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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6월 14일) 제목: “구원에 사로잡히다” 말씀: 마태복음 8:28-34 찬양인도: 오준석 부목사님 설교자: 김승진 부목사님 --------- *마태복음 8:28-34, 28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 29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30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31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이르되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시려면 돼지 떼에 들여 보내 주소서 하니. 32 그들에게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33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34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아주 잘 오셨습니다. 말씀의 생기가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이끌어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 함께 보실 말씀은 마태복음 28장 8장 28절부터 34절까지 말씀을, 마태복음 8장 28절부터 34절까지 말씀을 저와 여러분이 함께 읽겠습니다. -저는 휴전선 GOP라는 곳에서 군생활을 했습니다. 휴전선 자체는 거대한 무덤 같았습니다. 죽이려는, 죽으려는 살기가 있고,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속에 속고 속이는 대남 방송, 대북 방송만 들려왔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나라에 그렇게 십자가가 많다고 하는데, 유일하게 십자가 불빛 하나 없는 곳이었습니다. 교회가 없는 곳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언제가 주일인지도 모르고 예배가 있는지도 모르고, 요일도 모르고, 시간도 모른 채 지내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영적으로 무덤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생명의 이야기보다 죽음의 이야기가 많은 곳이라 음산함은 대단했습니다. 그중에도 근무자들이 교대하는 모든 불빛이 다 꺼지는 시간은 더욱 그러했습니다. 달 빛없이 안개가 아주 자욱했던 그런 날이었습니다. 저도 알고 있었던 한 병사였는데 그 병사가 총을 자기 가슴에 대고 쏘았습니다. 3발의 총알이 관통을 하였고, 그 자리에서 사망했습니다. 그 이후가 더 문제였습니다. 장례를 치르고 며칠이 흘러 그 병사의 빈 침장에서 그 병사가 누워 자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는 소대원들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또 죽은 병사와 이야기를 밤새 나누웠다는 병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열 명을 넘어 서기 시작하자 그 소대는 난리가 나기 시작했고 아주 어려워졌습니다. 이런 일이 생겨나기 시작하면 부대 지휘관들은 제가 군 종병이라는 이유로 자연스럽게 저를 찾았습니다. 퇴마사와 신학생을 같은 업종이라 여기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지휘관들은 늘 쉽습니다. 가서 처리하고 와! 명령만 내리면 됩니다. 저도 귀신 무서워합니다. 혼자 가려니 더 무섭습니다. 신학교 갈 때도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지 않았는데, 정말 간절히 기도하고 그 소대에 도착을 했습니다. 소문대로 벌써 병사들은 하얗게 질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제가 별로 두려워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디서 온 담대함인지 죽은 병사가 늘 누웠다. 라는 그 침상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제가 누워버렸습니다. 병사들이 몰려들어서 저를 말리기 시작했습니다. 내 누운 이상 자존심 상하지 않게, 어떻게든 여기서 끝까지 자야 된다. 라는 생각 속에 기도를 하며 눈을 감았는데 너무 쉽게 제가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눈을 떠보니 병사들이 제 주변을 둘러싸 저를 구경하듯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눈을 떴네! 어 살았네!”라는 소리도 들려왔습니다. 저는 정말 잘 잤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귀신을 봤다는 병사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군대 이야기의 특징은 허세와 허구와 허위사실입니다. 