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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5월 31일)
제목: "싫음과의 싸움"
말씀: 출애굽기 4:10-17
찬양인도: 쉐키나

설교자: 강건우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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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4:10-17,
10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11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12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13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14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15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의 입에 할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희들이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16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17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오주여, 오늘 모세의 이 짤막한 발언을 따라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두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먼저 10절인데요. 제가 읽어드릴게요.

10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뒤에 좀 넘어가면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두 번째 부분은 어디서 오 주여가 등장하죠? 13절에 등장합니다. 여기도 한번 제가 읽어드리면

13 모세가 이르되 오주여 보낼 만 한 자를 보내소서.
-여러분도 느끼셨겠지만 두 번 다 모세는 거절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두 번이 아니에요. 이 본문 앞에 무려 세 번의 거절이 더 있습니다. 본문의 길이 상 오늘 읽진 않았지만, 오늘 자막으로 추리기 3장 10절 11절을 한번 같이 읽어볼 텐데요.

*출애굽기 3:10-11,
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그렇죠 여러분, 여기서도 모세는 내가 누구이기에 하면서 분명 거절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거절은 우리가 잃지 않은 두 번의 거절과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서의 두 번의 거절을 더해서 총 다섯 번입니다. 다섯 번이나 거절해요. 왜 그럴까? 왜 모세는 이토록 반복해서 좀 거절을 할까? 어쩌면 하나님과 모세도 삼요의 늪에 빠진 것이 아닐까 여러분 삼요 아세요? 잘 모르시죠? 3요는 이걸요?
제가요? 왜요? 라는 질문입니다.

신세대들이 자주 한다고 그래서 기업의 임원들이 꼭 알고 있어야 할 질문으로 어느 tv 퀴즈 프로그램에 나온 질문인데요. 저도 그러고 보니까 모세가 참 신세대 같아요. 왜냐하면 창세기에서 아브라함과 요셉까지의 그 족장 시대를 다 지나고, 무려 400년 만이라고 하는 긴 시간이 지난 다음에 출연한 인물이잖아요. 아주 참 신세대 아닙니까? 그래서 이 신세대의 느낌으로다가 이 걸요? 제가요? 왜요? 라고 묻는 것은 아닐까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니겠죠? 여러분,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요. 모세가 다섯 번 거절할 동안 지금 지시하시는 그 일에 대한 명확한 그림, 목적, 심지어는 필요한 능력에 대해서 아주 소상하게 설명을 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러면 왜 모세는 다섯 번이나 주저하고 거절하는가? 그 질문에 좀 답을 하기 위해서 오늘 네 번째, 다섯 번째 거절 단락을 지금 여러분하고 같이 읽은 것인데요. 왜 제가 네 번째 다섯 번째를 좀 설정했냐면 뒤로 갈수록 속마음이 드러나기 때문이에요. 그렇다면 모세의 속마음이 뭐냐, 네 번째 다섯 번째 줄 어디를 읽으면 속마음이 더 진하게 담겨 있을까요? 제가 아까 뒤로 갈수록 속마음이 드러난다고 했으니까 어디일까요? 다섯 번째겠죠 다섯 번째 거절 단락은 13절이었습니다. 여기 한번 같이 읽어보실까요? 13절 같이 읽겠습니다.

13 모세가 이르되 오주여 보낼 만 한 자를 보내소서.
-여러분 모세의 속마음은 무엇이냐면요. 그냥 가기 싫은 거예요. 다른 사람 보내라 다른 사람 써 달라 이겁니다. 왜 이렇게 모세에게 하나님이 맡기시려는 이 일이 좀 싫은 일이 무조건 싫은 거, 그냥 무작정 거절하고 싶은 일이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네 번째 거절 단락에서 힌트를 좀 얻을 수 있는데요.
10절을 한번 보시면 여기 제가 읽어드릴게요.
10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이렇게 돼 있죠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주요 나는 뭘 못하는 사람입니까? 말을 잘 못하는 사람이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이 부분을 두고 어떤 학자들은 모세가 실제로 말이 어눌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명기라고 하는 모세의 장편 설교 3개나 되는 그 장편 설교를 성경으로 갖고 있습니다. 말을 과연 잘 못했을까 싶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세는 어디서 성장을 했냐면 당대 최고의 권력 이집트 왕궁에서 자란 사람입니다. 절대 군주의 딸의 양아들로 자란 사람인데 그런 그에게 왕궁이 어떤 교육을 시켰을까요? 왕궁은 여러분 최고를 키우는 곳이죠? 최고가 아니라면 최고가 되게끔 하는 곳입니다. 근데 어찌 모세가 입이 둔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가진 이 배움이나 어휘력이나 어떤 필력이 모자랐다면 ‘토라’라고 부르는 이 모세 오경이 집필되었을 리가 만무합니다.

