나 있다. 지금은 코로나로 그 모습이 보이지 않지만, 늘 방송국 앞에 학생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호기심이 발동해서 학생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한 여학생이 물었다. “너 어디서 왔니? 저요? 부산에서 왔는데요?” 옆에 옆에서도 물었다. 대답에 제주도에서 왔다고 했다. 엄마 모르게 왔다고 했다. 그 연예인이 스치듯 지나가도 그들은 마치 예수님을 본 듯이 환해지고 이 세상에 들을 수 없는 그 함성과 그 외침과 그 간절한 부르짖음을 들을 수 있다.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을 만나도 이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데, 하나님을 경험하고 만난다면, 그이상의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여러분은 태어나서 언제 연예인을 처음 보았는가? 그리고 처음 본 연예인은 누구인가? 생각해 보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처음 본 것은 고3때 학원에서 황신혜를 처음 보았다. 그녀가 지나가는 것을 처음 보았는데 소리를 지르니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면서 가던 길을 다시 갔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알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가르켜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다. 이런 점에 공통점은 무엇인가? 바로 분명한 자기 인식이다. 하나님을 만나면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사야는 하나님을 보았을 때,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이사야 6장 5절을 보면,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난 후, 그 자신에게 일어난 자기 반응은 아주 격렬한 자기인식이다. 이 말은 나는 이제 파멸할 것이다. 이제 나는 끝장났다는 말이다. 스랍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케 하는데 자신은 부정한 입술을 가진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는 그런 존재라는 자기인식이 일어났다. 아마도 이사야는 자신을 볼 때, 꽤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던 것 같다. 원래 이사야는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 화를 선포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사야 5장 8, 11, 18, 20, 21절을 보면,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화 있을진저, 화 있을진저, 라고 심판을 전했다. 자신을 제외한 그 백성들이 화를 받을 것이라고 마치 경고하는 것 같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자신이 서보니 자신의 존재가 부패하고 더럽고 큰 죄인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선포했던 그 화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화를 당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과 만나는 참된 경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엄청난 질량과 높이와 깊이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하나님과 나 자신의 무한한 질적 차이를 볼 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배할 수밖에 없고, 예배할 수밖에 없고, 전율할 수밖에 없고, 자복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위대한 영광 앞에 내가 형편없고, 존립할 수 없는 초라한 자로 무한 서로 자신을 낮추고, 한없이 부풀려진 옛 자아, 거짓으로 만들어진 옛 자아가 해체되고 무너지는 경험이 절대자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난 사람의 자기인식이다. 구약 판 자기부인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자기부인, 자기인식을 할 수 있는가? 바로 성경을 통해서 가능하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하나님의 의해 내가 읽혀지는 것이다. 내가 성경을 읽기도 하지만, 성경이 나를 읽기도 한다는 것이다.
 
※성 어거스틴의 ‘고백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본적으로 사람은 두 가지 밖에 없다. 자아를 잊을 정도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님을 잊고 부인할 정도로 자아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성경으로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 자아의 현주소와 본적이 낱낱이 드러난다. 하나님의 의해 내가 읽혀지는 순간 나의 숨겨진 삶이 폭로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의 죄가 융단폭격(緞爆擊)을 당하게 된다. 그때 우리도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도다! 이런 자기 부인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사야가 그 경외감에 압도되어 있을 때, 이사야가 그 경외감 앞에서 자기 자신의 본적을 발견했을 때,

본문 6 저~7절에
6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 네 악이 제하여졌다는 것은 이사야가 거듭난 순간이고, 네 죄가 사하여졌다는 것은 이사야가 하나님과 화해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기까지 이사야가 하는 일은 오직 자기의 부족함에 대한 절망감뿐이었다. 이외에 그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의 죄를 사하시고 그와 화해하시는 데까지 이사야가 한 일은 하나님 앞에 나는 죄인이고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구나 라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것 밖에는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스랍을 통하여 그를 깨끗하게 정화시켜 주셨다.
*시편 51:1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은 상처가 있으면 안 된다. 어떤 제물이든 안전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께 바칠 수 있다. 조금의 흠이라도 있으면 하나님께 바칠 수 없다. 그러나 유일하게 상차가 있는 제물을 받으시는데, 그 제물은 상한 심령, 찢겨진 심령, 자신의 죄악을 고발하는 심령, 바로 그러한 심령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만들어주신다. 우리가 예배 가운데에 나올 때에 하나님의 말씀 속으로 들어갈 때에, 어떤 심령으로 나아가는가? 우리가 예배 가운데 나올 때에, 어떤 심령으로 나오는가? 오늘도 내일도,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모든 이들을 우리 하나님은 기쁘게 받으시고 그 영혼들을 새롭게, 새롭게 만들어 주실 줄 믿는다. 이렇게 이사야의 존재가 정화된 후, 이사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정화된 이사야는 즉각 응답을 한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나님을 본 자는 듣게 되고, 들은 자는 반드시 말하게 된다. 이사야도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받았고, 사도들도 그 사명을 받았다.

