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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3월 15일)

제목: "놀라운 그 사랑"
말씀: 요한일서 4:7~9
찬양인도: 쉐키나(유재원 부목사님)
 
설교자: 문진호 부믁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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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4:7~9,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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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저는 제 아들들과 치킨을 먹거나 피자를 먹을 때 살많은 닭다리 보다는 날개, 토핑이 얹어있는 것보다는 부실한 조각을 먹는다. 그리고 천천히 먹는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돈은 내가 냈는데 내가 차지하는 무게가 더 적다. 참 비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생각은 합리적이지 못할수록 제 마음에는 기쁨이 더 커진다는 사실이다. 내 몫을 줄이면 아들들의 몫이 커진다는 생각에 기쁘다. 대부분 부모의 마음이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다. 부모는 자녀들의 기쁨을 양식으로 삼는 것 같다. 그때 문득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해 보았다. ‘내가 기뻐할 때, 아버지 하나님도 행복해 하시겠구나!’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그 사랑의 본질이 더 궁금해졌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요한일서 4:7~9,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이 사랑이시다.’ 라고 할 때, 그분의 본질이 사랑이시라는 것이다. 그분을 알고 싶고 그분 안에 거하고 싶다면 그 사랑을 알아야 한다. 저는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그 사랑의 관한 이야기 세 가리를 나타내고자 한다.
 
첫 번째, 그 사랑은 우리를 살리기 위한 사랑이다.
 
*요한 1서 4:9-10,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이어지는 10절도, 내용을 상세히 설명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죄를 속하여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지기 위해 그 아들을 화목제물로 내어주시는 사랑이었다. 우리의 죄인 됨은 가치 없는 상태를 보여준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무가치한 것을 살리기 위해서 무한한 가치를 내어주시는 비합리적인 거래를 하셨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 놀라운 하나님의 그 사랑이다. 무가치한 나를 용납해 주신 그 사랑이 우리를 살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가 진노의 자녀, 사랑밖에는 도저히 발견할 수조차 없는 죄인 되었을 때, 보여주신 하나님 사랑의 완결판이다. 무가치한 우리를 용납해 주신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파격적이었는지 다음에 이야기가 우리에게 가르쳐주신다. 탕자의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브래너 매니게 이야기를 조금 더 우리 식으로 바꾸어 보았다. 약간 길지만 한 번 들어보자.
 
*여러분의 막내아들을 미국의 아이브 리그 대학교에 유학을 보내 학교를 마치도록 여러분이 돈을 댔다고 하자. 기숙사비, 등록금, 용돈, 집에 오가는 항공료, 교통비가 4년간 3억 원이 넘는다. 아들이 졸업한다. 여러분은 아들 친구들과 그분의 친구들을 200명을 불러 성대한 파티를 열어주었다. 성대한 철갑상어 요리, 피자와 리플 포도주, 각종 디저트가 나온다. 익명의 아이유 등, 유명 가수들이 공수되어 음악을 선사한다. 축제는 새벽에 끝났다. 당신은, 여러분은 아들과 함께 벽난로에 앉아 아들에게 즐거운 마음으로 보냈냐고 묻는다. 그러자 아들이 대답한다. “솔직히 말씀을 드리지요. 저는 이제 아버지도, 아버지의 가치관도, 아버지의 얼굴도, 지긋지긋 합니다. 내일이 제 보험금 만기일이니 독립하겠습니다. 대학 졸업장도 땄으니 그것을 가지고 성공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기가 막히고 억장이 무너지지만 그것 가지고 말릴 수도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이유는 만 3년 동안 당신은 아들의 생사조차 모른다. 전화 한통, 엽서 한 장도 없다. 경찰도 행방을 찾을 수 없다. 그러던 어느ㅍ날 월요일 새벽 3시 초인종이 울린다. 몽롱한 상태로 현관에 나와서 당신은 충격에 빠진다. 아들이 단정치 못한 이제 옷차림으로 립스틱 자국을 묻힌 채, 술기운을 풍기며 문간에 서 있다. 여러분이 그 아버지라면 돌아온 탕자에게 어떻게 하겠는가? 그 아버지는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눈물과 입맞춤을 퍼부으며 불이라는 불을 다 켜고서, 방 안에 자고 있는 아내를 소리쳐 부른다. “여보, 아껴두었던 샴페인을 터트리고 헨델의 메시아를 틀구렴, 진호가 돌아왔소,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왔소.” 사실 심각한 이야기이다. 웃으면 안 되는데,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이런 분이시다.
 
