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2월 15일)

제목:"평신도훈련 개강예배, 사랑글로벌아카데미(SaGA) 입학감사예배“
말씀: 사도행전 7:36~38
대표기도: 김기상 장로님, 백형선 장로님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시온찬양대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
---------------------
 
*사도행전 7:36~38,
36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37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38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
 
▶귀한 입학식과 개강예배를 드림을 주님을 찬양한다. 오늘 찬양대가 ‘거룩한 성’을 너무 잘 했다. 여러분 사실 굉장히 잘 했다. 오늘 개강예배, 입학식에 왜 ‘거룩한 성’인가를 생각해보았다. 왜 거룩한 성인가! 어거스틴이 이야기 한 대로 신곡 하나님의 도성, The city of God.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가장 중요한 주님의 사역의 목표가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확산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가 펼쳐지는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에 임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거룩한 성을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특별히 이 제자훈련과 SaGA 입학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더 강하게 이루실 줄 확신한다는 마음을 찬양했다. 하나님이 영광 빋으신 줄로 믿는다.
 
저는 1988년도에 교회를 개척하면서 마음에 ‘왜 이 교회를 왜 또 세워야 하나? 주위에 교회들이 많은데 왜 또 교회를 세우고 개척해야 하나?’ 그러면서 물론 제자훈련 목회 철학을 가지고 하는데, 그걸 어떻게 이루는가? 저희 집사람과 저와 둘이서 많은 기도의 제목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 분명한 기도제목은 “주여, 마음 맞는 가족 다섯 가정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진짜 열심히 기도했다. 저보다도 집사람이 더 열심히 기도했다. 여러분들은 보통인데 저는 ‘마음 맞는 가정을 다섯 가정이 있게 해’달라고 했다. 뭐든지 중요한 것은 사명이나, 비전이나, 핵심이나 중요한 것은 같이 정렬을 하는 것이고, 같이 얼라인먼트(alignment) 하는 것이고, 같이 어세스먼트(assessment)를 해야 되는 것이다. 그래서 본래는 이 SaGA 입학식하고 제자훈련 개강예배가 따로 따로 드리는데, 올해는 같이 한 번 해보자는 마음을 같이 하게 되었다. 여러분들은 어떠한가? 여러분들도 제자훈련 개강 예배만 드리는 분들은 어떻게 이러한 것을 보겠는가? 이것은 SaGA 입학식에만 드리우는 것이다. 또 SaGA 입학식만 하는 분들은 어떻게 오늘 거룩한 성을 하는 것을 보시겠는가? 오늘 찬양대가 이런 찬양을 쉽지가 않다. 그래서 저희 교회는 남들은 주일 예배가 어떠하다 등을 말하지만 공간이 어떻고, 사랑의 교회 시스템이 어떻다. 사랑의 교회 45년의 역사는 어떻다. 이렇게 말할지 모르지만 사실 사랑의 교회 비밀병기는 사람을 키우는 것이고, 그 키우는 핵심이 뭐냐면 다락방에서 준비된 사람들을 제자훈련과 성도들이 와서 영적 교제, 변화의 산실을 경험하고 거기서 잘 준비되는 사람을 제자훈련, 또 제자훈련을 추천을 하고 또 추천된 사람이 또 사역훈련을 하고 사역훈련을 마치고 나면 말씀으로 섬기는 순장 반을 하고 순장사역을 하면서 영혼을 말씀으로 섬기게 되고 또 우리가 순장반의 말씀으로 섬기다 보니까 아! 조금 더 한 단계 올라가야 되겠다. 한국교회 전체가 다 함께 하나님 나라의 소중한 일꾼이 세워져야 되겠다는 차원의 영적 집현전이요, 영적 사관학교라고 하는 이 SaGA를 사랑 글로벌 아카데미를 하게 하신 주님을 찬양한다. 이게 다 영적인 비밀병기요, 남들은 겉으로 볼 때 평가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다락방, 제자훈련, 사역훈련, 순장 반, 사랑글로벌 아카데미, 이 모든 내용들이 저희교회의 핵심 사역이다. 그리고 핵심 사역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무장이 되어야 할 것인가? 오늘 우리는 역할 모델을 한 명 잡았다. 모세라는 인물을 역할모델로 잡았다. 사도행전 7장은 오늘 본문은 스테반이 아주 그냥 엑기스가 있는 구약 전체를 정리를 해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모세와 같은 이런 역할모델을 놓고 37절을 보면,
 
*사도행전 7:36-37,
36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37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무슨 말인가? 나와 같은 선지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모세가 미리 예표로 감당했다는 그 말이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다락방, 제자훈련, 사역훈련, 사랑글로벌 아카데미, 이 모든 내용들이 따로 따로 가는 것이 아니고 한 정렬, 얼라인먼트(alignment), 해가지고 우리가 감당을 해야 되는데, 그중에 핵심은 뭐냐면 정말 좋은 가정, 다섯 가정을 허락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과 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이 귀한 사역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워주시길 소원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쓰신다고 할 때 가슴이 벌렁벌렁 뛰는 정말 그런 기대감과 익사이팅이 넘치는 사람들을 세워주시길 원한다. 그래서 이 중요한 내용들은 계속 제가 강조할 것이다.
 
알에이토레이(R.A Torrey) 라는 신앙의 선배는 어디가든지 맨날 똑 같은 설교를 500번이나 했다. How do d I be filled with the Holly Sprit? 어떻게 하면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는가? 어느 날 이 알에이토레이(R.A Torrey)가 그날도 똑 같은 설교를 하려고 나갔는데 찬양을 인도하던 존 알렉산드라는 사람이 그걸 몇 번이나 들었기 때문에 다 외우고 있었다. 그래서 찬양을 인도하다가 너무 은혜가 많아가지고 설교자가 할 설교를 찬양 인도자가 다 해버렸다. 그래서 알에이토레이(R.A Torrey)가 큰일이 난 것이다. 잠시만 기다리라고 해놓고 설교를 좀 더 준비해서 나가겠다고 했다. 그러고 난 다음에 똑 같은 설교를 강조했다. 왜냐하면 안다고 다 아는 것이 아니다. 내 것이 되어야 주어지는 말씀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기를 원하고 다 소중하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아야 될 것이 아닌가? 오늘 이 자리에 온 성도님들은 여러분들의 생애에 가장 가슴이 뛰고 쓰릴이 넘치고 가장 익사이팅(exciting)하고 가장 여러분의 가슴을 벌렁벌렁하게 할 핵심이 뭐냐면 나 같은 사람을 하나님이 써 주신다는 것이다.
 
이번에 48기 제자훈련, 35기 사역훈련, 특별히 우리 SaGA 입학생들, 모두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다는 이 사실 앞에 가슴이 벌렁벌렁 뛰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하나님이 어떻게 쓰셨는가? 어떻게 쓰시게 되었는가? 그의 인생을 120년을 가지고 돌아볼 때에 모세는 끝까지 주님 앞에 쓰임 받았다. 누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다. 모세는 죽고 난 다음에 끝났다. 모세는 120년 죽기까지 삶은 하나도 군더더기가 없었다. 늙어서 어찌해볼까, 늙어서 노년을 어떻게 보내볼까 이런 것은 다 없고, 모세는 그냥 죽고 끝났다. 말이 좀 이상한가? 여러분, 바로 이 말이다. 우리가 늙어서 어떻게 해볼까, 남은여생을 어떻게 보내볼까 막 복잡한 것 다 두고 여러분 주님 앞에 끝까지 쓰임 받다가 죽어야 좋은 것이다. 아멘. 여기에 굉장히 중요한 것이 담겨있다. 저는 소원이 끝까지 쓰임 받다가 싹 사라지는 것이다. 어떤 이는 강단에서 말씀 전하다가 죽게 해달라고도 한다. 그러는데 강단에서 말씀 전하다가 죽으면 말씀 듣는 성도들이 심장마비 걸리니까 강단에서 내려와서 죽게해 달라고 했다.
 
오늘 우리가 이 모세의 내용을 가지고 할 때, 적어도 SaGA의 생도, 영적 집현전, 우리 제자훈련생, 사역훈련생, 정도가 되면 마음에 이런 정도를 가져야 한다. 하나님, 우리가 은퇴하고 양지 받는 뙤약볕 밑에 살다가 어찌어찌 하다가 나중에 골골해서 죽지 말고, 그냥 죽고 인생 끝나게 해달라고 해야 한다. 이 경지를 알 사람만이 알도다. 모세는 죽고 끝났다. 여기에 깊은 뜻을 말하자면,,, 죽고 끝났다. 우리도 죽고 끝나야 한다. 그러러면 세 가지가 있다. 잘 아시는 대로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모세의 머리를 훈련시키셨다.
 
*사도행전 7:22,
22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모세의 생애를 세 가지로 나누는데
1) 40년 동안 He learned something. 그가 배움을 받아 머리를 쓰임 받았다.
2) 40년 동안 몸에 훈련을 하면서 He learned his nothing. 자기 몸을 보니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3) 40년 동안 그의 마음과 그의 생각과 그의 어떤 심정이 훈련을 받아가지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아신다고 처음 something으로 알다가 자기가 nothing으로 생각하다가 마지막에는 everything이라고 그렇게 고백할 정도로 점점 성숙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성숙하니까 죽으면 끝이었다. 다시 이야기한다. 오늘 다시 이야기 한다. 중요하다. 저나 여러분들 SaGA, 제자훈련, 사역훈련생들 모두가 다 여러분들의 생이 죽으면 다 끝나는 것을 주시라고 해야 한다. 그 사이에 복잡한 것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죽으면 다 끝나게 해달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러면
첫 번째는 -오늘 7:22절처럼 말씀한 대로 모세는 40년간 애굽의 모든 지혜를 배우고 그의 하는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고 했다. 애굽의 모든 학술을 배웠다. 능통하다고 했다. 사람이 학문을 다해 능통하려면 적어도 모세는 기하학, 천문학 역사학, 수학, 논문학, 건축학, 일곱 가지 학위를 가질 정도로 당시 피라미드를 다 만들고, 애굽의 모든 수사학과 논리학, 파피루스로 쓰고 그 모든 것들, 최고의 머리를 훈련 받았다. 제자훈련 동안에 SaGA, 제자훈련, 사역훈련이 1년 만에 하나님께서 특별하신 은총을 통하여 머리가 개발되기를 바란다. 머리가 개발되는 방법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일목요연하게 구원사적이고 우리가 제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머리가 제대로 발전되는 줄로 확신한다. 하나님께 머리에 지혜를 달라고 해야 한다. 그 말씀 한 절 한절이 내 마음에 교훈되게 해달라고 늘 인 사이트 영 사이트를 해야 한다. 영감 력과 통찰력이 충만하게 해달라고 해야 한다.
 
두 번째는 -이제 애굽에서 40년 동안 머리 좋게 훈련을 했는데 결과가 살인자가 되었고 광야로 도망갔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미디안 광야에서 목자로서 온갖 종류의 몸의 훈련을 받는다. 모세 양어머니 하셉수트 공주는, 그 아버지 터트머스 1세인데 터트머스 1세가 애굽의 파라오 1세의 강력한 파라오였다. 그런데 터트머스 1세가 아들이 없었다. 그의 딸 하셉수트 공주가 실권자였다. 그러니까 모세가 하셉수트 공주의 양아들이니까 그 아들이니 얼마나 강력했겠는가? 애굽에서 모든 대우를 다 받으면서 자랐다. 그랬던 그가 미디안 광야로 쫓겨나서 거기서 늘 이야기 하지만, 광야는 일교차가 너무 심한 곳이다. 일교차가 너무 심하니까 몸의 훈련이 너무 되는 곳이다. 광야는 일천지하에 낮에는 뜨겁고 밤에는 찬 냉기이다. 광야는 온도가 보존이 안 된다. 물과 나무도 없다. 거기서 혹독(酷毒)하게 훈련을 받는 것이다.
 
저는 우리 생도들과 훈련생들에게 늘 하는 이야기가 있다. 사람은 우리 육신은 대우하면 대우할수록 더욱 버릇이 없어진다. 더 잘해달라고 요구한다. 잘해주면 더 높은 수준의 편안함을 더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정 부분, 하나님께서 이 훈련하는 기간 동안에 우리의 몸을 훈련하는데 단순히 우리가 무슨 운동선수처럼, 이렇게 머슬 대회 나가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을 가지고 –The city of God를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꿈을 가지고, 하나님의 소명을 가지고, 우리의 몸을 하나님 나라에 쓰임 받겠다는 그런 어떤 큰 가슴 떨리는 기대감을 가지고 하나님 내 몸을 관리하게 해달라고 그래서 생도들과 우리 훈련생들, 밤에 야식을 먹으면 안 될지, 될지요?? 훈련기간 동안에는 철저하게 해야 한다.
 
