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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2020. 5. 6.)

제목: ''큰 믿음의 비밀''

말씀 (마태복음 15:21~28)

설교자: 장광천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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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약

1) 자아를 깨뜨리는 자.

문제(수치심)를 주께 드러내며 경멸. 관계를 깨뜨리는 요인수치와 굴욕 속에도 딸을 살리려는 내 자신 내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주를 바라라.

2) 주가 구원자(메시아)라는 믿음.
이사야9:6~7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And he will be called Wonderful Counselor,
Mighty God, Everlasting Father, Prince of Peace
7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3) 주 앞에 엎드려 말씀을 받아드리는 것이다.
딸만 바라보면 예수님을 도구로 주님의 말씀에 대한 여인의 반응
27“주여 옳소이다마는 (자격 없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지만 주의 긍휼을 받고저 합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 - 프로스퀴네오.절하다, 경배하다.
37: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내 뜻대로 안 될때  그때 말씀 앞에 엎드리라. 은혜받을 자격 없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로 삼아주셔서 감사하라는 말씀.

 

 

1.어떤 문제 상항 속에서도 나 자신에게 고정된 시선을 돌이켜 주님만을 바라보고, 순순한 사랑과 믿음의 연합으로 큰 믿음의 역사를 체험하기 바란다.

2. 나의 생각과 뜻이 맞지 않아도 먼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나의 소원과 우상을 내려놓고, 주의 위엄 앞에 엎드리는 예배자가 되어야 함.

3. 문제의 자리를 은혜의 자리로, 수치의 자리를 칭찬과 영광의 자리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은혜만을 전작으로 의지하고 자랑하며, 내 뜻보다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역사가 영광스럽게 이루어지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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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서는

본문에서 그리스도께서 가나안 여자의 딸로부터 귀신을 내어쫓는 유명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이야기 속에는 그리스도께서 불쌍한 이방인을 호의적으로 바라보시는 매우 진기하고 놀라운 내용이 들어 있다. 그리고 또 그리스도께서 이방인을 위하여 예비해 주신 진기한 사랑이 이 이야기 속에 들어 있다. 여기서 이방인을 비추는(2:32) 희미한 빛이 드러난다.

그 여자는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이야기 한다.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자녀들이 괴로움을 당하면 부모들이 걱정을 하게 된다. 다정한 부모들은 자신의 분신인 자녀들의 불행을 아주 민감하게 느끼는 것이다. 따라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라고 한 그 여자의 간청 속에는 "귀신들리신 했지만 그 아이는 여전해 내 딸입니다"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우리의 가족이 가장 큰 불행을 당했다고 그들에 대한 우리의 의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므로 우리는 그들에게 애정을 베풀지 않으면 안된다. 가나안 여자가 그리스도에게 나온 것도 그 여자의 가족이 고통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여자가 믿음을 가지고 나왔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그 여자의 간청을 거절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비록 우리가 어떤 필요에 의해 그리스도에게 나아간다 해도 그리스도는 그런 이유로 우리를 내쫓지 않으실 것이다.

