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2020. 6. 10)

제목:''흩어진 나그네들에게 ''
말씀::베드로전서 1:1~7
설교자: 김경덕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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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에 대한 추억을 한두 개 쯤은 가지고 살고 있다. 편지함을 오래된 통을 꺼내 읽어보기도 한다. 모든 편지에는 이유가 목적이 있다. 개구쟁이 초등학교 아이가 갑자기 편지를 쓰는 것은 어버이 날이어서 쓴다. 유학 중인 딸이 왜 장문으로 아빠에게 이 메일을 쓰는가? 그것은 용돈이 떨어져서이다. 청년이 자매에게 밤바다 편지를 쓰는가? 좋아해서이다. 모든 편지에는 목적이 있다. 병무청장께서 편지를 보내는 것은 아들을 군대에 보내라는 뜻이고, 경찰서장께서 편지를 쓰는 것은 신호위반의 편지이다. 신약성경 27권중에 22권에 성경이 편지였다는 것이 편지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경의 저자요, 교회 지도자였던 사도들에게 편지를 써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 교회가 갓 태동했던 시기에 교회들마다 당면한 이슈와 혹은 어려움이 있었다는 뜻이다. 편지 한 통을 누군가 건네 준 두루마리 한 통을 받게 된다. 두루마리 편지를 읽으면서 일고 난 사람은 평온하고 담담함으로 변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공동체에게 전했다. 읽는 사람과 보낸 사람은 누구인가? 학자들은 이 편지를 AD 63년에 기록된 것으로 말하고 있다. 황제 네로가 교회를 핍박할 때이다. 대 재앙과 대 환난을 앞둔 신앙 공동체에 보낸 편자라는 사실이다. 신앙 때문에 받는 이 시련은 언제까지 계속 되는가? 이 땅의 성도들은 이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가를 생각하며 이 편지를 받은 이 성도는 이 편지를 보낸 사람을 발견하고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를 느꼈을 것이다. 헬라어로 기록된 이 편지는 페트로스 ~~ 아파스톨로스 ~ 베드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이다. 이 편지는 베드로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최고의 사도 베드로가 썼다. 이 편지를 왜 썼는가?


* 베드로는 소아시아 지역에 거주하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흩어진 나그네’(디아스포라)라고 한다. 디아스포라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멸망한 이후 전 세계에 흩어졌던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베드로는 이 용어를 통해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나그네 신분으로 살고 있음을 주지시킨다. 그리스도인은 비록 나그네요 이방인으로 살지만 하나님과 아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 베드로는 그것을 삼위 일체적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첫째,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께 미리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다.
둘째, 그들은 순종하는 자가 되도록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자들이다.
셋째,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은 자들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삼위 하나님의 전폭적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얻을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나그네라고 하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고 배척을 당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 핍박이 극심해서 마치 불로 연단하는 것과도 같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은 소망으로 인해 기뻐할 수 있다. 그 소망은 금보다도 귀하고 영광스럽고 존귀한 것이며, 그것은 썩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으며 사라지지 않는 것이기에 ‘산 소망’이라고 말한다. 그 소망은 하늘에 간직된 기업으로써 우리가 종말의 구원을 통해 얻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거듭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시험 가운데서 보호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 소망에 이르도록 인도하신다.


♣요약-
어려운 시간을 지나며 흩어져 있는 우리 성도들을 성령께서 말씀으로 연결하여 주시는 것을 믿고 나그네 같은 지금의 삶 속에서 말씀으로 주님과 동행하며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산 소망되시니 이 모든 고난과 근심은 잠깐일 것을 믿어서 주님 앞에 강한 척도 약한 척도 말고 겸손하게 세상 앞에서 당당하게 살기를 바란다. 금보다 더 귀한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라 하신 말씀을 소망으로 두고 흩어져 있기에 서로를 위해 더 기도하고 나그네 인생이기에 서로를 더욱 사랑하며 살아가는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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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20. 6. 3)
제목: ''매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
말씀: (디모디후서 2: 9~10)
설교자: 백승준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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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코로나로 인한 어둠이 지나가고 있다, 어둠의 때, 모든 것을 종식시켜 주시고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시리라 믿는다. 많은 문제를 직면하며 살고 있을지 모르겠다. 선교부를 일하면서 그렇고 해외에 살고 있는 안전문제가 마음에 걸린다. 선교지가 의료체계나 힘든 열약한 한 환경의 건강이 염려가 된다. 코로나로 인해서 단기선교도 우리교회에도 취소되었다. 우리 성도들의 선교로 소통이 되었었는데 그런 일들로 인해서 취소가 되어서 좀 아쉽고 한동안 갈 수도 없게 되어 선교의 자원을 어떻게 하나님은 인도하실지 그것에 대한 숙제와 고민도 떠안고 있다. 무엇보다도 더 마음을 누르는 것은 한국교회를 향한 연일 메스컴에 대한 잘못된 뉴스들이 교회에 대한 안 좋은 이미지를 갖게 되는 그런 현실을 바라보면서 코로나 이후의 한국 교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걱정도 있다. 그러나 오늘 디모데후서를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말씀해 주셨고 깨닫게 해주셨다.



본문에
-9 “이 복음으로 인하여 내가 악을 행하는 자처럼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당하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느니라”.
이 말씀은 바울이 유언과도 같이 남긴 말씀이다. 이 말씀을 남기고 4장에 부음바 되어서 그의 떠나는 그 시간 직감한다. 사도 바울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사도 바울은 이 복음으로 인하여 마치 악을 행한 범죄자처럼 감옥에 갇히기까지 고난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그 어떤 사슬에도 묶이지 않았고, 매이지 않았고, 갇히지 않았다. 여전히 복음의 말씀은 널리널리 전파되고 있었던 것이다. 괴로운 상황에서 보게 된다. 고린도후서 1123-27절까지 보면 그것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바울은 고생의 순간들을 마음속에 새겨놓았던 것 같다.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름을 받고 그의 복음이 평생이었지만 연일 계속되는 고난 속에서 신음했다. 그러나 분명히 한 가지를 깨달았다. 그러나 몸은 엉망이었지만 한 번도 하나님의 말씀에 매이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도 그 진리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귀신들린 여인을 치유해 주는 모습이 있다. 그 치유에 기적이 일어나자마다 바울과 신라가 감옥에 갇힌다. 옷이 찢겨지고 매를 맞지만 그들은 그래서 찬양을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때 지진을 일으키셨고, 하나님께 백성들이 돌아오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이 메시지가 빌립보 감옥에서 선포되었고, 빌립보 교회가 개척되었다. 또한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가택 연금되어 있는 모습을 본다. 그러나 그 기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였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였다. 그 결과 가이사의 집에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오게 되었고 로마 그 당시 제국의 수도였던 로마에 하나님은 교회가 든든하게 세워지는 것이었다.


