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2월 1일)
제목: "승리의 시작, 마음의 할례"
말씀: 여호수아 5:2~9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부목사님)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백요셉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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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5:2~9,
2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3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
4 여호수아가 할례를 시행한 까닭은 이것이니 애굽에서 나온 모든 백성 중 남자 곧 모든 군사는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길에서 죽었는데. 
5 그 나온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았으나 다만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길에서 난 자는 할례를 받지 못하였음이라.
6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의 음성을 청종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맹세하사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들이 보지 못하게 하리라 하시매 애굽에서 나온 족속 곧 군사들이 다 멸절하기까지 사십 년 동안을 광야에서 헤매었더니. 
7 그들의 대를 잇게 하신 이 자손에게 여호수아가 할례를 행하였으니 길에서는 그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못하였으므로 할례 없는 자가 되었음이었더라.
8 또 그 모든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마치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 머물며 낫기를 기다릴 때에. 
9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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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요셉 부목사님-"승리의 시작, 마음의 할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부흥보고 수요저녁예배에 오신 성도님들을 한 분 한 분 축복하며 환영한다. 오늘은 하나님만 영광 받으시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를 허락하시기를 믿는다. 오늘 말씀은 여호수아 말씀이다.
- 부부는 살다 보면 서로 닮는다는 말을 많이 들었을 것이다. 부부가 오래 살다보면 함께 웃고 함께 울기도 하고 함께 한 시간이 많기 때문에 서로 닮아가기 마련이다. 이제 눈빛만 보더라도 또 말투만 듣더라도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어떤 것을 표현하고 싶은지를 알게 되고 닮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우리들은 누구를 많이 닮았는가? 하나님과 동행하고 그분과 오래 생활을 하다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닮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우리는 심령 가운데 하나님 말씀을 늘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사모하고 따라 가야 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수요일 이 밤에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부흥보고 수요예배에 참석하신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많이 닮으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그리고 이 밤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영적 비결을 깨달아서 정말 결단하고 주님 앞에 더 가까이 가는 귀한 밤이 되기를 소원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음을 들으시고 모세를 통해 애굽에서 나오게 하셨다. 그 과정 가운데 열 가지 재앙을 경험하고, 또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인데도 하나님께 끊임없이 불순종하였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기 위해 40년 동안 광야의 길을 걷게 하셨다. 40년이란 시간이 지나자, 광야에서, 광야 1세대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다 죽고, 광야에서 태어난 젊은 2세들과 일어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된다. 출애굽 할 때는 홍해의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알려주셨다면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넘어가는 과정 가운데 요단강이 있었는데, 그 요단강은 허리춤까지 오는 가파른 물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요단강을 밟자마자 그 요단강이 멈추는 하나님의 은혜를 허락해 주셔서 요단강의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알려주셨다.
 
오늘 본문은 가나안 땅에서 처음 맞이하는 적군인 여리고 성 전투를 준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리고 성의 정확한 크기와 위치는 우리 알 수 없지만 높은 지대에 있었고, 외곽과 내각의 벽이 촘촘히 있어서 아무도 알 수 무너뜨릴 수 없는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성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알듯이 하나님께서는 여리고 성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방법으로 함락시키시기를 원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7일 동안 여리고 성을 돌라고 명령하셨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말씀에 순종하여 여리고성이 무너졌고 이것은 정말 충격적이고 쇼킹한 사건이었다. 사실 이런 스토리를 접할 때마다, 우리들도 우리들의 삶의 여리고성이 무너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여리고 성이 무너졌다.’라는 결과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여리고 성이 무너지기까지 하나님께서 어떠한 말씀을 하셨고,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청종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이왕이면 오늘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를 깨달아 우리들의 삶의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귀하고 복된 역사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힘이 있고 능력이 있음을 여러분이 믿으시길 소원한다.
 
