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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5월 24일) 제목: "하나님의 본심" 말씀: 예레미야애가 3:29~33 찬양인도: 쉐키나(유재원 부목사님) 사회: 문진호 부목사님 설교자: 전승현 부목사님 ㅡㅡㅡㅡ *예레미야애가 3:29~33, 29 그대의 입을 땅의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 30 자기를 치는 자에게 뺨을 돌려대어 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31 이는 주께서 영원하도록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며. 32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 ▶이 시간 부흥 보고 수요 저녁 기도회에 참여하신 우리 영 가족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이 시간을 통해서 회복을 넘어 부흥의 실체와 응답을 경험하는 복된 시간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같이 봉독하시겠습니다. 구약 성경 예레미야 애가 3장에 주신 말씀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29-33절에 주신 말씀 제가 가지고 있는 성경책 구약 성경 1146페이지에 있습니다. *예레미야애가 3:29~33, 29 그대의 입을 땅의 티끌에 댈 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 지로다. 30 자기를 치는 자에게 뺨을 돌려대어 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31 이는 주께서 영원하도록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며. 32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또 이 저녁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통하여서 함께 은혜 받는 귀하고 복된 시간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예레미야애가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로 알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애가는 이제 남쪽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했을 때 예레미야가 지은 5개의 시로 이루어진 성경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끊임없이 남쪽 유다에 경고를 합니다. 그러나 남쪽 유다 백성들이 그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회심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주님 앞에 악행을 저지르게 되고 결국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하셨듯이 바벨론이라는 민족을 들어서 이 남쪽 유다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던 이스라엘 백성, 남쪽 유다가, 그리고 하나님께서 머무시는 그 시온 성, 예루살렘이 멸망, 방해지고 함락되어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봤던 예루살렘, 예루살렘의 모습을 봤던 예레미야는 그 모습을 보며 눈물지으며 탄식하며 이렇게 노래하고 주님 앞에 나아가고 있습니다. 특히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이 당하고 있는 고난을 그저 남쪽 유다, 북쪽 이스라엘이라고 하나의 민족으로 하나의 나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그 아픔과 고통이 나의 아픔이요, 고통이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라고 표현하고 있냐면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과 고통이 나에게 임하였다. 앞 절을 보게 되면 그 고난이 나에게 내가 그 고난을 당하고 있다. 라고 말하고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럼 유다가 당하고 있는 그 고난이 내 앞 절 본문을 읽진 않았지만 그 앞 절을 살펴보면 그 내용이 나오는데요.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 않겠습니까? *예레미야애가 3:4-16, 4 나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며 나의 뼈들을 꺾으셨고. 5 고통과 수고를 쌓아 나를 에우셨으며. 6 나를 어둠 속에 살게 하시기를 죽은 지 오랜 자 같게 하셨도다. 7 나를 둘러싸서 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내 사슬을 무겁게 하셨으며. 8 내가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나 내 기도를 물리치시며. 9 다듬은 돌을 쌓아 내 길들을 막으사 내 길들을 굽게 하셨도다. 10 그는 내게 대하여 엎드려 기다리는 곰과 은밀한 곳에 있는 사자 같으사. 11 나의 길들로 치우치게 하시며 내 몸을 찢으시며 나를 적막하게 하셨도다. 12 활을 당겨 나를 화살의 과녁으로 삼으심이여. 13 화살통의 화살들로 내 허리를 맞추셨도다. 14 나는 내 모든 백성에게 조롱거리 곧 종일토록 그들의 노랫거리가 되었도다. 15 나를 쓴 것들로 배불리시고 쑥으로 취하게 하셨으며. 16 조약돌로 내 이들을 꺾으시고 재로 나를 덮으셨도다. -아멘이 되십니까? 이 말씀을 읽으니까 어떠십니까? 너무나도 끔찍하고 잔인하고 무섭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여러분 여기에 나와 있는 제가 지금 앞줄에 있는 말씀을 전부 다 여기에 기록하고 있지는 않고요. 중간 중간 발췌해서 이렇게 나누었습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 유다 또 예레미야가 자기를 표현하면서 내가 당하고 있는 고통 고난을 말하는 것이 어느 것 하나 쉬운 고난, 녹록치 않은 고난인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쉽게 감당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죠. 근데 놀랍게도 예레미야는 그 가운데서도 우리에게 무엇이 있다. 라고 말 하냐면, 소망이 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기에 나와 있는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나를 과녁으로 삼으셨고, 내 허리에 그 활들을 쏘아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쓴 것들로 배부르고 속에 치여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조약돌로 나의 이빨이 이가 다 빠졌고, 나를 죄로 덮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서 어떤 소망이나 희망 단 1도 찾아보기 어려울 겁니다. 