저는 그래서 좀 더 나아가서 그가 왕궁에 있었기 때문에, 또 높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언어도 접했을 것이라고 추측을 합니다. 그냥 단순히 하나의 언어, 말 못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고 여러 나라의 언어도 접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면 ‘입이 둔하다.’ 라는 모세의 발언은 납득하기 어려운 거절 사유죠 그럼에도 불쑥 모세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뭐냐면 그가 가진 철 천지 한(恨) 때문이에요 철 천지 한 출애굽기 2장 11절부터 15절인데요. 여기 화면에도 한번 띄워주실 텐데 여러분 출애굽기 2장 11절부터 15절도 한번 천천히 교독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2:11-15,
11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12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
13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잘못한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14 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15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는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곁에 앉았더라.
-여러분이 익히 잘 아시는 이 본문은요 모세가 왕궁에서 자란 이후로 처음으로 어떤 행동을 하는 그 장면입니다. 처음으로 어떤 액션을 취했다는 것에서도 주목할 만하지만 13절만 보시면 2장 13절만 보시면 처음으로 성경에서 모세가 입을 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그 앞에 안 나와요 입을 떼요. 성경에서 등장하는 모세의 첫 발언이라는 건 뭐냐면 히브리 사람이 싸울 때 가서 왜 동포끼리 그러냐? 라고 하는 그 중재의 발언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에게 돌아오는 반응은 무엇이었냐면 누가 너를 재판관 삼았냐? 니가 뭐라고 이렇게 하냐? 라고 하는 핀잔이었고 언어적 폭력이었고 정서적 몰매였어요. 그로 인해 신변의 위협이 왔고 너무 좋게 지내던 자신의 처소에서 박차고 다른 곳으로 도망가야 할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만약에 오늘 여기서 이 시점에서의 모세라면 이런 자들에게 돌아가서 그 입을 다시 떼서 너희들이 나의 동포라고 말하고 ‘너희들을 하나님이 사랑하신다.’ 라고 말하고 너희들에게 언약을 지키시려고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 라고 말하실 수 있겠습니까? 처음 입을 뗐는데 그런 반응과 이런 타격이 왔는데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때 이런 발언을 하러 갈 수가 있겠어요? 쉽지가 않아요. 그래서 어쩌면 그 마음이 툭 입이 사용돼야 되는 문제에서 입이 툭 나가서 나는 입이 분한자입니다. 사실은 속내는 ‘뭐야 난 말하기가 싫어.’ 모세의 속마음 어디선가 나는 그들과 말도 섞기 싫어요. 괜히 가서 또 입 댔다가 무슨 봉변을 내가 당하려고 무슨 억하심정의 상황에 처하려고 나는 싫어요. ‘아론 붙여준다 그래도 나는 싫어요.’ 이거 이럴 줄 알고 아론을 다 준비시켜서 지금 오고 있다고 해도 하나님이 그렇게까지 날 도와주신다고 해도 나는 싫어요. 상관없어요. 이게 모세의 속마음이었을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여러분 무척 신기한 건 뭐냐면 하나님이에요. 왜냐하면 무려 이렇게 다섯 번이나 거절하고 있는 이 모세를 하나님은 계속 붙들고 설득하고 물론 이제 나중에 화를 좀 내시면서 강하게 밀어붙이시긴 합니다만 모세가 말 잘 못한다고 하니까 야 아론도 준비해 놨다. 이렇게 말하는 그 하나님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래서 오늘 이 장면에서 저는 하나님에 대한 작은 단상 두 가지를 깨닫게 되는데 그게 뭐냐면?

