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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2020. 4. 29.)

제목: ''사람아, 아들아''

말씀: (마가복음 5:35-43)

설교자: 박유관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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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미션 --- 물 댄 동산 수요 기도회를 통해서 우리 모두에게 놀라운 따뜻한 사랑으로 축복하시길 간절히 바란다.!!!

 

만약에 이 세상에서 믿음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는 우리가 먹는 음식이 안전하다고 매일 음식을 먹는다. 버스나 지하절이 사고 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원하는 목적지까지 우리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있다. 우리가 집에 있을 때에도 내가 있는 이 집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기에 밤에 잠자리에서 잠을 잔다. 이처럼 믿음은 우리 모든 일상을 유지시켜 주는 기초가 된다. 믿음 없이는 사람이 살 수 없고, 믿음 없이 이 세상은 가능하지 않고 믿음 없이는 아무것도 서지 못한다. 우리가 그런 현실을 부분적으로 범하고 있지 않나요? 그렇고 코로나 바이러스로 일상을 무너뜨리고 있다. 모든 믿음을 흔들고 있는 것이다. 감염되지 않는다는 믿음, 감염이 되어도 나을 수 있다는 확신이 우리에게 없다. 그래서 누구도 편히 만나지 못하고 또 마음 놓고 가지 못하고 사람과 거리를 두고 살고 있다. 이런 현실을 그동안 우리가 겪으면서 중요하다고 여겼던 모든 것들은 결국 믿음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뿐만 아니라 믿음이 흔들리면 불편한 삶을 넘어서 고통이 우리들에게 찾아온다. 이 또한 우리가 경험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의 사망자가 20만명을 넘어섰다. 우리나라는 약 59만 명이나 실직을 했다고 한다. 고용절벽을 만난 것이다. 이 모든 겪는 사람들과 가족은 큰 고통과 슬픔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오늘 본문에서도 슬픔과 고통의 시간을 지내고 있는 사람이 있다. 바로 회당장야이로이다. 그의 외동딸이 죽기 직전이다. 부모라면 야이로의 심정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딸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아버지의 심정은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죽고 딸이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나아가길 결심한다. 하지만 당시 회장장으로서 예수님께 나아가가 엎드리고 간절히 구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는 일이었다. 그것을 행하고자 원한다면 대단한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먼저 당시 예수님은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의 의해서 지탄을 받고 있었다. 야이로도 회당장이었기 때문에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과 동일한 종교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야이로가 예수님께 나아온다는 것은 그의 종교적 입장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자신이 회당장이라는 사회적 지위, 체면 사람들의 시선, 수근거림의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딸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께 나와야 했다. 야이로는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께 나아와 간절히 간구했다. 이 말씀에서 주목할 3개의 동사가 있다. 와서 엎드려 구하여, 이 세 사를 살펴보겠다. 야이로는 바로 엎드려 오랜 시간 동안 간곡히 예수님께 구했다. 한 번만이 아니라 아주 오랜 시간 주님께 매달리고 매달렸다. 특히 야이로가 이렇게 예수님께의 발 앞에 엎드린 행동은 나병환자나 거라사의 광인이나 이방 여인이 취했던 그런 행동과 동일한 것이었다. 한없이 자신을 낮춘 겸손한 행동이었다. 그의 종교적 지위 사회적 신분을 고려한다면 정말 파격적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인생은 지위가 높아도 권력이 있어도 재물이 많아도 그것보다 더 큰 세력 앞에 직면할 때 얼마나 그것이 무기력한지를 깨닫게 된다. 야이로는 세상적인 관점으로 보면 대단한 사람일지 몰라도 죽음의 세력 앞에 장말 무기력하게 서 있는 연약한 피조물에 불과했다. 왜 야이로가 체면과 사회적 신분과 종교적 입장을 뒤로하고 예수님 앞에 나아와 엎드려 오래도록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이렇게 예수님께 간구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죽음 앞에 있는 딸을 구원할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질병과 가난과 죽음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을 격려하는 것을 자주 목격한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인간에게 고통을 허락하셨는가요?? 물론 죄 때문이다. 인간의 질병과 죽음의 고통이 찾아온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 자신의 대한 생각을 가장 많이 할 때가 언제인가? 그것은 인간은 고통을 당할 때 생각을 가장 많이 한다. 내 고통이 있을 때 나와 하 나님을 생각하게 된다. 인간이 당하는 고통이 알고 하나님은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인간은 고통당할 때 자신에 대해서 가장 많이 한다. 그런데 신앙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고통당할 때 나와 하나님을 생각한다. 비록 죄로 말미암아 고통이 시작 되었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겪는 고통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생각하고 하나님이 누구인지 생각하게 하신다. 욥도 그렇다. 나의 삶의 고통의 답이 있을까요? 왜 고통이 나에게 있어야 되냐고 묻는 순간에 답은 없다. 욥은 하나님을 찾는다. (욥기 42:5) 욥은 피조물이 연약하고 무지한지 낮은지를 알고, 하나님이 얼마나 높고도 위대하신 지를 깨닫는다. 전 세계 코로나 확진 자가 300만명이 넘고 사망자도 20만명이 넘었다. 아프리카가 폭발할지 모른다고 한다. 국가마다 문을 걸어 잠갔고 사람마다 직장을 잃었다. 기업들은 부도의 위기에 있다. 학생들은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있다. 일부 국가에서는 생필품이 없어지고, 부족한 마스크를 가지고 싸운 자들,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인 교회를 겨냥한 사회적 책임이 부족하다는 비난과 분노, 이 모든 것을 지켜보면서 지금 이 세계는 야이로의 딸처럼 죽음 직전에 놓인 것처럼 느낌이 든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의 극도의 두려움과 공포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현실 속에서 우리는 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코로나19로 전 지구적인 고통과 두려움 속에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무