근데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 가운데 소망이 있다 말할까요? 그건 바로 여호와의 인자, 긍휼하심이 그 사랑하심이 무한하시고, 주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이라고 그가 고백하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읽지는 않았지만 앞절 21절에 보니까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예레미야애가 3:21, 21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 왜냐하면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심으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가운데 소망을 분간하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고백하고 있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계속해서 유다 백성들에게 또한, 또한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어요. 무엇이라고 말하냐면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29절에 보니까 *예레미야애가 3:29, 29 그대의 입을 땅의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 -너의 입을 땅에 티끌에 대라고 말하고 있어요. 그대의 입을 땅에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어다. 여러분 입술을 땅에 티끌에 땅에 먼지에 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냐면 여러분 입을 땅에 대기 때문에 그 어떠한 탄식이나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어요. 입을 땅에 대니까 그 시선이 자연스럽게 어디로 향하겠습니까? 위로 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래 땅을 향하겠죠. 그래서 너는 너에게 당하는 그 고난 고통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위를 바라보지 말고, 그냥 밑을 보면서 당하라고 겸손히 그 고난을 당하라고, 고통을 받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0절에 더 나아가서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레미야애가 3:30, 30 자기를 치는 자에게 뺨을 돌려대어 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너를 때리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너의 뺨을 대주고 너를 욕하거든 기꺼이 그 욕을 들으라. 그 수치와 모욕을 당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 고난 가운데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발버둥을 쳐서라도 그 고난을 피하려고 도망치려고 했을 텐데, 예레미야는 신실하신 우리 하나님이 너를 반드시 회복시켜 주시기 때문에 그 소망 가운데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과 고통을 겸손한 마음으로 그 수치와 모욕을 당하라고 그렇게 권면해 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사실이 믿겨지십니까? 여러분 이것은 믿음으로 수용이 가능하시겠습니까? 근데 더 뒤에 나와 있는 말씀 무엇이라고 말하냐면 32절 보니까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예레미야애가 3:32-33, 32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그게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래요. 하나님의 본심은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고, 근심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모든 것 가운데서 자유를 누리고 해망을 누리고 그 가운데서 평안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본인의 본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근데 왜 하나님은 그게 본심인데 우리에게 보여주는 모습은 너무나도 잔인하고 무서운 모습일까? 왜 우리가 그 당하는 고난과 고통을 아무렇지 않게 그냥 놔두실까요? 저의 이야기를 좀 잠깐 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많이 맞고 자랐습니다. 누구한테 많이 맞고 자랐냐면 저희 아버지한테 많이 받고 자랐습니다. 저희 집에 한 제 기억으로는 한 1m 정도 되는 한 PVC 파이프 관이 있었어요. 그래서 어렸을 때, 그걸로 많이 맞았습니다. 여러분들이 상상하는 이상으로 좀 많이 맞았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제 기억이 맞다면,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부터 맡기 시작해서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예 물론 중학교 고등학교 때도 간헐적으로 맞은 적이 있지만 정기적으로 맞았던 건 그렇게 초등학교 6년의 시간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아마 모르시는 분은 저 목사님 아버지는 뭐 하시는 분이 길래 자식을 저렇게 때렸을까 혹시 조직에 무슨 몸을 담고 있는 분이 아닐까? 그렇게 오해할 수 있는데요 저희 아버지는 목사님입니다. 저를 그렇게 많이 때렸는데요. 제가 기억나는 게 있다면 초등학교 4학년이었습니다. 학교를 끝나고 난 다음에 제가 친구들과 같이 놀았어요. 놀다 보니까 약간 제가 정확히 어떤 위치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높은 곳에서 떨어졌습니다. 떨어져가지고 다리를 접 질렀는데 걸을 수 없을 만큼 다리가 팅팅 부어 있었어요. 제 친구들이 저를 업고 집에까지 데리고 갔습니다. 그 모습을 보았던 저희 아버지가 그리고 보통 부모님이라면 걱정을 먼저 하실 텐데, 저한테 대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매를 가지고 그리고 난 다음에 맞았습니다. 제가 맞은 이유는 이것입니다. 학교 끝나면 바로 집에 올 것이지 누가 밖에 나가서 놀았냐? 