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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8월 16일)
제목: "돌아가야 할 우리의 자리"
말씀: 호세아 6:1~6
찬양인도: 쉐키나(이다니엘 부목사님)
사회: 문진호 부목사님

설교자: 박단열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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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 6:1~6,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4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5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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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베이컨이 그의 저서 ‘노붐 오르가눔’에 기록한 말입니다. 이 말은 인간의 능력은 그가 가진 지식에 정비례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지식이 많은 것이 능력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지식 중에서도 잘못된 지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확한 사실에 근거한 지식이 아니라 자신의 선입견에 의해서 어긋난 사고를 할 수 있다고 그는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선입견을 4가지 우상,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것으로는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 등으로 구분해서 설명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에 근거해서 행동합니다. 즉 인간은 자신이 소유한 지식에 근거하여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보고 들은 모든 것을 통해 우리는 생각을 하게 되고요. 그 생각은 가치관을 형성하게 되고, 형성된 가치관이 행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데에도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나면 우리는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그 경로는 때로는 설교 말씀일 수도 있고요 성도 간의 교제일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봉사와 섬김과 같은 그런 행동들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일들로 통해서 각자가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결국 각자의 신앙관으로 정리되게 되고 실제적인 신앙의 행위로 드러나게 됩니다. 하지만 때때로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선입관은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그리고 그 오해로 인해 우리의 신앙 행위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에서 벗어나 형식만을, 때로는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감정적이거나 여러 가지 잘못된 모습으로 드러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바른 앎을 추구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호세아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의 삶과 그의 예언 활동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자와 결혼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디블라임의 딸 고멜이라는 여인과 결혼하였습니다. 그리고 세 자녀를 낳게 .그 세 자녀의 이름이 사실 굉장히 놀랍습니다. 장남이었던 이스르엘이라는 이름은 이제 각지로 흩어지게 될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고요 장녀 로르하마는 긍휼을 받지 못한 자, 그리고 막내 로암미는 내 백성이 아니다. 라는 그런 이름을, 이름의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세 자녀를 낳고서도 그 아내는, 호세아의 아내는 계속해서 음란한 행동을 하고, 가출하고, 다른 남자에게 가는 그런 잘못된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성경을 보시면, 마지막에 호세아는 그 가출했던 아내를 또한 다시 돈을 주고 사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호세아라는 선지자의 가정을 통해 신랑 되신 하나님과 그의 언약 관계,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축소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멜이 남편 호세아를 버리고 음란하게 다른 남자를 만나고 음란한 삶을 살았듯이, 이스라엘은 그들의 남편 대신 여호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않고, 이방의 우상들을 음란하게 섬겼습니다.북이스라엘은 결국 호세아의 장남 이스라엘의 이름과 같이 온 사방에 흩어져 살게 되었고, 로르하마의 이름과 같이 긍휼을 받지 못한 자로 나라가 망하는 망국을 경험하여 유리방황하게 되었으며, 로암미라는 이름처럼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한 비참한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음란한 아내를 용서하고, 다시 살아가는 호세아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회복시킬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대략 주전 760년에서 710년 사이에, 한 40~50년 정도 사역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기에는 북이스라엘이 기원전 722년에 완전히 멸망한 것 같은 그런 시기도 거치게 됩니다.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라는 왕의 시대부터 활약합니다. 여로보암 2세 당시에 북이스라엘은 그들의 나라의 역사상 가장 큰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그 어떤 시대보다도 북이스라엘이 강력했던 시기였습니다. 그들의 영토는 넓었고, 아직까지 아수르가 그리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북이스라엘 왕국은 고대 근동 지역 중에서도 강력한 국가로 자리매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에 북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는 강한 나라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의 우상들을 섬기는 영적으로는 음란한 나라였습니다. 그리하여 여로보암 2세 이후에 약 30년간 북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굉장한 혼돈 기를 겪게 됩니다. 30년 동안 6명의 왕이 바뀌면서 때로는 6개월, 때로는 1년, 2년 이렇게 짧은 기간 재위 기간을 거치면서 북이스라엘은 굉장히 정치적으로 혼돈하게 되고요. 그리고 점차 멸망해 가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주전 722년 호세아 왕 9년에 아수레 왕 살마네세 로셉에 의해 사마리아가 함락되고, 북 이스라엘 왕국은 철저하게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에 대해서 호세아서에서 호세아 선지자는 분명한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북이스라엘의 멸망의 이유가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그들에게 부재했기 때문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호세야서 4장 1절 자막을 보시면 이렇게 나옵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호세아 4:1,
1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호세아 4:6,
6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에 망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것은 특별히 하나님이 자신을 직접 보신 하나님의 말씀 구약에서는 그것을 모세의 오경으로 대변되는 율법으로 이야기하고 있 이 율법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에 아까 앞서 읽은 4장 6절 하반 절에서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계속해서 그들이 그 율법대로 살아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저버리고 하나님을 모르는 것처럼 살아갔기 때문에 결국 이스라엘이 멸망한다. 라는 것이죠.

근데 여기에서 하나님을 아느니라. 라고 할 때 이 ‘알다’ 라는 말에 대해서 아마도 많은 설교 시간을 통해서 들어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알다라는 히브리어 ‘야다’라는 단어는 지식적인 앎을 넘어선 경험적이나, 때로는 가장 친밀한 부부 관계를 표현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하곤 합니다. 또한 고대 근동 시대에서는 어떤 언약을 맺을 때에 당사자들 간 그 언약이 굉장히 중요했기 때문에 이 언약을 맺을 때, 그 당사자들 간의 결합 관계를 의미할 때도 이 단어를 사용했고요. 또한 어떤 나라의 죽음과 신하의 주종 관계에서도 신하가 주인에게 드리는 충성을 아는 것, 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호세아서에서는 계속해서 2장 20절, 4장 6절, 5장 4절, 6장 6절, 8장 2절, 13장 4절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한 언급을 계속해서 반복해서 하고 있습니다. 한번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2장 20절입니다.

*호세아 2:20,
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호세아 4:6,
6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호세아 5:4,
4그들의 행위가 그들로 자기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나니 이는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그들의 행위가 그들로 자기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나니 이는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
6장 6절입니다.
6 나는 이해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죄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8장 2절입니다.
2 그들이 장차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하나님이요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아나이다 하리라.
13장 4절입니다.
4 그러나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이렇게 반복해서 하나님 여호와를 알 것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 바로 호세아의 말씀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그들에게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5장 4절에 나타난 것처럼 그들의 마음 가운데 음란한 마음,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을 섬기고,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기를 거역하는 그런 잘못된 마음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에, 그것으로 말미암아 여호와를 바르게 아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기보다는 자신들의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을 차지하기 위해 그릇된 지식으로 하나님을 잘못 섬겼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알기는 알았지만 바르게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문제가 있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말로는 하나님을 섬긴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자기 자신들의 만족과 만족을 위해서,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이방의 신들을 즐거워하고 섬겼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멸망하게 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호세아는 결국 하나님과의 언약을 저버린,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내어버린 북이스라엘이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 다시 회복해야 하실 하나님을 기대하면서, 오늘 우리가 읽었던 호세야 6장 1절부터 6절까지의 본문을 우리에게 준 것입니다. 이 본문을 통해서 호세아는 우리에게 크게 두 가지 권고를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권고는 바로

I.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지금까지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숭배했던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향해 우리의 방향을 고정하고 그 방향으로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지금껏 잘못된 삶을 통해 찢어졌던 삶을 하나님께서 낫게 하실 것이고, 그릇된 행동으로 인해 우리를 찢었더라도 다시 싸매어 주실 것을 이야기합니다. 또한 영적으로 완전히 죽은 것과 같았던 삶에서 우리를 일으키실 것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2절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셋째 날에 우리를, 우리를 일으키신다. 라는 말이 나옵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사람이 죽은 지 셋째 날이 되면, 그의 육체를, 육체 주위를 떠돌아다니던 영혼이 완전히 응부로 옮겨진다. 라고 그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즉, 셋째 날이 되었다는 것은 완전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신다는 말은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오기만 한다면, 완전한 죽음과 같은 상태에 놓여 있다 하더라도 여호와 앞에서 다시 완전히 살아날 수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권고는 3절에 나타납니다.

II.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이것은 우리 삶에서 끊어졌던 하나님과의 언약의 거리가 다시금 굳게 맺어지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편견과 우리의 선입견으로 인해 하나님에 대해 잘못된 그릇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의 마음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향한 바른 지식을 추구하자는 것입니다. 신랑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지식을 통해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삶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통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을 때에 우리가 참된 구원의 길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쌓을 수 있겠습니까? 바로 우리에게 약속으로 주신 하나님의 살아있는 그 말씀을 통해 하나의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나의 구주로 믿고 의지합니다. 아마도 이곳에 계신 모든 우리 성도님들은 이 말에 동의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때로는 특별한 경험으로 하나님을 알 수도 있고요. 그리고 어떤 경로든지 예수를 믿게 된 이후에 우리의 신앙이 바르게 자라나기 위해서는 결국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토대 위에서 성장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을 알게 하는 중요한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항상 말씀의 토대 위에서만 건강하게 자라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때로는 기도와 묵상, 교재와 전도, 봉사도 필요하지만 그 근본에는 하나님의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드러내신 말씀이 자리 잡아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에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 나는 얼마나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있을까라는 것은 평소에 내 삶에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으로 그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지금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가까이 하지 않고 말씀을 잘 보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의 어떤 중대한 균열이 생겨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더 깊이,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서 내가 하나님을 바르게 안다. 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근거가 부족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더 가까이 하고 더 깊이 알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쌓을 수 있고, 그로 말미암아 평소의 삶에서, 삶의 자리에서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올해 봄에 있었던 일입니다. 저희 집에 초등학교에 입학한 저희 첫째 아이가 어느 날 이제 집에서 학교 후에 저녁에 집에서 수학 숙제를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초등학교 1학년짜리가 수학 숙제라고 해봤자 그렇게 막 대단한 문제가 있을 수는 없습니다. 거기에 굉장히 막 수능 시험에 넣을 만한 그런 문제는 전혀 나오지 않죠. 고작 해봐야 한 자릿수 혹은 두 자릿수에 덧셈 뺄셈 정도가 그에게 주어진 숙제입니다. 그런데 제가 옆에서 그래도 숙제를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옆에서 그래도 열심히 하라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옆자리에 앉아서 이렇게 지켜보고 있는데 열심히 하더라고요. 양손을 사용해서 9빼기 7을 하는데 막 그렇게 하는데, 저희 같은 어른들이라면 그냥 웬만하면 머리로 바로바로 생각해서 쓸 수 있는 답인데 막 열심히 하다가, 9빼기 7인데 당당하게 상을 딱 적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옆에서 보면서 아이고 어떻게 하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제가 개입을 했습니다. 이게 정답이 맞을까? 라고 물어봤어요. 그러니까 저희 아이가 제 생각에 그랬어요. 이렇게 물어보면 내가 잘못했나? 한번 살펴보고 한번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금방 바로 된 정답을 쓸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가만히 있는 거예요. 그래서 왜 그러지? 이거 쉬운 거니까 한 번 더 생각해 봐라. 지금 내가 볼 때 이 답이 잘못된 것 같으니까 한 번만 더 생각해 보면 어떨까라고 하는데 가만히 있는 거예요.

