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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주후 2023년 4월 5일) 제목: "사랑으로 덮어주다" 말씀: 마가복음 14:66~72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구성찬 부목사님 ㅡㅡㅡㅡㅡㅡ *마가복음 14:66~72, 66 베드로는 아랫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와서. 67 베드로가 불 쬐고 있는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68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 69 여종이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 하되. 70 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 71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72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 ------------------ ▶고난 주간에 이렇게 부흥보고 수요저녁기도회에 나오신 여러분을 주님이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한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고난주간에 비를 뚫고 오신 만큼 예배의 특별한 은혜를 한 분 한분에게 내려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이번 한 주간 고난주간을 보내고 있다. 고난주간이어서 십자가를 더 애쓰다보니까 평소 일상이 그냥 지나치던 것도 또 다른 시각으로 이렇게 바라보는 것 같다. 지난 월요일에 이렇게 운전을 하고 가다가 신호를 대기 중이었는데 앞에 횡단보도에 예쁜 안전모를 착용하고 보호 장구를 착용한 아이가 킥보드를 타고 쌩하고 지나갔다. 엄청 신나보였다. 그런데 그 뒤로 그 아이의 것으로 99% 추정되는 가방을 들고 느낌상으로 세수를 하지 않아서 모자를 꾹 눌러쓰고 그 아이의 뒤를 종종 걸음으로 쫓아가는 엄마로 보이는 한 여인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제 마음에 어떤 생각이 확 들었냐면 ‘혹시 내가 하는 신앙생활이 저런 모습이 아닐까?’ ‘나는 하나님의 은혜 받고, 하나님의 보호하심 구하면서 어떻게 하면 내 인생에서 더 즐겁고 누리면서 살지?’ ‘어떻게 하면 내가 더 행복하고 즐겁게 살 수 있을까?’ 라고 생각에 킥보드를 타고 나가는데, 뒤에는 내가져야 될 십자가를 대신 지신 예수님이 힘겹게 내 뒤를 쫓아오고 있는 모습, 그것이 나의 신앙생활이 아닐까? 고난주간 이다보니까 킥보드를 보고 별 생각을 다한다. 그 아이를 정죄하려는 의도는 전혀 아니다. 그와 동시에 그런 상황을 장악하면서도 여전히 나는 세상살이가 너무 피곤하고 힘드니까, 내 신앙 수준은 그 정도는 아니니까, 내 신앙의 연수는 그만큼은 안 되었으니까 라고 이야기 하면서 나 자신의 어려움에만 집중하고 예수님의 그 십자가는 외면하는 삶을 어떻게 보면 너무나 이기적인 삶을 내가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난 며칠 동안 그 생각과 고민을 해보았다. 만약 이런 이야기를 제가 태신 자로 품고 있는 친구에게 이야기를 꺼냈다면 그 친구의 반응은 100% 이것일 것이다. “너 인생 참 피곤하게 산다. 인생 다 즐기면서 사는 것인데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사냐?”고 할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까 왠지 우리는 세상을 피곤하게 사는 것 같다. 오늘 하루도 열심히 일하고 지내셨을 텐데, 비도 오고 찌뿌등 하면 집에 가서 좀 쉬시지 굳이 이 안아주심의 본당까지 비를 뚫고 오셔가지고 예배드리려고 앉아계신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참 세상 피곤하게 사십니다. 우리 옆에 있는 분들에게 “세상 참 피곤하게 사십니다.”라고 인사는 안 하겠다. 굳이 피곤한데 인사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저는 이 피곤이 너무 좋다. 세상 사람들은 하지 않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고민하고, 피곤하기까지 한 이 생활이 너무나 좋다. 물론 자꾸 이런 자꾸 고민을 하다보면 다크써클은 자꾸만 짙어지고 커지고 눈은 퉁퉁 붓고 어깨부터 시작해서 근육통은 한두 군데는 다 알고 있고, 굳이 안 가져도 되는 죄책감을 스스로 느끼면서 왠지 내 자존감까지 살짝 떨어지는 것 같은 그러한 삶, 그런데 어떻게 이것이 행복할 수 있는가? 왜일까? 이 피곤을 넘어서서 이 세상의 모든 죄를 자신이 짊어지시고 이 걸음을 걸어가시는 그분이 계시기에 나의 연약함과 나의 죄책감과 나의 허물과 부족함으로 인하여 좌절하고 쓰러질까봐 그 짐을 대신 져 주시며 이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이 내 곁에 계시기에 때로는 피곤하고 굳이 ‘그렇게까지 사냐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우리는 너무 행복한 거 아닌가? 그런데 이 행복을 알고 있는 한 사람이 있다. 그 고백을 함께 읽도록 하겠다. 