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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2월 22일) 제목: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말씀: 로마서 1:17 찬양인도: 쉐키나(유재원 부목사님) 사회: 문진호 부목사님 설교자: 홍진기 부목사님 ---------------------- * 로마서 1:17,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홍진기 부목사님 -우리가 믿지 않는 자들에게 전도를 할 때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질문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고 대답일 수도 한 말이,,, 하나님 보여주면 나도 믿을게. 당신도 보지 못한 하나님을 나보고 믿으라구요? 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이 말을 들으면 우리도 하나님을 그들에게 보여줄 수 없기 때문에 좀 곤란할 때가 있다. 우리가 곤란할 표정을 지으면 불신자들은 “좋았어, 잘 물리쳤어” 라고 생각하면서 속으로 좋아한다. 그런데 이 말은 오류가 있다. 이 오류는 너무나 일반적이어서 흔히들 이런 오류이면서도 오류인지 모르고 오류를 습관적으로 쓰는 관용적 오류라고 하는 표현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문 닫고 나가’ 밥 먹으면서 떠드는 아이에게 ‘입 다물고 먹어’ 또 한 가지는 ‘꼼짝 말고 손들어!’ 어떻게 두 손을 드는가? 이렇게 습관적으로 쓰는 오류의 말들이 있다. 금방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을 보여주면 나도 믿겠다는 이 말도 사실은 오류 중에 하나이다. 우리는 믿음과 그리고 확인을 구분해야 한다.
*믿음의 전제 - 첫째, 눈으로 직접 본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둘째, 본 것만큼이나 확신해야 합니다. -믿음은 눈으로 직접 본 것이 아니어야 한다. 눈으로 직접 보는 순간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확인하는 대상이 된다. 믿음의 전제 조건의 두 번째는 본 것보다 더 확신을 해야 한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이야기 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그런 하나님이 아니신가? 우리는 하나님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보고 만난 것만큼이나 확신한다. “보여주면 믿을 게.” 보는 순간 믿음이 아니라, 확인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을게’, 하는 것은 오류인 것이다. 성경에 히브리서 11장 1절에 보면, *히브리서 11:1,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이야기 한다. 여기서 바라는 것은 ‘보지 못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바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보지 않는 것을 믿는 자’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믿고 있는 믿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 믿음이 우리에게 어떻게 들어온 것이며, 이 믿음을 통해서 우리가 얻게 되는 것, 보지 않는 것에서의 믿는 자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함께 나누도록 하겠다. 오늘 우리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의인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 의인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믿음을 가진 의인이 산다. 라는 것은 무엇인지를 우리가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1. 첫 번째 의인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보통 의인하면 도덕적인 개념을 먼저 떠올리기 마련이다. 의인, 다른 말로 착한 사람, 법 없어도 살만한 사람, 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러나 그 정의는 오늘의 말씀의 흐름과는 맞지 않다. 의인을 착한 사람으로 바꾸어서 이 본문을 읽어보면 오직 착한 사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어울리지 않는다. 오직 법이 없어도 살만한 사람,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어울리지 않는다. 이 본문에서 말하는 의미는 누구인가? 사실 이 본문은 로마서를 기록한 사도 바울이 처음으로 한 말이 아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구약의 하박국 선지자가 하박국 2장 4절에 한 말씀을 인용한 말씀이다. *하박국 2:4, 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말씀은 본문 로마서뿐만이 아니라, 갈라디아서 3장 11절에도 한 번 더 언급했을 만큼 사도바울이 좋아했던 말씀이다. 하박국 선지자가 언급한 이 의인은 하박국 선지자가 바벨론의 심판과 멸망을 예언하면서 그 어려운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따르는 자라는 의미로 의인이라고 인용했다. 