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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1월 18일)
제목: "일상, 하나님의 나라!"
말씀: 미테복음 4:1-10
찬양인도: 쉐키나(이 디니엘 부목사님)
사회: 문진호 부목사님

설교자: 빅인기 부목사님(목양 3팀장, 중보기도사역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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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테복음 4:1-10,
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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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시험을 본다. 학창시절 중간고사 기말고사 뿐만이 아니라 수능도 있다. 또한 학교를 졸업하고 난 다음에 직장에 취업하기 위하여 취업시험도 보고 직장에서 진급 시험도 본다. 그뿐이 아니라 어떤 자격증을 갖기 위하여 자격증 시험, 운전면허 시험도 본다. 이런 시험들은 우리를 기쁘게도 하지만 어떨 때는 심각한 좌절 가운데 빠지게 하기도 한다. 저는 운전면허 시험에 떨어져서 좌절에 빠졌다. 무려 8번이나 떨어졌다. 학원비 아껴보려고 친구한테 그냥 한 번씩 배우고, 한 번씩 운전해 보고 시험을 쳤는데, 나중에는 시험 치는 비용이 운전학원 비용보다 훨씬 더 많이 나왔다. 여덟 번 떨어지고 난 다음에 아홉 번째에 붙었는데 너무 기뻤다. 20년 동안 무사고로 운전하고 있는데, 한 번씩 도로에 운전하며 운전연습 차량들을 보면 짠한 동질감을 참 많이 느끼곤 한다. 시험은 우리를 절망에 빠지게도 하고 우리를 기쁘게 하기도 한다. 이런 시험은 학교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도 동일한 여러 시험들이 있다.
 
베드로는 그의 서신 서에서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찾아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라고 말씀한다. 성도들을 시험에 빠뜨리기 위하여 어떨 때는 우는 사자의 두려움으로 또한 어떨 때는 광명을 천사처럼 달콤한 유혹으로 성도들을 호시탐탐 노리고 위협한다. 우리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두려움을 주고 또한 우리를 유혹하고 결국에는 경계심을 제거하여 시험에 빠뜨리는 것이다. 인류를 대표하는 첫 번째 아담도 뱀의 유혹에 넘어가 결국 인류를 모든 오염된 가운데 태어나게 하고 살아가게 했다. 이처럼 치명적이다. 또한 너무 어렵고 힘든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항상 이 모든 시험들이 어렵다거나 힘들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는 그의 서신 서에 “네 형제들아 너희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시험당할 때 우리에게 기쁘게 여길 것들을 권면한다. 수제자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6-7절에 보면,
 
*베드로전서 1:6-7,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 도다.
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신앙인들에게 다가오는 시험, 이 시험을 어떻게 견디고 이기느냐에 따라 우리 신앙생활 가운데 치명적인 어려움을 줄 수도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영광이 될 수도 있다고 권면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오는 이 시험들을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고 풀어가는 가의 문제이다. 이런 측면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무나 멋지고 좋은 모범적인 답안들을 보여주셨다. 오늘 우리가 읽었던 본문이다. 예수님은공생애를 시작하며 마귀에게 당하시는 이 세 가지의 시험, 이 시험에서 너무나 못 있게 이기심으로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우리의 삶 가운데 다가오는 시험을 어떻게 이길 것인가를 보여주셨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승리의 비결들을 함께 나누고 우리의 삶 가운데 오는 시련과 어려움들을 승리할 수 있는, 비결들을 배워갈 수 있는 주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예수님이 당하신 첫 번째 시험이다.
I. 첫 번째 시험은 삶의 모습에 대한 오해입니다.