우리에게도 다가오는 현실은 어둡고 좌절되고 낙망하게 만들고, 우리를 어둠의 감옥에 갇혀 있을 수 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흥왕할 것이며 승리하고 결국에는 모든 민족과 백성 언어 모든 나라들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 꿇고 예수를 주로 믿고 시인하는 바로 그날이 우리 가운데 찾아 올 것이다. 우리는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능력이 있고 살아있는 것이기에 이 세상 어떤 것도 하나님의 말씀에 매이게 할 수 없다. 토비새에서 스펄전 목사님을 인용하신 것을 기억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자와 같다~~” 이 말씀을 잘 몰랐다가 이 코로나 사태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능력이 있고 얼마나 놀라운지 묵상해 본다. 우리 어떻게 해야 전도를 잘 할 수 있을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팬더믹 시기를 겪으면서 분명히 깨닫는 것이 있다. 전도의 중요한 키가 아니라 우리 어떤 것을 갖고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에게 있는 복음은 어떤 것보다 가장 능력 있는 생명의 말씀임을 믿는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나도 놀랍고 너무나도 큰 변화를 일으키는 능력의 기적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1224, 1920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은 힘이 있어 흥하여 세력을 얻느니라~ 등 사도행전 전체 역사를 보면 사단이 교회를 방해하고 하나님의 복음 사역자들을 방해하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 흥왕하여 교회가 성장하고 힘을 얻어서 교회의 악한 것들을 이겨서 승리하는 기록이 사도행전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기에 어떤 날샌 검보다 날카로워서 이 세상 모든 악한 것들을 파괴할 수 있는 검이다.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놀라운 것이며 우리 손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세상을 변화를 시킬지 다시 한 번 깊이 있게 생각해 보고자 한다.
왜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서 이 세상을 변화 시킬 수밖에 없는가? -3가지가 있다.
1.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당연하게 들었던 말씀이다. 한 번 이 시간을 통해서 다시 생각해 보자. 진리란 사전적 정의는 언제 어디서나 인정할 수 있는 보편타당한 법칙이나 사실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어떤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이 그것이 바로 진리라 여긴다. 진리란 말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거창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 조건이 따라온다. 궁극적인 질문이란 무엇인가! 평소 우리가 먹고 살기 바쁘다보면 그런 질문 앞에 우리 자신을 잘 내놓지 않지만 우리 인생에서 이 질문들이 자주 떠올리는 순간들이 자주 온다. 가까운 친구나 가족이 세상을 떠난다든지 아니면 현실과 같이 인간이 큰 재난이나 재앙들이 찾아오는 그 시간일 때, 사람들은 근원적인 질문들을 마음속에 떠올리기도 한다. 산다는 것이 무엇이고, 죽은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며, 이 세상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고, 또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인가? 과연 진짜 신은 존재하는 것일까? 이러한 구체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은 종교와 철학을 의지 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이런 것들보다는 과학에 의지하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과학은 대단한 힘을 갖게 되지만 명쾌한 해답을 주기에 그렇다. 본인(목사님)은 화학을 전공했다. 어린 시절 독극물을 실험하면서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염산과 또 다른 양잿물인 수산화나트륨 독극물과 독극물을 섞으면 강력한 독극물이 될 것 같은데 그 둘은 소금물이 된다. 그러니까 NaCLNaOH이 섞으면 더 강력한 독극물이 아닌 소금물이 되는 것이다. 그 단순한 진리에 탄복했다. 그래서 그런 명쾌한 단순한 진리의 해답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과학을 통해서 질문들을 해결해 보려고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생명의 기원들에 대한 과학의 논리를 살피면 그 초라한 논리를 보고 우리는 과연 우리가 신뢰하며 믿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우리가 많은 것들 중에 설명할 수 없는 진화론이 있다. 진화론이 인류를 어떤 기초를 설명할 때 더욱 그렇다. 태초에 어떤 물질이 있었다고 설명하는데 생명의 기원은 그 물질이 물과 암모니아 매탄 이산화탄소가 있었는데 어느 날 번개가 쳤을 때 이 물질들이 화학적 반응을 일으켜서 단백질로 변화되어 단백질이 우연히 좀 더 고차원적인 방식으로 바꾸기 시작하여 그 우연의 우연을 거듭하여 생명체로 발전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진리인 것처럼 배웠지만 이것이 일어날 수 있는 확률은 정말 0이다. 어떤 학자는 타이핑을 칠 수 있는 원숭이가 삼국지 같은 소설을 써 낼 수 있을까? 이것은 자판의 우연의 일치로 써낼 그런 확률보다 더한 확률을 우리는 믿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을 의지 한다면 이 세상을 의지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다. 창세기 1:1절부터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시며,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이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계시고, 그 하나님이 자기의 선하신 뜻을 따라 이 세상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만물의 영장으로서 사람이 특별한 지위를 누리는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아 이 땅을 하나님과 함께 다스릴 그 영광을 같이 누릴 존재로 만들어졌기 때문이기에 그렇다. 문제는 무엇인가 이 땅에서 그렇게 지음 받은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신하여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죄로 말미암아 이 세상 모든 것이 망가지게 되었다. 이 세상의 유일한 소망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허락하신 한 가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라는 그 단순한 진리가 성경 안에 기록되어 있다. 그렇게 되어있어 우리게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다시 한 번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고 하나님과 영원토록 할 수 있는 바로 그 삶, 하나님나라의 영원한 삶을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진리가 왜 중요한가? 바로 역병이 돌던 시기 팬더믹이 있던 시기 수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질문에 해답에 되어주기 때문이다. 로마시대 초기 기독교 역사를 보면은 그 시대에도 그 역병이 전 세계적이지는 아니라도 로마시대를 장악했던 두 번의 역병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역병을 거치면서 초기 기독교가 엄청난 성장부흥이 있었다는 분석이 있다. 신학자 로드니 스타크란 사람이 쓴 책인데, 1차역병은 165년 마르크 아우렐리우스가 통치시에 천연두가 돌았다고 한다. 그 천연두로 인해 15년간 로마제국에 인구가 3분의 일이 줄어드는 죽게 되는 일이 벌어졌다.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본인도 비엔나에서 이 역병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그리고 체 100년이 지나지 않아서 251년 파괴력을 가직 역병이 다시 로마에 휩쓸게 되는데 이번에는 홍역으로 여겨진다. 그 홍역으로 인해서 수백만 사람들이 죽었다. 그러나 역병의 시기, 우리와 같이 이 팬더믹의 시기에 하나님의 복음은 더욱더 흥하여서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왔다고 이 책은 기록하고 있다. 로드니 스타크는 죽음에 한 복판에서 죽어가고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하면서 근본적인 질문으로 사람들에게 있게 되었다. 러나 유일하게 기독교 인 들만이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을 사람들에게 선포하게 된다.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하셨고, 하나님을 거역한 인간들로 인해서 수많은 죄가 들어오며 수많은 악과 재앙이 찾아오게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돌아갈 때에 그 모든 재앙에서 벗어나 우리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영원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그 십자가의 복음을 힘 있게 전파했던 것이다.
백년이 지나지 않아서 처음 기독교인들이 첫 역병이 일어났을 때 기독교인들이 수는 사만 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백년이 지난 이후에 백육십 만 명으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했다고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 세상의 유일한 진리라는 그 확고한 사실 앞에 다시 한 번 우리 마음을 다부짐을 해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선포할 책임이 있다. 베드로전서 3:15절을 보면 우리와 같은 이러한 시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왜 이런 일이 벌어지며 이 세상을 치유할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그러할 때 우리는 진리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책임이 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이 말씀을 선포할 때 사람들은 진리의 말씀으로 돌아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날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고 절대로 매일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2.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이유가 있다면 구원에 이르는 진리를 얻기 위해서이다. 이 성경은 바로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영생을 얻게 되는 책이라고 성경 스스로가 증거하고 있다. 요한복음 5:39절을 보면 성경전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게 해준다. 신약에만 아니라 구약에 어디라도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를 찾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게 인도 해준다. 창세기 316, 2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준비한 그 어린 양이 우리를 위해 구원할 소망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어린양 되신 출애굽기를 보면 어린양이 되셔서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받을 형벌을 이제는 벗어나게 만드는 놀라운 구원의 길을 보여주고 계신다. 구약 5경에 놀라운 제사에 대해서 보여주신다. 그 제사를 통해서 참된 제물이시며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요, 우리의 유일한 제사상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게 하신다. 여호수아를 통해서 군대 장관으로 오셔서 친히 정복의 싸움에 최선봉에서 싸우시는 하나님의 군대장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끔 인도하시며, 다윗의 언약과 다윗의 전체를 통해서 참된 메시아 되심을 우리 가운데 소개하고 있다. 구약에서 신약 전체에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생명을 전파하고 있다. 우리는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이 예수님으로만 영생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영생을 먹고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자만이 이 세상 가운데 담대히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죄악과 죽음과 싸워 이기는 유일한 사람으로 세워질 수 있음을 믿는다. 고전 1555-58절을 보면 바로 이와 같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했던 영웅스런 선배들의 모습이 또한 로마시대 바로 역병의 시기에 기록되어 있다. 모든 사람들이 죽음 앞에 벌벌 떨 그 때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영원한 사명과 소명을 꿈꾸며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담대하게 섬겼던 믿음의 선조들이 있었기에 초대교회는 승리했던 것을 본다. 우리 또한 하님께서 주신 생명이 있기에 우리에게 시시각각 찾아오는 모든 두려움을 떨쳐내는 백성이라 믿는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형벌은 없다. 왜냐하면 더 이상 율법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만이 우리를 지배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두려움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담대한 모습들,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떳떳한 모습으로서 모든 두려움을 떨쳐 버리는 우리가 되길 소원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고 절대로 매일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3.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요 우리 가운데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만이 아니라 능력 그 자체이다. 어떠한 능력인가? 디모데후서 316-17절에 기록되어 있다.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바로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이며 하나님의 능력이지만 또 이 말씀을 묵상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온전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 자신은 연약하지만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이 되어 주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할 때면 우리는 조금씩 변화되는 것을 믿는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없었지만 매일 묵상하고 그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차근차근 변화시켜 주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완전한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이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변화된 사람들이 초대교회 로마시대를 변화시켰다. 이 역병의 시기에 안타까운 기록이 있다. 치사율(致死率)25퍼센트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집단에서의 연구를 보면 10퍼센트였다고 한다. 그 당시 연구결과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기적이 교회 안에 계셨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이방인들은 서로 자기만 살기 위해서 힘쓰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달랐다. 하나님 말씀을 몸소 행했기에 실천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고통을 함께 나누었기 때문이다. 함께 병에 걸려서 죽게도 되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것에는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그 아름다운 사랑 때문에 세상과 다른 놀라운 결과의 모습은 이방인들에게 큰 도전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역병이 끝나는 순간 수많은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디오니소스는 이렇게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그 능력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고 생명이고 능력이다. 이 세상 어떤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방해할 수 없고 매일 수 없다. 이 세상은 우리를 매이게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하게 깨달아서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승리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공동체는 승리 하 수 밖에 없다. 믿음의 선배들이 보여 주었듯이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그 말씀은 승리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한다. 바로 말씀에 매어야 한다. 우리가 이 세상 가운데 채울 것은 바로 생명의 말씀 능력의 말씀에 나아가서 이 말씀으로 새로운 힘을 공급받게 된다면 이 세상 어떤 것도 우리를 꺾을 수 없다는 것을 믿는다. 세상 미디어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 말씀에 집중하라. 그 말씀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 있는 도구로 만들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귀한 일꾼으로서 예수님의 참된 제자로서 하나님 나라에 아름답게 쓰임 받는 사람이길 주 이름으로 부탁한다.