사도바울은 이 본문에서 포괄적인 의미에서 더 줄여서 사도바울은 ‘구원받은 자’,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라는 의미로 의인을 사용하고 있다. 본문에서 우리가 읽은 17절 말씀과 바로 앞에 16절 말씀에서 그 정의를 조금 더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로마서 1:16,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 그전에 의인이라는 말을 풀어보면 의인, 의로움을 가진 자, 또는 의를 소유한 자의 뜻임을 알 수 있다. 의인이라는 것은 의로운 자, 의를 가지고 있는 자의 뜻이다. 하지만 이 말씀을 들어보면 하박국3장 10절에 보면, *하박국 3:10, 10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의인은 이 땅에 한 명도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성도를 가리켜 의인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 의인이 가진 의는 우리가 읽은 17절 본문을 앞에 보면 ‘하나님의 의’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그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났다고 말한다. * 로마서 1:17,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 속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다. 그 복음이 우리에게 들어왔을 때, 그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나에게 전가 되어서 저와 여러분이 의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들을 때, 그 복음 속에 있는 의가 내 안에 들어와서 내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가 내 안에서 들어오심으로, 전가되므로 나는 하나님의 의인이라고 불리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의인이 되었다. 이 복음이 무엇인지를 16절 앞 절에서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는데, 16절을 보자. *로마서 1:16,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이 뭐라고 하는가?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에게는 없는데 복음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의가, 그 복음이 뭐냐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십자가 보혈의 능력이다. 하나님의 의가 들어있는 또 다른 말로 십자가는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에, 하나님의 의는 다른 말로 하나님께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의미가 하나님의 의에 들어있다. 이 복음 안에 들어있는 이 복음을 우리가 받아들일 때, 이 복음이 내게 올 때, 그 복음 안에 있는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그 능력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의가 내게 오게 되므로 나는 의인이 되는 것이다. 기록된바 하나도 없는 의인, 도저히 이 땅 가운데서 찾아볼 수 없는 의인, 그러나 하나님의 의가 내게 임하면 내게 전가되고 복음을 통하여 우리가 의인이 된 것이다. 그래서 의인은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의인은 하나님의 의, 다른 말로 구원을 주시는 십자가의 능력을 입은 자입니다 -우리 옆에 성도님들께 이렇게 이야기 해보자. “당신은 의인이십니다.”아직까지 내 행동으로 의롭게 되어야 한다는 것에 불편함을 주지만 그렇지 않다. 다른 말로 바꾸면 “당신은 십자가의 능력을 입은 자입니다.” 그렇다. 저와 여러분은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의 의가 단 1도 없는 의가 하나님의 능력, 우리에게 오게 되고 그 은혜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는 줄로 믿는다. 전적으로 은혜이다. 최소한 눈으로 보는 절차도 없이 그 보혈에 적셔져서 그냥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내가 의인이 된 것이, 내가 주인이 아니라 주님이 되어서 된 것이다. *에베소서 2:8,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나님의 선물로 부어진바 된 우리, 그래서 의롭게 된 우리, 의인으로 당당히 불릴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은 의로 말미암아 무엇을 가지게 되는데 그 가지는 그 무엇이 바로 두 번째에 살펴보는 믿음이라는 것이다. II.두 번째 믿음이라는 단어이다. -일반적인 논리로 보면 우리가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한다. 믿으면, 이 먼저이다.