전에 우리 교회에 주철기 장로님이 계셨다. 주 장로님은 프랑스 대사이시고 외교안보로 청와대에 들어가셔서 얼마나 안보수석으로 얼마나 일이 너무 많았는지 모른다. 그런데 주 장로님은 몸을 어떻게 관리하시냐고 물었더니 선비같이 성실하신 분인데, 국가를 위해 사명을 위해 국가적인 사명을 위해서도 이와 같이 간절함을 가지고 자기 몸을 추스린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일 년 동안 여러분, 죽지도 말고, 아프지도 말고, 이사도 가지 말아야 한다. 제가 3년 동안에 그 어려움 가운데서 몸을 안 지키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 주위에 한 명도 없이 거의 코로나 다 걸리고 감기도 다 걸렸다. 그런데 저는 안 걸렸다. 이런 이야기 하다가 막판에 2주 동안 감기 걸렸다. ㅋ 내가 조금 눈 속에 손녀딸을 안고 5킬로를 걸었더니 감기가 걸렸다. 육신의 한계가 있다. 여러분 몸 관리해야 한다. 육체는 대우하면 대우할수록 더욱 버릇이 없어진다. 1년 동안 말씀을 통한 머리의 훈련뿐만이 아니라 몸의 훈련도 사관학교 들어갔다고 생각하시고, 운동을 안 하면 살들이 중부지방에 조금씩 모이다가 나중에는 베들레헴 산맥을 이루게 된다.
 
*고린도전서 9:27,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훈련시킬 때는 반드시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여러분, 시간과 모든 것들을 집중해서 해야 하며 지금도 저에게 부친을 전화하셔서 “오목사, 성전관리 잘 하나?”라고 하신다. 우리 몸 관리가 성전 관리이다. 1년간 잘 해야 한다. 우리는 6/1의 인생이 아니라 6배 인생을 산다. 무슨 말이냐면, 우리는 주일 날 이 안식 지켜 새 은혜 입어서 구약은 노동이후에 안식이지만, 신약은 안식이후에 노동이다. 그러니까 6분의 1, 안식일을 잘 지키고자 한다. 우리는 주일 하루를 잘 지켜서 나머지 6일을 승리하는 것이다. 나머지 6일을 제대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남들이 10년 만에 할 일을 2-3년 만에 다 해버리는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해야 한다. 그런데 아무리 머리와 몸의 훈련을 해도 이제 제일 중요한 것이다. 이 마음의 훈련이 없이는 안 된다. Head, Health를 훈련해도 Heart가 훈련이 안 되지 않으면 소위 broken heart, 깨어진 마음, 끝까지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면 우리의 마음이 깨어져서 훈련을 받아야 하는데 특별히 자아가 깨어지는 훈련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80-120세 될 때까지, 모세가 죽을 때까지, 어마 무시한 마음을 훈련시키신다. 모세는 나름대로 사람들은 자기의 믿는 구석이 있다. 아무리 부족한 사람이라도 자기는 믿는 구석이 하나 있다. 아무리 내가 부족해도 우리 주위에 나보다 부족한 사람은 한 명 더 있다고 생각한다. 늘 사람은 자기의 마음이 그러하다. 그리고 자기가 아무리 어려워도 자기는 믿는 구석이 하나 남겨둔다. 뭔가 의지할 비빌 언덕이 다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처럼 하나님이 쓰시려면 사람은 마지막 그것까지 싸그리 깨뜨리시고 훈련시키신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 40년 동안 몸의 훈련을 했다. 미디안 광야길, 가이드 투어 1인자이다. 다 하나님께서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시려 내가 갖고 있는 미디안 광야의 투어 길에 대한 지식을 하나님이 다 나름대로 갖고 있으니까 내가 사용해가지고 가면 될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자기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했는가? 광야 투어 가이드를 할 만한 모세를 어떻게 훈련을 시키시는가?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 구름기둥이 나타났다는 것은 앞으로 가라는 뜻이다. 불기둥은 제자리에 서라는 뜻이다. 어떤 날은 너무 피곤하여 가기 싫을 때가 있다. 나는 그래도 앞으로 가, 구름기둥, 어떤 날은 힘이 남았다. 힘이 남았는데 하나님은 불기둥을 딱 하나님이 주신다. 모세가 알고 있는 광야에 모든 지식을 무용지물로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실 때 반드시 그렇게 하신다. 반드시 세상에 똑똑한 사람들이 아니라, 마음이 깨어진 똑똑한 사람을 쓰신다. 기독교에 유명한 말이 있다. 서울대학 출신 가운데서 목회 제대로 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러면 제가 S대학 출신 가운데 목회 잘 하는 사람도 한 명도 없다. 서강, ,,,, 숭실,,, 서울여자 대학 성균관 성신여대, ㅋ 그냥 하는 말이 아니고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마음을 깨뜨실 때 그 마음이 와장창 깨어지는 것이 쉽지가 않다.
 
여러분 사랑글로벌 아카데미다. 제자훈련이다. 특별히 제자훈련 사역훈련은 다 마음이 깨어지는 훈련이다. 희한하게도 12명이 나와 케미가 안 맞는 사람을 갖다 놓았다. 좀 나와 스타일이 아니다. 일 년 내내 훈련을 시키는 것이다. 기가 찬 것이다. 하나님의 신묘(神妙)막측한 훈련인데 마음을 깨뜨리는 훈련이다. 모세는 오죽하면 모세가 이 백성을 제가 낳았냐고 했다. 하나님의 백성을 내가 낳았냐고 묻는다. 그런데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고 난리쳤을 때 그 마음이 깨어진 훈련을 한 모세는 하나님께서 모세가 갖고 있는 머리훈련, 몸의 훈련을 통한 그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모세가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게 하시고 그 모세의 마음을 깨뜨리셔서 그 마음이 주님 앞에 납작 엎드려져서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모세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 깨어진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이루시고 그렇게 될 때에 모세가 나중에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출애굽기 32장 30절에 보면,
 
출애굽기 32:30,
30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를 위하여 속죄가 될까 하노라 하고.
-모세가 너희가 속죄가 될까 하여는 무슨 말인가? 여기서 속죄가 되겠다는 것은 속죄물이 되겠다는 것이다. 제물이 되겠다는 것은 양이나 염소 같은 제물에 각을 뜨고 피를 흘리는 것이다. 온 몸을 불사르는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심정을 깨닫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 내 온 몸에 각을 뜨고 내가 피를 흘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살려주시라는 것이다. 이 백성을 살리는데 내가 쓰임 받게 해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정을 깨달은 것이다. 신앙생활하면서 억울한 일, 답답한 일도 당하고 이해할 일도 많고 여러분의 인생에 각을 뜨고 피를 흘려지고 수많은 어려움들이 생긴다. 그때에 비로소 마음이 깨어져서 하나님의 심정을 깨달아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깨달은 사람은 그 순간 주님께 고백하여 이 민족과 이 사람들을 위해서 속죄물이 되겠다고 주님께서 나를 사용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야말로 이런 심정을 가지고 있을 때 무한한 헌신을 할 수 있고, 무한한 섬김을 가질 수 있고 무한한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드릴 수가 있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감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적당히는 안 된다. 오늘 여러분들과 만나려고 오후에 이발하고 왔다. 평소에 머리 스타일이 다르다. 무한한 말씀을 해야 되는데 우리는 속죄가 되어야겠다고 마음의 고백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전력투구하는 무한한 헌신, 무한한 섬김, 이것이 아니고는 이 시대의 감동이 안 된다. 훈련 담당하시는 분, 목사님들, 이번에 우리 3기 사랑글로벌 아카데미, 주의 종들, 생도들, 학장, 부학장, 모든 교수진들, 우리 앞에 많은 일들이 있는데 우리 마음가짐은 무한 헌신과 섬김을 통하여 그냥 나는 그렇게 할 때에 하나님의 감동이 일어나서 하나님께서 열매를 주실 것을 믿는다.
 
결론은 그렇게 할 때에 머리와 몸과 마음을 통하여 주님의 심정을 깨닫고 시대를 향한 속죄물이 되고 어떨 때는 피도 흘리고, 어떨 때는 각도 떠야 한다. 우리나라의 진영논리 복잡함의 이것도 다른 방법이 없다. 누군가 이 시대의 심정을 깨닫고, 하나님의 나라의 심정을 깨닫고, 누군가가 무한한 헌신이 없으면 해결이 안 된다. 그럴 때 여러분과 저는 모든 것 하나하나가 의미 있도록 주님께서 만들어 주실 것이다. 찬양을 하나 하더라도 감동 있는 찬양이 될 것이며, 훈련을 하더라도 거기에 뭔가 열매와 변화가 있다면, 예를 들어 모세는 지팡이 하나라도 남들은 막대기였지만 머리와 몸과 마음의 훈련이 된 모세 같은 지팡이는 홍해를 가르는 지팡이가 된 것이다.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산에 올라가서 전쟁을 승리하도록 하는 기도의 지팡이가 된 것이다. 그냥 마른 막대기가 시대를 가르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시는, 사랑의 교회의 이런 평가하고 이런 겉으로 볼 때는 이런 이야기를 하지만 오늘 핵심은 다락방, 제자훈련, 사역훈련, 순장 반, 사랑글로벌 아카데미, 모두 다 거룩한 훈련 가운데 상승작용을 함으로 말미암아 이 시대에 쓰임 받은 거룩한 주의 종이 되기를 한 분 한 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맞춤의 은혜를 물 붓듯 주님이 허락해 주실 줄 믿는다. 여러분들이 잘 하면 거룩한 파장을 일으키시는 것이다.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이다 올해 45년 된 교회가 성도들에게도 기쁨과 축복이 되며 처음 나온 성도들에게는 도전이 되고 역할모델을 하게 되고 여러분들이 파장을 일으켜서 거룩한 공진이 되어서 진동이 일어나서 우리 교회에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가는 거룩한 공진과 놀라운 전환점이 있기를 바라며, 하나님께서 48기, 35기, 3기 사랑글로벌 아카데미, 모든 훈련생들을 축복해 주시길 소망한다.
 
♣요약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고 훈련생도로 불러주심에 감사드리며, 한 해 동안 우리 자신을 주님께 드리며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온전한 제자로 훈련되어 주님의 주제 권을 일상에서 살아내고 평신도 훈련으로서 최선을 다해 감당해서 예수님의 신실한 제자로 충성된 사명자로 종이 되어야 한다. 아프지도 죽지도 말고, 변화되어서 역할 모델이 되는 주님의 자녀로 성장하여야 한다.


-오늘 사랑글로벌 아카데미 입학식과 48기, 35기 제자 반, 사역 반 개강예배를 드리는 이 훈련생들이 주님의 심정을 깨닫는 수많은 모세들이 제2, 제3, 제4의 21세기의 모세들이 벌떼처럼 일어나기를 소원한다. 쳇GPT, AI, 4차 산업혁명, VR 수많은 복잡한 이 시대 가운데서 그 모든 것을 깨뜨려 버리고 통거할 만한 기백을 가진 신실한 주의 종들이 배출될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길 소원하며 훈련생 모두를 기억해 주셔서 훈련생과 가르치는 교역자님들과 교수진들이 일 년 동안 무사하고 안전하고 건강하고 순전하게 기쁨으로 집중하도록 전력투구할 수 있도록 환경과 처지와 일정들을 주님이 지켜 주시길 서로 기도해주고, 우리가 노년에 어떻게 살지를 고민하지 말고 우리가 죽으면 끝나는 그 정도의 집중력과 결사적인 신앙의 여정이 되어야 한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2월 8일)
제목: "은혜의식 사로잡힌 삶"
말씀: 사무엘하 5:1~5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설교자: 오규현 부목사님
ㅡㅡㅡㅡㅡ

*사무엘하 5:1~5,
1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한 골육이니이다. 
2 전에 곧 사울이 우리의 왕이 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려 출입하게 하신 분은 왕이시었고 여호와께서도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네가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3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헤브론에 이르러 왕에게 나아오매 다윗 왕이 헤브론에서 여호와 앞에 그들과 언약을 맺으매 그들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니라. 
4 다윗이 나이가 삼십 세에 왕위에 올라 사십 년 동안 다스렸으되. 
5 헤브론에서 칠 년 육 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더라.  

----------------

우리 성도님들과 서로 인사하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황금 같은 수요일 저녁 시간에 이곳 안아주심의 본당에 이렇게 앉아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인 줄 믿는다. 무엇보다 세상 사람들에게 아무리 자세하게 설명한다고 한들 그리고 아무리 힘주어서 목청껏 외친다고 한들 믿지 못하는 예수님이 믿어진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고 은혜인 줄 믿는다. ‘은혜’라고 하는 이 말은 어쩌면 교회에서 가장 자주 사용되는 말이기도 하는데, 그래서 그것을 명확하게 정의 내리기가 쉽지 않다. 보통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이해를 하고는 하는데, 교회에서는 도무지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을 일컬을 때 이 은혜라는 이 용어를 사용한다. 그런데 이 말을 좀 바꾸어서 생각해보면 결국 은혜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더 받기 위해서 우리 편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또 하나님의 사랑을 약화시킬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제가 어제 제자훈련 첫 모임을 하면서 특별히 첫 모임을 할 때 마다 내 삶에 대한 자기소개를 나누고는 하는데 자기소개를 다 나누고 나서 제가 마지막 이렇게 정의를 내렸다. ‘인격적인 하나님께서는 모두에게 똑 같은 방식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맞춤형 은혜로 오늘 이 자리까지 오게 하셨고, 우리는 우연히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攝理) 가운데 사랑의 교회 48기 제자 반으로 만나게 되었다.’고 이렇게 정의(定義)를 해서 나누었다. 
 