그 여자는 그리스도의 자비를 간청한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 여자의 간청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한 것이었다. 그 여자는 그리스도의 권능을 제한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자비를 구했다. 다시 말해서 그 여자는 필요한 것만을 간청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그리스도에게 맡기고 그리스도의 자비에 의지했다. 자녀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그 부모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과 같다. 곧 우리의 자녀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자기의 자녀들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는 것은 부모들의 의무다. 그러므로 믿음과 기도를 통하여 그 자녀들을 그리스도에게로 데려오라. 그것은 그리스도만이 그들을 고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간청을 한 뒤 가나안 여자가 직면했던 좌절감.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한 모든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이와 비슷한 내용을 찾아 볼 수 없다. 그는 늘 그를 찾아 온 모든 사람들에게 호의를 보이시며 용기를 주셨다. 그리고 그는 그들이 소리치기 전에 응답해 주시거나 아니면 그들이 말하는 동안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여기에선 그와 다른 방법으로 그리스도께서 대하셨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어떤 학자는 생각하기를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들과 다름없이 이방인들에게도 같은 호의를 베풀어 유대인들을 화나게 하려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 여인에게 등을 돌리셨다고 한다.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그 여자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여자를 시험하기 위하여 이와 같이 대한 것이며, 따라서 그리스도는 그 여자의 믿음이 강하다는 것과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 여자가 그와 같은 좌절감을 얼마나 훌륭하게 헤쳐 나갈 수 있는지를 알았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그 여자에게 실망을 안겨주셨던 것은 그 여자의 믿음의 시련이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백성을 대하실 때, 그들에게 자신의 섭리를 특히 자신의 은혜를 베푸시는 방법 중에 모호하고 어리둥절하게 했던 대부분의 방법들이 이 이야기를 통하여 설명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불쾌한 모습을 보이신다 해도 그의 마음 속에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 여자가 특별히 심한 실망을 받게 된 것을 살펴보자.

그 여자가 그리스도의 뒤에서 소리칠 때 그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셨다. 그리스도는 늘 귀를 기울이시며 자기에게 간구하는 불쌍한 자들의 소리를 경청하셨다. 그런데 이 불쌍한 여인에게 그리스도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여자는 어떤 자비나 답변도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자시의 행한 일을 알고도 아무 대답을 하시지 않은 것은 그 여자가 더 열심히 기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 여자에게 자비를 바랄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하게 함으로써 그리스도는 그 여자로 하여금 자비를 얻기 위하여 훨씬 더 끈질기게 간구하도록 했다. 하나님께 열납되는 모든 기도는 즉각적으로 응답을 받지 않는다. 때때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기도에 관심이 없으신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그들의 믿음을 시험함으로써 그들의 믿음을 개선시키기 위한 것이다.

제자들이 그 여자를 위하여 친절한 말을 하자 그리스도는 그 여자의 간청을 거절하시는 이유를 밝혀 그 여자를 더 실망하게 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이 그 여자를 대신하여 간청한 것은 그 여자에게 어느 정도의 위안을 주었다. 그들은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라고 말했다. 비록 제자들도 그 여자의 요구가 해결되기를 바랬겠지만 그들은 불쌍한 여인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일보다 오히려 그들 자신의 편안함을 위하여 그리스도에게 건의했던 것이다. 따라서 제자들이 한 말은 다음과 같은 뜻으로 한 말이다.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질러 우리를 성가시게 할 뿐 아니라 우리를 창피하게 하오니 그 여자의 딸을 고쳐주어 그 여자를 보내소서"라는 뜻이다. 계속해서 끈질기게 간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그것은 선한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뒤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을 좋아하신다.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답은 그 여자의 기대를 완전히 좌절시켰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아무리 끈질기게 요구한다고 해도 현명한 사람의 확고한 이유는 좀처럼 변경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그 여자의 요구에 아무 대답도 하시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여자를 반박하셨으며 하나의 이유를 들어 그 여자의 입을 막았다.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속해 있는지에 대해 질문을 받을 때 큰 시험에 빠진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전혀 의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 여자가 계속 끈질기게 간구하자 그리스도는 그 여자의 간청이 부당하다는 것을 주장하여 그 여자의 간청을 거절하셨을 뿐 아니라 겉으로 보기엔 그 여자를 거의 꾸짖기까지 하셨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26).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그 여자의 모든 희망을 없애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만일 그 여자가 진정으로 아주 강한 믿음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그 여자는 그리스도의 이 말을 듣고 절망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복음의 은혜와 그 부속물로 생기는 기적적인 치유들이 바로 자녀들에게 주어진 떡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것처럼 누구에게나 베풀어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열방에게 결실이 맺어지는 시기를 주어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다(14:16,17). 이들은 곧 특별한 백성에게만 어울리는 특별한 은혜들이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로 간주하여 개로 불렀을 만큼 매우 경멸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스도는 여기서 그런 점을 인전 하신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그는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은혜를 이방인이 나누어 갖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여기신다.