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하지만 구속사적으로 정확히 보면 하나님께서 은혜로 구원해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믿음이 생긴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그 결과로 생긴 것이 바로 믿음이다. 실제로는 정확한 표현은 내가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내 안에 들어왔을 때, 우리가 믿어지는 믿음을 받게 된 것이다. 먼저는 이 믿음이 뭔지를 살펴보기 전에 앞서 말씀드린 믿음의 전제조건 두 가지를 믿음은 눈으로 본 것이 아니어야 하고, 믿음은 본 것만큼이나 확신하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믿음의 전제조건이고 우리가 의인을 통해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는 내 의와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으로, 구원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복음이, 하나님의 의가 내게 들어와서 내가 의롭게 되었다. 그래서 내게 두 가지 믿음이 생기게 되는데, 현재 서 있는 이 현재를 기점으로 해서 과거에 있었던 일 하나와 미래에 있을 일 하나에 대한 믿음이 우리에게 생기게 되는 것이다. 먼저 우리의 믿음의 첫 번째는 과거에 있었던 일,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서 대신 돌아가신 것을 믿게 되는 것이다. *의인의 믿음 1. -여러분들이 이 사실을 믿으셨다고 생각하는가? 여러분들이 힘과 능력으로 믿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나에게 주어졌을 때, 이것이 믿어지는 믿음이 생기는 것이다. 이천 년 전에 그것도 지구 반대편지역에서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한 유대인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그분이 바로 나를 위해서 죽었다고 한다. 이천 년 후에 나올 나을 위해서,,, 지금 이곳에 있는 나를 위해서, 성경에 보면 그 일이 이천 년에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이미 창세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다 선택해 놓으시고 그 하나님이 선택해 놓으신 그 길을 따라서 그 약속대로 완벽히 이루어졌다. 라고 말씀하고 있다. 흔히들 말하는 쉽게 말하는 논리적으로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가? 이천년 후에 나를 위해서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적어도 나와 같은 종족도 아닌 그 한 사람이 나를 위해서 죽었다라는 그 사실을 우리가 믿을 수 있는가? 상식적으로 논리적으로? 그런데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가? 왜 그 사실이 믿어지는가? 하나님의 의가 구원을 주시는 그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임하셨기 때문이다. 복음을 통해 의인에게 생긴 첫 번째 믿음은 과거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나의 구원을 위해 죽으시고 내 죄를 대신 져 사해주셨다는 그 사실이 바로 믿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믿음은 이제 현재에 내가 서 있는 현재로부터 미래의 일에 대한 한 사건의 대한 믿음이다. *의인의 믿음 2. 미래에 있을 일, 우리가 천국에서 주님과 영생을 누린다는 사실을 믿게 됩니다. -여러분은 내가 천국에 갈 것을 내 힘과 내 능력으로 믿은 것이 아니다. 이것을 믿을 수 있는가? 사람이 죽은 다음에 그 다음 생애가 있고 그 다음 생애 가운데서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어지고, 이천년 전에 한 번 본적 없고 나와 전혀 다른 한 사람이 나를 위해 대신 죽어주신 그 이유 때문에 내가 죽어서 천국에 영원히 영광스러운 곳에서 영화롭게 산다는 이 사실을 우리의 상식과 논리로 믿을 수 있나라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은 믿는 게 아니라 믿어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의 복음의 능력,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그 복음, 그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을 때, 우리에게는 과거에 이천 년 전에 그 사건이 믿어지고 미래의 우리가 천국에서 주님과 영생하겠다는 그 사실이 믿어지는 그 사람이 바로 의인인줄 믿는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5장 19절 말씀에 이렇게 말씀한다. *고린도전서 15:19,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우리의 삶의 초점이, 우리의 삶의 바람이 이 땅의 삶뿐이면 우리가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 말은 우리의 삶이 이 땅에서 끝나지 않고 마무리되지 않는다. 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하나님의 의를 십자가의 능력을 부어주셔서 천국의 영생을 누리게 하셨다. 이 사실을 믿는가? 여러분은 이 땅에서가 아니라, 천국에서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영화롭게 사는 것을 믿는가? 