엇을 하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것인가?

 

첫째, 예수님을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야이로는 예수님을 찾았기에 나왔기에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내려놓고 눈물로 기도했던 것이다.

그에게 찾아온 고통을 한 순간에 내려놓게 했다. 문제는 생각할수록 고통이 더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도적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나 예수님을 더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자리 바꾸기 시선 바꾸기라 여긴다. 서있는 위치가 다르면 모는 위치에 따라 달라 보인다. 도라산에 전에 효도관광으로 노인들을 모시고 간적이 있다. 도라산 젊은 봉사자들은 꽃을 보며 환호성을 쳤지만, 할아버지들은 북한 땅을 바라보셨고, 할머니들은 쑥을 캤다. 내가 서있는 자리에서 보는 지리가 현실을 바꾼다. 고통의 시선에서 예수님으로 바꾸는 것이다. 내가 서 있는 자리가 결정한다. 내가 어디에 서 있느냐가 그것이 현실을 바라보는 눈을 바꾼다는 뜻이다. 내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자아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자리로 고통에서 자리로, 고통의 시선에서 예수님의 시선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리바꿈 시선 바꿈이 있을 때 나를 진정으로 도우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라는 것을 믿게 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화목제물로 드려졌다는 사실이 우리 모두의 생각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없던 힘이 생겨나고 잃어버린 용기는 되찾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은 사람들의 마음을 두려움으로 인해 현대인들은 만성적인 고통에 산다. 전전긍긍하며 살아간다. 이 시대는 인생의 문제가 고통에 단기적인 처방이 난무하다. 일본 동경대 강상균 교수는 고민하는 힘이라 한다. 이 시대의 환경은 사람들에게 생각하는 힘을 빼앗아 간다. 그러다 보니 본질을 바라보는 삶의 테도가 부족하다. 예수님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시선으로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부족해진다. 야이로가 겪는 교통이 예수님을 생각하게 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 예수님 앞에 나오게 한 것처럼 오늘 우리가 겪는 이 어려움이 예수님을 더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이 영적인 기폭제가 되길 바란다.

둘째, 기도해야 합니다.( 이 상황 속에서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요?)

