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3월 8일)
제목: "시련이 크면 은혜도 크다"
말씀: 창세기 39:19-23
찬양인도: 쉐키나(유재원 부목사님)
사회: 문진호 부목사님

설교자: 천동원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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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봄 부흥보고 수요저녁기도회에 참여하신 우리 성도님들을 주 안에서 축복한다. 우리에게 회복을 넘어 부흥의 실체를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귀한 은혜가 있기를 소망한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예기치 못한 일들을 종종 경험하게 된다. 달리 표현하면 우리 인생의 고난이 참 많다. 사람들은 고난을 가리켜서 위장된 축복이라 표현하지만 정작 고난 속에 처한 사람에게 그런 표현은 설득력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누구나 내가 겪은 고통을 경험해 보지 못한 채 제3자가 그런 말을 위로하려고 할 때, 위로는 고사하고 불편한 마음마저 들게 된다는 것이다. 되게 찾아오는 고난이 내 과실로 일 수 있다. 보증을 잘못 섰거나, 혹은 지나친 욕심과 과욕을 가진 결과로 그러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고난은 내 의지나 혹은 내 잘못과 상관없이 내가 선택하지 않은 일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때 당장 드는 생각은 우리 성도들의 경우는 내가 하나님 앞에 혹여 범죄 하지나 않았는지? 이 불안한 마음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의 죄 악 됨이나, 혹은 과실이 발견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헌신하며 살았던 생각이 더 앞서게 될 때, “하나님, 왜 제가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왜 하필 저입니까? 아니 내가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왔는데, 어떻게 주님이 나에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 같은 탄식과 원망이 불쑥 나타나기도 한다. 그 순간에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보이지 않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찾아볼 수가 없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충성 되이 섬긴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부요와 만사형통이 임할 것임을 기대한다. 하나님의 축복을 바란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시각은 사뭇 다르다.