베드로의 고백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게 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다. -우리처럼 고민하고 피곤했던 베드로의 고백이다. 읽으면서 어떤 느낌이 드는가? 확신에 차 있지 않은가? 정말로 예수님이 주신 살아있는 소망, 산 소망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베드로는 영 가족들을 권면하면서 사랑하는 목자의 심정을 담아서 이 고백을 하고 있다. 그런데 베드로가 처음부터 이러했는가? 고백을 했는가?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더 느꼈겠지만 그는 실패한 제자이다. 폭 망한 제자이다. 3년 동안 예수님의 오리지널 제자훈련을 받았고 그리고 우리의 제자 사역보다 훨씬 더 밀도 있는 훈련을 받았으며 3년 동안 예수님과 먹고 마시면서 정말 하나님과 함께 했던 그 임재를 누리며 함께 했는데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는 가장 열정적인 순간에 그는 실패했다. 회복불가, 재생 불가 상태가 된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어떻게 베드로전서를 이렇게 기록하면서 확신에 찬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인가? 오늘 말씀에 통해 예수님께서 실패자 베드로를 초대 교회 반석과 같은 사도 베드로가 될 수 있도록 사랑으로 덮어주신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동시에 지금 이 시간 우리를 사랑으로 덮어주고 계신 그 예수님을 만나는 이 저녁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첫 번째 이야기로 들어가 보겠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대제사장의 관저에 예수님이 끌려가 심문 받는 장면으로부터 이어진다. 아예 ‘신성모독’이라는 죄명을 정해놓고 거짓 증인을 동원해가지고 이 야밤에 진행하는 불법 심문 그 현장에 이 베드로가 따라왔다. *마가복음 14:54, 54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아랫사람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 -베드로가 어떤 제자였는가? 베드로는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따르던 예수님을 정말 사랑하는 제자였다. 그런데 그렇게 예수님을 따르던 베드로가 예수님이 세상의 강력한 권력 앞에 무기력하고 그 힘을 잃고 따라가시니까 가까이 있지 않고 멀찍이 거리를 두고 예수님을 따라간다. 사실 우리도 평소에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이렇게 늘 가까이 따르는 삶을 살고자 하지만 우리는 바람과는 달리 때로는 예수님을 베드로처럼 멀찍이 따라갈 때가 있는 것 같다. 생각지도 못한 변화된 환경에 압도되고 일상에 자잘한 그러한 유혹에서 결국에 넘어지고 마는 제 자신을 볼 때가 참 많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훈련 받고 살면 무언가 막 일어나고 영적으로 충만하면 하나님이 내 앞에 어떤 역사가 확 일어나게 해 주실 것 같은데 현실은 그래인 것이다. 그 현실 속에서 자꾸 무기력해지고 내게 다가온 그러한 저항들을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이다. 너무 강력한 벽처럼 느껴진다. 정말 성경에 다윗처럼 그 벽을 뛰어 넘는 그러한 제자로 살고 싶은데 그냥 그 벽에 낙서 밖에 못하는 것처럼, 무기력하게 세상 속에서 능력을 잃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때가 있다.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 무기력하게 느껴지는 우리 약함 속에 하나님의 강함이 숨겨져 있는데, 이 베드로처럼 우리도 눈에 보이는 강함은 강함이고, 강함이고, 약함이 그 강함 앞에 무기력하다. 그것을 느끼면서 멀찍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 같다. 이런 베드로를 보며 종교 개혁자 존 칼빈은 자신의 주석에서 이렇게 해석한다. 이미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 앞에 30절에서 보면, ※제자로서 자기 선생의 뒤를 따르는 것은 임무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범한 실수를 경고 받고 있었던 터이므로 죄짓는 자 장에 뛰어들지 말고 어느 구석에 숨어 있어야 했다. -존 칼빈- *마가복음 14:30, 3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이미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 앞에 30절에서 이 밤에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3번 나를 부인할 것이라고 예언을 하셨기 때문에 이런 주석을 한 것 같다. 그런데 오늘 감히 이 종교개혁자 존 칼빈의 주석과 반대되는 해석을 하고자 한다. 베드로는 그 자리에 가서 그 상황을 직면해야 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철저히 깨어지고 부서져야만 했다. 왜인지 오늘 현장으로 가서 살펴보고자 한다. 