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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4월 12일) 제목: "쉼 없는 은혜" 말씀:이사야 62:6-7 찬양인도: 쉐키나(유재원 부목사님) 설교자: 김도훈 부목사님 ------------------ *이사야 62:6-7, 6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주야로 계속 잠잠하지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7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 ----------------- ▶주전 721년 북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당했을 때 남 유다와 주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북 이스라엘이 벌을 받았다 생각을 했다. 그런데 130년 정도 지나서 남 유다까지 바벨론에 망하고 끌려갔을 때에 이제 모든 이방 사람들은 ‘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전체를 버리셨구나!’ 하고 비웃었다. 젖과 꿀이라고 알려졌던 가나안 땅은 이제 버려져서 그들의 죄악 때문에 선지자를 통해 예언된 대로 황무지와 같이 되었다. 그래도 오늘 본문 읽었듯이 6-7저을 보면, *이사야 62:6-7, 6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주야로 계속 잠잠하지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7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 -너의 성벽 위해 파수꾼을 세우겠다와 예루살렘을 세워 찬송을 받겠다는 것을 보아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하시는 그 마음과 분위기 그 모두가 심판에서 회복, 저주에서 복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마음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증거가 오늘 본문 4절에 나온다. 우리가 4절을 함께 읽어보겠다. *이사야 62:4, 4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택한 백성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잡혀가고 버림받은 자들이었다. 그 땅은 정말 황무지가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름을 바꾸셔서 그들의 이름을 햅시바로 그들의 땅을 쁄라라고 부르기로 하셨다. 여기서 햅시바는 신랑이 신부를 두고 하는 고백이다. ‘내 기쁨이 그녀 안에 있다.’는 뜻이다. 쁄라는 결혼한 자, 라는 결혼한 여자, 기혼자라는 뜻이다. 하님께서는 마치 호세아 선지자가 집나간 자기의 아내 고멜을 다시 데리고 와서 사는 것처럼 이 죄악 된 이스라엘을 다시 아내로 삼아서 버림받은 자를 기쁨으로 삼으시고, 황무지를 책임지고, 돌보시는 땅으로 만드시겠다고 선포하시는 것이다. 혹시 주위에 주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버림받은 황무지와 같은 인생을 살다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아 다시 기쁨이 되는 인생으로 바뀐 사례를 알고 계시는가? 저는 오래 살지 않아도 저를 포함해서 몇 몇 분이 떠오른다. 그 중에 한 명은, 어릴 적 주일학교를 다니던 친구가 있었는데 이 친구는 가장이 좀 불우했다. 이 친구는 고등학교 때에 곁길로 나가게 되고 스무 살이 되었을 때에는 자기 개인 소유로 가지고 있는 도박장을 차릴 정도로 아주 많이 곁길로 갔다. 이 친구는 고향을 떠나 한참 못 보다가 우연히 이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어디서 만나냐면 말씀 집회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 사이에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알고 보니까 돈과 사람 때문에 고생도 많이 하고 국가 기관에서 벌도 좀 받고 이제 다시 돌아와서 주님 앞에서 착실하게 살고 있더라는 것이다. 교회 열심히 다니면서 교회서 목사님이 말씀 집회에 한 번 참석하라고 하셔서 왔다고 했다. 너무나 감사했다. 정말 걱정을 많이 했고 어떻게 할 수가 없었는데 그 뒤에 한 번씩 문자를 받으면서 그 친구 문자 뒤에는 항상 성이 ‘이씨’였는데 이OO 집사 라고 이렇게 써 있었다. 다소 적응이 잘 안 되었지만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성경에서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택한 백성으로써 드라마틱한 삶을 경험한 사례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 오늘 본문 이사야 본문이 이전에 있었던 유명한 사례가 있는데, 버림받은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사사기 시대에 나오미와 룻이다. 나오미는 이방 땅에서 남편도 먼저 잃고, 아들 두 명도 먼저 보내고 다 망해서 고향 땅으로 돌아오게 된 비운의 여자이다. 그런데 세상 적으로 보나, 현실적으로 보나 옆에 있는 룻은 조금 더 망가진 인생이다. 무슨 망한 인생, 나오미의 버금 딸림으로 붙어있는 인생이다. 그 인생이 어디에 붙어있냐에 따라 많이 다를 수 있는데, 다 망한 인생 옆에 또 붙어있다. 고향이 아니라, 타향으로 오게 되었다. 남편이 죽었고 자녀가 없다. 예정이 없다. 유일하게 있는 분이 어머니이다. 