오늘 본문에 소개된 요셉은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인물이다. 요셉을 수식하는 여러 표현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형통한 자, 요셉은 가는 곳곳마다 하나님의 형통이 임했다는 것이다. 성경은 요셉을 가리켜 형통한 자라고 표현하지만 실상 요셉의 생애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실 우리가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이 너무 많다. 역설적이게도 요셉은 하나님께로부터 꿈을 꾸게 되면서부터 그 인생의 시련이 시작된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꿈을 통해 미래를 보여주시고 요셉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주셨다. 이 꿈을 꾸고 요셉은 형들과 아버지에게 자랑도 하며 그리고 어린 마음에 기분이 좋았을지 모르나, 사실 요셉이 이 꿈을 본 날로부터 요셉이 시련이 찾아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요셉이 꿈을 꾼 나이가 17세였다.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된 나이는 30세이다. 그는 꿈을 이루기까지 13년 동안 혹독한 시련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요셉은 아버지의 심부름에 순종하여 형들의 안부를 묻고 확인하기 위해서 먼 여정 길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 비참했다. 형들이 자신의 옷을 찢고 구덩이에 내 던졌을 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미디안 상인들에게 은20에 팔아버렸다. 꽃다운 17세 소년에게 일어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큰 시련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보디발의 종으로 팔렸고, 또 그곳에서 인정받아 또 가정총무가 되었을 때는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치다가 그만 강간범일라는 그 누명을 얻고 감옥에 던져졌다. 요셉의 불행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정치범으로 갇혀있던 술 맡은 관원 장, 그리고 떡 굽는 관원 장을 만나 그 꿈을 해석했을 때, 관직에 복직 되었던 술 맡은 관원 장을 통해 요셉의 그 억울함이 호소가 되고 그로인해 자유의 몸을 기대했지만 그만 이 술 맡은 관원 장은 요셉을 깡그리 잊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내일 일을 기약할 수 없는 그 칠흑 같은 감옥 속에서 어떻게 보면 허송세월과 같은 2년의 기나긴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요셉은 하나님께 꿈을 받은 이후로 점점 더 악화되고 점점 더 비참한 상황으로 몰아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소위 말해 우리가 생각하는 형통과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형통을 생각할 때, 수식어로 만사를 떠올리게 된다. 만사형통, 모든 일들이 뜻대로 잘 풀린다는 뜻이다. 요셉이 성경에 우리에게 말씀한 대로 정녕 형통한 자라면 요셉은 사실상 매사에 일사천리로 잘 풀려야만 했다. 그러나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요셉의 삶은 그렇지 않았다. 우리 기준대로라면 사실 요셉은 형통한 인물이 아니었다. 매사가 뒤틀렸다. 혈육의 형들에게 버림받았다. 총애 받던 보디발에게 거절을 당했다. 관원 장에게 외면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이 같은 우리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고 비웃고 있듯이 요셉의 생애 가운데 형통이라는 단어를 세 번이나 표현하며 요셉을 가리켜 그는 형통한 자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그 형통이라는 표현의 시점을 살펴보면 참 흥미롭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성경지식, 요셉을 가만히 떠올려 보라.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요셉의 인생 중 가장 형통할 때가 언제라고 생각하는가? 아마도 대 다수의 성도님들은 총리가 된 요셉의 시절이 가장 형통할 때라고 생각할 것이다. 혹은 어린 시절 그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 하며 채색 옷을 입었던 때를 요셉의 형통한 시절이라고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아이러니 하게도 요셉의 어린 시절, 혹은 요셉이 총리가 되었던 천하를 호령했던 그 시절에 형통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지 않다. 형통이라는 그 단어가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제 이 형통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냐면, 요셉이 보디발에게 팔려갔을 때, 그리고 보디발의 아내로 감옥에 처에 있을 때, 이 형통이라는 단어가 세 번이라 반복하여 우리에게 표현하고 있다. 어쩌면 세상 사람들은 이 같이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네가 힘든 종이 된 주제에, 네가 죄수 된 주제에 무엇이 형통이냐?’ 라고 그렇게 반문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요셉이 처한 상황과 환경, 혹은 눈에 보이는 현상과 결과에 상관하지 않고 요셉을 가리켜 ‘형통’이라는 단어를 세 번 씩이나 반복하며 우리에게 요셉의 삶을 주목하게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 같은 입장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성경은 형통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창세기 39장 2절에 보면,