요약
바울의 위로는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핍박하는 힘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인간의 마음과 양심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는 막을 수 없다. 그것은 어떤 인간의 힘에 의해서도 결코 매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디모데로 하여금 예수님을 증거 함으로 매이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용기를 주었을 것이다. 바울은 왜 즐거이 고난을 당하였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혼이 구원 받은 후 다른 사람들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기꺼이 일하고 고난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 말씀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 있는 도구로 만들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귀한 일꾼으로서 예수님의 참된 제자로서 아름답게 쓰임 받는 사람이길 바라며, 교회사의 교훈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능력이 있고,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인지, 이 세상 어떤 것도 하나님 말씀이 매일 수 없고, 하나님 말씀이 승리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이 말씀을 가까이 하여 우리의 삶 또한 승리하는 삶이 되고, 말씀이 다시 흥왕하여 한국교회가 힘을 얻고, 전 세계를 향해 선교의 열정이 타오르는 그 놀라운 부흥을 허락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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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 (2020. 5 27)
제목: “위대한 신앙, 다윗처럼
말씀: 역대상 19:1-9
설교자: 정은석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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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역대상 19:1~절까지이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바라볼 때 흔히 그들이 나타냈던 결과에 주목할 때가 많다. 예를 들면 모세 -홍해를 갈라선 사건, 여호수아 -여리고 성 무너진 사건들이 있다. 승리했던 그런 일들을 더 많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그런 결과를 내기까지 기도의 문제 이런 것들이 강조되기도 하고 그런 것들을 주목하는 것이 당연지사이지만, 우리는 스스로 믿음이나 기도가 부족했나? 신앙의 회의를 느끼면서 놀라운 그런 기적들을 바라볼 때 마음속에 열등감을 갖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성경에 어떤 인물과 나타나는 사건과 기적들을 바라볼 땐 그 결과도 존경하지만 그 사람이 그 기적을 행할 수 있었던 그 능력을 이루어 낼 수 있었던 그 사람만의 가치, 생각의 방향, 마음의 태도가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이런 결과를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할 수 있다. 왜냐면 하나님을 향한 바른 태도, 바른 가치가 결국 그 사람의 삶과 신앙의 모든 것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으면 기도하면 그 이전에 그 사람자체가 기도하는 그 사람자체가 뭔가 행동하는 데 사람자체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중심된 가치, 그 마음의 방향, 그 방향과 가치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삶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내 것으로 삼아낼 때에, ‘무언가 내가 해내어야지’, ‘뭔가 내가 보여줘야지라고 하는 노력과 열심히 없이도 하나님께서는 자연스럽게 그 사람을 통해 성경에 말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변화와 하나님의 나라를 감당해 낼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게 하신다. 성경 속에 나타났던 기적과 능력을 오늘 우리 삶 속에서도 경험하게 해 주신 줄 믿는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성경에 어떤 인물의 가치와 마음의 태도를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가? 많은 인물들이 떠오르겠지만 다윗이라고 생각한다. 왜인가? 가장 평범한 목동에서 가장 높은 왕의 자리에 올랐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사람의 진면목과 실패함을 둘다 보여 준 사람이 다윗이기 때문에 그렇다. 따라서 다윗을 기억할 때 골리앗을 이긴 믿음, 악기를 내어준 찬송, 절말과 낙심 속에서 기도했던 그 다윗을 생각하기 전에 그리고 그것을 통해 이루어 냈던 다윗의 승리를 우리가 마음속에 담기 전에 그런 믿음과 찬송과 기도와 승리가 가능할 수 있었던 다윗의 하나님을 향한 태도 삶의 가치와 삶의 방향을 주목하고 그것을 내 것으로 삼아 우리의 삶을 힘 았게 걸어간다면 지금 평범한 삶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도 하나님 앞에 위대한 사람으로 서가는 놀라운 축복이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함께 하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다윗의 하나님을 향한 삶, 그리고 자신의 삶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삶의 태도는 무엇이었을까요? 도대체 그게 어떤 것이었기에 하나님도 사람도 기억하는 가장 위대한 신앙이 될 수 있었는가? 두 가지가 있다. 말씀을 통해 살펴보면 은혜가 될 수 있다.