하지만 축구 이야기처럼 부풀려 말할 수 있는 것들도 있지만 이런 사건을 직접 경험한 군인들에게는 잊지 못할 사실이 됩니다. 제게도 그러했습니다. 하나는 귀신이라는 그 존재의 기억이었고 또 하나는 귀신이 떠나간 기억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마태복음에도, 마가복음에도, 누가 복음에도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새 복음서를 공관복음(共觀福音)이라고 합니다. 한자로 함께 공, 볼 관자를 쓰고 있습니다. 이 내용을 기록한 제자들이 함께 보고 있는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그때 보았던 귀신이라는 존재와 쫓아내던 예수님을 기억하며 증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귀신의 특징도 보입니다. 사로잡는다는 것입니다. 귀신 들린 사람을 자세히 풀어써 보면 악한 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귀신은 돼지들도 사로잡아 함께 바다로 뛰어들고 있습니다. 사탄을 ‘디오 블로스’ 라고 합니다. 디오 블러스는 비난하는 자, 고소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를 비난하며 죄로 묶어버리는 존재입니다. 귀신은 이 사탄의 수하입니다. 우리 말씀 한 절 같이 보실까요? 마태복음 12장 26절과 27절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2:26-27, 26 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 27 또 내가 발 세부를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리라. -사탄을 귀신의 군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귀신은 사탄처럼 우리를 속이고 두렵게 하여 사로잡아버립니다. 어떻게 사로잡는지 오늘 말씀에 나오고 있습니다. 풍랑이 몰아치는 배에서부터 오늘 말씀은 시작이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몰아치는 환경들, 항해의 길을 아무리 돌리려 해도 소용없는 상황들, 꼼짝없이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물이 배 위에 차올라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 바다에 자신이 있었던 갈릴리 뱃사람의 바다에 대해서는 아주 자신 있었던 이 갈릴리 뱃사람들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덮쳐오고 있습니다. 이때 주무시던 예수님은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십니다. 독특한 장면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 장면과 함께 이어지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5장 2절에 보면요, ‘배에서 나오심에’ 이렇게 기록이 시작됩니다. *마가복음 5:2, 2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 -환경과 상황을 뒤흔드는 바다의 풍랑이 예수님과 악한 영과의 1차전이었다면 이제 2차전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귀신이 달려오고 있습니다. 사람의 내면을 흔들어 몰아쳐서 배의 키를 놓치듯 자신마저 통제가 불가능해진 귀신 들린 사람이 달려 나오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무덤에 살고 있습니다. 무덤은 죽은 자들의 공간입니다. 악한 영은 우리의 인간을, 우리 인간을 철저하게 고립시켜버립니다. 묶는 것, 족쇄조차 귀신 들린 자를 제어하는 데, 실패합니다. 당시에 주술용으로 사용되던 여러 기구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족쇄도 있고 밧줄도 있는데 이 주술용 기구에는 악령이 그려져 있기도 했다고 합니다. 사단에게 속박된 자를 다루는 방식이 오히려 사단에게 더 도움을 주는 것 같습니다. 호수의 폭풍을 일게 하는 악한 존재가 간단한 밧줄로 묶는다고 잠잠할 일이 아닙니다. 풍랑이 일게 하는 존재가 바다뿐만 아니라 이미 귀신 들린 사람 안에 맹렬한 폭풍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옷을 다 벗고 무덤에 살게 합니다. 소리를 지르고 스스로 자해하게 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잊은 채 살아가게 합니다. 처한 무기력,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 갑니다. 결국 의욕도 소망도 잃은 채 살아갑니다. 그냥 귀신에게 몸을 맡기며 살아가게 합니다. 강남역을 나가보면 ‘타로’점을 보는 사람들이 많아 어느 때는 강남역이 아니라 타로 역 같기도 합니다. 이미 우리 민족은 수많은 전쟁, 그리고 강탈 정치적 격변을 겪으며 내일을 두려워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가 있습니다. 