여러분이 아버지 집에 가고 싶어 하는 것보다 여러분이 그 집에 오기를 아버지께서 더 원하시고 계시다는 것이다. 실패해도, 넘어져도, 아니면 실망하고, 힘이 빠졌던지 간에 언제든지 우리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우리를 두 팔로 안으시고 환영해 주시는 사랑의 아버지가 계신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용납이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되어야 할 모습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신다. 좀 다르게 표현하면 우리가 왕이신 하나님의 식탁에 앉을 만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 할지라도 언제라도 왕이신 하나님의 식탁에는 우리가 앉을 자리가 있다는 것이다.
 
요나단 때문에 다윗왕의 식탁에는 므비보셋의 자리가 있었다. 평생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사울왕의 손자, 원수의 손자, 므비보셋이다. 다리를 저는 불구자였다. 다윗을 위해 전쟁에 나가 힘이 되어줄 수 없는 이런 외적인 것을 조그만 보면 무가치한 존재, 므비보셋이다. 그러나 다윗을 사랑했던 요나단으로 인해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다윗왕의 식탁에 앉았다. 무가치한 존재인 우리를 사랑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주신 예수님으로 인해 왕이신 하나님의 식탁에는 우리의 자리가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식탁으로 나오시기 바란다. 그분의 공급을 받으시기를 바란다. 항상 예비 되어 있다. 아침과 저녁으로 큐티와 기도로, 함께 드린 공적인 예배와 기도의 자리로 나아오시기 바란다. 우리를 위해 예비 된 식탁이다.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왕의 식탁에 앉아야 산다. 왕의 식탁에 앉아야 살 수 있다.
 
두 번째, 그 사랑은 서로 사랑할 때 알게 되는 사랑이다.
*요한일서 4:7~8,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을 알게 된다고 말한다. 그 사랑은 머리로 아는 지식이 아니라, 경험으로 아는 지식을 통해 닦게 되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 사랑을 알기 위해서 ‘왜 공동체여야만 할까?’ 그런 의문이 떠나지 않는다. ‘예수님을 사랑을 성경을 통해 그냥 감동하면 안 되는 것일까? 혼자 온라인으로 예배하고 혼자 은혜 받고, 혼자 성경보고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면 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글쎄,,,, 요한은 힘주어 강조한다.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경험적으로 공동체 안에서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그 사랑을 온전히 깨닫는 통로는 공동체이다. 서로 사랑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이기 때문이다. 제자는 스승을 따르는 자요, 스승처럼 따라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삶과 십자가가 우리에게 본으로 보여주는 겸손과 평범 성을 저는 한 번 적어보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손에 홀을 쥐고 백마를 타고 승리한 군주로 오시지 않았다. 그는 오해 받기에 딱 좋을 만큼 처녀의 몸으로 오셨고, 짐승들의 먹이통에 누우셨다. 머리 둘 곳이 없으셨으며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달리셔서 세상의 아픔과 고난을 느끼시려 팔을 쭉 뻗으시면서 죽으셨다.
 