이제 그리스도는 이 가나안 여인의 간청을 다음과 같은 말로 반박하신다. "가족도 아닌 이 여자가 어떻게 자녀의 떡을 먹으려고 생각할 수 있느냐?" 그리스도는 먼저 가장 두드러진 영광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을 낮추시고 그들을 천하고 무가치하게 떨어뜨리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로 말미암아 명예를 얻고, 특권을 누리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자비를 전혀 받을 수 없는 개와 같은 존재로 여겨야 한다. 그리스도는 큰 시험을 주셔서 큰 믿음을 갖게 하시를 기뻐하시기 때문에 때때로 우리가 시험을 받고 정금과 같아지도록 가장 고통스러운 마지막 시험을 준비해 두신다.

이와 같이 시험을 받으면 많은 사람이 침묵 속에 빠져들거나 갑자기 격분하게 될 것이다. 그 여자가 신앙이 약했다면 다음과 같이 말했을지도 모른다. "불쌍하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에게 달갑지 않은 말만 하는구나. 내가 차라리 집에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불쌍한 처지에 놓여 있다고 무시할 뿐만 아니라 개라고 부르기까지 하다니!" 그 여자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했을지도 모른다. "이 사람이 다윗의 자손이란 말인가? 정말 이 사람이 친절하고 다정하며 동정심이 많다고 소문난 그 사람이란 말인가? 나는 개가 아니라 여자다. 나는 불쌍한 처지에 빠져 있는 정직한 여자일 뿐이다. 분명 나를 개라고 부르는 것은 마땅치 않은 일이다." 겸손한 믿음을 가지고 진실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영혼은 모든 것을 선한 쪽으로 말하고 행동할 뿐 아니라 그것을 최선으로 생각한다. 그 여자는 이런 모든 절망을 다음과 같은 태도로 헤쳐 나간다.

그 여자는 자기의 간청을 그리스도께서 들어주시기를 열심히 구했다. 이런 태도는 방금 전에 그리스도로부터 거절을 당했을 때도 나타났다.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25). 그 여자는 계속해서 간구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제자들을 잠잠케 했다. 그는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더 이상 말을 듣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응했다. 그러나 그 여자는 그렇지 않았다. 이와 같이 우리는 부담을 더 민감하게 느끼면 느낄수록 그 부담을 제거하기 위하여 더욱 굳은 결의로 기도해야 한다. 그 여자는 더욱 간청하였다. 그녀는 그리스도를 욕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실수한 것이 아닌가 하고 돌이켜 보는 것 같다. 그 여자는 더욱 겸손하게, 자신의 행동이 예수님께 혹시나 거만하게 보이지 않았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와서 예수께 절하였다.' '또한 그 여자는 자기의 열심히 부족하지 않았는가 하여 이제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외쳤던 것이다. 기도의 응답이 늦춰질 때 하나님은 응답이 늦어지는 것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이 기도하고 더 좋은 기도를 하도록 가르치신다.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하고 실망을 당하게 될 때 기도를 더 열심히 해야 한다. 그 여자는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도 보내셨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는다. 믿음이 약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에 대한 선택 때문에 질문하고 의심함으로써 당황하게 된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자기들의 목적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 좋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한 그 여자의 기도는 매우 간절하지만 포괄적이고도 열렬했다. 그 여자가 이와 같은 기도를 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 때문이었다.

 

첫째, 그 여자는 자기의 처지를 슬퍼했다. 상한 심령을 가진 자들이 슬퍼하는 것은 헛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때에 그들을 살피시기 때문이다. 또한

둘째, 그 여자는 시험을 당하는 이때에 자기를 도와주시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다. 그 여자는 이처럼 언짢은 일을 당했을 때 믿음을 지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기도했던 것이다.