팔자라는 단어입니다. 굴레 속에서 자신의 삶을 우리는 그냥 팔자려니 여기며 던지며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말마다 무속 인들이 참 많았습니다. 사회로부터 고립된 인생을 살아가며 귀신에게 능력을 구했던 사람, 마치 귀신이 악령을 쫓을 수 있는 것처럼 거짓되게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이런 지독한 죄악의 굴레가 이제 젊은이들에게 문화처럼 놀이처럼 다가왔습니다. 운세라는 이름으로, 점괴라는 이름으로 내 인생을 돌아보며 맡기라고 합니다. 중독에 익숙한 이들은 내 몸을 맡기는 것에도 익숙합니다. 게임에 쉼을 맡기고, 포르노에 가정을 맡기고, 게으름에 시간을 맡기고, 술 취함에 생각을 맡기고 살다 보면 타로와 운세를 통해 악한 영에게 사로잡히는 일은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됩니다. 어느 날 타로 점을 잘 보는 청년이 찾아왔습니다. 뜻밖의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싶다고 합니다. 왠지 타로를 통해 예수님도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소리마저 합니다. 근데 놀랍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청년이 예수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청년의 표현이 놀랍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찾을 거라 생각했는데, 예수님이 나를 찾아오셨습니다. 자신에게 모든 것이 어떤 타로를 삶에서 놓아버렸습니다. 자신의 주요한 생계 수단이었고, 명성이었고, 인생이었는데 이제는 구원이 청년의 인생이 되었습니다. 후에 들은 이야기인데요. 청년을 찾아왔던 타로 고객들에게, 청년이 복음을 전해서 교회에 등록을 시키기도 했다고 합니다. 구원이란 이런 수많은 우리의 삶의 상황들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이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벌거벗은 채 날 뛰는 귀신 들린 자에게 옷을 입혀주시고 피를 닦아주십니다. 덜렁거리는 쇠사슬도 족쇄도 풀어주십니다. 구원은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우리를 만나주신 사건입니다. 사로잡힌 자를 만나 풀어주시는 바로 그 순간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바다가 고요해지듯, 귀신 들렸던 사람도 이제 잠잠해졌습니다. 옷도 입고 멀쩡하게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사람들은 두려워합니다. 말씀 함께 보실까요? 마가복음 5장 15절 말씀인데요. *마가복음 5:15, 15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귀신 들린 사람이 달려들 때 두려워해야 합니다. 무덤과 산을 뛰어다니는 모습 보며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나으니 두려워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이 두려운 것 같습니다. 마가복음 5장 17절 말씀인데요.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마가복음 5:17, 17 그들이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사람들은 예수님을 ‘떠나라’ 말합니다. ※ 존 옥스 햄이라는 사람이 이런 글을 썼습니다. “랍비여, 떠나주시옵소서. 당신의 능력이 우리 자신과 우리의 재산에 손실을 가져옵니다. 우리의 길은 당신의 길과 다릅니다. 당신은 사람들을 사랑하지만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저 돼지입니다. 그러니 전능하신 주여 떠나주시옵소서. 그리고 이 바보 같은 녀석도 데려가 주십시오. 의 영혼이라고요? 그 영원히 무슨 상관입니까? 당신이 그 녀석을 온전케 하신 것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줄 수 있습니까? 우리는 돼지를 잃어버렸습니다. 한 사람의 영혼이 누구의 영혼이, 이 돼지 값 앞에서 중요하지 않다. 라는 것입니다. -존 옥스 햄- 예전에 성경 번역을 하는 선교사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프리카 원주민에게 성경을 번역할 때, 이해시킬 때 가장 어려운 성경 구절이 이 구절이라고 합니다. 그 원주민들에게 돼지 값과 한 사람의 값은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2천 마리의 돼지가 어떻게 한 사람과 바꿀 수 있는지, 그들에게 설명하기가 너무 어려웠다고 합니다. 