앞에 ‘시’자가 붙어있는 시어머니가 계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 룻이 참 특별하다. 무슨 일인지 용하게도 시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고, 시어머니가 죽는 곳에 나도 죽겠다고 고백을 하며 이방 땅 베들레헴까지 쫓아온 것이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모압 땅에서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경험을 하게 하신 것 같은 은혜를 주셨다. 세상 적으로나 육적으로는 망한 것 같지만 실제로 영적으로 깨어있었다. 사실 이 정도 결단을 실천한다고 생각한다면 저는 룻이 베들레헴 들어오자마자 하나님께서 그냥 은혜를, ‘복을 가득 넘치게 주셨으면 좋았겠다.’하는 생각이 드는데, 하나님께서 베들레헴에 오자 갑자기 복을 주시지 않으셨다. 룻이 처음으로 들어와서 바로 이삭을 줍는 일이었다. 사실 이삭을 줍는 것은 자기의 기업이 없거나 또는 정말 소작도 할 수가 없어서 이삭을 주워야 하는 빈궁(貧窮)한 삶을 의미한다. 나오미와 룻은 정말 먹고 살기가 굉장히 힘들었던 것이 분명하다. 기도하며 살기를 쫓아서 떡집이라는 베들레헴 고향에 왔지만 먹고 살기란 막막한 것이다. 그때 룻이 내가 나가보겠다고 이삭을 주우러 나갔는데 사실 어디에 갈지, 누구를 따라가야 할지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고 할 수도 없고 그냥 그렇게 나온 것이다. 눈칫밥을 먹으면서 굉장히 생각만 해도 민망하다. 한 쪽에서는 추수를 한다고 계속 이렇게 이삭을 베는데 그걸 떨어지기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흘리기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떨어뜨리면 주우려고 기다리는 것이다. 얼마나 민망한 삶인가? 그런데 이런 룻의 모습을 보고 보아스가 이것을 보고 묘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룻기 2장 7절을 같이 읽어보자. *룻기 2:7, 7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 -그냥 좀 따라다니게 해달라던 룻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억척스럽게 일을 하는 것 같다. 거의 쉬지도 않고 그리고 보리추수와 밀 추수를 마칠 때까지 아주 성실하게 쉼 없이 감당한다. 룻은 하나님을 신뢰하면서도 믿으면서도 그가 해야 될 것 같은 사소하지만 먹고 살아야 되니까 그 일을 충실히 성실히 하고 있다. 저는 룻을 보면서 저는 룻을 보면서 제가 어릴 때, 그 시절 어머니들, 집사님, 권사님들이 생각이 났다. 그 어려울 때, 자식들을 위해서 도시락을 열 개씩도 싸고 밖에서 일을 억척스럽게 일을 하시고 또 집안일을 하신다. 제가 아는 권사님은 젊을 때 손톱을 깎아보신 적이 없다고 하신다. 노동일을 하시는데 왜냐면 손톱이 다 달아서 깎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손톱 귀퉁이만 깎아내면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셨다. 그런데 이 분들이 그렇다고 해서 절망 가운데 슬프게 사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실히 교회를 섬길 수 있어서 행복해 하셨고, 늘 찬송하고 기도할 수 있어서 감사해 하셨던 모습이 기억이 난다. 이따금 정말 세상에서 억울하고 울고 싶을 때, 교회에서 참 신랑 되신 주님 앞에서 실컷 다시 힘을 내셨다. 이들로 말미암아 가정이 살아났고, 자녀들이 신실하게 커 가는 것을 보았고 그리고 교회가 은혜롭게 확장되는 것을 보았다. 억척스럽게 쉬지 않고 일을 하던 룻의 결말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스스로 나아가려는 그 성실, 그 쉼 없이 일하는 그 성실이 보아스에 성실을 불러왔다. 보아스와 룻이 하나가 되면서 복을 받게 되었다. 참으로 버려진 인생과 같은 룻이 나오미의 인생까지 한 가문의 기쁨이 아니라, 온 이스라엘 기쁨의 헵시바가 된다. 그 가문에서 다윗 왕이 나오고 예수 그리스도까지 그 혈육에서 나온다. 하나님께서 바로 그 은혜를 허락하셨다. 주인 없는 그 황무지와 같은 그 땅이 기업이 그 뿔라, 그 기업이 누군가 책임지는 땅이 되었다. 이 모든 복과 은혜를 누가 허락하셨는가? 우리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때마다 계획하시고 필요할 때마다 공급하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큰 은혜를 주실 때, 룻의 성실함을 사용하셨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에 있어서 우리의 어떤 성실함도 사양하지 아니하신다. 믿음도 하나님께서 주시오, 구원도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의 어떤 공로도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심에 쓰일 수가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뿐이다. 그런데 이 땅에서 주의 백성이 살아갈 때, 주님을 닮아가고자 할 때, 사명을 감당하고 할 때,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에 은혜와 복을 주시고자 할 때는 주님께서는 그 자녀의 성도의 그 제자의 성실함을 사용하신다고 한다. 쉼 없는 섬김과 사역을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결국 주님의 자녀의 성실함은 은혜와 복의 통로가 된다. 이것이 성실함의 첫 번째 국면이다. I. 성실의 첫 번째 국면: 은혜와 복의 통로.