가만히 있는데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끼던 그 순간 저희 아들의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두르락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누가 당황했을까요? 눈물을 흘린 아이가 당황했을까요? 제가 당황했을까요? 제가 갑자기 당황을 한 거예요. 그래서 왜 눈물을 흘릴까? 그래서 계속해서 얘기해보라고 하는데 몇 분 동안 대답을 하지 않는 겁니다. 그러다가 제가 계속해서 물어봤습니다. 우영아 왜 울었냐? 라고 물어보니까 갑자기 그 아이가 저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아빠가 나를 야단치는 것 같아서 울었어요. 라고 대답하는 거예요. 그때 저에게 어떤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먼저 일단 크게 반성을 했습니다. 혹시 내가 그동안 우리 아이에게 강압적인 모습이 나에게 혹시 나 있었지 않을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은데 그런 모습을 보면서 설명을 했어요. 그런 게 아니다. 아빠는 네가 바른 답을 찾아가고 바르게 이 문제를 풀어가는 게 목적이지 니가 이거를 틀렸다거나 뭐 잘못했다고 해서 야단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설명을 하고 그렇게 넘어갔습니다. 넘어갔는데 그날 밤 자리에 누워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냐 하면 우리 아이의 이런 모습이 어쩌면 하나님 앞에서 나의 모습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때론 여러 가지 시험 문제들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여러 가지 숙제들도 있고요 시험들도 다가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사실 그 시험 문제 그렇게 대단히 어렵거나 그렇게 복잡한 문제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제가 저희 아이의 그 수학 숙제의 답을 2, 3 옆에서 혼자 계속 암산으로 혼자 풀고 있던 저처럼, 하나님께서는 제 삶의 여러 가지 복, 제가 볼 때는 복잡하고 어려워 보이는 그 문제들을 끙끙대며 양손을 써가며 어떻게든지 풀어가려고 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옆에서 이미 답을 다 알고 계시고, 그 답을 하나님 생각에는 참 쉽게 우리가 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어려워하고 힘들어하는 모습이 나의 모습이 아닐까라고 생각을 했던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그저 나에게 바른 길을 알려주시려고, 인도하시고 안내하시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혹시 하나님이 나를 혼내시는 것은 아닐까? 나를 야단치시는 것은 아닐까? 내가 잘못된 길로 갔다가 하나 나에게 벌을 주는 것은 아닐까? 라고 하나님의 진심과 하나님의 마음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 나의 모습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 라고 하면서도, 하나님 믿는다. 라고 하면서도, 때때로 우리는 굉장히 경험적인 것이 아니라, 그냥 나의 어떤 선입견과 나의 기본적인 하나님에 대한 인식으로 나의 삶의 순간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막기도 하고, 온전히 신뢰하지도 못하고 그렇게 살아갈 때가 참 많다는 것을 느낍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하게 9빼기 7정도의 문제를 주심에도 불구하고,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고, 그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바로바로 풀릴 수 있는 그 문제들을 나의 계획과 나의 생각이 앞서기 때문에 어떻게든지 내 방식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풀어보려고 그 간단한 문제를 복잡하게 풀다가 실패하고, 실패하고 난 뒤에는 하나님, 나에게 왜 이런 힘든 일을 주십니까? 왜 하나님 나에게 이렇게 야단치시고 나를 힘들게 하십니까? 라고 오히려 잘못된 반응을 하는 것이 연약한 나의 모습은 아닐까? 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삶에 놓여져 있는 우리 우리의 그런 문제들을 마주할 때에, 하나님에 대한 바른 앎이나 이해가 없이, 나의 생각으로 판단하고 살아갈 때에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어려운 일들이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되고요. 우리 인생의 여러 가지 시험 문제들과 과정들을 허락하신 출제자의 의도, 하나님의 의도를 바르게 파악하는 것이 우리가 인생 가운데 정말 큰 은혜와 복을 누릴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지난여름 휴가 동안에 저희 가족들과 함께 차를 타고 가던 중에 저희 아이들이 이제 저희 사역에 주일학교에 있으니까 또 찬양을 많이 듣습니다. 캔송 키즈 찬양을 듣는데요. 15집부터 쭉 거슬러 올라가다 어느덧 10집까지 들었어요. 10집까지 듣는데 캔송 키즈 10집에 이런 이런 제목의 찬양이 있습니다. ‘우리의 자리’라는 찬양이 있었는데요. 그 찬양의 가사를 듣다가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번 가사를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1절 주님의 생명의 빛 비치는 그곳에, 주님의 음성이 잘 들리는 그곳에,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맞아주시는 내가 있어야 할 곳 할 곳, 내 자리가 있죠 잠시 잊었나요? 잠시 놓쳤나요? 주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십자가의 은혜가 넘치는 주님의 품, 그것이 우리의 자리죠.

​2절입니다. 주님의 생명에 비치는 그곳에 주님의 음성이 잘 들리는 그곳에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맞아주시는 내가 있어야 할 곳 내 자리가 있죠. 잠시 잊었나요? 잠시 놓쳤나요? 주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십자가의 은혜가 넘치는 주님의 품, 그곳이 우리의 자리죠. 잠시 잊었어도 잠시 놓쳤어도 주님은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시죠. 십자가의 은혜가 넘치는 주님의 품 그곳이 우리의 자리죠.
-아이들의 찬양인데 제가 듣다가 참 많은 어떤 울림이 제 마음 가운데 있었습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니고, 저희 가정은 제가 이제 5대째 신앙생활하고 있고요. 저는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 모두 목회를 하셨습니다. 집안에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게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나서 말씀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알아가고 또한 목회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저이지만, 제가 이 찬양의 가사에서 어디서 제가 흔들렸냐 하면 잠시 잊었나요? 잠시 놓쳤나요? 에서 저 또한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놓치고 잊고 살아가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가슴 깊이 느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오지만, 매주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놓치고 살아가기 쉬운 존재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예배를 드리고 집에 돌아가면 금세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또 내 삶에, 내 생각대로 내 길을 걸어가기 위해 그렇게 애쓰는 모습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 사랑의 교회, 귀한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기 위해 날마다 애쓰고 살아가십니까? 그렇게 살아간다 할지라도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그 뜻을 잊어버리기 쉬운 존재입니까? 우리 날마다 주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우리에게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는 힘써 여호와를 알아야 하고요 또한 여호와께 돌아와야 합니다. 날마다 혹시나 내가 잘못된 길로 걸어가지 않을까 우리 스스로를 점검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 자신을 비추어서 그 길로 나아가기 위해 힘써야 하는 존재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께 돌아가는 삶 정도에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이키고 열정을 갖고 하나님께 나아간다 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으면 우리는 결국 의미 없거나, 한쪽으로 치우친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6절에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이해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신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미 없는 종교 행위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에게 끊임없이 그 십자가의 은혜의 자리로 돌아오라고 하신 그 말씀에 반응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길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지식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날마다 기억하며, 앞서서 말씀드린 우리의 자리에 앉은 찬양의 가사처럼, 때때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십자가의 은혜를 잠시 놓치기도 하고 잊어버리기도 하지만, 계속해서 다시 주님께로 돌아가기 위해 힘써야 하는 것이 우리가 살아갈 길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오늘도 은혜의 자리를 찾아 이 자리에 나오신 모든 사랑의 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바로 알고 우
리에게 허락된 은혜의 자리로 돌아오기를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요약
우리는 연약하여 하나님을 안다 하면서도 우리의 선입견과 경험에 의지하여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할 때가 많지만 한 결 같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자리를 마련하고 계신 하나님이 계심을 확인하며 우리가 돌아가야 할 자리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힘써 하나님을 바르게 알기를 소망하며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은혜의 자리로 날마다 돌아갈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주장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십자가의 은혜의 자리를 잊거나 놓치고 살아왔다면 다시 한 번 은혜의 자리로 나아갈 힘과 지혜를 허락해 주시기를 간구하자.
-하나님을 온전히 알지 못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여기서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바로 알고 그대로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닥치는 불행과 행복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다. 때문에, 재난에 빠졌을 때는 그 재난에서 자신을 구원하실 하나님의 처분, 곧 불쌍히 여기시고 건져 주실 것을 바라고 기다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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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8월 9일)
제목: 우리를 구별하시는 하나님"
말씀: 사사기 16:19-22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부목사님)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최종민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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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16:19-22,
19 들릴라가 삼손에게 자기 무릎을 베고 자게 하고 사람을 불러 그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밀고 괴롭게 하여 본즉 그의 힘이 없어졌더라.
20 들릴라가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21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그의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줄로 매고 그에게 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
22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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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오늘 부흥 보고 수요 저녁 기도에 오신 모든 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간 우리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크나 큰 은혜를 허락하실 줄로 믿습니다. 이 시간 함께 나누실 하나님 말씀은 사사기 16장 19절에서 22절 말씀입니다. 사사기 16장 19절에서 22절 말씀입니다. 구약 성경 390페이지 사사기 16장 19절에서 22절 말씀 함께 교독하시겠습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이 갖는 그 신앙이 우리의 것이 되기를 위해서 간구하며 나아갑니다. 예를 들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렇게 기도하면서 또한 이제 다윗과 같은 담대한 믿음, 또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서 우리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는 솔로몬과 다니엘과 같은 지혜로 일터에서, 가정에서, 자연들을 위해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지혜가 충만케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그렇게 간구하며 나아갑니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온전한 순종으로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즉각적인 순종을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갑니다. 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많은 인물들을 우리는 들어서 주님 앞에 그와 같은 믿음, 그와 같은 담대함을 가질 수 있도록 주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갑니다. 그런데 이런 인물들 중에서 언급되지 않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삼손입니다. 우리는 삼손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특징이 있을까요? 힘이 셉니다. 그리고 나실 인으로 구별 받았고 사사기에서 마지막 사사로 등장을 합니다.

그러나 그 결국은 좋지 않았다. 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삼선을 생각할 때에 그가 과연 하나님의 사람인가라고 우리는 의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1장 32절은 이와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32,
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히브리서 저자는 11장 믿음 장을 말하면서 32절에 누구를 말하냐면, 정말 많은 사람들을 나열하다가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도온, 바락, 삼손을 말하면서 그 사이에 삼손을 넣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그 뒤에 있다 그리고 우리가 진정으로 담고 싶어 하는 다윗도 여기서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사무엘과 선지자들, 정말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언급하면서 그 사이에 믿음의 사람으로서 누구를 놓고 있냐면 바로 이 삼손을 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게 되면 우리는 아, 삼손은 하나님의 사람, 믿음의 사람이 맞구나! 라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삼손과 같이 살고 싶으세요? 삼손과 같은 믿음으로 삼손과 같은 그런 삶의 결말을 주요 나에게 주시옵소서. 우리는 기도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삼손은 우리에게 반면교사가 될 뿐입니다.