먼저는 본문의 배경은 이러하다.
다윗이 직위에 올라서 계속 정복 전쟁이 진행되었다. 그런 가운데 암몬의 왕 나하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사실 그 당시에 다윗 왕국은 영토의 확장이 최고로 이루어져 있었고 당시에 최고의 강대국으로서 군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암몬와이 죽었다. 그의 아들인 하눈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는 복잡한 상황이 된다. 다윗은 정복전쟁 계속해 가고 있는 가운데 암몬도 정복할 나라 중에 한 나라였다. 그런데 혼란스럽고 어순한한 상황이지만 그러면 정치가이자 군사전문가였던 다윗은 그가 틈을 놓치면 안되었던 것이다. 암몬을 공격하기에 최고의 적기다. 그럼에도 다윗은 암몬을 공격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하스의 위로하는 조문단을 꾸며 보낸다. 그런데 조문단을 보내는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본문 2절에 그이 아버지가 의를 베풀었으니 그리 아들에게 보낸다. 문상의 이유가 암몬의 왕이었던 나하스가 이전에 다윗에게 호의를 베풀었다는 뜻이다. 호의라는 말은 히브리 말로 헤쎄드이다.=호의이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나하스가 다윗이 필요할 때, 은혜로 사랑으로 친절로 베푼 적이 있었고, 그 다윗이 그것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기억하고 지금 나하스의 죽음 앞에 사절단을 조문으로 암몬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사실 그게 문상 보내는 것이 대단한 것이냐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지금 다윗은 영토를 정복해야 할 전쟁 중에 있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겠는가? 땅을 차지하는 것, 승리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을 것이다. 적이 약점을 보이거나 뭔가 승리할 수 있는 허점이 보이게 되어지면 집요하게 이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함이 상식적이고 지혜로운 일이라 할 수 있겠으나 그러나 그 상황에서 그렇게 하지 않고 조문단을 보내는데, 이유가 이전에 나하스에게 받았던 성경도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는 사소할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은혜로 기억하고 그 은혜를 내가 받았기에 모든 것을 멈추고 조문단을 보냈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다윗의 위대한 신앙의 태도를 발견하게 된다.


 다윗의 위대한 신앙의 태도
1.하나님의 싸움과 나의 싸움을 구별하여 내 싸움에 집중하기.
하나님은 언제나 모든 전쟁으로부터 내가 주인이라고 말씀하신다. 전쟁의 주인이다. 다윗은 그것을 철저하게 몸으로 지켰던 사람이다. 곰과 양떼를 지켰던 그 시절부터 시작해서 골리앗을 쓰러뜨린 모든 과정까지 다윗은 의자할 것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전쟁에 하나님이 주인되셔야 한다는 것,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루어 가셔야지만이 된다는 것, 힘과 능력과 승리의 원동력은 오직 내 하나인 한 분 밖에 없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다윗은 언제나 대단한 무기와 뛰어난 병기를 찾지도 않았고, 그것을 구하거나 입지도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기 때문이서 그렇다. 내가 개입해서 이렇게 하면 이기고 저렇게 하면 승리할 것이다란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본인이 개입하면 내 힘으로 되어지면 패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기에, 싸움은 하나님께서 싸우시고 나는 내가 싸워야 할 그 일, 내 해야할 일에 집중하겠다는 생각한 사림이 바로 다윗이었다. 하나님의 승리를 위해서 쓰임을 위해서 거룩한 도구로써 자기를 만들기 위한 싸움만 집중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싸움을 이길 수 있는 좋은 도구로 나를 만들어 낼 것인가에 집중했던 사람이 바로 다윗이다. 그래서 다윗은 어떤 싸움에서도 자기 자신에만 집중했다. 그러니 상식적으로 어수선한 틈을 타서 적국이 공격을 해서 승리할 수 있었지만, 다윗은 그 절호의 기회를 내려놓고 어쩌면 왕으로서 멋지게 이름을 날릴 수 있는 욕심을 내려놓고 사절단을 만들어서 그들은 보낸다. 자기 자신에게 베풀어 주었던 그 은혜를 기억하여 집중하며 승리하는 모습을 보인다. 다윗은 자기 욕심을 먼저 생각하고,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지 않을 때 언제나 패베 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늘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뭔가 거창하게 이야기 하며 계획하는 다윗은 그럴 때마다 졌다. 인구조사나, 우리아 아내를 범했을 때, 다윗은 번번이 패배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본문의 자기에게 허락된 은혜에 기억하는 것, 여기에 집중하는 것이 승리함을 알았다.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 자기싸움이 될 수 있을까요? 내가 힘이 생기면 그래서 이전에 어떤 은혜를 받았는지를 잘 모른다. 내가 잘 되면 내가 잘해서 그러는 줄 안다. 그래서 그 자리까지 오를 수 있게 도와주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그 은혜를 잊는다. 우리의 죄 된 인간의 본성이다. 다윗의 당대의 최고의 권력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성경조차 기억하지 않는 그 작은 호의, 자기가 힘들었을 때에 자기에게 베풀어 주었던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조문단을 보내는 그 다윗에 모습을 통해서 자기의 싸움은 다른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 있는 욕심을 내려놓는 것, 그래서 하나님을 통해서 베풀었던 은혜이든, 사람을 통해 받았던 그 은혜이든 그것을 기억하는 것이고 거기에 집중했던 이 다윗의 모습이 위대한 신앙의 사람으로 서 갔던 다윗의 핵심 가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위대한 신앙이란 대단한 결과와 업적이 나타나고 보여지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 정말 위대한 신앙으로 가는 것이 은혜를 잊지 않는 것이 바로 위대한 사람이며 보답의 길이다. 그 은혜의 통로가 되었던 사람을 잊어버리고 사람들을 하대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하나님의 싸움에 어떤 사람을 사용하는가? 자기 싸움에 승리한 사람을 사용한다. 내가 드러나지 않고 하나님만이 드러난 준비된 사람으로 된 것만이 거룩한 실천이다. 자기 싸움에 승리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영광스런 사람을 사용하는 줄 믿는다. 하나님의 사람은 호의와 친절과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을 중심 가치를 놓고 한 걸음 씩 옮겨가는 자이다. 그이 신앙의 모습은 자신의 정치적인 야망보다 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 소중함 예의로 대하는 모습이다. 다윗이 조문단을 보내고 나니 그 암몬의 새로운 신하들이 모여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다. 핵심은 다윗이 조문단을 보낸 것은 아버지를 존경하고 호의를 생각해서 아니고 저들이 자기 나라를 염탐하고 정탐하러 왔다고 말해주며 믿지 말하고 한다. 그래서 하눈이 사절단을 잡아다가 이렇게 하고 있다. 본문 4절에 보면, 이에 다윗의 신하들을 잡아서 수염을 자르고 의복을 자르고 엉덩이를 들쳐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런 상태를 보면 사절단은 다윗에게 한 짓이나 다름없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수치와 모욕을 했다. 다윗이 이 내용을 듣고 어떠했겠는가? 보복하고 싶을 것이다. 험한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그 복수를 행하지 않는다. 오히려 암몬을 정리하고 나라의 자존심을 찾겠다는 거창한 슬로건을 가지고 전쟁의 명분을 삼을 수도 있었는데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5절에 보면, 그 사람들이 부끄럽게 하도록 하지 않고, 수염이 자라기까지 여리고에서 머물다가 돌아오라고 한다. 오히려 상처를 입었던 자기의 그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고 만져주는 것을 최고로 먼저 해준다. 엉덩이를 드러나는 수치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윗은 사절단의 상처를 알고서, 참고 상처받은 자들을 여리고에 모든 것을 제공해 주고, 휴식을 취하게 한다. 수염이 자라고 치유되기까지 있다가 오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함부러 여기지 않고 무례히 하지 않는다. 큰일을 하는 사람일수록 그 사람을 진실하게 대하는 것이 우선 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사람의 마음을 먼저 살피고 소중히 여길 수밖에 없다. 내가 받은 호의와 친절을 기억하고 보답해야 한다.