어느 신학자는 ‘긍휼의 아들이신 그분은 자기 형제자매들의 죄책과 거부당하는 것과 실패를 흡입하려 하셨다. 십자가에서 두 팔을 벌린 것이 자기 형제자매들의 죄책과 거부당하는 것과 실패를 흡입하는 행위였다. 라고 평했다. 마냥 예수님의 모습이 다음과 같았다면 엄청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영광의 압도적인 위력과 모든 것을 아는 지혜의 모습과 일체의 흩트려짐이 없는 전혀 두려움이 없고 요지부동이며 누구도 필요치 않은 자의 모습이었다면 늘 자신감이 넘쳐 승승장구 하는 모습이라면 그의 앞에 서는 게 얼마나 부담스러울까, 어린 아이들이 예수님께 안기고 죄 많은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으, 수많은 죄인과 소원을 가진 이들이 부르짖으며 주님을 만나고자 할 때에, 주님은 자신의 자리를 쉽게 내어 주셨다. 그리고 그들을 만지시고 안아주셨다. 누구라도 그분의 설 수 있도록 예수님은 약한 모습으로 오셔서 그분은 우리에게 사랑할 기회를 주시면서 내게도 그분에게 드릴 것이 있다는 느낌이 들도록 해 주셨다.’ 라고 그 신학자가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다.
-예수님은 약한 모습으로 오신 그 이유가 우리가 그분을 사랑할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었다. 라는 것이다. 세상은 이런 연약함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서로를 사랑할 기회이다. 세상은 서로를 연약함을 배척할 기회로 삼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서로를 섬기를 기회로 삼는다. 그 섬길 기회를 포착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 서로의 약점을 적절히 내 보이는 공동체가 되어서 서로 발을 씻어주고, 서로의 약점을 두 팔로 안아줄 수 있는 예수님의 제자공동체가 될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이것이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그의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본보기이시다. 그럴 때, 우리는 서로의 약함을 통해 나의 약함을 통해 주님의 능력이 임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약한 자와 실패한 자, 무기력한 자와 무가치한자의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그 삶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며 다시 사랑 받는 존재로 회복시키시는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공동체가 줄 수 있는 우리에게 유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약할 그 때가 서로 사랑을 통해서 이점이 너무나 중요하다. 서로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게 될 절호의 기회가 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3장 4절에서 보면,
 
*고린도후서 13:4,
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우리는 서로 우리의 약함을 안아주고 싸매어주고 감싸줌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게 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것이 이것이다. 십자가를 통한 예수님의 영광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힘없고 연약하고 겉보기에는 실패한 모습이셨던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 자신을 따르게 하셨고 제자들은 그 스승의 길을 따라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서로를 사랑하는 긍휼의 삶을 삶으려 말미암아 그분의 수난을 재현하도록 부름 받았다는 사실이다. 주님은 힘없고 연약한 모습으로 다가가 형제자매들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시는 분이시다. 그곳에 저와 여러분처럼 그분의 종, 그분의 제자들도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다. 무관심이다. 타경철은 무관심이 만들어 낸 불행, 동시에 사랑이 만들어 낸 행복에 대해서 이렇게 노래한다. ‘인생에서 불행은 내가 우울할 때, 남은 웃는 것이고, 인생에서 더 큰 불행은 남이 울 때 나는 웃는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큰 불행은 웃지고 울지도 않는 것이다. 인생에서 행복은 내가 울 때 남도 우는 것이며, 인생에서 더 큰 행복은 남이 울 때 나도 우는 것이며 인생에서 큰 행복은 함께 웃을 수 있는 것이다.’
 
형제자매들과 함께 웃을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이 우리의 삶에 가득하기를 바란다. 옆에 울고 계신 분이 있다면 함께 울어주어라. 옆에 웃고 계신 분이 계신다면 좀 자존심을 내려놓고 함께 웃어줄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여유가 있기를 바란다. 아니 그렇게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서로의 약함을 채워주라고 공동체로 불러주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안에 더욱 알게 하시려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여러분 바라옵기는 그 기회를 꼭 잡기를 바란다.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더욱 알게 되어지는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어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한다.
 
세 번째, 그 사랑이 주는 유익이 있다.심판 날에 담대함을 갖게 해준다.