그 끝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 끝은 너무나도 후하고 비참하게 죽은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누구도 삼손과 같은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삼손의 탄생 기사를 처음부터 살펴보게 되면 그와 같이 그 앞에 탄생을 바라보며 바라볼수록 기대와 소망이 충만한 사람이 구약에서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삼손의 그 탄생 이전에 바로 사사기 13장에 무엇이라 말하냐면 바로 1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40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주시니라.” 말하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어두운 그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사사로 세우시기 위하여 임신하지 못하는 마노아의 아내를 찾아가서 무엇이라 말하냐면 네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서는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나실 인으로 구별한 사람이며 또한 나신으로 세웠을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하여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기 시작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삼손의 어머니가 되는 이 만호의 아내는 자신의 남편을 향해서 달려갑니다. 그리고서는 하나님의 사자가 자신을 찾아와서 아들을 낳게 될 것이고, 그리고 그를 어떻게 키워낼지 나실 인 기회를 주면서 그가 나실 인으로 성장하게 될 것을 말해줍니다. 그때 마노아가 다시 한 번 우리 가정 가운데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그 아이를 어떻게 양육할지에 대해서 가르쳐 주옵소서!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다시금 그 여호와의 사자를 나타나게 하셔서 어떻게 양육해야 될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그 보내신 이 여호와의 사자, 이 여호와의 사자의 이름을 바로 이 나노아가 묻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그때 이 여호와의 사자가 무엇이라 말하죠? 바로 기묘자라고 말합니다. 이 기묘자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사람일까요? 어떠한 인물일까요? 바로 구약성경에서 얼마 등장하지 않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현연이 바로 이 기묘자라는 것입니다. 이 삼손이라는 나실 인이자 사사를, 태어나게 될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자 누가 나타났느냐? 바로 신약에서, 이 땅에 오셔서, 성육신하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우리 수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삼손이 도대체 얼마나 위대한 사람이 길래 우리 주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가 태어날 것을 말씀하셨는지 우리는 기대하게 됩니다. 이 나실 인이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요? 민수기 6장에 보게 되면 나실 인의 규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나실 인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민수기 6장에서 말하는 나실 인은 바로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특별히 구별하여서 선하여 자기 자신을 드린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게 되는 이 삼손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자신을 선별하여서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드린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그분의 주권에 따라서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구별하셨음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이 나실 인은 바로 이 히브리어 나자르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로 바쳐지다, 봉원하다 이 의미와 함께 ‘구별 되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삼손을 통하여 놀라운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서 그의 탄생 가운데 놀라운 계획 가지고 그를 나신 인으로 세우고 계시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할 것이다 말씀하십니다.

13장 1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시기 위해서, 그들이 그 죄악 가운데서 하나님을 떠나서 이방신을 섬기는 그들 가운데 하나님이 징계하시기 위해서, 그 불레셋 가운데 40년 넘겨주신 그 고통의 시간, 인내의 시간을 주께서는 이제 그만 멈추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삼손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시작할 사람이 누구냐 바로 이 삼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떠한 구원을 이루실지, 어떻게 역사하실지 기대하고 소망하게 됩니다. 이 기대와 소망은 바로 사사기 13장 24절과 25절 말씀을 통해서 더욱 극대화됩니다.

*사사기 13:24-25,
24 그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그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25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셨더라
그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25절 말씀에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시작한 이 하나님의 구원자로서 삼손이 태어나고 자라면서 어떻게 붙드시고 함께하셨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소라, 소라라는 땅은 바로 그의 아버지 마노아의 고향입니다. 그리고 에스다올이라는 것은 바로 이 유다와 단 지파 사이의 경계선에 있는 말을 말하는 것이죠. 이 사이에 소라와 에스더블 사이에 마하네단이라는 그 마을이 있습니다. 마하네단이라는 것은 바로 이 삼손의 고향입니다. 삼손이 태어나서 자란 곳, 그리고 나중에 죽어서 그가 묻힌 곳이 바로 이 마하네단이라는 것이죠. 삼손이 그의 삶을 시작한 곳, 그의 삶을 펼쳐나간 곳,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을 이루고 나서 결국 묻혀서 죽은 곳, 바로 이곳이 마하네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어떻게 하셨냐면 여호와의 영, 성령, 하나님께서 이 삼손을 붙들어서 움직이기 시작하셨다는 것입니다.

신약적인 표현으로는 무엇을 말하냐면 성령으로 충만케 하셔서 이제 삼손을 통하여 놀라운 구원과 회복의 역사를 시작하기를 주님이 준비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이 삼손을 통해서 놀라운 계획과 거룩한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진정으로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심으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정하셨다고 로마서 5장 8절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를 통하여 주 거룩한 뜻을 온전히 행하시기 위함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를 통해서 놀라운 역사를 이루실 줄로 확신합니다.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를 허락하시기 위해서 오늘 우리를 이 자리에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나실 인으로, 또한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부르신 사사로서 이 삶을 시작한 이 삼손이 14장에서부터 어떠한 역사를 감당했을까요? 우리는 이와 같은 좀 낙관적인 한번 상상을 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와 같이 이 삼손과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사사로 구별되어서, 또한 나실 인으로 주님 앞에 선택되어서, 그 배후 력과도 같은 그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했을까요?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을 모아서 블레셋을 공격할 모든 수단을 갖추고 전략을 세우고, 이제 분리세대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데에 온 힘을 기울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했을까요? 바로 삼손은 사사기 14장에서부터 그와 같이 행하지 않고 블레셋 여인을 쫓아다니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계획과 소망을 가지고 삼손을 사사로, 나실 인으로 세웠지만 이 삼손은 그와 같이 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도 처음 사역을 시작할 때가 떠올랐습니다.

제가 27살의 전도사로 이제 사역을 시작했는데 이제 제가 이제 많은 처음 사역한 교회에서 많은 성도들 앞에서 설교를 하려고 이제 설교문도 정말 열심히 준비하고 기도도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단상에 서서 이 강단에 서서 말씀을 선포하면,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가슴을 치며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며 주님 앞에 엎드려 엉멍 울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로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제가 설교를 마치자마자 또 다른 의미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정말 절반 이상의 분들이 깊은 안식 가운데 들어가셔서 편히 쉬고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지금은 그런 거 없으시죠? 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고 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진정으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인데 우리의 삶에는 그런 일들이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정말 기도하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데 그 기도가 응답되기는커녕, 하나님께서 정말 살아계시는가? 내 기도에 지금 귀 기울이고 계시는가? 우리는 의심하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이 삼손을 세웠다면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시작하셔야 되는데, 이 삼손, 하나님께서 나실 인으로 세운 이 사사는 지금 분류된 여인들 뒤를 쫓아다니기 바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그런데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이 사설을 통해서도 놀라운 역사를 이루십니다. 사사기 14장 4절 말씀 우리 같이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까닭에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하였으나 그의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사사기 14:4,
4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까닭에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의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삼손은 자신의 정욕에 따라 행했습니다. 자신의 욕심을 따라 행했습니다. 민수기 6장에서 말하고 있는 나실인 규례에는 아내에 대한 말은 없습니다. 사사가 죄송합니다. 나실 인이 어떻게 아내를 맞이하고, 그 아내를 통해서 어떻게 가정을 꾸려야 되는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나실 인 교리와 비슷한 것이 바로 제사장 규례입니다. 레위기 21장에 말하고 있는 이 제사장 규례에 따르면, 제사장은 바로 이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현숙하고 정결한 처녀와 결혼해야 된다는 그런 교례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사사로 세워진 이 나실 인 삼손은 그와 같이 이 제사장들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정숙한 여인과 함께 결혼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여인을 쫓아다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냐면 바로 자신의 정욕을 따라서 행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때 당시에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같이 세속주의에 휩쓸려서, 혼합주의에 휩쓸려서, 블레셋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가는 그 모습을 지금 하나님 앞에 구별되어 거룩하게 선별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 이 삼손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상소를 통해서 놀라운 구원과 회복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혈을 단신으로 불레셋과 싸우지 마. 하나님께서는 계속적으로 그에게 승리를 허락하십니다. 로마서 8장 28절은 그와 같은 놀라운 역사를 이와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같이 함께 읽겠습니다.

*로마서 8:28,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죄악을 따랐던, 자신의 욕망을 따랐던 이 삼손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구원과 회복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이 삼손이 자신을 구별하여서 거룩함을 온전히 지켜가면서 세상과 자신을 구별하여서 주님 앞에 자신을 내어드렸다면 어떤 역사가 일어났을까요? 온전한 구원 완벽한 구원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블레셋을 향하여서 이루고자 하시는 그 놀라운 구원 이스라엘을 블레셋 가운데 건져내시고자 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됐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고 바라시는 것이 무엇이냐면 이 시대에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 시대의 삼손과 같은 우리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 구별되어 주의 거룩한 말씀으로 자신을 선별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들고 나아갈 때에 우리를 통하여 우리가 진정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던 놀라운 구원과 회복의 역사, 회복을 넘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을 주님은 우리에게 지금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런 놀라운 역사가 우리 삶 가운데 일어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바로 요한일서 2장 15절 16절 말씀입니다.

*요한일서 2:15-16,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 누구를 사랑해야 될까요? 오직 우리 주 하나님, 우리 아버지만을 사랑하며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 앞에 우리가 갖춰야 되는 것이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고 바라시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이 무엇이냐? 바로 거룩히 구별된 삶입니다. 구약에서 나실 인이 있었다면 이 시대에는 바로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구약에서의 나실 인과 같은 존재이고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지금도 블레셋이라는 이 세상 가운데서 우리 자신의 생명뿐만 아니라 우리 다음 세대들, 우리의 가정,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바라시는 모든 주님 믿지 않는 영혼들을 우리를 통하여 구원하기를 시작하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주여 우리를 통하여 이 놀라운 구원과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들릴라와 같은 이 세상 가운데서 몸을 누이면 안 됩니다. 그 들릴라의 그 무릎에 우리의 머리를 누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마음을 거룩하게 지키고 온전히 주님 앞에 우리의 모든 것들을 내어드리며 나아가야 합니다. 삼손이 마지막으로 찾아가 그의 머리를 누인 여인이 바로 들릴라죠. 이 들릴라의 이름에 대해서 여러 신학자들이 다양하게 말합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이 이름은 히브리어로 밤과 비슷한 언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제 ‘밤의 여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고, 또 다른 신학자들은 요염하다, 유혹하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을 또 합니다. 이 여인은 바로 어떤 사람이냐 바로 어둠 가운데 속하여서 하나님의 사랑을 유혹하고 그 유혹 가운데 빠뜨리는 사람이 바로 이 들릴라, 이 밤의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 들릴라는 어디 살았냐? 바로 소래 골짜기에 살았습니다. 소레는 바로 이제 삼손이 자신의 삶을 시작했던 이 마하네단과 근처에 있는 블레셋의 국경 지역입니다. 그래서 이 소래에 사는 사람들은 불레셋 사람도, 이스라엘 사람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리하면 이스라엘 백성들한테 붙고, 아니면 블레셋 사람들이 유리하면 블레셋 사람들한테 붙는 그런 회색 지대에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이 이 들릴라가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이냐 블레셋 사람이냐 이스라엘 백성이냐 의견이 분분합니다. 근데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들릴라는 이 당시에는 블레셋에 붙어서 볼레셋이 요구하는 대로 살아가는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삼손은 이 들릴라의 그 품에 안겨서 너무나도 행복한 시간을 보냅니다. 그런데 이 블레셋의 지도자들이 바로 이 삼손 안에 있는 삼손을 품고 있는 이 들릴라에게 찾아가서 무엇이라 말하냐면 바로 이 삼손을 결박하여 넘겨주면 내가 우리가 바로 너에게 거금을 줄 것이다 그렇게 유혹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들릴라는 그때부터 이제 삼손에게 어떻게 하면 당신을 결박할 수 있나요? 라고 끊임없이 묻습니다.