 다윗의 위대한 신앙의 태도
2.세상 방법이 아닌 하나님과 연합하기.
6절에 하눈이 상황파악이 된다. 하눈이 해결책을 내놓는데, 은 천 달란트와 병거와 마병과 영병을 가지고 해결하려 한다.
첫째 -잘못된 것은 다윗에게 찾아가서 직접 이야기와 사과를 해야 했다. 사과가 전혀 없었다.
둘째 -잘못된 것은 당사자인 이스라엘과 전혀 상관없는 아람을 끌어 들여서 그들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방식이 잘못 되었다. 지금 세상에서 발생하는 것과 동일하다. 하나님의 방식을 알지 못한 문제 해결 방식은 딱 두 가지이다. 책임해피와 돈으로 해결하려 한다. 그러니까 문제 해결 방법은 세상은 사람으로 해결하려 한다. 세상의 가치를 힘과 돈만 있음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게 하눈과 세상이 보여주는 방법이다. 그러면 힘과 돈에 이런 것과 맞서는 다윗의 방법은 역대상 19:12-13절이다. 지금 암몬은 아람과 다윗에게 맞서는 상황이다. 그런데 암몬과 아람군과 맞서고 있는 자는 요압과 아비새얐다. 요압과 아비새가 전장을 지키는 자였다. 실질적으로는 다윗이 행하는 일이기에 생각과 방향대로 모든 것을 수행해야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비새와 요압의 고백은 무엇인가? 서로 돕자고 한다. 암몬과 아람의 사이에 낀 요압과 아비새는 하나님만 계시면 된다고 한다. 다윗을 대표하는 요압과 아비새는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다운 정체성을 유지하는 자들이기에 하나님과 연합된 자이기에, 어떻게든 하나님과만 연합되고,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 승리함을 믿는다. 그렇게 살면 내가 다 세상의 방법 앞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면, 하나가 되면 반드시 이기게 하실 것이다. 코로나 바리러스로 인생에 지나가고 있는 이때에 지금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을 것이다. 그 시간 속에서 무엇을 생각하는가? 정말 마음먹으시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멈추시게 하셨다. 모든 것을 스톱하게 하실 수도 있다. 우리에게 모두에게 요청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상과 연합하는 것을 보시고 멈추어 나를 바라보라고 하시는 것 같다. 세상과 연합함을 버리고 나하고만 연합하여 믿어서 우리를 바라보기를 바라신다. 지금 이 시간을 의미 없이 지나가면 안 되며 하나님의 방법만을 바라며 살고 있는지 아닌지를 잘 생각하는 시간이 되고 정리하는 시간으로 되길 바란다. 하나님은 무언가 대단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을 가지고 산다면 축복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절며하게 포장하지 말고, 모든 것을 정리하고 이 과정이 지나가길 바란다. 다윗의 이 놀라운 핵심 가치와 태도가 우리의 뼈에 새겨지길 간절히 소망한다. 뭔가 내 삶이 힘들어도 결과가 없어도 거리가 없어도 안 될 때 어떤가? 내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당황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로 내 싸움에 집중하고, 나를 선대해 주었던 사람에게 갚아주기를 바란다.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위로 받는다면 얼마나 행복한가. 눈에 보이는 믿음의 결과를 소유하지 않더라도 흔들리지 말고 나는 내 싸움만 집중하자. 받은 은혜를 생각하고 기억하여 그들에게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 허물을 덮어주고 약점을 안아주고 눈물 닦아주는 자가 되길 바란다. 이것이 쌓이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칭찬해 주실 것을 믿는다. 또한 주님과 더욱 가깝게 지내며 내 생애 무엇을 덜어내야 할지를 생각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과 연합하는 분별력으로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위대한 결과는 나타내지 않아도, 위대한 신앙의 길을 끝까지 달려가길 바란다.


 요약
다윗의 순수한 의도를 오해한 하눈이 조문 사절단을 모욕하고 돌려보낸다. 하눈과 암몬 자손들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나하스의 호의에 대해 하눈이 이를 수치와 모욕으로 갚은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그런 상황이 되면 억울함을 느낄 수 있고, 낙담할 수 있다. 하지만 다윗이 조문 사절단을 여리고로 보내 시간을 갖게 하며 끝까지 주님의 때를 기다렸듯이, 요압과 아비새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끝까지 암몬과 아람 연합군에 맞서 싸워 승리를 쟁취했듯이 모든 것은 주님께 맡기고 지금 있는 자리에서 행해야 할 선을 행하는 것, 베풀어야 할 호의와 은혜를 베푸는 것이 정성껏 갚아서 주님의 뜻을 바라보라. 의도치 않은 수치와 모욕이 있다 해도, 호의와 은혜에 대해 생각하는 결과가 다르더라도 낙담하지 않고 더욱 더 힘내서 해야 할 일을 하며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며, 코로나 바리러스도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이때에 더욱 주님과 가까이 하여 그리고 당연히 그 바라보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온전히 그 분의 때를 기다리는 자세가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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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2020. 5. 20)

제목: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말씀: (여호수아 1:1~9)
설교자: 연승철 부목사님


