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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7월 12일)
제목: "산자들의 땅에서 여호와를 경험하는 삶 "
말씀: 시편 27:1~14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부목사님)
설교자: 오우진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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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7:1~14,
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2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3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5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6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7 여호와여 내가 소리 내어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8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9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
10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11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생각하셔서 평탄한 길로 나를 인도하소서. 12 내 생명을 내 대적에게 맡기지 마소서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 함이니이다.
13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14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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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간단하게라도 27편에 저자와 저작 시기에 대해서 먼저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알려진 바와 같이 본인 시편의 저자는 다윗입니다. 다윗은 제가 성경 인물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인물인데요. 사람들에게 보통 덜 알려진 인물을 좋아한다고 하면 저 사람이 참 성경을 잘 알고 있구나! 혹은 독특한 사람이구나! 하면서 관심을 받을 수 있는데요 다윗을 좋아한다고 하면 뭔가 평범해 보이고 누구나 다 아는 인물인데 굳이 다윗을 좋아하나 이렇게 은연중에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제가 다윗을 좋아하는 이유가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그가 정말 고독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고요 그리고 두 번째는 그가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이었다는 데 있습니다.
이세의 8번째 아들이면서 목동이었던 그에게는 독특한 재능이 하나 있었습니다. 수금을 잘 연주하고 언변이 뛰어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의 언변과 수금의 연주가 노래를 작곡하고, 또 부르는데 큰 도움을 주었고, 그의 삶의 순간순간마다 느꼈던 자신의 감정들을 자신이 사모하는 하나님을 향한 노래와 시로 표현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재능을 사용하셔서 그로 하여금 수많은 시편을 작곡하여 노래를 부르게 하셨고요.
오늘 시편 27편도 그가 하나님을 향해 불렀던 수많은 노래들 중에 하나입니다. 이 시가 기록된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는데요. 아마도 이 신은 다윗이 왕이 된 이후에 주변 국가들과의 치열한 전쟁의 시기에 쓰여 졌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윗은 헤브론에서 왕으로 기름 받음을 받았던 때부터 사무엘하 22장 1절에 하나님께 승리의 노래를 그가 확신하며 부를 수 있게 될 그때까지 사울과 압살롬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대적들과 전쟁을 치르는 삶을 살았습니다. 2절과 3절에 기록된 대적들에 대한 묘사들, 그리고 11절에 기록된 간절한 그의 기도들, 그리고 14절에 자신의 영혼에게 말하기를 여호와를 기다리라고 스스로 설득해 나가는 그런 어조들을 미루어 볼 때, 그는 이 시를 매일매일 인생의 가장 치열한 싸움을 싸워나가던 바로 그때에 불러 노래하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개론적인 내용을 가지고 우리가 본문을 한번 들어가 보겠습니다. 바로 산자들의 땅에서 여호와를 경험하는 삶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먼저 우리는 흔들림 없이 서 있는, 흔들림 없는 다윗에 관해 생각해보려 합니다. 우리가 먼저 살펴볼 것은 흔들림 없는 다윗인데요.
I. 흔들림 없는 다윗.
1절과 3절에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편 27:1~14,
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3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아멘. 다윗은 지금 자신 안에 두려움이 없으며 그의 마음이 여전히 태어나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실 다윗이 이렇게 고백하는 이면에는 그를 두렵게 하는 실질적인 악인들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데요. 그 앞에는 끊임없이 악인, 대적, 원수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원수들은 그들의 기세에서, 그들의 수에서, 그들의 힘에서 다윗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2절에 보시면 원수들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고 말합니다.
