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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5월 17일)
제목: "주님은 나의 피난처"
말씀: 시편 16:1~2,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소문수 부목사님
ㅡㅡㅡㅡㅡ
*시편 16:1~2,
1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2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ㅡㅡㅡㅡㅡ
▶새 봄 새로운 은혜를 사모하며 부흥 보고 수요 저녁 기도회에 참여하신 여러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수요 저녁 기도회를 통해서 여러분 마음 가운데 회복을 넘어 부흥이 체험되어지고 또한 우리가 기도하는 모든 내용들이 응답되어지는 이 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실 하나님의 말씀은 시편 16편 1절과 2절, 2절의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시편 16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이 시편에 많은 시대를 기록하였는데요. 그 가운데에 오늘 다윗은 다의 믹담이라는 제목의 시로 16편을 지었습니다.
시편에 있는 제목은 그 시가 가지고 있는 많은 정보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제목이 무엇인지 알고 그 실에 읽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시가 가지고 있는 배경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가 있고요. 시가 가진 음악적인 요소를 말하여 줄 때도 있고, 시가 가진 성격을 알려줄 때도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은 믹담이라는 제목을 가진 시인데 사실 ‘믹담’이라는 단어가 어떤 뜻인지 정확하게 알려지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학자들에 의하면 두 가지 정도로 해석을 해볼 수가 있는데
첫 번째는 황금이라는 뜻입니다. 주옥같은 시, ‘황금 같은 시’라는 뜻을 의미하고요.
두 번째는 새기다. 비문 같은 곳에 새겨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기 위한 새김이 있는 시다. 라고 하여서 ‘새기다’ 라는 뜻으로 두 번째를 해석하기도 합니다. 첫 번째로 해석하든지 두 번째로 해석하든지 오늘 시편 16편은 굉장히 중요한 시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죠. 특별히 시편에 150편 가운데 믹담이라는 제목을 가진 시는 오늘 우리가 읽은 16편과 56편- 60편까지 총 6편의 시가 믹담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 오늘 16편은 첫 번째 믹담의 시입니다. 이 내용을 아시고 우리가 함께 첫 번째 9절 1절을 하나님께 또 면서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1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시편 16:1,
1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오늘 1절의 내용을 보면, 다윗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주님 앞에 나아가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시의 내용을 볼 때에 다윗은 지금 적지 않은 위기 가운데에 놓여 있다. 라는 것을 유추해 볼 수가 있죠. 지금 우리가 이 위기 앞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간구하며 지켜보하여 주시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지금 사무엘상 큐티를 계속해서 진행하고 있는데, 이제 한 내일 모레쯤이면 아마 사울이 길보아 전투에서 생을 마감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 3월 삼규 뒤로 마무리가 될 텐데 여러분 성경에서 계속 사울과 다윗을 비교하고 있는 모습들을 여러분 발견하셨습니까? 큰 차이점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면 다윗은 이렇게 위기에 봉착했을 때에,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서 하나님께 자신의 이야기를 토로한다라는 것이죠. 하지만 사울은 위기 앞에 섰을 때의 다급함 앞에 섰을 때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 자기중심적인 해결 방법을 찾는 것이 사울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다윗의 모습은 하나님께 존심으로 달려 나아가 자기를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원하는 간절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1절에 사용된 지켜 달라. 라는 단어의 ‘슈마르’는 양떼를 지키고 보호할 때 사용되어지는 ‘울타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목동이었던 다윗에게 있어서 가장 안전하다. 라고 여겨지는 장소 중에 하나가 어디였냐면 바로 자기가 지키는 울타리 안이었다라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그 기억을 생생하게 되새기면서 다윗은 하나님 앞에 하나님, 나를 지켜주십시오. 나의 울타리가 되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한다라는 것이죠. 여러분 어떤 느낌이 좀 오시나요? 굉장히 일상적이고 실제 상황 가운데에 화려한 미사여구라든지, 이런 단어를 써야만 하나님이 들어주실 것이다. 라는 어떤 그런 단어들이 아니라, 자기에게 너무나 익숙하고 너무나도 평안하고 너무나도 함께할 수 있는 단어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간혹 제가 이렇게 심방을 가다 보면 오늘은 집사님 집사님이 한번 기도해 주시겠습니까? 그러면 눈이 두 배로 커지시면서 “목사님, 저 기도 못해요!” 저는 사실 이렇게 있으면서 어떻게 하는 게 기도를 못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그냥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상의 언어들과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하나님께 그냥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이 기도일진데, 어떻게 기도를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건지 여러분 이제 오늘 수요예배에 참석하신 분들은 절대로 기도 못한다는 말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냥 여러분들이 생각되어지는 일상의 단어,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익숙한 단어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곧 기도인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오늘 자신에게 울타리가 되어 주십사, 요청하는 그 단어 뒤에는 ‘하나님께 피할 것이다.’ 라는 다윗의 고백이 또 있죠. 한국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았지만 이 전절과 호절 사이에는 키라는 왜냐 하면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나를 지켜주시옵소서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께 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피하다.’라는 하스이라는 단어는 ‘신뢰 하다.’라는 뜻도 있어요.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의 울타리 안으로 나아가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나의 울타리가 되어 주십사,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뭐냐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라는 다윗의 고백이라는 거죠.
