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3월 22일)
제목: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복"
말씀: 시편 128:1~6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권진우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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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28:1~6,
1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2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3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4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5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며.
6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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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시편 128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복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시편 기자는 1절에서,
 
*시편 128:1,
1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 ‘경외하다’는 단어가 많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여기서 ‘경외’는 누군가를 향한 지극한 사랑과 존경에 나오는 두려움, 혹은 조심스러운 마음을 의미한다. 단순히 잘못하면 불이익 당하고 벌 받을까봐 갖게 되는 그런 두려움이 아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면 그 관계 속에서 감동을 받게도 하고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기도 한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어서 관계가 멀어짐이 없도록 마음과 짐과 행동을 매우 조심하게 된다. 일례로 우리가 학교 다닐 때, 인격이 존경스럽고 나를 아껴주는 선생님이 계시면 어떻게 하는가? 그 과목은 더 열심히 공부하게 된다. 더 선생님께 주목 받고 싶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행동거지를 더 조심하게 된다. 그것은 단지 매를 맞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그 선생님을 좋아하고 존경하기 때문에 나오는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저는 대학교를 신학교를 나오지 않고 화학을 전공했다. 제가 화학을 전공하게 된 계기가 있는데, 제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문과와 이과를 선택하지 않는가? 제가 딱 이과를 선택했는데, 이후에 구체적으로 내가 무엇을 전공해야 될지 참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그때 저의 고민을 알고 있던 저의 친한 친구가 옛날 그 유명한 한샘학원을 하실 것이다. 그 학원에 단과 화학 선생님이 정말 잘 가르치신다고 했다. 자기와 함께 다녀보자고 권면을 했다. 그래서 그 친구를 따라서 그 학원 화학 단과 반을 다니게 되었다. 그때 처음 본 학원 선생님의 첫 인상이 어땠냐면 요즘 인기 있는 요즘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슬램덩크에 안 감독님을 알 것이다. 그 분과 외모가 아주 비슷했다. 안 감독님보다는 좀 더 젊으시지만 연세가 지긋이 있고 아주 인자하게 생기셨다. 그런데 이 선생님이 그 어려운 고등학교 화학을 너무 재미있고 쉽게 잘 가르치셨다. 게다가 인품도 아주 훌륭하셨다. 학생들이 집중 안하거나 졸면 혼을 내시는 것이 아니라 천 원짜리 한 장, 또는 두 장을 딱 꺼내 놓고 돌발퀴즈를 내셨다. 그때 천원은 그 당시 학생들에게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그런데 손을 들어서 돌발퀴즈를 딱 맞히면 그 돈을 그 자리에서 직접 건네주시면서 잘했다고 칭찬을 많이 해 주셨다. 그런 선생님을 저는 매우 존경하게 되었다. 그리고 돌발퀴즈를 더 열심히 하기 위해서 화학 공부를 정말 열심히 하게 되었다. 그것은 결코 돈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이다. 한 번이도 더 선생님과 눈을 마주치고 싶고 칭찬을 듣고 싶은 마음이 제 마음이 훨씬 더 컸다. 그리고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수업시간 보다 일찍 와서 칠판 정리도 다 하고 선생님이 드실 음료수를 미리 준비해 놓았다. 그리고 혹시라도 다른 친구가 사온 것이라고 착각 하실까봐 포스트잇에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권진우 올림”을 딱 크게 써서 음료수에 붙여 놓았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보는 Test도 있었는데 정말 선생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에 정말 열심히 공부해서 거의 매번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다. 그것은 절대로 선생님한테 매 한 번 덜 맞고, 선생님에게 안 찍히려는 동기에서 나오는 열심이 아니었다. 너무나 존경하는 그 선생님과 멀어지고 싶지 않은 그런 마음의 동기였다. 그러다가 제가 화학과를 가게 된 것이다. 이 성경에 나오는 경외라는 단어가 이와 비슷한 면이 있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사랑과 존경심에 바탕한 두려움, 다만 잘못하면 벌 받고 혼날까봐 갖게 되는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여서 나의 잘못된 행실로 인해 그분과 관계가 단절되고 멀어지는 게 싫어서 갖게 되는 두려움이 바로 경외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여호와를 마음으로부터 진정으로 경외하는 자가 나타나게 되는 삶의 모습은 무엇인가? 오늘 1절 중반에 나오는 것처럼 그의 길, 즉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을 걸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분께 더 잘 보이고 싶고 실망시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과 사랑과 존경에 대한 경외이기 때문에 여호와를 두려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분을 찾고 만나려고 하고 의지하려고 할 것이다. 만일 인격적으로 존경을 갖지 않는데 그냥 무섭고 엄하기만 한 선생님이 계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는가? 피해 다닐 것이다. 우리한테 가까이 오면 멀리 돌아서 지나갈 것이다. 그러나 존경과 사랑이 전제가 되어 있으면 그 선생님이 계신 자리에는 항상 함께 하려고 하고 누구보다 곁에 있으면서 눈에 띄려고 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그 반응이 말씀과 기도를 통해 주님을 더 자주 만나고 찾으려고 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려고 할 것이다. 상대방에 대한 진정한 경외는 더 자주 찾고 만나려는 모습으로 반응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자신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복을 오늘 말씀에서 크게 네 가지로 말씀하신다.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 당사자에게는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다. 라고 오늘 말씀하고 계신다. 이것은 당시에 농사짓는 배경으로 표현하고 있다. 고대사회에서 수고한 대로 먹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매우 중요했다.

첫 번째는, 농사를 지을 물이 넉넉해야 한다.

두 번째는, 그 수확한 것에 대해 주변 나라들로부터 약탈을 당하지 않도록 안전이 보장이 되어야 한다.

-이 두 가지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이 성경에 쓰여 진 이 고대사회에서 이러한 조건을 잘 갖춘 천혜(天惠)의 지역이 있었는데 거기가 어디였냐면 오늘날 이집트에 해당하는 애굽이었다. 애굽은 나일 강이라는 큰 강을 끼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여름에 큰 비가 내리면 이 나일 강 물이 막 범람(氾濫)을 하면서 그 강 주변으로 농사짓기에 좋은 검은 흙들이 막 쌓이게 된다. 이게 뭐냐면 따로 거름이나 퇴비(堆肥)를 줄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큰 비가 멈춘 후 홍수(洪水)가 멈추고 나면 그 나일 강 주위에 그 기름진 땅, 그 검은 흙 위에 씨만 뿌려주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곡식들이 알아서 잘 자라서 애굽의 왕과 그 고위층만이 아니라, 하층민까지 충분히 먹을 수 있는 많은 양의 곡식을 수확을 할 수가 있었다. 더군다나 애굽은 지형적(地形的)으로도 이 사방(四坊)이 사막(砂漠)과 지중해(地中海)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이것이 천연의 요새(要塞)가 되어서 외부의 침략을 받는 일도 거의 드물었다. 이처럼 애굽은 농사짓는데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옛날에 세계 7대 불가사의인 피라미드 같은 고난도 건축물도 세울 수가 있었던 것이다.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사정이 달랐다. 이스라엘은 일단 큰 강이 없다.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강은 뭐가 떠오르는가? 그런데 요단강은 평상시에는 강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수량도 부족하고 그 규모가 상당히 작았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이스라엘이 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늘로부터 때에 맞게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내려주어야지만 포도농사도 짓고 올리브 농사도 지을 수 있었다. 제때 풍족한 비가 내리지 않으면 다른 곳에서 물을 구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해 농사를 완전히 망쳐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그토록 하나님께서 의지 말라고 하는 비와 폭풍의 신인 바알을 끝까지 버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비가 아니면 살 수가 없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스라엘의 나라는 적군이 많았다. 서쪽으로는 블레셋이 있고 동쪽에는 앗수르와 바벨론이 딱 버티고 있었다. 하늘로부터 제 때 내려주어서 농사를 잘 짓고 나면 그 수확의 시기에 맞추어서 외부의 세력들이 호시탐탐 약탈할 기회를 노렸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힘이 약해지고 경비가 허술할 때 치고 들어와서 모든 수확물을 다 거두어 가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나라가 요즘 날샘(날마다 솟는 샘물) 큐티에 등장하는 블레셋인 것이다. 이런 일이 발생하면 그동안 애썼던 모든 수고가 헛된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애굽과는 달리 제때 비가 내리지 않고 외부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하면, 수고한대로 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무어라고 하시는가? “너희가 여호와를 경외하면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수 있도록 때에 맞게 비를 내려줄 수 있다.” 고 말씀하신다. 모든 풍족한 수확(收穫)을 위한 조건들, 그 조건들을 다 갖추어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수확한 것을 이방민족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내가 창과 방패가 너희에게 되어주겠다고 하신다. 네가 복되고 형통하다고 느낄 정도로 오늘 2절에 말미에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라고 나오고 있는데,
 
*시편 128:2,.
2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네가 복되고 형통하다고 느낄 정도로 당시에 애굽 못지않게 수고한대로 풍족히 먹게 해주겠다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약속하시는 것이다. 그러니 너의 존재하지도 않는 바알 같은 것들 의지 하지 말고 오직 만물의 주관자 되신 ‘여호와를 경외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오늘 날 우리는 이 성경 본문에 나오는 당시보다 훨씬 문명화된 곳에 살고 있고, 지식과 정보에 기반을 둔 사회에서 살고 있다. 오늘 날 우리가 수고하고 애쓴 만큼의 수확을 거두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때에 맞게 지혜의 단비를 내려 주셔야 한다. 시대에 맞는 창조적인 창의력을 허락해 주셔야 한다. 또한 때가 되면 주저하지 않고 담대함을 갖고 일을 추진해 나갈 수 있는 우리 마음 가운데 은혜의 단비를 내려 주셔야 한다. 풍성한 수확을 위한 이른 비와 늦은 비는 옛날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늘 날 이 시대에 맞게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그 비를 우리에게도 내려 주셔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수확을 거둔 이후에도 약탈을 위해서 부지불식간에 침략해 들어오던 그 블레셋처럼 내가 미쳐 생각하지 못한 컨트롤 할 수 없는 영역에서 문제가 생기고 갈들이 생겨서 우리가 손해를 보는 경우가 일하다 보면 발생하지 않겠는가? 이처럼 내가 보지 못하고 내가 컨트롤 할 수 없는 영역은 누가 지켜 주셔야 하겠는가? 하나님 밖에 지켜주실 이가 없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가 수고한대로 먹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경외하는 자의 삶을 수고하는 자의 손에 영역에 미치는 않는 모든 영역에서도 지켜주신다. 라고 오늘 말씀에 다 포함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수고한 것이 헛되지 않는 인생이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신다. 삶 가운데 이 은혜를 경험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바란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왜? 자신을 경외하는 자에게 허락되는 복의 첫 번째로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을 가장 먼저 이야기 하시는가? 먹는 것을 가장 먼저 이야기 하셨는가? 우리가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우리의 필요로 채워주시는 연결되는 말씀을 자주 발견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마태복음 6장 33절을 보겠다.
 
*마태복음 6:33,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삶에 필요한 모든 것들도 더하여 주신다고 약속하신다. 이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주기도문에서 보면 어떠한가? 초반에는 하나님의 뜻을 위한 기도를 하게 한 이후에 이어서 중간에 뭐가 나오는가? 우리에게 무얼 달라고 하는가?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를 하라고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서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허락하시는 첫 번째 복이 수고한대로 먹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하시고 계신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를 구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첫 번째로 허락하시는 약속과 복이 다른 것도 아니라, 먹을 것을 채워주시는 것이 먼저 나오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분을 경외하며 사는 게 삶에 자꾸 먹는 것,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과 연결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모든 만물가운데서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경외 받으시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녀들을 통해서 영광 받으신다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영으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그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살아있는 눈에 보이는 자녀들의 영혼 가운데 함께 하셔서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을 나타내 사 높임을 받으시고 영광 받으신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작정하신 방법이다.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 만물 가운데 영광 받으시고 그분의 일을 행하시며 경외함을 받으시기 위해서 전제되어야 할 조건은 무엇이냐면, 바로 그분의 자녀들의 생존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을 통해 영광 받으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그분이 선택한 자들의 생존은 필수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구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을 넉넉히 채워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계획과 마음을 알고 우리의 필요를 구하고 양식을 구해야 한다. 그냥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했으니까 그 상으로 원하는 것을 주신다는 것은 그런 기복적인 의미가 절대 아니다. 우리의 육신의 필요를 채우셔서 살아 있는 우리를 통해 영광 받으시기로, 하나님께서 또 일하시기로 하나님께서 작정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목적으로 일용할 약식을 위한 수고를 감당해야 되고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기도해야 된다는 것이다. 분명한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여호와를 경외한대로 수고한 대로 결실을 맺으며 또 그 생명과 힘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 또한 우리가 오늘 본문 3절을 보면,

*시편 128:3,
3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복의 그 다음은 가정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내 아내는 결실한 포도(葡萄)나무 같으며, 자식들은 어린 감람(橄欖)나무 같다고 약속을 하신다. 여기에 아내와 자녀들을 비유하는 이 포도나무, 감람나무, 다른 말로 하면 올리브 나무인데 이 감람나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좋아하는 열매를 맺는 유실수이다. 몸에 영양분을 공급하고 기분을 좋게 하는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면 그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를 섬기는 마음으로 각자의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그리고 상대방의 내면을 아프게 하고 악하고 공격적인 말이 아니라 서로를 건강하게 하고 세워주는 사랑과 격려의 마름을 하게 되는 것이다. 서로를 기쁘게 하고 건강하게 하는 유실수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정의 복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기도 하지만 또한 앞으로 하나님이 주실 약속이 될 수도 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설령 내 배우자와 내 자녀가 결실한 포도나무요, 어린 감람나무라고 말하기에 부족함이 있을지라도 그 과정 안에 있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그 가족 구성원, 그 한 사람으로 인해서 오늘 3절의 말씀이 장차 반드시 이루어져가게 된다는 것이다. 아직 배우자가 결실한 포도나무와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믿는 자 역할을 하지 않아 기도 제목이 될 수가 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면 그 배우자의 변화를 위해서 믿는 남편, 혹은 아내로서 감당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남편은 아내를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려고 하고, 아내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를 따라서 남편의 권위에 순종하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나의 그 노력과 섬김의 배우자가 막 감동 받고 곧바로 반응이 오면 좋겠는데 그것이 쉽지 않은 경우가 많이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마음의 상처를 더 주는 말을 하기도 한다. 또한 사단이 믿음의 가정을 세우는데 쓰는 중요한 전략이 하나 있다. 약을 올리는 것이다. ‘네가 이래도 잘하나 보자.’ 하면서 평소에 마시던 술을 일부러 두 배로 더 마시게 하고, 상대방이 싫어하는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도 하게도 한다. 그런 모습을 보면 어떠한가? 인간적으로 다 집어치우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네 마음대로 살아라.’ 할 것이다. 사람의 힘으로 오래 인내하기 힘들고 화가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다스리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지만 오로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전적으로 그분을 의지할 때,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주관하셔서 우리에게 인내할 힘을 주신다. 상대방을 향한 분노가 아니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주셔서 그를 위해 기도하게 하시고, 끝까지 믿음의 배우자로서의 본분을 감당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마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끝까지 인내하시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인내하실 때에, 그 마음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품게 하시는 것이다. 그럴 때 어느 순간 상대방의 완고한 마음은 점점 꺾이게 되고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인내와 수고가 다리 역할이 되어서 그가 주님 앞에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이라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여호와를 경외하면 자식들이 감람나무, 즉 올리브나무와 같은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가 될 것이라고 우리 하나님은 약속하신다.
 