야이로에게는 심장이 절박했겠는가! 예수님이 마지막 희망이었을 것이다. 그 간절한 기도가 드디어 예수님의 발걸음이 움직이기 시작하신 것이며, 응답의 신호탄이다. 우리가 고통당할 때 기도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도 살아남기 위해 기도를 하는 것인가? 만약 이것이 고난 중에 기도해야할 이유의 타종교와 차이가 있겠는가? 그들도 그들이 믿는 신에게 자신들이 얻고자 하는 기도를 경건하게 한다. 우리가 타종교도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고자 그들도 간절히 기도한다. 우리는 야이로의 태도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예수님께 간곡히 구했다라고 말하고 있다. 야이로는 전심으로 오래도록 기도했고 줄기차게 기도했던 것이며 한 번으로 끝나기 않게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왜 우리가 세상에 휘둘리면서 살고 있는가? 예수님의 발걸음이 움직이기까지 줄기차게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사람 모두가 한 방향으로 가는데, 유독 다른 방향으로 걷고 있다면 다른 북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다. 다른 방향으로 걷고 있는 그 사람은 세상의 북소리가 아니라 하늘의 북소리를 듣고 사는 사람이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 벌벌 떨고 있을 때, 세상이 주눅들고 위축들고 있을 때, 하늘의 북소리를 듣고 세상사람들이 걸어가는 사람과 반대방향으로 걸어가는 사람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요 예수 그리드소의 제자인 줄로 믿는다. 왜 우리가 줄기차게 기도해야 하는가? 그것은 예수님을 의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도가 멈추면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것도 멈추게 된다. 우리 기도의 목적은 당장 문제 해결이 아니라 줄기차게 예수님을 깊이 생각할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 우리는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도 이 고통의 때에 야이로처럼 멈춰선 예수님의 발걸음이 다시 움직일 때까지 줄기차게 기도해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더욱 깊이 생각하는 힘, 더 힘차게 의지하는 힘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셋째,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야이로의 집을 향하시던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사건이 있다. 열 두 해를 혈루 증으로 고통당하는 여인으로 인하여 시간이 지체가 되었다. 한시가 급한 야이로가 얼마나 초조했겠는가? 그런데 야이로의 시선은 그녀에게서 떠날 수 없었던 것은 오직 그녀가 믿음으로 고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신의 딸도 살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자신의 딸에게 손만 얹으시면 그냥 살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기대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야이로의 집에서 비보가 왔다. 네 믿음이 구원하였다는 순간에 예수님을 가로 챈다 그러면서 상황은 종료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야이로는 간곡히 기도한다. 야이로는 선택을 하게 된다. 딸의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한다. 혈루 증 여인과는 다른 두려움이 야이로에게 왔다. 신적 경이로움에서 오늘 것이다. 호명하니 하나님의 경외로움으로 그런 두려움이 온다. 그런데 인간적인 생각이 벗어난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말씀을 듣고 야이로는 힘을 얻는다. 그의 집으로 간다. 도착하니 직업적으로 곡을 사람들이 죽었다고 리를 불면서 곡을 하고 있지만, 예수님이 소녀가 잔다고 하신다. 예수님은 그 소녀에게 가셔서 말씀으로 일으키신다. 인류 역사 속에 전대미문의 사건이 있게 된다. 처음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릴 때 요한처럼 터져 나왔던 야이로의 눈물은 기쁨과 감사가 되었고, 사랑하는 딸이 음식을 먹고 걸어 다니는 것을 볼 때 예수님이 누구신지 분명히 알고 믿게 된 것이다. 야이로의 딸이 살아난 사건은 예수님의 부활을 예표 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시에 질병과 죽음의 고통 앞에 떨고 있는 인간을 향해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이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이 무엇이며 누구를 믿고 의지해야 하는 지를 말씀을 알려주는 말씀이다. 두려움과 불안을 한 번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철학자 키에르 케고르는 불안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니 대신 올바로 불안해하는 법을 배우라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두려움, 불안 염려는 우리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도 점령하고 더 나아가 우리의 영혼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신앙과 믿음이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이 모든 것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이런 모습을 가리켜 성경은 인간의 비참함이라고 말한다. 이 인간의 비참함을 극복할 유일 한 길은 하나님을 믿는 것뿐이다. 이 인간이 비참함을 극복하는 것은 다시 하나님께도 돌아오는 길이다.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성령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 온몸을 던져 믿고 의지하고 따른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단단한 반석처럼 의지하며 반석처럼 튼튼하신 분이시기에 의지하는 것이다. 이사야 7:9절에 굳게라는 단어는 아만이다. 아멘과 같다. 너희는 하나님을 굳건히 믿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아멘이 없는 삶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의 전통은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고 의지 한다는 것이며 아멘의 믿음이며 의지이다. 코로나를 겪으면서 많은 절망과 두려움이 있다. 절망의 이 자리에서 무엇이 그렇게 일으킬 수 있는가? 절망의 그 자리에서 백신인가 아니다 오직 예수님뿐이시며,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향하여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이 고통과 절망이 점령당하지 않도록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기도해야 한다. 그래야만 단단하고 굳건하게 믿음의 자리까지 나아갈 수 있다. 우리 안에 불안과 두려움은 하나님을 믿음 안에서만이 사라지게 된다. 그 믿음으로 우리교회도 일어서고 한국교회가 일어서는 믿음으로 극복하기를 소망한다.

 

요약---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님께 자신의 딸이 죽어 가고 있음을 알렸으나, 혈루증 앓던 여인과 대화하는 도중 딸이 죽었다는 비보를 듣게 된다. 야이로는 혈루증 앓던 여인을 고치신 예수님을 보면서 분명 자신의 딸의 목숨도 시급한 사항이라 안절부절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비보를 들었으니, 아버지로서 그의 비통함은 매우 컸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셨으며, 회당장의 집에서 통곡하는 자들을 향해서도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말씀하신다. 사람들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의 딸을 말씀으로 일으키시며, 신적 권능을 다시 한 번 보이신다. 이처럼 모든 일을 바라보고 행할 때는 예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믿음이 전제돼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온전히 믿는 자들은 자신의 이성적 한계에 갇혀 예수님의 능력을 불신하는 마음부터 버려야 하며,. 오직 예수님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제자가 되기를 바라며 가르치고 있다.

 

- 우리가 예수를 깊이 생각하고, 예수님을 믿을 때, 모든 두려움의 안개가 사라지게 하시고 영 가족 모두가 아멘의 삶을 살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전하길 바라며. 믿음으로 일어나서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심을 굳게 믿어 은혜의 삶으로 인도하시길 간구하며 예배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뜨겁게 찬양하는 은혜가 넘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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