*시편 27:2,
2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비유적인 표현인데요. 살점을 뜯어 먹으려고 사나운 기세로 달려드는 짐승들처럼 원수들이 다윗의 목숨을 집중하여 겨냥하고 그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 같은 기세를 가진 수많은 대적들이 다윗을 둘러싸고 있는데, 이를 가리켜 3절에는 군대라고 하였고 그들과 싸움을 전쟁이라고 말합니다. 실로 다윗은 끊임없는 전쟁을 실어야 했습니다. 왕이 된 직후에도 그는 사울의 아들과 전쟁을 치러야 했고요. 전쟁이 끝나자마자 블레셋의 군대, 그리고 모압과 암몬 자손, 아람 자손들을 비롯해서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있는 거의 모든 민족과 치열한 전쟁을 치러 나가야 했습니다. 인근 국가의 입장에서 볼 때는 급격하게 그 당시 부상하고 있던 다윗과 그의 군대를 반드시 짓밟아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고, 그러기에 사방에 있는 적들이 다윗을 둘러싸고 서서 그의 목숨을 빼앗는데 지금 혈안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어쩔 수 없이 끊임없이 전쟁터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와중에도 다윗의 분명한 고백은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 할지로다 였습니다. 죽음의 위협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그의 마음은 오히려 고요하고, 술을 셀 수 없는 대적의 군대가 자신의 눈앞에서 뻔히 진을 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은 흔들림 없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오히려 강하고 담대하여 갔던 것입니다.
여러분, 어쩌면 이와 같은 다윗의 마음, 흔들림 없고 견고한 삶을 살아가는 그 마음을 소유하는 것이 우리들의 가장 큰 바람이 아닐까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 생각할 때 가장 이상적인 신자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어떤 위기 속에서도, 어떠한 위협 속에서도, 마치 평온한 때를 살아가는 듯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과 같이 살아가는 그런 흔들림 없는 신자의 모습을 우리 모두가 소망하고 있지 않습니까? 다윗이 대적에게 둘러싸였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대적이 있으니, 우리를 둘러싼 원수 마귀입니다. 우리의 대적 마귀가 원수의 실존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영적인 이 실존인 마귀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마귀의 실존을, 실존에 대해 무감각한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 대적 막이 사탄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어떻게 아시나요? 어떤 사람은 저한테 자기가 실제 마귀를 봤다고 합니다. 검은색 비닐 봉다리 같이 생겼다고 하던데요. 저는 마귀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생겼는지 확신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 영혼의 내면에 평상시와 다른 어떤 충동이나 혼란스러운 현상들이 마귀가 실존하는 근거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마귀의 실존을 깊이 인식할 수 있는 매우 좋고 유익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한 것도 마귀요, 가라지, 비유에서 가라지를 뿌리는 것도 마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에 말하기를,
*베드로전서 5:8,
8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담기며 삼킬 자를 찾나니
요한복음 13장 2절을 보니
*요한복음 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려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에베소서 2장 2절에 말하기는
*에베소서 2장 2,
2 허물과 죄로 죽었던 그때를 가리키면서, 그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에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삶을 흔들어 놓으려는 우리의 대적 마귀는 생각을 흔들고, 상황을 흔들며, 세상의 얼개를 짜내어 풍조를 만들어내고요. 그 풍조로 사람들을 질질 끌고 감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 우겨 쌈을 당하게 하고 포획당한 것 같이 되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한 백성으로 살지 못하도록 우리의 무릎을 꿇게 하는 시도를 여전히 끊임없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므로 우리 자신들은 결코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살아있는 사람들이 살아 있는, 살아가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결코 보지 못할 것이라고 낙심하게 하고 좌절하게 하려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삶이 얼마나 호락호락하지 않는 영적인 싸움의 연속입니까? 그러한 삶의 한 가운데 있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다윗의 고백과 같이 두려움이 없고 태연하여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마음들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두 번째는 흔들림 없는 삶의 근거입니다.
II.두 번째는 흔들림 없는 삶의 근거.
-다윗의 흔들림 없는 이러한 삶이 도대체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느냐, 하는 이야기를 하려 하는 것입니다. 회답을 먼저 말하자면 이것은 바로 그가 성전에서 경험했던 하나님의 임재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흔들림 없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인들만의 고유한 전유물은 아닙니다. 예전에 철학의 학파들도 보면, 이성으로 감정을 다스리는 그 평정심이 미덕으로 추구하는 그런 학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다윗의 마음이 과연 그런 것일까요? 우리의 감정이 계속해서 쉽게 흔들리는데 우리의 이성으로 똑바로 이성을 차림으로 우리의 이 흔들리고 있는 감정을 컨트롤해서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나 내가 지금 당장 해야 할 그 일을 정확하게 해내는 것이 다윗이 소유하고 있는 바로 그 견고함이냐 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지가 않습니다. 다윗이 소유한 것은 그처럼 이성이 감정을 누르는 그러한 평정심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윗의 마음은 늘 뜨거웠습니다. 그의 이성은 그의 감정과 하나가 되었고요. 그의 마음은 그의 이성과 함께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노래하는 불타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다윗의 평정심은 무엇일까요? 4절에 보면 다윗의 고백이 있습니다.