부모님 허락도 받지 않고, 또 하나는 놀려면 안전하게 놀아야지 왜 그렇게 위험하게 놀아서 다치고 들어왔느냐? 그래서 제가 맞았어요. 어느덧 제가 아버지가 됐습니다. 어떨까요? 제가 그때 당시에는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근데 지금은 조금 이해가 되더라고요. 무엇이 이해가 되냐면 아 내가 맞을 만했구나. 그리고 또 하나는 부모님들 많이들 사랑의 매라고 하는데 모든 것이 다 사랑의 매는 아니더라고요. 저도 자녀를 키워보니까 항상 자녀에게 훈계하고 때로는 때릴 수도 있는데 그게 사랑만 있는 건 아니더라고요. 때로는 너무 미워 보일 때도 있다. 라는 거예요. 제가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 건 제가 아버지가 되니까, 그 아버지의 마음이 이해가 되더라는 거예요. 정말 웃긴 건 그렇게 맞았는데 제가 왜 초등학교 육학년 때까지만 맞은 지 아십니까? 제가 육학년이 되고 난 다음에 처음에 아버지한테 맞을 때 맞고 난 다음에 너무나도 아파서 울었습니다. 때리지 말아달라고... 근데 육학년 때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마치 그 모습을 제가 상상해 봤어요. 근데 남자답지 않더라고요. 사나이답지 않은 거예요. 그냥 맞으려면 떳떳하게 맞지 어차피 맞을 거 멋지게 한번 맞아보자. 그래서 맞았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처음에는 몇 대를 더 때리셔야 될 텐데도 불구하고 별로 때리지 않고 이제 더 이상 더 이렇게 매질을 하지 않으시더라고요. 처음에는 오해를 했습니다. 아버지가 늙었구나! 아버지가 병이 들었구나! 맞았는데 아프지가 않는 거에요. 저희 아버지가 결혼을 좀 일찍 하셔가지고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 30대 중반밖에 되지 않는 그런 나이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그만큼 컸다. 라는 거죠. 그런데 그때 당시에는 그걸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근데 제가 아버지가 되니까 그게 이해가 되더라는 거예요.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냐면,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를 이해하고 누군가의 상황을 받아들인다면 그 입장이 되면 그것이 이해가 쉽게 되고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너무나도 고난 가운데 있고, 고통 가운데 내버려 두셨는데, 그게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계세요.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의 입장이 된다면 그 입장이 그 말씀이 이해가 될 텐데 우리는 결코 하나님이 될 수 없잖아요. 어찌 보면 이 말씀이 너무나도 우리 삶에 있어서 괴리감이 느껴지고 쉽게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 라는 것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 본심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는데, 우리가 이 하나님의 본심을 깨닫게 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이 있는데, 그 부분들이 무엇인지 한 번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I. 첫 번째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고난 받고 있는 세상이라는 것을 늘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권한을 주신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요.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권한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겠습니까? 아담과 하와의 제약으로 말미암아 두 사람 두 인물만이 타락하고 죄 가운데 거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만물이 타락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타락했다. 라는 거예요. 이 세상 또한 그 죄로 말미암아 고난 가운데 있다. 라는 사실이죠. 여러분 더 쉽게 말씀을 드릴까요? 여러분 진흙탕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린아이가 진흙탕에 있습니다. 근데 그곳에서 뛰어놀고 있는데, 그 아이가 자기의 몸에 진흙을 묻히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내가 이곳에서 그저 뛰지 않고 가만히 서 있으면 이 진흙이 나한테 뛰지 않을 거야 묻혀 지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근데 여러분 그 진흙탕에 있을 때 그 아이 혼자만 있습니까? 아니요. 그 진흙탕에서 뛰어노는 또 다른 아이들도 있다. 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 아이가 뛰어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지만 그 진흙이 저절로 나에게 묻혀 지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이 세상이 바로 그거예요. 이 세상이 그런 진흙과 같은 세상입니다. 그리고 그 진흙탕 속에서 묻혀 지는 그 진흙이 우리에게는 고난이 된다. 라는 거죠. 어찌 보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고난을 당하는 건 당연한 겁니다. 자연스러운 거예요. 근데 때로는 많은 사람들이 이 고난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때로는 이 고난을 문제를 우리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철학자 가운데 19세기에 독일의 천재 철학자라고 말하는 니체 여러분 그 니체가 무엇이라 말합니까? ‘신은 죽었다’ 라고 말합니다. 그는 목사의 아들입니다. 근데 그 목사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왜 그가 하나님은 죽었다라고 말을 했을까요? 여러분 여기에서 니체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신론자로서 이 표현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말하고 싶은 게 무엇이겠습니까? 이제 우리의 삶에 있어서 더 이상 하나님은 필요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존재 여부 하나님이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초인이 되어서 우리 스스로 또 다른 세계, 우리가 견딜 수 있는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세계를 만들어야 된다. 