저는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패역함을 꾸짖으시는 한 가지 좀 충격적인 말씀이 마음에 들어왔다. 약간의 충격적인 말씀인데, 에스겔 16장 20절을 보자.
 
에스겔 16:20-21,
20 또 네가 나를 위하여 낳은 네 자녀를 그들에게 데리고 가서 드려 제물로 삼아 불살랐느니라 네가 네 음행을 작은 일로 여겨서.
21 나의 자녀들을 죽여 우상에게 넘겨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였느냐.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여러 범죄를 저질렀는데 그 중에 어떤 범죄가 있었냐면 자신의 자녀를 우상에게 제물로 바치는 일이 있었다. 자녀를, 이것은 당시 실재로 모압 족속의 신인 몰록에게 자녀를 불로 태워 제물로 바치는 인신제사가 있었다는 것이다. 아니 왜 이렇게 자녀를 제물로 바치는 어처구니 일들을 이 시대에 자행했던 것인가? 그것은 바로 신 앞에 인간이 나타낼 수 있는 최고의 정성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가장 아끼는 자녀까지도 당신한테 바치니 우리 공동체 큰 번영과 영화를 주시기를 원하는 것이다. 제물로 희생된 자녀는 신을 통하여서 좋은 곳에 있을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믿음을 가졌다는 것이다. 이런 인신제사가 충격적이지 않는가? 우리에게 너무나 충격적으로 다가오고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 앞에 자녀를 드리는 인신 제사가 오늘날 정말 우리에게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올해 저희 자녀가 고3인데, 자녀가 수험생이 되면 ‘너 올해는 공부에 전념해야 되니 대학생이 되면 예배 나가고 교회활동을 자제하라.’고 권면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다. 이것이 세상의 성공이라는 우상 앞에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 영혼을 불사르는 일은 아닐 것이다. 인간적인 욕망과 욕심이라는 우상 앞에 부모의 따뜻한 사랑과 돌봄을 받아야 할 자녀의 정서가 메마르고 자존감은 밑바닥까지 내려앉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녀에게 심어놓으신 은사 소명은 설자리를 잃어버리고 만다. 영적으로 본다면 현대판 인신제사가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신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식들이 감람나무와 같을 것이고 자신의 영혼과 삶이 풍요로울 것이며 오늘 감람나무, 이 유실 수 같은 이 존재로 그의 가정과 장차 자녀들이 속할 공동체를 유익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평생을 세상만 바라보며 세상에 파묻혀 바라보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는 자가 되어서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가장 가치 있게 쓰임 받게 될 것이라. 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면서 오늘 시편 기자는 3절 이후의 4절에서 이런 말씀을 하고 있다.
 
*시편 128:4,
4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다시 말해서 참으로 이것은 분명하다고 단정 지으며 말씀한다. 이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개인과 가정이 놀라운 복을 누리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런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복은 내 개인, 내 가정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예루살렘이 번영하며 내 자식의 자식이 보게 될 것이다. 5절 6절을 보면,
 
*시편 128:5-6,
5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며.
6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
-여기에 보면 예루살렘이 번영하며 네 자식의 자식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고대 사회에서는 영토를 빼앗기 위한 국가 간의 전쟁이 꽤 많이 있었다. 그것은 어떤 명예이기 앞서서 생존이 직결되는 문제였다. 고대 근동의 어떤 지역의 하나의 도시를 이루고 어떤 집단이, 살았던 집단이 그 지역의 인구가 늘어나는데 비해서 농사지을 땅은 부족해지고 가축을 먹일 목초지가 부족해지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옆에 힘이 약한 근접한 도시 국가를 공격해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격은 매우 맹렬하고 잔인하게 이루어져서 심지어는 임산부와 어린아이까지 목숨을 앗아가게 했다.
 
대표적으로 여러분이 잘 아시는 앗수르가 그러한 일들을 많이 행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왜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했는가? 그게 무언가하면 원래 민족이 민족성이 원래 잔인해서가 아니라, 그 상대방이 그 침략을 받는 나라가 어린 아이들이 성장하면 다시 보복할 가능성이 있기에 그것을 완전히 제거해 버리기 위해서 임산부 애들까지 다 죽여 버리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한 번 나라가 힘이 약해져 침략(侵略)을 당하게 되면 그 나라는 번영(繁榮)이 아니라 쇠퇴(衰退)를 넘어서 침몰(沈沒)을 하게 되고 자식의 자식을 보는 게 아니라 그 당대에서 대가 끊겨버리게 되는 너무나 비극을 맞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 당시에 이 번영이라는 이스라엘의 번영이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이스라엘의 번영이라는 말을 사실은 상당히 거리가 있는 나라였다. 군사력이 그리 강하지도 않고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애굽이나 앗수르처럼 나라 안에 큰 강이 있어서 먹을 것이 풍요로운 것도 아니었다. 그냥 변방에는 하나님의 작은 초라한 나라에 불과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보잘 것 없고 악조건만 있는 이 민족에게 무얼 말씀 하냐면 한 번도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번영을 이야기 하시고 내 자식의 자식을 보게 될 것이다. 라고 감히 다른 나라가 침범하지 못하도록 평강을 허락하겠노라고 약속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무기가 많아서인가? 아니면 인구가 많아서인가? 하나님은 단 한 가지만을 말씀 하신다. 너희가 여호와를 경외하면 그의 길을 걸으면 자식의 자식을 볼 것이라고 분명히 약속하고 계시는 것이다. 결국 여호와가 힘과 방패가 되시고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공급자가 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또한 다른 말씀을 보면 이방민족들이 이스라엘 때문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하는 여호와를 두려워 떨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까지 이스라엘에 대해서 그러하시는가?
 
첫째는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기 때문이고 열방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제사장 나라를 이스라엘을 삼기 위함인 것이다. 그러하기에 저와 성도님들 각자 한 사람이 기도의 사람이 되는 것은 비단 나와 가정뿐만이 아니라, 한 지역과 나라를 지키는 영적 파수꾼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을 믿는다. 우리가 언론과 뉴스를 통해서 매 정치적, 사회적으로 여러 뉴스와 사건들이 들려온다. 또 우리나라는 작은 나라이고 실제적으로 자원도 거의 없는 나라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담임목사님께서 늘 말씀하시는 것처럼 인구도 적고, 땅도 작지만, 그리고 자원도 없지만 어떤 자원이 있는 나라인가? 기도자본이 있는 나라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기도로 자리를 지키는 의인 열 명을 주목하시고 그들로 인하여서 이 나라를 지키시는 것이다. 대한민국을 번영하게 하시고 대한민국의 자식의 자식을 보게 하시고 대한민국의 평강을 주실 것을 믿는다.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저와 여러분의 기도에 달려 있는 줄 믿는다. 그래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기도의 자리를 지키는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누리게 되는 복에 대해서 우리가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너무나 당연한 말 같지만 왜 우리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요구하시는가? 먼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우리와의 관계를 하나님이 회복하시고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달리게 하셔서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또 앞으로도 짓게 될 미래의 죄의 모든 죄를 예수님께 다 담당하게 하셨다. 그리고 그 사실을 믿는 믿음도 우리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완악한 처지에 있으니까, 은혜로 믿고 받아들이게 하셨다. 구원의 방식도 하나님이 마련하시고 그것을 믿는 것도 하나님께서 조치를 취하신 것이다. 다 하나님이 하셨다.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며 함께 하는 관계로 우리를 하나로 묶어놓으셨다. 이처럼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또한 무얼 원하시냐면 우리에게 사랑받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한다.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원하신다. 그렇게 본다면 어쩌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오늘 시편 말씀과 같은 이 네 가지의 그 큰 구한 네 가지의 복을 주시겠다고 하는 것도 여기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냐면, ‘네가 나와 교제를 하고 사랑을 하는데, 다른 무엇 때문에 지장을 받지 않도록 나머지는 내가 다 책임져 줄게’ 나머지는 여기에 담겨있음을 생각을 한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결국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인가? 단 하나, 저와 여러분 우리 자신인 것이다. 우리를 너무나 존귀하게 여기신다. 그래서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은 자, 즉, 그 자, 그 한 사람, 우리를 원하시며, 그 외 그렇게 걸으면 그 외 다른 것들은 그것 때문에 네가 정신이 생각이 분산되고, 나를 위한 집중이 어려움이 없도록 하나님의 손 안에서 다 지키시고, 채우시고, 해결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될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면 되는 것이다. 올 한해 전심을 다해 하나님을 경외하며 오늘 시편 말씀의 약속을 경험하며 복된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바란다.
 
♣요약
우리에게 먼저 무한한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삶에 부족함이 없도록 채워주시겠다고 약속하시니 항상 주님을 경외하며 우리의 삶을 통해 영광 받으시기 위해 우리 개인뿐만이 아니라 가정과 민족과 나라까지 복되게 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깨달아서 우리는 사명감을 가지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복을 누리며 나라와 민족을 위한 영적 파수꾼의 역할을 신실히 감당하여야 한다.
- 개인과 가정과 나라를 안락하게 할 수 있는 복의 길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의 말씀을 복종하는 것이다. 신앙과 경건은 번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리는 그러한 찬양을 하나님께 돌리며 진리에 대한 굳건한 신념과 믿음으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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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3월 15일)

제목: "놀라운 그 사랑"
말씀: 요한일서 4:7~9
찬양인도: 쉐키나(유재원 부목사님)
 
설교자: 문진호 부믁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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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4:7~9,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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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저는 제 아들들과 치킨을 먹거나 피자를 먹을 때 살많은 닭다리 보다는 날개, 토핑이 얹어있는 것보다는 부실한 조각을 먹는다. 그리고 천천히 먹는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돈은 내가 냈는데 내가 차지하는 무게가 더 적다. 참 비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생각은 합리적이지 못할수록 제 마음에는 기쁨이 더 커진다는 사실이다. 내 몫을 줄이면 아들들의 몫이 커진다는 생각에 기쁘다. 대부분 부모의 마음이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다. 부모는 자녀들의 기쁨을 양식으로 삼는 것 같다. 그때 문득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해 보았다. ‘내가 기뻐할 때, 아버지 하나님도 행복해 하시겠구나!’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그 사랑의 본질이 더 궁금해졌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요한일서 4:7~9,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이 사랑이시다.’ 라고 할 때, 그분의 본질이 사랑이시라는 것이다. 그분을 알고 싶고 그분 안에 거하고 싶다면 그 사랑을 알아야 한다. 저는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그 사랑의 관한 이야기 세 가리를 나타내고자 한다.
 
첫 번째, 그 사랑은 우리를 살리기 위한 사랑이다.
 
*요한 1서 4:9-10,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이어지는 10절도, 내용을 상세히 설명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죄를 속하여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지기 위해 그 아들을 화목제물로 내어주시는 사랑이었다. 우리의 죄인 됨은 가치 없는 상태를 보여준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무가치한 것을 살리기 위해서 무한한 가치를 내어주시는 비합리적인 거래를 하셨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 놀라운 하나님의 그 사랑이다. 무가치한 나를 용납해 주신 그 사랑이 우리를 살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가 진노의 자녀, 사랑밖에는 도저히 발견할 수조차 없는 죄인 되었을 때, 보여주신 하나님 사랑의 완결판이다. 무가치한 우리를 용납해 주신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파격적이었는지 다음에 이야기가 우리에게 가르쳐주신다. 탕자의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브래너 매니게 이야기를 조금 더 우리 식으로 바꾸어 보았다. 약간 길지만 한 번 들어보자.
 
*여러분의 막내아들을 미국의 아이브 리그 대학교에 유학을 보내 학교를 마치도록 여러분이 돈을 댔다고 하자. 기숙사비, 등록금, 용돈, 집에 오가는 항공료, 교통비가 4년간 3억 원이 넘는다. 아들이 졸업한다. 여러분은 아들 친구들과 그분의 친구들을 200명을 불러 성대한 파티를 열어주었다. 성대한 철갑상어 요리, 피자와 리플 포도주, 각종 디저트가 나온다. 익명의 아이유 등, 유명 가수들이 공수되어 음악을 선사한다. 축제는 새벽에 끝났다. 당신은, 여러분은 아들과 함께 벽난로에 앉아 아들에게 즐거운 마음으로 보냈냐고 묻는다. 그러자 아들이 대답한다. “솔직히 말씀을 드리지요. 저는 이제 아버지도, 아버지의 가치관도, 아버지의 얼굴도, 지긋지긋 합니다. 내일이 제 보험금 만기일이니 독립하겠습니다. 대학 졸업장도 땄으니 그것을 가지고 성공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기가 막히고 억장이 무너지지만 그것 가지고 말릴 수도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이유는 만 3년 동안 당신은 아들의 생사조차 모른다. 전화 한통, 엽서 한 장도 없다. 경찰도 행방을 찾을 수 없다. 그러던 어느ㅍ날 월요일 새벽 3시 초인종이 울린다. 몽롱한 상태로 현관에 나와서 당신은 충격에 빠진다. 아들이 단정치 못한 이제 옷차림으로 립스틱 자국을 묻힌 채, 술기운을 풍기며 문간에 서 있다. 여러분이 그 아버지라면 돌아온 탕자에게 어떻게 하겠는가? 그 아버지는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눈물과 입맞춤을 퍼부으며 불이라는 불을 다 켜고서, 방 안에 자고 있는 아내를 소리쳐 부른다. “여보, 아껴두었던 샴페인을 터트리고 헨델의 메시아를 틀구렴, 진호가 돌아왔소,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왔소.” 사실 심각한 이야기이다. 웃으면 안 되는데,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이런 분이시다.
 