여기서 결박이라는 것은 단순히 묶어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겨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의 결박은 영적인 의미를 보게 되면 바로 이 삼손이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과 삼손을 분리하는 그런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계속적으로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당신에게서 하나님의 능력을 떼어놓을 수 있나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당신을 분리시킬 수 있나요? 지금 들릴라는 계속적으로 묻고 있죠? 그런데 세상은 우리에게 묻지 않습니다. 당신에게 있는 하나님의 권능, 하나님의 능력, 성령의 역사하심이 어디로 통하나요? 묻지 않습니다. 세상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경건 생활을 하지 못하고 주님 앞에 온전히 서 있지 못하면 우리는 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러기 때문에 세상은 우리에게 묻지 않습니다. 우리의 거룩함을 경건함을 밀어버립니다. 힘들고 어렵기 때문에, 바쁘기 때문에, 생활이 너무나도 시간이 촉박하기 때문에, 말씀 읽을 시간도 없고 기도할 시간도 없고 주님 앞에 나아가서 주의 말씀에 귀 기울일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들릴라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들릴라에 지금 무릎에 누워서 우리가 지금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그 나실 인의 규례가 없어지는지도 모르고 우리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사사기에서 삼손이 바로 이 들릴다에게 자신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주신 능력이 없어질 것인가 결박당할 것인가에 대해서 세 번을 말합니다. 이 세 번 다 나실 인의 규례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그 방법을 써서 결박하려 한다 할지라도 이 삼소는 결박당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경건함을 가지고 있다면 주의 거룩한 말씀으로 나아간다면 우리가 주님 앞에 간절한 기도로 나아간다면 이 세상은 우리를 어떠한 방법으로든 결박하려 한다 할지라도 결박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8장 38절, 39절 말씀 다 같이 한 목소리를 또 하겠습니다.

*로마서 8:38-39,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지 일이나 장례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기쁨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우리는 이 말씀이 진리임을 믿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이 온전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우리를 결박하려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우리를 구별한다 할지라도 분리시키려고 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분의 사랑이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붙잡고 계시고 끊어낼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안전한 줄로 믿습니다. 이것을 항상 기억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삼손이 해야 될 것은 무엇일까요? 자신을 세 번이나 결박함으로 자신을 불레셋 가운데 넘겨주려 했던 이 들릴라, 이제 들릴라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될까요? 그 집에서 나와서 도망가야 됩니다. 그 집에서 나와서 그 집을 벗어나야 됩니다. 이제 더 이상 들릴 나의 무릎에 누이는 것이 아니라 이제 자신이 더 이상 이 들릴러와는 상관없는 사람임을 고백하면서 진정으로 하나님께 주신 자신의 사명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 그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구별된 사람임을 온전히 고백하며 사명을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삼선이 들릴라를 떠났을까요? 안 떠났을까요? 네 다 대답하고 계시죠 어떻게 됐을까요? 들릴라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들릴라를 떠나지 않고 어떻게 했을까요? 여전히 들릴라 품 가운데 있습니다. 들릴라가 어떻게 했을까요?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 아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계속적으로 매일 마다 울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계속적으로 삼손이 괴로워 죽기까지 묻습니다. 어떻게 해야 당신을 결박할 수 있습니까? 드디어 삼손이 비밀을 말합니다. 나는 나실 인이고 나실 인의 규례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고 하셨다. 그 말을 듣자마자 이 들릴라는 어떻게 합니까? 바로 그의 머리를 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서는 똑같이 이 삼손을 끼우기 시작합니다. 삼손, 일어나세요. 즉 블레셋 사람들이 당신에게 왔어요. 똑같이 자신을 묶고 있는, 결박하고 있는 그 밧줄을 풀고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을 발휘하려고 했을 때에, 삼손은 여호와의 영이 성령께서 자신을 떠난 지 몰랐습니다. 그리고서는 결박당하여 이제 블레셋 사람들이 끌고 가는 대로, 두 눈은 뽑히고 그는 이제 맷돌을 지하 감옥에서 돌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삼손을 통해서 무엇이라 말씀하시냐면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나시린 규리와 같은 경건함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디모데후서 3:5,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에서 바로 3장 2절에서 4절 말씀 가운데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쭉 나열하고 있습니다. 이 나열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종합해보면 단 한 가지입니다. 바로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바로 경건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선적으로 주님만 사랑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주의 거룩한 말씀 붙들고 나아가며 주의 거룩한 뜻 가운데 행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만을 따라 조차 살아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경건함이고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우리에게 주신 경건의 능력으로 세상 가운데 어떠한 일을 당하든지 우리는 담대히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승리를 이미 허락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사기 16장 이 말씀 가운데 우리가 함께 읽었던 말씀 중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이 바로 22절 말씀입니다. 사사기 16장 22절 말씀 다 같이 한 목소리로 우리 온 마음 다해서 읽도록 하겠습니다.

*사사기 16:22,
22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지금 삼소는 어디에 있죠? 감옥 가운데 있습니다. 무엇을 하고 있죠? 눈이 뽑혀서 연자 맷돌을 돌리고 있습니다. 하나님 저는 이제 끝났습니다. 주님 저는 이제 더 이상 재개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기도 전에 그가 그 상황 가운데 있다는 것을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22절 말씀이 바로 이어집니다.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 하니라’ 이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주님 저는 이제 더 이상 소망이 없습니다. 저의 삶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이 삼손에게, 그가 입을 떼기도 전에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 삼손아 네가 지금 나실 인의 그 규례를 어겼지. 너는 이제 더 이상 나실 인이 아니지. 그런데 내가 다시 너의 머리털을 자라에 할 거야. 내가 너를 향해서 가지고 있었던 거룩한 계획, 거룩한 뜻과 소망 나는 버리지 않았단다. 나는 너를 통해서 이 놀라운 역사를 이룰 거야. 주님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좌절하고 낙심하고 낙망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재정적인 문제, 자녀의 문제, 인생의 개인적인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모든 문제들이 우리를 엄습할 때에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이라 말하냐면 네가 어려운 가운데 있지만 힘들고 좌절하고 포기하고 싶은 그 순간 가운데 있지만 나는 너와 함께 있단다. 내가 너와 동행한단다. 주님을 말씀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승리를 외칠 수 있고 주님 앞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래서 이제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결박하게 한 자신의 신에게 지금 영광 올려드리면서 예배를 드립니다. 다곤 신전에 다 모여서 모든 지도자들 모든 방백들 다 모여서 파티를 개최합니다.

그들이 즐겁게 파티를 하면서 야! 우리의 전리품과 같은 삼손을 끌어와라 그러면서 제주를 부리게 하고 그러면서 막 즐겁게 놀고 있습니다. 그리고서는 이제 기둥에 눈이 뽑힌 상태로 기둥에 이제 붙들고 있는 그 삼손, 그 삼손이 자기를 도와주는 어린 소년에게 말합니다. 나를 이 다곤 신전에 바치고 있는 기둥을 붙들게 해 달라. 그리고 저는 주님 앞에 기도합니다. 주님, 이번 한 번만 나를 기억하여 주시고 이번 한 번만 나를 도우사, 내가 이 불레셋 사람들 가운데 주의 거룩한 구원을 나타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 번만 이번 한 번만 나를 기억하사.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삼손을 우리를 단 한 번만 기억하실까요? 우리 함께 말씀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사야 49장 15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이사야 49:15,
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이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주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절대 잊지 않으십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너무 예쁘죠 어머님은 어머니는 절대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젖 먹는 자식을 잃을지라도 나는 잊지 않겠다. 나는 잊지 않는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 나는 잊지 않고 너를 돕고 너와 함께하며 너를 일으킬 것이다. 주님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믿으며 고백하며 나아갈 때 우리는 주께서 주신 사명을 온전히 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무엇일까요? 바로 삼손과 같이 주의 거룩한 뜻 가운데 행하며 주의 뜻대로 간구하며 나아갈 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임하게 하고 또한 음부의 권세를 무너뜨리는 주의 거룩한 군사로서 담대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할 때에 음부의 권세가 흔들려서 무너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삶 가운데 충만하게 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고 바라셨던 이 세상 가운데서 구별하시고, 우리를 온전케 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우리의 삶을 통해서 흘러가며,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모든 죄의 사슬에서 끊어져 하나님의 나라가 충만하게 임하는 것을 날마다 경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와 같은 놀라운 삶을 날마다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마태복음 18장 20절 말씀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8:20,
20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주께서 이 말씀 붙들고 나아가게 하시는 우리 모두가 이 시대에, 실패한 삼손이 아니라 주의 거룩한 말씀 의지하며, 주의 거룩한 말씀의 능력을 날마다 우리 삶 가운데 행하며, 다음 세대를 그리스도에 일으키며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으로 가정과 일터와 이 사회와 나라와 민족을 온전히 세워나가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요약
우리는 온전히 세상 가운데 구별되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었음을 이 시간 고백하며 아버지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주의 거룩한 말씀의 권능과 경건의 능력을 주셨으니 우리가 날마다 기도할 때마다 우리 삶 가운데 음부의 권세가 무너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충만하게 임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체험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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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8월 2일)--교회음악하계대학특별수요찬양축제-본당
제목: "젖먹이들의 입으로 세우시는 권능"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
말씀: 시편 8:1-2,
사회: 조성환 부목사님
 
설교자: 조성환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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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8:1-2,
1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2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복 자들을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자리를 축복하사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에 허락하신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음들이 풀려지는 예배 되게 하소서. 창세전에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그 사랑이 새롭게 이해되어지는 은혜의 자리가 되게 하시고, 예배드릴 때마다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 되게 하소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신 그 사랑이 우리의 지친 영혼을 쉬게 하시는 복된 자리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 특별 수요 찬양 페스티벌에 나오신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우리 옆 사람한테 이렇게 고백하시면 어떨까요? 오늘 복 받으셨네요.”!!! 이렇게 서로 고백하겠습니다. 제 생각에 저희 교회에서 1년에 한 장소에 가장 많은 음악가들이 모인 자리가 이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시편 81절과 2절 말씀입니다. 시편 81절과 2절 제가 봉독하겠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젖먹이들의 입으로 세우시는 권능입니다. 우리 1절에 보니까 시편 기자는 온 땅에 덮인 주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시면 똑같은 사람이, 똑같은 사람이 똑같은 환경을 바라보는데, 어떤 사람은 온 땅에 덮인 주님의 아름다운 이름을 보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그냥 땅만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보이는 것으로만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믿음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예를 하나 정확하게 성경으로부터 들으면 왕하 6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왕하 615절에 제가 읽겠습니다.
 