이게 바로 하나님은 죽었다 신은 죽었다 마치 창세기 11장 바벨탑 사건처럼, 신 바벨탑 사건이 이 말 한 가운데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어떻습니까? 우리의 힘은 변화가 가능합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정책으로 사람의 힘으로 능력으로 이 세상이 변화가 됩니까? 여기 계신 대부분의 사람들은 20세기에 사셨을 겁니다. 20세기에 태어나셨고, 그 시간들을 보내셨을 겁니다. 저도 20세기에 초중 대학교를 다녔던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21세기를 맞이하였습니다.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였을 때, 저는 되게 마음 함 속에 기대감이 있었어요. 세상이 많이 바뀔 거야,,, 지난 20세기에는 전쟁도 많았고 아픔도 많았고, 고통도 많았는데, 이제 글로벌 시대라고 말하는 21세기에는 모든 세상 사람들이 하나가 되고, 통합되고 평화만이 공존할 것이다. 라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 신제국주의도 끝나고 그 냉전 체제도 다 끝날 거야.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 그러나 2023년, 21세기에 들어온 지도 벌써 23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 오늘 이 시기는 어떻습니까? 여러분 지난 20세기에 여러 갈등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지역 갈등, 세대 갈등 그러나 여전히 그 갈등은 어떻습니까? 존재합니다. 지난 20세기에 듣도 보도 못했던 젠더 갈등, 역사적 갈등, 그런 새로운 갈등들이 생겨났습니다. 냉전 체계가 끝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다시 신냉전 시대가 시작되는 것을 볼 수가 있어요. 여러분 이 세상은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아무리 우리가 애를 쓰고 아무리 우리가 바꾸려 한다 할지라도, 이미 죄악으로 말미암아 타락했기 때문에 이 세상조차도 그 고난 가운데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죠.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신명기 15장 11절에 보면, *신명기 15:11, 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6:11, 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흔히 말할 때 부의 재분배, 그 가난을 극복하려고 아무리 노력한다 할지라도요. 이미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불가능한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주고 계십니다. 가난한 자는 너희와 항상 함께할 것이다. 예수님도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다. 라고 말씀하는 거예요. 주님 다시 올 때까지 이 문제는 결코 해결될 수가 없습니다. 어떠한 이상이나, 어떠한 사상이나 어떠한 제도적으로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없다. 라는 거예요. 왜요? 이 세상은 고난 가운데 이 세상은 타락하였기 때문에 그렇다면 어떻습니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떠할까요? 고난 속에 있는 우리이기 때문에 우리 역시 그 고난 속에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을 볼 수가 있죠. 여러분 우리가 다가오는 그 고난을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난을 볼 때, 이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힘들게 하기 위해서 쓰는 도구라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잠시 그 고난을 우리에게 허락하셨지만, 그러나 그 고난조차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회복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그 믿음으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그 본심, 하나님의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것입니다. II. 두 번째, 우리는 그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에 32절에 보니까 그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레미야애가 3:32-33, 32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우리가 때로는 아픔이나 어려움이 찾아오게 되면 정말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나 그런 의구심이 먼저 우리의 삶 가운데 생겨날 겁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성경을 보게 되면 하나님이 사랑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가 상당히 많이 등장합니다. 오늘 읽었던 본문의 말씀도 그중에 하나가 되겠고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여서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하게 됩니다. 출애굽을 하였던 1세대들이 그 광야에서 40년 생활 가운데 다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의 모습은 너무나도 잔인해 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는 그 가나안 땅,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땅에 들어가 지내게 됩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들의 잘못된 모습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만 당하는 고난이 그렇게 잔인한 것이 아니에요. 이스라엘 백성들 아닌 타 민족들 가운데서도 그들이 당하는 고난이 하나님께서 너무나도 잔인하게 베푸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 불과 유황으로 그들을 시험하십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 특별히 사울 왕 때 아말렉과 전투를 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사무엘을 통해서 명령하십니까? 