 
*사도행전 4:19-20절을 보면,
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그리스도인이란, 보고 들은 것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이란, 보고 들은 그것을 말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에게 듣고 말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사야 50:4-5,
4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5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여기서 학자라고 하는 단어는 제자라는 단어이며, 여기서 학자라고 번역된 단어는 학자와 제자는 동일한 단어이다. 그 제자들에게 아침마다 말씀으로 깨우치신다. 아침은 창조의 시간이고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이며, 이른 아침에 정적 속에서 찬송으로 새벽을 깨우고 성경 읽기와 묵상을 통해서 하나님 귀를 열어두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생활은 다를 수밖에 없다. 듣는 사람만이 제대로 이야기 할 수 있다. 하늘의 음성을 듣고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를 두려워하겠는가?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이 말씀이 참 따뜻하게 들린다. 그 아침에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주변이 온갖 소음으로 들끓어도, 자기 아기의 울음소리를 가려듣는 엄마처럼, 세상의 소음 속에서도 살면서도, 하늘의 소리를 가려들을 줄 아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다시 하나님의 질문에 귀를 기울여 본다. 너희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느냐? 매 아침마다 매 순간마다 우리의 들을 귀가 이미 되어서 주님의 음성을 놓치지 않는 자 되길 소원하며 축복한다.
 
♣요약
이 세상에는 볼 것도 들을 것도 많은 세상이며,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는 세상이기도 한데, 성경을 통해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 하나님을 집중하여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서, 주님의 기쁨을 누려야 한다. 그래서 주님의 영광을 체험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무관심, 무지, 무책임, 무감각, 무분별, 말씀에 대한 이러한 태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고 꿰뚫어보고 체험하지 못하게 하는 우리 안에 있는 커다란 장애물이니, 이러한 다섯 가지 없음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의 부재가 일어나지 않게 무장되어서 이사야처럼 즉각적으로 응답하여 훈련이 몸이 기억하도록 하는 것처럼, 올바른 태도로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라고 말하고 있다. 이사야는 주전 736년이나 혹은 735년경에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다. 이사야가 자신의 소명 시기를 밝힌 것은 그것이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님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한편 스랍이라는 말은 ‘불타는 자들이란 뜻이다. 또한 스랍은 하나님의 보좌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영물들이다. 이러한 행동은 이사야의 죄를 사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하나님 편에서 인간의 죄를 덮지 않는다면 죄를 소멸하려는 인간의 모든 노력이 소용없다는 것을 상징한다. 죄를 깨닫고 그 죄로부터 벗어난 사람만이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했다. 이 대답은 부르심을 받은 자의 모범적인 대답으로 간주되고 있다. 부르심을 사양했었던 모세나 예레미야와는 달리 이사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응답하는 신속성과 결단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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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주후 2020. 6. 24일)

제목:''아버지와 아들''
말씀:누가복음 15:11-20절
설교자: 이기원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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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러 이 세상에 오셨음을 증거 하는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잃은 아들에 관한 비유이다. 우리는 여기서 방탕한 아들에 대한 비유를 보게 된다. 그것은 앞의 비유들과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비유의 상황은 앞의 비유 보다 훨씬 더 크고 풍성하게 복음의 은혜의 부요함을 설명하며, 따라서 이 비유는 세상이 존재하는 동안은 불쌍한 죄인들에게 말할 수 없이 유용한 것이 될 것이다.


본문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세 가지 비유는 '복음중의 복음이다.
이 세 가지 비유는 당시 유대사회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예수님을 향한 원망에 대한 대답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예수께서 모든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의 말씀을 들으러 그에게 나아옴을 용납할 뿐 아니라, 심지어 이 사람(예수)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까지 함께 먹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누가복음 15장 11절에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라고 하였다. 여기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그리고 '두 아들'은 크게 나누면 '유대인과 이방인', 혹은 '바리새인? 사두개인과 죄인들'을 의미하고 있다. 오늘 우리는 두 아들의 비유 중에 '그 둘째'(아들)에 대한 주님의 비유를 생각해 본다.