셋째, 그 여자는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한 본래의 요구를 굳게 주장했다. 이 말은 곧 "주여 제가 오게 된 목적을 이루게 하소서"라고 한 것이다. 그 여자는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도울 수 있으며 또 기꺼이 도우실 것이라고 믿었다. 그 여자는 여전히 그리스도를 선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또한 자기의 주장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 기도가 웃음거리로 되고 또 우리가 그런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게 한다면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여자는 경건하고 훌륭한 믿음으로 매우 놀라운 간청을 했다. 이 가련한 여인을 그리스도의 말씀을 반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말씀에 순응하기로 결심한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27). "주여 옳소이다"라고 한 그 여자의 고백은 매우 겸손했다. 우리는 겸손한 신도를 그와 같이 비천하게 말할 수 없지만 그리스도는 언제든지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이다. "주여 옳소이다. 제가 그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개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자녀의 떡을 함께 나눌 권리가 없습니다." 그 여자가 이 말을 하고 나서 간청을 한 것은 매우 영리한 행동이었다.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그 여자가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것을 통하여 논증을 한 것은 매우 총명하고 영적으로 기민하고 영민했기 때문이었다. 생동적이고 적극적인 믿음은 우리를 곤란하게 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까지도 우리에게 유익이 되도록 한다. 우리는 우리를 실망케 하는 것 속에서도 믿음을 통하여 용기를 얻을 수 있다. 따라서 그 믿음은 우리를 밀어내려고 뻗어진 손을 잡음으로써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도록 한다. 그 여자의 간청은 바로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한 것이다. 진실로 충분한 정식은 자녀들만을 위하여 마련되지만 그 자녀들이 먹다 떨어뜨리는 작은 부스러기들은 개들이 먹어도 아까와 하지 않는 것이다. 그 여자의 겸손과 궁핍은 그 여자로 하여금 부스러기라도 기뻐하게 만들었다. 스스로 아무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든 것에 감사할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있는 지극히 적은 것이라도 신자에게는 귀한 것이며 그 이유는 그것이 바로 생명의 떡 부스러기이기 때문이다. 그 여자의 믿음이 그녀로 하여금 이런 부스러기를 기대하도록 자극했다. 부자의 식탁에서 그 자녀가 먹듯이 개도 떡 부스러기를 먹는데 하물며 그리스도의 식탁에서는 더욱 그렇지 않겠는가? 그 여자는 그리스도의 식탁을 주인의 식탁이라고 부른다. 진정 그 여자가 개라면 그 여자는 주인인 그리스도의 개가 될 것이다. 비록 우리가 문지방에 거한다 해도 그곳이 하나님의 집이라면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모든 간청에 대한 좋은 결과의 성공 : 그 여자는 이 노력을 통하여 신뢰와 위로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 여자는 비록 가나안 사람이었지만 진실한 이스라엘의 딸임을 입증하였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28). 이제 그리스도는 본심으로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신다. 그러므로 그는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 여자의 믿음을 칭찬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칭찬하시는 것은 바로 그 여자의 믿음이다. 그 여자가 기지를 발휘하여 이 일을 잘 처리한 것은 여러 가지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곧 지혜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와 꾸준한 기도였다. 그러나 이것들은 바로 그 여자가 지니고 있는 믿음의 산물이었다. 믿음은 모든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 가장 큰 영광을 돌리는데 그리스도께서도 모든 은혜들로 말미암아 믿음에 대해 가장 큰 영광을 돌리신다. 그것이 바로 그 여자의 믿음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모든 성도들의 믿음이 다 귀중하지만 그들의 믿음이 모두 다 강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모두 같은 정도의 발전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믿음의 위대성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원수로 대하시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그를 절대적으로 신봉하여 친구로 여겨 사랑하고 신뢰하는 데 있다. 진실하기만 하다면 약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도 거절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큰 자는 칭찬까지 받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네 소원대로 되리라'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 여자의 딸을 고쳐 주셨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곧 "내가 너의 간청을 도저히 거절할 수 없으니 네가 온 목적을 이루고 가라"라는 뜻이다. 믿음이 큰 자들은 구하고자 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의지가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는 뜻과 부합되었을 때 그의 의지도 우리가 바라는 뜻과 일치할 것이다. 결코 그리스도를 거절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비록 한동안 자신의 모습을 그들로부터 숨기시는 것처럼 보여도 그들을 끝까지 거절하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 결과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화답하였다. 그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그 어미의 믿음이 딸을 치유하게 한 것이다. "그가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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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2020. 4. 29.)