그래서 오늘 이 내용을 유진 피터슨이 쓴 메시지 성경에는 좀 더 간절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를 지켜주소서. 죽을 힘 다해 죽게 피합니다.’ 이렇게 유진 피터스는 자기의 메시지 성경에 쓰고 있습니다. 라는 표현을 하면 죽을힘을 다해서 주님을 신뢰합니다. 죽을힘을 다해서 주님께 매달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번역해 볼 수 있다는 것이죠. 이렇게 절박한 심정 가운데 매달리고 있는 다윗의 모습을 여러분 한번 상상할 때, 여러분 그 마음이 좀 전해지시는 것 같습니까? 근데 여러분 다윗이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하는 데에는요. 아마 이런 생각하실 분도 있으실 것 같아요. 역시 다윗이구나. 다윗은 이 절박한 순간에 사월과 달리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이렇게 기도하는구나! 우리는 힘들 때, 혹은 저는 굉장히 힘들고 어려울 때는 기도의 소리조차도 나오지 못할 때가 있어요. 그냥 이렇게 망연자실하게 있을 때가 있죠. 그래서 이 다윗의 이런 고백을 보면서 다윗은 정말 하나님께서 합당하고, 합당하다. 라고 여겨질 만한 성품과 신앙을 가졌구나! 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수도 있겠지만 여러분 다윗의 일생을 잠시 한 번 살펴보면 저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하나님께 나아와 절박하게 기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뭐냐 하면 그 어느 곳에서도 다윗이 발을 붙일 수가 없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한번 해봅니다.
제가 지금부터 짧게짧게 사건을 중심으로 다윗의 인생을 한번 좀 살펴볼 건데 여러분도 한번 잘 따라와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다윗이 역사 앞에 딱 가장 출사표를 내며 등단했었던 때는 골리앗과의 전투겠죠. 골리앗과의 전투에서 다윗은 골리앗을 죽이고 난 다음에 민족의 영웅으로 급부상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인 즉은 사울의 적수가 되어 버렸다는 뜻이었어요. 주님을 위해 용기를 낸 결과가 왕의 눈 밖에 나는 일이 되었습니다. 이런 다윗을 사울은 궁으로 불러들여서 가까이 두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이렇게 아주 달콤한 유혹을 하나 하죠. 내가 너를 가까이 두기를 위해서 나의 딸 미가를 너희에게 주겠다. 근데 내가 미가를 너에게 주를 때에는 조건이 하나 있는데, 네가 우리의 원수 같은 나라, 블레셋 나라에 가서 남자의 표피 100개를 가지고 와야 한다. 다른 표현으로 하면, 100명의 남자를 쓰러뜨려야 한다. 라는 뜻이에요. 여러분 혼자의 몸으로 블레셋으로 들어가 백 명의 남자의 포피를 벗긴다. 라는 것은 사울에게는 어떤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이죠? 다윗이 이 일을 하다가 죽었으면 좋겠다. 라는 뜻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100개가 아니라, 200개를 가지고 와 사울 앞에 내어놓았고, 사울은 오히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다윗을 더욱 미워하게 될 뿐만 아니라, 어쩌면 두려워하는 마음까지도 갖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을 한번 해보게 됩니다.