그 아말렉 백성을 다 멸하는데, 그곳에 있는 젖 먹는 아이들까지도 다 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모습을 보면, 정말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맞나? 정말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맞으신가? 라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만약에 우리가 그 의구심이 있다면 하나님의 본심을 깨달을 수 없겠죠. 그러나 여러분 저는 종종 이러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여러분, 혹시 주위에 당뇨나 어떠한 바이러스로 말미암아 몸의 일부가 괴사되는 사람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저도 예전에 심방하면서 당뇨병으로 다리를 발가락을 절단하시는 한 성도님을 본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 조직 이걸 떼어내지 않는다면 그 괴사 부위는 점점 커집니다. 처음에는 발끝에서 시작되었지만, 그것이 발전체로, 발전체가 다리 전체로 나중에는 내 생명까지도 앗아갈 수 있다. 라는 거예요. 여러분, 그 썩어가는 부위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 썩어지는 부위를 도려내야 되겠죠. 잘라내야 되겠죠. 만약에 그 부분을 잘라내지 않는다면 그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울 겁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볼 때, 여러분 나의 몸의 일부를 괴사로 말미암아 잘라내는 사람이 그 신체 일부를 보면서 나의 다리를 잘라낸다면 이 다리는 더 이상 나에게 필요 없어. 빨리 잘라버리라고 의사에게 말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어떻게 해서든지 의사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자르지 않고 내 다리를 살려달라고 애원하지 않겠습니까? 왜요? 나의 몸이잖아요 사랑하는 나의 신체잖아요. 근데 저는 그 모습이 하나님의 모습인 거라고 생각돼요. 하나님께서 왜 그들을 멸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왜 그 민족을 심판하십니까? 때로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잔인해 보이고 너무나도 인정 없는 그런 모습으로 비춰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민족을, 그 나라를 멸하실 때, 너희는 더 이상 필요 없어. 너희는 사라지라 하고 그들을 심판하신 것이 아니에요.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나라, 그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그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눈물을 머금고 그것을 감당하지 않으셨겠습니까? 디모데전서 4장 2절에서는 그래서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라 말하냐면, *디모데전서 2:4, 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구원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 하나님께서 부르신 백성들만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다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때로는 하나님의 모습이 내가 이해되지 않는 모습으로 비쳐진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를 향한 그 사랑을 놓지 않는 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의심하지 아니하고 달려갈 수 있는 우리들의 믿음의 모습되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 그때 우리가 하나님의 본심, 하나님의 마음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본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III. 세 번째. 우리가 그 고난에 대해서 우리가 당하는 고통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이 있다면 그 부분들을 내려놓을 수 있는 부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잘하는 말씀이에요. *시편 119:71, 71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우리는 고난이 유익이라. -그래서 하나님은 그 고난을 통하여서 나를 훈련시키시고 그리고 그 고난을 통하여서 나에게 더 큰 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우리가 많이 알고 있습니다. 물론 맞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혹시 여러분들에게 지금 고난의 시간이 있다면, 고난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혹시 그 고난이 기대될, 기대되는 분이 계십니까? 아 이 고난 가운데 하나님께서 나를 훈련시키시네. 야, 이 고난이 끝나면 하나님은 나에게 놀라운 복으로 덧입혀주실 거야. 이 고난이 너무나도 기대되고 설레어, 라고 생각되고 혹시 계십니까? 없겠죠. 어떻게 해서든지 이 고난의 터널이 끝나기를. 어떻게든 이 고난의 잔이 나에게서 물러가기를 원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제가 몇 개 성경 구절을 준비해 봤는데요.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너무나도 잘하는 말씀 중에 구절입니다. *욥기 5:17-18, 17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18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 “미약하였으나 내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청하건데 너는 하나님의 입에서 교훈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라. 내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면 내가 지음을 받을 것이며 또 내 장막에서 구리를 멀리하리라. 