여러분이 아버지 집에 가고 싶어 하는 것보다 여러분이 그 집에 오기를 아버지께서 더 원하시고 계시다는 것이다. 실패해도, 넘어져도, 아니면 실망하고, 힘이 빠졌던지 간에 언제든지 우리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우리를 두 팔로 안으시고 환영해 주시는 사랑의 아버지가 계신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용납이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되어야 할 모습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신다. 좀 다르게 표현하면 우리가 왕이신 하나님의 식탁에 앉을 만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 할지라도 언제라도 왕이신 하나님의 식탁에는 우리가 앉을 자리가 있다는 것이다.
 
요나단 때문에 다윗왕의 식탁에는 므비보셋의 자리가 있었다. 평생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사울왕의 손자, 원수의 손자, 므비보셋이다. 다리를 저는 불구자였다. 다윗을 위해 전쟁에 나가 힘이 되어줄 수 없는 이런 외적인 것을 조그만 보면 무가치한 존재, 므비보셋이다. 그러나 다윗을 사랑했던 요나단으로 인해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다윗왕의 식탁에 앉았다. 무가치한 존재인 우리를 사랑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주신 예수님으로 인해 왕이신 하나님의 식탁에는 우리의 자리가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식탁으로 나오시기 바란다. 그분의 공급을 받으시기를 바란다. 항상 예비 되어 있다. 아침과 저녁으로 큐티와 기도로, 함께 드린 공적인 예배와 기도의 자리로 나아오시기 바란다. 우리를 위해 예비 된 식탁이다.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왕의 식탁에 앉아야 산다. 왕의 식탁에 앉아야 살 수 있다.
 
두 번째, 그 사랑은 서로 사랑할 때 알게 되는 사랑이다.
*요한일서 4:7~8,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을 알게 된다고 말한다. 그 사랑은 머리로 아는 지식이 아니라, 경험으로 아는 지식을 통해 닦게 되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 사랑을 알기 위해서 ‘왜 공동체여야만 할까?’ 그런 의문이 떠나지 않는다. ‘예수님을 사랑을 성경을 통해 그냥 감동하면 안 되는 것일까? 혼자 온라인으로 예배하고 혼자 은혜 받고, 혼자 성경보고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면 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글쎄,,,, 요한은 힘주어 강조한다.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경험적으로 공동체 안에서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그 사랑을 온전히 깨닫는 통로는 공동체이다. 서로 사랑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이기 때문이다. 제자는 스승을 따르는 자요, 스승처럼 따라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삶과 십자가가 우리에게 본으로 보여주는 겸손과 평범 성을 저는 한 번 적어보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손에 홀을 쥐고 백마를 타고 승리한 군주로 오시지 않았다. 그는 오해 받기에 딱 좋을 만큼 처녀의 몸으로 오셨고, 짐승들의 먹이통에 누우셨다. 머리 둘 곳이 없으셨으며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달리셔서 세상의 아픔과 고난을 느끼시려 팔을 쭉 뻗으시면서 죽으셨다.
 
어느 신학자는 ‘긍휼의 아들이신 그분은 자기 형제자매들의 죄책과 거부당하는 것과 실패를 흡입하려 하셨다. 십자가에서 두 팔을 벌린 것이 자기 형제자매들의 죄책과 거부당하는 것과 실패를 흡입하는 행위였다. 라고 평했다. 마냥 예수님의 모습이 다음과 같았다면 엄청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영광의 압도적인 위력과 모든 것을 아는 지혜의 모습과 일체의 흩트려짐이 없는 전혀 두려움이 없고 요지부동이며 누구도 필요치 않은 자의 모습이었다면 늘 자신감이 넘쳐 승승장구 하는 모습이라면 그의 앞에 서는 게 얼마나 부담스러울까, 어린 아이들이 예수님께 안기고 죄 많은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으, 수많은 죄인과 소원을 가진 이들이 부르짖으며 주님을 만나고자 할 때에, 주님은 자신의 자리를 쉽게 내어 주셨다. 그리고 그들을 만지시고 안아주셨다. 누구라도 그분의 설 수 있도록 예수님은 약한 모습으로 오셔서 그분은 우리에게 사랑할 기회를 주시면서 내게도 그분에게 드릴 것이 있다는 느낌이 들도록 해 주셨다.’ 라고 그 신학자가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다.
-예수님은 약한 모습으로 오신 그 이유가 우리가 그분을 사랑할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었다. 라는 것이다. 세상은 이런 연약함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서로를 사랑할 기회이다. 세상은 서로를 연약함을 배척할 기회로 삼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서로를 섬기를 기회로 삼는다. 그 섬길 기회를 포착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 서로의 약점을 적절히 내 보이는 공동체가 되어서 서로 발을 씻어주고, 서로의 약점을 두 팔로 안아줄 수 있는 예수님의 제자공동체가 될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이것이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그의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본보기이시다. 그럴 때, 우리는 서로의 약함을 통해 나의 약함을 통해 주님의 능력이 임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약한 자와 실패한 자, 무기력한 자와 무가치한자의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그 삶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며 다시 사랑 받는 존재로 회복시키시는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공동체가 줄 수 있는 우리에게 유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약할 그 때가 서로 사랑을 통해서 이점이 너무나 중요하다. 서로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게 될 절호의 기회가 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3장 4절에서 보면,
 
*고린도후서 13:4,
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우리는 서로 우리의 약함을 안아주고 싸매어주고 감싸줌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게 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것이 이것이다. 십자가를 통한 예수님의 영광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힘없고 연약하고 겉보기에는 실패한 모습이셨던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 자신을 따르게 하셨고 제자들은 그 스승의 길을 따라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서로를 사랑하는 긍휼의 삶을 삶으려 말미암아 그분의 수난을 재현하도록 부름 받았다는 사실이다. 주님은 힘없고 연약한 모습으로 다가가 형제자매들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시는 분이시다. 그곳에 저와 여러분처럼 그분의 종, 그분의 제자들도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다. 무관심이다. 타경철은 무관심이 만들어 낸 불행, 동시에 사랑이 만들어 낸 행복에 대해서 이렇게 노래한다. ‘인생에서 불행은 내가 우울할 때, 남은 웃는 것이고, 인생에서 더 큰 불행은 남이 울 때 나는 웃는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큰 불행은 웃지고 울지도 않는 것이다. 인생에서 행복은 내가 울 때 남도 우는 것이며, 인생에서 더 큰 행복은 남이 울 때 나도 우는 것이며 인생에서 큰 행복은 함께 웃을 수 있는 것이다.’
 
형제자매들과 함께 웃을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이 우리의 삶에 가득하기를 바란다. 옆에 울고 계신 분이 있다면 함께 울어주어라. 옆에 웃고 계신 분이 계신다면 좀 자존심을 내려놓고 함께 웃어줄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여유가 있기를 바란다. 아니 그렇게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서로의 약함을 채워주라고 공동체로 불러주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안에 더욱 알게 하시려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여러분 바라옵기는 그 기회를 꼭 잡기를 바란다.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더욱 알게 되어지는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어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한다.
 
세 번째, 그 사랑이 주는 유익이 있다.심판 날에 담대함을 갖게 해준다.

*요한일서 4:17,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심판 날에 담대함은 이것이다. 구원받을 것에 대한 확신인 것이다. 여러분 구원 받았는가? 마지막 날에도 완성되어 그 자리에 계실 줄로 믿는가? 아멘! 어떤 훈련생이 저에게 질문을 했다. “우리가 구원을 믿음으로 받고 어차피 죽을 때까지 성화를 이룰 수 없다면, 그 죽을 때까지 성화를 이루는데 참 어려운데 과연 성화를 이룰 수 있는가요?” 그런 질문이었다. 그런 질문을 충분히 짐작했다. 죽을 때까지 이룰 수 없는 성화를 왜 이루려고 그토록 애를 써야 합니까? 성화되려고 하는 훈련, 꼭 받아야 됩니까? 한 번 묻고 싶었다. 이 자리에 오셨다. 아마도 아내에게 끌려서 왔습니다. 라고 하실 수 있다. 어떻게 왔던지, 제가 대답했다. “그렇죠. 우리 중에 한두 분은 죽을 때, 성화를 이룰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대부분은 저를 포함해서 성화를 이루기 어렵습니다.” 라고 이야기 했다. 그런데 왜 훈련을 받으며 예수님을 닮아가려고 애쓰지요?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설령 인생의 졸업식 날에도 내 힘으로 이루지 못한 성화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이루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안에서 내가 갖는 담대함이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주님은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아니 설령 성화의 삶을 완성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나를 버리지 않고 나를 주의 집에 영원토록 거하게 하실 것이라는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안에서 갖는 평안이 그것이다. 생각해 보라. 우리의 구원이 거룩해지려고 애썼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인가? 여전히 인생 졸업식에 성화를 이루지 못할 가능성이 더 많지만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줄 믿는다. 마지막 날에 이루어지는 구원의 완성도 은혜로써 이루어질 것임을 우리는 믿는 것이다. 그러면 성화를 이루는 삶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라고 물을 수 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성화에 관해서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여러분, 자녀가 완벽한 존재이기 때문에 부모의 완전한 사랑, 온전한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자녀에게 완벽하게 보이는 것이다. 자녀가 완벽해서도 아니고 완벽하라고 날마다 결심하기 때문도 아니다. 부모는 자녀를 온전히 사랑하기 때문에 자녀는 부모에게 완벽한 존재인 것이다. 부모의 사랑의 핵심이다. 자녀가 부모 앞에 완벽해지려 애쓰는 모습이 어떤 면에서는 참 안타까울 때가 있다. 착한 아이가 되려고 노력하는 아이의 모습을 볼 때면 “그러지 않아도 돼”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와 같다. 우리가 완벽하기에 하나님이 우리를 온전히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얻기 위해 완벽해질 필요는 없다. 그런데 참 행복한 진리가 여기에 있다. 부모의 사랑을 온전히 받고 자란 아이가 사랑이 많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고 난 우리가 더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될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이다. 여러분, 성화는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으면 받을수록 온전해지고 싶은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완벽해질 필요는 없지만 하나님의 사라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 사랑하고 더 온전해지고 싶어지는 것, 여러분, 이것이 성화이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는 영화를 보면서 세상의 부러울 것도 부족할 것도 없이 홀로 완전하게 만족함을 살고 있는 중년 남자, 잭 니콜슨이 등장한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 삶에 끼어들어와 사랑하게 된 헬렌 헌트에게 건네는 유명한 대가가 있다. You make me one of batter man(당신은 내가 더 좋은 남자가 되고 싶게 만들었소).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이 우리가 더 나은 사람이 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자녀가 부모의 온전한 사랑을 받을수록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지는 욕구가 생겨나는 것이다. 자녀는 부모의 눈물을 먹고 산다고 한다. 우리가 자녀를 위해서 눈물로 기도한 그 제목들은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는 줄로 믿는다. 좀 더 들어가면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받아들여질까, 안 받아들여질까, 고민하지 않게 된다. 하나님의 그 사랑을 나누고 누릴수록 담대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원하게 되는 것이다. 주님을 더 원하고 원하게 되는 것, “주님만을 원합니다. 더 원합니다. 나의 만족 주소서.” 주께 가까이 가고자 하는 그 욕망이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생겨나는 거룩한 욕구라고 말할 수 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얻기 위해 더 완벽해질 수는 없다. 하나님은 이미 완벽하게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님의 온전하신 사랑, 완벽한 사랑을 받게 되면 더 온전해지고 싶은 욕구가 발동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원하게 되는 것을 나도 원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이 성숙되는 원리인 것이다. 최고의 단계는 주님 자체를 원하는 것이다. 전에는 내가 원했던 것을 원하게 주님을 찾았다면, 이제는 주님 자체가 너무 좋은 것이다. 여전히 내가 실수투성이 약점 투성이 일지라도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에 관해서 깨닫게 되면 그 앞에 두려움 없이 설 수 있게 되는 줄로 믿는다. 그 사랑이 주는 또 하나의 유익이 있다면 응답의 확신이다.
 
*요한일서 5:14,
14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사랑하시는 우리 주님을 더욱 사랑하면 우리가 구하는 것을 주실까? 안 주실까? 이런 것을 고민하는 수준에 머무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설령 우리가 구하는 것을 안 주신다고 해도 최소한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이 무엇이냐면 우리에게 안 좋은 것이기 때문에 안 주시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안 주신다고 우리가 손해 볼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계속해서 기도할 필요가 있다. 계속 주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될 때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주님께 구할 것을 다 받을 줄 확신하는 가운데 우리가 구할 것을 무엇이든지 들으실 줄 알면서 구하게 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아니 이미 얻은 것인 줄을 확신하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이것이 주님을 사랑한 자가 얻는 담대함이다. 바울은 로마서 8장 32절에서 보면,
 
*로마서 8:32,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우리를 위해 가장 소중한 아들을 내어주신 이가 우리 주님이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뭐가 아까워서 아니, 뭔들 줄 수 없어서 안 주시는 것인가? 안 주신다면 우리에게 해가 되거나, 당장 안 주신다면 더 좋은 때에, 더 좋은 것을 주시는 줄로 믿는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다시,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하는 것을 주기를 원하신다. 그러면 우리의 필요를 원하시는 좋은 주기를 원하시면 알아서 좋은 것 주시면 되는데, 왜? 원하는 것을 구하라고 하시는가? 그런 의문이 들지 않는가? 구하면 구할수록 우리에게 유익이 있어서이다. 주님이 무엇을 원하고 원하지 않는지 선명하게 이해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가 주님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가 되게 해주시는 것이다. 여러분, 신앙의 본질은 성공과 실패, 구함과 응답의 이분법이 아니다. 때로는 우리가 너무나 바라지만 그렇게 되는 경우가 많다. 신앙생활에 우리는 구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때에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참 많다.
 
※제임스 브라이언 스미스가 말하는 일화가 있다. 자기 동료 사역자 한 명이 수업시간에 상자 하나를 학생들에게 보여주면서 그것을 부수라고 했다고 한다. 학생들은 구멍을 내고 구기고 발고 차고 박살을 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상자를 책상위에 잘 보이도록 올려놓는다. 전등을 가져다가 그 상자 안에 넣고 전원을 켰다. 학생들을 그 상황이 주는 역설을 깨달았다. 예수의 빛이 우리의 상처를 통해 더 잘 미친다는 역설이다. 때로는 응답이 너무 늦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상처받고 낙심하고 주저앉아 있을 때가 있다. 여러분, 꼭 기억하기를 바란다. 부서진 상자의 역설이다. 우리의 연약함이 크면 클수록 그 구멍이 크고 깨어진 부분이 크면 클수록, 그리스도가 가장 빛나는 곳이 된다는 역설이다. 신앙생활을 하다가도 우리의 약함이 클수록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를 통해 더 밝게 비춰진다는 사실을 기억하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능력과 응답은 우리가 가장 약할 때 온전해 지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 바울이 고백한다.
 