왕국에서 사울은 다윗에 대한 마음이 점점점 악해지면서, 단창을 던져가며 다윗을 죽이려는 마음을 본격적으로 드러내었고요. 다윗이 미갈과 함께 있는 그 집 가운데 부하들을 보내어서 다윗를 직접 죽이고자 하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때 미갈이 먼저 그 소식을 알았기 때문에 다윗을 창틀 밖에 달아 내리면서 도망시키죠. 그렇지 않았다면 다윗은 사울의 수하 가운데 죽었을 것이에요. 유리(流離)방황(彷徨)하며 이리저리 돌다가 너무 배가 고파서 도읍 지역으로가 제사장들의 도움을 얻으며 이 진설병, 떡을 먹고 힘을 내었습니다. 그리고 골리앗을 죽였을 때에, 그 칼을 얻고 다시 방황하는 시간을 갖게 되지. 이 이야기가 사울의 귓가에 들렸을 때, 사울은 너무나도 분개(憤慨)한 나머지 도읍에 있는 제사장들을 전부 죽이게 되죠. 여러분, 이 소식을 다윗이 들었겠죠? 자기를 도와준 것으로 인하여서 그 제사장들이 다 죽음 가운데로 나갈 수밖에 없다는 그 소식을 들었을 때의 다윗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정말 슬픔과 절망 가운데에 빠져 있지 않았을까요? 결국 다윗은 이스라엘 나라에 발붙일 것을 찾지 못하여서 블레셋이라는 나라, 아기스 왕 앞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목숨을 구걸하게 되죠. 이때 가드 사람들이 모함을 하는 것을 통하여서 다윗의 목숨이 위태(危殆)해지자, 다윗은 곧바로 태세를 전환하여 침을 질질 흘리면서 미친 체하며, 그 앞에서 목숨을 연명하는 구걸하는, 여러분 이 블레셋이라는 나라는 이스라엘과는 철 천지 원수의 나라인데, 그 원수의 수장 앞에서 미친 체하며 목숨을 구걸할 수밖에 없는 인생 나락으로 떨어진 다윗 그래서 겨우겨우 살아날 수가 있었죠.
아둘람 골로 간 다윗은 그와 비슷한 처지의 동료들을 만나게 됐고, 그곳에서 계속 유리 방황하며 도피(逃避)자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계속되는 도피 생활 중에 다윗은 두 번의 좋은 찬스를 맞이하게 되죠. 여러분, 어떤 찬스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찬스였습니다. 근데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아요.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근데 여러분, 이 과정을 통하여서 아마 다윗은 다윗의 동료들에게 아주 큰 신임을 잃었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사울을 죽이게 된다면, 다윗과 함께 유리방황하는 그 사람들의 도망자의 생활이 곧 끝나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좋은 찬스를 두 번이나 놓쳤으니, 다윗은 주변에 있는 동료들에게 불신을 얻게 될 것이 분명하고요. 다시 볼레세으로 찾아간 다윗은 시글락이라는 아주 작은 동네를 얻게 됩니다. 근데 그곳에서 잘 사는가 했더니, 이제 블레셋이 이스라엘과의 전면전을 앞두고 다윗과 그의 용사들을 징집하게 된다. 그러니까 자기의 칼끝이 자기의 동족을 향하여 전쟁을 하는 위기 가운데 다윗이 봉착했다는 것이 우여곡절 끝에 그 전쟁에는 참여하지 않고, 시글락으로 돌아오지만, 돌아왔을 때 다윗을 맞이했던 그 마을의 상황은 아말렉이 전부 약탈에 가서 부녀자들이 다 포로로 끌려간 상황이었습니다. 이때에 다윗을 가장 신임하던 그 동료들이 어떠한 일을 하죠? 돌로 쳐서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다급했을 때에 다윗은 다시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정신을 차리며 구했을 때, 하나님이 그 위기를 다시 승리로 갚아주시게 되죠. 왕이 된 이후에 다윗도 평탄치만은 않습니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 군대와의 충돌도 있었고요. 계속되어지는 정복 전쟁이 있었기 때문에, 여러분 성경에 수많은 전쟁들을 통하여서 다윗은 아마 갑옷을 벗을 날이 없었을 것 같아요.