*왕하 6:15-16,
15하나님의 사람의 수종드는 자가 일찌기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을 에워쌌는지라 그 사환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16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17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이런 놀라운 기적이 있습니다. 아람 군대에게 둘러싸인 상황에서도, 그러니까 우리 인생에 어떤 위기가 오든지, 그 위기만 바라보는 사람이 있고, 그 위기 뒤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물건과 불만을 보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번에 획기적 합창 세미나에 오신 여러 교회의 음악 지도자들을 통해서 저는 이런 섬김을 한번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들의 찬양대와 여러분들의 사역이 여러분들의 섬김을 통해서, 그분들이 그 사역의 대상의 성도님들이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여전히 그 어려운 환경들을 바라보고 낙심하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고, 온 땅에 충만하신 아름다우신 주님의 이름을 계속해서 보기 시작하고 온 하늘을 덮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그런 놀라운 기적이 여러분들의 섬김을 통해서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이렇게 영안이 열리면 영안이 열리면 주의 대적을 인하여 주께서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의 입술의 권능을 세우신 것을 알게 되는데, 너무나 희한한 것은 시편 8편에 2절에 제가 읽어드립니다.
 
*시편 8:2,
2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복 자들을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그런데 이 똑같은 말씀을 예수님께서 신약에서 인용하십니다. 그러니까 뭐라고 인용하시냐면 마태복음 21장에 보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한 이것을 너희가 읽어본 적이 있느니라. 있느냐질문하셨어요.
 
여러분,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그 입술의 공통점은 한마디로 만약에 한다면 뭘까요? 바로 연약함이고 부족함입니다. 그죠? 어린아이들일수록 부모에 대한 그들의 전적인 또 신뢰가 있어요. 분명히 어린 아이와 젖먹이들이니까 부족한 것이 많겠지만 그 아이들의 공통점은 뭐냐면 어리면 어릴수록 부모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찬양을 음정, 박자, 리듬 하나도 안 틀리고 강약을 잘해서 음악을 기가 막히게 만들어도 하나님이 맨날 들으시는 천사의 찬양과 비교할 때 얼마나 부족하겠습니까? 그렇죠?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준비해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이 찬양이 여전히 하나님 앞에는 어린 아이와 젖먹이들의 고백인 것을 주님 앞에 고백합니다. 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역사를 이루시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거든요.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신다.
 
혹시 우리 이번에 획기적 합창 세미나에 오신 지휘자님들 중에서 이런 생각을 하실 분도 계세요 오늘 저녁에 이렇게 오케스트라와 우리 큰 찬양대가 이제 돌아가면서 찬양을 드리게 되는데 우리 교회는 독창자도 없고, 우리 교회는 오케스트라도 없고, 우리 교회 차가인데 너무나 작고 그러니까 상대적인 빈곤을 느낄 수 있는데 여러분, 소망을 가지세요. 왜냐하면 주님께서 약속하십니다. 젖먹이들의 입술에서 전적인 신뢰 가운데 나오는 그 찬양을 주님께서 친히 온전케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어요.
 
할렐루야! ‘런 어원스라고 하는 미국의 교회 학 음악가가 이런 말씀을 했어요.
하나님의 귀에 들리는 당신의 찬양이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귀에 들리는 것은 귀한 것입니다. 당신의 그 소리는 자신의 즐거움과 자신의 타고난 역량을 뽐내느라고 부르는 그 어떤 노래보다도 하나님의 귀에 귀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연이어서 얘기를 해요. 나는 뜻대로 이렇게 상상해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한 찬양을 바꾸시는, 변환시키시는 거대한 천상의 소리 변환 시스템을 하나님이 갖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이 땅에서는 부족한 소리일 수 있지만 그 소리가 하나님 귀에 도달하면 그 소리는 오직 구원받은 자, 찬양자만이 들을 수 있는 온전한 소리로 변형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귀에 진정한 음악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럴 때 설교 길게 하면 어렵습니다. 할렐루야 그분은 저를 꼭 만나고 가세요. 이번 획기적 합창 세미나에 오신 여러분들의 믿음의 섬김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이제 내일 하면 마치잖아요.
 
여러분이 그 교회 돌아가실 때 여러분들의 섬김을 통해서 끝없는 문제와 어려움 속에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찬양 대원들이 모일 때마다 여전히 우리 인생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불변고와 불만을 보게 되는 역사를 소망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찬미를 정성을 다해서 준비해 드릴 때마다 여전히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그 찬양을 준비하지만 우리들의 심령의 고백에서는 하나님 이렇게 준비 정말 최선을 다해서 준비했지만 하나님 이것은 여전히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참인 것을 주님 앞에 고백합니다. 라고 우리가 그 찬양을 올려드릴 때, 우리 가운데 놀랍게 임하셔서 우리의 그 부족하고 연약한 그 찬양을 온전케 하시는 그 주님의 역사가 우리 각 교회 찬양들 가운데 임하게 될 때 그 찬양의 입술에 주께서 권능을 세워서 원수들과 대적들의 소리를 잠잠케 하시는 그런 놀라운 역사가 저와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함께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이 시간에 주기도문으로 우리 예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리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러한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해 드리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아메 이제부터 이제 2부 순서로 특별 수요찬양 페스티벌을 시작합니다. 어색한 사회를 맡은 조성환 목사입니다. 너무 박수 오래 치시지 마세요. 그러면 이제 합창단은 등단해 주시고요. 오늘 여러분이 보시면 찬양대의 지금 찬양하시는 분들의 제목이 피제 파이 피제이 폴이렇게 나오는데 제가 처음에 그걸 보고 얼마나 속으로 어 웃었는지 모릅니다. 왜냐면 피제이는 미국에서 파자마를 뜻합니다. 그래서 파자마 프로젝트 콰이어는 아니고 프로젝트 콰이어로 연주합니다.
 
오늘 연주되는 모든 곡의 반주는 지금 자리를 함께하고 계신 우리 사랑의 교회 할렐리야 찬양대 3부 찬양대 오케스트라가 이재민 집사님의 리더십으로 진행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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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7월 26일)
제목: "깊은 슬픔을 노래로 바꾸시는 하나님"
말씀: 시편 39:1-13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사회: 문진호 부목사님
 
설교자: 조충현 부목사님
----------------
 
*시편 39:1-13,
1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치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자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
2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발하지 아니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
3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묵상할 때에 화가 발하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4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5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 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 뿐이니이다(셀라).
6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7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8 나를 모든 죄과에서 건지시며 우매한 자에게 욕을 보지 않게 하소서.
9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하옴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연고니이다.
1 0주의 징책을 나에게서 옮기소서 주의 손이 치심으로 내가 쇠망하였나이다.
11 주께서 죄악을 견책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 먹음 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각 사람은 허사 뿐이니이다(셀라).
12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대저 나는 주께 객이 되고 거류자가 됨이 나의 모든 열조 같으니이다.
13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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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계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말씀의 은혜를 사모하며 수요일 저녁 기도에 나오신 모든 성도님들 한 분 한 분을 축복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이 시간 하늘로부터 부어주시는 성령의 위로와 말씀을 통해 우리 삶의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고 고침 받는 시간 되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말씀 부흥과 예배 부흥의 실체가 나타나는 수요 저녁 기도에 나오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수요 저녁 기도회를 통해서 회복을 넘어 부흥의 역사와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는 시간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시편 39편 말씀입니다. -오늘 저는' 기쁨, 슬픔을 노래'로 바꾸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씀으로 우리 함께 성도님들과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성도님들께서는 독서하실 때 어떤 습관을 가지고 계십니까?

저는 목회자로 살아오면서 책을 읽을 때 은혜가 되는 저자를 만나면 시중에 나오는 저자의 책을 모두 사서 읽으려고 합니다. 얼마 전 하나님의 품에 안식하신 팀 켈러 목사님이 쓰신 고통에 답하다. 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다가 매우 흥미로운 부분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면 시편에 150편 중에서 긍정적인 메시지가 전혀 나오지 않는 시편이 두 개가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읽었던 다윗이 쓴 시편 39편과 헬만이 쓴 88편입니다. 여러분, 일반적으로 시편에 나오는 시들은 적어도 하나님을 향한 감사냐 찬양으로 시작해서 끝을 맺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이 두 편의 시에서는 어떻게 긍정적인 메시지가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인지, 저는 굉장히 궁금해서 말씀을 찾아보았습니다. 오늘 저는 두 편의 시 중에서 다윗을 쓴 39편의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께서 오늘 여러분 각자에게 주시는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아멘. 저는 오늘 시편 39편의 말씀을 읽어가는 도중에 제일 먼저 제 눈에 들어오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13절이었습니다. 13절을 세 번역 성경으로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편 39:13,
13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다시 미소 지을 수 있도록 나에게서 눈길을 단 한 번만이라도 돌려주십시오. 여러분 다윗의 고통이 얼마나 심각했으면 하나님을 향해 이런 슬픈 고백을 하는 걸까요? 여러분 성경을 보십시오.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한 번만, 나에게 눈길을 달라고 지금 다윗이 하나님께 마지막 13절 마무리하면서 이런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왜 이런 고통에 겪게 되었는지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시편 39편의 말씀을 묵상하며 내려가 보면 그의 고통의 깊이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통증 지수를 1에서 10으로 계산한다고 하면 아마도 다윗이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은 아마도 구에서 10에 가까울 정도로 그런 고통 가운데 있는 것으로 보여 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한 번만 나에게 눈길 한 번만 달라고 애원하고 있는 것이겠죠. 저는 이 시간 다윗의 깊은 고통의 터널을 지나가고 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어떤 신앙의 자세를 보여줬는지 오늘 세 가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다윗은 고난 가운데 잠잠하고 침묵했습니다.
-다윗은 고난 가운데 잠잠하고 오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고난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작은 고난이든 큰 고난이든 고난을 경험했습니다. 여러분 혹시 이 중에서 성도님들 중에 고난을 겪어보지 않은 분이 있으십니까? 혹시 있으시면 손 들어보시겠습니까? 없으시죠?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 작은 고난이든 큰 고난이든 그런 고난들을 겪고 살아갑니다. 여러분은 내 앞에 고난이 닥칠 때 어떤 반응을 보이시나요? 처음에는 한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할 것이고, 화를 내기도 할 것이고요. 원망할 것 같기도 할 것이고요. 한탄하기도 할 것이고 그 시간을 지나면 우하에 멍만이 있기도 할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의 감정은 고난 앞에서 쉼없이 요동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통은? 다윗은 고통의 수렁 속에서 어떤 행동을 보였을까요? 1절을 다 같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편 39:1,
1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치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
-다윗은 고난 앞에서 불평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불평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자 이 모든 행위가 하나님 앞에 범죄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불평하는 혀를 억제하려 합니다. 그러면서 다윗은 자신의 입에 재갈을 먹이겠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재갈이라는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 이곳에서만 나오는 단어입니다. 재갈은 말의 입에 물리는 토막 같은 거죠. 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사람의 입에 물리는 물건이기도 합니다. 시인은 고난 앞에서 입마개를 하고 자기 입을 스스로 통제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지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은 왜 고통 앞에서 재가를 물고 입을 열지 않기로 다짐했을까요? 하나님께서 고통을 주셔서 기분이 상해서 입을 닫는 것일까요? 아니면 자신을 괴롭히는 악한 자의 힘이 너무나 세서 겁나서 침묵을 선택하는 것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는 은혜를 베푸시는 데는 자기에게는 아무것도 해주는 것이 없어서 좌절해서 입을 다무는 걸까요? 다윗은 침묵을 선택한 이유를 주님께 찾고 있습니다. 여러분, 9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9절입니다.
 