우리 사절을 한번 같이 읽어볼까요?
*시편 27:4,
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바로 여기에 다윗의 견고함의 근거가 있습니다. 다윗의 유일한 소망이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더욱 사모하며 살아가는 것이 다윗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여러분, 왜 다윗이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보는 것을 그의 유일한 소망이라고 고백을 했을까요? 이는 그가 이미 성전에서 바로 그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한 가지 더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겠죠? 과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은 무엇일까요? 사실 저는 이것을 아주 오랫동안 진지하게 고민해 왔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성품을 말하는 것입니다. 원래 아주 오래전 고대부터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대상들이 가지고 있는 그런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에야 워낙 우리들이 감각적이 되어서 눈에 보이는 것들 즉 색채, 균형, 비율, 질서, 길이, 넓이, 공간 등이 우리로 하여금 무엇인가 사물을 아름답게 느끼게 하는 그런 요소들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미약에서 볼 때 아름다움 즉 미라고 하는 것은 ‘칼론’이라고 하는 헬라어인데요. 지극히 일반적인 입장에서 이에 대해 생각할 때 눈에 보이는 대상 배후에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고 있는 것들을 만들고 형성하는 배후에 있는, 더 내적이고 영적인 것들이라고 설명하였던 것입니다. 고대인들이 생각했던 가장 아름다운 것은 내 마음에 가장 큰 즐거움을 주고 기쁨을 주면서 나를 끌어당기는 그것, 사람들로 하여금 찬탄을 불러일으키는 그것, 인간으로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내적인 요소들 마음과 그 성품의 질적인 것이라고 이해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슨 얘기인지 잘 모르시겠죠? 사실 오늘날 이것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제가 한 가지 예를 들어드릴 텐데요 우리 남성들이 여성들을 만날 때 하고 있는 기대가 한 가지 있습니다. 얼굴이 아름다운 여성이 내면도 아름다운 여성일 것이라는 그런 기대입니다. 한 형제가 누군가의 소개로 한 여성을 만나러 갔습니다. 이 여성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형제가 기분이 너무 좋아졌습니다. 모처럼 나간 속의 자리였기에 고급 레스토랑을 예약해서 찾아갔는데요. 마침 그 레스토랑에서 베토벤의 교향곡이 교양 있게 흘러나왔습니다. 기분이 좋아진 형제가 음악을 들으면서 그 아름다운 여성에게 물었습니다. 이 곡이 무슨 곡이죠? 그랬더니 여성이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여성이 수줍게 미소 지으면서 머리를 넘기며 말하기를 ‘안심이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으신 분은 옆 사람들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이 여성의 대답에 형제는 실망했겠죠. 근데 여기에서도 우리가 진지하게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지금 이 형제도 그 여인의 외모를 보면서 마음속에 기대한 것은 이 여인의 영혼이 아름다울 것이라는 그런 마음의 기대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하나님은 아름다운 분이시죠. 우리는 하나님이 아름답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다윗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창조된 세상을 보면서 알았습니다.
*시편 8:1,3,9,
1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우신지요.
3 주의 손가락으로 지으신 주의 하늘과 주가 베풀어주신 달과 별을 내가 보오니.
9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우신지요.
-그러나 다윗이 그보다 더 깊이 그리고 더 풍성하게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경험했던 곳은 어디였을까요? 바로 하나님의 집이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여기에 기록된 성전은 솔로몬의 성전이 아니라 그 이전의 성막이었는데요. 사람들 눈에 보기에는 어떤 의미에서는 초라했던 그 성막이었지만, 다윗은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다윗이 만난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사랑이 충만하신 분이었습니다. 신약에서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다고 말씀하신 바로 그 하나님은 흠이 없는 분이셨고, 그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은 다윗에게 있어 경건한 두려움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다함이 없고 무한하신 그 사랑은 다윗 또한 그분을 사랑하게 하는 그분의 아름다운 성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두려움과 사랑하는 마음이 결합되어 다윗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런 마음이 형성되었던 것이죠. 결국 그가 성전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아름다운 그 성품이 그에게 삶의 확신을 갖게 하고, 수많은 대적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그때에도 흔들림 없는 마음을 소유할 수 있게 하였던 바로 그 근간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시편의 핵심으로 다가가고 있습니다. 성막에 간 사람들이 그 시대에도 굉장히 많았을 텐데요. 성막에 간 사람들마다 다윗처럼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아름다운, 그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힌 사람이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1년에 최소 세 번씩 절기마다 성막에 나아갔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마다 하나님을 경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아갔지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는 사람은 극히 일부요, 소수였습니다. 무엇이 그 수많은 사람들과 다윗을 구분 짓게 하였을까요? 그 핵심이 바로 오늘 본문 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무너무 중요한 구절입니다. 우리 다 같이 8절을 한번 한 목소리로 읽어보겠습니다.