첫 번째는 하나님은 모든 걸 아세요.
-모든 걸 아세요. 아론이 14절에서 오늘 보면 14절에 보면,
출애굽기 4:14,
14 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아론이 지금 너를 만나러 오고 있다. 라는 얘기를 합니다. 그 말은 시차 상 모세가 나 말 잘 못하겠어요. 나는 말이 있어서는 둔합니다. 라고 핑계 댈 때 야 그러면 일이 이렇게 되면 누구를 골라서 이제 도와주러 가게 만들어야 되지? 누구를 그럼 어떻게 해야 되지? 이렇게 전략을 그때 짜는 게 아니라 모세가 이런 핑계를 다 될 줄 이미 익히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야 인마 벌써 준비해서 오고 있어 그런 핑계에 될 필요가 없어. 이걸 보여주세요. 그래서 생각되는 하나님의 단상 하나님에 대한 단상.

두 번째가 뭐냐면 이런 질문이에요. 아론을 준비시키실 수 있었다면, 하나님은 왜 굳이 모세여야 했을까?
-왜냐하면 모세는 지금 아론은 지금 움직이고 있고 명령을 따라 움직이고 있고 모세는 움직일 생각이 없어요. 모세의 말을 구지 그대로 믿어보자면 아론은 말을 잘하는 거고 모세는 안 해요 못해요. 여러분 누구를 택해야 정상적입니까? 아론을 택해야 사실 정상적이죠. 그럼에도 하나님은 모세가 이렇게 거절을 하고 심사가 뒤틀리는 반응을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끝없이 설득하고 타이르고 굳이 일을 맡기시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까요? 오늘 이 중요한 질문에 본문 속에 이게 가장 제가 드리고 싶은 핵심 질문인데, 이 핵심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중요한 분리가 일어나야 돼요. 어떤 분리냐면 싫어하는 걸 말하는 것과 원하는 것, 이 두 가지 사이의 분리입니다. 제가 뭐라고 말씀드렸죠? 싫어하는 걸 안 하는 것과 원하는 것 이 두 가지를 분리해야 돼요. 왜 이걸 분리하자고 말씀드리냐면, 보통은 싫어하는 걸 안 하는 걸 내가 원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싫어하는 걸 안 하는 걸 내가 원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이 실제로 두 개가 같은 거라고 여깁니다.