*창세기 39:2,
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성경이 말씀하는 ‘형통’의 정의는 ‘하나님의 함께하심’이다.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곧 형통이다. 사람들의 시선에는 요셉이 종이 되었고 사람들이 혐오하는 죄수가 되어, 마치 그 인생에 실패자처럼 느껴지고 또한 그 마음 가운데 불편한 심정마저 들지라도 성경은 형통의 기준을 무엇이 되었느냐?, 그가 무엇을 되었느냐, 그것으로 기준을 삼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함께 하심에 그 기준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비록 지금은 비참한 종의 모습으로 살아간다 할지라도 주 안에서 형통한 자이며,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사람들이 혐오하고 손가락질 하는 죄수라 할지라도 주 안에서 형통한 자라는 것이다. 오늘 본문도 동일한 입장에서 증거하고 있다. 23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창세기 39:23,
23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성경은 요셉이 범사에 형통했던 이유에 대해서 요셉이 정직했다. 요셉이 성실했다. 요셉은 비범한 은사와 능력, 재능이 많았다. 라고 그렇게 표현하지 않는다. 어쩌면 성경은 그 같은 표현을 하지 않을지라도 요셉은 성실하고 또 실제 정직하며, 은사와 능력과 재능이 많은 사람이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성경은 형통의 이유에 대해 요셉 개인에게 그 관심과 초점을 두고 있지 않다. 요셉 개인의 탁월함에 주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너무도 단순하고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곧 형통이 되었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원인이었고, 결과 범사에 형통하게 되었음을 증거 하게 되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사실은 굉장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람들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결과물을 중요하게 여긴다. 당장 건강해지고, 부유해지고, 소원하는바 명예와 지혜를 얻게 되면 또 지휘를 얻게 되면 그는 형통한 삶을 누린다고 생각한다. 역으로 병들고 가난하고 하는 일마다 실패하게 되면 형통과 무관한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과 시련 앞에 낙심하며 마치 하나님께서 나를 외면하시거나 혹 나를 떠나시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며 좌절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같은 관점에서 형통을 평가하게 되면 성경에 서게 된 대다수 믿음의 인물들은 하나 같이 불행한 자들이요, 실패자들의 불과하지 않다. 오늘 보문에 소개된 요셉이 그러하다. 그는 형들의 미움을 받고 17세 꽃다운 나이에 종으로 팔려가 기구한 삶을 살게 되었다. 또한 주인의 아내를 겁탈하려고 했다는 그 같은 거짓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다. 여러분 이런 요셉을 보고 누가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이알고 하며 누가 이 사람을 가리켜서 형통한 자라고 표현이 가능하겠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겪는 시련도 마찬가지이다. 당장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결과와 현상만을 바라보고 판단한다면 내가 겪는 시련은 마치 저주요, 불행 그 자체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면 시련 때문에 낙심하는 인생이 아니요, 오히려 시련 속에 일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형통을 발견하게 될 줄을 믿는다. 요셉은 하나님께 꿈을 받은 이후로 점점 더 열악하고 점점 더 비참한 상황으로 몰렸다. 시련이 끊일 날이 없었다. 역설적이게도 요셉의 시련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더 커갔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이들에게 허락하시는 세 가지 은혜의 사인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신다.


