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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2023년 4월 26일)
제목: "복음은 기쁨입니다"
말씀: 로마서 1:14~17,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설교자: 남동우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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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14~17,
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ㅡㅡㅡㅡㅡㅡ
 
▶오늘 우리 사랑 형제자매들과 함께하기 때문에 조금 우리가 소란스럽기도 하지만 행복한 모습이에요. 언제나 우리 사랑도 예배는 이런 모습으로 진행이 되었다. 이번 주 배포되어진 장애인 주간 기념 특별 신문을 읽으셨으면 오늘 본문의 말씀 제목처럼 “복음이 기쁨입니다.”라고 하는 것을 누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받아보지 못하신 분계시면 나중에 예배를 마치고 가시다 보면 약 사이드에 이 신문이 있을테니 꼭 읽어보시면 정말 이곳에서 복음을 통해서 기쁨을 회복한 성도들을 만나게 되리라고 믿는다. 우리가 지금 3년 이상의 코로나 긴 터널을 지나고 있다. 그러다 보니까 우리 생각지 못하게 우리 마음속에 있던 기쁨은 다 사라지고 보이지 않게 서로 다투거나 힘든 일을 맞이하면 참지 못하고 사건 사고가 이곳저곳에서 많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조금 힘들면 참아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원래 하나님께서 세상과 사람을 만드실 때에 아담과 하게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이 세상을 창조해 주셨다. 창세기 1장 13절에 31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창세기 1:13,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힘이 좋았더라.”

-하나님이 이들을 위해서 준비해 주신 자연 만물만 봐도 기쁨이 넘치고 행복이 넘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 먹구름이 찾아온 것은 바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음을 통해서 우리 안에 죄가 들어오게 되어졌다는 것이다. 죄는 인간과 자기를 파괴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죄는 인간의 기쁨과 마음의 평화를 빼앗아갈 뿐 아니라 구원의 기쁨조차도 빼앗아갔다. 그래서 다윗은 10편에서 구원의 기쁨을 회복해달라 라고 기도하고 있다
 
*시편 51: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의 매개 회복시켜주시오”
-라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죄는 자유를 억압하고 죄는 서로를 이간질하고 결국 죄는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로마서 6:23,
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씀한다. 이 병에 걸리면 치료할 치료약이 없다. 이 병에 걸린 사람에게 찾아온 것은 어떤 사람도 예외가 없이 죽음에 이르게 되어 진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끝나면 우리에게는 절망이겠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 주셨다.

*창세기 3:15,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정말 인간이 들어야 될 참 복음인 것이다. 이 복음은 바로 우리에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이요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임 바 되어주고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어 주는 놀라운 은혜와 복을 누리게 되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신 귀한 복음의 메시지인 것이다. 오늘 봉독된 말씀
 
*로마서 1:16,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 에게로다.
-어떤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그 죄에서 용서 안 받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져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는 특권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다. 라고 말씀하신다.

*갈라디아서 4:6,
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느니라.’ 얼마나 감사합니까?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허를 주셨다. 이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우리의 선행이나 우리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성령 하나님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한 것이다.

*에베소서 2:8,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성령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시면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할 수 있는 놀라운 은혜를 누리게 되어지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2:3,
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성령이 아니고서는 어떤 사람도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 장애인 주일 기념 수요 찬양대에 처음오신 우리 장애인 성도 가족 여러분들 우리 가운데 아직도 이 놀라운 복음의 소식을 듣지 못하고 예수를 믿지 않는 분이 있다면 이 시간에 “예수님 믿고 싶습니다.” “성령님 도와주십시오.” 요청만 하면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게 하시고 그 예수님을 나의 구조로 영접하는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 시간 여러분들의 마음을 열고 그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면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게 되어지는 것이다. 사탄 마귀는 언제나 우리를 좌절케 한다. 우리의 평안을 빼앗아 가는지 모른다. 그리고 우리를 슬픔과 절망 우울의 모든 요소들이 가득하게 하고 우리의 매일의 삶이 아픔과 고통으로 만들어져 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신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은 어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는가? 범사에 감사하게 여겨지고 모든 일에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해 주신 말씀이다. 세상 적으로는 자랑할 것이 없고 아무것도 내어놓을 것이 없지만,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만 하면 이런 놀라운 기적의 역사를 베풀어주시는 것이다.

 
나중에 이부 순서에 우리 장애 선교부가 사역하는 영상을 보게 될 텐데 이 사랑부 형제자매들이 주일 예배를 사모하고 기대하는지 예배 가운데서 찬양하는 모습을 볼 때, 천사들이 찬양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느껴질 때가 많다. 주 안에 기쁨이 없다면 어떻게 이 형제자매들이 이렇게 손을 올리면서 찬양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기뻐할 수 있겠는가? 자신의 약점을 바라보면 어떻게 저런 모습이 나올 수 있겠는가? 그러기에 예수님을 믿으면 제일 먼저 찾아오는 것이 기쁨이다. 제가 웃으려고 많이 노력하는데 지금 많이 긴장이 돼가지고 제가 사랑부 형제자매들하고 설교할 때는 언제나 기뻐요. 영상을 보시면 되는데 어르신들과 함께 이렇게 예배하면 늘 긴장이 많이 되어진다. 사투리가 나올까 싶어가지고 세상이 주는 기쁨은 여러분 하루 이틀 지나면 유효 기간이 끝난다. 근데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은 유효 기간이 없다. 평생 그 기쁨 안에서 행복을 누릴 줄 믿는다. 제가 섬기고 있는 사랑이 복지관 지난 코로나 가운데서도 귀한 사익을 했다. 오래전에 담임 목사님께서 “이 사랑의 복지관 같은 기관이 북한에서도 세워져서 연약한 자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면 좋겠다.” 라고 말씀하셔서 저희들이 바자회를 해서 그동안 조금 많은 돈을 모아 놨다. 근데 통일이 빨리 되면 우리가 북한에 가서 우리가 복지관을 지을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시간이 지나면 사실 복지관 후원금은 3년 안에 사실 사용을 해야 된다. 이 돈을 어떻게 사용할까 저희들이 고민하고 여러분들 찾는 가운데 간에서 탈북해서 나마비로 내려와 가지고 행복한 삶을 원하던 분이 가정을 이루고 자녀가 태어났는데 자라면서 모르게 장애 아이가 되어졌다. 사실 북한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이 남한에 와서 환경에 적응하는 데도 굉장히 어렵고 힘든데 태어난 아이가 자기 아이가 되어주니까 이중고를 겪고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보냈겠는가? 마침 저희 복지관과 연결이 되어져서 이분 14가정들을 저희들이 섬기게 되었다.
이 장애 아동들이 필요한 치료비와 또 이 과정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었다. 그리고 나서 2년 이후에 작년 겨울에 저희들이 사역 보고를 했다. 그들이 사역하는 것 같이 이런 고백을 했다 가장 힘든 시기에, 가장 힘든 시간에 사라이 교회가 자신의 이웃이 되어줘서 함께 이 무거운 짐을 지어주심에 대한 따뜻한 사랑을 베풀어주심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이 그들의 고백 가운데 그들이 보고하는 가운데 나타난 것이다. 혼자서 힘들다. 라고 끙끙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가 와서 그 힘듦을 함께 주고 그들과 함께 웃어주고 그들과 함께 울어주는 귀한 분들이 있어서 이 코로나 가운데서 이 남한에 내려와서 장애 아이를 키우는 그 어음을 이겨낼 수 있었다라고 고백을 하였다.

 
마침 여러분들이 지난겨울의 추운 가운데서도 사랑의 쌀을 주셔서 또 사랑의 쌀과 함께 성탄절을 맞이해서 제가 이 가정들마다 방문해서 쌀과 케이크를 전하면서 필요한 가정에 기도해 주고 격려해 주었더니 그들이 얼마나 행복하고 기뻐했는지 모른다. 이런 놀라운 기적이 어디에서 일어났는가?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그 기쁨이 여기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고, 정말 이 강대상을 통해서 지역으로 올라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전파하게 되어 진 것이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웃음을 잃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다시 웃음을 되찾게 해주는 강력한 능력 있는 복음인 줄 믿는다. 우리가 천국 가서 이 기쁨을 누리겠지만 주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복음을 통해 잃어버린 기쁨을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면서도 이런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 아직도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이 기쁨 가운데 있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전하도록 기쁨의 통로로 우리를 사용해 주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란다. 혹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데도 불구하고 여러분들 마음에 여러분들 얼굴 표정에 저처럼 이렇게 굳어 있거나 얼굴이 밝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을 한번 체크해 봐야 된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죄로부터 용서함 받고 영원히 죽어야 되는데, 영원히 지옥 가서 그곳에서 형벌을 받아야 되는데, 예수님을 통해서 나와 상관없이 나의 능력과 지혜와 관계없이, 어떤 모습이든지 그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이면 누구든지 이 기쁨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도 기뻐하고 오늘도 이 자리 사모해서 이곳에 와서 예배하는 줄 믿는다. 여러분들 정말 예수 믿는 것이 즐겁고 행복한 줄 믿는다. 그러기에 우리가 이렇게 사모하지 않는가? 그래서 오늘 본문 17절에 원래 하나님의 의로우심 때문에 우리 모두는 다 심판을 받아야 되는데,

*로마서 1:17,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여러분들 예수님이 우리의 의가 되어져서 그분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우리는 의롭지 않은데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라고 인정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이 놀라운 복음이 오늘 우리에게 증거 되어졌고, 이 복음을 우리가 가지고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장애인주 기념해서 우리가 수요 찬양을 드리면서 물론 앞자리에 우리 소망부, 사랑부 형제자매들 가족들이 이렇게 다 앉아 있는 거 보고 있을 것이다. 이들의 얼굴만 봐도 예수 믿는지 안 믿는지 알 거야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입으로 시인하고 고백해야 정확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가? 이렇게 알지만 저는 우리 친구들이 우리 형제자매들이 얼굴만 보면 아 이 형제자매가 예수를 믿는구나!“ 알게 되는 거다. 놀라운 기적이다. 이런 경지까지 가기가 쉽지는 않다. 여러분 우리 친구들은 비록 말하지 못하고 표현하지 못해도 주일날 교회 오는 모습이 너무너무 행복하다 그 속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런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저는 형제자매들과 정말 복음 때문에 이들이 기뻐하고 매일 주일마다 춤을 춘다. 아까도 우리 쉐키나와 찬양할 때 춤을 춘 친구들이 나오고 싶은데, 혹시 여러분들이 당할까 싶어가지고 그 친구들은 자제하고 평소에 아주 온순하고 서 있는 친구들만 나왔다. 혹시 여러분 궁금하시면 주일날 한번 와보아라.
팔딱팔딱 뛰는데 저는 그걸 잘 못해요. 우리 친구들은 뒤에서 앞에서 찾아가면 손을 들고 찬양한다. 저는 사역 가운데 형제자매들과 이런 찬송을 부른다.

 
♬찬송가 565장 ‘예수께로 가면’ 예수께로 가면 나는 기뻐요 근심 걱정 없이 정말 즐거워 예수께로 가면 나는 기뻐요 나와 같은 아이 부르셨다. 예수께로 가면 맞아주시고 나를 사랑해서 용서하셔요. 예수께로 가면 손을 붙잡고 어디서나 나를 인도하셔요. 예수께로 가면 나는 기뻐요 나와 같은 아이 부르셨어요. ♪
 
-오늘 우리 모두는 어린아이 같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했다. 오늘 우리 모든 사랑부, 소망부 형제자매들 어린아이 같이 예수께로 가면 기쁘고 차장이 나오고 근심 걱정이 다 살아지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그곳에 복음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여러분 오늘 가사처럼 우리의 삶이 예수님께로 가기만 하면 예수님을 만나기만하면 주님이 주시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이 기쁨을 우리에게 주신 줄 믿으시기 바란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면 어떤 환경이 온다고 할지라도 어떤 상황이 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언제나 기쁨이 충만하다. 사실 우리 형제자매들 보면 장애라고 하는 이 높은 장벽이 있어 살아가는 데 얼마나 힘들겠는가? 그런데 이들 마음속에 복음 되신 예수님이 계시니까 그 장벽을 뛰어넘어서 매 주일마다 직장 가운데서, 사회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미하고 찬양할 수 있게 되어 주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14장 17절 말씀 우리 같이 한번 읽어봅시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병관과 희락이더라.” 하나님의 나라는 기쁨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즐거움이요 희락이라고 있다. 그래서 예수 믿는 것이 기쁘고 즐거운 것이다. 여러분들 매 주마다 여러분들 기쁨으로 교회 오시기를 바란다. 여러분, 혹시 기쁨이 없다고 할지라도 매 주마다 교회를 향해서 수요일 저녁마다, 여러분 교회에 나올 때마다 기쁨으로 나오면 그것은 또 기쁨이 생성되어지는 것이다. 혹시 아직도 여러분들 마음속에 기쁨이 없다면 이 시간이 기쁨 되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시기 바란다. 그래서 예수 믿는 것이 정말 기쁘고 행복한 삶이 되어주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한다. 오늘 주신 말씀 때문에 복음 때문에 일평생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으로 인해서 기쁨을 잃지 아니하고 항상 기쁨의 찬양을 드릴 수 있는 믿음의 형제자매들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한다.

♣요약
오늘 장애인 주간 기념 수요 찬양 입을 통해 주신 하나님 말씀처럼 우리 모두가 복음 안에서 예수님 안에서 참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고, 아직도 이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성령님 도와주셔서 꼭 예수님을 만나는 결신이 되기를 기도해야 한다.

-성도가 영적으로 빚진 것은 먼저 복음을 받은 것과, 아무 공로 없이 하나님께 의롭다 여김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것과, 다른 성도들의 사랑과 도움을 받은 것이다. 이신칭의(以信稱義), 이는 행위나 공로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죽지 않고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이다.