먼 아프리카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이 시대도 돈이라면 영혼도 팔겠다고 말하는 청년을 만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오래된 영화중에 알파치노와 키아노 리브스가 함께 나왔던 ‘데블스 에드버킷’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유능한 젊은 변호사에게 사탄이 찾아옵니다. 무조건 너에게 승소하게 해줄 테니 넌 나에게 무엇을 줄래? 젊은이는 진실을 팔아버립니다. 그리고 또다시 가족도 팔아버립니다. 그는 결국 스스로가 악마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존 옥슨 햄이라는 분은 계속해서 이렇게 글을 써 내려갑니다. 그리스도는 문밖에 서서 부드럽게 문을 두드리신다. 하지만 만약 당신의 금이나 돼지가 그 출입구를 막는다면 그는 억지로 밀치고 들어오지는 않으실 것이다. 그를 떠나실 것이며 당신의 마음이 보아를 따라 살도록 내버려 두실 것이다. 조금은 극단적으로 레디컬 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현장에서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쉽게 떠나지는 않으십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오히려 예수님이 떠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우리에게도 이런 모습들이 종종 나타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능력이 내 삶에 좀 적당히 일어나면 좋겠다. 상처 난 곳에 소독약, 빨간 약을 바르는 것은 쓰라려 싣습니다. 몸에 아픔이 있는 것처럼 우리 내면의 상처에도 구원의 능력이 아프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즐거운 경험들을 기억하기를 좋아합니다. 즐거운 기억들이 즐거움의 기억이 과거의 즐거움을 재현시켜줘서 지금도 내가 즐거운 것처럼 느끼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고통의 기억도 그렇습니다. 과거의 고통은 기억 속에서 복제되어서 우리를 찾아옵니다. 상처가 크고 기억이 정확할수록 과거의 기억의 괴로움은 현재의 고통이 되기도 합니다. 성도님들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구원받으셨습니까? 그렇다면 구원받은 이후에 인생에서 일어난 그 괴로웠던 사건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과거의 상처는 치유되셨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그대로 남아 고통스럽게 곪아가고 있습니까? 내가 받은 구원은 과거의 기억을 향해, 그동안 사로잡혔던 숨겨왔던 상처의 기억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구급약품과 수술함을 들고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아무리 폭풍 같을지라도 아무리 군대 같을지라도 악한 영이 사로잡은 모든 영역들, 죄와 고통과 상처의 영역을 치료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 시간 말씀 한 절 더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8장 29절 하반 절인데요. 하반절만 우리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마태복음 8:29, 29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귀신들이 최후의 심판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는데 예수님 왜 벌써 오셨습니까? 하고 묻는 장면입니다. 다시 말해서 귀신들이 멸망하도록 정해진 시간 그전에 하나님의 아들이 왔으니, 이제 우리는 그냥 좀 내버려 두시면 안 되겠습니까? 하듯 예수님께 흥정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귀신들은 물에 던져집니다. 누가복음에는 귀신들이 물로 상징되는 그 시면, 무저갱 안에 갇혔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귀신들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우리를 사로잡아왔던 모든 것을 끝장 내는 능력입니다. 어느 날 참 사랑하는 친구가 찾아와 이런 얘기를 제게 합니다. ‘아 나 잠을 한숨도 못 잤어.’ 이 친구는 이런 친구였습니다. 꽤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났는데요. 머리도 좋아 공부도 너무너무 잘했었습니다. 그냥 마냥 행복할 것 같았던 시절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폭풍처럼 찾아온 일이 아버지의 죽음이었습니다. 모든 것들이 변해버렸습니다. 남은 어머님과 여동생을 책임지기 위해 그 좋은 성적 다 내려놓고, 젊은 나이에 취업하여 가정을 책임지는 그런 친구였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내려놓은 자리에 가족이라는 무게를 올려놓고 살아가던 친구였습니다. 