-이 시험은 마귀는 40일 동안 금식하신 예수님께 찾아와서 돌을 변하여 떡으로 만들어 먹을 것들을 촉구한다. 우리나라 속담에 ‘3일을 굶으면 담을 넘지 않을 군자가 없다.’라는 말이 있다. 배고픔들이 너무 심각한 어려운 문제라는 것이다. 저도 예전에 일주일 정도를 금식한 적이 있다. 어느 정도 초반부에는 견디었다. 마지막 2-3일 정도 남겨두고서는 금식 끝나고 나서 먹을 것들을 생각하며 그 상상으로 남은 시간들을 견뎠다. 금식이 그만큼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일주일을 금식도 이렇게 힘들 진데 40일 금식하신 예수님, 얼마나 힘드셨겠습니까? 육체의 모습을 입고 계셨기 때문에 동일하게 고통과 배고픔을 경험하신 예수님이셨다. 그 예수님께 마귀가 시험하는 것이다. 먹을 것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예수님께 배고픔의 문제는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원초적인 문제였다. 마귀는 예수님의 약한 부분을 비집고 들어와 집요하게 공격한다.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 굶주림은 삶의 중요한 현실이며 우리가 당면한 현실의 어려움을 상징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돈이 없어 고민하고 몸이 아픈 것 때문에 어려워하며 불안한 미래 때문에 힘들어 한다. 우리의 가장 원초적이며 현실적인 어려움 아닌가?
 
예수님도 우리의 어려움들을 아셨기 때문에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친히 가르쳐 주셨다. 그런데 이런 마지노선이 무너진 것이다. 그리고 마귀는 우리에게 찾아온다. 또한 예수님께 이야기한다.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역으로 이야기하면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 문제들을 해결해 주셔야 되는 것 아닌가?” ‘하나님이 아버지라면 친히 너의 자리 가운데 찾아오셔서 너를 돕고 일으키시며 그 문제를 하나하나 다 풀어주셔야 되는 것 아닌가?’ 라는 의구심들을 우리에게 던진다. 시험하는 자는 구체적인 현실들 앞에서 해결을 주지 않는 예수님께 실망하고 그 결속력들을 깨뜨리는 것이다. 이러한 시험에 빠지면 우리의 속에 원망이 생긴다. “하나님, 왜 이런 문제들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인가요? 왜 나만 힘든 걸까요? 하나님 나를 사랑하는 것 맞습니까? 아니 하나님 게신 것 맞습니까?” 이런 의구심과 불안함 들이 우리 속에 솟아난다.
 
※얼마 전에 풀룻 연주자인 송솔나무 선교사님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허준, 이산, 동이, 드라마 주제곡들을 연주한 아주 탁월한 풀룻 연주자이다. 어렸을 때, 참 부자였다고 이야기 한다. 아버지께서 유명한 출판사를 운영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의 사업이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도피성으로 어쩔 수 없이 엄마와 누나와 함께 미국으로 떠난다. 미국에서 참 힘겨운 생활을 하고 있던 상황에서 아버지의 사업이 완전히 망했다. 아버지는 도망자가 되에 연락도 안 되었고 엄마와 누나와 함께 그렇게 어렵게 살아가던 중, 어려움 끝에 줄리아드 음대에 프리스쿨에 풀룻 연주로 합격했다. 어려운 현실 가운데 엄청난 은혜였다. 이것만이 그가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고 소망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던 중, 그에게 힘겨운 일이 찾아왔다. 음악연주자에게 악기는 생명과 같은데 그 악기를 세 번이나 도둑을 맞았다고 한다. 첫 번째 도둑맞고, 두 번째 도둑맞고, 마지막 한 악기가 남았는데 천만 원이 넘는 그 악기마저 도둑맞은 것이다. 그때 그는 심각한 절망 가운데 빠졌다.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것인가요? 내 삶을 돌보고 계신 것 맞습니까? 하나님, 나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해도 해도 너무 한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때부터 교회를 떠났다. 그런데 만약 이런 마귀의 속삭임,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런 속삭임이 예수님을 위한 것인가? 그것이 아니다. 이 마귀의 속삭임은 우리를 유혹하는 마귀의 음침한 속삭임이다. 이 비슷한 속삭임이 있다. 마태복음 27:40절에 나온다.
 