*고린도후서 12:9,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의 약함을 통해서 세상의 그분의 사랑의 빛으로 비추기로 작정하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종들인 우리의 약함과 실패, 그 약함을 보듬는 사랑의 공동체를 통해서 어두운 세상의 빛을 비추기로 작정하셨다는 사실이다. 이 진리를 붙들고 함께 부르짖으며, 서로 사랑하며, 위로하며 서로 약함을 싸매어 주는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그래서 세상 가운데, 어두운 세상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밝은 빛을 비추어내는 아름다운 생명의 공동체, 서로 사랑하며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과 그 은혜를 세상 가운데 널리 전파하는 아름다운 믿음의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우리 자신과 우리 다락방과 우리 훈련반과 또 우리가 가정이 그렇게 되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한다.
 
♣요약
무가치한 나를 위해서 생명 주신 예수님을 인해 감격하여 하나님의 식탁위에 날마다 앉는 자가 되어 약한 모습으로 찾아오시는 예수님처럼 서로 사랑함으로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소망해야 한다.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부서진 상자 같은 우리를 통해 더 밝은 주님의 빛을 세상에 비추게 되는 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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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3월 8일)
제목: "시련이 크면 은혜도 크다"
말씀: 창세기 39:19-23
찬양인도: 쉐키나(유재원 부목사님)
사회: 문진호 부목사님

설교자: 천동원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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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봄 부흥보고 수요저녁기도회에 참여하신 우리 성도님들을 주 안에서 축복한다. 우리에게 회복을 넘어 부흥의 실체를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귀한 은혜가 있기를 소망한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예기치 못한 일들을 종종 경험하게 된다. 달리 표현하면 우리 인생의 고난이 참 많다. 사람들은 고난을 가리켜서 위장된 축복이라 표현하지만 정작 고난 속에 처한 사람에게 그런 표현은 설득력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누구나 내가 겪은 고통을 경험해 보지 못한 채 제3자가 그런 말을 위로하려고 할 때, 위로는 고사하고 불편한 마음마저 들게 된다는 것이다. 되게 찾아오는 고난이 내 과실로 일 수 있다. 보증을 잘못 섰거나, 혹은 지나친 욕심과 과욕을 가진 결과로 그러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고난은 내 의지나 혹은 내 잘못과 상관없이 내가 선택하지 않은 일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때 당장 드는 생각은 우리 성도들의 경우는 내가 하나님 앞에 혹여 범죄 하지나 않았는지? 이 불안한 마음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의 죄 악 됨이나, 혹은 과실이 발견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헌신하며 살았던 생각이 더 앞서게 될 때, “하나님, 왜 제가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왜 하필 저입니까? 아니 내가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왔는데, 어떻게 주님이 나에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 같은 탄식과 원망이 불쑥 나타나기도 한다. 그 순간에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보이지 않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찾아볼 수가 없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충성 되이 섬긴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부요와 만사형통이 임할 것임을 기대한다. 하나님의 축복을 바란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시각은 사뭇 다르다.


오늘 본문에 소개된 요셉은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인물이다. 요셉을 수식하는 여러 표현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형통한 자, 요셉은 가는 곳곳마다 하나님의 형통이 임했다는 것이다. 성경은 요셉을 가리켜 형통한 자라고 표현하지만 실상 요셉의 생애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실 우리가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이 너무 많다. 역설적이게도 요셉은 하나님께로부터 꿈을 꾸게 되면서부터 그 인생의 시련이 시작된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꿈을 통해 미래를 보여주시고 요셉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주셨다. 이 꿈을 꾸고 요셉은 형들과 아버지에게 자랑도 하며 그리고 어린 마음에 기분이 좋았을지 모르나, 사실 요셉이 이 꿈을 본 날로부터 요셉이 시련이 찾아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요셉이 꿈을 꾼 나이가 17세였다.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된 나이는 30세이다. 그는 꿈을 이루기까지 13년 동안 혹독한 시련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요셉은 아버지의 심부름에 순종하여 형들의 안부를 묻고 확인하기 위해서 먼 여정 길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 비참했다. 형들이 자신의 옷을 찢고 구덩이에 내 던졌을 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미디안 상인들에게 은20에 팔아버렸다. 꽃다운 17세 소년에게 일어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큰 시련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보디발의 종으로 팔렸고, 또 그곳에서 인정받아 또 가정총무가 되었을 때는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치다가 그만 강간범일라는 그 누명을 얻고 감옥에 던져졌다. 요셉의 불행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정치범으로 갇혀있던 술 맡은 관원 장, 그리고 떡 굽는 관원 장을 만나 그 꿈을 해석했을 때, 관직에 복직 되었던 술 맡은 관원 장을 통해 요셉의 그 억울함이 호소가 되고 그로인해 자유의 몸을 기대했지만 그만 이 술 맡은 관원 장은 요셉을 깡그리 잊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내일 일을 기약할 수 없는 그 칠흑 같은 감옥 속에서 어떻게 보면 허송세월과 같은 2년의 기나긴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요셉은 하나님께 꿈을 받은 이후로 점점 더 악화되고 점점 더 비참한 상황으로 몰아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소위 말해 우리가 생각하는 형통과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형통을 생각할 때, 수식어로 만사를 떠올리게 된다. 만사형통, 모든 일들이 뜻대로 잘 풀린다는 뜻이다. 요셉이 성경에 우리에게 말씀한 대로 정녕 형통한 자라면 요셉은 사실상 매사에 일사천리로 잘 풀려야만 했다. 그러나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요셉의 삶은 그렇지 않았다. 우리 기준대로라면 사실 요셉은 형통한 인물이 아니었다. 매사가 뒤틀렸다. 혈육의 형들에게 버림받았다. 총애 받던 보디발에게 거절을 당했다. 관원 장에게 외면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이 같은 우리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고 비웃고 있듯이 요셉의 생애 가운데 형통이라는 단어를 세 번이나 표현하며 요셉을 가리켜 그는 형통한 자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그 형통이라는 표현의 시점을 살펴보면 참 흥미롭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성경지식, 요셉을 가만히 떠올려 보라.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요셉의 인생 중 가장 형통할 때가 언제라고 생각하는가? 아마도 대 다수의 성도님들은 총리가 된 요셉의 시절이 가장 형통할 때라고 생각할 것이다. 혹은 어린 시절 그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 하며 채색 옷을 입었던 때를 요셉의 형통한 시절이라고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아이러니 하게도 요셉의 어린 시절, 혹은 요셉이 총리가 되었던 천하를 호령했던 그 시절에 형통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지 않다. 형통이라는 그 단어가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제 이 형통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냐면, 요셉이 보디발에게 팔려갔을 때, 그리고 보디발의 아내로 감옥에 처에 있을 때, 이 형통이라는 단어가 세 번이라 반복하여 우리에게 표현하고 있다. 어쩌면 세상 사람들은 이 같이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네가 힘든 종이 된 주제에, 네가 죄수 된 주제에 무엇이 형통이냐?’ 라고 그렇게 반문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요셉이 처한 상황과 환경, 혹은 눈에 보이는 현상과 결과에 상관하지 않고 요셉을 가리켜 ‘형통’이라는 단어를 세 번 씩이나 반복하며 우리에게 요셉의 삶을 주목하게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 같은 입장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성경은 형통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창세기 39장 2절에 보면,


*창세기 39:2,
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성경이 말씀하는 ‘형통’의 정의는 ‘하나님의 함께하심’이다.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곧 형통이다. 사람들의 시선에는 요셉이 종이 되었고 사람들이 혐오하는 죄수가 되어, 마치 그 인생에 실패자처럼 느껴지고 또한 그 마음 가운데 불편한 심정마저 들지라도 성경은 형통의 기준을 무엇이 되었느냐?, 그가 무엇을 되었느냐, 그것으로 기준을 삼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함께 하심에 그 기준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비록 지금은 비참한 종의 모습으로 살아간다 할지라도 주 안에서 형통한 자이며,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사람들이 혐오하고 손가락질 하는 죄수라 할지라도 주 안에서 형통한 자라는 것이다. 오늘 본문도 동일한 입장에서 증거하고 있다. 23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창세기 39:23,
23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성경은 요셉이 범사에 형통했던 이유에 대해서 요셉이 정직했다. 요셉이 성실했다. 요셉은 비범한 은사와 능력, 재능이 많았다. 라고 그렇게 표현하지 않는다. 어쩌면 성경은 그 같은 표현을 하지 않을지라도 요셉은 성실하고 또 실제 정직하며, 은사와 능력과 재능이 많은 사람이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성경은 형통의 이유에 대해 요셉 개인에게 그 관심과 초점을 두고 있지 않다. 요셉 개인의 탁월함에 주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너무도 단순하고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곧 형통이 되었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원인이었고, 결과 범사에 형통하게 되었음을 증거 하게 되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사실은 굉장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람들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결과물을 중요하게 여긴다. 당장 건강해지고, 부유해지고, 소원하는바 명예와 지혜를 얻게 되면 또 지휘를 얻게 되면 그는 형통한 삶을 누린다고 생각한다. 역으로 병들고 가난하고 하는 일마다 실패하게 되면 형통과 무관한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과 시련 앞에 낙심하며 마치 하나님께서 나를 외면하시거나 혹 나를 떠나시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며 좌절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같은 관점에서 형통을 평가하게 되면 성경에 서게 된 대다수 믿음의 인물들은 하나 같이 불행한 자들이요, 실패자들의 불과하지 않다. 오늘 보문에 소개된 요셉이 그러하다. 그는 형들의 미움을 받고 17세 꽃다운 나이에 종으로 팔려가 기구한 삶을 살게 되었다. 또한 주인의 아내를 겁탈하려고 했다는 그 같은 거짓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다. 여러분 이런 요셉을 보고 누가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이알고 하며 누가 이 사람을 가리켜서 형통한 자라고 표현이 가능하겠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겪는 시련도 마찬가지이다. 당장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결과와 현상만을 바라보고 판단한다면 내가 겪는 시련은 마치 저주요, 불행 그 자체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면 시련 때문에 낙심하는 인생이 아니요, 오히려 시련 속에 일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형통을 발견하게 될 줄을 믿는다. 요셉은 하나님께 꿈을 받은 이후로 점점 더 열악하고 점점 더 비참한 상황으로 몰렸다. 시련이 끊일 날이 없었다. 역설적이게도 요셉의 시련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더 커갔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이들에게 허락하시는 세 가지 은혜의 사인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신다.


I. 첫째는 하나님이 주시는 피할 길.


*고린도전서 10:31,
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은 함께 하시는 자에게 시련이 크면 클수록 반드시 피할 길을 허락하신다. 피할 길을 통해 그 시험을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 피할 길을 내시는 이 같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요셉의 생애를 다시 들여다보면 우리는 이 요셉의 삶을 재해석 하게 된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심부름으로 형들의 안부를 확인하기 위해 세겜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형들을 찾을 수 없어 우여곡절 끝에 도단에 이르게 되어 드디어 그곳에서 형들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요셉은 그곳에서 형들에게 사로잡혀 그 채색 옷이 찢겨지고 그리고 구덩이에 내 던져지는데, 요셉의 형제들이 그 마음에 결심하기를 이 요셉을 목숨을 앗아가겠다. 요셉을 죽이겠다는 이 같은 작심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절대 절명의 우기 속에 우리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피할 길을 허락하시는데 그 장남 루우벤을 통하여 형제들의 손에 피를 흘리지 않게 하셨고, 또한 유다를 통해 미디안 상인 사람에게 은 20에 팔게 하셨다. 여러분, 앞서 이야기 했지만 형제들의 원래 계획은 요셉을 죽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해주님으로 말미암아 요셉은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가정총무로 총애를 받았을 때, 보디발의 아내가 날마다 요셉을 찾아가서 동침하기를 청했다. 요셉이 그 말을 듣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그 곁에도 얼씬도 하지 않으려 하니, 이 여주인이 어느 날 한 날에 요셉 외에는 집에 아무도 사람을 남겨두지 않는다. 독대하여 요셉에게 집요하게 유혹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성경에 의하면 그 요셉이 옷을 붙잡고 애원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그 요셉이 자기 옷을 붙드는 그 여주인을 뿌리치고 그 옷을 버려두고 밖으로 도망가 버렸다. 이에 분한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모함하는데 소리소리를 친다. 우리 집 종 요셉이 나를 겁탈하려고 했다면서 그 증거물로 요셉의 옷을 보이며 이 요셉을 마치 강간범처럼 거짓 증언을 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보디발이 이 소식을 듣고 어떻게 하는가? 심히 노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요셉에게 극단의 처방을 하는데 여러분 이 본문에 보면 신기하다. 그 종 요셉을 극형 사형에 처했는가? 그렇지 않다. 이 급박한 상황 속에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는데 우리 하나님이 요셉에게 피할 길을 주신다. 요셉을 죽음으로 몰지 아니하고 당시 정치범을 수용하는 감옥으로 요셉을 보내주시면서 그 생명을 지켜 주셨다는 것이다. 여러분 이것은 시대적인 정황을 살펴보면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종이 여주인을 겁탈하려고 했는데 주인이 그 종을 죽이지 않았다? 여러분 이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이에 대한 분분한 해석이 있다. 이 아내의 증언에 보디발이 의심을 품었다는 것과, 또한 요셉이 평상시에 주인의 총애와 신임을 얻었기 때문에 이 같은 일이 가능했다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성경의 관점은 분명하다.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피할 길을 허락하셔서 요셉을 보호하셨다는 것이다. 이후 감옥에서 술 맡은 관원 장과 떡 굽는 이 관원 장의 꿈 해몽하고, 해몽대로 술 맡은 이 관원장이 복직하게 되면서 요셉은 자신의 억울함을 풀고 자유의 몸을 기대했지만 그 뜻이 성사되지 않는다. 술 맡은 관원 장이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린다. 그리고 2년 동안 기약할 수 없는 시간을 요셉은 보내게 된다. 그러나 역시 하나님이 함께 하신 이후, 우리 하나님이 요셉에게 허락하신 피할 길이었다. 하나님은 정확한 때에 바로가 꿈을 꾸고 번민하는 때에 이 술 맡은 관원 장에게 요셉을 기억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요셉을 불러들여 그 왕의 꿈을 해몽(解夢)하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애굽의 총리가 되는 마치 놀라운 인생의 반전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시며 인생의 고비 고비마다 피할 길을 허락하셔서 그 인생을 이끄셨다. 여러분, 여러분이 지난 경험하고 겪었던 시련의 때를 한 번 떠올려 보라. 당시에는 끝이라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내 인생의 고비 고비마다 피할 길을 허락해 주셨음을 모두가 선뜻 떠올리며 동일한 마음의 고백을 올려드릴 줄 믿는다. 그 순간에는 어떻게 내 인생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 라고 때로는 하나님께 소리를 질러보기도 하고 원망했던 시간들이 그 시간이 지나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허락하시니, 어느 순간 그 시련을 달게 이겨내게 되었고 또한 내 인생 가운데 하나님이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해 주셨음을 목도하며 고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시련이 크면 클수록 반드시 피할 길을 허락해 주심을 믿기를 바란다. 우리가 어떤 시련 가운데 처할지라도 낙심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며 그 은혜의 사인으로 피할 길을 보여주시기 때문이다. 혹 시련 속에 있는 성도님들이 계시다면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 하나님은 반드시 피할 길을 허락해 주심을 믿고 이 길은 하나님의 사인이요,,궁극적으로 나를 형통하게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길이심을 믿기를 바란다. 시련이 더할수록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두 번째 사인은


II. 둘째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받게 하신다.


-가는 곳곳마디 이 같은 은혜를 허락하신다.