지칠 줄 몰라 달리던 이 친구는 정말 괜찮을 줄 알았는데 어느 날 참 많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젊은 친구 젊은 때여서 그랬는지 그 많은 상황들보다 여자 친구와 헤어졌던 것이 그렇게 힘들었나 봅니다. 자신에게 큰 위로였는지 너무 실연으로 힘들어하고 있을 때 이때가 기회다 싶어 복음을 전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을 아주 잘하고 있었습니다. 근데 그렇게 지내던 친구가 날 찾아와서 잠 못 잔다. 라는 이야기를 하며 늘어놓는 마음의 이야기였습니다. 난 왜 교회를 가도 가위에 눌릴까? 너 가위에 눌려 잠을 못 자겠어. 지갑 좀 볼 수 있을까? 하는 말에 보여주었는데 지갑 안에 부적이 있었습니다. 오늘 저녁 집에 가서 베개속도 뒤져보라고 했습니다. 다음 날 몇 장의 부적을 가지고 왔습니다. 베개뿐만 아니라 방 이곳저곳에 붙어 있었다고 합니다. 부적은 제가 다 받아 가서 태워버렸습니다. 며칠 후 친구는 아주 개운한 표정과 뽀송뽀송한 얼굴로 또 찾아왔습니다. 일평생 가위에 눌려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적을 버렸던 바로 그날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가위에 눌리지 않고 너무 잘 잤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머니를 찾아갔습니다. 어머니께 조심스럽게 물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우리 아들 잘 되라고 큰 돈 들여 사 온 부족이라고 합니다. 아들이 어머니를 붙잡고 펑펑 울며 평생 가위에 눌렸던 이야기를 처음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 예수님을 믿고 부적을 버리는 그 순간부터 너무 잠을 잘 자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엄마, 우리 교회 가자. 엄마도 나처럼 평안히 잠드는 인생 살았으면 좋겠어. 라는 말에 어머니가 교회를 따라 나오기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구원의 사로잡히다.’입니다. 제 친구를 사로잡고 있었던 것은 지독한 인생의 무게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알지 못했던 감춰진 것들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정치적으로 해석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귀신을 만나 치료하신 것이 아니라, 로마의 정치적 악재가 군대 귀신이라는 것입니다. 민족의 해방을 설명하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 내면에 있는 폭풍 앞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죽은 자보다 못한 모습으로 때로는 지켜 달라. 소리치고 살려 달라. 부르짖어도 깨울 스승조차 없는, 누가 보아도 버려진 한 개인의 구원의 문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귀신 들린 사람은 민족이 로마로부터 해방되어도 여전히 무덤에서 소리 지르며 산을 뛰어다녔을 것입니다. 하지만 메시아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 민족과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오셨지만 모든 일정을 뒤로 하고 이방 도시를 찾아 나서셨으며, 그리고 한 사람, 귀신 들린 사람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을 구원하셨습니다. 말씀하십니다. 이 한 사람이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 내면에도 시도 때도 없이 폭풍과 같이 불어오는 상처의 기억들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아픔을 준 기억도 있고, 여전히 숨겨두고 싶은 고통의 기억도 있습니다. 난 잊었어! 라고 수도 없이 되 내이며 망각이 은혜야! 섣부른 위안을 하며 무덤을 떠나 집에 왔는데, 여전히 무덤에 지내는 것처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의 역사는 도대체 어떻게 일어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한 구원의 일들은 오늘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에서는 어떻게 일어나는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그 순간 우리 모든 것이 다 해결된 것 같았지만 여전히 기억은 악몽과 같은 시간 안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기억은 구원받지 못했는데, 과거의 아픔은 여전히 그대로인데 지금 나는 평안하다 말하는 것은 구원에 대한 오해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혔던 한 신학자의 이야기를 한참을 읽어보았습니다. 