*마태복음 27:40,
40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십자가를 향하여 매달린 예수님께 내 뱉은 사람들의 조롱이다.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동일한 속삭임이다. 마귀의 요구는 예수님 안에 있는 인간, 이것을 가장 원하는 것이며 마귀가 기대하는 것이었다.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하나님이 너의 아버지라면 너의 하나님이 너를 구원해 주셔야 되는 것 아니냐?’는 그의 외침이다. 하나님이 너의 어려움의 삶에 찾아오셔서 너를 건져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 ‘너를 도와 주셔야 하는 것 아니냐‘ 한다. 혹시 근본적인 문제로 시험 가운데 있는 분들이 있는가? 동일한 이런 마귀의 외침 가운데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35-37절에 보면,
 
*로마서 8:35, 37,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다. 우리의 삶이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가 얼마나 곤고한 문제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그 어떤 것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고 여전히 하나님이 사랑에서 붙들고 계심을 약속하고 있는 줄 믿는다. 아멘, 하나님의 은혜는 어려움 가운데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우리의 간구 가운데 응답해 주셔서 그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 것,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가 맞다 하지만 또 다른 은혜는 여전히 바뀌지 않는 현실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서 우리를 붙들고 계시다는 것들을 확신하고 그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을 믿는다. 시편 23편에 나오는 고백처럼,
 
*시편 23:4-6,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사망의 음침한 가운데서도 주께서 지팡이가 되시고 원수가 바로 앞에 있는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에게 상을 차려주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럴 때 성도는 고백한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모든 말씀, 그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이 우리에게 고백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아멘.
 
예수님이 당하신 두 번째 시험이다.
II. 두 번째 시험은 삶의 이유에 오해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높은 성전으로 데리고 간다. 그리고 뛰어내리라고 재촉한다. 이 마귀의 시험은 하나님의 말씀까지 동원해서 시험을 한다. 시편 91편 11-12절에 나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천사들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도록 지켜주신다.
 
*시편 91:11-12,
11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12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이 말씀을 인용하여서 “뛰어내려 뛰어내리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너를 구해 주실 거야.”라고 이렇게 유혹한다. 하나님의 권능,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에 대하여 확신하며 뛰어내리는 것을 요청한다. 이 마귀의 시험은 하나님의 권능을 증명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이다. “그래, 내가 한 번 뛰어내리지. 하나님 정말 권능과 능력이 있어, 내가 뛰어 내리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천사들을 통하여 나를 보호해 주실 거야. 야, 잘 봐, 하나님이 얼마나 권능에 있는지, 능력이 있는지, 똑똑히 봐?” 하면서 풀쩍 뛰어내릴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마귀의 예수님은 요청에 전혀 응답하지 않는다. 왜 그랬는가? 하나님의 능력을 증명할 수 있는, 하나님의 힘을 증명할 수 있는 이 상황 가운데 왜 예수님은 묵묵부답(黙黙不答)이셨는가? 마귀의 말에는 하나님의 능력만 나타날 뿐이다. 능력에만 집중하고 있다. 이렇게 하나님의 능력에만 집중할 때, 우리는 시험에 빠진다. 그 능력을 집중하고 신뢰하지만 어떨때는 그 능력이 우리의 삶 가운데 나타나지 않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필립 얀이 지은 책 제목 중에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라는 책에 실망하는 것이다. 왜 실망하는 것인가? 실망이라는 항상 기대라는 단어와 짝을 이루며 나타난다. 기대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실망이 없다. 기대하기 때문에 그 기대한 대로 결과들이 나타나지 않을 때, 우리는 실망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실망할 때가 있다. 우리가 “하나님, 이만큼 내가 했기 때문에 하나님, 나의 기도를 들어주셔야 되죠, 하나님, 내가 열심히 기도했기 때문에, 내가 열심히 봉사했기 때문에, 내가 열심히 모든 것을 열심히 했기 때문에, 하나님 기도 가운데 응답해 주시고,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셔야 되죠?”라고 그런 기대들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 마치 하나님은 능력의 자판기처럼, 내가 어떤 input을 넣으면 하나님으로부터 output이 나와야 된다. 라는 은연중에 그런 기대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하나님, 우리 아이가 이번에 대학교 시험에 떡하니 합격해서 하나님께 영광되게 해주십시오. 하나님, 이번 진급 시험에 합격해서 진급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해주십시오. 하나님, 질병을 주께서 낫게 해주십시오. 하나님께 영광 올리게 주십시오.” 이런 기도가 필요하다. 물론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하지만 이런 기도들, 이런 바램들, 이런 하나님의 능력, 이 능력 가운데는 하나의 전제가 깔려있다. 그것은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내기 위함보다 하나님과 먼저 교제하기 위함이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 가운데서 그 관계 가운데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다.
 