오늘 본문 66절을 보자. *마가복음 14:66, 66 베드로는 아래 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와서. -예수님이 심문 당하는 곳에까지 와서 그곳 분위기를 살펴보고자 아래 뜰까지 왔다. 그런 그에게 무언가 긴장감 느껴지는 그에게 군인이나 조사관이 와서 보고한 것이 아니라, 여종 하나가 그에게 다가와서 베드로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마가복음 14:67, 67 베드로가 불 쬐고 있는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왜 불을 쬐고 있었는가? 추워서?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거기 와서 혼자 뻘쭘하게 따로 서 있는 것이 눈에 띄니까 그 속에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것처럼, 그 사람들 사이에서 불을 쬐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런데 한 가지 생각을 못했다. 불 앞에 있으니까 얼굴이 더 잘 보이는 것이다. 여종이 거기서 봤다. 너 혼자 있다. 너는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평상시라면 이런 여종의 말에 웃기지 마, 화가 들 건데 그날따라 두려움이 그를 장악했는지, 이렇게 반응한다. 68절에 보면 *마가복음 14:68, 68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 새. -베드로는 여종의 말을 부인한다. 부인한다는 것은 부정하다, 거부하다, 인정하지 않다. 이런 의미를 담고 있다. 더 이야기 한다면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거부하고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과 가장 가까웠던 제자가 그러는 것이다. 왜냐면, 이 정도 강도로 이야기 하면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겠지, 라고 생각한 것이다. *마가복음 14:69, 69 여종이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 하되. -그 집요한 여종이 끝내지 않는다. 이제는 여종이 옆에 있는 사람과 함께 이 사람 그 사람이 도당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가 어떻게 반응한가? *마가복음 14:70, 70 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 -섬찟 했을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거부하고, 인정하지 않는데 다른 사람들이 또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것이다. 어떻게 알아봤냐면 학자들은 당시 이 갈릴리 억양이 독특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경상도 억양이 독특한 것처럼 이야기 하면 알아듣는 것이다. 아무리 베드로가 완벽하게 억양을 바꾸어 본다고 해도 “네가 무슨 말을 하든지, 나는 모르겠어.” 라고 아무리 서울말을 이렇게 써도 표가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다보니까 어디까지 가냐면 71절에 보면, *마가복음 14:71, 71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며 예수님을 이 사람으로 지칭하고 부인한다. 이 표현을 봤을 때, 뭔가 가까이 있었던 것 같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상급의 부인을 한 것이다. 완전히 그 예수님의 사랑을 부인한 것이다. 여기 보면 부인의 강도가 강해진다. 처음에는 작던 죄가 나중에는 눈덩이처럼 커지듯이 “몰라, 나 이사람 몰라” 하던 것이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는 것이다.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자기 합리화가 갈수록 강도가 더해지는 것과 같은 특징이다. 이때 결정적인 소리가 들려온다. 우리 72절을 함께 보자. *마가복음 14:72, 72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 - 닭이 두 번째 운다. 베드로는 이 닭이 두 번째 우는 순간 기억했다. 무엇을 기억했는가? 제자들이 같이 둘러앉아서 치킨을 먹고 있는 모습을 기억했는가? 닭이 우니까,,, 아니면 열병을 나았던 닭 도리 탕이 생각났을까? 비가 와서 다를 다운되어 있을 것 같아서 이야기 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어떤 상황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났다. 말씀이 기억되니 그 일을 그가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닭 울음소리가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났다. 우리는 실수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실수를 할 때, 우리가 양심의 찔린 정도로 넘어가면 금방 쉽게 그 일을 저지르고 만다. 