말할 수 없는 고문으로 정말 긴 시간 자신을 괴롭혔던 한 사람을 기억하며 아주 긴 페이지를 할애하며 책의 많은 부분들을 그 사람에 대한 이름을 불러가며 이렇게 글들을 써내려가기 시작합니다. -오랜 시간 그 사람의 얼굴을 기억 속에서 찾아서 찢어 죽이고, 말려 죽이며, 모든 분노를 저는 더욱 키웠습니다. 그런데 당한 악행을 잘못 기억하는 것은 내 영혼을 훼손하는 일이었습니다. 악이라는 것이 완전히 승리하려면, 온전히 승리하려면, 한 번만 이겨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악은 꼭 두 번의 승리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악행이 벌어지는 바로 그 순간 첫 번째 승리를 맛보고, 악을 되갚을 때 두 번의 승리가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우리의 기억은 왜곡되기 쉽습니다. 더 지독한 악으로, 더 지독한 복수로, 더 지독한 파멸로 왜곡되기 쉽습니다. 청년부의 사역을 하면서 청년들을 참 만날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청년들을 만나며 놀라운 사실을 하나 듣게 됐었습니다. 생각보다 참 많은 청년들이 학교 폭력에 시달렸었다. 라는 것입니다. 학교 폭력이라는 것은 감히 쉽게 누구에게 말할 수 없고, 내가 어디 가서 작은 당했던 흔적마저 드러낼 수 없는 것이라, 누구나 감추며 살아가는 것이라 정말 쉽게 드러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또 학교 폭력의 특징은 잊혀진듯하지만 우리 삶에 깊이 새겨져 기억된다는 것입니다. 폭력을 당했던 당사자는 누구에게도, 아무 말도, 어떤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시간이 지나기만을 기다렸다가 그렇게 주변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 집니다. 하지만 남은 기억 때문에 나타나는 특징들이 있습니다. 남자 청년이나 여자 청년이나 비슷한 양상인데요. 남자 청년에게 나타나는 것은 이런 모습들이 좀 나타납니다. 예전에 우리 남자 집사님들도 공감하실 텐데 무협지 많이 읽어보셨죠? 저만 읽어봤나요? 영웅 문이라고 들어본 적 없으십니까? 손에서 장풍이라는 것이 나가고 사람이 날아다니는 소설 보신 적 없으십니까? 이 소설을 읽고 있으면 너무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내가 악한 무리들을 마음껏 때려보시는 것들을 상상할 수가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아주 잔인한 컴퓨터 게임에 몰입을 하게 됩니다. 소설 속에서 나는 강하고 게임 속에서 나는 잔인합니다. 나를 괴롭혔던 일을 생각하며 모든 분노와 그날의 기억들을 쏟아내며 보상받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게임이나 그런 소설 안에서 오히려 내 기억은 더 붙잡히게 되고, 어느새 기억은 더 과장되게 되고, 감당할 수 없는 수준 되면 급하게 닫아버리듯 망각이라는 섣부른 방법만 사용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얘기를 합니다. 내가 기억을 붙잡고 있는 이유는 가해자들을 가해자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함이며, 그들이 수치심과 죄책감과 도덕적 열등감을 느끼지 하기 위해서라고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기억 속에서 악이 승리하도록 내 삶을 바치는 것 밖에 남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1년 전 뉴스마다 개에게 물려 축 늘어진 아이의 모습을 연신 보도하던 기사가 기억납니다. 이 뉴스를 보며 도스토에프스키가 지독한 이야기를 던졌던 것이 떠올랐습니다. 네 살배기 아이가 개들에게 던져져 먹히는 것을 지켜본 그 어머니의 경험은 그녀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 글을 읽던 신학자는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이것은 마치 큰 사고로 발 모양이 다 찌그러져 이전에 신발은 다시 신지 못하는 인생이 된다. 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다시 신지 못할 신발은 버리듯 잊으라고 합니다. 우리가 살려면 기억은 무시하라고 합니다. 아무 일도 없었어. 라고 되 내이라고 합니다. 우리 마음에 지하실에 가두라고 합니다. 지하실에서 이 기억이 야수처럼 소리 지르고 발을 울지라도 외면해야 우리는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맞습니까? 이렇게 살면 우리가 살 수 있습니까? 이게 구원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여전히 죄와 사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귀신 들린 것 같은 삶의 현장을 찾아오시는 예수님의 그 걸음이며 맞이함입니다. 누구도 절대로 예수님조차 절대 할 수 없어 확신하는 그곳에 예수님이 오셔도 안 돼, 내 삶의 이곳에서는 예수님이 오셔도 이거는 소용없어, 아니 오시지 않아도 돼. 