천국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는데, 천국에 갔다 온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본적도 없는데, 가끔 다녀왔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믿지 말라. 천국은 그렇게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는다. 천국을 언제 갈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천국 가서 영화로운 주님과 영광스런 그 밝고 빛난 곳에서 영원히 살 것을 내가 믿고 있지 않은가? 그 믿음은 하나님의 의, 복음 안에 들어 있는 그 하나님의 의가 저와 여러분에게 부어졌기 때문에 믿어지는 것이다. 정리하면 의인이 믿은 두 가지는 내가 서 있는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의 십자가의 구속 사건이 믿어지는 것, 미래의 천국에 영생에 사건이 믿어지는 것, 이것이 의인이 가진 믿음이다. 사실 이 두 가지 외에 다른 믿음들도 있지만 다 부스러기이다. 그런데 오히려 우리는 이 의인이 믿음의 의의 전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들어온 것 두 가지, 강력한 믿음의 사건, 이 사건은 조금 멀리 두고 그저 내 주변에 있는 내가 정말 가지고 싶고 내가 정말 말하는 것만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이렇게 우리 믿음의 대상을 정말 나의 마음만큼 좁혀놓고 있지는 않은지 한 번 돌아보면 좋겠다. 자 이제 복음을 통하여서 의가 전가된 그래서 이롭게 되어 의인이라고 불리어지게 되고 그 의인에게 십자가의 능력으로 두 가지 미음이 우리에게 들어오게 되었다. *의인의 믿음1: 과거, 십자가 구속의 사건, 의인이 믿음2: 미래, 천국 영생의 사건. -그 두 가지 믿음으로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하면 III. 세 번째가 집중해 볼 단어이다. ‘살리라’ 하는 단어이다. -믿음은 사실 믿는 것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사는 것이다. 정말 믿으면 자연스럽게 살아진다. 우리는 가끔 계단을 오를 때 계산이 높이가 다른 계단을 내려갈 때, 발을 헛디딜 때가 있다. 우리는 계단이 이번 계단과 높이가 같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다음 계단을 딛는다. 자연스럽게 딛는다. 그런데 그렇지 않을 때, 발을 접 지르거나 넘어지고는 한다. 믿음이라는 것은 내가 믿어야지, 믿음대로 살아야지 가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살아지는 것이 진짜 믿음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다른 말로 의인은 십자가의 능력으로, 천국의 미래의 소망으로 산다는 것은 과거에 그 십자가의 능력이 오늘을 살게 하는 능력이다. 미래의 그 소망이 오늘을 살게 하는 바로 그 능력이다. 우리 담임목사님께서 잘 쓰시는 표현으로 ‘과거의 현재형, 미래의 현재형’, ‘의인이 산다.’ 라는 것은 의인이 된 이후로 현재부터 앞으로 살아갈 삶을 함축하는 표현으로 ‘살리라’를 미래형으로 이렇게 성경에는 표현해 놓고 있다. 이 ‘산다.’ 라는 것에는 과거에 십자가의 능력이 포함되고, 그리고 미래의 천국이 포함되는 것이 바로 현재를 산다. 라는 그러한 의미가 들어가 있다. 저와 여러분이 현재에 과거의 십자가의 능력이 없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저 지옥으로 가는 컨베이어 벨트에 얹어져 있을 뿐이다. 저와 여러분의 현재에 미래의 천국의 소망이 없다면 마찬가지로 그저 지옥으로 가는 컨베이어 벨트에 얹어져 있을 뿐이다. 믿지 않는 자들은 과거에 쌓아놓은 재력, 능력, 지식, 기술, 그것으로 현재를 살아간다. 그렇지만 십자가로 의롭게 된 의인들은 이천 년 전에 십자가에 그 보혈의 능력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다. 미래도 마찬가지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앞으로 개발될 과학, 의학, 이런데 의지하고 소망을 두고 현재를 살아간다. 하지만 의인이 된 예수 그리스도의 자녀들은 미래의 천국 입성할 그날을 기다리면서 그 소망으로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그 상급에 대한 소망으로, 그곳에서 만나게 될 수없이 많을 믿음의 가족들을 만남의 소망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산다.’ 라는 것은 과거의 십자가의 능력, 미래의 천국의 소망, 이것이 의인에게 믿음으로 자리 잡아서 그 능력으로 앞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믿음을 구체적인 내용으로 바꾸어보면 이렇게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살리라 라는 말씀에 한 가지 살펴볼 수가 있다. 바로 문장이 태라는 것을 살펴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능동태, 수동태, 그 태이다. 태는 주어가 하는 방향을 말하는 것이다. 능동태는 주어가 스스로 가는 동사의 형태를 우리가 능동태라고 이렇게 이야기 한다. 예를 들어서 ‘내가 성경책을 들었다.’는 것은 능동태이다. 그런데 수동태는 주어가 어떤 대상에 의해서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내가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서 ‘내가 지게차에 들렸다’ 주어는 나인데 나의 결정과는 상관없이 지게차에 의해서 움직이는 수동이라고 한다. 