*시편 39:9,
9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하옴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연고니이다.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않음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까닭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침묵을 선택한 이유는 이 모든 고난이 주님께서 주신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서 잠잠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겪을 때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닥치는 모든 고난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식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서 시인 다윗이 행동했던 것처럼 잠잠히 침묵할 수 있습니다. 고난 속에서 보통 사람들은 쉽게 열을 내고 흥분합니다. 감정은 모두 곤두서고 마음은 불붙듯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 거침없이 신경질이 되기도 하죠. 여러분, 다윗이 침묵을 설득했다는 것은 결코 고통을 포기하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침묵은 고통 중에 성도가 선택할 수 있는 위대한 신앙의 자세입니다. 뭐라고요? 침묵은 고통 중에 성도가 선택할 수 있는 위대한 신앙의 자세입니다. 시에스(C.S) 루이스가 쓴 스쿠르 테이프에 편지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고참 악마인 스쿠르 테이프가 마귀의 영역을 아주 시끄러운 소음의 왕국으로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마침내 온 우주를 소음으로 만들겠다고 다짐합니다. 이를 위해 스쿠르 테이프는 다른 악마들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침묵을 경계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침묵이 악마들이 하는 일인 그리스도인의 영혼을 파괴하는 일에 큰 위협을 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소음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음에서 벗어나 잠잠히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이 사실을 알았던 다윗은 고통 앞에서 잠잠히 침묵하며 주님께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래야 그곳에서 고난의 해결책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도님들은 고난 가운데 어떤 모습을 보이십니까? 오늘 다윗이 주님 앞에 잠잠히 침묵하며 나아갔던 것처럼 우리가 고난 앞에서 잠잠히 주님께 나아가면 어떨까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의 해결책을 허락해 주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윗은 혀의 재갈을 물고 있다가 고난 가운데 잠잠한 다윗의 태도가 바뀌고 있습니다. 어떻게 바뀔까요? 다윗은 고난 가운데 하나님께만 토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두 번째입니다. 다윗은 고난 가운데 하나님께만 토로하였습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시편 39:4,
4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여기에 본문에 보시면 4절에서 주어가 다윗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바뀌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고난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다윗은 고난 앞에서 잠잠히 입을 열지 않은 채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모든 괴로움을 토로하기 시작합니다. 4절에서 6절에 보면 메시지 성경으로 한번 보기 원합니다. 다윗의 심정을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다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 무슨 일인지 알려주소서. 나의 살날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려주소서. 죽을 날이 언제인지 알려주소서. 주께서 내 수명을 짧게 하셨으니 내 목숨 줄 건질 것 없을 만큼 짧습니다. 아 우리는 한단 이김. 아 우리는 모닥불 속 그림자, 아 우리는 허공으로 내뱉는 침. 기껏 모아놓고는 그대로 두고 갈 뿐입니다.
 
여러분, 다윗은 고난 가운데 하나님만 바라보며 이 시간 토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토로의 사전적인 정의는 마음에 있는 것을 죄다 드러낸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인생은 토로(吐露)의 연속입니다. 다윗은 인생의 고난 속에서 자신의 모든 감정을 오직 하나님께만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는 마음에 있는 짐들을 토로할 수 있는 분이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신앙생활 가운데 나의 아픔과 고뇌(苦惱)를 토로할 수 있는 세상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어느 종교도 인간이 신에게 고통을 토로하는 종교는 없습니다.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만이 성도들이 고난의 터널을 지나며 겪는 모든 아픔을 들어주십니다. 여러분 다윗은 이번 한 번만 하나님께 토로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의 인생 자체가 토로하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는 고난을 마주할 때마다 고난 앞에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였습니다. 자신의 아픔과 슬픔을 토로하였습니다. 시편 142편 1절과 2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시편 142:1-2,
1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와께 간구하는 도다.
2 내가 내 원통함을 그의 앞에 토로하며 내 우한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 도다.
- 다윗이 하나님 앞에 토라고 한다고 할 때 토로하다. 라는 쏟아 붓다. 라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사정을 숨김없이 쏟아 붓고 있습니다. 여러분 1절과 2절에 9절에 보십시오. 소리 내다. 불을 짓다. 소리 내다. 간구하다. 원통함을 하나님께 토로하다. 우한을 진술하다. 토로하다. 라는 동사 비슷한 동사들이 이렇게 많이 나옵니다. 이렇듯 다윗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통과 슬픔 앞에서 자신의 망가진 모습을 어린아이처럼 솔직하게 드러낸 것은 몹시 중요합니다. 신앙을 내세워 감정을 부정하거나 지나치게 통제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온 마음을 다해 쏟아놓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있는 걱정, 근심을 모두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쏟아 부으십시오. 오늘도 주님은 우리의 토론을 듣기 위해 길을 열고, 들을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아멘. 고난은 우리의 시선을 나에서 하나님으로 바뀌게 하는 특효약입니다. 다윗은 고난을 통과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가족이나 친구에게 토로한다고 해서 조금은 마음의 짐이 내려놓을 수 있지만 완전한 해결책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께 모든 시선을 맡기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영 가족 여러분, 이 시간 여러분의 고통의 무게를 하나님께 쏟아 부으십시오. 여러분의 모든 마음의 짐을 이 시간 내려놓고 하나님의 참된 평화를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세 번째로 다윗은 고난 가운데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었습니다.
 
-시편에 39편에 유일한 한 줄기의 빛은 7절 하반 절입니다. 우리 39장 7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편 39:7,
7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여러분 원문에서는 그것이라는 인칭 대명사가 따로 등장하여 나의 소망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를 반영하면 나의 소망, 그것은 바로 주님께 있습니다. 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고난 중에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자세를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소망이라는 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소망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전제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신앙의 자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고난 중에 하나님을 향한 신실하심을 신뢰하며, 그분께 자신의 삶을 모두 위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끝까지 놓치지 말아야 할 신앙의 가치는 바로 소망인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는 사람에게 소망을 갖는 것보다 더 실질적인 것은 없습니다. 우리 안에 소망이 상실되면 우리 앞에 닥친 시련을 더 고통스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망 없고, 빛도 없는 흑암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이 경험했던 것처럼 하나님께 눈길 한 번만 달라고 외쳤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께 외면당할 뿐 아니라 완전한 흑암을 경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자신의 다른 열두 제자에게 배신을 당하셨으며, 심지어 하늘 아버지에게도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고난의 길로 걸어가신 예수님 덕분에 무슨 일이 있어도, 심지어 우리의 삶에 가장 어두운 순간을 마주한다 하여도 우리의 소망은 사라지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히브리서 6장 19절에서 이렇게 담대히 고백하고 있습니다.
쉬운 성경으로 함께 보겠습니다.
 
*히브리서 6:19,
19 우리가 가진 소망은 영혼의 닻처럼 안전하고 튼튼하며, 그 소망을 통해 하늘 지성소의 커튼을 열고
그 안에 들어가게 합니다. 우리 다시 한 번 있기 원합니다.
-우리가 가진 소망은 영혼의 닻처럼 안전하고 튼튼하여 그 소망을 통해 하늘 지성소의 커튼을 열고 그 안에 들어가게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붙잡고 있는 소망은 영혼의 다처럼 안전하다고, 튼튼하다고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늘의 소망을 붙잡고 나아간다면, 우리가 세상에서 잠시 당하는 고난이 있을지라도 언젠가 하늘 지성소의 커튼을 열고 그 안에 들어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놀라운 은혜를 우리가 맛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소망을 우리 모두가 누리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고난 가운데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기 위해서는 과연 어떻게 해야 될까요? 저는 한 가지만 오늘 적용을 하길 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기억하고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기억하고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고난 가운데서 소망을 잃지 않도록 우리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언제나 이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말씀을 우리는 끝까지 붙잡고 나아가야 합니다. 어떤 분이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는 약속의 말씀이 없는데요. 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시간 말씀의 은혜를 사모하며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매일 날마다 솟는 샘물을 통해서 하루를 시작하며 주님이 주신 음성을 들으십시오. 토요 성령 집회를 통해서 참 만족을 주시는 생수의 강을 여러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매주 토비세 때 담임 목사님과 함께하는 72구절을 암송하면서 주의 말씀이 내 발에 등이 되도록 말씀 앞에 여러분의 삶을 맡기십시오. 개인적으로 저는 오랫동안 하나님 앞에서 붙잡았던 소망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저는 2012년에 정격 성 강경변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정격 성은 번개같이 갑작스럽게 나타난다는 의미입니다. 갑작스럽게 강경 변으로 간이식을 받지 않으면 생명의 위태로움을 겪는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두 번의 간이식을 받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처음에는 응급으로 간이식 수술을 하고 수술을 했는데, 하루가 지나서 제 몸이 이식받은 간을 거부하여 더 이상 방법이 없어 의료진이 모두 포기한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살려주셔서 두 번째 간 이식을 받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6년의 투병 생활을 하고, 지금 이 자리에 서 있게 되었습니다. 이식 수술을 하고 무균 실에 혼자 있을 때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었던 기도 내용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다시 사명의 길로 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 제가 다시 하나님께 안아주심을 본당에서 하나님 말씀을 증거할 수 있는 날이 과연 올까요?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때 붙잡았던 말씀이 시편 118편 17절이었습니다.
 
*시편 118:17,
17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리로다.
-여러분 이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 뒤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일날 사회자 목사님이 예배 부름 때 하셨던 말씀을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어 또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 의인의 장막에 깊은 소리, 구원의 소리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오른손이 높이 들었으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는 도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 선포하리로다.’ 아멘.
 