※제가 첫 사역지에서 결혼한 지 3개월 만에 부부를 대상으로 하는 공동체를 섬겼던 적이 있어요. 여러분 신혼 3개월 차에 결혼 10년 차 되었고 아이들도 막 키우고 있는 사람들한테 가서 뭘 말합니까? 그래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토요일 오후에 아내랑 주일 모임이었기 때문에 해당 부서 실에 가서 토요일 오후에 청소하고 그 애들 때문에 장판이 깔린 공간이었거든요. 바닥 다 걸레질하고 장난감 이렇게 청소해 놓고 둘이 손꼭 붙잡고 엎드려 기도하는 것밖에 없었어요. 살려달라고. 근데 그때 하나님 불쌍히 여기셔서 깨닫게 하시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몇 가지를 소개해 드리면 첫 번째는 ‘이게 경험으로 목회하는 게 아니구나 말씀으로 목회하는 것이구나! 말씀이라는 본질로 쓰임 받는 것이구나!’이것을 경험하기도 했고요. 또 하나는 거기에 있는 부부들을 이제 케어하고 목양하다 보니까 부부도 살아나지만 저희 가정도 막 활기가 넘쳤어요. 왜냐하면 왜 부부가 다투는지 알았고, 왜 세상 적으로 신앙적으로 고비에 처하는지를 알고 나니 저희는 그 선을 안 넘으려고 하고 저희는 거기서 미리 서로를 보호하고 사랑하니까 저희 부부가 더 좋아지더라고요. 그리고 또 하나 앞서 말씀드린 분리가 안 되는 선택을 할 때가 참 많구나! 이 사실도 많이 깨달았어요. 한 사람이요, 여러분 성장의 과정에서 겪은 중요한 어떤 사건들이 있으면 그것이 기억에 깊이 남고 존재의 깊이 새겨집니다. 그런데 그게 배우자를 고를 때 필연적으로 제거돼야 할 요소, 아주 중요한 요소 그래서 정작 고려했어야 할 여러 아주 내가 생각하는 중요한 요소들을 소홀히 여기고 가벼이 여겨서 놓치고 가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걸 제가 거기서 봤어요. 이 사실은 그 그룹을 제가 설명 드리면 개인정보 보호에 위반될 수도 있으니까 개인정보 보호에 위반되지 않는 저희 어머니를 예로 들어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희 어머님은 외할아버지가 아버지시죠. 술 마시는 것이 그렇게 싫어서 술 안 마시는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그것이 저희 아버님입니다. 근데 여러분은 아시잖아요. 인생은 그것만 보면 안 된다는 거. 두 분이 부부로 지내시는 동안 수없이 그 외에도 고려할 상황이 참 많았구나! 라는 것을 깨닫곤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왜 어머님이 그런 선택을 주저 없이 나는 술 안 마시기만 하면 된다. 그런 남자면 된다. 다른 거 다 안 보고 그거 하나만 볼 거다. 라고 주저 없이 결정을 하셨을까요? 왜 기꺼이 그 선택으로 뛰어드셨을까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싫어하는 걸 안 하는 게 자기가 원하는 거라고 착각하고 그렇게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의 모세도 그래요. 모세도 지금 그냥 싫어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거 그냥 싫어요.
그 일 너무 싫어요. 심지어 오늘 이 장면이 추리기 4장이니까 3장에서 이어지는 장면이거든요. 3장이 무슨 장면이냐면 떨기나무에 하나님 불을 붙이셔서 놀라운 광경 임재를 목격하게 하신 그 이야기에 붙어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과 확실한 증표가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나님을 오늘 모세가 분명히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여기 신을 벗어라 여기서는 그 압도적인 장면을 지금 모세가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거절의 핑계를 무려 몇 번이요? 5번 장수 돌 침대도 아니고, 다섯 번!!, 여러분 왜요? 가기 싫은 거예요? 다시 가기가 싫은 거예요. 말이 어눌한 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과 말을 섞기가 너무 싫은 겁니다. 나를 억울하게 보았던 나를 억눌렀던 그래서 인생을 완전히 꼬아버린 그 민족에게는 그 못돼먹은 민족에게는 다시는 가기 싫은 거죠. 더 고생해야지 내가 뭘로 거기 가서 그들을 구출합니까? 이 상황 자체가 너무 싫은 거예요. 그래서 그 싫은 일을 하지 않기를 원하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붙드세요. 그리고 설득하세요. 그리고 여러 번 권하세요. 왜인지 아세요? 이것이야말로 모세의 영혼이 갈망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에요. 싫어하는 일을 안 하는 게, 지금 자기가 원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철저히 믿고 있는 오늘 모세에게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라고 너의 영혼이 그토록 원하던 일이 이거야 이스라엘을 데리고 나오는 것, 이스라엘을 리더가 되는 것 구출하는 것 이게 니 영혼이 원하던 일이야. 지금은 부정하고 있지만 지난 실패로 인해서 너무 두렵고 지금 실증도 나고 그러겠지만 아니야 이게 니가 그토록 바라고 원하던 일이야. 그래서 너도 일어났었잖아. 동포를 치던 애굽 사람을 죽일 정도로 사납게 매섭게 한 번 일어났었잖아. 히브리 동포의 싸움에 개입해서 들여다보려고 했었잖아. 그러니까 이건 너의 영원히 갈증하던 갈망하던 바로 그 목말라 하던 일이야. 그래서 내가 이토록 너를 붙들고 설득하는 거야. 아론을 시켜도 되지만 굳이 너를 붙들고 설득하는 거야. 그러니까 싫어하는 걸 안 하는 걸 니가 원하는 일이라고 착각하지 마. 오히려 그 일을 통해 믿음의 발걸음을 떼면 내가 사람을 붙이든, 능력을 허락하든 너를 도와 너의 그 깊은 영혼의 갈망을 이루어 줄게’ 라고 하는 그 씨름을 지금 하나님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왜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잘 혼동할까요? 왜 심지어 같은 것이라고 여길까요? 예레미야 17장 9절이 그 해답을 주는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 17:9,