*시편 27:8,
8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아멘.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민수기 6장에 보면 하나님은 말씀하셨는데요.
*민수기 6:25-26,
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내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여호와는 그 얼굴을 내게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더라.
-때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죄를 범할 때면 하나님은 자신의 얼굴을 그들에게서 감추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본심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그분의 얼굴을 비추어 은혜와 평강 주시기를 간절하게 원하셨습니다. 다윗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전에서 들었습니다. 너희는 나의 얼굴을 찾으라. 그 말씀은 다윗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자신이 들은 하나님의 그 음성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붙잡았고 하나님께 나아가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마음으로 죽게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여러분, 왜 그가 이렇게 고백하였을까요? 사실 왕, 다윗 왕, 다윗의 왕과 이렇게 말을 하니까 우리가 다윗을 굉장히 크게 생각하지만 사실 그의 집안은 매우 보잘 것 없는 집안이었습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다윗의 아버지의 할머니, 곧 증조할머니는 모함 여인이었던 룻 이였고요. 룻이 베들레헴에 찾아올 때는 아무도 그의 집안에 남성들이 없었습니다. 늙은 시어머니 한 분과 소녀 같은 룻 자신 단 둘이 여성이 베들레헴에 돌아왔습니다. 비록 지역 유지였던 보아스가 계대를 이어 자녀를 낳아주었지만, 실제 여인 두 명이서 그 아이가 자라날 때까지, 또 그 아이가 자라나 성인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울 때까지는 매우 긴 시간이 필요로 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다윗의 아버지 이새가 이새 때에 와서도 가문은 그렇게 써 보잘 것이 없는 상태였을 것입니다. 어쩌면 다윗의 아버지 이새가 큰 아들에게 그렇게 큰 기대를 걸면서 아들 아들을 찾았던 것은, 그의 큰 아들이 이새 집안에 희망이라고 여겼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보잘 것 없는 집안에서 태어난 여덟 째 아들, 목동이라는 직업을 가진 다윗은 매우 비천한 자였고, 더욱이 그 집 안에서조차 다윗을 중요한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본문 10절에 보면 다윗은 말합니다.
*시편 27:10,
10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자신의 부모는 자기를 버렸다고요. 실제 그는 부모와 형제들에게서 없신여김을 받았습니다. 이새의 가족은 자신의 집 안에서 태어난 여덟 째 아들을 멸시하고 소외시켰습니다. 햇살이 뜨거울 때, 밤기운이 차가울 때, 그들의 형제 중에 집 밖에 들에서 양을 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지만, 다윗은 그들을 대표해 그들의 가정의 재산이라고 불릴 만한 양을 치는 고생을 하였습니다. 사무엘이 찾아와 그의 아들들을 찾았을 때도 아무도 그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그 가족들에게조차 철저히 소외된 삶을 살아가며 양을 치는, 아주, 아주 하차는 목동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는 그저 숨만 쉬며 끼니를 때우며 살아가는 인생에 불과했습니다. 왜 이새의 가족들이 그를 그렇게 대우했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하지만, 우리 주변에서도 특별한 이유 없이도 그런 일들이 일어나기도 하니, 그런 일들이 얼마든지 다윗의 삶에 발생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 뿐입니다. 그런 그였지만 그가 소년이었을 때 그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었습니까? 간절히 하나님의 얼굴을 찾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어린 소년의 마음에 들린 이 하나님의 음성은 한 줄기 빛과 같이 그 마음을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소년의 마음에 큰 결단이 있었습니다. “내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그는 자신의 마음으로 말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진실했고 진심이었으며 순수했고, 평생에 어쩌면 단 한 번뿐인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단호하고 결단 어린 목소리로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그와 같은 목소리로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바로 그때부터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다윗의 그 마음이 시작된 것은요 그가 하나님 앞에서 그와 같은 목소리로 고백하기 시작하던 바로 그때, 바로 그때부터 다윗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열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다윗은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때로는 밤이 깊도록 하나님을 찾았고, 때로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 그는 하나님의 앞에 엎드렸고 간절히 그의 얼굴을 구했습니다. 여러분,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 어두운 시대를 건너, 칠 흙 같이 어둡게 장막이 쳐져 있는 지성 속에서 빛을 발하며 다윗의 마음이 찾아오셨고, 그는 그 시대에 아무도 경험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본 최초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후 다윗의 인생은 달라졌습니다. 