오늘 본문 말씀은 모세가 죽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깊은 슬픔과 두려움에 빠졌다. 누구보다도 여호수아는 슬픔 속에서 불확실한 미래로 인해서 더 큰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러한 때에 여호수아에게 나타나셔서 그에게 그가 해야만 할 일들을 말씀하신다. 1-9절의 핵심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여호수아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이제 요단강을 건너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하라는 명령이시다. 그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 땅의 경계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시고 여호수아 생전에 여호수아를 대적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약속도 주신다. 그러면서 모세에게 함께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도 함께 하시겠다고 하신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여전히 모세가 떠난 이스라엘 처지에 대해서 자기가 감당해야 하는 일에 대해서 두렵고 불안했던 것 같다. 그런 여호수아를 하나님이 설득하신다. 5-9절에서 보면 마치 어린아이들 설득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한다. 7절에도 한 번 더 강조해서 재차 말씀하신다. 9절에도 내가 너에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고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상기시켜 주시면서 마음을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라고 그렇게 여호수아를 타이르고 있다. 여호수아가 두려움을 넘어서서 강하고 담대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여호수아가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고 얼마나 불안해하고 있는지가 드러나고 있다. 여호수아가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것을 잘 아신다. 어떤 것을 두려워하는가? 함께 하시겠다고 하시는데 왜 두렵고 불안해하는가? 하나님은 강하고 담대하라고 거듭거듭 강조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1. 자신의 역량이 부족함을 알기에 두려웠다.
모세가 죽었다. 이제 모세의 역할을 여호수아가 대신해야 한다. 오늘 1절에 보면 모세와 여호수아를 소개하는 설명에 차이가 난다. 모세는 여호와의 종 모세라고 이렇게 소개된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 이렇게 소개가 되었다. 모세는 여호와의 종이고 여호수아는 모세의 수종자라고 말한다. 지금 참모정도의 개념이다. 여호와의 종으로 모세가 있고 여호수아는 모세 아래에 수종자였다. 두 사람의 신분과 위상의 차이가 얼마나 명확한 지 알 수 있다. 여호수아만큼 모세를 아는 자가 없었을 것이다. 모세는 아주 특별한 사람이었다. 시내 산에서 40일씩 하나님과 머물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율법을 전달받은 사람이다. 온유하기가 땅에 어떤 사람보다도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사람이었다. 애굽에서 가장 탁월한 학문으로 준비되었던 사람이다. 그런데 그 모세의 죽음과 그 모세의 부재는 여호수아에게는 두려움이었다. 아무리 용기를 스스로 다잡아 봐도 자신이 모세의 뒤를 이을만한 제목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마도 두려웠을 것이다. 여호수아도 모세의 수종자로서 역할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로 전쟁을 이끌 만큼 군사적 업적도 있고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한 훈련을 받은 사람이었다. 나름 리더쉽과 업적이 내세울만한 것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모세에 비견 될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여호수아가 가진 리더쉽에 자질 면에서나 영적인 면에서 여호수아는 모세를 이를 만한 제목이 되지 않는다고 스스로도 생각했을 것이고 다른 사람도 그렇게 보는게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모세의 영적 거인의 뒤를 이어서 모세가 감당했던 그 일을 이제 내가 감당해야 된다고 생각했을 때에 여호수아는 두려웠을 것이다. 그만한 제목이 안 되니까 그만한 역량이 없다고 역겼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야 한다는 자체가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가나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곳을 정복해야 하고 정복한 그 땅을 이스라엘 12지파에게 나누어 주어야할 책임이 주어졌다. 여호수아가 이끌어야 할 백성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여호수아가 이끌 백성들은 불평과 불순종에 원망을 가진 자들이었다. 하나님의 말씀과는 다른 방향으로 사는 자들이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두려웠다. 하나님이 만나를 주셨지만 그들은 만나를 먹으면서도 하찮다고 원망했던 자들이었다. 메추리고기를 먹을 때 잇사이에 남아있을 때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다. 물이 없다고 하나님을 원망 했고 모세 지도력이 없다고 모세를 대항해서 반역했던 사람들이다. 심지어는 황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 송아지가 애굽에서 인도해 낸 여호와라고 말하며 우상숭배의 길로 빠져들 때 앞장섰던 인물은 대제사장 아론이었다. 얼마나 불순종하고 불평하고 믿음 없이 행동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라보고 하나님은 다 죽여 버리겠다고도 했었지만 자신이 대신해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여호수아는 두려웠다. 여호수아가 아마도 성취해야만 하는 과업이 너무 어려운 것이었기 때문에 두려웠을 것이다. 가나안 정복전쟁을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40년간 어떤 눈에 보이지 않는 국력이 없었다. 가나안은 풍요롭고 너무 강하기 때문에 여호수아가 두려웠고 불안한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 땅을 차지해야 한다는 것이 도무지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고 모세에 비하면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저들을 이끌고 나아가는 것이 두려웠다. 감당할 수 없을 때 두려움이 찾아오는 것이다. 그런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신다. 강하고 담대하라고 요구하신다. 그러면서 두 가지 약속을 주신다. 내가 함께 할 것이다. 임재와 율법 순종의 명령을 주신다. 말씀을 떠나지 말고 묵상하라고 하신다. 우리에게는 암송하라는 뜻이다. 작은 목소리로 읖조리라며 다 지켜 행하라는 핵심을 임재와 동행과 약속과 함께 율법에 을 말씀을 묵상하고 지켜 행하는 것이라고 깨닫는 대로 행하라는 것과 하나님께서 넘어서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임재와 동행, 율법을 가까이 두고 읽는 것이며 묵상하고 그말 씀을 삶으로 살아내라는 것이다 그것이 형통이며 평탄이며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한 것이다. 자신의 한계가 두려웠다. 가나안을 정복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느끼는 두려움이란 것이 우리와 어떻게 연결될까요? 대학부부터 신앙생활을 했다. 은혜를 받고 도전을 받았기에 왠만하면 옥한흠 목사님처럼 사역을 잘 섬길 줄 알았다. 목회자의 꿈을 꾸는 시절에 본인에게 도전을 주셨던 한경직 목사님이시다. 상금을 북한 선교에 내주신 것이다. 청빈하게 살면서 닮고 싶었다. 선배 목사님들의 열정을 바라볼 때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다.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없다. 그런 자신이 없다. 신앙 안에서 자녀들이 그렇게 살지 않아서 부모들이 불안하고 두렵다. 하지만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면 자신이 신앙에서 모범이 되지 못하니 두려운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그렇다 예배당에 예배드릴까봐 두려워들 한다. 신앙 생활하는 것을 불편한 시선을 바라보며 불안해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확실치 않다. 세상으로 보냄 받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정체성과 고백하고 있다. 잘 감당하고 있나요? 일터선교사로 잘 살고 있고, 주부로 가정 선교사로 산다고 하면서 잘 하고 있나요? 쉽지가 않다. 먹고 사는 것이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래서 두렵고 무서운 것이다. 그래서 회피하고 타협하는 것 아닌가? 여호수아도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직면한 것이면서 우리가 직면한 것이 같아 보인다. 그렇다면 답도 같을 것이다. 주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 하시겠다고 하시겠다는 동행하시고 임재하심을 붙들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동행하시고 임재는 말씀을 읽는 것이다. 암송하는 것이다. 깨달아지는 것을 하나씩 하나씩 살아내는 것이 동행하시는 의미이다.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다 지켜 행하라고 하신다. 오늘 지금 여기에서 동일한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과 같다. 도망가서 숨어버리고 싶을 때가 많다. 그냥 모른 체 하고 싶을 때도 있다. 이 세상도 착박하고 쉽지 않은 세상에서 주어진 사명을 선포하고 요단강을 건너서 승리를 쟁취하는 영웅적인 모습이 나와는 너무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그 두려워하고 불안하게 신앙생활 하는 모습이다. 하나님께서 거듭 여호수아에게 담대함을 심어주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동일한 말씀으로 여겨야 한다. 강하고 담대 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두라는 것이며 늘 읽으라는 것이다. 성경책이 닳아져야 한다. 말씀을 열고 살아내고 닫아야 한다. 날마다 샘솟는 은혜로 살아서 일터선교사로 가정선교사로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함께 하길 바란다.


요약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용기를 주신다. 하나님은 모세와의 언약대로 그와 백성이 밟는 모든 땅을 주겠다고 하신다. 또한 적들이 그들을 대적하지 못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든다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 것을 거듭 확신시키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는 아주 위대한 사람이다. 모세가 가나안 땅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들어갔다면 또 다른 상황이 벌어졌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차기 지도자 여호수아를 통해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이끄셨다. 모세의 시종(보좌관)에 불과하였던 여호수아이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이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시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을 여호수아 때에 이루어 주셨다. 자기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까지 결코 백성들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본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약속을 따를 때에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흔들리지 않도록 하시며 내가 순종하고 지켜야할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일까? 여호수아는 백성의 지도자로서 먼저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지켜야 했다. 부모로서, 지도자로서, 리더십으로서 내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 좌우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도록 하나님 말씀을 잘 순종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길 소망한다. 여호와께서 명한 율법을 다 지키라고 하였다. 큰일을 앞두고 우리가 할 일은 주변 환경에 의지하거나, 군사력과 경제, 정치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의지하는 것이 바로 신앙의 모습이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보좌관으로 많은 정보와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생각대로 전략을 세워서 가나안 땅으로 진격할 수도 있었지만, 여호수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대로 실행하는 것이다. 이 교훈은 오늘 지금 우리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 매일 말씀을 읽고 암송해서 임재와 동행을 속에 말씀을 읽고 암송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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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2020. 5. 6.)

제목: ''큰 믿음의 비밀''

말씀 (마태복음 15:21~28)

설교자: 장광천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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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약

1) 자아를 깨뜨리는 자.

문제(수치심)를 주께 드러내며 경멸. 관계를 깨뜨리는 요인수치와 굴욕 속에도 딸을 살리려는 내 자신 내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주를 바라라.