여러분 첫 번째 곧 전투를 시작하는데, 오늘 읽었던 여호수아 5장에서 하나님께서 조금 상식 밖의 일을 요청하시는듯하게 들린다. 그것이 무엇인가? 할례이다. 여러분 할례가 무엇인지를 아는가? 할례(割禮)는 남성의 생식기(生殖器)의 포피(包皮)를 자르는 것을 말한다. 생명을 잘랐다는 뜻으로 죽음을 상징하는 행위였다.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할례는 창세기 17장에 나온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셨는데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창세기 17:7~11.
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1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행하기를 원하셨는데 그 이유는 언약의 표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맺는 언약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말씀과 또 그들을 축복하시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 대상이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맺는 이 할례를 통해서 언약의 표징을 삼과 하나님께서 원래 디자인하신 본연의 모습대로, 말씀대로, 하나님의 계획대로, 뜻대로 살아가겠다고 고백하는 상호간의 약속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시점에 많은 사람들이 할례를 통해 언약을 체결(締結)했다는 사건만을 보고 ‘나는 이제 됐구나!’ 라고 생각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을 체결하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를 요청하고 계신다. 그런데 우리가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또 언약 가운데 있는 약속을 이행 받지 못한다. 사실 이것은 굉장히 무서운 이야기이다. 그냥 단순히 축복을 덜 받고 못 받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못될 수도 있다는 표현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그리고 끊임없이 그분의 백성들을, 그분의 백성들의 어떠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어떠함을 통해서 사랑해 주시고, 오래 참아주시고, 안아주시고 인도해 주신다. 또 언약 안에 있을 수 있도록 해주셨다.
 
500년 전에 아브라함과 언약을 체결하신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으로 애굽 땅을 나왔지만, 불순종으로 광야의 길을 걷고, 광야의 1세대는 다 죽고, 이제는 할례 받지 못한 2세대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언약을 체결하자고 초청하고 계신다.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기를 원하고 너희들의 길을 축복한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래서 할례는 무엇인가? 할례는 언약의 초청이자 축복의 초청이다. 오늘 이 밤에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렇게 초청하고 계신다.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싶다. 내가 너희 길을 축복하고 싶다.” 고 초청하고 계신다. 그런데 할례는 정말 어이가 없는 일일수도 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라. 여리고 성에 전투를 앞두고 있다. 그리고 여리고 성 사람들의 입장에서 광야에서 막 나온 사람들이 이제 막 전쟁을 하려고 하는데 무엇을 하나 보니까 할례를 받는 것이다. 남들이 생각할 때에는, 어떻게 보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큰 전투를 앞두고 전술(戰術)을 짜고, 전략(戰略)을 짜고, 군사(軍士)를 훈련(訓練)하고 체력(體力)을 길러야 하고 상대방(相對方)의 실태(實態)를 조사(照査)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적군(敵軍) 앞에서 할례를 행하는 것이다. 실제로 전쟁에 참여할 남성들이 다 할례를 받고 움직일 수조차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것은 정말 어처구니없고 어이없는 상황일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선포(宣布)하신다.
 
*역대하 20:15,
15 야하시엘이 이르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전쟁은 나의 것이라는 것이다. 전쟁은 나한테 속하였으니 이제 너희들은 언약 안에 있다”고, 이제는 내가 너희를 대신해서 싸우겠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다시 한 번 언약(言約)을 체결하자고 하신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부분, 영적인 부분들의 해결을 통해서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면 외적인 부분, 눈에 보이는 문제와 어려움들은 내가 해결해 주겠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할례를 통해서 이제는 너희가 죽고, 너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나기를 원한다고 말씀하고 계시고 이 언약을 통해서 이제는 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너희들의 실제적인 주인이 되고 왕이 되어 주신다고 인도하시는 인도(引導)자가 되어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시는 것이다. 죽었다고 진짜 죽은 삶이 아니라, 이제는 우리들의 삶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셔서 생명의 강수가 넘쳐흘러 그 예수께서 전지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를 대신해서 싸워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세상 사람들 보기에는 정말 어처구니없고, 어이없고, 바보 같고 멍청한 것 같은 이 할례를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하기를 원하셨고, 심지어 적군 앞에서 행하기를 원하셨다. 왜 이것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방법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방법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도 이 할례를 원하고 계신다. 죽음을 상징(象徵)하는 이 할례(割禮)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제 우리는 죽고,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기를 원하신다. 그렇다면 2023년 2월 1일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에 할례를 어떻게 받아야 할까? 우리도 포피를 자르고 표징을 내야 될까? 아니다. 이제는 몸이 아니라, 마음 가운데 할례를 받기를 원하시고 계신다. 신명기와 골로새서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신명기 30:6,
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골로새서 2:11,
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이제는 몸이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받기를 부탁하고 계신다. “성경을 읽고 교회에 열심히 나오면 되는데, 꼭 이렇게 할례를 받아야 됩니까?” 라고 질문하실 수 있지만 대답은 “꼭 받으셔야 합니다.” 할례는 언약의 표준이고 할례가 없으면 하나님과의 언약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냥 단순이 믿고 신앙생활 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나의 자아, 정욕, 욕심, 죄들을 십자가에 다 못 박고 이제는 내가 육에 속한 것이 아니라,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이제는 영에 속한 사람임을 씩씩하게 고백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무슨 말이냐면 우리의 삶에 여리고성이 나타나면 우리는 무엇을 가장 먼저 하는가?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넘어 트리냐? 라고 전략을 짜고, 우리들의 생각과 계획을 정말 인맥을 동원해서 그것을 고심하고 고민한다. 물론 그리고 기도한다. 그리고 어떻게 기도하는가? “하나님, 내 자아와 고집과 아집이 다 여기 있는데, 하나님, 내가 세운 계획은 여기 다 있는데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나님이 밀어주시면 저 여리고성 쓰러질 수 있습니다. 쓰러트릴 수 있습니다.” 라고 우리는 기도한다.
 