여러분, 오늘 이 자리 가운데 우리 하나님께서 각자 각자에게 동일한 은혜가 아닌 맞춤형 은혜로 하나님께서 주실 줄 믿는다.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결코 우연이가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다. 아무리 받을 자격이 없고 전혀 사랑할만한 모습이 보이지 않더라도, 영원 전에 우리를 선택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인줄 믿는다. 이 하나님의 은혜 또한 이렇게 성경 전체를 해석할 수 있는 중요한 주제들 중에 하나로 그렇게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다. 특별히 구약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가르친다고 한다면, 신약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이라고 우리가 생각해볼 수가 있다. 온 우주 만물과 그리고 인류를 이 땅에 존재하게 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첫 사람, 아담에게 선악과를 주심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리고 첫 사람 아담이 선악과 명령을 거역하면서 심판과 타락이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멸망하지 않고 지금도 존재하게 된 것,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들 중에 특별히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이 후손들로 한 민족을 세우신 것,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게다가 그 민족을 출애굽 하셔서 제사장 나라 삼으시고, 그리고 율법과 성막을 허락해 주심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뿐만 아니라 그 민족이 끊임없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회개하고 돌아오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결국에는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서 이방 강대국에 끌려갔지만 그들이 완전히 망하지 않고 다시 돌아오게 된 것, 그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은혜의 절정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났다. 
 
오늘 우리가 살아서 천국을 누리고, 죽어서도 천국이 보장된 것, 결국 무엇 때문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 때문인 줄로 믿는다. 이 은혜를 한마디로 요약한 구절이 있다. 예배소서 2장 8절이다. 
 
*에베소서 2:8,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나님께서는 도대체 왜 우리에게 이런 선물을 주셨는가? 그것은 우리를 구원함과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변화된 삶을 살게 하기 위함이다. 에베소서 1장 4절을 보면,
 
*에베소서 1:4,
4 곧 창 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신 궁극적인 이유가 무어라고 하시는가? 구원 받은 우리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는 구원 받을 때만 전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이 땅을 힘 있게 살아가는데도 전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삶의 시작이자 끝이고, 구원의 조건이자 삶의 원동력인 것이다. 그래서 날마다 이렇게 구해야 한다. “주여, 은혜를 주옵소서!!~, 주여, 은혜를 주옵소서!!” 날마다 우리가 삶속에서 모든 일을 해 나갈 때마다, 무슨 일을 있을 때마다 우리가 날마다 구해야 하는 제목이 “주여, 은혜를 주옵소서!!~” 바로 이 제목인 줄 믿는다. 
 
성경에서 이런 모습을 잘 보여주는 한 인물이 있다. 바로 다윗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골출신에다가 어린 목동에 불과했던 이 다윗, 그를 왕으로 부르신 것,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 다윗이 왕이 되는 모든 과정들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된다. 
 
오늘 본문에 비로써 마무리가 되게 되는 다윗이 왕이 되는 그 이야기를 살펴보면 그 핵심도 바로 이것이다. 오늘 이 이야기는 사울이 죽은 이후부터 시작된다.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는 사무엘하 2장에서 시작된다. 사무엘하 1장에는 다윗의 정적 사울이 전사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자연스럽게 다름 왕으로 다윗을 세운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울이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은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에 분위기가 매우 어수선했다. 그리고 신하들은 자신의 입지를 고수하기 위해서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지도자를 잃고 나라가 혼돈에 빠져있는 바로 이 상황에서 다윗은 내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았으니까 ‘당연이 내가 후계자이다.’ 라고 이런 고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유력한 차기 후보였던 이 다윗은 가장 무엇을 하는가? 하나님이 뜻을 묻는다. 사무엘하 2장 1절을 보면, 
 
*사무엘하 2:1,
1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아뢰되 내가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다윗이 아뢰되 어디로 가리이까 이르시되 헤브론으로 갈지니라.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이렇게 구하고 움직였을 뿐인데 놀라운 일이 벌어지게 된다. 무슨 일이냐면 유다지파 사람들이 와서 다윗을 자신들의 왕으로 세워버린 것이다. 다윗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유다지파의 왕이 된 것임을 그렇게 볼 수 있다. 이렇게 작고 사소하게 여겨지는 그 일들, 지극히 당연하다고 싶은 그런 일일지라도, 먼저 하나님께 물어보고 움직이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의 모습인줄로 믿는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다가 이런 질문을 할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 위가 구하기도 전에 있어야 할 모든 것들을 다 아신다고 하시는데, 왜? 굳이 우리로 하여금 기도를 하라고 하시는지? 그런 것 한 번쯤 생각해 보았는가? 그런데 여러분 한 편으로 생각해 보라. 만약에 기도하지 않고 우리가 뭔가를 얻었다고 한다면, 그 모든 것이 내가 잘나서, 내가 잘해서 그렇게 된 줄로 착각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본성인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너무나 지극히 당연하게 보이는 그 일일지라도 기도하면서 만약 그 응답을 얻게 되면 그 모든 것이 결국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다 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로 하여r금 필요한 것을 구하여서 얻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에 보면,
 
*요한복음 15:7,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이 자리에 앉아 계신 모든 성도님들도 날마다 모든 일에 먼저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서 그렇게 움직이고 행동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깊이 경험하는 그런 삶이되기를 부탁드린다. 다윗이 은혜로 유다지파의 사람들에 의해서 왕이 되었지만, 아직까지 반쪽짜리 그런 왕일뿐이었다. 왜냐면 나머지 11지파가 아직까지 다윗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 어떤 한 소식이 들린다. 사울의 시신(屍身)을 장사(葬事)했던 사람이 다름 아닌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라는 소식을 이제 듣게 된다. 그 순간 다윗은 무릎을 탁 치면서 ‘아,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왜 그렇게 생각했겠는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예전에 그 자신들을 위협으로부터 구해준 그 사울 왕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핵심 세력들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을 잘만 포섭(包攝)을 하면 어떻게 되는가? 나머지 지파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것은 시간문제였을 것이다. 그런데 다윗의 이러한 판단은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상황을 더욱 꼬이게 만들어버렸다. 당시 이 사울의 군 사령관이었던 아브넬이라고 하는 장군이 있었는데, 그가 그 모습을 보면서 즉시 사울의 남은 아들이었던 이스보셋을 나머지 11지파의 왕으로 세워버린다. 지금까지 한 나라였는데 그 통일왕국이 순식간에 두 동강이 나버린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다윗과 이스보셋의 그러한 갈들이 사무엘하 2장 12절부터 4장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다. 그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아브넬 장군과 이스보셋 왕 사이에 관계가 틀어진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아브넬이 화가 나서 홧김에 다윗 왕에게 사신을 보내게 된다. 그래서 사신을 보내서 자신과 언약을 맺으면 온 이스라엘을 자기가 넘기겠다고 제안을 하게 된다. 
 
여러분, 참으로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지 않은가? 그것을 받아들이면 나머지가 정말 아무런 내 노력 없이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브넬과 협상을 통해서 나머지 이스라엘 지파들과 그렇게 얻으려던 다윗의 시도가 거의 성사되게 직전에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왜냐면 다윗의 군사령관이었던 요압 장군이 동생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아브넬을 도중에 살해해버렸기 때문이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다 된 밥에 재 뿌린 것이다. 모든 것이 다 완성되기 직전이었는데 그것이 순식간에 수포로 돌아가 버리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이것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는 바가 있다. 다윗은 인간적인 협상에 통해서는 절대 왕이 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성경저자가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다윗은 이 일을 계기로 이런 사실에 더욱 깊이 깨달을 것이 분명하다. 왜냐면 다음에 이어지 사건을 보면 잘 알 수 있는데 아브넬이 살해되었다는 그 소식이 전해지자, 그 사울의 군 지휘관 두 사람이 이스보셋 왕을 살해를 해서 그 머리를 가지고 다윗에게 투항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생각해보라. 인간적으로 또 한 번 협상 할 수 있는 그러한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하지만 앞서서 아브넬의 죽음을 통해서 깊이 깨달았던 다윗은 이들을 반기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만이 나의 구원자’라고 선포하면서 두 암살자를 처형하는 단호함을 보이게 된다. 결국 이렇게 사울 가문에 속해 있던 사람들이 다 사라지게 되자, 이스라엘 나머지 지파 사람들이 다윗에게 제 발로 찾아와서 그들의 왕이 되어달라고 요청을 한 것이다. 
 
*사무엘하 5:1,
1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한 골육이니이다.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지파의 왕이 된 이후에 자그만 치 7년 6개월 만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지금까지 살펴보며 이 다윗이 왕이 되는 이야기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의식에 더욱 사로잡힐 수 있는 우리의 삶이 되어 지기를 원한다. 
 
I. 하나님의 은혜는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맡길 때만 경험할 수 있다. 
-다윗이 왕이 되는 과정에서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가? 그 주도권은 다윗 자신이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지파가 쥐고 있었다. 더 엄밀히 말하는 그들을 통해서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쥐고 계셨다. 2절에 보면, 
 
*사무엘하 5:2,
2 전에 곧 사울이 우리의 왕이 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려 출입하게 하신 분은 왕이시었고 여호와께서도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네가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
-여러분, 비록 다윗이 왕이 되는 것은 다윗 자신이었던 지혜와 능력으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다윗은 결코 이 열두 지파 이스라엘 전체 왕국의 왕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백성들도 인정한 것일 뿐만이 아니라, 이후에 보면 다윗 자신도 이것을 인정하는 것을 본다. 사무엘하 5장 12절의 말씀을 보면, 
 
*사무엘하 5:12,
12 다윗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세우 사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 나라를 높이신 것을 알았더라.
-하나님께서 자기를 왕으로 세우신 것을 다윗이 알았다고 그렇게 12절에서 언급하고 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에게 삶의 주도권을 누구에게 있는가? 우리가 꾸려나가는 가정과 자녀들의 삶, 우리들이 만나서 맺고 있는 여러 인간관계들, 그리고 직업을 가지고 일터에서 하고 있는 모든 일들, 또한 우리가 몸 된 교회에서 우리가 여러 곳에서 우리가 맡고 있는 직책들과 섬김과 여러 훈련의 과정들, 이 모든 것이 어떻게 해서 가능하게 되었는가? 우리가 억척 같이 노력하고 우리가 그 부분에 탁월하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인가?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그렇지 않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자녀를 두신 분들은 잘 아실 것이다. 우리가 주도권을 가지고 자녀들의 삶을 이끌어가려고 해 본다면, 그게 쉽게 잘 되는가? 그러면 그럴수록 자식들은 더 튕겨져 나가는 것을 봤을 것이다. 또한 단순히 우리의 힘으로 직장에서나 몸 된 교회에서 맡고 있는 그러한 일들을 내 더 악을 쓰면서 잘해내려고 그렇게 하면 할수록 그의 미치는 만족한 결과를 얻어내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을 우리는 삶 속에서 심심치 않게 경험하게 된다. 왜 그런가? 우리가 주도권을 가지고 환경을 통제해서 원하는 그 결과를 얻으려고 하면 할수록 그 속에 우리의 욕심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면 실수가 생기고 많은 오류들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의 삶속에 참된 만족과 평안함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에 주도권을 내려놓아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 아니면 내가 원치 않는 결과를 맞이하지 않기 위해서 안달복달 하는 그 모든 것들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는 비로소 다른 사람들과 환경들을 통해서 일하기 시작하실 것이다. 저는 보통 일상의 영성을 추구하는 편이다. 그런데 삶에 순간순간마다 도저히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그런 때가 찾아오면 철야기도를 한다든지, 또 산에 올라가서 기도를 한다든지, 그렇게 하면서 집중적으로 기도를 하는 어떤 나름의 영적 루틴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딱 어제 그랬다. 갑자기 몇 주 전부터 저의 허리와 목에 통증이 찾아와서 정말 오래 앉아있기 힘든 상황들을 겪으면서 어제 화요일 직장인 훈련 반 첫 모임을 가지고 또 첫 수요기도회 설교를 앞에 두고 그 중압감이 저에게 밀려오는데 도저히 저에게 사자지지 않는 두통과 그 견딜 수 없는 중압감으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집에서 교회로 출근하는 길에 청계산 표지판이 보였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방향을 틀어서 청계산 기도원으로 향했다. 산에 올라서 자리에 앉아서, 그렇게 주님 앞에 부르짖기 시작했다. ‘주여, 은혜를 주옵소서!’ 그렇게 간절히 부르짖으면서 찬양을 하기 시작하는데 얼마나 지났을까? 제 마음속에 있는 중압감이 어느 순간 사라지고 마음속에 정말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그런 평안한 마음이 제게 찾아든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 모든 것들을 감당할 힘이 생겨서 산에 내려올 수가 있었다. 그리고 나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들려온 찬양의 가사가 ‘내게로부터 눈을 주를 보기 시작할 때 주의 일을 보겠네. 그 찬양의 후렴이 그렇다. 모든 시선을 주님께 드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느낄 때 내 삶은 주의 역사가 되고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네.’ 시선이라는 가사의 찬양이다. 여러분, 혹시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아서 내려놓지 못하고 꼭 붙잡고 있는 일들이 있는가? 우리 힘을 빼고, 하나님께만 시선을 두시기를 바란다. 내가 주도권을 가지고 하는 그 모든 시선들을 내려놓기를 바란다. 그러면 그때부터 하나님이 일하시기 시작하실 것이다. 우리 삶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도록 하나님께 우리의 삶의 주도권을, 우리 가정의 주도권을, 우리 직장에서의 주도권을, 우리 모든 사역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내어드리기를 결단하는 우리 모든 영 가족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오늘 다윗이 왕이 되는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할 수 있는 두 번째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II.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 
 