2) 주가 구원자(메시아)라는 믿음.
이사야9:6~7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And he will be called Wonderful Counselor,
Mighty God, Everlasting Father, Prince of Peace
7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3) 주 앞에 엎드려 말씀을 받아드리는 것이다.
딸만 바라보면 예수님을 도구로 주님의 말씀에 대한 여인의 반응
27“주여 옳소이다마는 (자격 없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지만 주의 긍휼을 받고저 합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 - 프로스퀴네오.절하다, 경배하다.
37: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내 뜻대로 안 될때  그때 말씀 앞에 엎드리라. 은혜받을 자격 없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로 삼아주셔서 감사하라는 말씀.

 

 

1.어떤 문제 상항 속에서도 나 자신에게 고정된 시선을 돌이켜 주님만을 바라보고, 순순한 사랑과 믿음의 연합으로 큰 믿음의 역사를 체험하기 바란다.

2. 나의 생각과 뜻이 맞지 않아도 먼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나의 소원과 우상을 내려놓고, 주의 위엄 앞에 엎드리는 예배자가 되어야 함.

3. 문제의 자리를 은혜의 자리로, 수치의 자리를 칭찬과 영광의 자리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은혜만을 전작으로 의지하고 자랑하며, 내 뜻보다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역사가 영광스럽게 이루어지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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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서는

본문에서 그리스도께서 가나안 여자의 딸로부터 귀신을 내어쫓는 유명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이야기 속에는 그리스도께서 불쌍한 이방인을 호의적으로 바라보시는 매우 진기하고 놀라운 내용이 들어 있다. 그리고 또 그리스도께서 이방인을 위하여 예비해 주신 진기한 사랑이 이 이야기 속에 들어 있다. 여기서 이방인을 비추는(2:32) 희미한 빛이 드러난다.

그 여자는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이야기 한다.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자녀들이 괴로움을 당하면 부모들이 걱정을 하게 된다. 다정한 부모들은 자신의 분신인 자녀들의 불행을 아주 민감하게 느끼는 것이다. 따라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라고 한 그 여자의 간청 속에는 "귀신들리신 했지만 그 아이는 여전해 내 딸입니다"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우리의 가족이 가장 큰 불행을 당했다고 그들에 대한 우리의 의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므로 우리는 그들에게 애정을 베풀지 않으면 안된다. 가나안 여자가 그리스도에게 나온 것도 그 여자의 가족이 고통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여자가 믿음을 가지고 나왔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그 여자의 간청을 거절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비록 우리가 어떤 필요에 의해 그리스도에게 나아간다 해도 그리스도는 그런 이유로 우리를 내쫓지 않으실 것이다.

그 여자는 그리스도의 자비를 간청한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 여자의 간청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한 것이었다. 그 여자는 그리스도의 권능을 제한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자비를 구했다. 다시 말해서 그 여자는 필요한 것만을 간청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그리스도에게 맡기고 그리스도의 자비에 의지했다. 자녀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그 부모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과 같다. 곧 우리의 자녀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자기의 자녀들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는 것은 부모들의 의무다. 그러므로 믿음과 기도를 통하여 그 자녀들을 그리스도에게로 데려오라. 그것은 그리스도만이 그들을 고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간청을 한 뒤 가나안 여자가 직면했던 좌절감.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한 모든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이와 비슷한 내용을 찾아 볼 수 없다. 그는 늘 그를 찾아 온 모든 사람들에게 호의를 보이시며 용기를 주셨다. 그리고 그는 그들이 소리치기 전에 응답해 주시거나 아니면 그들이 말하는 동안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여기에선 그와 다른 방법으로 그리스도께서 대하셨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어떤 학자는 생각하기를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들과 다름없이 이방인들에게도 같은 호의를 베풀어 유대인들을 화나게 하려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 여인에게 등을 돌리셨다고 한다.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그 여자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여자를 시험하기 위하여 이와 같이 대한 것이며, 따라서 그리스도는 그 여자의 믿음이 강하다는 것과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 여자가 그와 같은 좌절감을 얼마나 훌륭하게 헤쳐 나갈 수 있는지를 알았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그 여자에게 실망을 안겨주셨던 것은 그 여자의 믿음의 시련이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백성을 대하실 때, 그들에게 자신의 섭리를 특히 자신의 은혜를 베푸시는 방법 중에 모호하고 어리둥절하게 했던 대부분의 방법들이 이 이야기를 통하여 설명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불쾌한 모습을 보이신다 해도 그의 마음 속에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 여자가 특별히 심한 실망을 받게 된 것을 살펴보자.

그 여자가 그리스도의 뒤에서 소리칠 때 그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셨다. 그리스도는 늘 귀를 기울이시며 자기에게 간구하는 불쌍한 자들의 소리를 경청하셨다. 그런데 이 불쌍한 여인에게 그리스도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여자는 어떤 자비나 답변도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자시의 행한 일을 알고도 아무 대답을 하시지 않은 것은 그 여자가 더 열심히 기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 여자에게 자비를 바랄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하게 함으로써 그리스도는 그 여자로 하여금 자비를 얻기 위하여 훨씬 더 끈질기게 간구하도록 했다. 하나님께 열납되는 모든 기도는 즉각적으로 응답을 받지 않는다. 때때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기도에 관심이 없으신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그들의 믿음을 시험함으로써 그들의 믿음을 개선시키기 위한 것이다.

제자들이 그 여자를 위하여 친절한 말을 하자 그리스도는 그 여자의 간청을 거절하시는 이유를 밝혀 그 여자를 더 실망하게 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이 그 여자를 대신하여 간청한 것은 그 여자에게 어느 정도의 위안을 주었다. 그들은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라고 말했다. 비록 제자들도 그 여자의 요구가 해결되기를 바랬겠지만 그들은 불쌍한 여인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일보다 오히려 그들 자신의 편안함을 위하여 그리스도에게 건의했던 것이다. 따라서 제자들이 한 말은 다음과 같은 뜻으로 한 말이다.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질러 우리를 성가시게 할 뿐 아니라 우리를 창피하게 하오니 그 여자의 딸을 고쳐주어 그 여자를 보내소서"라는 뜻이다. 계속해서 끈질기게 간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그것은 선한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뒤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을 좋아하신다.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답은 그 여자의 기대를 완전히 좌절시켰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아무리 끈질기게 요구한다고 해도 현명한 사람의 확고한 이유는 좀처럼 변경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그 여자의 요구에 아무 대답도 하시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여자를 반박하셨으며 하나의 이유를 들어 그 여자의 입을 막았다.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속해 있는지에 대해 질문을 받을 때 큰 시험에 빠진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전혀 의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 여자가 계속 끈질기게 간구하자 그리스도는 그 여자의 간청이 부당하다는 것을 주장하여 그 여자의 간청을 거절하셨을 뿐 아니라 겉으로 보기엔 그 여자를 거의 꾸짖기까지 하셨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26).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그 여자의 모든 희망을 없애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만일 그 여자가 진정으로 아주 강한 믿음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그 여자는 그리스도의 이 말을 듣고 절망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복음의 은혜와 그 부속물로 생기는 기적적인 치유들이 바로 자녀들에게 주어진 떡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것처럼 누구에게나 베풀어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열방에게 결실이 맺어지는 시기를 주어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다(14:16,17). 이들은 곧 특별한 백성에게만 어울리는 특별한 은혜들이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로 간주하여 개로 불렀을 만큼 매우 경멸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스도는 여기서 그런 점을 인전 하신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그는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은혜를 이방인이 나누어 갖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여기신다.

이제 그리스도는 이 가나안 여인의 간청을 다음과 같은 말로 반박하신다. "가족도 아닌 이 여자가 어떻게 자녀의 떡을 먹으려고 생각할 수 있느냐?" 그리스도는 먼저 가장 두드러진 영광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을 낮추시고 그들을 천하고 무가치하게 떨어뜨리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로 말미암아 명예를 얻고, 특권을 누리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자비를 전혀 받을 수 없는 개와 같은 존재로 여겨야 한다. 그리스도는 큰 시험을 주셔서 큰 믿음을 갖게 하시를 기뻐하시기 때문에 때때로 우리가 시험을 받고 정금과 같아지도록 가장 고통스러운 마지막 시험을 준비해 두신다.