2부,
이제 잠시 우리 특별 순서를 좀 진행하려고 한다. 먼저 우리 장애인 선교부 영상을 좀 보도록 하겠다. 이곳은 사랑의 교회에서 가장 사랑이 넘치는 사라이 교회 장애인 선교부 예배 현장이다. 함께 은혜 현장으로 가보실까요. 장애인 선교부는 발달장애인과 함께 예배하는 사랑부 청각장애인 성도들이 예배하는 소망부가 매 주일 기쁨으로 예배하는 문제이다. 사랑부는 1부 8시 이후 10시 3 4부 12시에 예배를 드리고 소망부는 오후 2시 20분에 예배를 드리고 있다. 장애인 교성부 예배는 언제나 기쁨의 찬양으로 시작합니다. 성도들은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다윗처럼 자유하고 찬양하고 있다. 성도들의 찬양하는 모습을 보면 마치 천국 자치의 예고편을 보는 것 같다. 예배를 위해 성도들이 직접 대표 기도를 한다. 비록 언어 표현에 있어서 부족한 부분도 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한다. 장애인 선교부 목회자들은 성도들의 눈높이에 맞춰 매주 일 은혜로운 말씀을 준비한다. 성도들을 위한 다양한 그림 자료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 예배 중에 서로를 축복하며 기도 제목을 나누고 합심하여 기도한다. 이 시간을 통해 성도도 스스로 기도하는 훈련을 하고 있다. 장애인 성도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많이 응답해 주시리라 믿는다. 말씀의 능력을 장애인 전교구 성도들도 누리게 하고자 매주 성경 암송과 성경 쓰기를 진행하고 있다. 72구절 말씀을 좀 더 잘 암송하기 위해 손동작을 암송하고 글씨 쓰기가 힘든 성도를 위해 성경을 따라 쓰기로 진행한다. 예배를 마치고 선생님들과 함께하는 교과 공부 시간이 있다. 장애인 선교부는 공과를 G 러브 비전에 맞춰 예배, 훈련, 사랑 섬김, 복음 전도의 큰 주제로 자체 제작하고 있다. 같은 공문을 설교를 통해 먼저 듣고 교과 공부를 통해 반복 학습을 함으로 성도들이 말씀을 잘 기억하고 삶에 적용하도록 도와준다.

※간증시간.

▷먼저 부족한 종이 저희 막내아들 준우로 말미암아 이 시간 귀한 감정의 자리에 설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제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는 기술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아 질병 치료와 출산을 우석의 힘에 의존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집안 어른들 말씀으로는 저도 친가와 외가의 친척 중 세 분의 무속 인이 소위 영험한 국가 백일기도를 드려서 삼신할머니가 점지 하에 태어났으며 예수 믿으면 큰일 난다고 하셔서 저는 어릴 적부터 교회를 모르고 지내왔습니다. 저는 4남매 장남으로 장성하여 결혼 후 두 딸을 낳았으나 가문에 대가 끊긴다며 아들 낳기를 종용하는
친척 어른들의 성화에 못 이겨 그 당시 둘도 많다.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산화제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1995년 각고의 노력 끝에 아내는 둘째 딸과 일곱 살 차이 나는 막내아들 준호를 출산하였습니다. 지금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만 준호를 얻은 아내는 세상을 모두 가진 듯 뛸 듯이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태어난 지 두 달도 안 된 준호를 데리고 집안의 결혼식에 다녀온 뒤 준호는 밤새 고열로 울음을 그치지 않아 출생했던 병원에 갔더니 단순 감기라는 처방을 받았고 며칠이 지나도록 열이 떨어지지 않자 몇 가지 검사 끝에 세균성 뇌막염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의사는 완치를 장담하며 준호는 한 달 동안 병원에 입원하였는데 거의 매일 고열과 특수 검사의 고통 속에서 차도가 없어 다른 종합병원으로 병원으로 옮겨 다시 한 달간 입원 치료 끝에 퇴원을 하였으나 준호가 네 살이 되던 해 내막염 후유증으로 인해 심한 경기를 시작하면서 119 구급차와 병원 응급실을 단골처럼 찾게 되었으며 결국 발달장애 판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병원과 의사를 상대로 의료소송도 생각했습니다만 아픈 아이를 담보로 돈을 요구하는 것 같아서 소송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공무원으로 재직 중이었는데 제게 주어진 모든 휴가를 준호의 치료에 사용하면서 아내와 함께 명의로 소문난 병원 한의원 침술사 기 치료사 승마 수영 각종 운동시설 언어치료실 등 좋다는 곳을 백방으로 찾아 매달렸으나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아내와 제가 준호의 치료에만 매달리는 동안 준호가 태어날 무렵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둘째 딸은 세 살 위인 큰 딸이 돌봐야 했습니다. 둘 다 엄마 아빠의 손길이 한참 필요한 때였는데 정말 미안하고 가슴 아팠습니다. 그랬던 딸들이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로 잘 자라줘서 결혼 후 자식을 낳고 행복하게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준호의 교육과 장애 치료를 맡아줄 곳을 찾아보았습니다. 아내는 대학 다닐 때 믿었던 천주교를 멀리하고, 저의 부모님을 따라 불교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추운 끝에 준호와 같은 아이들을 돌보는 수녀원을 찾아가 아내는 천주교로 개종하고 세례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도 큰 도움이 되질 않자 또다시 영험하다는 사찰을 찾아가 일러준 비법대로 실행해보았으나 그것 또한 준호를 제대로 치료해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아내는 교회 복지관을 찾아가게 되었고 다시 종교를 바꿔 사랑의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아내가 종교를 자주 바꾸는 것이 교회의 제자 사회 훈련과 전도 폭발 과정에 매달려 밤늦도록 고생하는 모습이 싫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매달려야 하는 상황이라 그냥그냥 모른 척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준호가 열세 살 되던 해 저는 직장의 건강검진 과정에서 신장 암 판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준호의 치료도 막연하던 차에 저마저 암 선고를 받고 나니 제 인생이 모두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암 치료와 요양을 위해 직장에서 승진도 포기한 채 한직으로 물러나 소망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아이 셋을 돌보면서도 지극 정성으로 저를 간호해주던 아내의 모습에서 제가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았고 아내를 위해 무엇인가 해야겠다는 결심이 섰을 때 평소 가족들을 주일 예배에 데려다 주는 저에게 아내가 말했던 우리도 남들처럼 부부가 함께 손잡고 교회 다니는 게 소원이라는 말이 문득 생각났습니다. 그동안 부모님과 친척들의 반대로 교회 다니는 것을 생각조차 못했던 저는 죽음의 문턱에서 벗어나 주님이 인도하시는 사랑의 교회 본당에 첫 걸음을 옮기게 되었고, 2007년 새 생명 축제에서 주님이 주시는 사랑과 은혜에 북받쳐 오르는 회계와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준으로 인해 하늘의 원망이 대상이 되었습니다. 저의 무지와 방심과 교만으로 준호의 인생이 바뀐 것이라고는 생각하기가 싫었습니다. 그러나 준호는 이제 저의 인생에서 더 이상 애물단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만난 이듬해 저는 그동안 포기했던 서기관 승진과 짧은 기간 내에 부이사관으로 다시 승진하여 모 광역시 기관장을 역임한 후 명예롭게 공직을 퇴임하였으며 신장 암도 완치되어 지금은 전문 자격사로서 제2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아내와 저는 시기는 다르지만 교회 강대상에서 세례 감정을 하는 축복도 받았습니다. 모든 것이 준호를 통해 하나님이 주신 크나 큰 은혜였습니다. 저는 나이 예순을 넘겨 사랑의 교회 제자 사회 훈련을 신청하여 훈련 수료 후 지금은 사랑부 다락방 순장과 교구장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임 받고 있으며 아내와 함께 10년째 예배 안내 봉사를 감당하며 지역장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무익한 종을 불러주셔서 믿고 다듬어 사용하여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저에게 처음으로 하나님을 알게 해준 사랑의 교회는 가난 아기가 느끼는 어머님 품 같은 곳이었습니다. 다락방은 하나님을 몰랐던 저에게 말씀을 통해 세상 적 삶을 돌아보고 회개하며 은혜 받는 곳이었고, 특별히 사랑부 다락방은 남들에게 말하지 못하는 아픔을 서로 나누는 위로와 교제의 장이 되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다락방에 참여하기를 망설이는 부모님이 계신다면 이 다락방에 오셔서 환난을 산 소망으로 있게 하신 주님을 만나보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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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주후 2023년4월 19일)
제목: "의의 상속자가 됩시다"
말씀: 히브리서 11:7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부목사님)
사회: 문진호 부목사님

설교자: 양은규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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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7,
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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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사모하고 부흥보고 수요저녁기도회에 오신 모든 분들을 환영하고 축복한다. 오늘 본문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읽고 나누겠다. 히브리서 11:7절 말씀을 세 가지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 번째,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않은 일에 경고하심을 받았다.
-두 번째, 믿음으로 노아는 경외함으로 방주를 만들어 방주를 준비해서 그 집을 구원하였다.
-세 번째, 믿음으로 노아는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으로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설교를 끝냈으면 좋겠다. ㅋㅋㅎㅎ믿음의 결과의 의미가 각각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함께 살펴보고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I. 의의 상속자는 보이지 않는 일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입니다.

-7절에 보면,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았다. 라고 말씀한다. 노아는 하나님의 경고하심을 받았다. 보이지 않는 일에 대한 말씀,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았다. 그 메시지는 바로 창세기 6장 13절에 나온다.

*창세기 6:13,
13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하나님께서 죄가 관영(貫盈)한 이 세상과 사람들을 땅과 함께 멸(滅)하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17절에 가면 어떻게 멸할지 그 방법을 말씀한다.

*창세기 6:17,
17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그러면서 노아에게 한 가지 더 말씀하신다. “너는 방주를 만들라.” 왜 이것이 보이지 않는 일이라고 했는가? 왜 이것이 보이지 않는 일인가? 그것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 번도 본적도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미래에 있는 일이다. 장래에 있는 일이다. 불확실한 것이다. 여러분, 노아 시대에 물로 온 세상이 심판되어지는 것을 본적이 없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일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종말에 불로써 이 세상을 심판하시리라고 말씀하신다. 여러분, 이 세상이 불로 심판하는 것을 믿는가? 불로써 이 세상이 사라지는 것을 믿는가? 모르겠다. 이것이 보이지 않은 일이다. 미래의 일이다. 볼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이렇게 말한다. 노아는 믿음으로 아직 보이지 않은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들였다. 라며 accept!. 노아시대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었다. 노아시대에 보이지 않는 세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잠시 생각해보자. 노아시대 보이지 않는 것은 첫 번째는 사람들이 번성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번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들의 딸들을 보았는데 그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의 마음에 맞는 사람들을 마음대로 자기의 아내를 삼았다. 라고 성경은 이야기 하고 있다. 번성이 시작했고, 아름다운 것들이 보였고, 그것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취하는 세상이다. 그것이 바로 노아가 살았던 세상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자신의 존재와 신분을 잊어버리고 살았다. 그래서 사람의 딸들이 아름다움을 보며, 자기가 원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그 결과 하나님의 아들들과 딸들 사이에 ‘네피림’이라는 존재가 태어난다. 그들을 고대의 용사였고, 명성 있고 유명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제가 짧은 시간에 이 네피림의 이종교배 이런 거 설명을 안 하겠다. 나중에 기회 되면 하겠다. 문제가 뭐냐면 이 보이는 세상 자체가 상당히 확장되는 느낌이 든다. 사람들이 늘어나는데 그 늘어나는 것과 함께 용사가 되고, 유명하고, 대단하고 뭔가 사람들이 보기에 멋있는 존재들이 거기에 등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단한 발전을 이룬 것 같이 보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네피림을 갈망했는지 모르겠다.

여러분, 실력 있고 힘 있고 유명하고 명성 있고 그리고 키도 크고, 여러분들이 갈망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다시 이야기 하자면, 실력 있고 힘 있고 명성 있고 유명하고 그리고 키도 크고, 아마 여기 결혼하지 않은 자매들은 그런 남성이 있으면 내가 차지하고 싶다고 할 수 있다. 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갈망하면서 살았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7장 27절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누가복음 17:27,
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예수님이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시대는 외형적으로 확장되기도 했고, 거기에 영웅 같은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갈망하면서 자기들의 좋은 여자들을 아내로 삼고, 그리고 거기에 네피림이 멋있는 존재들이 등장하고 아마 이것이 반복되었던 것 같다. 여러분,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이거 왠지 여러분들이 다 이룬 것이 아닌가를 생각하지 않는가? 여러분 밥 먹었는가? 여러분 장가 안 가고, 시집 안 갔는가? 어쩌면 우리는 지금 이 노아시대에 추구했던 것들을 이미 웬만한 것들은 다 이루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잘 먹고, 잘 살고, 장가 잘 가고, 시집 잘 가고 이것은 제가 매일 받는 여러분들의 기도 제목이다. 우리가 품는 기도 제목과 너무나 비슷하다. 겉으로 보면 마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이루어진 것 같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 하라. 그것을 다스리고 그것을 정복하라.” 마치 하나님의 말씀이 노아시대에 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 것처럼 그렇게 보여 진다. 그러나 그것은 보이는 것이고,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것, 아직 보이지 않는 그 일을 생각하고 드러내고 있다. 창세기 3장 6절에 보면,

*창세기 3:6,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여러분, 사람이 자기 눈에 보기에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좋은 것을 취하는 것이 죄(罪)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들의 딸들의 그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의 마음대로 취하는 것이 죄(罪)의 관영(貫盈)이다. 그들은 굉장히 네피림과 같은 사람들이 나오면서 대단한 사회를 구성하는 것 같고 굉장히 확장되고 외형적으로 풍성한 사회 같지만,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고 그리고 더 좋은 것들을 취하며 사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바로 죄가 관영했다는 것이다. “내가 이 포악한 땅이 가득했기 때문에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고 주님은 말씀하시는 것이다. 노아시대나 오늘, 우리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 비슷하지 않은가? 마치 보이는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 마음대로 맞는 대로 취하는 것, 이것이 죄의 패턴이다. 믿음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 마음의 계획이 항상 강퍅하고 죄가 가득하게 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노아는 보이지 않는 분을 보았다. 노아는 보이지 않는 분의 경고를 들었다. 노아는 보이지 않는 분의 그 말씀을 들었다. 그리고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현재 일이 아니라 먼 훗날에 언젠가 있을지도 모르는 그날의 이야기, 그 경고를 노아는 믿고 그 일에 깨어있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오늘 살기도 팍팍하지 않는가? 우리는 좋은 것들이 눈에 많이 보이지만 그 좋은 것들을 취하는 방법은 너무 멀지 않은가? 여러분들은 앞으로 장래에 먼 훗날에 여러분들이 살기 위해서 여러분들은 무엇을 좋다고 보고 무엇을 준비하고 싶은가? 괜찮은 집이 한두 채 있고 그 다음에 그 다음에 내가 일하지 않아도 재산적인 자본이 좀 돌고 그런 것을 다 준비한 자들을 보면서 나는 언제 저것을 준비할 수 있을까? 하면서 마치 이 세상에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네피림들을 부러워했던 그들과 같이 우리는 그 삶을 동경하고 있지 않은가? 라는 것이다. 노아는 당시 사람들이 자기 눈에 아름다운 것들을 보는 것처럼 그 아름다운 것들을 보지 않았다. 노아는 당시 사람들처럼 자기가 원하는 대로 결정하며 취하지 않았다. 노아는 당시 사람들처럼 자기가 쌓고자 하는 대로 그렇게 다 쌓고 살지 않았다. 노아는 보이지 않는 것, 하나님이 아직 보여주시지 않은 그것을 심판의 메시지를 받고 그 말씀에 깨어있었다. 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깨어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II. 의의 상속자는 순종으로 하나님을 경외(敬畏)하는 사람입니다.
-11장 7절에 이렇게 말씀한다.