.-다윗이 왕이 되는 과정에서 때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인간적인 수단을 사용하려고 했다는 것을 아까 말씀을 드렸다. 길르앗 아베스 사람들을 포섭을 하려고 했다든지, 또 아브넬과 동맹을 통해서 그렇게 왕이 되려고 했던 것들, 분명 다윗의 실수이고 잘못이다. 그런데 성경저자는 이런 다윗을 혹독하게 비판한다든지, 그의 잘못을 심각하게 지적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윗이 왕이 되는 그 과정이 더 복잡하게 얽혀지고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는 그 사실만 보여줄 뿐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어떠한가? 아브라함은 우리 믿음의 조상이라고 알고 있지만, 실제 그의 삶을 보면 믿음의 조상답지 못한 그런 삶을 살았다. 하나님께 약속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그 약속을 이루려고 그렇게 했던 그 모습들, 그리고 자기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아내를 사지로 내모는 그 모습들, 믿음의 조상답지 못한 그의 모습, 하지만 성경저자는 그 아브라함을 통해서 정말 한 민족을 이루시고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어가는 것을 창세기를 통해서 우리는 볼 수 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다윗에게는, 아브라함에게는, 비록 인간적인 연약함, 그리고 잘못이 있었지만, 다윗 자체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인물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로 택하셔서 왕으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연약함과 잘못에 대해서 반드시 징계는 하시지만 결코 그를 버리시지는 않으셨다. 마찬가지이다.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우리들을 은혜로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육신의 장막을 벗고 영화로운 존재로 서기까지 이 땅에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오직 은혜로만 대해주실 것이다. 우리가 때론 실수하고 잘못된 선택을 한다고 할지라도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를 징계하실 뿐이지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지 않으신다고 하는 사실이다. 오히려 우리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면 십자가 앞에 다 내려놓고 회개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또 다시 새롭게 우리의 삶을 인도해 가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과에 대해서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단지 끊임없이 우리의 선택과 행동의 동기가 올바른지를 돌아보는 그 일만이 필요한 것이다. 이 사실이 우리의 삶에 놀라운 자유와 평안을 가져다 줄 것이다. 이것을 잘 요약해서 정리한 구절이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로마서 8장 28절이다. 
 
*로마서 8:28,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가 안다고 했다. 무얼 안다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 우리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들, 지나왔던 모든 삶들 속에서 좋은 것, 나쁜 것, 성공과 실패, 그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는 사실이다. 말씀을 맺겠다. 최근 2주 동안 담임 목사님의 주일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삶의 엔진과 같은 기백에 대해서 우리는 도전 받고 결단을 했다. 우리가 영적을 기백을 가지고 이 한해를 힘 있게 달려 나가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일말의 찌꺼기라도 그 가라않는 찌꺼기라도 남아 있는 우리의 공로의식을 다 버리고 은혜의식의 온전히 사로잡혀야 될 줄 믿는다. 구원의 시작부터 완성에 이르는 우리의 삶의 모든 과정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그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오늘도 오직 은혜로 선택하신 이미 창세전에 우리를 은혜로 선택하신 그 하나님께서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를 오직 은혜로만 대해주시는 그 하나님께서 모든 일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믿고 감사하며 날마다 기쁨으로 순종하며 사는 우리 사랑의 교회 모든 영 가족들이 되기를 간절히 부탁드린다. 
 
♣요약
아무 자격 없는 우리를 오직 은혜로 자녀 삼아 주심에 감사하며, 우리 인생여정 가운데 여기까지 인도하여 주심도 감사함을 가지고 우리가 그간에 누려왔던 모든 길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인정하고 오직 은혜만을 구하며 우리의 삶의 주도권을 잡고 내 뜻대로 하려 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제 주님 앞에 우리의 삶의 주인으로 모셔서 친히 우리와 나를 다스려 주시길 소원해야 한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2월 1일)
제목: "승리의 시작, 마음의 할례"
말씀: 여호수아 5:2~9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부목사님)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백요셉 부목사님
ㅡㅡㅡㅡㅡㅡ

*여호수아 5:2~9,
2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3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
4 여호수아가 할례를 시행한 까닭은 이것이니 애굽에서 나온 모든 백성 중 남자 곧 모든 군사는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길에서 죽었는데. 
5 그 나온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았으나 다만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길에서 난 자는 할례를 받지 못하였음이라.
6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의 음성을 청종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맹세하사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들이 보지 못하게 하리라 하시매 애굽에서 나온 족속 곧 군사들이 다 멸절하기까지 사십 년 동안을 광야에서 헤매었더니. 
7 그들의 대를 잇게 하신 이 자손에게 여호수아가 할례를 행하였으니 길에서는 그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못하였으므로 할례 없는 자가 되었음이었더라.
8 또 그 모든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마치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 머물며 낫기를 기다릴 때에. 
9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


▶▶백 요셉 부목사님-"승리의 시작, 마음의 할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부흥보고 수요저녁예배에 오신 성도님들을 한 분 한 분 축복하며 환영한다. 오늘은 하나님만 영광 받으시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를 허락하시기를 믿는다. 오늘 말씀은 여호수아 말씀이다.
- 부부는 살다 보면 서로 닮는다는 말을 많이 들었을 것이다. 부부가 오래 살다보면 함께 웃고 함께 울기도 하고 함께 한 시간이 많기 때문에 서로 닮아가기 마련이다. 이제 눈빛만 보더라도 또 말투만 듣더라도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어떤 것을 표현하고 싶은지를 알게 되고 닮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우리들은 누구를 많이 닮았는가? 하나님과 동행하고 그분과 오래 생활을 하다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닮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우리는 심령 가운데 하나님 말씀을 늘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사모하고 따라 가야 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수요일 이 밤에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부흥보고 수요예배에 참석하신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많이 닮으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그리고 이 밤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영적 비결을 깨달아서 정말 결단하고 주님 앞에 더 가까이 가는 귀한 밤이 되기를 소원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음을 들으시고 모세를 통해 애굽에서 나오게 하셨다. 그 과정 가운데 열 가지 재앙을 경험하고, 또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인데도 하나님께 끊임없이 불순종하였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기 위해 40년 동안 광야의 길을 걷게 하셨다. 40년이란 시간이 지나자, 광야에서, 광야 1세대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다 죽고, 광야에서 태어난 젊은 2세들과 일어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된다. 출애굽 할 때는 홍해의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알려주셨다면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넘어가는 과정 가운데 요단강이 있었는데, 그 요단강은 허리춤까지 오는 가파른 물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요단강을 밟자마자 그 요단강이 멈추는 하나님의 은혜를 허락해 주셔서 요단강의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알려주셨다.
 
오늘 본문은 가나안 땅에서 처음 맞이하는 적군인 여리고 성 전투를 준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리고 성의 정확한 크기와 위치는 우리 알 수 없지만 높은 지대에 있었고, 외곽과 내각의 벽이 촘촘히 있어서 아무도 알 수 무너뜨릴 수 없는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성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알듯이 하나님께서는 여리고 성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방법으로 함락시키시기를 원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7일 동안 여리고 성을 돌라고 명령하셨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말씀에 순종하여 여리고성이 무너졌고 이것은 정말 충격적이고 쇼킹한 사건이었다. 사실 이런 스토리를 접할 때마다, 우리들도 우리들의 삶의 여리고성이 무너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여리고 성이 무너졌다.’라는 결과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여리고 성이 무너지기까지 하나님께서 어떠한 말씀을 하셨고,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청종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이왕이면 오늘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를 깨달아 우리들의 삶의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귀하고 복된 역사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힘이 있고 능력이 있음을 여러분이 믿으시길 소원한다.
 
여러분 첫 번째 곧 전투를 시작하는데, 오늘 읽었던 여호수아 5장에서 하나님께서 조금 상식 밖의 일을 요청하시는듯하게 들린다. 그것이 무엇인가? 할례이다. 여러분 할례가 무엇인지를 아는가? 할례(割禮)는 남성의 생식기(生殖器)의 포피(包皮)를 자르는 것을 말한다. 생명을 잘랐다는 뜻으로 죽음을 상징하는 행위였다.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할례는 창세기 17장에 나온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셨는데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창세기 17:7~11.
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1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행하기를 원하셨는데 그 이유는 언약의 표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맺는 언약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말씀과 또 그들을 축복하시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 대상이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맺는 이 할례를 통해서 언약의 표징을 삼과 하나님께서 원래 디자인하신 본연의 모습대로, 말씀대로, 하나님의 계획대로, 뜻대로 살아가겠다고 고백하는 상호간의 약속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시점에 많은 사람들이 할례를 통해 언약을 체결(締結)했다는 사건만을 보고 ‘나는 이제 됐구나!’ 라고 생각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을 체결하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를 요청하고 계신다. 그런데 우리가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또 언약 가운데 있는 약속을 이행 받지 못한다. 사실 이것은 굉장히 무서운 이야기이다. 그냥 단순히 축복을 덜 받고 못 받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못될 수도 있다는 표현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그리고 끊임없이 그분의 백성들을, 그분의 백성들의 어떠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어떠함을 통해서 사랑해 주시고, 오래 참아주시고, 안아주시고 인도해 주신다. 또 언약 안에 있을 수 있도록 해주셨다.
 
500년 전에 아브라함과 언약을 체결하신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으로 애굽 땅을 나왔지만, 불순종으로 광야의 길을 걷고, 광야의 1세대는 다 죽고, 이제는 할례 받지 못한 2세대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언약을 체결하자고 초청하고 계신다.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기를 원하고 너희들의 길을 축복한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래서 할례는 무엇인가? 할례는 언약의 초청이자 축복의 초청이다. 오늘 이 밤에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렇게 초청하고 계신다.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싶다. 내가 너희 길을 축복하고 싶다.” 고 초청하고 계신다. 그런데 할례는 정말 어이가 없는 일일수도 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라. 여리고 성에 전투를 앞두고 있다. 그리고 여리고 성 사람들의 입장에서 광야에서 막 나온 사람들이 이제 막 전쟁을 하려고 하는데 무엇을 하나 보니까 할례를 받는 것이다. 남들이 생각할 때에는, 어떻게 보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큰 전투를 앞두고 전술(戰術)을 짜고, 전략(戰略)을 짜고, 군사(軍士)를 훈련(訓練)하고 체력(體力)을 길러야 하고 상대방(相對方)의 실태(實態)를 조사(照査)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적군(敵軍) 앞에서 할례를 행하는 것이다. 실제로 전쟁에 참여할 남성들이 다 할례를 받고 움직일 수조차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것은 정말 어처구니없고 어이없는 상황일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선포(宣布)하신다.
 
*역대하 20:15,
15 야하시엘이 이르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전쟁은 나의 것이라는 것이다. 전쟁은 나한테 속하였으니 이제 너희들은 언약 안에 있다”고, 이제는 내가 너희를 대신해서 싸우겠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다시 한 번 언약(言約)을 체결하자고 하신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부분, 영적인 부분들의 해결을 통해서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면 외적인 부분, 눈에 보이는 문제와 어려움들은 내가 해결해 주겠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할례를 통해서 이제는 너희가 죽고, 너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나기를 원한다고 말씀하고 계시고 이 언약을 통해서 이제는 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너희들의 실제적인 주인이 되고 왕이 되어 주신다고 인도하시는 인도(引導)자가 되어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시는 것이다. 죽었다고 진짜 죽은 삶이 아니라, 이제는 우리들의 삶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셔서 생명의 강수가 넘쳐흘러 그 예수께서 전지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를 대신해서 싸워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세상 사람들 보기에는 정말 어처구니없고, 어이없고, 바보 같고 멍청한 것 같은 이 할례를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하기를 원하셨고, 심지어 적군 앞에서 행하기를 원하셨다. 왜 이것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방법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방법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도 이 할례를 원하고 계신다. 죽음을 상징(象徵)하는 이 할례(割禮)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제 우리는 죽고,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기를 원하신다. 그렇다면 2023년 2월 1일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에 할례를 어떻게 받아야 할까? 우리도 포피를 자르고 표징을 내야 될까? 아니다. 이제는 몸이 아니라, 마음 가운데 할례를 받기를 원하시고 계신다. 신명기와 골로새서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신명기 30:6,
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골로새서 2:11,
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이제는 몸이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받기를 부탁하고 계신다. “성경을 읽고 교회에 열심히 나오면 되는데, 꼭 이렇게 할례를 받아야 됩니까?” 라고 질문하실 수 있지만 대답은 “꼭 받으셔야 합니다.” 할례는 언약의 표준이고 할례가 없으면 하나님과의 언약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냥 단순이 믿고 신앙생활 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나의 자아, 정욕, 욕심, 죄들을 십자가에 다 못 박고 이제는 내가 육에 속한 것이 아니라,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이제는 영에 속한 사람임을 씩씩하게 고백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무슨 말이냐면 우리의 삶에 여리고성이 나타나면 우리는 무엇을 가장 먼저 하는가?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넘어 트리냐? 라고 전략을 짜고, 우리들의 생각과 계획을 정말 인맥을 동원해서 그것을 고심하고 고민한다. 물론 그리고 기도한다. 그리고 어떻게 기도하는가? “하나님, 내 자아와 고집과 아집이 다 여기 있는데, 하나님, 내가 세운 계획은 여기 다 있는데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나님이 밀어주시면 저 여리고성 쓰러질 수 있습니다. 쓰러트릴 수 있습니다.” 라고 우리는 기도한다.
 