※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 되십니다. 또 나의 구원이 되십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소망 가운데 그가 살아갔던 것입니다. 드디어 오늘 그 소망의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주님께서 제 생명을 살려주시고 회복시켜주시고, 바로 이 자리에서 주님의 말씀 증거 하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믿습니다. 그리고 담임 목사님의 돌보심과 사랑하는 우리 성도님들의 충복이도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안아주심의 본당에 예 드리시거나 부득이하게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시는 분 중에 다윗처럼 고통의 시간들을 보내고 계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병마와 씨름하는 분들도 있으실 것이고, 어떤 분들은 진로의 문제로 뜬눈을 밤을 새며 지세 우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회사의 스트레스로 인해서 고통 받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중에는 가장으로서 가정을 온전히 세워가기 위해 부딪혀주려 노력하지만, 경쟁적인 문제로 회복되지 않는 어려움 가운데 계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비참한 현실 속에서 취해야 할 신앙의 자세는 단 하나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의 소망 대신 예수님을 붙잡는 것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당하는 고난이 힘들고 낙심되더라도 다윗이 끝까지 놓지 않았던 이 말씀 나의 소망이 죽겠나이다. 나의 소망이 오직 살아계신 주님께 있습니다. 라고 기억하며 이 말씀을 잊지 않고 하루하루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 소망만 붙잡고 나아간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역전시키실 것이며, 우리의 삶에 믿음 보고 2.0을 써내려가도록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길 원합니다. 우리에게 우리 대신하여 우리를 위하여 가장 깊은 고난의 터널을 지나가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누구십니까? 다윗의 뿌리이시며,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온갖 모욕과 침 뱉음과 고통을 당하면서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그 입을 열지 않으시고 잠잠히 침묵하셨습니다. 처절한 십자가의 죽음과 그 고통과 두려움 앞에서 숨김없이 아버지가 할 만하시거든 이 자는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토로하셨던 주님을 떠올려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으므로 고난에는 늘 의미가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심지어 그 뜻을 우리가 전혀 가늠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더라도 우리는 끝까지 그분을 신뢰하며, 소망 가운데 오늘 다윗처럼 나의 소망은 죽게 있나! 라고 고백하며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바라기를 다윗의 깊은 슬픔을 소망의 노래로 바꿔주신 그 사랑의 주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거두시고 고난 가운데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며 토로할 때, 소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인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요약
어떤 고난과 위기가 닥쳐도 하나님 앞에서 혀로 범죄 하지 않고, 이 모든 고난이 주님께서 허락하신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고난 가운데 잠잠히 하나님께 나아가는 삶이 되어야 한다. 신앙생활 가운데 나의 아픔과 슬픔을 토로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사실을 날마다 기억하며, 나의 삶을 짓누르고 있는 고통의 문제들을 하나님께 토로하고 쏟아 부어 모든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참된 평안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이 땅에 잠시 당하는 고난 앞에 흔들리지 말고,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의 소망되신 예수님을 꼭 붙잡아 깊은 슬픔을, 소망과 기쁨의 노래를 바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를 소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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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7월 12일)
제목: "산자들의 땅에서 여호와를 경험하는 삶 "
말씀: 시편 27:1~14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부목사님)
설교자: 오우진 부목사님
ㅡㅡㅡㅡㅡ
*시편 27:1~14,
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2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3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5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6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7 여호와여 내가 소리 내어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8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9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
10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11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생각하셔서 평탄한 길로 나를 인도하소서. 12 내 생명을 내 대적에게 맡기지 마소서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 함이니이다.
13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14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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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간단하게라도 27편에 저자와 저작 시기에 대해서 먼저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알려진 바와 같이 본인 시편의 저자는 다윗입니다. 다윗은 제가 성경 인물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인물인데요. 사람들에게 보통 덜 알려진 인물을 좋아한다고 하면 저 사람이 참 성경을 잘 알고 있구나! 혹은 독특한 사람이구나! 하면서 관심을 받을 수 있는데요 다윗을 좋아한다고 하면 뭔가 평범해 보이고 누구나 다 아는 인물인데 굳이 다윗을 좋아하나 이렇게 은연중에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제가 다윗을 좋아하는 이유가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그가 정말 고독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고요 그리고 두 번째는 그가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이었다는 데 있습니다.
이세의 8번째 아들이면서 목동이었던 그에게는 독특한 재능이 하나 있었습니다. 수금을 잘 연주하고 언변이 뛰어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의 언변과 수금의 연주가 노래를 작곡하고, 또 부르는데 큰 도움을 주었고, 그의 삶의 순간순간마다 느꼈던 자신의 감정들을 자신이 사모하는 하나님을 향한 노래와 시로 표현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재능을 사용하셔서 그로 하여금 수많은 시편을 작곡하여 노래를 부르게 하셨고요.
 
오늘 시편 27편도 그가 하나님을 향해 불렀던 수많은 노래들 중에 하나입니다. 이 시가 기록된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는데요. 아마도 이 신은 다윗이 왕이 된 이후에 주변 국가들과의 치열한 전쟁의 시기에 쓰여 졌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윗은 헤브론에서 왕으로 기름 받음을 받았던 때부터 사무엘하 22장 1절에 하나님께 승리의 노래를 그가 확신하며 부를 수 있게 될 그때까지 사울과 압살롬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대적들과 전쟁을 치르는 삶을 살았습니다. 2절과 3절에 기록된 대적들에 대한 묘사들, 그리고 11절에 기록된 간절한 그의 기도들, 그리고 14절에 자신의 영혼에게 말하기를 여호와를 기다리라고 스스로 설득해 나가는 그런 어조들을 미루어 볼 때, 그는 이 시를 매일매일 인생의 가장 치열한 싸움을 싸워나가던 바로 그때에 불러 노래하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개론적인 내용을 가지고 우리가 본문을 한번 들어가 보겠습니다. 바로 산자들의 땅에서 여호와를 경험하는 삶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먼저 우리는 흔들림 없이 서 있는, 흔들림 없는 다윗에 관해 생각해보려 합니다. 우리가 먼저 살펴볼 것은 흔들림 없는 다윗인데요.
 
I. 흔들림 없는 다윗.
1절과 3절에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편 27:1~14,
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3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아멘. 다윗은 지금 자신 안에 두려움이 없으며 그의 마음이 여전히 태어나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실 다윗이 이렇게 고백하는 이면에는 그를 두렵게 하는 실질적인 악인들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데요. 그 앞에는 끊임없이 악인, 대적, 원수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원수들은 그들의 기세에서, 그들의 수에서, 그들의 힘에서 다윗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2절에 보시면 원수들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고 말합니다.
 
*시편 27:2,
2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비유적인 표현인데요. 살점을 뜯어 먹으려고 사나운 기세로 달려드는 짐승들처럼 원수들이 다윗의 목숨을 집중하여 겨냥하고 그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 같은 기세를 가진 수많은 대적들이 다윗을 둘러싸고 있는데, 이를 가리켜 3절에는 군대라고 하였고 그들과 싸움을 전쟁이라고 말합니다. 실로 다윗은 끊임없는 전쟁을 실어야 했습니다. 왕이 된 직후에도 그는 사울의 아들과 전쟁을 치러야 했고요. 전쟁이 끝나자마자 블레셋의 군대, 그리고 모압과 암몬 자손, 아람 자손들을 비롯해서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있는 거의 모든 민족과 치열한 전쟁을 치러 나가야 했습니다. 인근 국가의 입장에서 볼 때는 급격하게 그 당시 부상하고 있던 다윗과 그의 군대를 반드시 짓밟아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고, 그러기에 사방에 있는 적들이 다윗을 둘러싸고 서서 그의 목숨을 빼앗는데 지금 혈안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어쩔 수 없이 끊임없이 전쟁터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와중에도 다윗의 분명한 고백은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 할지로다 였습니다. 죽음의 위협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그의 마음은 오히려 고요하고, 술을 셀 수 없는 대적의 군대가 자신의 눈앞에서 뻔히 진을 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은 흔들림 없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오히려 강하고 담대하여 갔던 것입니다.
 
여러분, 어쩌면 이와 같은 다윗의 마음, 흔들림 없고 견고한 삶을 살아가는 그 마음을 소유하는 것이 우리들의 가장 큰 바람이 아닐까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 생각할 때 가장 이상적인 신자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어떤 위기 속에서도, 어떠한 위협 속에서도, 마치 평온한 때를 살아가는 듯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과 같이 살아가는 그런 흔들림 없는 신자의 모습을 우리 모두가 소망하고 있지 않습니까? 다윗이 대적에게 둘러싸였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대적이 있으니, 우리를 둘러싼 원수 마귀입니다. 우리의 대적 마귀가 원수의 실존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영적인 이 실존인 마귀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마귀의 실존을, 실존에 대해 무감각한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 대적 막이 사탄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어떻게 아시나요? 어떤 사람은 저한테 자기가 실제 마귀를 봤다고 합니다. 검은색 비닐 봉다리 같이 생겼다고 하던데요. 저는 마귀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생겼는지 확신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 영혼의 내면에 평상시와 다른 어떤 충동이나 혼란스러운 현상들이 마귀가 실존하는 근거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마귀의 실존을 깊이 인식할 수 있는 매우 좋고 유익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한 것도 마귀요, 가라지, 비유에서 가라지를 뿌리는 것도 마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에 말하기를,
 
베드로전서 5:8,
8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담기며 삼킬 자를 찾나니
요한복음 13장 2절을 보니
*요한복음 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려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에베소서 2장 2절에 말하기는
*에베소서 2장 2,
2 허물과 죄로 죽었던 그때를 가리키면서, 그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에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삶을 흔들어 놓으려는 우리의 대적 마귀는 생각을 흔들고, 상황을 흔들며, 세상의 얼개를 짜내어 풍조를 만들어내고요. 그 풍조로 사람들을 질질 끌고 감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 우겨 쌈을 당하게 하고 포획당한 것 같이 되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한 백성으로 살지 못하도록 우리의 무릎을 꿇게 하는 시도를 여전히 끊임없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므로 우리 자신들은 결코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살아있는 사람들이 살아 있는, 살아가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결코 보지 못할 것이라고 낙심하게 하고 좌절하게 하려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삶이 얼마나 호락호락하지 않는 영적인 싸움의 연속입니까? 그러한 삶의 한 가운데 있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다윗의 고백과 같이 두려움이 없고 태연하여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마음들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두 번째는 흔들림 없는 삶의 근거입니다.
 
II.두 번째는 흔들림 없는 삶의 근거.
-다윗의 흔들림 없는 이러한 삶이 도대체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느냐, 하는 이야기를 하려 하는 것입니다. 회답을 먼저 말하자면 이것은 바로 그가 성전에서 경험했던 하나님의 임재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흔들림 없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인들만의 고유한 전유물은 아닙니다. 예전에 철학의 학파들도 보면, 이성으로 감정을 다스리는 그 평정심이 미덕으로 추구하는 그런 학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다윗의 마음이 과연 그런 것일까요? 우리의 감정이 계속해서 쉽게 흔들리는데 우리의 이성으로 똑바로 이성을 차림으로 우리의 이 흔들리고 있는 감정을 컨트롤해서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나 내가 지금 당장 해야 할 그 일을 정확하게 해내는 것이 다윗이 소유하고 있는 바로 그 견고함이냐 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지가 않습니다. 다윗이 소유한 것은 그처럼 이성이 감정을 누르는 그러한 평정심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윗의 마음은 늘 뜨거웠습니다. 그의 이성은 그의 감정과 하나가 되었고요. 그의 마음은 그의 이성과 함께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노래하는 불타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다윗의 평정심은 무엇일까요? 4절에 보면 다윗의 고백이 있습니다.
 
우리 사절을 한번 같이 읽어볼까요?
 