계속되어지는 전쟁터에서의 그 삶, 아무리 우리가 다윗이 싸움을 잘한다고는 하지만 여러분, 그것은 결과로 봤을 때지 그 수많은 전쟁터를 나가는 다윗의 그 매순간은 얼마나 위태롭고 위기였던 위기였을까요? 급기야 그의 마지막 전쟁 이후에는 조금 더 평안해지는가! 했더니 밧세바를 취(取)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고, 하나님께 큰 죄를 얻게 된다. 그리고 압살로 아들의 반역을 통하여서 마지막 다윗의 손에는 그 수많은 적군에 피를 씻어야만 하는 명도 있었지만, 자기 아들이 나무에 달려 죽어 있는 모습을 손수 장사해야 하는 아주 비운의 인생을 산 것이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의 일생을 여러분, 제가 조금 사건 중심으로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때, 여러분, 어떤 감정이 드신가요?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파란만장(波瀾萬丈)하게 여겨지시지요? 하지만 어느 순간도 편하게 지낼 수 없었고, 어느 순간에도 발을 뻗고 편하게 잘 수 없었던 위기와 전쟁과 배신과 외로움과 급기야는 아들의 반역까지 겪어야만 했던 한 인생에 있어서 하나 정도만 겪어도 아주 큰 불행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 수많은 일들을 다윗은 그 한 일생 가운데 오롯이 담아내야만 했던 것이죠. 그런 다윗의 삶을 볼 때, 다윗은요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 더 성숙한 믿음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피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도 있었겠지만, 하나님 외에는 다른 곳으로 피할 곳이 없었던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때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윗처럼 하나님에게로만 피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절박한 외길, 외통수와 같은 그 골목 앞에 섰을 때에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여러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신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릴 때 제가 찬송가를 많이 부르고 싶어서 찬송가를 많이 부를 수 있는 예배가 어디 있는가? 찾아보다 보니, 금요 철야 시간에는 우리 머리가 하얗게 된 우리 권사님들과 함께 찬송가를 기본으로 한 10곡 정도는 부를 수 있는 곳이어서 제가 금요 천하를 자주 갔더랬습니다. 그때 자주 불렀던 곡 중에 하나가 뭐냐면 여러분도 다 아실 텐데 천보여 의지 없어서 손 들고 옵니다라는 그런 찬양이었어요. 찬송가 338장이고 찬송가는 280장인데요. 이 곡은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레의 동생이었던 찰스 웨슬레가 찬송 시로 고백한 내용이고요. 이 곡조는 스코틀랜드의 미녀입니다. 근데 그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 ♬~! ‘천부여 의지 없어서’ 라는 찬송가가 나오게 되면 우리 권사님들은 누구도 약속하지 않았는데 전부 다 손을 들고 찬양을 하셨어요. 그리고 그렇게 몇 번이나 이 찬송가를 부르고, 부르고, 부르다 보면 저쪽에서부터 훌쩍훌쩍 눈시울이 붉어지시며 그 눈물 콧물을 닦으시면서 주님 앞에 두 손 들고 나아가 찬양하는 그 모습을 저는 함께 바라보면서
그 찬송가가 그때 당시에는 그게 어떤 느낌인지 잘 몰랐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하니 이런 마음으로 우리 권사님들께서 그 찬송가를 불렀겠구나! 그분들의 삶의 여정과 삶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 아니고서는 피할 길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께 나와 찬양하셨구나!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와 하나님께만 절박하게 그렇게 찬양하셨구나! 라는 걸 이제 조금은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여러분과 함께 이 찬송과 1절만 한번 불러보고 싶은데 여러분 어떠십니까? 괜찮을까요? 여러분 그러나 너무 처지지 않게 하지만 우리의 마음을 담아서 여러분이 찬송과 1절만 함께 찬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불러보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다윗이 이 찬송가를 알았다면 아마 수십 번, 수백 번도 더 부르지 않았을까... 생각을 한 번 해보았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아니요 주님만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심을 꼭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그다음 두 번째로 우리가 이제 2절을 함께 살펴볼 텐데 여러분 이 2절의 내용을 깊이 있게 묵상하다 보면 왜 다윗이 1절에 그렇게 고백하였는지가 또 기가 막히게 연결이 되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는데요.