*창세기 39:4,
4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창세기 39:21,
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이 본문의 말씀을 보면, 요셉은 가는 곳곳마다 사람들에게 은혜를 입는다. 보디발의 종으로 팔려갔을 때는 보디발에게 은혜를 입는다. 그로인해 가정총무로 세워지고 보디발은 그의 모든 소유를 요셉에게 위탁을 하게 된다. 감옥에 처해있을 때는 간수장의 은혜를 받게 하신다. 간수장은 옥중 죄수를 요셉의 손에 다 맡기고 심지어는 제반 사무조차도 요셉의 손에 다 처리하게 한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요셉이 바로 앞에 서서 꿈을 해몽하게 되었을 때 바로에게 은혜를 덧입게 된다. 바로는 요셉에게 애굽을 다스리게 한다. 창세기 41장 40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창세기 41:40,
40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
-여러분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요셉은 이 같이 바로의 명에 따라 애굽의 전국을 다스리는 총리로 세워지게 된다. 이처럼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입게 하셔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증거 하신다. 여러분, 시련의 때마다 나를 돕는 손길들이 있는가? 내가 어려운 순간마다 고비 고비마다 나를 위해 기도해서 기도의 중보자가 있는가? 때로는 고달픈데 삶을 위로하는 따스한 손길로, 때로는 떡과 고기로 물어다 주는 까마귀 같은 돕는 손길로 주위 사람들을 통해 시마다 때마다 나를 돕는 그 같은 은혜가 목도된다면 여러분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시는 은혜의 사인이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형통으로 이끄시는 인도하심을 믿기를 바란다. 우리가 시련의 순간순간마다 사람들에게 은혜를 덧입게 된다면 이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베푸시는 분명한 은혜의 사인이 된다. 그 은혜의 손길을 통해 힘을 얻고 또 주 안에서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세 번째로 시련이 더할수록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사인은 더 큰 시련이다.


III. 셋째는 하나님의 은혜의 사인은 더 큰 시련이다.


-아니 더 큰 축복도 아니고, 이게 뭐냐고 놀랄 수도 있을 것이다. 더 큰 시련이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은혜의 사인이 될 수 있느냐고, 아마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시련의 강도만큼이나 하나님의 사람을 귀히 쓰시고 사용하심을 증거하고 계신다. 요셉은 꿈을 이루기까지 무려 13년 동안 혹독한 시련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여러분, 성경을 보면 요셉뿐만이 아니다. 많은 믿음의 위인들이 그 시련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축복도 컸다. 우리가 잘 아는 다윗은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날부터 인생의 시련기에 들어가게 된다. 사울 왕으로부터 얼마나 괴롭힘과 박해를 받았는지 모른다. 다윗은 결코 시련 없이 왕이 되지 않았다. 우리 하나님은 특별히 크게 쓰시고자 하는 자에게 이 같은 혹독한 시련의 과정을 연단하심을 기억해야 한다. 요셉처럼 우리 인생도 이와 반문할 때가 많다. 이제는 무언가 일을 풀릴 듯하고 하나님께 뭔가 형통의 길을 인도해 주실 듯 했는데 그만 생각지도 못한 더 큰 시련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한 문제가 해결되면 또 다른 문제가 터지고 또 그 문제를 해결하면 더 큰 문제가 붉어지면서 하루하루를 마치 살얼음을 걷는 듯한 그 위기의 순간순간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해야 한다. 마지막 시련이 더 큰 것이다. 하나님은 크게 쓰시려고 하는 자에게 반드시 큰 시련을 겪게 하신다. 그 시련을 통해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시고 정금 같은 믿음으로 연단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온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빚어 가신다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혹독한 시련들은 그 신앙과 인격을 온전하게 만들어 주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분명하신 뜻을 깨닫게 한다. 요셉을 보면 이렇게 혹독한 과정을 통해 그 신앙의 인격이 얼마나 온전해 졌는지 자신을 그 꽃다운 17세 나이에 은 20에 팔았던 형제들을 모두 용서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대하심과 계획을 깨닫게 된다. 창세기 45장 5절에서 보면,


*창세기 45:5,
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요셉은 그 많은 시련을 이겨나가면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고,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이다. 요셉뿐만이 아니다. 믿음의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 겪은 시련의 마지막은 마치 목숨을 잃어버릴 것만 같은 큰 시련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 큰 시련을 이겨낼 때, 하늘로부터 임하는 영광과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 아브라함이 겪은 마지막 시련은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일이었다. 이삭은 100세에 얻은 아들이었다. 아브라함의 유업을 이을 자요, 언약의 자손이었다.


누군가 그런 말씀을 했다. 이 세상에 지옥을 경험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자식의 죽음이다. 부모에게 있어 자식은 자기 생명보다 더 귀한 존재이다. 그래서 부모는 자녀를 위해 기꺼이 자기 목숨도 버릴 수가 있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그 인생의 최대의 시련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그 큰 시련으로 감당하니 우리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피할 길을 허락해 주시는데, 이삭 대신에 제물로 바칠 숫양을 예비해 주시고, 하나님이 이 시련을 겪은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조상이 되고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적인 계보의 영광을 허락해 주셨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너무나 큰 시련을 당하고 계시는가? 곧 끝날 것이다. 다시 한 번 말씀하면 곧 끝날 것이다. 시련의 정점에 이르기 때문에 그만큼 그 시련이 더 큰 것이다. 이것은 곧 끝이 보이고 있다는 하나님의 마지막 사인이요, 내 인생 가운데 하나님이 행하실 형통의 계획이심을 믿음으로 선포하기를 바란다. 터널은 반드시 끝이 있다. 우리는 그 터널 너머에 희미한 불빛을 통해 터널의 끝을 직감하게 되듯, 더 큰 시련은 끝이 이르렀다는 하나님의 사인이요, 하나님의 형통이 기다리고 있는 분명한 은총의 표징(表徵)임을 믿기를 바란다. 주일 강단에서 담임 목사님께서 기도했는데도 더 큰 어려움이 있다면, 이것은 더 큰 역사를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계획하심’이라고 말씀하셨다. 시련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큰 역사가 나타남을 믿고 끝까지 인내로써 마지막 시련을 감당하며 믿음으로 승리하기를 바란다. 말씀을 맺겠다. 요셉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형통한 자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성경은 그 형통이 시련과 무관하다고 말씀하지 않는다. 시련을 피해갈 수 있는 인생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신약에 이르면 우리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배에 광풍이 치는 것과 같다. 주님이 함께 하심은 늘 순풍에 돛단배가 될 줄 알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그 광풍을 고요하게 하신 것처럼 우리 하나님이 함께 하는 백성들을 그 어떤 광풍 가운데서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허락해 주시는 것이다. 이것은 아무리 시련이 커도 하나님이 그 시련보다 더 크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련이 크면 하나님의 은혜도 크다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시련이 클수록 피할 길을 허락해 주신다. 우리 하나님은 시련이 클수록 사람들에게 은혜를 받도록 인도해 주신다. 무엇보다 마지막 시련일수록 그 시련은 더 크지만 이는 곧 끝을 이르렀음을 보여주시며 우리를 정리하시며 마지막 그 도달점으로 인도하고 계신다. 그 마지막 시련을 이겨낼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성취하신다. 궁극적인 하나님의 뜻을 믿기를 바란다. 사람들은 가난을 경험할 때 비로소 돈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질병을 경험하면서 비로소 건강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시련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의 형통을 깨닫게 되는 줄 믿는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꿈을 주었을 때, 요셉을 애굽으로 이끄시는 시련을 허락하지 아니하셨다면 그는 결단코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없었다. 요셉이 그 시련으로 인해 애굽의 종으로, 애굽의 죄수로, 바로 와 앞에 서게 되었을 때, 이것은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꿈이 성취가 되었던 것이다.


여러분 여러분의 환경과 상황을 가지고 자신의 처지를 속단하지 말라. 우리 하나님의 지혜는 완전하시다.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실패하지 않으신다.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시련이 크면 하나님의 은혜도 크다.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지혜와 사랑이 나를 선히 인도하심을 믿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형통이라는 이 진리의 말씀 앞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자가 되기를 바란다. 오늘 이 밤에 주님의 말씀이 평생의 축복이 되어 어떤 시련이라도 이겨내며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궁극적인 하나님의 형통과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성취해 나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요약
우리는 어떤 절망적인 상황과 환경을 만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형통임을 알고 위축되지 않는 믿음의 기지를 가지고, 시련이 있어도 우리에게 피할 길을 주시며 시련이 있어도 사람들에게 은혜를 받게 하심의 손길이 있다면 우리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분명한 은혜의 사인인줄 알고 함께 하시는 주님을 더욱 의지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요셉은 누명을 쓰고 왕의 죄수를 가두는 옥에 갇혔다. 요셉은 의를 위하여 옥에 갇혔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실망하고 돌아선다. 그러나 요셉은 인간의 현실적 조건에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묵묵히 충성할 뿐이었다. 그 결과 요셉은 전옥의 신임을 얻어 옥의 사무를 맡아보게 되었다. 그는 성도들의 일상생활의 모범을 보여준다. 또한 의를 위해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예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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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3월 1일)
제목: "덤으로 사는 삶"
말씀: 열왕기하 20:1-6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고영민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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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20:1-6,
1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그에게 나아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2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3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더라. 
4 이사야가 성읍 가운데까지도 이르기 전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5 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 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겠고. 
6 내가 네 날에 십오 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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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민 부목사님
사람들에게는 무너지는 순간들이 있다. 대학입시를 위해서 수능을 준비하고 면접도 보고, 또 열심히 노력했는데 내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때 마음이 무너져 내린다. 또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별을 통보 받았을 때도 마음이 무너져 내린다. 그러나 목양을 하면서 제가 마음이 무너질 때가 언제였냐면 생명에 관한 것을 들었을 때이다. 어떤 집사님께서 병원에 갔다가 이상한 조직을 발견하시고 의사의 권유에 따라서 조직검사를 맡기신 것이다. 그리고 나서 결과를 간절하게 기다리게 된다. 주일에 담당 교역자인 저에게 찾아오신 것이다. 그 떨리는 마음을 아는가? 간절하게 기도해 드리고 다음에 또 연락이 온다. 그리고 나서 어떠한 말을 듣는다. “목사님 저 암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지요?” 저는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마음이 무너지는 마음을 느낀다. 우리는 크고 작은 일에 마음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한다. 우리의 삶 속에서 피해갈 수 없기에 누구나 경험을 한다. 하지만 우리기가 함께 읽은 히스기아는 절대(絶對) 절명(絶命)의 위기의 순간들에 맞닥뜨리고 있다. 그리고 그는 마음이 무너져 내렸고 참담함 그 자체이다. 이 이야기를 보면 내용이 아주 간단하다. 히스기야가 중병이 든다. 그리고 이 병은 선지자가 와서 히스가에게 삶을 정리 하라고 할 만큼 중한 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말을 들은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하나님의 응답은 그가 살아갈 날을 15년을 연장하여 주셨다는 이야기이다. 너무 간단하지 않은가?
 
아마도 이 시기는 유다와 예루살렘이 앗수르에 침공을 받는 시기와 겹치는 시기로 보인다. 히스기야 재위 기간이 29년이다. 그리고 히스기야가 삶을 15년을 연장을 받았기 때문에 그가 병들었고 그 기도의 응답을 받은 시기가 아마 히스기야 재위 14년 정도였을 것이다. 열왕기하 1
 
*열왕기하 18:13,
13 히스기야 왕 제십 사년에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올라와서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읍들을 쳐서 점령하매.
 
*열왕기하 10:6,
6 내가 네 날에 십오 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셨더라.
-그리고 오늘 말씀에도 이 성을 앗수르의 성에서 구원해줄 것을 약속하는 것을 보면, 아직 침공이 끝나기 전으로 보인다.
 
*열왕기하 21:1,
1 므낫세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오십오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헵시바더라.
-15년을 연장 받은 것을 생각해보면 이때는 아직 자식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분 히스기야의 위기가 보이는가? 히스기야에게는 지금 적국으로부터 침공(侵攻) 받는 국가적 위기(危機) 뿐 아니라, 후사(後嗣)가 없는 가정의 위기, 그리고 시한부(時限附) 판정을 받은 개인의 위기까지 총체적인 위기를 겪고 있는 것이 위기의 상황이다. 오늘은 인생의 절대 절명의 위기이자, 총체적(總體的)인 위기를 맞이한 이유를 중심으로 기도하고 그 받은 응답을 받고 그 이유까지 우리가 살펴보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하는 하나님이 말씀에 보면서 우리가 귀 기울이기를 바란다. 먼저 히스기야를 살펴보자.
 
히스기야는 이런 총체적인 위기에 맞이했을 때 어떻게 했는가? 즉시 그는 기도했다. 여러분, 성도는 위기의 순간에 기도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마음이 무너지는 고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곳에 기도하는 자리까지 나오지 못하고 그리고 가지고 나오는 것도 쉽지가 않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 히스기야는 그렇지 않았다라고 이야기 한다. 오늘 말씀을 203절을 보면,
 
*열왕기하 20:2-3,
2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3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더라.
 