제목: ''사람아, 아들아''

말씀: (마가복음 5:35-43)

설교자: 박유관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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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미션 --- 물 댄 동산 수요 기도회를 통해서 우리 모두에게 놀라운 따뜻한 사랑으로 축복하시길 간절히 바란다.!!!

 

만약에 이 세상에서 믿음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는 우리가 먹는 음식이 안전하다고 매일 음식을 먹는다. 버스나 지하절이 사고 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원하는 목적지까지 우리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있다. 우리가 집에 있을 때에도 내가 있는 이 집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기에 밤에 잠자리에서 잠을 잔다. 이처럼 믿음은 우리 모든 일상을 유지시켜 주는 기초가 된다. 믿음 없이는 사람이 살 수 없고, 믿음 없이 이 세상은 가능하지 않고 믿음 없이는 아무것도 서지 못한다. 우리가 그런 현실을 부분적으로 범하고 있지 않나요? 그렇고 코로나 바이러스로 일상을 무너뜨리고 있다. 모든 믿음을 흔들고 있는 것이다. 감염되지 않는다는 믿음, 감염이 되어도 나을 수 있다는 확신이 우리에게 없다. 그래서 누구도 편히 만나지 못하고 또 마음 놓고 가지 못하고 사람과 거리를 두고 살고 있다. 이런 현실을 그동안 우리가 겪으면서 중요하다고 여겼던 모든 것들은 결국 믿음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뿐만 아니라 믿음이 흔들리면 불편한 삶을 넘어서 고통이 우리들에게 찾아온다. 이 또한 우리가 경험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의 사망자가 20만명을 넘어섰다. 우리나라는 약 59만 명이나 실직을 했다고 한다. 고용절벽을 만난 것이다. 이 모든 겪는 사람들과 가족은 큰 고통과 슬픔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오늘 본문에서도 슬픔과 고통의 시간을 지내고 있는 사람이 있다. 바로 회당장야이로이다. 그의 외동딸이 죽기 직전이다. 부모라면 야이로의 심정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딸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아버지의 심정은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죽고 딸이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나아가길 결심한다. 하지만 당시 회장장으로서 예수님께 나아가가 엎드리고 간절히 구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는 일이었다. 그것을 행하고자 원한다면 대단한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먼저 당시 예수님은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의 의해서 지탄을 받고 있었다. 야이로도 회당장이었기 때문에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과 동일한 종교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야이로가 예수님께 나아온다는 것은 그의 종교적 입장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자신이 회당장이라는 사회적 지위, 체면 사람들의 시선, 수근거림의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딸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께 나와야 했다. 야이로는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께 나아와 간절히 간구했다. 이 말씀에서 주목할 3개의 동사가 있다. 와서 엎드려 구하여, 이 세 사를 살펴보겠다. 야이로는 바로 엎드려 오랜 시간 동안 간곡히 예수님께 구했다. 한 번만이 아니라 아주 오랜 시간 주님께 매달리고 매달렸다. 특히 야이로가 이렇게 예수님께의 발 앞에 엎드린 행동은 나병환자나 거라사의 광인이나 이방 여인이 취했던 그런 행동과 동일한 것이었다. 한없이 자신을 낮춘 겸손한 행동이었다. 그의 종교적 지위 사회적 신분을 고려한다면 정말 파격적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인생은 지위가 높아도 권력이 있어도 재물이 많아도 그것보다 더 큰 세력 앞에 직면할 때 얼마나 그것이 무기력한지를 깨닫게 된다. 야이로는 세상적인 관점으로 보면 대단한 사람일지 몰라도 죽음의 세력 앞에 장말 무기력하게 서 있는 연약한 피조물에 불과했다. 왜 야이로가 체면과 사회적 신분과 종교적 입장을 뒤로하고 예수님 앞에 나아와 엎드려 오래도록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이렇게 예수님께 간구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죽음 앞에 있는 딸을 구원할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질병과 가난과 죽음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을 격려하는 것을 자주 목격한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인간에게 고통을 허락하셨는가요?? 물론 죄 때문이다. 인간의 질병과 죽음의 고통이 찾아온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 자신의 대한 생각을 가장 많이 할 때가 언제인가? 그것은 인간은 고통을 당할 때 생각을 가장 많이 한다. 내 고통이 있을 때 나와 하 나님을 생각하게 된다. 인간이 당하는 고통이 알고 하나님은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인간은 고통당할 때 자신에 대해서 가장 많이 한다. 그런데 신앙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고통당할 때 나와 하나님을 생각한다. 비록 죄로 말미암아 고통이 시작 되었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겪는 고통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생각하고 하나님이 누구인지 생각하게 하신다. 욥도 그렇다. 나의 삶의 고통의 답이 있을까요? 왜 고통이 나에게 있어야 되냐고 묻는 순간에 답은 없다. 욥은 하나님을 찾는다. (욥기 42:5) 욥은 피조물이 연약하고 무지한지 낮은지를 알고, 하나님이 얼마나 높고도 위대하신 지를 깨닫는다. 전 세계 코로나 확진 자가 300만명이 넘고 사망자도 20만명이 넘었다. 아프리카가 폭발할지 모른다고 한다. 국가마다 문을 걸어 잠갔고 사람마다 직장을 잃었다. 기업들은 부도의 위기에 있다. 학생들은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있다. 일부 국가에서는 생필품이 없어지고, 부족한 마스크를 가지고 싸운 자들,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인 교회를 겨냥한 사회적 책임이 부족하다는 비난과 분노, 이 모든 것을 지켜보면서 지금 이 세계는 야이로의 딸처럼 죽음 직전에 놓인 것처럼 느낌이 든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의 극도의 두려움과 공포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현실 속에서 우리는 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코로나19로 전 지구적인 고통과 두려움 속에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무