*시편 16:2,
2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우리 2절을 다 같이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2절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표현 중에 하나가 바로 주는 나의 주님이십니다. 라는 표현이 한글 성결로는 한글 성경으로는 주님을 당신이라고 하기에는 좀 우리 정서가 맞지 않기 때문에 주님이라고 표현했지만 원래 더 표현대로 이 표현을 원어대로 더 해석을 하다 보면 ‘당신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정확하게 하나님을 향하여서 ‘당신은 나의 주권자이십니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맞습니다. 유 아 마이 로드(You are my Lord!) 라고 쓰여 있습니다.
모든 삶의 생사(生死)여탈(與奪)권(權)까지 다윗에 있는 모든 인생의 순간순간을 다 하나님이 주인 되시고 주권자가 되어 주셔서 인도하여 주고 있으시다. 라는 고백인 것이지요. 이 주권자라는 인식은 단순하게 그냥 하나님 다 나의 삶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라고 고백되어지는 내용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훨씬 더 깊은 신앙 고백이 있는데 그것을 알기 위해 우리가 바로 뒤에 나오는 후반 절을 읽어보면 주 밖에는 나의 목이 없다 하였나이다. 라고 표현되어 있죠 하나님이 나의 복이 되십니다.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얼핏 이 이야기를 듣다 보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공급하여 주시는구나! 하나님이 나의 복이 되시고 풍족하게 하여 주시고, 장수하게 하여 주시고, 나에게 좋은 것을 허락하시는 분이시구나! 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쓰여 있는 복은 그런 뜻이 아니에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복은 ‘빠라크’라는 단어를 쓰는데 그 단어가 바로 ‘번영하게 되다, 풍성하게 되다 좋은 것을 갖게 되다 우리의 직경이 넓어지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2절 가운데 쓰여 있는 복이라는 단어는 바라크라는 단어가 아니라, ‘토바티’ 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토바티라는 단어의 원형은 ‘토브’ 라는 단어예요. 여러분 토브라는 단어 한 번쯤 들어보시지 않았습니까? ‘좋다 선하다, 완전하다, 완성되다.’ 이런 뜻을 가지고 있죠. 그래서 어떤 분들은 이 단어가 너무 좋기 때문에 자녀의 이름으로 사용하시는 것도 제가 보았습니다. 애칭으로도 쓸 수 있으니까, 저희 아이들에게도 이 ‘토브라는 이름을 한번 붙여볼까?’ 라고 생각하다가 제 성이 소라는 걸 생각하고 내려놓았습니다. ‘소 토브’ 좀 이상하죠?
근데 여러분,
이 ‘토브’ 라는 단어가 성경에 처음 쓰일 때는 언제냐면 창세기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난 다음에 창조물을 바라보시며 보기에 좋았더라. 라고 말씀하실 때 그 좋다가 ‘토브’예요. 사람을 창조하시고 난 다음에 보시기에 힘이 좋았더라. 라고 말씀하실 때에 그 심히 좋았더라. 가 그 ‘토브’라는 단어입니다. 창조물이 하나님의 계획과 뜻 안에 그대로 꼭 맞게 있을 때에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내는 그 상태를 토브라고 말한다. 라는 것이죠. 그러면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여러분 다윗에게로 다시 한 번 돌아오겠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이 나의 주권자 되시고 하나님이 나의 토브가 되십니다. 라고 고백하는 이 고백의 내용은 나의 인생에 비록 위기와 전쟁과 피로 얼룩진 인생일지 모릅니다. 하나님 저의 인생은 사울이 저의 생명을 취하기 위해 끊임없이 도망해야 하는 도망자의 신세였습니다만, 그러한 인생일지라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면 하나님, 나의 인생길은 ‘토브’였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하나님 칼과 전쟁의 위협이 하나님 늘 제 앞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인생은 풍전등화와 같았지만 그러한 인생일지라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기만 한다면 그 인생도 저에게는 토부의 인생 라고 고백한다. 라는 것이지요. 연약함과 범죄 함과 인생의 밤과 같은 시기를 보내야만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 가운데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셨다면, 그 인생도 저에게는 좋은 인생이었습니다. 