아주 쉽게 만성이 되어서 그렇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기억나서 말씀으로 인해 내 마음과 자아가 깨어지고 부서지는 그런 회개를 하면 물론 다시 반복해서 실수는 할 수 있겠지만 이전처럼 쉽게 넘어지지는 않는다. 왜냐면 하나님의 말씀에는 그런 능력이 있다. 베드로에게는 자신의 잘못이 말씀에 비추어 자아가 완전히 깨어지고 부서지는 완전한 회개가 바로 이 자리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만약에 이 일이 없었다면 베드로는 어땠을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잡혀가실 때에, 그나마 칼을 빼서 대제사장 말고의 귀를 베었던 사람이 베드로 아닌가? 제자가 다 모여 봐도 다 같이 도망간 처지에 ‘그나마 칼을 빼어서 귀를 베었던 사람은 손 들어봐!! 그래 내가 그래도 제자 맞지.’ 베드로의 혈기가 쉽게 죽었을 것 같지가 않다. 이 사건이 없었다면, 그런데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말씀에 완전히 자기 자신을 비추어 자아가 산산이 깨어지고 부서진 베드로는 회개의 자리로 내려간 것이다. 낮아지려고 해도 그 혈기 때문에 그 낮아지지 않았던 그 베드로가 이 사건으로 인해서 완전히 바닥까지 내려간다. 이것이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어야만 하는 이유이다. 그런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다. 요한복음 20장에서 부활하신 저녁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였다. 예수님께서 못 박힌 손과 창에 찍힌 옆구리까지 직접 보여주시면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스승이 부활하셔서 돌아오신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이긴 것이다. 그 모습을 봤다면 베드로는 어떤 반응을 해야 하는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 사람들아 보아라, 로마군병도 어쩔 수 없는 예수님이 살아나셨다.” 이게 베드로가 보여주어야 할 반응이 아닌가? 요한복음 21장 3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요한복음 21:3,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음에도 다시 물고기를 잡으러 간다. 철저한 낮아짐을 통해 지금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 베드로의 이 실수는 예수님의 그 계획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베드로가 부인했을 때, 예수님은 “아니 네가 어떻게 네가?”라는 논란이 아니라, “네가 그런 실수를 하더라도 나는 너의 허물을 나의 사랑으로 덮어주겠다.” 는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예견된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22장 31-32절을 함께 보겠다. *누가복음 22:31-32, 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예수님께서 잡히시는 날에 마지막 만찬에서 하시는 말씀이다. 베드로가 부인하기 전에 저 이야기를 하신 것이다. 사탄이 가만 두지 않고 계속해서 이 제자의 길을, 이 제자 도를 포기하도록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지만 누가 기도했는가? 예수님이시다. 베드로가 부인하기 전부터 예수님은 알고 계셨다. 그리고 사탄이 그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하는 순간 베드로와 사탄을 막아서셔서 “내가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라.” 라고 하시는 그 예수님, 이 예수님의 계획 속에서, 사랑 속에서, 예수님은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참으로 돌이키게 하는 것을 이미 예고 하셨다. 지금도 사탄과 우리 사이를 막아서셔서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계신 그 예수님을 이 저녁에도 의지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기도와 당부만 하신 것은 아니다. 이 기도와 당부에도 완전히 바닥을 치며 예수님의 제자로서 자격이 없다고 철저하게 부서지고 깨어진 베드로를 찾아가신다. 그리고 또 물고기를 못 잡고 있는 그에게 처음 만난 축복처럼 만선의 축복을 주신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이 주신 것을 알고 예수님께 헤엄쳐 왔을 때, 그에게 떡과 생선을 구워주신다. 개인적으로는 이 때 예수님이 생선을 굽고 계신 것이 아니라, 통닭을 굽고 계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도 잘 안 나온다. 그리고 이야기 하실 것이다. ‘베드로야, 이리 와라, 이놈이 그 두 번째 울었던 그 닭이다.’ ㅋㅋㅋ!!! ‘특별히 이 목살은 네가 먹어라. 이 목살을 먹고 죄책감에서 놓여나고 치유함을 받아라.’ 아마 이런 생각을 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하는데 다들 비슷한 것 같다. 