*시편 27:4,
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바로 여기에 다윗의 견고함의 근거가 있습니다. 다윗의 유일한 소망이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더욱 사모하며 살아가는 것이 다윗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여러분, 왜 다윗이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보는 것을 그의 유일한 소망이라고 고백을 했을까요? 이는 그가 이미 성전에서 바로 그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한 가지 더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겠죠? 과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은 무엇일까요? 사실 저는 이것을 아주 오랫동안 진지하게 고민해 왔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성품을 말하는 것입니다. 원래 아주 오래전 고대부터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대상들이 가지고 있는 그런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에야 워낙 우리들이 감각적이 되어서 눈에 보이는 것들 즉 색채, 균형, 비율, 질서, 길이, 넓이, 공간 등이 우리로 하여금 무엇인가 사물을 아름답게 느끼게 하는 그런 요소들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미약에서 볼 때 아름다움 즉 미라고 하는 것은 ‘칼론’이라고 하는 헬라어인데요. 지극히 일반적인 입장에서 이에 대해 생각할 때 눈에 보이는 대상 배후에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고 있는 것들을 만들고 형성하는 배후에 있는, 더 내적이고 영적인 것들이라고 설명하였던 것입니다. 고대인들이 생각했던 가장 아름다운 것은 내 마음에 가장 큰 즐거움을 주고 기쁨을 주면서 나를 끌어당기는 그것, 사람들로 하여금 찬탄을 불러일으키는 그것, 인간으로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내적인 요소들 마음과 그 성품의 질적인 것이라고 이해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슨 얘기인지 잘 모르시겠죠? 사실 오늘날 이것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제가 한 가지 예를 들어드릴 텐데요 우리 남성들이 여성들을 만날 때 하고 있는 기대가 한 가지 있습니다. 얼굴이 아름다운 여성이 내면도 아름다운 여성일 것이라는 그런 기대입니다. 한 형제가 누군가의 소개로 한 여성을 만나러 갔습니다. 이 여성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형제가 기분이 너무 좋아졌습니다. 모처럼 나간 속의 자리였기에 고급 레스토랑을 예약해서 찾아갔는데요. 마침 그 레스토랑에서 베토벤의 교향곡이 교양 있게 흘러나왔습니다. 기분이 좋아진 형제가 음악을 들으면서 그 아름다운 여성에게 물었습니다. 이 곡이 무슨 곡이죠? 그랬더니 여성이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여성이 수줍게 미소 지으면서 머리를 넘기며 말하기를 ‘안심이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으신 분은 옆 사람들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이 여성의 대답에 형제는 실망했겠죠. 근데 여기에서도 우리가 진지하게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지금 이 형제도 그 여인의 외모를 보면서 마음속에 기대한 것은 이 여인의 영혼이 아름다울 것이라는 그런 마음의 기대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하나님은 아름다운 분이시죠. 우리는 하나님이 아름답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다윗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창조된 세상을 보면서 알았습니다.
 
*시편 8:1,3,9,
1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우신지요.
3 주의 손가락으로 지으신 주의 하늘과 주가 베풀어주신 달과 별을 내가 보오니.
9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우신지요.
-그러나 다윗이 그보다 더 깊이 그리고 더 풍성하게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경험했던 곳은 어디였을까요? 바로 하나님의 집이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여기에 기록된 성전은 솔로몬의 성전이 아니라 그 이전의 성막이었는데요. 사람들 눈에 보기에는 어떤 의미에서는 초라했던 그 성막이었지만, 다윗은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다윗이 만난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사랑이 충만하신 분이었습니다. 신약에서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다고 말씀하신 바로 그 하나님은 흠이 없는 분이셨고, 그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은 다윗에게 있어 경건한 두려움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다함이 없고 무한하신 그 사랑은 다윗 또한 그분을 사랑하게 하는 그분의 아름다운 성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두려움과 사랑하는 마음이 결합되어 다윗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런 마음이 형성되었던 것이죠. 결국 그가 성전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아름다운 그 성품이 그에게 삶의 확신을 갖게 하고, 수많은 대적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그때에도 흔들림 없는 마음을 소유할 수 있게 하였던 바로 그 근간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시편의 핵심으로 다가가고 있습니다. 성막에 간 사람들이 그 시대에도 굉장히 많았을 텐데요. 성막에 간 사람들마다 다윗처럼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아름다운, 그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힌 사람이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1년에 최소 세 번씩 절기마다 성막에 나아갔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마다 하나님을 경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아갔지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는 사람은 극히 일부요, 소수였습니다. 무엇이 그 수많은 사람들과 다윗을 구분 짓게 하였을까요? 그 핵심이 바로 오늘 본문 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무너무 중요한 구절입니다. 우리 다 같이 8절을 한번 한 목소리로 읽어보겠습니다.
 
*시편 27:8,
8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아멘.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민수기 6장에 보면 하나님은 말씀하셨는데요.
 
*민수기 6:25-26,
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내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여호와는 그 얼굴을 내게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더라.
-때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죄를 범할 때면 하나님은 자신의 얼굴을 그들에게서 감추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본심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그분의 얼굴을 비추어 은혜와 평강 주시기를 간절하게 원하셨습니다. 다윗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전에서 들었습니다. 너희는 나의 얼굴을 찾으라. 그 말씀은 다윗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자신이 들은 하나님의 그 음성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붙잡았고 하나님께 나아가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마음으로 죽게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여러분, 왜 그가 이렇게 고백하였을까요? 사실 왕, 다윗 왕, 다윗의 왕과 이렇게 말을 하니까 우리가 다윗을 굉장히 크게 생각하지만 사실 그의 집안은 매우 보잘 것 없는 집안이었습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다윗의 아버지의 할머니, 곧 증조할머니는 모함 여인이었던 룻 이였고요. 룻이 베들레헴에 찾아올 때는 아무도 그의 집안에 남성들이 없었습니다. 늙은 시어머니 한 분과 소녀 같은 룻 자신 단 둘이 여성이 베들레헴에 돌아왔습니다. 비록 지역 유지였던 보아스가 계대를 이어 자녀를 낳아주었지만, 실제 여인 두 명이서 그 아이가 자라날 때까지, 또 그 아이가 자라나 성인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울 때까지는 매우 긴 시간이 필요로 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다윗의 아버지 이새가 이새 때에 와서도 가문은 그렇게 써 보잘 것이 없는 상태였을 것입니다. 어쩌면 다윗의 아버지 이새가 큰 아들에게 그렇게 큰 기대를 걸면서 아들 아들을 찾았던 것은, 그의 큰 아들이 이새 집안에 희망이라고 여겼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보잘 것 없는 집안에서 태어난 여덟 째 아들, 목동이라는 직업을 가진 다윗은 매우 비천한 자였고, 더욱이 그 집 안에서조차 다윗을 중요한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본문 10절에 보면 다윗은 말합니다.
 
*시편 27:10,
10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자신의 부모는 자기를 버렸다고요. 실제 그는 부모와 형제들에게서 없신여김을 받았습니다. 이새의 가족은 자신의 집 안에서 태어난 여덟 째 아들을 멸시하고 소외시켰습니다. 햇살이 뜨거울 때, 밤기운이 차가울 때, 그들의 형제 중에 집 밖에 들에서 양을 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지만, 다윗은 그들을 대표해 그들의 가정의 재산이라고 불릴 만한 양을 치는 고생을 하였습니다. 사무엘이 찾아와 그의 아들들을 찾았을 때도 아무도 그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그 가족들에게조차 철저히 소외된 삶을 살아가며 양을 치는, 아주, 아주 하차는 목동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는 그저 숨만 쉬며 끼니를 때우며 살아가는 인생에 불과했습니다. 왜 이새의 가족들이 그를 그렇게 대우했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하지만, 우리 주변에서도 특별한 이유 없이도 그런 일들이 일어나기도 하니, 그런 일들이 얼마든지 다윗의 삶에 발생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 뿐입니다. 그런 그였지만 그가 소년이었을 때 그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었습니까? 간절히 하나님의 얼굴을 찾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어린 소년의 마음에 들린 이 하나님의 음성은 한 줄기 빛과 같이 그 마음을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소년의 마음에 큰 결단이 있었습니다. “내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그는 자신의 마음으로 말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진실했고 진심이었으며 순수했고, 평생에 어쩌면 단 한 번뿐인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단호하고 결단 어린 목소리로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그와 같은 목소리로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바로 그때부터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다윗의 그 마음이 시작된 것은요 그가 하나님 앞에서 그와 같은 목소리로 고백하기 시작하던 바로 그때, 바로 그때부터 다윗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열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다윗은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때로는 밤이 깊도록 하나님을 찾았고, 때로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 그는 하나님의 앞에 엎드렸고 간절히 그의 얼굴을 구했습니다. 여러분,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 어두운 시대를 건너, 칠 흙 같이 어둡게 장막이 쳐져 있는 지성 속에서 빛을 발하며 다윗의 마음이 찾아오셨고, 그는 그 시대에 아무도 경험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본 최초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후 다윗의 인생은 달라졌습니다. 다윗은 홀로 외롭게 살아가던 바로 그곳, 축축한 들판과 그곳에서 바라보던 어둡던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이 눈부시게 찬란하게 빛나는 창조의 걸 작품이 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외롭게 살아가던 그의 시간은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한 시간으로 채워졌고, 세상에서 결코 경험될 수 없었던 안식과 생명이 흘러넘치는 교재로 가득한 시간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지금 다윗은 그의 전쟁의 때 어릴 적 그가 하나님 앞에 고백하였던 것처럼 다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그의 선하고 아름다운 성품을 나타내기 원하셨고, 그분에 대한 믿음과 확신 안에 다윗이 서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니 다윗은 그의 평생에 그러하였던 것처럼, 가장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다른 것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우리도 지금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분산되는 대로, 기도가 흐트러지는 대로, 우리 자신을 방치하지 말고, 좋은 마음의 감동을 받는 것으로 우리의 예배가 충족되었다고 느끼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전까지 우리가 경험했던 모든 종교적인 방식의 감동과 경험을 넘어서는, 진실로 우리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이 기독교의 핵심에 놓여 있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바로 그 자리를 우리가 되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마음을 간절히 기울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 고백해야 됩니다.
 
“내 마음으로 말하기를, 주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겠나이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과 원수가 끊임없이 걸어오는 이 싸움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살아있는 자들의 이 땅에서 결코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할 것이라고 우리를 설득해내려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간절히 그의 얼굴을 구할 때, 하나님은 그의 선하심과 아름다움을 여전히 우리 가운데 드러내시오,. 살아있는 자들이, 숨 쉬며 살아가는 산 자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움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우리에게 확신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을 맺어보려 합니다. 먼저 우리는 다윗과 같이 흔들림 없는 견고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다윗은 이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시편 27:13-14,
3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14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우리가 다윗과 같이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을 확실하게 믿으며, 도저히 설 수 없을 것과 같은 그때에라도 강하고 담대하여, 여호와를 기다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된다면 얼마나 그 인생이 복된 인생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지금 이곳에서 일하시며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니, 바로 그 하나님을 기다리며 믿음으로 서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제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흔들림 없는 믿음은 오직 하나님을 깊이 만난 사람 안에서만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되는 때입니다. 이전에도 기도했어야 했고, 앞으로도 기도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됩니다. 왜 그럴까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너무나 중요한 전환점의 시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시대를 분별하여 여러분들이 지금 이 시대를 한번 바라본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우리가 이전에 살았던 그 시대와 무언가 분명한 차이가 있는 중요한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누구든지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때, 우리가 무엇으로 이 시대를 헤치며 앞으로 전진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그분의 아름다우심을 새롭게 경험하는 것 말고는 우리가 이 시대를 승리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의 얼굴을 우리에게 밝히 비추어 주실 것입니다.
 
제가 13절과 14절을 다시 한 번 읽고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을 확실히 믿었노라.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요약
이 시간 마음과 뜻을 다하여 기도하오니 원수들이 현장 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도록 우리를 대적할 때 두려움이 없게 하시고 태연하며 흔들림이 없는 마음으로 산 자들의 땅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기대하고 소망해야 한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주의 얼굴을 구하는 기도의 불꽃이 되살아나서, 선하고 아름다우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을 믿고 강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흔들림 없이 이 땅을 살아가도록 간절히 간구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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