저는 우리 아이들이 어리 적에 가끔 퇴근하면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간식들을 사간 적이 있다. 아이들이 치킨을 좋아하고 햄버거를 좋아했다. 유독 많이 좋아했다. 한 번씩 치킨이나 햄버거를 사서 한 손에 들고 집으로 간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다. 아이들이 저를 보고 막 달려온다. “아빠!!!” 하고 달려와서 저와 함께 하이파이브를 함과 동시에 다른 편에 있는 봉투를 낚아채서 달려간다. 저는 내심 하이파이브하고 나서 아빠를 안아주기라도 하든지, 뽀뽀라도 한 번 해주든지 해줄지 알고 “아빠 감사해요. 잘 먹겠습니다.”라고 이야기 할 줄 알고 시간을 줄줄 알았는데, 이 봉투만 들고 가는 것이다. 물론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왔지만 내심 섭섭한 마음이 있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생각해보았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에만 집중할 때, ‘하나님은 어떤 마음이실까?’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는 그 능력만 우리가 바라본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보실까?’ 그 마음이다.
 
고린도전서 1:9,
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 이전에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시는 줄 믿는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다. 역대하 16장을 보자.
 
*역대하 16;9,
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하나님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신다. 그리고 어떤 자들을 찾으시는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자,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 하나님을 향해 시선이 고정된 자를 찾는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런 자들을 향하여 능력 베푸시는 줄 하나님이신 줄 믿는다. 능력이전에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먼저이고 하나님은 우리와 교제하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다.
 
제가 지난주에 제천기도동산에 다녀왔다. 신년을 시작하기 위하여 기도하러 간 것도 있고 제 삶들 가운데 여러 어려운 문제들, 제 두 자녀의 문제, 또한 저의 문제, 저의 가정의 문제들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간구하기 위하여 기도할 문제들을 가지고 올라갔다. 기도동산의 본당에 앉아 처절하게 기도했다. “하나님, 이 문제를 주께서 해결해 주시고 하나님 도와주셔야 합니다.” 막 기도하는 중에 너무 답답하게 기도하는 중에 주께서 저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인기야, 힘드냐? 네 주님, 너무 힘듭니다. 너 힘듦을 내가 모를 것 같냐? 네가 힘들어 하는 것 나도 잘 알고 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고 너는 내 것이다. 너의 삶을 내가 책임진다. 너의 삶, 그 능력 가운데 해결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가 너의 삶을 책임진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라고 그 마음을 주시는데 하나님 앞에 끄억 끄억 소리 내어 울었다. 저는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저를 기다리고 계셨다.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제가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을 기대하고 계셨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을 능력의 자판기처럼 오해하고 있지는 않는가? 예수님은 이 마귀를 향하여 외치신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우리가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날 때, 이 마귀의 시험은 말씀으로 물리칠 줄 믿는다. 아멘.
 
예수님이 당하신 세 번째 시험이다.
III. 세 번째 시험은 삶의 목적에 대한 오해입니다.
 
-삶의 목적에 대한 오해, 마귀의 마지막 시험은 예수님을 가장 높은 산으로 데려가서 모든 영광들을 다 보여 주신다. 그리고 예수님께 이야기 한다. 그리고 예수님께 이야기 한다. “이거 다 너에게 모든 것들을 줄게. 나에게 딱 한 번만 절 한다면 모든 것들을 줄게.” 모든 것들을 다 가질 수 있는 정말 좋은 진 기회이다. 마귀에게 절만 한 번 한다면, 마귀의 유혹이다. 이 마귀의 유혹은 세상의 화려한 물질을 보면 그것을 갖고 싶고 또 마음껏 누리고 싶고 즐기고 싶은 우리의 욕망들을 부추기며 계속해서 유혹한다. 그 욕망이 유혹으로 넘어간다. 이런 유혹들은 우리의 삶의 도처에 널려있다. 조금만 신앙양심을 접으면 수많은 수익들이 생길 수 있고, 또한 한 번만 눈을 질끔 감으면 얼마간의 소유가 생길 수 있다. 또한 신앙이라는 것만 잠깐 접으면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누리는 그 기쁨들을 동일하게, 그 희락들을 동일하게 누릴 수 있다. 라고 유혹한다. 마귀의 유혹이다. 잠시 접어두기만 하면 한 번, 한 번만, 접어두기만 하면, 요한은 이런 마귀의 유혹들을 너무나 잘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는데, 요한 일서를 보면,
 