첫째- 히스기야는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했다.
-이 본문은 히스기야가 기도한 내용이다. 오늘 히스기야 기도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먼저 히스기야는 사람을 의지하지 않았다. 먼저 죽음을 가지고 온 사람은 바로 이사야 선지자였다. 이사야 선지자는 평생을 히스기야와 함께 했던 사람이다. 그와 함께 의지하면서 전쟁을 겪은 사람이다. 영적으로 잘 통했던 사람이겠다. 그렇다면 히스기야에게 그 말을 해준 사람은 이사야 선지자는 히스기야는 아주 가까운 사람이다. 여러분들도 이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 하겠는가? 그 사람을 붙잡고 하소연 할 수 있지 않은가? 이유가 뭐냐? 라고, 내가 무얼 해야 되느냐? 네 생각은 어떠한가? 라고 하여야 할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한다. 또 히스기야에게 많은 재산들이 있었다. 히스기야는 “왕의 건강과 회복을 위하여 이제 너희들은 기도하고 제사를 올려라.” 라고 명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외 많은 의사들과 박사들도 있었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들도 부르지 않았다. 히스기아는 누구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혼자 하나님을 대면하고 기도했다. 여러분, 기도는 하나님과 독대하는 것이다. 독대하는 것에 동의하는가? 사람들의 조언과 생각을 듣는 것이 아니다. 사실 두려움은 하나님의 말을 듣고 사람을 의지할 때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를 어지럽혔던 말이 사라진다. 히스기아는 즉시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기도했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대면한 것이다. 절대 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사람의 소리, 세상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기도를 드린 것이다.
 
둘째- 히스기야는 하나님 말씀 앞에 즉시 기도했다.
 
*열왕기하 20:1,
1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그에게 나아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이사야 선지자가 찾아가서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정리하라, 이제 너는 죽는다.”라고 이렇게 이야기 한다. 여러분 보통 때는 예고의 말씀이 없어야 정상이 아닌가? 성경에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 사람들은 그냥 병이 중하여 지다가 명이 다하면 죽는 것이 일반이 아닌가? 그런데 오늘 말씀에 중병을 앓고 있는 히스기야에게 와서 “너는 죽는다.”라고 말해주고 있다. 이것은 아주 특별한 케이스라고 생각하시면 된다. 이것은 지금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사인인 것이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이 주시는 이 사인 앞에 지체하지 않고 즉시 기도했다. 다른 생각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이 말씀이 나를 위한 말씀이며,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의 사인이며,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확신이 들었을 때, 그 어떤 생각이나 조치를 하기 전에 바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 이럴 때 하나님은 어떻게 하는가? 신속하게 응답하신다. 4절을 보면,
 
*열왕기하 20:4,
4 이사야가 성읍 가운데까지도 이르기 전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여러분, 성 가운데까지도 이르기 전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였다라고 이야기 한다. 즉시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기 시작했을 때, 당신도 지체하지 아니하고 바로 응답하신 분이 하나님이신 줄 믿는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과 사인 앞에 지체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즉시 나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가장 복된 하나님의 선으로 응답하실 줄 믿는다.
 
셋째- 하나님 앞에 전심을 다해 눈물로 기도했다.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고 그 눈물을 보시는 하나님이시다. 여러분 모든 눈물을 흘린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강하셨던 저희 아버지 인생이 힘드시니 우셨다. 사람은 다 운다. 그러나 그 눈물이 다 기도는 아니다. 운다고 하나님이 다 보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눈물은 기도의 눈물이다.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치고 응답받지 않는 자는 없다. 한나가 그랬고, 다윗이 그랬고, 예레미야가 그랬다. 여러분 예수님도 눈물로 기도하셨다. 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때 뭐라고 하시는가?
 
*열왕기하 20:5,
5 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 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겠고.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눈물을 보셨다. 그의 마음을 보셨다. 하나님은 그의 슬픔을 아셨고 이 눈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아시는 분이시다. 여러분, 하나님은 절대 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눈물로 나온 자에게 기도를 반드시 응답하신다. 그리고 5-6절을 보면,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응답하신다. 그 중병을 고치신다.
 
열왕기하 20:5-6,
5 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 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겠고.
6 내가 네 날에 십오 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셨더라.
-그 중병을 고치신다. 하나님께 즉시 기도했다. 그리고 그 말씀과 사인 앞에서 지체하지 않았다. 생명도 15년이나 연장시켜 주신다. 그리고 전심을 다해 기도했다. 히시기야의 받은 응답을 보면 기도의 타임이 태도 내용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인다. 이것은 받은 응답도 너무나 완벽하다. 위기의 순간에 기도자로서 최고의 모험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귀감이 되는 모습이다. 그러나 성령은 히스기야에 대해서 이렇게 아름답고 귀감(龜鑑) 될 만한 내용으로 마치지 않는다. 성경은 우리에게 히스기야의 기도응답 이후의 삶을 통해서 메시지를 던진다. 이것은 하나님은 기도응답과 함께 변화된 삶을 요구하신다는 것이다. 기도응답 이후에 히스기야의 변화 소식을 들은 바벨론 왕, 브로닥발라단이 사절단과 함께 편지와 예물을 보낸다.
 
*열왕기하 20:12,
12 그 때에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의 왕 브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들었다 함을 듣고 편지와 예물을 그에게 보낸지라.
-아마 이 예물을 보냈을 때에는 병이 해결되고 회복되었을 때로 보인다. 시간차가 있다. 어쨌든 그들이 온다. 그만큼 바벨론도 앗수르가 지금 남하하고 있는 국제정세에서 유다를 크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편지와 예물은 화해나 동맹 등의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다. 히스기야는 기분이 아주 좋아서 자기 창고에 금은, 향품과 기름과 군기고에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13절에 보면,
 
*열왕기하 20:13,
13 히스기아가 사자들의 말을 듣고 자기 보물고의 금은과 향품과 보배로운 기름과 그의 군기고와 창고의 모든 것을 다 사자들에게 보였는데 왕궁과 그의 나라 안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히스기야가 그에게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더라.
-마지막에 한 번 더 강조하고 있다. 히스기야가 보인 것 중에 그의 나라에 있는 모든 것 중에 그에게 보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 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 일은 산헤립의 1차 침공 이후에 전쟁을 다시 준비하면서 다시 국고가 채워진 뒤에 일어났을 것이다. 특히 오늘 말씀에 보면 자기의 보물고, 그의 군기고, 그리고 그의 나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아마도 히스기야는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려고 했던 것 같다. 아니면 화해와 동맹의 손길에 손 내미는 바벨론에게 자기의 나라의 영광과 부요함을 자랑스런 모습을 보여주고 잘해보려고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경은 어떻게 이야기 하냐면, 역대하에서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 *역대하 32:25,
25 히스기아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그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내리게 되었더니.
-성경은 마음이 교만하여졌다고 진단한다. 이 사실을 안 이사야는 얼른 달려가서 히스기야를 크게 책망한다. “무엇을 보였느냐? 질문에 히스기야가 해맑게 안 보여준 게 없다고 한다. 정말 아이러니하다. 그리고 더 황당한 이사야는 하나님을 대언하여 책망정도가 아니라
 
*열왕기하 20:17-18,
17 여호와의 말씀이 날이 이르리니 왕궁의 모든 것과 왕의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두었던 것이 바벨론으로 옮긴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요.
18 또 왕의 몸에서 날 아들 중에서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여러분, 여기에서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히스기야의 개인적인 허영심? 아니면 어떻게든 잘 보여서 동맹국을 맺어 의지하려고 했던 마음인가? 이런 것들도 해달될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여러분 그 당시에 바벨론이 사절단을 통해서 편지와 예물을 보낸 것은 무엇인가? 앗수르가 자꾸 남하를 하니까 그런 국제정세 안에서 유다와 함께 무엇인가 동맹을 맺을까를 하여서 온 것 아닌가? 그런 의도를 뻔히 알고 있는 왕이다. 왕도 그냥 왕이 아니라, 국가적인 위기, 개인적인 위기, 생명의 위기, 이 모든 절대 절명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큰 은혜를 넘치도록 받은 왕이다. 보통 사람은 경험할 수 없었던 그런 경험을 하고도 정작 그 나라가 어떠한 나라인지, 궁금하여서 친히 자기 나라에 방문한 이방인에게 크게 역사하신 그 크신 하나님의 역사를, 하나님을 어느 한 점 비추거나 거론하지 않고 각종 보물과 무기고를 보여주면서 마치 자신의 재력과 자신의 무기와 군대가 지금 그 나라를 보호하고 있는 것처럼, 지금 으스대고 있는 것 아닌가? 여러분 굳이 죽을 사람에게 “너 죽을 것이다.” 라고 특별히 예고하시면서 기회를 주신 이유가 무엇인가? 15년생을 연장해 주셨는데 하나님은 무엇을 하라고 그 생을 연장해 주셨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경험한 하나님을 유대의 온 땅에,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알리고, 만국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고 증언하라고 15년을 허락하신 것이다. 이러한 히스기야의 반응이 더 놀랍다. 19절에 보면,
 
*열왕기하 20:19,
19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이 전한 바 여호와의 말씀이 선하니이다 하고 또 이르되 만일 내가 사는 날에 태평과 진실이 있을진대 어찌 선하지 아니하리요 하니라.
-이 말씀은 무슨 말인지 이해가 어렵다. 다른 번역본을 보면 이렇다. <그대가 전한 여호와의 말씀은 지당하신 말씀이요, 그리고 자기의 목숨이 붙어있는 동안은 평안과 안전이 계속 되리라고 혼자 생각했다.>
-여러분 지금 남하하고 있는 앗수르에게서 유다를 보호하고 있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은금과 보물인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군대나 무기인가?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싸울 생각도 못하고 포위되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우리는 히스기야에게 연장된 15년을 굉장히 크게 생각한다. 아주 특별한 경험이다. 개인적인 기도의 응답으로는 아주 큰 응답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 기도응답으로 끝맺지 않고 히스기아의 마지막을 지금 기록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베풀어지고 일들이 다 해결 된 이후 즉 기도응답을 받은 이후의 삶도 중요하다고 우리에게 메시지를 던지고 계신다.
 
여러분 히스가아는 생명을 건지는 은혜를 경험한다. 이런 은혜는 아주 특별한 은혜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의 사건을 이후를 살고 있는 지금 우리, 신자에게는 히스기야의 이 큰 경험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은혜를 경험한 자들이다. 죄의 근간을 부수고 사망권세를 이기고 죄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비교할 수도 없는 은혜를 경험자들이 바로 신자요, 성도요, 교회가 아닌가? 이렇게 히스기아에게 15년이란 시간이 주어진 것처럼, 우리에게는 거듭난 이후에 주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의 시간이 주어진 것을 아는가? 죽음의 선물을 받은 인생들에게 사망으로 결론지어질 인생들에게 제2의 인생의 선물을 주신 것이다. 우리는 다 죽은 자들이다. 생명이 없었던 자들이다. 사망으로 결론지어진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거듭난 은혜로 생명을 주셨다. 그래서 거듭난 성도는 모두 덤으로 사는 것이다. 삶을 선물로 주신 것이다. 그 누구도 경험할 수 없었던 모두가 다 그 죄 아래에서 종노릇 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 아들로 말미암아 히스기야처럼 그때그때 위기에서 건져주신 것도 아니요,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영원한 생명수 가운데서 우리를 부르셔서 영원한 생명의 은혜를 경험한 여러분이라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세상에서 무엇을 보여주는가? 무엇을 위해 살아보겠노라고 하겠는가? 여러분 무엇을 사랑하겠는가?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닌가? 죽음의 권세를 깨부수시고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시고 생명의 자리로 옮겨온 그 원천인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닌가? 이제 우리에게 생명이 주어졌다고 하면 히스기야처럼 자신이 갖고 있던 재산을 내어놓으면서 무기를 자랑하고 자신의 군대를 내보이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대로 우리를 구원한 복음이 우리의 자랑이 되어야 한다. 내가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 해야 되는 것 아닌가? 내가 세상에 보여줄 것이 딱 한 가지 밖에 없다 라고 말하면서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여러분, 복음을 증거 하라고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인생가운데 히스기야와 같은 축복을 주셨다. 복음을 증거 하라고 물질을 주셨고, 신분도 주셨고, 건강도 주셨다. 종흔 성적도 주셨고 작은 지혜로 주셨다. 그렇다면 여러분, 주어진 시간에 여러분은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입든지,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하든지, 어떤 자리에 있든지 그 시간에 무엇을 하겠는가? 이것이 여러분에게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구원이후에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그 두 번째 인생, 덤으로 주어진 인생이 복음으로 가득 채워지기를 소망한다. 히스기야가 사랑했던 그 보물들, 그 군기들,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겠다고 하시는가? 다 팔려가겠다고 이야기 하신다. 여러분들의 인생이 히스기야 같지 않고 하나님 앞에 온전히 복음으로 가득 채워진 기쁨의 인생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성도는 기도응답의 삶도 승리해야 한다.
 
넷째-기도응답의 삶도 승리해야 한다.
-여러분 히스기야는 기도의 성공이 있었지만 그의 평가가 좋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긴급할 때 기도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히스기야가 너무 잘 한 부분이다. 맞다. 그러나 말씀의 히스기야처럼 기도응답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실패하고 나서 하나님 앞에 두손 들고 나온다. 무엇이 부족한 것인가? 기도응답이후의 삶까지도 영적으로 승리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도응답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3절을 보면,
 
*열왕기하 20:3,
3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더라.
-여기 히스기야의 기도를 보면 “여호와의 구하오니 기억하옵소서!” 라고 기도한다. 이렇게 호소하면서 자신의 삶을 기도로 올려드렸던 삶이다. 먼저는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주 앞에 행하였던 삶을 기도로 올려드렸던 사람이다. 두 번째는 하나님 앞에 선하게 행하였던 삶을 기도를 드렸던 사람이다. 여러분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가? 자신의 삶을 근거로 기도의 응답을 요청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 앞에 진실함과 전심의 삶, 선한 행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렇게 근거를 두고 기도할 만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그렇게 잘 아는 사람이라면 앞에 살펴보았듯이 갑자기 자기에게 죽을 병이 들었던 것, 또 기도했는데 보란 듯이 너무나 즉시 병을 낫게 해주신 것,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 것, 나라를 지킬 수 있는 약속을 주신 것, 또 그 약속의 증거를 주신 것, 이렇게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에게 티를 내도 너무나도 팍팍 티를 내시면서 응답하셨음에도 불구하고 12절 이후처럼 행동하는 것은 기도 응답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에 히스기야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여러분 분명 기도응답은 너무나도 기쁜 이야기이다. 여러분 기도하고 계신 것이 있을 것이다. 그 응답을 받았다고 생각을 해보라. 기도응답은 얼마나 기다렸던 기도응답인가? 그러나 이제 성숙한 여러분이라면 그 응답과 함께 주시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 의도,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마음을 충분하게 헤아리고 묵상하여서 한 차원 높은 기도를 올려드리며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여러분 되시길 소망한다.
 
어제 제자훈련을 하면서 들었던 이야기이다. 히스기야가 제자훈련 과제인 큐티와 신앙일기를 쓰는 사람이었다면 분명 아버지 마음을 알았고, 감사하게도 한 차원 높은 기도를 드렸을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이런 생각이 든다. 여러분들도 그 기도응답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헤아려 더 높은 차원의 기도를 올려드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두 번째로 예배를 통해 우리를 지속적으로 기도를 올려드리기를 바란다. 기도가 응답되어지고 문제가 해결함을 받으면 기도응답을 받았던 히스기야에게 찾아왔던 유혹들이 찾아온다. 내 보물고라고 말하고 싶은 이유, 내 군기고, 내 나라, 라고 말하고 싶은 유혹이다.
 