*히브리서 11:7,
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노아가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그 일에 경고를 받고 그리고 방주를 만들게 되었는데 그 일의 마음의 태도가 뭐냐면 경외함이다. 여러분 경외함이란 무엇인가? 무서워한다는 것이다. 그 말씀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경외함이란 것을 단순히 개념으로만 생각하면 참 어려운데 우리는 노아를 통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여러분, 노아가 방주가 만들었던 시간이 짧았는가? 아님 길었는가? 모른다. 정확하게 노아가 방주를 만든 시간을 말하고 있지 않다. 어떤 사람은 120년간 만들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100년간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런데 실재로 노아 방주의 크기를 이렇게 설계도가 나오기 때문에 그 설계도로 만든다면 이게 하루아침에 될 일이 절대 아니다. 이 방주는 아주 우습게 생겼다. 방주는 배가 아니다. 배라고 이해하면 안 된다. 배가 아니고 방주는 관장이다. 축구장만한 관장이다. 그래서 높이는 15미터, 길이는 120미처, 폭은 50-60미터이다. 굉장히 넓은 3층으로 이루어진 관장이다. 좀 더 쉽게 이야기 하면, 어린이 영어 성경을 보니까, 이 방주를 캔이라고 적혀있다. 따 먹는 캔인 듯하다. 캔은 위에서 구멍 한 곳 떼면 없는 것이다. 방주도 하나님께서 뚜껑 하나 딱 닫아버리면 아무것도 없는 키도, 돛도, 닻도 없는 것이다. 그 안에 들어간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이 아무도 없고 그 방주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손길만 의지해야 되는 것이 방주이다. 주님께서는 상자, 방주,, 상자를 좋아하신다. 모세도 갈대 상자에다 담아서 놓은 것이다. 모세는 자기가 어디로 가야지? 의지해서 그렇게 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 가운데 구원받은 것이다.

여러분,
이 노아가 이 방주를 만들 때, 이 관짱 같은 엄청나게 큰, 노아가 하루아침에 만든 것이 아니겠지만 얼마나 고생했을까를 여러분은 생각해 보았는가? 여러분이 제 손을 잡으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목사님은 고생을 하나도 안 한 손이에요. 손이 너무 부드러우신가요?” 한다. 그 다음부터는 제가 조심한다. 나는 고생도 안 하고 일도 안 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깐 잠깐 하게 된다. 여러분, 노아와 악수했을 때 노아의 손이 어떠했겠는가? 저는 이 방주의 크기를 짓는데 드는 그 코페아 나무를 베어오고, 옮겨오고, 가지치기를 하고, 그 다음에 배열하고 엮고, 그다음에 만들어 가는 과정 가운데 중간에 역청을 바르고 또 바르고, 또 발라서 그게 한 번 발라가지고 그 배가 물에 뜨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여러분 손톱에는 노아의 손톱을 생각하면 안 봐도 알겠다. 시커먼 아스팔트가 가득 끼어있고 손은 아마 웬만한 천하장사보다 더 두껍고 키는 어떠했겠는가? 키는 씨름 선수처럼 되어 있고 얼굴과 몸과 이 모든 것에 수많은 상처 투성이였을 거라고 상상해 보았다. 저는 노아 할아버지가 수염 하얗게 해가지고 선지자처럼 회“개하십시오 회개하십시오.” 이렇게 하는 목사님 같은 이미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노아의 모습은 아주 오랜 막노동으로 고생한 누가 봐도 그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그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성경은 그런 노아의 모습에 대해서 뭐라고 표현 하냐면 ‘경외함’이었다. 라고 표현하고 있다. 아마 사람들은 그랬을 것이다. “노아, 당신 왜 그렇게 살아?” 했을 것이다. “비는 와? 언제까지 그렇게 할 거야? 당신 몰골이나 봐, 당신이나 챙겨!”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노아는 철저하게 하나님이 자기에게 보이신 그 일을 위해서 자신의 전 시간과 몸과 마음을 거기에 쏟았다. 그게 경외함이다. 창세기 6장 22절과 7장 5절에 보면 동일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창세기 6:22,
22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창세기 7:5,
5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는 것을 다 준행하였다고 이야기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그 대가를 여러분 단순한 시간으로 계산해서 계산할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는데 여러분은 준행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은 하나님께 얼마만의 시간을 드리면 준행된다고 생각하는가? 제자훈련 받는 분들, 1년의 시간을 바쳤는가? 하나님이 사역하신 분들, 여러분 시간을 2년의 시간을 바치셨는가? 전폭하는 하는 분들 이제 2년 반 바치라고 이야기 하는가? 그러면 이제 2년, 2년 반, 4년, 아니면 끝나는가? 아니면 순장 되어서 한 5년 6년 하고 권사 되면 끝나는 것인가? 여러분, 경외라는 것은 어떠한 시간을 정해놓고 것이 아니다. 경외는 어떠한 장소에 가서 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 예배시간에 와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 시간에 와서 찬양하면서 집중하는 것은 누구나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우리 일상 가운데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신 그 일, 하나님께서 아직까지 완성되지 않는 그 일에 대해서 우리에게 당부하시고 말씀하시는 것들에 대해서 우리가 그것을 지속적인 과정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지속적인 과정일 뿐만 아니라, 어쩌면 영원한 과정일수도 있다. 어느 한 순간 하나님 앞에 눈물 뚝뚝 흘리며 회개하는 것도 하나님을 경외함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자신의 일정한 시간들을 하나님께 헌신하고 드리고 자신을 훈련하는 것도 하나님을 경외함이겠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을 우리의 삶 전체를 통해서 이루어 드리는 전 삶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게 쉽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쉽지가 않다. 만만한 것이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경외함이 필요하다. 여러분 경외함이란 것은 어쩌면 우리의 믿음을 지키는 능력이다. 우리가 경외함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의 믿음을 끝까지 지킬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이 시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저와 여러분에게 채워주시길 축복한다.

III. 의의 상속자는 은혜를 받고 은혜를 보는 사람입니다.
*히브리서 11:7,
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다. 여러분, ‘의의 상속자’는 이게 무슨 말인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지는 상속을 받는 사람.’, 이것이 이신칭의이다. 이신칭의 –‘내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진 삶의 결과’를 얻었다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는 대부분 ‘이신칭의’를 어디서 배우는가? 처음 예수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의롭게 되었다라고 배운다. 맞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이 구원의 사건을 알고, 그분을 우리의 주로 고백하고 영접하면 그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그러나 의의 상속자라는 것은 이 믿음을 가지고, 경외함을 일생을 살아냈을 때, 그것이 바로 의의 상속자라고 표현할 수 있다. 저는 제가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공부했던 것이 뭐냐면 왜 하나님은 노아를 선택하셨을까? 이다. 왜 하나님을 그를 선택하셨을까? 왜 하필이면 노아에게 말씀해 주셨을까? 왜 노아일까? 창세기 6장 8절에 이렇게 말씀한다.

*창세기 6:8,
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창세기 6:9,
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왜 하필이면 은혜를 입었을까? 6장 9절에 보면 노아의 사람됨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성경에 영어 성경에 이렇게 되어 있다.
But Noa, found grace in the eyes of the Lord. -제 발음이 너무 좋지 않은가? 영국식 발음이다. ‘노아는 주님의 눈 안에 있는 은혜를 발견했다.’ 는 것이다. 우리 성경은 수동태로 되어 있다. 은혜를 입었다고 표현되어 있다. 영어 성경은 오히려 은혜를 능동태로 은혜를 봤다. 로 표현하고 있다. 노아는 주의 눈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노아가 하나님이 눈을 보았다는 것이다. 눈을 보는 사이는 어떤 사이인가? 친한 사이이다. 여러분, 눈 보고 이야기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눈을 보고 이야기 하는 것은 내 속에 있는 진실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오늘 제 아들이 안 왔을 것이라 여기고 이번 주에 아들과 좀 언짢은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제 아들과 함께 대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아들이 벌써 나와 가지고 의자에 탁 앉아서 머리를 푹 숙인다. 나는 이 아들에게 잔소리를 하게 될 것이고 이 아이는 유튜브 음 소거를 하고 듣고 있다고 들어가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들, 아버지 눈 좀 볼래?’하려고 했다. 그 자리에서는 제가 아들을 책망하거나 타이르거나 또 아들에게 교훈하거나 가르치고 했던 자리가 분명하다. 왜? 여러분은 그렇게 안하시나요? 그런데 제 본심은 이 아이가 나의 책망과 나의 티칭과 나의 교훈과 나의 잔소리로 상처받거나 아파하니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저는 정말 이 아이가 배웠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자꾸 고개를 떨구는 것이다. 제가 느꼈다. 아들이 지금 나와 친하고 싶지 않구나, ‘내 눈 안에 있는 그 아들을 향한 이 마음을 이아이가 볼려고 하지 않구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제가 아들과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네가 정말 좋다.“ 라고 했더니 이때까지 가만히 있던 아들이 닭똥같은 눈문을 흘리면서 ”아빠 저 아빠가 생각하는 만큼 저 괜찮은 아들이 아니에요!“ 라고 말을 하는데 ”아니야 너 괜찮아!“ 라고 했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팩트인지는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눈을 보고 이야기 하는 것은 중요하다. 노아는 하나님의 눈 안에 있는 하나님의 그 은혜를 본 것이다. 세상을 멸하겠다는 그 순간에도 세상은 어떻게 보존되어야 되고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이 지켜져야 되는지 그 자비, 그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 눈 안에 있는 것을 노아가 발견했다. 그렇기 때문에 노아가 방주를 예비하는 일에 자신의 몸과 시간을 헌신했다고 생각한다.

베드로후서 2:5,
5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 여러분 노아가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는 그 세상에서도 그는 의를 전파했다고 말한다. 의를 전파했다. 하나님의 눈 안에 있는 그 의를 전파했다. 여러분들은 회개하가. 삶을 돌이키라. 여러분들의 삶을 발견하라. 방주 안에 들어와야 한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심판하실 거라고 말씀하셨다 여러분 들어와야 한다. 아마도 노아는 배를 만들며 이 의를 하나님의 이 구원을 선포하는 삶을 살았다고 믿고 싶다. 그것은 노아를 통해서 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신정이라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말세에 산다. 라고 말한다. 지금은 말세라고 생각하는가? 정말 말세인가? 믿는가? 정말 말세인가? 여러분 하나님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우리에게 보이셨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때가 차며 하나님은 반드시 이 세상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심판의 그 경고를 알고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눈 안에 있는 은혜를 먼저 발견하고 먼저 경험한 사람들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녹록치 않을 수 있다. 여러분들의 자녀가 애를 먹일 수가 있다. 여러분의 장래의 재산이 풍전등화 같을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의 삶이 내가 아등바등 하지 않으면 보장되지 않을 것 같은 우리의 삶이 찾아올 수 있다. 여러분 그것은 노아 시대 때 시집가고 장가가고 네피림의 시대 때 그들의 삶과 우리의 삶과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그러한 시대에 구원의 주, 구원의 방주, 구원의 주이신 그리스도를 발견하라고 하신다. 그리스도의 안에 있어라.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도록 초대해라,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 약속의 말씀을 잊지 말라. 너희 자녀와 가족들을 향해서도 잊지 말라. 그리고 우리가 먼저 그분 안에 있는 은혜를 발견하고 그분을 경외함으로 우리의 일생을 주님께 드려서 주님이 주시는 그 구원의 날에 이 방주 안에서 발견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노아가 참 크다고 느껴졌다. 나는 언제 노아처럼 산 적이 있는가? 나는 언제 노아 같은 인생을 살 것인가? 주님은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이 시대 노아 같기를 바라시고 계신지 모른다. 이 믿음과 구원과 이 의를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고 외치는 것을 부끄럽지 않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노아 닮았네” 라고 듣는 자가 되기를 소망한다.

요약
우리는 늘 보이는 것에 쫓아 사는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의 눈 안에 있는 은혜를 바라보기를 소원해야 한다. 멸망으로 달려가는 이웃과 가족과 주위의 사람들에게 우리 주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하나님의 그 은혜를 누리는 자 되어 이 시대의 노아로 부름 받고, 노아의 믿음을 가지고 부끄럽지 않는 의의 상속자로 삶을 살아야 한다.
-아벨은 정결한 마음으로 믿음의 예물을 드림으로 하나님께 의롭다고 칭찬을 받았다. 이렇게 참된 예배는 먼저 몸과 마음이 헌신되어야 한다. 또한 에녹은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는 은혜를 입었는데 그의 영적 성장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이루어졌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하여 가족을 구원하고 불신앙을 정죄하였으며, 의인이란 칭호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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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4월 12일)
제목: "쉼 없는 은혜"
말씀:이사야 62:6-7
찬양인도: 쉐키나(유재원 부목사님)


설교자: 김도훈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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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62:6-7,
6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주야로 계속 잠잠하지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7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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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전 721년 북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당했을 때 남 유다와 주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북 이스라엘이 벌을 받았다 생각을 했다. 그런데 130년 정도 지나서 남 유다까지 바벨론에 망하고 끌려갔을 때에 이제 모든 이방 사람들은 ‘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전체를 버리셨구나!’ 하고 비웃었다. 젖과 꿀이라고 알려졌던 가나안 땅은 이제 버려져서 그들의 죄악 때문에 선지자를 통해 예언된 대로 황무지와 같이 되었다. 그래도 오늘 본문 읽었듯이 6-7저을 보면,


*이사야 62:6-7,
6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주야로 계속 잠잠하지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7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
-너의 성벽 위해 파수꾼을 세우겠다와 예루살렘을 세워 찬송을 받겠다는 것을 보아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하시는 그 마음과 분위기 그 모두가 심판에서 회복, 저주에서 복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마음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증거가 오늘 본문 4절에 나온다. 우리가 4절을 함께 읽어보겠다.