내가 행동을 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본 살리라는 헬라어에는 우리나라의 말에도 없고 지금 남아 있는 태가 하나 있는데 그 태가 바로 ‘중간 태’이다. 능동도 아닌 수동도 아닌 중간 태라는 아주 독특한 동사의 형태가 있다. 유명한 신학자 유진 피터스는 중간 태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주어로 참여하는 데에 내가 참여하는 행동에 내가 주도적이지 않는다. 어중간한 중간의 상태. 예를 들면 내가 최선을 다해서 기도하지만 응답의 방향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결정하신다. 내가 하나님이 감사해서 최선의 삶을 살지만 삶의 주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결정하신다. 내가 최선을 다해서 말씀에 순종하고 헌신하며 살지만, 그 열매는 주어인 내가 아니라, 그 열매는 하나님이 받으신다. 이게 바로 수동도 아니고 능동도 아닌 중간 태의 의미이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문장의 중간 태 의미를 조금 살려서 번역해 보면 이렇게 할 수 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삽니다. 그러나 그 삶은 내가 주관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이끄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들이 바로 이 형태를 유지한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로버트로 만들이 않았다. 완전히 우리가 수동태가 되어가지고 하나님이 시키는 삶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주권을 모두 다 넘겨주어서 “네 행동 네가 책임져라. 네 구원도 네가 책임져라.”라고 그렇게 우리에게 맡겨주시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지와 인격을 주셨지만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의 삶을 여전히 인도하고 계신다. 헬라어의 이 중간 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인, 선택받은 백성인 의인 사이에 그 아주 미묘한 관계를 설명하는 아주 독특한 동사의 형태가 바로 이 중간 태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삽니다.’ 그 의인은 바로 저와 여러분이다. 주어이다. 저와 여러분이 주어가 되어서 허락해 주신 믿음을 가지고 산다. 그렇지만 그 삶은 삶의 주관은 나를 구원하시고 내 삶을 끝까지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는다. 말씀을 마무리 하겠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얼마나 익숙한 말씀인가? 이 말씀을 볼 때마다 우리가 계속 마음이 불편하다. ‘의인’, ‘나는 의인이 아닌데, 믿음으로 나 믿음 없는데, 살리라, 못사는데’ 이 본문을 볼 때 마다 늘 마음이 불편하다. 왜냐하면 의인의 정의가 잘못되었다. 믿음의 정의가 잘못되었다. 삶의 그 태가 잘못되었다. 수동도 아닌 능동도 아닌 헬라어의 독특한 이 중간 태라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으로 보지 못하면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이 말씀이 우리가 불편한 것이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복음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의인이 된 줄 믿는다.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이 옆 사람에게 하면 좋겠다. “당신은 의인이십니다.” 이제 안 불편 하는가? 의인에게 두 가지 선물이 주어진다. 이것은 의인에게 주시는 선물과도 같다. 이천 년 전에 그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이 그 십자가의 예수님이 믿어진다. 내가 예수님이 믿어진다. 그리고 미래의 내 삶의 영원한 소망이 천국에 있다는 사실이 믿어진다. 그것이 우리에게 믿음이다. 내가 주어로서 사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그리스도의 능력이 현재로, 미래의 천국의 소망이 현재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초점이 십자가에 있을 때, 우리의 초점이 천국에 있을 때, 우리는 믿음 가진 의인답게 이 땅에 살 수 있는 것이다. 여러분들에게 십자가가 천국이 선명해질수록 오늘의 우리의 믿음의 삶이 선명해진다. 여러분 누군가에게 십자가에 대해서 선명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가? 그것이 우리에게 믿음이다. 그래서 내가 지금 사나는 것은 내가 주어로서 사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그리스도의 능력이 현재로, 미래의 천국의 소망이 현재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초점이 십자가에 있을 때, 우리의 초점이 천국에 있을 때, 우리는 믿음 가진 의인답게 이 땅에서 살 수 있는 것이다. 여러분들에게 십자가가, 천국이 선명해질수록 오늘의 우리의 믿음의 삶이 선명해진다. 