Ⅰ. 그 둘째는 자율 방종하는 탕자였다.


1) 그 둘째는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을 달라고 아버지에게 요구하였다. 12절에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라고 요청하였다. 여기 '내게 주소서'라는 말 은 청원이 아니고 일종의 명령적 어투의 강요를 의미한다. 그는 구약 신명기 21장 17절에서 명한 자기의 분깃을 요구한 것이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 아버지의 재산 중 2/3는 장자의 몫이고, 1/3은 차자들의 몫이었다. 그는 아버지를 떠나 아버지가 없는 곳에서 마음껏 자유하고, 독립하고, 자주하며 살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반역적 어투로 아버지께 감히 강요를 하였다. 누가복음 15장 12절 하반 절에 보면 이에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다」고 하였다. 둘째 아들의 몫을 떼면 나머지는 자연히 맏아들의 것이었다.


2) 그 둘째는 먼 나라로 떠났다고 하였다.
눅 15: 13절에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고 했다. '재산을 다 모았다'고 했다. 여기 '다'는 '무엇이든지'를 의미하며, 하나도 남겨두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렇게 한 이유는 그가 다시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올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먼 나라(distant country)! 그곳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상거가 먼 곳을 의미한다. 그러나 영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하나님을 등진 죄인들의 거처는 언제 어디서나 먼 나라이다. 영적으로 애굽이라고도 하고, 소돔이라고도 하고, 바벨이라고도 하는 이 세상은 실로 하나님 편에서 먼 나라들이다.
하나님의 집 교회가 바로 자기 옆에 있지만 사탄의 지배에서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하나님 떠난 인생(죄인)들은 실로 멀고도 먼 나라입니다. 암흑의 권세가 주장하는 이 세상 나라입니다.


3) 그 둘째는 허랑방탕했다.
눅 15: 13절 하반절에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라고 했다.
여기 '허랑방탕'은 어떤 기준의 한계를 넘어서 버린 낭비생활을 뜻한다. 나중에 집에 있던 큰아들은 그 둘째의 허랑방탕을 설명하기를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눅 15:30)이라고 그 동생의 죄를 지적했다. 이는 하나님 떠난 인생의 영적, 육적 타락의 생활을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고유한 지위와 신분과 달란트들을 모조리 사탄에게 빼앗겨버린 상태를 말한다. 그야말로 그 둘째는 '탕자'하였다.


4) 그 둘째는 기생(寄生)하는 종이 되고 말았다.
누가복음 15장 14절에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라고 했다.
다 없이한 후」라고 하였다.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설상가상의 비운을 맞게 되었다. 결국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고 하고 있다. 이 말은 '더 가난하고, 더 어렵게 되어 버렸다'는 뜻이다. 그는 할 수 없이 남에게 붙어살아야만 하는 기생(寄生)하는 인생의 걸음을 걷게 되었다. 누가복음 15장 15절에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아무도 오라고 청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찾아갔다는 말이다. 사람의 어떤 필요에 따라 간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가고 말았다. '붙어산다'는 말은 주인에게 있어서는 귀찮기 짝이 없는 존재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기생하는 인생이 되고 만 것이다. 그는 더 나아가 돼지에게 붙어사는 존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누가복음 15장 15절 하반 절부터 16절에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고 말씀하고 있다. '쥐엄열매'는 돼지의 사료이다. 결코 사람의 식료품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주는 자가 없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실로 그 둘째는 육체의 마지막을 만나는 저주의 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결코 인생은 떡으로만 살지 않는다.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복음)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임을 알아야 한다. 그 둘째! 그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절망과 싸움을 하는 탕자의 모습이다. 그 둘째! 그는 아버지(하나님)를 떠나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고', 결국 육체의 상징인 돼지인생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Ⅱ. 그 둘째에게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7절에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말씀을 보면 '이에 스스로 돌이키다'라는 말은 '자기 자신에 와서 보니'라는 뜻이다. 그는 자신에게 '내 아버지'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18절에 보면 '아버지'란 말이 세 번이나 반복된다. 20절에는 '아버지'란 말이 두 번 나온다.


1) 「내 아버지」라고 했다.
누가복음 15장 17절 상반 절에 “내 아버지에게는”이라고 하며, 결정적인 부자관계(父子關係)를 뜻한다.


2) 양식이 풍족한 품꾼을 많이 거느리고 있는 아버지라고 하고 있다.
누가복음 17장 17절 하반 절에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 고로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라고 하였다.