*이사야 62:4,
4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택한 백성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잡혀가고 버림받은 자들이었다. 그 땅은 정말 황무지가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름을 바꾸셔서 그들의 이름을 햅시바로 그들의 땅을 쁄라라고 부르기로 하셨다. 여기서 햅시바는 신랑이 신부를 두고 하는 고백이다. ‘내 기쁨이 그녀 안에 있다.’는 뜻이다. 쁄라는 결혼한 자, 라는 결혼한 여자, 기혼자라는 뜻이다. 하님께서는 마치 호세아 선지자가 집나간 자기의 아내 고멜을 다시 데리고 와서 사는 것처럼 이 죄악 된 이스라엘을 다시 아내로 삼아서 버림받은 자를 기쁨으로 삼으시고, 황무지를 책임지고, 돌보시는 땅으로 만드시겠다고 선포하시는 것이다.


혹시 주위에 주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버림받은 황무지와 같은 인생을 살다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아 다시 기쁨이 되는 인생으로 바뀐 사례를 알고 계시는가? 저는 오래 살지 않아도 저를 포함해서 몇 몇 분이 떠오른다. 그 중에 한 명은, 어릴 적 주일학교를 다니던 친구가 있었는데 이 친구는 가장이 좀 불우했다. 이 친구는 고등학교 때에 곁길로 나가게 되고 스무 살이 되었을 때에는 자기 개인 소유로 가지고 있는 도박장을 차릴 정도로 아주 많이 곁길로 갔다. 이 친구는 고향을 떠나 한참 못 보다가 우연히 이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어디서 만나냐면 말씀 집회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 사이에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알고 보니까 돈과 사람 때문에 고생도 많이 하고 국가 기관에서 벌도 좀 받고 이제 다시 돌아와서 주님 앞에서 착실하게 살고 있더라는 것이다. 교회 열심히 다니면서 교회서 목사님이 말씀 집회에 한 번 참석하라고 하셔서 왔다고 했다. 너무나 감사했다. 정말 걱정을 많이 했고 어떻게 할 수가 없었는데 그 뒤에 한 번씩 문자를 받으면서 그 친구 문자 뒤에는 항상 성이 ‘이씨’였는데 이OO 집사 라고 이렇게 써 있었다. 다소 적응이 잘 안 되었지만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성경에서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택한 백성으로써 드라마틱한 삶을 경험한 사례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 오늘 본문 이사야 본문이 이전에 있었던 유명한 사례가 있는데, 버림받은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사사기 시대에 나오미와 룻이다. 나오미는 이방 땅에서 남편도 먼저 잃고, 아들 두 명도 먼저 보내고 다 망해서 고향 땅으로 돌아오게 된 비운의 여자이다. 그런데 세상 적으로 보나, 현실적으로 보나 옆에 있는 룻은 조금 더 망가진 인생이다. 무슨 망한 인생, 나오미의 버금 딸림으로 붙어있는 인생이다. 그 인생이 어디에 붙어있냐에 따라 많이 다를 수 있는데, 다 망한 인생 옆에 또 붙어있다. 고향이 아니라, 타향으로 오게 되었다. 남편이 죽었고 자녀가 없다. 예정이 없다. 유일하게 있는 분이 어머니이다. 앞에 ‘시’자가 붙어있는 시어머니가 계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 룻이 참 특별하다. 무슨 일인지 용하게도 시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고, 시어머니가 죽는 곳에 나도 죽겠다고 고백을 하며 이방 땅 베들레헴까지 쫓아온 것이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모압 땅에서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경험을 하게 하신 것 같은 은혜를 주셨다. 세상 적으로나 육적으로는 망한 것 같지만 실제로 영적으로 깨어있었다. 사실 이 정도 결단을 실천한다고 생각한다면 저는 룻이 베들레헴 들어오자마자 하나님께서 그냥 은혜를, ‘복을 가득 넘치게 주셨으면 좋았겠다.’하는 생각이 드는데, 하나님께서 베들레헴에 오자 갑자기 복을 주시지 않으셨다.


룻이 처음으로 들어와서 바로 이삭을 줍는 일이었다. 사실 이삭을 줍는 것은 자기의 기업이 없거나 또는 정말 소작도 할 수가 없어서 이삭을 주워야 하는 빈궁(貧窮)한 삶을 의미한다. 나오미와 룻은 정말 먹고 살기가 굉장히 힘들었던 것이 분명하다. 기도하며 살기를 쫓아서 떡집이라는 베들레헴 고향에 왔지만 먹고 살기란 막막한 것이다. 그때 룻이 내가 나가보겠다고 이삭을 주우러 나갔는데 사실 어디에 갈지, 누구를 따라가야 할지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고 할 수도 없고 그냥 그렇게 나온 것이다. 눈칫밥을 먹으면서 굉장히 생각만 해도 민망하다. 한 쪽에서는 추수를 한다고 계속 이렇게 이삭을 베는데 그걸 떨어지기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흘리기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떨어뜨리면 주우려고 기다리는 것이다. 얼마나 민망한 삶인가? 그런데 이런 룻의 모습을 보고 보아스가 이것을 보고 묘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룻기 2장 7절을 같이 읽어보자.


*룻기 2:7,
7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
-그냥 좀 따라다니게 해달라던 룻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억척스럽게 일을 하는 것 같다. 거의 쉬지도 않고 그리고 보리추수와 밀 추수를 마칠 때까지 아주 성실하게 쉼 없이 감당한다. 룻은 하나님을 신뢰하면서도 믿으면서도 그가 해야 될 것 같은 사소하지만 먹고 살아야 되니까 그 일을 충실히 성실히 하고 있다. 저는 룻을 보면서 저는 룻을 보면서 제가 어릴 때, 그 시절 어머니들, 집사님, 권사님들이 생각이 났다. 그 어려울 때, 자식들을 위해서 도시락을 열 개씩도 싸고 밖에서 일을 억척스럽게 일을 하시고 또 집안일을 하신다. 제가 아는 권사님은 젊을 때 손톱을 깎아보신 적이 없다고 하신다. 노동일을 하시는데 왜냐면 손톱이 다 달아서 깎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손톱 귀퉁이만 깎아내면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셨다. 그런데 이 분들이 그렇다고 해서 절망 가운데 슬프게 사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실히 교회를 섬길 수 있어서 행복해 하셨고, 늘 찬송하고 기도할 수 있어서 감사해 하셨던 모습이 기억이 난다. 이따금 정말 세상에서 억울하고 울고 싶을 때, 교회에서 참 신랑 되신 주님 앞에서 실컷 다시 힘을 내셨다. 이들로 말미암아 가정이 살아났고, 자녀들이 신실하게 커 가는 것을 보았고 그리고 교회가 은혜롭게 확장되는 것을 보았다. 억척스럽게 쉬지 않고 일을 하던 룻의 결말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스스로 나아가려는 그 성실, 그 쉼 없이 일하는 그 성실이 보아스에 성실을 불러왔다. 보아스와 룻이 하나가 되면서 복을 받게 되었다. 참으로 버려진 인생과 같은 룻이 나오미의 인생까지 한 가문의 기쁨이 아니라, 온 이스라엘 기쁨의 헵시바가 된다. 그 가문에서 다윗 왕이 나오고 예수 그리스도까지 그 혈육에서 나온다. 하나님께서 바로 그 은혜를 허락하셨다. 주인 없는 그 황무지와 같은 그 땅이 기업이 그 뿔라, 그 기업이 누군가 책임지는 땅이 되었다. 이 모든 복과 은혜를 누가 허락하셨는가? 우리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때마다 계획하시고 필요할 때마다 공급하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큰 은혜를 주실 때, 룻의 성실함을 사용하셨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에 있어서 우리의 어떤 성실함도 사양하지 아니하신다. 믿음도 하나님께서 주시오, 구원도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의 어떤 공로도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심에 쓰일 수가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뿐이다.


그런데 이 땅에서 주의 백성이 살아갈 때, 주님을 닮아가고자 할 때, 사명을 감당하고 할 때,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에 은혜와 복을 주시고자 할 때는 주님께서는 그 자녀의 성도의 그 제자의 성실함을 사용하신다고 한다. 쉼 없는 섬김과 사역을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결국 주님의 자녀의 성실함은 은혜와 복의 통로가 된다. 이것이 성실함의 첫 번째 국면이다.


I. 성실의 첫 번째 국면: 은혜와 복의 통로.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사야 본문을 통해서 또 다른 국면을 말씀하신다.
주님의 일꾼에 성실을 사용하신다고 하시는데 6절에 있다.
*이사야 62:6,
6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주야로 계속 잠잠하지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그 땅을 향하여서 너희는 헵시바, 그땅은 뿔라 라고 말씀하시고 모든 것을 책임지시고 기뻐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제는 예루살렘을 지키기 위해서 파수꾼을 그 성벽 위에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들에게 성실하게 그 일을 감당하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이 파수꾼들의 성실을 통하여서 무엇을 지키신다는 것인가? 예루살렘을 지키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실의 두 번째 국면이다.


II. 성실의 두 번째 국면: 하나님 나라를 보호.
-그렇다면 이 파수꾼이 누구인가? 이들은 왜 ‘여호와로 기억하시는 자.’라고 이야기를 하는가? 원래 파수꾼은 일차적으로 적의 동태를 살펴서 그것을 보고하는 것이 첫 번째 임무이다. 잘 전달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파수꾼의 역할이 독특하다. 밤에 소리를 잘 들으려면 조용히 해서 잘 들어야 한다. 오히려 이들은 잠잠하면 안 되는 것이다. 쉼 없이 무엇인가를 말을 해야 한다.


*이사야 62:6,
6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주야로 계속 잠잠하지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이 여호와로 ‘기억하게 하는 자’들이란 이 단어가 이사야서에 한 번 더 나오는데 무엇이냐면 ‘사관’이라고 나온다. 사관이 뭐하는 사람이냐면 지금의 역사를 기록하고 옛날의 역사와 지금의 역사를 왕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사관이다. 이 파수꾼이 정리를 해보면 예루살렘을 지키는 이 파수꾼들은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도록 쉬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 역사, 이루신 역사를 계속 말해야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파수꾼이 그냥 무기 들고 정찰병처럼 보통 병사들은 아닌 것은 아닌 것 같다. 예루살렘도 그냥 보이는 예루살렘에 국한 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만약 보이는 예루살렘 성, 그 성벽에 이러한 파수꾼이 서 있다고 한 번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파수꾼이 중얼중얼, 또는 큰 소리로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적의 침투를 막는데 효과적인가? 전혀 효과적이지 않는다. 당시 성벽 아래는 사람들이 많이 살았는데 아마 시끄러워서 못 살았을 것이다. 계속 와글와글 블라블라 했으면 힘들었을 것이다. 오히려 아브라함의 자손이 오늘 우리와 같은 영적 자손인 것처럼, 이 예루살렘 시온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 종말로 완전히 임하실 온전한 하나님 나라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이 하나님 나라를 지키는 파수꾼의 역할, 계속해서 말로해서 쉬지 않고 고백하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기억하시게 하는 이 역할을 하는 파수꾼, 현대적으로 본다면 누구인가?


종교개혁가 칼빈은 이들을 ‘목회자’ 라고 말씀한다. 바른 하나님의 말씀, 이전의 역사, 이전에 보여주신 약속 계명을 계속해서 선포하고 말씀하므로 하나님 나라를 잘 지킨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학자는 이 사람이 ‘기도하는 자’라고 생각했다. 끊임없이 예루살렘 성,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도고의 기도를 하고 이전에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놀라운 일을 기억하여서 끊임없이 기도를 올려드리는 중보기도 자들이라고 생각을 한 것이다. 둘 중에 뭐가 맞는가? 말씀을 맡은 목회자인가? 기도자인가? 사실 말씀이냐, 기도냐에 우리가 고민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기도가 따라가지 않을 수가 없다.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기도는 하나님의 바른 말씀에 근거하는 기도가 받으실 만한 기도이다. 말씀과 기도를 따로 떼어놓을 수가 없다. 오히려 우리는 이들을 끊임없이 예배하는 예배 자들이라고 지칭해도 될 것 같다. 주야로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고, 계속하여 예배하며 하나님 앞에 나가는 자, 이 세상에서 선포하고, 백성들 앞에서는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 계속 읍소(泣訴)하는 기억하시도록 읍소하는 이 예배 자들이다. 이 예배 자들이 누구인가? 바로 우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파수꾼으로 예배자로 세우셨다. 예루살렘 성, 하나님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그 영광이 온전해 질 때까지 하나님께서 그 일을 쉬지 말며 성실하게 감당하고 하신다.