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이 부패한 심령이 여러분 뭘 알 수 있겠습니까? 싫은 것을 하지 않는 것이 내가 원하는 바입니다. 오늘 이 모세의 행동과 우리의 평소 경향이 다를 리 없는 이유입니다. 부패하였기 때 선악과를 떠올려보십시오. 인류는 하나님이 그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이 싫었어요. 뱀은 그걸 싫어하도록 만들었고 싫어하는 그것에 더욱 집중하도록 만들었어요. 씨름과의 씨름에 매달리게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선악과를 원하게 만들었죠. 그러면서 자신이 그 아담과 하와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는 지금 놓쳐버렸어요. 선악과를 원하느냐고? 여러분, 아담과 하와가 원했어야 하는 건 에덴에서의 하나님과 깊이 있는 영혼의 교제였어야 합니까? 아니면 선악과 실고 하나 먹는 겁니까? 왜 씨름과의 씨름을 세상에 걸어오는지 여러분 아시겠습니까? 씨름과의 씨름이 어디서 오는지 그걸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싫어하는 것을 안 하는 것과 원하는 것을 분리하고 분별해야 할 이유가 지금 여기에 있다. 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죄가 시작되었고 인류가 넘어졌습니까? 싫은 것이 생겼을 뿐 아니라, 그것을 그걸 붙들고 씨름을 해도 다룰 줄을 몰랐기 때문에 엎어진 것이 저 또한 그래서 이 질문에서 결코 자유롭지가 않습니다. 사람이란 모름 직이 기호라는 게 존재해요. 좋고 싫은 게 항상 존재합니다. 그 사이에서 선택하느냐고 인생을 시간을 여러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그 고민하고 또 그것과 그냥 씨름하느냐고 분주하다고 느끼는 것이, 피곤하다고 느끼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럴수록 내가 진짜 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내 영혼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내 영혼의 그윽이 깊은 데서 바라고 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심지어는 그걸 안다고 착각하지도 말아야 됩니다. 그래서 물어야 합니다. 모세의 진정한 원함을 알고 그래서 그를 설득하고 그를 꾸짖으시던 그 하나님께 나의 이 씨름에 씨름을 맡기고 구하고 엎드려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씨름과의 씨름을 하느냐 정작 원해야 하는 것을 여러분 놓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요 십자가에 매달리시면서 고통과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얼마만한 고통이 있는지 모르지 않았어요. 그래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해야만 했습니다. 그의 입으로 ‘아버지여! 할 만하시거든 이걸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간구할 정도였어요. 그러니까 분명 싫은 것이었죠. 피하고 싶고 거부하고 싶을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건 분명한 것이었어요. 싫어할 이유도 명백했습니다. 그러나 싫어하는 것을 해야 할 이유도 명백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아버지의 뜻 때문에? 세상을 구원해야 되는 그 아버지의 뜻 때문에, 싫어하는 것을 하는 방향으로 정면 돌파하는 방향으로 그의 인생을 몰아가셔서 제가 오늘 이 순간 그 말씀을 드리면서 단순히 여러분 하나님 뜻이니까, 그냥 무조건 꺾여라. 그 말씀드리는 게 아니고요. 예수님이 자신의 시름과 싸움하면서 씨름하면서 오히려 그걸 통과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뭐냐면 그 시름보다 더 강력한 원함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려는 그 자신, 예수님 자신의 갈망에 있었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름이 고통을 향한 시름이, 고난을 향한 시름이 원함을 가리고 덮으려 할 때가 있었지만 기도하며 그 시름과의 씨름 속에서 끝끝내 자기 영원히 원하는 거, 자기 존재가 원하는 거, 그 진정 원하는 것의 성취를 이루어 가시려고 뚜벅뚜벅 걸어가셨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우리 사랑하시는 휘한 성도 여러분 혹시 요즘 무언가 싫은 것이 막 다가 오세요? 무엇이 싫은 것으로 내 존재와 인생 앞에 떡하니 여러분 버티고 서 계세요? 무시하면 될 일일 수도 있고 거부해도 될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원함이 오히려 거부되고 있고, 여러분 영혼의 진정한 원함이 지금 무엇이 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이 씨름과의 씨름 속에서, 이걸 이길 강력한 그 강렬한 원함이 무엇인지 내 영혼의 속내를 들추어보시길 바랍니다. 만물보다 부패한 우리의 심령 저를 포함하였어요. 그걸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별한 힘을 주시옵소서. 그렇게 요청하시며 나아가시는 귀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너무나 간절히 바라고 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성장하세요. 왜냐하면 싫은 것을 하는 것은 우리를 성장하도록 돕습니다. 올 초에 제천에 가서 기도하다가 연 초 계획을 저 나름대로 이것저것 세우다가, 하나님이 저에게 강하게 주신 마음이 뭐였냐면 이 세상 누구나에게 다 성장 욕구가 있다. 라는 것이었어요. 저는 없는 줄 알았거든요. 이미 커서 더 이상 성장하면 안 되고 욕구 부리면 안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너의 영혼도 겸손하다는 이유로, 낮아진다는 이유로 성장하는 것에 대해선 관심 없다는 듯 살지 말고 너희 안에도 성장하고 싶은 욕구가 있을 것이다 누구나 다 있다. 그 마음을 주셨어요. 그렇잖아요? 여러분 성경을 일도 하고 싶고 기도의 진중함에 빠지고 싶은 건 우리 모든 이들의 영원이 연 초마다 또는 월 초마다 어떤 분위기가 바뀔 때마다 늘 바라고 원하는 거잖아요? 왜요? 성장하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다,,, 살아있으니까, 살아있으면 당연히 성장하고 자라나고 싶잖아요. 아닌 게 더 이상하잖아요. 근데 여러분 성장하려면 뭐가 필요하냐면 싫은 것을 할 줄 아는 훈육 훈련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좋아하는 것만 해서는 좋은 것만 해서는 도통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저희 첫째가요 키도 크고 발도 큽니다. 저를 닮아 덩치는 않고서 하나님 크신 은혜를 우리 가정에 주셨다고 생각하는데, 근데 여러분, 가끔 그 녀석이 발이 아프다고 할 때가 있어요. 그게 언제냐면, 신발을 살 때예요. 새 신발 살 때 워낙 이제 좀 쿨하고 좀 무던한 녀석이라서 그런지 가타부타 말이 별로 없어요. 그러다가 신발이 좀 낡아서 뭔가 이제 신발을 교체하게 될 때가 오면 신발 고르는 장소에 가서 새 신발 신고 얘기해요. ‘그동안 발이 아팠다.’ 부모 마음에서 여러분 마음이 무너지죠. 일찍 얘기하지 일찍 얘기하지, 발이 아팠다고 왜 이제 얘기 하냐?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하지 아프면 뭘로 참고 있어? 왜 그 씨름과 씨름을 하고 있어?