I. 첫째는 하나님이 주시는 피할 길.


*고린도전서 10:31,
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은 함께 하시는 자에게 시련이 크면 클수록 반드시 피할 길을 허락하신다. 피할 길을 통해 그 시험을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 피할 길을 내시는 이 같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요셉의 생애를 다시 들여다보면 우리는 이 요셉의 삶을 재해석 하게 된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심부름으로 형들의 안부를 확인하기 위해 세겜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형들을 찾을 수 없어 우여곡절 끝에 도단에 이르게 되어 드디어 그곳에서 형들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요셉은 그곳에서 형들에게 사로잡혀 그 채색 옷이 찢겨지고 그리고 구덩이에 내 던져지는데, 요셉의 형제들이 그 마음에 결심하기를 이 요셉을 목숨을 앗아가겠다. 요셉을 죽이겠다는 이 같은 작심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절대 절명의 우기 속에 우리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피할 길을 허락하시는데 그 장남 루우벤을 통하여 형제들의 손에 피를 흘리지 않게 하셨고, 또한 유다를 통해 미디안 상인 사람에게 은 20에 팔게 하셨다. 여러분, 앞서 이야기 했지만 형제들의 원래 계획은 요셉을 죽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해주님으로 말미암아 요셉은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가정총무로 총애를 받았을 때, 보디발의 아내가 날마다 요셉을 찾아가서 동침하기를 청했다. 요셉이 그 말을 듣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그 곁에도 얼씬도 하지 않으려 하니, 이 여주인이 어느 날 한 날에 요셉 외에는 집에 아무도 사람을 남겨두지 않는다. 독대하여 요셉에게 집요하게 유혹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성경에 의하면 그 요셉이 옷을 붙잡고 애원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그 요셉이 자기 옷을 붙드는 그 여주인을 뿌리치고 그 옷을 버려두고 밖으로 도망가 버렸다. 이에 분한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모함하는데 소리소리를 친다. 우리 집 종 요셉이 나를 겁탈하려고 했다면서 그 증거물로 요셉의 옷을 보이며 이 요셉을 마치 강간범처럼 거짓 증언을 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보디발이 이 소식을 듣고 어떻게 하는가? 심히 노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요셉에게 극단의 처방을 하는데 여러분 이 본문에 보면 신기하다. 그 종 요셉을 극형 사형에 처했는가? 그렇지 않다. 이 급박한 상황 속에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는데 우리 하나님이 요셉에게 피할 길을 주신다. 요셉을 죽음으로 몰지 아니하고 당시 정치범을 수용하는 감옥으로 요셉을 보내주시면서 그 생명을 지켜 주셨다는 것이다. 여러분 이것은 시대적인 정황을 살펴보면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종이 여주인을 겁탈하려고 했는데 주인이 그 종을 죽이지 않았다? 여러분 이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이에 대한 분분한 해석이 있다. 이 아내의 증언에 보디발이 의심을 품었다는 것과, 또한 요셉이 평상시에 주인의 총애와 신임을 얻었기 때문에 이 같은 일이 가능했다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성경의 관점은 분명하다.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피할 길을 허락하셔서 요셉을 보호하셨다는 것이다. 이후 감옥에서 술 맡은 관원 장과 떡 굽는 이 관원 장의 꿈 해몽하고, 해몽대로 술 맡은 이 관원장이 복직하게 되면서 요셉은 자신의 억울함을 풀고 자유의 몸을 기대했지만 그 뜻이 성사되지 않는다. 술 맡은 관원 장이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린다. 그리고 2년 동안 기약할 수 없는 시간을 요셉은 보내게 된다. 그러나 역시 하나님이 함께 하신 이후, 우리 하나님이 요셉에게 허락하신 피할 길이었다. 하나님은 정확한 때에 바로가 꿈을 꾸고 번민하는 때에 이 술 맡은 관원 장에게 요셉을 기억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요셉을 불러들여 그 왕의 꿈을 해몽(解夢)하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애굽의 총리가 되는 마치 놀라운 인생의 반전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시며 인생의 고비 고비마다 피할 길을 허락하셔서 그 인생을 이끄셨다. 여러분, 여러분이 지난 경험하고 겪었던 시련의 때를 한 번 떠올려 보라. 당시에는 끝이라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내 인생의 고비 고비마다 피할 길을 허락해 주셨음을 모두가 선뜻 떠올리며 동일한 마음의 고백을 올려드릴 줄 믿는다. 그 순간에는 어떻게 내 인생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 라고 때로는 하나님께 소리를 질러보기도 하고 원망했던 시간들이 그 시간이 지나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허락하시니, 어느 순간 그 시련을 달게 이겨내게 되었고 또한 내 인생 가운데 하나님이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해 주셨음을 목도하며 고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시련이 크면 클수록 반드시 피할 길을 허락해 주심을 믿기를 바란다. 우리가 어떤 시련 가운데 처할지라도 낙심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며 그 은혜의 사인으로 피할 길을 보여주시기 때문이다. 혹 시련 속에 있는 성도님들이 계시다면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 하나님은 반드시 피할 길을 허락해 주심을 믿고 이 길은 하나님의 사인이요,,궁극적으로 나를 형통하게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길이심을 믿기를 바란다. 시련이 더할수록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두 번째 사인은


II. 둘째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받게 하신다.


-가는 곳곳마디 이 같은 은혜를 허락하신다.


*창세기 39:4,
4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창세기 39:21,
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이 본문의 말씀을 보면, 요셉은 가는 곳곳마다 사람들에게 은혜를 입는다. 보디발의 종으로 팔려갔을 때는 보디발에게 은혜를 입는다. 그로인해 가정총무로 세워지고 보디발은 그의 모든 소유를 요셉에게 위탁을 하게 된다. 감옥에 처해있을 때는 간수장의 은혜를 받게 하신다. 간수장은 옥중 죄수를 요셉의 손에 다 맡기고 심지어는 제반 사무조차도 요셉의 손에 다 처리하게 한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요셉이 바로 앞에 서서 꿈을 해몽하게 되었을 때 바로에게 은혜를 덧입게 된다. 바로는 요셉에게 애굽을 다스리게 한다. 창세기 41장 40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창세기 41:40,
40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
-여러분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요셉은 이 같이 바로의 명에 따라 애굽의 전국을 다스리는 총리로 세워지게 된다. 이처럼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입게 하셔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증거 하신다. 여러분, 시련의 때마다 나를 돕는 손길들이 있는가? 내가 어려운 순간마다 고비 고비마다 나를 위해 기도해서 기도의 중보자가 있는가? 때로는 고달픈데 삶을 위로하는 따스한 손길로, 때로는 떡과 고기로 물어다 주는 까마귀 같은 돕는 손길로 주위 사람들을 통해 시마다 때마다 나를 돕는 그 같은 은혜가 목도된다면 여러분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시는 은혜의 사인이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형통으로 이끄시는 인도하심을 믿기를 바란다. 우리가 시련의 순간순간마다 사람들에게 은혜를 덧입게 된다면 이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베푸시는 분명한 은혜의 사인이 된다. 그 은혜의 손길을 통해 힘을 얻고 또 주 안에서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세 번째로 시련이 더할수록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사인은 더 큰 시련이다.