하지만 우리는 문제에 치중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전쟁은 나에게 속하였으니 나한테 와라, 나를 신뢰하라. 나한테 너희들의 믿음을 보여주어라.”라고 요청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사람은 내면의 싸움, 영적인 싸움을 하면서 외적인 것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이라고 믿고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면 가고, 서라하시면 서고, 앉으라고 하시면 앉고, 누우라고 하시면 눕고, 일어서라 하시면 일어설 준비가 되어 있어야 된다고 본다. 그래서 오늘은 동일하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마음의 할례를 부탁하고 계신다. 이제는 정말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삶, 우리들의 생각과 방법과 우리들의 능력으로 행하는 삶이 아니라, 이제는 우리 가운데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삶, 언약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삶을 요청하고 계신다. 라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하면 마음의 할례를 받을 수 있을지에 두 가지를 가지고 나누겠다.
 
I. 회개(悔改).

-여러분, 회개할 때, 어떻게 하는가? 그냥 기도하면서 마음이 불편했던 것, 생각해 보면서 실수했던 것, 어떻게 보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감정적으로 도덕적으로 우리가 넘어졌던 부분을 기도하지는 않는가? 여러분, 그것도 회개(悔改) 맞다. 그것도 맞지만 회개라는 것은 내 입장에서 내가 생각나고 내가 잘못된 것들만이 기도하고 중요한 용서를 구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하지 않은 것을 내려놓는 것이 진정한 회개이다. 여러분 회개는 물론 내가 저질렀던 것, 실수했던 것, 연약했던 부분들, 내 감정적으로 도덕적으로 부족한 부분들, 주님 앞에 내려놓은 것은 맞다. 그런데 진정한 회개는 내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 입장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지 않는 것들을 내려놓는 것이 회개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옆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 사람이 답답해, 왜 저렇게 살지?’ 라고 속으로 욕하는 부분들도 있다. 예를 들어서 지금 ‘백요셉 목사님 왜 눈이 저렇게 적어, 키는 왜 그리 큰 거야!’ 라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발음이 왜 저렇게 자꾸 꼬이는 거야’라고 이렇게 하는 속으로 하는 것도 다 회개해야 된다. ㅋㅋㅋ 농담이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관계적으로 지은 죄들, 속으로 지은 죄도 회개해야 되지만 여러분, 한 번 이렇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여러분, 우리가 잘 되었을 때, 감사의 조건이 넘쳤을 때, 우리가 했던 행동과 표정을 혹시 다른 사람들이 듣고, 다른 사람들이 관계를 맺으면서 혹시 상처를 받았다면, 혹시 나의 모습 때문에 내가 잘못되고 죄 짓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혹시 내가 보편적으로 살아가는 행동들이 하나님께서 보시고 마음에 드시지 않았다면, 여러분 회개해야 되지 않는가? 내가 감사할 때도, 내가 즐거울 때도, 내가 그 어떠한 때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지 않았다면 여러분, 회개해야 한다.
 