하지만 우리는 문제에 치중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전쟁은 나에게 속하였으니 나한테 와라, 나를 신뢰하라. 나한테 너희들의 믿음을 보여주어라.”라고 요청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사람은 내면의 싸움, 영적인 싸움을 하면서 외적인 것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이라고 믿고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면 가고, 서라하시면 서고, 앉으라고 하시면 앉고, 누우라고 하시면 눕고, 일어서라 하시면 일어설 준비가 되어 있어야 된다고 본다. 그래서 오늘은 동일하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마음의 할례를 부탁하고 계신다. 이제는 정말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삶, 우리들의 생각과 방법과 우리들의 능력으로 행하는 삶이 아니라, 이제는 우리 가운데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삶, 언약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삶을 요청하고 계신다. 라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하면 마음의 할례를 받을 수 있을지에 두 가지를 가지고 나누겠다.
 
I. 회개(悔改).

-여러분, 회개할 때, 어떻게 하는가? 그냥 기도하면서 마음이 불편했던 것, 생각해 보면서 실수했던 것, 어떻게 보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감정적으로 도덕적으로 우리가 넘어졌던 부분을 기도하지는 않는가? 여러분, 그것도 회개(悔改) 맞다. 그것도 맞지만 회개라는 것은 내 입장에서 내가 생각나고 내가 잘못된 것들만이 기도하고 중요한 용서를 구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하지 않은 것을 내려놓는 것이 진정한 회개이다. 여러분 회개는 물론 내가 저질렀던 것, 실수했던 것, 연약했던 부분들, 내 감정적으로 도덕적으로 부족한 부분들, 주님 앞에 내려놓은 것은 맞다. 그런데 진정한 회개는 내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 입장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지 않는 것들을 내려놓는 것이 회개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옆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 사람이 답답해, 왜 저렇게 살지?’ 라고 속으로 욕하는 부분들도 있다. 예를 들어서 지금 ‘백요셉 목사님 왜 눈이 저렇게 적어, 키는 왜 그리 큰 거야!’ 라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발음이 왜 저렇게 자꾸 꼬이는 거야’라고 이렇게 하는 속으로 하는 것도 다 회개해야 된다. ㅋㅋㅋ 농담이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관계적으로 지은 죄들, 속으로 지은 죄도 회개해야 되지만 여러분, 한 번 이렇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여러분, 우리가 잘 되었을 때, 감사의 조건이 넘쳤을 때, 우리가 했던 행동과 표정을 혹시 다른 사람들이 듣고, 다른 사람들이 관계를 맺으면서 혹시 상처를 받았다면, 혹시 나의 모습 때문에 내가 잘못되고 죄 짓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혹시 내가 보편적으로 살아가는 행동들이 하나님께서 보시고 마음에 드시지 않았다면, 여러분 회개해야 되지 않는가? 내가 감사할 때도, 내가 즐거울 때도, 내가 그 어떠한 때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지 않았다면 여러분, 회개해야 한다.
 
여러분, 디모데후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그릇이 있다고 하신다. 큰 집에는 금 그릇도 있고 은그릇도 있고, 나무 그릇도 있고, 질그릇도 있는데, 하나님께서 뭐라고 표현 하셨냐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그릇은 깨끗한 그릇이라고 말씀하신다. 여러분 믿는가?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마음의 할례 중에 이 회개라는 부분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러분 내가 생각나지 않더라고 기도해야 한다. “성령 하나님 이 밤에 오늘 이 시간에 주님 앞에 제가 회개합니다. 주님, 깨끗한 그릇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하기 때문에 성령 하나님, 생각나는 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행동이나, 원치 않는 표현을 했다면, “주여 이 시간에 생각나게 하셔서 이 입술로 회개하게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 기도의 영을 부어주셔서 주님 앞에 무릎 꿇어 주님의 은혜를 구할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시옵소서.” 라고 나아가야 된다는 것이다. 여러분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는 주님 앞에 나아와 은혜를 구하는 자에게는 분명히 베풀만한 은혜를 허락해 주실 것을 믿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깨끗한 그릇이 되어 주님 앞에 쓰임 받는 평생이 되기를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원한다.
 
II. 자기부인.

-자기 부인은 정말 어려운 부분이다. 보통 우리들이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는 우리들의 삶과 나의 삶과 생각을 정해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입하기 쉽다 제가 예를 들어보면 “내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하시는가? 정말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겠다고 결심하는가? 아니면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 표현이 너무 조금 강하셔, 너무 극단적이셔, 그냥 요즘 표현대로 “네 이웃을 자상하게 해라, 따뜻하게 해라, 상냥하게 해라, 손 한 번 잡아주어라.”라고 표현하시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표현하신 것은 여러분, 우리가 우리들의 생각과 기준이, 생각대로 기준을 내려놓기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입하려고 하면은 자꾸 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표현은 그냥 조금 극단적인 표현, 패션, 너무나도 다른 표현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몸소 실천하신 표현이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너희가 작은 예수가 되어서 그 명령을 실행하기를 원한다고 하셨다. 우리가 지키지 못하는 이유는 내용이 오래되어서가 아니라, 내 생각과 내 기준을 내려놓지 못해서이다. 그러기에 자기부인은 내 생각과 내 기준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기준이 우리들의 삶에 우선으로 삼고 나의 것을 내려놓는 일을 이야기 한다. 물론 아프다. 물론 고통스럽다. 괴롭다. 어떨 때는 이렇게 사는 것이 맞을까? 라고 생각도 든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모든 믿음의 선조들은 이 자기부인의 시간을 거쳤다.
 
여러분, 야곱을 기억하시는가?
*야곱- 평생 자기 생각, 자기의 방법, 자기의 꾀로 살아가다가 얍복 강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와 씨름해서 자기부인의 시간을 가지고 온전히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다.

또 다윗은 어떠한가?
*다윗- 승승장구한 평생의 삶을 살았지만 자기욕정, 욕망에 못 이겨 범죄하고 난 뒤에 하나님 앞에서 씨름해서 “하나님께서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도와주시옵소서. 나를 떠나지 마옵소서.”라고 고백하며 자기부인의 시간을 가진 이후에 하나님의 평생친구가 되는 삶을 살았다.

또 요나는 어떠한가?
*요나- 하나님 뜻과 자신의 뜻이 틀리다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도망갔지만 칠 흙 같은 어둠 가운데 그 물고기 뱃속에서 다시 한 번 주님 앞에 돌이키고 자기부인으로 주님 앞에 쓰임 받았다.

또 사울은 어떠한가?

*사울- 자기 의가 넘쳐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던 그 사울이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 이후에 평생 자기부인하면서 살아가는 삶을 살았다. 다른 사람, 다른 이야기 할 것 없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사셨는가? 여러분, 3년의 공생애가 끝난 이후에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직전에 “하나님, 너무 힘듭니다. 라고 기도하시면서 내 잔을 옮겨주시옵소서.”라고 하셨지만 결국에는 십자가를 지시고 자기부인을 하시며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저희들에게 나타나셨다.
 
여러분, 이 믿음의 선조들이 대충대충 기도하면서 “하나님, 도와주세요. 아니면 말구요.” 라고 이렇게 기도했는가? 아니다. 이들은 정말 땀방울이 핏 방울이 될 때까지 자기의 뜻을 내려놓고 자기부인의 시간을 가졌다. 다리를 절며 평생을 살 때까지 그렇게 될 때까지 하나님께 씨름하면서 자기의 것을 내려놓은 시간을 가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과 씨름하여 나를 내려놓은 시간은 마음의 할례를 갖는 시간이다. 이제는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죽고 이제는 예수님 마음대로 사용해 달라고 고백하는 시간이다. 분명한 것은 이 과정은 너무나도 고통스럽고 아프지만 하나님께서 내 삶 가운데 역사하신다면
나의 살은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삶, 내 삶은 가장 영광스런 삶, 나의 삶은 가장 능력이 풍성한 삶, 권능이 있는 삶, 가장 아름다운 열매 맺게 하시는 삶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이심을 여러분은 기억했으면 좋겠다.
 
여러분, 누가 할례를 받고 싶어 하겠는가? 누가 예수님께서 지셨던 십자가를 지고 싶겠는가? 누가 몸에 칼을 대고, 피를 흘리고 싶겠는가?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받기를 원하신다. 내 자녀답게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이제 그렇게 살아서 하나님께서 온전히 역사하시는 삶, 이제는 정말 축복의 통로, 언약의 통로로 세상 가운데 우리가 그렇게 살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여러분, 포피를 자르고, 피나는 시간은 죽을 것 같이 아프고, 고통스런 시간일지 모르지만 가장 완벽하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시간임을 믿으시길 소원한다. 오직 그 시간만이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명료하고, 명확하게 기억하고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며, 이제는 내가 아니라, 내 안에 하나님께서 사시는 시간임을 여러분은 기억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말씀을 마무리 하겠다.
여러분 할례를 받으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 5장 마지막 절에 여리고 성을 다가가기 전에 이렇게 고백하신다.
 
*여호수아 5:15,
15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내가 선 땅은 거룩하니 신을 벗으라고 이야기 하신다. 여러분 이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에 더러운 것이 있을 수 없다. 라고 말씀하시며 내려놓으라고, 이제는 깨끗해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또 다른 의미는 우리가 우리의 신발을 신고는 우리 뜻대로, 우리 멋대로 가고 싶은 곳 가고,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삶 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신발을 벗고 이제는 하나님께서 안아주신다는 것이다. 이제는 신발을 벗고, 하나님께서 업어주셔서 이제는 네가 가는 곳을 같이 가주신다고 하신다. ‘네가 움직이고 네가 행하는 것, 같이 함께 해주시겠다.’ 라고 하나님께서 도전하고 부탁하고 계신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의 인생 가운데, 우리들의 삶 가운데, 직면하고 있는 우리들의 삶의 여리고성은 무엇인가? 그것이 건강인가? 재정인가? 그것이 가정인가? 그것이 가족인가? 그것이 관계인가? 신앙의 문제인가? 신앙의 문제인가? 마음의 두려움인가?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 밤에 우리들에게 도전하고 계신다. “전쟁은 나에게 속하였으니, 이제는 내려놓고 이제는 너희들은 죽고 예수로 사는 너희의 삶이되기를 바란다.” 이제는 이 전쟁 가운데는 우리가 할 것은 마음의 할례이고 우리가 해야 될 것은 우리들의 자아를 죽이고 우리들의 모습과 정욕과 우리들의 죄를 죽이고 이제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파트를 기다리며 기대하며 소망하며 손을 들고 이제는 나의 신을 벗고 주님과 동행하는 시간을 기대하라고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신다. 소원하고 바라기는 우리들의 삶 가운데 마음의 할례는 고통스럽지만 우리가 마음의 할례를 통해서 우리의 평생 가운데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다. 하나님께서 나의 여리고 성을 무너트려주셨다. 라고 간증하고 고백하고 자랑하고 다른 이들에게 나눌 수 있는 평생이 되기를 축원한다.
 
♣요약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으니 이 시간에 나의 마음을 주님께 맡기며, 이제는 내 생각, 내 계획, 내 방법대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이제는 이 여리고 성을 주님께 맡기고, 영적인 부분과 내면적인 부문과 관계를 정리하여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서 이제는 전쟁은 하나님께만 속하였다는 것을 고백하는 삶이되기를 기도해야 한다. 마음의 할례를 받아서 오직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고 회복하여 주의 백성답게 살아가야 한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1월 25일)
제목: "광야를 장막으로 바꾸시는 은혜"
말씀: 출애굽기 13:17-22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사회: 문진호 부목사님

설교자: 설성환 부목사님
-------------

 출애굽기 13:17-22,
17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18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대열을 지어 나올 때에. 
19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더라.
20 그들이 숙곳을 떠나서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21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22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우리가 운전을 하게 되면 우리의 길을 안내 해 주는 네비게이션이 있다. 네비게이션은 우리가 길을 안내 받게 되면 때로는 평소에 다니지 않았던 생소한 그러한 길을 안내하는 경험을 종종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생소한 길로 우리를 안내하게 되었을 때, 그 네비게이션에 따르지 않고 내가 평소에 가던 길을 고집하면서 그렇게 가고자 할 때가 우리 가운데 분명하게 있다. 그렇게 내 고집대로 내가 지금까지 운전했었든 길로 우리가 가게 될 때, 어떠한 경험들을 했는가? 제 개인적으로는 내가 익숙한 대로 그 네비게이션을 따르지 않고 갔더니 어김없이 공사 현장이 나온다든가 때로는 접촉 사고로 인하여 차량이 상당히 막혀져 있는 그런 상황이 놓여 져 있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의 길을 안내해주는 이 네비게이션은 도로의 상황과 도로의 환경들과 여러 가지 데이터를 취합해서 그렇게 안내자 역할을 보게 된다. 내가 생각하기에 더 편하게 갈 수 있는 길로, 더 쉬운 길로 이 네비게션이 안내를 해주지 않게 되면 때로는 어떤 생각이 들게 되는가?