-여러분 근데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씨름과의 씨름은요 뭔가 성장할 시기가 왔다는 분명한 사인이에요. 그럼에도 새신 더 큰 신을 맞춰서 바꾸어 신기보다 나의 용량을 넓히시려는 용적을 넓히시려는 걸 하나님께 붙들려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보다는 여전히 좁아터진 그 신발 안에서 꾸역꾸역 그 씨름과 씨름만 하고 있다면, 그건 분명 어리석은 일이고 불쌍한 인생이라고밖에 말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아버지가 보실 때, 혹시 여기 지금 씨름과의 씨름을 하고 계시는 분이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그 가운데에 성장시키실 줄 믿으십시오. 싫은 것을 말하는 게 답이 아니라, 그게 내가 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길을 지나 내가 진짜로 원하고 있는 것을 하나님 깨닫게 해 주십시오. 그것을 이루어 좀 주십시오. 그리고 그에 맞게 나를 성장시켜 주십시오. 그렇게 고백할 수 있는, 그렇게 이 씨름을 견뎌내고 이기실 수 있는 귀한 인생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제 이번 주 내 금요일 또 토요일 여러 귀한 시간이 여러분 우리 앞에 펼쳐집니다. 저는 이번 일을 앞두고 하나님이 저한테 이렇게 많이 물으세요. ‘야, 너의 영혼은 갈망하지 않냐? 한 사람이 더 전도되는 걸 갈망하지 않냐? 하나의 교회라도 더 세워지는 걸 갈망하지 않냐? 너희의 영혼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거 너 그래서 목회하는 거 아니냐? 너 그래서 예수 믿고 나 따라오고 있는 거 아니냐?’ 그렇게 많이 물어보시면 여러분은 우리 앞에 놓인 이 일을 놓고 어떻게 바라보고 또 생각하고 기도하고 계십니까?