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사야 본문을 통해서 또 다른 국면을 말씀하신다. 주님의 일꾼에 성실을 사용하신다고 하시는데 6절에 있다. *이사야 62:6, 6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주야로 계속 잠잠하지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그 땅을 향하여서 너희는 헵시바, 그땅은 뿔라 라고 말씀하시고 모든 것을 책임지시고 기뻐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제는 예루살렘을 지키기 위해서 파수꾼을 그 성벽 위에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들에게 성실하게 그 일을 감당하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이 파수꾼들의 성실을 통하여서 무엇을 지키신다는 것인가? 예루살렘을 지키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실의 두 번째 국면이다. II. 성실의 두 번째 국면: 하나님 나라를 보호. -그렇다면 이 파수꾼이 누구인가? 이들은 왜 ‘여호와로 기억하시는 자.’라고 이야기를 하는가? 원래 파수꾼은 일차적으로 적의 동태를 살펴서 그것을 보고하는 것이 첫 번째 임무이다. 잘 전달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파수꾼의 역할이 독특하다. 밤에 소리를 잘 들으려면 조용히 해서 잘 들어야 한다. 오히려 이들은 잠잠하면 안 되는 것이다. 쉼 없이 무엇인가를 말을 해야 한다. *이사야 62:6, 6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주야로 계속 잠잠하지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이 여호와로 ‘기억하게 하는 자’들이란 이 단어가 이사야서에 한 번 더 나오는데 무엇이냐면 ‘사관’이라고 나온다. 사관이 뭐하는 사람이냐면 지금의 역사를 기록하고 옛날의 역사와 지금의 역사를 왕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사관이다. 이 파수꾼이 정리를 해보면 예루살렘을 지키는 이 파수꾼들은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도록 쉬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 역사, 이루신 역사를 계속 말해야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파수꾼이 그냥 무기 들고 정찰병처럼 보통 병사들은 아닌 것은 아닌 것 같다. 예루살렘도 그냥 보이는 예루살렘에 국한 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만약 보이는 예루살렘 성, 그 성벽에 이러한 파수꾼이 서 있다고 한 번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파수꾼이 중얼중얼, 또는 큰 소리로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적의 침투를 막는데 효과적인가? 전혀 효과적이지 않는다. 당시 성벽 아래는 사람들이 많이 살았는데 아마 시끄러워서 못 살았을 것이다. 계속 와글와글 블라블라 했으면 힘들었을 것이다. 오히려 아브라함의 자손이 오늘 우리와 같은 영적 자손인 것처럼, 이 예루살렘 시온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 종말로 완전히 임하실 온전한 하나님 나라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이 하나님 나라를 지키는 파수꾼의 역할, 계속해서 말로해서 쉬지 않고 고백하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기억하시게 하는 이 역할을 하는 파수꾼, 현대적으로 본다면 누구인가? 종교개혁가 칼빈은 이들을 ‘목회자’ 라고 말씀한다. 바른 하나님의 말씀, 이전의 역사, 이전에 보여주신 약속 계명을 계속해서 선포하고 말씀하므로 하나님 나라를 잘 지킨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학자는 이 사람이 ‘기도하는 자’라고 생각했다. 끊임없이 예루살렘 성,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도고의 기도를 하고 이전에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놀라운 일을 기억하여서 끊임없이 기도를 올려드리는 중보기도 자들이라고 생각을 한 것이다. 둘 중에 뭐가 맞는가? 말씀을 맡은 목회자인가? 기도자인가? 사실 말씀이냐, 기도냐에 우리가 고민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기도가 따라가지 않을 수가 없다.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기도는 하나님의 바른 말씀에 근거하는 기도가 받으실 만한 기도이다. 말씀과 기도를 따로 떼어놓을 수가 없다. 오히려 우리는 이들을 끊임없이 예배하는 예배 자들이라고 지칭해도 될 것 같다. 주야로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고, 계속하여 예배하며 하나님 앞에 나가는 자, 이 세상에서 선포하고, 백성들 앞에서는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 계속 읍소(泣訴)하는 기억하시도록 읍소하는 이 예배 자들이다. 이 예배 자들이 누구인가? 바로 우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파수꾼으로 예배자로 세우셨다. 예루살렘 성, 하나님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그 영광이 온전해 질 때까지 하나님께서 그 일을 쉬지 말며 성실하게 감당하고 하신다. 