엇을 하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것인가?

 

첫째, 예수님을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야이로는 예수님을 찾았기에 나왔기에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내려놓고 눈물로 기도했던 것이다.

그에게 찾아온 고통을 한 순간에 내려놓게 했다. 문제는 생각할수록 고통이 더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도적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나 예수님을 더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자리 바꾸기 시선 바꾸기라 여긴다. 서있는 위치가 다르면 모는 위치에 따라 달라 보인다. 도라산에 전에 효도관광으로 노인들을 모시고 간적이 있다. 도라산 젊은 봉사자들은 꽃을 보며 환호성을 쳤지만, 할아버지들은 북한 땅을 바라보셨고, 할머니들은 쑥을 캤다. 내가 서있는 자리에서 보는 지리가 현실을 바꾼다. 고통의 시선에서 예수님으로 바꾸는 것이다. 내가 서 있는 자리가 결정한다. 내가 어디에 서 있느냐가 그것이 현실을 바라보는 눈을 바꾼다는 뜻이다. 내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자아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자리로 고통에서 자리로, 고통의 시선에서 예수님의 시선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리바꿈 시선 바꿈이 있을 때 나를 진정으로 도우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라는 것을 믿게 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화목제물로 드려졌다는 사실이 우리 모두의 생각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없던 힘이 생겨나고 잃어버린 용기는 되찾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은 사람들의 마음을 두려움으로 인해 현대인들은 만성적인 고통에 산다. 전전긍긍하며 살아간다. 이 시대는 인생의 문제가 고통에 단기적인 처방이 난무하다. 일본 동경대 강상균 교수는 고민하는 힘이라 한다. 이 시대의 환경은 사람들에게 생각하는 힘을 빼앗아 간다. 그러다 보니 본질을 바라보는 삶의 테도가 부족하다. 예수님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시선으로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부족해진다. 야이로가 겪는 교통이 예수님을 생각하게 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 예수님 앞에 나오게 한 것처럼 오늘 우리가 겪는 이 어려움이 예수님을 더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이 영적인 기폭제가 되길 바란다.