여러분, 디모데후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그릇이 있다고 하신다. 큰 집에는 금 그릇도 있고 은그릇도 있고, 나무 그릇도 있고, 질그릇도 있는데, 하나님께서 뭐라고 표현 하셨냐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그릇은 깨끗한 그릇이라고 말씀하신다. 여러분 믿는가?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마음의 할례 중에 이 회개라는 부분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러분 내가 생각나지 않더라고 기도해야 한다. “성령 하나님 이 밤에 오늘 이 시간에 주님 앞에 제가 회개합니다. 주님, 깨끗한 그릇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하기 때문에 성령 하나님, 생각나는 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행동이나, 원치 않는 표현을 했다면, “주여 이 시간에 생각나게 하셔서 이 입술로 회개하게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 기도의 영을 부어주셔서 주님 앞에 무릎 꿇어 주님의 은혜를 구할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시옵소서.” 라고 나아가야 된다는 것이다. 여러분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는 주님 앞에 나아와 은혜를 구하는 자에게는 분명히 베풀만한 은혜를 허락해 주실 것을 믿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깨끗한 그릇이 되어 주님 앞에 쓰임 받는 평생이 되기를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원한다.
 
II. 자기부인.

-자기 부인은 정말 어려운 부분이다. 보통 우리들이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는 우리들의 삶과 나의 삶과 생각을 정해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입하기 쉽다 제가 예를 들어보면 “내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하시는가? 정말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겠다고 결심하는가? 아니면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 표현이 너무 조금 강하셔, 너무 극단적이셔, 그냥 요즘 표현대로 “네 이웃을 자상하게 해라, 따뜻하게 해라, 상냥하게 해라, 손 한 번 잡아주어라.”라고 표현하시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표현하신 것은 여러분, 우리가 우리들의 생각과 기준이, 생각대로 기준을 내려놓기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입하려고 하면은 자꾸 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표현은 그냥 조금 극단적인 표현, 패션, 너무나도 다른 표현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몸소 실천하신 표현이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너희가 작은 예수가 되어서 그 명령을 실행하기를 원한다고 하셨다. 우리가 지키지 못하는 이유는 내용이 오래되어서가 아니라, 내 생각과 내 기준을 내려놓지 못해서이다. 그러기에 자기부인은 내 생각과 내 기준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기준이 우리들의 삶에 우선으로 삼고 나의 것을 내려놓는 일을 이야기 한다. 물론 아프다. 물론 고통스럽다. 괴롭다. 어떨 때는 이렇게 사는 것이 맞을까? 라고 생각도 든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모든 믿음의 선조들은 이 자기부인의 시간을 거쳤다.
 
여러분, 야곱을 기억하시는가?
*야곱- 평생 자기 생각, 자기의 방법, 자기의 꾀로 살아가다가 얍복 강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와 씨름해서 자기부인의 시간을 가지고 온전히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다.

또 다윗은 어떠한가?
*다윗- 승승장구한 평생의 삶을 살았지만 자기욕정, 욕망에 못 이겨 범죄하고 난 뒤에 하나님 앞에서 씨름해서 “하나님께서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도와주시옵소서. 나를 떠나지 마옵소서.”라고 고백하며 자기부인의 시간을 가진 이후에 하나님의 평생친구가 되는 삶을 살았다.

또 요나는 어떠한가?
*요나- 하나님 뜻과 자신의 뜻이 틀리다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도망갔지만 칠 흙 같은 어둠 가운데 그 물고기 뱃속에서 다시 한 번 주님 앞에 돌이키고 자기부인으로 주님 앞에 쓰임 받았다.

또 사울은 어떠한가?

*사울- 자기 의가 넘쳐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던 그 사울이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 이후에 평생 자기부인하면서 살아가는 삶을 살았다. 다른 사람, 다른 이야기 할 것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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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사셨는가? 여러분, 3년의 공생애가 끝난 이후에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직전에 “하나님, 너무 힘듭니다. 라고 기도하시면서 내 잔을 옮겨주시옵소서.”라고 하셨지만 결국에는 십자가를 지시고 자기부인을 하시며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저희들에게 나타나셨다.
 