이와 같이 시험을 받으면 많은 사람이 침묵 속에 빠져들거나 갑자기 격분하게 될 것이다. 그 여자가 신앙이 약했다면 다음과 같이 말했을지도 모른다. "불쌍하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에게 달갑지 않은 말만 하는구나. 내가 차라리 집에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불쌍한 처지에 놓여 있다고 무시할 뿐만 아니라 개라고 부르기까지 하다니!" 그 여자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했을지도 모른다. "이 사람이 다윗의 자손이란 말인가? 정말 이 사람이 친절하고 다정하며 동정심이 많다고 소문난 그 사람이란 말인가? 나는 개가 아니라 여자다. 나는 불쌍한 처지에 빠져 있는 정직한 여자일 뿐이다. 분명 나를 개라고 부르는 것은 마땅치 않은 일이다." 겸손한 믿음을 가지고 진실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영혼은 모든 것을 선한 쪽으로 말하고 행동할 뿐 아니라 그것을 최선으로 생각한다. 그 여자는 이런 모든 절망을 다음과 같은 태도로 헤쳐 나간다.

그 여자는 자기의 간청을 그리스도께서 들어주시기를 열심히 구했다. 이런 태도는 방금 전에 그리스도로부터 거절을 당했을 때도 나타났다.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25). 그 여자는 계속해서 간구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제자들을 잠잠케 했다. 그는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더 이상 말을 듣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응했다. 그러나 그 여자는 그렇지 않았다. 이와 같이 우리는 부담을 더 민감하게 느끼면 느낄수록 그 부담을 제거하기 위하여 더욱 굳은 결의로 기도해야 한다. 그 여자는 더욱 간청하였다. 그녀는 그리스도를 욕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실수한 것이 아닌가 하고 돌이켜 보는 것 같다. 그 여자는 더욱 겸손하게, 자신의 행동이 예수님께 혹시나 거만하게 보이지 않았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와서 예수께 절하였다.' '또한 그 여자는 자기의 열심히 부족하지 않았는가 하여 이제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외쳤던 것이다. 기도의 응답이 늦춰질 때 하나님은 응답이 늦어지는 것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이 기도하고 더 좋은 기도를 하도록 가르치신다.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하고 실망을 당하게 될 때 기도를 더 열심히 해야 한다. 그 여자는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도 보내셨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는다. 믿음이 약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에 대한 선택 때문에 질문하고 의심함으로써 당황하게 된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자기들의 목적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 좋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한 그 여자의 기도는 매우 간절하지만 포괄적이고도 열렬했다. 그 여자가 이와 같은 기도를 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 때문이었다.

 

첫째, 그 여자는 자기의 처지를 슬퍼했다. 상한 심령을 가진 자들이 슬퍼하는 것은 헛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때에 그들을 살피시기 때문이다. 또한

둘째, 그 여자는 시험을 당하는 이때에 자기를 도와주시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다. 그 여자는 이처럼 언짢은 일을 당했을 때 믿음을 지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기도했던 것이다.

셋째, 그 여자는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한 본래의 요구를 굳게 주장했다. 이 말은 곧 "주여 제가 오게 된 목적을 이루게 하소서"라고 한 것이다. 그 여자는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도울 수 있으며 또 기꺼이 도우실 것이라고 믿었다. 그 여자는 여전히 그리스도를 선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또한 자기의 주장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 기도가 웃음거리로 되고 또 우리가 그런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게 한다면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여자는 경건하고 훌륭한 믿음으로 매우 놀라운 간청을 했다. 이 가련한 여인을 그리스도의 말씀을 반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말씀에 순응하기로 결심한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27). "주여 옳소이다"라고 한 그 여자의 고백은 매우 겸손했다. 우리는 겸손한 신도를 그와 같이 비천하게 말할 수 없지만 그리스도는 언제든지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이다. "주여 옳소이다. 제가 그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개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자녀의 떡을 함께 나눌 권리가 없습니다." 그 여자가 이 말을 하고 나서 간청을 한 것은 매우 영리한 행동이었다.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그 여자가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것을 통하여 논증을 한 것은 매우 총명하고 영적으로 기민하고 영민했기 때문이었다. 생동적이고 적극적인 믿음은 우리를 곤란하게 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까지도 우리에게 유익이 되도록 한다. 우리는 우리를 실망케 하는 것 속에서도 믿음을 통하여 용기를 얻을 수 있다. 따라서 그 믿음은 우리를 밀어내려고 뻗어진 손을 잡음으로써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도록 한다. 그 여자의 간청은 바로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한 것이다. 진실로 충분한 정식은 자녀들만을 위하여 마련되지만 그 자녀들이 먹다 떨어뜨리는 작은 부스러기들은 개들이 먹어도 아까와 하지 않는 것이다. 그 여자의 겸손과 궁핍은 그 여자로 하여금 부스러기라도 기뻐하게 만들었다. 스스로 아무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든 것에 감사할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있는 지극히 적은 것이라도 신자에게는 귀한 것이며 그 이유는 그것이 바로 생명의 떡 부스러기이기 때문이다. 그 여자의 믿음이 그녀로 하여금 이런 부스러기를 기대하도록 자극했다. 부자의 식탁에서 그 자녀가 먹듯이 개도 떡 부스러기를 먹는데 하물며 그리스도의 식탁에서는 더욱 그렇지 않겠는가? 그 여자는 그리스도의 식탁을 주인의 식탁이라고 부른다. 진정 그 여자가 개라면 그 여자는 주인인 그리스도의 개가 될 것이다. 비록 우리가 문지방에 거한다 해도 그곳이 하나님의 집이라면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모든 간청에 대한 좋은 결과의 성공 : 그 여자는 이 노력을 통하여 신뢰와 위로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 여자는 비록 가나안 사람이었지만 진실한 이스라엘의 딸임을 입증하였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28). 이제 그리스도는 본심으로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신다. 그러므로 그는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 여자의 믿음을 칭찬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칭찬하시는 것은 바로 그 여자의 믿음이다. 그 여자가 기지를 발휘하여 이 일을 잘 처리한 것은 여러 가지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곧 지혜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와 꾸준한 기도였다. 그러나 이것들은 바로 그 여자가 지니고 있는 믿음의 산물이었다. 믿음은 모든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 가장 큰 영광을 돌리는데 그리스도께서도 모든 은혜들로 말미암아 믿음에 대해 가장 큰 영광을 돌리신다. 그것이 바로 그 여자의 믿음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모든 성도들의 믿음이 다 귀중하지만 그들의 믿음이 모두 다 강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모두 같은 정도의 발전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믿음의 위대성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원수로 대하시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그를 절대적으로 신봉하여 친구로 여겨 사랑하고 신뢰하는 데 있다. 진실하기만 하다면 약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도 거절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큰 자는 칭찬까지 받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네 소원대로 되리라'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 여자의 딸을 고쳐 주셨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곧 "내가 너의 간청을 도저히 거절할 수 없으니 네가 온 목적을 이루고 가라"라는 뜻이다. 믿음이 큰 자들은 구하고자 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의지가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는 뜻과 부합되었을 때 그의 의지도 우리가 바라는 뜻과 일치할 것이다. 결코 그리스도를 거절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비록 한동안 자신의 모습을 그들로부터 숨기시는 것처럼 보여도 그들을 끝까지 거절하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 결과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화답하였다. 그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그 어미의 믿음이 딸을 치유하게 한 것이다. "그가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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