여러분 이 히스기야가 이 유혹에 넘어가서 내 보물고, 내 군기고, 내 나라라고 말하는 그 순간 그는 하나님 앞에 진심과 전심을 잃어버린 것이다. 순전한 동기로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그의 삶, 온전한 마음을 다하여서 주님만을 의지했던 삶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뿐인가? 그는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하였던 삶도 잃어버렸다. 판단의 기준이 자기가 보는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옳다고 했던 것, 하나님께서 옳다고 하신 삶을 위해서 최선을 살아갔던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무엇인가? 그 한 마디에,,, 내 보물고, 내 군기고, 내 나라, 우리는 주위에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시기에 주님만 붙들고 살다가 기도응답 이후에 주님과 멀어지고 바른 태도를 취하지 않은 사람들을 보았다. 여러분 히스기야 이야기는 먼 이야기가 아니다. 기도응답의 이후의 삶도 영적으로 승리하기 위해서는 예배를 통해 우리를 주님께 지속적으로 올려드려야 한다. 동의하는가? 말씀의 능력의 은혜를 올려드릴 때에 우리 인생의 주제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게 될 것이다. 성령으로 충만한 예배를 올려드릴 때에 자기를 드러내고 싶은 그 유혹을 벗어나서 하나님의 일하심에 증거자로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여러분, 이 모든 시작은 예배이다. 날마다 드리는 예배를 통해 여러분들의 인생의 최종 결정권을 지속적으로 주님께 올려드리기를 소망한다. 그리하여서 성공적인 기도생활을 영위하는 자가 되기를 바란다. 정리하겠다. 성도가 인생에 절대 절명의 위기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 성도는 위기의 순간에, 오직 하나님께 지체하지 않고 기도해야 한다. 두 번째는 하나님은 분명히 응답을 주실 것인데, 그 응답과 함께 반드시 변화된 삶을 요구하신다는 것이다. 마지막은 주님은 기도응답 이후의 삶도 영적으로 승리하기를 원하신다. 여러분 우리의 삶 속에서 기도의 제목이 끊일 날이 있겠는가? 기도의 제목은 계속해서 우리가 살아있는 한 주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위기의 순간에 주님을 의뢰하고, 그러면 분명히 응답을 주실 것인데 그 응답의 의미를 깨닫고 기도응답의 요구하시는 변화된 삶의 순종을 위해서 영적으로 승리하는 그 영적인 선순환의 기도생활이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기도하고 응답받고 영적으로 또 올려드리고, 응답받고 이것이 기도생활의 선순환이다. 하나님께서 이 기도생활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기쁨과 승리로 인도하실 줄 믿는다.
 
요약
인생의 한계 앞에서 우리의 모든 주재권을 주님 앞에 내어드리고 전심으로 기도를 드릴 때에 우리의 위기를 초월한 새 차원인 인생으로 인도하실 것이며 기도응답이후의 삶도 한결 같이 주님을 바라고 기도하는 영적 선순환의 기도생활이 되면 인생의 상상할 수 없는 승리를 주님이 주님이 주실 것이다.
우리가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며 살아가서 덤으로 사는 삶에 보답하는 복음의 산 증거를 보여야 한다.
-히스기아는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통곡하며 기도했다. 히스가야의 이런 기도는 세상을 등지고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바라는 참 믿음의 기도이다. 뿐만 아니라 전인격을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였다. 기도는 우리의 전인격을 바쳐서 드리는 헌신적인 모습을 지녀야 한다.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의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땀이 피가 되기까지 기도하시는 모범을 보여주셨다. 우리들도 환난을 만날 때 세상을 등지고 하나님만 전적으로 바라고 기도해야 한다. 이 사건은 하나님이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생명을 주관하시며 모든 사람의 수한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우리는 오직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순종하는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기도와 의학적 치료방법은 둘 다 병행하는 것이 좋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의술이나 지혜는 인간들을 위해 사용하게 하신 귀한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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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2월 22일)
제목: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말씀: 로마서 1:17
찬양인도: 쉐키나(유재원 부목사님)
사회: 문진호 부목사님

설교자: 홍진기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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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서 1:17,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홍진기 부목사님
-우리가 믿지 않는 자들에게 전도를 할 때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질문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고 대답일 수도 한 말이,,,
하나님 보여주면 나도 믿을게. 당신도 보지 못한 하나님을 나보고 믿으라구요? 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이 말을 들으면 우리도 하나님을 그들에게 보여줄 수 없기 때문에 좀 곤란할 때가 있다. 우리가 곤란할 표정을 지으면 불신자들은 “좋았어, 잘 물리쳤어” 라고 생각하면서 속으로 좋아한다. 그런데 이 말은 오류가 있다. 이 오류는 너무나 일반적이어서 흔히들 이런 오류이면서도 오류인지 모르고 오류를 습관적으로 쓰는 관용적 오류라고 하는 표현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문 닫고 나가’ 밥 먹으면서 떠드는 아이에게 ‘입 다물고 먹어’ 또 한 가지는 ‘꼼짝 말고 손들어!’ 어떻게 두 손을 드는가? 이렇게 습관적으로 쓰는 오류의 말들이 있다. 금방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을 보여주면 나도 믿겠다는 이 말도 사실은 오류 중에 하나이다. 우리는 믿음과 그리고 확인을 구분해야 한다.
믿음과 확인 하나님을 보여 주면 나도 믿을 게. 이 문장에서 보여 주면 말고 믿으면 믿을 게 라는 말은 논리적으로 부딪히는 말이다. 보고나서는 확인하는 것이지 본 다음에는 더 이상 믿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보고나서는 더 이상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계신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눈으로 확인했으면 더 이상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인 것이다. 예를 들어서 부모 자녀의 사이를 확인과 믿음의 사이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자녀는 엄마와 아빠가 나의 엄마 아빠라고 믿는다. 자녀들은 내가 엄마에게서 태어난 것을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다. 그런데 여러 정황을 봐서 이 분이 나의 엄마이고 이 분이 나의 아빠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종종 부모님이 아이들을 놀리려고 “너 내 아들이 아니야, 다리 밑에서 주워왔어.” 그런 농담들을 어른들은 그런 말을 많이 했다. 그런 말을 들은 아이들은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한다. 내가 정말 엄마에게서 태어났는지, 아니면 엄마가 다리 밑에서 주워왔는지, 왜냐하면 아니는 엄마에게서 태어난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니는 엄마, 아빠를 내 부모라고 믿는 것이다.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모는 다르다. 이 아이가 내 아이라고 믿지 않는다. 이 아이가 나에게서 태어난 것을 눈으로 확인을 했기 때문에, 아빠는 확인했기 때문에, 이 아이가 내 아이라고 믿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냥 엄마 아빠는 이 아이가 내 자녀라고 그냥 확인한 것뿐이다. 그래서 믿음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다.


*믿음의 전제
-
첫째, 눈으로 직접 본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둘째, 본 것만큼이나 확신해야 합니다.
-믿음은 눈으로 직접 본 것이 아니어야 한다. 눈으로 직접 보는 순간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확인하는 대상이 된다. 믿음의 전제 조건의 두 번째는 본 것보다 더 확신을 해야 한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이야기 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그런 하나님이 아니신가? 우리는 하나님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보고 만난 것만큼이나 확신한다. “보여주면 믿을 게.” 보는 순간 믿음이 아니라, 확인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을게’, 하는 것은 오류인 것이다. 성경에 히브리서 11장 1절에 보면,

*히브리서 11:1,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이야기 한다. 여기서 바라는 것은 ‘보지 못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바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보지 않는 것을 믿는 자’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믿고 있는 믿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 믿음이 우리에게 어떻게 들어온 것이며, 이 믿음을 통해서 우리가 얻게 되는 것, 보지 않는 것에서의 믿는 자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함께 나누도록 하겠다. 오늘 우리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의인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 의인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믿음을 가진 의인이 산다. 라는 것은 무엇인지를 우리가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1. 첫 번째 의인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보통 의인하면 도덕적인 개념을 먼저 떠올리기 마련이다. 의인, 다른 말로 착한 사람, 법 없어도 살만한 사람, 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러나 그 정의는 오늘의 말씀의 흐름과는 맞지 않다. 의인을 착한 사람으로 바꾸어서 이 본문을 읽어보면 오직 착한 사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어울리지 않는다. 오직 법이 없어도 살만한 사람,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어울리지 않는다. 이 본문에서 말하는 의미는 누구인가? 사실 이 본문은 로마서를 기록한 사도 바울이 처음으로 한 말이 아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구약의 하박국 선지자가 하박국 2장 4절에 한 말씀을 인용한 말씀이다.

*하박국 2:4,
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말씀은 본문 로마서뿐만이 아니라, 갈라디아서 3장 11절에도 한 번 더 언급했을 만큼 사도바울이 좋아했던 말씀이다. 하박국 선지자가 언급한 이 의인은 하박국 선지자가 바벨론의 심판과 멸망을 예언하면서 그 어려운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따르는 자라는 의미로 의인이라고 인용했다. 사도바울은 이 본문에서 포괄적인 의미에서 더 줄여서 사도바울은 ‘구원받은 자’,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라는 의미로 의인을 사용하고 있다. 본문에서 우리가 읽은 17절 말씀과 바로 앞에 16절 말씀에서 그 정의를 조금 더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로마서 1:16,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 그전에 의인이라는 말을 풀어보면 의인, 의로움을 가진 자, 또는 의를 소유한 자의 뜻임을 알 수 있다. 의인이라는 것은 의로운 자, 의를 가지고 있는 자의 뜻이다. 하지만 이 말씀을 들어보면 하박국3장 10절에 보면,

*하박국 3:10,
10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의인은 이 땅에 한 명도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성도를 가리켜 의인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 의인이 가진 의는 우리가 읽은 17절 본문을 앞에 보면 ‘하나님의 의’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그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났다고 말한다.

* 로마서 1:17,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 속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다. 그 복음이 우리에게 들어왔을 때, 그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나에게 전가 되어서 저와 여러분이 의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들을 때, 그 복음 속에 있는 의가 내 안에 들어와서 내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가 내 안에서 들어오심으로, 전가되므로 나는 하나님의 의인이라고 불리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의인이 되었다. 이 복음이 무엇인지를 16절 앞 절에서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는데, 16절을 보자.

*로마서 1:16,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이 뭐라고 하는가?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에게는 없는데 복음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의가, 그 복음이 뭐냐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십자가 보혈의 능력이다. 하나님의 의가 들어있는 또 다른 말로 십자가는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에, 하나님의 의는 다른 말로 하나님께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의미가 하나님의 의에 들어있다. 이 복음 안에 들어있는 이 복음을 우리가 받아들일 때, 이 복음이 내게 올 때, 그 복음 안에 있는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그 능력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의가 내게 오게 되므로 나는 의인이 되는 것이다. 기록된바 하나도 없는 의인, 도저히 이 땅 가운데서 찾아볼 수 없는 의인, 그러나 하나님의 의가 내게 임하면 내게 전가되고 복음을 통하여 우리가 의인이 된 것이다. 그래서 의인은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의인은 하나님의 의, 다른 말로 구원을 주시는 십자가의 능력을 입은 자입니다
-우리 옆에 성도님들께 이렇게 이야기 해보자. “당신은 의인이십니다.”아직까지 내 행동으로 의롭게 되어야 한다는 것에 불편함을 주지만 그렇지 않다. 다른 말로 바꾸면 “당신은 십자가의 능력을 입은 자입니다.” 그렇다. 저와 여러분은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의 의가 단 1도 없는 의가 하나님의 능력, 우리에게 오게 되고 그 은혜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는 줄로 믿는다. 전적으로 은혜이다. 최소한 눈으로 보는 절차도 없이 그 보혈에 적셔져서 그냥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내가 의인이 된 것이, 내가 주인이 아니라 주님이 되어서 된 것이다.

*에베소서 2:8,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나님의 선물로 부어진바 된 우리, 그래서 의롭게 된 우리, 의인으로 당당히 불릴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은 의로 말미암아 무엇을 가지게 되는데 그 가지는 그 무엇이 바로 두 번째에 살펴보는 믿음이라는 것이다.

II.두 번째 믿음이라는 단어이다.
-일반적인 논리로 보면 우리가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한다. 믿으면, 이 먼저이다.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하지만 구속사적으로 정확히 보면 하나님께서 은혜로 구원해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믿음이 생긴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그 결과로 생긴 것이 바로 믿음이다. 실제로는 정확한 표현은 내가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내 안에 들어왔을 때, 우리가 믿어지는 믿음을 받게 된 것이다. 먼저는 이 믿음이 뭔지를 살펴보기 전에 앞서 말씀드린 믿음의 전제조건 두 가지를 믿음은 눈으로 본 것이 아니어야 하고, 믿음은 본 것만큼이나 확신하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믿음의 전제조건이고 우리가 의인을 통해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는 내 의와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으로, 구원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복음이, 하나님의 의가 내게 들어와서 내가 의롭게 되었다. 그래서 내게 두 가지 믿음이 생기게 되는데, 현재 서 있는 이 현재를 기점으로 해서 과거에 있었던 일 하나와 미래에 있을 일 하나에 대한 믿음이 우리에게 생기게 되는 것이다. 먼저 우리의 믿음의 첫 번째는 과거에 있었던 일,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서 대신 돌아가신 것을 믿게 되는 것이다.

*의인의 믿음 1.
-여러분들이 이 사실을 믿으셨다고 생각하는가? 여러분들이 힘과 능력으로 믿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나에게 주어졌을 때, 이것이 믿어지는 믿음이 생기는 것이다. 이천 년 전에 그것도 지구 반대편지역에서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한 유대인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그분이 바로 나를 위해서 죽었다고 한다. 이천 년 후에 나올 나을 위해서,,, 지금 이곳에 있는 나를 위해서, 성경에 보면 그 일이 이천 년에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이미 창세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다 선택해 놓으시고 그 하나님이 선택해 놓으신 그 길을 따라서 그 약속대로 완벽히 이루어졌다. 라고 말씀하고 있다. 흔히들 말하는 쉽게 말하는 논리적으로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가? 이천년 후에 나를 위해서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적어도 나와 같은 종족도 아닌 그 한 사람이 나를 위해서 죽었다라는 그 사실을 우리가 믿을 수 있는가? 상식적으로 논리적으로? 그런데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가? 왜 그 사실이 믿어지는가? 하나님의 의가 구원을 주시는 그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임하셨기 때문이다. 복음을 통해 의인에게 생긴 첫 번째 믿음은 과거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나의 구원을 위해 죽으시고 내 죄를 대신 져 사해주셨다는 그 사실이 바로 믿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믿음은 이제 현재에 내가 서 있는 현재로부터 미래의 일에 대한 한 사건의 대한 믿음이다.