여러분, 이 믿음의 선조들이 대충대충 기도하면서 “하나님, 도와주세요. 아니면 말구요.” 라고 이렇게 기도했는가? 아니다. 이들은 정말 땀방울이 핏 방울이 될 때까지 자기의 뜻을 내려놓고 자기부인의 시간을 가졌다. 다리를 절며 평생을 살 때까지 그렇게 될 때까지 하나님께 씨름하면서 자기의 것을 내려놓은 시간을 가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과 씨름하여 나를 내려놓은 시간은 마음의 할례를 갖는 시간이다. 이제는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죽고 이제는 예수님 마음대로 사용해 달라고 고백하는 시간이다. 분명한 것은 이 과정은 너무나도 고통스럽고 아프지만 하나님께서 내 삶 가운데 역사하신다면
나의 살은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삶, 내 삶은 가장 영광스런 삶, 나의 삶은 가장 능력이 풍성한 삶, 권능이 있는 삶, 가장 아름다운 열매 맺게 하시는 삶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이심을 여러분은 기억했으면 좋겠다.
 
여러분, 누가 할례를 받고 싶어 하겠는가? 누가 예수님께서 지셨던 십자가를 지고 싶겠는가? 누가 몸에 칼을 대고, 피를 흘리고 싶겠는가?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받기를 원하신다. 내 자녀답게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이제 그렇게 살아서 하나님께서 온전히 역사하시는 삶, 이제는 정말 축복의 통로, 언약의 통로로 세상 가운데 우리가 그렇게 살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여러분, 포피를 자르고, 피나는 시간은 죽을 것 같이 아프고, 고통스런 시간일지 모르지만 가장 완벽하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시간임을 믿으시길 소원한다. 오직 그 시간만이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명료하고, 명확하게 기억하고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며, 이제는 내가 아니라, 내 안에 하나님께서 사시는 시간임을 여러분은 기억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말씀을 마무리 하겠다.
여러분 할례를 받으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 5장 마지막 절에 여리고 성을 다가가기 전에 이렇게 고백하신다.
 
*여호수아 5:15,
15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내가 선 땅은 거룩하니 신을 벗으라고 이야기 하신다. 여러분 이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에 더러운 것이 있을 수 없다. 라고 말씀하시며 내려놓으라고, 이제는 깨끗해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또 다른 의미는 우리가 우리의 신발을 신고는 우리 뜻대로, 우리 멋대로 가고 싶은 곳 가고,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삶 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신발을 벗고 이제는 하나님께서 안아주신다는 것이다. 이제는 신발을 벗고, 하나님께서 업어주셔서 이제는 네가 가는 곳을 같이 가주신다고 하신다. ‘네가 움직이고 네가 행하는 것, 같이 함께 해주시겠다.’ 라고 하나님께서 도전하고 부탁하고 계신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의 인생 가운데, 우리들의 삶 가운데, 직면하고 있는 우리들의 삶의 여리고성은 무엇인가? 그것이 건강인가? 재정인가? 그것이 가정인가? 그것이 가족인가? 그것이 관계인가? 신앙의 문제인가? 신앙의 문제인가? 마음의 두려움인가?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 밤에 우리들에게 도전하고 계신다. “전쟁은 나에게 속하였으니, 이제는 내려놓고 이제는 너희들은 죽고 예수로 사는 너희의 삶이되기를 바란다.” 이제는 이 전쟁 가운데는 우리가 할 것은 마음의 할례이고 우리가 해야 될 것은 우리들의 자아를 죽이고 우리들의 모습과 정욕과 우리들의 죄를 죽이고 이제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파트를 기다리며 기대하며 소망하며 손을 들고 이제는 나의 신을 벗고 주님과 동행하는 시간을 기대하라고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신다. 소원하고 바라기는 우리들의 삶 가운데 마음의 할례는 고통스럽지만 우리가 마음의 할례를 통해서 우리의 평생 가운데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다. 하나님께서 나의 여리고 성을 무너트려주셨다. 라고 간증하고 고백하고 자랑하고 다른 이들에게 나눌 수 있는 평생이 되기를 축원한다.
 
♣요약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으니 이 시간에 나의 마음을 주님께 맡기며, 이제는 내 생각, 내 계획, 내 방법대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이제는 이 여리고 성을 주님께 맡기고, 영적인 부분과 내면적인 부문과 관계를 정리하여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서 이제는 전쟁은 하나님께만 속하였다는 것을 고백하는 삶이되기를 기도해야 한다. 마음의 할례를 받아서 오직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고 회복하여 주의 백성답게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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