여러분, 우리는 그 마음 가운데 그 네비의 말을 듣기보다는 그냥 내가 운전했던 길로, 내가 익숙한 대로, 이렇게 운전하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들의 모습일 때가 더 많다. 이와 비슷하게도 오늘 본문 말씀에도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나오게 하시고 약속의 땅, 그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때, 더 편한 길, 그 지름길로 인도하셨던 것이 아니라, 결코 예상할 수 없었던 그 홍해의 광야의 길로 돌려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고 계시는 모습을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현실적인 상황을 봤을 때, 눈앞에 보이는 그 바닷길을 따라가는 것이 어찌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좋은 길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 길이 오늘 본문 말씀의 17절에 말씀하고 있는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이었다.


* 출애굽기 13:17,
17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이 길은 상업도로였다. 가는 길이 험하지 않고 잘 닦여진 그러한 길이었다. 그래서 대략 빠르게 걸으면 5일정도 소요가 되기도 하고 조금 천천히 이렇게 걷는다고 할지라고 대략 7일 정도의 소요가 걸린다고 한다. 그러한 짧은 지름길이었다고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했을 때, 이 지름길은 어떠한 길로 보였을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러한 길이다. 라고 분명히 생각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러한 길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왜 그러한가? 하나님께서 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라고 말씀하신 그 가나안 땅으로 최대한 빨리 갈 수 있는 길이 어디인가? 바로 이 지름길이었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기대와는 다르게 본문 말씀에서는 이렇게 17절에 말씀하고 있다.


* 출애굽기 13:17,
17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하나님께서는 왜 그렇게 그 지름길로 인도하지 않으신 것인가? 누가 보더라도 이 지름길로 가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가나안 땅으로 빨리 들어갈 수 있는 그러한 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길로 인도하지 않고 왜 광야 길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인도하셨던 것인가? 마치 네이게이션이 도로의 상황을 다 파악하고 막히는 길로 인도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상황과 모든 형편을 아시는 그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지름길로 인도하지 않으셨다. 라고 말씀하고 있다. 저와 여러분들은 이 시점에서 광야를 장막으로 바꾸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서 첫 번째로 주목해야 할 것을 발견할 수 있다.


I. 하나님의 인도하신대로 순종해야 한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애굽에서 탈출하고 난 후에 그들 스스로 길을 정하여 갈 수 있는 선택권이 있었다면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코 그 광야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선택권이 있었다면 그들은 광야의 길을 선택하지 않고, 당장 누가 보더라도 가기 편한 길, 가기 평탄해 보이는 그 지름길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발걸음을 옮겼을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 빨리 가는 것을 선택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선택하고 나아갈 수 있는 그 선택권이 없었던 것이 오히려 은혜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때로는 저와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우리의 선택권이 없는 것이 오히려 더 은혜의 순간인줄로 믿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내 뜻으로 내 경험으로 내 생각으로 그 길을 선택했다면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길로 가지 않을 확률이 더 높았을 것이다. 우리의 본능이 그렇다. 더 좋은 길, 더 편한 길로 가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연약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저는 목회자 자녀로 소위 PK로 태어났다. 부모님께서 교회를 개척하셨기 때문에 실제로 교회는 저의 집이었고, 저의 놀이터였다. 저는 살면서 이 교회를 빼놓고는 절대로 저의 삶을 논할 수 없을 정도로 교회는 저에게 특별한 그런 장소였다. pk로서 어렸을 때부터 목회자에 준하는 그러한 신앙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예배에 빠짐없이 필수적으로,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하는 것이 저의 가정의 모습이었다. 사실 복음을 완전히 깨닫기 전의 저의 모습은 모든 예배를 빠지지 않고 드리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었다. 특별히 주일 날 낮 예배드리고, 청소년부서 예배를 드리고, 저녁예배를 드리고, 심지어 부흥 예배가 있는 날이면 예배를 네 번이나 드렸다. 그렇기 때문에 저의 마음 가운데 만약에 선택할 수 있다면 예배를 이렇게 많이 드리지 않았을 텐데, 라는 그러한 부끄러운 마음이 그때 저의 마음이 들었었다. 예배를 자율적으로 드릴 수 있는 선택권을 부모님이 저에게 주셨을까? 절대로 주시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이 복음의 능력을 완전하게 깨닫고 난 저의 모습은 목회자 자녀로서 이 예배에 드릴 수 있는 그 환경이 너무나도 은혜였다는 것을, 너무나도 감사의 조건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 적이 있었다. 우리가 선택권이 있는 선택권이 없어서 심지어 억지로 하는 것이어도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대로 순종하게 될 때,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줄로 믿는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저와 여러분들의 삶의 현장 가운데서 그 어떠한 선택권 없이 하나님이 전적인 인도하심을 받아 우리가 전진하며 나아갈 때에 광야와도 같은 그 장소에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놀라운 은혜가 우리의 삶 가운데 있게 될 줄 믿는다.


* 출애굽기 13:17-18,
17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18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대열을 지어 나올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아갈 길을 선택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름길이 아닌 그 광야 길로 인도해 주셨기 때문에 그 광야를 장막으로 바꾸시는 그러한 은혜를 맛볼 수 있었다는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이 그 광야 길로 인도해 주시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은혜를, 그 기적을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다 지름길이 아닌 홍해 광야 길로 인도하셨을 때에는 그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과 목적이 있으셨다. 오늘 본문 말씀 17절에 보면,


* 출애굽기 13:17,
17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하나님께서 그 길로 인도하시지 않은 이유가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라고 말씀하시고 계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지름길로 가게 되면 어떻게 된다고 말하는가? 어쩔 수 없이 전쟁을 하게 될 텐데, 애굽 땅에서 힘겹게 탈출해서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그런 전쟁을 하게 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명히 마음을 돌이켜서 애굽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않았다. 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간다.’ 라는 이 말씀에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시금 노예(奴隸)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인도함을 받는 그러한 인생이 아니라 애굽에서 종살이 했던 그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것을 영적인 의미로 보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그런 인생에 머무르지 않고, 죄의 종노릇하며 살던 그런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애굽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광야 길로 인도하셨다는 것은 고난의 길처럼 보이는 그 험난하고 그 힘든 광야의 길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시더라도 죄의 노예로는 결단코 다시금 돌아가지 않도록 하겠다는 그 하나님의 선한 마음이 담겨있다. 라는 사실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 애굽의 노예, 그 죄의 노예로 사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원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지 않은 우리의 눈에 좋아 보이는, 빠르게 갈 수 있어 보이는 길은 결코 주님께로 가까이 가는 길이 아니라 결국 과거의 애굽으로, 다시 죄의 노예 상태로 돌아가게 만드는 그런 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저와 여러분이 분명하게 기억하길 소원한다. 신명기 8장 2절 말씀을 보면,


*신명기 8:2,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지름길로 인도하지 않으신 것에 대해서 넓은 의미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그 광야 길로 인도하셨다고 하시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추시며 시험하시려고 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추셨다는 것은 그들을 겸손(謙遜)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또한 시험(試驗)하셨다는 것은 훈련(訓練)의 시간을 의미하고 있다. 40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그 광야의 삶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선택들을 내려놓고 전적으로 주님만을 의지하고 주님을 붙들게 되는 그러한 훈련의 시간이었다는 사실이다. 주님만을 의지하는 이 훈련의 과정들을 통하여서 내 주장과 내 생각은 철저히 낮아짐은 통하여서 겸손하게 되고 주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따르는 그런 겸손함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시간들을 통하여서 이 40년이란 광야의 시간들을 통하여서 배우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비록 우리들의 상황과 환경이 끝까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광야와도 상황이 우리의 현장 가운데 펼쳐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곳으로 인도하셨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그곳에서 망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광야와도 같은 그 상황과 그 환경에서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게 하시고 하나님과 우리의 영적인 추억으로 가득한 그러한 추억의 장소로, 그러한 은혜의 장소로, 그 광야의 자리를 만들어 가실 줄로 믿는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저와 여러분이 붙들어야 할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대한 전적인 신뢰이다.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그 신뢰와 그 믿음 가운데 우리가 있을 때, 그 광야를 장막으로 보게 되고 험난하고 어려움으로 가득한 그 광야를 하나님이 인도하심으로 가득한 은혜의 장소로 고백하게 되는 놀라운 믿음의 고백이 우리들의 삶의 현장 가운데 경험되고 고백되어지고 회복되어 질 줄로 믿는다. 광야를 장막으로 바꾸시는 그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II.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늘 경험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 우리는 그 모습을 오늘 본문 말씀 21-2절 말씀에서 확인하자.

*출애굽기 13:21-22,
21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을 그들에게 비추 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22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하나님께서는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매순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결코 떠나지 않으시고 그들과 함께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한 순간도 1분 1초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혼자 버려두지 않으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던 그런 홍해 길을 만났을 때에도 그 광야 길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그 막혀버린 바닷길이 갈라지게 되었고, 그 막다른 길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명의 길이 되었고, 구원의 길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 있다. 하나님께서 지금 이 순간 여러분들 각자에게 허락하신 그 바닷길은 무엇인가? 그 광야의 길은 무엇인가? 그 바닷길은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서 막막해 보이지만 결국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기적을 경험하는 자리가 될 줄 믿는다. 저와 여러분이 마주하게 될 막혀버린 것 같은 그 홍해 바닷길은, 그 광야의 자리는 우리가 주님을 더욱 더 간절하게 찾아야 되는 그러한 자리인 줄 믿는다. 사방이 막혀버린 것 같은 그런 환경 가운데서 오히려 그 상황이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가 되고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는 그러한 시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저와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되기를 소원한다. 인간적인 눈으로 이 광야를 보게 되면 광야라는 공간은 수시로 야생동물을 만나게 되는 너무도 위험한 공간이다. 의식주의 문제가 해결될 수 없는 그런 정착되지 못한 그런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어려운 상황일 수밖에 없다. 인간적인 눈으로 이 광야라는 공간을 보게 되면 절대로 우리들이 머물면 안 되는 그런 공간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믿음으로 눈으로 그 광야를 보게 되었을 때, 오히려 그 광야가 위험한 곳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 광야가 사람이 정착하여 살 수 없는 그런 환경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과 함께 해야만 하는 그러한 장소가 되게 된다는 사실이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광야를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로 해석되는 그런 믿음의 눈이 날마다 경험되어지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광야로 해석되는 히브리어 단어는 ‘미드바르’ 히브리어 단어이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되어지는 히브리어 단어는 ‘다바르’ 단어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지성소로 해석되고 있는 히브리어 단어는 ‘드비르’ 단어이다. 광야와 또 하나님의 말씀, 또 지성소라고 해석되어지고 있는 이 세 가지 히브리어 단어의 어근이 모두 같다라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을 통하여서 영적으로 깨달음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 동안 살게 하신 광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신 그런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는 장소였고, 하나님을 만나는 지성소와 같은 장소였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아니 하나님께서 광야라는 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시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주하고 있는 그 홍해 바다로 막혀버린 그 광야 길은 애굽 군대에 의해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무덤이 되었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머물렀던 그 광야는 먹을 음식을 찾지 못해 굶어죽거나 마실 물이 없어서 목말라 죽을 수밖에 없는 죽음의 장소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부재는 아무리 좋은 환경도 죽음의 광야로 만들게 될 수밖에 없다. 반대로 아무리 열악한 광야의 환경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자리 가운데 함께 하시면 생명의 샘으로 바뀌어 지고 구원의 방주로 바뀌어 지게 되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될 줄로 믿는다. 시편 4편 8절 말씀을 보면

*시편 4:8,
8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다윗의 평생의 삶에서 그의 고백은 어떠한 고백인가? 나를 안전하게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하나님 밖에 없다. 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다윗이 이 시를 썼을 때가 언제인지를 우리는 주목해 보아야 한다. 이 순간은 바로 다윗의 셋째 아들이었던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서 이 아버지를 죽이려고 쫓아오고 있는 그 때에 다윗이 자신의 아들의 반란으로부터 도망가면서 이 시가, 이 고백이 바로 이 하나님을 향한 이 고백이었다. 다윗이 지금 마주 하고 있는 그 상황은 누가 봐도 암울해 보이는 상황이다. 누가 보더라도 절대로 안전해 보이지 않는 그러한 환경이다. 인간적인 눈으로 수백 번 보아도 다윗은 현재 상황은 절대로 안전하게 볼 수 없는 그러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윗의 고백은 무엇인가? 하나님 안에 있을 때, 내가 안전하다는 것이다. 자신의 친 아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쫓아오는 그때에 다윗은 자신을 안전하게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는 것을, 이 놀라운 고백을 주님 앞에 올려드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윗의 그 고백처럼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구원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모드 어려움 가운데서 안전한 길로 인도하시는 분도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의 입술로 날마다 고백하게 될 때, 다윗이 경험했던 그 진정한 평안, 그 진정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저와 여러분의 삶의 현장 가운데서 경험하게 될 줄로 믿는다.