예배 자의 성실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지키시기 위해서이다. 세상에는 쉬어서 좋지 않은 것이 있다. 우리 자녀에게 물으면 공부는 쉬어서 좋은 것이고, 게임은 쉬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할 것 같다. 그런데 정말 심령 가운데 영적으로 쉬어서 안 좋은 것은 걱정과 근심이 어떤가? 쉬는 것이 좋다. 반대로 소망과 감사는 쉬지 않는 것이 좋다. 질투와 비방은 제발 쉬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칭찬과 격려는 쉬지 않는 것이 좋다. 예배는 어떤가? 예배는 쉬는 것이 좋은가? 쉬지 않는 것이 좋은가? 그렇다. 쉬지 않는 것이 좋은 정도가 아니라, 쉬면 안 된다. 쉼 없는 예배, 성실한 예배 가운데 하나님이 나라가 보존되며 지켜지고 하나님 나라의 특징 때문에 자연스럽게 은밀한 중에 확장된다. 우리 모두가 주님께서 주신 각각의 사명이 있는데, 예배의 자리는 우리 모두가 받은 공동의 사명이다. 너무도 중요한 사명이다. 이 사명을 내가 감당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다른 사람이 대신한다. 하나님 나라의 교회는 주님 오실 때까지 결코 쓰러지거나 무너지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으로 채우신다. 오히려 모든 사명이 그러하지만 사명을 성실하게 감당하지 않을 때, 그 인생이 피폐(疲弊)해지는 것이다. 저의 경우 목회자로서 부끄럽지만 사명을 피할 때가 생각난다. 목회자로 부르시는 하나님께 반항하며 나대로 좀 잘 살아가려고 했던 그런 때가 있었다. 낮에는 직장 다니고 밤에는 고시공부를 하면서 인생 성공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는데 주께서는 계속 사명에 대한 말씀을 주셨다. 제가 피하고 있었고 그렇게 친밀한 교제가 멀어지니까 제 마음에 평강과 낙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때가 2002년도였는데 그때 우리 한국이 축구 때문에 들썩이지 않았는가? 난리가 났었다. 제가 축구를 참 좋아한다. 제가 거리 응원을 나간 적이 없다. TV로 축구를 볼 때가 있었는데, 볼을 넣으면 우리 한국이 꼴을 넣으면 꼴을 넣는가 보다. 한국이 이기면 한국이 이기면 좋겠다. 하면서 제 마음에 기쁨이 없는 것이다. 낙이 없는 것이다. 마치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의 낯을 피한 아담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고 제가 일하는 곳, 일을 위해 준비하는 그 시간들이 다 황무지처럼 느껴졌다. 살아계신 귀한 은혜로 말미암아 이후 사명을 감당하게 되었을 때, 제 마음 가운데 기쁨이 다시 회복되었다. 상황은 여전히 어려웠지만 그 환경과 상황이 꼭 토처럼 느껴졌다. 쁄라처럼 느껴졌다. 제가 지금 목회를 해야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이 소명은 다양하고 각자각자이다. 중요한 것은 내게 주신 소명을 감당할 때 내 안에 기쁨이 넘치는 것이며 내 삶의 터전이 황무지에서 케어를 받는, 돌봄을 받는, 옥토가 된다는 것이다. 지금 사랑의 교회는 봄 글로벌 특새 중에 있다. 너무 이른 새벽을 깨우느라 힘들지만 우리는 룻과 같이 쉼 없이, 성실하게 예배자로 사명자로 굳게 서야 한다. 우리의 예배자로서 성실로 말미암아 우리가 살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굳건히 지켜지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룻의 성실로 그의 가문이 복을 받았을 뿐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시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다는 사실이다. 룻의 성실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 우리의 성실은 결국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도구로 쓰임을 받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세 번째 국면이다. III. 성실의 세 번째 국면: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영광과 찬송의 도구. *이사야 62:7, 7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서 무엇을 받으신다는 것인가? 찬송을 받으신다는 것이다. 파수꾼이 계속해서 말씀과 기도로 예배자로서 나아갈 때 예루살렘이 보호받고 든든히 세워지는데 있게 되면 하나님께서 찬송과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이 세워지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신다. 우리가 찬송을 위해서 지음 받지 않았는가? 당연히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성실은 쉼 없이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주님께서는 영광을 받는다. 여기서 성경은 더 나아가서 예루살렘이 온전히 세워질 때가지 완전한 하나님 나라가 올 때까지 그로 쉬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쉬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쉬시는 분이신가? 하나님은 쉬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신다. 