예배 자의 성실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지키시기 위해서이다. 세상에는 쉬어서 좋지 않은 것이 있다. 우리 자녀에게 물으면 공부는 쉬어서 좋은 것이고, 게임은 쉬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할 것 같다. 그런데 정말 심령 가운데 영적으로 쉬어서 안 좋은 것은 걱정과 근심이 어떤가? 쉬는 것이 좋다. 반대로 소망과 감사는 쉬지 않는 것이 좋다. 질투와 비방은 제발 쉬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칭찬과 격려는 쉬지 않는 것이 좋다. 예배는 어떤가? 예배는 쉬는 것이 좋은가? 쉬지 않는 것이 좋은가? 그렇다. 쉬지 않는 것이 좋은 정도가 아니라, 쉬면 안 된다. 쉼 없는 예배, 성실한 예배 가운데 하나님이 나라가 보존되며 지켜지고 하나님 나라의 특징 때문에 자연스럽게 은밀한 중에 확장된다. 우리 모두가 주님께서 주신 각각의 사명이 있는데, 예배의 자리는 우리 모두가 받은 공동의 사명이다. 너무도 중요한 사명이다. 이 사명을 내가 감당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다른 사람이 대신한다. 하나님 나라의 교회는 주님 오실 때까지 결코 쓰러지거나 무너지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으로 채우신다. 오히려 모든 사명이 그러하지만 사명을 성실하게 감당하지 않을 때, 그 인생이 피폐(疲弊)해지는 것이다. 저의 경우 목회자로서 부끄럽지만 사명을 피할 때가 생각난다. 목회자로 부르시는 하나님께 반항하며 나대로 좀 잘 살아가려고 했던 그런 때가 있었다. 낮에는 직장 다니고 밤에는 고시공부를 하면서 인생 성공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는데 주께서는 계속 사명에 대한 말씀을 주셨다. 제가 피하고 있었고 그렇게 친밀한 교제가 멀어지니까 제 마음에 평강과 낙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때가 2002년도였는데 그때 우리 한국이 축구 때문에 들썩이지 않았는가? 난리가 났었다. 제가 축구를 참 좋아한다. 제가 거리 응원을 나간 적이 없다. TV로 축구를 볼 때가 있었는데, 볼을 넣으면 우리 한국이 꼴을 넣으면 꼴을 넣는가 보다. 한국이 이기면 한국이 이기면 좋겠다. 하면서 제 마음에 기쁨이 없는 것이다. 낙이 없는 것이다. 마치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의 낯을 피한 아담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고 제가 일하는 곳, 일을 위해 준비하는 그 시간들이 다 황무지처럼 느껴졌다. 살아계신 귀한 은혜로 말미암아 이후 사명을 감당하게 되었을 때, 제 마음 가운데 기쁨이 다시 회복되었다. 상황은 여전히 어려웠지만 그 환경과 상황이 꼭 토처럼 느껴졌다. 쁄라처럼 느껴졌다. 제가 지금 목회를 해야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이 소명은 다양하고 각자각자이다. 중요한 것은 내게 주신 소명을 감당할 때 내 안에 기쁨이 넘치는 것이며 내 삶의 터전이 황무지에서 케어를 받는, 돌봄을 받는, 옥토가 된다는 것이다.


지금 사랑의 교회는 봄 글로벌 특새 중에 있다. 너무 이른 새벽을 깨우느라 힘들지만 우리는 룻과 같이 쉼 없이, 성실하게 예배자로 사명자로 굳게 서야 한다. 우리의 예배자로서 성실로 말미암아 우리가 살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굳건히 지켜지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룻의 성실로 그의 가문이 복을 받았을 뿐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시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다는 사실이다. 룻의 성실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 우리의 성실은 결국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도구로 쓰임을 받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세 번째 국면이다.


III. 성실의 세 번째 국면: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영광과 찬송의 도구.


이사야 62:7,
7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서 무엇을 받으신다는 것인가? 찬송을 받으신다는 것이다. 파수꾼이 계속해서 말씀과 기도로 예배자로서 나아갈 때 예루살렘이 보호받고 든든히 세워지는데 있게 되면 하나님께서 찬송과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이 세워지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신다. 우리가 찬송을 위해서 지음 받지 않았는가? 당연히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성실은 쉼 없이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주님께서는 영광을 받는다. 여기서 성경은 더 나아가서 예루살렘이 온전히 세워질 때가지 완전한 하나님 나라가 올 때까지 그로 쉬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쉬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쉬시는 분이신가? 하나님은 쉬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신다. 오히려 우리 하나님은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존 하시고 유지하시고 섭리하시며 온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분이시다. 성실로 치자면 성실의 최고봉이시다. 그런데 왜? 여호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쉬지 못하게 하라고 하시는가? 이 구절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는 기억이 난다. 바로 불의한 재판관에 대한 이야기이다. 과부가 너무나 억울하여서 계속해서 재판관한테 찾아가서 소원을 이야기 한다. 그런데 이 재판관은 불의하다. 그런데 이 과부가 너무 귀찮다. 그래서 빨리 들어줘서 더 이상 안 찾아오게 한다.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재판관도 이렇게 하는데 의로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냐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인가? “좀 찾아와!!, 좀 하나님께 간구해, 하나님의 옷자락이라도 붙들어,”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하여 요청받기 위하여 보여주시는 것이다. 제발 좀 요청하라고 하신다. 요청하면 내가 그것을 해결해 주고 그로 말미암아 피조물로부터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겠다는 것이다.


가정에서도 그렇다. 남편은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기를 원한다. 믿지 않겠지만 대부분 도와줄 준비가 되어있다. 동의가 잘 안 되시는가? 다만 남편들이 눈치가 없을 뿐이다. 유리병의 뚜껑이 잘 안 열리는 것을 남편은 잘 모른다. 그런데 아내가 이것 좀 열어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는가? 뭐 그거 가지고 그래, 하면서 열어준다. 그 유리병이 안 열리면 낭패이다. 안 열리면 손을 닦고 온 몸의 꼬리뼈까지 당겨서 열고 만다. 자존심의 문제이다. 아내가 감탄을 한다. 아직 힘세네. 고마워요. 찬송과 영광을 받은 남편은 목을 돌리고 거실로 가서 갑자기 아령을 올리기 시작한다. 왕년에 내가 말이야, 뚜껑을 한 번 열고 갑자기 왕년이 나온다. 사실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유치하고 연약한 수준이 완전히 다르시지만 확실히 우리의 요청 받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부탁과 요청과 간구를 들어주시고, 우리의 감탄과 감격과 찬송을 받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찬송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영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뻐하시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성실히 쉼 없이 간청하라고 우리에게 간청하고 계신다. 주님께서 사랑하는 영 가족 여러분, 우리 성부 하나님께서는 우리 구원을 섭리하시며 이루시매 조금도 쉬지 아니하신다. 우리 성자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쉬지 않으시며 중보하고 계시고 성령 하나님께서는 말할 수 없는 사랑으로 우리의 기도를 돕고 계신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가 복과 은혜를 누리기를 원하시며 성실과 쉼 없는 나아가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를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말씀과 기도로 쉼 없이 성실하게 예배자로 서 있으라고 지금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을 위해 성실하게 쉼 없이 바로 그 기도의 자리를 지키라고 부탁하고 계신다. 지금도 예배의 자리로 나와야 한다. 말씀과 기도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 훈련의 자리로, 다락방과 소그룹 자리에서 함께 하기를 바란다. 웃는 기뻐하는 은혜의 자리에서, 가슴을 치며 울어도 말씀의 자리에서 그렇게 하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성실로 말미암아 누리게 되는 쉼 없는 은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함께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요약
은혜와 복의 통로는 하나님이 주신 예배의 장소에서 찬송과 경배를 하는 자에게 누리게 하신다. 룻은 성실함으로 하나님의 신뢰를 받은 것처럼 자신뿐만이 아니라 나라를 위한 구원을 해내고 아름다운 응답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파수꾼으로서의 예배자로서 우리의 사명과 의무를 다 해야 하고, 하나님께서는 저희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종일 종야에 잠잠치 않게 하셨음을 깨달아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안아주심의 본당에서 기도함에 있어서 서로 영혼이 교통하고 우리는 주님께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리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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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주후 2023년 4월 5일)
제목: "사랑으로 덮어주다"
말씀: 마가복음 14:66~72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구성찬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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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4:66~72,
66 베드로는 아랫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와서.  
67 베드로가 불 쬐고 있는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68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  
69 여종이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 하되.  
70 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  
71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72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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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주간에 이렇게 부흥보고 수요저녁기도회에 나오신 여러분을 주님이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한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고난주간에 비를 뚫고 오신 만큼 예배의 특별한 은혜를 한 분 한분에게 내려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이번 한 주간 고난주간을 보내고 있다. 고난주간이어서 십자가를 더 애쓰다보니까 평소 일상이 그냥 지나치던 것도 또 다른 시각으로 이렇게 바라보는 것 같다. 지난 월요일에 이렇게 운전을 하고 가다가 신호를 대기 중이었는데 앞에 횡단보도에 예쁜 안전모를 착용하고 보호 장구를 착용한 아이가 킥보드를 타고 쌩하고 지나갔다. 엄청 신나보였다. 그런데 그 뒤로 그 아이의 것으로 99% 추정되는 가방을 들고 느낌상으로 세수를 하지 않아서 모자를 꾹 눌러쓰고 그 아이의 뒤를 종종 걸음으로 쫓아가는 엄마로 보이는 한 여인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제 마음에 어떤 생각이 확 들었냐면 ‘혹시 내가 하는 신앙생활이 저런 모습이 아닐까?’ ‘나는 하나님의 은혜 받고, 하나님의 보호하심 구하면서 어떻게 하면 내 인생에서 더 즐겁고 누리면서 살지?’ ‘어떻게 하면 내가 더 행복하고 즐겁게 살 수 있을까?’ 라고 생각에 킥보드를 타고 나가는데, 뒤에는 내가져야 될 십자가를 대신 지신 예수님이 힘겹게 내 뒤를 쫓아오고 있는 모습, 그것이 나의 신앙생활이 아닐까? 고난주간 이다보니까 킥보드를 보고 별 생각을 다한다. 그 아이를 정죄하려는 의도는 전혀 아니다. 그와 동시에 그런 상황을 장악하면서도 여전히 나는 세상살이가 너무 피곤하고 힘드니까, 내 신앙 수준은 그 정도는 아니니까, 내 신앙의 연수는 그만큼은 안 되었으니까 라고 이야기 하면서 나 자신의 어려움에만 집중하고 예수님의 그 십자가는 외면하는 삶을 어떻게 보면 너무나 이기적인 삶을 내가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난 며칠 동안 그 생각과 고민을 해보았다. 만약 이런 이야기를 제가 태신 자로 품고 있는 친구에게 이야기를 꺼냈다면 그 친구의 반응은 100% 이것일 것이다. “너 인생 참 피곤하게 산다. 인생 다 즐기면서 사는 것인데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사냐?”고 할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까 왠지 우리는 세상을 피곤하게 사는 것 같다. 오늘 하루도 열심히 일하고 지내셨을 텐데, 비도 오고 찌뿌등 하면 집에 가서 좀 쉬시지 굳이 이 안아주심의 본당까지 비를 뚫고 오셔가지고 예배드리려고 앉아계신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참 세상 피곤하게 사십니다. 우리 옆에 있는 분들에게 “세상 참 피곤하게 사십니다.”라고 인사는 안 하겠다. 굳이 피곤한데 인사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저는 이 피곤이 너무 좋다. 세상 사람들은 하지 않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고민하고, 피곤하기까지 한 이 생활이 너무나 좋다. 물론 자꾸 이런 자꾸 고민을 하다보면 다크써클은 자꾸만 짙어지고 커지고 눈은 퉁퉁 붓고 어깨부터 시작해서 근육통은 한두 군데는 다 알고 있고, 굳이 안 가져도 되는 죄책감을 스스로 느끼면서 왠지 내 자존감까지 살짝 떨어지는 것 같은 그러한 삶, 그런데 어떻게 이것이 행복할 수 있는가? 왜일까? 이 피곤을 넘어서서 이 세상의 모든 죄를 자신이 짊어지시고 이 걸음을 걸어가시는 그분이 계시기에 나의 연약함과 나의 죄책감과 나의 허물과 부족함으로 인하여 좌절하고 쓰러질까봐 그 짐을 대신 져 주시며 이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이 내 곁에 계시기에 때로는 피곤하고 굳이 ‘그렇게까지 사냐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우리는 너무 행복한 거 아닌가? 그런데 이 행복을 알고 있는 한 사람이 있다. 그 고백을 함께 읽도록 하겠다. 베드로의 고백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게 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다.

-우리처럼 고민하고 피곤했던 베드로의 고백이다. 읽으면서 어떤 느낌이 드는가? 확신에 차 있지 않은가? 정말로 예수님이 주신 살아있는 소망, 산 소망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베드로는 영 가족들을 권면하면서 사랑하는 목자의 심정을 담아서 이 고백을 하고 있다. 그런데 베드로가 처음부터 이러했는가? 고백을 했는가?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더 느꼈겠지만 그는 실패한 제자이다. 폭 망한 제자이다. 3년 동안 예수님의 오리지널 제자훈련을 받았고 그리고 우리의 제자 사역보다 훨씬 더 밀도 있는 훈련을 받았으며 3년 동안 예수님과 먹고 마시면서 정말 하나님과 함께 했던 그 임재를 누리며 함께 했는데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는 가장 열정적인 순간에 그는 실패했다. 회복불가, 재생 불가 상태가 된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어떻게 베드로전서를 이렇게 기록하면서 확신에 찬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인가? 오늘 말씀에 통해 예수님께서 실패자 베드로를 초대 교회 반석과 같은 사도 베드로가 될 수 있도록 사랑으로 덮어주신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동시에 지금 이 시간 우리를 사랑으로 덮어주고 계신 그 예수님을 만나는 이 저녁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첫 번째 이야기로 들어가 보겠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대제사장의 관저에 예수님이 끌려가 심문 받는 장면으로부터 이어진다. 아예 ‘신성모독’이라는 죄명을 정해놓고 거짓 증인을 동원해가지고 이 야밤에 진행하는 불법 심문 그 현장에 이 베드로가 따라왔다.
 