예수님은 저처럼 수준이 낮지 않으셨다. 다시 한 번 만선의 축복을 통해서 처음 그를 찾아왔던 것을 생각나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불가에 앉아서 헤엄쳐 왔으니 얼마나 춥겠는가? 몸을 녹이고 있는 그 베드로, 베드로는 처음 예수님을 만났던 것을 생각했던 동시에 한 가지가 더 생각났을 것이다. 예수님을 부인할 때, 불을 쬐고 있었다. 그 불이라는 단어와 그리고 예수님이 그 생선을 굽고 있는 불과 같은 의도라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나를 부르셨던 그곳에서 예수님을 부인하던 그 기억에 불에다가 생선을 구워서 베드로를 먹이고 계신다. 아픔의 불이 그에게 있어서 자꾸만 그걸 보는 순간 트라우마가 생각나는 그 불이 처음 그를 찾아오셨던 그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의 굶주림, 자신의 허기짐, 누구도 채워줄 수 없는 그 배고픔을 채워주시는 따뜻한 사랑의 도구가 된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르신다. “내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라고 예수님은 다른 것을 묻지 않으셨다. 저 질문만 세 번을 물으셨다. 그 질문 속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냐면 “베드로야 나는 네가 세 번 부인 한 것이 중요하지 않다. 나한테 중요한 것은 네가 나를 지금도 사랑하느냐?”고 묻고 있다. 제자의 자격은 “네가 어떠한 일을 해내고 너에게 능력이 어느 정도까지가 아니라 거기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또 실패할 수 있다. 네 제자라도 나를 부인할 수 있다. 무너질 때가 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네가 나를 지금도 사랑하고 있나?” “너 정말 지금도 나를 사랑하니?” 베드로에게 사랑을 가르치시는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묻고 계신다. 고난주간을 보내며 십자가를 묵상하는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예수님은 얼마나 십자가의 복음을 얼마나 많이 원하시는지, 밖에 나가서 전도를 몇 명 했는지, 너의 성화의 단계는 어느 단계까지 갔는지, 이러한 질문을 하시기 전에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오늘 우리에게 던지고 계신다. “너 정말 나를 사랑하니?” 이 자리에 저녁 ‘수요기도회’를 드리는 지체들보다 네가 나를 정말로 사랑하니? 라고 하신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자훈련, 사역훈련의 완성된 최종상태가 어떠한 정도라고 생각하는가? 완벽한 훈련 큐티와 완벽한 IBS, 완벽한 로마서 8장 암송? 아니다. 저는 이 고백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 저는 예수님을 세상에서 제일 사랑합니다.” 마치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것처럼 순간순간 내 삶을 살아가고 있고 여전히 나의 삶의 부족하고 훈련의 마무리를 하면서도 나의 허물과 부족함이 여전히 나를 찔러 오지만 그래도 부족하지만 나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 “저는 예수님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합니다.”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곧 그에게 죄를 고하리라. 큰 은혜를 주신 예수 되오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엎드려 비는 말 들으소서 내 진정 소원이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지난주일 설교 중에 담임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세 가지 적용 중에 두 번째가 바로 이 내용이 아닌가? 주님을 더욱 사랑할 결심, 이 고백과 사랑의 결심이 가능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기 전에 내가 예수님을 알기도 전에 예수님이 나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이다. 오늘 설교 제목처럼 우리 모두의 죄와 허물을 사랑으로 덮어주셨기 때문이다. 이 사랑이 마의 모든 부족함과 허물을 덮어주셨다. 지금도 예수님의 십자가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증언하고 계신다. 나는 너의 처절하고 실패한 그 신앙생활, ‘네가 감당하기 어려워하는 그 자꾸만 넘어지는 그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졌단다.’ 예수님은 아셨다. 우리가 구원 받은 이후에도,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순간에도 제자훈련 받고, 사역훈련 받고, 순장사역을 하고, 목사로 설교하는 이 순간에도 내 삶의 여정에서는 여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죄의 문제들이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은 아셨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허물과 치욕까지도 덮어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있기에 우리는 베드로가 고백했던 것처럼 살아있는 소망, 산 소망이 있는 줄 믿는다. 