*요한일서 4:17,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심판 날에 담대함은 이것이다. 구원받을 것에 대한 확신인 것이다. 여러분 구원 받았는가? 마지막 날에도 완성되어 그 자리에 계실 줄로 믿는가? 아멘! 어떤 훈련생이 저에게 질문을 했다. “우리가 구원을 믿음으로 받고 어차피 죽을 때까지 성화를 이룰 수 없다면, 그 죽을 때까지 성화를 이루는데 참 어려운데 과연 성화를 이룰 수 있는가요?” 그런 질문이었다. 그런 질문을 충분히 짐작했다. 죽을 때까지 이룰 수 없는 성화를 왜 이루려고 그토록 애를 써야 합니까? 성화되려고 하는 훈련, 꼭 받아야 됩니까? 한 번 묻고 싶었다. 이 자리에 오셨다. 아마도 아내에게 끌려서 왔습니다. 라고 하실 수 있다. 어떻게 왔던지, 제가 대답했다. “그렇죠. 우리 중에 한두 분은 죽을 때, 성화를 이룰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대부분은 저를 포함해서 성화를 이루기 어렵습니다.” 라고 이야기 했다. 그런데 왜 훈련을 받으며 예수님을 닮아가려고 애쓰지요?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설령 인생의 졸업식 날에도 내 힘으로 이루지 못한 성화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이루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안에서 내가 갖는 담대함이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주님은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아니 설령 성화의 삶을 완성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나를 버리지 않고 나를 주의 집에 영원토록 거하게 하실 것이라는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안에서 갖는 평안이 그것이다. 생각해 보라. 우리의 구원이 거룩해지려고 애썼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인가? 여전히 인생 졸업식에 성화를 이루지 못할 가능성이 더 많지만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줄 믿는다. 마지막 날에 이루어지는 구원의 완성도 은혜로써 이루어질 것임을 우리는 믿는 것이다. 그러면 성화를 이루는 삶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라고 물을 수 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성화에 관해서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여러분, 자녀가 완벽한 존재이기 때문에 부모의 완전한 사랑, 온전한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자녀에게 완벽하게 보이는 것이다. 자녀가 완벽해서도 아니고 완벽하라고 날마다 결심하기 때문도 아니다. 부모는 자녀를 온전히 사랑하기 때문에 자녀는 부모에게 완벽한 존재인 것이다. 부모의 사랑의 핵심이다. 자녀가 부모 앞에 완벽해지려 애쓰는 모습이 어떤 면에서는 참 안타까울 때가 있다. 착한 아이가 되려고 노력하는 아이의 모습을 볼 때면 “그러지 않아도 돼”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와 같다. 우리가 완벽하기에 하나님이 우리를 온전히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얻기 위해 완벽해질 필요는 없다. 그런데 참 행복한 진리가 여기에 있다. 부모의 사랑을 온전히 받고 자란 아이가 사랑이 많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고 난 우리가 더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될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이다. 여러분, 성화는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으면 받을수록 온전해지고 싶은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완벽해질 필요는 없지만 하나님의 사라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 사랑하고 더 온전해지고 싶어지는 것, 여러분, 이것이 성화이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는 영화를 보면서 세상의 부러울 것도 부족할 것도 없이 홀로 완전하게 만족함을 살고 있는 중년 남자, 잭 니콜슨이 등장한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 삶에 끼어들어와 사랑하게 된 헬렌 헌트에게 건네는 유명한 대가가 있다. You make me one of batter man(당신은 내가 더 좋은 남자가 되고 싶게 만들었소).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이 우리가 더 나은 사람이 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자녀가 부모의 온전한 사랑을 받을수록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지는 욕구가 생겨나는 것이다. 자녀는 부모의 눈물을 먹고 산다고 한다. 우리가 자녀를 위해서 눈물로 기도한 그 제목들은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는 줄로 믿는다. 좀 더 들어가면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받아들여질까, 안 받아들여질까, 고민하지 않게 된다. 하나님의 그 사랑을 나누고 누릴수록 담대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원하게 되는 것이다. 주님을 더 원하고 원하게 되는 것, “주님만을 원합니다. 더 원합니다. 나의 만족 주소서.” 주께 가까이 가고자 하는 그 욕망이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생겨나는 거룩한 욕구라고 말할 수 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얻기 위해 더 완벽해질 수는 없다. 하나님은 이미 완벽하게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님의 온전하신 사랑, 완벽한 사랑을 받게 되면 더 온전해지고 싶은 욕구가 발동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원하게 되는 것을 나도 원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이 성숙되는 원리인 것이다. 최고의 단계는 주님 자체를 원하는 것이다. 전에는 내가 원했던 것을 원하게 주님을 찾았다면, 이제는 주님 자체가 너무 좋은 것이다. 여전히 내가 실수투성이 약점 투성이 일지라도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에 관해서 깨닫게 되면 그 앞에 두려움 없이 설 수 있게 되는 줄로 믿는다. 그 사랑이 주는 또 하나의 유익이 있다면 응답의 확신이다.
 