라고 다윗이 지금 고백하고 있다. 라는 것이. 제가 이 대목을 읽고 깨달았을 때 제 가슴에 뭔가 묵직한 것이 올라온 것이 느껴졌습니다. 왜냐하면 제 속에는 늘 제 인생의 길에 대해서 불평과 부족함과 횧ᅟᅡᆫ이 너무나 많이 깔려 있었습니다. 늘 쫓기듯이 살면서 막 다른 길로만 인도하신 하나님에 대한 원망의 마음이 제 속에 조금 있었다. 라는 것, 녹록치 않았던 저의 경제생활을 저희 가정의 경제생활로 인해서 저에게는 살면서 그렇게 많은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저에게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도 없었던 것 같아요. 늘 그거 아니면 안 되는 인생으로 살아왔던 것 같아요. 공부를 잘해서 여러 대학을 붙어서 어느 대학을 가야 될지 고민하는 고민도 저에게는 없었습니다. 이 대학 아니면 안 됩니다. 라고 한 대학만 놓고 주구장창 죽도록 기도하는 게 저의 인생이었어요. 자매들이 많이 있어서 누구와 사귀고 어떤 사람과 결혼해야 되는지 선택할 수 있는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있는 제 아내에게 가서 제발 저를 거두어 달라고 애원하며 결혼에 골인했습니다.
여러분 저는 우리 교회 부임하기 전에 잠시 호주에 있었는데, 호주에 있을 때, 어려운 상황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외국 생활을 하고 또 거기에 아예 살고 싶은 마음으로 나갔기 때문에, 제가 가진 몇 가지 기도제목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정원이 있는 집에서 살고 싶습니다. 두 번째, 호주에 나가니 외제차를 주고 타면 어떨까요? 제가 저희가 호주에 갔을 때, 정원이 있는 집에서 저희가 살았어요. 그런데 그 집은 어떤 집이었냐면 저희 교회 멤버가 되시는 1927년 권사님의 별채 같은 집, 이곳에서 살았어요. 근데 이분이 어떤 분이냐면 이북 출신의 분이셨는데 ,이분이 잠시 동안 주기철 목사님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셨던 권사님이세요. 1927년 권사님을 모시고 그 집에서 주기철 목사님이 목사님으로 생각되어지는 권사님과 함께 이 철 없는 목사가 함께 살았다는 것이죠. 근데 정확하게 그 집에 정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저에게 차를 이제 주었어요. 제공해 주었습니다. ‘기아 스펙트라’였습니다. 근데 생각해 보니까 호주에서 기아는 외제차였기 때문에, 그것도 하나님이 정확하게 기도의 제목을 응답해 주신 거더라고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살아야만 했습니다. 여러분, 한국에 돌아와서도 저에게는 작은 아주 소박한 기도 제목이 있었어요. 그냥 교회 근처의 작은 집, 너무 소박하지 않습니까? 걸어 다닐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교회 근처의 작은 집, 지금 제가 살고 있는 집은 큰 산에 둘러싸여서의 아파트 단지 하나가 덜렁이고요. 조용하고 공기가 매우 좋습니다. 다른 선택의 길이 없었어요. 저에게는 늘 선택이 아니라 그냥 주어지는 그 일 그거라도 놓치게 된다면 저에게는 차선이 없었기 때문에 그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 라는 생각으로 아등바등 살 수밖에 없는 게 저의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런 삶에 대하여서 하나님께 참 어려운 마음을 토로할 때, 하나님이 호주에서 제가 기도를 하는데 응답을 주셨어요. 호주에서 기도해서 응답을 주셨을 때에는, 0으로 응답을 주시더라고요. 이렇게 응답을 주셨습니다. I give you best way. 근데 여러분 이게 받아들여지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이 제 안에 이 응답을 주시면서 지금까지 살아오며 저에게는 없었던 그 선택들 수많은 외통수 길에서, 이거 아니면 안 된다고 전전긍긍하며 살아왔던 저의 시간들이 쭉 지나가는데,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런 삶 속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최고의 길로 인도하셨다면, 수십 가지, 수백 가지, 아니 수천 가지의 기회가, 나에게 선택의 기회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오히려 그게 있더라면, 더 고민하고 더 염려하고, 더 괴로움만 더 했겠구나!. 오히려 그런 말을 잘 아시고 하나님이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여 주셨구나! 라고 생각을 하니 여러분 저에게 있어서 더 이상 어떠한 선택도 좋은 선택이 아니라는 것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문수야, “내가 너에게 가장 좋은 길을 준 염려와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그 길을 내가 너에게 줄 거야.”