이 사랑으로 덮어주심이 우리를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이끌어 가실 것이다. 말씀을 마무리 하겠다. 베드로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오순절 성령 강림의 때에 예수님을 부인할 때와 동일한 곳인, 동일한 바로 예루살렘에서 담대하게 그 예수님을 증거 한다. 진짜 사람 낚는 어부, 진짜 증인이 된 것이다. 우리 베드로의 사도행전 2장 설교에 마지막 구절을 함께 읽겠다. *사도행전 2:36, “그런즉 이스라엘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 저는 이 사실을 읽을 때 전율이 일어난다. 세상 권력이 너무나 두려워가지고 내가 사랑하는 예수님이 저 앞에 있는데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고, 맹세하고, 거부하고, 부인하던 그 베드로가 그 세상 권력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제는 “너희는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이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이전에 부인의 상처가 저는 이때 완벽하게 치유되었음을 믿는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그 죄와 허물, 신앙생활에서 자꾸만 넘어지는 그 처절한 실패와 무너진 삶을 이제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셨던 것처럼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사랑으로 덮어주고 계신다. 다시 그렇게 신앙생활 못한다고? 다시 이전처럼 뜨겁게 전도를 못한다고? 다시 이전처럼 뜨겁게 기도를 못한다고? 다시 그 예전처럼 사랑으로 못 섬긴다고? 이것은 사탄의 밀 까부르듯 하는 소리에 불과하다.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것 같아도 사탄이 자꾸 그런 마음을 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내가 왕년에 이렇게 신앙생활 잘했어, 내가 그때는 말이야 전도를 100명씩 했어.’ 예수님은 왕년에만 예수님이신가? 지금 우리 예수님이 아니신가? 나를 무너뜨리는 그 분만 바라보지 말고, 내 곁에서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 다시 바라보시기 바란다. 지금도 나를 사랑으로 덮어주셔서 다시 일어나도록 이 말씀을 통해 산 소망을 주고 계신 우리 주 예수님을 이 저녁에 더 깊이 바라보시기 바란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던 그 자리에서 누가는 ‘베드로가 세 번째 부인하고 닭이 울었을 때,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라고 증거 한다. 왜 보셨는가? 세 번 부인했다고? 아니다. 다시 살리시려고, 다시 살리시려고 그가 이제 나가서 울고 쓰러지고 완전히 깨어지고 부서질 것을 그분은 아셨기 때문에 ‘내가 너를 살리겠다.’고 바라보셨다고 저는 확신한다. 오늘도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로 살려고 애쓰다가 쓰러진 여러분을 그 베드로를 바라보시는 동일한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계신다. 고난주간 가운데서 나를 사랑으로 덮어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고 마침내 그 십자가에서 우리를 향한 그 사랑을 완성하시는 예수님 앞으로 더 가까이 나아가 기도하는 이 저녁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요약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는 예수님의 말씀에 내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삶으로 응답하는 자로 매일의 일상이 되고 우리가 알게 모르게 우리 주님을 얼마나 부인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예수님을 부인하던 자리에 있던 부족한 나를 살리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그 사랑을 날마다 기억하며 영 가족과 이웃을 사랑으로 덮어주는 자로 살아야 한다. 세밀하게 아시는 주님께 감사와 영광 돌리는 삶으로 살아가 지금 이 시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네,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삶으로 응답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도 가족과 지체들을 그리고 형제와 이웃을 사랑으로 덮어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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