*마가복음 14:54,
54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아랫사람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
-베드로가 어떤 제자였는가? 베드로는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따르던 예수님을 정말 사랑하는 제자였다. 그런데 그렇게 예수님을 따르던 베드로가 예수님이 세상의 강력한 권력 앞에 무기력하고 그 힘을 잃고 따라가시니까 가까이 있지 않고 멀찍이 거리를 두고 예수님을 따라간다. 사실 우리도 평소에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이렇게 늘 가까이 따르는 삶을 살고자 하지만 우리는 바람과는 달리 때로는 예수님을 베드로처럼 멀찍이 따라갈 때가 있는 것 같다. 생각지도 못한 변화된 환경에 압도되고 일상에 자잘한 그러한 유혹에서 결국에 넘어지고 마는 제 자신을 볼 때가 참 많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훈련 받고 살면 무언가 막 일어나고 영적으로 충만하면 하나님이 내 앞에 어떤 역사가 확 일어나게 해 주실 것 같은데 현실은 그래인 것이다. 그 현실 속에서 자꾸 무기력해지고 내게 다가온 그러한 저항들을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이다. 너무 강력한 벽처럼 느껴진다. 정말 성경에 다윗처럼 그 벽을 뛰어 넘는 그러한 제자로 살고 싶은데 그냥 그 벽에 낙서 밖에 못하는 것처럼, 무기력하게 세상 속에서 능력을 잃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때가 있다.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 무기력하게 느껴지는 우리 약함 속에 하나님의 강함이 숨겨져 있는데, 이 베드로처럼 우리도 눈에 보이는 강함은 강함이고, 강함이고, 약함이 그 강함 앞에 무기력하다. 그것을 느끼면서 멀찍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 같다. 이런 베드로를 보며 종교 개혁자 존 칼빈은 자신의 주석에서 이렇게 해석한다. 이미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 앞에 30절에서 보면,
 
※제자로서 자기 선생의 뒤를 따르는 것은 임무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범한 실수를 경고 받고 있었던 터이므로 죄짓는 자 장에 뛰어들지 말고 어느 구석에 숨어 있어야 했다. -존 칼빈-
 
*마가복음 14:30,
3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이미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 앞에 30절에서 이 밤에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3번 나를 부인할 것이라고 예언을 하셨기 때문에 이런 주석을 한 것 같다. 그런데 오늘 감히 이 종교개혁자 존 칼빈의 주석과 반대되는 해석을 하고자 한다. 베드로는 그 자리에 가서 그 상황을 직면해야 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철저히 깨어지고 부서져야만 했다. 왜인지 오늘 현장으로 가서 살펴보고자 한다. 오늘 본문 66절을 보자.
 
*마가복음 14:66,
66 베드로는 아래 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와서.
-예수님이 심문 당하는 곳에까지 와서 그곳 분위기를 살펴보고자 아래 뜰까지 왔다. 그런 그에게 무언가 긴장감 느껴지는 그에게 군인이나 조사관이 와서 보고한 것이 아니라, 여종 하나가 그에게 다가와서 베드로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마가복음 14:67,
67 베드로가 불 쬐고 있는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왜 불을 쬐고 있었는가? 추워서?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거기 와서 혼자 뻘쭘하게 따로 서 있는 것이 눈에 띄니까 그 속에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것처럼, 그 사람들 사이에서 불을 쬐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런데 한 가지 생각을 못했다. 불 앞에 있으니까 얼굴이 더 잘 보이는 것이다. 여종이 거기서 봤다. 너 혼자 있다. 너는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평상시라면 이런 여종의 말에 웃기지 마, 화가 들 건데 그날따라 두려움이 그를 장악했는지, 이렇게 반응한다. 68절에 보면
 
*마가복음 14:68,
68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 새.
-베드로는 여종의 말을 부인한다. 부인한다는 것은 부정하다, 거부하다, 인정하지 않다. 이런 의미를 담고 있다. 더 이야기 한다면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거부하고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과 가장 가까웠던 제자가 그러는 것이다. 왜냐면, 이 정도 강도로 이야기 하면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겠지, 라고 생각한 것이다.
 
*마가복음 14:69,
69 여종이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 하되.
-그 집요한 여종이 끝내지 않는다. 이제는 여종이 옆에 있는 사람과 함께 이 사람 그 사람이 도당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가 어떻게 반응한가?
 
*마가복음 14:70,
70 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
-섬찟 했을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거부하고, 인정하지 않는데 다른 사람들이 또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것이다. 어떻게 알아봤냐면 학자들은 당시 이 갈릴리 억양이 독특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경상도 억양이 독특한 것처럼 이야기 하면 알아듣는 것이다. 아무리 베드로가 완벽하게 억양을 바꾸어 본다고 해도 “네가 무슨 말을 하든지, 나는 모르겠어.” 라고 아무리 서울말을 이렇게 써도 표가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다보니까 어디까지 가냐면 71절에 보면,
 
*마가복음 14:71,
71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며 예수님을 이 사람으로 지칭하고 부인한다. 이 표현을 봤을 때, 뭔가 가까이 있었던 것 같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상급의 부인을 한 것이다. 완전히 그 예수님의 사랑을 부인한 것이다. 여기 보면 부인의 강도가 강해진다. 처음에는 작던 죄가 나중에는 눈덩이처럼 커지듯이 “몰라, 나 이사람 몰라” 하던 것이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는 것이다.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자기 합리화가 갈수록 강도가 더해지는 것과 같은 특징이다. 이때 결정적인 소리가 들려온다. 우리 72절을 함께 보자.
 
*마가복음 14:72,
72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
- 닭이 두 번째 운다. 베드로는 이 닭이 두 번째 우는 순간 기억했다. 무엇을 기억했는가? 제자들이 같이 둘러앉아서 치킨을 먹고 있는 모습을 기억했는가? 닭이 우니까,,, 아니면 열병을 나았던 닭 도리 탕이 생각났을까? 비가 와서 다를 다운되어 있을 것 같아서 이야기 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어떤 상황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났다. 말씀이 기억되니 그 일을 그가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닭 울음소리가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났다. 우리는 실수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실수를 할 때, 우리가 양심의 찔린 정도로 넘어가면 금방 쉽게 그 일을 저지르고 만다. 아주 쉽게 만성이 되어서 그렇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기억나서 말씀으로 인해 내 마음과 자아가 깨어지고 부서지는 그런 회개를 하면 물론 다시 반복해서 실수는 할 수 있겠지만 이전처럼 쉽게 넘어지지는 않는다. 왜냐면 하나님의 말씀에는 그런 능력이 있다. 베드로에게는 자신의 잘못이 말씀에 비추어 자아가 완전히 깨어지고 부서지는 완전한 회개가 바로 이 자리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만약에 이 일이 없었다면 베드로는 어땠을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잡혀가실 때에, 그나마 칼을 빼서 대제사장 말고의 귀를 베었던 사람이 베드로 아닌가? 제자가 다 모여 봐도 다 같이 도망간 처지에 ‘그나마 칼을 빼어서 귀를 베었던 사람은 손 들어봐!! 그래 내가 그래도 제자 맞지.’ 베드로의 혈기가 쉽게 죽었을 것 같지가 않다. 이 사건이 없었다면, 그런데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말씀에 완전히 자기 자신을 비추어 자아가 산산이 깨어지고 부서진 베드로는 회개의 자리로 내려간 것이다. 낮아지려고 해도 그 혈기 때문에 그 낮아지지 않았던 그 베드로가 이 사건으로 인해서 완전히 바닥까지 내려간다. 이것이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어야만 하는 이유이다. 그런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다. 요한복음 20장에서 부활하신 저녁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였다. 예수님께서 못 박힌 손과 창에 찍힌 옆구리까지 직접 보여주시면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스승이 부활하셔서 돌아오신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이긴 것이다. 그 모습을 봤다면 베드로는 어떤 반응을 해야 하는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 사람들아 보아라, 로마군병도 어쩔 수 없는 예수님이 살아나셨다.” 이게 베드로가 보여주어야 할 반응이 아닌가? 요한복음 21장 3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요한복음 21:3,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음에도 다시 물고기를 잡으러 간다. 철저한 낮아짐을 통해 지금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 베드로의 이 실수는 예수님의 그 계획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베드로가 부인했을 때, 예수님은 “아니 네가 어떻게 네가?”라는 논란이 아니라, “네가 그런 실수를 하더라도 나는 너의 허물을 나의 사랑으로 덮어주겠다.” 는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예견된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22장 31-32절을 함께 보겠다.
 
*누가복음 22:31-32,
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예수님께서 잡히시는 날에 마지막 만찬에서 하시는 말씀이다. 베드로가 부인하기 전에 저 이야기를 하신 것이다. 사탄이 가만 두지 않고 계속해서 이 제자의 길을, 이 제자 도를 포기하도록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지만 누가 기도했는가? 예수님이시다. 베드로가 부인하기 전부터 예수님은 알고 계셨다. 그리고 사탄이 그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하는 순간 베드로와 사탄을 막아서셔서 “내가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라.” 라고 하시는 그 예수님, 이 예수님의 계획 속에서, 사랑 속에서, 예수님은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참으로 돌이키게 하는 것을 이미 예고 하셨다. 지금도 사탄과 우리 사이를 막아서셔서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계신 그 예수님을 이 저녁에도 의지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기도와 당부만 하신 것은 아니다. 이 기도와 당부에도 완전히 바닥을 치며 예수님의 제자로서 자격이 없다고 철저하게 부서지고 깨어진 베드로를 찾아가신다. 그리고 또 물고기를 못 잡고 있는 그에게 처음 만난 축복처럼 만선의 축복을 주신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이 주신 것을 알고 예수님께 헤엄쳐 왔을 때, 그에게 떡과 생선을 구워주신다. 개인적으로는 이 때 예수님이 생선을 굽고 계신 것이 아니라, 통닭을 굽고 계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도 잘 안 나온다. 그리고 이야기 하실 것이다. ‘베드로야, 이리 와라, 이놈이 그 두 번째 울었던 그 닭이다.’ ㅋㅋㅋ!!! ‘특별히 이 목살은 네가 먹어라. 이 목살을 먹고 죄책감에서 놓여나고 치유함을 받아라.’ 아마 이런 생각을 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하는데 다들 비슷한 것 같다. 예수님은 저처럼 수준이 낮지 않으셨다. 다시 한 번 만선의 축복을 통해서 처음 그를 찾아왔던 것을 생각나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불가에 앉아서 헤엄쳐 왔으니 얼마나 춥겠는가? 몸을 녹이고 있는 그 베드로, 베드로는 처음 예수님을 만났던 것을 생각했던 동시에 한 가지가 더 생각났을 것이다. 예수님을 부인할 때, 불을 쬐고 있었다. 그 불이라는 단어와 그리고 예수님이 그 생선을 굽고 있는 불과 같은 의도라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나를 부르셨던 그곳에서 예수님을 부인하던 그 기억에 불에다가 생선을 구워서 베드로를 먹이고 계신다. 아픔의 불이 그에게 있어서 자꾸만 그걸 보는 순간 트라우마가 생각나는 그 불이 처음 그를 찾아오셨던 그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의 굶주림, 자신의 허기짐, 누구도 채워줄 수 없는 그 배고픔을 채워주시는 따뜻한 사랑의 도구가 된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르신다. “내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라고 예수님은 다른 것을 묻지 않으셨다. 저 질문만 세 번을 물으셨다. 그 질문 속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냐면 “베드로야 나는 네가 세 번 부인 한 것이 중요하지 않다. 나한테 중요한 것은 네가 나를 지금도 사랑하느냐?”고 묻고 있다. 제자의 자격은 “네가 어떠한 일을 해내고 너에게 능력이 어느 정도까지가 아니라 거기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또 실패할 수 있다. 네 제자라도 나를 부인할 수 있다. 무너질 때가 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네가 나를 지금도 사랑하고 있나?” “너 정말 지금도 나를 사랑하니?”
 
베드로에게 사랑을 가르치시는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묻고 계신다. 고난주간을 보내며 십자가를 묵상하는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예수님은 얼마나 십자가의 복음을 얼마나 많이 원하시는지, 밖에 나가서 전도를 몇 명 했는지, 너의 성화의 단계는 어느 단계까지 갔는지, 이러한 질문을 하시기 전에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오늘 우리에게 던지고 계신다.
 
“너 정말 나를 사랑하니?” 이 자리에 저녁 ‘수요기도회’를 드리는 지체들보다 네가 나를 정말로 사랑하니? 라고 하신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자훈련, 사역훈련의 완성된 최종상태가 어떠한 정도라고 생각하는가? 완벽한 훈련 큐티와 완벽한 IBS, 완벽한 로마서 8장 암송? 아니다. 저는 이 고백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 저는 예수님을 세상에서 제일 사랑합니다.” 마치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것처럼 순간순간 내 삶을 살아가고 있고 여전히 나의 삶의 부족하고 훈련의 마무리를 하면서도 나의 허물과 부족함이 여전히 나를 찔러 오지만 그래도 부족하지만 나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 “저는 예수님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합니다.”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곧 그에게 죄를 고하리라. 큰 은혜를 주신 예수 되오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엎드려 비는 말 들으소서 내 진정 소원이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지난주일 설교 중에 담임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세 가지 적용 중에 두 번째가 바로 이 내용이 아닌가? 주님을 더욱 사랑할 결심, 이 고백과 사랑의 결심이 가능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기 전에 내가 예수님을 알기도 전에 예수님이 나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이다. 오늘 설교 제목처럼 우리 모두의 죄와 허물을 사랑으로 덮어주셨기 때문이다. 이 사랑이 마의 모든 부족함과 허물을 덮어주셨다. 지금도 예수님의 십자가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증언하고 계신다. 나는 너의 처절하고 실패한 그 신앙생활, ‘네가 감당하기 어려워하는 그 자꾸만 넘어지는 그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졌단다.’ 예수님은 아셨다. 우리가 구원 받은 이후에도,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순간에도 제자훈련 받고, 사역훈련 받고, 순장사역을 하고, 목사로 설교하는 이 순간에도 내 삶의 여정에서는 여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죄의 문제들이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은 아셨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허물과 치욕까지도 덮어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있기에 우리는 베드로가 고백했던 것처럼 살아있는 소망, 산 소망이 있는 줄 믿는다. 이 사랑으로 덮어주심이 우리를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이끌어 가실 것이다. 말씀을 마무리 하겠다. 베드로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오순절 성령 강림의 때에 예수님을 부인할 때와 동일한 곳인, 동일한 바로 예루살렘에서 담대하게 그 예수님을 증거 한다. 진짜 사람 낚는 어부, 진짜 증인이 된 것이다. 우리 베드로의 사도행전 2장 설교에 마지막 구절을 함께 읽겠다.
 