그런 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여자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냐 보라, 그의 눈에는 다리라도 빛을 바라지 못하고 별도 빛나지 못하거든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랴.” -이 말씀을 읽고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너무나도 익숙한 말씀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아까 처음에 읽었던 말씀 “하나님을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신다”. 이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말씀, 성경 구절 가운데 또 한 구절에 생각되십니다. “내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너희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여러분, 제가 이렇게 준비했던 이 성경 구절은 전부 다 욥기 서에 등장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 저절로 아멘이 나아지고 저절로 은혜가 되리라 생각되어집니다. 그런데 이 역에 나와 있는 이 말씀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어떤 공통점이 있냐면 바로 요벨 새 친구들 누구입니까?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이 욥에게 하고 있는 말입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말이 신학적으로 문제되는 말 없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벗어나는 표현 없습니다. 맞는 것처럼 들립니다. 근데 여러분, 이 새 친구들이 욥에게 이 말을 했을 때, 어떠한 목적으로 이 말을 했을까요? ‘욥아, 네가 하나님 앞에 득죄하였기 때문에, 너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너의 모든 소유, 심지어 너의 사랑하는 10명의 자녀들까지 다 몰살당했다. 그러니 어떻게 하라 하나님 앞에 나아가 회개하라. 너가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너의 지금 시작은 미약한데 너의 나중은 창대하게 하리라. 하나님이 너의 아픔을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다시 고치실 것이다 회복시킬 것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결론을 말씀을 드리면, 이들은 이 세 친구들은 이 욥을 고발하였지만 그 고발하는 정확한 목적을 상실해 버리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마치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 맞는 것처럼 들려줘요. 그러나 그들이 말하고 있는 이 성경 구절 가운데 이 말 가운데 무엇이 결여되어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본심,, 하나님의 마음이 이 가운데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때로는 그래요.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난 고난을 보게 되면, 우리가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하게 됩니다. 내가 왜 이 고난을 당하지?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 권한을 주셨다면 정말로 하나님의 본심이 무엇일까? 내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나? 내가 하나님 앞에 잘못을 해서 하나님께서 지금 나를 치시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주위에 혹시나 같이 신앙생활을 함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모습 가운데 있었는데 이러한 고난 가운데 처한 성도를 보게 되면, 그래 그래 저렇게 될 줄 알았어. 하나님께서 가만히 놔두시겠어. 하나님께서 치시지 함부로 그렇게 정지할 때가 있다. 라는 거예요. 여러분 그러나 그렇게 말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좀 살펴보십시오. 정말로 내가 그 가운데 하나님의 그 목자의 심정, 아비의 마음을 가지고 그 상황들을 보고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나의 편협적인 그 성경적인 사고에 바탕을 두고 하나님을 그렇게 몰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씀을 볼 때 저는 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크다. 라는 것을 많이 느끼게 됩니다. 때로는 성경에 우리의 사고로 이해되지 않을 때도 참 많이 있는 것 같아요. 저는 개인적으로 다윗이라는 인물을 좋아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특별히 다윗도 하나님 앞에 실수하였고, 인간적인 모습이 있었기 때문에 저에게 있어서는 다윗이 뭔가 동질감을 느끼게 하고, 그래서 다윗이 인간적으로 더 가깝게 느껴집니다. 여러분, 우리가 잘 알다시피 사무엘하를 묵상하게 되면 사무엘하에 11장에서 다윗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바로 우리아의 아내였던 밧세바를 취하게 되죠. 여러분 이 밧세바를 치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서 다윗을 책망하십니다. 이미 그 상황 가운데서는 밧세바의 남편이었던 우리아 다윗이 그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게 만듭니다. 너무나도 용서받지 못할 큰 악행을 이 다윗이 저지른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때 나다 선지자가 다윗에게 와서 무엇이라 말합니까? 하나님께서 나단을 통해서 다윗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너의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너의 눈앞에서 너의 아내를 빼앗아 너의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너의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의 가문 가운데 칼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었던 다윗이 나단 선지자에게 이제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되죠. 하나님 앞에 내가 이러한 악행을 저질렀다고 눈물로써 회개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다시금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다. 