*의인의 믿음 2.
미래에 있을 일, 우리가 천국에서 주님과 영생을 누린다는 사실을 믿게 됩니다.
-여러분은 내가 천국에 갈 것을 내 힘과 내 능력으로 믿은 것이 아니다. 이것을 믿을 수 있는가? 사람이 죽은 다음에 그 다음 생애가 있고 그 다음 생애 가운데서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어지고, 이천년 전에 한 번 본적 없고 나와 전혀 다른 한 사람이 나를 위해 대신 죽어주신 그 이유 때문에 내가 죽어서 천국에 영원히 영광스러운 곳에서 영화롭게 산다는 이 사실을 우리의 상식과 논리로 믿을 수 있나라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은 믿는 게 아니라 믿어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의 복음의 능력,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그 복음, 그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을 때, 우리에게는 과거에 이천 년 전에 그 사건이 믿어지고 미래의 우리가 천국에서 주님과 영생하겠다는 그 사실이 믿어지는 그 사람이 바로 의인인줄 믿는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5장 19절 말씀에 이렇게 말씀한다.

*고린도전서 15:19,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우리의 삶의 초점이, 우리의 삶의 바람이 이 땅의 삶뿐이면 우리가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 말은 우리의 삶이 이 땅에서 끝나지 않고 마무리되지 않는다. 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하나님의 의를 십자가의 능력을 부어주셔서 천국의 영생을 누리게 하셨다. 이 사실을 믿는가? 여러분은 이 땅에서가 아니라, 천국에서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영화롭게 사는 것을 믿는가? 천국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는데, 천국에 갔다 온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본적도 없는데, 가끔 다녀왔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믿지 말라. 천국은 그렇게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는다. 천국을 언제 갈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천국 가서 영화로운 주님과 영광스런 그 밝고 빛난 곳에서 영원히 살 것을 내가 믿고 있지 않은가? 그 믿음은 하나님의 의, 복음 안에 들어 있는 그 하나님의 의가 저와 여러분에게 부어졌기 때문에 믿어지는 것이다.

정리하면 의인이 믿은 두 가지는 내가 서 있는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의 십자가의 구속 사건이 믿어지는 것, 미래의 천국에 영생에 사건이 믿어지는 것, 이것이 의인이 가진 믿음이다. 사실 이 두 가지 외에 다른 믿음들도 있지만 다 부스러기이다. 그런데 오히려 우리는 이 의인이 믿음의 의의 전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들어온 것 두 가지, 강력한 믿음의 사건, 이 사건은 조금 멀리 두고 그저 내 주변에 있는 내가 정말 가지고 싶고 내가 정말 말하는 것만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이렇게 우리 믿음의 대상을 정말 나의 마음만큼 좁혀놓고 있지는 않은지 한 번 돌아보면 좋겠다. 자 이제 복음을 통하여서 의가 전가된 그래서 이롭게 되어 의인이라고 불리어지게 되고 그 의인에게 십자가의 능력으로 두 가지 미음이 우리에게 들어오게 되었다.
*의인의 믿음1: 과거, 십자가 구속의 사건, 의인이 믿음2: 미래, 천국 영생의 사건.
-그 두 가지 믿음으로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하면

III. 세 번째가 집중해 볼 단어이다. ‘살리라’ 하는 단어이다.
-믿음은 사실 믿는 것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사는 것이다. 정말 믿으면 자연스럽게 살아진다. 우리는 가끔 계단을 오를 때 계산이 높이가 다른 계단을 내려갈 때, 발을 헛디딜 때가 있다. 우리는 계단이 이번 계단과 높이가 같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다음 계단을 딛는다. 자연스럽게 딛는다. 그런데 그렇지 않을 때, 발을 접 지르거나 넘어지고는 한다. 믿음이라는 것은 내가 믿어야지, 믿음대로 살아야지 가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살아지는 것이 진짜 믿음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다른 말로 의인은 십자가의 능력으로, 천국의 미래의 소망으로 산다는 것은 과거에 그 십자가의 능력이 오늘을 살게 하는 능력이다. 미래의 그 소망이 오늘을 살게 하는 바로 그 능력이다. 우리 담임목사님께서 잘 쓰시는 표현으로 ‘과거의 현재형, 미래의 현재형’, ‘의인이 산다.’ 라는 것은 의인이 된 이후로 현재부터 앞으로 살아갈 삶을 함축하는 표현으로 ‘살리라’를 미래형으로 이렇게 성경에는 표현해 놓고 있다. 이 ‘산다.’ 라는 것에는 과거에 십자가의 능력이 포함되고, 그리고 미래의 천국이 포함되는 것이 바로 현재를 산다. 라는 그러한 의미가 들어가 있다. 저와 여러분이 현재에 과거의 십자가의 능력이 없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저 지옥으로 가는 컨베이어 벨트에 얹어져 있을 뿐이다. 저와 여러분의 현재에 미래의 천국의 소망이 없다면 마찬가지로 그저 지옥으로 가는 컨베이어 벨트에 얹어져 있을 뿐이다. 믿지 않는 자들은 과거에 쌓아놓은 재력, 능력, 지식, 기술, 그것으로 현재를 살아간다. 그렇지만 십자가로 의롭게 된 의인들은 이천 년 전에 십자가에 그 보혈의 능력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다. 미래도 마찬가지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앞으로 개발될 과학, 의학, 이런데 의지하고 소망을 두고 현재를 살아간다. 하지만 의인이 된 예수 그리스도의 자녀들은 미래의 천국 입성할 그날을 기다리면서 그 소망으로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그 상급에 대한 소망으로, 그곳에서 만나게 될 수없이 많을 믿음의 가족들을 만남의 소망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산다.’ 라는 것은 과거의 십자가의 능력, 미래의 천국의 소망, 이것이 의인에게 믿음으로 자리 잡아서 그 능력으로 앞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믿음을 구체적인 내용으로 바꾸어보면 이렇게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살리라 라는 말씀에 한 가지 살펴볼 수가 있다. 바로 문장이 태라는 것을 살펴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능동태, 수동태, 그 태이다. 태는 주어가 하는 방향을 말하는 것이다. 능동태는 주어가 스스로 가는 동사의 형태를 우리가 능동태라고 이렇게 이야기 한다. 예를 들어서 ‘내가 성경책을 들었다.’는 것은 능동태이다. 그런데 수동태는 주어가 어떤 대상에 의해서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내가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서 ‘내가 지게차에 들렸다’ 주어는 나인데 나의 결정과는 상관없이 지게차에 의해서 움직이는 수동이라고 한다. 내가 행동을 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본 살리라는 헬라어에는 우리나라의 말에도 없고 지금 남아 있는 태가 하나 있는데 그 태가 바로 ‘중간 태’이다. 능동도 아닌 수동도 아닌 중간 태라는 아주 독특한 동사의 형태가 있다. 유명한 신학자 유진 피터스는 중간
태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주어로 참여하는 데에 내가 참여하는 행동에 내가 주도적이지 않는다. 어중간한 중간의 상태. 예를 들면 내가 최선을 다해서 기도하지만 응답의 방향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결정하신다. 내가 하나님이 감사해서 최선의 삶을 살지만 삶의 주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결정하신다. 내가 최선을 다해서 말씀에 순종하고 헌신하며 살지만, 그 열매는 주어인 내가 아니라, 그 열매는 하나님이 받으신다. 이게 바로 수동도 아니고 능동도 아닌 중간 태의 의미이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문장의 중간 태 의미를 조금 살려서 번역해 보면 이렇게 할 수 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삽니다. 그러나 그 삶은 내가 주관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이끄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들이 바로 이 형태를 유지한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로버트로 만들이 않았다. 완전히 우리가 수동태가 되어가지고 하나님이 시키는 삶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주권을 모두 다 넘겨주어서 “네 행동 네가 책임져라. 네 구원도 네가 책임져라.”라고 그렇게 우리에게 맡겨주시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지와 인격을 주셨지만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의 삶을 여전히 인도하고 계신다. 헬라어의 이 중간 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인, 선택받은 백성인 의인 사이에 그 아주 미묘한 관계를 설명하는 아주 독특한 동사의 형태가 바로 이 중간 태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삽니다.’ 그 의인은 바로 저와 여러분이다. 주어이다. 저와 여러분이 주어가 되어서 허락해 주신 믿음을 가지고 산다. 그렇지만 그 삶은 삶의 주관은 나를 구원하시고 내 삶을 끝까지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는다.

말씀을 마무리 하겠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얼마나 익숙한 말씀인가? 이 말씀을 볼 때마다 우리가 계속 마음이 불편하다. ‘의인’, ‘나는 의인이 아닌데, 믿음으로 나 믿음 없는데, 살리라, 못사는데’ 이 본문을 볼 때 마다 늘 마음이 불편하다. 왜냐하면 의인의 정의가 잘못되었다. 믿음의 정의가 잘못되었다. 삶의 그 태가 잘못되었다. 수동도 아닌 능동도 아닌 헬라어의 독특한 이 중간 태라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으로 보지 못하면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이 말씀이 우리가 불편한 것이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복음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의인이 된 줄 믿는다.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이 옆 사람에게 하면 좋겠다. “당신은 의인이십니다.” 이제 안 불편 하는가? 의인에게 두 가지 선물이 주어진다. 이것은 의인에게 주시는 선물과도 같다. 이천 년 전에 그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이 그 십자가의 예수님이 믿어진다. 내가 예수님이 믿어진다. 그리고 미래의 내 삶의 영원한 소망이 천국에 있다는 사실이 믿어진다. 그것이 우리에게 믿음이다. 내가 주어로서 사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그리스도의 능력이 현재로, 미래의 천국의 소망이 현재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초점이 십자가에 있을 때, 우리의 초점이 천국에 있을 때, 우리는 믿음 가진 의인답게 이 땅에 살 수 있는 것이다. 여러분들에게 십자가가 천국이 선명해질수록 오늘의 우리의 믿음의 삶이 선명해진다. 여러분 누군가에게 십자가에 대해서 선명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가? 그것이 우리에게 믿음이다. 그래서 내가 지금 사나는 것은 내가 주어로서 사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그리스도의 능력이 현재로, 미래의 천국의 소망이 현재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초점이 십자가에 있을 때, 우리의 초점이 천국에 있을 때, 우리는 믿음 가진 의인답게 이 땅에서 살 수 있는 것이다. 여러분들에게 십자가가, 천국이 선명해질수록 오늘의 우리의 믿음의 삶이 선명해진다. 여러분 누군가에게 십자가에 대해서 선명하게 설명해 줄 수 있겠는가? 여러분들은 믿음으로 존재하고 있는 천국에 대해서 누구에게나 선명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가? 드 십자가가 선명하지 않다면 현재 내 믿음의 삶도 선명하지 않다. 라는 것이다. 이천 년 전의 십자가의 복음의 능력이 선명해질수록 오늘의 믿음의 삶이 선명해진다. 천국의 그 소망이 선명하면 선명할수록 오늘의 믿음의 삶이 선명해질 수 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저 십자가는 이천 년 전에 있었던 일, 천국에는 언젠가는 죽으면 갈 곳이 아니라, 십자가에 대해서, 천국에 대해서 깊이 연구하고 묵상하라. 십자가와 천국에 대해 믿을 필요는 없다. 이것은 믿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믿기 때문에 이 자리에 와 있다. 그렇지만 십자가와 천국에 대해서 깊이 묵사하라.

전 개인적으로 마틴 로이드 죤슨 목사님의 ‘십자가’라는 책이 큰 도움이 되었다. 오래 사역훈련생들에게 필독서이기도 하다. 여러분들도 꼭 한 번 읽어보라. 천국에 대한 책은 마틴 로이드 죤슨 목사님인 의 교리강해서 3권짜리가 있다. 이 세권 중에 3권, ‘영광스런 교회와 아름다운 종말’, 이 교리책을 읽으면서 저는 천국에 대해서 굉장히 큰 도움을 얻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한 번 더 말씀드리겠다. 십자가가 선명해질수록 오늘의 삶이 선명해진다. 오늘의 믿음의 선택이 선명해진다. 미래의 천국이 선명하게 보일수록 오늘의 삶이 선명해진다. 나의 믿음의 시험지는 무엇인가? 나를 의롭게 하는 것은 나에게 십자가와 천국이 내게 얼마나 선명하게 그려지는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믿어질 때, 나도
믿어질 수 있는 만큼 말할 수 있는 우리에게 힘이 있어야 한다. 그럴 때 과거의 일이 아니라, 지금 사는 의인이 사는 삶이 되는 줄 믿는다.

♣요약
내가 무언가를 해서 의인이 되려고 하는 그런 율법적인 그런 마음을 버리고, 복음으로 의롭게 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기억하여 나의 의가 아닌 하나님이 주신 십자가의 의로 살아가며 이천 년 전의 나르 구속하신 십자가의 능력의 믿음과 미래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 영생의 소망이 믿음으로 과거 현재형, 미래 현재형의 삶을 살고, 십자가의 천국을 선명하게 소개하고 십자가의 천국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진정한 의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이는 행위나 공로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죽지 않고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이다. 복음은 우리에게 믿는 자의 칭의를 그 방법으로 보여준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우리에게 구원의 도를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은 반드시 우리에게 칭의의 도를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복음은 의로운 것을 나타낸다. '복음에는' 그와 같은 의가 '나타나' 있다. 이 같은 복음의 의를 '하나님의 의'라고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의이다. 그 의는 우리 자신의 행위로 인한 공로로부터 나오는 의에 대한 모든 주장들을 끊어버린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의이다. 이 같은 복음의 의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 즉 우리로 의롭다함을 얻게 해 주는 믿음에서 우리로 살게 해 주는 믿음으로 이르게 한다. 이것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접붙이게 하는 믿음에서 우리의 뿌리이신 그로부터 덕행을 끌어내는 믿음에 이르게 되는 것을 나타내주는 말이다. 이 두 믿음이 다음의 말에 포함되어 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이란 말은 우리를 의롭게 하는 믿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란 말은 우리를 유지시켜 주는 믿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소중하다. 그 믿음은 증가하고 계속되며 인내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이 갑작스럽게 유명해진 새로운 교리가 전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하여 구약에서 잘 알려진 성경 한 구절을 인용한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자는 또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와 영광의 삶을 살 것이다. 이와 같이 복음의 의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 즉 그것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약의 믿음에 이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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