III. 셋째는 하나님의 은혜의 사인은 더 큰 시련이다.


-아니 더 큰 축복도 아니고, 이게 뭐냐고 놀랄 수도 있을 것이다. 더 큰 시련이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은혜의 사인이 될 수 있느냐고, 아마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시련의 강도만큼이나 하나님의 사람을 귀히 쓰시고 사용하심을 증거하고 계신다. 요셉은 꿈을 이루기까지 무려 13년 동안 혹독한 시련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여러분, 성경을 보면 요셉뿐만이 아니다. 많은 믿음의 위인들이 그 시련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축복도 컸다. 우리가 잘 아는 다윗은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날부터 인생의 시련기에 들어가게 된다. 사울 왕으로부터 얼마나 괴롭힘과 박해를 받았는지 모른다. 다윗은 결코 시련 없이 왕이 되지 않았다. 우리 하나님은 특별히 크게 쓰시고자 하는 자에게 이 같은 혹독한 시련의 과정을 연단하심을 기억해야 한다. 요셉처럼 우리 인생도 이와 반문할 때가 많다. 이제는 무언가 일을 풀릴 듯하고 하나님께 뭔가 형통의 길을 인도해 주실 듯 했는데 그만 생각지도 못한 더 큰 시련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한 문제가 해결되면 또 다른 문제가 터지고 또 그 문제를 해결하면 더 큰 문제가 붉어지면서 하루하루를 마치 살얼음을 걷는 듯한 그 위기의 순간순간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해야 한다. 마지막 시련이 더 큰 것이다. 하나님은 크게 쓰시려고 하는 자에게 반드시 큰 시련을 겪게 하신다. 그 시련을 통해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시고 정금 같은 믿음으로 연단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온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빚어 가신다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혹독한 시련들은 그 신앙과 인격을 온전하게 만들어 주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분명하신 뜻을 깨닫게 한다. 요셉을 보면 이렇게 혹독한 과정을 통해 그 신앙의 인격이 얼마나 온전해 졌는지 자신을 그 꽃다운 17세 나이에 은 20에 팔았던 형제들을 모두 용서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대하심과 계획을 깨닫게 된다. 창세기 45장 5절에서 보면,


*창세기 45:5,
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요셉은 그 많은 시련을 이겨나가면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고,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이다. 요셉뿐만이 아니다. 믿음의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 겪은 시련의 마지막은 마치 목숨을 잃어버릴 것만 같은 큰 시련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 큰 시련을 이겨낼 때, 하늘로부터 임하는 영광과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 아브라함이 겪은 마지막 시련은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일이었다. 이삭은 100세에 얻은 아들이었다. 아브라함의 유업을 이을 자요, 언약의 자손이었다.