사람은 편한 길, 그리고 빠른 길을 선택해서 가려고 하는 것이 어찌 보면 본능적인 모습일 것이다. 왜 그러한가? 편한 길과 빠른 길이 우리들의 인생 가운데서 가장 좋은 길이다. 라고 본능적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편한 길로만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우리들에게 편한 길이 아닌 불편한 길로, 때로는 울퉁불퉁한 그러한 길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실 때가 있다. 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선하신 그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이 우리에게는 가장 좋은 길이라는 그 믿음으로 그분을 신뢰함으로 그분을 따라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현장 가운데 늘 베풀어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할 줄로 믿는다. 어떻게 하면 내가 빨리 갈 수 있고, 성공하는 길로만 갈 수 있을까? 내가 가야될 길에 상태와 그러한 길이를 보는 그러한 인생이 아니라 나의 길을 인도하시는 분이 누구이신지, 내가 함께 하시는 분이 누구이신지, 그 질문을 날마다 내 삶 가운데 되새겨 보면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고 우리의 길 위에서 함께 하시는 그 하나님을 끝까지 붙잡고 의지하며 나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요약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맡겨진 그 값진 삶을 하나님의 자녀답게 온전히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 말씀이 우리의 삶에서 실재가 되므로 예수님의 흔적을 드러내어 살며, 어떠한 선택권도 없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은혜임을 깨달아서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는 믿음의 선택을 하며 광야와도 같은 인생의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끝까지 보호해 주시고 버리시지 않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야 할 길을 선택하셨다. 하나님은 그들의 인도자이셨다. 직접적으로는 모세가 그들을 지휘하였지만 그는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그대로를 지시하였던 것이다.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가는 데에는 두 가지의 길이 있었다. 하나는 애굽 북부에서 가나안의 남쪽을 향해 가는 지름길로서 아마도 4,5일 정도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다. 다른 하나의 길은 광야를 통해서 가는 훨씬 먼 길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인 이스라엘 자손들을 인도하실 때 바로 이 길을 선택하셨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실 때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않으셨다. 이런 인도 방법은 사막을 행진할 때 꼭 갖추어야 할 조건이다. 즉 하나님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자기 백성을 돌보시며, 어려울 때마다 힘이 되어주시고, 슬플 때 위로해 주시며, 기쁠 때 함께 기뻐해 주신 것이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1월 18일)
제목: "일상, 하나님의 나라!"
말씀: 미테복음 4:1-10
찬양인도: 쉐키나(이 디니엘 부목사님)
사회: 문진호 부목사님

설교자: 빅인기 부목사님(목양 3팀장, 중보기도사역부)

------------------------------------------------------

미테복음 4:1-10,
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시험을 본다. 학창시절 중간고사 기말고사 뿐만이 아니라 수능도 있다. 또한 학교를 졸업하고 난 다음에 직장에 취업하기 위하여 취업시험도 보고 직장에서 진급 시험도 본다. 그뿐이 아니라 어떤 자격증을 갖기 위하여 자격증 시험, 운전면허 시험도 본다. 이런 시험들은 우리를 기쁘게도 하지만 어떨 때는 심각한 좌절 가운데 빠지게 하기도 한다. 저는 운전면허 시험에 떨어져서 좌절에 빠졌다. 무려 8번이나 떨어졌다. 학원비 아껴보려고 친구한테 그냥 한 번씩 배우고, 한 번씩 운전해 보고 시험을 쳤는데, 나중에는 시험 치는 비용이 운전학원 비용보다 훨씬 더 많이 나왔다. 여덟 번 떨어지고 난 다음에 아홉 번째에 붙었는데 너무 기뻤다. 20년 동안 무사고로 운전하고 있는데, 한 번씩 도로에 운전하며 운전연습 차량들을 보면 짠한 동질감을 참 많이 느끼곤 한다. 시험은 우리를 절망에 빠지게도 하고 우리를 기쁘게 하기도 한다. 이런 시험은 학교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도 동일한 여러 시험들이 있다.
 
베드로는 그의 서신 서에서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찾아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라고 말씀한다. 성도들을 시험에 빠뜨리기 위하여 어떨 때는 우는 사자의 두려움으로 또한 어떨 때는 광명을 천사처럼 달콤한 유혹으로 성도들을 호시탐탐 노리고 위협한다. 우리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두려움을 주고 또한 우리를 유혹하고 결국에는 경계심을 제거하여 시험에 빠뜨리는 것이다. 인류를 대표하는 첫 번째 아담도 뱀의 유혹에 넘어가 결국 인류를 모든 오염된 가운데 태어나게 하고 살아가게 했다. 이처럼 치명적이다. 또한 너무 어렵고 힘든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항상 이 모든 시험들이 어렵다거나 힘들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는 그의 서신 서에 “네 형제들아 너희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시험당할 때 우리에게 기쁘게 여길 것들을 권면한다. 수제자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6-7절에 보면,
 
*베드로전서 1:6-7,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 도다.
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신앙인들에게 다가오는 시험, 이 시험을 어떻게 견디고 이기느냐에 따라 우리 신앙생활 가운데 치명적인 어려움을 줄 수도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영광이 될 수도 있다고 권면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오는 이 시험들을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고 풀어가는 가의 문제이다. 이런 측면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무나 멋지고 좋은 모범적인 답안들을 보여주셨다. 오늘 우리가 읽었던 본문이다. 예수님은공생애를 시작하며 마귀에게 당하시는 이 세 가지의 시험, 이 시험에서 너무나 못 있게 이기심으로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우리의 삶 가운데 다가오는 시험을 어떻게 이길 것인가를 보여주셨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승리의 비결들을 함께 나누고 우리의 삶 가운데 오는 시련과 어려움들을 승리할 수 있는, 비결들을 배워갈 수 있는 주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예수님이 당하신 첫 번째 시험이다.
I. 첫 번째 시험은 삶의 모습에 대한 오해입니다.

-이 시험은 마귀는 40일 동안 금식하신 예수님께 찾아와서 돌을 변하여 떡으로 만들어 먹을 것들을 촉구한다. 우리나라 속담에 ‘3일을 굶으면 담을 넘지 않을 군자가 없다.’라는 말이 있다. 배고픔들이 너무 심각한 어려운 문제라는 것이다. 저도 예전에 일주일 정도를 금식한 적이 있다. 어느 정도 초반부에는 견디었다. 마지막 2-3일 정도 남겨두고서는 금식 끝나고 나서 먹을 것들을 생각하며 그 상상으로 남은 시간들을 견뎠다. 금식이 그만큼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일주일을 금식도 이렇게 힘들 진데 40일 금식하신 예수님, 얼마나 힘드셨겠습니까? 육체의 모습을 입고 계셨기 때문에 동일하게 고통과 배고픔을 경험하신 예수님이셨다. 그 예수님께 마귀가 시험하는 것이다. 먹을 것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예수님께 배고픔의 문제는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원초적인 문제였다. 마귀는 예수님의 약한 부분을 비집고 들어와 집요하게 공격한다.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 굶주림은 삶의 중요한 현실이며 우리가 당면한 현실의 어려움을 상징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돈이 없어 고민하고 몸이 아픈 것 때문에 어려워하며 불안한 미래 때문에 힘들어 한다. 우리의 가장 원초적이며 현실적인 어려움 아닌가?
 
예수님도 우리의 어려움들을 아셨기 때문에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친히 가르쳐 주셨다. 그런데 이런 마지노선이 무너진 것이다. 그리고 마귀는 우리에게 찾아온다. 또한 예수님께 이야기한다.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역으로 이야기하면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 문제들을 해결해 주셔야 되는 것 아닌가?” ‘하나님이 아버지라면 친히 너의 자리 가운데 찾아오셔서 너를 돕고 일으키시며 그 문제를 하나하나 다 풀어주셔야 되는 것 아닌가?’ 라는 의구심들을 우리에게 던진다. 시험하는 자는 구체적인 현실들 앞에서 해결을 주지 않는 예수님께 실망하고 그 결속력들을 깨뜨리는 것이다. 이러한 시험에 빠지면 우리의 속에 원망이 생긴다. “하나님, 왜 이런 문제들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인가요? 왜 나만 힘든 걸까요? 하나님 나를 사랑하는 것 맞습니까? 아니 하나님 게신 것 맞습니까?” 이런 의구심과 불안함 들이 우리 속에 솟아난다.
 
※얼마 전에 풀룻 연주자인 송솔나무 선교사님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허준, 이산, 동이, 드라마 주제곡들을 연주한 아주 탁월한 풀룻 연주자이다. 어렸을 때, 참 부자였다고 이야기 한다. 아버지께서 유명한 출판사를 운영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의 사업이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도피성으로 어쩔 수 없이 엄마와 누나와 함께 미국으로 떠난다. 미국에서 참 힘겨운 생활을 하고 있던 상황에서 아버지의 사업이 완전히 망했다. 아버지는 도망자가 되에 연락도 안 되었고 엄마와 누나와 함께 그렇게 어렵게 살아가던 중, 어려움 끝에 줄리아드 음대에 프리스쿨에 풀룻 연주로 합격했다. 어려운 현실 가운데 엄청난 은혜였다. 이것만이 그가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고 소망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던 중, 그에게 힘겨운 일이 찾아왔다. 음악연주자에게 악기는 생명과 같은데 그 악기를 세 번이나 도둑을 맞았다고 한다. 첫 번째 도둑맞고, 두 번째 도둑맞고, 마지막 한 악기가 남았는데 천만 원이 넘는 그 악기마저 도둑맞은 것이다. 그때 그는 심각한 절망 가운데 빠졌다.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것인가요? 내 삶을 돌보고 계신 것 맞습니까? 하나님, 나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해도 해도 너무 한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때부터 교회를 떠났다. 그런데 만약 이런 마귀의 속삭임,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런 속삭임이 예수님을 위한 것인가? 그것이 아니다. 이 마귀의 속삭임은 우리를 유혹하는 마귀의 음침한 속삭임이다. 이 비슷한 속삭임이 있다. 마태복음 27:40절에 나온다.
 
*마태복음 27:40,
40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십자가를 향하여 매달린 예수님께 내 뱉은 사람들의 조롱이다.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동일한 속삭임이다. 마귀의 요구는 예수님 안에 있는 인간, 이것을 가장 원하는 것이며 마귀가 기대하는 것이었다.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하나님이 너의 아버지라면 너의 하나님이 너를 구원해 주셔야 되는 것 아니냐?’는 그의 외침이다. 하나님이 너의 어려움의 삶에 찾아오셔서 너를 건져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 ‘너를 도와 주셔야 하는 것 아니냐‘ 한다. 혹시 근본적인 문제로 시험 가운데 있는 분들이 있는가? 동일한 이런 마귀의 외침 가운데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35-37절에 보면,
 
*로마서 8:35, 37,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다. 우리의 삶이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가 얼마나 곤고한 문제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그 어떤 것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고 여전히 하나님이 사랑에서 붙들고 계심을 약속하고 있는 줄 믿는다. 아멘, 하나님의 은혜는 어려움 가운데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우리의 간구 가운데 응답해 주셔서 그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 것,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가 맞다 하지만 또 다른 은혜는 여전히 바뀌지 않는 현실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서 우리를 붙들고 계시다는 것들을 확신하고 그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을 믿는다. 시편 23편에 나오는 고백처럼,
 
*시편 23:4-6,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사망의 음침한 가운데서도 주께서 지팡이가 되시고 원수가 바로 앞에 있는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에게 상을 차려주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럴 때 성도는 고백한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모든 말씀, 그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이 우리에게 고백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아멘.
 
예수님이 당하신 두 번째 시험이다.
II. 두 번째 시험은 삶의 이유에 오해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높은 성전으로 데리고 간다. 그리고 뛰어내리라고 재촉한다. 이 마귀의 시험은 하나님의 말씀까지 동원해서 시험을 한다. 시편 91편 11-12절에 나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천사들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도록 지켜주신다.
 