그러니 당신이 죽지 아니할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다윗이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이후에 다윗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근데 다윗의 가정에 비극적인 일들이 생겨납니다. 어떤 일입니까? 바로 다말 사건이 퍼지죠. 형제가 서로 칼부림을 갖게 됩니다. 근친이 이루어집니다. 결국에는 그로 말미암아 암논이라는 아들이 죽임을 당하게 되죠. 압살롬이라는 동생에게, 여러분 이후에 보면 압살롬이 왕자의 난을 일으키게 됩니다. 반란을 일으키게 돼요. 그때 다윗이 이제 예루살렘에서 도망가게 됩니다. 그 가운데 이 압살롬이 아이도벨, 계략가였던 아이도벨을 통하여서 또 하나님 앞에 큰 악행을 저지르게 됩니다. 무엇이었냐면 바로 아버지의 아내들 후궁들을 자신이 취하게 됩니다. 옥상에서 백주 대낮에, 여러분 이 모습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에게 말씀하셨던 그 예언 그 징벌이 이루어졌다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많은 주석 책에서도 그렇게 해석이 되더라고요. 여러분 하나 여쭤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용서하셨나요? 용서하지 않으셨나요? 용서하셨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용서의 개념이 무엇입니까? 용서의 개념이 무엇이에요? 그거에 대해서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것이 용서입니다. 근데 하나님께서 다윗을 용서하셨지만, 다윗의 죄에 대해서는 벌을 내리신다. 징벌하신다. 형벌하신다. 우리는 그렇게 말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가끔 그렇게 말을 해요. 죄 용서함은 받지만 그러나 그 죄에 대해서 벌은 받아야 된다. 형벌은 받아야 된다. 그렇게 말을 합니다. 죄에 대해서 죄의 용서를 받지 마 그 죄의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된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이 그 죄에 대해서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이니? 여러분 마태복음에 오면 예수님께서 일만 달란트 비유를 하시는 것을 볼 수가 있어요.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그 임금 앞에 나아가서 이제는 그것을 정산하게 됩니다. 갚지를 못해요. 그때 임금이 어떻게 합니까? 그 빚진 자에게 아내와 자식들을 다 팔고, 모든 소유들을 팔아서 그것을 갚게 만듭니다. 그런데 그가 임금 앞에 빌게 되죠. 살려달라고 그때 그 모습을 봤던 임금이 측은히 여겨서 어떻게 합니까? 그 일만 달란트를 모두 다 탕감해주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근데 때로는 우리가 이 부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던 그 용서에 대해서 오해를 할 때가 있다, 라는 여러분, 그 오해가 더 나아가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받고 있는 그 고난에 대해서도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마치 욥의 친구들이 그 잘못은 너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너에게 주신 징벌이다. 마치 그렇게 우리에게, 우리가 때로는 그 고난이 찾아오게 되면, 이 고난이 어디에서 출발되었지? 내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 앞에 잘못하였기 때문에, 내가 회개하지 못했던 그 부분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이 고난을 주신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라는 거에요. 여러분 그러나 고난을 우리가 그렇게 받아주지 않기를 원합니다. 앞에서 무엇이라고 말했나요? 고난이 우리에게 유익이다. 여러분 그 이후의 성경 구절은 무엇으로 말하냐면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내가 그 고난을 통하여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심을 경험하게 되고, 내가 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희망과 소망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그 고난이 나에게 유익이었다라고 이 시편의 저자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본심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깊이 상고하는 이 시간되기를 원합니다. 혹시나 우리가 하나님의 그 마음을 우리의 자의적으로 우리의 형편에 맞게 우리가 생각나는 대로 혹시나 판단하고 있고 나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 본심 가운데 결코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아, 결코 나는 너를 버려두지 않아, 결코 나는 너를 떠나지 않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긍휼하심을, 인자하심을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기에 이 세대에 끊임없이 고난과 아픔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무너지는 우리들의 모습이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놀라운 계획, 하나님의 그 사랑을 붙잡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본심을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주께 영광 돌리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든 영 가족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약 눈물과 고통이 가득한 이 세상 가운데서 고난이 우리에게 유익하다는 사실을 믿고 고난 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을 분별하여야 한다. 우리에게 선하고 아름다운 열매로 응답하시며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본심을 깨닫고 믿음의 길을 달려가야 하며,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과 신실하신 사랑을 결코 의심하지 않고 주님 다시 오실 그날까지 믿음으로 승리하는 세대가 되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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