그래서 여러분 저는요 오늘 마치 다윗이 그러한 길일지라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셨다면, 저는 그 길이 복인 줄로 믿습니다. 그 길이 저에게 토브였습니다. 라고 고백한 다윗의 고백이 너무나 마음으로 동의가 되고 공감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다윗이요 시편 16편 8절에서부터 11절까지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데 여러분 다윗의 심정으로 한번 저희가 8절부터 11절까지를 같이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편 16:8-11,
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9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10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11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아멘.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 참석하신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분들에게 이 기쁨의 고백을 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반드시 이 길 가운데 우리가 서서 하나님 앞에 이 고백을 하시도록 하나님 우리를 붙잡고 인도하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어떤 삶을 살아오셨는지, 어떠한 기도 제목으로 여러분들의 삶이 가득 채워져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어떠한 기도 제목일지라도 그 길 위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동행 하시고, 하나님이 우리의 울타리가 되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 울타리 안에 있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선하고 좋은 길로 인도하여 주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우리를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고 계시고, 남겨진 우리의 삶에도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토브의 길로 인도하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이 고백은 단순히 우리의 삶에 우연처럼 만난 어떤 당혹스러운 일을 정리하기 위한 정리용 멘트가 아니에요. ‘아니야 괜찮아 우리는 이해할 수 없지만 그래 이 길이 그래도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가장 좋은 길일 거야’ 이렇게 그냥 정리하기 위한 정리용 멘트가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 당혹스러운 우리 인생길 앞에, 어쩌면 선택이 아무것도 없는 그 외통수와 같은 길 앞에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셔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실 거야,’라고 끊임없이 세뇌하며 끊임없이 나를 나의 신념을 붙잡는 그런 류의 고백이 아닙니다. 다윗의 입술 가운데 이렇게 고백하도록 하나님이 하나님의 마음을 다윗에게 넣어주신 거예요. 하나님의 실제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역사가 오늘 그의 인생 가운데 끊임없이 주입되어지고 있고, 끊임없이 경험되어지고 있고 체험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이 길을 거는, 걸어가고 있는 과정도 우리에게 너무 중요하다. 라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그 과정에 안내, 하나님의 섭리가 오늘도 계속 이어지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인생 하나님에게 붙들린바 되었을 때, 가장 안전하고, 가장 편안하고, 가장 따뜻한 그 울타리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시고, 오늘도 주님의 그 피난처 앞으로 달려 나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요약
수렁 같은 인생의 고비 앞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일하심과 섭리를 바라본 것처럼, 인간의 힘으로는 고백할 수 없는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고백을 다윗의 입술 가운데 담아주셨듯이, 이제 우리 입술에도 그 믿음의 선한 고백 담기를 간구하며 살아가야 한다. 때로는 우리의 머리로 이해되지 않고, 때로는 우리의 마음으로 감당하기 힘든 현실 앞에서도,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가장 선하고 좋은 길로 인도하여 주심을 믿고, 그 믿음과 그 마음의 고백으로 나아가서,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주님의 함께하심을 바라보고, 늘 주님을 찬양하고, 변화무쌍한 인생의 파도 앞에서 좌고우면하지 않고, 가장 선하고 좋은 길로 인도 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심을 고백하며 살아가야 한다. 가장 좋은 포부의 길, 베스트 웨이는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확신하며, 응답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그 시간을 지켜서 토비새와 공 예배에 기쁨을 현장에서 받아 누리고, 이 힘든 세상을 이기는 힘을 주심을 감사하며 간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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