라고 그렇게 거부하는데 예수님이 찾아오시는 바로 그 순간이 구원입니다. 우리가 상처받고 부서지고 깨어진 바로 그 자리에 예수님이 우리를 마주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 순간 우리가 우리 자신을 깨뜨리고 예수님을 만나 사랑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오늘 말씀은 출애굽기를 연상시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바다 건너편으로 넘어가는 장면과 이스라엘 백성이 바다를 건너는 장면과 비교합니다. 제어할 수 없는 귀신의 그 능력, 귀신에 들렸던 사람의 그 능력과 바로가 가졌던 그 제어할 수 없는 권세를 비교합니다. 돼지들이 바다에 익사하는 것과 이집트인과 병거가 바다에 수장되는 것들을 비교합니다. 성경이 이런 말씀을 기록하고 비교하며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악하고 더러운 기억들, 그걸 붙들고 복수와 분노로 부르르 떨고 있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기억, 구약 성경에 나타났던 하나님의 은혜의 기억, 말씀 가운데 우리를 구원해 주셨던 신성한 기억, 거룩한 기억을 심어주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진실 된 기억들이 우리를 찾아오기 시작하면, 그러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의 기억들이 우리를 사로잡아가게 되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지옥의 우리의 고통의 시면에 끝까지 도달하여 내가 지옥으로부터 구원된 사람임을 떠올리며 그 사실을 붙잡고 살아가게 합니다. 이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있어야만 우리는 과거로부터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으며, 현재로부터 우리의 삶 속에 구원의 일들을 누리고 살아갈 수 있으며, 미래의 그날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실 것들을 붙잡고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언제나 동일합니다. 막막한 현실 앞에 하나님의 역사는 타협도 망설임도 없습니다. 어떤 기억도, 어떤 경험도, 삶의 어떤 현장도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사로잡을 수 없습니다. 구원은 오늘 내가 예수를 믿는 믿음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지은 듯한 기억과 오늘을 사는 치열함과 내 일에 대한 두려움을 풀어주는 것입니다. 심판의 날에 정이 놓으신 하나님이 우리의 재판관이 될 것이며, 그분은 우리의 기억을 틀림없고 정확하고 완전하게, 모든 악행들은 그 의도까지 낱낱이 기억하여 이웃에게 간위에어나 하나님의 정항한 모든 심판까지 주께서 행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은혜로 살려주시고 구원하신 일들만 남아 있습니다. 십자가의 저주와 그 죽음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 끊어지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은혜의 생명이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요약 우리의 삶이 얼마나 비참하고, 얼마나 무지하고, 무능하고 연약한지, 풍랑이 있는 것 같은 인생의 상황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음에 감사하고, 내면에 몰아치는 상처받은 기억과 잊어버리고 싶은 지독한 죄의 문제를 구원의 능력으로 사로잡아 예수 그리스도의 그 생명의 기운과 생명의 역사와 생명의 일들이 삶에 나타나고 있음을 확신하며, 여전히 무덤으로 달려가는 것과 같은 우리의 어리석음을 돌아보게 하심에 감사해야 한다.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하여 주신 것과 우리로 새 생명을 입으며 살아가게 하신 주님을 경배하며, 그 능력을 의지하며, 과거의 상처와 기억이 아니라, 과거에 묶여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구원의 능력에 사로잡혀 결국에 찾아올 천국의 소망을 바라며 살아가야 한다. 사단의 권세는 우리의 인생을 사로잡기를 원하나 구원의 능력이 이미 우리를 사로잡고 있기에 우리가 붙잡고 있던 과거의 상처 받은 기억과 지독한 죄의 문제까지도 성령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의 마음 가운데 다 처리해 주신 줄로 확신해야 하며, 사랑의 교회가 동일한 본향을 사모하며 사랑의 동산을 준비할 때, 시대를 바꾸는 제자도와 세계 선교를 일깨우는 믿음 계승의 플랫폼으로 쓰임 받는 자가 되고, 제2의 양화진이 되기를 간구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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