다윗은 홀로 외롭게 살아가던 바로 그곳, 축축한 들판과 그곳에서 바라보던 어둡던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이 눈부시게 찬란하게 빛나는 창조의 걸 작품이 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외롭게 살아가던 그의 시간은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한 시간으로 채워졌고, 세상에서 결코 경험될 수 없었던 안식과 생명이 흘러넘치는 교재로 가득한 시간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지금 다윗은 그의 전쟁의 때 어릴 적 그가 하나님 앞에 고백하였던 것처럼 다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그의 선하고 아름다운 성품을 나타내기 원하셨고, 그분에 대한 믿음과 확신 안에 다윗이 서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니 다윗은 그의 평생에 그러하였던 것처럼, 가장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다른 것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우리도 지금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분산되는 대로, 기도가 흐트러지는 대로, 우리 자신을 방치하지 말고, 좋은 마음의 감동을 받는 것으로 우리의 예배가 충족되었다고 느끼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전까지 우리가 경험했던 모든 종교적인 방식의 감동과 경험을 넘어서는, 진실로 우리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이 기독교의 핵심에 놓여 있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바로 그 자리를 우리가 되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마음을 간절히 기울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 고백해야 됩니다.
“내 마음으로 말하기를, 주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겠나이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과 원수가 끊임없이 걸어오는 이 싸움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살아있는 자들의 이 땅에서 결코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할 것이라고 우리를 설득해내려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간절히 그의 얼굴을 구할 때, 하나님은 그의 선하심과 아름다움을 여전히 우리 가운데 드러내시오,. 살아있는 자들이, 숨 쉬며 살아가는 산 자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움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우리에게 확신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을 맺어보려 합니다. 먼저 우리는 다윗과 같이 흔들림 없는 견고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다윗은 이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시편 27:13-14,
3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14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우리가 다윗과 같이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을 확실하게 믿으며, 도저히 설 수 없을 것과 같은 그때에라도 강하고 담대하여, 여호와를 기다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된다면 얼마나 그 인생이 복된 인생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지금 이곳에서 일하시며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니, 바로 그 하나님을 기다리며 믿음으로 서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제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흔들림 없는 믿음은 오직 하나님을 깊이 만난 사람 안에서만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되는 때입니다. 이전에도 기도했어야 했고, 앞으로도 기도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됩니다. 왜 그럴까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너무나 중요한 전환점의 시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시대를 분별하여 여러분들이 지금 이 시대를 한번 바라본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우리가 이전에 살았던 그 시대와 무언가 분명한 차이가 있는 중요한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누구든지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때, 우리가 무엇으로 이 시대를 헤치며 앞으로 전진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그분의 아름다우심을 새롭게 경험하는 것 말고는 우리가 이 시대를 승리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의 얼굴을 우리에게 밝히 비추어 주실 것입니다.
제가 13절과 14절을 다시 한 번 읽고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을 확실히 믿었노라.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요약
이 시간 마음과 뜻을 다하여 기도하오니 원수들이 현장 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도록 우리를 대적할 때 두려움이 없게 하시고 태연하며 흔들림이 없는 마음으로 산 자들의 땅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기대하고 소망해야 한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주의 얼굴을 구하는 기도의 불꽃이 되살아나서, 선하고 아름다우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을 믿고 강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흔들림 없이 이 땅을 살아가도록 간절히 간구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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