*요한일서 2:16,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마귀는 우리를 유혹한다. 이 마귀가 가지고 있는 강력한 무기이다. ‘한 번만 나에게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너에게 다 줄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이것을 다 줄게.’ 라고 한다. 이런 것들에 대해
 
유명한 신학자 리차드 포스트는 돈과 권력과 섹스, 성으로 표현한다. 마귀의 성 가운데 있는 무기이다. 딱 한 번만 눈을 감으면 그것이 나의 것이 된다고 이야기 한다. 혹시 복 요리를 좋아하는가? 복요리, 아주 맛있는 보양식이다. 하지만 복어가 갖고 있는 독성은 죽음의 아이콘 청산가리보다 몇 십 배나 강력한 독을 품고 있다. 돈, 권력, 성이 우리의 일상이지만 마귀의 유혹에 넘어갈 때, 이것은 우리의 신앙 가운데 치명상을 일으킨다. 순식간에 절망가운데 빠진다. 불의한 재물이 되고, 오만한 권력이 되고, 불륜이 되는 것이다. 이런 유혹들은 최초 아담의 유혹인 뱀을 유혹하는 것과 흡사하다. 아담이 그 전에도 선악과를 참 많이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뱀이 와서 유혹을 한다. “저거 한 번 먹어봐, 먹는 날에는 하나님처럼 될 거야.” 그때부터 선악과를 보는데 보암직도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하는 탐스러운 과일이 되었다. 그리고 유혹한다. “한 번만, 한 번만”, 이거 한 번이 너무나 치명적이다. 한 번 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되고, 그때부터 우리의 삶이 된다. 조금 지나면 어떠한가? 절망적으로 우리의 신앙 가운데 심각한 어려움 가운데 빠지고 수많은 후회들과 죄책감에 시달린다. 저의 이야기이다. 제가 목사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참 많이 경계하지만 한 번씩 한 번씩 그런 유혹들이 엄습(掩襲)해 온다. 어떨 때는 그런 유혹 가운데 빠지기도 한다. 그러면서 제 스스로 시달린다. ‘아이구 목사가 되어서... 내가.’ 어렵다. 우리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 반대도 있다. 항상 우리가 이런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 아담처럼 이런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다니엘서를 보면, 다니엘은 10대의 나이에 이억 만리 바벨론에 포로(捕虜)로 잡혀간다. 10대의 나이에 왕의 진미(眞味), 먹으라고 주는 그 맛있는 음식들을 거부한다. 장년이 되어서는 금 신상에 절하기만 하면, 그가 물을 수 있는 것이 참 많았다. 그런데 그 금 신상에 절하지 않고 그 세 친구들과 함께 풀무 불에 던져지는 것들에 주저(躊躇)하지 않는다. 그의 노년이 되었을 때, 90대의 노후가 되어 왕 외에는 어떤 간구들을 하지 않아야 됨에도 불구하고 만약에 그렇게 하면 사자 굴에 던져진다는 유혹 가운데서도 그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전에 하던 대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했다. 한 번만 눈 찔끔 감으면 모든 것들이 해결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모든 것들을 누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의 자존심을 지키며 그에게 절하기를 원하는 마귀의 유혹가운데 단호하게 맞서 물리친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다니엘과 세 친구들을 풀무 불 가운데 보호해 주시며 다니엘을 사자의 입 가운데 건져 주신 줄 믿는다. 아멘, 수많은 유혹 가운데서 우리는 얼마나 연약(軟弱)하며 연약하다 못해 나약(懦弱)한 존재이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나는 나약하지만 나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은 절대 나약하지 않는다. 나는 부족하지만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강하고 능하신 용사인줄 믿는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돕고 계신다. 그 하나님이 그 성령님이 날마다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 분이신줄 믿는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로마서 8장 26절을 보면,
 