*요한일서 5:14,
14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사랑하시는 우리 주님을 더욱 사랑하면 우리가 구하는 것을 주실까? 안 주실까? 이런 것을 고민하는 수준에 머무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설령 우리가 구하는 것을 안 주신다고 해도 최소한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이 무엇이냐면 우리에게 안 좋은 것이기 때문에 안 주시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안 주신다고 우리가 손해 볼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계속해서 기도할 필요가 있다. 계속 주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될 때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주님께 구할 것을 다 받을 줄 확신하는 가운데 우리가 구할 것을 무엇이든지 들으실 줄 알면서 구하게 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아니 이미 얻은 것인 줄을 확신하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이것이 주님을 사랑한 자가 얻는 담대함이다. 바울은 로마서 8장 32절에서 보면,
 
*로마서 8:32,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우리를 위해 가장 소중한 아들을 내어주신 이가 우리 주님이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뭐가 아까워서 아니, 뭔들 줄 수 없어서 안 주시는 것인가? 안 주신다면 우리에게 해가 되거나, 당장 안 주신다면 더 좋은 때에, 더 좋은 것을 주시는 줄로 믿는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다시,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하는 것을 주기를 원하신다. 그러면 우리의 필요를 원하시는 좋은 주기를 원하시면 알아서 좋은 것 주시면 되는데, 왜? 원하는 것을 구하라고 하시는가? 그런 의문이 들지 않는가? 구하면 구할수록 우리에게 유익이 있어서이다. 주님이 무엇을 원하고 원하지 않는지 선명하게 이해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가 주님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가 되게 해주시는 것이다. 여러분, 신앙의 본질은 성공과 실패, 구함과 응답의 이분법이 아니다. 때로는 우리가 너무나 바라지만 그렇게 되는 경우가 많다. 신앙생활에 우리는 구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때에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참 많다.
 
※제임스 브라이언 스미스가 말하는 일화가 있다. 자기 동료 사역자 한 명이 수업시간에 상자 하나를 학생들에게 보여주면서 그것을 부수라고 했다고 한다. 학생들은 구멍을 내고 구기고 발고 차고 박살을 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상자를 책상위에 잘 보이도록 올려놓는다. 전등을 가져다가 그 상자 안에 넣고 전원을 켰다. 학생들을 그 상황이 주는 역설을 깨달았다. 예수의 빛이 우리의 상처를 통해 더 잘 미친다는 역설이다. 때로는 응답이 너무 늦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상처받고 낙심하고 주저앉아 있을 때가 있다. 여러분, 꼭 기억하기를 바란다. 부서진 상자의 역설이다. 우리의 연약함이 크면 클수록 그 구멍이 크고 깨어진 부분이 크면 클수록, 그리스도가 가장 빛나는 곳이 된다는 역설이다. 신앙생활을 하다가도 우리의 약함이 클수록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를 통해 더 밝게 비춰진다는 사실을 기억하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능력과 응답은 우리가 가장 약할 때 온전해 지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 바울이 고백한다.
 
*고린도후서 12:9,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의 약함을 통해서 세상의 그분의 사랑의 빛으로 비추기로 작정하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종들인 우리의 약함과 실패, 그 약함을 보듬는 사랑의 공동체를 통해서 어두운 세상의 빛을 비추기로 작정하셨다는 사실이다. 이 진리를 붙들고 함께 부르짖으며, 서로 사랑하며, 위로하며 서로 약함을 싸매어 주는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그래서 세상 가운데, 어두운 세상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밝은 빛을 비추어내는 아름다운 생명의 공동체, 서로 사랑하며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과 그 은혜를 세상 가운데 널리 전파하는 아름다운 믿음의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우리 자신과 우리 다락방과 우리 훈련반과 또 우리가 가정이 그렇게 되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한다.
 
♣요약
무가치한 나를 위해서 생명 주신 예수님을 인해 감격하여 하나님의 식탁위에 날마다 앉는 자가 되어 약한 모습으로 찾아오시는 예수님처럼 서로 사랑함으로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소망해야 한다.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부서진 상자 같은 우리를 통해 더 밝은 주님의 빛을 세상에 비추게 되는 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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