여러분 누군가에게 십자가에 대해서 선명하게 설명해 줄 수 있겠는가? 여러분들은 믿음으로 존재하고 있는 천국에 대해서 누구에게나 선명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가? 드 십자가가 선명하지 않다면 현재 내 믿음의 삶도 선명하지 않다. 라는 것이다. 이천 년 전의 십자가의 복음의 능력이 선명해질수록 오늘의 믿음의 삶이 선명해진다. 천국의 그 소망이 선명하면 선명할수록 오늘의 믿음의 삶이 선명해질 수 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저 십자가는 이천 년 전에 있었던 일, 천국에는 언젠가는 죽으면 갈 곳이 아니라, 십자가에 대해서, 천국에 대해서 깊이 연구하고 묵상하라. 십자가와 천국에 대해 믿을 필요는 없다. 이것은 믿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믿기 때문에 이 자리에 와 있다. 그렇지만 십자가와 천국에 대해서 깊이 묵사하라. 전 개인적으로 마틴 로이드 죤슨 목사님의 ‘십자가’라는 책이 큰 도움이 되었다. 오래 사역훈련생들에게 필독서이기도 하다. 여러분들도 꼭 한 번 읽어보라. 천국에 대한 책은 마틴 로이드 죤슨 목사님인 의 교리강해서 3권짜리가 있다. 이 세권 중에 3권, ‘영광스런 교회와 아름다운 종말’, 이 교리책을 읽으면서 저는 천국에 대해서 굉장히 큰 도움을 얻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한 번 더 말씀드리겠다. 십자가가 선명해질수록 오늘의 삶이 선명해진다. 오늘의 믿음의 선택이 선명해진다. 미래의 천국이 선명하게 보일수록 오늘의 삶이 선명해진다. 나의 믿음의 시험지는 무엇인가? 나를 의롭게 하는 것은 나에게 십자가와 천국이 내게 얼마나 선명하게 그려지는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믿어질 때, 나도 믿어질 수 있는 만큼 말할 수 있는 우리에게 힘이 있어야 한다. 그럴 때 과거의 일이 아니라, 지금 사는 의인이 사는 삶이 되는 줄 믿는다. ♣요약 내가 무언가를 해서 의인이 되려고 하는 그런 율법적인 그런 마음을 버리고, 복음으로 의롭게 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기억하여 나의 의가 아닌 하나님이 주신 십자가의 의로 살아가며 이천 년 전의 나르 구속하신 십자가의 능력의 믿음과 미래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 영생의 소망이 믿음으로 과거 현재형, 미래 현재형의 삶을 살고, 십자가의 천국을 선명하게 소개하고 십자가의 천국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진정한 의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이는 행위나 공로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죽지 않고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이다. 복음은 우리에게 믿는 자의 칭의를 그 방법으로 보여준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우리에게 구원의 도를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은 반드시 우리에게 칭의의 도를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복음은 의로운 것을 나타낸다. '복음에는' 그와 같은 의가 '나타나' 있다. 이 같은 복음의 의를 '하나님의 의'라고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의이다. 그 의는 우리 자신의 행위로 인한 공로로부터 나오는 의에 대한 모든 주장들을 끊어버린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의이다. 이 같은 복음의 의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 즉 우리로 의롭다함을 얻게 해 주는 믿음에서 우리로 살게 해 주는 믿음으로 이르게 한다. 이것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접붙이게 하는 믿음에서 우리의 뿌리이신 그로부터 덕행을 끌어내는 믿음에 이르게 되는 것을 나타내주는 말이다. 이 두 믿음이 다음의 말에 포함되어 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이란 말은 우리를 의롭게 하는 믿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란 말은 우리를 유지시켜 주는 믿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소중하다. 그 믿음은 증가하고 계속되며 인내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이 갑작스럽게 유명해진 새로운 교리가 전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하여 구약에서 잘 알려진 성경 한 구절을 인용한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자는 또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와 영광의 삶을 살 것이다. 이와 같이 복음의 의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 즉 그것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약의 믿음에 이르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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