※아내랑 결혼을 고민할 때 너무 가난한 나머지 아내가 저한테 시집오는 게 너무 미안해서 결혼의 단계로 넘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게 너무 고민일 때가 있었어요. 그때 저의 멘토 중에 한 분이 제 고민을 막 듣다가 음악 듣다가 이렇게 짧게 얘기했는데, 그게 저의 정신을 바짝 차리게 만들었어요. 그게 뭐였냐면 그게 됐고 제가 뭘 많이 얘기했거든 뭐 이래서 이건 고민이고 이러면 어렵고 이건 어떻게 할까 이렇게 했더니 한참 됐다. “이거 됐고, 됐고, 이 사랑하냐? 고 되게 묵직한 한 방이잖아요. 됐고, 됐고 우리가 알았으니까 다 됐고 사랑하냐?” 고 거기서부터 저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을 하기 시작했어요.

여러분 여러분도 하나님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이 일으키시려는 오늘의 그 어떤 일 속에 영원히 기적, 영원히 살아나는 어떤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는 걸 여러분 사모하십니까? 누군가를 이끌어주는 일 또는 그 때문에 헌신하고 고난 받아야 된다면 오늘 이제 모세의 앞길이죠. 두렵고 떨리고 힘들기도 하겠지만 그 안에 그 속에 내가 진짜 원하는 그 일이 담겨 있으니까 사랑해서 결혼하는 거잖아요. 그게 담겨 있으니까 주여 나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이 씨름과의 씨름에서 고전하는 나를 좀 건져내셔서 한 사람이라도 더 전도하고 하나의 교회라도 더 세워지는 그 일에 나를 좀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이번 집회에도 누군가 은혜를 받아서 오늘 모세와 같이 이 민족을 이 교회를 새 땅으로 이끄는 놀라운 역사의 주인공들이 좀 발탁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게 나이길 원하고 우리 교회이기를 원하고 내가 모르지만 거기 참석한 아무개이기를 원하고 주여, 그 일을 위해서 우리를 필요하다면 꾸짖어주시고 설득해 주셔서 우리의 진정 원하는 그 일, 우리가 진정 바라는 그 일로 우리를 좀 이끌어 주시옵소서. 그런 기도 가운데에 나아가시고 마음 모아주시고 또 기도해 주시는 귀한 우리 사나의 교회, 우리 귀한 연 가족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요약
내 영혼에 어떤 질문이 긁히고 체 이는지, 나는 무엇을 갈망하며 살고 있는지 또는 무엇을 피하느냐 정신이 없는지, 나를 성장시키시려 씨름하시고, 오늘도 내게 수백 번, 수천 번 권하시고, 명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에 온전히 순전히 붙들려서, 나의 인생 씨름과 씨름하는 이 나의 인생 성장하기를 원하면서도 좋은 것만 해내려는 내 기호에 맞는 것만 하려는, 이 연약한 나의 영혼에 하나님께서 꾸짖음과 하나님이 밀어붙이심과 만져주심을 받아서, 나를 통해 이루고 싶은 그 일, 구원받은 내가 너무나 원했던 그 일, 내 평생 내 면류관이 될 그 일, 그 일을 위하여 힘껏 나아가는 헌신된 인생을 간구하며 살아가야 한다.
-모세가 자신은 말에 능치 못하며 적당한 사람이 아니니 보낼 만 한 자를 보내라고 거절하자, 하나님께서는 그와 늘 함께하여 부족함을 채우겠다고 위로하시며 그를 권면하셨다. 천지를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께 능치 못할 일이 어디 있는가? 우리에게는 다만 그 힘을 의지하는 순종이 필요하다. 또한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내와 자비로써 죄인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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