*사도행전 2:36,
“그런즉 이스라엘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 저는 이 사실을 읽을 때 전율이 일어난다. 세상 권력이 너무나 두려워가지고 내가 사랑하는 예수님이 저 앞에 있는데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고, 맹세하고, 거부하고, 부인하던 그 베드로가 그 세상 권력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제는 “너희는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이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이전에 부인의 상처가 저는 이때 완벽하게 치유되었음을 믿는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그 죄와 허물, 신앙생활에서 자꾸만 넘어지는 그 처절한 실패와 무너진 삶을 이제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셨던 것처럼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사랑으로 덮어주고 계신다. 다시 그렇게 신앙생활 못한다고? 다시 이전처럼 뜨겁게 전도를 못한다고? 다시 이전처럼 뜨겁게 기도를 못한다고? 다시 그 예전처럼 사랑으로 못 섬긴다고? 이것은 사탄의 밀 까부르듯 하는 소리에 불과하다.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것 같아도 사탄이 자꾸 그런 마음을 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내가 왕년에 이렇게 신앙생활 잘했어, 내가 그때는 말이야 전도를 100명씩 했어.’ 예수님은 왕년에만 예수님이신가? 지금 우리 예수님이 아니신가? 나를 무너뜨리는 그 분만 바라보지 말고, 내 곁에서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 다시 바라보시기 바란다. 지금도 나를 사랑으로 덮어주셔서 다시 일어나도록 이 말씀을 통해 산 소망을 주고 계신 우리 주 예수님을 이 저녁에 더 깊이 바라보시기 바란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던 그 자리에서 누가는 ‘베드로가 세 번째 부인하고 닭이 울었을 때,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라고 증거 한다. 왜 보셨는가? 세 번 부인했다고? 아니다. 다시 살리시려고, 다시 살리시려고 그가 이제 나가서 울고 쓰러지고 완전히 깨어지고 부서질 것을 그분은 아셨기 때문에 ‘내가 너를 살리겠다.’고 바라보셨다고 저는 확신한다. 오늘도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로 살려고 애쓰다가 쓰러진 여러분을 그 베드로를 바라보시는 동일한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계신다. 고난주간 가운데서 나를 사랑으로 덮어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고 마침내 그 십자가에서 우리를 향한 그 사랑을 완성하시는 예수님 앞으로 더 가까이 나아가 기도하는 이 저녁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요약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는 예수님의 말씀에 내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삶으로 응답하는 자로 매일의 일상이 되고 우리가 알게 모르게 우리 주님을 얼마나 부인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예수님을 부인하던 자리에 있던 부족한 나를 살리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그 사랑을 날마다 기억하며 영 가족과 이웃을 사랑으로 덮어주는 자로 살아야 한다. 세밀하게 아시는 주님께 감사와 영광 돌리는 삶으로 살아가 지금 이 시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네,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삶으로 응답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도 가족과 지체들을 그리고 형제와 이웃을 사랑으로 덮어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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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2023년 3월 29일)
제목:"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말씀: 여호수아 15:16-19
찬양인도: 쉐키나, 유재원 부목사님

설교자: 백승준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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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15:16-19,
16 갈렙이 말하기를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점령하는 자에게는 내가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하였더니.
17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 그것을 점령함으로 갈렙이 자기 딸 악사를 그에게 아내로 주었더라.
18 악사가 출가할 때에 그에게 청하여 자기 아버지에게 밭을 구하자 하고 나귀에서 내리매 갈렙이 그에게 묻되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니.
19 이르되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네겝 땅으로 보내시오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하매 갈렙이 윗샘과 아랫샘을 그에게 주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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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준 부목사님
-영혼의 봄 동산 같은 은혜를 사모하며 부흥보고 수요저녁기도회에 오신 성도님을 한 분 한분을 축복한다. 주님께서 회복을 넘어 부흥케 하시는 그런 은혜를 이 밤에 허락해 주실 것을 확신한다. 오늘 주시는 말씀을 읽어보겠다. 여호수아 15장 16절에서 19절이다.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은 믿음 보고의 대명사 같은 갈렙의 마지막 행적을 적고 있는 본문의 말씀이다. 여호수아 15장 말씀은 유대 백성들이 땅을 분배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그 장면 속에서 특별히 이 갈렙 가족의 귀한 이야기를 우리 가운데 더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말씀이 여호수아에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사사기 1장에 다시 한 번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 이렇게 동일한 말씀이 반복되어 나오는 것은 흔치는 않는데 그만큼 중요한 장면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려고 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저는 바로 믿음의 세대계승을 위해서 철저히 준비하는 갈렙의 모습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갈렙은 어떤 사람인가? 우리가 잘 알듯이 열 두 지파를 대표해서 모세가 정탐꾼으로 보내게 되는데 유다지파의 대표로서 그 땅을 밟았던 사람이다. 여호수아와 함께 믿음 보고를 하였고 ‘그 땅을 능히 우리가 취할 수 있노라.’고 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 믿음대로 사십 년이 지난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거인들이 살고 있는 헤브론 땅을 믿음을 가지고 취했던 사람이 바로 갈렙이었다. 그랬던 그가 이제는 ‘드빌’이라는 곳을 점령하게 되면서 뭔가 새로운 장면을 우리 가운데 보여주고 있다. 잠깐 지도를 통해서 드빌이 어떤 곳인지를 한 번 살펴보기를 원한다. 작지만 사해가 보일 것이다. 사해 옆에 엔게디라는 도시가 보일 것이고 거기서 오른쪽으로 보게 되면 드빌이 있다. 드빌 위쪽으로 갈렙이 정복했던 헤브론이 있고, 조금 더 올라가면 예루살렘이 나오게 되는데 바로 저 드빌을 점령하면서 그가 잠시 본인의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드빌’이라는 곳은 원래 이름이 기럇세벨 이라는 지명이었는데 그 뜻은 책에 도시라는 뜻이다.


이름 자체가 세련된 듯하다. 무언가 문화가 발전되어 있고 그 문화가 있을 만큼 군대도 잘 갖추어져 있는 그런 방어 조직이 있었지 않을까 하는 곳이다. 이러한 드빌을, 기랏세벨을 정복하기 위해서 그가 한 가지 조건을 내 본다. 이 드빌을, 기럇세벨을 정복하는 자에게 내 딸, 악사를 주겠노라고 선포하고 있다. 왜 갑자기 믿음의 사람, 그리고 승승장구했던 갈렙이 이와 같은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꺼냈을까? 아마도 이렇게 추측해 볼 수가 있다. 그의 나이가 85세가 되었는데 헤브론까지는 점령할 수 있었지만 ‘거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그와 같은 모습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이제는 이 모든 것들을 그가 감당할 수 없기에 이제는 맞는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고 여긴다. 자신의 한계를 알고 만용을 부리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하는 것도 지혜로운 지도자의 모습이기 때문에 그렇다. 저는 그렇지만 여기에는 특별한 모습이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악사를 부인으로 줄 뿐만이 아니라, 그 이후에 땅을 유업으로 주는 것까지 치밀하게 갈렙이 준비하여서 다음세대를 일으키기 위해서 그가 한 가지, 한 가지를 펼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여기서 보면 악사를 전리품 같이 주는 것에 대해서 불편해 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과거에 그러한 문화에는 현재의 문화로 평가할 수 없는 그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하고, 그리고 악사조차도 이와 같은 아버지의 행동에 동의하면서 적극적으로 따라가는 것처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제 믿음의 세대계승을 위해서는 마치 갈렙이 헤브론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믿음으로 행동하였듯이 그와 같은 믿음이 일어나서 그 드빌, 기럇세벨을 점령해야 되기 때문에 그렇다. 여기서 우리가 갈렙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갈렙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갈렙을 조금 더 깊이 생각하다보면 흥미롭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된다. 민수기 32자아 12절을 보면 이렇게 나온다.

*민수기 32:12,
12 그러나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여호와를 온전히 따랐느니라 하시고.
-우리는 잘 알고 있듯이 갈렙은 유다지파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그에게 또한 그나스 사람, 도대체 그나스 사람이 무엇인가? 성경을 잘 살펴보면 그나스 사람에 대한 힌트를 살펴볼 수가 있다. 바로 창세기 36장에 나와 있다.
*창세기 36:15을 읽어보겠다. 15 에서 자손 중 족장은 이러하니라 에서의 장자 엘리바스의 자손으로는 데만 족장, 오말 족장, 스보 족장, 그나스 족장과.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바로 이 말씀을 비추어볼 때 갈렙이 그나스 사람이라는 것은 결국은 에서의 후손, 에돔 족속이었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많은 성경학자들이 그렇게 추측하고 있다. 원래 유다족속은 아니었고 그나스 사람이었는데 출애굽 그 시절에 허다한 잡족들이 같이 출애굽을 하여서 이스라엘 백성과 나오게 된다. ‘그때에 유다지파에 함께 편입되지 않았나?’로 평가하고 있다. 그래서 더 살펴볼 것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인물의 뜻이 있지 않은가? 여러분 갈렙의 이름이 무슨 뜻인지 아는가? 뜻밖에도 그의 이름의 뜻은 개라는 뜻이다. 도그, 라는 뜻이다. 갈렙이 어떤 사람이었는가? 에돔족속, 이방 족속 개였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랬던 그가 믿음의 대명사와 같이 변화된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출애굽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그 크신 능력을 친히 경험하였고, 이 분,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요, 내가 유일하게 섬길 분이라는 것을 확신이 섰던 것 같다. 그런 확신을 가지고 가나안 땅을 믿음으로 정복할 수 있었던 갈렙은 확실히 깨달았다. 참된 이스라엘 되는 것은 혈통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을 향한 참 된 믿음에서부터 말미암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이제 딸 악사를 통해서 이룰 다음 세대는 믿음의 세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설 그 사람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런 세대를 일으키기 위해서 그런 기회를 제공하고, 믿음으로 자기가 마치 헤브론 땅으로 나갔듯이, 믿음으로 이제 드빌을 정복할 그러한 사람을 찾고 있는 것이다. 누가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었는가? 마치 보면 이 갈렙의 조카와 같이 표현되어 있는 옷니엘이 그 일을 취하게 되는 것을 본다. 옷니엘이 동일하게 믿음으로 일어나서 드빌을 취하게 되고, 그 옷니엘은 사사기를 보면 첫 번째 사사가 되어서 또한 이스라엘을 정복하고, 이스라엘을 위해서 구원자로서 쓰임 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들을 보게 된다. 철저하게 준비되고 사람을 키웠기에 대를 이어서 이스라엘을 이끌 수 있는 믿음의 명문가를 이루었던 것을 보게 된다. 바로 갈렙은 후세를 준비하고 믿음의 다음세대를 위해서 애썼음을 우리가 볼 수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시사 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어제 저희 사랑의 교회를 사역하시다가 한 지역 교회로 맡아 섬기시는 목사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목사님을 통해서 어떻게 목회를 하시는지 여러 가지 궁금하였는데 첫 마디부터 너무나도 한국교회 현실이 어렵다는 것을 들었다. 다른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젊은 세대가 교회에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래도 사랑의 교회에서는 많은 젊은 분들을 또한 이렇게 많은 젊은 세대들을 있지만 한국교회 목회 현장에 갔을 때 가장 절망적인 것은 젊은 사람들, 특히 3-40대를 찾아보기 너무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그 목사님은 이렇게 설명하셨다. 80대의 권사님이 식판을 받아 손을 떨면서 힘들게 걸어가시는 모습을 보고서는 그 애처로운 모습에 달려와 식판을 대신 받으신 분이 계시는데, 그분 또한 손이 떠시면서 그 식판을 받아서 대신 들고 가 주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제가 영국 웨일즈에 있을 때, 이와 비슷했다. 영국의 1904년 ‘모리아 교회’라고 그 교회에서 엄청난 대 부흥이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은 영국이 웨일즈를 갔을 때, 그 교회를 방문하게 되는데, 그 교회를 소개해 주시고 부흥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는 한 분이 계셨다. 그분이 손님들에게 차를 따라 주시면서 저에게 대접을 해주셨는데 손을 떨면서 차를 따라 주셨다. 그분이 그 일을 섬기시냐면 그 교회에서 가장 젊은 분이었기 때문이다. 그 나이대가 80대가 되셨던 것을 제가 기억한다. 참 한국교회의 현실이 저희가 그토록 유럽교회 모습과 비슷해지지나 않나! 그런 걱정이 된다.

그럴 때일수록 믿음의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이 갈렙의 모습을, 자기 딸 악사에게 믿음의 사람, 옷니엘을 예비시켜 주기 위해서 참으로 치밀하게 준비하는 갈렙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하지 않나 하는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렇다면 갈렙은 믿음의 세대를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바로 믿음의 세대계승은 사명의 계승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결국 옷니엘은 드빌을 점령하였고, 악사를 아내로 얻게 된다. 그리고 나서 여호수아 15장은 땅을 분배한 이야기이다. 이들 악사와 옷니엘에게도 땅을 배분할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들에게 어떤 땅이 주어지는 건가? 저희는 이 땅 분배에 관심이 많지 않은가? 한국 사람들처럼, 부동산에 한이 맺힌 사람들은 없는 것 같다. 갈렙이 정복한 헤브론 땅은 장차 수도권이 될 그런 요지였다. 헤브론 땅은 아브라함과 이삭이 믿음으로 살아갔던 땅이었고, 사라가 죽었을 때, 사라를 장사(葬事)한 땅이기도 했다. 그리고 다윗이 왕으로 와서 처음으로 7년간 다스렸던 땅이 바로 헤브론 땅이었다. 바로 그 헤브론 땅을 갈렙이 정복하였고, 그 갈렙이 정복한 땅에 헤브론을 조그만 내려갔을 때가 드빌이었기 때문에 상당히 요충지(要衝地)였다. 소위 말해서 노른자위 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갈렙이 이 악사와 옷니엘에게 준 땅은 바로 그런 노른자위 땅이 아닌 아니 흰자위도 되지 못한 네겝 땅(메마른 땅)을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러분, 네겝이 어떤 땅이었는가? 사진을 준비했다. 보면 사막은 아니지만 사람이 살아가기에는 황무지(荒蕪地) 같은 곳이 네겝 땅이다. 겨우 낙타 떼나 지나갈 수 있는 그런 땅이다.