오히려 우리 하나님은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존 하시고 유지하시고 섭리하시며 온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분이시다. 성실로 치자면 성실의 최고봉이시다. 그런데 왜? 여호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쉬지 못하게 하라고 하시는가? 이 구절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는 기억이 난다. 바로 불의한 재판관에 대한 이야기이다. 과부가 너무나 억울하여서 계속해서 재판관한테 찾아가서 소원을 이야기 한다. 그런데 이 재판관은 불의하다. 그런데 이 과부가 너무 귀찮다. 그래서 빨리 들어줘서 더 이상 안 찾아오게 한다.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재판관도 이렇게 하는데 의로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냐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인가? “좀 찾아와!!, 좀 하나님께 간구해, 하나님의 옷자락이라도 붙들어,”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하여 요청받기 위하여 보여주시는 것이다. 제발 좀 요청하라고 하신다. 요청하면 내가 그것을 해결해 주고 그로 말미암아 피조물로부터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겠다는 것이다. 가정에서도 그렇다. 남편은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기를 원한다. 믿지 않겠지만 대부분 도와줄 준비가 되어있다. 동의가 잘 안 되시는가? 다만 남편들이 눈치가 없을 뿐이다. 유리병의 뚜껑이 잘 안 열리는 것을 남편은 잘 모른다. 그런데 아내가 이것 좀 열어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는가? 뭐 그거 가지고 그래, 하면서 열어준다. 그 유리병이 안 열리면 낭패이다. 안 열리면 손을 닦고 온 몸의 꼬리뼈까지 당겨서 열고 만다. 자존심의 문제이다. 아내가 감탄을 한다. 아직 힘세네. 고마워요. 찬송과 영광을 받은 남편은 목을 돌리고 거실로 가서 갑자기 아령을 올리기 시작한다. 왕년에 내가 말이야, 뚜껑을 한 번 열고 갑자기 왕년이 나온다. 사실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유치하고 연약한 수준이 완전히 다르시지만 확실히 우리의 요청 받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부탁과 요청과 간구를 들어주시고, 우리의 감탄과 감격과 찬송을 받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찬송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영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뻐하시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성실히 쉼 없이 간청하라고 우리에게 간청하고 계신다. 주님께서 사랑하는 영 가족 여러분, 우리 성부 하나님께서는 우리 구원을 섭리하시며 이루시매 조금도 쉬지 아니하신다. 우리 성자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쉬지 않으시며 중보하고 계시고 성령 하나님께서는 말할 수 없는 사랑으로 우리의 기도를 돕고 계신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가 복과 은혜를 누리기를 원하시며 성실과 쉼 없는 나아가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를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말씀과 기도로 쉼 없이 성실하게 예배자로 서 있으라고 지금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을 위해 성실하게 쉼 없이 바로 그 기도의 자리를 지키라고 부탁하고 계신다. 지금도 예배의 자리로 나와야 한다. 말씀과 기도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 훈련의 자리로, 다락방과 소그룹 자리에서 함께 하기를 바란다. 웃는 기뻐하는 은혜의 자리에서, 가슴을 치며 울어도 말씀의 자리에서 그렇게 하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성실로 말미암아 누리게 되는 쉼 없는 은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함께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요약 은혜와 복의 통로는 하나님이 주신 예배의 장소에서 찬송과 경배를 하는 자에게 누리게 하신다. 룻은 성실함으로 하나님의 신뢰를 받은 것처럼 자신뿐만이 아니라 나라를 위한 구원을 해내고 아름다운 응답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파수꾼으로서의 예배자로서 우리의 사명과 의무를 다 해야 하고, 하나님께서는 저희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종일 종야에 잠잠치 않게 하셨음을 깨달아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안아주심의 본당에서 기도함에 있어서 서로 영혼이 교통하고 우리는 주님께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리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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