누군가 그런 말씀을 했다. 이 세상에 지옥을 경험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자식의 죽음이다. 부모에게 있어 자식은 자기 생명보다 더 귀한 존재이다. 그래서 부모는 자녀를 위해 기꺼이 자기 목숨도 버릴 수가 있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그 인생의 최대의 시련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그 큰 시련으로 감당하니 우리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피할 길을 허락해 주시는데, 이삭 대신에 제물로 바칠 숫양을 예비해 주시고, 하나님이 이 시련을 겪은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조상이 되고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적인 계보의 영광을 허락해 주셨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너무나 큰 시련을 당하고 계시는가? 곧 끝날 것이다. 다시 한 번 말씀하면 곧 끝날 것이다. 시련의 정점에 이르기 때문에 그만큼 그 시련이 더 큰 것이다. 이것은 곧 끝이 보이고 있다는 하나님의 마지막 사인이요, 내 인생 가운데 하나님이 행하실 형통의 계획이심을 믿음으로 선포하기를 바란다. 터널은 반드시 끝이 있다. 우리는 그 터널 너머에 희미한 불빛을 통해 터널의 끝을 직감하게 되듯, 더 큰 시련은 끝이 이르렀다는 하나님의 사인이요, 하나님의 형통이 기다리고 있는 분명한 은총의 표징(表徵)임을 믿기를 바란다. 주일 강단에서 담임 목사님께서 기도했는데도 더 큰 어려움이 있다면, 이것은 더 큰 역사를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계획하심’이라고 말씀하셨다. 시련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큰 역사가 나타남을 믿고 끝까지 인내로써 마지막 시련을 감당하며 믿음으로 승리하기를 바란다. 말씀을 맺겠다. 요셉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형통한 자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성경은 그 형통이 시련과 무관하다고 말씀하지 않는다. 시련을 피해갈 수 있는 인생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신약에 이르면 우리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배에 광풍이 치는 것과 같다. 주님이 함께 하심은 늘 순풍에 돛단배가 될 줄 알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그 광풍을 고요하게 하신 것처럼 우리 하나님이 함께 하는 백성들을 그 어떤 광풍 가운데서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허락해 주시는 것이다. 이것은 아무리 시련이 커도 하나님이 그 시련보다 더 크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련이 크면 하나님의 은혜도 크다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시련이 클수록 피할 길을 허락해 주신다. 우리 하나님은 시련이 클수록 사람들에게 은혜를 받도록 인도해 주신다. 무엇보다 마지막 시련일수록 그 시련은 더 크지만 이는 곧 끝을 이르렀음을 보여주시며 우리를 정리하시며 마지막 그 도달점으로 인도하고 계신다. 그 마지막 시련을 이겨낼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성취하신다. 궁극적인 하나님의 뜻을 믿기를 바란다. 사람들은 가난을 경험할 때 비로소 돈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질병을 경험하면서 비로소 건강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시련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의 형통을 깨닫게 되는 줄 믿는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꿈을 주었을 때, 요셉을 애굽으로 이끄시는 시련을 허락하지 아니하셨다면 그는 결단코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없었다. 요셉이 그 시련으로 인해 애굽의 종으로, 애굽의 죄수로, 바로 와 앞에 서게 되었을 때, 이것은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꿈이 성취가 되었던 것이다.


여러분 여러분의 환경과 상황을 가지고 자신의 처지를 속단하지 말라. 우리 하나님의 지혜는 완전하시다.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실패하지 않으신다.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시련이 크면 하나님의 은혜도 크다.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지혜와 사랑이 나를 선히 인도하심을 믿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형통이라는 이 진리의 말씀 앞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자가 되기를 바란다. 오늘 이 밤에 주님의 말씀이 평생의 축복이 되어 어떤 시련이라도 이겨내며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궁극적인 하나님의 형통과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성취해 나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요약
우리는 어떤 절망적인 상황과 환경을 만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형통임을 알고 위축되지 않는 믿음의 기지를 가지고, 시련이 있어도 우리에게 피할 길을 주시며 시련이 있어도 사람들에게 은혜를 받게 하심의 손길이 있다면 우리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분명한 은혜의 사인인줄 알고 함께 하시는 주님을 더욱 의지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요셉은 누명을 쓰고 왕의 죄수를 가두는 옥에 갇혔다. 요셉은 의를 위하여 옥에 갇혔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실망하고 돌아선다. 그러나 요셉은 인간의 현실적 조건에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묵묵히 충성할 뿐이었다. 그 결과 요셉은 전옥의 신임을 얻어 옥의 사무를 맡아보게 되었다. 그는 성도들의 일상생활의 모범을 보여준다. 또한 의를 위해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예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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