둘째, 기도해야 합니다.( 이 상황 속에서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요?)

야이로에게는 심장이 절박했겠는가! 예수님이 마지막 희망이었을 것이다. 그 간절한 기도가 드디어 예수님의 발걸음이 움직이기 시작하신 것이며, 응답의 신호탄이다. 우리가 고통당할 때 기도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도 살아남기 위해 기도를 하는 것인가? 만약 이것이 고난 중에 기도해야할 이유의 타종교와 차이가 있겠는가? 그들도 그들이 믿는 신에게 자신들이 얻고자 하는 기도를 경건하게 한다. 우리가 타종교도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고자 그들도 간절히 기도한다. 우리는 야이로의 태도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예수님께 간곡히 구했다라고 말하고 있다. 야이로는 전심으로 오래도록 기도했고 줄기차게 기도했던 것이며 한 번으로 끝나기 않게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왜 우리가 세상에 휘둘리면서 살고 있는가? 예수님의 발걸음이 움직이기까지 줄기차게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사람 모두가 한 방향으로 가는데, 유독 다른 방향으로 걷고 있다면 다른 북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다. 다른 방향으로 걷고 있는 그 사람은 세상의 북소리가 아니라 하늘의 북소리를 듣고 사는 사람이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 벌벌 떨고 있을 때, 세상이 주눅들고 위축들고 있을 때, 하늘의 북소리를 듣고 세상사람들이 걸어가는 사람과 반대방향으로 걸어가는 사람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요 예수 그리드소의 제자인 줄로 믿는다. 왜 우리가 줄기차게 기도해야 하는가? 그것은 예수님을 의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도가 멈추면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것도 멈추게 된다. 우리 기도의 목적은 당장 문제 해결이 아니라 줄기차게 예수님을 깊이 생각할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 우리는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도 이 고통의 때에 야이로처럼 멈춰선 예수님의 발걸음이 다시 움직일 때까지 줄기차게 기도해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더욱 깊이 생각하는 힘, 더 힘차게 의지하는 힘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셋째,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야이로의 집을 향하시던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사건이 있다. 열 두 해를 혈루 증으로 고통당하는 여인으로 인하여 시간이 지체가 되었다. 한시가 급한 야이로가 얼마나 초조했겠는가? 그런데 야이로의 시선은 그녀에게서 떠날 수 없었던 것은 오직 그녀가 믿음으로 고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신의 딸도 살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자신의 딸에게 손만 얹으시면 그냥 살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기대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야이로의 집에서 비보가 왔다. 네 믿음이 구원하였다는 순간에 예수님을 가로 챈다 그러면서 상황은 종료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야이로는 간곡히 기도한다. 야이로는 선택을 하게 된다. 딸의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한다. 혈루 증 여인과는 다른 두려움이 야이로에게 왔다. 신적 경이로움에서 오늘 것이다. 호명하니 하나님의 경외로움으로 그런 두려움이 온다. 그런데 인간적인 생각이 벗어난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말씀을 듣고 야이로는 힘을 얻는다. 그의 집으로 간다. 도착하니 직업적으로 곡을 사람들이 죽었다고 리를 불면서 곡을 하고 있지만, 예수님이 소녀가 잔다고 하신다. 예수님은 그 소녀에게 가셔서 말씀으로 일으키신다. 인류 역사 속에 전대미문의 사건이 있게 된다. 처음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릴 때 요한처럼 터져 나왔던 야이로의 눈물은 기쁨과 감사가 되었고, 사랑하는 딸이 음식을 먹고 걸어 다니는 것을 볼 때 예수님이 누구신지 분명히 알고 믿게 된 것이다. 야이로의 딸이 살아난 사건은 예수님의 부활을 예표 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시에 질병과 죽음의 고통 앞에 떨고 있는 인간을 향해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이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이 무엇이며 누구를 믿고 의지해야 하는 지를 말씀을 알려주는 말씀이다. 두려움과 불안을 한 번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철학자 키에르 케고르는 불안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니 대신 올바로 불안해하는 법을 배우라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두려움, 불안 염려는 우리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도 점령하고 더 나아가 우리의 영혼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신앙과 믿음이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이 모든 것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이런 모습을 가리켜 성경은 인간의 비참함이라고 말한다. 이 인간의 비참함을 극복할 유일 한 길은 하나님을 믿는 것뿐이다. 이 인간이 비참함을 극복하는 것은 다시 하나님께도 돌아오는 길이다.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성령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 온몸을 던져 믿고 의지하고 따른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단단한 반석처럼 의지하며 반석처럼 튼튼하신 분이시기에 의지하는 것이다. 이사야 7:9절에 굳게라는 단어는 아만이다. 아멘과 같다. 너희는 하나님을 굳건히 믿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아멘이 없는 삶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의 전통은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고 의지 한다는 것이며 아멘의 믿음이며 의지이다. 코로나를 겪으면서 많은 절망과 두려움이 있다. 절망의 이 자리에서 무엇이 그렇게 일으킬 수 있는가? 절망의 그 자리에서 백신인가 아니다 오직 예수님뿐이시며,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향하여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이 고통과 절망이 점령당하지 않도록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기도해야 한다. 그래야만 단단하고 굳건하게 믿음의 자리까지 나아갈 수 있다. 우리 안에 불안과 두려움은 하나님을 믿음 안에서만이 사라지게 된다. 그 믿음으로 우리교회도 일어서고 한국교회가 일어서는 믿음으로 극복하기를 소망한다.