*시편 91:11-12,
11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12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이 말씀을 인용하여서 “뛰어내려 뛰어내리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너를 구해 주실 거야.”라고 이렇게 유혹한다. 하나님의 권능,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에 대하여 확신하며 뛰어내리는 것을 요청한다. 이 마귀의 시험은 하나님의 권능을 증명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이다. “그래, 내가 한 번 뛰어내리지. 하나님 정말 권능과 능력이 있어, 내가 뛰어 내리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천사들을 통하여 나를 보호해 주실 거야. 야, 잘 봐, 하나님이 얼마나 권능에 있는지, 능력이 있는지, 똑똑히 봐?” 하면서 풀쩍 뛰어내릴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마귀의 예수님은 요청에 전혀 응답하지 않는다. 왜 그랬는가? 하나님의 능력을 증명할 수 있는, 하나님의 힘을 증명할 수 있는 이 상황 가운데 왜 예수님은 묵묵부답(黙黙不答)이셨는가? 마귀의 말에는 하나님의 능력만 나타날 뿐이다. 능력에만 집중하고 있다. 이렇게 하나님의 능력에만 집중할 때, 우리는 시험에 빠진다. 그 능력을 집중하고 신뢰하지만 어떨때는 그 능력이 우리의 삶 가운데 나타나지 않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필립 얀이 지은 책 제목 중에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라는 책에 실망하는 것이다. 왜 실망하는 것인가? 실망이라는 항상 기대라는 단어와 짝을 이루며 나타난다. 기대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실망이 없다. 기대하기 때문에 그 기대한 대로 결과들이 나타나지 않을 때, 우리는 실망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실망할 때가 있다. 우리가 “하나님, 이만큼 내가 했기 때문에 하나님, 나의 기도를 들어주셔야 되죠, 하나님, 내가 열심히 기도했기 때문에, 내가 열심히 봉사했기 때문에, 내가 열심히 모든 것을 열심히 했기 때문에, 하나님 기도 가운데 응답해 주시고,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셔야 되죠?”라고 그런 기대들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 마치 하나님은 능력의 자판기처럼, 내가 어떤 input을 넣으면 하나님으로부터 output이 나와야 된다. 라는 은연중에 그런 기대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하나님, 우리 아이가 이번에 대학교 시험에 떡하니 합격해서 하나님께 영광되게 해주십시오. 하나님, 이번 진급 시험에 합격해서 진급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해주십시오. 하나님, 질병을 주께서 낫게 해주십시오. 하나님께 영광 올리게 주십시오.” 이런 기도가 필요하다. 물론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하지만 이런 기도들, 이런 바램들, 이런 하나님의 능력, 이 능력 가운데는 하나의 전제가 깔려있다. 그것은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내기 위함보다 하나님과 먼저 교제하기 위함이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 가운데서 그 관계 가운데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다.
 
저는 우리 아이들이 어리 적에 가끔 퇴근하면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간식들을 사간 적이 있다. 아이들이 치킨을 좋아하고 햄버거를 좋아했다. 유독 많이 좋아했다. 한 번씩 치킨이나 햄버거를 사서 한 손에 들고 집으로 간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다. 아이들이 저를 보고 막 달려온다. “아빠!!!” 하고 달려와서 저와 함께 하이파이브를 함과 동시에 다른 편에 있는 봉투를 낚아채서 달려간다. 저는 내심 하이파이브하고 나서 아빠를 안아주기라도 하든지, 뽀뽀라도 한 번 해주든지 해줄지 알고 “아빠 감사해요. 잘 먹겠습니다.”라고 이야기 할 줄 알고 시간을 줄줄 알았는데, 이 봉투만 들고 가는 것이다. 물론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왔지만 내심 섭섭한 마음이 있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생각해보았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에만 집중할 때, ‘하나님은 어떤 마음이실까?’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는 그 능력만 우리가 바라본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보실까?’ 그 마음이다.
 
고린도전서 1:9,
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 이전에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시는 줄 믿는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다. 역대하 16장을 보자.
 
*역대하 16;9,
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하나님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신다. 그리고 어떤 자들을 찾으시는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자,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 하나님을 향해 시선이 고정된 자를 찾는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런 자들을 향하여 능력 베푸시는 줄 하나님이신 줄 믿는다. 능력이전에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먼저이고 하나님은 우리와 교제하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다.
 
제가 지난주에 제천기도동산에 다녀왔다. 신년을 시작하기 위하여 기도하러 간 것도 있고 제 삶들 가운데 여러 어려운 문제들, 제 두 자녀의 문제, 또한 저의 문제, 저의 가정의 문제들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간구하기 위하여 기도할 문제들을 가지고 올라갔다. 기도동산의 본당에 앉아 처절하게 기도했다. “하나님, 이 문제를 주께서 해결해 주시고 하나님 도와주셔야 합니다.” 막 기도하는 중에 너무 답답하게 기도하는 중에 주께서 저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인기야, 힘드냐? 네 주님, 너무 힘듭니다. 너 힘듦을 내가 모를 것 같냐? 네가 힘들어 하는 것 나도 잘 알고 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고 너는 내 것이다. 너의 삶을 내가 책임진다. 너의 삶, 그 능력 가운데 해결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가 너의 삶을 책임진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라고 그 마음을 주시는데 하나님 앞에 끄억 끄억 소리 내어 울었다. 저는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저를 기다리고 계셨다.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제가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을 기대하고 계셨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을 능력의 자판기처럼 오해하고 있지는 않는가? 예수님은 이 마귀를 향하여 외치신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우리가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날 때, 이 마귀의 시험은 말씀으로 물리칠 줄 믿는다. 아멘.
 
예수님이 당하신 세 번째 시험이다.
III. 세 번째 시험은 삶의 목적에 대한 오해입니다.
 
-삶의 목적에 대한 오해, 마귀의 마지막 시험은 예수님을 가장 높은 산으로 데려가서 모든 영광들을 다 보여 주신다. 그리고 예수님께 이야기 한다. 그리고 예수님께 이야기 한다. “이거 다 너에게 모든 것들을 줄게. 나에게 딱 한 번만 절 한다면 모든 것들을 줄게.” 모든 것들을 다 가질 수 있는 정말 좋은 진 기회이다. 마귀에게 절만 한 번 한다면, 마귀의 유혹이다. 이 마귀의 유혹은 세상의 화려한 물질을 보면 그것을 갖고 싶고 또 마음껏 누리고 싶고 즐기고 싶은 우리의 욕망들을 부추기며 계속해서 유혹한다. 그 욕망이 유혹으로 넘어간다. 이런 유혹들은 우리의 삶의 도처에 널려있다. 조금만 신앙양심을 접으면 수많은 수익들이 생길 수 있고, 또한 한 번만 눈을 질끔 감으면 얼마간의 소유가 생길 수 있다. 또한 신앙이라는 것만 잠깐 접으면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누리는 그 기쁨들을 동일하게, 그 희락들을 동일하게 누릴 수 있다. 라고 유혹한다. 마귀의 유혹이다. 잠시 접어두기만 하면 한 번, 한 번만, 접어두기만 하면, 요한은 이런 마귀의 유혹들을 너무나 잘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는데, 요한 일서를 보면,
 
*요한일서 2:16,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마귀는 우리를 유혹한다. 이 마귀가 가지고 있는 강력한 무기이다. ‘한 번만 나에게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너에게 다 줄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이것을 다 줄게.’ 라고 한다. 이런 것들에 대해
 
유명한 신학자 리차드 포스트는 돈과 권력과 섹스, 성으로 표현한다. 마귀의 성 가운데 있는 무기이다. 딱 한 번만 눈을 감으면 그것이 나의 것이 된다고 이야기 한다. 혹시 복 요리를 좋아하는가? 복요리, 아주 맛있는 보양식이다. 하지만 복어가 갖고 있는 독성은 죽음의 아이콘 청산가리보다 몇 십 배나 강력한 독을 품고 있다. 돈, 권력, 성이 우리의 일상이지만 마귀의 유혹에 넘어갈 때, 이것은 우리의 신앙 가운데 치명상을 일으킨다. 순식간에 절망가운데 빠진다. 불의한 재물이 되고, 오만한 권력이 되고, 불륜이 되는 것이다. 이런 유혹들은 최초 아담의 유혹인 뱀을 유혹하는 것과 흡사하다. 아담이 그 전에도 선악과를 참 많이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뱀이 와서 유혹을 한다. “저거 한 번 먹어봐, 먹는 날에는 하나님처럼 될 거야.” 그때부터 선악과를 보는데 보암직도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하는 탐스러운 과일이 되었다. 그리고 유혹한다. “한 번만, 한 번만”, 이거 한 번이 너무나 치명적이다. 한 번 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되고, 그때부터 우리의 삶이 된다. 조금 지나면 어떠한가? 절망적으로 우리의 신앙 가운데 심각한 어려움 가운데 빠지고 수많은 후회들과 죄책감에 시달린다. 저의 이야기이다. 제가 목사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참 많이 경계하지만 한 번씩 한 번씩 그런 유혹들이 엄습(掩襲)해 온다. 어떨 때는 그런 유혹 가운데 빠지기도 한다. 그러면서 제 스스로 시달린다. ‘아이구 목사가 되어서... 내가.’ 어렵다. 우리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 반대도 있다. 항상 우리가 이런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 아담처럼 이런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다니엘서를 보면, 다니엘은 10대의 나이에 이억 만리 바벨론에 포로(捕虜)로 잡혀간다. 10대의 나이에 왕의 진미(眞味), 먹으라고 주는 그 맛있는 음식들을 거부한다. 장년이 되어서는 금 신상에 절하기만 하면, 그가 물을 수 있는 것이 참 많았다. 그런데 그 금 신상에 절하지 않고 그 세 친구들과 함께 풀무 불에 던져지는 것들에 주저(躊躇)하지 않는다. 그의 노년이 되었을 때, 90대의 노후가 되어 왕 외에는 어떤 간구들을 하지 않아야 됨에도 불구하고 만약에 그렇게 하면 사자 굴에 던져진다는 유혹 가운데서도 그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전에 하던 대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했다. 한 번만 눈 찔끔 감으면 모든 것들이 해결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모든 것들을 누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의 자존심을 지키며 그에게 절하기를 원하는 마귀의 유혹가운데 단호하게 맞서 물리친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다니엘과 세 친구들을 풀무 불 가운데 보호해 주시며 다니엘을 사자의 입 가운데 건져 주신 줄 믿는다. 아멘, 수많은 유혹 가운데서 우리는 얼마나 연약(軟弱)하며 연약하다 못해 나약(懦弱)한 존재이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나는 나약하지만 나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은 절대 나약하지 않는다. 나는 부족하지만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강하고 능하신 용사인줄 믿는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돕고 계신다. 그 하나님이 그 성령님이 날마다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 분이신줄 믿는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로마서 8장 26절을 보면,
 
*로마서 8:26,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연약함을 너무 잘 아신다. 하지만 그 성령이 우리를 도우신다.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계속해서 간구하고 계신다. 말씀을 마무리 한다. 앞에서 나왔던 풀롯 연주자, 송솔나무 연주자 이야기 뒤 부분이다.
악기를 세 번이나 도둑맞고 하나님을 떠났다. 십 년이나 하나님을 떠났다. 그렇게 연주자로서 승승장구하고 있을 무렵, 그의 친한 동료가 전도 집회 때에 그를 초청했다.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 그를 따라가 전도 집회에 앉아있었다. 한참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그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물었다. “내가 도둑맞은 게 무엇이냐?” 송솔나무씨가 하나님께 대답한다. “하나님, 제가 생명같이 여기던 풀룻을 도둑맞았어요.” 하니, “아니 네가 도둑맞은 게 무엇이냐?” “아니오. 하나님, 제가 풀룻을 도둑맞았습니다.” “그래, 네가 도둑맞은 것은 풀룻이 아니라, 나의 대한 마음이야. 나를 도둑맞았어.” 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마음 가운데 그는 그 자리에서 예배 마칠 때까지 그는 펑펑 울면서 다시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성탄절 저녁에 TV를 보는데 TV에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구출하는 한국사람 영상이 나온다. 누굴까? 벤을 구출하는데 벤을 보니 총알자국이 너무 많은 것이다. 언제 죽을지, 언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그런 상황 가운데서 벤을 통하여 다른 나라로 구출하는 그 사람이 그 송솔나무 그 사람이었다. 나중에 인터넷을 통해서 찾아보니 그분이 바로 송 솔나무씨였다. 하나님 앞에 그를 드리며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고난이 닥치면 낙심하고 의심에 맞기 쉽다. 또한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의 타락한 우리의 본성이며 우리의 모습이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 주신 이유는 승리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통하여 승리하는 비결들을 보여주셨고 그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우리 또한 마귀의 시험 가운데서 승리할 수 있을 줄 믿는다. 마귀의 시험들은 공통점이 있다. 계속해서 우리를 보게 한다. 우리 자신에게 집중하게 한다. 이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시선’이라는 찬양이 계속 떠올랐다. 그 가사를 보면,
 
1절-내게로부터 눈을 들어 주를 보기 시작할 때, 주의 일을 보겠네. 내 작은 마음 돌이키사 하늘의 꿈꾸게 하네. 주님을 볼 때, 모든 시선을 주님께 드리고 살아계신 주님을 느낄 때, 내 삶은 주의 역사가 되고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네.
2절- 성령이 나를 변화시켜 모든 두려움 사라질 때 주의 일을 보겠네. 황폐한 땅 한 가운데서 주님 마음 알게 되리. 주님을 볼 때, 모든 시선을 주님께 드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느낄 때, 세상은 주의 나라가 되고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네.
-시험이 난무하는 우리의 일상이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 가운데 우리의 시선들을 내게로부터 주님께 시선을 고정할 때, 우리의 일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줄 믿는다. 수많은 시험과 유혹 가운데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봄으로 승리를 선포하며 하나님의 일상이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도드린다. ♪  ~~

♣요약
말씀을 통해 우리가 깨달아서 일상 가운데 하나님을 경험하여 마귀의 시험과 유혹을 이길 수 있어야 한다. 우리를 향하는 시선들을 주님께 고정시켜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고 능력 주심을 확신하며 모든 연약함과 마귀를 이겨내게 하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승리를 선포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유명한 결투 즉 천사 장 미가엘과 용,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아니 뱀 자신과의 백병전의 사건을 보게 된다. 이 싸움에서 여자의 후손은 시험을 받고 고통을 당하며 그의 발꿈치를 상한다. 그러나 뱀은 그의 시험에서 완전히 실패하며 그의 머리가 깨뜨려진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