*로마서 8:26,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연약함을 너무 잘 아신다. 하지만 그 성령이 우리를 도우신다.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계속해서 간구하고 계신다. 말씀을 마무리 한다. 앞에서 나왔던 풀롯 연주자, 송솔나무 연주자 이야기 뒤 부분이다.
악기를 세 번이나 도둑맞고 하나님을 떠났다. 십 년이나 하나님을 떠났다. 그렇게 연주자로서 승승장구하고 있을 무렵, 그의 친한 동료가 전도 집회 때에 그를 초청했다.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 그를 따라가 전도 집회에 앉아있었다. 한참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그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물었다. “내가 도둑맞은 게 무엇이냐?” 송솔나무씨가 하나님께 대답한다. “하나님, 제가 생명같이 여기던 풀룻을 도둑맞았어요.” 하니, “아니 네가 도둑맞은 게 무엇이냐?” “아니오. 하나님, 제가 풀룻을 도둑맞았습니다.” “그래, 네가 도둑맞은 것은 풀룻이 아니라, 나의 대한 마음이야. 나를 도둑맞았어.” 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마음 가운데 그는 그 자리에서 예배 마칠 때까지 그는 펑펑 울면서 다시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성탄절 저녁에 TV를 보는데 TV에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구출하는 한국사람 영상이 나온다. 누굴까? 벤을 구출하는데 벤을 보니 총알자국이 너무 많은 것이다. 언제 죽을지, 언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그런 상황 가운데서 벤을 통하여 다른 나라로 구출하는 그 사람이 그 송솔나무 그 사람이었다. 나중에 인터넷을 통해서 찾아보니 그분이 바로 송 솔나무씨였다. 하나님 앞에 그를 드리며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고난이 닥치면 낙심하고 의심에 맞기 쉽다. 또한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의 타락한 우리의 본성이며 우리의 모습이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 주신 이유는 승리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통하여 승리하는 비결들을 보여주셨고 그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우리 또한 마귀의 시험 가운데서 승리할 수 있을 줄 믿는다. 마귀의 시험들은 공통점이 있다. 계속해서 우리를 보게 한다. 우리 자신에게 집중하게 한다. 이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시선’이라는 찬양이 계속 떠올랐다. 그 가사를 보면,
 
1절-내게로부터 눈을 들어 주를 보기 시작할 때, 주의 일을 보겠네. 내 작은 마음 돌이키사 하늘의 꿈꾸게 하네. 주님을 볼 때, 모든 시선을 주님께 드리고 살아계신 주님을 느낄 때, 내 삶은 주의 역사가 되고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네.
2절- 성령이 나를 변화시켜 모든 두려움 사라질 때 주의 일을 보겠네. 황폐한 땅 한 가운데서 주님 마음 알게 되리. 주님을 볼 때, 모든 시선을 주님께 드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느낄 때, 세상은 주의 나라가 되고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네.
-시험이 난무하는 우리의 일상이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 가운데 우리의 시선들을 내게로부터 주님께 시선을 고정할 때, 우리의 일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줄 믿는다. 수많은 시험과 유혹 가운데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봄으로 승리를 선포하며 하나님의 일상이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도드린다. ♪  ~~

♣요약
말씀을 통해 우리가 깨달아서 일상 가운데 하나님을 경험하여 마귀의 시험과 유혹을 이길 수 있어야 한다. 우리를 향하는 시선들을 주님께 고정시켜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고 능력 주심을 확신하며 모든 연약함과 마귀를 이겨내게 하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승리를 선포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유명한 결투 즉 천사 장 미가엘과 용,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아니 뱀 자신과의 백병전의 사건을 보게 된다. 이 싸움에서 여자의 후손은 시험을 받고 고통을 당하며 그의 발꿈치를 상한다. 그러나 뱀은 그의 시험에서 완전히 실패하며 그의 머리가 깨뜨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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