 

요약---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님께 자신의 딸이 죽어 가고 있음을 알렸으나, 혈루증 앓던 여인과 대화하는 도중 딸이 죽었다는 비보를 듣게 된다. 야이로는 혈루증 앓던 여인을 고치신 예수님을 보면서 분명 자신의 딸의 목숨도 시급한 사항이라 안절부절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비보를 들었으니, 아버지로서 그의 비통함은 매우 컸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셨으며, 회당장의 집에서 통곡하는 자들을 향해서도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말씀하신다. 사람들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의 딸을 말씀으로 일으키시며, 신적 권능을 다시 한 번 보이신다. 이처럼 모든 일을 바라보고 행할 때는 예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믿음이 전제돼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온전히 믿는 자들은 자신의 이성적 한계에 갇혀 예수님의 능력을 불신하는 마음부터 버려야 하며,. 오직 예수님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제자가 되기를 바라며 가르치고 있다.

 

- 우리가 예수를 깊이 생각하고, 예수님을 믿을 때, 모든 두려움의 안개가 사라지게 하시고 영 가족 모두가 아멘의 삶을 살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전하길 바라며. 믿음으로 일어나서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심을 굳게 믿어 은혜의 삶으로 인도하시길 간구하며 예배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뜨겁게 찬양하는 은혜가 넘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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