3) 그 아버지는 탕자의 소망이다.
누가복음 15장 18-20절에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라고 하였다. 그 아버지는 그 둘째, 곧 탕자의 소망이었다. 그 아버지는 부요한 아버지였다. 그 아버지는 탕자가 다시 재기할 수 있는 살아 있는 힘이었다. 그 아버지는 그 둘째 아들의 모든 재활의 힘이요 용기요 소망이었다. 그 아버지는 그 둘째의 과거요 현재요 미래였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실로 위대한 회개와 재기와 재생의 힘이 아버지였다.
4) 선수적(先手的) 사랑의 아버지였다.
누가복음 15장 20절에 선수적(先手的) 아버지의 사랑을 본다.
① 아직도 상거가 먼 데 아버지가 저를 먼저 보고 마중을 나갔다. 이것은 그가 자신을 떠나 버린 '그 둘째를 잊지 않고 늘 고대하며 기다린 사랑의 표'이다.


② 측은히 여겼다. 이는 그 둘째를 향한 아버지의 긍휼과 자비를 보여 준다. 아버지의 눈에는 자식의 죄와 죄로 인해 입은 상처는 보이지 않고 오직 '그 둘째만', 자식만 보인 결과이다.


③ 달려갔다. 바로 사랑은 여기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 보내신 것이다.


④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고 했다. 이것은 그 둘째를 향한 아버지의 견딜 수 없는 사랑의 폭발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 둘째를 향한 아버지의 선수적 사랑(initiative love)이다.
저 애굽의 총리였던 요셉과 그 아버지 야곱이 30년 세월 후에 만났을 때, 그 부자(父子)도 이렇게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


5) 온전한 회복의 아버지였다.
돌아와도 겸손하게 성령 충만으로 돌아가야 한다. 큰아들은 욕심을 내지만 나중에 받을 상급보다는 지금 현재 누리지 못하는 것에 불만하고 있다. 예수님께 찾아온 서기관과 바리새인 모습이다. 아버지는 문밖에 큰 아들을 향해 위로한다. 우리는 교회 안에 있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폼페이의 웅장함이 지진으로 어마어마한 폼페이가 묻힌다. 폼페이를 후에 발굴하고 보니 발굴자를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보초병이었다. 무기를 손에 들고 있다. 그림의 설명을 보라. “하늘에서 화산대와 불이 눈송이처럼 품페이 성 안에 쏟아져 내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살기 위해 성문 밖으로 밀려 나가기에 온통 아수라장이 돼 있는 장면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 성문을 지키는 군인 한 사람이 성문 곁에 서서 전혀 동요 없이 보초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보초 임무를 완수하면서 죽음을 맞이했다. 제목이 '충성'이다. 우리는 한심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는 그 자리에 있어서는 내가 감당할 자리를 지키는 것처럼 그 충성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내 것을 챙기지 않고 주님을 찾는 자가 되어라. 주님께로 돌아오는 은혜가 있기를 원한다.




♧ 요약
예수님이 탕자의 비유를 들려주신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중 작은 아들이 자신의 분깃을 받아 아버지를 떠나 허랑방탕하게 살며 재산을 낭비합니다. 쥐엄열매조차 먹지 못할 정도로 궁핍하게 되자 그는 아버지께 돌아와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안아주며 큰 잔치를 베풉니다. 예수께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러 이 세상에 오셨음을 증거 하는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잃은 아들에 관한 비유이다. 우리는 여기서 방탕한 아들에 대한 비유를 보게 된다. 그것은 앞의 비유들과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비유의 상황은 앞의 비유 보다 훨씬 더 크고 풍성하게 복음의 은혜의 부요함을 설명하며, 따라서 이 비유는 세상이 존재하는 동안은 불쌍한 죄인들에게 말할 수 없이 유용한 것이 될 것이다. 내 몫을 달라 하며 먼 타국으로 떠나려는 죽어 마땅한 패역한 아들의 모습이 나에게도 있음을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돌이켜 돌아올 수 있게 인도하심에 감사한다. 아버지 품 안에서 내 것을 찾기 위해 어쩌면 위장된 성실, 위장된 순종을 하고 있는 큰 아들의 모습이 나에게 있다면 이 또한 스스로 돌이켜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돌아올 때도 제대로 돌아와야 한다. 겸손하고 완벽하게 회개하여 주님 앞에 회복되어 온전한 자세로 충성 되이 바로 서야 한다.그 날에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이어받은 때까지 내 것을 챙기지 않고 우직하고 충성스런 사명을 다하게 되기를 소원한다. 내가 회개와 회복을 위해 속히 제자리로 돌아와 보초병처럼 충성하는 자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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