왜? 좋은 땅도 있는데, 헤브론과 드빌과 같이 그런 좋은 땅도 있는데, 갈렙은 자기 딸의 부부에게 이 네겝 땅, 남방 땅을, 바로 황무지와 같이 건조하고 사람이 살아가기 힘든 그런 땅을 그들에게 유업으로 주었을까?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장면이라고 생각된다. 네겝 땅이 분명히 사람이 살기 힘든 땅이지만 그들에게 사명을 맡긴 것 같다. 바로 그것을 사람이 거할 수 있고, 바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땅으로 개척하라는 것이었다. 바로 편하게 살 수 없는 그곳을 모든 것을 갖추어진 땅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근면하게 일하면서 최선을 다해서 그 땅을 개척하고 하나님 백성이 살만한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킬 것에 대한 사명을 갖고 그들에게 네겝 땅을 주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성경을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바로 네겝 땅이 갖고 있는 전략적인 위치이기 때문이다. 바로 갈렙이 정탐꾼으로 자기가 젊은 40세에 정탐꾼으로 걸어왔을 때, 그 땅을 통과했기 때문이다. 민수기 13장 17절을 보면,

*민수기 13:17,
17 모세가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그들을 보내며 이르되 너희는 네겝 길로 행하여 산지로 올라가서 그 땅이 어떠한지 정탐하라.
-네겝 땅을 본인이 통괴 해서 네겝 땅을 정탐했던 것이다. 그 땅을 정탐할 수 있었던 곳이 그만큼 네겝이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았고 그곳에 수비가 허술했기 때문에 쉽게 그곳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민수기 13장 22절에도 또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모세의 말씀이다.

*민수기 13:22,
22 또 네겝으로 올라가서 헤브론에 이르렀으니 헤브론은 애굽 소안보다 칠 년 전에 세운 곳이라 그 곳에 아낙 자손 아히만과 세새와 달매가 있었더라.
-든든하게 지키라는 그 사명을 지키면서 자기 딸 악사와 또한 사위 옷니엘을 그 땅으로 보내는 것을 볼 수 있다. 항상 하나님의 사람들, 그리고 인물들은 어디서 길러지는지 아는가? 광야와 같은 네겝 땅에서 길러진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헤브론과 같이 좋은 곳, 그곳을 받는 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곳에는 인물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항상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던 곳은 광야였고, 황무지였고, 고난 속에서였다. 또 하나님께서 네겝과 같이 황무지와 같이 어려운 시간을 주시게 된다. 왜? 그런 시간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가? 그런 시간이 찾아와야지만, 그런 환경이 찾아와야지만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그 삶을 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운동이란 언제 되는가? 우리의 힘에 능력으로 넘어갔을 때, 힘들게 되었을 때 그때부터 운동이 되고 그때부터 우리의 근력이 붙게 되면서 우리의 힘이 붙게 되는 것이다. 믿음 또한 그러한 것이다. 편안한 곳에서 모든 것이 갖추어진 환경에서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의 훈련에서 우리를 광야로 부르실 때가 있다. 그러나 더 귀한 것은 이렇게 억지로 어쩔 수 없어서 광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명에 순종하셔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그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네겝 땅으로 가는 이 모습 속에서 다음 세대가 준비되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어떠한가?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시기 전까지는 절대로 이와 같이 어려운 환경을 우리는 구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 아닐까? 이런 것을 깨기 위해서 우리 담임 목사님께서 계속 말씀하신다. 자발적으로 고난을 받던지, 새벽기도회에 나오고, 토비새에 나와서 그곳에서 하나님께 바짝 엎드리든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어쩔 수 없는 고난에 믿음에 성장하든지, 그 두 가지 아니고서는 우리 가운데 믿음이 성장할 기회는 없는 것 같다. 항상 우리가 기억했으면 좋겠다. 예수님께서도 고난을 받고 영문 밖으로 나가서 친히 우리를 위하여서 모든 것을 쏟아부어주시는 그런 삶을 보여주셨다. 안전한 성합 그리고 모든 것이 갖추어진 곳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친히 영문 밖에 나가셔서 고난을 받으셔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걸어주셨다. 바로 그와 같이 사명을 위해서 네겝 땅을 가는 악사와 옷니엘의 모습 속에서 다음세대가 준비되는 것이다. 과연 그렇게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서 기꺼이 고난을 받고 기꺼이 어려운 걸음을 걷는 예수님의 참된 제자들인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셨듯이 그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또한 동일하게 걸어가고 있는 사람인지 우리는 스스로 돌아보았으면 좋겠다. 그 십자가의 길을 걷고 예수님과 같이 영문 밖에서 고난을 받고 그것을 준비하는 사람을 통하여서 다음세대가 준비되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렇지만 사명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특별한 축복이 있다는 것이 그 다음 말씀에서 기록되어 있다. 아름다운 장면이 그 다음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 네겝 땅을 정복하기 위해서 길을 가려는 딸과 사위에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18절을 보면 그래도 여인인 악사가 조금 더 현실 감각이 있었던 것 같다. 18절을 다시 한 번 제가 읽어보겠다.

*여호수아 15:18,
8 악사가 출가할 때에 그에게 청하여 자기 아버지에게 밭을 구하자 하고 나귀에서 내리매 갈렙이 그에게 묻되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니.
-악사가 출가하면서 아버지기 네겝 땅을 준 것을 알았던 것이다. 아마 아버지를 통해서 그 땅을 받아야 될 이유에 대해서 많이 들었을 것이다. “내가 정탐꾼으로 이 땅을 밟았을 때에 네겝 땅이 너무 허술해서 그곳을 쉽게 통과했으니 다른 적들도 그럴 수 있다. 네가 그 땅을 든든하게 지키고, 그 땅을 정복하고, 그 땅을 이제는 하나님의 땅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아마 그런 책임을 주었기 때문에 그 땅으로 갈 마음에 각오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갈지라도 이건 그냥 가서는 안 되겠다는 이런 현실적인 생각이 있었다. 옷니엘은 그런 것도 없이 그냥 가려고 했는데 남편을 설득해서 아버지에게 뭐를 청하자고 설득했다. 그리고서는 나귀에서 내렸다. 아버지에게 다가가서 아버지는 직감을 했다.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그냥 가지 않게 두면서 아버지는 묻는다.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그랬을 때, “네게 복을 주옵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네겝 땅으로 보내시오니 샘물도 주옵소서.” 네겝 땅으로 갈 때, “그 땅은 살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사명을 위해서 맡기신 그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가겠지만 그 땅으로 가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축복과 하나님의 축복이 필요하오니 샘물을 주옵소서.” 라고 간구했다. 그랬을 때, 그 간구에 어떻게 응답했는가? 샘물을 달라고 단수로 간구했지만 어떤 응답이 듣게 되는가? 윗샘과 아랫샘, 두 배로 복을 받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아버지 갈렙도 너무나도 잘 알았기 때문에 그렇다. 바로 네겝 땅에 가서 그 땅을 변화시키고 그 땅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샘물이 필요한데 그냥 샘물이 아니라, 윗샘과 아랫샘, 그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으로 그들을 축복해야만 된다는 것을 아버지 갈렙이 잘 알고 있었다. 바로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 살아가는 자에게 이와 같은 기도 응답의 축복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도 응답은 누구에게 허락하시는지 아는가? 바로 주님의 나라와 그를 위해서 순종하며 그 길을 걷는 자에게 축복이 기도 응답의 축복인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보면 너무나도 많은 기도 응답에 대한 약속이 있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기도에 대해서 쉽게 생각할 것이다. “구하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너희가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에게 열릴 것이요.” 그러면서 수많은 기도약속에 대한 응답이 있기에 우리는 기도에 대한 그런 확신이 있지만, 막상 우리가 기도해도 응답이 많이 없는 것 같다. 왜 그럴까? 한 번 생각해 보라. 기도라는 것은 그냥 우리가 편안하게 앉아서 더 많은 복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응석부리기 위해서 그런 수단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바로 악사와 옷니엘이 네겝 땅을 정복해서 그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왜적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 순종하며 나아갈 때, 샘물을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하는 것보다 더 놀랍도록 채우는 것이 기도이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와 같은 기도응답을 경험할 때, 우리는 담대해지게 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서 하나님 맡기시는 일을 위해서 살아가는 자를 책임지시고 끝가지 돌보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경험한 사람이 그의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볼 것이 있다. 갈렙이 악사에게 묻는다.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바로 그녀는 무엇을 원했던 것인가? 아버지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축복이 필요하다. 그 땅을 개척하기 위한 샘물이 필요하다. 이 사명을 위해서 도망치지 않고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하다고 간구한 것이다. 바로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간구하는 바로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주어지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를 한 번 돌아보면 좋겠다.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시며 참 안타까워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마태복음 6장 31-33절이다.

.*마태복음 6:31-33,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해서 가르쳐 주신 아주 중요한 말씀이다. 얼마나 많은 기도를 하늘에서 들으셨겠는가? 그런데 기도의 내용을 잘 들어보면 무엇인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면서 내 생활의 안전한 지대를 벗어나지 않은 채, 좀 더 많은 축복, 좀 더 많이 흡족하게 살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응석을 부리듯이 하는 그것이 바로 우리가 구하는 기도가 아니었나? 하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돌아보게 된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우리의 기도의 모습이 이러지 아니한가? 미래에 대한 염려와 불안 때문에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 모르는 그런 세상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은행이 흔들리고 있는 이런 시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하나님, 나를 보호하여 주시고, 이 모든 환난에서 나를 지켜주시라고 우리는 기도하고 있다. 기도 안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기도가 무엇인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라고 말씀하신다. 바로 악사와 옷니엘이 네겝 땅을 향하여 가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구하듯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명을 위해서 살아가는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듣기 원하신다.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듣기를 원하시는 기도가 하나 더 있다. 시편 2장에 나오는 기도이다.

*시편 2:7-8,
7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8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듣기 원하시는 기도, 바로 2장 8절이다. 아까도 말했듯이 우리는 땅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확실한 약속을 주시는데 여러분, 이 기도를 해보신적이 있는가? 이방나라를 유업으로 구하는 기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듣기 원하시는 기도는 이 정도의 기도이다. 마치 네겝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기 위해서 사명을 위해 살아가듯이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지 않은 땅,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다스려지지 않은 불모지와 같은 땅, 바로 그것이 우리 가족일 수 있고, 우리 직장일 수도 있고, 아니 한참 라마다 기간에 하나님을 모른 채, 잘못되게 열심을 살아가고 있는 선교 현장일 수도 있다. 바로 그런 선교 현장을 품고 아버지 하나님, 그 땅이 하나님이 다스리는 땅,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땅, 하나님께 예배하는 땅으로 되기를 원한다고 그 열방을 향해서 부르짖는 그 기도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도를 하다보면 하나님께서 마음을 주신다. 그 땅을 이제 네가 취라고 마음을 주셨을 때, 그와 같은 마음을 품고 담대한 응답을 향해 가는 그러한 순종의 발걸음이 선교를 위한 기도이고, 또 전도를 위해 기꺼이 내 입을 벌려서 하나님 말씀을 담대히 증거 하는 그와 같은 모습일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모습,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아멘.

하나님께서 우리가 담대한 믿음과 담대한 기도로 살아갈 때, 하나남께서 그 기도의 응답을 주시리라 약속하신다. 우리가 이 시대에 그러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를 하나님께서 찾고 계심을 확신하기 바란다.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께서 사명을 감당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책임지시며, 기도를 응답하시는 내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가장 필요한 땅을 위해서 내가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저 북한 땅이 변화되게 하시며, 저 아랍 민족들이 주님께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하나님을 모르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온 땅 가운데 널리 퍼지게 되기를 소원하고 간구하자. 우리의 기도가 땅 끝까지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순종하며 그리고 그 땅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믿음의 사람들이 우리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땅위에서 살아가는 많은 선교사들이 있다. 그 선교사들이 믿음의 영웅과 같이 나가 있지만 우리의 기도와 함께 그것을 위해서 싸우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 땅을 하나님의 땅, 우리의 소유의 땅으로 변화시키실 것이기에 그렇다. 우리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이 약속을 붙잡고 더욱더 주님의 나라를 꿈꾸며 믿음의 다음 세대가 힘 있게 일어나서 갈렙에 의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용기를 얻었듯이 또 옷니엘이 일어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혼란의 시기에 첫 번째 사사로 그 땅을 변화시켰듯이 계속된 믿음의 계승으로 또 믿음의 사람들로 말미암아 이 한국교회가 온 열방을 주님께로 돌이키는 제사장 나라로써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는 주님의 백성이 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사용하여 주시길 다시 한 번 우리가 간절히 소망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와 같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쓰임 받게 되는 그러한 하나님의 백성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요약
갈렙의 신앙이 딸 악사와 사위 옷니엘에게 이어져 믿음의 명문가문이 되어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듯이 우리와 한국교회가 선대의 강점을 다음 세대들에게 체계적으로 계승하여 세계 선교에 사명을 감당하는 자가 되고, 제사장 나나로 쓰임 받으며,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황무지 같이 열악한 복음의 불모지와 세계선교 현장으로 찾아가 그곳을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로 변화시키는 부흥 도구의 주인공들로 헌신하며 십자가의 길을 위해 걸어갈 때, 위샘과 아랫샘의 은혜로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더욱 더 담대하게 믿음보고를 써 가는 부흥의 용사로 쓰임 받아야 한다.

-이 갈렙의 이 마지막 행적을 통해서 믿음의 다음세대를 준비하는 갈렙의 모습을 보고 우리 가운데서도 다음세대들이 필요함을 깨달아서 편안한 그런 곳이 아닌 네겝 땅과 같은 황무지에서도 주님을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축복하시며 그들을 끝까지 지키시는 모습을 교훈삼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다음세대를 잘 세우고, 다시 한 번 그 믿음의 세대들이 그 땅을 밟고 그 땅을 책임지는 세대가 되기를 소원한다. 한국교회가 이제는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믿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우리가 그것을 구하면 우리는 주님이 일을 해주심을 믿어야 한다. 매일 삶이 네겝 땅 같이 황무지에 놓여 있다할지라도 주님 붙들고 나아가면 부족함이 없는 줄 믿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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